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기도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카 전서 5:17),
"항상 기도하십시오"(로마 12:12),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데살로니카 전서 2:13),
"나는 밤, 낮 기도할 때마나 그대를 기억합니다."(디모테오 후서 1:3)
기도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전체 생명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숨 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매 순간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는
이러한 질문들은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과 몸짓, 미소조차도
찬송가나 찬양 또는 봉헌과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린도 전서 10:31)
더 깊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고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전통은 심장의 기도라고도 불리는
예수기도를 전해줍니다. 예수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가장 잘 쓰이는 예수기도의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는 단순 명료함 안에 성경에 근원을 두고 성령에 의해 인도된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기도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2:3)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성경은 예수기도의 구체적 형식과 신학적 바탕을 제공합니다. 예수기도는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성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의 간단명료함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 처럼 쓸데없는 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마태오 6:8)
예수기도는 주님의 이름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라고 쓰여 있습니다.(필립비
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루가 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한 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사도행전 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예수기도의 말들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크게 소리쳤고(루가
17:13), 세리는 "오, 하느님!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루가 18:14).
예수기도는 우리들의 죄를 인식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요한 I서 1:8).
3.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루가 15:11-32).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 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4.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The Way of the Pilgrim)"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순례자의 길의 작가는,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5. 끝없는 성장
훼오판은 "기도에 있어서 성장은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성장이 멈추면, 그것은 삶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그 영광의 깊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기도는 우리 모두가 떠나야
할 여정인 영적 오솔길의 길잡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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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Philokalia)
필로칼리아(Philokalia)라는 말은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탁월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탁월한 것은 초월적인 삶의 원천이자 진리의 계시로 이해됩니다.
필로칼리아는 4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영적 대가들이 기록한 글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필로칼리아는 18세기에
그리스 아토스 성산의 성 니코디모스와 고린도의 성 마카리오스가 편집한 것으로서 1782년 베니스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두 번째
판본은 1893년 아테네에서 출판되었습다. 세 번째 판본은 아스티르(Astir) 출판사가 1957년부터 1963년 사이에
아테네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총 다섯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 러시아의 수도자 파이시 벨리츠코프스키(Paisii Velichkovski, 1722―1794)는 필로칼리아의 본문들을
발췌하여 슬라브 말로 번역하고, 도브로톨류비예(Dobrotolubiye)라는 제목으로 1793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하고,
1822년에 다시 출판하였습다. 이 책은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의 주인공이 항상 소지하고 다니며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한 많은 배움을 얻는 바로 그 책입니다. 필로칼리아는 19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영성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작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1857년에 이그나티 브리안차니노프(Ignatii Brianchaninov, 1807―1867)가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은수자 테오판 주교(Theophan, 1815―1894)는 또 다른 러시아어 번역본을 "도브로톨류비예"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로 된 원본에는 없던 내용을 자신의 영적 경험을 바탕으로 포함시켰으며, 그리스어 판본의 일부분을 알기
쉽게 의역하였습니다. 은수자 테오판의 번역본은 모스크바에서 다섯 권의 총서로 출판되어, 첫 번째 권은 1877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883년, 1885년, 1905년, 그리고 1913년에 각각 출판되었습니다. 1883년에 발행된 판본은 1963년
뉴욕의 조단빌에 있는 성 삼위일체 해외러시아정교회 수도원에 의하여 영인본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본문들은 관상수도 생활을 안내합니다. 성 니코디모스가 말한 대로, 필로칼리아는 '마음의 기도를 배우는 신비로운
학교'가 됩니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심겨진 영적 씨앗을 싹틔우고 힘차게 길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요한 1:12), 그러한 거룩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에페 4:13). 그리하여 내적인
공부, 즉 '그릇의 내부를 깨끗하게 씻어 겉도 깨끗하게 되는 일'에 있습니다(마태 23:26).
필로칼리아는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예수기도를 되풀이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기도는 필로칼리아에 내적인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발전된 상태를
헤시키아(hesychia, 이시하시모스)라고 합니다. 헤시키아는 평정과 침묵의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으로 볼 때 사고가 안정되고 고정되고 집중되어 있는 상태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유래된
헤시카즘(hesychasm)은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필로칼리아에 묘사된 영성운동 전체를 가리킵니다.
헤시카즘은 교회의 성사 및 전례 생활의 요체이며 그것은 교회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동떨어져 영성훈련을 실행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본문들은 동방 정교회의 성사 및 전례의 틀은 물론이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통의 틀 속에서 수도자들에 의하여 또
수도자들을 위하여 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 니코디모스는 자신의 서문에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진 덕분에 각 사람은 온전해지는 데에로 부름을 받고,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부름 받습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같은 소명을 가지고 같은 영적인 길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 길을 더 잘 따를 것이고 그 길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은 그 길이 요구하는 것에
맞는 생활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을 수도원이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도원 환경 안에서
그 길을 걷든 밖에서 걷든 간에, 이러한 영적인 길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즉, 필로칼리아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성취를 이루고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적인 수행 길을 제멋대로 걷지 않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질을 갖춘 스승의 지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지도를 받을 수 없다면, 교회의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과 위험을 극복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세계의 겉모양과 상태는 변할는지 모르나, 그러한 변화가 인간 상태의 타고난 잠재력과, 인간과 하느님의 친근한 교류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필로칼리아의 가르침과 방법이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타고난 잠재력과, 인간과 하느님의 친근한
사귐입니다. 그렇기에 필로칼리아가 소중히 품고 있는 많은 조언들은 그것들이 기록되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습니다.
필로칼리아는 광야와 같고 공허한 삶, 특히 현대인의 삶을 사랑과 영적인 지혜로 안내하며, 생기가 넘치고 시들지 않는 삶의 비결을
일러줍니다. 우리는 필로칼리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기도의 삶, 즉,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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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마태복음 26: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He went away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not possible for this cup to be taken away unless I drink it, may
your will be done."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주 쉽고 편합니다.
그런데 막상 나의 문제이거나 나하고 연관된 문제를 놓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교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쉽고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반드시 건강하게 회복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럽고 육신적으로는 너무 처참하고 힘든 과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만일 내 문제가 아니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문제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 때문입니다.
연약함과 정이란 다른 말로 밀접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대로가 아니라 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쉽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그 사랑은 밀접한 관계라는 범위 안에서만 작용되고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약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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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영을 주옵소서(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And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They will look
on me, the one they have pierced, and they will mourn for him as one
mourns for an only child, and grieve bitterly for him as one grieves for
a firstborn son.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하려고 하면 기도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힘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기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에게 온전히 붙들리게 되면,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에 힘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주십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이라는 단어는 ‘성령’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기도를 부어주십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기도가 하고 싶어지고, 특히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부어준다’라는 단어는 ‘쏟아 부어준다’는 뜻으로, 폭포수처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어떤 기도를 드리게 됩니까?
십자가의 기도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우러러 본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모습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죄가 씻길 때, 기도를 막는 장애물이 사라지고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때 진정한 성령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성령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기도를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능력을 채워주시며, 십자가의 힘으로 기도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아가 해결 받게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막힘없이 기도할 길이 뚫립니다.
올바른 기도는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고,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힘이 없고 하기 어렵다면, 어린양의 보혈로 기도를 덮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우리의 기도를 기도 되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히 10:19-22, 새)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기도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령님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0~12)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다 아십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하여 세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를 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가난한 심령의 기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또한 가난한 심령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는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보고 나서도 안 되어 이젠 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옵니다. 사실 다른 것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면 가장 좋지만, 그렇게 다 실패하고 나서 무력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귀한 일입니다.
갓난아기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무력함을 느끼며 하나님께 간절히 울부짖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향하여 울부짖는 갓난아기의 울음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 반응하십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하나님이 빨리 오십니다.
금식기도의 능력도 그러한 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육체에 힘이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안 먹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안 하는 것도 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니엘 금식기도’를 하면서 미디어 금식을 합니다. 자기가 평소에 의지하고 즐기던 것들을 중단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집중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주고 있는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끊고 금식하면 우리는 무력해지는데, 그때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면 우리의 무력함이 만들어낸 절박함과 집중력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무력함의 기도를 드릴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어떤 때는 너무 무기력하고 힘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말을 할 힘조차 없어 그냥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침묵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있기만 해도 됩니다. 그것도 좋은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유창하게 기도하고 달달달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철저한 무기력함 앞에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력함을 느끼는 대로 매일 하나님 앞에 말씀드려야 합니다. 크고 중요한 일뿐 아니라 작고 상세한 일도 다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큰일일 수도 있고, 우리가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작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기준을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그냥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 바로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무력함이 믿음과 합쳐질 때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이 없는 무력함은 헛된 부르짖음에 불과합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의 부르짖음과 부모가 있는 아이의 부르짖음은 다릅니다. 부모가 옆에 있는 아이에게는 정확한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은 믿음이 없다고 부끄러워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괴로움을 가지고 딴 데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먼저 나왔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함을 느끼며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이고 믿음의 표시가 됩니다.
사실 믿음의 크기와 주님께 나오는 속도는 반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빠르게 즉시 나옵니다. 빨리 나오고, 사고가 나기 전에 옵니다. 자주 나오고, 항상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주 가끔 나옵니다. 느리게 오고, 다 망가져서야 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주님께 나아와 자신의 모든 괴로움을 먼저 그분께 아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러한 믿음에 응답해주십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주십니까?
1) 기도를 바로잡아주심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큰 스승이 되십니다. 스포츠 팀도 훌륭한 감독을 만나야 우승하고, 학교 공부도 위대한 스승을 만나야 잘되는데, 기도에도 역시 스승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잘못 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승이 되셔서 우리의 기도가 잘못될 때 고쳐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기도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눅 9:54-55, 새)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다 멸망시키게 해달라고 한 기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욱하는 성격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푸는 도구로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은 마음이 무거우셨는데, 그때 다시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며 자기 야심을 이루는 방편으로 기도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막 10:35-37, 새)
이들의 말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돌합니까? 이런 기도는 당연히 응답이 안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정말 문제아들이었습니다. 또 이들과 비슷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잘 나갈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칭찬을 받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니까 안 된다고 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는 꾸중을 들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 중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신 적이 많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이 세 명을 데리고 가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도 열한 명의 제자들 중 이 세 명을 조금 더 깊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 명을 편애하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들이 엄청난 문제아로 ‘공포의 삼인방’이었기 때문에 특별 교육이 필요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3)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들을 성령님이 바로잡아주십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구해도 받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기도는 고쳐주시는 것이지, 아예 폐기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서툴고 실수해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 기도해서 하나님께 야단맞는 게 겁나서 아예 기도도 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도는 실제로 기도를 하면서 늡니다.
어느 축구팀에 최고의 감독이 새로 부임했는데, 선수들이 그 감독 앞에서 실수하여 야단맞는 게 두려워 몸을 사리고 조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감독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로 보여주며 시도해야 합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그게 낫습니다. 그래야 감독은 그것들을 다 보고서 잘못된 부분은 고쳐주고 다듬어주며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만족시켜야 하는 심사위원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실수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완벽한 기도를 하고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들지 말고, 자유롭게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성령님이 우리가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실 것이고 거친 부분은 부드럽게 다듬어주실 것입니다.
외국어는 처음 배울 때 수도 없이 실수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수해서 외국인들이 자기를 보고 웃을까봐 그것이 두려워 시도도 안 한다면 평생 못 배웁니다. 영어를 빨리 배우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입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마구 말을 해나가는 사람이 빨리 배웁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서툴고 실수를 하더라도 계속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잘못 기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틀리더라도 계속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도록 인도하십니다.
2) 응답의 때와 방법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게 하심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염려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자상’하고 ‘친절’해서 하나님을 걱정해드립니다. 기도로 문제를 말씀드린 다음에는 맡겨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며 하나님을 걱정해드리면서 하나님 대신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드리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걱정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쓸 데 없는 것이 하나님 걱정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도저히 수가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기도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는 빠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실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해법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주님을 위해 걱정해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로 나의 문제를 말씀드렸다면, 알아서 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할 일까지 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잠잠히 기다리게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이끄시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무슨 말씀입니까? 염려와 기도를 동시에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와 기도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기도가 제대로 안 된 것이고, 기도했으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뿐입니다. That’s it! 그게 끝입니다. 문제를 말씀드려놓고는 계속 붙어 서서 ‘이러셔야 해요. 저러셔야 해요.’라고 잔소리하고 하나님께 이걸 하실 수 있으시겠느냐고, 어떻게 하실 거냐고 계속 물어보며 걱정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는데 전혀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래도 안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기도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듣기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이미 그 일에 손을 쓰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려고 하실 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이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은을 구할 때 오히려 금을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전에 거의 두 살쯤 된 아이가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돈은 알아서 1불짜리 지폐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와서 설날이라 10불짜리를 주겠다고 하는데도 1불짜리를 절대 안 바꾸겠다고 버틴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똑같이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지금 가진 것을 달라고 하시는데 절대 안 내놓는다고 버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응답을 주시는 때와 방법을 결정하시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응답해주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재촉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성급함 때문에 흔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주님이 방법을 밀고 나가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시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데, 베드로가 자기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7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했는데도 불안해지고 염려가 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될까봐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응답을 안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실까봐 그런 것입니다.
말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찬송가 중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가 있는데, 아주 위험한 찬송인 것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전혀 죽기를 원치 않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지 마시고 살게 하소서.’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응답을 해주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못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과 다르더라도 응답은 응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를 못하더라도, 나중에 보면 그때 그 응답이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있어도 빨리 접습니다.
포기가 빠를수록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집니다.
내 뜻과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삶에 평안이 오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이뤄지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안 된다고, 기도가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잘되는 최고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대화를 보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집니다.
서로 말을 안 해도 마음이 통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도를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힘들고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자연스럽고, 즐겁고, 그래서 틈만 나면 기도합니다.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그렇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그럴 때 기도의 길이 뚫리고 우리 삶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내 기도를 바로잡아주시고, 모든 때와 방법까지 하나님께 맡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주십시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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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 년부터 1576 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 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 년도 1 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년도 11월 15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 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 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주의 기도 제 45 주일제 116 문 :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까?답 : 기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를, 그러한 은사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이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2
1) 시편 50:14-15; 116:12-19;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마태복음 7:7-8; 누가복음 11:9-13
제 117 문 : 어떠한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떠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까?
답 : 첫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신 오직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1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필요와 비참함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2
셋째,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변치 않는 기초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받을 자격이 없으나 우리 구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그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3
1) 시편 145:18-20; 요한복음 4:22-24; 로마서 8:26-27; 야고보서 1:5;
요한일서 5:14-15
2) 역대하 7:14; 시편 2:11; 34:18; 62:8; 이사야 66:2; 요한계시록 4 장
3) 다니엘서 9:17-19; 마태복음 7:8; 요한복음 14:13-14; 16:23; 로마서 10:13;
야고보서 1:6
제 118 문 :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답 :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1
1) 야고보서 1:17; 마태복음 6:33
제 119 문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
1) 마태복음 6:9-13; 누가복음 11:2-4
* 마태복음 6 장의 더 오래 되고 좋은 사본들에는 마지막 부분인 “나라와…
아멘”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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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주일
제 120 문 : 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명령하셨습니까?
답 : 우리가 기도하는 가장 처음부터
우리 기도의 기본이 되는 요소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경외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자녀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1
1) 마태복음 7:9-11; 누가복음 11:11-13
제 121 문 : ‘하늘에 계신’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1
우리가 영육간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기대하라는 것입니다.2
1) 예례미야 23:23-24; 사도행전 17:24-25
2) 마태복음 6:25-34; 로마서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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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주일
제 122 문 : 첫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올바로 알게 됨으로.1
당신이 하신 모든 일들로 인해서
그리고 그러한 일들로부터 보이는
당신의 전능한 능력과 지혜,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진리로 인해서
당신을 존중하고,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게 하소서.2
그리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해 주셔서
당신의 이름이 우리로 인해 더렵혀지지 않고
언제나 존중되고 찬양되게 하소서.3
1) 예례미야 9:23-24; 31:33-34; 마태복음 16:17; 요한복음 17:3
2) 출애굽기 34:5-8; 시편 145 편; 예례미야 32:16-20; 누가복음 1:46-55, 68-
75; 로마서 11:33-36
3) 시편 115:1; 마태복음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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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주일
제 123 문 : 두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더욱 더 당신께 순종하도록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소서.1
당신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부흥하게 해주소서.2
사단의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에게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부수시며,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 거역하는 모든 음모를 소멸하옵소서.3
당신의 나라가 온전히 도래하여서
당신이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해 주옵소서.4
1) 시편 119:5,105; 143:10; 마태복음 6:33
2) 시편 122:6-9; 마태복음 16:18; 사도행전 2:42-47
3) 로마서 16:20; 요한일서 3:8
4) 로마서 8:22-23; 고린도전서 15:28; 요한계시록 22:1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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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주일
제 124 문 : 세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뜻을 버리고
말대꾸 없이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오직 당신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1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들을 2
하늘의 천사들이 자원하여서 신실하게 하듯이 3
우리 모두가 감당하도록 인도하소서.
1) 마태복음 7:21; 16:24-26; 누가복음 22:42; 로마서 12:1-2; 디도서 2:11-12
2) 고린도전서 7:17-24; 에베소서 6:5-9
3) 시편 1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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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0 주일
제 125 문 : 네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간구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근원임을,1
당신의 복주심이 없이는 2
우리의 노력이나 걱정, 심지어 당신이 주신 은사들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필요를 채워주옵소서.3
또한 우리가 피조물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당신만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4
1) 사도행전 14:17; 17:25; 야고보서 1:17
2) 신명기 8:3; 시편 37:16; 127:1-2; 고린도전서 15:58
3) 시편 104:27-30; 145:15-16; 마태복음 6:25-34
4) 시편 55:22; 62 편; 146 편; 예례미야 17:5-8; 히브리서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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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주일
제 126 문 : 다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짓는 여러 죄들 때문에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달라붙는 악들 때문에
불쌍한 죄인인 우리들을 처벌하지 말아주옵소서.1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작정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옵소서.2
1) 시편 51:1-7; 143:2; 로마서 8:1; 요한일서 2:1-2
2) 마태복음 6:14-15;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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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 주일
제 127 문 : 여섯 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 미약하여서
잠시라도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1
그런데 우리의 원수들,
마귀와 2 세상과 3 우리의 육체가 4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이 삶의 영적투쟁에 5 쓰러지지 않고
우리가 최후의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굳건하게 원수를 대적하게 하옵소서.6
1) 시편 103:14-16; 요한복음 15:1-5
2) 고린도후서 11:14; 에베소서 6:10-13; 베드로전서 5:8
3) 고린도후서 15:18-21
4) 로마서 7:23; 갈라디아서 5:17
5) 마태복음 10:19-20; 26:41; 마가복음 13:33; 로마서 5:3-5
6) 고린도전서 10:13; 데살로니가전서 3:13; 5:23
제 128 문 : 이 기도의 결론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위의 모든 간구를 당신께 드렸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시기 때문에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1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2
1) 로마서 10:11-13; 베드로후서 2:9
2) 시편 115:1; 요한복음 14:13
제 129 문 :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 “아멘“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땅히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원하는 나의 진실한 소원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더욱 확실합니다.1
1) 이사야 65:24; 고린도후서 1:20; 디모데후서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