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잠언 10구절 - 된 사람, 될 사람, 안 될 사람



된 사람, 될 사람, 안 될 사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된 사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

예를 들면 바울이란 젊은이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에 응답한 후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될 사람
될 사람은 하나님의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

예를 들면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는데 공교롭게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급하게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이전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잘못된 일을 행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제부터는 종이라고 하지 말고 동역자로 함께 섬기라고 부탁합니다.

세번째는 안 될 사람
안 될 사람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비뚤어진 사람

유월절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겨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는 순간 그 생각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 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된 사람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근본이란 히브리 단어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브레쉬트)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근본이란 곧 시작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호 궤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수 없다"

출발이 잘못되면 그 결과는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의 출발 즉 신앙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대학 시절 데칼트를 전공하셨던 최명관교수님으로부터 데칼트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에 3학점으로 전공 필수 과목이므로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기말 시험을 치루는데 칠판에 여러 문장을 적은 후에 강의실 밖으로 나가든지 도서관에 가든지 대학원생을 만나든지 시간 안에 답을 적어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아주 독특한 철학자이셨습니다.
학생들이 이번 시험 어떻게 출제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항상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런 성경구절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그 아래에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적었다고 합니다.
성적을 받았는데 저는 A학점입니다.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D학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당시 과대표로 있었기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나도 모르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철학이란 살아서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 60점은 받기 때문에 무슨 답을 적든지 기본은 받지만 솔직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이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재수강을 결심한 줄 아세요?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기 때문에 엉터리 답을 적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희생 할 수 있는 것
믿음은 맡길 수 있는 것
어떻게 맡길 수 있나요?
맡깁니다! 맡겼습니다!
이런 언어의 유희가 아닙니다.
온전히 맡기려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맡긴다는 히브리 단어 "야라"

יָרָה 스트롱번호3384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yârâh ]
구약 성경
81회 사용
1.
원형 던지다, 투표하다, 제비를 뽑다, 운명에 맡기다, 수18:6, 삼상20:36,37, 시11:2, 64:5(4), 민21:30.


관련 성경
☞던지다(출15:4, 욥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 네 짐(*,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근본(7225) 레쉬트() רֵאשִׁית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발음 [ rêʼshîyth ]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처음, 시작, 창1:1, 10:10, 렘28:1
    2. 명사, 여성 이전의 상태, 욥42:12, 이전의 때, 사46:10.
  • 3. 명사, 여성 처음 것, 첫 열매.
    [시간의 견지에서] 첫 열매, 창49:3,레2:12, 23:10, 신18:4, 26:10, 33:21, 잠8:22.
    [위엄의 견지에서] 첫째의, 주요한, 암6:1,6.

  • 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 3374)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경외(3374) 이르아() יִרְאָה 스트롱번호3374

1. 두려워함.  2. 두려움.  3. 존경
발음 [ yirʼâh ]
구약 성경  /  44회 사용
  • 1.  명사, 여성 두려워함, 무서워함, 신4:10, 5:26, 6:24, 10:12, 14:23, 삼하3:11, 느1:11
  • 2.  명사, 여성 두려움, 무서움, 공포, 신2:25, 욥4:6,시55:6(5), 사7:25, 욘1:10.
  • 3.  명사, 여성 존경, 경외, 경배, 욥28:28, 시2:11,5:8(7), 19:10(9), 34:12(11), 111:10,잠1:7, 사11:2.

문법설명 / 3373의 여성형
관련 성경  /  두려워함(창 20:11, 시 90:11, 욘 1:10), 경외함(출 20:20, 대하 19:9, 잠 16:6), 무서움(겔 1:18), 두려움(시 55:5, 겔 30:13).


‘된 사람’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 절은 잠언 전체의 주제성구로 종종 인용됩니다.
여기 ‘근본’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창조기사에서 ‘태초’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의 용례를 두루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경외는 인간 지성활동의 요체, 알파와 오메가”라는 식의 해석보다, 배움과 성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평이한 이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말씀에는 ‘인식론의 전제로서의 지식’ 같은 건조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없는 포괄적이고도 역동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식은 정보가 아니라 슬기로운 판단과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인격은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을 통해 빚어지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 사람’이지만 인격자는 ‘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된 사람’이 갖춘 ‘됨’의 상태가 잠언이 말하는 지식-분별-지혜의 인성을 표현하다면, 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그 과정의 출발점에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놓인다는 것이 여호와 신앙,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잠언이 지혜의 책이라는 말은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지혜를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구별하는 근본적 변별성이 바로 ‘하나님 경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으로, 우리 내면의 태도와 더불어 일상의 선택을 통해 표현하는 신앙적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은 잠언 1:7에 담긴 신앙선언문이 잠언 9:10에 변주되어 1~9장의 프레임을 이루며(“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마지막 장인 31장에서도 이상적인 여인상의 결론이자 잠언 전체를 마무리하는 핵심표현으로 ‘여호와 경외’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 시문은 주로 평행(병치)되는 두 시행을 함께 살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1:7 상반절의 하나님 경외가 하반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과 대비되는 데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어 ‘에빌’인데,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는 세 단어 중 가장 불량한 사람을 가리켜 쓰입니다.
즉 지력이 떨어지거나 지식이 없어서 실수하는 사람이 1단계, 반복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2단계라면, 아집과 교만에 빠져 가르침을 비웃는 상태에 있는 3단계 바보가 에빌입니다.

시편 1:1에도 복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행동들이 나오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악인→죄인→오만한 자로 점점 더 악화되는 인간군상 중 최종단계가 바로 '비웃는자' 레쯔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한 인격으로 발현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의 화신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인생은 반석 위에 세운 집, 불순종한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라 하셨습니다(마 7:24~2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된 인생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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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잠언 14:26-2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두 가지가 바뀐다. 
하나는 가치관이고 다른 하나는 우선순위이다. 

가치관이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하고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중에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치관이 분명하면서도 우선순위가 잘못된 경우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먼저 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과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야 좋은 것을 얻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전에 따라가던 것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전에 먼저 하던 일을 이제는 나중에 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여도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패역하게 행한다”라고 하는 것이 뜻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잘났든지 못났든지, 의로워 보이든지 악해 보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패역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외(敬畏)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따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시편 139:1-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쓴다.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생각하는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를 먼저 찾아가는가? 하나님이 자녀라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내가 하나님께 피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되기 때문이다. 시편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래서 믿고 의지했다가 실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해도 복을 주신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셋째,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쓰는 신앙이다.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시는 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넷째,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옳고 선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룩하고 선한 소원을 주실 때에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패역한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라. 내 뜻과 소원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라. 내 소원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거나 고집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복을 네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의뢰 즉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신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산성이요 피할 바위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뜨리려면 하나님을 넘어뜨려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복을 주신다. 

“26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으로 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심어주라.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생명의 샘물처럼 계속 주어진다.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어떤 경우라도 그 생명이 살게 해주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사사기 15장에 삼손이 블레셋 족속과 싸워 이긴 후에 너무 힘들고 지쳤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마른 땅에서 샘물을 내주셨다. 사사기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라도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셔서 얼마든지 먹고 마시고 소생하게 해주신다.

넷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27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망의 그물’이란 나를 얽어매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문제를 말한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어떤 사탄의 공격이나 환난이 와도 건져주신다. 꼼짝할 수 없는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사탄의 공격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시편 124: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이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해도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열려 있지 않고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가 중단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일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일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지 말라. 
오히려 더 기도에 힘쓰라. 
그러면 일하는데 지혜가 솟아나고 힘이 솟아나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에서의 일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그 사람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의 성취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믿음에 손해가 가게 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일이 좀 늦어지더라도,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되더라고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유지되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7이하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일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 

빌립보서 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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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와 복종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삶의 자세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며, 그중에서도 '경외'와 '복종'은 믿음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단순한 행위나 감정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가 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포함합니다.
본 서론에서는 경외와 복종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1. 경외의 의미 :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

'경외'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는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경외가 신앙생활의 시작점임을 강조합니다.
경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경외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복종의 의미 : 자기의 뜻을 버리고 올바른 권위와 요구를 따르는 것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권위나 요구에 따르는 것
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복종은 종종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치며, 경외와 복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복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의 관계에서 나타나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또한,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복종이 없는 경외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경외와 복종

경외와 복종은 성경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들입니다.
본론에서는 성경에서 경외와 복종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경외의 성경적 의미와 사례

1.1 경외의 정의 경외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에 기반한 존경심입니다.

1.2 구약에서의 경외 구약 성경에서는 경외가 하나님의 지혜와 연관되어 자주 언급됩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이 구절은 경외가 지혜의 시작점임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지혜로운 삶의 출발점임을 보여줍니다. 욥기 28장 28절: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이 구절은 경외가 단순히 두려움이 아니라, 악을 피하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명철과 연결됨을 보여줍니다.

1.3 신약에서의 경외 신약 성경에서도 경외는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느라." 이 구절은 초기 교회가 경외를 통해 성장하고 강화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경외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구절은 경외가 개인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2. 복종의 성경적 의미와 사례

2.1 복종의 정의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권위나 요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복종은 종종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되며,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2.2 구약에서의 복종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2장 2~3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언약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속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2.3 신약에서의 복종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종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돌아가심이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우리의 본보기가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구절은 가정 내에서의 복종을 강조하며, 복종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올바른 삶의 태도임을 가르칩니다.

3.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3.1 경외와 복종의 연관성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3.2 균형 잡힌 신앙생활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복종이 없는 경외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복종에만 집중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


1.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의미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함, 사랑, 희생을 깊이 인식하고, 그분을 존경하며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함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경외심을 품는 것입니다.

1.2 경외의 중요성 경외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진정한 순종과 헌신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2. 경외심을 기르는 방법 2.1 성경 묵상과 기도 성경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배우고, 그분을 더욱 경외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경외심을 강화해 줍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성경 말씀이 우리의 영적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2 찬양과 예배 찬양과 예배는 우리의 경외심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과 사랑을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분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시편 95편 6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구절은 경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3 공동체 생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해 줍니다. 서로의 신앙을 나누고 격려함으로써 우리는 경외심을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구절은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과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 경외의 삶을 통한 변화 3.1 성품의 변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 겸손, 사랑, 인내, 자비 등의 덕목을 실천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런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3.2 행동의 변화 경외심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 구절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3.3 관계의 변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은 우리의 대인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구절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의 본보기


1.1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과 사역 전반에 걸쳐 분명히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아버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보여줍니다.

1.2 기도와 경외 예수님은 기도 생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며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6절: "예수께서 자주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느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주 기도하셨음을 보여주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2. 예수님의 복종 2.1 십자가의 순종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복종이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돌아가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그분의 절대적인 복종과 겸손을 보여줍니다.

2.2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과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이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분의 복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나타냅니다.

3.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의 교훈 3.1 신뢰와 사랑의 경외 예수님의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도 마찬가지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3.2 철저한 순종의 본보기 예수님의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님을 본받아 완전한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3.3 기도와 교제의 중요성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유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유지하고, 기도 생활을 통해 경외와 복종을 실천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결론

경외의 의미와 중요성 경외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경외의 중요성 :
경외는 신앙생활의 시작점입니다.
잠언 1장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듯이, 경외는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따르는 데 필수적입니다.

경외의 영향 :
경외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는 성경 묵상, 기도, 예배, 공동체 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습니다.

복종의 의미와 중요성 복종은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와 요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복종의 중요성 :
복종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이는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복종의 영향 :
복종은 우리의 행동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경외와 복종의 상호 관계 경외와 복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외 없는 복종 :
경외가 없는 복종은 형식적이고 공허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복종 없는 경외 :
복종이 없는 경외는 참된 신앙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의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경외와 복종의 적용 경외와 복종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묵상 :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분들을 더욱 경외할 수 있습니다.

기도 :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본보기: 예수님의 경외와 복종을 본받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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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첫째, 악을 미워하는 것(잠언 8:13)

둘째, 정직하게 행하는 것(잠언 14:2)

셋째, 칭찬을 받는 것(잠언 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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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결과

첫째,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14: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잠언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언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언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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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구절이 몇 번이나 등장하나요?

킹 제임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정확한 문구가 30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성경 전체에서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 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같은 관련 문구를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납니다.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텍스트에서는 영어로 "공포"로 번역되는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두려움, 경외감 또는 경외심을 뜻하는 '이랴'가 가장 흔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포보스"가 자주 사용되며, 이는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반복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신자들의 영적 삶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수많은 권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잠언에서는 이 개념을 지혜의 시작이라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강조점이 다소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확한 숫자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개념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응답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의미가 풍부하지만 현대의 맥락에서는 종종 오해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지혜와 인간 이해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 개념을 마음과 머리로 탐구해 봅시다.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체적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능력, 거룩함, 권위에 대한 강력한 경외심, 경외심, 존중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본성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1편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이다"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이해와 올바른 삶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에 떨며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 앞에서 우리의 한계와 취약성을 건강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겸손과 지혜, 그리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10:12-13에는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니라"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개념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해와 점점 더 결합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닌 창조주와의 더 깊은 관계로 초대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경외심과 순종,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행동의 마비로 이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나요?

이것은 창조주와의 관계의 핵심을 건드리는 강력한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탐구하면서 신학적 통찰력과 심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고통이나 불안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권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마비되는 공포가 아니라 지혜와 순종, 영적 성장으로 이끄는 경건한 경외심입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 정서적 안녕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오해나 자신의 하나님 이미지에 투영된 부정적인 경험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불안, 영적인 문제에 대한 회피 또는 하나님을 가혹하고 징벌적인 존재로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개념은 심리학자들이 "건강한 존경심" 또는 "경건한 경외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더 비슷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안정감과 목적 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관점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출애굽기 20:20과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러 오셨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여러분과 함께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두려움과 의로운 삶으로 이끄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빠지기 위해 노예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쇠약해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고통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해와 치유를 구하세요.
요한일서 4:18의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세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며, 이 사랑에 대한 이해가 커질수록 두려움은 경건한 경외심과 신뢰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구절 중 하나는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진정한 지혜와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영적, 지적 성장은 하나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분께 의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언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1:10은 잠언을 인용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그분의 교훈을 따르는 자는 명철을 얻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지혜를 얻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도 연결됩니다.

전도서 12장 1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이것이 모든 인류의 의무이니라"라는 인간의 의무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인도해야 하는 원칙임을 시사합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모두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 초대 교회의 특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전역의 교회는 평화의 시간을 누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과 강화에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시사합니다.

저는 이 구절들이 지혜에 대한 욕구, 목적에 대한 탐색,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향 등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개념이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 이야기 전반에 걸쳐 중심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다른가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능력과 심판에 대한 인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명기 6:2과 같은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와 네 자손과 그 후손이 내가 네게 주는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켜서 네가 사는 동안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장수를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직결됩니다.

시편과 지혜서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임을 자주 강조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의로운 삶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끄는 경건한 경외심으로 묘사됩니다. 잠언 14장 2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물이며, 사람을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가면서 강조점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계시와 점점 더 결합되고 있습니다.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영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 두려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은 영이 여러분을 아들의 자녀로 입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형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진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합니다. 구약성경이 강조하는 두려움과 순종은 구조와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다루지만,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사랑과 은혜는 수용과 소속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갈망을 말해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두 가지 관점을 긴장감 있게 받아들이기를 권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경외의 필요성을 상기시키지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로 초대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떤 유익이 있나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칩니다(잠언 9:10).
이 지혜는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입니다.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와 가르침에 자신을 개방하여 그분의 지혜가 우리의 삶과 결정에 스며들도록 허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결하여 영원히 지속된다"(시편 19:9)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정신의 순수함은 유혹에 저항하고 의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영적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신성한 보호를 약속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주위에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편 34:7).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겸손과 창조세계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길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더 깊은 신뢰와 그분의 뜻에 우리의 삶을 기꺼이 내맡기려는 의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기쁨과 성취감을 가져다줍니다.
잠언 14장 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의 충만한 사랑과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는 세속적인 추구를 초월하는 목적과 의미로 이어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고 행동을 인도하며 창조주와의 관계를 깊게 하는 변화의 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아버지 앞에서 지혜, 순결, 보호, 겸손, 기쁨의 삶으로 인도하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것은 영적 성장과 신앙의 깊이를 더하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인내로 길러야 하는 마음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라고 제롬 성인이 현명하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위대한 행적,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위엄 앞에 경외감과 경건함으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있어 또 다른 필수 요소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정직한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더 잘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분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키웁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묵상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주의 광대함, 생명의 복잡함, 자연의 아름다움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늘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시편 19:1)라고 외칩니다.

겸손을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인식하면 주님을 올바르게 경외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성사, 특히 성체성사와 화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임재를 만나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부르심을 상기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삶을 연구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경외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이 거룩한 남녀의 삶을 통해 주님을 건강하게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그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사랑의 열망에서 비롯된 처벌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두려움을 키우는 것은 평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인내와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커질수록 이러한 두려움이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더 큰 자유와 기쁨,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예수님은 무한한 지혜로 우리에게 경외와 사랑의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전능하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깊이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9)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순종과 신뢰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혼과 육체를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은 지상의 모든 권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새 두 마리가 한 푼에 팔리지 않느냐?"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도 너희 아버지께서 돌보시지 아니하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통제를 인정하는 건강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마비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과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두려움 때문에 달란트를 묻어둔 종은 책망을 받았고, 달란트를 사용한 종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이 적극적이고 용기 있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혜와 분별력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를 비판하며 "너희는 박하, 딜, 커민 등 향신료의 10분의 1을 바칩니다. 그러나 너희는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인 정의, 자비, 신실함을 소홀히 하고 있다"(마태복음 23: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이 그분의 뜻과 우선순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에 관한 것임을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습니다(마 22:37-39).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에 뿌리를 둔 이 완전한 사랑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일서 4:18).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 데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온 존재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성취를 얻는 길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개념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관점은 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이끄는 경건한 두려움의 변화적 본질을 강조합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호하는 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적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방어의 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경건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니라 영적 위험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하는 방패로 간주합니다.

오리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우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는 점진적인 여정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발달적 관점은 영적 성장과 성숙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바실 대제,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두려움을 신의 완전성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겸손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도덕적 행동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과의 친교를 유지하려는 열망에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의롭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순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이 신앙을 위해 박해와 심지어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믿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했지만, 그것이 잘못 해석될 가능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건강하지 않고 마비시키는 두려움과 영적 성장으로 이끄는 거룩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두려움을 구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킹제임스성경(KJV)은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을 어떻게 번역하고 표현하나요?

KJV는 히브리어 이라트 아도나이와 그리스어 포보스 테우를 번역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다"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문구를 일관되게 사용합니다. 이 직역은 현대인의 귀에 거칠게 들릴 수 있는 원문의 강한 언어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잠언 9장 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부 현대 번역에서는 이 개념을 더 부드럽게 표현하거나 명확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새 국제 버전(NIV)에서는 "두려움" 대신 "경외" 또는 "경외심"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생활번역(NLT)에서는 "존경" 또는 "경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두려움'을 단순한 공포로 오해할 수 있는 현대 독자들에게 경건한 두려움의 미묘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KJV는 '두려움'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써 전능자 앞에서 경외심, 경외심, 심지어 어느 정도의 두려움까지 포함하는 원래 개념의 다층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도서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도리이니라"는 KJV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KJV의 접근 방식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다른 덕목 또는 축복 사이의 연관성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1편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혜가 있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번역은 두려움, 지혜, 순종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유지합니다.

KJV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두려움"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공포를 분명히 의미하는 문맥에서는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접근 방식은 세심한 독자들이 건강에 해로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KJV의 표현은 성경에서 이 개념의 역설적인 성격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은 고통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사이의 이 명백한 모순은 경건한 두려움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킵니다.

KJV의 고풍스러운 언어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때때로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빌립보서 2:12)과 같은 구절은 구어체 번역이 효과적으로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경외감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에 대한 KJV의 번역은 성경 원어의 힘과 복잡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좀 더 신중한 해석이 필요할 수 있지만, 이 강력한 영적 개념에 더 깊이 관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도 합니다. 다른 번역본과 함께 KJV를 읽을 때, 우리는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랑스럽고 놀라운 하나님께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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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성경적 정의는 무엇인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구절은 잠언 9:10, 시편 111:10, 욥기 28:28 등 성경의 여러 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가르침의 중심이 되는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원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경외심, 경건함, 존중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란 무슨 뜻인가요?

  1. 경외심과 경외심: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함'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 거룩함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고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2. 지식의 기초: 이 두려움은 참된 지혜와 이해의 기초가 되는 원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서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3. 도덕적, 윤리적 생활: 성경적 의미의 지혜는 단순히 지적 또는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개인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인도합니다.
  4. 지혜의 시작: "시작"이라는 용어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인 출발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근본적인 태도 없이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의 예:

  •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구절은 지식과 지혜를 연결하여 둘 다 주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 그분의 교훈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명철을 얻느니라." 이 구절은 이해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데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욥 28:28: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피하는 것이 명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악을 피하는 것을 연결하며, 이는 지혜롭게 사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하며,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잠언 9:10에 따라 신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도록 원동력이 되며 지혜를 길러줍니다.
  • 신약 성경에서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계명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신성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 '두려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적 성장의 자양분이 되고 평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숙고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강력한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 이 무한한 우주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둔 주목할 만한 개념이며, 그 의미는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는 성소 안에서 강력하게 울려 퍼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헤아릴 수 없는 허공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신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정적인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공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인간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지만)를 증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랑과 은혜. 우리 의식의 풍경 속에서 전능하신 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은 신비롭게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은 그 이상으로 확장됩니다. 성경은 수많은 성스러운 구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진심으로 신뢰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넘어 우리의 영적 핵심에서 가시적인 세상에서의 행동으로까지 뻗어나가는 삶의 변화를 촉발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순종, 신뢰라는 소중한 가치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상호 연결된 측면입니다. 신자들은 스트레스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깊은 사랑과 순종,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에서 영적 나침반이 신성한 법과 계명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인생의 결정은 크든 작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두려움은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도덕적 나침반우리를 둘러싼 세상뿐 아니라 그분께서도 기뻐하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것은 외부적이고 사회적인 검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승인을 얻는 것에 관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 우리 존재의 모든 순간에 스며듭니다. 

매일 선택의 눈사태가 우리를 포위하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확고한 기반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단순히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나침반을 다듬고, 신성한 계명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 은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감사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분의 신성한 우월성에 대한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에 대한 사랑과 순종, 신뢰로 이어집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이 두려움은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둘러싼 이해의 매듭을 푸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

  1. 경건과 존중: 이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함, 권위를 인정하며 깊은 경배와 복종으로 이어집니다.
  2. 긍정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조성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인정하고 사랑과 존경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합니다.
  3. 지혜와 이해: 이러한 유형의 두려움은 삶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추기 때문에 지혜와 이해의 기초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4. 자신감과 신뢰: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공의, 자비에 대한 신자들을 안심시킵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것:

  1. 공포와 두려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종종 형벌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죄책감, 수치심,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싶은 욕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2. 부정적 관계: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부정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만듭니다. 그것은 개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복종과 순종보다는 회피와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3. 이해 부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열망을 간과합니다.
  4. 불안과 불안: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보다는 하나님의 보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불안과 불안을 낳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이자 경이로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겸손으로 자신을 굴복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한 모습을 갈망하고 그분의 자비로운 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어느 정도의 분리와 부정성을 의미하며, 종종 처벌이나 잠재적 해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심어주는 도덕성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불가피성을 인정합니다. 신성한 정의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과 동시에 신의 용서와 자비, 영원한 구원의 약속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은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강력한 경외심과 경건한 존중입니다.
  •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위와 능력에 대한 인식과 그에 비해 인간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정교한 관계를 향한 여정을 촉진하여 사랑, 신뢰, 순종을 촉진합니다.
  • 부정과 분리를 나타내는 두려움과 달리,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공의를 환영하고 용서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희망을 키워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개념을 풀어내려면 신학적 깊이에 대한 깊은 몰입과 함께 성경에 묘사된 신의 기념비적인 위상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강력한 힘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은혜와 감사, 경외심이 가득한 삶을 포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적 여정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적 두려움은 다가오는 위험이나 즉각적인 위협으로 인해 유발되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용어와 연관된 불안과 떨림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합쳐진 것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우리를 계속 지탱해 주시는 무한히 부드러운 사랑에서 비롯된 경외심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흥미로운 측면은 그것이 양심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깊은 성찰과 자기 평가를 유도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결점과 허물은 우리 앞에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이해하면 이러한 두려움이 완화되고 동시에 회개와 변화를 향한 우리의 길이 밝혀집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키우는 것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의식적인 반응으로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촉구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기도, 묵상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된 관점이 발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묘목이 자라기 위해 햇빛과 물, 영양분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도 번성하기 위해 창조주에 대한 감사와 숭배, 존경의 식단을 꾸준히 유지해야 합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영적인 여정입니다.
  • 이 신성한 두려움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존경심, 경외심이 합쳐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성찰과 자기 평가를 불러일으키며 회개와 변화의 길을 깨닫게 해줍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지며,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 겸손과 기도, 하나님의 말씀 묵상을 지속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전능자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영적인 틀을 일상적인 실천에 통합하고, 적극적으로 전인적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이 길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길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 그리고 신성한 부모님을 이해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길입니다. 

신앙과 헌신의 관찰 가능한 표현인 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디딤돌 이 여정에서. 매일의 기도는 이러한 노력에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기도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여 깊은 존경심과 경외감을 촉진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울 때 기도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측면입니다. 하느님을 집단적으로 경배하는 행위는 강력한 경건함을 심어주며, 개인이 교회와 공동체의 거룩함에 나타난 하느님의 위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은 결코 다음과 같은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예배 혼자서. 양심 시험과 같은 자기 성찰과 도덕적 판단의 순간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러한 시험은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부분을 파악하여 주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해성사는 이러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해성사는 죄에 대한 후회를 불러일으켜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 즉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매일 겸손하게 걷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배양됩니다. 신성한 인도. 이러한 수준의 사고를 일상 생활에서 구현하면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을 일치시켜 궁극적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일상 생활에 영적인 틀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외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 매일의 기도, 미사 참여, 양심 성찰을 통한 자기 성찰, 참회 성사 등의 실천이 이러한 노력에 큰 역할을 합니다.
  •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하느님의 승인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개인 생활에 통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측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모순되나요?


종교적 헌신의 본질적인 요소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약속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사이의 긴장은 신학계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다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 그리고 사랑.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해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지혜와 성숙함에 따라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유동적일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인 히라 또는 그리스어 포보스에서 번역된 성경적 관점에서 '두려움'을 생각해 보면, 신앙의 맥락에서 이러한 개념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더 깊이 연구해보면 이 두려움은 위험이나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경외심, 신의 주권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힌 인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간청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능력과 지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그분의 길을 겸손히 인정하라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권적 보좌에 모시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빼앗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완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와 신성한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 안일한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안주하고 그분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두려움이 순전히 공포나 절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놀랍도록 강력하고 의로우시지만 무한히 사랑스럽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은혜, 두려움이 복잡하고 신성한 춤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

그러므로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저는 우리가 두려움과 사랑을 인식하는 세상적인 렌즈를 버리고이를 보완적인 힘으로 바꾸고 능숙하고 섬세하게 직물로 짜여진 신성한 관점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요약해 보겠습니다: 

  • 성경적 맥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경건한 경외심과 존경을 의미합니다.
  • 이러한 두려움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완하는 것입니다.
  •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안일함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주님의 신성한 권위와 공의를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두려움을 상쇄하고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상기시켜 줍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그분의 사랑, 은혜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을 초월한 신성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깨끗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우리는 종종 경전에서 언뜻 보기에 역설적이거나 모순되어 혼란스럽거나 당황스러운 느낌을 주는 문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 중 하나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깨끗하다"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묵상한 시편 19:9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본질에 대한 내밀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깨끗하다'고 묘사될 때, 그것은 이 두려움의 순수성, 즉 때 묻지 않은 본질을 가리킵니다. 혼란이 아니라 명확함을, 어둠이 아니라 빛을, 정체가 아니라 성장을 가져다주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 이 신에 대한 경외심는 우리의 지각을 정화하고, 우리의 이해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며, 밝은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거짓 증거가 진짜처럼 보이거나 쇠약하게 만드는 공포와 같은 인간의 일반적인 두려움과 관련된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 '깨끗한' 두려움의 본질적인 측면은 영적인 '경보'로서의 기능에 있습니다. 옛 현자들과 성인들에 따르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과의 관계에 대한 바로미터 역할을 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정의의 길역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악의 무서운 유혹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과 사고 과정을 정화하여 고독 속에서도 우리의 신성한 책임감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깨끗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또한 지혜의 시작을 안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경외심과 경외심는 지혜가 깊어지는 길을 열어줍니다. 지식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무한함에 비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 '깨끗한 두려움'은 우리를 이해로 인도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지혜가 성장한 결과인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시편 19편 9절에 나오는 주제 표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정결하고 깨달음을 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 이 '깨끗한' 두려움은 인간의 일반적인 두려움과 관련된 불순물이 없는 명료성을 유도하여 삶을 바라보는 깨달음의 관점을 촉진합니다.
  • 이는 '경종'의 역할을 하여 의로움을 장려하고 악과의 교전을 억제함으로써 사고 과정과 행동을 정화합니다.
  •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위엄을 인정하면 지혜가 확장되고 이해가 깊어지는 등 두려움은 지혜의 기초가 됩니다.

교부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교회 교부들은 이 고대의 지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움츠러드는 공포가 아니라 참된 지식과 미덕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그들 안에 있지 않을까 두려워서, 진심으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모두 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신자와도 거리가 멀다!"라고 썼습니다.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지혜는 위대한 미덕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이 아름답게 표현했듯이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계명의 끝'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참된 미덕입니다."라고 말했죠.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악에서 떠나도록 이끌고 이해로 인도합니다.

위대한 오리겐은 우리의 이해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합니다. 그는 지혜는 도덕적 훈련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도덕적 훈련과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지혜를 구하였으니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라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우리 삶의 실제적인 방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암브로스 성인은 지혜롭게도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성령의 선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고 아버지께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라고 썼습니다. (프란치스코, 2015)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묘사한 성 보나벤투레의 말을 생각해 봅시다. (Murray, 2011) 이 이미지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교부들의 가르침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랑과 순종, 변화의 여정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참된 지혜와 하느님과의 연합을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을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에 마음을 열어주는 선물로 받아들입시다.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할 수 있나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이 심오한 영적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할 수 있는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라"는 말을 들으면 공포와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폭군이나 예측할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서 저는 하느님은 가혹한 명령자가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라는 점을 자주 강조해 왔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견뎌야 할 짐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프란치스코, 2015)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야말로 위대하고 참된 미덕"이라고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하마의 성 어거스틴 컬렉션, nd)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창조주에 대한 더 깊은 사랑과 경외심으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오해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들만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성자든 죄인이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2015) 그것은 우리의 실패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으로 마비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나벤처의 설명처럼 "거룩한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나무"입니다. (Murray, 2011) 두려움은 우리를 거룩함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시적인 이해에 속하는 구시대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이 성령의 은사는 성경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은 미신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면 자신감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수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시편 19:9) 이러한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기쁨을 증진시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오해에 현혹되지 맙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두려움은 공포나 복종이 아니라 경외심과 경건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랑과 기쁨, 그리고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도 함께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다른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에 대한 이해와는 크게 다른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두려움은 종종 불안, 공포 또는 해를 피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용어로 존경은 종종 성취나 지위에 대한 존경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제한된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더 깊고 변화적인 관점을 제공합니다.

먼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위협이나 위험을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려고 기다리는 폭군이 아니라 우리의 선을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과 지혜와 이해의 샘이며... 그 열매로 사람을 채운다"라고 말한 것과 더 비슷합니다. (보이쿠와 오덴, 2014) 이 두려움은 생명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두려움은 종종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후퇴하게 만들지만,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영적 여정을 전진하게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 어거스틴 하마 컬렉션, nd) 두려움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지혜와 이해, 궁극적으로는 사랑으로 이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종종 업적이나 지위를 통해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의 업적(비록 그것이 측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인 그분의 본성 자체에 근거합니다. 보나벤쳐가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신성한 능력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고려"에서 비롯됩니다. (Murray, 2011) 이것은 감탄을 넘어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 이르는 존경심입니다.

게다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종종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을 보호하거나 개인적인 이득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우리를 밖으로 향하게 합니다. 시라크서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면류관이며, 평화와 온전한 건강이 번성하게 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캐나다, nd)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평화, 타인과의 평화,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평화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종종 외적인 요인에 기반하는 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의 내적인 성향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했듯이, 두려움은 외형적인 규칙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이 두려움은 "마음을 열어 용서와 자비, 선함과 아버지의 애무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합니다. (프란치스코, 2015)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두려움과 존경은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순수하며 영원히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19:9) 그것은 세상의 의견이나 상황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 삶의 안정적인 토대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세상의 두려움이나 존경과는 전혀 다른 주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어 봅시다. 두려움은 우리를 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두려움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면으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지혜와 거룩함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톨릭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항상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발견되는 이 심오한 진리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영적 삶의 초석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요약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 중 하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이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선물로 제시됩니다. 교회는 이 두려움이 형벌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두려움, 즉 효도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목자로서 저는 교회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사랑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 중 한 명인 성 어거스틴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계명의 끝'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참된 미덕입니다." (하마의 성 어거스틴 컬렉션, nd) 이 두려움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고, 사랑은 이 두려움을 완성합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오리겐은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도덕적 훈련과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희가 지혜를 원하였으니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라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순종과 도덕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힘과 위안의 원천으로 여깁니다. 암브로스 성인은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것이 은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힘은 오직 주 예수님을 따르고 아버지께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프란치스코, 2015) 두려움은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를 열어주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점진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함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성 보나벤투르는 이를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Murray, 2011) 우리가 이 은사를 가꾸어 나갈 때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겸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이해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우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리와 일치시킴으로써 우리를 높여줍니다. 제가 자주 말했듯이 겸손은 우리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덜 생각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시라크서에서 읽은 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죄를 쫓아내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진노를 물리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두려움은 유혹에 저항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죄와 이기심의 폭정에서 해방시켜 하느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의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로 영적인 개념이지만, 심리적으로도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자로서 저는 이 성경적 지혜가 우리의 인간 본성 및 심리적 안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 관점에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한계와 더 높은 힘에 대한 의존을 건강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극심한 불안이나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창조의 거대한 계획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성숙한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성 보나벤쳐의 가르침처럼, 이러한 두려움은 "신성한 힘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고려"에서 비롯됩니다. (Murray, 2011) 심리적으로는 경외감과 경이로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정신 건강과 웰빙에 유익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교만과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향에 대한 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 용어로 나르시시즘과 자만심을 견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며(성 어거스틴의 하마 컬렉션, nd), 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지혜에는 현실적인 자기 평가와 겸손이 포함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건강한 자기 인식은 개인의 성장과 긍정적인 관계에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자기 초월이라는 심리적 개념, 즉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삶의 만족도와 회복력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라크서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면류관이며, 평화와 완전한 건강을 번성하게 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nd)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심리적으로 정신적, 정서적 웰빙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 보나벤투레가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가장 아름다운 나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물을 주시는 나무"(Murray, 2011)라고 묘사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의 점진적인 성격은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심리적 모델과도 일치합니다. 이는 정적인 상태가 아닌 역동적인 성숙과 지혜의 증가 과정을 제시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심리적 측면에서 안전한 애착의 한 형태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고 권위적인 부모 앞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암브로스 성인의 가르침처럼 "마음을 열어 용서, 자비, 선하심, 아버지의 애무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합니다. (프란치스코, 2015)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안전한 애착은 심리적 건강을 위한 안정된 토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토론토 온타리오주 캐나다, nd)에서 언급했듯이 죄에 대한 보호 수단으로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기 규제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자들이 초자아 또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과 의사 결정을 안내하는 내적 나침반을 제공합니다.

이 개념은 또한 통제력의 중심점이라는 심리적 원리와도 공명합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외적 통제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책임감 측면에서 내적 통제력을 촉진합니다. 이러한 균형은 더 나은 정신 건강 결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인지 발달에 관한 심리학 이론과도 일치합니다. 이는 단순하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현실과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이해로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심리적 해석은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는 있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영적 차원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이 성경적 지혜는 사랑의 창조주께서 설계하신 우리의 인간 본성과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두려움의 선물이 우리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녕에도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이 선물을 받아들여 봅시다.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지혜와 평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개념을 다루면서 성스러운 영역을 밟을 때, 우리는 영적인 심오함이 가득한 물속을 헤엄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려면 먼저 이 맥락에서 두려움이 두려움이나 공포의 일상적인 의미를 초월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강력한 경외심과 경외심, 신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무게에 대한 의식을 포괄합니다. 

우주적 포옹의 따스함으로 우리를 감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친밀한 유대감이며,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강물입니다. 인간 존재 신성한 바다로 인도합니다. 사랑이 커질수록 경외심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집니다. 

이러한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맞물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영적 다리를 만들어냅니다. 두려움은 진심 어린 존경과 경외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뒷받침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편재하심, 공의에 의해 촉발됩니다. 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의 씨앗을 키워서 다음과 같은 나무로 키웁니다. 확고한 믿음 그리고 순종.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과 하나님의 의식에 기꺼이 복종하는 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두려움과 사랑은 같은 신학적 동전의 양면으로, 강력한 영성의 순환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라며, 다음에 대한 죄를 피하려는 욕구를 강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촉발되고 자극을 받아 그분의 신성한 명령에 충실하고자 하는 깊은 순종과 갈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강력하게 두려워해야 합니다. 

요약: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깊은 경외심과 경외심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위대함과 우리 행동의 도덕적 중력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강력한 인식으로 키워진 신과의 친밀한 유대감을 상징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은 깊은 영성의 순환적인 춤 속에서 서로를 키워줍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범죄를 피하려는 욕구를 강화하고, 이 두려움은 더 깊은 사랑을 촉발하여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을 촉구합니다.
  •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절대적인 경외심과 존경심을 의미하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두려움이 필수적입니다.

사실 및 통계

미국 성인의 801TP3%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기독교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5%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념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종교 관련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의 약 60%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건함과 경외심과 연관시켰습니다.

한 종교 텍스트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문구가 성경에 300번 이상 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000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5%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종교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0%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깊은 존경과 사랑의 형태로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기독교인 중 약 651%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 요소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종교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0%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 이어진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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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19:20-29)

운영자
6~8분

본문 19장 23절을 읽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신명기 10장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수아 24장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 8장 13절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고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즉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다음부터는 인간을 유익하게 해주는 본래의 지경을 지나서 도에 넘치게 되고 또한 그러한 형태가 변해서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도에 지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포심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인간 생활을 해하는 하나의 하나의 감정적인 요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흔히 민주 사회에서 여론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아니하더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 더구나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말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팔아 버린 후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어떻게 했어요? 형들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묻혀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는 나이 많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구나’하면서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해 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는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간음한 뒤에 자기의 범한 죄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 되는 우리아를 모함하였습니다. 우리아를 말하면 다윗의 충신입니다. 비밀문서를 써서 우리아에게 주며 요압 장군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아로 하여금 최일선인 암몬성 가까이에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부탁대로 했더니 사실 우리아는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을 대지 아니하고 적의 손을 통해서 죽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아가 일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가지 아니해서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을 다 보십니다. 사람의 눈은 혹시 피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든 죄를 죄대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귀는 두 가지로 인간을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너 아무리 죄를 회개해보라. 그는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아무리 죄를 범해도 벌하시는 분은 아니다”고 유혹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에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 주시지마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형벌을 내리십니다.

금생에도 내리시고 내생에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때로는 양심을 통해서, 때로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3,4대까지 내려가면서 형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무서운 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범한다고 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보십니다. 그 죄는 그 사람의 뒤를 항상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씀처럼 요긴한 대목에 가서 꼭 마주칩니다. 그 죄가 꼭 사람을 벌하고야 맙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의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 형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잠깐 실수해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벌할 수가 있겠는가?”고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5장 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48절에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보지 못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합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뿐만은 아닙니다. 공기가 보입니까? 전파가 보입니까? 세상에 보이지는 않지마는 실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아니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도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꼭 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감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단에 서서 여러분을 대개 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의 방향, 몸의 자세를 다 봅니다. 누가 재미있게 듣고 계시나, 누가 졸고 계시나 하는 것을 다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은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병원엘 가면 X-레이 촬영실이 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몸의 밖의 부분만 봅니다. 그러나 X-레이를 비치면 이 몸의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뼈가 다 보입니다. 폐나 심장, 위장, 내장들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 심령의 상태를 다 보십니다. 밖으로는 아무리 웃는 낯으로 말하지마는 속에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레이보다 더 밝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해서 사람이 흠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친구 셋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행해 기도했는데 계속하게 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선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던 그대로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무섭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그 청년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그들을 책잡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여기에다 절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시기하는 바벨론 동관들이 다른 것으로는 흠을 잡을 수 없으니까 그들이 하나님 외에는 무엇에게나 절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것으로 그물을 쳤습니다. 왕이 세운 금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결국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섬기지 아니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 세 청년을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노해서 사실을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지마는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인데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실 신이 어떤 신이냐?”고 하였습니다.

이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한 말이 이러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어떻게 이렇게 대왕 앞에서 포로의 신세로 있는 청년들이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정죄할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래를 위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요? 장래가 분명히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란 대심판이요 형벌이기 때문에 이것처럼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조심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청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혹 어떻게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즉시 회개합니다.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때에는 두려운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요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면 이 두려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변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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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두 아들들 -



사무엘의 아들들 - 요엘, 아비야

사무엘상 8:1-3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사무엘은 선지자의 대표로 불립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사명을 완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사역의 과정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모세는 40이 되어서야 민족을 돌아볼 마음이 들었다면 사무엘은 아주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가운데 성전에서 성장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일백 이십 세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삶을 마친 반면 사무엘은 자신이 세운 왕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가운데(삼상15:35) 자신이 기름 부어 세운 왕 사울을 더 이상 대면하지 않는 가운데 일생을 마쳤습니다(삼상 25:1)

사무엘은 기도하는 선지자였고(삼상 7:5), 사무엘이 선포한 말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며(삼상 3:19), 사무엘이 기도했을 때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물리쳐 주실 정도로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도 해 주셨습니다(삼상 7:10), 뿐만 아니라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삼상 7:15-17) 열심과 성심으로(삼상 12: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붙어있게 하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봉사. 사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들이 그와 같지 않았다는데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

삼상 8장 2절에는 사무엘의 두 아들이 등장을 합니다.
한 사람은 ‘요엘’이요 또 한 사람은 ‘아비야’입니다.
‘요엘’ 이란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인데 ‘우상을 대적 한다’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 란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성적(父性的) 신뢰를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의 끊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이란 친숙한 어의(語意)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이름에 담긴 뜻만큼 신앙의 인물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사사가 되어서 율법이 엄히 금하고 있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던 것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렇게 성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무엘이 사역에 너무 바쁜 나머지 양육자로서의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기인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의 아들들은 혹 ‘아버지의 부재(不在)’ 인 가운데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모 대학 연구소에서 임신 중에 엄마가 다이어트를 하거나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이 때 태중에 있던 아이는 태어나서 음식을 탐하며, 비만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중에 있을 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 태아는 본능적으로 ‘음식은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뇌에 각인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 또 음식이 공급되지 않을지 모르니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인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식습관이 그들을 비만으로 성장시킨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것을 적절한 때에 공급받는 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스스로 그 부족을 채우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바쁜 사역으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물질, 관심과 보호 등을 충분히 그리고 제때에 공급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사가 되어서 뇌물이라도 받아서 자기의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 상담을 해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성장배경을 추적해 보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물질, 사랑, 관심, 보호 등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뭘 달라고 해서 얻은 것이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도 육신의 아버지처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공급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잘도 구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그 아버지가 공급해준 것이 많으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이처럼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또한 중요합니다. 사춘기 이전에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 그 엄마의 사랑을 찾아 이 여자 저여자로 방황할 수 있습니다.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은 어릴 때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각 사람은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양합니다. 대통령도 있고, 재벌총수도 있고,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교사도 있고, 목사도 농부도 있고 구멍가게 사장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각자가 일하는 위치에서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일은 누구나 똑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사장님을 하면 직원이 제반 일을 다 해줄 수 있어 사장님은 지시만 하면 조직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가정만큼은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몸소 남편의 역할을 해야 하고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청소도 하고 음식쓰레기도 내다 놓아야 하고, 아이들과 같이 목욕도 하고 무등도 태워주고, 축구도 같이 하고, 대화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법도 배우고 돈 쓰는 방법도 매우고 분노하고 푸는 방법도 배웁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것들이 생략된 채 학원에만 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지식은 늘지 모르지만 정서는 늘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잘하는 정서지수(EQ)가 높은 사람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할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으며 그 역할은 무척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선조들도 명심보감에서 '아버지를 알고 싶으면 아들을 보라'(欲知其父 先視其子1) 라고 했겠습니까?

한편, 사무엘이 이렇게 바쁜 사역 가운데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하고 자녀 양육에 실패한 것은, 자신도 어머니 한나의 서원기도로 말미암아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를 떠나서 성장하는 바람(삼상1:21-28)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아버지 엘가나로부터 영향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까닭도 조금은 있다고 보여 집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그를 닮은 아버지가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역과 가정 & 자녀양육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결코 세습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부동산처럼 자녀에게 자동으로 상속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육환경이 좋고,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을 하고, 훌륭한 신앙의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체적이고 면밀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 개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다고 하여 아들의 이가 시(醋)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렘31:29). 대신 집에서 하는 아버지의 신앙의 모습이 그자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또는 후손에게 믿음(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자녀에게 삶으로 "하나님의 모습(무섭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사랑, 용서, 거룩, 관용, 기다려줌, 공급 등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하나님께 의탁)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목사님 가정에서 자녀들이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 목사님의 이중적인 생활을 보고 혼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역(하나님께 봉사)을 위해서 가정을 내팽개치고 소홀히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사역은 사역을 위해서 가정도 자녀도 버리고 사역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가정과 자녀를 떠나 광야나 굴에 들어가 수도승처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은 세미나에서 ‘내가 사역을 함으로 가정이 망가진다면 나는 차라리 가정을 살리기 위해 사역을 그만 두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역 이전에 주신 건강한 가정의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나홀로, 사역을 위해 자기를 불태우는 신앙은 은혜로 하는 사역이 아니고 자기열심과 탐욕에 기인한 것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은 비인간적인 사고와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가짐으로 가정이 살아나고 화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화목이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지극히 건강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물론, 사역과 봉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업무량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짐을 자기 스스로 모두 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민11:11)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잘 모르는 무지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한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일정 분량의 짐을 내려 놓거나 나눠 줌으로서 짐을 가볍게하고(하나님께 의탁으로 하고) 가벼워진 짐으로 가정과 자녀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출18:13-23).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자기만 남아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큰 일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왕상19:14). 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임금과 이세벨의 폭압과 사악한 통치 가운데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남겨두고 계셨던 것입니다(왕상19:18).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에 혹은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열심으로 봉사 충성하면 나머지 모든 가정의 일들을 하나님이 자동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사무엘의 가정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으로, 바쁘게 한 것으로 치면 사무엘처럼 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들은 자녀들의 때에 적당하고 충분한 사랑을 부모님으로 부터 받아야 건강한 한 사회개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저절로 인격자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격자로 성장하는 때를 놓치면 회복되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게 됩니다.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충분한 보살핌과 공급,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도박과 같은 중독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어린이 때에 장남감을 가지고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장남감을 가지고 놀게 됩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남감은 자동차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 장남감을 가지고 충분히 놀아 보지 못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새삼스럽고 유치하게 자동차, 모형 비행기, 각종 모형 만들기, 각종 게임기 등에 몰두 합니다.  

어른이 되어 어른으로서 바쁘게 해야할 일이 많음에도, 지나간 때가 족한 것을 모르니까  어른 장난감 가지고 어린아이 처럼 놀고 있는 것이지요..... 장난감 가지고 노는 어른아이 때문에 속상해 하는 주부를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에 가서 청소로 봉사하고 기도많이 한다고 해서(물론 이것은 필요하고 권장할만 하며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는 않고 자기열심으로 청소,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저절로 건강한 신앙의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동으로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가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농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뙤약볕에 땀흘리며 김을 매고 비오는데 논 물 보며 이슬 맞으며 비료줄 때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도가 쌓이면 더 풍성한 열매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가정이나 그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의 세밀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와 충분한 공급과 사랑과 보호 밑에서 성장을 해야 건강하게 사회를 살 수 있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지게 됩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외적인 사역을 열심히 하고 성심으로 하여야 하는 만큼 가정의 머리된 자로서의 가정의 내적의무를 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너무 사역에 바쁜 나머지 가정과 자녀들 양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으로 영향도 받고 영향도 끼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보내심을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미명으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끊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성공과 자녀의 겸손

부모가 사업으로, 고위 공직으로, 큰 목회사역으로 성공을 하면 자녀들은 자칫 자신들도 부모님과 같지 않을까 하고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마치 요즘 방영되고 있는 월화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아버지가 거대한 그룹총수를 하니까 장남은 자신도 카드 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큰 딸은 호텔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모 대통령의 아들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칫하면 자녀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사무엘 가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사무엘을 존경하니까 그 아들들이 겸손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사회적 지위가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교만하여 방종으로 나아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엘의 아들인 나는)뇌물을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성경에서 뇌물을 금하는 이유는 모든 것의 공급자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힘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받겠다는 불신앙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가끔 재벌 총수의 2세들이 사회를 요란케 하는 일들을 보면 모두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대외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일수록 가정과 자녀의 교육, 양육, 아내에 대한 사랑 등에 관심이 부족하기 쉽습니다. 너무 바쁜 탓에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핑계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이것 까지도 소홀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그로말미암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왕을 구하는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명심할 일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평생 바쁜 사역을 하면서 얻은 명성을 잘 못 키운 자식 때문에 그 명성이 빛이 바랠 뿐만 아니라 평생에 회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자칫 그 일그러진 아버지의 상(像)이 자손 대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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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강화







다락방 강화(요한복음 13-16장)

소위 ‘다락방 강화(the Upper Room Discourse)’라고 불리는 13-17장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락방 강화의 목적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 숭천을 목전에 두신 상황에서 이제 자신의 부재시에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사랑(Loving one another)’,
‘위안과 평강(Comfort and Peace)’,
‘예수 안에 거함(Abiding in J esus)’,
‘세상에 대한 승리의 확신(Conviction of Victory against the World) 등이 강화의 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방 강화의 내용 구조는 크게 세 부분,
13장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도,
14-16장의 주님의 고별 설교,
17장의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구성되었다.

​17장은 강화의 완결(Consummation) 부분으로서 다락방 강화의 일부에 속하지만 그 내용의 특성상 독립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13-16장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1-20절),
가룟 유다의 배반과 이탈(21-30절),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암시적 예고와 사랑의 새 계명 수여(31-35 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36-38절) 등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중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둥 공관복음서들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보도함에 있어서 신약의 중요한 2대 성례 중 하나인 성만찬(聖曉餐) 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성만찬 제정 부분을 모두 생략하고 대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속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수여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뚜렷한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기사로서, 이후에 이어지는 긴 강화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몸으로 보이신 설교’라고 할 만큼 이후의 강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었다.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저녁, 예수님의 마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 먼저 한 가지 행동을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각인(刻印)시키신 것이다.

그 메시지란 우선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1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다. 장차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을 아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인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다는 것은 무조건적이고도 변함없는 그분의 초월적 사랑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회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눅 22:24을 참조해 볼 때, 사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이루리라고 생각한 정치적 메시야 왕국에서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신약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할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순간에까지 여전히 시기와 경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몸으로 그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친히 모범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교훈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와 스승’이신 분으로서 제자들의 발 씻기시기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새 계명(New Commandment)’ 을 주신다(31-35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로운’ 계명이란 시간적인 차원에서 옛것에 비해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질적인 면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미 구약의 율법에 주어졌으며(레 19:18), 또 구약 율법의 요약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눅 10:27). 따라서 여기서 새로움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즉, 옛계명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인간의 자기 사랑에 두고 있는 데 비해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과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완전하고도 신적인 사랑을 모델(Model)로 삼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새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몽소 보이신 대로 무조건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14-16장은 예수께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그 자리에서 주신 고별 설교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 중 14장에서는 이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세상이 주는 각종 핍박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과 나아가 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주님의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곧 떠나시지만 그 떠나시는 목적이 곧 아버지 집에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는 데 있음을 언급하시며 다시 오셔서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에 영접하여 인도할 것임을 약속하신다. 또한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the Way, the Truth, the Life)이라는 자기 선언을 하시며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밝히신다(1-7절). 이어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벌립의 요청에 대해 자신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으며 또 아버지는 자신 안에 계시다고 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라고 하는 단일성(Oneness)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자신이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며 이로써 성부께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히신다(8-15절).

이어 14:16-31에서는 예수께서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the Counselor)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과 또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끼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또 다른 보혜사’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시다(롬 8:9 ; 고전 12:3 ; 갈 4: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영으로써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바로 깨닫는다면, 남겨진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가 있을 수 없다. 비록 예수께서 ‘몸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지만,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셈인 것이다.

다음 15:1-11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 안에 거하는 것(Abiding in J esus)에 관해 교훈하신다. 즉 제자들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하듯이 그렇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이 곧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10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어서 15: 12-17 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준수를 재차 언급하며 촉구하신다.

이어 15:18~16:33의 네 문단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며 세상에 대한 숭리의 확신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와 성령이 오셔서 행하실 사역에 대해서 예언과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고하신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것이다(16:2). 사실 핍박을 당해도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견디고 이겨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핍박하는 자가 오히려 의의 편에 선 듯한 상황이 되면 핍박을 받는 제자들은 두려울 뿐 아니라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죄(罪), 의(義), 심판(審判)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곧 죄,의,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보혜사의 이러한 사역은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으로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성부와 성자께 속한 모든 영광의 비밀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6:13-15).

13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긴 강화의 결미 부분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드디어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임박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승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강화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그 목적을 밝히신 후 세상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16:33).

물론 예수님의 이같은 심오한 강화를 제자들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 내일 새벽이 되면 예수님은 체포되실 것이고, 제자들은 평소의 충성의 장담(마 26:35)과는 달리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 것 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치 않으셨으며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자신의 지상 사역의 종결(終結)이 곧 보혜사 성령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의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작(始作)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결코 주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상황을 초월하여 세상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지도 못하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을 바르게 깨닫고 상기하게 되며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보혜사가 오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떠나심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진정 유익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16:7).

* 자료출처 / 옥스퍼드 주석.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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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강화(講話) 1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서 다락방 강화에 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다락방강화는 요한복음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강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씀이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락방 강화(講話)의 의의(意義)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갖는다.
유월절 만찬이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제자들에게 고별 강화를 하시는 시간이고 앞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제자훈련의 시간이라 하겠다.
제자들에게 유언의 의미를 갖는 강화를 하셨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의 개요를 보아두도록 한다.

다락방 강화 개요(요한복음 13장-16장) 고난주간 제5일 목요일 마지막 만찬에서

      주   제

       장   소

      마   태

       마   가

       누   가

       요   한

1. 서로 섬기라

마가 다락방




13:12-17

2.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마가 다락방




13:31-34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그리스도

마가 다락방




14:1-14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야속

마가 다락방




14:15-31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마가 다락방




15:1-17

6. 세상의 증오에 대한 경고

마가 다락방




15:18-16:4

7. 성령에 관한 강화

마가 다락방




16:5-15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강화

마가 다락방




16:16-33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갖는다.
유월절 만찬이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제자들에게 고별 강화를 하시는 시간이고 앞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제자훈련의 시간이라 하겠다.
제자들에게 유언의 의미를 갖는 강화를 하셨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설명하셨고 성령을 설명하심으로 신학적 진리를 제자들에게 강화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르치셨고, 제자의 길을 가르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하는 아주 쉽고 편리한 방법이라고 하겠다(마 11:29).

다락방 강화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제자는 그 선생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다락방 강화는 신학적 진리를 강화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말씀을 주신 것이다.
아마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 내용은 제자들이 살아가야할 길이며 성도가 성화되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강화 내용은 크게  여덟 가지로 볼 수 있다.
13장에서 마지막 만찬의 준비와 만찬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 13:1-11)과 “서로 섬기라”(요 13:12-17)
가롯 유다의 배반 예언과 그의 배반(요 13:18-30), 만찬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요 13:31-35)
그리고 만찬이 계속되는 동안 14장∼16장에서 6개의 강화를 더 하셨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화셨고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강화하셨다.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강화를 통해서 생명,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강화를 하셨다. 그리고 세상의 핍박과 그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신다.

16장에서 성령에 대한 강화와 그리스도의 승리로 우리들은 주님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강화하셨다.

다락방 강화(講話) 1. 서로 섬기라

성경 요 13:12-17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로 섬기는 길을 가르치신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도록 하라는 것이 주님의 강화 내용이다.
선생과 주가 되어서 제자의 발을 씻기신 것은 산 교육이셨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서로 섬긴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이다.
이 만찬은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둔 선생님의 절박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강화하시는 자리이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메시아 관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만찬장에 이르러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높으냐의 논쟁이 있었고 섬긴다는 생각은 종이나 낮은 자들의 길이라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섬기는 길이요 낮아져서 종이 되는 길이었다.
이것이 가장 높아지는 길이라고 하셨다.
제자의 길이며 성화된 사람의 삶이 아닐까!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하나님과 동등 되려하지 않으시고 인간으로 낮아져서 이 세상에 섬기는 분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품성을 온유와 겸손이라 하셨다.
섬기는 사람의 품성이 겸손이겠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 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성화된 사람, 자기완성을 이루어 자신만만한 사람, 성품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겠지, 이런 사람은 섬기는 것이 몸에 젖어있어서 자연스럽게 섬기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성화된 삶을 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강화이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시다.
참 행복이 어디서 올까?
사랑으로 성화된 삶이다.
그 속에 섬김이 있고 나눔이 있고 내가 낮아지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2 /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35)

중요 메시지 : 율법의 완성으로 사랑의 길을 가르치신다.

가롯 유다가 제사장에게 간 뒤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을 은유하시는 말씀을 하시고 다정하게 제자들을 부르신다.
영어 성경에는 my children(요 13:33)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뜻이 부합하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 것이다.
Christian이란 말이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바로 그 냄새가 나는 사람들, 그 맛이 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은 사랑으로 표출(레 19:18)되며 이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사랑은 공허(空虛)하고 사랑으로 역사 할 수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고전 13:2).
그래서 성화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이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을 말한다.
믿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기반(infra)이고 사랑은 그 기능(function)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강화하셨다.
예수님의 강화는 요 13:34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다.
이 명령은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명령이고 다락방 강화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이다.

사랑에 대한 강화를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목적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강화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장(擴張)해서 강화하신다.
사랑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일체가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제자의 품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제자훈련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다.
사랑은 다락방 강화의 중심 덕목이 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2

다락방강화 II는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만찬과 성만찬의 제정,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과 서로 섬기라는 강화, 성만찬을 세우신 후에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강화하셨다.
다락방강화는 제자를 훈련 하시는 내용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구원은 오로지 성자 예수그리스도로만 이룰 수 있고, 예수님이 떠나시면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지켜 주심을 강화하신다.
다락방 강화 II 에서는 뒤의 두 명제를 중심으로 다루게 된다.

다락방 강화(講話)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14:1-14)

  3-1 :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요 14:1-11)

  3-2 : 능력과 영광이 같이하는 믿는 자(요 14:12-14)

다락방 강화(講話)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요 14:15-31)

  4-1 : 보혜사 성령의 약속(요 14:15-19)

  4-2 : 사랑 안에서 하나 됨(요 14:20-24)

  4-3 : 보혜사 성령의 깨우치심(요 14:25-31)

다락방 강화(講話) 3.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 (14:1-14)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며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영광이 있음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이심을 증언하셨다.
이 항목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구원의 통로이심을 말씀하시고
다음 그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삶 즉 능력이 있고 빛나고 거룩한 삶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하신 통로임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요 14:6).
주검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그 가는 길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그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식후에 제자들에게 강화하셨다.
요 14:11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일체이심을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락방 강화는 훗날을 위한 사랑의 강화라 할 것이다.

두 번째 단락(요 14:12-14)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주실 것이요 그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여 빛날 것을 말씀하셔서 믿는 자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신다.
훗날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이고 이에 의해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니 그 영광이 어떠하겠는가?!

다락방 강화는 제자훈련을 하시는 것이다.
이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제자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세계열방을 향한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다락방 강화는 아마 그 선교사역의 일꾼들을 기르시는 강화일 것이다.

묵 상 : 1. 나는 생명의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2.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빛나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3-1 :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요 14:1-1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안한 심리와 예수님 떠나신 후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강화를 계속 하셨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신다는 점을 밝힌다(요 14:1-4).
도마가 길을 묻는다(요 14:5-7).
빌립이 아버지를 보기를 원한다(요 14:8-11).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 14:6).
히브리 문학에서 강조 용법은 3번을 반복한다.
그러나 다른 용어를 쓴다.
길, 진리, 생명은 같은 말이다.
생명의 진리이며, 생명의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생명을 얻는다는 강화를 하신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였으나 주님은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과 우리가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음을 설명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 예수님과 우리들이 일체 이심을 설명하시고 전체가 유기체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이는 다락방강화 5에서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요 14:9).
빌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었다.

제자들에게 신학적 진리를 강화하신 것이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그의 나라가 임재하시는 길이며,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는 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분명히 하신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마 6:10)

제자들은 그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하여 그 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모르는데 어떻게 타자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
제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분명히 알고 전해야 한다.

또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 이심을 강화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일체이시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과 일체가 된다는 강화는 제자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강화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3-2 : 능력과 영광이 같이하는 믿는 자(요 14:12-14)

주를 믿는 자들은 주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넉넉히 할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 주실 것을 이르셨다.
특히 요 14:15에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다.
이로써 율법이 완성된다.
이를 보면 그의 삶이 빛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 알게 된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다.
그 삶에서 냄새가 나고, 빛을 발하게 된다. 주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러 성도(聖徒)라 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요 14:15-31)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설명 하신다.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para,klhton,, helper, counselor, the Holy Spirit)을 설명하신다.
이 강화는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하겠다.
요 14:15-19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요14:20-24에서 보혜사 성령이 사랑으로 임재하심을, 요 14:25-31에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게 됨을 설명하신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는 영(靈)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나 제자들은 알고 함께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지만 보혜사 성령은 항상 우리와 같이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로써 보혜사 성령의 존재를 설명하셨고 성도들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강화하셨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一體)이시고, 예수님과 우리 성도가 하나이심을 설명하신다.
하나 됨은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여기 두 개의 세계(world)가 있다. 하나는 주님의 세계(cosmos)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모른 자들의 세계(chaos)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왕국은 전연 다르다는 것이다.
다락방 강화에서 세계(world)라는 단어가 40번 나온다.
주님은 두 개의 세계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것이다.

셋째로 보혜사 성령을 통한 깨달음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우리로 알게 하시는 이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진리는 듣고 알아야하고 알아서 깨달아야한다.
깨달음이 있어야 변화가 있게 된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있고 사랑 안에 거(居) 하게 된다.

묵 상 : 1.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되는가?

           2. 주님의 계명을 생각해 보자.

           3. 나에게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4-1 : 보혜사 성령의 약속(요 14:15-19)

제자들의 불안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씀 또 가롯 유다의 이탈 등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어수선하고 제자들에게는 불안한 저녁이었을 것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실 것을 이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도 말씀하셨다.
이 보혜사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같이 하신다고 한다.
삼위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설명이 된다.
우리의 삶, 경영, 생각이 모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해 주신다.

다락방 강화(講話) 4-2 : 사랑 안에서 하나 됨(요 14:20-24)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어떻게 일체가 될 수 있을까?
앞 단락(요 14:16-19)에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요 14:15과 이 단락의 요 14:21을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사랑으로 임하시며 이로써 우리가 서로 그 안에 거하게 된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높은가를 논쟁하였다.
아직 그들에게는 세상(chaos)의 욕망이 넘쳐 났다.
서로 하나 되기에는 길이 먼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까지 기다려야 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완전한 변화(또는 총체적 갱신, 고후 5:17)가 이루어져야 그때 모두가 일체가 된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제자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도 받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유기체로서의 교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성도 그 모두가 유기체이다.
유기로서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요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유기체인 것 같다.

다락방 강화(講話) 4-3 : 보혜사 성령의 깨우치심(요 14:25-31)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우리를 지켜주시는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셔도 제자들을 지켜주실 성령이 임하시며 그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눈과 귀가 있어도 듣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으며 지금 제자들의 상태도 이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깨달음과 감격과 생동하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참 지혜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근심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보아도 들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보고 듣는 대로 알고 깨닫게 된다.
보고 듣는 것의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원리)까지 알게 된다.
이 덕목 역시 제자훈련 중 아주 중요한 훈련이다. 제자는 진리를 알고 그 숨어있는 뜻을 깨달아야한다.

이 강화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떠나자고 하신다(요 14:31).
그러나 다락방 강화는 요한복음 15장, 16장에 계속된다.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이동하셨다.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강화이다. 이 강화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주로 다루셨다고 보인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 세계 열방으로 전파될 것이기에 제자훈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락방 강화 III은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한다. 강화 5는 하나님, 예수님과 우리가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설명하신다. 강화 6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 “사랑”은 형식주의자들의 가치와 충돌 한다. 그러나 제자들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다락방 강화 III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락방 강화(講話)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요15:1-17)

[다락방 강화(講話) 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15:1-5)

[다락방 강화(講話) 5-2: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요15:6-8)

[다락방 강화(講話) 5-3: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15)

[다락방 강화(講話) 5-4: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요15:16, 17)

[다락방 강화(講話) 6. 세상의 증오에 대한 경고] (요15:18-16:4)

[다락방 강화(講話) 6-1: 새로운 규범과 믿는 자에게 닥칠 박해] (요15:18-27)

[다락방 강화(講話) 6-2: 진리를 핍박하는 것은 진리를 몰라서] (요16:1-4)

강화 5

다락방 강화(講話) 5.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강화] (요15:1-17)

중요 메시지: 예수님과 성도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심

  이 강화는 마지막 만찬 후에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강화이다. 요14:31에서 여기를 떠나자고 하셔서 이 때 다락방을 떠났다고 생각 할 수 있으나 떠나신 것이 아니고 강화는 계속되어 16장까지 강화하시고 17장에서 기도하시고 감람산으로 가셨다.

  강화 4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체 이심을 강화하셨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때 일체가 됨을 밝히셨다. 요한복음 15장은 앞의 두 장 즉 13장과 14장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강화를 하신 것이다. 제자훈련에 대들보 같은 강화라 해야겠다.

  강화 5는 이스라엘의 가장 많은 과수이기도하고 메시아를 상징하기도 하는 포도나무 강화이시다. 이 강화로 예수님과 그 제자가 일체임을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의 관계를 유기체의 관계로 설명하신다. 또한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유기적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강화 5는 요15:1-5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그 제자들은 가지로 관계를 설정하신다.

  요15:6-8에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의 실상을 설명하시고 요15:9-15에서 사랑 안에 거하라는 강화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강화하신다. 요15:16, 17에서 구원은 일방적 주님이 택하셨음을 설명하신다. 이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으로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며 즉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묵 상: 1. 나무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을 때 유기적 관계를 갖게

            된다. 나는 주님과 연결되어 유기적 관계

            즉 하나가되어 있는가?

         2. 유기적 관계는 영적으로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주님과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       3. 나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해서 구원하셨음을 받아드리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15:1-5)

  이 강화는 마지막 만찬 후에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강화이다. 하나님-예수님-우리 제자들이 일체 임을 요한복음 14장 20-24절에서 강화하셨다. 일체가 되는 주된 요인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14장에서 강화하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포도나무를 예로 드시며 설명하신다. 이 단락에서는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신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은 유기적 관계에 있다. 떨어져 나가면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열매가 없으면 잘라버릴 것이다. 성도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랑의 열매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I am the true vine)이시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으며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주안에서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5-2: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요15:6-8)

[요의(要義)]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한 가지는 마르고 모아서 불에 사르게 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생명이 있다. 그때 아버지의 능력을 나타내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힘이 있고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의 증거요 받을 만하신 향기로운 냄새가 될 것이다. 열매 맺음은 가지가 해야 할 일이며 그 열매가 있음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을 알게 되며 좋은 열매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임을 증명한다.

  가지에 감이 열려있으면 그 나무가 감나무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사랑 안에서 행하는 행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다락방 강화(講話) 5-3: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15)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라.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은 본질적 요소이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믿음 생활에서 믿음은 infra structure(essence)이고 사랑은 그 기능 function(behavior)이다.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될 수 없다(고전13:1-3).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언급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친구를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사랑 없이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친구에게 몸을 내어 주는 행동이라도 사랑 없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또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사랑하시는 것임을 주시해야 한다.

  강화 2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 이다. (요13:34, 35) 주님은 강화 5에서 강화 2에서 하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포도나무와 가지”를 설명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새 계명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신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며 사랑은 곧 생명임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제자들 사이에도 사랑으로 연결될 때 그들이 하나가 될 것이다. 유기적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니까!


[다락방 강화(講話) 5-4: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요15:16, 17)

  우리(사람)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주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만이 열매를 맺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행위는 그 심령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심령의 변화가 있으면 완전한 변화(총체적 갱신, 고후5:17)가 이루어지며 행위는 자연 수반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미워함을 받게 될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임의로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우리는 그의 가지가 되었다(롬8:35).

[다락방 강화(講話) 6-2: 진리를 핍박하는 것은 진리를 몰라서] (요16:1-4)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진리를 몰랐고 자기들의 율법에 비추어보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가치 충돌이다. 세상 사람들(유대교인)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진리의 종을 배교자라 생각할 것이요 따라서 출교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진리의 사람을 죽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는 외식하는 자라할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전한 복음을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형식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강화이다. 이 강화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주로 다루셨다고 보인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 세계 열방으로 전파될 것이기에 제자훈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락방 강화 IV는 요한복음 16장을 중심으로 한다. 강화 7과 8로 구성되는데 강화 7은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이시고 강화 8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거기서 오는 영원한 기쁨, 믿고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나 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락방 강화 IV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다락방 강화(講話) 7.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 (요16:5-15)

   [다락방 강화(講話) 7-1: 보혜사 성령의 약속] (요16:5-7)

   [다락방 강화(講話) 7-2: 보혜사 성령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 (요16:8-11)

   [다락방 강화(講話) 7-3: 진리로 인도 받는 제자] (요16:12-15)

[다락방 강화(講話)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요16:16-33)

   [다락방 강화(講話) 8-1: 부활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 (요16:16-22)

   [다락방 강화(講話) 8-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요16:23, 24)

   [다락방 강화(講話) 8-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음] (요16:25-28)

   [다락방 강화(講話) 8-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 (요16:29-32)

   [다락방 강화(講話) 8-5: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요16:33)

                               다락방 강화(講話) 7과 8

강화 7

[다락방 강화(講話) 7. 보혜사 성령에 관한 강화] (요16:5-15)

중요 메시지: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 대신으로 오심, 우리로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다락방 강화 4에서 먼저 말씀하셨다(요14:15-19). 다락방 강화 4에서는 보혜사 성령의 약속과 보혜사 성령으로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강화 5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유기체의 속성을 다시 설명하시면서 그 근거가 사랑임을 설명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다락방 강화 4와 5가 연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다시 사랑방 강화 7과 연계됨을 알 수 있다. 다락방 강화 7에서 다루는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 대신으로 오시는 분(요16:5-7)이며 보혜사 성령의 역할(요16:8-11)과 그가 우리를 인도해 주심(요16:12-15)을 설명 하셨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이로써 삼위일체 신앙이 정립된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실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생명으로 인도 할 것이다.

묵 상: 1. 예수님 대신에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       2.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하실까?

.        3.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인도해 주실 진리는 무엇일까?

[다락방 강화(講話) 7-1: 예수님이 가셔야 오시는 보혜사 성령] (요16:5-7)

[요의(要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셔야 영원히 제자들과 같이 계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설명함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자들과 항상 같이 계심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이로써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7-2: 보혜사 성령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심] (요16:8-11)

[요의(要義)]

  보혜사 성령(the Helper; the Counselor)이 오시면 그가 죄, 의(義)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으로 깨닫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죄는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 이상의 죄는 없다. 의(義)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심령이다. 주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신다. 이로써 의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순전한 의를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우리의 공로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 이루어진다. 심판은 세상의 왕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에 대한 것이다. 성령이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심으로 악의 세계와 의의 세계를 분명히 하실 것이다.


[다락방 강화(講話) 7-3: 진리로 인도 받는 제자] (요16:12-15)

[요의(要義)]

보혜사 성령은 우리로 진리를 깨닫고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은 능력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롬8:26, 34). 보혜사 성령은 우리들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신다.

강화 8

[다락방 강화(講話) 8.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도의 기쁨] (요16:16-33)

장소: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고 하나님께 돌아가시며 이는 제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하신 것이다.

[종합 요의]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8은 승리하신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원한 기쁨을 설명하시며 하나님께 구할 것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요16:16-33의 내용은 1. 부활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요16:16-22) 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요16:23, 24) 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음(요16:25-28) 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요16:29-32) 5.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요16:33) 으로 나눌 수 있으나 예수님의 돌아가심은 또 다른 전환 즉 영원히 성도들과 같이하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주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음을 알게 하신 일이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영원한 기쁨이 우리와 같이하심을 이르신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심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겠다.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오히려 성도들은 큰 기쁨 안에 살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에게 구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하셨고, 이 메시지를 통해서 구원을 위시한 우리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될 것이고 아무 의심도 없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강화에서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16:25-2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신다고 강화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진리를 믿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어렴풋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뒤 그들은 선생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간다.

  이 강화 중 요16:29-32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를 확인하시고 제자들이 다 도망 갈 것을 예언하시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며 다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세상권세를 이기신 일이며 우리 성도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고 이 평안은 구원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제자들의 기뻐하는 삶을 이루신다는 강화이다.

묵 상: 1.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가?

        2. 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3. 그리스도의 승리와 구원에서 오는 평안은 무슨 관련이 잇는가?

[다락방 강화(講話) 8-1: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부활 설명] (요16:16-22)

[요의(要義)]

  공관복음에서는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에 대해 3차 예언하셨고(1차: 마16:21-23; 2차: 마17:22, 23; 3차: 마20:17-19) 또 마지막 고난주간에도 예언하셨다(마26:1-5).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이 예언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어서 제자들이 질문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풀어서 설명하시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에 기쁨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신다. 그 비유로 산모의 해산 고통과 어린아이의 탄생 기쁨을 들어 자기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다락방 강화(講話) 8-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요16:23, 24)

[요의(要義)]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제자들 앞에 서시어 부활을 확증하신다면 제자들에게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해 졌기 때문이다. 이 확신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주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고난도 다 감내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로 믿음에 거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승리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누구나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가 되셨다. 구원사역은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 기쁨이 충만할 것을 이르셨다.

[다락방 강화(講話) 8-4: 말씀을 믿게 된 제자들] (요16:28-32)

[요의(要義)]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예언을 수차에 걸쳐하셨지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메시아관이 일치하지 못했었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모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에서 어렴풋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모양이다. 아마 확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도망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제자들에게 이르셨고, 제자들은 흩어져서 다시 오순절에 새로운 변화를 입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오늘의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한다.


다락방에서 주님의 기도(요한복음 17:1-26)

다락방에서 주님의 기도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의 자신을 위한 기도(17:1-5)
제자들을 위한 기도(17:6-19)
성도들을 위한 기도(17:20-26)


이 기도를 마치시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과 가셨다.
다락방에서 주님 기도(祈禱)의 개요(槪要)

      주   제       장   소       마   태        마   가        누   가       요   한
1.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1-5
2.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6-19
3. 장래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마가 다락방


17:20-26

주님의 기도 1. 예수님, 성부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요 17:1-5)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구한다.

요의(要義)

세 단계로 구성된 기도 중 첫째 기도이고 이 단락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요 17:1-5).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영광은 그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아버지는 그 권세를 아들에게 주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아들은 만민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영화롭게 되신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시는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심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고, 이로써 아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도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입고 성화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냄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蘇生)케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이며 이 때문에 우리는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한다.

묵상(默想)

1.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2.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왜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을까?


주님의 기도 2. 예수님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17:6-19)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예수님 떠나신 후의 제자들의 성공적 삶을 위한 기도

요의(要義)

공관복음에서 다룬 겟세마네 피의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가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어있다.
대신에 장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전계 된다.
중보기도 세 단계 중에서 둘째 단락의 내용은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간절히 구하는 기도이다(요 17:6-19).
제자들이 승리하는 거룩한 삶을 구하는 기도내용은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기를, 아들의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하기를, 악에서 이기기를 구하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중보 기도하신다.

제자를 위한 주님의 기도 내용

첫째,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위한 제자들의 영적 연합을 구하는 기도(요 17:11)

둘째,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에게서도 충만히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쁨이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요 17:13).

셋째,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한 기도 즉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요 17:15).

넷째,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요 17:17-18).
 

묵상(默想)

1. 제자의 길은 하나님과 일체, 기쁨 충만, 악을 이기는 것, 거룩한 삶이라 한다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주님의 기도 3. 예수님 장래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요 17:20-26)

장소 : 예루살렘 성내 (마가?) 다락방

때 : 30 A.D.(고난주간 목요일)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중요 메시지 : 앞으로 믿을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영광을 알기를 위한 기도

요의(要義)  

중보기도의 세 단계는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 자신을 믿게 될 성도들의 신령한 연합을 위한 기도입니다(요 17:20-26).
모든 주를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로서(요 17:20)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을 믿도록하고(요 17:21),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거룩한 성도가 서로 그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요 17:22-26).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여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그 기도의 대상이 앞으로 예수를 믿을 모든 사람(요 17:20)
둘째, 성도들도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도록 하시는 기도(요 17:21)인데 이는 성도들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기도이다(요 17:22).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시기를 위한 기도이다(요 17:23),
넷째,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그 사랑이 성도 안에 있음을 알므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이다(요 17:24-26).

묵상(默想)  

1.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는가?

2.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낼까?
















의와 정의와 공의 - 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의”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실이나 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의”는 “정의”나 “공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욥, 다니엘 (겔 14:14).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롬 1: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義)”는 관계(relation)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면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와 하나님의 의(로마서 3:22)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자녀는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런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성경에서의 의(義)

1. 공의
2. 정의
3. 관계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17은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도 ‘의’란 ‘관계’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이걸 공의나 정의로 해석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오해하여 복음에는 공의/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복음에는 공의나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자녀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최소한 이 두 구절(마 6:33, 롬 1:17)만큼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히 12:11도 "관계"로 해석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서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짐) 로마서 14:17
“의”(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아들이요 딸이다)를 구하고 찾으라 로마서 3:2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 내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모든 세계에 이루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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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1. 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
2.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
3.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

의(義) :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뜻함.

공의(公義) : 공명정대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속성. 공의의 원어는 의로 번역됨.

정의(正義) : 하나님의 본성. 타락전 인간의 완전한 의. 인간 사이의 정당한 관계.


정의와 공의

랍비 리스킨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You must help again and again with him/출23:5)"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출21:1)”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어서 공표하도록 지시하신 이 '법규'의 히브리 원어는 '미슈파트(משפט)'로 그 의미는 '도덕적 정의에 관한 법(the laws of the moral justice)'이다.

모세가 미슈파트(mishpat)의 개념을 통하여 첫 번째 이스라엘 족장인 아브라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루시려 했던 거룩한 뜻을 이제 모세로 하여금 구체화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tzedakah)와 정의(mishpat)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9)".

하나님 나라의 두 큰 이상(ideals)이자 두 기둥, 즉 '공의와 정의(righteousness and justice*)'는 성경에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반복하여 언급된다 :

"시온은 정의(mishpat)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tzedakah)로 구속함을 받으리라(사 1:27)"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특히 예레미아의 이 예언적 가르침을 우리는 성전파괴 추도일이자 주권상실의 날인 Tishab B'av(아브월 9일)에 찬양으로 지어 항상 부르고 있다.

이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mishpat)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법과 질서 없이 정의사회와 자유세상을 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공의(체다카:Tzedekah:צדקה:righteousness)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카리타스(karitas)라고 하였지만, 사실 카리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헨(hen: חֵן)으로 자비(graciousness)의 뜻이므로 결국 charity(자선)의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체다카(Tzdeakah)를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성경의 의도인가? 이 핵심단어가 갖는 이중(ambigous)의 의미가 토라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인간의 모범적 감성을 보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백성이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an act of tzedakah)이 되리라(신24:10-13)".

히브리어 체덱(tzedek:צדק)은 정의(justice), 명확(precise), 그리고 양 당사자 간의 정확한 일 처리(exact treatment of both side)를 의미한다. 그런데 체다카(Tzedakah:צדקה)는 체덱과 동의어이긴 하지만 사실은 명백히 다른 명사라고 봐야 한다. 체다카는 자애심(loving-kindness)과 정의(justice)가 융합된 단어로서,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충분하지 못한 대접으로 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 필요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도 스스로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토라가 제시하는, 칠 년에 2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십일조는 비교적 적은 양이다. 또 모든 농지 소유자들은 그들 땅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떼어놓아 그들로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매일 아침 일어나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밭을 매고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룻기는 모압여인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타지에서 처절한 가난과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마을의 유지인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었던 장면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같은 내용이다. 탈무드는 우리의 이웃이 비록 적일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도 우리와 함께 하는 형제이므로, 우리에게 끝까지 그를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라도 그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없을 때에는 끝까지 그를 도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미슈나(Mishna)에 "여행 중에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는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은 내 것이고 당신 것은 당신 것이요’라고 했다면 아마도 중용의 도리로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은 내 것이요’라는 뜻이겠지만, 무지한 사람에게는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당신 것도 당신 것이요’가 되어 법의 요구를 넘어 ‘당신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짓이다(One who says that 'mine is mine and yours is yours' travels the middle of the road, perhaps even the golden mean; 'mine is yours and yours is mine' is an ignoramus; 'mine is yours and yours is yours' goes beyond the requirement of the law; 'yours is mine and mine is mine' is wicked.)" 라고 나온다.

가난한 자가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요구만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가 세상에 올바로 정립되어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를 보장하여 주는 한편, 그들이 속한 사회를 개선시키도록 독려 또는 명령하여 그들이 기금을 내어 그것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Tzedakah and Mishpat(צדקה ומשפט) : 체다카 와 미슈파트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본 이유이자 하나님의 사회정의(social justice)실현의 표어라 할 수 있는 "의와 공도(창 18:19)"의 히브리어 단어로써 신/구약을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이지만, 우리 한글성경에는 여러 다른 단어들로 번역이 되어있어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이사야서에는 주로 "정의와 공의"로 번역이 되어 있으며,
랍비 리스킨은 이것을 "긍휼의 공의(compassionate righteousness)와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로 표현하였고,
랍비 삭스는 "분배의 공점함(Distributive Justice)"와 "재판의 공정함(Retributive Justice)"으로 정의하였다.

요약하면 체다카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재화의 분배(자선)를,
미슈파트는 올바르고 공정한 법의 집행을 강조하여 억울하고 소외됨이 없는 평등한 정의 사회실현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참고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삼하 8:15)"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 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 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의(義)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3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잉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공적인 덕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잉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잉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편5절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장5절에서 잉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레미야서 23장5절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잉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사적인 덕목과 사회적/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띵가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예수님-성직자의 관계는 양-목자-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공의(公義)

이 낱말도 역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 20세기초에 한반도에 들여온 일본식 한자인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저스티스'의 번역어였습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의와 정의와 공의는 모두 '옳음'이라는 덕목을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덕목이 자리를 잡는 위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義)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신 덕목입니다. 

정의(正義)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된 공통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덕목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한 덕목입니다. 

공의(公義)

정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이지만, 그 적용은 정의에 비해 훨씬 제한적입니다. 
명시적인 법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공식적인 심판 과정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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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




성경의 장(chapter), 절(verse) 구분의 역사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분, 그리고 심지어 제목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제목을 붙이고 장(chapter)을 쓰고 내용을 쓰고, 절(verse)을 구분하고 내용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제목, 장, 절은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즉 성경의 내용과 달리 제목이나 장, 절 구분은 성경 영감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chapter)의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4세기입니다.
그런데 그 장(chapter)의 구분도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장 구분과 다릅니다.
그리고 4세기에 있었던 장 구분은 신약만 있었습니다.
구약의 장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20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1560년대 제네바 성경에서 해 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2000년 교회 역사에서 500년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절대시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사용하는 성경의 장, 절 구분도 모든 번역 성경이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예배 중의 강복선언(축도)에서 자주 사용하는 고린도후서 13:13의 경우 한글성경은 13:13이지만,
영어성경(KJV, NIV, NASB)을 보면 13:14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장절 구분을 절대시 해서는 안됩니다.
영감받은, 즉 성령님께서 장절을 구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한 것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장과 절의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찾기 쉽게 하고 읽기 쉽게 하는 정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장절 구분을 참조하되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 장(章)에 대한 구분 

성경의 ‘장’에 대한 구분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신약인데, 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이후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역에서 처음 이루어집니다.
1204-5년 즈음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스티븐 랑턴(Stephan Langton, 1150-1228)에 의해 고안되었습니다.
그 이후 1330년 경 랍비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에 의해 히브리어 성경의 필사본에 도입되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의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장의 표시는 본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에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 안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 절(節)에 대한 구분

성경의 ‘절’에 대한 구분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구약인데,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절 구분의 시작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유대인들의 원래 언어는 히브리어였으나 바벨론 포로 시절을 거치면서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어가 일상언어가 되었는데, 이러한 그들에게는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통역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 아람어로 통역하였는데,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헤미야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마소라 텍스트(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이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1503-1559)에 의해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말 위(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e) 성경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 절 구분은 1560년대 제네바 성경에서 해 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장(章) 절(節)누가 구분했을까?
장은 영국 스티븐 랭턴교수가 구분
절은 300년 뒤 로베르 에스티엔이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면 지금부터 2천년 전의 대 선배인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한번쯤 상상하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의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이 우리교회에 막 도착했다.
서신 낭독을 듣다 보니 ‘거룩한 기록들’, 즉 히브리어 내용의 바울 선생이 여러 차례 말씀한 것을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

이 말씀을 비롯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 3:15)했고 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성경 66권이 너무 방대하고 또한 구분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원래 章과 節이 없었다

바울 사도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한 ‘거룩한 기록들’의 자본(字本)은 어떤 모습들이었을까. 최초 성경의 자본은 바레스탄 사해 동굴에서 발견한 구약의 위가야서이다. 그 원본은 보지 못했지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빼곡히 차 있는 글자뿐이었다고 한다.
구두점도 없고 오늘의 우리가 사용하는 장(章)과 절(節)고 없었다고 한다. 초기의 성경 필자들은 친구나 교회에 소식을 전할 때 장이나 절로 구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전해주신 소식을 그대로 전체를 기록하여 전해준 것’이다.
오늘날 성경에 장과 절이 없었다면 그 많은 명언들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章을 구분한 분은 스티븐 랭턴

장(章)을 구분한 인물은 영국의 교직자(聖公會?) 스티븐 랭턴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사이며 대학교수이고 나중엔 영국 성공회의 캔터버리 대주교가 된 분이고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성경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불편을 느꼈다. 13세기에 종교개혁 전, 자기 나름대로 편리하게 성경 66권을 장(章)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랭턴 교수 이전에도 성경학자들이 나름대로 제목별로 장을 분류해 보기도 했다. 주로 성경에 있는 유명한 선지자(先知者)의 말을 찾기 쉽게 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참으로 편리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자기 나름대로는 편리했지만 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하나의 예로 마가복음은 현재로는 16장으로 되어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분류는 50장이 넘도록 작성하기도 했다.
랭턴 교수에게 여러 나라 신학자들이 공부하면서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던 각국 학생들은 자기 나라에서 사용하던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공부했는데 스티븐, 랭턴 교수의 성경과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맞지 않아서 불편을 느꼈다. 이 때문에 스티븐 랭턴 교수는 학생들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성경의 장을 구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랭턴 교수의 작업은 독자들과 필경사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인기가 고조하여 마침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장이 된 것이다.

절(節)을 구분한 자는 누구일까

장(章)이 구분된 후 300년이 지난 16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유명한 인쇄업자 겸 학자인 로베트 에스티엔이 성경을 더욱 대중화시키고 알기 쉽고 찾기 쉽도록 절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성경을 더 많은 사람이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구절을 기억하도록 작업했다. 로베르 에스티엔은 성경을 오늘날 전 세계가 통일된 장과 절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오늘날 인류의 구원과 교회 설립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 하겠다. 실은 이전에도 절을 구분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널리 보급하지는 못했다.
AD 1553년, 로베르 에스티엔 교수는 66권의 히브리어 구약과 그리스어 신약을 통합하여 66권 성경의 장과 절을 통합하여 오늘날 성경, 신구약 성경을 인쇄했다. 원본은 프랑스어로 인쇄되어 오늘의 성경과 장과 절이 통일한 최초의 성경이다.

구원을 얻게 해준 ‘거룩한 기록’의 은혜

오늘의 우리가 66권의 장과 절을 구분한 작업을 쉽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과 절은 성경에 있는 명구절의 고유한 주소가 된 셈이다. 장과 절의 구분 덕택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전파와 논문과 설교에 중요한 성구(聖句)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글이나 책에서 특별히 기억하는 성구나 표현의 방법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성구를 전하고자 할 때 이 장과 절은 표현하는데 과학적인 이해와 편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소식 전체를 이해하고 기억하는데 이것보다 더 편리하고 과학적인 방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66권 장과 절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주는 ‘거룩한 기록’으로 큰 은혜가 되게 하여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