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행동 중에 하나다.
부활절 아침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셔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이 본문이 어려운 것은 그 후에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20:27).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면서 한 주일 후에 도마에게는 그의 상처를 만져 보라고 요청까지 하셨는가?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는데 왜 똑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는 만지라고 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마리아는 예수님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2. 마리아는 시체를 만짐으로 의식적으로 더럽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3.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서 예수님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제자들과 같이 최후만찬에 참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의 옷을 무덤에 두시고 벗으신 상태였으므로 예수님을 만져서는 안 되었다.
5.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나타내지 못했다.
6. 원문 성경의 요한복음 20:17절이 고쳐졌거나 변경되었다.   
    만지지 말라(me haptou)가 아니라 두려워말라(meptoou)로 읽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저자가 아니면 그 앞에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씀을 요한복음 20:17절에서 오역하였다.
7.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곧 올라가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지 말아야 한다.1)
      그 밖에 나를 예배하지 말라 혹은 믿음의 손으로만 나를 만질 수 있다는 등등으로 보기도 한다.2)

그러면 본문의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먼저 이 본문의 원문 번역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역 성경으로는 흠정역(KJV)만이 우리말 성경처럼 "나를 만지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밖에 모든 영역 성경은 “나를 붙들지 말라, 붙잡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헬라어 원문의 해석에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메 합토우(μέ ἃπτου)는 붙잡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이미 시작된 행동을 금하는 말이다.3)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를 붙잡지 말라,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내가 아직 승천할 싯점에 와 있지 않으니 나를 볼 기회가 더 있을 것이다.4)  
렌스키(Lenski)도 같은 의미로 해석하여 아직 승천 전이니 다시 나를 잃을 때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마리아가 이전(부활)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었던 교제를 원했다고 지적한다.
즉 마리아는 부활 전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런 잘못된 생각을 고치시기 위해 나를 붙잡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비슷한 해석이긴 하지만 핸드릭슨(Hendriksen)은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야 네가 나를 이렇게 꼭 붙잡으므로 나를 너와 같이 항상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이제 너는 내가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나와 온전한 교제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본문을 만지지 말라 또 붙잡고 늘어지지도 말라는 말씀이기보다 보고 만지는 육신적인 교제에 집착하지 말고 참되고 복된 교제, 승천하신 후에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더 사모하란 뜻으로 보았다.5)  
이 해석은 결국 부활의 완성인 승천과 성령의 강림 때까지는 안전한 영적 교제가 제약적일 것임을 의미한다.6)

위의 두 해석이 다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 문맥에 연관시켜 해석해야 하며 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과도 연관시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20:28에 도마에게 내 상처에 손을 넣어 만져 보고 하셨는데 그때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다.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으니 나를 붙잡지 말라는 말씀은 마리아에게 부활 전에 나를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네 선생(랍오니)이 아니라, 네 생명의 구주야, 나는 부활하였고 승천해야 한다.
그러니 그전에 선생으로, 그 교제로 그 생각과 이해로 나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붙잡지 말라는 대신에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뜻은 네가 세상에서 나를 알았듯이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나는 아직 하늘의 엄위를 되찾지 않았어, 두려워 말아라, 옛날처럼 내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라 한다.7)  
그러나 이 해석은 앞에 것만큼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다.

   주
   1. Robert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Gospels, Baker Book House, pp.110-111
   2.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Gopspel(Augusburg Pub. Co., 1961), p.1360
   3. Ibid.,
   4. Leon Morris, John, p.840
   5. W. Hendrikse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Grand Rapids: Eerdmans, 1971), p.455
   6. J.H. Bernard, A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
      (T. & T. Clark, 1953), p.670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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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지 말라는 말씀의 뜻

<문>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여기서 ‘붙들지’는 개역 성경에는 ‘만지지’로 번역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답>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마리아가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에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이 우리를 오해하게 한 점이 있다.
단순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체를 마리아의 부정한 손으로 터치하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붙들지 말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 면에서 더 좋은 번역이라 생각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다.
그 의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전과 같이 늘 머물러 계시도록 붙들어 두겠다는 뜻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님은 마리아와(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실 수 있었지만, 부활 후에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은 앞으로도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와 함께하시겠지만, 그 방법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육체로 함께 하셨지만 이제 후로는, 제자들도 부활할 때까지는, 영으로만 함께 하시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의 뜻은 이제부터 함께 하시는 방법, 교제의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는 이전의 교제와는 달라졌다.
그것을 마리아가 모르고 이전처럼 붙들어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를 거절하시고, 이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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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가 루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대로 만약 예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부활은 하나의 신앙고백적 사건으로 믿어지고 고백될 따름이지, 사진을 보여주는 등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래 지금도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예수 부활사건은 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비신화화를 얘기하는 불트만같은 신학자는 이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믿음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활은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벗어나는 사건이기에 부활의 실재에 관련한 의심과 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사건의 현대적 조명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4개의 복음서는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씩 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는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엠마오를 향해 내려갔던 두 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손을 대어 만져보라고 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가에 나타나셔서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기도 하시어 배고픔을 느끼는 육신의 몸을 증명하여 주셨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방에 문을 열지 않고서도 들어오시는 신비의 영체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부활 후 잠시 갈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제자의 사명을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지만,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 이후 40일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이 서로 어긋난다는 이유로 부활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루쉰이 말한 희망의 정의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부모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듯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이는 부활의 사실성을 넘어서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사는 것이니까, 우리 믿는 우리들이 너도나도 이 땅에서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와 생명 그리고 정의실현이라는 하늘 진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암에 걸렸거나 직장에서 해고되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부활은 과연 있는 것이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 영성의 뿌리를 찾아

조선의 초기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의 모습만이 아니라, 소수이지만 내면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 영성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조선의 호세야 혹은 성 프란체스코에 비교되는 이세종 선생입니다.

이세종1880년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살았습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는 오기와 뚝심을 갖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구두쇠처럼 재산을 모아 드디어 머슴살이 10년 만에 마을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뻐기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10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아도 효험이 없자 무당굿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하자 2층짜리 산당을 짓고 그 앞에 몸을 씻기 위한 연못까지 팠습니다.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심히 앓아눕게 되어 사경을 헤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동네 미친 여자로부터 ‘예수를 믿어야 살지’ 하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성서를 하나 구해 놓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가며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이런 얘기가 전해옵니다.

영성 : 청빈, 희생, 사랑의 길

이세종의 얼굴은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가서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고함을 지릅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너무 흥분하여 춤을 추는 동안에 자신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하루 12번의 제사를 드린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청빈과 자기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바로 실천에 옮겼는데, 그의 실천은 참으로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장 부자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성서의 얘기를 읽자 이를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에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판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하며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외치신 희년 선언을 따라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줍니다.
심지어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줍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합니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밤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에게 성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성서공부는 영해(靈解)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성교회 와는 달리 삶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 진리다.
진리에 대해 우리 마음에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 많이 낳은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것조차 마다하면서 고생을 자처하고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자기들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자 멀리 광주에서 전도사, 선생, 목사들이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목사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프란체스코

그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거지 옷을 입고 다녔고, 한번은 광주의 교회 공식모임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어 새 옷을 입고 가다가 길에서 걸인을 만나 그와 옷을 바꿔 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아버지가 반대하자 아버지와의 부자 인연을 끊고 작은 형제회를 통해 청빈의 삶을 살았던 성인 12세기의 이태리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소유나 청빈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합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청빈과 무소유는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사람은 풍요 속에서 삶의 풍성함과 생의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여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그 삶을 보면 사람들은 반대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하는 불안에 휩싸이고 그래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악착스러워지고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경쟁심에 불타오릅니다.
결국은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도가 떨어지고 자살률은 올라가고 사회 범죄는 더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비우는데 있습니다.
청빈, 맑은 가난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갖게 합니다.
악기는 속이 비어 있을 때 맑은 소리가 울려납니다.
우리 인간도 그 몸과 영혼이 비어 있을 때에 하늘의 맑은 평화의 소리가 울려납니다.

이세종님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는데, 그것은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고,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자연 사랑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산천 초목과 금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고,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을 누군가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에는 마치 사람의 피와 같다하여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발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빈대도 죽이지 않고 파리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내어 몰긴 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네팔에 갔을 때, 음식점 주인들이 창문에 붙어 있는 파리를 죽이지 않고 문을 열고는 살살 달래 밖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안에 파리를 파리채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내리치는 사람과 살살 달래 집밖으로 내보내는 사람 이 둘 중 누가 참 사람에 가까운가요?

인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다 고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살아가도록 자리를 제공하는 자연 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산과 강은 무생물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낳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동안 과학과 기술문명은 자연을 인간 욕망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지구 변화는 그동안 우리가 겪어왔던 경험의 수치를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급작스런 변화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의 호세야

그런데 예수를 믿어 참 기쁨을 누렸던 이세종에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으니, 그건 아내와의 관계였습니다.
이세종은 30세 때에 14살짜리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이로 인해 예수를 만나게 되고 변화된 삶의 얘기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화는 단순히 먹고 사는 일뿐만이 아니라, 부부생활까지 변화가 왔는데, 그는 아내와 한 방에 거처하면서 성생활을 하지 않고 남매처럼 지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이혼이 아닌 해혼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참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떠나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갑니다.

물론 간디류영모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들이 이를 받아들여 오누이처럼 살아갔지만, 이세종의 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세종은 깨끗한 신앙인이고 그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에 눈을 뜬 20대 중반의 부인에게 금욕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의 말에 부부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내로 하여금 남의 부인이 되도록 한 것은 남편 이세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세종 님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성생활이라는 금욕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세종 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주지 말라.
내 욕심과는 정반대되게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서로 채워주지 말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일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므로 생명과 육신의 괴로움이 없고, 영혼은 구원할 수 있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고운 옷을 모르는 아이에게 고운 옷을 입혀 기르는 것은 그 아이의 영혼을 버리게 하는 일이다.”(엄두섭, 202쪽)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했던 이세종의 아내는 집을 나가 딴 남자에게 갑니다.
처음 아내가 몰래 집을 나가자 사람을 시켜 아내가 쓰던 세간을 옮겨다 주고, 아내 집에 심방을 가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그래 어떤 때는 아내로부터 물바가지 세례를 받기도 하고 구정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점에서 이세종님은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간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던 호세아 선지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세월이 흐르자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 그 또한 50이 넘어 한글을 깨우치고 성서를 읽어 큰 은혜를 얻었습니다.
말년에 이세종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습니다.
이세종이 죽은 후에는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년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감사했습니다.
77세 임종할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남편에게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세종의 예수 사랑의 힘은 결국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켜 또 하나의 성인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신앙 영성의 완성

이세종 님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 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심으로 그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런고로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도 이와 같다.”(엄두섭, 203쪽)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삼 개월을 곡기를 끊어 자기 몸을 비우고, 마지막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어 좁은 방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옆에서 울자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조금 후에 죽었습니다.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남았습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계속 이어 개신교 영성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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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단독으로 목격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함께 부활을 목격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 봤으니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교회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무시된 인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거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다, 그리고 이전에 간음하다 잡혀 온 죄지은 여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읽어만 봐도 이 셋 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한 첫 구절은 누가복음 8장 초반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옆에서 항상 동행하며 섬긴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한 명입니다.

누가복음 8:2-3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성경 기록으로 보아 대략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지근거리에서 도운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가정도 놔두고 여자 혼자 단독으로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신분이 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교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만큼 예수님의 제자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뒤에서 생계를 보조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비단 가사 일만 했겠습니까?
이들도 제자들만큼 예수님 옆에서 가까이 지내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쩌면 제자들 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며 섬긴 여인 중 가장 유력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에서 보아 대단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막달라라는 말의 뜻은 아람어독수리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큰 성벽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달라는 위대하다는 의미가 있어서, the great maria, 위대한 마리아라고 불리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외경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초대 교회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다른 외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외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특히 베드로와 갈등 관계로 자주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왜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사적으로 이야기하셨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은 생명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막달라 마리아를 우리로부터 떠나보내도록 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부터,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세워질 당시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인류 역사에서 여성 폄하로 인해 저평가되고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도화되자, 교회는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지웠습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위주로 쓰인 기독교 역사 잊힌 신앙의 위인입니다.

빈 무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유월절 안식일이 끝난 후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아리마대 사람이 소유한 동굴 무덤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을 막고 있었던 큰 바위가 움직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다급한 마음으로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그 길로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명의 제자와 베드로가 달려갔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요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저자 자신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요한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굽혀서 동굴 안을 살펴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도착했는데, 베드로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을 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이 잘 정리되어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걸 보면 제자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돌아가신 선생님의 무덤이 훼손되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설령 슬픔이 올라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예법이라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자신들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제자들이 내려가고 난 뒤 그제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제자들도 영문을 모른 채 아무런 대책 없이 내려간 것을 보고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울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궁금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제자들과 달리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엇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 중 하나가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다시 뒤로 돌아섰는데, 그 사이에 누가 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찾아온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 역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옮긴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리아야 하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본능적으로 “라브니!”, 즉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에 몸에 다 손을 데려고 팔을 내밀었던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 장면에서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달리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천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결국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태도 중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말한다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머물러 있을 때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시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지 그것이 지닌 장점과 매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었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분이 계시죠.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인 즐거움만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이 단순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면, 즐거움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줍니다.
사람은 실증을 잘 내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질리게 되고,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도 그 기간이 지속되면 힘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몰입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어떤 활동에 빠져든 동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몰입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향하는 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고자 일관적인 행위를 지속할 때 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몰입의 태도를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지요.
예수님의 무덤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자마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빈부덤의 장소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머물러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했는데, 반대로 이런 글귀가 있지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을 토대로 유홍준 교수가 구절을 좀 고쳐서, 문화유산을 보는 자세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고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 보았기에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보았고, 무엇보다 죽음과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사랑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라보니’로 대답한 장면은 전형적인 사랑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와도 같습니다.
생이별 뒤에 극적으로 만나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지요.
그런데 음성을 듣자 예수님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인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있었던 사건에서 요한 자신이 등장한 부분에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 또는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그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게 손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원어로 하면, ‘메 무 하프투(Μή μου ἅπτου)’라는 말이에요.
하프투(ἅπτου)’는 만지다, 접촉하다는 뜻인데, 매달리다, 집착하다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말아라, 손대지 말라고 번역도 되지만, 나에게 집착하지 말아라 라는 번역해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마리아야 나를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집착해서는 결코 네가 간절히 만지고 싶은 나의 몸은 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복음서의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예수님이 잡히시기 며칠 전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이 여인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여자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나 향유 부은 여인 모두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근접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하고 변화하는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 향유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이 기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고자 한 행동이 자신의 전부라 여겨진 기름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기름은 딱딱하게 굳어진 고체와 다르고, 그리고 점액성이 전혀 없는 물과도 구분됩니다.
만약 물을 쏟아부었다면 그냥 다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고체는 딱딱해서 무한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점액성이 있어서 유연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 표면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부은 행동은 무한 중 무한, 도저히 우리의 이성과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고자 한 것은 향유 기름이 아니라 고체로서 붙들고자 한 것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딱딱히 굳어진 고체의 형태로 예수님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물론 일시적으로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으나,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변화하시는 역동을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으려고 한 것은 육신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있어도, 결코 부활하신 영과 육의 통합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도 깊이 고민을 한 듯합니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믿기가 힘든 것과 달리,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신 그 몸이 육체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있지요.
바로 도마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 하자 도마는 내 눈으로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있었던 문이 잠겨 있는 방 안으로 예수님이 갑자기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직접 예수님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는 증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도마에게 오실 때를 보면, 집에 문이 꽁꽁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벽을 통과한 건지 하늘에서 내려온 건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육체의 몸이 있다면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가냐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붙잡기 위해서는 몸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만져서 도마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도마는 사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만진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이 진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내게 손대지 말아라, 집착하지 말아라는 말씀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내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앞서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먼저 베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화해하고 사랑할 때에야, 그러면 너희가 부활한 나의 몸을 육체로서 만질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을 마리아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앞서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이 오래 동안 머무르며 바라보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바라보게 되면 결국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게 되어서 그 대상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자 손으로 만져 버리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참된 실재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에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소유가 아니라 참되게 사랑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가 잘 알듯이, 마지막 가장 강조했던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에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본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부활의 관계는 신약에서 불쑥 등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나타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부활을 생각했을 때 떠올렸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더운 낮 정오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대접한 사건입니다.
그 행인 중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신 다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시는데, 아브라함의 오랜 염원인 사라의 태에서 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이삭이야 말로, 아브라함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나와 이해관계가 하나 없는 내게 유익을 줄 수 없는 이웃을 환대할 때, 경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토라의 핵심이지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지요?
토라 전체는 그것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만큼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나의 이웃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고 그리고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으뜸이 사랑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사랑은 뭔가를 바라거나 기대해서가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처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활은 그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사건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삶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이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납득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보면서 또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시간을 드려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바라보고 계세요. 그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 고통의 이유들이 보이고요. 또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의외의 모습,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게 빨리 보이지 않아요. 감정 기분에 휩싸여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다 가라앉고 사라진 다음, 모든 편견이 없어지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지요. 나에게 손을 대지 말고, 형제들에게로 가라. 집착하지 말고, 사랑해라. 바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행할 때, 육체로나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온전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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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 /

부활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는 자신을 만져 보라고 권하셨으면서 그보다 얼마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막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오래된 성서 번역판을 보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개역 한글판」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

“만지다”로 번역되는 원래의 그리스어 동사는 또한 “매달리다, 붙들다, 붙잡다, 움켜 잡다, 다루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가 단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무덤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그분의 발을 잡”는 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신세계역 성경」, 「신 예루살렘 성서」, 「신 영어 성서」 등 현대어로 된 많은 번역판들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더는 나에게 매달리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함으로,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그 말씀을 각각 “나를 붙들지 말라”와 ‘나를 붙잡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친밀한 동료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누가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온 줄 알고 근심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주와 함께 있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에 예수를 꼭 붙잡고 가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직 떠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키기 위해 마리아에게 그만 매달리고 그 대신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와 도마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그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면서 예수의 못 박힌 상처를 보고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8일 후에 예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상처를 만져 보라고 권하셨습니다(요 20:24-27)

따라서,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셨을 때는 그분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잘못된 열망에 대응하신 것인 반면에, 도마의 경우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사람을 도우신 것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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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ma - 영구(everlasting)









보혈(寶血)의 능력(能力)





원수를 위해 아들을 죽인 하나님(요한복음 3:16-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3장 시작 부터 있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끝나고 16절 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는 내용이 시작 됩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 봤을만한, 그만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모두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 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기독교의 교의 (Dogma)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찾아오셨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의

보내심의 교리(the sending formula)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신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교리인가? 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온 종교가 있나요?
어떤 종교가 신이 사람을 찾아 왔다고 얘기하나요?
고등 종교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이 땅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인간이 찾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내심의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사상이 들어 있고, 또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아서 그 분의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Sending Formula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써의 자격이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선재하지도 않았고, 권세도 없는자가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17절에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렌( ἀπέστειλεν)은 내쫓다, 유기 시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유기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ἀφοριζω 스트롱번호 873

1. 분리하다.  2. 내쫓다. 3. 따로 두다
발음 [ aphŏrizō ]
관련 성경 / 갈라 내다(마13:49), 구분하다(마25:32), 떠나 물러가다(갈2:12), 멀리하다(눅6:22), 택정하다(롬1:1, 갈1:15), 따로 세우다(행13: 2, 19:9), 따로 있다(고후6:17).


죄를 지어 원수된 인간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교리
내어줌의 교리(Giving up Formula)


죄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 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 유기 시키셨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감동이 없지만, 이는 사실 문제인 것 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너무 무뎌져서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 보다 더욱 감동을 주는 구절은 성경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고 내어 주셨다는 이 말씀에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않되는데도, 엉뚱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런 진리를 듣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지칭하는데, 독생자라는 뜻의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 외아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독종자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귀한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2:2>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는 유일 무이한 독생자 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에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해 이 땅으로 유기 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로마서 5:8>

우리는 이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 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먼저 흘러 나온 것 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얘기하는 3장 16절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 있기에 사랑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의 흉내, 용서의 흉내를 낼 수 있듯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이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를 모르더라도 사랑의 모습 또는 단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 입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변합니다. 또 인간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 입니다.

결국 그 죄인들의 사랑은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멕시코 영화 중에 아모레스 페로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치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전직 대학 교수인데 혁명에 참여 했다가 20년간 복역을 하고 나와서 살인 청부업을 하며 삽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위해서 돈을 열심히 모읍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있는 개들을 여러 마리 데려다가 쓰레기 같은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다 교통 사고 현장에서 투견에 쓰던 총상을 입은 개를 하나 발견 합니다. 코피라는 투견에서 맹위를 떨치던 개였는데, 치료를 해주고 다른 개들과 같이 키웁니다.

그런데 치보가 자신에게 청탁이 들어온 사람을 살해하고 들어 왔더니 코피라는 투견개가 자식처럼 키우던 다른 개들을 물어 죽인 것 입니다.  그래서 치보는 총을 들어 코피를 겨누는데, 문뜩 자기 자신과 코피를 오버랩 해서 비교 합니다. 코피는 주인을 위해서 다른 개들을 목숨걸고 물어 죽였던 투견개 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살인 청부 업자 였죠.

자기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막 죽이며 다녀 놓고는 이 개가 자신이 사랑하는 개들을 죽였다고 개를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개도 아까운 것이고 남의 것은 사람이어도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기 딸을 위해서 돈을 모은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말 입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의 사랑과 일관성을 갖는 하나님의 사랑

이 영화를 만든 이나리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이기주의를 또 타락을 얘기하고 싶어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모습이며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랑에 대한 증거 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 속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 변치 않는 속성을 사랑으로 갖고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 졌을 때, 그 사랑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비춰지게 되는 것이지 우리안에서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사랑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입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인가요? 우리가 회개하고 착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부터 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이 꼭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터 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고, 베드로 전서 1장에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예정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요한 계시록 13:8>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 입니다. 즉 어린 양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세워진 것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의 저편에서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 내고 계셨던 것 입니다. 십자가는 역사를 너머 영원에 서 있고, 이 십자가의 효력은 전 역사에 미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섰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님은 창세 전에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 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셋은요?
에녹은요?
이들은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거죠.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룻이나 라합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있다는 것은 구원 계획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았다는 메세지를 성경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것 이었음을 힌트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선민 사상의 정점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유대교와 그 형식 주의를 박살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메세지를 요한은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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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 창조 과학회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동전 10개가 있습니다.
흔든 다음 처음 1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입니다.
다시 집어 놓고 처음에는 1번 동전을 꺼내고 두 번째는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0입니다.
이런 식으로 열 번을 꺼낼 때에 1번 동전부터 10번 동전까지 차례대로 꺼낼 확률은 10에 10승 즉 1/100억입 니다.
100억번을 시도하면 한번 나타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확률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동전 열 개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안계시면 창조도 운행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1. 지구의 자전 속도 한 시간당 1,600km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10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납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2.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지축은 23도 기우러짐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머 예화 /  장학사가 어느 학교를 방문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이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지?"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제가 안그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학사가 담임 선생님께 "내가 이 학생에게 지구가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이 자기가 안그랬다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엔 담임 선생님이 말합니다.
"그 학생은 착한 학생입니다. 게가 안그랬다고 하면 안그랬을  겝니다."
기가찬 장학사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 학교 어떻게 된 겁니까? 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왈 "국산 다 그렇지요 뭐!"

지구가 23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4.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5.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겠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브리서 3:4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후면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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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옷"이다.
몹쓸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마태복음 5:44~4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선한 사람에게만 비춰주시지 않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에게만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시는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야 철이 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달아지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빵 하나를 먹어도, 그 빵 하나를 먹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밀농사 짓는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클까요?
또 밀가루 공장에서는 품질이 좋은 밀가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할까요?
또 빵집에서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먹는 빵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빵 한 조각을 먹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가 담겨져 있는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면 그만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도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학생 시절에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기쁨이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으며,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우 하게 사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빵을 먹은 적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그녀는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왔으며, 그녀는 죽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녀는 그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으로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구호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고, 그 구호 단체를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생명을 부지한 그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 소녀가 바로 오드리 햅번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라고 말하던 그녀는 죽은 후에도 ‘홍보 대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구호를 돕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받은 사랑을 감사할 줄 알고, 남에게 나눠 주는 사람들이 모일 때,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랑이란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물이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아름다운 들과 산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선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독생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 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갇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길이 너무 심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아버지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국가나 정부나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재능도 아닙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척 스윈돌 목사는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과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경제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를 사함 받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실 구세주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최고의 선물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게 되었고,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고, 죽어야 할 자, 지옥에서 멸망을 당할 자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일본에 카가와 토요히코라는 유명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시장(市長)의 소실 태생입니다.
그는 시장 본처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는데, 그 형제들이 하나같이 그를 구박했습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 가지고……” 하며 서자인 그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했지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무룩해 있던 그가 어느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카가와 토요히코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토요히코는 당장에 그 대열에 따라 나섰습니다.
전도대원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아무개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아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고, 행복한 자가 되! 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 보니 선하게 산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 그 집사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웠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도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를 많이 지었지만, 저와 여러분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변호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기에 주님이 내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모든 저주로부터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목회의 해답도 사랑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목회를 잘하는 방법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민족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선교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사회도 가정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감으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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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성(獨特性)과 절대적(絶對的) 사랑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낮은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감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지 못한 까닭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된 자화상은 무엇이고 우리가 확고하게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독특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제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개개인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장애가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절대적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금반지가 찌끄러졌다 할지라도 그 금의 가치가 여전한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예뻐야 사랑하고, 아름다워야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로마서 8:32).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최고, 최상의 것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 이하의 것은 아끼지 않고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누가 죄인을 위해 사랑스러운 자식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탕자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내가 창조주였다면 벌써 이 세상을 박살내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떠서 태평양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사이 합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했는데 얻은 사랑은 좋다. 그러나 구하지 않았는데 얻은 사랑은 더욱 좋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구해서 얻은 사랑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마어마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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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1-14)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

들깨를 기름틀에 넣고 짜면 들기름이 나오고, 포도를 짜면 포도즙이 나오며, 양파를 넣고 짜면 양파즙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피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의 중심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의 핵심은 피입니다.
제물을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피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속죄 제사를 드리는 자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물을 대신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드려야 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피로 속죄에 필요한 모든 피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음으로 믿고 고백하면 더 이상 실제적인 피 흘림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배로운 피 곧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무엇인가?

1. 죄를 속죄하는 능력(히브리서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 보혈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때 저질러 진 죄라도 다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한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산다"는 의미입니다. 저당잡힌 것을 값을 주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값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없는 피를 쏟아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그 피가 나를 죄에서 해방시켰음을 믿으면 구원받고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

롬 8:1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출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 날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 애굽에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pass over 곧 유월(踰越)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유월절이라 했습니다. 그 피가 재앙을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중세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수도원 원장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기도만 하면 사람을 투시해 봅니다. 과거의 죄를 다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들어왔는데 옛날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 마음이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 앞에 오니까 벌벌 떨립니다. 내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겠지 싶어서 그 원장이 와서 “원장님! 원장님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과거의 죄를 다 보여 주셨는데 내 죄를 보여 주십니까?”

그러니까 원장이 “며칠 후에 오시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볼테니까?” 며칠 후에 원장님실에 가니까 원장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죄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니요.

내가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당신 회개했어요?” “회개했어요.”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보혈로 씻고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니 하나님은 당신의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왜 당신 자꾸 있다고 그래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지 마시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를 다시 기억나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시고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2. 하늘 성소에 들어갈 담력(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보혈을 힘입어 죄인이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됩니다. 보혈이 없이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에 하나님조차 기억하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혈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예수님의 피의 대가로 우리를 자녀 삼았습니다.

요한1서 5:18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녀의 권세입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를 손 못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구속이란 구속은 덮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보이니까? 악한 영들이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을 덮어 가릴 수 있게 보혈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불을지라도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다 덮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이 범죄하고 난 후에 나타난 현상이 죄를 지어면 따라오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뭇 잎사귀로 중요한 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숨었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이 숨은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두움이 빛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인간이 낙원 외부의 거친 환경 속에서 수치를 가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옷을 지어주셨다는 뜻도 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을 잡아 짐승의 피를 내어 죄를 덮으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 피로만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속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무거운 죄의 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죄의식, 죄책감 다 털어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히브리서 9:14)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남아있던 죄의 흔적들, 죄가 남긴 것들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순종하여 피를 바른 가정은 하나님이 그 가정의 장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유월절은 ‘pass over’ 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넘어가는 역사가 피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오늘날의 이 피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 그 가정에 예배가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있는 한 가정을 무너트리는 어두움의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벧전 1:2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뿌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피를 뿌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며 어두움을 물리치며 질병을 치유하며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대로 그 피를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뿌리되 모든 장막과 쓰는 그릇에 까지 정결하게 하기 위해 뿌리라고 하십니다. 창 3장 이후에서 보듯이 일단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우리 안에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죄는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그 다음은 사람과의 단절이며 마지막으로 환경과 문화의 타락입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다시 말해 사람에게서만 더럽고 썩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보혈의 능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정욕,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을 깨끗이 씻어서 참된 성결을 이루게 될 때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마귀를 물리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인간에게 온갖 불행과 재난과 불안을 갖다 주다가 자살까지 하게 만듭니다.귀신들도 보혈을 알고 또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혈의 능력을 알고 믿음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하며 물리쳐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은,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정욕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롬5:4에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육체의 정욕과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단호히 결심하고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작심삼일로 삼일도 못가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주저 앉게 되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은 인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하여, 우리의 결심과 결단을 금새 무너트리고 우리에게 비참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빈곤한 상태로 빠트립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와 친구가 되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맺게 하고, 온갖 분쟁과 시기와 당짓는 것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에 빠지게 만듭니다(갈5:17-21). 뿐만 아니라 거짓을 조장하고, 서로 불신과 미움과 악한 감정을 갖게하여 서로 분열하게 하고, 교만과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은, 인간을 정욕의 노예로 만들려고 힘을 다합니다.

이같은 사탄의 세력과 싸우려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고 부단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은 스스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삶이 육체에 끌려 다니는 정욕의 노예처럼, 세상과 짝하여 세상과 타협하기를 즐겨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불의와 싸우고 능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우리를 위해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골 2:15).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만이, 육체의 정욕을 이기며 사탄과 대적하여, 능히 승리의 함성을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고, 사탄을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로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보혈(히브리서 9:11~22)

히브리서를 일컬어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행하셨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사역하시는 말씀이므로 제5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들의 양심이 깨끗해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룹니다.
그 피는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정결함과 죄사함은 없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 새 언약의 중보자, 언약의 피, 피 흘림과 죄 사함 등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구약의 제사제도로 인해 육체가 정결 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제사 때이나 속죄일에 죄인들과 성소에 뿌려집니다.
이는 정결을 위함입니다.
또한 암송아지의 재도 뿌립니다.
율법에 따르면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민수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됩니다. 또한 두루마리 성경 즉, 구약성경에 뿌린 것도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에 정결 의식을 위해 뿌린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물건마저 모두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피는 언약을 세우는 용도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장막과 모든 기구에 뿌려져 그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 피는 정결과 속죄를 위하여 효과가 있었으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사는 매일 반복되어야 되고, 그에 따라 짐승도 계속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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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3-1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짜보면 짐승의 피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짐승의 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을 짜보면 예수님의 피가 줄줄 흘러나옵니다. 

그만큼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피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피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장님일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식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은평성결교회 한태수 목사 대학 2학년 때 목사님의 후배 하나가 동맥과 정맥에 문제가 있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열두 시간에 걸친 목숨을 건 대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피가 모자라 친구 수십 명이 헌혈하고 시간시간 기도했습니다. 
결국 수술을 잘 마치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가 다시 살아나서 간증을 하는데 수술하는 동안 눈을 감아도 보이고 떠도 보이는 심장이 있었답니다. 
그때 그 심장에서 자기에게 피를 떨어뜨리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지 않는 피가 계속 떨어졌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예수님의 피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식어버린 피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따끈따끈한 살아 있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는 보배로운 피 즉 보혈(寶血)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보혈입니까? 
그 피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 피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는 피입니다.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죄 사함의 능력(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즘 찌든 때를 벗기는 세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TV 홈쇼핑에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서 쓱 문지르기만 해도 찌든 때가 싹 사라지는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단한 기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세제도 인간의 죄를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세제이며 강력한 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을 미가서 7:19에서는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You will again have compassion on us; you will tread our sins underfoot and hurl all our iniquities into the depths of the sea.

생각해 보세요. 
깊은 바다에 검은색 바둑알 하나를 던졌다면 그 바둑알을 누가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그렇게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동쪽 끝은 어디고 서쪽 끝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가 극동지역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더 가면 그곳에는 동쪽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그곳에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보다 더 동쪽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구를 돌고 돌아도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만날 수 없습니다. 

시편 103:12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회개한 죄를 다시는 찾지 못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고백한 죄를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사함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를 정죄하는 마귀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는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마귀가 방에 들어와서는 굉장히 큰 두루 마리 책을 펴놓았습니다. 
루터가 보니까 자기가 평생에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다는 것을 빼놓았군.” 
이 말을 하자마자 마귀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루터는 다시 새 힘을 얻고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행복자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자신의 죄로 양심은 더러워지고 늘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목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범한 죄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심한 편두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편두통이 심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좋은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목사님은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놀라운 평안과 신비스러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주일 후, 목사님의 편두통은 싹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삶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악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마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죄악 속에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피의 능력을 깊이 깨닫고 그 피의 능력으로 죄악을 대적할 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식사를 하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을 하시니 둘째 아들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식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밤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손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도가 웨슬레 목사님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돈이 없으니까 “야! 돈이나 좀 가지고 다녀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웨슬레 목사님이 강도에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것 가져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가 해서 돌아섰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당신이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렸습니다.”, 
“쳇! 뭐라도 줄 줄 알았더니만 보혈?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런데 3년 후 웨슬레 목사님이 저녁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 신사가 곁에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저는 3년 전에 길거리에서 목사님을 세웠던 강도입니다. 
그날 목사님이 말씀한 그 보혈의 이야기를 듣고 내내 마음속에 보혈, 보혈 소리가 들려서 할 수 없이 저도 회개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이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일본에 동양의 성자로 불려지던 호지유태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술에 만취된 채 집으로 귀가하다가 길 옆 작은 집에서 붉은 전등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창가로 가서 방안을 훔쳐보았습니다. 마침 젊은 여인이 하얀 속살이 다 비치는 엷은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들어가 여인을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여인을 목 졸라 죽이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얼마 후 체포된 그는 강간, 살인, 방화의 극악한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포악한 죄수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가 보내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뜨겁게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얼마나 변화를 받았는지 특사로 사면 받고 출옥했으며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살다가 성자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이 성결해지기를 원하신다면 보혈을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작은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 고백하시고 보혈로 씻김을 받으십시오. 또 보혈찬송을 많이 하시고, 자신에게 보혈이 적용되었음을 계속해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헌신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만 받는 것만 아니라 새 생명, 새 능력까지 부여받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모자라 창백하게 죽어가던 사람이 수혈을 하면 얼굴이 불그스레해지면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힘이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속에 가득 차니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였던 그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깊은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1. 주님을 위하여 헌신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주님을 위하여 당연히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헌신은 강제적인 헌신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돈 많은 신사가 흑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흑인 여자를 놓고 경매하는 것을 보고 부르는 값의 배를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는 서류를 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고 “나를 풀어 주려고 나를 샀다고요?, 나를 자유케 하려고 나를 샀다고요?” 하며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비웃더랍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신사의 참뜻을 깨닫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자원하여 주인님의 종이 되겠다고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헌신하는 것은 세 종류입니다. 
하나는 복받기 위한 헌신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워서 하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마지막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헌신이 세 번째 헌신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2. 교회를 위하여 헌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보혈의 공로를 깨닫고 나니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헌신했던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요?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자주 찾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제 몸을 괴롭게 하겠습니까? 
저를 사랑하면 제 몸도 사랑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면 저를 자꾸 찾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낙중 목사님이 캐나다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담임목사님과 함께 김집사님을 심방했답니다. 
김 집사님은 주유소와 함께 슈퍼마켓을 경영하는데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에 크게 힘이 되는 분이고, 아들은 의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최목사님에게 그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교회가 500달러의 월세를 내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보다 큰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큰 장소로 이전하니 월세도 올라서 월 3,000달러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돈 많은 집사님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집사님은 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형편이 되지 않아도 매주 500달러씩 헌금을 해서 교회 월세를 감당했습니다. 
그 500달러는 작은 가게를 하면서 들어오는 돈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형편을 아는 목사님은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김집사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헌금을 작정했는데 그 김집사님이 1만 달러를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3,000달러까지 헌금을 하고 가게도 어려움을 당하고 해서 결국은 미국으로 개인택시 기사를 하겠다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게에서 뺀 돈 나머지 7,000달러를 다 헌금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후 김집사님은 3년 동안 미국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작은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네 주민들이 다른 가게는 이용하지 않고 그 가게만을 이용했습니다. 
이유는 가게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파는데 비디오를 대여하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던 날 동네 대표가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니 성인용 음란비디오는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김집사님 마음속에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주민대표의 말을 받아들이고 음란비디오를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마켓 주인은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란비디오를 대여하고 판매했습니다. 
주민들은 단합을 하여 음란비디오를 취급하는 가게를 이용하지 않았고 김 집사님의 가게로 몰려왔습니다. 
김집사님은 장사가 잘되어 이제는 주유소도 하고 슈퍼마켓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유는 오직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2:6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한 것입니다.    

3. 세상을 위하여 헌신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본인도 시각장애인이면서 역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 목사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답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런데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어떤 보상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 보혈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합시다. 

넷째, 승리의 능력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승리하게 만듭니다. 
무엇에 대해서 승리하게 만들어 줄까요? 

1. 마귀에게 승리합니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그는 사단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마귀에게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 하고 생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일들을 가로막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승리하므로 우리의 영, 혼, 몸과 생활과 관계와 사역과 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니 힌(Benny Hinn) 목사님이 필리핀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귀신들린 한 젊은이가 단상으로 뛰어올라와 난동을 부리더랍니다. 
사람들이 저지하려해도 말을 듣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베니 힌 목사님이 기도하기를 “주님, 저와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청년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 말 하지마! 그 말 하지마!”하더랍니다. 
베니 힌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라고 더욱 힘 있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며 “그 말 하지마!”하며 난폭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귀신은 떠나고 그 젊은이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귀신들은 베니 힌의 사역에서처럼 사람이 감지하게도 역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 할 수 없도록 은밀히 역사하며 믿는 자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든 못하든 악한 영의 역사를 허용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사십시오.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어린양의 피로 덮으십시오. 보혈은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2. 가난에 대해서 승리

고린도후서 8:9에 보면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가난에 대하여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양계장을 하는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은 언제부터인가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보혈을 바르고, 뿌리고, 덮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런 표현에 대해서 장로님은 거부감을 가진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로님도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닭장 속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 피! 예수님 피! 예수 보혈! 예수 보혈!”이라고 외치며 보혈이 뿌려지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짧은 기간에, 적은 사료로, 병아리를 적게 죽이고, 좋은 상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2등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환경적인 저주를 이기게 합니다. 

넷째, 치유의 능력(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이미 건강해졌습니다. 
주의 보혈은 우리들에게 질병을 이기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고훈 목사님은 20세 청년 때 폐결핵 말기로 죽음의 문턱에 서있었습니다. 
전도를 받은 후 교회에 나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만 온 몸과 맘을 다해 찬송하는 성도들이 부러웠습니다. 
한밤중이면 교회에 가서 “나도 저들처럼 찬송을 부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보름날 밤 12시쯤 목사님의 입에서 드디어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곧 씻어주소서” 
목이 터지도록, 밤이 깊는 줄 모르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반복해서 온 몸이 땀에 젖도록 불렀습니다. 
회개와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서 찬송으로 보혈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병에서 고침 받았고 그 후 무수한 시련과 환난, 질병을 만날 때마다 보혈찬송으로 세례를 받고 오늘까지 생존하는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질병을 이기게 합니다.

몸이 아픈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보혈을 적용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위장이 아프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주의 보혈을 위장에 적용합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바릅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뿌립니다. 나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위장병에서 자유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위장병은 치료 될 것입니다. 
주의 보혈은 질병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넷째,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 (고린도전서 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애굽에 내린 장자의 죽음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천사들이 넘어갔습니다. 
그 밤에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했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죽음의 천사들이 장자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을 믿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입니다.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기자가 찾아왔습니다. 
당국에서 그를 앞세워 선생을 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선생! 인도의 간디는 사람이 태어났으면 100년은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은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일제에 순응하고 감옥에서 나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100년만 살겠는가? 영생을 해야지.”, 
“아니, 어떻게 영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된다네. 자네가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온 것을 보니 나를 통해 예수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 같구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네도 예수나 믿으시게.” 
그러자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생기는 겁니다. 보혈의 능력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경향이 많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디가 한번은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탄광의 책임자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도를 말하자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구원이 너무나 값이 싸군요.” 

그래서 무디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수백 피트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단추만 누르면 승강기가 내려가고 다시 누르면 올라옵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물론이지요. 석탄 회사가 이미 돈을 많이 들여서 설치해 놓았으니 저는 그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공로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설치하여 놓으셨으니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단추만 누르시면 됩니다.” 라고 하자, 그 때야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대신한 희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믿음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죄의 능력
거룩한 삶의 능력
헌신의 능력 /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승리의 능력 / 마귀에 대하여! 

(예화)

일본에 ‘호지 유태랑’ 이란 난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성질이 포악했던 지, 겨우 18세에 살인과 강간, 방화 등 흉악한 죄를 저지르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형을 살던 유태랑은 뉘우치기는 커녕, “꼭 탈옥해서 판사에게 보복하겠다”며 오히려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감옥에서 한 청년의 전도를 받은 유태랑은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새사람이 된 유태랑은 그때부터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심한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자기 입으로 고름을 다 빨아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죄수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이백 명도 넘는 죄수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기독교를 탄압하던 당시 군국주의 일본 정부였지만, 그 감옥 안의 교회에 대해서 만큼은 묵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태랑같이 난폭한 사람도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니까,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런 극적인 회심을 겪고 나서, 오히려 먼저 믿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구나 위축된 자기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유태랑과 같은 그런 극적인 변화를 체험할 수도 없고, 꼭 그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극적으로 변화된 삶도 아니고 완전하지는 못할 망정, 내 삶 속에서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끈질김에 순복하면서, 부족한 대로 주변에 그 사랑을 전하려 한다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같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해도, 늘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부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황금률을 실천하는 분들을 저는 우리 공동체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오히려 처음 믿는 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먼저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복음의 능력을 목격할 때마다, 새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열심이 그 분들의 삶에서 이루실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 32)
그렇기때문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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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18)

성경 66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골라내라면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하고 그 사랑한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악센트가 강한 부분이 “독생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뜻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소유

버클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그만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강도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학생의 장례식을 치룬 후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를 위로하러 심방을 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지방 도시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호텔도 가지고 계셔서 제가 있는 동안 그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잘 사셔서 다른 빌딩도 가지고 계시고 택시 회사도 하고 계셨습니다. 택시가 몇 대냐고 여쭤보니 100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주 성공한 분이셨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그 분 이름을 대면 누구도 다 아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제가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아들을 만나고자 하면 교회를 나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틀림없이 있는데 내가 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당신에게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번 믿어 보시고 교회에 출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훌륭한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물질적으로 한번 성공하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꿈을 다 이루었습니다. 나는 100세까지 살아도 이만한 재산만 가지고 평생 꿈을 이루었는데, 내가 평생을 통해서 이룬 꿈인 내 모든 소유를 다 가져가고 우리 집의 숟가락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몽땅 다 없어지고 그 대신 죽은 내 아들이 살아난다면 내가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분만 그러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저도 다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분은 그 아들 말고도 또 아들 둘이나 있고 딸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부모는 어떠하겠습니까? 다 똑같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 아들을 희생 시키는 값으로 대통령이 된다면 되실 분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 아들을 죽일 경우 대통령 시켜준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 안 드시길 다행이지 만약에 드셨다면 제가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내 아들이 죽고 그 값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된다.’ 허락하실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이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는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이 아들을 보내서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그 다음 또 다른 아들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면 차선의 길이 있는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3의 길이 없습니다. “이거 밖에 없다.” 이게 독생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이 소유를 주셨으니”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최고로 여기는 최고의 가치를 인간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주셨다. 이거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줄 때도 즐겁고 받을 때도 즐겁습니다. 그 선물을 보면 어떨 때는 컵을 하나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화장품을 줄 수도 있고 책을 한권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큰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여신도들을 만나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신도들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이 보석과 명품 가방인거 같습니다. 그것만 선물 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하나 선물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벤츠 자동차를 “이거 선물입니다.” 하고 주면 어떻겠습니까?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좋은 집을 한번 선물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은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들이 한명 있는데 옆집이 아들이 없다고 하니까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 아들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세상에는 수양아들이나 양자 문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고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을 남의 집에 주는 순간 그 아들은 그 집의 어떤 일을 위해서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이유가 있을 때 내 아들을 선물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이 독생자이다.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시켰으니” 

성경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희생시키는 문화는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독자 이삭이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아들 하나가 생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습니다. 
번제는 죽여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이 독자를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독자를,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번제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들은 죽었습니까? 마음만 봤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렙다 땅에 사는 어느 불쌍한 과부는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모두 다 굶어 죽는데 이 가정은 어디 가서 식량을 구할 데도 없고 한 끼 밖에 없어서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함께 나누고 이제 죽으려고 생각한 가정에 하나님의 종에게 가라고 하셔서 그 집을 또 갔습니다. 그랬을 때 이 여자는 한 끼 남은 그 식량을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대접하고 “내가 한 끼 더 먹고 죽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를 대접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에게 대접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집에 평생 동안 먹을 것이 있게 했다.” 그 하나를 드린,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린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헌금하는 사람을 구경하셨습니다. 어느 불쌍한 여인이 너무나도 구차한 중에 동전 두 개, 유대 나라에서 사용하는 돈의 최고의 낮은 단위인 렙돈, 가장 낮은 동전 두 개를 헌금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이유는 자기의 소유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을, 이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즘은 아주 좋은 신앙적 계획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갈보리교회도 많이 계셔서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흔하게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사업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틀림없이 교회도 짓고 고아원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선교 사업도 하겠습니다.” 아주 장황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제발 그렇게 되십시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렇게 성공한 다음에는 잘 행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뭐냐?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동전 두 개 밖에 없고, 한 끼 식량 밖에 없습니다. 
아들 한명 밖에 없습니다. 
이것 밖에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한사람의 한 끼 식량을 드렸더니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의 기적 역사는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이나 사렙다 땅의 어떤 과부나 두 렙돈 헌금한 가난한 여인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화려한 미래만 자꾸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건물 뭐든지 안 가본 곳 없이 다 사진 찍어라.”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저는 재벌 총수를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이 건물을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나는 건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예배당을 하나 짓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벌 총수가 그런 일을 말해주니 저는 그때 좀 흥분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그때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으면 오늘 저 재벌 총수가 감동을 받아서 저런 말을 할까?’ 그런데 그분은 그 일을 안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건물을 말했는데 왜 안했을까?’ 간단합니다. 아까워서 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도 안 믿는데 예배당 지어서 뭐해?’ 그러니까 우리 목회학 교수가 그 전에 우리 학생들에게 “감동되었을 때 빨리 해!” 그러셨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수백 개의 교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까운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것 가운데 조금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 없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독생자를 주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의 혜택자는 누구나 다입니다. 많이 받을수록 주시는 자가 기뻐하는 진리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장애인이 한사람 있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돈 좀 달라고, 마침 베드로와 요한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갑니까? 돈은 없지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예배드리러 기도하러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나는 목사인데 있는 것이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으로 해석해서 전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해서 모든 영혼의 기쁨과 행복과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요 소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나는 평생을 통해서 이 한 가지를 온 세상에 나누어주면서 살자.” 그런데 있는 것도 사람들이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것을 못줍니다. 

서울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살던 서부 이촌동 난민촌 목회를 일평생 하다가 돌아가신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가 1인자이신 이현우 목사님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생 과장이셨습니다. 
그분의 교인은 다 판잣집에 살았습니다. 
‘이 교인들에게 내가 어떤 선물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시다가 그분은 미술가로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밀레처럼 사실적 화가이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십니다. 그래서 난민촌의 그림을 그리십니다. 그 판잣집에서 마당에다 통로 하나 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라든가 자기가 목회하는 난민촌의 모든 환경을 보는 것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는 교인들에게 그림 한 장씩 나눠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그러면 그 난민촌의 가난한 게 살던 사람들은 ‘차라리 라면 한 봉지를 사다 주는 것이 낫지 우리들이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도 구차하게 사는데 이렇게 구차한 그림을 받아서 뭐하나?’ 
그러나 목사님이 주시는 거니까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았지 않느냐? 그때 판잣집에서 살 때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그려준 이 그림!” 
어떤 보물보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가치성에 의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겠다. 이것만 소유하면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영생을 너희에게 주노니 멸망치 않고 이것을 가져가라. 그러기 위해서 내 독생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받았습니다. 

옛날 6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서울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160명 호텔 투숙객들이 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TV로 현장 중계를 다 했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서 “저 아래 타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느냐?” 안타깝게 별 수단을 다 써도 160명이나 죽었습니다. 사람마다 창가에 나와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창가에서 탈출을 찾는 그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이 나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소.” 

그게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재벌이 와서 돈 수백억을 들고 와서 “이거 가지시오.” 어느 대학 총장이 와서 “내가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겠습니다.” 미스코리아가 와서 “나와 결혼해요.” 다 좋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두 평소에 소원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 준다 하여도 그 사람에게는 그 시간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것만 되면 다른 가치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셔서 모두가 멸망 받을 자리에서 모두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나는 희생하고 너희는 구원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은 자는 다소 이 세상에서 고난 부분이 있다 하여도 가장 귀한 소유가 있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호텔 꼭대기에서 살려달라는 사람에게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원받는 그 하나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크게 기뻐하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더욱 기뻐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기뻐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기쁠 게 있습니까? 우리 세상 기준으로 기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 받고 쫓겨 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독신입니다. 그러니 뭐가 기쁩니까? 우리 기준에 기쁠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뭐가 기쁜 것입니까?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되어서 영생할 수 있는 진리를 내가 얻고 그것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있는 것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로다.” 이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는 사람은 ‘아!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를 나에게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지금 최고로 여기고 있는 내 소유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나는 그것을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제일 목표로 되어 있는 진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런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모두 다 영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최고의 가치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오늘 말씀에서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나도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는 믿음의 결단이 생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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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셉(Joseph,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예수님의 부친)은 마태복음 1:16절과 누가복음 3:23절에서 다른 이름의 두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복음 3:23)

먼저 몇 가지 사전 설명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genealogy)는 완전한 계보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지 선택되어진 계보이다. 마태복음 1:17절에서 특별히 14대 씩으로 나뉘어져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는 완전한 계보라고 볼 수 없다.

이 두 족보는 다윗의 두 아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둘 다 아브라함까지 이어진다. 마태는 다윗을 통해 내려온,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온 왕의 계보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누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계속 추적을 하였다. 누가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아담으로부터 창조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그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두 족보 모두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는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as was supposed) 요셉의 아들이니...”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요셉의 두 아버지에 관해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사이의 차이는 꽤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추적하였고, 반면에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통해 추적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

마태가 요셉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여고냐(Jeconiah,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 때문이다. 그는 마태복음 1:11절에 등장한다.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그의 자손 중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게 되었다.(렘 22:30) 동정녀 탄생은 명백히 이것을 방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심장한 여성형 용어(feminine verbiage)의 사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마태가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를 족보의 마지막에서 언급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부모님에 대하여 여성형(feminine form)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족보.

누가복음 3장을 살펴보면, 족보의 목록은 마태복음의 족보(다말, 룻 등과 같은 몇몇 여인들을 포함)에서처럼 엄격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남자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면, 그러면 그녀는 목록에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족보에서 헬리(Heli)는 요셉의 아버지로서 기재되어져 있다. 헬리는 2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한 딸은 마리아였고, 다른 딸은 세베대의 부인(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이었다.(마 27:56, 요 19:25). 모세의 법에서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민 27:1–11, 36:1–12), 사위는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그 형태는 마태복음의 족보 형태와 다르다. 마태복음의 목록은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는지(begot, 그리스어로 gennao)로 표현되고 있다. (한글 성경은 ”낳고”로 번역됨).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그 형태는 다르다. 그곳에서 ”그 위는”(영어성경은 X is the son of Y)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son(아들)’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헬라어) 성경에는 없던 것이었다.(한글 성경에는 ”그 위는”으로 번역함). 단지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성경에서 삽입되어졌던 것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son’이 사용된 유일한 곳은 23절로서,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son)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는 구절이다.

누가는 매우 정확했다. 예수님은 헬리의 아들이었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누가는 그리스어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 기록이 성경적 오류라는 주장을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였으며(요셉의 이름은 물려받은 기업에 기인하여 기재됨),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족보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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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 비교)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림차순으로, 누가는 오름차순으로 기록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족보인데, 마태는 다윗이 예수의 27대조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42대조라고 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의 족보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1장1-17절과 누가복음 3장23-38절에 전해온다.

누가는 예수부터 아담까지 77(7*11)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42(14*3)대를 내려가며 기록한다.

두 족보에 수록된 조상의 이름을 비교해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왕조이전의 조상들은 대체로 일치하나 한 곳이 다르다.

마태 1장3절의 람대신에 누가 3장33절에서는 아니를 기록하였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 직전까지 왕조시대에는 다윗 하나만 같고 나머지 조상은 모두 다 다르다.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까지 왕조 이후 시대에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그리고 예수의 아버지 요셉만 같고 나머지 조상은 모두 다 다르다.

누가는 예수가 아담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강조한다.

2. 예수의 족보에는 마리아 말고도 4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이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을 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창세기 38장), 라합은 조국인 여리고를 배신한 비천한 창녀였으며, 룻은 말룐의 아내이지만 말룐이 죽자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후원으로 보아스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지만 말룐의 게보가 아닌 보아스의 계보를 잇는다. 밧세바는 다윗의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이지만 다윗왕을 유혹하고 남편 우리야를 교살한 다윗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낳는다.(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4명중의 셋째,넷째인 나단과 솔로몬, 본문의 내용과 관련됨)

모두가 비정상적인 관계이며 지탄을 받을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선 이다,

창세전 언약과 작정하심으로 섭리하심속에 이런 인간들을 도구로 쓰신 것이다!

곧 성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것으로 믿어진다면 그것이 곧 믿음이다.

3.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왕의 계보를 잇는 왕으로,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윗-솔로몬으로 요셉까지 기록하였고,

누가는 이방인을 향하여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아담-하나님까지 헬리의 계보인 마리아의 가계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예수의 부친인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냐? 헬리의 아들이냐? 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모세의 법을 이해하여야 하고, 둘째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모세의 법(율법)민27:1~11, 36:1~12, 막12:18~

유대인 남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인척의 남자가 죽은 남자의 대를 잇게한다,

둘째, 렘22: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당시 유대왕인 고니야(여고니야, 여고냐, 여호야긴=동명)의 악행으로 예레미야선지자를 보내어 예언하신 것이다, 곧 왕의 계보를 고니야를 통하여는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는 솔로몬의 가계를 이었다기 보다는 나단의 계보를 이었다고 볼 수 있고,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기 보다는 헬리의 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 헬리의 기업을 잇는다고 이해한다면, 예수는 마리아, 곧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모세의 법을 생각하고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의 셋째아들 나단과 넷째 솔로몬은 가장 가까운 친형제임을 기억하고, 그의 후손들중에 계보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나단과 솔로몬의 후손들이 서로 모세의 법을 이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름이 겹치고 다른것이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마태가 기록한 맛단은 야곱을 낳고 죽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레위는 맛단의 아내에게서 헬리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헬리는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입니다,

그런데 헬리는 두딸(마리아와 세베대의 부인,마27:56,요19:25)을 낳고 아들없이 죽자 가장 가가운 친척인 야곱이 헬리의 아내에게서 요셉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며 헬리의 법적인 아들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역시 이복형제이며 마리아는 어려서 성전에 바쳐졌다가 혼인할 시기가 되어 성전에서 나오게 되고, 가장 가가운 친척인 요셉과 정혼합니다,

(위경, 요셉의 분노에서 발췌)

4. 마태는 의도적으로 14대씩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짜맞춘것입니다.

요람이 바로 웃시야를 낳은 것이 아니다. 웃시야의 아버지는 아마샤이다. 마태는 3대 정도를 빠트렸다. 또 요시야가 여고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요시야가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이 여고냐를 낳았으니 여고냐는 요시아의 손자이다. 여고냐는 유다 19대왕으로 기원전 597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이스라엘백성은 60년동안 바벨론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여고냐—스알디엘—스룹바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지만(에스라3장 및 5장, 느헤미야12장1절, 누가3장27절) 여고냐—브다야—스룹바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다. (역대상3장 17-19절) 기원전 538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을 석방하자 스룹바벨은 이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룹바벨의 자손목록(역대상3장19-20절)에는 아비훗이 없다. 누가복음 3장27절에는 스룹바벨의 아들을 레사라 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기원전 1750년-1000년경), 다윗부터 바벨론 유배초기까지가 14대(기원전1000-597년), 바벨론 유배기간부터 예수까지가 14대(기원전597-6년경) 이렇게 마태는 의도적으로 14대씩 나누었다. 그것도 억지로 짜맞춘것이되는 겁니다.

따라서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는 당시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면 족보에서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가계에 넣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여자의 후손에게서 오셔야 했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 누가의 계보기록이 신빙성이 있고, 또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고 하여도 누가의 기록이 더 무게가 실립니다.

즉, 마태의 기록은 사실적인 족보가 아니고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는 족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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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

​마태복음 족보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을 하향식(자손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요, 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체 세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의도된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렷한 증거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17)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해석하는 열쇠인 마태복음 1:17을 볼 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를 큰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14’라는 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4’는 ‘7’의 두 배수인데, 성경에서 ‘7’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하늘의 상징수인 ‘3’과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땅의 상징수인 ‘4’를 합한 수로, ‘어떠한 뜻이 완성되는 성취의 기간, 가득 채워진 충만, 전체’를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이면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일곱이면 그 자체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셈족 사람들은 ‘7’의 두 배인 ‘14’를 더욱 무게 있는 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시대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42대로 기록한 것은, 각 시기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시대적 경륜이 있었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정하신 때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엡 1:4, 3:11, 딤후 1:9). 이처럼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합 2:3, 막 1:15, 갈 4:2)에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의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3장 족보의 특징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사건(눅 3:21-22)과 마귀의 세 가지 시험(눅 4:1-13)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다룬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구약 전체 약 4천 년간에 걸친 인물 총 77명(하나님, 예수 포함)을 상향식(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상향(上向)식 구조’는 누가복음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취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첫 사람 아담까지 올라간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할 모든 인간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 것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눅 3:23, 38).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첫 사람 아담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仲保者)로서(요 14:6,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전 인류를 끌어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엡 2:15-16, 골 1:21-22).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엡 2: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3:23에서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마 13:55, 눅 4:22, 요 1:45, 6:42) 사실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족보의 위대한 구속사적 가치는,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라는 사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을 따라 모든 시대를 섭리하사,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이 땅에 보내셨음과(갈 4:4), 죄악된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롬 3:22, 24, 행 2:21, 10:43, 16:31)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눅 3:22, 4:3, 9, 롬 1:2-4, 눅 1:35, 2:49)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1) 총 42대이나 다윗이 두 번 겹쳐서 나오므로 실제 기록된 인물은 41명임.

2) 마태복음 족보는 요셉 가문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가문의 족보로 알려져 있음.

J. A. 벵겔, 「마태복음 상」 신약 주석 시리즈, 고영민 역(도서출판 로고스, 1990), 54-55.

Norval Geldenhuys, 「누가복음 상」, NIC 성경주석 시리즈(생명의 말씀사, 1983), 167-168.

3) 전경연, 「마태의 신학」,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2003), 61.

http://www.abrahampark.com/kor/core3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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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 -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삼복, 추석, 중양절, 동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
-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삼복, 추석, 중양절, 동지

세시풍속(歲時風俗) -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하여 행해온 고유의 풍속

세시풍속이란 우리가 해마다 설날(음력1월1일)이 되면 친척들이 모여 다 함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고 윷놀이를 하는 것처럼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는 다양한 생활 모습(일과 놀이, 먹는 음식, 입는 옷 등)을 말한다.

'문장을 암기하고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이해하고 문장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1. 설날(음력 1월 1일, 새해 첫 날)

- 설빔(설날 아침에 입는 새 옷), 세배, 차례, 야광귀 쫓기, 복조리 걸기, 윷놀이, 널뛰기, 떡국

​야광귀는 정월 초하루나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간다고 하는 '신발귀신'이다.
신발을 귀신에게 빼앗기면 신발 주인은 1년 동안 불운하다고 믿어, 설날이 되면 신발을 방 안에 숨기고 문 밖에 체를 걸어두었는데 이를 야광귀 쫓기라 한다.

2.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 음력으로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

-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달맞이, 줄다리기, 지신밟기, 부럼깨물기, 오곡밥

​쥐불놀이는 횃불을 들고 들판에 나가 쥐불을 놓으며, 논밭두렁의 잡초와 잔디를 태우며 노는 풍속이다.
쥐불을 놓게 되면 겨울을 지낸 들쥐나 메뚜기, 해충의 번데기 그리고 각종 해충들이 알을 낳아 놓은 잡초나 해충 서식지를 태울 수 있다. 이러한 풍속에는 농사의 피해를 줄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3. 삼월삼짇날(음 3.3)

우리 선조들은 음력으로 양수가 겹치는 날은 양기가 왕성한 날로 아주 좋은 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설날(1.1), 삼월삼짇날(3.3), 단오(5.5), 중양절(9.9)은 양수가 겹치는 좋은 날입니다.

삼짇날은 응력 3월 3일로 봄을 알리는 명절입니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삼짇날 무렵이면 봄기운이 왕성해서 사람들은 흥이 저절로 나, 산과 들로 몰려나가 진달래 화전을 먹으며 봄을 즐겼습니다.

4. 한식(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음, 한 해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며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함.

​한식은 지난 일 년 동안 사용해 온 불씨를 끄고 새로운 불씨를 켜는 날로 불을 사용하지 않아 찬 음식을 먹었다.
새로운 불씨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란 의미를 지녀, 한 해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를 했다.

​한식은 새로운 불씨를 받는 날!​

5. 단오(음력 5월5일, 모내기를 끝낸 후로 더위가 곧 시작됨)

- 그네뛰기, 씨름, 창포물에 머리감기, 부채 선물하기(단오선)

​단오선은 단오날 임금이 재상과 시종들에게 하사한 부채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가에서도 단오날이 되면 서로에게 부채를 선물해 주었다.

6. 유둣날(음 6.15)

음력 6월 15일을 유둣날이라고 합니다.
유두는 ‘동유두목욕(東流頭沐浴)’이란 말을 줄인 말인데요, 동쪽의 냇가에서 머리를 감으며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입니다.

동쪽의 냇가에서 씻는 이유는 동쪽은 밝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둣날이 있는 6월은 삼복(三伏)이 들어 있는 때로 가장 무더울 때입니다.
이날은 술과 안주 등 먹을 것을 가지고 계곡이나 물가에 가서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7. 칠월칠석<七夕>(음 7.7)

전설 속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음력 7월 7일입니다.

농사일을 하던 견우와 베 짜는 일을 하던 직녀가 결혼 후 각자의 일을 소홀히 하자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둘을 각각 은하수 끝에 떨어뜨려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까치와 까마귀가 칠월칠석에 오작교(烏鵲橋)라는 다리를 만들어줘 1년 중 단 한 번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칠석날에 직녀성과 견우성 두 별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매우 가까워지기 때문에 생겨난 설화라고 합니다.


8. 백중<百中>(음 7.15)

전통적인 보름 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15일입니다.
모내기가 끝나고 김을 세 번 매고 나면 여름철 농한기인 백중이 되는데, 이날만큼은 하루 푹 쉴 수 있는 농민들의 여름 명절입니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주는데,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사면서 휴식을 취합니다.

이 무렵에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백종(百種)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다른 명절은 내 가족, 내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나 백중에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9. 삼복(하지로 부터 셋째 경일이 초복, 넷째 경일이 중복, 입추 후 첫 경일이 말복으로 보통 10일 간격임)

-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계곡이나 산으로 놀러감, 삼계탕이나 육계장과 같은 보양식을 먹음.

​우리 조상들은 여름철 가장 더운 시기를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복 날짜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는데 이는 아마도 '셋째 경일', '넷째 경일' 에 나온 '경일'이라는 표현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일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날을 의미한다.
하지가 지나고 '경일'이 세번째로 돌아오는 날이 초복이며 그 다음 경일(10일간격)이 중복이 된다.
입추 후 첫 경일인 말복은 보통 중복 다음 '경일'에 해당되어 중복과 10일 간격으로 나타나는데 가끔은 20일 차이가 날 때도 있다.(말복이 20일 차이가 나면 '월복'이라 부른다)

10. 추석(한가위, 음력 8월 15일)

- 차례, 성묘, 줄다리기, 강강술래, 송편, 토란국, 보름달에 소원빌기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 지은 곡식과 과일을 수확한 후 조상님께 감사의 의미로 차례를 지내고 성묘했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추석의 다른 표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듯이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이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국가의 주요 산업이 농업이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추석은 오곡이 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였으므로, 이날처럼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이 간절히 표현된 날이다.

11. 중양절(음력 9월 9일, 중국에서 유래된 명절)

- 국화주, 국화전, 밤떡, 단풍놀이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된 명절이나, 우리 조상님들도 즐겼던 명절이다.
중양절은 벼를 수확한 후 새로운 밭작물을 심는 시기와 겹치기에 농촌이 상당히 바쁜 때이나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단풍 놀이를 가며 여유를 즐겼던 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2. 동지 (양력 12월 22일 혹은 12월 23일 무렵,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 팥죽

​동지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남회귀선, 즉 황경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이 날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이 날은 밤이 길어 귀신들의 활동이 왕성하다 여겼기에, 악귀를 쫓는데 효험이 있다 여긴 팥을 이용해 죽을 쑤어 먹었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도 고사를 지낼 때 팥떡을 올리는 것은 이러한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이다.
팥은 악귀를 쫓고 소원을 이루어준다 믿었지만, 실제로 팥은 설사, 해열, 종기, 수종, 진통, 임질 등에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외도 다양한 세시풍속이 존재하나 초중등 교과과정에 언급하는 내용만을 정리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은 농업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농사'였기 때문이리라.
산업화 이후 농업에 대한 비중이 감소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에겐 명절과 세시풍속의 의미가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나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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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5)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를 말합니다.
문제는 같은 나라에 대하여 볼 수 없다 또는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볼 수 없다는 표현에서 육신적으로 볼 수 없다.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에서 영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며 창조주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말씀으로 오신 메시야 즉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할 때는 그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를 볼 수 없다 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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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I. [타동사]
 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a. [사람의 대격과 함께 쓰임] 마28:7, 10, 막16:7, 눅16:23, 요8:57, 9:37, 14:9, 16:16,19,22, 20:18,25,29, 요일4:20, 계1:7.
   b. [사물의 대격과 함께 쓰임] 눅1:22, 23:49, 24:23, 요4:45, 6:22, 행2:17.
   c. [완곡어법] ㉠ ὁρ. τό πρό- σωπόν τινος, 얼굴을 보다, 행20:25, 골2:1, 계22:4. ㉡ ορ. τὴν δ όξαν τοῦ θεοῦ :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요11:40.
   d. [수동태] 보이다, 나타나다, 드러나다, 행2:3, 16:9, 계11:19, 12:1, 3.

 2. 경험하다, 목격하다, 증언하다, 눅 17:22, 요1:50, 3:36.
 
 3. [비유적, 정신적이고 영적인 개념]
  a.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b. 바라보다, 주목하다[정신적으로], 롬15:21.

II. [자동사]
 1. 바라보다, 보다, 요19:37.
 2. 조심하다, 주의하다.
  a. 본대로 하다, 그대로 하다, 마27:4, 행18:15, 22:26, 히8:5.
  b. 지키다, 경계하다, 마8:4, 18:10, 막1:44, 살전5:15.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들어가다

εἰ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1525

1. 오다.  2. 마 8:5. 3. ㉠ 히 9:12, 24, 25
발음 [ ĕisĕrchŏmai ]
어원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오다, 가다, 들어가다, 들어오다.
 1. (장소]
  a. [도시의 명칭과 함께] 마8:5, 21:10, 막2:1, 11:11, 눅7:1, 행10:24, 23:33.
  b. [기타 장소] ㉠ [성소 안으로] 히9:12,24,25. ㉡ [성전 안으로] 눅1:9, 계15:8. ㉢ [집 안으로] 마10:12, 12:29, 막7:17, 눅1:40, 8:41, 행11:12, 16:15, 21:8. ㉣ [회당 안으로] 막1:21, 3:1, 눅4:16, 6:6, 행14:1, 18:19, [참조] 약2:2. ㉤ [성 안으로] 마10:11, 27:53, 막1: 45, 눅10:8, 22:10, 행9:6, 14:20. ㉥ [마을 안으로] 막8:26, 눅9:52. ㉦ [관청 안으로] 요18:28, 19:9, [참조]마6:6, 24:38, 눅9:34, 17:27, 요10:1, 18:1, 20:6, 행25:23.
  c. [일반적으로] 롬 5:1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히10:5.
  d. [흔히 장소가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상 유추할 수 있음] 마9:25, 막13:15, 눅19:1, 행1:13, 5:7,10, 10:25, 고전14:23, 24.

 2. εἴς τινα
  a. ~중에 들어가다[군중 속에], 행19:30, εἰς ὑμᾶς, 행20:29.
  b. ~에게 들어가다[특히 귀신이] 막9: 25, 눅8:30. ㉠ [귀신에 대하여] 막5:12,13, 눅8: 32,33. ㉡ [사탄에 대하여 유다에게] 눅22:3, 요13:27. ㉢ [기타] 눅9:46, 계11:11.

 3. πρός τινα: ~에게 오다, 가다, 막15:43, 행10:3, 11:3, 16:40, 계3:20.

 4. ἐπί τινα, 행1:21.

 5. [출발한 장소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마7:13, 19:24, 눅13:24, 18:25, 요10:1,2,9.

 6. [ὑπὸ τὴν στέγην과 함께] 지붕 아래로 즉 집에 들어가다, 마8:8, 눅7:6.

 7. [부사 εἰ. ἔσω와 함께] 안쪽으로, 내부로 가다, 마26:58, 22:12, 막14:14, 히6:20.

II. [비유적으로]
 1. [사람에 대하여] ~것 안으로 들어가다=~을 나누다, 공유하다, ~을 누리 기에 이르다, 마5:20, 7:21, 19:24, 막9:47, 10:15,23,24, 눅18:17,25, 요3:5.
  a.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다=그것을 얻다, 마18:8,9, 19:17, 막9:43, 45.
  b. 안식으로 들어가다, 히3:11,18, 4:1
  c.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다, 눅24:26.
  d. 시험에 들어가다, 마26:41, 눅22: 40,46
  e. 은혜 안으로, 마25:21,23.
  f. 수고 안으로 들어가다=수고의 열매를 누리다, 요4:38.
  g. [이 용법과 함께 목표가 언급될 필요는 없으나 함축될 수 있는 경우] 마7:13, 23:13, 눅11:52, 롬11:25.

 2. [사물에 대하여] 음식에 대하여, 마15:11, 행11:8, 사상에 대하여, 눅9: 46, 히6:19, 약5:4.

관련 성경
들어가다(마5:20, 눅4:16, 히9:12), 들어오다(마8:8, 눅7:45, 고전14:24), 참여하다(마25:21, 23), 들다(마26:41, 눅22:40,46), 나가다(막10:25), 오다(눅8:41), 일어나다(눅9: 46), 데리다(눅14:23), 돌아오다(눅17:7), 출입하다(행1:21), 이르다(행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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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동일한 나라이라면 들어다와 본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들어가다와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예언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로 오신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며 창조주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은 표적을 보면 메시아로 믿고 표적을 볼 수 없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일시적인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들어갈 수 없다,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5).
교회에 다니는 것을 거듭난 것(born again)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교회에 다니는 것은 종교행위이다.
거듭난 사람만이 주님의 교회에 속할 수 있고, 거듭난 사람이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수 있다(요 4:24).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짧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인지 모르고 산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은 어디로 가는가?
지옥으로 간다.
지옥은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다(막 9:44, 46, 48).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죄가 제거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종교나 인간의 자의적인 열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오직 거듭남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3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셨지만
5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똑 같은 의미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는 뜻이거나 하나님 나라의 부분이 되는 것이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보고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부분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함께 경험하여 공유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3절에서 본다는 말을 쓰고 5절에서는 들어간다는 말을 쓰신 것은 분명히 같은 말을 말만 바꾸어 하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두 단계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보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가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구경꾼이나 관광객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믿음이란 니고데모처럼 기적을 보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다.
물로 거듭나는 것도 역시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역시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어려운 본문에 단어 하나 하나가 구약성경의 깊은 울림을 간직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겉도는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기 위해서 거룩한 난동을 피우신 이 사건은 공생애 마지막 때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이 예수님이 한 말,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그 말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고소죄목이 되는 걸 볼 때, 공생애 마지막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죠.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추측은 합당하게 맞는 것이고, 니고데모가 찾아온 그 밤도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니고데모에게 썼던 칭호를 보면, 아르콘이라는 말과 디다스칼로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아르콘이라고 하는 관원이라는 말을 썼고,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 디다스칼로스입니다.
교훈적인이라는 말을 할 때 영어로 didactic 이라는 말을 쓰죠?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그 어원입니다.
아르콘은 뭡니까?
archangel, 아르크가 들어가면 대, 큰 천사, archenemy 하면 대 원수 이런 뜻이 되고, archangel 하면 대천사가 됩니다.
arche 하면 머리입니다.
창세기를 헬라어로 말하면 엔 아르케 가 되는 거죠.
요한복음도 엔 아르케, 이 말은 In the beginning, In the head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르콘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사법, 입법, 일종의 자치정치 기구의 한 관원입니다.
로마에 있었던 300명의 원로원과 같은 보수적인 지도자들의 모임입니다.
국회와 대법원을 겸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 71명 중의 한 명인데, 이름이 니코데모인 걸 볼 때, 니코라는 말은 victories라는 말이고, 데모스는 백성이라는 말이니까 뜻은 victories people 승리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이니까 이 사람은 그리스문화에 찬동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대부분 두 개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스 이름, 즉 헬라어 이름과 히브리이름을 가졌는데 이 사람이 니고데모라는 그리스 이름을 가진 걸 볼 때 대세에 순응하는 이스라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은 이스라엘 선생인데, 이 말은 씨, you yourself, 2인칭 대명사가 쓰였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선생님인데,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투 이스라엘, 씨라는 2인칭 남성단수대명사는 원래 쓰이지 않습니다.
쓰이지 않고,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그냥 동사만 써도 거기에 인칭과 성수가 표현돼 있기 때문에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칭대명사를 쓸 때는 굉장히 강조할 때만 씁니다.
그래서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여기서 You are the teacher of Israel, the teacher라는 말을 쓰면 뭐에요?
중세 때, the philosopher 하면, 중세 때 그 철학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말이죠?
the 라는 말은 대표단수 알죠?

정통종합영어에 보면 The wales is mammal, 할 때 그 고래는 포유류라는 말이 아니라 무릇 모든 고래는 포유류다, the는 대표단수다 이렇게 배우잖아요.

the 디다스칼로스, 당신은 대표적인 이스라엘 선생님이다,
이 사람은 71명의 관원일뿐만 아니라 학식에 있어서 최고봉에 올랐다,
유대교, 예수님 당시에 닫힌 종교였던 유대교, 교양과 가문과 교육으로 단련된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최고가 된 사람,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디다스칼로스는 닫힌 유대교 안에서 최고였기 때문에 초월 저편에서 쏟아지는 계시의 빛을 받고 깨달음을 갖기에는 매우 불리한 자기 충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 쌓아올린 교육 교양 혈통적 우수성 등이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초월 저편에서 오는 새로운 진리에 목마를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한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교육을 통해 자기수양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입니다.
문제는 왜 이 사람이 밤에 찾아왔겠습니까?

뉙토스, 밤에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낮에 난동을 피우셨잖아요.
예수님이 난동을 피우셨는데 또 율법을 어기고 바리새인 적대감에 먹이를 주는 행동만 했다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뭐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율법파괴자이고 신성모독자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이 사람이 헷갈렸던 것은 성전을 거룩하게 도발하시고 안식일 율법도 어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이 분이 performed, 이적을 너무 많이 행합니다.
miracle, 표적을 너무 많이 행하니까, 2장 23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으나 예수는 이런 표적을 보고 믿는 대중들의 믿음에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았고, 표적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시대의 아젠다, 즉 자기를 임금 삼아서 정치적 지도자 삼아서 로마제국과 결승전을 치르게 만들려는 정치적 함정이 있는, 정치적 덫이 있는 열광과 지지와 추종인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 말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로마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는 모세적인 영도자로 예수 자신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얼 하러 왔습니까? 로마제국의 군대를 이스라엘 영토에서 추방하고 그 아래 토착 왕조, 다윗왕조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로마제국,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우상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각인의 심령에 성령의 내주를 매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각의 심령에 성령 충만하도록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분이지, 1장 33절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그 분이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낸 것으로,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내면 대개 누가 옵니까? 토착 유력자들의 왕조가 들어서겠죠?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하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토착 세습 왕조가 들어서는 게 전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진이 아닌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각인 속에 와 있는 노예근성, 죄, 대세순응주의, 배금주의, 물신숭배, 형제자매 차별주의, 이런 죄악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죠?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단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계약 갱신, 언약갱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헐거워진 언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하여, 다시 한 번 언약적 결속감을 강하게 해주는 것, 이게 예수님의 뜻이었거든요. 여러분, 백성사이, 국민구성원 사이에 언약 공동체적 결속감이 강하다면 가난의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7남 3녀가 사는 대가족에 만약 한 형제가 못 산다면 어떻게 하던가요? 못 사는 형제를 나머지 형제가 어떻게 돌봐요? 추석 때마다 보면 대개 돕죠? 그게 형제간입니다. 한 형제가 못살 때, 심지어 동기생들도 장신대 신대원 84기 중 누가 못 산다 그러면 동기생들이 돈을 내 돕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합니다. 어떤 목사가 정당하게 목회를 하다 가난하게 됐다? 그러면 많은 돈이 들어옵니다. 많은 돈이 아니고 죽지 않을 만큼 돈이 들어옵니다. 부자가 될 만큼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그건 언약공동체의 결속감이거든요. 저도 형제가 많지만 내가 일차적으로 느끼는 책임과 경계선 안에 누가 잘 못살면 그건 송두리째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게 내 안에 있는 원천적인 상식이거든요. 교회가 그런 겁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와서 탁 쓰러졌다, 그가 교회 등록교인이다, 쓰러진 그 사람은 공동체적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등록이 참 중요한 겁니다. 등록이라는 말은 세례 받은 교우공동체, 성만찬 나눈 공동체에 그가 등록을 했다, 그러면 그때부터 법적으로 교회 상식으로 볼 때, 돌봄의 대상이 됩니다. 학교도 참 웃깁니다. 출장신고를 하고 가서 다치면 엄청난 보험금이 나오는데, 몰래 가서 다치면 전혀 돈이 안 나옵니다. 언약공동체를 확인하고 가는 사람, 그게 참 희한합니다. 이번에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몰래 갔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지원 못 받았습니다. 인하대학교 발명동아리 아이들이 춘천에 갔는데 학생처에 신고를 안 하고 자기들끼리 몰래 갔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 보고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인하대학교랑 보험회사랑 맺은 수혜혜택에서 다 제외됐습니다. 그래서 꼭 모든 동아리가 갈 때는 반드시 등록을 하라고 숭실대학교에서는 교육을 합니다. 특히 춘천 펜션에 가는 사람들은 생명보험까지 드는 게 낫습니다. 언약공동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형제우애적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시내산 기슭의 감격, 광야시대의 감격, 모세시대의 감격, 엘리야 시대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것은 최강로마를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이라고 본 것입니다. 형제자매끼리 우애가 튼튼한 것이야말로 로마 제10군단, 벳세다에 와 있는 로마 제10군단, 강력하고 중무장된 로마보병보다 더 센 힘은 형제자매끼리 신실한 사랑으로 결속돼 있는 것, 군대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본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 공동체의 중심이 돼야 할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성전이 function, 제 기능을 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참새와 제비 같이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자비심의 본산이 되도록 성전을 고치도록 한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 말은 무엇이에요?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가장 멀어진 자, 땅 끝에서 추방되고 버려진 그 자마저도 이곳에 와서, 아버지 내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소연 할 수 있는 그곳이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런 성전을 정결케했다는 말은 무엇이죠? 내가 부유하게 사는데 내 이웃이 여기 성전에 와서 기도를 합니다. 내가 예루살렘 산 1번지에 펜션과 빌라 엄청 좋은 집에 사는데 저 성전에 와서, 모레셋 가드 시글랏, 이런 지방민들이 와서 하나님 못 살겠다고 소리치면 부자인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못 살죠. 뭐할 때까지? 그들의 아우성이 그칠 때까지 내 재산은 전부 그들을 돕는 데 가야 되겠죠? 이것이 성전의 형평기능, 사회경제적 형평작업을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부익부 빈익빈을 영구적으로 정당화하며 빈부격차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면 그 성전은 파괴되어야 할 성전이죠. 예수님이 볼 때 성전은 빈부격차를 정당화하고 이방인과 야합한 이스라엘의 귀족층과 상류층들이 갈릴리 농민들을 못 살게 구는 악질적인 착취체제라고 보았어요. 그 착취체제의 배후에 성전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부순 게 아니라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산산조각 낸 파괴적인 빈부격차와 양극화 그 체제를 부순 것이죠. 그걸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의 본거지를 부셨단 말, 형제자매를 못 살게 굴고 형제자매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 이 악한 세상을 예수님은 도발하신 겁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전 청소하는 일만 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런 표적을 베풀지 못하면 우리는 바로 죽습니다. 예수님은 안 죽은 이유가 그렇게도 하시면서 표적을 베풀었기 때문에, 강력한 개인기라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겁니다. 그래서 밤에 3장 1절에 많이 헷갈려하는 이런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헷갈려하는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헬라적 교양이 많은 사람이 밤에, 괄호하고, 낮에는 부끄러워서 못 찾아옴, 밤에 찾아와서 성전을 청소하는 난동사건과 이 표적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성전을 훼방하시고 성전을 도발하신 이 사건은 꼭 불량배 폭도 같은 점이 있습니다, 신성 모독적 언동까지 보입니다, 성전을 허물어뜨리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면모도 보이지만 진짜 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모세급 엘리야급 예언자적 표적을 행합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성전을 훼방하고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범하는 당신은 신성모독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표적을 행하는 당신은 진정 예언자입니까? 누구입니까? 3장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때 선생, 똑같은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예언자라 보지도 않고 하늘에서 온,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 신적 권위를 가진 선생, 랍비 또는 디다스칼로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동급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을 썼고,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될 텐데 왜 영접하지 못하죠?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속한 체제는 성전을 정점으로 하는 자기수양과 율법적 수련의 종교 그리고 인간적 교육적인 배경을 튼튼히 가지고 아래로부터 제공된 교육의 혜택을 듬뿍 받은 자들의 종교죠? 그렇게 혈통좋고 가문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서 71명에 든 닫힌 유대교 종교 안에서 최고봉에 오른 그 자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님이라고 만일에 믿었다면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가 속했던 체제를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봉으로써 아르콘으로써 디다스칼로스로써 자기가 누리는 존경과 신망과 리더십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옵니다. 만일 낮에 왔다면 스캔들이 되겠죠? 예루살렘 신문 일면에 나오겠죠. 니고데모 예수께 무릎을 꿇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연합정권 탄생하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와서 예수님께 이런 딜레마를 물었더니,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죠. 예수님이 지금 하는 것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기 시작하는 증거라고 보는 거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무엇이죠? 예수님의 모든 표적사역,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는 건 모두 뭐죠?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 사이에 오셔서 당신의 주권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노마이 동사,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32장 15-16절 읽어보세요.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이스라엘 각각의 사람들 마음이 바뀌고, 이스라엘이 집단적 갱신을 경험할 것이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다섯 가지 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왜 니고데모는 못 봤을까요? 지금 우리는 다 보는데 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선생님이라는 그가, 구약성경에 달통한 그가 왜 위로부터 초월적인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 개개인과 집단이 갱샌되어 하나님께 언약적 재결속감을 느끼는 그런 사태가 올 것을 왜 몰랐을까요? 이스라엘 선생인 그가 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괄호하고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6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똑같습니다.

물은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Born again은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이사야 32장 15절, 앞으로 인용하게 될 성경구절에 의하면, 성령으로 그 심령이 갱신되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till the Spirit is poured upon us from on high, and the desert becomes a fertile field, and the fertile field seems like a forest.

에스겔 36:25-26
맑은 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sprinkle clean water on you, and you will be clean; I will cleanse you from all your impurities and from all your idols.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예레미야 31:31-34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 "The time is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make a new covenant with the house of Israel and with the house of Judah.
  6. It will not be like the covenant I made with their forefathers when I took them by the hand to lead them out of Egypt, because they broke my covenant, though I was a husband to them, " declares the LORD.
  7. "This is the covenan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at time,"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 in their minds and write it on their hearts.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8. No longer will a man teach his neighbor, or a man his brother, saying, 'Know the LORD,' because they will all know me, from the least of them to the greatest," declares the LORD. "For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will remember their sins no more."



요엘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에 베풀리니 곧 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가 어두워지고 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And afterwar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Even on my 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pour out my Spirit in those days.
I will show wonders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blood and fire and billows of smoke.
The sun will be turned to darkness and the moon to blood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And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for on Mount Zion and in Jerusalem there will be deliverance, as the LORD has said, among the survivors whom the LORD calls.


에스겔 37장

37 내가 여호와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그의 성령이 나를 데리고 가서 한 골짜기 가운데 두었다. 그 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 주위를 사방 돌아다닐 때 보니 그 골짜기 바닥에 대단히 많은 뼈가 있었으며 그 뼈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만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그는 이 뼈들에게 이렇게 예언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주 여호와께서 너희 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불어넣겠다.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을 붙이고 살을 입히며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

그래서 내가 명령을 받은 대로 예언하자 갑자기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뼈 저뼈가 서로 붙어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내가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였으나 그 안에 생기는 없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생기를 향하여 예언하고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외쳐라.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어 있는 몸에 들어가 이들을 살게 하라.’ ”

10 그래서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더니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 굉장히 큰 군대가 되었다.

11 그때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은 ‘우리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이 사라졌으며 우리는 완전히 망하였다’ 하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거기서 나오게 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거기서 나오게 할 때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14 내가 또 [a]너희 속에 내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를 살게 하고 너희를 너희 본토에 정착하게 하겠다. 그때 너희는 나 여호와가 그것을 말하고 실행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합을 상징한 두 막대기

15 여호와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16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b]‘유다 왕국’ 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c]‘이스라엘 왕국’ 이라고 써라.

17 그리고 네 손 안에 그 두 막대기 끝을 서로 연결하여 한 막대기처럼 보이게 하라.

18 “네 백성이 너에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겠소?’ 하거든

19 너는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내가 이스라엘의 막대기와 유다의 막대기를 결합하여 한 막대기가 되게 하겠다. 두 막대기가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20 너는 네가 글 쓴 그 막대기를 그들이 보는 데서 들고

21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이 쫓겨간 모든 나라에서 사방 불러모아 그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 한 왕이 그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겠다.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을 것이며 두 나라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들은 우상들과 더러운 물건들과 그들의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범죄하고 타락한 자리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4 “ ‘내 종 다윗과 같은 왕이 그들의 왕이 될 것이며 그들은 다 한 목자 아래서 내 법과 규정을 따르고 지킬 것이다.

25 그들은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조상들이 살던 땅에 자손 대대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과 같은 왕이 영원히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26 내가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겠다. 그것이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견고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고 그들 가운데 내 성소를 영원히 세워 두겠다.

27 내 처소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게 될 때 모든 나라가 나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

Footnotes

  1. 37:14 또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2. 37:16 또는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
  3. 37:16 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

37 The hand of the Lord was on me, and he brought me out by the Spirit of the Lord and set me in the middle of a valley; it was full of bones.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and I saw a great many bones on the floor of the valley, bones that were very dry.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I said,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a]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I will attach tendons to you and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So I prophesied as I was commanded. And as I was prophesying, there was a noise, a rattling sound, and the bones came together, bone to bone. I looked, and tendons and flesh appeared on them and skin covered them, but there was no breath in them.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 breath; prophesy, son of man, and say to it,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Come, breath, from the four winds and breathe into these slain, that they may live.’” 10 So I prophesied as he commanded me, and breath entered them; they came to life and stood up on their feet—a vast army.

11 Then he said to me: “Son of man, these bones are the people of Israel. They say, ‘Our bones are dried up and our hope is gone; we are cut off.’ 12 Therefore prophesy and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My people, I am going to open your graves and bring you up from them; I will bring you back to the land of Israel. 13 Then you, my people,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open your graves and bring you up from them. 14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you will live, and I will settle you in your own land. Then you will know that I the Lord have spoken, and I have done it, declares the Lord.’”

One Nation Under One King

15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16 “Son of man, take a stick of wood and write on it, ‘Belonging to Judah and the Israelites associated with him.’ Then take another stick of wood, and write on it, ‘Belonging to Joseph (that is, to Ephraim) and all the Israelites associated with him.’ 17 Join them together into one stick so that they will become one in your hand.

18 “When your people ask you, ‘Won’t you tell us what you mean by this?’ 19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I am going to take the stick of Joseph—which is in Ephraim’s hand—and of the Israelite tribes associated with him, and join it to Judah’s stick. I will make them into a single stick of wood, and they will become one in my hand.’ 20 Hold before their eyes the sticks you have written on 21 and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I will take the Israelites out of the nations where they have gone. I will gather them from all around and bring them back into their own land. 22 I will make them one nation in the land, on the mountains of Israel. There will be one king over all of them and they will never again be two nations or be divided into two kingdoms. 23 They will no longer defile themselves with their idols and vile images or with any of their offenses, for I will save them from all their sinful backsliding,[b] and I will cleanse them. They wi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24 “‘My servant David will be king over them, and they will all have one shepherd. They will follow my laws and be careful to keep my decrees. 25 They will live in the land I gave to my servant Jacob, the land where your ancestors lived. They and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will live there forever, and David my servant will be their prince forever. 26 I will make a covenant of peace with them; it will be an everlasting covenant. I will establish them and increase their numbers, and I will put my sanctuary among them forever. 27 My dwelling place will be with them;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28 Then the nations will know that I the Lord make Israel holy, when my sanctuary is among them forever.’”

Footnotes

  1. Ezekiel 37:5 The Hebrew for this word can also mean wind or spirit (see verses 6-14).
  2. Ezekiel 37:23 Many Hebrew manuscripts (see also Septuagint); most Hebrew manuscripts all their dwelling places where they sinned

이사야 32장 15절, 에스겔 36장 25절 26절, 예레미야 31장 31-34절, 요엘서 2장 28-32절, 에스겔서 37장 전체,
다섯 구절이 성령으로 각각의 개인과 집단 이스라엘이 완전히 갱신될 것,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이 다섯 구절입니다.

다섯군데 성경구절은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도 거듭난다,
즉 성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각각 거듭나서 언약 재갱신을 하게 된다는 말이 다 나옵니다.
이 외에도 너무 많습니다.
많은데 우선 다섯군데만 말씀드린 겁니다.
중간 요약하면, 거듭난다는 말은 6절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 물과 성령할 때, 카이란 말, 히드로스 카이 프뉴마토스 할 때, 카이는 that is to say, 이런 뜻입니다. and 등위접속사, conjunctive 아닙니다. 카이는 and, 물과 성령으로 할 때, 물 곧 성령으로, 이런 뜻이에요. 위로 거듭난다는 말의 어원은 위로부터 난다, born from above 라는 뜻입니다.
born from above할 때 above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초월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으로, 이런 뜻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맞고 성령의 바람을 쐬고,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것은 정확하게 에스겔서 37장을 암시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의 이야기 에스겔 37장이죠.
이 내용을 왜 몰랐을까?
그 말은 한 번 닫힌 종교의 체제에 갇혀 버리면 나머지 성경구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에 관한 성경구절은 시편 2편과 솔로몬의 시편 18편, 외경 솔로몬시편 18편과 시편 2편만이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 정복군주, 알렉산더 대왕급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강력하게 잡고 나니까 이사야 53장 같은 이런 본문이 오실 메시아에 관한 본문으로 보이질 않는 겁니다. 도살장에 끌려가 죽는 어린 양과 같은 이 연약한 자는 메시아에 관한 성경구절로 안 보인 겁니다. 무엇때문에요? 우리가 캘비니즘에 빠지면 큰일 납니다.
웨슬리즘에 빠지면 큰일 나요.
지금 우리 한국에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 캘빈을 신격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캘빈을 성경수준으로 올리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캘빈의 글은 성경이 아닙니다.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웨슬리도 마찬가지고, 오류와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류와 불충분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 캘빈과 웨슬리 등을 신격화시키고 정경화시켜서 캘빈파들은 다 모여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넘어가고요.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이 성령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신적 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제가 풀지 못하는 미스테리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은 신적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바람을 맞고 가지와 뿌리가 흔들리고 줄기가 흔들리고 세차게 갱신을 경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감도 잡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에게 맞은 것처럼 내가 인간적으로 추적 가능한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는 신적임의성과 초월성 때문에 내가 누구의 설교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았다, 내가 장신대 가서 성령 받았다, 아차산 느티나무 밑에서 성령 받았다, 이게 안 된다는 말이에요. 왜? 신적임의성과 불가의성, 실제로 성령이 언제부터 내게 불었는지 몰라요. 제가 감을 잡기로 저한테는 79년 5월부터 많이 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영감의 바람이 청년 20대 때 계속 불었습니다. 그때는 제 생각과 세계관이 막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한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앙을 가질까 말까하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믿으려고 다닌 게 아니라 무얼 믿는가를 알기 위해서 다녔기 때문에 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전에도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때 따라 다닌 것도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성령의 임의성, 신적 임의성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해도 제가 여러분에게 다 구원을 약속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됩니다. 절대로 인간 목사나 교사가 구원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너무 놀랍고, 왜 둘 중의 한 사람만 거듭날까요? 저는 풀 수 없는 신비입니다. 왜 소수만이 거듭나고 나머지 절대다수는 왜 전부 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버렸을까요? 지금 제가 돌이켜보면 12년 동안 캠퍼스 ministry 하면서 만난 사람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제 강의를 듣고 1년 2년 3년 한 달 그렇게 만났지만 그 사람이 다 낳고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니고데모는 혈통을 우선시했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교육적 배경이 이스라엘 지도층을 구성했거든요. 혈통과 가문이 성전 제사장을 다 채웠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인간의 유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리더십이 다 채워졌거든요. 예수님은 성령의 임의성을 강조함으로써 혈통기득권, 가문기득권, 학벌기득권, 교육기득권, 특별히 예루살렘 지역기득권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입니다. 너무 신비한 겁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약속은 성경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령으로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거듭난다는 건 분명히 있고 새 언약백성이 된다는 게 나오고 성령 받고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생긴다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5-26절 이것만 읽으면 다섯 개 대표 본문 구절 다 읽은 거예요. 평소에 에스겔을 못 찾으니까 양진일 목사밖에 못 찾잖아요. 실제로 여러분이 에스겔을 평소에 안 읽어보죠? 우리 가향형제자매들 성경지식이 거의 다른 교회랑 비슷한지 상당히 영적으로 총기가 많은지, 여러분이 영적 총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순수해 보이기는 하는데 똑똑해보이지는 않아요.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지적으로 파고들고 굉장히 영적으로 예민한 사무엘 같은 영적 총기는 안 보여요. 무교병 같은 순결은 보이는데, 그 말은 뭡니까? 간신히 1인분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공세적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성과 영성이 둘 다 비슷하게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하나님 진짜 사랑하는 건 말씀을 사랑하는 건데, 이 말씀 사랑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대부분 청년대학부에 가면 하나도 안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그걸 어떻게 개별적으로, 경건계획 보니까 성경 많이 읽겠단 사람은 거의 없던데, 대부분 그냥 단편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총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구원의 불길에 자기를 새롭게 태워서 정화하겠다는 야심찬 비전이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에스겔서를 이렇게 못 찾는 걸 보면, 오늘 느꼈습니다. 양진일 목사처럼 바로 찾아야죠. 찾지 말고 암송을 해야죠. 에스겔 36장 25절 26절은 바로 암송해야지 찾아 읽을 구절은 아니죠. 같이 읽겠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영이 바로 바람입니다. 영이란 말은 바람과 똑같은 말입니다. 바람도 되고 루하흐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영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모르듯이 영이 어디서 부는지 모릅니다. 에스겔 37장이 바람과 영이 interchangeble 서로 상호이용되는 것, 영으로 되고 바람으로 된다는 것이 에스겔 37장이죠. 거듭났다는 말은 에스겔서 36장과 37장 undeniable,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난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정확하게 거듭났죠? 거듭나는 걸 모른다, 누가?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비약적인 능력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인생관이 바뀌고 재능은 바뀌지 않지만 인생관이 바뀌어요. 바둑을 정말 좋아했던 제가 성령 받고 나서 바둑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도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듭니다. 바둑 한 판 두었으면, 그런데 제가 하나님 말씀에 창영돼서 바둑을 끊었습니다. 서예가 제 특기입니다. 1필 2지, 큰 묵과 벼루가 우리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저는 그것도 버렸습니다. 그걸 버리고 저는 하나님 말씀에 창영했습니다. 저는 20대 때 임해당의 바둑, 그걸 버렸습니다. 조선일보 신문만 보면 항상 바둑 기보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항상 누워잘 때마다 화투장이 들어온 게 아니라 바둑판이 들어옵니다. 그게 제 상태입니다. 바둑과 서예 등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낭만적인 연애를 해보고 싶다, 그걸 예수 믿고 나서 버렸습니다. 그건 나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가 되어서 떵떵 거리고 살겠다, 가나난 사람들을 잊어버리면서 내가 홀로 안전하게 살겠다, 저는 그 꿈을 버렸습니다. 나는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안전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일정정도 불안전한 요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중보자가 되기 때문에,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7,80대 죽는데 그때 죽어야지, 대부분이 일찍 죽는데 후배들보다 30년 오래 살면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지런함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부지런함 성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많이 공부했던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위로부터 거듭나면 혈통과 육정의 비즈니스에는 더 이상, 대학교 동창 고등학교 동창, 혈통과 육정과 본토 친척 아비집은 제게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직 보편적인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전 세계 만민이 어떻게 고루 우애롭게 살 것인가? 사자와 어린 양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것이 저의 모든 지향점이 되고 모든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의 전공이 돼버렸습니다. 영문학이 제 전공이 아니고 신학도 제 전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제 메인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야러분, 진짜 거듭나면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6개월-1년이상 계속 경험하면 내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나의 잠재적 은사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2,3년 이상 경험하면 충성과 온유와 양선과 절제, 성령의 열매가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네임이 정해집니다. 충성스런 사람, 온유한 사람, 성령 충만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 상태가 계속 유지돼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재미 없을까?
너무 긴박하기 때문에, 내 인생 자체가 드라마고 살아 있는 성공스토리고, 하나님의 감동스토리고 구원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인생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도 이 감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구원하게 됩니다.
이런 구원의 감동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만지자마자 구원이 번지고 그렇게 됩니다.
제가 제 주변 사람에게 구원을 전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밤과 결별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새벽기도에 나와야 하고, 밤과 결별하고, 20대 30대를 새벽에 제단을 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정 체질상, 사상의학으로 볼 때 새벽에 일어날 때 당신은 일찍 죽는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새벽기도 안 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청년은 여호수아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밤의 문화와 결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 잡다한 수다와 결별하고 말씀에 깊이가 있어야, 그래야 여러분이 2,30대 때 어떤 일에 적합한지를 아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 충만함의 결과 열매가 나타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직도 지향하지 못한다는 말은 성령이 여러분을 충분히 individualization, 개성화를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일치가 잘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공동체생활이나 성령충만하지 않은 교회생활은 개성이 다 없어지고 획일화됩니다.

참된 공동체는 개성화와 일치감이 동시에 증가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옛 허물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남녀들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내 님은 어디야, 하면서 엉뚱한 데를 쳐다봅니다.
성령충만하여 아름다워 지는 방법, 열매를 맺는 방법, 그건 인간의 값어치를 우주적 보배로 만들어버립니다.
성령충만은 우주적 보배의 값어치입니다.
여기에 한 번 도전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령의 역사가 신적 임의성을 따라 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성령 훅 불어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했을 때 모든 사람위에 각각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역사가 불가능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거듭나는 인생 최대의 신비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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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목받는 CEO 중의 하나가 KTF의 조서환 부사장입니다.

조서환 부사장은 아이디어가 많아 휴대전화 번호이동 서비스, 샴푸와 린스를 합친‘하나로 샴푸’, 20세의 치아를 80세까지 유지하라는 ‘2080치약’, 휴대전화 서비스 ‘쇼(show)’ 등 여러 히트상품을 제조했습니다.

조 부사장은 23살 때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 생활을 하다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 때 조 부사장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병원 옆으로 이사 와서 병간호를 해 주었습니다.

손을 잃은 슬픔은 여자 친구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의 아버지가 나타나 딸을 끌고 가려 했습니다.

 

저항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그 남자를 택할 것인지, 집으로 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때 딸은 “만약 아버지가 손을 잃었다면 엄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나는 이 남자의 전부를 사랑한 것이지, 손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서환 부사장은 이때부터 평생 이 여자만을 행복하게 해주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사랑의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2008.02.27 국민일보 참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온전히 갖춰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습 이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신앙고백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구원 받은 백성 되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 초대 교회에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맨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부고장은‘○○○가 죽었으니 ○월 ○일 ○시에 입관/발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훗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었을 때 사람들이 ‘참 아까운 사람 죽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그 분이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 목사님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얹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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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섯 가지 특징

1. 점진적 성장해 가는 나라
2. 사회 변혁보다 개인 회심
3. 하나님의 선물과 잔치로
4. 인간의 책임적 동참 요구
5. 역사성과 초월성 동시에
6. 모든 사람들 포함하는 곳


1장 : 선교와 하나님 나라(사도행전 1:1-11)

제자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 선교의 핵심주제 :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첫 장을 열어보면 하나님 나라가 아주 중요한 주제로 대두됨을 보게 된다. 1장 1-2절에서 사도행전 기자는 전에 쓴 기록인 누가복음에 대해 언급한 후, 3절에서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라고 말하면서, 부활과 승천 사이 결정적인 사십일 간의 말씀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로 요약하고 있다.

뒤이어 6절부터 8절에 나오는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역시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 역시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게 돼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 전 40일 동안 말씀하신 주제가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하나님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다가올 세대(the age to come)’는 현 세대에 깊숙이 침입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미 시작됐던 ’다가올 세대‘가 현 세대를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뤄질 때 하나님 나라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임하게 돼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빌 2: 10-11). 또한 그때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마 6:10).

이 같은 재림의 시기가 올 때까지 즉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두 세대가 겹쳐 있는 격이 될 것이며, 이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의 선교적 사명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승천 바로 직전의 중요한 시기인 40여 일 동안 사도들에게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사도들의 선교적 사명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동상이몽(同床異夢)

하나님 나라가 이처럼 핵심적인 주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제자들의 이해는 사뭇 달랐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는 질문을 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에 줄곧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참고 막 10:35 이하, 눅 22:24 이하). 즉 제자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민족적이고 이 세상에 제한된 하나님 나라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우주적 메시아보다는 다윗 왕조를 재건할 지상적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오셔서 새롭게 통치하실 것을 기대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고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보다(마 1:21), 정치적 메시아로서 그들을 대적들로부터 구출하는 정복자 메시아가 될 것을 기대했다(눅 1:73-74).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베푸시고 있다. 즉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는 말씀은 이것이 믿는 자들의 사색 주제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때와 기한에 대해 사색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행 1:8).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사도행전의 주제라고 볼 수 있고, 여기 나오는 지리적 명칭들은 사도행전의 목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은 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는 8장 1-11절과 18절, 나머지 11장 19절부터 28장 31절까지는 복음이 유대의 경계선을 넘어 로마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의 존망에 대해 어떤 목적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할 일은 해방운동이나 어떤 투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기다려야 할 나라는 정치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증인이 됨으로써 임하는 하나님 나라이며, 이러한 나라를 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증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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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