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3장 / 7대 절기


레위기 23장 -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
출애굽기 23:15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해 봅니다.

1 . 유월절(逾越節) - 넘을 유, 넘을 월, 마디 절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

레위기 23:4-5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 날짜 : 성력 1월(닛산) 14일 저녁
  • 유래 :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출 12:1~14)
  • 약속 : 죄 사함, 영생, 재앙을 면하게 해주심, 다른 신 심판, 하나님의 인
  • 예언 성취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한 역사는 인류가 죄악 세상에서 영적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자다(요 8장 32~3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어린양의 살과 피로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애굽에서 해방되었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죄악 세상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고전 5장 7절) 이날에 당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로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마 26장 17~28절, 눅 22장 7~20절).

2. 무교절(無酵節) - 없을 무, 삭힐 효, 마디 절 / 애굽( 죄악의 종노릇 하던 삶) 의 삶을 홍해에 수장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기념일 = 좌악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아 땅에 영원히 장사지냄의 상징(안식일에)

레위기 23:6-8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히브리어로는 맛차.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1월 15일
  • 유래 : 성력 1월 15일 라암셋에서 출발,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 홍해를 건너기까지의 고난.
  • 약속 :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됨.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심(마 5장 10절).
  • 예언 성취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홍해를 건너기까지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칠 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켰다(신 16장 3절, 레 23장 5~6절).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장장 6시간 동안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심으로 예언을 이루셨다. 신약시대에는 이날 금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막 2장 20절).

3. 초실절(初實節) - 처음 초, 열매 실, 마디 절 / 봄 절기 수확으로 첫 열매 첫 곡식의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제로 드림 =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열납되어진 부활승리를 가념한다.( 안삭후 첫날)

레위기 23:9-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초실절(부활절)

  • 날짜 : 무교절 후 첫 안식일 이튿날(첫 일요일)
  • 유래 : 홍해에서 상륙,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 전멸.
  • 약속 : 부활
  • 예언 성취 :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홍해로 들어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실 것을 뜻하고, 홍해에서 상륙한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것을 뜻한다. 구약시대 무교절 후 안식일 이튿날(일요일)에 처음 익은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께서도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전 15장 20절).

  • 날짜 :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가던 날.
  • 약속 : 이른 비 성령
  • 예언 성취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초대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장 1~4절).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五旬節) - 다섯 오, 열흘 순, 마디 절 / 이 때 고운가루로 누룩을 넣어 불에 구워 떡을 만드는데 이는 우리의 모든 의가 깨어져 가루가 되면 불의 성령을 받아 말씀을 증거할때 누룩과 같이 복음 학장이 됨을 의미한다.§ 넉달농사 §다음절기인 나팔절이 오가 전가지 4 개월이란 시간이 남는데 이기간에 마 28:19~20과 행1:8~9 절의 말씀처럼 복음이 땅끝까지 확장도어 이방인 구원을 이루는 은혜의 교회시대를 의미한다,이시가는 자금까지도 진행되고 았는 중이다

레위기 23:15-21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사도행전 2:1-47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 날짜 :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가던 날.
  • 약속 : 이른 비 성령
  • 예언 성취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초대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장 1~4절).

5. 나팔절 / 4개월 농사가간(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은혜시대)이 끝나면 7월1일에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온 백성이 추수한 곡식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이방인의 추수기가 끝나면 계8장의 일곱 나팔에 의해 환란 중에도 믿음을 지킨 계 14 장의 시온산애 주님과 함께 서있는 산부돈 자들을 의미한다.

레위기 23:23-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이요 성회라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일
  • 유래 : 모세가 첫 번째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가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지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모세는 들고 내려 오던 십계명을 던져 깨뜨렸고 백성들은 재앙을 받아 3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출 32장 1~28절). 이후 백성들은 죄를 뉘우치며 단장품을 제했고, 모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함으로 성력 7월 10일에 두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게 되었다(출 34장 4~35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십계명 받은 날을 대속죄일로 정하시고, 그로부터 열흘 전을 나팔절로 정하셔서 회개의 나팔을 불어 대속죄일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 예언 성취 :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하여 금송아지를 숭배한 역사는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세월이 흐르자 교회가 부패하여 태양신의 날들을 지키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대속죄일을 알리는 나팔을 분 것같이 윌리엄 밀러 당시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 재림 운동이 10년 동안 일어났다.

6. 속죄일(贖罪日) - 속할 속, 허물 죄, 날 일 /  이 민족적인 죄를 씻음빋기 위해 여호와 앞에 성횔로 나아가는 대 속죄일이다. = 이는 예수님 께서 나팔절기의 완성으로 재림 하신후에 대접 재앙으로 적 그리스도를 멸하시고 주의 천년왕국 직전에 첫째 부활에 참예한(계20:4~5) 어린양이신 주님을 의지마므로 죄에서 씻음 받은 자들의 공의로운 속죄언약의 완성의 의미이다.( 사35장, 사65:17~25)

레위기 23:26-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0일
  • 유래 :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 돌비를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
  • 약속 : 죄 사함
  • 예언 성취 :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자 십계명이 대속죄일에 다시 허락된 것같이, 1844년 10월 22일(성력 7월 10일) 대속죄일에 진리가 일부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한 구약의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아사셀 수염소에게 백성들의 모든 죄를 안수한 후 광야로 보내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는 아사셀 수염소로 표상된 사단이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무저갱 속에 갇혀 있다가 지옥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7. 초막절(草幕節) - 풀 초, 장막 막, 마디 절  / 이스라엘이 모새로부터 죄악된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 동안 구름가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초막을 잣고 장막 생활을 했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장막절,수장절이라함) = 이는 애굽과 같은 환란이 지나고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광야에서처럼 살아있는 주의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천년왕국안에서의 백성된 삶을 의미한다.

레위기 23:33-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 날짜 : 성력 7월 15~22일
  • 유래 :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다. 이에 백성들이 성막 재료를 넘치도록 가져왔다(출 36장 3~5절).
  • 약속 :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전도, 늦은 비 성령(요 7장 37절, 슥 14장 16~18절)
  • 예언 성취 : 초막절에는 무성한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어 거하는 규례가 있었다.
    성소 재료와 나뭇가지는 모두 구원받을 성도들을 상징하므로(계 3장 12절, 엡 2장 20~22절, 사 60장 21절, 61장 3절),
    초막절은 구원받을 성도들을 모으는 복음 사업으로 예언이 성취된다.

제8일의 큰 성회

초막절을 일주일간 지낸후 8일 째에 거룩한 큰 날로 다시 모였다.(민 29:25, 레 23:36)
주의 천년왕국 초막절을 지낸후에 영원한 안식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한 천국 세계를 의미 한다고 본다(계 21~22장)
8일은 첫째로 난자 8일만에 할례를 통해 죄사함 받는 날이요,
둘째는 안식후 첫날인 8일 째에 주님이 부활허산 날이요,
셋째로 인간 역사 6천년과 주님의 왕국1천년이 지나 8천년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올라움을 받는때가 성경에 가록한 제8일의 거룩한 큰 성회를 의미한 것이다.(레 23:39, 사 66:1)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통해 인간 구속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경 전체로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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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다.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 23:2).
이스라엘 민 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무교절 - 그리스도의 친교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 -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
나팔절 -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 - 그리스도의 속죄
초막절 - 그리스도의 심판


 

​여호와의 3대 절기와 이스라엘의 농사

1. 여호와의 3대 절기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의 그림자이다.
또한 농사의 목적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함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얻기 위하심이다(고전 9:10).
세상 농사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나님의 농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시대별로 다른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눅 16:16).
또한 농사의 끝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추수의 때가 있다(계 14:6-7).

여호와의 3대 절기는 하나님의 3가지 농사를 예표한다.
여호와의 3대 절기로는 출 23:14-16에서와 같이 '무교병의 절기'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과 연종에 모든 수확을 거두어 저장하는 '수장절'이다.

<무교절, 유월절>

· 무교절은 율법시대를 예표한다.

· 율법시대는 애굽에서 마지막 유월절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마감되었다.(출12:7-11, 요13:1)

· 또한 주님은 삼일 후 초실절날 약속에 따라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전15:23).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 맥추절은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 교회시대의 농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심으로 시작되었다(행2:1-3). 또한 교회시대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의미의 맥추절에 성령의 첫 열매(롬8:23,약:18,계14:4)가 하늘로 수확됨으로서 마쳐질 것이다.

· 마13:39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때에는 추수꾼을 보내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영어성경은 '밀'로 표현됨)은 곳간에 거두어진다(마13:30).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 수장절은 천년왕국시대를 예표한다.

· 연종에(세상나라의 끝) 모든 농사의 작물을 거두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안식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하여진다(레 23:39-43). 초막은 결핍이나 초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와 지켜주심을 의미한다(시27:5).

· 일시적인 광야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하였던 것과 같이 일시적인 천년왕국 후에는 영원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야에 거할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불기둥이 그들을 비쳐주었지만 영원한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수가 있을 것이며(계22:1-2) 어린양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계21:23).

2. 이스라엘의 농사의 4가지 주요작물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4가지 주요 작물이 있다(대하2:15, 계6:6). 이는 보리, 그리고 기름포도주이다.

<보리와 밀; 곡물농사>

· 곡식농사보리와 밀이 있으며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밀의 대용작물 혹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또한 보리농사는 율법시대를, 밀농사는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주님께서는 초실절에 보리농사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첫 열매는 밀농사의 첫 열매(출34:22)가 거두어지는 맥추절에 있을 것이다(출23:16).

· 또한 추수시기별로 구분해 볼 때 추수를 시작할 시기에 얻는 첫 열매본격추수기와 추수가 끝날 무렵의 이삭줍기추수가 있다 (출23:19, 룻2:23).

· 여호와께서는 곡물의 첫 열매에 관한 제사의 방법을 지시하실때 곡물에 따라 다른 방법을 주셨다. 보리의 첫 열매는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가져가 요제로 드리고(레23:10-12), 50일이 지난 후 밀의 첫 열매는 가루를 내어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제사장에게 드려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야 한다(레 23:16-17, 20).

· 또한 레23:22에서는 밀을 추수할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또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것으로 남기라 하셨으니 이는 이삭줍기 추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 23장에서는 밀 추수의 3종류를 언급하였지만 보리는 오직 첫 열매만 언급이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포도와 올리브; 열매농사>

· 포도주틀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행하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사63:3, 욜3:13, 계14:20).

· 올리브 농사는 이스라엘의 농사중 마지막 작물이다. 또한 올리브 열매에서 얻어지는 감람기름의 주목적은 태워져 빛을 발함이다. 광야시절 여호와의 장막 안에는 감람유 등불은 항상 빛을 발하였다. 마지막 농사인 감람열매는 천년왕국의 농사 즉 영원한 복음의 열매인 것이다. 광야의 장막 안 등대에서는 감람유가 항상 태워져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냈듯이 영원한 복음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내용을 갖는다(계14:6-7).

<작물별 추수시기>

· 보리농사의 추수4-5월에 있다.

· 밀농사의 첫 열매5-6월에 시작된다. 이후 추수기는 3개월 정도 지속되어 이삭줍기로 마쳐진다.

· 포도의 수확8-9월에 있게 된다. 또한 포도주틀을 밟는 시기와 밀의 추수(타작마당)의 시기는 맞물린다(민18:27,30).

· 올리브열매의 수확은 연종에 있어 9월 중순-11월 중순경이다. 올리브열매의 타작은 포도수확 이후에 있다(사24:13).

위와 같은 모든 농사들이 끝나면 작물들은 거두어져 저장되고 다음해의 새 농사가 준비되는것 처럼, 영원한 복음을 끝으로 인간경작의 농사는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 곡물의 제사방법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보리농사의 첫 열매인 초실절(9-14절)과 밀농사에 해당하는 오순절(15-22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실절

·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이 거두어져 제사장에게로 주어지며,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린다.

· 주 예수님께서는 초실절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눅22:69,히12:2).

<오순절>

· 보리의 초실절 이후 50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데, 이는 밀의 첫 이삭(20절)을 빻아 고운가루로 만들고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17절). 누룩으로 구워진 떡은 죄의 성정(누룩은 죄악을 상징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한다.

· 주님의 부활이후 50일째 날이었던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밀농사의 추수 때가 이르러 성령의 첫 열매가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함을 입게 될 것이다(계14:4).

· 율법시대가 출애굽시의 유월절에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유월절에 이중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시대도 역시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으로 시작하여 어느 한 맥추절(오순절)날에 인류 가운데 첫 구속함을 받은 첫 열매(약1:18, 계14:4)가 거둠어 짐으로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밀의 첫 열매는 보리의 첫 열매와 같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진다. 즉 성령의 첫 열매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부활·휴거되어 대환난시에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계12:12,13:6)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밀의 추수는 세상나라의 끝(마13:30,39) 시기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마24:29-30)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루매 곡식이 공중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계14:14-16, 살전4:14-17, 살후2:1-3,7-8).

· 이스라엘에서는 농부가 사는 집과 밭의 중간지점에 곳간을 지어놓고 수확된 알곡을 곳간에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의 알곡성도는 하늘과 지상의 중간지점인 공중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밀의 이삭줍기 추수는 주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멸하신 후(고전15:23)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게 된다. 땅에 남겨진 밭의 모퉁이와 떨어진 낱알들은 이삭줍기 추수로 거두어짐과 같이 늦게 익어진 성도는 땅에 남겨지나 천년왕국 직전 이삭줍기의 추수에 이기는 자로 부활·휴거되어 1,000년간 주님과 함께 열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와같이 알곡은 익는 순서에 따라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다(계 22:16).
일출 직전에 나타날 때 깨어 있는 자들만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첫 열매의 자격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때는 대환난기이며 일출은 천년왕국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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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맷 스맷서스트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맷 스맷서스트

맷 스메서스트는 리치먼드에 있는 River City Baptist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202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 자료 사이트 /  https://www.tgckorea.org/author/424


[‘복음과 도시  예수]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진리를 간결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종종 진리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진리를 가리기도 한다.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이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첫째,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렘 32:27) 그렇기에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신다.(히 13:5)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해서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문만이 아니라 모든 창문까지 전부 닫아버리는 이야기로 가득하다.(잠 16:9; 19:21, 행 16:6~7)

둘째,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참으로 은혜로운 진리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경우 대부분은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안전을 말한다. 몇 년 전 어느 폐쇄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다. “…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18) 그런데 완벽하게 안전할 거라고? 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적 안전은 그중 하나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는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좋게 본다면 이 말은 항복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험 변명 두려움 등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러나 아주 교묘하다. 왜냐하면 싸우고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이 말은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녹록지 않다. 사도 바울이 석양과 낮잠 대신 군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농부, 달리기 경주장과 권투 시합장을 예로 든 이유다. J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독교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돼야 한다.”

넷째, ‘감당 못 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기에 그 한계를 넘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 못 할 정도의 일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이 구절보다 더 많이 성경 말씀으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 돕는다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즉 우리를 위해 오셨다.(마 9:12~13, 눅 19:10)
기독교의 핵심은 찰스 스펄전 목사가 말한 바와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맷 스맷서스트

◇미국 복음연합(TGC) 총괄 에디터이며 ‘Before You Open Your Bible’의 저자이다.



죽음 - 죄의 결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18:20)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 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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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 -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

일반적으로 가장 회피되는 단어는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향하여 정해 놓으신 이치(히 9:27)가 죽음이므로 세상을 향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이를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와 형벌 (창 2:17; 3:19; 롬 6:23; 고전 15:21; 약 1:15)로서 우리 삶의 일부가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Augustine)은 죄의 형벌이 곧 죄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은 죄악된 상태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임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며 모든 삶에는 항상 죽음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종교개혁자 칼빈 (John Calvin)의 주장 (<기독교 강요>, 3.9.4)은 합당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 1:21).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표현하며 (전 2:7; 창 3:19; 약 2:26) 이로 인해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롬 5:12, 17).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시 90:7, 11), 심판 (롬 1:32), 정죄 (롬 5:16), 저주 (갈 3:13)로 표현된다.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죽음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엡 2:1-2;겔 18:4, 20; 롬 6:23).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셋째,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을 들 수 있다 (계 20:14).

이는 앞서 설명된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 (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킨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결과는 이렇게 저주와 형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번민과 방황,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형벌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무서운 적과 가장 큰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대적이 아니라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가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이기셨으므로 (고전 15:55-56) 죽음은 이제 정복된 원수에 불과하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이었으므로 (요 8:44)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예수를 시험했고 (마 4:1-11), 더러운 영들을 보내었고,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서 그를 죽이기를 꾀했다 (눅 22:3; 요 6:70, 13:2, 27).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거룩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사탄의 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음부의 권세는 결국 패배 당했다. 오리겐 (Origen)과 이레니우스 (Irenaeus)를 포함한 몇몇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했던 속전설은 사탄이 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사탄의 노예인 죄인들을 속량하셨다. 오리겐은 우리가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전 6:20)는바울의 고백을 자주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게 지불한 속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전설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하셨다는 성경적 진리를 충분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단지 사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원래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었던 죽음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탄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뜻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복음의 핵심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

그러나 이렇게 영생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사탄은 그들의 성화를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하도록 총력전을 펼친다 (벧전 5:8).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실제적 악이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세력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당장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가? 이미 구원받아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경륜 속에서 죽음을 성화를 완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화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지나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게 될 때 비로소 더 나은 본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죽음을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빌 1:20-23).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예비된 상급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므로 이에 대한 명상은 희망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로 다가오게 된다 (롬 14:8). 죽음은 세상에서 한 평생 지속되었던 영과 육의 싸움의 종식을 가리키며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영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아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지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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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성서적의미

기독교의 죽음의 이해의 특색은 윤리적 성격에 있다고 본다.
즉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윤리적 차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는 죽음이 단지 인간의 운명이며 자연적 사건이라는데 머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적으로 죽음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윤리적 극복을 추구한다.
⽄런 입장에서 기독교는 우선 죽음의 현상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한다. 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은 죄의 대가를 지불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해결의 길이 열리고 부활의 영광 속에서만 그 완전한 답이 주어진다.

기독교는 죽음의 문제를 앞에 놓고 몰트만(J. Moltman)의 말대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즉 신정론(Theocracy)의 질문이다. 왜 이 세상은 불의의 세력이 판을 치고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가. 즉 기독교는 고난과 죽음의 문제를 신정론적인 윤리적 물음에서부터 다룬다. ⽄독교의 신앙을 그런 각도에서 다룬다면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반항과 항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죄가 죽음을 결과하였고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며 의로운 빛의 자녀들을 괴롭혔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존재론적으로 극복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활로 이어지며 영생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극복 그것이 기독교의 죽음이해이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요 상실로서 영과 육의 분리이다. ⽄경은 절대로 죽음을 존재의 폐기나 중지로 다루지 않는다. ⽄경은 죽음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맥박이 멎고 호흡이 끊어지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요 11:11-14).

②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

인간이 하나님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시인간(原始人間)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도 단절되고, 조화의 관계도 파괴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적 죽음이 발생했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단절이 생겼다. 이 분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영적 죽음으로 상존해 있는 것이다(엡 2:1).

③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은 요한게시록 21:8에 기록한대로 둘째 사망으로 하나님의 面前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것이다. ⽄째 사망이란 악인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계 20:8, 14). 이 죽음에도 본질적인 죽음이 수반되고 있으며, ⽄ 죽음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그의 사자들에게도 임한다(마 25:41).

이제 성서를 통하여 좀더 세밀하게 죽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에 나타난 죽음

초기시대에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였다. ⽄것은 곧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일방적인 확신이 있었다는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생명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집약해보면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뜻하며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칠 수 없는 단절된 상태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죄와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죄성 여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서의 삶을 죄를 멀리하는 생명의 삶이라면 반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죄와 결탁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이 ⽄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은 그 자체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1) 죽음의 허무성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것은 구약시대의 사람에게 있어서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온 세상의 길을 떠난다"는 ⽄구는 죽음에 대한 담담한 의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는 죽은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의식과 장례식에 대한 애도의 기사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생명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죽음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낸다.

(2)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구약에서는 죽음을 곧 죄와 벌로 연결시켜 생각하려 했다.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관념은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벌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으며 불멸불사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이 죽음이 세상에 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란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형벌인 것이다. 이런 내용은 구약의 지혜 문학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악을 좇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자이며"(잠11:19)

"어리석은 여자의 유혹에 자신을 내 맡기는자"(잠7:25-27, 9:18)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들의 경우에 죽음은 자연적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귀한 선물의 성격을 지닌다. 결국 죽음은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할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기 생명을 이해하지 않고 신뢰와 감사로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성취하려는 자의 결과이다.

그래서 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절망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축복으로서의 죽음

구약성서에서 이상적인 죽음은 노년기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한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죽음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죽음으로 창세기 25장 8절에서 그런 죽음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백발의 노년에 이르러 늙고 만족하게 산 다음에 죽었으며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 함께 있었다."

이런 죽음은 성취된 인간의 마무리로서 누구나 죽어야 할 죽음이지 특정한 인간의 죽음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삭과 다윗과 욥도 만족한 죽음을 죽었으며 (창 35:29, 욥 42:16, 대상 29:28) 그들의 죽음은 음울한 결말이 아니라 평화로운 성취였다. 즉 고령과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행복한 성취일 수 있으며 풍성한 축복의 생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정리해 보면, 우선 죽음은 일반적인 자연스러운 경계선이고 생명의 유한성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죽음을 누구나가 겪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신약성서에서의 죽음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움 이전까지는 죽음이 구약성서의 사상 아래서 반영되어 왔다. 즉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을 얻게 된 것처럼 죽게 되었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인류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강조되었던 죽음이 실재 한다는 사실은 이제 객관적인 사실이 된 것이다.

(1) 절망을 넘는 죽음

신약의 죽음관은 희망의 죽음이다. 바로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 희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부활의 희망인 것이다. 그레사케(Greshake)에 의하면

"형제들아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사람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 소비하여 없애는 것이 죽음이며 생명을 버리는 길"이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죄의 벌로서 조명된 구약시대의 죽음과는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는 옛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같이 새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에 의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라서 신약의 죽음 이해는 이미 우리는 죄와 옛사람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이 우리를 예속하지 못하고 죽음은 희망을 가져오는 제 2의 출발로 말하고 있다.

(2)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순교나 진리의 수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철저한 희생의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또 우리를 대신해서 그를 죽음으로 내어준 죽음이다. ⽄봉랑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의 죽음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죽음"이라고 했다. 즉 그가 십자가를 맞이한 것은 인생의 허무와 좌절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을 가지려는 1차적 행동이었다. 예수가 보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은 죽은자에 대한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가 가진 신관으로 죽음에 대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모습에 대한 견해이다.

둘째는, 유대인과 함께 했던 것으로 죽음이후 부활하게 된다는 예수의 확신있는 견해이다. 또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실 때도 죽음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표현하신 부분은 생명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임을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죽음의 이해를 살펴보면,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와 맺은 인격적인 관계의 빛 속에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미 바울에게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음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존재를 깊이 생각 하도록 요구하셨다. ⽄것은 이미 죽음이 신앙안에서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임을⽄생각케 하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나타낸 죽음의 반응을 시련의 하나로 보고 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심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죽음의 심각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기독교인의 현세의 삶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을 막아주는 관점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의 모형을 새롭게 제시한다. 요 12:24이나 6:54는 밀알의 비유와 성찬의 비유로 자신을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 한다면 예수와 함께 그날에 다시 살 수 있다는 삶을 향해 죽음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 서신의 죽음의 이해

바울서신에서는 죽음의 기원과 죽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있다.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세례의식과 부활로 증명되는 죽음의 극복성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있는 피조적 한 실재로 보았다. 죽음이란 철저히 상대화되고, 죽음은 그 쏘는 가시의 권세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첫째, 바울은 죽음의 기원과 죽음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 땅에 죄가 들어 왔고 그 죄의 벌로서 죽음이 주어졌으며 온 인류는 죽음의 그림자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런 죄로 인하여 죽음에 놓인 인간을 위하여 직접 죽음을 취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형벌로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율법 아래 나셨고"(갈 4:4) "죄 많은 인류의 모습을 몸소 취하신"(롬 8:3)것으로 온 인류와 유대를 같이 보시고 인류가 받을 형벌을 대신 지신 사랑의 죽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무죄하시지만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그⽄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조물의 죄와 죽음의 역사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바울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죄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세례의식을 통하여 표시하고 있다. 로마서 6:3과 빌립보서 3:10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죽음에 묻히며 그 분의 죽음에 합치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소극적인 면에서 본 신비스러운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죽는 죽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권세가 나타내는 모든 사물의 질서에 대한 죽음이다. 즉, 죄에 대해서와 우리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이며 육과 율법에 대한 죽음이고 세상의 모든 원리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조직신학에서의 죽음

성종현은 "기독교는 죽음으로 부터 출발한 신앙공동체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사건이요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나아간 부활의 씨앗 사건이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삶에 대한 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전제라고 말한다.

성종현은 [장신원보](1989.11.6)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죽음"이라는 그의 글에서 몇몇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다루고 있다. 개혁자 루터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깊은 수면에 비유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지지한다. 한편 칼빈은 "만약 누가 오늘날도 경건한 신자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잠든 성도는 천상의 생명의 즐거움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영광은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날까지 유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철저종말론

본 이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쿨만(O. Cullmann), 바르트(K. Barth), 엘러트(W. Elert), 퓨리(R. de Pury)와 융겔(E. Jungel) 등으로 이들의 죽음 이해는 완전 죽음설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어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전적죽음 또는 완전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하고 선한 것, 생명 자체까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만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믿어 온 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초대교회)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나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의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사건 위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희랍인들의 신앙인 영혼의 불멸 사상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나 바울이나 초대교회는 영혼의 불멸을 가르틴 것이 아니라 부활체와 영체와 죽음 후의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을 후세의 교회가 희랍인의 사상인 영혼의 불멸론과 혼돈해서 그것이 현재까지 전달되어 왔다고 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떠난다거나 어떤 장소로 이동된다는 생각은 이방종교적 사고라고 비난한다. 이들에 의하면 영혼불멸설은 비기독교적이다.

(2) 영혼불멸설

본 이론은 여러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2 서서 신앙고백, 소요리 문답서)에서 지지하는 이론이다. ⽄,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죽음이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이며, 육체적 존재의 종말을 의미한다. ⽄떤이들은 영혼부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시대에 활기띤 사상이다. ⽄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영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 W.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구약성서는 개인의 사후에 그의 영혼이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여러 곳에 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0:28로 볼 수 있으며, 요한복음 11:25도 죽음 후에도 그 사람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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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 : 허물 죄

罪자는 ‘허물’이나 ‘죄’, ‘잘못’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罪자는 网(그물 망)자와 非(아닐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본래 ‘허물’이나 ‘죄’라는 뜻은 辠(허물 죄)자가 쓰였었다.
辠자는 自(스스로 자)자와 辛(매울 신)자가 결합한 것으로 고대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의 코를 잘라 처벌한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辠자가 ‘황제’를 뜻하는 皇(임금 황)자와 비슷하여 진시황 때는 이를 피해 새로이 만든 글자가 바로 罪자이다.
罪자는 ‘아니다’나 ‘나쁘다’라는 뜻을 가진 非자에 网자를 결합한 것으로 ‘잘못(非)을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网)’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죄 : 넉 사(四) + 아닐 비(非)죄는 네 가지 아닌 것을 의미한다.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성경에서 죄를 정의하는 구절을 살펴봅시다.

1. 불신(요 16:9)
참조 - 롬 14:23, 막 16:16
2. 불선(약 4:17)

3. 불의(요일 5:17)
4. 불법*요일 3:4)


죄의 본성


I. “죄” 용어


1. 구약성경

(1)  chattaath, chattath--표적에서 빗나감.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서 벗어남. 탈선
(2) a'won -부정, 죄책, 도덕적인 비틀어짐. 고결성과 정직성 결여. 품성과 행위에 있어서 결함
(3) pesha - 권위에 대한 반항. 하나님에게 항거나 반역
(4) a'bar - 범법(transgression), 지나치는 것, 건너가는 것.
(5) resha' - 사악함, 경건치 못함, 타인과의 관계 파괴
(6) ma’l - 위법행위 배반하는 행위
(7) 'ajen - 우상숭배, 부정, 허영
(8) remiyyah - 거짓, 속임, 표리부동


2. 신약성경

(1) hamartia-- chattaath와 같은 의미로 “표적에서 빗나감”
(2) anomia - 무법, 위법, 불법(lawlessness)
(3) paraptoma - 배반행위, 실수, 차질
(4) parabasis - 위법(transgression)
(5) asebeia - 불경건 (irreligion), 경건치 못함
(6) parachoe -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음, 부정확하게 듣는 것.
(7) adikia - 불의, 불법, 부정, 정의와 진리에 반대
(8) apeitheia - 반역

위의 성서적 용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 불신과 불경건, 범죄, 정직성의 결여, 불법, 반역, 변절, 왜곡, 가증한 것, 무지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비추어 보아 죄라는 용어가 대체로 외적 행위, 내적 상태, 관계의 파기를 나타내는 세 범주에서 사용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II. 죄에 관한성경의 4대 정의


1.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죄는 외적 행위이나 그 뿌리는 내적 상태에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위 인용문은 “죄=불법”이라는 도식으로 죄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불법이 외적인 행위에 국한 된 문맥이 아니다. 위 인용문을 이끄는 대전제에 다음 말씀이 선행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1기별, 320).

그리고 “죄=불법” 이라는 정의라는 문단 안에서 동 불법을 인간의 내면 상태와 연관 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표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간 내면 상태를 묘사하는 다음 진술로 끝맺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롬 8:7)다.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1기별, 321).


2. 죄는 불신이다(롬 14:23; 요 16:9). 죄는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다.

3. 죄는 불의이다(요일 5:17). 죄는 내적으로 비틀어진 상태이다.


4. 죄는 불선이다(약 4:17). 죄는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결핍이다.


III. 죄의 본성


1. 죄의 본성에 관한 개요적 안내

(1) 죄는 缺性이나 결핍(privation)이다.

Augustinus 은 죄를 선한 것 안에 생긴 선의 결핍이나 상실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원래 볼 수 있는 시력이 있었으나 그 시력을 상실하여 눈먼 상태와 같거나 부상당한 팔과 같다.

피조적 존재는 그 제한성 때문에 이러한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 전 이런 결핍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죄의 필연적 결과로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결핍을 지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완전한 상태의 결핍에서 시작한 이 결핍성은 인간을 무제한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전 1:7).

Schleiermacher는 죄를 감성(sensuous nature)에 기인한 신의식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죄를 결핍으로 보는 시각은 근원적 존재에서 이탈한 존재원천의 결핍 즉, 독립성으로 보는 방향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죄를 선의 상실 정도로만 보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 죄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능동적 반역이나 반항이기 때문이다.


(2) 죄는 幻影이나 환상이다

Spinoza는 죄의식이 인간의 제한성, 즉 지식의 불충분에서 기인한 환영이나 환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고차원 수준으로 상승되는 경우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Ritschl 역시 무지에서 기인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죄를 부인하는 천박한 이해에 불과하다.


2. 죄의 본질적인 특성

(1) 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에는 독립성이 없다. 죄는 존재가 아니다(Sin is not "is."). 죄는 존재의 반대이다(Sin is opposite of "is."). 죄가 독립성의 결핍이라는 점은 실재(reality)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된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루터파 신학자 Matthias I. Flacius(1520-1575)가 죄를 분리된 독립적인 본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2)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계되어 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참회하는 고백을 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한 범죄를 곧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고 인식을 하였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한 관계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즉, 죄에는 관계적 특성이 있다.

죄는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 율법에 일치하지 못하는 범법 행위이다. 인간 마음 판에는 보편적인 도덕률이 새겨져 있다. 보편적 도덕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들어 있다(롬 2:14-1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죄는 도덕률과 연관 되어 있어 절대적 특징을 지녔다. 죄가 되던지 안 되던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지대는 없다.


(3)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은 인격체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중심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반이 된다.

Augustinus는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이 된다.


(4) 죄는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갖가지 죄악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지적은(히 8:10; 10:16) 마음에 이는 생각을 경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16-17).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구 즉, “죄된 본성의 욕망들(epithumian sarkos)"이다.

이 내적 상태에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뿌리도 포함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 주었다(5BC 1128).

“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치료, 372-373).


(5) 죄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은 유죄가 된다. 즉, 죄책이 성립되어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유전 받은 잠재적 죄책(potential guilt)과 죄된 행위를 한 결과인 실제로 범한 죄책(자범죄, actual guilt)이다. 하여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롬 1:18).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롬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오염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도덕적 성질의 부패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타락성을 지닌 채 탄생한다(시 51:5; 욥 14:4; 엡 2:3).


(6)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자기 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 자체는 교만의 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루스벨이 범한 길을 따른는 것이 된다(딤전 3:6).


(7)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죄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다. 그리고 자기 죄는 숨기고 남의 죄를 극대화시킨다.


(8) 죄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녔다.

Sin is "sui generis." -->Sin is "of its kind," "one of its kind,' or "unique type of its kind."


(9) 죄는 세력(power)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이지만 (존재론적 의미), 죄는 존재(being) 이 아닌 세력이다.
  a. 부정적인 세력이다.
      죄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된다(negative power).
  b. 죄는 자멸적 세력이 된다(suicidal power).
     죄는 항상 자기 파멸적 힘이 된다.
     이는 마치 모든 수를 곱하면 것을 제로로 만드는“O"과도 같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사 64:7).
  c. 죄는 기생적 세력이다(parasitic power).
     독립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림과 재림




초림과 재림에 관한 예언과 성취

 

구약의 예언

내용

신약의 성취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창 12:3)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마 1:1)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갈 3:1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또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워 영존하는 언약이 되게 하리라. (창17: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 아이나 네 노예 여자로 인하여 그 일을 네 눈앞에 근심거리로 두지 말고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창21:12)

이삭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1:2)

유다는 야곱의 아들이요,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요, 데라는 나홀의 아들이요, (눅3:34)

내가 그를 볼 터이나 지금 보지 아니하며 내가 그를 바라볼 터이나 가까이서 보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笏)이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모든 자녀들을 멸하리로다. (민24:17)

야곱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1:2)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눅1:33)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 (창49:10)

유다 지파에 속하심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王座)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눅1:31~ 33)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다윗에게 진리로 맹세하셨으니 그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로다. 이르시되, 내가 네 몸의 열매 중에서 취하여 네 왕좌에 두리라. (시132: 10~11)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마1:1)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이르되, 이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냐? 하되 (마12: 23)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라, 하니 (마22:41~42)

네 날들이 다해 네가 반드시 네 조상들과 함께 있으려고 가야 할 때에 내가 네 뒤를 이을 네 씨 곧 네 아들들 중에서 하나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좌를 영원토록 굳게 세우리라. (대상17:11~12)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정비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라. (사9:7)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심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1:32)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하리라. (렘23:5)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슥9:9)

오 하나님이여, 왕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왕의 왕국의 홀(笏)은 의로운 홀이니이다. 왕이 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 (시45:6~7)

왕으로서의 사역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요18:37)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마21:5)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笏)은 의의 홀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주에게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 하시고 (히1:8~9)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Prophet)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켜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Prophet)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켜 세우고 내 말들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 누구든지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리라. (신18:15~19)

대언자로서의 사역

그때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을 보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이시니라, 하더라. (요6:14)

그 무리가 이르되,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대언자 예수님이라, 하니라. (마21:11)

주께서 맹세하셨고 또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니 이르시되,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110:4)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 대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그분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신 분께서 그리 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그분께서 또한 다른 곳에서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심과 같으니 (히5:5~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계획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사9:6)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5:2)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심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8:58)

오 아버지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또한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골1:17)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하나님이라 불리심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마1:23)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7)

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속 중심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왕좌를 영원토록 굳게 세우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삼하7:12~14)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심

바로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그들의 자녀 된 우리에게 성취하셨다는 것이라. 그것은 또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바,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함과 같도다. (행13:33)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3: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마16:16)

이에 그들이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느니라, 하시니 (눅22:70)

주(LORD)께서 내 주(Lord)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110:1)

주(Lord)라 불리심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해 구원자 곧 그리스도 주(Lord)께서 태어나셨느니라. (눅2:11)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시편에서 다윗이 스스로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Lord)라 부른즉 어찌 그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눅20:41~44)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여자의 씨로 태어나심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갈4: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심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에 의해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보내어져서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 천사가 들어가 그녀에게 이르러 말하되, …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눅1:26~31)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9:25~26)

정해진 때(시간)에

태어나심

그 무렵에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조세 등록을 하게하니 (이 조세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 처음 한 것이더라.) (눅2:1~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5:2)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

그러므로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그 대언자시로다, 하매 다른 이들은, 이분이 그리스도시다, 하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나오시겠느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에서 나오시며 또 다윗이 있던 베들레헴 고을에서 나오시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이처럼 그분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 분열이 생기고 (요7:40~43)

요셉도 (다윗의 집과 혈통에 속하였으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시에서 나와 유대로 올라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도시에 이르러 자기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세 등록을 하려 하더니 그녀가 아이를 배어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거기 있을 때에 그녀가 해산할 날들이 다 차매 그녀가 자기의 맏아들을 낳아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그들을 위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더라. (눅2:4~7)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애통하며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기 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렘31:15)

유아 대학살이 벌어짐

이에 헤롯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우롱 당한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부지런히 물은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것의 온 지경 내에 있던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니라.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라마에서 애통하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기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느니라. (마2:16~18)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노라. (호11:1)

이집트로 피난가심

그가 일어나 밤에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이르시되, 이집트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러내었노라, 하셨더라. (마2:14~15)

그러할지라도 그 흑암은 그 땅이 괴로움을 당하던 때의 흑암과 같지 아니하리니 그때에는 그분께서 처음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가볍게 괴롭히시고 나중에 요르단 건너편 바닷길 옆 민족들이 거하는 갈릴리에 있는 그 땅을 더욱 심하게 괴롭히셨느니라. 어둠 속에 다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그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사9:1 ~2)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심

이제 예수님께서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떠나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경계의 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에 와서 거하시니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르단건너편 바닷길 옆 이방인들의 갈릴리여,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지역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하였느니라.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마4:12~1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말3:1)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 큰길을 곧게 만들라. (사40:3)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있음

요한의 사자들이 떠난 뒤에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네 길을 예비하리라,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자가 곧 이 사람이니라. (눅7:24~27)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의 광야에서 선포하여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니 이 사람은 곧 주께서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자니라. 이르시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분의 행로들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3:1~3)

이 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사11:1~2)

내 가 떠받쳐 주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선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성령님으로 충만하심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리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니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3:16~17)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시69:9)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충만하심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5~17)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갚으시리니 곧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리라. 그분께서 오셔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하라.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사35:4~6)

상한 육체를 치유하심

예수님께서 온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니라. (마9:35)

이제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자기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을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 분 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 세워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마11:2~5)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결박된 자들에게 감옥에서 놓임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요, 또 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을 포고하고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며 (사61:1~2)

상한 마음을 치유하심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 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자유 하게 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주께서 주의 원수들로 인하여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힘이 나오게 정하셨나니 이것은 주께서 원수들과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8:2)

어린이들을 영접하심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또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소리치며,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21:15)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옛적부터 있던 은밀한 말들을 말하리니

그것들은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해 준 바라.

우리가 그것들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주를 찬양함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다가올 세대에게 보이리로다.  (시78:2~4)

비유로 말씀하심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마13:34~35)

나 주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붙잡고 너를 지키며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들의 빛이 되게 내주리니 (사42:6)

이방인에게 빛이 되심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게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 (행13: 47~48)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

세상으로부터 불신 당하심

그러나 그분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으니 (요12:37)

내 원수 된 자들이 부당하게 나를 누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35:19)

미움을 당하심

내가 아무도 행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다 보았고 또 미워하였느니라. (요15:24)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3)

동족에게 배척당하심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요1:11)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사53:5)

죄인을 위해 희생당하심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롬5:6~8)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리니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리라.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스스로 목숨을 내 주심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으니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요10:17~18)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슥9:9)

나귀 새끼를 타심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 그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그것들 위에 얹고 그분을 그 위에 태우니 (마21:4~7)

참으로 내가 신뢰한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자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 (시41:9)

친구에게 배반당하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영으로 괴로워하사 증언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여 넘겨주리라, 하시매 (요13:21)

그분께서 아직 말씀하실 때에, 보라,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오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느냐? 하시니 (눅22:47~4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값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하매 이에 그들이 은 서른 개를 달아 내 값으로 삼으니라. (슥11:12)

은 삼십에 팔리심

그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라 하는 자가 수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를 너희에게 넘겨주면 너희가 얼마를 내게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서른 개로 그와 언약을 맺거늘 (마26:14~15)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것 곧 그들이 나를 평가하여 매긴 그 상당한 값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에 내가 그 은 서른 개를 취해 주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슥11:13)

피 값으로 토기장의 밭을 삼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수제사장들이 그 은들을 거두며 이르되, 그것은 피 값이므로 그것들을 성전 보고에 넣어 두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 하고

의논한 뒤에 나그네들을 묻기 위해 그것들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그러므로 이 날까지 그 밭을 피 밭이라 하느니라. (마27:5~8)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곧 내 동료인 자를 치라.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지리니 내가 내 손을 돌이켜 작은 자들 위에 두리라. (슥13:7)

그를 따르던 자들이 도망함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의 양들이 널리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1)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성취하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그분을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26:56)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내 책임으로 떠넘기며  (시35:11)

거짓 고소를 당하심

이제 수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분을 대적할 거짓 증인을 구하되 아무도 찾지 못하더니 참으로 많은 거짓증인이 왔으나 그들이 아무도 찾지 못하였더라. 끝으로 두 명의거짓증인이 와서 이르되, 이 자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마26:59~61)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사53:7)

고소를 당하나 침묵하심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실 때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 (마27:12)

빌라도가 다시 그분께 물어 이르되, 네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너를 대적하려고 얼마나 많은 것을 증언하는지 보라, 하되 예수님께서 여전히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이에 빌라도가 이상히 여기더라. (막15:4~5)

그는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그는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도다. (사53:8)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심

빌라도가 수제사장들과 치리자들과 백성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을 내게로 데려와서 백성을 나쁜 길로 이끄는 자라 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그를 조사하였으되 너희가 고소하는 일들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아무잘못도 찾지 못하였고 내가 너희를 헤롯에게 보내었으나 그 역시 전혀 찾지 못하였도다. 보라, 그는 죽을 일을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를 징계하고 놓아주리라, 하니 …그들이 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이 사람을 없애 버리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매 빌라도가 그들에게 세 번째 이르되, 도대체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이유를 찾지 못하였나니 …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하니 그들과 수제사장들의 목소리가 이기니라. 빌라도가 그들이 요구한 대로 되도록 선고하고 … 예수님은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23: 13~25)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주고 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 (사50:6)

침 뱉음을 당하심

그분께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치더라. (마27:30)

오 군대들의 딸아, 이제 너는 군대들을 형성하여 모일지어다. 그가 우리를 치려고 에워쌌으니 그들이 막대기로 이스라엘의 재판관의 뺨을 치리로다. (미5:1)

매를 맞으심

이에 그들이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분을 주먹으로 치고 다른 자들은 손바닥으로 치며 (마26:6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사53:5)

채찍에 맞으심

그때에 빌라도가 이런 까닭에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19:1)

자기들끼리 내 옷들을 나누고 내 겉 옷을 놓고 제비를 뽑나이다. (시22:18)

그분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음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뒤에 그분의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그들이 자기들끼리 내 옷들을 나누며 내 겉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나이다, 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마27:35)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려보며  (시22:14~17)

주의 : 다윗 왕 시대에는 십자가형이 없었고 돌로 쳐 죽이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십자가에 처형하는 방식은 BC200년경 로마인들이 받아들였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매 그들이 예수님을 맡아서 끌고 가니라. 그분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장소라 하는 곳으로 나가시니 이곳은 히브리어로 골고다라 하더라. 그들이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다른 두 사람도 그분과 함께 양쪽에 못 박으니 예수님은 한가운데 있더라. (요19:16~18)

…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범죄자들과 함께

못 박히심

그들이 그분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분의 오른편에 하나는 그분의 왼편에 있더라. (막15:27)

나를 보는 모든 자들이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주가 자기를 건지실 줄로 그가 신뢰 하였도다. 그분께서 그를 기뻐하셨으니 그를 건지시리로다, 하나이다. (시22:7~8)

나는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사오니 그들이 나를 보고 자기 머리를 흔들었나이다.  (시109:25)

멸시와 수치를 당하심

또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그분을 조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들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그분께서 그를 원하시면 이제 그를 건져 내실 것이라.그가 말하기를,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 (마27:39~44)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려보며  (시22:17)

사람들이 바라 봄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눅23:35)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시22:16)

 

손과 발을 찔리심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요20:27)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시22: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리로다. (슥12:10)

심장이 찔리심

그러나 군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4)

나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이 내 대적이 되었사오나 나는 스스로 기도할 뿐이니이다. (시109:4)

…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원수를 위해 기도하심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눅23:34)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는 일로부터 또 나의 울부짖는 말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나이까?  (시22:1)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라. (마27: 46)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 (시22:15)

십자가상에서 목이 마르심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 기록을 성취하시려고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그들이 또한 쓸개즙을 나의 먹을 것으로 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내게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였나이다. (시69:21)

쓸개와 식초를 받으심

이제 거기에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놓여 있으므로 그들이 해면을 식초로 적신 뒤에 우슬초에 달아 그분의 입에 대니라. (요19:29)

주의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 오 주 진리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구속 하셨나이다. (시31:5)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심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눅23:46)

그분께서 그의 모든 뼈를 지키시매 그것들 가운데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였도다. (시34:20) 

 

한 집에서 그것을 먹되 너는 그 고기를 조금이라도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말고 너희는 그 뼈를 꺾지 말지니라. (출12:46)

뼈가 꺾이지 않으심

이에 군사들이 가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그분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니라. (요19:32~ 33)

그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사53:9)

부자의 무덤에 묻히심

저녁이 되었을 때에 요셉이라 하는 아리마대의 부자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더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간청하매 이에 빌라도가 몸을 넘겨주라고 명령하거늘 요셉이 그 몸을 가져다가 깨끗한 아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것을 두고 큰 돌을 굴려 돌무덤 입구에 놓고 떠나갔더니 (마27:57~60)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 이다. (시16:10)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밝히 보이리로다.  (시118:17)

부활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족장 다윗에 대하여 거리낌 없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 그가 대언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서약으로 맹세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허리의 열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워 자기 왕좌에 앉히실 것을 알았고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더니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셨느니라. 우리가 다 그 일에 증인 이로다. (행2:29~32)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는구나. 그분은 일어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그들이 그분을 두었던 곳을 보라. 그러나 너희 길로 가서 그분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그분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그분을 볼 것이라고 고하라, 하니라. (막16:6~7)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며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선물들을 받으시되 참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받으셨나니 이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68: 18)

승천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엡4:8)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110: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다윗은 하늘들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나 친히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니라. (행2:34~35)

이렇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 (막16: 19)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시118: 22~23)

버린 돌과 머릿돌이 되심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읽어 본적이 없느냐? (마21:42)

이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행4:11)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See, I will send you the prophet Elijah before that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comes.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엘리야"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짖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을까요?
과연 그 엘리야는 누구를 말할까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케 하는 것을 전연 제외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귀절에 선지자 엘리야(세례 요한)가 그 전(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인데 그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약 시대를 두려운 날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 멸망 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한다.

선지 엘리야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눅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함은

그 때에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개척하겠다는 뜻이다.
도덕적 개혁이 진정한 종교를 발생시킬 수는 없으나, 진정한 종교가 나타날 때에 그것을 영접할만한 준비는 될 수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다(눅 3:4-6).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