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카리스) 긍휼(엘레오스) 평강(에이레네)



은혜(恩惠. 카리스) 긍휼(矜矜. 엘레오스) 평강(平康. 에이레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친절. 죄로부터 구원(용서)

χάρις, ιτος, ἡ  스트롱번호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charis ]


평강은 은혜를 받은 결과

εἰρήνη 스트롱번호 1515

1. 평화.  2. 눅 11:21. 3. 평화
발음 [ ĕirēnē ]

긍휼은 심판으로부터 구원

ἔλε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1656

1. 자비.  2. 마 9:13. 3. 눅 1:58
발음 [ ĕlĕŏ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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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긍휼, 평강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지금 현실을 직시해 보면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처리하고 어떤 문제를 통과하는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과 시간을 드린다면 먼저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어떤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우선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은혜(恩惠. 카리스)

은혜(恩惠)

성경에서 은혜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안에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다.
둘째, 우리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은 환난과 고난의 때에 우리가 성경이 약속한 말씀 위에 성령으로 믿음의 뿌리를 굳건하고 견고하게 내리게 하신다.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긍휼(矜矜. 엘레오스)

긍휼(矜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무한한 자비로 함께 하는 것이 긍휼이다.
가령 우리가 세상과 육신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성령과 말씀으로 긍휼의 경고장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다.   

예레미야 애가 3:22-24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평강(平康. 에이레네)

평강(平康)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가장 힘든 환경을 통과하는 우리를 붙들고 지탱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른 차원의 평강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붙드신다.
세상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안심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늘의 평강을 우리의 심령과 삶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허락하신다.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변함없는 영원한 은혜, 긍휼 그리고 평강을 우리의 중보 기도를 통해 그들에게 충만히 흘러가도록 늘 성령 안에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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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어떻게 다른가? (요한이서 1: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from Jesus Christ, the Father's Son, will be with us in truth and love.​

은혜(恩惠) :

자격이 없는 나를 값없이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시는 사랑이다.
무슨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해결하여 주시는 사랑

긍휼(矜恤) :

내가 받을 고통과 형벌을 면제(免除)해 주는 것.

평강(平康) :

위의 두가지, 은혜와 긍휼의 열매로서의 결과가 평강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오는가?

하나님 아버지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요한이서 1:3, 에베소서 1: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from Jesus Christ, the Father's Son, will be with us in truth and love.​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그러므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로를 가까이 섬기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면 이러한 은혜긍휼평강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엔 크리스토 예수)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그리스도 예수안에(엔 크리스토 예수)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에베소서 2:30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베드로후서 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

첫째, 죽음에서 영생으로(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모든 육체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노는여우언유









남은 자의 신앙



남은 자의 신앙

라이프 성경 사전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 심판받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죄악 된 세상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역경을 견디며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소수의 의로운 자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구원에 목적이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의로운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대표적 실례를 살펴보면,

1. 대홍수 가운데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창 6:5-8)
2. 바로의 남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모세(출 2장)
3. 출애굽 1세대로서 광야에서 살아남은 여호수아와 갈렙(민 14:29-30)
4. 아합의 여호와 신앙 말살 정책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성도(왕상 19:18)
5.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사 10:20. 미 2:12-13)

사도 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롬 9:27).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교회 용어 사전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레 26:36. 민 24:19).
특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에 멸망치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사 10:20. 렘 31:7)
이런 자들은 고난 중에도 죄악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남겨 두신 일차적인 목적은 이들의 구원에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창 6:5-8; 출 2장; 민 14:29-30; 왕상 19:18; 사 10:20-22; 미 2:12-13).

참고로,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남은 자'로 정의했다.(롬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Isaiah cries out concerning Israel: "Though the number of the Israelites be like the sand by the sea, only the remnant will be saved.

두산백과사전

남은 자 사상 요약 :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는데, 그 중에서도 소수자를 남겨 구원과 축복의 담당자로 함을 자각하고 있는 자.

헤브라이어로는 아하리스, 예세르, 펠레타(피한 자) 등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로서 심판을 면케 하고 심판에 제한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정치적,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을 일컫는다. 《여호수아서》 13장 12절에 “곧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도읍하였던 바산 왕

옥의 온 나라라 모세가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내었어도”로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남은 족속을 이야기한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싹이 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허락한 것이다. 《이사야》 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고 하여 하나님이 남은 자를 허락하였음을 나타낸다.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구약성서 《이사야》 10장에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여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모으고, 남은 자는 회개하게 된다. 《예레미야》 31장 9절에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향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남은 자는 여호와를 의탁하여 보호받게 된다. 남은 자는 순결한 자들이 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남은 자가 받는 축복은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예레미야 32:38~39)”로 나타나 있다. 스바냐에 따르면 남은 자는 겸비하여 주를 찾는 자이고 남은 자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약성서의 이 개념은 바울로의 구원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Holynet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어리트’(tyrav)입니다.
‘남다’, ‘뒤에 남겨지다’라는 뜻의 ‘솨아르’(rav)에서 파생된 ‘쉐어리트’는 ‘잔류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솨아르’는 벌목 후에 남아 있는 나무나 그 나무의 그루터기(사 6:13; 10:19)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에 의해 심판을 받고 남은 자, 혹은 남은 민족, 남은 땅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사 15:9; 렘 47:4,5; 겔 25:16).

‘쉐어리트’는 하나님 심판의 엄중함을 표현하며,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오직 남은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을 절대로 멸하시지 않는다는 소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 하실 때에 그 중에서 몇명을 남겨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데, 그것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남은 자’에는 광야 생활에서 살아 남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 앗수르의 강제 이송에서 탈출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대하 30:6; 34:9),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유다로 되돌아 온 자들(학 1:12; 슥 8:6 참조; 느 1:2-3), 이방 여러 나라들로부터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 오게 된 자들(사 11:11; 미 2:12)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케 하시거나, 심판을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남은 자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심판 중에서도 회복을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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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성경에 나오는 ‘남은 자’는 누구이며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십시오.

A : 사물일 때는 ‘남은 것’으로(레 2:3), 사람일 때는 ‘남은 자’로 표기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와 세속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흩어지게 됩니다.
훗날 그들 가운데 남은 자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둘째. 그들은 흩어진 현장에서 신앙을 지킨 소수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순교적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다수가 굴종하고 무릎 꿇었을 때 엘리야와 남은 자 7000명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도 입을 맞추지도 않았습니다.(왕상 19:18)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생명을 걸고 신상 숭배를 거부하고 유일신 신앙을 지켰습니다.(단 1:8, 3:18)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야 시대나 바벨론 포로 시대 상황이 신앙을 지키고 선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학자 델리취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1장 9절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소돔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터인데 남겨두신 생존자, 남은 자들 때문에 심판을 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0장 22절은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포로로 흩어진 사람이 다수지만 남은 자만 돌아온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소수임을 밝힙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5절에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남은 자’ 사상은 ‘은혜로 택하신 사람들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각처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벧전 1:1)

그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남은 자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지칭합니다.

남은 자의 반대말은 떠난 자, 버림받은 자입니다.
나무를 떠난 가지의 생존이 불가능한 것처럼 예수 떠난 생명은 버림받은 생명입니다.
끝까지 남은 자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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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자들’의 신학

[1] 남은 자(the ramnants)는 구약의 핵심 사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사도바울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중요한 구원론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남은 자”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전개되어 나갈 때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구원이 단절될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남겨두신 소수의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사 6:13)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시며, 마침내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은 기독교사관 및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2] 구약의 남은 자들“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2)

구약에는 이같은 개념이 540회나 사용되었다.

창 6-9장의 홍수 기사는 온 인류의 멸망 때 오직 노아의 가족 8인만이 살아서 후대에 인종을 보전했음을 보여준다.

 열왕기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당신 백성 7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셨다(왕상 19:18). 선지서에는 당시 이스라엘-유다의 멸망의 정황과 연관되어 남은 자 사상이 예언으로 선포되었지만, 이는 포로들의 귀환 예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메시야의 나라가 지상에 임할 때 흩어진 “남은 자”들이 다시 모여 메시야의 나라를 이룬다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이들 남은 자들은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3] 신약의 남은 자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4-5)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이같은 남은 자들은 신약에서도 구원론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로 택정된 남은 자들에 관해 말하는데, 동족 이스라엘 인들이 예수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대해,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선택받아 구원의 자리로 이끌려나온 소수의 무리를 준비해두셨음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택함받은 소수만이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도 이에 관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 22:14)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사상은 요한계시록의 14만4천 명 사상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남은 자”들이 있어 지상에서 교회의 명맥을 이어가며, 마침내 그들을 통해 사단이 쫓겨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완성된다. 이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씨인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 참 이스라엘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리는 복락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네 백성이 바다 모래보다 많게 되리라”(창 22:17)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신다.

 결론적으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 승리의 확실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남은 자(로마서 9:27-29)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었을까요?"

바울은 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약속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약속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정당한 것입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죄인 중에 일부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선택)은 선한 일이며, 나머지 사람들을 자기가 행한 행위를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는 것(유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자비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자비의 그릇"(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남은 자'가 구원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그릇으로 선택된 사람
= 유대인 중 소수(남은 자) + 선택받은 이방인

1. 이사야의 예언(1)(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해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7),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28)."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두 개의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첫 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사 10:22-23)의 말씀입니다.
(사 10:22-23)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 10;22-23)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남은 자'는 말은 원래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 남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왕하 19:30-31 참조).
그러나 이 단어는 후기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구원받게 될 (선택된)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7000명을 남겨 두었다(왕상 19:14)."
여기에서 "남은 자"는 이교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을 굽히지 않은 경건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가 될 때에도, 소수의 경건한 자들을 남겨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이사야의 예언(2)(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9)."

바울이 인용한 두 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사 1:9)입니다. 이 곳에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와 같았었으리라."(사 1:9) 이사야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들 중에 일부를 남겨 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이때에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행하여 모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다면, 이스라엘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처럼 영원히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대부분은 이방인에 동화되고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다수의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 두시고 그들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호세아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폐지되지 않으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2.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3.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도 선택된 백성이 있다.
4. 유대인 중에서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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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the remnants)는 구약의 핵심 사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사도바울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중요한 구원론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남은 자”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전개되어 나갈 때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구원이 단절될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남겨두신 소수의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사 6:13)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시며, 마침내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은 기독교사관 및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구약의 남은 자들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2)

구약에는 이같은 개념이 540회나 사용되었다.

창 6-9장의 홍수 기사는 온 인류의 멸망 때 오직 노아의 가족 8인만이 살아서 후대에 인종을 보전했음을 보여준다.

열왕기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당신 백성 7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셨다(왕상 19:18).

선지서에는 당시 이스라엘-유다의 멸망의 정황과 연관되어 남은 자 사상이 예언으로 선포되었지만, 이는 포로들의 귀환 예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메시야의 나라가 지상에 임할 때 흩어진 “남은 자”들이 다시 모여 메시야의 나라를 이룬다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남은 자들은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다.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신약의 남은 자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4-5)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이같은 남은 자들은 신약에서도 구원론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로 택정된 남은 자들에 관해 말하는데, 동족 이스라엘 인들이 예수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대해,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선택받아 구원의 자리로 이끌려나온 소수의 무리를 준비해두셨음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택함받은 소수만이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도 이에 관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 22:14)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사상은 요한계시록의 14만4천 명 사상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남은 자”들이 있어 지상에서 교회의 명맥을 이어가며, 마침내 그들을 통해 사단이 쫓겨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완성된다.

이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씨인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 참 이스라엘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리는 복락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네 백성이 바다 모래보다 많게 되리라”(창 22:17)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신다.

결론적으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 승리의 확실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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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씨 남은자

이사야 6 장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1] In the year that King Uzziah died, I saw the Lord seated on a throne, high and exalted, and the train of his robe filled the temple.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2] Above him were seraphs, each with six wings: With two wings they covered their faces, with two they covered their feet, and with two they were flying.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3] And they were calling to one another: "Holy, holy, holy is the LORD Almighty; the whole earth is full of his glory."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4] At the sound of their voices the doorposts and thresholds shook and the temple was filled with smoke.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5] "Woe to me!" I cried. "I am ruined! For I am a man of unclean lips, and I live among a people of unclean lips, and my eyes have seen the King, the LORD Almighty."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 Then one of the seraphs flew to me with a live coal in his hand, which he had taken with tongs from the altar.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7] With it he touched my mouth and said, "See, this has touched your lips; your guilt is taken away and your sin atoned for."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8] Then I heard the voice of the Lord saying,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And I said, "Here am I. Send me!"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9] He said, "Go and tell this people: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0]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calloused; make their ears dull and close their eyes. Otherwise they might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and be healed."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1] Then I said, "For how long, O Lord?" And he answered: "Until the cities lie ruined and without inhabitant, until the houses are left deserted and the fields ruined and ravaged,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2] until the LORD has sent everyone far away and the land is utterly forsaken.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13] And though a tenth remains in the land, it will again be laid waste. But as the terebinth and oak leave stumps when they are cut down, so the holy seed will be the stump in the land."

서론)

신구약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중요한 성경적 사상 중 하나가 바로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remnant)이다.

“남은 자”(레임마, 렘넌트)로 보존, 남겨 놓음, 나머지, 남은 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총을 마지막까지 입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예를 든다면, 창세기 45장 7절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흉년때 곡식을 구하려 온 형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But God sent me ahead of you to preserve for you a remnant on earth and to save your lives by a great deliverance.

요셉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과 그 식구들을 위하여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야곱의 가문과 그 식구들을 남은 자로서 은총을 입고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남은 자는 범죄한 에덴동산에서부터 족장시대, 광야 시대, 가나안 정복시대, 통일 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 시대, 귀환 시대, 예수님 시대, 교회 시대, 종말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신학 사상이다.

1. 성경에 등장하는 남은 자의 용례들

1) 솨알-성경에 약 260여 번 등장하는 단어로 무가치하고 수적으로 적으나 끝까지 남김을 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신3:11; 신4:27; 렘 8; 3).

2) 팔랏-성경에 약 80여 번 등장하는 단어로 죽음의 위기로부터 극적 구출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사4:2; 욜2:32).

3) 말랏-성경에 약 89여 번 사용되고 있으며, 팔랏과 같이 도피, 구출을 의미한다. 한 민족, 한 집단이 떼죽음 당하는 전멸의 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생명이 보존된 자들 의미한다(삿3:29; 렘32:3-4; 렘51:45).

4) 야탈-성경에 약 28회 정도 사용되고 있으며 전쟁의 위험 속에서 다 죽고 남은 소수의 생존자를 가리킨다(신3:3; 수 10:20).

5) 이할리트-성경에 몇 곳에 등장하는 단어로 위기일발의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킨다(암4:2, 9:1; 겔 23:25)

이처럼 성경에 남은 자에 대한 용례가 여러 곳 등장한다. 남은 자는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하나님의 역사의 증언으로 남고, 거룩한 그루터기로 쓰임받은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믿음의 계승자, 하나님 역사의 거룩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 때, 그 때 마다 역사의 소용돌이와 와종 속에서도 하나님 구원의 은총과 복음의 동역자로 남기움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최종적 영광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평가되어 진다.

2. 성경 역사에서 남은 자의 반열에 세워진 인물들

1) 첫 사람 아담은 남은 자의 첫 인물

아담은 인류의 첫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첫 번 째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으로 말미암아 첫 번 째 남은 자가의 은총을 입은 자이다. 아담은 그의 아내와 함께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죽음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가죽을 얻어 입고 하나님 구속 역사의 첫 은총을 입고 메시야 구원을 약속을 받은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사람이다.

2) 족장 전 후 시대의 남은 자들

(1) 셋-첫 살인자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첫 피살인자인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신자 자이다.

창세기 4장 25-26 “창 4:25-26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 Adam lay with his wife again, and she gave birth to a son and named him Seth, saying, "God has granted me another child in place of Abel, since Cain killed him." [26] Seth also had a son, and he named him Enosh. At that time men began to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2) 노와와 그 가족들-홍수 대 심판 가운데 생명의 보존을 받은 남은 자이다. 온 세상의 물 심판으로 당 위에 모든 생명이 다 죽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남은 자의 은총을 베푸셔서 120년간 생존의 복과 새인류의 역사의 장을 열게 하셨다.

창세기 7: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Every living thing on the face of the earth was wiped out; men and animals and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and the birds of the air were wiped from the earth. Only Noah was left, and those with him in the ark”.

또한 믿음의 족장들의 귀한 반열에 노아의 가족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히11: 7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By faith Noah, when warned about things not yet seen, in holy fear built an ark to save his family. By his faith he condemned the world and became heir of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by faith”.

(3)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전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열국의 백성 중에 특히 남은 자의 반열, 복의 근원으로 선택함을 입었다. 하나님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다. 그 목적은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고, 열국의 아비 곧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함이다.

창세기 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2]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3]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whoever curses you I will curse; and 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

(4) 롯-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 속에서도 그곳의 영적 실상과 불의 현실을 보고 고통 속에 있는 롯을 성경은 의로운 롯, 의로운 심령으로 보고, 저주의 성, 멸망의 성에서 삼아 남은 은총을 입었다.

벧후 2:6-8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6] if he condemned the cities of Sodom and Gomorrah by burning them to ashes, and made them an example of what is going to happen to the ungodly; [7] and if he rescued Lot, a righteous man, who was distressed by the filthy lives of lawless men. [8] (for that righteous man, living among them day after day, was tormented in his righteous soul by the lawless deeds he saw and heard)”

4) 출애굽 시대의 남은 자들

극한 흉년 속에 애굽의 국무총리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남겨 놓으셨다(창45:7). 애굽의 430년간 학정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남겨 놓으셨다(출 2:9-10). 40년간 광야 생활, 불신앙과 반역의 역사 속에서(히3:16) 하나님께서 여분네의 아들 갈렘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남은 자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민 14: 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29] In this desert your bodies will fall--every one of you twenty years old or more who was counted in the census and who has grumbled against me. [30] Not one of you will enter the land I swore with uplifted hand to make your home, except Caleb son of Jephunneh and Joshua son of Nun.”

5) 가나안 정복 시대의 남은 자

기생 라합과 그 부모와 형제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군대의 여리고 성 정복을 도와 초기 가나안 정복의 큰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그녀와 그 가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속에 남은 자의 반열에 우뚝 서게 하신다. 더욱이 비록 기생 라합이지만 남은 자로서의 최선의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족보의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마1:5).

6) 사사 시대 남은 자들

가나안 정복 시대 이후 이스라엘 왕정 국가가 시작되기 약 300 여년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이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그 결과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혼란의 시대였다(삿17;6; 18:1; 19:1; 21:25). 이 때, 하나님께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셨다. 그들 가운데, 때 사사인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과 같은 자들이 있었고, 소 사사인 삼갈, 돌라, 야일, 입산 같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부족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사사요 첫 선지자인 사무엘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정국가의 탄생을 위한 남은 자로 그들을 사용하셨다.

7)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남은 자들

다윗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과 선지자들 또란 그들을 믿고, 믿음으로 산 경건한 남은 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엘리야, 엘리사 같은 하나님의 종들과 특별히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는 7,000명의 선지자들이 있었다(왕상 19:18). 더욱이 암흑의 시대에 이사야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그루터기로 남겨 놓으시고 사용하셨다.

사 6: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And though a tenth remains in the land, it will again be laid waste. But as the terebinth and oak leave stumps when they are cut down, so the holy seed will be the stump in the land."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대부분 포로가 되고 또 죽고 죽는 비극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거룩한 그루터기가 남게 될 소망과 비전을 하나님의 묵시로 받아 선포하였다.

이사야 선지자 외에도 에스겔, 아모스, 미가, 스바냐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은총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다(렘23:3, 겔14:20, 22, 암 9:8-10, 미2:12, 5:3, 습3:12-13)

8) 포로 시대와 포로 귀환 시대의 남은 자

(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칠배나 뜨거운 풀무풀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바로 느브갓네살 포로 시대의 남은 자들이다. 환란과 위기 시대에 믿음으로 살았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 죽이려 했던 자들이 남은 자 그들의 하나님을 칭송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다니엘 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Then Nebuchadnezzar said, "Praise be to the God of 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who has sent his angel and rescued his servants! They trusted in him and defied the king's command and were willing to give up their lives rather than serve or worship any god except their own God”.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보호와 높임을 얻게 된다(단3:29, 30).

(2) 다니엘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왕의 꿈의 해몽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비밀을 밝히 자이다. 비록 간신들의 계락으로 사자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생활 속에서도 남은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때부터 새로운 제국인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 그리고 다리오 치하까지 궁중의 박사장으로 쓰임을 받았다( 단 2장, 5장, 6장 참조).

(3)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

악한 신하 하만의 모략으로 유대인의 몰살 위기 가운데, 죽음 각오하고 아하스에로 왕과 대면했던 에스더와 그의 동역자 모르드개는 남은 자의 반열에 굳건히 서서 유대인의 몰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부림절의 영웅이 되었다(에4:16, 9:31-32).

(4)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정치지도자 스룹바벨과 신앙 지도자 여호수는 사만 이천 오백 여명의 유대인을 이끌고 첫 번째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착수하는 남은 자들이었다, 학사 에스라는 율법 학자로 제사장으로 제 2차 일천오백 여명의 포로 귀환과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남은 자의 사명을 능히 감당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 아닥삭스다 왕 통치 때, 눈물과 금식으로 애국애족 운동을 하였다, 그 결과 왕의 호의를 받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건축에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5) 포로후기의 학개, 스가랴 말라기

포로 귀환 시대 때 포로들과 함께 남은 자로서 귀환한 학개,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 재건 역사에 결정적 사명을 감당한다. 늦어진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백성들은 경책하과 경고하고 위로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성전 재건을 완성하는 위대한 과업을 이루게 된다. 말라기 선지자는 성전 완공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 파괴와 함께 영적, 도덕적인 타락에 대하여 질책하고 언약의 갱신을 설파한다. 또한 장차 오실 남은 자의 표상인 메사야의 대망의 빛을 선포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한다.

9) 마지막 선지자 시대의 남은 자인 세례 요한

구악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남은 자의 표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직전에 외쳤던 구약의 마지막 남은 자의 대표 인물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먼저 보내 주신다고 하였는데(말4:5)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요한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Jehovah's gift),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God is graciouds)이다. 세레 요한은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보다 앞에 태어나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그 백성을 회개 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남은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다 순교된 자이다.

10) 남은 자의 표상,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포커스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남은 자의 표상, 남은 자의 성취자이시다.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전체를 결론 짓고 신약 성경 전체를 여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장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After Jesus was born in Bethlehem in Judea, during the time of King Herod, Magi from the east came to Jerusalem.”은 남은 자의 표상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역사의 도래를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 분의 탄생은 바로 구약 전 역사를 통해 기다렸던 메사야 구주의 도래 하심이다.

누가복음 2장 10절-13절 “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0] But the angel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that will be for all the people. [11]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12] This will be a sign to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 [13] Suddenly a great company of the heavenly host appeared with the angel, praising God and saying.“

남은 자의 표상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히브리서 기자는 남은 자의 구원을 책임지시고 완성하실 진정한 남은 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놀랍게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 1장 1-2절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 In the past God spoke to our forefathers through the prophets at many times and in various ways, [2] 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he made the universe.”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진정한 남은 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마지막 아담으로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고(고전 15:45),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눅19:9-10),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신 자이시다(막10:45). 남은 자의 구원자되시고 진정한 남은 자의 표상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남은 자자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신다. 또한 그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복음을 깨닫은 남은 자들은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한다(막16:15).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막16:16).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11:5)”의 구원을 위해 남은 자의 공동체인 주의 몸된 교회를 굳건하게 잘 세워가야 할 사명이 있다.

11) 교회사 시대의 남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남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진정한 성도들과 교회의 지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초기 박해시대에 카타콤의 고난의 역사 속에 살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중세 카톨릭의 박해 중에도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야의 요한 허스, 구파라의 왈도파, 중세 시대의 루터, 칼빈, 쯔빙글리 그리고 근세 시대에 들어오면서 청교도, 독일 나치 박해, 한국 선교 순교사, 현재 이북 지하 교회 및 선교지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남은 자의 반열에 서서, 자신의 기도 사명, 전도의 사명, 눈물의 사명을 감당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남겨 놓은 자들이다,.

12) 종말의 때 남은 자

계시록 17장 14절에 종말의 때에 구원받는 자 즉 남은 자에 대한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 계시록 17장 14절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They will make war against the Lamb, but the Lamb will overcome them because he is Lord of lords and King of kings--and with him will be his called, chosen and faithful followers."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싸우는 악한 무리 떼가 있다. 그들이 바로 짐승, 거짓 선지자, 짐승의 표를 받은 자, 큰 붉은 용, 큰 바벨론 음녀 등이다. 종말적으로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긍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여기서 밝히는 어린 양과 함께 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다. 여기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은 첫째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둘째로, 빼내심을 얻는 자들이다 셋째로, 진실한 자들이다. 이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 곧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계12:17; 14:12).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녹명된 자들이다(계13:8).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않는 자등ㄹ이다(계13:8, 14:13). 성부, 성자, 성령의 인을 받은 자들이다(계14:1, 7:2, 엡 1:13, 4:30). 죽기까지 예수께 충성하는 자이다(계2:10).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의 모습이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이들은 결국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 Vide, Vici).

왜냐하면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고린도 전서 15장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But thanks be to God! He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남은 자의 삶은 포기의 삶, 배신의 삶, 좌절의 삶, 불신의 삶, 불만의 삶, 부정의 삶이 결코 아니다. 남은 자의 삶 믿음의 선진들처럼 인내의 삶, 믿음의 삶, 승리의 삶, 감사의 삶, 섬김의 삶, 눈물의 삶, 헌신의 삶, 영광의 삶이다.

3. 남은 자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들과 그 의미

1) 이슬 같고 단비 같은 존재들

미가서 5장 7절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The remnant of Jacob wi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like dew from the LORD, like showers on the grass, which do not wait for man or linger for mankind.”

이슬과 단비는 하나님 말씀을 상징한다(호14:5, 시133:3). 또한 이슬과 단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다(신32:2), 이슬과 단비는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은총을 의미한다(시72:6, 시654:10). 또한 이는 이슬과 단비의 은총을 입는 성도들의 존재를 의미한다(사26:19, 시110:3).

2) 수풀의 짐승 중 사자 같고, 양떼 중 젊은 사자같은 존재

미가서 5장 8절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The remnant of Jacob will be among the nations,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like a lion among the beasts of the forest, like a young lion among flocks of sheep, which mauls and mangles as it goes, and no one can rescue.”

이슬과 단비 같은 존재인 남은 자가 사자와 젊은 사자와는 너무 대조가 되는 비유의 말씀이다. 이것은 남은 자들이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축복의 존재임과 동시에 사자와 젊은 사자같이 용맹스럽고 힘이 있어, 원수 대적과 세상,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자처럼 발로 밟고, 사자처럼 찢어버리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이다. 계시록 5장 4절에 “유대 지파를 사자”로, 또한 “이긴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세상에서 너희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나라: 주님의 승리가 믿은 자의 승리요, 남은 자의 승리의 보장이 되신다. 남은 자는 반드시 이긴다. 이기게 되어 있다. 이긴 싸움이다. 결과는 이미 이긴 것이다.

미가 7장 8절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찌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Do not gloat over me, my enemy! Though I have fallen, I will rise. Though I sit in darkness, the LORD will be my light.“

엎어질지라도 일어나는 약속 그것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마18:22) 무한한 주님의 용서에 근거한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저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요한 1서 5장 4절 “요일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 have known the Father.“

남은 자는 사자처럼 특히, 젊은 사자처럼 원수 대적 마귀를 이기고 이길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 해악하는 무리들을 반드시 이기고 이길 것을 약속하셨다.

3) 십분의 일인 존재들

이사야 선지자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삼키움을 당하고 베임을 당한 중에도 남아 있는 존재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십분의 일인 존재입니다. 비록 십분의 일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가치있는 존재요 목적있는 존재다, 비록 숫적으로 적지만 하나님의 양식이요, 하나님 집에 있는 고귀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이사야 6장 13절에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남은 자 중에 또 다시 소멸되고 또 다시 환란을 당하는 중에도 생존한 귀한 존재이다. 온갖 위험과 권모술수와 음모와 궤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복된 존재들이다.

4) 거룩한 씨, 그루터기

남은 자를 이사야 6장 13절에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비우했습니다. 그루터기는 가지와 둥지가 짤린 뿌리 부분을 말한다. 그루터기는 가지가 다 잘리고 입이 다 떨어지고 겨우 뿌리 부분만 땅 속에 묻혀 생존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욥 14장 7절 말씀처럼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날 것임이니라” 라고 결코 실망치 않았습니다. 다시 움이 날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바로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 언약의 땅, 축복의 땅의 그루터기라고 했습니다. 넓게는 하나님 나라, 좁게 섬기는 교회가 바로 이 땅입니다. 비록 다 잘리고 비록 다 떨어지졌지만 남은 자는 바로 하나님 나라에, 이 곳에, 우리가 머문 곳에 그루터기가 된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더욱이, 남은 자를 거룩한 씨라(사 6:13)고 말씀하셨다. 씨는 종자이다. 생명의 보존체이다. 생명력이 있다. 거룩한 씨 곧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인 믿음의 성도, 남은 반열에 선 자는 거룩한 씨이다.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얼마든지 풍성한 열매를 또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사야 시대 비록 성읍이 파멸되고, 거민이 없어지고, 가옥들이 파괴되고 인적들이 사라지고, 모든 토지가 폐허 되어 생존의 가능ㅅ겅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 낙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존재, 사명을 받은 존재는 바로 이 시대의 거룩한 싸앗이다. 선택받은 남은 존재이다. 이 세상 중, 아니 껍질을 떨어버리거고 남은 알곡, 십분의 일 같은 고귀한 존재들이다. 남은 자들은 바로 주의 영광을 선포할 믿음의 계승자, 이 땅의 그루터기, 거룩한 씨앗들이다.








성막 강좌(04-03-2024 / 05-29-2024)



 성막  :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1. 문 : 예수
        2. 번제단 : 속죄 제물
        3. 물두멍 : 물(보혜사 성령)
        4. 떡상 : 생명의 떡(말씀)
        5. 등대 : 빛
        6. 분향단 : 기도
        7. 법궤(속죄소) : 하나님 


 성막 문 : 예수는 양의 문(요 10:7) /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의 문이라.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번제단 : 예수는 영원한 제물(히 10:14) / 죄를 사함 받는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because by one sacrifice he has made perfect forever those who are being made holy.

 물두멍 :  예수는 생명의 물(요 4:14) / 영원한 성령을 받는다

내가 주는 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떡상 : 예수는 생명의 떡(요 6:48) (요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등대 : 예수는 세상의 빛(등불) /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간다.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다.(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이사야 45:7 /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분향단 : 예수는 중보자(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9:15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12:24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휘장 : 예수는 휘장(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언약궤 : 예수는 영원한 속죄 제물(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로마서 6:10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브리서 7:27 /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2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10:2 /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브리서 10:10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유다서 1:3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04-03-2024(수) 오후 8:00
성막 제1강  / 성막의 정의

성막(聖幕, tabernacle)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
성막(聖幕, tabernacle)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성막(聖幕, tabernacle)은 약 3,500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지키며 살아야 할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율법과 함께 주신 명령으로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세우게 하신 거룩한 집, 천막 성전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하는 동안 하나님의 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단은 설치와 해체가 용이한 조립식 구조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광야의 거센 바람이나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재료와 견고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성막 제작에 관련된 내용들이 출애굽기에 무려 12장에 걸쳐 마치 설계도면을 펼치듯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성막 공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과 기구들, 그 형식들이 담고 있는 영적 의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이시고 또 말씀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성경을 사도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였듯이 성막에 대한 부분도 동일한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가장 중요한 모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길(임마누엘) 원하십니다.
그러나 천막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건물로 이루어진 집은 임마누엘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몸을 성전 삼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8:13-14
은 여호와께서 장차 ‘성소(미크다쉬,מִקְדָּש  )’가 되시겠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3. The LORD Almighty is the one you are to regard as holy, he is the one you are to fear, he is the one you are to dread.
14. and he will be a sanctuary; but for both houses of Israel he will be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And for the people of Jerusalem he will be a trap and a snare.

​5. 성소(聖所, 미크다쉬, מִקְדָּשׁ)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Then have them make a sanctuary for me, and I will dwell among them.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레위기 19: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Observe my Sabbaths and have reverence for my sanctuary. I am the LORD.

​‘미크다쉬’는 구별된 장소, 거룩한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또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구별된 곳이고 거룩한 공간입니다.
성소는 전체적으로 말할 때 성막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지만 구체적으로는 성막 내에서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황금을 입힌 조각목으로 만든 구조물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에서 ‘거하시다’라는 단어 스케노오(σκηνοω)는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 거하시매(4637) 스케노오(skēnŏō)  σκηνόω    

1. 살다.   2. 거주하다.  3. 계 13:6
발음 [ skēnŏō ]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다, 거주하다, 계 13:6, 21:3, 요 1:1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의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성막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육체라는 장막을 입고 세상에 임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 2:14-15).
당황한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유대인들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46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 성전인 줄로 받아들였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성막과 성전은 결국 육신을 입고 오셔서 완전한 성전(성막)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막은 메시아의 강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체와 신분,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양성(兩性), 그의 사역, 죽음, 부활, 높이 들리심, 심판과 통치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그림자와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2-3의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쓴 내용인데 이 말씀은 성막과 관련하여 그대로 적용해도 적합한 말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감추어 있듯이 성막은 구약시대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비밀입니다.
따라서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1. 가죽옷(창세기 3:21) - 짐승의 피
    2. 노아의 방주(창세기 6:14) - 역청(코페르)<속죄>
    3. 모세의 갈 상자(출애굽기 2:3) - 역청(코페르)<속죄>
     4. 성막(출애굽기 26:1) - 제물의 피
    5. 예수님의 십자가(요한복음 19:30) - 예수의 피
    6. 피 흘림의 속죄(히브리서 9:22)  - 속죄의 피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1. 가죽옷(창세기 3:21) - 짐승의 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성막은 복음의 뿌리 - 죄인의 구원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2. 노아의 방주(창세기 6:14) - 역청(코페르)<속죄>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역청(코페르. kôpher) כֹּפֶר  
     - 속전, 몸값, 구속의 댓가(출 21:30, 30:12)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3. 모세의 갈대 상자(출애굽기 2:3) - 역청(코페르)<속죄>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역청(코페르. kôpher) כֹּפֶר  
     - 속전, 몸값, 구속의 댓가(출 21:30, 30:12)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4. 성막(출애굽기 26:1) - 제물의 피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a)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5. 예수님의 십자가(요한복음 19:30) - 예수의 피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다 이루었다(텔레오. tĕlĕō) τελέω / 끝내다, 수행하다, 완납하다
    *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b)

왜 성막을 만들어야 할까요?

        6. 피 흘림의 속죄(히브리서 9:22)  - 속죄의 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피(하이마. haima) αἷμα
      * 제물(祭物) / 소, 양, 염소, 비둘기 - 동물(動物)
      - 랍비 학교 : 사육하기 쉽다. 죽이기 쉽다(비공격성)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04-10-2024(수) 오후 8:00
성막 제2강  / 성막의 정의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
- 모형론(模型論) 교리(敎理)

1. 대제사장 - 영원한 대제사장
2. 휘장 - 육체 상
3. 그림자 성막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막 강좌 #. 2 / 04-10-2024(수)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성막  :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1. 문 : 예수
        2. 번제단 : 속죄 제물
        3. 물두멍 : 물(보혜사 성령)
        4. 떡상 : 생명의 떡(말씀)
        5. 등대 : 빛
        6. 분향단 : 기도
        7. 법궤(속죄소) : 하나님  


출애굽기 25:8-9 / 모양대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 모양(식양) 8403.



신명기 4:1-49 / 형상

12. 형상 (8544)


12절, 15절(8544), 16절(8403), 17절(8403), 18절(8403), 23절(8544. 6459), 25절(6459), 5:8

* 모양이란 히브리 단어와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형상이든지,
17.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아래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 성막(聖幕. tabernacle) mishkan / מִשְׁכָּן
- 성소, 지성소(법궤) 하나님을 만나는 곳 <초림 예수>

* 장막(帳幕. tent) ’ôhel / אֹהֶל
- 법궤를 빼앗긴 후(홉니, 비느하스) 삼상 4:11
- 법궤 돌아오다 삼상 6:21 <고난 예수>

* 성전(聖殿. temple) qôdesh /  קֹדֶשׁ 

- 법궤가 있는 성막을 성전으로 건축(솔로몬 성전) <재림 예수>
AD 70. 7. 9 로마 디도 장군

AD 70년 7월 9일 로마 디도 장군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다에서는 능하다
    그러나 땅에서는 능하지 못하다! / 노이로제에 걸려 사망

    개선문을 세워주는 경우
      1. 적군을 많이 죽였을 때
      2. 금을 많이 빼앗아 올 때
     3. 노예를 많이 포획한 때

    예루살렘 성전 금 10만 달란트(680만Kg)
    1달란트 : 68kg
    금 시세 / 골드바 1Kg 85,750,000원($85,750)
     * 짐승의 피가 바쳐지는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짐승의 피가 바쳐지는 성전은 무너진다.
     마가복음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마태복음 24:2. 누가복음 21:6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라!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04-17-2024(수) 오후 8:00
성막 제3강  / 세마포 울타리와 출입문(출애굽기 27:13-16)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성막문은 동쪽에 있고, 법궤는 서쪽에 있다.

예루살렘 성전도 동쪽으로 문이 나 있다. 현재 동쪽문인 황금문은 막혀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 이 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성막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성막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이 성막문은 희생양과 함께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므로 양의 문은 성막문을 가리킨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에 갈 때에 양을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나의 죄를 담당하신 희생양이 되셔서 나와 함께 동행해 주신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나를 위해 희생양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양문이 있다.
양문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 북쪽에 위치한 사자문(일 명 스데반 문)으로 들어오면, 북쪽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문을 가리킨다.
양문 앞에는 베 데스다 연못이 있는데, 이 못을 가리켜 양의 못이라고도 한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 때에 희생양으로 가지 고 온 양을 씻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더럽혀진 양을 깨끗하게 씻고, 제사장에게 흠이 없음을 검사받은 연후에야 성전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다.
바로 이 연못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세례장소로 쓰이기 도 했다고 한다.

동쪽문

성막문은 동쪽에 나 있어서 성막으로 들어 올 때는 서쪽을 향해서 들어오지만, 나갈 때 는 해뜨는 동쪽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올 때는 석양의 그늘같은 문제를 안고 들어오지만, 교회에서 나갈 때에 는 떠오르는 태양같은 확신과 기쁨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4색 문

성막문은 하나이지만,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흰색)의 네가지 색깔로 정교하게 짜 여진 문이다.
예수님도 한 분이지만, 네 복음서가 정교하게 어울어져서 한 분 예수님을 증 거하고 있다.

청색은 생명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요한복음에 해당한다.
자색은 왕(임금)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마태복음에 해당한다.
홍색은 희생양(고난)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마가복음에 해당한다.
백색은 무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누가복음에 해당한다.

성막문의 4색실이 함께 섞여 하나의 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네 복음이 하나로 묶여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성막의 문

출애굽기 27:13-16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출애굽기 38:13-20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문 이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요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문 저쪽도 그와 같으니 뜰 문 이쪽, 저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씩이요 그 기둥이 셋씩, 받침이 셋씩이라.
뜰 주위의 포장은 세마포요.
기둥 받침은 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 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
뜰의 휘장 문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와 높이는 뜰의 포장과 같이 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은 넷인데 그 받침 넷은 이요 그 갈고리는 은이요 그 머리 싸개와 가름대도 은이며.
성막 말뚝과 뜰 주위의 말뚝은 모두 이더라.

1.성막의 문

a. 성막을 향해 좌측에 세개의 기둥을 세워 세마포장으로 둘렀다(출 27:14, 38:14)
b. 성막을 향해 우측에 세개의 기둥을 세워 세마포장으로 둘렀다(출 27:15, 38:15)
c. 동편 중앙 기둥 네개 사이에 문장을 만들어 성막의 문으로 하였다(출 27:16)
d. 기둥의 설치는 성막 사방의 울타리와 같다.

1)문장(출 27:16, 38:18-29)
  a.크기 : 높이 5규빗(2.3m), 나비 20규빗(9m)
  b.재질 : 흰색 세마포
  c.무늬 : 청색,자색,홍색,흰색의 4색실로 수를 놓아 무늬를 만들었다.

2.문장 4색의 의미

1)청색=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
*성경에서 청색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2)자색=왕이신 예수그리스도
*자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통적으로 왕을 상징한다.
3)홍색=고난 받으시는 예수그리스도
*홍색은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종,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낸다.
4)흰색=인자되신 예수그리스도
흰색은 성결의 표상으로,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상징한다.

3. 4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


a. 마태복음 :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b. 마가복음 : 예수그리스도를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c. 누가복음 : 예수그리스도를 죄없으신 참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d. 요한복음 : 예수그리스도를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4.문장의 의미

1)넓은 문
a.폭이 약 9m되는 넓은 문이다.
b.죄인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넓은 문을 만드셨다(롬6:23)
c.넓은 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원하는 자는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다(요10:9)
e.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2:4)
f.원하는 자는 누구나 들어 올 수 있다(계22:17)

2)구원의 문
a.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요14:6)
b.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문이다(요10:9)
c.이 문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엡2:18)
d.예수그리스도만이 구세주가 되신다.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행4:12)
e.하나님께 사람 사이의 중보도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다(딤전2:5)
f.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나 주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다.(계3:20)
g.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는 주 안에서 쉼을 얻는다(마11:28)
h.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롬10:9-10)




. 유일한 출입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門)은 동쪽으로 난 출입문입니다.

1) 문은 항상 동쪽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이동하는 생활입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성막은 해체와 설치를 반복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어느 곳에 진을 치더라도 방향은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문은 항상 동쪽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배치되는데 문 앞에 진을 치는 지파는 언제나 유다지파입니다. 백성들이 이동할 때도 유다지파는 성막 기구들을 운반하는 레위지파 다음으로 지파들 중에서는 가장 선두에서 앞장서 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 야곱(이스라엘)의 축복과 예언에서 유다 지파가 백성들을 통치하며 그들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실로가 오시기까지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 지파에 있을 것이라는 축복이며 예언입니다. ‘실로(שִׁילֹה)’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 이후로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유다 지파에게 주어졌고 ‘실로’인 메시아도 반드시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이것이 동쪽으로 난 문의 의미입니다.

2)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양을 돌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막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모든 역사에 등장하는 개념들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여정은 하나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진행할 때 앞서가며, 멈추었을 때 그 중심에 위치한 성막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양들을 보호하는 양의 우리라고 해도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리로 들어가는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7). 현실에서 볼 때 양의 우리에는 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담장을 넘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며 절도입니다. 성막에는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서는 문을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려는 거짓 목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짜 목자가 아니라 영혼을 훔치는 강도며 도둑입니다.

오직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다원주의(多元主義)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문입니다.

‘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3) 문을 이루는 4개의 기둥과 4가지 색상의 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출 27:16)

​성막 뜰로 들어가는 문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휘장도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등 네 개의 색상 실로 짰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4개의 복음서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입문서입니다.
특히나 4개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4가지 면을 보여주는데 마태는 왕되신 그리스도를, 마가는 희생하는 종되신 그리스도, 누가는 완전한 인자이신 그리스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색상으로 보면 청색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고 자색은 왕권, 홍색은 죽음을 포함한 희생, 세마포는 흠없는 완전한 인성을 상징합니다.

4. 문은 상당히 큽니다.

동쪽 울타리는 길이가 50규빗(22.8m)입니다.
거기에 20규빗(9.12m) 크기로 문은 만들게 하셨습니다.
울타리 길이에 비해서 문은 거의 절반에 이를 만큼 상당히 큽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언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열방과 만민을 대상으로 합니다.
속된 성령이 임하던 오순절날 베드로는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위해서 물침례를 받으며, 성령을 받는 것, 이것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나가는 기본적인 절차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성막을 배울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이 약속의 대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그렇습니다. 너희와(그 시대 유대인들) 너희 자녀와(유대인 후손들), 모든 먼데 사람(모든 만민들)들이 그 대상입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족속과 방언,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고 누구라도, 어떤 죄인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은 대단히 크고 넓습니다.

또 한 가지 볼 것은 문의 색상(color)입니다.
울타리 포장은 절대적 의로움의 상징인 희고 깨끗한 세마포였습니다.
그런데 출입문은 청색, 자색, 홍색, 흰색 베실로 짠 다양한 색상입니다.
물론 이 네 가지 색은 각기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 되심과, 죽으심,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만 또 다른 관점에서 옆에 펼쳐진 세마포 포장과 비교할 때는 그저 다양한 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굳이 비교하자면 유월절과 무교절에 사용되는 떡은 반드시 누룩이 없는 무교병이지만 오순절(맥추절, 칠칠절)에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떡은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레 23:17)이었다는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병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무교병이며 오순절은 죄인 된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시작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누룩넣은 유교병을 사용한 것과 유사합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의 울타리 포장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출입문에 보여지는 이 다양한 색상들은 깨끗하고 흰색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누구든지, 어떤 유형의 죄인이라도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04-24-2024(수) 오후 8:00
성막 제4강 / 번제단(출애굽기 27:1-7.  38:1-7)

번제단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 - 피,  불,  뿔(생명)

성막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번제단이다. 번제단은 나의 죄를 대신할 희생제물 을 바치는 곳이다. 번제단은 죄를 버리는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번제란 속죄제물을 온전히 태워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이다.
주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조각목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을 씌운 것이다. 조각목은 광야에서 자라는 아카시아 나 무로, 성경에서는 씻김 나무라고도 말한다.
성경은 때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 1편)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렘 5:14)
아카시아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버림받은 나무이다. 광야에 버림받은 인생같은 조각 목으로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만들었다. 이와같이 성막에서는 모두 조각목을 쓰지만, 금, 은, 놋으로 씌웠기 때문에 볼 수 없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으로 싼 것이다. 놋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조각 목처럼 버림받은 것같은 인생들을 놋같은 십자가의 은혜로 감싸 주신 것이다.

번제단의 크기는 넓이와 길이가 각기 5규빗이고, 높이가 3규빗이다.
5는 성경에서 고통의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온갖 병자들이 모인 베데스다 연못의 솔로몬 행각이 다섯이요,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다섯 이라 했고,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가진 물매가 5개, 야곱이 애굽에 내려왔을 때 아직 흉 년이 5년 더 남았다고 했다.

번제단에는 네개의 뿔이 있는데, 이는 생명의 뿔이다. 죽을 죄인도 이 뿔을 붙잡으면 살 수 있었다.

번제단에서 쓰이는 불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불끄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불내려온 연대가 성막이 완성된 주전 1445년이었으니,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주전 587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한번 받은 불을 약 1천 년 동안 꺼뜨지리지 않았다.

은혜는 받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극을 받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 오끼나와에 유명한 오뎅집이 있는데, 한번은 기자가 그 맛의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3 대 동안 불을 꺼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번제단의 기구

1. 재 담는 통 / 문제를 해결하는 교인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번제단에도 재물을 태우고 남은 재가 생긴다. 번제단 에는 재를 담는 통이 있다.
번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재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
스펄젼 목사는 성전 지하의 기도실을 교회의 발전소라 하였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놓고 기 도하는 교인은 교회가 계속해서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든다.

2. 대야 / 제물을 채우는 교인(교회 부흥)

대야는 제물을 담아 제단까지 나르는 데에 쓰인다. 번제단에 쓰이는 모든 제물은 산 제 물이다. 죽은 짐승은 제물이 될 수 없다.

"너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3. 부삽/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교인

부삽은 번제단에서 나무가 잘 타도록 쑤셔 넣기도 하고, 재가 생기면 긁어 모으는 역할 을 한다.
부삽예수: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긁어내어 주신 부삽 같은 분이다. 

4. 갈고리 /

번제단에 고기가 많이 쌓이면, 고기가 튀어 나가기도 하는데, 갈고리는 고기가 튀어나가 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어부의 사명은 바다에 나가면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는 것이요, 육 지에 돌아오면 야고보와 요한처럼 배안에서 그물을 깁는 것이다(마 4:18-22)
갈고리의 역할은 그물을 깁는 것과 같다. 그물을 깁는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르티조"는 교 회를 온전하게 한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 교회내의 분쟁을 없앰(고전 1:10)
  • 서로 온유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평화함(고후 13:11)
  • 온유한 심령으로 그릇된 것을 바로 잡음(갈 6:1)
  • 고난받는 이를 온전케 하여 굳건하게 함(벧전 5:10)

5. 화로 /

화로는 성막에서 불 옮기는 그릇이다.
성막에서 불이 필요한 곳이 셋인데, 번제단과 분향단, 그리고 등대이다.
성막의 불은 절대로 꺼트리면 안된다. 옮길때는 화로에 불씨를 담아 옮겼다.

성막과 성전, 그리고 교회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로 시작됐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하고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여 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으며(대하 5:11-14),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밤새 기도 할 때에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방언의 역사나 나타나 교회가 시작되었다.


번제단의 규모

1.번제단의 규모

a.크기:가로=5규빗(2.3m),세로=5규빗(2.3m),높이=3규빗(1.4m)(출27:1,38:1)
b.모양:널판으로 직사각기둥 모양의 단을 만들어 놋으로 전부를 쌓았으며,높이
절반 위치에 놋 그물을 만들고 네 귀에 제단 뿔 넷을 만들었다.그리고 네모퉁이에
네개의 놋고리를 만들어 운반할 때에는 두 채를 꿰어 운반하였다.
c.재료:조각목,놋(출27:1,38:1)
d.부속기구:놋그릇,채통,부삽,대야,고기 갈고리,불 옮기는 그릇
e.네 뿔:제단의 네 귀에 놋으로 뿔 넷을 만들었다(출27:2,38:2)
f.네개의 놋고리
g.운반용 채: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으로 쌓았다(출27:4,5,38:4)
h.제단의 위치: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막 뜰 첫번째에 놓여있다(출40:6,29)

2.재료들이 보여주는 의미


1) 조각목 나무

a.절대로 썩지 않는 사막에서 자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이었다.
b.가장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난 나무들로 만들어졌다.
c.이 사실은 주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인성을 의미한다

2) 놋

a.녹슬지 않고 부식되지 않는다.
b.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을 의미한다.

3. 제단의 의미


1)제단의 위치(출40:6,29)
a.제단은 성막 문을 들어서면 맨 첫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b.구약시대에는 먼저 희생제물을 드린 다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c.제단을 지나야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뿐이다.

2)제단의 영적 의미

a.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의 표징이다.
b.대속으로 죽음을 당하신 곳=죽음의 장솔이며 철저한 자기 폐쇄의 자리이다.
c.하나님과 만나고 거기서 말씀하시는 곳이다.(출29:42)
d.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9:22)

4.꺼지지 않는 제단 불


a.불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
b.하나님은 소멸하는 불과 같다.(히12:29)
c.하나님께서 친히 점화하신 불이다.(레9:24)
d.제단 부릉 한번 붙은 후 꺼지지 않게 하였다(레6:12,13)
e.그리스도의 감격과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찬양의 삶은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f.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영속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5.제단 뿔의 의미


1)생명의 뿔

a.죄를 범한 인간들이 위협을 당할 때 그들은 장막이나 성전 안에 들어가서
이 제단의 뿔을 잡기만 하면 살 수 있었다.
b.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만 붙잡으면 산다.

6.속죄와 계속되는 제물


1)제물
a.하나님은 양이나 염소 등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대신한 제물로 드리도록 명하셨다.
b.죄를 대신하는 일시적인 방편으로 이 제물들을 하나님께 허용하셨다.
c.제물되는 짐승을 잡을 때마다 제사장은 그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였고
안수하는 순간 죄가 그 짐승에게로 전가되었다.
d.모든 번제물의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아야 했다(레4:7,18,25,30)

7. 번제


1)번제의 성격

a.번제는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제사이다.(레1:9)
b.번제는 제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기 위하여 드려진 제사이다(레1:3,4)
c.번제는 생명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이다.
d.번제는 제물의 전체가 태워지는 제사이다.

2)번제의 제물

a. 가축=소
b. 목축=양,염소
c. 조류=산 비둘기

3) 제물의 특징

a.제물은 다 사람들과 가깝고 사랑받는 동물이다.
b.제물은 다 온순하고 충직한 동물들이다.

4)제물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a.경제적인 이유:누구라도 자기의 형편에 알맞게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b.상징적인 이유:제주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힘,근면,순종,온유함,평화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양=순종
*비둘기=평화와 순결
c.예배적인 이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것 가운데서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흠 없는 것을 원하시고,새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최선의 것,처음 것을 원하신다.(잠3:9,10)

5)번제의 특성

a.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하나님과의 관계
b.번제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
c.번제는 안수가 있는 제사
d.번제는 내 죽음과 피를 강조한 제사
e.번제의 제물인 정강이와 내장은 완전히 불살라졌다.
f.번제는 대대로 바쳐지는 제사(출 29:42)



05-01-2024(수) 오후 8:00
성막 제5강 / 물두멍(출애굽기 38:8)


그가 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They made the bronze basin and its bronze stand from the mirrors of the women who served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수종(隨從) : 따를 수(隨). 좇을 종(從)
- 따라 좇음
- 따라 다니며 곁에서 심부름 등을 하는 사람

(예) 수종자(隨從者)

출애굽기에 사용된 물두멍 / 9회
출애굽기 30:18. 28.   31:19.  35:16.  38:8.  39:39.  40:7. 11.  30.

헌신(獻身) : 드릴 헌(獻).  바칠 헌(憲).  몸 신(身)
-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

탈무드 유머 / 자녀가 9명
자녀를 나눌 수 없어 하나를 더 낳은 후 이혼하라
그런데 쌍둥이를 낳았다.
결국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았다.

왜 부부 싸움해?
신발에 콩을 넣고 일주일을 다닌 후에 다시 찾아와라
남편은 생콩을 넣고 다녀서 어그적 거리고 온다.
그런데 여자는 삶은 콩을 넣었다.

대학생 주일날 놀고 와서 월요일에 거짓말을 한다.
월요일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끌고 오느라 어제 결석하였다.
어느 바퀴에 펑크가 났는지 작성하라!

못생긴 여자를 호박과 같다고 한다.
정말 못생긴 여자가 스카프를 쓰고 가다나 바람에 날려서 날아간다.
지나가던 남자가 스카프를 주워 주며 여기 호박잎 있어요.

네살 난 사내가 세 살난 여자아이와 소꼽 놀이

이러다가 사고 나는 것 아니야
야 우리가 한 두 살 난 아이니.............

할머니가 입원 중 매일 아침 소변을 받아서 의사에게 보낸다.
이 날은 소변을 갔고 가다 쏟아버렸다.
며느리가 자기 소변을 받아서 의사에게 보냈다.
할머니 어제 밤 큰 일이 났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의사가 병실을 방문하여
할머니 임신했어요.

음식점에서 개 밥이 따로 없다.
저기 테이불에 손님이 먹고 남은 것이 개밥이다.
아들이 그 테이블 옆에서 지켜보다
손님이 식사를 모두 먹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개밥 까지 다 먹었어요.

유대인들이 금지 된 유머 세 가지

성적 유머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머
사람에게 상처주는 유머

대머리에게 이 자리를 빛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성막 - 378평

성막은 하나님을 마나러 가는 약도
문에서 예수, 번제단에서 죄를 버리고, 물두멍에서 성령을 받고, 떡상에서 말씀을 받아먹고 등대에서 빛처럼 생활하라
분향단에서 기도한 후 지성소에거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물두멍은 규격(規格)이 없다.
솔로몬 성전의 물두멍은 규격이 있다.

솔로몬 성전 마당에 있던 놋 물두멍(왕상 7:23-26, 44).
번제단과 성전 본관 사이에 위치했다.
지름 10규빗(5m), 둘레 30규빗(15m), 높이 5규빗(2.5m), 두께 10㎝(손바닥 너비)로 무려 2,000밧(1밧은 약 22ℓ)의 물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대단히 큰 놋 그릇인데, 놋 기술자 히람이 제작하였다.

수종드는 여인들

1. 거울 없이 살아가는 여인들

거울이 없는 여자들의 세 가지 특징

 a. 수종 / 2백만 명이 제사 드리러 올 때 안내 위원, 제사장 24,000명에게,
 
국이 식었구나!
오 그래요, 파리를 집어서 씹어 먹는다.
아 까만 콩입니다.
당신이 잘못 봤어요.
내가 잘못 마래헛 미안해요.
주인 : 예, 네가 보기에도 분명히 파리이었지?
종 : 단골 손님이 떠나지 않게 하려고...

사무엘상 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b. 헌신 /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가복음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c.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한다 /

남편이 아내를 볼 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민수기 5장 의심 받는 여자를 데리고 제사장 앞에 간다.
다른 남자를 만난적이 있는가?
없다!
남편에게 : 믿겠는가?
못 믿겠다!

물두멍 앞에서 물을 떠서 여자에게 마시게 한다.
죄가 있으면 물을 마시고 창자가 썩어서 죽는다.
아무 일이 없으면 정결한 여자로 판명된다.

(예) 쌍둥이 여인이 결혼
언니가 부정하였다.
그의 남편이 부정을 증명하려고 물두멍으로 간다.
그 때 동생 집에 들러 동생이 언니를 대신하여 물두멍으로 간다.
제사장님, 아내의 부정을 밝혀 주십시오.
물두멍의 물, 성막의 거룩한 재
언니 이제는 해방되었어!
너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
입을 맞추는 순간 물이 언니 입에 묻어 넙적다리가 썩어서 죽어간다.

미드라쉬 - 성경의 모조품

* 예수 믿는 것은 성령 받은 것이다 - 장로교 / 믿음의 단계와 성령의 단계가 다르다.

* 사도행전 8:14-17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낸다.
성령 받기를 기도한 결과 <예수를 믿는데 성령 받기를 기도>
성령 받은 사람이 없이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안수 후 성령을 받았다.

세례 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다르다.

* 사도행전 19:1-4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다.





문에서 예수 믿고
번제단에서 죄를 버리고
물두멍에서 성령을 받자!
 성령은 파라클래이토스 - 곁에서(파라) + 도와주는 사람(클래토스)


물두멍(a laver of brass)

출애굽기 40:30-32
그가 또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고 자기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니라

물두멍은 놋거울로 만든 일종의 커다란 세수대야로서 번제단 앞 성소 입구에 위치했다. 그 용도는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 혹은 제사를 드리기 전 먼저 손발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세한 모앙이나 크기, 제조방법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제사장들이 여기 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제사 의식을 집전하기 전 사막의 흙과 먼지로 더렵혀전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는 정결례였다.

그러나 보다 깊은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심령이 물과 성령으로 깨끗이 씻음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두멍에 담긴 물은 인간의 온갖 더러움울 깨끗이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아낌없이 쏟아 흘리신 예수의 물과 피를 연상케 한다(요19:34;계7:14).

• 물두멍의 모양과 크기

모양이나 제조 방법 등에 대해서는 성경상의 언급이 없으나 원어 '키요르(כּיּר)'는 '둥근', '도려낸', '솥' 등의 뜻이므로 둥글게 생긴 큰 대야나 욕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물두멍의 재료

그리고 출 38:8에 의하면 이것은 회막 문 앞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놋거울로 만들었음을 알 수있다.
아마 이들은 이스라엘의 절기 때에 춤을 추고 노래하는 역할을 많은 여인들이었던 것 같다(15:20). 그들이 자신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도록 헌물(獻沕)한 것은 그들 자신의 단장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마10:38,39). 여기에서 거울은 동판(銅版)거울을 가리킨다(고전 13:12).

한편 이러한 물두멍은 본래 하나였으나, 훗날 솔로몬 당시에는 성전의 규모에 비례하여 10개로 늘어났다(왕상7:38). 받침 - 물두멍을 고정시키기 위한 발(KJV,foot)이다.

• 물두멍의 위치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회막 즉 성막 본체와 번제단을 일직선상으로 연결하는 신에서 남쪽으로 약간 비껴난 지점에 몰두멍을 두었다(유대 랍비들) 아마 이는 물두멍이 회막 앞 정중앙 부분에 위치하면 제사장이 성소를 출입할 때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 물두멍의 용도
"수족을 씻되" - 물로 몸을 씻는 것은 고대에 성행하던 종교 예식이었다. 이는 곧 죄를 씻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행동이기도 하면서 먼지와 흙으로 더러워지기 쉬운 광야 지대에서는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 행동이었다.그러나 물이 귀한 광야 지대에서 매번 제사드리기에 앞서 손과 발을 씻는다는 것은 쉬운 일니 아니며 상당한 노력이 따라야 했다. 이로 볼때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제사는 그 준비 단계에서부터 노력과 정성이 따라야 함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들도 이와 같아(또한 예수의 말씀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요4:24). 아울러 이 행위는 이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주위의 온갖 죄의 오염으로 인하여 영혼이 더렵혀졌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의 생명수로 매일 정결케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요13:8-10).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심령이 물과 성령으로 깨끗이 씻음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두멍에 담긴 물은 인간의 온갖 더러움울 깨끗이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서 아낌없이 쏟아 흘리신 예수의 물과 피를 연상케 한다(요19:34;계7:14). 물두멍의 크기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여인들이 바친 동거울의 양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물두멍은 주님의 보혈의 능력처럼 모든 죄인을 씻기기도 남음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주님께서 마지막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감히 주님이 어떻게 제자의 발을 씻긴다는 말인가. 이는 종이나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라고 하셨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용서 받고 거듭난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회개를 통해 깨끗한 후에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요4:24).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의 생명수로 매일 정결케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요13:8-10). 물이 귀한 광야 지대에서 매번 제사드리기에 앞서 손과 발을 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이였을 텐데 주님께서 씻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보면 이를  뒷받침해주신다.

• 씻지 않으면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출 30:20).

 비록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부정한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이는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침범이 되기 때문에 죽임을 당케된다. 따라서 그는 물로 씻어 의식적으로 정결케 되었다고 인정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채 하나님을 보고, 스스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었다(사6:5).

 "그와 그 자손이...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 물론 이러한 의식적인 규례는 구약제사제도가 지속되는 동안 아론과 그 자손인 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영적인 의미는 오늘날 만인 제사장적 자격을 지니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의 재림시 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생명수로 매일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롬5:9).

• 제사장 임명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 29:4)

"물로 씻기고" - 여기 물은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 큰대야(물두멍)의 물을 가리킨다(출 40:30). 한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됨에 앞서 먼저 몸을 씻음은 몸을 씻음으로써 몸과 영을 깨끗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후 7:1; 엡5:26). 따라서 향후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 갈 때와 번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 먼저 이 대야의 물로 손발을 깨끗히 씻어야 했다(30:20).본문은 28장에 기록된 대제사장의 복식들을 완전히 갖추어 입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대제사장의 복장에 대한 언급이 이와 같이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차질없이 수행되어야 할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서도 이러한 정성과 면밀함을 갖추어야 한다.본문은 28장에 기록된 대제사장의 복식들을 완전히 갖추어 입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대제사장의 복장에 대한 언급이 이와 같이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차질없이 수행되어야 할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서도 이러한 정성과 면밀함을 갖추어야 한다.


물두멍의 의미


각 사람마다 물두멍의 크기가 다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던 성막에는 물두멍이 놓여져 있습니다. 물두멍은 성막뜰에 위치해 있었으며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있었습니다. "[출 30: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그런데 놀랍게도 물두멍의 크기에 대해서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성물들은 모두 정확한 규격이 있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천국의 성막을 그대로 본따 만들었습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세가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께 보여주신 본(sample)을 따라 그대로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물두멍도 보았을 것입니다. 다른 성물에 대한 정확한 규격을 말씀해 주신 하나님께서 물두멍의 크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물두멍의 크기에 대해 조금의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물두멍의 크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각 사람마다 회개할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지은 죄에 따라 각자 알아서 회개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으로 인한 원죄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속죄되었기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원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삶 가운데 짓는 자범죄는 우리가 날마다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물두멍에서 우리는 자범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두멍은 물세례를 상징합니다.

번제단이 성령세례를 뜻하듯이 물두멍은 물세례를 뜻합니다. 성령세례와 물세례는 하나님께로 나아기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물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의식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놋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물세례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출 38: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물두멍에서의 정결의식

성막은 일반 땅과 똑같은 땅이었습니다. 그 위에 뭔가를 덮거나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성막뜰 남쪽에는 짐승을 잡아 죽이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피를 북쪽편에 있는 번제단 밑에 부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성막뜰은 항상 짐승의 피가 묻어져 있는 불결한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사장은 신발을 신지 않고 의식을 수행했기 때문에 항상 제사장의 손과 발과 몸은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더럽혀진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후에 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출 30:19]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만일 손과 발을 깨끗이 씻지 않고 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은 죽임을 면치 못했습니다.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찌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찌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또한 물두멍이 놋으로 만들어진 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깨끗함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놋은 백성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세 때 불뱀에 물려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메달아 높이 쳐들었을 때 누구든지 놋뱀을 보고 죽임을 면치 않았습니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속사자료 - 물두멍


물두멍은 물을 담아 놓고 쓰는 큰 가마, 놋으로 만들어진 큰 통을 말합니다(출 30:17-21, 38:8, 40:30-32). 성막에서 제사장의 거룩한 봉사를 위해 물두멍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론과 그 자손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나 혹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물두멍에서 흙과 먼지와 피로 더럽혀진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물두멍의 물로 하나님께 드릴 희생 제물을 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1. 물두멍의 크기

물두멍은 다른 용기들과 달리, 크기나 무게에 대한 정확한 수치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물을 담는 두멍과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두멍의 크기나 형태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그 물의 양이 제한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의 양을 제한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물이 많이 필요했다는 뜻이요, 제사장이 더러울 때마다 자신의 정결을 위해서 얼마든지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음을 의미합니다. 

2. 물두멍의 제작

물두멍 재료는 놋인데, 그 놋은 회막문에서 수종 들던 여인들이 봉헌한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8:8 하반절). 회막문에서 수종 들던 여인들은 제사장의 성결을 위하여 물두멍을 만드는 데 자신들의 필수품을 즐거이 헌납했습니다(마 19:29, 막 10:29-30). 그 거울은 과거에 여인들이 외모를 꾸미고 단장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제사장들이 수족을 씻어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물두멍의 표면은 제사장들을 비추는 거울로도 사용되어 거울을 통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 자신의 흠을 발견하고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물두멍이 보는 거울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신을 비추어 흠도 없이 점도 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전 10:6, 11, 약 1:23-25).

3. 물두멍의 특징

(1) 물두멍의 위치는 회막과 단 사이였습니다. 

물두멍은 회막과 단 사이에 놓였는데(출 40:7, 30) 번제단보다 회막문 쪽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물두멍은 성막문 앞을 가리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출 40:29), 북쪽은 제물을 잡는 곳이었으므로(레 1:11), 아마도 물두멍은 성막문 근처 남쪽 방향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도록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한다면 자신을 정결케 하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앞에 복종하겠다는 겸손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는 것은 대대로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출 30:19-21).

① “수족을 씻되”(출 40:31-32) : 물두멍에서 손을 씻으라는 규정은 첫째,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실하고 정결한 예배를 원하시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둘째, 제사장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준비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② “죽기를 면할 것이요”(출 30:20) : 제사장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규례를 지켜 항상 정결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③ “아론과 그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규례”(출 30:21) : 이 규례는 구약 제사 제도가 지속되는 동안 아론과 그 자손인 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되었으나, 그 영적 의미는 오늘날 신령한 제사장이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벧전 2:9). 성도의 정결함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합니다(빌 2:12, 계 7:14-15).

4. 물두멍의 구속사적 교훈

(1) 물은 거룩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에는 물을 넣어 두되 계속해서 채워 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무제한으로 솟아나는 생수와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사 58:11, 요 4:14).

이사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동산 같겠고 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물두멍에 항상 물이 채워져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중생을 체험하고 난 후에도 죄와 허물로 오염되기 쉬운 마음을 말씀으로 늘 깨끗하게 해야 함을 상징합니다(시 119:9, 엡 5:26, 요 17:17, 딤전 4:5).

시편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요한복음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2)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성막 출입 전후에 반드시 손과 발을 씻고 물두멍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하셨는데, 이것은 영적으로 성도가 하루하루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에 먼저 자신의 허물과 범죄와 실수를 신령한 거울에 비추어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나타냅니다(마 5:23-24).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번제단이 목욕의 역사로 비유된다면, 물두멍은 발 씻음의 역사로 비유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받음으로써 마치 목욕한 자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총에 의지하여 날마다 죄를 회개함으로 마치 발을 씻은 자 같이 되는 것입니다. 

(3) 물두멍에서 물로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되는 세례를 예표합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물두멍의 물로 자신을 씻은 것은, 신약 시대에 와서 행하여진 세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주의 몸 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그 증표로 물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구원의 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05-08-2024(수) 오후 8:00
성막 제6강 / 떡상(출애굽기 25:23-30)

떡상은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며 정금으로 그 위에 입혔습니다.
장이 2규빗(1m), 광이 1규빗(50cm), 고가 1규빗 반(75cm)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르고

 
떡상의 크기는 가로가 3피트(90cm) * 세로가 1.5피트(45cm), 그리고 높이가 2피트 3인치(67.5cm) 정도입니다. 
떡상은 금등대(금촛대) 맞은 편, 성소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타내는 12 덩어리의 빵을 그 상 위에 두었습니다.

제사장은 고운가루로 빵을 굽고 일주일(7일) 동안 주님 앞에 항상 떡상을 두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은 떡을 치우고 그것을 거룩한 성소에서 먹었고, 새롭게 구운 12 덩어리의 떡을 테이블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아무나 떡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떡을 먹을 수 있었고, 떡이 거룩하기에 거룩한 성소에서만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먹는 떡을 주님 앞에 항상 거룩하기에 "진설병(bread of the presence)"으로 불렀습니다.
상과 떡은 사람과 함께 교제하고 교통하고 나누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담겨있는 그림을 먼저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그것은 마치 식사 때 친구의 우정을 나누고 교제하는 초대와 같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친구와 더불어 식사하는 것은 친근한 교제의 한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더불어 떡상을 사이에 두고 즐거운 식사와 대화, 그리고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원함을 날마다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이 당신과 더불어 영광스럽고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당신의 임재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개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우리가 살펴보는 떡상 곧 "진설병"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설병의 의미와 가치를 세리들과 창기들과 유대 사회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그 한 예로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관계맺는 친구사이의 우정의 모습을 초월하고 뛰어 넘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당신 자신에게로 초청하여,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교제권 안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인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와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맺어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모두 버리시고 독생자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갖기 원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그 떡에 참여하는 모두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도록 "생명의 떡"으로 자원하여 약속을 좇아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와 함께 한 주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주님은 자신을 다시 한번 떡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의 찢겨진 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가능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유월절에 제자들과 맺은 새 언약(예수의 살과 피)의 은혜의 진리(복음)를 성령으로 믿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늘나라의 모형인 성막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영광과 거룩과 생명으로 교제하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와 같은 예배를 갖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약속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런 "생명의 떡"을 나누어 가진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교제와 사랑의 나눔과 교통을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혹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런 예배자입니까?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구속사자료 - 진설병을 두는 상

진설병을 두는 상은 남편에 놓인 등대 맞은편, 성소의 북편에 놓았습니다(출 26:35, 40:22-24).
“진설병”은 히브리어로 ‘레헴 파님’으로,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출 25:30). “여호와 앞(면전)”에 진설해 놓았기 때문에 ‘면전의 떡’이라고 불렀습니다(레 24:6, 8). 

1. 떡상의 크기

떡상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올려놓았습니다(레 24:5-6).
떡상은 네 개의 다리와 이동 시에 사용되는 네 개의 금고리와 두 개의 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떡상은 장이 2규빗, 광이 1규빗, 고가 1.5규빗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애굽기 25:23에서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7:10). 


2. 떡상과 보조 기구의 제작

(1) 떡상의 재료는 조각목이며, 그것을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둘렀습니다(출 25:23-24, 37:10-11).

여기 “테”는 히브리어 ‘제르’이며, ‘테두리, 화관(wreath), 관(crown)’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금테는 금으로 테두리를 둘러 화려한 모습으로 돋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금테는 떡상에 두 개, 언약궤(출 37:1-2), 향단(출 37:25-26)에 각각 하나씩 있었으며, 번제단에는 없었습니다.

(2) 떡상의 사면에는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었습니다(출 25:25, 37:12).

여기 “턱”은 ‘평평한 곳에 갑자기 조금 높인 자리’라는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미스게레트’이고 ‘둘러싸는 어떤 것, 가장자리’라는 뜻입니다.
이 턱은 떡상 위로 떡상의 둘레를 따라 손바닥 넓이(1/6규빗=7.6㎝)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금테를 둘러 튼튼함을 더했습니다. 

(3) 채를 꿰는 금고리 넷은 떡상 네 발의 위 네 모퉁이에, 곧 “턱 곁에” 달았습니다(출 25:26-27, 37:13-14).

금고리 넷은 떡상을 운반하기 위해 채를 꿰는 고리입니다.
떡상을 메는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쌌습니다(출 25:28, 37:15).
떡상에 금고리를 다는 위치에 대하여 첫째, “네 모퉁이”로 떡상의 테두리가 둘려 있는 상부의 턱과 그 아래 네 다리(발)가 경계를 이루는 모서리 부분입니다.
둘째, “턱 곁에”(레움마트 하미스게레트)인데, 여기서 ‘레움마트’는 ‘가까운, 연접한’(겔 48:18)이라는 뜻입니다. 

(4) 떡상에는 부속된 기구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9:36에서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기구”는 떡상 위에 놓는 부속 기구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甁)과 붓는 잔”이 있습니다(출 25:29, 37:16). 

① 대접(케아라, dish)

“대접”은 히브리어로 ‘케아라’이며, ‘쟁반(platter), 큰 접시(plate)’을 가리킵니다.
대접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두 줄로 진설하는 데 사용된 기구였습니다.

② 숟가락(카프, pan)

“숟가락”은 히브리어로 ‘카프’이며, ‘오목한 손바닥 모양의 도구’입니다.
이 숟가락은 유향을 채워 놓는 도구였을 것입니다(참고-민 7:14, 20, 26, 32, 38, 44, 50, 56, 62, 68, 74, 80, 86). 

③ (붓는) 병(카사, jar)

“병”은 ‘둥글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카사’로, 일종의 주전자, 병, 단지 등을 가리킵니다(출 25:29, 37:16, 민 4:7, 대상 28:17).
민수기 4:7에서는 전제나 관제를 드릴 때 사용하는 “붓는 잔”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참고-민 28:7, 렘 44:18).
“붓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세크’로, 그 어원인 ‘나사크’는 ‘왕에게 기름붓다(왕을 세우다), 전제를 붓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참고-창 35:14, 왕하 16:13, 시 2:6).
제사에 있어서 붓는 행위는 전제(奠第, drink offering)를 드리는 것으로, 전제는 독립된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번제와 소제에 곁들여 포도주 또는 독주로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입니다.
전제는 포도주 4분의 1힌을 쏟는데, 보통 번제나 소제와 함께 시행하였습니다(출 29:40, 레 23:13, 민 15:5, 욜 1:9, 13, 2:14). 

④ (붓는) 잔(메낙키트, bowl)

“잔”은 히브리어로 ‘메낙키트’이며, ‘깨끗하다, 비우다’라는 뜻의 ‘나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보통 전제를 드릴 때 포도주나 전제의 술(출 29:40-41)을 쏟아 붓는 데 사용하는 사발이나 잔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25:29에 “붓는 잔”, 출애굽기 37:16에 “잔”, 민수기 4:7에 “주발”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레미야 52:19에는 관제를 위해 순금으로 만든 ‘바리들’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술을 따르는 그릇’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붓다’(네세크)라는 단어가 “잔”과 함께 쓰인 것은, 아마도 전제를 드릴 때 “붓는 병”과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붓는 잔”과 “붓는 병”이라는 도구가 필요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진설병 상 위에는 떡과 함께 전제로 드릴 포도주가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진설병의 특징

(1) 떡상 위의 떡을 가리켜 “진설병”(출 25:30, 35:13, 39:36), “진설하는 떡”(showbread. 대상 9:32), “거룩한 떡”(consecrated bread. 삼상 21:4, 6)이라 불렀습니다. 

진설(陳設: 베풀 진, 베풀 설)은 ‘큰 잔치 때 상 위에 음식을 벌여 놓음(show)’이라는 뜻입니다. 진설되는 떡은 ‘지극히 거룩한’(코데쉬 카다쉼: most holy)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레 24:9). 진설병의 히브리어는 ‘레헴 파님’으로,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파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참고-출 33:14, 민 5:16, 18), 진설병은 ‘하나님 임재의 떡’이었습니다. 

(2) 지극히 거룩한 떡상 위에는 하나님 앞에 바치는 12개의 떡을 올려놓았습니다.

12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나타내며, 12개의 떡을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한 지파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위기 24:8에서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한 것이요”의 히브리어는 ‘에트’로, 목적어를 분명하게 지시해 주는 불변사입니다. 이것은 매주 떡을 진설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는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설병은 하나님께 음식을 제공한다는 봉양(奉養)의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3) 진설병의 재료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소금”이었으며, 화덕에 구워 만든 것입니다(레 2:4, 13, 24:5).

레위기 24:5에서는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4에서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레위기 2:13에서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을 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진설병이 무교병인지 유교병인지 언급이 없지만, 진설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므로 무교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Ant. 3.142-143). 한편, 광야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아 고운 가루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아마도 ‘만나’로 진설병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진설하는 떡 열둘을 구울 때 매 덩이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에바 십분 이로 만들었습니다(레 24:5). 진설병을 만들기 위해서 곡식은 고운 가루가 되기까지 계속해서 찧어져야 했고, 그리고 나서 뜨거운 화덕에서 구워져야 했습니다. 곡식이 맷돌 속에서 부서져 가루가 되고 떡으로 빚어져서 뜨거운 화덕에 구워지는 과정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하여 받으신 고통과 시련을 예표해 줍니다.

(4) 떡이 떡상 위에 진설된 모양은 한 줄에 6개씩 쌓은 두 줄입니다(set them in two piles, six in a pile: ESV. 레 24:6).

역대상 9:32에서는 안식일마다 그핫 자손 중에 어떤 자는 “진설하는 떡”을 준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설하는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 하마아라케트’는 ‘그 쌓아 올린더미’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떡 한 덩이는 고운 가루 약 4.6리터 정도로 만들어져 부피가 상당히 컸으므로, 가로 2규빗(91.2㎝), 세로 1규빗(45.6㎝)크기의 상 위에 떡 여섯 개를 한 개씩 나란히 수평으로 두 줄로 놓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떡은 두 줄로 쌓아서 진설하였는데, 둘은 증거의 수입니다(막 6:7, 눅 10:1, 참고-신 17:6, 19:15, 요 8:17-18, 10:30). 떡상 위에 두 줄로 쌓아 올린 떡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떡입니다. 

(5) 진설된 각각의 떡 모양은 구멍 뚫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떡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레헴’을 쓰는데 특별히 레위기 24:5에서는 ‘할라’가 사용되어 진설병의 모양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할라’는 ‘구멍을 뚫다’라는 뜻의 ‘할랄’에서 유래한 것으로, 옆과 위에서 볼 때 ‘구멍 뚫린’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6) 진설한 떡의 매줄 위에 정결한 유향을 두어 화제를 삼아야 합니다.

진설병 위에는 정결한 유향을 매줄 위에 두었다가, 안식일에 진설병을 새 것으로 교체할 때 태워서 기념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레 24:7-8). 이때 금으로 만든 접시 위에 놓여 있는 유향을 한줌 취하여 단에 불살라, 하나님 앞에서 그 진설병이 기념되도록 하였습니다(레 24:7). 유향(乳香, frankincense)은 감람과의 유향 나무에서 추출한 젖 빛깔의 방향(芳香) 물질입니다. 향은 성도의 기도를 나타내는데(시 141:2, 계 5:8, 8:3-5), 특별히 유향은 히브리어로 ‘레보나’이며, ‘희다’(white)라는 뜻을 가진 ‘라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헌신은 반드시 깨끗한 마음으로 드려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7)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레위기 24:8에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번 진설한 떡을 그냥 두지 말고, 일주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교체하라는 말씀입니다. 떡을 만드는 일은 안식일마다 고핫(그핫) 자손들이 맡아 준비하였습니다(대상 9:32).  사무엘상 21:6에서 “더운 떡(hot bread)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라는 말씀을 볼 때, 고핫 자손들이 안식일 새벽에 떡을 구웠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8) 물려낸 떡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성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① 제사장에게 돌아간 떡은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레위기 24:9에 “이 떡은... 지극히 거룩함이니라”라고, 음식 자체를 거룩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 ‘거룩하다’(코데쉬)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히브리어는 최상급을 써서 ‘코데쉬 카다쉼’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거룩한 것’(KJV・RSV・NIV: most holy)입니다. 

레위기 6:29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레위기 7:6 “지극히 거룩하니 이것을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며”

율법에서는, 여호와께 요제나 거제로 흔들어 바친 제물은 제사장에게 돌아갈 지극히 거룩한 양식임을 엄격히 명하였습니다(레 7:6-7, 10:15, 14:13, 민 18:9-11). 모세가 제사장이 먹어야 할 속죄제의 고기를 찾으러 왔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율법 규례를 어기고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른 것을 알고 그들을 호되게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레 10:16). 

② 진설되었던 묵은 떡은 안식일에 새로 만든 떡으로 교체되고, 그 묵은 떡은 제사장과 그 자손들이 성막 뜰에서 먹도록 했습니다.

레위기 24:9에서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운 가루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진설병은 제사법 가운데 ‘소제’에 속하며, 소제의 규례에서,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레 6: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글 개역성경에는 ‘먹다’라는 뜻의 ‘아칼’을 두 번만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먹는 주체에 대한 기록으로 ‘아론과 그 자손’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했고, 두 번째는 “누룩을 넣지 말고” 먹으라 하며 먹는 방법과 규례를 말씀했고, 세 번째는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한다고 ‘먹는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지정해 주고 있습니다. 

③ 진설병이 제사장의 몫이 되는 일은 “영원한 규례”입니다.

‘진설병은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리라’는 이 법은,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원한 규례”(레 24:9下)로 지켜졌습니다. 진설병을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리게 한 이 규례가 주어진 지 약 400년 후였던 주전 1020-1018년 즈음, 다윗의 도피 생활 중에서 진설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굶주린 자기 부하들을 위하여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자, 아히멜렉은 그들이 3일 동안 부녀(婦女)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몸의 성결’)을 확인한 후에 “거룩한 떡”(진설병)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삼상 21:1-6). 이는 제사장이 아닌 일반 사람이 진설병을 먹은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그때에도 ‘부녀를 3일 동안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거룩성을 확인한 후에 내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설병은 “영원한 규례”로 제사장들을 위한 거룩한 떡으로 구별되어, 제사장들과 그 자손들의 생계를 위한 식물이 되었습니다. 

4. 떡상과 진설병의 구속사적 교훈

(1) 떡상과 그 부속품을 만든 재료인 정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믿음을 나타냅니다.

정금으로 제작된 모든 것들은, 금이 지닌 귀하고 아름답고 불변하는 속성과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8). 불순물이 제거된 정금 같은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히 12:2). 물질적 부요와 헛된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사랑의 권면이었습니다(계 3:17-20). 금은 본래 자연에서는 정금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흙이나 돌 속에 소량 섞여 있습니다. 금광에서 채굴된 불순물이 섞인 금을 용광로에 녹여 순금을 분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도 정금과 같이 순전하고 보배로운 믿음이 자리 잡기까지는 수없는 연단 과정이 필요합니다(욥 23:10). 신앙은 오직 불 같은 연단과 징계를 통해서만 순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욥 5:17-18, 롬 8:18, 히 12:5-11). 

(2) 항상 진설된 떡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떡상에 진설된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떡은 아무리 보기 좋고 맛이 있어도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양식이요 영원한 생명의 떡입니다(참고-요 6:63). 이 떡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영생을 줍니다. 이 말씀의 떡은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1, 48, 51).  요한복음 6:51에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복음 6:58에서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은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요 6:63, 8:51). 

(3) 항상 떡을 진설하는 것은 변함없는 영원한 언약을 나타냅니다.

열두 덩이의 떡을 진설하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레위기 24:8에서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떡상 위에는 항상 진설병이 있어야 합니다. 민수기 4:7에는 “항상 진설하는 떡”(the continual bread)이라고 말씀하였고, 출애굽기 25:30에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끊임없이 떡을 진설하는 것은, 하나님과 12지파 사이에 맺은 언약이 영원한 언약임을 나타냅니다. 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진설할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임을 새롭게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묵은 떡을 새로운 떡으로 바꾸어 놓듯이, 우리도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심령으로 새롭게 바쳐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매주일 예배를 통해 영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받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령한 제사장 된 성도들도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말씀의 떡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해 바치는 헌신적인 예배 생활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일평생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영원한 규례입니다.


진설병상(출 25:23-30) — 떡상

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25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26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1. 진설병상

성막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 안에 법궤가 놓여 있었다면, 지성소 다음으로 거룩한 장소인 성소 안에는 진설병상과 금등잔대와 분향단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진설병상은 성소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남쪽에 위치한 금등잔대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진설병이란 (하나님 앞에) 진열하여 베풀어 놓은 떡이란 뜻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레헴 파님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인 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진설병으로 번역을 한 것이지요. 하나님 면전에 12개의 빵이 놓여 있으니 진설병은 12지파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반대편에 서있는 금등잔대는 하나님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을 늘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성막의 성물들이 대부분 그렇듯 진설병은 이중적인 상징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1)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진설병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성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진설병은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떡입니다. 요 6:35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진설병상 위에는 떡은 물론 병과 붓는 잔이 함께 올려져 있습니다. 병은 떡에 부을 포도주를 담아 두기 위한 것이었꼬, 붓는 잔은 포도주를 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인에게 생명을 주는 성찬,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지요.

진설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곡식을 가루로 빻아 불로 구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가루처럼 빻아지셨고, 뜨거운 진노에 불에 구워 지셨습니다.

2) 성도의 자발적이고 순결한 헌신을 상징하는 진설병

열두 개의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한 모든 백성을 의미합니다. 맞은 편의 하나님의 등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추고 있습니다. 진설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입니다. 죄도 없고 허물도 없이 성결하게 하나님의 빛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빻아지셨듯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형체를 남기지 않고 빻아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형상으로 다시 빚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길같이 험한 길을 걸으셨듯, 성도들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험한 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걸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쉬지않고 그 영광스러운 얼굴의 빛으로 비춰 주시며 성도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설병상에 있는 턱도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보호막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상에 턱이 없다면 진설병은 쉽게 상 아래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단 하나도 하나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주시는 분이십니다.



05-15-2024(수) 오후 8:00
성막 제7강 / 등잔대(출애굽기 25:31-40)

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34.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금등잔대

성소에 비치된 세 기구 중 두 번째 기구는 등잔대입니다.
등잔대는 성소 내의 유일한 빛으로서 진설병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노라라 칭해지는 등잔대는 부속기구인 불집게와 불똥그릇과 더불어 모두 금 한 달란트를 쳐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순금 34kg에 해당하며, 현재의 시가대로 하자면 약 45억원(약 4백만불) 정도 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렇게 어마 어마한 가치를 들여 만들 정도로 금등잔대가 갖는 의미는 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등잔대의 빛 역시 이중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 예수 그리스도가 일차적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차적 상징이 되겠지요.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

금등잔대는 순금을 이용하여 하나로 쳐서 만들었습니다.
부품을 연결하여 만든 조립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은 나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순금으로 만든 이유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온전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어두움을 밝힙니다. 즉 어둠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빛이란 뜻입니다.

등잔대는 한 개의 줄기와 6개의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등잔을 7개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빛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순결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세상은 어둠을 깨고 빛가운데로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2) 세상의 빛 성도

등잔대는 또한 성도를 상징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해 가르치신 후, 성도를 세상의 빛이라 규정하셨습니다 (마 5:14). 성도는 사실 빛이 아닙니다. 유일한 빛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됩니다. 우리가 더이상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살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등잔대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등잔을 등잔대에 올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잔에는 심지가 있고 또한 기름이 들어갑니다. 기름은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합니다. 감람유가 나오기 위해서는 올리브가 으깨져야 합니다. 성도가 으깨어져야 비로소 등을 밝힐 수 있습니다. 또한 심지가 바로 세워져 태워져야 그으름이 생기지 않습니다. 심지를 바로 세워 그으름 없이 빛을 태우기 위해 불 집게와 불 똥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심지는 성도 자신을 말합니다. 성도 자신이 틀어져 있거나 불똥이 튈 정도로 엉키어 있으면 빛 대신 그으름과 고약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심지는 타는데 빛은 나지 않는 것이지요. 성도는 순결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섞여서도 꼬여서도 안됩니다. 그래야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온전히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습니까?

3) 금등잔대에 살구꽃 문양이 들어간 이유

살구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샤케드로 사실 아몬드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아몬드 나무가 없으므로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살구꽃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돋았던 싹도 아몬드꽃입니다. 죽은 나무인 지팡이에서 생명이 돋아 났으니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아몬드 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샤케드와 비슷한 음을 갖는 쇼케드라고 하는 단어는 지켜본다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비추어 이스라엘 백성을 늘 지켜본다는 의미를 형상화하는 꽃이 바로 아몬드 꽃입니다.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얻고 부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깨어 백성들을 지켜보듯, 성도들 역시 늘 깨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전을 비추어야 합니다. 살구꽃은 예수님의 부활과 지켜보심을 상징할 뿐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과 깨어있음을 함께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깨어있는 성도입니까?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창세기 30:37-39)

① (30:37)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ㅇ. ‘버드나무(리브네)’는 ‘희다’는 뜻의 히브리어 ‘라반’에서 유래했으며, 흰색을 띤 ‘포플라과에 속한 관목(styrax officinalis)’을 가리킨다. 또 ‘살구나무(루즈)’는 ‘편도나무(almond tree) 를, ‘신풍나무(에르몬)는 키가 큰 ‘플라타너스(platanus orientalis)’를 각각 지칭 한다.
ㅇ. 이 나무들은 모두 그 껍질이 푸른 기운을 띠고 있으며, 또 껍질이 통째로 벗겨지고, 껍질의 속 부분은 회고 수분이 많은 특성들이 있다. 따라서 그 나무들의 껍질을 부분부분 벗겨내면 겉의 푸른 색과 속살의 흰색이 어우러져 얼룩진 모양을 이루게 된다.
 
② (30:38)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ㅇ. ‘개천의 물구유에’라는 한글 번역은 상당히 어색하다. 여기서 ‘개천’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하팀’은 천연적으로 물이 흐르는 여울이나 실개천이 아니라 사람이 파놓은 인공 수로들을 가리킨다. 즉 주로 우물이나 오아시스 생물 옆에 얕고 길게 파놓은 도랑을 가리킨다. 이는 평 상시에 막아 두었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임시로 퍼서 물이 흐르게 하여 양떼들이 길게 옆으로 늘어서 물을 먹는 장소였다(출2:16).
ㅇ. 그리고 ‘물구유(쉬카토트 함마임)’는 ‘(물을)마시다’ (24 :46)란 뜻을 가진 ‘솨카’ 에서 유래한 ‘쇼케트’의 복수연계형 ‘쉬카토트’와 ‘물’을 뜻하는 ‘마임’ (9:15)이 합쳐진 말로서 결국 이는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파놓은 인공 수로 속의 물이 흐르는 홈통용 부분들을 가리킨다.

ㅇ. 따라서 ‘개천의 물구유에’ 라는 말은 ‘인공 수로의 고랑들 속에’라는 뜻이다. KJV도 이를 ‘in the gutters in watering troughs'라고 번역했다. 즉 야곱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인공 수로 속의 고랑들 곳곳에 앞절에 나오는 껍질 벗긴 세 종류의 나무가지를 세워둔 것이다.

ㅇ. 한편 당시 목자들은 양떼들이 물을 먹는 장소에서 즐겨 교미 (交尾)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야곱은 양들이 날마다 와서 물을 마시던 고랑들 안에 얼룩무늬 새끼를 얻기 위한 자신의 처방전을 세워두었던 것이다.
 
③ (30: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ㅇ.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뜨겁게 달아오르다’란 의미가 있는 ‘야함’의 완료형 ‘예헤무’는 이성에 대해 몸이 달아오르는 상태를 가리키며 동물에 적용될 때는 ‘교미하다’란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새끼를 배므로’는 ‘교미하므로’ 로 번역되어야 한다.

ㅇ. 한편 나무가지의 알록달록한 색깔과 무늬에 영향을 받아 반점을 지니거나 알록달록한 색깔을 띤 종자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축이 수태될 때 어미의 심리 상태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표현이나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없는 일이다. 따라서 야곱은 우성에 해당하는 순백의 양과 순흑의 염소로부터(32절 참조)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열성의 변종(變種)을 수태시키기 위해 얼룩무늬의 나뭇가지 앞으로 가축 떼를 인도하였으나 이러한 방법으로 변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ㅇ.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한 후 얼룩무늬 새끼들을 많이 낳게 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것은 훗날 야곱도 고백했듯이 이 방법 자체에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야곱을 속히 부하게 하사 가나안 땅으로 귀향시키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전적인 지시와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31:8-12).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아몬드 (샤케드, שקד) : 살구나무?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분홍색 아몬드 나무

히브리명 : 샤케드 ( שקד ) / 셈어로 "루즈" ( לוז )

영명 : 알몬드 (Almond)

학명 : 아미그달루스 코뮤니스 (Amygdalus communis L.)

아몬드 나무는 열매 나무들 중에 가장 일찍 꽃이 피는 나무이며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크기는 최고 6미터까지 자란다.
2~3월에 아몬드 열매가 달리고 9월에 수확을 한다.

아몬드 열매

샤케드는 아카드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아람어로 넘어가면서 나무를 가리킬 때에는 "샤케데트" 그 열매를 가리킬때에는 "루즈"를 사용하였다.

​샤케드 (שקד) 단어는 성경에 총 16 구절에서 17번 등장한다.
식물로서는 4번 등장하고, 동사로는 12번 등장한다.

샤케드 : "살구나무" "파단행" "감복숭아" "루스"

창세기 43:11 ...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살구(감복숭아)니라

민수기 17:8 이튿날 ...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예레미야 1:11 ..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전도서 12: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예전 성경에 보면 "파단행"이라는 단어가 쓰였었다.

창세기 43:11 너희는....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아몬드의 페르시아어가 "바담" (badam)이다. 이 단어가 중국으로 넘어가 "파담행"이 되었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파단행"이 되었을 것으로 추청한다.

그 이외에 같은 아몬드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로 "루즈" (לוז = 살구나무)라는 단어가 성경에 딱 한번 쓰인다.

창세기 30: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לוז)와 신풍 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

사실 현대 이스라엘에서 "루즈"는 아몬드보다 우리나라 개암과 비슷한 열매를 가르킨다.

현대 이스라엘의 "루즈" (לוז)

벧엘의 옛 이름이 "루즈"였다. 아마도 그곳에 많은 아몬드 나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세기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לוז)더라

샤케드 : "지키다" "보다" "파수꾼" 12번 등장

샤케드는 성경에서 동사로 "감시하다" "지키다" (watching, guard)의 뜻으로 사용되며, 대부분 "~을 지키다" (to keep)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사야 29:20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예레미야 1:12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예레미야 5:6 ..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

예레미야 31: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예레미야 44:27 보라 내가 경성하여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니 ..

시편 102: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욥기 21:32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잠언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

다니엘 9:14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

에스라 8:29 너희는 ...이 기명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왜 샤케드 (아몬드 나무)는 "살구나무"로 번역되었을까?

아몬드가 지금은 한국에서 일반화되어 있지만 아몬드 나무는 예전에 한국에 없는 나무였다.
그런데 학자들이 처음 성경을 번역하다 보니, 한국에 없는 아몬드 나무를 한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아몬드의 꽃이 한국 살구나무 꽃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한국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몬드 나무를 살구나무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살구나무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노란 열매를 먹는다.

민수기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사실 시기를 생각해 봐도 아몬드 나무가 필 시기는 지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를 "아몬드 꽃" (샤케드)가 피어나도록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샤케드는 "감시하다" 또는 "파수하다" (watch out)라는 뜻이 있고, 명사로는 "파수꾼"이라는 뜻이 가능하다.

​아론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늘 하나님의 백성들을 감시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도록 해야 하는 파수꾼과 같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론의 지팡이에 아몬드 싹이 난 사건을 민수기에서 보면, 몇몇이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이 정말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로 입증하셨다. (민수기 16~17장)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아몬드 꽃과 같이 늘 자신과 주변을 지키는 사람이다.


05-22-2024(수) 오후 8:00
성막 제8강 / 분향단(출애굽기 30:1-10, 37:25-29)

분향단,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의 제단,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분향단(焚香壇, the altar of incense)은 향을 사르는 제단으로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 앞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규빗(50cm)이며 높이는 2규빗(100cm)의 크기로 싯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습니다.
번제단처럼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었고 운반을 위해 금고리와 멜 수 있도록 채를 만들어 모두 금을 입혔습니다.
향단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조된 거룩한 향들만 피울 수 있었고 이른 아침과 저녁때 등잔대의 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명칭이 ‘분향하는 제단’이라고는 하나 번제나 소제, 전제 등 제사는 드리지 못하며 오직 향만 사르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상징적이나 영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에는 성막이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그 기구들이 가진 영적 의미들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구약에 있었던 그림자와 요한이 본 환상들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향’이 의미하는 바가 ‘기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울 때 발생하는 향연(香煙)은 우리의 기도가 이 향연처럼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하나님께서 분향단의 위치를 규정하실 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금등대에 대해서는 ‘떡상의 맞은 편’이라고 하셨듯이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 편’이라고 하신 것은 분향단이 속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번제단처럼 분향단에도 사방으로 네 뿔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일 년에 한번 속죄제의 피로 속죄합니다. 아마도 이날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大贖罪日, Yom Kippur, 7월 10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6:13에는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 있는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레 16:13)

정리하자면 분향단은 언약궤의 속죄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도 이 향단의 위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며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이기도 합니다. 기도처럼 하나님께 실제적으로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은 없습니다.

2. 분향에 사용되는 향에 대한 규정

출애굽기 37:29에서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조법을 따라 만들어야 했으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관련 명령은 이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제조법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4-38)

1) 향의 원료

향의 원료는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등 네 가지입니다.

먼저 소합향(蘇合香, stacte)‘스며 나오다, 방울되어 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나타프(נָטָף)’에서 나온 말인데 단풍나무와 비슷한 소합향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송진처럼 진액이 흘러나와 방울처럼 맺하는데 그것을 채취한 것이 소합향입니다.

대부분의 향 재료가 식물에서 얻어지는데 특별히 나감향(onycha)은 홍해나 지중해에서 서식하는 향조개(aromatic shell)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를 내어 만든 향입니다. 이 가루는 특히 불로 태울 때 진한 향을 발합니다.

풍자향(galbanum)은 인도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자라는 페룰라 갈바니플루아(Ferula galbaniflua)라는 다년생 식물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만들어졌는데 향이 자극적라서 불쾌하기도 하나 다른 향과 배합되면 향기를 오래 지속시켜 준다는 특성이 있고 해충을 막고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향료를 유향(乳香, frankincense)에 섞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서식하는 유향나무에 상처를 입혀서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이 나지만 대단히 상쾌한 꽃향기를 발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진정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말해 줍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진액이 스며 나와 방울이 맺히는 소합향처럼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 아래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수듯 우리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그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향연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지극히 자아적인 것입니다.
나의 자아와 육체의 욕망은 죽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이 바로 껍질의 부서짐입니다.

풍자향은 칼로 베임을 당한 곳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욱 향기를 발하는 향료가 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고난 속에 부르짖는 기도는 방부제처럼 우리 영혼을 타락의 죄악에서 지켜 줍니다.
고난은 쓰지만 향의 효과는 큽니다.
이 세 가지 향 재료는 유향과 섞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향기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교제의 삶은 하나님 앞과 세상 속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향 제조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언약의 소금’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8:19에서 레위인에게와 역대하 13:5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금지사항과 의미

향과 관련된 금지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향단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든 향 외에 다른 향을 절대 사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앞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향재료들은 인반적인 것들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임의로 삶에 필요한 향품을 만들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겠으나 다만 거룩한 향을 만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하여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거룩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향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제조의 방식이 거룩한 것입니다.
상징이나 그림자란 영적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해야만 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령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제조법으로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역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이 분향과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3. 분향단은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과 함께 가장 많이 하신 일은 기도였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지존자이고 전능자이며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기도하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입장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사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기도는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육신을 입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시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도들을 세울 때 밤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요한복음 17장 전체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능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치 진액이 나무에서 방울처럼 스며 나오는 소합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감향처럼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풍자향처럼 채찍맞고 가시관 쓰이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이 되어 보좌로 올라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중보자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님은 부활 후 살려주시는 영(성령)으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4. 분향단의 뿔

앞서 번제단에 대해 나눌 때 네 뿔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분향단에 있는 네 뿔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을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막 9:29).

분향단은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중보는 구원과 절대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중보의 힘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가 굳게 설 수 있고 또 성도들이 하는 진정한 기도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게 하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분향단의 불에 대한 중요한 명령

레위기 10장에는 대단히 당황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이란 무엇일까요?
레위기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이는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언급되지만 이미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모세가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세히 가르쳤던 내용일 것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레 16:12)

​분향단에 사용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사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어서도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사용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반역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심판하시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 16:41).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까지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서 불을 담아 향을 피우고 회중들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아론이 모세의 말대로 하자 염병이 그칩니다.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속죄 사역과 기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영적 실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죄 사역을 이루신 복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간구의 바탕에는 복음의 진리와 영혼 구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복음이고 다른 불입니다.
그 복음의 진리가 바탕되지 않는 기도의 제단은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움이 되는 복음 진리를 바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모든 중보의 사역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중심이 되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위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바탕에는 복음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소위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원칙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역의 성격상 특히 기도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그 기도와 사역이 복음이나 영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능력의 나타남’ 자체를 추구하거나 ‘성공과 축복과 번영’이라는 기복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와 추구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야 합니다.

​분향단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생활의 모범입니다.

6. 분향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 30:7-8)

번제단에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떡상에 떡이 항상 진설되어야 하고 등잔대에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하며 분향단에도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05-29-2024(수) 오후 8:00
성막 제9강 / 언약궤(출애굽기 25:10-22) 

언약궤(증거궤, 법궤)와 속죄소(시은좌)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2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그룹(cherubim, 케루빔)

네개의 날개를 가졌고(에스겔 1장, 10장) 이동하는데 사용하는 바퀴가 있다.
얼굴은 기이하게도 사면에 다른 얼굴을 가졌는데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습이다.
그룹은 성경에 85회나 언급되었다.​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창 3:24).
모세가 만든 법궤의 속죄소 양끝에 그룹을 각각 마주보게 만들었다(출 25:18).
이는 하나님이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사 37:16)
그룹이나 바람날개를 타고 이동하기도 한다(겔 1,삼하 22:11)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중앙에 날개를 펴져있는 그룹을 두었다(열상 6:27)​
그룹은 수호천사겸 이동할 때 타고 다니기도 한다​.

스랍(seraphim, 세라핌)

이사야 6장1~7절에 나오는데 여섯날개를 가졌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계시록 4장의 네생물도 여섯날개를 가지고 동일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면 스랍과 계시록의 네생물은 동일한 천사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천사들 중 가장 많은 여섯날개를 가졌으며 첫째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생물은 사람같고 넷째생물은 독수리 얼굴과 같다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역할을 한다​ .​

속죄소(카포레트. kappôreth)  כַּפֹּרֶת 스트롱번호 3727

1. 뚜껑.  2. 덮개. 3. 출 25:17이하
발음 [ kappôreth ]
어원 / 372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6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뚜껑, 덮개[언약궤의 뚜껑에 대해서만 사용], 출 25:17이하, 30:6, 31:7, 대상 28: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속죄소(출 25:17, 레 16:2, 대상 28:11).

3722. 카파르(kâphar)  כָּפַר 스트롱번호 3722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kâphar ]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 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지성소에 있는 가장 거룩한 기물인 언약궤에 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 블로그의 ‘성막해설’ 전개 순서는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가는지 인간의 입장에서 설명하기 위해 성막 밖에서부터 문을 통해 뜰에 들어오고 번제단과 물두멍을 지나 성소로 들어가며 성소의 기구들을 열거한 후 지성소로 들어가는 순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만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실 때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것은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막이 거룩한 집이 될 수 있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기 때문이고 지성소가 지극히 거룩한 공간이 될 수 있음은 바로 언약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언약궤가 없다면 성소나 지성소나 성막은 더 이상 거룩한 처소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언약궤는 성막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구입니다.

1. 언약궤 관련 명칭들

언약궤는 성막을 대표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성막처럼 다양한 명칭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칭들은 궤가 가지는 여러 속성들을 드러내 줍니다.

① 언약궤(言約櫃, Ark of the Covenant)

먼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언약궤’입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히브리서와 계시록에까지 총 46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이 기구 안(앞)에 보관되어 있는 내용물이나 궤의 윗부분의 속죄소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돌판은 언약의 말씀의 압축판이며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곳에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처소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전반부의 ‘나의 사자(my messenger)’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침례자 요한’을 말하고 후반부의 ‘언약의 사자(the messenger of the covenant)’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브리서 8:6)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브리서 12:2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자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최초로 예언된 여인의 후손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씨,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자손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입니다.

또한 ‘증거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증거이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없습니다.
그는 각종 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들이 사실대로 이루어짐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4. 언약궤의 내용물과 예수 그리스도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3-5)

광야에 있을 동안에 언약궤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물들 하나하나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① 만나 항아리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 16:33)

​만나는 광야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도 먹게 하셨지만 주식은 만나입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으로 매일 새벽에 이슬과 함께 지면에 내렸고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어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모두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매일의 양식으로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사람이 떡(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라 나온 무리들의 굶주린 배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하는 표적을 행했는데 당신은 자신들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며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4-35).

따라서 만나는 영원한 ‘생명의 떡(빵, 양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②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8)

​성막 안에 둔 마른 지팡이에서 불과 하룻밤 사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아몬드) 열매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자연 속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놀라운 기적은 매우 심각한 죄와 심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레위인 제사장 고라와 몇몇 사람들이 당을 짓고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여 세우신 권위에는 반드시 순복해야 합니다. 특히나 이때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수여하고 새로운 체계를 세워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출애굽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모세와 아론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곧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반역 사건에서 인류 역사에 앞서 사단이 교만한 마음을 품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보다 높아지겠다고 대적했던 그 근원적인 죄의 장면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죄의 출발점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KJV)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이 고라의 반역 상황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간단하게 결론만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대적하는 자들과 가족까지 모두 심판하셨고 그 상황을 불평하던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치셨으며 그 와중에 아론이 번제단의 불을 담은 향로를 들고 백성에게로 신속히 달려가 중보 함으로 죽음의 전염병이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 후에 아론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확인시키고자 이스라엘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열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써서 언약궤 앞에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를 통해 더 이상 백성 중에 이런 원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민 17:5). 아침에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서 하룻밤 사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건 속에는 죄의 원초적인 모습과 하나님의 심판과 대제사장의 중보와 속죄와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는 기적의 부활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속죄를 위해 죽으심과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건에서 결과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③ 십계명 돌판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글씨를 새겨 넣으신 것이라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중심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상징적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옛 언약의 말씀인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로운 언약이 되신 분이십니다. 십계명은 진리의 말씀인 토라(Torah)의 압축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분이시고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요 14:6).

​십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서입니다. 율법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드러내어 주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시며 그분이 자신의 말씀을 따라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계시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고 통치자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 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구약에서는 그 위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출애굽기 16:33-34)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출애굽기 16:33-34)

여기에서 증거판 앞에'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로 리프네이 하에두트( לפני העדת )
증거판의 정면에 두라는 것이니까 증거판 안은 확실히 아닌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수기 17:3-4)

고라와 그의 당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거역하는 일이 일어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아론의 합당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각 지파마다 지팡이 하나에 족장의 이름을 쓰고 아론은 레위 지파를 대표하게 하셔서 그 이름을 쓴 지팡이를 모세에게 가져오게 하십니다.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으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종족의 각 두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수기 17:3-4)

'증거궤 앞에 두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리프네이 하에두트로( לפני העדות )
증거판 정면에 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고,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아몬드 열매가 열렸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 모두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져오고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두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수기 17:25)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에로 도로 가져다가'는 히브리어로는 엘 모쉐 하쉐브 엩 마테 아하론 리프네이 하에두트( אל-משה השב את-מטה אהרן לפני העדות ) 입니다.
즉 원래 두었던 증거궤 앞에 두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3. 언약의 비석 - 두 돌판(출애굽기 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출애굽기 25:16)

하나님께서는 증거판 하에두트(העדות)를 그 안에 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히브리어로 하에두트(העדת) 라고 합니다.
즉 두 돌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증거판을 만드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라고 하실때 이 '궤'는 히브리어로 ארון-아론-입니다.
그러나 두 돌판이 넣어진 궤는 언약궤 즉, 하에두트가 되었습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어라(출애굽기 25:21)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언약궤 안에 두 돌판인 언약의 돌판을 넣고 속죄소를 얹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언약궤에는 두 돌판 즉 언약의 돌판만이 있다는 것을 열왕기 상 8:9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호렙 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열왕기 상 8:9)

'두 돌판 외에는 궤 안에 없었다' אין בארון רק שני לכות האבנים-에인 바아론 라크 쉬네이 루호트 하아바님-

열왕기 상 8:9에서는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만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시 역대하 5:10에서 다시 증거됩니다.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역대하 5:10)

'두 돌판 외에는 궤 안에 없었다' אין בארון רק שני הלחות -에인 바아론 라크 쉬네이 루호트-

구약 성경은 열왕기상 8:9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

그러면 우리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약궤는 역대하 요시아때 까지 있었습니다.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역대하 35:3)

언약궤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 훼파때 사라졌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언약궤를 열어 볼 수 없었고 언약궤 앞에 놓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는 더욱 볼 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교회에서 항상 언약궤 안에 있는 것을 히브리서 9:4에서의 말씀으로 가르치지만 사실 구약에서는 두 돌판만이 언약궤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궤의 다양한 명칭
출애굽기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 – 언약궤

▣ ‘언약궤’는 성소의 가장 깊은 곳,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 안’에 보관되어 있다.
▣ 하나님께서는 성막 계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성물들보다도 ‘언약궤’를 가장 먼저 언급하셨다(출 25:10).
▣ 성막 전체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언약의 두 돌비가 보관되어 있으므로, 성막 전체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겨졌다(출25:16, 21, 40:20).
▣ 그리고 ‘완성된 율법책을 언약궤 곁’에 두었다(신31:24-26).
▣ 특히 언약궤 뚜껑에 해당하는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이므로(출25:22), 언약궤의 거룩성은 더할 나위 없이 엄격히
지켜졌으며, 궤 앞에 있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신성한 언약궤가 모셔진 곳은, 깊은 산 속이나 한적한 곳이 아니었다.
신31:24-26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율법책
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출25:21-22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세찬 바람이 불고 거친 모래가 날리고, 사나운 짐승들이 횡행하며, 가시나무가 산재한 광야에 세운 성막, 그 안에 언약궤를 모신 것이다.
▣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흑암과 어둠과 악함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1 언약궤의 다양한 명칭

1 궤

십계명을 기록한 언약의 비석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어 둔 궤.
(출25:10, 14-16, 37:1)

2 언약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의 말씀이 들어 있으므로 언약궤라고 하였다.
▣ 왕상 8:21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 역대하 6:11에는 ‘언약 넣은 궤’라고 기록.

3 증거궤
1)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십계명)이 들어있는 궤를 의미한다.
(1) 출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2) 출25:21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3) 출40: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2)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증거’를 담아 두었음을 의미한다(출16:32-36).

4 법궤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넣어둔 궤를 의미한다(레16:2).
▣ 신4: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 신10:4-5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5 나무궤

조각목(싯딤나무)으로 궤를 만들었다는 의미이다(신10:1).
▣ 신10:3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6 만국의 여호와의 언약궤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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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군의 여호와’는 특별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강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호칭이다.
▣ 삼상 17:45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
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호칭이다.
(1) 아벡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나갈 때 언약궤를 가지고 오면서,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삼상 4:4)라고 불렀다.
(2)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고자 할 때,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하였다(삼하 6:2).

7 여호와의 궤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궤임을 의미한다.

▣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이름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이름이다.

▣ 특별히 ‘여호와의 궤’라는 명칭은,
1)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에 사용되었다.
2) 주변에 적이 가득할 때 혹은, 적의 땅에 궤를 빼앗겼을 때에도 그 궤가 ‘여호와의 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삼상6:1-2, 8, 11, 15, 18-19, 21 ; 삼상7:1).

8 하나님의 궤

하나님께 속한 궤를 의미한다(삼상3:3, 4:11, 17-19, 21-22, 5:1-2).

9 이스라엘 신의 궤

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삼상5:7-8, 10-11, 6:3).

10 주의 능력(권능)의 궤 법궤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음을 뜻한다.즉 이 궤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수4:7, 10, 18 ; 대하6:41)

11 거룩한 궤

세상(죄)으로부터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했다는 의미이다.

12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의미이다.
▣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의 신이나 지역의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널

(1) 언약궤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모세의 제8차 시내산 입산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2)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나무궤를 만들었는데 그 재료는 조각목이었다.
❶ 그 크기는 2규빗 반(114cm), 광은 1규빗 반(68.4cm), 고는 1.5규빗(68.4cm)이었다(출25:10, 37:1).
❷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언약궤의 네 발에 달았으며, 채를 금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다(출25:12-14).
❸ 이 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쌌다(출25:13).
(3) 조각목은,
❶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으로, 옹이(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가 많고 가늘어서 좋은 목재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다.
❷ 천상천하에 가장 존귀한 궤를 만들면서, 솔로몬 성전에 쓰인 것과 같이 값비싼 재료(감람나무, 잣나무, 백향목, 종려나무)를 쓰지 않고,
광야에서 자라는 볼품없고 흔한 조각목으로 만들었다.

❸ 영적 의미

➀ 사막의 마른 땅에서 고운 모양도 없고 아무런 풍채도 없이 자라난 천한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한다.

➁ 그리스도의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예표한다(사 53:2-3).
때, ‘온 땅의 주의 언약궤(수 3:11)’,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맨 제사장...’(수 3:13)이라고 하였다.

▣ 바다와 강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다.

2 언약궤의 제작
1) 언약궤는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었다
신10: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
들라

(4) 성경에서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❶ 조각목(싯딤나무)는 광야에서 제멋대로 자라 나무결이 비틀어져 있어서 다듬기가 쉽지 않고, 가시도 유난히 많다.
→ 그러나 그 가시들을 다듬고 나면 견고하기 때문에 오래가는 장점이 있다.
❷ 우리 인생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제멋대로 자란 조각목과 같이 불품 없는 존재들이었다(창3장).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셔서, 수없는 시련과 연단을 통해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다듬어지도록 하셨다.
(1) 번제단은 놋으로 입혀지고(출27:2), 분향단은 겉면만 정금(출30:3)으로 입혀졌지만, 언약궤는 안팎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다.
(2) 금은 대기 중에 노출되어도 변하지 않고, 땅속에 묻혀서 천 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다.
❶ 이러한 불변성 때문에 성경에서 금은 고귀한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❷ 따라서 ‘궤를 금으로 쌌다는 것’은 궤 자체의 귀중함을 나타낼 뿐 아니라, 궤 속에 있는 십계명이 매우 귀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3) 출 25:11에서 ‘정금’은 히브리어로 ‘반짝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다.
❶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함을 의미한다.
❷ 정금은 물리적으로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금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으로는 순결함과 정결함을 상징한다.
❸ 그러므로 언약궤 안팎을 싸고 있는 정금은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예표한다.
→ 그리스도는 정금과 같이 영화롭고 순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4) 하나님께서는 창 3장으로 인하여 소망없는 우리들을 불러, 정금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에 발라 구속해
사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2) 언약궤는 정금으로 안팎을 쌌다

출 25:10-11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언약궤(Ark, 아론 אָרוֹן)

출애굽기 25:10-16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성막에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의 금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을 지나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있으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 여호와(יְהֹוָה, LORD)의 궤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법 즉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법궤라고 부른 것이며 또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불렀기 떄문에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판이 들어있는 궤이므로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우리는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말씀 안에 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the ark of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번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옛날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단어가 나오면 발음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여호봐 יְהֹוָה)"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으면 글자만 보아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맛소라 학파가 모음부호를 추가하면서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추가하여 만들어진 소리가 "여호와" "야훼"입니다. 그후 70인역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것을 계승하여 헬라어로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주님께서 우리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11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단강)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궤는 백성들보다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으며, 요단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백성들이 모두 무사히 건너자 다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또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도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성을 돌며 그곳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하신 약속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징벌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상징하고 있는 마귀와 원수가 되어 이땅에 오셔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하난미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만나셨고 모세에게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셨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선전 안의 모든 기물은 새로 만들었지만, 이 언약궤 만큼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언약궤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2규빗 반(114cm, 4 feet), 넓이와 높이가 1규빗 반(68.4cm, 2.5 feet)의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씌운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이처럼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물은 그것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거나 아니면 정금으로만 만들거나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책을 보면, 예전에는 책 가장자리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으로 성경의 테두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붉은 색은 사라지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막을 연구하면서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색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므로 금색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소 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들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만을 예표합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도 하는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은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가시 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본 것은 떨기나무의 불꽃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30절을 보면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즉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6절에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외롭게 자라는데, 이것은 이사야 53장2-3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든 언약궤는 이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정금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9장28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는 사도 요한이 용모가 변화되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두 돌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택한 대제사장은 아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 역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 이외의 다른이가 예수님 역할을 할 경우에는 다 죽을 것이라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옆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역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을 넣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9절과 역대하 5장10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6장33-34절에는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수기 17장1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민 17:10)

그런데 히브리서 9장4절을 보면,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로 성막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를 이동할 때에는 언약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었기 때문에 언약궤 안에 그 3가지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가 쓰여진 배경은 성막시대가 끝나고 솔로몬의 성전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더 이상 언약궤가 이동될 필요가 없으므로 원래대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9장과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5장을 비교하면서 성막을 이동하면서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분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대로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만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왕은 말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던 왕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 안에 두 돌판만을 넣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언약궤도 떡상처럼 4개의 발(feet)에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서 이동할 때에 그 고리에 채(긴 막대기)를 끼어서 메고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발'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파암(פַּעַם)'은 '모퉁이'(corner)라는 뜻도 있고 '발'(foot)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rner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foo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위쪽 코너에 고리를 만들어놓은 모습이었고, 그런 것은 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은 4개의 발이 있고 거기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아랫부분에 있는 발에 고리를 달아서 메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언약궤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거룩한 물건에 함부로 몸이 닿지 않도록 매우 세밀하게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하여서 가는 도중에 소가 날뛰는 바람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특별히 구별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 사람들의 풍속대로 새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궤를 메고 가도록 네 모퉁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놓았고, 그 고리에 집어넣어서 들고 갈 '채'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은 고리보다는 바퀴가 훨씬 편하며,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소가 끌고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서 소가 끌고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뻬어내지 말찌며"라며 언약궤를 메고갈 '채'를 고리에 항상 끼워두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메고가야할 성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이렇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까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합리적이며 편리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예배드릴 동안 예배당의 의자가 편한지, 목사님의 설교는 길지 않은지,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만 한지,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핀 다음 교회 시설을 살펴봅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에오콘이 없는 교회를 싫어하며 아이들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다닙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고 만족해야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궤의 모퉁이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금으로 씌운 막대기(채)를 끼워놓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면 즉시 채를 어깨에 메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된 상태로 주인의 명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항상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은 "설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즉시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아무리 준비하라고 해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 몇 번을 말해야 간신히 그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0장33-34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으며, 진을 칠 때에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진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또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보호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서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3절에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tablets of stone)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tablets of the heart)에 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둘어있는 것이 '증거궤'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써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엉뚱한 말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런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어?"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저런 분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쩔쩔 매며 어찌할 줄 몰라서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고싶다면서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다가가서 "아니다. 이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고 우울해서 이렇게 낙망하면서 살 시간이 없다. 내 모든 시간은 빛으로서 살아가야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둠을 내쫓고 빛을 밝히 비추어주며 썩어가는 곳에는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며 또 소금이 간을 고르게 하듯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말을 해주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라며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언약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인과 성도는 매우 다릅니다. 교인은 알곡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중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곡이며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거룩을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 말씀의 칼로 단호히 무찌르고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말씀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또한 말씀의 파수꾼으로서 죄의 길로 달려가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궤 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삶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원시복음을 주시면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과 사단이 원수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사단의 권세를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실 것을 저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한이 없으신지요!
주님께서는 약속을 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님과는 반대로 저는 약속을 해놓고도 그것을 저희 마음이 원치 않거나 마음이 변하면 그 약속을 파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제가 주님으로 또 아버지로 섬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를 주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또한 죄의 종이었던 저를 의의 종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마귀의 군사로써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를 주님의 의로운 군사로 만들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성소에서 귀하게 쓸 수 있는 거룩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한 번 쓰임받고 버려지거나 깨뜨려버릴 질그릇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서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의 사명을 받아 주의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언약궤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제 속에 얼마나 주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마음판에 확실하게 새겨져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속에 주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이 더 많이 새겨져 있는지 살펴보면서, 만약 세상의 것들이 더 많이 새겨져 있다면 그 모든 견고한 진들을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정말로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서 주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것이 저의 신념일 뿐,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그 믿음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부어주시고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분별의 은사를 주셔서 이 악한 세대 속서에 제대로 깨닫고 분별해서 예수님만 붙잡고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언약궤가 먼저 앞서 가셔서 저의 갈 길을 인도하시며 또한 제가 어느 곳에 진을 치려고 할 때에 저의 삶의 중심이 되셔서 저를 이끌어주시며 보호자가 되시며 반석이 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부터 저는 주님의 자녀로서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모시고 주님의 임재가운데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면서 주님 뜻대로만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옵소서.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지난 글에는 성막의 울타리에 사용된 놋기둥과 말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울타리의 중요 재료인 세마포에 관해서 나누겠습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출 27:9)

세상과 거룩한 성막을 구별하는 경계선으로 사방으로 돌아가며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휘장을 둘렀습니다. 휘장은 기둥과 말뚝으로 고정합니다. 세마포는 성막의 기본 소재인 가늘게 꼰 베실로 짠 천입니다.

성경에는 굵은 베옷과 가는 베로 만든 세마포 옷이 등장합니다. ‘굵은 베옷’이란 히브리어로 ‘샤크(שַׂק)’인데 영어에서도 ‘sackcloth’라고 쓰고 있습니다. 때로 이 단어는 곡식을 담는 ‘자루(sack)’로 쓰이기도 했으며 이 굵은 베옷은 투박하고 거친 실, 염소털, 낙타털 등으로 짠 천으로 만든 것입니다. 굵은 베옷은 주로 극도의 슬픔이나 애통함, 원통함을 표현할 때, 혹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출 때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죽었거나 국가적 재앙의 날에 이 베옷을 입습니다. 때로는 금식을 하거나 회개를 할 때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물론 옷으로 입을 뿐만 아니라 굵은 베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두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세마포는 아마(亞麻)로 만든 깨끗하고 고급스런 천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 휘장, 성막 출입문에 염색하지 않은 가는 베실이 다른 색상의 실과 함께 사용되었고, 순전히 베실로만 짠 세마포가 울타리 휘장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마포로 대제사장의 두건과 관과 속바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 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관을 만들고 가는 베 실로 짜서 세마포 속바지들을 만들고”(출 39:27-28)

1. 세마포가 의미하는 것

1) 세마포는 존귀함을 나타내는 의복입니다.

애굽왕 바로가 꿈을 해석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할 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창 41:41-42)

다니엘에게 나타난 천사도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단 10:4-5)

천상의 존재가 굳이 이 땅에서 생산되는 세마포로 만든 옷을 입었겠습니까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입은 옷을 세마포로 지칭했다는 것은 존귀한 존재가 입는 의복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 장면에는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이들은 천군 천사들과 구원받고 부활한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세마포는 거룩함을 나타내는 의복입니다.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 16:4)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마도 ‘거룩함’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선택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직책, 그들의 삶, 그들의 의복, 그들의 음식, 모두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특히나 그들의 속옷, 속바지, 띠, 두건 등 모든 것이 염색되지 않은 깨끗한 세마포로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온전히 거룩함으로 옷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깨끗한 세마포에 싸였습니다(마 27:59).​

3) 세마포는 구원받고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옷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구원받은 백성들, 그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빛난다’는 말은 영광과 존귀를 표현하는 것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정결하고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입은 세마포 옷은 그리스도를 닮은 깨끗하고 존귀한 삶을 살아온 그들의 ‘옳은 행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왕은 존귀하고 제사장은 거룩합니다. 그들에게 입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그들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4)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먼저 그리스도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성도들이 입은 세마포를 언급하기 전에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사용된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일차적으로 왕과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의 존귀하고 거룩하며 의로우신 속성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2. 세마포 포장은 출입 금지 표지판

만일 성막을 하나님께서 설계하지 않으시고 전체적으로 사용된 재료들을 가지고 마음대로 만들도록 사람들에게 맡겨 놓으셨다면 과연 울타리는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겠으나 전체를 흰색 천으로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마포 울타리는 독특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날 만큼 희고 깨끗한 천으로 사방을 돌아가며 안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 키높이 보다 높게 담장을 만드신 것은 성막이 깨끗하고 거룩한 집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은 깨끗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무언의 싸인(sign)이기도 합니다. 의롭지 않은 자, 깨끗하지 않은 자는 누구라도 그리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의 ‘제한하심’과 또 ‘허용하심’을 확실하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 은혜와 자비로우심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우심은 죄인 된 인간을 제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하나님도 죄인에게 가까이하실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죽음으로 심판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는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용납하여 살리시며, 교제하시고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공의나 거룩함을 간과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공의 때문에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공의와 거룩함을 만족시키고 은혜와 사랑의 결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막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한’과 ‘허용’은 신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적용됩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냥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대충 생각합니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이나 속죄, 하나님께 나아감에도 분명한 과정과 절차가 있습니다.

3

출애굽기 27: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찌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출애굽기 27:40
뜰의 포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 문의 장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막의 소용 곧 성막의 모든 기구와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성막 제4강  / 번제단

     번제단(출애굽기 28:1)

    그가 또 조각목으로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오 규빗이요
    광이 오 규빗이라
    네모 반듯하고 고는 삼 규빗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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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다양한 명칭 - 회, 장, 성, 증, 성(회막, 장막, 성막, 증거막, 성소)

1. 회막(會幕, 오헬 모에드, אֹהֶל מֹועֵד) 출애굽기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Whenever they enter the Tent of Meeting, they shall wash with water so that they will not die. Also,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by presenting an offering made to the LORD by fire,

​만남을 위한 장막(tent of meeting)이란 뜻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란 의미로 쓰였습니다.
‘미쉬칸’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를 강조한 표현이라면 '회막'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시고 사람들 또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모이는 처소라는 점에 더 의미를 부여한 명칭입니다.
또한 성막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을 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을 임시로 세웠는데 그것을 회막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임시 장막은 완성된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쪽에 세웠었습니다(출 33:7-11).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2. 장막(帳幕, 오헬, אֹהֶל) 신명기 31: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Then the LORD appeared at the Tent in a pillar of cloud, and the cloud stood over the entrance to the Tent.

장막은 일반적으로 유목민이 이동하며 거주하는 천막(tent)으로 만들어진 거처를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된 용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막을 장막이라고 칭할 때는 그 소재가 천막이라는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성막 전체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막에서 특히 성소와 지성소 구조물을 덮고 있는 천막 부분을 구분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 성막(聖幕, 미쉬칸, מִשְׁכָּן) 출애굽기 26:30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
Set up the tabernacle according to the plan shown you on the mountain.

​미쉬칸은 거주하는 처소란 뜻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란 의미입니다.
어근은 ‘샤칸(shakan, שָׁכַן)’이며 ‘거주하다, 정착하다, 머물다, 체류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알려진 '쉐키나(shekinah, שכינה)'는 '샤칸'의 명사형입니다.

성막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뜻과 목적을 가지고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시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물론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어떤 한 장소나 공간에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할 때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왕상 8:13)라고 했지만 이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막과 이후에 건축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만날 수 있는 공식적으로 지정된 공간이 된 것입니다.

4. 증거막(證據幕, 미쉬칸 하에두트, מִשְׁכַּן הָעֵדֻת) 민수기 17: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Moses placed the staffs before the LORD in the Tent of the Testimony.

​성막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장막(tabernacle of testimony) 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 위에 임하여 있습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는 언약궤일 것입니다.
언약궤는 다른 말로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라고 부릅니다(출 25:22).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고 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거물들입니다.
특히나 십계명 돌판은 '증거판'이라고도 불렸고(출 25:16, 21; 31:18; 40:20)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백성들이 준행해야 할 계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의 증거가 쉐키나 영광으로 나타나는 집,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는 증거물들이 보관된 집, 바로 증거막, 증거의 장막입니다.

​5. 성소(聖所, 미크다쉬, מִקְדָּשׁ)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Then have them make a sanctuary for me, and I will dwell among them.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레위기 19: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Observe my Sabbaths and have reverence for my sanctuary. I am the LORD.

​‘미크다쉬’는 구별된 장소, 거룩한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또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구별된 곳이고 거룩한 공간입니다.
성소는 전체적으로 말할 때 성막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지만 구체적으로는 성막 내에서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황금을 입힌 조각목으로 만든 구조물을 말합니다.

6. 하나님의 집() 사사기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They continued to use the idols Micah had made, all the time the house of God was in Shiloh.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 법막( ) 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개역 개정)
Therefore the king summoned Jehoiada the chief priest and said to him, "Why haven't you required the Levites to bring in from Judah and Jerusalem the tax imposed by Moses the

율법, 특히 법궤가 그 성막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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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 안에서 당시 시대적 의미

성막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당시(구약)에 실제적으로 성막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지를 말해 주는 그 시대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막이 내포하고 있는 미래 예언적인 의미,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궁극적이고 실체적 의미입니다. 먼저는 당시 시대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① 성막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집이며, 제사와 예배의 중심입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이시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길 바라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하며 교통하기 원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중간 매개체가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성막은 출애굽 한 이후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이동 중에 그 역할을 했으며 이후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출애굽한지 480년만에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성전이 그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자발적 헌신과 죄사함 받는 속죄를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속죄의 장소이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희생의 통로입니다.

②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앞서가는 인도자입니다.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민 9:16,17)

광야 생활은 이동과 정착이 계속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 머물 것인가, 얼마 동안 머물 것인가, 언제 떠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가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혹 그가 기도해서 개인적으로 응답받고 진행한 것도 아니었고 지도자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백성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막 위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동을 시작하고 어느 곳에 머무르면 정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름기둥이나 불기둥과 성막은 일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성막은 백성들의 인도자인 셈입니다.

이는 마치 들판에서 양떼를 모는 유목민들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목자는 양떼보다 앞서가며 풀과 마실 물이 있는 곳, 또 양들이 마음 놓고 편히 쉴만한 안전 지대를 찾고, 맹수나 수렁같은 위험 요소들을 피하거나 제거해 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성막 안에서, 성막을 통해 앞서서 백성들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③ 이스라엘이 머물렀을 때 항상 진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성막의 주변에 진영의 안쪽으로는 레위의 자손들이 사방으로 돌아가며 진을 이루고, 바깥쪽으로는 12지파가 각각 3지파씩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있습니다. 어디서 보더라도 성막은 진영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각 교재와도 같습니다.

3. 신약 안에서 예언적, 모형적 의미

① 성막은 궁극적으로 새 언약의 모습을 상징과 그림자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하며 속죄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능을 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의 모든 부분이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놀라운 은혜를 예언적으로, 모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증을 통해 성막을 복원하고 제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신약적인 상징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② 성막의 가장 중요한 모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길(임마누엘) 원하십니다.
그러나 천막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건물로 이루어진 집은 임마누엘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몸을 성전 삼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8:13-14은 여호와께서 장차 ‘성소(미크다쉬,מִקְדָּש)’가 되시겠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에서 ‘거하시다’라는 단어 스케노오(σκηνοω)는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의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성막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육체라는 장막을 입고 세상에 임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 2:14-15). 당황한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46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 성전인 줄로 받아들였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성막과 성전은 결국 육신을 입고 오셔서 완전한 성전(성막)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막은 메시아의 강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체와 신분,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양성(兩性), 그의 사역, 죽음, 부활, 높이 들리심, 심판과 통치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그림자와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2-3의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쓴 내용인데 이 말씀은 성막과 관련하여 그대로 적용해도 적합한 말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감추어 있듯이 성막은 구약시대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비밀입니다. 따라서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부분이 성막 안에 모형과 그림자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막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이 다양한 상징들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계시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 구원, 교회, 죄, 세상, 거듭남, 재림, 심판, 부활, 영광, 하나님 나라 등 거의 모든 중요 주제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막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찾아오신 길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의 길이 그림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④ 성막의 재료나 모양, 수치, 제작 방식, 크기까지도 새 언약의 내용들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사실 성막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 만남, 제사 등 시대적인 기능으로만 본다면 굳이 이러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이 모든 것들이 상징 부호들처럼 미래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들입니다. 황금, 은, 동, 나무, 각종 실과 천들 등 재료들과 색상, 크기, 모양 모든 것이 영적, 상징적 중요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⑤ 따라서 이것은 모형적으로 중요하기에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만 지어져야 합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이 상징들로 이루어져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적이고 실체적인 것을 예시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제작되어야만 합니다. 자칫 사람의 의견이 개입하게 되면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어긋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 제작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다는 표현이 무려 25정도 기록되었습니다(예: 출 39:1,5,7,21,26...)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재료와 모양과 크기 등을 명령하셨고 모세는 그 명령대로 준행했습니다.

이 중요성에 관해 한 예를 들자면 모세를 통해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신광야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 17:6). 모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반석을 치니 물이 넘치게 흘러나왔습니다. 이후 민수기 20장에서 다시 그들이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툴 때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민 20:7-8)

그런데 백성들의 반복되는 불신앙에 화가 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다시 넘쳐흘렀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표면적인 이유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성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 부분도 상징과 모형으로써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수를 쏟아 낸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바울이 해설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은 십자가에서 치심을 당해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생수는 그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성령의 생수가 강물처럼 흐를 것을 의미합니다(요 7:37-39).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치심(죽임) 당하신 것으로 충분하고 완료되었다는 점입니다. 또다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모세는 말로 반석을 향해 명령해야 하는데 다시 두번이나 지팡이로 친 것은 모형을 어긋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세는 대단히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넌 장차 이룰 나의 경륜을 나타내는 모형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책망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 일들이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경륜들이라고 구체적으로 계시되지는 않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리나 하나님의 경륜에 관련된 것은 사람이 임의로 정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고 수정하거나 변형시켜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막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그 구조와 형태에 관한 내용을 다음 시간에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울타리 - 누구든지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자는 생명이 있고 울타리 밖에 있는 자는 저주를 말합니다.

문 - 성막의 문은 오직 하나 이문을 통하지 아니하고 절대로 성막을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오직예수(사도행전 4:12)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

번제단 - 문을 통하여 들어온 자는 번제단을 만나게 되는 번제단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 없이 성막 뜰안에 배회해서는 안됩니다.

물두멍 - 죄사함을 받은 이들이 성소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물두멍에서 철저하게 손과 발을 씻어 성소안에서 죽음 면해야 합니다.
물두멍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한자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금촛대 - 성소에 들어 가면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철저한 암흑입니다. 그 암흑을 밝히는 것이 바로 등대입니다.등대의 임무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성도는 빛을 발해야만이 참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떡상 - 금촛대 앞에는 떡상이 있습니다. 이떡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임의 대로 반죽해서 먹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기름(성령)과 썩어서 잘 구워야 합니다.
말씀은 그 말씀을 기록하도록 감동을 주신 성령님의 역사로 읽을 때 참된 깨달음이 있습니다.

분향단 - 향단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받고, 성령충만 받아 빛된 생활을 하며,
말씀과 더불어 사는 이 들은 반드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성도 그는 곧 생명이 없는 껍데기입니다.

법궤 -



성경학자 아더 핑크(Arthur Walkington Pink,1886-1952)는 성막 성전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창조를 위하여는 창세기 1, 2장을 기록하시는 것으로 충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실 성막을 위하여는 무려 50장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성막에 관한 기록은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에서 4장, 합하여 총 50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전체가 50장임에 비하면 엄청난 분량입니다.
그러기에 성막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이 멈추시던 때에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마 27장 50-51절)”.

이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같이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이 말씀에서 구약의 성막과 신약의 예수님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가 곧 예수 공부가 됩니다.
출애굽기 25장에서 성막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자리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애굽기 25장 22절)”.

성막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Mishikan(미쉬칸)입니다.
미쉬칸은 ‘머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의미는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는 곳입니다(출 25:22)
둘째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출 25:8-9)
셋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곳입니다(출 25:22)
넷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레 1:1-5)
다섯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시는 곳입니다.(레 4:18-20)

성막의 설계는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 하신 것입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출 27:8)”.


성막이란?(히브리서 8:1-6)

구약의 성막 연구가 중요한 이유를 한번 살펴볼까요?
왜 성막 연구가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막을 연구할까요?

첫째, 성경에서 성막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먼저 출애굽기에만 13장이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어느 한 구절이라도 의미 없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출애굽기에만 13장에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에 관한 기록이 있는 부분은 25-31장과 35-40장인데, 25-31장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의 내용과 설계를 가르쳐 준 장이고, 출애굽기 35-40장은 성막의 실제적인 공사를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밖에 레위기 18장, 민수기 13장, 신명이 2장이 성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가장 유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서에서 4장이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할애되어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 합해서 성경 전체에서 약 50장 이상이 성막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전체가 50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됩니다.

둘째, 성막이 가지는 위대한 상징성 때문입니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머무르는 동안 계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설계도에 있는 부분 부분마다 그저 설계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막이 하늘에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 8:5)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심으로 강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2) 그래서 성막은 물론, 성막 안에 있는 각 기구들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를 알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막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이 있습니다.
그러한 명칭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가 있습니다.

1. 장막(출 25:9) - 가장 흔히 쓰이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천막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2. 성막(출 26:1) -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하는 성스러운 천막이라는 뜻입니다.
3. 성소(출 25:8) -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입니다.
4. 회막(레 1:1) - 하나님과 인간이 이곳에서 만나서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5. 증거막(민 1:53) -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6. 하나님의 집(삿 18:31)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 법막(대하 24:6) - 율법, 특히 법궤가 그 성막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막의 정의 >
그러면 성막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정의를 내려 보겠습니다.

1. 구약시대의 은총의 통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요, 또 하나는 성막입니다. 십계명은 고통의 선물로서 거울처럼 그 법에 비춰봄으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성막은 감사의 선물로서 속죄 제사의식을 수행함으로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그 단절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설정하신 방법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찾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에게 죄를 속함받는 길은 오직 성막을 통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 즉 신약시대에는 새로운 은총의 통로가 생겼습니다. 그 새로운 은총의 통로는 무엇일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친히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계시하는 구약시대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백성 중에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처소

성막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작하신 은총의 통로였기에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의 예배의 중심, 곧 생활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백성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습니다.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진을 쳤고, 남편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진을 쳤고, 서편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진을 쳤고, 북편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을 쳤던 천막 문의 방향은 반드시 성막을 향하도록 했습니다. 항상 성막을 바라보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은 겉으로는 보잘 것 없었으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 유대인이 아니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제사장이 아니면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이 아니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지성소의 교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감격적이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번 성막강해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새롭게 발견해 보시고, 다시 한번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은총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구속사자료 - 성막 개요



성경에서 가장 소홀히 여기기 쉬운 부분 중 하나가 출애굽기 25-31, 35-40장까지 13장에 걸쳐 기록된 ‘성막’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막을 직접 그려 보거나 만들어 보기 전에는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깊은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모형과 비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히 8:5, 9:9, 23-24), 성막과 관련된 모든 것(재료, 크기, 모양, 위치 등)에 깊은 영적 의미가 있으므로, 정확한 그림 복원 이후에도 오랜 시간 깊은 묵상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성막은 범죄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구현(俱現)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성막 곳곳마다 하나님의 구속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성막에 관한 모든 것의 설계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그것이 먼저 모세에게 계시되었고(출 25:9, 40, 26:30, 27:8, 히 8:5下), 모세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설계도대로 빠짐없이 순종하여 성막을 세웠습니다(출 39:32, 42, 40:16, 19, 21, 23, 25, 27, 29, 32).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주 설계도대로 노아가 하나도 빠짐없이 준행함과 같습니다(창 6:22, 7:5).

성막의 식양을 모세가 받은 후에 성막을 짓기 시작하여, 그것이 완성된 것은 출애굽 제 2년(주전 1445년) 1월 1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40:2에서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출애굽기 40:17에서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 성막이 그 사명을 마감한 것은 주전 959년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고정된 성전을 완성하였을 때입니다(왕상 6:38). 성막은 주전 1445년부터 주전 959년까지 약 486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 드리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을 준비시키실 때,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2). 그 말씀대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셨던 호렙산 곧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시내 광야에 성막을 짓게 되었습니다(출 3:1, 19:1-2, 40:2, 17, 레 7:38, 신 4:10, 15, 5:2).

출애굽 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에서 우상을 음란하듯 섬기며 살았습니다(레 17:7, 수 24:14, 겔 20:5-9).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제사 드리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출 19:6).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시편 50:5에서는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이 제사를 통해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음을 나타냅니다(창 12:7-8, 15:9-11, 렘 34:18-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맺은 첫 언약은 피로 맺은 것이었습니다(출 24:5-8, 히 9:18-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피로 맺은 언약 관계는, 이후에 지속되는 제사를 통해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변개치 못할 약속의 증표로서 제사를 드리게 하여, 언약을 이행하겠다는 순종의 고백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시며(레 19:30, 26:2), 하나님의 택하신 처소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2:5, 11, 13-14, 17-18, 21, 26).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레 1:3-4, 4:3-4, 20-35, 5:10, 16, 18, 6:6-7, 12:6-8, 14:11-20, 16:30, 19:21-22, 민 8:6-12, 15:24-28, 히 5:1, 9:21-22),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레 11:44-45, 20:26).

오늘날의 성도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친히 흘리신 ‘언약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고전 11:25, 히 9:12-15).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입니다(신 10:12, 전 12:13, 사 43:7, 21).

2.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그의 백성을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셨으며(출 25:22, 참고-민 17:4),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라고 하셨습니다(출 29:42-43). 죄와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을 보거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들을(출 33:20, 신 4:33, 5:24-26, 삿 6:22-23, 13:22)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출 3:7-8, 요일 4:10, 19).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여 안 계신 곳이 없지만(왕상 8:27, 대하 6:18, 사 66:1, 렘 23:24, 행 7:48-50, 17:24), 특별히 구별하신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그들과 동행하면서 인도하고 보호하시겠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만남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라고 하셨고(출 25:22), “네게 말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출 29:42).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곳이었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민 7:89).

오늘날의 교회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되는 그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행 10:44, 14:3).

4. 이스라엘 진(陣)의 중심으로서, 

언약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求心點)입니다.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질서가 확립되었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진의 중심에 위치하였는데, 광야에서 진을 칠 때뿐만 아니라 행진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하였습니다(민 2:2, 17, 10:11-13). 철저하게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에 따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을 좆아 진을 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습니다(민 9:15-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로서(출 6:26, 7:4, 12:17, 41, 51, 민 10:28), 출애굽 할 때에 무질서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항오(行伍; 군대를 편성한 대오)”를 지어 나왔습니다(출 13:18, 민 33:1, 참고-출 6:26, 12:17, 51).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모든 진의 중앙에 있어 진행하되(민 10:17, 21), 그들의 진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 기를 따라 앞으로 진행하였습니다(민 2:17). 가장 먼저 “유다 자손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그 다음이 “르우벤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그 다음이 “에브라임 자손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그 다음이 “단 자손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진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따라 나아갔습니다(민 10:14-28).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질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고전 14:33, 40).

성막이 완성되자,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동서남북 사방에 세 지파씩 배치하였는데, 각각의 모든 장막을 성막 쪽을 향해 치도록 하였습니다. 민수기 2:2을 볼 때,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에서 “대하여”(민네게드)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전치사 ‘민’과 ‘앞에서, 마주하여’라는 뜻의 ‘네게드’가 결합된 단어로, ‘정면에, 대면하여,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각 진의 모든 거주용 장막들은 입구를 성막 쪽으로 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은 백성의 사적인 공간이지만, 진을 칠 때에도 각 처소에서 항상 성막을 바라보게 하여 모든 일상 생활이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일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하였으며, 아이를 출산하였을 때 (레 12장)이나 질병이 나았을 때(레 14:10-32, 15:29-30)에도 성막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각종 절기 준수와 특별한 성회를 위해 백성은 성막에 모였습니다(레 23:1-8, 21, 24, 27, 35-37, 민 28:18, 25-26, 29:1, 7, 12, 35, 신 16:2, 5-8, 11, 15-16, 31:1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거처를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둘러 진을 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방향까지 성막을 향하도록 자세히 간섭하였습니다. 이로써 온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언약 공동체임을 강하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성막



예수는 양의 문(요 10:7) /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간다

예수는 영원한 제물(히 10:14) / 죄를 사함 받는다

예수는 생명의 물(요 4:14) / 영원한 성령을 받는다

예수는 생명의 떡(요 6:48) (요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는 세상의 빛(등불) /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간다.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다.(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이사야 45:7 /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예수는 중보자(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9:15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12:24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는 휘장(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는 영원한 속죄 제물(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로마서 6:10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브리서 7:27 /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2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10:2 /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브리서 10:10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유다서 1:3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생명수의 의미

생명수(生命水, Water of Life)는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해주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은 식물을 포함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이다. 인체는 연령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대개 50~80%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경우는 체내의 수분이 1~2% 부족한 상태일 때다. 5~10%가 부족하면 혼수상태에 이를 수 있고, 12%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물은 생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이러한 이치는 영혼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생명도 생명수가 필요하다. 생명수가 없다면 우리 영혼도 심한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아모스 8:11~13)

우리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인 생명수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어 모든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생명수는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생명수의 근원

생명수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생명수를 주셨다.

성부시대 – 여호와 하나님

성부시대, 40여 년 동안 하나님의 규례와 뜻을 대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생명수의 근원이 여호와라고 밝혔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호와여 ···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 17:13~14)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흙에 기록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모세, 다윗, 솔로몬 등 성부시대 믿음의 선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생명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성자시대 – 예수 그리스도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9~14)

이천 년 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물은 성자시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셨다. 예수님께서 생명수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3년의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에게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생명의 진리를 교훈해주셨다(마태복음 28:20).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영적으로 목말라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성령시대 – 성령과 신부

지금은 성령시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성령시대, 생명수의 근원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사도 요한은 성령시대에 생명수를 주시는 구원자를 계시로 보았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오늘날 영적 기갈에 허덕이는 인류는 성령과 신부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생명수를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누구일까.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성령시대 이 땅에 임하시는 그리스도, 즉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령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누구일까. 생명수를 베푸시는 주체를 알지 못하고는 생명수를 받을 수 없기에 구체적으로 신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신부를 계시로 보았다.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사도 요한은 어린양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있는 무너진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인 하늘 예루살렘은 누구일까.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사도 바울은 하늘 예루살렘을 가리켜 ‘우리 어머니’라고 증거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성령과 신부께서 함께 생명수를 주신다는 것은 이 시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수를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어머니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수를 주시는 예루살렘

구약시대 스가랴 선지자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온 세상에 사시사철 흐를 것이라고 예언했다(스가랴 14:8). 즉 마지막 때 새 예루살렘의 실체이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생명수를 허락해주실 것을 알려준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어머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온 세계로 흘러가 만국이 소성하게 될 것이며, 열방의 민족들이 진리 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에스겔 47:1~7). 이어 생명수의 엄청난 효력에 대해 소개한다. 생명수가 흐르는 곳마다 죽어가던 생물이 살고 바다가 소성함을 얻을 것이라고 설명한다(에스겔 47:8~12).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을 가리킨다(요한계시록 17:15). 즉 영적 기갈에 목말라 죽어가던 온 세상의 인류가 하나님의 생명수로 살아날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에 달마다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잎사귀가 죽어가는 인류를 치료하는 약재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예언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2)

생명수의 발원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서 하늘 예루살렘이신 어머니 하나님을 의미한다(예레미야 3:17). 신·구약 성경은 생명수를 주시는 예루살렘,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에 따라 어머니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생명수를 받으러 오라.”고 외치고 계신다. 이 외침에 응한 사람만이 영혼의 소성함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어머니 안에서 참된 행복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이사야 66:13).



성막의 개요, 성막의 의미와 중요성


성막 해설 연재를 시작합니다. ‘성막(聖幕, tabernacle)’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지키며 살아야 할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율법과 함께 주신 명령으로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세우게 하신 거룩한 집, 천막 성전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하는 동안 하나님의 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단은 설치와 해체가 용이한 가건물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광야의 거센 바람이나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재료와 견고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성막 제작에 관련된 내용들이 출애굽기에 무려 12장에 걸쳐 마치 설계도면을 펼치듯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감사하게도 오늘날엔 성막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막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쓰며 심지어는 실제 성막을 실물 크기로, 또는 축소된 형태로 제작하기도 하여 입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을 위한 간소화된 제작 키트들도 판매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막 공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과 기구들, 그 형식들이 담고 있는 영적 의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저히 고증하고 실물로 복원하여 제작하는 것도 성경 연구에 유익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이시고 또 말씀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사도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였듯이 성막에 대한 부분도 동일한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설명되는 일반적인 내용들은 그동안 성막 연구에 힘을 쏟아온 여러 연구자들의 글이나 강의들을 참조하였으며 특별히 사도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부분들은 개인적인 배움과 연구와 묵상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결과물임을 말씀드립니다.

1. 성막을 일컫는 다양한 명칭들

한글 성경에는 성막을 일컫는 여러 명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일관되게 동일한 단어로 번역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참고삼아 살펴봅니다.

① 장막(帳幕, 히/오헬, אֹהֶל)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신 31:15)

장막은 일반적으로 유목민이 이동하며 거주하는 천막(tent)으로 만들어진 거처를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된 용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막을 장막이라고 칭할 때는 그 소재가 천막이라는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성막 전체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막에서 특히 성소와 지성소 구조물을 덮고 있는 천막 부분을 구분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② 성막(聖幕, 히/미쉬칸, מִשְׁכָּן)

“너는 산에서 보인 양식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출 26:30)

미쉬칸은 거주하는 처소란 뜻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란 의미입니다. 어근은 ‘샤칸(shakan, שָׁכַן)’이며 ‘거주하다, 정착하다, 머물다, 체류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알려진 '쉐키나(shekinah, שכינה)'는 '샤칸'의 명사형입니다.

성막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뜻과 목적을 가지고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시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물론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어떤 한 장소나 공간에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할 때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왕상 8:13)라고 했지만 이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막과 이후에 건축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만날 수 있는 공식적으로 지정된 공간이 된 것입니다.

③ 회막(會幕, 히/오헬 모에드, אֹהֶל מֹועֵד)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출 30:20)

만남을 위한 장막(tent of meeting)이란 뜻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란 의미로 쓰였습니다. ‘미쉬칸’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를 강조한 표현이라면 '회막'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시고 사람들 또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모이는 처소라는 점에 더 의미를 부여한 명칭입니다. 또한 성막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을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을 임시로 세웠는데 그것을 회막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임시 장막은 완성된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쪽에 세웠었습니다(출 33:7-11).

④ 증거막(證據幕, 히/미쉬칸 하에두트, מִשְׁכַּן הָעֵדֻת)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민 17:7)

성막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장막(tabernacle of testimony) 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 위에 임하여 있습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는 언약궤일 것입니다. 언약궤는 다른 말로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라고 부릅니다(출 25:22).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고 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거물들입니다. 특히나 십계명 돌판은 '증거판'이라고도 불렸고(출 25:16,21;31:18;40:20)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백성들이 준행해야 할 계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의 증거가 쉐키나 영광으로 나타나는 집,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는 증거물들이 보관된 집, 바로 증거막, 증거의 장막입니다.

⑤ 성소(聖所, 히/미크다쉬, מִקְדָּשׁ)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0)

‘미크다쉬’는 구별된 장소, 거룩한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또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구별된 곳이고 거룩한 공간입니다. 성소는 전체적으로 말할 때 성막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지만 구체적으로는 성막 내에서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황금을 입힌 조각목으로 만든 구조물을 말합니다.

2. 구약 안에서 당시 시대적 의미

성막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당시(구약)에 실제적으로 성막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지를 말해 주는 그 시대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막이 내포하고 있는 미래 예언적인 의미,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궁극적이고 실체적 의미입니다. 먼저는 당시 시대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① 성막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집이며, 제사와 예배의 중심입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이시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길 바라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하며 교통하기 원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중간 매개체가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성막은 출애굽 한 이후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이동 중에 그 역할을 했으며 이후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출애굽한지 480년만에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성전이 그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자발적 헌신과 죄사함 받는 속죄를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속죄의 장소이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희생의 통로입니다.

②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앞서가는 인도자입니다.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민 9:16,17)

광야 생활은 이동과 정착이 계속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 머물 것인가, 얼마 동안 머물 것인가, 언제 떠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가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혹 그가 기도해서 개인적으로 응답받고 진행한 것도 아니었고 지도자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백성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막 위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동을 시작하고 어느 곳에 머무르면 정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름기둥이나 불기둥과 성막은 일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성막은 백성들의 인도자인 셈입니다.

이는 마치 들판에서 양떼를 모는 유목민들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목자는 양떼보다 앞서가며 풀과 마실 물이 있는 곳, 또 양들이 마음 놓고 편히 쉴만한 안전 지대를 찾고, 맹수나 수렁같은 위험 요소들을 피하거나 제거해 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성막 안에서, 성막을 통해 앞서서 백성들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③ 이스라엘이 머물렀을 때 항상 진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성막의 주변에 진영의 안쪽으로는 레위의 자손들이 사방으로 돌아가며 진을 이루고, 바깥쪽으로는 12지파가 각각 3지파씩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있습니다. 어디서 보더라도 성막은 진영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각 교재와도 같습니다.

3. 신약 안에서 예언적, 모형적 의미

① 성막은 궁극적으로 새 언약의 모습을 상징과 그림자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하며 속죄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능을 하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의 모든 부분이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놀라운 은혜를 예언적으로, 모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증을 통해 성막을 복원하고 제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신약적인 상징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② 성막의 가장 중요한 모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길(임마누엘) 원하십니다. 그러나 천막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건물로 이루어진 집은 임마누엘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몸을 성전 삼고 사람들 가운데 계시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8:13-14은 여호와께서 장차 ‘성소(미크다쉬,מִקְדָּש)’가 되시겠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에서 ‘거하시다’라는 단어 스케노오(σκηνοω)는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의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성막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육체라는 장막을 입고 세상에 임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 2:14-15). 당황한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46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 성전인 줄로 받아들였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성막과 성전은 결국 육신을 입고 오셔서 완전한 성전(성막)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막은 메시아의 강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체와 신분,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양성(兩性), 그의 사역, 죽음, 부활, 높이 들리심, 심판과 통치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그림자와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2-3의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쓴 내용인데 이 말씀은 성막과 관련하여 그대로 적용해도 적합한 말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감추어 있듯이 성막은 구약시대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비밀입니다. 따라서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부분이 성막 안에 모형과 그림자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막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이 다양한 상징들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계시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 구원, 교회, 죄, 세상, 거듭남, 재림, 심판, 부활, 영광, 하나님 나라 등 거의 모든 중요 주제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막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찾아오신 길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의 길이 그림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④ 성막의 재료나 모양, 수치, 제작 방식, 크기까지도 새 언약의 내용들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사실 성막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 만남, 제사 등 시대적인 기능으로만 본다면 굳이 이러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이 모든 것들이 상징 부호들처럼 미래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들입니다. 황금, 은, 동, 나무, 각종 실과 천들 등 재료들과 색상, 크기, 모양 모든 것이 영적, 상징적 중요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⑤ 따라서 이것은 모형적으로 중요하기에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만 지어져야 합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이 상징들로 이루어져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적이고 실체적인 것을 예시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제작되어야만 합니다. 자칫 사람의 의견이 개입하게 되면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어긋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 제작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다는 표현이 무려 25정도 기록되었습니다(예: 출 39:1,5,7,21,26...)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재료와 모양과 크기 등을 명령하셨고 모세는 그 명령대로 준행했습니다.

이 중요성에 관해 한 예를 들자면 모세를 통해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신광야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 17:6). 모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반석을 치니 물이 넘치게 흘러나왔습니다. 이후 민수기 20장에서 다시 그들이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툴 때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민 20:7-8)

그런데 백성들의 반복되는 불신앙에 화가 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다시 넘쳐흘렀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표면적인 이유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성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 부분도 상징과 모형으로써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수를 쏟아 낸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바울이 해설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은 십자가에서 치심을 당해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생수는 그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성령의 생수가 강물처럼 흐를 것을 의미합니다(요 7:37-39).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치심(죽임) 당하신 것으로 충분하고 완료되었다는 점입니다. 또다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모세는 말로 반석을 향해 명령해야 하는데 다시 두번이나 지팡이로 친 것은 모형을 어긋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세는 대단히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넌 장차 이룰 나의 경륜을 나타내는 모형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책망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 일들이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경륜들이라고 구체적으로 계시되지는 않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리나 하나님의 경륜에 관련된 것은 사람이 임의로 정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고 수정하거나 변형시켜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막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그 구조와 형태에 관한 내용을 다음 시간에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성막의 구조와 형태



1. 성막의 구조

성막은 골조와 천막, 기구들로 이루어진 가건물 형태의 하나님의 집인데 대단히 짜임새 있고 견고하며 균형이 잘 잡힌 대칭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성막의 대략적인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사용된 길이 단위를 알아야 합니다. 성막 건축에 사용된 길이의 단위는 규빗(cubit)입니다. 규빗은 고대의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이스라엘 등에서 사용된 길이의 단위로 성인을 기준으로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약간은 차이가 있으나 통상적인 수치를 미터(m)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45.6c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의 구조

1) 일반적인 땅과 구별된 공간

일단은 일반적인 평범한 땅 중에서 거룩한 장소를 따로 구분시켜 주는 것이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는 직사각형 형태로 동서(東西)로 길이가 100규빗(1규빗을 45.6cm로 환산/ 약 45.6m), 폭이 50규빗(약 22.8m)으로 직사각형 형태입니다. 울타리는 사방으로 돌아가며 5규빗(2.28m) 높이로 가늘고 흰 세마포 천을 둘렀고 60개(20+20+10+10)의 기둥으로 흔들리지 않게 든든하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쪽으로 오직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울타리 안쪽이 성막 뜰입니다. 뜰은 면적이 1,039㎡로 평수로 환산하면 약 314평 정도 됩니다.

2) 뜰 안에 세워진 성소 구조물

울타리 안쪽 뜰에는 조각목에 황금을 입힌 널판으로 세워진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 역시 직사각형 형태인데 길이가 30규빗(약 13.68m), 폭이 10규빗(4.56m), 높이가 10규빗(4.56m)으로 마치 컨테이너 형태의 구조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구조물의 전체 면적은 62.3㎡이며 역시 평수로 환산하면 약 18.8평 정도 됩니다.

조각목으로 세워진 구조물은 안쪽으로 ⅓공간을 휘장으로 따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입구 쪽을 거룩한 공간이란 의미로 성소(聖所, the holy place)라 하고 안쪽을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 하여 지성소(至聖所, the holy of holies)라고 부릅니다.

3) 중요한 기구들

성막 뜰 안에는 입구에 번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제사드리는 제단입니다.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등 5가지의 제사가 이곳에서 드려집니다. 그리고 제단과 성소 사이에는 물을 담은 기구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봉사의 일을 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뜰에 배치되어 있는 이 두 기구는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소 안에는 3개의 기구들이 놓여 있는데 우측으로 떡을 진설해 놓는 떡상, 좌측에 불을 켜는 금등대, 그리고 앞쪽에는 향을 사르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면 일명 법궤라고도 불리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상자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거기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또한 상자 위에는 그룹(cherub) 천사 둘이 날개를 맞댄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그룹 사이에 대속죄일에 피를 뿌리는 속죄소(贖罪所)가 있습니다. 그룹들이 날개로 속죄소를 덮고 있는 모습입니다. 속죄소는 시은소, 혹은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은혜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그곳에서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4가지 기구들은 모두 금으로 되었거나 금으로 또 입혀 있습니다.

각 기구들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앞으로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2. 성막의 구조적 의미들

1) 성막의 3영역

성막을 중심으로 3개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문밖 바깥이고 둘째는 성막 뜰, 그리고 성소 안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점에서 3가지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문밖 바깥은 세상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안에 있지 않고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문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성막 뜰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는 자들은 문을 통해 그리스도께 가까이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뜰에 들어왔어도 번제단이나 물두멍을 통과하지 않고 뜰만 밟고 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믿음은 있으나 온전한 구원의 믿음은 갖지 못한 사람들인 셈 입니다. 뜰에 들어왔다면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막 전체에 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성소와 지성소 건물 위에 임하여 있습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은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비로소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세부적인 기구들은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거듭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들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에 관해서 3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부정함입니다. 이것은 죄에 속한 것이고 세속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다, 속되다’라고 표현합니다. 속된 것은 깨끗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정결해’집니다. 물론 부정한 동물의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사람이 부정하게 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결한 것 가운데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려진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거룩하고 드려진 제물이 거룩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것들이 ‘거룩한 것’들입니다.

정리하면 상태에 따라 속된 것, 정결한 것, 거룩한 것, 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부정한 것은 바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정결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성막의 세 영역을 보여줍니다. 문밖은 부정한 곳입니다. 뜰은 속죄와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소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려진 거룩하게 되는 공간입니다. 거룩한 것도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부정하던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여김을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성소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그곳까지만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의 근원이고 근본이신 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곳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차례 들어갑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제사장이 아니라 진정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메시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히 2:11)의 차이가 지성소와 성소의 차이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는 본질이 스스로 거룩한 분이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본질은 거룩하지 못하나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는 교회(에클레시아)를 상징하고 지성소는 예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천년왕국과 영원한 보좌가 있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냅니다.

2) 성막의 3가지 금속

성막에 사용된 금속으로는 놋(銅)과 은(銀)과 금(金)이 세 종류인데 이 금속들도 각기 서로 다른 것을 상징합니다. 성막 안에서 이 금속들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놋(동)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에 따른 세상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은은 구속(救贖)을 상징합니다.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 세상에 속한 것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은 존재를 말할 때는 신성(神性)을, 영역을 말할 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상징합니다.

3) 성막의 4가지 컬러

성막에는 4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흰색, 붉은(홍)색, 보라(자)색, 푸른(청)색입니다. 이 세 가지 색상의 실들을 가지고 천을 만듭니다.

흰색은 완전한 의로움을 나타냅니다. 홍색은 붉은 피입니다. 자색은 왕권, 통치권입니다. 청색은 하나님 나라, 영광, 신성(神性)을 말합니다.

오늘은 성막의 대략적인 구조를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해당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3. 성막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진영 배치

무려 200만명 정도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이동해 가거나 정착할 때 질서가 없다면 대단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동과 정착시에 성막을 중심으로 분명한 질서를 따르게 했습니다. 먼저 정착할 때는 성막을 중앙에 배치하고 성막을 돌아가며 먼저는 레위 자손이 진을 칩니다. 동쪽으로 성막 앞쪽에는 모세와 아론 자손이, 남쪽에는 고핫자손, 서쪽에 게르손 자손, 북쪽에는 므라리 자손이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그 레위 자손들의 진을 둘러 사방으로 3지파씩 진을 칩니다. 동쪽은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족은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입니다.

그들이 이동할 때도 그 진영의 형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언약궤를 멘 고핫 자손이 먼저 나갑니다. 그 뒤를 이어 동쪽 지파인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그 다음엔 남쪽 진영의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 그리고 서쪽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마지막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그 뒤를 따릅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또 거주하지만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그 모습이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너무도 질서가 있습니다.

민수기 24장에는 모압왕 발락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가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는 발람 선지자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은 비록 재물을 탐하여 발락의 요청을 따랐으나 하나님의 경고로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의 진영은 너무나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민 24:5)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진영


성막에 사용된 각종 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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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출 35:4-9)

성막을 세우기 위하여 어떤 재료들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구절에는 성막에 사용된 재료들이 모두 열거되어 있습니다. 일단 그 종류별로 살펴보면 금속 재료, 목재, 천을 짜기 위한 4가지 색상의 실, 털과 가죽류, 향품, 다양한 보석 등이 있습니다.

1. 금속재료

1) 금(金, gold)

성막 건축에 사용된 재료 중에 가장 귀한 귀금속면서도 많은 양이 사용된 것이 금입니다. 금이 사용된 부분은 오직 성소와 지성소 구조물 안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성소 이외의 장소엔 금이 사용된 예가 전혀 없습니다. 언약궤와 분향단, 떡상, 등잔대, 그리고 그것들을 운반하는데 필요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을 입혔습니다. 특히 언약궤 위의 그룹(cheub)과 금등대와 성소 안에서 쓰는 도구들을 금덩이를 두들겨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소 기둥 5개와 지성소 기둥 4개, 성소 벽을 이루는 48개의 널판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을 입혔습니다. 물론 널판들을 연결하는 고리와 띠도 모두 금으로 쌌습니다.

사용된 금의 양과 비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성막 제작에 사용된 모든 물품 목록을 만들고 계산하게 했는데 사용된 금의 양이 자그마치 29달란트 730세겔입니다.

“성소 건축 비용으로 들인 금은 성소의 세겔로 스물아홉 달란트와 칠백삼십 세겔이며”(출 38:24)

'달란트'는 화폐와 무게의 단위이며 1달란트의 무게는 약 34kg입니다. ‘세겔’은 달란트보다 소량을 측정하는 무게 단위로 일반인들이 쓰는 '일반 세겔'과 왕궁에서 사용하던 '왕실 세겔', 성전에서 사용하는 '성소 세겔'이 있는데 일반 세겔은 약 11.4g, 왕실 세겔은 약 13g인데 성소 세겔은 사람들에 따라 일반 세겔보다 많다고 하기도 하고 혹 적다고 하는 의견차가 있어서 그냥 일반 세겔(11.4g)을 기준으로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9달란트 730세겔이면 현대의 킬로그램 단위로 환산하면 994.322kg으로 대략 1톤 정도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체감할 수 있게 금액으로 환산해 보겠습니다.

흔히 소량의 금을 재는 단위인 1돈은 3.75g입니다. 따라서 성막에 사용된 금의 총량 994.322kg은 약 265,152돈입니다.

금일 금 1돈의 시세는 약 25만 8천 원입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대략 684억 92만 원 정도 됩니다. 불과 18평 남짓 되는 성소 구조물 안에 황금만 1톤 정도, 무려 684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측량하지 못할 하나님의 영광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황금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 은(銀. silver)

은은 바깥과 성막 뜰을 구분 지어 주는 60개의 울타리에 뚜껑과 고리, 연결하는 가림대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기둥 4개의 받침대, 성소 널판 48개의 받침에 사용되었습니다.

“계수된 회중이 드린 은은 성소의 세겔로 백 달란트와 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니”(출 38:25)

100달란트 1,775세겔 중 100달란트는 지성소 기둥과 널판의 밑받침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울타리의 뚜껑과 가림대,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은도 역시 총량과 비용을 환산해 보겠습니다.

100달란트는 3,400kg(3.4톤)이고 1,775세겔은 20,235kg입니다. 이를 합산하면 3,420.235kg이 됩니다.

비용 계산을 해보겠습니다. 912,053돈, 1돈 가격이 3,750원이면 대략 34억 2천 23만 원입니다.

금과 은을 합치면 중량으로는 약 4.4톤, 금액으로는 약 718억 정도의 귀금속이 사용된 것입니다.

3) 놋(銅, brass)

“드린 놋은 칠십 달란트와 이천사백 세겔이라. 이것으로 회막 문 기둥 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며 뜰 주위의 기둥 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이며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주위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더라”(출 38:29-31)

놋은 70달란트 2,400세겔이 사용되었습니다. 약 2.4톤 정도 되는 양입니다. 사용처는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 그리고 뜰에 필요한 기구들을 모두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울타리의 60개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을 씌웠으며 그 받침 60개를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울타리를 지탱하도록 줄로 묶어 고정시키는 말뚝들과 성막 덮개를 고정시키는 말뚝들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나 성소로 들어가는 기둥 5개의 밑받침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소의 널판이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기둥 4개의 받침이 은인데 반해 성소로 들어가는 기둥 받침은 놋이 사용된 것입니다. 참고로 성소에 들어가는 기둥 받침을 제외한 성소 안에는 전혀 놋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놋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십시오.

세 가지 금속들이 사용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 뜰에서 땅과 닿아 있는 기구와 받침, 말뚝들은 모두 놋으로 되어 있습니다. 울타리의 위쪽은 은으로 되어 있고 성소 널판의 받침이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울타리는 결국 은(구속)으로 성소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를 이루는 금 기둥과 금 널판은 은(구속)의 바탕(받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된 공간 안에 있는 기구들은 비록 땅에 닿아 있을지라도 놋이나 은이 필요하지 않은 이미 거룩한 공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성소 출입 기둥은 뜰과 연결되어 땅에 직접 닿아 있기 때문에 은이 아닌 놋받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곳 땅은 울타리 뚜껑의 은으로 거룩하게 된 공간이기 때문에 성소 안의 기구들과 세워진 기둥, 널판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거나 금이 입혀져 있습니다. 놋→은→금의 순서는 세상(심판)→구속→영광(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금, 은, 놋이 사용된 곳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막에 사용된 금속 재료들의 양

2. 목재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출 25:10)

조각목으로 번역된 이 나무의 히브리명은 싯딤(Shittim)이고 학명은 아카시아(Acacia)입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목재는 언약궤와 분향단, 떡상, 번제단의 기초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소 기구들은 조각목 위에 금을 입혔고 번제단은 놋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5규빗(약 2.25m) 높이의 울타리 60개, 10규빗(4.56m) 높이의 널판 48개와 같은 높이의 기둥 9개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구들을 운반하는 채와 성소 널판을 연결하는 채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3. 천을 짜는 실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출 25:4)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출 27:9)

실은 청(파란)색, 자(보라)색, 홍(붉은)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흰색)이 사용되었습니다.

네 가지 실을 모두 합해서 짠 천은 성막의 가장 안쪽에 덮은 앙장,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성소에 들어가는 문, 성막 뜰로 들어가는 문에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성막을 덮는 앙장과 지성소 휘장에는 그룹들(cheubim)을 수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실들은 대제사장의 에봇과 여러 장식을 만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에봇에는 특별히 금실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가늘게 꼰 베실로는 세마포를 짰고 세마포는 높이 5규빗(2.25m)과 길이 280규빗(100+100+50+30)으로 127.6m 울타리를 둘렀습니다. 또한 세마포로 제사장들의 의복과 대제사장의 두건, 관, 띠도 만들었습니다.

4. 털과 가죽류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출 26: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출 36:19)

염소털과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사용되었습니다. 염소털로는 실을 만들어 성막의 내부 앙장을 덮는 외부 앙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붉은 색으로 염색한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었고 그 바깥 덮개로는 해달의 가죽이 사용되었습니다. 상세한 의미들은 해당 기구들을 설명할 때 하겠습니다.

5. 기름과 향품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출 35:8)

등불을 밝히기 위한 등유와, 관유를 만드는 데 필요한 향품, 분향단에서 사를 향품 등이 있습니다. 등유는 감람나무(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성소를 밝히는 금등대에 사용되었습니다, 관유(灌油, anointing oil)는 거룩한 의식에 사용하는 기름으로, 하나님의 일꾼(제사 장, 선지자, 왕)을 세워 위임할 때나 성소의 기물들을 거룩하게 할 때 사용했습니다.

6. 각종 보석

보석들은 성막 안에 사용된 성막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의 에봇의 견대와 흉패에 사용되었습니다. 견대는 금테를 물린 호마노 보석에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이름을 각각 여섯 개씩 새겨 넣어 양쪽 어깨에 달았고 흉패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가지 보석을 금테에 물려 달았습니다.

7. 재료들의 출처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35:4-5)

성막을 세우는데 필요한 모든 재료는 백성들이 즐거이 하나님께 헌신하여 가져온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 물건들을 ‘예물’이라고 칭했습니다. ‘예물’은 히브리어로 ‘테루마(תְּרוּמָה)’인데 ‘올리다, 높이다’ 란 의미의 단어 ‘룸(רוּם)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높이 올려바치는 물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살펴보면 목재들은 들판에서 구했을 수 있고, 실 종류도 각 가정에서 소유할 수 있으며 향품, 보석 등은 소량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져오기에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겠으나 몇 톤이나 되는 금과 은은 어디서 났을까요?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귀금속을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출 11: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는 날 애굽 사람들에게 금과 은, 패물들을 요구했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이 겪었던 엄청난 재앙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神)이 애굽 땅을 떠나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예물들은 너무나 많아서 성막을 만드는 일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 가져오지 말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 36:3-5)

8. 성막 기구 제작의 책임자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출 31:1-6)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재주를 주어 이 모든 일을 책임 맡은 자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정교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방면에 소질이 있기도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더 부어 주셔서 개인적인 자질과 재능을 넘어 탁월한 기술을 갖게 하셔서 이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들을 해 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자신의 재능과 경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의 충만함과 지혜와 지식, 명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의 충만‘이 신약적인 성령 충만은 아닙니다. 구약에서의 충만이란 예언이나 어떤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의 기능적인 역사입니다. 신약의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입니다.

기록된 순서로 보면 유다 지파의 브살렐이 총책임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론과 함께 항상 모세를 보필했던 훌의 손자입니다. 브살렐을 돕도록 세운 사람이 단 지파의 오홀리압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일할 지혜로운 사람들을 세워 그들에게도 지혜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1:6).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었고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그와 함께 하였으니 오홀리압은 재능이 있어서 조각하며 또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은 자더라”(출 38:22-23)



밖에서 바라보는 성막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광야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 성막은 이방나라의 거짓 신들의 신전(神展)처럼 거창하거나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여러 신전과 신상들을 보아 왔던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초라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대단히 정교하고 견고하며 언제든 설치와 해체가 가능한 실용적인 건축물입니다. 사용된 재료들도 상징적인 의미를 따라 체계적으로 배치되었으며, 그 크기나 넓이와 높이의 수치상 비율도 놀랍도록 고도의 짜임새를 갖추어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위에 항상 임재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성막은 그 실물에서 배우는 특성을 넘어 모든 재료와 구조들이 그리스도와 교회, 복음과 구원, 하나님 나라 등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건축물과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함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막의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탐구해 나겠습니다.

1. 밖에서 바라보는 성막의 모습

우리가 흔히 여러 자료들에서 볼 수 있는 성막의 이미지들은 대다수가 위에서와 먼 거리에서 본 전체 모습을 표현한 것들이라서 성막 전체가 한눈에 보이도록 그리고 있지만 우리가 막상 그 실물 성막 옆에 다가갔을 때 가까운 옆에서 본 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합니다(이것은 실제 크기로 제작된 성막 모형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전체 크기가 약 314평 남짓 되는 성막은 사방으로 돌아가며 약 2.25m 높이로 세마포 포장 울타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 평균 키를 170cm 정도로 잡았을 때 그 키보다 약 52.5cm 더 높은 세마포 담장입니다. 그러면 성막 밖에서는 사실 그 안에 무엇이 있으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뜰 안쪽에 세워진 성소는 높이가 4.56m이기 때문에 가까이서는 높은 울타리 위로 우뚝 솟은 성소의 거무스름한 해달의 가죽 지붕만이 보였을 것입니다.

5규빗 높이의 성막 울타리 기둥과 세마포 휘장

그리고 성막 뜰에서는 항상 희생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에 고통스런 동물의 울음소리와 제물을 태우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제물이 타면서 발생하는 매캐하고 비릿한 냄새는 주변 사람들의 코를 심하게 자극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성막이나 성전을 생각할 때 고요한 분위기에서 잔잔한 예배 음악이 흘러나올 법 하고 사람들은 조용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을 연상하겠지만 구약의 하나님의 집의 외형적 풍경은 동물을 잡고 피를 쏟고 불 위에 올려 태우는 등, 항상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희생제물을 태우는 번제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타오르는 불기둥이 환하게 성막 위에 임하여 있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으로 인해 사람들은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바깥문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인지, 성소 휘장처럼 드리워져 있다가 사람이 들어갈 때만 열고 들어갔는지는 성경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열려 있는 문으로 안쪽을 볼 수 있다면 바로 입구에 동물들이 태워지는 번제단이 보일 것이고 안쪽에는 물을 담은 물두멍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네 종류의 포장으로 덮여진 성소 건물을 볼 것인데 금을 입힌 5개의 기둥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 울타리 밖에서 볼 수있는 성막의 전체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아닌 이방인 방문자가 혹시 성막을 구경하기 위해 가까이 왔다면 볼 수 있는 장면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그 정도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뜰 안에 들어간다 하여도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 외에는 성소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성소 안에 얼마나 놀라운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귀금속으로 따지더라도 금이 약 1톤, 은이 약 3.4톤이 사용된 보배롭고 영광스런 기물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도 일반 백성은 그 영광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성막이 이동할 때도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이 안에 들어가서 해체하여 포장으로 완벽하게 덮고 감싼 후에 이동을 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해체 시나 이동 시에도 그 영광스러운 기물들은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 기구들은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에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영적인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2. 겉으로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성막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그림자로 나타내 주는 것인데 그 영광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신약 안에서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맛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찌 보면 흠모할 아름다움이 없는 보잘것없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한 권력, 재물, 인기를 내보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처음 임하셨을 때 사람들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천대를 당하실 것을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마치 밖에서 바라보는 성막처럼 사방으로 둘러있는 울타리나 지붕을 덮은 해달의 가죽에서 보여지듯이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낮고 천한 모습과, 제사에서 풍기는 동물 죽음의 자욱한 연기와 냄새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와 죽음의 참혹함이 더해져 결코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능력의 근원자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입니다. 권력으로 치면 지존자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이 모든 존귀한 것을 육체 안에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성막의 외형은 예수님이 처음 인간의 신분(人子)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사람들이 성막의 외관만 보고 어떠함을 판단하듯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습니다. 후에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빌립으로부터 처음 예수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고 그를 가볍게 여길 정도였습니다(요 1:46).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목, 그가 누구시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 실체를 알았더라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바깥에서 성막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성막의 외형이나 태워지는 제사들로 인한 불편함때문에 그리 호의적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위에 임하며 그들을 압도하였기 때문에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가 표면상으로 권력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오히려 동족에게 배척당하고, 멸시받으며, 죽임 당하는 모습이 그리 흠모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배불리시는 놀라운 능력들은 마치 구름 기둥과 불기둥처럼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해 주는 것이라서 그에게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요소가 된 것입니다.

성막은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전시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한 공간도 아닙니다. 피를 흘리는 참혹한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이 화목하게 되는 거룩한 화해의 집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우리 죄를 담당하셔서 죄로 인해 원수 관계가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는 거룩한 집(성전,성막)이 되어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희생제물이며 동시에 대제사장이십니다.

성막 안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말해줍니다. 그가 문이시고 울타리이며, 제단이시고 물두멍입니다. 또한 생명의 떡이시며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의 중보자시며 그의 몸이 휘장이며 새언약의 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물 성막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가 하는 그 길을 발견하게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임시로 사용하게 될 그림자와 같은 집이라는 점입니다. 그리므로 성막을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과 지존하심과 광대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엄과 영광과 권세는 감추시고 겸비하게 낮아지시며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막을 탐구하면서 마치 전시관을 둘러보듯 관람자로 구경만할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 은혜의 여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막의 울타리, 기둥과 말뚝 | 그리스도의 십자가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출 27:9-10)

성막의 본 구조물은 널판으로 만들어진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그 성막이 세워진 곳에 뜰이 있고 그 뜰을 둘러 싸고 있는 100규빗(45.6m)×50규빗(22.8m) 길이의 울타리가 있습니다. 울타리의 소재는 세마포이고 그것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가며 60개의 놋기둥이 있습니다.

1. 울타리 - 분리와 구별

울타리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구분시켜 주는 분리와 구별의 담장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 속된 땅에서 진행되려면 먼저 분리시키고 구별하는 작업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구별을 시키면 그곳이 거룩한 처소가 됩니다. 성막의 울타리가 그 분리와 구별의 경계선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계속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운데 임재하시며 앞서 가시다가 머무는 곳에 백성들도 멈추어 먼저 성막을 세웁니다. 성막을 세울 때 가장 먼저 하는 순서는 울타리를 세우는 일입니다. 일단 울타리가 세워지면 세상과 거룩한 공간은 구분됩니다. 울타리 밖은 속되고 부정한 곳이고 울타리 안쪽은 정결하고 거룩한 곳이 됩니다. 밖은 여전히 죄의 영향력과 세속적 권세에 의해 통치되나 거룩한 공간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거룩한 공간은 본래 스스로 거룩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까지만 거룩합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비록 성막을 세우고 지성소가 놓였던 장소라 할지라도 그곳이 더 이상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지나가고 나면 평범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곳을 거룩하게 구별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지역을 성지(聖地, holy place)라고 부르고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닙니다. 물론 성경 역사가 진행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거룩한 땅(holy place)은 아닙니다. 아쉽지만 이 땅에 영속적인 거룩한 땅 성지(聖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경륜을 따라 구별시켜 놓은 곳이 성지인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정하여 구별시켜 놓은 영역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예루살렘도, 베들레헴도, 갈릴리도, 심지어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실제적 성전터도 성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거룩한 땅이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은 세상에서 유일한 거룩한 집(聖殿, holy temple)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이 건물 성전의 기능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땅, 거룩한 집, 공간적으로 거룩한 곳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완전하고도 거룩한 성전이고 거룩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의 경계선

성막의 울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과 하나님 영역을 구별시켜 주는 담장과도 같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따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나뉘었고 거룩한 백성과 이방인이 구분되었습니다. 물론 성막에 관한 것도 율법에 규정된 것입니다. 성막의 울타리는 율법을 반영합니다. 부정한 자나 이방인들은 그 뜰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울타리와 같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함과 속됨이, 하나님 나라와 세속이 구분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거룩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모두 속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나누었던 구분법은 유효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실체가 오기까지의 그림자였고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땅, 거룩한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율법으로는 부정했던 나병환자나 혈루병을 가진 자도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설령 다윗 가문 출신의 정통 유대인이거나 제사장 아론 가문의 후손이라 해도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세상에 속한 이방인과 동일한 입장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나누는 울타리는 그리스도입니다.

3. 놋기둥과 말뚝

울타리는 기둥과 말뚝으로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싯딤나무(조각목)를 반듯하게 깎고 놋을 입힌 60개의 굵직한 놋기둥은 세마포 울타리를 튼튼하게 고정시켜 줄 뿐 아니라 광야의 세찬 바람을 막아 주어 그 안에서 제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안전하게 할 수 있게 합니다. 기둥들은 안쪽과 바깥쪽에 튼튼한 놋 말뚝을 박아 굵은 줄을 매어 튼튼하게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따라서 울타리는 세상과 맞닿은 성막의 1차적 안전한 보호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안전지대입니다.

놋으로 만든 기둥과 말뚝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녹슬지 않습니다. 기둥을 고정시키고 울타리를 견고하게 해 주는 ‘말뚝’은 하나님의 견고하고 변함없는 보호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뚝’으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는 ‘야테드(יָתֵד)’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못은 우리가 생각하는 조그만 못이 아니라 천막을 칠 때 땅에 박는 말뚝 같은 튼튼한 못인 것입니다. 에스라 9장입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스 9:8)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이 성막을 지탱하는 말뚝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은혜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3은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 33:20)

이 예언의 글은 성막을 연상시켜 줍니다. 튼튼한 줄과 말뚝으로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장막,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은 영원한 안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사야의 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사 22:22-23)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4. 놋기둥과 말뚝,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예언을 계속해서 보면 ‘못(말뚝)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못’이라 함은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40여번 사용된 ‘십자가에 못박다’, 혹은 ‘십자가에 매달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타우로오(σταυρόω)’입니다. 이 단어의 고전적 의미는 '말뚝을 박다,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다, 말뚝으로 요새화하다, 방어하다‘ 등입니다. 그러므로 놋기둥과 말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세상과 구원받은 자가 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분 지어 주는 울타리가 되신다는 것으로 연관지어 이해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범죄하여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민 21:5-9).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요 3:14) 그 사건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대 위에 달린 놋뱀, 성막에서 줄과 말뚝으로 세워진 놋기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림자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놋은 항상 심판을 상징합니다.

성막 안에는 기둥이 더 있습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에 5개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기둥 4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둥들은 싯딤 나무에 금을 입혔고 줄이나 말뚝으로 고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널판과 고리와 채를 궤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기둥이라도 울타리 기둥과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따라서 놋기둥과 말뚝은 하나의 짝을 이루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은 못은 조그만 못이 아니라 성인 한 사람의 체중을 지탱시켜 줄 만큼 크고 힘이 있는 말뚝같은 대못인 것입니다. 성막의 말뚝은 죄와 의를, 세상과 하나님 나라(거룩한 성소)를 분리하는 울타리를 견고하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기둥을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에 줄로 매고 말뚝을 박아 기둥과 세마포 휘장을 고정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십자가 기둥과 대못은 우리를 죄와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거룩하게 하고 영원히 그 안에 살 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그리고 말뚝에 매인 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견고하게 묶어 주는 사랑의 줄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고린도후서 5: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강권(쉬네코, συνέχω)'이란 단어는 '결합시키다', 붙잡아 매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매어 든든하게 결합시켜 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그 속죄의 말뚝(못)은 뽑히지 않을 것이고 그 강권하는(붙들어 매는) 사랑의 줄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사 33:2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5. 은으로 만든 놋기둥의 머리싸개

60개의 모든 기둥 위에는 은으로 만든 두껑(기둥 머리 싸개)과 가림대가 있습니다.

“기둥 받침은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 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출 38:17)

울타리의 기둥은 놋으로 만들고 받침도 놋으로 이루어졌지만 위쪽은 은이 사용되었습니다. 기둥머리와 줄을 매는 고리와 옆의 기둥과 이어주는 가림대까지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놋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은(銀)은 구속(救贖, redemption), 구원(救援)을 상징합니다. 성막에 사용된 모든 은은 백성들이 낸 속전을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에는 속전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출 30:11-16)

속전(贖錢)은 20세 이상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銀) 반(½) 세겔을 의무적으로 내는 세금 형태의 돈입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차별도 없고 예외도 없이 동일합니다. 이것이 이후에는 성전세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조사를 할 경우 반드시 속전을 거두어야 합니다. 다윗이 충동적으로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은 것도 속전을 받아야 하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사무엘하 24장). 그리고 예수께서도 물고기를 낚시하여 베드로의 것과 함께 반 세겔씩 한 세겔을 속전으로 내기도 하셨던 것입니다(마 17:24-27).

성막에 사용된 모든 은(銀)은 이스라엘이 속전(대속금)으로 바친 물품입니다.

“계수된 회중이 드린 은은 성소의 세겔로 백 달란트와 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니 계수된 자가 이십 세 이상으로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인즉 성소의 세겔로 각 사람에게 은 한 베가 곧 반 세겔씩이라. 은 백 달란트로 성소의 받침과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을 모두 백 개를 부어 만들었으니 각 받침마다 한 달란트씩 모두 백 달란트요 천칠백칠십오 세겔로 기둥 갈고리를 만들고 기둥 머리를 싸고 기둥 가름대를 만들었으며”(출 38:25)

백성들이 바친 은은 전체가 100달란트와 1,775세겔이었는데 100달란트는 성소 기둥과 널판의 받침에 사용되었고 1,775세겔은 울타리 놋기둥의 두껑과 갈고리, 가름대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속전으로 바친 은으로 만든 모든 것은 대속자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기둥머리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기둥의 아래쪽 놋기둥과 말뚝은 심판이었지만 위쪽은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결국은 구원과 영원한 소망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싸움을 위해 취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할 때 특히 ‘구원의 투구’(엡 6:17)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살전 5:8)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둥머리는 머리에 쓰는 투구를 연상케 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구원의 소망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성막의 울타리는 분리와 구별, 보호, 구원을 나타내 주는 경계의 담장이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궁극적인 복음을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울타리의 중요 소재인 세마포와 출입문에 관한 내용은 다음 회에 계속하겠습니다.


세마포 울타리와 출입문



지난 글에는 성막의 울타리에 사용된 놋기둥과 말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울타리의 중요 재료인 세마포에 관해서 나누겠습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출 27:9)

세상과 거룩한 성막을 구별하는 경계선으로 사방으로 돌아가며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휘장을 둘렀습니다. 휘장은 기둥과 말뚝으로 고정합니다. 세마포는 성막의 기본 소재인 가늘게 꼰 베실로 짠 천입니다.

성경에는 굵은 베옷과 가는 베로 만든 세마포 옷이 등장합니다. ‘굵은 베옷’이란 히브리어로 ‘샤크(שַׂק)’인데 영어에서도 ‘sackcloth’라고 쓰고 있습니다. 때로 이 단어는 곡식을 담는 ‘자루(sack)’로 쓰이기도 했으며 이 굵은 베옷은 투박하고 거친 실, 염소털, 낙타털 등으로 짠 천으로 만든 것입니다. 굵은 베옷은 주로 극도의 슬픔이나 애통함, 원통함을 표현할 때, 혹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출 때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죽었거나 국가적 재앙의 날에 이 베옷을 입습니다. 때로는 금식을 하거나 회개를 할 때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물론 옷으로 입을 뿐만 아니라 굵은 베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두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세마포는 아마(亞麻)로 만든 깨끗하고 고급스런 천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 휘장, 성막 출입문에 염색하지 않은 가는 베실이 다른 색상의 실과 함께 사용되었고, 순전히 베실로만 짠 세마포가 울타리 휘장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마포로 대제사장의 두건과 관과 속바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 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관을 만들고 가는 베 실로 짜서 세마포 속바지들을 만들고”(출 39:27-28)

1. 세마포가 의미하는 것

1) 세마포는 존귀함을 나타내는 의복입니다.

애굽왕 바로가 꿈을 해석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할 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창 41:41-42)

다니엘에게 나타난 천사도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단 10:4-5)

천상의 존재가 굳이 이 땅에서 생산되는 세마포로 만든 옷을 입었겠습니까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입은 옷을 세마포로 지칭했다는 것은 존귀한 존재가 입는 의복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 장면에는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이들은 천군 천사들과 구원받고 부활한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세마포는 거룩함을 나타내는 의복입니다.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 16:4)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마도 ‘거룩함’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선택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직책, 그들의 삶, 그들의 의복, 그들의 음식, 모두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특히나 그들의 속옷, 속바지, 띠, 두건 등 모든 것이 염색되지 않은 깨끗한 세마포로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온전히 거룩함으로 옷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깨끗한 세마포에 싸였습니다(마 27:59).​

3) 세마포는 구원받고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옷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구원받은 백성들, 그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빛난다’는 말은 영광과 존귀를 표현하는 것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정결하고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입은 세마포 옷은 그리스도를 닮은 깨끗하고 존귀한 삶을 살아온 그들의 ‘옳은 행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왕은 존귀하고 제사장은 거룩합니다. 그들에게 입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그들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4)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먼저 그리스도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성도들이 입은 세마포를 언급하기 전에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사용된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일차적으로 왕과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의 존귀하고 거룩하며 의로우신 속성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2. 세마포 포장은 출입 금지 표지판

만일 성막을 하나님께서 설계하지 않으시고 전체적으로 사용된 재료들을 가지고 마음대로 만들도록 사람들에게 맡겨 놓으셨다면 과연 울타리는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겠으나 전체를 흰색 천으로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마포 울타리는 독특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날 만큼 희고 깨끗한 천으로 사방을 돌아가며 안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 키높이 보다 높게 담장을 만드신 것은 성막이 깨끗하고 거룩한 집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은 깨끗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무언의 싸인(sign)이기도 합니다. 의롭지 않은 자, 깨끗하지 않은 자는 누구라도 그리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의 ‘제한하심’과 또 ‘허용하심’을 확실하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 은혜와 자비로우심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우심은 죄인 된 인간을 제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하나님도 죄인에게 가까이하실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죽음으로 심판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는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용납하여 살리시며, 교제하시고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공의나 거룩함을 간과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공의 때문에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공의와 거룩함을 만족시키고 은혜와 사랑의 결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막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전체적인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한’과 ‘허용’은 신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적용됩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냥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대충 생각합니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이나 속죄, 하나님께 나아감에도 분명한 과정과 절차가 있습니다.

3. 유일한 출입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門)은 동쪽으로 난 출입문입니다.

1) 문은 항상 동쪽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이동하는 생활입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성막은 해체와 설치를 반복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어느 곳에 진을 치더라도 방향은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문은 항상 동쪽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배치되는데 문 앞에 진을 치는 지파는 언제나 유다지파입니다. 백성들이 이동할 때도 유다지파는 성막 기구들을 운반하는 레위지파 다음으로 지파들 중에서는 가장 선두에서 앞장서 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 야곱(이스라엘)의 축복과 예언에서 유다 지파가 백성들을 통치하며 그들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실로가 오시기까지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 지파에 있을 것이라는 축복이며 예언입니다. ‘실로(שִׁילֹה)’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 이후로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유다 지파에게 주어졌고 ‘실로’인 메시아도 반드시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이것이 동쪽으로 난 문의 의미입니다.

2)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양을 돌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막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모든 역사에 등장하는 개념들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여정은 하나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진행할 때 앞서가며, 멈추었을 때 그 중심에 위치한 성막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양들을 보호하는 양의 우리라고 해도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리로 들어가는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7). 현실에서 볼 때 양의 우리에는 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담장을 넘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며 절도입니다. 성막에는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서는 문을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려는 거짓 목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짜 목자가 아니라 영혼을 훔치는 강도며 도둑입니다.

오직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다원주의(多元主義)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문입니다.

‘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3) 문을 이루는 4개의 기둥과 4가지 색상의 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출 27:16)

성막 뜰로 들어가는 문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휘장도 청색,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등 네 개의 색상 실로 짰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4개의 복음서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입문서입니다. 특히나 4개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4가지 면을 보여주는데 마태는 왕되신 그리스도를, 마가는 희생하는 종되신 그리스도, 누가는 완전한 인자이신 그리스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색상으로 보면 청색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고 자색은 왕권, 홍색은 죽음을 포함한 희생, 세마포는 흠없는 완전한 인성을 상징합니다.

4) 문은 상당히 큽니다.

동쪽 울타리는 길이가 50규빗(22.8m)입니다. 거기에 20규빗(9.12m) 크기로 문은 만들게 하셨습니다. 울타리 길이에 비해서 문은 거의 절반에 이를 만큼 상당히 큽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언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열방과 만민을 대상으로 합니다. 약속된 성령이 임하던 오순절날 베드로는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위해서 물침례를 받으며, 성령을 받는 것, 이것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나가는 기본적인 절차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성막을 배울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이 약속의 대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그렇습니다. 너희와(그 시대 유대인들) 너희 자녀와(유대인 후손들), 모든 먼데 사람(모든 만민들)들이 그 대상입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족속과 방언,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고 누구라도, 어떤 죄인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은 대단히 크고 넓습니다.

또 한 가지 볼 것은 문의 색상(color)입니다. 울타리 포장은 절대적 의로움의 상징인 희고 깨끗한 세마포였습니다. 그런데 출입문은 청색, 자색, 홍색, 흰색 베실로 짠 다양한 색상입니다. 물론 이 네 가지 색은 각기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 되심과, 죽으심,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만 또 다른 관점에서 옆에 펼쳐진 세마포 포장과 비교할 때는 그저 다양한 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굳이 비교하자면 유월절과 무교절에 사용되는 떡은 반드시 누룩이 없는 무교병이지만 오순절(맥추절,칠칠절)에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떡은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레 23:17)이었다는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병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무교병이며 오순절은 죄인 된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시작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누룩넣은 유교병을 사용한 것과 유사합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의 울타리 포장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출입문에 보여지는 이 다양한 색상들은 깨끗하고 흰색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누구든지, 어떤 유형의 죄인이라도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제단(놋제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회개



동쪽으로 난 출입문을 통해 성막 뜰로 들어갑니다. 여기는 제사장들의 공간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출입이 허용되어 있지만 반드시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뜰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가장 먼저 만나는 기구가 놋으로 만든 제단입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출 27:1-2)

제단은 잡은 제물을 불태워 제사를 드리는 곳인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5규빗(약 2.8m)으로 정사각형이며, 높이는 3규빗(약 1.36m)의 크기입니다. 제단은 조각목(싯딤나무)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놋을 입혔습니다. 제단에는 나무와 제물을 올려놓고 불사를 놋그물과 이동할 때 채를 꿰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채와 고리를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뿔을 만들고 그것 역시 놋으로 씌웠습니다.

1. '놋'이 의미하는 것은 심판입니다.

앞선 글에서 성막에 사용된 각종 재료 목록을 간략하게 보았지만 놋의 쓰임새와 영적 의미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막에 사용된 금속으로는 금과 은과 놋 등 세 가지인데 금은 오직 성소 본 구조물 안에만 배치되어 있고 울타리나 뜰에는 모두 예외 없이 놋이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울타리 기둥의 상층부 기둥머리 싸개는 개념상 성소로 이어지는 ‘구속’이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은이 사용되었지만 땅에 닿아 있는 모든 기구나 기둥이나 말뚝은 놋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땅은 세상입니다. 성막 뜰 안의 성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in Christ)’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는 보좌가 있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각자의 제물을 들고 들어와 뜰에 있는 기구들을 통해 죄를 속죄함을 받고 거룩케 함을 입는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심판아래 있습니다. 놋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이나 눈 같았고 눈은 불꽃같으며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계 1:14-15).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그의 발이 ‘빛난 주석’같았다고 한 부분입니다. 개역과 개역개정 성경은 ‘주석’이라고 번역했지만 킹 제임스 성경은 ‘like unto fine brass’라고 기록하고 한글로는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라고 번역합니다. 한글 새번역 성경도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빛나는 놋쇠 같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은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의 환상에서도 등장합니다(겔 1:7). 네 가지 모습을 가진 생물의 발에 대해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같이 빛나며”라고 ‘빛나는 구리 같다’라고 표현했지만 역시 킹 제임스 성경은 “그들은 광택 나는 놋쇠의 색깔처럼 번쩍이더라”라고 번역합니다. 새번역 역시 “광낸 놋과 같이 반짝거렸다”라고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표현으로 번역했습니다.

발은 땅에 닿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발로 밟는다’는 표현은 '심판'과 연관 짓는 관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사 63:6)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합 3:12)

이사야 선지자와 사도 요한은 메시아의 마지막 열방 심판을 '발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3)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 19:15)

이렇듯 발은 세상과 맞닿아 있는 신체 부위고, 그 발이 놋과 같다고 표현되는 것은 장차 포도즙 틀을 발로 밟듯이 죄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심판에는 죄의 원인자이며 반역의 우두머리인 마귀(사탄)를 발등상 되게 하시는 것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놋과 관련된 상징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실례는 놋뱀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째 되던 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하나님께 원망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출애굽 이후 반복된 불신앙과 불평에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 모형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자신의 구속 사역을 설명하셨습니다. 놋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복음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장대에 매달린 놋뱀처럼 예수님은 땅에서 들어 올려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그 뒷면에는 마귀와 죄가 그 위에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놋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2. 번제단은 제물이 되어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번제단에서는 소나 양이 제물이 되어 죽임 당하고 불태워집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대속제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히 9:22). 사람은 마땅히 자기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당할 대속제물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동물제사는 사실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피가 인간의 죄를 사하지 못하며 오직 완전한 제물이 되실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임시로 드려진 것입니다(히 10:1-4).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 바로 번제단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3. 네 귀퉁이의 뿔 – 속죄와 구원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번제단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이 뿔에는 제단에서 드려진 희생제물의 피를 바릅니다.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출 27:2)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 4:18)

성경에서 뿔(히:케렌,קֶרֶן)은 권력이나 힘, 능력, 세력을 상징합니다.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시 75:5)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시 75:10)

이런 말씀들은 악인들의 세력을 차단하고 의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시 89:17)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4)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시 92:10)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권세와 능력을 그에게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사용하는 기름병은 뿔나팔(양각나팔)처럼 정결한 짐승의 뿔로 만든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병이나 그릇이 얼마든지 있을텐데도 굳이 뿔로 만든 기름병을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뿔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왕상 1:39)

열왕기에는 다윗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여 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으나 다윗이 솔로몬에게 기름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붙잡고 솔로몬이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왕상 1:50-53)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단 뿔은 힘없는 약자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나, 혹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한 경우라도 긍휼과 정상 참작이 필요한 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뿔’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제사장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능력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셨다고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번제단의 뿔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제단에서는 동물이 제물로 드려지고 그 피는 뿔에 바릅니다. 예례미야는 유다의 죄를 언급할 때 그들의 죄가 철필로 제단의 뿔에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속죄'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카파르(כָּפַר)'이고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것은 피를 칠하여 죄를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하는 '속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놋으로 상징되는 죄에 대한 심판과 뿔로 상징되는 구원의 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네 귀퉁이의 뿔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가리키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만국, 민족과 족속과 언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구원의 능력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4. 제단 아래 모든 피를 쏟음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 4:18)

속죄제로 드려진 희생제물의 피를 뿔에 바르고 난 후에 남은 모든 피는 제단 아래에 모두 쏟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다리뼈는 하나도 상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금방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체중으로 인해 몸이 아래로 쳐지면 호흡하기가 어려우니까 있는 힘을 다해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밀어 올려 간신히 호흡을 이어갑니다. 이때 못 박힌 손과 발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더해질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러한 고통의 반복이 몇 시간이나 지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형수를 빨리 죽게 하기 위해서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도록 부러뜨립니다. 군병들이 예수님 곁에 못 박힌 강도들의 다리를 이렇게 부러뜨렸습니다(요 19:32).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호흡이 멈추신 터라 군인들이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나오게 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3-34)

‘우리말 성경’은 그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번역합니다.

“대신에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요 19:34, 우리말)

정리하면 이 상황은 두 가지의 예언과 상징들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는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시편의 예언이고 또 하나는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아래 다 쏟아부으라는 번제단과 관련된 명령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9:36)

5.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 6:12-13)

번제단의 불은 절대 꺼트리지 않고 타올라야 합니다. 설사 성막이 이동해 갈 때도 제단의 불씨는 꺼트리지 않고 계속 유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꺼지지 않습니다. 소멸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속이 완료되고 경륜을 이루시기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6. 이동할 때 자색 보자기에 쌉니다.

“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민 4:13)

번제단을 운반할 때는 자색 보자기로 싸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 덮개를 덮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금으로 된 기물들은 모두 청색 보자기로 싸지만 유독 번제단은 자색 보자기로 쌉니다. 자색은 왕을 상징하는 색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군인들이 자색 옷을 입히고 희롱합니다. 이 부분도 예수님에게 이루어질 하나의 사건을 보여주는 그림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막 15:16-18)

7. 운반할 때 어깨에 멥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민 4:15)

언약궤나 다른 성소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번제단도 이동할 때 채를 꿰어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멥니다. 성막의 여러 시설물들은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하지만 기구들만큼은 수레에 싣지 않고 제사장이 직접 어깨에 메는 것입니다. 다윗의 때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에 실어 운반하다가 웃사가 죽임 당하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도 헌신을 짐으로 여겨 짐승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여 쉽게 가지 않고 몸소 무게를 느끼며 즐거이 어깨에 메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의미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죄와 저주의 짐을 동물들에게 맡겨 쉬운 방법으로 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친히 죄악을 어깨에 짊어지시고 그 고난을 고스란히 담당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깨에 메신 십자가가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8. 번제단은 우리에게 '회개'를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나가려면 출입문을 통과하여 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서 희생제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끌고 간 양의 머리에 죄인이 안수하고 잡으면 제사장이 제사를 진행합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그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죽는 것이며 우리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침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외친 것이 회개입니다(마 3:1-2).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 4:17; 막 1:15).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시작되던 오순절 날 베드로가 전한 첫 번째 복음 적용 메시지도 회개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하는 번제단의 메시지입니다. 번제단을 통하지 않고는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는 주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7:12)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회개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회개는 죄사함을 위한 전제조건이고 회개는 결국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고후 7:10)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회개란 죄를 버리는 것이고, 죄에 대해 죽는 것이며,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또한 진정한 회개는 제사장이 기구를 어깨에 메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메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듯이 이러한 회개의 삶은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더욱 깊어져야 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으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제사이며 거룩한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물두멍,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물침례를 나타냄

J앤G 말씀창고 2022. 2. 5. 12:00
9~11분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출 30:18)

번제단과 회막 사이에 놋으로 만든 물두멍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두멍’이란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물을 많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나 독’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키요르(כִּיוֹר)’라는 단어를 썼는데 깊은 대야나 냄비를 가리키며 ‘파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쿠르(כִּיוֹר)’에서 유래했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제작할 때 하나님께서 크기를 정해 주셨는데 오직 이 물두멍은 지정해 주신 규격이 없습니다.

1. 물두멍은 더러움을 씻는 곳입니다.

물두멍의 용도는 단순합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거나 성소 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수족을 씻도록 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씻음의 명령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반드시 수족을 씻어서 죽기를 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고는 두 번이나 반복될 정도로 엄중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명령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대대로 영영히 지킬 규례라고 최고 수위로 더 강조를 하셨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19-21)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이처럼 삼중으로 강조하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씻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2. 물두멍은 번제단과 마찬가지로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놋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번제단에 관한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놋’에 대한 설명을 보시지 않았다면 ‘성막해설 07번 번제단’에 관한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막 뜰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금이 아니라 놋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뜰에서는 하나님 나라나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생명과 영광에 대한 것은 성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은 짝을 이루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단에서는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드려집니다.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려면 물두멍에서 씻어야 합니다. 씻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통과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함께 연결되어 깨끗함, 정결함이라는 결과를 이룹니다.

3.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출 38:8)

물두멍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하나님께 드린 놋 거울을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레위 자손 여인들일 것입니다. 성막 제작에 사용된 전체 놋이 무려 2.4톤 정도 되는데 아마도 놋그릇이나 놋 연장 등 다양한 놋 제품들을 녹여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물두멍을 제작하는 재료로는 오직 여인들이 사용하던 거울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도구입니다. 특히나 여인들이 거울을 많이 사용하는 데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꾸밉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거나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을 때 거울을 보듯 들여다보며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자로서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가다듬었을 것입니다.

4. 물두멍은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 제물이십니다. 번제단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두멍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사해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죄 사함의 근거는 그가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에 두 번의 경우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직접적으로 선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첫 번의 경우는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 속에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라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다시 한번 선포하셨습니다(눅 5:24).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는가?’라는 서기관들의 생각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예수님이 바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란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그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져와 깨뜨려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하신 선언입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7:48)

여기서도 함께 앉은 사람들이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눅 7:49).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입니다. 공생애 사역 기간에 직접적인 말씀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단 두 번밖에 없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라는 알려 주는 예시(例示)입니다. 예수님의 그 권세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그 '예수 이름(Jesus name)'을 통해 나타납니다.

5. 제사장이신 예수님도 물로 씻으셨습니다.

메시아는 제사장 역할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공적 사역에 임하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물로 씻으셨습니다. 손과 발만이 아니라 온몸을 씻으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처럼 죄가 있어서 씻으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씻으신 것입니다.

6. 물두멍은 물침례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경륜 안에서 물침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침례를 기독교 의식(儀式)의 하나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울러 구원은 단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나 침례 등 행동이 수반되는 그 어떤 것이든 구원과 관련지을 경우 '행위구원론'으로 치부되어 ‘이신칭의’ 교리가 훼손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율법의 행위나, 인간이 만든 종교적 행위, 인간의 선행 등은 구원과 결코 연관 지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물침례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와 같은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구원과 관련짓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복음 명령입니다.

흔히 성경에서 ‘물’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씻음, 혹은 과거와의 단절, 죽음, 심판을 상징하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전자의 경우 노아의 홍수나 출애굽시 홍해,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의 요단강 건너기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노아 대홍수의 물은 옛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홍해의 물은 애굽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며 애굽 군대를 물 속에 장사하여 심판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은 광야 생활의 청산입니다. 물론 노아 홍수 물을 통해 새 역사가 시작되고 홍해 물을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면에서 생명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옛것을 청산하는 것이지 새로움이나 생명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경우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라는 부분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등의 사례입니다. 이러한 경우의 ‘물’은 분명히 ‘생명’을 상징합니다.

동일한 물이라도 두 경우가 상징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쉽게 구분하려면 '씻느냐' '마시느냐'를 보면 됩니다. 전자는 우리 몸 밖에서 씻거나 몸을 담그는 것이고 후자는 우리 안으로 마시고 섭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두멍의 ‘물’은 씻기 위함이지 마시는 용도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의 견해처럼 ‘물’이 ‘말씀’이나 ‘성령’을 상징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은 그냥 ‘물’입니다. 따라서 물두멍의 물은 본래적 의미 그대로 씻음, 죽음, 심판, 옛 생활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 안에서 명령된 물침례와 의미상으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 물침례는 죄씻음입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물침례)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성령침례) 씻음과(죄씻음, 죄사함)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칭의) 받았느니라"(고전 6:11)

□ 물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3-4)

□ 물침례는 옛 사람을 벗어내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물침례가 처음 시작된 것은 새로운 언약의 준비자인 요한의 사역부터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 생각을 따라 임의로 침례를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실 때 침례를 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요 1:33).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명령하신 침례는 분명히 죄 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눅 1:76-77)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막 1:4)

그런데 동일한 의미를 가진 형태로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연관지어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죄 사함은 회개와 침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최초로 임한 오순절날 베드로 사도는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그들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원하여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6) 하고 질문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구원의 메시지, 복음 적용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새 언약을 여는 자 요한에게 주어졌던 죄사함의 침례 명령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침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이어졌습니다(마 28:19).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셔서 죄를 사하셨던 그 죄 사함의 권세는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 때 그 이름에 부여된 동일한 권세로 적용되어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회개를 의미하는 상징이었고 물두멍은 죄를 씻는 물침례를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막 16:15). 씻으면 구원을 받고 씻지 않으면 죽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물두멍의 명령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앞서 물두멍에 관해서 출애굽기에 기록된 말씀을 보았듯이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고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라고 규정하심으로 씻음은 재차 강조된 엄중한 명령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삼중, 사중으로 강조된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진실로’라는 단어를 무려 네 번이나 사용하셨고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다(cannot see),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cannot enter into)’라고 반복하며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물두멍 명령과 병행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막에서 상징되는 천국은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그러므로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각기 복음의 상징과 복음의 실체를 다루지만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땅에 있는 성소에는 씻지 않고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면 ‘씻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는 죄를 씻지 않으면 결코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의 과정을 ‘물과 성령으로’라고 하셨는데 일단 ‘성령’은 오순절날 제자들이 약속으로 받았듯이 하나님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에서 살펴 볼 것은 ‘물’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거듭남의 도구인 ’물‘도 물침례로 연결시키기를 꺼려 합니다. 굳이 ‘말씀’, ‘성령’, 혹은 ‘모태의 양수’로 해석합니다. 진리는 너무도 선명하고 성경에서 증거와 사례들은 넘쳐나는데 왜 애써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니까 여기서의 물도 ‘생명’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새로운 생명을 받기에 앞서 죄를 씻어내고 옛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결국 ‘물과 성령’이란 죽고 장사되며(회개와 물침례) 새로 태어나는 것(성령의 침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언급하면서 그 ‘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표인 침(세)례라”고 해석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벧전 3:21)

번제단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물두멍은 죄를 씻고 장사 지내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상징입니다.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침례를 받는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자신의 영적 상태를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는 것을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약 1:23).

물두멍은 크기의 규정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도 제한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를 죄인 되게 한 근본적인 죄에서부터 살아오면서 개인적으로 지은 죄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짓게 될 죄들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되었고 물침례를 통해 각 개인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적용되었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에 짓는 죄들에 대해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요 13:10)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면 사함을 받습니다(요일 1:9).


















성소와 지성소, 공간의 상징적 의미



성막은 광야 들판 위에 세마포 울타리를 둘러서 특별한 공간으로 구별시킨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거룩한 처소라 할 수 있는 본 건물은 4겹의 포장으로 덮여 있는 성소 구조물입니다. 성소는 길이가 30규빗(약 13.68m), 폭이 10규빗(45.6m)의 넓이로 조각목에 금을 입힌 널판들을 세워 벽을 만들었고 그 중간에 휘장을 쳐서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입구 쪽을 성소(聖所, the Holy Place)라 하고 안쪽을 지성소(至聖所, the Most Holy Place. the Holy of Holies)라 부릅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벽면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기물들은 모두 금(gold)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금은 영광과 영원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성소와 지성소는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나타냅니다.

앞서 성막해설 제 2번 글에서 성막의 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시피 일단 성막이 세워지면 4가지의 구역이 생겨납니다. 성막 울타리 밖은 죄가 지배하고 있는 속되고 부정한 영역입니다. 온 세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 온 세계는 죄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 죄를 해결 받지 않는다면 영원한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성막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성막 뜰인데 이곳은 죄가 다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동물들이 희생되는 속죄와, 물로 더러움을 씻어내는 곳입니다. 울타리 밖의 공간에 비하면 당연히 이 뜰도 거룩한 공간으로 분류되지만 범위를 성막 안으로 좁혀서 본다면 이곳은 아직 ‘거룩’의 영역이 아니라 ‘죄’와 ‘정결’의 영역입니다. ‘거룩의 영역’이란 하나님께서 구분시켜 놓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거룩한 장소는 하나님과 접촉하며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영광이 표현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이 다음 영역인 성소입니다. 성소는 거룩하게 구별된 일반 제사장들이 들어가 섬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소를 지나 휘장 안쪽에 성소보다 더 지극히 거룩한 곳,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는 곳입니다.

정리하면 성소는 일반적인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여김을 받은' 인간의 영역을 의미하며, 지성소는 본질적인 거룩함으로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의 영역을 나타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동일한 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되거나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룩하신 분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연합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죄의 영역에서 곧바로 거룩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대속제물을 드리고 씻는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물론 새언약의 그림자인 실물 성막의 성소에는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소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는 죄인인 일반인들이 속죄와 죄 씻음을 통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얻어 그들이 들어갑니다. 성막은 역사적으로 구약 시대 당시에 실제적인 기능과 역할보다 그리스도와 영원한 언약을 예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큽니다.

1. 성소와 지성소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막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집이고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성막 전체는 육신의 장막을 입고 성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집(성전)이고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성막의 모든 기구들이 예수님 자신과 그의 속성과 사역을 나타냅니다. 특히나 성소와 지성소는 전체적인 의미와 배치되어 있는 모든 기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림자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2. 성소는 이 땅에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성막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들은 사실 구약의 백성들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성막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를 통해 이루시는 완전한 언약의 복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성소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시작된,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성령이 임하고, 복음이 전파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생겨날 때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이 천국은 완전한 천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유 속에 길가 밭도 나오고 가라지도 나오며 누룩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나라라면 이런 문제와 오류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그의 몸 된 교회(에클레시아, 물로 씻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의 모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성소는 지성소에 비해서 완전하거나 절대적인 거룩함은 아닙니다.

3. 지성소는 주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지성소는 일반 제사장들도 들어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공간입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 들어갑니다(히 9:7). 우리는 제사장 직분을 얻었지만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성소는 흠도 없고 죄의 가능성도 없는 완전한 거룩함,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지성소의 크기는 숫자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성소의 길이가 10규빗이고, 폭이 10규빗이며, 높이도 10규빗입니다. 이 숫자들을 모두 곱하면 1,000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많은 경우에 숫자에도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막에는 수없이 많은 숫자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 숫자들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합니다만 그중에서도 확실하게 연관되는 숫자들도 있습니다. 지성소의 1,000이라는 숫자도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직접 통치하시는 기간이 1,000년이라고 확실하게 명시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사도 요한은 이 1,000년이란 기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는데 마귀가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혀있는 기간이고,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는 기간이며, 성도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땅에서 왕 노릇 하는 기간이라고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서 바로 지옥에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궁극적 의미에서 천국이나 지옥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직접 통치하십니다. 이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합니다(계 20:5). 천년이 지난 이후에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리고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 후에 영원한 지옥 형벌이라 할 수 있는 불못에 던져집니다(계 20:15). 그것이 진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의 일차적인 상징은 천년왕국입니다. 천년왕국은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전처럼 단순히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고 관여하시는 정도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지성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된 영원한 나라의 중심부, 새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이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처럼 길이와 폭과 높이가 동일한 입방체(立方體, cube)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계 21:16-17)

새 예루살렘성은 길이와 폭과 높이가 각각 12,000스다디온(stadion)씩으로 마치 큐브처럼 모든 면의 크기가 동일한 반듯한 구조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실제 모습을 묘사하거나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지성소와 새 예루살렘성이 구조적인 면에서 유사한 형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지성소가 주님이 직접 다스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참고삼아 말하는 것입니다만 지성소의 크기가 10×10×10=1,000 이기 때문에 숫자적으로 천년왕국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몸 된 교회가 시작된 성소의 기간은 20(길이)×10(폭)×10(높이)=2,000년이 됩니다. 따라서 시한부 종말론으로 치부되기 쉽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교회 시대의 기간이 대략 2천여 년임을 예시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추측이 가능해 집니다. 물론 단정 짓거나 그러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신중하게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4.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침례를 상징합니다.

1) 거룩함은 성령을 통해 가능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거듭남의 과정에는 ‘물과 성령’이 있습니다(요 3:5). ‘물’은 씻기는 것이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침례’로 씻음이 이루어지고 ‘성령’안에서 ‘거룩함’이 이루어집니다. 성막 뜰의 번제단과 물두멍에서 속죄와 씻음이 이루어지고 성령을 받을 때 거룩함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거룩한 인침입니다(고후 1:22; 엡 1:13).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2)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은 4단계로 구분됩니다. 1단계는 공생애입니다. 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등 인간의 육신적 필요를 위한 사역입니다. 2단계는 우리의 속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신 것입니다. 성막뜰의 사역입니다. 3단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소의 사역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지성소 사역으로써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친히 통치하시며 만유를 회복시키시고 복음이 완성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행 1:4). 성령의 감동이나 임재나 능력 나타남은 ‘성령침례’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임재, 또 성령의 능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사도들의 경우 오순절이 되기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침례는 단순히 임재나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고, 그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것이며, 그 사람도 또한 성령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며칠 앞두고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예고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with)’ 계셨지만 이후에 ‘안에(in)’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함께 계신 성령이 장차 너희 안에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성령침례를 받을 때입니다. 성령침례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를 이루고 '물'은 씻어서 정결하게 하여 속죄를 개인적으로 적용하여 유효화하며, '성령'은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인치는 것입니다.

2 )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실 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때 그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받음의 그림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물로 씻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각 성도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성소)’이며 이들의 함께 모여 연합된 ‘성전’을 이루어 갑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5. 성소의 기둥은 성령 받음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되기 전까지 아직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령 감동이나, 임재, 성령의 능력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각 사람 안에(in) 임하고 사람이 성령 안으로 들어가는 침례(밥티스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오순절 날에 최초로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임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이 성령 안으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소 기둥에도 하나님께서 설계해 놓으신 숫자적 상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기둥은 다섯 개입니다. 그 기둥의 높이는 각기 10규빗입니다. 다섯 개의 기둥을 합치면 50이란 숫자가 나옵니다. 우리말 ‘오순(五旬)’이란 단어는 숫자 50을 말합니다.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은 무교절 기간의 안식일로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낸 그다음 날, 바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구약에서는 오순절이란 단어보다 칠칠절, 맥추절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주로 오순절이란 단어를 씁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때입니다. 최초로 성령이 임했고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 120명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약이 온전하게 시작된 날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10규빗짜리 다섯 개의 기둥을 통과하여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는 성령침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오늘은 성소와 지성소의 공간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용된 재료와 구조가 담고 있는 의미들을 나누겠습니다.




성소의 널판, 금을 입힌 조각목(싯딤나무)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출 26:15-17)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출 26:29)

지난 글에서는 성소와 지성소의 공간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성소를 이루고 있는 벽면의 재료에 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소의 구조물은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널판(board)을 만들고 그 위에 순금을 입혔습니다. 널판 하나의 길이는 10규빗(약 4.56m), 너비는 1.5규빗(약 68cm)으로 총 48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각 널판들에는 금으로 4개씩 고리를 만들어 달았고 역시 조각목에 금을 입힌 띠(bar)를 꿰어 단단하게 고정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널판의 중심부에 하나의 구멍을 뚫어 띠를 관통하게 하여 이중으로 고정시켰습니다. 성소의 입구는 조각목에 금을 입힌 5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널판들은 입구쪽 외에 3면을 둘러싸는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널판의 받침대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널판 아래 쪽에 두개의 촉을 만들어 받침과 연결시킵니다.

1. 조각목(皁角木, shittim wood)

성막에 사용된 목재들은 모두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울타리나 성소의 기둥들과 성소 벽면을 이루는 널판, 그리고 번제단, 떡상, 분향단, 언약궤 등 기본 틀은 이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성소 밖에 있는 울타리와 입구 기둥은 이 나무로 만들고 놋을 입혔고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그 위에 금을 입혔습니다.

먼저는 ‘조각목’이라는 용어로 인한 오해를 바로잡고 가겠습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는 여기에 사용된 나무를 ‘싯딤(שִׁטִּים)나무’로 기록하고 영어 KJV도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합니다. 싯딤나무는 ‘아카시아’로도 알려진 나무입니다. 그래서 NIV나 한글 새번역 성경에서는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라고 번역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카시아로 불리는 나무는 북미가 원산지인 '아까시나무'이며 싯딤나무와는 다른 종류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에서 사용된 ‘조각목’이라는 단어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말 ‘조각’이란 단어 자체가 재료를 깎거나 다듬어서 모양을 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쪼개어거나 갈라져서 나누어진 작은 부분들을 말하기 때문에 ‘조각목’은 아마도 성막의 널판이나 기구들이 칼로 새기거나 조각하여 만들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나무들의 여러 조각들을 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쓴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글 번역 과정에서 적절치 않은 용어 선택으로 인한 오해입니다. 한글 성경은 중국어로 번역된 한자어들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에서 싯딤나무를 한자어로 번역할 때 중국 내에 서식하는 나무 중에 싯딤나무와 비슷한 모양의 ‘조각자나무’라는 종(種)이 있어서 중국인들이 알기 쉽도록 그 이름으로 그냥 사용한 것입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이 조각자 나무를 한자어로 ‘조협목(皂莢木)’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성경 번역 과정에 이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번역에도 ‘아몬드나무’를 ‘살구나무’로, 삭개오가 올라갔던 ‘돌 무화과나무’는 뽕나무로 표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시대적으로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번역 초기에 낯선 외래어 명칭보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 주변에 있는 유사한 종의 이름을 따서 번역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와 같이 조각목도 중국이 한자어로 번역한 나무 명칭을 한글 성경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은 나무에 새기거나 깎아 만든다는 의미의 ‘조각(彫刻/雕刻)’이나 ‘떨어져 나온 부분’을 의미하는 ‘조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원래의 용어 그대로 ‘싯딤나무’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싯딤나무는 북아프리카나 아라비아 광야, 또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서식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뿌리를 50~60m에서 길게는 2km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는, 광야에 최적화된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기에 싯딤나무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장점으로는 묵직하고 단단하여 벌레가 파먹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뒤틀리지 않는 등 내구성이 매우 뛰어나고 바란 광야에서는 수령이 3,500년 넘은 나무가 발견될 정도로 수명도 깁니다. 그러나 단점은 숲에서 곧고 길게 자란 나무들과는 달리 나무가 곧지 않고 너무 단단하여 목재로써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2. 싯딤나무에 금을 입힌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모든 기구들과 널판은 싯딤나무에 금을 입힌 것입니다. 싯딤나무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상징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광야 같은 세상에 사람의 아들(人子, Son of Man)로 오셨습니다. 그가 취하신 인성은 흠모할 것이 없는 거친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품고 계셨지만 그는 썩지 않고 뒤틀리지 않는 견고함과 불변성과 영원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싯딤나무에 금이 입혀졌습니다. 금(金, gold)은 성경에서 황금(gold), 순금(fine gold), 정금(pure gold) 등으로 표현되는데 부요함, 존귀함, 영화로움, 영원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쓰입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는 것을 ‘황금 빛’이 나오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또한 요한계시록은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정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의 길도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계 21:18)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 21:21)

싯딤나무와 금의 결합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본질에서도, 신분에서도, 살았던 삶의 환경과 인간의 모든 고통을 맛보신 것까지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분 스스로는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던 그의 또 하나의 본질과 신분은 완전한 하나님, 홀로 한 분이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육체를 가진 인간 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셨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두 가지 속성, 두 가지 본질, 두 가지 신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방 신화에 등장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의 신성(神性)을 말할 때는 구약의 하나님 외에 또 한 분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유일하신 그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거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신성 안에는 나눔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⅓의 부분 충만이 아니라 모든 충만이 거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For in him dwelleth all the fulness of the Godhead bodily)”(골 2:9)

예수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신하는 화목제물이시며, 인류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신분으로서는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싯딤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힌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 즉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도 한편으로는 부활로 영광을 덧입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소 밖에는 울타리 기둥과 번제단에 싯딤나무와 놋의 결합이 있습니다. 이 부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과 영광스러움을 뒤에 감추시고 죄를 짊어지고 심판받으실 종의 형체로 사시고, 사역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형체가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시며,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골 1:15; 히 1:3). 만약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 제한되거나 가려짐 없이 본연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면 마땅히 보좌 위에서 보듯이 최고의 영광스러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우리와 동일한 비천한 모습으로, 죄인이 아니었으나 동일한 죄의 종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막 뜰에서 만나는 예수는 이런 모습입니다. 나무와 놋의 결합은 성소 안에서 나무와 순금의 결합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여 영광스런 하늘의 형상으로 변화되신 그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3. 널판 아래에는 은으로 만든 받침이 있습니다.

48개의 널판마다 각 2개씩 은(銀) 받침이 놓였습니다. 이 은 받침은 하나에 1달란트(약 34kg)씩 사용되었습니다.

“은 백 달란트로 성소의 받침과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을 모두 백 개를 부어 만들었으니 각 받침마다 한 달란트씩 모두 백 달란트요”(출 38:27)

이스라엘 백성들 각 사람이 반 세겔씩 낸 속죄금은 은 100달란트(3.4톤)와 1,775세겔이었습니다. 그중 100달란트가 성소의 48개의 널판과 4개의 지성소 입구 기둥 받침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널판 하나에 1달란트 무게의 은 받침이 2개씩이니까 96달란트이며, 기둥 4개에 각기 1달란트씩으로 합하면 100달란트가 정확합니다.

은(銀, silver)은 ‘성막해설 제5회’에서 울타리 기둥의 뚜껑에 관해 나눌 때 설명했듯이 ‘속죄, 구속, 구원’을 의미합니다. 울타리에서는 기둥의 윗부분에 은이 사용되었는데 성소에서는 기둥과 널판의 아랫부분 받침입니다. 의미상으로 울타리 머리에서 성소 기둥과 널판 받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소는 거룩한 공간이지만 여전히 땅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속죄와 구속이 받쳐 주어 그 사이를 구분하며 또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 구원과 구속(救贖)의 받침이 없으면 성소는 결코 세워질 수 없습니다.

4. 싯딤나무와 금의 결합은 구원받는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앞서 놋을 입힌 싯딤나무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심판받으시는 예수님의 종의 형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대입될 때 죄로 인해 심판 앞에 놓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에덴에서 추방되어 광야 같은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싯딤나무의 단점들이 곧 우리 본연의 모습입니다. 볼품없고 뒤틀렸으며 완고하여 불을 피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인간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싯딤나무 외에는 하나님의 집 건축에 쓰일 목재로 사용할 나무가 없습니다. 종려나무가 있긴 하지만 목재로는 부적합합니다. 결국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람’이란 존재 외에는 없으며 이들을 대신할 다른 존재가 없습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하늘의 천사들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완벽한 존재로 아름답게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배반하는 등 문제투성이고 창조의 실패작 같은 ‘인간’이란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유일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이란 존재를 부르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시며 성령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싯딤나무에 순금을 입히시는 작업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관계에 대해서 정의하시길

“거룩하게 하시는 이(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성도들)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님과 구원받은 이들을 동일한 근원에서 난 ‘형제 관계’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를 ‘맏아들’이라 칭하고 성도들을 ‘많은 아들들’이라 칭하며, 그래서 형제라고 부르기에 합당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싯딤나무에 금을 입히신 것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하늘의 신분과 그 영광으로 덧입히신 것입니다. 널판이 서로 연결됨 같이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동일한 신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놀랍고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널판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집합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널판이 한 개뿐이라면 세워질 수 없습니다. 48개의 널판이 촉(tenon)과 고리와 띠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흔들림없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출 26:17)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지니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이며 널판 가운데에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출 26:26)

널판들을 고정시키기 위해 각 각 판마다 두개의 촉을 만듭니다. 이것은 바로 옆에 있는 널판과 연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개의 띠를 만들었는데 널판마다 각각 4개의 고리들과 널판 중심에 서로 연결하는 구멍을 뚫어 총 5개의 띠로 전체 널판을 연결합니다. 밖에 노출된 4개의 띠는 보이는 것이지만 속에 있는 두 촉과 띠는 널판들이설치된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지만 교회는 연합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널판이 혼자 설 수 없듯이 구원받은 성도들도 혼자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널판을 연결하여 세워 주는 4개의 노출된 띠는 일차적으로 교회에 주신 4가지 직임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⓵'사도'로, 어떤 사람은 ⓶'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⓷'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⓸'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이와 같은 직분과 사역들을 세우시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세워지는 성소의 널판의 모습과 너무나 확실하게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직분들은 교회 내에서 계급이나 특권이 아니라 몸을 세우고 지탱하기 위해 역할을 담당하는 고리나 띠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몸을 세우는 시스템이라면 또 한 가지 실제적인 활동적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모임의 형태에서 그 모범적 사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⓵사도들의 가르침, ⓶함께 떡을 떼는 친밀한 교제와 소유들을 나눔, ⓷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것, ⓸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함(예배) 등입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활동들이 교회를 부흥되게 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나가는 요소들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더 중요한 것, 눈에 보이지 않게 널판 안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⓹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그리스도와 우리를 강력하게 연결하는 띠는 사랑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강권’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도메(οἰκοδομή)’인데 집이나 거처를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세우다, 짓다’라는 뜻의 ‘데모’가 합쳐진 말로 ‘집을 세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강력한 사랑이 몸된 교회를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세우고 있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서로를 강력하게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띠도 당연히 ‘사랑’입니다. 초대교회의 활동들은 제도나 행정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던 것’도(행 2:45)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강하게 하고 온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주는 띠와 같은 것입니다" (골 3:14, 현대인의 성경)


떡상과 진설병,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23-30)

이번 글부터는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소에 들어서면 오른 편에 떡상이 있습니다. 떡상은 길이가 2규빗(약 91.2cm), 너비는 1규빗(45.6cm), 높이는 1.5규빗(68.4cm)의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떡상도 다른 기구들처럼 싯딤나무로 틀을 짜고 금을 입혔습니다. 상 위에는 차려진 것들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손바닥 만한 크기로 턱을 만들고 금테를 둘렀습니다. 또한 제사장이 메고 이동할 수 있도록 금고리와 채도 만들어 금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떡상과 함께 부속 기구로는 대접과 숟가락, 병, 붓는 잔이 있는데 모두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상 위에는 12개의 떡(빵)을 여섯 개씩 두 줄로 항상 차려 놓습니다. 우리말 성경엔 이 떡을 진설병이라고 칭합니다. 떡은 고운 가루로 만들었고 그 위에 유향을 놓았으며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여 진설하며 물려낸 떡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회막 안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레 24:5-9)

1.진설병

우리말 ‘진설병(陳設餠)’은 ‘진열하거나 차려 놓은 떡’이란 의미로 번역된 말이지만 히브리어로는 ‘레헴 파님(לֶחֶם פָּנִים)’입니다. 이는 '레헴(빵,떡)'과 '파님(얼굴)'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으로 보면 ‘얼굴의 떡(빵)’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떤 신체적 부분으로 표현하는 것은 영적, 혹은 상징적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로 표현된 문구가 많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임재(臨在, presence)'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말은 그의 임재를 사모하라는 뜻이며 '하나님이 얼굴을 가린다'고 하면 하나님이 떠나시고 외면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한 후 그곳 이름을 ‘브니엘(페니엘, פְּנוּאֵל)’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2:30). 이는 ‘파님(얼굴)’과 ‘엘(하나님)’이 더해진 말로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여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KJV는 ‘레헴 파님’을 ‘보이도록 진열된 빵(shewbread)’으로, 그 외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임재의 빵(bread of the Presenc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설병은 하나님의 면전에 놓여진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떡(빵)이고, 떡상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대면하여 상(床, table)에 참여하는 특별한 관계나 교제를 의미합니다. 하나의 상에서 함께 떡을 뗀다는 것은 가족관계, 우정을 나누는 친구 관계, 뜻이 하나가 된 동료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언약 체결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절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의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삼하 9:10) 므비보셋이 비록 다윗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쫓았던 사울의 손주지만 다윗과는 형제로 언약을 맺은 요나단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언약을 위해 왕과 왕자들이 먹는 상에서 함께 먹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그를 아들처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를 왕자 중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삼하 9:11)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우상제물에 관하여 교훈하면서 제물을 먹는 자는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요,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곧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 10:18-20)

그러므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 떡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한 상에서 떡을 떼는 깊은 친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 70인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신 것과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진설병은 6개씩 두 줄로 12개를 항상 차려놓았습니다. 대제사장의 흉패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물려 달았듯이(출 28:21) 12개의 진설병은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백성의 대표가 되어 이 떡과 상에 참여하지만 결국은 그들 안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3-35)

성막의 모든 기구들이 그러하듯이 떡상과 진설병 떡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약의 대부분의 말씀들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나 상징들이 신약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나 사역의 부분은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그 떡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계속 쫓아와서 "모세를 따랐던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먹었는데 당신은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실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만나’는 작은 가루 덩이처럼 생겼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거두어다가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서 과자나 떡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했습니다(민 11:8). 광야에서는 밀이나 보리같은 곡식이 없었을 터이므로 진설병을 만들 때도 만나를 곱게 갈아서 떡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나'나 떡상 위에 올려진 떡(bread)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 보전을 위한 주식입니다. 우리의 식생활로 보면 떡이나 빵은 마치 간식처럼 생각되지만 빵(떡)이 주식인 그들에게는 반드시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생존의 필수요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만나를 언급하며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칭하신 것은 자신이 백성들을 살릴 영적인 양식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임재의 떡(빵, bread of the Presence)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의 결정판입니다. 구약시대처럼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으로 비인격적인 형태나 특정한 상징적 이미지로 나타남이 아니라 친히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임마누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도록(show) 자신을 드러낸 것입니다.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이 본체의 형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완전한 임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성막의 떡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12개의 떡이 차려졌지만 생명의 떡상에는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며 모든 백성의 대표이신 메시아가 영생의 떡이 되어 올려졌습니다. 그를 먹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여러 말로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8-51)

광야에서 기적의 떡이라 할 수 있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결국은 죽었으나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서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난해하여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떠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58)

3. 어떻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유대인들처럼 그가 어떻게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겠느냐 하고 혐오감을 유발한 정도로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그가 십자가에서 찢어질 몸과 흘리실 피를 말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항상 함께 합니다. 진설병 떡상에도 주전자와 잔이 함께 있었습니다. 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 피는 제단 아래 쏟고 살은 불태웁니다. 예수님의 피는 쏟아냈고 살은 찢기며 못 박혀 죽음에 처해집니다. 그의 피는 우리 죄를 사하고 몸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1)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는 길은 일차적으로 그분과 온전한 연합입니다.

그 언약의 피가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의 죽음 안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 이름의 침례를 통해 죄사함의 역사를 이루어 냅니다. 육체로 계시던 예수께서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내주(內住)하셨습니다. 성령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육체로 사람들 곁에(with) 계시던 예수님이 사람들 안에(in) 다른 모습인 영(Spirit)으로 오신 것이며 이것은 육체로 계실 때보다 더 완전한 임마누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이것이 그의 얼굴 앞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교제입니다. 다소 추상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진설병을 ‘임재’와 ‘교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연합이 가장 합당합니다.

2)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목적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좀 더 실제적인 부분입니다. '만나'는 생존의 수단인 ‘떡(빵)’으로 비유되고 그것은 또 하나님의 말씀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충동질할 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하고 위의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4:3-4).

그러므로 떡은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구약에서 영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선지자들이나 천사들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들은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친히 하신 말씀은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들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관해서 가르치는 사도들의 가르침, 신약성경이 생명의 떡입니다. 그를 통과하여 이해되는 구약의 말씀들도 생명을 확증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성막에 관한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직접적으로 생명을 주는 말씀은 아니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통해 이해될 때 우리의 생명을 더욱 확고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의 섭취가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다시 오심을 기억하며 떡과 잔을 나누는 ‘주의 만찬’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만찬(聖晩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은 제자들과 예수님이 한 상에 참여하는 특별한 떡상(밥상)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출애굽을 기념하는 만찬상이었지만 이후에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영혼의 출애굽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의미를 가진 만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사도 바울이 이 만찬에 대해 가르친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8)

그러나 이 ‘주의 만찬’이 카톨릭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부의 축복기도로 떡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이 되고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적 의식(儀式)이긴 하나 실체를 경험하지 못했던 구약적 상징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기리며, 재확인하고, 그 은혜를 새롭게 맛보며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4. 진설병 위에 유향이 놓여졌습니다.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레 24:6)

진설병 위에는 정결한 유향(乳香)이 놓여졌습니다. 평범한 떡이 정결한 유향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특별한 떡이 되고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유향은 안식일 날 떡을 교체할 때 번제단에서 기념물로 태워 화제로 드립니다. 이는 일반적인 소제(素祭)와 유사합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아 일부를 기념물로 삼아 태워서 화제를 드리고 그 외의 것을 제사장이 먹도록 했습니다(레 2:1-3). 진설병의 재료도 고운 가루입니다. 고운 가루는 항상 그리스도의 흠없는 인성(人性)을 나타내고 유향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특별한 향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로 드린 품목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마 2:11).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베다니에서 한 여자가 예수께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제자들이 여인을 향해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분개하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6:6-12).

그리고 그가 죽으셨을 때 시신과 함께 향품을 세마포에 쌉니다. 유향은 식물에서 향을 체취하여 그 수액을 굳힌 것이고 향유는 향기 나는 기름의 형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향기로운 예물이시고 동시에 생명의 향기를 뿜어내는 떡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4. 떡은 매주 새로운 것으로 진설됩니다.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레 24:8)

진설병은 매주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됩니다. 물려낸 떡은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떡을 진설하는 일은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면에서 보면 떡상 위의 진설병은 성전의 실체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 역할과 유효성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 형식 그대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떡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기본적인 원칙과 개념은 완전한 떡이신 그리스도로 대체되고 영원한 언약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상에 참여하는 것은 날마다 새로워야 하고 중단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실제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지속적으로, 더 깊이, 날마다 새롭게 우리 안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섬기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영(Spirit)과 진리(Truth, 말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4).

진설병 떡상은 상차림이라는 제사의 일환이었고,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해서 상에 참여하여 떡을 먹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구입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새롭게 양식으로 먹음으로 새 힘을 얻으며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떡 되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섭취(?)하는 것입니다.


금등대(금촛대, 등잔대, 메노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출 25:31-34)

성소에 들어가면 왼편에 금등잔대(히:메노라, מְנוֹרָה)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순금으로만 만들었습니다. 싯딤나무를 기반으로 한 모든 기구들은 크기에 대한 지침들이 있지만 물두멍이나 금등잔대는 크기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떡상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금등대는 위 그림과 같이 중심되는 등잔대를 만들고 양쪽으로 각각 3개씩의 줄기를 연결하여 총 7개의 등이 되게 하였습니다. 등대와 연관된 부속 기구로는 불집게와 불똥을 담는 그릇이 있는데 등잔대를 포함하여 이 모두를 순금 한 달란트(약 34kg)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금등대 제작 과정에 특별한 점은 조형 틀을 만들고 금속을 녹여서 붓는 주조(鑄造)의 방식이 아니라 순금 덩어리를 두들겨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단조(鍛造)의 방식으로 제작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금등대 장식입니다. 등잔대는 살구(아몬드, almond)꽃 형상의 등잔, 그리고 꽃받침으로 장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형상들을 만드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성시되거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성막 제작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어떤 형상에 관해 지시하신 것은 단 세 경우입니다. 하나는 언약궤 위에 금을 쳐서 만든 그룹들(cheubim)입니다(출 25:18). 그룹의 형상은 지성소 입구 휘장과 성소 맨 안쪽 덮개에도 수를 놓은 모습으로 들어가 있습니다(출 26:1,31). 그리고 대제사장의 에봇 가장자리에 수놓은 석류 열매 형상입니다(출 28:33). 또 한 가지가 이 등잔대의 살구꽃 장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시하신 것은 분명히 거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들을 부여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금등대는 주 기둥 하나에 여섯 가지가 뻗어 나온 아몬드 나무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살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케드(שָׁקֵד)’이며 ‘아몬드 나무’를 말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역시 아몬드 나무입니다. ‘샤케드’는 ‘샤카드(שָׁקַד)’라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경계하다, 깨어있다, 깨우다, 망을 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몬드는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꽃 중의 하나입니다. 성소를 비추는 등불이 어둠을 깨우고, 또 항상 깨어있어야 함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몬드 꽃잎 형상을 만들어 장식하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성소에는 별도의 창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빛이 들어올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금등대는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제사장들은 등대의 불빛으로 성소 안에서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1. 금등대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신약의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세 복음서와는 다른 시작으로 전개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사역으로 시작을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태초 이전부터 계신 만물의 근원자이며 창조자시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를 ‘빛’으로 소개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이어서 예수께서도 친히 자신을 ‘빛’으로 증거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이사야 선지자도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서 그를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예수님은 어둠을 깨우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시고 의로운 빛이십니다. 성소를 비추는 빛은 금등대가 유일하듯 세상을 비추는 진정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빛의 상대어는 어둠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고 세상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성경은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지독한 어둠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상징적인 면에서 빛의 성질은 첫째 ‘진리’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라고 했습니다(요 3:21). 물리적 어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고, 영적인 어두움이란 영적 무지(無知)와 무감각의 상태이며, 거짓이 가득 찬 진리의 부재 상태입니다.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치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하셨습니다(요 9:5). 맹인은 눈에 이상이 생겨서 빛이 눈 속에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육신의 눈을 고치시면서 그의 내면과 영적인 눈도 열어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도리어 예수를 안식일 규정을 어긴 범죄자로 몰아가는 장면 속에서 영적 어둠이 그들을 덮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우리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고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요 14:6).

또 빛의 성질은 ‘의로움’, ‘옳음’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요 3:19). 죄나 악함은 의로움의 반대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가 무엇이며, 옳음과 의로움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녀가 행한 것은 죄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께서는 빛이신 자신을 따르면 더 이상 죄의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의로움입니다.

금등대는 금속을 가열하여 녹인 후 틀에 부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금덩이를 망치로 두들겨서 모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구약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이 그리스도가 고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는 그림자이듯이 금등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망치로 치는 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온갖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진리 되심과 의로우심은 핍박과 고난 중에 더욱 빛이 났고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두들겨 맞아 만들어진 금등대와 같으며 그로 인해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 영원을 비추는 빛이 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역사의 마지막 장면,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열린 장면을 보십시오. 거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2. 금등대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용하는 단어 중에 ‘등대(lampstands)’와 ‘촛대(candlesticks)’중 어느 것이 적합한지 그 용어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등불’과 ‘촛불’이라는 두 단어가 불을 밝힌다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불을 밝히는 근원과 방식이 무엇인가 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본다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구약에서 ‘메노라’를 모두 ‘등잔대’로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본 과정에서는 ‘금촛대’로 번역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에 기록한 전체적인 환상에는 제단, 향로, 언약궤 등 성전(성막)의 기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1장의 환상도 성막과 성전에 있던 그 메노라, 즉 금등대의 형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은 ‘candlesticks(촛대)’로 번역하지만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lampstands(등잔대)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번역된 킹제임스(NKJV)에서는 다른 성경들처럼 ‘lampstands’로 번역합니다.

이 용어들이 왜 의미상 차이가 있는가 하면 ‘등대(lampstand)’라는 표현은 등잔(lamp)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통해 불을 켜는 형태이기 때문에 등잔에는 기름이 항상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촛대는 초를 꽃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치대인 셈입니다. 초(candle)는 가연성 고체인 밀랍이나 기름을 원통형으로 성형하고 심지를 심어 불을 켜는 형태이기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흔히 초(candle)는 자기 스스로를 녹여서 빛을 낸다는 점 때문에 희생의 상징으로 쓰이고 특히 종교적 상징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자기 희생과 공로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의를 이루려는 인간적인 종교성의 표현에는 적절할지 몰라도 성경의 개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형태라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빛은 인간이 자기를 희생하여 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만 매개체일 뿐이며 성령으로 상징되는 기름이 우리를 통해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빛의 근원이 인간의 자기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진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희생도 진리의 빛이 될 수 없으며 의로움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요점은 등잔대의 불이 오직 성령에 의해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인 구원과, 교회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데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환상을 보면 이러한 개념이 더욱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슥 4:1-3)

환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순금 등잔대(Menorah)가 가운데 있고 양쪽에 두 감람나무가 서 있습니다. 등잔대는 감람나무와 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슥 4:8). 이것은 일차적으로 스가랴 선지자 당시에 성전 재건을 위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세우심에 대한 내용인데 성전 재건의 역사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감람나무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에는 두 종류의 기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하게 하는 관유인데 제사장을 위임할 때 머리에 부었고(출 29:7) 성물들을 거룩하게할 때 뿌리거나 발랐습니다(출 29:21; 40:9). 그리고 또 하나의 기름은 등잔대에 부어 불을 켜는데 사용한 순결한 감람유였습니다(출 27:20; 레 24:2). 목적과 재료는 다르지만 이 두 종류의 기름은 모두 '성령'을 상징합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도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진리와 의로움의 빛을 발하는 것도 성령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나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도 성령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도 인간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지만 메시아로써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고 모든 능력의 사역들도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굳이 쓰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에 기름부음을 받는 형태를 취하신 것은 이 모든 사역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3. 금등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와 환상을 보여 주실 때 첫 번째 본 장면이 일곱 금등잔대 사이에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것은 일곱 등잔으로 이루어진 바로 그 ‘메노라’임이 분명합니다. 일곱 개의 금등잔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가지로 이루어진 하나의 등대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본 일곱 금등잔대가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계 1:20).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기록되는데 일곱 등대가 그 일곱 교회인 것입니다. 그 일곱 교회는 당시에 소아시아에 있었던 역사적인 실제 교회입니다만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대표하고 포함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께서 등잔대를 만드는 형식을 지시하실 때 그냥 일곱 등잔대를 만들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운데 등잔대를 만들고 양쪽에 세 가지씩 여섯 가지를 그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출 25:31-32)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운데 등잔대는 중심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가지가 교회인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그리스도)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교회, 성도)이 거룩한 영으로 하나 되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온 교회는 하나입니다.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빛이며, 우리는 다만 통로와 매개체일 뿐입니다. 그의 영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비출 수 있습니다. 우리 힘이나 재능이나 희생으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빛을 발합니다.

1) 빛을 비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등잔대는 불을 켤 때 앞 쪽을 비추게 했습니다.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민 8:2)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맞은 쪽을 비추게 하라’고 번역합니다. “아론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에게, 등잔을 밝힐 때에는, 등잔 일곱 개가 등잔대 앞 맞은 쪽을 비추게 차려 놓으라고 일러라”

등대의 맞은 쪽은 떡상입니다. 떡상이 상징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자신의 몸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대의 불빛은 그것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진리의 빛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와 복음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거짓의 어둠으로 덮여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진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입니다.

또 빛을 비춘다는 의미는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삶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2) 등불이 항상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레 24:2-4)

제사장은 등대의 등불을 항상 관리하여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채워 넣어야 하며 등잔을 항상 깨끗하게 관리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등불을 켜다’, ‘등불을 밝히다’, ‘등불이 꺼지다’ 등의 표현은 생존과 번영, 혹은 소멸이나 멸망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대하 2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21:17)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잠 13:9)

예수께서 결혼식의 들러리인 열 처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 25:1-13).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하였고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은 가지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기도 하고 잠들기도 했는데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황급히 일어나서 등불을 준비하는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에는 기름이 부족하여 등불이 꺼져갑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은 나누어 줄 수 있는 성질의 기름이 아닌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만 영적이고 상징적인 부분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살전 5:19). 이는 소멸할 수도,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등대로 본다면 기름을 채우지 않아서 불이 꺼지거나 등잔의 불똥이나 불순물들을 잘 정리하지 않아서 불이 꺼질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일평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관리를 소홀히 하여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열 처녀 비유에서 마지막 결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앞서 서두에서 금등대을 만들 때 아몬드 꽃잎 모양의 장식을 지시하셨다는 것을 보았고 그 아몬드(사케드) 라는 단어의 어원이 ‘깨어있다, 경계하다”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깨어있음'과 '등불',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눅 12:35-38)

그러므로 이 궤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속죄’에 관한 언약이 실현되는 처소와 기물이 있기 때문에 ‘언약의 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후에 성전 건축을 완료하고 회중 앞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노라 하니라"(대하 6:11)

② 증거궤(證據櫃, Ark of the Testimony)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증거궤’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궤에 들어 있는 내용물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의 증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고 그 판위에 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율법이 새겨진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글을 쓰신 것이었지만(출 32:15-16)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모세가 분노하여 깨뜨려 버렸고(출 32:19) 이후에 다시 모세가 돌판을 준비하고 하나님이 친히 그 돌판 위에 계명을 기록하셨습니다(출 34:1).
이는 그분의 살아계심과 나타나심과 역사하심의 증거입니다.

만나 항아리는 40년 동안 백성들을 먹이시고 돌보신 증거물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를 세워주신 증거물이고 장차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므로 증거궤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실제적인 증거물들의 보관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새롭게 체결한 언약을 증거하는 공식 문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판을 ‘증거판(tables of testimony)’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 31:18)

③ 법궤(法櫃, Ark of the Law)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레 16:2)

​'언약궤’란 단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라는 단어가 한글 성경에는 레위기 16장 2절 단 한 군데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은 그 본문의 히브리어 원문이나 영문 번역 성경들에도 ‘법(法, law)’이란 의미는 없으며 그냥 별다른 수식어 없이 ‘궤(ark)’로만 기록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중국어 성경에서 ‘증거궤’를 주로 ‘法櫃(법궤)’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단어를 쓰든지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겠으나 가능하면 기록된 본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④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그 외에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궤(삼상 3:3; 4:11)’, 또는 ‘여호와의 궤(수 3:13; 4:5)’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특히나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라고 칭했습니다(삼상 5:7,8).

그리고 시편 132:8에는 ‘권능의 궤(the ark of thy strength)’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언약궤 앞에서 강물이 멈춰 선 것이나(수 3:14-17)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리고를 돌며 행진했을 때 성이 무너진 것이나(수 6:13-20) 블레셋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겼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엄청난 재앙으로 블레셋을 심판하여 하나님 스스로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보입니다(삼상 5:1-12).

2. 언약궤의 구조

성소의 여느 기구들처럼 언약궤도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안쪽과 바깥면에 모두 순금을 입혔습니다. 특히 이것은 물건을 보관하는 궤의 형태이기 때문에 다른 기구들과 달리 안쪽에도 금을 입힌 것입니다. 제원을 보면 길이는 2.5규빗(약 114cm), 폭은 1.5규빗(68.4cm), 높이가 1.5규빗(68.4cm)이고 금으로 고리와 채를 만들어 이동할 때 제사장들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언약궤는 구조상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아래쪽은 물품을 넣는 궤의 형태이고 위쪽은 덮개를 겸한 ‘속죄소’라는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가진 구조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되 길이와 폭이 궤와 같으며 역시 순금으로 속죄소 끝에 그룹(케룹,Cherub) 천사 둘을 속죄소와 한 덩어리로 만들되 금등대처럼 두들겨서 만들라고 하셨으며 그 그룹들의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고 날개는 높이 펴서 서로 맛대어 속죄소를 덮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 25:17-21)

3.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

언약궤는 모든 언약의 집합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무척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죄, 구원, 회복, 하나님의 자녀, 영원한 생명, 부활, 하나님 나라 등 이 다양한 언약의 내용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통해 모두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입니다.

말라기 3장에서 오실 메시아를 ‘언약의 사자’라고 표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5. 속죄소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출 25:17)

① 명칭에 관하여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카포레트(כַּפֹּרֶת)’입니다.
이것은 ‘덮다, 가리다, 칠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카파르(כָּפַר)’라는 기본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성경적인 ‘속죄’의 기본 개념은 죄를 지우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피로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그것이 영구적인 것이 될 때 죄가 없어지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속죄소를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로 칭하기도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이 ‘mercy seat(자비의 자리)’로 번역하고 중국어 성경도 같은 의미로 ‘施恩座(시은좌)’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아마도 그룹(케루빔)이 호위하는 속죄소의 이미지가 영광스런 하늘 보좌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은혜의 보좌’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삼하 6:2; 시 80:1; 시 99:1).
그러나 어찌되었든 '속죄소'라는 히브리 단어에는 ‘자비’나 ‘자리’란 의미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속죄소는 1년에 단 한 하루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날은 유대 종교력 7월 10일 대 속죄일날(Yom Kippur)입니다.
1년 동안 굳게 드리워졌던 지성소 휘장이 열리는 날, 대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속죄한 후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속죄제 염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이 속죄소 위와 앞에 뿌립니다.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레 16:15)

이 날은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1년 중에 단 하루, 백성의 대표자이며 모든 제사장들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한 해 동안의 온 회중의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마치고 나오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회막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레 16:17).

의미상으로 보면 속죄소 아래 언약궤에는 십계명 돌판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어 정죄하고 죄의 형벌은 사망이란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데 그 위에 속죄의 피가 덮입니다.
희생의 피로 죄를 덮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피로 덮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됩니다.

② 속죄소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단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관련된 모든 것이 그림자와 설계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죄소도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3:25을 보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구절에 언급된 ‘화목제물’은 헬라어 원문에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단어를 히브리서에서는 ‘속죄소’로 번역했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ἱλαστήριον)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5)

‘힐라스테리온’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Septuagint)에서 히브리어 ‘카포레트(כַּפֹּרֶת, 속죄소)’의 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3:25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소로 세우셨으니...”라고 하는 것이 의미상으로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궁극적인 속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동물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아닌 흠없는 자기 피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증거판(에두트. ʽêdûwth) עֵדוּת 스트롱번호 5715

1. 하나님의 계율.  2. 대부분 복수형으로 쓰임  עִדְוֹת  시119:14.  3. 율법
발음 [ ʽêdûwth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성경

☞증거판(출 16:34, 25:16, 31:18), 증거(민 17:7, 왕상 2:3, 시 119:14), 율법책(왕하 11:12, 대하 23:11), 법도(왕하 23:3, 대상 29:19),
율례(왕하 23:3), 율법(시 19:7), 전례(시 122:4), (경계하신) 말씀(왕하 17:15).




지성소 휘장,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 찢어진 휘장, 새롭고 산 길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출 26:31)

우리는 앞서 성막해설 9번과 10번 글에서 성소와 지성소의 공간적 의미와 그 구조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성소의 넓이가 10규빗, 높이가 10규빗이었으므로 휘장의 길이와 높이도 각각 10규빗(약 4.56m)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재료는 네 가지 색상의 실들을 혼합하여 튼튼하게 짰습니다. 그리고 이 휘장에는 그룹들(케루빔, cherubim)의 형상을 정교하게 수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성소 휘장은 4개의 기둥과 함께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벽이 되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출입하는 문이 되었습니다.

1. 휘장(揮帳, vail)의 의미

앞선 글에서도 보았듯이 성소와 지성소는 구조나 사용된 재료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심지어 벽을 이루는 48개의 널판 구조물은 고리와 띠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장 하나로 구분된 양쪽 공간의 거룩함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납니다. 성소는 제사장이 매일 드나들지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에 국한되며, 시간제한도 엄격해서 1년에 단 한차례 대속죄일만 출입이 허용된 공간입니다.

①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구분선

그러므로 지성소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구분선이고, 지극히 거룩한 곳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베일(veil)이며, 그리스도께서 임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느 선까지 접근이 가능한 지를 보여주는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규정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어느 지점까지 허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허용’과 ‘한계’를 분명히 합니다. 즉 옛 언약에도 은혜가 있긴 하지만 뚜렷한 한계점이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 중에서도 제사장, 제사장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 대제사장에게만 1년에 단 한 번 출입이 허용된다는 것은 온 인류의 대표자 되실 메시아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도 성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즉 교회를 상징하며, 지성소는 예수님이 통치하실 지상 나라인 천년왕국과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기 때문에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현실 세계와 영적 세계, 시공간의 세계와 초월된 영원의 세계를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실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는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그 나라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상에서 경계선입니다.

② 출입을 통제하는 장벽

휘장은 누구라도 함부로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성막의 세마포 울타리가 임의로 출입할 수 없는 출입 금지 담장이듯 지성소 휘장은 한층 더 강화된 출입 금지 장벽입니다. 그것은 단단한 금속 재질이나 거대한 바윗 덩이도 아니며 한낱 천에 불과한 커튼이지만 그 누구도 절대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두껍고 단단한 장벽이 된 것입니다. 그곳을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휘장 너머는 호기심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믿습니다” 하고 밀치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 휘장을 만들 때 그룹들(케루빔)을 정교하게 수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에는 동일한 형식으로 짜서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휘장이 3개가 있습니다. 성막 뜰로 들어오는 성막 출입문과 성소로 들어가는 성소 출입문, 그리고 이 지성소 문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룹들을 수놓은 것은 이 지성소 문에만입니다. 이것은 출입을 통제하는 그룹들을 이미지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희생 제물을 가지고 성막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날마다 성소에 들어가 봉사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휘장 앞에서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성소는 죄인 된 인간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1년에 한차례 대 제사장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특별 은총입니다. 그것은 애당초 인간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그리스도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소 출입에 대하여 모세를 통해 대제사장 아론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 16:2)

성경에서 그룹(cheub)이 가장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3장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화염검)을 두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룹의 중요 역할이 죄인 된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단절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대상에게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그 창세기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의 실재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곳에 죄인인 인간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습니다. 휘장의 그룹은 마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 접근을 통제하듯이 사람들의 출입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2. 휘장의 재료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세마포를 만드는 가늘게 꼰 베실 등 네 가지 실 재료들로 직조된 천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색깔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만든 천은 뜰의 문과 성소의 문 휘장, 성소의 내부앙장 덮개, 그리고 대제사장 에봇을 만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듯이 지성소 휘장 역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 색깔 하나하나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오늘은 이 네 가지 색상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① 청색(blue)

청색은 일반적으로 하늘(sky, heaven)을 표현하는 색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발아래가 청옥을 편 것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청옥(靑玉)은 푸른색을 띤 투명하고 단단한 보석으로 영어로는 ‘사파이어(sappir)’로 불리며 성경에서 ‘남보석’으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또한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는 궁창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역시 ‘남보석(청옥, sappir)’ 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겔 10:1)

따라서 청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신분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예수님은 여러 명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히: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인자(son of man)’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완전한 인간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란 하나님께로 난 자,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나타나신 자란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칭했습니다(사 9:6). 외적으로 보여지고 나타난 모습이나 역할을 따라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히 1:3).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색상은 아마도 ‘청색’일 것입니다.

② 자색(자주색, 보라색, purple)

자주색은 고대에 매우 고귀한 색이었습니다. 자주색 천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나 소아시아, 페니키아 연안에서 서식하는 뿔 고동에서 채집된 염료로 염색한 것인데 워낙 고급스럽고 고가품이라서 왕족이나 귀족, 부자들이 입는 의복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겔 23:5-6)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단 5:2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눅 16:19)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두아디라에서 자주색 고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였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자주색은 대표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고난 당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막 15:17-19)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단지 희롱할 목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그분께 입혔지만 예수님의 실제 신분은 왕이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셨고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가 처음 세상에 임하실 때는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희생양이셨지만 장차 그분의 시간이 되면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실 만왕의 왕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자주색은 그분이 왕이신 것을 말해 줍니다.

③ 홍색(진홍색, scarlet)

이 단어는 그냥 붉은(red) 색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톨라(תּוֹלָע)’는 ‘벌레’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벌레’(시 22:6; 66:24; 욘 4:7), 혹은 ‘지렁이’로(사 14:11; 41:14), 욥기에서는 ‘구더기’(욥 25:6)로 번역했습니다. 아마도 벌레들의 유충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를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고대에 주홍색 염료는 케르메스 참나무에 기생하는 연지벌레에서 채취했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단어는 하찮음이나 비천함, 혹은 죄를 상징하거나, 피 흘리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욥기는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더러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톨라, תּוֹלָע)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

이사야 선지자는 죄의 색깔을 이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톨라, תּוֹלָע)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시편 22편은 전체가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장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메시아의 독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벌레(톨라, תּוֹלָע)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홍색(진홍색)은 비천한 색이며, 죄의 색이며, 벌레를 의미하는 색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벌레’라고 표현하실 만큼 비천해지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분이 피조물들에게 온갖 희롱과 모욕과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스스로 ‘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④ 흰색, 가늘게 꼰 베실

이것은 ‘성막해설 제 6번, 세마포 울타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자세하게 나누었습니다.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가늘게 꼰 흰색 베실은 소제의 고운 가루처럼 흠과 티와 주름 잡힘이 없는 깨끗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세마포 울타리가 말해 주듯 흰색은 정결함, 의로움,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 것을 ‘희다’고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구원받은 사람들은 ‘흰옷’을 입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도 ‘흰색’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계 20:11)

3. 찢어진 휘장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지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막 휘장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헤롯 성전의 휘장입니다.
솔로몬 성전 본체의 길이는 60규빗으로 성막보다 두 배 길었고 넓이 역시 20규빗으로 두 배입니다.
그런데 높이는 30규빗으로 성막의 높이보다 3배 높습니다.
따라서 휘장의 크기는 길이가 20규빗(9.12m), 높이가 30규빗(13.68m)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성전의 높이를 10규빗이나 더 높여 40규빗(약 18m)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휘장의 두께는 10cm가 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휘장이 얼마나 두껍고 튼튼한지 힘센 황소가 양쪽에서 끌어당겨도 결코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견고한 휘장이 예수께서 운명하심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찢어져 내려 두 쪽이 된 것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찢어진 것이라면 혹 사람의 소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찢어진 사건의 영적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만일 히브리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성막, 성전, 율법 등 구약의 중요한 주제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구약 속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발견하는 보물지도와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성전(성막)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며 그가 돌아가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동안 죄로 인하여 출입이 통제되었던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 앞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격리되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나갈 수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함께 은혜의 성막(성전)을 주셔서 대속 제물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안에서 주시는 은혜의 한계는 분명하여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고 제사장이라는 대리자를 거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되 그들조차도 원하는 만큼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속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히 10:2) 출입 금지된 막힌 담을 허물어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장벽은 제거되었고 어느 민족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덮는 앙장(휘장)과 덮개



성막의 본 구조물은 싯딤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힌 48개의 벽면 널판과 성소와 지성소 출입구에 각각 5개와 4개, 총 9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윗부분은 나무나 금속으로 된 구조물 없이 앙장(휘장, curtains)과 덮개로 덮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총 4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앙장 두 가지는 내부용으로 크기와 형식이 정해져 있으며 가죽으로 된 두 가지 덮개는 외부용으로 크기에 대한 규정이 없습니다.

가장 안쪽은 내부 앙장으로 4가지 색상의 실로 짠 두꺼운 천이고, 그 위를 염소털로 짠 것을 덮습니다. 이것이 외부 앙장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2가지는 가죽 덮개인데 안쪽은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이고 마지막 바깥쪽은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앙장’으로, 개정판은 ‘휘장’으로, KJV는 ‘curtain’으로 번역합니다.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휘장’과는 구분하기 위해 ‘앙장’이란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1. 내부앙장

(출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2)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4) 그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이어질 다른 끝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휘장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휘장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6)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휘장을 연결하게 한 성막을 이룰지며

1) 구조

내부 앙장은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위에 보이는 천정입니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섞어서 짠 두꺼운 천이며 그룹들(cherubim)을 수놓았습니다. 앙장은 성소 출입문을 제외한 양옆과 뒤 벽면에 덮어서 늘어뜨리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앙장의 형식은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휘장처럼 전체를 한 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28규빗(12.77m), 넓이가 4규빗(1.82m)인 조각 열 폭을 짜서 만든 후 그것을 다섯 폭씩 이어붙입니다. 그러면 28규빗×20규빗 크기의 앙장이 두 세트(set)가 됩니다. 그 두 개의 앙장 각각의 한쪽 면에 청색 실로 짠 고리 50개씩을 만들고 두 세트를 금고리 50개로 연결합니다. 그러면 28규빗×40규빗 크기의 앙장이 완성됩니다. 이것은 이동할 때 고리를 해체하여 다시 두 개의 앙장으로 분리합니다.

성소의 길이가 20규빗, 지성소가 10규빗, 높이가 10규빗, 총 40규빗이니까 입구 쪽을 정확히 맞추어 덮으면 뒤쪽 벽면 아래까지 완전히 덮이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A+B 두 폭을 고리로 연결한 이음매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의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지성소 휘장 위치를 기준으로 내부 앙장도 성소와 지성소가 나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소털로 만든 외부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성소의 좌우 폭이 10규빗, 양쪽 벽의 높이가 10규빗, 널판의 두께가 1규빗씩 2규빗이니 완전히 덮이려면 32규빗이 되어야 하는데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2규빗씩 짧게 각각 8규빗 크기로 만들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2) 내부 앙장이 상징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내부 앙장의 제작에 대해 말씀하실 때 “너는 성막(미쉬칸, מִשְׁכָּן)을 만들되..”라고 하셨습니다(출 26:1). 하나님의 집 자체를 ‘성막(미쉬칸:하나님이 거하는 처소)’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이 앙장에 대해서 ‘성막’이라고 칭하신 것은 천이나 가죽 등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 중에서는 대표성을 가지는 가장 거룩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모든 기구들 중에서 언약궤가 가장 중요한 대표적 기구이듯이 말입니다.

내부 앙장의 소재는 지성소 휘장과 같습니다. 네 가지 색상의 실로 두껍게 짜고 그룹을 수놓은 것까지 동일합니다. 네 가지 색은 그리스도의 4가지 속성을 말합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앞서 ‘성막해설 15번’ 지성소 휘장에 대한 글에서 설명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룹에 대한 부분은 의미를 좀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지성소 휘장의 그룹은 분명히 출입 금지 구역을 지키는 천사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천정의 내부 앙장에 수놓은 그룹은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할 때 천정을 바라보면 화려한 색상의 앙장과 그 가운데 수놓인 그룹의 날개를 볼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들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때 더 이상 땅의 것에 시선을 두지 말고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육신의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 그곳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섬기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3) 연결된 앙장의 영적 의미

내부 앙장과 외부 앙장 두 가지는 모두 천을 몇 폭으로 만들어서 이어붙이고 또 그것을 고리로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이는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휘장처럼 한 폭으로 만들 경우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이동 시 해체와 설치를 반복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현실적 이유도 당연히 있겠지만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겉 덮개 두 가지는 가죽이라서 부피도 크고 무게도 더 나가는데도 한 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 개의 폭으로 만든 천을 5개씩 이어붙여 두 세트가 되게 하고 그 두 세트를 50개의 고리로 서로 연결한 것은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두 세트의 천을 잇는 고리 갯수인 50이라는 숫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옛 언약에서 50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오순절(五旬節, 칠칠절)과 희년(禧年, Yobel)입니다. 오순절은 초실절 후 7주(週, weeks)를 지나 50일째 되는 날이고, 희년은 7번의 안식년을 계산하여 매 50년 되는 해입니다. 희년은 ‘은혜의 해’로 표현되며(사 61:2)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고, 빚을 탕감해 주며, 토지를 원래의 소유주에게로 되돌려 주는 해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회복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오순절은 봄 절기의 마지막 날로 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인데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처음 맞이하는 오순절은 성령이 최초로 사람들 안에 강림한 날로써 새로운 언약이 시작된 날입니다.

오순절이나 희년은 모두 하나님의 경륜에서 놀라운 은혜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50개의 고리가 두 세트의 앙장을 연결합니다. 오순절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결 짓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매우 중요한 은혜의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언약은 오순절 날에 발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은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으시는 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언약의 체결 과정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으로 비로소 온전하게 마무리 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베푸실 것인데 그때는 말씀을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마음 판에 기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바울은 이 예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새 언약은 말씀을 돌판에 쓰지 않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도 첫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최초로 임한 날도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잇는 연결고리입니다. 새로운 언약 체계인 복음은 옛 언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새 언약의 모든 은혜는 옛 언약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옛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어 더 완전한 언약으로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 연결점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은혜의 날입니다.

오순절(맥추절, 칠칠절) 날에는 하나님 앞에 누룩 넣은 떡 두 덩이를 흔들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요제를 드립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레 23:15-17)

이 두 떡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옛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 즉 유대인(이스라엘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장벽이 생겼고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본래는 서로 다른 두 개인데 하나로 연결한 것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6)

그리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유월절(죽으심)과 오순절(성령강림)은 봄 절기의 한 묶음입니다. 십자가의 속죄와, 성령이 임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함으로 새 언약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고리가 오순절입니다.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을 통한 새로운 약속의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유대인) 모든 먼 데 사람(이방인)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물론 사도행전에서 첫 이방인이 복음으로 거듭난 것은 10장에서 시작되지만 이미 십자가로 막힌 담은 허물어졌으며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두 세트의 앙장을 하나로 연결하는 50개의 연결고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소 벽면의 48개의 싯딤나무 널판들처럼 낱개가 서로 연결되어 성소와 지성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구조물을 덮고 있는 앙장도 역시 다섯 개의 조각 폭들이 이어지고 또 다른 세트와 고리로 연결되어 천정으로 완성됩니다. 교회도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집니다. 앙장은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2. 염소 털로 만든 외부 앙장

(출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8)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길이를 같게 하고 (9)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10)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이을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11)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2) 그 막 곧 휘장의 그 나머지 반 폭은 성막 뒤에 늘어뜨리고 (13) 막 곧 휘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쪽에 한 규빗, 저쪽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쪽에 덮어 늘어뜨리고

1) 구조

성소의 두 번째 덮개인 외부 앙장은 ‘성막을 덮는 막(오헬,אֹהֶל, 천막, ten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부앙장을 덮기 위한 것입니다. 재료는 염소털이고 형식은 내부 앙장과 거의 비슷한 구조입니다. 11폭의 앙장을 5폭과 6폭으로 나누어 이어붙여 두 세트의 앙장으로 만든 뒤 50개의 고리를 걸어 하나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내부 앙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부 앙장은 한 폭의 길이가 28규빗이었는데 외부 앙장은 30규빗으로 2규빗 더 길고, 내부 앙장은 10폭이었는데 외부 앙장은 11폭이며, 따라서 셋트도 A-6폭과 B-5폭으로 나누어 있는 것을 50개 고리로 연결하는데 내부 앙장은 고리가 금으로 만든 것이었던 반면 외부 앙장은 놋으로 만든 고리입니다.

외부 앙장은 내부 앙장보다 앞뒤로 길이가 한 폭(4규빗)이 더 길고 좌우로도 폭이 1규빗씩 더 길기 때문에 성소 출입문에 약간 늘어뜨려 덮고 좌우로도 내부 앙장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지면에 직접 닿지 않게 하고, 또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금으로 이루어진 판넬과 그룹을 수놓은 내부 앙장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널판 아래에는 은으로 받침을 했고 내부 앙장은 좌우로 1규빗씩 짧게 하여 바닥에 닿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외부 앙장이 완전히 덮어 가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부 앙장은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의 표현이기 때문에 50개의 고리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외부 앙장은 밖으로 노출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고리들을 ‘놋’으로 만든 것입니다. 금과 놋의 쓰임새는 완전히 다릅니다. 금은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성소 내부용이고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부용입니다.

2) 염소털 앙장

염소털로 만든 앙장은 방습과 보온에 탁월하여 기능적인 필요를 위한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나타내 줍니다. 염소는 대속죄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숫염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한 마리는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 버려지고, 한 마리는 제단에서 제물로 드린 후 대제사장이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게 됩니다(레 16:5-15).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는 광야에 버림 당하신 것처럼 버림받으셨고 제단에 죽임당한 염소처럼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숫염소처럼 희생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하나님 백성들의 영광과 거룩함을 지키는 보호 덮개가 되셨습니다.

3.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 덮개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출 26:14)

이 두 가지 가죽 덮개는 앞서 두 개의 앙장과 비교했을 때 재료 외에는 딱히 크기나 양식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이나 지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크기를 정해 주신 것도 없고 설치 방식도 따로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안쪽의 두 가지는 앙장(휘장)이라고 표현하고, 가죽으로 된 바깥의 두 종류는 ‘덮개’라 하였다는 것과, 안쪽의 앙장들은 덮어서 늘어뜨리라고 하셨으나 덮개에 대한 지침은 따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막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줄을 매어 말뚝에 고정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1)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

창세기에 최초 복음, 혹은 원시 복음이라 불리는 가죽 옷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통한 대속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창 3:20).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렸으나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그들에게 옷을 입히셨습니다. 이후에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대신할 제물로 숫양을 준비하신 것을 볼 때 대속제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 숫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창 22:13).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 동물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은 동물의 피흘림을 표현한 것으로 대속제물로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 성막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히듯이 가죽 덮개를 만들어 자기 피로 죄를 덮고 그의 백성들과 교회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2) 해달의 가죽 덮개

이것은 성막의 최종덮개입니다. 해달의 가죽 덮개는 방수 능력이 뛰어나서 비나 이슬, 습기로부터 성막의 기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광야의 모래바람이나 뜨거운 태양열로 인해 성막이 손상되지 않도록 합니다.

해달(히:티하쉬, תַּחַשׁ)이 어떤 동물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들이 많습니다. 돌고래나 바다표범 등 해양동물로 보는 것이 대세지만 어떤 이들은 당시 광야 지대에서 해양동물의 가죽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 때문에 오소리나 염소 등 육지 동물의 종류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막에 사용된 대부분의 재료들이 이미 애굽에서 나올 때 가져온 것들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신발 등 가죽 제품을 만들 때 해양동물의 가죽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면 이해함에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에스겔 16:10서는 동일한 단어를 ‘물돼지’로 번역했습니다.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해달의 가죽은 성막의 가장 윗 덮개로 그리 화려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며, 외부로부터의 온갖 열악한 기후와 거친 환경들을 온전히 부딪혀 감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거친 인생을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외적 환경과 삶의 상황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부분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그는 만왕의 왕이시지만 왕으로서 권세를 행사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능력과 부와 권세를 자신의 뜻대로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오히려 그의 삶은 화려함이나 부요함이나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배척과 배신과 멸시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모든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온갖 풍파에 빛바랜 해달의 가죽 덮개처럼 묵묵히 감내하고 온 힘을 다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지켜내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해달의 가죽 덮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대제사장의 예복(에봇, 견대, 흉패, 우림과 둠밈, 12보석들, 금 방울, 두건과 금패)



(출 28:1)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전체 백성들을 대표한 레위 지파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제단을 중심으로 제사드리는 일을 하고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제사장직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섬길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만든 의복을 착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제작하는 과정 안에 제사장들의 의복 만드는 법을 포함시키셨습니다. 제사장들 중에서 대표되는 사람이 대제사장(High Priest)입니다. 일반 제사장의 의복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대제사장은 일반 제사장들의 기본 복장 위에 에봇이라는 특별한 예복을 덧입고 제사장들과는 다른 형태의 관(冠, 두건)을 머리에 씁니다.

1. 기본적인 제사장 의복

의복 제작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대로 본다면 대제사장의 에봇이 먼저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제사장의 기본 복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공통 복장입니다.

(출 28:39-42) “너는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 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 (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41)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제사장 의복으로 가장 안쪽에 속바지가 있습니다. 허리에서 넓적 다리에 이르는 속옷입니다. 하체를 가리기 위한 목적이며(레 6:10) 가는 베실로 짠 세마포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긴 세마포 옷이 있습니다. 이것은 ‘케토네트(כְּתֹנֶת)’라고 부르는데 어깨에서 손목까지 오는 긴 소매이며 아래로 정강이나 발목까지 내려와 온몸을 덮어 가리는 긴 옷입니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혔던 가죽 옷에서였습니다(창 3:21). 이것을 ‘반포 속옷’이라고 기록했는데 우리말 ‘반포(斑布)’란 ‘바둑판무늬로 엮어 짜다’라는 ‘샤바츠(שָׁבַץ)’를 번역한 것입니다. 특히 이 옷은 연결된 부분이 없이 전체를 통으로 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입으셨던 속옷이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은 네 깃으로 나눠 가졌지만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라 나눌 수 없어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지게 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 19:23-24)

이렇게 통으로 짠 긴 옷은 일반 제사장의 예복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는 이것이 속옷이 됩니다. 그 위에 겉옷인 에봇을 입기 때문입니다. (성막 제작 과정에 관한 성경기록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일반 제사장도 그 위에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 에봇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옷 위에 띠를 맵니다. 띠는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를 놓아 만듭니다.

“가는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 놓아 띠를 만들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출 39:29)

4가지 색깔은 성막의 모든 문 휘장과 성소의 내부 앙장과 같은 형식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머리에 쓸 세마포 관을 만듭니다. 이 관의 형태와 장식은 대제사장의 것과 다릅니다.

결국 제사장은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덮은 셈입니다. 세마포는 의로움과 순결함의 상징입니다.

시편 132편에서는 제사장의 옷을 ‘의’와 ‘구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132:9)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시 132:1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입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완전한 의로움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허물을 덮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처럼 구원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가죽옷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복음의 그림자였습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씻어 희게 된 사람들, 의로운 행실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새 언약 안에서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벧전 2:9; 계 1:6; 5:10).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2. 대제사장의 예복

하나님께서 아론(대제사장)을 위하여 만들게 하신 옷의 특징은 ‘거룩한 옷,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입니다. 제사장의 기본 복장은 거룩한 옷입니다. 대제사장이 그 위에 덧입게 될 겉옷과 장식들은 영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더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제사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넘어 영광과 존귀로 옷 입히고 관 씌우시는 것인데 당시로써 장차 이 땅에 임하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표현할 목적입니다.

1) 에봇(ephod)

에봇은 멜빵끈과 같은 어깨 띠가 있고 허리에도 띠를 묶는 마치 앞치마 같은 형식의 겉옷입니다. 여기에 각종 보석과 장식들이 부착될 것입니다.

“그들이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에봇을 짓되”(출 28:6)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라는 성막의 휘장과 앙장을 만드는 기본적인 재료에 특별히 금실을 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재료입니다. 4가지의 실 재료가 이미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과, 죽으심, 의로우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금실은 영원성과 영화로움을 더한 것입니다. 성소의 모든 기구들이 ‘물건’들에 속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인격체로써 그리스도의 모든 면들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에봇과 각종 장식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히 2:17; 3:1; 5:5,10 등등). 대제사장은 인간의 편에 선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신분을 의미하는 인자(Son of Man)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와 영광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이는 그 영광에 함께 형제 된 사람들도 같이 동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함을 입었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져 천사보다,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습니다(히 2:7-9). 그 영화로움이 에봇을 통해 계시되고 있습니다.

2) 견대

(7) 그것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 (9) 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출 28:7-10)

에봇에 멜빵 같은 띠를 만들고 어깨 받이를 연결하여 양 어깨에 호마노 보석(Onyx stones)을 하나씩 부착합니다. 물론 이 띠도 에봇의 소재와 같이 네 색상의 실과 금실로 만든 것입니다. 호마노 보석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6명씩 양쪽에 도장을 새기듯이 새겨 넣습니다. 이 보석도 영화로움과 아름다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모든 민족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그 어깨에 짊어지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와 저주와 사망의 무거운 짐입니다.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을 어깨에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 영원한 대제사장이 온 인류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3) 판결 흉패와 열두 보석

(13)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 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출 28:13-16)

에봇 위 가슴 부위에 금테와 금 사슬로 흉패를 매답니다. 여기에 사용된 것도 역시 4색 실과 금실입니다. 온통 금으로 장식하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흉패는 네모 반듯한 형태로 만들되 12가지 보석을 3개씩 네 줄로 깎아 물립니다. 12개의 보석들 하나하나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17)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출 28:17-2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보배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연약하여 넘어지며 실패하더라도 하나님 앞에는 보배들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어깨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을 나이순으로 6명씩 두 개의 보석에 새겼는데 흉패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을 열두 보석에 각각 하나씩 새겨 넣은 것입니다. 어깨에는 태어난 순서를 따라 자연 그대로의 아들들이며 흉배에는 지파들의 이름인데 이는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역할에 따라 조직된 하나님 나라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새 언약으로 완성되는 열방이 참여하는 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출 28:29)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타내는 보석들은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의 성곽 기초석으로 등장합니다(계 21:19-20).

4) 판결 흉패 안에 든 우림과 둠밈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

아마도 흉패는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항상 가슴에 붙이고 나갑니다. 대제사장은 개인적인 자격과 신분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자 자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판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우림(אוּרִים)’은 ‘빛, 불꽃’을 의미하는 ‘우르’의 복수형입니다. ‘둠밈(תֻּמִּים)’은 ‘온전함’의 복수형으로 ‘완전함’입니다. ‘빛’과 ‘완전함’은 모두 그리스도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우림’의 첫 글자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렙(א)’이고 둠밈의 첫 글자는 아파벳의 마지막 글자인 ‘타브(ת)’입니다. 이는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되시며, 알파(A)와 오메가(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흉패의 열두 보석은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이 우림과 둠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형태나 형식이 기록되거나 또 알려진 부분들이 거의 없어서 충분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두 가지 보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흰돌과 검은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무엇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판결 흉패라고 불리는 것은 이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백성의 대표자가 국가의 중대사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확인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고, 때론 제비뽑는 방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를 뒤이어 백성들을 인도할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여호수아)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

또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삼상 28:6)

사무엘 선지자가 죽은 이후였으므로 더 이상 물을 곳이 없어 결국 그는 신접한 여자를 찾아가는 죄를 범합니다.

왕정 시대에는 판결 흉패가 달려있는 대제사장의 에봇 자체가 하나님은 뜻을 묻는 도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삼상23:9; 30:7-8).

5) 에봇 받침 겉옷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출 28:31-32)

이 옷은 제사장 복을 입은 후 에봇을 입기 전에 받쳐 입는 겉옷입니다. 특이한 점은 전부 청색으로만 이루어진 천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이어붙이지 않고 통으로 짠 옷입니다.

청색은 하늘을 나타내는 색으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표현하며 속옷과 에봇을 구분하여 받쳐주는 옷입니다. 속옷은 앞서 보았듯이 일반 제사장의 것과 같습니다. 그 위에 덧입는 에봇과 거기에 포함된 장식들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가진 영화로움과 아름다움이 표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청색 겉옷은 일반 제사장의 옷과 구분하는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에봇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영광은 인간에게서부터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거룩한 신성, 바로 그가 하나님이심에서부터 나온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청색의 받침 겉옷은 그것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6) 겉옷 밑단에 매단 석류 열매와 금 방울

(33)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 놓고 금 방울을 간격을 두어 달되 (34)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출 28:33-35)

청색 겉옷 아래 끝 단에는 돌아가면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 열매를 수놓는데 그 열매들 사이에 금방울을 달으라는 것입니다. 즉 석류 하나, 그리고 금 방울 하나, 이런 패턴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예복을 입고 성소를 드나들 때 방울 소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대목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교회들 안에 대단히 잘못 알려진 사실 하나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날 지성소에 들어갈 때 발에 밧줄을 매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제사가 합당치 않거나 대제사장에게 문제가 생겨서 지성소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면 그곳에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밖에서 그 밧줄로 죽은 대제사장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걸어 다닐 때 방울 소리가 나면 살아 있다는 것이고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는 출발점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일날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의 겉옷과 에봇 등 영화스러운 것들은 모두 벗어놓고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자신과 집안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립니다(레 16:6). 그 말은 대속죄일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영광으로 입혀지고 존귀로 관 씌워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도 죄인인 동시에 모든 죄인의 대표자 신분인 것입니다. 백성들 앞에 설 때는 영광과 존귀을 가진 대제사장이지만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때는 동일한 죄인일 뿐입니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 16:3-4)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레 16:23-24)

대제사장은 세마포 옷과 세마포 띠, 세마포 관을 쓰고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아사셀 염소를 뽑아 광야로 보내기까지 속죄의 과정을 다 마친 다음에 거룩한 곳에서 몸을 씻고 평소의 대제사장 복장으로 환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옷이나 에봇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성소에서 방울 소리가 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금 방울 소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은 솔직히 명쾌한 해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기록된 말씀의 문맥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내용은 ‘방울 소리를 들리게 해야만 살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 ‘그리하면’에 해당되는 접속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울 소리가 그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사인(sign)인 셈입니다.

이것은 모두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과 연관된 것입니다. 속죄일날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누구도 성막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레 16:17)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회막안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홀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제사장들이나 그 누구도 그 안에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이처럼 모든 제자들마저 떠나고 홀로 있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여 죽기까지 말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요 16:32)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다른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회막 밖에서 기다리면서 그 안에 일어나는 상황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드나드는 시간 동안에는 평소에 대제사장의 움직임을 따라 울리던 방울 소리가 오히려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에봇과 방울 달린 겉옷을 벗어놓고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과정을 마치고 그가 다시 겉옷과 에봇을 입고 활동할 때 회막 밖에 있던 백성들은 다시 금 방울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의 죽지 않았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결국 금 방울 소리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여타 번역본과는 좀 다르게 번역합니다.

“그것은 아론이 섬길 때 입을 것이니 그가 주 앞 성소에 들어갈 때와 그가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리면 그가 죽지 않은 것이라”(출 28:35)

그리고 금 방울 소리와 수놓은 석류 열매의 상관관계에 대한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소리(콜, קוֹל)’는 귀로 듣는 모든 것을 일컫지만 일차적으로 ‘음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기록된 것은 창세기 3:8의 ‘하나님의 소리(음성)’이었습니다. 석류 열매와 연관된 방울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을 전하는 소리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 앞에 먼저 와서 길을 예비하는 침례자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소리’, ‘말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사 40:3,6; 마 3:3).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 3:4)

그 광야의 소리인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야할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삶에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열매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그리고 이어서 복음도 열심히 전하고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며 열심히 사역한 사람들을 열매가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들은 말(소리)로는 하나님을 전하였으나 삶의 변화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금 방울과 석류 열매를 하나씩 교차하여 매단 것은 말과 행동의 균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입술과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 마음과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나타나는 인격적 변화의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과 온유, 절제 등 9가지로 설명했습니다(갈 5:22-23). 이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또 방언과 예언이라는 은사적인 부분을 언급하면서 모든 은사는 ‘사랑’이라는 덕을 세우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사랑’은 모든 열매를 대표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랑이 없다면 방언과 예언(소리와 관련된 은사)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의미 없는 소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금방울과 열매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은사도 필요하고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소리’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 분량만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아 내는 열매도 있어야 합니다.

7) 머리에 쓰는 관(冠, 두건)과 금패

(36)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37)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38)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출 28:36-38)

관(두건)과 금패는 대제사장 복장의 최종 마무리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으로는 거룩한 세마포 속바지부터 밖으로 화려한 에봇까지, 아래로는 석류와 금방울 장식, 그리고 위로는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금패를 부착합니다. 안에서 밖으로, 발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이 모든 것이 ‘거룩하고, 영화롭고, 아름답게’라는 예복의 취지에 걸맞게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이마 패에 새긴 ‘여호와께 성결’은 모든 예복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막 안의 모든 것들은 이 한 문장 아래서 통일됩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공간, 구별되어 거룩하게 된 성물들, 거룩한 제사와 제물, 구별된 백성, 구별된 제사장, 거룩하고 영화롭게 된 대제사장...

“...그 패가 아론(대제사장)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성막의 상징적 의미 총정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신 길,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길


성막의 상징적 의미
-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신 길,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길

성막은 출애굽 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대적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들 백성 중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증거해 주는 증거장막이며 목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은총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새 언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영원한 영광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는데(요 5:39) 성막이야말로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고증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막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확실하게 찾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완벽하게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100% 성경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무려 3천 년 전의 구조물을 오로지 성경 기록과 문헌들만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확도에서 있어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전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막을 통해 얻는 은혜는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상징성에 대해 큰 틀에서 종합적인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공간들이나 재료들, 그리고 색상, 모양, 크기, 수량 등이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중요한 영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성막은 만유 위에 계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어떻게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첫째로 정리한 소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시며 사역하시다가 최종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영광스런 보좌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 앞서 가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로 정리했습니다. 그다음은 그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 길, 영생의 길’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

이 길은 지성소의 언약궤에서 출발하여 아래로 향합니다. 그룹들이 날개로 덮고 호위하고 있는 속죄소는 천국에 있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곳이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 보좌는 만유를 다스리는 통치의 보좌이고(시 103:19), 심판의 보좌이며(시 9:7; 계 20:11), 은혜의 보좌요(히 4:16), 생명을 살리는 생수의 강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계 22:1).

언약궤에 넣어 둔 만나와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이 생명의 말씀이시며 그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또 생명을 공급하는 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그 하나님이 휘장을 입으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작은 육체 안에 자신을 제한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의 전능성과 전지성과 편재성의 신적 속성이 제한받지는 않겠으나 육체 안에서 인생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을 두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해설합니다(히 10: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과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두 가지 목적을 설명해 줍니다. 그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으신 분이 자신의 형상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하나님의 최종 계시, 가장 온전한 계시는 자기 형상을 입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는 하나님이 낳은 또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심’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골 1:15)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성소와 지성소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관점에서 공간적으로 접근한다면 지성소는 예수가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성소는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분향단은 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금등대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요 1:9; 8:12; 9:5)를, 떡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 6:35,50,51).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은 성막 뜰 물두멍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에 임하시기 전에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본래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내셨습니다(마 9:2-6). 따라서 그가 침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들처럼 죄 사함이나 정결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고후 5:21) 그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부정해진 적도 없습니다. 침례는 동일시와 연합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룹니다. 그가 침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과 동일시되기 위해서입니다. 공간적 의미에서 성소를 ‘하나님의 아들’, 성막 뜰을 ‘사람의 아들(人子)’라고 한 것은 어떤 사건과 시점을 기준으로 한 시간적 구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과 역할의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침례를 받으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 이후엔 사람의 아들, 이런 식의 시간적 구분이 아니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신분과 입장을 가지셨으나 성막 뜰에서 보여 주시는 것이 그분의 인자됨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육신의 첫번째 목적이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가져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면 두번째 목적은 완전한 인간으로써 인간의 대표자와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아 통치자가 되는 것도 인간의 대표자입니다. 반면 대속제물이 되심은 인간의 대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본질과 속성과 신분에까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대속제물이 되시기 전에 먼저 그의 온 생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교훈했습니다(롬 12:1). 예수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인자의 입장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고, 그 뜻에 온전히 굴복했고 죽기까지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삶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2.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써 앞서 가신 길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릅니다. 그가 앞서 가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올라가 보겠습니다.

번제단에서 그는 죽으셨습니다. 제사 드리는 대제사장으로써 자신을 친히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일 염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물두멍은 제사드리기 전과 후에 손과 발에 묻은 피나 오물을 씻어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여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그가 장사되신 것은 그 죄를 영원히 묻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두멍'과 '장사됨'이 직접적인 연결점은 없지만 믿는 자들이 받는 물침례는 물두멍과 장사됨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침례를 통해 죄를 씻으며 동시에 그 죄와 옛사람을 장시지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절기적 관점에서 유월절이 어린 양의 죽임당한 번제단이라면 물두멍은 누룩을 제거하는 무교절에 해당됩니다. 무교절에는 죄를 상징하는 누룩을 다 모아서 불에 태우거나 땅속에 묻습니다. 장사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에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두 동강이 났습니다. 막혀 있던 생명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 된 인간이 도저히 갈 수 없었던 하나님 앞, 그 영광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new and living way)’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림자와 같은 땅에 있는 성전과 성소가 아니라 하늘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휘장이 그가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입으셨던 연약한 육체를 상징했듯이 이제 다시 올라가실 때 휘장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의 몸이 되었습니다. 언약궤에 들어 있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지팡이가 광야에서 아론에게 주어진 권위를 훼방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그가 바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권능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우편(right hand)’이란 말은 위치나 장소적인 면에서 오른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에게 위치나 장소적 개념의 오른쪽 왼쪽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권능과 위엄이 집합된 지존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보좌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 옆에 또 다른 보좌나 작은 의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길, 생명의 길, 영광의 길

예수님은 우리의 본보기시며 앞서 가신 인도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길로 나아가려면 앞서 가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면 됩니다. 성막은 상징적인 내용들을 통해 우리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맨 아래에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도표 이미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야 합니다. 문밖 바깥은 죄가 지배하는 곳이고 영원한 심판과 형벌이 예정되어 있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자연인 상태로 그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자기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께로 와야 합니다. 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를 믿기로 작정하는 것이고 영접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문에 들어감(믿음, 영접함)으로 구원의 완료된 것이 아니라 이제 출발점에 섰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계속 들어가야 합니다.

번제단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심지어 의를 위해 죽는다고 해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죄인은 무엇으로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한 대속 제물이라는 것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동물을 제물로 드렸듯이 이제는 우리의 대속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동물의 피는 죄를 사할 능력이 없지만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물이시므로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번제단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자아에 대하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분명하게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 예수님이 죽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번제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누구도 성막 안으로(그리스도 안으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물두멍은 죄를 씻는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보다는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새 언약에서 빼놓을 수 없이 너무도 중요한 구원의 요소인 물침례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이 열리는 순간부터 요한의 침례가 등장합니다(막 1:1-5). 예수님도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3-15).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볼 수도 없다고 ‘진실로 진실로’를 단어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요 3:3-5). ‘물과 성령’이 무엇인지는 이미 예수께서 친히 요단강에서 물로 침례를 받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성령의 침례의 장면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지상명령에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막 16:16). 그러시면서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날 최초로 전하는 복음 선포에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위해 물침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38). 바울은 물침례가 더 완전한 할례를 받는 것이며(골 2:1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이며(롬 6:3-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갈 3:27). 성경이 침례의 중요성을 너무도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두멍은 믿는 자들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역시 이 과정이 없이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씻지 않으면 죽습니다(출 30:20-21).

공간적 의미에서 성막뜰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해 씻음과 사함과 정결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거룩한 처소인 성소(Holy Place)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룩한 영(성령, Holy Spirit)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곳은 거룩함의 영역입니다. 성소에 관해 ‘성막해설 09’에서 설명할 때 성소의 5개의 기둥이 각각 10규빗씩으로 ‘50(五十)’ 즉 ‘오순절(五旬節)’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신약의 첫 오순절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최초로 사람들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감동하시고 임재하셨지만 사람들 속에 임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욱신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여 영광 받으신 이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행 1:4-5). 이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용어대로 하면 ‘성령의 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오순절은 성령침례가 시작된 최초의 날이었고 이후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성령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날이나 절기에 상관없이 사도들이 오순절날에 받은 것과 같은 성령침례를 받음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막 덮개인 내부, 외부 앙장에도 두 폭의 천을 이어주는 고리가 50개였습니다(출 26:4-6). 이것 역시 오순절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새언약에서 복음 적용의 핵심은 ‘물’과 ‘성령’입니다. 물은 씻고, 사하고, 정결하게 하고, 장사 지내는 죄를 처리하는 부분이고 성령은 거룩한 영의 부으심으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며, 또한 성령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임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백성, 성도(聖徒)가 되는 것입니다.

성소의 기구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백성들의 제사장적 삶을 보여 줍니다.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새롭게 섭취합니다. 말씀은 성령을 통해 더욱 깨닫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성령)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금등잔대는 성령의 충만함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더욱 잘 설명해 줍니다. 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좇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육체를 따르면 육체의 열매를 맺고 성령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 5:16-23). 이 성령의 열매가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이 어둠의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아루어 지는 것입니다.

분향단은 기도와 예배의 삶을 상징합니다. 위치상으로 볼 때 분향단이 지성소와 가장 가깝습니다.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가는 통로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과 진리(Spirit and Truth)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요 4:24).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기도의 삶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성령이 친히 우리와 더불어 간구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와 예배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도록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소의 기간, 즉 교회의 시대가 끝나는 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임하실 것이고 세상은 심판을 받겠으나 구원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부활의 몸(휘장)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4)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

이렇게 부활의 몸을 입은 사람들은 지성소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고 또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구속이 완성되고 만유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5)

성막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까지 전체적인 부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성막과 성전이 서 있는 동안에는 그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길이 가려져 있었으나(히 9:8)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젠 우리 모두가 그가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보좌 앞까지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지만 때가 이르면 이 모든 것이 예고했던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막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며,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은혜의 길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그 은혜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성막 완성, 세움과 봉헌



[명령]"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출 40:1-2)

[실행]"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출 40:17)

1. 말씀대로 준행한 모세

출애굽기 40장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으로써 성막을 세우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로써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온 일차적 목적이 율법을 받고 성막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40장은 그동안 만들어진 성막의 기구들이 제자리를 찾아 설치되고 하나님의 전으로 봉헌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장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되는데 1절부터 1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는 순서들을 지시하시는 내용이고, 17절부터 33절까지는 모세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실행하는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성막이 실제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록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했다”(40:16) 라는 부분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모든 기구들이 설치될 때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라고 정리합니다. 이 같은 말씀은 무려 7번이나 반복됩니다(19,21,23,25,27,29,32). 이는 마치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6일 동안의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라, 되라"라고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그것들이 그대로 되어 완료될 때마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만물이 말씀대로 스스로 이루었으나 성막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중간자인 모세를 세우시고 그에게 말씀하신 후 그의 순종을 통해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원칙을 알려 줍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이루어가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안에 품고 있는 계획과 의지가 말씀으로 선포되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 실재(實在)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성막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제사로 하나님을 만나는 실제적인 성전(聖殿)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가실 구원과 회복과 영광을 예시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과정도 오로지 말씀하신 대로 제작과 진행이 이루어져야 하고, 나아가서 이후 메시아를 통해 그 상징들이 성취될 실제 하나님의 역사에서도 당연히 오직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말씀을 맡은 모세와 같이 오직 말씀하신 대로 따르고,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부분은 깊은 탐구와 분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신중한 분별을 요하는 내용도 있겠으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말씀 안에서 자기 나름의 독특한 해석이나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발견하고자 함이 우선이고 아울러 그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학문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잣대로 역으로 말씀을 판단하며 재단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대단히 위험한 일이며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모든 역사는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에 동참하려면 반드시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2. 성막 제작 기간과 완성 일자

성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이듬해 1월 1일, 즉 새해 첫 날에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을 제작하는 기간이 얼마나 되었을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을 하는 달을 새로운 해의 첫 달로 정하라고 하셨습니다(출 12:2). 그 달 14일은 유월절이고 그다음 날 애굽을 떠납니다. 그들이 홍해를 거쳐 시내산에 도착한 날이 3월 1일입니다(출 19:1). 그리고 3일을 기다렸다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 70명과 함께 산에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이후에 6일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충만하였고 7일째 하나님이 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후 율법의 세부사항들과 성막 건립에 관한 명령을 하시는 데 무려 40일이 걸렸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온 것은 약 4월 20일 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을 내려올 때 산 아래에서는 그를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여 우상숭배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돌판을 집어던져 깨뜨렸고 다시 산에 올라가 40일을 더 보냅니다. 그리하여 5월 30일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계산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얼마나 시간 간격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대략적인 추정치일 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번째 내려왔을 때 바로 성막 제작을 시작했다고 가정하여 그해 12월 말일까지면 제작 기간이 대략 7개월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최대치이고 중간에 얼마나 시간 간격이 있느냐, 또 그 시작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온 후 언제 했느냐에 따라서 기간이 짧아질 수는 있습니다.

3. 성막을 설치하여 세우는 순서(명령과 실행)

앞서도 언급했듯이 출애굽기 40장은 다 만들어진 성막을 조립하고 기구들은 제자리를 찾아 배치하는 순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순서들을 지시하신 내용이고 17절부터 33절까지는 그 명령대로 세워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① 성소 골조를 세움.

(명령)“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출 40:2)

(실행)“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18-19)

성소와 지성소를 이루는 골조를 먼저 세우는 작업입니다. 이것의 순서는 먼저 받침들을 제자리에 놓고 그 위에 널판을 세운 후 띠로 각 널판들을 연결하여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입구 기둥들을 세웁니다. 그 후에 4가지 앙장과 덮개를 덮습니다.

② 언약궤

“또 증거궤를 들여놓고 또 휘장으로 그 궤를 가리고”(출 40:3)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놓고 가리개 휘장을 늘어뜨려 그 증거궤를 가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0-21)

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판을 넣고 제사장이 어깨에 멜 채를 고리에 뀁니다. 그리고 속죄소를 언약궤 위에 올립니다. 그 후 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늘어뜨려 지성소를 가립니다.

③ 진설병 상

“또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출 40:4)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북쪽으로 휘장 밖에 상을 놓고 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2-23)

성막 북쪽에 떡상을 놓습니다. 북쪽은 입구에서 들어가면 오른쪽입니다. 휘장 밖이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여 성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④ 금 등잔대

“...등잔대를 들여놓아 불을 켜고”(출 40:4)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하고 또 여호와 앞에 등잔대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4-25)

등잔대는 남쪽에 배치되며 떡상과 마주 봅니다. 떡상을 설치하면서 상 위에 떡을 진설하고 등잔대를 설치하면서 바로 불을 켠 것 같습니다.

⑤ 분향단

“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출 40:5)

“또 여호와 앞에 등잔대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앞에 두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는 또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출 40:25-28)

성소 기구들 중에 분향단은 맨 마지막에 배치되는 점이 특이합니다. 향단을 지성소 휘장 앞에 두고 역시 향을 바로 살랐습니다. 그리고 성소 입구 휘장을 답니다. 성소도 이제 가려졌습니다.

⑥ 번제단

“또 번제단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출 40:6)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9)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와 소제를 드립니다.

⑦ 물두멍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고 그 속에 물을 담고”(출 40:7)

“ 그는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으니라.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30-32)

기구들 중에 맨 마지막에 놓여진 것이 물두멍입니다. 그곳에 물을 담고 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족을 씻습니다. 씻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⑧ 성막 울타리와 문

“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달고”(출 40:8)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출 40:33)

성막을 세움에서 마지막 작업은 울타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둥을 세우고 세마포 포장을 치고 성막을 들어가는 입구 문의 휘장을 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형태는 완벽하게 가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기능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기름을 발라 모든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⑨ 관유를 바름

“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 너는 또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출 40:9-11)

이 마지막 대목은 모세가 실제 어떻게 실행했는가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하여 특별하게 제조된 거룩한 관유를 모든 성막의 구조물과 기구들에 바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평범한 재료들이 거룩한 관유로 인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관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4. 완성된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모세가 성막 세우는 일을 다 마쳤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 모세조차도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에 대하여 모세가 다 말씀대로 실행했다고 일일이 다 기록했지만 마지막 부분인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바르는 실제적인 실행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모세가 이 부분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명령대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부분에서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구름과 영광의 임재는 동반적인 역사이며 그런 경우에 그것은 동의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도 계속 언급했다시피 관유도 성령을 상징하고 이 특별한 임재의 구름도 성령을 상징합니다. 관유는 인간이 바르는 부분이지만 구름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성령에 대한 상징이지만 구름으로 나타남은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인간이 율법과 의식을 따라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지만 실제 그것을 거룩하다고 확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나타남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내려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도 마지막 봉헌식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4)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전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재료와 웅장한 모습의 집을 지어서 하나님의 전이라고 일컫는다 해도 하나님이 증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막과 광야의 싯딤나무를 사용하여 이동식 재료로 지었든 최고의 재료인 레바논의 백향목과 금을 입힌 아름다운 돌로 지었든 하나님이 임하시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고 임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완벽하게 외형을 다 갖추었어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유컨대 그것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영)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기 이전의 아담은 완벽한 인간의 몸을 가졌지만 살아있는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언약에서도 깊이 상고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침례식에서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가 여기서 성령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 3:11; 요 1:33) .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그가 성전이심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 위임식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런데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말씀들은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향해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는 경우에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확고하게 단정 짓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입니다. 그날에 모여있던 120명 각 사람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냥 성령의 임재가 아닙니다. 성령이 그들 각자 안에 임하여 내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각 사람이 성전이 되었고 교회는 집합적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 20:22). 예수님이 재차 강조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행 1:4-5).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행 8:14-15). 그들은 믿는 사람들로써 기적도 체험하고 물침례도 받았고 은혜를 받아 기쁨이 넘쳤던 사람들인데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행 8:1-16).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믿는 사람들을 만나 첫 번째 질문한 내용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행 19:2).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다고 했습니다(행 19:6). 이방인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베드로와 함께 간 사람들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모호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성령받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믿는 자가 모두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경우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지라는 것들입니다. 믿을 때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록들과는 완전히 상충되기 때문에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이 글에서 그 부분들까지 다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을 편견 없이 읽는다면 충분히 그 의문은 풀리게 됩니다.

성막 세우는 일을 마치자 그 위에 구름이 덮이고 안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만약 성령을 받은 적이 없다면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처럼 외형은 믿는 자로서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다 갖추었어도 하나님의 영이 아직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막 건축의 마지막 마무리는 구름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하심입니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과정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막 이동시 행진 순서와 정착할 때 진영 배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다음 해 1월 1일에 성막이 완공되고 비로소 성막 제사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달 14일에 그곳 시내 광야에서 첫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다음 달 제20일에 성막의 구름이 떠올라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됩니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행진하기를 시작하였는데”(민 10:11-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역사하셨는데 성막 완공 후에는 성막 위에 충만하게 임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 광야 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이동과 머무름의 여부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거나 멈추는 것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민 9:15-17)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항상 일정한 기간을 두고 이동한 것은 아닙니다. 짧게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멈추었다가 아침에 이동을 한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이틀, 혹은 한 달, 일 년을 머문 적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민 9:21-22)

1. 이동할 때 성막 운반 담당자들

레위 지파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 지파로 분류되었습니다. 레위에게는 고핫(그핫), 게르손, 므라리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성막 운반 책임은 이 세 사람의 자손들에게 각각 분배되었습니다.

① 고핫 자손들

“고핫 자손이 회막 안의 지성물에 대하여 할 일은 이러하니라”(민 4:4)

고핫 자손이 담당한 성막의 성물은 각종 기구들입니다. 언약궤, 분향단, 금등잔대, 진설병 떡상, 번제단, 그리고 성경 기록에는 찾아 볼 수 없지만 물두멍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지성물들은 반드시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고핫 자손에게는 소나 수레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고핫 자손에게는 (소와 수레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민 7:9)

반드시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은 후에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운반해 오는 과정에서 수레를 사용하였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고핫 자손이 운반해야 하는 것들은 게르손이나 므라리 자손들이 담당한 것들에 비해서 비록 양은 적지만 지극히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에 고도의 경외심과 주의력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지성물 운반을 담당한 그들이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은 성소를 들여다 보거나 성물들을 직접 손으로 만지는 일입니다. 그들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 제사장이 먼저 기구들을 천으로 덮는 포장 작업을 마쳤을 때 채만 잡고 어깨에 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 4:15)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할 일과 그가 멜 것을 지휘하게 할지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 4:18-20)

언약궤를 운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궤를 가리거나 덮지 않은 채 그냥 메고 가는 것으로 묘사한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물론 그림을 그린 작가가 그것이 언약궤임을 알도록 하게 위한 의도였겠지만 실제로 그런식으로 운반한다면 그것을 멘 사람들이나 그것을 본 백성들이나 모두 죽습니다. 언약궤는 이동시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지성소 휘장으로 먼저 궤를 덮고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후 다시 청색 보자기를 덮습니다(민 4:5-6). 그것을 멘 사람들이나 백성들이나 누구도 언약궤를 볼 수 없고 보아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궤를 운반하는 모습은 위의 그림과 같이 청색 보자기로 싼 모습입니다. 언약궤뿐만 아니라 어깨에 메야 하는 모든 지성물들이 마찬가지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았다가 죽은 것이나(삼상 6:19) 웃사가 궤를 만졌다가 죽은 것이나(삼하 6:7) 모두 언약궤를 보거나 만지지 말라는 이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제사장 외에는 그것을 운반하는 고핫 자손마저도 만지거나 들여다 보면 죽임을 당하는 지극히 거룩한 기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강력한 거룩함의 규정과 그것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엄위함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속죄와 정결케 함과 거룩함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렇게 단절시켜 놓았고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② 게르손 자손들

“게르손 종족의 할 일과 멜 것은 이러하니 곧 그들이 성막의 휘장들과 회막과 그 덮개와 그 위의 해달의 가죽 덮개와 회막 휘장 문을 메며 뜰의 휘장과 성막과 제단 사방에 있는 뜰의 휘장 문과 그 줄들과 그것에 사용하는 모든 기구를 메며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맡아 처리할 것이라. 게르손 자손은 그들의 모든 일 곧 멜 것과 처리할 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명령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이 멜 짐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니라”(민 4:24-27)

먼저 용어를 정리하겠습니다. “게르손 종족의 할 일과 멜 것은 이러하니”, “가죽 덮개와 회막 휘장 문을 메며”, “모든 기구를 메며” 개역 성경이 이 부분도 모두 ‘메다’로 번역하여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는 것과 구분이 잘되지 않아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맛사(מַשָּׂא)'는 반드시 어깨에 메는 의미가 아닌 단순히 ‘운반'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소 기구나 고핫 자손과 관련된 것이 아닌 경우는 ‘운반하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게르손 자손이 운반해야 할 품목은 성막의 천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모두 담당합니다. 즉 앙장, 덮개, 휘장 종류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성소를 덮는 내부 앙장과 외부앙장, 붉은 물들인 염소 가죽과 해달의 가죽 덮개, 성소의 문 휘장, 성막 입구 출입문과 울타리 세마포 휘장 등입니다. 그리고 덮개를 고정하는 줄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르손 자손에게 운반을 위해 수레 두 대와 소 네 마리를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소 두 마리가 수레 한 대를 끄는 것입니다.

“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민 7:7)

③ 므라리 자손들

“너는 므라리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그들이 직무를 따라 회막에서 할 모든 일 곧 그 멜 것은 이러하니 곧 장막의 널판들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 둘레의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그 말뚝들과 그 줄들과 그 모든 기구들과 그것에 쓰는 모든 것이라...”(민 4:29-32)

므라리 자손들이 책임 맡은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그들은 성소 널판, 받침, 띠, 금고리, 성소와 바깥 울타리 기둥들, 말뚝과 줄 등 구조물을 이루는 골조 모두를 망라합니다. 워낙 부피가 크고 무거우며 수량이 많은 관계로 그들에게는 수레 4대와 소 8마리가 주어졌습니다.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민 7:8)

성막을 걷고 운반하며 다시 세우는 작업을 고핫 자손과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에게 분배하였으나 그 업무들을 총 관리할 사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성소 기구들, 고핫 자손이 운반할 품목들을 관리할 감독자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입니다. 그는 기구들과 함께 성막에서 쓰는 향들과 관유도 책임 맡았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맡을 것은 등유와 태우는 향과 항상 드리는 소제물과 관유이며 또 장막 전체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성소와 그 모든 기구니라”(민 4:16)

그리고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운반할 것들을 총 관리하는 책임자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입니다(민 4:28,33).

2. 머물 때 진영 배치와 이동시 행진 순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장정만 대략 60만명입니다. 여기에 부인과 노인, 아이들을 모두 합산하면 장정 하나에 부양 가족이 최소 3명이라고 할 때 240만명이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숫자는 어림잡아 150만에서 250만 정도로 추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정착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특히나 정착과 이동에 관련하여 군사적인 용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나팔을 불때 그들은 소집되거나 진군합니다. 군대를 나눈 각 진영(陣營)이 있으며, 군기(軍旗)가 있고, 가문별로 기호(旗號)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직을 관리하는 백부장, 천부장 등 지휘관들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직도에 따라 진영을 배치하고 또 이동해야 합니다.

① 머무는 동안 진영 배치

성막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도 언급했지만 이스라엘 진영의 가장 중심에는 항상 성막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으로 세워지는 각 지파와 가문과 가정의 장막들은 그 방향이 중앙에 있는 성막을 향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사방으로 치라”(민 2:2)

여기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라는 대목을 직역하면 ‘사방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마주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을 성경들이 ‘회중의 성막에서 멀리’(흠정역), ‘장막 둘레에서 조금 떨어져’(공동번역)등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아마도 민수기 1:51에서 '성막을 걷거나 세울 때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까이 하면 죽이라'는 명령과 여호수아 3:4에서 언약궤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 2천규빗 정도 떨어지도록 명령하고 있는 내용을 따라 의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막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자체가 장막들의 방향이 그곳을 향하고 그럼으로 인하여 사방의 진영이 서로 마주 보는 결과가 되는 모습이 하나님의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각각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 옆에 진을 치되, 곧 회막을 향하여 그 둘레에 진을 쳐라”(바른성경)

성막 바로 주위에는 레위의 자손들이 진을 칩니다. 성막의 입구가 있는 동쪽에는 레위인들 중에서도 특히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이 진을 칩니다. 그들은 고핫 자손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아론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길 사람들입니다. 오직 이들만이 성막의 기구들을 포장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모세와 아론의 후손을 제외한 고핫 자손들이, 서쪽에는 게르손 자손, 북쪽에는 므라리 자손이 진을 치게 됩니다. 이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막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막사 사이에 위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성막을 걷거나 세울 때 레위인 아닌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죽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인한 진노의 완충지대와도 같습니다.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민 1:51)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민 1:53)

레위인들의 진영을 둘러싸며 백성들의 장막들이 세워집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동서남북 네 진영으로 나누어 각 방향에 세 지파씩 진을 치게 됩니다. 네 진영에는 대표되는 선임 지파들이 있는데 동쪽에는 유다지파, 남쪽엔 르우벤, 서쪽에는 에브라임, 그리고 북쪽에는 단지파입니다. 상세한 것은 도표를 참조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② 이동할 때 행진 순서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동과 머묾을 결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그 싸인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의 이동여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가장 앞서 나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앞서 갑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멘 고핫 자손이 가장 앞서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네 대(隊)로 나누어 놓은 순서를 따라 행진하되 언약궤 다음에는 가장 먼저 동쪽의 선임인 유다지파가 뒤따르고 그 뒤로 같은 진영에 속한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가 따라 나갑니다. 그리고 제 1대(隊)의 뒤를 이어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성막의 부속품들을 소 수레에 싣고 행진합니다.

다음 제 2대(隊)는 르우벤 지파를 선두로 하여 시므온과 갓 지파가 따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성막의 기구들을 어깨에 멘 고핫 자손이 뒤따릅니다. 고핫 자손 중 언약궤를 멘 사람들은 군대 행렬의 맨 앞에 나갔고 그 외의 모든 기구를 어깨에 멘 사람들은 전체 행렬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여 행진합니다. 기구를 멘 이 고핫 자손들이 다음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간 므라리 자손들과 게르손 자손들이 이미 성막을 다 세워 놓은 후입니다.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민 10:21)

그들을 뒤이어 제 3대(隊)인 서쪽 진영이 행진을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에브라임이 대표이고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가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맨 후미에 제4대(隊)인 북쪽 진영이 출발합니다. 단지파가 선임이고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행진합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가 넓은 연병장에 모여 있다가 순서를 따라 차례차례 뒤를 이어 행군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민수기 10장 11절부터 28절까지입니다.

(11)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12)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1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행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14)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유다 군대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이끌었고

(15) 잇사갈 자손 지파의 군대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이끌었고

(16) 스불론 자손 지파의 군대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이끌었더라

(17) 이에 성막을 걷으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출발하였으며

(18) 다음으로 르우벤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출발하였으니 르우벤의 군대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이끌었고

(19) 시므온 자손 지파의 군대는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 이끌었고

(20) 갓 자손 지파의 군대는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 이끌었더라.

(21)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22) 다음으로 에브라임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에브라임 군대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이끌었고

(23) 므낫세 자손 지파의 군대는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 이끌었고

(24) 베냐민 자손 지파의 군대는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 이끌었더라

(25) 다음으로 단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이 군대는 모든 진영의 마지막 진영이었더라 단 군대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 이끌었고

(26) 아셀 자손 지파의 군대는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 이끌었고

(27) 납달리 자손 지파의 군대는 에난의 아들 아히라가 이끌었더라

(28)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할 때에 이와 같이 그들의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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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으로 성경을 말한다 / 강문호목사



Ⅰ.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은 쾌쾌 묵은 성막을 현대인이 왜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막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심지어 성막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조차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꼭 알아야만 합니다. 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이유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닙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공을 만나야 하듯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행복만이 깃들어 있었고 죄가 무엇인가를 몰랐고 저주와 관계가 없었고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은 마귀의 식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같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고쳐질 수가 있습니다 아담은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제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4:1_4)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8:20_22 15:12_21 46:1_3)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에서 사람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성시키던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성막”이란 본래 단어 “미쉬칸”이란 뜻으로 거처한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에 성막공부를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중심은 오실 예수, 신약의 중심은 “다시 오실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미국 흑인들에게 “사람의 담요”보내기 운동을 하고 계시는 헨리 홈 선교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어린 딸에게 성경을 매일 읽으라는 명령을 내셨습니다. 성경을 읽던 딸이 “아빠 너무 두꺼우니 요약 좀 해줘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약 한달간 요약 해보니 결국은 “예수”두자 더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 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 5:46_47)

모세의 글을 믿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모세 5경이 예수 이해의 첫 단추가 됩니다. 그런데 모세 5경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막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성막을 모르고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학자는“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막 전체는 예수의 사건이요 성막의 모두는 예수의 사실이요 성막의 전부는 예수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실 때 성막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희 육체니이다.”(히 10:20) 라고 성막과 예수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공부는 곧 예수 공부입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에서 4장, 모두 50장이 성막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모르면 성경에서 막대한 부분에 무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성막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천지 창조가 거창한 것이지만 겨우 11장이 할애되었을 뿐입니다. 성막은 천지창조보다 4배이상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도 겨우 14장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단일 주제로 최고로 많은 비중을 둔 것은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4. 성막은 죄인의 구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너무나 귀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 주시는 장소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죄된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라고 언약 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 하시는 장소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앗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본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요 1:18) 그리고 성막을 본자는 예수를 본자입니다. 성막이 곧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3)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요 성막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엡 1:1)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이같이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 같이 대화하는 너무도 흥분된 곳입니다

4)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 주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을 안만나 주십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급살 맞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막에서는 죄인을 만나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지니 그리하면 열랍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으시는 모습이요 방법입니다.

5)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았다는 영수증입니다 제단에서 불이 타오를때 이는 바로 용서의 표징입니다 이 같이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5.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는 성막의 인도입니다. 성막 완성후 바로 성막에 구름기둥이 임하였습니다. (출 40:33)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화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것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4_38)

성막시대의 구름기동과 불기동의 역사는 오늘날 성령의 역사와 동일합니다. 구름기동과 불기둥처럼 성령은 다음과 같이 7가지 신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출발신호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출 40:36_37)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 이제는 그만 가자!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약 2,000명 되는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자를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12명의 족장회의에서 타협을 본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민주화되면 안 됩니다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동이 떠오르면 가야했습니다. 좀 더 가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머물면 멈추어야 했습니다. 과거는 구름기둥이 출발신호 소리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출발신호를 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성령님은 바울과 바나바로 해외선교를 이루라는 출발신호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종하였습니다.(행 13:1_3)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출발신호를 주셨습니다. 성막시대에는 구름기둥이 출발신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7교회에게는“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시며 늘 성령께서 출발신호를 주셨습니다.

2) 방향신호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 갈가 저리 갈까 도무지 고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갈까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름기둥이 가는 곳으로 방향을 잡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안 좋은 길 같았어도 나중에 지나놓고 보면 가장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홍해쪽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먼길 같았으나 너무도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그리로 갔기에 애굽 군대는 다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 살게 된 것입니다. 만약 가자는 길로 직접 갔더라면 애굽군대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 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방향을 주십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전도가는 것을 막았습니다.(행 16:6) 그리고 빌립보로 방향을 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잠 16:1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하나님께 전적 복종이 완전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소련에서 완전 자유가 보장된 미국으로 망명온 솔제니친이 미국에 와서 한 말은 “자유가 많아 고민이 생겼다. 시키는 대로만 사니 선택의 고민이 없어 오히려 자유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방향대로만 살면 고민이 없습니다.

3) 사랑신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두 가지 사랑입니다.

<알맞는 사랑>

밤에는 추운 광야이니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낮에는 더운 광야이니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알맞는 사랑입니까 만일 반대로 낮에는 불기둥으로 밤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다고 봅시다. 얼마나 고역이었을까요 또 밤에는 어두워 구름기둥이 안 보일테니 잘 보이라고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낮에는 불기둥이 밝은 해 때문에 안 보일테니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알맞은 사랑인가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요 너무나 기가 막힌 사랑이요 너무나 신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26, 35_37)

<언제나 사랑>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밤낮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지금은 성령이 우리와 늘 같이 계십니다.

4) 생활신호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발도 도착도 출발과 도착 사이의 생활도 모두 구름기둥 불기둥에 의존하였습니다. 두 기둥이 머무는 기간이 생활기간이요 머무는 공간이 생활공간 이었습니다. 한치도 벗어나면 추워서 죽고 더워서 멸망되었습니다.

풀가에 매어 놓은 소가 그 끈을 반경으로 풀을 뜯는 것과 같습니다. 두 기둥을 이스라엘이 벗어날 수 없듯이 지금은 성령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슬려도 안 되고 성령을 훼방해도 안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유 20, 엡 6:18, 롬 8:28) 성령 안에서 찬송해야 하고 성령으로 말씀도 전해야 합니다.(행 1:18)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만 붙잡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에만 의지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5) 하나님 신호

200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 두기둥을 친히 다 보았습니다.(38절) 두 기둥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친히 보고 따라 다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하나님이 주신 신호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6) 영광 신호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_35)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기둥이 나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한 천사가 루시퍼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남자가 아담이요 여자가 하와였습니다.

그 때는 두 기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나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성령충만만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간절한 명령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7) 선교 신호

“온 족속이” 친히 보았습니다. 온 족속이 이를 보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다 보아야 합니다. 다 동참해야 합니다. 두 기둥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족속이 구원받도록 성령은 지금도 맹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셩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4_8)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십니다. 그때 두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제는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막공부를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떠한지를 알아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수 있습니다

문에서 구원론을 번제단에서 죄론과 보혈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등대에서 사명론을 떡상에서 축복론과 헌신의 생활을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전체요 성경의 전체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완벽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균형잡힌 신앙생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7.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한것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_4)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한 홍해는 세례의 모형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 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_2)

아담이 입었던 가죽옷은 구원의 모형이고 촛대(등대)는 하나님의 임재의 모형입니다. 구리뱀은 십자가의 모형이고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지고 올라간 장작도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멋진 모형은 바로 성막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8. 복 받는 길을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십니다(신 5: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아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2_27)

하나님의 뜻은 축복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첫 선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번 선포는 축복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2:27_28)

2) 노아에게 주신 말씀

온 인류가 홍수로 다 멸망당하였습니다. 노아의 가정만 남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말씀도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3)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아브라함을 메시야의 첫 조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자 말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고 말씀 하셨습니다

4) 이삭에게 주신 말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도 축복이었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26:3)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시고는 꼭 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 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하게 되면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 복을 찾는 비결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는 길이 번제단 안에 숨어 있고 은총을 얻는 길이 물 두멍에 들어 있고 축복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 분향단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9. 영혼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의 고장은 병원에서 진단하여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고장은 성막에서 말씀으로 고치게 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성막을 문부터 법궤까지 공부하면 영이 어디가 고장나 있는지 영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 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2 번제단에서

나의 죄는 무엇인가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3 물두멍 앞에서

나는 죄를 버린 후 성결 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중생하고 지은 죄의 사슬을 끊었는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죄는 없는가?

4 촛대(등대) 앞에서

나는 빛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5 떡상 앞에서

나는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 분향단 앞에서

나는 기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가?

7 법궤 앞에서

나는 주님을 통하여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나는 말씀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죽은 나무에게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가?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나와 같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는가? 이같이 성막 공부를 하면 영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막 공부를 해야 합니다.

10.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진정으로 알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성경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어설프게 예수를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예수를 분명히 안 다음부터 베드로는 예수께 모두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가야 파트리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때까지 그는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성막은 예수를 너무도 분명히 조각하여 주기에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합니다.

이같이 성막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10가지입니다. 성막은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이야기입니다.

4. 죄인의 구원 장소입니다.

5.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7.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8. 복 받는 길을 가장 정확히 알려 줍니다.

9. 영혼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Ⅱ.성막의 명칭 (출 25:8, 26:30)

나를 사람들이 부를 때는 여러 명칭이 사용되어 집니다. 교인들이 저를 부를 때는 “목사님” 아내가 부를때는 “여보” 자녀가 부를 때는 “아빠” 학생들이 부를 때는 “교수님” 부흥회 나가면 “강사님” 그러나 아버지가 부를 때는 “애야” 친구들이 부를 때는 “야” 고모가 부를 때는 “조카야”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성막도 불러주는 대상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성막에는 10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다른 명칭 같지만 모두 “성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장 막

“모텔”이라는 원어는“텐트”라는 뜻입니다. 성막의 겉모양은 텐트이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성경에 130회 가량 나오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찌니라”(출 25:9)

2. 성 막

원어 “미쉬칸”은 “거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장 신성한 곳이요 최대로 거룩한 곳이요 최고로 엄숙한 곳입니다. 성경에 성막이란 말은 100여회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찌니라”(출 26:30)

3. 회 막

회막은 “모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회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3지파씩 12지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일 때에는 늘 성막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일 때는 늘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1 회개 하였습니다.

2 제사 드렸습니다.

3 재판 하였습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았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이 회막에서,

1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3 사람들끼리 만났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자리 회막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4. 증거막

회막에 모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3가지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1 현재 어떤 사건에 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증거해 주었습니다.

2 과거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늘 잊지 않도록 증거 하였습니다.

3 재판할때 증인들이 와서 증거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때로는 증거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찌니라”(민 1:53)

5. 성 소

성막을 “거룩하게 구별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성소”라 불렀습니다. 거룩한 분이 계시니 거룩하였고 그러하기에 성소입니다. 성막이 있던 땅이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내가 그 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시되”(출 25:8)

6. 법 막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바로 그곳에 있기에 “법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이 대제사장인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항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 하였느냐”(대하 24:6)

7. 하나님의 집

장막은 하나님과 관계된 집이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집입니다.

3 하나님께 제사하는 집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집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집입니다.

이같이 성막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기에“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31)

8.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여호와”이시기에 하나님의 집이나 여호와의 집은 동일합니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 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 1:7)

9. 세상에 속한 성소

본래의 성소는 하늘 나라에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성소가 참 모습입니다. 성막은 단지 이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모형이 세워진 곳이 세상이기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히 9:1)

10.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성막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불렀습니다.

“다읫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하니”(행 7:46)

이같이 성경에서 성막은 여러 명칭을 때에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성막의 다른 이름”입니다.

장막, 성막, 회막, 증거막, 성소, 법막,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집, 세상에 속한 성소, 하나님의 처소.

Ⅲ.성막의 변천사 (수 3:8, 4:19, 18:1)

성막은 모세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받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수차례 변화되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성막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1. 광야 성막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던 모세가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받았습니다. 이때가 대개 B.C 1220년경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2년째 되는 1월 1일 성막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자 말자 착공하여 약 10개월 남짓 동안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1월 1일에 낙성식을 하려고 부지런히 서둘렀는 지도 모릅니다. 성막이 완성되던 날 구름기둥이 떠올랐고 그 날 밤 불기둥이 이스라엘 진영을 덮었습니다.(민 9:15)

그후 50일 정도가 지난 2월 20일 성막을 덮었던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다시 걷여져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막 최초의 이동 이었습니다

1) 성막 운반인

그러나 이동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아무나 성막을 걷거나 만지거나 나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한 사람만이 가능하였습니다.

1 게르손 자손 (민 3:21_31)

성막, 장막덮개, 회막문장, 뜰 휘장, 4면의 문장 축, 등은 게르손 자손이 운반책임을 지었습니다.

2 고핫자손(민 3:31)

가장 중요한 것들을 고핫 자손이 맡았습니다. 증거궤, 상, 등대, 단, 그리고 각종 기구들을 날랐습니다.

2) 성막 운반법

1 증거궤 운반법(민 4:4_6)

칸 막은 장으로 증거궤를 덮고 그 위에 해달 가죽으로 씌우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어 날랐습니다.

2 떡상 운반법(민 4:5_8)

위에 청색 보자기를 덮고 그 위에 대접, 숟가락, 주발, 붓는 잔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떡을 놓고 그 위에 홍색 보자기로 씌운 다음 해달 가죽을 덮어 운반하였습니다.

3 등대 운반법(민 4:9_10)

청색 보자기로 등대, 불집게, 불똥 그릇, 쓰는 기름 그릇을 덮고, 해달 가죽으로 덮어 날랐습니다.

4 분향단 운반법(민 4:11)

청색 보자기로 덮어 해달가죽으로 씌워 날랐습니다.

5 기타 모든 기물 운반법(민 4:12_14)

역시 청색 보자기로 싸서 해달 가죽을 덮어 날랐습니다.

3) 성물 운반 법칙(민 4:15_20)

1 싸는 작업은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2 메는 것은 고핫 자손에게만 가능하였습니다.

3 메더라도 만지면 죽었습니다.

4 지성소의 물건은 누구든지 접근만 해도 죽었습니다.(민 4:19)

5 지성소는 대제사장 외에 들어가면 죽었습니다.(민 4:20)

이같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을 맡아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8580명이었습니다. (민 4:48) 그러나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정식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암 5:25)

그 이유는 추측건대 가는 곳마다 대적들과 전쟁중이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가나안 성막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능한 한 사람들이 적고 무덤들이 없는 곳을 성지로 골랐습니다. 법궤를 앞장세워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넜기에 성막에 대한 애착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수 3:8) 길갈에서 그 동안 광야생활에서 지키지 못한 율법 할례를 행하고 그곳에 성막을 세웠습니다.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수 4:19, 5:10, 9:6, 10:6, 10:43)

그들은 진 치기 전에 꼭 먼저 진 가운데 성막을 만든 것이 순서였습니다.

그 후 길갈에서 32km 떨어진 실로로 성막을 옮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서 회막을 세웠으니”(수 18:1)

그 후 여호수아가 어느 정도 땅을 점령하였을 때 성막에 모여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로 성막에서 생긴 일들이었습니다.(수 19:51) 얼마후 실로의 성막은 탠트형이 아닌 건물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다니던 광야 생활에서 안정된 생활로 바뀌자 성막의 모습도 이동형에서 고정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이름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삼상 1:9)

또 삼상 3:3을 보면 어린 사무엘이 궤 옆에서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법궤에는 대제사장만 1년에 1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데 사무엘이 늘 그 옆에서 잔 것을 보면 성막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3. 빼앗긴 법궤

실로 성막의 관리자는 엘리 제사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그는 3가지 관리에 실패하였습니다.

1) 자녀관리 실패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 2:1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삼상 2:22)

2) 성전 사환 관리 실패

제사장의 사환들이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물론 드릴 제물까지 가져다가 먹는 큰 죄악을 범하였습니다.(삼상 2:13_17)

3) 자신의 영 관리 실패

엘리의 당시 나이가 98세라(삼상 4:15) 기도하기에 기력이 쇠하였고 일하기에 나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영력은 약화될 때로 나약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 나가 죽었습니다. 법궤도 불레셋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가 의자에 앉았다가 거꾸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실로의 성막은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법궤 없는 성막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긴 후 잠시 성막부재시대가 되었습니다.

4. 다시 찾은 법궤

불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쳐박아 놓았습니다. 섬김과 경외가 전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법궤는 경외의 대상이지 보관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1) 아스돗의 법궤

불레셋은 실로의 법궤를 에벤에셀에서 다시 아스돗으로 가지고 왔습니다.(삼상 5:7) 그들의 다곤신 옆에 법궤를 두었습니다. 이튿날 보니 다곤 신이 앞으로 엎드려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세웠습니다. 이튿날 다시 가보니 다곤신이 목이 잘리고 두 손목이 끊어진 채 다시 엎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는 독종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회의를 거듭한 결과 가드로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2) 가드의 법궤(삼상 5:18)

법궤가 가드로 오자 가드에서도 큰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아스돗보다 더 심하게 전 주민이 다 독종에 결렸습니다. 다시 법궤는 에그론으로 보내졌습니다.

3) 에그론의 법궤(삼상 5:10)

갈 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에그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복이지만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화와 저주의 씨앗이었습니다. 신나게 빼앗았는데 처치 곤란이었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스스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수레에 실려 두마리의 소에 끌려 기럇 여아림으로 보내졌습니다.

4) 기럇여아림의 법궤

불레셋에서 보내온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 보존되었습니다. 엘르아살이 정성껏 보관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과 법궤의 분리시대가 장기간 계속이 되었습니다.

5. 법궤운반 사고

다윗이 왕이 되자 가장 먼저 추진한 정책은 “법궤 운반 정책”이었습니다.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궁중 곁으로 나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삼만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도 조직하였습니다. 웃사와 아히오 두 사람이 직접 법궤를 나르는 책임자로 임명 되었습니다. 수많은 환영 인파속에 법궤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갑자기 소들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웃사는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웃사를 쳐서 그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온 백성의 흥분이 홀연히 무서움으로 변했습니다. 잔치자리가 장례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충성스런 웃사가 즉사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볍궤 운반을 편리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힘들여 반드시 어깨에 메고 날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 운반은 잠시 중단되어 임시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방치해 두게 되었습니다.(대상 13:1_14)

6. 두개가 된 성막

얼마 후 다윗은 자기의 궁 옆에 성막을 세우고 법궤를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해 놓고야 마는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가로되 레위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섬기게 하셨음이니라”(대상 15:1_2)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성막이었습니다. 궤를 옮겨 두던 날 다윗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정성껏 드렸습니다.(대상 18:1_3) 그러나 성막이 하나 더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기브온 성막이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앞에 모시게 하여”(대상 16:3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대상 21:29)

분명히 다윗은 모세가 지은 성막을 두 성막으로 분리시켰습니다. 법궤는 예루살렘에 기타 다른 성막 성물은 기브온에 두었습니다.

7. 성전이 된 성막

기브온 성막에서 1000번제의 복을 받은 솔로몬은 성전건축에 임하였습니다. (대하 1:1_13) 모리아산에 (대하 3:1) 아버지 다윗이 모아 놓은 금 은 기타 수많은 재료를 사용하여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막형 성전을 지었습니다. 물두멍은 10개나 만들었습니다.(대하 4:6) 등대도 10개였습니다(.대하 4:7) 떡상도 10개였습니다. (대하 4:8) 법궤안에는 두 돌판만 남았을 뿐입니다.(대하 5:10) 이제 성막은 크기도 모양도 모세의 성막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법궤안에 있던 것은 없어지고 10배의 기물들이 여기저기 자리잡았습니다. 성전의 물량화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듯 하였습니다. 7년간 지었습니다. (대하 8:1) 담군 7만명, 산에서 나무를 작벌하는 이가 8만명, 감독 3,600명등 모두 153,60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대단한 공사가 끝났습니다. 성막이 성전화된후 낙성식도 대단하였습니다. 소를 22,000마리 양은 120,000마리 잡았습니다. 7일간 계속된 장엄한 낙성식이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나타나 그 성전에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주는 자리가 될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대하 7:12_16)

1 기도응답의 자리(12)

2 죄 용서의 자리(12)

3 재앙 제거의 자리(13)

4 병고침의 자리(13)

5 땅을 고치는 자리(14)

6 하나님이 사시는 자리(16)

그래서 그 날부터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8 불가시화된 성막

솔로몬이후 텐트 같은 성막은 없어지고 세계 도처에 솔로몬형 성전형 성막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또 세워지고 있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후에는 장소에 그렇게 강조점을 두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때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하여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할지니라”(요 4:21_24)

그래서 예수이후 보혜사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후 예배 장소는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시적 성전은 불가시적 성전으로 땅의 장소는 마음이란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땅위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책을 북경에서 쓰고 있습니다. 북경에서도 제일 연합 교회인 충문 교회에서 1,700여명이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이 교회 의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5명의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집사님이 설교 하였습니다. “네 마음에 천국을 이루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966년 6월 25일 문화대혁명으로 성경을 다 불태우고 온 교회건물을 헐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온 노인들이 80%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익을 포기하고 출세를 포기하고 예수만 붙잡고 살아온 이들입니다. 건물교회는 없어도 마음의 성전을 지켜온 이들이었습니다.

이같이 모세가 받은 성막은 오늘날 불가시 성전이 마음의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마음이 천국이요 성막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마음에 주님은 영원토록 같이 계실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Ⅳ.성막뜰 울타리 (출 27:9_1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면을 당하게 할지니(9) 그 기동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10) 그 복편에도 광이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11) 뜰의 옆 곧 서편에 광 오십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12) 동을 향하여 뜰 동편의 광도 오십 규빗이 될지며(13) 문 이편을 위하여 포장이 십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14) 문 저편을 위하여도 포장이 십 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15)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식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이십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16) 뜰 사면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17) 뜰의 장은 백 규빗이요 광은 오십 규빗이요 세마포장의 고는 오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18)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19)

1. 울타리의 모양

성막을 밖에서 보면 울타리만 보게 됩니다. 동쪽이나 서쪽에서 보면 10개씩의 기둥이 보이고 남쪽이나 북쪽에서 보면 20개씩 보입니다. 기둥의 높이는 2,5m정도 (5 규빗)가 되어 사람의 키보다 좀 높습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문 외에는 모두 세마포로 둘러 쳐져 있습니다.

2.울타리의 기둥

울타리의 60개 기둥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놋받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 고리가 달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놋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들었을때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다 고침 받았습니다. 그후 놋은 십자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과 은은 변함이 없는 금속으로 언제나 믿음을 의미합니다. 세마포는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울타리는 십자가에서 만이 믿음으로 성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울타리의 높이

이미 언급한대로 울타리의 높이는 2,5m가량입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안을 절대로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성막은 예수의 모습인데 울타리안에 들어가야만이 예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불신자가 목사님에게 “예수를 보여 주십시요 믿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믿으십시요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믿고 보는 것이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4. 울타리의 의미

1) 보 호

울타리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안은 보호를 받지만 밖은 보호를 받지 못 합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_2)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식구들은 모두 보호를 받았고 방주밖에 있는 이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중재림때 교회만 보호 받으며 들림 받게 될 것입니다.

2) 울타리 안은 안전하지만 밖은 언제나 화가 미치는 곳입니다.

울타리의 60개 기둥은 40년간 단 한 번도 고장 난 기록이 없이 안전하였습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 하리니”(시 91:10)

말세에는 3대 화가 있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계 8:13)

<화 화 화 3번 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1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는 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2 성전 밖 마당만 밟은 자에 임하는 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자들을 척량하되 성전밖 마당은 척랴앟지 말고 그냥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동안 짓밟으리라”(계 11:1_2)

3 불신자에게 오는 화

“죽음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 찌어다”( 계 13:8_9)

이들은 다 울타리 밖에 있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울타리안만이 안전합니다.

3) 소 유

울타리는 소유를 의미합니다. 울타리 친 안은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땅에 울타리를 두르게 됩니다. 주인의 것과 주인의 것이 아닌 것의 경계가 바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울타리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밖에 있으면 마귀의 식구입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_3)

“내가 너를 구속했다”는 말은 성막안의 번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울타리안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4) 공 급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두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안에 있는 이는 연결되어 있는 이요, 연결되어 있는 이는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이입니다. 말씀이 공급됩니다. 빛이 공급됩니다. 복이 공급됩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공급됩니다. 구름 우산으로 시원함이 공급되고 불 우산으로 밤에는 따뜻함이 공급됩니다. 울타리 안은 공급을 의미합니다.

5) 울타리안과 밖은 양과 염소의 구별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구별입니다.

복과 죄의 구별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구별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_9)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소입니다.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일입니다.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물입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성도입니다.

울타리 안은 울타리 밖과 무엇이나 구별됩니다. 이같이 울타리는 보호요 안전이요 소유요 공급이요 구별을 의미합니다.

Ⅴ.성막문 (출 27:13_16) 

성막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동을 향하여 뜰 동편의 광도 오십 규빗이 될지며 (13) 문 이편을 위하여 포장이 십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14) 문 저편을 위하여도 포장이 십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15)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16)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자! 이제부터 문으로 들어가며 문의 특징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 오직 하나의 문

성막 사방에는 12지파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한 쪽에 3지파씩입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문 하나씩 내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러나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성소에 들어가는 데는 오직 한 문으로 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소가 아무리 좋아도 문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에서는 예수님의 성격을 7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나는 선한 목자다.

2 나는 생명의 떡이다.

3 나는 빛이다.

4 나는 길이다.

5 나는 진리다.

6 나는 생명이다.

7 나는 문이다.

2. 큰 문

오직 하나의 문은 작은 문이 아니라 큰 문입니다. 동쪽 25m(50규빗)중에 10m(20규빗)가 문입니다. 우리는 좀체로 10m나 되는 통문을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구라는 고기가 앞에서 보면 입만 있는 것 처럼 성막의 동쪽은 거의가 문입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그렇게 큰 문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격스럽습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든지 들어와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명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예루살렘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온 유다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들어 와야 합니다.

땅 끝까지의 사람들도 들어 와야 합니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다 들어와야 하기에 모두에게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 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릅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_15)

3. 동쪽 문

동쪽의 첫 인상은 해 뜨는 곳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햇살이 비취는 곳입니다. 마귀의 세력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밝은 곳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더구나 문 앞에는 유다지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주님은 유다지파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 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에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동쪽문은 유지파가 위치한 문이며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두가 들어 있기에 동쪽문은 소망입니다.

4. 4 색의 문

성막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짜여 있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깔입니다. 그래서 청색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문입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왕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홍색은 피 색깔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백색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는 베실은 백색인데 이는 “성결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여론 조사에서는 참으로 다양하게 타나났습니다. (마 16:13_20)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장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그러나 이는 잘못 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성막문으로 대답하면 아주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막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5. 문턱이 없는 문

이 문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누구나 들어 갈 수 있으며 누구나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예수 믿기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영접하면 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6. 개인 구원의 문

들어가는 사람마다 자기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남이 열어 주지 않습니다. 각자 예수를 영접하고 들어와야 합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까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7. 열리고 닫히는 문

언제나 열려있는 문이 아닙니다. 열고 들어가면 곧 닫히고 맙니다.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문은 아닙니다.

Ⅵ.번제단  (출 27:1_8)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1)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2)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3)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5)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6)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7)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8)”

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1. 번제단의 뜻

단은 “미쯔바하”란 말로서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 의 뜻입니다. 번제는 “오라”란 말로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람이 긴급한 문제로 왕을 만나고 싶어 궁궐 앞에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관리가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왕을 만나고 싶어요.” 물었습니다. “네가 왕을 만나게 할 수 있니 ”비웃으며 물었습니다. “따라오세요.”하며 어린아이가 앞장섰습니다. 알고 보니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왕을 만나 듯 번제단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는 유일한 문으로 들어가 피로 죄를 닦는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 하나 가까워지게 됩니다.

2. 변제단의 특징

1) 재 료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목”은“버림받은 인간”을 뜻합니다. 놋은 물론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 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간청해도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그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죽일테면 죽이라”외쳤습니다. 차마 미국 국기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국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기로 씌웠기에 살았습니다. 버림받은 인간도 십자가로 싸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2) 크 기

가로 세로 각각 2.5m(5규빗) 높이가 1.5m(3규빗)입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신들이 모이는 솔로몬 행각은 5기둥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5인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의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입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의 경험입니다. 짐승이 학살되어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피는 고통의 절정입니다.

3은 하나님 숫자입니다. 성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때문에 같이 고통당하는 자리가 바로 번제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런 인간 때문에 그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은 죄사함 받는 자리, 죄 버리는 쓰레기장, 마귀와 이혼하는 자리입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모 양

4군데 4개의 뿔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의 뿔”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에 반역한 아도니야가 도망가 제단뿔을 부여 잡고 있었습니다. 반역하는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이때 병사가 아도니야를 잡으러 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니다”(왕상 1:51)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 왕은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습니다. 제단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라”(시 18: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4) 의 미

4뿔입니다. 한개로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 서 남 북에 한개씩 4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북(north) 동(east) 서west) 남(south)의 첫 글자는 news입니다.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큰news는 역시 생명입니다. 예수 피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예수 피는 묻어져야 합니다. 예루살렘도 온유다도 사마리아 땅 끝까지 죄인을 구원시켜 생명을 주신 예수 news가 퍼져 나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신의주를 내려다보며 중국 단동 압록강 호텔 614호실 창가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방금 신의주땅 30m가까이 까지 갔다 왔습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곳, 이 생명의 뿔은 사방으로 펴져 나가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_69)

5) 불

번제물을 번제단에 올려놓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불이 내린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사랑을 말합니다. 응답을 표합니다. 만일 다른 불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지내다가 하나님이 두명을 죽여 버렸습니다.(레 10:1_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동쪽의 번제단과 서쪽의 속죄소는 멀었습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우며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순간입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인본주의가 섞여서는 안 됩니다. 순수 복음이어야 합니다. 마귀의 식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입니다. 당당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생명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홀레옹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며 “너는 장교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 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때 그는 “난 장교입니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누가 그러더냐?”물었습니다. “황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인정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_39)

죄 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 곳이 번제단이요. 그 증거가 불이었습니다.

6) 번제단의 기구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릴 때 보조기구가 5가지 있습니다. (출 27:3)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다 필요한 그릇입니다.

1 재를 담는 통

재를 담는 통은 청소 통입니다. 번제단에서 태운 나무, 제물의 재가 광야 바람에 날리는 것은 그리 반가운 것은 못됩니다. 성막 안이 더러워지고 세마포 울타리가 지저분해지고 성막 주변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건강상 해롭습니다. 그래서 재를 담아 두었다가 진밖에 버리는 통입니다. 교회 안에 못된 요소를, 가정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꼭 안고 있다가 혼자 어디에 갔다 버리는 아름다운 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일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남은 재까지 다 모았다가 진 밖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짐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가요?

2 부 삽

번제단에서 탄 모든 것의 재를 긁어내는 도구가 부삽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다 생기는 찌꺼기, 공동생활 하다가 생기는 시험, 고통, 모두 긁어내고 교회 분위기, 속해 있는 곳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부삽과 같은 성도가 꼭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부삽이셨습니다. 만나는 심령 속에서 병을 긁어내고 귀신을 긁어내고 못된 것을 긁어내는 부삽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은 부삽예수를 닮아 부삽 성도로 바뀌고 있는가요?

3 대 야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뺀 후 번제단에 올려 놓기 위하여 고기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 대야입니다. 이는 전도를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을 하는 성도는 제물을 제단까지 나르는 대야입니다. 예수님만큼 큰 대야가 어디 있습니까?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자마다 좋은 대야입니다.

“온 세상 위하여 나 복음 전하리 주 예수 이름 힘입어 이복음 전하자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 해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기도 힘쓰리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4 고기 갈고리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 온 고기를 찍어서 제단에 넣고 타는 동안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기구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사랑의 고리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갈고리 같은 일꾼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는 가장 크고 훌륭한 갈고리입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갈고리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이었습니다. 전선이 폭탄으로 1m 가령 끊어져 통신이 두절되었고 다 전멸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끊어진 양끝을 각각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전기가 몸으로 통하여 새카맣게 몸이 탔습니다. 그 시간동안 전선이 연결되어 sos를 할 수 있었고 모두가 구출되었습니다. 갈고리 예수를 본받은 갈고리 교인이 꼭 필요합니다.

5) 불 옮기는 그릇(화로)

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합니다. 교회에는 불씨가 있어야 합니다. 불같이 뜨거운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불붙이는 이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가져오신 화로는 모든 것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 같이 번제단에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이 보조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런 것들의 도움으로 모든 죄는 다 소멸 되었습니다.

Ⅶ.물두멍  (출 30:17_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출 30:17)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18)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19)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20)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21)

성막 문을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고 죄를 그곳에서 닦고 나면 물두멍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제부터 물두멍이 무엇인지를 보십시다.

1. 물두멍의 재료

여인들이 바친 놋 거울로 물두멍은 만들어졌습니다.(출 38:8) 놋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두명은 수족을 닦는 곳으로 성결을 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놋)의 피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그 놋은 여인들이 쓰던 거울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쓰던 물건이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육을 아름답게 하던 것이 영을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2. 물두멍의 내용

물두멍에 담긴 내용물은 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합니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이는 주님의 보혈은 어떠한 죄와 실수와 허물이든지 다 깨끗이 씻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결 되게 하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들을 그때, 그때마다 닦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물두멍의 목적

번제단에서 이미 죄를 씻었습니다. 이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형벌을 용서받았습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범죄 하게 됩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발을 못 닦이게 한 베드로에게 주임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너무나 강력한 단어입니다. 구원에서 낙오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자는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죄와 불신자의 죄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죄는 은혜 아래서의 죄이기에 사랑으로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죄는 율법 아래 있기에 멸망 아래 있습니다. 지금은 물두멍의 역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꿋하엿으니”(요 15:3)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0)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 17:17)

4. 물두멍의 위치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졌습니다. 일단 죄를 피로 번제단에서 용서받은 이후에 물두멍으로 올 수가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그런 사람만이 성결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5. 물두멍의 결과

만일 성소에 들어갈 때 수족을 물두멍에서 씻지 않고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출 30:20_21) 성결해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족을 물두멍에서 씻은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축복이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시 24:3_4)

이는 물두멍에서 손닦는 것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에 갈 수 있는 자격은 물두멍을 통하여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이는 물두멍에서 손 닦은 이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2)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 17:9)

이 말씀도 물두멍을 연상하고 한 말씀입니다. 손이 깨끗한 자는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거리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만만하기 때문입니다. 큰소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 말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마귀가 도망가게 됩니다.

한 마리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속에는 귀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이 다니다가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다시 와 보니 그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와 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 12:43:45) 귀신을 쫓은 후 성결 된 마음에는 성령이 임하여 지키게 됨으로 마귀는 다시 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을 통과한 마음은 물두멍으로 지켜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내 손에 깨끗함을 쫓아 갚으셨으니” 자! 이제 죄와 이혼하였고 물두멍에서 성결 되었으니 성소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셈입니다. 발걸음을 성소 안으로 옮겨 보십시다. 휘황찬란한 황금의 집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Ⅷ.결  론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가는 약도이다. 문 (오직 하나)에서 예수 믿고 번제단에서 죄를 버리고 물두멍에서 성령 받고 떡 상에서 말씀을 먹어 영적 건강을 얻고 등대에서 빛 된 사람으로 분양단에서 기도한 다음에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속죄소 (법궤)에서 만난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게 하는 복음의 뿌리다. 곧 성막은 예수님이다.”

성막의 7대기구

번호

기구

상징적 의미

관련성구

1

뜰  문

(성막의 문)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출27:16;39:40;요10:7,9

2

번제단

제사장과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출27:1-8; 39:39;

히4:14-15; 9:12-14,26

3

물두멍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30:18-21; 39:39; 요7:37-44

4

진설병상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출25:23-30;39:36; 요6:48,50,55

5

등 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출25:31-39; 39:37;

요1:9; 8:12; 9:5

6

분향단

중보기도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30:1-10; 39:38;           

롬8:34; 계8:3-4

7

법 궤

생명의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25:10-22; 39:35;         

요1: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