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예수의 비유 중 네 제목은 합당한가?

 

이번 개정판에서는 독자들이 내용을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개역 한글판에서는 없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그 소제목 중 몇은 외국어 성경에서나 이전의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서 붙인 것과 다르다. 그것은 그 소제목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에 일치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마 13:1-23)

본래의 개역성경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1995년 개정판 신약성경에서 소제목을 붙였다 (이미1967년의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소제목을 붙여 왔다). 그런데, 이들 소제목 가운데에서 그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마 13:1-23의 내용을 보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네 가지 다른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한 것이다.

 

2)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 비유 (눅 15:4-7)

본문의 내용을 보면, 결코 잃은 양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3)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 (눅 15:8-10)

이 본문에서도 그 내용으로 보아 드라크마의 비유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이다. 그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눅 15:11-32)

이 본문은 흔히󰡐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의 초점이 결코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물론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상의 4 가지 소제목을 우리말 성경 개정판에서 그 본문의 내용과 일치시켜 바로잡은 것은 참으로 전 세계를 두고도 획기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 중 최근 또 최우수 번역이라고 하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년, 번역위원장 Bruce M. Metzger) 에서도 보면 마태 13장의 소제목은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 15장의 3 가지 비유도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잃은 양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Lost Coin’ (잃은 동전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and His Brother’ (탕자와 그의 형의 비유) 등으로 되어 있어 그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나 주역(마 13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 13의 목자, 여인, 아버지)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과 귀신 들림


정신병 & 귀신 들림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은?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난히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신 갈릴리 지역이 가진 지역적 특성(예루살렘과 달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역) 도 작용하였겠지요.
심지어 벙어리 들린 귀신(요즘은 보기 힘든)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벙어리 들리면 모두 귀신 들린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여기 귀신들림과 단순 정신병(단순히 육체적 물리적 무질서에 의한 마음병)의 차이를 살펴봅시다(구분은 하나 때로는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기억하고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실어즘과 귀신들림을 꼭 구분합시다!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 12 가지(눅 11:13-28) 

1. 귀신 들린자는 자신이 귀신들린 것을 아나 깊은 정신병은 자신이 정신병인것조차 모른다.
2. 귀신들리면 때로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나 물리적 단순 정신병은 무덤덤하고 허약하다.
3. 귀신들리면 투시, 예언, 비밀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 정신병은 그런 초능력이 전혀 없다.
4. 귀신들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때로 이상한 방언을 하고 남에게 귀신들림이 전이 된다. 단순 육체적 무질서에서 오는 정신병은 남에게 전이되지 않으며 이상한 말을 하기는 하나 단순한 중얼거림이다.
5. 귀신들린 자는 급속한 치유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단순 정신병은 대체적으로 치유가 장기적이다. 
6. 귀신들린자는 극도의 공포심이 있다.
오래된 정신병은 이런 수준의 공포심은 없다.
다만 오래지 않은 약한 정신병의 경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우울증과 공포심이 올 수 있으니 잘 분별할 것. 
7. 귀신들린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정신병인 경우에도 초기 자살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정상인도 자살 시도하므로)
오래된 깊은 정신병의 경우 자살에 무덤덤해진다. 

8. 귀신들린자는 약물효과가 별로 없다(나중 역효과가 나거나 더 악화 가능성도 존재).
정신병에는 약물로 인한 조절과 효과가 있다. 

9. 귀신들린자는 눈이 빛나고 음침하다.
정신병자는 눈의 촛점이 흐리고 흐리멍텅하다
(정상인이 볼 때 정상인과 눈이 다르므로 판단이 어렵거나 귀신이 속이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할 것). 

10.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나 여러 종교들과 교주에 대해 유난히 지나친 반응을 하나
정신병자는 평균 수준 이상의 특별한 반응이 없다. 

11. 귀신들린자는 귀신들린 것을 나타내거나 속이려하나 정신병자는 그냥 횡설수설한다. 

12. 귀신들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될 수 있다.
정신병자는 유능한 의사를 찾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겨야 한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소유한 아주 난감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할 것. 

세 가지 참고 사항: 

1). 참된 귀신 추방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세와 긍휼로 가능하다. 
타 종파 사람들이나 퇴마사, 무당들도 축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들 귀신 축사는 귀신 축사가 아닌 귀신에게 놀아나는 경우(귀신이 오히려 귀신 쫓는 자들을 가지고 노는 경우임)임을 명심할 것.  그러므로 잠시 상황이 호전 되는 듯하나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오히려 악화(영적, 육적 악화) 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미숙한 도구요 오직 주님이 하십니다. 

2)귀신을 상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에 빠졌던 사람들을 오래 상담하면서 느꼈던 것은 귀신을 쫓는 것과 이 두 경우를 분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들이 마치 무슨 능력 많은 것처럼 떠벌릴 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능력 있다는 사람들도 횡설수설하거나 제가 볼 때 아무런 효험이 없거나 오히려 악화 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룰 때는 내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3) 귀신이 떠나간 후가 더욱 중요하다. 
귀신 축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뒤가 문젭니다. 귀신이 떠나간 후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거나 신앙이 병들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기억하고 분별하고 치유하고 치유 받아 이 문제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긍흉하심 안에서 참 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회복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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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한의학]
정신병과 귀신들림

김양규 원장

정신병의 90%는 정신분열증이다.
정신분열증은 요즘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그 주된 증상은 환각과 망상의 두 가지다.
환각과 망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과잉분비가 원인이라고 하는 학설이 주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도파민은 흥분성 호르몬인데 이것이 적당량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과잉 분비되면 환각과 망상과 같은 이상증상들이 생길 수 있다.

환각이란 환청, 환시, 환미, 환취, 환촉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의 하나라도 있으면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 중에 환청이 제일 많고 환시는 그 다음으로 많다.

망상에는 사고 장애와 감정 장애가 있다. 즉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는 것과 이상한 감정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망상과 환각을 모두 갖고 있으면 이를 정신분열증이라 한다. 이중에 한 가지만 있을 때는 분열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은 한방에서는 ‘기란’(氣亂)이라고 하는데 기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기는 항상 가볍게 팽팽 도는즉 순기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기가 거꾸로 도는 역기 현상이나, 기가 체하거나 막히는 기체, 기색, 기가 어지럽게 도는 기란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분
열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방에서는 기의 순환을 바르게 해주는 약재를 써서 치료한다. 우리 몸의 가슴 윗 부분은 항상 물이 있어서 시원해야 하고, 배꼽 아래쪽은 불이 있어서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이것이 반대로 돼 가슴 윗부분이 더우면서 열이 나고, 배꼽 아래쪽이 차가우면서 시리게 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증상이 생기게 된다.

가슴 위로 열이 차올라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정신이 분열되거나 우울에 빠지는 등등의 증상이 생기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므로 육체를 치료하므로 당연 치료될 수 있는 문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귀신들림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완전히 다르다.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요, 정신분열증은 육체의 문제이다. 정신은 육체의 한부분이요, 육체에 속하기 때문에 육체가 약해질 때에 정신이 약해진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물론 영과 정신을 완전히 구분할 순 없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귀신들림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약물에 대해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귀신들린 자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귀신들린 자를 약물로 치료했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나 부인은 귀신들린 자에게
는 꼭 있는 요소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그러지는 않는다.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또한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들린 자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면서 적대시 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결코 그렇지 않다.

괴력에 대한 문제도 확연하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괴력이 없다. 담을 뛰어넘거나 쇠사슬을 끊는 괴력이 없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은 그런 괴력이 있다. 그건 귀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건만 봐도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정신분열증상이 있으면 귀신들린 것으로 오 해하고 ‘기도해야 낫는다’면서 일체의
약물치료 거부와 함께 기도원으로 가게 만든다.

정신적인 질환도 육체 질환의 한 부분이며 분명히 약을 쓰면 치료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사회에서는 이런 병을 왜 이단시할까. 이건 중대한 문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다. 정
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마녀에게 사로잡혔다고 하면서 화형 시켰던 처절한 흑역사가 우리 종교사에 분명히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기나 배탈로 고생할 수 있고 수술을 받을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약해지고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찾아 가족치료나 환경 개선과 집단치료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를 할 생각보다, 사람을 도외시하며 매장시키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식한 처술이다.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구분할 줄 알자.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 무슨 병이든 영적인 유혹과 시험을 받고 사탄의 틈탈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지식 없는 사람들의 예사로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실족케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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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VS정신질환 구별 어떻게함? 

성경에 귀신들린자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별 기준들이 생긴다. 

(1) 예수 혐오

정신병자는 예수님을 그다지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예 관심이 없을때가 많다. 

반면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을 극도로 싫어한다.

(2) 논리적 대화 

귀신들린자는 논리가 탁월하며 지식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는 논리가 엉성하거나 비현실적이다. 

(3) 특별한 신체능력

귀신들린자는 종종 힘이 쎄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슈퍼파워는 없다. 

예) 막5:34-35

(4) 특별한 영적능력

귀신들린자는 점쟁이처럼 사람의 생각을 꽤둟어보거나, 과거 or 미래에 대한 정확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런 영적 능력은 없다. 

(5) 약물효과

정신병자는 특정 약 복용으로 증세의 호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귀신들린자는 그렇지 않다. 

(6) 탁월한 공격적 거짓말

귀신의 특징중 하나가 거짓말이다. 이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심정과 영혼을 파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거짓말로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주지 못한다. 

(7) 이중적 실존

정신병자는 자신의 인격과 몸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귀신들린자는 또 다른 영적 자아가 지배권을 휘두르며 그 몸을 이용해서 말한다. 이때 귀신들린자는 자기 몸 안의 귀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한다. 

(8) 치료 시간

귀신들린 자는 즉시 귀신들리거나,

귀신이 나가면 즉시 치료되거나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서서히 나빠지거나, 서서히 호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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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들림

귀신들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영향의 한 가지 측면은 자기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귀신은 인간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이든, 어떠한 행위이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로 그 곳을 지배하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림의 특징으로 특별한 신체적인 힘, 분노 폭발, 인격분열, 천리안이나 예지 같은 초자연적인 감각 능력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덧붙이면 옷을 벗고 돌아다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 기괴한 행위 등이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교역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보고한 사례 연구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 속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도덕적인 타락, 우울증, 분명한 백치 상태에 빠짐, 황홀경에 빠짐, 극단적인 공격성, 무의식에 빠짐, 입에 거품을 묾, 기도와 성경 읽기 등 광범위한 종교적 활동에 저항함, 배운 바 없는 언어를 이야기 함, 환상, 고통, 의기소침, 불결한 생각, 성적·감각적 ·적대적인 본능의 행동에 강박 관념을 갖거나 참여함, 정죄 하는 선언이나 살해,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라고 명하는 음성을 들음, 자살 강박 관념 등이다.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음 몇 가지의 두드러진 징후를 나타낸다.

첫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초능력을 종종 발휘하여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갈거나 광란을 부리거나 남을 저주하고 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절교를 하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한다.

둘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빈번히 경멸적인 웃음을 던진다.

셋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적 징후는 가끔 투시력이나 비상한 지식을 갖게 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인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정적 징후는 밖으로 표출되는 심한 내면의 갈등적 현상이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성격분열 혹은 성격 파탄이라고 표현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항시 좌정된 마음으로 일정한 목표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해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인데 귀신들린 자들은 늘 좌불 안상으로 두리번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하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정신의학자인 스코트 팩(Peck M. Scott)은 자기의 저서에서 귀신들림의 음성적 증상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귀신들림은 지속적이며 파괴적이고 남을 희생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둘째, 귀신들림은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여기고 공적인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존대 받고자 하는 집착이 매우 강하다.
셋째, 귀신들림은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때론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인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위풍이 남에게 폭로되어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곧잘 표현한다.
다섯째, 마귀, 귀신의 압박에는 신체적 질병을 유발 할 수 있는 추악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책의 임상적 증상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귀신들림 현상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2.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격어 왔음을 볼 수 있으며, 아직 까지도 확실한 개념을 정립되지 못한 실정이다.

현재 지배적인 견해는 뇌에 기질적인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 감정, 시각, 행동 등 인격의 여러 측면에서 특히 사고의 기능에서 와해가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병 상태라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유전적 요인, 환경의 영항을 중시하는 심리사회적 요인, 뇌에 이상과 관계된 접근을 하는 신경해부학적 요인, 종교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원인 규명을 위한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열증의 병태생리가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질환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정신분열증 증상은 사고, 언어, 감정 행동, 지각, 의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증상들은 환자마다 다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한 환자에서도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들은 망상, 환청, 사고의 장애, 정서적 둔마, 자아 경계의 상실, 자발성 장애, 외부세계와의 단절, 움직임의 감소이다.
정신분열증을 진단하는 기준에는 망상(delusion), 환각(hallucination), 와해된 언어(disorganized speech), 심하게 와해된 행동이나 긴장증적 행동, 음성증상을 중요시 하여 진단하는 DSM - IV가 있다.

이 기준에 의하여 진단되는 정신분열증의 아형은 편집형(망상형), 해체형, 긴장형, 감별불능형, 잔류형이다. 이러한 복잡 다양한 정신분열증을 환자의 증상을 기준으로 정신분열증의 아형을 나누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신분열증 증상의 특징들을 기준으로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기준이 제시되었다. 정신분열에 있어서 양성증상에는 환각, 환청, 환시, 망상, 말하기 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의지영역에서의 이상증상, 행동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있으며, 음성증상에는 감정둔마, 무언증, 무의욕, 무관심, 즐거움의 상실, 비사교적태도, 주의력 감소 등이 있다.

3.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비교

귀신의 영향과 정신장애는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양자의 증상이 광범위하게 중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주어진 사례에서 어떤 현상이 거기에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한 정신 정애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하지 않은 정신장애 사이에도 유사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증상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증상이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명확한 차이라고 한다면, 약물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는 정신분열증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귀신들림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치료에 있어서도 정신이상 현상에 대한 진단에 적절한 약물을 발견하기가 힘들며, 환자의 반응을 보면서 약물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듯 하면서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혼란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신경정신의학과 최영민 교수는 정신병과 구별하여 일반적인 귀신들림 현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는 지속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데 매우 교묘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순수하고 착한 성격을 보여주며, 남을 희생시키는 요령과 술수를 부리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둘째, 귀신들린 자는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존경받으려는 집착을 보인다.
정신병에서도 물론 자기에 대해서 과대망상을 가질 수 있으나 대인과의 관계에서 존대를 원하기보다는 자기 홀로 그런 환상에 빠지며,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스스로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셋째, 귀신들린 자는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면서 때로 정신질환의 증상을 보이지만 정신병의 경우는 만성적인 퇴행성이 오지 않는 한 이러한 지적 능력의 장애는 없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자신들의 허세가 남에게 폭로되고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보인다.
반면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망상이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해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보기에 더욱 위축 되어 보인다.

정신분열의 증상과 귀신들림의 증상은 명확히 판단해 볼 때, 구별은 된다고 보지만 정신의학자는 정신분열로 인한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정신분열로 판단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진다고 볼 수 있으며, 귀신들림에 중점을 두어 판단하는 목회자나 영을 분별하는 자들은 귀신들림으로 인한 증상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기에 증상 하나 하나를 놓고 서로 연구하면서 판단하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4.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에 대한 돌봄

a. 의학적 돌봄
정신분열증 치료를 위한 처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약물치료이다. 항정신병 약물은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현저하게 감소시켜 주고 재발을 효과적으로 막아준다. 항정신병 약물은 몸속에 침범한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와는 달리 환자의 뇌 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의 활성도의 이상이 생간 것을 정상생리로 회복시켜 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항정신병약을 먹는데 있어서 우려할 수 있는 것은 부작용의 문제이다. 주로 도파민 활성도를 차단하는 항정신병 약물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부작용이 있다. 졸리움,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날 때 어지러움, 입이 마름, 코가 막힘, 눈이 어릿어릿함, 안절부절 못함, 근육이 굳어서 팔·다리 움직이는 것이 느림,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음, 햇볕에 예민해 얼굴이 쉽게 탐, 변비, 식욕증가 등의 부작용이 있다.
b. 목회적 돌봄
목회자는 정신분열에 있어서 미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가 발생하거나 환자의 가족들이 고민이 되어 상담할 때 목회자는 정신분열증에 있어서 전문병원이나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을 알려 주도록 해야 한다. 또한 환자가 의사 처방을 무시한 채로 병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할 때 목회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재발을 막기 위해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약을 복용하도록 권하고, 환자의 가족에게도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고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격려하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 가족적 돌봄
정신분열증이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생기는 병도 아니요, 부모가 잘못 키우거나 특별한 가정환경 때문에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 것도 아니다. 정신분열증은 사람에게 생기는 다른 모든 병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병일뿐이다. 심장병에 심장에 생기고, 폐병이 폐에 생기듯이 정신분열증은 사람이 뇌에 생기는 병일뿐이다. 마음에 생기는 병이 아니다.
d. 인지-행동 치료적 돌봄
정신병의 인지-행동 치료자의 주된 목표는 정신병적 증상으로 인한 고통과 기능장애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환자들이 경험하는 사고, 신념, 그리고 이미지가 인지-행동 치료자가 다루는 핵심적인 재료가 된다.
정신병의 핵심증상과 경험은 인지장애에서 비롯되는데, 지각의 이상과 자기 경험의 이상(예를 들면 환각)을 가져오는, 정보-처리에 관련된 기본인지과정의 장애와 망상을 이끌어내는 의식적 사정(査定)과 판단의 장애라는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인지-행동 치료의 넓은 목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는 정신병적 증상이 야기한 고통과 장해를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둘째는 감정적 교란을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셋째는 재발의 위험과 사회적 장애 수준을 줄이는 데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 정신 재활(psychiatric rehabilitation)적 돌봄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하는 약물 이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약물 하나만으로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회복되기 어렵다. 정신장애의 고통을 겪었다는 경험이 남긴 자존심과 자신감의 손상, 그리고 잃어버린 기능력과 시간을 보충하는 문제는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영역이다. 재활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회복에는 치료와 재활이 함께 필요한 것이다.
정신재활은 오랫동안 정신과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기능력(functioning)을 개선하고, 그들이 선택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전문적인 개입(intervention)을 받으면서 성공적이고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내담자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특수한 기술들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담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능력 수준을 지원해 주거나 강화해 주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결어

목회현장에서도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대한 목회자의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 한다. 과거이 목회자들은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에 대한 뚜렷한 근거와 구별이 없이 대부분의 정신분열증을 귀신들림으로 판단하여 신앙치료만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또한 이러한 판단과 신앙적 치료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정신분열증을 보이는 환자에게 축사를 한다고 하여 오히려 내적 상처를 심화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는 목회자들이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아울러 영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의학적 치료 또한 그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의 원인을 마귀나 귀신들림과 같은 영적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이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는 생각은 현대 의학적 개념과 거리가 먼 반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치료의 방법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정신의학계의 이러한 입장은 영의 존재와 활동을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폐쇄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정신이상 증상은 전인치유의 맥락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환자는 단순히 신체적 치료만을 필요로 하는 질병의 사람만은 아니다.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까지 이해하고 치료영역을 넓혀야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정신병의 원인에 대하여 마귀나 귀신들림을 고려하지 않고 의학적 치료만 인정하는 입장과 모든 질병의 원인을 마귀 들림에 두고 축사의 방법을 통해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치료만 인정하는 입장을 절충하는 조화된 치료(전인적 치료)를 시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가 상호 존중해가면서 서로의 이해를 넓혀야 할 것이다. 곧,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은 그 증상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정신분열증 환자인지 귀신들린 것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전제로 정신의학적 치료와 영적인 치료 모두에 열린 의식이 필요하며 치료법에 있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21세기 앞서가는 목회자는 정신이상 현상에 대하여 영적치료 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적 심리치료를 고려하는 지평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에서 서로의 의견이나 치료에 있어서 서로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만남을 갖고 세미나나 포럼과 학술강연회를 통하여 상호이해의 길을 모색하고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해 치료의 방안에 대한 협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제공하기 위하여 본고는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이해의 지평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차이점과 유사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사나 목회자들에게 전인적 인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나타나는 양상은 너무도 비슷하여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진단할 뿐이지 확정된 결론은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단지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판단 근거라고 한다면, 귀신들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표시는 환자 이외의 새로운 인격이 표현되는 것이고, 정신분열증임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기준은 약물에 나타내는 반응여부에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영과 육의 전인적 접근이 요청된다. 정신이상현상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요인들이 서로 다양하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기 때문에 의학적 돌봄과 심리적 돌봄과 목회적 돌봄이 공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함께 나타나는 복합적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진단을 시도했다. 좀 드물지만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정말 그 환자의 정신이상 현상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를 원하는 제보자의 요청에 의하여 시도된 것이다. 제보자의 어머니의 정신이상현상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양상이 아주 복잡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두 가지 측면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분열적 측면과 귀신들림적 측면을 분석함을 통하여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서로 비교가 되고 그 차이점과 유사점을 규명하는 가운데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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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구분법




평소에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저로서는 김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부분을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한 그리스도인이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어떻게 분별하고 이해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사례로 명쾌하게 분석한 따뜻한 목소리"로 쓰여진 김진의 『정신분열증에 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운데 부분적으로 요약한 글입니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의 분별을 위한 시험적 분별점

1) 절대적 분별점  

(1) 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 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 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 막 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 행 16:16~19, 배가된 완력: 행 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소녀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정신 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 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지식을 말하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 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면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중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 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결국 동시적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상대적 분별점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띠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 일반인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 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진 경우를 정신과 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믄드믄하게 나타나, 어떤 때는 전혀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 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 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 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의 당부의 말씀 


제가 지금까지 주치의로서 직접담당한 환자의 수가 600명 이상이 되고 게다가 주치의로서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병동 또는 병원에서 알았던 환자들까지 합하면 수천 명을 훨씬 넘게 됩니다. 그렇게 알았던 환자 분들 중에서 앞서 언급한 분별점인 초능력의 행사나 영적인 특별한 능력을 보인 환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 기독 정신과 의사들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통계적으로 정신이사장들의 거의 대다수는 정신병에 의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많은 예들이 나오지만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확실한 사례는 거라사 걸인의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귀신이 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가 실지로 적어서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상자를 만났을 경우 우선 정신과적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역자와 상의하여 이러한 결정이 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또, 기독 정신과 의사들은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의 존재에 대해 늘 주의하여 살피는 의식을 키우고, 그러한 가운데 그러한 사례라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교역자에게 자문을 구하여 상의한 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귀신들림으로 판단이 된다면, 정신과 의사는 믿을 수 있는 교역자에게 의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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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병의 차이
빙의, 귀신들림, 귀신들림과 헤리성 정체성 장애의 구분


저는 정신과의사로써 개인적으로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믿습니다.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지요.. 묘하게 겹쳐져 있기도하고요..
귀신들림처럼 보이는사람이 나중에 정신병으로 판명되어 약을 먹고 좋아지기도 하고,
멀쩡해보이는사람이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신들림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정신병 환자들에게 퇴마사가 귀신을 좇을 때 더 악화됩니다.
정신질환 중에서 다중인격은 귀신들림처럼 다른 인격체가 표현되며,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분별점

(1)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kg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kg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kg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막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행 16:16-19,배가된 완력:행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추는 소녀 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정신 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전혀 배우지 않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 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컴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컴플렉스 에 의한 반응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귀신에 의한 적대적인 것을 구분하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인용한 것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다중인격장애를 다루면서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다중 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결국 동시적 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 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 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띄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 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일반인 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지는 경우를 정신과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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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문드문 나타나, 어떤 때는 아주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 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두 세 가지 더 소개할 수도 있지만 비전문인에게는 혼란을 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정신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익히신 분들에게만 소개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 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 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 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병이 심리적 신체적 유전적 기질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인식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귀신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정신병과 귀신들림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차별화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차박사는 정신병인 경우 약물치료 및 재활상담치료가 효과적이며 귀신들림의 경우 단계별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즉 대상자가 현실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없는 혼란상태에 있을 때는 항정신성 약물치료를 한다.그리고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정신상태로 회복된 후엔 영적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를 통해 치료자는 귀신들림에 대한 개인적 배경,가족배경,신앙상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정신질환과 영적질환이 혼합됐을 경우엔 정신치료와 영적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2∼3주동안 자극받지 않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항정신성 약물,항불안제의 투여로 정신병적 상태를 회복시킨뒤 정신치료 문제의 파악 및 해결로 현실 적응력을 강화시킨다는 것.


 

아래는 Deep Bang의 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Deep Bang 의 구분에 의하면, 귀신들림은 죄, 악, 신경증, 또는 정신병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림의 원인이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증상면에서 정신병이나 악과 많은 부분이 관련되어 있지만, 원인으로 분리해 볼 때는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귀신들림이 해리성정체감장애와 분명히 구분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귀신들림은 다른 인격이 밖에서부터 인간의 내면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두개 이상의 인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던 외부 인격이 인간의 내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귀신들림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정말 귀신들림이 가능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또는, “지식과 과학이 한참 뒤쳐져 있던 옛날에나 먹힐만한 얘기지, 최첨단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신(악한 영)에 대한 얘기를 꼭 옛날 동화 속의 얘기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치부해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오랜 경험 있는 정신과의사, 심리학자, 또는 상담사는 적어도 한두 번 정도는 귀신들린 환자를 만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맨 처음에는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다 해도 매우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정신병 환자와 같이 처방하고 치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만약, 유능한 의사였다면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점점 많은 정신과의사와 정신건강을 위한 학회들이 귀신들림이나 영적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신과의사는 영적 문제를 DSM-IV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 이러한 움직임들을 고려할 때, 귀신들림이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Deep Bang 에 의하면, 인간 안에 한 사건으로 인해서 텅빈 공간이 형성 되었으며, 그 빈 공간 안에는 원래 하나님의 영이 존재해 있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웅덩이를 메우기 위해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돈, 명예, 권력, 섹스, 성공, 등등 수많은 것들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영 외에는 그 어떠한 것(욕망)도 자아의 갈망을 근본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아는 욕구불만을 경험하게 되며, 더 구체적으로 자아는 두려움/죄책감/불안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정.의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신경증과 정신병을 앓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귀신들림을 이해해보자. 귀신들림은 자아의 텅빈 그 공간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또 다른 영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웅덩이는 본래 영적 존재를 위한 곳이었기 때문에, 악한 영(귀신) 역시도 침범할 수 있는 곳이다. 귀신이 인간의 영혼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서, 하나님의 영이나 자아를 대신해서 주인 행세 하는 것이 바로 귀신들림의 실체이다.

귀신들림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첫째는, 자아가 자신의 영혼 안으로 귀신이 들어오도록 의지적으로 허락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영혼을 판다. 또는 영혼을 거래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는 자아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는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파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복수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단순한 호기심에 영혼을 팔기도 한다.

이와같은 영혼 거래 행위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역의 문화와 배경에 따라서 각기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영혼 거래 행위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의식의 내용이나 방법은 다르겠지만, 비밀스런(때로는 그룹으로) 의식행위를 행함으로써, 자아가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판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는 행위나, 제단 위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나, 특정 문구를 반복해서 읽는 행위 등이 있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진다. 특수한 약물을 복용하거나 격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자아가 제기능을 할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이끌어간다. 다시말하면, 자아의 기능(특히 사고와 의지)을 최소로 약화시킴으로써 무아지경(無我地境)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한다. 그 이유는 자아의 기능이 약한 그때에 귀신이 자아의 중심에, 즉 그 텅빈 웅덩이에 쉽게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 판매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무당이다. 사람들은 정말 용한 또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무당을 이렇게 부른다. “신이 내린 무당이다.” 말 그대로, 귀신이 무당 안에 내려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귀신이 자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당은 인간 이상의 능력들을 보여주곤 한다.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맞추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무당이 점을 치거나 귀신을 불러내는 일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을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아가기 위해서 자신만의 의식을 행한다. 특별한 의식 행위를 통해서 자아의 기능이 약해지면, 무의식(하나님의 영이 빠져 나감으로 형성된 것이 무의식이라 했다. 그 무의식에 귀신이 숨어들어가게 된다.)에 숨어 있던 귀신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영혼거래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아 안에 두개의 인격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일정 수준에 있어서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아가 지.정.의에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은 채로, 귀신과 함께 공존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아가 의지적(의)으로 귀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영혼거래자는 자신 안에 귀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지) 있으며,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자아 안에 있는 귀신을 경험(정)했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지.정.의 전체를 통해서 귀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영혼거래자의 자아는 귀신(악한 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지.정.의에 큰 문제없이 꼭 평상인과 같이 기능하며 살아간다. 굳이 영혼거래자와 보통 인간의 차이점을 밝혀본다면, 보통 자아의 중심은 무의식 상태로 텅 비어 있지만, 영혼거래자의 자아 중심에는 귀신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귀신이 자아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것이다.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이 자아의 지.정.의를 파괴하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이때는 자아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아의 영혼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자아의 허락없이 악한 영적 인격체가 자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상황을. 자아가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악한 영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는 상황을. 그리고 자아 안에서 강력하게 몸부림치는 악한 영을 경험할 때 느끼는 감정과 사고의 혼란과 고통을 상상해 보라.

이와 같은 자아와 악한 영 사이의 싸움으로 인해서 상처받는 쪽은 언제나 자아이다. 자아가 싸움에서 이겨낸다 할지라도 지.정.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언제든 제 2차, 3차의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만약에 자아가 싸움에서 패배하고 귀신이 승리하게 된 경우에는, 자아가 완전히 망가지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지.정.의 뿐 아니라, 인격과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 경우에는 자아가 기능을 거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옷차림이나 외모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며, 심한 공격성을 갖기도 하고, 백치 수순의 생활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귀신의 침입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처한 자아에게 자주 발생한다. 자아의 지.정.의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거나, 기능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이다. 중요한 사람의 죽음이나 불행과 같은 갑작스런 사건을 경험한 자아는 순간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와 폭발로 인해서 사고와 의지의 기능을 순간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한번 조화가 깨어지게 되면, 그 후유증은 심각하다. 많은 경우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점차 회복되지만, 어떤 경우는 심한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을 앓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정신병을 갖게 되기도 한다.(앞의 인숙의 예처럼) 그리고 더러는 귀신들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정 폭발이나 불행한 사건이 귀신들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감정 폭발은 일종의 자아 표현에 불과하고, 불행한 사건은 아무리 크고 심각하다 할지라도 외부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정.의의 기능 약화 역시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귀신에게 침입을 허용할 만한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자아의 기능 약화가 약점으로 작용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원인은 되지 못한다. 귀신의 침입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이유는 자아의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사고)에 있다.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 자아가 이후에 악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질 때가 있다.

“나는 죽어 마땅해.” “나는 쓰레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복수하겠어.” “죽일 거야.” “나는 하나님을 저주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해.” 등등과 같은 수없이 많은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들로 자아가 가득해지게 되면, 동시에 자아 안에 악한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고, 악한 의지가 형성되게 된다. 이와 같이 자아가 부정적이고 악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귀신이 침입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귀신의 영향력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귀신은 사람을 헤치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영적 존재다’라고 생각하지만, 귀신의 영향력은 자아가 믿고 인정하는데 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귀신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아에게는, 귀신이 어떤 능력이나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귀신에게 바쳐진 자아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의 존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미성숙한 어린 자아의 주위에 머물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그 자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권위를 부모로부터 양도 받은 귀신이 어린 자아에게 쉽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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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은밀히 해야 하는가?


은밀히 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7:8-10.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비밀히(2927)

κρυπ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927

1. 감추인.  2. 막 4:22. 3. 숨은 것
발음 [ krüptŏs ]
어원 / 2928에서 유래
  • 1. 감추인, 비밀의.
    • a. [형용사] 막 4:22, 눅 12:2, 벧전 3:4.
    • b. [명사로 사용할 때] 숨은 것, 숨은 생각, 눅 8:17, 롬 2:16, 고전 14:25.
  • 관련 성경

    은밀한(마 6:6, 롬 2:16), 숨은(마 10:26, 눅 8:17, 벧전 3:4), 숨기는(막 4:22), 감추인(눅 12:2, 고전 4:5), 묻힌(요 7:4), 은밀히(요 7:10, 18:20), 이면적(롬 2:29).

* 2928  κρύπτω

1. 숨기다.  2. 감춰 두다. 3. 숨다
발음 [ krüptō ]

마태복음 6:6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인경건 생활 

마태복음 6:1-18
잠언 11:24-25
누가복음 6:38
누가복음 11:41
시편 50:15
이사야 58:6-9

신약에서 경건(敬虔) - (헬) [유세베이아] : 유/(잘)+세베이아/(경외함으로 서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두려워함)으로 바르게 잘 서다, 행한다           하나님 면전(面前)에서 걷는다, 행한다

구약에서 경건 - (히) [할락 리페네 야웨]   할락 : 걷다. 행하다.

  리페네 : 면전에서(전치사)   야웨 :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는 자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서로 일치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자세를 가리킨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칼빈의 좌우명(座右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신앙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면전에서 사는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3가지 경건 생활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인데,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하고, 자랑하려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구제, 기도, 금식하라는 것이다.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1. 구제 생활 (1-4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함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신문 기자 부르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자신의 선행이 이미 칭찬받고, 박수도 받았으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구제하라.
그래야 하나님이 칭찬해 주고, 도 주시고 갚아 주신다.

구제마음을 담아 물질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로 구제하면 을 받아 더 풍족해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富)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영적인 법칙이다.

전도서 11:1
너는 네 식물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구제하면 얼마 안 가서 도로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죄성이라는 것이다.
죄성욕심으로 나타나고,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를 낳고,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물욕, 명예욕, 권세욕 같은 것들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욕심부린다.
그래서 욕심에 붙잡혀 사는데, 구제는 이러한 이기심, 욕심을 사라지게 한다.

누가복음 11: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정말, 구제에는 놀라운 축복이 들어 있다.
문제는 은밀히 해야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이것이 참된 경건한 생활이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구제가 된다.

2. 기도 생활 (5-6절)

기도는 정말 축복된 경건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고, 은혜 받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외식이라는 말이다.

기도가 자랑이 되면 기도의 은총과 축복을 놓치는 일이 된다.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왜 은밀히 기도하라고 할까요?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다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7-8절)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과 유혹을 받기도 하고,

실족하여 죄짓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환난을 당할 때도 있다.

환난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를 부르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환난에서 구원해 주고,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환난 중에 기도해야 하고, 또한 풍성한 삶(요 10:10)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즉,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 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되기 위하여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예배 때 많이 사용한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다. (마 6:9-13)

주기도문 안에는 6가지 간구가 있다.

대신 간구(3가지) :

①하나님의 이름

②하나님의 나라

③하나님의 뜻.

대인 간구(3가지) :

공급용서 보호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이고, 기도 중기도이다.

주기도문 마지막에 (대개)라는 말은 (호티)인데 왜냐하면(For)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라권세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3. 금식 생활 (16-18절)

금식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금식기도 하면서, 티내지 말고, 금식기도 후에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자기 욕망에서 벗어날 때 할 수 있다.
금식은 식욕의 욕망을 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문제는 금식이 공로가 되고,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은밀히 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인가?

이사야 58:6-9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금식 기도하는 것이 귀하지만, 자랑 거리가 되고, 공로가 되면 안 된다.

모든 경건 생활하나님만 의식하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경건 생활은 정말 중요하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구제, 기도, 금식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자랑하지 말라.
공로심으로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하라.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갚아 주신다는 말씀이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인정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령한 기쁨도 누리게 된다.

신학교 교훈 중에, [경건과 학문] 이란 것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신학교의 중요한 교훈이다.
경건이 없이는 아무리 신학과 학문을 많이 닦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경건한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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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구제(마태복음 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가 신앙의 생활을 영위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여도 우리의 신앙은 정상적이지 못할 것이며, 아울러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는 엉망으로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인정받지 못하며, 반면 사람과는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서로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하나님을 향하여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이러한 두 가지가 아름답게 균형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과의 관계는 구제한다는 말로서 즉,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선대할 것이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남에게 나누면서 의를 행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구제를 행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그분의 명령을 중시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합당한 삶을 행해 갈 때 아주 조심하여야 할 사항을 강조하시며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 나팔을 불지 말 것(2~)

미담(美談), 미행(美行), 미덕(美德) 등은 메마른 삶에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은 주님께서 지적하심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외식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심은 본장에서만 1절, 5절, 16절에 걸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연보와 봉사 그리고 더 나아가 구제하는 것까지 사람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행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유욕
가능한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입니다. 

둘째는 출세욕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출세의 본능입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
그 다음으로 내세우고 싶어 하는 명예의 욕망입니다.
인정을 받으려하고, 칭찬을 받고자하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본능입니다(마 23:2~7. 눅 18:11~12). 우리 역시 이러한 것들을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적이며, 육신적인 미혹됨에 빠지게 됩니다(요일 2:15~16).

‘선량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내용을 잘 알 것입니다(눅 10:30~37). 혹자는 이 사건이 만약에 후미진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거리 한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안보는 곳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이었기에 할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사람들이 보니까 하는척하면서 행세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사람에게 들려  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아뢰는 비밀스런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나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의 육신적 유혹을 이기고. 다만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아뢸 것입니다(빌 4:6. 골 4:2).

둘째, 구제는 은밀하게 할 것(3~4a).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삼대 덕목으로서 구제와 기도, 금식을 지적하십니다. 이것들은 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제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금식은 자신에 대한 행위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면의 행위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구제는 선행입니다. 예로부터 선행은 장려되었습니다. 선행만큼 칭찬 받을만한 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한 방법으로 자선행위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구제의 문제부터 지적하신 것입니다.

구제는 은밀히 해야 합니다. 자신까지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밀해야 참된 자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상급이 따릅니다. 사람의 칭찬을 원하게 되면 자선(慈善)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상급도 이미 받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려고” 무엇인가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이 말은 “구경거리로”라는 말입니다. 극장과 위선이라는 용어는 상호 연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배우들”을 말합니다.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우는 것이 배우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일에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나팔을 불었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당시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나팔을 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적인 나팔이 아니라 “오버-액션” 즉 과장되게 떠벌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밖으로 시끄럽게 공포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나팔(의도적)을 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호화롭게 자기를 칭송하는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너그러움과 행위를 나타내려고 신문이나 방송에 그 사실을 발표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갈 2:10), 동시에 경건한 삶의 부분이 됩니다(약 1:26~27).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로다(시 41: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선행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명령은 여전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사도바울은 전도와 함께 중요한 또 하나가 구제라고 역설합니다(고후 8:1). 구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재물이 아깝지 않고 또 자만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제는 자신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팔을 불어 자신의 선행을 선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행하든 은밀하게 행하든 그러한 행위를 하늘 아버지께서 보십니다. 이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하는 일을 즉, 구제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다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처럼 감동스럽고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만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람들은 그를 몰라주었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그를 멸시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고 말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욥 6:2, 31:6).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 중에서도 하나님은 살피고 계시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믿음의 일들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진실해야만 하고 오직 그분께 인정받는 믿음의 행위를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십시다(계 2:23).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자세보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삶의 자세로 살아 갈 것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하다가 미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나를 보시고 계심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믿음의 행위를 살아갑시다.

셋째, 아버지께서 갚으심(4b~)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하나님만 보면서 행하는 자를 다 보시고 아시면서 반드시 갚아 보상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하면 그것을 보상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보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말없이 행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갈 6: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헛되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제 발견하십시다. 왜, 그토록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었는지,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한다고 하여도 왜, 열매가 없었는지, 부지런히 구제를 하여도 왜, 기쁨과 은혜가 없었는지, 도리어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미혹에 빠지고, 다툼이 생기며, 하지 않은 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의 일에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랑과 칭찬을 위하여서 그리고 세상의 허영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고 무엇보다 공명정대하신 하나님만이 알아주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행하기를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은밀한 기도(마태복음 6:5-8)

성경 공부 시간에 기도에 대한 교육을 이미 받은 대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우리의 대화의 대상이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와 대화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바를 기도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대화자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좁은 의미로는 바로 나 지신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양지 삼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어,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나라에서 살고, 그곳에서 상 주시려고 우리를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며, 늘 돌보시는 분으로 24시간을 언제, 어디서나 그의 눈이 우리를 관찰하시며, 늘 함께 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의 존재로 보존하시기 위해 우리가 순수하고, 거짓이 없이 진실하며, 세상보다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다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하나님은 창조자요, 나는 피조물, 하나님은 아버지시오, 나는 그의 자녀,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진실이시오, 영원한 영적 존재이시며,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대화할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라시고, 자녀와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대화하시기를 바라시는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고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아주 자상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런 아버지와의 대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루 24시간을 연속적으로 가져야할 필수적인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바를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5-8절까지에서 주님이 주시는 3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3]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7-8절)

하나하나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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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신자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만큼 서로 다투어 열심히 기도를 해오고 있는 과정에서 기도의 본질이 변화되어 오열되고, 부패된 기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뭐가 많은 줄 아세요? 가짜가 많은 것입니다. 귀하지 않을 것을 가짜로 만들 필요 없어요. 기도가 그토록 중요하다 하심은 가짜 기도가 있어서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에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매일 드리는 기도문 두 가지가 있어서, 이런 기도문을 암송해온 경과를 거치며 몇 가지 기도의 불순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성도에게 늘 따라야할 중요한 것이므로 자기의 경건을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귀의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 와서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도록 자랑을 위해, 자기가 아주 기도 열심히 하는 경건한 교인, 경건한 교회 지도자임을 보이려고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거리에나 회당에서 기도 흉내를 낸 것을 주님의 꿰뚫어 보시고, 이를 지적하시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기도를 했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시에 하나님 이름을 여러 번 들먹거렸으나 입술만 움직였지 마음으로는 않고, 사람의 눈을 생각했으며, 기도는 소리 크게 질러 하나님께 들리도록 한 것 같지만 그 기도는 결국 사람 귀의 높이까지만 올라가고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한 기도가 되므로 하나님이 들으실 몫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은 없고, 본인의 인간의 눈을 의식했던 대로 그 보상만으로 사는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팔아 우리를 샀는데 우리는 하나님 팔아 사람을 산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하지 말도록 권하십니다.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6절 말씀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코 아버지께 얻기를 기도하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는 말은 첫째, 내가 기도하는데 내 주변에 들러리가 필요 없고, 증인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나와 하나님 둘만의 장소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내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고 전달할 수 있는 밀실을 말합니다. 골방이란 연극배우와 같이 사람을 의식하여, 소리를 크게 해야 한다든지, 이상한 소리를 내서 기도의 사람을 과시해야 한다거나 이상한 몸짓하여 능력이 역사한다는 흉내를 내서 보여야할 어떤 외적 요소가 없는 분위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골방이란 아주 작은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조용하고, 아무 방해받지 않은 곳을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넓은 들에서나, 산에서도 그 누구의 방해 없이 하나님과 내가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마음가짐이라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으며, 수 만 군중 틈에서도 이웃의 귀, 눈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드릴 수 있다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은 골방에서도 내 마음이 집중이 되지 아니하고 설레 이는 마음으로 안정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므로 골방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는 참뜻을 깊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기도원에 가서 하는 것이 통념인데 혹시 기도원에서 내가 했던 기도가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의미에 어긋난다면 40일 금식기도도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 기도의 상은 누구에게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는 권면이십니다.

[3] 중언부언하지 말라 입니다(7-8절)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이웃에 살았고, 또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살았던 관계로 갈릴리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이방신에게 드리는 기도 모습에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신 앞에서 반복하여, 오랫동안 질질 기도를 끌어감으로 이방신도 지겹고 기도하는 사람도 지겹게 되는 기도 습관이 있었는데, 유대인들도 이를 닮아 오래 기도 하는 것은 경건의 정도를 의미하며, 오래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져, 기도를 오래하는 것으로 이력을 삼은 사실을 주님이 아시고 시정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중언부언이란 반복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오래 기도를 해야 철야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줄 알고, 특별한 의미도 없이 간절함도 없이, 감동도 없이, 시간을 늘리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있고, 좋은 기도의 낱말로 잘 짜여진 기도이나 내 마음이 살러지지 않은, 감동이 없는 외워진 기도나, 글로 써진 기도를 읽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준비 없는 기도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고, 듣는 이들로 혼잡케 하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참뜻을 모르고 기도의 원칙을 전연 무시한 혼자만의 중얼거림일 수도 있습니다. 또 중언부언이란 기도하는 동안 생각을 딴 곳에 두고 하는 기도나 입버릇처럼 주님과 할렐루야를 섞어가며  이를 경건미를 내는 것이라 여기는 입버릇의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똑 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3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3번이지만 더 많이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를 탔는데, 파선되어 있다고 가정합시다. 밤새도록 ‘주여 살려주십시오’를 수 백 번 반복했어도 나를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전능 자 하나님이 계시고, 능력자의 힘을 필요로 하는 갈급함이 있고, 진실 된 표현이 있다면, 아무리 여러 번 반복되어도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7-8절에 보니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아는데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구할 것을 다 아신다는 말은 또 기도란 필요가 없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요청을 잘 알고 있으나, 필요 없이 긴 기도, 엿가락 느리듯 늘리는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표현하신 말씀인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길어진 기도의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은 길게 해야 한다는 오해, 준비 없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일이 되어진 상황 설명까지 다 설명이 필요하신 분 인줄 아는 기도, 하나님께 성경 공부를 시키는 기도, 지금 기도하는 참 목적을 바로 모르고 방황하는 이유로 기도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전 5:1-2에 “너는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은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아버지라도 준비하고, 정중하고, 진실하며, 요약하며, 분명하게 기도하므로 중언부언의 기도에서 치료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도 습관으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습관과 자기 경험도 좋지만 주님이 주신 기도의 처방에 따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기도가 있다고 지적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기도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귀에 관심이 가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하고 인간을 가르치거나 인간의 귀에 들려주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자기 기도가 중언부언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거리와 회당 즉 교회에서나 사람 보는 대해서만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 기도원에서만 하고 있고, 그런 것만 좋아하고 있는지? 기도원 기도를 높이 평가하고 골방에서 혼자 하는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 소리 내어 떠들어대는 기도를 조용한 소리로 드리고 기도보다 더 좋아하는지 우리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과 전연 상관없는 장소에서 우리 둘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로도 둘 사이에 방해가 되는 아무 것도 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이외의 다를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보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통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통해 소식 듣는 것 말고 직통 전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침에 일찍 QT Time을 갖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연속적인 경건과 기도가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진실 된 기도 통해 믿음이 더욱 향해지고 소망과 사랑과 확신을 늘려주는 그런 기도가 매일 연속되기를 원합니다. 짧은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마음이 실려진 기도가 응답 받는다고 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더욱 활력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카이로스, 크로노스, 호라의 차이와 의미


카이로스, 크로노스, 호라의 차이와 의미

크로노스의 시간 :

크로노스는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시간 관리와 계획을 통해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시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합니다.

χρό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550

1. 시간.  2. 유예(猶豫) - 망설이며 결행하지 않음, 집행유예
발음 [ chrŏnŏs ]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시간, 때, 마 25:19, 눅 8:27, 요 7:33, 행 8:11.
  • 2. 유예, 지체, 계 2:21, 10:6.

  • 관련 성경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카이로스의 시간 :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으로, 특정한 순간이나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적절한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강조하며, 기회와 행운의 신으로 묘사됩니다.
카이로스는 종종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빠른 결단력과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설명됩니다
정량화할 수 없으며, 특정한 사건이나 기회를 나타냅니다.
"올바른 순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며,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주관적인 경험과 관련이 깊습니다.

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 c.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 d.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 관련 성경
    때(마8:29, 눅8:13, 딤후3:1), 날(마16:3, 눅1:20, 고후6:2), 세월(골4:5), 연대(행17:26), 틈(행24:25), 현재(롬8:18, 히9:9), 기회(갈6:10), 항상(엡6:18).


호라의 시간 :

호라의 시간은 카이로스에 속한 시간으로 카이로스는 좀 더 긴 기간과 시기를 말합니다.
반면에 호라의 시간은 아주 짧은 잠시의 시간을 말합니다.

ὥ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5610

1. 때.  2. 시간. 3. 시간의 한토막
발음 [ hōra ]
  • 1.  때[낮의], 막11:11, 마14:15, 눅12:39, 40, 계3:3.
  • 2. 시간.
    • a. 시간의 한토막, 계9:15, 요11:9, 마20:12.
    • b. 짧은 시간, 잠깐, 계18:10,17,19, 요5:35, 고후7:8, 막15:25, 행2:15, 23:23, 마20:5, 막15:33, 눅23:44, 요4:6.
  • 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8:13, 막13:11, 눅 7:21, 행16:33, 계11:13.
  • 관련 성경
    시(時)(마8:13, 막15:33, 계3:3), 때(마14:15, 요4:53, 요일2:18), 시간(마20:12, 눅1:10, 14:17), 날(마24:42), 한때(요5:35), 잠시(고후7: 8), ~시(마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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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두 명의 신이 있습니다.
크로노스카이로스 인데요 크로노스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으로 몇 시 몇 분 몇 초입니다.
크로노스는 태양과 달, 수성에서 유래된 시간 단위인데요. 상대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현재, 순간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 뜻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데요.
아침에 눈을 떠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봅니다.
시계 속에는 3개의 시분초 침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데요 바로 크로노스 시간을 뜻합니다.
시계 속 시분초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고대 천문학자들은 밤하늘 천체를 바라보며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도는 횟수로 시간을 측정하였습니다.

① 첫 번째는 몇 시 / 아워(hour) 

hour 아워는 고대 이집트 태양신인 HORUSE (호루스)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호루스는 독수리 모양으로 상징되는데요 이것은 태양이 아침에 떠오르고 정오를 지나서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지듯 독수리도 하늘 높이 날아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두 번째 몇 분 / 분(minute)

분은 MINUTE인데요 어두운 밤 하늘에 떠 있는 달, MOON (문)이 유래입니다.

③ 세 번째는 몇 초 / 초(second)
 
초를 가리키는 시간은 세컨드(SECOND) 인데요 SECOND의 어원은 수성(MERCURY)입니다.
수성은 태양계 행성 중에서 태양 주위를 가장 빠르게 도는 행성이고요 태양 다음으로 2번째 위치하고 있어서 세컨드라고 합니다.

이처럼 시분초 를 이루는 세 개의 침이 크로노스를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현재 혹은 순간 시간을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카이로스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 사람, 물건 등 관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 있어야 합니다.
이때 휴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요. 쉬는 날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혹은 취미활동은 본질적으로는 일하는 것이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이며 이때 내면의 카이로스 시간과 마주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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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Κ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헬라어는 '때'(시간)를 표현하는 단어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이 두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의 때와 시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된다.

'크로노스'(Κρόνος)는 규칙적인 시간적 흐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의 어떤 특별한 시기를 뜻한다.

또 “때가 벌써 되었으니”(ὥρα ἡμᾶς ἐγείρω 호라 헤나스 에기로)라는 표현(은유)은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 안에서 어떤 특별한 때(카이로스와 비슷함)를 가리킨다(종종 요한복음에서 사용됨 / 참조, 요 16:25, 3:26; 고전 7:29; 10:11; 약 5:8; 벧전 4:7; 벧후 3:9-13; 요일 2:18; 계 1:3; 22:10).

•'카이로스'에 대한 몇가지 예문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때가 이르매" - '때'(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오실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에베소서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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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C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특징과 차이

시간을 뜻하는 단어 중에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두 개념을 구분하는 감각을 부지런히 길러서 잘 활용하면 매사 성공할 수 있다. 

먼저 각각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1. 크로노스 (Cronos)

크로노스란,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의 단위를 의미한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 이 크로노스이다. 1초와 1분 같은 단위들로 시간을 측정한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얼마나 빨리?' 와 같은 것들이 크로노스와 관련된 질문에 해당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시계나 달력의 숫자여야 한다.

2. 카이로스(Kairos)

카이로스는 양적인 시간이 아닌 질적인 시간을 말하며, '적절한 순간'을 의미한다.
'언제?', '정확한 시점은'이 카이로스와 관련된 질문이다.
위기나 기회 같은 순간에 대한 개념들도 모두 카이로스와 관련된 것이다.
타이밍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을 잘 잡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늘 '어느 타이밍에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모험을 시도하기 보다 말과 행동을 삼가는 편이 좋다. 우리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경우도 타이밍을 잘 잡아야 생긴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사이에 연관성도 있다. 양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카이로스를 붙잡을 수 없다. 크로노스가 채워진 다음에 카이로스도 의미가 생긴다.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고 타이밍을 살펴라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모두 타이밍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 때나 무턱대고 열심히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적절한 시점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기를 분별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또 좋은 시기가 왔을 때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항상 '이것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 일상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타이밍이 맞는지 살펴보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

 건전한 시간 의식을 기르려면 면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을 분별하는 감각이 생기면 시간관리 능력도 향상된다.

실생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감각 기르기

계획이나 시간표를 짤 때 반드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개념을 활용하자. 

즉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한다.

언제 그 일을 시작해야 하며(카이로스)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한가?(크로노스)
그리고 타이밍이 모든 일의 가치를 결정하므로, 시간표를 잘 때 카이로스를 먼저 고려한다.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 기준을 만들어 보자.

- 각각의 일이 얼만큼 시간이 걸리는지 예상하고 시간을 할당한다, (크로노스)

-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므로 아껴 쓴다, (크로노스)

- 중요한 일에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의미 없는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거나 최소한만 투자한다. (크로노스)

-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빨리 결과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크로노스)

 이때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적당히 투자해야 일이 이루어진다. 운전, 악기, 외국어 배우기 등이 여기 해당하며,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힌다.

- 최상의 상태일 때 노력을 최대한 집중한다. 그러면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다. (카이로스)

- 짧지만 의미 있는 연설을 하는 것이 (카이로스), 길고 지루한 연설을 하는 것 (크로노스)보다 낫다.

-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려라. (카이로스) 나쁜 시기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 적시에 결단을 내려라. (카이로스) 우물쭈물하면 기회를 놓친다. 직관과 경험을 잘 활용해 선택한다.

-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가끔은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크로노스)

출처 :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 습관 (유성은, 유미현 / 중앙경제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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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야기 '모모'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어른용 동화 (1973년 作) ​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

모모 - 미하엘 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모모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날부터인가 회색신사들이 나타나 "시간을 아껴야 행복해집니다."라며 시간을 쪼개라고 강요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모에게 오지 않는다.
모모는 사람들을 돌아오게 만드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준비하다 카시오페아라는 거북이와 박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시간의 근원을 깨달은 모모는 결국 회색 신사들을 해치우는데 성공한다.

이 소설의 첫마디에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왜 작가는 스스로 이상한 이야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문득 궁금해져 호기심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모모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바로 모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경청이다.
사람들은 모모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나도 수학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차근차근 말하며 풀어보곤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실수했던 점을 발견하고 또 해결방안이 나온다.
말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말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이러한 말 한마디는 경청이 있어야 시작되지 않나 싶다.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의 반대말으로 이 소설에서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잊었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모임에 나가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으면 주도적으로 말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왠지모르게 마음 한켠이 답답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 책을 읽으니 이 답답함은 내 얘기만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말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감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던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나도 앞으로는 모모처럼 다른사람을 잘 경청해주고 내 이야기를 먼저 하기보다는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의 주요 키워드, 즉 주제는 시간이다. 이 책에서는 시간을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라고 정의한다. 또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시간의 흐름에 대해 알고 있긴 하지만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아니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왜 시간을 아껴야하는 것일까? 열심히 살아서 얻는것은 무엇일까?

시간절약?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릴적의 나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은 너무 느리게 갔다. 하루종일 뛰어놀고 지쳐 잠들면 또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커갈수록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바삐 살다보니 어느순간 1년이 지나있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후회하던 찰나 금방 세월이 지나갔다. 어릴때는 시간이 많았고 지루할 새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항상 왜 이렇게 시간은 빨리가는지 고민하곤 한다.

사람들은 항상 빨리빨리를 외친다. 나는 커서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지.,, 일상 속의 작은 행복과 여유를 찾아야지... 다짐했지만 나도 어쩔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어느새 나도 빨리빨리를 외치고 산다. 짧은 줄도 기다리지 못하고 로딩창만 보면 한숨을 외치는 나..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겠다는 생각에 삶의 목표와 행복을 잊은채 사는것이 아닐까? 살다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지,,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꿈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일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일상속에 지쳐가는 날엔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왜이렇게 빨리 늙을까...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야."라는 말에 내가 "에이~ 엄마 하루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게 즐겁지 않아요?"라고 답했던 장면이다.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가 매일 특별한 일들로 가득찬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서야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가고 학원가면 벌써 밤이다. 인생이 항상 같은 날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의 나는 시간이 많았고, 행복했다. 언젠가부터는 내가 "시간없어.", "서둘러." 등과 같은 말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 왜 시간은 항상 모자란가? 나는 항상 남들처럼 바쁘게 살지만 왜 아직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나중에 다 잘되라고 그런거라고 하지만 이런 삶속에서 따뜻함은 잃어버린지 오래다.

요즘 나온 말중에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소확행이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소확행이란 말처럼 심심할때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것, 외로울때 들을 노래가 있다는 것, 우울할 때 위로해줄 친구가 있다는 것... 바쁜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는 습관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하면서 작은 여유를 찾는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진정한 시간이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시간이란 나의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하나에 내 감정, 경험, 생각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이다." 내 책상에 붙여놓은 문장이다. 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나온 말처럼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시간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린다는 것은 태양이 한 바퀴 돌 동안 땅 속에서 내내 잠을 자다가 드디어 싹을 틔우는 씨앗과 같은 거란다. 네 안에서 말이 자라나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야." 이 소설이 정의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하는 책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핑계로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교훈을 주는 책인 것 같다. 또한, 경청과 오랜 고민, 생각을 거친 뒤에 말을 해야함도 깨닫게 되었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을때까지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줄거리 요약)

작은 고대 원형극장의 폐허가 있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 어느 날 어린 고아 '모모'가 나타난다.
모모는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재능의 소유자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을 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는 정적에 귀기울여 시간의 노래를 듣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난하지만 마음씨 넉넉하던 마을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는 강박에 쫓기기 시작하고 각박한 분위기가 마을을 지배한다.
모모와 모모의 특별한 친구인 베포 할아버지는 이 사태를 퍼뜨린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인 '회색 신사'들과 맞닥뜨려 정체를 알게 되고, 이 때문에 시간저축은행의 표적이 된다.

모모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안내를 받아 시간의 관리자인 '호라 박사'의 집에 피신하고, 이곳에서 황금빛 사원에 들어가 위대한 시간의 진면목을 목격한다.

호라 박사가 관리하는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빼앗고 싶어하는 회색 일당은 끝내 모모를 추격해 호라 박사의 집을 포위해 시간을 오염시키기 시작한다.
호라 박사는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지만 위험천만한 작전을 세우고 모모와 카시오페이아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1. 크로노스 Chronos

-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  ·시계와 달력상에 나타나는 시간(절대적 양의 개념).
하루, 한 달, 일 년, 100년...

2 카이로스 Kairos

- 특정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
·인간이 현실에서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시간 (상대적 질의 개념)

천천히, 급속히, 거꾸러...

격변기에는 카이로스의 1년이 크로노스 수백 년에 버금가는 중요한 시기일 수 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크로노스 안트로포스(Kronos Anthropos, 시간의 신으로서 인간)'로 살아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카이로스 안트로포스(Kairos Anthropos, 기회의 신으로서 인간)'로 살아가는 것이다.

크로노스(시간의 신)의 상징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계다.
오늘날 크로노스의 상징물인 시계와 달력 속 기호로서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근대 산업 시대에 핵심 발명품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바로 시계라고 주장했다.

​시계는 하나의 도구다.
하지만 우리는 시계를 사용하면서부터 시계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시계는 우리 생각에 침투해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조끼 주머니에서 항상 시계를 빼어 들고서 "늦었어, 늦었어"라고 말하는 토끼가 등장한다.
여기서 토끼는 크로노스 안트로포스 모습을 상징한다.

​철학자 존 스미스에 따르면 크로노스 세계에서 중요한 질문들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등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주로 숫자로 표현된다.

​시계에서는 모든 하루가 똑같다.
하지만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비범한 작품 '기억의 연속성'은 시간에 대한 우리 인식이 주관적인 체험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그림에서 시계는 카망베르 치즈처럼 녹아 흐늘흐늘해져 있다.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도 '음향과 분노'에서 "시계 안의 조그만 바퀴들로 체크되는 시간은 이미 죽은 것이다.
시계를 멈출 때 시간은 생명을 얻는다"고 적었다.

​반대로 카이로스 세계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특성이 강조된다.
작가 린다 그린러는 작품 '굶주린 대양'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항해 초기에 시간 흐름은 거리로 측정된다.
이때 마일 수는 초침의 수많은 움직임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 선원들이나 나 역시 시간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시간 개념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 후 어장에 도착해서 그물을 던지게 되면 시간 흐름을 표시하는 척도는 거리에서 그물을 던진 횟수와 배 위로 던져 올린 고기 무게로 바뀐다.
선원들이 손목시계를 차는 법은 거의 없다."​

​카이로스(기회의 신)의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시계가 가리키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전략적 시간, 즉 각 사건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과 관계된 시간이다.
특히 카이로스적 시간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카이로스 세계에서는 '정확히 언제?'처럼 타이밍과 관계된 질문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질문'은 카이로스 안트로포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질문은 피터 드러커가 잭 웰치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이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은 지금 이 일을 새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기존에 불필요한 활동 때문에 소중한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주어진 기회를 붙잡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앞머리가 풍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기회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처럼 행동해야 할 적기를 지혜롭게 알아차려 기회를 붙잡음으로써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 안트로포스의 삶이다.​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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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에 대한 고찰                    

1.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평함이란 크기와 질량, 부피와 같이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단위에서의 그 절대 값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색하기를 즐겼던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의 시간을 찾아내었던 것 같다이 중 하나가 크로노스(c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의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정해진 크기와 단위를 가진 시간’이 이것과 가까워 보인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의 개념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카이로스는 ‘어떤 의미’를 가진 시간을 말한다. ‘시간이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카이로스를 시간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사용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게 되어 좀 더 능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크로노스는 단 한순간, 그것이 비록 단 일 초 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자신의 것을 빼앗길 수 없는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다. 크로노스로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 년을 365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일 분은 60초와 같이 수치를 통해 정량화가 가능하다. 

2.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시간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시간은 태초부터 있어온 것일까.’와 같이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우선 논외로 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본질을 따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우선 ‘시간을 사용한다’는 관점에서의 시간에게로 눈길을 가져가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하게 주어진 자유지만 스스로 그 결과를 책임져야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행위이다

시간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제약을 가하려 하지 않기에,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크로노스의 소중함은 쉽게 잊혀 지기 일쑤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했던 것 같아 보인다. 카이로스의 개념에는 책임을 잊어버린 시간의 낭비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카이로스란 의미를 가진 시간이다. 어제 내가 보낸 24시간을 돌이켜 보자.  그 시간 중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24시간 전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인 것일까. 자신 있게 ‘분명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인 것일까. 

만약 그것이 1시간이나 그 이하뿐이라면 어제 나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는 24시간이었지만, 카이로스는 1시간이 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23시간이란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침 햇빛에 물안개가 사라지듯 그저 증발해버린 것일까.     

이렇듯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단위를 통해 일반화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특수화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래부터 있어온 타의적 개념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그 시간을 사용하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자의적 개념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i 24cm 33cm 1931 Museum of Modern ArtNew York City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i, 24 cm × 33 cm, 1931,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3.

시간 또한 개체이고 크로노스는 정량적인 개체로, 카이로스를 정성적인 개체로 여기게 된다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이 끼어들만한 틈을 여기저기에서 만들어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비록 그것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원래부터 있어온 것에 대한 무지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행위가 과학이고 그것에 의미를 담아 해석하려는 정성적이고 주관적인 행위가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생각의 걸음을 조금 더 앞으로 끌고 나가본다. 크로노스는 지극히 정량적이고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태초부터 주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다른 모든 것들처럼 크로노스 또한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띄고 있으며 그것을 동일한 크기와 분량으로 나누어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엔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생각하고 생각하던 ‘사고의 유희’가 어딘가 꼭꼭 숨겨져 있던 카이로스를 인간 세계로 끄집어내었고 그때부터 시간은 정성적 성질을 지닌 개체가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 하더라도 시간 또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된 이상 어떤 특정 구간에서는 반드시 연속성을 갖기 마련이었다. 이제 물질계로 끌려 내려온 크로노스에게 속성을 부여해가는 행위는, 예를 들어 크로노스를 글과 논리에 담아내는 행위와 같은, 생각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4.

그렇다면 정성적이고 가변적인 카이로스를 정량화할 순 없을까. 수학적으로 본다면 어느 특정 시점, 영에 가까운 지극히 짧은 시점에 대한 미분을 통해 카이로스를 크로노스화 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영에 가까운 순간에서 미분된 개체는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고 하더라도 정량화된 특정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일반화된 것이든 특수화한 것이든, 이 두 가지의 시간 모두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시야를 늘려가야만 한다.     

카이로스 또한 크로노스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가 해야 할 일은 객관의 크로노스를 아주 조금씩이나마 주관의 카이로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 삶이란 객관의 크로노스에서 주관의 카이로스를 찾아 쌓아 가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흘러간 크로노스 속 어딘가에 쌓아둔 카이로스를 찾아 만지작거리며 채색하는 것이, 희끗해진 머리에 문득 불어오는 바람을 그리 차갑게 만은 느껴지지 않게 만들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Vladimir)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과,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려 산을 올라야만 하는 시시포스(Sisypos, Sisyphus)의 시간 속에는 얼마만큼의 크로노스가 있는 것일까.

비록 물질계 속을 살아가야만 하지만 생각하고 생각하는’ 본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크로노스는 얼마만큼의 카이로스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일까

태초 신에게서 부여받은 인간의 시간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 다른 시간은 없었을까. 혹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놓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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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은 어떻게 다른가?

구약과 신약이 ‘율법’과 ‘복음’으로 요약 구별되는 것과 유사하게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또한 다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복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완전히 잘못하게 된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육신적인 복(예: 장수, 건강, 부귀 등)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영적인 복(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마음이 청결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등)이다. 구약의 복사상은 동양의 5복사상(장수, 강녕, 부귀, 유호덕, 고종명)과 흡사하다.

2)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현세적인 것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예수의 산상보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국(내세적)의 복(마 5:3-12)을 말한다.

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조건적인 복(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신 28:1-14)인데 대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무조건적인 복이다(롬 3:23-24, 엡 1:3-5). 그리스도인은 구약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받는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조건) 없이 복(=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그 전체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복 사상(창 12:1-3; 시 1:1 등)이 그 반대인 저주와 더불어 인과응보적인 논리로 선포되어 있으므로(신 28:1-19),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할 때는 구약의 복이 아니고 신약의 복을 뜻하는 것이다.



팔복에 관한 메시지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개역개정,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새번역,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 '심령이'
우리말성경,3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3  "You're blessed when you're at the end of your rope.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영어NRS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3 beati pauperes spiritu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3 אשרי עניי רוח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심령이 가난한 자(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 40:17; 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 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 70:5; 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 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 51:17; 사  66:2).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음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롭게 가지게 되는 생각들을 ‘관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보이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잘 신경쓰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팔복’으로 많이 알려진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이란 무엇인가요? 혹은 어러분은 ‘어떤 복’을 받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자녀들이 잘 되었거나 건강하거나 장수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 건강, 생명 등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 즉 ‘소유하지 않은 상태’ 가 복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잠가둘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ed are they who have nothing to lock up)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잠가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고, 소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전에는 없었던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빼앗기지 않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더 늘리고 가져야 할지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걱정과 염려를 주는 존재가 동시에 ‘복’이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은 가난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성가들은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가난을 통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물질에 대해 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물질을 갖기 위해 삶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누는 삶이 되는 것의 축복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먼저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PPT한영)

마태복음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학업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삶의 큰 시련을 맞이했을 때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함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마음의 가난이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가난 속에서, 무엇으로 채울까… 성경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적 관점이 강한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면 다른 단어로 고쳐서 쓰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하늘나라', 하늘 '천'자에 나라 '국'자로 바꾸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만 '하늘나라', '천국'이란 말로 쓰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 "가난"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πένης’ [penes]란 단어이고, 둘째는 ‘πτωχός’ [ptochos] 라는 단어입니다. 예를들어, 페네스는 수입은 있지만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가난입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고, 파산을 당하거나 해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10초에 한 명 꼴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프토코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하고 절대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무력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 '부', 즉,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의 이해와는 반대로, 역설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부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부자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태를 ‘복’있는 상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상태가 복된 상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가?' '부자는 복이 없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언뜻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넉넉한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난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가난함’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가난함 그 자체가 옳다고 말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보면 가난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함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하나의 '현상'일 뿐,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잘 못 해석하여 가난한 것,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 자체를 미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만일 가난 자체가 복이라면, 우리가 노력하고 발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일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또 부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떻게라도 무언가를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으로는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헬라어로 보면 이 구절 중간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οτι’(호티), 즉 ‘왜냐하면’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천국을 소유한 사람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것, 혹은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가난’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심령, 곧 마음과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 즉 이 세상 기준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잘 믿는 부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잠시 나에게 있을 뿐, 원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청지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삶의 기준이, 이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되다, 하신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필요하다는 믿음 곧 ‘심령의 가난’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고,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돈, 학벌, 경험 등, 내가 가질 수 있는,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가하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소유는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삶의 배경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에 경제성장이 되어서, 70년대 말부터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있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물론 각 가정형편이 다르겠지만, 상대적 빈곤을 경험했을 뿐이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누군가와 비교해서 어려운 것을 의미하고, 절대적 빈곤이란, 모든 사람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함께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자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자란 분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미국은 이미 강대국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나, 십대에 미국에 와서 자란 분들 모두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입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로 경제성장이 멈추고,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여러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넉넉하지만, 개인의 만족도는 낮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풍요롭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시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않은 것처럼」에 실린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제프 딕슨이 처음 인터넷에 이 시를 올린 뒤, 많은 사람이 한 줄씩 덧보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삶은 풍요롭고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한쪽이 풍요로우면 한쪽은 더 피폐해진다.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우리 시대의 역설 
-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 출처 :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않은 것처럼』 오래된 미래. 2005.03.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번쯤은 곱씹어 볼 내용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난다.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교통수단은 더 빨라지지만 소통은 더 막히여졌고

광고는 더 많아졌지만 상업 양심은 더 줄어들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약들은 많이 졌지만

행복을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라는 것은 결코 소유를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질까’, 즉 ‘소유’에 집착한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심령의 가난함을 간직할 때,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인데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라는 성경구절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외우기도 하는 구절일텐데요, 11절과 12절을 함께 외우는 분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보시죠.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가지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아우토이 파라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4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영어NI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영어NASB,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영어MSG,4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영어NRS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ακαριοι οι πενθουντες οτι αυτοι παρα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4 beati mites quoniam ipsi possidebunt terram
히브리어Modern,4 אשרי האבלים כי הם ינחמו׃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개역개정,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영어NI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영어NASB,5 "Blessed are the gentle,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영어MSG,5  "You're blessed when you're content with just who you are--no more, no less. That's the moment you find yourselves proud owners of everything that can't be bought.
영어NRS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5 μακαριοι οι πραεις οτι αυτοι κληρονομησουσιν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5 beati qui lugent quoniam ipsi consolabuntur
히브리어Modern,5 אשרי הענוים כי המה יירשו הארץ׃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논테스 카이 딮손테스 텐 디카이오쉬넨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개역개정,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새번역,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우리말성경,6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배부름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영어NI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영어NASB,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영어MSG,6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영어NRS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μακαριοι οι πεινωντες και διψωντε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οτι αυτοι χορτασ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6 beati qui esuriunt et sitiunt iustitiam quoniam ipsi saturabuntur
히브리어Modern,6 אשרי הרעבים והצמאים לצדקה כי הם ישבע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엘레에모네스 호티 아우토이 엘레에데손타이

개역개정,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7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영어NI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영어NASB,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영어MSG,7  "You're blessed when you care. At the moment of being 'carefull,' you find yourselves cared for.
영어NRS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receive mercy.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οι ελεημονες οτι αυτοι ελε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7 beati misericordes quia ipsi misericordiam consequentur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הרחמנים כי הם ירחמו׃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마카리오이 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호티 아우토이 톤 데온 옾손타이

개역개정,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새번역,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말성경,8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영어NI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영어NASB,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MSG,8  "You're blessed when you get your inside world--your mind and heart--put right. Then you can see God in the outside world.
영어NRS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ι οι καθαροι τη καρδια οτι αυτοι τον θεον οψονται
라틴어Vulgate,8 beati mundo corde quoniam ipsi Deum videbunt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ברי לבב כי הם יחזו את האלהים׃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이 휘오이 데우 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그, '아들들이라고'
우리말성경,9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영어NI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NASB,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MSG,9  "You're blessed when you can show people how to cooperate instead of compete or fight. That's when you discover who you really are, and your place in God's family.
영어NRS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μακαριοι οι ειρηνοποιοι οτι αυτοι υιοι θεου 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9 beati pacifici quoniam filii Dei vocabuntur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 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마카리오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호티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새번역,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0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0  "You're blessed when your commitment to God provokes persecution. The persecution drives you even deeper into God's kingdom.
영어NRS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μακαριοι οι δεδιωγμενοι 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ς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0 beati qui persecutionem patiuntur propter iustitiam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10 אשרי הנרדפים על דבר הצדקה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마카리오이 에스테 호탄 오네이디소신 쉬마스 카이 디옼소신 카이 에이포신 판 포네론 칻 휘몬 프슈도메노이 헤네켄 에무

개역개정,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새번역,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
우리말성경,11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영어NI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NASB,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and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MSG,11  "Not only that--count yourselves blessed every time people put you down or throw you out or speak lies about you to discredit me. What it means is that the truth is too close for comfort and they are uncomfortable.
영어NRS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ακαριοι εστε οταν ονειδισωσιν υμας και διωξωσιν και ειπωσιν παν πονηρον ρημα καθ υμων ψευδομενοι ενεκεν εμου
라틴어Vulgate,11 beati estis cum maledixerint vobis et persecuti vos fuerint et dixerint omne malum adversum vos mentientes propter me
히브리어Modern,11 אשריכם אם יחרפו וירדפו אתכם וידברו בשקר עליכם כל רע בעבורי׃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마스데 호티 호 미스도스 휘몬 폴뤼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후토스 가르 에디옼산 투스 프로페타스 투스 프로 휘몬

개역개정,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새번역,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우리말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 
가톨릭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어NIV,12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NASB,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n heaven is great,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MSG,12  You can be glad when that happens--give a cheer, even!--for though they don't like it, I do! And all heaven applauds. And know that you are in good company. My prophets and witnesses have always gotten into this kind of trouble.
영어NRSV,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 οτι ο μισθος υμων πολυς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ουτως γαρ εδιωξαν τους προφητας τους προ υμων
라틴어Vulgate,12 gaudete et exultate quoniam merces vestra copiosa est in caelis sic enim persecuti sunt prophetas qui fuerunt ante vos
히브리어Modern,12 שמחו וגילו כי שכרכם רב בשמים כי כן רדפו את הנביאים אשר היו לפניכם׃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 우리가 산상수훈으로 알고 있는 말씀의 시작은 팔복으로 시작한다. 이에 앞서 보면 이 산상수훈의 시작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온 사람들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것을 듣고서, 천국 복음을 듣고자, 또한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보고자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니 제자들이 나왔다고 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는 것, 즉 제자들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먼저 사시고, 그 사심을 보고 들은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라'하시니 그들의 마음이 동하여 제자로 따라 나서는 그런 관계이다. 지금 이 산상수훈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듣고, 병이 나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르치신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제자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가르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는 가르치는 이의 삶을 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땅에 씨가 뿌려지듯 심겨져 그것이 싹이 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가고 그렇게 제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있어 사람의 삶이 빠지면 안 되는 그런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이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시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팔복>으로 일컫는 말씀이다. 팔복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헬라어 프토코스)은 절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절대적인 빈곤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그런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빈곤하게 된 과정보다 다시 일어서기 힘든 지경이 된 가난에 의미가 있는 그런 가난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함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곧 마음과 영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채워 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대변된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워서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뭔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이 가난해지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이 가난함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가난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상태라는 것은 자신이 그 빈곤을 채울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람 스스로 채운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의 속 심령 안에 어떤 것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이 저희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공허함, 살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공허하게 하는 '왜 사는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그 공허함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의 모든 것으로 자신의 가난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것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자기 안에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공허함,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원래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채워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서 비롯된 유흥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과 같이 사람으로는 어떻게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가 채워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가난,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람의 공허함이 원래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몇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펜데오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중 가장 극심한 슬픔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애통하고 슬픈 이유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고한 노력의 결과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일부로 자신의 사랑으로 여기던 것을 잃어버려서 이제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애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애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 그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은 그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 애통함, 그 극심한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돈이나 명예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에 두고 있다가 잃어버린 그런 애통함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사람이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통한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여 애통한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를 찾을 것이고, 자신이 비롯된 뿌리를 찾고자 할 것이며, 그것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으로는 그것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너무 애통한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한 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위로>라는 것은 등을 두드려주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가까이 부른다.>는 의미를 가진 팔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부른다는 것은 같은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리라는 것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는 공간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같은 정체성으로 부른다는 말씀인 것이다.


애통하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알지 못함으로 느끼는 애통함이다. 이런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극심하게 느껴야 하는 애통함이지만 알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오는 것들이 알고 보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만한 것이 그렇게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보편성과는 다른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 보면 된다. 모두는 위한 복음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두이어야 하고, 그 순종에 관해서 사람이면 가능한 것이기에 모두를 위한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것 보다는, 돈이 없는 것이 더 애통한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공허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운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기(명)가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이 육신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어 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세상에서 사람이 만들고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채우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세상에 있는 재물과 명예에 두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 부르시지 않는 것이다. 즉 위로함이 없는 것이다.


애통하고 위로하는 것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에 관한 것으로 애통해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 사람이 왜 살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가난함과 그것이 없어 애통한 마음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존재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공부에 있어 성경에 사용된 원어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보편성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누가 읽어도 자신의 말씀이 되도록 말씀하신 것이지, 원어나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말씀이 되면, 그것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 원어가 주는 의미가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언어로 읽어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경영하시기 때문이다.


이 온유라는 것은 헬라어로 '프라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흥분을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있어 진정제의 약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통상적인 용법은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건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온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정말로 부당하게 취급한 행동의 경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또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왕이신 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죽이려고 처형한 형틀이 바로 십자가고 그것을 억울하게 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땅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로 단편적으로 정의하면 그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그렇고, 사람이 자신이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어디서든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넓은 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십자가를 지시는 온유함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 얼마나 넓은 땅을 얻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온유함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에게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더 좋고, 말씀의 계시가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했을 때, 신앙 없는 사람을 훈계하려 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신앙 없는 사람(땅)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얻으려면, 때로 계시가 어두운데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따라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이다. 


그렇게 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더 밝은 것인지를 알게 하실 것이고, 어두우면서 밝은이를 끌고 간 사람이 그것을 깨달을 때 자신보다 더 밝고 분명히 알면서 자신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것을 맞는 것으로 여겨 수고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런 관계,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유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온유함을 아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얻으신 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기를 그런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얻는 일이 자신의 기업,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사람 앞에서 더 아는 것을 주장하거나 안다고 모르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깨달을 때 까지 그들의 주장에 수고하는 희생을 보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일과 기업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인 것이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 사용된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인데, 이는 신학적 성격이 강한 단어라고 한다. 이 '의'는 신적 본질에 속하는 속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먹을 것, 사람의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이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베고픔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며 육신의 배가 불러진다는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부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배부르게 채워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 '네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목마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문자로 표현된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듯 해야 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심청전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는 것이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것이듯, 성경을 읽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배부르게 채워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즉 그것에 순종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엘레에몬'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나 알듯이 죄에 빠진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누이 강조하듯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대속하신 것이지만,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반복되게 이야기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없다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수학박사가 낙제생에게 수학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구조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한 긍휼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나보다 안 좋은 형편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긍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긍휼은 나 보다 못한 사람이 나 보다 더 잘난 줄로 알고 나를 가르치고 심판하려 하는 것에 나를 내어줌으로 그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때 까지 수고하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법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쉬울 것 같지만 무지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는 쉬운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있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 힘든 것이다.


어떤 공동체, 무엇을 추구하는 모임에서는 그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앞선 사람이 늘 있고, 그것을 배워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에 대하여 더 아는 사람이 아직 배워야 하는 사람을 심판하거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나아가서 알 때까지 그 사람보다 더 아는 것이 어린 사람을 위한 수고가 되는 것, 희생이 되는 것 그것이 긍휼인 것이다.


그런 긍휼을 보이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사람이라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것이 청결(헬 : 카다로스)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청결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채워져야 할 것, 그리고 그 채워진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사람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장, 눅 11장) 즉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채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 청결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끗한 것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채워졌을 때 그것이 바로 청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 우리 안에 채워졌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청결하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채워져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처음 존재가 누구신가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하게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정말로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또한 그런 사람을 알아보기에 그런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대접하였고, 야곱도 에서를 만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며, 그런 사람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마음 안에 있어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것이 온전히 마음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평화인데 그 의미는 평화라는 것은 서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일 때 평화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평안하뇨?'라고 하실 때 그 평안이 바로 이 에이레네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형체가 없으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유전자)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표현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시고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안이고 화평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평안이 되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화평이고 평안인 것이다. 에이레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오코'라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뜻을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의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핍박이 수반되어도 따라 간다는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 의를 옳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탈북하여 남쪽으로 오는 것을 의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과정도 의를 좇아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 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의인 민주주의를 좇아 온 사람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들 핍박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를 따라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곤고함이라는 것은 핍박이 맞지만, 예를 들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떼를 쓰다가 그 사람들이 한 소리 하는 것은 핍박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핍박이라기보다 자초한 일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벌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또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 의를 좇아가면서 겪는 곤고함은 수고와 희생의 곤고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아니라, 의를 따라가다 보니 감당하는 곤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곤고함이 바로 다른 사람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 그런 원인인자 없이 당하는 곤고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함으로 받는 반사작용을 핍박이라 하면 곤란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핍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군사들로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서 처형당하신 그런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핍박이다. 그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시끄럽게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육신의 수고와 비난과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과정이 표준이다. 그렇게 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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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서 말씀하실 때 나아온 제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모든 요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은 그 짠맛으로 인해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소금이 가진 형태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소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금이 가진 하얀 결정체로서의 모양은 소금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소금이 가진 짠 맛 때문이다.
그 짠맛은 소금이 결정 상태로 있어서는 절대로 낼 수 없다.
녹아서 그 형태가 없어질 때 그 때 비로소 소금이 소금다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고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소금이 짠맛은 없고 그 결정체인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없이 신앙의 형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형식은 녹아 없어지지만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육신의 삶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소금이 녹는 것과 같은 육신의 소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과 연관이 있다.
소금이 녹아서 맛을 내는 것은 삶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비와 투자가 착한 행실이 되었을 때 소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착한 행실은 공통된 가치관이 아니다.
그러니까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가치관에서 볼 때는 착한 행실이고 어떤 가치관으로 볼 때는 극악무도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폭탄 테러는 시도하는 가치관에서 보면 순교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극악무도한 테러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누구의 관점에서 볼 때 착한 행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착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착한 행실로 여기시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삶이라야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그런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그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맛인 것이다.
그 맛, 즉 소금이 녹아서 형태가 없어지듯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맛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것을 착한 것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맛으로 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자신을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표본이시기에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소금이 가진 그 결정의 모양이 짠 맛을 가진 것이 아니듯,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과 방법과 형태가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다.
소금은 그 모양이 어떠해도 짠 맛을 내듯, 사람의 삶도 생긴 것이 어떻던, 어떤 행함으로 공로를 세우든 그런 것 때문에 짠맛이 나듯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 목적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짠 성분인 염화나트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또 부패하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금과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맛을 찾기 원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 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고 하셨다.
(영어성경에서는 촛불을 감추지 않고 촛대에 꽂는다고 함)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전해지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기능, 빛과 같은 본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 능동적이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동적 형태를 한정하는 말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간과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의 근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또 말씀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서울역에 가서 전하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이라 빼 놓더라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너무 능동적인 열심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냥 길가는 사람, 하나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마구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적으로 전하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들으려 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싶고, 또 필요로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을 보고, 또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볼 때, 정말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빛을 높이는 것이 빛이 높이 서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향만 바꾸면 누구나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낮은 땅,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런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이건 겸손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애굽의 가치관이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출애굽이고, 그것이 인간의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리가 바로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로 가는 것이다.
즉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천한 동네, 그리고 사람의 낮은 자리가 바로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회복하는 것, 제 자리를 찾아 가는 것, 그것이 자리를 벗어난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자리가 낮다고 하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낮은 자리이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자리가 영광스럽고, 죽음 가운데서도 살려낼 정도로 존귀한 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관은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귀함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리에서는 외칠 것이 없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있었기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이니 병을 고치신 것이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등불이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가듯 능동적인 성과를 내려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소란을 떠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말씀으로 무조건 전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시미청전을 문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사람이 때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라는 것이지, 시간 정해서 전도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능동적이고 주입식이 아니라, 보고 배울 것이 있게 하므로 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NCIS라는 미드를 아주 좋아한다.
그 안에 주인공인 '깁스'라는 보스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극중에서 그는 부하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보고 배우게 한다.
또 실수를 지적질도 하지 않는다. 알고 고칠 때까지 자신이 대신 수고한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해서 그 미드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보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은 인식이라 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그 본이 된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빛,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해서 어떤 세계를 알게 한 그 빛, 그 사람의 삶을 모든 집을 밝히듯이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