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케리그마 / 말씀, 코이노니아 / 교제, 디아코니아 / 봉사)


교회의 세 가지 요소 - 케리그마(말씀),  코이노니아(교제),  디아코니아(봉사)

1. 케리그마 : 말씀

κήρυ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782

1. 전령이나 선구자가 외치는 선포.  2.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메시지
발음 [ kērügma ]
어원 / 2784에서 유래 - 케루쏘(κηρύσσω) 공포하다, 크게 선포하다, 공공연히 말하다

뜻풀이부

1. 전령이나 선구자가 외치는 선포, 공포, 성명, 발표, 통지.
2.  하나님이 보낸 사자의 메시지, 선포, 설교, 전도, 마 12:41, 눅 11:32, 롬 16:2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전도(마 12:41, 고전 1:21, 딛 1:3), 전파함(롬 16:25, 고전 15:14).

2. 코이노니아 : 사귐
- 성만찬 예식

κοινω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842

1. 합동.  2. 관대.  3. 교제의 표
발음 [ kŏinōnia ]
어원  /  2844에서 유래-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 동무, 참여자

뜻풀이부

1. 합동, 교제, 친교, 고전 1:9, 고후 13:13, 갈 2:9, 빌 2:1.
2. 관대, 동정, 애타주의, 고후 9:13, 빌 2:1, 히 13:16.
3.  교제의 표, 형제 화합의 증거, 롬 15:26.
4.  참여, 나눔, 고전 1:9, 10:16, 고후 8:4, 13:13, 빌 3:10, 몬 1:6.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교제(행 2:41, 빌 2:1, 몬 1:6), 연보(롬 15:26), 참여(고전 10:16, 빌 3:10), 사귐(고후 6:14, 요일 1:3, 6, 7), 교통(고후 13:13), 나눠줌(히13:16), 경륜(엡 3:9), 친교(갈 2:9).

3. 디아코니아 : 봉사

διακο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248

1. 봉사.  2. 준비하는 일.  3. 직무
발음 [ diakŏnia ]
어원 / 1249에서 유래-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종, 협조자, 집사

뜻풀이부

1. 봉사, 섬기는 일, 행 6:4, 고전 16:15, 고후 11:8, 엡 4:12, 딤후 4:11, 히 1:14, 계 2:19.
2. 준비하는 일, 눅 10:40.
3. [예언자나 사도의] 직무, 행 1:17, 25, 20:24, 21:19, 롬 11:13, 고전 12:5, 고후 3:7,9, 4:1, 5:18, 6:3, 골 4:17, 딤전 1:12, 딤후 4:5.
4. 구조, 원조, 기증, 행 6:1, 11:29, 롬 15: 31, 고후 9:12.
5. 집사직, 롬 12:7.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직무(행 1:7, 고후 9:12, 딤후 4:5), 구제(행 6:1), 부조(행 11:29, 12:25), 일(행 20:24, 딤후 4:11), 사역(행 21:19), 직분(롬 11:13, 고전 12:5, 골 4:17, 고후 6:3), 섬기는 일(롬 12:7), 준비하는 일(눅 10:40), 힘씀(행 6:4), 사명(행 20: 24), [동] 섬기다(롬 12:7, 고전 16:15, 고후8: 4), 준비하다(눅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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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 - 히브리어 담(דָּם) , 헬라어 하이마(αἷμα)

피(담.  dâm )   דָּם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 22), 피 값(겔 3:18), 죄(겔 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에스겔 33:5-6 <죄 - 피>

그가 경비를 하였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를(1818) 내가 파숫군의 에서 찾으리라.
- 그 죄를(피) 1818. 히브리 단어 "피(담)"를 의미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דָּם 스트롱번호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피(하이마. haima)  αἷμα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α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129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haima ]
뜻풀이부
I. 피.
 1. [문자적으로]
   a.  사랑의 피, 요 19:34. ῥύσιςαἵ- ματος : 혈루증, 막 5:25, 눅 8:43.
   b.  동물의 피, 히 9:7, 8, 25. ζᾠων τὸ αἷ : 짐승의 피, 히 13:11.
2. [상징적으로]
   a.  생명의 거처로서의 피, 마 23:30, 27: 4,6, 행 22:20, 롬 3:15, 히 12:4, 계 16:6.
   b.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 3:25, 엡 1:7, 히 9:12, 요일 1:7, 계 1:5.
 3.하늘에 재앙의 표시로 나타나는] 붉은 색깔.
   a.  불과 연기와 함께, 행 2:19.
   b.  우박과 불과 함께, 계 8:7.
   c.  달의 색깔, 행 2:20.


* 대속의 희생물로서의 피와 생명, 특히 대속의 의미로서의 예수님의 피, 롬 3:25, 엡 1:7, 히 9:12, 요일 1:7, 계 1:5.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요한일서 1:7

저가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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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基督-血, 라틴어: Sanguis Christi, 영어: Blood of Christ)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
(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 등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성경에서의 보혈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11-22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신학 / 로마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지극히 고귀한 그리스도의 성혈 호칭 기도문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영원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궤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사랑과 자비의 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심을 열어 쏟아주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매 맞으실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가시관을 쓰셨을 때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늑방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악의 세력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성직자들의 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수도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짐진 이들의 휴식처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불신을 신뢰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미움을 화해로 바꾸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갈등과 고뇌하는 이의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임종하는 이의 위안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마음의 안식과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영원한 생명의 증표이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모든 영광과 흠숭과 찬미를 받으셔야될 그리스도의 성혈이여,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오, 주님! 당신의 거룩한 성혈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 기도합시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혈을 통하여 당신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 자비로 이루신 구원을 저희 안에 견고케 하시어 저희로 하여금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구원의 열매를 충만히 체험하게 해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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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스도의 피”라는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완전한 속죄 사역을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피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수 세대를 거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수한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피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속죄 수단이라는 사실은 모세 율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성전 제단에 동물들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그러나 이는 그 효과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피흘림이었기에 반복해서 드려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의 전조였습니다(히브리서 7:27).
예수님의 희생이 드려진 후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건네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20).

잔에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흘려질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동물들을 지속적으로 희생시켜야 했던 옛 언약의 요구는 폐하여졌습니다.
동물들의 피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사람들의 죄를 덮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죄는 거룩하고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3).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완전히 갚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히브리서 9:12) 완전한 구속 사역이 영원히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믿는 자들을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히브리서 9:14).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 쓸모 없는 (죽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치 없고 비생산적인 육신의 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자료출처 / Got Questions

용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용서하다 ’라는 단어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덮어주고, 눈감아주며, 빚을 청산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아 마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서란 사랑, 자비, 그리고 은혜의 행위입니다. 용서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시 51: 4).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의 결과로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입니다(마 25: 46; 요 3: 36).

용서 –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망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상반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영원한 죽음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인간이 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 1, 14).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우리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용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고전 15:1-2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 23b).

죄 사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받음을 위해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에 이 놀라운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용서 –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께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의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도문을 읊는 것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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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셨습니까?

답변


성경은 영생에 이르는 분명한 길을 제시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저질러 왔으며, 이에 형벌을 받아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만이 합당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나 죄가 없으시며(벧전 2:22)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요 1:1, 14) 우리의 형벌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요 19:31-42)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고후 5:21).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고전 15:1-4),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가짐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가 누구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왜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행 3:19).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의 죄값 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죄 사함 을 받고 천국 에 속한 영원한 삶을 약속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것만이 영생에 이르는 유일하고 참된 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의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도문을 읊는 것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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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성경에는 많은 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는 사람과 동물의 몸속의 혈관을 타고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며 노폐물을 운반하여 제거하는 일을 하는 붉은 물질의 액체로 우리 인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노아홍수 후에 주께서 노아에게 동물들을 주어 음식으로 먹게 하셨지만 그러나 고기는 먹어도 그 생명 되는 피를 먹지 말라고 금(禁)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반드시 동물들과 사람들의 피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시며 특히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면 그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를 반드시 찾아 보응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 4:10, 5:1, 9:4-6)

또 주께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 에 있기 때문에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가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해 죄(罪)를 속(屬)하게 하였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7:11)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께서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고 금하셨고 만일 피를 먹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하셨습니다.(레 17:14)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에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된다고 말하며 피 흘림이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고 말합니다.(히 9:22)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제도는 동물의 피를 단에 뿌려 백성들의 죄를 사하였으나 이 제의(祭儀)가 온전치 못하여 자주 반복하여 제사를 드렸고 또 온전케 되지 못하여 제사제도를 변혁(變革)하여 완전하신 여호와하나님의 의(義) 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 하고 새 언약의 피, 곧 자기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려주심으로 완전하며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시고 우리의 양심의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하늘 보좌 성소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9:12,14,10:12) 이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셨으며 저가 한 제물로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요1:29.히10:14)

그런데 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참 다양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 주의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 어떤 이들은 혼동하여 예수의 피를 믿어서는 소용없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한다는 이상한 교리를 내세워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며 실족케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실정입니다.

예수의 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육신(肉身)으로는 다윗의 혈통(血統)으로 오셨으며 성령(聖靈)과 말씀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육체(肉體) 가운데 오셨습니다.(요1:14.롬1:3,9:5) 주께서 육체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 되었고 육체를 따라 그 가운데서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인 인간의 육체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위해 속전이 되어 언약의 피를 흘려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言約)의 피라고 스스로 증언하셨습니다.(마26:28.막14:24)

이에 예수께서 사람으로 육체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흘리신 피 가 있었고, 이는 흠 없고 점 없는 피 이기 때문에 모든 죄를 사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를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고 이 피를 주시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5:9,10)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함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피를 말할 때에 “피는 육체에 생명”이라고 말하였는데 위에 제목들을 보면 많은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피 가 있음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육체의 생명을 입고 있기 때문에 피 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 다양한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피,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그러나 이 가운데 피 가 있는 분은 “육체 가운데 오신 예수께만 피 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피.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피 가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말하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메시야를 말하며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사명을 위해 여호와의 신인 성신(聖神)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것을 말하며 이는 성령(聖靈)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으며 기름 붓듯이 부어주셔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다 고치셨습니다.(삼상 2:10. 사 32:15, 42:1, 61:1. 요 1:32, 33, 3:34. 행 10:38)

그런데 우리가 의구심(疑懼心)이 드는 것은 이 기름 부으심의 주체가 되시는 “성령님이 피가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와 히브리서 기자와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피 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엡 2:13. 히 9:14. 벧전 1:2)
혹시 이들에게 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도 성령께서 피 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께서는 피 가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who have been chosen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for obedience to Jesus Christ and sprinkling by his blood: Grace and peace be yours in abundance.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5:50)

그러므로 “혈(血)은 곧 피” 를 말합니다.
피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도 못하고 썩을 “피와 육신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명백하게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느냐?

하시며 내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 39)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실 때에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5:6)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살과 뼈는 있다고 하셨으나 “피 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다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증언에서도 “이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까요?

이는 육체가운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 육체의 생명을 가진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심으로 죄 값을 치루시고 속전이 되셨음을 말하며 이 “예수님에게만 있는 피”를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한 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시기를 한 량 없이 또 기름 붓듯이 부음 받으신 “성령의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신약의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피” 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의 이름에는 성령의 기름부음 받으심과 그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피” 라고 “편의적(便宜的) 부른 것”입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떡에 참예함에 아니냐?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피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한 것은 독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을 믿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은 그 이름이 여호와하나님의 의(義) 이심을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렘23:6) 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안에 계신 여호와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사도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그의 제자들이 믿어야하며 또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즉 메시야 되신 분이라고 말하며 그는 아들 예수라는 이름과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증언합니다.(요20:31)

그런데 최근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예수라는 이름은 육신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취약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신성을 격하시키려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야한다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하며 예수라는 이름을 불신(不信)시키며 폄하(貶下)하고 다른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요14:6) 이에 제자 베드로사도 역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증언합니다.(행4:12)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며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리스도가 한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라고 성경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요20:31.벧전1:2) 이에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로 오셔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 하게하시며 구원하여 생명을 주십니다.(엡1:7.요일1:7) 또 새로운 피조물가운데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데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주님과 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주님과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요3:5,14:16.행2:38.딛3:5.히2:11.요일2:27)

이에 우리도 주님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받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예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시며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이시기 때문입니다.(렘23:6)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에는 이미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이 이미 선재(先在)하셨으며 그 이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골1:16,17)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벧전1:2, 곧 하나님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하나님의 피.

레위기 서를 통해 말씀하신 피는 육체의 생명으로 동물과 사람의 피를 말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은 사역을 마치고 로마에 가서 마지막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께서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기다릴 것을 알게 하셨지만 순교 할 것을 예견하고 해(害) 받을 것을 말했어도 자신에게 계시하신 뜻대로 마지막에 자신을 관제로 부을 것을 각오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 설교 가운데 자신은 모든 이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꺼리지 아니하고 다 전했기 때문이라고 에스겔의 파수꾼 사상을 상기(想起)하며 말합니다.(겔3:17-21.행20:23-27)

파수꾼은 하나님의 입으로, 그의 말씀을 대신하여 주님의 백성들을 깨우치는 자입니다.(겔3:17) 그는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또 동족들이 주께 돌아와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입니다.(롬9:3,11:14) 그러므로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너희는 자기를 위하고 또 온 양떼를 위해 조심하라 성령께서 너희들 가운데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행20:28)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피”, 우리의 쟁점은 “피는 육체의 생명에게만 있는 것인데” 왜 사도 바울은 “이 피를 하나님의 피” 라고 말했을까요?

실재로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 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이신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가운데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구원하기위해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신 분의 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 아이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사7:14,9:6,7.렘23:6.마1:21,23) 그러므로 말씀이시며 영이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끝에 오셨는데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습니다.(요1:14)

이 아기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 라는 말에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포함한” 내용을 말합니다. 주님은 선재(先在) 하신 분으로 마지막 날 아들로 만유를 세우시고 저로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 하셨고 또 만물을 붙들고 계신분입니다.(요1:3.골1:16,17.히1:3) 이 예수께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타락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피 가” 있으므로 “예수의 피” 라 고 말 한 것입니다.(히10:19,13:12)

이 “예수님”을 사도바울은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혈통"이며 다윗의 한 가지로 “유다지파 가운데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즉 그의 증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그리스도의 것”인데 주께서 유다지파로 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예수의 나심”을 “그리스도가 나셨다” 고 말한 것이며 이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사람가운데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피” 라는 것은 곧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저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고 증언합니다.(롬9:5)

우리는 이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그 분을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범인(凡人)으로 알고 경배하는 자들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을 능욕(凌辱)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거역하는 자들로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의 일 계명부터 삼 계명을 범하는 자들로 주의 이름을 범(犯)하는 죄(罪)를 범하는 것입니다.(출20:3-7) 우리는 다만 예수님과 그 이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마지막 설교를 통해 그가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가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양떼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행20:29)

이들은 제자들이라도 끌어다 자기들을 좇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일러줍니다. 즉 이와 같은 말씀들은 금세기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 이름을 폄하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이상한 무리들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운운하며 각 블로그 마다 순회하며 사람들의 신앙을 헐어버리려고 하며 실족하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성경을 통해 주께서 증언한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신앙을 오직 예수님께만 고정해야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의(義)의에 문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만이 여호와께로 들어가는 문이 되십니다.(시118:19,20.사26:2.롬3:21)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진리로 자유케 하시며 여호와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분입니다.(요14:6.행4:12) 이 믿음을 우리가 견고히 잡을 때에 우리가 여호와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승리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주인삼아 진리로 자유를 얻은 자들만이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행 20: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너희 중에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들을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에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 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잠든 자들이 주께 돌아와 그의 긍휼을 입을 때입니다.(엡 5:14)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for it is light that makes everything visible. This is why it is said: "Wake up, O sleeper, rise from the dead, and Christ will shine on you."

종말이 되면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며 불법이 난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의(義)를 보내셨고 이제 그 의롭다함을 입을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사 46:13. 계 3:20)

그리고 우리 믿음의 대상의 이름과 그 피는 “그 이름이 예수와 예수의 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피, 라고 다양하게 부르지만 오직 우리의 신앙의 대상의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의”(義) 이신 “예수의 이름과 그의 피를 말한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뛰어난 이름 위에 세세토록 찬양을 드리며 경배하며 영원히 의지하는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이사야 46: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시온에 베풀리라.
I am bringing my righteousness near, it is not far away; and my salvation will not be delayed. I will grant salvation to Zion, my splendor to Israel.


요한계시록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Here I am!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 I will come in and eat with him, and he with me.



*자료출처 / https://wangjo49.tistory.com/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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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피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6:28   
구절 개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7:25   
구절 개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히브리서 10:4   
구절 개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요한1서 5:6   
구절 개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히브리서 9:14   
구절 개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1서 1:7   
구절 개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출애굽기 12:13   
구절 개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요한1서 2:2   
구절 개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5:8   
구절 개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히브리서 12:24   
구절 개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에베소서 2:13   
구절 개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히브리서 10:19   
구절 개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요한계시록 19:13   
구절 개념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에베소서 1:7   
구절 개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20   
구절 개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요한복음 6:54   
구절 개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히브리서 10:10   
구절 개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복음 19:34   
구절 개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1서 3:5   
구절 개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로마서 5:9   
구절 개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레위기 17:11   
구절 개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10:18   
구절 개념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 죄를 깨끗이 씻는 피(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2. 성소에 담대하기 들어가는 피(히브리서 10:19)  영원한 속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3. 피는 하나님의 말씀(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스가랴 13:1-2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피의 샘이 터져야 한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레위기 17:11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26:28 / 언약의 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야고보서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말세




데이빗 윌커슨 예언-1 :  다섯 가지 예언과 성취 / 말세의 징조   


https://blog.naver.com/acoloje/60200824499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이 지금부터 40년전인 1973년에 예언한 내용이다.  

예언은 성취여부를 통하여 그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성취측면에서 보면 월커슨 목사님의 예언은 참 예언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이 비전을 주신 이유는 '장차 성령충만한 백성들이 핍박을 받게 될 때가 올 것인데 이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광신자로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이미 이런 조롱하는 현상은 시작되었다

그는 환상에서 5개의 재앙이 세계와 미국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 

세계와 교회는 점점 바벨론 음녀의 문화에 정복당하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예언이 대부분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종말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세계적인 경제 불황 (World-wide Economic Recession) 

 

 

잠시동안 호황 후에 혼란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을 경제적 불황이 올 것이다

유럽과 일본, 미국에도 불황이 찾아 올 것이고 대기업들이 파산할 것이다

교회들도 파산할 것이며 선교 프로젝트들은 철회될 것이다

지혜로은 사람들은 호황을 활용하여 다가올 불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경제불황을 통하여 돈에 대한 우상화가 가속되었다  

 

예언 성취 : 일본의 10년 불황, 미국이 서브 프라임모기지와 국가부채로 인한 경제위기,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로 세계적인 경제불황이 야기됨.

 

2. 자연이 해산의 산고를 시작 (Nature having labour pains)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자연적 재해들은 해산의 고통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질수록 이런 자연재해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며 세계적인 기근이 올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우주폭풍이 일어나서 하늘에 변화를 보일 것이다 

 

예언 성취 진행 : 2011년 일본 9.0 대지진으로 약 2만명 사망, 미국 토네이도,허리케인,산불재해, 중국 2008년 쓰촨성 지진으로 1만 3천여망 사망,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약 20만명 사망

 

3.  타락의 홍수 (Flood of Filth, Prophecy of Nahum) 

 

 

나훔 선지자의 예언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나훔 3:6)

 

자정이 지나면 TV에서 음란한 성인영화를 보여 줄 것이다

음란물들이 TV를 통해 방송될 것이다

신문가판대는 음란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킨다고 성행위가 담긴 영상을 보여 줄 것이다

법원은 음란물이 퍼지는 것을 반대하는 판결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각 신문사의 선정적인 인터넷 메인화면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정론지인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다를 것이 없다, 동성애자 증가, 세계음란물 생산국 중 한국순위 6위

 

4. 거역과 반역 (Rebellion)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고 증오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위선을 본 자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수백만명의 자녀들이 가출을 할 것이다

부모들은 점점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고 한 지붕 안에서 원수처럼 살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2011년 한국의 가출청소년 약 3만명, 가출사유 51%가 부모와의 갈등 

 

5. 진실된 기독교인을 대적하는 핍박  

( Persecution against true Christians)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성령강림한 오순절을 통하여 성령을 받은 진실된 믿는 자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분은 예수님이다 

요한복음 18장 15절에 의하면 저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박해 하였은즉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핍박을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영적으로 핍박이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알곡과 가라지, 즉 진실된 신앙과 가짜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 중에는 방언기도를 하면서도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시간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

성령을 받을 것이다. 방언을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은사주의 기독교인들도 핍박을 받을 것이다 

 

핍박의 광기가 이 땅에 올 것이다

숨겨진 있던 괴물같은 자들이 일어나서 인류가 전에 보지 뭇했던 광기로 진실된 기독교인을 핍박할 것이다.

핍박은 천천히 커져가다가 종교자유가 최고조에 이를 때 갑자가 거세져서 전세계에 퍼져갈 것이며 일종의 광기가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고위직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들어 갔다. 

 

또 하나는 험담인데 사탄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목회자들의 모든 험담을 잡아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파멸시키려고 한다

한국의 언론만 해도 마치 불의한 기자들이 비밀결사라도 맺은 것처럼 교회와 목회자 험담을 기사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통한 복음전파가 쉽다

그러나 핍박이 시작될 것이다

TV와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대중매체를 통한 복음전파를 다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아직 빛이 남아 있는 낮에 열심히 일하라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도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동참할 것이다

폭로와 음모성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격하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전에 없던 신성모독을 할 것이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재산세나 소득세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어 교회와 기관들이 파산할 것이다

국세청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가장 강력한 기관이 될 것이다

그렇게되면 이젠 정부가 교회를 핍박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미 미국정부는 교회외 비영리 교회단체를 조사하고 있다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기 위한 핍박이 올 것이다

오직 완전히 순종하는 자들만이 견디어 낼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인기를 끄는 요소가  안되는 시간이 오고 있다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학생들은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이런 움직임은 사탄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으며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이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저 변변치 않은 자들로 조롱받는 것을 넘어 모든 종류의 욕설을 들을 것이며 학교에서는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 

동료 학생들이 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웃으며 찢어 버리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기독교 학생들을 향한 괴롭힘은 폭력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서 결국 두려워서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예언성취가속 : 기독교 안티, 개신교에 배타적인 대중매체 언론 증가, 반기독교 영화, 교회세금부과 



데이빗 윌커슨 예언-2 : 두종류의 세계교회 출현 말세의 징조  

https://blog.naver.com/acoloje/60200885536

마지막 시대에는 교회가 두 종류의 교회로 나누어진다고 예언하고 있다 

하나는 정치적 기반의 영향력이 보이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능력 기반의 교회다 

 

Visible Super Church 

 Invisible Super Church

연합목적

 정치적인 연합

외적으로 영향력 행사하기를 선호

 영적 연합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이름도 빛도 없는 사역

주요사역

 성공,번영,정치적 영향력,개교회성장

세계선교, 성령운동 

 사역결과

 세속화, 빚더미 건축

세상과 타협, 교파간 정치적 연합

적그리스도 출현에 기여

세계 복음화

성령운동을 통한 심령회복

그리스도 재림 열망과 준비 

 

 

전자는 세속적 교회이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한 교회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문제다 

두 종류의 교회는 두 개의 세계에 속한 슈퍼세계교회로 물리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연합된다

문제는 전자에 속한 교회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전자에 속한 목회자가 특별히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실패를 보이는 사람들은 아니다

사탄은 교회를 세속의 도구로 타락시키기 위해 교묘히 미혹하여 왔다

그러므로 개인은 물론 교회차원의 목회자, 특별히 대형교회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기반 슈퍼세계교회가 만들어진다  

 

개신교 자유주의 세계교회운동과 로마 가톨릭이 연합해서 기본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갖게 된다

이 연합은 처음에는 자선사업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정치 결합이 될 것이다

외적으로 슈퍼월드교회는 영적인 단체라 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이며 이들이 하는 사업은 적그리스도적인 활동이 될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사회에 개입하며 정치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며 세계정세에 관여할 것이다

세계교회연합운동이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일때 갑자기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이 연합의 뼈대가 만들어 질 것이다

교회는 개신교 세계교회연합운동 지도자에게 복종하라는 강요를 당할 것이다

교황은 이 교회 연합의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간주될 것이다

 

세계교회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누구든 제압할 수 있는 큰 정치권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불경건하고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이다

이 두 연합(개신교와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기적과 사랑, 화합을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종교단체들을 핍박하고 괴롭힐 것이다

세계교회는 동성애자들을 환영할 뿐 아니라 그들을 격려할 것이다

오해에 기인한 것처럼 꾸미며 동성애자들과 연합할 것이다

동성애자 목회자들이 임명을 받을 뿐 아니라 고위직에 오를 것이며 새로운 사랑의 복음에 대한 개념을 가진 선구자로 치켜질 것이다

미국과 전세게에 동성애자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목회자들이 사탄단체에 의해 행해지는 초자연적 역사에 현혹될 것이다

예수님과 친밀감이 없는 목회자들이 사탄과 아주 가까워지는 날이 온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할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도 유혹하려고 할 것이다

 

다음에 다른 종류의 영적 기반 슈퍼교회가 일어날 것이다

그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권능을 가진자들로 이루어지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하는 자들이 만든 연합이다

진실되게 믿는 자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일종의 지하교회가 될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등 모든 교파와 인종과 국경을 넘어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다

보이는 슈퍼세계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되지만 다른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는 강력한 영적 권세를 갖게 될 것이다

핍박을 통해 주어진 권세다

핍박의 광기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와 가깝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들은 교파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더 관심을 둘 것이다

성령께서 이들을 국적,인종,교파,직업에 관계없이 연합 시키실 것이다

이런 교회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해 왔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영향력이 없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두종류의 교회는 존재했었다)

이런 교회는 핍박이 강해질 수록 더 강하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성령의 자연적 기름 부음 아래 능력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일종의 인터콥같은 선교단체로도 보인다, 이들 선교단체는 한중일 교회와 연합하고 교파와 세대를 초월하여 작은교회들이 연합하고 있다, 정치적 교회는 오히려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을 방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제가 여기 서기까지 어떤 영적 전투를 치러왔는지 알지 못한다

사탄은 "모든 사람들이 너를 광신자라 할 것이다"하며 위협하였다

이미 신뢰를 얻고 있는 사역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이미 너를 존경하는데 그들앞에 바보처럼 보이려고 하는가 속삭였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의 귀나 간질거리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 저는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종말에 관하여는 별로 말하지 않았었다

영적인 눈을 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보지 않고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구원이 가까지 왔음이라

 

이런 비전을 본 저는 매일밤 주님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한밤중에 주님께 이 모든 일에 물어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믿음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숨고, 모든 것이 파산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탄이 세상을 장악할 때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빚을 다 갚고, 물건을 팔고,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해 농장을 사서 앞으로 좋은 날을 기대하며 그저 숨어 지내며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토네이도와 기후 변화를 보면서 기독교인들이 제 정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추락하는 때에 우리가 어떻게 강인하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아주 짧은 말씀으로 저를 각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God has everything under control)

 

이것이 제가 들은 말씀입니다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구에 부어져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것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연재해가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자연재해를 본다면 하나님이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물질을 다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탄은 당신의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의 권세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어린 기독교인이라도 사탄을 대적해서 물리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두려운 자연재해나 경제위기나 불황의 소식이 들려와도 하나님의 자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치지 못합니다

마지막 환란과 심판과 아마겟돈 전쟁은 모두 하나님의 일정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하나씩 실행됩니다

오늘 잠라리에 들기 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마지막 때에 젊은이는 비전을 볼 것이고 예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인간관 - 생기와 생령 / 사람과 짐승



인간관(人間觀,  human condition)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한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철학에서의 인간관

흔히 인간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철학적 성찰의 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사실 그 생각이 맞는데, 인간에 대한 관심은 철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철학은 자연의 보편적 본질과 윤리적 규범이 본질을 묻는 방향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자연을 인식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그 자체가 우리의 주관에 그대로 받아들여 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능력이 가진 모종의 한계로 인해 다소 우리 주관에 맞게 고쳐져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몇 몇 특수한 지각이 있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 능력으로는 초음파방사선을 감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오감 역시도 다른 동물들보다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물론 그 동물들보다 나은 부분도 있고 말이다. 또한 사람들마다 신체 상태에 따라 인식하는 능력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과연 그러한 인식들 중 어떤 인식이 가장 정확한 인식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자연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 그 자체의 본래 모습을 탐구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의 의지는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귀결에 주춤하고 만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소피스트들이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방법으로 그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을 공격했다.

결국 자연 그 자체를 알고자 하던 의지는, 그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에게로 옮아가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면 그 너머에 있는 자연의 본질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이 기존에 신적 질서로 믿어지던 전통적 관습과 법률을 공격해서 상대화함에 따라,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는 그것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면서 한편을 윤리적 규범의 행위자인 인간에게로 관심을 옮기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인간관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마디로 쉽게 요약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인식 능력의 토대에 따라 합리주의경험주의의 인간관을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철학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관과 공동체주의적 인간관 역시 계속해서 대립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

잘 알려진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적 자아와 개별적인 인간은 현상계의 일종의 가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귀결이 나온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구 사회에 '가장 인간다운, 가장 완전한 인간상이 있을 수 있다'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러한 인간상을 기초로 하여 가장 완성된 상태의 인간성을 갖추고자 하는 노력이 서구 문명에서 계속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 기독교 역시 이런 방향으로 수용 되었다.

인간의 내면을 이성욕망으로 대별하고, 둘 중 이데아를 직관하는 능력을 갖춘 이성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 해야고 본 것 역시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최초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두 명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에게는 없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 현상의 원인을 탐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어떤 대상의 원인이란 곧 그 대상의 본질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금 눈앞에 있는 컴퓨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것을 재료적으로는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형태는 육면체이며,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고, 전기를 통해 작동하는 것 등등의 정의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컴퓨터의 원인이며, 구체적으로는 각각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에 해당한다. 이러한 원인들은 곧 컴퓨터의 본질이고 그러한 본질이자 원인인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그 대상을 도구적으로 잘 활용할 수도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위계를 설정하고 그 위계상 인간은 다른 여느 동식물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서구 문명의 철학 사상과 과학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되었다.

한편 윤리학과 정치학에서는 그는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공동체에 속해서 역할을 갖고 참여하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보았다. 사실 개인주의가 근대에 탄생한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이러한 시각이 보편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근대의 데카르트는 중세 기독교의 신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 분위기를 간파하고,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된 사고 체계를 만들어 낸다.

사실 현대의 서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관은 대강 보았을 때 데카르트의 인간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인간관은 다소 장황하고, 이후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의 인간관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크게 세 가지 실체로 나눈다. 즉 , 정신, 물질이 그것이다. 인간은 물질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정신을 갖고 있는 존재자이다. 즉,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자연적인 물질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신체적 욕망에 이끌리지만, 내면세계는 정신적인 세계에 속해 있어 물질적 자연법칙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신체 역시 자연적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고자 했던 당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할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과 종교가 물질과학과 독립해서 존립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데카르트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영혼이 없으며, 영혼이 없다는 것은 곧 정신이 없는 것이고, 자유로운 의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만든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데이비드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인간은 순전히 생리적 신체일 뿐이다’라고 답할 철학자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런 대답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 종래의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과정이다.

대체로 철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히 생리적인 신체일 뿐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자아’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데카르트 역시 자아로서의 이성적 정신을 물질적 신체보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우위에 두고 있다.

하지만 흄은 이런 관념을 해체한다. 우리의 인식과 행위를 통일시켜주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관념일 뿐이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의 이론은 이성적 자아에 기반을 둔 근대의 합리주의적 인간관과 합리주의적 윤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경험주의적 인간관, 더 나아가 이후 시대의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정초하는 작업이 된다.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

라 메트리는 근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더 밀고나가면서 흄의 경험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간의 정신으로서의 자아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간기계론’을 제시한다. 인간이란 순전히 물질적 존재일 뿐이며,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신체의 작용에 따라 욕망을 품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생리적 신체의 작용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카를 마르크스

마르틴 하이덱거와 철학적 해석학

서구 철학의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경험 과학의 발전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진화론부터 시작해서 경험적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이 합리적 판단에 따르기보다, 오히려 흄의 말대로 욕망과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저 다른 생명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연적 존재가 되고 만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독자적 특징을 성찰하고 싶었던 철학자들의 기획은 이렇게 무너지는 듯 보였다. 더구나 경험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심화된 근대적 기술 문명의 발달은 기술과 관료 체제 그 자체가 중요하며, 정작 그 기술과 체제를 향유하려던 인간은 도리어 그 체제에 속박되어 버리고, 개체적인 고유함이 중요시 여겨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만들고 말았다. 즉, 인간소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필두로 한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독특함을, 인간의 언어로 쓰인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그들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갖고 있다. 인간만이 단순히 스스로를 자연 현상에 속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또 자신의 시간적 삶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길어내는 것이다.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특히나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자연적 현상에는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과가 뒤따른다고 말한다. 대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은 이런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물들은 저마다 본성상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따라 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적인 씨앗이 자라 꽃이 되는 것도, 올챙이가 자라 개구리가 되는 것도 자연적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만이 이러한 인과관계를 포착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결단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과학적 탐구를 벗어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철학의 고유한 과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종교에서의 인간관

유대교

선민인 유대인과 그 이외의 사람들로 구분된다.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는 이러한 타락 속에서 인간은 신의 엄격한 명령, 즉 계명을 철저히 지킴으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여기서는 주인과 노예처럼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서구 종교의 대표격이 되는 기독교는, 철학적 인간관과 생물학적 인간관과는 구분되는 신학적 인간관을 따로 상정하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이 대개는 생물학적 인간관만을 갖고 인간을 파악하거나, 아니면 그 위에 합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역사성이 기초가 되는 철학적 인간관을 더불어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 신자들은 그 위에 신학적 인간관을 하나 더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테마는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또한 기독교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서사', 즉 신과 인간이 펼치는 장대한 이야기를 갖춘 것으로 믿는다.
신은 처음에는 인간을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고, 원죄를 갖게 되었다.
사실 이 원죄의 관념은 고대적인 연좌제적 성격을 갖고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12세기의 신학자 요아킴은 예수의 도래 이후, 신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 흡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예수의 복음을 통해 신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요아킴은 이후 재림할 메시아의 시대에는 인간이 지적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외 기독교적 인간관은 여기서 간단히 이야기하기 불과하니 관련 항목을 참조하길 바람.

3.3. 이슬람교[편집]

이슬람교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선교하겠다는 이념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단번에 신앙적으로도 모종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을 가장 우위에 놓고, 계전의 백성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그 다음에 놓아 어느 정도 포용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하며,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들은 가장 아래에 놓는 수직적인 인간 관념을 갖고 있다.

힌두교

인도의 모든 종교는 윤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회에 의해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동물들도 내세에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 계열 종교들은 대체로 윤회 상에서 인간이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보다 높은 위계를 가진 것으로 그리곤 한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 상의 계급 역시 전생의 (業)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즉, 전생에 좋은 일을 했다면 좀 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는 뜻이다.

힌두교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단계는 윤회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 더 이상 다시 환생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 동물과 인간, 그리고 카스트상의 계급 차이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역시 인간을 고된 현생에 집착하게 하여 계속해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 즉 브라흐만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이 한갓 가상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체인 브라흐만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는 자는 해탈하여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

불교는 인간의 개별적 자아란 한갓 가상이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같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유일 실체인 브라흐만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실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없다.
불교의 '(空)' 관념은 이렇다.
세계는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공(空)이며, 다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된 '연기'만 있을 뿐이다.

불교 사상은 귀결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개별적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상은 60~70년대 생태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4. 현대 생물학심리학에서의 인간관[편집]

이하에서 보듯이 심리학개론 시간에 줄창 배우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생물학, 특히 심리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이미 인간관의 변화무쌍한 변천의 역사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을 묘사하고 그리는 방식이 천지차이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전부 교집합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대립 관계인 것은 아니다. 크게 보아서 "인간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nature-nurture 논쟁), "인간은 고정 불변의 존재인가 변화 가능한 존재인가"(trait-state 논쟁), "인간은 동물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가, 아니면 동물과는 다른 무언가인가", "인간은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구성물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더 큰 무언가인가"(환원주의 대 전체론의 논쟁) 등의 기준들이 있는데, 각각의 입장은 저마다 이에 대해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기도 하는 관계이다.

4.1. 진화론적 인간관[편집]

찰스 로버트 다윈의 《종의 기원》 이 서구권의 전통적 인간관을 뿌리째 뒤흔들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의 저서가 출판되기 전까지, 서구의 일반적인 인간관은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존엄한 인간상을 제시했던 중세 이전의 영향을 받아 왔다. 즉 인간의 모습은 곧 신의 모습이었고, 이러한 우월성은 인간을 평범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만물의 영장'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즉 다윈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든지 간에 평범한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다윈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다윈의 책들을 통해 일견 정적으로 보이던 생물들의 분류가 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보이게 된 것에 더하여,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는 인식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린네처럼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보려는 다양한 시도는 있어 왔지만, 다윈만큼 기존의 인간관에 막대한 파장을 몰고 온 사람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던 장벽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면,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만들었다" 는 얘기까지 나왔다.[2] 이는 동물에 대하여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찌보면 훗날의 행동주의적 사고는 진화론에 의해 변화된 인간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이 흐름을 충실히 이어받은 학문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심리학 및 가족심리학, 생물심리학, 정서심리학, 사회심리학 등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에 진화가 영향력을 끼치려면 수만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양복 입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수십, 수백만 년 전에 적응적이던 특징이 지금도 적응적일 거란 보장은 없지만, 진화는 그렇게 빨리 반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먼 옛날 수렵채집 시절에 맞게 튜닝되어 있고, 맹수의 습격과 식량의 부족을 극복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비만이 그때 그 시절만 해도 가장 적응적인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점만 생각해도...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때건 지금이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우월성 내지는 고유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이게 되거나 취급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는 집단은 은연중에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보고도 많이 있다. 이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도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측면들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발견도 있다. 이는 따로 인간의 동물성 부정(human creatureliness denial)이라고도 한다. 이는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갈아넣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어째서 (종교와는 무관한 경우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의 관점에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4.2. 정신분석학적 인간관[편집]

20세기 인류 지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프로이트는, 비록 그가 극히 논쟁적인 위치에 있다고는 하더라도, 심리학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서구 인간관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로 인해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오해를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20세기 중엽까지 학계를 리드하던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정신분석학자 출신의 볼비(J.Bowlby)는[3] 오늘날까지도 심리학개론 수준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론인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창시하여 유명해진 바 있다.

정신분석학이 인간관에 끼친 가장 큰 기여는 인간의 천성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그 자체가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유전자 결정론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인간의 성품이 사회의 영향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조성된다는 대립적인 관점과는 사뭇 달랐다.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모자녀 간 관계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지만, 한 인간 내에서 일단 형성된 어떤 (대다수의) 측면들은 이후의 인생 내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생 전체가 유년기의 경험(특히 5세 이전의 경험)에 의해 사실상 완전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단순명료한 아이디어로부터 현대 심리학의 거대한 두 갈래를 이루는 테마, 성격(personality)과 발달(development)이 튀어나왔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두 주제에 대해 물론 프로이트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설명을 하지만, 그 분야를 본격적인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따지자면, 프로이트는 사실상 시조와도 같은 셈이다. 5세 이전의 인간의 발달, 그리고 그 이후의 평생을 지배하며 불변하는 성격. 한 인간의 내면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다.

프로이트는 또한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병들어 있는 존재로 보았다. 물론 이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에게 찾아온 소수의 내담자들을 바탕으로 만든 관점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개인의 생각을 표출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심도 있게 탐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의식의 의식화(unconscious conscious)와 훈습(workthrough)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활용하기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기로는 자유연상 이전에 최면술을 비롯한 몇몇 방법들이 있었다지만, 프로이트 이전의 인류에게는 "정신이 병들 수 있다" 는 아이디어 자체가 낯설었다. 흔히 말하는 "미친 놈" 에 대해서는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가혹하게 매질을 하거나, 굶기거나, 골방에 처박거나, 수용소에 감금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트 이전의 정신병 치료법 중 제도권에서 받아들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신병자들끼리 모아 놓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춤을 추게 하기" 였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가 그 문제가 사실은 무의식 속의 원초아와 초자아의 싸움 때문이라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통찰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다윈은 인간을 동물로 끌어내렸고, 프로이트는 인간을 병든 동물로 끌어내렸다" 고도 한다.

4.3. 행동주의적 인간관[편집]

행동주의는 그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을 철저히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말했던 무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그들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인간의 외현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ex. 기억, 감정, 의사결정, 판단, 표상, 통찰 등) 애초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심리학 연구방법론의 발전과, 톨먼(E.Tolman)의 인지도(cognitive map) 및 쾰러(W.Koehler)의 통찰학습(insightful learning)과 같은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깨지게 되었다.

이들은 자극-반응 이론(S-R theory)에 의거하여 인간을 기본적으로 외부 자극에 대하여 적절하게 능동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존재로 여겼고,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많이, 나쁜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적게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인간은 매우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행동의 변화를 통해 학습을 측정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학습의 대전제가 되는 여러 기본 가정들을 세우기도 하였다. 손다이크(E.L.Thorndike)가 대표적.

인간이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는 이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프로이트적인 결정론과는 달리, 이들은 적절한 조건형성만 갖추어진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교하고 어려운 행동이라도 조성(shaping)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아무리 길고 복잡한 일련의 행동들이라도 연쇄(chaining)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화를 통해 변화하는 행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본유적인 측면들은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스키너의 상자 속에서 똑같을 뿐이었다. 왓슨(J.B.Watson)이 대표적.

또한 이들 역시 생물학의 선대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행동주의에서 인간을 설명할 때 "인간은... 이러하다" 로 설명하지 않고 굳이 "유기체는... 이러하다" 고 설명하는 것은 그 때문. 가 그렇듯이 고양이가 그러하고, 또한 사람이 그러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아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고 보고했다. 계속 언급하지만, 인간이나 동물이나 조건형성을 했을 때 반응하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4.4. 인본주의의 물결[편집]

인본주의 심리학의 북극성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자 로저스(C.Rogers)를 비롯한 일군의 임상가들은 인간을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향하여 현실의 자신을 이끌어 가는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며, 현 상태에 만족하거나, 심지어는 자기파괴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슬로(A.Maslow)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긍정적 성장에 반드시 전제되고 우선시되는 다른 욕구들이 미처 채워지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주관적 경험의 가치에 주목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느낌과 기분, 정서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아니, 인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로저스의 발언처럼, "우리는 석양이 지는 것을 그저 경외심을 갖고 바라볼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자들이 이 학풍을 싫어합니다. 심리학의 다양한 접근법들 중에서도 행동주의와 인본주의는 공통점을 찾기가 극히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르다.

이처럼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주관성 자체를 긍정하기 때문에 사회 구성주의와도 접점이 많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구성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에 대해서만큼은 타인이 함부로 "터치" 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관점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함부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오히려 각 개인이 구성한 세계는 무조건적 수용의 대상이며, 여기에는 인간 중심 치료를 실시하는 상담가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4.5. 인지주의의 도래[편집]

이 분야의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4]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같은 새로운 흐름은 종래의 인간관을 다시 한 번 뒤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행동주의가 자극에는 곧바로 반응이 따라온다(S→R)고 주장한 반면, 이들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블랙박스" 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외현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 마음 속의 변화이며, 이러한 심적 과정(mental process)은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심리학의 영역이 되었다.[5] 이는 기존의 학습심리학 분야에서 유기체가 주체적으로 기억하고 판단하고 환경을 표상한다는 근거들이 "더 이상은 양탄자 밑으로 밀어넣기 힘들 만큼"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사후 오랜만에 다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면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6]

이 시점에서 세계는 "컴퓨터" 라고 불리는 새로운 첨단의 기계의 원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철학자 퍼트넘(H.Putnam) 등이 그 효시이다. 오늘날 유명한 인물로 인지철학자 데닛(D.Dennett)도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도 컴퓨터의 논리와 은유를 빌려다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7] 라는 상상을 했고, 이를 가지고 컴퓨터로서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실제로 만들었다. 이것이 다시 몇십 년이 지나서 정말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로봇공학이나 최첨단 컴퓨터공학 분야에 응용되는 걸 보면 정말이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관점을 따르는 인지과학자들은 인공지능 연구에도 자주 협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알파고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학습 연구 역시 그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이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공학과는 별개로, 이는 또한 심리철학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이 당시의 많은 인지과학 이론들이 기계로서의 인간을 그리면서, 인간의 심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들이 크게 뒤바뀌었다. 외현적 행동의 변화 정도로 간주되던 학습의 의미는 이제는 장기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들의 변화로 환원되었고, 환경적 맥락이나 상호작용, 외부 자극들이 전부 싸잡아서 "정보" 로 환원되었다. 앳킨슨-시프린(Atkinson-Shiffrin) 모형에서의 부호화(encoding)나 반출(retrieving) 같은 용어들, Baddeley-Hitch 모형에서의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나 음운루프(phonological loop) 및 일화적 완충기(episodic buffer), 시공간 보조기억장치(visuo-spatial scratchpad) 같은 용어들을 보자면 이 인간들이 지금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려는 건지 아니면 웬 컴퓨터 썰을 푸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다면 이 관점은 인간을 (행동주의처럼) 수동적으로 볼까, 아니면 (인본주의처럼) 능동적인 존재로 볼까? 오늘날의 인지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어느 한쪽으로 크게 쏠리지는 않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어차피 지나친 결정론적 접근은 위험하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고, 인간에게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으레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견 이 관점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개인이 "단지" 처리할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업기억에 관련된 연구들은 인간이 정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능동적 특징을 보여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본성이냐 양육이냐의 논쟁에 있어서도 이들은 양쪽 모두를 함께 고려한다. 즉 인간에게는 타고난 인지적 능력의 한계와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후천적인 개입이나 학습, 변화를 통하여 인지적 처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억술.

4.6. 뇌과학의 출현과 신경 환원주의 논쟁[편집]

이전에도 뇌가 사고의 근원일 것이라는 연구는 지속되어왔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신경영상학(neuroimaging)이 발전하면서 미스터리로 보이던 의 정체를 속속들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신경과학(뇌과학)이 태동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은 결코 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뇌에 대한 사실들이 밝혀질수록 기존 심리학의 질문들이 해결되고 있다. 뇌전도를 측정하고, MRI나 fMRI와 같은 비싼 장비들을 활용하여 뇌의 활성화를 확인하면서, 개인이 경험하는 심적 과정과 외현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에 대응되는 뇌 영역이 있을 거라는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학자들은 심지어 "두뇌혁명"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발전에 도취한 일부 학자들은 "모든 심리적인 현상은 곧 생물학적인 현상이다"(Every psychological is biological)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과정과 변화는 전부 생물학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기계로서의 인간" 이라는 은유와도 묘하게 연결되는 이 관점은, 이미 생기론이 죽어 사라진 서구 과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단순히 뇌 영역의 활성화를 연구하는 흐름에서 더 나아가, 그 활성화의 패턴이 인간 심리의 전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계의 오랜 논쟁이자 서구 지성의 최대의 장점이자 한계로 꼽히기도 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수많은 다양한 세포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신경윤리학자이자 저술가인 해리스(S.Harris)의 시큰둥한 코멘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사랑과 증오, 모든 격정적인 감정은, 단지 "한 다발의 뉴런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인간은 그 정도뿐인 것인가? 신경과학의 발견이 인간 전체를 온전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는가? 심리학은 마침내 성배를 발견한 것일까?

사실 이는 굉장히 논쟁적인 것이다. 당장 많은 신경심리학자들은 그렇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며, 비서구권 연구자들이나 사회심리학, 문화심리학 연구자들도 무척 난색을 표하는 발상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그들의 발견을 통해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동안, 이들은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방향에서 조명했다고 평가할 뿐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퍼즐 조각들을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이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사랑이란 단지 시냅스 사이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흐름 그 자체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동안, 이들은 "개인이 사랑을 느낀다고 보고하는 것과, 개인 내부의 옥시토신의 분비량 사이에는 상관관계(correlation)가 존재합니다" 고만 말하는 데 그친다. 환원주의자 : "OK! 설명 끝! 야 신난다!" 비환원주의자 : "좋아... 변인 하나를 더 찾아냈어..." 꼭 양자역학에서 확률 및 다중우주론으로 얼버무리는 것과 어떻게든 정확한 원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것 같다.

물론 사랑이 옥시토신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창발(emergence)이라는 것이 존재하니 문제가 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뉴런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설명 자체의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complicated"가 아닌, 더 복잡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암시하는 "complex"를 의미한다. 사랑을 느낄 때 옥시토신 분비량이 증가하는 경향만을 가지고 옥시토신의 이름을 사랑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그 개인이 처한 객관적 상황과 환경, 주관적 맥락,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영향 등이 전부 모여서 옥시토신의 분비와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사랑" 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시토신은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폄하와 배척, 거부, 방어적 행동과도 밀접한 정적 상관관계를 보인다. 아직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 단언하기에는 너무 많이 모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원주의보다 창발주의가 더 바람직한 것이냐고 한다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창발주의는 그나마 환원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설명으로부터 더 많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창발주의는 당장 그 창발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창발의 개입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뇌와 그 신경계가 만드는 신호 이상일 수 있지만, 어떻게 그 이상이 되는지, 얼마나 더 큰 개념이 되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그 메커니즘이 정확히 확인될 때까지는 차라리 창발이라는 개념을 배제한 설명을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기능주의에 관련된 심리철학자들의 논쟁과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더욱 정교한 학술적 논의에 관심이 있다면 존 설(J.Searle)의 "마인드" 같은 입문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도서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4.7. 생명공학초인본주의[편집]

현대 들어 공학기술이 발전하고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일부 서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는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제약 없는 발전과 그 무한한 응용을 주장하면서, 인간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진화해 나갈 방향을 예견하는 종이 되었다고 본다. 축적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개조하고 뜯어고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며, 충분히 극복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를 통해서 불로불사와 같은 영생을 획득할 수 있으며, 먹고살기에 급급한 문제를 떠나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 자체가 사실상 무한해진 만큼,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로 그들을 위협하는 종교나 각종 이데올로기에 무관하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아끼며 더 깊은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향해 애쓰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쉽게 말해서 과학공학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인본주의의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형태이다. 기존의 인본주의자들이 교육의 힘을 강조하긴 했지만, 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거리낌이 없고, 도리어 이를 초인류(transhuman)라 하여 이상적 목표로 삼는 것이다. 권위의 제재와 통제, 정부의 규제,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대해서 이들은 그것이 그저 낡고 시대착오적일 뿐이라고 여긴다. 특히 종교는 하루속히 던져버려야 할 과거의 유물로 취급한다.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지상주의낙관주의가, 기술을 통해 인류가 유토피아에 도달한다는 발상은 기술만능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상에 모든 사람들이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이는 영미권 지식인들 중에서도 급진적인 일부의 담론에 머무르고 있으며, 독일 등을 비롯한 대륙권 지식인들과 비서구권 지식인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라며 규탄하는 중.[8] 초인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의 힘만으로 인류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인류는 너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기술은 60억 인구에게 100%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채로 일부의 전유물이 될 것이고, 기술을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와 필연적인 간극을 발생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기꺼이 죽이기까지 하며,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배척하려 하는 이 모습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그러한 부족한 모습으로서 350만 년의 세월을 이겨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 역시 비관적인 사고만큼 불안정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해 완벽하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보다도 맹목적인 광기이자 그저 믿음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초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도움으로 인류는 "완성" 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이미 인류 자체가 완성에 가까워져 있다는 마인드에 가깝다. 물론 어떤 이들은 정말로 방법만 주어진다면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고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돌아보면 세상에 많이 있다. 하지만 초인본주의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이들로 인한 문제가 적절한 공적 교육 등을 통하여 "계몽" 시킴으로써 쉽사리 관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게 말은 쉬운데...

5. 현대 사회과학에서의 인간관[편집]

5.1. 현대 사회학에서의 인간관[편집]

주로 사회학자들은 사회실재론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실재론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다. 개인들은 사회를 이룸으로써 개별적인 개인의 차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사회학인 것이다. 특히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을 필두로 하여, 많은 사회학자들은 '사회화된' 인간관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후술할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별적인 개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들의 경제적 행위는 모여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경제 현상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라는 실체가 만들어 낸다는 사회학적 견해와는 많이 다르다. 단순히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냈을 뿐인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으며, 타인을 굳이 고려하지 않으며, 공동체적 사회를 굳이 고려하지 않는 개인들의 이익추구가 결론적으로 경제 현상을 자연스럽게 균형 잡힌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사회학은 '과잉 사회화된' 인간관을, 경제학은 '과소 사회화된' 인간관을 기초로 학문을 전개한다고 볼 수 있겠다.

5.2. 현대 경제학경영학에서의 인간관[편집]

경제학에선 국가의 효용과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고 경영학에선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문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점차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1903년 테일러(F.W.Taylor)가 처음으로 제안한 "시간동작연구"(time & motion study)에서 간접적으로 제안되었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인간관은, 이후 1924년의 저 논란 많았던 호손 실험을 통해 반박되고, 이것이 다시 경영기법 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극복되었다. 이후 이 두 가지의 대립되는 인간관은, 1960년 맥그리거(D.McGregor)의 저서 『기업의 인간적 측면』을 통해 X-Y 이론으로 명명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맥그리거의 관점을 따라 상반되는 인간관을 제시하기로 한다.

5.2.1. X-Y 이론[편집]

5.2.1.1. 고전적 인간관: X인간관[편집]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암묵적으로 줄곧 취해져 왔던 인간관이라 고전적 인간관, 전통적 인간관이라 불린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며, 지시되어야 하고, 처벌로서 위협받아야 한다.

  •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타인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하고, 책임지는 것을 피하려 하며, 야망이 없고, 무엇보다도 안전함을 추구한다.

출처는 Frederickson, 2011, p.103.

테일러 이전에도 이런 인간관은 있었지만 이것이 매우 대놓고(…) 반영된 것이 테일러가 주창한 "과학적 관리론"(scientific management)이며, 경영이나 행정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개념이다.[9] 딱 보면 알겠지만 인간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일하기 위해서는 정말 특단의 통제와 강제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의 관점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남이 뭘 하든, 뭐라 하든 철저히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결정하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여기서는 집단 내 사회의 동적인 측면을 파악하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또한 인간을 마치 기계처럼 인식하기에, 직원들의 사기복지와 같은 부분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인데, 실제로 짐작하듯이 경제학이 바로 기본적으로 고전적 인간관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이를 통해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니 경제적 합리성[10]이니 하는 개념들이 등장한 것. 주류 경제학의 대부분의 이론들은 위와 같은 가정들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아주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한편 스키너도구적 조건형성 역시 X인간관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보상이 있다면 뛰어들고 처벌이 있다면 피한다" 는 개념은 위의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개념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X인간관에 충실한 제도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넓은 범위의 신상필벌 제도가 포함되는데, 포상에 관련된 것으로는 봉급, 보너스인센티브와 같은 것들이 있고, 처벌에 관한 것으로는 임금 삭감이나 강등, 이직, 해고, 기타 등등이 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은 항상 감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한다" 가 기본 전제이므로, 직원 컴퓨터 모니터링이나 기타 이런저런 감시비용 및 결박비용 역시 X인간관에 입각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5.2.1.2. 자기실현적 인간관: Y인간관[편집]

종래의 인간관에 반하여 새롭게 제시되고 조명받게 된 인간관으로, 마찬가지로 관련 내용을 옮겨 보기로 한다. 원문은 다소간 윤문하였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 내적인 직업적 노력은 놀이나 휴식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로 헌신할 때 목표달성을 위해 자기통제력을 보인다. 외부의 통제나 처벌의 위협은 근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 목표에 대한 헌신은 자기존중과 자기실현을 위한 보상으로 작동한다.

  • 여건이 따라 준다면,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책임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찾아나서기도 한다.

  • 많은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창의성이나 혁신까지도 보일 수 있다.

  • 대부분의 경우 개인들의 지적 능력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실제 지적 능력은 오히려 그 이상이다.)

상동 출처.

이런 관점이 사실상 처음으로 대두된 것이 저 호손 실험이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있듯이 이 실험 자체는 방법론적으로 제대로 망했다.(…) 이를 통해 등장한 인간관계론은 테일러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11]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냐에 대해 제대로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초 스코틀랜드오언(R.Owen)이 이와 비슷한 노동개혁을 하긴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쪽은 인간관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주의적 측면에 가깝다.

딱 보면 알겠지만 어째 굉장히 마음에 쏙 드는(…) 좋은 표현들로 가득하다. 실제로 Y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가능성을 표방하며, X인간관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질구질한(…) 모습들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더 많은 성과급으로 유인하고 유혹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직무 만족도와 자긍심을 높이고, 그들이 직무를 통해 자기계발을 하고 경력관리를 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외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격하시키며, 그 대신에 개인의 내적인 통제의 힘을 신뢰한다. 또한 "사람은 일하고 싶어한다" 는 메시지는 개인의 포부와 장래희망,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는 욕구와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궁극적 완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처럼 동기부여된 개인들에게, 과연 당근과 채찍이라는 외부의 압력을 굳이 행사할 이유가 있겠냐는 것.

  • "언제든 마음껏 쉰다"... 美 기업 "무제한 휴가" 실험
    이 기사에 등장하는 회사의 경영자들은 Y인간관에 입각하여, "인간은 충분한 여건을 보장하면 스스로 책임을 찾아나서고, 일을 하면서 자기실현을 완성하고자 한다" 라는 긍정적인 인간관을 경영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X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모험적인 시도이다. X인간관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 경제적 인간이 보기에는, 유급휴가일 제한이 풀렸다면 더 많이 쉴수록 더 이득이므로, 개인에게는 합리적이나 전체에게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5.2.1.3. 조직이론에서의 적용[편집]

흔히 오해하는 것이 "X인간관은 과거의 잘못된 인간관, Y인간관이 보다 정확한 인간관" 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인데,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현실 설명력을 지니고 있고 둘 다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Y인간관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X인간관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가를 정당하게 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 같은 경우. 화장실 청소나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떠올리면 쉽다. Y인간관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실제적 제안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X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디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쓴소리에 가깝다. 씁쓸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누구나 빈둥빈둥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학창시절 동안 간절히 바라며, 하기 싫은 일을 만나면 피하려 하고, 그럴 수 없다면 보상이라도 받으려 하고,[12] 골치 아픈 일에 대해서는 가급적 책임소재에 엮이기 싫어하며 타인이 자신을 통제해 주길 바란다. 항상 자율적일 수도, 항상 타율적일 수도 없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의식이 탑재된, 자기 삶을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몸바칠 준비가 된 인재들이 일하기 시작하면 이때의 생산성은 X인간관에서 말하는 그런 마지못해 끌려와 일하는 사람들의 생산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보통은, Y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많은 조직이나 집단이 좀 더 바람직한 것은 사실. 결국 X-Y 이론은 근로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봄과 함께 경영자가 자기 조직의 현주소와 노동문화를 점검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한국적 인간관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W이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인간을 "신바람" 이라는 개념에 따라 설명하려 한 이론.

한편 심리학에서도 내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라는 유사해 보이는 이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동기가 외적 동기에 비해 훨씬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3]

5.2.1.4. 심리학의 매슬로와의 비교[편집]

다시 인간관이라는 넓은 범주로 돌아와서, 위의 X-Y이론은 매슬로의 욕구위계설과도 연관성이 있다. X인간관은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으며, Y인간관은 자기실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5.2.2. Z 이론[편집]

종래의 X-Y이론이 너무 흑백논리라 하여 Z이론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일본계 미국인 학자 윌리엄 오우치의 Z 이론은 '미국 속의 일본식 경영 방식'을 가리킨다. 오우치의 Z 이론에 기반한 조직은 영미적 개인주의가 아닌 일본적 집단문화로 운영되며, 조직 구성원의 종신 고용을 보장하고 직원을 '가족'과 같이 대우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또한 조직 구성원에 대해 장기적 평가를 하고자 하며, 상벌을 엄격히 하기 보다는 느슨한 통제를 시도한다. 조직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도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자 하며, 이렇게 내려진 결정으로 얻는 결과에 대해서도 집단적 책임을 진다.

[1] 참고영어 위키백과[2] 서구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관점은 사실 천동설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반영하고 있다. 천동설의 세계에서 우주의 중심은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범속하고 하찮은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관련 위키 문서들을 참고. 라고 되어 있지만 정작 천동설 위키 문서를 참고하면 기독교의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천동설이 부합하며 강력히 옹호되었고 코페르니 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는 비유적 표현이 틀린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3]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클라인(M.Clein)의 슈퍼비전을 받았다.[4] 당장 정보처리 흐름과 사뭇 다른 피아제 역시 인지분야의 발달학자였다.[5] 현대 심리학에서도 심리학의 정의를 내릴 때 "외현적인 행동과 심적인 과정" 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한다고 말하면서 양쪽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6] 이 이후로 무의식에 관련된 연구들은 프로이트와 별개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재개되었다. 재미있게도 연구자들은 무의식(unconscious)이 아니라 비의식(nonconscious)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쓰는데, 그 조어법 자체가 비유하자면 북한이 싫다고 인민(people)을 "국민" 으로, 동무를 "친구" 로 바꿔 쓰는 거랑 비슷한 계기라는 것.[7] 물론 이 당시의 컴퓨터라는 물건이 튜링 머신 수준이라는 걸 고려할 필요는 있다.[8] 참고: "나는 미래 세대가 유전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장애를 야기하는 결함을 치료하는 것 외의 유전적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 정신 발달의 후성 규칙과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이 종의 물리적 영혼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감정과 후성 규칙을 충분히 변화시켜라.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아질 수 있어도 더 이상 인간은 아닐 것이다. 순수한 합리성을 선호하도록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중화시켜라. 그러면 남는 것은 조악하게 구성된 단백질 컴퓨터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수백만 년의 생물학적 시행착오를 통해 형성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을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p.476 <통섭>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 북스[9] 다만 테일러가 인간 자체를 게으르게 보았다는 것은 맞는 설명은 아니다.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론을 주창하던 시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 경영이 보편적이었다. 당시의 비합리적인 경영 행태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을 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었고, 때문에 일부러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테일러는 그러한 비합리적 경영 실태가 생산성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 대책으로 노동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안한 것이다. 테일러는 그 외에도 노사협력,공정한 이익 분배 등을 주장했다. 애초에 테일러 본인부터가 노동자이기도 했고... 자세한 것은 프레더릭 테일러 항목과 과학적 관리론 항목을 참조.[10] 이것도 나중에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개념에 의해 반박당하게 된다.[11]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관리의 영역에서 "인간 활동 역시 조작될 수 있다고" 접근했기 때문.[12] "이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인간의 이와 같은 X이론적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13] 물론 외적 동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개념과 동일시하거나 일체화함으로써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크레타 섬에 얽힌 신화와 역사-제우스의 탄생과 최초의 유럽 문명



 크레타 섬은 신화는 물론 유럽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곳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이 섬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과 인간의 제왕으로 군림한 제우스가 탄생한 곳이자 유럽 문명의 시초인 에게 문명이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제우스의 탄생 신화부터 알아볼까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3세대 신에 해당합니다. 그 앞 세대는 할아버지 우라노스, 아버지 크로노스 세대입니다.

 맨 처음 세상은 혼돈의 어둠, 즉 카오스였습니다. 카오스에서 땅과 대지, 현세 활동의 공간인 가이아, 지하세계이자 활동이 정지된 타르타로스, 그리고 사랑, 욕구, 결합, 번식, 번영하려는 의지인 에로스가 순서대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여왕이기도 한 가이아는 배우자 없이 하늘인 우라노스를 낳은 뒤, 자신의 아들인 우라노스와 사랑의 결합을 했습니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이들은 6명의 남신과 6명의 여신을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거인족인 티탄족이었습니다. 12티탄들 중에 가장 먼저 태어난 신이 강의 신 오케아노스이고, 가장 나중에 태어난 신이 농업의 신 크로노스입니다.

 가이아는 티탄족 외에 헤카톤케이르 3명과 키클롭스 3명도 낳았습니다. 헤카톤케이르는 머리가 50개, 팔이 100개나 되는 괴물이며 키클롭스는 외눈박이 거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툭하면 자기들끼리 치고받아 세상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시끄러웠습니다. 이들은 형과 누나인 티탄족 12남매에게도 행패를 부려 우라노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습니다. 우라노스는 말썽 피우는 자식들이 보기 싫어 모두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습니다. 이곳은 지하 깊은 곳으로 빛조차 닿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하늘과 땅 사이에 경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자식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둔 우라노스가 맘에 들지 않은 가이아는 자식들로 하여금 아버지에 반항하도록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아버지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 티탄족의 막내인 크로노스가 나섰습니다.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몰래 지상으로 데리고 와 낫을 주며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찾아왔을 때 크로노스는 낫으로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랐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 것을 그린 것입니다.


 우라노스는 하늘로 달아나면서 저주했습니다. “너도 장차 네 자식에게 쫓겨나고 말 것이다”
 이후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영원히 갈라섰으며, 하늘과 땅도 떨어졌습니다. 땅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가이아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가이아는 어쩔 수 없이 우라노스의 마지막 아이들을 임신했습니다. 이를 통해 기가스들이 태어났습니다. 기가스들은 후에 크로노스의 자식인 제우스 등과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우라노스가 거세되고 폐위된 후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를 아내로 삼아 신들의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는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등 5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이는 아버지 우라노스가 그에게 생식기를 잘리고 하늘로 쫓겨 갈 때 “너도 장차 네 자식에게 쫓겨나고 말 것이다”라고 저주어린 예언을 내린 탓이었습니다. 예언을 미리 막기 위해 자식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자식을 삼키는 우라노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아래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뱃속으로 삼켜지는 것을 보고 슬픔에 빠진 레아는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날 즈음에는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레아는 가이아가 준 계책을 따라 크레타 섬으로 가 제우스를 출산했습니다. 제우스를 받은 가이아는 크로노스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칠흑 같은 밤을 이용해 숲이 우거진 아다 산의 외진 동굴로 가 그를 숨겼습니다.
 그런 뒤 레아는 커다란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건넸고 크로노스는 이를 새로 낳은 아이인 줄 알고 삼켰습니다. 아래 그림은 강보에 산 돌덩어리를 크로노스에게 건네는 레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기 울음소리를 감추기 위해 찰과 청동방패를 두드리며 소란을 떠는 아말테이아라는 요정들과 함께 크레타 섬에서 자라 청년이 되었습니다. 제우스가 성인이 되자 레아는 제우스에게 사자를 보내 지난날의 사정을 전하고 형제들을 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제 우스는 티탄족 여신 중 하나인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레아는 제우스가 보내온 구토제를 음식에 섞어 크로노스에게 먹였습니다. 이 약을 먹은 크로노스는 자신이 삼켰던 자식들을 토해냈습니다.

 아버지 뱃속에서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족 신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10년 동안 치러진 이 전쟁에서 제우스는 티탄족 신들 중 핵심인 프로메테우스의 협력을 얻어낸데 이어 번개라는 무기까지 갖추게 되면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들의 전쟁에서 패한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에 의해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습니다. 크로노스 등 자신의 자식들이 타르타로스에 갇히자 이번엔 그들의 어머니 가이아가 분노했습니다. 가이아는 자신의 또 다른 자식인 기가스들로 하여금 제우스와 싸우게 했습니다. 제우스가 이들을 힘들게 물리치자 가이아는 또 다른 자식들인 티폰을 보냈지만, 제우스는 이들마저 물리쳤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에 자리 잡고 신들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힘을 빌려 세상을 함께 지배했습니다. 자신은 하늘과 땅을 지배했고, 포세이돈에게는 바다, 하데스에게는 지하 세계를 맡겼습니다.

 제우스가 지배하는 세계는 더 이상 혼돈의 카오스가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강이 모두 제자리를 잡은 안정된 세계, 즉 코스모스의 세상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우스와 관련된 크레타 섬의 신화입니다.

 이번엔 크레타 섬에서 최초로 시작된 고대 유럽 문명을 알아볼까요. 유럽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모태로 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고대 4대 문명 중 두 곳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 즉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에게 해 일대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럽 최초의 문명을 에게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에게 문명은 전기인 크레타 문명과 후기인 미케네 문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 크레타 문명은 소아시아와 가까운 크레타 섬에 정착한 미노아인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를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또 제우스의 아들이자 이 섬을 통치한 미노스의 이름을 따 미노스 문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왜 크레타 섬이 유럽에서 오리엔트 문명을 최초로 받아들이게 됐는지는 처음의 지도를 보며 이해하기 쉽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유럽으로 전해지려면 지금의 터키 땅이나 지중해를 거쳐야했을 겁니다. 지도에서 보면 그 길목에 크레타 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레타 섬에서 최초의 유럽 문명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1400년까지 활동했던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2500년 청동기 시대를 열었고,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활발한 해상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반도 남부의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급속히 크레타의 미노아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해 후기 에게 문명을 열었습니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이르면 미케네인들 역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여 문화가 번영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황금 미케네 시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강해진 미케네인들은 크레타인들을 압박해 기원전 1500년경에는 동부 지중해의 해상 교역권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신화가 바로 미케네 지역의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으로 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는 내용의 테세우스 신화입니다.

 실제로 미노스 섬에서는 미노타우로스 신화와 관련된 건축물들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크노소스 궁전으로, 이 궁전은 미로처럼 작게 구획된 방들이 겹겹이 싸여있으며 회랑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방들은 경쾌한 프레스코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3~4층으로 지어져 1천 개가 넘는 방을 갖춘 웅장한 이 궁전 안에는 수도 설비는 물론,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각 방에는 광정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내부를 밝히는 등 건축술이 고도로 발달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반면 크레타의 개방적인 왕궁과 달리 미케네의 왕궁은 침입과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지어졌습니다. 미케네 왕궁에서는 사자문이 유명한데, 한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두 마리의 사자 모양 동물이 부조된 거대한 돌문은 미케네의 힘과 예술미의 상징으로 평가 받습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미케네 왕궁의 사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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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
생기(네솨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 = 호흡. 바람)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 = Living Being)이 된지라."

에스겔 37:5
생기(루아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 = 호흡. 바람)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 = Living Being)이 된지라."(창2:7)

본문에서 “생령”이라는 단어를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처음에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런 해석은 잘못된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생기’를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하고, ‘생령’을 ‘살아있는 영’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특히 지방교회와 같은 곳에서는 이 본문을 인용하여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대량으로 만들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또 베뢰아와 같은 곳에서는 “아담 이전에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아담을 선택하여 영을 불어넣어줌으로서 영적존재인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영"(spirit)이라 번역되는 용어는 히브리어 "루아흐"이며, "영혼" 혹은 "혼"(soul)이라고 번역되는 용어는 히브리어 "네페쉬"이다.

그런데 생령(네페쉬 하야)이라는 단어는 “영”(spirit)이 아니라 “혼”(soul)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분법에서는 성경은 영과 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구별을 하지는 않지만, 삼분법에서는 영과 혼은 다르다.
그런데 "루아흐"(영)나 "네페쉬"(혼)라는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는 모두 "호흡"이며 "바람"이라는 뜻을 갖는다.

즉 창세기 2장7절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어 생령(살아있는 영)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생기”를 “혼”과 구별되는 “영”으로 해석하고, 생령을 "살아있는 영적존재"로 해석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볼 때에 완전히 오류가 된다.
창세기 2장 7절에서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는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뜻하며, “네페쉬 하야”는 영적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생명체”라는 뜻이다. 
즉 개역성경에 “생령”으로 번역되어, 마치 육체를 배제한 영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혹간은 에스겔 37장을 창세기 2장7절의 본문과 비교하는데, 에스겔 37장과 창세기 본문은 다르며, 마른 뼈에 불어준 “생기”는 “루아흐”(영, spirit)이고, 에스겔 본문은 바벨론 포로생활로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이스라엘에 넣어준 성령을 회복으로 비유한 것이지만, 창세기 본문은 흙으로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번역성경과 비교하여보자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표준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현대인의 성경)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영어성경을 살펴보자

[KJV]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NIV]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왜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를 영적존재라고 해석하면 안될까?
성경을 살펴보면, 사람만 “생령”(네페쉬 하야)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짐승들도 동일한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창 1:21, 1:24, 1:30, 2:19등) 만일 ‘생령’을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려면, 각종 들짐승과 새등 짐승들도 모두 영적인 존재라고 해석하여야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하이 네페쉬 :  Living Creature)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즉 본문은 하나님이 생기 또는 호흡을 불어 넣어주므로써, 생명체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혹간은 흙을 이상한 의미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데, 흙을 “사탄의 저주”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고, 흙을 “영이 없고 혼만 가진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도 알레고리적인 잘못된 주장이며, 육체를 사단, 죄와 연결시키는 이원론적인 주장이다.
또 혹간은 뱀이 흙을 먹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한다.

“땅”은 히브리어로 “아다마”이며, “붉다”(하아다마 : 붉게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아담”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다고 한다.
“흙”은 “아파르”로서 먼지를 말한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혼과 영과 관계가 없으며, 사람은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아파르)을 먹을지니라”(창 3:14)

이단들이 그들을 전도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부분적인 구절을 인용하며, 기독교가 잘못 해석한 오류라고 문제를 삼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달리 해석하여야 한다고 유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신천지는 뱀이 실제로 흙을 먹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뱀이 흙을 먹도록 저주를 하였다는 것이 오류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달리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뱀은 작은 짐승을 잡아 먹고 사는 육식동물이다.
과연 유대인들이 뱀이 흙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기록을 하였을까?

뱀이 저주를 받아 흙을 먹게 되었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비하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비하적인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아파르 :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은 땅바닥으로 번역)을 핥을 것이며” (시 72:9)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욥 30:3)

“그들이 뱀처럼 티끌(아파르: 공동번역, 흙)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미 7:17)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아파르, 다른 번역은 먼지로 번역)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 49:23)

신천지뿐 아니라 지방교회와 베뢰아도 ‘흙으로 지은 사람’에 대해서, 영은 없으며 혼과 몸으로 된 육신의 사람이라고 해석하며, 생기를 곧 영이라고 해석하며 생기를 받아 생령, 즉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심지어 정통교회의 목사들도 그와 같은 해석을 하는 수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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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창조와 생기, 생령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1)생령이 되니라.

(새번역) 주 하나님이 2)땅의 흙으로 3)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사람의 창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를 불어 넣으시니 사림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두 부분이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어구를 깊이 연구 하지 않고 언뜻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넣어져 사람이 영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령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 즉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사람이"생령" 되었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하면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라는 말로 곡해 할수 있고 더 나아가 진리에서 빗나간 교리로 발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곡해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령" 이란 말은 "생명, 기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다 ,생존하다,라는 "하야"와 결합한 말로 "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 가 되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로 번역 되었고, 공동 번역 에서는 사람이 "숨을 쉬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혼 생명 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인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전인 적인 새명체라 함은 사람 안에 "영 이나, 혼 같은 구별된 존재가 사람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적인 사람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은 영, 혼, 몸, 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기 호홉을 그 코에 불어 넣었다고 하는 말씀을 오해 하여 코에 불어 넣은 생기가 곧 사람의 영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의 어구 가 얼마나 곡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혼선을 주고 진리에서 빗나가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 생기 호흡은 무엇이며, 그 코에 불어넣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생기가 영인가? 단순한 호홉을 말하는가? 여기에 중요한 질리가 감추어 있다. 생기라는 뜻은 바람이 불다, 숨쉬다, 라는 말에서 유래, 활동 하고 살아가는 기력 "생명을 말하며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데,성경에서는 성령, 영, 으로 번역 되고 있다 . 따라서 생기는 히브리어 "루아흐"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 하다. 성경은 생기, 콧김이 기름부음 받은자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증거 한다 .

예레미애가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기름부음 받은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를 말함.)

하여 사람의 코에 불어넣었다는 생기는 곧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말한다.

그러면 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 즉 기름 부음 받은자 메시야, 성령을 불어넣으 셨다고 말씀 하셨는가?

그것은 흙으로 된 인간이 마지막 아담이 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실것을 것을 상징 하는그림 으로 미리 보여주는 그리스도 영의 원시 모형이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혼,생명체가 된 인간 안에 생명이신그리스도의 영 생명을 넣어 주시므로 참 생명을 가진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원시 복음을 의미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시되어 나타나 있다 .

첫 사람은 흙 육의 몸을 입었지만 새 창조될 몸은 하늘에 속한 몸과 하늘에속한 그리스도의 영을 넣어 주심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 창2:7절의 말씀은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의 말씀이다.

필자가 누누이 말하지만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둘레며 중심이다. 하여 이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첫 사람 아담은 생령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 즉 생명 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한다.

다시 말하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진리는 첫 사람 아담의 생명과, 마지막 아담 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르다는 것을 교회 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처 주기 위해 고전 15:45절에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을 헬라어 "푸쉬게, 영이 아닌 "혼 으로 기록 하였고 ,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 "푸뉴마, 영 으로 구분 하여 사도는 분명 하게 기록 하였다. 따라서 창세기 2장 7절에서 말한 생령은 영이 아닌 "네페쉬 , 살아있는 혼, 생명체. 숨쉬다로 보아야 한다. 사도는 창 2:7절의 말씀을 인용 하여 아래 성구를 기록 하였다.

(고전15: 45 "기록된 바 ㄴ)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

따라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생기 호흡은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호흡을 말한다 .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 하는 생기 호흡은 참 실제 생기 호흡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불어 넣으신 생기가 실제 하나님의 영이 라면 "생령 이라는 단어가 "네페쉬,하야, 즉 살아 있는 혼 존재 로 번역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그리고 "콧김 생기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을 넣어 주셨다면 사람은 죽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 '루아흐' 는 죽을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루아흐" 영을 의미 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했는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은 생명 주는그리스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성령으로 호흡 하며 살것을 상징으로 그림 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 영의 모형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성경은 "걷 말과 속 말, "안 과 밖. 으로 되여있다. 로고스는 문자.의문 걷말 이라 하며 의문 문자는 진리 내용을 감싸고 있는 즉 껍질과 같은 것이다. "속 말은 레마 즉 진리,영, 참, 실제 내용을 말한다. 따라서 문자 의문 안에 참 실제 진리 영이 담겨 져 있다. 로고쓰 문자는 진리를 담는 그릇 이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문자 안에 진리를 담아 주셨다. 이것을 알지못하면 진리를 바르게 이해 할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코에 불어 넣은 "생기" 안에는 실제 진리 영 생명을 의미 하는 내적인 면과, 또 한 면은 "흙으로 지은 몸을 움직여 살게 하는 숨 호흡을 의미 하는 외적인 생기의 면이 있다.

실제 생명인 생기는 우리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말하며, 육신의 몸이 호흡 하므로 생명을 유지 하며 살게 하는 생기를 우리가 숨쉬는 호흡이라 한다. 하여 "생기 라고 하는 단어 안에는 육신의 숨을 말하는 생기와, 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하는 생기 양면성을 내포 하고 있다.

육신의 숨은 껍질을 의미 하며 그리스도의 영이 진짜 생기 숨을 의미 한다. 육신의 숨은 껍질 육신의 몸을 살게 하지만, 진짜 내적 생기 영은 거듭난 우리에게 영원 생명 호흡이 되신다.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기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호흡 성령으로 산다.

따라서 우리 육신의 몸이 호흡 하며 사는 숨은 진짜 생기도 호흡도 아니다. 하여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육신의 몸이 모두 죽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 생명 이라도 가진 것처럼 생각 하지만 실제로는 공기 숨이 생명 이다 .그러므로 겸손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생기 숨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신후 내 뿜으신 숨이 생명 주는 진짜 숨 생기다.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그림으로 보여준 모형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 하심을 통 하여 비로소 실제화 되고 완성 되었다. (요 20: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여 진짜 호흡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호흡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호흡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되어 호홉 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주와 합한자는 한 영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영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영이 없는 사람으로 비록 육신의 생명은 호흡 하며 살고 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하여 성경은 "영 이 없는 몸은 죽은 몸이라고 증거 했다.
사도가 영과 혼과 몸을 보존 하라 한말은 구원 받은 믿는 이들애개 한말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육신의 몸으로 사는 생명체 일 뿐이다.
하여 성경은 "죄와 허물로 죽은자, 무덤속에 있는자,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 했고,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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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흙의 구성성분

현대과학은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흙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물은 그 구성 원소를 분석해보면 흙의 성분과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생물체의 모든 원소의 구성비(무게%)는 아래 표와 같으며 생물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 일정합니다.

한편 지각(암석)의 구성 원소는
산소(O), 규소(Si), 알루미늄(Al), 철(Fe), 칼슘(Ca), 나트륨(Na), 칼륨(K), 티타늄(Ti), 수소(H), 인(P), 구리(Cu), 크롬(Cr), 니켈(Ni), 납(Pb), 아연(Zn), 망간(Mn), 주석(Sn), 우라늄(U), 텅스텐(W), 은(Ag), 수은(Hg), 금(Au), 백금(Pt)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생물체와 흙(지각)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성분산소, 수소, 칼슘, 칼륨, 인, 나트륨, 마그네슘, 철, 구리, 망간, 크롬 등입니다.
그리고 생물체에 두 번째로 많이 포함된 탄소(C)는 지각 성분에는 없으나 실제로 흙(토양)에는 유기 화합물로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체의 모든 성분은 빠짐없이 흙속에 들어있는 성분입니다. 

                                   <생물체의 구성원소>

원소

기호 

무게(%)

미량원소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칼륨
염소
나트륨
마그네슘
요오드

O
C
H
N
Ca
P
S
K
Cl
Na
Mg
I
Fe

62
20
10
3.3
2.5
1.0
0.25
0.25
0.2
0.10
0.07
0.01
0.01


구리(Cu)
망간(Mn)
몰리브덴(Mo)
코발트(Co)
아연(Zn)
플루오르(F)
셀레늄(Se)
크롬(Cr)

이상과 같이 원소로 분석해 볼 때 생물체는 분명히 흙으로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산, 칼륨, 칼슘, 마그네슘, 황, 규소, 철, 붕소, 망간, 아연, 구리, 몰리브덴. 등 사람은 흙으로 지었고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지은신 하나님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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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탄생

우리가 늘 밟고 다니며, 식물들이 심어져 자라는 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흙은 언뜻 보면 늘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우선 흙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아보자.

흙이 생기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일반적인 경우로서 큰 바위가 오랜 세월을 거쳐 비, 바람, 기온, 생물 등의 작용을 받아 부서져 쪼개지고 또 쪼개져서 가루가 되며, 이 가루가 모여서 흙이 생기는 것이다.
1cm 두께의 흙이 만들어지는 데 약 2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좀 더 특별한 경우로 여러 해 동안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여러 생물들의 죽은 잔해들이 쌓이고 쌓여 유기물이 모여서 생기는 흙이다.

첫 번째처럼 바위가 부서져 돌, 자갈, 모래나 더 가는 가루가 모여 흙이 되는 경우에 흙이 되는 최초의 바위를 가리켜 어머니가 되는 바위라는 뜻으로 모암(母岩)이라고 부른다.
또한 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것을 모재(母材)라고 한다.
이 모재가 여러 작용에 의하여 흙의 층위가 표층, 심층으로 나누어져 비로소 흙으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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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 일치

흙과 사람의 성분이 99%일치한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곳곳에 나오게 되는데 과거 과학자들은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니..   성경은 정말 엉터리'라고 비웃었다고 하는데,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18세기, 19세기에 이르러 원소의 발견으로 원형질과 광물질의 화학적 분석이 가능해지면서 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가 드러났다.

일부 반론가들은 지구 즉, '흙과 지각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은 다르다'라고 하지만 '흙과 지각'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셨다는 그 재료는 '흙'으로 창조하셨다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 비율이 일치할까?

사람이 만들어지려면 이렇게 13가지 원소면 된다고 하네요.
정말 성경은 알면 알수록 너무 신기방기 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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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의한 신앙 / 1. 베드로, 2. 본디오 빌라도,


성경인물 200명 이름의 뜻과 의미


1. 가나안 - 노아의 저주를 받은 자

2. 가룟 유다 - 영원한 배반의 상징

3. 가말리엘 - 사도 바울의 스승

4. 가야바 - 정치적인 종교 지도자

5. 가인 - 첫 출생자, 첫 살인자

6. 갈렙 - 진취적인 믿음의 인물

7. 갓 - 암사자에 비유된 용맹한 지파

8. 고넬료 - 최초의 이방 세례 교인

9. 고라 - 땅에 삼키운 바 된 자

10. 고멜 - 방탕한 이스라엘의 상징

11. 골리앗 - 소년 다윗에게 패배한 거인

12. 기드온 - 이스라엘의 큰 용사

13. 나다나엘 - 거짓됨 없는 참 회의론자

14. 나단 - 충실한 여호와의 예언자

15. 나답과 아비후 - 불로 심판받은 불의의 제사장들

16. 나발 - 어리석은 자

17. 나봇 - 유업을 중시한 의로운 포도원 주인

18. 나사로 -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19. 나아만 - 문둥병을 치유받은 이방의 군대장관

20. 납달리 - 발 빠른 암사슴에 비유된 지파

21. 노아 -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

22. 누가 - 사랑받는 의사요 신의 깊은 문학가

23. 느부갓네살 -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방의 권세자

24. 느헤미야 -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유능한 정치가

25. 니고데모 - 중생의 도를 추구한 지식인

26. 니므롯 - 여호와를 대적한 최초의 영걸

27. 다니엘 -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28. 다말 -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유다의 며느리

29. 다윗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통치자

30. 단 - 우상숭배로 소멸된 지파

31. 데마 - 신앙의 길을 떠나 세상을 택한 자

32. 데메드리오 - 이해 타산으로 복음을 배척한 자

33. 도르가 - 구제와 선행의 여제자

34. 도마 - 진솔한 신앙의 회의론자

35. 두발가인 - 금속 가공의 시조

36. 드루실라 - 회개의 기회를 거부한 여인

37. 드보라 - 이스라엘의 유일한 여사사

38. 들릴라 - 재물에 미혹되어 사랑을 버린 여인

39. 디나 - 강간당한 비극의 소녀

40. 디도 - 신실한 복음 사역자

41. 디모데 - 경건한 젊은 목회자

42. 라멕 - 복수의 칼을 노래한 가인의 후손

43. 라반 -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

44. 라합 -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기생

45. 라헬 - 질투심 강한 믿음의 여인

46. 레아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47. 레위 - 참혹한 복수극의 주인공

48. 로데 - 베드로를 영접한 계집종

49. 로이스와 유니게 -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믿음의 여인들

50. 롯 - 세속에 물든 우유부단한 신앙인

51. 루디아 - 마게도나(마케도니아) 최초의 개종자

52. 룻 - 효성과 신앙이 뛰어난 모압 여인

53. 르우벤 - 장자권을 잃은 야곱의 맏아들

54. 르호보암 - 왕국의 분열을 초래한 왕

55. 리브가 - 야곱은 편애한 족장 이삭의 아내

56. 미가 - 복음의 조력자요 나눔의 사람

57. 마르다 - 헌신적인 봉사의 여인

58. 마리아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59. 마리아② - 주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

60. 마태 - 사도로 쓰임받은 세리

61. 막달라 마리아 -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간 여인

62. 맛디아 - 사도로 뽑힌 예수님의 증인

63. 멜기세덱 - 그리스도를 예표한 영원한 대제사장

64. 모르드개 - 하만의 궤계를 물리친 민족의 파수꾼

65. 모세 - 출애굽의 위대한 영도자

66. 므낫세① - 들소의 뿔 같은 지파

67. 므낫세② - 초기의 악정을 말년의 회개로 용서받은 왕

68. 미가 - 기복적 신앙을 가진 범신론자

69. 미갈 - 다윗을 사랑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여인

70. 미리암 - 최초의 여선지자

71. 바나바 -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72. 바디매오 - 믿음으로 고침받은 소경

73. 바라바 - 예수님 대신 놓임 받은 죄수

74. 바르실래(바실래) - 신실하고 겸손한 부호

75. 바울 - 위대한 복음 전도자

76. 발람 - 탐욕에 물든 술사

77. 밧세바 - 죄가 많으나 은총을 입은 여인

78. 베냐민 - 이스라엘을 지킨 파수꾼

79. 베드로 - 교회의 반석이 된 수석 사도

80. 보디발 - 아내의 농간에 놀아난 자

81. 보아스 - 책임질 줄 아는 덕망있는 신앙인

82. 뵈뵈 - 주의 종에게 정성을 다한 여집사

83. 브나야 - 충직한 신하의 표상

8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성심성의껏 교회를 섬긴 믿음의 부부

85. 비느하스 - 공의의 제사장

86. 빌라도 - 진리를 외면한 역사의 죄인

87. 빌레몬 - 사랑이 충만한 성도

88. 빌립 - 친구를 주께 인도한 복음의 증인

89. 사가랴 - 의심함으로 벙어리가 되었던 의인

90. 사독 - 신의를 지킨 제사장

9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 영원한 믿음의 친구들

92. 사라 - 모든 믿는 여성의 표상

93. 사무엘 - 최후의 사사

94. 사울 - 교만 때문에 버림받은 이스라엘 초대 왕

95. 삭개오 - 구원받은 세리장

96. 살로메 - 헌신적으로 주를 따른 여제자

97. 삼손 - 긴 머리털을 가진 힘센 용사

98. 세례 요한 - 주의 길을 예비한 광야의 선구자

99. 솔로몬 - 지혜의 왕

100. 스데반 - 초대교회 최초의 집사요 순교자

101. 스룹바벨 - 제2성전의 재건자

102. 스불론 - 미약했으나 용맹했던 지파

103. 시드기야 - 유다 왕국 최후의 왕

104. 시므온 - 잔인한 피의 보수자

105. 시므이 - 처세술에 능한 기회주의자

106. 실라 - 복음전파의 충실한 조력자

107. 아간 - 여호와의 물건을 훔친 자

108. 아나니아와 삽비라 - 거짓말로 주의 영을 시험한 부부

109. 아달랴 - 왕위를 찬탈한 잔학한 여왕

110. 아담 - 최초의 인간, 인류의 조상

111. 아도니야 - 솔로몬의 왕위에 도전한 자

112. 아론 - 제1대 대제사장

113. 아모스 - 공의의 선지자

114. 아벨 -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의인

115. 아볼로 - 탁월한 학문을 지닌 전도자

116. 아브넬 - 신의를 저버린 사울의 군장

117. 아브라함 - 영원한 믿음의 조상

118. 아비가일 - 총명한 믿음의 여인

119. 아비멜렉 - 심은 대로 거둔 악인

120. 아비새 - 용감한 다윗의 용사

121. 아비아달 -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한 자

122. 아사 - 태후의 위를 폐한 종교개혁자

123. 아셀 - 배타적인 지파

124. 아하스 - 철저한 우상숭배자

125. 아합 - 선지자들을 핍박한 바알 숭배자

126. 아히도벨 - 실패한 군사전략가

127. 아히야 - 왕국 분열을 선포한 무명의 선지자

128. 안나 - 대망 중에 예수님을 만난 여선지자

129. 안드레 - 실천적인 전도자

130. 압살롬 - 아비의 왕권에 대항한 자

131. 야고보① - 사도 중 최초의 선교자

132. 야고보② -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

133. 야곱 -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134. 얀네와 얌브레 -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

135. 에녹 -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

136. 에브라임 - 형보다 높임을 받은 아우

137. 에서 - 식물에 미혹된 망령된 자

138. 에스겔 -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139. 에스더 -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소유자

140. 에스라 - 율법에 능통한 학사

141. 에훗 - 단검으로 주의 구원을 이룬 왼손잡이 사사

142. 엘가나 - 아내의 결점까지 사랑한 남편

143. 엘르아살 - 아론의 직분을 승계한 대제사장

144. 엘리 - 자녀로 인해 몰락한 가문의 제사장

145. 엘리멜렉 - 약속의 땅을 떠난 자

146. 엘리사 -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킨 선지자

147. 엘리사벳 - 흠 없고 의로운 여인

148. 엘리야 - 병거 타고 승천한 선지자

149. 여로보암 -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왕

150. 여호람 - 결혼정책의 제물이 된 왕

151. 여호사밧 - 신앙으로 개혁에 힘쓴 왕

152. 여호수아 -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153. 예레미야 -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154. 예후 - 처절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

155. 오네시모 - 주 안에서 해방된 노예

156. 오르바 - 안일 속에 머물고 만 여인

157. 오므리 - 사마리아 성을 건설한 왕

158. 오바댜 - 하나님을 경외한 궁내대신

159. 옷니엘 -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

160. 와스디 - 폐위당한 정숙한 왕후

161. 요게벳 - 신앙으로 자녀를 키운 어머니

162. 요나 -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163. 요나단 - 다윗의 진정한 친구

164. 요셉① - 고난 후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예표

165. 요셉② - 의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

166. 요시야 - 율법서를 발견한 종교개혁자

167. 요아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왕

168. 요안나 - 감사의 헌신의 여제자

169. 요압 - 불의의 죄값을 치른 장군

170. 요엘 - 여호와의 날은 선포한 선지자

171. 요한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랑의 사도

172. 욥 - 완전한 동방의 의인

173. 우리아 - 충직한 신하의 표상

174. 웃시야 - 교만으로 천형을 받은 왕

175. 유다 - 메시아 후손을 약속받은 자

176. 유두고 - 바울의 이적으로 소생한 청년

177. 율리오 - 바울에게 호의를 베푼 로마 백부장

178. 이사야 -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179. 이삭 - 순종과 온유의 사람

180. 이새 - 메시아의 혈통을 이어나간 자

181. 이세벨 - 사악한 바알 숭배자

182. 이스마엘 - 육체를 따라 난 자

183. 이스보셋 - 사울 왕가의 마지막 왕

184. 입다 - 서자 출신의 사사

185. 잇사갈 -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지파

186. 하갈 - 쫓겨난 사라의 여종

187. 하만 - 자기 꾀에 빠진 유대인의 원수

188. 하와 - 인류의 첫 어머니

189. 학개 - 성전 재건을 독려한 선지자

190. 한나 - 기도의 어머니

191. 헤로디아와 살로메 - 희대의 간부(奸婦)와 그 딸

192. 헤롯 대왕 - 폭력과 불의의 왕

193. 헤롯 안디바 - 부도덕하며 우유부단한 왕

194. 헤만 - 충실한 성가대장

195. 호세아 - 회개를 호소한 사랑의 선지자

196. 홉니와 비느하스 - 악행을 일삼은 타락한 제사장들

197. 훌 - 모세를 도운 인물

198. 히람 - 성전건축을 자원한 두로 왕

199. 히스기야 - 신앙 부흥과 기도의 왕

200. 힐기야 -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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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이름의 뜻과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과 그 이후
교회의 반석이 된 사도

1. 베드로의 본명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3대 제자이자 수제자였는데,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요하나(히브리어)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요하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른 것인데, 

"바"는 아람어로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요나는 '요하나'의 약칭입니다. 

2. 예수님이 바꾸어준 이름 베드로의 뜻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준다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고, 그 이후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게바"(아람어) 즉, "베드로"(헬라어)로 바꾸어 줍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라는 말은 본명과 예수님이 변경한 이름을 두번 나열한 것으로서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한복음 1장 42절 

게바 또는 베드로의 의미는 반석이라는 뜻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7-18절)

즉, 베드로의 위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가다. 

1. 반석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 

위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의 이름을 받았고, 실제로도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고, 그것이 바로 당시 베드로가 믿고 있던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한복음 13장 37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은밀하게 뒤따라 간 그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공범이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게 되자, 자칫하면 자신도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무서운 현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두려움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무려 3번이나 부인하였는데, 특히 3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예수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였으며 결국 심한 자책감으로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장 60절 ~ 62절)

반석인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무섭고 냉혹한 현실과 두려움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여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의 의미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 그 첫 사랑에 불타오르거나 새로운 사람이 된 감격으로 그 이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후 수 없이 많이 넘어지고, 죄도 짓고 심지어 낙심하여 주저 앉게 되는 그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어 레전드 그리스도인이 되다. 

1. 예수님을 부인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의 삶과 고민 

베드로는 그 이후부터 다시 예전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건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으며 하루에도 수십번도 넘게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어부로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그 시간들보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구나. 예수님께 모든 제자들이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고 죽음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그 고백도 거짓이 아니라 당시 진심이었고, 또 그렇게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자신까지도 속였던 것이구나.

막상 무서운 현실이 닥치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주님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불과했구나.

내 자신의 벌거벗은 비참한 모습을 깨달은 지금 주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고, 이렇게 물고기나 다시 잡아야 하는 몸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예수님이 잊혀지지 않고 그 3년의 시간을 부인할 수도 없으며, 다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일까.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 동일한 현실이 닥치면 다시 예수님 부인할거야.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런데 또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2.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다시 만난 주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디베리아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리라고 하셨고, 그대로 따르자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위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바로 그 만남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누가복음 5장 4절 ~ 11절 중)

베드로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한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예수님이 바로 신적인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엎드러 졌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콜링하였고, 베드로는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좇았고, 바로 그 순간이 베드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처음 만나 뜨겁게 살아가다가 자신의 참된 모습과 비참함을 깨닫고 주저앉거나 낙심한 베드로를 주님은 처음 콜링한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다시 진실하게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사도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 외침을 듣고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바다로 뛰어 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처음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던 그 때처럼요.  

베드로의 회복 

예수님은 모닥불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고,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동일하게 3번 질문하였고, 베드로는 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사랑하느냐" 

-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은 2번째까지 베드로에게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베드로는 2번 모두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답변하였으며, 마지막 예수님은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지 묻자,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적인 답변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베드로는 예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끝까지 따라갈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과 현실이 닥치게 되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고,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와 실체를 그때서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가슴과 영혼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 역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우정 정도로 사랑한다고 답변하였고, 주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부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책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자신의 정직한 실체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수준을 인식한 바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였으며,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박해가 무척 심한 상황에서 어느 성도가 배반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배반한 그 성도가 베드로 앞에 잡혀 와 살기 등등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베드로는 "용서하자"고 대답하였고,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죄인 중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 자리까지 이끄셨고, 자기 역시 그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사랑과 용서의 원천은 바로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예수님과 만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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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 /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라틴어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재임 26년 ~ 36년)
본티오 빌라도(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 유대의 속주로 다섯 번째 총독으로 유대인에 의해 고소된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한 인물이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에 따르면 ‘본티오 빌라도’는 예수를 고난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 당시 사건을 기록한 사복음서 등 성경 여러 곳에서는 본티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며 손을 씻고, 예수를 놓아주려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의 복음서 18:38)’
이외에도 요 18:31, 눅 23:20~23, 마 27:24~25, 마 27:19에 나와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
천주교에서는 '본시오 빌라도'라고 하며,
정교회의 신앙고백과 개신교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로 옮기고 있다.

본티오는 이탈리아 남부 중앙에 있던 고대 부족 집단 삼니움(Samnium) 주민이 사용한 가족 성(姓) 중 하나로서, 삼니움 주민은 나중에 로마인이 되었다.

빌라도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후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대 속주의 총독을 지낸 것과 기독교 신약성서의 짧은 기록 및 몇몇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의 유다인 학대 정책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실록 15,44;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다전쟁 2,9,4;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7)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가혹해서 횡포를 휘둘렀고 반역자는 법적 판결 심사없이 처형했다. 갈릴리인의 학살은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눅 13:1).[1]

성서에 묘사된 본티오 빌라도[편집]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


안토니오 시세리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폰티우스 필라투스(그림 가운데)가 좌측의 예수를 군중들에게 가리키고 있다.
로마 제국의 제5대 유다이아 총독
임기 26년 ~ 36년
전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후임 마르켈루스
군주 티베리우스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1세기
사망일 서기 39년
국적 로마 제국




본디오 빌라도

빌라도의 이름은 “창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로마의 무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였으므로 그 부모님이 장차 장군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름값을 하였다.
창과 칼을 사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로마의 자랑스러운 장군이 되었다.
그의 이름자 앞에는 “본도에서 승리한 기사”라는 영예스러운 칭호(본디오)까지 붙이게 되었다.
빌라도는 무인으로서 정상에 서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자는 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와 총리 그리고 지방에서 각 도를 다스리고 있는 백여명이나 되는 분봉왕과 총독들이 로마 제국을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군복을 벗고 로마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총독이 되고 훗날 더 큰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는(AD 14-37, 디베료 가이사, 눅 3:1)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변방지역 유다 땅에는 여전히 불순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황제의 최측근인 총리 세야누스를 찾아가서 자신을 유다 총독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곳의 불온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그를 설득했다.
AD 26년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소원대로 제5대 로마 총독이 되어 유다 땅으로 들어왔다.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는 무인으로서는 대단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란의 조짐에 대해서는 과감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했다.
발본색원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29년 갈릴리 사람들의 반로마 움직임을 탐지하여 그 주모자들을 잡아서 처형한 사건이다.
그들의 피를 제물에 뿌려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눅 13:1).
빌라도의 공포 정치의 효과는 대단했다.
제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뒤로는 반감을 크게 표출하면서도 앞으로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열심당원들의 움직임도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그저 약간의 극소수 열혈분자들이 간헐적으로 테러 행위를 감행했을 뿐이다.
십년동안이나 공포 정치가 진행되고 난 후 AD 36년에 큰 사건이 터졌다.
여리고의 불순분자들이 그들의 성지인 그리심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빌라도는 과감하게 로마 군대를 몰고서 그들의 성역을 침범하여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일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마침내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에 이르기까지 빌라도의 철권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연대되어 크게 일어났다.
극한 대결로 발전할 경우 유대인들이 많은 피를 흘리게될 것이고 그 반로마 정서는 이웃 지방으로 확산될 것이 뻔했다.
이 점을 우려했던 로마 당국은 얼른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해버리고 말았다.
유다 총독으로 머무르지 아니하고 이를 새로운 출발점으로하여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중앙무대 한 복판으로 진입하기를 원했던 빌라도의 꿈은 민심을 얻지 못하여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빌라도의 이름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렇게 좋지아니한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최종 결정한 악의 화신이 본디오 빌라도이기 때문이다(마 27:36, 요 19:13-16).
그런데 이 견해는 약간 수정을 요하고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앞 길 창창한 자신의 장래를 이 때문에 망치지 아니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빌라도를 구석으로 몰아서 그와 같이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묘한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주어 빌라도가 그와 같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는 누구인가?
이들의 공동정범(共同正犯)적인 행위를 정확하게 따지지 아니한 채 본디오 빌라도만을 단독정범으로 몰아서 역사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옳지못한 처사이며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권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권세를 받아들이느냐하는 선택만이 인간의 몫인 것이다. 당사자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른다. 그렇지만 그 권세를 쥐어준 자와 그 권세를 발동시키도록 예수를 넘겨주고서 압력을 가한 자의 죄는 더 큰 것이다”(요 19:11).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빌라도의 약점이 다음과 같이 노출되고 있다.

첫째, 그는 정치적인 이슈에 있어서는 소신있는 입장표명과 확고한 행동으로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예수가 무죄이면 무죄방면해야 했으며 유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죄로 처벌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의 또다른 의미 “확고히 하다"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둘째, 책임회피에 급급하여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우겼다.

제사장에게(요 18:31), 헤롯 왕에게(눅 23:7, 12) 그 책임을 떠넘기다가 끝내는 유대인 대중들에게(눅 23:22-25) 예수의 핏값을 떠넘기는 비겁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셋째, 손을 물에 씻어서 잘못된 판결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마 27:24).

넷째, 예수를 잘못 사형시킨 책임을 추후 로마 당국으로부터 추궁받게될 것을 염려하여 예수가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자이므로 그를 처형하지 아니하면 반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역사를 날조했다(요 18:33, 39, 19:14-15, 19-22).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빌라도의 모습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강한 무인으로 보이고 싶었던 장본인 그래서 공포 정치를 과감하게 실시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였지만 그 내면은 비겁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출세하기 위하여 위아래 눈치를 보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성공 지향, 출세 지향적인 사고방식
둘째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권세 가운데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동화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마태복음 27:1-26)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이방인으로서 빌라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단지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잠시 등장했을 뿐인데, 어찌 이토록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 기독교인들이 수시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책임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고, 몇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노력하는 등,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비쳐지는데,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빌라도’라는 이름만이 사도신경에 선명히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저주스러운 이름이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총독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땅은 그의 유언대로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로마제국은 이들에게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다.
그 가운데 헤롯 대왕이 직접 통치하였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된 분봉왕은 아켈라오였다.
그는 부친 헤롯대왕의 성품을 쏙 빼닮아 잔인했다.
아켈라오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통치를 감행하다, 결국 AD6년 아구스도 황제의 재판을 받고 고울지방으로 추방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아켈라오가 추방된 뒤, 유대와 사마리아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로마는 총독을 파견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파견된 총독이 바로 빌라도이며, 그는 유대에 파견된 제5대 총독이었다. 로마는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황제 밑에 13명의 총독을 두고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그의 이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본디오 가문은 로마제국의 지방호족이었고,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으로 무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통해 볼 때, 로마제국 초기의 기사 가문 출신으로 어떤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아 로마제국에서 이같은 지위를 누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는 A.D.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이다.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다.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 공의회를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많은 세리들을 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A.D.6-7년에는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갈릴리지방의 유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하에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행 5:37 참조)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그의 소유물 중에 대제사장의 의복도 포함되었는데, 빌라도가 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그는 그 의복을 가지고 가서 유대인들에게 빌려 주었다고 한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약 18년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직하다 AD36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직접 연관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았던,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잠시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다보니, 빌라도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그는 기사 가문 출신답게 무력을 앞세워 횡포를 일삼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총독 휘하의 군대 사령부를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황제의 상과 함께 그들의 군기들을 거룩한 신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유대 백성들은 격앙하여 떼를 지어 가이사랴로 몰려가 그에게 유대인의 종교에 대한 이러한 횡포를 중지해 달라고 탄원했다. 닷새동안 고집을 부리다가, 그리고 폭동을 진압하려는 부분적 시도도 해본 후 마침내 빌라도는 굴복한 적도 있다. 전임 총독들은 이러한 문제가 가져오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일은 되도록 피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했으며 그 일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궁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져 있는 금도금한 방패를 걸어 놓았으며, 유대인들의 극심한 상소에 따라 디베료 황제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그것을 치우기를 거부했다. 그는 상수도 건설을 위하여 성전의 금고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이것은 또 한 차례의 폭동을 낳았고, 이 폭동은 폭도들뿐만 아니라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학살하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눅13:1에 잠시 언급되어 있듯이,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의 북쪽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남쪽의 전통적인 유대사람들에 비해 성품이 강렬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의 점령에 가장 끈덕지게 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빌라도는 갈릴리인들의 지하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그들을 무참히 죽였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로마 경비병은 관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을 곤봉으로 쳐죽였다고 한다.

이같은 일들로 야기된 긴장은 빌라도의 위치를 약화시켰으며, 유대인의 불만은 로마에 계속 전달되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켰던 유대왕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빌라도는 ‘고지식하고 무자비하고 완고한 자’로 그려지고 있으며, 또한 ‘부패, 폭력, 강도, 학대, 억압, 불법적인 처형, 그리고 끊임없는 가장 가혹한 잔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빌라도는 A.D.36년 사마리아인들의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 조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평소 빌라도의 이같은 무자비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자칭 왕이라 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면, 쉽게 사형언도를 내릴 것으로 판단하고 빌라도에게로 몰려갔을 것이다.

한편,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분명히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당시에 빌라도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무죄한 사람을 유죄판결하는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만 것으로 볼 수 있다.

● 하지만, 빌라도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로마인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고, 남의 말에 쉽게 부하뇌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기간이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예루살렘의 치안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그에게 끌려오게 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였다. 1)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자칭 왕이라고 했다.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처형을 요구하자, 때려서 놓으리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그 아내의 말대로 예수의 판결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다. 빌라도는 양심과 의협심에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편의 위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다.

지혜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현명하면 무엇하나? 로마의 최고학문을 배우면 무엇하나? 권력과 재물과 기술이 있으면 무엇하나?

진실되게, 바르게, 공명정대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용지물이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지혜는 간사가 된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패가망신케 하고,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된다. 어찌 빌라도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온갖 부정부패, 비리, 권력남용, 권모술수와 책임회피, 공갈협박, 무력, 테러...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어떤 핑계가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그의 소극성, 사특한 지혜, 권력 유지를 위한 권모술수는 예수를 죽였다. 백성의 고함 소리에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3일 밖에 잡아두지 못했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은 것은 3일에 불과했다.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이 되어 역사에서 물러갔으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사흘의 고난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 어둠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은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이 넘칠 것이다. 믿음을 가졌기에 당하는 작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3일의 고난뿐이다. 짧은 고난이다. 롬8:18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예수님께서 심판받기 위해 총독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옆에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와 고함지르는 군중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한번 둘러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 순간, 진정으로 심문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 앞에서 재판받고 있는 것은 고함지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어떤 소리를 따라 가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양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처럼 끌려오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듯이 주님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심판자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억울함, 고달픔, 배신감,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누가 심판해 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까? 진정한 재판관, 최후의 심판자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여러분의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을 믿습니다.

●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민란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준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 예수를 사형토록 허락하고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손을 씻은 것으로 보아 약삭빠르고 직무에 무책임했던 사람. 아내의 지혜로운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아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물. 폭동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것으로 보아 잔학하고 반유대적 성향을 지닌 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빌라도와 관련된 몇몇 전설들과 창작된 이야기만이 전해올 따름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예수님 처형 무효로 해달라" 케냐 변호사 소송 제기

* 케냐 천주교 신부 / 돌라 인 디디스
2000년 전 빌라도 재판을 무효하다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 하였다.



케냐에 거주하는 한 변호사가 국제사법재판소를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돌라 인디디스(Dola Indidis)라는 이름의 이 변호사는 전 케냐 법관의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며, 종교는 가톨릭이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와 당시 유대인 장로들, 헤롯 왕과 티베리우스(로마 황제, BC 42~AD 37), 이탈리아 정부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인디디스 변호사는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예수님의 존엄성을 되찾고 대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하는 소송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지난 2007년 처음으로 나이로비 소재 케냐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케냐 TV인터뷰에서 "예수님의 부당한 죽음의 증거는 성경으로부터 비롯됐다. 증거는 오늘날 성경의 기록으로, 누구도 성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전례를 통해 충분한 승소의 개연성이 보이는 사건"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사건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유로는 인디디스 변호사가 소송을 제기한 해당 국가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관할하는 UN 소속 국가 영토에서 벗어나 있음이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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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왜 일주일 만에 처형당했나?
예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히스토리컬 픽션으로 풀어내다!

저항단체 지도자 유다는 로마의 점령을 전복시킬 계획의 시작으로 로마 병사를 암살한다.
엘르아살과 그의 아버지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도성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고 술책을 쓴다.
많은 백성이 메시아로 여겨 환호하는 인기 있는 선지자 예수에 관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 모두 다가올 유월절 기간에 사회 불안과 폭력 사태가 빚어질 것을 염려한다.
이런 긴장 상태의 와중에 예기치 않은 동맹 관계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 신약학자 애덤 윈은 역사상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 이야기를 신선한 상상으로 직조해 예수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구성해 낸다.
1세기 정황과 관련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윈의 내러티브는 복음서 기사의 여백을 메우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예수를 둘러싼 세계의 사회·정치·신앙 현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성경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 준다.

정치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정찰하고 정찰 당하는 이들,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로 가득했던 도성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책임 문제는 복잡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한 편에만 오롯이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누가 죽였는가?

이 책의 특징

- 히스토리컬 픽션(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복음서에 드러나지 않은 메시아 처형 사건의 행간을 속도감 있게 복원한다.
- 메시아 예수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 로마와 유대, 빌라도, 열심당원,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메시아 처형에 관여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 마가복음, 로마제국을 깊이 연구한 신약학자가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메시아의 죽음에 대한 담대한 가설을 제공한다.

지은이 / 애덤 윈(ADAM WINN)

메리 하딘 베일러 대학의 기독교학 조교수이다. 풀러 신학교에서 신약 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IVP Academic, 2018), The Purpose of Mark's Gospel (Mohr Siebeck, 2008), Mark and the Elijah-Elisha Narrative (Wipf and Stock, 2010)가 있고, 편집한 책으로 An Introduction to Empire in the New Testament (SBL Press, 2016)가 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로마제국과 신약성경, 1세기 기독교 운동 속 기독론에 관심이 많다.

옮긴이 / 오현미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종교개혁 핵심질문』(복 있는 사람), 『주목할 만한 일상』(비아토르), 『폴 트립의 복음 묵상』(생명의말씀사),
『아름다운 안녕』,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이레서원), 『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CH북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CUP),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죠이북스) 등의 책을 번역했다.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는 로마제국의 전성기였다.
로마제국의 통치 방식이 지닌 특징은, 점령은 하되 해당 지역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평화를 지켜 준다는 점에 있었다.
다신교 체제의 로마 입장에서 유대 지역은 참으로 '괴랄한' 곳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일신 신앙과 제례를 철저히 고집하면서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 소요와 봉기가 끊이지 않았던 유대 땅은, 제국을 통째로 뒤흔들 큰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역 분봉왕(헤롯)과 총독(빌라도), 유대 대제사장(가야바)의 역학 관계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거기에 다양한 그룹(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등) 간 갈등까지 얽힌 유대 지역에 예수라는 갈릴리 '컨츄리' 선지자의 등장과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점들은 이 책에서 적당한 상상을 더해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선다.
수많은 이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며 각자 뜨거운 욕망을 분출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1세기 이후로 예수는 항상 욕망의 정치 한가운데서 표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줄 평 : 정치와 종교의 욕망이 한데 어우러진 1세기 예루살렘의 그날들.

책을 덮은 뒤 '예수 없는 예수 소설'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 주인공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웠다.
최근 계속 출간되는 1세기 관련 신학 소설들이 건네는 교훈과도 결이 달라 보였다.
저자는 신약학자로서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 관련 최신 연구를 토대로 십자가 처형이 당대 정치·사회를 아우르는 다층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신중하고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1세기 자료와 복음서 사이를 줄타기해 그린 시대적 배경 위에, 열심당원, 밀정, 종교 지도자, 빌라도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예수 처형을 둘러싼 긴박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저자는 이 음모의 중심에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며 책임과 파문에서 빠져나갈 전략을 짠 빌라도를 위치시킨다.
십자가 처형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 탓으로 돌려 반유대주의의 비극이 펼쳐진 2000년 역사를 성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직전에 읽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현대문학)와 겹쳐 보다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다.
폴라 구더의 <이야기 뵈뵈>(에클레시아북스)에 비해 그저 배경 장치로만 등장하는 듯한 여성 서사의 공백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뭇 그리스도인이 줄곧 낭만적인 신앙 연애 대상으로만 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날것 그대로 보여 주는 스릴러 느낌이 흥미로웠다.
마치 새로 쓰일 <의인을 찾아서>(새물결플러스)의 각본 같았다.
읽는 이마다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줄 평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의미를 새롭게 구현한 역사 스릴러.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본디오·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치하에서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AD 26-36)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직접 주관하였던 인물로서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사도신경에서도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하였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원한과 감정으로 대립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필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특별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휘장을 사용하거나, 빌라도와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방패를 걸어 놓음으로서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또한 빌라도는 성전의 보물들을 압수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로와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강탈자와 포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13:1에 의하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극악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기 전에 그의 총독직을 위협하는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봉기는 로마군을 투입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속화시키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즉각 폭동을 일으켰다.
빌라도는 5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번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에 세운 「로마」기념비를 제거하라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아내의 청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석방시키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은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에 대한 판결을 바꾸어버리는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마리아의 거짓 선지자가 그리심산에서 성전보물을 찾아내겠다고 주장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으로 몰려 들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빌라도는 군중들이 갑자기 모임으로 인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유대인들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사마리아 지방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 때문에 빌라도는 AD 36년에 로마로 소환 당하고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가「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항상 예수의 비극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수년 후에 칼리쿨라 황제때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주장에 의하면 네로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하며,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특히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던 그의 아내는 프로쿨라라고 알려져 있는데,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가 추앙을 받고 있으며, 희랍정교회는 그의 아내 프로쿨라만이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가. 제1차 총독 시대
(AD 6년 ~ AD 41년)

헤롯 1세(Herod Ⅰ, BC 37년 ~ BC 4년)가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헤롯 왕조(BC 37년 ~ AD 70년)가 성립되었습니다. 헤롯 1세는 로마에 충성하며 유대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 시기 로마는 그를 통해 이 지역을 통제하였습니다.

​BC 4년 헤롯 1세는 사망 직전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2세 등 3명의 아들에게 유대 왕국을 분할 상속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갈릴리, 베레아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인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아우라니티스, 드라고닛, 이두래를 분할 받았습니다.

AD 6년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의 가혹한 통치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 반란이 거듭되었고, 유대-사마리아 지역의 귀족들은 로마 제국 황제에게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해 달라고 고소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August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아켈라오를 갈리아(Gaul) 지역 나르보덴시스로 추방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빈(Vienne) 지역입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총독(행정 장관)을 파견하여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에 의한 제1차 총독 시대는 AD 6년에서 AD 41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행정 장관)은 행정 수도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머무르며 유대(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나. 유대 지역 5대 총독 : 본디오 빌라도

AD 26년 로마 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는 폰티우스 필라테(Pontius Pilate, AD 26년 ~ AD 36년)를 유대 지역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티베리우스를 디베료(Tiberi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글 성경에서는 폰티우스 필라테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행정 장관)으로 부임하던 때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디베료가 카프리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근위병 세야누스가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갈릴리-베레아 지역의 분봉왕 헤롯(헤롯 안티파스)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행정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로마 제국 황제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를 저지하려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명령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기세에 눌려 가이사랴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수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성전세)를 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AD 36년 본디오 빌라도가 사마리아 학살 사건으로 로마로 소환되었고, 자살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크리스트교도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콥트 교회 및 에티오피아 교회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와 그의 아내 프로쿨라(Procula)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다. 신약 성경과 ​본디오 빌라도

로마 제국 시대 유대의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고 십자가형에 처한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시기에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자신은 무죄하다고 말하며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그가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태복음 27:24)

본디오 빌라도는 AD 26년에서 AD 36년까지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1절의 내용을 보면 디베료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베료 15년은 AD 28년에 해당하며, 이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누가복음 3:1)

로마 제국의 역사와

성경 내용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CLC)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가

역사적(세계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경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고 소개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웃님들 함께 읽어주시고

주변에 소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를 소개드립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수메르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이르는 세계사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역사를

균형 있게 엮어낸

성경 이해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아시아사 및 서양 고대사,

특히 세계사 교과서에서 접하는

12개 고대 국가(문명)와

성경(성경 역사)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메르(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헤브라이,

페니키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의 역사는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과

역사적 무대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성경 역사)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12개 고대 국가(문명)의 역사와

성경 역사의 관련성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의 역사적 배경 이해에 갈급했던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의

지적 욕구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역사교육자이자

성경학을 전공한 그리스도인인

저자의 균형적 성경 이해 시도는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던 역사적 인물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이다.
AD 26년,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에 의해 유대 지역의 제5대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수리아 지역을 관할한 비텔리우스(Vittelius) 총독에 의해 면직되던 AD 36년까지 약 10년 간 유대에서 총독으로 있었다.

AD 26년 이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반면,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다.
복음서에 나타난 인상과는 달리 요세푸스나 필로는 그가 매우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잔인한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총독으로서의 빌라도 :
빌라도의 본군은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는 분견대를 두었다.
당시 주둔군은 약 120명의 기병대와 2,500-3,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빌라도는 주로 가이사랴에 머물렀지만 유월절과 같이 이스라엘의 특별한 절기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며, 이때에는 병력을 보강해서 민란 방지를 위한 순찰을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총독으로서의 권한은 막강해서 사형 집행권을 비롯해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과 성전의 돈을 통제하는 한편 대제사장의 예복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절기 때만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산헤드린 공의회가 결정한 주요 재판 결과까지도 바꿀 수 있었다.

 

빌라도와 유대인과의 관계: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총독직을 맡으면서 황제의 상(像)이 그려진 로마 군기를 예루살렘에 세움으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그 군기는 가이사랴로 옮겨졌다.

필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관저에는 총독과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한 세트의 황금 방패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디베리우스 황제에게 진정이 들어와 그것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세워 두라고 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와 요세푸스는 빌라도가 성전 금고의 돈을 수로를 건설하는 데에 유용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복음 13:1-2은 빌라도가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의 본거지인 갈릴리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죽여,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이 성전 금고의 돈을 유용한 것으로 시위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입장과 무관하다는 입장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빌라도에 대한 헤롯의 적대감(눅 23:12)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 앞에서 재판 받도록 보낸 것(눅 13:4)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헤롯에 대한 유화 제스처임을 알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게 된 배경: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도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요 18:38)고 까지 말했다. 요한은 그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요 19:12)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다.

 

이는 고위층의 유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임기 중에 민란이나

큰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마 27:24-25).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대해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지만(마 27:24) 예수님의 재판 사건에서 사형을 언도한 그의 책임은 면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성을 증거해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었던 것으로 보아(마 27:19) 유대 지역으로 부임할 때(AD 26년) 그의 아내도 함께 왔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들이 부임지에 아내를 대동할 수 있다는 원로원의 결정이 이미 AD 21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마 27:19)이라고 불렀으며,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 대해 상관하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녀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 속에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무죄하심과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부당함을 증거해 주는 여러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기 묵시 문학에 의하면, 빌라도 아내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ula) 였으며,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희랍 정교회에 의해 추앙을 받고 있다.

바라바(Barabba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 수감되어 있었던 유명한 죄수로 폭도였으며 살인자였다(마 27:16; 눅 23:19).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할 때 군중들은 ‘바라바’라고 외쳤다(마 27:2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15).
그 후 바라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