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신학



과정 신학이란 무엇인가요?

과정과 섭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역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하나님의 주관 즉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과정 철학에서는 그 섭리를 하나님의 변질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과정 신학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섭리로 이해한다면 섭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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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과정철학으로부터 발전된 신학이다.
찰스 하츠혼존 캅에 의해서 유명해졌다.
과정신학과 과정철학은 과정의 사상에 연관된다.
화이트헤드찰스 하츠혼은 신의 본질적 속성은 일시적인 과정에 의해서 영향을 주고 그리고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신론은 신은 모든 면에서 영원하고, 세계에 의해 변화되지 않으며,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본다.
과정신학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적 성격을 강조하여 신(神)도 변화해 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발전과정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
이 용어는 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기포드(Giffiord) 강연에서의 원고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강연에서의 원고는 1928~1929년, 출판은 1929년]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이것이 뚜렷한 신학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특히 시카고대학에서였으며 곧 널리 퍼졌다.
그 중요한 대표자들은 하트숀(C. Hartshorne), 오그덴(S.M. Ogden), 콥(J.B. Cobb), 헤밀턴(P.N. Hamilton), 피텡거(W.N. Ppttenger) 등이다.
이들은 다른 급진적인 신학자들과는 달리 유신론적이며, 신의 개념에서는 신의 창조와의 관련성, 자신에 대한 초월능력, 신의 양극성, 사랑이라는 신의 근원적인 속성 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자연, 인간 및 신적인 모든 과정은, 상호성과 참여를 수반하기 때문에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전통적인 신학의 '실체'(實體)에 대한 논쟁을 정적인 형이상학의 시대에 뒤진 유산으로 거부하고, '사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신은 과거의 조망도이며 현재의 관계및 미래의 목적인 이 '사건'을 자신의 사랑본성에 입각하여 받아들인 뒤 우주의 창조적인 진화를 위해 사용한다.
이런 중심적 개념에 따라 과정신학자들은 세계의 예외현상으로서가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강생을 본다.
과정신학에서 구원은 신이 피조물의 성과를 수용하는 것이며, 신은 성취된 모든 선을 수용하과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자신의 본성과 조화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천국지옥이란 창조의 성과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이들은 신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창조에 대한 참여와 이를 통한 작용으로 신중히 다루는 반면, 이러한 성서적 확신이 만들어진 이미지 자체를 신화화하는 것과 고전적인 일신론의 정적인 성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과정신학의 특징 및 평가>

1. `존재'보다는 `과정'이 실재에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재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을 강조한다.

2. 신은 인격성을 지니고 있는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성의 근거로서 끊임없이 새로 운 것에로 세계를 부르시는 `창조적인 동인(動因)'이다.

3. 이러한 신을 묘사하는 여러 종교의 다양한 신개념을 인정하며 이에 따라서 기독교의 `배타성' 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4, 신은 `창조자'이고 세계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또한 신은 세계가 창조되기 이 전부터 `선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신과 세계는 함께 있는 것이다.

5. 신은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초월성'보다는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재성'을 강조 한다.

6. 인간을 행위와 결단의 주체로 이해 한다. 세계 내의 실존으로 던져진 인간의 책임과 자기결정 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조건들이나 과거, 그리고 신에 의해 전적으 로 결정된다는 이해를 거부한다.

7. 신은 `원초적 본성'과`귀결적 본성'의 양면성를 갖는다. 그리스도와 원초적 본성을 동일한 실재 로 본다. 즉 성자와 창조적 변화의 힘과 신의 원초적 본성 셋을 동일시하고 있다. 성부는 원초적 본성의 성자와 귀결적 본성의 성령이 통일된 면에 있어서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신학의 신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의 멧세지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점을 말할 수 있다.

1. 과정신학은 '신'을 어떤 존재성을 가지신 실재적인 분이 아니라 창조성을 부여하는 어떤 '원리' 나 '동인(動因)'으로서 말함으로써'인격적인 신'을 거부한다. 이러게 되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나 그분께 드려지는 예배, 찬양, 기도등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것으 로 되고 마는 것이다.

2.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하므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근본적으로 배 치되며, 복음선포의 절박성을 흐리게 한다. 물론 타종교와의 대화나 동양과 서양의 신론 사이에 대화를 유도하는데에는 공헌할 수 있으나, 이러한것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뒤 흔드는 요소가 될 것이다.

3. 인간의 주체성의 강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데로 창조된 피조물,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하 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의미가 있다는 사실과 마찰을 빚고 있다.

4.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원리인'삼위일체론'의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성부,성자, 성령'이 라는 삼위의 구별성과 동일성을 함께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이면서 중심 적인 교리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론은 이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신중심적인 신학' 의 방향으로 또는 유일신론적인 방향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과정 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지속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과정 신학이 거짓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6:10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하지 않는 성품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은 고작 인간의 변덕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3:11).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그러나 과정 신학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최종 권위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 성품과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심 (이사야 6:3, 요한계시록 4:8),
주권자 되심(역대상 29:11; 느헤미야 9:6; 시편 83:18; 이사야 37:20),
유일하심 (신명기 6:4), 편재하심 (시편 139:7-10),
전지하심 (욥 28:24; 시편 147:4-5),
전능하심 (욥 42:1-2),
자존하심 (출애굽기 3:14; 시편 36:9),
영원하심 (시편 90:2; 하박국 1:12),
불변하심 (시편 33:11; 야고보서 1:17),
완전하심 (신명기 32:34),
무한하심 (욥5:9;9:10),
진리되심 (신명기 32:4; 시편86:15),
사랑이심 (요한일서 4:8, 16),
의로우심 (시편 11:7; 119:137),
신실하심 (신명기7:9; 시편 89:33),
자비로우심 (시편102:17),
은혜로우심(출애굽기22:27; 느헤미야9:17,31; 시편86:15; 145:17),
공의로우심 (시편111:7; 이사야 45:21),
자유하심 (욥 23:13; 잠언21:1).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속성을 이 세상에서 활발히 발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분의 창조물을 초월하시지만,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며 알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과정 신학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인간들과 내재된 차이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과정 신학의 인본주의 철학은 인류에게 구원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소망 없이 방황하게 되며 영원토록 지옥에 있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이사야 9:6-7;마태복음1:22-23;요한복음1:1,2,14;20:28; 사도행전 16:31, 34; 빌립보서 2:5-6 ; 골로새서 2:9; 디도서 2:13; 히브리서1:8; 베드로후서1:1)
예수님께서 사망하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지 않으셨다면 (로마서3:23;6:23;고린도후서5:21)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2;3:18;3:36;14:6;사도행전4:10-12;16: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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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내용을 중심으로 본 과정신학 논쟁

목창균/ 서울신대 교수 | 1994. 1.

현대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시사적 토대였던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반면, 환멸, 염세,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비관주의적 세계관이 널리 확산되게 했다.
현대인은 전쟁과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적 노력의 무익함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로부터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바르트, 브루너, 불트만 틸리히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과 인간 존재의 비극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으로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신학적 흐름을 주도했다.
한편 다윈(darwin)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과학적 세계관이 또다른 신학적 흐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신학과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이 그것이다.1
과정신학이란 말은 그 근원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좁은 의미로,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에 근거하여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전통을 말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샤르댕 또는 화이트헤드와 샤르댕 사상 모두로부터 유래하는 신학전통을 가리킨다. 화이트헤드가 과정 형이상학파를 대변한다면, 샤르댕은 과정사상의 진화론파를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을‘창조적인 전진’이라 부르고 그것을 어떤 정점(climax)을 향해 반복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반면, 샤르댕은 과정을 그가 오메가(0mesa)라 부른 정점을 향해 계속적인 진화단계를 거치며 일직선으로 상승 발전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2 샤르댕의 핵심사상은 진화의 개념이었으며 신학의 중심개념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이었다. 그는 다윈으로부터 유래하는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을 문화와 영적인 영역에 확대 적용했으며 전체 우주가 계속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진화의 오메가와 계시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필자는 과정신학의 두 흐름 가운데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미국의 과정신학의 논의를 제한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전통신학과는 어떻게 다르며 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과정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과정신학의 태동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철학개념을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세계가 불변적인 실체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을 수용했다. 특히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문제로 삼은 것이나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영향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종래의 세 가지 신 개념-즉 절대 군주, 냉혹한 도덕주의자 및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을 비판하는 한편, 기독교의 갈릴리적 기원에서 또 다른 신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부드럽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양극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 그것이다. 전자는 순수한 정신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대해 영향을 끼치나 그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후자는 현실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나타낸다.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신은 정적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그의 신이 철학적인 신이냐 혹은 종교적인 신이냐 하는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에서는 그의 신관을 단지 철학적인 신관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다른 편에서는 그것을 종교적인 신관으로 이해한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엘리(Stephen Ely)에 따르면,“형이상학이 도달할 수 있는 신은 종교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신이라 불리울 수도 없다.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적 분석으로부터 이끌어낸 신은 종교의 신이 아니다.”3
이 견해에 대해 루우머(Bernard M. Loomer)는 비판적이었다. 엘리의 저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종교철학에 대한 비전문가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이트헤드 사상의 풍성함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초한 전통적인 신관과 같지 않았다. 따라서 신의 주전적 의지와 존재 자체로서의 신 개념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기독교에 수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기독교에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신관은 기독교 계시의 하나님을 반영하며. 과정적인 신 개념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의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주장했다.5 멜러트(Robert B. Mellet)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아퀴나스의 신 개념보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보다 탁월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6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던 과정신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과정신학은 1930년 이후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과정신학파는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카고 대학교가 과정사상의 중심지가되었던 주요한 이유는 하트숀(Charles Martshome)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하트숀은 하바드 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요 그의 조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이트헤드의 저명한 해석자요 그의 원리들을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던 철학자였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화이트헤드 사상의 해석과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과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교수들을 연결시킨 사람이 하트숀이었다.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고전적 유신론(theism)을 비판하는 한편,‘신(新)고전적’유신론을 제시했다.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결코 능가될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그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신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관적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7 하트숀은 이것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불렀다.
헬라사상으로부터 기원하는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와 절대성을 높이 평가한 반면, 변화와 과정 및 관계성을 평가절하 했다. 전통신학은 이러한 편중적인 경항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자들은 성서의 하나님은 변화하는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적인 존재와 초자연적인 독립성과 절대성을 선언하는 언어로는 이러한 성서적인 관점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정과 생성, 관계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과 개념을 수용할 때, 성서적인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8 그들은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이 기독교의 계시를 반영할 뿐 아니라 전통신학의 절대자로서의 신 개념보다 성서의 증거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했다.9
이와같이 미국의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의 철학사상을 기독교 신앙에 도입하여 그것을 현대 세계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시카고 대학 교수로 과정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제 1세대 과정신학자들은 위이맨(Henry N. Wieman), 월리암즈(Daniel D. Williams), 루우머(Bernard Loomer), 멜란드(Bernard Meland) 등이다. 그후 월리암즈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로, 루우머는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으로 하트숀은 텍사스 대학교로 옮겨 활동한 것에 힘입어 과정신학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시카고 대학교에서 과정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제 2세대 과정 신학자들은 오그덴(Schubert M. Ogden)과 캅(John B. Cobb, Jr. )이다. 피텐저(W. Norman Pittenger)는 미국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어 영국에 과정신학을 소개했다. 과정신학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에서 가장 활력적으로 발전하여 다양한 기독교 전통 출신의 학자들을 매혹했다. 과정신학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그리핀(David R. Griffin), 하밀톤(P. Hamilton), 쿠씽(Cousins) 등이 있다. 한편 과정신학은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 즉 합리적인 요소와 경험적인 요소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형성된 신학경향이다.
첫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합리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합리주의적이며 논리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하트숀이 이를 대변하며, 주로 신고전적 유신론을 주장했다. 두번째 흐름은 과정신학의 경험주의적 전통이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경험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위이맨과 루우머가 이를 대변한다. 특히 루우머는 시카고 대학에서“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있어서 경험적인 분석 방법의 신학적 의의”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0 이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적 방법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루우머는 화이트헤드를‘합리적인 경험론자’로 간주했다. 한편, 세번째 흐름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체계를 보다 명백하게 기독교 신학적인 방향에서 취급하려는 경향으로 캅이 이를 대변한다.

과정신학설
과정철학은 존재를 실재(實在)로 보는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 ontology)을 거부하고 생성과 과정을 실재로 보는 사상이며, 이것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한 것이 과정신학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초자연적 존재론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전통신학의 교리들은 폐기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과정신학자들은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연구방법을 수용하여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참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서의 역사성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본래의 자료들이 변경되거나 초자연적 교훈과 기적 이야기들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11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어떻게 재해석하며 무엇을 주장하는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과 세계, 창조론 및 기독론을 중심으로 과정신학의 핵심교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양극적인 본성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는 과정신학이 전통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신론을 가장 신랄히 비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론에서 과정신학과 전통신학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유신론(theism)은 하나님을 정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완전한 선과 동일시했다. 하나님을 인간의 희노애락에 참여하는 동적인 인격적 행위자로 보지 않고 불변적이며 고정적인 존재로 설명했다. 과정신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관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증거를 위협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미래의 일을 예상하여 인간에게 반응하는 반면,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신론을 성서적인 개념과 헬라사상의 혼합물로 간주했다. 고전적인 유신론은 이교적인 헬라철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12
과정신학자들은 전통신학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에서 찾았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은 부동의 동자, 지고의 존재, 천지의 창조자가 아니다. 위로하고 사랑하며 이해하는 신이요,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활동하는 신이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이 과정신학자들을 매혹시켰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에 대해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 전통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정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양극적인(dipolar)본성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을 단순히 절대자로만 보는 전통신학의 단일극적인 신론은 상대성과 생성이 결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 즉 신의 원초적인 본성과 결과적인 본성의 개념을 수용했다.13 하나님은 지극히 절대적인 동시에 지극히 상대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동시에 시간적이며 변화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추상적인 극과 구체적인 극 또는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추상적인 극에는 영원성, 절대성, 독립성, 불변성과 같은 필연적인 속성이 포함되며, 구체적인 극에는 시간성, 관계성, 생성과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속성이 포함된다. 이 두 극은 상호보충적이며 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낸다.14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하나님의 속성의 교리를 거부하거나 재해석했다. 전통신학이 정적인 개념이나 용어에 의해 하나님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는 달리, 과정신학은 동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해 하나님을 진술한다. 즉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정적이며 무감각한 실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과정 유신론은 실체를 과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역시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거부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증거와 기독교인의 경험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불변적인 절대자의 개념보다는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더 성서적이라는 것을 성서적 근거에 의해 입증하려 했다. 또한 기독교인의 경험에 호소하여 어떻게 불변적인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시했다. 따라서 쿠씽은“과정사상의 하나님이 헬라철학의 영원한 절대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가깝다”고했다.15 같은 이유로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무감각성(impassibility)의 개념을 부정했다.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서는 과정사상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은 반면, 캅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자로 인정했다. 한편 피텐저는 중간 입장을 택해 하나님을 인격적인 것의 근거인 동시에 인격적 범주를 초월하는 분으로 묘사했다.16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무시간성(timelessness) 혹은 영원성의 교리를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있으면서도 불변적이라고 하는 것이 모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시간적이며, 관계적이며. 가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의 구체적인 면 또는 결과적인 본성이다.17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서도 과정신학은 전통신학과 입장을 달리한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을 주장하지만, 완전에 대한 의미가 서로 다르다. 전통신학은 완전성을 더이상 아무 것도 첨부될 수 없는 것 또는 결코 능가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완성된 또는 성취된 완전이다. 반면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완전을 계속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하트숀에 의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피조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18

2. 만유재신론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일원론에 근거하여 만유재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자들은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 양극단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양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 또는 신고전적 유신론이라고 불렀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유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세계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만유재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적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19
요약하면,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 전통적인 유신론의 중심적인 관심사를 종합한 것이다.20 그러나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범신론과 구별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상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유신론과 구별된다.

3. 무로부터의 창조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나 지배자가 아닌, 진·선·미의 환상과 매력에 의해 영향을 미치는‘세계의 시인’또는‘세계의 위대한 동료’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 자신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정 속에 있고 과정이 하나님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도 세계도 정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양자 모두 신기성에 이르는 창조적인 전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21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전통신학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 무(無)로부터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창조자이며, 세계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것이 성서적 창조론의 핵심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창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근거하여 성서적 창조교리를 재해석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물론,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하도록 보존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선재하는 재료의 단순한 재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22 이 세계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온 것이다. 끊임없이 과정 속에서 존재했다 소멸하고, 다시 존재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로부터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로부터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트숀에게 있어서, 창조는 성장하도록 지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했다.23
이러한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따르면,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트숀은 이것을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유비에 의해 설명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세계와 같으며, 정신은 육체에 대해 내재하는 하나님과 같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영향을 받고 또한 주지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24
요약하면,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만든 창조자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이다. 반면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있는 재료로 세계를 재형성한 것이 창조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반자이다.

4. 과정기독론
과정신학은 기독론을 신론처럼 철저히 탐구하지 않았다. 신론이 중심 주제였던 데 비해 기독론은 파생적인 주제였다.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은 기독론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멜란드가 과정사상의 관점으로부터 기독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과정사상 내에서 기독론에 대한 주요한 공헌을 이룩한 사람은 피텐저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신조는 칼케돈 신조(A.D.451)이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며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union)되어 있다는 양성의 교리를 명시하고 있다. 피텐저는 이런 고전적 신조는 더이상 현대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25 그것은 세계, 역사 및 인간의 경험을 현대인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고대 세계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캅 역시 성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교리를 거부했다.26 따라서 과정신학자들은 과정 세계관에 근거하여 기독론을 재구성했다.
피텐저는 예수를 다른 영역으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온 침입자 또는 신적인 방문자로 간주하는 것은 예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고대 헬라인들의 개념이며 현대인들은 그것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피텐저에 따르면, 예수는 1세기에 살았으며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진정한 인간이었다.27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나 목수생활을 한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진정으로 이 세상 안에 있었으며 이 세상에 속했던 자로 간주되었다. 예수의 모든 것은 인간적이었다. 이것이 피텐저가 본 과정세계 안에서의 예수의 위치였다.
피텐저는 예수가 말씀이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지점이라는 데서 예수의 의의를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적인 행위의 일치점이다. 창조적인 말씀이 우주 전체에 임재하며 활동한다. 예수 안에서 그 말씀이 육화(肉化)되었으며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대한 사랑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28
피텐저의 견해에서 보듯이, 과정신학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선재성과 신성, 성육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론의 핵심 교리를 부정했다. 그것은 신화적이며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단지 보통 인간, 즉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팔레스틴 유대인으로 취급했다.

과정신학 논쟁
과정신학은 19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개신교신학과 가톨릭신학에 대한 주요한 경쟁자와 도전자가 되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존재의 형이상학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과정 형이상학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지지자들은 과정신학이 현대 정신과 조화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훌륭한 재해석을 현대인에게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비판자들은 과정신학은 현대 교회에 나타난 가장 위험한 이단이며, ‘이교(異敎)주의에 대한 항복문서’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29
과정신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재해석을 시도한 주제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핵심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며, 우주의 창조주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인 동시에 진정한 인간인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및 부활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속죄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가? 과정신학은 이런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이것은 전통신학에 대한 부정이요 공격이었다.
과정신학의 도전에 대한 전통신학의 응전은 신속한 편이 아니었다. 단지 과정신학에 대한 단편적인 비판과 평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과정신학에 대해 포괄적이며 비판적인 평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내쉬(Ronald Nash)가 편집한「과정신학」(Process Theology, 1987)이다. 이는 13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전통신학과 과정신학을 비교 분석하고 신학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에서 과정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과정신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신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에서 논쟁이 된 문제도 신론에 관련된 것이 많다. 신론세 관한 논쟁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이들 개념을 재해석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무감각(apatheia)’의 원리이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나 원인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자족적인 존재나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무감각성 혹은 무고통성의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이 교리의 포기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함께 고통받을 수 없는 하나님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무감각성의 원리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통에 구속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30
한편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특히 창조론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정하고 창조를 기존의 재료를 통한 재형성으로 해석했으며,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가 아니라 세계의 협력자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성서와 전통신학에 근거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피노크(Clark H. Pinnock)는 과정신학의 창조론이 비성서적임을 지적했다.31 왜냐하면 히브리어‘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오직 하나님의 활동에만 사용되며 하나님이 사물을 만든 재료를 결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한 암시가 있다(시 33:9).
과정신학의 기독론 역시 전통신학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과정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성육신, 동정녀 탄생, 무죄성, 신성, 대속적 죽음, 부활, 숭천, 재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등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따라서 기독론 역시 논란과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마무리

과정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 과학사상을 중재하고 종합하려고 한 시대적 산물이다.
진화, 상대성, 유기체 창조성 등 자연과학적 개념들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신앙을 현대 지성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전통신학이 존재와 절대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플라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과정과 관계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 사상의 특징은 동적인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실재를 존재나 본질과 같은 정적인 개념이 아닌 과정이나 생성과 같은 동적인 개념으로 파악했으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과정을 반복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한 것 때문이었다.32
전통신학이나 철학이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접촉점이 취약한 데 비해, 과정철학은 하나님을 세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그리고 세계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과 세계는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체계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려 한 과정신학은 많은 난점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헬라 철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고대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과정신학도 전통신학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닌 생성과 과정의 형이상학에 의존하는 것이 전통신학과 다를 뿐이다.33

둘째,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의 결점을 개선하려고 시작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개악(改惡)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이 성서적인 신관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전통신학은 하나님이 영원 불변하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반해, 성경은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따라 행동하실 뿐 아니라 후회도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신학의 정적인 신관을 동적인 신관으로 수정했다. 창조의 하나님을 진화와 변화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성장하는 하나님,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활동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은 전통신학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했다고 판단된다.

셋째, 과정신학은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것은 성서적 교훈과 반대이거나 성서로부터 이탈되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 세계 내에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성서의 증거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기독교 핵심 교리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 세계 창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구속적 죽음, 부활 승천, 삼위일체와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다.


주(註)

1. Ewert H. Cousins(ed.). Process Theology(New York:Newman Press. 1971) pp. 3∼5.
2. Ibid. p. 9.
3. 엘리는 그의 저서 The Religious Availability of Whitehead′s God 에서 화이트헤드의 신의 종교적 이용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4. Bernard M. Loomer.“Ely on Whitehead′s God”, Process Philosophy and Christian Thought, Delwin Brown. ed.(Indianapolis: Bobbs-Merrill Company. 1971). pp. 264∼286.
5. Ewert H. Cousins. (ed.). Process Theology(NewYork: Newman Press. 1971). p. 15.
6. Robert B.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New York: Paulist Press.1975). p. 50.
7. Charles Hartahome.“Philosophical and Religious Uses of God”,Process Theology, Ewert Cousins(ed.) (New York: Newman Press. 1971). pp. 101∼117
8. W. N. Pittenger.“Process Thought : A Contemporary Trend in Theology”, Process Theology. p. 27.
9. Ibid.. p. 15.
10. Bernard M. Loom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Method of Empirical Analysis in the Philosophy of A. N. Whitehead”(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1942).
11.예를 들어, 캅은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이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한 것,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냐고 외친 것 등과 같은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p. 142.
12. Ronald Nash(ed). Prdcess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pp. 13, 39, 314.
13. 모든 과정신학자들이 양극적인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트숀, 오그덴 등은 그것을 수용했으나 캅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거부했다.
14. Kenneth Surin.“Process Theology).”David F. Ford. The Modern Theologians. vol.Ⅱ(Oxford:Basil Blackwell Ltd..1989). p. 105.
15. Cousins. Process Theology, p. 15.
16. John B. Cobb, 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1965) .pp. 188.
17. John B. Cobb. Jr. and David R. Griffin Process Theology(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76). p. 47.
18. Cousins. Process Theology, p. 14. Surin.“Process Theology.” p. 106.
19. Cousins. Process Theology, pp. 14∼15. 101 ff. 119 ff 하트숀은 선생과 학생의 유비에 의해, 그리고 오그덴은 자아와 몸의 유비에 의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했다.
20. John B. Cobb. Jr., 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ance. 이기춘(편역)「과정신학과 목회신학」(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1983). p. 61.
2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New York:Macmillan. 1969). p. 408
22. Nash. Process Theology, pp. 41, 145.
23. Charles Hartahoyne, Man′s Vision of God and the Logic of Theism(Chicago:Willets, Gark, & Co.. 1941). p. 194. Nash. Process Theology, p. 147. 참조할 것.
24.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대해서는 Willia L. Craig의 논문“Creatio ex nihilo”를 참조할 것.Nash. Process Theology, pp. 145∼172.
25. W. Norman Pittenger.“Bernard E. Meland . Process Thought and the Significance .”Cousins. Process Theology, p. 208.
26. John B. Cobb. Jr., Christ in a Pluralistic Age(Philadelphia:Westminster, 1975), p. 170.
27. Pittenger, p. 210.
28. Ibid., p. 213.
29. Nash. Process Theology, 서론을 참조할 것.
30. Surin.“Process Theology,”p. 109.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Herbert MoCabe. God Matters, pp. 39∼51. Richard E. Creel, Divine Impasilbility, pp. 140∼158을 참조할 것.
31. Clark H. Pinnock,“Between Classical and Process Theism.”Nash, Process Theology, p. 318.
32. Mellert, What is Process Theology, p. 51.
33. Nash, Process Theology, p. 22.
*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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