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지혜, 명철





지식(知識)과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 : 배움을 통하여 얻은 정보 - 길을 찾는 것
지혜 : 성령을 통하여 얻은 정보 - 방법을 찾는 것
명철 :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드러내는 정보 - 분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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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테부나)은 분별력, 지혜(호크마)는 도덕적 실천력 등으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명철이 스승, 노인 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합니다. 즉, 스승은 지식(비나)을 비유한 말이며, 노인은 세상 경험이 있어 지혜를 뜻합니다.

인식론에선 명철은 관조(contemplation)로 직관(intuition)과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종교심리학의 견지에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심지어 초자아인 신의 의지도 일치시키려는 과정의 인식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가끔 이 같은 명철 의미와 유사한 뜻으로 성경에선 대구법 형식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이와 달리 실행력, 영적이며 도덕적 실천력(praxis)을 강조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칸트가 명철과 지혜의 이분화를, 애써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구분지어 저서로 남겼다는 추측도 해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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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지식, 총명, 명철의 뜻을 알아보자.

기도할 때 '지혜와 총명과 명철과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과연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잠언 4:7)

·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잠언 18:15)

·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에베소서 1:8)

1. 지혜

지식, 경험, 통찰력을 통해 얻은 깊은 이해지적인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주로 인간의 내면 성장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은 자기 경험과 배움을 바탕으로 지혜를 향상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흔히 오랜 세월 동안 얻어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자기 인식, 타인과의 관계, 문제 해결, 의사 결정 등 다양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주로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과 통찰력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현명한 조언과 조언받거나, 문제 해결과 결정에 대한 심사숙고를 통해 지혜를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명상이나 내면 탐구를 통해 내적인 지혜를 발견하는 때도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 발전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판단과 대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데 있어서 더 뛰어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는 어렵지만, 아래 예시를 통해 지혜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성인의 인생 선택

어떤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지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롭게 판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우선, 자신의 관심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자신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파악합니다. 그다음, 현실적인 가능성과 산업 동향을 조사하고 직업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분야를 고려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치관과 일생의 목표를 고려하여 자신의 결정이 자신의 비전과 목표에 부합하는지 평가합니다. 이러한 순차적인 사고 과정과 다양한 요소의 고려는 그의 결정에 지혜를 발휘한 결과입니다.

2. 동료와의 갈등 해결

조직 내에서 일하는 두 명의 동료가 의견 충돌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접근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합니다. 그다음,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와 이해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호 간의 대화와 협상을 시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상호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상황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접근법은 갈등을 해결하고 더 나은 협업과 조직 내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2. 지식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주제나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와 이해의 체계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연구, 관찰 등을 통해 얻어지며, 다양한 형태와 수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지식은 주제나 분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체계적인 연구와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과 원리를 바탕으로 합니다. 역사적인 지식은 과거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정보와 해석을 포함합니다. 철학적인 지식은 인간의 존재와 인식, 윤리 등의 깊은 질문을 탐구합니다. 또한, 예술, 문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도 독특한 지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공유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지식은 그들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고와 판단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지식은 교육, 연구,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되며 사회적인 진보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심하게 증가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정보와 이해의 공유가 가능해졌으며, 온라인 강좌, 도서, 학술 자료 등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지혜로운 활용은 다른 문제입니다. 지식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식을 통해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술과 발견을 이루어내며, 사회는 문화와 인류의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식은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정보와 이해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지식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의학 지식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진단하는 과정에서 의학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 의사는 그 증상과 관련된 가능성 있는 질병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의사는 의료 서적이나 연구 결과를 참고하여 환자의 증상을 분석하고 진단을 내립니다. 이러한 지식은 의사의 학문적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며, 환자의 건강을 돌보고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2. 과학적 지식

과학자가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가 실험을 통해 물질의 특성을 연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은 물리학에 관한 이론과 법칙을 배우고 이를 기반으로 실험을 설계하여 자료를 수집합니다. 이 데이터는 이론과 비교하여 분석되고, 새로운 지식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연구, 실험, 이론의 과정을 통해 쌓이며, 자연 현상의 이해와 새로운 발견을 끌어내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3. 역사적 지식

역사학자가 과거 사건과 인물에 관해 연구할 때 역사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정치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학자는 그 시대의 문서, 기록, 증언 등을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과거 사건과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지식은 과거의 경험과 사회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3. 총명

한 사람이 뛰어난 지능이나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빠르게 이해하고 배우며, 문제를 해결하거나 판단을 내릴 때 예리한 생각하고 있습니다. 총명한 사람은 주로 뛰어난 지적 능력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하며,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총명한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숨겨진 패턴이나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총명한 사람은 학업적인 성취나 직업적인 성공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지적 도전을 즐기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흥미와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명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며, 지도력과 창의성을 통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총명함은 선천적인 요소와 환경 요소가 결합하여 형성될 수 있습니다. 유전적인 요인이나 뇌의 구조와 기능의 차이가 총명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좋은 교육과 경험, 도전적인 환경에서의 성장과 배움도 총명함을 향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총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적 호기심과 지속적인 자기 계발이 필요합니다.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또한, 문제 해결과 분석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활동에 참여하고,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뛰어난 지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 해결과 판단력에 있어서 예리한 사고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총명한 사람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수학적인 총명함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한 학생이 수학적으로 총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양한 방법과 접근법을 활용하여 빠르게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수학적인 패턴이나 관계를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능숙합니다.

2. 언어적인 총명함

언어와 관련된 영역에서 총명한 사람의 사례로는 작가시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며, 예리한 언어적 적성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언어적 기술과 표현 방법을 활용하여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창작하며, 깊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능숙합니다.

3. 과학적인 총명함

과학 분야에서 총명한 사람의 사례로는 우주과학자연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주와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이해하고 있으며, 복잡한 우주 현상과 천체의 동작에 대한 원리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뛰어납니다. 또한, 연구 과정에서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 명철

한 사람이 깨달음과 신중함을 지니고 있어 상황을 잘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현명하게 사고하며, 조심스럽고 신중한 결정을 내립니다. 명철함은 사람이 지식과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변의 정보와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결과와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로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 장단점, 이익과 비용 등을 고려하여 행동하며,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짧은 시간적인 이익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또한, 명철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제한을 알고 받아들이며, 현실적인 가능성을 고려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명철함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향상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고력판단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분석력을 기르며, 주어진 정보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판단에 반영해야 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현명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끌어내고, 문제와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받으며, 지도력과 조언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명철한 사람은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명철한 사람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비즈니스 결정

기업 경영자가 명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새로운 시장 진출을 고려할 때, 경영자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시장 조사와 경제 동향 분석을 통해 시장의 잠재력과 위험을 평가하고, 기업의 자원과 역량을 고려하여 적절한 전략을 수립합니다. 명철한 경영자는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과 성장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2. 법적인 문제 해결

변호사가 명철하게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입니다. 변호사는 클라이언트의 이익을 위해 명확한 법적 지식과 사례 연구를 바탕으로 법적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법적 규정과 판례를 고려하여 법적 전략을 수립하고, 객관적이고 합법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명철한 변호사는 클라이언트의 이익과 법적 요건을 고려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능숙합니다.

3. 인간관계 조정

팀 대표가 명철하게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사례입니다. 팀 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리더는 객관적인 시각감정적인 지속을 유지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각 팀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하고 중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명철한 리더는 팀의 조화와 협업을 끌어내며, 팀원들이 상호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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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understanding)

박여라 영문에디터
1~2분

구약성경에 명철(明哲)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부나’(이해)입니다. ‘빈’(분간하다, 파악하다)에서 파생돼 나온 단어입니다. 테부나는 명철 외에도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출 31:3, 이하 새번역)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한없이 많이 주시니”(왕상 4:29)에서 총명으로 번역되고, “슬기와 이해력도 그분의 것이다”(욥 12:13)에서는 이해력으로,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시 136:5)에선 지혜, “그의 슬기는 헤아릴 수 없다”(시 147:5)에선 슬기로 번역됐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테부나를 understanding으로 번역했습니다. Stand(서다) 앞에 붙인 under는 오늘날 뜻처럼 ‘~아래에’라기 보다는 고대영어 under(~가운데, ~사이에)라고 합니다. 잘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사이에 가까이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과 신앙 고백이 담겼습니다. 특히 욥기 잠언 전도서는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혜가 부르고 있지 않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마을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외친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른다. 내가 모두에게 소리를 높인다. 어수룩한 사람들아, 너희는 명철을 배워라. 미련한 사람들아, 너희는 지혜를 배워라.”(잠 8:1~5)

명철은 지혜를 동반하는 짝꿍입니다. 사이에 서서(understand) 사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잠언1장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식(知識)의 "知"

아는 것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수해 주는 것을 학습과 공부, 수련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다.
지식(知識, Knowledge)을 정의해 보면, 일반적 상황에서 평가된 자료들이 축척된 것을 말하는데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어떤 분야의 대상을 연구하여 얻은 데이터(Data)나 정보(Information), 혹은 사실(Facts)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로 "정보를 보다 체계화하고 개념화한 것"을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습득한 것을  사람들이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은 어떤 분야에 숙련된 기술이나 축척된 정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知)라는 것은 고대사회에  무언가를 안다(知)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숙련된 기술로 《사냥이나 싸움, 전쟁》에 필요한 경험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矢(화살 시)와 말(口, 입구)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화살이 어떻게 정확히 과녘을 맞추는지, 혹은 과녁의 어느 부분을 맞추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식(識)은 言(말씀, 말 언)과 戠(새길 시)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말(言)하는 것을 새길(戠) 수 있다는 말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 것, 익힌 것을 '적다, 기록하다(記)'는 의미이다.
종합해 보면 지식은 문자나 표기로 기록해 놓은 것을 습득하여 알게 된 사실이나 정보를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은 얻는 자에게는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것을 얻으면, 잠언2장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智慧)의 '지智'

지혜 지(智),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알 지(知)자에 해(日)가 붙어 있어 밝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이 두루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Wisdom)는 지식을 통해 깨달은 원리를 계속해서 응용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슬기로울 혜(慧), 그같이 알고 있는 원리를 '슬기로움'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다.
慧(지혜 혜), 글자는 彗(빗자루 혜, 날카로울 혜)+心(마음 심)의 형성자(形聲字)이다.
빗자루는 산란할 개(丯)인데 이는 산란스럽게 많다. 많아서 예쁘다(예쁠 봉), 풍채가 있다(풍채 풍)는 의미로 쓰인다. 거기에 손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이는 금상첨화가 아닌가.
손 씀씀이와 마음 씀씀이가 예쁘꼬 또 예쁜 것이 바로 '지혜'라는 뜻의 한자가 된 것이다.
이같이 혜(慧)자는 윗부분이 빗자루의 상형이고,  그 밑에 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 혜는 긍정적으로는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 상쾌하다, 시원스럽다, 슬기, 능력, 지혜'로 쓰이고, 이것이 나쁜 부정적 의미로 쓰이면 '교활하다, 간교하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이든 양날의 칼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은 바탕이며, 지혜는 활용이니 둘은 피를 나눈 형제나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응용하여 확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잋빛나개 두루 펼쳐내며, 손 재주와 마음의 생각으로 많은 것들을 예쁘게 솟아오르고 가득차게 만드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같이 "지혜"는 문제해결 능력을 의미한다.
잠언1장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히브리어원전(잠언2:2~3) “비나”를 '지식', “호크마”는 '지혜', “테부나”는 '명철'로 번역했다.
지식(知識), 지혜(智慧), 명철(明哲)의 차이
• 지식(비나)은 이해나 총명 = 아는 능력(정보)
• 지혜(호크마)는 숙련, 지식, 다양한 학식 =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테부나)은 지식, 지각, 능숙함 =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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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명철, 지식의 차이

 

 

1. 지혜(智慧, 히:호크마,chokma. 헬:소피아,sophia. 영: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8;12)

 

2. 명철(明哲, 히:비나,beenah. 헬:순네시스. 영: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보다 심오한 차원의 이해력을 표현할 수도 있다. 예컨대 참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3. 지식(知識, 히:daath. 헬:gnosis. 영: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으로,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로,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4. 종합(綜合)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7:4,9:10,16:16; 욥 28:12,20,28;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4:7).

 







과정신학



과정 신학이란 무엇인가요?

과정과 섭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역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하나님의 주관 즉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과정 철학에서는 그 섭리를 하나님의 변질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과정 신학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섭리로 이해한다면 섭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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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과정철학으로부터 발전된 신학이다.
찰스 하츠혼존 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과정신학과 과정철학은 과정의 사상에 연관된다.
화이트헤드찰스 하츠혼은 신의 본질적 속성은 일시적인 과정에 의해서 영향을 주고 그리고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신론은 신은 모든 면에서 영원하고, 세계에 의해 변화되지 않으며,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본다.
과정신학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적 성격을 강조하여 신(神)도 변화해 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발전과정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
이 용어는 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기포드(Giffiord) 강연에서의 원고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강연에서의 원고는 1928~1929년, 출판은 1929년]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이것이 뚜렷한 신학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특히 시카고대학에서였으며 곧 널리 퍼졌다.
그 중요한 대표자들은 하트숀(C. Hartshorne), 오그덴(S.M. Ogden), 콥(J.B. Cobb), 헤밀턴(P.N. Hamilton), 피텡거(W.N. Ppttenger) 등이다.
이들은 다른 급진적인 신학자들과는 달리 유신론적이며, 신의 개념에서는 신의 창조와의 관련성, 자신에 대한 초월능력, 신의 양극성, 사랑이라는 신의 근원적인 속성 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자연, 인간 및 신적인 모든 과정은, 상호성과 참여를 수반하기 때문에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전통적인 신학의 '실체'(實體)에 대한 논쟁을 정적인 형이상학의 시대에 뒤진 유산으로 거부하고, '사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신은 과거의 조망도이며 현재의 관계및 미래의 목적인 이 '사건'을 자신의 사랑본성에 입각하여 받아들인 뒤 우주의 창조적인 진화를 위해 사용한다.
이런 중심적 개념에 따라 과정신학자들은 세계의 예외현상으로서가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강생을 본다.
과정신학에서 구원은 신이 피조물의 성과를 수용하는 것이며, 신은 성취된 모든 선을 수용하과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자신의 본성과 조화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천국지옥이란 창조의 성과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창조에 대한 참여와 이를 통한 작용으로 신중히 다루는 반면, 이러한 성서적 확신이 만들어진 이미지 자체를 신화화하는 것과 고전적인 일신론의 정적인 성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과정신학의 특징 및 평가>

1. `존재'보다는 `과정'이 실재에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재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을 강조한다.

2. 신은 인격성을 지니고 있는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근거로서 끊임없이 새로 운 것에로 세계를 부르시는 `창조적인 동인(動因)'이다.

3. 이러한 신을 묘사하는 여러 종교의 다양한 신개념을 인정하며 이에 따라서 기독교의 `배타성' 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4, 신은 `창조자'이고 세계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또한 신은 세계가 창조되기 이 전부터 `선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신과 세계는 함께 있는 것이다.

5. 신은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초월성'보다는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재성'을 강조 한다.

6. 인간을 행위와 결단의 주체로 이해 한다. 세계 내의 실존으로 던져진 인간의 책임과 자기결정 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조건들이나 과거, 그리고 신에 의해 전적으 로 결정된다는 이해를 거부한다.

7. 신은 `원초적 본성'과`귀결적 본성'의 양면성를 갖는다. 그리스도와 원초적 본성을 동일한 실재 로 본다. 즉 성자와 창조적 변화의 힘과 신의 원초적 본성 셋을 동일시하고 있다. 성부는 원초적 본성의 성자와 귀결적 본성의 성령이 통일된 면에 있어서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신학의 신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의 멧세지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점을 말할 수 있다.

1. 과정신학은 '신'을 어떤 존재성을 가지신 실재적인 분이 아니라 창조성을 부여하는 어떤 '원리' 나 '동인(動因)'으로서 말함으로써'인격적인 신'을 거부한다. 이러게 되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나 그분께 드려지는 예배, 찬양, 기도등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것으 로 되고 마는 것이다.

2.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므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근본적으로 배 치되며, 복음선포의 절박성을 흐리게 한다. 물론 타종교와의 대화나 동양과 서양의 신론 사이에 대화를 유도하는데에는 공헌할 수 있으나, 이러한것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뒤 흔드는 요소가 될 것이다.

3. 인간의 주체성의 강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데로 창조된 피조물,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하 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과 마찰을 빚고 있다.

4.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원리인'삼위일체론'의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성부,성자, 성령'이 라는 삼위의 구별성과 동일성을 함께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이면서 중심 적인 교리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론은 이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신중심적인 신학' 의 방향으로 또는 유일신론적인 방향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과정 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지속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과정 신학이 거짓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6:10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하지 않는 성품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은 고작 인간의 변덕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3:11).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그러나 과정 신학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최종 권위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 성품과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심 (이사야 6:3, 요한계시록 4:8),
주권자 되심(역대상 29:11; 느헤미야 9:6; 시편 83:18; 이사야 37:20),
유일하심 (신명기 6:4), 편재하심 (시편 139:7-10),
전지하심 (욥 28:24; 시편 147:4-5),
전능하심 (욥 42:1-2),
자존하심 (출애굽기 3:14; 시편 36:9),
영원하심 (시편 90:2; 하박국 1:12),
불변하심 (시편 33:11; 야고보서 1:17),
완전하심 (신명기 32:34),
무한하심 (욥5:9;9:10),
진리되심 (신명기 32:4; 시편86:15),
사랑이심 (요한일서 4:8, 16),
의로우심 (시편 11:7; 119:137),
신실하심 (신명기7:9; 시편 89:33),
자비로우심 (시편102:17),
은혜로우심(출애굽기22:27; 느헤미야9:17,31; 시편86:15; 145:17),
공의로우심 (시편111:7; 이사야 45:21),
자유하심 (욥 23:13; 잠언21:1).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속성을 이 세상에서 활발히 발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분의 창조물을 초월하시지만,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며 알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과정 신학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인간들과 내재된 차이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과정 신학의 인본주의 철학은 인류에게 구원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소망 없이 방황하게 되며 영원토록 지옥에 있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이사야 9:6-7;마태복음1:22-23;요한복음1:1,2,14;20:28; 사도행전 16:31, 34; 빌립보서 2:5-6 ; 골로새서 2:9; 디도서 2:13; 히브리서1:8; 베드로후서1:1)
예수님께서 사망하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지 않으셨다면 (로마서3:23;6:23;고린도후서5:21)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2;3:18;3:36;14:6;사도행전4:10-12;16: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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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내용을 중심으로 본 과정신학 논쟁

목창균/ 서울신대 교수 | 1994. 1.

현대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시사적 토대였던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반면, 환멸, 염세,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비관주의적 세계관이 널리 확산되게 했다.
현대인은 전쟁과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적 노력의 무익함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로부터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바르트, 브루너, 불트만 틸리히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과 인간 존재의 비극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으로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신학적 흐름을 주도했다.
한편 다윈(darwin)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과학적 세계관이 또다른 신학적 흐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신학과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이 그것이다.1
과정신학이란 말은 그 근원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좁은 의미로,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에 근거하여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전통을 말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샤르댕 또는 화이트헤드와 샤르댕 사상 모두로부터 유래하는 신학전통을 가리킨다. 화이트헤드가 과정 형이상학파를 대변한다면, 샤르댕은 과정사상의 진화론파를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을‘창조적인 전진’이라 부르고 그것을 어떤 정점(climax)을 향해 반복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반면, 샤르댕은 과정을 그가 오메가(0mesa)라 부른 정점을 향해 계속적인 진화단계를 거치며 일직선으로 상승 발전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2 샤르댕의 핵심사상은 진화의 개념이었으며 신학의 중심개념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이었다. 그는 다윈으로부터 유래하는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을 문화와 영적인 영역에 확대 적용했으며 전체 우주가 계속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진화의 오메가와 계시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필자는 과정신학의 두 흐름 가운데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미국의 과정신학의 논의를 제한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전통신학과는 어떻게 다르며 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과정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의 태동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철학개념을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세계가 불변적인 실체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을 수용했다. 특히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문제로 삼은 것이나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영향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종래의 세 가지 신 개념-즉 절대 군주, 냉혹한 도덕주의자 및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을 비판하는 한편, 기독교의 갈릴리적 기원에서 또 다른 신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부드럽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양극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 그것이다. 전자는 순수한 정신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대해 영향을 끼치나 그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후자는 현실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나타낸다.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신은 정적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그의 신이 철학적인 신이냐 혹은 종교적인 신이냐 하는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에서는 그의 신관을 단지 철학적인 신관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다른 편에서는 그것을 종교적인 신관으로 이해한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엘리(Stephen Ely)에 따르면,“형이상학이 도달할 수 있는 신은 종교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신이라 불리울 수도 없다.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적 분석으로부터 이끌어낸 신은 종교의 신이 아니다.”3
이 견해에 대해 루우머(Bernard M. Loomer)는 비판적이었다. 엘리의 저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종교철학에 대한 비전문가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이트헤드 사상의 풍성함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초한 전통적인 신관과 같지 않았다. 따라서 신의 주전적 의지와 존재 자체로서의 신 개념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기독교에 수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기독교에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신관은 기독교 계시의 하나님을 반영하며. 과정적인 신 개념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의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주장했다.5 멜러트(Robert B. Mellet)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아퀴나스의 신 개념보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보다 탁월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6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던 과정신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과정신학은 1930년 이후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과정신학파는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카고 대학교가 과정사상의 중심지가되었던 주요한 이유는 하트숀(Charles Martshome)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하트숀은 하바드 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요 그의 조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이트헤드의 저명한 해석자요 그의 원리들을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던 철학자였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화이트헤드 사상의 해석과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과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교수들을 연결시킨 사람이 하트숀이었다.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고전적 유신론(theism)을 비판하는 한편,‘신(新)고전적’유신론을 제시했다.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결코 능가될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그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신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관적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7 하트숀은 이것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불렀다.
헬라사상으로부터 기원하는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와 절대성을 높이 평가한 반면, 변화와 과정 및 관계성을 평가절하 했다. 전통신학은 이러한 편중적인 경항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자들은 성서의 하나님은 변화하는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적인 존재와 초자연적인 독립성과 절대성을 선언하는 언어로는 이러한 성서적인 관점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정과 생성, 관계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과 개념을 수용할 때, 성서적인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들은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이 기독교의 계시를 반영할 뿐 아니라 전통신학의 절대자로서의 신 개념보다 성서의 증거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했다.9
이와같이 미국의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의 철학사상을 기독교 신앙에 도입하여 그것을 현대 세계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시카고 대학 교수로 과정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제 1세대 과정신학자들은 위이맨(Henry N. Wieman), 월리암즈(Daniel D. Williams), 루우머(Bernard Loomer), 멜란드(Bernard Meland) 등이다. 그후 월리암즈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로, 루우머는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으로 하트숀은 텍사스 대학교로 옮겨 활동한 것에 힘입어 과정신학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시카고 대학교에서 과정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제 2세대 과정 신학자들은 오그덴(Schubert M. Ogden)과 캅(John B. Cobb, Jr. )이다. 피텐저(W. Norman Pittenger)는 미국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어 영국에 과정신학을 소개했다. 과정신학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에서 가장 활력적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기독교 전통 출신의 학자들을 매혹했다. 과정신학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그리핀(David R. Griffin), 하밀톤(P. Hamilton), 쿠씽(Cousins) 등이 있다. 한편 과정신학은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 즉 합리적인 요소와 경험적인 요소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형성된 신학경향이다.
첫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합리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합리주의적이며 논리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하트숀이 이를 대변하며, 주로 신고전적 유신론을 주장했다. 두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경험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경험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위이맨과 루우머가 이를 대변한다. 특히 루우머는 시카고 대학에서“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있어서 경험적인 분석 방법의 신학적 의의”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0 이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적 방법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루우머는 화이트헤드를‘합리적인 경험론자’로 간주했다. 한편, 세번째 흐름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체계를 보다 명백하게 기독교 신학적인 방향에서 취급하려는 경향으로 캅이 이를 대변한다.

과정신학설
과정철학은 존재를 실재(實在)로 보는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 ontology)을 거부하고 생성과 과정을 실재로 보는 사상이며, 이것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한 것이 과정신학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초자연적 존재론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전통신학의 교리들은 폐기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과정신학자들은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연구방법을 수용하여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참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서의 역사성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본래의 자료들이 변경되거나 초자연적 교훈과 기적 이야기들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11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어떻게 재해석하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과 세계, 창조론 및 기독론을 중심으로 과정신학의 핵심교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양극적인 본성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는 과정신학이 전통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신론을 가장 신랄히 비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론에서 과정신학과 전통신학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유신론(theism)은 하나님을 정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완전한 선과 동일시했다. 하나님을 인간의 희노애락에 참여하는 동적인 인격적 행위자로 보지 않고 불변적이며 고정적인 존재로 설명했다. 과정신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관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증거를 위협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미래의 일을 예상하여 인간에게 반응하는 반면,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신론을 성서적인 개념과 헬라사상의 혼합물로 간주했다. 고전적인 유신론은 이교적인 헬라철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12
과정신학자들은 전통신학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에서 찾았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은 부동의 동자, 지고의 존재, 천지의 창조자가 아니다. 위로하고 사랑하며 이해하는 신이요,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활동하는 신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이 과정신학자들을 매혹시켰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에 대해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 전통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정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양극적인(dipolar)본성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을 단순히 절대자로만 보는 전통신학의 단일극적인 신론은 상대성과 생성이 결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 즉 신의 원초적인 본성과 결과적인 본성의 개념을 수용했다.13 하나님은 지극히 절대적인 동시에 지극히 상대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동시에 시간적이며 변화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추상적인 극과 구체적인 극 또는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추상적인 극에는 영원성, 절대성, 독립성, 불변성과 같은 필연적인 속성이 포함되며, 구체적인 극에는 시간성, 관계성, 생성과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속성이 포함된다. 이 두 극은 상호보충적이며 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낸다.14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를 거부하거나 재해석했다. 전통신학이 정적인 개념이나 용어에 의해 하나님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는 달리, 과정신학은 동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해 하나님을 진술한다. 즉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정적이며 무감각한 실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과정 유신론은 실체를 과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역시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거부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증거와 기독교인의 경험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불변적인 절대자의 개념보다는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더 성서적이라는 것을 성서적 근거에 의해 입증하려 했다. 또한 기독교인의 경험에 호소하여 어떻게 불변적인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시했다. 따라서 쿠씽은“과정사상의 하나님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가깝다”고했다.15 같은 이유로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무감각성(impassibility)의 개념을 부정했다.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서는 과정사상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은 반면, 캅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자로 인정했다. 한편 피텐저는 중간 입장을 택해 하나님을 인격적인 것의 근거인 동시에 인격적 범주를 초월하는 분으로 묘사했다.16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무시간성(timelessness) 혹은 영원성의 교리를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있으면서도 불변적이라고 하는 것이 모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시간적이며, 관계적이며. 가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의 구체적인 면 또는 결과적인 본성이다.17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서도 과정신학은 전통신학과 입장을 달리한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을 주장하지만, 완전에 대한 의미가 서로 다르다. 전통신학은 완전성을 더이상 아무 것도 첨부될 수 없는 것 또는 결코 능가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완성된 또는 성취된 완전이다. 반면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완전을 계속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하트숀에 의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피조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18

2. 만유재신론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일원론에 근거하여 만유재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 양극단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양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 또는 신고전적 유신론이라고 불렀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유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세계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만유재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적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19
요약하면,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 전통적인 유신론의 중심적인 관심사를 종합한 것이다.20 그러나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범신론과 구별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상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유신론과 구별된다.

3. 무로부터의 창조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나 지배자가 아닌, 진·선·미의 환상과 매력에 의해 영향을 미치는‘세계의 시인’또는‘세계의 위대한 동료’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 자신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정 속에 있고 과정이 하나님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도 세계도 정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양자 모두 신기성에 이르는 창조적인 전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21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전통신학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 무(無)로부터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창조자이며, 세계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것이 성서적 창조론의 핵심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창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근거하여 성서적 창조교리를 재해석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물론,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하도록 보존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선재하는 재료의 단순한 재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22 이 세계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온 것이다. 끊임없이 과정 속에서 존재했다 소멸하고, 다시 존재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로부터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로부터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트숀에게 있어서, 창조는 성장하도록 지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했다.23
이러한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따르면,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트숀은 이것을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유비에 의해 설명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세계와 같으며, 정신은 육체에 대해 내재하는 하나님과 같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영향을 받고 또한 주지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24
요약하면,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만든 창조자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이다. 반면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있는 재료로 세계를 재형성한 것이 창조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반자이다.

4. 과정기독론
과정신학은 기독론을 신론처럼 철저히 탐구하지 않았다. 신론이 중심 주제였던 데 비해 기독론은 파생적인 주제였다.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은 기독론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멜란드가 과정사상의 관점으로부터 기독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과정사상 내에서 기독론에 대한 주요한 공헌을 이룩한 사람은 피텐저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신조는 칼케돈 신조(A.D.451)이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며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union)되어 있다는 양성의 교리를 명시하고 있다. 피텐저는 이런 고전적 신조는 더이상 현대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25 그것은 세계, 역사 및 인간의 경험을 현대인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고대 세계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캅 역시 성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교리를 거부했다.26 따라서 과정신학자들은 과정 세계관에 근거하여 기독론을 재구성했다.
피텐저는 예수를 다른 영역으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온 침입자 또는 신적인 방문자로 간주하는 것은 예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고대 헬라인들의 개념이며 현대인들은 그것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피텐저에 따르면, 예수는 1세기에 살았으며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진정한 인간이었다.27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나 목수생활을 한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진정으로 이 세상 안에 있었으며 이 세상에 속했던 자로 간주되었다. 예수의 모든 것은 인간적이었다. 이것이 피텐저가 본 과정세계 안에서의 예수의 위치였다.
피텐저는 예수가 말씀이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지점이라는 데서 예수의 의의를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적인 행위의 일치점이다. 창조적인 말씀이 우주 전체에 임재하며 활동한다. 예수 안에서 그 말씀이 육화(肉化)되었으며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대한 사랑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28
피텐저의 견해에서 보듯이, 과정신학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선재성과 신성, 성육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론의 핵심 교리를 부정했다. 그것은 신화적이며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단지 보통 인간, 즉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팔레스틴 유대인으로 취급했다.

과정신학 논쟁
과정신학은 19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개신교신학과 가톨릭신학에 대한 주요한 경쟁자와 도전자가 되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존재의 형이상학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과정 형이상학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지지자들은 과정신학이 현대 정신과 조화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훌륭한 재해석을 현대인에게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비판자들은 과정신학은 현대 교회에 나타난 가장 위험한 이단이며, ‘이교(異敎)주의에 대한 항복문서’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29
과정신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재해석을 시도한 주제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핵심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며, 우주의 창조주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인 동시에 진정한 인간인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및 부활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속죄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가? 과정신학은 이런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이것은 전통신학에 대한 부정이요 공격이었다.
과정신학의 도전에 대한 전통신학의 응전은 신속한 편이 아니었다. 단지 과정신학에 대한 단편적인 비판과 평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과정신학에 대해 포괄적이며 비판적인 평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내쉬(Ronald Nash)가 편집한「과정신학」(Process Theology, 1987)이다. 이는 13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전통신학과 과정신학을 비교 분석하고 신학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에서 과정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과정신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신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에서 논쟁이 된 문제도 신론에 관련된 것이 많다. 신론세 관한 논쟁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이들 개념을 재해석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무감각(apatheia)’의 원리이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나 원인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자족적인 존재나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무감각성 혹은 무고통성의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이 교리의 포기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함께 고통받을 수 없는 하나님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무감각성의 원리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통에 구속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30
한편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특히 창조론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정하고 창조를 기존의 재료를 통한 재형성으로 해석했으며,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가 아니라 세계의 협력자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성서와 전통신학에 근거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피노크(Clark H. Pinnock)는 과정신학의 창조론이 비성서적임을 지적했다.31 왜냐하면 히브리어‘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오직 하나님의 활동에만 사용되며 하나님이 사물을 만든 재료를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한 암시가 있다(시 33:9).
과정신학의 기독론 역시 전통신학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과정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성육신, 동정녀 탄생, 무죄성, 신성, 대속적 죽음, 부활, 숭천, 재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등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따라서 기독론 역시 논란과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마무리

과정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 과학사상을 중재하고 종합하려고 한 시대적 산물이다.
진화, 상대성, 유기체 창조성 등 자연과학적 개념들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신앙을 현대 지성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전통신학이 존재와 절대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플라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과정과 관계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 사상의 특징은 동적인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실재를 존재나 본질과 같은 정적인 개념이 아닌 과정이나 생성과 같은 동적인 개념으로 파악했으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과정을 반복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한 것 때문이었다.32
전통신학이나 철학이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접촉점이 취약한 데 비해, 과정철학은 하나님을 세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그리고 세계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과 세계는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체계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려 한 과정신학은 많은 난점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헬라 철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고대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과정신학도 전통신학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닌 생성과 과정의 형이상학에 의존하는 것이 전통신학과 다를 뿐이다.33

둘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결점을 개선하려고 시작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개악(改惡)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성서적인 신관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전통신학은 하나님이 영원 불변하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반해, 성경은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따라 행동하실 뿐 아니라 후회도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신학의 정적인 신관을 동적인 신관으로 수정했다. 창조의 하나님을 진화와 변화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성장하는 하나님,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활동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했다고 판단된다.

셋째, 과정신학은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것은 성서적 교훈과 반대이거나 성서로부터 이탈되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 세계 내에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성서의 증거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기독교 핵심 교리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 세계 창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구속적 죽음, 부활 승천, 삼위일체와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다.


주(註)

1. Ewert H. Cousins(ed.). Process Theology(New York:Newman Press. 1971) pp. 3∼5.
2. Ibid. p. 9.
3. 엘리는 그의 저서 The Religious Availability of Whitehead′s God 에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종교적 이용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4. Bernard M. Loomer.“Ely on Whitehead′s God”, Process Philosophy and Christian Thought, Delwin Brown. ed.(Indianapolis: Bobbs-Merrill Company. 1971). pp. 264∼286.
5. Ewert H. Cousins. (ed.). Process Theology(NewYork: Newman Press. 1971). p. 15.
6. Robert B.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New York: Paulist Press.1975). p. 50.
7. Charles Hartahome.“Philosophical and Religious Uses of God”,Process Theology, Ewert Cousins(ed.) (New York: Newman Press. 1971). pp. 101∼117
8. W. N. Pittenger.“Process Thought : A Contemporary Trend in Theology”, Process Theology. p. 27.
9. Ibid.. p. 15.
10. Bernard M. Loom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Method of Empirical Analysis in the Philosophy of A. N. Whitehead”(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1942).
11.예를 들어, 캅은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이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한 것,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냐고 외친 것 등과 같은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p. 142.
12. Ronald Nash(ed). Prdcess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pp. 13, 39, 314.
13. 모든 과정신학자들이 양극적인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트숀, 오그덴 등은 그것을 수용했으나 캅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거부했다.
14. Kenneth Surin.“Process Theology).”David F. Ford. The Modern Theologians. vol.Ⅱ(Oxford:Basil Blackwell Ltd..1989). p. 105.
15. Cousins. Process Theology, p. 15.
16. John B. Cobb, 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1965) .pp. 188.
17. John B. Cobb. Jr. and David R. Griffin Process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76). p. 47.
18. Cousins. Process Theology, p. 14. Surin.“Process Theology.” p. 106.
19. Cousins. Process Theology, pp. 14∼15. 101 ff. 119 ff 하트숀은 선생과 학생의 유비에 의해, 그리고 오그덴은 자아와 몸의 유비에 의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했다.
20. John B. Cobb. Jr., 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ance. 이기춘(편역)「과정신학과 목회신학」(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1983). p. 61.
2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New York:Macmillan. 1969). p. 408
22. Nash. Process Theology, pp. 41, 145.
23. Charles Hartahoyne, Man′s Vision of God and the Logic of Theism(Chicago:Willets, Gark, & Co.. 1941). p. 194. Nash. Process Theology, p. 147. 참조할 것.
24.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대해서는 Willia L. Craig의 논문“Creatio ex nihilo”를 참조할 것.Nash. Process Theology, pp. 145∼172.
25. W. Norman Pittenger.“Bernard E. Meland . Process Thought and the Significance .”Cousins. Process Theology, p. 208.
26.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Westminster, 1975), p. 170.
27. Pittenger, p. 210.
28. Ibid., p. 213.
29. Nash. Process Theology, 서론을 참조할 것.
30. Surin.“Process Theology,”p. 109.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Herbert MoCabe. God Matters, pp. 39∼51. Richard E. Creel, Divine Impasilbility, pp. 140∼158을 참조할 것.
31. Clark H. Pinnock,“Between Classical and Process Theism.”Nash, Process Theology, p. 318.
32.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 p. 51.
33. Nash, Process Theology, p. 22.
*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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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再臨) second coming



재림(再臨) second coming

재림(再臨, Second Coming, Second Advent, Parousia)

기독교에서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또다시 내림(來臨)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
예수의 다시 오심, 또는 예수의 두 번째 오심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재림이라는 용어의 원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영어로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하며 '도착(到着)' 또는 '내방(來訪)'의 뜻이다.
현재 그리스어에서는 실질적인 뜻으로 쓰이지 않지만 영어에서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하게 인식되어 있다.

재림에 대한 근거는 마태오복음과 여러 서신서에서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가르친 내용이다.
특별히 초대교회 시대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림의 시기나 양상(樣相), 그리고 기대의 강약에 관해서는 똑같지 않았으나,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적·윤리적 준비를 해야 한다는 확신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마태오복음 24장에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방식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원시 교회에 있어서는 재림의 희망도 그 지연으로 차츰 엷어지고, 이것은 다음 시대의 교회의 제도화, 조직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재림의 절박성을 강조하고 열광적으로 이를 기대하는 가르침이나 운동은 기독교 사상이 가끔씩 나타난다.

성경 속에서의 언급

이 부분의 본문은 마라나타입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신 뒤에 그분께서 그들이 보는 동안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이 그분을 받아들여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더라. 그분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똑바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라, 흰옷 입은 두 남자가 그들 곁에 서며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 사도행전 1장 9~11절

And when he had spoken these things, while they behold, he was taken up; and a cloud received him out of their sight. And while they looked stedfastly toward heaven as he went up, behold, two men stood by them in white apparel; Which also said, Ye men of Galilee, why stand ye gazing up into heaven?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shall so come in like manner as ye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 Acts 1:9~11

재림이 늦어짐에 대한 성경 속에서의 언급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베드로후서 3장 4~10절 (개역개정)

They will say, "Where is this 'coming' he promised? Ever since our fathers died, everything goes on as it has since the beginning of creation." But they deliberately forget that long ago by God's word the heavens existed and the earth was formed out of water and by water. By these waters also the world of that time was deluged and destroyed. By the same word the present heavens and earth are reserved for fire, being kept for the day of judgment and destruction of ungodly men.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Bu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The heavens will disappear with a roar; the elements will be destroyed by fire, and the earth and everything in it will be laid bare.

— 2 Peter 3:4~10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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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과 삶의 태도(마가복음 13:24-37)

성경에 재림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재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유스티노스(Ἰουστῖνος ὁ μάρτυς, Justinus Martyr. 약 100년 – 약 165년)라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변증가, 순교자, 신학자, 겸 철학자였다.

초림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초림이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초림하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모두 191개나 나온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재림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께서 직접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요14:3; 마24:30; 마26:64).
구약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건을 동시에 말씀하시고 있어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욥 19:25, 26; 단 7:13, 14; 슥14:4; 말 3:1-2 등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300회 이상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림에 대한 기록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 전체 구절 가운데 25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재림에 관한 언급이 없는 책은 요한2서, 3서, 빌레몬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뿐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면 신약의 주제는 영광 중에 재림하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약속 있는 예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흐르고 있는 메시아사상은 신약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와서 재림하실 예수님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신천신지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재림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야고보도 말하기를, “너희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고 했습니다.
성경을 마감하면서 계시록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림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26)”

Ⅰ. 재림의 확실성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마 16:27) 공회 앞에서 선언하셨고(마 26:64)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요14:1-3) 그리고 천사가 분명히 증명하였고(행 1:11)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살전 4:14)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에게 기대와 환희, 기쁨과 위로, 소망을 줍니다.

1.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24-25)
이미 5절 이하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 재림 전에 자연 재해와 복음의 세계적 전파, 이스라엘의 회심, 성도의 대배교와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바로 대환난 후라고 말씀합니다(24). 환난이 끝난 후입니다. 해가 어두어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합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있는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세상은 어두움에 휩 쌓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권능”이란 우주를 유지하고 있는 인력과 같이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체들이 위치를 잃어버립니다. 태양, 달, 별들이 제 위치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대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예언을 보면 것인가 역사 속에서 나타날 현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13:10; 암3:15 계8:12; 벧후3:10; 사34:9.) 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계 8:12)”
이사야는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 13:10)”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역사의 종말 때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2. 어떻게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까?(26)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초림 할 때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은 신적인 존재로서 영광스런 위엄을 갖추고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당한 예수님의 초림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리 신적 권능과 영광스럽게 오신다는 것입니다(행1:11; 살후1:7-10; 2:8 계1:7; 19:11-16) 초림 때 동방박사, 목자 등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 주었으나 재림은 모든 인류가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슥12:10 계1:7; 행 1:10-11) 초림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으로, 누울 곳이 없어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오셨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영적 재림이 아니라 신자나 비신자나 모두 볼 수 있도록 인격적이며 가시적으로 재림합니다. 승천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육체적 형태를 가지고 재림하십니다. 심판의 주(主)로 만왕의 왕으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천군천사의 옹위를 받으며 능력과 영광과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각인의 눈이 볼 수 있입니다(마 24:30, 26:64, 행 1:11, 딛 2:13, 계 1:7). 하늘의 구름이 그의 마차가 될 것이며(마 24:30), 천사들은 그의 호위병이며(살후 1:7), 천 사장들은 그의 전령관이 되며(살전 4:16),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런 수행원이 될 것입니다(살전 3:13, 살후 1:10).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의 약속대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이 역사속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갈등도 없는 새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무엇을 합니까?(27)
천사들을 보내어 세계 곳곳에서 택한 자를 모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한 충성스러운 종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 헌신된 성도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마16 :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계22 :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게 됩니다. (벧전1:5) 영광스러운 주의 몸과 같이 됩니다(빌3:21).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4:8; 벧전5:4)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단7:27).

악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악인은 영벌에 처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20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 불붙은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계 20:13) 받는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재림하신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집니다. 많은 사람이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으로 나올 때에 주님께서는 오른편의 양과 왼편에 염소를 분명하게 나누실것입니다(마 2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를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계 20:15)

Ⅱ.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
그러면 우리는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28-29절에서는 “배워 알라”는 것입니다. 33절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1.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징조를 통하여 배우고 알아야 하겠습니다(28-29).
28절을 보십시오. 28절을 보십시오. 배우고 알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확실성에 대하여,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재림에 대하여 무관하게 살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익과 편리 쾌락의 원리에 빠져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낙심하고, 시험들고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산을 넘어가는데 산 너머에 황금이 있다는 사실과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고 가는 사람은 발걸음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눈빛이 다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알고 사는 사람과 재림이 있다고 알고 사는 사람은 삶의 태도와 질과, 방법과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비유입니까? 낙엽수인 무화과나무로 계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록수로는 계절을 잘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낙엽수인 무화과나무는 그 잎사귀를 보면 계절을 잘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무화과나무는 잎이 다 떨어집니다. 가지는 마르게 됩니다. 그런데 봄이 되어 마른 무화과 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도 예수님께서 이미 5절부터 23절까지 징조가 나타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고 살고,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고 고달파도 예수님 만나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잘했다 칭찬을 받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힘 있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국일보에서 한 기자가 가수 심수봉과 인터뷰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에 재림을 알기 전에는 불교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본명이 심민경이라고 합니다. 아는 스님에게 이름을 지었는데 수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도를 이룬다는 굉장히 센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10.26사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방송금지, 출국금지 등 지독한 고통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라 남자를 통해 그 사랑을 채우려고 하다보니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두 차례나 결혼에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재림을 아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기자가“심수봉 하면 한(恨)이고, 그 처절한 슬픔이 감동을 줬던 건데, 너무 마음의 평안을 찾아버리면 우리로선 좀 곤란하지 않나 싶은데요.”라고 말하자 "안 그래요.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고통을 노래할 수 있으니까요. 완벽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어요. 음악은 그런 폭까지도 아울러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다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생을 살고 싶으세요?”“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영원한 곳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남은 생애를 즐겁게,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아는 삶과 재림의 삶을 모르는 삶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늘 세상의 징조들을 보면서 역사는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조금만 자연으로부터 배워도 삶은 겸손해지고 정결해 집니다. 요즈음 원유가 폭등으로 신음이 깊습니다. 석유 문명의 종말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소비되는 모든 것은 다 끝날이 있습니다. 태양도, 우주도, 지상의 자원도 언젠가 다 끝이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으로 모든 문명은 끝이 날 것입니다. 세계는 창세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주와 만물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며 새 하늘과 새땅으로(계21:1-2) 그 옷을 갈아입는 날이 옵니다. 그 때 역사는 하나님앞에 심판을 받게되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로 회복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롬8:19-25).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생생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재림에 대한 생생한 기대를 상실하면 신앙인의 삶은 심각한 영적 질병에 신음하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을 알면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집니다. 삶의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고 사명감이 넘칩니다.

2.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유혹에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30-33a).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niv에서는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at time will come. (막 13:33)”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강조하신 교훈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이 때의 실수는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재림에 대하여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재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림은 종교적 허구이며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하늘 어디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 오냐는 것입니다. 단지 과학문명 전에 일어난 신화적 사고에서 기록된 신앙 고백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상업성을 쫓는 언론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성을 신처럼 신뢰하는 이성만능주의 자들이 우리를 비난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중에서도 ‘실현된 종말론’을 말합니다. 재림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상징적인 종말론’을 말합니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재림은 실제적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인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재림설’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령 강림으로 오순절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순절에 성령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재림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을 때 성도의 마음 속에 이미 재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영으로 같이 계시기 때문에 따로 재림하시는 일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역사 속에 수없이 이런 미혹은 나타났습니다. 근세에 들어와서 16세기의 소시너스는 죽은 다음에 인간의 영혼이 무의식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며, 18세기의 스웨덴버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부정하고 영적인 재림만을 주장했습니다. 학문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재림도 부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하셨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시편 102편 26절과 27절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40장 8절의 말씀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날은, 그때는 꼭 오고야 맙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세대가 지나기 전(30)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은 5-23절까지 예언한 말씀입니다. 세대라는 것은 용례적으로 한 인간의 생존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지진과 전쟁, 대환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예언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 말씀을 보면 세대라는 말은 그날과 그 때로 연결됩니다. 바로 재림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적 원근 통시법입니다. 중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시점보다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재림에 대한 예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둘째, 재림에 대하여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 오십년 동안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나 세상의 구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1,100명 이상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재림의 날짜를 정해놓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제7일 재림 안식교의 창시자 밀러는 1843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다가 맞지 않자 1944년 10월 22일로 수정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14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 서기 2000년, 재세례파들이 1533 또는 1734년, 나운몽은 1980년대가 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미 선교회 이장림은 1992년 10월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성부는 예정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보존하시는 직무적 차이를 표현한 것 그날과 그 때를 예정하시는 것은 성부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미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3.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33b-37)

예수님은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를 어떻게 가지라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확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욥19 : 25). 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벧후3 : 12; 딤후4 : 8).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합니다(약5 : 7: 고전1 : 7). 기도하라(계22 : 20)고 말씀합니다. 예비하라고(마24 : 44)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예수님이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34절, 35절, 37절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졸음을 쫓아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파수꾼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절제와 긴장을 말합니다. 깨어 있는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청지기와 문지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종으로 청지기와 문지기가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다고 하고 각각 사무를 맡겼다는 것을 보아 다릅니다. 한 사람이 종들에게 모든 권한과 사무를 맡겨놓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집을 비우면서 종들을 불러 관리권한을 주고 각 사람에게 임무를 맡겼습니다.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집을 지키는 자이기에 당연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물 때인지(오후6-9), 밤중(9-자정) 인지, 닭 울 때(자정-3) 인지, 새벽(3-6) 인지 모릅니다. 오는 시간은 주인의 마음입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 졸고 있든지 자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의 책망을 받습니다. 문지기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이 엄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날 홀연히 오실 것입니다. 맡겨준 권한을 가지고 청지기 사역을 잘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문지기는 문지기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서 노아를 통하여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깨어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세상의 향락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홍수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과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파수꾼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까지 주인이 맡긴 권한을 잘 활용하여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어차피 무너질 것이라고 삶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을 내 욕망의 충족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향락에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재림으로 진정한 희락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목표가 되어 짐승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하늘과 새땅은 각족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재림의 때를 생각하며 부를 생산하되 골고루 나누며 깨끗한 삶과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를 깨우는 새벽 탉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며 충성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영생과 상급의 소망으로 힘차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게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며 병을 고치고 복음을 선포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이 권세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딤후 4:1,2). 그래서 예수님 재림하는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다섯 달란트 맡은 자처럼 잘했다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깨어 있을 자는 네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입니다.

정종철 집사의 간증

그는 어릴 적부터 개그맨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심형래 집사의 인기를 보며 '꼭 심형래 씨 같은 개그맨이 돼야지'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를 타는 등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안방에서 '하나님. 우리 아들 종철이 붙잡아 주세요. 붙잡아 주세요' 울며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함께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2003년도에는 '옥동자' 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기는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답니다.
교회도 가기 싫었고 목사님 말씀 듣는 것은 더 내키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잊혀지기 시작했답니다.
너무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삶은 변했다고 합니다.
2006년도에는 '마빡이'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 을 받았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고 합니다.
개그맨들이 그를 보면 '정 목사'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의 소망은 작은 교회들을 위한 수양관을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돈이 없어서 수련회를 못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교회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수양관을 짓고 싶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간접적인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개그맨들이 저보고 '정 목사' 라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천인 줄 아는데 어떻게 밖에서 허튼 짓을 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이기에 실수는 하지요.
그래서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영혼에 도둑이 들기 쉽습니다.
재림을 부정하는 사상이 우리를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재림은 성경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예언입니다.
재림은 예수님의 초림처럼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재림과 동시에 성도에게는 영생, 악인에게는 영원한 사망이 선고됩니다.
초대 교회 신앙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거리에서나 어떤 집에서 만나면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들의 주님, 다시 오시옵소서"하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보면서 그 재림을 확실히 알고, 미혹을 주의하고 깨어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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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최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포가 아닌 축복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미 모든 것들의 온전한 구속과 영광을 위해 다시 오시는 때에 대해 말씀하셨다"면서 "그분이 이 땅에 처음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됐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소식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고의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진 이 땅의 모든 것을 회복하고 바르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처음 만드신 대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크리스천투데이가 소개한 종말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이다.

계시록 22장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시록 1장 7절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야고보서 5장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골로새서 3장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타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사도행전 1장 10~11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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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요 5:39)와 그의 강림이다. 성경은 300회 이상 그의 강림을 약속하고 있다. 성도의 신앙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구약 성도의 차이가 없다.

아벨, 에녹, 아브라함, 다윗 같은 구약 성도들의 염원 역시 그리스도의 강림이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강림을 열망했던 구약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칠 주제도 언제나 그리스도였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목적도 그들로 하여금 ‘그것의 성취자’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짐승 제사’를 드리게 한 목적도 그것의 ‘실체’이며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믿음의 선진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환영했던(히 11:13)” 것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의 강림이었다. 그 기다림의 끝은 이러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갈 4:4).”

신약시대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이 신앙의 대주제였다. 사도들이 수없이 그의 재림을 언약했다(살전 4:16, 히 10:37, 계 1:7). 지상과의 하직인 그리스도 승천 때는 천사의 입을 빌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 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직접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요14:3)”고 했다.

◈재림 신앙인들의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

그런데 재림 약속이 있은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주의 재림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해 ‘재림 신앙’을 포기했고(벧후 3:3-5), 어떤 이들은 21세기인 지금도 흔들림 없이 재림 신앙을 견지한다(계 22:20).

둘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것은 그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수평적인(horizontal)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을 가졌느냐,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직적인(vertical)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을 가졌느냐에서 갈려진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 짓는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 개념으로는 2천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할 수 없다. 크로노스의 2천년은 너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2천년이 지났는데 아직도?’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40년 후, 곧 주후 70년 쯤부터 여기저기서 기다림에 대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며, ’시한부(時限附) 종말론‘, ’상징적 재림론‘ 혹은 ’재림 부정론‘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모두 지리한 ’크로노스‘ 개념에 매몰된 결과이다.

반면 수직적인 ’카이로스(καιρός)‘ 개념은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소위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하나님의 시간‘으로써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를 공유함으로서이다.

이러한 수직적 ‘카이로스(καιρός)’에는 당연히 ‘더디다 빠르다’는 개념도, ‘조급하다 느긋하다’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8-9)”는 2천 년 전의 말씀을 21세기인 지금 받아들이는데도 어려움이 없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 3:8)”고 한 말씀 역시 그가 카이로스의 ‘수직적(vertical) 시간’ 개념을 공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렸던 아브라함도, 지금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유한된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 시간을 아는가?

‘영생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유한된 시공간 안에 영원(eternity)이 들어오신 것’이고, 이는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를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개인이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날 때 구현된다. 이는 단지 영생을 약속받는 것(요 3:36; 5:24; 6;47, 54)을 넘어 그것의 체험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물론 죄인의 카이로스 경험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는, 단지 희미한 형상적 경험(imagic experience)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정될 수 없는 확실성을 담보한다.

다음 구절은 ‘영생’을 샘물에 비유하는 말씀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everlasting life)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칭의의 원리’와 함께 ‘영생의 경험적인 측면’을 함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 체험은 성도들로 하여금 유한된 시간 개념을 극복하고, 2천년이라는 시간차를 능히 뛰어넘어 재림 신앙을 견지하도록 해 준다.

그렇다고 성도가 항상 ‘카이로스’를 견지해 재림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약 5:8)”,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 3:9)”는 권면이 필요할 만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혹 때론 대적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3)”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며 미혹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일시적으로 재림 신앙이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내외적인 도전들이 있음에도,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각성시킴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며 재림 신앙을 붙들도록 해 준다.

◈재림 신앙은 사랑의 기다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생면부지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와 연합하여(엡 5:23-25) 부부애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소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시는(계 1:4)”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적 체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이미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의 오심을 예언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재림 신앙은 ‘미증유(未曾有)의 존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의 발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나님을 찾고, 성령을 받았기에 성령을 갈망하고, 의에 배불렀기에 의에 주려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내주해 있지 않은 자들은 그가 누군지도, 그의 사랑도 모른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오심에도 관심이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재림 신앙은 은혜에 은혜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려 함이다.

영으로만 하던 사랑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고전 13:12, 요일 3:2) 하려 함이요, 기왕의 사랑을 더욱 절정화(絶頂化)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은 ‘연모(戀慕)의 기다림’이다.

성경이 그의 재림일(再臨日)을 ‘간절히 사모할 날(벧후 3:12)’이요, ‘복스러운 소망의 날(딛 2:13)’이라 함도, 그날은 오매불망 사랑하는 이를 대면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누가 그들에게 ‘그가 오신다’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미 그들 안에 내주해 계신, 익히 아는 분이 오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가 늦게 오시더라도 안달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그들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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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 (The Second Coming of Christ)

1. 재림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신약에 30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그의 펀지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적어도 50번쯤 기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록은 그의 초림에 대한 기록 보다 팔배나 더 많

다고 한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은 예수 그리스

도의 재림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 재림론이야 말로 신약에서 찾아 볼 수 있

는 가장 중요한 교리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육체를 입고 오시는 인격적인 것이다. (요 14:3,

행 1:10,11 살전 4:16, 계 1:7. 22: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문자 그대로의

재림이다. (행 1:10. 살전 4:16,17. 계 1:7. 슥 14: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볼 수 있다. (히 9:28, 빌 3:20. 슥 12:1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광스럽다

(마 16:27. 살후 1:7-9. 골 3:4. 마 25:31).

어떤 사람들은 에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문자 그대로의 인격적인 재림을 부인하

기 위하여 그것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교묘히 해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때문이다. 죽을 때에 우리들은 그리스도 앞으

로 간다. 그러나 재림하실때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오신다. 만일 죽음으로 그리

스도의 재림을 대치시킬 수 있다면 어떤 성경 구절들은 (마 16:28. 빌 3:20)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들의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주장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고께서 AD 70년에 예루살렘성이 멸망될 때

에 재림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림시에 있을 여러 가지 현상 즉 죽은 자들

이 부활하는 일과 살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에 휴거되는 일이 위에서 언급한 그

어느 경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3.재림의 때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여 예언하였다. 그

러나 모든 예언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시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마 24:36-42,

막 13:21,2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모르게 한 것은 매

우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죽을 날자를 아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자기의 죽을 날자를 만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날자를 알므로서 도리어 그의 일상 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

와 같이 한 번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

에" 힘써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

를 아는 일을 우리들에게 허용치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는

우리들 중에 아무에게도 계시된 바,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

은 그날이 갑자기 임할 것과 (고전 15:52. 마 24:27) 그날이 언제 임할지 기대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벧후 3:4. 마 24:48-51. 계 16:15) 주님께서 그의

종들을 향하여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재림시에 관하여 주신 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일

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된 후에 유대인들은 만방에 흩

어져 방랑객이 될것이다. 저들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만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모으실 때 즉 이 세상의 끝날이 올 때까지 이방인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다

(눅 21:24).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실천 할

것이다 (눅 19:11-27). 그런데 이 사업의 완성은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써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마 24:1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 된다고 생

각하여 때때로 교회는 왜 예수 그리수도께서 출현 하시지 않는가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눅 18:1-8). 이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신랑이 더디온다고 생각하여

준비에 소홀할 것이다 (마 25:1-11). 불 신실한 교역자들은 마음 속으로 "주인

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며 타락하게 될 것이다 (눅 12:45). 그러나 "오랜 후

에" (마 25:19) "밤중에" (마 25:6)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그

시간에 (마 24:36,42,50) 주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서 그의 종들을 불러 모아 놓

고 저들의 행의대로 심판할 것이다(마 25:19. 고후 5:10)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

었으나 저들이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고 거부하고 세상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눅 17:28,29) 전혀 세계의 파멸적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살고 있을 때에 인자는 영광과 권세를 갖고 재림하여 만백성을 심판하고 다스릴

것이다 (마 25:31-46).

4. 재림의 징조

육적 불안과 전쟁과 경제적 곤런과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배신과 불신과 일반

적 공포와 난국 등으로 특징지워질 환란의 과도기가 지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이 땅 위에 천년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활란의 후기를 가리켜 특별히 "대환란기" 라고 하는데 이 동안에 전 세계는 완

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 기독교적인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

을 믿는 신자들은 몹시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고난과 박해

를 받게 될 것이다.

5. 재림의 목적

(a)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파딩톤(Paedington)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여 이 세상에 삼십 여년 동안 계시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던 것 처럼 그가 재림하게 되면 또한 여러 가지 일을 하실 것이다.
초림시에 그는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출생함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였고 또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나타났으며 갈보리 언덕에서는 구세주로서 나타나셨다.
재림시에 그는 먼저 성도들에게 비밀리에 나타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저들을 데리고 가실 것이다.(마 24:40,41)"

이와 같은 예수의 출현을 휴거 (rapture)라고 칭한다.
이 휴거(携擧)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파로시아(Parousia)라고 하는데 그뜻은 출현(appearing) 또는 임재(presence) 또는 도착(arrival)을 뜻한다. 이 때에 신자들은 행한대로 심판을 받고 봉사의 보상으로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마25:14-30)

성도들이 휴거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움을 나누는 기간이 끝나게 되면 지상의 대환란도 끝나게 될 것이다.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메시아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b)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 나라의 백상인 교회의 머리되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도 된다.
메시아로서 그는 저들을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여 사방 팔방으로부터 흩어진 저들을 불러모아 저들의 고토를 회복하여 나라를 세워 저들을 다스릴 것이다.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출현하여 나라를 다스릴 것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바 있다.

(c) 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미 적 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요1서 4:3, 2:18, 2:22).
그러나 마지막에 적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날 것이다 (살후 2:3) 말세에 그가 옛 세상에서 일어나(계 13:1) 전 세계를 다스릴 부활된 로마 제국을 통치할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단 7:8,25) 경재적으로 (단 8:25. 계 13:16,17) 종교적으로 (계 17:1-5) 큰 권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완전히 기독교를 멸망시키려고 모든 신자들을 몹시 박해 할 것이다(단 7:25, 8:24. 계 13,7:15).
인간은 어떤 종류의 종교이든지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인간의 정신과 국가의 우월성에 기초를 둔 종교를 세울 것이다. 그는 국가의 화신으로서 자신을 예배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 할 것이며 또한 제사장을 임의로 임명하여 그에 대한 예배를 강요케 할 것이다(살후 2:9,10. 계 13;12-15).

적 그리스도는 극단적으로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국가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력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즉 인간의 양심까지도 국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칠 것이다. 국

가의 권력 보다 더 높은 권력이나 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율법도 폐하

고 국가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국가를 예배으이 대상으로 섬기는 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다니엘서 3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느브갓네살 왕은 자기가 건설한 그의 대제국을 자랑으로 삼았

다. "이 큰 바베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단 4:30) 그는 인간의 능력과 정치적

권력에 어찌나 현혹되었든지 그의 눈에는 국가가 하나의 신(神)으로 보였던 것

이다. 국가의 상징을 숭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 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들에

게 국가의 영광에 대하여 인상을 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금으로

만든 큰 신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신상에 절하도록 명했던 것이

다. 만일 이 명령을 어기면 그 형벌로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신상은

어떤 지방의 신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상징한 것이었다. 이 신상을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신론자 내지 반역자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내면서 느브갓네살 왕은 백성들에게 이

렇게 말하였다. "누가 너희에게 아름다운 도시와 좋은 도로와 우아한 정원을 주

었느냐? 바로 국가가 너희에게 준 것이다. 누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며 일터

를 주며 너희들의 학교를 지어주었으며 또 너희 사원(寺院)들을 지어 주었느냐?

바로 국가가 그렇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 국가란 하나님과 같이 강한 세력을 갖

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참으로 너희들은 너희들의 정부 보다 더 위대한 신(神)을

구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대 바벨론의 상징 앞에 절하라!" 만일 하아님께서

그의 불경스러운 교만을 꺾지 않았던들 느브갓네살 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의

자기를 숭배할 것을 끝끝내 요구했을 것이다(단 4:28-37). 히브리 세 청년이

(단 3장)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았던 것과

꼭 같이 제일세기의 기독교 신자들이 씨자 (Ceasar) 의 신상을 신(神)으로 섬기

기를 거부함으로써 큰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로마 제국 안에는 온갖 종교에게

자유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씨자의 신상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숭배한다는

조건 하에서 모든 종교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까닭에 주도 박해를 받는 것 보다 씨자를 주로 시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저들은 국가를 신(神)으로써 섬기지는 않

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불란서 혁명을 통하여 이와 같은 정책의 또하나 본보기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추방되고 국가를 신(神)으로 모시게 되었다. 어

떤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 국가가 말할 때에 교회는 할말이 없

는 것이다."

즉 국가에 대한 충성울 종교의 지위 보다 더 높은데 올려 놓은 것이다. 입법

자들은 모든 촌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붙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국가를 위해서 출생하여 살다가 죽는 것이다." 시민의 세례와

시민의 결혼과 시민의 장례를 위한 의식이 마련되었었다. 국가라는 종교도 찬

송과 기도와 금식과 축제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신약 성경은 인간의 정부는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자기의 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다

해야하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각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데 있어서

자기가 맡은 바,직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각기 활동하는

영역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받고 가이사는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받아 드린다.

그러나 가끔 가이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까지 요구할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가 조화를 잃어버리고 갈등을 일으키는 결과를 종종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 간에 알력이 극도에 달할 날이 오리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인류의 최후의 문명은 반신적 문명이 될 것이며 적 그리스도가 그 국가의 수반

이 되어 전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법보다 우월한 세계 정부

와 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神으로 섬기도록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마침내는 반 기독교적 세계 정부를 파괴시키고 승리하여 하나

님의 나라를 건설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단2:34,35,44,계11:15,19:11-21)

(d) 만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지상의 모든 사라믈은 전복될 것이며 만백성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사람들은 왕중 왕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단 2:44,미4:1,사49:22,23, 렘23:5. 눅 1:32,슥14:9.사24:23,계11:15)
그리스도께서는 만백성을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며 이 지상에서 모든 불의와 압박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한 후에 천년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시2:7-9,시72,사11:1-9 계20:6)

"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4)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는 세 가지 면이 있다. 즉 예언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지상에서 보낸 그의 공 생애 기간에 성취되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때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의 재림시에 시에 시작하여 천년 왕국 시대를 통하여 내내 계속될 것이다. 천년 왕국 시대가 끝나면 그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합시키는 일을 완성하여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과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자들을 한데 연합시켜 하나의 큰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의 가장이 되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엡1:10.3: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써 여전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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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Jesus)


예수(Jesu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백팔번뇌(百八煩惱) : 쉼(Rest)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신 앞에 나오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불교는 백팔번뇌를 갖고 석가모니에게 나와야 합니다.

백팔번뇌의 내용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서 지내야 하는 번뇌
만나고 샆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며 살아가야 하는 번뇌

기독교는 무거운 짐을 갖고 나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2:2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백팔번뇌(百八煩惱)는 불교에서 나온 말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108가지 번뇌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번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기복과 감정의 경험으로 나타나며, 이 성어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세계와 마음의 상태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유래를 살펴보면, 백팔번뇌는 불교에서 나온 개념으로, 육관(六官) 즉 귀(耳), 눈(目), 입(口), 코(鼻), 마음(心), 몸(體)이 서로 작용해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번뇌들은 총 18가지로, 좋고(好), 나쁘고(惡), 좋지도 싫지도 않은(不好不惡) 평등(平等)의 3가지 인식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 성어에서의 18가지 번뇌에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고려하면 18 × 6 = 108가 되어 백팔번뇌라고 합니다.

한자풀이

이제 '백팔번뇌(百八煩惱)'의 각 한자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 百 : 일백 백
  • 八 : 여덟 팔
  • 煩 : 번거로울 번
  • 惱 : 번뇌할 뇌

위의 한자들을 이해하고 조합하여 백팔번뇌(百八煩惱)의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백'은 일백을, '팔'은 여덟을, '번'은 번거로운 것을, 그리고 '뇌'는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합쳐진 '백팔번뇌'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다양한 번뇌와 감정 상태를 잘 표현해 줍니다. 

실생활 예시

  1. 그녀는 진로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백팔번뇌를 겪으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지 고민하였다.
  2. 출근길에 음악을 들으면서 일상의 백팔번뇌를 잠시 잊어 누운다.
  3. 연인 사이에서도 때로 맞추기 어려운 성격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백팔번뇌를 느끼며 이 관계를 이어갔다.
  4. 영화의 주인공은 가족 간의 갈등과 이해관계로 인해 백팔번뇌를 겪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곤 한다.
  5.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가련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백팔번뇌를 이겨내며 삶의 전환점을 찾아낸다.
  6. 뉴스에서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백팔번뇌를 타개하려는 모습을 보며, 국가를 이끄는 것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7. 옛날 일본의 문학 작품 중 하나에서는 주인공이 적철명월(적절한 때에)을 기다리며 혼란에 휩싸인 정치 세력 속에서 백팔번뇌를 겪게 된다.
  8. 시에서 시인은 화려한 술집에서의 인생을 묘사하며, 백팔번뇌를 느끼며도 참아낸다.
  9.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와 부모님의 기대를 동시에 충족하는 것에 대한 백팔번뇌를 겪었다.
  10. 하루 종일 일을 보며 사람들은 백팔번뇌 속에 취해 파도 치는 바다 먼방에 있는 평온한 바다가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 어느 스님을 만났을 때 받은 질문에서
- 목사님,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불교에는 용서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 밖에서 의심을 갖고 계속적인 질문만 던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은 질문이며 복음은 해답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아들이란 개념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개념은 아들이란 반드시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의해서 얻은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하나님과 마리아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마리아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리아의 몸에 생명을 주어 그 생명이 남자의 씨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성령) + 마리의 몸 = 예수

예수님은 사람들의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혼하셔서 아들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셔서 그녀와 함께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대제사장이 요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이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한 대로 그러하다고” 답하셨습니다.

또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태복음 26:64)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며 고소하였습니다(마 26:65-66).
후에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것이 신성모독 죄로 여겨지며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아야만 합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구로 무엇을 뜻하시는지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질이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 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 24장 15절을 따라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이(그 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6장 71절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에서 유다를 “멸망의 자식” 이라고 부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멸망”이란 말은 “파괴, 파멸, 폐기”를 뜻합니다.
유다가 말 그대로 파멸, 파괴, 그리고 폐기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유다의 삶의 정체였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멸망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____________________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이신가?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으면서 왜 또 기도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지, 이 부분은 전에 잘 이해가 안 되고 고민스러웠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어떻게 정확히 알게 되었는지 공유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여기에서 확실한 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딸과 함께 성경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8~10) 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엄마, 목사와 장로님은 설교할 때 다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이라고 하셨잖아요. 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도 이 문제를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때는 딸에게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번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알고 싶어 목사와 장로님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갈 수 있고 주님을 따르는 게 확실한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제가 몇 마디 더 물어보면 그들은 말을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확실한 답을 듣지 못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에 대해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고 이 문제는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저는 여러 차례 기도드리며 주님께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구했으며, 주 안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서 해답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왕 자매와 성경 몇 구절을 찾아 읽다가 오랫동안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 자신인지,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실 때, 성령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였고,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아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으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요한복음 14장 8절 말씀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 그 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여기에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부자 관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단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어서 왕 자매가 나에게 두 대목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예수 안에 있는 영과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모두 하나이다. 성령이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리며 일곱 배 강화된 영이자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의 영은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홍수로 세상을 멸할 수도 있으며, 전 인류를 속량할 수도 있고, 더욱이 전 인류를 정복하거나 멸할 수도 있다. 이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혼자서 하는 사역이지 그 어떤 위격의 신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여호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전능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는 주이고, 그리스도이며, 인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으며, 전 우주 위에도 있고 만인 가운데도 있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관자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 사역은 하나님의 영이 혼자 행한 것이다. 하늘에서 행한 사역이든지 육신으로 행한 사역이든지 모두 그의 고유한 영이 행한 것이다. 하늘의 피조물이든지 땅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의 전능한 손에 달려 있으며,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므로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가 하늘에서 영일지라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사람 가운데서 육신으로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다….』

말씀을 읽은 후,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경륜을 시작하셨어요.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율법을 반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이러한 사역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영의 방식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인류가 점점 심하게 타락하고 율법에 어긋나 여호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자꾸 하게 되자, 사람들은 율법을 범한 죄로 정죄받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류의 필요에 따라,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는데, 사실상,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셨고,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나타내시고,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동시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어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재웠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등 완전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된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왕 자매의 교제를 듣고 나니 마음속이 갑자기 밝아지며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인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왕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신 거죠?”

왕 자매가 말했습니다. “우리 같이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을 갖추었음).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위치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병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위치에 섰을 뿐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자로 된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음성을 발하시든, 혹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시든, 예수님의 본질은 신성이지 인성이 아니예요. 예수님 역시 육신의 형상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의혹이 생기는 것은 주요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알지 못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글귀의 의미로만 해석을 해서 생긴 것입니다.”

자매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비로소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신 것이고 주님이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하고, 또한 인류에게 율법을 반포하신 이 땅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피조물의 각도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마음속이 환해졌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나의 깨우침을 딸에게 전해 주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심오한 비밀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성육신에 관한 진리의 내용을 추천드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아직 고민스럽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소통의 창을 통해 연락주십시오!


[신학 Q&A] 예수님이 "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의 차이점은 뭐죠?

Q :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A:
1.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이 때에 장로 중에 하나였던 "아리우스"는 당시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설교 중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그릇된 언급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감독 알렉산더의 설교 내용 중에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더 감독을 비난한 장로 아리우스 역시 성자에 대해 옳지 않은 주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 아리우스는 헬라식 이원론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은 직접 관련을 맺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하는 성자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자를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에 있는 존재 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자를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자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창조되신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시로 만들어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으며, 알렉산더 감독은 321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장로 아리우스의 장로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리우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분쟁 조짐까지 보이게 되자 323년 동로마 제국까지 석권한 콘스탄틴 황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이 두 사이를 중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3. 그러자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25년 5월 20일 전체 기독교권을 말라하는 대종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에서 열린 이 회의는 전체 기독교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 편을 지지했던 사람은 니코메디아라는 감독이었으며, 알렉산더를 지지한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습니다. 아다나시우는 이미 "성자의 성육신"에 관한 논문을 통해 당시 신학자로 크게 인정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중간 입장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였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중간 입장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가이사랴 교회의 세례 문답을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도록 "기본 교리"로 제시했습니다. 이 교리 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말씀, 하나님 중의 하나님....독생자, 하나님에 의해 처음 창조되신 분, 성부 하나님에 의해 잉태되신 분....등"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4. 그러나 이러한 고백문은 당시에 일어났던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논쟁에 대한 만족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 대표자들은 이 고백문을 아리우스의 논쟁에 답변을 제시할 수 있도록 다시 수정했습니다. 이 때에 수정된 고백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진정한 하나님 중의 진정한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로 나셨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문은 당시에 참석한 모든 교회의 대표자들이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공식 교리로 체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했던 두 명의 감독만은 끝내 이 교리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 두 감독은 파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 여기에서 논쟁이 되었던 문제는 성자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 즉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고 계신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버지와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 을 가진 분으로 표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고백에 대해서 한 발도 양보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때에 교회의 대표자들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만일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회는 본질이 서로 다른 두 분의 신을 믿는 이신론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표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또한 성자의 신성을 양보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중보할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국 니케아 교회 회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 이라는 교리를 공식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후에 몇 차례 논쟁(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3차 에베소 회의)을 거치면서 더욱 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51년에 열린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최후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수용되어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성자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7. 이와 같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1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서 4차례의 전 세계 교회 대표자들의 모여서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전통 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 동안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기독론을 무너뜨리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기독론에 대한 이단은 대부분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첫째는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둘째는 성자께서 참 사람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교리를 부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왜 이사야가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기 600 여년 전에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서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신앙문답: 기독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점이 뭔가요?



Q :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A: 
1.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위격"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318년에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이때에 장로 중에 하나였던 "아리우스"는 당시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설교 중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그릇된 언급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감독 알렉산더의 설교 내용 중에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더 감독을 비난한 장로 아리우스 역시 성자에 대해 옳지 않은 주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 아리우스는 헬라식 이원론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은 직접 관련을 맺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 하는 성자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자를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자를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자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창조되신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시로 만들어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으며, 알렉산더 감독은 321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장로 아리우스의 장로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리우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가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분쟁 조짐까지 보이게 되자 323년 동로마 제국까지 석권한 콘스탄틴 황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이 두 사이를 중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3. 그러자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25년 5월 20일 전체 기독교권을 말라하는 대종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에서 열린 이 회의는 전체 기독교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 편을 지지했던 사람은 니코 메디아라는 감독이었으며, 알렉산더를 지지한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습니다. 아다나 시우는 이미 "성자의 성육신"에 관한 논문을 통해 당시 신학자로 크게 인정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중간 입장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4. 그러나 이러한 고백문은 당시에 일어났던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논쟁에 대한 만족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 대표자들은 이 고백문을 아리우스의 논쟁에 답변을 제시할 수 있도록 다시 수정했습니다. 이때에 수정된 고백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진정한 하나님 중의 진정한 하나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본질로 나셨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문은 당시에 참석한 모든 교회의 대표자들이 동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했던 두 명의 감독만은 끝내 이 교리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 두 감독은 파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 여기에서 논쟁이 되었던 문제는 성자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 즉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고 계신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버지와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진 분으로 표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고백에 대해서 한 발도 양보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때에 교회의 대표자들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만일 성자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회는 본질이 서로 다른 두 분의 신을 믿는 이신론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표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또한 성자의 신성을 양보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중보 할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국 니케아 교회 회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교리를 공식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후에 몇 차례 논쟁(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3차 에베소 회의)을 거치면서 더욱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51년에 열린 제4차 종교회의인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최후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수용되어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 문답을 할 때에 성자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7. 이와 같이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리는 1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서 4차례의 전 세계 교회 대표자들의 모여서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지금까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전통 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동안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기독론을 무너뜨리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기독론에 대한 이단은 대부분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첫째는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둘째는 성자께서 참 사람이라는 것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교리를 부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왜 이사야가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기 60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서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출처:biblenara.com]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 자신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 저는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성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설교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천 년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다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형제자매님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시니 주님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한복음 10:30)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데 왜 주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하신 걸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아버지와 아들로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펼치신 후 율법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지내셨습니다.
당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고 예수님 역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을 본 형제자매님이라면 모두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께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 사역을 하실 때도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에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9~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육신에 실제화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정상적인 인성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어떤 책에 적힌 내용처럼 말입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분은 하나님 영이 실제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실 때 긍휼과 자애의 성품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3:2)와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가르침과 함께 사람이 새롭게 실천해야 할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모두 권능과 능력이 있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 말 한 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시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 중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속성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생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현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

   어쩌면 형제자매님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단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는 모든 사람으로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선상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능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취한 관점이 다른 것이지 위격이 다른 것은 아니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는 단지 피조물의 입장, 다시 말해 사람의 입장에서 부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영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의 신분은 인자이시고 정상적인 인성이 있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먹고 자며,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말투나 호칭으로 기도드렸건 그분의 본질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또한 정상적인 인성과 함께 완전한 신성도 갖추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사역을 하시는 기간에는 말씀을 선포하시거나 이적을 나타내신 것 모두 하나님 영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신분으로 모든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시어 사람에게 진리와 길, 생명을 베풀어 주셨으며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사역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일까

  또 일부 형제자매님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다음 단락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라고 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말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단지 다른 관점으로 그 자신을 증거한 것이고, 하늘에서 영의 관점으로 그가 입은 육신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는 그가 입은 육신이지 하늘에 있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너는 이해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영이 원래 하나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아래로 분리된 것이 아니냐? 사실, 여전히 하나이다. 어쨌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하늘의 영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을 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어떻게 독생자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성육신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단지 하늘과 땅에 있는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사랑하는 아들’은 하나님께서 영의 관점에서 그분이 성육신하시어 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자신을 위해 증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만약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직접 증거하셨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막 접했고 성육신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인자가 바로 하나님 영의 화신이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임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선포하고 역사를 하시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에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께서 현현하셨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고 엘리야이며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을 생각하시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잠시나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생각과도 맞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칭하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으면 그들의 죄는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신 선택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분량과 무지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살피시는 하나님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긴다면 그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역하신 몇 년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끝내신 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누가복음 8: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고린도후서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아들(휘오스)

υἱ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5207

1. 아들.  2. 사람의 남자 자식.  3. 동물의 수컷 새끼
발음 [ hüiŏs ]
관련 성경
자손(마 1:1, 막 12:37, 고후 3:7), 아들(마 1: 21, 행 7:29, 계 12:5), 새끼(마 21:5), 인자(막 14:41), 자녀(눅 20:34,36), 자식(요 17:12), 족 속(행 5:21), 후손(행 13:2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 '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6:28   
구절 개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7:25   
구절 개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히브리서 10:4   
구절 개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요한1서 5:6   
구절 개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히브리서 9:14   
구절 개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1서 1:7   
구절 개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출애굽기 12:13   
구절 개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요한1서 2:2   
구절 개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5:8   
구절 개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히브리서 12:24   
구절 개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에베소서 2:13   
구절 개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히브리서 10:19   
구절 개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요한계시록 19:13   
구절 개념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에베소서 1:7   
구절 개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20   
구절 개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요한복음 6:54   
구절 개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히브리서 10:10   
구절 개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한복음 19:34   
구절 개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1서 3:5   
구절 개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로마서 5:9   
구절 개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레위기 17:11   
구절 개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10:18   
구절 개념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 죄를 깨끗이 씻는 피(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2. 성소에 담대하기 들어가는 피(히브리서 10:19)  영원한 속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3. 피는 하나님의 말씀(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스가랴 13:1-2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피의 샘이 터져야 한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레위기 17:11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26:28 / 언약의 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야고보서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예수님의 기도

1.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 전서 5:17)

"항상 기도하십시오"(로마서 12:12)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3)

"나는 밤, 낮 기도할 때마나 그대를 기억합니다."(디모데후서 1:3)

기도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전체 생명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숨 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매 순간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는 이러한 질문들은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과 몸짓, 미소조차도 찬송가나 찬양 또는 봉헌과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린도 전서 10:31)

더 깊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고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전통은 심장의 기도라고도 불리는 예수 기도를 전해줍니다.
예수 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가장 잘 쓰이는 예수기도의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는 단순 명료함 안에 성경에 근원을 두고 성령에 의해 인도된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기도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2:3)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성경은 예수기도의 구체적 형식과 신학적 바탕을 제공합니다.
예수기도는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성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의 간단명료함(마태복음 6:8)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 처럼 쓸데없는 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성서에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쓰여 있습니다.(빌립보서 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루가 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한 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사도행전 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크게 소리쳤고(루가 17:13),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루가 18:14).

죄를 인식하게 한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요한일서 1:8).  

3.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루가 15:11-32).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 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4.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The Way of the Pilgrim)"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순례자의 길의 작가는,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5. 끝없는 성장

훼오판은 "기도에 있어서 성장은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성장이 멈추면, 그것은 삶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그 영광의 깊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기도는 우리 모두가 떠나야 할 여정인 영적 오솔길의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카 전서 5:17),

"항상 기도하십시오"(로마 12:12),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데살로니카 전서 2:13),

"나는 밤, 낮 기도할 때마나 그대를 기억합니다."(디모테오 후서 1:3)


기도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전체 생명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숨 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매 순간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는 이러한 질문들은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과 몸짓, 미소조차도 찬송가나 찬양 또는 봉헌과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린도 전서 10:31)


더 깊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고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전통은 심장의 기도라고도 불리는 예수기도를 전해줍니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가장 잘 쓰이는 예수기도의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는 단순 명료함 안에 성경에 근원을 두고 성령에 의해 인도된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기도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2:3)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성경은 예수기도의 구체적 형식과 신학적 바탕을 제공합니다. 예수기도는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성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의 간단명료함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 처럼 쓸데없는 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마태오 6:8)

예수기도는 주님의 이름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쓰여 있습니다.(필립비 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루가 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한 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사도행전 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예수기도의 말들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크게 소리쳤고(루가 17:13),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루가 18:14).

예수기도는 우리들의 죄를 인식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요한 I서 1:8).  

3.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루가 15:11-32).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 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4.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The Way of the Pilgrim)"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순례자의 길의 작가는,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5. 끝없는 성장

훼오판은 "기도에 있어서 성장은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성장이 멈추면, 그것은 삶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그 영광의 깊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기도는 우리 모두가 떠나야 할 여정인 영적 오솔길의 길잡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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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Philokalia)


필로칼리아(Philokalia)라는 말은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탁월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탁월한 것은 초월적인 삶의 원천이자 진리의 계시로 이해됩니다. 


필로칼리아는 4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영적 대가들이 기록한 글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필로칼리아는 18세기에 그리스 아토스 성산의 성 니코디모스와 고린도의 성 마카리오스가 편집한 것으로서 1782년 베니스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두 번째 판본은 1893년 아테네에서 출판되었습다. 세 번째 판본은 아스티르(Astir) 출판사가 1957년부터 1963년 사이에 아테네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총 다섯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 러시아의 수도자 파이시 벨리츠코프스키(Paisii Velichkovski, 1722―1794)는 필로칼리아의 본문들을 발췌하여 슬라브 말로 번역하고, 도브로톨류비예(Dobrotolubiye)라는 제목으로 1793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하고, 1822년에 다시 출판하였습다. 이 책은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의 주인공이 항상 소지하고 다니며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한 많은 배움을 얻는 바로 그 책입니다. 필로칼리아는 19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영성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작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1857년에 이그나티 브리안차니노프(Ignatii Brianchaninov, 1807―1867)가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은수자 테오판 주교(Theophan, 1815―1894)는 또 다른 러시아어 번역본을 "도브로톨류비예"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로 된 원본에는 없던 내용을 자신의 영적 경험을 바탕으로 포함시켰으며, 그리스어 판본의 일부분을 알기 쉽게 의역하였습니다. 은수자 테오판의 번역본은 모스크바에서 다섯 권의 총서로 출판되어, 첫 번째 권은 1877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883년, 1885년, 1905년, 그리고 1913년에 각각 출판되었습니다. 1883년에 발행된 판본은 1963년 뉴욕의 조단빌에 있는 성 삼위일체 해외러시아정교회 수도원에 의하여 영인본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본문들은 관상수도 생활을 안내합니다. 성 니코디모스가 말한 대로, 필로칼리아는 '마음의 기도를 배우는 신비로운 학교'가 됩니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심겨진 영적 씨앗을 싹틔우고 힘차게 길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요한 1:12), 그러한 거룩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에페 4:13). 그리하여 내적인 공부, 즉 '그릇의 내부를 깨끗하게 씻어 겉도 깨끗하게 되는 일'에 있습니다(마태 23:26). 


필로칼리아는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예수기도를 되풀이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기도는 필로칼리아에 내적인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발전된 상태를 헤시키아(hesychia, 이시하시모스)라고 합니다. 헤시키아는 평정과 침묵의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으로 볼 때 사고가 안정되고 고정되고 집중되어 있는 상태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유래된 헤시카즘(hesychasm)은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필로칼리아에 묘사된 영성운동 전체를 가리킵니다. 헤시카즘은 교회의 성사 및 전례 생활의 요체이며 그것은 교회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동떨어져 영성훈련을 실행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본문들은 동방 정교회의 성사 및 전례의 틀은 물론이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통의 틀 속에서 수도자들에 의하여 또 수도자들을 위하여 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 니코디모스는 자신의 서문에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진 덕분에 각 사람은 온전해지는 데에로 부름을 받고,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부름 받습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같은 소명을 가지고 같은 영적인 길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 길을 더 잘 따를 것이고 그 길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은 그 길이 요구하는 것에 맞는 생활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을 수도원이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도원 환경 안에서 그 길을 걷든 밖에서 걷든 간에, 이러한 영적인 길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즉, 필로칼리아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성취를 이루고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적인 수행 길을 제멋대로 걷지 않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질을 갖춘 스승의 지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지도를 받을 수 없다면, 교회의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과 위험을 극복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세계의 겉모양과 상태는 변할는지 모르나, 그러한 변화가 인간 상태의 타고난 잠재력과, 인간과 하느님의 친근한 교류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필로칼리아의 가르침과 방법이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타고난 잠재력과, 인간과 하느님의 친근한 사귐입니다. 그렇기에 필로칼리아가 소중히 품고 있는 많은 조언들은 그것들이 기록되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습니다. 필로칼리아는 광야와 같고 공허한 삶, 특히 현대인의 삶을 사랑과 영적인 지혜로 안내하며, 생기가 넘치고 시들지 않는 삶의 비결을 일러줍니다. 우리는 필로칼리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기도의 삶, 즉,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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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마태복음 26: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He went away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not possible for this cup to be taken away unless I drink it, may your will be done."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주 쉽고 편합니다.
그런데 막상 나의 문제이거나 나하고 연관된 문제를 놓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교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쉽고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반드시 건강하게 회복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럽고 육신적으로는 너무 처참하고 힘든 과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만일 내 문제가 아니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문제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 때문입니다.

연약함과 정이란 다른 말로 밀접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대로가 아니라 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쉽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그 사랑은 밀접한 관계라는 범위 안에서만 작용되고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약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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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영을 주옵소서(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And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They will look on me, the one they have pierced, and they will mourn for him as one mourns for an only child, and grieve bitterly for him as one grieves for a firstborn son.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하려고 하면 기도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힘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기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에게 온전히 붙들리게 되면,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에 힘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주십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이라는 단어는 ‘성령’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기도를 부어주십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기도가 하고 싶어지고, 특히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부어준다’라는 단어는 ‘쏟아 부어준다’는 뜻으로, 폭포수처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어떤 기도를 드리게 됩니까?

십자가의 기도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우러러 본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모습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죄가 씻길 때, 기도를 막는 장애물이 사라지고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때 진정한 성령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성령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기도를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능력을 채워주시며, 십자가의 힘으로 기도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아가 해결 받게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막힘없이 기도할 길이 뚫립니다.

올바른 기도는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고,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힘이 없고 하기 어렵다면, 어린양의 보혈로 기도를 덮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우리의 기도를 기도 되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히 10:19-22, 새)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기도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령님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0~12)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다 아십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하여 세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를 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가난한 심령의 기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또한 가난한 심령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는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보고 나서도 안 되어 이젠 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옵니다. 사실 다른 것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면 가장 좋지만, 그렇게 다 실패하고 나서 무력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귀한 일입니다.

 

갓난아기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무력함을 느끼며 하나님께 간절히 울부짖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향하여 울부짖는 갓난아기의 울음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 반응하십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하나님이 빨리 오십니다.

 

금식기도의 능력도 그러한 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육체에 힘이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안 먹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안 하는 것도 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니엘 금식기도’를 하면서 미디어 금식을 합니다. 자기가 평소에 의지하고 즐기던 것들을 중단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집중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주고 있는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끊고 금식하면 우리는 무력해지는데, 그때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면 우리의 무력함이 만들어낸 절박함과 집중력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무력함의 기도를 드릴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어떤 때는 너무 무기력하고 힘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말을 할 힘조차 없어 그냥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침묵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있기만 해도 됩니다. 그것도 좋은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유창하게 기도하고 달달달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철저한 무기력함 앞에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력함을 느끼는 대로 매일 하나님 앞에 말씀드려야 합니다. 크고 중요한 일뿐 아니라 작고 상세한 일도 다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큰일일 수도 있고, 우리가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작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기준을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그냥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 바로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무력함이 믿음과 합쳐질 때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이 없는 무력함은 헛된 부르짖음에 불과합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의 부르짖음과 부모가 있는 아이의 부르짖음은 다릅니다. 부모가 옆에 있는 아이에게는 정확한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은 믿음이 없다고 부끄러워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괴로움을 가지고 딴 데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먼저 나왔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함을 느끼며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이고 믿음의 표시가 됩니다.

 

사실 믿음의 크기와 주님께 나오는 속도는 반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빠르게 즉시 나옵니다. 빨리 나오고, 사고가 나기 전에 옵니다. 자주 나오고, 항상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주 가끔 나옵니다. 느리게 오고, 다 망가져서야 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주님께 나아와 자신의 모든 괴로움을 먼저 그분께 아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러한 믿음에 응답해주십니다.

 

 

리의 기도 중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주십니까?

 

1)  기도를 바로잡아주심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큰 스승이 되십니다. 스포츠 팀도 훌륭한 감독을 만나야 우승하고, 학교 공부도 위대한 스승을 만나야 잘되는데, 기도에도 역시 스승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잘못 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승이 되셔서 우리의 기도가 잘못될 때 고쳐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기도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눅 9:54-55, 새)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다 멸망시키게 해달라고 한 기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욱하는 성격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푸는 도구로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은 마음이 무거우셨는데, 그때 다시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며 자기 야심을 이루는 방편으로 기도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막 10:35-37, 새)

 

이들의 말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돌합니까? 이런 기도는 당연히 응답이 안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정말 문제아들이었습니다. 또 이들과 비슷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잘 나갈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칭찬을 받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니까 안 된다고 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는 꾸중을 들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 중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신 적이 많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도 열한 명의 제자들 중 이 세 명을 조금 더 깊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 명을 편애하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들이 엄청난 문제아로 ‘공포의 삼인방’이었기 때문에 특별 교육이 필요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3)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들을 성령님이 바로잡아주십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구해도 받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기도는 고쳐주시는 것이지, 아예 폐기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서툴고 실수해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 기도해서 하나님께 야단맞는 게 겁나서 아예 기도도 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도는 실제로 기도를 하면서 늡니다.

 

어느 축구팀에 최고의 감독이 새로 부임했는데, 선수들이 그 감독 앞에서 실수하여 야단맞는 게 두려워 몸을 사리고 조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감독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로 보여주며 시도해야 합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그게 낫습니다. 그래야 감독은 그것들을 다 보고서 잘못된 부분은 고쳐주고 다듬어주며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만족시켜야 하는 심사위원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완벽한 기도를 하고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들지 말고, 자유롭게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성령님이 우리가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실 것이고 거친 부분은 부드럽게 다듬어주실 것입니다.

 

외국어는 처음 배울 때 수도 없이 실수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수해서 외국인들이 자기를 보고 웃을까봐 그것이 두려워 시도도 안 한다면 평생 못 배웁니다. 영어를 빨리 배우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입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마구 말을 해나가는 사람이 빨리 배웁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서툴고 실수를 하더라도 계속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잘못 기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틀리더라도 계속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도록 인도하십니다.

 

 

2)  응답의 때와 방법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게 하심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염려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상’하고 ‘친절’해서 하나님을 걱정해드립니다. 기도로 문제를 말씀드린 다음에는 맡겨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며 하나님을 걱정해드리면서 하나님 대신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드리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걱정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쓸 데 없는 것이 하나님 걱정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도저히 수가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기도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는 빠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실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해법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주님을 위해 걱정해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로 나의 문제를 말씀드렸다면, 알아서 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할 일까지 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잠잠히 기다리게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이끄시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무슨 말씀입니까? 염려와 기도를 동시에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와 기도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기도가 제대로 안 된 것이고, 기도했으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뿐입니다. That’s it! 그게 끝입니다. 문제를 말씀드려놓고는 계속 붙어 서서 ‘이러셔야 해요. 저러셔야 해요.’라고 잔소리하고 하나님께 이걸 하실 수 있으시겠느냐고, 어떻게 하실 거냐고 계속 물어보며 걱정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는데 전혀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래도 안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기도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듣기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이미 그 일에 손을 쓰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려고 하실 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이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은을 구할 때 오히려 금을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전에 거의 두 살쯤 된 아이가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돈은 알아서 1불짜리 지폐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와서 설날이라 10불짜리를 주겠다고 하는데도 1불짜리를 절대 안 바꾸겠다고 버틴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똑같이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지금 가진 것을 달라고 하시는데 절대 안 내놓는다고 버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응답을 주시는 때와 방법을 결정하시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응답해주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재촉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성급함 때문에 흔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주님이 방법을 밀고 나가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시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데, 베드로가 자기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7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했는데도 불안해지고 염려가 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될까봐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응답을 안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실까봐 그런 것입니다.
말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찬송가 중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가 있는데, 아주 위험한 찬송인 것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전혀 죽기를 원치 않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지 마시고 살게 하소서.’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응답을 해주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못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과 다르더라도 응답은 응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를 못하더라도, 나중에 보면 그때 그 응답이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있어도 빨리 접습니다.
포기가 빠를수록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집니다.
내 뜻과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삶에 평안이 오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이뤄지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안 된다고, 기도가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잘되는 최고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대화를 보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집니다.
서로 말을 안 해도 마음이 통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도를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힘들고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자연스럽고, 즐겁고, 그래서 틈만 나면 기도합니다.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그렇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그럴 때 기도의 길이 뚫리고 우리 삶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내 기도를 바로잡아주시고, 모든 때와 방법까지 하나님께 맡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주십시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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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 년부터 1576 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 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 년도 1 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년도 11월 15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 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 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주의 기도 제 45 주일

제 116 문 :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까?

답 : 기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를, 그러한 은사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이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2

1) 시편 50:14-15; 116:12-19;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마태복음 7:7-8; 누가복음 11:9-13





제 117 문 : 어떠한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떠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까?

답 : 첫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신 오직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1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필요와 비참함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2

셋째,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변치 않는 기초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받을 자격이 없으나 우리 구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그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3

1) 시편 145:18-20; 요한복음 4:22-24; 로마서 8:26-27; 야고보서 1:5;
요한일서 5:14-15

2) 역대하 7:14; 시편 2:11; 34:18; 62:8; 이사야 66:2; 요한계시록 4 장

3) 다니엘서 9:17-19; 마태복음 7:8; 요한복음 14:13-14; 16:23; 로마서 10:13;

야고보서 1:6

제 118 문 :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답 :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1
1) 야고보서 1:17; 마태복음 6:33
제 119 문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
1) 마태복음 6:9-13; 누가복음 11:2-4
* 마태복음 6 장의 더 오래 되고 좋은 사본들에는 마지막 부분인 “나라와…
아멘”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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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주일
제 120 문 : 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명령하셨습니까?
답 : 우리가 기도하는 가장 처음부터
우리 기도의 기본이 되는 요소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경외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자녀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1
1) 마태복음 7:9-11; 누가복음 11:11-13
제 121 문 : ‘하늘에 계신’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1
우리가 영육간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기대하라는 것입니다.2
1) 예례미야 23:23-24; 사도행전 17:24-25
2) 마태복음 6:25-34; 로마서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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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주일
제 122 문 : 첫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올바로 알게 됨으로.1
당신이 하신 모든 일들로 인해서
그리고 그러한 일들로부터 보이는
당신의 전능한 능력과 지혜,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진리로 인해서
당신을 존중하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하소서.2
그리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해 주셔서
당신의 이름이 우리로 인해 더렵혀지지 않고
언제나 존중되고 찬양되게 하소서.3
1) 예례미야 9:23-24; 31:33-34; 마태복음 16:17; 요한복음 17:3
2) 출애굽기 34:5-8; 시편 145 편; 예례미야 32:16-20; 누가복음 1:46-55, 68-
75; 로마서 11:33-36
3) 시편 115:1; 마태복음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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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주일
제 123 문 : 두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더욱 더 당신께 순종하도록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소서.1
당신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부흥하게 해주소서.2
사단의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에게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 거역하는 모든 음모를 소멸하옵소서.3
당신의 나라가 온전히 도래하여서
당신이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해 주옵소서.4
1) 시편 119:5,105; 143:10; 마태복음 6:33
2) 시편 122:6-9; 마태복음 16:18; 사도행전 2:42-47
3) 로마서 16:20; 요한일서 3:8
4) 로마서 8:22-23; 고린도전서 15:28; 요한계시록 22:1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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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주일
제 124 문 : 세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뜻을 버리고
말대꾸 없이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오직 당신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1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들을 2
하늘의 천사들이 자원하여서 신실하게 하듯이 3
우리 모두가 감당하도록 인도하소서.
1) 마태복음 7:21; 16:24-26; 누가복음 22:42; 로마서 12:1-2; 디도서 2:11-12
2) 고린도전서 7:17-24; 에베소서 6:5-9
3) 시편 1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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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0 주일
제 125 문 : 네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근원임을,1
당신의 복주심이 없이는 2
우리의 노력이나 걱정, 심지어 당신이 주신 은사들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필요를 채워주옵소서.3
또한 우리가 피조물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당신만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4
1) 사도행전 14:17; 17:25; 야고보서 1:17
2) 신명기 8:3; 시편 37:16; 127:1-2; 고린도전서 15:58
3) 시편 104:27-30; 145:15-16; 마태복음 6:25-34
4) 시편 55:22; 62 편; 146 편; 예례미야 17:5-8; 히브리서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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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주일
제 126 문 : 다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짓는 여러 죄들 때문에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달라붙는 악들 때문에
불쌍한 죄인인 우리들을 처벌하지 말아주옵소서.1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작정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옵소서.2
1) 시편 51:1-7; 143:2; 로마서 8:1; 요한일서 2:1-2
2) 마태복음 6:14-15;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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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 주일
제 127 문 : 여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 미약하여서
잠시라도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1
그런데 우리의 원수들,
마귀와 2 세상과 3 우리의 육체가 4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이 삶의 영적투쟁에 5 쓰러지지 않고
우리가 최후의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굳건하게 원수를 대적하게 하옵소서.6
1) 시편 103:14-16; 요한복음 15:1-5
2) 고린도후서 11:14; 에베소서 6:10-13; 베드로전서 5:8
3) 고린도후서 15:18-21
4) 로마서 7:23; 갈라디아서 5:17
5) 마태복음 10:19-20; 26:41; 마가복음 13:33; 로마서 5:3-5
6) 고린도전서 10:13; 데살로니가전서 3:13; 5:23
제 128 문 : 이 기도의 결론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위의 모든 간구를 당신께 드렸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시기 때문에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1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2
1) 로마서 10:11-13; 베드로후서 2:9
2) 시편 115:1; 요한복음 14:13
제 129 문 :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 “아멘“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땅히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원하는 나의 진실한 소원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더욱 확실합니다.1
1) 이사야 65:24; 고린도후서 1:20; 디모데후서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