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수비학(숫자의 의미와 상징)


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 (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 (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 (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디모데후서 3:16)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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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신비한 상징과 의미

1. 숫자에 대한 의미들


숫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성경의 숫자에는 하나님의 의도, 계획, 뜻이 함축되어 의도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서 말씀과 상징들에 여러 가지 의미들을 더하시며 항상 변함이 없으신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성품 중 변함이 없으신(말라기3:6)동일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으며 언제나 동일하신(히브리서4:12절)성품을 그대로 숫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숫자의 의미에 담고 계신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역사는 많은 변화를 거쳐 모든 것이 변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숫자들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원히 변함이 없이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숫자에 대한 개념은 대단히 정확하고 깊어 자녀에 대한 사랑과 하시는 일에 대한 표현을 숫자를 통해 표현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계수 하시고(시편147:4), 나의 걸음을 세시기도 하고(욥기14:16),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 신바 되고(마10:29-30), 율법의 일 점 일획도 변함이 없어야(마5:18)한다고 숫자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 외 성막의 건축과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교한 수치를 자세하게 지시하실 만큼 숫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계

신다. 

그럼 지금부터 숫자에 대한 성경적 의미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연구해 보자

1. 하나, 일치, 연합
사도행전 4:32,33
시편 133:1-3
고린도전서 1:10
에베소서 4:3-6

2. 나눔, 분리, 두 배의 기름부음, 상호보완 
창세기 10:25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히브리서 8:1-12
마가복음 6:41
사도행전 27:41

3. 부활(회복, 다시 살아남)
열왕기상 17:21
열왕기하 4:16-32
요한복음 6:40
요한복음 21:1-14
히브리서 11:17-19

4. 첫 번째 창조, 육의 것, 땅의 것, 피조물, 자연인, 육신에 속한 사람,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 -

하나님은 4를 염두에 두고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셨다.
예를 들어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하루 4번. 달의 변화는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로 구분. 공간을 측정하는 것 길이, 넓이, 깊이, 높이로 측정함. 만물의 4 원소 물, 불, 공기, 흙

5. 하나님의 은혜 
다윗이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쓰러트림
손가락, 발가락, 인간의 감성이 오감으로 느껴짐
수학적인 주장으로는 최초의 짝수 2와 최초의 홀수 3의 합이 5이다. (1은 홀수가 아니다.)
출애굽기 32:5 - 소, 나귀, 양때, 남종, 여종을 보내서
출애굽기 33:12-17 - 은총이 5회
룻기 2:1-10 - 1-9절까지 보아스가 5회 나온 후 10절에서 룻이 엎드려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사무엘상 16:13-22 - 다윗이 5회 나온 후 은총을 입어
고린도후서12:1-12 -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세 번 간구했을 때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헬라어로 다섯 단어로 표현함.(바울의 육체의 가시란? 질병이 아니라 유대인의 공격이 평생지속 된 것을 의미) 10절에서 다섯까지 통로를 통해서 은혜의 통로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음.
이사야 9:6 - 아들의 이름
기묘자
모사
전능의 하나님
영존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창세기 15:6-9 - 6절 믿음으로 구원
9절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출애굽기 27:1 - 아카시아 나무로 번제 단, 장이 오규빗, 광이 오규빗, 고는 삼규 빗
민수기 3:46-48 - 속전을 치룰 때 두 당 오세겔씩

6. 두가지의 상반된 의미 1. 안식과 완성을 의미, 끝 맺음,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한 갈망 2. 사단의 영향력, 사단, 사단의 역사, 중심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완전한 수"로 해석
1 은 모든 수의 출발, 최초의 짝수 2, 최초의 홀 수 3으로 해석하고 있다.

1더하기 2더하기 3더하기는 6이다.
1곱하기 2곱하기 3곱하기는 6이다.
물분자 구조가 육각형, 벌의 집 모양도 육각형이다. 자연적인 구조물은 6과 관련 된 것이 많다. "6"이 완전해 보이기는 하나 이것은 자연적인 시각이며 자연적인 구조에 대한 영향력이다.

마태복음 4:1-13 - 마귀, 사단, 시험하는 자 명칭이 6회
욥기 1:9 - 욥 이라는 이름이 6번째 언급될 때 사단이 공격
요한복음 8:44 - 여섯째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32:6 - 우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민수기 11:5 -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6가지 불평
에스더 3:6 - 하만의 이름이 1절부터 6번나올 때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고자 하심
다니엘 3:1-5 - 금 신상의 넓이가 6 규빗
5절 - 사단에게 경배하기 위한 악기 6가지
다니엘 5:4 - 우상을 만들 때 사용한 재질 6가지
금, 은, 동, 철, 물, 석
누가복음 17:28 -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고린도전서 5:1-5 - 음행한 자는 사단에게 내어준다.
11절 - 6종류의 음행의 죄를 기록함
베드로전서 4:3 - 너희 죄의 항목 6가지
계시록 9:13-20 -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태초에 창조가 6일째 끝났다.

지성소의 육면체로 만들어 짐

7. 완성, 완전한 끝맺음, 온전, 완전 

헬렌 바흐라는 사람은 "모든 순환하는 물체에는 7이라는 수와 관계가 있다."라고 했다.
음계 - 도에서 시까지 7음계로 구성
무지개 -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으로 구성(하나님의 약속을 의미)
요일 -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7일로 구성 됨
인생의 7년주기 변화를 이야기 함
7세 - 젖니 빠짐
14세 - 성장의 단계(여아는 잉태가 가능한 나이)
21세 - 남자에게는 수염
28세 - 인생의 절정기
35세 - 결혼 할 나이
42세 - 분별력이 온전케 됨
49세 - 이성에 의해서 영혼이 고귀해 지는 시기
56세 - 분별력과 이성이 완성
63세 - 열정을 극복하고 이성과 공정성이 온전케 됨
70세 - 삶의 정점에 이르러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 함
고린도후서 12:9 - 내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에서 "온전"은 헬라어 7단어로 쓰임
계시록 10:7 - 일곱째 천사가 이루리라
계시록 16:17 - 일곱째가 "되었다" 는 "개곤낸"이란 히브리어로 7단어로 기록하심
계시록 15:6-7 - 일곱 재앙을 일곱 천사가 
일곱 금 대접과 일곱 천사(7×7〓49 "하나님의 진노")
창세기 7:10 -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 창세기에서 땅 이라는 단어가 49번째 나올 때 홍수고 심판하심

열왕기하 8:1-3 - 칠 년 동안의 완벽한 기근 
칠 년 우기
칠 년을 다하매 
여호수아 6:3-5 - 성을 6일 동안 돌고
일곱 나팔 제사장
마지막 날에는(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나팔을 불면 성이 무너지리라 
열왕기하 5:1-7 - 일곱 번 씻 으라
열왕기하 4:35 - 일곱 번 재채기하고 깨어나다 
계시록 16:1 -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 으라
창세기 4:15 -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24 - 가인은 칠 배의 벌이
라맥은 벌이 칠 십 칠 배
창세기 41:1-7 - 칠 년 주기의 꿈
마태복음 18:21-22 -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잠언 9:1 - 지혜가 일곱 기둥으로 집을 세운다.
스가랴 4:2 - 일곱 등잔, 일곱 관이 있고
시편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鍛鍊)한 은 같도다

8. 새로운 탄생, 새 창조, 거듭남

요한복음 3:3-8 - 거듭났다는 단어가 8번나옴
골로새서 3:9-11 - 8종류의 새사람
베드로후서 1:4-7 - 신의 성품 8가지
베드로전서 3:20 - 새로운 인류의 시작 8명
사무엘상 17:12-14 -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형제 중 8번째다.
창세기 20:4 - 이삭이 8일만에 할례

9. 성령의 열매, 거듭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새로운 탄생이 있은 다음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갈라디아서 5:22-23 - 성령의 열매 9가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FAITH)


10. 법, 율법, 가르침을 의미
출애굽기 20:3-17 - 십계명
창세기 16:3 - 가나안에 10년째 거주
출애굽기 26:1-3 - 다섯 폭의 앙장과 다섯 폭의 앙장을 하나로 합하는 것
출애굽기 12:3 - 그 달 10일에 취하라 
사무엘상 25:38 - 한 열흘 후에
다니엘 1:12-15 - 열흘의 기한이 지난 후에 올 결과 
에스겔 24:1 -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11. 심판을 의미

출애굽기 14:2 - 애굽의 11가지 재앙
히브리서 11:20 - "빠져 죽었으며" 헬라어 11단어
창세기 5:32 - 아담의 11대손인 셈, 함, 야벳세대의 홍수심판
오바댜 1:8-11 -에서자손의 멸망을 예언
창세기 36:40-43 - 에서 에게서 나온 족장의 11족장
민수기 13:25-33 - 열하룻길 가데스 바네아 (심판의 장소)

신명기 1:2 -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이사야 3:1-3 - 심판할 사람 11명을 열거
예레미야 52:1-9 - 야곱의 11번째 자식이 딸 "디나"-심판의 의미가있다.

12.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위의 의미
다니엘 4:29 - 느부갓네살이 12달이 지난 후
마태복음 19:28 - 열두 보좌
마태복음 15:35-38 -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명을 먹이고 7광주리남음, 12광주리 남음.
요한복음 11:9 - 낮이 12시간
욥기 38:31-33 - 열두 궁성 (북두칠성과 그 속한 별들)
민수기 33:9 - 12샘물
열왕기상 7:25 - 12마리의 소
창세기 12:7 - 아브라함이 12번째 나타날 때
에스겔 41:1 - 성소의 넓이가 12규빗
계시록 22:2 - 12가지 실과를 맺히되, 그 잎사귀 - 만국을 소성 하기 위하여 있더라

13. 죄, 반역, 타락, 반항, 대적의 의미
미국에서는 13이라는 숫자의 의미 때문에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손해를 보고 있다.
마가복음 7:20-22 - 13가지의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창세기 14:4 - 십 삼년 - 배반
창세기 10:8 - 니므롯 - 바벨탑을 건조한 자 - 아담이후 함의의 13대손(창10:10-)
에스더 3:12-13 - 정월13일에 조서를 내렸고 13일에 모두 죽임.

계시록 20:2 - 용이란 단어가 13번째 나올 때 결박
창세기 17:25, 골로새서 2:11 - 이스마엘이 13살에 할례를 받았고 이삭은 8살에 할례를 받음

14. 구원, 해방, 석방, 육체읙 구원
출애굽기 12:25-27 - 그 달 정월 14일에
요한1서 3:14 - 헬라어 14단어로 기록
사도행전 11:14 - 헬라어 14단어로 기록

15. 안식의 의미
레위기 23:6 - 이달 15일은 무교절이니
에스더 9:18 - 15일에 쉬며
레위기 23: 34-35 -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
민수기 29:12 -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출애굽기 16:1 -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에스겔 32:17 - 제 십이년 어느 달 십오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창세기 7:20 -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열왕기하 20:6 -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
이사야 38:5 -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16. 사랑, 주를 향한 사랑, 주님이나를 향한 사랑, 일반적인 사랑
고린도전서 13:4-8 - 사랑의 특성 16가지
고린도전서 14:1 - "사랑을 따라 구하라" 헬라어 16단어로 기록


17. 승리(죽음을 이기신 승리)를 의미 
로마서 8:35-39 -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 17가지
사무엘상 17:45 - 물매돌 5개와 하나님의 능력(12)로 승리함
요한일서 5:5 - 헬라어 17단어로 기록
창세기 8:4 - 칠월 곧 그 달 십칠 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창세기 47:28 -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하였으니
예레미야 32:9 -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8. 구속, 매임의 의미
누가복음 13:16 - 사단에게 18년동안 매인바 된 여인
누가복음 13:4 - 치어죽은 18사람
사사기 3:14 -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
사사기 10:8 -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예레미야 52:29 - 느부갓네살의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삼십이인이요
누가복음 13:11 -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19. 믿음 - 1부터 19까지 더하면 합이 190이다.-
히브리서 11:11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나이 100세 사라는 90세
로마서 10:10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19글자로 기록
고린도전서 15:11 -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9글자로 기록

20. 구속, 값을 치룸의 의미
출애굽기 30:12-14 - 이스라엘은 20세에 속전을 치룸
창세기 18:31 -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창세기 37:28 -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레위기 27:5 -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민수기 10:11 - 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매
민수기 32:11 -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사사기 4:3 -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사무엘상 7:2 -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열왕기상 9:10 -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열왕기상 9:14 - 히람이 금 일백 이십 달란트를 
열왕기상 9:28 - 금 사백 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
열왕기상 10:10 - 금 일백 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 역대하 4:1 -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

21. 죄가 관영함의 의미
로마서 1:28-32 - 악한 것이 21가지이다.
예레미야 52:1 -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다니엘 10:13 - 그런데 바사 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22. 빛, 나타냄, 들어냄의 의미
출애굽기 25:31-34 - 등잔 22개(성소에 있는 등대)

23. 죽음, 사망의 의미
로마서 1:28-32 - 이 일을 행하는 자. 영어성경에서는 23가지 죄를 말함
고린도전서 15:56 - 10+13=23
로마서 7:9 - 10+13=23
누가복음 23:43-46 -예수님은 14일(유월절) 제 구시에 죽으심
계시록 18:8 - 11+12=23
요한일서 5:16 - 11+12=23
예레미야 25:3 -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24. 제사장직을 의미
역대상 24:1-9 - 24명의 족장이 제사장직 감당
계시록 4:4 - 24보좌, 24장로

25. 죄용서를 의미
에스겔 40:1 -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오 년이요 
누가복음 24:13 -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촌으로 가면서


26. 복음을 의미
27. 복음 전파, 예언을 의미

28. 영생을 의미
29. 출발을 의미, 믿음의 성취로써의 기대

30. 피값, 예수 그리스도의 피,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미 
창세기 18:30 -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창 41:46 -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출애굽기 12:40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민수기 20:29 -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의 죽은 것 을 보고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였더라
신명기 34:8 -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마태복음 27:3 -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31. 후손, 씨,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 함
32. 언약
33. 약속
34. 인내
35. 소망
36. 적
37. 높임
38. 의
39. 진리


40. 시험, 환난(사단의 영향력에 의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 녀와 백성에게 내려지는 보응)
신명기 8:2-5 -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심

사사기 13:1 - 블레셋 하에서의 40년 생활
사도행전 7:23 - 애굽에서의 모세의 삶

41. 속임수, 사기
42. 재림


42는 6?7과 7?6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6?7은 6을 7번 곱하는 의미에서 6의 의미가 앞서 나온다.
6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사단의 수를 의미한다.
7은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교만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대로 7곱하기 6은 하나님의 완전수가 육체적인 제한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이런 경우 상반된 두 가지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꿈 해석에 적용하는데 난감한 부분이 있지만 오히려 꿈의 상황과 느낌 꿈의 전개되는 내용을 정확히 분석하면 오히려 더욱 분명한 해석으로 가져가기가 수월해 진다.
상반된 의미는 오히려 더욱 해석의 질과 깊이를 더해주는 경우가 많다.

46. 불못 사망
49. 하나님의 진노
50. 영, 성령, 희년, 기쁨 혹은 구원
51. 하나님의 계시
65. 배교
70(72). 영과 권세가 크게 강조된 온전한 영의 세계의 질서, 열방을 의미

눅10:17-19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심(70 혹은 72명)

히브리어로 70이나 72는 열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누가복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점령하셨다는 의미로도 말함

72. 예수님 당시 그리스어 역본에는 창12에 기록된 열방의 수가 72로 기록됨(70과 72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봄)
91. 내어 쫓다

100. 백배의 축복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105. 주님의 이름을 부름 
120.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뜻을 이루시기 까지 기다려야하는 기간을 의미한다.
수련기간이다.


153. 베드로의 물고기와 예수님의 명령, 사람과 직접 관련된 영혼 구원을 의미함

물고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1:11 물고기를 잡지 못해 낙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그물을 끌어 올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


200. -이 채워져야 함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것


300. 승리 - 기드온의 삼백용사 -

360 - 남아있는 징벌의 기간
390.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기간- 390년, 죄악의 년 수


400.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기다리는 기간

출애굽을 시작한 기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남의 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다.

430 - 유다집의 죄악의 년 수
536 - 포로에서 풀려남, 귀환

606 - 포로로 끌려 감

666. 적그리스도의 이름






독생자(요 1:14. 3:16. 18. 4:9. 히 11:17)


독생자(요 1:14. 3:16. 18. 4:9. 히 11:17)

요한복음 1:14 / 우리말성경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독생자(3439) 모노게네스(mŏnŏgĕnēs)  μονογ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3439

1. 오직.  2. 독생하신
발음 [ mŏnŏgĕnēs ]
어원  / 3441과 1096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 2.
    독생하신, 요1:14, 18, 3:16, 요일4: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독생한(요1:18). [명] 외아들(눅9:38, 히11:17), 독생자(요1:14, 요일4:9).
3441.

μό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3441
1.

오직

2.

홀로 있는

3.

버려진

발음 [ mŏnŏs ]
어원
33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1096.

γίνομαι 스트롱번호1096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21:19

발음 [ ginŏmai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거듭남



거듭남

땅의 일과 하늘 일(요한복음 3:9~15)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 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 본 것, 경험한 것, 확실한 것, 아주 뚜렷한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도 상대방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 단절된 관계가 우리를 매우 가슴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단절의 시대" 라고 합니다(미국의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존재를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확인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웅겔스마(Ungelsma)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흔히들 군중 속의 고독을 운위하면서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말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다 쓸쓸해서 하는 말이요, 역설적인 넋두리입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경험한 것,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이 증거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지나온 시대를 통틀어 아마도 지금이 가장 대화가 안 통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의사소통에 대하여, 심리학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연구하고 배우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가 가장 communication이 안 되는 시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단절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단절의 시대」|미국 경영학자「드러커」

최근 구미의 사회과학계는 어느때없이 「용어의 풍년」을 맞고있다.
이들은 그 신선도나 기발한면에서 매력적이기까지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저술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다.
미래는 그만큼 미지의 세계이며 그것을 이해하는길은 새로운 용어밖엔 없을것이다.
미국의 경영학자「피터·F·드러커」는 최근 『단절의 시대』(The Age of Dis continuity)라는 저서를 내놓아 또다시 관심과 매력을 자아내고 있다.
「과거」「현재」「미래」를 그는「단절」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있다.

「드러커」는 과거에 있었던 몇가지 사례를 장래에 투영하여 예측하는 입장을 극복했다.
인류의 역사란 「단절」하는 「프로세스」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를 빌리면 우리는 오늘날 단절의 시대에 태어났으며 바로 그 단절때문에 고민한다.

<「연속성」의 무시>
그렇다면 「단절」이란 무엇인가. 「단절」이란 연속적인 과거의 세력을 토대로하여 그위에 서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속을 건너뛴다는 커다란 비약을 뜻한다. 현대는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온 과거의 축적위에 세워질수없기 때문에 이것을 비연속=단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드러커」자신은 「비연속」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미 있었던 사실과의 여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실과의 도전, 쌍방에 의해 짜여진 가까운장래의 자태-.』

<기업혁신에 업적>
확실히 과거를 이해하는 종래의 자세들은 겸허하지 못했다. 이른바 「세대간의 갭」이라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붙어다니는 것이지만 그것처럼 싱거운말은 없게 되었다.
과거를 정확히 인식하는 태도에서부터 오류를 밟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드러커」는 영지의 학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의 경영 「콘설턴트」이면서 「뉴요크」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며, 저자「단절의 시대」로 경영및 기업조직에 큰 업적을 쌓은 셈이다.
세계의 실업계에선 이미 그의 행동을 통해 저명하게 되었지만 학계나 지식인사회에선 그다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과학이 지엽말단적인 「테마」에 정신을 팔고있는 상황에선 그의 위치는 마땅히 그렇게 간과될 수밖에 없는것도 같다.

<4개분야로 세분>
「단절의 시대」는 현재의 사회와 우리의 생활을 협공해오는 단절성에 대해 4개의 주요 분야로 나누어 고찰했다.
ⓛ기술 ②경제 ③사회 및 정치조직 ④지식의 역할.
이 지식의 역할서는 지식을 오늘날의 경제를 이룩하는 자본이며 비용이며 주요한 자원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지식은 제1차산업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새지식 공급돼야>

<경제>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가 지금까지의 생산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네오·케인즈언」의 낡은 지식을 믿고 여기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품지않는 정부는 언젠가는 불쾌한 사태를 당할것이다.

<사회및 정치조직>「드러커」는 「사적체제의 복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실천을 정부이외의 조직에 맡겨 행하도록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교육기간 장기화>

<지식사회>평균수명의 연장은 노동수명을 그이상 증가시키며 따라서 지식노동자를 출현시킨다. 동시에 이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얻어진 햇수의 대부분을 학교교육에 사용하려는 대중일반의 경향에 기인한다. 「드러커」는 『교육기간의 장기화때문에 노동력이 되는 연령이 늦어져 현재 선진국의 노동수명은 1세기전의 2배, 제1차대전무렵 보다는 5할이나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개인의 잠재적 수입은 2배이상이 되었고 이것은 『경제사상 부와 복지의 최대발전』이다.
그러나 「지식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육체노동자와는 달리 「지식노동자」는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만 만족할수 없게 되었다.
지식노동자는 중년이 되면 벌써 직업에 권태를 느끼고 의욕을 잃는다.
「드러커」는 재출발을 하는것만이 그 자신에 있어서나 조직체에 있어서 새로운 동기를 주는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것에 적응하는 「교육」이다. 「드러커」는 여기에 예리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현재의 고교나 대학은 과거 1세기이래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드러커」의 논리는 매우 정밀하고 풍성하며 합리적인 예증을 구사하고 있는것에 바로 매력이 있다.
그는 이 저서의 서문에서 자신의 주장들을 「게릴라」지역의 「손수레」 에 비유한다.
대화물열차의 선두에서 재빨리 지뢰를 탐지해서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아이러니」이다.


'단절의 시대'는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위대한 책이다.
지식사회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그는 지식사회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1969년에 출간된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미래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너무도 정확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경영의 바이블이기도 하다.
 
단절의 시대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피터 드러커는 지식사회를 예언하면서 지금의 지식 노동자들을 위해 중요한 조언을 남기고 있다.
'단절의 시대'에서 우리들이 실제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 조언.

'지식 근로자는 어떤 것을 성취하려면 그것을 최고로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럭저럭 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지식 근로자는 자신의 생산성을 스스로 높여야 하는 일종의 경영자이다.
자신의 마음과 머리, 손끝에서 모든 작업이 완성되는 것이 지식 노동자의 노동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대충 해서는 안되며 남보다 무언가 하나는 탁월하게 잘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최고로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두 번째 조언.

지식 작업에 대한 동기부여는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임금이나 근로의 조건들이 중요한 동기부여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식 근로자에게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식 근로자의 작업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의 결과는 그의 것이다. 결과는 그의 평판이 되고 그의 경쟁력이 되며 그의 브랜드가 된다.
스스로 성취 욕구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하고 강한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도전 정신이 없다면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의 질문이 가능해 진다.
"나는 도전하며 살고 있는가?"


세 번째 조언.

평생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조언이다.
그것은 '지식 탐구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현대사회는 지식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어떤 것을 배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기망양이ㅡ 시대가 온 것이다. 이것은 기업의 경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배울 것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당황하게 될 것이고, 결국 제대로 된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낯선 질문에 답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단절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지 예전에 비해 그 주기가 점점 짧아졌을 뿐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감지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주 당황하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노출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피터 드러커가 큰 시대의 물줄기를 통해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보았듯이 우리도 이 시대를 보는 큰 눈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들을 가지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과 자신에게 현명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이다.


첫째, 언어의 단절

말이 안 통합니다. 용어가 틀립니다. 계층간에 다르고, 연령 간에 다르고, 직업간에 다릅니다. 정말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의 젊은이들이 쓰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정말 모르겠습디다. 얼마 전에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대빵 좋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도대체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대빵'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철판'이라는 뜻이거든요. '대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시는 분이 있기에 제가 스스로 설명을 만들었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하지요. 그것을 '대빵'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어찌 달라져서 '대빵 좋다'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간신히 엮어 설명을 합니다마는, 도대체 이것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Nobody knows.-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어이기는 합니다.

쓰는 대로 통하면 좋은 언어요, 통하지 않으면 죽은 언어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통하지 않는 데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빵 좋다' 할 때에도 '아, 아주 좋다는 말이구나'라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할 바 없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했으면 족한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의 문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과 말하다가 '야, 그거 무슨 말이니?'하고 물어보십시오. 대번에 '알 필요 없어요' 할 것입니다. 멋모르고 물어보았다가 무안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대가 틀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제입니다.

둘째, 학문의 단절

전부가 각기 협소한 의미에서 전문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하는 말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법과를, 어떤 사람은 의과를, 어떤 사람은 문과를 전공합니다. 그리고 의사끼리도 내과와 외과가 서로 틀립니다. 자기 분야만 열심히 연구해서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는 의사가 세상에서 제일 무식합니다. 자기의 전공분야만 연구하느라고 다른 것은 들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대화가 안됩니다.

간혹 보면 남편과 대화가 안 통한다느니, 남편이 집에 오면 말이 없다느니 하며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부터도 집에 가서는 말을 잘 안 합니다. 밖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하다보니 집에서는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듣는 것도 짐스러우니까요. 그리고 실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휴식인 것입니다. 여기다 대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더는 입력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문성, 전문적인 위치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오히려 협소해지고, 나아가 대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야기가 안됩니다.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그저 수지가 맞느니 안맞느니 증권이 어떻다느니 하는데, 공부하는 사람은 딴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학문의 전문화가 언어의 단절을 가져오게 했다는 말입니다.

용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콘덴서(condens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상당히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 '콘덴서'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먼저, '콘덴서'는 전자부품의 하나를 일컬을 때에 쓰입니다. '저항 콘덴서'라고 하여 쓰입니다. 또한 렌즈의 종류 가운데 하나가 '콘덴서'입니다. '콘덴서'는 특수한 렌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화학분야에서는 거르는 기계를 '콘덴서'라고 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콘덴서인데도 쓰임에 따라서 그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사용하는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은 '콘덴서'라고 하면 당연히 렌즈만을 떠올립니다마는, 이 콘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그 개념은 저마다 다릅니다. 모든 말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 나름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 역시 그 나름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쓰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아듣기 힘드니까 안하고, 말하기 힘드니까 안 하기에 대화가 단절 되어 가는 것입니다.

셋째, 도덕의 단절

이것은 가치관의 단절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데올로기의 대립하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각합니다. 극렬한 대결하에서 보면 이쪽에서는 간첩이 저쪽에서는 애국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는 애국자가 우리 나라에 와서는 간첩이요,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자가 북한에 가서는 간첩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틀립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도덕적으로 보더라도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옳은 것인데 저 사람에게는 틀린 것이요, 이 사람에게는 선한 일인데 저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그만큼 복잡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빌 1:10)'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절대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상대화해버렸기에 그 기준이 없어졌습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도덕성이 상실되고 맙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언어를 이토록 혼잡하게 하고 대화가 없는, 말이 안통하는 시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가장 슬픈 일은 언어소통의 상실에 있습니다. 언어가 언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다르기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현지 토착민의 말을 잘하는, 언어 재주가 있는 선교사가 선교활동에 성공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통계를 내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토착민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선교사치고 선교활동에 성공한 예는 극히 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만 잘한다고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가하면 토착민의 말을 못해서 현지에서 40년을 살면서도 설교 한번을 못한 선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토착민의 언어로 설교는 못해봤을지언정 행동으로 많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도 보면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문까지 배워서 논어 맹자도 압니다. 우리보다 더 잘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언제나 별 할일도 없이 나가나 들어오나 환영을 못 받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 와서 30년, 40년을 일하면서도 한국말로 제대로 설교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선교사가 오히려 활동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특히나 교역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인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가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언어의 단절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만 열려 있으면 대화는 절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안 해도 됩니다. 얼굴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눈만 마주침으로 아무 말 없이도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히고 나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밤새껏 말을 해도 타인이요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싸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들을 생각은 않고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남 말하는 도중에 끼어 들어 가만있으라고, 나 말 좀 하자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과하겠다 하고는 싸웁니다. '미안합니다'라는 사과 한마디로 끝났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그치지를 못하고 한마디 더하다가 싸웁니다. 사과해가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것은 용어의 문제가 아니요 전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의 문제입니다. 가슴이 닫혔기 때문에 언어가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것입니다. 말의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안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어머니를 보십시오.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지 통하지도 않는 말을 주고받습니다 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는 잘도 통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가면서 듣는데도 곧잘 통합니다. 서로가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잘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심의 문제입니다. 공통의 관심거리를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별도로 가진 채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공통의 관심을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같아야 합니다. 경험이 다르면 안됩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니 젊은 사람들의 결혼연령 차이가 옛날보다 좀 작아진 것 같습니다. 동갑이나 몇 살 차이 안 나는 사람들끼리 많이 합니다. 언어가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나이 차이가 7년 이상이면 대화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지 대화적으로는 영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여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우리 남편은 바가지를 긁어도 잘 참아줘요"라고 자랑합니다마는, 그것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봐주는 것입니다. 말 같지 않으니까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싸운 적이 없노라 으스댑니다만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대화가 없으니까 안 싸우는 것입니다. 상대가 안 되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어린아이하고 할아버지가 싸우겠습니까? 이렇듯 대화는 같은 경험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말을 조금 합니다.

그런가하면 공산치하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유학하느라 영어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파란만장하게 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래서인지 6․25를 겪지 않은 사람들, 일제하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는 '아, 이거 이야기해도 모를 텐데 내가 괜히 이러는구나' 싶어집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 그 때 그 시절 많이 굶었노라 하면 "굶기는 왜 굶습니까?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면 되지" 합니다. 그 어려운 시절, 쌀이 없어서 밥을 숱하게 걸렀노라 하면 "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요. 참 이상하시네요" 합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굶는다'는 것의 뜻이나 제대로 알겠습니까? 며칠이나 설명해야 알 것 같습니까? 이렇듯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소원이 다릅니다. 욕망과 소원이 다르면 의사소통이 안됩니다. 꿈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이상이 다르면 대화가 안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요 소원인 사람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과의 사이에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다. 수억씩 없애면서 뭣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전혀 이상이 다르니까요. 소원이 다르니까요. 이렇게 idea가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주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면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가슴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이야기를 위의 시각에서 보십시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 중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게네세나이 아노센'-'위로부터 다시 나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지금 어리석게도 '나는 늙었는데, 그래도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리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답니까? 이 사람 디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떨었나, 왜 '늙으면'이라는 말이 여기서 튀어나옵니까? 어린아이는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말은 자기 경험에 집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니고데모 자신이 늙었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다보니 '늙으면' 하고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모태에는 늙으나젊으나 다시 못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번 나왔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대화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상대가 되겠습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 역시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리 없지요.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니고데모가 묻고 있지 않습니까? 거듭나는 일이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신비로운 생활과 신비로운 체험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망신을 주신 것 같습니다. 무안을 주신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10절)" --- 이스라엘의 랍비가 되어서 이 정도도 모르느냐,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고 묻고 계심입니다. 그 자신 늙었다고 생각하는 니고데모가 30세밖에 안되신 예수님께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배웠느냐고 무안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온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해도 '중생'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생의 문제를 모르고, 생명의 문제를 모르고야 어떻게 무엇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오늘의 잠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여기서 땅의 일이란 세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요, 인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늘'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단순히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께 대한 별칭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부르기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여 십계명 가운데 제3계명으로 엄히 정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잘못 불렀다가는 하나님께로서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경계의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지를 못한 것입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다른 호칭을 쓰려 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하늘 일은 하나님께 관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잠언말씀에 담긴 뜻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욕망의 초점이 땅에 있기 때문에 설사 하늘의 일을 생각해도 땅의 시각에서. 땅의 중심에서 이해하려든다는 말입니다. 관심과 이상과 지식과 경험이 전부 땅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 보면 이 말씀을 내가 구원받고, 내가 성장하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서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더군요. 그리고 때때로 보면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받아 적는 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에게 "무엇을 쓰셨습니까? 왜 쓰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저를 실망시키기 일쑤입니다. "회사에서 직원회의 할 때에 훈시하려고요." 교회 다니기 전에는 훈시할 때마다 할말이 없어서 '에, 에……' 하다 말았는데 교회에 다니고 부터는 말씀을 적어놨다가 하니 할말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것도 전도로 생각한다면. 전도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괜찮겠습니다 마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교회에 나와서는 부부일지라도 같이 앉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같이 안으면 서로 말씀 듣는 것을 미루게 됩니다. 자신이 들으려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잘 들어둬'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합니다.

하늘로 향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직선적으로 통하는 열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땅 중심으로 땅의 세계관에서만 생각하고, 땅의 언어로 땅의 소원으로만 바라보기에 무엇을 듣든지 전부 땅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합디다. "목사님은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것 같아요. 설교 들으면서 가만히 보니 저런 머리로 돈을 벌었으면 잘 벌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하더군요. "글쎄요" 하고 말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일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땅의 일을 통하여 하늘 일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하늘의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땅의 이치를 가지고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이것이 상징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과 관심이 하늘에 있어야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는데, 생각이 땅에만 있고보니 하늘 일을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땅의 이야기로 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이와 똑같이 답답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긷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그녀 역시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물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그 여인이 다시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라고 말합니다. 저 같으면 가만 안 뒀을 것 같습니다. 호되게 한 마디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으셔서 솟아나는 생수를 보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실물교육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물에서 긷는 이 물은 마신 뒤에는 다시 목마르겠으나, 내가 주는 물은 영혼 속에 들어가서 영원히 솟아나는 물이기에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귀하디 귀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은 대낮에 물길으러 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인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특별히 많이 있습니다.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한 생각들입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인즉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리스도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무엇인지, 그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면 안됩니다. 주제를 바로 알아야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할 때에 보면 학생들이 잘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패에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험을 치게 해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학생은 얼마나 확실하게 알아들었는지 제가 의도했던 바를 시험지에 완벽하게 써놓았습니다. 그럴 때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생은 쓰기는 열심히 썼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게 썼습니다. 그 사람은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말하려고 하는 근본의도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맥락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 모든 선교, 모든 교훈, 모든 이적, 모든 사역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하니까 세상으로, 혹은 대한민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세상적인 나라로 받아들이고는 이것은 전쟁 없는 사회, 평등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을 놓고도, 그 이적이 현재에 있다면 경제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을 텐데 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을 기억하시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 10)."

여러분, 핍박이 무엇입니까?
재산을 뺏기는 것이요,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생명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이것을 하늘나라 말이 아닌 무슨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순교자가 되면 기념비를 세워주겠다' 하겠습니까? '순교자의 후손은 오래오래 잘산다'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을 두지 않고는 한마디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빛을 말씀하시든지 씨뿌리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하늘나라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조용하게 하신 이야기를 접해도 하늘나라로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보아도 하늘나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땅의 일을 보면서 하늘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꽃을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를 하나 들어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 거칠어진 바다를 보며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보시고, 들으시고, 경험하신 바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증거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 어디를 읽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기도하든지 말씀이 통합니다. 언제 설교를 듣든지 그 신령한 말씀이 내 귀에 확연히 와 닿습니다. 마음에 와서 부딪칩니다. 이렇듯 말씀이 통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마음이 닫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의 잠언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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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1939- )

인물소개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는 미대륙을 포함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워크숍, 포럼, 강연회를 열고 있으며 '교사의 교사'로 불린다. 미고등교육학회 임원과 페처연구소의 수석 고문을 맡고 있으며 미공립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사양성 프로그램을 창설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전미 1만여 명의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요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경력

  • 미공립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사양성 프로그램 창설
  • 1997 전미 1만여 명의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요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의 한 명으로 선정


지식을 얻는 세 가지 과정(단계)

1. 능동적 지식 :

내가 주체가 되고 다른 대상은 객체가 되어 아는 것
(예) 책을 읽는다, 자료를 모은다,

2. 수동적 지식 :

나는 객체가 되고 상대가 주체가 되는 것
(예) 내가 생각하는 나 -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
(예) 나는 쓸모가 없다 -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체험적 지식 :

참여와 헌신에 의한 것
(예) 십자가 - 주관적인 십자가 / 날 위하여
                     객관적 십자가 / 모든 죄인을 위하여
                     종합적 십자가 /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지식에서 진리로 변화해야 한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7세기 잉글랜드 연방의 정치인이자 군인.

젠트리 계급 지주 출신으로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스스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군주가 되어 크롬웰 가문의 새 왕조를 개국하려고 하였으나 군부가 반대하자 설득을 시도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아들 리처드 크롬웰후계자로 지명하여 호국경 자리를 세습했지만, 결국 그가 세운 잉글랜드 연방은 무너졌다.

크롬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젠트리 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통해 독실한 청교도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한다. 그리고 1620년 런던 부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와 결혼을 하게 된다.

1628년 고향인 헌팅던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629년 찰스 1세의 의회 해산으로 인해 의회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1640년 단기의회와 장기의회가 차례대로 소집되자 여기에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평범한 잉글랜드의 하원의원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바뀌게 된다.

메리 여왕에 의하여 사형 언도
종탑의 여섯번째 종이 울릴 때 "길로틴"에 의해서 처형을 받는다.
그러넫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여자가 크롬웰을 위하여 종의 추에 매달려 자기를 희생한 결과
여왕은 크롬웨을 사형에서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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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1. 서론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성경의 중심 사상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뜻하는 나라이며,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며(마 6:33)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마태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 중)라고 기록했으며,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는 기록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시며(마 6:9~10)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언급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하늘과 이 땅을 직접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현재 세상 속에서, 특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이면서도 궁극적인 소망이 되고 있다.

2.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시작은 구약이다.
조지 래드(George Eldon Ladd)는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그 분의 목적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통해 이루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와 같은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구약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상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와 신앙의 대망 가운데 깊이 잠재해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이러한 대망은 곧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에 근거해 하나님은 좀 더 강하고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왕이 될 것이라는 대망 사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정왕국으로 말해지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하나님의 통치 사상에 의한 것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올 미래에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소망이 피력된 것이다.
결국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하는 나라, 온 세상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라는 대망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메시아적 예언은 미래에 참다운 하나님의 왕국이 메시아 중심으로 설립되어질 것을 제시하는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는 평화의 통치자로 오시고(사 11:1~9), 그의 왕권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이고, 영원한 특징을 갖는 것이다(미 5:1~9).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아 대망사상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근거를 형성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평화의 그 날이 오면 모든 인간적인 갈등이나 사회적인 문제가 없고, 악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와 안전이 미래에 약속됐다고 믿은 것이다. 김회권도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절대 선언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죄, 악, 고난, 질병과 죽음, 전쟁 패배와 포로살이로부터의 구출과 해방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복음은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의 왕적 칙령으로써 하나님 없는 상황이 종식되며,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작동할 것이라는 선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와 같은 묵시와 예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됐다. 마태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고 기록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임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도 다양한 사역과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특정한 단어로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다.

특히 로마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며 하나님 나라를 현재 각자가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실체로까지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되는 유업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영적 상태이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 때 얻을 수 있는 것으로써 ‘이미’라는 현재성과 ‘아직’이라는 미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조지 래드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체이면서(마 12:28), 미래적 축복(고전 15:50), 다시 태어난 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요 3:3) 영적인 내적 축복이면서(롬 14:17) 또한 이 세상 나라의 통치(계 11:15)와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람들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현재적 영역이면서 나중에 들어갈 수 있는 미래적 영역(마 8:11), 믿는 자에게 상속되는 미래적 축복의 나라이면서(눅 12:32), 현재에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나라(막 10:15)라고 강조한다.

3. 하나님 나라의 어원적 의미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성과 풍요로움은 하나님 나라를 섣불리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어원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나님 나라는 ‘말쿠트’(malkeuth)다. 약 200회 정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인간 왕에게 적용될 경우, 주로 ‘통치’, ‘지배’, ‘왕권’ 등과 같은 추상적, 역동적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지극히 부차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공간적 영역, 지역, 영토의 의미로도 쓰였다.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바실레이아’(basileia)’라로 표현한다. 히브리어인 ‘말쿠트’와 동일하게 추상적, 역동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구약의 ‘말쿠트’와 신약의 ‘바실레이아’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과 ‘왕권’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는 항상 통치, 다스림 또는 주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사상이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만물의 주인이시다. 눈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인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도 복종해야 하는 만민의 주인이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만 주인이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에도 주인이신 것이다.

구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통해 당신의 열방을 드러내려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거역하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이들을 돌이키시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북 이스라엘, 남 유다에 이른다. 이러한 심판과 바빌론 포로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 또는 ‘다윗의 자손’, ‘여호와의 종’을 간절히 기다린다. 바로 ‘주의 날’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부르시며 악인들과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의인들과 그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서 깨어졌던 만물이 회복될 것을 약속하신다. 구약은 이렇게 메시아를 대망하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신약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이러한 대망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 끊임없이 가르치셨다. 복음서는 단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킨 메시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증언임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다고 반복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사복음서는 거의 ‘하나님 나라’로 표기하고 일부는 ‘천국’으로 표시하고 있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기록됐고, 마태복음에서는 네 곳(12:28, 19:24, 21:31, 43)을 제외하고 ‘천국’이라고 기록됐다.

결국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대망했던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했으며, 현재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백성들을 통해 이루어지심을 통해 자라가고 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또는 어원적 의미는 ‘왕 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통치, 주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시며 만물을 다스린다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 개념이기도 하며, 단순히 영역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자라면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복을 누리는 곳,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 후에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4.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모두 104번 사용되고 있는데, 거의 전폭적으로 예수 자신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즉 아직 기다려야 하는 미래적인 나라인 것이 반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종이라는 소명을 받은 후 고향 땅에 돌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이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는 선포이었다(막 1:14~15, 마 4:17).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한 기대나 준비를 위한 선언이 아니라 선포하는 예수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착했다는 선언이며, 지금 예수 안에서 도착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단의 요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예수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 물었다(눅 17:20).
그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깨우치셨다(눅 17:20~21).
당대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의 때와 장소에 관한 두 가지 사상(하나님의 나라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속해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나라라는 사상)에 동의하지 않음을 지적하셨다.

물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의 구현 및 윤리를 표방하는 등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이며, 전 세계적이며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는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적인 나라가 아니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미 도래했음을 선언하시기도 하셨다(“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 중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마 5:2), 구하는 자의 것이며(마 6:33),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받드는 자의 것이며(마 18:3, 19:14, 막 10:14, 눅 18:17), 거듭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요 3:5).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하며(마 5:10),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하며(마 5:10),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마 7:21).

결국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중심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그 분의 왕권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6~18).

특히 예수님께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 곧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내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줘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기초해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불가분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 확장된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 있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에 따르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일치시키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표로,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로, 하나님 나라의 ‘선 경험’이 돼야 한다.

양용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의 현재적 삶은 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경성된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지극히 강조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도 매우 확고하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를 한 순간도 소홀히 하거나 잊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완전한 그 때의 도래를 늘 기다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더욱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실존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면서 예수님의 재림 이후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할 때까지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다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6. 교회의 궁극적 사명

교회,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완전한 축복의 상태로 실현되어지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악과의 무서운 싸움 속에서 보증되어지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투쟁을 감당하는 기구인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됐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게 됐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그 지은 죄의 결과로 죽음을 가져다줬다(롬 6:23).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게 창조자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가장 큰 이유이다. 죄인들로 하여금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러내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막 2:17). ‘회개’와 ‘믿음’으로 죄인인 인생이 사단의 나라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선포하셨고, 친히 십자가에서 그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을 왕으로 섬기는 삶의 방식, 곧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삶의 모습을 회개하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생이 가진 궁핍함에서 창조주의 부요함으로 들어가며, 인생의 유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 즉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앞으로 임하시게 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과 환경,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하는 청지기의 사명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누리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에 기초해 하나님의 법을 찾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항상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시고 항생 행동하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존재하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결국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김형국은 “교회는 단지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수용하고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고(마 5:14~16, 엡 5:8~9, 빌 2:15, 골 1:12, 살전 5:5), 우리 가운데 있는 소망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벧전 3:15)”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온전한 회심을 이루어야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값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섬기는 사역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답게 하기 위해 교회에 소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며 그 분을 닮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

7. 결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 주어진 나라다.
그 나라는 이미 임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최종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 그 때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공동체이며 하나님 나라의 표지인 교회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공동체로서 예수님의 삶을 뒤따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할 수 있는 힘과 능력, 촉매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들어왔다고 선언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현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공동체다. 예수님의 부활부터 고대하는 재림, 곧 종말 사이에 위치한 이 마지막 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끌어야 한다.

교회는 이미 설립된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증거자로서 곧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대한 증거자로서 세상 속에 보내어졌다.
따라서 교회는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승리와 성취된 승리를 믿고, 아직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특히 인간사회가 이미 세워놓은 모든 장벽들을 초월하는 신앙공동체를 세상 앞에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의 흔적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는 지체를 넘어서서 세상 속에 선행과 형제사랑을 확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복음을 교회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것처럼 그 아가페(사랑)를 더 이상 교회 안에 가두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기 위해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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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erhardus Vos(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 정정숙 역, 서울:엠마오, 1981
Geerhardus Vos(게할더스 보스) & George Eldon Ladd(조지 E. 래드), 「하나님의 나라, 제대로 알고 믿는가?」, 정정숙&신성수 역,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90.
George Eldon Ladd(조지 E. 레드), 「신약신학」, 이한수ㆍ신성종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3.
George Eldon Ladd(조지 E. 래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태훈 역, 서울:도서출판 엠마오, 2001.
George Eldon Ladd(조지 앨든 레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박미가 역, 서울:서로사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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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ㆍ김회권ㆍ정현구, 「하나님 나라 복음」, 서울:새물결플러스, 2013.
김진동, 「하나님 나라의 복음신학 연구」, 서울:도서출판 포이멘, 2006.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이형기, 「하나님 나라의 공적신학」, 서울:한국학술정보(주), 2009.
정일웅, 「우리 시대의 하나님 나라」, 서울:총신대학부설 한국교회문제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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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신앙


노동(勞動)과 신앙(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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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에 나타난 노동(일)에 관하여

잠언에서는 일하지 않는 것과 일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지혜의 잠언은 우리 일상에서의 일하는 것 즉, 노동에 대하여 귀한 사실들을 총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과 함께 그 주체인 노동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 소고에서는 잠언 10-31장까지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먼저 일하지 않는 것 즉, 게으름에 대하여 그 특성과 주어지는 결과를 살펴보며, 그 다음으로 일하지 않는 자와 대조되는 일하는 자에 대하여 그 해당하는 구절들을 생각해보고 일하는 자의 특징과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댓가와 일하는 자가 어떠한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일하지 않는 것(게으름)

1) 일하지 않는 자(게으른 자)의 특성

-게으른 자는 제가 사냥한 것도 굽지 않지만, / 부지런한 사람은 귀중한 재산을 얻는다.(12:27)
-아무리 바랄지라도 게으름뱅이의 갈망은 헛되지만 / 부지런한 이의 갈망은 충족된다.(13:4)
-게으르면 깊은 잠에만 빠지고 / 나태하면 배를 곯는다.(19:15)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19:24)
-게으름뱅이는 제 철에 밭을 갈지 않고 / 수확철에 소출을 찾지만 아무것도 없다.(20:4)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게으름뱅이는 “밖에 사자가 있어! / 길거리에 나가면 난 찢겨 죽어!” 하고 말한다.(22:13)
-게으름뱅이는 “거리에 사자 있어! / 길거리에 사자가 있어!” 하고 말한다.(26:13)
-문짝이 돌쩌귀에 달려 돌아가듯 / 게으름뱅이는 잠자리에서만 뒹군다.(26:14)
-게으름뱅이는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 입으로 가져가기조차 힘들어 한다.(26:15)
-게으름뱅이는 재치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 자기가 더 지혜로운 줄 안다.(26:16)

■ 이상의 구절들은 게으른 자의 특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

첫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그들은 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20:13).

그들은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지 않는다(19:15).
그들은 늘 침상에서 생활을 하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다(26:14).
완전히 짐승적인 게으름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면 잠이 아주 유해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습관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상실하여 빈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둘째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이다(22:13; 26:13).

그는 자신의 변명을 믿게 되고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그런데 그런 변명들은 터무니가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이 늘어놓는 그 변명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들이다(26:16).
그들은 수월한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들임으로(‘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20:4) 그의 사업만큼 그의 인격도 손상된다.
  
셋째 게으른 자들은 게으름의 정도가 끝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앞에 있는 그릇에도 손을 넣지 않는 극도의 게으름을 가지게 된다.
전혀 힘을 쓰지 않는 자들이다(19:24; 26:15).
그들은 늘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지 절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들이다(13:4).
그래서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적당한 때를 놓치고(20:4), 아예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부해 버린다(21:25).
  
만일 그들이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시작부터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곧 추진력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사냥감은 부패해가고(12:27), 그의 음식은 차게 식는다(19:24; 26:15).

결과적으로 그는 만족되지 못한 갈망으로 편안함이 없고(13:4; 21:25, 26), 마치 ‘가시 울타리’같이 얽히는 그의 여러 가지 일들 앞에서 무력하고(15:19), 그를 고용하는 사람에게 많은 비용이 들게 하고(18:9)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10:26) 무용한 자이다.

2) 게으른 자가 맞이하는 결과

-게으른 손바닥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 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 파괴자의 형제이다.(18:9)
-잠을 좋아하지 말아라. 가난해진다. /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게으름뱅이의 욕심은 그를 죽이니 /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21:25)
-내가 게으른 사람의 밭과 / 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는데
보아라, 온통 엉겅퀴가 우거지고 / 쐐기풀이 전부 뒤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24:30-31)
-‘조금만 더 자자. 눈을 조금만 더 붙이자. /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24:33-34)

■ 이상의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게으른 자가 맞이하게 되는 결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데 그 행동은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손을 게을리 할 때, 주어지는 결과는 바로 가난인 것이다(10:4; 20:13; 24:33-34). 손을 게을리 하는 자는 다시 말해서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이다. 그리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자기가 맡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18:9).
  또한 그는 힘든 일을 피함으로 천한 노역을 자초한다(12:24). 그리고 꾸물대는 버릇으로 말미암아 그의 무질서한 삶은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황무지가 된 것이다(24:30, 31).

2. 노동(일)
-게으른 손은 가난을 지어내고 / 부지런한 이의 손은 부를 가져온다(10:4)
-여름에 모아들이는 이는 사려깊은 아들이고 / 수확철에 잠만 자는 자는 수치스러운 아들이다(10:5)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이 넉넉하지만 / 헛것을 좇는 자는 지각이 없다(12:11)
-자기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 헛것을 좇는 자는 가난으로 배부른다(28:19)
-부지런한 이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 게으른 자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12:24)
-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이지만 / 입술만 놀리면 궁핍해질 뿐이다(14:23)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너는 제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 그런 이는 임금들을 섬기고 / 하찮은 이들을 섬기지 않는다.(22:29)
-바깥일을 정리하고 / 밭일을 준비한 다음 / 집을 지어라(24:27)
-네 양떼의 형편을 잘 파악하고 / 가축 떼에게 관심을 기울여라(27:23)

1) 일하는 자 의 특징
  첫째,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부지런하며 성실하다(12;11, 28:19, 27:23). 둘째, 시기와 때를 따라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며 행한다(10:4-5). 셋째 말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행동하는 것이 앞선다(14:23). 넷째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재빠르고 민첩하게 행한다. 이것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요령을 알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달인이 됨을 말한다(22:29).

2) 일하는 자에게 결과로 주어지는 대가
  첫째 양식이 넉넉하고 풍부해진다(12:11, 28:19). 둘째 이득이 주어진다(14:23). 셋째 일함을 통해서 얻어진 이익이 쌓이게 되므로 부를 가져온다(10:4). 넷째 남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12:24). 다섯째 존귀한 자에게 쓰임을 받아 귀중한 사람이 된다(22:29). 여섯째 가정을 든든히 세운다(24:27).

3) 일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

  첫째 주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27:23). 관심은 곧 일의 동기이며 일의 시작이다. 맡겨진 일에 관심이 없다면 일하지 않을 것이다. 관심을 기울일 때 해야 할 일이 보이고 더욱 정성스럽게 힘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둘째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10:4-5). 일은 그 시기와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것처럼 특별히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치는 일은 때를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에 대한 효과와 능률이 떨어지게 된다.
  셋째 모든 일의 시작과 결과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16:3). 이것은 우리의 일의 성취가 우리의 노력과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게으른 자)와 일하는 자(부지런한 자)의 특징이 너무도 뚜렷하게 들어나고 그 특징이 서로 상반되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몸을 움직이기 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일하는 자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민첩하다.
또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그 결과가 가난이며 남의 지배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
하지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양식의 넉넉함과 부와 높은 지위 등이다.
우리는 잠언의 노동(일)을 싫어하는 자와 노동(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자를 통해서 어떤 삶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될 것인지를 미리 우리에게 예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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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에 관한 성경연구

1. 일해야 하는 이유

1)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에(창 2:5-15)
2)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창 3:16,17)
3)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출 20:9, 마21:28)
4) 내일을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잠 6:6-8)
5) 일할 날이 길지 않기 때문에(시 90:10)

2. 노동이 주는 유익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됨(출 20:9)
2) 수고에 따른 삯을 받음(레19:13, 잠14:23)
3)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음(시128:2)
4) 노동 후 낙을 누릴 수 있음(전3:13)
5)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잠31:31)
6) 잠을 달게 잠(전5:12)
7)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게 됨(전9:9)
8) 빈궁한 자를 구제할 수 있음(행20:35, 엡4:28)

3. 일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엿새동안 일하고 주일은 지킬 것(출20:9-11)
2) 즐겨 일할 것(삿5:2)
3) 자원하여 일할 것(느11:2)
4) 실망하지 않도록 수고할 것(전2:20)
5) 힘을 다하여 일할 것(전9:10)
6) 헛된 수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사49:4)
7) 힘써 수고한 후 주께 나아가 안식할 것(마11:28)
8) 타인의 일을 간섭하지 말 것(마20:12-14)
9) 말은 일에 등한히 말 것(마21:28,29)
10) 능력에 맞게 일할 것(마25:22,23)
11)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 것(요6:27)
12)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할 것(고전16:16)
13)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할 것(엡4:28)
14)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 것(살후3:10)
15) 규모 있게 일할 것(살후3:11)
16) 종요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을 것(살후3:12)
17)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것(딤후2:15)

4. 일을 위해 고용된 자의 자세

1) 자기 할 일에 근신할 것(잠22:29)
2) 다른 사람의 보수와 비교하지 말 것(마20:12,13)
3) 정한 보수에 만족할 것(눅3:14)
4) 상전을 공경할 것(딤전6:1)

5. 성도가 쉬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해야 할 영적인 일

1) 기도하는 일(삼상7:8, 삼상12:23, 살전5:17)
2) 생명을 얻기 위한 수고(잠10:16)
3) 좋은 상을 얻기 위한 모든 일(전4:9)
4) 구제하는 일(전11:1,2)
5) 영적 파숫군으로서의 직무(사62:6)
6) 그리스도를 닮는 일(요13:14)
7) 말씀을 가르치는 일(행5:42, 행20:31)
8) 전도하는 일(행5:42)
9) 말씀을 상고하는 일(행17:11)
10) 위로하는 일(고후7:7, 살전4:18)
11)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골1:29)
12) 감사하는 일(살전2:13)
13) 권면하는 일(딛1:8, 딛2:6, 딛2:15)
14) 봉사하는 일(벧전4:10,11)
15) 찬송하는 일(계4:8)

6. 영적 수고의 결과

1) 복음이 전파됨(살전2:9)
2) 상급을 받음(눅6:35)
3) 영생에 이름(잠10:16)
4) 장차 수고를 그치고 영원히 안식함(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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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현재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행위


하나님의 노동은 인간의 존재이유와 정의에 대한 답변의 핵심
성경은 착취와 억압 반대하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쉼 보장

경제적 위기 때문일까. 실업률이 높아졌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도 정규직 임금의 50~70%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도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정규직 또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임금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기보다는 노동에 대해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노동에 대한 생각과 노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 최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평화누리와 함께 ‘노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연속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일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일(노동)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느헤미야 연구위원 김근주 박사는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신구약 성경은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고하게 증거하고 있다”며 “온 세상을 지으시고 주관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노동이야말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며, 정의를 구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경작하고 지키도록, 노동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며 “일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다. 노동은 노동이 가져오는 어떤 열매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며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결국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창조질서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주신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노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경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일하다’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다’, ‘예배하다’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쉼과 삯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노동은 억압과 착취가 된다. 김 박사는 “성경은 노동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쉼은 노동과 반드시 결합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며 “노동자에게 삯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 자본과 자본으로 형성되는 제물만이 삶의 안정성을 확보해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쉴 새 없이 노동하도록 내모는 지배자와 권력자들의 행동은 성경에 반하는 억압과 착취가 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어 “노동은 사회적으로 실패하거나 낮은 계층에 속한 이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며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노동자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노동하는 우리 이웃들과 소통하는 교회의 노력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참된 노동은 예수의 제자됨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고, 예수님 또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석민 박사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개한다”고 설명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조 박사는 “요한복음에 소개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으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으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물론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본래 직업인 목수를 일은 하지는 않으셨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노동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했을까. 임금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품삯을 받은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으며, 노동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쉼을 보장하셨다.

조 박사는 “예수님은 당시 노동자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권리, 곧 노동의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과 노동에 따른 쉼을 역설하시며 노동자들을 옹호하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복음서는 노동이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와 공동체의 경제상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개인적인 불안과 걱정을 위한 노동은 복음서가 가르치는 노동의 원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추수 노동자로 사는 것, 예수의 제자됨이 노동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동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노동의 신학과 윤리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위임 혹은 문화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동춘 박사는 “노동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고, 다스림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총체적인 활동”이라며 “노동의 위임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개입하라는 요구이며,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행위”임을 강조했다.

특히 “노동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라고 보는 신학적 오해를 교정해야 한다”며 “노동은 죄의 저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 있으며, 죄의 억제와 잠재력의 발현(창조적 노동)과 같은 신적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노동은 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선을 제공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지 않고, 주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직업과 기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에 대해 설명한 그는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과 같은 편향된 노동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의 신실성을 요구하는 청지기적 노동관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박사는 “청지기 윤리관은 마치 인간이 노동환경에서 상당한 자율성과 선택의 융통성이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는 한계를 가질 수 있지만 일터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듯이 일하도록 도전을 준다”고 설명했다.

인권적 차원의 노동윤리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은 일용 노동자들(품군)에게 정당한 임금을 체납하거나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며 “노동자는 성경계시의 중심이다. 노동자에 대한 바른 대우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이며, 권리의 문제”라고 피력했다.

김 박사는 “한국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이 노동의 착취와 억눌림으로부터 신음하지 않도록, 노동하는 인간이 존엄성과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비인간화된 노동구조를 대행할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며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시장경제 등 대안적 노동사회 창출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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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는 실업률은 높아지고 취업률은 낮아지는 실업 문제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막상 취업을 해도 일자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되어 있어서 비정규직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노동 착취가 발생하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2배나 차이가 나는 임금 불평등이 벌어지고 있다.

아울러 양질의 고소득 일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같은 불안한 저소득 일자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정규직으로 취업해 임금을 제대로 받아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실질 임금은 계속 떨어지고 파업과 노사 갈등이 만연하고 있다. 아울러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와 인권 침해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임금 소득 불평등은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노동의 기원, 하나님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노동은 원래 이런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 노동은 선하고 거룩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노동(일)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나오며 창조와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은 노동(일)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일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맡기면서 노동하라고 말씀하신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노동을 통해 수행된다. 인간은 노동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마땅히 거룩한 노동을 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자 창조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노동하시는 하나님처럼 인간도 노동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노동해야할 책임과 의무, 권리가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이 노동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노동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

인간의 노동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는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창조 명령이자 문화 명령이다. 노동은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본래 목적이다.

하나님의 노동과 관련한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첫 장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말씀한다. 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며 하나님이 손으로 노동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묘사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화(文化) 명령이다. 문화 명령은 곧 노동하라는 명령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노동의 목적 변질

노동은 원래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과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된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자체가 저주를 받거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저주를 받아 땀 흘려 노동해도 이 세상에는 늘 빈곤과 굶주림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했어도 땀 흘려 노동하면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노동에 대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고 말씀한다.

인간이 다스릴 대상인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계속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원래 의도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즐거움과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 이후 피조물을 섬기면서 자연의 물질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어리석은 우상숭배(물신숭배)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노동의 본질은 여전히 거룩함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이 수고로움이 되고 인간의 우상숭배(물신숭배)로 인해 노동의 목적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노동 그 자체가 타락하거나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한 섬김과 봉사의 일이다.

노동은 지금도 거룩한 것이며 다른 사람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섬김과 봉사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것처럼 노동이 예배(기도)요 예배(기도)가 노동이다. 예배(기도)와 노동을 분리하는 것은 성속을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오류다.

예배와 기도는 거룩하고 노동은 비천한 것이라는 중세 가톨릭의 수도원적인 성속 이원론을 깬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세상의 모든 노동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알맹이다. 즉 자신의 소명과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몸소 목수로서 노동하셨고, 어부였던 베드로, 천막을 만들면서 사도의 역할을 한 바울도 모두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몸으로 노동한 이 분들이 바로 교회의 머리와 대들보가 되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눅 10: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유명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 말씀에서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일을 하고 싶어도 아무도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일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사람에게도 동일한 노동권과 생존권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노동의 목적에 맞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물론 돈이 목적이 되면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 교회를 위해 노동하고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 혹은 이루어 낸 것은 모두 선하고 좋은 일이다. 그것이 목회든 선교든 다른 노동이든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간이 노동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이렇듯 다른 사람과 창조 세계의 생명을 살리고 섬기는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거룩하다.

노동과 안식,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

하나님께서는 몸소 노동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신다. 성경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고 말씀한다.

안식은 창세기 말씀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나온다. 성경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고 말씀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즉 노동을 할 것과 함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즉 안식할 것을 함께 말씀한다. 안식은 노동처럼 원래 창조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안식일도 창조하셨다. 따라서 천지의 주인이 예수님이듯 안식일의 주인도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하기를 싫어하여 불로소득으로 살려는 것은 잘못

안식일에는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는 말씀은 노동하지 않고 사는 것을 금한다. 즉 땀 흘려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것으로만 살아가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하여 만든 결과를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취하려는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으로 얻으려는 마음은 성경이 금하는 잘못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여러 불로소득을 통해 다른 사람이 만든 노동의 열매를 취하여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일하기를 싫어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의 열매로만 살아가려는 잘못된 사람이다.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노동하여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문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희년,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림과 노동 착취 금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상적인 노동은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권은 노동권과 연결된다. 일할 수 있는 자기 땅이 없으면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침해된다. 토지권이 없으면 노동권도 침해되는 것이다. 희년 말씀에서는 가난해져서 희년까지 땅을 판 형제를 보살피고(레 25:25) 품꾼(임금 노동자)으로 일을 시키면서 일한 대가를 주도록 말씀한다(레 25:39, 40).

성경에서는 품꾼을 잘 대우하고 일한 그날의 품삯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한다(신 24:14~15).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은 예배와 공공의 업무를 하고 십일조를 받아서 살도록 말씀한다(민 18:21). 또 땅이 없는 나그네와 이방인들에게도 일거리를 주고 그들을 압제하거나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노동/고용에 관한 성경의 희년 말씀에서는 희년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품꾼과 종의 상태에서 해방되어(레 25:33~55) 자신의 땅과 집, 가족을 회복한다(레 25:2~34). 이런 희년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토지와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여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만든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희년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희년 말씀에서는 빈곤의 심화 단계에 따른 규례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가난하게 되어 토지를 팔게 된 경우(레 25:25~28), 집을 팔게 된 경우(레 25:29~34),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하여 함께 머물게 된 경우(레 25:35~38), 형제가 품꾼이 된 경우(레 25:39~46),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레 25:47~55)에 따른 규례들이다. 이 중에서 노동에 해당하는 사람의 몸을 속량하는 규례(레 25:35~55)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 경우

먼저 형제가 가난해져서 함께 머물게 될 경우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5~38)."

땅을 팔고 난 후에도 가난한 형제가 자립을 할 수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고 함께 데리고 살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은 같은 동족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종처럼 부리면서 노동을 시킬 수 없다. 이런 희년 말씀에서 노동 착취 금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

두 번째는 형제가 품꾼이 될 경우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 올 것이며 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 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레 25:39~46)."

가난한 친족에게 더 이상 팔거나 담보 잡힐 땅이 없는 경우 그 사람과 가족은 부유한 친족 밑에서 희년까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품꾼 즉 고용된 노동자가 된다. 이스라엘은 땅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신의 몸을 파는 종이나 노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자신의 땅을 회복하여 자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희년까지 자신의 노동력을 판 품꾼은 종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고 입주한 고용인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런 품꾼의 상태는 한 세대를 넘기지 않고 다음 희년까지만 지속한다.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종을 삼을 수 없고 고용된 노동자(품꾼) 신분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도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금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희년까지 노동의 대가를 받는 품꾼으로 살다가 희년이 되면 품꾼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가족과 함께 자신의 땅으로 떠나 완전한 자유를 회복한다.

토지가 회복되어야 완전한 자유와 노동권이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노동권을 함께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동 착취 금지와 함께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될 경우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47~55)."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친족은 책임지고 그 사람을 속량(무르기)할 의무가 있다. 친족들은 책임지고 어려움에 처한 친족을 속량하여 땅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채권자라도 이스라엘 채무자에게 하듯이 대하게 하고 희년의 규정이 적용되도록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이스라엘 형제가 이방인의 품꾼이 된 경우에는 토지 무르기처럼 몸의 무르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몸의 무르기 즉 몸의 속량 규례는 토지 무르기 순서와 같다. 먼저 친족(goel)이 몸값을 대신 치르고 속량해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부유해졌을 때 자기가 직접 몸값을 다시 주고 자유롭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품꾼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일하는 자유노동자 된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의 품꾼이 되면 이방인 주인은 그를 엄하게 부리면서 노동 착취를 해서는 안 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품삯을 주고 인격적 대우를 할 것을 말씀한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사람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한다.

품꾼이나 종이 되었어도 속량(무르기)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거나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다시 땅과 몸의 자유를 회복한다. 이처럼 희년 노동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노동 착취 금지와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유노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노동 착취 금지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관한 성경 말씀

성경에는 노동에 관한 희년 말씀뿐만 아니라 노동 착취를 금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는 많은 말씀이 있다. 대표적인 말씀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여러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노동 착취 금지와 일한 대가를 제대로 줄 것,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9)."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 3:5)."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말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먼저 보장하고 자기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며 살 것을 말씀한다. 즉 토지와 노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보장하라는 것이다.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래서 희년 말씀에서는 몸의 해방과 땅의 회복을 함께 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노동의 권리를 누리고 노동의 의무를 다하려면 먼저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토지/주택(부동산)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는 토지 가치를 사회가 거두어 모든 사람을 위해 쓰는 토지 가치 공유를 통해 공평한 토지권을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노동문제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리가 현대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다.

노동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원리는 자기 땅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게 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현대사회에 적용하려면 노동의 결과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법과 제도를 실시하면 된다.

예를 들어 땀 흘려 일한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감세나 면세를 해 줌으로써 노동의 결과를 보장해 줄 수 있다. 또 땀 흘려 열심히 일하려는 노동자를 우대 및 장려하고 노동 착취를 막을 수 있는 노동법과 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 실업자가 발생하면 직업 재교육과 일자리 알선,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여 다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희년의 노동 정의 실천하기

자기 노동의 열매를 보장하고 노동 착취를 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과 희년 말씀을 정부가 법과 제도로 실시하기 전에라도 개인과 공동체, 교회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실천할 수 있다. 우선 고용주는 이윤 추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용 창출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핵심 목표로 사업을 경영한다.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켰으면 노동자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주면서 노동 착취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또 회사 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혹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더라도 차별과 소외를 받지 않도록 힘쓴다.

고용주는 노동자가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주말 노동은 하지 않도록 힘쓰고 회사 사정에 맞춰 노동자의 안식과 재충전을 위한 월차 휴가, 안식월 휴가, 안식년 휴가를 도입한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단지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돌보며 생산 활동을 한다. 아울러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노동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교회와 공동체, 시민사회는 실업자에 대한 일자리 상담 및 알선, 의료 서비스 및 정신적 상담, 물질적 도움, 자활 지원 등을 통해 도울 수 있다. 개인은 실업 상태에 빠졌을 때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자기 계발에도 힘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유익과 덕을 끼치지 않는 사업이나 일(음란 퇴폐 산업, 도박 등 사행성 산업, 조직 폭력, 불량 식품 및 불량 상품 제조/판매 등)은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울러 자신은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가로채는 일(부동산 투기를 비롯한 각종 투기, 다단계 사업, 각종 사기성 사업)은 하지 않으며 정부는 이런 사업은 규제하거나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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