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백합화(마태복음 6:28)


들의 백합화(마태복음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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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화(크리논. krinŏn) κρ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2918

1. 백합.  2. 마 6:28. 3. 눅 12:27.
발음 [ krinŏn ]

뜻풀이부

1. [기본형] 백합, 마 6:28, 눅 12:27.

한국의 백합화는 하얀색의 고결한 모습으로 부활주일에 강단 장식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백합화는 한국의 백합화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를(크리논, 마치 한국의 민들레) 말합니다.
야생화의 특징은 강한 생명력을 말합니다.

꽃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꽃에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백합화(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하여 보라(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세상의 염려는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꼭 일어날 일인 것처럼 염려를 했습니다.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처럼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까?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할까? 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염려를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도 없는 염려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준비하신 일에도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쓸 것들을 미리 다 아시고 준비하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염려를 했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괴롭게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알아서 맡아서 모두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염려는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행복한 내일을 기다리는 염려입니다.

기도로 이어지는 행복한 염려가 요즘의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는 먹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염려나 고통스러운 염려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잠자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 입고 사는 것도 참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계절이 뚜렷하게 변하는 우리나라는 철 따라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입을 옷도 많지 않았습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아이들이 가장 많이 기대하는 것이 새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아무 때나 옷을 사서 입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런 명절이 되어야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형제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많은 형제들에게 다 새 옷을 사 줄 수 없으니까 큰 형에게만 사 주고 동생들은 형의 옷을 물려받아서 입었습니다.
다 클 때까지 새 옷 한 번 입지 못하고 자란 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수고와 김쌈이라는 말을 같이 썼는데 정말 수고를 많이 해야 하는 일이 길쌈입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는 삼베옷이나 모시베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삼나무나 모시나무의 껍질로 만든 옷감을 말합니다.
나무의 씨를 뿌려서 자라면 잘라다가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 가느다랗게 찢어서 한 올 한 올 이어서 씨줄과 날줄로 베를 짜면 옷감이 됩니다.
말은 쉽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오늘날에는 길쌈을 하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면으로 만든 옷도 많이 입었습니다.
면으로 만든 천은 고려시대의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서 재배에 성공을 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목화나무를 심으면 열매 속에서 하얀 솜이 나옵니다.
그 솜으로 실을 만들어서 만든 천이 면입니다.
명주비단은 어디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누에를 키워서 누에가 입으로 실을 뿜어서 자기 집인 누에고치를 만들면 그 누에고치를 뜨거운 물에 넣고 삶아서 그 실을 다시 뽑아내는 것입니다.
길쌈은 참 어렵고 수고가 많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노력 때문에 의복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의복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인간들처럼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기 때문에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백합화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의 대표적인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합화를 보라고 할 때 꼭 백합화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생에서 자라는 들꽃들이나 이름 없는 들풀들까지도 다 입히시고 기르시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다음에 또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는 그래도 스스로 움직이면서 노력하면서 먹고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는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노력도 없이 피어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은 지는 들의 꽃과 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만물의 으뜸으로 특별히 만든 너희 인간들을 입히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돌보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하게 만드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의복을 위해서 걱정을 한다고 할 때 입을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라고 걱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어야 더 멋있게 보일까, 더 아름답게 보일까, 더 고급스럽게 보일까, 이런 것 때문에 염려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왕들이나 제사장의 옷도 아주 화려하게 입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 사극영화를 보면 신분에 따라 옷 입는 것이 다릅니다.
왕이나 신하들은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평민들은 그저 보통의 옷들을 입습니다.
오늘날도 그 사람이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아주 값이 비싼 일류메이커의 옷을 입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는데 정말 좋은 옷을 입으면 더 잘생긴 것 같고 못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도 비싼 옷을 사 입고 싶어 합니다.
학생들도 메이커가 없는 옷은 입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별 것도 아닌 옷들을 아주 비싸게 만들어서 그 옷을 입어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유혹을 합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옷 메이커가 있는 옷을 사 입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유행 따라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이 그 영광으로 입은 옷과 백합화가 입은 옷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최고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위가 왕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에 최고의 비싼 옷을 입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였기 때문에 당대의 최고의 디자인을 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아무리 최고의 기술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솜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 한 송이에게도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하얀 백합화, 빨간 장미, 코스모스, 국화 꽃,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예쁜지 키워보지 않으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 꽃들이 다 하나하나 자기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피었다가 지고 또 피는 것이 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그렇게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람은 겉만 화려하게 갖춘다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갖추어야 되는데 겉모양만 화려하게 갖추면 오히려 위선자가 되고 냄새나고 추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을 들에 핀 한 송이 꽃만도 못하다고 평가절하를 하셨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솔로몬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백성을 착취해서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군대를 강하게 하고 오직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특별한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영광은 돌리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 중에서 하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하는 구두를 신고 고급시계에 비싼 반지를 끼고 온갖 멋을 부리는 목사를 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와서 하나님 말씀이나 바르게 전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서 성도들이 충성을 해서 아무개 장로가 이 시계를 해 주고 아무개 집사가 이 양복을 해 주고 그런 자랑이나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고 말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고백한 그 사연도 알지 못하고 헛된 것 자랑하면서 들꽃 하나만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에게 배우는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이상야릇하고 사치스런 의복에 욕심을 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과 많은 물질을 투자하면서 유행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이런 사치와 자기 자랑을 극심한 죄라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성도들의 죄를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데 대해서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속사람은 그대로 두고 겉만 화려하게 가꾸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좋은 옷으로 사치를 하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자기 자랑을 위해서, 자기 신분의 향상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치를 하기 위해서 염려하는 성도들에게도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비단 입는 옷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세상의 쾌락을 따라, 세상에서 더 화려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아보려고 하는 타락한 삶을 사는 인생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없어지는 들풀도, 그가 살아있는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특별한 신분을 주시고, 자녀로까지 삼아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자기를 들어내려고 애를 쓰고, 얼마나 더 쾌락을 누리며 잘 살아보려고 염려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을 주신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 라고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옷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믿음이라는 말까지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맨 처음 옷을 입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입은 것이 최초의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짐승을 잡아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히셨습니다.옷은 죄를 가리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옷은 우리를 멋있게 폼 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가려주는 수단입니다.
옷을 잘 입어서 화려하게 치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옷을 입고 사는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아마 우리들에게는 형편없이 더러운 죄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고 있는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그런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 앞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 깨끗한 세마포 옷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가려주는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를 때, 날 대신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에게 깨끗한 세마포 흰옷을 주시는데 그 옷은 나의 모든 죄악들을 완전히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옷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은 그 화려한 옷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그 세마포 흰옷이 나의 모든 죄를 가려주어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초라한 옷을 입고 살았든지 세상에서 내 신분이 어떠했든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보든지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깨끗한 세마포 흰 옷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이 세마포 옷을 주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는 자처럼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없어서 먹을 것 때문에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그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좀 더 화려하게 살고 싶어서 좀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기 위해서 염려하고 계십니까?
그 염려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염려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시기 위해서 세마포 흰옷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마포 흰옷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 춤 출 그날을 바라보면서 염려를 다 버리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지에서 백합화는 어떤 꽃일까?

성경의 꽃 중 가장 잘 알려진 꽃이면서 가장 논쟁적인 꽃이 백합화다.
성지를 30여 년 간 가이드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백합화와 샤론의 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솔로몬과 연관돼 있고, 예수님의 꽃이요, 후에 예수님이 솔로몬과 백합화를 함께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백합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아마도 백합화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여기서 백합화가 어떤 꽃 이길래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 보다도 아름다운가?
게다가 여기에 쌍벽을 이루는 연관된 꽃이 샤론의 꽃이다.
아마도 찬송가 '샤론의 꽃 예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늘 궁금해 지는 꽃이다.
이 두 꽃이 연관이 되는 것은 바로 아가서 2장 1절에 함께 나온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백합화(쇼샨)로다"

백합화가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곳이 아가서다.
구약성경에 총 12번이 언급되는데 아가서에서만 8번이 나오니 말이다.
아가서에서는 수선화와 백합화가 함께 등장하며 이후 백합화라고 언급된 히브리어 꽃명은 쇼산나다.
함께 등장한 수선화는 하브쩰레트.
즉 샤론의 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쇼산나로다.
분명 다른 두 꽃인데 칠십인역과 라틴역에서는 이 두 꽃을 구분없이 봤다.
그게 반영된 것이 이사야서 35장 1절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하브쩰레트)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이 구절에서 아가서에서 수선화로 번역된 하브쩰레트를 이사야서는 백합화로 본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두 꽃을 같은 꽃으로 번역한 문학적인 관점. 왜 같은 꽃으로 보았을까?
이 관점이 이미 성지의 백합화가 무엇이냐에 힌트를 갖고 있다.

아가서에서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 한 것은 문자적인 두 꽃 이라기 보다는, 문학적인 들꽃의 총칭으로서 산지 골짜기의 백합화에서부터 해안평야 샤론의 수선화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피는 들꽃들이라는 것.
마치 한라에서 백두까지가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듯이, 또 창세기의 여자와 남자를 만드셨다는 표현도 모든 인류를 만드셨다라고 보는 문학적인 표현 말이다.

이 두 꽃을 혼용했던 중세시대 이후, 근대에 성경신학이 발달하면서 다시 쇼샨나는 백합화로 하브쩰레트는 수선화로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꽃은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쇼산나(백합화)는 세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하브쩰레트(수선화, 또는 들꽃)는 여러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특징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절을 통해 설명하면, "주는 저산 밑에 백합" 할 때 백합은 쇼산나, "샤론의 꽃 예수" 할 때는 샤론의 꽃은 하바쩰레트(수선화 또는 들의 꽃)이다.

성지순례시 가이사랴-갈멜산을 오갈 때 샤론평야를 지나며 종종 부른 찬양이 '샤론의 꽃 예수'이다.
봄철의 차창 밖에 펼쳐진 그 수많은 꽃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진한 붉은 색 아네모네다.
그리고는 "저 돋보이는 붉은 꽃이 아네모네인데 바로 성경의 백합화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아네모네가 백합화가 되었는가?

"들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성지에서 아네모네를 가르키며 저 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라 하면 의하해 한다.
"흰색의 꽃이 아니였어요? "라고 되묻는다.
백합화는 흰꽃이라 생각했는데 붉은색 아네모네라니.
심지어 성지에서 백합화는 아네모네뿐만 아니라 들녘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을 백합화로 부른다는 것에 다시 한번 의아해 한다.
백합화를 이해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백합화의 백자가 흰백자가 아니라 일백백자라고 알면 된다.
그래서 백합화는 성지의 들에 피는 백 여 가지나 되는 들꽃의 총칭인 것이다.

들의 핀 아네모네를 보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백합구나"라고 생각하면 무난하다.
그러나 "근데 왜 붉은색 아네모네가 백합화지?" 라고 생각하면 아주 복잡해진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백합화가 붉은색 아네모네가 됐는가?
구약에서 백합화로 언급된 히브리어 이름인 '쇼샨나(쇼산)'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흰색 백합화(lily) 꽃들이 나타나고, '하브쩰레트'를 검색하면 나르키스(Narcissus)과의 여러 꽃들이 보여진다.
모두가 흰색의 꽃들이다.
붉은 색 꽃은 없다.
그런데 성지에서는 붉은 색 아네모네를 백합화라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주셨던 갈릴리의 산야에 피어난 봄꽃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붉은 색의 아네모네다.
성지의 봄을 아름답게 수놓은 붉은 색의 꽃으로 치자면 당연히 아네모네가 있고 여기에 양귀비 아도니스가 모두 백합화에 해당한다.
피어나는 순서도 아네모네가 가장 먼저 피어나고 아도니스 그리고 양귀비가 이어 피어난다.
그러니 성지 봄은 1월부터 5월까지 온통 붉은색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하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입술을 백합화(아 5:13)로 비유한 것을 보면 백합화는 당연히 입술처럼 붉은색이 됐을 것이다.
이미 4장에서 네 입술은 홍색 실 같다(아 4:3)고 하니 두말할 나위가 없이 붉은 색이다.
여기에 더해 솔로몬 왕의 자주색 옷이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홍의에서도 자연스럽게 붉은색이 도출된 듯 하다.
성지에서 붉은색을 품은 대표적인 꽃이 아네모네인 것이다.

쇼산나(백합화)는 구약성경에 총 12번 언급되는데 그 중 8번이 아가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고 보면 솔로몬은 백합화를 참 좋아한 듯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전은 바로 이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도 이 백합화만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네모네는 성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꽃임에는 틀림없다.
솔로몬의 아름다운 의복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리라는 예찬은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이렇게 산천에 스스로 피어나니 말이다.
특히 더 아름다운 것은 토양이 좋은 꽃밭이 아니라 돌짝밭의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어로 아네모네를 칼라닛이라 부른다.
신부란 뜻이다. 봄의 신부.
참 어울리는 이름이다.
성지의 백합화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가시밭에서 더욱 돋보이는 꽃이기 때문이다.
황무지의 땅 가시밭에 대조되며 그 아름다움이 더욱 고조된다.
다음의 가사도 성지의 현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사실 백합화란 꽃이 어떤 꽃이냐는 것은 단지 사전적인 관심일 수 있다.
무슨 꽃이냐는 논쟁보다 그 꽃이 왜 언급되었는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들의 꽃은 그저 흔한 꽃이지만 인간이 온갖 권위와 사치로 꾸며놓은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아름답다는 것이요,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비유한 것이고, 이사야서에서는 황량한 사막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향기와 시각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쇼산(백합화)이 진짜 어떤 꽃인지 궁금해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성막의 놋바다를 설명하며 쇼샨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고 그 둘레는 잔 둘레와 같이 백합화의 모양을 만들었으니(대하 4:5, 왕상 7:26)" 놋다바의 모양을 했던 그 백합화가 진짜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들의 백합화, 아네모네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는 아네모네라는 아리따운 시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 바람의 신 제프로스가 아네모네를 사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포모노 궁전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제프로스는 아네모네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사랑을 이어갔고, 도저히 그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플로라는 마침내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꽃이 되자 바람의 신 제프로스는 그녀를 잊지 못해 봄이 되면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을 보내 화려한 꽃을 피게 했다.
그리하여 이 꽃에 ‘바람꽃’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아네모네의 꽃말과 관련된 이야기다.
해마다 2월말에서 3월이 되면 성지에는 아네모네가 만발하는데, 호수 주변에서 노란 겨자 꽃과 섞여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볼 수 있었다.
아네모네는 자생하는 빨간 들꽃으로 키가 작다.
바로 이 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百合花)’라고 한다(마 6:28).

* 일백 백, 합할 합, 꽃 화 -

그런데 어떻게 빨간 꽃을 백합이라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백합이란 ‘흰 꽃’이 아니다.

백은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이다.
백 개의 인편(鱗片)이 하나의 구근(球根)을 이루고 있어서 백합(百合)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꽃을 주님이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로 보는 이유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을 주신 장소가 갈릴리 호수 주변이고,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 아네모네는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꽃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가(슬픔과 죽음의 의미) 그림 안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피사 대성당의 움베르토가 성지에서 가져온 흙 속에 아네모네의 알뿌리가 있어 이 흙을 사용한 십자군 순교자의 묘지에서 피와 같이 붉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순교자의 피가 되살아 난 것이라 믿게 되었고, 그후 유럽에서는 기적의 꽃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주님의 피에 비유되는 꽃이기도 하다.

들꽃이 만발한 성서의 땅을 순례하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는 말씀이 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판이나 사람이 보지 않는 숲속이나 나무 사이 여기저기 빨갛게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노란 겨자 꽃 만발한 들녘에 마치 빨간 점을 찍어놓듯 피어있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이런 대자연의 캔버스에 이런 엄청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들꽃 하나도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들의 백합화를 보라!’
들의 달맞이꽃을 보라!
들의 은방울꽃을 보라!
들의 패랭이꽃을 보라!
저 들의 한 떨기 이름 없는 꽃을 보라!
그 분의 형상인 자신을 보라!......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걸작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잘 믿으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성경에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신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으신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장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봤을 때, 이 말은 곧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3).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분의 신성을 주장하셨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3)고 선언하셨을 때 이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본성과 본질에 속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8장 58절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모세의 율법이 명한대로 그분을 죽이려고 돌을 집어들었습니다(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반복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누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같은 구절인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고 표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에 대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 20:28).
예수께서도 도마의 선언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디도서 2장 13절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격려합니다.

히브리서 1장 8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선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시며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계 19:10).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마 2:11; 14:33; 28:9, 17; 눅 24:52; 요 9:38).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결코 꾸짖지 않으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요한계시록의 천사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논증하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치 않았을 것입니다(요일 2:2).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그저 피조물이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죄에 따르는 무한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고후 5:21)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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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이신가?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으면서 왜 또 기도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지, 이 부분은 전에 잘 이해가 안 되고 고민스러웠던 문제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8~10)

설교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이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갈 수 있고 주님을 따르는 게 확실한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에 대해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고 이 문제는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저는 여러 차례 기도드리며 주님께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구했으며, 주 안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서 해답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실 때, 성령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였고,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아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요한복음 14장 8절 말씀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 그 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여기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부자 관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단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예수 안에 있는 영과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모두 하나이다.
성령이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리며 일곱 배 강화된 영이자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의 영은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홍수로 세상을 멸할 수도 있으며, 전 인류를 속량할 수도 있고, 더욱이 전 인류를 정복하거나 멸할 수도 있다. 이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혼자서 하는 사역이지 그 어떤 위격의 신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전능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는 주이고, 그리스도이며, 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전 우주 위에도 있고 만인 가운데도 있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관자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 사역은 하나님의 영이 혼자 행한 것이다.
하늘에서 행한 사역이든지 육신으로 행한 사역이든지 모두 그의 고유한 영이 행한 것이다. 하늘의 피조물이든지 땅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의 전능한 손에 달려 있으며,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므로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가 하늘에서 영일지라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사람 가운데서 육신으로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경륜을 시작하셨어요.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율법을 반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이러한 사역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영의 방식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인류가 점점 심하게 타락하고 율법에 어긋나 여호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자꾸 하게 되자, 사람들은 율법을 범한 죄로 정죄받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류의 필요에 따라,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는데, 사실상,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셨고,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나타내시고,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동시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어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재웠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등 완전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인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신 거죠?”

“우리 같이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을 갖추었음).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위치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병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위치에 섰을 뿐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자로 된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음성을 발하시든, 혹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시든, 예수님의 본질은 신성이지 인성이 아니예요. 예수님 역시 육신의 형상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의혹이 생기는 것은 주요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알지 못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글귀의 의미로만 해석을 해서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신 것이고 주님이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하고, 또한 인류에게 율법을 반포하신 이 땅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피조물의 각도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나의 깨우침을 딸에게 전해 주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심오한 비밀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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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근거 구절이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근거는 무엇인가요?
부활? 아니면 천재적인 지식들? 기적들을 행하심? 관련된 구절들을 모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근거 구절은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서 약 50 가지 정도 되는 구절들을 모아서 드립니다.

1.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벧후1:1)

2. 하나님 곧 예수 우리 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노니(벧후1:2)

3.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벧전5:10)

​4.  그 복된 소망 곧 위대한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딛2:13)

5.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6.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3:16)

7. 하나님의 영을 너희가 이렇게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 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3)

또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라도 예수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8. 태초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하나님이셨느니라(요1:1)

​그 말씀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요1:14)

9.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요일1:1)

10.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말씀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일5:7).

11.

아버지아들성령이름으로 침례를 주며(마28:19)

12.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행10:48)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고후13:14)

14.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오히려 자신의 영예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어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셨느니라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빌2:6).

15.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사7:14).

16.

보라, 한 처녀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1:23)

17.

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시110:1)

18.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 안에서 그를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겠느냐?(마24:43-4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19.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슼12:10)

어떤 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네 손들에 이 상처들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들은 내 친구들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슼 13:6)

거기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더라. 그리고 주와 함께 다른 두 사람도 이쪽과 저쪽에 못박고 예수를 중간에 두니라.(요 19:18)

20.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행20:28).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 1:14)

21.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창22:8).

그 다음 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22.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더라(막2:5).

23.

이 사람아, 네 죄들이 용서되었느니라.”고 하시더라.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눅5:20-21)

24.

도마가 대답하여 께 말씀드리기를 “나의 ,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요20:28-29).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께 경배하며 말씀드리기를 “참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마 14:33)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너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10)

이는 그들로 그들의 하나님말고는 어떤 다른 신도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단 3:28)

25.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9:6)

26.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3-16).

27.

그러나 너 베들레헴의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5:2)

28.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딤후1:9).

29.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시22:1).

30.

제구시경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마27:46).

31.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나니라(I AM THAT I AM)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니라(출3:14)

또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음이라(요7:29).

주께서 “내가 그니라.”(I am he)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리더라.(요 18:6)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I AM)고 하시니라(요8:58).

3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34.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허락한지라(막11:2-6).

35.

밤 제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니(마14:25).

36.

주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잠잠해지더라(막4:39).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음성으로 외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죽었던 자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오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고 하시니라.(요 11:43-44)

37.

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첫태생이시니 이는 만물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골1:16-18).

38.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1:3)

39.

또다시, 그분께서 첫째로 나신 분을 세상으로 데려오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하셨으며(히1:6).

40.

그러나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영원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의 홀이니이다(히1:8).

41.

“주여, 주께서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들도 주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니이다(히1:10).

42.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행2:31).

43.

와 나의 아버지하나니라(요10:30).

44.

본 자아버지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하느냐?(요14:9).

45.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더욱 죽이려고 하니, 이는 그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요5:18).

46.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창1:27).

47.

주 하나님께서 땅의 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이 되었더라(창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몸, 혼, 영(살전5:23)으로 지으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몸과 혼이 없고 영만 있다는 것은 모순임, 하나님께서도 몸[예수 그리스도, 딤전3:16], 혼[아버지 하나님, 판10:6], 영[성령 하나님, 살후2:8]을 가지심)

48.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1).

4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요 진리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요14:7-8).

​50. 하나님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말씀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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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3439)  μονογενής, ές 

1. 오직.  2. 독생하신
발음 [ mŏnŏgĕnēs ]

어원  / 3441과 10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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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4:1-14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답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마태복음 기자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대답합니다.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한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이미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달라진 게 별로 없습니다.
고난과 불행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둔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과 대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요한복음 기자가 요한복음 14-17장까지 자그마치 4장에 걸쳐서 변증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4-17장은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말씀입니다. 본문 요 14:1절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는 기원후 100년 어간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만 몇 명이 남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조짐도 없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근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아버지 집에 가셨으며, 거처가 예비 되면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기입니다. 중간 시기에는 모든 게 불안한 법입니다. 요한은 그런 불안을 극복하게 하려고 이 고별사를 기록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도마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의 말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 중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인 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서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어떤 곳을 찾을 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다른 한 제자인 빌립이 등장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말도 당연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도 다 여기에 연결됩니다. 13절과 14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모든 걸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물리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처럼 여기는 전통은 유대교가 아니라 이집트와 로마입니다. 파라오와 시저는 인간이지만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파라오나 시저는 그렇게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 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나사렛 예수는 무기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아들입니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없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거대한 종교단체를 조직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이를 신으로, 특히 창조주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여러 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물이 포도주 되는 이야기,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 기적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문헌에도 자주 나옵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한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외로워하기도 하셨고, 자신이 감수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신 하나님과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근심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으로 믿어지나요?

사도 요한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9절)
예수님을 보았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거의 죽고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만 교회에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10절)
반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서로의 안에 거한다는 말인가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그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이외의 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일어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한 사건은 부활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만 그 나머지 사건들도 구원의 현실이 됩니다.
치유, 축귀, 순종, 사명 등도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모든 행복한 삶의 조건들도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을 잃는다면 좋은 직장과 연봉과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전체가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거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본문도 그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멀게 느낍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기한 소문 정도로 듣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부활이 우리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남거나 아니면 언젠가 부활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으로만 남습니다. 부활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왜 부활의 영성에 천착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인식과 신앙의 토대가 부활이라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실질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피안이 아니라 차안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피안적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계 전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분을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 역사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실존에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절대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유대인처럼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헬라인처럼 철학에 매달리거나, 로마인처럼 세계를 지배하려고만 했을 겁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그의 모든 운명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에서만 우리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한 참된 생명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종교적 감수성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이자 고유한 삶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운명과 일치할 수 있는지, 거기서 나오는 삶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신약성서도 늘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접적으로 이에 걸맞은 경구만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참된 깨우침을 가리킵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됩니다.

요한 공동체는 근심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요한의 설명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저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염려해도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여러분의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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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년 동안 무관심, 음모, 논쟁, 추측, 조롱, 그리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믿음이 그의 성육신 이후(눅 1:41) 전 세계에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예배와 헌신 그리고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높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여전히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오류가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다양한 영적 손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 구세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골 1:15)이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요 14:9).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세상에 그 어떤 질문이 이 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되었던가? 이 세상에 또한 그 어떤 질문이 이 질문처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또는 아예 무시당함으로 누군가를 지옥의 위험에 빠뜨리고 또는 정확하게 대답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한 천국을 얻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묘사했다(요 1:14). 도마는 예수님을 그의 “주” 그리고 “하나님”(요 20:28)으로 고백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 그리고 그는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자” (히 2:14)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했으며 신성한 이름을 받은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도 표현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자 모든 뛰어난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빌 2:9-11).

이런 증언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더 많은 증언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특징, 또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분되는 신인(God-man)이다. 그는 실로 독특한 분인데 우리기 흔히 쓰는 그런 독특함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와 비슷할 수 없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감스러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신인(神人)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역사를 망각한 채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그는 정말로 사람인가?

1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라피온(Serapion, 190-203)을 통해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을 믿는 이단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이 “영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겉으로 인간처럼 보였다는 주장을 했다(그리스어, dokeō = “…처럼 보이다”).
그 후 4세기에 들어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5-392년 경)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부분적으로 그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폴리나리스는 영원한 아들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성육신은 단순히 마음과 영혼이 없는 육체에 거했던 아들의 신성일 뿐이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서자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요즘 들어서 그리스도가 가졌던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슬퍼했다.
그럼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셨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사람이고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다움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단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서술한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히 2:17).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배고픔(마 4:2)과 갈증(요 19:28) 그리고 피곤함(요 4:6)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했다.
그는 울었고(요 11:35), 통곡했으며(눅 19:41), 한숨을 쉬었고(막 7:34) 또한 신음했다(막 8:12).
B. B.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나와 똑같은 인간을 앞에 놓고 만나고 있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나지안조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서신 101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가 입지도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하고 인간을 치유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영혼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혼을 소유해야만 했다.
합리적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도 합리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을 입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다양한 오류와 관련해서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주 그리스도는 그의 영혼의 합리적 능력과 능력, 그의 이해력, 의지 및 애정으로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 … 오래 전 사람들이 헛되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신성한 본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신성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대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 분 안에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의 모든 도덕적 활동의 즉각적인 기초(principle)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행위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였다. 그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힘이 강해졌고 또한 지혜도 더 자라났다. 지혜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새롭고 더 큰 지식이 필요했다(눅 2:52). 이것은 그가 참된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유한함을 반영하는 유한한 마음과 영혼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필수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온갖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구세주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복음서와 히브리서의 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든 단지 속임수(phantom)가 아니었다. 그의 피는 우리 몸이 잘리거나 찔릴 때 나오는 진짜 피였다. 핏방울과 같았던 그의 땀은 십자가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인간을 정복한 죄의 영향을 바라보며 느낀, 진정으로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비극은 오로지 그가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만 통해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 우리를 영원히 치유했다.

2. 그는 도움을 받았는가?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요 4:34; 5:19, 30; 6:29, 42, 57), 그를 도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존재는 누구일까?
축복받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다른 두 격이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성령님이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주의 영이 주의 종인 메시아에게 안주하실 것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42장 1절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바로 첫 번째 종의 노래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61:1도 참조하라)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종(그의 아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붙잡는다. 이사야서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읽게 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사 50:7).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실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을 읽는다. 성육신(눅 1:31, 35), 세례(막 1:10), 광야의 유혹(막 1:12; 눅 4:14), 설교(눅 4:18), 기적(마 12:28), 죽음(히 9:14), 부활(롬1:4, 8:11), 그리고 승천과 영광 받으심(행 2:33, 시편 45:1-7)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결코 그를 떠나거나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온전히 기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내려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자신이 가진 신적 본성에 의존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될 때 진정한 종으로 오신 성육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셨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를 맞추고 준비시키셨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명령하라.”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순종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만이 구세주라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참된 종교적인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3. 예수님도 죄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도 분명 유혹을 받았었기에 혹시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첫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진 두 가지 의지(will)의 관계에 관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각각 다른 두 본성에 적합한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이다.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가지 자연적 의지는 불경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간적인 의지는 주저하거나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성하고 전능한 의지에 종속된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결코 그의 신적 의지에 어긋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공유하는 신성한 의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되지만 결코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종속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즉 그리스도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일치는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묵상하면 할수록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관여하지 않고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적 본성은 추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추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단지 행동하는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됨(personhood)은 사실상 신인이기에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W.G.T. 쉐드(W.G.T. Shedd)는 이렇게 말했다.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이 본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행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신다면, 그건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된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죄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히 4:15). 그가 받은 유혹의 현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진짜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4. 그는 진짜 사람인가?

많은 신자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진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광 가운데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지금도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인간인지를 물으면 약간 혼란스러워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승천 후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한테 지금 굳이 인간성(humanity)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오웬은 말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이성적인 영혼 뿐 아니라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사항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존재함은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항목이다.
네덜란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다시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런 육신이 되었다! 보좌에 앉아계신 지금조차도 그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오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이제 와서 “신성화”되지 않았다(즉, 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본성이 “하늘에서 신적인 본성과 결함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되는 어떤 신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항상 참된 인간적인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됨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인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한때 약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히 4:15) 약점 때문에 허덕이는 우리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도 제사장이다. 신부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권능으로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다.

5. 그는 완전한 하나님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수님, 놀라운 분이죠.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임명하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6년 경)는 아들이자 로고스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가장 유명한 이단자일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그의 참된 신성을 부인했다.

나사렛 예수의 완벽한 신성의 증거, 즉 아버지와 나누고 있는 동질성(동일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에 혼란을 주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예 : 빌 2:5-11, 히 1:1-14, 골 1:15-20 참조).

요한복음의 프롤로그는 교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시작하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롤로그 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라는 놀라운 요점을 말하는데 이 진리는 아마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 믿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1절의 “계셨다(was)”는 14절의“되셨다(became)”와 대조되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되신 게” 아니다. 이전에는 그 말씀이 단지 “계셨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도 이 진리를 확인하고 뒷받침한다(요 3:13; 6:62; 8:57–58; 17:5; 20:28).

나중에 요한은 이사야가 “만군의 주인되신 왕”(사 6:5)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이사야 6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후, 그는 이사야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주는 법이 없다고 쓰여있다(사 42: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속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요청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서 묘사하는데 바로 예수님과 구약의 야훼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런 병행이 가르쳐주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다름 아닌 야훼, 그분이라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동등한 바로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신성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위엄이 있는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또 변함없이 강력한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가? 아들도 그렇다. 신성한 본성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그는 단지 영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고 변함없이 영광스럽다.

6.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언어(theotokos)는 무엇인가?
이 진술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단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육신이 되었을 때(요 1:14) 그는 보통 인간(human person)이 아닌 단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만을 취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인격 아래에 존재한다.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자 같은 아들이며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칼케돈 공의회).

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인간 본성이 이랬다” 또는 “그의 신적 본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적 또는 신적 본성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로마서 1:3).
주체는 인간, 아들이고 그는 인간적 본성(예: 먹는 것, 눅 24:43) 또는 신적 본성(예: 세상을 유지함, 히 1:3)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마리아는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AD 451)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정통성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이유이다.

“여러분은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아들이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피로서 교회를 얻으셨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한 보상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창 22:17)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메시아이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마 16:16).
이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같은 영광을 볼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신인(神人)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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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까?
성경 읽고, 헌금하는 것입니까?
교리를 정확히 잘 아는 것입니까?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맞는 말 같지만 정답이 되기엔 모두 다 부족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주인이 예수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가 인생의 왕 노릇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자신 안에 새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끔찍하게 죽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냥 ‘용서하노라’ 한 마디면 안 된단 말입니까?
당신의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죄이니 당연히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안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죄이며, 이 죄로 인해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기만 하면 모든 죄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전히 삶의 주인이기를 고집하십니까?
왕좌에서 내려오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까?
지금 당신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분은, 당신을 목숨 걸고 사랑하시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맡아 다스리기에 충분한 권능과 지혜가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

첫째,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 이 말은 ‘주인님’이라는 말과 같아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속한 자이고, 나의 모든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과 같은 거예요.

둘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 ‘구원자’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아요.

셋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가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 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을때 유대인들은 굉장히 분노했어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에요“(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_요 5:18,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_요 10:32-33).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며 하나님이세요. 정리해 볼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자,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방금 설명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에 담긴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셨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인 거죠.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의미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요, 유일한 구원자요, 나의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그 믿음에 담긴 내용 즉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죄인 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네, 맞아요.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제가 이렇게 구분지어 설명하는 이유는 많은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 내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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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의미를 함의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우리의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의존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엡 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기 이전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바르고 온전하게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한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되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성경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인간들의 힘에 의존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하게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참으로 철저하게 절망한 이들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이 구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어떤 기여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그대로,또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후에 우리의 자리, 우리의 형벌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리 구속[代贖]의 방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 15:3,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신 이런 구원의 방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건과 그것을 전하는 말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고전15: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너무 쉬워서 그런 식으로 구원하려 하신 것은 옳지 않다든지 하는 식의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어리석은 것이라거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여 죽고 돌아가신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고전 1:18, 24), 그 수욕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있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라든지,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부활은 없이 그 의미만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고 다시 사신 것에 온전히 의존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즉,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롬4:25).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그것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에 있음을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원을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영원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구속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그러나 다시 사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리며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만 하고 있는 이들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발이 되어 그가 이루시려는 일을 열심히 이루어 가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또 다른 부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다. 그것이 예수 믿는 일의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은 단지 그것으로 그쳐지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Saviour)로 받아들인 이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산다. 즉,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종(slave or servant)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1. 우리의 소유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우리의 소유주(owner)로 인식하며 그렇게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고전적인 고백(classic confession)이다. 사실 우리는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중(二重)으로 주님의 것이 된 존재들이다. 창조로 인해 모든 사람은 본래 주의 것이나, 그들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구속을 적용해 주셔서 우리를 다시 그의 것으로 삼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금 주께 속한 자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하여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b-20)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구속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 주의 것으로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게 위해 노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주를 위한 존재로 날마다 드려 나가며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예배이고, 특히 그 중의 헌상 순서가 그러한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나 자신과 나의 존재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義)에 의존해서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마음을 다 표해 내는 것이 우리의 헌상의 의미이다. 
  
또한 나를 주께 속한 자로 여기며 사는 것은 사실 큰 은혜가 되는 일이다. 주의 소유된 존재이니 주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그리하여 결국 당신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의 소유를 삼으셔서 우리를 이용하여 무슨 별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했던 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경계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인간 됨의 실현을 주께서 친히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소유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고 주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을 다 주께 맡기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2. 우리 삶의 목적이신 그리스도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바로 우리 주님의 영광과 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드러난다. 나의 생의 궁극적 목표를 다른 곳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나의 삶에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이는 삶의 목적이 없을 수도 있어서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다고 살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자신의 행복이나 가정의 행복이나, 국가와 민족의 번영이나 온 세상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살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구주로 받아들인 이들은 이런 것들로서는 실상 그 어떤 행복도, 가정의 번영도, 민족의 발전도, 세계의 평화와 발전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면서, 이제 삶의 목적이 바뀌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그의 나라와 그 뜻을 수행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이기주의자(egoist)일 수도 없고,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혈연 이기주의자일 수도 없고,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민족지상주의자일 수도 없고, 온 세상의 평화를 지고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해동포주의자(cosmopolitanist)나 인류의 인간 됨을 지고한 가치로 여겨서 하나님조차도 이에 도움이 되면 섬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개념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도주의자(humanist)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특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 스스로가 타락하여 나갔을 때 그들에게 구원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자신과 가족과 민족과 온 인류와 온 세상을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는 일에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려는 일념(一念)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이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 사는 이요, 그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는 이이다. 자신의 삶을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려는 노력과 헌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이이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3. 우리 삶의 안내자요 모범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서만 주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사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의 삶의 진행에서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사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성경의 바른 뜻을 이해하려는 일에 열심이게 되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인 기도에 열심이게 된다. (1)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2) 그 말씀의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에 주는 함의를 알기 위해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열심이며, (3)기도한 자답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 열심인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의 하나는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잘 살펴보고, 바르게 해석하여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주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 가는 일이다.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일이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이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 그가 이루신 구속에 적용함을 받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이가 구주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며 주께서 친히 보이신 모범을 쫓아가는 데서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이만이 진정한 제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주께서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니, 이제 나는 존귀, 영광, 부요, 건강의 축복을 받겠다고 나서는 이는 자신이 주를 따라간다고 나서는 그 근본적 동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세우셨으니 이제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다른 이를 위해 내어 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고난의 길에로 나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종이요, 제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어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사는 제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일에서는 믿음으로 그 사실과 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이제 동일한 믿음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다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도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trust in God)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3)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1) 예수님을 나 자신과 온 세상의 유일한 구주(the only Saviour)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고, (2)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the Lord)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온 천하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음을 의식하면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Coram Deo(1) 죄의식(Sin-Consciousness)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먼저 가장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는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과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기독교의 현관이요, 참 기독교에 이르는 통로라는 우리 선배들의 생각은 참으로 옳은 통찰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엄위하시고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감히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의식을 실존적으로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유난히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느끼고, 어떻게 죄인인 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참으로 실존적으로 고민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고뇌를 잘 아는 그의 후예들 가운데서는 기독교적 죄의식을 깊이 있게 설명한 이가 많다. 가장 깊이 있게 죄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철두철미 절망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을 전혀 내세우거나 의존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에 자기를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도 인간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는 아직도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았고, 아직 철저한 죄의식을 갖지 못한 자이다. 
  
Coram Deo(2) 칭의 의식(Justification-Consciousness)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理 贖罪] 사역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죄용서, 즉 칭의(稱義)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선언하신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행위로 하지 않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그대로 믿는[즉, 받아들이고 의존하는] 것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칭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칭의 의식을 가지며, 또한 참된 칭의 의식을 가진 이는 참된 죄의식을 가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설이 바로 기독교적 진리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면서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보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보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끝임 없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죄를 지어 나가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의 천재적이고 선언적인 표현은 때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던져 주지만, 그가 성경으로부터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무리 완벽히 노력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철저하고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일 뿐이지만(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절망),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온전하신 삶의 의(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에게 전가된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義)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인(義人)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의만을 내는 우리들로서는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이라는 것이다. 
  
Coram Deo(3) 성화의 삶(The Life of Sanctification)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으로 보는 이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 나갈 수밖에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른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 전체(Tota Scriptura), 즉 온전하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규범으로 하고(Sola Scriptura), 성령님을 의존하여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삶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그 사역을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된다. 그는 십자가의 빛에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사는 성령의 사람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 성화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과 현실 전체를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예술 등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과 영역이 다 이런 성화의 삶, 성령님과의 교제의 삶,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삶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영역 밖이나 주변의 작은 소위 종교성의 영역에 성화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원론적인 것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런 소아병적인 사고와 삶의 분과화(departmentalization)는 성경적 기독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성(everyday life)과 공적인 영역(public arena)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한다. 성화는 일상성과 공적인 삶의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속의 한 가운데 우리의 거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이는 세속 속의 성자(the secular saint)이다. 

Coram Deo(4) 사랑의 삶(The Life of Love)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같이 하나님 앞에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 나간다는 의식을 나누는 사랑 의식(agape-consciousness)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홀로 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정죄 된다(따라서 여기서는 아무런 비교 의식도, 우열 의식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는다(여기서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이들은 자신들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고 칭의함을 받은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냉정하게 홀로 서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사랑할 많은 이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함께 살아가도록 새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동체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탄생된 이 공동체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고 연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현실(可視的 現實)로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함께 그는 동시에 그 공동체 안에서 연습한 그 사랑을 온 세상 안에 가서 실천해야 한다. 이 세상은 그의 사랑이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가 나타나야 하는 무대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가야 할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사랑의 실천의 장(場)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사랑의 도관(channel of the love of God)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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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 - 산 영



구약(舊約)의 오역(誤譯)/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인가 산 목숨인가?

창세기 2:7에서 번역한 ‘생령’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있는 영’이라는 뜻이 되는 데 그렇다면 영(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낳게 한다.

생령(生靈)은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를 번역한 말인데 네페쉬 하야라는 말은 ‘살아 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숨’이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산 목숨’ 또는 ‘산 존재’라고 번역해야만 했을 것이다.(참고로 히브리어는 한문처럼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고 읽는다는 것을 알아두자).

한편 고린도전서 15:45에서 ‘산 영(靈)’으로 번역한 프쉬케 조산(ψυχ? ζ?σαν) 역시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산 목숨’의 오역인 것이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

현대인 /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 라고 쓰여 있으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이 되셨습니다.
공동번역 /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생명을 주는 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번역과 달리 KJV 등의 영어 성경은 창 2:7의 네페쉬 하야와 고전 15:45의 프쉬케 조산을 Living Spirit(산 영)이 아닌 Living Soul(산 목숨)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네페쉬(???)와 프쉬케(ψυx?)를 영어로는 항상 Soul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목숨’ 또는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며 ‘영’이라는 뜻을 가진 Spirit이나 Ghost와는 전혀 다르다.

네페쉬(프쉬케)는 ‘목숨’과 ‘생명’이라는 뜻과 함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물’로 번역될 때도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 특히 ‘사람 자신’을 표현할 때도 많이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개역 성경은 이러한 구분 없이 네페쉬(프쉬케)를 ‘목숨’과 ‘생명’이라는 원 뜻에 맞게 번역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영(靈), 혼(魂) 또는 영혼(靈魂) 등으로 혼용하여 번역하기도 함으로써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역 성경이 이처럼 네페쉬(프쉬케)를 일관된 뜻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양하게 번역한 것은 단어의 개념의 발전과는 무관하며, 단지 용어의 혼용의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게다가 개역 성경에 ‘혼’이나 ‘영혼’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중국어 성경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동양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백(魂魄)이 몸을 떠나서 귀신이 된다고 하는 속설이 지배적이며 이 혼백을 줄여서 혼(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개역 성경은 도처에서 ‘영’과 ‘혼’ 그리고 ‘영혼’이라는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없게 하고 있다.

영혼의 정확한 뜻은?

개역 성경은 특히 영혼(靈魂)이라는 말에 대하여 심하게 혼용을 하고 있다.
즉 영혼이라는 말이 어느 경우에는 ‘목숨(Life)’이나 ‘사람(Soul)’의 뜻으로 사용되다가 또 어느 경우에는 ‘영(Spirit)’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등 매우 혼란스럽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편에서 이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시 22:20에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라고 할 때의 ‘영혼’은 네페쉬를 번역한 것으로 사실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되었을 것이다.

네페쉬(Soul)는 ‘목숨’, ‘생명’ 또는 ‘사람 자신(自己)’이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번역된 곳이 드물고 시편에서처럼 대부분 ‘영혼’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혼’을 ‘목숨’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편 시 143:7에서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 하나이다” 라고 할 때의 ‘영혼’은 루아흐를 번역한 말이므로 원 뜻은 ‘내 영이 소멸되려 합니다(육체를 떠나려 합니다 곧, 죽을까 합니다)’가 된다. 사실 영혼이란 표현은 위와 같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동안의 언어 관습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 ‘목숨’이나 ‘사람’의 뜻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영(靈)’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함으로써 계속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혼란스러운 용어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목숨의 뜻을 가지는 성경의 번역 용례가 매우 많은 데다가 찬송가에도 그렇게 사용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혼(靈魂)에서 혼(魂)이라 하는 말의 뉘앙스(Nuance)가 타락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는데 영(靈)은 ‘사람의 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도 적용되는 말이므로 이를 영혼으로 대치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목숨’과 ‘영’이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존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존재에 관한 논의는 ‘영’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분설(二分說)과 ‘영’과 ‘혼’과 ‘몸’의 세 종류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삼분설(三分說)로 대립되어 있는데 정통적으로는 이분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지방 교회주의자인 ‘위트니스 리’와 같은 신학자들과 일부 천 년 왕국론자들이 주장하는 삼분설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용어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이는 살전 5:23에 나타나는 혼(프쉬케)이라고 표현한 어휘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발생된 것이었다.

원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결여될 때 새로운 추론에 의한 학설은 계속 생성되어지게 마련이며,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느 특정한 말씀에 집착할 때 이상한 교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구조

인간의 구조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창 2:7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사람의 구조는 흙으로 이루어진 몸과 더불어 생기(生氣)라는 두 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임인데 직역하면 ‘생명들의 호흡’이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의 몸 안에 영(靈)을 넣으심으로 산 존재를 만드셨다 뜻이다.
즉 다른 모든 동물은 생기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만 창조되었지만 사람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며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μα)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영이라는 존재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사람에게 부어주신 것으로서 피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언젠가 죽어 없어지더라도(전 3:20) 비물질적인 존재인 영은 몸과 함께 소멸되지 않고 몸에서 분리되어 위로 간다(전 3:2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전 3:21에서 인생의 ‘혼’으로 번역한 루아흐는 물론 ‘영’의 오역이다.

다시 창 2:7의 구절을 살펴보면 사람의 몸에 영이 합쳐져서 산 목숨이 되었다고 하였다.
즉 사람은 몸이 영과 결합되었을 때 살아있는 존재이며, 몸에서 영이 분리된다면 죽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설령 죽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 죽은 자의 영이 다시 돌아와서 그의 몸과 재결합할 때는 죽은 자가 부활하여 다시 산 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예(겔 36:5, 눅 8:55)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몸은 히브리어로 게쉠이라고 하고 헬라어로 소마(σ?μα)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몸(Body)은 다시 육체(Flesh)와 구분되어지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몸과 육신 또는 육체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흔하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는 두 용어를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한다.

육체는 히브리어로 바싸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사르크스(καρδ?α)라고 하여서 몸과 반드시 구별을 한다. 몸은 육체에 무엇인가가 더하여진 상태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즉 육체는 글자 그대로 고깃덩어리의 상태로서 그곳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과 정욕의 산실일 뿐이며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은 육체의 어딘가에 사람의 영을 담아둘 장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곳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이며 헬라어로는 카르디아(καρδ?α)라고 하는데 육체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질적인 공간이 아닌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이므로 특정한 위치를 구별해 낼 수는 없으나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는 장소이며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도 함께 계시는 곳(고후 1:22, 갈 4:6)도 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람은 몸(게쉠, 소마)과 영(루아흐, 프뉴마)으로 이루어지는데 몸과 영이 결합됨으로써 목숨이 있는 상태 즉 생명의 존재(네페쉬, 프쉬케)가 되며 몸에서 영이 떠나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몸은 다시 육체(바싸르, 사르크스)와 마음(레브, 카르디아)으로 구분되며 사람의 영이 거하는 곳은 마음이다. 이를 간단한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히 브 리 어
헬  라  어  
목숨(생명)
네페쉬(???)
프쉬케(ψυχ?)
루아흐(???)
프뉴마(πνε?μα)
게쉠(???)
소마(σ?μα)
육체
바싸르(???)
싸르크스(σ?ρξ)
마음
레브(??)
카르디아(καρδ?α)
  * 몸 + 영 =  생명, 목숨(살아있는 사람으로 존재)
  * 몸 - 영 =  죽음(죽은 육체만 남아서 소멸됨)
  * 몸 = 육체 + 마음(영이 거하는 비물질적 공간)

삼분설의 오류
살전 5:23에서 ‘혼’으로 번역한 프쉬케(ψυχ?)는 ‘목숨’의 오역이다.
즉 삼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과 몸 이외에 혼이라고 하는 별도로 구별되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몸이 결합하여 이룬 상태를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와 같이 표현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종말관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특히 4장과 5장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교훈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다 읽어보면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님이 갑작스럽게 오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이 땅에 이미 임하여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신실한 삶보다는 다가올 종말을 고대하며 들떠있는 자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살후 2:2).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다리는 종말과 주의 재림은 이 세상 끝에 있을 최후 정점의 종말을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바울의 교훈은 최후 정점의 종말이 아닌 구약의 모든 예언서와 신약(마 24:2-3)에서도 예언되어졌던 ‘주의 날’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요 ‘야곱의 환란의 날’인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의 날인데, 당시로 볼 때 그 날까지 대부분 생존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십 수 년 이내에 실제적으로 겪게될 상황이므로 매우 긴장되고 실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종말을 맞게될 자들로서 ‘우리 살아 남은 자’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살전 5:23에서는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인 ‘너희들’을 향하여 주께서 예루살렘 심판의 심판주로서 오실 때에 ‘영과 몸’ 곧 ‘목숨(프쉬케)’을 보존하고 있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주님이 문자적으로 지상에 강림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는 심판주로서의 엄위를 가지고 영적으로 오시는 상태(마 26:64, 살후 1:7-8)를 말하며, 그 날이야말로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심판 받는 경악의 날(사 13:9-16)이 되겠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너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는 환희의 날(마 24:31, 욜 3:16-17)이 될 것이므로 그 때까지 너희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울의 소원을 말한 것이다.

종말에 대해서는 예언과 묵시기록의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Symbol)과 메타포(Metaphor)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오역(誤譯)인 눅 21:35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강론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심판(크리시스, κρ?σι?)과 재림(파루시아, παρουσ?α)에 다중적(多重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성경은 불변의 진리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서신서들은 특별히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하여 당시의 정황에 부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죽음의 원인

이제까지 사람의 구조를 살펴본 바로는 사람의 몸에 영이 결합되어 사람이 사는 것이며 사람의 몸이 더 이상 영을 담아둘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영은 그 몸을 떠나게 되고 남은 육체는 소멸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은 원래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능을 더 이상 못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생겼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반드시 죽을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라는 말씀을 보면 사망(따나토스,θ?νατο?)과 영생(조에 아이오니아,ζω? α?ων?α)을 대비시키고 있으며 또한 사망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하마르티아,?μαρτ?α)의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하마르티아라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가 과녁이라는 뜻의 마르티아(μαρτ?α)에 붙어서 된 말로 원 뜻은 ‘과녁을 맞추지 못함’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 뜻에서 빗나간 것이 죄인 셈이다.

한편 성경은 롬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인(하마르톨로스,?μαρτω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롬 5:17-18의 말씀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라고 함으로써 인간들이 제각기 저지른 개별적인 죄가 아니라 최초 인간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그의 후손된 모든 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의 결과를 낳은 그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롬 5:19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라는 말씀에는 불순종(아페이떼이아,?πε?θεια)이 바로 죄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영생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창 2:16-17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선악과(정확하게는 知善惡果)만 먹지 않는다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혹자는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이 죽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영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영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영적으로 죽는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영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 3:17-19에서도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영생의 기회 상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이라는 물질로 몸을 만드시고 그 안에 영원히 소멸치 않을 존재인 영을 넣어주셨다. 인간이 그 상태로 영생하기에는 불완전하였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도 아니었다. 첫 인간 아담에게는 영생과 죽음 중에서 택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대로 죽을 몸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며 영은 몸을 떠나 음부(쉐올,또는 하데스,?δη?)에서 심판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불순종의 대가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죽을 몸을 물려줌으로써 전 인류에게 사망의 선물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고 다시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은 창 3:22의 말씀처럼 타락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음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선악과 대신에 생명과를 먹었다면 고전 15:44에서와 같은 죽지 않는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코스,σ?μα  πνευματικ??)이 되어 영과 결합함으로써 영생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아니하고 생명과를 먹은 후 영생의 존재가 되어서 창 1:28에서 최초에 주신 명령에 따라 에덴 동산에서 많은 자손을 낳고 번창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일정한 수의 경건한 자손(말 2:15)을 얻으신 후에 그들로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첫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만한 수의 인간(롬 11:25)을 얻으시기 위해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뤼트로시스,λ?τρωσι?, Atonement)의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5:20에서 말씀하듯 영생 그 자체이신 분(요 11:25, 요 1:4, 롬 6:23)이므로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주님은 일시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가지셔야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셨지만 인간의 타락을 비롯한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작정하셨다는 것은 쉬운 말로 각본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로 각본에 따라 타락한 것이며 현존하는 모든 악도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죄를 짓는 것일 따름이므로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근거가 없어지고 말게될 것이다. 또한 각본에 따라 불순종한 인간들에 대하여 그 대가로 불못 형벌에 처하신다고 하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알고 계시다’는 것과 ‘작정하셨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불변하는 영원한 현재에 오직 동시적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상의 순서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형질과 각 인생마다의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다 알고 계시므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신 그대로 모든 것이 같은 결과를 이루도록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작정’이나 ‘예정’이란 용어는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특정한 언명일 뿐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시간의 흐름 안에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섭리하시는 분으로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생각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충분히 가능한 추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지식은 인간의 타락을 비롯하여 믿고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일과 불신의 결과로 멸망 받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함으로써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운명론적 신학적 사고의 오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예정에 관해서는 신약편 요 17:2의 오역을 다루면서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신망애(信望愛) / 믿음 소망 사랑(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信望愛)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구원을 얻는 믿음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해당합니다.

소망은 현재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기대이며 바램이고 또한 확신입니다.
따라서 소망은 미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랑은 현재라는 시간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거는 믿음이며 또한 미래를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내 몫을 모두 주십시오!
율법대로 해결하면 간단합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당장 내쫓든지 아니면 회당으로 끌고가서 이 녀석이 무리하게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자기 유산을 요구합니ㅏ다.
율법은 이런 자식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돌로 쳐 죽여라!
집에서 내 쫓아라!

그럼에두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드르이 요구에 따라 그의 몫을 모두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들이 비참한 신분이 됩니다.
심지어 끼니를 떼울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꾸짖으며 너 그러면 네 장래가 망가진다.
좀 더 기다려봐라!
이렇게 타일렀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가버린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찾아봅시다.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싫어하며 극구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를 에 이루어야 할 라으사랑ㅏㄷ.
을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ㅏㄷ.하서가공

1. 소망을 갖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믿음(信)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3982에서 유래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답변

히브리서 11:1은 우리에게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크리스천 삶의 요소 중에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사거나, 팔거나, 우리의 동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은 크리스천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사전에 의하면 믿음이란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서, 특히 논리적인 증거 없이 믿는 것, 헌신하는 것, 혹은 신뢰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으로도 정의합니다. 성경은 믿음과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믿음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고,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도 유일 하신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을 열심히 연구하거나 추구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8-9은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이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우리가 그것을 얻었거나, 혹은 그것을 가질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자유 의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긍휼로그 분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분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째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속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을 만드셨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6의 주요 부분에서는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적이고 충실한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의 완벽한 예를 누가복음 7:50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째서 믿음이 그토록 보람 있는 것인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시다가 한 죄 된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그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상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을 믿어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지탱해주는 힘이 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8-9).

믿음의 예: 히브리서 11장은 위대한 믿음의 업적들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주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렸고 (4절), 믿음으로 노아는 폭우가 쏟아질 지 몰랐던 때에 방주를 준비했고 (7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가 알지 못했던 곳으로 갔고, 그 후에 기꺼이 자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쳤고 (8-10, 17절), 믿음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했고 (23-29절), 믿음으로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여 그녀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31절). 더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 (33-34절)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명백하게, 믿음의 존재는 행위로 입증되었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의 초석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입증하지 않고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에 대해 애매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 삶 속에서 높으신 하나님의 지위에 필수적인 숭배가 부족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믿음은 가끔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분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또 우리의 믿음을 날카롭고 강하게 단련시시기 위해 시련과 힘겨운 시간들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2-4).




소망(所望)(望)

ἐλπ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1680

1.

기대

2.

신뢰

3.

행16:19

발음 [ ĕlpis ]
어원
ἔλπω에서 유래


크리스천의 소망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을 소원하는 것, 즉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소망은 “확신에 찬 기대”를 뜻합니다. 소망이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말합니다(로마서 8:24-25; 히브리서 11:1,7). 소망은 의인의 삶의 기초적인 요소입니다(잠언 23:17-18). 소망 없는 인생은 그 의미를 잃으며(예레미야 애가 3:18; 욥기 7:6) 사망 안에는 소망이 없습니다(이사야 38:18; 욥기17:15).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소망을 갖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시편 28:7). 또한 망하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이사야 49:23).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망이 있는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으며(예레미야 29:11)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시편 46:2-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2:21; 베드로전서 1:3).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약속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세상에 이루어집니다(로마서 8:24-25).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미래의 소망이며(사도행전 23:6),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며(사도행전 26:6-7), 모든 육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자(로마서 8:23-25), 영원한 영광(골로새서 1:27), 성도들의 영생과 상속(디도서 3:5-7), 그리스도의 재림(디도서 2:11-14),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요한일서 3:2-3), 하나님의 구원(디모데전서 4:10) 또는 단순히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십니다.

축복된 미래에 대한 확신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로마서 8:23-25), 우리 안의 그리스도(골로새서 1:27),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고린도전서 15:14-22)을 통해 보장됩니다. 소망은 고난을 견디면서 만들어지며(로마서 5:2-5) 우리가 인내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히브리서 6:11).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 속에 높여지는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며(히브리서 6:18-19), 우리는 소망 안에서 자랑할 수 있고(히브리서 3:6), 믿음 안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2).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2:12; 데살로니가전서 4:13).

믿음과 사랑과 함께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항상 있는 미덕이며(고린도전서 13:13) 사랑은 소망에서 말미암습니다(골로새서 1:4-5). 소망으로 인해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즐거움과 평안이 생깁니다(로마서 12:12; 15:13). 바울은 사도로서의 소명이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디도서 1:1-2). 재림에 대한 소망은 믿는 자가 자신의 삶에서 정결케 되도록 하는 기반이 됩니다(디도서 2:11-14; 요한일서 3:3).




사랑(愛)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25에서 유래

아가페적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헬라어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랑”이라고 번역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다른 사랑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가페적 사랑의 핵심은 선의, 박애,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향한 의지적인 즐거움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페는 로맨틱하고 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헬라어로 “필리아”라 하는 진한 우정이나 형제애를 말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실함, 헌신 및 의지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고귀한 도덕적 성격과 강한 특성으로 인해 다른 사랑과 구별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 밖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그 자체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아가페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합니다(누가복음 10:27). 즉, 주인에 대한 종의 신실한 섬김(마태복음 6:24)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애착(요한복음 3:19)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랑의 종류는 우리에게 자주 들리는 것처럼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은 본성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항상 행위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우리는 그런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없어도 베푸시는 것이며, 자비로우며, 끝없이 그 분께서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3:1).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결국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겁니다(요한복음 3:16-18).

우리 역시 상대가 믿는 자든(요한복음 13:34), 원수이든 간에(마태복음 5:44) 서로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느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남의 필요를 위해 의지적으로 기쁘게 결심하여 하는 행동임을 그리스도께서 본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듯 우리가 사랑하려 한다면, 그 사랑은 오직 그 원천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로마서 5:5; 갈라디아서 5:22).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과 다르다. 후자가 막연한 인간의 바람을 말한다면 전자는 확실한 약속에 근거한 바람이며, 후자가 인간의 자의로 가지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바람이다. 후자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갖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신령한 세계를 보고, 그 완성을 향해 가지는 바람이다. ‘소망’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세 요소다(고전 13:13).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우리 구원의 강력한 행위들 가운데 놓여 있고, ‘소망’은 미래에 있을 우리 구원의 최후 완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에 대한 바람과 기대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재림을 넘어 영원한 천국까지 계속될 삶이다. 그리하여 소망은 그리스도교 사도신경의 중요한 신앙고백 내용이다.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어떤 소망인가?

  신약의 소망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소망
‘소망’이란 어휘는 구약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드물지 않게 나오는데, 대개의 경우 ‘신뢰하다,’ ‘기대하다’는 뜻의 히브리어에 상당하는 의미로, 점차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의 신학적 의미의 용례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망”, “경건한 이스라엘인의 소망”이다(스 10:2; 시 39:7; 62:5; 78:7; 146:5; 렘 14:8; 50:7; 애 3:18 등).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시 33:18), 하나님의 말씀에(시 119:81, 1









예수님의 족보 /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 시대별 정리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소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 기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족보에 기록된 인물들의 이름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한 사람(마태복음 1:3의 ‘람’, 누가복음 3:33의 ‘아니’)만 제외하고는 동일하나, 다윗 다음부터 예수의 부친 요셉 이전까지의 이름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까지 두며 총 77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부터 그 이름이 달라지는 이유는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어가고 있고(마 1:6),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을 통해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3:31). 이렇듯 서로 같은 듯하면서도 결코 같지 않은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

마태복음 족보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을 하향식(자손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요, 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체 세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의도된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렷한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해석하는 열쇠인 마태복음 1:17을 볼 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를 큰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14’라는 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4’는 ‘7’의 두 배수인데, 성경에서 ‘7’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하늘의 상징수인 ‘3’과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땅의 상징수인 ‘4’를 합한 수로, ‘어떠한 뜻이 완성되는 성취의 기간, 가득 채워진 충만, 전체’를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이면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일곱이면 그 자체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셈족 사람들은 ‘7’의 두 배인 ‘14’를 더욱 무게 있는 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시대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42대로 기록한 것은, 각 시기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시대적 경륜이 있었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정하신 때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엡 1:4, 3:11, 딤후 1:9).

이처럼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합 2:3, 막 1:15, 갈 4:2)에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의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3장 족보의 특징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사건(눅 3:21-22)과 마귀의 세 가지 시험(눅 4:1-13)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다룬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구약 전체 약 4천 년간에 걸친 인물 총 77명(하나님, 예수 포함)을 상향식(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상향(上向)식 구조’는 누가복음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취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첫 사람 아담까지 올라간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할 모든 인간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 것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눅 3:23, 38).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첫 사람 아담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仲保者)로서(요 14:6,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전 인류를 끌어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엡 2:15-16, 골 1:21-22).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엡 2: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3:23에서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마 13:55, 눅 4:22, 요 1:45, 6:42) 사실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족보의 위대한 구속사적 가치는,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라는 사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을 따라 모든 시대를 섭리하사,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이 땅에 보내셨음과(갈 4:4), 죄악된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롬 3:22, 24, 행 2:21, 10:43, 16:31)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눅 3:22, 4:3, 9, 롬 1:2-4, 눅 1:35, 2:49)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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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42대이나 다윗이 두 번 겹쳐서 나오므로 실제 기록된 인물은 41명임.
2) 마태복음 족보는 요셉 가문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가문의 족보로 알려져 있음.
     J. A. 벵겔, 「마태복음 상」 신약 주석 시리즈, 고영민 역(도서출판 로고스, 1990), 54-55.
     Norval Geldenhuys, 「누가복음 상」, NIC 성경주석 시리즈(생명의 말씀사, 1983), 167-168.
3) 전경연, 「마태의 신학」,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2003),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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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족보와 수 열 네대(14)


“히브리인과 헬라인들은 로마인보다 더 진보해서 알파벳의 각 철자마다 그에 해당하는 숫자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알파벳을 이중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철자들은 낱말을 구성하기 위한 철자이면서 또한 수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듯이 문자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의 첫 번째 문자인 알파(Α α)는 산수에서는 항상 1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런고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어느 낱말이든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데 알파벳의 각 문자가 대표하는 숫자를 각 문자에 대입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이 문자들의 값을 더해주는 것이 그 단어의 게마트리아나 숫적 값을 결정해준다.” (Ed F. Vallowe의 책에서)

이처럼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하여 단어나 문장을 암호화 하는 방식을 소위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이라고 합니다.
이 수비학은 기원 전 6세기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가 주장한 만물의 근원은 수(數)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현대에 이르러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미래의 운명이나 행동 패턴를 예견까지 하기에 이르러 수점술(數占術)이라고도 불리지만 이에 대한 수학적,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비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지만, 특히 유대인들이 그들의 문자인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사람이나 사물, 사건 등과 관련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게마트리아(Gematria) 수비학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마태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14대씩 끊어서 세 등분하는 자기만의 법칙을 만들어 기록한 족보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마 1:17)

이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과 관련된 숫자가 바로 14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철자인 달레트(ד=4) + 바브(ו=6) + 달레트(ד=4)에 각각 부여된 숫자를 합치면 14가 되는데,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의 게마트리아 수비학을 사용해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직간접적인 숫자에 대한 현실적 해석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헬라어 이름 ‘예수’를 게마트리아로 계산하면 888이 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숫자 8이 들어가는 년도마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는 해석은 본질을 한참 빗나갔습니다. 게다가 역시 숫자 8이 들어가는 2018년은 남북통일의 해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전인수 그 자체입니다. 마태가 그의 족보를 포함하여 마태복음을 통해서 진짜 의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문자적인 다윗 왕국보다 더 큰 왕국, 즉 하늘 왕국의 왕(마2:2)과 주(마22:41-46)이심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특정 국가를 초월하여 이 세상 속에 감추어진 채 확장되고 있는 하늘 왕국의 왕과 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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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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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1:16
야곱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 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 라고 한다.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족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유대 사회의 수혼제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야곱과 헬리는 형제이었는데 형 야곱이 자식이 없이 죽은 후에 동생 헬리가 형수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족보에 올리면 실제적인 아버지는 헬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족보상의 아버지는 야곱이 된다.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

오늘 우리는 아주 따분하고도 까다로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족보인데 이 족보는 아무리 봐도 별로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족보처럼 사람의 이름만 계속 나열되고 있기에 따분할 뿐이고 이처럼 사람의 이름만 나열되고 있는 그 속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생각되니 흥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따분할 것 같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까다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 또한 우리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부분 하나도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마태가 말하는 족보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족보를 언급하며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한 마태의 족보는 보편적인 족보 형식인 하향식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양식의 족보는 누구의 후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이며 다윗 자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연결되고 다윗은 솔로몬과 유대의 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전혀 다릅니다. 일단 마태는 생략하고 있는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를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혈통을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도 마태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부터 그 노선이 마태복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마태는 다윗 이후 솔로몬으로 이어지지만 누가는 ‘나단 위는 다윗’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아니라 단지 다윗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 나단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5:14절을 보면 나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한 아들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가 서로 다른 또 하나는 마태의 족보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 1:16)라는 내용을 보면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 23절에서는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함으로써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헬리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요셉의 아버지가 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따분하기도 하지만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예수님 끝은 하나님

그러면 누가의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백성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족보를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신 아들이심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본문의 족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연결된 이 족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에서만 77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거론된 이름들은 거의 생소합니다. 그 이름이 본문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의 계통을 제쳐 버리고 이름만 있을 뿐 그 행적이 언급되지 않은 나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랑할 만한 화려한 족보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한 가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화려한 영웅의 세계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웅적 인물이 많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예수님의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생명의 가문은 그처럼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영웅적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고 천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을 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로 연결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벌레 보다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가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는 죽은 자인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라는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

누가의 족보에는 왕도 있고 이름 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이 족보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업적을 높이고 자랑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족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하면 누가가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헬리를 요셉의 장인으로 말하기도 하고, 마태가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야곱의 동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헬리를 요셉의 장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족보에서도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헬리를 야곱의 동생으로 말한 사람은 형 야곱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유대 혼인법에 의해 동생 헬리가 형수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는데 율법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으로 말한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가는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것은 족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헬리라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족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 끝이 하나님으로 끝나는 위대한 족보에 도무지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으로 죽음에 갇힌 나를 예수님이 붙들어 구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오직 나처럼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신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이유

로마서 5:17-18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한 사람의 범죄자인 그도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이 사망의 종으로 있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족보에서 예수님을 삭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끝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시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면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살았다고 해도 역시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갇힌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의와 용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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