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위해 아들을 죽인 하나님(요한복음 3:16-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3장 시작 부터 있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끝나고 16절 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는 내용이
시작 됩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 봤을만한, 그만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모두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 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기독교의 교의 (Dogma)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찾아오셨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의
보내심의 교리(the sending formula)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신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교리인가? 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온 종교가 있나요?
어떤 종교가 신이 사람을 찾아 왔다고 얘기하나요?
고등 종교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이 땅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인간이 찾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내심의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사상이 들어 있고, 또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아서 그 분의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Sending Formula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써의 자격이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선재하지도 않았고, 권세도 없는자가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17절에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렌( ἀπέστειλεν)은 내쫓다, 유기 시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유기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ἀφοριζω
스트롱번호 873
관련 성경 / 갈라 내다(마13:49), 구분하다(마25:32), 떠나 물러가다(갈2:12), 멀리하다(눅6:22), 택정하다(롬1:1, 갈1:15), 따로 세우다(행13: 2, 19:9), 따로 있다(고후6:17).
내어줌의 교리(Giving up Formula)
죄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 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 유기 시키셨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감동이 없지만, 이는 사실 문제인 것 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너무 무뎌져서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 보다 더욱 감동을 주는 구절은 성경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고 내어 주셨다는 이 말씀에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않되는데도, 엉뚱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런 진리를 듣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지칭하는데, 독생자라는 뜻의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 외아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독종자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귀한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2:2>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는 유일 무이한 독생자 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에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해 이 땅으로 유기 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로마서 5:8>
우리는 이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 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먼저 흘러 나온 것 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얘기하는 3장 16절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 있기에 사랑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의 흉내, 용서의 흉내를 낼 수 있듯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이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를 모르더라도 사랑의 모습 또는 단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 입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변합니다. 또 인간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 입니다.
결국 그 죄인들의 사랑은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멕시코 영화 중에 아모레스 페로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치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전직 대학 교수인데 혁명에 참여 했다가 20년간 복역을 하고 나와서 살인 청부업을 하며 삽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위해서 돈을 열심히 모읍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있는 개들을 여러 마리 데려다가 쓰레기 같은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다 교통 사고 현장에서 투견에 쓰던 총상을 입은 개를 하나 발견 합니다. 코피라는 투견에서 맹위를 떨치던 개였는데, 치료를 해주고 다른 개들과 같이 키웁니다.
그런데 치보가 자신에게 청탁이 들어온 사람을 살해하고 들어 왔더니 코피라는 투견개가 자식처럼 키우던 다른 개들을 물어 죽인 것 입니다. 그래서 치보는 총을 들어 코피를 겨누는데, 문뜩 자기 자신과 코피를 오버랩 해서 비교 합니다. 코피는 주인을 위해서 다른 개들을 목숨걸고 물어 죽였던 투견개 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살인 청부 업자 였죠.
자기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막 죽이며 다녀 놓고는 이 개가 자신이 사랑하는 개들을 죽였다고 개를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개도 아까운 것이고 남의 것은 사람이어도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기 딸을 위해서 돈을 모은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말 입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의 사랑과 일관성을 갖는 하나님의 사랑
이 영화를 만든 이나리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이기주의를 또 타락을 얘기하고 싶어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모습이며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랑에 대한 증거 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 속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 변치 않는 속성을 사랑으로 갖고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 졌을 때, 그 사랑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비춰지게 되는 것이지 우리안에서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사랑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입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인가요? 우리가 회개하고 착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부터 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이 꼭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터 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고, 베드로 전서 1장에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예정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요한 계시록 13:8>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 입니다. 즉 어린 양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세워진 것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의 저편에서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 내고 계셨던 것 입니다. 십자가는 역사를 너머 영원에 서 있고, 이 십자가의 효력은 전 역사에 미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섰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님은 창세 전에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 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셋은요?
에녹은요?
이들은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거죠.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룻이나 라합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있다는 것은 구원 계획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았다는 메세지를 성경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것 이었음을 힌트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선민 사상의 정점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유대교와 그 형식 주의를 박살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메세지를 요한은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
- 창조 과학회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동전 10개가 있습니다.
흔든 다음 처음 1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입니다.
다시 집어 놓고 처음에는 1번 동전을 꺼내고 두 번째는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0입니다.
이런 식으로 열
번을 꺼낼 때에 1번 동전부터 10번 동전까지 차례대로 꺼낼 확률은 10에 10승 즉 1/100억입 니다.
100억번을 시도하면 한번 나타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확률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동전 열 개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안계시면 창조도 운행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1. 지구의 자전 속도 한 시간당 1,600km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10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납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2.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지축은 23도 기우러짐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머 예화 / 장학사가 어느 학교를 방문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이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지?"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제가 안그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학사가 담임 선생님께 "내가 이 학생에게 지구가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이 자기가 안그랬다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엔 담임 선생님이 말합니다.
"그 학생은 착한 학생입니다. 게가 안그랬다고 하면 안그랬을 겝니다."
기가찬 장학사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 학교 어떻게 된 겁니까? 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왈 "국산 다 그렇지요 뭐!"
지구가 23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4.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5.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겠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브리서 3:4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후면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옷"이다.
몹쓸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마태복음 5:44~4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선한 사람에게만 비춰주시지 않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에게만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시는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야 철이
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달아지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빵 하나를 먹어도, 그 빵
하나를 먹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밀농사 짓는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클까요?
또 밀가루 공장에서는 품질이 좋은 밀가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할까요?
또 빵집에서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먹는 빵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빵 한 조각을 먹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가 담겨져 있는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면 그만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도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학생 시절에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기쁨이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으며,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우 하게 사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빵을 먹은 적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그녀는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왔으며, 그녀는 죽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녀는
그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으로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구호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고, 그 구호 단체를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생명을 부지한 그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 소녀가 바로 오드리 햅번입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라고 말하던 그녀는 죽은 후에도 ‘홍보 대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구호를 돕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받은 사랑을
감사할 줄 알고, 남에게 나눠 주는 사람들이 모일 때,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랑이란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물이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아름다운 들과 산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선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독생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 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갇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불길이 너무 심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아버지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국가나 정부나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재능도 아닙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척 스윈돌
목사는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과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경제학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를 사함 받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실 구세주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최고의 선물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게 되었고,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고, 죽어야 할 자, 지옥에서 멸망을 당할 자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일본에 카가와 토요히코라는 유명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시장(市長)의
소실 태생입니다.
그는 시장 본처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는데, 그 형제들이 하나같이 그를 구박했습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 가지고……” 하며
서자인 그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했지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무룩해 있던 그가 어느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카가와 토요히코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토요히코는 당장에 그 대열에 따라 나섰습니다.
전도대원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아무개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아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고, 행복한 자가 되! 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 보니 선하게
산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 그 집사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웠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도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를 많이 지었지만, 저와 여러분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변호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기에 주님이 내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모든 저주로부터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목회의 해답도 사랑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목회를 잘하는 방법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민족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선교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사회도 가정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감으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독특성(獨特性)과 절대적(絶對的) 사랑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낮은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감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화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지 못한 까닭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된 자화상은 무엇이고 우리가 확고하게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독특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제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개개인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장애가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절대적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금반지가 찌끄러졌다 할지라도 그 금의 가치가 여전한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예뻐야 사랑하고, 아름다워야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로마서 8:32).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최고, 최상의 것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 이하의 것은 아끼지 않고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누가 죄인을 위해 사랑스러운 자식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탕자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내가 창조주였다면 벌써 이 세상을 박살내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떠서 태평양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사이 합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했는데 얻은 사랑은 좋다. 그러나 구하지 않았는데 얻은 사랑은 더욱 좋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구해서 얻은 사랑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마어마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1-14)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른다.
들깨를 기름틀에 넣고 짜면 들기름이 나오고, 포도를 짜면 포도즙이 나오며, 양파를 넣고 짜면 양파즙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피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의 중심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의 핵심은 피입니다.
제물을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피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속죄 제사를 드리는 자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물을 대신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드려야 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피로 속죄에 필요한 모든 피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음으로 믿고 고백하면 더 이상 실제적인 피 흘림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배로운 피 곧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무엇인가?
1. 죄를 속죄하는 능력(히브리서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 보혈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때 저질러 진 죄라도 다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한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산다"는 의미입니다. 저당잡힌 것을 값을 주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값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없는 피를 쏟아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그 피가 나를 죄에서 해방시켰음을 믿으면 구원받고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
롬 8:1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출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 날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 애굽에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pass over 곧 유월(踰越)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유월절이라 했습니다. 그 피가 재앙을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중세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수도원 원장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기도만 하면 사람을 투시해 봅니다. 과거의 죄를 다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들어왔는데 옛날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 마음이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 앞에 오니까 벌벌 떨립니다. 내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겠지 싶어서 그 원장이 와서 “원장님! 원장님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과거의 죄를 다 보여 주셨는데 내 죄를 보여 주십니까?”
그러니까 원장이 “며칠 후에 오시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볼테니까?” 며칠 후에 원장님실에 가니까 원장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죄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니요.
내가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당신 회개했어요?” “회개했어요.”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보혈로 씻고 잊어 버렸어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니 하나님은 당신의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왜 당신 자꾸 있다고 그래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지 마시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를 다시 기억나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시고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2. 하늘 성소에 들어갈 담력(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보혈을 힘입어 죄인이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됩니다. 보혈이 없이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에 하나님조차 기억하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혈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예수님의 피의 대가로 우리를 자녀 삼았습니다.
요한1서 5:18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녀의 권세입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를 손 못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구속이란 구속은 덮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보이니까? 악한 영들이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을 덮어 가릴 수 있게 보혈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불을지라도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다 덮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이 범죄하고 난 후에 나타난 현상이 죄를 지어면 따라오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뭇 잎사귀로 중요한 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숨었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이 숨은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두움이 빛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인간이 낙원 외부의 거친 환경 속에서 수치를 가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옷을 지어주셨다는 뜻도 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을 잡아 짐승의 피를 내어 죄를 덮으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 피로만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속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무거운 죄의 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죄의식, 죄책감 다 털어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히브리서 9:14)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남아있던 죄의 흔적들, 죄가 남긴 것들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순종하여 피를 바른 가정은 하나님이 그 가정의 장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유월절은 ‘pass over’ 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넘어가는 역사가 피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오늘날의 이 피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 그 가정에 예배가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있는 한 가정을 무너트리는 어두움의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벧전 1:2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뿌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피를 뿌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며 어두움을 물리치며 질병을 치유하며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대로 그 피를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뿌리되 모든 장막과 쓰는 그릇에 까지 정결하게 하기 위해 뿌리라고 하십니다. 창 3장 이후에서 보듯이 일단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우리 안에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죄는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그 다음은 사람과의 단절이며 마지막으로 환경과 문화의 타락입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다시 말해 사람에게서만 더럽고 썩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보혈의 능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정욕,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을 깨끗이 씻어서 참된 성결을 이루게 될 때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마귀를 물리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인간에게 온갖 불행과 재난과 불안을 갖다 주다가 자살까지 하게 만듭니다.귀신들도 보혈을 알고 또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혈의 능력을 알고 믿음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하며 물리쳐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은,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정욕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롬5:4에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육체의 정욕과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단호히 결심하고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작심삼일로 삼일도 못가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주저 앉게 되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은 인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하여, 우리의 결심과 결단을 금새 무너트리고 우리에게 비참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빈곤한 상태로 빠트립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와 친구가 되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맺게 하고, 온갖 분쟁과 시기와 당짓는 것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에 빠지게 만듭니다(갈5:17-21). 뿐만 아니라 거짓을 조장하고, 서로 불신과 미움과 악한 감정을 갖게하여 서로 분열하게 하고, 교만과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은, 인간을 정욕의 노예로 만들려고 힘을 다합니다.
이같은 사탄의 세력과 싸우려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고 부단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은 스스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삶이 육체에 끌려 다니는 정욕의 노예처럼, 세상과 짝하여 세상과 타협하기를 즐겨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불의와 싸우고 능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우리를 위해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골 2:15).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만이, 육체의 정욕을 이기며 사탄과 대적하여, 능히 승리의 함성을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고, 사탄을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로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보혈(히브리서 9:11~22)
히브리서를 일컬어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행하셨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사역하시는 말씀이므로 제5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들의 양심이 깨끗해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룹니다.
그 피는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정결함과 죄사함은 없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 새 언약의 중보자, 언약의 피, 피 흘림과 죄 사함 등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구약의 제사제도로 인해 육체가 정결 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제사 때이나 속죄일에 죄인들과 성소에
뿌려집니다.
이는 정결을 위함입니다.
또한 암송아지의 재도 뿌립니다.
율법에 따르면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민수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됩니다. 또한 두루마리 성경 즉, 구약성경에 뿌린 것도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에 정결 의식을
위해 뿌린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물건마저 모두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피는 언약을 세우는 용도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장막과 모든 기구에 뿌려져 그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 피는 정결과 속죄를 위하여 효과가 있었으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사는 매일 반복되어야 되고, 그에 따라 짐승도 계속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혈의 능력(히브리서 9:13-14)
구약성경을 짜보면 짐승의 피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짐승의 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약성경을 짜보면 예수님의 피가 줄줄 흘러나옵니다.
그만큼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피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피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장님일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식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은평성결교회 한태수 목사 대학 2학년 때 목사님의 후배 하나가 동맥과 정맥에 문제가 있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열두 시간에 걸친 목숨을 건 대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피가 모자라 친구 수십 명이 헌혈하고 시간시간 기도했습니다.
결국 수술을 잘 마치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가 다시 살아나서 간증을 하는데 수술하는 동안 눈을 감아도 보이고 떠도 보이는 심장이 있었답니다.
그때 그 심장에서 자기에게 피를 떨어뜨리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지 않는 피가 계속 떨어졌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예수님의 피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식어버린 피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따끈따끈한 살아 있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는 보배로운 피 즉 보혈(寶血)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보혈입니까?
그 피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 피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는 피입니다.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죄 사함의 능력(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즘 찌든 때를 벗기는 세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TV 홈쇼핑에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서 쓱 문지르기만 해도 찌든 때가 싹 사라지는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단한 기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세제도 인간의 죄를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세제이며 강력한 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을 미가서 7:19에서는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You will again have compassion on us; you will tread our sins underfoot and hurl all our iniquities into the depths of the sea.
생각해 보세요.
깊은 바다에 검은색 바둑알 하나를 던졌다면 그 바둑알을 누가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그렇게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동쪽 끝은 어디고 서쪽 끝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가 극동지역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더 가면 그곳에는 동쪽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그곳에도 동쪽은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보다 더 동쪽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구를 돌고 돌아도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만날 수 없습니다.
시편 103:12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회개한 죄를 다시는 찾지 못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고백한 죄를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사함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를 정죄하는 마귀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는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마귀가 방에 들어와서는 굉장히 큰 두루 마리 책을 펴놓았습니다.
루터가 보니까 자기가 평생에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마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다는 것을 빼놓았군.”
이 말을 하자마자 마귀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루터는 다시 새 힘을 얻고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행복자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자신의 죄로 양심은 더러워지고 늘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목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범한 죄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심한 편두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편두통이 심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좋은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목사님은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놀라운 평안과 신비스러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주일 후, 목사님의 편두통은 싹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삶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악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마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죄악 속에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피의 능력을 깊이 깨닫고 그 피의 능력으로 죄악을 대적할 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식사를 하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을 하시니 둘째 아들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식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밤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손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도가 웨슬레 목사님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돈이 없으니까 “야! 돈이나 좀 가지고 다녀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웨슬레 목사님이 강도에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것 가져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가 해서 돌아섰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당신이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렸습니다.”,
“쳇! 뭐라도 줄 줄 알았더니만 보혈?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런데 3년 후 웨슬레 목사님이 저녁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 신사가 곁에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저는 3년 전에 길거리에서 목사님을 세웠던 강도입니다.
그날 목사님이 말씀한 그 보혈의 이야기를 듣고 내내 마음속에 보혈, 보혈 소리가 들려서 할 수 없이 저도 회개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이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일본에 동양의 성자로 불려지던 호지유태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술에 만취된 채 집으로 귀가하다가 길 옆 작은 집에서 붉은 전등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창가로 가서 방안을 훔쳐보았습니다. 마침 젊은 여인이 하얀 속살이 다 비치는 엷은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들어가 여인을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여인을 목 졸라 죽이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얼마 후 체포된 그는 강간, 살인, 방화의 극악한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포악한 죄수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가 보내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뜨겁게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얼마나 변화를 받았는지 특사로 사면 받고 출옥했으며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살다가 성자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이 성결해지기를 원하신다면 보혈을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작은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 고백하시고 보혈로 씻김을 받으십시오. 또 보혈찬송을 많이 하시고, 자신에게 보혈이 적용되었음을 계속해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헌신의 능력(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만 받는 것만 아니라 새 생명, 새 능력까지 부여받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모자라 창백하게 죽어가던 사람이 수혈을 하면 얼굴이 불그스레해지면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힘이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속에 가득 차니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였던 그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깊은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1. 주님을 위하여 헌신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주님을 위하여 당연히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헌신은 강제적인 헌신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돈 많은 신사가 흑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흑인 여자를 놓고 경매하는 것을 보고 부르는 값의 배를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는 서류를 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고 “나를 풀어 주려고 나를 샀다고요?, 나를 자유케 하려고 나를 샀다고요?” 하며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비웃더랍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신사의 참뜻을 깨닫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자원하여 주인님의 종이 되겠다고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헌신하는 것은 세 종류입니다.
하나는 복받기 위한 헌신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워서 하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마지막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헌신이 세 번째 헌신 감사해서 하는 헌신입니다.
2. 교회를 위하여 헌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보혈의 공로를 깨닫고 나니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헌신했던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요?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자주 찾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제 몸을 괴롭게 하겠습니까?
저를 사랑하면 제 몸도 사랑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면 저를 자꾸 찾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낙중 목사님이 캐나다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담임목사님과 함께 김집사님을 심방했답니다.
김 집사님은 주유소와 함께 슈퍼마켓을 경영하는데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에 크게 힘이 되는 분이고, 아들은 의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최목사님에게 그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교회가 500달러의 월세를 내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보다 큰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큰 장소로 이전하니 월세도 올라서 월 3,000달러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돈 많은 집사님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집사님은 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형편이 되지 않아도 매주 500달러씩 헌금을 해서 교회 월세를 감당했습니다.
그 500달러는 작은 가게를 하면서 들어오는 돈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형편을 아는 목사님은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김집사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헌금을 작정했는데 그 김집사님이 1만 달러를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3,000달러까지 헌금을 하고 가게도 어려움을 당하고 해서 결국은 미국으로 개인택시 기사를 하겠다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게에서 뺀 돈 나머지 7,000달러를 다 헌금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후 김집사님은 3년 동안 미국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작은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네 주민들이 다른 가게는 이용하지 않고 그 가게만을 이용했습니다.
이유는 가게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파는데 비디오를 대여하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던 날 동네 대표가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니 성인용 음란비디오는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김집사님 마음속에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주민대표의 말을 받아들이고 음란비디오를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마켓 주인은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란비디오를 대여하고 판매했습니다.
주민들은 단합을 하여 음란비디오를 취급하는 가게를 이용하지 않았고 김 집사님의 가게로 몰려왔습니다.
김집사님은 장사가 잘되어 이제는 주유소도 하고 슈퍼마켓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이 축복 받은 이유는 오직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2:6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한 것입니다.
3. 세상을 위하여 헌신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본인도 시각장애인이면서 역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 목사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답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런데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어떤 보상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 보혈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합시다.
넷째, 승리의 능력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승리하게 만듭니다.
무엇에 대해서 승리하게 만들어 줄까요?
1. 마귀에게 승리합니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그는 사단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마귀에게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 하고 생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일들을 가로막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승리하므로 우리의 영, 혼, 몸과 생활과 관계와 사역과 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니 힌(Benny Hinn) 목사님이 필리핀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귀신들린 한 젊은이가 단상으로 뛰어올라와 난동을 부리더랍니다.
사람들이 저지하려해도 말을 듣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베니 힌 목사님이 기도하기를 “주님, 저와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청년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 말 하지마! 그 말 하지마!”하더랍니다.
베니 힌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라고 더욱 힘 있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며 “그 말 하지마!”하며 난폭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귀신은 떠나고 그 젊은이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귀신들은 베니 힌의 사역에서처럼 사람이 감지하게도 역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 할 수 없도록 은밀히 역사하며 믿는 자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든 못하든 악한 영의 역사를 허용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사십시오.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어린양의 피로 덮으십시오. 보혈은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2. 가난에 대해서 승리
고린도후서 8:9에 보면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가난에 대하여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양계장을 하는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은 언제부터인가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보혈을 바르고, 뿌리고, 덮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런 표현에 대해서 장로님은 거부감을 가진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로님도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닭장 속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 피! 예수님 피! 예수 보혈! 예수 보혈!”이라고 외치며 보혈이 뿌려지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짧은 기간에, 적은 사료로, 병아리를 적게 죽이고, 좋은 상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2등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환경적인 저주를 이기게 합니다.
넷째, 치유의 능력(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이미 건강해졌습니다.
주의 보혈은 우리들에게 질병을 이기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고훈 목사님은 20세 청년 때 폐결핵 말기로 죽음의 문턱에 서있었습니다.
전도를 받은 후 교회에 나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만 온 몸과 맘을 다해 찬송하는 성도들이 부러웠습니다.
한밤중이면 교회에 가서 “나도 저들처럼 찬송을 부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보름날 밤 12시쯤 목사님의 입에서 드디어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곧 씻어주소서”
목이 터지도록, 밤이 깊는 줄 모르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반복해서 온 몸이 땀에 젖도록 불렀습니다.
회개와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서 찬송으로 보혈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병에서 고침 받았고 그 후 무수한 시련과 환난, 질병을 만날 때마다 보혈찬송으로 세례를 받고 오늘까지 생존하는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질병을 이기게 합니다.
몸이 아픈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보혈을 적용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위장이 아프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주의 보혈을 위장에 적용합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바릅니다. 주의 보혈을 위장에 뿌립니다. 나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위장병에서 자유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위장병은 치료 될 것입니다.
주의 보혈은 질병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넷째,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 (고린도전서 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애굽에 내린 장자의 죽음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천사들이 넘어갔습니다.
그 밤에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했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죽음의 천사들이 장자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을 믿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입니다.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기자가 찾아왔습니다.
당국에서 그를 앞세워 선생을 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선생! 인도의 간디는 사람이 태어났으면 100년은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은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일제에 순응하고 감옥에서 나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100년만 살겠는가? 영생을 해야지.”,
“아니, 어떻게 영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된다네. 자네가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온 것을 보니 나를 통해 예수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 같구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네도 예수나 믿으시게.”
그러자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생기는 겁니다. 보혈의 능력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경향이 많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디가 한번은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탄광의 책임자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도를 말하자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구원이 너무나 값이 싸군요.”
그래서 무디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수백 피트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단추만 누르면 승강기가 내려가고 다시 누르면 올라옵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물론이지요. 석탄 회사가 이미 돈을 많이 들여서 설치해 놓았으니 저는 그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공로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설치하여 놓으셨으니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단추만 누르시면 됩니다.” 라고 하자, 그 때야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대신한 희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믿음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죄의 능력
거룩한 삶의 능력
헌신의 능력 /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승리의 능력 / 마귀에 대하여!
일본에
‘호지 유태랑’ 이란 난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성질이 포악했던 지, 겨우 18세에 살인과 강간, 방화 등 흉악한 죄를
저지르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형을 살던 유태랑은 뉘우치기는 커녕, “꼭 탈옥해서 판사에게 보복하겠다”며 오히려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감옥에서 한 청년의 전도를 받은 유태랑은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새사람이 된 유태랑은 그때부터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심한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자기 입으로 고름을 다 빨아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죄수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이백 명도 넘는 죄수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기독교를 탄압하던 당시
군국주의 일본 정부였지만, 그 감옥 안의 교회에 대해서 만큼은 묵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태랑같이 난폭한 사람도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니까,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런 극적인 회심을 겪고 나서, 오히려 먼저 믿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구나 위축된 자기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유태랑과 같은 그런
극적인 변화를 체험할 수도 없고, 꼭 그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극적으로 변화된 삶도 아니고
완전하지는 못할 망정, 내 삶 속에서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끈질김에 순복하면서, 부족한
대로 주변에 그 사랑을 전하려 한다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같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해도, 늘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부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황금률을 실천하는 분들을 저는 우리 공동체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오히려 처음 믿는 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먼저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복음의 능력을 목격할 때마다, 새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열심이 그 분들의 삶에서 이루실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 32)
그렇기때문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18)
성경 66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골라내라면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하고 그 사랑한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악센트가 강한 부분이 “독생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뜻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소유
버클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그만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강도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학생의 장례식을 치룬 후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를 위로하러 심방을 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지방 도시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호텔도 가지고 계셔서 제가 있는 동안 그 호텔에서 숙박했습니다. 잘 사셔서 다른 빌딩도 가지고 계시고 택시 회사도 하고 계셨습니다. 택시가 몇 대냐고 여쭤보니 100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주 성공한 분이셨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그 분 이름을 대면 누구도 다 아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제가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아들을 만나고자 하면 교회를 나가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틀림없이 있는데 내가 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당신에게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번 믿어 보시고 교회에 출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훌륭한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물질적으로 한번 성공하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꿈을 다 이루었습니다. 나는 100세까지 살아도 이만한 재산만 가지고 평생 꿈을 이루었는데, 내가 평생을 통해서 이룬 꿈인 내 모든 소유를 다 가져가고 우리 집의 숟가락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몽땅 다 없어지고 그 대신 죽은 내 아들이 살아난다면 내가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분만 그러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저도 다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분은 그 아들 말고도 또 아들 둘이나 있고 딸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부모는 어떠하겠습니까? 다 똑같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 아들을 희생 시키는 값으로 대통령이 된다면 되실 분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 아들을 죽일 경우 대통령 시켜준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 안 드시길 다행이지 만약에 드셨다면 제가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내 아들이 죽고 그 값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된다.’ 허락하실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이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는 최고의 가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이 아들을 보내서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그 다음 또 다른 아들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면 차선의 길이 있는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3의 길이 없습니다. “이거 밖에 없다.” 이게 독생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이 소유를 주셨으니”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최고로 여기는 최고의 가치를 인간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주셨다. 이거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줄 때도 즐겁고 받을 때도 즐겁습니다. 그 선물을 보면 어떨 때는 컵을 하나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화장품을 줄 수도 있고 책을 한권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큰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여신도들을 만나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신도들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이 보석과 명품 가방인거 같습니다. 그것만 선물 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하나 선물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벤츠 자동차를 “이거 선물입니다.” 하고 주면 어떻겠습니까?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좋은 집을 한번 선물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은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들이 한명 있는데 옆집이 아들이 없다고 하니까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 아들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세상에는 수양아들이나 양자 문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고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을 남의 집에 주는 순간 그 아들은 그 집의 어떤 일을 위해서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이유가 있을 때 내 아들을 선물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이 독생자이다.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시켰으니”
성경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희생시키는 문화는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독자 이삭이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아들 하나가 생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 했습니다.
번제는 죽여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이 독자를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독자를,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번제를 드리는 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들은 죽었습니까? 마음만 봤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렙다 땅에 사는 어느 불쌍한 과부는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모두 다 굶어 죽는데 이 가정은 어디 가서 식량을 구할 데도 없고 한 끼 밖에 없어서 마지막 한 끼 식사를 함께 나누고 이제 죽으려고 생각한 가정에 하나님의 종에게 가라고 하셔서 그 집을 또 갔습니다. 그랬을 때 이 여자는 한 끼 남은 그 식량을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대접하고 “내가 한 끼 더 먹고 죽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를 대접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에게 대접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집에 평생 동안 먹을 것이 있게 했다.” 그 하나를 드린,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드린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헌금하는 사람을 구경하셨습니다. 어느 불쌍한 여인이 너무나도 구차한 중에 동전 두 개, 유대 나라에서 사용하는 돈의 최고의 낮은 단위인 렙돈, 가장 낮은 동전 두 개를 헌금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이유는 자기의 소유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없는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독생자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을, 이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즘은 아주 좋은 신앙적 계획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갈보리교회도 많이 계셔서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흔하게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사업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틀림없이 교회도 짓고 고아원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선교 사업도 하겠습니다.” 아주 장황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제발 그렇게 되십시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렇게 성공한 다음에는 잘 행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뭐냐?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동전 두 개 밖에 없고, 한 끼 식량 밖에 없습니다.
아들 한명 밖에 없습니다.
이것 밖에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한사람의 한 끼 식량을 드렸더니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의 기적 역사는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이나 사렙다 땅의 어떤 과부나 두 렙돈 헌금한 가난한 여인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화려한 미래만 자꾸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건물 뭐든지 안 가본 곳 없이 다 사진 찍어라.”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저는 재벌 총수를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이 건물을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나는 건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예배당을 하나 짓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벌 총수가 그런 일을 말해주니 저는 그때 좀 흥분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그때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했으면 오늘 저 재벌 총수가 감동을 받아서 저런 말을 할까?’ 그런데 그분은 그 일을 안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건물을 말했는데 왜 안했을까?’ 간단합니다. 아까워서 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도 안 믿는데 예배당 지어서 뭐해?’ 그러니까 우리 목회학 교수가 그 전에 우리 학생들에게 “감동되었을 때 빨리 해!” 그러셨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수백 개의 교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까운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것 가운데 조금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 없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독생자를 주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의 혜택자는 누구나 다입니다. 많이 받을수록 주시는 자가 기뻐하는 진리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장애인이 한사람 있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돈 좀 달라고, 마침 베드로와 요한은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갑니까? 돈은 없지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예배드리러 기도하러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나는 목사인데 있는 것이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으로 해석해서 전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해서 모든 영혼의 기쁨과 행복과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요 소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나는 평생을 통해서 이 한 가지를 온 세상에 나누어주면서 살자.” 그런데 있는 것도 사람들이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것을 못줍니다.
서울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살던 서부 이촌동 난민촌 목회를 일평생 하다가 돌아가신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가 1인자이신 이현우 목사님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학생 과장이셨습니다.
그분의 교인은 다 판잣집에 살았습니다.
‘이 교인들에게 내가 어떤 선물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시다가 그분은 미술가로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밀레처럼 사실적 화가이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십니다. 그래서 난민촌의 그림을 그리십니다. 그 판잣집에서 마당에다 통로 하나 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라든가 자기가 목회하는 난민촌의 모든 환경을 보는 것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갈 때는 교인들에게 그림 한 장씩 나눠주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그러면 그 난민촌의 가난한 게 살던 사람들은 ‘차라리 라면 한 봉지를 사다 주는 것이 낫지 우리들이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도 구차하게 사는데 이렇게 구차한 그림을 받아서 뭐하나?’
그러나 목사님이 주시는 거니까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았지 않느냐? 그때 판잣집에서 살 때 목사님이 심방 오셔서 그려준 이 그림!”
어떤 보물보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가치성에 의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겠다. 이것만 소유하면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영생을 너희에게 주노니 멸망치 않고 이것을 가져가라. 그러기 위해서 내 독생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받았습니다.
옛날 6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서울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160명 호텔 투숙객들이 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TV로 현장 중계를 다 했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도 현장에 나와서 “저 아래 타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느냐?” 안타깝게 별 수단을 다 써도 160명이나 죽었습니다. 사람마다 창가에 나와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창가에서 탈출을 찾는 그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이 나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소.”
그게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재벌이 와서 돈 수백억을 들고 와서 “이거 가지시오.” 어느 대학 총장이 와서 “내가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겠습니다.” 미스코리아가 와서 “나와 결혼해요.” 다 좋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두 평소에 소원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 준다 하여도 그 사람에게는 그 시간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것만 되면 다른 가치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셔서 모두가 멸망 받을 자리에서 모두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나는 희생하고 너희는 구원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은 자는 다소 이 세상에서 고난 부분이 있다 하여도 가장 귀한 소유가 있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호텔 꼭대기에서 살려달라는 사람에게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원받는 그 하나만이 그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크게 기뻐하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더욱 기뻐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기뻐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기쁠 게 있습니까? 우리 세상 기준으로 기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 받고 쫓겨 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독신입니다. 그러니 뭐가 기쁩니까? 우리 기준에 기쁠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뭐가 기쁜 것입니까?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이 되어서 영생할 수 있는 진리를 내가 얻고 그것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있는 것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로다.” 이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는 사람은 ‘아!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를 나에게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지금 최고로 여기고 있는 내 소유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나는 그것을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제일 목표로 되어 있는 진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런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모두 다 영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희들에게 최고의 가치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오늘 말씀에서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나도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는 믿음의 결단이 생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