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정의와 공의 - 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의”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실이나 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의”는 “정의”나 “공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욥, 다니엘 (겔 14:14).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롬 1: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義)”는 관계(relation)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면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와 하나님의 의(로마서 3:22)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자녀는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런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성경에서의 의(義)

1. 공의
2. 정의
3. 관계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17은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도 ‘의’란 ‘관계’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이걸 공의나 정의로 해석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오해하여 복음에는 공의/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복음에는 공의나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자녀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최소한 이 두 구절(마 6:33, 롬 1:17)만큼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히 12:11도 "관계"로 해석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서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짐) 로마서 14:17
“의”(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아들이요 딸이다)를 구하고 찾으라 로마서 3:2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 내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모든 세계에 이루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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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1. 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
2.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
3.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

의(義) :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뜻함.

공의(公義) : 공명정대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속성. 공의의 원어는 의로 번역됨.

정의(正義) : 하나님의 본성. 타락전 인간의 완전한 의.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의와 공의

랍비 리스킨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You must help again and again with him/출23:5)"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출21:1)”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어서 공표하도록 지시하신 이 '법규'의 히브리 원어는 '미슈파트(משפט)'로 그 의미는 '도덕적 정의에 관한 법(the laws of the moral justice)'이다.

모세가 미슈파트(mishpat)의 개념을 통하여 첫 번째 이스라엘 족장인 아브라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루시려 했던 거룩한 뜻을 이제 모세로 하여금 구체화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tzedakah)와 정의(mishpat)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9)".

하나님 나라의 두 큰 이상(ideals)이자 두 기둥, 즉 '공의와 정의(righteousness and justice*)'는 성경에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반복하여 언급된다 :

"시온은 정의(mishpat)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tzedakah)로 구속함을 받으리라(사 1:27)"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특히 예레미아의 이 예언적 가르침을 우리는 성전파괴 추도일이자 주권상실의 날인 Tishab B'av(아브월 9일)에 찬양으로 지어 항상 부르고 있다.

이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mishpat)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법과 질서 없이 정의사회와 자유세상을 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공의(체다카:Tzedekah:צדקה:righteousness)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카리타스(karitas)라고 하였지만, 사실 카리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헨(hen: חֵן)으로 자비(graciousness)의 뜻이므로 결국 charity(자선)의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체다카(Tzdeakah)를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성경의 의도인가? 이 핵심단어가 갖는 이중(ambigous)의 의미가 토라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인간의 모범적 감성을 보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백성이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an act of tzedakah)이 되리라(신24:10-13)".

히브리어 체덱(tzedek:צדק)은 정의(justice), 명확(precise), 그리고 양 당사자 간의 정확한 일 처리(exact treatment of both side)를 의미한다. 그런데 체다카(Tzedakah:צדקה)는 체덱과 동의어이긴 하지만 사실은 명백히 다른 명사라고 봐야 한다. 체다카는 자애심(loving-kindness)과 정의(justice)가 융합된 단어로서,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충분하지 못한 대접으로 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 필요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도 스스로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토라가 제시하는, 칠 년에 2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십일조는 비교적 적은 양이다. 또 모든 농지 소유자들은 그들 땅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떼어놓아 그들로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매일 아침 일어나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밭을 매고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룻기는 모압여인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타지에서 처절한 가난과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마을의 유지인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었던 장면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같은 내용이다. 탈무드는 우리의 이웃이 비록 적일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도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이므로, 우리에게 끝까지 그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라도 그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없을 때에는 끝까지 그를 도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미슈나(Mishna)에 "여행 중에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는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은 내 것이고 당신 것은 당신 것이요’라고 했다면 아마도 중용의 도리로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은 내 것이요’라는 뜻이겠지만, 무지한 사람에게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도 당신 것이요’가 되어 법의 요구를 넘어 ‘당신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짓이다(One who says that 'mine is mine and yours is yours' travels the middle of the road, perhaps even the golden mean; 'mine is yours and yours is mine' is an ignoramus; 'mine is yours and yours is yours' goes beyond the requirement of the law; 'yours is mine and mine is mine' is wicked.)" 라고 나온다.

가난한 자가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요구만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가 세상에 올바로 정립되어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를 보장하여 주는 한편, 그들이 속한 사회를 개선시키도록 독려 또는 명령하여 그들이 기금을 내어 그것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Tzedakah and Mishpat(צדקה ומשפט) : 체다카 와 미슈파트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본 이유이자 하나님의 사회정의(social justice)실현의 표어라 할 수 있는 "의와 공도(창 18:19)"의 히브리어 단어로써 신/구약을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이지만, 우리 한글성경에는 여러 다른 단어들로 번역이 되어있어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이사야서에는 주로 "정의와 공의"로 번역이 되어 있으며,
랍비 리스킨은 이것을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와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로 표현하였고,
랍비 삭스는 "분배의 공점함(Distributive Justice)"와 "재판의 공정함(Retributive Justice)"으로 정의하였다.

요약하면 체다카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재화의 분배(자선)를,
미슈파트는 올바르고 공정한 법의 집행을 강조하여 억울하고 소외됨이 없는 평등한 정의 사회실현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참고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삼하 8:15)"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 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 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의(義)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3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잉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공적인 덕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잉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잉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편5절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장5절에서 잉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레미야서 23장5절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잉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사적인 덕목과 사회적/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띵가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예수님-성직자의 관계는 양-목자-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공의(公義)

이 낱말도 역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 20세기초에 한반도에 들여온 일본식 한자인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저스티스'의 번역어였습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의와 정의와 공의는 모두 '옳음'이라는 덕목을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덕목이 자리를 잡는 위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義)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신 덕목입니다. 

정의(正義)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된 공통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덕목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한 덕목입니다. 

공의(公義)

정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이지만, 그 적용은 정의에 비해 훨씬 제한적입니다. 
명시적인 법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공식적인 심판 과정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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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




성경의 장(chapter), 절(verse) 구분의 역사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분, 그리고 심지어 제목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제목을 붙이고 장(chapter)을 쓰고 내용을 쓰고, 절(verse)을 구분하고 내용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제목, 장, 절은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즉 성경의 내용과 달리 제목이나 장, 절 구분은 성경 영감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chapter)의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4세기입니다.
그런데 그 장(chapter)의 구분도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장 구분과 다릅니다.
그리고 4세기에 있었던 장 구분은 신약만 있었습니다.
구약의 장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20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1560년대 제네바 성경에서 해 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2000년 교회 역사에서 500년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절대시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사용하는 성경의 장, 절 구분도 모든 번역 성경이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예배 중의 강복선언(축도)에서 자주 사용하는 고린도후서 13:13의 경우 한글성경은 13:13이지만,
영어성경(KJV, NIV, NASB)을 보면 13:14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장절 구분을 절대시 해서는 안됩니다.
영감받은, 즉 성령님께서 장절을 구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한 것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장과 절의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찾기 쉽게 하고 읽기 쉽게 하는 정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장절 구분을 참조하되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 장(章)에 대한 구분 

성경의 ‘장’에 대한 구분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신약인데, 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이후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역에서 처음 이루어집니다.
1204-5년 즈음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스티븐 랑턴(Stephan Langton, 1150-1228)에 의해 고안되었습니다.
그 이후 1330년 경 랍비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에 의해 히브리어 성경의 필사본에 도입되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의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장의 표시는 본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에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 안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 절(節)에 대한 구분

성경의 ‘절’에 대한 구분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구약인데,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절 구분의 시작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유대인들의 원래 언어는 히브리어였으나 바벨론 포로 시절을 거치면서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어가 일상언어가 되었는데, 이러한 그들에게는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통역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 아람어로 통역하였는데,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헤미야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마소라 텍스트(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이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1503-1559)에 의해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말 위(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e) 성경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1560년대 제네바 성경에서 해 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장(章) 절(節)누가 구분했을까?
장은 영국 스티븐 랭턴교수가 구분
절은 300년 뒤 로베르 에스티엔이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면 지금부터 2천년 전의 대 선배인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한번쯤 상상하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의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이 우리교회에 막 도착했다.
서신 낭독을 듣다 보니 ‘거룩한 기록들’, 즉 히브리어 내용의 바울 선생이 여러 차례 말씀한 것을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

이 말씀을 비롯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 3:15)했고 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성경 66권이 너무 방대하고 또한 구분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원래 章과 節이 없었다

바울 사도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한 ‘거룩한 기록들’의 자본(字本)은 어떤 모습들이었을까. 최초 성경의 자본은 바레스탄 사해 동굴에서 발견한 구약의 위가야서이다. 그 원본은 보지 못했지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빼곡히 차 있는 글자뿐이었다고 한다.
구두점도 없고 오늘의 우리가 사용하는 장(章)과 절(節)고 없었다고 한다. 초기의 성경 필자들은 친구나 교회에 소식을 전할 때 장이나 절로 구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전해주신 소식을 그대로 전체를 기록하여 전해준 것’이다.
오늘날 성경에 장과 절이 없었다면 그 많은 명언들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章을 구분한 분은 스티븐 랭턴

장(章)을 구분한 인물은 영국의 교직자(聖公會?) 스티븐 랭턴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사이며 대학교수이고 나중엔 영국 성공회의 캔터버리 대주교가 된 분이고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성경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불편을 느꼈다. 13세기에 종교개혁 전, 자기 나름대로 편리하게 성경 66권을 장(章)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랭턴 교수 이전에도 성경학자들이 나름대로 제목별로 장을 분류해 보기도 했다. 주로 성경에 있는 유명한 선지자(先知者)의 말을 찾기 쉽게 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참으로 편리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자기 나름대로는 편리했지만 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하나의 예로 마가복음은 현재로는 16장으로 되어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분류는 50장이 넘도록 작성하기도 했다.
랭턴 교수에게 여러 나라 신학자들이 공부하면서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던 각국 학생들은 자기 나라에서 사용하던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공부했는데 스티븐, 랭턴 교수의 성경과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맞지 않아서 불편을 느꼈다. 이 때문에 스티븐 랭턴 교수는 학생들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성경의 장을 구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랭턴 교수의 작업은 독자들과 필경사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인기가 고조하여 마침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장이 된 것이다.

절(節)을 구분한 자는 누구일까

장(章)이 구분된 후 300년이 지난 16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유명한 인쇄업자 겸 학자인 로베트 에스티엔이 성경을 더욱 대중화시키고 알기 쉽고 찾기 쉽도록 절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성경을 더 많은 사람이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구절을 기억하도록 작업했다. 로베르 에스티엔은 성경을 오늘날 전 세계가 통일된 장과 절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오늘날 인류의 구원과 교회 설립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 하겠다. 실은 이전에도 절을 구분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널리 보급하지는 못했다.
AD 1553년, 로베르 에스티엔 교수는 66권의 히브리어 구약과 그리스어 신약을 통합하여 66권 성경의 장과 절을 통합하여 오늘날 성경, 신구약 성경을 인쇄했다. 원본은 프랑스어로 인쇄되어 오늘의 성경과 장과 절이 통일한 최초의 성경이다.

구원을 얻게 해준 ‘거룩한 기록’의 은혜

오늘의 우리가 66권의 장과 절을 구분한 작업을 쉽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과 절은 성경에 있는 명구절의 고유한 주소가 된 셈이다. 장과 절의 구분 덕택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전파와 논문과 설교에 중요한 성구(聖句)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글이나 책에서 특별히 기억하는 성구나 표현의 방법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성구를 전하고자 할 때 이 장과 절은 표현하는데 과학적인 이해와 편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소식 전체를 이해하고 기억하는데 이것보다 더 편리하고 과학적인 방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66권 장과 절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주는 ‘거룩한 기록’으로 큰 은혜가 되게 하여 주신다.


십자가(十字架)


십자가(十字架)

스타우로스(4716) [ staurŏs ]  σταυρός, οῦ, ὁ     

1. 십자가.   2. 형틀.  3. 수난과 죽음의 상징
발음 [ staurŏs ]
어원  / 2476의 어간에서 유래
  • 1.  십자가.
    • a.  [문자적으로] 형틀, 마27:32,40, 막15: 21,30, 눅23:26, 요19:17,19,25,31, 빌2:8, 히12:2.
    • b.  [상징적] 수난과 죽음의 상징, 마10: 38, 16:24, 막8:34, 눅9:23.
    • c. 기독교와 그 전파 내용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5:11, 6:12, 고전1:18, 엡2:16, 골2:14.
  • 관련 성경  /  십자가(마 10:38, 막 8:34, 골 1:20).

* 2476. 히스테미() ἵστημι    스트롱번호2476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histēmi ]

관련 성경 / 서다(마2:9, 막9:1, 요1:35), 세우다(마4:5, 행6:6, 롬3:31), 데리고 가다(마18:16), 서 있다(마20:6), 두다(마25:33), 멈추다(행8:38), 작정하다(행17:31), 그대로 두다(고전7:37), 확정하다(고후13:1), 대적하다(엡6:13), 앉다(약2:3), 일어서다(계11:11).


십자가형

우선 사형수에게 기절할 정도로 모진 채찍질을 가한다.
다만 성경에서는 예수는 이러한 채찍질을 당했다는 묘사가 있으나 다른 죄수들은 이러한 묘사가 없다는 점을 들면 일반적으로는 십자가형을 당할 죄수에게 굳이 채찍질을 가하지는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십자가형이 공개처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죄수가 오랫동안 살아있어야 공개처형의 효과가 커지니까 굳이 시작부터 반 죽여놓고 하면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쓰던 채찍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노예들에게 작업을 강요하거나 군율을 위반한 병사에게 그 대가를 가르쳐줄 목적으로 때리는 채찍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짜로 죽일 생각으로 때리는 채찍이었다.
십자가형에서 사용되는 채찍은 대부분 후자로, 벌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상 사형이 목적인 도구였다.
이러한 사형 집행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마음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죽끈을 꼴 때 곳곳에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온갖 위협적인 흉기들을 박아 넣었다.
게다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을 하루 동안 물에 담궈 불려놓아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때문에 단순히 피멍이 드는 정도는 약과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 채찍을 이용해 사형수의 전신을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난타질한다.
이렇게 얻어터진 사형수의 피부는 모조리 뜯겨져 나오고 그 밑의 골격과 근육은 대부분 쓸려져 내리는데, 3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에우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내장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인 예수의 경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망가져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한 성경 표현에 비유할 정도이니 일반적인 채찍질과는 차원을 달리함을 짐작할 수 있다.
네로 황제가 폐위된 후 이 채찍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살했을 정도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이렇게 채찍질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사형수에게, 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고 처형장까지 이동시킨다.
십자가 형틀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볍게 보는 학자들은 18㎏에서 무겁게 보는 학자들은 50㎏까지 다양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빈사 상태인 사람이 쉽게 지고 이동할 만한 무게는 아니다.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겪는 고통도 엄청난데,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당하면 그만큼 빨리 상처의 괴저가 일어나 전신이 불로 달구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중도 사망하는 죄수도 많았는데, 이때 사형수의 가족들은 채찍질을 가하는 집행인에게 뇌물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채찍질을 살살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을 엄청 심하게 해서 가능하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죽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사형수가 십자가를 들고 처형장으로 오면 십자가에 매달 준비를 한다.
우선 사형수의 속옷까지 모두 벗겨 나체로 만든다.
형의 집행에 남녀를 가리는 일은 없었다.
이후 사형수를 십자가에 눕히고 손목과 발뒤꿈치에 18cm에서 13cm정도의 사람의 몸무게를 지탱할 만한 초대형 대못을 박는다.
이 못의 크기 때문에, 못에 박히는 순간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팔꿈치를 벽에 세게 부딪칠 때 혹은 척골신경을 펜치로 잡고, 비틀어서, 뭉개는 듯한 심한 고통이다.
쉽게 말해 무릎을 벽이나 책상 모서리 등 딱딱한 물체에 세게 부딪혔을 때나 정강이를 쪼인트까는 고통이 계속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익히 알려진 손과 발등에 못을 박는 방식이라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팔을 십자가에 묶는 식으로 그런 형태를 재현한다 해봤자 결국 별 차이는 없다.
일단 팔과 어깨에 가해지는 압박감이야 그대로이고, 손이란 부위 자체가 촉감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이라 손바닥에 대못을 박으면 역시 상당한 고통이 따르고, 무게로 인해 상처가 점차 찢어져갈 테니 더욱 고통스럽다.
특히 발등의 경우 뼈가 밀집한 곳이라 여기에 대못을 박는 것 자체가 뼈를 상하게 만드는 탓에, 발목에 못을 박는 것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애초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부터가 이 전통적 인식의 십자가형에 기반한 것인데, 순화한 게 그만한 고어도를 선보였으니 말 다한 셈.

그리고 사형수가 박힌 십자가를 세워서 사형수가 죽을 때까지 방치한다.
얼핏 보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자체는 별로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최악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선 못박힌 상처에 몸무게와 같은 힘이 가해져 상술한 고통이 극대화되며, 못에 잔뜩 끼었을 이물질로 인한 감염 때문에 파상풍이 일어난다. 
여기에 못 박힌 팔이 몸무게 때문에 팔이 늘어나다 결국 양쪽 어깨가 탈골된다.
이를 시작으로 온 몸의 다른 관절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어그러진다.
거기다 양 팔이 대못에 고정되어 있어 가슴을 압박, 폐와 횡격막을 강제로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때문에 사형수는 생존본능상 몸을 올려서 숨을 내쉬려고 하는데, 몸을 세우려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에 힘을 줘서 몸을 들어올려야 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힘을 빼버리면 또 다시 숨을 못 쉬는 상태로 돌아온다.
결국 이 과정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의 수형자들은 못박힌 상태에서 대략 1,000번 정도 기절했다가 깨었다를 반복하며, 이 과정은 그야말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라고.
그렇게 반복하다가 지치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호흡 수가 줄어들면서 질식사하거나 혹은 호흡 산독증(酸毒症)에 빠져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게 되면서 심장이 터지거나, 심정지로 사망한다. 후술할 십자가형 마지막에 다리를 부러뜨린 이유도 이제 그만 질식사해서 빨리 죽으라고 부러뜨린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을 제외하더라도, 십자가형은 당시에 수치와 혐오의 상징과도 같은 형벌이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백주대낮에 알몸으로 매달려 지나가는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당연히 수치스럽지만,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면 더럽고 추한 몰골로 인간성을 잃은 채 죽기 때문이다.
우선 형 집행에 앞서 채찍질을 당한 경우, 난도질 당한 상처들이 세균 감염과 괴저 현상으로 인해 곪아터져 진물과 고름이 흐르고, 부족한 산소와 계속되는 출혈로 인해 상처투성이인 전신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때 풍기는 악취로 인해 주변의 벌레들까지 잔뜩 달라붙게 되니 사실상 목숨만 붙어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극악의 고통으로 인해, 몸 안에 있는 모든 체액이 빠져나온다.
단순히 피만 흘리면서 깔끔하게 죽는 게 아니라는 것. 신체에 남아있던 소변, 대변 등의 오물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모조리 빠져 나온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온 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흐르고, 악취와 함께 전신이 산 채로 썩어들어가며, 통제를 잃은 신체에서 분비되는 자신의 배설물에 범벅이 되어 죽는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역겹고 구역질 나는 형벌"이라고 묘사하며 "로마 시민의 시야는 물론 생각에서조차 지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십자가형이 단순히 고통스럽게 피만 흘리다 죽는 형벌이었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를 내릴 이유가 없다.

이러한 혐오스러움으로 인해 로마 시민이나 시민권자가 아니라도 자유민으로 인정된 사람. 그리고 해방노예는 십자가형을 적용받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속주민은 적용이 가능했지만 자치가 인정되는 동방에서도 총독이 다른 사형으로 대체할 수 있었고 서방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주로 적용 가능한 사례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인을 살해한 혹은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노예들이었다.
노예가 아닌 자들은 반란이나 연쇄살인 같은 정말 심각한 중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드물었고, 자치가 어느 정도 인정되던 동방이 아닌, 적어도 로마법이 원칙대로 집행되던 서방 지역에서 노예가 아닌 자는 차라리 맹수의 먹이가 될지언정, 십자가형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인간 사회의 가장 하찮은 자들 가운데서도 쓰레기들만 모아 처리하는 형벌로 인식되었고, 이 같은 관습은 형벌을 당할 때 수치스러움을 증가시켰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시점에서 "나는 죄 지은 노예 아니면 가장 나쁜 죄를 저지른 범죄자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이전에 당했던 채찍질과 못박힐 때의 출혈로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심장이 더 이상 피를 퍼올리지 않게 되고, 혈압이 떨어져서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한다.
그리고 신장은 남아 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며,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 액체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매우 목이 마르게 된다.
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로마 병사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주었다.
번역에 따라서는 그냥 식초라 하기도 하지만, 당시 로마군은 쉬어서 식초나 다름없게 된 포도주를 상한 물에 타 둘 다 마실 수 있게 만든 포스카(Posca)라는 음료를 주로 마셨으므로, 예수의 처지를 동정하여 포스카를 준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병사 이전에도 몰약이나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주기도 했는데 이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마취약이었다는 설이 있다.
예수는 이 몰약 섞은 포도주는 거절했지만 해면에 적신 신 포도주는 마셨다.

보통 십자가에 못박히면 하루 안에 사망한다고 하지만, 처형자가 오래 버티면 다리뼈를 부러뜨리기도 하는데, 이 경우 다리가 버티는 힘이 사라지면서 몸이 순간적으로 아래로 쳐져서 가슴을 더 압박한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발을 세워야 하는데 뼈가 부서졌으므로 몸을 들 수 없어 곧 질식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자비를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9:31-36에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앞두고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예수와 두 도적을 처리해 달라고 본티오 빌라도에게 요청했고, 로마 병사들이 가서 두 도적은 다리를 꺾어 죽였는데 예수는 이미 죽었으므로 시체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마지막 자비.
이에 대해선 성흔 문서의 내용도 참고.
다만 이는 유대에만 국한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선 시체를 계속 매달아 썩게 했으며 장례가 허용되지 않았다.
십자가형의 또 다른 잔인함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진 두 강도의 시체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그대로 버려졌다. 
장례를 치른 예수가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

죄수가 사흘간 생존했다는 기록도 일부 보이며, 사흘을 버티면 '너는 죄값을 다 치렀다'며 살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살아봤자 이미 채찍질 과정에서 등의 피부와 근육이 박살이 나고 십자가에 박히는 과정에서 손발목의 뼈와 힘줄에도 심한 타격이 갔고, 지저분한 못으로 인해 파상풍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위생과 거리가 먼 시대고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이 재산이나 빽이 넉넉하지도 않을 테니 풀어줘도 세균 감염, 통증 등의 후유증으로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는데, 유대 전쟁 당시 요새푸스가 십자가에 처형된 유대 반란자들 중에서 지인 셋을 발견하고 티투스에게 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티투스가 십자가에서 내려주었으나 그 중 한 사람만 살고, 나머지는 전부 사망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사형이라서 로마도 사형 중에서 능지형과 함께 최악의 사형으로 규정해 두었고,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

'말 못할 고통, 미칠 듯한 고통' 라는 뜻의 'excruciating'의 어원이 바로 이 십자가(cross)에서 왔으며, 문자적으로 excruciating은 '십자가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옛 로마의 문인들은 십자가형을 차마 말할 수 없이 잔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라틴어 욕 중 "천벌 받아라"는 의미의 "아비 인 말람 끄루쳄 / 아비 인 말랑 크루켕(Abi in malam crucem)!"은 직역하면 "X랄 같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라"이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육시랄 놈"과 의미가 일치하는 것이다.
법에서도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그래서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로는 참수형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시민권자가 아니었기에 십자가형을 당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죄수가 죽을 때까지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그 잔혹함과 죄수가 겪는 끔찍한 고통에 무심하지는 못했던지, 과다출혈이나 질식으로 죽더라도 고통을 덜 느끼고 죽게 하기 위해 죄수에게 마취제를 투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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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까지나 죽는 데 며칠이 걸리는 십자가형에 비해 비교적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길어야 몇 시간 정도로 적을 뿐이지, 확실한 사실은 거열형이나 팽형, 화형 역시 심각한 고통을 동반하는 사형법들이다.

거열형()은 사형의 방법 중 하나이다. 환열(裂), 환형(轘刑)으로도 불린다.

중국전국시대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변법과 개혁으로 유명한 나라 재상인 상앙이 개발했다고 전하며, 과 사지를 밧줄에 묶어 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방법이다.
이름에 수레 거가 들어가는 이유는 밧줄을 소의 몸에 묶은 모습이 우마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극 등에서는 이를 오해하여, 실제 수레가 형 집행에 동원되는 연출이 나오기도 한다.

5마리의 를 이용해 당기기에 오우분시(五牛分屍)라고도 하고, 몸이 5조각이 나므로 오체분시라고도 한다.
잘 안 찢어질 경우에는 망나니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칼집을 내기도 했다.
능지형 정도는 아니라도 심히 아프게 죽을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거열형을 실행하면 무릎 관절 혹은 허벅지 관절부터 찢어지지만 허벅지 관절이 뜯어지는 상황은 거의 없다.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무릎부터 파열한다.
또한 보통 상상하는 모습대로 양 손목과 발목에 줄을 묶었다간 손발만 뜯겨져 나가 죽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팔꿈치와 무릎에 줄을 묶는다.

이 벌을 고안해낸 상앙은 결국 죽은 뒤 이 형벌부관참시를 당했다.
사형대 기요틴을 고안해 낸 기요탱 박사가 기요틴의 이슬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상앙의 거열은 사실이다.
산 채로 당한 것은 아니고 숙청의 위기에 몰린 상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 시체를 함양으로 끌고 가 거열에 처했다. 그는 변법으로 진나라에게 부국강병을 이뤄주고 전국을 통일할 발판을 마련해줬지만, 무자비한 처벌을 한 터라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러서 거열당한 뒤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다투면서 그의 살을 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반란을 꾀한 역적을 처형할 때 쓰이며, 동양권은 물론 유럽에도 마녀이단, 반역자 등 중죄인을 처형할 때 비슷한 방법을 썼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 말 3마리에 묶여 처형당한 장면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미셸 푸코의 대표 저작 <감시와 처벌>의 도입부에 전근대의 대표적인 형벌로써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잔혹함 때문에 공개처형의 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사실 고대 기준으로도 너무 잔인한 처벌이라 춘추전국시대 지식인들도 거열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며, 중국에서는 978년 요나라에서 평왕의 아들 진가가 부왕을 살해하려다 거열형에 처해진 후에는 공식 형벌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2]


[2] 사실 능지형도 FM대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 보통 형대상자를 먼저 죽이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이 경우는 육시()라고 하며, 욕설 '육시랄'의 어원이 이것이다), 아니라 해도 죄수에게 마취를 목적으로 아편이라도 먹였다. 다만 이는 인도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쇼크로 너무 일찍 죽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능지형은 시신의 훼손 정도는 십자가형보다 더해도 실제로 가해지는 고통은 FM대로 집행하든 AM대로 집행하든 십자가형보다는 덜했다.[3] 그 밖에도 스카피즘이라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행된 길고 고통스러운 사형방식이 있었다 전해지지만, 이는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4]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한 십자가는 '아포툼파니스모스(Apotumpanismos)'라고 한다.[5] 스파르타쿠스는 전투 중에 전사했다.[6] 다른 건 몰라도 사형 선고만큼은 반드시 로마 행정관의 허가가 필요했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형 이외의 형벌은 로마인 행정관의 허가조차 필요 없었다는 뜻이 된다.[7] 다만 해당 전통이 복음서 외에서 발견된 적은 없기에, 현대 사학자들은 이 전통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본다.[8] IESVS NAZARENVS REX IVDAIORVM.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유다이오룸. 십자고상을 보면 명패에 INRI라는 약자로 적혀있다.[9] 일부 해설본에서는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의 선동에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처형하게 되자 자존심이 상한 빌라도가 처형하는 대신 유대인들에게 엿도 먹이려고 일부러 저런 명패를 달았다는 말이 있다. 사실 당시 빌라도는 예수를 진심으로 믿었거나 원칙주의자라서 처형을 말리려 한 것이 아니라 원래도 말 안 들었던 유대인들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죽이라고 엄밀히 정부에서 임명받아 그들을 다스리는 빌라도에게 떼쓴 것이니 빌라도 입장에서는 당연히 순순히 내줄 이유가 없었다. 쉽게 말해 기싸움(= 당신이 이 사람 안 죽이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당신은 황제의 충신이 아니다 등등)에 져서 멀쩡한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일부러 불편한 심기를 팍팍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해석대로면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들은 너희가 죽이는 거지 내가 죽이는 게 아니라고 선포하는 것도 일말의 양심선언이 아니라 이런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는 거라고 볼 수 있다.[10] 특히 성경 관련 영화나 매체에서는 예수는 일단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서 못에 박히는데 비해, 다른 두 죄수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못에 박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 성경에서도 누가복음 23장과 요한복음 18~19장을 통해 보면 빌라도가 군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에게 채찍질만 가한 후 풀어줄 생각이었으나, 그 후에도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12] 성경에서 보면 양의 뼛조각, 철조각 등 온갖 날카로운 조각들을 붙여놨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13]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영화인,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이 장면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채찍질의 상식을 뛰어넘는다.[14] 이사야서 52장 14절: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사람 비슷한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아서 보는 사람마다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15] 참고로 이 채찍질은 십자가형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으며, 로마 시민과 해방 노예를 대상으로 한 참수형에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기록에도 남아있다. 특히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10분의 1형에서는 아예 죽을 때까지 후려쳤다고 한다.[16] 실제로 예수의 경우 골고타 언덕까지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17] 2004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두 죄수가 가로축인 파티불룸만 어깨와 팔에 걸쳐 묶어서 지고 가는 데 반해 예수는 종래의 이미지대로 십자가 전체를 손으로 들고 가며 2011년작 My Last Day에서는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불룸만 진다.[18] 다만 예수는 빈사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고 이동했고 다른 대부분의 죄수들은 채찍질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지고 이동했다. 그렇다고 건강한 상태에서도 저 무게가 가벼운 무게는 절대 아니다.[19] 비슷한 사례로, 전근대 한국에서도 죄인의 가족 등이 참수형을 집행할 망나니에게 고통 없이 한 번에 편하게 보내 달라고 뇌물을 쥐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정작 죄질이 극악할수록 오히려 채찍질을 안 하고 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행인에게 채찍질을 심하게 당하면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기 때문에 그나마 고통이 덜해지지만, 채찍질을 당하지 않고 집행하면 오히려 고통이 며칠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지기 전 따로 채찍질을 당한 예수는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으나, 그렇지 않은 두 강도는 안식일 시작 전(현대 기준 토요일 오전 6시)까지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려야 했다. 또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봉기를 진압한 뒤 생포된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할 때도 일부러 채찍질을 하지 않았는데, 반역자가 고통스럽게 죽는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아피아 가도를 지나면서 봐야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두 강도는 채찍질을 당했다는 묘사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예수만 채찍질을 모지게 당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십자가형에 처하는 이유가 오랫동안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채찍질을 안 해야 오래 살기 때문에 그렇다. 본티오 빌라도는 성서에 나오는 묘사로는 그저 예수를 채찍질만 하고 풀어주려는 생각이었으나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요구에 못 이겨 십자가형까지 선고해버려서 예수의 십자가형이 특히 잔혹해졌다는 평가다. 결국 예수는 두 강도보다 일찍 사망했고 두 강도는 시체를 매달아두면 안 되는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죽지 않아서 병사들이 직접 다리를 부러뜨려 죽였다.[20] 다만, 여자의 십자가형이 미술에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다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거의 최근에 와서 예술로 그려진 것들이며, 보통 십자가하면 남성인 예수를 생각하기 마련이므로.[21] 흔히 성화상에는 예수의 손바닥에 못이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이다. 당시의 언어가 손바닥과 손목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고대 헬라어에서는 손목이 손바닥에 속했다)이다. 상식적으로도 손목의 뼈 사이에 못을 박아야 몸이 단단하게 고정이 되며, 손바닥에 못이 박히면 몸무게 때문에 손바닥이 찢겨져 나가서 십자가에서 떨어져 버린다. 물론 팔을 밧줄로 묶어서 고정했다면 손바닥에 박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22] 팔굽에 있으며 때리면 짜릿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나는 부분의 신경.[23] 사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에서나 그나마 현실에 근접하는 고어도를 보인 정도이고, 막상 십자가가 세워진 다음 희생자가 겪는 끔찍한 고통에 대해선 그냥 대강 넘어갔다. 즉 현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절대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2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묘사되지 않은 증상이지만,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못박힌 손목과 발목 모두 시간이 흐르면서 끔찍스럽게 부어올랐을 것이다.[25] 혈액 속 이산화 탄소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것.[26] 사실 이 당시엔 최대한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게 하는 사형방식이 유행이었는데, 앞서 설명한 방식대로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둔 후 손발의 통증과 서서히 조여오는 숨통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최대 3일까지 생존한 죄수도 있다고 한다. 성서에서 예수의 양옆에 못박힌 죄수들을 빨리 죽으라며 다리를 꺾었는데 이는 예수의 처형 다음날이 유대교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였다.[27] 이들에 대한 법정 최고형은 참수형이었다. 사도 바울로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것이 바로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이다.[28] 물론 네로처럼 대중에게 보여주고 방화죄를 뒤집어 씌울 겸 당시 로마에 살던 속주민 출신 기독교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네로 자체가 로마 역사상 극히 드문, 비정상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었다.[29] 고대 로마 시대에 해면의 용도는 휴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로마 병사의 행위는 모욕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휴지가 화장실에서만 쓰이지는 않듯이, 이 당시의 해면도 볼일을 본 뒤 닦는 용도뿐만은 아니었다. 로마 군인들도 해면을 두 개 소지하고서는 작전 등으로 인해 주둔지 밖으로 나갈 경우 깨끗한 해면을 이용해 물을 마셨는데, 이는 해면은 압축해서 들고 다닐 수도 있기에 공간 차지가 적고, 컵과는 달리 깨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30] 요한 복음서에서는 창으로 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유명한 롱기누스의 성창이 이때 쓰인 창이다.[31] 부활 영화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시체들을 처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의 버리다시피 하는데 시체를 처리하는 병사들이 시체의 썩는 냄새 때문인지 구역질을 해댄다.[32]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을 때 빌라도가 흔쾌히 시체를 내어주었는데 본래 십자가형을 받는 사형수는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빌라도는 죽이는 걸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죽인 예수의 시체를 도의적인 차원에서 예외로 장례를 허용해준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33] 로마 군법에는 더 상위의 처형이 하나 더 있었는데, 군단의 10% 인원을 무작위로 뽑으면 남은 동료들이 직접 때려죽이게 해서 집단 처형하는 1/10형(decimatio)이 그것이다. 워낙 악명높았기 때문에 학살을 의미하는 단어 'Decimate'의 유래가 됐다. 제노사이드보다 조금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인다.[34] 전자가 교회 라틴어, 후자는 로마 제국 당시 라틴어(즉 고전 라틴어) 발음.[35] 아킬레스건에 가까운 방향.[36] 요한 복음서 20장 27절.[37] 해당 언어들에서 손이라는 단어는 팔 전체를 가리키고, 발은 다리를 넘어 사타구니까지 포함한다.[38] 애시당초 개혁주의 개신교에서 성상을 꺼리는 이유에는 단순히 '비성경적이다', '우상숭배다' 외에 묘사된 성상들이 하나같이 재현 오류 투성이라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39] NGC 예수 이전 메시아의 부활.[40] 대부분 속옷 비슷한 걸 입힌 십자가상이나 그림이 많지만 반대로 현실대로 다 벗겨놓은 그림이나 십자가상도 있는 편이다. 구글에 검색하면 나온다. 물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정말 그대로 다 벗겨서 처형하는 장면이 나오는 건 몬트리올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정도. 대부분 영화에서는 속옷 비슷한 걸 입고 있다. 이유는 알몸 표현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 터부시되고 그림은 몰라도 영화 제작에서 이렇게 알몸 표현을 하면 성(性) 관련 심의규정 등 여러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해서 편의상 입힌다고 보면 된다.[41] 정확히는 좌우 옆구리에서 창을 찔러넣어 어깨로 관통하게 찔렀다. 이 때문에 일본 책형의 경우 애초에 죄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나 방식이 십자가형과는 전혀 다르므로 완전히 동일시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사실상 창을 이용한 자살(刺殺)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42]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의 가톨릭 성당에 있는 십자고상 중에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형(책형)에 처해진 전근대 일본 가톨릭 신자의 모습을 한 게 많다. 그리고, 바울로는 십자가형이 아닌 참수형을 받게 되자 십자가형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고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는 것도 송구스러워하면서 역십자형으로 순교했다고 전승된다.[43] 여자의 하의를 벗긴 후에 등을 묶어 매달아서 삼각목마형 고문도구에 태우는 것이다. 문제는 목마의 안장이 그야말로 칼날 그 자체라는 것. 그걸로도 부족하면 발목에 무거운 추를 매단다. 스페인 마녀재판에 주로 사용되었고, 역시 에도 시대 천주교 박해 때도 이용되었다.[44] 잔 다르크가 당한 것 같은 방식과는 달랐다. 당시 일본의 화형은 여성과 남성을 불문하고 전라로 만들어 기름을 붓고 기름에 절은 도롱이까지 입혀서 광장에서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다.[45] 슬로바키아자유 프랑스 국기에 그려져 있는 로렌 십자와 비슷한 것.[46] 실제로 이 문화는 문경 십자가 시신 사건 발생되기 훨씬 이전에 한국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에 해당 사건의 당사자가 이 방송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필리핀 현지인들도 어떻게 혼자서 할 수 있냐는 등의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한다.[47] 심지어 테마곡 또한 '산제물의 역책형'.[48] 조피,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울트라맨 잭.[스포일러] 아라가키는 이미 죽었거나 의식불명 상태로 이탈한 시점이다.[50] 애초 로마가 모티브인 집단이다, 다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을 만큼 강한 이들은 참수형으로 고통 없이 끝내준다.[51]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다르다.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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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라는 단어를 한글성경에서 검색하면 신약에서만 72구절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16
마가복음 12
누가복음 8
요한복음 11
사도행전 2
로마서 1
고린도전서 6
고린도후서 1
갈라디아서 6
에베소서 1
빌립보서 2
골로새서 3
히브리서 2
요한계시록 1
_________________ 72구절

예수님께서 십자가형(十字架 刑)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형은 인간이 지닌 잔인성과 가학성,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형벌이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은 인권이 무시된 채 길가에서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다.

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참혹하고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셔야 했을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해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형의 잔인성

십자가형은 사거리, 극장, 언덕 등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서 집행됐다. 이는 로마제국이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어 국가를 향한 반란심이나 저항 의지를 초석부터 꺾기 위함이었다. 죄수는 대중 앞에서 십자가에 나체 상태로 매달려 처형당했다. 이러한 처형 방식은 죄수에게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수치심까지 안겨주었다.

일단 십자가형이 선고된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직접 지고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의 질타를 받고, 십자가에 달린 이후에도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배고픔, 목마름, 수치심을 겪는다. 그러나 목숨이 끊기기 전까지는 절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다.

십자가형은 그리스어로 ‘Stauros’라 한다. 사람을 매달 수 있는 말뚝을 의미하는데, 집행 방법은 찌르기, 매달기, 묶기, 못 박기 등 다양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형틀은 기둥 모양이나, ‘T’자 모양, ‘十’자 모양이 보편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7피트(약 2m) 정도 높이의 십자가에 달리셨다. 실제 예수님을 못 박을 때 쓴 못의 길이는 5~7인치(약 12~17cm)인데, 못이 박힐 때 느껴지는 고통은 팔굽뼈의 신경을 잡고 펜치로 비틀어 뭉갤 때의 강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죄수들은 보통 9시간에서 2~3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런데 성경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예수님은 이미 생명이 위독하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 이전 태형(채찍형)을 받으셨다. 로마의 태형은 매우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다. 이 형벌에는 ‘아홉 꼬리 고양이’라는 이름의 채찍이 사용되었다. 총 39가닥의 줄로 이루어진 채찍 끝에는 동물의 뼈, 쇠구슬, 유리조각 등이 박혀 있어, 한 번만 채찍질을 가해도 죄수는 치명상을 입었다. 로마 군병들은 이 채찍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기 위해 처형 전 미리 채찍 가죽을 물에 불려 놓았다고 전해진다. 고대에는 이 형벌을 받다가 쇼크사로 즉사한 사례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장시간 동안 채찍질을 받으셨다. 군병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묵직한 채찍은 예수님의 어깨, 팔, 가슴, 복부, 등,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 등 전신에 깊숙이 박혔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의 잔인함에 대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은 밖으로 드러나고, 근육과 근골, 창자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후에도 인간이 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견디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해 연구하는 의학자들은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극심한 호흡곤란과 혈액순환 장애를 겪었을 것’이라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뤼네발트의 작품 <십자가형>, 1515년∙유화∙운터린덴 미술관

대한민국의 한 법의학자는 그뤼네발트의 작품 <십자가형>이 예수님의 고통을 잘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슴 밑 부분이 잘록하게 파여 들어가고 흉벽에는 늑골 모양이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호흡곤란이 오다 지쳐서 탈진상태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못이 박힌 손바닥 부위를 보면 손가락은 부채 살처럼 퍼져 있는데 이것은 손바닥에 못이 박힐 때의 아픔 때문에 손목과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을 때 보이는 모양이다. 발 부위는 두 발이 겹쳐 못이 박혔으며 발가락의 인대들이 줄무늬처럼 일어선 것 역시 아픔 때문에 일어나는 발가락의 경련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예수님께서 선고받았던 십자가형의 의미

예수님께서 선고받으신 십자가형은 그 당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그야말로 저주의 상징이었다. 십자가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저주받은 나무로 여겨졌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십자가형을 받은 이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므로, 그 시체를 밤새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2~23)

유대인들은 흉악한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중죄인을 처형한 후 나무 위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 매달려 죽은 자를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 칭했다. 그러한 십자가형을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이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런 끔찍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시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마태복음 14:14~21),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요한복음 2:1~10) 등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정작 십자가 앞에서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잠잠한 양처럼 고난을 감내하셨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당신을 호위하게 할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신을 위한 이적과 기사를 보이셔야 할 때 그리하지 않으셨다(마태복음 26:5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성경은 우리 인류가 지은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 죄는 하늘에서 지은 죄를 의미한다. 즉 인류는 하늘에서 지은 죄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인생을 가리켜 ‘하늘에서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하셨다(누가복음 19:10, 마태복음 9:13). 공교롭게도 우리가 지은 죄는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영혼의 심판과 죽음까지 치러야 비로소 씻어낼 수 있다(요한계시록 20:11~15, 마태복음 10:28). 그렇다면 인류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셨다(요한복음 1:29).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증거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우리가 겪어야 했을 사망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심으로 인류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묵묵히 당하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크고 지극하신 사랑에 우리가 어찌 보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새 언약 유월절

전 세계 모든 기독교는 교파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인류 구원을 위한 가장 큰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한다며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세우고 섬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작 예수님께서 그 희생을 담아 세우신 구원의 약속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신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이 유월절 지키기를 원하고 원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새 언약의 유월절을 세우시고 전해주시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새 언약 유월절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써 세워졌으며, 그 처절한 희생의 대가로 우리에게 허락된 진리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인류의 사망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붙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5, 19~20)












백발



백발 / 성서공회 검색 결과 9구절

1. [신명기 32:25]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

2. [열왕기상 2: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3. [열왕기상 2:9]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4. [역대하 36: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5. [욥기 41:32]
자기 뒤에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6. [잠언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7. [잠언 20: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8. [이사야 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9. [호세아 7:9]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센 머리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생명나무


한글 개역 성경에서 "생명나무"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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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잠언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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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창세기 3:22-24)

22. 여호화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일반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하여는 많이 들어 보았지만 이 생명나무에 관하여는 잘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또한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창세기 2:9 말씀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시므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도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지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임을 만든다든가 또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나무보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현재는 더 유명하다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나무의 공통점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창세기 3: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하셨으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무슨 지혜였는가 하면 본문 말씀 창세기 3:22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하심과 같이 뱀이 여자에게 알려준 사실대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봐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간접적인 동기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 두 나무가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었고 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것이 같았는데 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 먹지 말라고 명령을 하셨는가?

만약에 한, 두 살 된 어린 아이 앞에 사탕과 사탕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둔다면 아이는 그것을 입에 넣어보고 입에 단 사탕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달지도 않고 또 그 다이아몬드의 값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에게 사탕과 다이아몬드를 내 놓는다면 무엇을 가지겠습니까?
다이아몬드겠지요. 그 다이아몬드의 값어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로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된 후에라야 생명나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아니하시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판단한 사실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또 그 결과도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잠언서 3:15부터 말씀을 보시면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하시므로 이 생명나무 또한 지혜의 나무인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24부터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5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하셨으니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므로 영생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4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하심과 같이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계시록 22:19 말씀에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하시므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릴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제한다’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뺀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에 계시록이 있으면서 모르는 것과 또는 계시록을 떼어 버리고 모르는 것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한다’는 뜻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않는다’것은 ‘예언의 말씀을 안다’는 뜻인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여 생명나무로 나아가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 수 있겠지요. 계시록 2:7에 보시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하셨으니 예언의 말씀을 제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기는 자로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하시므로 이긴 자이십니다. 이기는 자는

요한일서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이기는 자인 것을 믿습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요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다 하였는데 죽은 영혼에게는 장수와 부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장수와 부귀는 살아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지혜로 장수와 부귀를 얻을 자들은 마태복음 24:21부터 말씀에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하심과 같이 전무후무한 환난의 때에도 택하신 자들로 육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전무후무한 환난의 때에 육체의 구원을 얻은 자들은

고린도전서
15:51-54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이니요 마지말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홀연변화를 받아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어 영생으로 옮기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는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움을 가리게 되며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무리와 같이 되는 지혜로 생명나무를 발견하게 될 것이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는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나무 실체는 무엇인가? 창세기와 요한복음 증언

창세기의 ‘생명과’의 실체는?

생명나무(히브리어: עֵ֥ץ הַֽחַיִּֽים)는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특별한 나무다.
성경에는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젊음과 생명의 영속을 바라는 인류에게 있어,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생명나무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

생명나무 열매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처음 거론되었다.
먹으면 죽음에 이르는 선악과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마음껏 따 먹도록 허락하셨다.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금하시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어버렸다(창세기 3:4~6).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에서 살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 그가 생명 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시고 ···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여 ···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 천사들을 배치하여 ···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현대인의성경 창세기 3:22~24)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쫓아내신 후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을 에덴동산 동편에 배치하여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셨다.

죄인으로서 생명나무에 손을 댄다면 화염검에 죽임을 당했다. 이때부터 생명과를 원해도 먹을 수 없게 된 아담은 죽음의 고통에서 신음하다 결국 930세에 삶을 마쳤다(창세기 5:5). 만약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막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고 영생을 누렸을 것이다. 생명과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의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곤고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로마서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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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에 가는 방법을 깨달은 아벨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잃고 한탄하던 아담에게 그것을 다시 먹을 수 있는 진리를 보여주셨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히브리서 11:4, 13)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두 아들 곧 가인과 아벨에게 증거하였다(히브리서 11:4). 그러나 가인은 그것을 거부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농산물로 제사했고, 아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를 흘려 제사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3~5)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신 이유는 어린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으면 결단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히브리서 9:22). 즉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할 때는 반드시 피 흘림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아벨은 이 진리를 깨닫고 어린양의 피로 제사한 것이며, 이는 곧 선악과의 죄에서 풀려나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짐승의 피로 제사하는 제도는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되어 노아, 아브라함 시대를 넘어 모세 때까지 전승되었고(창세기 8:20~22, 12:7, 15:9), 모세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규례의 제도로 성문화되었다.

구약시대 제사가 이루어진 장소는 성소였다. 앞 칸 성소와 뒤 칸 지성소로 나뉜다. 흥미로운 점은 에덴동산의 그룹 천사가 생명나무를 지켰던 것처럼, 지성소에 있는 두 그룹 천사가 법궤 즉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금을 두들겨 두 그룹 천사의 모양을 만들어 궤 뚜껑 양쪽 끝에 각각 하나씩 세워라. ··· 그 그룹 천사들은 날개를 위로 펴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여 서로 마주 보게 하라. 그리고 두 돌판(십계명)을 궤 안에 넣고 ···

(현대인의성경 출애굽기 25:18~21)

하나님께서 법궤가 있는 속죄소 양편에 두 그룹 천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영생에 들어가는 생명과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십계명은 아담과 하와가 따 먹던 생명과 대신에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9:16~17).

그렇다면 지성소 안의 십계명은 의인이 아닌 죄인이 마음대로 만질 수 있었을까? B.C. 1500년경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 벧세메스 사람들, 웃사 등은 부정한 손으로 법궤를 만지다가 불에 휩싸여 죽임을 당했다(민수기 18:3, 레위기 10:1~2, 사무엘상 6:19, 사무엘하 6:6~7). 죄인의 몸으로 법궤 곁에 가까이 가거나 만지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나무를 지키던 두 그룹 천사가 화염검을 가졌던 것처럼, 지성소 안의 법궤를 지키는 두 그룹 천사도 화염검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갈까?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있는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공동번역 히브리서 10:19~20)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것이다. 구약시대 대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의 피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레위기 16:1~34, 히브리서 9:18~28),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가 생명나무 열매를 받게 될 것을 그림자로 보이신 것이다(히브리서 6:19~20, 로마서 3:22~25, 8:3~4). 즉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이라도, 유명한 목사라도, 내로라하는 신학박사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지 않고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6:48~57).

문제는 예수님의 피를 어떻게 힘입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지 믿기만 하면 될 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구체적 방법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직접 그 해답을 알려주셨다.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성력 1월 14일 저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즉 유월절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다. 주목할 점은 이날 먹는 떡을 가리켜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내 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당신의 희생의 피로 한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 새 언약인 것이다. 즉 유월절 떡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이고, 유월절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것이다(누가복음 22:14~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내 살(유월절 떡)을 먹고 내 피(유월절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 6:53~57)

결국 인류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방법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다. 이를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세상 끝날까지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힘입어 지성소에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고린도전서 11:23~26).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생명나무 열매의 비밀. 먹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그것의 실체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새 언약 유월절이다.

생명과를 먹는 진리인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믿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기와 규례를 ‘준행’할 때야 비로소 ‘살 길’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다(에스겔 20:11, 18:9, 레위기 18:4~5).

아담으로 시작하여 모든 인류가 바라던 ‘영생’이라는 선물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선물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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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עץ החיים 에츠 하솨임 Etz haChayim),
명의 나무
, 생명수(生命樹)는 창세기에 나오는 어구이며, 야훼에덴 동산 한가운데에 심은, 불로장생과 같은 영원한 삶을 주는 열매를 지닌 나무를 가리킨다.
야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다. (창세기 2장 9절)
그러나 일부 학자에 따르면 같은 나무에 두 가지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설도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용어 둘 다 세계수의 형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고대 히브리어: עֵ֕ץ הַדַּ֖עַת ט֥וֹב וָרָֽע ʿêṣ had-daʿaṯ ṭōwḇ wā-rā, 영어: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창조 신화의 한 종류인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는 나무이다.[1]야훼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아담에게 이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직접 명령하였다. 이와 비슷한 나무인 생명나무 또한 동산에 있었다. 그 뒤 이러한 금기를 알고 있는 하와에게 뱀이 접근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난 열매인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였다.[2] 뱀은 하와에게 이 과실을 먹으면 현명하게 될 것이라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담과 하와는 그 금단의 열매를 먹고 그들이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3] 야훼는 그들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음을 알고 이들을 동산 밖으로 쫓아내어 그들에게 불로장생을 안겨줄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였다. 야훼는 뱀과 땅에 저주를 내려 아담이 농업으로 수고하여야 살아남을 것이라 하였고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심히 늘린 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동산 동쪽에 케루빔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4]

이름의 의미

선악에 대한 지식을 알도록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은 자에 대한 논의는 가장 먼저 앤토니 버제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어거스틴 이후로 어떤 영향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고, 아담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것으로 결국 선과 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았다. 또한 단순히 사건만으로는 의미를 모두 알 수 없고, 하느님의 신적 작정과 지정이 하느님이 지정했던 것보다 아담이 알지못하도록 제한을 갖도록 하였다고 밝혔다.



선악과(善惡果, 영어: forbidden fruit)는 창세기에 나오는 열매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이다.[1] 하느님이 아담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유일한 열매이기도 하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에덴 동산에서 이 과실을 따먹었다고 기록되었다.

성경의 기록

16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 공동번역 개정판, 창세기 2장 16-17절

정체

창세기에는 금지된 열매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고있지 않다. 본문에 사용된 열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페리(פֶּ֫רִי)'이다. 이 열매의 모양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여러 후보가 제기되어왔는데, 사과, 포도, 석류,[2] 무화과,[3]케럽,[2]시트론,[2], 마르멜루(모과), 버섯이 후보로 제기되어왔다. 위경에녹서타마린드 나무에 포도를 닮은 열매가 매우 아름답게 열렸으며, 그 향기가 엄청나게 멀리까지 퍼져나갔다고 서술한다.[4] 이슬람교에서는 포도나 밀로 묘사한다.[5]

사과

사과는 다양한 종교들에서 신비적이고 금지된 과일로 여겨진다. 일반적인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와아담을 유혹하여 함께 나누어 먹은 과일이 사과라고 본다. 라틴어에서 사과(라틴어: malus)와 악(라틴어: malum)을 뜻하는 단어가 유사한 까닭에 이러한 해석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의 목에 있는 후두가 영어로 "Adam's apple"이라고 불리는 것도 아담의 목에 걸려 있는 선악과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사과의 유혹적인 빛깔, 양면성을 지는 맛(달콤하고 신), 여성을 암시하는 중심의 생김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과를 가로로 잘랐을 때 중심의 별의 모양이 바로 선악과나무에서 자랐을 열매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해석하였다.[6]

또한 지금의 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접하는 국경을 기준으로 그 남쪽에서는 포도를 숭배한 반면 북쪽에서는 포도가 잘 자라지 못하는 까닭에 사과를 숭배하였다. 그래서 그곳의 성직자들 및 드루이드들은 의식을 거행할 때 포도주 대신에 사과주를 이용한 것으로 본다. 이들은 심지어 천국을 아발론(Avalon) 즉 사과의 섬이라고 부르면서 그곳엔 사과 착즙기 같은 것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켈트족은 자신들의 신앙인 드루이드교와 기독교를 합하여 기독교의 한 분파인 켈트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4세기 경에 이르면서 로마 가톨릭과 심각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470년경, 로마 가톨릭은 켈트 기독교의 그 성스러운 과일을 선악과의 전형으로 삼기 시작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고 본다.[7]

이슬람 종교는 경전 쿠란에서 아담과 하와의 열매에 대해 얘기하는 구절에서 사과라는 명칭은 없고 선악과로만 표시되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생명나무란 무엇인가요?

생명나무는 성경의 시작과 끝에 모두 등장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생명나무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의도하신 생명의 충만함을 상징하며 성경의 서사를 마무리합니다.

생명나무는 창세기에서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서 있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아담과 이브가 있던 낙원의 중심 요소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한 온갖 나무가 땅에서 자라게 하셨어요.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창세기 2:9). 이 나무는 영생과 하나님의 공급의 상징입니다. 타락하기 전 인류가 접근할 수 있었던 이 나무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타락 이후 인류는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죄의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않도록 그룹과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기 3:22-24). 이 행위는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인류가 깨어진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구원을 기다릴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나무는 생명수 강 양쪽에 서서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열방을 치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때 천사가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큰 성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었고, 매달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사귀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1-2).

따라서 생명나무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공급,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약속을 상징하는 강력한 성경적 상징입니다. 신성한 은혜에 뿌리를 둔 생명나무는 신과 인간 사이의 조화 회복을 상징하며,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가족들이 종종 크리스마스 트리 주위에 모여 축하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생명나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물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계절의 전통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신자들을 위해 다음을 살펴보세요. 크리스마스 트리에 관한 성경 구절 는 이러한 상징의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며, 창조물과의 영원한 친교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The 성경에서 나무의 상징성 는 하늘과 땅을 잇는 궁극적인 다리가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듯이 희생, 구속, 신성한 연결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나무와 나무의 의미를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분의 구속 계획에서 발견되는 희망을 묵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서 처음 등장하며 영생과 하나님의 공급을 상징합니다.
  • 타락 이후, 인류는 죄의 상태에서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낙원과 영생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상징입니다. 인류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설정하신 경계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도덕법과 선악에 대한 지식을 구현합니다. 이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이 금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에 대한 순종과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이브는 창조주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그들은 죄의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서 추방당했습니다(창세기 3:22-24).

두 나무의 관계는 인간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강조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고,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었고, 이는 죄로 인해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실했음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회복의 희망은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일부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이에게 제공하는 궁극적인 치유와 영생을 의미합니다.

요약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도덕적 경계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시험을 상징합니다.
  • 생명나무는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 지식의 나무와 관련된 불순종으로 인해 생명 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영생을 약속하는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을 회복시켜 줍니다.

기독교 교파마다 생명나무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교단은 각 교단의 고유한 교리적 강조점과 전통을 반영하여 다양한 신학적 렌즈를 통해 생명나무를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성경에 뿌리를 둔 공통적인 요소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톨릭 해석: 가톨릭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종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제공하는 새로운 생명나무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연관성은 십자가가 생명과 치유의 원천으로 묘사되는 가톨릭 전례와 예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여 영생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가르칩니다.

정통 해석: 동방 정교회도 마찬가지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정교회 전통은 생명나무의 신비적이고 성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성찬례와 연관시킵니다. 성체성사는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과의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교회 도상학에서 십자가는 종종 생명나무를 모티브로 하여 그리스도의 희생과 영생의 약속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개신교 통역: 생명나무에 대한 개신교의 해석은 교파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영생과 신의 공급에 대한 상징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개신교 전통은 생명나무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통해 성취된 약속으로 간주하여 구속의 내러티브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생명나무를 영생에 이르는 길을 회복시켜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간주합니다.

복음주의적 해석: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구원의 개인적 측면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영생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는 종종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생명을 주는 관계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믿음과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지만, 모두 생명나무를 하나님의 공급, 영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소망을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약

  • 가톨릭: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십자가의 예표로 여겨집니다.
  • 정통: 생명나무와 성체성사, 그리고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연결합니다.
  • 개신교: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생과 신성한 공급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 복음주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한 영생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생명나무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생명나무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글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성경과 생명나무의 신학적 함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종종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제공되는 구원과 영생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자신과 연결시켰습니다. 성경의 유형학에 깊이 뿌리를 둔 이 이미지는 역사 전반에 걸쳐 기독교 전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성경적 기원 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성찰을 통해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성 이레네우스: 성 이레네우스는 그의 저서 "이단에 대하여"에서 생명나무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을 주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잃어버린 생명나무에 다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생명나무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한 약속으로 보았습니다.

세인트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특히 "하나님의 도성"에서 생명나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생명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생명나무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영생과 썩지 않는 생명을 상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생명나무를 지식의 나무와 대조하여 불순종의 결과와 구원의 희망을 강조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설득력 있는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맥락에서 생명나무를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신자들이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설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변혁적 힘을 강조했습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 니사의 성 그레고리는 생명나무의 신비로운 차원을 탐구하며 이를 신을 향한 영혼의 여정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는 생명나무를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오는 영적 영양과 성장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레고리는 신성한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상승과 새로운 창조의 종말론적 현실에서 이 여정의 궁극적 성취를 강조했습니다.

교부들의 글은 생명나무를 영생, 신성한 지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상징으로 종합적으로 강조합니다. 교부들의 해석은 이 성서적 상징과 기독교 신앙 및 신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해줍니다.

요약

  • 성 이레네우스: 생명나무 보기

그리스도와 영생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 세인트 어거스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지혜와 썩지 않는 것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톰: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했습니다.
  • 니사의 성 그레고리: 영혼의 영적 여정 및 하나님과의 연합과 연관시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영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며, 낙원의 회복과 하나님과 인류의 궁극적인 화해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는 새 예루살렘의 맥락에서 생명나무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성의 큰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었고, 매달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은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이 생생한 이미지는 종말론적 비전에서 생명나무의 몇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1. 영원한 생명: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매달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는 이 생명의 풍요로움과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2. 치유 및 복원: 생명나무의 잎은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물의 완전한 회복과 치유를 나타냅니다. 이는 온전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충만함을 반영합니다.
  3. 신성한 섭리: 생명수 강가에 위치한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흐르는 강은 이 생명의 근원이 신성하고 영원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4.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옷을 빨고 그 문을 통해 성에 들어간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2:14).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과 인류의 회복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의 역할은 영생, 신성한 치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요약합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요약

  •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영생과 신성한 공급을 상징합니다.
  • 이 잎은 회복을 의미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강조합니다.
  • 생명나무에 접근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생명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계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자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생명나무'라고도 불리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로서의 십자가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영생과 하나님과의 친교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신학적 고찰에서는 기독교에서 나무의 상징성과 다음과 같은 문화적 전통을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이교도의 기원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이러한 변형적 혼합은 하나님의 구속 내러티브가 어떻게 문화적 상징을 그분의 더 큰 목적을 향해 재조정할 수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상징적 유사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궁극적인 치유와 영생을 제공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나무로 여겨집니다. 이 연관성은 초기 기독교 문헌과 전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수난 대축일 미사 서문은 "인류의 구원을 십자가 나무에 두셨으니 이는 죽음이 왔으면 거기서 생명도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나무로 정복한 자도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무로 정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속적 중요성: 에덴의 생명나무가 영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듯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영생을 위한 수단을 제공합니다. 성 베드로는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그 나무에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나음을 받았습니다."(베드로전서 2:24). 따라서 십자가는 영적 치유와 영생의 원천이 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견해: 성 어거스틴과 성 이레네우스와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은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자주 비유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통해 지식의 나무의 저주가 역전되어 죽음 대신 생명을 가져왔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십자가가 생명나무의 약속을 성취하여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술과 도상학: 기독교 예술은 종종 십자가를 잎과 열매로 장식된 생명나무로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명을 주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 이미지는 신학적 연관성을 강화하고 십자가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이미지는 십자가와 생명나무가 처음 등장한 에덴동산을 유사하게 표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구속과 영생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상징과 그 의미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은 크리스마스트리는 종종 이 아이디어를 반영하여 새 생명, 희망,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기독교 예술은 이러한 시각적 요소를 결합하여 창조, 구원, 영생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심오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와 다른 생명을 긍정하는 상징 사이의 유사점을 이끌어내어 영적 울림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이 이미지와 크리스마스 트리의 역사는 모두 생명, 희망, 쇄신을 상징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시각적, 상징적 전통은 서로 어우러져 신자들이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심오한 방식을 형성해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나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자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한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요약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징적으로 새로운 생명나무라고 불립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치유와 영생을 주셨습니다.
  • 초대 교회 교부들은 십자가와 생명나무를 유사하게 묘사했습니다.
  • 기독교 미술은 십자가를 생명나무로 묘사하여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생명나무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나무는 풍부한 상징과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 현대 크리스천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급, 구원의 희망, 영생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 서 있던 생명나무가 영생을 제공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더라도 영생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2.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은혜를 통해 우리를 지탱해 주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고 우리의 생명과 힘의 원천이신 그분을 찾도록 격려받습니다.
  3. 회복과 치유: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열방의 치유를 위한 잎사귀를 맺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요한계시록 22:2). 이것은 회복과 치유라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반영하여 세상에서 치유와 화해의 주체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4. 순종과 신실함: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죄의 결과와 회개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5. 미래에 대한 희망: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나무가 궁극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와 더 이상 고통이나 아픔이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 비전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충실히 살아가도록 영감을 줍니다.

이러한 교훈을 묵상함으로써 현대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신앙을 더욱 온전히 실천하며, 성경의 약속에서 격려와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을 상징합니다.
  • 이는 하나님의 공급과 생계를 상징합니다.
  • 회복과 치유라는 주제는 우리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생명나무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제공합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어떻게 이해되나요?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성경적 토대와 구속의 이야기에서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이해됩니다.

  1.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진정한 생명나무로 간주됩니다. 이 해석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2. 성례전 신학: 성례전 신학에서 생명나무는 종종 성례전, 특히 성체성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찬은 영생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이 견해는 교회에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임재와 성례를 통한 신자의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강조합니다.
  3. 종말론적 관점: 종말론적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회복과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관점은 영생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를 강조합니다.
  4. 윤리적 및 도덕적 의미: 현대 신학은 또한 생명나무의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생명나무는 정의, 평화, 사랑 등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생명나무는 크리스천들이 행동과 성품을 통해 삶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릅니다.
  5. 생태 신학: 최근 몇 년 동안 생명나무는 생태 신학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관점은 모든 피조물의 상호 연결성과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위해 의도하신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환경 보호에 참여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요약

  •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에서는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봅니다.
  • 성사 신학에서는 성찬을 성체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는 영양분과 연관시킵니다.
  • 종말론적 관점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회복과 성취에 초점을 맞춥니다.
  • 윤리적, 도덕적 함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
  • 생태 신학은 모든 생명체의 상호 연결성과 피조물을 돌봐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생명나무에 대한 오해와 오해는 생명나무의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은 몇 가지 일반적인 오해와 해명입니다:

  1. 그리고 생명의 나무 마법의 물건으로: 어떤 사람들은 생명나무를 내재적인 힘을 가진 마법의 물건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공급과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불멸의 마법의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2. 동일하게 생명의 나무 를 사용하여 지식의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같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닌 별개의 나무입니다. 지식의 나무는 신이 정한 경계와 도덕법을 상징하는 반면 생명나무는 영생과 신의 공급을 상징합니다.
  3. 구약 성경으로 제한: 어떤 사람들은 생명나무가 구약의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와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에 대한 약속을 상징합니다.
  4. 심볼을 지나치게 영성화하기: 생명나무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를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상징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5. 기독교 예술과 전례에서의 역할 무시하기: 생명나무는 기독교 예술에서 종종 묘사되고 전례에서 언급되며 그리스도와 영생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무시하면 이 성경적 상징의 풍부한 시각적, 문화적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마법의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의 상징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는 구별됩니다.
  • 생명나무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모두 등장합니다.
  • 상징적인 의미와 실질적인 의미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 기독교 예술과 전례에서는 생명나무를 풍부하게 묘사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전통, 그리고 풍부한 신학적 유산을 통해 생명나무를 바라봅니다. 교회는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생명나무의 상징적이고 구속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1. 성경적 기초: 가톨릭 교회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지지합니다. 생명나무는 영생의 상징이자 인류가 그분과 교제하며 살기 위한 하나님의 원래 설계로 인정합니다. 교회는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이 죄로 인해 상실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었다고 가르칩니다.
  2. 기독론적 중요성: 교회는 생명나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영생의 원천이며,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나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자들은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원한 생명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3. 성례전 신학: 교회는 또한 생명나무가 성사, 특히 성체성사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영적인 영양과 영생의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영생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4. 종말론에서의 역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생명나무가 약속하는 영생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날을 고대합니다.
  5. 패트리스틱 인사이트: 성 어거스틴과 성 이레네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저술은 생명나무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초기 신학자들은 생명나무를 신성한 지혜, 영생,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으로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더욱 풍성해졌고, 성사 신학 및 종말론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요약

  • 가톨릭 교회는 생명나무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원래 설계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구속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 성찬은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생명나무는 새로운 것에 대한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의 일부입니다.

생성.

  • 패트리스트의 통찰은 신성한 지혜와 구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의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특히 칼 융의 분석 심리학의 렌즈를 통한 생명나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신학적 관점을 보완하는 상징적 이해를 제공합니다. 융은 성경의 상징을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원형의 표현으로 보고 인간의 정신과 영적 발달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1. 온전함의 원형: 융은 생명나무를 온전함과 통합의 원형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는 정신의 의식적, 무의식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융 심리학의 중심 원형인 자아를 상징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람이 심리적 온전함을 얻기 위해 성격의 여러 부분을 통합하는 개별화 과정을 상징합니다.
  2. 변화의 상징: 생명나무는 변화와 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개인은 심리적, 영적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분열된 상태에서 보다 통합되고 조화로운 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3. 신과의 연결: 융은 생명나무를 개인과 신 사이의 연결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생명나무는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영적 여정을 의미하며, 융은 이를 내면의 신성한 이미지와 동일시했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는 영적 깨달음과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탐구를 상징합니다.
  4. 치유와 리뉴얼: 융 심리학에서 생명나무는 치유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심리적, 영적 치유를 촉진하는 정신의 일부인 '내적 치유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잎사귀를 제공하는 생명나무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요한계시록 22:2).
  5. 반대되는 것의 균형 맞추기: 생명나무는 빛과 어둠, 의식과 무의식, 남성과 여성과 같은 상반된 것들의 균형을 잡는다는 개념을 구현합니다. 이러한 균형은 심리적 온전함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융은 진정한 개인화를 위해서는 자아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용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심리적 렌즈를 통해 생명나무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그 상징적 의미와 개인의 성장 및 영적 발달과의 관련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약

  • 생명나무는 온전함과 통합의 원형입니다.
  • 심리적, 영적 변화를 상징합니다.
  • 개인과 신 사이의 연결을 나타냅니다.
  • 치유, 쇄신, "내면의 치유자"를 상징합니다.
  • 개성을 표현하는 데 필수적인 상반된 요소의 균형을 구현합니다.

사실 및 통계

  1. 성경 참조: 생명나무는 성경의 세 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잠언, 요한계시록입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처음 등장하고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2. 예술의 상징주의: 생명나무는 기독교 예술과 도상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티브로, 영생과 신성한 축복을 상징하는 열매를 맺는 무성한 나무로 묘사되곤 합니다.
  3. 로 교차 생명의 나무: 기독교 전통,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 전례에서 십자가는 종종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강조하며 생명나무라고 불립니다.
  4. 에큐메니칼 중요성: 생명나무는 에큐메니칼 대화에서 통일된 상징으로, 다양한 기독교 교파가 영생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5. 심리학 연구: 생명나무에 대한 융의 분석은 인간 정신의 깊은 원형적 주제를 반영하는 심리적 완전성과 통합의 상징으로서 생명나무의 역할을 탐구합니다.
  6. 문화적 영향: 생명나무는 유대교, 이슬람교,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 등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보편적인 매력과 심오한 상징성을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