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사랑(If), 때문에 사랑(because),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 less)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누가복음 5:1~11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 가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People are often unreasonable, illogical,
and self-centered;
Forgive them anyway.
If you are kind,
people may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Be kind anyway(…)
If you are honest and frank,
people may cheat you;
Be honest and frank anyway.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someone could destroy overnight;
Build anyway.
If you find serenity and happiness,
they may be jealous;
Be happy anyway.
The good you do today,
people will often forget tomorrow;
Do good anyway.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it may never be enough;
Give the world the best you've got anyway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 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 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 시는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마더 테레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씨의 글입니다. 하지만 누가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최상의 것을 내놓고 베푼다면 세상도 우리에게 언젠가는 최상의 선물을 줄 것이라고 믿어보라는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열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한 '마쓰미 토요토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참사랑은 그 어디에」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 행복이란? 이 세 가지의 사랑 중 어느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세 가지의 사랑이란 이런 종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만약에의 사랑(IF의 사랑)

'마쓰미 토요토미'는 '만약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가령, '만약에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사랑할 것이다.' 라든가 '나에게 그것을 해주면 사랑하겠습니다.'라든가 '만약에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조건을 두고 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끈 달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의 끈들을 끊어 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끈 달린 사랑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도 뭔가를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 'IF'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때문에의 사랑(BECAUSE)의 사랑 

그는 또 '때문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나 건덕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잘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많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해관계에서 오는 그런 사랑을 가리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평생을 살고서도 한다는 소리가 '저 웬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에게 실망했다.'말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랐기에, 무엇을 두고 사랑했기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보고 사랑했기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동기와 목적이 잘못 되었고, 오리엔테이션이 잘못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조건이 없는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코 끈달린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사랑 받을만한 건덕지가 있어서 사랑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히려 기대치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용납하는 사랑을 가리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렇게 살면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이런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성경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사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역설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세 번째 소개한 전형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신앙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물고기를 잡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현제 ‘갈릴리 바다의 별칭’입니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워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해당하였는데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따라 새벽에 돌아와 그물을 씻어 정리한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피곤하고 짜증스러운지.... 그 이유는 아마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물 정리가 끝나 갈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배를 강대상 삼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 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뭔가 좀 보답할 뜻인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까지 수고한 밤새도록 허탕 친 바다입니다. 새 번역대로라면 ‘지금까지 애를 쓴’ 그런 바다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군소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순종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어 동료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시작은 낙심과 피곤과 절망과 짜증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승리와 결과에 만족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이 시작과 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 5절에 보면, “잡은 것이 없지마는”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킹제임스 버젼을 보면, “Nevertheless”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으로 삼으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실패했음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말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무식하고 거칠어서 인간적인 면으로는 전혀 성공적인 요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마는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빈손으로, 빈 배로 돌아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빈배나 빈손은 실패를 의미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다시 재도전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의 실패로 인해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소원대로 가득 채워지기만을 바라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 생애에 베드로와 같이 ‘빈 배’와 같은 위기와 실패를 경험하게도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건강문제일 수도 있고, 사업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문제일 수도 있고, 자식문제일 수도 있고, 물질문제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생겨지는 문제일 수도 있고, 오늘과 같은 경제적 위기와 갖가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씻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다시 재도전 하려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공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업도 성공해야 하겠고, 기업도 살려내야 하겠고, 기울어 가는 가정도 바로 일으켜야 하겠고, 정치도 성공해야 하겠고, 심지어 목회도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온갖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성공을 향해서 무섭게 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성공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려가면 실패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올라갈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려갈 때가 문제입니다. 내려갈 때의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 한 번의 그물을 쳐서 성공한 사람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입니다. 그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1,330개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비로써 714개의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가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러 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실패를 했거든요?”였습니다. 과거의 그 많은 실패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대답입니다.

미국대학 교수 가운데 서부극에 나오는 명사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조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서부극의 명사수처럼 조준을 하지 않고도 명중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이 끝날 때쯤 되어서는 그도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명사수가 될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맞추든 못 맞추든 걱정하지 말고 2만 발을 쏘면 자연히 명사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2만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할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안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 앞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자세에 있습니다.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도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까지 순종 하셨습니까? 빌립보 2장엔 '죽기까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고,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 모두가 높아졌습니다. 주님이 쓰신 저 가시관은 오늘날 온 인류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스런 왕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집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두 배에 가득 차는 축복을 방아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실패는 사생아”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쉽게 느낄 수 있는 어려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이고도 절망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수 있고, 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질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열심히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해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임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버려졌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날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위기, 그 실패로 인하여 오늘 낙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씻는다는 자세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비합리적임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상식에 준하기를 합니까? 내 생각, 내 마음에 반절만이라도 든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혀 엉뚱한 얘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과도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말씀인가를 보십시오.

1) 시간적으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지금은 그물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의 특성으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습니다. 물고기가 호수가로 밀려 나오는 밤에 주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낮이었습니다.

2) 장소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장소를 봐도 고기가 잡힐 장소가 아닙니다. 고기 잡는 방법이 낚시가 아닌 그물입니다. 여기서 그물이란 “디크튀아”로써 던지는 투망입니다. 투망이라고 하는 것은 고기가 많이 몰리는 곳에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데나 던진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닙니다. 깊은 곳은 약 60M가 되는데 거기 투망을 던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은 깊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던지라는 거라. 상식이나 경험에도 없는 말씀입니다.

3) 더구나 어려운 것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고기잡이에는 '비전문가’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 40이 넘도록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전문가입니다. 어려서 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어부로 외길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갔을 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베드로 고기도 먹어 보았습니다마는 그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호수라고 해야 할 만큼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호수이기에 제 손바닥 보듯이 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또한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습니다. 목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를까 목수가 어부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합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쓴다.'고 합니다.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한다.'고 합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보세요, 경험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일찍이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나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여러 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미 늦은 때이고, 환경 적으로 모든 여건을 뒤집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주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테도 프레마티수'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당신이 말씀하였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 명령을 합니다.'라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강한 역사를 일으켜서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내 몸과 마음에 명령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로고스'가 아닌 '레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 자체를 말하지만 '레마'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온 '레마'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딤후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모든 말씀의 기록자이며 말씀을 통해 역사 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히4:12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마'의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다는 말은 성경대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에게 접촉하고 내 생활을 변화시키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6절의 "그리한즉"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회개시키고 심령 속에 뜨겁게 역사 하는 살아 있는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 즉각적인 순종이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말씀하는 것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니 지식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제 고집이 너무 강합니다. 제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순종을 배우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가 즐겁게만 순종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것이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불확실함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진정한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도, 그물도, 직업도, 심지어 처자식까지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우선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전에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생활이 보장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한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용기가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적당히 타협할 때가 많고,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순수함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마음 아플 때가 많고, 너무 안일무사하게 행동하다 보니 용기도, 뜨거움도 식어지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 ‘헬렌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한데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합니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는데 행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아는 것은 많습니다마는 용기도 행함도 없는 현실적으로 바뀐 우리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것이 “결단성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주저하다가 세월 다 보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앞날이 불확실하기만 하다고 미적거리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불투명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여기에 베드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자기를 비웠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결국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따르노라면 상상도 못한 엄청난 축복의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을 교훈삼아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종하는 자세를 신앙으로 삼으셔서 생애의 나의 수고보다 몇 배나 가득 차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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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사람으로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몸 된 교회에 달려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출타하신 당회장 목사님 동부인께서 안전하게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도 불확실하기만 하고, 어둡기만 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앞날이 불투명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전진할 수 있는 결단성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생애에 다시 한 번 실패한 빈 그물이 아니라 그물에 고기가 가득차서 넘치는 축복을 경험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게 하옵소서.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게 하옵소서.

실패한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때문에’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 때문에 사랑입니다.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네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한다.
네가 일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네가 부유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런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기도 하고 또 천박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이라는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랑은 네가 만약 돈을 준다면 사랑하겠다. 네가 만약 내 말을 잘 들으면 사랑을 하겠다.
네가 만약 충성스럽게 일을 하면 사랑을 하겠다는 계약적인 사랑을 합니다.
이런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때문에나 만약에 라는 조건이 필요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똑같은 죄를 계속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은 몇 년 이었나?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노예’ 생활은 정확히 몇 년이었을까?

난해 성경절

164. 이스라엘은 애굽에 430년 동안 거주했는가?
성경절
문제
 430년의 시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인가 애굽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부터인가의 문제다. 만일 아브라함 때부터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훨씬 짧아지게 된다.
해석
 A.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두 종류의 성경 절들이 존재한다. 창세기 15:13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12:40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삽십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7:6에 보면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이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행 7:6)고 말하였다. 이런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 즉 종노릇한 기간이 400-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B.
 그러나 또 한 편의 기록들을 보면 아브라함 시절부터 출애굽까지를 포함한 것이 430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3:15-18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이야기이다. 따라서 430년의 시작도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5:13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까지가 이방인가? 그 당시는 가나안도 애굽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가나안 생활도 애굽생활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창세기 15:16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 4대 란 출애굽기 6:16에 보면 레위 - 고핫 - 아므람 -모세를 말하며 대략 5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2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계산하 면 애굽에 실제 거주했던 기간은 200-230년 정 도가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처음 애굽에 내려올 때 70여 명에 불과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4대 215년 만에 어떻게 200여 만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요약
 430년의 기간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전자는 아브라함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보는 견해와, 후자는 순수한 애굽 체류기간만 430년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도 어느 한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산점이 언제이든지간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는 43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유랑생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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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40-41 / 430년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Now the length of time the Israelite people lived in Egypt was 430 years.
At the end of the 430 years, to the very day, all the LORD's divisions left Egypt.


갈라디아서 3:16-17 / 430년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The promises were spoken to Abraham and to his seed. The Scripture does not say "and to seeds," meaning many people, but "and to your seed," meaning one person, who is Christ.
What I mean is this: The law, introduced 430 years later, does not set aside the covenant previously established by God and thus do away with the promise.

제임스 어셔는 창조 연대를 산출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6-17절을 근거로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체류한 기간을 215년으로 추산했다.
이러한 현상은 70인역에도 나타난다.
이는 출애굽기 12장 40-41절에서 이집트 체류 기간이 430년이라는 말씀과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0-41)”.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6-17)”.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창 12:3-4)”.

제임스 어셔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과 출애굽 후 시내산에 이르러 “율법”을 받을 때까의 시간을 430년으로 읽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이 75세 때 주신 것으로 읽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75세로부터 출애굽까지 기간이 430년이라고 읽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75세 때로부터 25년 후 이삭을 낳고(창 21:5),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고(창 25:26), 야곱은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갔으므로(창 47:9) 아브람이 약속을 받은 후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기까지 215년(25+60+130)이 걸렸고, 따라서 이집트 체류 기간은 430년에서 215년을 뺀 215년이라고 추산했다.

이러한 연대 산정에 대해, 70인역 출애굽기 12장 40절 번역은 더욱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70인역) And the sojourning of the children of Israel, while they sojourned in the land of Egypt and the land of Chanaan, was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70인역 출애굽기 12장 40절 말씀에서, 430년이라는 기간은 이집트뿐 아니라 ‘이집트와 가나안에 있었던 기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창세기 12장 10절(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75세 때 이집트로 내려간 때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읽는다. 제임스 어셔 연대와 일치하는 셈이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의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에서 ‘언약’은 16절의 “약속들”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동일한 하나의 내용으로서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이다(창 12:3; 26:3-4; 28:13-14; 갈3:8). 그래서 17절의 ‘언약(디아데케)’은 단수명사다.

그런데 왜 16절에서는 ‘약속들(에팡겔리아이)’이라는 복수명사가 사용됐을까? 그것은 동일한 내용의 약속이 여러 번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도 주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이삭에게도)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단수)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야곱에게도)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단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3-14)”.

여기서 ‘자손(단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11장 9절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 17절의 “하나님의 정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뿐 아니라 이삭과 야곱에게도 하신 언약이므로, 아브라함의 75세 때로부터 시작되는 430년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70인역의 출애굽기 12장 40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430년의 여정의 주체는 “the sojourning of the children of Israel”,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야곱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야곱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이 430년 기간의 시작을 아브라함의 75세 때로 볼 수 없음이 명백하다.

창세기 15장 13-16절 말씀은 창세기 12장 10절 본문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며, 창세기 12장 10절의 상황 이후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2장 10절을 창세기 15장 13-16절의 ‘사백년’의 시작으로 볼 수 없다. 참고로 여기서 ‘사백년’은 실제로 겪은 430년에 대한 어림수로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당시 전략적 모호성을 포함하신 하나님의 의도이셨다.

아마 어림수로 100년을 1대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 006 출 12:40, 30쪽 참조).

반면,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출애굽기 12장 40-41절에서 ‘430년’을 두 번 중복하여 강조하는 동시에, “끝나는 그 날에(베에쳄 하욤 핫쩨, even the selfsame day)”를 서술하여 명확한 시간을 거듭 강조한다.

아빕월 14일이 지난 아빕월 15일이 정확하게 430년이 차는 날이었다(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 006 출 12:41, 31쪽 참조).

출애굽기 12장의 이 문맥은 하루, 아침, 저녁, 밤 등의 시간 단위가 매우 세밀하고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는 문맥이며(출 12:2, 3, 5, 6, 10, 11, 15, 16, 18),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중한 시간이 포함된 서술이다(출 12:5).

출애굽기 12장 40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은 이스라엘(=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의 아들 레위, 레위의 아들 고핫, 고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모세에 이르는 4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로부터 나오기까지의 기간이다.

출애굽기 12장 40-41절갈라디아서 3장 16-17절은 언뜻 모순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단지 해석의 문제였을 뿐이며, 전혀 모순되지 않고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석(구약학 박사)
한국창조과학회 성경위원회, 군선교위원회 위원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전 국방대학교 합참대 교수
전 KC대학교 구약학 외래교수


창세기 46장 7-11절과 출애굽기 12장 40-41절 간에 모순이 있는가?

1. 문제 제기

야곱이 130세에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창 47:9),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 430년을 체류하고 나온다(출 12:40-41). 출애굽기 12장 40절을 보면 “이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가 창세기 15장 16에서 약속하신 4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4대 만에 출애굽한 것이다. 출애굽기 6장 14-27절에 따르면, 레위의 수명은 137세, 고핫의 수명은 133세, 아므람의 수명은 137세였다.

아므람의 아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수행한다(출 7:6-7). 그런데 창세기 46장 7-11절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고핫)과 므라리요(창 46:7-11)”.

여기서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때, 레위가 그의 아들 고핫을 실제로 데리고 함께 내려간 것이라면 모순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고핫이 갓 태어난 상태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고핫은 133세, 아므람은 137세를 살았고,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모두 합산해도 350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해석

창세기 46장 11절 말씀을 출애굽기 12장 40-41절 말씀에 따라 주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근거는 히브리어 원어성경(BHS) 창세기 46장 7절에서 표기되어 있는 문단 나누기 부호인 ‘스투마’, 즉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를 따라 창세기 46장 8절이 시작되는 곳에 표기된 ‘동그라미’이다.

이는 새로운 문단의 시작을 알리는 표기로, 앞 문단과 문단을 분리하여 해석하라는 지시이다.

문단 구분에 따르면, 창세기 46장 7절의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에서 하나의 문단이 종료되었고, 창세기 46장 8절의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새로운 문단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경우 8절은 7절의 당시 상황이 아니라, 7절의 결과로 이집트로 내려가서 살았던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명단은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때 동행했던 명단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집트에서 체류했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명단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어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도 거기에 동참한 것으로 말하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6장 3-4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 “반드시 너를 다시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3-4)”.

우리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후 거기서 죽었으며, 요셉이 그를 장사지낸 자리가 아벨미스라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창 50:5-11). 그리고 야곱의 유언에 따라(창 49:29) 야곱의 죽은 몸을 옮겨서 가나안에 장사지낸 것이 창세기 46장 4절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46장 4절에서 말씀하신 ‘어법’은 자손들을 조상과 동일시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식 어법이며, 성경의 말씀하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예가 나타난다. 히브리서 7장 4-10절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나중에 아브라함의 증손자로 태어날 레위도 이미 이때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 7:4-10)”.

이러한 어법을 적용한다면, 고핫은 실제로는 야곱이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갈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레위가 이집트에 내려간 후에 낳은 아들이지만 이미 레위의 허리에 있었던 것이다(히 7:10 어법). 그래서 창세기 46장 11절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수 년 전에 터키를 방문했을 때. 이스탄불에서 큰 카펫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젊은 사람을 만났는데, 형제라고 부르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한 것을 자신이 참전한 것으로 말한 것이다. 즉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이들의 어법이다.

당시 필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해보았던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독특한 어법(말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창세기 46장 11절과 출애굽기 6장 14-27절, 출애굽기 12장 40-41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히브리서 7장 10절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당시에 고핫은 레위의 허리에 있었고, 그래서 같이 내려갔다고 말할 수 있다.


▲광야로 나서는 모세와 히브리 민족의 모습. ⓒ못생긴나무 제공

3. 결론

출애굽기 12장 40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은 이스라엘(=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의 아들 레위, 레위의 아들 고핫, 고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모세에 이르는 4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모세가 80세 때 이집트로부터 나오기까지의 기간이다.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갈 당시 레위는 43세 정도였으며, 고핫은 레위의 허리에 있었다. 이후 레위는 이집트에서 고핫을 낳았다. 고핫은 아마 레위가 이집트로 내려간지 대략 90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창세기 46장 7-11절의 고핫에 대해서는 7절 끝에 있는 문단구분 부호에 따라 8절부터는 다른 새로운 문단으로 해석하고, 또한 성경의 어법, 히브리식 어법에 따라 조상과 자손을 동일시하는 어법을 이해하고 주석하게 되면, 어느 방법으로든지 창세기 46장 7-11절과 출애굽기 12장 40-41절 간의 모순처럼 보이는 마찰은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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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들의 애굽체류기간은 400년인가 430년인가 자손4대인가(창세기 15:13~16)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야곱의 70명의 가족이 애굽에 들어간 해는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들이 애굽을 빠져나온 해는 또한 언제였을까? 우리는 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그때가 언제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 곧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민족이 되어 탈출하기까지 히브리인들은 과연 몇 년을 애굽에서 살다가 탈출한 것일까? 성경의 기록을 보면, 400년인 것 같기도 하고, 430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창15:13에 의하면, 애굽체류기간은 아브라함의 자손 4대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어 보면 4대가 더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실제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얼마동안 체류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떻게 성취되어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성경을 읽다보면, 어딘가에서 무엇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본문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애굽체류기간이다. 출애굽했던 히브리인들은 과연 애굽에서 얼마동안 체류해 있었을까? 출애굽기 12장을 읽어보면, 히브리인들의 애굽체류기간은 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곧 창15:13에 기록에 의하면, 애굽체류기간이 400년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것도 자손 4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혹시 날짜를 혹시 계산하실 때에 잠깐 실수하신 것은 아닐른지... 아니면 처음 성경기록자는 제대로 기록했는데 베껴쓴 사람이 잘못 배껴쓴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나이 많은 모세가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얼마나 체류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4대"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한 분이며, 하신 약속을 어떻게 성취해가시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애굽은 무엇을 상징하여, 애굽의 바로왕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인가?

  성경의 기록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도 사실은 영적인 책이다. 영적인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장차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어,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기록한 것이 성경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약성경은 매우 중요한 구약의 확증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약에 있었던 사건의 의미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민21장에 기록된 놋뱀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출애굽2세대들이 만나에 싫증난 나머지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들에게 보내 물려 죽게 한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에게 달려와 제발 기도하여 뱀들이 떠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 위에 높이 불뱀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가 있다면 그것을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들마다 놋뱀을 쳐다 보았던 사람은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뱀과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가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대위에 높인 달린 뱀은 자기에게는 죄가 없으나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를 전가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는 그 옛날 놋뱀을 쳐다본 자가 뱀의 독에서 해독될 수 있었듯이 누구든지 죄의 독으로부터 해독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 들어간 것과 다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간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들어와 사는 것을 상징하며(요일5:19), 그곳에서 애굽왕 바로를 섬기고 산 것은 이 세상임금인 마귀를 섬기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12:31~32).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어떻게 생활하며 살았는가? 비록 종살이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불편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에서 계속해서 살기를 바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족 70명을 애굽에 들여보낸 이유는 애굽에서 영영토록 살게 하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잠시 기근을 피해 들어가서 살다가, 반드시 그곳을 빠져나와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들여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애굽은 한 마디로 무엇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출1:7에 의하면, "풍요로움"과 "번성"의 장소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고 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있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하여 임시로 주어진 기간인 것이지, 이 세상의 풍요로움에 푹 빠져 영영토록 이 세상에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은 번성의 장소인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은 영체와 부활체만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번성의 축복은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 오직 물질세계이자 육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삶에서만 사람이 번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되, 이 세상에 있는 풍요로움 속에서 번성의 축복을 해야 할 장소인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얼마동안 체류한 뒤에 나왔을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탈출하여 거기를 빠져 나왔을까? 출12:40~11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때은 이스라엘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 끝나던 해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출12:40~41). 다시 말해, 야곱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와 증존자까지 이끌고 애굽에 들어간지 430년만에 탈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왕상6:1의 기록을 통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해가 솔로몬통치 4년이 되는 해의 2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왕상6;1). 그해는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B.C.966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연도에 관한 놀라운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이 되던 해에 성전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480년이 되던 해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 오르난의 타작마장에 다윗이 정한 곳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연도는 B.C.966에다가 480년을 합친 B.C.144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민족은 언제 애굽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출12:40~41에 의하면, 애굽땅에 거주한지 430년이 되는 해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간 해는 B.C.1876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으며(창47:9),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그의 나이 147세(B.C.1859년)에 애굽땅에 죽게 된다(창49:33).

4.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틀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말씀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부터 살펴보자.

창15:13-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우리가 이 말씀을 정확히 살펴보면서, 보통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히브리인들의 실제 애굽체류기간은 430년이었다. 그렇다면, 400년은 무엇인가? 창15:13을 보니, 그것은 이방인들(애굽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는 기간이다. 그렇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들어갔다가 17년을 더 살고 죽었는데, 그후 13년이 흐른 다음에, 애굽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처음에는 강도가 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셈의 자손인 힉소스인들의 통치(애굽13~17왕조)가 끝나고, 함의 자손(제18왕조)이 다시 이집트땅을 다시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고역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졌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체류했던 기간은 정확히 430년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았고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인 야곱의 나이 90세에 태어났다. 그런데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 야곱의 나이는 107세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죽을 때의 요셉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리고 요셉은 110세에 죽었으니, 야곱이 죽고 나서 약 53년을 더 애굽에서 산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의 나이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얼마를 살았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다. 다만, 계보만 남아 있을 뿐이다.

  먼저, 애굽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의 자손 4대가 누구였는지부터 살펴보자. 애굽땅은 야곱이 들어갔다. 그때 야곱은 자신의 12아들들과 손자와 증존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창46장 12절에 보면, 야곱은 넷째아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유다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였던 베레스와 세라를 데리고 들어갔으며, 베레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증손자인 헤스론과 하물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이는 야곱이 자신의 자손4대를 데리고 애굽에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족보는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이다. 그런데 이후의 사람의 족보가 역대기에 나오고(대상2:9~10), 마태복음 1장의 왕의 족보에도 나온다. 이 족보에 의하면 헤스론은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를 낳았고, 그의 둘째아들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을 나손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대상2:9~10). 그리고 나손은 살마(살몬)을 낳았는데, 살몬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탐할 때 보낸 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우선 헤스론 이후의 족보를 좀 더 보자.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이 그 족보다. 그런데 헤스론이 3명의 아들을 낳은 것까지는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야곱의 증손자 헤스론이 고손자 람(누가복음 족보에는 '아니')을 낳은 것을 기록한 족보가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다의 계보가 헤스론에서 첫째아들이 아니라 둘째아들인 람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람이 암미나답을 직접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여러분은 혹시 람의 아들인 암미나답이 누군였는지를 알고 있는가? 암미나답(혹은 아미나답)은 아론의 부인인 엘리세바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출6:23). 다시 말해, 암미나답은 아들인 나손을 낳았고, 딸인 엘리세바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암미나답은 딸인 엘리세바를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시집보내었다. 이때 엘리세바는 아론에게 시집가서, 4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은 바로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다(출6:23).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론과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세대가 아닌가?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1세대들 중에 광야의 행진순서를 기록했을 때, 유다지파의 족장으로 기록한 사람이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는 것이다(민2:3). 그러니까, 암미나답이나 나손은 출애굽하고 있는 세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가나안땅에서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 - 유다 - 헤스론까지며, 헤스론이 애굽땅에서 람을 낳았으리라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암미나답과 나손은 출애굽세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야곱이 헤스론까지는 자신이 직접 대리고 들어갔는데, 람까지가 430년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지 말이다. 람이 분명 암미나답을 낳았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 암미나답은 람의 직접적인 아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엄청 많은 세대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족보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왜, 성경의 기록은 람의 아들들 중에서 몇 세대를 생략한 채 기록하고 있는는 것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마태복음 1장의 메시야의 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왕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왕과 여호아하스왕의 아들 여호야긴(엘리야김)왕이 족보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마1:11).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메시야의 족보에 그 이름이 생략된 자들은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람의 아들들의 수 댓수가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들이 생략되어 있고, 성경의 기록에는 람의 아들은 곧 암미나답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애굽에 체류하고 있다가 나온 세대는 딱 4대만 가리키지 않다는 것이 어느정도 확실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야곱의 후손이 4대만에 애굽에서 탈출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것은 번역상의 잘못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원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가나안 땅에 돌아온다는 말씀이 아니라, "네번째의 세대" 때에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온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4번째 세대에 출애굽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람과 암미나답 사이에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들어있음을 추측해 본다. 그래야 사실 430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이 전혀 문제가 없이 해석될 수가 있다.

5. 나오며

  성경의 기록은 사람이 썼지만 사람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들어쓰셔서 기록게 한 성령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책들은 성령의 책이자 하나님의 책인 것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체류기간에 있을지도 모를 야곱의 후손들도 이 원칙은 동일하다. 딱 4대가 아니라 네번째의 세대가 흘러간 다음에 출애굽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뜻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낳게 하기 위해 준비된 유다지파의 족보에는 천국에 못 들어간 자의 이름이 생략된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족보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 석 자에 대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라도 꼭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원히 잊혀버리는 사람의 이름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이름의 하늘의 생명책에 남아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반드시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충성하여 하늘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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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생활을 400년, 430년, 450년 중 어느게 맞는가?
왜 이렇게 적으셨을까? 교회가 비방받는 이유는?

요즘 불신자들의 교회공격이 도를 넘고 있다. 이러다간 얼마 안가서, 가톨릭과 wcc와 함께 교회습격, 프랑스바돌로매사건이나 종교재판때 같은, 마녀사냥이 생기지 않을까 싶을정도다. 그러므로 우린 더 열매맺는 언행과 모든계명지킴과 강력한 영적전쟁과 기도가 필요하다.


성경에선, 교회가 욕먹는 이유를 뭐라 하시는가? 거짓교사들의 음녀짓 때문에 교회가 비방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즉 성경속 바알이며, 음녀들의 어미 가톨릭과 그 음녀딸 wcc, wea 가, 영적 창녀짓 호색 음란짓 하기에 비방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벧후 2:2,) 『여럿이 저희(거짓교사들)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분명, 진리대로만 성경대로만 제대로 믿고,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요소들=바알교리들을 모두 찾아 버리시면, 칭찬을 듣고 수도 더 는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얼마전, 어느 불신자가 올린 글중에, "성경은 거짓투성이다" "이런 거짓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라는 취지의 글로, 내용은, 애굽생활을 400년, 430년, 450년으로 적고 있어, 소설같다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에겐 말씀이 가려져서 잘보이지 않고, 보아도 못보게, 들어도 못듣게 하시니까 그런것도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도 제대로 답변하나 해놓은게 없어서 글을 올립니다.


또 그 가라지는, "어느게 정답이며, 또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에서 정말 4대가 400년이상이 되느냐?" 식이었다. "400년이면 40년씩만 해도 10대는 될텐데..?"


정답을 말씀드립니다.
일단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란 걸 아셔야 한다. 전지전능하시지만, 오직 하나 못하시는 건, 거짓말이다. 거짓의 아비는 마귀다(요8:44)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 4대 만에 나온다고 하신 말씀을 보자.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여기서 잘 아는 아론. 모세의 족보를 보자.
(대상 6:1)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대상 6:2)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대상 6:3)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야곱은 거의 죽기 직전에 애굽에 들어갔기에 빠집니다.
요셉의 형인 레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애굽은 아론. 모세가 이끌었기에 아론.모세까지 세어야 합니다.

레위>그핫>아므람이 고모 요게벳과 결혼(출 6:20)>아론.모세.미리암
으로 4대 만에 출애굽 했다.  그러므로 4대가 맞다.
이 당시엔 보통 120년정도씩 살던 시대다.
(신 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물론 노아의 홍수 전에는 거의 천년가까이 살았다.
심지어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
노아와 샘은, 야곱과 요셉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족보를 보면, 정말 아이러니다.
샘의 직계자손들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때에 와서는 우상을 섬기게됐다(수24:2) 심지어 그토록 하나님을 잘섬기던 샘의 직계에서 말이다.
(창 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또 샘이, 같은 지역에서 생존해 있는 기간에도 말이다.

이토록 죄 때문에 점점 나이가 줄어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역대일기를 보면, 왕들의 나이가 보통30-50세를 못산다. (시 109:8)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 레위26장 신명28장도 보면 죄때문에 저주 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400년은?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나그네)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에서 분명히 답을 주십니다. "그들을 섬기겠고,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즉 <종으로 삼아 괴롭게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분명 요셉 때는 되려 번성했고, 주인으로(창 45:9) 대우받았다. 하여 그 기간을 뺀 것이다. 요셉을 알지못하는 다음 새 왕이 나왔고(출 1:8) 즉 요셉 때 바로왕 외에 다음 바로부터는 이스라엘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정치적계산으로 학대한 것이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3. 430년은?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갈 3:17) 『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


 430년은?  애굽에 거주한 총 기간을 말씀하신다.
즉 정확하게 하루도 차이없이, 430년 마치는 그날에 출애굽하셨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이시다.


4.  450년은?
(행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 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행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성경에서 말한 430년을, 왜? 450년이라고 했을까요? 바울은 거짓말 못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확히 문맥을 깨닫지 못하니까. 거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시작은 16절이고, 17절에선 핵심이 <나그네 된 그 백성>이다. 즉 요셉 때 30년은,  객이 아닌 당당한 주인으로 살았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애굽의 <주>로 세워진 요셉으로 인해, 당당히 주인으로 살았으나, 다음 바로왕 때부터는, 요셉이 죽고나서 객=나그네로 전락된다.  즉 나그네로 학대. 압제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도 나그네를 잘 대해주라시며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다고 하신다.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바울은 17절에서,

나그네의 학대 압제받은 기간인 400년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 다음 18절의 광야 40년간과
그 다음 19절의 가나안 정복전쟁 10년을 더하여  총 약 450년을 말한 것이다. 그것도 <약 450년간>이라고 하신다.


이처럼 깨닫고 나면, 얼마나 정확하신 분인지 아는데요.
불신자나 가라지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유일신 예수님을 욕하기 바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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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회복과 430년의 기간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3-24)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리이까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아니요(행1:6-7)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겔 37:21,24)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겔 38:8)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성서적 근거
예수 그리스도는 공관복음서에서 마지막 때에 있을 징조들을 언급하면서, 우선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누가복음 21 : 23, 24절 말씀에서 각각 <이 백성>, <예루살렘>을 언급함으로써 <유대인>들로 그 범위를 국한시키고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 37:38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38: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처럼 <말년-a long time, in the distant future>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누가복음 21:20-24절 까지의 말씀의 적용은 반드시 A.D 70년과 A.D135년의 시점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1:23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진노(Wrath)’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상의 의미인 ‘호르게’로써, 즉 <분노>, <분개>와 동일한 의미인데, 이는 누가복음 13:34-3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처럼<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에스겔, 이사야, 스가랴, 학개, 그리고 스바냐 등 <바벨로 포로 이후>시대에 주로 활동했고 예언 했던 선지자들의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며, 이 예언서에서 가리키는 ‘시점’은 <종말의 때>에 맞춰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바벨론 포로와 그 이후 이스라엘 귀환의 멧세지의 중심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귀환과 회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지서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최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겔38:17-23)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성격이 아닌, 하나님 그 자신의 <의>를 전 세계에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 21:24절의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은 실제로 A.D 135년 조국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이 1917년 벨포어 선언(이스라엘 건국)과, 그 뒤에 이은 1947년 UN의 합의 결의안이 있기까지 약 1900여년 동안의 <흩어진 디아스포라 기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21:24절에서 에스겔서 37:21절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의 공백기간은 약 1900여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숫자의 상관성
성서에서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숫자>가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2, 7, 6, 4, 3 과 같은 숫자가 그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4’ 라고 하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는 <고난>이며 '3은' <완전함>이다. 한편 <4>와 <3>이라는 숫자는 자주 <40일, 40년, 혹은 400년>, 그리고 3은 <30년>의<기간>을 나타낼 때 쓰이곤 한다. 그러면 성서에서의 기간, 즉 400년과 30년을 더한 430년이라는 기간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지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사건, 즉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한 가지의 독특한 공통점을 이끌어 낼 수 가 있다. 그것은 <430년>이라는 기간이다.



1.성서 속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
430년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먼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탈출할 때,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기간이 바로 <430>년이 정확하게 차던 해라고 말을 한다. 물론 이 기간과 관련해서 학자들 간에 몇 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분명히 <400>년 혹은 <430>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모세는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을 한다. 먼저 그는 왕의 아들(애굽의 왕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에 들어가 40년간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목자로서의 40년이라는 기간은 하나님이 모세를 준비시키기 위한 특별한 준비기간임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후계자인 여호수아에 의해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신약으로 넘어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만난다. 앞서 언급했던 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임을 잘 알고 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애굽에서의 430년간에 걸친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준 사건이라면, 신약의 <십자가 사건>역시 430년간의 <신구약 중간기의 암흑>을 뚫고 참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준 사건이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B.C 4)까지의 기간을 약 400년간으로 본다. 선지자 말라기의 활동연대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400년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기는 B.C 4년경이라는 것은 이미 일반화 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헤롯왕의 죽음(B.C 4)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거의 같은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400년의 기간동안 선지자의 활동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흔히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기>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암흑시기인 400년간 이스라엘은 제국국가들의 속국으로 있었는데, 즉 바사(이란), 헬라(셀류쿠스제국-시리아), 로마제국의 속박 아래에 놓이게 된다. 특히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끔찍하고도 잔혹한 행위는 유명하다. 그는 예루살렘에 밀어닥쳐 성전에 들어가 보물을 빼앗고 시리아 군대를 주둔(B.C169-168)시킨다. 그리고 유대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금지시키고 성전에 제우스신(바알신에서 유래되었으며, 로마제국 당시엔 주피터신)을 세우고 토라를 불태운다.(B.C167-164) 이렇듯 중간시대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기간이었다. 게다가 이어서 출현한 로마제국의 폭군 헤롯대왕(B.C37-4)는 가장 잔인한 인간 중의 하나였는데, 그의 잔인함은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도 살해할 정도였다.

바로 이러한 암흑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론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A.D 30)하게 된다. 정확히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는 4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의 실제를 의미하며, 이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회복을 안겨준다.(고전10:11)


2.역사 속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
430년과 UN <이스라엘 재건국>합의 결의안 (1517-1947)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은 현재 이스라엘의 회복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다음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일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성서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려 한 시도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적어도 성서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건을 통해 언급되는 <430년>이라는 기간, 이 기간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관짓고자 한다. 또한 이 시점에 맞춰 일어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A.D 70년의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서 A.D 135년에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다. 아니 사실은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각처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게 된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아울러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으셨다. 아니 그것은 이미 창세기에 등장하는 장자 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창4:10-26) 애초부터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7년 11월 UN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이 합의 될 때 까지,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재건국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기까지 1900여년이 걸렸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신.구약 중간암흑시기 때에 겪었던 것 처럼, 많은 제국국가들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세계의 3대 종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는데, 즉 유대교, 기독교(가톨릭,정교회,개신교), 이슬람교가 그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엔 저 유명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옛 성전터 위에 세워지게 되며, 기독교도의 십자군(1096)을 시작으로 7번에 걸친 전쟁으로말미암아 수많은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 되게 된다. 1096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학살은 20세기 나치의 유대인 전멸 정책까지 유럽에서 계속 되었으며, 기독교도에 의해 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아이러니할 뿐이다.

430년간의 애굽종살이에서 출애굽사건의 시작, 그리고 430년간의 중간암흑시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시 마지막 때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회복'(겔37:21)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517년 팔레스틴에 대한 오스만왕조의 지배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같은 해에 시작된다는 점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1917년 '발포어 선언'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의 재건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를 분리해낸 사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성격을 띤 사건이기도 하다.






A.<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기간 400년, 그리고 30년의 역사

1. 40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와 멸망까지의 400년(1517-1917)
이스라엘에 대한 오스만 제국(터어키)의 지배는 정확히 400년간 지속된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며, 터어키가 회교 군주국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십자군 시대 200년간을 제외하곤 1천여년간을 거의 이슬람 교도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온 셈이다. 그리고 비로서 1917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영국군이 들어오게 되는데, 십자군 이래 처음으로 비이슬람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이 때 유대인의 부대도 함께 입성 하는데 육군 상병 데이빗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이라는 지도자도 함께 들어왔다. 400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이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시작과 발포어 선언까지의 400년(1517-1917)
이스라엘의 회복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후 인문주의의 발달로 인간성 회복의 운동에서 부터이다. 이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유대인 해방운동도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 출신의 최고 학자들이 계몽주의에 편승해서 유대인 자유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영향으로 서유럽을 위시하여 유대인 해방운동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게 되며, 이에 반해 동유럽에서는 그보다 후에 본격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영향으로 1657년 오란다에서 최초로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8세기 이래 유대인들에게 법적평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1830년 이후부터는 유대인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다.
전세계에서 시작된 유대인의 법적 평등 및 권리의 부여, 그리고 그로 인한 유대인의 해방은 다음과 같은 역사를 따르게 된다.

미국(1776) / 프랑스(1789) / 이탈리아및 독일(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지역' 해방) / 프랑스(1846) / 영국(1858) / 이탈리아(1871) / 스위스(1874)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결국 1897년 8월 29일 204인의 유대인 대표들이 모여서 최초로 개최한 <시온주의>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이는 또한 전세계 시온주의 기구설립을 채택하게 되고, 전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촉매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동유럽과 러시아(거주지 제한 정책의 철폐로 인해 가능하게 됨-1917.3월 시행)에서 불모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굶주림과 고통이 따르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초기 정착민 중 많은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기도 했는데, 결국 유대인 민족의 저력은 지금의 키부츠(집단 공동체 농장)를 탄생시킨다. 한편 이것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는 유대출신이면서 대부호들인 재벌 및 금융가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 있는 유대인 부호들의 역할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17년의 발포어 선언, 1947년의 UN의 분할 합의안, 그리고 최종적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실로 이것은 1,900여년을 뛰어넘어, 2,600여년 만에 완전한 독립국가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 30년간 역사의 재조명
발포어 선언과 UN 합의안까지의 30년(1917-1947)
1917년 발포어 선언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재건국을 승인한 1947년 UN 합의안이 있기까지의 3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독립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요청>을 잘 반영하고 있는 기간이다. 특히 세계전쟁의 발발로 인해(1914-1945 1,2차 세계대전)더욱 가속화 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다.

또한 특이할만한 사실은 1917년 발포어 선언이 있었던 같은 해에, 러시아에서는 정말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를 탄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세계는 극단적인 두 세계로 양극화 되기에 이른다. 즉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이념의 대립의 결과로 냉전,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수많은 희생의 결과를 낳게 된다. 다시말해 비극의 시대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결국 공산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최근 다시 <러시아의 부활>이 급속도로 가속화 되면서,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대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이는 에스겔서를 비롯한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마지막 때의 예언을 이루는 하나의 확실한 징조를 보여주는 예이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격동기를 경험하게 되는 이 시기에 역시 종교적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같은 해 1917년 포루투칼의 파티마 지역에서 일어난 <성모마리아의 출현 및 예언>사건이 그것이다. 이 파티마 사건은 가톨릭의 교황에 의해 극비로 취급될 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 된다. 현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그 비밀의 전모가 알려졌으며, 그 비밀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교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정립한 사람이 바로 당시 교리성 장관으로 있었던 라칭거 추기경(현 베네딕트 16세 교황)이었다. 대략 말한다면 그 비밀의 내용이란 <세계전쟁과 최후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예언이다. 물론 전쟁에 관한 예언은 이미 제 1,2차 세계전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본다. (이것에 관하여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파티마' 예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17년과 1947년 사이에 일어났던 20세기 초의 사건들은 이상과 같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기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히틀러에 의해 자행되어진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전체국가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 당시 대량학살로 인해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최대 600만이라는 통계도 있지만 상이한 견해가 존재함). 그러나 결국 이러한 핍박과 협박으로 인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 된다. 또한 1917년 러시아의 <거주지 제한 정책>이 해제 되면서 그곳에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 어떤 나라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보다 많은 수가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제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또 2차적으로는 세계인류에게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준 사건들이 30년 동안 발생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시점이 바로 <이스라엘이 재건국>하는 시점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수천년간의 침묵의 기간을 깨고, 그리고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과 아픔을 딛고 잉태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에르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땅>에 돌아와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되며, 그 중심에는 이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이 있으셨음을 부인 할 수 없다.

한편 구약성서에서는 바벨론 포로와 이후에 성취될 이스라엘의 재건 사건이, 출애굽 사건과 아울러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또 그것은 가장 확실한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묘사되고 있다.







B.<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과정기간 60년(1947-2007)

1. 3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UN 분할합의안에서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제안까지 (1947-1977)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유대국가와 아랍국가에 대한 동시 분할안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는 다시 재건되었다. 독립이 선포된 후 13명의 초대내각을 구성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는 30년간 시온이즘 운동을 지도해 온 와이즈만 박사를 초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들이 속속 승인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아랍국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이집트(애굽), 시리아(헬라-셀류쿠스 제국 ), 요르단(에돔,암몬,모압), 레바논(페니키아) 등은 강경하게 대항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고, 1973년 욥키푸루 전쟁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중동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2차대전 당시, 줄곧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틴으로 계속 모여들었다. 그래서 1947년 이후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된다.

제 1차 중동전쟁(1948.5)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동시에 7개국으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영토를 침입했다. 절대적 약세 놓여있던 이스라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통해 UN 분할안에 명시된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제 2차 중동전쟁(1956. 7)
1956년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얻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가의 전멸'을 다짐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급기야 연합군을 결성해 시나이 반도를 급습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미국 소련의 압력을 받게 되자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철수하게 된다. 한편 가자의 이집트군 기지를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2차 중동전쟁에서도 이집트는 대패했다. 3만여명의 군사가 갈증으로 죽어갔으며, 이중 5,000여명 정도가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이에반해 이스라엘은 172명의 전사자와 8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제 3차 중동전쟁(1967.6)
1967년 대아랍 전쟁은 전쟁 역사상 가장 짧은 시일안에 가장 많은 영토를 점령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6일 안에 끝이 났으며 이집트로써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며 복구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선제 공격을 가함으로써 제공권을 장악, 출격 4시간만에 적기 4백여대와 군사 요충지 25개소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집트는 소련에서 지원받은 20억불의 군사장비 중 대부분을 6일 전쟁에서 소모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대의 비행기 손실을 입는데 그쳤다.
제 3차 중동전쟁은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동예루살렘(이스라엘의 성지)을 점령하게 된다.
둘째, 북쪽의 시리아 골란고원(헤르몬산) 지대를 모조리 점령하게 된다.
셋째, 요단강 서안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곳이 지니는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중요성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 4차 중동전쟁(1973.10)
3차 전쟁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아랍국가들, 특히 이집트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다시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남쪽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그리고 북쪽 골란고원을 시리아가 동시에 공격하게 된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 패전하게 되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전멸 위기에 처해진 이스라엘 군을 포기하고 시리아 군대는 작전상 후퇴함으로써 믿을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로인해 전쟁은 한 순간에 반전이 되어버린다. 다시 이스라엘은 전열을 정비한 후 수에즈운하를 이집트군으로 가장해 도강한 후 이집트 영토에 몰래 침입한다. 이집트 영토를 직접 침입하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그리고 <마긴 다비드-다윗의 별표>를 이집트 영토 안에 게양한 후 수많은 이집트군을 포위, 전멸의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다급해진 이집트 왕 사다트는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며 미국무장관 키신저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 이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군대에 의해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점령지역에서 철수한다면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래서 1978년 9월 17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사다트 대통령 및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이 평화의 원칙에 합의한 후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2. 30년간의 역사의 재조명
이집트 평화협정 제안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까지(1977-2007)
1973년 중동 4차 전쟁까지 아랍권은, 특히 이집트를 중심으로한 연합세력은 공산권(구소련-에스겔서에서는 <곡>이라고 언급된 국가 - 겔38:16) 의 막강한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집트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지난 4차에 걸쳐 치러진 중동전쟁의 성서적 의미는, 예언서에서 알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혔던 열국들을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심판하고 계신 다는 것이며,(슥1:16-21)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온 열국 가운데에 보여주고 계시다는 사실이다.(겔38:16)

한편 1977년 평화협정의 제안에 이어 1978년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중동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을 맞게된다. 물론 주변국가들과의 몇차례 산발적인 충돌이 있긴 했었지만 4차에 걸친 중동 전쟁 만큼이나 큰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그리고 최근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란 및 시리아와의 정치, 군사적 마찰이 일게 되었고, 그 와중에 다시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의 제안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1977년 이집트의 평화협정제안 이후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 미국의 중재로 2008년까지 평화협정을 완료할 예정인데, 여기에서 특이할 만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이스라엘 역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1947년-UN 분할 합의안 > 1948년-이스라엘 독립국가 재건
1977년-이집트의 평화협정 제의>1978년-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미국중재)
2007년-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제의> 2008년-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완료 예정(미국중재)

1517년에서 1917년까지의 400년, 그리고 1947년 UN 분할 합의안까지 30년, 이후 정확히 30년간의 일정한 기간을 두고 평화협정이 제의되고 체결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성서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때가 차매>라는 말이 이럴때 쓰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한 가지 주목 해야할 것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차지한 동예루살렘 및 골란고원, 그리고 서안지역의 반환문제가 중동의 평화에 핵심적인 사안이 된다는 것이다. 1967년 이후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 즉 작년부터 미국의 중재로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가시화 된다. 그리고 현재 부시 대통령의 중재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동예루살렘의 성서적 의미와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요단강 서안지구 및 역시 골란고원(헤르몬산 부근-시리아와의 분쟁)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지금 평화협정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에 대해 양보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과 관련한 성서적 근거와 그 의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차후에 논의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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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횃불 언약에서 400년에 4대가 분명한가?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횃불 언약을 하시며 그 후손이 400년, 4대(Generation)만에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400년간 단지 4대만이 있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한 세대를 30년 정도로 계산 한다고 볼 때 400년이면 적어도 14대는 돼야 한다. 4대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의 애굽생활을 43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고, 속 시원한 답을 발견하게 됐다. 결국 필자는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400년이 옳은가 아니면 430년이 옳은가?', '4대가 맞나?'라는 질문에 일부 성경학자들은 명확한 대답을 회피한다. 또 실제로는 430년이 옳은데 하나님께서 대충 400년이라고 말씀하셨으며 4라는 숫자가 고난과 시련을 의미하므로 일종의 상징(Symbol)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바로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는 성경의 분명한 역사(History-His Story)를 하나의 우화(Fiction)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인간의 '참된 도'이다. 숫자 1은 2가 될 수 없고, 2가 1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충’ ‘어름 짐작’으로 말씀 해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다.

그러면 400년에 4대가 가능한 것인가? 그 대답은 분명히 Yes 이다. 성경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횃불 언약에서 말씀하신 400년에 4대(Generation)가 되었음을 출애굽기 6장 16절~20절이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론과 모세가 레위 후손으로 4대임을 분명히 밝혀주며, 그 조상들이 살았던 나이까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야곱의 아들인 레위는 137세, 레위의 아들 고핫은 133세, 고핫의 아들인 아므람은 137세까지 살았으며, 아므람의 아들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이다. 그러므로 1대는 레위, 2대는 고핫, 3대는 아므람이며, 4대는 아론과 모세이다. 분명히 횃불언약에서 400년, 4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이 아니요 사실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의 족보로 보면, 아론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고--고조 할아버지 격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족보 순서로 최고로 높은 자 즉 아론과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더욱 증명해 주는 자료가 민수기의 열두 지파 인구 분포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레위족을 제외한 11지파의 인구는 장정 20세 이상의 남자들만 계수하여 603,550명이었다(민1:46). 그렇다면 평균 한 지파에 54,868명이 된다. 특히 유다족은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74,600명이었다. 그런데 레위족의 숫자는 생후 1개월 이상의 모든 남자의 숫자가 22,000명에 불과하다(민3:39). 이것은 레위족들은 대부분 400년 동안에 아주 늦게 자녀를 가졌거나 자녀 손이 아주 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과 모세의 조상들은 아주 늦게 자녀들을 가졌기에 400년 동안에 4대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이 400년이 옳은가 430년이 옳은가?

출애굽기는 야곱과 그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갔던 때(날짜까지)와 나온 때(날짜까지)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이 애굽에 있었던 기간은 정확한 430년이었으며 하루라도 지나거나 모자라지 않다. 출12:41은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이스라엘)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라고 말하고 있다. 애굽에 들어간 날과 나온 날이 같다는 말이다. 이토록 성경에는 정확하게 날짜까지 기록 돼있다.

출애굽한 날은 원래 성경유대월력으로 7월 15일이었으며 장막절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은 이 날에 출애굽하여 장막을 치며 광야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날을 기념하며 장막절로 지키게 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달 즉 7월(디스리월/메담밈월)을 1월(니산월/아빔월)로 바꾸게 하셨다. “이 달(7월)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1월)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12:2)”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변경하신 것이다. 왜 바꾸셨을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다루기로 한다.

그러므로 야곱과 그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간 날짜는 창세후 즉 ac2338년 1월 15일이며, 출애굽한 날짜도 정확히 430년 채우는 날인 창세후 즉 ac2768년 1월 15일이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은 주후 30년 즉 ac4034(?)년 1월 15일(수난일)이 된다.

위에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애굽생활은 정확한 430년이며 날짜까지 정확한데,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왜 일까? 대충 말씀하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횃불 언약에서 하나님은 “--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셨다. 즉 400년은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려 먹는 기간이지, 이스라엘이 애굽에 산 기간이 아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었다. 오히려 잘 살았고 넉넉하게 살았다. 애굽에서도 좋은 땅 라암세스에 거하며, 잘 살았었다(창47:11).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처음 30년은 애굽 총리인 요셉 때문에 잘 살았고, 그 후 요셉이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다른 왕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한 것이다. 애굽 사람들 눈에는 이스라엘이 남의 땅에 와서 자기들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격이었고, 이를 미워하며 그들을 노예 삼아 괴롭혔다. 그 기간이 400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400년이란 노예생활 기간이고, 430년은 정확히 애굽에 거했던 기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으며(창37:2, ac2216년), 30세(ac2229년)에 총리대신이 되었고(창41:46), 39세에 자기의 형제들과 아버지가 애굽에 내려오게 되었으며(ac2338년 1월 15일) , 그 후 대략 69세(ac2368년)까지 총리대신 이었을 것이며, 110세(ac2309년)에 죽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이 자손 삼대를 보았으니(창50:23), 즉 요셉은 약 80년 동안에 벌써 4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레위는 45세에 애굽에 가서 살게 되었으며, 애굽에서 92년 동안 살았으며, 6살 아래 동생인 요셉이 죽고 난 후에도 21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의 후손으로 아론과 모세는 400년에 4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들을 그냥 상징이거나 대충 말한 숫자라고 단정 지어버린다면,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한 가지 더. 야곱과 그 가족이 애굽에 내려갔던 가족의 숫자는 구약 창세기 46장 27절에는 70명이라고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데, 신약 사도행전 7장 14절에서는 75명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은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다’인데 이 또한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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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나드 한 근 / 300데나리온



순전한 나드 한 근에 담긴 존재와 삶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중략)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게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중략)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1~9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인에 대한 묘사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직접적으로 밝힌 요한복음과 달리,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한 여인', 심지어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앞 장면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신의 절망과 상실감에 매몰되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심각한 불신앙과 원망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시몬)은 여인이 주님께 향유를 부을 때 죄인이 기름 붓는다는 점에 주목해 예수님을 판단하려 했다.
결국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왔던 것이고 그 때문에 주님 발 앞에 철저히 엎드렸던 것이다.

​향유 옥합과 여인의 태도에 대한 묘사

4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지극히 값진 향유'라고 설명하는데, 특별히 '순전한 한 나드' '옥합'으로 묘사된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같은 향유는 당시 화폐가격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인데, 장례에도 쓰였고 여인이 혼인할 때 예물 혹은 지참금처럼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 부음이라고 묘사했다. 과연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던 의미를 정말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마리아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나의 이해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께 순간의 불신으로 얼마나 큰 불경죄를 지었고 그것이 주님께 아픔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지극한 회한과 슬픔으로 마리아가 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믿지 못했고 주님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 죄로 인해 주님과 끊어지고 멀어졌다는 절망과 죄책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길... 그것은 미천한 자신이 주님 발앞에 고꾸라져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굴복시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순전한 나드 향유는 공기 중에서 변질되기 쉽기 때문에 밀봉된 옥합에 담겨 있었고, 그 옥합을 깨뜨릴 때 딱 한 번 쓸 수 있는 소량이라서 진귀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는데, 젊은 여인에게 머리카락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자신의 존재와 모든 삶을 통째로 드려 주님을 경배했다. 나의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것만 택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러지지 않은 가장 깊고 은밀한 심연의 한가운데서부터 끄집어올려진 100% 순복, 헌신의 의지가 주님께 '순전한 한 나드'이며 이것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는 것이 가장 투박하고 진심어린 행위이다.

올해 이 말씀을 레마로 받은 나의 존재가 주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드려져야 했다. 무익하고 죄인 그대로인 나는 왕 되신 주님 앞에 내 존재가 철저히 깨져야만 주님께 드려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어둠과 쓴뿌리, 정욕과 아집, 불신앙과 죄성까지 까발려지고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굴복시켜야 한다. 마리아도 이 아픔과 온전한 헌신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온전한 신부이자 제자로 변화할 수 있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구속 사역에 일부로 끼워맞춰졌던 것이다.

​주변인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

앞서 말했듯이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건을 통해 마음 속에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여인을 죄인으로 정죄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목소리 높였으며, 심지어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악심을 품었다. 요한복음의 말씀에서는 특히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가룟 유다의 은밀한 악심을 지적함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심중까지 다 알고 계심을 전하는 것 같다. 나는 내적 고통과 어둠의 심연을 뚫고 나아가 주님께 바쳐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주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편에 서서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존재가 될 것인가?

예수님의 결론에 대한 묘사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여인의 행위가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대단한 영광 아닌가?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표현보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더라'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썼다. 사도 요한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이 장면을 온전히 예수님의 관점에서 느끼고 기록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사랑과 믿음이 '향기'라는 감각으로 기억되었고, 이후의 세대에 여인의 믿음이 기억되리라는 예언을 이같은 감각적 묘사로 아름답게 기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 역시 감동적이다. 회한과 눈물로 드렸던 마리아의 절절한 사랑이 주님께 인정받고 죄사함을 받는 대목이 참 아름답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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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1. 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성경에 나오는 나드(또는 나도)
(막 14:3∼9)와 (요 12:3∼8)에, 순전한 나드는 값비싼 향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값은 1옥합(향수병)에 300데나리온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품삯에 해당되므로, 300데나리온이면 약 1년치의 품삯에 맞먹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박물학자 프리니는, 나드 향유의 원료가 되는 나드초의 뿌리 1파운드(453g)의 가격이, 100데나리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름을 짰으므로 10∼15배의 높은 값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나 히브리인들은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화한을 손님의 머리에 씌울 뿐 아니라,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시체를 장사할 때에도 향유를 발라서 방부처리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귀한 손님(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분)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값비싼 나드 옥합을 깨뜨려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이를 보고 비싼 것을 낭비했다고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고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시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아가 1:12에서 "왕의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라고 말했고, 아가 4:13에서는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다"라고 했으며, 아가 4:14에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모든 귀한 향품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들은 나드가 비싸고 귀한 무역상품으로, 왕이나 부자 또는 귀족들만 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토록 값비싼 나드는 무엇이었을까요?

2. 나드는 무엇인가?

나드는 히말라야 산맥의 3,000미터 고지에 자생하는 마타리과에 속한 다년초입니다. 히말라야, 부탄, 네팔, 티베트, 인도동부 등이 나드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드는 인도산의 다른 향료나 약제와 함께 중동지역으로 거래된 역사가 오랜 진귀한 향료였습니다.

나드는 학명을 Nardostachys Jatamanse DC라고 하며, 영어명은 Spikenard, Indian Nard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향기를 풍긴다는 뜻의 말인 nalada가, 히브리어 Nerd, 그리스어 Nardos, 라틴어 Nardus, 시리아와 페루샤어는 Nardin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나드 향료를 Sunbul hindi(Indian spike), 즉 이삭같이 생긴 인도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서, 나드초의 생김과 원산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드초는 키가 15∼30㎝로 자라는데, 잎이 크고 꽃은 연분홍색 잔꽃이 꽃대 끝에 뭉쳐서 핍니다. 그리고 근경에는 털이 덮여 있어서, 피기 전에는 이삭처럼 보히고, 근경 밑쪽에 굵은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와 근경에 강렬한 방향(芳香) 정유성분이 있습니다. 잎이 벌어지기 전에 뿌리와 근경을 파내어서 건조시킨 것을, 나드 뿌리(Nardus Root)라 하여 약으로 사용합니다. 약초일 때는 주로 이뇨·위장약으로 사용하며 복통·두통등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료로 만들 때는, 근경을 파내어서 바로 방향성분을 증류하여, 다른 기름과 섞어서 나드 향유를 만듭니다. 휘발하기 쉬우므로, 옥합(아라파스티제 향료병)에 넣어 밀봉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수출했는데, 사용할 때는 이것을 깨뜨려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강한지, 향을 깨뜨리면 방에 나드 향이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드 향유는 지금도 인도에서 여자들의 머릿기름의 향유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대 유럽에서는 값비싼 향유로 즐겨쓰던 것이, 지금은 향이 너무 짙어서 향료로 쓰이지 않고, 신경 안정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료  ("성서의 식물" 최영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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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심리학(Motivation Psychology)

인간의 행동의 근본적인 힘을 말하는 '동기'가 어떻게 발생되는지, 이를 활용해서 어떻게 업무 생산성이나 삶에서의 행복을 획득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동기 심리학은 당신의 '커리어(Career)' 방향성을 올바르게 안내하기 위해서 제가 꾸준히 공부하고 있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동기 심리학은 당신이 외적 동기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입각한 커리어를 밟을 때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외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외재적 동기는 말 그대로 외부적 보상이나 처벌과 같이 외부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금전적 보상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금전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금전적 보상', '금전적 처벌'은 외재적 동기라고 말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당신이 만약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또는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래와 행동이 바로 전형적인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입니다. 

•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밤을 새워 중간 고사 준비를 하는 것
•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
• 와이프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집안 청소를 하는 것
• 무료 음료 한 잔을 먹기 위해서 똑같은 카페를 지속적으로 방문 하는 것
•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 과속을 하지 않는 것
• 급여를 받기 위해서 오늘도 지옥철에 몸을 밀어넣는 것
•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 멋진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
•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2. 내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반면 내내적 동기는 말 그대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내부 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순전히 '즐거워서' 하는 경우라면 이는 전형적으로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동기에 의한 행동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것
•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
•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하나뿐인 딸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 재정적 '독립'을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
• 내적 성장을 위해서 전혀 해보지 않은 경험을 추구하는 것
•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봉사활동을 하는 것
• 자존감을 향상시키고자 매주 피트니스 센터에 방문하는 것
•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

3. 외재적 동기 vs. 내재적 동기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 둘 중 어느 동기가 좋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가 더 좋은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돈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교양인 같아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기 심리학에서는 이런 가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적 성장보다 돈을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외재적 동기를 더 우선시 여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돈도 좋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를 우선시 여길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의 삶과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를 모두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성장'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하루에 한 끼를 겨우 사먹을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면 당신은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영화 배우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결국 자신들의 꿈을 못 이루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내재적 가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지언정, '금전적 보상'이라는 외재적 가치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심리학 연구 논문들은 인간의 내재적 동기가 한 사람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지만, 외재적 동기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된 이후에 내재적 동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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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외적 보상에 의해서 무언가를 하게 될지라도,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행동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동기를 '내재화' 시키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현재까지 제가 축적한 동기 심리학적 지식을 토대로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생산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기계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창의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 내재적 동기

만약 당신이 '일'을 중요시 여김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 굶지 않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굶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외재적 동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기계적인 일을 한다면 생산성도 올라가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조적인 일은 다릅니다. 창조적인 일의 경우 일정한 보상을 넘어선 이후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가 아니라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그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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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적 동기가 충만한 예술가들에게 '돈'이라는 보상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게 할 경우에는 오히려 예술성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죠.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고민하고 선택할 때에는, 당신이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 내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하며, 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예수의 비유 중 네 제목은 합당한가?

 

이번 개정판에서는 독자들이 내용을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개역 한글판에서는 없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그 소제목 중 몇은 외국어 성경에서나 이전의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서 붙인 것과 다르다. 그것은 그 소제목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에 일치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마 13:1-23)

본래의 개역성경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1995년 개정판 신약성경에서 소제목을 붙였다 (이미1967년의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소제목을 붙여 왔다). 그런데, 이들 소제목 가운데에서 그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마 13:1-23의 내용을 보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네 가지 다른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한 것이다.

 

2)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 비유 (눅 15:4-7)

본문의 내용을 보면, 결코 잃은 양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3)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 (눅 15:8-10)

이 본문에서도 그 내용으로 보아 드라크마의 비유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이다. 그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눅 15:11-32)

이 본문은 흔히󰡐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의 초점이 결코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물론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상의 4 가지 소제목을 우리말 성경 개정판에서 그 본문의 내용과 일치시켜 바로잡은 것은 참으로 전 세계를 두고도 획기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 중 최근 또 최우수 번역이라고 하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년, 번역위원장 Bruce M. Metzger) 에서도 보면 마태 13장의 소제목은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 15장의 3 가지 비유도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잃은 양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Lost Coin’ (잃은 동전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and His Brother’ (탕자와 그의 형의 비유) 등으로 되어 있어 그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나 주역(마 13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 13의 목자, 여인, 아버지)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과 귀신 들림


정신병 & 귀신 들림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은?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난히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신 갈릴리 지역이 가진 지역적 특성(예루살렘과 달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역) 도 작용하였겠지요.
심지어 벙어리 들린 귀신(요즘은 보기 힘든)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벙어리 들리면 모두 귀신 들린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여기 귀신들림과 단순 정신병(단순히 육체적 물리적 무질서에 의한 마음병)의 차이를 살펴봅시다(구분은 하나 때로는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기억하고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실어즘과 귀신들림을 꼭 구분합시다!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 12 가지(눅 11:13-28) 

1. 귀신 들린자는 자신이 귀신들린 것을 아나 깊은 정신병은 자신이 정신병인것조차 모른다.
2. 귀신들리면 때로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나 물리적 단순 정신병은 무덤덤하고 허약하다.
3. 귀신들리면 투시, 예언, 비밀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 정신병은 그런 초능력이 전혀 없다.
4. 귀신들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때로 이상한 방언을 하고 남에게 귀신들림이 전이 된다. 단순 육체적 무질서에서 오는 정신병은 남에게 전이되지 않으며 이상한 말을 하기는 하나 단순한 중얼거림이다.
5. 귀신들린 자는 급속한 치유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단순 정신병은 대체적으로 치유가 장기적이다. 
6. 귀신들린자는 극도의 공포심이 있다.
오래된 정신병은 이런 수준의 공포심은 없다.
다만 오래지 않은 약한 정신병의 경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우울증과 공포심이 올 수 있으니 잘 분별할 것. 
7. 귀신들린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정신병인 경우에도 초기 자살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정상인도 자살 시도하므로)
오래된 깊은 정신병의 경우 자살에 무덤덤해진다. 

8. 귀신들린자는 약물효과가 별로 없다(나중 역효과가 나거나 더 악화 가능성도 존재).
정신병에는 약물로 인한 조절과 효과가 있다. 

9. 귀신들린자는 눈이 빛나고 음침하다.
정신병자는 눈의 촛점이 흐리고 흐리멍텅하다
(정상인이 볼 때 정상인과 눈이 다르므로 판단이 어렵거나 귀신이 속이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할 것). 

10.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나 여러 종교들과 교주에 대해 유난히 지나친 반응을 하나
정신병자는 평균 수준 이상의 특별한 반응이 없다. 

11. 귀신들린자는 귀신들린 것을 나타내거나 속이려하나 정신병자는 그냥 횡설수설한다. 

12. 귀신들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될 수 있다.
정신병자는 유능한 의사를 찾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겨야 한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소유한 아주 난감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할 것. 

세 가지 참고 사항: 

1). 참된 귀신 추방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세와 긍휼로 가능하다. 
타 종파 사람들이나 퇴마사, 무당들도 축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들 귀신 축사는 귀신 축사가 아닌 귀신에게 놀아나는 경우(귀신이 오히려 귀신 쫓는 자들을 가지고 노는 경우임)임을 명심할 것.  그러므로 잠시 상황이 호전 되는 듯하나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오히려 악화(영적, 육적 악화) 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미숙한 도구요 오직 주님이 하십니다. 

2)귀신을 상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에 빠졌던 사람들을 오래 상담하면서 느꼈던 것은 귀신을 쫓는 것과 이 두 경우를 분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들이 마치 무슨 능력 많은 것처럼 떠벌릴 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능력 있다는 사람들도 횡설수설하거나 제가 볼 때 아무런 효험이 없거나 오히려 악화 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룰 때는 내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3) 귀신이 떠나간 후가 더욱 중요하다. 
귀신 축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뒤가 문젭니다. 귀신이 떠나간 후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거나 신앙이 병들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기억하고 분별하고 치유하고 치유 받아 이 문제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긍흉하심 안에서 참 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회복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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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한의학]
정신병과 귀신들림

김양규 원장

정신병의 90%는 정신분열증이다.
정신분열증은 요즘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그 주된 증상은 환각과 망상의 두 가지다.
환각과 망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과잉분비가 원인이라고 하는 학설이 주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도파민은 흥분성 호르몬인데 이것이 적당량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과잉 분비되면 환각과 망상과 같은 이상증상들이 생길 수 있다.

환각이란 환청, 환시, 환미, 환취, 환촉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의 하나라도 있으면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 중에 환청이 제일 많고 환시는 그 다음으로 많다.

망상에는 사고 장애와 감정 장애가 있다. 즉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는 것과 이상한 감정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망상과 환각을 모두 갖고 있으면 이를 정신분열증이라 한다. 이중에 한 가지만 있을 때는 분열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은 한방에서는 ‘기란’(氣亂)이라고 하는데 기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기는 항상 가볍게 팽팽 도는즉 순기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기가 거꾸로 도는 역기 현상이나, 기가 체하거나 막히는 기체, 기색, 기가 어지럽게 도는 기란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분
열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방에서는 기의 순환을 바르게 해주는 약재를 써서 치료한다. 우리 몸의 가슴 윗 부분은 항상 물이 있어서 시원해야 하고, 배꼽 아래쪽은 불이 있어서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이것이 반대로 돼 가슴 윗부분이 더우면서 열이 나고, 배꼽 아래쪽이 차가우면서 시리게 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증상이 생기게 된다.

가슴 위로 열이 차올라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정신이 분열되거나 우울에 빠지는 등등의 증상이 생기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므로 육체를 치료하므로 당연 치료될 수 있는 문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귀신들림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완전히 다르다.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요, 정신분열증은 육체의 문제이다. 정신은 육체의 한부분이요, 육체에 속하기 때문에 육체가 약해질 때에 정신이 약해진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물론 영과 정신을 완전히 구분할 순 없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귀신들림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약물에 대해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귀신들린 자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귀신들린 자를 약물로 치료했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나 부인은 귀신들린 자에게
는 꼭 있는 요소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그러지는 않는다.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또한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들린 자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면서 적대시 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결코 그렇지 않다.

괴력에 대한 문제도 확연하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괴력이 없다. 담을 뛰어넘거나 쇠사슬을 끊는 괴력이 없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은 그런 괴력이 있다. 그건 귀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건만 봐도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정신분열증상이 있으면 귀신들린 것으로 오 해하고 ‘기도해야 낫는다’면서 일체의
약물치료 거부와 함께 기도원으로 가게 만든다.

정신적인 질환도 육체 질환의 한 부분이며 분명히 약을 쓰면 치료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사회에서는 이런 병을 왜 이단시할까. 이건 중대한 문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다. 정
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마녀에게 사로잡혔다고 하면서 화형 시켰던 처절한 흑역사가 우리 종교사에 분명히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기나 배탈로 고생할 수 있고 수술을 받을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약해지고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찾아 가족치료나 환경 개선과 집단치료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를 할 생각보다, 사람을 도외시하며 매장시키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식한 처술이다.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구분할 줄 알자.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 무슨 병이든 영적인 유혹과 시험을 받고 사탄의 틈탈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지식 없는 사람들의 예사로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실족케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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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VS정신질환 구별 어떻게함? 

성경에 귀신들린자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별 기준들이 생긴다. 

(1) 예수 혐오

정신병자는 예수님을 그다지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예 관심이 없을때가 많다. 

반면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을 극도로 싫어한다.

(2) 논리적 대화 

귀신들린자는 논리가 탁월하며 지식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는 논리가 엉성하거나 비현실적이다. 

(3) 특별한 신체능력

귀신들린자는 종종 힘이 쎄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슈퍼파워는 없다. 

예) 막5:34-35

(4) 특별한 영적능력

귀신들린자는 점쟁이처럼 사람의 생각을 꽤둟어보거나, 과거 or 미래에 대한 정확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런 영적 능력은 없다. 

(5) 약물효과

정신병자는 특정 약 복용으로 증세의 호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귀신들린자는 그렇지 않다. 

(6) 탁월한 공격적 거짓말

귀신의 특징중 하나가 거짓말이다. 이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심정과 영혼을 파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거짓말로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주지 못한다. 

(7) 이중적 실존

정신병자는 자신의 인격과 몸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귀신들린자는 또 다른 영적 자아가 지배권을 휘두르며 그 몸을 이용해서 말한다. 이때 귀신들린자는 자기 몸 안의 귀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한다. 

(8) 치료 시간

귀신들린 자는 즉시 귀신들리거나,

귀신이 나가면 즉시 치료되거나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서서히 나빠지거나, 서서히 호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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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들림

귀신들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영향의 한 가지 측면은 자기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귀신은 인간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이든, 어떠한 행위이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로 그 곳을 지배하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림의 특징으로 특별한 신체적인 힘, 분노 폭발, 인격분열, 천리안이나 예지 같은 초자연적인 감각 능력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덧붙이면 옷을 벗고 돌아다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 기괴한 행위 등이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교역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보고한 사례 연구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 속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도덕적인 타락, 우울증, 분명한 백치 상태에 빠짐, 황홀경에 빠짐, 극단적인 공격성, 무의식에 빠짐, 입에 거품을 묾, 기도와 성경 읽기 등 광범위한 종교적 활동에 저항함, 배운 바 없는 언어를 이야기 함, 환상, 고통, 의기소침, 불결한 생각, 성적·감각적 ·적대적인 본능의 행동에 강박 관념을 갖거나 참여함, 정죄 하는 선언이나 살해,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라고 명하는 음성을 들음, 자살 강박 관념 등이다.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음 몇 가지의 두드러진 징후를 나타낸다.

첫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초능력을 종종 발휘하여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갈거나 광란을 부리거나 남을 저주하고 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절교를 하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한다.

둘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빈번히 경멸적인 웃음을 던진다.

셋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적 징후는 가끔 투시력이나 비상한 지식을 갖게 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인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정적 징후는 밖으로 표출되는 심한 내면의 갈등적 현상이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성격분열 혹은 성격 파탄이라고 표현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항시 좌정된 마음으로 일정한 목표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해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인데 귀신들린 자들은 늘 좌불 안상으로 두리번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하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정신의학자인 스코트 팩(Peck M. Scott)은 자기의 저서에서 귀신들림의 음성적 증상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귀신들림은 지속적이며 파괴적이고 남을 희생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둘째, 귀신들림은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여기고 공적인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존대 받고자 하는 집착이 매우 강하다.
셋째, 귀신들림은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때론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인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위풍이 남에게 폭로되어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곧잘 표현한다.
다섯째, 마귀, 귀신의 압박에는 신체적 질병을 유발 할 수 있는 추악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책의 임상적 증상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귀신들림 현상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2.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격어 왔음을 볼 수 있으며, 아직 까지도 확실한 개념을 정립되지 못한 실정이다.

현재 지배적인 견해는 뇌에 기질적인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 감정, 시각, 행동 등 인격의 여러 측면에서 특히 사고의 기능에서 와해가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병 상태라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유전적 요인, 환경의 영항을 중시하는 심리사회적 요인, 뇌에 이상과 관계된 접근을 하는 신경해부학적 요인, 종교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원인 규명을 위한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열증의 병태생리가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질환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정신분열증 증상은 사고, 언어, 감정 행동, 지각, 의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증상들은 환자마다 다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한 환자에서도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들은 망상, 환청, 사고의 장애, 정서적 둔마, 자아 경계의 상실, 자발성 장애, 외부세계와의 단절, 움직임의 감소이다.
정신분열증을 진단하는 기준에는 망상(delusion), 환각(hallucination), 와해된 언어(disorganized speech), 심하게 와해된 행동이나 긴장증적 행동, 음성증상을 중요시 하여 진단하는 DSM - IV가 있다.

이 기준에 의하여 진단되는 정신분열증의 아형은 편집형(망상형), 해체형, 긴장형, 감별불능형, 잔류형이다. 이러한 복잡 다양한 정신분열증을 환자의 증상을 기준으로 정신분열증의 아형을 나누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신분열증 증상의 특징들을 기준으로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기준이 제시되었다. 정신분열에 있어서 양성증상에는 환각, 환청, 환시, 망상, 말하기 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의지영역에서의 이상증상, 행동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있으며, 음성증상에는 감정둔마, 무언증, 무의욕, 무관심, 즐거움의 상실, 비사교적태도, 주의력 감소 등이 있다.

3.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비교

귀신의 영향과 정신장애는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양자의 증상이 광범위하게 중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주어진 사례에서 어떤 현상이 거기에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한 정신 정애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하지 않은 정신장애 사이에도 유사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증상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증상이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명확한 차이라고 한다면, 약물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는 정신분열증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귀신들림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치료에 있어서도 정신이상 현상에 대한 진단에 적절한 약물을 발견하기가 힘들며, 환자의 반응을 보면서 약물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듯 하면서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혼란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신경정신의학과 최영민 교수는 정신병과 구별하여 일반적인 귀신들림 현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는 지속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데 매우 교묘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순수하고 착한 성격을 보여주며, 남을 희생시키는 요령과 술수를 부리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둘째, 귀신들린 자는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존경받으려는 집착을 보인다.
정신병에서도 물론 자기에 대해서 과대망상을 가질 수 있으나 대인과의 관계에서 존대를 원하기보다는 자기 홀로 그런 환상에 빠지며,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스스로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셋째, 귀신들린 자는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면서 때로 정신질환의 증상을 보이지만 정신병의 경우는 만성적인 퇴행성이 오지 않는 한 이러한 지적 능력의 장애는 없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자신들의 허세가 남에게 폭로되고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보인다.
반면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망상이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해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보기에 더욱 위축 되어 보인다.

정신분열의 증상과 귀신들림의 증상은 명확히 판단해 볼 때, 구별은 된다고 보지만 정신의학자는 정신분열로 인한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정신분열로 판단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진다고 볼 수 있으며, 귀신들림에 중점을 두어 판단하는 목회자나 영을 분별하는 자들은 귀신들림으로 인한 증상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기에 증상 하나 하나를 놓고 서로 연구하면서 판단하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4.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에 대한 돌봄

a. 의학적 돌봄
정신분열증 치료를 위한 처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약물치료이다. 항정신병 약물은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현저하게 감소시켜 주고 재발을 효과적으로 막아준다. 항정신병 약물은 몸속에 침범한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와는 달리 환자의 뇌 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의 활성도의 이상이 생간 것을 정상생리로 회복시켜 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항정신병약을 먹는데 있어서 우려할 수 있는 것은 부작용의 문제이다. 주로 도파민 활성도를 차단하는 항정신병 약물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부작용이 있다. 졸리움,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날 때 어지러움, 입이 마름, 코가 막힘, 눈이 어릿어릿함, 안절부절 못함, 근육이 굳어서 팔·다리 움직이는 것이 느림,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음, 햇볕에 예민해 얼굴이 쉽게 탐, 변비, 식욕증가 등의 부작용이 있다.
b. 목회적 돌봄
목회자는 정신분열에 있어서 미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가 발생하거나 환자의 가족들이 고민이 되어 상담할 때 목회자는 정신분열증에 있어서 전문병원이나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을 알려 주도록 해야 한다. 또한 환자가 의사 처방을 무시한 채로 병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할 때 목회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재발을 막기 위해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약을 복용하도록 권하고, 환자의 가족에게도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고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격려하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 가족적 돌봄
정신분열증이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생기는 병도 아니요, 부모가 잘못 키우거나 특별한 가정환경 때문에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 것도 아니다. 정신분열증은 사람에게 생기는 다른 모든 병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병일뿐이다. 심장병에 심장에 생기고, 폐병이 폐에 생기듯이 정신분열증은 사람이 뇌에 생기는 병일뿐이다. 마음에 생기는 병이 아니다.
d. 인지-행동 치료적 돌봄
정신병의 인지-행동 치료자의 주된 목표는 정신병적 증상으로 인한 고통과 기능장애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환자들이 경험하는 사고, 신념, 그리고 이미지가 인지-행동 치료자가 다루는 핵심적인 재료가 된다.
정신병의 핵심증상과 경험은 인지장애에서 비롯되는데, 지각의 이상과 자기 경험의 이상(예를 들면 환각)을 가져오는, 정보-처리에 관련된 기본인지과정의 장애와 망상을 이끌어내는 의식적 사정(査定)과 판단의 장애라는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인지-행동 치료의 넓은 목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는 정신병적 증상이 야기한 고통과 장해를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둘째는 감정적 교란을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셋째는 재발의 위험과 사회적 장애 수준을 줄이는 데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 정신 재활(psychiatric rehabilitation)적 돌봄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하는 약물 이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약물 하나만으로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회복되기 어렵다. 정신장애의 고통을 겪었다는 경험이 남긴 자존심과 자신감의 손상, 그리고 잃어버린 기능력과 시간을 보충하는 문제는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영역이다. 재활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회복에는 치료와 재활이 함께 필요한 것이다.
정신재활은 오랫동안 정신과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기능력(functioning)을 개선하고, 그들이 선택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전문적인 개입(intervention)을 받으면서 성공적이고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내담자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특수한 기술들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담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능력 수준을 지원해 주거나 강화해 주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결어

목회현장에서도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대한 목회자의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 한다. 과거이 목회자들은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에 대한 뚜렷한 근거와 구별이 없이 대부분의 정신분열증을 귀신들림으로 판단하여 신앙치료만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또한 이러한 판단과 신앙적 치료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정신분열증을 보이는 환자에게 축사를 한다고 하여 오히려 내적 상처를 심화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는 목회자들이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아울러 영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의학적 치료 또한 그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의 원인을 마귀나 귀신들림과 같은 영적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이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는 생각은 현대 의학적 개념과 거리가 먼 반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치료의 방법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정신의학계의 이러한 입장은 영의 존재와 활동을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폐쇄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정신이상 증상은 전인치유의 맥락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환자는 단순히 신체적 치료만을 필요로 하는 질병의 사람만은 아니다.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까지 이해하고 치료영역을 넓혀야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정신병의 원인에 대하여 마귀나 귀신들림을 고려하지 않고 의학적 치료만 인정하는 입장과 모든 질병의 원인을 마귀 들림에 두고 축사의 방법을 통해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치료만 인정하는 입장을 절충하는 조화된 치료(전인적 치료)를 시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가 상호 존중해가면서 서로의 이해를 넓혀야 할 것이다. 곧,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은 그 증상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정신분열증 환자인지 귀신들린 것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전제로 정신의학적 치료와 영적인 치료 모두에 열린 의식이 필요하며 치료법에 있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21세기 앞서가는 목회자는 정신이상 현상에 대하여 영적치료 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적 심리치료를 고려하는 지평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에서 서로의 의견이나 치료에 있어서 서로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만남을 갖고 세미나나 포럼과 학술강연회를 통하여 상호이해의 길을 모색하고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해 치료의 방안에 대한 협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제공하기 위하여 본고는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이해의 지평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차이점과 유사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사나 목회자들에게 전인적 인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나타나는 양상은 너무도 비슷하여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진단할 뿐이지 확정된 결론은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단지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판단 근거라고 한다면, 귀신들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표시는 환자 이외의 새로운 인격이 표현되는 것이고, 정신분열증임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기준은 약물에 나타내는 반응여부에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영과 육의 전인적 접근이 요청된다. 정신이상현상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요인들이 서로 다양하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기 때문에 의학적 돌봄과 심리적 돌봄과 목회적 돌봄이 공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함께 나타나는 복합적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진단을 시도했다. 좀 드물지만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정말 그 환자의 정신이상 현상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를 원하는 제보자의 요청에 의하여 시도된 것이다. 제보자의 어머니의 정신이상현상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양상이 아주 복잡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두 가지 측면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분열적 측면과 귀신들림적 측면을 분석함을 통하여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서로 비교가 되고 그 차이점과 유사점을 규명하는 가운데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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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구분법




평소에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저로서는 김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부분을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한 그리스도인이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어떻게 분별하고 이해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사례로 명쾌하게 분석한 따뜻한 목소리"로 쓰여진 김진의 『정신분열증에 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운데 부분적으로 요약한 글입니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의 분별을 위한 시험적 분별점

1) 절대적 분별점  

(1) 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 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 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 막 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 행 16:16~19, 배가된 완력: 행 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소녀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정신 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 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지식을 말하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 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면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중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 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결국 동시적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상대적 분별점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띠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 일반인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 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진 경우를 정신과 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믄드믄하게 나타나, 어떤 때는 전혀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 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 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 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의 당부의 말씀 


제가 지금까지 주치의로서 직접담당한 환자의 수가 600명 이상이 되고 게다가 주치의로서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병동 또는 병원에서 알았던 환자들까지 합하면 수천 명을 훨씬 넘게 됩니다. 그렇게 알았던 환자 분들 중에서 앞서 언급한 분별점인 초능력의 행사나 영적인 특별한 능력을 보인 환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 기독 정신과 의사들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통계적으로 정신이사장들의 거의 대다수는 정신병에 의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많은 예들이 나오지만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확실한 사례는 거라사 걸인의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귀신이 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가 실지로 적어서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상자를 만났을 경우 우선 정신과적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역자와 상의하여 이러한 결정이 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또, 기독 정신과 의사들은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의 존재에 대해 늘 주의하여 살피는 의식을 키우고, 그러한 가운데 그러한 사례라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교역자에게 자문을 구하여 상의한 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귀신들림으로 판단이 된다면, 정신과 의사는 믿을 수 있는 교역자에게 의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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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병의 차이
빙의, 귀신들림, 귀신들림과 헤리성 정체성 장애의 구분


저는 정신과의사로써 개인적으로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믿습니다.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지요.. 묘하게 겹쳐져 있기도하고요..
귀신들림처럼 보이는사람이 나중에 정신병으로 판명되어 약을 먹고 좋아지기도 하고,
멀쩡해보이는사람이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신들림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정신병 환자들에게 퇴마사가 귀신을 좇을 때 더 악화됩니다.
정신질환 중에서 다중인격은 귀신들림처럼 다른 인격체가 표현되며,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분별점

(1)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kg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kg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kg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막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행 16:16-19,배가된 완력:행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추는 소녀 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정신 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전혀 배우지 않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 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컴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컴플렉스 에 의한 반응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귀신에 의한 적대적인 것을 구분하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인용한 것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다중인격장애를 다루면서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다중 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결국 동시적 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 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 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띄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 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일반인 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지는 경우를 정신과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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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문드문 나타나, 어떤 때는 아주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 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두 세 가지 더 소개할 수도 있지만 비전문인에게는 혼란을 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정신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익히신 분들에게만 소개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 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 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 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병이 심리적 신체적 유전적 기질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인식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귀신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정신병과 귀신들림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차별화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차박사는 정신병인 경우 약물치료 및 재활상담치료가 효과적이며 귀신들림의 경우 단계별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즉 대상자가 현실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없는 혼란상태에 있을 때는 항정신성 약물치료를 한다.그리고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정신상태로 회복된 후엔 영적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를 통해 치료자는 귀신들림에 대한 개인적 배경,가족배경,신앙상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정신질환과 영적질환이 혼합됐을 경우엔 정신치료와 영적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2∼3주동안 자극받지 않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항정신성 약물,항불안제의 투여로 정신병적 상태를 회복시킨뒤 정신치료 문제의 파악 및 해결로 현실 적응력을 강화시킨다는 것.


 

아래는 Deep Bang의 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Deep Bang 의 구분에 의하면, 귀신들림은 죄, 악, 신경증, 또는 정신병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림의 원인이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증상면에서 정신병이나 악과 많은 부분이 관련되어 있지만, 원인으로 분리해 볼 때는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귀신들림이 해리성정체감장애와 분명히 구분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귀신들림은 다른 인격이 밖에서부터 인간의 내면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두개 이상의 인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던 외부 인격이 인간의 내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귀신들림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정말 귀신들림이 가능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또는, “지식과 과학이 한참 뒤쳐져 있던 옛날에나 먹힐만한 얘기지, 최첨단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신(악한 영)에 대한 얘기를 꼭 옛날 동화 속의 얘기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치부해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오랜 경험 있는 정신과의사, 심리학자, 또는 상담사는 적어도 한두 번 정도는 귀신들린 환자를 만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맨 처음에는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다 해도 매우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정신병 환자와 같이 처방하고 치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만약, 유능한 의사였다면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점점 많은 정신과의사와 정신건강을 위한 학회들이 귀신들림이나 영적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신과의사는 영적 문제를 DSM-IV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 이러한 움직임들을 고려할 때, 귀신들림이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Deep Bang 에 의하면, 인간 안에 한 사건으로 인해서 텅빈 공간이 형성 되었으며, 그 빈 공간 안에는 원래 하나님의 영이 존재해 있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웅덩이를 메우기 위해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돈, 명예, 권력, 섹스, 성공, 등등 수많은 것들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영 외에는 그 어떠한 것(욕망)도 자아의 갈망을 근본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아는 욕구불만을 경험하게 되며, 더 구체적으로 자아는 두려움/죄책감/불안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정.의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신경증과 정신병을 앓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귀신들림을 이해해보자. 귀신들림은 자아의 텅빈 그 공간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또 다른 영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웅덩이는 본래 영적 존재를 위한 곳이었기 때문에, 악한 영(귀신) 역시도 침범할 수 있는 곳이다. 귀신이 인간의 영혼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서, 하나님의 영이나 자아를 대신해서 주인 행세 하는 것이 바로 귀신들림의 실체이다.

귀신들림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첫째는, 자아가 자신의 영혼 안으로 귀신이 들어오도록 의지적으로 허락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영혼을 판다. 또는 영혼을 거래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는 자아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는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파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복수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단순한 호기심에 영혼을 팔기도 한다.

이와같은 영혼 거래 행위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역의 문화와 배경에 따라서 각기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영혼 거래 행위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의식의 내용이나 방법은 다르겠지만, 비밀스런(때로는 그룹으로) 의식행위를 행함으로써, 자아가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판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는 행위나, 제단 위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나, 특정 문구를 반복해서 읽는 행위 등이 있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진다. 특수한 약물을 복용하거나 격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자아가 제기능을 할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이끌어간다. 다시말하면, 자아의 기능(특히 사고와 의지)을 최소로 약화시킴으로써 무아지경(無我地境)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한다. 그 이유는 자아의 기능이 약한 그때에 귀신이 자아의 중심에, 즉 그 텅빈 웅덩이에 쉽게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 판매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무당이다. 사람들은 정말 용한 또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무당을 이렇게 부른다. “신이 내린 무당이다.” 말 그대로, 귀신이 무당 안에 내려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귀신이 자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당은 인간 이상의 능력들을 보여주곤 한다.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맞추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무당이 점을 치거나 귀신을 불러내는 일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을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아가기 위해서 자신만의 의식을 행한다. 특별한 의식 행위를 통해서 자아의 기능이 약해지면, 무의식(하나님의 영이 빠져 나감으로 형성된 것이 무의식이라 했다. 그 무의식에 귀신이 숨어들어가게 된다.)에 숨어 있던 귀신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영혼거래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아 안에 두개의 인격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일정 수준에 있어서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아가 지.정.의에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은 채로, 귀신과 함께 공존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아가 의지적(의)으로 귀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영혼거래자는 자신 안에 귀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지) 있으며,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자아 안에 있는 귀신을 경험(정)했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지.정.의 전체를 통해서 귀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영혼거래자의 자아는 귀신(악한 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지.정.의에 큰 문제없이 꼭 평상인과 같이 기능하며 살아간다. 굳이 영혼거래자와 보통 인간의 차이점을 밝혀본다면, 보통 자아의 중심은 무의식 상태로 텅 비어 있지만, 영혼거래자의 자아 중심에는 귀신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귀신이 자아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것이다.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이 자아의 지.정.의를 파괴하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이때는 자아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아의 영혼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자아의 허락없이 악한 영적 인격체가 자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상황을. 자아가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악한 영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는 상황을. 그리고 자아 안에서 강력하게 몸부림치는 악한 영을 경험할 때 느끼는 감정과 사고의 혼란과 고통을 상상해 보라.

이와 같은 자아와 악한 영 사이의 싸움으로 인해서 상처받는 쪽은 언제나 자아이다. 자아가 싸움에서 이겨낸다 할지라도 지.정.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언제든 제 2차, 3차의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만약에 자아가 싸움에서 패배하고 귀신이 승리하게 된 경우에는, 자아가 완전히 망가지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지.정.의 뿐 아니라, 인격과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 경우에는 자아가 기능을 거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옷차림이나 외모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며, 심한 공격성을 갖기도 하고, 백치 수순의 생활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귀신의 침입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처한 자아에게 자주 발생한다. 자아의 지.정.의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거나, 기능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이다. 중요한 사람의 죽음이나 불행과 같은 갑작스런 사건을 경험한 자아는 순간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와 폭발로 인해서 사고와 의지의 기능을 순간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한번 조화가 깨어지게 되면, 그 후유증은 심각하다. 많은 경우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점차 회복되지만, 어떤 경우는 심한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을 앓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정신병을 갖게 되기도 한다.(앞의 인숙의 예처럼) 그리고 더러는 귀신들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정 폭발이나 불행한 사건이 귀신들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감정 폭발은 일종의 자아 표현에 불과하고, 불행한 사건은 아무리 크고 심각하다 할지라도 외부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정.의의 기능 약화 역시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귀신에게 침입을 허용할 만한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자아의 기능 약화가 약점으로 작용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원인은 되지 못한다. 귀신의 침입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이유는 자아의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사고)에 있다.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 자아가 이후에 악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질 때가 있다.

“나는 죽어 마땅해.” “나는 쓰레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복수하겠어.” “죽일 거야.” “나는 하나님을 저주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해.” 등등과 같은 수없이 많은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들로 자아가 가득해지게 되면, 동시에 자아 안에 악한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고, 악한 의지가 형성되게 된다. 이와 같이 자아가 부정적이고 악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귀신이 침입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귀신의 영향력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귀신은 사람을 헤치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영적 존재다’라고 생각하지만, 귀신의 영향력은 자아가 믿고 인정하는데 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귀신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아에게는, 귀신이 어떤 능력이나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귀신에게 바쳐진 자아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의 존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미성숙한 어린 자아의 주위에 머물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그 자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권위를 부모로부터 양도 받은 귀신이 어린 자아에게 쉽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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