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 - 생기와 생령 / 사람과 짐승



인간관(人間觀,  human condition)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한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철학에서의 인간관

흔히 인간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철학적 성찰의 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사실 그 생각이 맞는데, 인간에 대한 관심은 철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철학은 자연의 보편적 본질과 윤리적 규범이 본질을 묻는 방향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자연을 인식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그 자체가 우리의 주관에 그대로 받아들여 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능력이 가진 모종의 한계로 인해 다소 우리 주관에 맞게 고쳐져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몇 몇 특수한 지각이 있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 능력으로는 초음파방사선을 감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오감 역시도 다른 동물들보다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물론 그 동물들보다 나은 부분도 있고 말이다. 또한 사람들마다 신체 상태에 따라 인식하는 능력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과연 그러한 인식들 중 어떤 인식이 가장 정확한 인식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자연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 그 자체의 본래 모습을 탐구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의 의지는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귀결에 주춤하고 만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소피스트들이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방법으로 그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을 공격했다.

결국 자연 그 자체를 알고자 하던 의지는, 그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에게로 옮아가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면 그 너머에 있는 자연의 본질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이 기존에 신적 질서로 믿어지던 전통적 관습과 법률을 공격해서 상대화함에 따라,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는 그것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면서 한편을 윤리적 규범의 행위자인 인간에게로 관심을 옮기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인간관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마디로 쉽게 요약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인식 능력의 토대에 따라 합리주의경험주의의 인간관을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철학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관과 공동체주의적 인간관 역시 계속해서 대립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

잘 알려진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적 자아와 개별적인 인간은 현상계의 일종의 가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귀결이 나온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구 사회에 '가장 인간다운, 가장 완전한 인간상이 있을 수 있다'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러한 인간상을 기초로 하여 가장 완성된 상태의 인간성을 갖추고자 하는 노력이 서구 문명에서 계속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 기독교 역시 이런 방향으로 수용 되었다.

인간의 내면을 이성욕망으로 대별하고, 둘 중 이데아를 직관하는 능력을 갖춘 이성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 해야고 본 것 역시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최초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두 명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에게는 없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 현상의 원인을 탐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어떤 대상의 원인이란 곧 그 대상의 본질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금 눈앞에 있는 컴퓨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것을 재료적으로는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형태는 육면체이며,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고, 전기를 통해 작동하는 것 등등의 정의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컴퓨터의 원인이며, 구체적으로는 각각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에 해당한다. 이러한 원인들은 곧 컴퓨터의 본질이고 그러한 본질이자 원인인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그 대상을 도구적으로 잘 활용할 수도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위계를 설정하고 그 위계상 인간은 다른 여느 동식물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서구 문명의 철학 사상과 과학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되었다.

한편 윤리학과 정치학에서는 그는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공동체에 속해서 역할을 갖고 참여하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보았다. 사실 개인주의가 근대에 탄생한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이러한 시각이 보편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근대의 데카르트는 중세 기독교의 신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 분위기를 간파하고,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된 사고 체계를 만들어 낸다.

사실 현대의 서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관은 대강 보았을 때 데카르트의 인간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인간관은 다소 장황하고, 이후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의 인간관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크게 세 가지 실체로 나눈다. 즉 , 정신, 물질이 그것이다. 인간은 물질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정신을 갖고 있는 존재자이다. 즉,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자연적인 물질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신체적 욕망에 이끌리지만, 내면세계는 정신적인 세계에 속해 있어 물질적 자연법칙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신체 역시 자연적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고자 했던 당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할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과 종교가 물질과학과 독립해서 존립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데카르트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영혼이 없으며, 영혼이 없다는 것은 곧 정신이 없는 것이고, 자유로운 의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만든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데이비드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인간은 순전히 생리적 신체일 뿐이다’라고 답할 철학자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런 대답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 종래의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과정이다.

대체로 철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히 생리적인 신체일 뿐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자아’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데카르트 역시 자아로서의 이성적 정신을 물질적 신체보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우위에 두고 있다.

하지만 흄은 이런 관념을 해체한다. 우리의 인식과 행위를 통일시켜주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관념일 뿐이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의 이론은 이성적 자아에 기반을 둔 근대의 합리주의적 인간관과 합리주의적 윤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경험주의적 인간관, 더 나아가 이후 시대의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정초하는 작업이 된다.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

라 메트리는 근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더 밀고나가면서 흄의 경험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간의 정신으로서의 자아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간기계론’을 제시한다. 인간이란 순전히 물질적 존재일 뿐이며,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신체의 작용에 따라 욕망을 품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생리적 신체의 작용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카를 마르크스

마르틴 하이덱거와 철학적 해석학

서구 철학의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경험 과학의 발전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진화론부터 시작해서 경험적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이 합리적 판단에 따르기보다, 오히려 흄의 말대로 욕망과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저 다른 생명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연적 존재가 되고 만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독자적 특징을 성찰하고 싶었던 철학자들의 기획은 이렇게 무너지는 듯 보였다. 더구나 경험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심화된 근대적 기술 문명의 발달은 기술과 관료 체제 그 자체가 중요하며, 정작 그 기술과 체제를 향유하려던 인간은 도리어 그 체제에 속박되어 버리고, 개체적인 고유함이 중요시 여겨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만들고 말았다. 즉, 인간소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필두로 한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독특함을, 인간의 언어로 쓰인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그들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갖고 있다. 인간만이 단순히 스스로를 자연 현상에 속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또 자신의 시간적 삶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길어내는 것이다.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특히나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자연적 현상에는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과가 뒤따른다고 말한다. 대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은 이런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물들은 저마다 본성상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따라 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적인 씨앗이 자라 꽃이 되는 것도, 올챙이가 자라 개구리가 되는 것도 자연적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만이 이러한 인과관계를 포착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결단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과학적 탐구를 벗어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철학의 고유한 과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종교에서의 인간관

유대교

선민인 유대인과 그 이외의 사람들로 구분된다.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는 이러한 타락 속에서 인간은 신의 엄격한 명령, 즉 계명을 철저히 지킴으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여기서는 주인과 노예처럼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서구 종교의 대표격이 되는 기독교는, 철학적 인간관과 생물학적 인간관과는 구분되는 신학적 인간관을 따로 상정하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이 대개는 생물학적 인간관만을 갖고 인간을 파악하거나, 아니면 그 위에 합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역사성이 기초가 되는 철학적 인간관을 더불어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 신자들은 그 위에 신학적 인간관을 하나 더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테마는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또한 기독교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서사', 즉 신과 인간이 펼치는 장대한 이야기를 갖춘 것으로 믿는다.
신은 처음에는 인간을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고, 원죄를 갖게 되었다.
사실 이 원죄의 관념은 고대적인 연좌제적 성격을 갖고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12세기의 신학자 요아킴은 예수의 도래 이후, 신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 흡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예수의 복음을 통해 신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요아킴은 이후 재림할 메시아의 시대에는 인간이 지적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외 기독교적 인간관은 여기서 간단히 이야기하기 불과하니 관련 항목을 참조하길 바람.

3.3. 이슬람교[편집]

이슬람교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선교하겠다는 이념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단번에 신앙적으로도 모종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을 가장 우위에 놓고, 계전의 백성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그 다음에 놓아 어느 정도 포용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하며,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들은 가장 아래에 놓는 수직적인 인간 관념을 갖고 있다.

힌두교

인도의 모든 종교는 윤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회에 의해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동물들도 내세에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 계열 종교들은 대체로 윤회 상에서 인간이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보다 높은 위계를 가진 것으로 그리곤 한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 상의 계급 역시 전생의 (業)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즉, 전생에 좋은 일을 했다면 좀 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는 뜻이다.

힌두교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단계는 윤회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 더 이상 다시 환생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 동물과 인간, 그리고 카스트상의 계급 차이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역시 인간을 고된 현생에 집착하게 하여 계속해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 즉 브라흐만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이 한갓 가상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체인 브라흐만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는 자는 해탈하여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

불교는 인간의 개별적 자아란 한갓 가상이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같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유일 실체인 브라흐만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실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없다.
불교의 '(空)' 관념은 이렇다.
세계는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공(空)이며, 다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된 '연기'만 있을 뿐이다.

불교 사상은 귀결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개별적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상은 60~70년대 생태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4. 현대 생물학심리학에서의 인간관[편집]

이하에서 보듯이 심리학개론 시간에 줄창 배우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생물학, 특히 심리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이미 인간관의 변화무쌍한 변천의 역사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을 묘사하고 그리는 방식이 천지차이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전부 교집합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대립 관계인 것은 아니다. 크게 보아서 "인간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nature-nurture 논쟁), "인간은 고정 불변의 존재인가 변화 가능한 존재인가"(trait-state 논쟁), "인간은 동물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가, 아니면 동물과는 다른 무언가인가", "인간은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구성물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더 큰 무언가인가"(환원주의 대 전체론의 논쟁) 등의 기준들이 있는데, 각각의 입장은 저마다 이에 대해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기도 하는 관계이다.

4.1. 진화론적 인간관[편집]

찰스 로버트 다윈의 《종의 기원》 이 서구권의 전통적 인간관을 뿌리째 뒤흔들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의 저서가 출판되기 전까지, 서구의 일반적인 인간관은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존엄한 인간상을 제시했던 중세 이전의 영향을 받아 왔다. 즉 인간의 모습은 곧 신의 모습이었고, 이러한 우월성은 인간을 평범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만물의 영장'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즉 다윈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든지 간에 평범한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다윈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다윈의 책들을 통해 일견 정적으로 보이던 생물들의 분류가 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보이게 된 것에 더하여,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는 인식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린네처럼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보려는 다양한 시도는 있어 왔지만, 다윈만큼 기존의 인간관에 막대한 파장을 몰고 온 사람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던 장벽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면,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만들었다" 는 얘기까지 나왔다.[2] 이는 동물에 대하여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찌보면 훗날의 행동주의적 사고는 진화론에 의해 변화된 인간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이 흐름을 충실히 이어받은 학문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심리학 및 가족심리학, 생물심리학, 정서심리학, 사회심리학 등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에 진화가 영향력을 끼치려면 수만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양복 입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수십, 수백만 년 전에 적응적이던 특징이 지금도 적응적일 거란 보장은 없지만, 진화는 그렇게 빨리 반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먼 옛날 수렵채집 시절에 맞게 튜닝되어 있고, 맹수의 습격과 식량의 부족을 극복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비만이 그때 그 시절만 해도 가장 적응적인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점만 생각해도...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때건 지금이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우월성 내지는 고유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이게 되거나 취급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는 집단은 은연중에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보고도 많이 있다. 이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도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측면들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발견도 있다. 이는 따로 인간의 동물성 부정(human creatureliness denial)이라고도 한다. 이는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갈아넣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어째서 (종교와는 무관한 경우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의 관점에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4.2. 정신분석학적 인간관[편집]

20세기 인류 지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프로이트는, 비록 그가 극히 논쟁적인 위치에 있다고는 하더라도, 심리학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서구 인간관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로 인해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오해를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20세기 중엽까지 학계를 리드하던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정신분석학자 출신의 볼비(J.Bowlby)는[3] 오늘날까지도 심리학개론 수준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론인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창시하여 유명해진 바 있다.

정신분석학이 인간관에 끼친 가장 큰 기여는 인간의 천성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그 자체가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유전자 결정론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인간의 성품이 사회의 영향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조성된다는 대립적인 관점과는 사뭇 달랐다.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모자녀 간 관계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지만, 한 인간 내에서 일단 형성된 어떤 (대다수의) 측면들은 이후의 인생 내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생 전체가 유년기의 경험(특히 5세 이전의 경험)에 의해 사실상 완전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단순명료한 아이디어로부터 현대 심리학의 거대한 두 갈래를 이루는 테마, 성격(personality)과 발달(development)이 튀어나왔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두 주제에 대해 물론 프로이트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설명을 하지만, 그 분야를 본격적인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따지자면, 프로이트는 사실상 시조와도 같은 셈이다. 5세 이전의 인간의 발달, 그리고 그 이후의 평생을 지배하며 불변하는 성격. 한 인간의 내면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다.

프로이트는 또한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병들어 있는 존재로 보았다. 물론 이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에게 찾아온 소수의 내담자들을 바탕으로 만든 관점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개인의 생각을 표출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심도 있게 탐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의식의 의식화(unconscious conscious)와 훈습(workthrough)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활용하기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기로는 자유연상 이전에 최면술을 비롯한 몇몇 방법들이 있었다지만, 프로이트 이전의 인류에게는 "정신이 병들 수 있다" 는 아이디어 자체가 낯설었다. 흔히 말하는 "미친 놈" 에 대해서는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가혹하게 매질을 하거나, 굶기거나, 골방에 처박거나, 수용소에 감금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트 이전의 정신병 치료법 중 제도권에서 받아들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신병자들끼리 모아 놓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춤을 추게 하기" 였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가 그 문제가 사실은 무의식 속의 원초아와 초자아의 싸움 때문이라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통찰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다윈은 인간을 동물로 끌어내렸고, 프로이트는 인간을 병든 동물로 끌어내렸다" 고도 한다.

4.3. 행동주의적 인간관[편집]

행동주의는 그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을 철저히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말했던 무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그들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인간의 외현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ex. 기억, 감정, 의사결정, 판단, 표상, 통찰 등) 애초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심리학 연구방법론의 발전과, 톨먼(E.Tolman)의 인지도(cognitive map) 및 쾰러(W.Koehler)의 통찰학습(insightful learning)과 같은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깨지게 되었다.

이들은 자극-반응 이론(S-R theory)에 의거하여 인간을 기본적으로 외부 자극에 대하여 적절하게 능동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존재로 여겼고,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많이, 나쁜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적게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인간은 매우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행동의 변화를 통해 학습을 측정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학습의 대전제가 되는 여러 기본 가정들을 세우기도 하였다. 손다이크(E.L.Thorndike)가 대표적.

인간이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는 이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프로이트적인 결정론과는 달리, 이들은 적절한 조건형성만 갖추어진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교하고 어려운 행동이라도 조성(shaping)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아무리 길고 복잡한 일련의 행동들이라도 연쇄(chaining)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화를 통해 변화하는 행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본유적인 측면들은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스키너의 상자 속에서 똑같을 뿐이었다. 왓슨(J.B.Watson)이 대표적.

또한 이들 역시 생물학의 선대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행동주의에서 인간을 설명할 때 "인간은... 이러하다" 로 설명하지 않고 굳이 "유기체는... 이러하다" 고 설명하는 것은 그 때문. 가 그렇듯이 고양이가 그러하고, 또한 사람이 그러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아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고 보고했다. 계속 언급하지만, 인간이나 동물이나 조건형성을 했을 때 반응하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4.4. 인본주의의 물결[편집]

인본주의 심리학의 북극성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자 로저스(C.Rogers)를 비롯한 일군의 임상가들은 인간을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향하여 현실의 자신을 이끌어 가는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며, 현 상태에 만족하거나, 심지어는 자기파괴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슬로(A.Maslow)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긍정적 성장에 반드시 전제되고 우선시되는 다른 욕구들이 미처 채워지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주관적 경험의 가치에 주목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느낌과 기분, 정서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아니, 인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로저스의 발언처럼, "우리는 석양이 지는 것을 그저 경외심을 갖고 바라볼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자들이 이 학풍을 싫어합니다. 심리학의 다양한 접근법들 중에서도 행동주의와 인본주의는 공통점을 찾기가 극히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르다.

이처럼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주관성 자체를 긍정하기 때문에 사회 구성주의와도 접점이 많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구성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에 대해서만큼은 타인이 함부로 "터치" 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관점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함부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오히려 각 개인이 구성한 세계는 무조건적 수용의 대상이며, 여기에는 인간 중심 치료를 실시하는 상담가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4.5. 인지주의의 도래[편집]

이 분야의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4]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같은 새로운 흐름은 종래의 인간관을 다시 한 번 뒤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행동주의가 자극에는 곧바로 반응이 따라온다(S→R)고 주장한 반면, 이들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블랙박스" 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외현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 마음 속의 변화이며, 이러한 심적 과정(mental process)은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심리학의 영역이 되었다.[5] 이는 기존의 학습심리학 분야에서 유기체가 주체적으로 기억하고 판단하고 환경을 표상한다는 근거들이 "더 이상은 양탄자 밑으로 밀어넣기 힘들 만큼"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사후 오랜만에 다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면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6]

이 시점에서 세계는 "컴퓨터" 라고 불리는 새로운 첨단의 기계의 원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철학자 퍼트넘(H.Putnam) 등이 그 효시이다. 오늘날 유명한 인물로 인지철학자 데닛(D.Dennett)도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도 컴퓨터의 논리와 은유를 빌려다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7] 라는 상상을 했고, 이를 가지고 컴퓨터로서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실제로 만들었다. 이것이 다시 몇십 년이 지나서 정말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로봇공학이나 최첨단 컴퓨터공학 분야에 응용되는 걸 보면 정말이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관점을 따르는 인지과학자들은 인공지능 연구에도 자주 협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알파고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학습 연구 역시 그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이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공학과는 별개로, 이는 또한 심리철학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이 당시의 많은 인지과학 이론들이 기계로서의 인간을 그리면서, 인간의 심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들이 크게 뒤바뀌었다. 외현적 행동의 변화 정도로 간주되던 학습의 의미는 이제는 장기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들의 변화로 환원되었고, 환경적 맥락이나 상호작용, 외부 자극들이 전부 싸잡아서 "정보" 로 환원되었다. 앳킨슨-시프린(Atkinson-Shiffrin) 모형에서의 부호화(encoding)나 반출(retrieving) 같은 용어들, Baddeley-Hitch 모형에서의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나 음운루프(phonological loop) 및 일화적 완충기(episodic buffer), 시공간 보조기억장치(visuo-spatial scratchpad) 같은 용어들을 보자면 이 인간들이 지금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려는 건지 아니면 웬 컴퓨터 썰을 푸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다면 이 관점은 인간을 (행동주의처럼) 수동적으로 볼까, 아니면 (인본주의처럼) 능동적인 존재로 볼까? 오늘날의 인지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어느 한쪽으로 크게 쏠리지는 않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어차피 지나친 결정론적 접근은 위험하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고, 인간에게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으레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견 이 관점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개인이 "단지" 처리할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업기억에 관련된 연구들은 인간이 정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능동적 특징을 보여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본성이냐 양육이냐의 논쟁에 있어서도 이들은 양쪽 모두를 함께 고려한다. 즉 인간에게는 타고난 인지적 능력의 한계와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후천적인 개입이나 학습, 변화를 통하여 인지적 처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억술.

4.6. 뇌과학의 출현과 신경 환원주의 논쟁[편집]

이전에도 뇌가 사고의 근원일 것이라는 연구는 지속되어왔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신경영상학(neuroimaging)이 발전하면서 미스터리로 보이던 의 정체를 속속들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신경과학(뇌과학)이 태동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은 결코 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뇌에 대한 사실들이 밝혀질수록 기존 심리학의 질문들이 해결되고 있다. 뇌전도를 측정하고, MRI나 fMRI와 같은 비싼 장비들을 활용하여 뇌의 활성화를 확인하면서, 개인이 경험하는 심적 과정과 외현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에 대응되는 뇌 영역이 있을 거라는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학자들은 심지어 "두뇌혁명"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발전에 도취한 일부 학자들은 "모든 심리적인 현상은 곧 생물학적인 현상이다"(Every psychological is biological)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과정과 변화는 전부 생물학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기계로서의 인간" 이라는 은유와도 묘하게 연결되는 이 관점은, 이미 생기론이 죽어 사라진 서구 과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단순히 뇌 영역의 활성화를 연구하는 흐름에서 더 나아가, 그 활성화의 패턴이 인간 심리의 전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계의 오랜 논쟁이자 서구 지성의 최대의 장점이자 한계로 꼽히기도 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수많은 다양한 세포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신경윤리학자이자 저술가인 해리스(S.Harris)의 시큰둥한 코멘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사랑과 증오, 모든 격정적인 감정은, 단지 "한 다발의 뉴런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인간은 그 정도뿐인 것인가? 신경과학의 발견이 인간 전체를 온전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는가? 심리학은 마침내 성배를 발견한 것일까?

사실 이는 굉장히 논쟁적인 것이다. 당장 많은 신경심리학자들은 그렇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며, 비서구권 연구자들이나 사회심리학, 문화심리학 연구자들도 무척 난색을 표하는 발상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그들의 발견을 통해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동안, 이들은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방향에서 조명했다고 평가할 뿐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퍼즐 조각들을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이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사랑이란 단지 시냅스 사이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흐름 그 자체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동안, 이들은 "개인이 사랑을 느낀다고 보고하는 것과, 개인 내부의 옥시토신의 분비량 사이에는 상관관계(correlation)가 존재합니다" 고만 말하는 데 그친다. 환원주의자 : "OK! 설명 끝! 야 신난다!" 비환원주의자 : "좋아... 변인 하나를 더 찾아냈어..." 꼭 양자역학에서 확률 및 다중우주론으로 얼버무리는 것과 어떻게든 정확한 원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것 같다.

물론 사랑이 옥시토신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창발(emergence)이라는 것이 존재하니 문제가 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뉴런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설명 자체의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complicated"가 아닌, 더 복잡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암시하는 "complex"를 의미한다. 사랑을 느낄 때 옥시토신 분비량이 증가하는 경향만을 가지고 옥시토신의 이름을 사랑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그 개인이 처한 객관적 상황과 환경, 주관적 맥락,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영향 등이 전부 모여서 옥시토신의 분비와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사랑" 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시토신은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폄하와 배척, 거부, 방어적 행동과도 밀접한 정적 상관관계를 보인다. 아직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 단언하기에는 너무 많이 모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원주의보다 창발주의가 더 바람직한 것이냐고 한다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창발주의는 그나마 환원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설명으로부터 더 많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창발주의는 당장 그 창발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창발의 개입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뇌와 그 신경계가 만드는 신호 이상일 수 있지만, 어떻게 그 이상이 되는지, 얼마나 더 큰 개념이 되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그 메커니즘이 정확히 확인될 때까지는 차라리 창발이라는 개념을 배제한 설명을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기능주의에 관련된 심리철학자들의 논쟁과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더욱 정교한 학술적 논의에 관심이 있다면 존 설(J.Searle)의 "마인드" 같은 입문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도서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4.7. 생명공학초인본주의[편집]

현대 들어 공학기술이 발전하고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일부 서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는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제약 없는 발전과 그 무한한 응용을 주장하면서, 인간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진화해 나갈 방향을 예견하는 종이 되었다고 본다. 축적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개조하고 뜯어고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며, 충분히 극복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를 통해서 불로불사와 같은 영생을 획득할 수 있으며, 먹고살기에 급급한 문제를 떠나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 자체가 사실상 무한해진 만큼,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로 그들을 위협하는 종교나 각종 이데올로기에 무관하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아끼며 더 깊은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향해 애쓰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쉽게 말해서 과학공학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인본주의의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형태이다. 기존의 인본주의자들이 교육의 힘을 강조하긴 했지만, 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거리낌이 없고, 도리어 이를 초인류(transhuman)라 하여 이상적 목표로 삼는 것이다. 권위의 제재와 통제, 정부의 규제,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대해서 이들은 그것이 그저 낡고 시대착오적일 뿐이라고 여긴다. 특히 종교는 하루속히 던져버려야 할 과거의 유물로 취급한다.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지상주의낙관주의가, 기술을 통해 인류가 유토피아에 도달한다는 발상은 기술만능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상에 모든 사람들이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이는 영미권 지식인들 중에서도 급진적인 일부의 담론에 머무르고 있으며, 독일 등을 비롯한 대륙권 지식인들과 비서구권 지식인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라며 규탄하는 중.[8] 초인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의 힘만으로 인류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인류는 너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기술은 60억 인구에게 100%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채로 일부의 전유물이 될 것이고, 기술을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와 필연적인 간극을 발생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기꺼이 죽이기까지 하며,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배척하려 하는 이 모습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그러한 부족한 모습으로서 350만 년의 세월을 이겨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 역시 비관적인 사고만큼 불안정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해 완벽하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보다도 맹목적인 광기이자 그저 믿음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초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도움으로 인류는 "완성" 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이미 인류 자체가 완성에 가까워져 있다는 마인드에 가깝다. 물론 어떤 이들은 정말로 방법만 주어진다면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고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돌아보면 세상에 많이 있다. 하지만 초인본주의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이들로 인한 문제가 적절한 공적 교육 등을 통하여 "계몽" 시킴으로써 쉽사리 관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게 말은 쉬운데...

5. 현대 사회과학에서의 인간관[편집]

5.1. 현대 사회학에서의 인간관[편집]

주로 사회학자들은 사회실재론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실재론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다. 개인들은 사회를 이룸으로써 개별적인 개인의 차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사회학인 것이다. 특히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을 필두로 하여, 많은 사회학자들은 '사회화된' 인간관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후술할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별적인 개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들의 경제적 행위는 모여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경제 현상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라는 실체가 만들어 낸다는 사회학적 견해와는 많이 다르다. 단순히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냈을 뿐인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으며, 타인을 굳이 고려하지 않으며, 공동체적 사회를 굳이 고려하지 않는 개인들의 이익추구가 결론적으로 경제 현상을 자연스럽게 균형 잡힌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사회학은 '과잉 사회화된' 인간관을, 경제학은 '과소 사회화된' 인간관을 기초로 학문을 전개한다고 볼 수 있겠다.

5.2. 현대 경제학경영학에서의 인간관[편집]

경제학에선 국가의 효용과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고 경영학에선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문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점차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1903년 테일러(F.W.Taylor)가 처음으로 제안한 "시간동작연구"(time & motion study)에서 간접적으로 제안되었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인간관은, 이후 1924년의 저 논란 많았던 호손 실험을 통해 반박되고, 이것이 다시 경영기법 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극복되었다. 이후 이 두 가지의 대립되는 인간관은, 1960년 맥그리거(D.McGregor)의 저서 『기업의 인간적 측면』을 통해 X-Y 이론으로 명명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맥그리거의 관점을 따라 상반되는 인간관을 제시하기로 한다.

5.2.1. X-Y 이론[편집]

5.2.1.1. 고전적 인간관: X인간관[편집]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암묵적으로 줄곧 취해져 왔던 인간관이라 고전적 인간관, 전통적 인간관이라 불린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며, 지시되어야 하고, 처벌로서 위협받아야 한다.

  •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타인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하고, 책임지는 것을 피하려 하며, 야망이 없고, 무엇보다도 안전함을 추구한다.

출처는 Frederickson, 2011, p.103.

테일러 이전에도 이런 인간관은 있었지만 이것이 매우 대놓고(…) 반영된 것이 테일러가 주창한 "과학적 관리론"(scientific management)이며, 경영이나 행정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개념이다.[9] 딱 보면 알겠지만 인간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일하기 위해서는 정말 특단의 통제와 강제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의 관점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남이 뭘 하든, 뭐라 하든 철저히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결정하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여기서는 집단 내 사회의 동적인 측면을 파악하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또한 인간을 마치 기계처럼 인식하기에, 직원들의 사기복지와 같은 부분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인데, 실제로 짐작하듯이 경제학이 바로 기본적으로 고전적 인간관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이를 통해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니 경제적 합리성[10]이니 하는 개념들이 등장한 것. 주류 경제학의 대부분의 이론들은 위와 같은 가정들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아주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한편 스키너도구적 조건형성 역시 X인간관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보상이 있다면 뛰어들고 처벌이 있다면 피한다" 는 개념은 위의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개념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X인간관에 충실한 제도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넓은 범위의 신상필벌 제도가 포함되는데, 포상에 관련된 것으로는 봉급, 보너스인센티브와 같은 것들이 있고, 처벌에 관한 것으로는 임금 삭감이나 강등, 이직, 해고, 기타 등등이 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은 항상 감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한다" 가 기본 전제이므로, 직원 컴퓨터 모니터링이나 기타 이런저런 감시비용 및 결박비용 역시 X인간관에 입각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5.2.1.2. 자기실현적 인간관: Y인간관[편집]

종래의 인간관에 반하여 새롭게 제시되고 조명받게 된 인간관으로, 마찬가지로 관련 내용을 옮겨 보기로 한다. 원문은 다소간 윤문하였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 내적인 직업적 노력은 놀이나 휴식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로 헌신할 때 목표달성을 위해 자기통제력을 보인다. 외부의 통제나 처벌의 위협은 근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 목표에 대한 헌신은 자기존중과 자기실현을 위한 보상으로 작동한다.

  • 여건이 따라 준다면,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책임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찾아나서기도 한다.

  • 많은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창의성이나 혁신까지도 보일 수 있다.

  • 대부분의 경우 개인들의 지적 능력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실제 지적 능력은 오히려 그 이상이다.)

상동 출처.

이런 관점이 사실상 처음으로 대두된 것이 저 호손 실험이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있듯이 이 실험 자체는 방법론적으로 제대로 망했다.(…) 이를 통해 등장한 인간관계론은 테일러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11]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냐에 대해 제대로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초 스코틀랜드오언(R.Owen)이 이와 비슷한 노동개혁을 하긴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쪽은 인간관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주의적 측면에 가깝다.

딱 보면 알겠지만 어째 굉장히 마음에 쏙 드는(…) 좋은 표현들로 가득하다. 실제로 Y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가능성을 표방하며, X인간관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질구질한(…) 모습들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더 많은 성과급으로 유인하고 유혹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직무 만족도와 자긍심을 높이고, 그들이 직무를 통해 자기계발을 하고 경력관리를 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외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격하시키며, 그 대신에 개인의 내적인 통제의 힘을 신뢰한다. 또한 "사람은 일하고 싶어한다" 는 메시지는 개인의 포부와 장래희망,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는 욕구와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궁극적 완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처럼 동기부여된 개인들에게, 과연 당근과 채찍이라는 외부의 압력을 굳이 행사할 이유가 있겠냐는 것.

  • "언제든 마음껏 쉰다"... 美 기업 "무제한 휴가" 실험
    이 기사에 등장하는 회사의 경영자들은 Y인간관에 입각하여, "인간은 충분한 여건을 보장하면 스스로 책임을 찾아나서고, 일을 하면서 자기실현을 완성하고자 한다" 라는 긍정적인 인간관을 경영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X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모험적인 시도이다. X인간관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 경제적 인간이 보기에는, 유급휴가일 제한이 풀렸다면 더 많이 쉴수록 더 이득이므로, 개인에게는 합리적이나 전체에게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5.2.1.3. 조직이론에서의 적용[편집]

흔히 오해하는 것이 "X인간관은 과거의 잘못된 인간관, Y인간관이 보다 정확한 인간관" 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인데,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현실 설명력을 지니고 있고 둘 다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Y인간관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X인간관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가를 정당하게 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 같은 경우. 화장실 청소나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떠올리면 쉽다. Y인간관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실제적 제안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X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디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쓴소리에 가깝다. 씁쓸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누구나 빈둥빈둥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학창시절 동안 간절히 바라며, 하기 싫은 일을 만나면 피하려 하고, 그럴 수 없다면 보상이라도 받으려 하고,[12] 골치 아픈 일에 대해서는 가급적 책임소재에 엮이기 싫어하며 타인이 자신을 통제해 주길 바란다. 항상 자율적일 수도, 항상 타율적일 수도 없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의식이 탑재된, 자기 삶을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몸바칠 준비가 된 인재들이 일하기 시작하면 이때의 생산성은 X인간관에서 말하는 그런 마지못해 끌려와 일하는 사람들의 생산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보통은, Y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많은 조직이나 집단이 좀 더 바람직한 것은 사실. 결국 X-Y 이론은 근로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봄과 함께 경영자가 자기 조직의 현주소와 노동문화를 점검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한국적 인간관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W이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인간을 "신바람" 이라는 개념에 따라 설명하려 한 이론.

한편 심리학에서도 내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라는 유사해 보이는 이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동기가 외적 동기에 비해 훨씬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3]

5.2.1.4. 심리학의 매슬로와의 비교[편집]

다시 인간관이라는 넓은 범주로 돌아와서, 위의 X-Y이론은 매슬로의 욕구위계설과도 연관성이 있다. X인간관은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으며, Y인간관은 자기실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5.2.2. Z 이론[편집]

종래의 X-Y이론이 너무 흑백논리라 하여 Z이론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일본계 미국인 학자 윌리엄 오우치의 Z 이론은 '미국 속의 일본식 경영 방식'을 가리킨다. 오우치의 Z 이론에 기반한 조직은 영미적 개인주의가 아닌 일본적 집단문화로 운영되며, 조직 구성원의 종신 고용을 보장하고 직원을 '가족'과 같이 대우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또한 조직 구성원에 대해 장기적 평가를 하고자 하며, 상벌을 엄격히 하기 보다는 느슨한 통제를 시도한다. 조직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도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자 하며, 이렇게 내려진 결정으로 얻는 결과에 대해서도 집단적 책임을 진다.

[1] 참고영어 위키백과[2] 서구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관점은 사실 천동설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반영하고 있다. 천동설의 세계에서 우주의 중심은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범속하고 하찮은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관련 위키 문서들을 참고. 라고 되어 있지만 정작 천동설 위키 문서를 참고하면 기독교의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천동설이 부합하며 강력히 옹호되었고 코페르니 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는 비유적 표현이 틀린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3]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클라인(M.Clein)의 슈퍼비전을 받았다.[4] 당장 정보처리 흐름과 사뭇 다른 피아제 역시 인지분야의 발달학자였다.[5] 현대 심리학에서도 심리학의 정의를 내릴 때 "외현적인 행동과 심적인 과정" 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한다고 말하면서 양쪽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6] 이 이후로 무의식에 관련된 연구들은 프로이트와 별개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재개되었다. 재미있게도 연구자들은 무의식(unconscious)이 아니라 비의식(nonconscious)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쓰는데, 그 조어법 자체가 비유하자면 북한이 싫다고 인민(people)을 "국민" 으로, 동무를 "친구" 로 바꿔 쓰는 거랑 비슷한 계기라는 것.[7] 물론 이 당시의 컴퓨터라는 물건이 튜링 머신 수준이라는 걸 고려할 필요는 있다.[8] 참고: "나는 미래 세대가 유전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장애를 야기하는 결함을 치료하는 것 외의 유전적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 정신 발달의 후성 규칙과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이 종의 물리적 영혼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감정과 후성 규칙을 충분히 변화시켜라.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아질 수 있어도 더 이상 인간은 아닐 것이다. 순수한 합리성을 선호하도록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중화시켜라. 그러면 남는 것은 조악하게 구성된 단백질 컴퓨터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수백만 년의 생물학적 시행착오를 통해 형성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을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p.476 <통섭>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 북스[9] 다만 테일러가 인간 자체를 게으르게 보았다는 것은 맞는 설명은 아니다.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론을 주창하던 시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 경영이 보편적이었다. 당시의 비합리적인 경영 행태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을 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었고, 때문에 일부러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테일러는 그러한 비합리적 경영 실태가 생산성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 대책으로 노동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안한 것이다. 테일러는 그 외에도 노사협력,공정한 이익 분배 등을 주장했다. 애초에 테일러 본인부터가 노동자이기도 했고... 자세한 것은 프레더릭 테일러 항목과 과학적 관리론 항목을 참조.[10] 이것도 나중에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개념에 의해 반박당하게 된다.[11]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관리의 영역에서 "인간 활동 역시 조작될 수 있다고" 접근했기 때문.[12] "이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인간의 이와 같은 X이론적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13] 물론 외적 동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개념과 동일시하거나 일체화함으로써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크레타 섬에 얽힌 신화와 역사-제우스의 탄생과 최초의 유럽 문명



 크레타 섬은 신화는 물론 유럽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곳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이 섬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과 인간의 제왕으로 군림한 제우스가 탄생한 곳이자 유럽 문명의 시초인 에게 문명이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제우스의 탄생 신화부터 알아볼까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3세대 신에 해당합니다. 그 앞 세대는 할아버지 우라노스, 아버지 크로노스 세대입니다.

 맨 처음 세상은 혼돈의 어둠, 즉 카오스였습니다. 카오스에서 땅과 대지, 현세 활동의 공간인 가이아, 지하세계이자 활동이 정지된 타르타로스, 그리고 사랑, 욕구, 결합, 번식, 번영하려는 의지인 에로스가 순서대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여왕이기도 한 가이아는 배우자 없이 하늘인 우라노스를 낳은 뒤, 자신의 아들인 우라노스와 사랑의 결합을 했습니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이들은 6명의 남신과 6명의 여신을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거인족인 티탄족이었습니다. 12티탄들 중에 가장 먼저 태어난 신이 강의 신 오케아노스이고, 가장 나중에 태어난 신이 농업의 신 크로노스입니다.

 가이아는 티탄족 외에 헤카톤케이르 3명과 키클롭스 3명도 낳았습니다. 헤카톤케이르는 머리가 50개, 팔이 100개나 되는 괴물이며 키클롭스는 외눈박이 거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툭하면 자기들끼리 치고받아 세상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시끄러웠습니다. 이들은 형과 누나인 티탄족 12남매에게도 행패를 부려 우라노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습니다. 우라노스는 말썽 피우는 자식들이 보기 싫어 모두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습니다. 이곳은 지하 깊은 곳으로 빛조차 닿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하늘과 땅 사이에 경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자식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둔 우라노스가 맘에 들지 않은 가이아는 자식들로 하여금 아버지에 반항하도록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아버지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 티탄족의 막내인 크로노스가 나섰습니다.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몰래 지상으로 데리고 와 낫을 주며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찾아왔을 때 크로노스는 낫으로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랐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 것을 그린 것입니다.


 우라노스는 하늘로 달아나면서 저주했습니다. “너도 장차 네 자식에게 쫓겨나고 말 것이다”
 이후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영원히 갈라섰으며, 하늘과 땅도 떨어졌습니다. 땅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가이아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가이아는 어쩔 수 없이 우라노스의 마지막 아이들을 임신했습니다. 이를 통해 기가스들이 태어났습니다. 기가스들은 후에 크로노스의 자식인 제우스 등과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우라노스가 거세되고 폐위된 후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를 아내로 삼아 신들의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는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등 5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이는 아버지 우라노스가 그에게 생식기를 잘리고 하늘로 쫓겨 갈 때 “너도 장차 네 자식에게 쫓겨나고 말 것이다”라고 저주어린 예언을 내린 탓이었습니다. 예언을 미리 막기 위해 자식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자식을 삼키는 우라노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아래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뱃속으로 삼켜지는 것을 보고 슬픔에 빠진 레아는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날 즈음에는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레아는 가이아가 준 계책을 따라 크레타 섬으로 가 제우스를 출산했습니다. 제우스를 받은 가이아는 크로노스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칠흑 같은 밤을 이용해 숲이 우거진 아다 산의 외진 동굴로 가 그를 숨겼습니다.
 그런 뒤 레아는 커다란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건넸고 크로노스는 이를 새로 낳은 아이인 줄 알고 삼켰습니다. 아래 그림은 강보에 산 돌덩어리를 크로노스에게 건네는 레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기 울음소리를 감추기 위해 찰과 청동방패를 두드리며 소란을 떠는 아말테이아라는 요정들과 함께 크레타 섬에서 자라 청년이 되었습니다. 제우스가 성인이 되자 레아는 제우스에게 사자를 보내 지난날의 사정을 전하고 형제들을 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제 우스는 티탄족 여신 중 하나인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레아는 제우스가 보내온 구토제를 음식에 섞어 크로노스에게 먹였습니다. 이 약을 먹은 크로노스는 자신이 삼켰던 자식들을 토해냈습니다.

 아버지 뱃속에서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족 신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10년 동안 치러진 이 전쟁에서 제우스는 티탄족 신들 중 핵심인 프로메테우스의 협력을 얻어낸데 이어 번개라는 무기까지 갖추게 되면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들의 전쟁에서 패한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에 의해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습니다. 크로노스 등 자신의 자식들이 타르타로스에 갇히자 이번엔 그들의 어머니 가이아가 분노했습니다. 가이아는 자신의 또 다른 자식인 기가스들로 하여금 제우스와 싸우게 했습니다. 제우스가 이들을 힘들게 물리치자 가이아는 또 다른 자식들인 티폰을 보냈지만, 제우스는 이들마저 물리쳤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에 자리 잡고 신들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힘을 빌려 세상을 함께 지배했습니다. 자신은 하늘과 땅을 지배했고, 포세이돈에게는 바다, 하데스에게는 지하 세계를 맡겼습니다.

 제우스가 지배하는 세계는 더 이상 혼돈의 카오스가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강이 모두 제자리를 잡은 안정된 세계, 즉 코스모스의 세상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우스와 관련된 크레타 섬의 신화입니다.

 이번엔 크레타 섬에서 최초로 시작된 고대 유럽 문명을 알아볼까요. 유럽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모태로 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고대 4대 문명 중 두 곳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 즉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에게 해 일대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럽 최초의 문명을 에게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에게 문명은 전기인 크레타 문명과 후기인 미케네 문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 크레타 문명은 소아시아와 가까운 크레타 섬에 정착한 미노아인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를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또 제우스의 아들이자 이 섬을 통치한 미노스의 이름을 따 미노스 문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왜 크레타 섬이 유럽에서 오리엔트 문명을 최초로 받아들이게 됐는지는 처음의 지도를 보며 이해하기 쉽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유럽으로 전해지려면 지금의 터키 땅이나 지중해를 거쳐야했을 겁니다. 지도에서 보면 그 길목에 크레타 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레타 섬에서 최초의 유럽 문명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1400년까지 활동했던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2500년 청동기 시대를 열었고,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활발한 해상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반도 남부의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급속히 크레타의 미노아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해 후기 에게 문명을 열었습니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이르면 미케네인들 역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여 문화가 번영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황금 미케네 시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강해진 미케네인들은 크레타인들을 압박해 기원전 1500년경에는 동부 지중해의 해상 교역권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신화가 바로 미케네 지역의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으로 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는 내용의 테세우스 신화입니다.

 실제로 미노스 섬에서는 미노타우로스 신화와 관련된 건축물들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크노소스 궁전으로, 이 궁전은 미로처럼 작게 구획된 방들이 겹겹이 싸여있으며 회랑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방들은 경쾌한 프레스코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3~4층으로 지어져 1천 개가 넘는 방을 갖춘 웅장한 이 궁전 안에는 수도 설비는 물론,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각 방에는 광정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내부를 밝히는 등 건축술이 고도로 발달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반면 크레타의 개방적인 왕궁과 달리 미케네의 왕궁은 침입과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지어졌습니다. 미케네 왕궁에서는 사자문이 유명한데, 한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두 마리의 사자 모양 동물이 부조된 거대한 돌문은 미케네의 힘과 예술미의 상징으로 평가 받습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미케네 왕궁의 사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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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
생기(네솨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 = 호흡. 바람)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 = Living Being)이 된지라."

에스겔 37:5
생기(루아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 = 호흡. 바람)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 = Living Being)이 된지라."(창2:7)

본문에서 “생령”이라는 단어를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처음에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런 해석은 잘못된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생기’를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하고, ‘생령’을 ‘살아있는 영’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특히 지방교회와 같은 곳에서는 이 본문을 인용하여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대량으로 만들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또 베뢰아와 같은 곳에서는 “아담 이전에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아담을 선택하여 영을 불어넣어줌으로서 영적존재인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영"(spirit)이라 번역되는 용어는 히브리어 "루아흐"이며, "영혼" 혹은 "혼"(soul)이라고 번역되는 용어는 히브리어 "네페쉬"이다.

그런데 생령(네페쉬 하야)이라는 단어는 “영”(spirit)이 아니라 “혼”(soul)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분법에서는 성경은 영과 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구별을 하지는 않지만, 삼분법에서는 영과 혼은 다르다.
그런데 "루아흐"(영)나 "네페쉬"(혼)라는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는 모두 "호흡"이며 "바람"이라는 뜻을 갖는다.

즉 창세기 2장7절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어 생령(살아있는 영)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생기”를 “혼”과 구별되는 “영”으로 해석하고, 생령을 "살아있는 영적존재"로 해석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볼 때에 완전히 오류가 된다.
창세기 2장 7절에서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는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뜻하며, “네페쉬 하야”는 영적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생명체”라는 뜻이다. 
즉 개역성경에 “생령”으로 번역되어, 마치 육체를 배제한 영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혹간은 에스겔 37장을 창세기 2장7절의 본문과 비교하는데, 에스겔 37장과 창세기 본문은 다르며, 마른 뼈에 불어준 “생기”는 “루아흐”(영, spirit)이고, 에스겔 본문은 바벨론 포로생활로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이스라엘에 넣어준 성령을 회복으로 비유한 것이지만, 창세기 본문은 흙으로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번역성경과 비교하여보자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표준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현대인의 성경)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영어성경을 살펴보자

[KJV]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NIV]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왜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를 영적존재라고 해석하면 안될까?
성경을 살펴보면, 사람만 “생령”(네페쉬 하야)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짐승들도 동일한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창 1:21, 1:24, 1:30, 2:19등) 만일 ‘생령’을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려면, 각종 들짐승과 새등 짐승들도 모두 영적인 존재라고 해석하여야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하이 네페쉬 :  Living Creature)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즉 본문은 하나님이 생기 또는 호흡을 불어 넣어주므로써, 생명체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혹간은 흙을 이상한 의미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데, 흙을 “사탄의 저주”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고, 흙을 “영이 없고 혼만 가진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도 알레고리적인 잘못된 주장이며, 육체를 사단, 죄와 연결시키는 이원론적인 주장이다.
또 혹간은 뱀이 흙을 먹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한다.

“땅”은 히브리어로 “아다마”이며, “붉다”(하아다마 : 붉게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아담”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다고 한다.
“흙”은 “아파르”로서 먼지를 말한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혼과 영과 관계가 없으며, 사람은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아파르)을 먹을지니라”(창 3:14)

이단들이 그들을 전도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부분적인 구절을 인용하며, 기독교가 잘못 해석한 오류라고 문제를 삼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달리 해석하여야 한다고 유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신천지는 뱀이 실제로 흙을 먹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뱀이 흙을 먹도록 저주를 하였다는 것이 오류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달리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뱀은 작은 짐승을 잡아 먹고 사는 육식동물이다.
과연 유대인들이 뱀이 흙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기록을 하였을까?

뱀이 저주를 받아 흙을 먹게 되었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비하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비하적인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아파르 :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은 땅바닥으로 번역)을 핥을 것이며” (시 72:9)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욥 30:3)

“그들이 뱀처럼 티끌(아파르: 공동번역, 흙)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미 7:17)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아파르, 다른 번역은 먼지로 번역)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 49:23)

신천지뿐 아니라 지방교회와 베뢰아도 ‘흙으로 지은 사람’에 대해서, 영은 없으며 혼과 몸으로 된 육신의 사람이라고 해석하며, 생기를 곧 영이라고 해석하며 생기를 받아 생령, 즉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심지어 정통교회의 목사들도 그와 같은 해석을 하는 수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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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창조와 생기, 생령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1)생령이 되니라.

(새번역) 주 하나님이 2)땅의 흙으로 3)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사람의 창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를 불어 넣으시니 사림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두 부분이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어구를 깊이 연구 하지 않고 언뜻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넣어져 사람이 영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령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 즉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사람이"생령" 되었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하면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라는 말로 곡해 할수 있고 더 나아가 진리에서 빗나간 교리로 발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곡해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령" 이란 말은 "생명, 기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다 ,생존하다,라는 "하야"와 결합한 말로 "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 가 되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로 번역 되었고, 공동 번역 에서는 사람이 "숨을 쉬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혼 생명 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인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전인 적인 새명체라 함은 사람 안에 "영 이나, 혼 같은 구별된 존재가 사람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적인 사람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은 영, 혼, 몸, 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기 호홉을 그 코에 불어 넣었다고 하는 말씀을 오해 하여 코에 불어 넣은 생기가 곧 사람의 영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의 어구 가 얼마나 곡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혼선을 주고 진리에서 빗나가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 생기 호흡은 무엇이며, 그 코에 불어넣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생기가 영인가? 단순한 호홉을 말하는가? 여기에 중요한 질리가 감추어 있다. 생기라는 뜻은 바람이 불다, 숨쉬다, 라는 말에서 유래, 활동 하고 살아가는 기력 "생명을 말하며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데,성경에서는 성령, 영, 으로 번역 되고 있다 . 따라서 생기는 히브리어 "루아흐"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 하다. 성경은 생기, 콧김이 기름부음 받은자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증거 한다 .

예레미애가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기름부음 받은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를 말함.)

하여 사람의 코에 불어넣었다는 생기는 곧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말한다.

그러면 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 즉 기름 부음 받은자 메시야, 성령을 불어넣으 셨다고 말씀 하셨는가?

그것은 흙으로 된 인간이 마지막 아담이 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실것을 것을 상징 하는그림 으로 미리 보여주는 그리스도 영의 원시 모형이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혼,생명체가 된 인간 안에 생명이신그리스도의 영 생명을 넣어 주시므로 참 생명을 가진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원시 복음을 의미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시되어 나타나 있다 .

첫 사람은 흙 육의 몸을 입었지만 새 창조될 몸은 하늘에 속한 몸과 하늘에속한 그리스도의 영을 넣어 주심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 창2:7절의 말씀은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의 말씀이다.

필자가 누누이 말하지만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둘레며 중심이다. 하여 이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첫 사람 아담은 생령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 즉 생명 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한다.

다시 말하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진리는 첫 사람 아담의 생명과, 마지막 아담 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르다는 것을 교회 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처 주기 위해 고전 15:45절에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을 헬라어 "푸쉬게, 영이 아닌 "혼 으로 기록 하였고 ,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 "푸뉴마, 영 으로 구분 하여 사도는 분명 하게 기록 하였다. 따라서 창세기 2장 7절에서 말한 생령은 영이 아닌 "네페쉬 , 살아있는 혼, 생명체. 숨쉬다로 보아야 한다. 사도는 창 2:7절의 말씀을 인용 하여 아래 성구를 기록 하였다.

(고전15: 45 "기록된 바 ㄴ)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

따라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생기 호흡은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호흡을 말한다 .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 하는 생기 호흡은 참 실제 생기 호흡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불어 넣으신 생기가 실제 하나님의 영이 라면 "생령 이라는 단어가 "네페쉬,하야, 즉 살아 있는 혼 존재 로 번역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그리고 "콧김 생기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을 넣어 주셨다면 사람은 죽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 '루아흐' 는 죽을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루아흐" 영을 의미 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했는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은 생명 주는그리스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성령으로 호흡 하며 살것을 상징으로 그림 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 영의 모형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성경은 "걷 말과 속 말, "안 과 밖. 으로 되여있다. 로고스는 문자.의문 걷말 이라 하며 의문 문자는 진리 내용을 감싸고 있는 즉 껍질과 같은 것이다. "속 말은 레마 즉 진리,영, 참, 실제 내용을 말한다. 따라서 문자 의문 안에 참 실제 진리 영이 담겨 져 있다. 로고쓰 문자는 진리를 담는 그릇 이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문자 안에 진리를 담아 주셨다. 이것을 알지못하면 진리를 바르게 이해 할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코에 불어 넣은 "생기" 안에는 실제 진리 영 생명을 의미 하는 내적인 면과, 또 한 면은 "흙으로 지은 몸을 움직여 살게 하는 숨 호흡을 의미 하는 외적인 생기의 면이 있다.

실제 생명인 생기는 우리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말하며, 육신의 몸이 호흡 하므로 생명을 유지 하며 살게 하는 생기를 우리가 숨쉬는 호흡이라 한다. 하여 "생기 라고 하는 단어 안에는 육신의 숨을 말하는 생기와, 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하는 생기 양면성을 내포 하고 있다.

육신의 숨은 껍질을 의미 하며 그리스도의 영이 진짜 생기 숨을 의미 한다. 육신의 숨은 껍질 육신의 몸을 살게 하지만, 진짜 내적 생기 영은 거듭난 우리에게 영원 생명 호흡이 되신다.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기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호흡 성령으로 산다.

따라서 우리 육신의 몸이 호흡 하며 사는 숨은 진짜 생기도 호흡도 아니다. 하여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육신의 몸이 모두 죽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 생명 이라도 가진 것처럼 생각 하지만 실제로는 공기 숨이 생명 이다 .그러므로 겸손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생기 숨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신후 내 뿜으신 숨이 생명 주는 진짜 숨 생기다.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그림으로 보여준 모형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 하심을 통 하여 비로소 실제화 되고 완성 되었다. (요 20: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여 진짜 호흡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호흡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호흡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되어 호홉 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주와 합한자는 한 영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영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영이 없는 사람으로 비록 육신의 생명은 호흡 하며 살고 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하여 성경은 "영 이 없는 몸은 죽은 몸이라고 증거 했다.
사도가 영과 혼과 몸을 보존 하라 한말은 구원 받은 믿는 이들애개 한말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육신의 몸으로 사는 생명체 일 뿐이다.
하여 성경은 "죄와 허물로 죽은자, 무덤속에 있는자,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 했고,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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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흙의 구성성분

현대과학은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흙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물은 그 구성 원소를 분석해보면 흙의 성분과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생물체의 모든 원소의 구성비(무게%)는 아래 표와 같으며 생물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 일정합니다.

한편 지각(암석)의 구성 원소는
산소(O), 규소(Si), 알루미늄(Al), 철(Fe), 칼슘(Ca), 나트륨(Na), 칼륨(K), 티타늄(Ti), 수소(H), 인(P), 구리(Cu), 크롬(Cr), 니켈(Ni), 납(Pb), 아연(Zn), 망간(Mn), 주석(Sn), 우라늄(U), 텅스텐(W), 은(Ag), 수은(Hg), 금(Au), 백금(Pt)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생물체와 흙(지각)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성분산소, 수소, 칼슘, 칼륨, 인, 나트륨, 마그네슘, 철, 구리, 망간, 크롬 등입니다.
그리고 생물체에 두 번째로 많이 포함된 탄소(C)는 지각 성분에는 없으나 실제로 흙(토양)에는 유기 화합물로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체의 모든 성분은 빠짐없이 흙속에 들어있는 성분입니다. 

                                   <생물체의 구성원소>

원소

기호 

무게(%)

미량원소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칼륨
염소
나트륨
마그네슘
요오드

O
C
H
N
Ca
P
S
K
Cl
Na
Mg
I
Fe

62
20
10
3.3
2.5
1.0
0.25
0.25
0.2
0.10
0.07
0.01
0.01


구리(Cu)
망간(Mn)
몰리브덴(Mo)
코발트(Co)
아연(Zn)
플루오르(F)
셀레늄(Se)
크롬(Cr)

이상과 같이 원소로 분석해 볼 때 생물체는 분명히 흙으로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산, 칼륨, 칼슘, 마그네슘, 황, 규소, 철, 붕소, 망간, 아연, 구리, 몰리브덴. 등 사람은 흙으로 지었고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지은신 하나님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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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탄생

우리가 늘 밟고 다니며, 식물들이 심어져 자라는 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흙은 언뜻 보면 늘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우선 흙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아보자.

흙이 생기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일반적인 경우로서 큰 바위가 오랜 세월을 거쳐 비, 바람, 기온, 생물 등의 작용을 받아 부서져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가루가 되며, 이 가루가 모여서 흙이 생기는 것이다.
1cm 두께의 흙이 만들어지는 데 약 2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좀 더 특별한 경우로 여러 해 동안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여러 생물들의 죽은 잔해들이 쌓이고 쌓여 유기물이 모여서 생기는 흙이다.

첫 번째처럼 바위가 부서져 돌, 자갈, 모래나 더 가는 가루가 모여 흙이 되는 경우에 흙이 되는 최초의 바위를 가리켜 어머니가 되는 바위라는 뜻으로 모암(母岩)이라고 부른다.
또한 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것을 모재(母材)라고 한다.
이 모재가 여러 작용에 의하여 흙의 층위가 표층, 심층으로 나누어져 비로소 흙으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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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 일치

흙과 사람의 성분이 99%일치한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곳곳에 나오게 되는데 과거 과학자들은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니..   성경은 정말 엉터리'라고 비웃었다고 하는데,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18세기, 19세기에 이르러 원소의 발견으로 원형질과 광물질의 화학적 분석이 가능해지면서 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가 드러났다.

일부 반론가들은 지구 즉, '흙과 지각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은 다르다'라고 하지만 '흙과 지각'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셨다는 그 재료는 '흙'으로 창조하셨다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 비율이 일치할까?

사람이 만들어지려면 이렇게 13가지 원소면 된다고 하네요.
정말 성경은 알면 알수록 너무 신기방기 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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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의한 신앙 / 1. 베드로, 2. 본디오 빌라도,


성경인물 200명 이름의 뜻과 의미


1. 가나안 - 노아의 저주를 받은 자

2. 가룟 유다 - 영원한 배반의 상징

3. 가말리엘 - 사도 바울의 스승

4. 가야바 - 정치적인 종교 지도자

5. 가인 - 첫 출생자, 첫 살인자

6. 갈렙 - 진취적인 믿음의 인물

7. 갓 - 암사자에 비유된 용맹한 지파

8. 고넬료 - 최초의 이방 세례 교인

9. 고라 - 땅에 삼키운 바 된 자

10. 고멜 - 방탕한 이스라엘의 상징

11. 골리앗 - 소년 다윗에게 패배한 거인

12. 기드온 - 이스라엘의 큰 용사

13. 나다나엘 - 거짓됨 없는 참 회의론자

14. 나단 - 충실한 여호와의 예언자

15. 나답과 아비후 - 불로 심판받은 불의의 제사장들

16. 나발 - 어리석은 자

17. 나봇 - 유업을 중시한 의로운 포도원 주인

18. 나사로 -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19. 나아만 - 문둥병을 치유받은 이방의 군대장관

20. 납달리 - 발 빠른 암사슴에 비유된 지파

21. 노아 -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

22. 누가 - 사랑받는 의사요 신의 깊은 문학가

23. 느부갓네살 -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방의 권세자

24. 느헤미야 -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유능한 정치가

25. 니고데모 - 중생의 도를 추구한 지식인

26. 니므롯 - 여호와를 대적한 최초의 영걸

27. 다니엘 -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28. 다말 -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유다의 며느리

29. 다윗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통치자

30. 단 - 우상숭배로 소멸된 지파

31. 데마 - 신앙의 길을 떠나 세상을 택한 자

32. 데메드리오 - 이해 타산으로 복음을 배척한 자

33. 도르가 - 구제와 선행의 여제자

34. 도마 - 진솔한 신앙의 회의론자

35. 두발가인 - 금속 가공의 시조

36. 드루실라 - 회개의 기회를 거부한 여인

37. 드보라 - 이스라엘의 유일한 여사사

38. 들릴라 - 재물에 미혹되어 사랑을 버린 여인

39. 디나 - 강간당한 비극의 소녀

40. 디도 - 신실한 복음 사역자

41. 디모데 - 경건한 젊은 목회자

42. 라멕 - 복수의 칼을 노래한 가인의 후손

43. 라반 -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

44. 라합 -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기생

45. 라헬 - 질투심 강한 믿음의 여인

46. 레아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47. 레위 - 참혹한 복수극의 주인공

48. 로데 - 베드로를 영접한 계집종

49. 로이스와 유니게 -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믿음의 여인들

50. 롯 - 세속에 물든 우유부단한 신앙인

51. 루디아 - 마게도나(마케도니아) 최초의 개종자

52. 룻 - 효성과 신앙이 뛰어난 모압 여인

53. 르우벤 - 장자권을 잃은 야곱의 맏아들

54. 르호보암 - 왕국의 분열을 초래한 왕

55. 리브가 - 야곱은 편애한 족장 이삭의 아내

56. 미가 - 복음의 조력자요 나눔의 사람

57. 마르다 - 헌신적인 봉사의 여인

58. 마리아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59. 마리아② - 주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

60. 마태 - 사도로 쓰임받은 세리

61. 막달라 마리아 -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간 여인

62. 맛디아 - 사도로 뽑힌 예수님의 증인

63. 멜기세덱 - 그리스도를 예표한 영원한 대제사장

64. 모르드개 - 하만의 궤계를 물리친 민족의 파수꾼

65. 모세 - 출애굽의 위대한 영도자

66. 므낫세① - 들소의 뿔 같은 지파

67. 므낫세② - 초기의 악정을 말년의 회개로 용서받은 왕

68. 미가 - 기복적 신앙을 가진 범신론자

69. 미갈 - 다윗을 사랑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여인

70. 미리암 - 최초의 여선지자

71. 바나바 -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72. 바디매오 - 믿음으로 고침받은 소경

73. 바라바 - 예수님 대신 놓임 받은 죄수

74. 바르실래(바실래) - 신실하고 겸손한 부호

75. 바울 - 위대한 복음 전도자

76. 발람 - 탐욕에 물든 술사

77. 밧세바 - 죄가 많으나 은총을 입은 여인

78. 베냐민 - 이스라엘을 지킨 파수꾼

79. 베드로 - 교회의 반석이 된 수석 사도

80. 보디발 - 아내의 농간에 놀아난 자

81. 보아스 - 책임질 줄 아는 덕망있는 신앙인

82. 뵈뵈 - 주의 종에게 정성을 다한 여집사

83. 브나야 - 충직한 신하의 표상

8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성심성의껏 교회를 섬긴 믿음의 부부

85. 비느하스 - 공의의 제사장

86. 빌라도 - 진리를 외면한 역사의 죄인

87. 빌레몬 - 사랑이 충만한 성도

88. 빌립 - 친구를 주께 인도한 복음의 증인

89. 사가랴 - 의심함으로 벙어리가 되었던 의인

90. 사독 - 신의를 지킨 제사장

9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 영원한 믿음의 친구들

92. 사라 - 모든 믿는 여성의 표상

93. 사무엘 - 최후의 사사

94. 사울 - 교만 때문에 버림받은 이스라엘 초대 왕

95. 삭개오 - 구원받은 세리장

96. 살로메 - 헌신적으로 주를 따른 여제자

97. 삼손 - 긴 머리털을 가진 힘센 용사

98. 세례 요한 - 주의 길을 예비한 광야의 선구자

99. 솔로몬 - 지혜의 왕

100. 스데반 - 초대교회 최초의 집사요 순교자

101. 스룹바벨 - 제2성전의 재건자

102. 스불론 - 미약했으나 용맹했던 지파

103. 시드기야 - 유다 왕국 최후의 왕

104. 시므온 - 잔인한 피의 보수자

105. 시므이 - 처세술에 능한 기회주의자

106. 실라 - 복음전파의 충실한 조력자

107. 아간 - 여호와의 물건을 훔친 자

108. 아나니아와 삽비라 - 거짓말로 주의 영을 시험한 부부

109. 아달랴 - 왕위를 찬탈한 잔학한 여왕

110. 아담 - 최초의 인간, 인류의 조상

111. 아도니야 - 솔로몬의 왕위에 도전한 자

112. 아론 - 제1대 대제사장

113. 아모스 - 공의의 선지자

114. 아벨 -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의인

115. 아볼로 - 탁월한 학문을 지닌 전도자

116. 아브넬 - 신의를 저버린 사울의 군장

117. 아브라함 - 영원한 믿음의 조상

118. 아비가일 - 총명한 믿음의 여인

119. 아비멜렉 - 심은 대로 거둔 악인

120. 아비새 - 용감한 다윗의 용사

121. 아비아달 -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한 자

122. 아사 - 태후의 위를 폐한 종교개혁자

123. 아셀 - 배타적인 지파

124. 아하스 - 철저한 우상숭배자

125. 아합 - 선지자들을 핍박한 바알 숭배자

126. 아히도벨 - 실패한 군사전략가

127. 아히야 - 왕국 분열을 선포한 무명의 선지자

128. 안나 - 대망 중에 예수님을 만난 여선지자

129. 안드레 - 실천적인 전도자

130. 압살롬 - 아비의 왕권에 대항한 자

131. 야고보① - 사도 중 최초의 선교자

132. 야고보② -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

133. 야곱 -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134. 얀네와 얌브레 -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

135. 에녹 -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

136. 에브라임 - 형보다 높임을 받은 아우

137. 에서 - 식물에 미혹된 망령된 자

138. 에스겔 -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139. 에스더 -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소유자

140. 에스라 - 율법에 능통한 학사

141. 에훗 - 단검으로 주의 구원을 이룬 왼손잡이 사사

142. 엘가나 - 아내의 결점까지 사랑한 남편

143. 엘르아살 - 아론의 직분을 승계한 대제사장

144. 엘리 - 자녀로 인해 몰락한 가문의 제사장

145. 엘리멜렉 - 약속의 땅을 떠난 자

146. 엘리사 -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킨 선지자

147. 엘리사벳 - 흠 없고 의로운 여인

148. 엘리야 - 병거 타고 승천한 선지자

149. 여로보암 -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왕

150. 여호람 - 결혼정책의 제물이 된 왕

151. 여호사밧 - 신앙으로 개혁에 힘쓴 왕

152. 여호수아 -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153. 예레미야 -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154. 예후 - 처절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

155. 오네시모 - 주 안에서 해방된 노예

156. 오르바 - 안일 속에 머물고 만 여인

157. 오므리 - 사마리아 성을 건설한 왕

158. 오바댜 - 하나님을 경외한 궁내대신

159. 옷니엘 -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

160. 와스디 - 폐위당한 정숙한 왕후

161. 요게벳 - 신앙으로 자녀를 키운 어머니

162. 요나 -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163. 요나단 - 다윗의 진정한 친구

164. 요셉① - 고난 후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예표

165. 요셉② - 의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

166. 요시야 - 율법서를 발견한 종교개혁자

167. 요아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왕

168. 요안나 - 감사의 헌신의 여제자

169. 요압 - 불의의 죄값을 치른 장군

170. 요엘 - 여호와의 날은 선포한 선지자

171. 요한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랑의 사도

172. 욥 - 완전한 동방의 의인

173. 우리아 - 충직한 신하의 표상

174. 웃시야 - 교만으로 천형을 받은 왕

175. 유다 - 메시아 후손을 약속받은 자

176. 유두고 - 바울의 이적으로 소생한 청년

177. 율리오 - 바울에게 호의를 베푼 로마 백부장

178. 이사야 -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179. 이삭 - 순종과 온유의 사람

180. 이새 - 메시아의 혈통을 이어나간 자

181. 이세벨 - 사악한 바알 숭배자

182. 이스마엘 - 육체를 따라 난 자

183. 이스보셋 - 사울 왕가의 마지막 왕

184. 입다 - 서자 출신의 사사

185. 잇사갈 -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지파

186. 하갈 - 쫓겨난 사라의 여종

187. 하만 - 자기 꾀에 빠진 유대인의 원수

188. 하와 - 인류의 첫 어머니

189. 학개 - 성전 재건을 독려한 선지자

190. 한나 - 기도의 어머니

191. 헤로디아와 살로메 - 희대의 간부(奸婦)와 그 딸

192. 헤롯 대왕 - 폭력과 불의의 왕

193. 헤롯 안디바 - 부도덕하며 우유부단한 왕

194. 헤만 - 충실한 성가대장

195. 호세아 - 회개를 호소한 사랑의 선지자

196. 홉니와 비느하스 - 악행을 일삼은 타락한 제사장들

197. 훌 - 모세를 도운 인물

198. 히람 - 성전건축을 자원한 두로 왕

199. 히스기야 - 신앙 부흥과 기도의 왕

200. 힐기야 -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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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이름의 뜻과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과 그 이후
교회의 반석이 된 사도

1. 베드로의 본명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3대 제자이자 수제자였는데,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요하나(히브리어)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요하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른 것인데, 

"바"는 아람어로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요나는 '요하나'의 약칭입니다. 

2. 예수님이 바꾸어준 이름 베드로의 뜻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준다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고, 그 이후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게바"(아람어) 즉, "베드로"(헬라어)로 바꾸어 줍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라는 말은 본명과 예수님이 변경한 이름을 두번 나열한 것으로서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한복음 1장 42절 

게바 또는 베드로의 의미는 반석이라는 뜻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7-18절)

즉, 베드로의 위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가다. 

1. 반석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 

위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의 이름을 받았고, 실제로도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고, 그것이 바로 당시 베드로가 믿고 있던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한복음 13장 37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은밀하게 뒤따라 간 그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공범이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게 되자, 자칫하면 자신도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무서운 현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두려움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무려 3번이나 부인하였는데, 특히 3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예수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였으며 결국 심한 자책감으로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장 60절 ~ 62절)

반석인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무섭고 냉혹한 현실과 두려움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여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의 의미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 그 첫 사랑에 불타오르거나 새로운 사람이 된 감격으로 그 이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후 수 없이 많이 넘어지고, 죄도 짓고 심지어 낙심하여 주저 앉게 되는 그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어 레전드 그리스도인이 되다. 

1. 예수님을 부인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의 삶과 고민 

베드로는 그 이후부터 다시 예전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건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으며 하루에도 수십번도 넘게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어부로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그 시간들보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구나. 예수님께 모든 제자들이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고 죽음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그 고백도 거짓이 아니라 당시 진심이었고, 또 그렇게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자신까지도 속였던 것이구나.

막상 무서운 현실이 닥치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주님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불과했구나.

내 자신의 벌거벗은 비참한 모습을 깨달은 지금 주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고, 이렇게 물고기나 다시 잡아야 하는 몸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예수님이 잊혀지지 않고 그 3년의 시간을 부인할 수도 없으며, 다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일까.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 동일한 현실이 닥치면 다시 예수님 부인할거야.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런데 또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2.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다시 만난 주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디베리아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리라고 하셨고, 그대로 따르자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위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바로 그 만남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누가복음 5장 4절 ~ 11절 중)

베드로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한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예수님이 바로 신적인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엎드러 졌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콜링하였고, 베드로는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좇았고, 바로 그 순간이 베드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처음 만나 뜨겁게 살아가다가 자신의 참된 모습과 비참함을 깨닫고 주저앉거나 낙심한 베드로를 주님은 처음 콜링한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다시 진실하게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사도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 외침을 듣고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바다로 뛰어 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처음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던 그 때처럼요.  

베드로의 회복 

예수님은 모닥불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고,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동일하게 3번 질문하였고, 베드로는 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사랑하느냐" 

-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은 2번째까지 베드로에게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베드로는 2번 모두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답변하였으며, 마지막 예수님은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지 묻자,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적인 답변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베드로는 예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끝까지 따라갈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과 현실이 닥치게 되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고,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와 실체를 그때서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가슴과 영혼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 역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우정 정도로 사랑한다고 답변하였고, 주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부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책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자신의 정직한 실체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수준을 인식한 바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였으며,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박해가 무척 심한 상황에서 어느 성도가 배반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배반한 그 성도가 베드로 앞에 잡혀 와 살기 등등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베드로는 "용서하자"고 대답하였고,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죄인 중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 자리까지 이끄셨고, 자기 역시 그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사랑과 용서의 원천은 바로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예수님과 만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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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 /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라틴어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재임 26년 ~ 36년)
본티오 빌라도(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 유대의 속주로 다섯 번째 총독으로 유대인에 의해 고소된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한 인물이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에 따르면 ‘본티오 빌라도’는 예수를 고난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 당시 사건을 기록한 사복음서 등 성경 여러 곳에서는 본티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며 손을 씻고, 예수를 놓아주려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의 복음서 18:38)’
이외에도 요 18:31, 눅 23:20~23, 마 27:24~25, 마 27:19에 나와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
천주교에서는 '본시오 빌라도'라고 하며,
정교회의 신앙고백과 개신교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로 옮기고 있다.

본티오는 이탈리아 남부 중앙에 있던 고대 부족 집단 삼니움(Samnium) 주민이 사용한 가족 성(姓) 중 하나로서, 삼니움 주민은 나중에 로마인이 되었다.

빌라도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후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대 속주의 총독을 지낸 것과 기독교 신약성서의 짧은 기록 및 몇몇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의 유다인 학대 정책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실록 15,44;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다전쟁 2,9,4;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7)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가혹해서 횡포를 휘둘렀고 반역자는 법적 판결 심사없이 처형했다. 갈릴리인의 학살은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눅 13:1).[1]

성서에 묘사된 본티오 빌라도[편집]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


안토니오 시세리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폰티우스 필라투스(그림 가운데)가 좌측의 예수를 군중들에게 가리키고 있다.
로마 제국의 제5대 유다이아 총독
임기 26년 ~ 36년
전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후임 마르켈루스
군주 티베리우스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1세기
사망일 서기 39년
국적 로마 제국




본디오 빌라도

빌라도의 이름은 “창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로마의 무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였으므로 그 부모님이 장차 장군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름값을 하였다.
창과 칼을 사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로마의 자랑스러운 장군이 되었다.
그의 이름자 앞에는 “본도에서 승리한 기사”라는 영예스러운 칭호(본디오)까지 붙이게 되었다.
빌라도는 무인으로서 정상에 서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자는 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와 총리 그리고 지방에서 각 도를 다스리고 있는 백여명이나 되는 분봉왕과 총독들이 로마 제국을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군복을 벗고 로마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총독이 되고 훗날 더 큰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는(AD 14-37, 디베료 가이사, 눅 3:1)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변방지역 유다 땅에는 여전히 불순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황제의 최측근인 총리 세야누스를 찾아가서 자신을 유다 총독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곳의 불온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그를 설득했다.
AD 26년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소원대로 제5대 로마 총독이 되어 유다 땅으로 들어왔다.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는 무인으로서는 대단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란의 조짐에 대해서는 과감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했다.
발본색원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29년 갈릴리 사람들의 반로마 움직임을 탐지하여 그 주모자들을 잡아서 처형한 사건이다.
그들의 피를 제물에 뿌려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눅 13:1).
빌라도의 공포 정치의 효과는 대단했다.
제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뒤로는 반감을 크게 표출하면서도 앞으로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열심당원들의 움직임도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그저 약간의 극소수 열혈분자들이 간헐적으로 테러 행위를 감행했을 뿐이다.
십년동안이나 공포 정치가 진행되고 난 후 AD 36년에 큰 사건이 터졌다.
여리고의 불순분자들이 그들의 성지인 그리심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빌라도는 과감하게 로마 군대를 몰고서 그들의 성역을 침범하여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일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마침내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에 이르기까지 빌라도의 철권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연대되어 크게 일어났다.
극한 대결로 발전할 경우 유대인들이 많은 피를 흘리게될 것이고 그 반로마 정서는 이웃 지방으로 확산될 것이 뻔했다.
이 점을 우려했던 로마 당국은 얼른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해버리고 말았다.
유다 총독으로 머무르지 아니하고 이를 새로운 출발점으로하여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중앙무대 한 복판으로 진입하기를 원했던 빌라도의 꿈은 민심을 얻지 못하여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빌라도의 이름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렇게 좋지아니한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최종 결정한 악의 화신이 본디오 빌라도이기 때문이다(마 27:36, 요 19:13-16).
그런데 이 견해는 약간 수정을 요하고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앞 길 창창한 자신의 장래를 이 때문에 망치지 아니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빌라도를 구석으로 몰아서 그와 같이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묘한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주어 빌라도가 그와 같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는 누구인가?
이들의 공동정범(共同正犯)적인 행위를 정확하게 따지지 아니한 채 본디오 빌라도만을 단독정범으로 몰아서 역사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옳지못한 처사이며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권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권세를 받아들이느냐하는 선택만이 인간의 몫인 것이다. 당사자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른다. 그렇지만 그 권세를 쥐어준 자와 그 권세를 발동시키도록 예수를 넘겨주고서 압력을 가한 자의 죄는 더 큰 것이다”(요 19:11).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빌라도의 약점이 다음과 같이 노출되고 있다.

첫째, 그는 정치적인 이슈에 있어서는 소신있는 입장표명과 확고한 행동으로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예수가 무죄이면 무죄방면해야 했으며 유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죄로 처벌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의 또다른 의미 “확고히 하다"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둘째, 책임회피에 급급하여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우겼다.

제사장에게(요 18:31), 헤롯 왕에게(눅 23:7, 12) 그 책임을 떠넘기다가 끝내는 유대인 대중들에게(눅 23:22-25) 예수의 핏값을 떠넘기는 비겁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셋째, 손을 물에 씻어서 잘못된 판결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마 27:24).

넷째, 예수를 잘못 사형시킨 책임을 추후 로마 당국으로부터 추궁받게될 것을 염려하여 예수가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자이므로 그를 처형하지 아니하면 반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역사를 날조했다(요 18:33, 39, 19:14-15, 19-22).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빌라도의 모습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강한 무인으로 보이고 싶었던 장본인 그래서 공포 정치를 과감하게 실시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였지만 그 내면은 비겁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출세하기 위하여 위아래 눈치를 보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성공 지향, 출세 지향적인 사고방식
둘째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권세 가운데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동화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마태복음 27:1-26)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이방인으로서 빌라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단지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잠시 등장했을 뿐인데, 어찌 이토록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 기독교인들이 수시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책임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고, 몇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노력하는 등,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비쳐지는데,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빌라도’라는 이름만이 사도신경에 선명히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저주스러운 이름이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총독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땅은 그의 유언대로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로마제국은 이들에게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다.
그 가운데 헤롯 대왕이 직접 통치하였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된 분봉왕은 아켈라오였다.
그는 부친 헤롯대왕의 성품을 쏙 빼닮아 잔인했다.
아켈라오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통치를 감행하다, 결국 AD6년 아구스도 황제의 재판을 받고 고울지방으로 추방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아켈라오가 추방된 뒤, 유대와 사마리아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로마는 총독을 파견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파견된 총독이 바로 빌라도이며, 그는 유대에 파견된 제5대 총독이었다. 로마는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황제 밑에 13명의 총독을 두고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그의 이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본디오 가문은 로마제국의 지방호족이었고,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으로 무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통해 볼 때, 로마제국 초기의 기사 가문 출신으로 어떤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아 로마제국에서 이같은 지위를 누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는 A.D.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이다.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다.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 공의회를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많은 세리들을 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A.D.6-7년에는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갈릴리지방의 유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하에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행 5:37 참조)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그의 소유물 중에 대제사장의 의복도 포함되었는데, 빌라도가 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그는 그 의복을 가지고 가서 유대인들에게 빌려 주었다고 한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약 18년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직하다 AD36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직접 연관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았던,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잠시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다보니, 빌라도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그는 기사 가문 출신답게 무력을 앞세워 횡포를 일삼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총독 휘하의 군대 사령부를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황제의 상과 함께 그들의 군기들을 거룩한 신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유대 백성들은 격앙하여 떼를 지어 가이사랴로 몰려가 그에게 유대인의 종교에 대한 이러한 횡포를 중지해 달라고 탄원했다. 닷새동안 고집을 부리다가, 그리고 폭동을 진압하려는 부분적 시도도 해본 후 마침내 빌라도는 굴복한 적도 있다. 전임 총독들은 이러한 문제가 가져오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일은 되도록 피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했으며 그 일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궁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져 있는 금도금한 방패를 걸어 놓았으며, 유대인들의 극심한 상소에 따라 디베료 황제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그것을 치우기를 거부했다. 그는 상수도 건설을 위하여 성전의 금고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이것은 또 한 차례의 폭동을 낳았고, 이 폭동은 폭도들뿐만 아니라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학살하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눅13:1에 잠시 언급되어 있듯이,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의 북쪽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남쪽의 전통적인 유대사람들에 비해 성품이 강렬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의 점령에 가장 끈덕지게 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빌라도는 갈릴리인들의 지하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그들을 무참히 죽였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로마 경비병은 관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을 곤봉으로 쳐죽였다고 한다.

이같은 일들로 야기된 긴장은 빌라도의 위치를 약화시켰으며, 유대인의 불만은 로마에 계속 전달되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켰던 유대왕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빌라도는 ‘고지식하고 무자비하고 완고한 자’로 그려지고 있으며, 또한 ‘부패, 폭력, 강도, 학대, 억압, 불법적인 처형, 그리고 끊임없는 가장 가혹한 잔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빌라도는 A.D.36년 사마리아인들의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 조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평소 빌라도의 이같은 무자비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자칭 왕이라 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면, 쉽게 사형언도를 내릴 것으로 판단하고 빌라도에게로 몰려갔을 것이다.

한편,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분명히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당시에 빌라도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무죄한 사람을 유죄판결하는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만 것으로 볼 수 있다.

● 하지만, 빌라도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로마인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고, 남의 말에 쉽게 부하뇌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기간이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예루살렘의 치안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그에게 끌려오게 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였다. 1)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자칭 왕이라고 했다.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처형을 요구하자, 때려서 놓으리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그 아내의 말대로 예수의 판결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다. 빌라도는 양심과 의협심에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편의 위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다.

지혜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현명하면 무엇하나? 로마의 최고학문을 배우면 무엇하나? 권력과 재물과 기술이 있으면 무엇하나?

진실되게, 바르게, 공명정대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용지물이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지혜는 간사가 된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패가망신케 하고,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된다. 어찌 빌라도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온갖 부정부패, 비리, 권력남용, 권모술수와 책임회피, 공갈협박, 무력, 테러...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어떤 핑계가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그의 소극성, 사특한 지혜, 권력 유지를 위한 권모술수는 예수를 죽였다. 백성의 고함 소리에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3일 밖에 잡아두지 못했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은 것은 3일에 불과했다.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이 되어 역사에서 물러갔으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사흘의 고난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 어둠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은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이 넘칠 것이다. 믿음을 가졌기에 당하는 작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3일의 고난뿐이다. 짧은 고난이다. 롬8:18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예수님께서 심판받기 위해 총독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옆에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와 고함지르는 군중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한번 둘러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 순간, 진정으로 심문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 앞에서 재판받고 있는 것은 고함지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어떤 소리를 따라 가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양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처럼 끌려오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듯이 주님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심판자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억울함, 고달픔, 배신감,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누가 심판해 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까? 진정한 재판관, 최후의 심판자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여러분의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을 믿습니다.

●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민란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준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 예수를 사형토록 허락하고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손을 씻은 것으로 보아 약삭빠르고 직무에 무책임했던 사람. 아내의 지혜로운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아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물. 폭동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것으로 보아 잔학하고 반유대적 성향을 지닌 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빌라도와 관련된 몇몇 전설들과 창작된 이야기만이 전해올 따름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예수님 처형 무효로 해달라" 케냐 변호사 소송 제기

* 케냐 천주교 신부 / 돌라 인 디디스
2000년 전 빌라도 재판을 무효하다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 하였다.



케냐에 거주하는 한 변호사가 국제사법재판소를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돌라 인디디스(Dola Indidis)라는 이름의 이 변호사는 전 케냐 법관의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며, 종교는 가톨릭이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와 당시 유대인 장로들, 헤롯 왕과 티베리우스(로마 황제, BC 42~AD 37), 이탈리아 정부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인디디스 변호사는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예수님의 존엄성을 되찾고 대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하는 소송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지난 2007년 처음으로 나이로비 소재 케냐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케냐 TV인터뷰에서 "예수님의 부당한 죽음의 증거는 성경으로부터 비롯됐다. 증거는 오늘날 성경의 기록으로, 누구도 성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전례를 통해 충분한 승소의 개연성이 보이는 사건"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사건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유로는 인디디스 변호사가 소송을 제기한 해당 국가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관할하는 UN 소속 국가 영토에서 벗어나 있음이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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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왜 일주일 만에 처형당했나?
예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히스토리컬 픽션으로 풀어내다!

저항단체 지도자 유다는 로마의 점령을 전복시킬 계획의 시작으로 로마 병사를 암살한다.
엘르아살과 그의 아버지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도성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고 술책을 쓴다.
많은 백성이 메시아로 여겨 환호하는 인기 있는 선지자 예수에 관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 모두 다가올 유월절 기간에 사회 불안과 폭력 사태가 빚어질 것을 염려한다.
이런 긴장 상태의 와중에 예기치 않은 동맹 관계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 신약학자 애덤 윈은 역사상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 이야기를 신선한 상상으로 직조해 예수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구성해 낸다.
1세기 정황과 관련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윈의 내러티브는 복음서 기사의 여백을 메우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예수를 둘러싼 세계의 사회·정치·신앙 현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성경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 준다.

정치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정찰하고 정찰 당하는 이들,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로 가득했던 도성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책임 문제는 복잡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한 편에만 오롯이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누가 죽였는가?

이 책의 특징

- 히스토리컬 픽션(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복음서에 드러나지 않은 메시아 처형 사건의 행간을 속도감 있게 복원한다.
- 메시아 예수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 로마와 유대, 빌라도, 열심당원,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메시아 처형에 관여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 마가복음, 로마제국을 깊이 연구한 신약학자가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메시아의 죽음에 대한 담대한 가설을 제공한다.

지은이 / 애덤 윈(ADAM WINN)

메리 하딘 베일러 대학의 기독교학 조교수이다. 풀러 신학교에서 신약 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IVP Academic, 2018), The Purpose of Mark's Gospel (Mohr Siebeck, 2008), Mark and the Elijah-Elisha Narrative (Wipf and Stock, 2010)가 있고, 편집한 책으로 An Introduction to Empire in the New Testament (SBL Press, 2016)가 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로마제국과 신약성경, 1세기 기독교 운동 속 기독론에 관심이 많다.

옮긴이 / 오현미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종교개혁 핵심질문』(복 있는 사람), 『주목할 만한 일상』(비아토르), 『폴 트립의 복음 묵상』(생명의말씀사),
『아름다운 안녕』,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이레서원), 『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CH북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CUP),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죠이북스) 등의 책을 번역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는 로마제국의 전성기였다.
로마제국의 통치 방식이 지닌 특징은, 점령은 하되 해당 지역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평화를 지켜 준다는 점에 있었다.
다신교 체제의 로마 입장에서 유대 지역은 참으로 '괴랄한' 곳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일신 신앙과 제례를 철저히 고집하면서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 소요와 봉기가 끊이지 않았던 유대 땅은, 제국을 통째로 뒤흔들 큰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역 분봉왕(헤롯)과 총독(빌라도), 유대 대제사장(가야바)의 역학 관계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거기에 다양한 그룹(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등) 간 갈등까지 얽힌 유대 지역에 예수라는 갈릴리 '컨츄리' 선지자의 등장과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점들은 이 책에서 적당한 상상을 더해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선다.
수많은 이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며 각자 뜨거운 욕망을 분출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1세기 이후로 예수는 항상 욕망의 정치 한가운데서 표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줄 평 : 정치와 종교의 욕망이 한데 어우러진 1세기 예루살렘의 그날들.

책을 덮은 뒤 '예수 없는 예수 소설'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 주인공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웠다.
최근 계속 출간되는 1세기 관련 신학 소설들이 건네는 교훈과도 결이 달라 보였다.
저자는 신약학자로서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 관련 최신 연구를 토대로 십자가 처형이 당대 정치·사회를 아우르는 다층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신중하고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1세기 자료와 복음서 사이를 줄타기해 그린 시대적 배경 위에, 열심당원, 밀정, 종교 지도자, 빌라도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예수 처형을 둘러싼 긴박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저자는 이 음모의 중심에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며 책임과 파문에서 빠져나갈 전략을 짠 빌라도를 위치시킨다.
십자가 처형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 탓으로 돌려 반유대주의의 비극이 펼쳐진 2000년 역사를 성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직전에 읽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현대문학)와 겹쳐 보다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다.
폴라 구더의 <이야기 뵈뵈>(에클레시아북스)에 비해 그저 배경 장치로만 등장하는 듯한 여성 서사의 공백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뭇 그리스도인이 줄곧 낭만적인 신앙 연애 대상으로만 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날것 그대로 보여 주는 스릴러 느낌이 흥미로웠다.
마치 새로 쓰일 <의인을 찾아서>(새물결플러스)의 각본 같았다.
읽는 이마다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줄 평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의미를 새롭게 구현한 역사 스릴러.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본디오·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치하에서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AD 26-36)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직접 주관하였던 인물로서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사도신경에서도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하였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원한과 감정으로 대립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필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특별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휘장을 사용하거나, 빌라도와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방패를 걸어 놓음으로서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또한 빌라도는 성전의 보물들을 압수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로와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강탈자와 포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13:1에 의하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극악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기 전에 그의 총독직을 위협하는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봉기는 로마군을 투입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속화시키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즉각 폭동을 일으켰다.
빌라도는 5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번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에 세운 「로마」기념비를 제거하라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아내의 청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석방시키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은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에 대한 판결을 바꾸어버리는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마리아의 거짓 선지자가 그리심산에서 성전보물을 찾아내겠다고 주장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으로 몰려 들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빌라도는 군중들이 갑자기 모임으로 인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유대인들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사마리아 지방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 때문에 빌라도는 AD 36년에 로마로 소환 당하고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가「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항상 예수의 비극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수년 후에 칼리쿨라 황제때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주장에 의하면 네로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하며,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특히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던 그의 아내는 프로쿨라라고 알려져 있는데,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가 추앙을 받고 있으며, 희랍정교회는 그의 아내 프로쿨라만이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가. 제1차 총독 시대
(AD 6년 ~ AD 41년)

헤롯 1세(Herod Ⅰ, BC 37년 ~ BC 4년)가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헤롯 왕조(BC 37년 ~ AD 70년)가 성립되었습니다. 헤롯 1세는 로마에 충성하며 유대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 시기 로마는 그를 통해 이 지역을 통제하였습니다.

​BC 4년 헤롯 1세는 사망 직전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2세 등 3명의 아들에게 유대 왕국을 분할 상속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갈릴리, 베레아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인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아우라니티스, 드라고닛, 이두래를 분할 받았습니다.

AD 6년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의 가혹한 통치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 반란이 거듭되었고, 유대-사마리아 지역의 귀족들은 로마 제국 황제에게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해 달라고 고소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August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아켈라오를 갈리아(Gaul) 지역 나르보덴시스로 추방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빈(Vienne) 지역입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총독(행정 장관)을 파견하여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에 의한 제1차 총독 시대는 AD 6년에서 AD 41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행정 장관)은 행정 수도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머무르며 유대(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나. 유대 지역 5대 총독 : 본디오 빌라도

AD 26년 로마 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는 폰티우스 필라테(Pontius Pilate, AD 26년 ~ AD 36년)를 유대 지역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티베리우스를 디베료(Tiberi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글 성경에서는 폰티우스 필라테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행정 장관)으로 부임하던 때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디베료가 카프리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근위병 세야누스가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갈릴리-베레아 지역의 분봉왕 헤롯(헤롯 안티파스)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행정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로마 제국 황제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를 저지하려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명령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기세에 눌려 가이사랴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수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성전세)를 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AD 36년 본디오 빌라도가 사마리아 학살 사건으로 로마로 소환되었고, 자살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크리스트교도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콥트 교회 및 에티오피아 교회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와 그의 아내 프로쿨라(Procula)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다. 신약 성경과 ​본디오 빌라도

로마 제국 시대 유대의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고 십자가형에 처한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시기에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자신은 무죄하다고 말하며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그가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태복음 27:24)

본디오 빌라도는 AD 26년에서 AD 36년까지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1절의 내용을 보면 디베료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베료 15년은 AD 28년에 해당하며, 이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누가복음 3:1)

로마 제국의 역사와

성경 내용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CLC)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가

역사적(세계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경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고 소개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웃님들 함께 읽어주시고

주변에 소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를 소개드립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수메르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이르는 세계사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역사를

균형 있게 엮어낸

성경 이해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아시아사 및 서양 고대사,

특히 세계사 교과서에서 접하는

12개 고대 국가(문명)와

성경(성경 역사)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메르(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헤브라이,

페니키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의 역사는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과

역사적 무대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성경 역사)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12개 고대 국가(문명)의 역사와

성경 역사의 관련성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의 역사적 배경 이해에 갈급했던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의

지적 욕구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역사교육자이자

성경학을 전공한 그리스도인인

저자의 균형적 성경 이해 시도는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던 역사적 인물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이다.
AD 26년,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에 의해 유대 지역의 제5대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수리아 지역을 관할한 비텔리우스(Vittelius) 총독에 의해 면직되던 AD 36년까지 약 10년 간 유대에서 총독으로 있었다.

AD 26년 이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반면,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다.
복음서에 나타난 인상과는 달리 요세푸스나 필로는 그가 매우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잔인한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총독으로서의 빌라도 :
빌라도의 본군은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는 분견대를 두었다.
당시 주둔군은 약 120명의 기병대와 2,500-3,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빌라도는 주로 가이사랴에 머물렀지만 유월절과 같이 이스라엘의 특별한 절기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며, 이때에는 병력을 보강해서 민란 방지를 위한 순찰을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총독으로서의 권한은 막강해서 사형 집행권을 비롯해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과 성전의 돈을 통제하는 한편 대제사장의 예복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절기 때만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산헤드린 공의회가 결정한 주요 재판 결과까지도 바꿀 수 있었다.

 

빌라도와 유대인과의 관계: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총독직을 맡으면서 황제의 상(像)이 그려진 로마 군기를 예루살렘에 세움으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그 군기는 가이사랴로 옮겨졌다.

필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관저에는 총독과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한 세트의 황금 방패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디베리우스 황제에게 진정이 들어와 그것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세워 두라고 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와 요세푸스는 빌라도가 성전 금고의 돈을 수로를 건설하는 데에 유용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복음 13:1-2은 빌라도가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의 본거지인 갈릴리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죽여,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이 성전 금고의 돈을 유용한 것으로 시위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입장과 무관하다는 입장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빌라도에 대한 헤롯의 적대감(눅 23:12)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 앞에서 재판 받도록 보낸 것(눅 13:4)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헤롯에 대한 유화 제스처임을 알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게 된 배경: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도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요 18:38)고 까지 말했다. 요한은 그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요 19:12)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다.

 

이는 고위층의 유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임기 중에 민란이나

큰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마 27:24-25).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대해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지만(마 27:24) 예수님의 재판 사건에서 사형을 언도한 그의 책임은 면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성을 증거해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었던 것으로 보아(마 27:19) 유대 지역으로 부임할 때(AD 26년) 그의 아내도 함께 왔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들이 부임지에 아내를 대동할 수 있다는 원로원의 결정이 이미 AD 21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마 27:19)이라고 불렀으며,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 대해 상관하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녀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 속에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무죄하심과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부당함을 증거해 주는 여러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기 묵시 문학에 의하면, 빌라도 아내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ula) 였으며,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희랍 정교회에 의해 추앙을 받고 있다.

바라바(Barabba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 수감되어 있었던 유명한 죄수로 폭도였으며 살인자였다(마 27:16; 눅 23:19).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할 때 군중들은 ‘바라바’라고 외쳤다(마 27:2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15).
그 후 바라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새 언약



새 언약 /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의미와 종류, 특징

‘언약’(covenant) 또는 ‘계약’은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의 ‘브리트’와 ‘디아테케’를 번역한 것으로, 흔히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서로의 신뢰 관계를 확증하는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언약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이 두 언약이 다 언급돼 있다. 전자가 쌍방 합의 하에 맺어지는 성격을 갖는다면, 후자는 사람의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수평적인 차원에 속한 언약의 예로는,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맺는 언약(창 21:27, 32)이나 라반이 야곱과 맺는 언약(창 31:44), 이스라엘 자손과 기브온 주민 사이에 맺어진 조약(수 9:6, 7, 11, 15, 16; 개역 개정판은 ‘브리트’를 “조약”으로 번역함),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과 맺고자 했던 언약(삼상 11:1),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어진 언약(삼상 18:3; 20:16; 23:18), 다윗과 아브넬의 언약(삼하 3:12-13, 21), 다윗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 사이에 맺어진 언약(삼하 5:3; 대상 11:3), 솔로몬과 두로 왕 히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상 5:26; 개역 개정판은 ‘브리트’를 “약조”로 번역함), 제사장 여호야다와 백부장들 및 온 회중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하 11:4; 대하 23:1, 3, 16), 요시야 왕과 유다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하 23:3),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이 가룟 유다와 맺은 언약(눅 22:3-4), 그리고 한 번 정한 후에는 누구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약(갈 3:15)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수직적인 차원의 언약에는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과 맺으신 언약(창 1:26-29; 2:15-17), 범죄한 인간과 맺으신 언약(창 3:15), 홍수의 주인공인 노아와 맺으신 언약(창 6:18-21; 9:1-17),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맺으신 횃불 언약(창 15장)과 할례 언약(창 17:1-14; 행 7:8),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 자손과 맺으신 이른바 시내 산 언약(출 19-24장),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과 맺으신 언약(삼하 7:5-16), 예레미야 31:31-34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새 언약(눅 22:20; 고전 11:25; 고후 3:6; 히 8:8, 13; 9:15; 12:24) 등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수평적인 차원의 언약이 아니라 수직적인 차원의 언약이기에, 이 글에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맨 처음 인간 : 하나님의 형상과 선악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간 창조에 대해 가장 많은 설명을 곁들인다. 이는 인간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창조가 창조의 절정에 속한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1:26-28). 또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공작(工作)에 의해 창조됐다(2:7, 22)는 점에서 창조의 정점에 속하는 존재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언약의 증거로 그에게 약속과 복을 주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언급하는 창세기 1:26-28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26절과 28절의 반복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참조. 시 8:5-8).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해서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지고 자연 세계를 마음껏 파괴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소유물을 잘 관리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에게 식물로 주신다(29절).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단순히 사람을 비롯한 온갖 생명체를 만든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식물을 마련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생명을 계속 지탱해갈 수 있게 해 주셨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제약이 따른다. 이른바 선악과 언약이 그렇다. 피조 세계 다스림의 복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형상 언약은 온갖 식물을 인간에게 식량으로 허락했지만, 그들이 경작하며 지켜야 할 에덴 동산 중앙의 선악과 열매만큼은 예외로 삼았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언약의 조건(2:16-17)이 그렇다.
이러한 선악과 금지의 조건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즉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명령하는 분이시요, 피조물인 사람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결코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피조물인 사람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도 같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피조물이기를 중단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3:4-5)이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범죄한 인간 : 원시 복음

창세기 3장은 악의 시작과 인간의 범죄 및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심판 후에 있을 새로운 구원 은총 등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창세기 3장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어떻게 해서 훼손됐는가,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불평등의 관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인간 세상에 왜 고통과 수고가 계속되는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왜 생겨난 것인가 등등의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는 단락이기도 하다.
창세기 3장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의도를 염두에 두면서 이 단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맨 먼저 간교한 뱀이 여자에게 나타나 여자를 유혹한다. 마침내 뱀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자기 남편에게도 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에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의 벗은 몸을 가린다(6-7절).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아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차례대로 심문하신 후에 뱀, 남자, 여자의 순서로 벌을 내리신다(8-19절). 여자의 이름이 남자에 의해 “하와”로 칭해진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다(20절). 아울러 하나님은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그들이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게끔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신다(22-24절).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가 뱀에게 벌을 내리시는 맥락에서 언급된다. 뱀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14-15절)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하나는 뱀이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배로 다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평생토록 흙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흙을 먹는다는 것은 벌을 받아 가장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시 72:9; 사 49:23; 65:25; 애 3:29; 미 7:17 등을 참조). 뱀에게 내린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뱀을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뱀 숭배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뱀에게 내린 두 번째의 심판은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인 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볼 때 인간과 뱀 사이의 관계, 즉 뱀을 혐오하는 인간 측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사 11:8 참조). 여기서 말하는 “후손”은 히브리어로 ‘제라’라는 낱말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손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보다 깊은 의미는 악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영적인 싸움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싸움은 사탄에 대해 승리를 거두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심판의 말씀이 그리스도가 사탄에 대하여 거둘 승리를 가리킨다고 이해한 초대 교회의 이레네우스(Irenaeus) 이래로 이 말씀을 이른바 “원시 복음”(proto- evangelium)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말씀이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있을 투쟁 관계만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과 악 사이의 오랜 싸움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결말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에 대해 거두시는 승리는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오랜 싸움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 말씀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뱀에게 내린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언약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수의 주인공 노아: 무지개 언약
창세기 4:16-24에 있는 가인의 족보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셋에게로 이어지는 아담과 하와의 족보(5장)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기본 성격은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족보는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인간의 선함과 신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아담과 하와의 족보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노아 시대 사람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생활상이다(6:5, 11-12).
인간 세상의 이러한 극심한 죄악상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마침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신다. 이를 위해 그는 지상 세계에 큰 홍수가 나게 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과 짐승들을 물로써 멸하신다. 그러나 의롭고 경건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큼은 홍수 심판의 와중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창세기 6장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구원을 언약의 맥락에서 언급한다. 1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맺으신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칭하시면서, 그의 여덟 식구들과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들어가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끝장 내지 않으시고 인류 역사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을 벌하시지만 결코 인간 역사가 중단되게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된 것으로써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구원 은총에 속한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18절).
홍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9장은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 은총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 준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인간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노아의 모든 식구들과 그의 후손들 및 모든 생물들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우주적인 언약(cosmic covenant)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죄→심판(홍수)’의 원리에서 인간에 대하여 무한한 인내심을 베푸시는 ‘심판→은혜’의 원리로 전환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무지개”(rainbow)라는 히브리어 낱말(‘케쉐트’)이 갖는 본래적이고 일반적인 의미가 전쟁 무기로서의 활(bow)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기 사용을 포기하셨음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볼 때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9:1-17의 노아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맨 먼저 창세기 1:28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갱신하심으로써, 홍수 심판 후 피조물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에 의해서 생육, 번성하는 것임을 선언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규정하시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갱신함과 동시에 피를 제외한 육식을 허용하셨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음을 재확인하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듭 천명하셨다.
이상의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언약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안전하고 확실한 인격적 관계가 함축돼 있는 바, 이는 신들과 인간 사이의 임의적이고 비인격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고대 근동 지역의 홍수 설화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 횃불 언약과 할례 언약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바벨론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부르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다. 그러고서는 그에게 두 가지 약속, 곧 자손의 약속과 땅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창 12:1-3). 그러나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오래도록 자식이 없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있는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정해 놓고 있었다(15:2-3).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몸에서 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아울러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5:1, 4-21).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언약 체결의 양식을 통해 주어졌는데, 그것은 곧 희생 제물들의 몸을 둘로 쪼개어 놓고 하나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방식이다(9-17절). 이러한 언약 세움의 절차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브리트’는 본래 “… 사이”(between)를 뜻하며, “자르다, 베다”(cut)를 뜻하는 ‘카라트’라는 동사와 결합하여 “언약을 맺다”는 뜻의 숙어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하여 “… 사이에(를) 베다”는 뜻이 “언약을 맺다”는 뜻으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언약을 맺을 때 소나 양 또는 당나귀 등의 몸을 둘로 쪼개어 서로 마주보게 한 다음에, 언약 당사자들이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곧 언약 위반자가 언약 체결의 증인으로 나오는 신(神)에 의해 그 쪼개진 짐승의 몸처럼 쪼개어질 것이라는 저주 의식을 뜻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언약 체결 양식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적용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암송아지와 암염소 및 숫양 등의 몸을 둘로 쪼개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고서는 하나님이 친히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그 언약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처럼 두 쪽이 나도 좋다는, 하나님 자신의 굳은 약속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시는 모습을 본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아무런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조건적인 언약(unconditional covenant)이요, 하나님 한 편만이 의무를 지고 있는 편무적(片務的; unilateral)인 언약이었던 것이다.
   이 언약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때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시금 그와 언약(“내 언약”; 17:2, 4, 7, 9, 10, 13, 14, 19, 21)을 맺으시면서, 그에게 언약에 순종하는 완전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셨다(창 17:1-2, 9). 이 언약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맨 먼저 이 언약은 아브라함이 크게 번성하여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요, 그에게서 나라들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17:4-6).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으로 바뀌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두 번째로 이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과도 맺으시는 것으로 이해됐다. 따라서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브리트 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그의 자손의 하나님도 되실 것이다(17:7-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언약은 태어난 지 8일 되는 모든 남자들의 포피를 베는 이른바 할례 의식을 통해 확실하게 보증되는 것이었다(17:10-14).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할례 받은 자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표시였던 것이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 시내 산 언약

출애굽 해방의 은총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에서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고(출 16장) 므리바에서 갈증을 해결한다(17:1-6).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워 승리를 거둔 다음(17:8-16), 출애굽한 지 3개월째 되던 때에 시내 산에 도착한다(19:1). 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이후로 지속돼 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인하는 성격을 가진다. 즉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때는 바로 이 시내 산 언약을 맺은 이후부터다.
모세 언약으로도 불리는 시내 산 언약은 사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 은총(출애굽 해방)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자발적인 순종과 응답의 체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출애굽기 19:5-6이 이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이 시내 산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참조, 벧전 2:9). 이것은 시내 산 언약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거나, 사람들을 강제하고 속박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제사장이 일반인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시내 산 언약에 의해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에 힘입어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이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시내 산 언약은 어디까지나 이미 조건 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함으로 응답해야 할 성격의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됨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경험한 오늘의 신자들이, 감사함으로 그의 법을 지킴으로써 생활 속에서 그가 원하시는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그의 현현(顯現, theophany)에 대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에는 성결한 생활, 의복을 청결하게 하는 일, 하나님이 나타나실 장소를 성역화하고 그곳을 침범치 못하게 하는 일 등의 세 가지가 포함된다(19:10-15).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화산 폭발과도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시내 산에 강림(19:16-18)하신 하나님은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언약 규정들을 주시고 희생 동물의 피로써 그 언약을 확정하신다(24:3-8). 언약 체결 절차를 모두 마친 후 모세와 70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른바 언약의 식사를 나눈다(24:9-11). 이 식사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보전했음을 축하하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몇몇 선택된 증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축하하는 감사제(感謝祭)의 성격을 갖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은 크게 십계명(20:1-17)과 언약서(20:22-23:33)로 나뉘며, 이의 구체적인 시행 방안으로 성막 건축과 레위기 제사법 규정이 뒤따른다. 모세는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언약의 중재자(mediator)로 나타나며, 십계명은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다른 계명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인 것이었다. 예레미야 34:18-20은 이것을 창세기 15장에 언급돼 있는 언약 체결 의식을 빌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바, 이것은 시내 산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인(conditional) 언약이요, 쌍무적(雙務的)인 언약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 다윗 언약

사울의 뒤를 이어 통일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남북의 중간 지대(지역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님)에 있는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해 정치적인 수도로 삼았다(삼하 5:1-10). 그리고 지파 동맹체의 모세 전승을 확보함으로써 종교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했다(삼하 6:1-19). 이로써 예루살렘은 다윗 왕국의 종교적인 수도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왕권을 견고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사울 때와는 달리 중앙 집권 정부를 구성하여 안정되게 나라를 통치했다(삼하 8:15-18; 20:23-26). 그 결과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에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로 그가 수도로 삼은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의 영향이 상존해 있는, 따라서 종교 혼합주의의 온상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제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동의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했다. 둘째로 가나안 원주민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긴장 관계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다. 셋째로 가정 문제가 심각했다. 배다른 자녀들(삼하 3:2-5)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밧세바 사건(삼하 11장), 다말을 강간하는 암논(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8장) 등이 그렇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통치 후반부에는 시므이의 저주(삼하 16:5-6)와 세바의 반란(삼하 20장) 등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나단 예언자를 통해 전달된 그 언약은 사무엘하 7장(시 89편과 132편도 마찬가지임)에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그래서인지 나단 신탁(Nathan’s Oracle)으로도 불리는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은 두 가지 중심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사람(다윗)의 선택이요, 다른 하나는 장소(시온)의 선택이다. 전자는 다윗 왕조의 연속성을 보증함으로써 세습 왕조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통일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다윗 왕조의 통치 거점으로 항구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는 다윗 언약은 앞에서 소개한 아브라함 언약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언약이요, 편무적인 언약임에 틀림이 없다. 설령 다윗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다(삼하 7:14-16; 시 89:30-37).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이 영원한 언약인 것(창 9:16)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 역시 영원한 언약인 것(창 17:7, 13, 19)과 마찬가지로, 다윗 언약 역시 영원한 언약으로 불린다(삼하 23:5).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조건적인 언약은 당연히 항구적인 효력을 갖는 편무적인 언약의 성격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다윗 언약 등은 조건적인 언약이면서 쌍무적인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시내 산 언약(또는 모세 언약)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개의 언약 전승이야말로 이스라엘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양대 축에 해당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달리 말해서 무조건적이고 편무적인 성격을 갖는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다윗 언약 등의 세 언약 전승과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성격을 갖는 시내 산 언약 전승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레의 두 바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

신약성경은 “새 언약”에 대해서 모두 일곱 번 언급한다(눅 22:20; 고전 11:25; 고후 3:6; 히 8:8, 13; 9:15; 12:2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곱 번의 용례 중에서 네 번이나 히브리서에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을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히브리서는 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히브리 사람들, 곧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쓴 편지인 까닭에,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의 주요 인물들보다 위대하신 분이요, 구약 시대의 옛 언약(또는 첫 언약, 히 9:15)을 새 언약으로 대체하신 이면서 동시에 새 언약의 중보자시라는 점을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떡과 잔을 나누시는 중에 포도주 잔을 일컬어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눅 22:20). 이 말씀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새 언약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5에서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그대로 성찬 예식의 말씀으로 사용한다. 그는 또한 자신을 비롯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일컬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칭함으로써, 율법 조문에 매이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활동하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고후 3:6).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새 언약”이라고 칭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와 배경을 예레미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됐음을 알고 있던 그는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했다(렘 21:9; 38:2, 17-18). 새 언약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은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와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날에 세우셨던 옛 언약, 곧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렘 31:31-32). 시내 산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편으로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셨지만,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 일반 백성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에 바로 응답하지 못했다. 언약 위반의 범죄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렘 7:23-26). 그 결과 그들은 시내 산 언약의 저주 규정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요, 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만드실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인도할 이 새로운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죄인인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할 것이다(렘 31:33-34).
이 새 언약은 궁극적으로 다윗 언약의 성취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됐다. 이 점은 예레미야 31:31-34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8:8-13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주신 새 언약(고전 11:25)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됐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성찬 예식은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성도들에게 항상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넓게 보면 신약성경(New Testament) 전체는 그러한 새 언약의 결정체인 셈이다.


성경에 대한 거룩한 의문과 성경적 신앙 회복을 위하여


존 파이퍼 목사님은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p.131)면서, “성경에서 분명한 신학적 불일치를 보고, 그것이 통일된 진리로 다가올 때까지 밤낮으로 연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지혜 속으로 우리를 깊이 인도하는 것은 없다.”(p.135)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는 이처럼 분명한 불일치가 수백 개가 넘으며 이런 것들을 보고 연구하면서 통일성의 뿌리를 찾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심오하고 놀라운 해답이 있다.”(p. 135-136)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티모시 존슨 목사님은 「의문, 진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널리 알려진 기독교 관련 내용들에 대한 의문을 통해 진정한 믿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개하면서, 결국 실천신앙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통해 믿음이 정화될 수도 있다.”(p. 18).
“나는 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도그마를 아무런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의 기초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2).

마이클 프로스트 목사님(교수)은 「일상, 하나님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비록 책의 주제에 연관된 내용은 아니지만, ‘의문’이라는 관점에서 도움이 되는 표현이 있어 인용합니다.
“…더 현실적이고 참된 ‘두 번 태어난’ 믿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실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실감, 문제제기, 회의와 같은 것은 참된 믿음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인데, 그런 신앙은 남에게서 그냥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터득한 믿음이다.
마치 뼈가 부러졌다가 아문 곳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이런 믿음은 믿음의 상실에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강한 믿음이라 볼 수 있다. 믿음의 상실에도 결국 살아남는 믿음이리라.”(p. 158).

성경을 깊이 이해하려는 성도라면 성경의 난제에 관한 의문과정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비록 괴로운 과정일망정 힘닿는 데까지 고민해 봅니다. 때론 명확한 이해나 결론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자체를 통해 보다 많은 보화를 발견하곤 합니다.

성경에 대해 거룩한 의문을 지니는 것은 결코 불경스러운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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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반석을 명하라(민수기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나?
첫번째 반석은 깨져야 한다.
그러나 두번째 반석은 깨지면 안 된다.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누가복음 5:4-6)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요한복음 21:6)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첫 번째 돌 판과 두 번째 돌판(출애굽기 31:18, 34:1)

십계명 돌판 설교말씀 중에서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십계명 돌판이 있는데 첫 번째 돌판은 깨지고 다시 모세가 만들어 시내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은 깨지지 않은 두 번째 돌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율법을 상징
두 번째 돌 판은 복음을 상징

나는 첫 언약의 백성인가?
아니면 새 언약의 백성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이곳에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데 십계명과 성막의 식양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육적인 금식을 했지만 영적으로는 풍성한 양식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때에 사람이 양식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육의 양식으로 영의 것을 채우려고 하면 절대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나의 영혼을 채워야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은혜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생각들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휩싸이지 않고 영적인 하늘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첫 번째 돌 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돌 판은 깨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두 번째 돌 판을 직접 모세에게 만들어서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돌 판들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첫 언약과 새 언약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첫 번째 돌 판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돌 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내가 어떤 언약 백성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돌 판(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모세와 40일 동안 함께 하시면서 주셨습니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시련, 훈련, 결단, 기다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말씀의 훈련을 통하여 인내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인내입니까?
육적인 배고픔의 인내입니다.
40일 동안 모세는 육적으로 금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의 훈련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호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애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이유

성경을 읽는 두 가지 길 : 문자와 영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이 적힌 돌판을 갖고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돌판을 깨뜨리는 대목이 나온다.
분노 때문일까?
실망 때문일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써주신 돌판을 깨뜨린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돌판을 깨뜨린 모세의 행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모세의 이 돌발적인 행위에 하나님도 동의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을 때 반석을 치므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때는 모세의 분노에 대해서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돌에 새겨진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글자나 그것을 새긴 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판에 새긴 글자 속에 담긴 영적인 은총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차지할 수 있다.
영적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글자나 그것을 새긴 돌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오히려 맹목적인 신앙의 우상이 될 뿐이다.
우상은 깨뜨려야 하므로 모세는 그것을 알고 미리 돌판을 깨드린 것이 아닐까?

▲ 1887년 신학 전체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셔. (대한성서공회 자료실)ⓒ복음과상황 신철민
이 문제를 어거스틴은 “문자와 영에 관하여”(On the Letter and Spirit)란 논문에서 다루었다. 그는 ‘죽이는 문자’(Letter that kill)와 ‘살리는 영’(Spirit that give life)이란 개념을 가지고 율법과 복음을 설명했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은 이렇다.
기록된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허튼 소리(Nonsense)만 될 것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영적인 지각 능력을 가지고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 내적인 삶을 영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육적인 생각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법도 두 가지다.
문자로(in a literal sense) 읽는 것영으로(by spiritual intelligence) 읽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구약의 아가서를 문자로 읽으면 ‘인간의 탐욕스런 애욕’만 보지만 영으로 읽으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모세의 율법도 처음엔 영으로 기록된 문자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것이 더 이상 영적인 진리를 담을 수 없는 육적인 문자로 우상처럼 군림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것을 ‘깨뜨리셨다.’

그리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 새 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그 새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모세의 율법 속에 담겨져 있던, 그러나 문자만 숭상하던 세대들에 의해 그 의미와 능력을 상실했던, 문자 속에 갇혀있던 영이었다.

문자 속에 갇힌 영을 해방하는 것, 그것을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이라 서술한다.
그래서 개혁은 언제나 번역을 수반한다.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어거스틴의 중세가 열렸고, 라틴어에 갇혔던 말씀이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면서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시대가 열렸다.

옛 문자에 갇혔던 영이 해방되어 새 문자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개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점은 한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초대 교인들이 성경 읽던 법 : 외우며 실천하기

한글 성경이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은 개척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3년 전인 1882년이었다. 그 해에 만주 봉천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 그리고 의주 출신 교인들이 번역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인쇄되어 은밀하게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1885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이수정이 번역·인쇄한 마가복음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지고 내한하였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 역사는 성경을 바탕으로, 성경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었다. 사람보다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경 중심적’(Bible-centric) 사고와 문화가 형성된 것은 당연하였다.

▲ 한국최초의 성경 예수셩교젼셔.(대한성서공회 자료실)ⓒ복음과상황 신철민

한국 초대 교인들의 독특한 ‘성경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 사경회(査經會)다. 매년 농한기(1~2월) 짧게는 한 주일 길게는 보름씩 교인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수백, 수천 명 교인들이 양식과 이불 짐을 싸 들고 수백 리 길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은 사경회를 ‘한국의 유월절’(Passover of Korea)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 내용과 형식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사경회는 성경 통독과 암송을 위주로 꾸며졌다. 초대 교인들은 서당에서 경전(經典) 공부하던 식으로 성경 공부를 하였다. 서당에서 암기 위주로 공부하듯 사경회도 성경을 죽죽 읽어나가며 암송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사경회 마지막 날은 성경 암송 순서로 꾸며졌다. 1906년 겨울, 개성지방 사경회에 참석했던 데밍(C.S. Deming) 선교사의 보고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국인들은 뛰어난 암기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 공부와 관련해 다음 세 사람의 보고가 내 관심을 끌었습니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눈이 되어주어 복음서 전체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서 전체를 순서로 외울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 절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 문화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한 성경 공부의 깊은 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 교인들이 외우기만 열중한 것은 아니다. 암송은 실천을 위한 준비였다.

1907년, 한국교회에 대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 인천에 있던 선교사 존스(G.H. Jones)를 만나러 300리 길을 걸어온 교인이 있었다. 그는 선교사 앞에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 말씀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 보였다. 성경 암송에 집착하는 한국 교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선교사는 “성경은 외우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응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 성경을 외우려고 애를 썼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했습니다. 한 절 외운 다음 이웃을 찾아가 말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외워지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외우기’. 암기력이 뒤떨어진 시골 농부가 고안해 낸 성경 암송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초대 교인은 성경을 외워 말씀을 자기 안에 담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그 말씀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문자 속에 담긴 영이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그 영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꾸었다. 성경 말씀에서 만민 평등·천부 인권(天賦人權)을 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였다. 그 결과 복종과 순종만 강조하던 봉건시대의 수직적 옛 질서가 붕괴되고 대신 평등과 평화로 이루어지는 수평적 새 질서가 구축되었다. 역사가들은 그것을 ‘근대화’(近代化) 혹은 ‘민주화’(民主化)로 표현하였다. 한반도에서 말씀의 영이 만들어 낸 개혁의 역사였다.

새롭게 번역되어야 할 성경 : 열린 번역과 닫힌 번역

그런데 문제는 개혁의 종교가 영원히 개혁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 문자에서 해방된 영이 새로운 문자로 자신을 표현했다가 그 문자에 갇히는 형국이 될 때가 있다는 말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민족사에서 나름대로 개혁과 해방의 종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였던 기독교가 오늘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세력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이유가 뭘까? 개혁 직전의 역사처럼 교회가 문자에 사로잡혀 영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다수 한국교회에서 읽히고 있는 개역 한글판 성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개동시에 사람과 그 나귀를 보내고”(창 44:3)

문제는 ‘개동시’란 단어의 뜻이다. 한글로 그렇게 적어놓으니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개역 한글판보다 20년 전 번역본인 구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동틀 때에 사람과 그 나귀를 보내니”

‘동틀 때’라는 쉽고도 아름다운 단어를 ‘개동시’(開東時)라는 난해한 단어로 바꾼 것은 분명 ‘개역’(改易)이 아니라 ‘개악’(改惡)이었다. 1930년대 성경을 개역하면서 한문 문화를 숭상하던 유식자 계층 번역자들이 쉬운 한글 대신 이런 난해한 한문 투 문장을 택하여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성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넘는 절’(passover)이 ‘유월절’(踰越節)로, ‘누룩 없는 떡’이 ‘무교병’(無酵餠)으로 바뀌었다. 어느 대학생 성경 공부 모임에 가서 ‘사신우상’(邪神偶像)이란 단어의 뜻을 물었더니 “살아계신 우상”, “네 가지 귀신과 우상” 등등의 답이 나왔다. 잘못 읽으니 풀이가 잘 될 리 없다.

▲ ⓒ복음과상황 신철민

성경은 그 시대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한글 성경도 복잡한 번역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지만 지방 사투리로 된 것이어서 내한 선교사들은 초교파적으로 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신약은 1900년, 구약은 1910년에 번역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난 후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936~37년에 구약과 신약 개역을 완성했으며 이것을 1954년 한글 맞춤법에 의거 표기법만 바꾸어 ‘한글 개역판’이라 하여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교회가 ‘공인’(公認) 성경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사이 새로운 번역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 번역은 논외로 하고 성서공회가 발행한 것으로 1967년 ‘새번역 신약 전서’, 1977년 ‘공동번역 성서’, 199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가 나왔지만 성경 독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 교단에서 교리와 신학 전통에 어긋난다며 사용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번역’이라고까지 폄훼함으로 새로운 번역은 금기 대상이 되었다(할 수 없이 성서공회는 개역 한글판 성경의 오역과 난해한 표현을 바꾸어 1998년 개역 개정판을 냈으나 보수 교단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개역한글판’ 성경이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수고한 공로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은퇴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은퇴하려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하여 명예스럽게 퇴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원로 목사의 딱한 모습과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 한국교회는 70년 전에 번역된 문자에 매여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노령화 단계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와 문장으로 꾸며진 성경으로는 인내심이 약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열 수 없다. 0.1초 안에 원하는 사이트가 열리지 않으면 다른 사이트로 옮겨가는 컴퓨터 세대에게 ‘개동시’ 같은 단어로 점철된 성경은 열리지 않는 천국 문일 뿐이다.

새 번역이 나와야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청년들이 다 나가기 전에 이들이 읽을 수 있는 ‘열린 번역’이 나와야 한다.
70년 전 고어(古語)에 갇힌 말씀의 영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교리와 신조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교리지상주의, “일 점 일 획도 바꿀 수 없다”는 문자주의 오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리기 쉽지 않다.
버티고 서 있는 우상과 같다.
문자에 사로잡힌 우리를 자유롭게 할 힘은 영 밖에 없다.
자유롭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이들이 말씀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옛 문자에서 새 문자로 번역했던 4세기의 제롬과 15세기의 위클리프, 16세기의 루터와 틴데일, 그리고 19세기 말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초대 교인들에게 임했던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 8:32), 그 ‘진리의 영’(요 14:17)이 오늘 한국교회에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나는 그 영의 능력을 믿는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릴 수 있었던 용기의 근원인 그 영의 능력 말이다.



두 번째 돌판(출애굽기 34: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오늘 본문은 모세가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하여 시내산에 오른 것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다시 강림하시는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지시를 하시니 곧 두개의 돌판을 준비하는 것과 백성을 남겨두고 혼자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시내산에 다시 강림하셨고 거기서 그분의 이름과 본성을 새롭게 계시해 줍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 순종하는 모세, 여호와의 선포, 모세의 중보기도 등입니다.

첫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하여 모세는 구름가운데 6일을 기다렸습니다.
7일째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습니다.
아마 그 때 모세는 초 긴장 가운에 최대한 낮은 자세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하여 모세는 역시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아침에 산 꼭대기에서 보자고 하셔 새벽부터 서둘러 올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서 있었습니다.

돌판을 받기 위한 두 번의 만남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모세는 6일을 기다려야만 했고 하나님의 강림 시 그는 두려워 감히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은 기다리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즉시로 하나님이 강림하셔 모세를 만나 주었고, 그는 감히 서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거기 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내려오셔서 모세가 서 있는 곳에 함께 서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모세가 서 있는 장소로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해진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 사이에 하나님과 모세는 얼굴과 얼굴을 대할 만큼 그렇게 가까워진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 믿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많이 다녀도 하나님! 하고 부르면 1년이 가도, 5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그냥 밋밋하게 느껴 진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정말 내 옆에 계신 것처럼, 그런 느낌과 믿음을 가져야 정상이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그 정도 가까운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께서는 한량없이 용서하시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징벌은 면하지 않되 천 대에 비하여 아주 작게 보응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 대가도 묻지 않으시지만 다만 예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에 해당되는 죄 곧 습관적이고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죄는 용서하시지 않고 처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벌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 그런 견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죄와 벌이 있습니다. 사랑과 공의가 있듯이 범죄와 형벌, 용서와 대가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찾지 않으셨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용서만 있고 벌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 악해 졌을 지도 모릅니다. 불륜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가진 아기가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받았지만 그 대가를 치른 구약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불분명한 사건도 있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 왕자의 죽음입니다. 물론 전쟁 중에 죽었지만 모든 정황은 죄에 대한 대가임을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사울 왕은 몹쓸 짓을 많이 한 왕입니다. 그 아들 요나단은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다윗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인격이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용기도 대단합니다. 부관과 함께 단 둘이 적진으로 들어가 선수를 쳐 승리를 불러온 용장 중의 용장입니다. 그는 다윗이 왕위에 걸림돌이 될 줄 알면서도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다윗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는 다음 왕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던 왕의 후계자였으나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왕권을 스스로 다윗에게 양보한 그런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런 인물 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를 미리 제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만의 하나 틀린 말이 아닐지라도, 그의 인품을 본다면 그런 말을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간됨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윗의 왕권의 도전세력이 될 까봐 미리 치웠다고 보기에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사울 왕은 이미 벌에 대해 많은 경고를 받았던 자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닙니다. 그렇게 일찍 젊은 나이에 갈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 때문에, 그는 왕좌도 포기하여야 했고 어쩌면 생명도 잃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악행이 자손에게 돌아간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무지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짓지 맙시다. 죄의 시작은 달콤할지 몰라도 그 끝은 씁니다. T.V. 드라마에선 불륜을 미화하고 있지만 법과 성경에서는 외도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설령 용서받고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처음과 같지는 않습니다. 물에 젖은 두루마기 휴지를 말려서 써 본일이 있는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풀기 조차도 어렵습니다. 이미 원 상태를 훼손했기 때문으로, 외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일단 신뢰를 잃은 것이지요. 같이 살아도 상호 믿음을 한 번 잃으면 그 만큼 힘이 들기 마련인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큰 교회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사울 왕처럼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그만 선지자와 하나님의 경고에도 끔쩍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높은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이 아니네요.

세상에는 나이 먹을수록 더욱더 욕심을 내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젊더라도 진작 욕심을 포기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를 교만하다고 볼 수 있고 후자를 겸손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지만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대에 비하여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그 대가를 자손이 진다면 너무 큰 징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은 왜 두 돌판인가?(신명기 9:6-14)


이 글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왜 두 개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고 간략한 묵상 도식에 의거해 요약한 글이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1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관찰:

1.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9절)
2.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11절)

묵상:

3. 돌판이 왜 두 개인지를 묵상함.

느낀점:

4. 통상 알려져 있기를 모세가 받은 돌판은 두 개이며, 그곳에 기록된 것은 십계명이며, 그리고 그 두 돌판에는 각각 다섯 개씩의 계명이 기록된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5 X 2 라는) 기록은 없다.

해설:

5. ‘두 돌판’이라는 명칭은 출애굽기 34장 4절에 처음 언급된다. 깨뜨린 것을 다시 깎았다는 대목에서다.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ㅡ 출 34:4.

그 앞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판’ 혹은 ‘증거판 둘’로 언급될 뿐이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ㅡ출 16:34.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ㅡ출 25:16.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ㅡ 출 25:21.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ㅡ출 31:18.

즉, ‘증거판 둘’ 혹은 ‘두 돌판’의 의미는 우리가 연상하는 것처럼 5 x 2, 다섯 계명 씩 두 개의 이미지가 아니라 언약이 두 쪽으로 되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화되는 대목이 신약성서의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에서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ㅡ 마태복음 12장 37-40

유대교 랍비의 후예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늘려서 정리하고자 한 것에 반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신명기 법전 상에서) 두 개로 요약된 율법을 하나로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마가, 누가, 마태, 이들 셋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한 판으로 줄이고 있는 것은 마태라 할 수 있다.

현대 신학은 대개 아래와 같은 구조로 십계명을 분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1) 1부터 4를 對神(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5부터 10을 對人(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보거나,
혹은 2) 우선 4계 안식일을 중심 key로 두고서 1부터 3을 對神(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5부터 7을 對人(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나머니 8, 9, 10을 對物(사물에 대한) 계명으로.

그러나 두 돌판은 양 편에 어떤 분류법에 의해 갈려 있는지 공지하고 있지 않다.

결단과 적용:

6.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개도 지키기 어려운 계명을 그것을 늘려 수백 가지로 만들어 스스로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울은 죄가 율법을 만들었다 하지 않고 율법이 죄를 들여왔다고 이른 바 있다. 한 개를 잘 지키자

참고 글 : 613가지 율법 전문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7. 나― 잘 지키겠나이다.
너― 잘 지키게 하소서.
우리― 계명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림묵상

800px-Rembrandt_Harmensz_van_Rijn_079Moses Breaking the Tables of the Law (1659) by Rembrandt. (Gemäldegalerie, Berlin)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5~6분

이글은 기독교 계명이 다른 계명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약술한 글이다.

001

보편성

계명이나 계율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불교에도 기독교의 십계명과 꽤 흡사한 십중계(十重戒)라는 것이 있다. 유교에서 비롯된 충·효·예의 경우는 내세(來世)가 있는 강제 법령은 아니나 우리 사회 통념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계명의 요소를 띠고 있다 하겠다.

특히 불교의 십중계는 위 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의 십계명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는데도 둘은 비슷하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생태/환경 신학 하는 부류들이 둘 간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는 인간이 사회와 체계를 이루는 ‘보편성’의 단서일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계명은 다음 다섯 가지, ‘법’, ‘명령’, ‘계시’, ‘약속’, ‘영원성’ 면에서 현저히 다르다. 기독교인은 이 다섯 가지 특질을 반드시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법으로서 계명

기독교의 계명이 다른 계율과 현저히 다른 점은 우선 그것이 법(法)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장에 죄(罪)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불교식 카르마와는 다른 명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죄라는 말보다 ‘업’(karma)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실을 자극하지 않고 카르마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흠 있는 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법령이 있다고 했을 때(레 21장) ‘흠’이란 죄로 간주된 어떤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윤리적 범주 이상의, 여성 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체 장애를 지닌 사람까지 그 ‘흠’에 포함한다. 그것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죄’라는 개념이 운명 카르마까지 소급하고 들어가 압도해버리는 엄정한 법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계명’을 이 무지막지한 법 개념으로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고수하는 교단/교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변화 받지 못한 조폭이나 전과자, 고문 기술자, 아내 두들겨 패는 연예인까지 목사로 부를(calling) 정도로 법이 붕괴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령으로서 계명

두 번째 차이점은 ‘명령’으로서의 계명이다. 불교의 십중계(十重戒)와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에서 서로 다른 한자 ‘계’가 공교롭게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래와 같이 그 용례를 참조하면 그 명령 강도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불교의 십중계에 쓴 계(戒)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막아 지키다, 경비하다(警備–) 2. 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3. 타이르다, 알리다 4. 이르다, 분부하다(分付ㆍ吩咐–) 5. 재계하다(齋戒–) 6. 이르다.
반면 십계명의 계(誡)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2. 고하다(告–) 3. 분부하다(分付ㆍ吩咐–), 명령하다(命令–) 4. 훈계하다(訓戒–) 5. 경고(警告), 경계(警戒) 6. 교령(敎令: 임금의 명령(命令).

후자가 훨씬 명령의 강도를 세다.

한편, 유교에서도 충(忠)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역시 기독교 계명의 ‘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 계명은 보다 격상된 신적 명령에 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미개한 인신 번제로서가 아니라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God’s Imperative) 하나님 명령의 예이다. 그 명령을 잘 표현한 영어 문장이 있어 참조한다.

No Ifs, Buts, or Maybes … God’s Imperative
(‘만약에’도 아니고, ‘그러나’도 아니고, ‘아마도/어쩌면’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명!)

계시로서 계명

세 번째로 중요한 차이점은 ‘계시’라는 사실이다.

마음에 맞는 몇이서 ‘이게 좋겠다ㅡ’ 해서 만들어낸 조문이 아니라, 지구 바깥 누군가로부터(초월적 존재로부터) 받은 계명이라는 것이 기독교 계명의 차이점이다. 모세는 자기가 받은 계명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받은 말을 전하되 하나님의 입을 그의 입이 ‘대신’했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의 말씀을 제1 계시로 삼는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계시란 없다. 어떤 이단들의 흔한 교설처럼 어느 날 땅속을 파보니 책이 있더라ㅡ는 계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약속으로서 계명

네 번째로 다른 점은 기독교의 계명이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규범과 율례는 대개 그것을 준수하는 자신이나 그 자신이 포함된 세계에 이로운 준칙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거한 쌍방 간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주된 내용은 복(福)이다. 오늘날은 복의 의미가 퇴색한 나머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약속의 내용이 복이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목적에 부합하면(준수하면) 복에 이른다는 약속이지만, 반대로 준수하지 못하면 복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이제부터 저주를 퍼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을 걷어내자 가시와 엉겅퀴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계명의 영원성

이런 네 가지 토대 ㅡ 법, 명령, 계시, 약속 ㅡ 속에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신 것이다. 모든 복을 준행하지 못함으로써 나라도 빼앗기고, 성전까지 더럽히고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 백성의 의지까지 모두 박약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바로 그 약속을 근거로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약이 강제적인 이유. 참조 글: 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것을 다 무시한 채 전혀 엉뚱한 새로움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약속을 토대로 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물이 감하여 퇴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창 8:1).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그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출 2:24).

약속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겠는가.
그래서 약속/계약과 ‘기억’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이다.
(계약 = 기억)

왜냐하면 이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진시황제의 불로장생 개념이 아니라 기억과 약속(계약)에 의거한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영.원.한. 계약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이다.

새 언약으로서 계명의 형식: 내 법을 그들의 속에

그런데 그 ‘새 언약’에 이르러서는 이 법/계명이 우리 속(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렘 31:33).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렘 31:34).
이 ‘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개 우리는 자라날 때 아버지에게서 하나부터 열까지 배운다. 그것은 십계명/십중계와 같은 강한 금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충·효·예의 유연한 훈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되었을 때 그것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성으로서 법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변변한 육친의 아버지를 못 만난 예외의 사람들은 어떨까? (슬프게도 현대 사회일수록 그런 사람이 많다) 오히려 폭행만 일삼는 아버지도 있다. 하지만 그랬을지언정 피해자인 그가 어엿한 아버지(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분명 아버지로서 어떤 음성이 들린 것이다. 그 음성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못 된 아버지에게서 못 된 아버지가 난다는 것은 세속의 가르침이다. 그런 자는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려오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참된 아버지·어머니가 된 것은 학습으로 된 것인가? (십중계 식) 계명으로  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내면에 기록된 ‘내 법’의 예시이다.

새 법의 실현,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르기를 “계명에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반문하였다(요 12:34-35).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가 사람들을 이끄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안다.’
과연 그것을 배워서 알 수 있었던가?
그냥 아는 것이다.
내 마음에 심긴 ‘법’으로.

(믿음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는 것이다. 믿음을 배우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일련의 모든 것들이 다른 계명과는 다른 기독교 ‘계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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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흔히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등 3가지가 들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래의 ‘스크랩’ 글은 이 문제를 비교적 타당하게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곧 ‘정말 3가지가 법궤 안에 들어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입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 십계명 돌판 - 궤 속에 넣으라(출25:16).
○ 싹난 지팡이 - 증거궤 앞에 두라(민17:4).
○ 만나 항아리 - 여호와 앞에 두라(출16:33).

여기서 보면 십계명 돌판은 법궤 속에 넣는 것이 맞지만 싹난 지팡이나 만나 항아리는 법궤 안에 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두라.”는 것입니다. 법궤 밖입니다.

그런데 신약이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히9:4)라고 기록함으로써 3가지 성물이 법궤 안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습니다.

아래 스크랩 글도 “이 3가지를 법궤에 넣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이동의 편의에 따랐다.”고 설명하면서 “이 3가지가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은 400년 정도(뒤에서는 30~40년 정도)”라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계산된 햇수의 편차(400년 / 30~40년)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일단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정말로 3가지가 법궤 안에 들어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충분히 해소되었다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규빗’으로 표현된 법궤의 규모(2.5 x 1.5 x 1.5 규빗)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침으로써 오는 착각을 주시해야 합니다.

규빗이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 까지를 칭하며 대략 45.6cm쯤으로 간주합니다(창6:15). 물론 에스겔 환상에서는 ‘규빗 + 손바닥 길이’를 합친 대략 52cm쯤으로 간주합니다(겔40:25)

성경에 기록된 법궤의 크기를 cm로 환산하면 「114.0 x 68.4 x 68.4 cm」가 되고, 법궤의 가장 긴 거리(공간)는 당연히 빗변으로서 「131.2 cm」 정도가 됩니다.

이 직육면체 궤 안에 들어있는 3가지의 크기가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십계명 돌판은 성경을 통한 크기 추정이 무척 힘듭니다. 다만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출31:18)이라는 말씀을 고려하면 손으로 들 수 있는 무게의 돌 2개였고 크기는 미상입니다. 다만 법궤의 크기보다는 작은 길이와 폭을 지녔을 것이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둘째, 만나 항아리(히:친체네트)에는 한 오멜(omer)을 넣었는데 이는 2.34 lt(1.2되)의 양입니다(출16:33). 법궤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셋째, 아론의 지팡이는 앞에서 계산한 바대로 약 131cm 정도였을 것입니다.

결국 3가지가 모두 법궤 안에 들어가려면,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의 크기도 고려해야 하지만, 빗변 방향으로 넣더라도 지팡이의 길이는 131 cm이하여야 합니다.

영화 같은 곳에서는 모세나 아론의 지팡이가 키보다 크게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당시 모세나 아론이 썼던 지팡이의 길이를 정확히 계산할 방법은 없습니다.

육체적 또는 상징적 필요에 의해 지팡이가 사용되었다면 대략 1~2m 규모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실제는 양몰이 보조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추정이 타당하다면 법궤 안에 지팡이도 들어갈 수는 있겠으나 그 최대 길이는 위에서 계산한 131cm 이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 지팡이를 2 또는 3등분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성경 분위기상 ‘잘라서 넣었다.’고 추정하기는 곤란할 듯합니다. 이 경우는 고려에서 제외하였습니다.

♣ 의문 : 개략적인 계산 결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131cm’ 이하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가 차지하는 공간을 고려한다면 지팡이의 허용 길이는 조금 더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표현상으로는 분명 ‘안’에 보관한 시기가 있었던 것 같으나, 느낌상 지팡이를 법궤 안에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싶다. 조금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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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고고학) 법궤 (2510~22)


지성소는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1차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히9:1-3). 지성소에 들어가면 법궤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으며 두 그룹이 양편에 서 있다.

1. 법궤의 모양

가. 크기 : 가로 2규빗 반, 세로 1규빗 반, 높이 1규빗 반
나. 재료 : 조각목으로 만들어 안팎에 모두 정금으로 싸서 만들었다.
다. 모양 :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가 둘러져 있고, 금고리 넷이 있으며,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든 채가 꼽혀 있다.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을 금을 쳐서 만들었다. 그룹이 편 날개는 속죄소를 덮도록 하였다.


2. 법궤의 특징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히9:4).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는 법궤에서 만나 주셨다(출25:21-22).

모세는 모든 계시를 법궤에서 받았다(출25:22).

구약 시대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1차 법궤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나면 고핫 자손만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핫 자손은 성막이 이동할 때 법궤를 담당한 사람들이었다(민4:4-15).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제는 누구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법궤는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날아야 한다. 수레에 실어 끌고 가다가 법궤를 만진 웃사가 죽임을 당했다(대상13:1-4).

법궤는 거룩하기에 3번 덮고 날라야 했다(민4:4-6).

법궤는 거룩하기에 함부로 만져서는 안된다(민4:15). 법궤는 피 없이는 만질 수 없었다(레16:2; 히9:7, 22).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 법궤가 맨 앞에서 행진하였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12지파가 순서대로 뒤를 따랐다(민10:11-28).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가 앞장서서 진행하자 요단강이 갈라졌다(수3:1-17).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법궤가 앞장서서 돌았다(수6:1-8).

법궤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기적이 따랐다(민10:35-36).

3. 법궤 속 성물

법궤 속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이 들어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가. 만나 항아리 - 육신을 위한 양식
나. 십계명 - 영을 위한 양식
다. 싹난 지팡이 - 부활의 새생명

왕상 8:9에 보면 솔로몬이 법궤를 열었을 때 십계명 돌판만 들어 있었다. 이 세가지를 법궤에 넣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이동의 편의에 따랐다.

가. 십계명 돌판 - 궤 속에 넣으라(출25:16).
나. 싹난 지팡이 - 증거궤 앞에 두라(민17:4).
다. 만나 항아리 - 여호와 앞에 두라(출16:33).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성전에서 그대로 쓴 성막의 성물은 법궤인데, 1600년 법궤의 역사 중에서 이 세가지가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은 40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법궤 속의 성물에 대한 오해

법궤에 십계명,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히9:2-4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이 구절 때문에 법궤 속에 세 가지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궤가 만들어진 때가 BC 1446년, 법궤가 없어진 때가 AD 70년으로 지구상에 법궤가 있었던 기간을 약 1,500년으로 보는데 법궤 속에 세 가지가 들어있던 시간은 불과 30~40년으로 본다.

하나님은 법궤 속에 십계명만 넣으라고 하셨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는 넣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들고 다닐 때 이 세 가지를 넣은 것이다.

히9장은 레16장 광야시절을 베낀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법궤를 열어보니 하나님이 넣지 말라고 한 두 가지는 없어지고 십계명 두 돌판만 있었다. 그래서 십계명만 들은 법궤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4. 지금 법궤가 있는 곳(가설)

지금 이스라엘이 벌이는 운동이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즘의 핵심은 메시야의 도래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나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나 그 사상이 똑같다.

언제 메시야가 오느냐하면 첫 번째 세계에 흩어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와야 한다. 지금 이스라엘에 사는 백성이 400만명, 미국에 사는 이스라엘인이 600만명, 그 외 흩어진 백성이 500만명, 그들이 다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귀한을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두 번째 벌이는 운동은 법궤찾기 운동이다.

세 번째는 성지회복인데 바고 거기에 제3성전을 세워야 한다. 제3성전의 법궤는 모세가 만든 법궤여야 한다.

메시야(우리에겐 재림 예수)가 이사야서에 보면 제3성전 곡대기에 박을 디디고 내가 왔다고 선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법궤찾기 운동이 명렬히 벌어지고 있는데 어디에 있는가?

다름은 현재 법궤의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다.

가. 솔로몬이 시바 여왕을 만나고 보물 창고를 열어준 뒤 법궤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에디오피아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악숨 사원은 지금도 법궤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예레미야가 느보산 어느 곳에 숨겼다(마카비2서 2:4).

다. 주후 70년 로마의 티토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술 때 모든 성물을 가져갔다. 티토의 개선문에 등대가 조각되어 있다(등대의 그림 참조). 현재는 바티칸 궁전에 있을지 모른다.

라. 세월이 많이 지나서 없어졌을 것이다(랍비들).


5. 법궤에 관한 마지막 구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렘3:16)

법궤가 곧 그리스도이시니, 법궤는 없어져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기억되어야 한다. 법궤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는데,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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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혼법과 예수님의 족보의 상충

 

 

신명기 25장에는 유대의 독특한 관습 중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수혼법이 곧 그것입니다.

 

수혼법(嫂婚法:levirate marriage)이란, 계대결혼(繼代結婚) 또는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이라고도 하는 유대인의 율법(고엘제도)으로서, 어떤 사람이 후사(후손) 없이 죽었을 때 그의 동생이나 가까운 친척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처음 낳는 아들을 죽은 사람의 아들로 삼는 제도입니다.

 

수혼법은 후손보존, 유업보호, 가난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계의 지속이라는 측면이 가장 강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수혼법은 우리나라의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유사한 면(家系의 持續이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는데 반하여, 유대의 경우는 실제 결혼을 통해 목적을 이룬다는 차이점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룻기 4장에 보면, 수혼법의 한 예로 볼 수 있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수혼법의 최대 목적인 가계의 지속과는 상이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혼란이 일고 있습니다.

 

즉, 기업무를 자의 자격으로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아들 오벳을 낳았으나, 수혼법의 정신에 따라 오벳을 롯의 본 남편인 기룐의 후사로 삼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는 선대(先代)인 과부 나오미와 결혼한 것이 아니므로 수혼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도 과부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가 남편과 사별하기 전에 두 아들을 낳았었기 때문에, 수혼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가 끊어진 사람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니라 룻의 남편인 기룐이기 때문에, 나오미가 아닌 룻이 수혼법의 대상이 되는 것이 타당합니다.

 

아무튼, 룻기의 경우를 수혼법의 한 예라고 할 때, 예수님의 족보에 큰 차질이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수혼법의 정신에 따른다면, 성경의 기록대로 "`살몬(라합)-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이 아니라, "엘리멜렉-기룐(룻)-오벳-이새-다윗"이 되어야 정확한 계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 기록대로라면, 룻은 보아스와의 통상적인 재혼을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수혼법 적용 사례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된다 하겠습니다.

 

☞ 의문 :

① 룻4:18-22절의 기록은 수혼법의 정신(신25:5-6)과 예수님의 족보(마1:1-16) 사이에 묘한 상충을 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②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가 가까운 형제가 아니라 먼 친척이라 가계를 잇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③ 또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의 일례로 볼 수 있는지 및 수혼법으로 볼 수 있다면 보아스(룻)의 경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박진호 목사의 답변 ]

 

항상 그러듯이 이번에도 일반인 심지어 전문가마저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3가지로 나눠서 질문을 주셨는데 각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사람들이 절대자를 이해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 하는 일 모두가 완전하다고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일을 했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논리의 눈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1:17) 한다고 했듯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아진다는 뜻으로,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과 가장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신자가 성경을 보는 태도에도 연관 되어집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지정의적 이해와 동의를 먼저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음을 요구하지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령이 죄인의 영혼을 간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믿어지고 또 그렇게 믿어진 후라야 이해되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그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신구약 기록 간에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뭔가 잘못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진리에 문제가 있는가 의심하기에 앞서 기록된 범위 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합니다.

 

물론 질문자님께서 이런 원리를 모를 리는 만무하며 또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해선 마태복음의 족보나, 신명기의 계대 결혼에 관한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하고 하등 하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족보는 족보대로, 수혼법은 수혼법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문제를 구태여 연결 시켜서 의혹을 야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계대결혼의 진정한 의미

 

신명기 25:5-10에 규정되어 있는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은 잘 아시는 대로 결혼한 형제가 후사가 없이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과부된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1)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대를 이어줄 후사를 낳아 줌으로써 그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가문과 지파에서 보존해 주며, 2)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며, 3)홀로 남아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대결혼을 이해하는 신자들의 관점이 너무 제한적입니다. 옛날 한국에서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의 족보에 다른 형제의 아들을 입적시켜 대를 잇게 하는 관습과 연관지어 단순히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는 제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계대 결혼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더 중요한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민수기 36:1-12에 의하면 슬로보핫은 아들 하나 없이 딸만 두고 죽었는데 모세는 그 딸들더러 그 조상 지파에게만 시집가도록 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혼 제도에 만약 집안의 혈통 보존이나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는 목적을 더 우선시 했다면 일본처럼 데릴 사위 제도를 만들어 장가 온 남편의 성을 여자 집안의 성으로 바꾸게 하는 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딸이 자기가 속한 “조상 지파의 가족 되는 사람에게” 시집가면 된다고 합니다. 딸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가 그들의 기업(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게 되는 사태를 막자는 뜻입니다. 즉 아들이 없는 형제의 미망인의 계대결혼이나, 아들 형제가 없는 딸의 결혼 문제에 관한 규정에서 근본취지는 동일합니다. 후사(後嗣)를 이어가되 그 중에서도 혈통과 가계 보존보다 땅의 보존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민36:9)

 

이스라엘 각 지파가 제비뽑기로 취득한 땅은 하나님과 그들 각 지파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축복의 보증으로 취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 첫 소유자인 지파가 자기들의 땅을 보존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땅에 대한 안식년이나 희년 제도에서 보듯이 땅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각 지파는 하나님을 대신한 청지기로서 소유보다 관리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땅은 모든 생업의 기반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땅에서 먹고 사는 모든 것들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속제도는 아들 위주였고 그에 따라 아들이 없는 가정의 경우에는 그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게 되는 불합리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 모순을 없애고 여자에게도 상속을 허용하는 획기적이고도 공평한 제도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11:44),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것입니다. 특별히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레25:23)이기에 영영히 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에 의한 땅의 분배, 땅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 계대 결혼 제도, 딸의 상속 문제 등등 모두가 당신의 그런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땅을 두고 분쟁하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도 거룩한 당신의 백성들로만 이뤄진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질문 1. 룻기의 계대 결혼과 마태복음의 족보가 상충되지 않는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하면 우선 마태복음의 기록과 룻기의 기록은 그 각각이 완전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그 기록 자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을 혈통과 가문 보존으로만 해석하여 각 기록간의 모순이 있어 보이는 것에 너무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둔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혈통과 남자를 중시하는 유대인의 관습과 제도에 맞추어 사실 그대로 해석해서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왕 중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 왕들의 이름이 주로 등장합니다. 또 비록 네 명의 여인들(이방인, 과부, 창기, 불륜의 관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반드시 남편 되는 남자의 이름, 즉 생물학적 생부(生父)의 이름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혈통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뜻입니다.

 

반면에 누가의 족보(눅3:23-38)에는 왕보다는 평범한 인물의 이름뿐입니다. 이방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메시야의 구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족보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 된 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가 났다는 것입니다.

 

만약 계대 결혼과 마태 족보 간의 상호 모순되는 점을 따지려 들면 오히려 마태와 누가의 족보의 상이점이 더 문제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원칙이 각각의 기록은 그 자체로 완전한 기록이며 그 안에 이처럼 고유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기에 구태여 두 기록 상의 차이점을 문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 족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위를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왕의 선조를 강조하기 위해 족보상에 많은 인물과 대수를 생략했기에 누가의 기록에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누락되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룻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는 룻기에 기록된 룻과 보아스 간의 계대 결혼이 신명기의 규정대로 잘 이뤄졌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질문자님께서 의아해 하는 대로 기록이 바꿔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방인 과부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믿음의 여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방인, 불륜의 태생, 과부, 창기이든 차별하지 않고 이땅의 모든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실제 생부와 왕의 선조 중심으로 기록해 나가다 보니 특이하게도 당시로선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혼인 관계에 의해 대가 이어진 사실 네 개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비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네 여인의 이름을 족보에 등장시켰던 것입니다. 아마도 기록할 당시 본인은 그 기록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만, 후대의 독자로선 그 네 명 여인들의 배경을 살펴 보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더욱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간섭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질문 2. 보아스가 먼 친척이라 기업을 무르지 않아도 되는지?

 

이스라엘의 계대결혼은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인척부터 시작해서 차츰 먼 친척까지 확대해서 그 후보로 선정합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의 후보로 오르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의무 규정에 속합니다만 그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본인의 선택과 자유에 맡깁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일차 후보가 결혼할 의사가 없으면 그 다음 가까운 친척 순서로 이차, 삼차 후보에게 결혼할 의사를 차례로 묻게 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을 거절한 친척은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고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의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칭하게 됩니다.(신25:8-10) 형제의 집을 세워줄 의무를 외면한 비겁한 자라는 불명예를 평생 아니 후손들에게까지 지우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 절차를 거쳤습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룻3:12-14)

 

보아스는 분명히 룻의 죽은 남편 기룐의 친척이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따로 있었습니다. 보아스로선 계대 결혼의 순서상 제 2 후보였고 그 이외에는 기업 무를 친척이 없었습니다.(룻4:4) 제 1 후보였던 이름 모를 친척은 처음에는 룻 즉 기룐의 재산이 탐나 선뜻 결혼할 의사를 내 비췄다가 그 기업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는 곧장 취소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려 든 것입니다.

 

기업을 무르고 안 무르고는 촌수가 가깝느냐 머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앞선 후보가 불명예를 감수하고도 거절하면 그 다음 후보에게 차례가 돌아가고 해당 후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만 하면 됩니다. 룻의 경우에는 후보자가 마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보아스마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를 괜스레 걱정할 염려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아스는 불쌍한 이방인 과부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룻은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신부인 신실한 신자의 예표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 이 사건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진행시키고 또 성경 기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습니다. 보아스는 보아스의 모습으로, 룻은 룻의 모습으로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했고 또 계대 결혼도 그런 모양으로 이뤄져야 했습니다. 계대 결혼을 거절한 친척도 조연으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거짓 삯꾼 목자의 표상입니다. 룻기는 룻기대로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별개의 완전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상호 모순되고 충돌 되어 보이는 의문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성경과 성경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 즉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도 예수요, 그 해석을 검증하는 기준도 오직 예수입니다. 룻기의 계대결혼이나 마태의 족보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는데 하등 오류가 없고 또 두 기록에서 이해되어진 예수님의 예수님 다우심에 모순이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한 기록인 것입니다.

 

질문 3.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수혼법에 해당하는지? 보아스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한 마디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아직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구체적인 율법을 받기 전이라 그런 규정에 직접적으로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익숙해 있는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 채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뤄나갈 수 있는 길을 기존의 관습법과 도덕법을 바탕으로 하여 당신의 선하신 뜻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 율법입니다.

 

창세기 38장의 기록으로 보아 계대 결혼은 이미 시행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관습을 율법에서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는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했는데 그 일을 두고 성경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다”(창38:9,10)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계대 결혼은 모세 율법 이전에도 하나님의 제도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너는 네 자부(子婦)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레18:15)라는 율법의 규정도 유다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선 도덕적 관습법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나아가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장래를 결정지을 위치이므로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주선해 줄 책임을 지고 있는 자이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그 결혼의 후보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보아스의 경우와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의 첫 남편이자 자기 장자인 엘이 죽자 차남 오난에게 계대 결혼을 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 둘째 아들마저 죽자 셋째 아들 셀라가 있음에도 친정으로 돌아가 수절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말로는 마치 셀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계대 결혼을 시켜 줄 것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창38:1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 마음은 다말이 시쳇말로 남편을 죽이는 재수 없는 불길한 여자로 여겨져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고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해”(창38:14) 다말이 그 유명하고도 추한 시아비와의 통간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계대 결혼 제도로 인해 생긴 비극이긴 하지만 유다와의 사이에 후손이 생긴 것 자체는 계대 결혼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극도로 가증한 범죄의 결실입니다.

 

또 외면적으로만 보면 마치 계대 결혼의 모순 혹은 잘못으로 인해 생긴 비극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유다의 장자 엘과 차남 오난은 다말이 재수 없는 여자라 저주 받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엘도 그렇고, 오난이 땅에 설정하여 기업 무를 형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여호아 목전에 악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것이지 다말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가 잘못된 판단과 선입관에 사로 잡혔고,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보다 재수나 운명을 믿는 큰 죄를 범합니다. 그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을 때에 본인의 의사를 물어 만약 그가 결혼을 거절하면 셀라의 가장 가까운 사촌들에게 순차적으로 그 결혼을 권유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을 다말과 결혼시키기 싫어 한데다 만약 관습(혹은 율법)대로 계대 결혼의 절차를 거쳐서 그 결혼을 못하게 하면 자기 아들 셀라와 자기 가문이 영원토록 비겁한 자로 찍히기에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쌍한 과부 며느리 다말의 앞 날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중 삼중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계대 결혼의 선한 뜻, 아니 신적 간섭과 주권으로 이뤄져야 할 결혼의 신성함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다말로선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시아버지의 뜻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좋다.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여인인가 시험해 보자. 거기다 당신이 하나님의 신성한 뜻인 계대결혼을 거부하는데 만약 당신이 바로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 죽나 안 죽나 보자”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유다도 그 아들도 죽지 않는 것으로 그 결말이 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장남과 차남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아비인 유다가 그들을 잘못 양육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셋째 아들 셀라에게도 계대 결혼을 제대로 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형제의 기업을 살리도록 가르쳤어야 함에도 오히려 오직 그의 생명만을 염려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다말 사건의 원천적인 책임과 잘못이 아비인 유다에게 전적으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다가 그렇게 된 데는 마찬가지로 그의 아비 야곱의 책임도 있습니다. 거짓과 사기와 잔혹함과 패륜성 등 온갖 타락이 야곱의 집안에 만연했습니다. 그 집안에 또 다시 치명적이며 부도덕한 시부와 며느리의 상간이라는 패륜이 추가되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아들과 자신이 비겁한 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기 싫어 그 아비 야곱을 닮아 인간적 계략을 동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일을 통해 그를 며느리와 통간한 패륜아라는 더 더럽고 추한 비방을 영원토록 듣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다말과 유다의 사건을 인간적 상식으로만 이해하면 이보다 더 추한 사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말과 유다와 그 아들들의 온갖 인간적 계략과 욕심이 뒤얽혀져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 사건만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엄정한 진리와 그에 대비해 한 없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상이 대조되는 사건도 드뭅니다.

 

유다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회개하게 됩니다. 이 일 뒤에 성경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야곱 가문이 애굽으로 요셉에게 양식을 얻으러 가는 사건을 바로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진심을 떠 보고 또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친 동생 베냐민을 담보로 애굽에 남겨두고 돌아가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유다는 간절하게 요셉에게 그 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가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44:33,34)

 

동생 요셉을 팔아 넘긴 죄와 며느리 다말에게 계대 결혼을 시키지 않은 죄와 그 전에 아들 둘을 잃어본 아비의 심정 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나온 유다의 솔직하고도 애끓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자식만 챙기지 않고 이제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형제와 아비를 살리려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되어진 일들의 배후에 간섭하고 그를 변화시킨 결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유다의 그 엄청난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또 타락한 야곱의 집안을 택해 한 국가 이스라엘로 자라게 하시며 선민으로서 모든 은총과 권능을 한 없이 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런 혈통을 통해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다말이 일으켰지만 가깝게는 다말의 원한을 신원해주고, 유다의 잘못에 벌을 주어 회개시키며, 멀리는 유다와 다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이 연출한 인류 구속사 중의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였습니다.

 

이처럼 다말의 사건이나, 룻의 계대 결혼이나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용서와 사랑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거듭 말하건대 각각이 완전한 의미를 지니는 별개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통일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에 어떤 모순과 충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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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출 4:24, 민 22:21-35)

 

 

출4:25의 기사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즉, 가기 싫다는 모세를 억지로(?)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도중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모세를 죽이려 하신다.

 

23절과 24절의 내용은 별개의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으므로 이 두절 사이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어쨌든 모세를 죽이려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자들을 죽음으로 징계하는 경우가 구약과 신약에서 다 같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순간적으로 처리하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드시 죽이려는 의도 없이 뜸을 들이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민수기 22장의 발람을 죽이려 했던 사건과 유사).

 

성경 기사로는 분명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태도에는 큰 망설임의 흔적이 역력하다.

 

어떤 학자는 이방인 아내 십보라가 할례의 실행을 거절한 것에 대해 모세가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공동체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할례를 행했어야 하는데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자 중병(?)을 앓게 하시고 할례를 반대하던 모세의 아내가 놀라 급히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모세의 생명을 구했다는 해석이다.

 

사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표시이므로 온전히 순종해야 할 율법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학자의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한 해석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징계를 결심하셨다가도 이런 저런 연유로 그 뜻을 돌이키신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뜻을 철회하신 사실은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하나님이 망설이신 이유도 본래의 뜻이 모세를 꼭 죽이겠다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스처를 통해 모세를 더욱 성숙시키시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이삭의 번제 사건 참조).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이 연약한 인간은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기 쉬우나 하나님은 죽음 자체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으신다.

 

즉, 죽은 자나 산 자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산 자이기 때문이다(욥의 첫 번째 10명의 자녀 참조).

 

따라서 이 땅에서 데려가시는 것 자체가 징벌은 아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안식)로 들어가는 축복이라고 믿는다(사도 바울의 견해).

 

 

 

☞ 의문 :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위에서 추론한 내용이 옳을 수 있는가?

 

※ 참조 : 1)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별지 : 조수현 목사)

2) 오경준 목사 /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홍성사/pp.44-53

 

 

 

 

 

 

 

 

<별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4:18-26)

(출처 : http://biblestudy.co.kr / 설교마당 /주일설교 9번)

[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출생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되어 궁중에서 키워지고 광야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큰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이 드디어 모세를 쓰실 그 때가 왔고, 모세는 사명을 받아 애굽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서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시려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80년간 애써 길러온 사명자 모세를 이제 막 사명의 길을 가는 중에 죽이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또 모세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모든 손실을 감당하고서라도 모세를 죽이려 하실 정도로 화가 나신 것일까? ]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여기 이 본문도 이해하기가 힘든 본분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출4:24)

 

이제 막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그의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사명의 길을 향해 애굽으로 떠나는 모세를 죽이시면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80년 동안 인재를 기르셨던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을 감수하시면서 까지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굉장히 화가 많이 나셨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40년 동안 훈련시킨 모세를 이제 사명의 길을 떠나는 마당에 죽이시려고 하셨겠습니까? 모세가 무엇을 얼마나 크게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본문 4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그제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니라 그 때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1. 할례를 행하지 않자 죽이시려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할례를 행해야 하는 모세가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아내 십보라가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자고 해서 모세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80년을 훈련시킨 모세라 할지라도 죽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깜짝 놀란 모세의 아내가 차돌을 취해서 두 아들의 양피를 베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놓아 주십니다.

 

도대체 할례가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자신도 아니고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사명의 길을 보내신 모세를 금방 죽이시려고 하셨는데 이 할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할례언약을 맺으시는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언약을 지시하시는 모습입니다.

 

할례언약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7장을 살펴봅니다. 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언약의 세우겠다는 말이 벌써 두 번 나왔습니다. 그리고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상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며 여기서도 ‘언약을 세운다.’ ‘언약을 삼는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무언가 중요한 언약임에는 틀림 없는가 봅니다. 도대체 무슨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바로 할례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 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 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운 이 할례언약으로 인하여서 이후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누구나 할례를 받게 도비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지키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고 안 지키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하는 아주 엄중한 효력이 있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할례를 받게 되고 할례를 받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이어져 갑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시작한 이 할례를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그의 아들들에게 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할례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철저하신 분이시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서 크게 사용하시려고 하는 도구라 할지라도 할례언약을 어기자 그냥 죽이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2. 할례언약에 대해서 모세까지도 죽이시려 하실 정도로 엄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철저하게 지키십니다.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두고 맹세하신 이 언약에 대해서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지키시려고 그렇게 아끼는 모세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죽이시려고 하셨던 엄위하고 철저한 모습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밝히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할례언약을 세우셨습니까? 왜 하필 남자 아이들의 성기 표피를 베어 버리는 그런 이상한 언약을 세우셨습니까? 요즈음은 건강상의 이유로 포경수술을 대부분하고 있고 어린아이도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창세기 시절부터 인간의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아예 할례를 해서 태어나게 하시지 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시킵니까?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건강을 목적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다른 깊은 뜻이 분명히 있으십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에는 어떤 감추어진 깊은 뜻, 참 뜻이 있습니다.

 

신10: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신30:6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이것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진짜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로 양피를 베어 던져 버리듯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렘4:4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여기서도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말합니다.

 

렘9:26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3. 신약시대의 할례 -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그래서 바울은 신약시대에 로마서에 이렇게 비밀을 말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참 할례는 사람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을 벗기는 것입니다. 롬2: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4. 마음에 할례 -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골2:11절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 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라스도의 하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할례는 손으로 양피를 베어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으로 하는 할례인데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수술 칼을 들이대사 나의 더러운 육적 소욕과 욕심과 욕정의 더러운 모든 것들을 벗겨 버리고 내 속에 깨끗한 새 영혼을 만들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참 할례입니다.

 

이렇게 참 할례를 받지 않으면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마음이 새로워지고 죄된 욕심의 마음을 깨끗이 벗어 버리지 않으면 천국백성에서 끊쳐진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몸에만 할례 받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내 영혼 속에 더러운 생각, 죄된 생각, 육신의 모든 악한 생각을 다 베어서 벗어버려야 이것이 참 예수 믿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참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또 귀에다가도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느냐.” 귀가 무엇으로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못하므로 귀에 할례를 받아서 막혀져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이렇게까지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언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의 피로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영접치 않은 사람이요 그러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의 할례언약이 신약의 새언약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5. 부싯돌로 할례를 행하라.

 

여기서 할례에 관해서는 깊이 있는 부분을 몇 부분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깊이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할례를 행할 때에 부싯돌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철로 만든 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칼로 서로 싸움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하필이면 왜 부싯돌로, 차돌로 할례를 베풀라고 했습니까? 위생적 이유 때문일까요?

 

수5:2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 시대는 칼로 싸우던 시대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 곧 부싯돌을 취하여 그것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냥 일부러 하나님께서 장난으로 구하기 힘든 차돌을 구해서 할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돌멩이로 사람 몸에 피를 내서 육적 껍질을 벗기라고 합니까?

 

바로 성경에서는 ‘돌’ 하면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뜨인 도이 셋ㅇ을 다 쳐서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뜨인 돌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령한 물을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이처럼 돌은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바 차돌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으로 우리의 심령에 할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차돌은 어떻게 하면 날카로워집니까? 깨뜨리면 차돌은 짝 갈라져서 끝부분이 유리처럼 날카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 한 근을 가지고 와서 깨트렸더니 그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가 내 장사를 예비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이 향유 옥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옥합인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져서 향유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하듯이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고 자기 자신이 깨뜨려졌다는 말입니다.

 

부싯돌을 깨뜨려서 그 돌멩이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 피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할례 해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6.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가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유입니까? 7일이면 7일이지, 또 3일이면 3일이지 왜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출22:30절에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 반에 내게 줄지니라.”고 했습니다. 첫 태생은 하나님께 바치는데 소나 양이 새끼를 낳으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고 7일 동안은 그 어미에게 있게 한 후에 8일째에 하나님께 가져와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어미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그 새끼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7일 동안은 젖 먹으라는 뜻입니까? 왜 7일은 놓아두었다가 8일째에 가져오라고 합니까? 왜 우리 인간에게서 태어난 아기도 8일째 하나님께 데려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까?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다 8일째 성전에 와서 할례를 받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도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6일 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습니다. 일하시고 쉬는 것으로 한 기간, 한 텀(term)이 끝이 납니다. 그 다음 8일째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달력에도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되어 있습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안식일입니다만 사도행전에 보면 여드레 날에, 안식 후 첫날에 예배를 드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안식일에 예배 안 드리고 주일날 예배를 드립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안식하셨습니다. 금요일 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토요일 날 하루 안식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이 세상 우리의 죄는 다 사해진 것입니다.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다시 말하면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8일째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롭고 위대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8일째의 진리가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7일 간은 데리고 있다가 8일째는 다시 시작하는 첫 시작의 날에 하나님께 새로이 바치라는 말입니다. 그 전 7일하고는 틀립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다음 주의 첫날입니다.

 

이 8일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약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끝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출발하는 주일날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안식일이 주일날로 신약시대에 새롭게 바꾸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8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이 있습니다. 완전히 주님과 함께 새 출발을 하자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그 마음이 할례 받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인 부싯돌, 차돌로 그 마음에 피를 내서 할례 받는 것입니다. 완전히 예수 믿고 그 마음이 새로워져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로 할례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례에는 엄청난 뜻이 있었습니다.

 

7. 구약의 할례에도 엄위하셨다면 신약의 참 할례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엄위하실까?

 

예수 안 믿으면, 그 마음에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예수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자기 백성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약속입니다.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지옥불에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안 지키시겠습니까?

 

이 약속이 잘 믿어지지 않으면 구야시대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지금까지 80년 동안 기르고 연단시켜서 이제 사명의 길로 보낼 모세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엄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할례언약을 철저히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동시에 신약시대의 참 할례언약에도 철저하실 것을 이 모세의 경우를 보더라도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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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수아보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언약과 모든 제사보다 탁월하시고, 모든 제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 또는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동물 제사를 드리던 대제사장과 질적으로 다른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영원한 제물로 드린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우월(탁월)하신 예수님

우월/탁월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구절

예수님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십니다.

1:1-3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우월하십니다.

1:4-14; 2:5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십니다.

3:1-6

예수님은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십니다.

4:6-11

예수님은 아론 계열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십니다.

5:1-10; 7:26-8:2

예수님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십니다.

6:20-7:25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십니다.

7:1-20

예수님의 사역은 성막의 사역보다 우월하십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성막의 역할보다)

8:3-6

9:1-28

예수님의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우월하십니다.

8:7-13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시대 제사보다 우월하십니다.

10:1-14

이스라엘 백성의 시내산 경험(임재)보다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이 우월합니다.

12:18-24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우월하심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의 거의 절반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 Abridged Edition: The New Testament, 

by Kenneth L. Barker; John R. KohlenbergerⅢ. By the Zondervan Corporation. 


히브리서의 특징 

1. 고대 편지의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1)설교처럼 시작해서 편지처럼 끝내는 책이며(13:22-25), 

저자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수신자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2)권고(권면)의 말(히 13:22)이라고 하는 묘사적 문구는 문서적 형식의 설교에 

적합한 것이며, 설교자가 여기에 몇 가지 개인적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인 것이다. 

 

2. 풍성한 기독론이 담겨 있다. 

1)기독론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2)히브리서는 특별히 풍부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는 문서다.

3)히브리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이고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심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큰 대제사장으로 강조한다.

1)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은 신약의 기독론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신약성경 가운데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하는 

유일한 책이다.

2)대속죄일의 예식과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을 연관시켜 기독론을 전개한다.

  

@ 히브리서의 역사적 배경

 

1. 글라우디오 황제 칙령(AD 49) : 로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 추방(로마서 배경과 동일)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로마 교회의 상황을 조금 알 수 있지만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아서 로마서만 가지고는 교회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증거 자료들을 기초하여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 교회에 대한 첫 역사적 증거 자료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쓴 로마 열 두 황제들의 생애(The Lives of The Twelve Caesars)에 나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Life of Claudius)’에 나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책에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크레스토스(chrestos) 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항상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 모두를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1,2절에 보면,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바울의 직업과 동일한 천막을 만드는 것이어서 동업자가 되었고, 결국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라스길라 부부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와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크레스토스’란 이름은 실제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일 기능성이 높습니다. 
일부에서는 모음이 잘못 기록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AD 1세기 헬라어에서는 e와 i를 거의 비슷하게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christos)시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갈등이 점점 격해지면서 극한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할 만한 갈등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로마 교회가 생겨나고 성장하게 된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유대인의 회당에 규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복음의 불덩이를 가슴에 품은 기독교인들이 전하지 않고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평소 다니던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다고 보는 이유는 당시 회당 예배의 규칙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회당 예배는 성인 남자 열 명 이상이 모이면 시작되었습니다. 회당장이 그 안식일에 읽도록 정해진 구약 성경의 본문을 한 구절 읽은 후에는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위로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청합니다.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 기독교인들은 회중 앞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했던 것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은 그것도 회당에서 “지금 여러분들이 들은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약속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도시에서처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아마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적극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의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1)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2)하나님을 믿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 유대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은 기존 신도들을 많이 잃게 되어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고, 그게 폭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글라오디오(Claudius) 황제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AD 49년에 글라오디오 황제의 로마에 살던 모든 유대인 추방 명령은 로마 교회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추방되어 생긴 빈자리에 이방 기독교인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 기독교인들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사도행전 18:1,2). 

AD 57년,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로마를 떠났던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교회 성도명단에서 발견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16:3,4).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떠난 사이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다수가 되었고, 교회의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AD 54년, 글라오디오 황제가 죽고, 네로가 새로운 황제가 되자 로마에서 추방된 모든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하나는, 글라오디오가 황제가 죽음으로 그가 내린 칙령 –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 추방 – 이 자동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2)다른 하나는 글라오디오를 이어 황제가 된 네로가 돈이 필요해서 유대인들을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네로 당시 로마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재정은 유대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는데, 유대인들이 다 추방되자 로마의 재정 상황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네로는 추방된 유대인들을 로마로 돌아오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유대 기독교인들은 로마 교회의 상황을 보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이방 기독교인들이 로마 교회를 잘 지켜주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고마운 생각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5년 전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로마 교회의 상황과 지금 상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설교도 하고, 교회 행정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이 없는 5년 동안 교회를 잘 지켜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처음에는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이방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음식법도 달랐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돼지고기 먹는 게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유대인들은 레위기 11장에 어긋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안 먹고 채식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배 스타일도 다르고, 특별한 날 지키는 것에서도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5년만에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과거 그들이 해왔던 일의 주도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방 기독교인들은 지난 5년 동안 교회를 안정적으로 잘 이끌어왔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주도권을 내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2. 네로 황제의 박해(마가복음 배경과 동일) 

마가복음은 AD 65-70년경(네로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할 무렵)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 포함)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이방교회에 대한 선교 차원에서, 고난의 때에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당시 발생했던 로마 대 화재가 핍박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로마 대 화재(AD 64. 7. 18-19)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기록한 그 시기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 ‘로마 대 화재’입니다. 
 

AD 64년 7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로마의 경기장 북서쪽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라왔다.
불이 순식간에 퍼졌다. 
로마 시내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팔레틴 언덕으로 옮겨붙어 그곳에 있는 원로원의 저택들과 과거의 영웅들의 입상들이 다 불에 타 버렸다. 
 


불길은 다시 그곳에서 전 로마로 옮겨 붙었다. 
6일이 지나 겨우 불길을 잡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다시 불은 살아나 그 후 2주간이나 더 로마는 불에 탔다. 
로마의 14구역 중 단 4지역만이 간신히 살아남는 참화였고 그 중에 3개 구역은 완전히 불길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이때 네로는 출타 중이었는데, 황제의 궁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듣고 귀경한다. 
네로는 즉시 국고를 열어 이재민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집이 불에 타 없어진 시민들을 위한 집을 지어주었다. 
로마 전역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시민들을 위한 공원을 계획하였다. 
네로 황제는 수개월간 새로운 로마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민들은 냉담하고 호응이 없었다. 
오히려 네로가 당시 새로운 로마의 건립을 위한 광적인 집념이 있던 터라, 새로운 궁을 건립할 욕심으로 처음 방화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은 확대되어 심지어는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마치 옛 트로이 성의 화려한 멸망을 연상하듯 무대 위에서 바라보며 악기를 타며 시를 읊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 안 좋은 소문 때문에 맹렬한 민중의 원망이 네로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당시 네로가 원로원에서 신 로마 건설을 위해 도시를 새롭게 건축하자고 말했던 곳이 북서쪽이었다. 
사람들이 네로에게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위의 모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돌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불타지 않은 4곳이 유대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로의 부인 포비아가 유대인이어서 일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민중의 원성은 거 커져만 갔다. 
이러한 민중의 적개심을 다른 상대로 돌리기 위하여 네로는 친위대를 명하여 기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고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네로는 희생양을 날조하였다. 
그리고는 소위 이 타락한 기독교도들을 (저들은 그렇게 불렀다) 가능한 모든 수단에 의하여 처형하였다.”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고문과 박해를 통해 얻어낸 정보로 더 많은 기독교인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어떤 기독교인도 정치적 반역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대중의 편견 때문에 무참하게 죽어갔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오락 삼아 자행하였다. 
짐승의 가죽을 입혀 맹수에게 찢기게 하였고, 십자가로 처형하였고, 밤중에 거리를 비출 가로등 대신에 저들을 달아 매어 놓고 콜타르를 칠한 후에 불을 질렀다. 
어떤 때는 공연장에서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는 무대를 꾸며 네로 자신이 관객과 섞여 구경하거나 전차를 몰고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부연하여 그러나 아무리 기독교 신자들을 무거운 죄목으로 처형을 해도 사람들은 동정하였다. 
그들은 나라의 이익과 상관없이 한 개인의 잔혹한 속성 때문에 희생되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Tacitus, Annals of Rome, 15, 44).
 

로마 시민들은 네로가 로마에 불을 낸 방화범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네로가 지목한 방화범들을 핍박하는 일에 동조했다. 로마 시민들도 대화재의 범인(사실은 희생양)으로 지목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태의 전환은 어쩔 수 없이 기독교로 하여금 문자 그대로 지하로 들어가게 하였고 복잡한 미로로 꾸민 통로와 무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지하 교회 및 무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바울이 쓴 빌레몬서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에 바울이 쓴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3:23절에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해서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에는 다른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특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바울이 쓴 편지라면 다른 바울 서신들처럼 교회에 보낸 편지 또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여야 합니다. 
바울서신 13통은 모두 바울이 교회에 보낸 편지와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에 보낸 편지들

바울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는 바울이 히브리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에 쓴 편지인지,

히브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히브리서를 야고보서부터 유다서처럼 사도들이 로마의 핍박 때문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보낸 7권 공동서신에 포함시켜야 할까요? 만약 히브리서를 공동서신에 포함시키려면 공동서신의 특성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공동서신은 모두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이 그 책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가 기록한 편지일까요?  

만약 히브리서가 공동서신이라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처럼 ‘히브리’도 초대교회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고, 구약 특히 제사(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누구인지 몰라서 지금까지도 히브리서를 바울서신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공동서신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편지들과 형식 자체가 다릅니다. 모든 바울 서신들은 첫 부분에 누가 누구에게 기록했는지 나옵니다. 히브리서 바로 앞에 나오는 빌레몬서 1:1,2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빌레몬과 그 집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빌레몬서 1:1,2) 


하지만 히브리서 1장 어디에도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 설명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절부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1-3) 

 

@ 히브리서의 특이한 점 - 서론 없이 바로 본문으로!

빌레몬서

히브리서

1) 발신인 이름: 1a절

2) 수신인 이름: 1b-2절

3) 인사/축복: 3절

4) 기도와 감사: 4-7절

5) 본문: 8-22절

6) 끝인사: 23-24절

7) 축도(복): 25절

1)발신인 이름 없음

2)수신인 이름 없음

3)인사/축복 없음

4)기도와 감사 없음

5)본문 1:1-13:23

6)끝 인사 13:24

7)축도 13:25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구약 율법과 제사는 물론이고 복음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구약의 제사와 대제사장을 그리스도와 예수와 연결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긴 것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정용철)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 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출 때 지칩니다.

 

몸이 가는 길은 앞으로만 나 있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돌아 가는 길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젖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더 깨끗해 집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합니다.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갈 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the way)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또한, 예수님은 길을 만드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길을 만드셨습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하루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0:19,10절입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성전의 휘장 -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커튼 - 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세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가복음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누가복음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성소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천입니다. 
성소의 휘장은 얇은 커튼이 아닙니다. 
성소 휘장은 24개의 실로 꼬아서 만든 줄 72개를 섞어 짠 아주 튼튼한 천입니다. 
휘장은 두께는 9.34cm, 길이는 22.4m, 넓이는 11.2m나 되는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천입니다. 
 

성소 휘장을 성전에 달기 위해서는 먼저 휘장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휘장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정결탕(깨끗한 물)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 휘장을 성소로 옮겨서 매답니다. 
그때 정결탕에 넣은 휘장을 꺼내서 성소로 옮기려면 제사장 300명이 힘을 다 모아야 합니다. 
그만큼 휘장이 크고 무겁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렇게 자연적으로 찢어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것도 자연스럽게 찢어져서 둘이 하나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삼손이나 골리앗 같은 힘센 장사가 아래에서 위로 찢을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을까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려고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찢어진 성소 휘장'입니다. 찢어진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몸)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은 구약의 동물 제사로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연결시켰습니다. 


성소 휘장(커튼)은 사람이 찢을 수 있는 천이 아닙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으셨을까요? 또,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돌아가셨을까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성소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그 길을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 –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심 - 이 더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이 더 중요하지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그림자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실체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새롭고 산 길입니다.


핵심 구절(Key Verse)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브리서 4:14)

  

중심 내용(main idea) 

1.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시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3. 예수님은 모든 것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이 책이 쓰인 주된 이유

1. 로마의 박해와 고난으로 인해 배교하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대교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강조함으로써 배교(신앙을 버림)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2. 새 언약의 그리스도가 옛 언약보다 더 나은, 더 좋고 완전한 것임을 가르치려고

3.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만을 따르는 믿음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히브리서 한 눈에 보기(1)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굳 게 잡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라(4:14)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1:1-10:18)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10:19-13:25)

뛰어나신 큰 대제사장 JX

(1:1-4:16)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큰 대제사장 JX(5:1-7:28)

새 언약의 중보자와 더 좋은 제물 되신 JX (8:1-10:18)

 믿음의 사람들(10:19-11:40)

 믿음의 삶(12:1-13:25)

 

히브리서 한 눈에 보기(2) - 방열 구조





히브리서 두 눈에 보기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라(4:14)

큰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1:1-10:18)

뛰어나신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1:1-4:16)

선지자,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1:1-2:18)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3:1-19)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4:1-16)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5:1-7:28)

아론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5:1-14)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6:1-20)

멜기세덱의 반차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7:1-28)

새 언약의 중보자와

더 좋은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8:1-10:18)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8:1-9:22)

더 좋은 제물(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9:23-10:18)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10:19-13:25)

믿음의 사람들

(10:19-11:40)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19-39)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11:1-40)

믿음의 삶

(12:1-13:25)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12:1-29)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13:1-25)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신약의 다른 증언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에서 증 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 그의 제사장직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외에도 새 약속과 옛 약속과의 관계성을 포함한 구약의 해석 및 신앙 생활 등과 관련된 무수한 진리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본 서신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이나 저작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도 알려진 것이 없다. 

작 연대 

히브리서는 AD 9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로마의 클레멘트가 클레멘트 1서에서 이미 인용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는 제 4대 교황(재위  88년 ~ 99년)으로, 기독교의 첫 번째 교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나아가 기록 연대를 AD 70년 이후로 잡기도 거의 어려운데, 그것은 히브리서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둔다. 
만약 본 서신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쓰여졌다면, 저자가 구약적인 제사 제도의 종결에 관해서도 분명한 언급을 했을 것인데 오히려 저자는 구약적인 제도가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8:4,13; 9:6-9; 10:1-3). 
 

또한 히브리서 2:3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2대째 기독교인 세대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본문은 명백히 저자가 이미 알고 있던 디모데의 생존기간(히 13:23)에 쓰여 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면 히브리서 13:23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디모데는 그의 출옥 후 바울과 합류하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저작 연대는 AD 68년이나 69년으로 추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히브리서의 수신자

히브리서 서신을 처음 받았던 독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이 독자들은 나름대로 의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저자는 그들의 ‘전날’(히 10:32-3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베푸는 과거와 현재의 관대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며(히 6:10) 그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히 12:4-6; 13:7-9). 
 

더구나 저자는 그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또한 디모데와 함께 그들을 방문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기도 했으며(히 13:19, 23)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히 13:18). 
또 이 서신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유대적 원형들(prototypes)파 레위기의 제사 제도의 영원성을 고수하거나 복고하려는 경향에 대해 반대한다(히 7:11-28). 
 

그리고 이방인 신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할례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으며 복음으로 돌아온 뒤 믿음에서 타락하여 예전의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던(히 6:4-6; 10:26-29, 37-39) 사림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점들로부터 유추해 볼 때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약 속의 레위기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니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를 없애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인간의 죄를 없애는 방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엄격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였다. 
그러나 동물의 피를 드리는 희생 제사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동물 제자를 드려야 했다. 
 

반면 신약의 히브리서에는 온전한 제사법이 적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애신 제사 즉 단 한번 번만으로도 충분한 효력이 있는 제사이다(히 9:12). 
히브리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제사법을 적은 ‘신약 속의 레위기’이다(히 9, 10장 참고).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해서

1. 바울 저작설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가장 오래전부터 주장되어 왔던 것인데, 사실 지금까지도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판테누스(AD 190년경 사망) 시대로부터 이 서 신이 바울적인 요소를 풍기고 있다는 의견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 원어로 본문을 썼고, 후에 누가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오리겐은 문학 양식의 근본에 있어서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하였으나 “누가 이 책을 기록했는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굳이 맞서려고 하지 않았다. 히브리서의 바울 저작설은 근래까지 주로 동방에서 주장되어 왔으며, 또한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에서 조차 바울 저작설을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체나 내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비울 저작설이 배제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히브리서를 헬라어로 읽을 때 그 안에서 풍기는 영적인 내음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도 사실이나, 아주 미묘하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통이 오직 바울만을 그 저자로 증언했다면 이러한 다소 주관적인 추론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바나바 저작설 

초대교회 때 이미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던 바나바의 저작설이 유포되고 있었음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설(說)은 서방교회 터툴리안에 의해 제일 먼저 제기되었다. 그는 한 논쟁적인 글에서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이름 하에 히브리서를 인용하였다. 더구나 이것이 그 자신만의 의견인 듯이 표현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독자들이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임을 암시하고 있다.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하는 견해는 후에 제롬에 의해서도 언급되었고, 4세기의 저작자들이었던 엘비라의 그레고리와 필라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코덱스 클레어몬타누스(Codex Claremotanus)라고 불리는 서방 사본에서 발견된 고대 정경 목록에서도 히브리서는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부제로서 기록되어 있다.  

바나바의 저작이라는 증거는 그리 충분하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것들이 서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지명이 이탈리아(히 13:24)이므로 바나바의 저작이 사실이라면 그 설이 이 지역으로부터 유포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 즉 바나바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행 4:36)은 히브리서 저자가 관심있게 묘사하는 레위 제도(제사장과 제사법)와 깊은 연관을 지을 수 있고, 그가 바울과 깊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바울적인 사상 문제 역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바나바의 저작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더구나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지에서 개종했던 디모데가 이미 바나바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바울이 이미 고인이었다면 디모데가 바울의 전 동역자였던 바나바를 만나려고 했던 것도 극히 자연스럽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불화(행 15:37-39)는 이미 화해되었고, 후에 바울은 바나바의 사촌 마가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참조 골 4:10; 딤후 4:11). 물론 바나바의 저작설은 바울의 저작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 단지 여타의 다른 설(說)들에 비해 가능성이 조금 더 큰 편이다.   

 

3. 아볼로 저작설 

때때로 로마의 클레멘트, 누가, 실바누스, 전도자 빌립, 브리스길라와 아볼로 등도 히브리서의 저자로 주장되어 왔다. 이중 아볼로 설(說)은 몇몇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마틴 루터에서 유래하는 이 설(說)은 비교적 그 증거가 취약하고, 바나바 설(說)의 경우와는 달리 초대교회의 전통적 지지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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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장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될 텐데 이게 전체 13장까지 있습니다. 한 주에 한 장씩 우리가 다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3주면 다 끝날 것 같아요. 이 히브리서는 조금 특이한 책입니다. 제가 마틴 루터 번역 성경을 가지고 왔어요. 조그만 글씨로 되어 있는데 주로 제가 설교 준비할 때라든지, 성경 본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을 때 참고하는 책입니다. 이것을 살 때는 안경을 안 쓰고 다 보고 했습니다. 지금은 안경 써야만 하는 그러한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걸 왜 가져왔냐면 마틴 루터가 번역한 건데 성경 순서가 달라요. 예를 들자면 이 신약성경은 히브리서가 보통 빌레몬 다음에 나오는데 마틴 루터는 그 차례를 좀 바꿨습니다. 빌레몬 다음에 히브리서가 아니라 베드로전서, 후서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하고 야고보서를 뺐습니다. 그 순서에서. 뒤로 돌렸어요. 그거하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네 권을 뒤로 돌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이게 사도 바울이라든지 어떤 복음의 진수, 여기서 약간 못 미친다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못 미친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요. 그래도 사도 바울이 말하는 어떤 그리스도론, 칭의 이런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뒤로 돌렸어요. 그래서 지푸라기와 같은 거다, 나쁜 건 아닌데, 약간 어떤 부분에서 미치지 못한 부분이 했다는 생각을 마틴 루터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서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앞으로 히브리서를 공부할 때 참고할 주석서도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오토 리켈이라고 하는 독일 사람이에요. 제가 설교할 때도 보고 있는 성서주석, 국제성서주석의 43번째, 마흔 세 번째 책입니다. 굉장히 긴 전집으로 되어있어요. 이게 1984년도 괴팅겐이라는 곳에서 출판 됐습니다. 그게 우리나라말로 번역이 된 거죠. 이 책이 몇 쪽까지 있냐면 772쪽까지 있습니다. 굉장히 자세하게 나오고 있어요. 이런 책을 주석한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2천년동안 신학이 굉장히 많이 발전했고요. 특히 계몽주의 이후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 나오면서부터 훨씬 많이 연구가 됐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성경이 연구가 됐어요. 그거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여기 있는 내용을 제가 이제 천천히 차례대로 따라서 읽어 가면서 참고적으로, 여기 있는 내용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전문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혹시 보고 싶은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빌려 드릴 테니까.

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한 번 펴보세요. 히브리서가 1장부터 13장까지 있는데 일단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히브리서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생각이 있으신 분들 말씀 해 보시죠. 히브리서하면 어떤 생각이 난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여기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죠? 아마 아실 거예요. 믿음에 대한 이야기요. 너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거니까, 거기 중요한 거라서 한 번 볼까요? 11장입니다. 아마 이게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닐까 싶네요.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많이 들었던 거예요. 이 히브리서의 특징은 주로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예표적으로 많이 설명을 하는 거예요. 뭘 비교하죠. 천사, 제사장,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는 그러한 성경입니다. 이게 이제 서신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서신이라기보다는 신학 논문이라고 분류하는 게 맞습니다. 누가 썼냐? 이것도 확실하게 드러난 게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저자가 확실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이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의 편지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글 쓰는 방식이 다른 거구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학자들의 의견이 굉장히 분분합니다. 일단 본문을 좀 보죠. 분문을 우리가 1장 1절부터 14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읽고 차례대로 가면서 한절 씩 읽어 보시겠어요. 숫자가 다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가는데 까지만 읽겠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그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멘. 어떻습니까? 읽어 가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이 눈에 띠나요? 보십시오. 전체적으로 기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요? 8절에 규라고 나와 있는데 무슨 뜻이지 아시는지요? 규, 지팡이 맞죠? 또 단어 중에서 혹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까? 13절에 보면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나오죠? 발등상, 이 단어가 뭔지 아시나요? 발등이 아니라 발을 올려놓는 판, 이런 걸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등받이가 없이 판으로 되어 있는 것 있죠? 발을 올려놓는 어떤 납작한 상,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또 단어나 문장에서 애매한 것 있을까요? 이것의 신학적 이야기나 영적인 이야기는 둘째 치고, 그것은 우리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이게 직접적인 말이 아니라 메타포에요. 은유에요. 이것은 손가락과 같아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서, 달은 안보이고 일단 손가락만 보입니다. 손가락을 통해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 쪽으로 가야되는데 그 작업이 사실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런 게 좀 어려운 점이고요. 또 하나를 본다면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2천년이라고 하는 것. 2천 년 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다르잖아요? 그 차이를 우리가 어떻게 뛰어 넘을까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하게 연구를 했고요. 그리고 또, 그래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그것이 공부가 가능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이게 꾸준하게 2천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서 텍스트를 안고 씨름했고 그것을 해석을 했고 전하고 해서요. 교회 전승 안에 흐름 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것을 공부 하는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게 한 점이 있고. 또 어떤 차원에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성령이죠,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에 이게 공부가 가능합니다.

14절까지 있는데 좀 보실까요? 한 절씩 제가 천천히 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설명 하겠습니다. 여러 분들이 미리 생각했던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또 비슷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집에서 읽고 어떤 뜻인가 미리 공부를 스스로 조금씩이라도 하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1절 이렇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 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짜고짜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데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가 누군지는 아실 거고요.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다른 말로 예언자라고 얘기하고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들이에요. 구약에 종교적인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지자고 또 하나는 제사장이겠죠. 서로 성격이 달라요. 자세한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제사장은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번제나 여러 가지 제사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이고요. 첫째 안정적으로 갈 수 밖에 없고요. 왕, 이런 사람들하고 가까울 수밖에 없어요. 이것에 반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야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게 아니라 개혁적이고, 이러한 양축을 중심으로 해서 유대교가 쭉 내려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일들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것인데, 그 행위를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신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위임받아서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오라클(Oracle)이라고 영어로 써요. ORACLE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라고 하는 것은 신탁을 받은 특별한 집단들, 오늘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러한 학파, 하나님 말씀과 관계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을 1절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히브리서의 어떤 성격이 드러나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바탕으로 놓고 얘기를 하는 거죠. 구약은 그런 면에서 참 중요합니다.

2절 보십시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이미 앞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역사적으로 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런데 종말론적으로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두 개가 비교되죠? 앞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여기 2절에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역사적인 것이고요. 유대인의 역사들,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역사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고 아들을 통해서는 뭐라고요?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마지막에 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자주 쓰시는 게 좋습니다. 이게 그냥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종말, 종말, 예수님의 재림, 마지막, 그런 얘기를 하는데 종말론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약간 낯설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억지로 우리가 학자들 흉내를 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단어는 알고 있는 게 좋고요.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입에서 그것을 표현 하는 게 좋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게 특별한 힘이 있어서요. 그것을 자기가 다 모르고 서도, 말라도 자꾸만 하게 되면 어느 때인가 언어의 세계가 자기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뜻도 모르고 염불 외우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염불을 통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가는 노력이니까요. 종말론적인 거예요. 두 가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하고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 두 개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도 아주 큰 주제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하는 그런 차원에서 간단하게 한 말씀만 드리면 이렇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 하나의 점진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떠한 일들이 전개해 나가는 것, 이런 방식으로, 왕이 정의롭게 통치를 해야 된다. 선지자들이 그런 것 많이 얘기하잖아요. 과부와 고아를 힘들게 하지 마라라든지 그런 것들이 이 사회가 점진적으로 괜찮아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어떤 생명 사건이 완성된 그 차원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두 가지 종말론적인 아들의 말씀, 종말론적인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 말씀,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인 계시, 이렇게 바꿔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사실 히브리서가 전부 그걸 얘기 하려는 겁니다. 아들 예수 그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말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거를 이제 말하기 위해서 초장부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짚고 있습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음, 이미 여기서 어떤 창조에 대한 문제에 아들 예수가 참여한 것으로 설명이 되네요. 비슷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뭐 그런 거 있죠. 잠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등등. 그리고 요한복음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마임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까지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는 비슷한 차원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금방 얘기한 게 전달이 됐습니까?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게 어떤 근거로 가능한지? 예수가 왜 창조의 근원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냥 교리적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사셨던 그러한 분이고 창조된 다음에. 우리 오늘의 물리학적인 어떤 정보에 의하면 120억년 내지는 130억년 쭉 지난 다음에 아주 최근에 2천 년 전에 역사에 사셨는데 바로 그 분이 어떻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에 깊숙이 관여 했냐, 창조 사건의 근원이 됐냐 하는 거죠. 왜 그런지, 그건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각자 생각할 수 있는데 따라 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오늘 제가 그것까지 또 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여러분들 머리가 복잡 해 지실 것 같으니까. 앞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비슷한 얘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 가야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냥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런 걸 얘기해요. 내가 뭐 예수 믿고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할 때 증거가 있습니까? 죄 용서 받았다는 게? 우리가 믿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잘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격다짐으로 가르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거기에 충분한 근거들,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이제 숨겨져 있다고 할까요? 그 안에 들어 있어요. 확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다른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면,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즐겁잖아요. 즐거운데 왜 즐거운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은 음악 감상에서 뛰어난 감상을 하는 겁니다. 설명을 하지 못해도 즐거울 수는 있어요. 그러나 왜 즐거운지 이게 화음이 어떻게 되고 그리고 어떤 주제고 어떻게 반복 돼가지고 우리들의 마음들, 감정, 어떻게 끌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 경험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으면, 그리고 알고 들으면 좋은 감상이 되는 거고 음악적인 어떤 힘들이 더 많아집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꾸준하게 가야죠.

3절, 이는 ‘이는’은 뭘까요? ‘이는’은 아들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이 있을까요? 아들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여기 보면 6절에 보면 맏아들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맏아들이 있다면 둘째 아들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나는 둘째 아들이다 이렇게 얘기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계시 받았으니까 내가 몇 째 아들이다 얘기 하는데요. 왜 이런 아들 그리고 다른 데에는 맏아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독생자 외아들 많이 표현하지 않습니까? 외아들, 맏아들, 그냥 아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고 각각 나름대로 그 단어를 쓴 성서 기자의 어떤 영성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와 그 당시 신앙의 어떤 자료들, 그런 것을 바탕에 두고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시오. 점점 더 어려운 단어가 나오네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마어마한 개념들이 여기 3절에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 말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그렇습니다. 영광, 광채, 본체, 형상, 만물, 죄 정결, 높은 곳, 지극히 크신 이, 그 분의 우편, 이런 단어들이에요. 이런 것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메타포에요. 시적인 언어에요.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혹은 개인이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접어두고 단어 하나하나 우리가 다 지금 따라가기는 힘들고요. 한 가지만 봅시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 우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사도신경에도 나오죠. 다른데도 조금 몇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있고 왼편이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죠. 하나님에게는 동서남북 이런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전적인 타자에요. 바르트식으로 표현하면 전적인 타자,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모든 대상들, 이런 것들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사물을 만지고 있다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거하고는 전혀 다른 타자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많이 노력해서 머리가 좋아가지고 어디에 닿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신학은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어떤 궁극적인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사실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합니다만 우리가 생명이 뭔지를 다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냥 숨 쉬고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적인 생명, 근원적인 거, 그거 자체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어떤 지성적인 노력을 통해서 또 신학적인 노력을 통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오신다,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여기 우편이라고 얘기 했는데 하나님에게는 오른편도 없고 왼편도 없어요. 무슨 얘길까요 이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그걸 전제하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유대교를 아는 게 우리 기독교는 그게 모판으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편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어떤 이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를 가진 분으로 계시다. 그걸 이제 말 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말도 그냥 알고 있을 거예요. 조금 더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편, 그래요,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이렇게까지 우리 생각할 수 있는데 정말 그게 뭔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게 뭔지에 대해서 말이죠. 됐습니다.

그 다음 4절,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천사 이야기가 나와요. 그게 1장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려고 하는 중요한 구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5절부터 쭉 보면 14절까지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시편이고요. 그 다음에 사무엘하가 한군데 있나? 시편이 주로 나오는데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5절, 천사와 예수님이 비교가 될 수 있냐. 비교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천사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이 히브리서에 독자일겁니다. 그들을 위해서, 천사에 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그걸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그 다음에 이제 두 가지가 인용됐어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시편 2편 7절입니다. 그 다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사무엘하 7장 14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얘기 했겠느냐 너희가 천사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천사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거다 그 얘기입니다. 6절,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맏아들, 외아들이라고 해도 좋고요. 바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아들하고 맏아들,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하나님과 성, 남자다, 여자다, 그런 생각을 뛰어 넘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성, 관계를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상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성격도 하나님에게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아버지라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정말 우리 육체적인 아버지, 남자로서 아버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혹시 제가 언젠가 얘기 했는데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아버지라는 표현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특별히 아빠 아버지라고 표현했잖아요. 진짜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죠. 자신의 영혼까지 다 맡길 수 있는 그 대상, 그 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얘기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 자체에 여러분들이 자꾸만 빠지면 안돼요. 하나님, 야훼, 엘로힘, 아빠 아버지, 뭐 이러한 단어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을 더 잘 표현하려고 했던 거지 이 안에 담기면 안돼요. 그걸 어려운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범주 안에다 끌어 들이면 안 됩니다. 범주라고 하면 카테고리를 말해요. 그러니까 아버지하면 아버지라는 범주가 있잖아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아내, 고체, 이런 것처럼 말이죠. 성서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게 많이 있어요. 탕자와 이런 비유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고 또 무소불위하다는 그러한 거라든지 이런 것들도 범주, 속성이라는 겁니다. 거기 안에 하나님이 담기지 않으니까 하여튼 거기까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단어로 설명한 것이지 그 단어 안에 담기진 않습니다. 6절에서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그냥 오게 한다고 하지 않고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고 했어요. 이게 뭘 가리킬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죠. 다시 오신다 그건 기독교 신앙에 기본 바탕에 있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 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비교가 되죠. 예수님은 아들로서 세상에 올 때 천사들이 경배를 해야 돼요. 비교의 대상이 아닌 거죠 사실은요. 8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절,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아들 예수에 대한 그러한 적극적인 평가를 지금 시편 45편 6절 이하를 인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절, 여기도 인용이죠. 시편 102편 25절입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절,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표현이 재미있네요.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이번 돌아오는 주일 제 설교 제목이 태초에 라는 건데 창세기 1장 1절부터 5절까지 나오는 말씀이 교회력에 따라서 중진 성서 일과, 돌아오는 주일에 제목인데 제 1독서 구약 성경의 본문입니다. 태초인데 여기도 지금 태초가 나오네요. 오늘 이 구절이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셨고 땅과 하늘 이게나오죠. 태초 할 때는 천지, 하늘과 땅, 온 세계를 가리켜요. 아주 어마어마하죠. 일단 그것을 여러분들이 고대인의 시각으로 천지를 보셔야 됩니다. 옛날에는, 구약성경 1장에도 나오지만, 하늘에도 물이 있고 땅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밑에도 물이고 하늘과 땅, 전체가 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조할 때, 여러분들 기억을 하시겠습니다만, 제일 첫날 창조한 게 빛이었어요. 빛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신으로 대다수가 섬겼어요. 이집트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바벨론도 그렇고, 잉카 문명도 그렇고, 이 태양은 신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 보면 창조한 게, 궁창, 하늘이에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하늘을, 궁창인데, 그것을 그냥 창조한 게 아니라 물과 물을 나눈 겁니다. 이 전체가 물이에요 이렇게 세계가. 그 당시에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나눠가지고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밑으로 내려가게 해가지고 이 중간 이것을 갖다가 하늘이다, 궁창이다 그렇게 불렀다는 거죠. 그래서 물이라고 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헬라 철학자 탈레스도 만물의 본질이 물이라고 얘기 한 것도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와 있는 재미난 이야기는 제가 지난주일 저녁에 서울에 신학공부 창조론 공부 하면서 얘기 한 겁니다만 다시 반복되네요. 두 번째 날에 창조한 하늘과 궁창은 그 전에 이미 물이 있어, 그럼 물이 어디서 왔을까요? 일단 물을 창조하고 그 다음에 물과 물을 나눠가지고 하늘을 창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는 걸로 전제가 되겠어요. 이 성경 창세기 앞부분에 보면. 그러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약간 맞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물리학이나 이런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약간의 착오가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고대인들의 시각으로 하늘과 땅, 태초, 이런 것들을 생각하시라는 뜻으로 잠깐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드렸어요. 대단한 거죠. 하늘과 땅. 그런데 11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게 이제 근동 지방의 종교하고 유대교하고 큰 차이에요. 태양 이런 것들을 정말 엄청난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슷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없어질 거로 봤거든요. 그걸 신성화 하지 않았습니다. 보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않은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집트나 다른데서는 신으로 섬겼지만 유대교는 신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말합니다. 오늘 여기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30분되기 전에 제가 정리를 하겠습니다. 11절에 보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낡아진다. 어떻게 이러한 시각에 도달했을까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태양 같으면 정말 영원할 것처럼 보일 텐데요. 그 당시에 시각으로 봤을 때요. 오늘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양도 앞으로 45억년 있으면 없어지는 거니까 세계가 다 그런 것처럼. 현대 물리학이 나올수록 성서가 말하는 어떤 세계관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창조만 하더라도 무로부터 창조를 얘기하잖아요. 이게 현대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빅뱅하고 상당히 구도가 맞는 거예요.

12절도 그렇고요. 세계는 아무리 대단해도 없어 진다고 얘기를 하면서 이제 아들의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13절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구절입니다. 인용한 부분 보겠습니다. 각주로 달아서 나왔습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발을 놓는 의자에, 의자가 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고요. 초기 기독교가 시편 110편 1절, 많이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편을 많이 인용했어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시편이 중요했습니다. 이 구절도 그와 같은 거예요. 보십시오. 그 구절 그냥 보십시오. 내가 네 원수로, 원수는 누굴까요? 네 원수, 네라고 할 때는, 내가 나는 이제 하나님이죠. 너의 원수라고 할 때 너는 오늘 히브리서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아들 예수고요. 원수는 누굴까요? 예수의 구원을 막는 어떤 악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네 발판이 되기까지는, 이건 완전히 굴복한다는 뜻이죠. 발로 밟는다는 뜻이니까요. 그럴 때까지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이 말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에는 이 세계에 예수님의 원수들, 생명과 적대적인 것들, 악한 세력들은 다 파괴되는, 다 정복되는 때다 그런 걸 우리가 알 수 있죠. 당연한 이야기죠. 우리가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우리의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 완성 된다 그러한 뜻입니다.

마지막 14절입니다.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마 천사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단들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던 것 같아요. 뒤에 보면 또 나올지 모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게 가르치는 거예요. 같이 길을 가다가 약간 옆으로 샛길로 빠지는 것을 얘기 하거든요. 초기 기독교에도 이단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만, 우리 한국 교회에 많은 게 아니라 원래 많았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외곡 되거나 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성서 기자들과 사도들과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거예요. 천사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니다 천사들은 오히려 아들 예수를 섬겨야 될 영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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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히브리서 2장입니다. 1장, 우리가 지난번에 14절까지 있는 것을 봤고요. 오늘은 조금 기네요. 18절까지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이 없었어요. 나중에 학자들이 읽기 편리하기 위해서 나눈 겁니다. 나눈 게 정확하게 나눈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하긴 해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2장이에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 신학 성경, 구약도 대게 그렇습니다만 저자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개인이 쓰기도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이 아니라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시편이 보통 다윗이 기록했다고 그러지만 실제적으로 다윗이 한 건 아니고 그러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 역사 안에서 형성된 거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2장 오늘 볼 텐데요. 이 히브리서가 약간 지루한 책입니다. 세밀하게 우리가 잘 파고들지 않으면 좀 낯설어요.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고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하고, 복음서는 그래도 좀 낫긴 합니다만, 그리고 바울의 다른 서신들, 로마서라든지 이런 것들은 굉장히 구원의 문제, 의로움에 대한 문제들이 강력하게 표현이 되어 있잖아요. 그렇데 이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약간 색다른 책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같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은 간단하게 A4용지 한 장으로 공부할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문건으로 드렸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어요. 1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자, 들은 것, 들은 것은 구약입니다. 율법이에요. 초기 기독교는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 할 때요. 상당한 시간 동안 없었어요. 당연히 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고 살았습니다. 들은 것, 그런 거 율법에 열심히 좀 하고, 그리고 그거는 제가 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다음 주에 제가 좀 더,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집에서 읽고 할 때는 율법으로 생각을 했는데 다시 읽다 보니까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이, 그 교회 공동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대한 것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가리키는지 아니면 정말 율법을 가리키는지, 제가 약간 혼란이 돼서요. 그 정도로 접어 두겠습니다. 이거 다 끝마칠 때쯤 정확하게 생각이 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것을 잘 유념해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부화뇌동한다, 왔다갔다,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유지하지 못하는 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구약에서도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되지 않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일단 들은 것,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일상생활이 너무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 때문에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그 안에서 서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그런 말이 될지 모르겠어요. 이게 쉬운 게 아닌 겁니다. 이게 쉬운 거라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죠. 잘 붙들고 있어라. 이런 것들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든다고 하는 게 많이 읽어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고요, 그 말씀대로 서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어요. 그게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잖아요. 지금 뭐 다 배우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겠습니다만. 어쨌든 1학년 들어가서 공부할 때 선생님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바둑아 이리 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단어, 문장 하나하나 바로 서는 거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물의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지고 어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커지고 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거거든요. 우리가 수요일 공부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죠. 그러한 한 걸음 한 걸음 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영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기본적으로.

2절,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건 율법이 확실한 거예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그러니까 그 안에 전통이 된 거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천사가 거기 역할 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 2장에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와요. 1장에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이제 모세가 율법과 십계명, 그런 것들을 받아서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전통으로 굳건하게 서게 됐습니다. 그런데 범죄함과 순종하지 않음으로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해서 거기에 대한 벌, 책임, 그걸 당하게 되었다. 간단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드린 유인물을 보시면, 2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대가를 예로써 몇 가지 들었어요. 바벨론의 포로, 로마 식민으로 떨어진 것들, 그리고 각종 고난들, 이런 것들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난과 이런 것들이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아요, 사실은요. 사건 사고도 많고 이렇게 저렇게 인생살이가 엮여져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체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죠.

3절, 그런데 율법에 관계는 그렇고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율법을 바로 순종하지 못함으로써도 그러 한 징벌과 책임,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하물며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냐, 더 심각한 것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이라고 얘기했어요. 구원이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지는 않습니다. 중요하다 그런 뜻이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여러분들이 구원이 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자주해요. 구원 받았다, 구원 얻어야 된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구원이 잡히나요? 제가 앞에서 찬송가 부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 찬양한다고 할 때 주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 했잖습니까? 그 질문을 여러분들이 자꾸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아도, 사실 근본은 다 끝나지 않은 거예요. 종말까지 가기 때문에 여러분 질문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란 것도 그렇고 지금 구원이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구원이 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간단히 교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아니라 살아서 평화를 누린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의 기쁨을 누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관념적인 거예요. 틀렸다는 게 아니고 옳은 이야기인데 그것이 더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충 되어야 합니다. 그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보충되어질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냥 한 말씀만 거기다가 생각을 그런 쪽으로 하시라는 차원에서 도움의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게 생명에 관계된 문제에요. 과연 인간의 생명이 뭐냐, 삶이 뭐냐, 그거를 이해하는 게 깊어질수록 이 구원에 문제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인생살이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늘 구원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여기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듯이 그런 걸 머릿속에 넣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정도 수준에 떨어지게 되고 말겁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등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철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많이 얘기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질문하자, 구원이 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라 그 뜻입니다.

3절입니다. 중반부터 보겠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 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내용은 간단하죠. 예수님 말씀 하신 거고요. 그리고 들은 자들이, 이들은 누구일까요? 들은 자들은. 당연히 제자들이죠. 사도들, 초도 기독교 1세대나 2세대 그러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거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들은 자들이 전해준거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누가 기도를 많이 하고 갑자기 번쩍, 이렇게 깨달음이 있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역사에요. 그러니까 예수가 말한 내용, 바실레이아, 하나님 나라, 그분이 그 얘기를 어떻게 했느냐, 말씀하신 거와 구원이 연관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제 안계시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들, 직접 만난 사도들, 이 사람들이 뒤에 전한 거잖아요. 계속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역사죠 흘러 내려 온 것. 이것을 소상하게 따라가는 게 신앙에서 중요한 거예요. 복음서에 어떤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지 사도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그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쭉 역사를 거쳐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을 아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게, 배우는 거죠.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주로 말씀하신 거고 또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거다.

4절,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굉장히 단어들이 좀 복잡하죠. 표적, 기사, 능력, 성령이 나눠 주신 것, 이런 게 나와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라서 다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 우리가 그대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요. 다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제자들이 후세대에게 전해 준 것, 그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가 지금까지 내려오게 됐는데 그러나 그런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령의 활동이시다,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4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죠? 큰 구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조금 주제가 바뀌면서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다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들이 나와요. 몇 번 나옵니다. 2절에서도 천사가 나왔고요. 천사라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날개달린 어떤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천사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또 주의 사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이는 날아다니는 천사, 날개가 있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 그렇게 하면 약하고요. 신학적인 상상력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는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천사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 할 수 있으세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성경도 기록됐고 많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연결 되지 않는 거예요. 헬라 철학에서는 제우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을 가리켜서 헤르메스라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그 어떤, 보이지 않으나 분명한 힘을 가진 어떤 이를 가리켜서 천사라고 얘기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헷갈릴 수 있어요. 천사라고 하는 낱말이 있으니까 자꾸만 구체적으로 생긴 어떤 것을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허황된 것, 확실하지 않은 건데 말만 붙인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안 되고요. 그러한 완전히 우리하고 다른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그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는 그 사건, 그걸 가리켜서 계시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알린다고 하는 것, 거기에는 그냥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떤 시각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의 어떤 인식이 굉장히 좋아서, 지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워져서 알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거기서 있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힘, 알리심, 그걸 천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많았어요. 굉장히 그런 것에 대한 생각들이 절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사라고 생각을 한 기독교 집단들도 있었어요. 이단이라기보다도 천사는 초월적이니까, 뛰어나니까,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천사쯤으로 생각을 한 거죠. 초기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천사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하고 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도 사실은 영지주의, 신비롭게 뭔가를 안다, 영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건강 했어요 이런 면에서. 굉장히 신비스러운, 비밀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비이고 비밀이지만 그것을 조금 아까 얘기한 전문적인 용어로 영지주의, 천사론, 이런 쪽으로 가지 않고 대단히 역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꾸준하게 밀고 나갔어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만은 아니죠.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긴장을 쉽게 해소 시키지 않았어요.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5절,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천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천사 중요한 게 아니다.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고 얘기 했잖아요.

6절,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에서 증언하여 가로되 거기서부터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요. 6절부터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계속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각주에 ‘ㄴ’보면 시편 8편 4절 이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과 인자, 이건 뜻은 다르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 재밌어요. 그를, 그는 누구죠. 여기 나오는 사람과 인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그 잠시라고 하는 단어에도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기독교에서 어떤 파가 예수님을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은 굉장히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우월성, 어떤 초월성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우월하잖아요, 사람보다. 날아다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선지, 뭘 미리 내다 볼 수 있고 말이죠. 어떤 영향을 받지 않잖아요.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신적인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런 쪽에 가두어 가지고 쉽게 처리하지 않고 계속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붙든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인간과 천사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뛰어나요. 천사가 당연히 뛰어나죠. 그걸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천사보다 못하다. 외롭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 다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인간성, 그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래도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그렇게 된 거다.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동안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신 공생애 동안이죠.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예수님의 부활, 예를 들자면, 그걸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천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영광과 존귀의 그 분이 되셨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천사들에게 복종한 게 아니라고 얘기했고, 이건 여러분들 머릿속에 구도를 보고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니다 인간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이것을 교통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고 했었던 영지주의나 천사론 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이 옳은 게 아니다 그걸 말하려고 하는 거죠.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만물이 복종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참 이 히브리서 기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하네요. 그리고 어렴풋하게 얘기하지 않죠. 아주 정확하게 얘기 하는 거죠. 이게 눈에 들어오시죠. 그리고 애매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되는데 그게 실제로는 아직까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8절 후반절에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당하고 힘들고 죽고 세상에 악이 있고 계속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걸 그냥 어렴풋하게 지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9절,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난, 십자가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 이런 말들도 굉장히 관념적이죠.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광채, 이렇게 표현 많이 해요.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런 게 다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들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얼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요. 하나의 은유 방식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걸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영광과 존귀라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의 사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아주 궁극적인 생명으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서 십자가와 구원, 십자가와 영광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영광은 승리죠. 정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에요. 십자가는 실패에요. 고난이고 이건 누구라도 다 피하고 싶은 거고요. 이 세계는 아직까지도 십자가의 모습들이 많이 있는데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비약, 뭐가 좀 필요합니다. 생각의 비약,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초월적인 능력자로만 보아요. 그렇게 또 보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요소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거는 실질적으로 실패입니다. 그거는 고난이고 말이죠. 천사는 죽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하셨는데 오히려 천사들은 죽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고 그 방식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로 하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게 연결이 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그 다음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래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니까 천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없죠. 죽을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죽으셨고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의 관으로 씌우셨기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살리신다, 구원하신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러한 기독교의 기초 교리입니다. 그것을 이제 성서가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고요. 우리가 그것을 좀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라고 하는 것은 하기오스, 그러한 단어인데 구별되었다는 뜻이에요. 성서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1절은 어떤 제사 행위와 연관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구별되느냐.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11절,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라고 하는 말은 구별시켰다는 뜻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말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거기서부터 구별된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별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11절에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에요. 그 다음 12절, 12절에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형제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절에서도 계속해서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4절, 자녀들은, 형제와 비슷한 차원의 의미에요.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혈과 육, 피와 살인데요. 그냥 인간의 구체적인 형체를 가리켜요.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때동안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앞에 있는 이야기하고 좀 비슷한 반복입니다. 똑같이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받으셨다는 그러한 뜻이죠.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표현이 좀 재밌죠.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듯알듯한데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했다. 대충 그러려니 생각하면 되긴 하겠지만 과연 뭘까요?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의 공식하고 비슷한 건데 이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그건 이제 죽음의 세력한테 굴복 당하신 건데 결국 예수님도 천사처럼 초능력이 있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고도 용케 풀려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성경의 기록처럼 확실하게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의 세력에 굴복 당한 건데, 무너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전제한다면, 부활이 뭐냐 지금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걸 전제하게 된다면 앞으로 죽게 될 모든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공식은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결국 마귀를 멸한 거죠. 죽음의 세력이 무너진 거죠. 그런데 이것은 부활이 뭐냐 이런데 까지 더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그건 오늘 주제는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에요. 제가 8시 30분까지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 믿음, 그런 게 있다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당연히 자유로워 진거죠. 종노릇하는 것에서부터 풀리는 거죠. 16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천사 많이 나오죠. 그 때 당시 천사론 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얘기예요. 그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내가 뭐 신기한 거 봤다 요즘에도 많이 기독교 신앙이 그렇잖아요. 환상 봤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들이에요. 그게 아니다. 천사를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들, 혈과 육을 가진 그런 나약한 사람들이다. 그걸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되어있습니다. 17절, 그러므로, 거의 결론에 갑니다. 그가 범사에, 그는 누구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그가 범사에 모든 일에 형제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처럼 되어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만 구원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하심이라.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구약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랑 똑같이 죽었어요. 그게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를 믿음으로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고 하는, 그러니까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그 얘기죠.

마지막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우리와 똑같이 그렇게 사셨다는 이야깁니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쭉 공부하면서 봤듯이 천사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을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써, 단순히 그들에 대한 반론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쨌든 천사에 대한 호감, 이런 걸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시다.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2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 그 과정에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 길에서, 귀중한 디딤돌이 되도록, 영적인 소양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기에 죄와 죽음가운데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셨다는 그 놀라운 고백, 그리고 증언을 저희들이 듣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지금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줄로 믿습니다. 2015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년 마칠 때까지 우리의 삶을, 특별히 신앙의 삶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3장




오늘은 3장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만이 아니라 이 성경 전체가 오래된 책입니다. 우리가 보통 500년 전에 쓴 것만 하더라도 오래된 책이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려시대로부터 이조로 넘어온 이성계 이야기, 뭐 그런 거 오래됐다고 해서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성경은 자그마치 2처년, 구약까지면 3천년 그런 정도의 전에 책입니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을 기록한 거거든요. 하여튼 역사적으로 오래된 책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제 히브리서라고 해서요.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인들, 그러한 뜻입니다. 이게 교회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 이름도 아니고 어느 민족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이 저자는 우리가 확실히 모릅니다. 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구약적인 배경이 굉장히 깊은 어떤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은 제 3장입니다. 1절부터 19절까지 있네요. 우리 한 바퀴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으실까요? 성경 다 가지고계시죠?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절,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절,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절,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절,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절,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절,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9절까지 있네요. 아주 긴 장은 아니고 정당한 길이의 장이네요. 우리가 함께 읽으면서 대충 내용은 파악이 됐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어려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요? 일단 단어나 문장이나 그 자체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어디 있나 보실까요? 특별한 거는 없어 보입니다. 9절에 보면 약간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나와요. 증험한다, 증명하고 경험 한다 그런 뜻일까요? 시험한다, 같이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고 시험했고 또 증거가 되려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한 뜻입니다. 다른 단어나 문장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제가 3장의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 조금 부정적인 표현이죠. 그거는 불자만 빼면 적극적인 겁니다. 순종과 신앙,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장 전체가 얘기하려는 것은 유대 역사에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고 올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걸까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말을 역사적으로 보면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이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이게 대다수가 못 들어갔어요. 심지어는 모세도 못 들어갔으니까 아주 어렸던 사람들만 들어갔고 스무 살 이상 되는 친구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들어가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있다. 그 이유가 불순종, 불신앙, 이거다.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인거에요. 정확하게 바라봐야 됩니다. 신학성경 다른 복음서 같은 것도 예수님의 역사죠. 벌어졌던 이야기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게 있었던 역사들, 그런 것들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제목으로 이거를 공부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유인물을 보시면 거기 서론 부분에 그 이야기를 썼어요. 잠깐 서론 부분만 보겠습니다. 18절, 19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그거를 불순종과 불신앙이라고 한다. 세 가지 단어, 하나님의 안식, 근데 이게 뭘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안식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안식이요. 종교적인 용어들을 우리는 다 놓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세속적이랄까? 어떤 종교적인 깊이를 현대인들 놓치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기 정말 성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그러한 게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이 성서 기자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불순종과 불신앙, 이런 겁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은 공부 끝날 때 제가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고요.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만 조금 더 보도록 합시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쉰다고 하는 거예요. 안식하면 안식을 이것도 연관이 되죠. 안식일,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는 쉼이 참 안됩니다. 그냥 쉽게 얘기하면 돈벌이라든지 사람들이 경쟁하고 이 세상살이가 쉼이 없어요. 그런 것들은 아주 부지런해가지고 그리고 경쟁하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실존 자체가, 실존이라고 할까요? 본질이라고 할까요? 그게 우리의 안식하고는 거리가 멀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런 거죠. 자기가 자기를 완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우리가 성실하게 산다, 뛰어나다,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그러한 삶들이요. 그런 것들은 결국 자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려는 것들 아니겠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 같은 것도 다 채워나가는 건데 그건 아무리 죽도록 해봤자 안식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 자체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안식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러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해서, 노력해서 어떤 걸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이루기만 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간절한데 이루고 나면 그걸로 안식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어거스틴 유명한 시, 기도문에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 안에서 내가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그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냥 인생살이가 그렇지, 애쓰고 힘들고 그래도 그게 인생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 성서 기자들은, 영성가들은 정말 안식, 어떤 것을 경험한 거예요.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이라고 할까? 똑같은 개념은 아닙니다만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얽어매고 있는, 그리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럴 때만 안식이 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우리는 전제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신앙의 훈련, 그 쪽 방향으로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겁니다. 네 그게 서론 부분이에요.

1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약문으로는 다 자세하게 제가 설명하지는 않고 토막토막 필요한 부분들만 설명했습니다. 1절만 보더라도 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거리가 많습니다. 보세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게 느껴집니까? 어떤 건지.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얘기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대충 알긴 압니다. 신학교에 갈 때도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건 아무도 증명은 못합니다. 이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자기가 착각할 수 있는 거고요. 하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 어떤 건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거죠. 그래서 거룩한 형제들아 그렇게 얘기해요. 다시 한 번 그 문장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거만 하더라도 참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늘, 부르심, 거룩함, 형제, 이렇게 나가고 있어요. 거룩하다고 하는 거는 보이지 않는 거죠.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구별됐다고 하는 그러한 뜻인데요. 구별됐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뭐로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게 표시는 안 나잖아요. 예수 믿는 다고해서 우리가 다 잘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늘 마음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거룩한 형제들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인데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딱 부러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거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종말론적인 사건이고요. 종말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셨죠? 우리를 종말론적으로 구원 시키신다, 그런 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거를 종말에, 죽음에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별된다고 하는 데에 막연하게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오늘 현재에 어떻게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하는 게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거예요. 이게 잘 안돼요. 자꾸만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 확신을 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최면, 자기도취라고 할 수 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이게 숙제입니다. 그건 꾸준하게 공부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 구원의 세계, 성서가 말하는 세계에 가까이 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게 구별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같은 1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벌써 예수님을 두 가지로 호칭하네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여러분 나왔어요. 지난번에도 나와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자이라고 불렀죠? 앞에서 공부하신 거 기억해 보십시오. 중보자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중보자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떤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그건 하나의 공식이고 수학에도 어떤 공식이 있잖아요. 피타고라스의 공식에 이등변삼각형의 무엇 무엇은 어떻다 이러한 것 말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거는 기독교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그 공식 안에, 피타고라스 공식에 많은 수의 세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이러한 기독교의 고백문, 이러한데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요. 이걸 차근차근 따라가야 정말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대제사장, 지금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가 돼야 하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인지, 그냥 우리가 예수님 없어도 맘 착하게 살면 되자 않냐 사람들은 생각할 텐데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왜 생각하지 않는지를 더 알아야 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건 흔히 들었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사도라는 나와 있어요. 조금 이상하죠? 예수님을 사도라고 얘기하는 건 조금 맞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를 사도라고 얘기하는데 이 사도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차원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구절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 하나에요. 다른 데는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어떤 관점에서 이 사람이 여기 쓴 것 같습니다.

그 다음, 2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여러분들 요약문에는 3절로 되어 있는데 오타네요. 2절부터 봐야 되겠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여긴 이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요. 그냥 제가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겁니다. 딱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고요. 이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서 시작 한 게 율법이죠. 물론 여러분들 짐작하시기겠지만 모세가 율법을 다 쓴 건 아닙니다. 그거는 이스라엘 역사에 오랫동안 축적된 법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법전이 있는데요. 그게 율법인거죠. 가장 유대 사회에 준거가 되는 거라서 준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인 모세 이름을 붙여서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모세 율법이라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율법이 하나고요. 또 하나는 같은 율법의 문제인데, 모세에게서 시작된 게 제사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제사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냐 하면, 그 전에도 개인별로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식으로 하면 예배, 제사를 드린 게 구약 성경에 나오죠. 그건 개인적으로 한 거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는 가나안땅에 살면서, 요셉과 더불어서, 그 쪽으로 이민을 떠나지 않습니까. 3, 4백년 살았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구약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3, 4백년은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엔 성서 기자의 관심이 없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도 나름대로 활동을 하기는 했을 텐데 전혀 언급이 없어요. 역사가 비약해가지고 모세가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아닌데 성전의 원형이라고 하는 회막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사 드리는 그런 일들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세하고 연관된다 하는 거예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모세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 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종은 하나님의 아주 성실한 일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잖아요. 일단 율법이니 핵심적으로. 율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회가. 좋아져요. 건강해집니다. 그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율법대로 그 사회를 끌어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불문법,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뭐 미드라쉬인가, 제가 이름을 다 거명을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많은 시행세칙들, 헌법이 있으면 나머지 법률들이 있고 시행세칙, 대통령령,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처럼 유대도 율법을 중심으로 한 법칙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대로 하면 정말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기자들은 그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죠. 판단한 것만 아니라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과 예수님과의 충돌이 많이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율법이 좋기는 한 건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하고요. 율법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뭔가 불안하고 그런 거예요. 늘 상대적인 가치, 가치론적인 거예요. 아,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율법은 가치에요. 조금 더 괜찮은 삶이 있고 좀 못 미치는 삶이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겁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연봉을 1억 갖고 사느냐 8천만 원 갖고 사느냐 조금 더 밑으로 떨어져서 5천만 원을 갖고 사느냐 삶의 어떤 형식들은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걸로 다 문제가, 오천만원 받는 사람보다 1억 원 연봉 받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괜찮아진다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비슷하잖아요, 약간의 차이만 있지. 율법은 그러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노력하는 자체는 괜찮은 겁니다. 그런 것을 종의 역할이다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6절 보시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 아들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확실하게 그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특별히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런데 제가 이런 용어를 쓰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안들 수도 있어요. 대다수의 신자들은 생각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만 그냥 대충,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들인가부지 생각하지 그게 이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한계에요. 그렇게 알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에요.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호칭했을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누가 대답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조금씩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정리가 들 겁니다. 이게 신학적인 거고 인문학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단어, 용어에 있는 어떤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에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경험을 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영적인, 종교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건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뭘 경험했다고요? 생명을 경험한 거예요. 이건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그것을 경험한 겁니다. 율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생명, 궁극적인 생명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려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지금 우리가 다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튼 방향은 그렇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을 정리 하셔야 됩니다. 2절에서 6절을 봤습니다. 모세는 사실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종이었다. 아들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의 집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7절에서 11절입니다. 여기에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이 됩니다. 여러분 각주에 보면 'ㄹ'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 95편 7절 이하의 내용들이 인용이 돼요. 신약성경이 구약을 인용할 때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95편 7절을 찾아보면 똑같은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그러나 비슷한 게 있고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있고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히브리어 성경이 원래 있고요. 그러나 여기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경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이라고 해서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성경이 있어요. 그걸 주로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왜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지는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틴에 살지 않고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 말, 언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알랙산드리아인가, 거기서 모여서 학자들 70명 정도가 번역을 했다고 해서 그 성경을 가리켜서 70인역, 얘기하는데 권위가 있는 성경입니다. 주로 그거를 많이 인용을 한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거예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너희들 조상들이 거기서 고집을 피우다가 망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너희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그걸 이제 시편 95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죠.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여기서 시험하던 날에는 구약에 나온 어떤 사건들인지는 대충은 아시죠? 뭘 시험 했냐 그러한 거죠. 만나, 메추라기, 사실은 이거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도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결과인거예요. 하여튼 그래서 계속해서 이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불안했어요. 가나안땅에 들어간다는 확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리고 모세에 대한 불평, 불만 이런 것들도 많이 있었고요. 굉장히 그렇습니다. 약간 전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애굽에서 뛰쳐나온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하는데 그 히브리라고 하는 말이 꼭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근동 지역의 하층민들을 가리키는 히브루라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정말 순수하게 유대인 자기 민족만 끌고 나온 게 아니라 욕구 불만, 사회 불만이 있는 사람들, 하층민, 노예들 이런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반란을 일으켜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다 시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완고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어요. 완고하다. 여기 보면 8절에도 있고요 13절에도 나오고 15절, 이건 다시 반복한 시편 인용문인데 완고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완고하다고 하는 건 신앙하고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사람 완고하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괴팍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 사실 그런 게 완고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7절에서 11절 부분 정리했는데 잠깐 보겠습니다. 세 번째 문장부터 봐요. 성령은 신구약을 관통하게 하는 진리의 힘이다. 그러니까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유대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부분이 못했어요.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마음이 완고한 것이다. 완고하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신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완고, 교만 비슷한 겁니다. 대게 우리는 그렇게 살죠. 저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복하기가 참 쉽지 않아요. 우리 어떤 전 이해에 너무 강하고 이렇게 저렇게 교육받은 것도 있고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그런 위험성은 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11절에 보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한 경고를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요약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리한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러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니까요. 이건 그냥 의인화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고, 말고 그런 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어떤 다른 걸 가리키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문제에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 그건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거죠.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하는 우리의 영적인 태도에서 가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게 경험 한다 아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제가 어저께 밤에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린 커피에 대한 이야기 잠깐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색깔, 향, 잔, 찰찰 넘치는 거품 등등이 있어요. 그리고 커피를 갈아서 넣고 거기 관계되는 많은 것들, 물을 넣어서, 물이 이제 중력에 따라 내려와서 커피가 내려진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어마어마한 이 우주 전체에 신비한 생명의 힘들이 작용한 거다 전 그렇게 보여요. 커피 알 갈고, 가루, 물, 수증기, 색깔,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온 세계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느끼는 사람은 느낄 수 있고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지금 빨리 한 잔 마시고 나서 다른 일 해야 된다고 마음이 쫓기게 되면 우리 일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놓치는 거하고 비슷하게 하나님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게 계시는 건 아닌 거거든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경험 하냐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거를 제가 요약문 안에 정리를 했습니다. 보시면 되겠어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해야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반복해서 얘기하듯이, 그건 13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완고한 마음, 이런데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보통 이런 글들을 읽으면 도둑질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성서는 그렇게 유치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도덕가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죄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묘해서 선으로 위장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집중이라고 하는 게 죄인데 자기를 스스로 성취하려고 하는 아주 강력한 욕망, 이게 죄에요. 이상하죠? 우리는 보통 자기 긍정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르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유혹하면 이상한 것 생각하지 말고요. 아주 파렴치한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유혹,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것에 있게 되면 완고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경험이 점점 줄어들게 되죠. 시간이 많이 돼서 제가 30분까지 정리를 해야 되는데요. 좀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이게 오늘 결론이기도 하지요. 다시 한 번 요약문을 보겠습니다. 7절에서 인용된 시편 95편 7절이 다시 인용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청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입니다. 이건 귀를 기울이려고 억지로 해봐야 사실 되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의 영혼이 그쪽으로 마음이 가야되는데 이게 쉬운 가요. 안되잖아요. 이거 저걸로 우리가 쫓기고 있는데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에 귀가 가겠습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인거죠. 크게 엄청나게 잘못한 거보다도 살인, 강도, 이거는 그냥 정말 파렴치한, 파괴적인 행위고요. 성서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순종을 통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순종이라고 하는 게 신앙하고 비슷한 얘긴데 어려운 거예요. 순종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런 것들이 잘 잡히지가 않으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뭘까. 내가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뭐 그런 건가. 아니면 심지어는 주의 종, 목사에게 순종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자꾸만 생각을 해요.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거 거부하고 청백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됩니다.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도 있고요.

제가 요약문에 예수님의 경우를 썼어요.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그렇죠? 십자가라는 것은 인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이거는 자기 파멸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파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가 점점 가까이 오니까 이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겁니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도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아마 그래서 제자들은 피하라고 많이 얘기 했잖아요. 그건 아주 상식적인 거예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순종하신 거죠. 자기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 그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일종의 결단이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 뭐 그렇게 엄청난 인류 구원,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일상적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되는 건데 이런데서 순종이 뭐냐 한, 두개로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어떠한 말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이거 결정하기도 힘든 문제고요. 제 삼자가 말해 줄 수도 없는 문제고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순종해야될 거냐 아니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거 어떤 구체적인 사항보다도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들어간 것만큼 어떻게 말하고 행동을 하는지 그러한 방향이 잡히겠죠. 문제는 용기가 있냐, 없냐, 그러한 건데. 그럼 안 되는 것을 희생해가지고 억지로 해라 전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자학적인 거 그걸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얻는 길인 거예요.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내가 당연히 가야될 길이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 그럴 때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생명을 얻게 되는 거죠. 신앙의 선진들은 다 그런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것 몇 줄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순종, 또는 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그 대상을 더 깊이 알아야 된다. 내가 따라가야 할 대상을 알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수다. 두 번째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공부는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다 보이는 게 아닌 거예요.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그 대상에게 자기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어야 된다. 저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다, 구도적인 거다, 죽을 때까지 계속 그 긴장이 있어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공부를 해야 되고요. 정말 이건 필요한 건데 우리 수요 공부팀은 그런 면에서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따로 공부실수도 있는 거고요. 꾸준하게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그러한 수행과 구도로써의 기독교인의 삶이 돼야 되지 않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3장,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준 그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눴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하여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그 생명에, 궁극적인 현실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이 어려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이 날로 달로 더 심화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4장




4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장, 2장, 3장, 우리가 쭉 봤습니다. 히브리서는 집에서 보통 읽기가 조금 지루한 본문입니다.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되고 있고요.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 했지만 시편 이런 것들이 많이 인용됐어요. 그리고 어떤 사상이나 개념 이런 것들이 구약에서 많이 인용 되고 있습니다. 천사 이야기라든지 대제사장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혼자 읽기가 만만치 않은 건데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함께 읽으니까 훨씬 이 말씀을 가깝게 느끼면서 대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 4장 1절부터 16절까지예요. 보통 때는 동그랗게 앉아서 해서 순서를 헷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약간 들쑥날쑥 해서요. 그러면 이쪽서부터 한 절씩 돌아갈까요? 먼저 읽으세요. 4장 1절.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절,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절,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절,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자, 제목은 4장 여러분들 유인물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안식과 말씀의 관계예요. 안식과 말씀입니다.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3장에서도 같이 본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쉼 그러한 거예요. 근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안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히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던지 아니면 어디 요양을 가서 좀 쉬었다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예요. 공관복음서에서 핵심을 이야기한다면 키워드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에게서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가장 궁극적인, 어떤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총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요 다른 때도 여러분들이 느끼셨겠습니다만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것들은 손에 잡히는 게 아니에요. 막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우리의 생각으로 다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꾸준하게 그 세계가 어떠냐하는 것을 넓혀갈 뿐이지 이걸 갖다가 어떤 걸 딱 고정시켜서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 부활, 예수님의 재림, 그런 것들과 다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 안식이라고 하는 그 개념, 오늘 여기 3장에 이어서 4장에 반복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걸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는 것을 지금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게 참,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보다도 저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목사가 설교하고 교회 운영하고, 목회하고 이런 저런 하는 것 자체로 사람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교회일 자체가 우리를 피곤하게 할 수 있어요. 피곤하다는 말이 정확한 건 아닌데 거기에 묶여 버려갖고 영혼의 안식,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 평생 살았는데 어떻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이러한 안식이 내 영혼에 깊이 자리 잡을 수 있느냐 숙제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이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문제예요. 천천히 한 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제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중요한 안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갈 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 다시 한 번 생각난 김에 짚고 지나가야겠네요. 그러니까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인 거거든요. 당장 이 땅에 살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건 종말론 적인 거고 약속이에요. 그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 그거를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사로 잡혀야 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죠. 그러한 기본적인 관점을 갖고 오늘 말씀을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 여러분들 가지고 계신 강의 요약문 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1절에 이렇게 시작하죠. 우리는 두려워하자, 이거 조심 좀 하자,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거냐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 테니까 그걸 좀 두려워해라, 그걸 조심해라, 좀 심각하게 생각해라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좀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를 하는데 이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성경 말씀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거예요. 말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긴 있는데 말로 그거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든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꾸 이제 공부를 통해서 성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에 더 가까이 가는 그런 게 최선입니다.

예, 이 말씀이에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고 들어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 건데 이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거기에 무조건 매달리는 거죠. 실제로 성서가 얘기하는 안식을 모르면서도 나는 안식을 얻었다. 다른 말로 구원 얻었다,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반대로 냉소적으로 생각해서 도대체 안식이 가능 하냐, 기독교가 얘기하는 구원이 실체가 있냐, 그렇게 조금 무시하면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말을 조금 더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잘 보세요. 약속.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도 약속인 거예요. 약속이라는 것은 지금 이루어 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아직 안 이루어진 미래적인 거예요. 미래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이 안식과 구원을 완성하거나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늘 조금 마음이 완벽하지 않은 거예요.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도 계속 시행착오가 있고 뒤뚱뒤뚱 대고 아무리 믿음 있어서 안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아 그러면 현재 삶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약속이니까 미래적인 것 만이겠네 생각하면 그거도 오해입니다. 약속이 미래적인 것이긴 하되 그게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실질적이냐 그 관계를 잘 따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정확한 인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울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잡힌 바 된 것을 따라간다. 잡힌 바 된 정도예요. 우리가 지금 신앙하고 있는 세계는 그와 같습니다. 완전히 이룬 게 아니라 어떤 힘에 붙잡혀서 어느 쪽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 말씀 보세요. 여긴 안식의 약속인데 이르지 못할 자가 왜 그러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2절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습니다.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건 믿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아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얘기 하겠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에요. 유대인을 비롯하여 등등의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게 참 이상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몰라요. 내가 지금 믿고 있는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마음은 다른 데 가있는 거예요. 이런 게 많죠. 이런 경우가. 그러니까 안식의 약속을, 그것에 대한 복음을, 말씀을 실질적으로 믿어야 되는데 믿지 못하는 거죠. 그게 어떤 상태냐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니까 그냥 넘어 가도록 하고 여러분들이 개인 적으로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3절과 4절, 여기에는 강의안을 잠깐 보시죠.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요약을 했어요. 안식의 약속에 대한 복음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예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와 들어간 자에 대한 차이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안식은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고 얘기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표현 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구원을 받았습니까, 받지 못했습니까. 이런 질문에서요.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거는 기본적으로는 약속이고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아주 궁극적인 일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받지 못했다는 건 맞아요. 그러나 구원 받았습니다 이야기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적인 거예요. 긴장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아주 궁극적으로는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그 약속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창조 사건하고 연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절에 이렇게 되어 있죠. 후반절 보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창조 6일 동안 하고 마지막 7일째 안식했다고 하는 그 사건. 그 창조는 기본적으로 안식 사건,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뒤에 또 나올지 모르겠는데 이 쉼이라고는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무덤에 가면 유럽이나 뭐 이런데 보면 비석 같은 거 세워 놓거든요. 거기에 누구누구가 여기에 영원한 안식을 얻다, 누워 있다, 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 잠깐 무덤에 보니까 거기에 쓴 단어가 루에라고 해요. 루에, RUHE해서 루에, 쉼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참된 쉼은 죽는 거죠. 이게 왜 참된 쉼이냐하면 살아 있는 한 자기 것하고 계속 뭐가 연결되어 생각합니다. 쉼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가리켜서 이 사람이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들었다, 쉼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짚고 있는 걸 거예요. 결국 죽어야 쉼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럼 이 땅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냐. 무의미한 것은 아니되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겁니다.

지난주에 제 설교 혹시 기억하시는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설교라기보다도 그 안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들 말이죠. 뭐뭐 아닌듯해라 이렇게 얘기 했잖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웃는 사람처럼 하라. 그 반어법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 얘기는 곧 너무 몰입하지 마라 그러한 뜻이었어요. 그래야 참된 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해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죽어야만 쉼이 있어요.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그걸로 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흥분하는 거죠. 열광하고 있을 뿐이지 열광하는 것이 쉼은 아니잖아요. 그건 푹 꺼져요 금방.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도 죽어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죽음이 곧 쉼이고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살아야 되요. 그러니까 긴장이죠, 불안하죠, 갈등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미래에 있는 죽음, 그게 구원의 관문인데 그걸 미리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죽음을 당겨서 사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핵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죽음을 미리 당겨서 살아가는 그 종교 의식을 가리켜서 세례에요. 세례 받는 것. 그렇잖아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본 관문이 세례이지 않습니까. 그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거잖아요. 그건 죽음입니다. 세례는 다른 게 아니라. 물론 삶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산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같이 있는 거예요. 하여튼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3절과 4절, 여기에 따르면 안식 혹은 구원, 하나님 나라, 생명, 이러한 것들이 이미 창조 때부터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창조와 제 7일 안식하신 것, 그 사건을 가리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하다가 여러분들 혹시 갑자기 질문할 게 생각이 나면 손들어주세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질문할 때 안하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즉시즉시 손드시면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5, 6, 7절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고 있네요. 5절에 인용한 시편은 95편 11절이에요. 쭉 여러 번 그렇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강의안을 좀 보십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설명한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이 복음이 뭐죠? 안식의 약속인거예요. 구원의 약속인거예요. 다시 한 번 여러분들 생각해 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성서를 이해하는데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이 약속이니까요. 구약과 신약, 약속입니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왜 복음이냐, 왜 복음이라고 합니까, 정말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냐,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순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쳐놓으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들을 얘기 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말씀을 실제로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거기 강의 요약에 두 가지로 제가 분류해봤어요. 일번, 구약의 말씀을 전해들은 유대인들, 그걸 받았으나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 복음을 전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 읽으면 참 믿음도 없다, 불순종 했다고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다,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표현이 정확하지 않네요. 그건 누가 봐도 뻔하게 아는 잘못, 이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니까. 겉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순종 했다, 믿지 못했다하는 것은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방해하거나 교회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안에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이 다른 데에 흩어져있는, 다른 데로 가있는 그런 겁니다. 자기 자신도 그걸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위험성이 많아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이게 자기의 잘못, 이런 것들을 인식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목사들에게는 그러한 위험성이 더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죠.

거기 강의 요약문에 제가 그래서 그렇게 묘사했어요. 이 불순종, 완고한 마음은 파렴치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세련돼 있지만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완고한 마음입니다. 불순종인 거예요.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내가 정말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아는 길은 별로 없어요. 스스로도 우리를 잘 모르니까. 그냥 기도하는 게 최선입니다. 나로 하여금 순종하는 사람, 목사에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교회 질서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안식의 약속, 이건 굉장히 궁극적인 거잖아요. 종말론적인 어떠한 하나님의 통치이고 생명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는, 거기에 마음이 가야되는 이게 순종인데 이게 잘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게 최선이죠. 성령이 우리 영혼을 끌어주셔서 거기에 마음이 가도록 해주십사 하는 기도가 최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고요. 목사도 할 수 없고 그분만이 할 수 있죠. 그분에게 전권이 있고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때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가사, 혹은 기도 가사는 성령이여 오소서입니다.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주관하지 않으면 이게 계속 흔들리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마음들이니까요. 그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확하게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이러한 기도지요.

다음, 8절과 9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들어가는 자,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구약에 있는 많은 시편과 어떤 사건들을 곁들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9절에는 여호수아가 나와요. 재밌어요. 8절 이렇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각주에도 나왔듯이 예수라는 말로도 같이 사용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건 구약의 역사를 아셔야 되는데 출애굽기에 나온 이야기고요. 또 등등 쭉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더라면 이라고 하는 거는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들어가는 거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요. 그게 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거예요. 상상해 보면 이거는 당연합니다. 이집트의 어떤 소수민족으로써 어려움을 겪다가 그리고 광야에서 생존조차 불확실한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은 곳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최소한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유목생활이고 떠돌이 생활이고 노마드라고 해서 이렇게 생활이 전혀 안정이 되지 않으니까 쉼이 없는 거죠.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정말 쉼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룬 사람이 여호수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쉼을 얻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못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못 얻은 거죠. 그걸로 완성되지 않았다 얘기하는 거죠.

가나안은, 광야와 가나안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광야 40년 동안 굉장히 척박했어요. 광야에서의 삶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있을 때 삶은 그래도 비교적 농산물이 어느 정도 풍족해서 괜찮았습니다. 약간 가난했던 시절이나 조금 풍족했던 시절이나 안식은 없는 거죠. 이거는 뭐 설교조로 말씀을 해서 조금 그렇습니다마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부자로 사는 사람이나 안식이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개인 소득이 삼만 달러, 사만 달러, 된다고 하는 걸 정치인들이 이야기하지만 가능한대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가면 좋긴 하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살아봤자 안식이 없어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경험 하는바 일겁니다. 그래도 거기 죽자 살자 매달리는 이유는 다른 안식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도 이제 기복신앙에 만약에 떨어진다면, 이거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아시죠. 하나님 잘 믿고 헌금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떻게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이거는 가나안 바알 종교하고 똑같은 거고 그걸로 결코 만족이 안 된다는 걸 아실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많이 받긴 하는데 또 그거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살 수도 없는데 가나안의 어떤 풍족한 삶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게 축소가 돼야죠. 우리 삶의 영역에서 축소가 되고 이제 다른 안식, 다른 안식이기 보다도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하자면 안식의 약속, 그리고 더 밑바탕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통치, 그리고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비전, 혹은 영적인 감수성, 영적인 통찰, 그런 게 우리의 삶에서 풍부해져야 되는 거죠. 그래야 가나안과 40년 광야생활의 그러한 압박, 유혹, 그런 거로부터 우리가 훨씬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 걸로는 안돼서 만약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안식이 됐다면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안식할 때가 아직 남아 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 부분을 조금 읽어 보겠습니다. 안식할 때, 9절에 나온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식은 아직 진행중이고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게 필요한 것 같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안식의 깊이가 풍부해져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세상은 일종의 가나안이다. 나름으로 생활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도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이 말은 몇 가지 뜻이 있어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머릿속에 꼭 넣어 두십시오. 제가 다른 때도 이야기 했지만 이 단어, 이름을 이거를 여러분들이 자꾸만 입으로 내 뱉어야 돼요. 종말론적이라는 말도 자꾸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개념이 더 우리들에게 풍부하게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종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으니까 가능한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더 좋고요. 이거는 간단하게 우리의 공부 모임의 규모에 맞도록 이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미래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네요. 현재는 아직은 아닌 거예요. 미래적이다. 여기서 그거를 어떤 방식으로 성취해 내려고 노력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미래적이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림절 신앙이 기초입니다. 기다림이에요. 미래에 있게 될 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게 한 가지고요. 미래적이라고 하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절대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경험한 것을 자꾸만 연장해서 조금씩 좋아지는 거, 이런 것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조금 배부르게 먹는 다거나 우리가 건강이 더 좋아진다거나 미래의 조건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이렇게 좋아지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절대적인 그러한 생명, 구원,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기다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정도로 보시고요.

10절, 11절, 강의안 좀 더 보겠습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의 일을 쉰다고 얘기한다. 거기 그대로 나와 있네요. 다시 한 번 성경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신 것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쉰다. 살아 있는 한 안식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을 쉰다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멈춘다고 하는 의미에요. 앞에서 이미 제가 말씀드린 거네요. 죽지 않으면 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지요. 세례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할까요. 죽은 사람들은 신경 안 쓰잖아요. 다른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얘기할까, 다른 사람 말에 그렇게 부하뇌동하지 않잖아요. 죽은 사람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는 예수와 더불어서 죽음사람으로 세상을 사는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눈만 뜨면 계속해서 신경 쓰고요. 눈 뜰 때만이 아니죠. 잘 때도 꿈속에서도 꿈도 사납고 말이죠. 계속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안식을 누린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다음, 마지막으로 12절에서 13절입니다. 위의 사실을 전하는 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얘기를 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헬라어 성경에 로고스 투 데우라고 해서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특성을 12절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어요. 살아있다. 활력이 있다. 예리하다.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그리고 생각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우리는 예술가나 시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그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영혼, 내 삶 전체가 화염에 불사르듯이 그 말씀에 휩싸이는 그런 경험들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바인데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수, 일반 통속 노래 부르는 그분이, 다른 클래식 가수도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납니다. 단 하루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벌써 음감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들 전문가거든요. 연습을 안 해도 언제나 완벽하게 노래를 부른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만 노래 연습을 안 해서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어떤 소리와 음의 세계가 자기하고 거리가 있어지게 되는 게 느끼게 되요.

우리 기독교인에게 그러한 게 좀 필요하죠. 그런데 매일 우리는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듯이 절간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보다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매일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야만 노래의 어떤 감각을 유지하는 가수들처럼 수도사들 이런 사람들은 계속 그 안에서 삽니다. 그래야지 영적인 내공이라고 하는 게 유지가 되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 살잖아요 현실적으로. 그게 좀 어렵습니다. 하는 만큼 해야죠. 제가 다른 때 말씀드렸듯이 재가 수도승처럼 가능한대로 최다한 우리가 그런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부족하니까 불쌍히 여겨주소서. 퀴리 엘레이송, 그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속성들을 쭉 열거 됐네요. 재밌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시고요.

강의안 중간에 보겠습니다. 12절, 13절 중간, 그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종말 때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13절에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 우리의 마지막, 그 모든 것을 받으실 이에 눈앞에 만물이 다 드러난다. 그러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가서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한 뜻이죠. 그 말은 곧 지금 이 세상의 만물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숨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그 때가 와야 실체로 서로를 알게 될 것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죠 사실은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 누군지 모릅니다. 내가 어디 선생이다, 목사다, 어디 이름이 뭐다 이런 거가 우리 자신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우리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이, 실체를 드러낸다는 그런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체 이런 거 아는 거하고 우리의 실제 삶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여러분들 혹시 그러한 질문을 하실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제가 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대답을 드려야겠네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냐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주는 게 아닙니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서 그 세계에 우리가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앎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거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돈벌이 어떻게 할 거냐? 이웃하고 어떻게 하냐? 사이가 나쁜 부부사이는 어떻게 하냐?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이 말씀을 통해서 해결하는 건 아닌 거예요. 그런 건 여러분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지혜롭게 잘 할 수 있는 거고 좀 잘 안되면 시행착오도 겪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내가 이렇게 인격적으로 이럴 수밖에 없나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고상한 사람이 되거나 심리적으로 어떤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그것을 알고 앎으로써 그분의 통치, 그분의 하시는 사건 속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또 말씀을 배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고 안식의 약속이 어떻고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는 내려놓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 말씀이 어떤 걸 가리키고 있는지 거기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매진하는 게 필요합니다.

14절에서 16절은 오늘 공부할 게 아닙니다. 이건 대제사장이라는 주제로 5장에 넘어가거든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들에게 전해준 우리들을 예상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의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 해 주신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놀라운 가르침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안식의 세계에 이끌림을 받도록,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모저모로 혼란스러운 세상, 그리고 손에 확실하게 붙잡히지 않는 그러한 모든 세상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푯대가 분명하여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옳은 신앙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5장



5장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로 들어가게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은유로 표현하는 내용이에요. 일단 본문을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은 교독하겠어요.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들이 그 다음 한 절 읽고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절,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절,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절,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절,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절,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절,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네, 어떻습니까. 이 내용이 우리가 교회를 다녔으면 익숙한 거예요. 특별하게 다르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걸 교회의 어떤 경험을 접어두고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만 읽으면 이 이야기들은 참 먼 이야기가 돼요.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속죄를 받고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연 얼마나 우리 실제 삶에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나 이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본문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위해서 하나하나 짚으면서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목이 대제사장 예수라고 하는 게 붙은 5장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근데 이 5장은 5장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듯이 4장 14절, 지난주에 마지막 단락으로 우리가 약간 제쳐놓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10장 31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이게 히브리서의 핵심이에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하면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은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틀린 게 아닙니다. 일단 그걸 여러분들 머릿속에 넣어 두시면 되겠어요. 각인 시켜놓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한 신약성경, 이게 히브리서다 하시면 돼요.

이 제사장들은 물론 많이 있어요. 계급에 제사장들이 있는데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제사 업무를 담당하는 거죠. 그런데 모든 제사장이 그거를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면서 하는데 해당 연도에 제사를 맡은 사람들이 대제사장이에요. 제사를 드리는 핵심이 뭘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를 드리는 것. 우리나라도 전래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여튼 제사라는 말은 똑같은 거예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감사하는 그러한 의미도 있고 또 핵심적으로는 속죄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하나의 의식으로써 제사를 드려요. 속죄도 있고 감사도 있고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그거를 핵심적으로 얘기하면 속죄행위입니다. 왜 죄를 용서받는데 제사를 드려야 되나 생각해 보십시오. 편안하게요.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다 해결할 수 있으면 굳이 제사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그냥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그거를 신앙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냥 말 자체만 생각하려고 하는 겁니다.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한테 잘못을 하면은 가서 화해할 수 있죠. 해결은 돼요 그거는. 빚 적어가지고 나중에 빚 갚으면 그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빌렸다 안 갚았다든지 남에게 해를 끼쳤다든지 이런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이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혹은 반대로 잘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거꾸로 잘못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판단자체가 우리들에게 사실은, 조금은 할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러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자칫하면 회피, 현실도피적일 수 있어요 무책임하게. 하나님께 제사 드려서 죄 용서 받았으면 다냐. 요즘 기독교인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가리켜서 값싼 은혜,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다 죄 용서 받았으니까 자기의 어떤 사회적인 책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어요. 그거는 도피적인 거죠. 신앙이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거든요.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제사 행위를 핑계로 해서 내가 뭐 여기서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 죄의 문제를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대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제사라고 하는 게요. 더 근원적인 차원이에요. 그걸 우리는 이제 학문적인 용어로 해서 존재론적 차원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그거를 이렇게 저렇게 다루어 가지고 모양을 내고 세련되게 살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그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 그거 자체가 존재론적인 어떤 깊이이기 때문에 우리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만 할 수 있다는 그 차원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러한 차원이죠.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첫 번 패러그래프 맨 마지막 문장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 뭘 가능하게 할까요? 죄의 실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게 실질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해요. 여전히 그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벗어난 어떠한 그 세계를 우리가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는 거죠.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의 어떤 죄책감 그런 걸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걸 또 인식하고 있고 새롭게 일어나려는 용기도 서고요. 자기의 어떤, 죄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능력이잖아요. 뭐 현대인들, 지난 번 설교시간에도 잠깐 말씀드렸나, 그리고 여러분들도 많이 듣고 있듯이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병, 우울증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사실은 죄책감, 이런 데서 많이 옵니다. 그러한 죄의 실질적인 깊이들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데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의 빛을 이렇게 보는 사람은 그리고 그 빛에 가 있는 사람은 거기서부터 벗어나 있는 거죠 기본적으로.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의 죄의 현실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렇구나, 그럴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그거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삶을 이해하면서 같이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가 가능합니다. 정말 우리가 제사를 바르게 드리고 예배를 바르게 드리면 그런 것이 풍요로워지는 거예요. 이건 분명합니다. 집사람 가끔 집에 돌아가면서 주일날이나 수요일 저녁에도 가끔 얘기하는데 복잡한 게 많이 있다가도 여기 와서 저의 성경공부를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얘기를 합니다. 맞을까요? 나중에 물어보세요. 내가 과장을 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 약간 집중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예배 전체를 통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니까 마음이 평화, 뭐 그렇게 되더라. 그건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습관적이라기보다도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의식적으로라도 어쩌면 반강제적으로라도 어떤 점에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이 본문을 좀 보도록 합시다. 4장 14절에서 16절까지, 지난주에 읽고 접어 두었던 그 대목입니다. 여기서 이런 말로 시작하죠.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당연히 예수님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승천하신 이라고 얘기했어요. 이건 사도신경에도 나오는 이야기고요. 예수님을 승천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주기도문에 나오지는 않죠. 여기에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니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승천하신 대제사장이라고 지금 이렇게 그런 말로 시작하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10장까지 그런 말을 합니다. 승천,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하늘이 뭘까요? 물론 이제 저 하늘이죠. 근데 주석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히브리어로 하늘이라고 가리키는 단어는 없다고 해요. 궁창일까요 뭘까요? 제가 지금 정확하게 말씀드리기 힘든데 굉장히 미묘한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저 하늘 공간 어디에 하나님이 있다 그게 아니라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손에 닿을 수 없는 세계이거든요. 거기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살아가는 모습들을 알 수 있지만 하늘은 더 숨겨진 거예요. 생명이 숨겨진 곳으로 그들이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든 그러한 생명의 비밀이자 근원이다 그런 뜻으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절대적인 세계인 하늘도 사실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고요. 그걸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네 그러한 이야기가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강의안 두 번째 패러그래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의 연약함, 실수도 하고 흔들리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못도하고 죄를 얘기하겠죠.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 인간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그러한 시험을 받은 분이다. 공생애 시작할 즈음에 세 가지 시험도 있고요. 공생애 중에서도 많이 이런저런 어려움도 당하고요. 또 눈물도 흘리시고 외롭다고 하시고 다 시험이에요. 사람이 당하는 희로애락 같은 것들 다 예수님도 똑같이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다 아신다는 거죠. 그러나 15절 끝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 그리고 시험을 당하셨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죄의 경향성이 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신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죄가 없는 그러한 분, 신성. 그래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성의 두 성격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 정체성의 두 성격이란 인성과 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레 호모, 참된 사람.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 이러한 고백문이 교부시대 때부터 성서 안에도 그러한 의미들이 있고요. 아주 핵심적인 예수님을 이해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그리스도론 할 때 예수님의 인간성과 신성의 하나 되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잖아요.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 두 정체성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됐다는 게 말로는 여러 번 들었는데 실제로 이해가 되나 그런 질문이에요. 그런 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이면 인간이고 신이면 신인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가 결합된다는 것은 더 모호하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모호하잖아요. 신이면 신이고 인간이면 인간이지 어떻게 두 개가 동시에 있는 어떤 분이 있을 수 있겠냐 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 계실 때 아 신이다, 인간이다 그 두 개가 보이는 게 아니에요. 이 표현들이 여러분들이 자칫 오해하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보여 가지고 제자들이 그걸 이해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한 많은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건데 제자들이 그렇게만 깨달았다는 말이냐 그것도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물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뭔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는 게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는데, 성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예수님처럼 두 성격, 아니면 두 정체성, 신성과 인성, 이 결합된 그러한 것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기 힘드니까, 뭘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그 신앙을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한쪽으로 가는 거예요. 완전히 신이었다로 가든지, 완전히 인간이었다로 가든지 이런 흐름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당연히 있죠. 그래서 투쟁한 거예요. 신학적으로 논쟁한 겁니다.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논쟁을 통해서 결정된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는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딱 정해진 거 없어요. 이게 진리 논쟁이에요. 어떤 면에서요.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거가 신학자들의 논쟁에 의에서 그냥 됐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기독교의 교리라는 게 확실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거는 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문제라기보다도 어떤 진리의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오히려 그러한 투쟁, 진리 논쟁,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 게 기독교가 살아있는 진리라고 하는 증거인 거예요. 그러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들어내시고 그러한 자기를 들어내시는 것을 초기 기독교인과 이천년 기독교 역사가 잘 이해해서 어떤 사상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쳐서 어떤 대답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오늘 우리 공부에 어쩌면 그거 하나만이라도 생각을 여러분들이 잘 하고 돌아간다면 오늘 먼 걸음 하셨는데 소기의 목표는 도달하지 않았을까. 다른 것도 필요합니다마는 하여튼 지금 말씀드리다 보니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거죠. 이건 눈에 보이는 거니까. 같이 뭐 먹고 자고 화도 내시고, 예수님 당연히 화내시지 않겠어요? 복음서에도 그런 부분들은 많이 있고. 심지어는 성전에 가서 거의 폭력적인 걸로 정화시키고 그런 일도 하시고.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저 친구는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 아니냐. 그 동생들도 알고 형제들도 안다. 그런 증언들이 복음서에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걸 보면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명백했던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참된 인간인데, 베레 호모인데 그런데도 참된 신이었다. 어떻게 이런 데까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신비롭죠. 어떻게 거기에 달했을까요. 그거는 오늘 우리가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핵심주제는 아닌 거예요. 다만 그게 기독교를 쭉 끌어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다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 아신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신성의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정말 그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간다. 그래서 담대히 나간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성경 기자들은 단어 하나하나 의미 없이 쓴 게 없어요. 제가 만약에 이 히브리서 4장 16절 한 절만 갖고 설교를 한다면, 그 중에서도 담대히 라고 하는 단어 하나만 띄워서도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냐 차근차근 들어가면 할 말이 많이 있는 거죠. 그 중에서 한 대목만 말씀 드리면 이런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거와 좀 연결이 되네요. 우리 자신만 보면 절망하잖아요. 작은 일 가지고 이래저래 짜증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기도 싫고 그런 것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결단으로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게 잘 안되기도 하고. 불안한 거죠.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 자신만 보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거기에 주눅 드는 게 아니죠.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인류 구원의 사건 앞에 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토대입니다. 이걸 실질적으로 느끼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비슷한 찬송가도 많이 부르기도 합니다. 다 좋은 이야기에요. 다른 나에게 있는 한계들에 절망하지 않고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들의 잘난 점, 그런 것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또한 나의 잘났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자랑거리가 아니고 오직 은혜의 사건, 은혜의 보좌, 그런 것만이 나를 끌어가는 토대, 삶을 견인해 가는 핵심이 되는 것, 이게 기독교 신앙이죠.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정말 자유로워 지고 평화로워 지고 자비, 연민 이런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해방과 자유, 점점 풍요로워 지는 거죠. 네, 그래서 이 대제사장이라는 게 그러한(오늘 서론적으로만 말씀드린 건데)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니 히브리서 기자가 얼마나 감격스럽게 이 이야기를 썼겠어요. 시인과 같은, 영적인 시인이지 성서기자는 그렇습니다. 영적인 시인들의 마음으로 구구절절하게 어떤 풍요로운 세계를 담아내려고 하는 간절한 그리고 치열한 노력들이 여기에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5장으로 넘어가네요. 오늘 우리가 주로 공부할 본문이라고 생각하는 5장입니다. 핵심적인 건 다 말씀드린 건데 5장부터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에 나오는 두 인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론이고 다른 하나는 멜기세덱이에요. 이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출애굽기에 이 아론이 많이 등장합니다. 주로 모세가 주인공처럼 묘사되어 있기는 해요. 그런데 아론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런 얘기는 없고요. 모세가 아주 어릴 때에 갈대상자에 던져져서 강물에 띄워질 때는 누나는 나와, 미리암이라고 누나는 나오는데 형은 안 나와요. 그냥 거기서 살았겠죠. 성서기자가 그런 데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네요. 고센이라고 하는 곳에, 다 유대인들은 소수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아론이 등장하는 거는 주로, 모세는 말을 좀 못했어요. 나는 말이 어눌하니까 뭐라고 사람들에게 얘기하냐, 그리고 바로하고 협상을 벌여야 하는데 그런 건 자신 없다 그렇게 하자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네 형이 있다 형이 말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출애굽을 바로 앞에 가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설득하고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에 모세하고 아론이 가서 백성들하고 정치 협성하는 것이 길게 나오지 않았으니까 간단했을 거라 생각을 하시겠죠.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아론이 큰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아론에 관계된 얘기 중에서 조금 핵심적인 것은, 모세는 정치적인 카리스마가 확보된 사람이라면 아론은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확보된 사람으로서 형제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온 대단한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일 년에 한 번 있었어요. 평소에는 조금만 죄를 용서하지만 그 대속죄일에는 모든 민족의 죄를 용서받는 종교적 세레모니를 했는데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이 들어가요. 그 역할을 아론이 한 겁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민족이 태동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은 더 오래전 이야기고요, 정말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진 것은 모세로부터 본다면 그 때 대표적인 종교 업무를 한 사람이 아론.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하는 이 과정에서 아론을 거론한 겁니다. 이 아론이 잠시 미리암하고 같이 모세를 약간 거부한 적이 있어요. 그 이야기는 제가 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에 자기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민중들이 원하니까 그러한 일들을 하기도 하고 그런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출애굽, 광야 생활 등에서 큰 역할을 한 그런 사람입니다.

또 한사람은 멜기세덱이에요. 창세기 14장 17절에서 24절 사이에 나옵니다. 아주 고대 유대인들에 구전에 의존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구전, 전승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다 전승이에요.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요. 그렇다보니까 약간씩 단어가 틀리기도 하고 숫자가 착오가 있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합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는 아브라함 전승에 포함된 어떤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가 납치를 당한 것을 보고 쫓아가서 전쟁을 벌여요. 당시 아브라함이 상당한 재력도 있었고 사병이라고 하죠. 정식 나라의 군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용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을 주고 사서 만드는 군사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펼치는 사람이었어요. 전쟁을 해서 롯을 구해서 다시 돌아오잖아요. 그 때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사람이 이 멜기세덱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거죠. 제사장. 아주 고대인데 그가 바로 멜기세덱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증명, 그런 것들을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에 이야기는 여러분들 아실 거예요. 돌아 올 때 멜기세덱이 나와서 축복을 해 주지 않습니까.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줘요. 보통 십일조라고 이야기하죠. 가끔 십일조를 강조하는 강사 분들이 성서적 근거를 드는 게 그 멜기세덱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아브라함에게 받은 거하고 말라기서에 나와 있는 그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전리품 십분의 일 그 이야기가 아니라 제사장 멜기세덱이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깊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그 클래스의 수준에 따라서 다릅니다. 우리는 일반 평신도로서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가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다면 전문적으로 연구를 해야 되겠죠. 제사 업무에 대한 것, 그리고 그 당시에 여러 제사의 종류들도 있고 이스라엘의 제사 업무의 기원 이런 것들을 샅샅이 다 연구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제사 행위와 근동지방의 제사 행위 사이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는가, 그런 데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최소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 정도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11절에서 14절입니다. 여긴 참 교훈적인 이야기가 나오네요.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 신학적인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12절을 보십시오. 참 책망일까요, 권면일까요, 안타까움의 표현일까요. 참 재밌습니다. 너희가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믿은 세월이 얼마냐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오래됐는데 그만한 정도 됐으면 남을 가르칠 정도가 됐는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서, 배워야 될 위치에 서 있으니 참 안타깝다 이거죠. 초보도 모른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게 초보가 제일 중요한 거고요. 그리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다 보면 등한히 할 수 있고요. 여기서 초보는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한다, 속죄의 그 분이다, 그런 걸 바탕에 두고 하는 겁니다.

그런 건 이제 이런 거예요. 약간 설교조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교회생활 오래 하다보면 이런 거에 관심이 없게 돼요. 교회 일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성경에 대한 지식도 늘어나간 나는데 그 근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퀴즈 대회 해가지고 점수는 많이 딸 수는 있어요. 이런저런 기독교의 정보에 대해서는 많이 말할 수는 있는데 예수를 믿고 내가 회심한다고 하는 것, 예수와 일치된다고 하는 것, 예수와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세례의 기본 원리, 이런 것들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안다고 전제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죽을 때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할 신앙의 화두, 초석이지 이 기초는 마스터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와 같이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말로는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인식하고 경험하냐,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정말 그 기초에 대해서 깊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거 안하고 너희들 뭐하고 있냐, 안타깝다 그 얘기죠. 그러면서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네요.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됐다.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하는 거죠.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아주 따끔한 경고가 되는 그런 말씀이에요. 신앙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도 그러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근본에 대해서 탄탄해 지는 사람이 있고 허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은 늘어나고 명예가 있어도 기초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 수도하는 사람들은 기초, 근본 이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도 그렇고 삶의 문제도 그렇고 그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13절과 14절에서 그걸 젖 먹는 자, 단단한 음식이라는 것을 나누어서 설명을 했어요. 13절은 이렇습니다. 어린아이에요. 젖을 먹는 자에 불과해요. 젖을 먹는 어린아이. 그런 사람이 하나 있고 14절에서는 장성한 사람이 있는데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써 분별한다. 그러니까 해석, 판단, 분석, 평가할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이죠. 그런 게 점점 풍요로워 지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양쪽에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과 장성한 자의 구분하는 기준은 본문에 나와 있죠. 의에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혹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 선악도 의의 문제니까요. 그런 것을 깊이 깨달을 줄 아냐 못 하냐 이게 어린아이와 장성한자를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여기서 의의 말씀, 선악을 분별하는 것 이렇게 하니까, 뭐 이미 아시겠죠. 행단보도에서 빨간불에 건너가면 안돼요.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그런 차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야 뭐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아는 거니까. 도둑질하면 안 된다 이런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장성한 사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서 의, 선악, 이런 걸 얘기하는 핵심은 당연히 전체 주제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바르게 알아서 무엇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풍요로워 지면 비록 완벽하게 살아가지 못할지라도 흔들리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바른 쪽으로 갈 수 있는 거죠.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전체를 다 본겁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전체 주제가 대제사장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우리의 죄, 우리의 반 생명,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어떤 세력, 여기서부터 해방시켜주는 유일하신 대제사장이다 그 이야기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고요 또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2015년 2월 초 우리가 또 세월이 가면 이 시간과 순간을 까먹겠지만 그러나 긴 시간 속에서 이 말씀을 같이 이렇게 믿음의 동반자로써 공부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천년 전 이 히브리서기자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는 그저 들은 풍월이 아니라 진리로써 생명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받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 풍요로워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6장




. 6장 1절부터 20절까지 있네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1절 읽고 여러분들 그 다음절 읽고 하면서 20절까지 있으니까 딱 떨어지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절,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절,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절,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절,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절,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절,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절,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단어 하나만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20절에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나와 있죠. 지난번 5장에서도 반차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실은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에요. 이 반차가 차례, 순서이긴 하되 조금 더 엄격한 질서를 가진 순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영어로 오더(order)라고 합니다. 어떤 체계가 잡힌 질서, 선한 질서, 이런 걸 얘기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차례차례 직임을 자기가 수행하잖아요. 그 순서, 이런 걸 갖다가 반차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6장은 전체 제목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잡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5장에서도 보면 어린 아이 신앙이 있고 좀 장성한 사람의 신앙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믿음을 큰 믿음이다 작은 믿음이다 우리가 얘기를 하긴 하지만 그 말하기에 따라서 약간 관점이 다른 겁니다. 뭐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고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게 다 똑같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근원적으로 보면 이 믿음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은사라고 한다면 큰 은사가 있고 작은 은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 똑같은 겁니다. 목사직, 이것도 은사고요. 교회 봉사하는 것들, 주일학교 교사들 등등을 은사라고 얘기합니다. 카리스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일반적인 세속에서는 저 사람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어 하면 어떤 강한 지도력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원래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그 뜻은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카리스마가 있어 얘기하는 것은 틀린 말은 또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하니까 힘이 느껴지는 거죠.

이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걸 크다 작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기능의 차이, 어떤 일을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거예요. 그러나 이 믿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성장하는 믿음이 있고 정체되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성장하는 건 큰 믿음이라고 보통 얘기 할 수 있고 정체되는 건 작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보겠냐 그런 말씀이 있는 것처럼 그 믿음에 정말 들어가게 되면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존재론적인 힘이 있어서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약간 다른 차원입니다. 그게 인제 뭔가 하는 것을 6장에서 천천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6장을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보면 동그라미를 쳐가지고 단락이 구분되어 있어요. 그것에 따라서 제가 구분을 했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가 하나고 두 번째는 9절에서 12절까지이고요. 세 번째는 13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각각 소제목을 붙였습니다마는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문맥에서 중요하다 싶은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소제목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 소제목이 두 번째 회개 위험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거는 6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일단 그거 먼저 보십시오. 6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회개 못한다. 두 번째 회개는 불가능하다 그런 뜻이죠. 이 말 자체로 보면요. 그래서 아주 옛날 교부시대 때에는 이러한 말에 근거해서 가능한대로 세례를 나중에 받으려고 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에 또 잘못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거 회개가 불가능하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 기독교를 공인한 그 황제가 일을 많이 했거든요. 4세기 초반, 중반에 역할을 한 사람인데 니케아 회의도 소집하고 굉장히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거의 죽을 때 이르러서 세례를 받았어요. 논리가 그겁니다. 자기가 황제로 살다보니까 잘못도 많이 하겠고 전쟁도 일으키고 해야 되니까 그런 걸 염두에 둬서 그런지 회개한 다음에 또 잘못하면 큰일 난다 생각을 해갖고 거의 죽음에 이르러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6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실수를 안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콘스탄티누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약간 못 미친 거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오해한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실수를 했다 안 했다 그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미 마음이 떠나면 돌이키려고 해봐야 되지 않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회심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걸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거죠. 그 이야기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의 핵심 단어를 두 번째 회개의 위험성이라고 정해서 어떤 뜻인가를 먼저 말씀드렸어요. 1절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1절은 앞에 써 있는 5장 이어지는 거예요.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뭘 버리라고 이야기하죠. 버리라, 떠나라 하는 겁니다. 그 도라고 하는 단어를 각주에 보니까 말씀이라고 나와 있죠.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진리, 그런 것의 초보, 기초죠, 출발점이죠. 이걸 버려라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사실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초보를 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초보를 붙들어야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이 중요하니까요. 기초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는 초보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 성장이 없는 거. 만날 젖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기초에만 머물러 있어 가지고 더 이상 성장이 없는 그러한 건 문제가 있다 그걸 말하면서 거기서 좀 떠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셨을 겁니다.

2절에, 1절 다시요. 초보를 버리고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오죠. 죽은 행실과 회개와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에 대한 교훈의 터를, 이게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다시 닦지 말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 반복됩니다마는 중요하되 거기서만 머물러 있지 말고 더 완전한 데로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나가야된다 얘기하고 있어요. 그 완전한 데가 뭔가 그건 설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게 실질적으로 들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초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거를 반복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었던 어떤 경험, 그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약간 식어지게 되면 예수 영접 회복해라 그래서 거기에 머물러 있죠.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것처럼 구구단을 자꾸만 반복해서 외우는 거예요. 수학은 잘 모르는 거예요. 구구단이 필요 없는 건 아니되 구구단을 기초로 해서 점점 수의 오묘한 세계로 들어가야 그 쪽으로 성숙한 수학을 아닌 게 아니겠어요. 이러한 준비, 훈련들이 우리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다툼, 갈등, 교단 분열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기초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써먹나, 좀 편하게 얘기해서요. 예수 믿는 걸로 어떻게 세상에서 복을 받는 자, 그럴듯한 기독교인이 되나 이런 거만 생각하지 더 나가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점점 완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 다시 터를 닦지 말고 자꾸만 돌아가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나가야 되는데 못나가는 그런 상태로 있지 말고 2절 후반절에 보면 안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신앙생활하면서 내 신앙이 진보하고 있다, 완전한 데로 점점 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한 거를 성취는 못해요. 그러나 그 불빛이 점점 환하게 비추가 있다는 그러한 느낌, 인식, 깨달음, 경험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건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낱말 뜻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니면 내가 죽었다 산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해도 세례는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입으로 자기가 고백하게 되면. 그런데 거기서 더 완전한 데로 나가게 되면 그 생명의 신비들,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과 예수의 재림과 그러한 하나님과 일치된 생명의 세계가 더 가까이 경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점점 우리에게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면 죽음이라는 것도 작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로 통과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적인 자기도취, 자기착각이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깨우침, 경험 죽음으로부터 자유,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과정이 있는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해요. 이건 불교식으로 수행이 아닌 거예요. 불교는 자기가 막 갈고 닦는 거잖아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초보의 단계에서 점점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어떤 과정, 길, 이러한 신앙의 성격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일단 관심도 없고요. 이게 참 딜레마인데요. 제가 여태까지 평생 동안 많은 사람들,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고. 제가 다른 사람보다 일찍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 갔다 오고 해서 부목사라든지 이런 경험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잠깐잠깐 있었는데 주로 단독 목회를 젊었을 때부터 해서요. 그래도 목사 생활을 하니까 지방이나 총회에 여러 사람들을 알고요. 장로님이나 목사들 많이 알기 때문에 그 분들의 관심이 어디 있나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단 관심이 없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같은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목사님들도 이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성경, 신학, 영성, 이런 것들이 방편이 돼버려요. 방편이 돼가지고 그걸 통해서 어떻게 교회를 어떻게 키우냐. 그런 식의 관심들이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종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부활에 대해서도 사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거는 구구단처럼 딱 주어진 거라서 그거를 이용해서 내가 구구단을 멋있게 화려하게 잘 외운다. 그런 일종의 쇼처럼 보여주기 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좀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교회 안에 사도신경과 교회 예배가 살아 있으니까 그런 허물이 있어도 나갈 수 있긴 있는데 그런 걸 잘 알고 신앙 생활하는 거 하고 아닌 거하고 차이가 좀 많이 있는 거죠. 그런 점을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생각을 해서 과연 내가 신앙의 초보가 아니라 완전한 데로 나가고 있는 그러한 수행으로써 살고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그 다음 6절, 이건 아까 얘기한 거예요. 이게 타락한 자가 새롭게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얘기예요. 그건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돌아가기 힘든 거는 내가 실수를 한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건 누구나 하는 거고요. 세례 받아도 그런데 이제 마음이 완전히 강퍅하게 된 거,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버린 거 그런 상태에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한 위험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은 창조의 문제를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실을 맺도록 다 만들어 놓으셨는데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 엉겅퀴가 돼서 버림을 받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8절 마지막에 보면 불 태워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 얘기를 한 겁니다. 다음 9절에서 12절입니다. 여러분 강의안 요약본 잠깐 보실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신앙의 초보와 성숙과 두 번째 회개의 불가능성 등등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편지, 혹은 신학 논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정말 신앙의 근본에 가게 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자세를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의 성장도 있고 신앙의 능력, 그런 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데요. 그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대게 형식에 떨어지거나 또는 자기 열광에 빠지는 거예요. 신앙하고 자기 열광하고는 정말 다른 겁니다. 내가 믿음 있는 것 같아하면서 그 쪽으로 열심을 내는 것. 그게 아니라 정말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부활과 종말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분의 약속, 가르침, 여기에 정말 마음이 가야 신앙이 좀 성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다 성숙하게 신앙생활하기 힘들어요. 다는 불가능합니다. 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야 되고요. 그걸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필요하고요. 우리들이 그런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뭐냐, 참된 신앙의 근원이 뭐냐, 이거를 11절과 12절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 가지예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 11절과 12절이에요. 신앙의 성격을 얘기하는 거예요. 혹은 본질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소망과 믿음과 오래 참음. 이 세 단어만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돌아가셔도 공부에 참가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보통 우리가 많이 소망, 희망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 그러한 희망, 그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거는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는 한 부분인 거예요. 소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어떤 속사정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 강의 요약문 좀 보십시오. 오늘 제가 글을 잘 설명해야 될 텐데 일단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소망, 믿음, 오래 참음 이게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요. 이런 신앙적인 태도는, 그렇잖아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이 우리의 태도잖아요. 이런 것들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세요. 약속과 희망, 믿음, 오래 참음이 다 연결되는 이야기에요. 약속은 어때요 이미 받았어요? 아직 못 받았어요? 못 받은 거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직 우리가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해서 어떤 걸 이루었다. 그런 걸 받은 거다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약속의 부스러기들입니다. 그건 결정적으로 우리의 약속은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뭘까요 쉽게 생각해서. 구원이죠. 하나님의 나라 거기에 참여하는 것, 부활 생명을 얻는 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을 이루었나요? 아니 잖아요. 그게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제가 건강을 달라고 기도해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건강하게 산다거나 10년 더 산다거나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건 그래봤자 조금 더 머물다 가거나 먼저 가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구원이죠. 구원을 다른 말로 부활이라고 얘기하고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거를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절대적인 것이라서 한, 두 단어로 딱 끝낼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복음서는 복음서대로 서신은 서신대로 요한계시록은 요한계시록대로 말이죠. 본문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데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 온 것이나 그리고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없어요. 막 노력해서 뭘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각한다면 참 하나님의 약속이 유치해지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어떤 것을 준 게 아니다. 여기서 실증적이라고 하는 말은 물건처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얘기합니다. 이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약속인 거예요. 지금 끝난 문제가 아니야. 앞으로 되어 질 일. 그러니까 기대가 되죠.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잘 먹고 잘 산다 그걸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다. 이걸로 머문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거는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거예요. 돈 많이 벌면 어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약속입니다. 정말 잘 생각하셔야 돼요. 아직 성취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정말 신실한 분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해요. 왜냐하면 확실하게 손에 든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 거니까 말이죠. 약속한 분을 우리가 신뢰할 만하니까 따라가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신경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얘기하잖아요. 그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으며 그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을 만 한 분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그 분으로부터 온 거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사도신경이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인지 좀 알아야 되잖아요. 알지 않고도 믿습니다하면 되긴 돼요. 사람은 신기해서 자기마저도 속입니다. 자기마저도 기만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믿지 못해 신뢰가 가지 않으면서도 열광적으로 매달리다 보면 정말 자기가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신앙인 거죠. 그렇게 가능한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의 믿음이 좋은 건 아실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왜 믿을 만한 분인지를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하고 신학만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죠.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을 기독교인들은 상속 받은 겁니다. 12절에 보면 기업으로 받는 자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게 상속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재밌는 표현이에요. 너희들은 상속받은 자다 이렇게만 말하지 않고요. 상속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인 거예요. 그냥 혼자서 날고 기고 해갖고 번쩍해서 기도 많이 해서, 뭘 받아가지고 깨닫는 게 아닙니다. 앞에 간 사람을 따라가는 거예요. 본받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도들 속사도, 교부들, 지난 몇 천 년 동안 경험한 사람들이 앞에 가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 길을 가야죠. 잘못 가게 되면 또 삐뚤게 가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 그렇게 기업을 받은 앞의 선배들이 어떤 신앙이었냐는 것을 알아야죠. 배워야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성서와 신학이, 역사입니다. 우리가 꾸준하게 배우는 게 최선입니다. 여러분, 공부 이런 것들이 당장 신앙이 불 같이 뜨거워지는 경험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래도 문득문득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어떤 단어라든지 어떤 개념 설명 그런 걸 통해서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경험들을 조금씩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확 더 열리게 됩니다. 그런 단계까지 가는 건데 여기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 빌리면 완전한 데까지 나가는 거죠. 갑자기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준비 없이는 안 됩니다. 만날 젖만 마시고 달콤한 데만 머물러 있다가는 성장하지 못하죠. 히브리서 기자가 예로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 딱딱해도 약간 써도 음식을 자기가 깨물어 먹고 신학도 공부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뭐냐, 존재한다는 게 뭐냐, 시간이 뭐냐, 그런 걸 예를 들어서.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학습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지금까지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알 수 있고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왔다 가거든요. 돈이 있으면 좋은 집에 산다거나 건강하면 조금 건강하게 산다거나 그런 거예요. 그런 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받는다고 하는 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보다 우리들에게 더 시급한 게,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게 뭘까요.

다음 마지막 13절에서 20절입니다.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애틋한 마음으로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권고를, 충고를 했어요.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구약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약속 개념, 이게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에요. 기본적인 걸 잠깐 말씀드리면요. 성서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혼자 고고하게 있어서 밑에 있는 인간들을 자기 마음대로 체스 놀이하듯이 여기 놨다, 저기 놨다하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람과 약속하는 분으로 성서가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약속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대표적인 출발이 아브라함입니다. 여기 약속이라고 하는데 단어가 두 가지가 나와요. 약속과 맹세. 그래서 이 단락의 소제목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두 가지가 비슷한 거예요. 비슷한데 좀 차이가 있죠. 약속에 근거해서 맹세하는 거예요. 이건 내가 변하지 않고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인, 이게 맹세예요.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고 또 맹세하셨다. 약속은 서로 관계에서 한 건데요. 맹세는 어떤 근원적인 걸 두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국기에 대한 맹세, 이런 거 있죠. 우리나라 예식을 공공기관에서 뭐할 때 말이죠. 그건 국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거예요. 약속은 아니죠. 약속을 어떤 권위에 근거해서 확인하는 걸 가리켜서 맹세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맹세할 때는 더 높은 권위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더 권위가 있는 존재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빌려서 맹세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약속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에 근거해서 맹세했다 그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약속과 맹세 두 가지가 어떻게 차이 있냐,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고요. 어쨌든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16절이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고 확증이니라. 그러니까 맹세를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논란이 잠재워 진다는 거죠. 나는 국기에 이름에 나라에 맹세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 앞에서는 애국적이냐, 아니냐, 그런 논란이 필요 없이 해결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핵심적인 표현은 아닌데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지금 여기 약속과 맹세가 반복해서 나왔어요. 여기에 근거해서 여러분 강의 요약문 넷째 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진다. 하나님과의 약속,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그리고 맹세에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집니다. 이거는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거기까지만 접어두고 넘어가지요. 19절에서 소망을 가리켜서, 여기 지금 소망이 중요한 거였어요. 앞에서 소망의 풍성함, 믿음,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건데 지금 다시 13절부터 그 약속과 맹세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그게 확실해야 우리가 소망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얘기한 거예요. 19절에서 이 소망을 재밌게 표현 했습니다. 영혼의 닻, 참 표현이 문학적으로 멋집니다. 영혼은 우리 사람의 가장 심층에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다 밝혀지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아직 미쳐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와 성서에 근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신학의 설명에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에요. 그게 살아 있어야 정말 사람이 사는 거죠.

우리를 정말 살아 있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영혼인데 영혼의 닻이다, 닻은 배에서 쓰는 건데요. 닻을 내려야 배가 안정적이잖아요. 우리 영혼이 안정적으로 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근데 이 소망은 약속한 맹세에 근거에서 가능한 거예요. 그 약속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약속이 신실하다는 걸 알고 그 약속에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사는 거죠. 그렇게 된 사람은 그 영혼이, 생명의 근원이, 닻을 내린 배와 같은.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안정이 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 안 됩니다.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여기서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그 휘장을 가리킵니다. 성전에는 여러 마당도 있고 건물도 몇 개 있는데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어요. 가장 거룩한 장소라서 거기는 유대 대제사장이 매번 안식일마다 들어가지 못해요.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갑니다.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거예요. 가장 거룩한 곳, 그건 생명의 비밀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닻을 내린 배와 같아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휘장 안에 들어간다, 생명에 중심으로 들어간다.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렇게 히브리서를 여러분들과 공부하지 않으면 구석구석 낱낱이 확인할 수 없었는데 공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표현들은 제가 잘 알고 있으면 다른 글을 쓰거나 설교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도 계속 억지로라도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요일만 하지 말고 매일 모일까요? 무슨 뜻 인가요 웃음이.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입니다마는 제 꿈, 비슷한 게 수도원 원장 되는 겁니다. 그럼 이제 거기서 매일 성경 가르치고 노동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매일 같이 읽고 보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닻을 내린 것처럼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문장만 보겠습니다. 휘장 안은 생명의 비밀이다. 이런 사건이 예수를 통해서 일어났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가 좀 많이 된 히브리서 6장 공부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렇게 또 순서에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을 공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도의 초보, 중요하되, 근본이되, 거기만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 데까지 나가라고 하는, 그 지성소의 비밀까지 나가라고 하는 간절한 호소를 듣습니다. 저희들에게 히브리서 기자의 간절한 호소가 우리 신앙에 자극, 공명, 그리고 동기가 되도록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그 소망을 안고 영혼의 닻을 내린 것처럼 한 평생을 살아가게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7장






히브리서 7장입니다. 1절부터 28절까지 있어요. 비교적 긴 장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이 핵심 주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때는 잘 듣지 못한 이름이죠. 멜기세덱이요. 그리고 성경에도 멜기세덱에 대해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알고 있는 것만 두 군데 정도에 불과해요. 근데 히브리서 기자가 특이한 관점으로, 이게 신약성경에 보면 다른 것도 많잖아요. 바울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거론한 부분이 있나요?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교리적으로 토대를 한 사람이거든요. 신학화 했죠.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거기도 나름대로 신학이 있습니다마는, 그냥 서술한 반면에 바울은 그걸 교리적으로 한 거예요. 신학 이론화를 한 거예요. 바울이 없었다면, 아까 우리 찬송 부를 때 말씀드린 그리스도론, 기독론이 짜여 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은 구원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에요. 사건 자체에요. 그건 원형이에요, 원질. 그거를 사람들이 이해하려면 그냥은 안 됩니다. 이론적으로 해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근데 바울도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고유한 어떤 시각에서 이 멜기세덱을 크리스톨로지에서의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네요. 왜 그런지는 우리가 조금 지나봐서 알 겁니다. 앞에도 한, 두 번 나왔습니다마는 결국은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이다 그걸 말하려는 거죠. 그래서 이 멜기세덱을 끌어들이는데 왜 굳이 멜기세덱이냐 다르게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오늘 7장에 나옵니다. 자, 7장 1절부터 28절까지 있네요. 저와 여러분들이 교독해서 이 내용을 잘 눈여겨보면서 읽겠습니다.

 

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절,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절,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절,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절,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절,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절,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절,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절,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절,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절,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절,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절,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느니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 번 읽었는데요.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한 번 읽고 이거를 탁 파악했으면 정말 위대한 학자입니다. 신약학 박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기에 많은 단어들이 나와요. 우리가 익숙하지 않는 단어들과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가 나오고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관용어가 나오기도 하고요. 굉장히 복잡하게 여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급은 12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에서 나옵니다. 레위 지파가 다 제사장이 되는 건 아니고요 거기서 그 사람들이 성전 일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그들이 가나안땅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정복할 때 12지파가 땅을 배분 받아요. 그러니까 유다는 어디, 누구는 어디 등등해서 12지파가 가나안 지역을 배분 받습니다. 그리고 그쪽을 지배를 하기위해 자기들이 공격을 해서 땅을 차지해야 됩니다. 그 때에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배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전통이 세워졌어요. 그래서 나머지 지파들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십분의 일씩 레위지파에게 주고 그들이 그걸 기본으로 해서 먹고 살면서 성전업무 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제사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아까 맹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요. 레위지파이기 때문에 혈통을 통해서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레위지파에 속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는데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이 맹세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더 확실하다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왜 등장하냐면 레위지파는, 이 논리를 조금 생각을 하셔야 돼요.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게 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 사람의 설명이 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확실성을 말 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근데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내려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에 전통이 있어야 되는데 이 레위지파의 우두머리는 어디에요. 레위지파는 야곱에게서 나온 거잖아요. 야곱에게 올라가고 야곱 위로 올라가게 되면, 이삭은 좀 생략됩니다.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렇게 네 족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파(派)에요.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사실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내려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12지파 이야기들이 따로따로 이스라엘 역사에 쭉 내려왔어요. 그게 일정한 시점에 편집한 어떤 성서 기자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정리를 다시 한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아들, 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걸 갖다가 제가 신학적인 그런 걸 말씀드렸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하여튼 성서가 얘기하는 걸 따라가게 되면 이 레위지파도 결국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인데 이삭은 좀 빠져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도 참고적으로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게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아니라 각각의 따로따로 있었던 전승이라는 걸 어떻게 아냐. 그건 학자들이 잘 연구하면 드러나게 되는 거고요. 그중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똑같은 일들이 이삭에게도 일어나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비슷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이거는 따로따로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 사람하고 붙어서 쭉 전해서 내려오다가, 보통 우리도 구전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구비문학이라고 해서 민요 이런 것들은 다 옛날에 입을 전해서 내려온 거예요. 이스라엘에도 성경이 있기 전에는 다 구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계급의 레위가 결국은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에게 가요. 아브라함에게 가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10절 후반절에 보면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섰음이라. 아브라함의 허리라고 하는 것은 생산 능력,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런, 배 안에 이미 씨앗이 들어있다 그런 뜻으로 사용 한 겁니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십분의 일,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이죠. 깨끗한 돈은 아닙니다.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하러 갔다가 구출만 해온 게 아니라 완전히 상대방을 초전박살 내버리고 많은 물건을 빼앗아 온 거예요. 그 중에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의 근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아브라함인데 그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쳤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그 사람, 멜기세덱입니다. 구약에 보면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 나오고 있어요. 이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종교의 제사장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 부분을 잠깐 볼까요. 창세기 14장 멜기세덱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 14장 17절에서 20절입니다. 그 14장에 소제목이 이렇게 붙어있죠.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다. 롯이 사로잡혔다고 하는 걸 쫓아가서 구출 했어요. 그 당시에 이미 굉장히 개인적인 사병이라고 하죠.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부호가 된 거예요. 전쟁을 해서 이겼고요. 그 다음에 17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전이 아브람이었어요.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소돔왕이면 소돔과 고모라, 별로 좋은 도시는 아닌데. 그렇게 됐고 그 다음 18절은 살렘왕은 샬롬, 이러한 뜻도 같이 있는 겁니다. 평화 이런 거죠.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이에요.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은 천연 요새라서요.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이 정복하지 못한 땅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들어갔지만 성공하지 못했고요.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겨우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하기에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 그런 쪽으로 온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제사장 계급이 생긴 것은 훨씬 후이니까요.

 

18절이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고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정리가 됐고 그 다음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축복했다고 그래요. 20절에는 아브람이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보다도 이 멜기세덱의 전통이 더 우월하다. 그걸 강조하는 거죠. 그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 나왔잖아요. 멜기세덱의, 여기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서열을 따라서 예수가 정말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걸 이제 얘기하려고 하는 거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죠. 내용을 좀 천천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3절, 여기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성서적 근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본 거예요. 창세기 14장 17절에서 20절 사이에 나옵니다. 여기서 내용을 금방 바로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3절에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준 멜기세덱에 대해서 살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라고 하면서 3절에 보면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이 나와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이건 멜기세덱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것도 조금 비약이 약간 있는 듯 보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을까요. 성서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버지 없고 어머니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유가 있겠죠.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멜기세덱도 역시 그랬다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죠.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다 있죠. 예수님에게도 사실 요셉과 마리아가 있는 것처럼. 이런 것은 사람에게 아버지,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있느냐 그렇게 따지고 들면 곤란하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의 이야기 중에서 십일조가 연관돼서 나옵니다. 4절에서 10절까지예요. 그래서 간혹 교회에서 하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말할 때 이 부분도 나오긴 합니다. 말라기서가 제일 많이 나오지만 이 부분도 나와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했다는 겁니다. 십분의 일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의 12지파 중에서 레위지파가 땅도 받지 못했으니까 먹고 살기위한 전통도 있고요. 여기 멜기세덱 이야기하고 연관해서 십분의 일이 나오는 걸보니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관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공부 요약안 두 번째 해당하는 것 잠시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십일조를 근거해서 설명한다. 레위지파들도 주변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요. 그러나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걸보면 이미 레위지파의 씨앗이라고 할까 그게 이미 아브라함에게 있는 거니까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하다 그러한 논리입니다.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열두 아들에 기원한다. 레위지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에서 제외 되었고 아까 설명한 겁니다. 다른 지파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서 살게 됐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보다 우월하다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을 하는 겁니다. 아주 히브리서 기자의 독특한 시각이에요. 신학적인 시각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바울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주로 로마서에서 인용하는 구약 인물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거론하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십일조를 준 것에 의해서 멜기세덱을 더 우위에 놓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1절에서 14절 소제목으로 제가 옛 제사장직의 붕괴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개를 대비시키고 있어요.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하고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110편 4절에 근거해서 멜기세덱을 거기에 대립하는 그러한 제사장 계급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은 조금 부족한 거죠. 조금이 아니라 이거는 한계가 있는 거죠. 멜기세덱에 비해서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계가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14절 사이에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옛 제사장직의 한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 지파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어떤 멜기세덱의 질서에 따라서 대제사장이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제 이 제사장의 직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장의 그것을 뒤집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모세가 제사장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유다지파, 그러니까 모세가 얘기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지파가 제사장이 돼야하는 거고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모세는 제사장 문제와 연관해서 유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야곱의 몇 째 아들이죠? 세 번째, 네 번째? 그 정도 되죠. 그런데 유다지파는 다윗 가문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될 수 없었어요. 모세가 한 번도 제사장과 연관해서 유다지파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제 멜기세덱의 더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근거해서 볼 때 이러한 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된다. 레위지파에서 나온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율법의 어떤 관점, 흐름, 이런 것들이 새롭게 해석돼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해석을 누가합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아니고 어느 지파가 해야 돼요? 유다지파가 되는 거죠. 이게 굉장히 아슬아슬한 거예요. 구약에 의하면 당연히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에서 제사장, 참된 제사장이 나와야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 얘기죠. 예수님이 유다지파라고 하는 거 맞나요? 맞지요? 성경에 여러 번 나와 있죠. 복음서에도 나와 있고 다윗 후손이라고 하니까 그게 다 같은 지파니까 분명한 것 같습니다. 12지파 중에서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유다지파여야 된다. 그 근거의 출발을 어디서 잡아요? 멜기세덱이 참된 제사장이고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보다 먼저 있었고 레위지파 제사장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고 축복을 할 때는 윗사람이 밑에 사람에게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영적으로 훨씬 우월한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 이러한 논리입니다.

 

대충 동의가 되나요? 아니면 조금 비약이 있어 보이나요. 내가 보기엔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 생각이 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성서는 해석의 문제인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하는 거잖아요. 구약에 있는 레위지파, 모세 율법,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런 사건들을 해석하는 거죠. 이 사람의 독특한 해석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고 게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율법의 한계에요. 요약문 잠깐 보겠습니다. 본문은 예수가 멜기세덱의 전통에서 오신 분이므로 율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율법의 전통을 따르면 레위지파여야 되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전통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한계가 있는 거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다. 15절 성경보세요.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 보니 더욱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죠. 16절에 그는 육신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이거는 레위지파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랐다. 이거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불멸의 생명의 능력. 거기에 따라서 그분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서 계속해서 율법의 한계,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멜기세덱을 인용하는 건 딱 두 개, 아까 말한 창세기 14장에 있는 거하고 여기 시편 이 두 개 약간 좀 성서 근거로 보면 빈약하죠. 그래도 그것에 근거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확신 가운데서 그렇다면 레위지파에서 오는 제사장 직분이 왜 문제가 있느냐.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논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을 잠깐 확인을 해 드릴게요.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구절이에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아사상이 여기 있다 보고요. 그래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 된 분, 이미 시편기자가 말하고 있지 않냐.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결국 18절에 보면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였다. 계명은 물론 율법이고요. 또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7장의 틀 안에서 본다면 레위지파에게 제사장 직이 대물림된다고 하는 한계를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은 폐하게 됐다. 다음, 20절에서 22절. 여기는 맹세라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제가 공부 시작할 때 잠깐 말씀 드렸습니다. 레위지파는 맹세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대를 이어서 하는 거니까. 자기 족보만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대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하셨다는 건 아니에요. 이것도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맹세하신 거죠. 내가 예수 외아들을 십자가에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 그러므로 영원한 번제물로 드려지게 됐고 속죄의 길이 됐고 그래서 참된 제사장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다고 하네요. 하나님이 딱 맹세했다는 말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아까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는 거예요. 그 부분을 갖다가 하나님의 맹세다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2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정말 참된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여기 소제목은 하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입니다. 히브리서에서 7장이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합니다. 핵심이에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레위지파보다 더 우월한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십분의 일을 바치었던 그 시편 110편 4절에서 언급된 그 멜기세덱의 반차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옳다 지금 말하고 있는 거죠. 강의 요약문 좀 보겠습니다. 본문은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 직분의 질적인 차이를 여기서 밝힌다.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죽어야 되기 때문에 숫자가 많다. 계속 대를 이어서 끊임없이 제사장을 하게 되는데 예수는 죽지 않으시기에, 부활이에요. 제사장 직분은 누구에게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제사장. 한 번으로 완성된 그러한 제사장이다. 지금 대제사장, 제사장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장 가운 입고 성전에서 제사장 직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런 일을 하셨다는 뜻에서 제사장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의 핵심은 부활인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지셨고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계속 역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은 분. 결정적인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부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죄인들이기에 스스로의 죄,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날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돼요. 두 양쪽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반복해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 스스로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는 반복하지 않고 단번에 자기를 드렸다. 유일회성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과 생명 부활사건의 유일회성 인거죠. 그런 점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바울이나 다른 편지들과 조금 특이하게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에 서있는 건 분명합니다. 단번에 드리심, 단번에 구원을 이루심, 이런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나 여러분들이 혹시 생각할 수 있어요. 단번이면 어떻고 반복이면 어떠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만약에 반복해야 된다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가 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약간 자유주의적인 분들은, 그리고 훨씬 해방 신학적인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택동이 오늘의 그리스도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 해방을 했으니까. 그리고 또 민중 그리스도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고 하는,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그리고 신학성서 곳곳에 배어있는 이러한 구원의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십자가의 드리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반복되는 건 아니에요. 이미 그건 끝난 문제에요. 여기서부터는 더 이야기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오늘 접어두고요. 레위 제사장들은 제사를 자꾸 반복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한 번에 끝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제사하고는 조금 다른 거예요.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 거예요. 이미 그건 끝났습니다. 죄 용서 받는 이 사건은 더 이상 똑같이 우리가 반복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끝나게 된 거고 그래도 여전히 죄에 휩싸여 있다는 딜레마 속에 있긴 있으나 그건 우리가 극복해야 될 문제이고 일단 그거는 유일회적으로 다 이룬 것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조금 더 요약문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 부활의 예수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28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어떻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쭉 끌고 가는 어떤 방향은 이해하시겠죠. 구도도 정확하게 나와 있는 거죠. 그 안으로 우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 가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일단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신앙과 신학의 기본 구도, 이건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된 제사장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단 번에 이루셨다. 그래서 반복될 필요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회성입니다. 근데 왜 이걸 자꾸 구약에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해서 반복해서 말 하냐. 왜 그러겠어요.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 율법, 토라, 이런 것들을 여전히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당시에 당연히 있는 거죠. 거기서부터 유대교의 전통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쟁을 한 거예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는 거고. 적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요. 바울 같은 사람들은 완전히 빠져나왔고 신약성서에 기록된 이런 사람들은 다 그 공동체 전통으로부터, 그걸 부정하고 까부시는 건 아니되 왜 다르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본적으로 구약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분인데 유대 전통이 잘못 해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되, 율법을 근원적으로 넘어서는 복음의 사건이다 그거죠. 저도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히브리서를 제가 여러 번 읽긴 읽었습니다마는 대게 그냥 지나가게 되네요. 근데 공부하려고 차분하게 읽고 하다보니까 좋은 영적인 시각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때인가 가서는 기독교 영성의 큰 틀 안에 들어가 있구나, 느끼게 될 겁니다. 단숨에 되는 건 아닙니다. 꾸준하게 이러한 공부에 참여하는 게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7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런저런 일들로 쫓기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함께 읽고 공부하게 하신 것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그의 참된 대제사장 되심, 그것을 초기 기독교가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잘 풀어서 설명한 이 히브리서 기자의 오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또 귀한 공부시간에 참여한 우리 믿음의 식구들 각각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형편들이 다 다릅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모든 삶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에 토양들이 되도록, 그리고 토대가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늘 주님께서 감춰 주시기를 원하고 늘 새로워지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8장



히브리서 8장입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짧아요. 13절까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내용도 좀 단순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구조적으로는 단순하지만 내용이야 깊죠. 1절부터 13절까지 저와 여러분이 교독해서 읽을 텐데 마지막 13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1절,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절,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절,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절,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절,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절,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절,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우리가 앞에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말하는데 구약의 어떤 한 인물을 거론하면 이야기를 했습니다.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은 성경에 그렇게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조카 룻을 구출하러 갔다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 여러 지역에 있는 왕들, 옛날에는 씨족사회 그런 정도니까 왕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는 의미하고는 다르죠. 추장, 씨족 족장, 이런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오게 된 이유는 성경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추측은 할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거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이기더라. 오히려 다른 군대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이 다 때려 부수고 많은 노획물을 갖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으니까요. 저 아브라함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게 아닌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계를 터놓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생각들을 곳곳에 있는 씨족, 추장들이 당연히 생각을 했겠죠. 제가 추정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인물이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그랬어요. 어디 왕이라고 그랬죠? 살렘이에요.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 샬롬, 같이 통하는 말들이죠. 평화라는 뜻이에요. 고대 사회에는 왕이 제사장하고 많이 겸했습니다. 종교하고 정치가 하나였어요. 신정정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멜기세덱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하지는 않겠습니다. 멜기세덱 그 흐름은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네요.

히브리서 기자가 왜 멜기세덱을 말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레위지파로 생각한 거예요.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만 혈통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아니라 레위보다도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더 근원적인 제사장인 멜기세덱이야 말로 레위지파보다 더 뛰어난 제사장이다. 이 멜기세덱의 반차, 순서에 따라서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 되었다 그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1장부터 7장까지 쭉 한 겁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확실하다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8장부터 10장 18절까지 이 대제사장의 직분이 뭐냐,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이 뭐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직무를, 다른 제사장들이 따라올 수 없는 탁월성을 갖고 감당하셨다. 그걸 이제 설명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구약하고 많이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전체적으로는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건 아주 원천적인 거다, 근원적인 거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 제사장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에 비교할 때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걸 말하려는 거예요. 1절 잠깐 보십시오. 표현이 재밌어요.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여태까지 7장까지 얘기한 것 중에서 이것을 요약적으로 말을 하면 다음의 사실이다 하는 거죠. 대제사장, 이건 약점이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이거죠.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1절 후반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여기서 지극히 크신 이는 물론 당연히 하나님이시고요. 하늘은 당연히 하늘을 가리키는데 그걸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져요. 어떤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걸 읽게 되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정말 예수님이 사진에서 본 그러한 모습으로 하늘 어느 공간에 임금이 앉듯이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이 오른쪽에, 우편이라고 했으니까, 여기 괜찮은 자리에 앉아계시겠다. 그런 그림이 그려지죠. 일단 이 표현은 그렇습니다. 그건 하나의 그림이에요.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약간 어린아이의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동화를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여기에는 더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이 방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어디 있고 왼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은 시간 전체에요. 창조와 종말 그 전체가 하나님인 거예요. 그리고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것,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다 모르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설명한 것이 정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 시간을 통치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분은 어떤 형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형상, 이런 거 만들지 말라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확인 하려고 하지 마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마라라 이야기합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 안에 가두는 거예요. 사과 이렇게 얘기하면 사과라는 그게 딱 있잖아요. 어떤 이름을 붙여 버리면 제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처럼 앉아 있고 오른쪽이라는 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다 그걸 가리키는 거예요. 이건 이미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된 건지를, 그리고 여태까지 관용적으로 유대인들에게서, 이 성경은 유대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걸 알고 읽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장 13절에 이미 한 번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시편 110편 1절에 근거한 거예요. 잠깐 읽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이 굉장히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성경이에요. 물론 모세오경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경전이었지만 시편은 그거하고는 좀 다른 차원에서 중요했습니다. 랍비들이 회당에서 종교 행위를 할 때 시편을 많이 읽었어요. 당연히 예수님도 이 시편을 많이 읽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외우셨을 거예요. 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런 것들이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예수님이 외우고 계시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그걸로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는 뭐고 주는 뭐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주를 예수님으로 생각을 한 거죠.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이러한 말씀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말씀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어떤 뜻으로 사용했냐면 오른편이다 왼편이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대제사장인 그 예수님이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똑같은 창조와 인간을 살리는 것, 세계 완성, 그런 권능이 있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설명을 제 강의안에 적어 놨으니까 보십시오. 강의안 1번에 두 번째 패러그래프, 거기서 셋째 줄 보면 이렇습니다.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리킨다. 우편에 앉아있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아까 영적인 권위라고 얘기했는데,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에 오르셨다는 뜻이다. 이 궁극적인 생명, 이런 표현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시겠죠.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것은 궁극적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죠. 지나가는 거예요. 잠정적이라고 합니다. 무상성이라고 해요. 이게 무의미하다는 거하고는 다른 거예요. 굉장히 오늘 현실이 중요하죠.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더 확장시켜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지금 말한 궁극적 생명, 이걸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부활 생명, 그런 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차이가 있다, 동일하다 어느 쪽?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동일한가. 오늘 그것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그 사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동일한 능력이 있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걸 조금 더 설명하는 거예요. 성서와 참 장막을 섬기는 이시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죠. 대제사장이죠. 성서와 참 장막,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사람이 세운 게 아니다 이렇게 비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서와 참 장막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 궁극적 생명이 감춰진 하나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을 두 가지로 설명하네요. 하나는 참 장막이 있고,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또 하나는 누가 세운 게 있죠. 사람이 세운 것. 하나는 주님께서 세우신 것, 또 하나는 사람이 세운 것. 이 사람이 세운 것은 유대인들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모세로부터 시작했죠. 성전과 성막. 성전하고 성막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차이가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고요. 그걸 솔로몬이라고 하는 왕이 지은 거예요. 그걸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성전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막은 성전이 세우기 전에 광야 생활할 때 천막 비슷한 걸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동식 성전을 가리켜서 성막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성전의 원형이긴 하죠. 성막을 비롯해서 그 모든 제사를 드릴 때 습관이나 형식, 그 제사장의 복장, 모든 성서와 성막, 이런 것들 일체에 대한 정보, 자료, 이런 것들은 다 모세에 기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과 등등을 받았을 때 그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거든요. 그게 이제 사람이 만든 거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걸 얘기하려고 하는지 감은 오시죠. 유대인들의 제사장 전통도 레위로부터 내려온 굉장히 그들로써는 대단한 건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정말 참된 제사장의 전통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멜기세덱으로부터 더 가게 되는 거죠.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성전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이 만든 거야, 모세 전통에 의해서 오긴 온 건데 그래도 율법도 그렇고 성전도 그렇고 다 사람에게서 온 거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 성소 혹은 성막. 두 가지 개념이 있어요. 이스라엘 전통에 있었던 그것은 사람이 만든 거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이 만드신 것은 참된 성막 인거죠. 이 두 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강의안 2번 보십시오. 계속 히브리서 기자가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땅의 제사장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보십시오. 유대 레위지파에 속하는 땅의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는 모두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다. 5절에 나와 있어요. 굉장히 거룩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형이고 그림자다. 진짜가 아니다. 그 실체는 하늘의 성소인거죠. 그건 주님께서 지으신 성소입니다. 이게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보면 헬라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와 세계관계가 약간 비슷할 수 있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대목에서 성소와 연관해서 말하는 핵심은 간단한 겁니다. 정말 참된 성소가 하늘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밑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소는 그것의 그림자에요. 모형인 거예요. 원천은 거기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러한 생각들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약간 연관이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가 모든 근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그것의 비춰진 어떤 영상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와서 잠깐 있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그렇게 플라톤이 설명을 했는데 오늘 여기서도 두 가지 성소, 땅에 있는 성소와 하늘에 있는 성소가 그렇게 읽혀 질수가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기자가 철학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원론적이에요. 이 세상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하늘의 성소와 땅의 성소는 그런 거는 아닌 거죠.

강의안 중간 부분을 좀 더 보겠습니다. 땅의 제사가 하늘 제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땅의 제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늘 제사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죠. 약간 관점의 차이인 거예요. 하늘의 성소가 온전한 거니까 거기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거기로부터 부여 받은 거다, 그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 제사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곧 이가 예수다.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설명들이 들어오시나요. 이런 표현들은 종교적인 언어라서 좀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잘 잡히지가 않는 거예요. 하늘의 성소라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건데,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그렇습니다. 참 저도 이 부분에서 설명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늘 망설여져요. 그런 것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약간 돌려야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어떤 사물이 있는 거만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어요. 그걸 넘어서야 되는 건데, 근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거죠. 인문학적 사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노자와 장자가 얘기하는 도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이 도라고 하는 게 노자와 장자에게는 가장 리얼한 거, 핵심인 거예요. 다른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는 거예요. 도가 정말 근원이에요.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라고 하는 게 눈에 보이나요. 안 보이지요. 그래도 안 보이지만 더 확실하게 느껴서 잘 설명한 게 그 분들의 책인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도가 어떻다는 게 잘 자리를 잡는 거 그게 공부에요. 그건 공부하지 않으면 전혀 되지가 않습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 한 유명한 이야기, 도가도 비상도라고 말이죠. 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딱딱 결정해서 되는 게 아니다. 도를 갖다가 도라고 불러 버리면, 이미 말해 버리면, 아까 하나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얘기 했잖아요. 규정해버리면 근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를 도라고 이름 부르면 더 이상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게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려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정말 실질적인 것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조금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먹고 살기 바쁘고 만날 돈과 연관되어 살면서 그거 말고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늘 그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차분하게 천천히 그렇게 가면 언젠가는 좀 더 확연하게 들어올 때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모형과 그림자라고 하는 그 말이 키워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너희들 말이지, 모세의 율법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과 모든 율법 체계들, 그리고 제사장의 어떤 일들,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특권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결국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에 의해서 된 하늘의 성소로부터 온 그림자다 그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그림자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제로 건물이 있고 제사장 제도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권위가 있어 보이니까. 그에 반해 하늘의 성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라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걸 봐라, 그게 핵심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걸 조금 직접적으로 말씀드려야겠네요. 성소, 제사장,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어떤 종교적인 제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실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우주 공간 하늘에 정말 어떤 성소가 있다 그런 뜻은 아닌 거예요. 그럼 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언어 등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핵심이 뭘까요. 그건 여러 번 얘기했기 때문에 다 아실 겁니다. 생명을 얻는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일도 뭡니까. 속죄 제물 드리고 번제 드리는 역할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유대인과 레위지파를 통해서 내려오는 것은 근원적인 게 아니라 그림자고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 받는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의 종교 제도를 통해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요약문에 나와 있는 단락 보십시오. 모형과 그림자는 한계가 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간이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약속의 성소와 제사장직은 7절에 나와 있는 대로 무흠하지 못하다. 흠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을 통해서 중보자를 세웠는데 그가 곧 예수다 이 얘기죠. 이 히브리서 기자만이 아니라 신약의 많은 성서 기자들,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화려했고 역사가 깊은 종교 행태들을 뛰어 넘어서, 그런 것들은 그림자고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 생명에 대한 경험, 하나님 경험이 정말 확실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고 경험해야 될 것이 바로 그거인거죠. 그런데요. 기독교 기초 교리 여러분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통해서 구원 받고 부활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 안에 들어간다, 그건 이제 우리가 교리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내가 그걸 경험하냐, 확실하냐, 이게 관건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해야만 구원받는 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그 세계에 깊이 들어 갔나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속죄 능력으로 그 분의 부활의 힘이 미래와 우리의 운명을 지배 한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는다, 안 받는다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겁니다. 구원 받았지만 더 신비한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거죠.

그 다음 네 번째,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구약의 어떤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하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의 전통, 성전, 성소, 대제사장들, 이런 것들은 흠결이 있다, 그건 완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다, 그림자만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되냐, 더 좋은 약속, 더 참된 성소, 바로 그 분에게 그것을 지으신, 혹은 거기서 제사장이신 그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된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상대화하고 더 참된 약속으로 들어 가야한다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 새로운 약속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했다는 거예요.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더 좋은 언약이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서 이미 오래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모세에게서 나온 거 말고 더 새로운 약속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셨는데 그게 예수님이다 하는 거죠.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기겠다, 그 얘기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다는 이야기에요. 왜 그러냐면 모세의 법은 어디에다 새겼죠. 돌에 새겼잖아요. 이걸로는 한계가 있고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주겠다. 이건 예레미야에게 준 예언인데 이게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소, 참된 제사장, 더 근원적인 언약 그거다 얘기하는 거죠.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신다.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거예요.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냥 용서가 없어요. 일단 벌을 받아야 돼요. 잘못했으면 벌 받고 해결돼요. 그런데 이 방식으로는 똑같은 잘못을 또 해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법의 한계인거예요. 근데 법이 없으면 세상은 안돌아가되 그 법으로 인간과 사회를 구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냥 용서하는 거죠.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약속을 주셨다. 그 새로운 언약, 두 가지 조건, 하나는 돌 판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셨다. 또 하나는 잘못된 것, 죄를 징벌이 아니라 용서해 준다고 하는 새로운 언약인데 여기에 부합되는 분이 예수다 그 얘기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논리는 따라 오시겠죠. 속으로 우리가 얼마나 들어 가냐는 둘째 치고 굉장히 명쾌하게 분명한 관점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옛 언약은 낡아졌다고 말한다. 이 옛 언약은 모세의 법이죠. 유대인들이 딱 붙들고 있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들 조상들에게 내려온 법을 너희들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한다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옛날 모세로부터 내려온 언약은 낡아진 거예요. 더 이상 모세의 법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한적이고 그림자이고 모형인 거예요. 참된 것이 왔을 때는 옛것은 낡아지는 거죠. 그걸 완전히 해체하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주장을 선뜻 받아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자기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겠죠. 그런 점에서 유대교와 우리는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이게 그들을 부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다만 그들은 히브리서 입장에서 본다면 그림자 안에 있어요.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짜는 아닌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얻는데 원본이다, 참된 성소다, 그 사실을 계속 변증해 나가고 우리의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나아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이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형성됐다고 생각이 되세요. 이 말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디서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을까요? 부활이죠. 예수님의 부활. 요즘 제가 사순절 묵상을 쓰고 있는데 톰 라이트라고 하는 성공회 신학자의 사순절 묵상이라는 글도 읽고 있어요. 재미있어요. 톰 라이트의 글을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굉장히 글이 재밌고 토대가 탄탄하고 괜찮습니다. 거기서 부활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설득력이 있어서 생각이 나서 말씀드립니다. 이 부활 경험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고 우리도 거기서 참된 성소다, 그림자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기독교적인 전통으로 알고 있는 거거든요. 모세의 법을 통해서는 부활 생명, 여기에 닿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재밌는 설명을 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부활 경험을 주변에서는 믿지 않으려고 했고 심리학적으로 어떤 것이 떠오르는 그런 정도로 평가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지금도 기독교인들의 부활 신앙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사건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댈 때 여자들이 증인을 설 수가 없어요. 여자가 확실하게 봤다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치는 겁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증인을 내세우려면 누구를 내세워야 되요. 남자를 내세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복음서 보면 누구입니까. 여자예요. 제일 첫 장면 빈 무덤에 가서 본 사람은 여자들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등등을 야이기 하는데 그런 점도 우리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기도하고 질문 있으면 질문, 대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사순절 이렇게 지나는 중 수요일 저녁 저희들이 또 히브리서 공부로 모여서 함께 생각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글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비로운 증언을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가 다시 읽고 경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무상한 이 실존을 포함하면서 또 이것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인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참 성소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자리라고 설명한 그 근원적인 생명, 부활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9장

히브리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히브리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 사람, 만을 위해 쓴 건 아니지만 그걸 배경으로 해서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구약에 특별히 율법하고 구약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낱말들 있잖아요. 율법이 있고요. 과거의 약속, 지난 언약,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무의미한 건 아니지만 그건 하나의 모형인 거예요. 진짜가 오기 전까지 필요했었던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으면 새로운 약속, 새 언약, 참된 제사장, 이런 것들을 따라가기 힘든 거죠. 그래서 그걸 대비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문제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는 제사 지파가 어디라고 그랬죠. 레위에요. 레위 가문이어야만 돼요. 혈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부심도 있을 거고요. 굉장히 여러 가지 복잡한 제사장 제도가 오랫동안 이스라엘 역사에 발전하고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이스라엘 신앙의 큰 줄기를 이야기한다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성전 중심의 제사장 제도요. 성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이거는 한 군데입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회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당은 제사 드리는 곳은 아니에요. 말씀 읽고 공부하는 곳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거예요. 제사를 드리는 거하고 구약성경을 공부해서 율법대로 잘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똑같은 건 아닙니다. 다른 건데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신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히브리서 앞에서 공부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대제사장도 레위지파 혈통이 아니라 그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으면서 자기의 십일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참된, 더 근원되는 제사장의 반차를 따라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됐다고 얘기하고 있죠. 그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레위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 아브라함보다 더 신앙적으로 우월한, 영적으로 우월한 그런 쪽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약성서가 얘기하는 그게 극복되었다 얘기하는 거고요, 이 회당 중심의 율법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언약, 이 율법은 옛날 언약이니까요. 이 율법을 왜 언약이라고 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약속 언약이라는 거요. 율법을 그렇게 말하는 거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율법 정신이 언약인 거예요. 율법이 누구한테서 시작을 했죠. 모세잖아요. 모세에게 주면서 너희들 이렇게 저렇게 살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언약이거든요. 히브리서 설명에 따르면 그건 옛날 언약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옛날 언약과 제사장과 성전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보고 참된 대제사장, 새 언약, 이게 정말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길이다 그걸 알라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복음의 지평에서 설명합니다. 표현이 좀 딱딱하죠. 특별하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붙였냐면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누구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신앙생활 하는 거거든요. 율법과 대립적인 차원에 있는 겁니다. 여기서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속죄 받았다고 하는 사실. 이건 우리가 율법적으로 착하게 살고 이런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가는 거예요. 모범생을 만들어 가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한 일들이 다 그런 겁니다.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공부하면서 나오겠습니다만 반복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하는 그런 일들인 거예요. 그에 반해 예수님이 하신일은 우리가 착하게 율법을 잘 지켜서,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길이 아니라 단 번에 자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죄가 용서 받는다는 그 사실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된다는 겁니다. 오늘 9장이 길기 때문에 한꺼번에 읽고 공부하기가 매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요약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한 단락 공부할 때마다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5절까지 읽겠습니다. 여기는 세상의 성소라고 하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것을 그냥 풀이한 거예요. 1절에서 5절까지 함께 통독으로 읽겠습니다.

1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절,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절,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절,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아멘. 이거는 예루살렘 성전을 간략하게 설명한 겁니다. 굉장히 예루살렘 성전이 복잡해요. 일단 마당이 있어요. 마당도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고 유대인들의 뜰이 있고 제사장의 뜰이 있고 이렇게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칸이 나누어져 있어요. 아마 맨 바깥에 있는 게 이방인의 뜰인지 싶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단계마다 있고요. 안에 가게 되면 성소가 있어요. 그건 건물이죠. 마당이 아니라 건물인데 그 성소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지성소는 아니에요. 제가 거기를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고요. 그리고 성소도 조금씩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걸 복원도 한다고 하지만 시대마다 형태도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성소 건물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면 일반적인 성소고요. 휘장이 있는데 그곳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가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지성소라고 하는 말뜻은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거기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지 못하고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속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지성소가 그렇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성전 안에 있는 구조들과 기물들을 간단하게 소개했어요.

여기서 지성소와 언약궤가 중요합니다. 그냥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늘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데 지성소는 그렇지 못해요. 이 지성소 안에 몇몇 기물들이 있어요. 여기 2절에 보면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낱말 어려운 거 없죠. 등잔대, 촛불 켜는 것. 상(床), 올려놓는 것, 그리고 진설병이 있습니다. 진설병은 이게 한자고 요즘 잘 쓰지 않는데 병은 떡이고요. 빵이겠죠. 진설, 빵가게 가면 빵 진열해 놓지 않습니까. 진열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올려놓은 빵이 있는 거예요. 지성소 안에는 빵이 늘 있는 거예요. 다윗이 언젠가 도망가다가 그 안에 들어가서 그걸 먹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좀 특이하죠. 등잔대와 상이 있는 건 이해가 되는데 진설병은 왜 거기다 놨을까요? 정말 거룩한 곳인데 빵을 거기다 놨을까요? 자세히 모르겠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이게 먹고 사는 생명의 양식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밥해서 제사상에 올리잖아요. 지금도 절 같은데 가면 늘 부처상 앞에 차려 놓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차려놓은 것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성소에 있고요. 휘장이 두 개라고 그러네요. 첫 번째 들어가면 성소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고. 둘째 휘장이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고 하는데 거기에 있는 중요한 게 언약궤라고 하네요. 금으로 싼 언약궤라고 합니다. 보통 다른 말로는 법궤라고도 많이 하죠. 이게 귀해서 금으로 쌌다고 하는데 이 안에 들어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거기 다 나와 있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만나, 이 만나는 출애굽기에 보면 만나를 걷어 들여도 그게 밤이 되면 녹아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라고 했으니까 만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항아리만 놓은 건지 사실적인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만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어요. 두 번째는 아론의 지팡이입니다. 이것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에피소드하고 연관이 돼요. 아론이 모세의 형으로서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왜 너만 그걸 하냐고 여러 지파 사람들이 일종의 항거를 했습니다. 그 때 각각 지파마다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해서 땅에 꽂아 놨는데 다음날 보니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어요. 이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러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는 겁니다. 사실은 아론의 지팡이보다 모세 지팡이가 더 중요하기는 한데 아론 것이 들어있다고 하네요. 세 번째는 언약의 돌판이라고 하네요. 이게 뭘까요. 십계명이 적혀있는 돌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도 있을까요? 물론 없지요. 예루살렘 성전이 여러 번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초토화 됐는데 그 때 성전 안에 있던 귀한 것은 다 약탈당해 갔어요.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조금 가져 왔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얼마나 가져오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진나라에서 폐물 같은 거 다 가져오잖아요. 나폴레옹도 아프리카, 이집트인가를 공격해서 많이 약탈하고 유럽의 박물관 보면 헬라라든지 이집트의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좀 있어요. 뺏어 온 거죠. 우리나라 보물도 일본이 많이 가져갔는데 이걸 반환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기는 한데요. 가져 간 것도 때에 따라서는 불법적인 것도 있지만 합법적으로 가져 간 것도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사 간 거예요. 그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귀한 건지 모르고 있다가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팔아서 그렇게 됐는데요. 유럽이라든지 일본과 같은 나라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돌려 달라 얘기를 하니까 만약에 그 때 안 가져갔으면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라 그런 입장인데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있던 것들은 물론 없어요. 몇 군데에 문헌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다음, 6절에서 10절까지 이것도 함께 읽겠습니다.

6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아멘. 여기에는 옛 계약과 제사 제도 이런 것의 간단한 설명이 나왔어요. 이거는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에 포함돼있는 겁니다. 6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첫 장막에 들어가서 의식을 행해요. 이건 일상적으로 하는 겁니다. 촛불도 켜고 이런 저런 거, 진설병 나르는 일 등을 해야 되겠죠. 둘째 장막은 지성소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가서 백성 전체의 사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9절에 보면 하나의 비유라고 하는 거예요. 참된 건 아닌 거죠. 9절 조금 더 보면 이렇습니다. 이에 따라 드리는, 그러니까 옛 계약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 구약에 근거한 예루살렘 성전, 성막에서 드리는 것들은,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의 형식에 떨어질 뿐이지 양심에서 정말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양심이라고 하는 말이 탁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양심하면 도덕적으로 옳다 그리다. 양심적으로 판단해야지.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심이라는 것은 그것이라기 보다 더 근원적인 우리의 인식의 능력이라고 봐야 됩니다.

제가 그거를 잠깐 설명을 했는데 그 다음 단락이군요. 여러분 강의안 3번에 셋째 줄에도 양심이 나와요. 옛 계약과 제사 제도에 따라서 드리는 그러한 제사로써는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데 세 번째 단락에서는 새 계약의 피,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죠, 이걸 통해서는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걸 헬라어를 통해서 더 세세하게 알면 좋겠습니다만 거기가지 갈 필요는 없고요. 그냥 그 뜻을 세 번째 단락 세 번째 줄에 설명해놨습니다. 양심은 단순히 도덕적인 판단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가장 깊은 차원의 어떤 능력이다. 번역으로는 탁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림으로써 옛 계약에 따라서, 의식에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의례에 따른 그런 것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만이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아주 화려하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해주실 수 있는 우리의 심층에 있는 인식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10절 보십시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이런 것들이 다 율법에 있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손을 어떻게 씻고, 옷을 어떻게 입고,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이 나와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다 육체의 예법일 뿐이다. 양심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심층에서 작동될 수 있는 우리의 인식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거다.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거라고 했어요. 개혁이라는 건 전체적으로 흐름에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데 정말 바르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제사제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 읽겠습니다.

11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아멘. 지금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옛 계약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한계가 있는 거고 하나의 형식이고 일시적인 거예요. 그리고 황소, 염소, 양의 피를 잡아서 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게 못 된다. 일단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이제 세 번째 단락에서 새 계약의 피가 정말 온전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이에요. 12절에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피는 구약에서부터 신약 이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데까지 생명의 근원으로 있고요. 사실은 그건 늘 생명이죠.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건 옛 계약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 자기의 죽음이죠. 그걸 통해서 속죄를 이루사, 속죄는 죄를 용서받는 겁니다.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이루시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고 유대인들이 레위지파 제사장들을 통해 쭉 실현돼 왔던 이 제사에서, 동물들의 피를 뿌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기들의 죄가 일시적으로나마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런 생각,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거는 옳은 거예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최선으로 그 방식에서 속죄를 경험한 거예요. 동물의 피로도 그렇게 그들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예수님의 피라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을 정말 깨끗하게 할 거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잠깐 보시죠.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의 피, 그의 속죄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 확실하다, 그걸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15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이 말씀도 함께 읽어 볼까요.

15절,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절,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절,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아멘. 네 번째 단락의 소제목을 피를 통한 계약의 체결이라고 잡았습니다. 15절에서 22절이에요. 그 내용에 대한 요약을 강의안에 간단하게 적었습니다. 그걸 좀 보시죠. 세 번째 단락에서 한 거하고 이어지는 거예요.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린 그들도 일시적이나마 죄가 용서 되었는데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오죽하겠느냐 우리가 양심의 차원에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온전하게 된다, 그렇게 세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라 할 수 있다. 옛 언약에는 동물의 피를 뿌려라, 이게 다 언약이에요. 아시겠죠. 율법이 언약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 다 있는 내용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제사를 지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 그런 차원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다. 이게 왜 새롭냐. 겉모양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고 완전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새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중보자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역할입니다. 이 단락에서 피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되고 있어요. 이게 논리가 이런 거예요. 앞부분에서는 유언이 나오잖아요. 이건 약속의 차원에서 말을 하는 건데 유언장을 쓰게 된다면 유언장의 효력은 죽어야 되잖아요. 죽는다는 게 피를 가리키거든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기자의 머릿속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하고는 다른 거죠. 이천년 전 이기도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의 온갖 제사제도를 바탕에 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 모든 것의 완성자인지 그걸 지금 논증해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잘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피가, 이건 죽음을 가리키는 거고, 죽음은 곧 유언장의 효력 가능성을 말하기 때문에 이 피를 반복해서 얘기한 거예요. 율법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도 동물의 피를 인한 언약이에요. 피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생명 자체였습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를 먹지 말라 얘기했잖아요. 근동 지방의 다른 종교에서는 피를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엄금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근동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지금도 조금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교파가 있죠. 여화와 증인, 지금도 독실한 사람은 수혈 안하죠?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면 그렇게 따르는 게 나을지 모르겠어요. 피는 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으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요. 내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단락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피의 중요성, 이게 유언장과 효력 시점과 죽음, 피를 연관시키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온전하게 속죄함을 얻었다, 죄를 씻기게 됐다 그 얘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리적인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해하냐,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게 몸으로 느껴지냐가 중요합니다. 일단 세례 받을 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은 것을 믿습니까. 아멘해서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긴 하는데요. 그때는 잘 모르더라도 기본적인 교리를 자기 입으로 고백하면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끝나게 되면 어린아이 신앙에 머무르게 되는 거고 점점 성숙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용서 받는다고 하는 것, 이게 확 와 닿으시나요. 이천년 전, 우리하고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유대인 한 남자였던 예수의, 사실은 예수님의 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는 죽음인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의 처형. 그걸 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진짜 피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인거예요. 거기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더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건 간단하게 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거기까지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세례 받을 때 교리 문답한 거, 그 정도 틀만이라도 잘 유지하고 있고요. 그리고 사실 이런 문제들은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서요. 웬만큼 신학공부를 해도 잘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죠.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다 신학자가 되어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신학자가 되어야만 기독교 영성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거기에 연결될 수 있어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 안에서 실행되는 그런 것들을 접함으로써 다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고 이거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로써만 가능한 그 어떤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 그걸 믿으면 되는 거죠.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 그걸 피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23절에서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절,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오늘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 8장에 비해서 두 배가 되네요. 강의 요약문을 잠깐 보시죠. 소제목에 속죄의 유일회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속죄가 반복되는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난 거예요. 예수 사건으로. 그래서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유대의 역사에서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리는 제사, 하나의 모형으로써, 하나의 그림자로써 그런 일을 하는 것뿐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드림으로써 그 제사를 완성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라기보다도, 제사는 제사인데 의미가 다른 거예요. 속제 제사가 아니라 속죄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에요. 기억으로서 종교 의식을 하는 것뿐이지 유대 제사처럼 또 속죄 받고 피를 뿌리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속죄 제사는 단번에 끝난 거예요. 그거를 지금 23절에서 28절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강의 요약문을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성소에서 행해지는 동물피의 희생제사는, 세상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거는 반복돼야 해요. 그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근본이 아니라 모형이에요. 하나의 비유에요. 하나의 그림자이고 오리지널이 아니라 복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짝퉁인거죠. 그래서 그거는 반복돼야 됩니다.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그래서 여기 몇 번 반복해서 단번이라는 게 강조되고 있어요. 12절에도 이미 나왔죠.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건 유일회적으로 그분에게만 일어난 거예요.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하시려고, 26절입니다.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죠. 단번에 죄를 없이하시려고 자기를 제물로 드린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어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후반부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감당하려고, 죽음으로 우리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일종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안 되는 거거든요. 그것의 근본적인 것의 해결, 이게 단번에 자기를 희생제사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더 이상의 속죄제사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종교의식인 거예요. 거룩한 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속죄를 완성했다는 이 엄청난, 아주 우주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써의 예배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셨는데, 현실로 다 해결이 됐나요? 아직 안 된 거예요. 여전히 죄나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거고 우리 스스로도 그 세력 안에 있고요. 그것의 완성은 언제 일어나죠. 예수님 재림이죠. 다시 오시리라 마지막 구절에 붙어 있습니다. 이 긴장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요. 이게 계속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도 하고 마음이 찜찜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거기에 얽혀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우리가 심판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은 아닌 거예요.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의 재림, 그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됩니다. 참아야 되기도 하고 견뎌야 하는 거예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루어 졌는데 우리에게까지 현실로는 아직 되지 못한 그 심판 너머에 있는 거룩한 성소로 들어가는 그 때까지 우리는 이러한 중간 시간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힘든 일이 있거나 실수도 할 수 있고요. 너무 거기에서 절망하지 마시고요.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살면 안 되는 거고 예수그리스도가 단번에 그 일을 이루셨다는 그 사건에 조금 더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히브리서 10장입니다. 좀 구절이 많습니다. 이게 39절까지 있어요. 이 히브리서 장들 중에서 가장 긴 장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39절까지 있으니까요. 다른 짧은 장에 비해서, 보통 20절, 16절까지 있는 것들에 비해서 두 배에 해당하네요.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가기에는 분량이 좀 많네요. 우리가 되는대로 읽은 때는 읽고 뛰어 넘을 때는 뛰어 넘으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0장까지 전체 주제는 몇 번 검토를 했기 때문에 아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 근거해서 변증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어떤 것을 변론하듯이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 근거해서 왜 옳은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10장을 전체적으로 다섯 대목으로 나눴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보십시오. 일단 소제목만 읽어도 10장을 전체를 대충 얼개 그림으로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1절에서 10절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제사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은 구약이 이야기하는 제사죠.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게 왜 완전하지 못 하냐 하는 것을 여기 1절에서 10절 사이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앞부분에서도 여러 번 나온 이야기에요. 히브리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이 말하는 희생 제물보다 완벽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 얘기인 거죠. 그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1절에서 10절까지는 구약의 제사 행위의 완전하지 못한 이유, 근거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11절부터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일회적이고 완전한 제사다.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 합니다. 자연스러운 얘기죠. 구약이 얘기하고 있는 제사 행위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리키고 있는 제사의 완전성, 그게 또 유일회적이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유일회적이라는 말을 왜 붙이는 걸 대충 이해하시겠죠. 구약 제사하고 비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행위의 절대성을 가리키는 겁니다. 구약 제사는 반복하죠. 계속해서 똑같이 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죄의 사죄행위는 유일회적으로 한 번에 끝난 거예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하듯이 이 제사행위도 단 한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었다라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19절에서 25절이에요. 앞에 나와 있는 두 가지를 전제하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을 굳게 지켜야 된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도 되지만 여기서는 희망, 희망의 신앙, 희망한다는 말이에요. 속죄 받았으니까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이 말은 곧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희망의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라. 유대인들의 제사 행위 그런 걸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회적이고 온전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생명의 세계로 인도된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단락은 26절에서 31절입니다. 여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왔다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요. 초기 기독교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일종의 배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아들었고 왔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해서 떠난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26절에서 31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2절에서 39절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 이게 오늘 10장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섯 단락으로 나눴어요.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 교독해서 읽으시죠.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보면서 읽으세요.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절,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절,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절,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절,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절,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아멘. 1절에서 10절까지 같이 읽었습니다. 강의 요약문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종교적 전통을 매개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내용입니다. 구약 전통의 핵심은 율법과 제사는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1절이 이것을 정확하게 짚고 있어요. 율법은 그림자다. 실체가 아닌 거죠.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필요 없는 거예요. 실체가 오지 않았을 때는 그림자만이라도 조금 필요합니다. 율법은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제사와 연관된 문제인데요. 1절 후반절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과 제사는 온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에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모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낱말 뜻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좀 다릅니다. 그걸 조금 더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돼요. 율법도 좋은 거예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해하시죠. 그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고요. 지금도 율법 없이는 못 삽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율법인 거예요. 주일을 지킨다든지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해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고요. 우리가 기독교인들답게 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율법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정받을 수 없는 거예요. 완전한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조금 덜 하고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고 약간 덜 하는 사람이 못하고 이런 건 사람의 기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그림자이지 그걸로 사람을 완전히 평가하기는 힘든 겁니다. 약간 겉으로 볼 때는 봉사를 덜 하더라도 그래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한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율법으로 평가를 못하는 거예요. 율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 도덕, 법하고 비슷한 건데, 그런 윤리, 도덕, 법이 아무리 많이 발달됐다고 해도 그 사회가 그것만으로 온전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닿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인정하는 데로 들어가는 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그러한 관점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알고 계시는 문제인데 그래도 놓칠 때가 많이 있어요. 강의 요약문 다시 보세요. 율법은 그림자이며 또 그래서 그것에 근거한 제사는 온전하지 못하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의 죄를 없애지 못 한다. 이게 다 율법에 따른 제사 행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시편 40편 6절을 근거로 해서 확인합니다. 인용을 한 거예요. 시편 40편 6절 이하의 내용이 히브리서 10장 5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 ‘ㄱ’해서 각주를 달았어요. 그걸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그걸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핵심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에 내가 말하기를, 시편기자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거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뜻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건데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제사와 예물, 이것으로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인용한 이야기를 8절에서 다시 해석을 해요.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 강조법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반드시 있었어야 되는 거였어요. 그림자마저 없으면 혼돈 속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만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것은 참된 것은 아닌 것, 실체는 아닌 것이죠. 그래서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걸 다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아무리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도 실제로 속죄가 가능하지 않는 거죠. 반복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제사에는 이제 매달릴 필요가 없는 거죠. 여전히 율법에 매달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난 참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죠. 참된 것을 모를 때는 약간 사이비 이런 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분명하게 이야기하네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의 의가 아니라, 내가 의로워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여기에 구약과 다른 복음의 능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자칫 오해하게 되면 값싼 율법 무용론에 떨어질 수 있어요. 율법 해체론에 떨어지는 것, 이것은 복음은 아닌 거예요.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율법보다 더 분명한 삶의 내용들을 담아 낼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핵심인거죠. 복음을 오해하면 무율법주의에 떨어지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에 실제로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 이미 율법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인가? 그런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런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무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이걸 다 포함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율법을 내가 스스로 지는 이러한 긴장, 이게 복음의 능력인 겁니다. 최선의 노력은 하지만 이게 부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써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들을 잘 감당해나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8절이에요. 이것도 교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11절 읽겠습니다.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절,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네, 예수 죽음을 통해서 드려진 희생제사의 유일회적이며 완벽한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재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 예수 스스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사도신경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죠. 시편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내 오른편에 앉으라는 표현들이 시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차원의 영적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가 확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 보세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이 말을 아마 세상 사람들은 잘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유대인의 한 남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어떻게 인류의 죄를 용서받냐고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일 거예요. 이 부분은 그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어떤 깊이를 이해할 때만 이게 자기에게 정말 진리로서 와 닿게 되는 거지 그게 안 돼 있으면 어려운 거예요. 이런 게 있습니다. 기독교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대로 설득시켜야 되는데 설득을 모두 시킬 수는 없어요.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건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자면 클래식 음악에 깊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설득 시킬 수 있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바둑도 마찬 가지에요. 프로기사들이 두는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창호, 이세돌의 이 수를 아냐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알아듣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비밀스러운 그러한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이 무조건 내 길만 간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능사는 아니고요. 가능한대로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준비를 하되 안 된다고 해서 불안하게 생각할 건 없고 일단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한발 한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방금 제가 예로 들은 것처럼 바둑의 어떤 수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프로 바둑 기사가 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영적인 전문가가 돼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이말, 이걸 지금 제가 다시 설명하지 않겠어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아는 걸 전제하고 쓰는 겁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많은 필요한 거예요. 인간이 왜 죽냐.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서 왜 죄의 결과가 죽음이냐, 우리가 죽어야 될 운명에서 어떻게 생명을 얻느냐, 죄가 용서 받아야 되는데 인간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이 뭐냐 이런 것들을 촘촘히 따라가야 되는 거거든요. 이런 것들을 제가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기록하기 때문에 천천히 더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그 사실, 영적 권위가 예수에게, 권세죠, 그것이 확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는 한데 모든 악이 제거되기까지 그리스도는 기다리신다. 모든 악이 제거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어떤 단어로 설명했을까요. 13절에 나온 걸 보면,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이러한 표현이 모든 악이 제거되고 완벽한 세계가 완성된다고 하는 것, 그걸 가리키는 겁니다. 발등상이라고 하는 것은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발걸이를 가리키는 거예요. 악이 제거되는 거죠. 보통 우리가 사탄, 악, 귀신, 이렇게 얘기하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어떤 세력들을 마귀, 악, 사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는 이 세계에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완전한 생명을 얻으셨는데 아직은 과도기에요. 신학적인 용어로 중간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시대가 있고 마지막이 완성되는 것, 이건 악이, 원수가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는 때에요. 이때까지 과도기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거죠.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 31장 33절 이하를 인용합니다. 9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은 옛 약속이 아니라 새 약속이다. 그 약속은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긴 것이다. 11절에서 18절 이야기를 제가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이 돌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이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 이게 정말 확실한 거다 그 얘기죠. 이 마음을 주관하는 이는 성령이고요. 그 약속이 구약에는 돌판에 새겨졌어요. 율법, 문자로 됐어요. 이제는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은 뭐냐.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겁니다. 예레미야서를 인용해서 설명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약속인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방법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 데까지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많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거죠. 그 방식으로는 우리가 완전한 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레미야서를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을 하고 바울도 로마서하고 갈라디아서 등등에서 여러 번 반복을 이야기 했듯이, 요즘 말로 하면 패러다임이 바뀐 거예요. 어떤 틀이 바뀐 거예요. 우리가 노력해서 이만큼 수준에 올라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걸 기억도 안하는 거예요. 무얼 통해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그렇다고 하는 거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고요. 이게 실질적으로 리얼하게 이해가 되고 경험이 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러한 죄와 불법을 아예 기억을 하지 않으신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또 죄와 불법을 행해도 된다? 그건 아니죠. 그걸 오해하게 되면 혼란스럽게 돼요. 구원파에 가면, 그런 사이비 이단들은 전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잘 가요. 그래서 정통 교회가 좀 놓쳤던 부분들을 잘 붙들고 가요. 가다가 너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되는 겁니다. 구원파라든지, 영지주의 이런데서 그런 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거죠. 제사 행위의 유일회성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이야기했는데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다시 한 번 제사를 반복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예수 십자가 죽음으로 유일회적으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걸 반복적으로 드리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됐습니다. 세 번째 단락 19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이것도 읽어 보실까요. 교독하겠습니다.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겠네요.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네, 그 단락은 강의 요약을 읽는 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설명은 더 하지 않겠어요. 보십시오. 앞에서 말한 그 이야기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그 근거는 예수의 피다. 예수의 죽음이다. 성소는 생명의 세계를 가리킨다. 22절에서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이 잘 설명돼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예수의 피 뿌림이죠.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악한 양심이 뭐에요. 죽음에 대한 공포에요. 거기서 벗어나고, 정말 놀라운 생명 경험이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성령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거예요. 세상이 요구하는 틀이 있잖아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에 의존하는 것.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근본을 잘 살펴서 이해하셔야 됩니다.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멋진 권면이에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25절에는 실제 신앙생활에 대한 권면이 나와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라. 같은 기독교인들인데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여러 종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굉장히 애매한 표현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보다 어수선했어요. 지금은 오랫동안 역사 과정을 통해서 검증되고 잘못된 것 떨어져 나가고, 사이비 이단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논증을 통해서 기독교가 체계를 잡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교파가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사도신경 이런 거는 똑같은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달라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달랐습니다. 그건 제가 언젠가 초기기독교의 형성이라는 책을 설명한 적이 있을 텐데 거기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 이 말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얘기죠. 모여 봐야 뭐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거 이게 매너리즘입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예배드리고 성찬하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렇게 할 건 없다.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겠죠. 그래서 모이는 걸 등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가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 재림의 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재림하면 가장 먼저 뭐가 생각나세요. 그림으로도 생각날 거고 의미로도 생각날 텐데 휴거 이런 걸 생각하겠죠. 그거는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림들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묘사된 겁니다. 너무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 근본 의미를 아닌 게 중요하죠. 예수의 재림하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우리는 지금 생명이 완성되지 않은 거예요. 그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오기를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게 완성된다고 봤죠. 다음 네 번째 단락,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이것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절,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절,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네,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굉장히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단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말씀드렸어요. 26절부터는 그런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완전히 배교, 배신이죠.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 메시지가 여기 있어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여기서 진리는 뭐죠. 그리스도 사건, 예수를 앎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배웠는데도 짐짓 죄를, 의도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부인하는 거죠. 의도적으로 부정하면 다시 속죄 받을 수 없다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런 논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그거 자체를 부정하게 되니까, 한 번 끝났으니까 다시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배신, 배교, 기독교를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잖아요. 이건 아마 히브리서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라요. 아마 공동체가 허물어질 정도로 배교행위가 일반화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례 받고 다시 또 죄를 졌을 때에 용서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초기 기독교에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기독교를 로마에 공인한 황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한 황제가 따로 있고 공인한 황제가 따로 있어요. 공인한 것이 중요한 거죠. 밀라노 칙령이죠. 그 사람의 이름이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 환상을 봤나 봐요. 전쟁에서 이겼어요.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한 일을 하고 그 때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됐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한 60년 이상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테오도시우스라는 황제가 정식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했어요. 그러니까 로마의 식민 통치가 있는 나라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 쪽에서 볼 때 잘 된 거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교회 역사학자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는 로마 제국의 어용적인 태도를 기독교가 좀 보이게 됐어요. 그러니까 황제로부터 수도원 생기면 땅 많이 받고 사제들은 군대도 안가지 등등해서 많이 챙겨주니까 황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교회가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쨌든 옆으로 얘기 나가지 말고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있는 걸로 자기가 공인을 하고 업적도 많이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는 죽기직전에 받았어요. 그 이유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고 죄지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게 세월이 지나면서 신학적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세례 받고 죄 지은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가 처음 생성될 때 아주 생생하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고 그리고 기독교가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는 그런 걸 전제하고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가 사실은 유대교와 로마 정치 사이에서 버텨내서 이렇게 세계 종교가 됐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의 위기를 경험한 히브리서 기자가 배교한 사람들에 대한 아주 준엄한 경고로써 속죄하면 더 이상 제사가 없다. 그들은 끝장이다.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쭉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절망적이라는 걸 얘기해요. 31절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그러니까 배교한 사람들이 당해야 될 어떤 두려운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형벌, 사죄 없음, 용서 받지 못함, 그런 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거는 어쩔 수 없이 짚어야 될 부분이고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라 다음이에요. 31절부터 39절까지, 이것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절,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쭉 하고, 상처 난 이야기도 하다가, 또 과격한 표현도 하다가, 이제 신앙의 근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걸로 10장이 정리가 됩니다. 32절부터 34절까지 한 번 눈으로 보세요. 그 구절이 무얼 가리키는지. 32절부터 34절,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난, 아주 비참했다고 하는 걸 알 수 있겠죠.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내긴 했어요. 비방과 환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방 당하고, 환란 당하고 그리고 구경거리가 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이 사회에 참여하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고 등등. 그러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처참했던 고난의 과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그렇게 표현해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버텨 냈기 때문에 기독교가 역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거죠. 그게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버텨냈을지 참 신기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세계 종교 얘기도 하고 미국이나 유럽 이런데서 종교가, 뭐 이슬람 같은 종교는 약간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거 자체로 어려움을 당할 일이 없지만 초기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신흥 종교에요. 그리고 기독교가 믿고 있는 대상이 십자가에 죽은 자에요. 그리고 나이도 어려, 삼십대 초반이에요.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러한 불이익을 감당하면서까지 그걸 견뎌 냈을지요. 그 안에 뭔가 있는 거예요. 그들의 신앙 경험이 말이죠.

네, 그런 것들을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그 경험의 내용을 한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거예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생명이다.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 확실했던 거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시대를 버틸 수 없습니다. 잠깐 추종하다가 시련이 오면 다 떠나지 이렇게 계속 붙어있을 수가 없었어요. 예, 이러한 어려움의 시절을 조금 지나왔어요. 그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35절에 너희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다 거쳤으니 이제 담대함을 버리지 마라. 받을 상이 크다, 큰 상을 얻게 된다. 여기서 상을 얻는다는 것은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희락과 평강,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그게 상인 거예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요. 또 하나 필요한 게 있다고 하는데 36절에 보면 인내에요. 두 가지를 얘기했어요. 담대한 거하고 인내. 담대함만 갖고는 조금 안 되죠. 용기만 갖고는 힘들어요. 이게 한 번 내가 용기를 내갖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서 해결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계속 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버텨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 두 가지요. 담대함과 인내를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구약을 인용하네요. 하박국이에요. 히브리서 10장은 구약을 세 군데 인용했습니다. 시편, 예레미야, 그 다음에 하박국이에요.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인용을 했습니다. 인용을 할 때 어떤 때는 히브리 성경을 인용도 하고 칠십인역도 하고. 이 칠십인역을 많이 했죠.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하박국의 유명한 구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39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정말 소중한 말씀이네요.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도망가는 거죠, 그래서 멸망당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고 했습니다. 영혼 구원, 보통 기독교에서 영혼 구원 얘기 많이 합니다. 이것도 오해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삶은 아무 쓸데없고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혼, 영은 생명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정말 생명의 근본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거는 영, 육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육은 썩어 문드러져도 되고 영만 구원 받으면 된다 이건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이고 기독교에서는 구약, 신약 통틀어서 이원론적으로 인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 부활 때도 영혼만 부활된다고 하지 않고 몸이 부활된다고 하고 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몸이라는 것도 단백질로 구성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요. 여전히 생명의 본체, 실질은 하나님 안에 비밀로 감춰져 있는 것인데 그것이 혼, 영, 그런 쪽으로만이 아니라 아주 총체로써의 인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함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다, 우리가 그렇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놀라운 히브리서 기자가 전해준 말씀 중에 한 장, 10장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의 가운데 요일, 수요일. 봄비가 하루 종일 이른 새벽부터 내린 정말 좋은 날, 이 지구의 비라는 현상에 우리가 감동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생명 현상에 찬양을 부르기도 하는 이러한 때, 이 수요일 저녁 더욱 놀랍게 이 말씀을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의 우리를 향한 권면이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담대함과 인내를 허락하시어 주님 오실 때까지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잘 간수하고 확장 시킬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1장


11장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각각 특징이 있어요. 믿음장하면 보통 히브리서 11장을 얘기합니다. 로마서에도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긴 한데요. 그건 로마서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요. 이 히브리서는 조금 더 색다르게 11장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장하면 고린도전서 13장 이렇게 얘기하고요. 또 바울이 그런 주제로 많이 썼어요. 부활장하면 고린도전서 15장, 은사장하면 고린도전서 14장 그러한 특징들이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것도 길어요. 10장도 39절까지 있는데 이것도 40절까지 있네요. 전체가 13장까지 돼있고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세 번만하면 히브리서를 다 마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의 요약문에 보면 다섯 대목으로 나누었어요. 다섯 패러그래프에요. 해당하는 구절들을 부분적으로 읽어가면서 공부하겠습니다. 도대체 이 히브리서가 믿음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봅시다. 먼저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오늘은 교독으로 말고 저와 함께 통독하겠습니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멘. 1절 보십시오.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번역이에요. 헬라어로부터 번역이 됐습니다. 헬라어는 철학적인 언어에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제논 등등 굵직굵직한 서양 철학의 대표자들이 다 헬라어로 자기의 철학을 논한 거예요. 이게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런데요. 이게 문자잖아요. 글이잖아요. 단어잖아요. 이 단어가 어떤 근본을 그대로 잘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안 됩니다. 물론 사물들은 가능하죠. 책이다, 하는 것들은 가능한데 철학적 언어들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질료와 형상이 낱말로 다 해명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쓴 글, 혹은 성령도 마찬가지인데요. 성령이 오순절 강림 때 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령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있잖아요. 성령이라는 말 자체로 정말 성령을 다 담아 낼 수 있냐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신학은 필요가 없어요. 확 들어나게 된다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얘기할 때 핵심 개념이잖아요. 트리니티라고 하는 거, 이걸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확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인데 본질로서는 하나라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서 말한 위격이 뭐냐, 본질이 뭐냐를 알아야 삼위일체가 들어오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게 뭔지를 설명은 할 수는 있지만 아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확인하기는 힘든 겁니다. 페르조나라고 하는 게 위격이라고 합니다. 이 페르조나에서는 분리된다, 우시우스라는 이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게 삼위일체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제가 괜히 빙빙 돌려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기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라고 번역이 됐잖아요. 실상이 뭐냐, 헬라어에서 번역된 거거든요. 지금 제가 헬라어를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게 번역이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번역이 돼야합니다. 정확한 말로 해야 되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에요. 루터의 번역을 제가 그대로 직역을 해서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뢰이고,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이 우리말 성경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부분인데 실상이라고 하는 것을 루터는 분명한 신뢰라고 번역했어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죠. 그 다음에, 보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단어를 루터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독일어로 그렇게 돼있어요. 이거는 하나의 예인데 성경의 세계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지금도 학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요. 그리고 번역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1절 아주 유명한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렇게 하면서 그게 뭐냐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합니다. 설명하면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여요. 여기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어떤 활동, 이런 것만 알아도 사실은 구약 성경을 다 꿰뚫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오는지 우리가 차차 보겠습니다.

그 실상이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나라 말로 그렇게 되어 있지만 딱 그건 아니다를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거고요. 오히려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있듯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진리가 경험되고 실현된다. 이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입니다. 전달이 됐죠. 그런데 이걸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믿음이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안되지만 ‘믿습니다’ 해가지고 믿는 건 아닌 거예요. 그 믿음은 어떤 진리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대상을 향해서 믿는 것은 아닌 거죠. 왜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이냐는 것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고 그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게 아직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신뢰하는 거죠. 그럼 이제 그게 진리에 도달하는 바른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조금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부부 간이라도 좋고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좋습니다. 정말 상대방을 신뢰할 만하다는 그 관계가 정말 참되려면 그 사람을 믿어야 되는 거죠. 허황되게 믿는 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식이 지금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믿으면 그 길을 가게 되거든요. 그게 언젠가는 드러나죠. 아직까지는 묻혀있어서 그걸 믿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 가는 영적인 태도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사람 관계도 그럴 진대요. 자식들도 그렇게 정말 믿어주면 그렇게 되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자꾸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하지만 어쨌든 믿음의 관계가 사람 사이에서도 그게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 관계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죠. 그런 걸 바탕에 놓고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있는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믿음의 본질, 실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선 1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아담은 제외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두드러지는 인물들 세 사람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에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니고요. 이건 역사가 아니라, 보통 신학에서는 원역사라고 얘기합니다. 역사의 근원이 되는 역사, 모든 인류의 보편사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노아 홍수까지예요. 노아 홍수가 끝나고 바벨탑 사건까지겠죠. 다 홍수와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 보편적인 근거를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세 사람 인물 아벨, 에녹, 노아가 나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과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나왔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그런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고 판단을 하네요. 그러니까 아벨이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 그런 얘기입니다. 4절에 나와 있어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실제로 창세기 안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아벨이 가인보다 믿음으로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은 없고 결과적으로 이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시면 되겠어요.

에녹 이야기. 에녹 이야기도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엘리야와 더불어서 성경퀴즈대회 많이 나왔던 이야기인데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 두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 엘리야하고 에녹이거든요. 사실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건 그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어떻게 두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하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믿음이 그만큼 돈독하다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아담 이후로 죽음은 우리의 통과해야 될 문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에녹도 결국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이야기해요. 근데 이건 사실적인 이야기라기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 이야기. 이것도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7절에 나왔어요. 노아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건 뭐냐. 홍수 사건이 아직 멀었잖아요. 대충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가 일어날 거다 약속이 있은 다음에 몇 년 후에 일어났죠? 120년 후 정도 될 겁니다. 상당히 후에요. 몇 년 후가 아니라 우리 지금 시대로 말하면 몇 세대, 30년을 한 세대라고 한다면, 고대 창세기의 나이 계산이 좀 다르긴 했습니다마는, 상당히 여러 세대가 흘러갈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홍수가 시작이 되거든요. 그 전까지는 노아가 감당해야할 짐은 무거웠던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노아가 산꼭대기 비슷한데 가서 방주 짓고 하는 게 전혀 근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을 갖고 120년 후의 어떤 사건을 확실한 것으로 자기가 받아들인 거죠. 예, 그런 점을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나와 있는 인물을 짚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한 대상이 신뢰할만한 분이여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그거를 기다리고 뚫고 나가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거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죠. 오스틴 목사라는 사람이 긍정의 힘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맨 앞부분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어디 길을 가다보니까 멋진 전원주택이 있어서 하나님께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지더라. 이걸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기독교 신앙이, 성서 신앙이 왜곡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단락, 드디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이어지는데 두 번째 단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8절에서 16절, 이것도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절,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다는 그 주제요. 그게 이제 기독교 전체의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고 특별히 로마 카톨릭하고 비교할 때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 이야기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게 복음의 핵심인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강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바울은 아브라함을 봐라.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얘기를 했어요.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핵심은 땅에 대한 거예요. 팔레스타인 가나안땅. 갈데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다가, 거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인 거기서, 고향이 거기에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방, 바벨론 문명의, 메소포타미아, 바벨론 같은 지역이죠. 거기였어요. 아버지가 데라였고, 거기를 떠나라. 이주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창세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었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될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거기에 신뢰를 갖고 떠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아직 갈 바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미래의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아주 분명한 신뢰이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진리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거죠.

이걸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과 연결해서 생각할 하면요. 아직 우리는 부활 실체가 아니잖아요. 약속으로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변한다는 약속을 받은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걸 온전히 믿으면 믿음에 의해서, 혹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부활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걸 극복하는 게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영성이기도 하고요. 아직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의 증거, 실체, 의심하지 않는 것, 진리로 경험하는 겁니다. 허황된 게 아닌 거예요. 잘못하면 망상으로 떨어지는 이상한 집단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이비 이단들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음으로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의 그 내용이 온전하게 우리가 정말 신뢰를 하고 의심하지 않되 그것이 왜 근거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을 꾸준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없어요. 그냥 믿는다고 하는 자기 주관성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기 성찰을 하려면 역사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신학적인 검증도 받아야 되고 그러한 것들이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 주류는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도 있었고 그러면서 점점 기독교 진리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깊어지게 됐습니다.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거를 믿고, 나왔고, 길을 갔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죠. 시간, 역사의 흐름은 어떤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의 과정이었어요. 여기서 과정이라고 해서 금방 차근차근 그대로 순서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오히려 약속이 아닌 거 아닌가하는 그런 회의와 시행착오가 많은 거예요. 그럴 때 방향을 잘 정해서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가야되죠.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경건 훈련도 필요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믿음의 동지들도 필요하고 같이 가는 도반들도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중요한 겁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명석하고 영성이 깊어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아닌 거예요. 같이 격려하고 더불어서 같이 성찰하고 그러한 공동체에 근거하여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같이 신앙에서 실제로 담아내야 되는 거죠. 네, 약속의 땅 그 문제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서 사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라가 믿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구약성서는 남성 중심으로 많이 되어 있어요. 그 당시는 가부장적이어서 여자들은 종속변수로 등장이 됩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했을 때 사라가 처음에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말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서 기자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아벨을 얘기할 때도 아벨이 정말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는 창세기에서 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까 믿음으로 드렸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이 사라 이야기도 사라가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는 창세기에 없지만 그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다는 결과를 놓고 보면 믿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 단락이요. 17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여기도 우리 같이 통독하겠습니다.

17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절,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멘, 여기까지요. 여기서 한 번 더 아브라함이 언급돼요. 족장들의 선봉장이라서 그렇습니다. 족장들은 대표적으로 네 명이에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까지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족장 전승이라고 해요. 전승이란 말을 이해하시겠죠. 구전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삭, 야곱, 요셉, 이런 것들이 사실은 독립적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창세기를 편집한 어떤 학자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다시 정리를 한 거예요. 성경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되어있는데 그렇게 말 하냐. 이걸 신학적으로 연구하면 다 나옵니다. 그런 것까지는 일반 신자들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가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대표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족장이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로 보면요 일반 역사하고 비슷한 거예요. 보통 인류 고대사를 따질 때 씨족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 부족 사회가 있고 왕정이 있고 봉건주의 그 다음에 민주사회가 쭉 내려오잖아요. 어쩐 체재가요. 씨족사회가 성경에 보면 족장들 시대에요. 아브라함은 씨족이에요. 이스라엘 씨족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씨족사회가 쭉 진행이 됐고요. 그 다음에 인류의 역사에서 부족 사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은 말하자면 작은 군주에요. 씨족에서 확장된 거예요.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사이기도 하고 예언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사무엘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어요. 부족사회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그 길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뒤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잖아요. 사울이 첫 왕이 됐습니다만 사울을 왕으로 삼지 않습니다. 왕정시대의 특징은 세습이에요. 아들이 왕이 돼야 되요. 사울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왕이라고 할 수 없고요. 다윗이 실제 왕이고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조입니다. 다윗 왕조라고 하죠. 사실은 이스라엘에 다툼은 많았습니다.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성경에는 일관되게 흐름이 있긴 한데 그 안에서도 서로 싸우고 북왕조, 남왕조 분리 되고 그런데서 우리나라가 북한과 남한이 갈라져 있듯이 서로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 족장들이 나와요. 아브라함, 이삭이야기가 나와요. 이게 다 믿음으로 된 거예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두 가지의 하나님 명령에 끼어있던 거예요. 하나는, 친자식 이삭이 후손이 된다는 분명한 약속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여기서 이게 어려운거죠. 이걸 그대로 순종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에 다 충실한 거예요. 이삭을 바치라는 말에도 순종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후손이 이삭을 통해서 된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확실하게 믿은 거죠. 서로 충돌되는 사건인데 같이 믿은 거예요. 거기에 어떤 믿음을 통해서 결정적인 사건이 증거가 되고 확실성이 되고 그게 정말 모든 것의 근거, 진리다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오늘 이 시간에 믿음의 정체를 다 빠삭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게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도피적으로 그냥 믿습니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를 꿰뚫고 들어가는 영적인 태도에요. 이거는 근거가 없어서 종교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실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신비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참된 신뢰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될 바른 영적 태도입니다. 이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이고요. 그게 정말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삭, 야곱, 에서, 쭉 얘기 나오지요.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23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여기는 모세가 주로 나와요. 이거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23절 읽겠습니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기 모세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의 기계적으로 믿음으로 했다고 구절구절마다 강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모든 걸 다 믿음으로 기록을 했어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시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참된 것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 보세요. 믿음으로 쭉 나오죠. 23절, 24절, 27절, 28절, 29절, 30절, 31절, 라합까지 나오네요. 기생 라합. 여리고성을 칠 때 정탐꾼들을 도와줬던 여자입니다. 그건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스라엘 역사를 쭉 따라가면서 이 모든 게 다 믿음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다를 말하려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이 믿음은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어서 어디로 도피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은 확실한 거고, 실증적인 거고 이 믿음은 그렇지 않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계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얘기 잠깐 더 붙이면요.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가나안 까지 들어가서 약속의 땅으로 거기서 정착하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어요. 그거는 계산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거기에 우연한 많은 사건들이 개입돼서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 드러나게 된 거죠. 우리는 굉장히 복잡하지 않습니까. 생각할 것도 많고요. 정치도 있고, 교육, 가정, 사회,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골치 아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가 하는, 여기에도 솔깃하고 저기에도 솔깃하고 많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면 안 되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이야기하는 고유한 삶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의 시각, 혹은 그러한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내도 다 답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붙드는 것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거룩한 영적 상상력,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32절에서 40절입니다. 여기 사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요. 여기도 교독 하실까요. 제가 32절을 읽겠습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절,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절,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 11장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장엄해요. 어떻게 보면 큰 교향악단의 노래를 듣듯이 이 믿음의 세계를 아주 화려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서 풀어가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부를 위해서 몇 번 읽었어요. 많이 더 깨달았습니다. 어떻다고 하는 게. 목사도 나름대로 교회 전문가이고 신학 전문가인데 멈춰 있는 게 아니에요. 거의 종말까지 계속 열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보, 앞으로 신앙이 나가야 되는 거예요. 목사도 계속 수행적인, 구도적인 자세로 일을 해야겠죠. 오늘도 이렇게 읽으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 말씀이 깊은 어떤 것들을 전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엄한 필치로 그 내용을 담고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사들이에요. 사사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오네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온다면 다윗이 아니라 사무엘이 나와야 되죠. 순서대로 따진다면.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거든요. 그런데 순서가 좀 바뀌었어요. 아마 히브리서 기자가 사무엘을 거의 왕 수준으로 보는 건지요. 시대적으로 보자면 사무엘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사울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다윗이 나와야 되는 거죠. 여기서 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지자들도 나와요. 이름은 나오지 않네요.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아까 제가 말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세요. 씨족 사회, 족장들, 그 다음에 부족, 사사 시대, 그 다음 왕정 시대로 내려오는데, 예언자들이 주로 어느 때 활동을 했을까요. 당연히 왕정 시대죠. 그 전에는 사사들이 직접 그런 일들도 했으니까요. 왕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물론 이스라엘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였지만, 그래도 좀 하는 역할이 분리되고 문명, 문화가 발달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때가 왕정시대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생활을 했다. 믿음으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얘기 하면서요. 특별히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거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얘기합니다. 선지자들도 고난 많이 당했어요. 다음 주가 종려주일이고요. 고난주간이라고도 합니다. 부활절 앞두고 있는 주일인데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그게 지금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써 여기에 오셔서 그렇게 감당하셔야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비천한 데에 오셔서 정말 낮은 데에 처하셨지, 케노시스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짐, 이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연스러웠을까요? 그건 굉장히 앞, 뒤가 안 맞는 얘기예요. 메시야가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은 그동안의 해석을 통해서 구약의 여러 가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야기나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충분히 해석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걸 알아듣는 거죠.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하고 추종하던 사람들하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난 받는 얘기가 쭉 나오잖아요. 결국 36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뭘 말하는 걸까요. 믿음으로 사사 역할을 하고 선지자 얘기 하고 다윗처럼 왕의 역할을 했던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조롱을 받았다.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난을 지금 받고 있다. 그러니 영적인 전통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거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 믿음이 유대인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온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받은 고난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어요. 시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좀 괜찮을 때도 있었어요. 황제에 따라서 좀 난폭한 황제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조금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있으면 마이너리티를 공격함으로써 정치 위기를 헤쳐 나가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정말 그 땐 어려웠고요. 그리고 로마 제도가, 기독교는 로마하고 뗄 수 없습니다. 로마 정치. 로마 황제, 황제주의죠 말하자면. 거기는 왕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굉장히 세련된 집단입니다. 왕이라고 하면 세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황제들은 세습을 하지 않습니다. 원로원이나 이런데서 민주적으로 뽑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로마의 황제, 이 제도를 우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곳곳 관공서 이런데다가, 황제의 이름을 까먹었는데, 황제 상을 세워놓고 공무원 되는 사람들은 절하고 인사하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거 안 하니까 로마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그런 등등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좀 보시죠. 밑에서 마지막 넷째 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에 의해서 살던 사람들이 받은 고난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모범들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은 믿음을 통해서 참된, 이거는 나중에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쓴 거예요. 구약의 위대한 사람들, 믿음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다. 그 약속된 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요. 부활이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건 못 받았어요. 그들만 있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를 통해서 구약의 믿음이 완성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지자나 사사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그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쭉 설명합니다. 재미있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 나오는 믿음의 실체,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천년 전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학 선언, 그리고 간증, 혹은 설교,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부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그것을 이미 오늘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주님 이렇게 한 주간의 중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또 같이 공부하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각각 여러 형편들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데로 인도하시사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2장




12장입니다. 전체가 13장까지 있으니까 다음 주면 끝나겠어요. 오늘 히브리서 12장입니다. 13장까지 마치고 제가 좀 생각을 했는데 신학책을 읽는 것 보다는 성경을 그대로 좀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성경 한 번하고 신학책 한 번하는 거였는데요. 신학책 여러 번 했으니까 성경을 통해서 신앙 훈련하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집사람 압력을 받아서 제가 꼭 그렇게 한 거는 아니고 샘터교회 초기 창단 멤버의 의견을 받아서 조금 참고를 했습니다. 이것 히브리서 다 끝나면 구약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조금 더 깊이 읽고 싶었던 욥기를 공부할까 생각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12장 1절부터 29절까지 있는 것, 같이 읽으면서 공부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강의안 보면 네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11장하고 이어집니다. 12장은 11장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그 유명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원역사에 나와 있던 사람들 쭉 열거하면서, 심지어 사사들하고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쭉 열거하면서 믿음의 본질이 뭔가 설명을 했습니다. 지난번에 공부한 거 기억이 나시죠?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은 못 받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었는데 기독교인을 통해서 유대인들도 언약, 혹은 약속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언자들과 구약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전통이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완성이 되었다고 1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갖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 믿음의 삶, 믿음의 길, 이런 것들을 12장에서 지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걸 네 항목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항목은 1절부터 11절까지예요. 징계와 연단입니다. 징계인데 그걸 통해서 연단이 되고 또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의 어떤 열매들이 맺혀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걸 1절부터 11절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12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그 이야기를 이제 에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에서와 쌍둥이 형제 야곱의 장자의 명분, 직분이 어떻게 가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 세 번째 항목은 18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서 기자의 특징이 나타나요. 구약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해주죠. 거기에 믿음도 있고 제사도 있고 속죄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완전하지 않은 것들을 짚어요. 여기서도 시내산을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분명히 약속을 받았다.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아가야할 이런저런 것들을 받았는데 그것은 불완전한 거죠.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 여기서 약속의 말씀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항목은 25절부터 29절까지예요.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시온산에서 주는 말씀이야말로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말씀이다. 세계를 완성하는 말씀이다. 시내산에서도 사람들이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이 시온산의 말씀에서는 더 근원적인 두려움, 떨림. 우리의 삶이 다 새로워져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것을 붙드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우리가 좀 살펴봅시다. 1절부터 11절까지 같이 교독으로 하겠는데요. 홀수니까 마지막 절은 함께 읽으면 되겠습니다.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절,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절,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 번 읽는 것으로는 확 들어오지 않죠. 이 히브리서에는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게 구약의 이런저런 어떤 상징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에요. 그래도 천천히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모를 거는 없습니다. 첫 번째 단락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근거한 믿음의 전통을 바르게 받았어요. 그리고 믿음이 완성되는 겁니다. 구약에 나와 있는 여러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마저 알지 못했던 언약을 우리는 알기에 그 믿음의 길을 잘 가야하는 거죠. 그런데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한 번 뜨거워져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이라고 하는 게 조수미가 몇 일 날에 콘서트를 여니까 티켓을 사가지고 가지고 있는 것, 이런 상태 아니잖아요. 그거는 과정입니다. 바울도 그런 것들을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젖을 먹는 상태에 머물지 말고 장성하라,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하고요. 꾸준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다른 인생살이도 비슷하잖아요. 노래를 배우는 사람도 초보자였다가 점점 좋아지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어린아이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건 일종의 구도라고 할 수 있고 근본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번갯불에 맞아 갖고 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서, 하나하나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요. 거기서 당연히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불행한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요. 그걸 감수해야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약간 착각하는 게 있어요. 자기에게 좀 어려운 일만 생기면 하나님한테 잘못한 게 있나 이런 쪽으로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죄책감 비슷하게 빠지게 됩니다. 자기의 삶 하나하나를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걸 죄의식 같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신자들이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이 있고 이런저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냐면, 징계로 보았는데, 말은 징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는 건가 이런 차원에서의 징계는 아닙니다. 원어로 징계라는 뜻은 교육하다는 뜻이 더 강한 거예요. 가르치다, 교육하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의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는 어떤 과정으로 받아드린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재밌는 표현이 있잖아요. 7절 이후에 쭉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혼내거나 할 때 정말 친아들이니까 그렇게 하지 징계를 받지 않는 아들이 있다면 이거는 좋은 게 아니라 사생자, 친아들이 아닌 거라고 8절에 나와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데 그런 게 없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런 어려운 일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다. 그 정도까지 가고 있는 거죠.

이게 참 중요한 건데요. 우리는 늘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데 이거는 나쁜 마음은 아니에요. 누구나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가기도 하는데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과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나를 더 올바른 뜻에 가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혹은 가르침이 아니냐. 이런 쪽으로 가야죠. 그런데 그게 좀 위험성도 있긴 한데 그걸 잘 파악해야 되요. 내 삶은 좋다, 불행한 일이 있어도 만족스럽다.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정말 힘들죠. 그런 거를 책임질 걸 책임지고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것은 감당하면서 궁극적으로 이것이 내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단계까지 가는 게 참 필요합니다. 아주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영적인 시각을 얘기하는 거죠. 거기 11절에 보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실재로 그렇잖아요.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니까 어려움들이 사람들을 두 가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어요. 내 인생이 왜 이래라든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이것이 계속 악순환이 되가지고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분노가 많게 되거든요. 공격적으로 변하고 그렇게 되면 징계라는 것이 나쁘게 영향을 미치는데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이런 쪽의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역경과 징계가 풍요롭게 끌고 가는 거죠. 그거를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신앙을 구도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데 그걸 핵심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그게 토대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인격적으로 된다든지, 마인드 콘트롤을 한다거나, 요즘 힐링 얘기하는데 심리적인 치료, 이런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세상의 방법이에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참고사항이에요. 그거는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거는 그냥 일반적인 그런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고유한 삶의 태도로 그러한 길을 가는 거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주목하는 것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뭔지를 아는 것이고 그와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 핵심인 거죠. 그런데 이 번역, 2절을 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봐야 되는데, 2절 전반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게 번역이 좀 서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믿음의 주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주님 할 때 주란 말이에요. 믿음의 주요하니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주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보통 퀴리오스라고 얘기하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라 아르케로 나가는 단어가 있어요.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토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믿음의 초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토대, 믿음의 출발점이요, 그리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믿음을 완성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이 뭔지를 우리들에게 정말 알게 해준 기초이고 믿음을 완성한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공동번역이 그걸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을 했어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보시면 제가 그걸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 바라보자. 이게 더 잘 들어오죠. 우리 말 번역은 약간 잘못된 거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것, 여기서부터 믿음의 길이 열리는 거죠. 제가 신학공부, 꼭 신학이라기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아야 되고 중요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일단 알아야 되잖아요. 그게 그냥 세례 받을 때 몇 가지 문답하는 거, 교회 생활하면서 익숙하게 하는 거, 이건 아니잖아요. 교회 생활은 생활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은 다른 거예요. 사실은 교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몰라도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동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신학 공부나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많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단락, 12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이것도 교독하십시다.

12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절,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여기 12절부터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너무 약한데 머물지 말고 반듯하게 신앙생활 좀 해라 그 얘기에요. 12절에 보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힘을 내고 다리를 절듯이 그렇게 어그러뜨리지 않고 고침을 받고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가야되지 않냐하는 겁니다. 그런 충고를 하면서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네요.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평함과, 이걸 이루는 거죠, 그리고 거룩함을 따르라. 이거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결 되는 거죠. 여기서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화평, 평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는 거죠.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거는 아닙니다. 단순하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거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자주자주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기독교 신앙을 일반 상식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걸 넘어서는 거예요. 상식은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물론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런저런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건 상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문장을 통해서 어떤 다른 실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라기보다, 그거는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 해야 마땅한 것이고요. 이걸 좀 생각 해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날 목사의 설교나 성경공부, 이런 것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학생들이 대학교가서 교수나 이런 사람들에게서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배우는 양은 굉장히 적어요. 배우는 게 뭐냐면 어떻게 학습하는가,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가 방법론을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학문의 가장 중요한 관문을 박사학위로 얘기하잖아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굉장히 그런 쪽에서 우수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최소한도 이 부분에서 어떤 근거를 갖고 연구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러한 자격증정도에요. 그러니까 박사학위를 받아도 꾸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이건 아무런 업적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용섭 목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다 옳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걸 제가 다 풀어 낼 수도 없고요. 다만 정용섭 목사가 과히 다른 길로 나가지 않고 그래도 비교적 바른 방향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해 주시겠죠? 어쨌든 그런 것을 통해서 성경을 이렇게 접근하는 구나. 그걸 통해 또 여러분들이 접근하는 방법을 익숙하게 하면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화평을 누려라, 평화를 누려라 할 때 이런 것들을 사이좋게 지내라는 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면, 나쁜 건 아니지만 깊이로 들어간 건 아닙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려면 먼저 화평이 뭔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샬롬, 에이레네라고 하는 헬라어, 그리고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화평이 뭐냐 이런 걸 알아야 이러한 문장들이 점점 넓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정말 이상한 사람하고 무조건 화평을 이루는 건 잘못된 거죠. 싸우지 않는 게 무조건 화평은 아닌 겁니다. 최소한의 문장으로 요약을 한다면, 이웃들과 생명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 이게 화평을 누리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악을 행하는 것, 이건 화평이 아닌 거죠. 생명이 아닌 거니까. 그래서 이런 문장들이 간단한 게 아닙니다. 또 다른 단어는 거룩함을 따르라.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습니다만 그래도 낱말 한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보통 거룩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저 목사는 목소리부터 거룩해. 신학교 다닐 때 그런 얘기 많이 했습니다. 부흥 강사들이 오면 홀리 보이스라고 해서 목소리를 탁하게 해서 은혜 끼치는 거 있지 않습니까. 홀리 보이스라고 거룩한 목소리, 태도도 근엄한 이런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말을 세련되게 잘 한다거나 도덕적인 우월감이 있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그게 구별된 거죠. 하기오스라는 단어를 쓰거든요. 저 사람이 몇 평 아파트에 사냐, 이걸로 구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지휘, 이런 게 아니라 기독교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게 바로 구별된 것, 거룩한 것이죠.

여기 에서가 인용이 됐어요.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자기 장자 명분을 팔았다는 이야기요.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장자라는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한 거죠. 그거 동생한테 팔았다고 해서 팔리냐, 배고프니까 먼저 해결하고 그냥 잘하면 되겠지. 너무 그것에 대해 의식이 없었죠. 그래서 결국 그 친구는 장자의 명분을 잃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안 되더라. 기회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그런 기회가 오기 힘든 거죠. 일반적인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가 실수 한 번 하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비유와 같을 거예요. 작은 거 충성하는 사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작은 하나하나, 달란트 자체의 액수는 큽니다만, 그런 기회에 성실하고 그거를 진지하게 자기 삶의 무게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대충 되겠지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말 값진 것에 대한 시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관계에 정직하고 진지하지 못하면 그게 결국 중요한 것들을 다 놓치게 됩니다. 이제 에서가 그런 사람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 단락, 18절에서 24절까지 마지막절은 같이 읽어야 되겠네요. 교독하겠습니다.

18절,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절,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절,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절,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멘, 예 여기도 아주 복잡합니다. 핵심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두 개의 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산이고요. 하나는 역사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으로 그것과 비교돼서 나오는 산입니다. 앞에 산은 시내산이고 뒤에 산은 시온산이에요. 시내산에서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었어요. 거기 시내산에서 임했던 하나님 임재의 특징이 일곱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불, 산, 침침함, 흑암, 폭풍, 나팔소리, 말소리,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경험된 거죠. 루돌프 오토가 쓴 책의 주제도 이거하고 많이 연결돼서 설명되고 있어요. 누미노제의 경험이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시내산만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득한 역사와 미래의 자기 자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막막함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표현으로는 현묘, 한자로 하면요. 현묘, 어두운 묘함, 그러한 경험들을 살면서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조금 더 저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을 더 느껴요. 옛날에도 그랬습니다만, 지금 세상에서 나에게 보이는 것들이 다 형체가 변하잖아요. 고정돼 있는 게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한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저에게 조금 더 절실하게 생각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과일 모양이었다가 꽃 모양이었다가 배가 되고 계속 변하잖아요. 무심하게 우리가 보긴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와 같은 거죠. 여기 안경집이 있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데 플라스틱의 재료는 석유에서 왔잖아요. 석유에서 모양이 바뀐 거예요. 석유는 아주 옛날에 수백만 년 전에 나무가 땅속에 묻혔다가 변화된 거 아닙니까. 나무였다가 석유 덩어리 원액이었다가 그게 제조돼갖고 이렇게 플라스틱 통이 되고요. 이렇듯 이 세계가, 우리는 너무 천천히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걸 짧게 축소시켜서 보게 되면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 세계에요. 이게 뭔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특별히 놀랄 것은 없는데 그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큰 변화 속에서 나는 과연 뭔가, 나도 점 하나로 있다가 변하는 큰 흐름 속에 하나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현묘, 이 시간, 역사, 그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느끼게 되죠. 말이 좀 옆으로 갔습니다만 시내산에서 고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그렇게 일곱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것들을 언어로 표현한 겁니다.

그것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22절에 보시면 나와요. 구약에서는 시내산이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임재이긴 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게 아니고요. 22절에 보면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까지 기독교인들이 왔다, 정말 거기에 딱 들어왔다고 얘기합니다. 이것도 우리말 성경이 좀 까다로워서 공동번역으로 제가 인용했습니다. 거기 한 번 보십시오. 강의 요약문,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종교적 상징이죠. 그러나 막연한 게 아니라 리얼리티가 있는 거예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신학이고 영성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연한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있고, 이런 것들이 정말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시나요, 리얼하게 느껴지시나요. 하늘의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 피가 있습니다. 참 놀라운 표현들입니다. 이 의미를 잘 모르면 구약의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거구나 정도로 들어올 거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역동성을 경험할 수 있어요. 어쩌면 이 22절에서 24절만 갖고도 책 한 권을 충분히 쓸 만한 주제가 나올 겁니다. 하나하나가 다 무게가 있는 거거든요.

예를 들자면, 천사 문제만하더라도, 천사라고 하고 잔치라고 하고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계속된 문헌, 전승들, 그들의 어떤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십자가 재림, 이런 것과 연관해서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도 우리가 촘촘히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죠. 이러한 공부들을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많이 해야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기초적인 것이 안 된 상태에서 졸업을 많이 해요. 성서를 해석할 만한 준비들을 갖추지 못하고 나와서 조금 아쉽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목회 현장에서 본인들이 열심을 내서 극복을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고요. 그래도 잘 하는 젊은 친구들을 잘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우리가 약속한데서 5분정도 남았네요.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25절에서 29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25절,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절,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절,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아멘, 여기 진동한다는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오죠. 진동, 흔들린다. 기본 토대가 흔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고대 이스라엘의 사도 중에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도의 제자일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쓴 건데, 이 사람들이야 현대 물리학을 전혀 몰랐겠죠. 그래도 현대 물리학이 풀어주는 것들을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의 영적 통찰력이 있습니다. 진동한다, 세계가 흔들린다는 게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 지구가 계속 땅이 움직인다는 것 아시죠. 판 운동이라고 하는데 지구가 공처럼 생겼잖아요. 이 껍질이 계속 움직여요.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아니라 지구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전문적인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뜨거운 불덩어리들이 쇳물처럼 녹아 있어서 계속 움직이다가 약한 지층이 있으면 뚫고 나오는데 그게 화산입니다. 이걸 조금 더 나가게 되면 지금 우리가 시간과 공간으로 세계를 경험하잖아요. 산이 있고 나무가 있는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질 수도 있어요.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되는 거죠. 신앙적으로 얘기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그 세계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완전한 그 변화를 가리켜서 진동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만 미래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등의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미래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인 거죠.

제 이야기가 좀 비약이 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비약이라도 여러분들이 알아서 들이시길 바라요. 그럼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하고 전혀 상관없다면 거기가 뭐가 좋다는 거냐, 가봐야 별 볼일 없겠네, 사실은 가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거지만,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 생각은 신앙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 고 있는 좋은 것을 축소시켜야 돼요. 하나님의 자유에 그 나라를 맡겨야지 내 자유로 하나님을 속박하려고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수 없는, 당연히 못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루시는 자유에 우리가 온전히 신뢰를 해야죠.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자유, 평화, 아까 본문에서 얘기한 거룩함,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거기에 삶을 맡기게 되는 거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키워드,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일치가 돼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모든 것들이 다 저주받은 상태까지 내려가는 거잖아요. 부활은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라는 분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거죠. 거기에 내 삶이 실질적으로 일치가 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 걱정을 안 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로우심,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나를 온전히 의존시키는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여기 마지막 구절에 진동한다는 말만 제가 간단히 설명한 거예요. 그 단락을 강의 요약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에서의 말씀과 시온산에서의 말씀을 비교해서 시온산에서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한다. 시내산은 땅이고 시온산은 하늘이다. 하늘에서의 말씀은 모든 세상을 진동시킨다. 그러나 진동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킨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우리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의 나라이다. 모든 것은 흔들리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그러한 신앙의 세계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영속적으로 하나님이 지키신다. 27일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흔드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우주론적인 거대한 생각을 갖고 기록하고 있네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고난 주간의 가운데 수요일 저녁, 우리 믿음의 식구들, 소수이지만 함께 모여서 이천 년 전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문자로 전해준 히브리서 말씀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비밀이 담겨 있어서 읽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그러한 표현처럼 이 말씀이 우리를 근본에서 살리심을 믿습니다. 이제 고난 주간 앞으로 며칠, 잘 주님 안에서 지내고 부활절 아침 기쁨으로 다시 만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13장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중에서도 앞에서 많이 우리가 접하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기도 해서 약간 뒤로 쳐지는 성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에 같이 읽으니까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요.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을 교독해서 전체 읽고 천천히 전체 13장까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듣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여기 여러 가지 모양이 가지각색이에요. 주제가 앞에 하고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특별히 여기에 13장, 마무리를 하면서 일부러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라는 게 있네요. 지금의 목사를 가리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하여튼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말씀을 전하거나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말도 있고 생각 좀 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거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교회 목사에게 순종해라’ 이렇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상황이 있기 때문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이거를 일반화 시키면 성경을 좀 오해하게 되는 거죠. 이 말씀을 따다가 무조건 순종하라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마 히브리서 공동체의 정확한 배경이 뭔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여기 지도자들을 생각해봐라 반복해서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거기에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러한 풍토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덕스럽게 운영이 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네, 그런 것들이 있어요. 여기 본문에 해당하면 조금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13장에서는 실제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잘 해야 되냐. 그러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의 일치,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갖잖아요. 기본적인 신앙이잖아요. 그걸 전문적인 신앙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서울에 예배 인도 하러갈 때 예배 마치고 신학공부를 해요. 지난 공부 주제가 칭의와 성화였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려놨으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른 건 빼고 하나만 얘기할게요. 칭의, 이걸 굉장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된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이론, 신학 개념들은 이론이기 전에 실체에요. 리얼리티에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도 그렇고요. 신학자들도 그렇고 이론을 잘 계산해갖고 어떤 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다, 신앙이 뭐다를 말한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신앙의 실체를 경험한 거예요. 그걸 합리적으로 설명한 게 신학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신앙의 능력 안에 들어간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론적인 설명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기독교인들이 이론에만 떨어져서 그게 어떤 건지를 조금 눈치를 못 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칭의의 능력, 역동성, 그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똑똑해야 인정받죠. 돈이 있어야 이 사람 괜찮다 인정받죠. 스펙이 있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다는 사실을 자기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능력 있게 사는 거죠. 보세요. 시시한 사람들이 인정하냐, 아니냐에 우리는 너무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한다, 너 의롭다, 칭의가 그런 말이니까요. 그 인정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하냐, 아니냐는 정말 작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어떤 학교에 한 반이 있습니다. 거기 한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을 자기 친구들이 조금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얘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인정해 주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칭의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 자기의 인식, 자기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실질적인 깨달음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지나갔네요. 오늘 본문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여기 신앙생활하고 실제 삶이 어떻게 연결 되나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칭의가 뭐냐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칭의와 예수님과의 관계. 그러나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에 걸 맞는 실제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거잖아요. 이 두 관계가 어떤 거냐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세 가지 삶의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요. 세 가지예요. 형제 사랑, 손님 접대, 갇힌 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거죠. 형제 사랑, 손님 대접, 갇힌 자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일일이 다 어떤 거냐를 꼼꼼히 살피려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겠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시각으로 이웃들을 대하게 되거든요. 나그네, 손님들, 형제, 그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한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또 그런 삶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을 나눠야겠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주의는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되 그건 단순히 윤리학은 아니 겁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잖아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이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기독교인이 휴머니즘적으로 사는 건 당연하되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은 아닌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4절. 여기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가르침이죠. 음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한, 두 마디 갖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성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 윤리라든지. 그런 것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온 문제들은 로마 윤리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조금 구분해서 봐야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거라서 사실은 일반 신자들이 그걸 다 구분해서 보기는 힘듭니다. 이런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들을 보면 성령의 열매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도 사실은 로마의 윤리적인 가치, 용어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관용에서 사랑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절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음적이라고 설교를 하면 조금 부족한 거예요. 관용적으로 살아야죠. 그러나 그건 일반 윤리이고 다 좋은 거예요.

성경 내용이 어떤 사실을 얘기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실을 지칭, 가리킬 때가 있는 거예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떠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다른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본질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뭔가 혼란스러워서 ‘예수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교회 안에서 싸우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 걸로만 충분하지 않으면 율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책 하루에 얼마나 읽어야 돼’ 이런 것처럼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냐 그러한 요구가 교회 안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걸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쭉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인 공동체가 복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거기에만 집중하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도덕한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좀 까다롭죠. 일반 신자들이 성전 읽고서 그런 것을 다 분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제가 4절을 설명하다가 옆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은 성윤리, 로마 시대가 굉장히 혼탁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는데, 성도라는 뜻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성윤리, 그런데 좀 끼지 마라 그런 얘기인 거죠. 그 당시에는 매음굴, 창녀촌이라고 하나요. 굉장히 일반화 됐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어요. 아기들을 로마 광장에다 버리면 소위 말해서 포주들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끼워서 다시 윤락가에 보내고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은 모르지만 남자가 윤락가의 여자 대상이 자기의 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동성애 이런 것도 굉장히 파괴적인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헬라 시대 때는 좋은 거였어요.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플라토닉러브, 이게 동성애였어요. 그 당시는 결혼해서 남, 여 간의 관계가 애기 낳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애기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거다. 플라톤 시대에 플라토닉러브라고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동성애였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문헌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굉장히 타락한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점점 문란하게 돼서 바울이 경고 한 거죠. 그게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경 말씀은 다 배경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촘촘히 따지지 않고 그것만 가져다가 ‘봐라!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서 6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왔네요.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한다.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둘 다 진정한 사랑은 못 되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건데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돈에게 맡기는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두 가지는 하지 못합니다. 이게 지금의 자본주의, 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속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거라는 걸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개인이 그런 것을 다 못하니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도록 달라져야 돼요. 정치적인 것들도 필요합니다. 복지 문제도 우리의 현황이 되고 있는데 약간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국가차원에서 보장 해준다면 그렇게 돈에 많이 치우치지는 않을 수 있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목회 활동이 점점 열악해져서요. 목사의 품위,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에게 품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목회하기가 쉽지 않아요. 젊은 목회자에게 더 그렇습니다. 부목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뒤에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학생회, 청년회, 어느 교구를 맡았던지 그 동안 얼마나 성정을 시켰는지를 평가 받고요.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온순한 목사들은 일반교회 부목사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면 자기 뜻대로 양심껏 하려면 담임목사를 가야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신학생들은 계속 많이 나오고요.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공급은 계속 되고 있으니까 불균형, 이게 목사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고 교회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다 보니까 자기를 비하하게 되거나 과욕을 많이 부리게 되고 총체적으로 악순환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품위인데 복지가 최소한 보장이 되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이에요.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자기의 신앙적인 인식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생명이 확보된다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닫는 것하고 그 다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는 것. 같이 좀 병행해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절, 8절. 드디어 여기 나오네요. 교회 지도자들을 좀 생각해라. 7절에 나오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날하고 상황이 다르게 순교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다음 9절.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 중에 하나에요. 영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9절에 재미있는 게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죠. 이거는 음식 규정,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그러한 율법적인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그러한 것들. 그건 별 거 아니다. 그런 것들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 한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6절. 이건 조금 복잡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학자들도 이게 정확한 뜻이 뭔가를 다 풀지 못했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게 무슨 비유, 상징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제가 하나의 틀로만, 전체적인 그림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소유한다거나 거기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지 못 한다. 그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 뒤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고 있어요. 12절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인데 예루살렘성 밖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이죠. 안에서 십자가 달리신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셔서 고난 받으셨어요.

13절,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도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 골고다죠, 성문 밖에 있는 그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두루두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14절에서 좀 더 정확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영구한 도성, 영원한 성읍, 하나님 나라,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예루살렘 도시도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황제도 아니다. 그건 장차온다.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제가 지금 인용한대로 새 예루살렘 그 얘기가 나오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 얘기 하거든요. 온다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나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표현들 말입니다. 그건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뜻인데 우주 공간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는 세계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나무 책상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무 책상으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질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정도까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변화될 때를 기다려야 되는데, 부활도 그런 거예요. 저도 전적으로 변화 됐으면 좋겠어요. 현대와 같은 상태, 이런 거로는 영원한 생명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나 현재 이 몸도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그 때를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늘 입관 예배 갔다가 제가 성경을 한 군데 읽었어요. 간단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부분이 기억이 또 나네요. 지금 전적인 변화를 얘기하다 보니까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4절,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탄식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모든 좋은 일들은 짐하고 같이 옵니다.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이 삶은 숙제를 푸는, 짐을 진 것과 같은데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게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죽을 거잖아요. 생명에 삼킨바 된다. 우리가 없이 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삼킨바 되는, 그 때를 우리가 바란다는 거죠. 바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질적인 변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고요. 그걸 우리가 기다리고 사는 거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10절에서 16절이라고 쓴 대목의 밑에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15절이 가리키는 찬송의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16절이 말하는 선한 행위이다. 재밌게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것을 제사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상의 제사죠. 앞에 있는 거는 실제 우리가 예배드리는 제사고요. 제사라기보다도 찬양이죠. 두 번째 선함과 함께 나눔, 이런 것들은 일상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연관되는 거예요.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그거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성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 19절. 여기에 두 번째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나오네요. 재밌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순종하라, 복종하라'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 다음 좀 내려오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런 일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고 얘기했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밑줄 쳐 놓고 잘 읽어두세요. 그리고 저를 잘 봐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늘 즐겁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18절에 보면,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도 교회 지도자들이죠. 우리가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축복입니다. 축복기도에요. 내용이 재밌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 쭉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 몇 마디에요. 22절에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여태까지 권면한 거예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그런데 간단한 건 아니네요. 13장까지 굉장히 길게 썼는데 간단하게 썼다고 했을까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가 봅니다. 줄이고 줄여서 썼나보네요.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은 것을 너희가 알라, 감옥에 같이 있다가 풀려났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암시이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과 아주 가깝게 아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요. 디모데하고 같이 일 한, 감옥에까지 같이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 여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또 나오네요. 문안하라, 그렇게 얘기했고요.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지금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방문을 받았나 봐요. 이달리야, 이탈리아죠. 로마 교인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한 마디만 우리가 잘 생각해도 우리 신앙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 삶에 역동성이 생겨요. 이거는 사회에서 심리 치료 받고, 힐링 치료 받는 거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자꾸 놓치기 때문에 다른 데 한눈을 파는 거죠. 은혜라고 하는 것, 받았다고 하는 것, 선물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은혜 한 마디만 가지고도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그냥 받았다고 하는 것, 너무 크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세상은 다 주고 받고 하는 차원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 이거를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13주에 걸쳐서 히브리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천년 전, 전혀 우리와 상관없던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던 이들의 문서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특별히 우리 대구샘터교회, 수요일 성경 공부하는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내려왔는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13주 동안 같이 공부한 히브리서의 그 영적인 깊이, 그러한 리얼리티, 우리의 신앙의 긴 발걸음에 좋은 디딤돌이 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다시 또 새롭게 다음 주부터 시작하게 될 욥기서 공부할 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