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요셉(Joseph,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예수님의 부친)은 마태복음 1:16절과 누가복음 3:23절에서 다른 이름의 두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복음 3:23)

먼저 몇 가지 사전 설명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genealogy)는 완전한 계보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지 선택되어진 계보이다. 마태복음 1:17절에서 특별히 14대 씩으로 나뉘어져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는 완전한 계보라고 볼 수 없다.

이 두 족보는 다윗의 두 아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둘 다 아브라함까지 이어진다. 마태는 다윗을 통해 내려온,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온 왕의 계보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누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계속 추적을 하였다. 누가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아담으로부터 창조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그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두 족보 모두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는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as was supposed) 요셉의 아들이니...”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요셉의 두 아버지에 관해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사이의 차이는 꽤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추적하였고, 반면에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통해 추적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

마태가 요셉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여고냐(Jeconiah,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 때문이다. 그는 마태복음 1:11절에 등장한다.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그의 자손 중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게 되었다.(렘 22:30) 동정녀 탄생은 명백히 이것을 방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심장한 여성형 용어(feminine verbiage)의 사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마태가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를 족보의 마지막에서 언급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부모님에 대하여 여성형(feminine form)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족보.

누가복음 3장을 살펴보면, 족보의 목록은 마태복음의 족보(다말, 룻 등과 같은 몇몇 여인들을 포함)에서처럼 엄격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남자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면, 그러면 그녀는 목록에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족보에서 헬리(Heli)는 요셉의 아버지로서 기재되어져 있다. 헬리는 2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한 딸은 마리아였고, 다른 딸은 세베대의 부인(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이었다.(마 27:56, 요 19:25). 모세의 법에서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민 27:1–11, 36:1–12), 사위는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그 형태는 마태복음의 족보 형태와 다르다. 마태복음의 목록은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는지(begot, 그리스어로 gennao)로 표현되고 있다. (한글 성경은 ”낳고”로 번역됨).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그 형태는 다르다. 그곳에서 ”그 위는”(영어성경은 X is the son of Y)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son(아들)’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헬라어) 성경에는 없던 것이었다.(한글 성경에는 ”그 위는”으로 번역함). 단지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성경에서 삽입되어졌던 것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son’이 사용된 유일한 곳은 23절로서,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son)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는 구절이다.

누가는 매우 정확했다. 예수님은 헬리의 아들이었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누가는 그리스어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 기록이 성경적 오류라는 주장을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였으며(요셉의 이름은 물려받은 기업에 기인하여 기재됨),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족보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의 족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 비교)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림차순으로, 누가는 오름차순으로 기록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족보인데, 마태는 다윗이 예수의 27대조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42대조라고 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의 족보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1장1-17절과 누가복음 3장23-38절에 전해온다.

누가는 예수부터 아담까지 77(7*11)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42(14*3)대를 내려가며 기록한다.

두 족보에 수록된 조상의 이름을 비교해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왕조이전의 조상들은 대체로 일치하나 한 곳이 다르다.

마태 1장3절의 람대신에 누가 3장33절에서는 아니를 기록하였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 직전까지 왕조시대에는 다윗 하나만 같고 나머지 조상은 모두 다 다르다.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까지 왕조 이후 시대에는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그리고 예수의 아버지 요셉만 같고 나머지 조상은 모두 다 다르다.

누가는 예수가 아담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강조한다.

2. 예수의 족보에는 마리아 말고도 4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이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을 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창세기 38장), 라합은 조국인 여리고를 배신한 비천한 창녀였으며, 룻은 말룐의 아내이지만 말룐이 죽자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후원으로 보아스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지만 말룐의 게보가 아닌 보아스의 계보를 잇는다. 밧세바는 다윗의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이지만 다윗왕을 유혹하고 남편 우리야를 교살한 다윗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낳는다.(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4명중의 셋째,넷째인 나단과 솔로몬, 본문의 내용과 관련됨)

모두가 비정상적인 관계이며 지탄을 받을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선 이다,

창세전 언약과 작정하심으로 섭리하심속에 이런 인간들을 도구로 쓰신 것이다!

곧 성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것으로 믿어진다면 그것이 곧 믿음이다.

3.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왕의 계보를 잇는 왕으로,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윗-솔로몬으로 요셉까지 기록하였고,

누가는 이방인을 향하여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아담-하나님까지 헬리의 계보인 마리아의 가계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예수의 부친인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냐? 헬리의 아들이냐? 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모세의 법을 이해하여야 하고, 둘째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모세의 법(율법)민27:1~11, 36:1~12, 막12:18~

유대인 남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인척의 남자가 죽은 남자의 대를 잇게한다,

둘째, 렘22: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당시 유대왕인 고니야(여고니야, 여고냐, 여호야긴=동명)의 악행으로 예레미야선지자를 보내어 예언하신 것이다, 곧 왕의 계보를 고니야를 통하여는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는 솔로몬의 가계를 이었다기 보다는 나단의 계보를 이었다고 볼 수 있고,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기 보다는 헬리의 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 헬리의 기업을 잇는다고 이해한다면, 예수는 마리아, 곧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모세의 법을 생각하고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의 셋째아들 나단과 넷째 솔로몬은 가장 가까운 친형제임을 기억하고, 그의 후손들중에 계보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나단과 솔로몬의 후손들이 서로 모세의 법을 이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름이 겹치고 다른것이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마태가 기록한 맛단은 야곱을 낳고 죽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레위는 맛단의 아내에게서 헬리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헬리는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입니다,

그런데 헬리는 두딸(마리아와 세베대의 부인,마27:56,요19:25)을 낳고 아들없이 죽자 가장 가가운 친척인 야곱이 헬리의 아내에게서 요셉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며 헬리의 법적인 아들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역시 이복형제이며 마리아는 어려서 성전에 바쳐졌다가 혼인할 시기가 되어 성전에서 나오게 되고, 가장 가가운 친척인 요셉과 정혼합니다,

(위경, 요셉의 분노에서 발췌)

4. 마태는 의도적으로 14대씩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짜맞춘것입니다.

요람이 바로 웃시야를 낳은 것이 아니다. 웃시야의 아버지는 아마샤이다. 마태는 3대 정도를 빠트렸다. 또 요시야가 여고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요시야가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이 여고냐를 낳았으니 여고냐는 요시아의 손자이다. 여고냐는 유다 19대왕으로 기원전 597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이스라엘백성은 60년동안 바벨론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여고냐—스알디엘—스룹바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지만(에스라3장 및 5장, 느헤미야12장1절, 누가3장27절) 여고냐—브다야—스룹바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다. (역대상3장 17-19절) 기원전 538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을 석방하자 스룹바벨은 이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룹바벨의 자손목록(역대상3장19-20절)에는 아비훗이 없다. 누가복음 3장27절에는 스룹바벨의 아들을 레사라 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기원전 1750년-1000년경), 다윗부터 바벨론 유배초기까지가 14대(기원전1000-597년), 바벨론 유배기간부터 예수까지가 14대(기원전597-6년경) 이렇게 마태는 의도적으로 14대씩 나누었다. 그것도 억지로 짜맞춘것이되는 겁니다.

따라서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는 당시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면 족보에서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가계에 넣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여자의 후손에게서 오셔야 했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 누가의 계보기록이 신빙성이 있고, 또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고 하여도 누가의 기록이 더 무게가 실립니다.

즉, 마태의 기록은 사실적인 족보가 아니고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는 족보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

​마태복음 족보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서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총 41명을 하향식(자손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요, 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체 세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의도된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렷한 증거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17)

마태복음 1장 족보를 해석하는 열쇠인 마태복음 1:17을 볼 때,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를 큰 사건들을 기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14’라는 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4’는 ‘7’의 두 배수인데, 성경에서 ‘7’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하늘의 상징수인 ‘3’과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땅의 상징수인 ‘4’를 합한 수로, ‘어떠한 뜻이 완성되는 성취의 기간, 가득 채워진 충만, 전체’를 뜻하는 상징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이면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일곱이면 그 자체로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셈족 사람들은 ‘7’의 두 배인 ‘14’를 더욱 무게 있는 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시대를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42대로 기록한 것은, 각 시기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시대적 경륜이 있었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정하신 때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엡 1:4, 3:11, 딤후 1:9). 이처럼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합 2:3, 막 1:15, 갈 4:2)에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의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3장 족보의 특징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사건(눅 3:21-22)과 마귀의 세 가지 시험(눅 4:1-13)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이후 약 2천 년간의 인물들을 다룬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구약 전체 약 4천 년간에 걸친 인물 총 77명(하나님, 예수 포함)을 상향식(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상향(上向)식 구조’는 누가복음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취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 첫 사람 아담까지 올라간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할 모든 인간과 깊은 연대를 맺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 것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눅 3:23, 38).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첫 사람 아담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仲保者)로서(요 14:6,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전 인류를 끌어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엡 2:15-16, 골 1:21-22).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엡 2:13).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3:23에서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요셉의 아들,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마 13:55, 눅 4:22, 요 1:45, 6:42) 사실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족보의 위대한 구속사적 가치는,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라는 사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을 따라 모든 시대를 섭리하사,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이 땅에 보내셨음과(갈 4:4), 죄악된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롬 3:22, 24, 행 2:21, 10:43, 16:31)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눅 3:22, 4:3, 9, 롬 1:2-4, 눅 1:35, 2:49)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1) 총 42대이나 다윗이 두 번 겹쳐서 나오므로 실제 기록된 인물은 41명임.

2) 마태복음 족보는 요셉 가문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가문의 족보로 알려져 있음.

J. A. 벵겔, 「마태복음 상」 신약 주석 시리즈, 고영민 역(도서출판 로고스, 1990), 54-55.

Norval Geldenhuys, 「누가복음 상」, NIC 성경주석 시리즈(생명의 말씀사, 1983), 167-168.

3) 전경연, 「마태의 신학」,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2003), 61.

http://www.abrahampark.com/kor/core3_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시풍속 -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삼복, 추석, 중양절, 동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
-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삼복, 추석, 중양절, 동지

세시풍속(歲時風俗) -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하여 행해온 고유의 풍속

세시풍속이란 우리가 해마다 설날(음력1월1일)이 되면 친척들이 모여 다 함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고 윷놀이를 하는 것처럼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는 다양한 생활 모습(일과 놀이, 먹는 음식, 입는 옷 등)을 말한다.

'문장을 암기하고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이해하고 문장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1. 설날(음력 1월 1일, 새해 첫 날)

- 설빔(설날 아침에 입는 새 옷), 세배, 차례, 야광귀 쫓기, 복조리 걸기, 윷놀이, 널뛰기, 떡국

​야광귀는 정월 초하루나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간다고 하는 '신발귀신'이다.
신발을 귀신에게 빼앗기면 신발 주인은 1년 동안 불운하다고 믿어, 설날이 되면 신발을 방 안에 숨기고 문 밖에 체를 걸어두었는데 이를 야광귀 쫓기라 한다.

2.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 음력으로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

-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달맞이, 줄다리기, 지신밟기, 부럼깨물기, 오곡밥

​쥐불놀이는 횃불을 들고 들판에 나가 쥐불을 놓으며, 논밭두렁의 잡초와 잔디를 태우며 노는 풍속이다.
쥐불을 놓게 되면 겨울을 지낸 들쥐나 메뚜기, 해충의 번데기 그리고 각종 해충들이 알을 낳아 놓은 잡초나 해충 서식지를 태울 수 있다. 이러한 풍속에는 농사의 피해를 줄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3. 삼월삼짇날(음 3.3)

우리 선조들은 음력으로 양수가 겹치는 날은 양기가 왕성한 날로 아주 좋은 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설날(1.1), 삼월삼짇날(3.3), 단오(5.5), 중양절(9.9)은 양수가 겹치는 좋은 날입니다.

삼짇날은 응력 3월 3일로 봄을 알리는 명절입니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삼짇날 무렵이면 봄기운이 왕성해서 사람들은 흥이 저절로 나, 산과 들로 몰려나가 진달래 화전을 먹으며 봄을 즐겼습니다.

4. 한식(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음, 한 해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며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함.

​한식은 지난 일 년 동안 사용해 온 불씨를 끄고 새로운 불씨를 켜는 날로 불을 사용하지 않아 찬 음식을 먹었다.
새로운 불씨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란 의미를 지녀, 한 해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를 했다.

​한식은 새로운 불씨를 받는 날!​

5. 단오(음력 5월5일, 모내기를 끝낸 후로 더위가 곧 시작됨)

- 그네뛰기, 씨름, 창포물에 머리감기, 부채 선물하기(단오선)

​단오선은 단오날 임금이 재상과 시종들에게 하사한 부채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가에서도 단오날이 되면 서로에게 부채를 선물해 주었다.

6. 유둣날(음 6.15)

음력 6월 15일을 유둣날이라고 합니다.
유두는 ‘동유두목욕(東流頭沐浴)’이란 말을 줄인 말인데요, 동쪽의 냇가에서 머리를 감으며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입니다.

동쪽의 냇가에서 씻는 이유는 동쪽은 밝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둣날이 있는 6월은 삼복(三伏)이 들어 있는 때로 가장 무더울 때입니다.
이날은 술과 안주 등 먹을 것을 가지고 계곡이나 물가에 가서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7. 칠월칠석<七夕>(음 7.7)

전설 속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음력 7월 7일입니다.

농사일을 하던 견우와 베 짜는 일을 하던 직녀가 결혼 후 각자의 일을 소홀히 하자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둘을 각각 은하수 끝에 떨어뜨려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까치와 까마귀가 칠월칠석에 오작교(烏鵲橋)라는 다리를 만들어줘 1년 중 단 한 번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칠석날에 직녀성과 견우성 두 별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매우 가까워지기 때문에 생겨난 설화라고 합니다.


8. 백중<百中>(음 7.15)

전통적인 보름 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15일입니다.
모내기가 끝나고 김을 세 번 매고 나면 여름철 농한기인 백중이 되는데, 이날만큼은 하루 푹 쉴 수 있는 농민들의 여름 명절입니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주는데,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사면서 휴식을 취합니다.

이 무렵에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백종(百種)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다른 명절은 내 가족, 내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나 백중에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9. 삼복(하지로 부터 셋째 경일이 초복, 넷째 경일이 중복, 입추 후 첫 경일이 말복으로 보통 10일 간격임)

-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계곡이나 산으로 놀러감, 삼계탕이나 육계장과 같은 보양식을 먹음.

​우리 조상들은 여름철 가장 더운 시기를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복 날짜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는데 이는 아마도 '셋째 경일', '넷째 경일' 에 나온 '경일'이라는 표현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일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날을 의미한다.
하지가 지나고 '경일'이 세번째로 돌아오는 날이 초복이며 그 다음 경일(10일간격)이 중복이 된다.
입추 후 첫 경일인 말복은 보통 중복 다음 '경일'에 해당되어 중복과 10일 간격으로 나타나는데 가끔은 20일 차이가 날 때도 있다.(말복이 20일 차이가 나면 '월복'이라 부른다)

10. 추석(한가위, 음력 8월 15일)

- 차례, 성묘, 줄다리기, 강강술래, 송편, 토란국, 보름달에 소원빌기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 지은 곡식과 과일을 수확한 후 조상님께 감사의 의미로 차례를 지내고 성묘했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추석의 다른 표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듯이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이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국가의 주요 산업이 농업이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추석은 오곡이 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였으므로, 이날처럼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이 간절히 표현된 날이다.

11. 중양절(음력 9월 9일, 중국에서 유래된 명절)

- 국화주, 국화전, 밤떡, 단풍놀이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된 명절이나, 우리 조상님들도 즐겼던 명절이다.
중양절은 벼를 수확한 후 새로운 밭작물을 심는 시기와 겹치기에 농촌이 상당히 바쁜 때이나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단풍 놀이를 가며 여유를 즐겼던 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2. 동지 (양력 12월 22일 혹은 12월 23일 무렵,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 팥죽

​동지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남회귀선, 즉 황경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이 날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이 날은 밤이 길어 귀신들의 활동이 왕성하다 여겼기에, 악귀를 쫓는데 효험이 있다 여긴 팥을 이용해 죽을 쑤어 먹었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도 고사를 지낼 때 팥떡을 올리는 것은 이러한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이다.
팥은 악귀를 쫓고 소원을 이루어준다 믿었지만, 실제로 팥은 설사, 해열, 종기, 수종, 진통, 임질 등에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외도 다양한 세시풍속이 존재하나 초중등 교과과정에 언급하는 내용만을 정리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은 농업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농사'였기 때문이리라.
산업화 이후 농업에 대한 비중이 감소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에겐 명절과 세시풍속의 의미가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나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임을 잊지 말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5)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를 말합니다.
문제는 같은 나라에 대하여 볼 수 없다 또는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볼 수 없다는 표현에서 육신적으로 볼 수 없다.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에서 영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며 창조주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말씀으로 오신 메시야 즉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할 때는 그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를 볼 수 없다 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I. [타동사]
 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a. [사람의 대격과 함께 쓰임] 마28:7, 10, 막16:7, 눅16:23, 요8:57, 9:37, 14:9, 16:16,19,22, 20:18,25,29, 요일4:20, 계1:7.
   b. [사물의 대격과 함께 쓰임] 눅1:22, 23:49, 24:23, 요4:45, 6:22, 행2:17.
   c. [완곡어법] ㉠ ὁρ. τό πρό- σωπόν τινος, 얼굴을 보다, 행20:25, 골2:1, 계22:4. ㉡ ορ. τὴν δ όξαν τοῦ θεοῦ :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요11:40.
   d. [수동태] 보이다, 나타나다, 드러나다, 행2:3, 16:9, 계11:19, 12:1, 3.

 2. 경험하다, 목격하다, 증언하다, 눅 17:22, 요1:50, 3:36.
 
 3. [비유적, 정신적이고 영적인 개념]
  a.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b. 바라보다, 주목하다[정신적으로], 롬15:21.

II. [자동사]
 1. 바라보다, 보다, 요19:37.
 2. 조심하다, 주의하다.
  a. 본대로 하다, 그대로 하다, 마27:4, 행18:15, 22:26, 히8:5.
  b. 지키다, 경계하다, 마8:4, 18:10, 막1:44, 살전5:15.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들어가다

εἰ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1525

1. 오다.  2. 마 8:5. 3. ㉠ 히 9:12, 24, 25
발음 [ ĕisĕrchŏmai ]
어원 / 미래 εἰ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εἰσῆλθον , 과거 완료분사 εἰσεληλυ- θώς, 1519와 2046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오다, 가다, 들어가다, 들어오다.
 1. (장소]
  a. [도시의 명칭과 함께] 마8:5, 21:10, 막2:1, 11:11, 눅7:1, 행10:24, 23:33.
  b. [기타 장소] ㉠ [성소 안으로] 히9:12,24,25. ㉡ [성전 안으로] 눅1:9, 계15:8. ㉢ [집 안으로] 마10:12, 12:29, 막7:17, 눅1:40, 8:41, 행11:12, 16:15, 21:8. ㉣ [회당 안으로] 막1:21, 3:1, 눅4:16, 6:6, 행14:1, 18:19, [참조] 약2:2. ㉤ [성 안으로] 마10:11, 27:53, 막1: 45, 눅10:8, 22:10, 행9:6, 14:20. ㉥ [마을 안으로] 막8:26, 눅9:52. ㉦ [관청 안으로] 요18:28, 19:9, [참조]마6:6, 24:38, 눅9:34, 17:27, 요10:1, 18:1, 20:6, 행25:23.
  c. [일반적으로] 롬 5:1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히10:5.
  d. [흔히 장소가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상 유추할 수 있음] 마9:25, 막13:15, 눅19:1, 행1:13, 5:7,10, 10:25, 고전14:23, 24.

 2. εἴς τινα
  a. ~중에 들어가다[군중 속에], 행19:30, εἰς ὑμᾶς, 행20:29.
  b. ~에게 들어가다[특히 귀신이] 막9: 25, 눅8:30. ㉠ [귀신에 대하여] 막5:12,13, 눅8: 32,33. ㉡ [사탄에 대하여 유다에게] 눅22:3, 요13:27. ㉢ [기타] 눅9:46, 계11:11.

 3. πρός τινα: ~에게 오다, 가다, 막15:43, 행10:3, 11:3, 16:40, 계3:20.

 4. ἐπί τινα, 행1:21.

 5. [출발한 장소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마7:13, 19:24, 눅13:24, 18:25, 요10:1,2,9.

 6. [ὑπὸ τὴν στέγην과 함께] 지붕 아래로 즉 집에 들어가다, 마8:8, 눅7:6.

 7. [부사 εἰ. ἔσω와 함께] 안쪽으로, 내부로 가다, 마26:58, 22:12, 막14:14, 히6:20.

II. [비유적으로]
 1. [사람에 대하여] ~것 안으로 들어가다=~을 나누다, 공유하다, ~을 누리 기에 이르다, 마5:20, 7:21, 19:24, 막9:47, 10:15,23,24, 눅18:17,25, 요3:5.
  a.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다=그것을 얻다, 마18:8,9, 19:17, 막9:43, 45.
  b. 안식으로 들어가다, 히3:11,18, 4:1
  c.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다, 눅24:26.
  d. 시험에 들어가다, 마26:41, 눅22: 40,46
  e. 은혜 안으로, 마25:21,23.
  f. 수고 안으로 들어가다=수고의 열매를 누리다, 요4:38.
  g. [이 용법과 함께 목표가 언급될 필요는 없으나 함축될 수 있는 경우] 마7:13, 23:13, 눅11:52, 롬11:25.

 2. [사물에 대하여] 음식에 대하여, 마15:11, 행11:8, 사상에 대하여, 눅9: 46, 히6:19, 약5:4.

관련 성경
들어가다(마5:20, 눅4:16, 히9:12), 들어오다(마8:8, 눅7:45, 고전14:24), 참여하다(마25:21, 23), 들다(마26:41, 눅22:40,46), 나가다(막10:25), 오다(눅8:41), 일어나다(눅9: 46), 데리다(눅14:23), 돌아오다(눅17:7), 출입하다(행1:21), 이르다(행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동일한 나라이라면 들어다와 본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들어가다와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예언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로 오신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며 창조주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은 표적을 보면 메시아로 믿고 표적을 볼 수 없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일시적인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들어갈 수 없다,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5).
교회에 다니는 것을 거듭난 것(born again)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교회에 다니는 것은 종교행위이다.
거듭난 사람만이 주님의 교회에 속할 수 있고, 거듭난 사람이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수 있다(요 4:24).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짧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인지 모르고 산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은 어디로 가는가?
지옥으로 간다.
지옥은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다(막 9:44, 46, 48).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죄가 제거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종교나 인간의 자의적인 열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오직 거듭남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3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셨지만
5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똑 같은 의미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는 뜻이거나 하나님 나라의 부분이 되는 것이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보고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부분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함께 경험하여 공유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3절에서 본다는 말을 쓰고 5절에서는 들어간다는 말을 쓰신 것은 분명히 같은 말을 말만 바꾸어 하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두 단계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보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가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구경꾼이나 관광객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믿음이란 니고데모처럼 기적을 보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다.
물로 거듭나는 것도 역시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역시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어려운 본문에 단어 하나 하나가 구약성경의 깊은 울림을 간직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겉도는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기 위해서 거룩한 난동을 피우신 이 사건은 공생애 마지막 때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이 예수님이 한 말,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그 말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고소죄목이 되는 걸 볼 때, 공생애 마지막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죠.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추측은 합당하게 맞는 것이고, 니고데모가 찾아온 그 밤도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니고데모에게 썼던 칭호를 보면, 아르콘이라는 말과 디다스칼로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아르콘이라고 하는 관원이라는 말을 썼고,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 디다스칼로스입니다.
교훈적인이라는 말을 할 때 영어로 didactic 이라는 말을 쓰죠?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그 어원입니다.
아르콘은 뭡니까?
archangel, 아르크가 들어가면 대, 큰 천사, archenemy 하면 대 원수 이런 뜻이 되고, archangel 하면 대천사가 됩니다.
arche 하면 머리입니다.
창세기를 헬라어로 말하면 엔 아르케 가 되는 거죠.
요한복음도 엔 아르케, 이 말은 In the beginning, In the head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르콘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사법, 입법, 일종의 자치정치 기구의 한 관원입니다.
로마에 있었던 300명의 원로원과 같은 보수적인 지도자들의 모임입니다.
국회와 대법원을 겸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 71명 중의 한 명인데, 이름이 니코데모인 걸 볼 때, 니코라는 말은 victories라는 말이고, 데모스는 백성이라는 말이니까 뜻은 victories people 승리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이니까 이 사람은 그리스문화에 찬동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대부분 두 개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스 이름, 즉 헬라어 이름과 히브리이름을 가졌는데 이 사람이 니고데모라는 그리스 이름을 가진 걸 볼 때 대세에 순응하는 이스라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은 이스라엘 선생인데, 이 말은 씨, you yourself, 2인칭 대명사가 쓰였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선생님인데,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투 이스라엘, 씨라는 2인칭 남성단수대명사는 원래 쓰이지 않습니다.
쓰이지 않고,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그냥 동사만 써도 거기에 인칭과 성수가 표현돼 있기 때문에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칭대명사를 쓸 때는 굉장히 강조할 때만 씁니다.
그래서 씨 에이호 디다스칼로스, 여기서 You are the teacher of Israel, the teacher라는 말을 쓰면 뭐에요?
중세 때, the philosopher 하면, 중세 때 그 철학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말이죠?
the 라는 말은 대표단수 알죠?

정통종합영어에 보면 The wales is mammal, 할 때 그 고래는 포유류라는 말이 아니라 무릇 모든 고래는 포유류다, the는 대표단수다 이렇게 배우잖아요.

the 디다스칼로스, 당신은 대표적인 이스라엘 선생님이다,
이 사람은 71명의 관원일뿐만 아니라 학식에 있어서 최고봉에 올랐다,
유대교, 예수님 당시에 닫힌 종교였던 유대교, 교양과 가문과 교육으로 단련된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최고가 된 사람,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디다스칼로스는 닫힌 유대교 안에서 최고였기 때문에 초월 저편에서 쏟아지는 계시의 빛을 받고 깨달음을 갖기에는 매우 불리한 자기 충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 쌓아올린 교육 교양 혈통적 우수성 등이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초월 저편에서 오는 새로운 진리에 목마를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디다스칼로스가 바로 한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교육을 통해 자기수양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입니다.
문제는 왜 이 사람이 밤에 찾아왔겠습니까?

뉙토스, 밤에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낮에 난동을 피우셨잖아요.
예수님이 난동을 피우셨는데 또 율법을 어기고 바리새인 적대감에 먹이를 주는 행동만 했다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뭐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율법파괴자이고 신성모독자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이 사람이 헷갈렸던 것은 성전을 거룩하게 도발하시고 안식일 율법도 어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시는 이 분이 performed, 이적을 너무 많이 행합니다.
miracle, 표적을 너무 많이 행하니까, 2장 23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으나 예수는 이런 표적을 보고 믿는 대중들의 믿음에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았고, 표적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시대의 아젠다, 즉 자기를 임금 삼아서 정치적 지도자 삼아서 로마제국과 결승전을 치르게 만들려는 정치적 함정이 있는, 정치적 덫이 있는 열광과 지지와 추종인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 말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로마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는 모세적인 영도자로 예수 자신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얼 하러 왔습니까? 로마제국의 군대를 이스라엘 영토에서 추방하고 그 아래 토착 왕조, 다윗왕조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로마제국, 이스라엘 백성 안에 와 있는 우상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각인의 심령에 성령의 내주를 매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각의 심령에 성령 충만하도록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분이지, 1장 33절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신 그 분이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낸 것으로, 로마제국의 군대를 몰아내면 대개 누가 옵니까? 토착 유력자들의 왕조가 들어서겠죠?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하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토착 세습 왕조가 들어서는 게 전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진이 아닌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각인 속에 와 있는 노예근성, 죄, 대세순응주의, 배금주의, 물신숭배, 형제자매 차별주의, 이런 죄악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죠? 성령으로 세례를 주러 오셨단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계약 갱신, 언약갱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헐거워진 언약을 다시 한 번 갱신하여, 다시 한 번 언약적 결속감을 강하게 해주는 것, 이게 예수님의 뜻이었거든요. 여러분, 백성사이, 국민구성원 사이에 언약 공동체적 결속감이 강하다면 가난의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7남 3녀가 사는 대가족에 만약 한 형제가 못 산다면 어떻게 하던가요? 못 사는 형제를 나머지 형제가 어떻게 돌봐요? 추석 때마다 보면 대개 돕죠? 그게 형제간입니다. 한 형제가 못살 때, 심지어 동기생들도 장신대 신대원 84기 중 누가 못 산다 그러면 동기생들이 돈을 내 돕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합니다. 어떤 목사가 정당하게 목회를 하다 가난하게 됐다? 그러면 많은 돈이 들어옵니다. 많은 돈이 아니고 죽지 않을 만큼 돈이 들어옵니다. 부자가 될 만큼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그건 언약공동체의 결속감이거든요. 저도 형제가 많지만 내가 일차적으로 느끼는 책임과 경계선 안에 누가 잘 못살면 그건 송두리째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게 내 안에 있는 원천적인 상식이거든요. 교회가 그런 겁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와서 탁 쓰러졌다, 그가 교회 등록교인이다, 쓰러진 그 사람은 공동체적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등록이 참 중요한 겁니다. 등록이라는 말은 세례 받은 교우공동체, 성만찬 나눈 공동체에 그가 등록을 했다, 그러면 그때부터 법적으로 교회 상식으로 볼 때, 돌봄의 대상이 됩니다. 학교도 참 웃깁니다. 출장신고를 하고 가서 다치면 엄청난 보험금이 나오는데, 몰래 가서 다치면 전혀 돈이 안 나옵니다. 언약공동체를 확인하고 가는 사람, 그게 참 희한합니다. 이번에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몰래 갔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지원 못 받았습니다. 인하대학교 발명동아리 아이들이 춘천에 갔는데 학생처에 신고를 안 하고 자기들끼리 몰래 갔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 보고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인하대학교랑 보험회사랑 맺은 수혜혜택에서 다 제외됐습니다. 그래서 꼭 모든 동아리가 갈 때는 반드시 등록을 하라고 숭실대학교에서는 교육을 합니다. 특히 춘천 펜션에 가는 사람들은 생명보험까지 드는 게 낫습니다. 언약공동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형제우애적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시내산 기슭의 감격, 광야시대의 감격, 모세시대의 감격, 엘리야 시대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것은 최강로마를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이라고 본 것입니다. 형제자매끼리 우애가 튼튼한 것이야말로 로마 제10군단, 벳세다에 와 있는 로마 제10군단, 강력하고 중무장된 로마보병보다 더 센 힘은 형제자매끼리 신실한 사랑으로 결속돼 있는 것, 군대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본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 공동체의 중심이 돼야 할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성전이 function, 제 기능을 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참새와 제비 같이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자비심의 본산이 되도록 성전을 고치도록 한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 말은 무엇이에요?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가장 멀어진 자, 땅 끝에서 추방되고 버려진 그 자마저도 이곳에 와서, 아버지 내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소연 할 수 있는 그곳이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런 성전을 정결케했다는 말은 무엇이죠? 내가 부유하게 사는데 내 이웃이 여기 성전에 와서 기도를 합니다. 내가 예루살렘 산 1번지에 펜션과 빌라 엄청 좋은 집에 사는데 저 성전에 와서, 모레셋 가드 시글랏, 이런 지방민들이 와서 하나님 못 살겠다고 소리치면 부자인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못 살죠. 뭐할 때까지? 그들의 아우성이 그칠 때까지 내 재산은 전부 그들을 돕는 데 가야 되겠죠? 이것이 성전의 형평기능, 사회경제적 형평작업을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부익부 빈익빈을 영구적으로 정당화하며 빈부격차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면 그 성전은 파괴되어야 할 성전이죠. 예수님이 볼 때 성전은 빈부격차를 정당화하고 이방인과 야합한 이스라엘의 귀족층과 상류층들이 갈릴리 농민들을 못 살게 구는 악질적인 착취체제라고 보았어요. 그 착취체제의 배후에 성전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부순 게 아니라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산산조각 낸 파괴적인 빈부격차와 양극화 그 체제를 부순 것이죠. 그걸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의 본거지를 부셨단 말, 형제자매를 못 살게 굴고 형제자매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 이 악한 세상을 예수님은 도발하신 겁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전 청소하는 일만 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런 표적을 베풀지 못하면 우리는 바로 죽습니다. 예수님은 안 죽은 이유가 그렇게도 하시면서 표적을 베풀었기 때문에, 강력한 개인기라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겁니다. 그래서 밤에 3장 1절에 많이 헷갈려하는 이런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헷갈려하는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헬라적 교양이 많은 사람이 밤에, 괄호하고, 낮에는 부끄러워서 못 찾아옴, 밤에 찾아와서 성전을 청소하는 난동사건과 이 표적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성전을 훼방하시고 성전을 도발하신 이 사건은 꼭 불량배 폭도 같은 점이 있습니다, 신성 모독적 언동까지 보입니다, 성전을 허물어뜨리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면모도 보이지만 진짜 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모세급 엘리야급 예언자적 표적을 행합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정녕 누구십니까? 성전을 훼방하고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범하는 당신은 신성모독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표적을 행하는 당신은 진정 예언자입니까? 누구입니까? 3장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때 선생, 똑같은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예언자라 보지도 않고 하늘에서 온,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 신적 권위를 가진 선생, 랍비 또는 디다스칼로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 디다스칼로스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동급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디다스칼로스라는 말을 썼고,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디다스칼로스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될 텐데 왜 영접하지 못하죠?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속한 체제는 성전을 정점으로 하는 자기수양과 율법적 수련의 종교 그리고 인간적 교육적인 배경을 튼튼히 가지고 아래로부터 제공된 교육의 혜택을 듬뿍 받은 자들의 종교죠? 그렇게 혈통좋고 가문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서 71명에 든 닫힌 유대교 종교 안에서 최고봉에 오른 그 자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님이라고 만일에 믿었다면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가 속했던 체제를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봉으로써 아르콘으로써 디다스칼로스로써 자기가 누리는 존경과 신망과 리더십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옵니다. 만일 낮에 왔다면 스캔들이 되겠죠? 예루살렘 신문 일면에 나오겠죠. 니고데모 예수께 무릎을 꿇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연합정권 탄생하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와서 예수님께 이런 딜레마를 물었더니,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죠. 예수님이 지금 하는 것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기 시작하는 증거라고 보는 거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무엇이죠? 예수님의 모든 표적사역,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는 건 모두 뭐죠?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 사이에 오셔서 당신의 주권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노마이 동사,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32장 15-16절 읽어보세요.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이스라엘 각각의 사람들 마음이 바뀌고, 이스라엘이 집단적 갱신을 경험할 것이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다섯 가지 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왜 니고데모는 못 봤을까요? 지금 우리는 다 보는데 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선생님이라는 그가, 구약성경에 달통한 그가 왜 위로부터 초월적인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 개개인과 집단이 갱샌되어 하나님께 언약적 재결속감을 느끼는 그런 사태가 올 것을 왜 몰랐을까요? 이스라엘 선생인 그가 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괄호하고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6절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똑같습니다.

물은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Born again은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이사야 32장 15절, 앞으로 인용하게 될 성경구절에 의하면, 성령으로 그 심령이 갱신되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till the Spirit is poured upon us from on high, and the desert becomes a fertile field, and the fertile field seems like a forest.

에스겔 36:25-26
맑은 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sprinkle clean water on you, and you will be clean; I will cleanse you from all your impurities and from all your idols.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예레미야 31:31-34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 "The time is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make a new covenant with the house of Israel and with the house of Judah.
  6. It will not be like the covenant I made with their forefathers when I took them by the hand to lead them out of Egypt, because they broke my covenant, though I was a husband to them, " declares the LORD.
  7. "This is the covenan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at time,"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 in their minds and write it on their hearts.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8. No longer will a man teach his neighbor, or a man his brother, saying, 'Know the LORD,' because they will all know me, from the least of them to the greatest," declares the LORD. "For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will remember their sins no more."



요엘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에 베풀리니 곧 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가 어두워지고 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And afterwar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Even on my 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pour out my Spirit in those days.
I will show wonders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blood and fire and billows of smoke.
The sun will be turned to darkness and the moon to blood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And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for on Mount Zion and in Jerusalem there will be deliverance, as the LORD has said, among the survivors whom the LORD calls.


에스겔 37장

37 내가 여호와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그의 성령이 나를 데리고 가서 한 골짜기 가운데 두었다. 그 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 주위를 사방 돌아다닐 때 보니 그 골짜기 바닥에 대단히 많은 뼈가 있었으며 그 뼈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만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그는 이 뼈들에게 이렇게 예언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주 여호와께서 너희 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불어넣겠다.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을 붙이고 살을 입히며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

그래서 내가 명령을 받은 대로 예언하자 갑자기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뼈 저뼈가 서로 붙어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내가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였으나 그 안에 생기는 없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생기를 향하여 예언하고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외쳐라.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어 있는 몸에 들어가 이들을 살게 하라.’ ”

10 그래서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더니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 굉장히 큰 군대가 되었다.

11 그때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은 ‘우리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이 사라졌으며 우리는 완전히 망하였다’ 하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거기서 나오게 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거기서 나오게 할 때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14 내가 또 [a]너희 속에 내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를 살게 하고 너희를 너희 본토에 정착하게 하겠다. 그때 너희는 나 여호와가 그것을 말하고 실행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합을 상징한 두 막대기

15 여호와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16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b]‘유다 왕국’ 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c]‘이스라엘 왕국’ 이라고 써라.

17 그리고 네 손 안에 그 두 막대기 끝을 서로 연결하여 한 막대기처럼 보이게 하라.

18 “네 백성이 너에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겠소?’ 하거든

19 너는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내가 이스라엘의 막대기와 유다의 막대기를 결합하여 한 막대기가 되게 하겠다. 두 막대기가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20 너는 네가 글 쓴 그 막대기를 그들이 보는 데서 들고

21 그들에게 나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이 쫓겨간 모든 나라에서 사방 불러모아 그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 한 왕이 그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겠다.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을 것이며 두 나라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들은 우상들과 더러운 물건들과 그들의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범죄하고 타락한 자리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4 “ ‘내 종 다윗과 같은 왕이 그들의 왕이 될 것이며 그들은 다 한 목자 아래서 내 법과 규정을 따르고 지킬 것이다.

25 그들은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조상들이 살던 땅에 자손 대대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과 같은 왕이 영원히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26 내가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겠다. 그것이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견고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고 그들 가운데 내 성소를 영원히 세워 두겠다.

27 내 처소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게 될 때 모든 나라가 나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

Footnotes

  1. 37:14 또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2. 37:16 또는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
  3. 37:16 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

37 The hand of the Lord was on me, and he brought me out by the Spirit of the Lord and set me in the middle of a valley; it was full of bones.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and I saw a great many bones on the floor of the valley, bones that were very dry.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I said,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a]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I will attach tendons to you and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So I prophesied as I was commanded. And as I was prophesying, there was a noise, a rattling sound, and the bones came together, bone to bone. I looked, and tendons and flesh appeared on them and skin covered them, but there was no breath in them.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 breath; prophesy, son of man, and say to it,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Come, breath, from the four winds and breathe into these slain, that they may live.’” 10 So I prophesied as he commanded me, and breath entered them; they came to life and stood up on their feet—a vast army.

11 Then he said to me: “Son of man, these bones are the people of Israel. They say, ‘Our bones are dried up and our hope is gone; we are cut off.’ 12 Therefore prophesy and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My people, I am going to open your graves and bring you up from them; I will bring you back to the land of Israel. 13 Then you, my people,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open your graves and bring you up from them. 14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you will live, and I will settle you in your own land. Then you will know that I the Lord have spoken, and I have done it, declares the Lord.’”

One Nation Under One King

15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16 “Son of man, take a stick of wood and write on it, ‘Belonging to Judah and the Israelites associated with him.’ Then take another stick of wood, and write on it, ‘Belonging to Joseph (that is, to Ephraim) and all the Israelites associated with him.’ 17 Join them together into one stick so that they will become one in your hand.

18 “When your people ask you, ‘Won’t you tell us what you mean by this?’ 19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I am going to take the stick of Joseph—which is in Ephraim’s hand—and of the Israelite tribes associated with him, and join it to Judah’s stick. I will make them into a single stick of wood, and they will become one in my hand.’ 20 Hold before their eyes the sticks you have written on 21 and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I will take the Israelites out of the nations where they have gone. I will gather them from all around and bring them back into their own land. 22 I will make them one nation in the land, on the mountains of Israel. There will be one king over all of them and they will never again be two nations or be divided into two kingdoms. 23 They will no longer defile themselves with their idols and vile images or with any of their offenses, for I will save them from all their sinful backsliding,[b] and I will cleanse them. They wi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24 “‘My servant David will be king over them, and they will all have one shepherd. They will follow my laws and be careful to keep my decrees. 25 They will live in the land I gave to my servant Jacob, the land where your ancestors lived. They and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will live there forever, and David my servant will be their prince forever. 26 I will make a covenant of peace with them; it will be an everlasting covenant. I will establish them and increase their numbers, and I will put my sanctuary among them forever. 27 My dwelling place will be with them;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28 Then the nations will know that I the Lord make Israel holy, when my sanctuary is among them forever.’”

Footnotes

  1. Ezekiel 37:5 The Hebrew for this word can also mean wind or spirit (see verses 6-14).
  2. Ezekiel 37:23 Many Hebrew manuscripts (see also Septuagint); most Hebrew manuscripts all their dwelling places where they sinned

이사야 32장 15절, 에스겔 36장 25절 26절, 예레미야 31장 31-34절, 요엘서 2장 28-32절, 에스겔서 37장 전체,
다섯 구절이 성령으로 각각의 개인과 집단 이스라엘이 완전히 갱신될 것,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이 다섯 구절입니다.

다섯군데 성경구절은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도 거듭난다,
즉 성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각각 거듭나서 언약 재갱신을 하게 된다는 말이 다 나옵니다.
이 외에도 너무 많습니다.
많은데 우선 다섯군데만 말씀드린 겁니다.
중간 요약하면, 거듭난다는 말은 6절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 물과 성령할 때, 카이란 말, 히드로스 카이 프뉴마토스 할 때, 카이는 that is to say, 이런 뜻입니다. and 등위접속사, conjunctive 아닙니다. 카이는 and, 물과 성령으로 할 때, 물 곧 성령으로, 이런 뜻이에요. 위로 거듭난다는 말의 어원은 위로부터 난다, born from above 라는 뜻입니다.
born from above할 때 above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초월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으로, 이런 뜻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맞고 성령의 바람을 쐬고,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것은 정확하게 에스겔서 37장을 암시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의 이야기 에스겔 37장이죠.
이 내용을 왜 몰랐을까?
그 말은 한 번 닫힌 종교의 체제에 갇혀 버리면 나머지 성경구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에 관한 성경구절은 시편 2편과 솔로몬의 시편 18편, 외경 솔로몬시편 18편과 시편 2편만이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 정복군주, 알렉산더 대왕급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강력하게 잡고 나니까 이사야 53장 같은 이런 본문이 오실 메시아에 관한 본문으로 보이질 않는 겁니다. 도살장에 끌려가 죽는 어린 양과 같은 이 연약한 자는 메시아에 관한 성경구절로 안 보인 겁니다. 무엇때문에요? 우리가 캘비니즘에 빠지면 큰일 납니다.
웨슬리즘에 빠지면 큰일 나요.
지금 우리 한국에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 캘빈을 신격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캘빈을 성경수준으로 올리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캘빈의 글은 성경이 아닙니다.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웨슬리도 마찬가지고, 오류와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류와 불충분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 캘빈과 웨슬리 등을 신격화시키고 정경화시켜서 캘빈파들은 다 모여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넘어가고요.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이 성령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신적 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제가 풀지 못하는 미스테리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은 신적임의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바람을 맞고 가지와 뿌리가 흔들리고 줄기가 흔들리고 세차게 갱신을 경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감도 잡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에게 맞은 것처럼 내가 인간적으로 추적 가능한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는 신적임의성과 초월성 때문에 내가 누구의 설교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어느 시점에 성령을 받았다, 내가 장신대 가서 성령 받았다, 아차산 느티나무 밑에서 성령 받았다, 이게 안 된다는 말이에요. 왜? 신적임의성과 불가의성, 실제로 성령이 언제부터 내게 불었는지 몰라요. 제가 감을 잡기로 저한테는 79년 5월부터 많이 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영감의 바람이 청년 20대 때 계속 불었습니다. 그때는 제 생각과 세계관이 막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한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앙을 가질까 말까하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믿으려고 다닌 게 아니라 무얼 믿는가를 알기 위해서 다녔기 때문에 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전에도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때 따라 다닌 것도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성령의 임의성, 신적 임의성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해도 제가 여러분에게 다 구원을 약속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됩니다. 절대로 인간 목사나 교사가 구원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너무 놀랍고, 왜 둘 중의 한 사람만 거듭날까요? 저는 풀 수 없는 신비입니다. 왜 소수만이 거듭나고 나머지 절대다수는 왜 전부 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가버렸을까요? 지금 제가 돌이켜보면 12년 동안 캠퍼스 ministry 하면서 만난 사람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제 강의를 듣고 1년 2년 3년 한 달 그렇게 만났지만 그 사람이 다 낳고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니고데모는 혈통을 우선시했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교육적 배경이 이스라엘 지도층을 구성했거든요. 혈통과 가문이 성전 제사장을 다 채웠거든요. 혈통과 가문과 인간의 유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리더십이 다 채워졌거든요. 예수님은 성령의 임의성을 강조함으로써 혈통기득권, 가문기득권, 학벌기득권, 교육기득권, 특별히 예루살렘 지역기득권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입니다. 너무 신비한 겁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약속은 성경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령으로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거듭난다는 건 분명히 있고 새 언약백성이 된다는 게 나오고 성령 받고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생긴다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5-26절 이것만 읽으면 다섯 개 대표 본문 구절 다 읽은 거예요. 평소에 에스겔을 못 찾으니까 양진일 목사밖에 못 찾잖아요. 실제로 여러분이 에스겔을 평소에 안 읽어보죠? 우리 가향형제자매들 성경지식이 거의 다른 교회랑 비슷한지 상당히 영적으로 총기가 많은지, 여러분이 영적 총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순수해 보이기는 하는데 똑똑해보이지는 않아요.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지적으로 파고들고 굉장히 영적으로 예민한 사무엘 같은 영적 총기는 안 보여요. 무교병 같은 순결은 보이는데, 그 말은 뭡니까? 간신히 1인분 신앙생활은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공세적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성과 영성이 둘 다 비슷하게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하나님 진짜 사랑하는 건 말씀을 사랑하는 건데, 이 말씀 사랑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대부분 청년대학부에 가면 하나도 안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그걸 어떻게 개별적으로, 경건계획 보니까 성경 많이 읽겠단 사람은 거의 없던데, 대부분 그냥 단편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총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구원의 불길에 자기를 새롭게 태워서 정화하겠다는 야심찬 비전이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에스겔서를 이렇게 못 찾는 걸 보면, 오늘 느꼈습니다. 양진일 목사처럼 바로 찾아야죠. 찾지 말고 암송을 해야죠. 에스겔 36장 25절 26절은 바로 암송해야지 찾아 읽을 구절은 아니죠. 같이 읽겠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영이 바로 바람입니다. 영이란 말은 바람과 똑같은 말입니다. 바람도 되고 루하흐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영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모르듯이 영이 어디서 부는지 모릅니다. 에스겔 37장이 바람과 영이 interchangeble 서로 상호이용되는 것, 영으로 되고 바람으로 된다는 것이 에스겔 37장이죠. 거듭났다는 말은 에스겔서 36장과 37장 undeniable,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난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정확하게 거듭났죠? 거듭나는 걸 모른다, 누가?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비약적인 능력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인생관이 바뀌고 재능은 바뀌지 않지만 인생관이 바뀌어요. 바둑을 정말 좋아했던 제가 성령 받고 나서 바둑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도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듭니다. 바둑 한 판 두었으면, 그런데 제가 하나님 말씀에 창영돼서 바둑을 끊었습니다. 서예가 제 특기입니다. 1필 2지, 큰 묵과 벼루가 우리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저는 그것도 버렸습니다. 그걸 버리고 저는 하나님 말씀에 창영했습니다. 저는 20대 때 임해당의 바둑, 그걸 버렸습니다. 조선일보 신문만 보면 항상 바둑 기보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항상 누워잘 때마다 화투장이 들어온 게 아니라 바둑판이 들어옵니다. 그게 제 상태입니다. 바둑과 서예 등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낭만적인 연애를 해보고 싶다, 그걸 예수 믿고 나서 버렸습니다. 그건 나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가 되어서 떵떵 거리고 살겠다, 가나난 사람들을 잊어버리면서 내가 홀로 안전하게 살겠다, 저는 그 꿈을 버렸습니다. 나는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안전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일정정도 불안전한 요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중보자가 되기 때문에,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7,80대 죽는데 그때 죽어야지, 대부분이 일찍 죽는데 후배들보다 30년 오래 살면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지런함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부지런함 성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많이 공부했던 것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위로부터 거듭나면 혈통과 육정의 비즈니스에는 더 이상, 대학교 동창 고등학교 동창, 혈통과 육정과 본토 친척 아비집은 제게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직 보편적인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전 세계 만민이 어떻게 고루 우애롭게 살 것인가? 사자와 어린 양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것이 저의 모든 지향점이 되고 모든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의 전공이 돼버렸습니다. 영문학이 제 전공이 아니고 신학도 제 전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제 메인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야러분, 진짜 거듭나면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6개월-1년이상 계속 경험하면 내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고 나의 잠재적 은사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2,3년 이상 경험하면 충성과 온유와 양선과 절제, 성령의 열매가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네임이 정해집니다. 충성스런 사람, 온유한 사람, 성령 충만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 상태가 계속 유지돼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재미 없을까?
너무 긴박하기 때문에, 내 인생 자체가 드라마고 살아 있는 성공스토리고, 하나님의 감동스토리고 구원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인생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도 이 감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구원하게 됩니다.
이런 구원의 감동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만지자마자 구원이 번지고 그렇게 됩니다.
제가 제 주변 사람에게 구원을 전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밤과 결별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새벽기도에 나와야 하고, 밤과 결별하고, 20대 30대를 새벽에 제단을 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정 체질상, 사상의학으로 볼 때 새벽에 일어날 때 당신은 일찍 죽는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새벽기도 안 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청년은 여호수아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밤의 문화와 결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 잡다한 수다와 결별하고 말씀에 깊이가 있어야, 그래야 여러분이 2,30대 때 어떤 일에 적합한지를 아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 충만함의 결과 열매가 나타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직도 지향하지 못한다는 말은 성령이 여러분을 충분히 individualization, 개성화를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일치가 잘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공동체생활이나 성령충만하지 않은 교회생활은 개성이 다 없어지고 획일화됩니다.

참된 공동체는 개성화와 일치감이 동시에 증가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옛 허물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남녀들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내 님은 어디야, 하면서 엉뚱한 데를 쳐다봅니다.
성령충만하여 아름다워 지는 방법, 열매를 맺는 방법, 그건 인간의 값어치를 우주적 보배로 만들어버립니다.
성령충만은 우주적 보배의 값어치입니다.
여기에 한 번 도전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령의 역사가 신적 임의성을 따라 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성령 훅 불어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했을 때 모든 사람위에 각각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역사가 불가능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거듭나는 인생 최대의 신비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근 주목받는 CEO 중의 하나가 KTF의 조서환 부사장입니다.

조서환 부사장은 아이디어가 많아 휴대전화 번호이동 서비스, 샴푸와 린스를 합친‘하나로 샴푸’, 20세의 치아를 80세까지 유지하라는 ‘2080치약’, 휴대전화 서비스 ‘쇼(show)’ 등 여러 히트상품을 제조했습니다.

조 부사장은 23살 때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 생활을 하다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 때 조 부사장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병원 옆으로 이사 와서 병간호를 해 주었습니다.

손을 잃은 슬픔은 여자 친구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의 아버지가 나타나 딸을 끌고 가려 했습니다.

 

저항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그 남자를 택할 것인지, 집으로 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때 딸은 “만약 아버지가 손을 잃었다면 엄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나는 이 남자의 전부를 사랑한 것이지, 손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서환 부사장은 이때부터 평생 이 여자만을 행복하게 해주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사랑의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2008.02.27 국민일보 참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온전히 갖춰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습 이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신앙고백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구원 받은 백성 되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 초대 교회에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맨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부고장은‘○○○가 죽었으니 ○월 ○일 ○시에 입관/발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훗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었을 때 사람들이 ‘참 아까운 사람 죽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그 분이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 목사님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얹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섯 가지 특징

1. 점진적 성장해 가는 나라
2. 사회 변혁보다 개인 회심
3. 하나님의 선물과 잔치로
4. 인간의 책임적 동참 요구
5. 역사성과 초월성 동시에
6. 모든 사람들 포함하는 곳


1장 : 선교와 하나님 나라(사도행전 1:1-11)

제자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 선교의 핵심주제 :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첫 장을 열어보면 하나님 나라가 아주 중요한 주제로 대두됨을 보게 된다. 1장 1-2절에서 사도행전 기자는 전에 쓴 기록인 누가복음에 대해 언급한 후, 3절에서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라고 말하면서, 부활과 승천 사이 결정적인 사십일 간의 말씀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로 요약하고 있다.

뒤이어 6절부터 8절에 나오는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역시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 역시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게 돼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 전 40일 동안 말씀하신 주제가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하나님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다가올 세대(the age to come)’는 현 세대에 깊숙이 침입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미 시작됐던 ’다가올 세대‘가 현 세대를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뤄질 때 하나님 나라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임하게 돼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빌 2: 10-11). 또한 그때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마 6:10).

이 같은 재림의 시기가 올 때까지 즉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두 세대가 겹쳐 있는 격이 될 것이며, 이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의 선교적 사명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승천 바로 직전의 중요한 시기인 40여 일 동안 사도들에게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사도들의 선교적 사명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동상이몽(同床異夢)

하나님 나라가 이처럼 핵심적인 주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제자들의 이해는 사뭇 달랐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는 질문을 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에 줄곧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참고 막 10:35 이하, 눅 22:24 이하). 즉 제자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민족적이고 이 세상에 제한된 하나님 나라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우주적 메시아보다는 다윗 왕조를 재건할 지상적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오셔서 새롭게 통치하실 것을 기대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고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보다(마 1:21), 정치적 메시아로서 그들을 대적들로부터 구출하는 정복자 메시아가 될 것을 기대했다(눅 1:73-74).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베푸시고 있다. 즉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는 말씀은 이것이 믿는 자들의 사색 주제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때와 기한에 대해 사색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행 1:8).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사도행전의 주제라고 볼 수 있고, 여기 나오는 지리적 명칭들은 사도행전의 목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은 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는 8장 1-11절과 18절, 나머지 11장 19절부터 28장 31절까지는 복음이 유대의 경계선을 넘어 로마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의 존망에 대해 어떤 목적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할 일은 해방운동이나 어떤 투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기다려야 할 나라는 정치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증인이 됨으로써 임하는 하나님 나라이며, 이러한 나라를 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증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경의 수비학(숫자의 의미와 상징)


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 (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 (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 (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디모데후서 3:16)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신비한 상징과 의미

1. 숫자에 대한 의미들


숫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성경의 숫자에는 하나님의 의도, 계획, 뜻이 함축되어 의도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서 말씀과 상징들에 여러 가지 의미들을 더하시며 항상 변함이 없으신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성품 중 변함이 없으신(말라기3:6)동일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으며 언제나 동일하신(히브리서4:12절)성품을 그대로 숫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숫자의 의미에 담고 계신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역사는 많은 변화를 거쳐 모든 것이 변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숫자들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원히 변함이 없이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숫자에 대한 개념은 대단히 정확하고 깊어 자녀에 대한 사랑과 하시는 일에 대한 표현을 숫자를 통해 표현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계수 하시고(시편147:4), 나의 걸음을 세시기도 하고(욥기14:16),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 신바 되고(마10:29-30), 율법의 일 점 일획도 변함이 없어야(마5:18)한다고 숫자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 외 성막의 건축과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교한 수치를 자세하게 지시하실 만큼 숫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계

신다. 

그럼 지금부터 숫자에 대한 성경적 의미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연구해 보자

1. 하나, 일치, 연합
사도행전 4:32,33
시편 133:1-3
고린도전서 1:10
에베소서 4:3-6

2. 나눔, 분리, 두 배의 기름부음, 상호보완 
창세기 10:25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히브리서 8:1-12
마가복음 6:41
사도행전 27:41

3. 부활(회복, 다시 살아남)
열왕기상 17:21
열왕기하 4:16-32
요한복음 6:40
요한복음 21:1-14
히브리서 11:17-19

4. 첫 번째 창조, 육의 것, 땅의 것, 피조물, 자연인, 육신에 속한 사람,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 -

하나님은 4를 염두에 두고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셨다.
예를 들어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하루 4번. 달의 변화는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로 구분. 공간을 측정하는 것 길이, 넓이, 깊이, 높이로 측정함. 만물의 4 원소 물, 불, 공기, 흙

5. 하나님의 은혜 
다윗이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쓰러트림
손가락, 발가락, 인간의 감성이 오감으로 느껴짐
수학적인 주장으로는 최초의 짝수 2와 최초의 홀수 3의 합이 5이다. (1은 홀수가 아니다.)
출애굽기 32:5 - 소, 나귀, 양때, 남종, 여종을 보내서
출애굽기 33:12-17 - 은총이 5회
룻기 2:1-10 - 1-9절까지 보아스가 5회 나온 후 10절에서 룻이 엎드려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사무엘상 16:13-22 - 다윗이 5회 나온 후 은총을 입어
고린도후서12:1-12 -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세 번 간구했을 때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헬라어로 다섯 단어로 표현함.(바울의 육체의 가시란? 질병이 아니라 유대인의 공격이 평생지속 된 것을 의미) 10절에서 다섯까지 통로를 통해서 은혜의 통로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음.
이사야 9:6 - 아들의 이름
기묘자
모사
전능의 하나님
영존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창세기 15:6-9 - 6절 믿음으로 구원
9절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출애굽기 27:1 - 아카시아 나무로 번제 단, 장이 오규빗, 광이 오규빗, 고는 삼규 빗
민수기 3:46-48 - 속전을 치룰 때 두 당 오세겔씩

6. 두가지의 상반된 의미 1. 안식과 완성을 의미, 끝 맺음,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한 갈망 2. 사단의 영향력, 사단, 사단의 역사, 중심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완전한 수"로 해석
1 은 모든 수의 출발, 최초의 짝수 2, 최초의 홀 수 3으로 해석하고 있다.

1더하기 2더하기 3더하기는 6이다.
1곱하기 2곱하기 3곱하기는 6이다.
물분자 구조가 육각형, 벌의 집 모양도 육각형이다. 자연적인 구조물은 6과 관련 된 것이 많다. "6"이 완전해 보이기는 하나 이것은 자연적인 시각이며 자연적인 구조에 대한 영향력이다.

마태복음 4:1-13 - 마귀, 사단, 시험하는 자 명칭이 6회
욥기 1:9 - 욥 이라는 이름이 6번째 언급될 때 사단이 공격
요한복음 8:44 - 여섯째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32:6 - 우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민수기 11:5 -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6가지 불평
에스더 3:6 - 하만의 이름이 1절부터 6번나올 때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고자 하심
다니엘 3:1-5 - 금 신상의 넓이가 6 규빗
5절 - 사단에게 경배하기 위한 악기 6가지
다니엘 5:4 - 우상을 만들 때 사용한 재질 6가지
금, 은, 동, 철, 물, 석
누가복음 17:28 -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고린도전서 5:1-5 - 음행한 자는 사단에게 내어준다.
11절 - 6종류의 음행의 죄를 기록함
베드로전서 4:3 - 너희 죄의 항목 6가지
계시록 9:13-20 -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태초에 창조가 6일째 끝났다.

지성소의 육면체로 만들어 짐

7. 완성, 완전한 끝맺음, 온전, 완전 

헬렌 바흐라는 사람은 "모든 순환하는 물체에는 7이라는 수와 관계가 있다."라고 했다.
음계 - 도에서 시까지 7음계로 구성
무지개 -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으로 구성(하나님의 약속을 의미)
요일 -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7일로 구성 됨
인생의 7년주기 변화를 이야기 함
7세 - 젖니 빠짐
14세 - 성장의 단계(여아는 잉태가 가능한 나이)
21세 - 남자에게는 수염
28세 - 인생의 절정기
35세 - 결혼 할 나이
42세 - 분별력이 온전케 됨
49세 - 이성에 의해서 영혼이 고귀해 지는 시기
56세 - 분별력과 이성이 완성
63세 - 열정을 극복하고 이성과 공정성이 온전케 됨
70세 - 삶의 정점에 이르러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 함
고린도후서 12:9 - 내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에서 "온전"은 헬라어 7단어로 쓰임
계시록 10:7 - 일곱째 천사가 이루리라
계시록 16:17 - 일곱째가 "되었다" 는 "개곤낸"이란 히브리어로 7단어로 기록하심
계시록 15:6-7 - 일곱 재앙을 일곱 천사가 
일곱 금 대접과 일곱 천사(7×7〓49 "하나님의 진노")
창세기 7:10 -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 창세기에서 땅 이라는 단어가 49번째 나올 때 홍수고 심판하심

열왕기하 8:1-3 - 칠 년 동안의 완벽한 기근 
칠 년 우기
칠 년을 다하매 
여호수아 6:3-5 - 성을 6일 동안 돌고
일곱 나팔 제사장
마지막 날에는(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나팔을 불면 성이 무너지리라 
열왕기하 5:1-7 - 일곱 번 씻 으라
열왕기하 4:35 - 일곱 번 재채기하고 깨어나다 
계시록 16:1 -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 으라
창세기 4:15 -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24 - 가인은 칠 배의 벌이
라맥은 벌이 칠 십 칠 배
창세기 41:1-7 - 칠 년 주기의 꿈
마태복음 18:21-22 -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잠언 9:1 - 지혜가 일곱 기둥으로 집을 세운다.
스가랴 4:2 - 일곱 등잔, 일곱 관이 있고
시편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鍛鍊)한 은 같도다

8. 새로운 탄생, 새 창조, 거듭남

요한복음 3:3-8 - 거듭났다는 단어가 8번나옴
골로새서 3:9-11 - 8종류의 새사람
베드로후서 1:4-7 - 신의 성품 8가지
베드로전서 3:20 - 새로운 인류의 시작 8명
사무엘상 17:12-14 -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형제 중 8번째다.
창세기 20:4 - 이삭이 8일만에 할례

9. 성령의 열매, 거듭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새로운 탄생이 있은 다음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갈라디아서 5:22-23 - 성령의 열매 9가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FAITH)


10. 법, 율법, 가르침을 의미
출애굽기 20:3-17 - 십계명
창세기 16:3 - 가나안에 10년째 거주
출애굽기 26:1-3 - 다섯 폭의 앙장과 다섯 폭의 앙장을 하나로 합하는 것
출애굽기 12:3 - 그 달 10일에 취하라 
사무엘상 25:38 - 한 열흘 후에
다니엘 1:12-15 - 열흘의 기한이 지난 후에 올 결과 
에스겔 24:1 -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11. 심판을 의미

출애굽기 14:2 - 애굽의 11가지 재앙
히브리서 11:20 - "빠져 죽었으며" 헬라어 11단어
창세기 5:32 - 아담의 11대손인 셈, 함, 야벳세대의 홍수심판
오바댜 1:8-11 -에서자손의 멸망을 예언
창세기 36:40-43 - 에서 에게서 나온 족장의 11족장
민수기 13:25-33 - 열하룻길 가데스 바네아 (심판의 장소)

신명기 1:2 -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이사야 3:1-3 - 심판할 사람 11명을 열거
예레미야 52:1-9 - 야곱의 11번째 자식이 딸 "디나"-심판의 의미가있다.

12.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위의 의미
다니엘 4:29 - 느부갓네살이 12달이 지난 후
마태복음 19:28 - 열두 보좌
마태복음 15:35-38 -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명을 먹이고 7광주리남음, 12광주리 남음.
요한복음 11:9 - 낮이 12시간
욥기 38:31-33 - 열두 궁성 (북두칠성과 그 속한 별들)
민수기 33:9 - 12샘물
열왕기상 7:25 - 12마리의 소
창세기 12:7 - 아브라함이 12번째 나타날 때
에스겔 41:1 - 성소의 넓이가 12규빗
계시록 22:2 - 12가지 실과를 맺히되, 그 잎사귀 - 만국을 소성 하기 위하여 있더라

13. 죄, 반역, 타락, 반항, 대적의 의미
미국에서는 13이라는 숫자의 의미 때문에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손해를 보고 있다.
마가복음 7:20-22 - 13가지의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창세기 14:4 - 십 삼년 - 배반
창세기 10:8 - 니므롯 - 바벨탑을 건조한 자 - 아담이후 함의의 13대손(창10:10-)
에스더 3:12-13 - 정월13일에 조서를 내렸고 13일에 모두 죽임.

계시록 20:2 - 용이란 단어가 13번째 나올 때 결박
창세기 17:25, 골로새서 2:11 - 이스마엘이 13살에 할례를 받았고 이삭은 8살에 할례를 받음

14. 구원, 해방, 석방, 육체읙 구원
출애굽기 12:25-27 - 그 달 정월 14일에
요한1서 3:14 - 헬라어 14단어로 기록
사도행전 11:14 - 헬라어 14단어로 기록

15. 안식의 의미
레위기 23:6 - 이달 15일은 무교절이니
에스더 9:18 - 15일에 쉬며
레위기 23: 34-35 -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
민수기 29:12 -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출애굽기 16:1 -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에스겔 32:17 - 제 십이년 어느 달 십오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창세기 7:20 -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열왕기하 20:6 -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
이사야 38:5 -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16. 사랑, 주를 향한 사랑, 주님이나를 향한 사랑, 일반적인 사랑
고린도전서 13:4-8 - 사랑의 특성 16가지
고린도전서 14:1 - "사랑을 따라 구하라" 헬라어 16단어로 기록


17. 승리(죽음을 이기신 승리)를 의미 
로마서 8:35-39 -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 17가지
사무엘상 17:45 - 물매돌 5개와 하나님의 능력(12)로 승리함
요한일서 5:5 - 헬라어 17단어로 기록
창세기 8:4 - 칠월 곧 그 달 십칠 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창세기 47:28 -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하였으니
예레미야 32:9 -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8. 구속, 매임의 의미
누가복음 13:16 - 사단에게 18년동안 매인바 된 여인
누가복음 13:4 - 치어죽은 18사람
사사기 3:14 -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
사사기 10:8 -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예레미야 52:29 - 느부갓네살의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삼십이인이요
누가복음 13:11 -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19. 믿음 - 1부터 19까지 더하면 합이 190이다.-
히브리서 11:11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나이 100세 사라는 90세
로마서 10:10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19글자로 기록
고린도전서 15:11 -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9글자로 기록

20. 구속, 값을 치룸의 의미
출애굽기 30:12-14 - 이스라엘은 20세에 속전을 치룸
창세기 18:31 -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창세기 37:28 -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레위기 27:5 -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민수기 10:11 - 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매
민수기 32:11 -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사사기 4:3 -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사무엘상 7:2 -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열왕기상 9:10 -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열왕기상 9:14 - 히람이 금 일백 이십 달란트를 
열왕기상 9:28 - 금 사백 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
열왕기상 10:10 - 금 일백 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 역대하 4:1 -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

21. 죄가 관영함의 의미
로마서 1:28-32 - 악한 것이 21가지이다.
예레미야 52:1 -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다니엘 10:13 - 그런데 바사 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22. 빛, 나타냄, 들어냄의 의미
출애굽기 25:31-34 - 등잔 22개(성소에 있는 등대)

23. 죽음, 사망의 의미
로마서 1:28-32 - 이 일을 행하는 자. 영어성경에서는 23가지 죄를 말함
고린도전서 15:56 - 10+13=23
로마서 7:9 - 10+13=23
누가복음 23:43-46 -예수님은 14일(유월절) 제 구시에 죽으심
계시록 18:8 - 11+12=23
요한일서 5:16 - 11+12=23
예레미야 25:3 -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24. 제사장직을 의미
역대상 24:1-9 - 24명의 족장이 제사장직 감당
계시록 4:4 - 24보좌, 24장로

25. 죄용서를 의미
에스겔 40:1 -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오 년이요 
누가복음 24:13 -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촌으로 가면서


26. 복음을 의미
27. 복음 전파, 예언을 의미

28. 영생을 의미
29. 출발을 의미, 믿음의 성취로써의 기대

30. 피값, 예수 그리스도의 피,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미 
창세기 18:30 -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창 41:46 -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출애굽기 12:40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민수기 20:29 -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의 죽은 것 을 보고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였더라
신명기 34:8 -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마태복음 27:3 -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31. 후손, 씨,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 함
32. 언약
33. 약속
34. 인내
35. 소망
36. 적
37. 높임
38. 의
39. 진리


40. 시험, 환난(사단의 영향력에 의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 녀와 백성에게 내려지는 보응)
신명기 8:2-5 -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심

사사기 13:1 - 블레셋 하에서의 40년 생활
사도행전 7:23 - 애굽에서의 모세의 삶

41. 속임수, 사기
42. 재림


42는 6?7과 7?6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6?7은 6을 7번 곱하는 의미에서 6의 의미가 앞서 나온다.
6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사단의 수를 의미한다.
7은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교만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대로 7곱하기 6은 하나님의 완전수가 육체적인 제한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이런 경우 상반된 두 가지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꿈 해석에 적용하는데 난감한 부분이 있지만 오히려 꿈의 상황과 느낌 꿈의 전개되는 내용을 정확히 분석하면 오히려 더욱 분명한 해석으로 가져가기가 수월해 진다.
상반된 의미는 오히려 더욱 해석의 질과 깊이를 더해주는 경우가 많다.

46. 불못 사망
49. 하나님의 진노
50. 영, 성령, 희년, 기쁨 혹은 구원
51. 하나님의 계시
65. 배교
70(72). 영과 권세가 크게 강조된 온전한 영의 세계의 질서, 열방을 의미

눅10:17-19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심(70 혹은 72명)

히브리어로 70이나 72는 열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누가복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점령하셨다는 의미로도 말함

72. 예수님 당시 그리스어 역본에는 창12에 기록된 열방의 수가 72로 기록됨(70과 72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봄)
91. 내어 쫓다

100. 백배의 축복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105. 주님의 이름을 부름 
120.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뜻을 이루시기 까지 기다려야하는 기간을 의미한다.
수련기간이다.


153. 베드로의 물고기와 예수님의 명령, 사람과 직접 관련된 영혼 구원을 의미함

물고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1:11 물고기를 잡지 못해 낙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그물을 끌어 올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


200. -이 채워져야 함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것


300. 승리 - 기드온의 삼백용사 -

360 - 남아있는 징벌의 기간
390.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기간- 390년, 죄악의 년 수


400.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기다리는 기간

출애굽을 시작한 기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남의 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다.

430 - 유다집의 죄악의 년 수
536 - 포로에서 풀려남, 귀환

606 - 포로로 끌려 감

666. 적그리스도의 이름






독생자(요 1:14. 3:16. 18. 4:9. 히 11:17)


독생자(요 1:14. 3:16. 18. 4:9. 히 11:17)

요한복음 1:14 / 우리말성경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독생자(3439) 모노게네스(mŏnŏgĕnēs)  μονογ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3439

1. 오직.  2. 독생하신
발음 [ mŏnŏgĕnēs ]
어원  / 3441과 1096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 2.
    독생하신, 요1:14, 18, 3:16, 요일4: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독생한(요1:18). [명] 외아들(눅9:38, 히11:17), 독생자(요1:14, 요일4:9).
3441.

μό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3441
1.

오직

2.

홀로 있는

3.

버려진

발음 [ mŏnŏs ]
어원
33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1096.

γίνομαι 스트롱번호1096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21:19

발음 [ ginŏmai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