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 - 산 영



구약(舊約)의 오역(誤譯)/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인가 산 목숨인가?

창세기 2:7에서 번역한 ‘생령’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있는 영’이라는 뜻이 되는 데 그렇다면 영(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낳게 한다.

생령(生靈)은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를 번역한 말인데 네페쉬 하야라는 말은 ‘살아 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숨’이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산 목숨’ 또는 ‘산 존재’라고 번역해야만 했을 것이다.(참고로 히브리어는 한문처럼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고 읽는다는 것을 알아두자).

한편 고린도전서 15:45에서 ‘산 영(靈)’으로 번역한 프쉬케 조산(ψυχ? ζ?σαν) 역시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산 목숨’의 오역인 것이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

현대인 /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 라고 쓰여 있으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이 되셨습니다.
공동번역 /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생명을 주는 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번역과 달리 KJV 등의 영어 성경은 창 2:7의 네페쉬 하야와 고전 15:45의 프쉬케 조산을 Living Spirit(산 영)이 아닌 Living Soul(산 목숨)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네페쉬(???)와 프쉬케(ψυx?)를 영어로는 항상 Soul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목숨’ 또는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며 ‘영’이라는 뜻을 가진 Spirit이나 Ghost와는 전혀 다르다.

네페쉬(프쉬케)는 ‘목숨’과 ‘생명’이라는 뜻과 함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물’로 번역될 때도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 특히 ‘사람 자신’을 표현할 때도 많이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개역 성경은 이러한 구분 없이 네페쉬(프쉬케)를 ‘목숨’과 ‘생명’이라는 원 뜻에 맞게 번역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영(靈), 혼(魂) 또는 영혼(靈魂) 등으로 혼용하여 번역하기도 함으로써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역 성경이 이처럼 네페쉬(프쉬케)를 일관된 뜻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양하게 번역한 것은 단어의 개념의 발전과는 무관하며, 단지 용어의 혼용의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게다가 개역 성경에 ‘혼’이나 ‘영혼’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중국어 성경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동양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백(魂魄)이 몸을 떠나서 귀신이 된다고 하는 속설이 지배적이며 이 혼백을 줄여서 혼(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개역 성경은 도처에서 ‘영’과 ‘혼’ 그리고 ‘영혼’이라는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없게 하고 있다.

영혼의 정확한 뜻은?

개역 성경은 특히 영혼(靈魂)이라는 말에 대하여 심하게 혼용을 하고 있다.
즉 영혼이라는 말이 어느 경우에는 ‘목숨(Life)’이나 ‘사람(Soul)’의 뜻으로 사용되다가 또 어느 경우에는 ‘영(Spirit)’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등 매우 혼란스럽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편에서 이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시 22:20에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라고 할 때의 ‘영혼’은 네페쉬를 번역한 것으로 사실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되었을 것이다.

네페쉬(Soul)는 ‘목숨’, ‘생명’ 또는 ‘사람 자신(自己)’이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번역된 곳이 드물고 시편에서처럼 대부분 ‘영혼’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혼’을 ‘목숨’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편 시 143:7에서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 하나이다” 라고 할 때의 ‘영혼’은 루아흐를 번역한 말이므로 원 뜻은 ‘내 영이 소멸되려 합니다(육체를 떠나려 합니다 곧, 죽을까 합니다)’가 된다. 사실 영혼이란 표현은 위와 같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동안의 언어 관습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 ‘목숨’이나 ‘사람’의 뜻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영(靈)’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함으로써 계속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혼란스러운 용어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목숨의 뜻을 가지는 성경의 번역 용례가 매우 많은 데다가 찬송가에도 그렇게 사용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혼(靈魂)에서 혼(魂)이라 하는 말의 뉘앙스(Nuance)가 타락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는데 영(靈)은 ‘사람의 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도 적용되는 말이므로 이를 영혼으로 대치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목숨’과 ‘영’이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존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존재에 관한 논의는 ‘영’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분설(二分說)과 ‘영’과 ‘혼’과 ‘몸’의 세 종류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삼분설(三分說)로 대립되어 있는데 정통적으로는 이분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지방 교회주의자인 ‘위트니스 리’와 같은 신학자들과 일부 천 년 왕국론자들이 주장하는 삼분설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용어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이는 살전 5:23에 나타나는 혼(프쉬케)이라고 표현한 어휘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발생된 것이었다.

원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결여될 때 새로운 추론에 의한 학설은 계속 생성되어지게 마련이며,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느 특정한 말씀에 집착할 때 이상한 교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구조

인간의 구조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창 2:7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사람의 구조는 흙으로 이루어진 몸과 더불어 생기(生氣)라는 두 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임인데 직역하면 ‘생명들의 호흡’이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의 몸 안에 영(靈)을 넣으심으로 산 존재를 만드셨다 뜻이다.
즉 다른 모든 동물은 생기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만 창조되었지만 사람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며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μα)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영이라는 존재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사람에게 부어주신 것으로서 피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언젠가 죽어 없어지더라도(전 3:20) 비물질적인 존재인 영은 몸과 함께 소멸되지 않고 몸에서 분리되어 위로 간다(전 3:2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전 3:21에서 인생의 ‘혼’으로 번역한 루아흐는 물론 ‘영’의 오역이다.

다시 창 2:7의 구절을 살펴보면 사람의 몸에 영이 합쳐져서 산 목숨이 되었다고 하였다.
즉 사람은 몸이 영과 결합되었을 때 살아있는 존재이며, 몸에서 영이 분리된다면 죽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설령 죽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 죽은 자의 영이 다시 돌아와서 그의 몸과 재결합할 때는 죽은 자가 부활하여 다시 산 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예(겔 36:5, 눅 8:55)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몸은 히브리어로 게쉠이라고 하고 헬라어로 소마(σ?μα)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몸(Body)은 다시 육체(Flesh)와 구분되어지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몸과 육신 또는 육체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흔하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는 두 용어를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한다.

육체는 히브리어로 바싸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사르크스(καρδ?α)라고 하여서 몸과 반드시 구별을 한다. 몸은 육체에 무엇인가가 더하여진 상태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즉 육체는 글자 그대로 고깃덩어리의 상태로서 그곳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과 정욕의 산실일 뿐이며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은 육체의 어딘가에 사람의 영을 담아둘 장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곳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이며 헬라어로는 카르디아(καρδ?α)라고 하는데 육체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질적인 공간이 아닌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이므로 특정한 위치를 구별해 낼 수는 없으나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는 장소이며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도 함께 계시는 곳(고후 1:22, 갈 4:6)도 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람은 몸(게쉠, 소마)과 영(루아흐, 프뉴마)으로 이루어지는데 몸과 영이 결합됨으로써 목숨이 있는 상태 즉 생명의 존재(네페쉬, 프쉬케)가 되며 몸에서 영이 떠나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몸은 다시 육체(바싸르, 사르크스)와 마음(레브, 카르디아)으로 구분되며 사람의 영이 거하는 곳은 마음이다. 이를 간단한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히 브 리 어
헬  라  어  
목숨(생명)
네페쉬(???)
프쉬케(ψυχ?)
루아흐(???)
프뉴마(πνε?μα)
게쉠(???)
소마(σ?μα)
육체
바싸르(???)
싸르크스(σ?ρξ)
마음
레브(??)
카르디아(καρδ?α)
  * 몸 + 영 =  생명, 목숨(살아있는 사람으로 존재)
  * 몸 - 영 =  죽음(죽은 육체만 남아서 소멸됨)
  * 몸 = 육체 + 마음(영이 거하는 비물질적 공간)

삼분설의 오류
살전 5:23에서 ‘혼’으로 번역한 프쉬케(ψυχ?)는 ‘목숨’의 오역이다.
즉 삼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과 몸 이외에 혼이라고 하는 별도로 구별되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몸이 결합하여 이룬 상태를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와 같이 표현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종말관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특히 4장과 5장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교훈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다 읽어보면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님이 갑작스럽게 오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이 땅에 이미 임하여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신실한 삶보다는 다가올 종말을 고대하며 들떠있는 자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살후 2:2).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다리는 종말과 주의 재림은 이 세상 끝에 있을 최후 정점의 종말을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바울의 교훈은 최후 정점의 종말이 아닌 구약의 모든 예언서와 신약(마 24:2-3)에서도 예언되어졌던 ‘주의 날’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요 ‘야곱의 환란의 날’인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의 날인데, 당시로 볼 때 그 날까지 대부분 생존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십 수 년 이내에 실제적으로 겪게될 상황이므로 매우 긴장되고 실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종말을 맞게될 자들로서 ‘우리 살아 남은 자’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살전 5:23에서는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인 ‘너희들’을 향하여 주께서 예루살렘 심판의 심판주로서 오실 때에 ‘영과 몸’ 곧 ‘목숨(프쉬케)’을 보존하고 있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주님이 문자적으로 지상에 강림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는 심판주로서의 엄위를 가지고 영적으로 오시는 상태(마 26:64, 살후 1:7-8)를 말하며, 그 날이야말로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심판 받는 경악의 날(사 13:9-16)이 되겠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너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는 환희의 날(마 24:31, 욜 3:16-17)이 될 것이므로 그 때까지 너희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울의 소원을 말한 것이다.

종말에 대해서는 예언과 묵시기록의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Symbol)과 메타포(Metaphor)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오역(誤譯)인 눅 21:35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강론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심판(크리시스, κρ?σι?)과 재림(파루시아, παρουσ?α)에 다중적(多重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성경은 불변의 진리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서신서들은 특별히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하여 당시의 정황에 부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죽음의 원인

이제까지 사람의 구조를 살펴본 바로는 사람의 몸에 영이 결합되어 사람이 사는 것이며 사람의 몸이 더 이상 영을 담아둘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영은 그 몸을 떠나게 되고 남은 육체는 소멸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은 원래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능을 더 이상 못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생겼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반드시 죽을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라는 말씀을 보면 사망(따나토스,θ?νατο?)과 영생(조에 아이오니아,ζω? α?ων?α)을 대비시키고 있으며 또한 사망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하마르티아,?μαρτ?α)의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하마르티아라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가 과녁이라는 뜻의 마르티아(μαρτ?α)에 붙어서 된 말로 원 뜻은 ‘과녁을 맞추지 못함’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 뜻에서 빗나간 것이 죄인 셈이다.

한편 성경은 롬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인(하마르톨로스,?μαρτω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롬 5:17-18의 말씀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라고 함으로써 인간들이 제각기 저지른 개별적인 죄가 아니라 최초 인간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그의 후손된 모든 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의 결과를 낳은 그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롬 5:19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라는 말씀에는 불순종(아페이떼이아,?πε?θεια)이 바로 죄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영생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창 2:16-17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선악과(정확하게는 知善惡果)만 먹지 않는다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혹자는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이 죽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영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영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영적으로 죽는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영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 3:17-19에서도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영생의 기회 상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이라는 물질로 몸을 만드시고 그 안에 영원히 소멸치 않을 존재인 영을 넣어주셨다. 인간이 그 상태로 영생하기에는 불완전하였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도 아니었다. 첫 인간 아담에게는 영생과 죽음 중에서 택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대로 죽을 몸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며 영은 몸을 떠나 음부(쉐올,또는 하데스,?δη?)에서 심판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불순종의 대가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죽을 몸을 물려줌으로써 전 인류에게 사망의 선물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고 다시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은 창 3:22의 말씀처럼 타락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음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선악과 대신에 생명과를 먹었다면 고전 15:44에서와 같은 죽지 않는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코스,σ?μα  πνευματικ??)이 되어 영과 결합함으로써 영생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아니하고 생명과를 먹은 후 영생의 존재가 되어서 창 1:28에서 최초에 주신 명령에 따라 에덴 동산에서 많은 자손을 낳고 번창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일정한 수의 경건한 자손(말 2:15)을 얻으신 후에 그들로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첫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만한 수의 인간(롬 11:25)을 얻으시기 위해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뤼트로시스,λ?τρωσι?, Atonement)의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5:20에서 말씀하듯 영생 그 자체이신 분(요 11:25, 요 1:4, 롬 6:23)이므로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주님은 일시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가지셔야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셨지만 인간의 타락을 비롯한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작정하셨다는 것은 쉬운 말로 각본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로 각본에 따라 타락한 것이며 현존하는 모든 악도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죄를 짓는 것일 따름이므로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근거가 없어지고 말게될 것이다. 또한 각본에 따라 불순종한 인간들에 대하여 그 대가로 불못 형벌에 처하신다고 하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알고 계시다’는 것과 ‘작정하셨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불변하는 영원한 현재에 오직 동시적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상의 순서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형질과 각 인생마다의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다 알고 계시므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신 그대로 모든 것이 같은 결과를 이루도록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작정’이나 ‘예정’이란 용어는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특정한 언명일 뿐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시간의 흐름 안에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섭리하시는 분으로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생각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충분히 가능한 추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지식은 인간의 타락을 비롯하여 믿고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일과 불신의 결과로 멸망 받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함으로써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운명론적 신학적 사고의 오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예정에 관해서는 신약편 요 17:2의 오역을 다루면서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신망애(信望愛) / 믿음 소망 사랑(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信望愛)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구원을 얻는 믿음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해당합니다.

소망은 현재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기대이며 바램이고 또한 확신입니다.
따라서 소망은 미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랑은 현재라는 시간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거는 믿음이며 또한 미래를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내 몫을 모두 주십시오!
율법대로 해결하면 간단합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당장 내쫓든지 아니면 회당으로 끌고가서 이 녀석이 무리하게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자기 유산을 요구합니ㅏ다.
율법은 이런 자식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돌로 쳐 죽여라!
집에서 내 쫓아라!

그럼에두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드르이 요구에 따라 그의 몫을 모두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들이 비참한 신분이 됩니다.
심지어 끼니를 떼울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꾸짖으며 너 그러면 네 장래가 망가진다.
좀 더 기다려봐라!
이렇게 타일렀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가버린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찾아봅시다.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싫어하며 극구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를 에 이루어야 할 라으사랑ㅏㄷ.
을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ㅏㄷ.하서가공

1. 소망을 갖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믿음(信)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3982에서 유래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답변

히브리서 11:1은 우리에게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크리스천 삶의 요소 중에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사거나, 팔거나, 우리의 동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은 크리스천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사전에 의하면 믿음이란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서, 특히 논리적인 증거 없이 믿는 것, 헌신하는 것, 혹은 신뢰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으로도 정의합니다. 성경은 믿음과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믿음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고,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도 유일 하신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을 열심히 연구하거나 추구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8-9은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이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우리가 그것을 얻었거나, 혹은 그것을 가질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자유 의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긍휼로그 분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분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째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속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을 만드셨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6의 주요 부분에서는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적이고 충실한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의 완벽한 예를 누가복음 7:50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째서 믿음이 그토록 보람 있는 것인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시다가 한 죄 된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그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상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을 믿어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지탱해주는 힘이 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8-9).

믿음의 예: 히브리서 11장은 위대한 믿음의 업적들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주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렸고 (4절), 믿음으로 노아는 폭우가 쏟아질 지 몰랐던 때에 방주를 준비했고 (7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가 알지 못했던 곳으로 갔고, 그 후에 기꺼이 자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쳤고 (8-10, 17절), 믿음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했고 (23-29절), 믿음으로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여 그녀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31절). 더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 (33-34절)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명백하게, 믿음의 존재는 행위로 입증되었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의 초석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입증하지 않고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에 대해 애매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 삶 속에서 높으신 하나님의 지위에 필수적인 숭배가 부족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믿음은 가끔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분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또 우리의 믿음을 날카롭고 강하게 단련시시기 위해 시련과 힘겨운 시간들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2-4).




소망(所望)(望)

ἐλπ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1680

1.

기대

2.

신뢰

3.

행16:19

발음 [ ĕlpis ]
어원
ἔλπω에서 유래


크리스천의 소망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을 소원하는 것, 즉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소망은 “확신에 찬 기대”를 뜻합니다. 소망이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말합니다(로마서 8:24-25; 히브리서 11:1,7). 소망은 의인의 삶의 기초적인 요소입니다(잠언 23:17-18). 소망 없는 인생은 그 의미를 잃으며(예레미야 애가 3:18; 욥기 7:6) 사망 안에는 소망이 없습니다(이사야 38:18; 욥기17:15).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소망을 갖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시편 28:7). 또한 망하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이사야 49:23).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망이 있는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으며(예레미야 29:11)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시편 46:2-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2:21; 베드로전서 1:3).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약속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세상에 이루어집니다(로마서 8:24-25).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미래의 소망이며(사도행전 23:6),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며(사도행전 26:6-7), 모든 육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자(로마서 8:23-25), 영원한 영광(골로새서 1:27), 성도들의 영생과 상속(디도서 3:5-7), 그리스도의 재림(디도서 2:11-14),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요한일서 3:2-3), 하나님의 구원(디모데전서 4:10) 또는 단순히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십니다.

축복된 미래에 대한 확신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로마서 8:23-25), 우리 안의 그리스도(골로새서 1:27),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고린도전서 15:14-22)을 통해 보장됩니다. 소망은 고난을 견디면서 만들어지며(로마서 5:2-5) 우리가 인내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히브리서 6:11).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 속에 높여지는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며(히브리서 6:18-19), 우리는 소망 안에서 자랑할 수 있고(히브리서 3:6), 믿음 안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2).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2:12; 데살로니가전서 4:13).

믿음과 사랑과 함께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항상 있는 미덕이며(고린도전서 13:13) 사랑은 소망에서 말미암습니다(골로새서 1:4-5). 소망으로 인해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즐거움과 평안이 생깁니다(로마서 12:12; 15:13). 바울은 사도로서의 소명이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디도서 1:1-2). 재림에 대한 소망은 믿는 자가 자신의 삶에서 정결케 되도록 하는 기반이 됩니다(디도서 2:11-14; 요한일서 3:3).




사랑(愛)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25에서 유래

아가페적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헬라어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랑”이라고 번역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다른 사랑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가페적 사랑의 핵심은 선의, 박애,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향한 의지적인 즐거움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페는 로맨틱하고 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헬라어로 “필리아”라 하는 진한 우정이나 형제애를 말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실함, 헌신 및 의지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고귀한 도덕적 성격과 강한 특성으로 인해 다른 사랑과 구별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 밖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그 자체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아가페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합니다(누가복음 10:27). 즉, 주인에 대한 종의 신실한 섬김(마태복음 6:24)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애착(요한복음 3:19)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랑의 종류는 우리에게 자주 들리는 것처럼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은 본성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항상 행위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우리는 그런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없어도 베푸시는 것이며, 자비로우며, 끝없이 그 분께서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3:1).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결국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겁니다(요한복음 3:16-18).

우리 역시 상대가 믿는 자든(요한복음 13:34), 원수이든 간에(마태복음 5:44) 서로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느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남의 필요를 위해 의지적으로 기쁘게 결심하여 하는 행동임을 그리스도께서 본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듯 우리가 사랑하려 한다면, 그 사랑은 오직 그 원천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로마서 5:5; 갈라디아서 5:22).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과 다르다. 후자가 막연한 인간의 바람을 말한다면 전자는 확실한 약속에 근거한 바람이며, 후자가 인간의 자의로 가지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바람이다. 후자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갖는 바람이라면, 전자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신령한 세계를 보고, 그 완성을 향해 가지는 바람이다. ‘소망’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세 요소다(고전 13:13).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우리 구원의 강력한 행위들 가운데 놓여 있고, ‘소망’은 미래에 있을 우리 구원의 최후 완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에 대한 바람과 기대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재림을 넘어 영원한 천국까지 계속될 삶이다. 그리하여 소망은 그리스도교 사도신경의 중요한 신앙고백 내용이다.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어떤 소망인가?

  신약의 소망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소망
‘소망’이란 어휘는 구약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드물지 않게 나오는데, 대개의 경우 ‘신뢰하다,’ ‘기대하다’는 뜻의 히브리어에 상당하는 의미로, 점차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의 신학적 의미의 용례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망”, “경건한 이스라엘인의 소망”이다(스 10:2; 시 39:7; 62:5; 78:7; 146:5; 렘 14:8; 50:7; 애 3:18 등).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시 33:18), 하나님의 말씀에(시 119:81, 1









예수님의 족보 /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 시대별 정리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소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 기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족보에 기록된 인물들의 이름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한 사람(마태복음 1:3의 ‘람’, 누가복음 3:33의 ‘아니’)만 제외하고는 동일하나, 다윗 다음부터 예수의 부친 요셉 이전까지의 이름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까지 두며 총 77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부터 그 이름이 달라지는 이유는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어가고 있고(마 1:6),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다윗 이후 족보의 맥을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을 통해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3:31). 이렇듯 서로 같은 듯하면서도 결코 같지 않은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

마태복음 족보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을 하향식(자손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요, 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체 세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의도된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렷한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해석하는 열쇠인 마태복음 1:17을 볼 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를 큰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14’라는 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4’는 ‘7’의 두 배수인데, 성경에서 ‘7’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하늘의 상징수인 ‘3’과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땅의 상징수인 ‘4’를 합한 수로, ‘어떠한 뜻이 완성되는 성취의 기간, 가득 채워진 충만, 전체’를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이면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일곱이면 그 자체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셈족 사람들은 ‘7’의 두 배인 ‘14’를 더욱 무게 있는 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시대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42대로 기록한 것은, 각 시기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시대적 경륜이 있었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정하신 때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엡 1:4, 3:11, 딤후 1:9).

이처럼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합 2:3, 막 1:15, 갈 4:2)에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의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3장 족보의 특징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사건(눅 3:21-22)과 마귀의 세 가지 시험(눅 4:1-13)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다룬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구약 전체 약 4천 년간에 걸친 인물 총 77명(하나님, 예수 포함)을 상향식(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상향(上向)식 구조’는 누가복음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취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첫 사람 아담까지 올라간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할 모든 인간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 것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눅 3:23, 38).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첫 사람 아담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仲保者)로서(요 14:6,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전 인류를 끌어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엡 2:15-16, 골 1:21-22).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엡 2: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3:23에서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마 13:55, 눅 4:22, 요 1:45, 6:42) 사실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족보의 위대한 구속사적 가치는,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라는 사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을 따라 모든 시대를 섭리하사,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이 땅에 보내셨음과(갈 4:4), 죄악된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롬 3:22, 24, 행 2:21, 10:43, 16:31)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눅 3:22, 4:3, 9, 롬 1:2-4, 눅 1:35, 2:49)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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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42대이나 다윗이 두 번 겹쳐서 나오므로 실제 기록된 인물은 41명임.
2) 마태복음 족보는 요셉 가문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가문의 족보로 알려져 있음.
     J. A. 벵겔, 「마태복음 상」 신약 주석 시리즈, 고영민 역(도서출판 로고스, 1990), 54-55.
     Norval Geldenhuys, 「누가복음 상」, NIC 성경주석 시리즈(생명의 말씀사, 1983), 167-168.
3) 전경연, 「마태의 신학」,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2003),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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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족보와 수 열 네대(14)


“히브리인과 헬라인들은 로마인보다 더 진보해서 알파벳의 각 철자마다 그에 해당하는 숫자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알파벳을 이중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철자들은 낱말을 구성하기 위한 철자이면서 또한 수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듯이 문자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의 첫 번째 문자인 알파(Α α)는 산수에서는 항상 1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런고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어느 낱말이든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데 알파벳의 각 문자가 대표하는 숫자를 각 문자에 대입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이 문자들의 값을 더해주는 것이 그 단어의 게마트리아나 숫적 값을 결정해준다.” (Ed F. Vallowe의 책에서)

이처럼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하여 단어나 문장을 암호화 하는 방식을 소위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이라고 합니다.
이 수비학은 기원 전 6세기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가 주장한 만물의 근원은 수(數)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현대에 이르러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미래의 운명이나 행동 패턴를 예견까지 하기에 이르러 수점술(數占術)이라고도 불리지만 이에 대한 수학적,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비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지만, 특히 유대인들이 그들의 문자인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사람이나 사물, 사건 등과 관련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게마트리아(Gematria) 수비학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마태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14대씩 끊어서 세 등분하는 자기만의 법칙을 만들어 기록한 족보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마 1:17)

이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과 관련된 숫자가 바로 14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철자인 달레트(ד=4) + 바브(ו=6) + 달레트(ד=4)에 각각 부여된 숫자를 합치면 14가 되는데,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시의 게마트리아 수비학을 사용해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직간접적인 숫자에 대한 현실적 해석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헬라어 이름 ‘예수’를 게마트리아로 계산하면 888이 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숫자 8이 들어가는 년도마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는 해석은 본질을 한참 빗나갔습니다. 게다가 역시 숫자 8이 들어가는 2018년은 남북통일의 해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전인수 그 자체입니다. 마태가 그의 족보를 포함하여 마태복음을 통해서 진짜 의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문자적인 다윗 왕국보다 더 큰 왕국, 즉 하늘 왕국의 왕(마2:2)과 주(마22:41-46)이심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특정 국가를 초월하여 이 세상 속에 감추어진 채 확장되고 있는 하늘 왕국의 왕과 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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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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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1:16
야곱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 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 라고 한다.

요셉의 아버지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족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유대 사회의 수혼제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야곱과 헬리는 형제이었는데 형 야곱이 자식이 없이 죽은 후에 동생 헬리가 형수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족보에 올리면 실제적인 아버지는 헬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족보상의 아버지는 야곱이 된다.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

오늘 우리는 아주 따분하고도 까다로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족보인데 이 족보는 아무리 봐도 별로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족보처럼 사람의 이름만 계속 나열되고 있기에 따분할 뿐이고 이처럼 사람의 이름만 나열되고 있는 그 속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생각되니 흥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따분할 것 같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까다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 또한 우리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부분 하나도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마태가 말하는 족보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족보를 언급하며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한 마태의 족보는 보편적인 족보 형식인 하향식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양식의 족보는 누구의 후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이며 다윗 자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연결되고 다윗은 솔로몬과 유대의 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전혀 다릅니다. 일단 마태는 생략하고 있는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를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혈통을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도 마태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부터 그 노선이 마태복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마태는 다윗 이후 솔로몬으로 이어지지만 누가는 ‘나단 위는 다윗’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아니라 단지 다윗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 나단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5:14절을 보면 나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한 아들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가 서로 다른 또 하나는 마태의 족보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 1:16)라는 내용을 보면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 23절에서는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함으로써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헬리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요셉의 아버지가 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따분하기도 하지만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예수님 끝은 하나님

그러면 누가의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백성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족보를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신 아들이심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본문의 족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연결된 이 족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에서만 77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거론된 이름들은 거의 생소합니다. 그 이름이 본문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의 계통을 제쳐 버리고 이름만 있을 뿐 그 행적이 언급되지 않은 나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랑할 만한 화려한 족보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한 가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화려한 영웅의 세계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웅적 인물이 많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예수님의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생명의 가문은 그처럼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영웅적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고 천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을 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로 연결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벌레 보다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가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는 죽은 자인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라는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

누가의 족보에는 왕도 있고 이름 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이 족보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업적을 높이고 자랑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족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하면 누가가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헬리를 요셉의 장인으로 말하기도 하고, 마태가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야곱의 동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헬리를 요셉의 장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족보에서도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헬리를 야곱의 동생으로 말한 사람은 형 야곱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유대 혼인법에 의해 동생 헬리가 형수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는데 율법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으로 말한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가는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것은 족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헬리라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족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 끝이 하나님으로 끝나는 위대한 족보에 도무지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으로 죽음에 갇힌 나를 예수님이 붙들어 구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오직 나처럼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신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이유

로마서 5:17-18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한 사람의 범죄자인 그도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이 사망의 종으로 있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족보에서 예수님을 삭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끝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시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면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살았다고 해도 역시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갇힌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의와 용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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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리며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 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요한복음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도행전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요한계시록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 / 중간시대, 헤롯 대왕과 세 아들의 분봉 왕




왕, 분봉왕, 총독이란 무엇인가?


말라기 기록 연대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서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약 4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비록 이 4백년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과 같은 세계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며,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알아두면 매우 도움이 되는 시기입니다.

누가복음 3:1-2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 23:11-12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본문에 나온 헤롯은 예수님이 갓 태어나셨을 때 2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인 헤롯대왕이 아닌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헤롯 대왕에 대해서는 왕이라고 하고, 헤롯 안티파스는 분봉왕, 빌라도는 총독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물론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보면 다시 유다민족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지만 말라기서가 끝날 때까지 유다에는 더 이상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마태복음을 보면 갑자기 유대인도 아닌 헤롯이 유다의 왕으로 소개가 됩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두매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지도

이두매는 구약시대로 말하면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돔 심판이후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큰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모압이고,
둘째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벤암미입니다.
모압은 모압의 조상이고, 벤암미는 암몬의 조상입니다.

이두매인이었던 헤롯 대왕 이후에는 그 아들들이 분봉왕이라고 불리게 되고 로마의 총독이라는 관리가 유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합니다. 헤롯 안티파스와 빌라도 즉, 분봉왕과 총독은 본래 서로 원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다가 바로 신약을 보면 뭔가 큰 연결고리가 빠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400년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면서 왕과 분봉왕, 총독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36년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그 여파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어서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500년 이상을 타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대략 그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구분

1.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시대가 시작됩니다.
이때는 왕은 없었고 각 지파에서 뛰어난 리더들이 등장하여 돌아가면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12지파 연합공동체의 시기였습니다.
이 기간이 사도행전에 따르면 450년입니다.(사도행전 13:19)

2.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는데 사울-다윗-솔로몬때까지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거의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솔로몬 사망한 B.C.931년 경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이 됩니다.

분열왕국 지도

지도에서 보라색이 유다이고 초록색이 이스라엘인데 이때부터 유다는 남유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분열 후 약 2백년 후인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하면서 잃어버린 10지파 시대가 시작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포로들을 유배시키는데 본국에서 수백, 수천킬로가 떨어져 있는 고산, 할라, 메대까지 끌고 가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포로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데 당시의 이런 상황이 앗시리아 부조에 그려져 있습니다.

앗시리아 부조) :    “부조는 평면상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조형기법”

이 부조를 보면 앗시리아 인들이 포로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우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오른쪽 부조에서는 포로로 끌려가는 유대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 이주민들이 혼인을 하게되면서 10지파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마리아 지도

신약성경에서는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보면 유대인들이 갈릴리와 유다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를 밟지 않으려고 요단강을 건너 돌아갈 정도로 사마리아인들을 매우 격멸했는데 여기에는 이런 역사적인 유래가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바벨론이 앗시리아를 정복하고 B.C.586년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키면서 유다역시 망하게 되는데 바벨론은 이때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6세기 열강들

앗시리아, 바벨론를 이어 새로운 고대근동의 패자인 페르시아가 등장하게 되는데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B.C. 539년 바벨론을 점령합니다.

  고레스 진흙 원통문서

당시의 상황이 고레스의 <진흙원통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원통에는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사건과 유다를 비롯한 포로들을 본국으로 해방하겠다는 그 유명한 고레스 칙령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 대영박물에서 소장중입니다.

  포로귀환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 2세가 유다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면서 유다의 백성들은 3차에 걸쳐서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의 이야기가 에스라, 느헤미야이고 돌아온 유다의 백성이 다시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한 것이 B.C. 515년 입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유다는 한 동안 자치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B.C. 430년 경의 인물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에 없는 역사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의 익수스 전투

6. B.C. 336년 저 유럽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라는, 당시 20세의 청년이 왕이 되면서 세계의 판도가 다시 한번 바뀌게 되는데 알렉산더는 이집트, 유다를 정복하고 331년 페르시아까지 패퇴시키고 바벨론과 수사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통치지역

그리고 323년 겨우 33살의 나이에 이 엄청난 대제국을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

알렉산더 수하의 네 명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누스, 데메트리오스, 셀류코스가 알렉산더의 제국을 분활해서 통치하게 되는데 이때 유다는 다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100년간 지배를 당하고, 그 후에는 또 다시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남유다의 독립

B.C.167년부터 마타티아스 가문의 주도로 유다 독립전쟁이 시작되는데 이것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카비 혁명을 통해 결국 B.C.142년에 드디어 유다가 독립을 하게 됩니다.

  446년의 식민지 시대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한 후 446년 만에 독립을 한 것입니다.
유다는 446년 동안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프톨레마이오스,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은 것입니다.
이때 셀류코스 왕조에서 독립한 유다 왕조를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릅니다.

  폼페이우스의 유다 점령

하스모니안 왕조는 그 후 두 왕자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 간의 왕위다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보이다가 히르카누스 2세가 B.C.63년 새로운 신흥강국이었던 로마를 끌여들이면서 결국 다시 식민지 시대가 시작됩니다.

구약과 신약 중간 400년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프톨로마이오스, 셀류코스의 후손들이 유다를 식민지로 다스리다가 유다가 독립을 해서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형제간의 다툼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히르카누스 2세가 로마를 끌어들이면서 B.C.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지만 그래도 유다의 공식적인 통치자는 하스모니안 왕조입니다.

일제식민시대때의 조선왕조, 대한제국처럼 말입니다.

  헤롯대왕의 통치

성경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다의 왕이 누구였습니까?
헤롯대왕이었습니다.
헤롯이 누구기에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것일까요?
헤롯 대왕은 하스모니안 왕가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씀드렸다 시피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두매인, 즉 구약의 에돔인입니다.
에돔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에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헤롯이 어떻게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당시 유다의 왕이 되었을까요?

하스모니안 왕가 내에 있었던 왕의 다툼 과정에서 로마가 자신들의 대리자로 이두매인이었던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때가 B.C.37년 입니다.
이때 헤롯은 유다를 통치하기 위한 정당성을 위하여 자신의 아내인 이두매인 도리스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안 왕가의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을 합니다.

헤롯 자신은 정통성이 없지만 하스모니안 왕가와의 결혼을 통해서 유다 통치의 정당성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대왕 당시까지만 해도 헤롯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갈릴리, 베레아를 포함한 과거의 이스라엘을 모두 통치했습니다.

 
  헤롯왕국의 분립

헤롯 대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그의 세 아들 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에 의해서 3등분이 됩니다.
안디바는 보라색 부분인 갈릴리와 베레아,
빌립은 황토색 부분인 갈릴리 바다 북동쪽,
아켈라오는 빨강색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렸던 헤롯대왕은 그냥 ‘왕’이지만 그의 아들들은 한 지역만을 다스리는 ‘분봉왕’이라고 부릅니다.
분봉왕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테트랄케스인데 이 단어는 한 나라의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가리키는 통치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헤롯대왕 때까지는 없던 분봉왕이 갑자기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가 유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롯의 세 아들 중에 아켈라오라는 인물이 몹시 억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다스렸고 성경에도 요셉과 마리아가 아켈라오를 피해 갈릴리 지방으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생활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2-23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결국 아켈라오의 폭정에 유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자 로마는 아켈라오를 추방시키고, 로마가 직접 로마의 통치자를 파견해서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하게 됩니다.

역대 총독

로마가 이처럼 직접 파견한 사람들을 ‘총독’이라고 부르는데 로마의 첫 총독이 코포니우스이고 우리가 잘 아는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가 유다에 파견한 5번째 총독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재판했던 두 인물이 헤롯 안티파스 왕과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당연합니다.
헤롯은 나름대로 헤롯대왕을 뒤이어 유대를 통치하는 그나마 정통성이 있는 왕이었고,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을 어떻게 하면 헤롯 왕조를 무너뜨리고 로마가 팔레스타인 전체를 다스릴까만 생각했기에 그 둘은 서로 원수일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서로 협조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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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헤롯(영어: Herod, 라틴어: Herodes)은 에돔(이두매) 출신으로 로마제국 시대에 황제를 대신해 가나안(팔레스타인)과 그 인접 지역을 통치했던 헤롯 왕조(B.C. 37-A.D. 70)의 사람들을 말한다. 헤롯 가문은 기원전 1세기경 헤롯 안티파테르 2세가 유대의 행정장관으로서 유대 지경을 다스리게 되면서 창시됐다. 왕조의 본격적인 시작은 헤롯 대왕이 유대의 유일무이한 통치자가 된 기원전 37년으로 본다. 성경에는 헤롯 대왕, 헤롯 안디바,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헤롯'으로 언급됐다.

헤롯 왕조의 창시

헤롯 안티파테르 2세는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1]의 귀족 딸과 결혼하여 큰 영향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유대 지역을 침공했을 때, 그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안티파테르 2세는 로마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안티파테르 2세를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하고 유대 지경을 다스리게 하면서(B.C. 47)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그 신분은 헤롯 대왕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됐다. 이방 지역 에돔 출신의 안티파테르 2세는 유대 지역을 다스리며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다.

헤롯 대왕의 가계도

성경 속 헤롯

이름 재위 언급된 성경 구절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 37-B.C. 4 마 2장, 눅 1:5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B.C. 4-A.D. 6 마 2:22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 B.C. 4-A.D. 34 눅 3:1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 4-A.D. 39 마 14:1–12, 막 6:14–29, 눅 3:19, 9:7-9, 13:31-32, 23:7-15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Ⅰ) A.D. 41-44 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Ⅱ) A.D. 53-70 행 25:13-27, 26장

헤롯 대왕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또는 Herod Ⅰ, 헤로데 1세)은 안티파테르 2세의 다섯 자녀 중 차남이다. 갈릴리 총독으로 있다가 기원전 40년에 로마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유대는 내전(內戰) 중이었기에 3년 뒤 전쟁이 마치고서야(36세) 실질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B.C. 37).[2]
헤롯 대왕은 사마리아(세바스테), 여리고 등의 옛 도시를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헤롯 성전) 사업을 진행하며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했다.[3] 이방인으로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했다. 그러나 그의 잔혹성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지만, 가정 내부에서 일어난 음모와 술수에 넘어가 아내와 두 아들을 처형시켰다. 거기에 마리암의 남동생과 조부, 모친까지 살해했다.[4] 헤롯 대왕의 잔혹성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유아를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에서도 드러난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마태복음 2:1-16

헤롯 대왕은 총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켈라오, 안디바, 빌립 2세, 세 아들을 분봉왕으로 임명해 유대 왕국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헤롯 안디바

존 로저스 허버트(John Rogers Herbert), <헤롯을 책망하는 침례 요한>, 1848. 이복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 안디바를 침례 요한이 책망하는 장면이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롯 1세의 차남으로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5]이었다. 성경에서 '분봉왕 헤롯', '헤롯왕'으로 언급됐다. 예수님은 교활하고 술수에 능한 그를 '여우'라고 부르기도 했다.[6]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갈릴리 해안에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다. 조카이자 이복 형제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로 침례 요한의 책망을 받자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7] 이후 헤롯 안디바의 생일 축하연에서 헤로디아가 전 남편의 딸 살로메를 이용하여 침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는데, 헤롯 안디바는 잠깐 근심했으나 결국 살로메의 요청에 따라 침례 요한을 참수시켰다.[8] 헤롯 안디바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해 끌려오신 예수님을 심문하기도 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고향이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임을 알고 그에게 보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자 희롱하고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냈다.[9] 통치 말엽에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득세를 시기한 헤로디아의 요청으로 그를 탄핵하려다가 실패하여 갈리아로 추방됐다.[10]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Ⅰ,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자 헤롯 안디바의 조카다. 어린 시절 로마 황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자랐다. 헤롯 안디바가 해임된 지 2년 후 갈릴리의 분봉왕이 되었다. 후에는 로마의 신임과 총애를 얻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11] 그날 밤 하나님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구출하셨고, 이를 알게 된 아그립바 1세는 화가 나서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였다.[12] 아그립바 1세는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추앙했을 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했다.[13]

그 외

  • 헤롯 아켈라오

아켈라오(Herod Archelaus, 헤로데 아르켈라우스)는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이 된 자이다. 헤롯 대왕의 정통 후계자였으나, 수많은 학살과 학정을 일으켜 로마 당국에 의해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그가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난폭한 그를 피해 갈릴리 나사렛으로 이주했다.[14]

  • 헤롯 빌립 2세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 헤로데 필리푸스)는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헤롯 대왕 사후 베다니, 이두래,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15] 아구스도가 헤롯 대왕에게 하사했던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고 황제를 기린다는 의미로 '가이사랴'로 명명했다. 이곳은 동명의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불리게 됐다. 빌립은 헤롯의 아들 중 가장 존경을 받았고, 37년간 영토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후사 없이 죽어 조카 아그립바 1세가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

  • 헤롯 아그립바 2세

바실리 수리코프, <바울과 아그립바왕>, 1875.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Ⅱ, 헤로데 아그리파 2세)는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성경에는 '아그립바'로 기록되어 있다. 44년 아그립바 1세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그립바 2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기에 로마 황제는 그에게 왕국을 넘겨주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레바논 산지의 작은 공국을 이어 받았고,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고, 100년경에 사망했다. 신약성경은 아그립바 2세가 로마의 행정관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16] 바울은 거기서 왕을 설득해 전도하려고 했다.[17]

헤롯당

헤롯당은 헤롯 대왕이 로마 정부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아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할 때부터 그의 왕조가 몰락하기까지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모인 친로마 계열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유대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를 부흥시키려 했던 헤롯 안디바의 정책을 지지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정치적 메시아로 여겨 바리새파 사람들과 합심하여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18][19]

같이 보기

각주

  1. "나바테아",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헬레니즘 시대부터 로마 시대에 걸쳐 번영한 아랍계의 왕국. 수도는 페트라이며 사해의 동남 지역에 있었다."
  2. 최창모, "헤롯은 유다의 왕이 되고" 《이스라엘사》, 미래엔, 2007
  3. 가스펠서브, "헤롯"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말씀사, 2006, "특히 그는 각종 건축 사업에 진력했다. 요새지 건설, 저수지와 수로 확충, 경기장, 궁전, 극장 건설 그리고 사마리아와 여리고 등의 도시 건설에 힘을 쏟았다. ...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라는 대 공사(B.C. 20년경에 시작하여 그의 사후 A.D. 64년에 완공됨)를 펼치기도 했다."
  4. "헤로데", 《브리태니커백과사전》제25권,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4, 85-86쪽
  5. 가스펠서브, "분봉왕",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말씀사, 2006, "왕이나 황제의 허락하에서 한 나라의 일정 지역을 다스리던 군주. 왕보다는 다소 지위가 낮았으나 때론 왕으로도 불렸다."
  6. 누가복음 13:31-32.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7. 마태복음 14:3-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8. 마태복음 14:6-11.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9. 누가복음 23:7-11.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0. "헤로데 안티파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제25권,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4, 87쪽
  11. 사도행전 12:1-4.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12. 사도행전 12:6-19.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13. 사도행전 12:21-23.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14. 마태복음 2:22-23.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15. 누가복음 3: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16. 사도행전 25:21-23.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17. 사도행전 26:27-29.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18. 마가복음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19. 마가복음 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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