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두 아들들 -



사무엘의 아들들 - 요엘, 아비야

사무엘상 8:1-3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사무엘은 선지자의 대표로 불립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사명을 완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사역의 과정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모세는 40이 되어서야 민족을 돌아볼 마음이 들었다면 사무엘은 아주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가운데 성전에서 성장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일백 이십 세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삶을 마친 반면 사무엘은 자신이 세운 왕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가운데(삼상15:35) 자신이 기름 부어 세운 왕 사울을 더 이상 대면하지 않는 가운데 일생을 마쳤습니다(삼상 25:1)

사무엘은 기도하는 선지자였고(삼상 7:5), 사무엘이 선포한 말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며(삼상 3:19), 사무엘이 기도했을 때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물리쳐 주실 정도로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도 해 주셨습니다(삼상 7:10), 뿐만 아니라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삼상 7:15-17) 열심과 성심으로(삼상 12: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붙어있게 하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봉사. 사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들이 그와 같지 않았다는데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

삼상 8장 2절에는 사무엘의 두 아들이 등장을 합니다.
한 사람은 ‘요엘’이요 또 한 사람은 ‘아비야’입니다.
‘요엘’ 이란 이름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인데 ‘우상을 대적 한다’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 란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성적(父性的) 신뢰를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의 끊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이란 친숙한 어의(語意)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이름에 담긴 뜻만큼 신앙의 인물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사사가 되어서 율법이 엄히 금하고 있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던 것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렇게 성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무엘이 사역에 너무 바쁜 나머지 양육자로서의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기인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의 아들들은 혹 ‘아버지의 부재(不在)’ 인 가운데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모 대학 연구소에서 임신 중에 엄마가 다이어트를 하거나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이 때 태중에 있던 아이는 태어나서 음식을 탐하며, 비만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중에 있을 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 태아는 본능적으로 ‘음식은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뇌에 각인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 또 음식이 공급되지 않을지 모르니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인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식습관이 그들을 비만으로 성장시킨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것을 적절한 때에 공급받는 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스스로 그 부족을 채우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바쁜 사역으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물질, 관심과 보호 등을 충분히 그리고 제때에 공급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사가 되어서 뇌물이라도 받아서 자기의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 상담을 해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성장배경을 추적해 보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물질, 사랑, 관심, 보호 등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뭘 달라고 해서 얻은 것이 있어야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도 육신의 아버지처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공급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잘도 구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그 아버지가 공급해준 것이 많으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이처럼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또한 중요합니다. 사춘기 이전에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 그 엄마의 사랑을 찾아 이 여자 저여자로 방황할 수 있습니다.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은 어릴 때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각 사람은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양합니다. 대통령도 있고, 재벌총수도 있고,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교사도 있고, 목사도 농부도 있고 구멍가게 사장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각자가 일하는 위치에서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일은 누구나 똑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 사장님을 하면 직원이 제반 일을 다 해줄 수 있어 사장님은 지시만 하면 조직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가정만큼은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몸소 남편의 역할을 해야 하고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청소도 하고 음식쓰레기도 내다 놓아야 하고, 아이들과 같이 목욕도 하고 무등도 태워주고, 축구도 같이 하고, 대화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법도 배우고 돈 쓰는 방법도 매우고 분노하고 푸는 방법도 배웁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것들이 생략된 채 학원에만 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지식은 늘지 모르지만 정서는 늘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잘하는 정서지수(EQ)가 높은 사람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할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으며 그 역할은 무척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선조들도 명심보감에서 '아버지를 알고 싶으면 아들을 보라'(欲知其父 先視其子1) 라고 했겠습니까?

한편, 사무엘이 이렇게 바쁜 사역 가운데 가정 사역을 소홀히 하고 자녀 양육에 실패한 것은, 자신도 어머니 한나의 서원기도로 말미암아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를 떠나서 성장하는 바람(삼상1:21-28)에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아버지 엘가나로부터 영향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까닭도 조금은 있다고 보여 집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그를 닮은 아버지가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역과 가정 & 자녀양육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결코 세습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부동산처럼 자녀에게 자동으로 상속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육환경이 좋고,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을 하고, 훌륭한 신앙의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체적이고 면밀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 개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다고 하여 아들의 이가 시(醋)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렘31:29). 대신 집에서 하는 아버지의 신앙의 모습이 그자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또는 후손에게 믿음(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자녀에게 삶으로 "하나님의 모습(무섭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사랑, 용서, 거룩, 관용, 기다려줌, 공급 등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하나님께 의탁)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목사님 가정에서 자녀들이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 목사님의 이중적인 생활을 보고 혼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역(하나님께 봉사)을 위해서 가정을 내팽개치고 소홀히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사역은 사역을 위해서 가정도 자녀도 버리고 사역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가정과 자녀를 떠나 광야나 굴에 들어가 수도승처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은 세미나에서 ‘내가 사역을 함으로 가정이 망가진다면 나는 차라리 가정을 살리기 위해 사역을 그만 두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역 이전에 주신 건강한 가정의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나홀로, 사역을 위해 자기를 불태우는 신앙은 은혜로 하는 사역이 아니고 자기열심과 탐욕에 기인한 것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은 비인간적인 사고와 결과를 낳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가짐으로 가정이 살아나고 화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화목이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지극히 건강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물론, 사역과 봉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업무량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짐을 자기 스스로 모두 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민11:11)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잘 모르는 무지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한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일정 분량의 짐을 내려 놓거나 나눠 줌으로서 짐을 가볍게하고(하나님께 의탁으로 하고) 가벼워진 짐으로 가정과 자녀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출18:13-23).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는 자기만 남아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큰 일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왕상19:14). 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임금과 이세벨의 폭압과 사악한 통치 가운데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남겨두고 계셨던 것입니다(왕상19:18).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에 혹은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열심으로 봉사 충성하면 나머지 모든 가정의 일들을 하나님이 자동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사무엘의 가정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으로, 바쁘게 한 것으로 치면 사무엘처럼 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들은 자녀들의 때에 적당하고 충분한 사랑을 부모님으로 부터 받아야 건강한 한 사회개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저절로 인격자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격자로 성장하는 때를 놓치면 회복되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게 됩니다.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충분한 보살핌과 공급,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도박과 같은 중독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어린이 때에 장남감을 가지고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되어 장남감을 가지고 놀게 됩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남감은 자동차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 장남감을 가지고 충분히 놀아 보지 못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새삼스럽고 유치하게 자동차, 모형 비행기, 각종 모형 만들기, 각종 게임기 등에 몰두 합니다.  

어른이 되어 어른으로서 바쁘게 해야할 일이 많음에도, 지나간 때가 족한 것을 모르니까  어른 장난감 가지고 어린아이 처럼 놀고 있는 것이지요..... 장난감 가지고 노는 어른아이 때문에 속상해 하는 주부를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에 가서 청소로 봉사하고 기도많이 한다고 해서(물론 이것은 필요하고 권장할만 하며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는 않고 자기열심으로 청소,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저절로 건강한 신앙의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동으로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가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농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뙤약볕에 땀흘리며 김을 매고 비오는데 논 물 보며 이슬 맞으며 비료줄 때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도가 쌓이면 더 풍성한 열매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가정이나 그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의 세밀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와 충분한 공급과 사랑과 보호 밑에서 성장을 해야 건강하게 사회를 살 수 있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지게 됩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외적인 사역을 열심히 하고 성심으로 하여야 하는 만큼 가정의 머리된 자로서의 가정의 내적의무를 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너무 사역에 바쁜 나머지 가정과 자녀들 양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으로 영향도 받고 영향도 끼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보내심을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미명으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끊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성공과 자녀의 겸손

부모가 사업으로, 고위 공직으로, 큰 목회사역으로 성공을 하면 자녀들은 자칫 자신들도 부모님과 같지 않을까 하고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마치 요즘 방영되고 있는 월화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아버지가 거대한 그룹총수를 하니까 장남은 자신도 카드 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큰 딸은 호텔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모 대통령의 아들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칫하면 자녀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사무엘 가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사무엘을 존경하니까 그 아들들이 겸손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사회적 지위가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교만하여 방종으로 나아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엘의 아들인 나는)뇌물을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성경에서 뇌물을 금하는 이유는 모든 것의 공급자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힘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받겠다는 불신앙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가끔 재벌 총수의 2세들이 사회를 요란케 하는 일들을 보면 모두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대외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일수록 가정과 자녀의 교육, 양육, 아내에 대한 사랑 등에 관심이 부족하기 쉽습니다. 너무 바쁜 탓에 말입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핑계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이것 까지도 소홀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그로말미암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왕을 구하는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명심할 일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평생 바쁜 사역을 하면서 얻은 명성을 잘 못 키운 자식 때문에 그 명성이 빛이 바랠 뿐만 아니라 평생에 회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자칫 그 일그러진 아버지의 상(像)이 자손 대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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