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 예수


아버지의 이름 예수(요한복음 17:6-8)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석가모니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6세기경 현재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틸라우라코트)를 중심으로 샤캬 공화국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캬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라자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 일부였다.

공자(孔子,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孔夫子,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는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인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석가모니는 예수님보다 600년 전, 500백년에서 600년 이전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성경과 불경에, 아주 흡사한 가르침이나 에피소드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의 주장처럼, ‘늦게 태어난 예수님이, 일찍 가르침을 뿌리고 간, 석가모니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붓다는, 사십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사십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과 흡사하죠? 불경 상부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열두 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열두 제자 파송하고 똑같아요. 아함경입니다.
붓다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붓다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붓다는 바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도, 오백 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에 나오는 말이죠.
붓다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입니다.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소경이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
똑같죠? 무문자설경이예요.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했다.
본생경에 나오는데, 목자들이 저 천사들을 목격한 그 사건과 흡사해요.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비슷하죠?
무문자설경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불경의 기록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불교학자들의 의하면, 예수님은 열세 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
그러니까 주님이 열두 살 때, 부모님과 성전에 올라가셔서, 랍비들과 토론하셨던 그 장면 있죠?
그 이후부터 공생애까지 예수님의 행적이 성경에는 전혀 기록이 안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불교학자들은 고 시점부터, 공생애 시작 때까지, 예수님이 티베트로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라고 주장을 해요.
‘인도로 간 예수!’ 뭐 이런 책도 있죠?
그래서 불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불교의 가르침을 십칠 년간 받으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 낸, 수많은 교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오백 년을 먼저 살다 간 사람은 맞지만, 불경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성경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그 시점으로부터, 수백 년 후예요. 그때까지 그냥 구전으로만 전달되었습니다.
그 중 오래 되었다고 하는 법화경도, AD 393년에 기록이 된 거예요.

​반면에 성경은 BC 1500년경,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AD 95년경 사도요한의 책을 끝으로 완결이 돼요.
불경은, 모든 불교의 경전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이 완전히 끝난 뒤부터 기록이 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불교학자들이 예수님의 불교 영향설을 주장하는 건, 불교 자체의 모순을 가져오게 됩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얼마나 허술하고 보잘  없고, 수준 낮은 종교이기에, 십칠 년간 불교를 공부한 청년이, 불교와 정반대의 교리를 가진 타력 종교를 만들어냅니까?
불교는 자력종교예요.
스스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자력종교.
불교는 원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처에게 뭔가를 빌어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하는 오늘날의 불교는, 가짜 불교예요.
그런 불교는 없어요.
무속신앙에게 먹혀 버린 불교입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면서 했다는 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잘 반영하고 있듯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신은 없고, 나! 곧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내가 최고다!’가 불교의 핵심 교리인 거예요.

​십칠 년 동안이나 불경을 공부한 사람이, 유일신 종교를 만들어 냅니까?
그건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거 아니에요?
십칠 년간 공부를 하고, 완전 반대의 종교를 만들어 내다니요?

​불교는 윤회(輪回)를 믿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십칠 년간 불경을 공부하고 오셨다는 우리 예수님은, 양고기와 포도주를 아주 즐겨 드셨어요.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고 나와 있죠?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열세 살부터 서른 살까지 인도에 가 계셨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언제 목수의 기술을 배우셔서, 목수라는 이름을 들으셨을까요?
목수라는 이름은, 하루 이틀 배워서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에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배워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로 생각할 뿐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고난(苦難)의 바다,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을 통과하면서, 그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 낸, 인간을 위한 창작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종교가 이런 저런 물증을 갖다 대면서, ‘우리가 맞다! 우리가 우월하다!’하고 디밀면, 금방 흔들려 버리는 거예요. 왜냐면 그들의 종교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똑같거든요. 이름만 달리 부르는 거예요. 알라! 부처! 문선명! 예수! 그런데 그 종교를 통하여 얻어 내고자 하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데에서, 뭔가 신빙성 있는 물증을 제시하면, 거기로 혹 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추구해야 할 바와, 기독교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신앙의 그런 짜릿한 어떤 경험을, 교회가 경험해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나오게 되면, 요리 흔들렸다 조리 흔들렸다, 내가 진짜 제대로 믿고 있는 건 맞는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 이 세상의 고난을 피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찾아와서, 당신을 계시(啓示)하시므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永生)을 살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러한 영생이 과연 무엇이며, 그건 어떠한 상태이며,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거예요. 가르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기독교는요!

그리고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왜 인간이, 지고의 복인 그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죄(罪)라는 소품을 사용하여, 창세기 1장부터 이제 설명을 해 가시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하시고,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 불가능한 존재들을, 가능함 속으로 인도하시는지, 그걸 죄의 해결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는지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죄의 문제와, 하나님나라라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른 종교로 이사를 하거나, 교회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이라는 소품과, 무대장치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무엇을 위해, 어떠한 상태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배우고,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는, 그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예요. 절대 종교가 추구하는 그런 것을 얻어내는, 그런 무당잡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나라에 가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니까, 기독교가 그것들과 뭐가 달라요? 다를 게 없으니까,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언제든지 여길 떠날 수도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위해 기도하시는 대상 즉 제자들과 교회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나타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단 말입니다.

​6절 안에 담겨있는 성도의 신분에 관한 마지막 고찰에 이르른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 즉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나타난, 말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는데, 모두에게 나타내신 게 아니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어서, 이해시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올바로 이해하고 가야 돼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정의하고 있어야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속성을 대변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 그는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해. 이름이 났어!’
그럴 때 거기에서 이름 안에는, 훌륭한 변호사로서의 속성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가수로 이름을 날려!’ 거기에서 이름은, 노래를 잘하는 그 사람의 특징과 속성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름은, 어떤 존재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등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거예요.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뒤에, 그 존재가 여늬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일 처음 물은 게, ‘이름이 뭡니까?’라고 물었어요?
이름을 알고 싶다는 건, ‘당신의 전 존재를, 내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인 거예요.
전 존재의 상징! 그것이 바로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기술과 이해심! 특징! 속성! 등등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님의 전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그것을, 예수가 나타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삶과 죽음과,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 존재를 드러냈다는 거예요.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의 모든 도움이다.’라고도 한 거고,
잠언 기자 또한, ‘여호와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달려가 피할 망대라!’라고 한 거예요.
무슨 이름에 가? 어떻게 갔다 피해요? 우리, 이름에 어떻게 숨어요? 그런 이름의 정의를 잘 알지 못하면, 그런 구절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거죠. ​

시편 124:7-8
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의 도움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만 우리의 도움이다.’
이 세상의 다른 힘 즉 돈, 명예, 지위, 어떤 관계, 인기, 이런 것들은 나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8:10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고 합니다.
의인(義人)은 그곳으로만 달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안전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즉 이름은 속성이며 성품이므로 여호와께로 피하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의 도움이시며, 그 자체로, 우리가 피할 안전한 망대예요.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들에게, 그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냈더니,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했다는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돈! 인기! 명예! 등이 자신들을 도와주며, 자신들의 안위를 책임져 줄 것이라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만, 우리의 도움과 안위가 있다는 사실을 안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도움과 안위의 방편으로 삼아 살지 않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성도는,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이 목적삼아 추구하는 그것들을 좇지 않고,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낸 이유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의 본질이 뭔지를 알아, 그것에 착념하고 전념하고 집중하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에 개입을 하시며, 왜 당신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온 아들은, 이 땅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가셨는지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7:7-8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아버지께, 내가 아버지께로서 나온 줄을 안다는 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거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다는 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이 그분을 왜 보냈는지를, 알았다는 뜻이에요.
그건 지금, 여기서 제자들이 이 시점에 알았다는 게 아니라, 제자들로 상징되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될, 모든 교회들은,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지어져가게 된다는 것을, 그런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요. 중보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그 분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직접 살고, 그래서 살고 죽었어요. 그리고 다시 부활했습니다. 삶으로 직접 살고, 입으로 말씀으로 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이고, 성도는, 그분의 삶과 그 분의 가르침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과 뜻임을 아는 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성도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이 되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가 된 것을, 믿는 자들인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성도의 본질을, 이미 확정이 되고 완성이 된 것으로, 과거와 완료시제로 쓰고 계신 것은,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임을, 단언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그들이 믿었습니다. 그들이 지켰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지키긴 뭘 지켜요? 금방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습니다. 믿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나는, 이들을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낼 거죠? 아버지! 그러니까 보존하여 지켜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건, 만사형통이나 소원성취!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의 그 해방(解放)! 그 창조의 목적으로의 그 회귀(回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말이에요.

아무튼 그런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선포는, 구약에서부터 이미 반복하여 예언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메시아의 시 시편 22편을 봅시다.
시편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여기서 주가 Lord예요.
바로 이 예언의 성취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편 22편은, 메시아 시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윗 개인의 시편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다윗은 성도를 대표하기도 하고, 예수를 상징하기도 하는 인물인데, 다윗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은, ‘메시아가 이런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도 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다윗 자체가 살아내므로 말미암아, 이중으로 계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이름 계시 사건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돼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그런 예수님의 삶이 동일하게 반복이 된단 말이에요. 그게 다윗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이런 시를 쓴 거예요. 다윗이!

자, 그러면 도대체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열왕기상 11장 36절 보세요.

(열왕기상 11:36)

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예루살렘? 뭡니까?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 선택한 백성! 그들에게 뭘 둔다, 그래요? 내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 그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름을 두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삶에 들어오는 건, 그 즉시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삶이 그랬잖습니까? 민수기 6장 27절 보세요.

(민수기 6:27)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보세요. ‘내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 뒤로 이스라엘의 삶이 복된 삶이었습니까?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 가시와 담으로,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삶이, 그 때부터 시작 되었어요. 그걸 복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福)! 계시록 14장 1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14:1)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십사만 사천은 12×12×1000. 그래서 열두 지파! 열두 사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숫자인 거죠.)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어린 양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성도의 이마에, 탁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그렇게 드러났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리고 그 삶은, 천국에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죄가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주일날 잘 설명해 드렸으니까, 잘 아시죠? 마귀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 이 땅에서는 고난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 천국에 들어가면, 죄가 싹 없어진 곳에, 그 곳에 들어가면, 이게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그 이중적인 나타남! 드러남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계셔야 되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과,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그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면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거죠. 이길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런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순종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내셨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과, 이 세상에 드러난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어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신, 나타내신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정말 가난하게 살다 가셨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쏟아 부으셨죠? 그 삶이, 사도행전으로 가면, 베드로와 요한의, 그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의, 작은 에피소드로, 그림으로 또 드러나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봅니다. 미문이 뭡니까? 아름다운 문이에요. 거기에 누가 돕지 않으면 절대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가 앉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 거기다가 그 앉은뱅이를 갖다 놓고 갔더니, 동냥 바구니를 놓고 동냥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그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문인 줄 알고, 미문인 줄 알고, 그게 진짜 좋은 건 줄 알고 거기 앉아서, 실제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면서, ‘누가 동냥 안 해주나?’라고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동냥 바구니를 보면서, 거기에 그 동냥 바구니로 얻어내는 모든 것은, 그냥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거지 동냥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천 만 불을 벌어도, 그건 거지 동냥에 불과한 거예요.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어딜 보냐? 나를 봐라!’ 그러잖아요? ‘주목하라! 나를 주목하라! 왜 동냥 바구니만 보고 있어? 나를 봐!’

봤더니, 개뿔이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동냥이나 받을 줄 알고 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지금 네가 원하는 건, 은과 금이잖아? 그래서 너는 지금 동냥 바구니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봐!’ 그러더니,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게 복(福)이란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받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가 드러내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고, 예수의 이름을 받아 세상으로 나간 성도는, 바로 은과 금을 무장해제 당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을, 열두 사도 파송할 때, 칠십 인의 제자 파송할 때, 전부 ‘내가 양을 이리 떼에게 보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 홀딱 벗겨서 보내는 거예요. ‘전대도 가져가지 마! 신발도 두 개 가져가지 마! 지팡이만 갖고 가!’

양을 이리에게 보내면서,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세상의 힘을 전부 무장해제 시키고 보내죠? 하나님의 일은, 은과 금으로 하는 거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티끌인 상태로 내려가면서, 하나님이 내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완전히 티끌인 상태로, 흙덩어리인 상태로 내려 가셨다니까요. 자기가 가진 힘을 자기를 위해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완전히 흙덩어리! 이리 굴리면 이리 굴러가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굴러가는 그런 삶으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 안에서 전부 일을 하셔서, 결국에는 살려 내시기까지 하시고, 승천시켜, 하나님나라로 끌어올리시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전부 하나님께 우리의 전 존재를 맡겨 버리는 걸,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나는 자꾸 흙덩어리로 낮아지는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일을 하셔요. 그러더니 나를 부활시키고, 승천까지 시켜 버리시는 거예요. 그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세상에서는,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모습으로 드러나요. 비전과 야망과 소망과 뜻이 기각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타날 것 아닙니까? 내 야망과 내 욕심이 없어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런 것들이 자꾸 부인을 당해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그 분의 권능에 의해서!

그런데 내 안에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분이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점점 바보가 됐는데, 하나님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저렇게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고 있어?’ ‘아니야! 나는 바보가 되고 있었어요. 내가 뭔데 저런 사람을 질타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판단해? 내가 티끌인데! 내가 흙덩인데!’ 이렇게 점점 부인이 되고 바보가 됐는데, 내 삶 속에서, 그 부인에 의해, 용서라는 게 격발되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도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뜻만 좇아, 완전히 비워지는 그릇으로 사는 것! 그것이 ‘왔다구나!’를 이 세상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다른 종교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극과 극 대척점에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요!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바람만 불어도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땅에서 배울 것만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우리를 미혹(迷惑)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앞으로도 엄청난 것으로 우리를 시험할 거예요. 우는 사자처럼, 우리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은, 문만 열면 들어오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문을 너무 자주 열잖아요? 그렇다니깐요. 마귀라는 존재는 그렇게 실존하는 존재예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며 안전한 삶이다.’라는 걸, 또 가르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귀에게 물리고 당하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절대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손해가 없어요. 여러분의 모든 삶이 합력하여, 선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 원래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복만을 의지해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전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도록 지어진 존재예요.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의 이름이, ‘아담’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느 날 흙으로 어떠한 형체를 빚었어요. 그리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담! 한글로 번역하면 ‘사람’이지만, 그 뜻은, ‘흙덩어리’라는 뜻이에요. 흙, 티끌이 ‘아다마’거든요. 그 ‘아다마’로 만들어진 존재가, ‘네페쉬’가, 아담인 거예요. 그러니까 흙덩어리예요. 흙덩어리!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하시고 뭐라 그래요? ‘네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잘 알아먹으라.’고 그러면서, 흙을 갈게 하죠? 땅을 갈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냥 흙덩어리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냥 흙덩어리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생기불어 넣어 주시면, 그 앞에서 재롱이나 피우면서, 하나님이 살라는 대로 살면 되는 게, 인간이에요. 이 사실을 마음에 올바로 각인하고 간직한 아담은, 한 평생 하나님께 의존하며, 동시에, 다른 동료 흙덩어리를 향해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했어요. 잘난 척할 수 없잖아요? 흙덩어리를 자각한 흙덩어리가!

그런데 아담이 흙덩어리인 자신의 신분을 잠시 망각했죠?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사건이에요. 하나님의 흙덩어리! 즉 티끌로 살아야 하는 도덕적 피조물이, 티끌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자기 가치 향상의 삶을 살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한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사건이에요.

그 뒤로, 아담들! 그 흙덩어리들은요. 매일 같이 그 흙덩어리에 이것, 저것 명품으로 걸치기도 하고, 또 그 위에, 최상의 화장품을 바르기도 하고, 흙덩어리를 깎아서 성형도 하고, 학력이라는 것과, 재력이라는 것과, 권력이라는 것과, 지능이라는 것으로도, 흙덩어리를 치장하고 위장하며 살죠?

그런데 그 치장과 위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본인들도, 자신들이 흙덩어리라는 것을 순식간에 잊어 버려요. 그래서 전 인류가, 자기가 흙덩어리라는 것을 잊어 버렸어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文明)과, 이 세상의 힘들 때문에!

그런데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로 발각이 될 때가 있어요. 흙덩어리에다가 아무리 예쁘게 화장을 해놓고 치장을 해 놓아도, 그 흙덩어리가 흙덩어리임을 발각이 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젭니까? 비가 올 때! 은혜의 단비가, 그의 삶의 내리면, 그의 흙덩어리 됨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 뒤부터, 계속해서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 당해요. 그 때 진짜 생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계속 폭로 당하면서, ‘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어야 되는 자이구나!’를 가슴 속 깊이 새기는, 그 삶을 사는 것을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은 뭐 전부, 그 흙덩어리에다가, 더 많은 어떤 치장과 위장을 할 수 있게, 나에게 힘을 허락해 달라고, 그렇게 구하고 있는 게, 오늘날 기독교의 실정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분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티끌의 자리로 내려 가셨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했고, 급기야 그 흙덩어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살해를 해 버렸어요.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예 흙덩어리의 무력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에요. 진흙을 마치 십자가의 척 붙여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건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들어서 십자가에다가 척 붙였더니, 그냥 말라 죽어 버리셨어요. 흙덩어리의 무력함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끝까지 그 흙덩어리의 삶을 고수하셨어요. 자기의 힘을, 그냥 흙덩어리가 되어서, 자기의 힘을, 자기를 위해 요만큼도 안 쓰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 보세요.

(마태복음 26:53-54)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할 수 있다는 거죠.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가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천사 하나가 내려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한 칼에 몰살시켰는데, 열두 영이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군단이 내려와요. 천사가! 이 세상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할 수 있는데, 안한다는 거예요. 난 그냥 흙덩어리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가 그거 인거예요. 여러분! 삼위일체의 연합의 원리가 그거인 거 아세요?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자기를 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연합의 원리인 거예요.

자,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를 보호하시고, 대적을 쳐 낼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이루시는 삶을 사셨던 거예요.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된다는,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셨던 거예요. 내 능력을, 나를 위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그 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에요. 그게 아담의 삶이었어야 했어요. ‘먹지 마!’ 그럼 먹지 말았어야 돼요. 그게 뭔지 몰라도, 그냥 먹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이 인생을 통하여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도, 수천 번, 수만 번 계속 선악과를 또 따먹고, 또 따먹고, 또 따먹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 개 따 드시고 오셨잖아요? 하지 말라는 거! 여러 개 하고 오셨잖습니까? 그 일로 여러분이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마음이 불편합니까? 천국에서 그런 마음 갖고 사실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아니죠? 예,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흙덩어리 됨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 분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당신의 힘을, 당신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쓰실 수 있는, 그런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그 어떤 존재도, 자기의 그 엄청난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원수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권능(權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권세(權勢)예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삶 속에 드러난다니까요. 이제!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힘을, 여러분 자신을 위해 못 쓰고, 원수를 위해 쏟아 내어지는 삶으로, 자꾸 바보처럼 바뀌어 가는 거예요. ‘옛날 같았으면, 저걸 그냥 확!’ 그런데 내가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에이 대충 그냥 이렇게 살지 뭐!’ 사람들이 볼 땐, ‘너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삶이라고요.

어떻게 하나님 말고 다른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쓰던 힘을, 원수에게 돌려, 그를 유익하게 삶을 사냐고요?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어떻게 그를 섬깁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그런 삶이 드러나게 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점점 비워지는 삶을 살게 되고, 흙덩어리로 폭로가 되고, 결국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그 삶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겁니다. 계속 죽고, 죽고, 죽고 죽다가,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히 죽어, 거기에서 최종승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는 순간이, 여러분이 승리하는 순간이거든요.

따라서 그 때가 최종승리! 승리의 절정이라면, 여러분의 삶은 어디로 수렴되어야 된다? 계속 죽는 쪽으로! 그러니까 기독교는 종교와 다른 거예요.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응전을 하지 못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돼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감싸 안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그러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마아터, 순교자가 되리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증인이 순교자란 단어가 똑같은 단어니까!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이에요.

그렇게 작정된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 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어요.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애굽의 왕자가 되죠. 어느 날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요. 그러한 모세 속에 애족의식이 싹텄어요. 그러던 중에,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모세는 그 자리에서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살인자가 됩니다. 모세는 그 길로 광야로 나가서 사십 년간을,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어요.

여든이 된 모세가 하루는, 호렙산이라 하는 곳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 곳은 나중에 모세가 율법을 받게 되는 시내산이죠? 시내산과 호렙산은 같은 산이에요.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어요.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불은 계속 활활 타고 있어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에, 뭔가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제일 먼저 그에게,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래요. 그 말은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는 삶! 거기가 거룩한 곳이죠? 그 삶은, 스스로의 신발을 신고, 스스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갈 수 없는 그런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거룩한 곳!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모든 존재는, 신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신발 신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면서, ‘하나님! 빨리 와서 나를 도우라!’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는 게 아니에요. 신을 벗어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밖에서 띠 띄우고 너를 끌고 갈 존재가 있다고, 목을 확 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곳에 선 성도! 거룩한 무리잖아요?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말씀 뒤에, 모세와 하나님의 난상 토론이 벌어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실 것이고, ‘너는 나의 대리인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인 것입니다. ‘네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너를 태워서, 너의 능력과 너의 언변! 너의 소질! 이런 걸 태워서, 일을 할 게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불태워 일을 할 거야.’가 고 그림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고 그림 안에는, ‘지금 내 백성이 애굽에서, 이렇게 풀무 불같은 고난을, 고통을 겪고 있지만, 절대 그들은 그 풀무 불에, 진멸되지 않을 것이고, 그 불은, 단지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양육용으로 준 것이다. 절대 그들은 나의 보호 아래에서, 절대 거기에 불타서, 진멸되지 않을 것이다.’를 보여주기도 하는 그림이기도 한 거예요.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모세가 그것을 알아먹었어요. 그걸 우리도 알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바로 그 현실을 알아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의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죠. 세상의 풀무불은, 그를 십자가의 매달아 놓고, 확 태워 버릴 줄 알았어요. 다 태운 줄 알았는데, 예수가 그 자리에서 다시 살 났어요. 고 현장에서 불은 분명히 타고 있었는데, 고난의 불이, 십자가의 불이 타고 있었는데, 예수가 죽지 않고, 안타고, 그대로 다시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그들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애굽의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을 당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뭔가 배우게 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그 풀무 불같은 고난이, 다 태워서 진멸하지 못하게 지키시며, 결국은 당신의 힘으로, 모세라는 인물을 들어서 썼지만, 그들을 완성해 내고 마신다는, 그 복음의 현실이, 그 전체 그림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지맞은 인생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뭘 더, 더 이상 원할 게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의 삶! 십자가의 삶! 부활! 승천! 전~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 그런다고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려 내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내려가 버리신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리고 ‘바로 너희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거야.’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나님이 살려내시지 않으면, 일으켜 내시지 않으면, 영원히 무덤 속에 거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까지 내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자기를 다 비워 버렸어요. 자기를 위해 자기의 신성을 전혀 쓰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왜? 너희가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살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흙덩어리의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수시로,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 제자들에게 수시로 반복하여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생각도 없습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다, 그래요? 아버지가 왜 시키는 일만 했다 그래요? 바로 그게 우리의 삶이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은, 이 잔이 내게서 비껴가는 건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으시고, 아버지 뜻대로 그냥 해 버리셨죠? 그 삶이 너의 삶 속에서 일어날 거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의 뜻이 있지만, 그건 우리의 이 얄팍한, 좋아봐야 150! 거기서 나오는 지혜 밖에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결국에는,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바뀌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고백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무릎 꿇고 앉아서, 죽자 사자 기도하는 거예요. ‘왜 이게 안 되죠? 왜 자꾸 내 뜻이 올라와요. 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자꾸 내 눈에 보여요. 아버지!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하나님과의 연합(聯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연합이 되는 게 기도라면,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시겠어요?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춰야죠. 그런 자로 내가 자꾸 해체되어져 가는 게, 기도란 말입니다. 기도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니까!

자,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분의 능력이, 밖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도구로 쓰이는 이의 그 흙덩이 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흙을 개어서 벽돌을 만드는 자들로, 낮아져야 했던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들을 애굽에 들여보내셔서, 흙을 개어, 벽돌을 굽게 함으로, 너희들이 흙이라는 것을, 거기서, 그 애굽의 삶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그 속에서 그들이, 그 고통으로 절대 안 죽더라는 것입니다. 살려 내셔서, 결국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시더라는 거예요. 그럴 거면 애굽에는 뭐 하러 넣었다 빼요? 필요하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삶을 산거죠. 예수님도 흙덩이가 되어서, 완전히 비워 버렸고, 하나님이 살려낼 때, 그냥 살아난 것뿐이에요.

이스라엘? 마찬가지입니다. 흙덩이가 되어서 그곳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큰일 나겠어요.’라고 부르짖었더니, 아버지가 그 부르짖음을 듣고, 그 전까지는 못 들었나요? 아니오. 부르짖게 만드신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의 도움이 나에게 필요하군요.’라고,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걸 아버지가 들었다고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보죠.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죠. 제가 그 장면을 조금 드라마틱하게 각색을 한번 해 볼게요.

‘하나님! 이제는 열정도 정열도 다 시들었습니다. 그 때 내가 분연히 일어나서, 애굽사람을 쳐 죽였을 때, 그 때 찾아와서 일을 시키시죠? 그 때는 왜 침묵하시고, 내가 처갓집에 가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다가, 이제 여든이 되어서, 이렇게 무력해진 이 시점에 와서, 저에게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양무리의 문을 열고 닫는 일 그것뿐이었어요. 하나님! 당신은, 제 인생의 시간을 잘 못 읽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잘못 찾아 오셨어요. 저는 게다가 입이 둔하여 말도 잘 못합니다. 대중연설도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적인 연설은, 더 더욱 못해요. 그러니까 저는 이 일의 적격자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끈질기게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모세를 설득하셨어요. ‘네 힘으로 하는 거 아니야! 네 능력! 네 언변! 태워서 일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면 가!’ 계속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마지못해서, 하나님의 청을 받아들이죠. 그런데 또 다른 조건이 있었어요.

‘하나님! 제가 애굽에 가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네가 무슨 권한으로, 네가 그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를 보냈느냐?’ 그러면, 제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됩니까?’ 물어봐요. 그 말은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 갖다가 보일 테니까! 당신 명함 하나 주세요!’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내가 딱 그들에게 내 놓아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그런 당신 명함을 나에게 하나 달라는 거예요. ‘아! 그 분이 보냈으면, 오케이!’ 라고, 그들이 인정할 만한 당신 명함을 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물어본 거예요. ‘누가 보냈다 그래야 돼요?’ 그 때 하나님이 명함을 주시죠.

그 명함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름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다시금, 왜 하나님이 자기의 명함을 주시게 되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왜 줬다고요? 모세가 애굽,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하러 갔을 때, 그들이 ‘도대체 누가 너를 보낸 거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때 보여줄 이름을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이 이름을 주신 거 아녜요?

그러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이름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같죠? ‘에흐헤!’ 가운데 글자인 ‘아쉐르’는 문법적으로 관계사예요. 두 단어를 연결 짓는 연결사죠. 그렇다면 ‘에흐헤’라는 단어의 뜻만 풀면, 하나님의 이름이 풀이가 되겠죠? ‘에흐웨’는 문법적으로 ‘무엇 무엇 이다. 있다.’ 거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1인칭 단수 미완료 동사예요.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 이런 뜻이어야 맞아요.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표준 새번역에도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좀 부족해요.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름 같죠?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온갖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추출해낸다면, 그건 잘못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책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건 전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진공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학문적 상아탑에서, 논의되는 이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이고, 매우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 아래서 주어진, 복음인 거예요. ‘누가 너를 보냈어?’ 그랬을 때, ‘이 분이 보냈어!’라고 주어질 복음인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생수와 같은 좋은 소식을 담고 있는 이름이에요. 그 분의 이름 자체가, 복음이고, 희망이고, 미래이며, 위로의 원천이에요. 어떻게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 세 글자를 담고 있는 그 명함을 건네 주셨을 때, 모세도 알아야 하고, 그 고난의 풀무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도 알아야 하며, 여러분과 저도 알아야만 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었어요.

몇 년 전에 작고한 그 저명한 신학자! 루이스 스메데스가, 이 광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어요? Wherever you are, I am The One who will always be with you there. 네가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 그게 바로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리고 어떤 사건 속에 처해 있든지, 그곳에 항상 함께 있는 게, 바로 나다! 그게 ‘I am Who I am’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던 이스라엘이, 그 명함을 척 받았을 때, 어땠겠어요? ‘아! 우리가 이 애굽에서 이렇게 고난을 당한 것이, 그냥 하나님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우리가 아무 유익이 없이 당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기 위해 준 고난이었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그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인 것입니다. 나는 네가 어느 곳에 있을 때에도, 너와 항상 함께 있는 존재야! 그게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러니까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는 임마누엘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풀무 불같은 애굽의 고난 속에서도 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죽일 거였다면, 거기서 다 죽였겠죠. 그런데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처럼, 풀무의 불이 그들을 연단하고 있는데, 그 안의 이스라엘은, 온전한 채 보전되고 있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인 교회! 이 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애굽을 살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 풀무불 같은 고난과 연단 속에 던져져요.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 상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죠? 그건 여러분을 방해하거나, 미혹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로서의 여러분의 본분은, 절대 상함이 없다는 거예요. 연결이 되시죠? 떨기나무 불꽃과, 불과, 애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 전체에 함께 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난으로 몰고 간 것의 정체는, 이 세상의 죄였죠? 이 세상의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사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죄가 예수님을 두들겨 패고, 죄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가 불살라 버리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분이, 세상의 죄가 자꾸 불을 사르는데도, 온전하게 보존이 되시다가, 새 몸으로 부활을 하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애굽에 들어갔다 나온 이스라엘의 삶이고, 그게 교회의 삶!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걸 성경전체가 그냥 일관성 있게 반복하고, 점층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좀 더 알기 쉬운 그림! 이렇게! 창세기부터는 유치원 수준으로 설명하다가, 나중에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은, 그 그림이 선명하게 확 드러나 버리는 거죠. 성도의 삶의 현실과, 천상의 교회의 모습! 이게 동시에 드러나잖아요? 요한계시록에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그릇은, 한없이 약해져야 하는 거고, 그 질그릇 같은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와 똑같은 삶을 살며,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자,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 이름! ‘I am who I am’이라는 그 이름이, 출애굽 때 처음 주어졌는데, 자, 그 출애굽이 언제 약속이 됐던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에서! 거길 보면 조금 더 명확해 지겠죠? 창세기 15장 7절 보세요.

(창세기 15:7-17)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이게 애굽의 약속이에요.)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즉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필연적인 약속의 땅 입성을 약속하시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바로 위에는, 불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붙어 있어요. 나와요. 그 언약의 장면에,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영토의 완성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창조! 이게 약속이 되면서, 쪼갠 고기가 등장하는 것이죠? 당시 고대시대 사람들은 어떤 약속을 할 때, 항상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를 둘이 손잡고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둘 중에 하나가 이 약속을 어기면, 요렇게 쪼개져서 죽는다.’를 확약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이 되는 그 현장에서, 고기가 쪼개져 있는데,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신단 말이에요. 왜? 인간 측에서는, 거기에 어떤 것도 보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혼자 지나가요. 그리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그 일을 방해하는 게 바로, 우리의 죄성(罪性)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을 나는, 반드시 완성해 내고 말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쪼개져서라도, 나는 반드시 만들어 내고 말거야! 그리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혼자 쪼개져 버리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그러한 엄청난 하나님 측에서의 손해와, 상함이 감수 되었다는 걸, 우리에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벌써!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창조가 약속되는 데에, 그들의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 종의 삶이, 끼어들어가 있단 말이에요. 필연적 과정으로! 너희들이 분명히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에, 어떤 일을 겪어야 되냐면, 사백 년 동안, 사백이라는 단어가 뭐, 숫자가 뭐라 그랬어요? 사십 년 광야! 인생! 너희들은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이 세상살이, 이 삶을 통과하여, 뭔가를 배우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출애굽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약속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들을 진짜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다 한 거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한 거야!’ 내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여, 너희들을 그리로 들여보냈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들어가라!’ 그래요. 그 전에는 들어가면 죽인다고 그러더니, 야곱한테 가서는 또, ‘들어가라!’ 그래요. 빨리 들어가라 그래요.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래놓고 거기서 종살이 하게 만든 다음에, 하나님이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뭘 가르쳐서! 그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인 거예요.

무슨 마귀새끼가 반역을 해서, 걔에 의해서, 막 모든 것이 주도가 되어 인간도 타락을 하고…,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동화적으로 해석을 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성경과 역사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전지전능한 창조주세요! 그 분이 아무런 계획과 목적도 없이 일하시겠습니까?

그 우리가 그러한 애굽살이! 애굽의 종살이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 즉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난 자들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이 되는, 이 세상에 종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어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서는, 다시 애굽으로 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배우고 오라는 거예요.

우리는 천상의 교회로 완성이 되어 있는데, 이 세상 애굽으로 잠시, 하나님이 밀어 내리신 거예요. 다시 끌어 들이실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세가 그 역할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해야 되겠냐고요? 아휴! 답답할 때가 많아요. 천국에 가면, 도대체 거기에 몇 명이나 있을까? 굉장히 궁금해요. 여러분!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절대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직시하게 하시기 위함인 거예요. 그들은 또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배움터인 그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그 고난의 풀무 속에서도 절대 타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어서, 오히려 연단이 되어서, 하나님나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임을, 다 아우르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에흐헤 아쉐르 에흐헤’예요. 그 이름이 여러분이 삶 속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드러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흙덩이로 낮아지고 굳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삶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고,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삶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만 보고, ‘야! 난 지지리도 복도 없어! 하나님이 날 지금 미워하시나 봐! 야! 저 사람은 참 복 받았어!’ 이렇게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하늘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떨기나무 불로 일하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고도, 자랑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뻐기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거고! 왜? 그것이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난하고 연약한 자리에서도, 기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단 말입니다.

그 그림이 잘 표현이 된 게, 우리가 이미 배웠던 실로암 사건이에요.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실로암 사건! 요한복음 9장 7절 보면,

(요한복음 9:7)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이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설명을 하죠. 그건 요한이, 이 에피소드에서 강조되어야 할 메시지가 바로, 그 이름 안에 담겨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 유다를 침공한다는 정보가, 첩보가 들어왔어요. 그 때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에서 한 500m 정도 떨어진, 그 기혼 샘에서, 지하수로를 뚫어서, 예루살렘 성 안에다가 연못을 하나 만들어요. 식수 때문에! 포위가 되면 물을 먹어야 되니까! 그게 실로암 연못이에요. 그러니까 실로암 못은, 기혼으로부터 보내진 물이, 여기서 현상으로부터 나타난 것뿐이죠?

그런데 현상으로 나타난, 소경이라는 현실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거 누구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라고 묻고 있단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건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소경 됨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밝히 드러내세요. 그런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거예요.

왜? 실로암은, 이 자체가 수원이 아니라, 기혼 샘이라는 수원이 있는데, 거기서 보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실로암만 보면서, 이 실로암이, 이 물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이는, 소경이고, 이 실로암이 어디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보는 자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본다고 하는 자가, 눈먼 자고, 눈먼 자가 바로, 보는 자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그걸 자기가 올바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면서, ‘조 놈은 나쁜 놈! 조 놈은 악한 놈! 요 사람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요 사람 착한 사람! 조 사람 저주받은 사람! 요 사람 복 받은 사람!’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연단이나, 그 분의 은혜의 손길이나, 긍휼의 손길이나, 이런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나는 현실과 현상만으로 판단해 버리는 게, 소경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어떤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크게 사고를 쳤어요. 이거는 누가 봐도 명백히 못된 짓을 한 거예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할 말 없는 그런 일을 했어요. 그 때 내가 같이 ‘야! 이 나쁜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창피해 죽겠다.’ 그리고는 머리 질끈 동여매고 앓아눕는 거! 이게 현상과 현실만 보고, 자기 스스로 그냥 판단해 버린, 소경들입니다.

성도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이 아이와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실 게 있는 거고, 이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분명히 뭔가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혹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임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것을 쳐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자! 그가 보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실과 현상 뒤에 숨어서, 당신의 일을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천상의 교회로서,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떠한 힘과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이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셨는지를, 잘 배우는 거예요. 흙덩이들은, 흙덩이로 살아야지! 거기다가 아무리, 위장을 하고, 변장을 하고, 치장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 아래서는, 생얼이 된다는 거를, 잘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점점 그런 위장과, 변장과 치장을 덜할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εἰ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1525

1. 오다.  2. 마 8:5. 3. ㉠ 히 9:12, 24, 25
발음 [ ĕisĕrchŏmai ]
어원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들어가다(마 5:20, 눅 4:16, 히 9:12), 들어오다(마 8:8, 눅 7:45, 고전 14:24), 참여하다(마 25:21, 23), 들다(마 26:41, 눅22:40, 46), 나가다(막 10:25), 오다(눅 8:41), 일어나다(눅 9: 46), 데리다(눅 14:23), 돌아오다(눅 17:7), 출입하다(행 1:21), 이르다(행11:20).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4-25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된 이래로(눅 1:26-38),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제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약혼자였던 요셉이 임신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마 1:18-24).
요셉은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사로부터 확인한 후에야 그녀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천사는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했습니다(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은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아기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마 16:13; 막 8:27).
그 대답은 오늘날과 같이 다양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더 자세히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베드로가 올바른 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사실이라고 확증하시고 그 진리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본성과 정체성에는 영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에 관한 바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질에 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요 1:1-14).

빌립보서 2:6-7에서는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9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시며,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2:14-18; 4:15).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에게 전해졌습니다(롬 5:12).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요 8:29; 히 9: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300개 이상의 예언을 성취해야 했습니다(마 4:13-14; 눅 22:37; 사 53; 미 5:2).

인간이 타락한 후(창 3:21-23), 인간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무고한 제물의 피가 필요했습니다(레 9:2; 민 28:19; 신 15:21; 히 9:22).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만족시킨 최종적이고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히 10:14).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적합했으며 예수님의 몸을 통해 그 구속 사업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그런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마 26:28; 요일 2:2).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예수님이 단지 선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에게도 죄의 본성이 있고 완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누군가를 구원할 능력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고 그로 인해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과 무덤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요1:12; 고전 15:3-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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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1.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14 말씀에 근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요 1:3) 성탄은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이 같은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 같이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創造物)에 불과한 인간(人間)과 같이 되셨다는 성탄의 사건은 천지창조(天地創造) 보다도 더 경이(驚異)로운 사건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사적(歷史的)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敬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絶頂)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1) 구원론의 차원과 2)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성육신사건은 기독교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는가?
  • 성육신사건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성육신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樣式)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2. 성육신의 구원론적 의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救援論的)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使者)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神性)과 참 인성(人性)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贖罪)의 사역을 대신하시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成肉身)의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게 된다.                  

3. 성육신의 신론적 의미

다음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神論的)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일까?”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像, Image)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릿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며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自信)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성’(유사본질, homoiousios, 아리우스의 주장)을 가졌을 뿐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동일본질, homoousios, 아타나시우스 주장)을 가졌는가?”
‘homoiousios’와 ‘homoousios’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자 한 자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超越的)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저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相衝)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로서의 성경과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그저 추상적(抽象的)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不滅)하시며 무한(無限)하시며 불변(不變)하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며, 유한하지 않으시고, 변하시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性稟)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像, image)은 우상(偶像)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골 1:15)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15: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像, image)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독생 성자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학 사상과 같은 추상적 개념(槪念)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人格的)으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首肯)만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信賴)와 순종(順從)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行動)  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被造物)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 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原理)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抽象的)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4. 성육신과 기독교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런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신앙은 어떠한 삶의 양태(樣態)를 요구하는가? 다시 말하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신앙은 이 세상을 부정(否定)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經綸)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해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 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해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조직신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로회신학대학원,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신학박사)
출처 / 월간 ‘교육교회’ 19995.11월호(장신대 기독교교육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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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靈)이 육신(肉身)으로
비실체에서 실체로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처음 성육신했을 때 29세 이전까지 정상 인성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며, 말을 떼자마자 천상의 말씀을 하고, 사람의 생각과 품고 있는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육신은 육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이었다면 성육신의 의의와 본질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이 ‘육신’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가 정상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더더욱 그의 육신이 정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존재임을 충분히 보여 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이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그의 사역을 방해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치는 일도,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말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다. 성령 역사의 본질은 인류 구원과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그의 본질을 육신에 실체화하여 육신이 충분히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기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영의 모든 사역을 대신하고, 성육신 기간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사역도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사역하며, 육신으로 온 이상 육신에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든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직분을 다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서문> 중에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삶과 사역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의 삶이다. 일반인의 가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며,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 윤리와 법칙, 정상적인 필요(의식주 등), 정상적인 연약함과 정상인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면서 정상인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의 삶이다. 이때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닌 평범한 인성으로 살며, 겉모습에는 조금도 초자연적인 부분이 없지만,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오로지 신성의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 인성이 이미 직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정상 인성으로 직분을 이행하는 삶이자,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삶이 완전히 평범한 인성으로 사는 삶인 이유는 그때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사역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인성이 성숙해질 때까지,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삶은 그저 정상 인성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인성으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고 직분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이행하는 기간의 삶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이 태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고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육신의 본질은 없어진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의 본질을 위해 존재하고,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의 인성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성육신 하나님께는 신성만 있고 인성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이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성육신의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을 지닌 신성으로 살며 사역한다. 다만, 이때의 인성은 오로지 신성이 정상 육신에서 사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이다. 즉,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지 인성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성은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인성이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단, 역사하는 것은 육신이며, 이 육신을 사람이라고도,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되고, 사람의 외형과 본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사람이기에 창조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인성을 지닌 모든 사람 가운데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 외에는 모두 창조된 인류인 것이다. 똑같이 인성을 갖추고 있지만, 창조된 사람은 인성 말고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는 인성 말고도 무엇보다 중요한 신성이 있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신성은 쉽게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 나타나며,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장 측량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음에도 너희 대다수는 이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고 하면 그의 본질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체이다. 이 결합체를 하나님 자신이자 땅의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의 정상적인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과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사역에는 사람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하고, 사유를 지닌 인성의 전제하에서 사역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고차원적이든, 그의 사역에는 논리학도, 사고학도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를 통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역을 인성으로 직접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사역은 전부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이지, 그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십자가에 달린 것은 머리로 상상한 것이 아니며, 두뇌의 사유를 지닌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지만 이 사역은 전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성이 해야 하는 일로, 육에 속하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와 정상 인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단지 정상 인성으로 살았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저 그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정상 인성은 하나님이 육신 되었음을 실증하고, 은혜시대는 영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한 시대임을 실증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육신으로 실체화했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는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정상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인 사유를 가진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실체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에 거하면서 그 육신을 통해 신성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처음 성육신하였을 때는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했다. 그가 하는 사역이 속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은 바로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은 그가 사람을 죄와 더러움에서 구원할 것임을 예시했다. 은혜시대이기에 그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어야 했고, 그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는 은혜시대 은혜의 상징이다. 은혜시대에는 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 또는 물질적인 축복이 은혜시대의 상징이자 예수를 믿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지닌 육신의 본능이었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한 사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육신에 거하면서 그런 사역을 행했으며 육신을 초월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든 여전히 정상 인성을 지니고, 인성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성육신의 시대에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전부 육신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의 육신이 육신의 본질을 완전히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신이 이적을 나타낼 수 있으며, 아주 가끔 육신을 초월하는 사역을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두 그가 직분을 이행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가 40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이나 산 위에서 형상을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성육신한 의의가 완전해지지 않았고, 일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육신의 모든 삶이 지극히 정상이었으나, 사역을 시작한 후로는 육신의 외형만 유지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신성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뛰어넘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만큼 육에 속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상시에는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집에 사는 등 정상적인 의식주 활동을 했고, 정상인의 이성과 두뇌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정상인이었으나, 그가 행한 사역은 아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역이든 평범한 정상 인성으로 했다. 또한 그가 사역하는 때일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정상적이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맑고 또렷했으며, 모든 정상인의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러한 이성과 생각도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신성의 사역은 가장 정상적인 이성과 가장 맑고 또렷한 생각을 지닌 육신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육신으로 신성의 사역을 발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33년 반 동안 세상에 있었다. 그는 33년 반 동안 시종일관 정상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그가 3년 반 동안 행한 직분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가 매우 비범하고, 그전보다 훨씬 초자연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사실, 예수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이나 후나 정상 인성에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 똑같은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직분을 이행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본래 갖고 있던 정상 인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으로 살아야 하고,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직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인성은 육신의 근본이므로 그의 육신이 지닌 정상 인성은 없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시작하기 전, 예수의 육신은 완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정상인의 모든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면이나 이적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게 추구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가장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육신의 남다른 점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의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하며, 평범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완전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아닌 불완전한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한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정상 인성이 없는 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성육신의 의의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신성 사역이고, 그 사역은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통해 사역하면서 정상 인성이 가려졌기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권병에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할 수도 있다. 영의 사역과 육신의 사역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에 대한 권병을 지니고,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육신 역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그의 권병에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고, 이를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사역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같은 뜻을 이루려 하며, 같은 사역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이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선하다. 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발현이자 모든 사랑의 발현이다.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만하는 성분이 없고, 오만 방자하거나 교활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이 사탄과 같은 속성을 갖게 된 이유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을 뿐,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생활할 때 사역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의 육신이 아무리 연약해져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며 거역하는 일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는다. 육신이 고통받을지언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똑같이 육신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 사명을 완수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본질만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영을 자신의 당연한 본분으로 삼아 이행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탄의 속성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함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 역시 마찬가지로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이 같은 육신은 오로지 공의로운 일, 인류에게 유익한 일, 거룩하고 빛나며 위대한 일만 할 수 있다.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리 없고, 하나님의 영을 배반하는 일을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므로 그의 육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과는 다른 본질을 가진 육신이다. 사탄이 패괴시키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 자신의 육신을 패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그리스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도 사람만 사탄에게 점령되고, 이용당하고, 해를 입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절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는다. 사탄은 영원히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나를 배반하는 존재는 오직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뿐이며, 이 문제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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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에 관련된 성경구절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을 말합니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인 성자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며, 자기비하의 초기과정에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딤전 3:16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성육신가 부활, 부활 후의 승천, 만국에 전파되심의 모든 과정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육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죄있는 육신으로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낳음을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피조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율법 아래 나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심으로 완전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감내해야할 모든 것을 스스로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승천하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다시 하나님되심을 회복하셨습니다. 

성육신 이전 하나님의 본체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낳으심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성육신의 과정

성령으로 잉태되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율법 아래에서 나심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죄인의 형상을 입음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육신의 목적

1. 죄를 사하심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심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마귀를 멸하심

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히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요한1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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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기독론(基督論, 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기독론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인물이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 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 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本質) 즉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罪)의 형벌(刑罰)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했다. 더욱이 그는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셔야 했다. 만일 그가 죄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代身)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孕胎)되어 탄생(誕生)하심과 관계된다.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눅 1:35)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轉嫁)되고 유전(遺傳)되어 내려오는 원죄(原罪)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體驗)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代贖) 제물로서 속죄(贖罪) 사역을 담당(擔當)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人性)이 범죄(犯罪)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 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贖罪)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또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靈)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本質)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主, κύριος, אֲדֹנָי)라는 명칭으로 불리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아도나이, אֲדֹנָי)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우주와 인간의 참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영광의 주’(고전 2:8)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롬 10:9)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1)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同等)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했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요일 5:20) (사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 2:13)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성경이 그를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誤謬)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屬性)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영원(永遠)하심에 대해 증거 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 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계셨다.)”(요 1: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 한다.

또 그는 신적지식(神的知識)을 가지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마 9:4)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요 2:24,25)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마 17:27)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超人間的)이요 적신(神的)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能力)을 가지신 자로 증거 되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屬性)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 하고 있다. 골로새서 2: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했다.

  •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먼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 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략) 다 그로 말미암고”(골 1:16)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 가진 자로 증거 한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도 피조물(被造物)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權威)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중략)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奇蹟)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님은 또 사람들의 죄(罪)를 용서(容恕)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自由)하게 하신다고 말씀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5,7,10)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히 1:3)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또 그는 참된 안식(安息)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 15:26) “내가 그(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하나님의 영(靈)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또 그는 마지막 날 세상 모든 사람을 심판(審判)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딤후 4:1)

  •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榮光)을 받으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이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 하니”(계 5:12,13)

이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神的)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그가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 인적(人的)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이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 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롬 5:15)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전 15:21) 

  • 인적(人的)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 고통당하시고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 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히 2:14)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그는 참으로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또 그는 지식의 제한(制限)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막 11:1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막 13:32) 

  • 인적(人的)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는 증거 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마 14:2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3.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 인격(人格, person)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질(性質, 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 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單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複數)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2)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 인격’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0-543)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 같은 이들은 ‘내(內) 인격’(interpersonal)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신적(紳的)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知情意)는 성(性, 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特質)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의지(紳的意志) 뿐만이 아니라 인적의지(人的意志)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의지와 그의 인적의지는 조화(調和)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의지는 그의 신적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680-681 AD)는 이것을 이렇게 진술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性)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3)  신성과 인성 연합의 결과 : 삼중적 전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單一) 인격(人格)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三重的) 전달이 있다.          

  • 속성(屬性)의 전달이다.

예수는 신적속성과 인적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나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인적속성)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신적속성)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요 3:13, 신적속성)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인적속성),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신적속성)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 사역(事役)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사역들과 인적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은 신인적(神人的) 성격을 가진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 은혜(恩惠)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4.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1)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와 그에게 메시아(Messiah)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分離)시킴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 한다.

(2) 도케티파

도케티파(Docetism, 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했다.(요일 4:2,3, 요이 7)   

(3)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했다. 초대교부 오리겐(Origenes Admantius, 185?-254)은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 했다.            

이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의 거센 반박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同一)한 본질(本質)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5년 니케야회의(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ὁμοούσιος, 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동일본질)는 신앙을 바른 견해로 선언했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 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라.”(ὁμοιούσιος, 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 유사본질)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와 ‘아이’(i)자 하나만 다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 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 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310-390)는 사람이 영(靈)과 혼(魂)과 몸(肉)의 세 실체(實體)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靈)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魂)과 몸(肉)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완전한 ‘참 사람’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5)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신적(神的)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有機的)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6)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Eutyches, 378-456)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混合) 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區別)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7)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一意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性, 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의지(神的意志)와 인적의지(人的意志)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질(本質)과 신적의지와 인적의지 두 의지(意志)를 고백한 것이었다.                

(8)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Theodotus of Byzantium, 2nd century)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사람이며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Felix, bishop of Urgel, Spain, ?-818)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9) 속성(屬性)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676-749)이나 루터파(Luthera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sm)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10) 인성 중심의 기독론

  •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理想的) 윤리적(倫理的)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救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인류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고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汎神論) 사상에 불과하다.
  •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의식을 가지셨고 하나님은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11)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 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과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점진적 성육신설

도르너(Isaak August Dorner, 1804-1884)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漸進的)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意識)과 한 의지(意志)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 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 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 칼케톤 신조(Definition of Chalcedon, 451)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제8장 2항 :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8)

제21문 :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信條的) 진술들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 그의 참된 신성(神性) 
  • 그의 참된 인성(人性) 
  • 그의 단일(單一)  인격성(人格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神人的) 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김효성 목사 /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 (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 (M.Div. equiv.); 미국, 페이스(Faith) 신학대학원 졸업 (Th.M. in N.T.); 미국,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 (Ph.D. in Theology);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 총회신학연구원(합동보수-냉천동) 교수 역임; 예수교 장로회 신학연구원 교수 역임; 현재,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 담임목사; 현재,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PART Ⅱ

동정녀 탄생과 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의미 

예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이란 예수의 동정녀에 의한 수태(受胎) 즉 남자와의 성적 접촉이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에 공통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는 이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대한 반대 또한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이 조항은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경이 지닌 표준의 지위를 부정하고 때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추정한 데서 귀결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반대 교리에 대한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고찰 해보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동정탄생초대교전승반대

(1) 사도 신경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셨음을 고백하는 오늘날 사도 신경의 형태는 5,6세기경 고울(Gaul) 지방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도 신경은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에 근거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사도신경의 후기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기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신경 초기형태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전 로마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북 아프리카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과 고울과 소아시아 지방의 이레네우스(Irenaeus, 140-202)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중요 교회들의 초기 고백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도신경이 다른 새로운 교리와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반대

2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증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歷史性)과 사실성(事實性)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 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支持)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기에도 반대(反對)가 있었다.

이교도(異敎徒)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주로 유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예수 관련 전승(傳承)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켈수스(Celsus)와 케린투스(Cerinthus),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 그리고 초대교회 때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에비온파(Ebionites) 등이 있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 문제에 대해 2세기 이후 부정적 증거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전체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로 오면서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Hans Erich Freiherr von Campenhausen, 1903–1989)은 마태의 족보(族譜)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Vincent Taylor, 1887–1968)는 ‘Proto-Luke’ 가정(假定)에 근거해서 누가복음 1,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揷入)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 1919–1983)은 동정녀 탄생 교리가 예수를 우리와 달리 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는 역사적(歷史的)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신앙적 기적과 초자연을 모두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은 스트라우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다. 케어드(George Bradford Caird, 1917–1984)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그리스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誤解)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도 동정녀 탄생은 유대적 맥락이 아닌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Hans Conzelmann, 1915–1989)은 이를 다신론(多神論)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異敎)에서의 신현(神顯)과 성육신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3. 동정녀 탄생의 교리의 중요성 

많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한 일반생육법(一般生育法)에 의해 출생(出生)하셨다면 그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罪人)일 뿐이며 그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921)는 초자연적(超自然的) 그리스도와 구원이 초자연적 출생의 필연적 결과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과 ‘죄(罪) 없는 인간의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수태 교리는 정통 기독론의 중요한 골격 중 하나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과 혼동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영원하신 성자(聖子)가 인간(人間)이 되셨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 아버지를 두시지 않았음을 말한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는 성육신을 ‘선재(先在)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人間性, (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超歷史的)인 분이 역사(歷史)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보았다. 동정녀 탄생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예수는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태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10개월 동안 자라 태어나신 것이다.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省察)에 앞서 이미 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을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브루너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만약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아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브루너와 달리 동정녀 탄생 교리를 성육신 교리와 연관시킨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 속에서 성육신의 표징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사야 7:14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는 동정녀 탄생에서 상징화(象徵化)되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事實)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 반대에 대한 비판 

   (1) 동정녀 탄생이 신약에 두 단락에서만 진술된다는 문제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의 두 단락에서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다.(마 1:18-25, 눅 1:26-38)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다른 단락에서도 가끔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막 6:3, 요 1:13, 갈 4:4) 신약성경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때로 이 교리의 부족한 역사성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두 유아기 기사에 공통되는 부분이 동정녀 탄생 기사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기사가 초기의 공동 전승을 기초로 삼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마태복음 1:23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 7:14을 인용하고 있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예언의 배경은 유대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앗수르의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를 꾸짖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표적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어 ‘알마’(המלע)의 번역인데 일반적으로 ‘알마’는 처녀를 가리키기보다 ‘젊은 여성’ 혹은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약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LⅩⅩ)에서 명확하게 ‘처녀’라는 말인 ‘팔데노스’(παρθὲνος, 남자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정절을 지킨 처녀를 의미)로 번역했다. 그 말은 구약의 ‘알마’라는 말이 ‘처녀’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確證) 하는 것이다.

‘처녀’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베투라’(הꗚוּתꔶ)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요 예수님이 꼭 동정녀 탄생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마’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 처녀는 기능(機能)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를 ‘알마’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마리아는 젊은 여성으로 ‘처녀’였다. 그것은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자신이 처녀인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또 잔(Theodor von Zahn, 1838–1933)은 제롬(Jerome, 347-420) 시대 이래로 구약에서 ‘알마’(המלע)가 나오는 모든 구절은 항상 ‘처녀’(virgin)로 쓰여 왔다고 했다. 더구나 70인 역이나 마태는 젊은 여인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처녀는 미가 5:3에 언급된 특수한 처녀를 가리켰다.

‘가나혼인잔치 기적’(요 2:1-11)이 성경에 단 한번 소개되었다고 이 표적(標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가 기적(奇蹟)이었음과 인간 아버지를 두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다.  

(2) 동정녀 탄생이 완전한 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 

예수의 부모 중 한 사람만 인간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몇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성(人性)의 본질과 그것이 한 세대에 다른 세대에 대해 혼동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완전(完全)한 인간이었고 특히 아담의 경우는 어떤 의미든 간에 그에게 인성을 전해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남성 인자(因子)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견은 무시될 수도 있다.

이런 의견은 지나치게 자의적(恣意的) 해석이며 실제 그런 일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예수는 마리아의 유전인자(遺傳因子)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에 의한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여성(女性)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남성인자(男性因子)로 구성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정자(精子)가 마리아의 난자(卵子)와 결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실존하는 남성에 의해 제공된 정자가 아니라 이 경우를 위해 성령의 능력에 의해 특별히 생성(生成)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중요한 견해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선택(選擇)하면 다른 하나는 부인(否認)할 수밖에 없다. 선재(先在)와 현재(現在) 이 둘은 시간적으로 상호 배타적(排他的)이며 결코 보완적(補完的)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부정적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은 그의 신성(神性)과 관련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성(人性)과 관계된다. 삼위 중 제2위 하나님으로서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데 한 유한(有限)한 시간(時間) 속에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시작부터 순수한 성육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선재론’과 ‘동정녀 탄생’이 모순(矛盾)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 동정녀 탄생이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인간의 생물학적(生物學的) 지식과 인간 출생에 관한 지식에 상반(相反) 된다는 근거 하에 거부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성경의 기적과 초자연이 받아들어지지 않는 인간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평주의(批評主義)는 기독교 신앙이 자연(自然)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규칙성(規則性)을 부인하여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적(異蹟)을 정의하는 데 있어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교부시대로 웅변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적은 언제라도 검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자연을 산발적(散發的)으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일이다. 자연의 일관성(一貫性) 혹은 통일성(統一性)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과학(科學) 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 혹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구조(構造)에서 바라볼 때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인간 구속(救贖)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자연적(超自然的) 구도(構圖) 가운데 일부이다. 자신의 과학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신적계시’라고 하는 고차원적 근거 위에서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믿는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이 세대의 위대하고 장대한 ‘구원역사’(救援歷史)’ 드라마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면 그 교리는 지나간 민족 설화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동정녀 탄생’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고백하고 있다. 처녀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부터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다는 사실은 역사신학(歷史神學)에서 하나의 무언(無言)의 전제(前提)임이 분명하다. 우리들 의견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조들이 그의 인격과 그 진정성을 또한 확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현대의 심리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교리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증식된 개구리가 그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개구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인간됨의 뜻과 인간의 유전학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갖기까지는 위의 반대의견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5) 동정녀 탄생은 지엽적 문제라는 견해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신앙 가운데 지엽적(枝葉的)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한 증거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결코 신약성경 본문들 가운데 기록된 ‘복음’ 혹은 ‘케리그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신학적 내용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평가절하 하거나 제거(除去)하려는 것이 비평적 혹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다른 기준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이 동정녀 탄생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할 때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이 동정녀 탄생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다른 기준이란 ‘동정녀 탄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기준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침묵으로부터의 주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논법은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외의 부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면에서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최후만찬’을 흥미 있게 비교했다. 주님의 만찬보다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자료가 더 많다. 만일 어떤 사실의 중요성 여부(與否)를 그에 관해 기록한 본문의 구절 수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그처럼 평가절하 한다면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평가절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1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가 절수를 세는 방법으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신학적 중요성을 계산해낸 사람은 없다. 어떤 주어진 개념이 그에 관한 성경의 증언 가운데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풍부하더라고 그것을 신학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구약성경 가운데 존재한다. 어떤 개념의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의해서 이며 따라서 역사적 기독론의 방법론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 교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6) 타종교 전설과의 유사성 견해    

성경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 기사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제안이 있다. 즉 다른 종교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유사(類似)한 기록들을 적용시켰다고 보는 견해이다.  

플루타르크(Lucius Mestrius Plutarchus, 45-157)는 한 여인이 신적 영(靈, (Pneuma)에 접했을 때 임신(妊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의 ‘누마’(Numa) 전설에 관해 말하면서 누마는 자신에 아내가 죽은 후 신적(紳的) 존재인 에게리아(Egeria)와 관계를 맺기 위해 고독(孤獨)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제우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그리고 알렉산더를 낳았으며 아폴로가 어떻게 이온과 아스클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낳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脈絡)에서 ‘동정녀 탄생’을 신화(神話)나 전설(傳說)로 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가 아닌 단지 신(紳)과 인간 사이의 간음(姦淫)에 불과하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은 전적으로 이와는 다르다. 무디(Dale Moody, 1915-1992)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성적 문란 신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고상한 일신론(一神論)의 간격은 너무나 넓어 아무리 조심스럽게 연구해도 그 틈새를 메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둘 사이에 유사성은 적고 차이점은 크다.

그러므로 이방(異邦) 신화들이 복음서에 섞여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와는 다르게 성경기사를 이방종교 대신 유대교와 관련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유대적인 색채가 매우 강함으로 직접적인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유대교가 이방 종교로부터 나온 생각을 어느 정도 따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적인 특성을 띠고 기독교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는 유대교가 실질적으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정녀 탄생은 사실 이교도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수용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흘러들어 갔다가 점차 기독교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믿음이 들어가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가정한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36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고 묻고 이에 대해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영원하신 성자(聖子)는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無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볼 때에 유한한 인간은 늘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심과 시비를 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동정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은 여전히 신적 권위 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http://irt.kr(국제개혁신학목회연구원)

예언성구 예언주제 성취성구
창 3:15 1. 여자의 후손 갈 4:4
창 12:2,3 2. 아브라함의 씨 마 1:1
창 49:10 3. 유다의 홀 눅 3:33
사 9:7 4. 다윗의 자손 눅 1:32,33
단 9:25 5. 예수 탄생시기 눅 2:1,2
미 5:2 6. 베들레헴에서 탄생 눅 2:4-7
호 11:1 7. 이집트로 피신 마 2:14,15
사 9:1,2 8. 예수의 갈릴리사역 마 4:13-17
사 61:1,2 9. 상처 받은 자 치유 눅 4:18,19
사 53:3 10. 유대인에게 버림받음 요 1:11
시 110:4 11. 멜기세댁반차 제사장 히 5:5,6
슥 11:12,13 12. 은 30에 팔림 마 26:15, 27:5-7
사 53:12 13. 참혹한 희생 막 15:27,28
시 69:21 14. 초에 저린 쓸개를 줌 마 27:34
시 22:18 15. 그의 옷을 나눔 마 27:35
시 34:20 16. 뼈가 부러지지 않음 요 19:32,33,36
슥 12:10 17. 옆구리를 찔림 요 19:34
사 53:9 18. 부자의 묘에 장사 마 27:57-60
시 49:15 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막 16:6,7
시 68:18 20. 하늘에 오르심 막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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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Incarnation) 
육체(Car) + 안에( in ) + 태어나는 것(natus)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 되심에 대한 성육신의 교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요 1:14; 롬 8:3; 골 2:9; 딤전 3:16)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골 2:9).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는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리로 하나님이신 성자의 자기 비움, 자기 낮아짐을 보여 준다(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성육신의 교리가 확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확정된 성육신의 교리 내용은 “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 서로 혼합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며, 나뉠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두 본성을 가지신 것으로 … 각 본성의 성질은 그대로 보존되며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고 …”이었다.

성육신의 교리에 반대하여 아리우스(Arius, 256-336)는 그리스도를 천사나 하나님의 피조물로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파괴하는 이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은 시인하면서도 그분의 인격 속에는 육과 혼이 있고 신성 속에 영(spirit)이 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유튀크스(Eutyches)도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르며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케노시스(Kenosis)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신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비워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 모든 주장들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성육신의 교리를 부분적으로 보았거나 잘못 본 것들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교리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신이자 인간이신 분으로 그 양성(신, 인간)은 모두 완전하고 참이며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양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연합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

 예수님은 왜 하나님이신가? (요1:9~14)

몇 가지 이유로 예수님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이라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 부자의 개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자의 개념과 다릅니다. 이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격을 설명하는 말이지 한 분이 다른 한 분보다 더 열등하다거나 혹은 피조되었다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격이 다른다는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속성을 가지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주옵소서 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 분은 성부로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성자로 부르셨는가? 그것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인가?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기 전, 다시 말해 성 관계를 갖기 전에,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셨고 보통 아이들과 같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누가 복음 2:52절을 보면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 출생과 성장 과정을 생략한 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단순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고 했고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종합할 때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태초에 말씀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요한복음 서론에 있어서 가장 축이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떻게 말씀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바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 이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 일서 1장에서는 더 구체적인 언어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14절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할 때 “되었다” 는 말은 번역할 때 매우 주의를 요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 한 마디를 잘못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파괴되어 이단으로 몰릴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되었다는 말은 만들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혹은 피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게네토”라는 말인데 전혀 새로운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영어로는 became 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되었다고 해석하면 제일 좋습니다.

이 말 때문에 초대 교회 시절 많은 이단 논쟁이 있었습니다. 4세기 초에 아리우스 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은 피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성부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피조물의 위치에 둔 것입니다. 또 5세기 초반 유티케스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둘이 아니라 이 둘이 합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단성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에 대해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아다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본체를 가지신, 세상 이전에 출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의 어머니의 본체를 가지신 이 땅에 태어나신 인간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자 인간이시다. 그럼에도 둘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다. 신격이 육신으로 변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셔서 하나가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만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감추시고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됨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육신은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여기 쓰여진 “육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싸르크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시절 “아폴로나리우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면 이 둘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 때 그는 결론 내리기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기는 했지만 보통 인간이 가지는 지성이나 영혼은 입지 않았으며 그 자리를 로고스가 대신하였다 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인정했지만 예수님이 인간임을 거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정의를 가진 전인, 호울 펄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가지셨고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해 하셨고, 주리기도 하셨고, 목 마름도 경험하셨으며, 주무시기도 하셨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한결 같이 고통을 당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 거하신다는 말은 “스케노오” 라는 말로 “거처를 정하다, 텐트를 치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장막 삼으셔서 거처를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인간의 틈 바구니 속에 찾아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 성육신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백악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비서진을 통해서 대통령이 당신 집에 가서 하루 밤 머물고자 하는데 허락해 달라고요. 놀랍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처를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특성이 무엇입니까?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죽으시려면 인간의 육신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죄가 용서 받으려면 누군가 그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므로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죽어 주신 것입니다. 벧전 2:24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27,28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성인으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겉 모습만 인간이고 속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상적인 출생의 과정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성을 친히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셨고 피곤함을 경험하셨고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고통이 전혀 감소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해 주신다. 친히 겪어 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53:6,7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다쳤습니다. 제대로 날지를 못합니다. 그 새를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새는 자꾸 도망갑니다. 이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너를 치료해 주려고 해 너를 도와 주려고 해 그러나 이 새는 그 마음을 모른 체 자꾸 도망갑니다. 이 때 이 사람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새를 도와 주려면 내가 새가 되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는 것입니다. 여기 우ㅠ리는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계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히 눈으로 보고 손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 보았다는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에테아사메타” 라는 말로 “관찰했다. 목격자 되었다” 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극장이라고 하는 “띠어터”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주의 깊게 음미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조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면밀히 검토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반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이는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닙니다.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복음 자체에 대한 논쟁 거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았다.” 단순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친히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았을 때 은혜와 진리가 전달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은혜와 진리와 경험적으로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받아드리고 받아 들이지 않고를 떠나서 여전히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진리가 개인적으로 경험적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고 그 때 그에게 임한 은혜와 진리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과 같이 직접 독생자의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을 떠나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한 사도 요한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전달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진리를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거절하는 사람이요 다른 한 부류는 받아 들이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통해서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들을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마음 분을 여십시다. 요한이 증거한 그 증거, 요한이 본 그 영광 나도 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은혜와 진리가 우리 맘 가운데 전달되는 게시의 역사를 보여 주옵소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님”, “예수 그리스도” 등 예배와 기도에 쓰이는 호칭에서 그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모세가 신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신은 “나는 나다”라고 대답했다.다시 말하면 그는 존재하는is 자being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신은 너무 신성해서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네 개의 자음으로 표기했고, 이를 영어로 옮긴 것이 YHWH이다.

여기에 모음을 붙여 Yahweh(야훼)라고 쓰고 여기에서 여호와(Jehovah)가 나왔다.

이슬람교에는 동정심의 아라만(Ar-Rahman), 복수의 알문타킴(Al-Muntaqim) 등 알라의 속성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의 이름 아흔아홉”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바그완(Bhagwaan)은 하나님, 이스바(Ishvar)는 우주의 통치자, 파라마트마(Paramatma)는 최고의 영이다. 브라마, 바슈누, 크리슈나, 라마 같은 이름은 그래도 친숙한 편이다.

불교도들은 인간보다 높은 경지의 존재인 천신devas이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불교는 비유신론으로, 주동자로서의 신 개념이 없다. 따라서 누구 또는 무엇, 즉 인격적 존재인가 비인격적 존재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실존 인물인 붓다는 영적 창시자, 보살, 깨달은 자의 속성을 지닌다.그는 자력으로 열반을 얻었고, 깨달은 자, 즉 붓다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인 다르마카야(Dhrmakaya)의 화현으로 이해된다.

붓다는 누구라고 물을 수 있는 실존인물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는 정신적 모범이었다.

신이 누구, 즉 인격적 존재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속성과 특질을 논할 수 없는 추상적 존재인 사람들도 있다.

인격화 신이라도 말에 담길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명사와 대명사로 그 부분을 붙들기도 한다.

절대적, 보편적인가 하면 또 상대적, 개인적인 신 개념 안에서 적절히 긴장을 유지하며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어느 종교에서나 화두이다.

종교와 신앙도 진화한다는 점에서 세상 만물과 별다르지 않다.

유대교의 천재성은 다신교의 온상에 일신교의 씨앗을 뿌린 데 있다. 기독교의 천재성은 성육신 개념에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알 수 없는 존재를 알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가장 완벽한 인격화이다.

서구 문화권은 신을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며, 나아가 신을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요컨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는 육화한 영, 즉 무엇이면서 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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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면서 주님의 인격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2. 동정녀(童貞女) 탄생

신비로운 성육신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다룰 수밖에 없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1) 동정녀 탄생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보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비로 가득 찬 위대한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교리에 접근할 때는 우리가 이전까지 배웠던 교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확실히 하였다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성경, 계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등)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동정녀 탄생 교리의 기초가 되는 두 구절이 있다.

– 누가복음 1:26-38 :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에게 고지되는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주목하자. 천사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벌써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놀랐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 주저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놀란 마리아에게 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마태복음 1:18-25 : 동정녀 탄생이 요셉에게 고지되는 장면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놀랐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으나 꿈속에 천사가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믿음에 대해 잊고 지나간다. 그는 아무런 반대나 망설임 없이 믿고 그대로 행동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교리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이 교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의 교리들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남자가 한쪽 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남자 는 이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타 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해보자. 그 약속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 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자, 이제 위의 창세기 3:15의 원복음의 은혜 언약 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남자 는 성육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결과에 의해 특별히 타락의 결과로 인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성육신 사건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나님은 오직 여자만 사용하셨다.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타락이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을 통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과 실패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한 인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307722) 동정녀 탄생은 성령님이 행하신 위대한 신비다.

누군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아무도 대답 못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다.
– 성육신은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 성령님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다.

“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 – 이것은 마리아가 죄 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녀의 일부분이라도 거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성령님은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인성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셨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셔서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1) 성육신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분명한 모양이 되었다.

당신이 정말로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정말로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것은 사실이다)이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의 표적이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신비하다. 주님의 탄생도 그러하고 세상을 떠나가신 일도 그러하며 부활하심도 그러하다.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다.

만일 당신이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가 만약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와 죄책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위해 특별한 인성을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라 미리 말했다.
주님은 인성을 마리아를 통해 받으셨고 그의 인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와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 서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행위 중 가장 최고의 행위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며 일찍이 일어났던 모든 일중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남자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성육신 사건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깨닫고 기억하자.

< 참고 >

제22문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제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 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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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적 선교원리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우선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을 평생 살도록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선교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타 문화권에 직접 가서 사역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평생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변화하는 선교 환경에 따라 각 시대에 따라 선교의 수단과 방법, 전략이 달라졌다. 특히 교통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더 복음 전파의 속도가 빨라졌고, 영역이 넓어졌으며 이에 따라서 나타난 선교의 열매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현장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특히 인간관계에 갈등이 많고,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가장 큰 요인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사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며, 왜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는가? 선교의 수단이나 방법 그리고 전략 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 비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하면서 정작 잊지 말아야 하는 본질적인 선교의 성경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교 137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받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전환된 후, 지난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해 1,5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한국선교는 위기를 맞고 있고, 선교사의 파송 숫자가 급감하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 시대에는 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꾸준히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2월에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리서치 전문기관인 KRIM(한국선교연구원)이 공동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0년 말 한국은 168개국에 22,259명의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가 사역하므로 여전히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도 2021년 3월 현재 55개국에 49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사역함으로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성경적인 선교의 원리를 선교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양적 성장의 변곡점을 넘어서고 있는 고신선교도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면, 본질적인 선교의 원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육신적 선교원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성육신(Incarnation)이란 무엇인가?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말은 본래 ‘육신으로(With the flesh)’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동정녀 탄생으로 그 자신이 본래 가지신 신성에 더해진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히 흠 없는 신성이 있으신데 여기에 인성이 더해진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 되신 것이다. 즉, 그는 50%는 하나님이고 나머지 50%는 사람인 존재가 아니라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이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온전한 인격체이시므로 구속사역을 능히 하실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시고 그분이 사람 가운데 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시고 '은혜와 진리' 충만하신 중보자가 되셨다.

 

   ‘은혜’라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귀한 것’이란 뜻이 있다. 둘째로 ‘아름답다’라는 뜻이 있다. 셋째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와 도움’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을 다른 목적이나 사심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행위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받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것, 분에 넘치는 것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자의 모습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진리란 인생의 등불과 같은 것이고, 등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된 진로를 밝혀줄 참된 가치가 된다. 또한 진리는 곧 생명이다. 진리는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죄에 매여있고, 두려움에 매여있고, 심판에 매여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모든 삶에서 묶여있다. 그러나 다음 성경 구절은 이에 대한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영원히 한 인격 안에 죄 없는 인성을 소유하셨다. 이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실 수가 있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은혜이다.

 

 

 

2. 이 성육신이 어떻게 선교사에게 나타나야 하는가?

 

   효과적인 타 문화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선교지 사람과 동일화(Identification)가 되어야 한다. ‘동일화’라는 말은 ‘대상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현지인과의 동일화’란 그들의 문화와 의식주 생활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태도의 문제로써 그 목적은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하는데 있다.

 

   한국선교는 여전히 세계 선교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으나 한국식 패턴과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는 한국적 선교, 선교지를 한국화하는 선교, 비서구인데도 비서구교회를 무시하는 태도 등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선교를 위해 한국선교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再考)가 불가피하다. 이것은 선교사라면 응당 ‘동일화(Identification)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성육신의 목적은 동일화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선교의 접촉은 먼저 인간 대 인간의 신뢰감이 확보된 후에 인간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 실례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동일화 작업을 통해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셨다.

 

   선교사는 모름지기 선교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그가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소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접촉점은 선교사 자신이다. ‘선교사가 타 문화권으로 들어갈 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교훈을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라고 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선교지에서 모름지기 작은 예수로서 선교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선교사는 선교지 문화 속에서 성육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사는 그저 단순히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분명히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 위해서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원의 메시지를 소유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메시지를 실제로 구체화하여 가르치며,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고(엡 3:8)’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말이나 글로 가르친다고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는 사역의 성격상 자기와 매우 다른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접촉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본을 따른다는 것은 철저한 ‘개인적 재교육(Personal Reorientation)’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타락한 이기주의의 본성을 버리고 죄인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며 철저하게 이타주의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다시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이 훈련은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민족적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을 떨쳐버리고 복음을 전해 받는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동화하며, 피선교지 주민들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피선교인 지향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All things to all men)’의 전도 방법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방법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영혼 구원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의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동일한 목적이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선교사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과 나아가 선교지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서 어긋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선교의 토착화(Indigenization)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의 목표가 선교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고 서로의 교제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항상 자기보다 선교지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하는 낮아진 종의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선교의 상황이 격변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선교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극단적으로는 ‘선교사 무용론(宣敎師 無用論)’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는 선교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왜 교회가 굳이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며, 왜 선교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면 굳이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 있지 않아도 비대면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지원도 온라인으로 하여 이제는 선교지에서 현지인 스스로 선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굳이 예수님을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셨듯이 교회가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하여 거기에서 작은 예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통해서 배워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려면 선교사가 현장에서 그의 삶으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SNS(Social Network Service)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3. 성육신(Incarnation)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동일화(Identification)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가 된다’는 뜻인데 ‘모든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환경의 짐도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동일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동일화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으로 동일화함으로 성공적인 선교를 하였다.

 

   그러므로 동일화만이 선교지 사람들의 언어와 풍속과 문화를 깊이 알게 되며, 또 복음을 전달받는 사람들과 마음의 일치를 가질 수 있다. 타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마음으로 선교지 주민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며 그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그 복음은 듣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깊숙이 뚫고 들어가 영혼을 일깨워 회개와 신앙의 결단으로 인도하게 된다.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의 전신인 CIM(중국내지선교회, China Inland Mission)을 세워서 18,625명의 중국인 성도뿐 아니라 1,152명의 중국인 사역자를 배출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국인처럼 되기 위해 변발을 하고 중국인 복장으로 중국인처럼 살면서 중국인의 마음을 얻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동일화가 그 당시 동료 서양 선교사들에게 논란이 되었고 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았고 그들처럼 낮아졌다. 그로 인해 드디어 막혔던 선교사역이 본격적으로 열렸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마음이요 선교사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er)는 동일화 모델을 가리켜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Incarnational Communication)”이라고 부르면서, “성육신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완벽한 모델”임을 주장했다.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세 가지 모델을 소개했다.

   첫째는, ‘분리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와 대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 문화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오류에 빠지게 해서 결국 신자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도록 만든다. 이 모델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델이다.

   둘째는, ‘동일시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문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가 세속화될 수 있다. 이 모델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는 ‘변혁의 모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는 말씀은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이 견해는 복음에는 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까지도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바람직한 모델이다.

 

   장중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초문화적 존재(Supracultural Being)인 하나님이 인간의 문화 속에 들어와서 문화적 규제하에 있는 인간과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속(Redemption)을 실현하신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인 인간의 실존 속으로 들어오셔서 성육신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문화와 접촉하시고 인간의 언어 세계를 통해 직접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신 것이다.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를 통해 들은 메시지 가운데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던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집 정원을 거닐다가 한 무리의 개미떼가 열심히 집을 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아침에 일기예보를 통해 오후에 큰 비가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는 저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큰 비가 쏟아질 것이고 그러면 그동안 개미들이 수고하여 지은 집이 다 떠내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이 폭우는 개미들의 생명까지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곧 닥칠 이 위험을 개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개미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만약에 개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만일 개미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자기가 개미처럼 낮아져 개미의 언어로 그들에게 곧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해 말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어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에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해 주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목적에 대해서 찰스 크레프트(Charles Kraft)는 그의 책, ‘기독교와 문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과의 친족관계(relationship)를 원하고, 인간에게 완전한 친족관계가 열쇠라는 응답을 끌어내려고 하며 또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수신자들을 그들의 고유한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발신자의 상황 속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반대로 수신자와 동일시하는(identificational) 성육신적(incarnational) 방법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바와 같이 발신자를 통해 수신자의 준거 기준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제임스 엥겔(James F. Engel)은 그의 책, ‘당신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아셨다. 그러기에 죄인인 인간을 해방시키는데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아셨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그러므로 스스로는 구원의 가능성이 제로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둘째, 예수님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며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구원의 시작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셋째, 예수님은 말씀을 적합하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물과 자연 만물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는 예화들을 사용하심으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도우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4. 타 문화에서의 성육신

 

   선교사에게 있어서 성육화의 목적은 어디에서 사역하든지 낮아진 모습으로 선교지 사람들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그들과 선교사의 삶을 나누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 문화 속에서 성육화를 이루기 위해서 선교사는 편안하고 안락한 자기 문화에서 불편한 선교지 문화로 적응해가야 한다. 빛과소금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친구 김낙춘 목사의 목회 철학은, “자발적인 불편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선교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는 말씀으로 도전받고 선교지 사람들의 문화 속으로 성육화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남미 파라과이에서 선교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파라과이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한국 사람을 닮았다”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파라과이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날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5.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

 

   문상철 박사는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말한다. 그것은 1) 하나됨 2) 낮아짐 3) 상황화 4) 소프트파워 5)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선교이다.

 

1) 하나됨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 가운데 실현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3~4)”고 말한다.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일 실체성은 ‘그 실체가 3개로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인 채로 3위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실체가 나누어지지 않고 3개로 존재하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성경에서 하나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은 죄인된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인의 삶으로 명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됨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리의 영’이므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도와 성도 사이를 하나 되지 못하도록 이간시키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선교를 위해서도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연합과 교제 가운데서 있어야만 복음으로 즐겁게 세상을 섬길 의지가 생긴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의 방법을 통한 선교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쁘신 의지가 있었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연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회의 보편성과 선교단체의 전문성이 함께 연합하고 협력할 때 시너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분파화되고 경쟁적인 구도 속에서의 선교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 또한 오랫동안 분열되고 개교회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지역교회들의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수준 높은 선교를 하기 어려워진다. 한국교회는 이제 일치단결하여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끼리 동역자들끼리 그리고 현지인들과 하나가 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속담에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집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이 하나되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면 선교지에서 나타날 현상은 불 보듯 뻔하다.

 

2) 낮아짐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낮아짐과 비움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심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모본을 보이셨다.

 

   선교사의 삶은 모름지기 본국에서의 모든 문화적인 익숙함과 특권들을 버리고 타 문화권에서 불편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에는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삼고 살던 삶의 패턴을 선교지의 문화를 기준으로 삼는 변화된 자세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우월감을 가지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활동들을 경계하고, 순수하게 그야말로 성육신의 자세로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외형과 규모를 자랑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선교지는 대부분 우리의 상황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이 많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들을 쌀 신자(Rice christian)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국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수하게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교사는 고국을 떠날 때, 마치 물품 보관소에 자신의 물건을 모두 맡기고 떠나는 사람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한국 사람이 아니라 선교지의 사람이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선교지에 도착하면 거기에서는 선교지의 상황에 맞추어 선교지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안식년으로 귀국하면 물품보관소에 보관했던 그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서 고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선교지로 출국할 때는 다시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낮아짐의 원리를 삶의 현장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다.

 

3) 상황화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원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문화 가운데서 사셨지만, 결코 신성을 잃지 않으셨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세상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으셨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구원의 역사가 가능케 되었다.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라고 말함으로 복음에 대한 분명한 선포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아 유대교와 성경에 정통한 자일뿐 아니라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철학에도 능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 보호받으며 선교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

 

   복음은 보편적인 것이며, 지구상의 모든 문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계시하시고, 또 타 문화권 전도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은 각양각색이다. 전달과정에서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황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한 다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정의하고 각색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문화권 사역자가 수행해야 할 상황화의 과제이다. 물론 상황화에 있어서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모든 문화는 부패하였기 때문에 문화를 복음의 메시지 속에 가지고 들어오게 될 때 참과 거짓이 섞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싸워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타문화권 사역자는 선교지의 문화를 알기 전에 반드시 성경과 성경의 본질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유형의 타문화권 선교이든지 간에 성경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일차적인 진리와 이차적인 진리 간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주는 것은 1차적인 진리요, 주는 방법에 대하여는 2차적인 진리이다. 2차적인 진리로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21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문화적인 동화를 실현하면서도 영적인 정체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비판적인 상황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이면서도 선교지 문화권의 사람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적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윤리의 기준에서 잘못되고 비성경적인 문화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문화를 선도할 책임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형이 한국 선교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가 진리의 선포와 함께 소프트파워 혁명의 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함을 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오용하지 않는다. 군사력은 물론, 정치력이나 경제적인 영향력, 심지어 미디어의 힘마저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어떤 영향력 있는 현지인들과 인맥 관계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영향력을 행세하려 든다면 그것은 성육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우리는 진리의 힘을 믿는다.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혁할 것을 믿는다. 진리의 힘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드파워는 겉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정신으로 임하는 선교는 진리의 역사와 함께 진정한 변화의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한 도시를 변화시키고, 한 종족을 변화시키는 힘은 바로 진리가 선포될 때 생겨난다. 이 진리가 무엇인가? 소프트 파워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초가 되는 성육신 선교의 원리이다.

 

5) 성령의 임재의 원리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33년의 생을 사셨고, 겨우 3년간 사역을 하셨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고 세상을 변화시키신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가능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권능으로 옷 입으심으로 능력있게 사역을 잘 감당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예수님께서 맡기신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선교는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동행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할 수 없다. 선교 역사상 크게 쓰임 받은 선교사들은 한결같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 원리는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 그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변함없는 선교의 근본 원리이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한국의 국력도 아니고, 한국교회의 경제력도 아니고, 오직 성령의 임재와 교통하심이다.

 

 

 

나가는 말

 

   과거의 선교는 마치 선교전략이 모든 선교의 열매를 좌우하는 양 전략을 세우는 일에 집중을 했다. 또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돈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선교 재정을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혜를 모았다. 물론 이런 것들도 당면한 과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선교를 선교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교계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떤 선교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뜨거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코로나19로 인해 이 주제는 쑥 들어가고 아예 이제는 기존의 선교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선교 환경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본질적인 원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더 가속화하고 본질적인 선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니 코로나19는 어쩌면 변화하는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는 모든 선교의 기초이다. 우리가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열매를 맺는 선교를 할 수 있다. 또한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에 따라 순수성을 회복할 때 한국선교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그 사명을 다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KPM도 이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성육신적인 선교원리를 사역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이 원리의 회복이 더욱 더 절실한 과제이다.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는 초대 교장인 전영창 교장 선생의 교육철학에 따라 신앙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이 학교에는 “직업십계명”이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물론 이것은 전 교장이 만든 그의 교육철학의 일부인데 이 직업 십계명이 성육신적 선교원리를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되어 인용함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직업 십계명

1. 월급이 많은 곳보다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3. 승진 조건이 없는 곳으로 가라.

4.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이는 곳으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으로 그러나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7.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변방으로 가라.

9. 주위 사람과 배우자가 반대하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라.

10.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단두대가 있고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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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를 번역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2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시체(詩體)로 기록된 이 요한복음의 서두는 독자로 하여금 영원에의 깊은 상념(想念)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그 가운데 있는 ‘로고스’(Logos)라는 어구 때문이다. 그러면 이 로고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 낱말의 번역에서부터 문제를 만난다. 제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로고스’라는 어휘를 가장 많이(1,300회 이상) 사용한 사람으로서, 로고스 개념 파악에 중요한 단서를 준다.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한 마디로 유대의 종교와 헬라의 철학을 조화 절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최고신(the supreme God)의 형상이라고 말한다(G.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IV 80면 이하). 이러한 필로의 로고스 이론은 인격(person) 이 아니고, 성육신이 불가능하며, 완전한 신이 아니며, 선재자(先在者)가 아니며, 메시야가 아닌 점 등에서 요한의 로고스 이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로고스라는 어휘, 즉 소위 ‘로고스 찬양’(Logos hymn)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1-18 본문의 주제어는 신약에 330여회 사용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말’/‘말씀’(word/Word)을 뜻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로고스는 그 문자적인 의미(‘말’이란 뜻)와 요한복음 서론에서의 실질적인 개념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우선 이 어휘의 번역에서부터 어려움을 경험한다. 일찍이 괴테(Goethe, 독일의 시인, 극작가인 동시에 철학자)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Faust)에서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처음에 ‘das Wort’(말씀, 영어의 the Word)로 했다가 불만이어서, ‘der Sinn’(사상, 영어의 thought)으로 했다가 또 불만이어서 ‘die Kraft’(힘, 영어의 power)로 했다가 또 불만, 마지막으로 ‘die Tat’(행동, 영어의 act 또는 deed)로까지 시도하고는 단념하였다. 영어성경에서는 대개가 ‘the Word’로 번역하고 있으나, Moffat 역은 영어의 ‘the Word’ 나 다른 어떤 어휘로도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Logos’ 라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음, 중국어역 성경을 보면 최근의 ‘今日聖經’(1979년)이 ‘基督’이라고 의역한 것 외에는 모두가 ‘道’로 번역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그 어느 나라 언어의 번역보다도 합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이다.

첫째 중국어의 ‘道’는 도교(道敎)의 우주론 또는 우주생성론(cosmology/cosmogony)에서 우주의 근원을 가리킨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우주와 만물의 생성에 대해서 “道 生 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抱陽 冲氣爲和”(42장)라고 하여,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만물의 근원적실재로 표현한 ‘하나’(das Eine)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道’는 모든 현상(現象)의 근원적 본체로서, 道에서 一氣(太極)가 나오고, 一氣에서 음양(陰陽) 二氣가 나오고, 二氣와 冲氣(조화의 힘)가 합하여 三氣가 되고, 三氣에서 만물이 생하며, 그 만물은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의 원리, 즉 금은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금을 생기게 하여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道’의 성질로는 “視而不見 名曰夷, 聽而不聞 名曰希, 搏而不得 名曰微 ... ” 즉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색깔이 없는 것이요(夷는 無色),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소리가 없는 것이요(希는 無聲), 쥐어도 쥐이지 않으니 형체가 없는 것이라(微는 無形)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둘째 중국어에서의 道(도) 는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언’(言, 말씀)이란 뜻이다. 道를 이러한 뜻으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우리말 성경 구역(1911년 발행)이 ‘말’(말씀)이라 번역하고 괄호 안에 “혹은 도라”고 한 것은 중국어역 성경을 그대로 따르는 데 있어서 도교의 사상을 고려에 넣은 것이라 해석된다.

그 외에 노자의 體道편에서 “道可道非常道”(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道는 영구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나, 한비자(韓非子)의 ‘解老’편에서 “道者萬物之所然也”(도는 만물의 본연)라고 한 것 등은 道의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성격을 말하는 점에서 로고스와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여훈’(女訓) 가운데 “口

不道淫聲”(입으로 음란한 것을 말하지 말라) 한 것과,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의 시 가운데 “主人莫道無顔色”(주인이여, 낯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등에서 ‘道’ 자가 ‘언’(言, 말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일어역에서는 모두가 ‘고도바’(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고도바’라는 말은 한자로는 ‘言葉’로 기록하는데 요한복음 번역에서 Logos 는 ‘言葉’로 기록하지 않고 ‘言’이나 ‘御言葉’(共同譯)로만 기록하는 것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verbum(말) 또는 Ratio(도리, 이성, reason)로 되어 있고, 불어로는 Verbe(1988년) 또는 Parole(1910년) 로 번역하고 있다.

















신앙(信仰)의 4요소


"자연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자연인으로 생활하게 된 동기가 사회적응 부적격자가 된 상태에서 죽어도 산에서 혼자 조용히 죽기로 다짐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텐트 하나 갖고 들어가서 겨우 하루 하루 지내다가 점점 몸이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으면 전혀 새로운 삶의 재미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인(靈性人)"으로 회복해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영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4요소 / 청(聽), 신(信), 지(知), 행(行)

첫째, 듣는 것(로마서 10:17)  Hear.   ἀκοή.    청(聽)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아라; 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예화) 절에 열심히 다니던 어느 할머니가 어느 날 절에서 불법 강론을 듣던 중 마음에 감동을 받아 "아멘"이라고 화답하였다고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 불자가 그렇게 열심히 절에 다녔는데 왜 '아멘'이라고 화답할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할머니 불자의 생신을 맞이하여 출가했던 딸들이 친정에 모였을 때 할머니가 딸들에게 최근 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그러자 딸들이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하며 딸들이 어머니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도록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들이 친정에 오면 '아멘'하고 말을 하였는데 '아멘'이 귀에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예화) 스님 김진규씨가 진지하게 수도를 하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임마누엘" 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사찰과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임마누엘'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노력하던 중 마땅한 대답을 듣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작은 암자에 계시다는 노스님을 찾아가던 중에 작은 기도원을 지나가려는데 '임마누엘 기도원' 이라는 간판을 보고 기도원의 원장에게 도대체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라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둘째, 믿는 것(사도행전 16:31)  Believe.  πιστεύω.   신(信)

사도행전 16:31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and thy house.

(예화) 신대원 재학 중 하루는 어느 길을 가는데 길 건너편에서 무당이 굿을 하고 있었지요.
맞은 편에 서서 그 굿을 바라보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무당이 대야에 물을 떠서 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쏟기 시작합니다.
속으로 무당이 굿이 안 되는구나!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셋째, 아는 것(요한복음 17:3)  Know.   γινώσκω.   지(知)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And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예화) 아는 것이 힘이다!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입니다.
베이컨은 사람을 세 종류의 곤충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1. 거미
2. 개미
3. 꿀벌






넷째, 행하는 것(야고보서 2:26)  Deed.  ἀκροατήριον.  행(行)

야고보서 2:26
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For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lso.

(예화) 믿음과 행함의 문제
"믿음으로 구원, 행함으로 축복"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ἀκροα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201

1. 청취실.  2. 심문소. 3. 청중석
발음 [ akrŏateri- ŏn ]
어원  / 202에서 유래

1. 청취실, 심문소, 청중 석, 관람석, 강당, 행 25:23.
관련 성경 / 접견 장소(행 25:23).




    
















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성경난제해설(요한복음 20:17,  20:27-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행동 중에 하나다.
부활절 아침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셔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이 본문이 어려운 것은 그 후에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20:27).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면서 한 주일 후에 도마에게는 그의 상처를 만져 보라고 요청까지 하셨는가?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는데 왜 똑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는 만지라고 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마리아는 예수님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2. 마리아는 시체를 만짐으로 의식적으로 더럽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3.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서 예수님을 붙잡았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제자들과 같이 최후만찬에 참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의 옷을 무덤에 두시고 벗으신 상태였으므로 예수님을 만져서는 안 되었다.
5.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나타내지 못했다.
6. 원문 성경의 요한복음 20:17절이 고쳐졌거나 변경되었다.   
    만지지 말라(me haptou)가 아니라 두려워말라(meptoou)로 읽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저자가 아니면 그 앞에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씀을 요한복음 20:17절에서 오역하였다.
7.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곧 올라가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지 말아야 한다.1)
      그 밖에 나를 예배하지 말라 혹은 믿음의 손으로만 나를 만질 수 있다는 등등으로 보기도 한다.2)

그러면 본문의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먼저 이 본문의 원문 번역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영역 성경으로는 흠정역(KJV)만이 우리말 성경처럼 "나를 만지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밖에 모든 영역 성경은 “나를 붙들지 말라, 붙잡지 말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헬라어 원문의 해석에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메 합토우(μέ ἃπτου)는 붙잡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이미 시작된 행동을 금하는 말이다.3)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를 붙잡지 말라,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내가 아직 승천할 싯점에 와 있지 않으니 나를 볼 기회가 더 있을 것이다.4)  
렌스키(Lenski)도 같은 의미로 해석하여 아직 승천 전이니 다시 나를 잃을 때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마리아가 이전(부활)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었던 교제를 원했다고 지적한다.
즉 마리아는 부활 전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런 잘못된 생각을 고치시기 위해 나를 붙잡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비슷한 해석이긴 하지만 핸드릭슨(Hendriksen)은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야 네가 나를 이렇게 꼭 붙잡으므로 나를 너와 같이 항상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이제 너는 내가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나와 온전한 교제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본문을 만지지 말라 또 붙잡고 늘어지지도 말라는 말씀이기보다 보고 만지는 육신적인 교제에 집착하지 말고 참되고 복된 교제, 승천하신 후에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더 사모하란 뜻으로 보았다.5)  
이 해석은 결국 부활의 완성인 승천과 성령의 강림 때까지는 안전한 영적 교제가 제약적일 것임을 의미한다.6)

위의 두 해석이 다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 문맥에 연관시켜 해석해야 하며 같은 형편에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과도 연관시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20:28에 도마에게 내 상처에 손을 넣어 만져 보고 하셨는데 그때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다.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으니 나를 붙잡지 말라는 말씀은 마리아에게 부활 전에 나를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네 선생(랍오니)이 아니라, 네 생명의 구주야, 나는 부활하였고 승천해야 한다.
그러니 그전에 선생으로, 그 교제로 그 생각과 이해로 나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붙잡지 말라는 대신에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뜻은 네가 세상에서 나를 알았듯이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나는 아직 하늘의 엄위를 되찾지 않았어, 두려워 말아라, 옛날처럼 내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라 한다.7)  
그러나 이 해석은 앞에 것만큼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다.

   주
   1. Robert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Gospels, Baker Book House, pp.110-111
   2.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Gopspel(Augusburg Pub. Co., 1961), p.1360
   3. Ibid.,
   4. Leon Morris, John, p.840
   5. W. Hendrikse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Grand Rapids: Eerdmans, 1971), p.455
   6. J.H. Bernard, A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
      (T. & T. Clark, 1953), p.670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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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지 말라는 말씀의 뜻

<문>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여기서 ‘붙들지’는 개역 성경에는 ‘만지지’로 번역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답>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마리아가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에 만지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이 우리를 오해하게 한 점이 있다.
단순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면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체를 마리아의 부정한 손으로 터치하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붙들지 말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 면에서 더 좋은 번역이라 생각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였다.
그 의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전과 같이 늘 머물러 계시도록 붙들어 두겠다는 뜻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님은 마리아와(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실 수 있었지만, 부활 후에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은 앞으로도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와 함께하시겠지만, 그 방법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육체로 함께 하셨지만 이제 후로는, 제자들도 부활할 때까지는, 영으로만 함께 하시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의 뜻은 이제부터 함께 하시는 방법, 교제의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교제는 이전의 교제와는 달라졌다.
그것을 마리아가 모르고 이전처럼 붙들어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를 거절하시고, 이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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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가 루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대로 만약 예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부활은 하나의 신앙고백적 사건으로 믿어지고 고백될 따름이지, 사진을 보여주는 등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래 지금도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예수 부활사건은 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비신화화를 얘기하는 불트만같은 신학자는 이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믿음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활은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벗어나는 사건이기에 부활의 실재에 관련한 의심과 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사건의 현대적 조명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4개의 복음서는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씩 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는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엠마오를 향해 내려갔던 두 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손을 대어 만져보라고 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가에 나타나셔서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기도 하시어 배고픔을 느끼는 육신의 몸을 증명하여 주셨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방에 문을 열지 않고서도 들어오시는 신비의 영체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부활 후 잠시 갈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제자의 사명을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지만,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 이후 40일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이 서로 어긋난다는 이유로 부활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루쉰이 말한 희망의 정의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부모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듯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이는 부활의 사실성을 넘어서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사는 것이니까, 우리 믿는 우리들이 너도나도 이 땅에서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와 생명 그리고 정의실현이라는 하늘 진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암에 걸렸거나 직장에서 해고되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부활은 과연 있는 것이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 영성의 뿌리를 찾아

조선의 초기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의 모습만이 아니라, 소수이지만 내면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 영성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조선의 호세야 혹은 성 프란체스코에 비교되는 이세종 선생입니다.

이세종1880년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살았습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는 오기와 뚝심을 갖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구두쇠처럼 재산을 모아 드디어 머슴살이 10년 만에 마을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뻐기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10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아도 효험이 없자 무당굿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하자 2층짜리 산당을 짓고 그 앞에 몸을 씻기 위한 연못까지 팠습니다.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심히 앓아눕게 되어 사경을 헤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동네 미친 여자로부터 ‘예수를 믿어야 살지’ 하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성서를 하나 구해 놓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가며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이런 얘기가 전해옵니다.

영성 : 청빈, 희생, 사랑의 길

이세종의 얼굴은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가서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고함을 지릅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너무 흥분하여 춤을 추는 동안에 자신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하루 12번의 제사를 드린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청빈과 자기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바로 실천에 옮겼는데, 그의 실천은 참으로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장 부자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성서의 얘기를 읽자 이를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에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판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하며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외치신 희년 선언을 따라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줍니다.
심지어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줍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합니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밤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에게 성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성서공부는 영해(靈解)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성교회 와는 달리 삶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 진리다.
진리에 대해 우리 마음에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 많이 낳은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것조차 마다하면서 고생을 자처하고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자기들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자 멀리 광주에서 전도사, 선생, 목사들이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목사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프란체스코

그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거지 옷을 입고 다녔고, 한번은 광주의 교회 공식모임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어 새 옷을 입고 가다가 길에서 걸인을 만나 그와 옷을 바꿔 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아버지가 반대하자 아버지와의 부자 인연을 끊고 작은 형제회를 통해 청빈의 삶을 살았던 성인 12세기의 이태리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소유나 청빈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합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청빈과 무소유는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사람은 풍요 속에서 삶의 풍성함과 생의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여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그 삶을 보면 사람들은 반대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하는 불안에 휩싸이고 그래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악착스러워지고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경쟁심에 불타오릅니다.
결국은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도가 떨어지고 자살률은 올라가고 사회 범죄는 더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비우는데 있습니다.
청빈, 맑은 가난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갖게 합니다.
악기는 속이 비어 있을 때 맑은 소리가 울려납니다.
우리 인간도 그 몸과 영혼이 비어 있을 때에 하늘의 맑은 평화의 소리가 울려납니다.

이세종님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는데, 그것은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고,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자연 사랑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산천 초목과 금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고,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을 누군가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에는 마치 사람의 피와 같다하여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발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빈대도 죽이지 않고 파리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내어 몰긴 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네팔에 갔을 때, 음식점 주인들이 창문에 붙어 있는 파리를 죽이지 않고 문을 열고는 살살 달래 밖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안에 파리를 파리채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내리치는 사람과 살살 달래 집밖으로 내보내는 사람 이 둘 중 누가 참 사람에 가까운가요?

인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다 고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살아가도록 자리를 제공하는 자연 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산과 강은 무생물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낳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동안 과학과 기술문명은 자연을 인간 욕망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지구 변화는 그동안 우리가 겪어왔던 경험의 수치를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급작스런 변화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의 호세야

그런데 예수를 믿어 참 기쁨을 누렸던 이세종에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으니, 그건 아내와의 관계였습니다.
이세종은 30세 때에 14살짜리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이로 인해 예수를 만나게 되고 변화된 삶의 얘기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화는 단순히 먹고 사는 일뿐만이 아니라, 부부생활까지 변화가 왔는데, 그는 아내와 한 방에 거처하면서 성생활을 하지 않고 남매처럼 지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이혼이 아닌 해혼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참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떠나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갑니다.

물론 간디류영모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들이 이를 받아들여 오누이처럼 살아갔지만, 이세종의 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세종은 깨끗한 신앙인이고 그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에 눈을 뜬 20대 중반의 부인에게 금욕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의 말에 부부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내로 하여금 남의 부인이 되도록 한 것은 남편 이세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세종 님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성생활이라는 금욕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세종 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주지 말라.
내 욕심과는 정반대되게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서로 채워주지 말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일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므로 생명과 육신의 괴로움이 없고, 영혼은 구원할 수 있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고운 옷을 모르는 아이에게 고운 옷을 입혀 기르는 것은 그 아이의 영혼을 버리게 하는 일이다.”(엄두섭, 202쪽)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했던 이세종의 아내는 집을 나가 딴 남자에게 갑니다.
처음 아내가 몰래 집을 나가자 사람을 시켜 아내가 쓰던 세간을 옮겨다 주고, 아내 집에 심방을 가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그래 어떤 때는 아내로부터 물바가지 세례를 받기도 하고 구정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점에서 이세종님은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간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던 호세아 선지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세월이 흐르자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 그 또한 50이 넘어 한글을 깨우치고 성서를 읽어 큰 은혜를 얻었습니다.
말년에 이세종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습니다.
이세종이 죽은 후에는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년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감사했습니다.
77세 임종할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남편에게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세종의 예수 사랑의 힘은 결국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켜 또 하나의 성인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신앙 영성의 완성

이세종 님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 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심으로 그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런고로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도 이와 같다.”(엄두섭, 203쪽)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삼 개월을 곡기를 끊어 자기 몸을 비우고, 마지막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어 좁은 방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옆에서 울자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조금 후에 죽었습니다.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남았습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계속 이어 개신교 영성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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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단독으로 목격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함께 부활을 목격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 봤으니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교회사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무시된 인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거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다, 그리고 이전에 간음하다 잡혀 온 죄지은 여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읽어만 봐도 이 셋 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한 첫 구절은 누가복음 8장 초반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옆에서 항상 동행하며 섬긴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한 명입니다.

누가복음 8:2-3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성경 기록으로 보아 대략 대여섯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지근거리에서 도운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가정도 놔두고 여자 혼자 단독으로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신분이 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교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만큼 예수님의 제자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뒤에서 생계를 보조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비단 가사 일만 했겠습니까?
이들도 제자들만큼 예수님 옆에서 가까이 지내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쩌면 제자들 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며 섬긴 여인 중 가장 유력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에서 보아 대단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막달라라는 말의 뜻은 아람어독수리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큰 성벽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막달라는 위대하다는 의미가 있어서, the great maria, 위대한 마리아라고 불리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외경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초대 교회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다른 외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외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특히 베드로와 갈등 관계로 자주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왜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사적으로 이야기하셨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은 생명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막달라 마리아를 우리로부터 떠나보내도록 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부터,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세워질 당시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인류 역사에서 여성 폄하로 인해 저평가되고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도화되자, 교회는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지웠습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위주로 쓰인 기독교 역사 잊힌 신앙의 위인입니다.

빈 무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유월절 안식일이 끝난 후 새벽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아리마대 사람이 소유한 동굴 무덤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을 막고 있었던 큰 바위가 움직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다급한 마음으로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그 길로 바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명의 제자와 베드로가 달려갔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요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저자 자신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요한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굽혀서 동굴 안을 살펴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도착했는데, 베드로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을 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이 잘 정리되어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걸 보면 제자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돌아가신 선생님의 무덤이 훼손되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설령 슬픔이 올라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예법이라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이 자신들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제자들이 내려가고 난 뒤 그제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제자들도 영문을 모른 채 아무런 대책 없이 내려간 것을 보고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울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궁금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제자들과 달리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엇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 중 하나가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다시 뒤로 돌아섰는데, 그 사이에 누가 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동산지기가 찾아온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 역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옮긴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리아야 하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본능적으로 “라브니!”, 즉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에 몸에 다 손을 데려고 팔을 내밀었던 것 같은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 장면에서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달리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천사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결국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태도 중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말한다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머물러 있을 때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시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지 그것이 지닌 장점과 매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었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분이 계시죠.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인 즐거움만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이 단순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면, 즐거움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줍니다.
사람은 실증을 잘 내기 때문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질리게 되고,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도 그 기간이 지속되면 힘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몰입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어떤 활동에 빠져든 동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몰입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향하는 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고자 일관적인 행위를 지속할 때 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몰입의 태도를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지요.
예수님의 무덤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자마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빈부덤의 장소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머물러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했는데, 반대로 이런 글귀가 있지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을 토대로 유홍준 교수가 구절을 좀 고쳐서, 문화유산을 보는 자세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고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 보았기에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보았고, 무엇보다 죽음과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사랑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라보니’로 대답한 장면은 전형적인 사랑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와도 같습니다.
생이별 뒤에 극적으로 만나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지요.
그런데 음성을 듣자 예수님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인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있었던 사건에서 요한 자신이 등장한 부분에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 또는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느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그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게 손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원어로 하면, ‘메 무 하프투(Μή μου ἅπτου)’라는 말이에요.
하프투(ἅπτου)’는 만지다, 접촉하다는 뜻인데, 매달리다, 집착하다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말아라, 손대지 말라고 번역도 되지만, 나에게 집착하지 말아라 라는 번역해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마리아야 나를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집착해서는 결코 네가 간절히 만지고 싶은 나의 몸은 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복음서의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예수님이 잡히시기 며칠 전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이 여인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여자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나 향유 부은 여인 모두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근접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하고 변화하는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 향유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이 기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고자 한 행동이 자신의 전부라 여겨진 기름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기름은 딱딱하게 굳어진 고체와 다르고, 그리고 점액성이 전혀 없는 물과도 구분됩니다.
만약 물을 쏟아부었다면 그냥 다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고체는 딱딱해서 무한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점액성이 있어서 유연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 표면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부은 행동은 무한 중 무한, 도저히 우리의 이성과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포착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고자 한 것은 향유 기름이 아니라 고체로서 붙들고자 한 것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딱딱히 굳어진 고체의 형태로 예수님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물론 일시적으로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으나,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변화하시는 역동을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손으로 붙잡으려고 한 것은 육신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있어도, 결코 부활하신 영과 육의 통합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도 깊이 고민을 한 듯합니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믿기가 힘든 것과 달리,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신 그 몸이 육체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있지요.
바로 도마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 하자 도마는 내 눈으로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있었던 문이 잠겨 있는 방 안으로 예수님이 갑자기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직접 예수님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는 증언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도마에게 오실 때를 보면, 집에 문이 꽁꽁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벽을 통과한 건지 하늘에서 내려온 건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육체의 몸이 있다면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가냐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붙잡기 위해서는 몸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만져서 도마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도마는 사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만진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만지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이 진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내게 손대지 말아라, 집착하지 말아라는 말씀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내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앞서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먼저 베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화해하고 사랑할 때에야, 그러면 너희가 부활한 나의 몸을 육체로서 만질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을 마리아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앞서 진리를 포착하는 방법이 오래 동안 머무르며 바라보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바라보게 되면 결국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게 되어서 그 대상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자 손으로 만져 버리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참된 실재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에는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소유가 아니라 참되게 사랑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가 잘 알듯이, 마지막 가장 강조했던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에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본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부활의 관계는 신약에서 불쑥 등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나타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부활을 생각했을 때 떠올렸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더운 낮 정오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대접한 사건입니다.
그 행인 중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신 다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시는데, 아브라함의 오랜 염원인 사라의 태에서 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이삭이야 말로, 아브라함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나와 이해관계가 하나 없는 내게 유익을 줄 수 없는 이웃을 환대할 때, 경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토라의 핵심이지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지요?
토라 전체는 그것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만큼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나의 이웃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고 그리고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으뜸이 사랑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사랑은 뭔가를 바라거나 기대해서가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처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활은 그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사건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삶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이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납득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알 수 없이 행동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보면서 또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시간을 드려서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바라보고 계세요. 그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 고통의 이유들이 보이고요. 또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의외의 모습,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게 빨리 보이지 않아요. 감정 기분에 휩싸여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다 가라앉고 사라진 다음, 모든 편견이 없어지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지요. 나에게 손을 대지 말고, 형제들에게로 가라. 집착하지 말고, 사랑해라. 바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행할 때, 육체로나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온전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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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 /

부활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는 자신을 만져 보라고 권하셨으면서 그보다 얼마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막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오래된 성서 번역판을 보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개역 한글판」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

“만지다”로 번역되는 원래의 그리스어 동사는 또한 “매달리다, 붙들다, 붙잡다, 움켜 잡다, 다루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가 단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무덤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그분의 발을 잡”는 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신세계역 성경」, 「신 예루살렘 성서」, 「신 영어 성서」 등 현대어로 된 많은 번역판들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더는 나에게 매달리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함으로,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그 말씀을 각각 “나를 붙들지 말라”와 ‘나를 붙잡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친밀한 동료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누가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온 줄 알고 근심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주와 함께 있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에 예수를 꼭 붙잡고 가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직 떠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키기 위해 마리아에게 그만 매달리고 그 대신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와 도마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그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면서 예수의 못 박힌 상처를 보고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8일 후에 예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상처를 만져 보라고 권하셨습니다(요 20:24-27)

따라서,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셨을 때는 그분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잘못된 열망에 대응하신 것인 반면에, 도마의 경우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사람을 도우신 것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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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ma - 영구(everlasting)









보혈(寶血)의 능력(能力)





원수를 위해 아들을 죽인 하나님(요한복음 3:16-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3장 시작 부터 있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끝나고 16절 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는 내용이 시작 됩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 봤을만한, 그만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모두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 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기독교의 교의 (Dogma)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찾아오셨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의

보내심의 교리(the sending formula)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신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교리인가? 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온 종교가 있나요?
어떤 종교가 신이 사람을 찾아 왔다고 얘기하나요?
고등 종교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이 땅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인간이 찾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내심의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사상이 들어 있고, 또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아서 그 분의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Sending Formula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써의 자격이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선재하지도 않았고, 권세도 없는자가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17절에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렌( ἀπέστειλεν)은 내쫓다, 유기 시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유기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ἀφοριζω 스트롱번호 873

1. 분리하다.  2. 내쫓다. 3. 따로 두다
발음 [ aphŏrizō ]
관련 성경 / 갈라 내다(마13:49), 구분하다(마25:32), 떠나 물러가다(갈2:12), 멀리하다(눅6:22), 택정하다(롬1:1, 갈1:15), 따로 세우다(행13: 2, 19:9), 따로 있다(고후6:17).


죄를 지어 원수된 인간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교리
내어줌의 교리(Giving up Formula)


죄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 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 유기 시키셨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감동이 없지만, 이는 사실 문제인 것 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너무 무뎌져서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 보다 더욱 감동을 주는 구절은 성경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고 내어 주셨다는 이 말씀에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않되는데도, 엉뚱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런 진리를 듣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지칭하는데, 독생자라는 뜻의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 외아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독종자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귀한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2:2>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는 유일 무이한 독생자 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에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해 이 땅으로 유기 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로마서 5:8>

우리는 이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 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먼저 흘러 나온 것 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얘기하는 3장 16절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 있기에 사랑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의 흉내, 용서의 흉내를 낼 수 있듯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이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를 모르더라도 사랑의 모습 또는 단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 입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변합니다. 또 인간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 입니다.

결국 그 죄인들의 사랑은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멕시코 영화 중에 아모레스 페로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치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전직 대학 교수인데 혁명에 참여 했다가 20년간 복역을 하고 나와서 살인 청부업을 하며 삽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위해서 돈을 열심히 모읍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있는 개들을 여러 마리 데려다가 쓰레기 같은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다 교통 사고 현장에서 투견에 쓰던 총상을 입은 개를 하나 발견 합니다. 코피라는 투견에서 맹위를 떨치던 개였는데, 치료를 해주고 다른 개들과 같이 키웁니다.

그런데 치보가 자신에게 청탁이 들어온 사람을 살해하고 들어 왔더니 코피라는 투견개가 자식처럼 키우던 다른 개들을 물어 죽인 것 입니다.  그래서 치보는 총을 들어 코피를 겨누는데, 문뜩 자기 자신과 코피를 오버랩 해서 비교 합니다. 코피는 주인을 위해서 다른 개들을 목숨걸고 물어 죽였던 투견개 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살인 청부 업자 였죠.

자기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막 죽이며 다녀 놓고는 이 개가 자신이 사랑하는 개들을 죽였다고 개를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개도 아까운 것이고 남의 것은 사람이어도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기 딸을 위해서 돈을 모은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말 입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의 사랑과 일관성을 갖는 하나님의 사랑

이 영화를 만든 이나리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이기주의를 또 타락을 얘기하고 싶어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모습이며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랑에 대한 증거 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 속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 변치 않는 속성을 사랑으로 갖고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 졌을 때, 그 사랑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비춰지게 되는 것이지 우리안에서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사랑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입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인가요? 우리가 회개하고 착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부터 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이 꼭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터 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고, 베드로 전서 1장에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예정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요한 계시록 13:8>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 입니다. 즉 어린 양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세워진 것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의 저편에서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 내고 계셨던 것 입니다. 십자가는 역사를 너머 영원에 서 있고, 이 십자가의 효력은 전 역사에 미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섰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님은 창세 전에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 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셋은요?
에녹은요?
이들은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거죠.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룻이나 라합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있다는 것은 구원 계획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았다는 메세지를 성경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것 이었음을 힌트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선민 사상의 정점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유대교와 그 형식 주의를 박살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메세지를 요한은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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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 창조 과학회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동전 10개가 있습니다.
흔든 다음 처음 1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입니다.
다시 집어 놓고 처음에는 1번 동전을 꺼내고 두 번째는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0입니다.
이런 식으로 열 번을 꺼낼 때에 1번 동전부터 10번 동전까지 차례대로 꺼낼 확률은 10에 10승 즉 1/100억입 니다.
100억번을 시도하면 한번 나타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확률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동전 열 개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안계시면 창조도 운행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1. 지구의 자전 속도 한 시간당 1,600km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10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납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2.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지축은 23도 기우러짐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머 예화 /  장학사가 어느 학교를 방문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이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지?"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제가 안그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학사가 담임 선생님께 "내가 이 학생에게 지구가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이 자기가 안그랬다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엔 담임 선생님이 말합니다.
"그 학생은 착한 학생입니다. 게가 안그랬다고 하면 안그랬을  겝니다."
기가찬 장학사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 학교 어떻게 된 겁니까? 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왈 "국산 다 그렇지요 뭐!"

지구가 23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4.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5.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겠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브리서 3:4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후면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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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옷"이다.
몹쓸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마태복음 5:44~4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선한 사람에게만 비춰주시지 않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에게만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시는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야 철이 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달아지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빵 하나를 먹어도, 그 빵 하나를 먹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밀농사 짓는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클까요?
또 밀가루 공장에서는 품질이 좋은 밀가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할까요?
또 빵집에서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먹는 빵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빵 한 조각을 먹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가 담겨져 있는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면 그만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도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학생 시절에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기쁨이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으며,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우 하게 사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빵을 먹은 적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그녀는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왔으며, 그녀는 죽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녀는 그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으로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구호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고, 그 구호 단체를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생명을 부지한 그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 소녀가 바로 오드리 햅번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라고 말하던 그녀는 죽은 후에도 ‘홍보 대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구호를 돕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받은 사랑을 감사할 줄 알고, 남에게 나눠 주는 사람들이 모일 때,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랑이란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물이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아름다운 들과 산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선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독생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 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갇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길이 너무 심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아버지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국가나 정부나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재능도 아닙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척 스윈돌 목사는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과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경제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를 사함 받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실 구세주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최고의 선물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게 되었고,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고, 죽어야 할 자, 지옥에서 멸망을 당할 자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일본에 카가와 토요히코라는 유명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시장(市長)의 소실 태생입니다.
그는 시장 본처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는데, 그 형제들이 하나같이 그를 구박했습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 가지고……” 하며 서자인 그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했지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무룩해 있던 그가 어느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카가와 토요히코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토요히코는 당장에 그 대열에 따라 나섰습니다.
전도대원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아무개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아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고, 행복한 자가 되! 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 보니 선하게 산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 그 집사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웠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도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를 많이 지었지만, 저와 여러분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변호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기에 주님이 내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모든 저주로부터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목회의 해답도 사랑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목회를 잘하는 방법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민족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선교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사회도 가정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감으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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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성(獨特性)과 절대적(絶對的) 사랑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낮은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감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지 못한 까닭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된 자화상은 무엇이고 우리가 확고하게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독특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제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개개인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장애가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절대적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금반지가 찌끄러졌다 할지라도 그 금의 가치가 여전한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예뻐야 사랑하고, 아름다워야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로마서 8:32).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최고, 최상의 것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 이하의 것은 아끼지 않고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누가 죄인을 위해 사랑스러운 자식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탕자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내가 창조주였다면 벌써 이 세상을 박살내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떠서 태평양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사이 합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했는데 얻은 사랑은 좋다. 그러나 구하지 않았는데 얻은 사랑은 더욱 좋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구해서 얻은 사랑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마어마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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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1-14)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

들깨를 기름틀에 넣고 짜면 들기름이 나오고, 포도를 짜면 포도즙이 나오며, 양파를 넣고 짜면 양파즙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피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의 중심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의 핵심은 피입니다.
제물을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피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속죄 제사를 드리는 자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물을 대신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드려야 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피로 속죄에 필요한 모든 피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음으로 믿고 고백하면 더 이상 실제적인 피 흘림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배로운 피 곧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무엇인가?

1. 죄를 속죄하는 능력(히브리서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 보혈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때 저질러 진 죄라도 다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한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산다"는 의미입니다. 저당잡힌 것을 값을 주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값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없는 피를 쏟아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그 피가 나를 죄에서 해방시켰음을 믿으면 구원받고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

롬 8:1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출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 날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 애굽에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pass over 곧 유월(踰越)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유월절이라 했습니다. 그 피가 재앙을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중세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수도원 원장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기도만 하면 사람을 투시해 봅니다. 과거의 죄를 다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들어왔는데 옛날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 마음이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 앞에 오니까 벌벌 떨립니다. 내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겠지 싶어서 그 원장이 와서 “원장님! 원장님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과거의 죄를 다 보여 주셨는데 내 죄를 보여 주십니까?”

그러니까 원장이 “며칠 후에 오시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볼테니까?” 며칠 후에 원장님실에 가니까 원장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죄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니요.

내가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당신 회개했어요?” “회개했어요.”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보혈로 씻고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니 하나님은 당신의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왜 당신 자꾸 있다고 그래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지 마시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를 다시 기억나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시고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2. 하늘 성소에 들어갈 담력(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보혈을 힘입어 죄인이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됩니다. 보혈이 없이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에 하나님조차 기억하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혈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예수님의 피의 대가로 우리를 자녀 삼았습니다.

요한1서 5:18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녀의 권세입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를 손 못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구속이란 구속은 덮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보이니까? 악한 영들이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을 덮어 가릴 수 있게 보혈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불을지라도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다 덮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이 범죄하고 난 후에 나타난 현상이 죄를 지어면 따라오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뭇 잎사귀로 중요한 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숨었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이 숨은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두움이 빛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인간이 낙원 외부의 거친 환경 속에서 수치를 가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옷을 지어주셨다는 뜻도 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을 잡아 짐승의 피를 내어 죄를 덮으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 피로만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속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무거운 죄의 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죄의식, 죄책감 다 털어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히브리서 9:14)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남아있던 죄의 흔적들, 죄가 남긴 것들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순종하여 피를 바른 가정은 하나님이 그 가정의 장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유월절은 ‘pass over’ 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넘어가는 역사가 피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오늘날의 이 피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 그 가정에 예배가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있는 한 가정을 무너트리는 어두움의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벧전 1:2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뿌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피를 뿌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며 어두움을 물리치며 질병을 치유하며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대로 그 피를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뿌리되 모든 장막과 쓰는 그릇에 까지 정결하게 하기 위해 뿌리라고 하십니다. 창 3장 이후에서 보듯이 일단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우리 안에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죄는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그 다음은 사람과의 단절이며 마지막으로 환경과 문화의 타락입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다시 말해 사람에게서만 더럽고 썩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보혈의 능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정욕,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을 깨끗이 씻어서 참된 성결을 이루게 될 때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마귀를 물리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인간에게 온갖 불행과 재난과 불안을 갖다 주다가 자살까지 하게 만듭니다.귀신들도 보혈을 알고 또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혈의 능력을 알고 믿음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하며 물리쳐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은,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정욕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롬5:4에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육체의 정욕과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단호히 결심하고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작심삼일로 삼일도 못가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주저 앉게 되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은 인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하여, 우리의 결심과 결단을 금새 무너트리고 우리에게 비참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빈곤한 상태로 빠트립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와 친구가 되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맺게 하고, 온갖 분쟁과 시기와 당짓는 것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에 빠지게 만듭니다(갈5:17-21). 뿐만 아니라 거짓을 조장하고, 서로 불신과 미움과 악한 감정을 갖게하여 서로 분열하게 하고, 교만과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은, 인간을 정욕의 노예로 만들려고 힘을 다합니다.

이같은 사탄의 세력과 싸우려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고 부단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은 스스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삶이 육체에 끌려 다니는 정욕의 노예처럼, 세상과 짝하여 세상과 타협하기를 즐겨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불의와 싸우고 능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우리를 위해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골 2:15).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만이, 육체의 정욕을 이기며 사탄과 대적하여, 능히 승리의 함성을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고, 사탄을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로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보혈(히브리서 9:11~22)

히브리서를 일컬어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행하셨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사역하시는 말씀이므로 제5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들의 양심이 깨끗해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룹니다.
그 피는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정결함과 죄사함은 없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 새 언약의 중보자, 언약의 피, 피 흘림과 죄 사함 등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구약의 제사제도로 인해 육체가 정결 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제사 때이나 속죄일에 죄인들과 성소에 뿌려집니다.
이는 정결을 위함입니다.
또한 암송아지의 재도 뿌립니다.
율법에 따르면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민수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됩니다. 또한 두루마리 성경 즉, 구약성경에 뿌린 것도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에 정결 의식을 위해 뿌린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물건마저 모두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피는 언약을 세우는 용도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장막과 모든 기구에 뿌려져 그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 피는 정결과 속죄를 위하여 효과가 있었으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사는 매일 반복되어야 되고, 그에 따라 짐승도 계속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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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3-1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짜보면 짐승의 피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짐승의 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을 짜보면 예수님의 피가 줄줄 흘러나옵니다. 

그만큼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피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피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장님일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식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은평성결교회 한태수 목사 대학 2학년 때 목사님의 후배 하나가 동맥과 정맥에 문제가 있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열두 시간에 걸친 목숨을 건 대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피가 모자라 친구 수십 명이 헌혈하고 시간시간 기도했습니다. 
결국 수술을 잘 마치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가 다시 살아나서 간증을 하는데 수술하는 동안 눈을 감아도 보이고 떠도 보이는 심장이 있었답니다. 
그때 그 심장에서 자기에게 피를 떨어뜨리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지 않는 피가 계속 떨어졌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예수님의 피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식어버린 피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따끈따끈한 살아 있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는 보배로운 피 즉 보혈(寶血)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보혈입니까? 
그 피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 피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는 피입니다.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죄 사함의 능력(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즘 찌든 때를 벗기는 세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TV 홈쇼핑에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서 쓱 문지르기만 해도 찌든 때가 싹 사라지는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단한 기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세제도 인간의 죄를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세제이며 강력한 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을 미가서 7:19에서는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You will again have compassion on us; you will tread our sins underfoot and hurl all our iniquities into the depths of the sea.

생각해 보세요. 
깊은 바다에 검은색 바둑알 하나를 던졌다면 그 바둑알을 누가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그렇게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동쪽 끝은 어디고 서쪽 끝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가 극동지역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더 가면 그곳에는 동쪽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그곳에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보다 더 동쪽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구를 돌고 돌아도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만날 수 없습니다. 

시편 103:12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회개한 죄를 다시는 찾지 못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고백한 죄를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사함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를 정죄하는 마귀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는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마귀가 방에 들어와서는 굉장히 큰 두루 마리 책을 펴놓았습니다. 
루터가 보니까 자기가 평생에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다는 것을 빼놓았군.” 
이 말을 하자마자 마귀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루터는 다시 새 힘을 얻고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행복자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자신의 죄로 양심은 더러워지고 늘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목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범한 죄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심한 편두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편두통이 심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좋은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목사님은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놀라운 평안과 신비스러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주일 후, 목사님의 편두통은 싹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삶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악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마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죄악 속에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피의 능력을 깊이 깨닫고 그 피의 능력으로 죄악을 대적할 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식사를 하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을 하시니 둘째 아들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식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밤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손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도가 웨슬레 목사님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돈이 없으니까 “야! 돈이나 좀 가지고 다녀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웨슬레 목사님이 강도에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것 가져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가 해서 돌아섰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당신이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렸습니다.”, 
“쳇! 뭐라도 줄 줄 알았더니만 보혈?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런데 3년 후 웨슬레 목사님이 저녁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 신사가 곁에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저는 3년 전에 길거리에서 목사님을 세웠던 강도입니다. 
그날 목사님이 말씀한 그 보혈의 이야기를 듣고 내내 마음속에 보혈, 보혈 소리가 들려서 할 수 없이 저도 회개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이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일본에 동양의 성자로 불려지던 호지유태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술에 만취된 채 집으로 귀가하다가 길 옆 작은 집에서 붉은 전등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창가로 가서 방안을 훔쳐보았습니다. 마침 젊은 여인이 하얀 속살이 다 비치는 엷은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들어가 여인을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여인을 목 졸라 죽이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얼마 후 체포된 그는 강간, 살인, 방화의 극악한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포악한 죄수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가 보내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뜨겁게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얼마나 변화를 받았는지 특사로 사면 받고 출옥했으며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살다가 성자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이 성결해지기를 원하신다면 보혈을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작은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 고백하시고 보혈로 씻김을 받으십시오. 또 보혈찬송을 많이 하시고, 자신에게 보혈이 적용되었음을 계속해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헌신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만 받는 것만 아니라 새 생명, 새 능력까지 부여받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모자라 창백하게 죽어가던 사람이 수혈을 하면 얼굴이 불그스레해지면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힘이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속에 가득 차니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였던 그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깊은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1. 주님을 위하여 헌신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주님을 위하여 당연히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헌신은 강제적인 헌신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돈 많은 신사가 흑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흑인 여자를 놓고 경매하는 것을 보고 부르는 값의 배를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는 서류를 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고 “나를 풀어 주려고 나를 샀다고요?, 나를 자유케 하려고 나를 샀다고요?” 하며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비웃더랍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신사의 참뜻을 깨닫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자원하여 주인님의 종이 되겠다고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헌신하는 것은 세 종류입니다. 
하나는 복받기 위한 헌신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워서 하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마지막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헌신이 세 번째 헌신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2. 교회를 위하여 헌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보혈의 공로를 깨닫고 나니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헌신했던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요?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자주 찾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제 몸을 괴롭게 하겠습니까? 
저를 사랑하면 제 몸도 사랑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면 저를 자꾸 찾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낙중 목사님이 캐나다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담임목사님과 함께 김집사님을 심방했답니다. 
김 집사님은 주유소와 함께 슈퍼마켓을 경영하는데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에 크게 힘이 되는 분이고, 아들은 의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최목사님에게 그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교회가 500달러의 월세를 내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보다 큰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큰 장소로 이전하니 월세도 올라서 월 3,000달러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돈 많은 집사님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집사님은 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형편이 되지 않아도 매주 500달러씩 헌금을 해서 교회 월세를 감당했습니다. 
그 500달러는 작은 가게를 하면서 들어오는 돈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형편을 아는 목사님은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김집사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헌금을 작정했는데 그 김집사님이 1만 달러를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3,000달러까지 헌금을 하고 가게도 어려움을 당하고 해서 결국은 미국으로 개인택시 기사를 하겠다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게에서 뺀 돈 나머지 7,000달러를 다 헌금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후 김집사님은 3년 동안 미국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작은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네 주민들이 다른 가게는 이용하지 않고 그 가게만을 이용했습니다. 
이유는 가게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파는데 비디오를 대여하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던 날 동네 대표가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니 성인용 음란비디오는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김집사님 마음속에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주민대표의 말을 받아들이고 음란비디오를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마켓 주인은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란비디오를 대여하고 판매했습니다. 
주민들은 단합을 하여 음란비디오를 취급하는 가게를 이용하지 않았고 김 집사님의 가게로 몰려왔습니다. 
김집사님은 장사가 잘되어 이제는 주유소도 하고 슈퍼마켓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유는 오직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2:6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한 것입니다.    

3. 세상을 위하여 헌신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본인도 시각장애인이면서 역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 목사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답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런데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어떤 보상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 보혈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합시다. 

넷째, 승리의 능력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승리하게 만듭니다. 
무엇에 대해서 승리하게 만들어 줄까요? 

1. 마귀에게 승리합니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그는 사단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마귀에게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 하고 생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일들을 가로막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승리하므로 우리의 영, 혼, 몸과 생활과 관계와 사역과 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니 힌(Benny Hinn) 목사님이 필리핀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귀신들린 한 젊은이가 단상으로 뛰어올라와 난동을 부리더랍니다. 
사람들이 저지하려해도 말을 듣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베니 힌 목사님이 기도하기를 “주님, 저와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청년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 말 하지마! 그 말 하지마!”하더랍니다. 
베니 힌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라고 더욱 힘 있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며 “그 말 하지마!”하며 난폭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귀신은 떠나고 그 젊은이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귀신들은 베니 힌의 사역에서처럼 사람이 감지하게도 역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 할 수 없도록 은밀히 역사하며 믿는 자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든 못하든 악한 영의 역사를 허용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사십시오.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어린양의 피로 덮으십시오. 보혈은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2. 가난에 대해서 승리

고린도후서 8:9에 보면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가난에 대하여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양계장을 하는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은 언제부터인가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보혈을 바르고, 뿌리고, 덮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런 표현에 대해서 장로님은 거부감을 가진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로님도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닭장 속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 피! 예수님 피! 예수 보혈! 예수 보혈!”이라고 외치며 보혈이 뿌려지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짧은 기간에, 적은 사료로, 병아리를 적게 죽이고, 좋은 상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2등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환경적인 저주를 이기게 합니다. 

넷째, 치유의 능력(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이미 건강해졌습니다. 
주의 보혈은 우리들에게 질병을 이기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고훈 목사님은 20세 청년 때 폐결핵 말기로 죽음의 문턱에 서있었습니다. 
전도를 받은 후 교회에 나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만 온 몸과 맘을 다해 찬송하는 성도들이 부러웠습니다. 
한밤중이면 교회에 가서 “나도 저들처럼 찬송을 부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보름날 밤 12시쯤 목사님의 입에서 드디어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곧 씻어주소서” 
목이 터지도록, 밤이 깊는 줄 모르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반복해서 온 몸이 땀에 젖도록 불렀습니다. 
회개와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서 찬송으로 보혈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병에서 고침 받았고 그 후 무수한 시련과 환난, 질병을 만날 때마다 보혈찬송으로 세례를 받고 오늘까지 생존하는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질병을 이기게 합니다.

몸이 아픈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보혈을 적용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위장이 아프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주의 보혈을 위장에 적용합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바릅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뿌립니다. 나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위장병에서 자유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위장병은 치료 될 것입니다. 
주의 보혈은 질병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넷째,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 (고린도전서 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애굽에 내린 장자의 죽음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천사들이 넘어갔습니다. 
그 밤에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했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죽음의 천사들이 장자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을 믿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입니다.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기자가 찾아왔습니다. 
당국에서 그를 앞세워 선생을 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선생! 인도의 간디는 사람이 태어났으면 100년은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은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일제에 순응하고 감옥에서 나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100년만 살겠는가? 영생을 해야지.”, 
“아니, 어떻게 영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된다네. 자네가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온 것을 보니 나를 통해 예수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 같구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네도 예수나 믿으시게.” 
그러자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생기는 겁니다. 보혈의 능력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경향이 많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디가 한번은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탄광의 책임자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도를 말하자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구원이 너무나 값이 싸군요.” 

그래서 무디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수백 피트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단추만 누르면 승강기가 내려가고 다시 누르면 올라옵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물론이지요. 석탄 회사가 이미 돈을 많이 들여서 설치해 놓았으니 저는 그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공로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설치하여 놓으셨으니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단추만 누르시면 됩니다.” 라고 하자, 그 때야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대신한 희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믿음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죄의 능력
거룩한 삶의 능력
헌신의 능력 /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승리의 능력 / 마귀에 대하여! 

(예화)

일본에 ‘호지 유태랑’ 이란 난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성질이 포악했던 지, 겨우 18세에 살인과 강간, 방화 등 흉악한 죄를 저지르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형을 살던 유태랑은 뉘우치기는 커녕, “꼭 탈옥해서 판사에게 보복하겠다”며 오히려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감옥에서 한 청년의 전도를 받은 유태랑은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새사람이 된 유태랑은 그때부터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심한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자기 입으로 고름을 다 빨아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죄수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이백 명도 넘는 죄수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기독교를 탄압하던 당시 군국주의 일본 정부였지만, 그 감옥 안의 교회에 대해서 만큼은 묵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태랑같이 난폭한 사람도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니까,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런 극적인 회심을 겪고 나서, 오히려 먼저 믿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구나 위축된 자기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유태랑과 같은 그런 극적인 변화를 체험할 수도 없고, 꼭 그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극적으로 변화된 삶도 아니고 완전하지는 못할 망정, 내 삶 속에서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끈질김에 순복하면서, 부족한 대로 주변에 그 사랑을 전하려 한다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같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해도, 늘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부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황금률을 실천하는 분들을 저는 우리 공동체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오히려 처음 믿는 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먼저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복음의 능력을 목격할 때마다, 새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열심이 그 분들의 삶에서 이루실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 32)
그렇기때문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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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18)

성경 66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골라내라면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하고 그 사랑한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악센트가 강한 부분이 “독생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뜻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소유

버클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그만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강도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학생의 장례식을 치룬 후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를 위로하러 심방을 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지방 도시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호텔도 가지고 계셔서 제가 있는 동안 그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잘 사셔서 다른 빌딩도 가지고 계시고 택시 회사도 하고 계셨습니다. 택시가 몇 대냐고 여쭤보니 100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주 성공한 분이셨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그 분 이름을 대면 누구도 다 아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제가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아들을 만나고자 하면 교회를 나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틀림없이 있는데 내가 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당신에게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번 믿어 보시고 교회에 출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훌륭한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물질적으로 한번 성공하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꿈을 다 이루었습니다. 나는 100세까지 살아도 이만한 재산만 가지고 평생 꿈을 이루었는데, 내가 평생을 통해서 이룬 꿈인 내 모든 소유를 다 가져가고 우리 집의 숟가락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몽땅 다 없어지고 그 대신 죽은 내 아들이 살아난다면 내가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분만 그러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저도 다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분은 그 아들 말고도 또 아들 둘이나 있고 딸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부모는 어떠하겠습니까? 다 똑같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 아들을 희생 시키는 값으로 대통령이 된다면 되실 분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 아들을 죽일 경우 대통령 시켜준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 안 드시길 다행이지 만약에 드셨다면 제가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내 아들이 죽고 그 값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된다.’ 허락하실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이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는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이 아들을 보내서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그 다음 또 다른 아들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면 차선의 길이 있는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3의 길이 없습니다. “이거 밖에 없다.” 이게 독생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이 소유를 주셨으니”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최고로 여기는 최고의 가치를 인간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주셨다. 이거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줄 때도 즐겁고 받을 때도 즐겁습니다. 그 선물을 보면 어떨 때는 컵을 하나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화장품을 줄 수도 있고 책을 한권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큰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여신도들을 만나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신도들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이 보석과 명품 가방인거 같습니다. 그것만 선물 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하나 선물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벤츠 자동차를 “이거 선물입니다.” 하고 주면 어떻겠습니까?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좋은 집을 한번 선물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은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들이 한명 있는데 옆집이 아들이 없다고 하니까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 아들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세상에는 수양아들이나 양자 문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고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을 남의 집에 주는 순간 그 아들은 그 집의 어떤 일을 위해서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이유가 있을 때 내 아들을 선물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이 독생자이다.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시켰으니” 

성경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희생시키는 문화는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독자 이삭이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아들 하나가 생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습니다. 
번제는 죽여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이 독자를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독자를,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번제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들은 죽었습니까? 마음만 봤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렙다 땅에 사는 어느 불쌍한 과부는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모두 다 굶어 죽는데 이 가정은 어디 가서 식량을 구할 데도 없고 한 끼 밖에 없어서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함께 나누고 이제 죽으려고 생각한 가정에 하나님의 종에게 가라고 하셔서 그 집을 또 갔습니다. 그랬을 때 이 여자는 한 끼 남은 그 식량을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대접하고 “내가 한 끼 더 먹고 죽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를 대접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에게 대접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집에 평생 동안 먹을 것이 있게 했다.” 그 하나를 드린,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린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헌금하는 사람을 구경하셨습니다. 어느 불쌍한 여인이 너무나도 구차한 중에 동전 두 개, 유대 나라에서 사용하는 돈의 최고의 낮은 단위인 렙돈, 가장 낮은 동전 두 개를 헌금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이유는 자기의 소유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을, 이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즘은 아주 좋은 신앙적 계획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갈보리교회도 많이 계셔서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흔하게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사업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틀림없이 교회도 짓고 고아원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선교 사업도 하겠습니다.” 아주 장황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제발 그렇게 되십시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렇게 성공한 다음에는 잘 행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뭐냐?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동전 두 개 밖에 없고, 한 끼 식량 밖에 없습니다. 
아들 한명 밖에 없습니다. 
이것 밖에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한사람의 한 끼 식량을 드렸더니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의 기적 역사는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이나 사렙다 땅의 어떤 과부나 두 렙돈 헌금한 가난한 여인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화려한 미래만 자꾸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건물 뭐든지 안 가본 곳 없이 다 사진 찍어라.”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저는 재벌 총수를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이 건물을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나는 건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예배당을 하나 짓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벌 총수가 그런 일을 말해주니 저는 그때 좀 흥분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그때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으면 오늘 저 재벌 총수가 감동을 받아서 저런 말을 할까?’ 그런데 그분은 그 일을 안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건물을 말했는데 왜 안했을까?’ 간단합니다. 아까워서 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도 안 믿는데 예배당 지어서 뭐해?’ 그러니까 우리 목회학 교수가 그 전에 우리 학생들에게 “감동되었을 때 빨리 해!” 그러셨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수백 개의 교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까운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것 가운데 조금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 없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독생자를 주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의 혜택자는 누구나 다입니다. 많이 받을수록 주시는 자가 기뻐하는 진리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장애인이 한사람 있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돈 좀 달라고, 마침 베드로와 요한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갑니까? 돈은 없지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예배드리러 기도하러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나는 목사인데 있는 것이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으로 해석해서 전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해서 모든 영혼의 기쁨과 행복과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요 소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나는 평생을 통해서 이 한 가지를 온 세상에 나누어주면서 살자.” 그런데 있는 것도 사람들이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것을 못줍니다. 

서울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살던 서부 이촌동 난민촌 목회를 일평생 하다가 돌아가신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가 1인자이신 이현우 목사님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생 과장이셨습니다. 
그분의 교인은 다 판잣집에 살았습니다. 
‘이 교인들에게 내가 어떤 선물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시다가 그분은 미술가로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밀레처럼 사실적 화가이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십니다. 그래서 난민촌의 그림을 그리십니다. 그 판잣집에서 마당에다 통로 하나 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라든가 자기가 목회하는 난민촌의 모든 환경을 보는 것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는 교인들에게 그림 한 장씩 나눠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그러면 그 난민촌의 가난한 게 살던 사람들은 ‘차라리 라면 한 봉지를 사다 주는 것이 낫지 우리들이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도 구차하게 사는데 이렇게 구차한 그림을 받아서 뭐하나?’ 
그러나 목사님이 주시는 거니까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았지 않느냐? 그때 판잣집에서 살 때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그려준 이 그림!” 
어떤 보물보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가치성에 의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겠다. 이것만 소유하면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영생을 너희에게 주노니 멸망치 않고 이것을 가져가라. 그러기 위해서 내 독생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받았습니다. 

옛날 6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서울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160명 호텔 투숙객들이 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TV로 현장 중계를 다 했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서 “저 아래 타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느냐?” 안타깝게 별 수단을 다 써도 160명이나 죽었습니다. 사람마다 창가에 나와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창가에서 탈출을 찾는 그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이 나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소.” 

그게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재벌이 와서 돈 수백억을 들고 와서 “이거 가지시오.” 어느 대학 총장이 와서 “내가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겠습니다.” 미스코리아가 와서 “나와 결혼해요.” 다 좋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두 평소에 소원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 준다 하여도 그 사람에게는 그 시간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것만 되면 다른 가치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셔서 모두가 멸망 받을 자리에서 모두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나는 희생하고 너희는 구원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은 자는 다소 이 세상에서 고난 부분이 있다 하여도 가장 귀한 소유가 있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호텔 꼭대기에서 살려달라는 사람에게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원받는 그 하나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크게 기뻐하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더욱 기뻐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기뻐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기쁠 게 있습니까? 우리 세상 기준으로 기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 받고 쫓겨 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독신입니다. 그러니 뭐가 기쁩니까? 우리 기준에 기쁠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뭐가 기쁜 것입니까?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되어서 영생할 수 있는 진리를 내가 얻고 그것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있는 것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로다.” 이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는 사람은 ‘아!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를 나에게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지금 최고로 여기고 있는 내 소유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나는 그것을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제일 목표로 되어 있는 진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런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모두 다 영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최고의 가치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오늘 말씀에서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나도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는 믿음의 결단이 생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