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쓴 뿌리(bitter root of sin)


한자에 "착각(錯覺)"이란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착각이란 한자의 훈은 "어긋날 착" "깨달을 각" 이라고 합니다.
착각이란 한자어의 사전적 정의는

1. (어떤 대상(對象)ㆍ현상(現象)을 실제(實際)와 다른 대상(對象)ㆍ현상(現象)으로) 잘못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것.

2. (어떤 사실(事實)을 실제(實際)와 다른 상태(狀態)로) 잘못 생각하거나 이해(理解)하는 것.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진리가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만이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히브리서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새번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새번역) 당신들 가운데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가,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리하여,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NIV) Make sure there is no man or woman, clan or tribe among you today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our God to go and worship the gods of those nations; make sure there is no root among you that produces such bitter poison.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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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성경은 쓴 뿌리에 대해 뭐라고 하나요?

답변 /

쓴 뿌리는 분개하고 냉소적인 마음으로써 상대에 대한 극심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낳습니다.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가르치며 더 나아가 그러한 쓴 뿌리와 그 산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42).

형용사로 “쓰다(bitter)”라는 단어는 “화살같이 날카로운, 톡 쏘는 듯한, 무례한, 앙심에 찬”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5:18에서 간통 혐의를 받은 여자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받은 것에서 착안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쓴 뿌리(bitterness)”는 좀먹거나 “갉아먹히고 있는” 정신/정서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는 극심한 슬픔을 주거나 독이 몸에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쓴 뿌리는 분노의 감정을 의지적으로 붙잡아 언제든 기분 상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금방이라도 분노를 폭발 시킬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쓴 뿌리에 굴복하여 내 마음을 그 감정에 지배받게 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더 이상 영혼이 화해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쓴 뿌리는 분노로 이어져 내부의 감정이 밖으로 폭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터져 나온 분노는 시끄러운 싸움질로 이어집니다.
분노한 사람이 자신에게 몰두하여 소란스럽게 자신의 불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로 인해 나타나는 또 다른 악은 비방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비방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나 단순히 사람에 대한 중상모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부터 뿜어 나오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모든 말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악의로 이어집니다.
악의란 극심한 증오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태도는 감정적이며 사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악의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의도적 시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악의”는 버려야 합니다(에베소서 4:31).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보통 분해하고, 냉소적이며, 냉혹하고, 차갑고, 가차없고, 함께 있기 불쾌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짓는 것으로, 그분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육에서 온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9-21).

히브리서 12:15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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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요?(히브리서 12:15)

『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질문 /

대부분의 성경 해석에는 쓴뿌리를 "배교자(이단자)"라고 해석합니다. 그 외에도 죄책감으로 인한 좌절감, 죄의식, 심한 자책감, 사람의 행위로 오는 상처,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 등으로 생긴 쓴뿌리로 해석하십니다.

​이 부분말씀을 가지고 내적치유 세미나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쓴뿌리를 배교자 외의 것들로 설명하는 것도 성경적인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답변 / ​

쓴 뿌리는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갖는 분노나 좌절감, 괴로움, 불평, 염려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주변 성도들에게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쓴 뿌리는 "육신적인 삶"이나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교회를 더럽히므로, 성도 각자는 그러한 것이 자신 안에 없는지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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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쓴 뿌리’에 대한 오역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인용한다.
유명한 양육단체인 D단체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에 대해서는 일전에 설명한바가 있으니 생략한다.
하지만, ‘쓴 뿌리’에 대한 주장 역시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은 이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D단체는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저주나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모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곳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인용하되 올바른 해석을 적용해야만 그곳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위 단체들이 ‘쓴 뿌리’를 주장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 히브리서 12:15~17을 살펴보자.
성경의 ‘쓴 뿌리’라는 용어는 본래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를 뜻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더욱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12장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신 29:17~19).

히브리서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해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자를 뜻하거나 도중에 믿음을 포기하는 경우를 뜻할 것이다. 혹간은 계속되는 둘째, 셋째, 넷째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불신앙과 배교가 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쓴 뿌리’의 ‘쓴’이라는 단어는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다.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싹’ 혹은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음행하는 자와 넷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셋째와 넷째를 한 가지 문제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인용하여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12:15~17 본문은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신앙, 배교, 음행, 망령된 행동을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자와 같은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을 내적치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런 내적치유가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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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존 파이퍼 외 | 이지혜 역 | 생명의말씀사 | 176쪽 | 10,000원

죄를 지적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행동을 분석하여 그 속에 숨겨진 죄를 찾겠다면, 그만큼 불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죄도 아니고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 마치 7대 질병을 검사하기 위해 온몸을 검진받는, 불편하고 두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검진은 필요하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내 몸 상태를 바르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아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유익하다.
우리 영혼을 타락시키고 병들게 하는 죄, 다른 죄와 밀접하게 연결된 죄를 알고 성경적으로 대처한다면 영혼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행동에 숨겨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저자는 총 8명이다.
모두 디자이어링갓(desiringGod) 기관 사역에 몸담고 있거나(데이비드 마티스, 토니 레인케, 조너선 파넬), 존 파이퍼 목사가 목회했던 베들레헴 침례교회 목사이거나(제이슨 마이어), 베들레헴 침례신학교의 교수이다(조 리그니, 조나단 바워스, 라이언 그리피스).

이 책을 총 편집한 사람은 마셜 시걸로 존 파이퍼의 비서이자 디자이어링갓 필진이다.
모두 같은 신학적 문맥 안에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편집자 시걸이 들어가는 말을 쓰고, 그리피스가 1장에서 죄의 역사를 짧게 다루었으며, 2장부터 8장까지 나머지 저자들이 각각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을 설명했다.

모든 장에서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을 중심으로 설명됐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원서 제목이 ‘Killjoys: Seven Deadly Sins’이다.

죄가 우리의 참된 기쁨을 죽인다는 걸 강조하는데, 결국 이 책의 목적은 영혼의 건강을 되찾아 구원의 참된 기쁨을 회복시키려는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1장에서 그리피스가 설명한 것처럼 죄는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수백 년 전부터 교회가 일곱 가지 대죄를 언급한 이유는 이 죄들이 나머지 모든 죄를 대표하는 죄의 종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6쪽).
이 죄에서 나머지 죄들이 가지처럼 뻗어 나온다는 말이다.

일곱 가지 죄는 육신의 죄(탐식)부터 영혼의 죄(교만)까지 포함하고,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여 일곱 가지 죄 외의 죄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데 유익하다.

우리가 죄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해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기대의 중심에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우리 기쁨의 이유를 오롯이 그리스도로 삼는 걸 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죄를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은 전체 분량이 176쪽으로 한 주제당 20쪽이 되지 않거나 살짝 넘는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인은 길고 복잡한 내용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면에서 부담되지 않는 양으로 각각의 죄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 해서 내용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각 장에서 독자는 저자가 다루는 죄의 문제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지향적 해결책을 얻게 될 것이다.

  lsquo   1485rsquo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칠죄종과 네 가지 종말(1485)’.

먼저, 교만은 일곱 가지 죄 목록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죄의 정수’이다. 교만은 첫 사람 아담이 범한 죄이기도 하다. 다소 추상적인 ‘교만’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자기를 비하하고 격하하며 자책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겸손과 온유의 본이 되신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을 옷 입을 수 있다. 우리가 회심할 때, 날마다 거룩함을 입을 때, 마침내 영화롭게 될 때, 교만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겸손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시기와 분노는 참 다양하게 표출된다. 조 리그니는 시기가 ‘천의 얼굴을 지닌 적’이라 말했고, 조너선 파넬은 분노가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시기의 적은 만족과 감사, 분노의 적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운 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시기하거나 나에게 없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분노를 배우는 자, 죄인인 자신을 향해 베푸신 끝없는 사랑을 계속해서 음미하는 자는 악한 분노를 품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악과 세상에 만연한 죄를 미워하여 거룩한 분노를 낸다.

나태가 흥미로운 것은 게으른 것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바쁜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예배하기 위해 하지 않는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토니 레인케는 지역 교회에서 나태의 뿌리를 뽑으라고 말한다. 교회가 함께 모인 곳에서 반복하여 예배하고 사랑을 실천하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위하는 나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탐욕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두고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우상 숭배이다. 탐식은 다른 무언가가 음식이 된 경우다.

오직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분을 가장 최고의 원함으로 삼을 때, 욕구에 맞서 절제하는 훈련을 할 때, 우상 숭배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마지막 정욕을 다루면서 파이퍼는 성적인 욕구를 이겨낼 방법을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①피하라 ②거절하라 ③돌아서라 ④붙잡으라 ⑤즐기라 ⑥움직이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일으키는 유혹을 피하고 거절하는 것. 거기에서 돌아서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분명한 약속을 붙잡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사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각자 더 쉽게 넘어지는 영역이 있고, 그 고통과 결핍이 강렬할수록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만족 대신 추구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교만과 시기, 분노와 탐욕, 탐심과 나태, 정욕이 솟구칠 때, “나는 과연 그리스도로 충분한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가?” 질문해 봐야 한다.

이 질문은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붙잡으려는 헛된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를 믿음으로 맛보는 행위이다.

독자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자기 영혼 속에서 찾으며, 영적 건강을 해치는 악을 제거하시고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선, 기쁨, 만족으로 영혼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을 도구로 삼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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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신명기 29:18-21)


모든 죄악의 현상들은 사탄이 사람의 심령 깊이 박혀 있는 쓴뿌리를 통하여 역사 기 때문입니다. 이 쓴 뿌리는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치 료되지 않으면 일평생 그 사람을 괴롭히며 나아가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 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 원인으로는; (1)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로 (2)죄로 말미암아 (3)심한 경젱의식으로 말미암아 (4)외모의 약점으로 말미암아 I. 쓴 뿌리의 유형들

1.혈기-모세(민12:3, 약4:7)->(온유) 젊은 40년의 세월을 혈기로 보냄. 이 혈기의 원인은 바로의 남아 학살정책에 따 른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애굽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임 다시 애굽에서 쫓겨나 광야 40년동안 이 쓴뿌리인 혈기를 치료받음. 그래서 모세 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승하더라는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교만-사울 왕(삼상15:22-,약4:6-7, 벧전5:5-6)->(겸손) 처음에는 겸손하여 아름답게 쓰임받았는데 나중에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 순종하고 타락함.

 3.고집-삼손->(순종) 말씀에 불순종

4.음행-솔로몬->(정결)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함(1000명의 아내)

5.두려움-여호수아(민27:18)->(강하고 담대함)(수1:5)(출17:14) 모세 사후 자신의 지도력에 비교하여 과소평가하여, 요단강물이 범람하여 우려 하여 두려워함.

두려움이 있으면 어떤 손해가 있는가 (1)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 (2)자신감을 잃음 (3)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음 (4)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음 따라서, 두려움의 쓴뿌리가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6.열등의식 열등의식이 있으면; (1)생각이 많아진다.

(2)자신감이 없어진다.

(3)두려움이 생긴다.

(4)마음이 좁아진다. 넓은 마음을 주소서!

7.교활함-야곱->(진실)

8.편애-요셉->(공평)

9.탐심-아간, 가룟 유댜, 롯->(청빈) II. 쓴 뿌리의 증세와 현상(신29:18-21)

1. 언어가 단절된다.

 2. 불만이 생긴다(삼상15:22) 그래서, (1)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2)하나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붙인다.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김-예, 아브라함이 창12:1절 이하에서 자기 본토 고향 을 떠날 때에 시키지도 않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나감으로 불화와 전쟁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죄앙을 만남./ 사울 왕도 사무엘 선지자의 하나님 명령에 대한 전 갈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아각 왕을 살려 놓고 살찌고 좋 은 짐승들을 살려 놓음> 다윗과 사울 왕의 신앙의 비교

다 윗 사 울 1) 죄를 지적할 때 즉시 회개 1) 죄를 지적하여도 회개치 않음 2) 기도의 사람이었음 2) 기도 하지 않았음 3)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 3) 백성을 의식, 사람을 의지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 4)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 5) 말씀에 순종한 사람 5) 주의 종의 권면과 말씀에 불순종 6) 전적으로 하나님을 높임 6) 전적으로 자신을 높임

3.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인격에 균열이 생긴다.

 4. 공격적인 사람이 된다(사14:12) 강하게 반항한다.1)십자가의 원리는; (1)순종 과 (2)섬김이다.

2)모든 죄는 교만과 불신앙에서 비롯된다(롬14:23)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 1)하나님의 말씀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순종-말씀이 곧 하나님의 주권 2)주일성수 3)십일조 출석하는 교회에대 할 것.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4)주의 사자(계1:20, 계2:1-)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심, 예 수님의 손에 쥐고 있는 일곱 별(교회 목회자) 그러므로 교역자는 하나님께 서 책임지신다. 잘못하고 실수하여 징계르 받아도 예수님께서 직접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양떼들)이 심판 방망이를 잡아서는 안된다.

5)인간의 생명 <A> 쓴 뿌리의 증세1)동질성끼리 모임 상처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남.

2)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한다.

3)다른 사람을 시기한다.(질투, 증오, 정죄) 4)극단적이 된다(욥10:1).

<B> 쓴 뿌리의 현상1)그런 환경을 만나면 아픔을 느낀다.

2)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학대(자학), 노이로제로 발전 3)다른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쓴다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

4)별 문제가 아닌데 화를 낸다.

5)매사에 불평 불만.

6)고집이 있다.

7)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

8)정서가 불안하다.

9)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빈정거리기 잘하고 칭찬이 없다 10)편파와 분당을 만든다.

11)신앙 생활에 힘이 없다. 고독, 외로워함 12)성실함이 없다. 충성, 책임감이 없음.

III. 쓴 뿌리를 치료 받는 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 치료 받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란 1)온유 6)친절 11)은혜 2)의로우심 7)전능 12)불변함 3)거룩 8)공의 13)질투 4)긍휼 9)신실 5)사랑 10)인내

1. 치료 방법1)회개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은 쓴뿌리이므로 2)상처를 준 사람(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만일 용서치 않으면 (1)예수님과 관계가 멀어짐 (2)자유함이 없고 속박이 온다.

(3)살인하는 것이 됨(미워하는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함) (4)인격의 성장이 없음 (5)용서 못받음(마6:14-15)

어떻게 용서해야 하나 (1)기억지 아니함(엡4:3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같이(엡3:15) (2)바다 깊은 곳에 던짐(미7:10) (3)등 뒤로 던짐(사37:8,17) (4)죄를 멀리 옮김(시103:10-14)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시간 을 바치고, 물질을 마치고, 몸을 바치라! 이 모든 것보다, 생명을 바치는 것(순교)이 가장 중요<순교적 자세로 신앙 생활하면 못 감당할 것이 없다>


목사 영접 = 예수님 영접(마10:40)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함(살전5:12-13)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감(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 복을 가지고 나아갈 줄로 알라!" 3)원망, 불평하는 마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원망, 불평할 일이 있거든 그 일로 인하여 기도하도록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홍해 앞에서 원망하였지만, 모세는 똑같은 상황하에서 기도함으로 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였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원망한 원인은 곧 우상숭배(탐심) 때문었다.

4)두려워 하는 마음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바꾸라! 마음이 주님을 찬양할 때에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진다. 찬송중에 두려움과 분 노가 틈탈 기회가 없다. 찬송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사12:2)

5)원망, 불평을 감사로 바꾸라!

6)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7)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4:18) 온전한 사랑= 완성된 사랑= 십자가 사랑= 아가페(하나님) 사랑= 예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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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와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

우리는 간혹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성경에 기록된 용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를 성경과 다른 뜻으로 짜맞추는 것을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들과 G12, 두날개와 같은 양육프로그램을 하는 곳에서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단체에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가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1) 쓴 뿌리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두날개와 G12등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므로서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Soul-Tie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되, 성경과 일치한 올바른 해석을 적용하여야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쓴 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2장 15-17절인데, 본문을 살펴보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신 29:17-19)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에 ‘쓴’은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싹,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를 말한다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쨋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의 경우를 인용하므로서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이나 혈통유전설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앞세워 ‘내적치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여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주장은 이단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내적치유를 하여주는 곳이 있는데, 과연 그런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성경은 악의 뿌리를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스람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단지 기도를 하기 위한 선교라면 굳이 수백만원을 들여서 현지에 갈 필요없이 한국에서 기도를 하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뜻하며, 땅밟기나 귀신축사로 전도를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단기선교 여행경비를 현지선교사들에게 후원한다면 더 효과적인 선교비로 사용될 수 있다고 현지 전문선교가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더욱이 요즈음 인카운터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2011년 합신과 고신은 이미 신사도운동을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고, 2012년 예장통합 은 극단적신비주의를 도입및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으며,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금이빨 사건, 입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일일이 지적하였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예언에 관한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크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히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KJV]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carnal, but mighty through God to the pulling down of strong holds;)

[NIV]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더욱이 ‘견고한 진’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이 위에 생각나는대로 적은 사람의 행위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물체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오역하여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으며, 쓴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선포기도와 대적기도가 예수 십자가 대속보다 더 권세가 있다는 뜻인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는 구원이 아니지만, 성경을 요약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어느 신학교수는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학교의 공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이제는 넘어지고 딩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솔직히 말하자면, 이단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성경을 오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건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서 용납되거나 묵인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파운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던 교단들이 알파운동보다 몇배나 더 위험하고 더 문제가 많은 G12와 두날개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선교단체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앞 다투어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경과 정통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숫적부흥만을 도모하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책임이 될 것이다.










메시아 예언과 성취


메시아 예언과 성취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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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위를 상속받음(누가복음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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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마태복음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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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의 탄생(누가복음 1:31)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눅 1장27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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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헤롯왕의 유아 학살(마태복음 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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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애굽으로 피난감(마태복음 2:14-15)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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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누가복음 3:3-6)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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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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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리에서 전도하심(마태복음 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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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2-4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비유로 가르치심(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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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선지자로 오심(사도행전 3:20-22)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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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 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심(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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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에게 배척 당하심(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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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친구에 의해 배반당함(누가복음 22:47-48)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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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은 삼십에 팔리심(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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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5:11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거짓증인들에게 고소됨(마가복음 14:57)
△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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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심(마가복음 15:4-5)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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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능욕 당하심(마태복음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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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대신 고난을 받으심(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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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심(마가복음 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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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손과 다리가 찔림(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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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조롱과 모욕당하심(누가복음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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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심(마태복음 27:34)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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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옷을 제비뽑음(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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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뼈가 꺾이지 않음(요한복음 19:32-33)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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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옆구리가 찔림(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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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마태복음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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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49: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부활하심(마가복음 16:6-7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하라 하는지라.

부활하심(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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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승천하심(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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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꿈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집트라는 제국의 황제(파라오)가 자신이 꾸었던 꿈을 해석한 요셉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제정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현대의 국가들은 공식적 업무를 결정하고 진행 할 때 종교적 현상인 꿈이나 환상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인정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한 제국의 황제가 꿈(의 해석)에 따라 제국의 정책을 결정하고 진행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듧니다. 
그러나 제정일치가 원칙이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꿈이나 환상 등의 종교적 현상을 무시 할 수 없었습니다—인정하고 (그 해석을) 심각하게 고려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종교적 현상에 대해 해석하고 조언할 수 있는 술객(?)들이 왕실에 신하들과 함께 황제의 주변에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꿈 해석에 대한 기법이 수백가지가 되었습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왕실의 술객이 되려면 그 수백가지나 되는 꿈 해석의 기법에 정통 해야 했습니다—실제 왕실의 술객들은 꿈 해석에 정통 했습니다.  
어떠한 꿈도 그들의 꿈 해석 기법을 피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주셨던 꿈만은 그 많은 기법들을 다 피했습니다—술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술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파라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그 꿈이 범상하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요셉이 그 꿈을 해석 하니까 놀라서 당장 요셉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황제의 꿈을 해석할 당시에도 상황이 비슷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황제도 다니엘을 인장 했던 것입니다. 
이쯤이면 파라오가 자신의 꿈을 해석한 요셉을 총리로까지 임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이해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속된 제국의 황제들까지도 꿈 해석으로 놀라게 했던 요셉과 다니엘은 꿈이나 환상(의 해석)과 관련된 설교나 강의 등에 항상 인용될 정도로 꿈이나 환상(의 해석)과 관련된 주제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다니엘에게도 해석 못한 꿈과 환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은 자신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양식을 구하고자 굽신거릴 때까지 해석하지 못했습니다—자신의 꿈도 해석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아무리 요셉과 다니엘이라도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직접 양육하셨던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가 욥바라는 곳의 한 옥상에서 기도 중에 환상을 봤습니다—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행 10:9 – 17). 

베드로 조차도 해석 하지 못했던 환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아무리 베드로라도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에게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저희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가 해석이 안되는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달라고 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반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해석을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저희가 아무리 기도 해도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은사가 있다면서 모든 꿈과 환상을 해석하는 사람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 입니다.)

그러나 요셉, 다니엘, 그리고 베드로가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몰랐다고 해서 신앙 생활에 손해를 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던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해석을 모른다고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처럼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저 신앙 생활만에 전념하면 되는 것입니다—알고 모르는 것이 신앙 생활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탓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꿈과 환상(의 해석)에서 자유로와 지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셨거나 환상을 보셨으면 하나님께 그 꿈이나 환상에 대한 해석을 주십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해석을 주고 안주시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해석을 받으셨다고 우쭐해 하실 필요도 없고 받지 않으셨다고 좌절하고 낙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석을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신앙 생활에만 전념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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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장~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나귀 새끼(스가랴 9:9)  550년 후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마태복음 21:5-7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 은 30에 팔릴 것(스가랴 11:12)  550년 후 성취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3.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스가랴 11:13) 550년 후 성취

스가랴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마태복음 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메시아를 거절 후 흩어진 백성(디아스포라)(스가랴 7:11~14) 590년 후 성취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스가랴 7:11~14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5. 예루살렘으로 귀환(스가랴 8:1:1~13)  2468년 후 성취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스가랴 8:1~13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7-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하여 실행을 추진하였으나, 이에 동의한 유대인과 달리, 이에 동의하지 않은 아랍인은 추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 세계 시오니즘 단체 경영이사, 그리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대통령 다비드 벤 구리온은 "에레츠 이스라엘"에서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 국가로 한다고 선언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함께 독립이 되었다.
영국군이 철수한 다음날 동시에, 근처의 아랍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이스라엘 군대와 싸웠다.
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중동 전쟁을 하는 동안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시나이 반도(1967년 ~ 1982년 사이), 남레바논(1982년 ~ 2000년 사이), 가자 지구와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지역을 부분 합병했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국경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은 여전히 이 지역의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6.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스가랴 12:2~3)  2540년 후 성취

스가랴 12:2~3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미성취 예언)

7.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스가랴 12:3~9, 14:12~15)

8-9.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8.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스가랴 12:10~13:1)

12:10-11.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9.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스가랴 14: 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10.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스가랴 14:16~21)

16-18.
예루살렘
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08. 04. 2021(수)

Patris Church
  08. 04. 2021(Wed) pm 7:00
  Seoul Korea 08-05 am 8:00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
       12:3, 무거운 돌
       신앙고백
       찬송 / 511장(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신,  죄, 구원)

<신> 단일신론 : 삼위일체
- JX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죄>율법(소극적) : 마음(적극적)
- 눈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   

<구원> 제3의 성전 재건 : 메시아 재림
- 예수는 저주를 받고 지옥으로 가야 할 존재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프로톤)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먼저(프로톤 / πρῶτον)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스가랴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거운 돌(에벤 마아마사)
돌(에벤, ’eben) אֶבֶן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the living Stone)

다니엘  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2년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을 꾸었으며 그 꿈의 내용을 해석하라!
희한한 일이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않는 신들 외에는 그것을 보일 자가 없다.

큰 신상을 보셨다.
정금 머리 : 사자 바벨론
은 가슴 : 곰 메대 바사
놋 허리 : 표범 헬라
철 다리 : 짐승 로마
열 발가락 : 열 왕, 열 뿔

뜨인 돌 - 메시아 나라

이사야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스가랴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마태복음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의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먼저 지붕을 그리고 지붕 아래에 집을 그린 후에 여러 개의 창을 그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지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귀, 눈, 입으로만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을 직접 짓는 사람은 집을 그리라고 하면 먼저 땅을 그린다고 합니다.
어떤 땅에 집을 지어야 할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몸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생활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을 그릴 때 지붕을 먼저 그리고 창을 그리며 집의 모양을 그리는 사람은 마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먼저 모양을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문제가 예수님을 내가 만난 것이 아니라 자주 많이 듣기 때문에 이미 내 머리 속에 형성된 예수님에 대한 정보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초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내가 직접 집을 지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는 땅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에서도 예수, 신약에서도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성경을 읽든지 그곳에서 예수를 찾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니엘 금신상의 비밀 -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 2:31~35 

1. 금머리 : 바벨론(사자)

금 머리는 북부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리아 왕조의 계승국으로 소위 갈대아 나라로 불리워지는 신 바벨론을 의미하는데,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되는 이 나라는 엄청난 힘을 과시했던 천하무적의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는 세상나라를 상징한다. 

건국자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도록 하였다(단 3장 이하).
바벨론은 나라가 부강해지므로 유브라데 강 좌우에 구리를 재료로 하여 견고한 성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그러나 엄청난 시설로 건축된 성의 힘만 의지하여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던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 때에 무너졌다. 그 무너질 때의 상황을 보면, 밤에 1,000명의 기생과 술잔치를 벌이며 자기들의 신을 찬양할 때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침공하여 유브라데 강물을 다른데(레토릭 호수)로 돌리고 강 밑으로 대군을 몰고 건너가 벨사살 왕을 죽임으로 금 머리로 묘사된 바벨론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① 예루살렘을 멸망시킴

 *1차 침공 : 주전 606~605,
   2차 침공 : 주전597. 3. 15,
   3차 침공 : 주전 586

② 유대의 인물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감

③ 이스라엘을 70년간 지배함

2. 은가슴 : 메데 바사(곰)

가슴 팔로 묘사된 메데 바사는 고레스Ⅱ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지금의 이란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국법이 왕권에 우선한 국가였는데, 이는 다리오 왕이라도 법을 마음대로 바꿀 권한이 없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되었을 정도였다(단 6:1~10).
그러므로 “왕만큼 못한 나라가 서리라”는 예언대로 된 것이다.

주전 558년 페르시아 제국과 합병하여 메데 바사로 불리게 된 이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들을 보면 사자로 상징되는 바벨론 제국과는 정 반대의 일들을 하였으니 곧 곰으로 상징되는 나라의 특성과는 달리 이스라엘에게 숫양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도 주전 331년 헬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메데 바사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① 바벨론에 의해 포로 된 유대인을 해방
② 성전을 건축케 함
③ 이 나라 통치 때 칠십 이레 예언

3. 놋허리 : 헬라(표범) 

헬라제국은 가장 크고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로 심지어 인도까지 정복하되, 표범처럼 속히 정복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28세의 알렉산더가 5년 만에 세계를 정복하고 친구의 죽음에 인생의 허무를 느껴 술에 취하여 병들어 32세에 요절하자 그 나라는 부하 4명에 의하여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이 나라의 통치 때에 저 유명한 마라톤 전쟁이 일어났으며, 로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으니 짐승의 성격으로 볼 때에 헬라는 표범에 해당하는 국가였다.

역사가들도 헬라의 멸망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꼬집어 말하지 못하나, 주전 168년 혹은 주전 164년 혹은 주전 64년으로까지 보는 예도 있다.

4. 철다리 : 로마 (짐승)  

지금의 이태리로 “세계의 길은 로마로 열려 있다”고 할 만큼 철 문화가 발달된 국가로서 주전 64년부터 중동 아시아를 지배해 온 무섭고 강력한 제국으로서 천하무적의 국가였으나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단 2:41)라는 예언처럼 주후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 후 두 아들에 의해서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분할되어 통치되었다.

5. 열발가락 : 열왕 (열뿔)

열발가락은 철다리 로마가 쇄락하면서, 생겨난 유럽을 중심으로한 유럽 각 국 이며,
이런 유럽국가들이 연합하여 만든 유럽 EC를 뜻한다.
또한 이때는 다른 인종이 석이나 석이지 않음 같이 되는 때 즉 우리는 많은 인종들이 서로 석여 있으나  인종 차별을 하는 등 석여 있으나 석이지 않는 상황을 볼 수 있는 지금의 시대를 말 하고 있다.

이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하나를 세우시는데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신상을 부숴뜨리며 그 나라가 굳건히 설 것을 예언 하고 있다. 

즉 느브갓네살이 꾼 꿈은 말일에 되어질 일을 예언 한 것이며, 금머리부터 시작하여 열발 까락까지 모두 이루어 졌으며, 산에서 띄인독 즉 거룩한 산인 시온에서 오실그리스도의 강림만 남겨두게 되었다.

이렇듯 성경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항상 깨어 근신하며, 인자가 문앞에 이른줄 알라라는 말씀을 상고하며 주의 강림의 날에 어떠한 내가 되어 있어야 할지를 생각 해보아야 할 것이다.

금신상의 예언과 적그리스도 국가
다니엘 2:25-3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명 종말의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는 종말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진리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종말에 나타날 여러 징조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주님의 재림에 이르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포함됩니다.

성 중건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계산하여 7 이레와 62 이레에 성이 중건되었고,
메시야의 기름부음이 정확히 AD 3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의 끊어짐과 예루살렘 성의 철저한 훼파 사건(AD 70년)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백기인 신약시대를 지나 이제 마지막 한 이레의 직전에 와 있음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입니다.


오늘은 다니엘의 기록 중 또 다른 중요한 구원 달력이 되는 금신상의 예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즉위 2년 어느날 이상한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번민하게 되었습니다(단 2:1).
왕은 온 나라의 박수, 술객, 점장이,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 세우고, 자신이 잊어버린 꿈 내용을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해괴한 요구입니다.
물론 이 사건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술객들의 대답입니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11절).

이 말에 격분한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을 죽이라 명했고, 그들과 함께 애꿎은 다니엘과 친구들까지 죽게 되었을 때(12-13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기도하니 그 밤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상 중에 왕의 꿈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해석하면서 언급한 말을 보십시오.

28절,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과연 왕의 금 신상 꿈은 세계의 역사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니엘 시대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접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1. 꿈의 내용과 다니엘의 해석

31-33절,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 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본 신상은 크고 광채가 특심하고 그 모양이 심히 두려웠습니다.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 후에 한 뜨인 돌이 철과 진흙의 발을 쳐부수었는데(34절),
그 결과 신상은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는 왕이 꾸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꿈을 제 3자인 다니엘에게 정확하게 알게 하셨고, 또 그 해석까지 한점 막힌 바 없이 알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우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고(36-38절),
은 가슴과 팔은 왕만 못한 다른 나라이며(39절),
놋 배와 넓적다리는 온 세계를 다스릴 다른 나라이고(39절),
넷째 나라인 철 종아리는 강하기가 철 같을 것이며(40절),
그 나라가 얼마는 철의 발로 얼마는 진흙의 발로 분리될 것이고, 서로 섞이지만 합해질 수 없는 열왕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가 일어나(44절), 신상으로 상징되는 세상 나라들을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입니다.

2. 역사 속의 금 신상 비밀

우리는 다니엘의 해석에 근거하여 수천 년의 역사를 한 눈에 조명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에게는 모든 것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대부분 과거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신상 부위에 따라
금 머리는 바벨론(BC 605~539),
은 가슴과 팔은 메대·바사(BC 539~331),
놋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제국(BC 331~168),
철 종아리는 로마 제국(동로마 AD 1453까지, 서로마 AD 476까지)으로 보는 것이 거의 모든 복음주의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과연 금 머리 바벨론은 부강한 나라로서 유프라데스 강 좌우 언덕에 구리를 재료로 하여 견고한 성을 쌓았습니다.
주변 열국을 점령하여 천하에 이름을 드날렸고, 교만하여 두라 평지에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강제로 경배케 할 정도였습니다.

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 둘레가 54마일, 높이는 300척, 성문은 100개나 되었습니다.
그의 손자 벨사살 때 1000명의 기생과 술잔치를 벌일 정도로 세계 최대 최강의 나라였으나,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은 가슴·팔로 묘사된 메대·바사는 고레스(Cyrus) 2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지금의 이란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국법이 왕권에 우선한 나라였는데, 왕이라도 법을 바꿀 권한이 없어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왕보다 못한 나라가 서리라”는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메대·바사는 이전 나라인 바벨론에 의해 포로 된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건축케 했고, 이 나라 통치 때 70 이레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놋 배·넓적다리로 묘사된 헬라 제국은 “온 세계를 다스린 나라”로서, 28세의 알렉산더가 5년 만에 페르샤와 인도까지 정복했을 정도로 크고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32세에 요절하자 네 명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 네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철 종아리로 묘사된 로마는 지금의 이태리를 중심으로 하여 철 문화가 발달된 국가로서, BC 64년부터 지중해 전역과 중동 아시아를 지배해 온 무섭고 강력한 제국이 되어 천하무적의 군사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2:41) 라는 예언처럼 AD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 후 두 아들에 의해서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 서로마는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의해 AD 476년에 망하였고, 동로마는 오랜 후인 1453년 이슬람교도의 공격을 받아 오스만투르크에 멸망당했습니다.

신상이 금속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처음 금으로부터 은, 놋, 철, 흙으로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흐를수록 점점 더 타락하는 모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머리는 무거운 금이고 발은 가벼운 진흙인 것은 결국 세상 나라가 무너지게 될 불안정한 모습을 말해줍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바벨론은 실제로 금을 많이 사용하여 우상들과 신당들을 금으로 단장했고, 메대·바사는 실제로 은을 돈으로 활용했으며, 헬라는 무기를 제조하는데 놋을 사용했고, 로마는 갑옷과 무기 모두를 철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금속까지 그 시대를 예표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며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느부갓네살 왕이 꾼 금 신상의 꿈은 역사적으로는 세상나라의 발전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들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하나이므로 바벨론은 한 국가였습니다.
가슴과 팔은 두 팔이므로 메데·바사가 같은 시기에 강국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아리는 둘이므로 동·서 로마로 분리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열 발가락의 비밀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임박한 재림 때의 여러 나라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3. 발(足)의 국가

41절,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절,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43절,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진흙·철 발가락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발의 국가는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출현할 열국(列國)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적그리스도가 배출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발과 종아리는 서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종아리는 철이요,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2) 신상의 부서짐에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34절).
재림하실 주님에 의해 이루어질 사건이므로, 종아리의 국가와 발의 국가는 동일한 국가가 아님이 자연스럽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3) 계 17:9-10절이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여기서 사도 요한 당시에 있던 국가는 로마였고, “아직 이르지 아니한” 나라는 미래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발의 국가는 네 번째 나라인 로마제국의 부패된 말기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게 될 열국(列國)의 성격을 지닌 국가로서, 적그리스도를 배출하게 될 한 나라로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발의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중 가장 지지받고 있는 것은 발의 국가가 유럽연합국(EU)이 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1) 그 나라가 나눠지기 때문입니다(단 2:41).

단 7:23~24,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
열 뿔로 상징되는 열국(列國)은 넷째 나라인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나타나게 될 것임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의 유럽 연합의 회원국들은 옛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지기 때문입니다(단 2:42).

현재 27 회원국 중 영국· 프랑스·독일·이태리 등의 강대국들과 약소국들이 섞여 있습니다.

3) 이들은 반목 속에서도 협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단 2: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EU를 구성하는 민족은 게르만계, 라틴계, 슬라브계로 나뉘는데, 이들은 역사상 은원관계가 많고 감정의 골이 깊어 하나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합쳐져야 할 이유는 군사적으로는 러시아를 대항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대항하기 위함입니다.

4) 정치적 국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금·은·놋·철 네 나라가 정치적 강국이었기 때문에 열 발가락으로 상징되는 EU 또한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유럽 연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1952년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CSC)로 시작하여 1957년에 유럽 경제공동체(EEC), 1967년에 유럽 공동체(EC), 그리고 1993년 EU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1999년 1월부터 공용 화폐인 ‘유로’(EURO) 달라를 전 회원국이 함께 사용하고 있고, 금년 6월 새 조약이 발효하여 EU 대통령이 2009년부터 나타날 전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EU는 다니엘과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열 뿔 권세를 지닌 강력한 국가로서의 출발을 예고하는 요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모든 사건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예의 주시하며, 더욱 종말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4. 유럽연합(EU)과 로마 카톨릭

계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 짐승(=적그리스도)은 여덟 째 왕인데, 이는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일곱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EU를 상징하는데, 그 중 일곱 째 나라인 EU에서 여덟 째 왕인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EU는 오래지 않아 최강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EU의 모든 국가가 단합해서 적그리스도에게 권력을 줄 것입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계 17:13). 이렇게 막강한 권세를 지닌 적그리스도는 전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EU의 첫시작이 로마 교황청에서 비롯된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 체결). 유럽 국가들의 70%는 카톨릭 국가입니다. 바티칸의 영향력이 어떠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 유력 언론사들의 심층 취재는 EU가 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002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EU는 종교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일찍이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의 후보로 지목했듯이, 지금의 로마 카톨릭 제도하의 교황은 오늘의 EU로부터 솟아날 강력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로마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듯이 종말에는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종말에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5. 뜨인 돌의 심판

34-35절,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본문의 뜨인 돌은 재림 예수를 상징합니다. 재림 예수께서 적그리스도 국가를 심판하시되 ‘신상을 쳐서 부숴뜨리듯이’, ‘여름 타작마당 같이’ 바람에 날린 쭉정이를 모아 아궁이 속에 태워버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는 재림 예수께서 검으로 만국을 치시고 철장으로 부수어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계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왕국은 영원히 망하지 않습니다. 이 왕국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계 20:6).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느껴지십니까?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와 같은 위대한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미리 정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오신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이 보이십니까?

지난 육십 구 이레의 모든 것을 이루신 우리 주님은 이제 마지막 한 이레의 예언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발의 국가, 곧 적그리스도 국가의 출현이 임박했습니다.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 성전에 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종말 신앙, 재림 신앙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마지막 시대의 이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의 환상을 이야기한 책입니다. 더 나아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의 환상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도 이사야처럼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9-11장에서는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했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해서(9:9), 은 30개에 팔리실 것에 대해서(11:12) 예고했습니다. 또한 12-14장에서는 메시아의 통치를 예언했는데, 자신들이 십자가에 죽인 메시아를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보고 애통할 것이며(12:10), 그날에 죄를 씻는 샘물이 열릴 것이며(13:1), 열방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께 경배하는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14:16-21)을 예고했습니다.

제목

이 책을 쓴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입니다. 스가랴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저자

이 책을 쓴 스가랴는 에스겔처럼 선지자로 부름받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노래한 선지자라면, 스가랴는 재건 성전에 대한 환상을 노래한 선지자입니다. 

기록 연대

스가랴의 연대는 성전 재건 이전과 이후로 크게 둘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1-8장으로 스가랴 선지자가 처음 계시를 받은 다리오왕 2년(1:1, B.C. 520년)에서부터 다리오왕 4년(7:1, B.C. 518년)까지 2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9-14장에는 기록시기를 짐작할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고, 다만 '헬라'(9:13)라는 표현이 언급될 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본서 후반부가 성전 재건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스가랴 선지자 말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대략 B.C. 480-470년경).

배경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이 인솔하는 1차 포로 귀환 때(B.C. 537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1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선지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B.C. 520년). 이때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이 중단된 지 14년이 흐른 뒤였고,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학개의 두 번째 예언(학 2:1-9)과 세 번째 예언
(학 2:10-19) 사이에 해당되는 시기였습니다.

스가랴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1: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벨론 유수라는 징계를 내리셨지만 결코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습니다.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1:7-6:15)은 학개를 통해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한 귀환 공동체에 큰 격려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귀환자들 중에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 질문한 자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진정성 있는 예배와 순종의 삶을 촉구함으로 내면의 영성을 세우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학개의 예언이 시작된(학1:1, 다리오왕 2년 6월 1일) 두 달 뒤 예언하기 시작한(1:1, 다리오왕 2년 8월)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가 2장에 걸쳐서 성전 재건과 메시아 도래를 예언한 것을 14장에 걸쳐서 확장판으로 예언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스가랴는 메시야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세상 종말과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장래의 모든 인류 역사가 장차 메시야와 그분의 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실제로 신약은 선지자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아직 성취되지 않는 세상 종말의 역사들 역시 선지자가 보여 주고, 신약의 여러 사도들이 보여 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내용과 구성

성전 재건에 관한 10가지 환상(1-6장)
금식 문제와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7-8장)
메시아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9-14장)


산 돌과 신령한 돌들
     
베드로는 그 이름의 뜻이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돌이었던 베드로는 교회의 진정한 반석, 진정한 초석과 바위와 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돌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를 자주 반석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익숙한 유대인이나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반석과 돌로 부르는 것에 낯설지 않습니다(사 28:16; 시 118:21-23 참조).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그 돌, 그 바위, 그 반석”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언제나 약속하신 메시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흔하고 흔한 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보배로운 돌이었고, 그는 반석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산 돌(Living Stone)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살아있고 보배로운 돌이요, 유일한 반석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돌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제일 먼저 성전을 떠올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제사(예배)의 중심지였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런 보이는 성전, 죽은 돌들로 이루어진 성전이 신앙의 목표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성전이나 제사 제도나 제사장 제도를 허락하시고 세우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서 보다 큰 어떤 영적 실체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의 모형으로 두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들로 건축된, 보이는 성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영적 실체를 나타내고 그것을 기다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 말씀을 읽어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도 이 산 돌에 연결되어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의 그림자로 세워진 것인데, 그 성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그에게 연합되고 연결된 성도들, 곧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여주는 심상(image)이었습니다. 산 돌이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연결된 돌들, 곧 그의 몸의 지체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 성도들은 신령한 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신령한 돌들로 세워지고, 서로 연결되어 자라가는 살아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보배로운 산 돌(the precious living stone)”이라고 하셨고, 성도들을 가리켜서는 “신령한 돌들(spiritual house)”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이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신약의 성전, 신령한 집도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택한 백성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경배를 받으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온 땅에 흩어진 교회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고 성령으로 연합되고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지어야 할 집이 바로 이런 집이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신령한 집의 한 부분인 산 돌, 신령한 돌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Rock)이십니다. 그는 신자들의 반석이요 주춧돌이요 초석이요 모퉁이돌이요 산 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허탄한 것에 우리의 영혼의 뿌리를 세우고 자신의 삶을 세워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곧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리스도는 산 돌이고 성도들은 신령한 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의 실체이시고 성도들은 그 신령한 집의 한 지체와 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처럼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요 성도들은 이런 대제사장에게 연결되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오늘날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히 7:23-25 참조). 목사나 장로만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지 않으셨고, 모든 성도들을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지어져가는 신령한 돌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이들이 다 거룩하고 신령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도 성도들을 가리켜서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늘 영적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 참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다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만인 제사장” 교리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일 때 그것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회집입니다. 그냥 친목으로 모이는 단체도 아니고, 어떤 인종과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 택한 족속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신령한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죄 사함을 위한 속죄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문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 희생과 화목의 제물로 자신을 완전히 드리신 그 제사에 의지하여,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제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감사제는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곡식을 빻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뜨리고, 자기라고 하는 돌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제사이며, 자기를 부인하여 드리는 자기부인의 제사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제사도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도 열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드리는 것뿐이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누더기와 같고 지푸라기와도 같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에 의지하고 연합하여 드리는 제사, 그것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피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갔기 때문인데, 그 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의 피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제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완전한 제사였고, 영원한 제사였습니다(히 9:28).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선을 행하고 구제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 이런 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종의 삶,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미 6:6-8 참조). 또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롬 6:13).
      오늘 우리가 보배로운 산 돌, 우리의 머릿돌과 모퉁이돌, 초석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연결되어 웅장한 성전의 신령한 돌들로 자라가고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우리 모두 그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 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종에서 아들로 변화된 결과가 무엇이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이제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근신하고 깨어 하늘에 간직한 산 소망을 온전히 바라고, 욕심과 정욕을 좇지 않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빚어져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로 입양하여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만세 전에 뜻두신대로 형제를 피차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다.


베드로전서 2 장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1-3 절은 1 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원동력임을 말씀하고 있다. 4-10 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기초에 세워졌으며 어떻게 자라고 있으며 왜 세우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먼저, 사도 베드로는 1 장의 결론으로서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1-3)


왜 베드로 사도는 곧바로 순전한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신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듣기에 거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 이유는 첫째는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두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을 버릴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면 요구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베드로 사도가 나열한 것은 우리가 모두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버릴 수 있는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독과 거짓과 악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1:9).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계명에 순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젖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이때 우리 안에 떨어져 심어진 말씀이 우리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 갓난 아이가 얼마나 엄마 젖을 사모하는지 모른다. 성장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함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은 삽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 우리의 사욕과 욕심대로 살았다. 그때는 아무리 후회하고 그렇지 않겠다고 작심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예로 예전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신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우리는 모두 경험하였다. 또한 매일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날마다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정결하게 되어 하늘 보좌 생수의 강에서 흐르는 생수를 마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그의 몸인 교회의 반석이 되신다. 4 절에 나와 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왜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하였는가? 돌은 움직이지 않고 요동함이 없는 것을 상징한다. 산 돌이라는 표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세 전에 이미 그의 아들을 보배로운 산 돌로 택정하셨다.


산 돌이신 예수님은 그의 몸된 교회의 반석이 되신다.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을 받았기 때문이다. 5 절에 나와 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집이라고 한 것은 계속 지어져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이 신령한 집은 이천년 가까이 지금까지 계속 지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산 돌 같이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죄아래 죽었던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부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에 세우신 목적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그림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성막이다. 성막에는 짐승을 잡는 바깥뜰, 성소, 지성소가 있다. 그런데 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갈수가 있고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씩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일반 백성은 짐승과 같은 예물을 가지고 성막의 바깥뜰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다.


우리를 제사장이 되게 하신 뜻이 무엇인가?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민 제사장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이유는 그곳에 나와서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죄라는 장벽 때문에 반드시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제사장으로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가는 장벽이었던 죄가 제하여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받은 우리를 정죄치 아니하시고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진리를 뒷밤침하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6-8)


예수님은 어떻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거부를 당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림을 받고 죽으신 그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그의 몸된 교회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다. 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머릿돌이 되셨는가?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도 머릿돌이셨다. 그런데도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피가 없이는 사함이 없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이다.


또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후에 머릿돌이 되신 것은 아무도 핑계치 못하게 하심이다. 조상 아담 탓으로 돌리거나 무슨 잘못이 있는지 항변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시기 위함이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하나, 대신 사랑하사 죄의 노예에서 해방 받을 수 있는 길을 아무 값없이 내어주셨다. 하나님이 애굽 왕과 백성들에게 내리신 마지막 재앙인 유월절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죽음의 천사는 문설주의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안전하였다. 누구라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받지 아니한다. 부끄러움을 받는다는 것은 배척 받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을 받은 우리를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선물로 부어 주신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왜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시는가?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나왔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아니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한복음 1:3).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나왔기 때문이다. 풀과 같고 이슬과 같은 것이 인생이나 우연히 왔다가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 심판의 기준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잣대가 존재한다. 소위 성공이 가장 잘알려진 잣대이다. 어떤 이는 철학이나 이념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도덕과 선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성공도 철학도 도덕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15-18)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공평과 공의로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모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있는 그대로 존재케하는 응집력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일어나 서고 앉고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주 예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지구의 공전과 자전 속도가 조금이라도 변동이 있거나 그 궤도에서 이탈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무지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이시요 왕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소위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상황을 탄식하고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2-3)


그들이 넘어지는 것은 완악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인 에서가 차자인 야곱을 섬길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저희가 멸망의 자식인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지만),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셔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순종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정하신대로 영원한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에서 그의 종들이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하였을 때 가만 두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제거하다가 알곡을 함께 뽑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천사를 보내어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게 하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교회의 역할이다. 9-10 절에 나와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은 만세 전에 우리를 아시고 택하시고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르셨다. 이제 교회는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를 한 족속 혹은 한 나라로 부르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인종과 모든 족속과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 포함하고 있다.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과 문화와 이념과 도덕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조건은 단 한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가이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나타내는가? 이는 그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외적인 표식은 아무 것도 없다. 성경책을 들고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가 1 장에서 말한 서로 형제 간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그의 기이한 빛 안에 거한다는 증거이다. 또한 베드로전서 2 장 후반부에서 말하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가족과 이웃에게 우리가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케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요 또한 이제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아들로 변화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하신다 (마태복음 10:8). 우리는 아무 값없이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형제간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든 악독과 거짓과 시기와 외식을 버리고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성장하고 자라도록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산 돌로 세워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래로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세워가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주님,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를 먼저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신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씀을 부지런히 사모하고 형제간에 피차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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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슥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슥 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슥 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슥 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슥 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슥 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슥 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 (슥 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슥 7: 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슥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 (슥 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슥 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믿음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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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티스 [pistis]  πίστις, εως, ἡ 4102 [pistis]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 성경이 강조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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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 신뢰, 신용.
2. ἡ πίσ- τις τοῦ ὀνόματος αὐτοῦ : 그 이름을 믿는 믿음, 행 3:16, 빌 1:27.

사도행전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By faith in the name of Jesus, this man whom you see and know was made strong. It is Jesus' name and the faith that comes through him that has given this complete healing to him, as you can all see.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one spirit, 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3. [신용이나 신앙을 일으키게 하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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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βραάμ, ὁ 11 [Abraam]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마 1:1, 2, 17, 3:9, 눅 1:73, 3:34.

Ἀβραάμ, ὁ 스트롱번호 11

1.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2. 마 1:1, 2, 17. 3. 마 3:9
발음 [ Abraam ]
어원 / 히브리어 85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많은 무리의 아버지” :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마 1:1, 2, 17, 3:9, 눅 1:73, 3:3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아브라함(마 1:1, 2, 눅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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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문자적으로] 결혼생활에서 태어난 아이, [상징적으로] 믿음의 권속, 빌4:3, 딤전1:2, 딛1:4.

  • 2.

    순진한, 진짜의, τὸ γ. 진실[사랑의], 충실함, 고후8: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비겁한, 겁먹은, 믿음 없는, 마8:26, 막4:40, 계21: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λιγόπιστος, ον 3640 [ŏligŏpistŏs]
  • 믿음이 작은, 마6:30, 8:26, 16:8, 눅12:2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불경건함, 신을 믿지 않음, 믿음이 없음, 롬1:18, 딤후2:16, 딛2:12. [복수로 사용하여] 롬11:26, 유1:1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여리고에 살던 기생으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자 ‘라합’, 수6:17, 25. [주]믿음의 의로움과 환대의 모델로서 언급됨, 히11:31, 약2:2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믿음 없는, 믿지 않는, 마17:17, 막9:19, 눅9:41.

  • 2.

    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행26:8.

  • 3.

    [도마의 불신] 요20:27, 고전6:6, 7:15, 10:2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 [ἔν τινι와 함께] ~에 있어서 유능한, 힘있는, 뛰어난[말과 행실이], 눅24:19, 행7:22. ㉣ [성경에 대해서] 능통한, 행18:24. οἱ δ. [믿음이] 강한 사람들, 롬15:1.

  • 2.

    힘있는, 강한, 능력있는, 강력한.

  • 3.

    [인격과 그것의 속성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형용사 δοκίμιος의 중성단수] 순수한, 섞은 것이 없는, τὸ δ. ὑμῶν τῆς πίστε ως: 너희 믿음의 순수성, 벧전1:7.

  • 2.

    추정.

  • 3.

    [명사] 시련, 시련의 도구, 약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κατὰ τὴν ἀ. τῆς πίστεως: 믿음에 합당하게, 롬12:6.

  • 2.

    바른 관계, 균형, 어울림.

  • 3.

    κατὰ(τὴν) ἀναλογίαν: 어울리게, 일치하게, 바른 관계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κ 1537 [ĕk]
  • 1.

    οἱ ἐκ π ίστεως: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갈3:7,9, [참조] 롬3:26, 4:16.

  • 2.

    모음 앞에서는 ἐξ, 소유격 지배전치사: ~로부터, ~에서, ~의 밖으로.

  • 3.

    [분리를 지칭하기 위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ζάω 2198 [zaō]
  • 1.

    ㉢ ζ.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하나님처럼 영으로 산다, 벧전4:6. ㉣ ὁ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롬1:17, 갈3:11, 히10:38등.

  • 2.

    살다.

  • 3.

    [죽음에 반대되는 육체적 삶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목적어로서의 대격과 함께] τοῦτο, 막5:43, 눅24:18, 행21:34, 22:30. 우리의 사정을~, 골4:8. 너희 믿음을~, 살전3:5. [수동] ~에게 알려지게 되다, 알려지다, [인격의 대격과 함께 쓰이거나 혹은 없이도 쓰인다]: 은밀한 것들이~, 마10:...

  • 2.

    알다, 알게 되다.

  • 3.

    [사물의 대격과 함께] 신비를~, 마13:11, 막4:11, 눅8:10. 주인의 뜻을~, 눅12:47,48.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눅19:42. 진리를~, 요8:32. 시간[때]을~, 행1:7. 죄를~, 롬7:7. 사랑을~, 고후2:4. [독립적으로] γνόντες, 막6:38, 고전13: 9,12. [전치...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ίνομαι 1096 [ginŏmai]
  • 1.

    관련된 사람의 여격과 함께: ㉠ [부정사가 뒤따르는 경우] 행20:16. ㉡ [부사나 부사구가 첨가된 경우]. 첫 째, κατὰ τὴν πίστιν ὑμῶν γενηθή τω ὑμῖν: 너희 믿음로 너희에게 되라, 마9:29. 둘째, γέ- νοιτό μο...

  • 2.

    [그 자신의 의미와 함께 동사로서]~이 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 3.

    탄생되다, 태어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 1909 [ĕpi]

  • 1.

    τῇ πίστει: 믿음의 기초에, 행3:16, 빌3:9, ἐπ᾿ ἐλπίδι: 희망에 근거하여, 행2:26, 26:6, 롬4:18, 8:20, 고전9:10, 딛1:2, ἐ. δυσὶν μάρτυσιν: 두 증인의 증언을 기초로 해서, 히10:28...

  • 2.

    [상징적으로] ㉠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권세, 지배, 통솔을 나타낼 때, βασιλεύειν ἐπί τι- να: 누군가를 지배하다, 눅1:33, 롬5:14, κριτὴν ἐφ᾿ ὑμᾶς: 너희를 다스리는 재판관, 눅12:14, ἡ- γούμενον ἐπ...

  • 3.

    [속격과 함께 쓰일 때]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μετά 3326 [mĕta]
  • 1.

    [두 명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낼 경우] ἀγάπη μ. πίστεως: 믿음있는 사람, 엡6:23, 골1:11, 딤전1:14.

  • 2.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와 함께, ~와 더불어.

  • 3.

    [장소의 뜻을 나타냄] ~가운데, ~속에, ~중에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διά 1223 [dia]
  • 1.

    믿음의 법으로, 롬3:27, 갈2:19. 기타, 롬1:12, 3:22, 7:8,11, 고전1:21, 4:15, 히7:11, 갈2:16.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롬15:32.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고전1:1, 고후1:1, 8:5...

  • 2.

    ~을 통하여.

  • 3.

    [속격지배]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ἵστημι 2476 [histēmi]
  • 1.

    [상징적으로] ㉠ 견고히 서다, 고전10:12, τ. πίστειἕσ- τηκας: 너는 믿음 때문에 견고히 서 있다, 롬11:20, 고전7:37, 딤후2:19. ㉡ ~안에 있다, ~안에서 있다, 롬5:2, 고전15:1, 고후1:24등.

  • 2.

    [타동사, 현재, 미완료, 미래, 제1부정 과거 능동태] 놓다, 두다, 위치해주다.

  • 3.

    [문자적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καθ᾿ ἑαυτόν: 혼자서. ㉠ μέ- νειν: 혼자서 지내다, 행28:16. ㉡ πίσ- τις νεκράἐστιν καθ᾿ ἑαυτήν: 믿음 그것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 약2:17. ㉢ βασιλεία μερισθεῖσακαθ᾿ ἑαυ- τῆς: 서로 맞...

  • 2.

    [삼인칭 단수나 복수에 대해 그것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과 동일인임을 지시해준다]

  • 3.

    [주]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능동] 신임하는, 신뢰하는, 믿는, 믿음을 가진, 믿음이 가득한, 믿음 있는, 갈3:9, 요20:27, 행16:15.

  • 2.

    [수동]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할 만한, 믿을 마음을 일으켜 주는

  • 3.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σθενής, ές 772 [asthĕnēs]
  • 1.

    [도덕적으로] 연약한, 롬5:6, 믿음의 연약성, 고전8:7,9,10, 9:22, 살전5:14.

  • 2.

    약한, 무력한.

  • 3.

    [문자적으로]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지식, 지혜, 명철





지식(知識)과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 : 배움을 통하여 얻은 정보 - 길을 찾는 것
지혜 : 성령을 통하여 얻은 정보 - 방법을 찾는 것
명철 :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드러내는 정보 - 분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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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테부나)은 분별력, 지혜(호크마)는 도덕적 실천력 등으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명철이 스승, 노인 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합니다. 즉, 스승은 지식(비나)을 비유한 말이며, 노인은 세상 경험이 있어 지혜를 뜻합니다.

인식론에선 명철은 관조(contemplation)로 직관(intuition)과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종교심리학의 견지에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심지어 초자아인 신의 의지도 일치시키려는 과정의 인식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가끔 이 같은 명철 의미와 유사한 뜻으로 성경에선 대구법 형식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이와 달리 실행력, 영적이며 도덕적 실천력(praxis)을 강조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칸트가 명철과 지혜의 이분화를, 애써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구분지어 저서로 남겼다는 추측도 해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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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지식, 총명, 명철의 뜻을 알아보자.

기도할 때 '지혜와 총명과 명철과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과연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잠언 4:7)

·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잠언 18:15)

·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에베소서 1:8)

1. 지혜

지식, 경험, 통찰력을 통해 얻은 깊은 이해지적인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주로 인간의 내면 성장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은 자기 경험과 배움을 바탕으로 지혜를 향상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흔히 오랜 세월 동안 얻어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자기 인식, 타인과의 관계, 문제 해결, 의사 결정 등 다양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주로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과 통찰력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현명한 조언과 조언받거나, 문제 해결과 결정에 대한 심사숙고를 통해 지혜를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명상이나 내면 탐구를 통해 내적인 지혜를 발견하는 때도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 발전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판단과 대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데 있어서 더 뛰어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는 어렵지만, 아래 예시를 통해 지혜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성인의 인생 선택

어떤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지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롭게 판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우선, 자신의 관심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자신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파악합니다. 그다음, 현실적인 가능성과 산업 동향을 조사하고 직업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분야를 고려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치관과 일생의 목표를 고려하여 자신의 결정이 자신의 비전과 목표에 부합하는지 평가합니다. 이러한 순차적인 사고 과정과 다양한 요소의 고려는 그의 결정에 지혜를 발휘한 결과입니다.

2. 동료와의 갈등 해결

조직 내에서 일하는 두 명의 동료가 의견 충돌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접근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합니다. 그다음,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와 이해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호 간의 대화와 협상을 시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상호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상황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접근법은 갈등을 해결하고 더 나은 협업과 조직 내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2. 지식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주제나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와 이해의 체계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연구, 관찰 등을 통해 얻어지며, 다양한 형태와 수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지식은 주제나 분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체계적인 연구와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과 원리를 바탕으로 합니다. 역사적인 지식은 과거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정보와 해석을 포함합니다. 철학적인 지식은 인간의 존재와 인식, 윤리 등의 깊은 질문을 탐구합니다. 또한, 예술, 문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도 독특한 지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공유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지식은 그들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고와 판단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지식은 교육, 연구,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되며 사회적인 진보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심하게 증가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정보와 이해의 공유가 가능해졌으며, 온라인 강좌, 도서, 학술 자료 등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지혜로운 활용은 다른 문제입니다. 지식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식을 통해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술과 발견을 이루어내며, 사회는 문화와 인류의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식은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정보와 이해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지식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의학 지식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진단하는 과정에서 의학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 의사는 그 증상과 관련된 가능성 있는 질병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의사는 의료 서적이나 연구 결과를 참고하여 환자의 증상을 분석하고 진단을 내립니다. 이러한 지식은 의사의 학문적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며, 환자의 건강을 돌보고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2. 과학적 지식

과학자가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가 실험을 통해 물질의 특성을 연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은 물리학에 관한 이론과 법칙을 배우고 이를 기반으로 실험을 설계하여 자료를 수집합니다. 이 데이터는 이론과 비교하여 분석되고, 새로운 지식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연구, 실험, 이론의 과정을 통해 쌓이며, 자연 현상의 이해와 새로운 발견을 끌어내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3. 역사적 지식

역사학자가 과거 사건과 인물에 관해 연구할 때 역사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정치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학자는 그 시대의 문서, 기록, 증언 등을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과거 사건과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지식은 과거의 경험과 사회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3. 총명

한 사람이 뛰어난 지능이나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빠르게 이해하고 배우며, 문제를 해결하거나 판단을 내릴 때 예리한 생각하고 있습니다. 총명한 사람은 주로 뛰어난 지적 능력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하며,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총명한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숨겨진 패턴이나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총명한 사람은 학업적인 성취나 직업적인 성공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지적 도전을 즐기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흥미와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명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며, 지도력과 창의성을 통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총명함은 선천적인 요소와 환경 요소가 결합하여 형성될 수 있습니다. 유전적인 요인이나 뇌의 구조와 기능의 차이가 총명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좋은 교육과 경험, 도전적인 환경에서의 성장과 배움도 총명함을 향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총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적 호기심과 지속적인 자기 계발이 필요합니다.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또한, 문제 해결과 분석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활동에 참여하고,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뛰어난 지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 해결과 판단력에 있어서 예리한 사고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총명한 사람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수학적인 총명함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한 학생이 수학적으로 총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양한 방법과 접근법을 활용하여 빠르게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수학적인 패턴이나 관계를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능숙합니다.

2. 언어적인 총명함

언어와 관련된 영역에서 총명한 사람의 사례로는 작가시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며, 예리한 언어적 적성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언어적 기술과 표현 방법을 활용하여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창작하며, 깊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능숙합니다.

3. 과학적인 총명함

과학 분야에서 총명한 사람의 사례로는 우주과학자연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주와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이해하고 있으며, 복잡한 우주 현상과 천체의 동작에 대한 원리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뛰어납니다. 또한, 연구 과정에서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 명철

한 사람이 깨달음과 신중함을 지니고 있어 상황을 잘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현명하게 사고하며, 조심스럽고 신중한 결정을 내립니다. 명철함은 사람이 지식과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변의 정보와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결과와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로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 장단점, 이익과 비용 등을 고려하여 행동하며,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짧은 시간적인 이익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또한, 명철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제한을 알고 받아들이며, 현실적인 가능성을 고려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명철함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향상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고력판단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분석력을 기르며, 주어진 정보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판단에 반영해야 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현명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끌어내고, 문제와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받으며, 지도력과 조언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명철한 사람은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래 예시를 통해 명철한 사람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비즈니스 결정

기업 경영자가 명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새로운 시장 진출을 고려할 때, 경영자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시장 조사와 경제 동향 분석을 통해 시장의 잠재력과 위험을 평가하고, 기업의 자원과 역량을 고려하여 적절한 전략을 수립합니다. 명철한 경영자는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과 성장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2. 법적인 문제 해결

변호사가 명철하게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입니다. 변호사는 클라이언트의 이익을 위해 명확한 법적 지식과 사례 연구를 바탕으로 법적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법적 규정과 판례를 고려하여 법적 전략을 수립하고, 객관적이고 합법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명철한 변호사는 클라이언트의 이익과 법적 요건을 고려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능숙합니다.

3. 인간관계 조정

팀 대표가 명철하게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사례입니다. 팀 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리더는 객관적인 시각감정적인 지속을 유지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각 팀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하고 중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명철한 리더는 팀의 조화와 협업을 끌어내며, 팀원들이 상호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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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understanding)

박여라 영문에디터
1~2분

구약성경에 명철(明哲)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테부나’(이해)입니다. ‘빈’(분간하다, 파악하다)에서 파생돼 나온 단어입니다. 테부나는 명철 외에도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출 31:3, 이하 새번역)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한없이 많이 주시니”(왕상 4:29)에서 총명으로 번역되고, “슬기와 이해력도 그분의 것이다”(욥 12:13)에서는 이해력으로,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시 136:5)에선 지혜, “그의 슬기는 헤아릴 수 없다”(시 147:5)에선 슬기로 번역됐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테부나를 understanding으로 번역했습니다. Stand(서다) 앞에 붙인 under는 오늘날 뜻처럼 ‘~아래에’라기 보다는 고대영어 under(~가운데, ~사이에)라고 합니다. 잘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사이에 가까이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과 신앙 고백이 담겼습니다. 특히 욥기 잠언 전도서는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혜가 부르고 있지 않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마을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외친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른다. 내가 모두에게 소리를 높인다. 어수룩한 사람들아, 너희는 명철을 배워라. 미련한 사람들아, 너희는 지혜를 배워라.”(잠 8:1~5)

명철은 지혜를 동반하는 짝꿍입니다. 사이에 서서(understand) 사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잠언1장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식(知識)의 "知"

아는 것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수해 주는 것을 학습과 공부, 수련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다.
지식(知識, Knowledge)을 정의해 보면, 일반적 상황에서 평가된 자료들이 축척된 것을 말하는데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어떤 분야의 대상을 연구하여 얻은 데이터(Data)나 정보(Information), 혹은 사실(Facts)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로 "정보를 보다 체계화하고 개념화한 것"을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습득한 것을  사람들이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은 어떤 분야에 숙련된 기술이나 축척된 정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知)라는 것은 고대사회에  무언가를 안다(知)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숙련된 기술로 《사냥이나 싸움, 전쟁》에 필요한 경험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矢(화살 시)와 말(口, 입구)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화살이 어떻게 정확히 과녘을 맞추는지, 혹은 과녁의 어느 부분을 맞추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식(識)은 言(말씀, 말 언)과 戠(새길 시)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말(言)하는 것을 새길(戠) 수 있다는 말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 것, 익힌 것을 '적다, 기록하다(記)'는 의미이다.
종합해 보면 지식은 문자나 표기로 기록해 놓은 것을 습득하여 알게 된 사실이나 정보를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은 얻는 자에게는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것을 얻으면, 잠언2장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智慧)의 '지智'

지혜 지(智),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알 지(知)자에 해(日)가 붙어 있어 밝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이 두루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Wisdom)는 지식을 통해 깨달은 원리를 계속해서 응용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슬기로울 혜(慧), 그같이 알고 있는 원리를 '슬기로움'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다.
慧(지혜 혜), 글자는 彗(빗자루 혜, 날카로울 혜)+心(마음 심)의 형성자(形聲字)이다.
빗자루는 산란할 개(丯)인데 이는 산란스럽게 많다. 많아서 예쁘다(예쁠 봉), 풍채가 있다(풍채 풍)는 의미로 쓰인다. 거기에 손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이는 금상첨화가 아닌가.
손 씀씀이와 마음 씀씀이가 예쁘꼬 또 예쁜 것이 바로 '지혜'라는 뜻의 한자가 된 것이다.
이같이 혜(慧)자는 윗부분이 빗자루의 상형이고,  그 밑에 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 혜는 긍정적으로는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 상쾌하다, 시원스럽다, 슬기, 능력, 지혜'로 쓰이고, 이것이 나쁜 부정적 의미로 쓰이면 '교활하다, 간교하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이든 양날의 칼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은 바탕이며, 지혜는 활용이니 둘은 피를 나눈 형제나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응용하여 확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잋빛나개 두루 펼쳐내며, 손 재주와 마음의 생각으로 많은 것들을 예쁘게 솟아오르고 가득차게 만드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같이 "지혜"는 문제해결 능력을 의미한다.
잠언1장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히브리어원전(잠언2:2~3) “비나”를 '지식', “호크마”는 '지혜', “테부나”는 '명철'로 번역했다.
지식(知識), 지혜(智慧), 명철(明哲)의 차이
• 지식(비나)은 이해나 총명 = 아는 능력(정보)
• 지혜(호크마)는 숙련, 지식, 다양한 학식 =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테부나)은 지식, 지각, 능숙함 =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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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명철, 지식의 차이

 

 

1. 지혜(智慧, 히:호크마,chokma. 헬:소피아,sophia. 영: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8;12)

 

2. 명철(明哲, 히:비나,beenah. 헬:순네시스. 영: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보다 심오한 차원의 이해력을 표현할 수도 있다. 예컨대 참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3. 지식(知識, 히:daath. 헬:gnosis. 영: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으로,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로,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4. 종합(綜合)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7:4,9:10,16:16; 욥 28:12,20,28;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4:7).

 







과정신학



과정 신학이란 무엇인가요?

과정과 섭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역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하나님의 주관 즉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과정 철학에서는 그 섭리를 하나님의 변질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과정 신학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섭리로 이해한다면 섭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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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과정철학으로부터 발전된 신학이다.
찰스 하츠혼존 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과정신학과 과정철학은 과정의 사상에 연관된다.
화이트헤드찰스 하츠혼은 신의 본질적 속성은 일시적인 과정에 의해서 영향을 주고 그리고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신론은 신은 모든 면에서 영원하고, 세계에 의해 변화되지 않으며,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본다.
과정신학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적 성격을 강조하여 신(神)도 변화해 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발전과정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
이 용어는 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기포드(Giffiord) 강연에서의 원고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강연에서의 원고는 1928~1929년, 출판은 1929년]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이것이 뚜렷한 신학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특히 시카고대학에서였으며 곧 널리 퍼졌다.
그 중요한 대표자들은 하트숀(C. Hartshorne), 오그덴(S.M. Ogden), 콥(J.B. Cobb), 헤밀턴(P.N. Hamilton), 피텡거(W.N. Ppttenger) 등이다.
이들은 다른 급진적인 신학자들과는 달리 유신론적이며, 신의 개념에서는 신의 창조와의 관련성, 자신에 대한 초월능력, 신의 양극성, 사랑이라는 신의 근원적인 속성 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자연, 인간 및 신적인 모든 과정은, 상호성과 참여를 수반하기 때문에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전통적인 신학의 '실체'(實體)에 대한 논쟁을 정적인 형이상학의 시대에 뒤진 유산으로 거부하고, '사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신은 과거의 조망도이며 현재의 관계및 미래의 목적인 이 '사건'을 자신의 사랑본성에 입각하여 받아들인 뒤 우주의 창조적인 진화를 위해 사용한다.
이런 중심적 개념에 따라 과정신학자들은 세계의 예외현상으로서가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강생을 본다.
과정신학에서 구원은 신이 피조물의 성과를 수용하는 것이며, 신은 성취된 모든 선을 수용하과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자신의 본성과 조화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천국지옥이란 창조의 성과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창조에 대한 참여와 이를 통한 작용으로 신중히 다루는 반면, 이러한 성서적 확신이 만들어진 이미지 자체를 신화화하는 것과 고전적인 일신론의 정적인 성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과정신학의 특징 및 평가>

1. `존재'보다는 `과정'이 실재에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재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을 강조한다.

2. 신은 인격성을 지니고 있는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근거로서 끊임없이 새로 운 것에로 세계를 부르시는 `창조적인 동인(動因)'이다.

3. 이러한 신을 묘사하는 여러 종교의 다양한 신개념을 인정하며 이에 따라서 기독교의 `배타성' 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4, 신은 `창조자'이고 세계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또한 신은 세계가 창조되기 이 전부터 `선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신과 세계는 함께 있는 것이다.

5. 신은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초월성'보다는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재성'을 강조 한다.

6. 인간을 행위와 결단의 주체로 이해 한다. 세계 내의 실존으로 던져진 인간의 책임과 자기결정 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조건들이나 과거, 그리고 신에 의해 전적으 로 결정된다는 이해를 거부한다.

7. 신은 `원초적 본성'과`귀결적 본성'의 양면성를 갖는다. 그리스도와 원초적 본성을 동일한 실재 로 본다. 즉 성자와 창조적 변화의 힘과 신의 원초적 본성 셋을 동일시하고 있다. 성부는 원초적 본성의 성자와 귀결적 본성의 성령이 통일된 면에 있어서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신학의 신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의 멧세지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점을 말할 수 있다.

1. 과정신학은 '신'을 어떤 존재성을 가지신 실재적인 분이 아니라 창조성을 부여하는 어떤 '원리' 나 '동인(動因)'으로서 말함으로써'인격적인 신'을 거부한다. 이러게 되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나 그분께 드려지는 예배, 찬양, 기도등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것으 로 되고 마는 것이다.

2.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므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근본적으로 배 치되며, 복음선포의 절박성을 흐리게 한다. 물론 타종교와의 대화나 동양과 서양의 신론 사이에 대화를 유도하는데에는 공헌할 수 있으나, 이러한것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뒤 흔드는 요소가 될 것이다.

3. 인간의 주체성의 강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데로 창조된 피조물,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하 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과 마찰을 빚고 있다.

4.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원리인'삼위일체론'의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성부,성자, 성령'이 라는 삼위의 구별성과 동일성을 함께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이면서 중심 적인 교리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론은 이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신중심적인 신학' 의 방향으로 또는 유일신론적인 방향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과정 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지속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과정 신학이 거짓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6:10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하지 않는 성품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은 고작 인간의 변덕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3:11).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그러나 과정 신학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최종 권위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 성품과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심 (이사야 6:3, 요한계시록 4:8),
주권자 되심(역대상 29:11; 느헤미야 9:6; 시편 83:18; 이사야 37:20),
유일하심 (신명기 6:4), 편재하심 (시편 139:7-10),
전지하심 (욥 28:24; 시편 147:4-5),
전능하심 (욥 42:1-2),
자존하심 (출애굽기 3:14; 시편 36:9),
영원하심 (시편 90:2; 하박국 1:12),
불변하심 (시편 33:11; 야고보서 1:17),
완전하심 (신명기 32:34),
무한하심 (욥5:9;9:10),
진리되심 (신명기 32:4; 시편86:15),
사랑이심 (요한일서 4:8, 16),
의로우심 (시편 11:7; 119:137),
신실하심 (신명기7:9; 시편 89:33),
자비로우심 (시편102:17),
은혜로우심(출애굽기22:27; 느헤미야9:17,31; 시편86:15; 145:17),
공의로우심 (시편111:7; 이사야 45:21),
자유하심 (욥 23:13; 잠언21:1).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속성을 이 세상에서 활발히 발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분의 창조물을 초월하시지만,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며 알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과정 신학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인간들과 내재된 차이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과정 신학의 인본주의 철학은 인류에게 구원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소망 없이 방황하게 되며 영원토록 지옥에 있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이사야 9:6-7;마태복음1:22-23;요한복음1:1,2,14;20:28; 사도행전 16:31, 34; 빌립보서 2:5-6 ; 골로새서 2:9; 디도서 2:13; 히브리서1:8; 베드로후서1:1)
예수님께서 사망하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지 않으셨다면 (로마서3:23;6:23;고린도후서5:21)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2;3:18;3:36;14:6;사도행전4:10-12;16: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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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내용을 중심으로 본 과정신학 논쟁

목창균/ 서울신대 교수 | 1994. 1.

현대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시사적 토대였던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반면, 환멸, 염세,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비관주의적 세계관이 널리 확산되게 했다.
현대인은 전쟁과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적 노력의 무익함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로부터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바르트, 브루너, 불트만 틸리히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과 인간 존재의 비극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으로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신학적 흐름을 주도했다.
한편 다윈(darwin)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과학적 세계관이 또다른 신학적 흐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신학과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이 그것이다.1
과정신학이란 말은 그 근원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좁은 의미로,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에 근거하여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전통을 말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샤르댕 또는 화이트헤드와 샤르댕 사상 모두로부터 유래하는 신학전통을 가리킨다. 화이트헤드가 과정 형이상학파를 대변한다면, 샤르댕은 과정사상의 진화론파를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을‘창조적인 전진’이라 부르고 그것을 어떤 정점(climax)을 향해 반복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반면, 샤르댕은 과정을 그가 오메가(0mesa)라 부른 정점을 향해 계속적인 진화단계를 거치며 일직선으로 상승 발전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2 샤르댕의 핵심사상은 진화의 개념이었으며 신학의 중심개념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이었다. 그는 다윈으로부터 유래하는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을 문화와 영적인 영역에 확대 적용했으며 전체 우주가 계속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진화의 오메가와 계시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필자는 과정신학의 두 흐름 가운데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미국의 과정신학의 논의를 제한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전통신학과는 어떻게 다르며 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과정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의 태동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철학개념을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세계가 불변적인 실체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을 수용했다. 특히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문제로 삼은 것이나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영향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종래의 세 가지 신 개념-즉 절대 군주, 냉혹한 도덕주의자 및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을 비판하는 한편, 기독교의 갈릴리적 기원에서 또 다른 신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부드럽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양극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 그것이다. 전자는 순수한 정신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대해 영향을 끼치나 그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후자는 현실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나타낸다.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신은 정적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그의 신이 철학적인 신이냐 혹은 종교적인 신이냐 하는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에서는 그의 신관을 단지 철학적인 신관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다른 편에서는 그것을 종교적인 신관으로 이해한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엘리(Stephen Ely)에 따르면,“형이상학이 도달할 수 있는 신은 종교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신이라 불리울 수도 없다.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적 분석으로부터 이끌어낸 신은 종교의 신이 아니다.”3
이 견해에 대해 루우머(Bernard M. Loomer)는 비판적이었다. 엘리의 저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종교철학에 대한 비전문가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이트헤드 사상의 풍성함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초한 전통적인 신관과 같지 않았다. 따라서 신의 주전적 의지와 존재 자체로서의 신 개념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기독교에 수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기독교에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신관은 기독교 계시의 하나님을 반영하며. 과정적인 신 개념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의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주장했다.5 멜러트(Robert B. Mellet)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아퀴나스의 신 개념보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보다 탁월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6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던 과정신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과정신학은 1930년 이후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과정신학파는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카고 대학교가 과정사상의 중심지가되었던 주요한 이유는 하트숀(Charles Martshome)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하트숀은 하바드 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요 그의 조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이트헤드의 저명한 해석자요 그의 원리들을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던 철학자였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화이트헤드 사상의 해석과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과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교수들을 연결시킨 사람이 하트숀이었다.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고전적 유신론(theism)을 비판하는 한편,‘신(新)고전적’유신론을 제시했다.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결코 능가될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그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신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관적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7 하트숀은 이것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불렀다.
헬라사상으로부터 기원하는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와 절대성을 높이 평가한 반면, 변화와 과정 및 관계성을 평가절하 했다. 전통신학은 이러한 편중적인 경항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자들은 성서의 하나님은 변화하는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적인 존재와 초자연적인 독립성과 절대성을 선언하는 언어로는 이러한 성서적인 관점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정과 생성, 관계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과 개념을 수용할 때, 성서적인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들은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이 기독교의 계시를 반영할 뿐 아니라 전통신학의 절대자로서의 신 개념보다 성서의 증거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했다.9
이와같이 미국의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의 철학사상을 기독교 신앙에 도입하여 그것을 현대 세계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시카고 대학 교수로 과정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제 1세대 과정신학자들은 위이맨(Henry N. Wieman), 월리암즈(Daniel D. Williams), 루우머(Bernard Loomer), 멜란드(Bernard Meland) 등이다. 그후 월리암즈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로, 루우머는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으로 하트숀은 텍사스 대학교로 옮겨 활동한 것에 힘입어 과정신학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시카고 대학교에서 과정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제 2세대 과정 신학자들은 오그덴(Schubert M. Ogden)과 캅(John B. Cobb, Jr. )이다. 피텐저(W. Norman Pittenger)는 미국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어 영국에 과정신학을 소개했다. 과정신학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에서 가장 활력적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기독교 전통 출신의 학자들을 매혹했다. 과정신학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그리핀(David R. Griffin), 하밀톤(P. Hamilton), 쿠씽(Cousins) 등이 있다. 한편 과정신학은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 즉 합리적인 요소와 경험적인 요소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형성된 신학경향이다.
첫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합리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합리주의적이며 논리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하트숀이 이를 대변하며, 주로 신고전적 유신론을 주장했다. 두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경험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경험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위이맨과 루우머가 이를 대변한다. 특히 루우머는 시카고 대학에서“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있어서 경험적인 분석 방법의 신학적 의의”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0 이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적 방법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루우머는 화이트헤드를‘합리적인 경험론자’로 간주했다. 한편, 세번째 흐름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체계를 보다 명백하게 기독교 신학적인 방향에서 취급하려는 경향으로 캅이 이를 대변한다.

과정신학설
과정철학은 존재를 실재(實在)로 보는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 ontology)을 거부하고 생성과 과정을 실재로 보는 사상이며, 이것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한 것이 과정신학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초자연적 존재론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전통신학의 교리들은 폐기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과정신학자들은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연구방법을 수용하여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참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서의 역사성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본래의 자료들이 변경되거나 초자연적 교훈과 기적 이야기들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11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어떻게 재해석하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과 세계, 창조론 및 기독론을 중심으로 과정신학의 핵심교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양극적인 본성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는 과정신학이 전통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신론을 가장 신랄히 비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론에서 과정신학과 전통신학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유신론(theism)은 하나님을 정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완전한 선과 동일시했다. 하나님을 인간의 희노애락에 참여하는 동적인 인격적 행위자로 보지 않고 불변적이며 고정적인 존재로 설명했다. 과정신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관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증거를 위협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미래의 일을 예상하여 인간에게 반응하는 반면,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신론을 성서적인 개념과 헬라사상의 혼합물로 간주했다. 고전적인 유신론은 이교적인 헬라철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12
과정신학자들은 전통신학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에서 찾았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은 부동의 동자, 지고의 존재, 천지의 창조자가 아니다. 위로하고 사랑하며 이해하는 신이요,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활동하는 신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이 과정신학자들을 매혹시켰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에 대해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 전통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정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양극적인(dipolar)본성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을 단순히 절대자로만 보는 전통신학의 단일극적인 신론은 상대성과 생성이 결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 즉 신의 원초적인 본성과 결과적인 본성의 개념을 수용했다.13 하나님은 지극히 절대적인 동시에 지극히 상대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동시에 시간적이며 변화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추상적인 극과 구체적인 극 또는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추상적인 극에는 영원성, 절대성, 독립성, 불변성과 같은 필연적인 속성이 포함되며, 구체적인 극에는 시간성, 관계성, 생성과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속성이 포함된다. 이 두 극은 상호보충적이며 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낸다.14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를 거부하거나 재해석했다. 전통신학이 정적인 개념이나 용어에 의해 하나님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는 달리, 과정신학은 동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해 하나님을 진술한다. 즉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정적이며 무감각한 실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과정 유신론은 실체를 과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역시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거부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증거와 기독교인의 경험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불변적인 절대자의 개념보다는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더 성서적이라는 것을 성서적 근거에 의해 입증하려 했다. 또한 기독교인의 경험에 호소하여 어떻게 불변적인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시했다. 따라서 쿠씽은“과정사상의 하나님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가깝다”고했다.15 같은 이유로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무감각성(impassibility)의 개념을 부정했다.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서는 과정사상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은 반면, 캅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자로 인정했다. 한편 피텐저는 중간 입장을 택해 하나님을 인격적인 것의 근거인 동시에 인격적 범주를 초월하는 분으로 묘사했다.16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무시간성(timelessness) 혹은 영원성의 교리를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있으면서도 불변적이라고 하는 것이 모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시간적이며, 관계적이며. 가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의 구체적인 면 또는 결과적인 본성이다.17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서도 과정신학은 전통신학과 입장을 달리한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을 주장하지만, 완전에 대한 의미가 서로 다르다. 전통신학은 완전성을 더이상 아무 것도 첨부될 수 없는 것 또는 결코 능가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완성된 또는 성취된 완전이다. 반면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완전을 계속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하트숀에 의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피조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18

2. 만유재신론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일원론에 근거하여 만유재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 양극단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양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 또는 신고전적 유신론이라고 불렀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유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세계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만유재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적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19
요약하면,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 전통적인 유신론의 중심적인 관심사를 종합한 것이다.20 그러나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범신론과 구별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상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유신론과 구별된다.

3. 무로부터의 창조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나 지배자가 아닌, 진·선·미의 환상과 매력에 의해 영향을 미치는‘세계의 시인’또는‘세계의 위대한 동료’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 자신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정 속에 있고 과정이 하나님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도 세계도 정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양자 모두 신기성에 이르는 창조적인 전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21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전통신학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 무(無)로부터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창조자이며, 세계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것이 성서적 창조론의 핵심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창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근거하여 성서적 창조교리를 재해석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물론,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하도록 보존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선재하는 재료의 단순한 재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22 이 세계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온 것이다. 끊임없이 과정 속에서 존재했다 소멸하고, 다시 존재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로부터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로부터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트숀에게 있어서, 창조는 성장하도록 지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했다.23
이러한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따르면,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트숀은 이것을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유비에 의해 설명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세계와 같으며, 정신은 육체에 대해 내재하는 하나님과 같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영향을 받고 또한 주지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24
요약하면,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만든 창조자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이다. 반면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있는 재료로 세계를 재형성한 것이 창조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반자이다.

4. 과정기독론
과정신학은 기독론을 신론처럼 철저히 탐구하지 않았다. 신론이 중심 주제였던 데 비해 기독론은 파생적인 주제였다.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은 기독론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멜란드가 과정사상의 관점으로부터 기독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과정사상 내에서 기독론에 대한 주요한 공헌을 이룩한 사람은 피텐저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신조는 칼케돈 신조(A.D.451)이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며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union)되어 있다는 양성의 교리를 명시하고 있다. 피텐저는 이런 고전적 신조는 더이상 현대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25 그것은 세계, 역사 및 인간의 경험을 현대인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고대 세계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캅 역시 성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교리를 거부했다.26 따라서 과정신학자들은 과정 세계관에 근거하여 기독론을 재구성했다.
피텐저는 예수를 다른 영역으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온 침입자 또는 신적인 방문자로 간주하는 것은 예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고대 헬라인들의 개념이며 현대인들은 그것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피텐저에 따르면, 예수는 1세기에 살았으며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진정한 인간이었다.27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나 목수생활을 한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진정으로 이 세상 안에 있었으며 이 세상에 속했던 자로 간주되었다. 예수의 모든 것은 인간적이었다. 이것이 피텐저가 본 과정세계 안에서의 예수의 위치였다.
피텐저는 예수가 말씀이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지점이라는 데서 예수의 의의를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적인 행위의 일치점이다. 창조적인 말씀이 우주 전체에 임재하며 활동한다. 예수 안에서 그 말씀이 육화(肉化)되었으며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대한 사랑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28
피텐저의 견해에서 보듯이, 과정신학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선재성과 신성, 성육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론의 핵심 교리를 부정했다. 그것은 신화적이며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단지 보통 인간, 즉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팔레스틴 유대인으로 취급했다.

과정신학 논쟁
과정신학은 19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개신교신학과 가톨릭신학에 대한 주요한 경쟁자와 도전자가 되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존재의 형이상학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과정 형이상학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지지자들은 과정신학이 현대 정신과 조화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훌륭한 재해석을 현대인에게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비판자들은 과정신학은 현대 교회에 나타난 가장 위험한 이단이며, ‘이교(異敎)주의에 대한 항복문서’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29
과정신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재해석을 시도한 주제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핵심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며, 우주의 창조주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인 동시에 진정한 인간인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및 부활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속죄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가? 과정신학은 이런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이것은 전통신학에 대한 부정이요 공격이었다.
과정신학의 도전에 대한 전통신학의 응전은 신속한 편이 아니었다. 단지 과정신학에 대한 단편적인 비판과 평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과정신학에 대해 포괄적이며 비판적인 평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내쉬(Ronald Nash)가 편집한「과정신학」(Process Theology, 1987)이다. 이는 13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전통신학과 과정신학을 비교 분석하고 신학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에서 과정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과정신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신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에서 논쟁이 된 문제도 신론에 관련된 것이 많다. 신론세 관한 논쟁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이들 개념을 재해석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무감각(apatheia)’의 원리이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나 원인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자족적인 존재나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무감각성 혹은 무고통성의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이 교리의 포기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함께 고통받을 수 없는 하나님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무감각성의 원리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통에 구속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30
한편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특히 창조론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정하고 창조를 기존의 재료를 통한 재형성으로 해석했으며,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가 아니라 세계의 협력자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성서와 전통신학에 근거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피노크(Clark H. Pinnock)는 과정신학의 창조론이 비성서적임을 지적했다.31 왜냐하면 히브리어‘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오직 하나님의 활동에만 사용되며 하나님이 사물을 만든 재료를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한 암시가 있다(시 33:9).
과정신학의 기독론 역시 전통신학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과정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성육신, 동정녀 탄생, 무죄성, 신성, 대속적 죽음, 부활, 숭천, 재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등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따라서 기독론 역시 논란과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마무리

과정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 과학사상을 중재하고 종합하려고 한 시대적 산물이다.
진화, 상대성, 유기체 창조성 등 자연과학적 개념들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신앙을 현대 지성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전통신학이 존재와 절대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플라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과정과 관계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 사상의 특징은 동적인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실재를 존재나 본질과 같은 정적인 개념이 아닌 과정이나 생성과 같은 동적인 개념으로 파악했으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과정을 반복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한 것 때문이었다.32
전통신학이나 철학이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접촉점이 취약한 데 비해, 과정철학은 하나님을 세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그리고 세계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과 세계는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체계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려 한 과정신학은 많은 난점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헬라 철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고대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과정신학도 전통신학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닌 생성과 과정의 형이상학에 의존하는 것이 전통신학과 다를 뿐이다.33

둘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결점을 개선하려고 시작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개악(改惡)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성서적인 신관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전통신학은 하나님이 영원 불변하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반해, 성경은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따라 행동하실 뿐 아니라 후회도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신학의 정적인 신관을 동적인 신관으로 수정했다. 창조의 하나님을 진화와 변화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성장하는 하나님,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활동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했다고 판단된다.

셋째, 과정신학은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것은 성서적 교훈과 반대이거나 성서로부터 이탈되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 세계 내에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성서의 증거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기독교 핵심 교리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 세계 창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구속적 죽음, 부활 승천, 삼위일체와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다.


주(註)

1. Ewert H. Cousins(ed.). Process Theology(New York:Newman Press. 1971) pp. 3∼5.
2. Ibid. p. 9.
3. 엘리는 그의 저서 The Religious Availability of Whitehead′s God 에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종교적 이용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4. Bernard M. Loomer.“Ely on Whitehead′s God”, Process Philosophy and Christian Thought, Delwin Brown. ed.(Indianapolis: Bobbs-Merrill Company. 1971). pp. 264∼286.
5. Ewert H. Cousins. (ed.). Process Theology(NewYork: Newman Press. 1971). p. 15.
6. Robert B.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New York: Paulist Press.1975). p. 50.
7. Charles Hartahome.“Philosophical and Religious Uses of God”,Process Theology, Ewert Cousins(ed.) (New York: Newman Press. 1971). pp. 101∼117
8. W. N. Pittenger.“Process Thought : A Contemporary Trend in Theology”, Process Theology. p. 27.
9. Ibid.. p. 15.
10. Bernard M. Loom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Method of Empirical Analysis in the Philosophy of A. N. Whitehead”(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1942).
11.예를 들어, 캅은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이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한 것,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냐고 외친 것 등과 같은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p. 142.
12. Ronald Nash(ed). Prdcess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pp. 13, 39, 314.
13. 모든 과정신학자들이 양극적인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트숀, 오그덴 등은 그것을 수용했으나 캅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거부했다.
14. Kenneth Surin.“Process Theology).”David F. Ford. The Modern Theologians. vol.Ⅱ(Oxford:Basil Blackwell Ltd..1989). p. 105.
15. Cousins. Process Theology, p. 15.
16. John B. Cobb, 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1965) .pp. 188.
17. John B. Cobb. Jr. and David R. Griffin Process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76). p. 47.
18. Cousins. Process Theology, p. 14. Surin.“Process Theology.” p. 106.
19. Cousins. Process Theology, pp. 14∼15. 101 ff. 119 ff 하트숀은 선생과 학생의 유비에 의해, 그리고 오그덴은 자아와 몸의 유비에 의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했다.
20. John B. Cobb. Jr., 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ance. 이기춘(편역)「과정신학과 목회신학」(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1983). p. 61.
2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New York:Macmillan. 1969). p. 408
22. Nash. Process Theology, pp. 41, 145.
23. Charles Hartahoyne, Man′s Vision of God and the Logic of Theism(Chicago:Willets, Gark, & Co.. 1941). p. 194. Nash. Process Theology, p. 147. 참조할 것.
24.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대해서는 Willia L. Craig의 논문“Creatio ex nihilo”를 참조할 것.Nash. Process Theology, pp. 145∼172.
25. W. Norman Pittenger.“Bernard E. Meland . Process Thought and the Significance .”Cousins. Process Theology, p. 208.
26.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Westminster, 1975), p. 170.
27. Pittenger, p. 210.
28. Ibid., p. 213.
29. Nash. Process Theology, 서론을 참조할 것.
30. Surin.“Process Theology,”p. 109.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Herbert MoCabe. God Matters, pp. 39∼51. Richard E. Creel, Divine Impasilbility, pp. 140∼158을 참조할 것.
31. Clark H. Pinnock,“Between Classical and Process Theism.”Nash, Process Theology, p. 318.
32.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 p. 51.
33. Nash, Process Theology, p. 22.
*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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