메시아 예언과 성취 그리고 심판



메시아 예언과 성취 그리고 심판


1. 탄생과 관련된 예언(계보)

1) 여자의 후손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2) 아브라함의 자손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행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3) 이삭의 자손

(창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눅 3: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4) 야곱(이스라엘)의 자손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5) 유다 지파에서 출생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눅 3: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 (히 7: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6) 다윗의 자손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7) 처녀에게서 탄생(임마누엘 하나님)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마 1:22-23)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8) 베들레헴에서 탄생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마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9) 그 외 탄생에 관한 예언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시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 생애와 사역

1) 애굽으로 피신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마 2:14-15)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2) 헤롯의 유아 대학살

(렘 3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 (마 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3) 공생애 시작-길을 준비하는 자

(사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 (마 3:1-3)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

(사 9:1-2)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마 4:12-16)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5) 주로 비유를 들어 가르치심

(시 78:2-3)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 (마 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6) 병고침과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

(사 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7)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다윗의 왕위를 이를 유대인의 왕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8)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모세같은 선지자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 (행 3:22-23)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 (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8)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히 7:16-17)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9) 성소(성전)가 되어 오신 분

(사 8: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10) 선한 목자로 오신 분

(겔 34: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 (요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3. 고난, 예루살렘 입성, 죽임당함, 부활, 승천

1) 동족 유대인에게 배척 당하고 버림받으심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요 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2) 버림받았으나 보배로운 모퉁이돌(산돌)이 되신 그리스도

(시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3)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요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4) 제자에게 배신당함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요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5) 은(銀) 삼십에 팔리심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 (마 26:15-16)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6) 거짓 증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심

(시 35:11-12)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 (막 14:55-57)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7) 거짓 고소자들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침묵하심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막 15:4-5)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8) 온갖 능욕을 당하심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마 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 (막 15:17-19)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9) 죄인을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고난 받으심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10) 범죄자 취급받아 흉악범들과 함께 처형되심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 (막 15:26-27)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11) 손과 발에 못박히실 것 예언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12) 조롱과 비방을 당하심

(시 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13) 사람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줌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14) 사람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음

(시 22: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마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15) 원수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하심

(시 109:2-4)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16) 대신 버림받고 심판받는 죄인으로 절규하는 기도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17) 우리의 죄를 담당한 희생양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출 12:21-23)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18)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음

(시 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 (요 19:32-33)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 (요 19: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19) 부자의 무덤(묘실)에 장사되심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 (마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20) 무덤에서 부활하심

(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 (마 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 (행 2:29-32)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1) 하늘로 승천하심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4.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이루실 구약과 신약의 예언들

1) 이 땅에 다시 오실 것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 (행 1:11-12)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계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2) 구원받은 백성들을 부활시키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호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 (고전 15:54-55)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전 15:25-26)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3) 세상을 심판하실 것

(사 63: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 (계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4) 피조세계를 회복시키실 것

(사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롬 8:19-21)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5) 모든 무릎이 예수 이름에 꿇고 주님이라 시인할 것

(사 45:22-23)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 (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6) 영원히 통치하실 것

(사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단 2: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약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적 예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은 구약의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수백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은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몇 가지 예언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에 관하여
–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시편 22:16-1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예언은 이사야 53장 전체입니다.
이사야 53:3-7은 특히 명확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다니엘서 9장의 "칠십 이레" 예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끊어져 없어질" 정확한 날짜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0:6은 예수님이 겪었던 채찍질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스가랴 12:10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일어났던 메시아의 “찔리심”을 예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브라함과 다윗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통을 확립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약속하셨고(창 22:18),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2-13).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예수께서 바로 그 메시아임을 강력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지 약 2천년 만에, 다윗에게 약속하신지 약 1천년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다윗 언약의 배경과 내용

다윗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한 이후 사사 시대와 사울 왕 시대를 지나 하나님이 다윗 왕과 맺으신 것입니다(삼하 7:12-16, 대상 17:10-14).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김으로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정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세운 다윗은, 성전을 짓고자 선지자 나단과 의논하였습니다(삼하7:1-2). 이때는 헤브론에서의 통치를 마치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주전 1003년 이후,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사방의 대적을 파하고 ‘안정’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권세를 잡고 안정되면 나태하고 교만하여 자신의 안위와 영화만을 구하게 되지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하였습니다. 참으로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하나님 제일주의’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하셨지만(대상 22:8, 28:3),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하시면서(왕상 8:18, 대하 6:8)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고, 다윗의 아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실하심으로 맹세하신 언약이며(시 89:3-4, 35, 49, 132:11), 파할 수 없는 언약이고(렘 33:20-21),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사 55:3)였습니다. 이것은 다윗 언약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정적인 선포이며, 사단의 그 어떤 강한 훼방도 그 언약의 성취를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에 대한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집과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윗은 수한이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자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9, 11-12, 16).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스라엘 나라가 옮김을 당하거나 해함을 당하지 않고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0-11).
 
다윗의 후손에 대한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세워 그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2-13
...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다윗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한 아들’ 곧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여기 ‘자식’은 히브리어로 ‘씨, 자손’이라는 뜻의 ‘제라’의 단수형이 쓰였는데, 일차적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가리키며, 구속사적으로 훗날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평강의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며 그 나라 위를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89:28-29).
이 언약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봉헌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지만, ‘한 아들’이 나라의 위를 굳게 세워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약속은 궁극적으로 다윗 왕가를 통해 만왕의 왕 메시아가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42에서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 1:3에서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사도행전 2:29-30, 13:23, 디모데후서 2:8, 요한계시록 22:16 등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다윗의 씨’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위의 소유자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89:4에서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으며, 시편 89:36에서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시 89:29). 이사야 9:7에서도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성취시키고 영원한 위를 얻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눅 1:32-3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라고 하신 말씀처럼(대하 21:7) 마침내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그 족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마 2:4-6),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마 12:22-23, 21:9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신 고난주간 화요일(변론의 날)에,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신 내용을 볼 때(마 22:41-46),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다윗의 주’가 되시는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주’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시 110:1),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그 이상 되시는 분,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실제 다윗처럼 군사적인 정복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다윗의 뿌리요 자손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계 5:5, 22:16), 이는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다윗 언약의 최종적인 성취자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다윗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다윗 언약 성취의 주역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성


영성(靈性) Spirituality

1. 오늘날 “영성” 개념의 문제점들

일반적으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요즈음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이미 오래 전에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분도 자신의 중요한 경험을 언급하는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제시하기도 했었고, 많은 이들이 이런 용례를 따라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데 선구적인 작업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복음주의권에서 처음으로 영성 신학의 매뉴얼을 제시했던 리쳐드 러브레이스일 것이고,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이 아마 캐나다의 리젠트 컬리쥐의 초대 영성 신학 교수였던 제임스 휴스톤일 것이다.

그를 이어서 영성 신학을 강의한 유진 피터슨폴 스티븐스가 아마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1-1.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상당히 주의하면서 사용해야 할 용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우리 기독교인들만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말 가르쳐서 “영성의 시대”라고 하는 말이 비기독교권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속화되는 서구 사회 속에서 20세기 말에 세속적인 삶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영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그들이 말한 의미는 우리들이 복음주의 권에서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그런 모습을 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삶 이상의 것을 찾는 모든 시도들을 가르쳐서 영적인 시도들이라고 하는 의미였었다.
그리하여 인도의 힌두교적 사상들도 영적인 것이며 영성의 한 측면으로 언급되었고, 요가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불교의 영성 등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여성의 영성을 말하는 한 홈페이지는 불교도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영성 훈련하는 내용과 그런 관점에서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이슬람에서도 영적 생활 등에 대한 논의가 강조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미국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고, 호주의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다.
그리하여 결국 “세계 영성”(world spirituality)을 말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종교의 영성을 언급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올 수 있는 오해는 무수하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영성만을 영성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게이들의 영성, 레즈비언의 영성 등등의 말도 흔히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여신을 추구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오늘 날에는 소위 뉴-에이지적 영성에 대한 강조가 가장 특징적인 것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성을 매우 강조하며, 우리가 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영성적인 모습을 지닌 한 표현이 그들이 말하는 어머니 신(母神)인 이 땅을 잘 보호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와 연관하여 지구 영성(earth spirituality)과 마술(witchcraft)을 연관시키는 홈페이지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뉴-에이지적인 영성과 우리가 이야기 하는 영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의미의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를 왜 당신들만 독점하려고 하느냐고 당신들은 배타적 영성 이해를 가졌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을 그냥 사용할 때 문제가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2. 그러면 기독교와 관련된 이들이 말하는 “영성”만을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것을 다 제쳐 놓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권에서,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과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이것도 그렇게 단순히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대개 이전 천주교 영성 사상가들이 말하던 바를 토대로 하고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이 이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배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천주교의 예수회(Jesuits)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료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적인 의미의 “영성”을 생각하고, 특히 “영성을 위한 수련”과 같은 것을 말할 때 그가 말한 “영신 수련”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특히 오늘 날 많이 유행하고 있는 영성 자료 같은 것은 결국 모두 그의 사상과 그로부터 발전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는 현실을 보라.
서강 대학교 영성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와 그로부터 기원하는 영성 훈련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초기에는 매우 단순한 형대로 지도했지만, 시간의 흐르면서 좀더 섬세한 모습으로 이 <원리와 기초>가 제시되었다.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지원자의 마음가짐을 오랜 기간 동안 준비시킨 후에, 이냐시오는 피정자에게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고, 동시에 여러 성찰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부터 죄 묵상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리와 기초>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신수련>을 체험하기를 원하면서 오랜 기간 마음 자세를 준비해 온 피정자로 하여금 이 피정을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한 통괄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을 상기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조와 구원의 역사 안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하는 <영신수련>의 여정을 위해 마음을 준비시키고, 동시에 이 여정의 첫 발을 내딛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영신수련>을 시작했기에 비교적 덜 성공스러운 결과들을 얻게 되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좀더 충분한 준비 묵상들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리와 기초> 본문을 세분하여 몇 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는 인간의 창조 목적, 수단들, 어려움 등의 세 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이 묵상을 제시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과 후계자들 역시 때로는 세 가지, 때로는 네 가지의 요점으로 나누어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묵상하도록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까니시오(St. Peter Canisius)는 인간의 창조된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올바른 자세 등의 세 가지 요점으로 나누었고, 폴랑코(J. Polanco) 신부는 창조와 인간의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의 사용, 불편심 등의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물론 <원리와 기초>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묵상하도록 하는 것은 <영신수련>의 근본 사상에 어긋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1599년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지침서]는 <영신수련>이 올바로 진행되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원리와 기초>의 내용이 몇 개의 요점들로 나누어져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사부 이냐시오의 실천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재천명했다.

그러므로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을 시작하는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의 빛에 의해 자신의 삶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를 의식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신앙에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준다. 이러한 열망은 <영신수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피정자가 이미 오랜 준비 기간을 통해 이러한 마음과 열망을 지니고 있으면, <원리와 기초>은 이미 형성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과 죄스러움을 의식하게 해주면서 첫째 주간의 묵상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피정자가 영적 이해력과 성숙에 도움을 주면서, 좋은 피정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켜야 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식의 영성 수련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래서 심상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 영성계에서 전통적으로 ‘수덕적 영성’은 입문 단계인 ‘정화(淨化)의 길’(via purificativa)로부터 시작하여 ‘조명(照明)의 길’(via illuminativa)을 거쳐 ‘일치(一致)의 길’(via unitiva)인 주입적 관상의 단계를 추구하며,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 은총의 결과인 주입적 관상과 수동적 정화 및 변형 일치의 영성 생활을 추구한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초보 단계에서 숙련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는 어두운 밤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이를 통과하면 그는 이제 새롭고 더 깊은 종류의 기쁨인 “주입된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의 기쁨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을 사람의 영과 함께 불꽃 가운데 두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주입(infusion)이라고 묘사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느 단계에로 나아가면 은혜의 주입이 주어지고 그것에 의해 우리를 상승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에서의 영성 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半)-펠라기아누스주의(semi-Pelagianism)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훈련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의 영성 훈련도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서 응용하고 있다. 비교적 건전한 개신교적 영성 신학을 제시하는 사이몬 챤도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의 <영적 훈련들>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이몬 챤은 비록 복음주의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많이 애쓰지만, 천주교의 훈련적(ascetical, 일반적으로 “수덕적”이라고 번역함) 특성을 많이 받아들이고, 은사주의적 강조도 많이 포용하면서 자신의 영성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일정한 복음주의적 틀은 유지하면서도 (구원적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영성 문제에 관한 한 상당히 혼합주의적인 내용을 말하고 이곳저곳의 사상과 기법을 다 용인하는 방법을 지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이몬 챤도 “인도 전통의 요가 훈련과 중국의 태극권 기술에서 보이는) 신체 훈련, 직관적 통찰력과 실제적 지혜와 같은 분야에서 "부정적”(apophatic) 전통과 이시아적 전통들로부터 배울 필요로 강조한 틸더른 에드워즈의 영적 지도 방법에 상당히 찬동하면서 이것이 서구적 합리주의적이고 분석적 접근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성 운동을 강조하는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개신교에서는 500년 동안 기독교의 좋은 전통인 수도원 운동을 잃었다고 하면서 그 전통을 복원하는 의미에서 영성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현대 천주교 영성 사상가들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나 헨리 나우엔(Henry Nouwen, 1932-1996) 등의 영성 개념과 그들이 말하는 영성 훈련 등이 오늘날 논의의 좋은 토대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보라. 물론 천주교회에 속한 이들이나 다른 이들이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성서적 영성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각교계가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서적 영성이라는 의미가 각기 다르다고 하는 것에 우리는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히 영성이나 영성에 관련된 말을 할 때는 천주교에서 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금 응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천주교적인 것이 오늘날 개신교 영성 훈련에 영향을 미친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같은 것이다. 이는 스페인에서 개발된 천주교 영성 수련 프로그램인 꾸르실료에 근원을 둔 것이다. 이를 활용해서 많은 개신 교회들도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당히 보수적인 복음주의권의 저자는 자신의 책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안식년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한다:

안식년 동안 적지 않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식년의 끝자리를 생소한 여행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워싱턴 근교의 한 수도원에서 일주일을 관상 기도로 보냈습니다. 거의 온종일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조용한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태고의 깊은 고요 속 영혼의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내게 낯선 친구였음을 확인하며 그와 벗됨을 아픔으로 배워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복음주의적 저자가 천주교적 영성 훈련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관상 기도를 하며 유익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상당히 일반화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자신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깊이 성찰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을 따라 제시되기 전에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늘 힘써 온 바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와 같은 어떤 방법을 따라 제시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방법 자체를 중요시하기 시작하게 된다.

때로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의 한 부분으로 영성 생활을 언급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의 당파성이 아니라 보편성/구체성, 절대성이나 상대성이 아니라 다원성, 탈세속성이 아니라 세속성을 추구하며 홍정수 박사가 1988년 11월 29일 개원한 세계신학연구원을 1995년 5월 15일에 확대 개편한 신학과 목회 연구소”인 한국 기독교 연구소는 그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영성 생활에 대한 많은 도서를 내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도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때로는 혼합주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에를 들어서 심상태 신부는 오늘날의 영성 운동의 과제의 하나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슷한 입장을 강조하는 김경재 교수에게 동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이러한 대화에서 공동적 묵상, 수행방법의 실시, 잠심, 영적 체험의 심화가 공동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실천적 그리스도교적 삶의 진정성이 동아시아적 명상적 종교나 아프리카-아메리카적 엑시스타시스적 종교의 체험들을 통하여 확인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기도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고유 가치가 드러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그리스도교계와 세계 교회는 불교, 유교, 노장사상, 천도교 등 세계적 종교인들이 체험한 영성 체험들과 깊은 대화를 통해서 영성이 새로워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종교가 자기 종교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개방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 종교의 진정한 실력이고 영적 능력입니다”.

이런 혼합주의적 경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런 사상이 침투할 때 더욱 더 분별하기 어렵게 한다.
요즈음 일반인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책의 하나인 파울로 코넬료(Paulo Coelho)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앞부분 작가 노트에 인용된 천주교 수도사요 영성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토마스 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를 인용하면서 파울로 코넬료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개시킨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영적인 체험에 보다 가까워진다. 참으로 깨달은 자,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진 영혼은 모든 편견을 넘어 설 수 있다....... 구체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적인 길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천주교적 영성 개념을 사용해서 그가 말하는 영적인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자신이 말하는 대로는 “신은 그/그녀를 허락하는 곳이면 어지에든지 임한다”는 것이며, 작중의 천주교 신학생인 그의 강연의 말로는 마법의 순간, 즉 “모든 별들에 깃들인 힘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데, 이 “마법의 순간은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도우며, 꿈을 실현시키도록 우리를 멀리 떠내 보낸다”고 한다. 또한 그 신은 이 작 중 신학생의 입으로는 다음과 같이도 설명되고 있다: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녀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야. 여신, 성모 마리아, 유대교의 셰키나, 어머니 대지, 이시스, 노예이자 주인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는 잊혀졌고, 금지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바꿔버렸지. 하지만 그녀를 위한 제의는 세기를 이어가며 계속되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어. 신의 다양한 면모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성의 면모야...... 모든 종교와 전통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어.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 나는 가톨릭 신자니까 그녀를 성모 마리아로 보는 거고.

이와 같이 코넬료가 말하는 영적인 것은 이렇게 여성적인 면모도 간직한 신적인 것에 대한 감응, 그와의 일치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현대인들이 천주교적 영성 개념으로부터 그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생각하고 있는 영성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천주교적 영성 개념과 익숙히 연관된 영성 개념이나. 그로부터 현대에 발전되어 나온 새로운 영성 개념과는 다른 것을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은 당신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을 쉐이퍼 처럼 참된 영성이라고 표현하거나 청교도들처럼 성경적 영성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오늘날의 복잡한 영성의 혼란 상황 가운데서는 새로운 용어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바를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의 한 측면이나 한 방향으로 여기거나, 이것도 영성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여성을 추구하는 여러 방향이 있는 중에 우리는 이런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그야 말로 영성의 혼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영성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영성”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단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한 채 우리가 성경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묘사해 보기로 하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녹의 영성(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란 단어를 인터넷 성경에서 검색하면 10구절이 나타납니다.
10구절 중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에 관한 구절은 8구절입니다.
8구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5:18-19 / 야렛 (162세에) - 에녹(65세에) - 므두셀라
 

1. 창세기 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2. 창세기 4: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3. 창세기 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야렛 - 에녹 - 므두셀라

4. 창세기 5: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창세기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6.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7. 역대상 1:3
에녹, 므두셀라, 라멕,

8. 누가복음 3: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9.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0. 유다서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


레위기 23장 / 7대 절기


레위기 23장 -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
출애굽기 23:15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해 봅니다.

1 . 유월절(逾越節) - 넘을 유, 넘을 월, 마디 절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

레위기 23:4-5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 날짜 : 성력 1월(닛산) 14일 저녁
  • 유래 :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출 12:1~14)
  • 약속 : 죄 사함, 영생, 재앙을 면하게 해주심, 다른 신 심판, 하나님의 인
  • 예언 성취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한 역사는 인류가 죄악 세상에서 영적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자다(요 8장 32~3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어린양의 살과 피로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애굽에서 해방되었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죄악 세상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고전 5장 7절) 이날에 당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로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마 26장 17~28절, 눅 22장 7~20절).

2. 무교절(無酵節) - 없을 무, 삭힐 효, 마디 절 / 애굽( 죄악의 종노릇 하던 삶) 의 삶을 홍해에 수장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기념일 = 좌악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아 땅에 영원히 장사지냄의 상징(안식일에)

레위기 23:6-8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히브리어로는 맛차.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1월 15일
  • 유래 : 성력 1월 15일 라암셋에서 출발,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 홍해를 건너기까지의 고난.
  • 약속 :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됨.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심(마 5장 10절).
  • 예언 성취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홍해를 건너기까지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칠 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켰다(신 16장 3절, 레 23장 5~6절).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장장 6시간 동안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심으로 예언을 이루셨다. 신약시대에는 이날 금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막 2장 20절).

3. 초실절(初實節) - 처음 초, 열매 실, 마디 절 / 봄 절기 수확으로 첫 열매 첫 곡식의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제로 드림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열납되어진 부활승리를 가념한다.( 안삭후 첫날)

레위기 23:9-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초실절(부활절)

  • 날짜 : 무교절 후 첫 안식일 이튿날(첫 일요일)
  • 유래 : 홍해에서 상륙,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 전멸.
  • 약속 : 부활
  • 예언 성취 :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홍해로 들어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실 것을 뜻하고, 홍해에서 상륙한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것을 뜻한다. 구약시대 무교절 후 안식일 이튿날(일요일)에 처음 익은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께서도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전 15장 20절).

  • 날짜 :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가던 날.
  • 약속 : 이른 비 성령
  • 예언 성취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초대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장 1~4절).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五旬節) - 다섯 오, 열흘 순, 마디 절 / 이 때 고운가루로 누룩을 넣어 불에 구워 떡을 만드는데 이는 우리의 모든 의가 깨어져 가루가 되면 불의 성령을 받아 말씀을 증거할때 누룩과 같이 복음 학장이 됨을 의미한다.§ 넉달농사 §다음절기인 나팔절이 오가 전가지 4 개월이란 시간이 남는데 이기간에 마 28:19~20과 행1:8~9 절의 말씀처럼 복음이 땅끝까지 확장도어 이방인 구원을 이루는 은혜의 교회시대를 의미한다,이시가는 자금까지도 진행되고 았는 중이다

레위기 23:15-21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사도행전 2:1-47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 날짜 :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가던 날.
  • 약속 : 이른 비 성령
  • 예언 성취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초대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장 1~4절).

5. 나팔절 / 4개월 농사가간(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은혜시대)이 끝나면 7월1일에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온 백성이 추수한 곡식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이방인의 추수기가 끝나면 계8장의 일곱 나팔에 의해 환란 중에도 믿음을 지킨 계 14 장의 시온산애 주님과 함께 서있는 산부돈 자들을 의미한다.

레위기 23:23-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이요 성회라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일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가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지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모세는 들고 내려 오던 십계명을 던져 깨뜨렸고 백성들은 재앙을 받아 3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출 32장 1~28절). 이후 백성들은 죄를 뉘우치며 단장품을 제했고, 모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함으로 성력 7월 10일에 두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게 되었다(출 34장 4~35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십계명 받은 날을 대속죄일로 정하시고, 그로부터 열흘 전을 나팔절로 정하셔서 회개의 나팔을 불어 대속죄일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 예언 성취 :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하여 금송아지를 숭배한 역사는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세월이 흐르자 교회가 부패하여 태양신의 날들을 지키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대속죄일을 알리는 나팔을 분 것같이 윌리엄 밀러 당시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 재림 운동이 10년 동안 일어났다.

6. 속죄일(贖罪日) - 속할 속, 허물 죄, 날 일 /  이 민족적인 죄를 씻음빋기 위해 여호와 앞에 성횔로 나아가는 대 속죄일이다. = 이는 예수님 께서 나팔절기의 완성으로 재림 하신후에 대접 재앙으로 적 그리스도를 멸하시고 주의 천년왕국 직전에 첫째 부활에 참예한(계20:4~5) 어린양이신 주님을 의지마므로 죄에서 씻음 받은 자들의 공의로운 속죄언약의 완성의 의미이다.( 사35장, 사65:17~25)

레위기 23:26-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0일
  • 유래 :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
  • 약속 : 죄 사함
  • 예언 성취 :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자 십계명이 대속죄일에 다시 허락된 것같이, 1844년 10월 22일(성력 7월 10일) 대속죄일에 진리가 일부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한 구약의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아사셀 수염소에게 백성들의 모든 죄를 안수한 후 광야로 보내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는 아사셀 수염소로 표상된 사단이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무저갱 속에 갇혀 있다가 지옥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7. 초막절(草幕節) - 풀 초, 장막 막, 마디 절  / 이스라엘이 모새로부터 죄악된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 동안 구름가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초막을 잣고 장막 생활을 했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장막절,수장절이라함) = 이는 애굽과 같은 환란이 지나고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광야에서처럼 살아있는 주의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천년왕국안에서의 백성된 삶을 의미한다.

레위기 23:33-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5~22일
  • 유래 :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다. 이에 백성들이 성막 재료를 넘치도록 가져왔다(출 36장 3~5절).
  • 약속 :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전도, 늦은 비 성령(요 7장 37절, 슥 14장 16~18절)
  • 예언 성취 : 초막절에는 무성한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어 거하는 규례가 있었다.
    성소 재료와 나뭇가지는 모두 구원받을 성도들을 상징하므로(계 3장 12절, 엡 2장 20~22절, 사 60장 21절, 61장 3절),
    초막절은 구원받을 성도들을 모으는 복음 사업으로 예언이 성취된다.

제8일의 큰 성회

초막절을 일주일간 지낸후 8일 째에 거룩한 큰 날로 다시 모였다.(민 29:25, 레 23:36)
주의 천년왕국 초막절을 지낸후에 영원한 안식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한 천국 세계를 의미 한다고 본다(계 21~22장)
8일은 첫째로 난자 8일만에 할례를 통해 죄사함 받는 날이요,
둘째는 안식후 첫날인 8일 째에 주님이 부활허산 날이요,
셋째로 인간 역사 6천년과 주님의 왕국1천년이 지나 8천년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올라움을 받는때가 성경에 가록한 제8일의 거룩한 큰 성회를 의미한 것이다.(레 23:39, 사 66:1)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통해 인간 구속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경 전체로 보여 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다.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 23:2).
이스라엘 민 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무교절 - 그리스도의 친교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 -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
나팔절 -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 - 그리스도의 속죄
초막절 - 그리스도의 심판


 

​여호와의 3대 절기와 이스라엘의 농사

1. 여호와의 3대 절기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의 그림자이다.
또한 농사의 목적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함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얻기 위하심이다(고전 9:10).
세상 농사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나님의 농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시대별로 다른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눅 16:16).
또한 농사의 끝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추수의 때가 있다(계 14:6-7).

여호와의 3대 절기는 하나님의 3가지 농사를 예표한다.
여호와의 3대 절기로는 출 23:14-16에서와 같이 '무교병의 절기'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과 연종에 모든 수확을 거두어 저장하는 '수장절'이다.

<무교절, 유월절>

· 무교절은 율법시대를 예표한다.

· 율법시대는 애굽에서 마지막 유월절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마감되었다.(출12:7-11, 요13:1)

· 또한 주님은 삼일 후 초실절날 약속에 따라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전15:23).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 맥추절은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 교회시대의 농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심으로 시작되었다(행2:1-3). 또한 교회시대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의미의 맥추절에 성령의 첫 열매(롬8:23,약:18,계14:4)가 하늘로 수확됨으로서 마쳐질 것이다.

· 마13:39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때에는 추수꾼을 보내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영어성경은 '밀'로 표현됨)은 곳간에 거두어진다(마13:30).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 수장절은 천년왕국시대를 예표한다.

· 연종에(세상나라의 끝) 모든 농사의 작물을 거두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안식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하여진다(레 23:39-43). 초막은 결핍이나 초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와 지켜주심을 의미한다(시27:5).

· 일시적인 광야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하였던 것과 같이 일시적인 천년왕국 후에는 영원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야에 거할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불기둥이 그들을 비쳐주었지만 영원한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수가 있을 것이며(계22:1-2) 어린양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계21:23).

2. 이스라엘의 농사의 4가지 주요작물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4가지 주요 작물이 있다(대하2:15, 계6:6). 이는 보리, 그리고 기름포도주이다.

<보리와 밀; 곡물농사>

· 곡식농사보리와 밀이 있으며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밀의 대용작물 혹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또한 보리농사는 율법시대를, 밀농사는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주님께서는 초실절에 보리농사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첫 열매는 밀농사의 첫 열매(출34:22)가 거두어지는 맥추절에 있을 것이다(출23:16).

· 또한 추수시기별로 구분해 볼 때 추수를 시작할 시기에 얻는 첫 열매본격추수기와 추수가 끝날 무렵의 이삭줍기추수가 있다 (출23:19, 룻2:23).

· 여호와께서는 곡물의 첫 열매에 관한 제사의 방법을 지시하실때 곡물에 따라 다른 방법을 주셨다. 보리의 첫 열매는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가져가 요제로 드리고(레23:10-12), 50일이 지난 후 밀의 첫 열매는 가루를 내어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제사장에게 드려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야 한다(레 23:16-17, 20).

· 또한 레23:22에서는 밀을 추수할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또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것으로 남기라 하셨으니 이는 이삭줍기 추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 23장에서는 밀 추수의 3종류를 언급하였지만 보리는 오직 첫 열매만 언급이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포도와 올리브; 열매농사>

· 포도주틀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행하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사63:3, 욜3:13, 계14:20).

· 올리브 농사는 이스라엘의 농사중 마지막 작물이다. 또한 올리브 열매에서 얻어지는 감람기름의 주목적은 태워져 빛을 발함이다. 광야시절 여호와의 장막 안에는 감람유 등불은 항상 빛을 발하였다. 마지막 농사인 감람열매는 천년왕국의 농사 즉 영원한 복음의 열매인 것이다. 광야의 장막 안 등대에서는 감람유가 항상 태워져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냈듯이 영원한 복음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내용을 갖는다(계14:6-7).

<작물별 추수시기>

· 보리농사의 추수4-5월에 있다.

· 밀농사의 첫 열매5-6월에 시작된다. 이후 추수기는 3개월 정도 지속되어 이삭줍기로 마쳐진다.

· 포도의 수확8-9월에 있게 된다. 또한 포도주틀을 밟는 시기와 밀의 추수(타작마당)의 시기는 맞물린다(민18:27,30).

· 올리브열매의 수확은 연종에 있어 9월 중순-11월 중순경이다. 올리브열매의 타작은 포도수확 이후에 있다(사24:13).

위와 같은 모든 농사들이 끝나면 작물들은 거두어져 저장되고 다음해의 새 농사가 준비되는것 처럼, 영원한 복음을 끝으로 인간경작의 농사는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 곡물의 제사방법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보리농사의 첫 열매인 초실절(9-14절)과 밀농사에 해당하는 오순절(15-22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실절

·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이 거두어져 제사장에게로 주어지며,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린다.

· 주 예수님께서는 초실절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눅22:69,히12:2).

<오순절>

· 보리의 초실절 이후 50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데, 이는 밀의 첫 이삭(20절)을 빻아 고운가루로 만들고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17절). 누룩으로 구워진 떡은 죄의 성정(누룩은 죄악을 상징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한다.

· 주님의 부활이후 50일째 날이었던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밀농사의 추수 때가 이르러 성령의 첫 열매가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함을 입게 될 것이다(계14:4).

· 율법시대가 출애굽시의 유월절에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유월절에 이중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시대도 역시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으로 시작하여 어느 한 맥추절(오순절)날에 인류 가운데 첫 구속함을 받은 첫 열매(약1:18, 계14:4)가 거둠어 짐으로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밀의 첫 열매는 보리의 첫 열매와 같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진다. 즉 성령의 첫 열매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부활·휴거되어 대환난시에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계12:12,13:6)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밀의 추수는 세상나라의 끝(마13:30,39) 시기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마24:29-30)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루매 곡식이 공중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계14:14-16, 살전4:14-17, 살후2:1-3,7-8).

· 이스라엘에서는 농부가 사는 집과 밭의 중간지점에 곳간을 지어놓고 수확된 알곡을 곳간에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의 알곡성도는 하늘과 지상의 중간지점인 공중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밀의 이삭줍기 추수는 주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멸하신 후(고전15:23)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게 된다. 땅에 남겨진 밭의 모퉁이와 떨어진 낱알들은 이삭줍기 추수로 거두어짐과 같이 늦게 익어진 성도는 땅에 남겨지나 천년왕국 직전 이삭줍기의 추수에 이기는 자로 부활·휴거되어 1,000년간 주님과 함께 열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와같이 알곡은 익는 순서에 따라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다(계 22:16).
일출 직전에 나타날 때 깨어 있는 자들만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첫 열매의 자격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때는 대환난기이며 일출은 천년왕국 시대인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맷 스맷서스트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맷 스맷서스트

맷 스메서스트는 리치먼드에 있는 River City Baptist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202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 자료 사이트 /  https://www.tgckorea.org/author/424


[‘복음과 도시  예수]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진리를 간결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종종 진리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진리를 가리기도 한다.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이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첫째,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렘 32:27) 그렇기에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신다.(히 13:5)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해서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문만이 아니라 모든 창문까지 전부 닫아버리는 이야기로 가득하다.(잠 16:9; 19:21, 행 16:6~7)

둘째,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참으로 은혜로운 진리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경우 대부분은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안전을 말한다. 몇 년 전 어느 폐쇄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다. “…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18) 그런데 완벽하게 안전할 거라고? 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적 안전은 그중 하나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는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좋게 본다면 이 말은 항복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험 변명 두려움 등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러나 아주 교묘하다. 왜냐하면 싸우고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이 말은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녹록지 않다. 사도 바울이 석양과 낮잠 대신 군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농부, 달리기 경주장과 권투 시합장을 예로 든 이유다. J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독교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돼야 한다.”

넷째, ‘감당 못 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기에 그 한계를 넘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 못 할 정도의 일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이 구절보다 더 많이 성경 말씀으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 돕는다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즉 우리를 위해 오셨다.(마 9:12~13, 눅 19:10)
기독교의 핵심은 찰스 스펄전 목사가 말한 바와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맷 스맷서스트

◇미국 복음연합(TGC) 총괄 에디터이며 ‘Before You Open Your Bible’의 저자이다.



죽음 - 죄의 결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18:20)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 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음의 의미 -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

일반적으로 가장 회피되는 단어는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향하여 정해 놓으신 이치(히 9:27)가 죽음이므로 세상을 향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이를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와 형벌 (창 2:17; 3:19; 롬 6:23; 고전 15:21; 약 1:15)로서 우리 삶의 일부가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Augustine)은 죄의 형벌이 곧 죄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은 죄악된 상태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임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며 모든 삶에는 항상 죽음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종교개혁자 칼빈 (John Calvin)의 주장 (<기독교 강요>, 3.9.4)은 합당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 1:21).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표현하며 (전 2:7; 창 3:19; 약 2:26) 이로 인해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롬 5:12, 17).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시 90:7, 11), 심판 (롬 1:32), 정죄 (롬 5:16), 저주 (갈 3:13)로 표현된다.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죽음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엡 2:1-2;겔 18:4, 20; 롬 6:23).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셋째,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을 들 수 있다 (계 20:14).

이는 앞서 설명된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 (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킨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결과는 이렇게 저주와 형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번민과 방황,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형벌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무서운 적과 가장 큰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대적이 아니라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가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이기셨으므로 (고전 15:55-56) 죽음은 이제 정복된 원수에 불과하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이었으므로 (요 8:44)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예수를 시험했고 (마 4:1-11), 더러운 영들을 보내었고,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서 그를 죽이기를 꾀했다 (눅 22:3; 요 6:70, 13:2, 27).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거룩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사탄의 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음부의 권세는 결국 패배 당했다. 오리겐 (Origen)과 이레니우스 (Irenaeus)를 포함한 몇몇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했던 속전설은 사탄이 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사탄의 노예인 죄인들을 속량하셨다. 오리겐은 우리가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전 6:20)는바울의 고백을 자주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게 지불한 속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전설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하셨다는 성경적 진리를 충분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단지 사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원래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었던 죽음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탄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뜻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복음의 핵심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

그러나 이렇게 영생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사탄은 그들의 성화를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하도록 총력전을 펼친다 (벧전 5:8).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실제적 악이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세력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당장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가? 이미 구원받아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경륜 속에서 죽음을 성화를 완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화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지나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게 될 때 비로소 더 나은 본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죽음을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빌 1:20-23).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예비된 상급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므로 이에 대한 명상은 희망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로 다가오게 된다 (롬 14:8). 죽음은 세상에서 한 평생 지속되었던 영과 육의 싸움의 종식을 가리키며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영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아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지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음에 대한 성서적의미

기독교의 죽음의 이해의 특색은 윤리적 성격에 있다고 본다.
즉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윤리적 차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는 죽음이 단지 인간의 운명이며 자연적 사건이라는데 머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적으로 죽음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윤리적 극복을 추구한다.
⽄런 입장에서 기독교는 우선 죽음의 현상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한다. 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은 죄의 대가를 지불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해결의 길이 열리고 부활의 영광 속에서만 그 완전한 답이 주어진다.

기독교는 죽음의 문제를 앞에 놓고 몰트만(J. Moltman)의 말대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즉 신정론(Theocracy)의 질문이다. 왜 이 세상은 불의의 세력이 판을 치고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가. 즉 기독교는 고난과 죽음의 문제를 신정론적인 윤리적 물음에서부터 다룬다. ⽄독교의 신앙을 그런 각도에서 다룬다면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반항과 항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죄가 죽음을 결과하였고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며 의로운 빛의 자녀들을 괴롭혔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존재론적으로 극복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활로 이어지며 영생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극복 그것이 기독교의 죽음이해이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요 상실로서 영과 육의 분리이다. ⽄경은 절대로 죽음을 존재의 폐기나 중지로 다루지 않는다. ⽄경은 죽음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맥박이 멎고 호흡이 끊어지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요 11:11-14).

②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

인간이 하나님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시인간(原始人間)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도 단절되고, 조화의 관계도 파괴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적 죽음이 발생했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단절이 생겼다. 이 분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영적 죽음으로 상존해 있는 것이다(엡 2:1).

③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은 요한게시록 21:8에 기록한대로 둘째 사망으로 하나님의 面前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것이다. ⽄째 사망이란 악인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계 20:8, 14). 이 죽음에도 본질적인 죽음이 수반되고 있으며, ⽄ 죽음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그의 사자들에게도 임한다(마 25:41).

이제 성서를 통하여 좀더 세밀하게 죽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에 나타난 죽음

초기시대에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였다. ⽄것은 곧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일방적인 확신이 있었다는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생명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집약해보면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뜻하며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칠 수 없는 단절된 상태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죄와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죄성 여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서의 삶을 죄를 멀리하는 생명의 삶이라면 반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죄와 결탁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이 ⽄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은 그 자체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1) 죽음의 허무성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것은 구약시대의 사람에게 있어서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온 세상의 길을 떠난다"는 ⽄구는 죽음에 대한 담담한 의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는 죽은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의식과 장례식에 대한 애도의 기사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생명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죽음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낸다.

(2)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구약에서는 죽음을 곧 죄와 벌로 연결시켜 생각하려 했다.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관념은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벌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으며 불멸불사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이 죽음이 세상에 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란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형벌인 것이다. 이런 내용은 구약의 지혜 문학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악을 좇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자이며"(잠11:19)

"어리석은 여자의 유혹에 자신을 내 맡기는자"(잠7:25-27, 9:18)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들의 경우에 죽음은 자연적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귀한 선물의 성격을 지닌다. 결국 죽음은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할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기 생명을 이해하지 않고 신뢰와 감사로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성취하려는 자의 결과이다.

그래서 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절망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축복으로서의 죽음

구약성서에서 이상적인 죽음은 노년기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한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죽음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죽음으로 창세기 25장 8절에서 그런 죽음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백발의 노년에 이르러 늙고 만족하게 산 다음에 죽었으며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 함께 있었다."

이런 죽음은 성취된 인간의 마무리로서 누구나 죽어야 할 죽음이지 특정한 인간의 죽음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삭과 다윗과 욥도 만족한 죽음을 죽었으며 (창 35:29, 욥 42:16, 대상 29:28) 그들의 죽음은 음울한 결말이 아니라 평화로운 성취였다. 즉 고령과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행복한 성취일 수 있으며 풍성한 축복의 생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정리해 보면, 우선 죽음은 일반적인 자연스러운 경계선이고 생명의 유한성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죽음을 누구나가 겪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신약성서에서의 죽음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움 이전까지는 죽음이 구약성서의 사상 아래서 반영되어 왔다. 즉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을 얻게 된 것처럼 죽게 되었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인류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강조되었던 죽음이 실재 한다는 사실은 이제 객관적인 사실이 된 것이다.

(1) 절망을 넘는 죽음

신약의 죽음관은 희망의 죽음이다. 바로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 희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부활의 희망인 것이다. 그레사케(Greshake)에 의하면

"형제들아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사람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 소비하여 없애는 것이 죽음이며 생명을 버리는 길"이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죄의 벌로서 조명된 구약시대의 죽음과는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는 옛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같이 새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에 의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라서 신약의 죽음 이해는 이미 우리는 죄와 옛사람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이 우리를 예속하지 못하고 죽음은 희망을 가져오는 제 2의 출발로 말하고 있다.

(2)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순교나 진리의 수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철저한 희생의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또 우리를 대신해서 그를 죽음으로 내어준 죽음이다. ⽄봉랑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의 죽음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죽음"이라고 했다. 즉 그가 십자가를 맞이한 것은 인생의 허무와 좌절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을 가지려는 1차적 행동이었다. 예수가 보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은 죽은자에 대한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가 가진 신관으로 죽음에 대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모습에 대한 견해이다.

둘째는, 유대인과 함께 했던 것으로 죽음이후 부활하게 된다는 예수의 확신있는 견해이다. 또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실 때도 죽음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표현하신 부분은 생명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임을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죽음의 이해를 살펴보면,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와 맺은 인격적인 관계의 빛 속에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미 바울에게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음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존재를 깊이 생각 하도록 요구하셨다. ⽄것은 이미 죽음이 신앙안에서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임을⽄생각케 하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나타낸 죽음의 반응을 시련의 하나로 보고 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심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죽음의 심각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기독교인의 현세의 삶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을 막아주는 관점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의 모형을 새롭게 제시한다. 요 12:24이나 6:54는 밀알의 비유와 성찬의 비유로 자신을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 한다면 예수와 함께 그날에 다시 살 수 있다는 삶을 향해 죽음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 서신의 죽음의 이해

바울서신에서는 죽음의 기원과 죽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있다.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세례의식과 부활로 증명되는 죽음의 극복성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있는 피조적 한 실재로 보았다. 죽음이란 철저히 상대화되고, 죽음은 그 쏘는 가시의 권세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첫째, 바울은 죽음의 기원과 죽음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 땅에 죄가 들어 왔고 그 죄의 벌로서 죽음이 주어졌으며 온 인류는 죽음의 그림자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런 죄로 인하여 죽음에 놓인 인간을 위하여 직접 죽음을 취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형벌로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율법 아래 나셨고"(갈 4:4) "죄 많은 인류의 모습을 몸소 취하신"(롬 8:3)것으로 온 인류와 유대를 같이 보시고 인류가 받을 형벌을 대신 지신 사랑의 죽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무죄하시지만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그⽄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조물의 죄와 죽음의 역사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바울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죄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세례의식을 통하여 표시하고 있다. 로마서 6:3과 빌립보서 3:10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죽음에 묻히며 그 분의 죽음에 합치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소극적인 면에서 본 신비스러운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죽는 죽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권세가 나타내는 모든 사물의 질서에 대한 죽음이다. 즉, 죄에 대해서와 우리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이며 육과 율법에 대한 죽음이고 세상의 모든 원리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조직신학에서의 죽음

성종현은 "기독교는 죽음으로 부터 출발한 신앙공동체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사건이요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나아간 부활의 씨앗 사건이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삶에 대한 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전제라고 말한다.

성종현은 [장신원보](1989.11.6)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죽음"이라는 그의 글에서 몇몇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다루고 있다. 개혁자 루터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깊은 수면에 비유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지지한다. 한편 칼빈은 "만약 누가 오늘날도 경건한 신자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잠든 성도는 천상의 생명의 즐거움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영광은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날까지 유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철저종말론

본 이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쿨만(O. Cullmann), 바르트(K. Barth), 엘러트(W. Elert), 퓨리(R. de Pury)와 융겔(E. Jungel) 등으로 이들의 죽음 이해는 완전 죽음설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어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전적죽음 또는 완전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하고 선한 것, 생명 자체까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만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믿어 온 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초대교회)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나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의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사건 위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희랍인들의 신앙인 영혼의 불멸 사상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나 바울이나 초대교회는 영혼의 불멸을 가르틴 것이 아니라 부활체와 영체와 죽음 후의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을 후세의 교회가 희랍인의 사상인 영혼의 불멸론과 혼돈해서 그것이 현재까지 전달되어 왔다고 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떠난다거나 어떤 장소로 이동된다는 생각은 이방종교적 사고라고 비난한다. 이들에 의하면 영혼불멸설은 비기독교적이다.

(2) 영혼불멸설

본 이론은 여러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2 서서 신앙고백, 소요리 문답서)에서 지지하는 이론이다. ⽄,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죽음이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이며, 육체적 존재의 종말을 의미한다. ⽄떤이들은 영혼부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시대에 활기띤 사상이다. ⽄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영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 W.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구약성서는 개인의 사후에 그의 영혼이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여러 곳에 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0:28로 볼 수 있으며, 요한복음 11:25도 죽음 후에도 그 사람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罪) : 허물 죄

罪자는 ‘허물’이나 ‘죄’, ‘잘못’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罪자는 网(그물 망)자와 非(아닐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본래 ‘허물’이나 ‘죄’라는 뜻은 辠(허물 죄)자가 쓰였었다.
辠자는 自(스스로 자)자와 辛(매울 신)자가 결합한 것으로 고대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의 코를 잘라 처벌한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辠자가 ‘황제’를 뜻하는 皇(임금 황)자와 비슷하여 진시황 때는 이를 피해 새로이 만든 글자가 바로 罪자이다.
罪자는 ‘아니다’나 ‘나쁘다’라는 뜻을 가진 非자에 网자를 결합한 것으로 ‘잘못(非)을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网)’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죄 : 넉 사(四) + 아닐 비(非)죄는 네 가지 아닌 것을 의미한다.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성경에서 죄를 정의하는 구절을 살펴봅시다.

1. 불신(요 16:9)
참조 - 롬 14:23, 막 16:16
2. 불선(약 4:17)

3. 불의(요일 5:17)
4. 불법*요일 3:4)


죄의 본성


I. “죄” 용어


1. 구약성경

(1)  chattaath, chattath--표적에서 빗나감.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서 벗어남. 탈선
(2) a'won -부정, 죄책, 도덕적인 비틀어짐. 고결성과 정직성 결여. 품성과 행위에 있어서 결함
(3) pesha - 권위에 대한 반항. 하나님에게 항거나 반역
(4) a'bar - 범법(transgression), 지나치는 것, 건너가는 것.
(5) resha' - 사악함, 경건치 못함, 타인과의 관계 파괴
(6) ma’l - 위법행위 배반하는 행위
(7) 'ajen - 우상숭배, 부정, 허영
(8) remiyyah - 거짓, 속임, 표리부동


2. 신약성경

(1) hamartia-- chattaath와 같은 의미로 “표적에서 빗나감”
(2) anomia - 무법, 위법, 불법(lawlessness)
(3) paraptoma - 배반행위, 실수, 차질
(4) parabasis - 위법(transgression)
(5) asebeia - 불경건 (irreligion), 경건치 못함
(6) parachoe -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음, 부정확하게 듣는 것.
(7) adikia - 불의, 불법, 부정, 정의와 진리에 반대
(8) apeitheia - 반역

위의 성서적 용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 불신과 불경건, 범죄, 정직성의 결여, 불법, 반역, 변절, 왜곡, 가증한 것, 무지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비추어 보아 죄라는 용어가 대체로 외적 행위, 내적 상태, 관계의 파기를 나타내는 세 범주에서 사용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II. 죄에 관한성경의 4대 정의


1.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죄는 외적 행위이나 그 뿌리는 내적 상태에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위 인용문은 “죄=불법”이라는 도식으로 죄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불법이 외적인 행위에 국한 된 문맥이 아니다. 위 인용문을 이끄는 대전제에 다음 말씀이 선행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1기별, 320).

그리고 “죄=불법” 이라는 정의라는 문단 안에서 동 불법을 인간의 내면 상태와 연관 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표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간 내면 상태를 묘사하는 다음 진술로 끝맺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롬 8:7)다.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1기별, 321).


2. 죄는 불신이다(롬 14:23; 요 16:9). 죄는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다.

3. 죄는 불의이다(요일 5:17). 죄는 내적으로 비틀어진 상태이다.


4. 죄는 불선이다(약 4:17). 죄는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결핍이다.


III. 죄의 본성


1. 죄의 본성에 관한 개요적 안내

(1) 죄는 缺性이나 결핍(privation)이다.

Augustinus 은 죄를 선한 것 안에 생긴 선의 결핍이나 상실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원래 볼 수 있는 시력이 있었으나 그 시력을 상실하여 눈먼 상태와 같거나 부상당한 팔과 같다.

피조적 존재는 그 제한성 때문에 이러한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 전 이런 결핍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죄의 필연적 결과로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결핍을 지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완전한 상태의 결핍에서 시작한 이 결핍성은 인간을 무제한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전 1:7).

Schleiermacher는 죄를 감성(sensuous nature)에 기인한 신의식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죄를 결핍으로 보는 시각은 근원적 존재에서 이탈한 존재원천의 결핍 즉, 독립성으로 보는 방향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죄를 선의 상실 정도로만 보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 죄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능동적 반역이나 반항이기 때문이다.


(2) 죄는 幻影이나 환상이다

Spinoza는 죄의식이 인간의 제한성, 즉 지식의 불충분에서 기인한 환영이나 환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고차원 수준으로 상승되는 경우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Ritschl 역시 무지에서 기인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죄를 부인하는 천박한 이해에 불과하다.


2. 죄의 본질적인 특성

(1) 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에는 독립성이 없다. 죄는 존재가 아니다(Sin is not "is."). 죄는 존재의 반대이다(Sin is opposite of "is."). 죄가 독립성의 결핍이라는 점은 실재(reality)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된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루터파 신학자 Matthias I. Flacius(1520-1575)가 죄를 분리된 독립적인 본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2)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계되어 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참회하는 고백을 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한 범죄를 곧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고 인식을 하였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한 관계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즉, 죄에는 관계적 특성이 있다.

죄는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 율법에 일치하지 못하는 범법 행위이다. 인간 마음 판에는 보편적인 도덕률이 새겨져 있다. 보편적 도덕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들어 있다(롬 2:14-1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죄는 도덕률과 연관 되어 있어 절대적 특징을 지녔다. 죄가 되던지 안 되던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지대는 없다.


(3)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은 인격체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중심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반이 된다.

Augustinus는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이 된다.


(4) 죄는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갖가지 죄악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지적은(히 8:10; 10:16) 마음에 이는 생각을 경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16-17).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구 즉, “죄된 본성의 욕망들(epithumian sarkos)"이다.

이 내적 상태에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뿌리도 포함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 주었다(5BC 1128).

“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치료, 372-373).


(5) 죄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은 유죄가 된다. 즉, 죄책이 성립되어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유전 받은 잠재적 죄책(potential guilt)과 죄된 행위를 한 결과인 실제로 범한 죄책(자범죄, actual guilt)이다. 하여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롬 1:18).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롬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오염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도덕적 성질의 부패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타락성을 지닌 채 탄생한다(시 51:5; 욥 14:4; 엡 2:3).


(6)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자기 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 자체는 교만의 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루스벨이 범한 길을 따른는 것이 된다(딤전 3:6).


(7)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죄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다. 그리고 자기 죄는 숨기고 남의 죄를 극대화시킨다.


(8) 죄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녔다.

Sin is "sui generis." -->Sin is "of its kind," "one of its kind,' or "unique type of its kind."


(9) 죄는 세력(power)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이지만 (존재론적 의미), 죄는 존재(being) 이 아닌 세력이다.
  a. 부정적인 세력이다.
      죄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된다(negative power).
  b. 죄는 자멸적 세력이 된다(suicidal power).
     죄는 항상 자기 파멸적 힘이 된다.
     이는 마치 모든 수를 곱하면 것을 제로로 만드는“O"과도 같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사 64:7).
  c. 죄는 기생적 세력이다(parasitic power).
     독립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