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再臨) second coming



재림(再臨) second coming

재림(再臨, Second Coming, Second Advent, Parousia)

기독교에서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또다시 내림(來臨)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
예수의 다시 오심, 또는 예수의 두 번째 오심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재림이라는 용어의 원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영어로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하며 '도착(到着)' 또는 '내방(來訪)'의 뜻이다.
현재 그리스어에서는 실질적인 뜻으로 쓰이지 않지만 영어에서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하게 인식되어 있다.

재림에 대한 근거는 마태오복음과 여러 서신서에서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가르친 내용이다.
특별히 초대교회 시대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림의 시기나 양상(樣相), 그리고 기대의 강약에 관해서는 똑같지 않았으나,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적·윤리적 준비를 해야 한다는 확신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마태오복음 24장에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방식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원시 교회에 있어서는 재림의 희망도 그 지연으로 차츰 엷어지고, 이것은 다음 시대의 교회의 제도화, 조직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재림의 절박성을 강조하고 열광적으로 이를 기대하는 가르침이나 운동은 기독교 사상이 가끔씩 나타난다.

성경 속에서의 언급

이 부분의 본문은 마라나타입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신 뒤에 그분께서 그들이 보는 동안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이 그분을 받아들여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더라. 그분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똑바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라, 흰옷 입은 두 남자가 그들 곁에 서며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 사도행전 1장 9~11절

And when he had spoken these things, while they behold, he was taken up; and a cloud received him out of their sight. And while they looked stedfastly toward heaven as he went up, behold, two men stood by them in white apparel; Which also said, Ye men of Galilee, why stand ye gazing up into heaven?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shall so come in like manner as ye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 Acts 1:9~11

재림이 늦어짐에 대한 성경 속에서의 언급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베드로후서 3장 4~10절 (개역개정)

They will say, "Where is this 'coming' he promised? Ever since our fathers died, everything goes on as it has since the beginning of creation." But they deliberately forget that long ago by God's word the heavens existed and the earth was formed out of water and by water. By these waters also the world of that time was deluged and destroyed. By the same word the present heavens and earth are reserved for fire, being kept for the day of judgment and destruction of ungodly men.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Bu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The heavens will disappear with a roar; the elements will be destroyed by fire, and the earth and everything in it will be laid bare.

— 2 Peter 3:4~10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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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과 삶의 태도(마가복음 13:24-37)

성경에 재림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재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유스티노스(Ἰουστῖνος ὁ μάρτυς, Justinus Martyr. 약 100년 – 약 165년)라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변증가, 순교자, 신학자, 겸 철학자였다.

초림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초림이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초림하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모두 191개나 나온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재림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께서 직접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요14:3; 마24:30; 마26:64).
구약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건을 동시에 말씀하시고 있어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욥 19:25, 26; 단 7:13, 14; 슥14:4; 말 3:1-2 등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300회 이상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림에 대한 기록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 전체 구절 가운데 25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재림에 관한 언급이 없는 책은 요한2서, 3서, 빌레몬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뿐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면 신약의 주제는 영광 중에 재림하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약속 있는 예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흐르고 있는 메시아사상은 신약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와서 재림하실 예수님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신천신지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재림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야고보도 말하기를, “너희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고 했습니다.
성경을 마감하면서 계시록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림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26)”

Ⅰ. 재림의 확실성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마 16:27) 공회 앞에서 선언하셨고(마 26:64)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요14:1-3) 그리고 천사가 분명히 증명하였고(행 1:11)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살전 4:14)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에게 기대와 환희, 기쁨과 위로, 소망을 줍니다.

1.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24-25)
이미 5절 이하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 재림 전에 자연 재해와 복음의 세계적 전파, 이스라엘의 회심, 성도의 대배교와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바로 대환난 후라고 말씀합니다(24). 환난이 끝난 후입니다. 해가 어두어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합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있는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세상은 어두움에 휩 쌓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권능”이란 우주를 유지하고 있는 인력과 같이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체들이 위치를 잃어버립니다. 태양, 달, 별들이 제 위치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대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예언을 보면 것인가 역사 속에서 나타날 현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13:10; 암3:15 계8:12; 벧후3:10; 사34:9.) 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계 8:12)”
이사야는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 13:10)”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역사의 종말 때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2. 어떻게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까?(26)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초림 할 때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은 신적인 존재로서 영광스런 위엄을 갖추고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당한 예수님의 초림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리 신적 권능과 영광스럽게 오신다는 것입니다(행1:11; 살후1:7-10; 2:8 계1:7; 19:11-16) 초림 때 동방박사, 목자 등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 주었으나 재림은 모든 인류가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슥12:10 계1:7; 행 1:10-11) 초림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으로, 누울 곳이 없어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오셨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영적 재림이 아니라 신자나 비신자나 모두 볼 수 있도록 인격적이며 가시적으로 재림합니다. 승천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육체적 형태를 가지고 재림하십니다. 심판의 주(主)로 만왕의 왕으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천군천사의 옹위를 받으며 능력과 영광과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각인의 눈이 볼 수 있입니다(마 24:30, 26:64, 행 1:11, 딛 2:13, 계 1:7). 하늘의 구름이 그의 마차가 될 것이며(마 24:30), 천사들은 그의 호위병이며(살후 1:7), 천 사장들은 그의 전령관이 되며(살전 4:16),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런 수행원이 될 것입니다(살전 3:13, 살후 1:10).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의 약속대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이 역사속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갈등도 없는 새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무엇을 합니까?(27)
천사들을 보내어 세계 곳곳에서 택한 자를 모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한 충성스러운 종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 헌신된 성도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마16 :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계22 :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게 됩니다. (벧전1:5) 영광스러운 주의 몸과 같이 됩니다(빌3:21).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4:8; 벧전5:4)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단7:27).

악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악인은 영벌에 처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20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 불붙은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계 20:13) 받는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재림하신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집니다. 많은 사람이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으로 나올 때에 주님께서는 오른편의 양과 왼편에 염소를 분명하게 나누실것입니다(마 2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를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계 20:15)

Ⅱ.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
그러면 우리는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28-29절에서는 “배워 알라”는 것입니다. 33절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1.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징조를 통하여 배우고 알아야 하겠습니다(28-29).
28절을 보십시오. 28절을 보십시오. 배우고 알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확실성에 대하여,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재림에 대하여 무관하게 살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익과 편리 쾌락의 원리에 빠져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낙심하고, 시험들고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산을 넘어가는데 산 너머에 황금이 있다는 사실과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고 가는 사람은 발걸음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눈빛이 다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알고 사는 사람과 재림이 있다고 알고 사는 사람은 삶의 태도와 질과, 방법과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비유입니까? 낙엽수인 무화과나무로 계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록수로는 계절을 잘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낙엽수인 무화과나무는 그 잎사귀를 보면 계절을 잘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무화과나무는 잎이 다 떨어집니다. 가지는 마르게 됩니다. 그런데 봄이 되어 마른 무화과 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도 예수님께서 이미 5절부터 23절까지 징조가 나타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고 살고,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고 고달파도 예수님 만나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잘했다 칭찬을 받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힘 있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국일보에서 한 기자가 가수 심수봉과 인터뷰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에 재림을 알기 전에는 불교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본명이 심민경이라고 합니다. 아는 스님에게 이름을 지었는데 수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도를 이룬다는 굉장히 센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10.26사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방송금지, 출국금지 등 지독한 고통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라 남자를 통해 그 사랑을 채우려고 하다보니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두 차례나 결혼에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재림을 아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기자가“심수봉 하면 한(恨)이고, 그 처절한 슬픔이 감동을 줬던 건데, 너무 마음의 평안을 찾아버리면 우리로선 좀 곤란하지 않나 싶은데요.”라고 말하자 "안 그래요.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고통을 노래할 수 있으니까요. 완벽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어요. 음악은 그런 폭까지도 아울러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다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생을 살고 싶으세요?”“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영원한 곳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남은 생애를 즐겁게,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아는 삶과 재림의 삶을 모르는 삶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늘 세상의 징조들을 보면서 역사는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조금만 자연으로부터 배워도 삶은 겸손해지고 정결해 집니다. 요즈음 원유가 폭등으로 신음이 깊습니다. 석유 문명의 종말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소비되는 모든 것은 다 끝날이 있습니다. 태양도, 우주도, 지상의 자원도 언젠가 다 끝이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으로 모든 문명은 끝이 날 것입니다. 세계는 창세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주와 만물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며 새 하늘과 새땅으로(계21:1-2) 그 옷을 갈아입는 날이 옵니다. 그 때 역사는 하나님앞에 심판을 받게되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로 회복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롬8:19-25).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생생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재림에 대한 생생한 기대를 상실하면 신앙인의 삶은 심각한 영적 질병에 신음하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을 알면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집니다. 삶의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고 사명감이 넘칩니다.

2.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유혹에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30-33a).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niv에서는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at time will come. (막 13:33)”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강조하신 교훈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이 때의 실수는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재림에 대하여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재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림은 종교적 허구이며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하늘 어디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 오냐는 것입니다. 단지 과학문명 전에 일어난 신화적 사고에서 기록된 신앙 고백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상업성을 쫓는 언론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성을 신처럼 신뢰하는 이성만능주의 자들이 우리를 비난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중에서도 ‘실현된 종말론’을 말합니다. 재림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상징적인 종말론’을 말합니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재림은 실제적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인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재림설’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령 강림으로 오순절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순절에 성령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재림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을 때 성도의 마음 속에 이미 재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영으로 같이 계시기 때문에 따로 재림하시는 일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역사 속에 수없이 이런 미혹은 나타났습니다. 근세에 들어와서 16세기의 소시너스는 죽은 다음에 인간의 영혼이 무의식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며, 18세기의 스웨덴버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부정하고 영적인 재림만을 주장했습니다. 학문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재림도 부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하셨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시편 102편 26절과 27절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40장 8절의 말씀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날은, 그때는 꼭 오고야 맙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세대가 지나기 전(30)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은 5-23절까지 예언한 말씀입니다. 세대라는 것은 용례적으로 한 인간의 생존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지진과 전쟁, 대환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예언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 말씀을 보면 세대라는 말은 그날과 그 때로 연결됩니다. 바로 재림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적 원근 통시법입니다. 중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시점보다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재림에 대한 예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둘째, 재림에 대하여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 오십년 동안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나 세상의 구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1,100명 이상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재림의 날짜를 정해놓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제7일 재림 안식교의 창시자 밀러는 1843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다가 맞지 않자 1944년 10월 22일로 수정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14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 서기 2000년, 재세례파들이 1533 또는 1734년, 나운몽은 1980년대가 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미 선교회 이장림은 1992년 10월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성부는 예정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보존하시는 직무적 차이를 표현한 것 그날과 그 때를 예정하시는 것은 성부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미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3.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33b-37)

예수님은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를 어떻게 가지라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확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욥19 : 25). 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벧후3 : 12; 딤후4 : 8).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합니다(약5 : 7: 고전1 : 7). 기도하라(계22 : 20)고 말씀합니다. 예비하라고(마24 : 44)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예수님이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34절, 35절, 37절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졸음을 쫓아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파수꾼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절제와 긴장을 말합니다. 깨어 있는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청지기와 문지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종으로 청지기와 문지기가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다고 하고 각각 사무를 맡겼다는 것을 보아 다릅니다. 한 사람이 종들에게 모든 권한과 사무를 맡겨놓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집을 비우면서 종들을 불러 관리권한을 주고 각 사람에게 임무를 맡겼습니다.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집을 지키는 자이기에 당연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물 때인지(오후6-9), 밤중(9-자정) 인지, 닭 울 때(자정-3) 인지, 새벽(3-6) 인지 모릅니다. 오는 시간은 주인의 마음입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 졸고 있든지 자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의 책망을 받습니다. 문지기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이 엄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날 홀연히 오실 것입니다. 맡겨준 권한을 가지고 청지기 사역을 잘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문지기는 문지기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서 노아를 통하여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깨어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세상의 향락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홍수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과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파수꾼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까지 주인이 맡긴 권한을 잘 활용하여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어차피 무너질 것이라고 삶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을 내 욕망의 충족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향락에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재림으로 진정한 희락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목표가 되어 짐승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하늘과 새땅은 각족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재림의 때를 생각하며 부를 생산하되 골고루 나누며 깨끗한 삶과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를 깨우는 새벽 탉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며 충성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영생과 상급의 소망으로 힘차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게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며 병을 고치고 복음을 선포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이 권세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딤후 4:1,2). 그래서 예수님 재림하는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다섯 달란트 맡은 자처럼 잘했다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깨어 있을 자는 네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입니다.

정종철 집사의 간증

그는 어릴 적부터 개그맨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심형래 집사의 인기를 보며 '꼭 심형래 씨 같은 개그맨이 돼야지'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를 타는 등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안방에서 '하나님. 우리 아들 종철이 붙잡아 주세요. 붙잡아 주세요' 울며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함께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2003년도에는 '옥동자' 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기는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답니다.
교회도 가기 싫었고 목사님 말씀 듣는 것은 더 내키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잊혀지기 시작했답니다.
너무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삶은 변했다고 합니다.
2006년도에는 '마빡이'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 을 받았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고 합니다.
개그맨들이 그를 보면 '정 목사'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의 소망은 작은 교회들을 위한 수양관을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돈이 없어서 수련회를 못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교회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수양관을 짓고 싶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간접적인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개그맨들이 저보고 '정 목사' 라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천인 줄 아는데 어떻게 밖에서 허튼 짓을 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이기에 실수는 하지요.
그래서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영혼에 도둑이 들기 쉽습니다.
재림을 부정하는 사상이 우리를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재림은 성경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예언입니다.
재림은 예수님의 초림처럼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재림과 동시에 성도에게는 영생, 악인에게는 영원한 사망이 선고됩니다.
초대 교회 신앙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거리에서나 어떤 집에서 만나면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들의 주님, 다시 오시옵소서"하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보면서 그 재림을 확실히 알고, 미혹을 주의하고 깨어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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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최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포가 아닌 축복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미 모든 것들의 온전한 구속과 영광을 위해 다시 오시는 때에 대해 말씀하셨다"면서 "그분이 이 땅에 처음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됐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소식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고의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진 이 땅의 모든 것을 회복하고 바르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처음 만드신 대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크리스천투데이가 소개한 종말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이다.

계시록 22장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시록 1장 7절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야고보서 5장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골로새서 3장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타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사도행전 1장 10~11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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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요 5:39)와 그의 강림이다. 성경은 300회 이상 그의 강림을 약속하고 있다. 성도의 신앙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구약 성도의 차이가 없다.

아벨, 에녹, 아브라함, 다윗 같은 구약 성도들의 염원 역시 그리스도의 강림이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강림을 열망했던 구약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칠 주제도 언제나 그리스도였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목적도 그들로 하여금 ‘그것의 성취자’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짐승 제사’를 드리게 한 목적도 그것의 ‘실체’이며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믿음의 선진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환영했던(히 11:13)” 것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의 강림이었다. 그 기다림의 끝은 이러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갈 4:4).”

신약시대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이 신앙의 대주제였다. 사도들이 수없이 그의 재림을 언약했다(살전 4:16, 히 10:37, 계 1:7). 지상과의 하직인 그리스도 승천 때는 천사의 입을 빌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 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직접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요14:3)”고 했다.

◈재림 신앙인들의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

그런데 재림 약속이 있은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주의 재림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해 ‘재림 신앙’을 포기했고(벧후 3:3-5), 어떤 이들은 21세기인 지금도 흔들림 없이 재림 신앙을 견지한다(계 22:20).

둘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것은 그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수평적인(horizontal)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을 가졌느냐,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직적인(vertical)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을 가졌느냐에서 갈려진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 짓는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으로는 2천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할 수 없다. 크로노스의 2천년은 너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2천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40년 후, 곧 주후 70년 쯤부터 여기저기서 기다림에 대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며, ’시한부(時限附) 종말론‘, ’상징적 재림론‘ 혹은 ’재림 부정론‘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모두 지리한 ’크로노스‘ 개념에 매몰된 결과이다.

반면 수직적인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은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소위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하나님의 시간‘으로써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를 공유함으로서이다.

이러한 수직적 ‘카이로스(καιρός)’에는 당연히 ‘더디다 빠르다’는 개념도, ‘조급하다 느긋하다’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8-9)”는 2천 년 전의 말씀을 21세기인 지금 받아들이는데도 어려움이 없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 3:8)”고 한 말씀 역시 그가 카이로스의 ‘수직적(vertical) 시간’ 개념을 공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렸던 아브라함도, 지금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유한된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 시간을 아는가?

‘영생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유한된 시공간 안에 영원(eternity)이 들어오신 것’이고, 이는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개인이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날 때 구현된다. 이는 단지 영생을 약속받는 것(요 3:36; 5:24; 6;47, 54)을 넘어 그것의 체험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물론 죄인의 카이로스 경험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는, 단지 희미한 형상적 경험(imagic experience)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정될 수 없는 확실성을 담보한다.

다음 구절은 ‘영생’을 샘물에 비유하는 말씀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everlasting life)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칭의의 원리’와 함께 ‘영생의 경험적인 측면’을 함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 체험은 성도들로 하여금 유한된 시간 개념을 극복하고, 2천년이라는 시간차를 능히 뛰어넘어 재림 신앙을 견지하도록 해 준다.

그렇다고 성도가 항상 ‘카이로스’를 견지해 재림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약 5:8)”,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 3:9)”는 권면이 필요할 만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혹 때론 대적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3)”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며 미혹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일시적으로 재림 신앙이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내외적인 도전들이 있음에도,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각성시킴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며 재림 신앙을 붙들도록 해 준다.

◈재림 신앙은 사랑의 기다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생면부지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와 연합하여(엡 5:23-25) 부부애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소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시는(계 1:4)”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적 체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이미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의 오심을 예언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재림 신앙은 ‘미증유(未曾有)의 존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의 발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나님을 찾고, 성령을 받았기에 성령을 갈망하고, 의에 배불렀기에 의에 주려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내주해 있지 않은 자들은 그가 누군지도, 그의 사랑도 모른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오심에도 관심이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재림 신앙은 은혜에 은혜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려 함이다.

영으로만 하던 사랑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고전 13:12, 요일 3:2) 하려 함이요, 기왕의 사랑을 더욱 절정화(絶頂化)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은 ‘연모(戀慕)의 기다림’이다.

성경이 그의 재림일(再臨日)을 ‘간절히 사모할 날(벧후 3:12)’이요, ‘복스러운 소망의 날(딛 2:13)’이라 함도, 그날은 오매불망 사랑하는 이를 대면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누가 그들에게 ‘그가 오신다’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미 그들 안에 내주해 계신, 익히 아는 분이 오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가 늦게 오시더라도 안달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그들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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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 (The Second Coming of Christ)

1. 재림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신약에 30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그의 펀지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적어도 50번쯤 기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록은 그의 초림에 대한 기록 보다 팔배나 더 많

다고 한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은 예수 그리스

도의 재림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 재림론이야 말로 신약에서 찾아 볼 수 있

는 가장 중요한 교리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육체를 입고 오시는 인격적인 것이다. (요 14:3,

행 1:10,11 살전 4:16, 계 1:7. 22: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문자 그대로의

재림이다. (행 1:10. 살전 4:16,17. 계 1:7. 슥 14: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볼 수 있다. (히 9:28, 빌 3:20. 슥 12:1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광스럽다

(마 16:27. 살후 1:7-9. 골 3:4. 마 25:31).

어떤 사람들은 에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문자 그대로의 인격적인 재림을 부인하

기 위하여 그것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교묘히 해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때문이다. 죽을 때에 우리들은 그리스도 앞으

로 간다. 그러나 재림하실때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오신다. 만일 죽음으로 그리

스도의 재림을 대치시킬 수 있다면 어떤 성경 구절들은 (마 16:28. 빌 3:20)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들의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주장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고께서 AD 70년에 예루살렘성이 멸망될 때

에 재림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림시에 있을 여러 가지 현상 즉 죽은 자들

이 부활하는 일과 살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에 휴거되는 일이 위에서 언급한 그

어느 경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3.재림의 때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여 예언하였다. 그

러나 모든 예언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시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마 24:36-42,

막 13:21,2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모르게 한 것은 매

우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죽을 날자를 아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자기의 죽을 날자를 만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날자를 알므로서 도리어 그의 일상 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

와 같이 한 번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

에" 힘써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

를 아는 일을 우리들에게 허용치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는

우리들 중에 아무에게도 계시된 바,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

은 그날이 갑자기 임할 것과 (고전 15:52. 마 24:27) 그날이 언제 임할지 기대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벧후 3:4. 마 24:48-51. 계 16:15) 주님께서 그의

종들을 향하여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재림시에 관하여 주신 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일

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된 후에 유대인들은 만방에 흩

어져 방랑객이 될것이다. 저들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만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모으실 때 즉 이 세상의 끝날이 올 때까지 이방인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다

(눅 21:24).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실천 할

것이다 (눅 19:11-27). 그런데 이 사업의 완성은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써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마 24:1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 된다고 생

각하여 때때로 교회는 왜 예수 그리수도께서 출현 하시지 않는가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눅 18:1-8). 이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신랑이 더디온다고 생각하여

준비에 소홀할 것이다 (마 25:1-11). 불 신실한 교역자들은 마음 속으로 "주인

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며 타락하게 될 것이다 (눅 12:45). 그러나 "오랜 후

에" (마 25:19) "밤중에" (마 25:6)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그

시간에 (마 24:36,42,50) 주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서 그의 종들을 불러 모아 놓

고 저들의 행의대로 심판할 것이다(마 25:19. 고후 5:10)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

었으나 저들이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고 거부하고 세상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눅 17:28,29) 전혀 세계의 파멸적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살고 있을 때에 인자는 영광과 권세를 갖고 재림하여 만백성을 심판하고 다스릴

것이다 (마 25:31-46).

4. 재림의 징조

육적 불안과 전쟁과 경제적 곤런과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배신과 불신과 일반

적 공포와 난국 등으로 특징지워질 환란의 과도기가 지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이 땅 위에 천년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활란의 후기를 가리켜 특별히 "대환란기" 라고 하는데 이 동안에 전 세계는 완

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 기독교적인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

을 믿는 신자들은 몹시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고난과 박해

를 받게 될 것이다.

5. 재림의 목적

(a)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파딩톤(Paedington)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여 이 세상에 삼십 여년 동안 계시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던 것 처럼 그가 재림하게 되면 또한 여러 가지 일을 하실 것이다.
초림시에 그는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출생함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였고 또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나타났으며 갈보리 언덕에서는 구세주로서 나타나셨다.
재림시에 그는 먼저 성도들에게 비밀리에 나타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저들을 데리고 가실 것이다.(마 24:40,41)"

이와 같은 예수의 출현을 휴거 (rapture)라고 칭한다.
이 휴거(携擧)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파로시아(Parousia)라고 하는데 그뜻은 출현(appearing) 또는 임재(presence) 또는 도착(arrival)을 뜻한다. 이 때에 신자들은 행한대로 심판을 받고 봉사의 보상으로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마25:14-30)

성도들이 휴거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움을 나누는 기간이 끝나게 되면 지상의 대환란도 끝나게 될 것이다.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메시아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b)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 나라의 백상인 교회의 머리되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도 된다.
메시아로서 그는 저들을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여 사방 팔방으로부터 흩어진 저들을 불러모아 저들의 고토를 회복하여 나라를 세워 저들을 다스릴 것이다.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출현하여 나라를 다스릴 것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바 있다.

(c) 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미 적 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요1서 4:3, 2:18, 2:22).
그러나 마지막에 적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날 것이다 (살후 2:3) 말세에 그가 옛 세상에서 일어나(계 13:1) 전 세계를 다스릴 부활된 로마 제국을 통치할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단 7:8,25) 경재적으로 (단 8:25. 계 13:16,17) 종교적으로 (계 17:1-5) 큰 권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완전히 기독교를 멸망시키려고 모든 신자들을 몹시 박해 할 것이다(단 7:25, 8:24. 계 13,7:15).
인간은 어떤 종류의 종교이든지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인간의 정신과 국가의 우월성에 기초를 둔 종교를 세울 것이다. 그는 국가의 화신으로서 자신을 예배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 할 것이며 또한 제사장을 임의로 임명하여 그에 대한 예배를 강요케 할 것이다(살후 2:9,10. 계 13;12-15).

적 그리스도는 극단적으로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국가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력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즉 인간의 양심까지도 국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칠 것이다. 국

가의 권력 보다 더 높은 권력이나 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율법도 폐하

고 국가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국가를 예배으이 대상으로 섬기는 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다니엘서 3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느브갓네살 왕은 자기가 건설한 그의 대제국을 자랑으로 삼았

다. "이 큰 바베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단 4:30) 그는 인간의 능력과 정치적

권력에 어찌나 현혹되었든지 그의 눈에는 국가가 하나의 신(神)으로 보였던 것

이다. 국가의 상징을 숭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 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들에

게 국가의 영광에 대하여 인상을 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금으로

만든 큰 신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신상에 절하도록 명했던 것이

다. 만일 이 명령을 어기면 그 형벌로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신상은

어떤 지방의 신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상징한 것이었다. 이 신상을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신론자 내지 반역자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내면서 느브갓네살 왕은 백성들에게 이

렇게 말하였다. "누가 너희에게 아름다운 도시와 좋은 도로와 우아한 정원을 주

었느냐? 바로 국가가 너희에게 준 것이다. 누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며 일터

를 주며 너희들의 학교를 지어주었으며 또 너희 사원(寺院)들을 지어 주었느냐?

바로 국가가 그렇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 국가란 하나님과 같이 강한 세력을 갖

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참으로 너희들은 너희들의 정부 보다 더 위대한 신(神)을

구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대 바벨론의 상징 앞에 절하라!" 만일 하아님께서

그의 불경스러운 교만을 꺾지 않았던들 느브갓네살 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의

자기를 숭배할 것을 끝끝내 요구했을 것이다(단 4:28-37). 히브리 세 청년이

(단 3장)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았던 것과

꼭 같이 제일세기의 기독교 신자들이 씨자 (Ceasar) 의 신상을 신(神)으로 섬기

기를 거부함으로써 큰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로마 제국 안에는 온갖 종교에게

자유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씨자의 신상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숭배한다는

조건 하에서 모든 종교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까닭에 주도 박해를 받는 것 보다 씨자를 주로 시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저들은 국가를 신(神)으로써 섬기지는 않

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불란서 혁명을 통하여 이와 같은 정책의 또하나 본보기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추방되고 국가를 신(神)으로 모시게 되었다. 어

떤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 국가가 말할 때에 교회는 할말이 없

는 것이다."

즉 국가에 대한 충성울 종교의 지위 보다 더 높은데 올려 놓은 것이다. 입법

자들은 모든 촌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붙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국가를 위해서 출생하여 살다가 죽는 것이다." 시민의 세례와

시민의 결혼과 시민의 장례를 위한 의식이 마련되었었다. 국가라는 종교도 찬

송과 기도와 금식과 축제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신약 성경은 인간의 정부는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자기의 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다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각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데 있어서

자기가 맡은 바,직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각기 활동하는

영역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받고 가이사는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받아 드린다.

그러나 가끔 가이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까지 요구할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가 조화를 잃어버리고 갈등을 일으키는 결과를 종종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 간에 알력이 극도에 달할 날이 오리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인류의 최후의 문명은 반신적 문명이 될 것이며 적 그리스도가 그 국가의 수반

이 되어 전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법보다 우월한 세계 정부

와 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神으로 섬기도록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마침내는 반 기독교적 세계 정부를 파괴시키고 승리하여 하나

님의 나라를 건설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단2:34,35,44,계11:15,19:11-21)

(d) 만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지상의 모든 사라믈은 전복될 것이며 만백성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사람들은 왕중 왕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단 2:44,미4:1,사49:22,23, 렘23:5. 눅 1:32,슥14:9.사24:23,계11:15)
그리스도께서는 만백성을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며 이 지상에서 모든 불의와 압박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한 후에 천년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시2:7-9,시72,사11:1-9 계20:6)

"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4)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는 세 가지 면이 있다. 즉 예언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지상에서 보낸 그의 공 생애 기간에 성취되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때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의 재림시에 시에 시작하여 천년 왕국 시대를 통하여 내내 계속될 것이다. 천년 왕국 시대가 끝나면 그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합시키는 일을 완성하여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과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자들을 한데 연합시켜 하나의 큰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의 가장이 되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엡1:10.3: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써 여전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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