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성경에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신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으신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장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봤을 때, 이 말은 곧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3).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분의 신성을 주장하셨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3)고
선언하셨을 때 이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본성과 본질에 속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8장 58절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모세의 율법이 명한대로 그분을 죽이려고 돌을 집어들었습니다(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반복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누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같은 구절인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고 표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 20:28).
예수께서도 도마의 선언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디도서 2장 13절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격려합니다.
히브리서 1장
8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선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시며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계 19:10).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마 2:11; 14:33; 28:9, 17; 눅 24:52; 요 9:38).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결코 꾸짖지 않으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요한계시록의 천사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논증하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치 않았을 것입니다(요일 2:2).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그저 피조물이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죄에 따르는 무한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고후 5:21)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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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이신가?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으면서 왜 또 기도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지, 이 부분은 전에 잘 이해가 안 되고 고민스러웠던 문제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8~10)
설교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빌립에게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이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갈 수 있고 주님을 따르는 게 확실한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에 대해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고 이 문제는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저는 여러 차례 기도드리며 주님께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구했으며, 주 안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서
해답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실 때, 성령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였고,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아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요한복음 14장 8절 말씀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 그 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여기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부자 관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단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예수 안에 있는 영과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모두 하나이다.
성령이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리며 일곱 배 강화된 영이자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의 영은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홍수로 세상을 멸할 수도 있으며, 전 인류를 속량할 수도 있고, 더욱이 전 인류를
정복하거나 멸할 수도 있다. 이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혼자서 하는 사역이지 그 어떤 위격의 신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전능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는 주이고, 그리스도이며, 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전 우주 위에도 있고 만인 가운데도 있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관자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 사역은 하나님의 영이 혼자 행한 것이다.
하늘에서 행한 사역이든지 육신으로 행한 사역이든지 모두 그의 고유한
영이 행한 것이다. 하늘의 피조물이든지 땅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의 전능한 손에 달려 있으며,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므로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가 하늘에서 영일지라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사람 가운데서 육신으로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경륜을 시작하셨어요.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율법을 반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이러한 사역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영의 방식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인류가
점점 심하게 타락하고 율법에 어긋나 여호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자꾸 하게 되자, 사람들은 율법을 범한 죄로 정죄받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류의 필요에 따라,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는데, 사실상,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셨고,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나타내시고,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동시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어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재웠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등 완전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인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신 거죠?”
“우리 같이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을
갖추었음).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위치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병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위치에 섰을 뿐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자로 된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음성을 발하시든,
혹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시든, 예수님의 본질은 신성이지 인성이 아니예요. 예수님 역시 육신의 형상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의혹이 생기는 것은 주요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알지 못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글귀의 의미로만 해석을 해서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신 것이고 주님이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하고, 또한 인류에게 율법을 반포하신 이 땅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피조물의 각도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나의 깨우침을 딸에게 전해 주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심오한 비밀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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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근거 구절이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근거는 무엇인가요?
부활? 아니면 천재적인 지식들? 기적들을 행하심? 관련된 구절들을 모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근거 구절은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서 약 50 가지 정도 되는 구절들을 모아서 드립니다.
1.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벧후1:1)
2. 하나님 곧 예수 우리 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노니(벧후1:2)
3.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벧전5:10)
4. 그 복된 소망 곧 위대한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딛2:13)
5.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6.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3:16)
7. 하나님의 영을 너희가 이렇게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 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3)
또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8.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요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요1:14)
9.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요일1:1)
10.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일5:7).
1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마28:19)
12.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행10:48)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고후13:14)
14.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오히려 자신의 영예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어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셨느니라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빌2:6).
15.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사7:14).
16.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1:23)
17.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시110:1)
18.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 안에서 그를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겠느냐?(마24:43-4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19.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슼12:10)
어떤 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네 손들에 이 상처들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들은 내 친구들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슼 13:6)
거기서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더라. 그리고 주와 함께 다른 두 사람도 이쪽과 저쪽에 못박고 예수를 중간에 두니라.(요 19:18)
20.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행20:28).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 1:14)
21.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창22:8).
그 다음 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22.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더라(막2:5).
23.
이 사람아, 네 죄들이 용서되었느니라.”고 하시더라.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눅5:20-21)
24.
도마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요20:28-29).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주께 경배하며 말씀드리기를 “참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마 14:33)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너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10)
이는 그들로 그들의 하나님말고는 어떤 다른 신도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단 3:28)
25.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9:6)
26.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3-16).
27.
그러나 너 베들레헴의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5:2)
28.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딤후1:9).
29.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시22:1).
30.
제구시경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마27:46).
31.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나니라(I AM THAT I AM)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니라(출3:14)
또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음이라(요7:29).
주께서 “내가 그니라.”(I am he)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리더라.(요 18:6)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I AM)고 하시니라(요8:58).
3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34.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허락한지라(막11:2-6).
35.
밤 제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니(마14:25).
36.
주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잠잠해지더라(막4:39).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음성으로 외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죽었던 자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오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하시니라.(요 11:43-44)
37.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첫태생이시니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골1:16-18).
38.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1:3)
39.
또다시, 그분께서 첫째로 나신 분을 세상으로 데려오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하셨으며(히1:6).
40.
그러나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의 홀이니이다(히1:8).
41.
또 “주여, 주께서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들도 주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니이다(히1:10).
42.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행2:31).
43.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니라(요10:30).
44.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하느냐?(요14:9).
45.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더욱 죽이려고 하니, 이는 그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요5:18).
46.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창1:27).
4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몸, 혼, 영(살전5:23)으로 지으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몸과
혼이 없고 영만 있다는 것은 모순임, 하나님께서도 몸[예수 그리스도, 딤전3:16], 혼[아버지 하나님, 판10:6], 영[성령
하나님, 살후2:8]을 가지심)
48.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1).
4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요14:7-8).
50.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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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3439) μονογενής, ές
어원 / 3441과 10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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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4:1-14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답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마태복음 기자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대답합니다.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한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이미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달라진 게 별로 없습니다.
고난과 불행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둔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과 대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요한복음 기자가 요한복음 14-17장까지 자그마치 4장에 걸쳐서
변증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4-17장은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말씀입니다.
본문 요 14:1절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는 기원후 100년 어간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만 몇 명이 남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조짐도 없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근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아버지 집에 가셨으며, 거처가 예비 되면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기입니다. 중간 시기에는 모든 게 불안한 법입니다. 요한은 그런 불안을 극복하게 하려고 이 고별사를
기록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도마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의 말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 중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인 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서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어떤 곳을 찾을 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다른 한 제자인 빌립이 등장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말도 당연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도 다 여기에 연결됩니다. 13절과 14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모든 걸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물리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처럼 여기는 전통은 유대교가 아니라
이집트와 로마입니다. 파라오와 시저는 인간이지만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파라오나 시저는 그렇게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 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나사렛 예수는 무기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아들입니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없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거대한 종교단체를 조직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이를 신으로, 특히 창조주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여러 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물이 포도주 되는 이야기,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 기적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문헌에도 자주 나옵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한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외로워하기도 하셨고, 자신이 감수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신 하나님과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근심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으로
믿어지나요?
사도 요한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9절)
예수님을 보았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거의 죽고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만 교회에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10절)
반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서로의 안에 거한다는 말인가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그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이외의 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일어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한 사건은
부활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만 그 나머지 사건들도 구원의 현실이 됩니다.
치유, 축귀, 순종, 사명 등도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모든 행복한 삶의 조건들도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을 잃는다면 좋은 직장과
연봉과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전체가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거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본문도 그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멀게 느낍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기한 소문 정도로 듣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부활이 우리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남거나 아니면 언젠가 부활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으로만 남습니다. 부활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왜 부활의 영성에 천착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인식과 신앙의 토대가 부활이라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실질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피안이
아니라 차안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피안적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계 전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분을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 역사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실존에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절대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유대인처럼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헬라인처럼 철학에 매달리거나, 로마인처럼 세계를
지배하려고만 했을 겁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그의 모든 운명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에서만
우리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한 참된 생명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종교적 감수성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이자 고유한
삶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운명과 일치할 수 있는지, 거기서 나오는 삶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신약성서도 늘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접적으로 이에 걸맞은 경구만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참된 깨우침을 가리킵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됩니다.
요한 공동체는 근심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요한의 설명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저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염려해도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여러분의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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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년 동안 무관심, 음모, 논쟁, 추측, 조롱, 그리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믿음이 그의 성육신 이후(눅 1:41) 전 세계에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예배와 헌신 그리고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높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여전히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오류가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다양한 영적 손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 구세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골
1:15)이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요 14:9).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세상에 그 어떤 질문이 이 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되었던가? 이
세상에 또한 그 어떤 질문이 이 질문처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또는 아예 무시당함으로 누군가를 지옥의 위험에
빠뜨리고 또는 정확하게 대답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한 천국을 얻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묘사했다(요 1:14). 도마는 예수님을 그의 “주” 그리고 “하나님”(요 20:28)으로 고백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 그리고 그는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자” (히 2:14)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했으며 신성한 이름을 받은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도 표현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자 모든 뛰어난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빌 2:9-11).
이런 증언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더 많은 증언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특징, 또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분되는 신인(God-man)이다.
그는 실로 독특한 분인데 우리기 흔히 쓰는 그런 독특함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와 비슷할 수 없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감스러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신인(神人)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역사를 망각한 채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그는 정말로 사람인가?
1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라피온(Serapion, 190-203)을 통해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을 믿는 이단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이 “영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겉으로 인간처럼 보였다는 주장을
했다(그리스어, dokeō = “…처럼 보이다”).
그 후 4세기에 들어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5-392년 경)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부분적으로 그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폴리나리스는 영원한 아들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성육신은 단순히 마음과 영혼이 없는 육체에 거했던 아들의 신성일
뿐이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서자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요즘 들어서 그리스도가
가졌던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슬퍼했다.
그럼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셨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사람이고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다움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단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서술한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히 2:17).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배고픔(마 4:2)과 갈증(요 19:28) 그리고 피곤함(요 4:6)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했다.
그는 울었고(요 11:35), 통곡했으며(눅 19:41), 한숨을 쉬었고(막 7:34) 또한
신음했다(막 8:12).
B. B.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나와
똑같은 인간을 앞에 놓고 만나고 있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나지안조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서신 101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가 입지도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하고 인간을 치유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영혼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혼을 소유해야만 했다.
합리적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도 합리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을 입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다양한 오류와 관련해서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주 그리스도는 그의 영혼의 합리적 능력과 능력, 그의 이해력, 의지 및 애정으로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 … 오래 전 사람들이
헛되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신성한 본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신성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대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 분 안에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의 모든 도덕적 활동의
즉각적인 기초(principle)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행위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였다. 그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힘이 강해졌고 또한 지혜도 더 자라났다. 지혜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새롭고 더 큰
지식이 필요했다(눅 2:52). 이것은 그가 참된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유한함을 반영하는 유한한 마음과 영혼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필수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온갖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구세주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복음서와
히브리서의 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든 단지 속임수(phantom)가 아니었다. 그의 피는 우리 몸이 잘리거나 찔릴 때
나오는 진짜 피였다. 핏방울과 같았던 그의 땀은 십자가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인간을 정복한 죄의 영향을 바라보며 느낀, 진정으로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비극은 오로지 그가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만 통해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 우리를 영원히 치유했다.
2. 그는 도움을 받았는가?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요 4:34; 5:19, 30; 6:29,
42, 57), 그를 도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존재는 누구일까?
축복받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다른 두 격이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성령님이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주의 영이 주의 종인 메시아에게 안주하실 것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42장 1절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바로 첫 번째 종의 노래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61:1도 참조하라)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종(그의 아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붙잡는다. 이사야서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읽게 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사 50:7).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실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을 읽는다. 성육신(눅
1:31, 35), 세례(막 1:10), 광야의 유혹(막 1:12; 눅 4:14), 설교(눅 4:18), 기적(마 12:28),
죽음(히 9:14), 부활(롬1:4, 8:11), 그리고 승천과 영광 받으심(행 2:33, 시편 45:1-7)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결코 그를 떠나거나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온전히 기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내려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자신이 가진 신적 본성에 의존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될 때 진정한 종으로 오신 성육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셨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를 맞추고 준비시키셨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명령하라.”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순종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만이 구세주라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참된 종교적인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3. 예수님도 죄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도 분명 유혹을
받았었기에 혹시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첫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진 두 가지 의지(will)의 관계에 관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각각 다른 두
본성에 적합한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이다.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가지 자연적 의지는 불경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간적인 의지는 주저하거나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성하고 전능한 의지에
종속된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결코 그의 신적 의지에 어긋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공유하는 신성한 의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되지만 결코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종속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즉 그리스도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일치는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묵상하면 할수록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관여하지 않고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적
본성은 추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추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단지 행동하는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됨(personhood)은 사실상 신인이기에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W.G.T. 쉐드(W.G.T. Shedd)는 이렇게 말했다.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이 본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행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신다면, 그건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된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죄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히 4:15). 그가 받은 유혹의 현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진짜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4. 그는 진짜 사람인가?
많은
신자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진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광 가운데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지금도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인간인지를 물으면 약간
혼란스러워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승천 후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한테 지금 굳이 인간성(humanity)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오웬은
말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이성적인 영혼 뿐 아니라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사항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존재함은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항목이다.
네덜란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다시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런 육신이 되었다! 보좌에 앉아계신 지금조차도 그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오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이제 와서 “신성화”되지 않았다(즉, 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본성이 “하늘에서 신적인 본성과 결함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되는 어떤 신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항상 참된 인간적인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됨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인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한때 약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히 4:15) 약점 때문에 허덕이는 우리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도 제사장이다. 신부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권능으로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다.
5. 그는 완전한 하나님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수님, 놀라운 분이죠.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임명하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6년 경)는 아들이자 로고스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가장 유명한 이단자일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그의 참된 신성을 부인했다.
나사렛 예수의 완벽한 신성의 증거, 즉 아버지와 나누고 있는 동질성(동일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에 혼란을 주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예 : 빌 2:5-11, 히 1:1-14, 골 1:15-20 참조).
요한복음의 프롤로그는 교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시작하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롤로그 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라는 놀라운 요점을 말하는데 이 진리는 아마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 믿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1절의 “계셨다(was)”는 14절의“되셨다(became)”와 대조되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되신 게” 아니다. 이전에는 그 말씀이 단지 “계셨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도 이 진리를 확인하고 뒷받침한다(요 3:13; 6:62; 8:57–58; 17:5; 20:28).
나중에 요한은
이사야가 “만군의 주인되신 왕”(사 6:5)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이사야 6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후, 그는 이사야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주는 법이 없다고 쓰여있다(사 42: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속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요청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서 묘사하는데 바로 예수님과 구약의 야훼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런 병행이 가르쳐주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다름 아닌 야훼, 그분이라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동등한 바로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신성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위엄이
있는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또 변함없이 강력한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가? 아들도 그렇다. 신성한 본성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그는 단지 영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고 변함없이 영광스럽다.
6.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언어(theotokos)는 무엇인가?
이 진술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단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육신이 되었을 때(요 1:14) 그는 보통 인간(human person)이 아닌 단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만을 취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인격 아래에 존재한다.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자 같은 아들이며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칼케돈 공의회).
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인간 본성이 이랬다” 또는 “그의 신적 본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적 또는 신적 본성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로마서 1:3).
주체는 인간, 아들이고 그는 인간적
본성(예: 먹는 것, 눅 24:43) 또는 신적 본성(예: 세상을 유지함, 히 1:3)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마리아는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AD 451)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정통성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이유이다.
“여러분은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아들이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피로서 교회를 얻으셨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한 보상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창
22:17)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메시아이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마 16:16).
이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같은 영광을 볼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신인(神人)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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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까?
성경 읽고, 헌금하는 것입니까?
교리를 정확히 잘 아는 것입니까?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맞는 말 같지만 정답이 되기엔 모두 다 부족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주인이 예수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가 인생의 왕 노릇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자신 안에 새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끔찍하게 죽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냥 ‘용서하노라’ 한 마디면 안 된단 말입니까?
당신의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죄이니 당연히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안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죄이며, 이 죄로 인해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기만 하면 모든 죄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전히
삶의 주인이기를 고집하십니까?
왕좌에서 내려오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까?
지금 당신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분은, 당신을 목숨 걸고 사랑하시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맡아 다스리기에 충분한 권능과
지혜가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
첫째,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 이 말은 ‘주인님’이라는 말과 같아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속한 자이고, 나의 모든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과 같은 거예요.
둘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 ‘구원자’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아요.
셋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가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 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을때 유대인들은 굉장히 분노했어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에요“(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_요 5:18,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_요 10:32-33).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며 하나님이세요. 정리해 볼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자,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방금 설명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에 담긴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셨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인 거죠.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의미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요, 유일한 구원자요, 나의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그 믿음에 담긴 내용 즉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죄인 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네, 맞아요.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제가 이렇게 구분지어 설명하는 이유는 많은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 내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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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의미를 함의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우리의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의존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엡 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기 이전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바르고 온전하게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한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되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성경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인간들의 힘에 의존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하게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참으로 철저하게 절망한 이들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이 구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어떤 기여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그대로,또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후에 우리의 자리, 우리의 형벌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리 구속[代贖]의 방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 15:3,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신 이런 구원의 방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건과 그것을 전하는 말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고전15: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너무 쉬워서 그런 식으로 구원하려 하신 것은 옳지 않다든지 하는 식의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어리석은 것이라거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여 죽고 돌아가신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고전 1:18, 24), 그 수욕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있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라든지,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부활은 없이 그 의미만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고 다시 사신 것에 온전히 의존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즉,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롬4:25).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그것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에 있음을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원을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영원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구속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그러나 다시 사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리며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만 하고 있는 이들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발이 되어 그가 이루시려는 일을 열심히 이루어 가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또 다른 부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다. 그것이 예수 믿는 일의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은 단지 그것으로 그쳐지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Saviour)로 받아들인 이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산다. 즉,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종(slave or servant)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1. 우리의 소유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우리의 소유주(owner)로 인식하며 그렇게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고전적인 고백(classic confession)이다. 사실 우리는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중(二重)으로 주님의 것이 된 존재들이다. 창조로 인해 모든 사람은 본래 주의 것이나, 그들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구속을 적용해 주셔서 우리를 다시 그의 것으로 삼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금 주께 속한 자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하여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b-20)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구속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 주의 것으로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게 위해 노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주를 위한 존재로 날마다 드려 나가며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예배이고, 특히 그 중의 헌상 순서가 그러한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나 자신과 나의 존재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義)에 의존해서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마음을 다 표해 내는 것이 우리의 헌상의 의미이다.
또한 나를 주께 속한 자로 여기며 사는 것은 사실 큰 은혜가 되는 일이다. 주의 소유된 존재이니 주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그리하여 결국 당신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의 소유를 삼으셔서 우리를 이용하여 무슨 별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했던 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경계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인간 됨의 실현을 주께서 친히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소유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고 주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을 다 주께 맡기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2. 우리 삶의 목적이신 그리스도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바로 우리 주님의 영광과 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드러난다. 나의 생의 궁극적 목표를 다른 곳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나의 삶에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이는 삶의 목적이 없을 수도 있어서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다고 살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자신의 행복이나 가정의 행복이나, 국가와 민족의 번영이나 온 세상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살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구주로 받아들인 이들은 이런 것들로서는 실상 그 어떤 행복도, 가정의 번영도, 민족의 발전도, 세계의 평화와 발전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면서, 이제 삶의 목적이 바뀌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그의 나라와 그 뜻을 수행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이기주의자(egoist)일 수도 없고,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혈연 이기주의자일 수도 없고,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민족지상주의자일 수도 없고, 온 세상의 평화를 지고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해동포주의자(cosmopolitanist)나 인류의 인간 됨을 지고한 가치로 여겨서 하나님조차도 이에 도움이 되면 섬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개념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도주의자(humanist)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특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 스스로가 타락하여 나갔을 때 그들에게 구원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자신과 가족과 민족과 온 인류와 온 세상을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는 일에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려는 일념(一念)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이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 사는 이요, 그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는 이이다. 자신의 삶을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려는 노력과 헌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이이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3. 우리 삶의 안내자요 모범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서만 주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사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의 삶의 진행에서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사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성경의 바른 뜻을 이해하려는 일에 열심이게 되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인 기도에 열심이게 된다. (1)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2) 그 말씀의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에 주는 함의를 알기 위해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열심이며, (3)기도한 자답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 열심인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의 하나는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잘 살펴보고, 바르게 해석하여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주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 가는 일이다.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일이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이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 그가 이루신 구속에 적용함을 받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이가 구주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며 주께서 친히 보이신 모범을 쫓아가는 데서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이만이 진정한 제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주께서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니, 이제 나는 존귀, 영광, 부요, 건강의 축복을 받겠다고 나서는 이는 자신이 주를 따라간다고 나서는 그 근본적 동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세우셨으니 이제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다른 이를 위해 내어 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고난의 길에로 나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종이요, 제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어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사는 제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일에서는 믿음으로 그 사실과 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이제 동일한 믿음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다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도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trust in God)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3)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1) 예수님을 나 자신과 온 세상의 유일한 구주(the only Saviour)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고, (2)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the Lord)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온 천하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음을 의식하면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Coram Deo(1) 죄의식(Sin-Consciousness)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먼저 가장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는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과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기독교의 현관이요, 참 기독교에 이르는 통로라는 우리 선배들의 생각은 참으로 옳은 통찰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엄위하시고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감히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의식을 실존적으로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유난히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느끼고, 어떻게 죄인인 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참으로 실존적으로 고민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고뇌를 잘 아는 그의 후예들 가운데서는 기독교적 죄의식을 깊이 있게 설명한 이가 많다. 가장 깊이 있게 죄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철두철미 절망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을 전혀 내세우거나 의존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에 자기를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도 인간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는 아직도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았고, 아직 철저한 죄의식을 갖지 못한 자이다.
Coram Deo(2) 칭의 의식(Justification-Consciousness)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理 贖罪] 사역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죄용서, 즉 칭의(稱義)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선언하신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행위로 하지 않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그대로 믿는[즉, 받아들이고 의존하는] 것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칭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칭의 의식을 가지며, 또한 참된 칭의 의식을 가진 이는 참된 죄의식을 가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설이 바로 기독교적 진리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면서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보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보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끝임 없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죄를 지어 나가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의 천재적이고 선언적인 표현은 때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던져 주지만, 그가 성경으로부터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무리 완벽히 노력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철저하고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일 뿐이지만(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절망),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온전하신 삶의 의(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에게 전가된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義)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인(義人)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의만을 내는 우리들로서는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이라는 것이다.
Coram Deo(3) 성화의 삶(The Life of Sanctification)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으로 보는 이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 나갈 수밖에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른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 전체(Tota Scriptura), 즉 온전하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규범으로 하고(Sola Scriptura), 성령님을 의존하여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삶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그 사역을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된다. 그는 십자가의 빛에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사는 성령의 사람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 성화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과 현실 전체를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예술 등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과 영역이 다 이런 성화의 삶, 성령님과의 교제의 삶,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삶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영역 밖이나 주변의 작은 소위 종교성의 영역에 성화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원론적인 것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런 소아병적인 사고와 삶의 분과화(departmentalization)는 성경적 기독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성(everyday life)과 공적인 영역(public arena)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한다. 성화는 일상성과 공적인 삶의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속의 한 가운데 우리의 거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이는 세속 속의 성자(the secular saint)이다.
Coram Deo(4) 사랑의 삶(The Life of Love)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같이 하나님 앞에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 나간다는 의식을 나누는 사랑 의식(agape-consciousness)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홀로 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정죄 된다(따라서 여기서는 아무런 비교 의식도, 우열 의식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는다(여기서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이들은 자신들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고 칭의함을 받은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냉정하게 홀로 서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사랑할 많은 이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함께 살아가도록 새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동체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탄생된 이 공동체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고 연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현실(可視的 現實)로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함께 그는 동시에 그 공동체 안에서 연습한 그 사랑을 온 세상 안에 가서 실천해야 한다. 이 세상은 그의 사랑이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가 나타나야 하는 무대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가야 할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사랑의 실천의 장(場)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사랑의 도관(channel of the love of God)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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