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림과 재림




초림과 재림에 관한 예언과 성취

 

구약의 예언

내용

신약의 성취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창 12:3)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마 1:1)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갈 3:1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또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워 영존하는 언약이 되게 하리라. (창17: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 아이나 네 노예 여자로 인하여 그 일을 네 눈앞에 근심거리로 두지 말고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창21:12)

이삭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1:2)

유다는 야곱의 아들이요,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요, 데라는 나홀의 아들이요, (눅3:34)

내가 그를 볼 터이나 지금 보지 아니하며 내가 그를 바라볼 터이나 가까이서 보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笏)이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모든 자녀들을 멸하리로다. (민24:17)

야곱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1:2)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눅1:33)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 (창49:10)

유다 지파에 속하심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王座)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눅1:31~ 33)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다윗에게 진리로 맹세하셨으니 그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로다. 이르시되, 내가 네 몸의 열매 중에서 취하여 네 왕좌에 두리라. (시132: 10~11)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마1:1)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이르되, 이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냐? 하되 (마12: 23)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라, 하니 (마22:41~42)

네 날들이 다해 네가 반드시 네 조상들과 함께 있으려고 가야 할 때에 내가 네 뒤를 이을 네 씨 곧 네 아들들 중에서 하나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좌를 영원토록 굳게 세우리라. (대상17:11~12)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정비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라. (사9:7)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심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1:32)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하리라. (렘23:5)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슥9:9)

오 하나님이여, 왕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왕의 왕국의 홀(笏)은 의로운 홀이니이다. 왕이 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 (시45:6~7)

왕으로서의 사역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요18:37)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마21:5)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笏)은 의의 홀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주에게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 하시고 (히1:8~9)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Prophet)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켜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Prophet)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켜 세우고 내 말들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 누구든지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리라. (신18:15~19)

대언자로서의 사역

그때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을 보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이시니라, 하더라. (요6:14)

그 무리가 이르되,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대언자 예수님이라, 하니라. (마21:11)

주께서 맹세하셨고 또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니 이르시되,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110:4)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 대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그분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신 분께서 그리 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그분께서 또한 다른 곳에서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심과 같으니 (히5:5~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계획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사9:6)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5:2)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심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8:58)

오 아버지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또한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골1:17)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하나님이라 불리심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마1:23)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7)

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속 중심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왕좌를 영원토록 굳게 세우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삼하7:12~14)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심

바로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그들의 자녀 된 우리에게 성취하셨다는 것이라. 그것은 또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바,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함과 같도다. (행13:33)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3: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마16:16)

이에 그들이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느니라, 하시니 (눅22:70)

주(LORD)께서 내 주(Lord)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110:1)

주(Lord)라 불리심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해 구원자 곧 그리스도 주(Lord)께서 태어나셨느니라. (눅2:11)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시편에서 다윗이 스스로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Lord)라 부른즉 어찌 그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눅20:41~44)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여자의 씨로 태어나심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갈4: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심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에 의해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보내어져서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 천사가 들어가 그녀에게 이르러 말하되, …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눅1:26~31)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9:25~26)

정해진 때(시간)에

태어나심

그 무렵에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조세 등록을 하게하니 (이 조세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 처음 한 것이더라.) (눅2:1~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5:2)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

그러므로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그 대언자시로다, 하매 다른 이들은, 이분이 그리스도시다, 하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나오시겠느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에서 나오시며 또 다윗이 있던 베들레헴 고을에서 나오시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이처럼 그분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 분열이 생기고 (요7:40~43)

요셉도 (다윗의 집과 혈통에 속하였으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시에서 나와 유대로 올라가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도시에 이르러 자기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조세 등록을 하려 하더니 그녀가 아이를 배어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거기 있을 때에 그녀가 해산할 날들이 다 차매 그녀가 자기의 맏아들을 낳아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그들을 위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더라. (눅2:4~7)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애통하며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기 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렘31:15)

유아 대학살이 벌어짐

이에 헤롯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우롱 당한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부지런히 물은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것의 온 지경 내에 있던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니라.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라마에서 애통하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기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느니라. (마2:16~18)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노라. (호11:1)

이집트로 피난가심

그가 일어나 밤에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이르시되, 이집트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러내었노라, 하셨더라. (마2:14~15)

그러할지라도 그 흑암은 그 땅이 괴로움을 당하던 때의 흑암과 같지 아니하리니 그때에는 그분께서 처음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가볍게 괴롭히시고 나중에 요르단 건너편 바닷길 옆 민족들이 거하는 갈릴리에 있는 그 땅을 더욱 심하게 괴롭히셨느니라. 어둠 속에 다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그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사9:1 ~2)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심

이제 예수님께서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떠나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경계의 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에 와서 거하시니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르단건너편 바닷길 옆 이방인들의 갈릴리여,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지역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하였느니라.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마4:12~17)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말3:1)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 큰길을 곧게 만들라. (사40:3)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있음

요한의 사자들이 떠난 뒤에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네 길을 예비하리라,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자가 곧 이 사람이니라. (눅7:24~27)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의 광야에서 선포하여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니 이 사람은 곧 주께서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자니라. 이르시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분의 행로들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3:1~3)

이 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사11:1~2)

내 가 떠받쳐 주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선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성령님으로 충만하심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리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니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3:16~17)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시69:9)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충만하심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15~17)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갚으시리니 곧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리라. 그분께서 오셔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하라.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사35:4~6)

상한 육체를 치유하심

예수님께서 온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니라. (마9:35)

이제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자기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을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 분 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 세워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마11:2~5)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결박된 자들에게 감옥에서 놓임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요, 또 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을 포고하고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며 (사61:1~2)

상한 마음을 치유하심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 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자유 하게 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주께서 주의 원수들로 인하여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힘이 나오게 정하셨나니 이것은 주께서 원수들과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8:2)

어린이들을 영접하심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또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소리치며,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21:15)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옛적부터 있던 은밀한 말들을 말하리니

그것들은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해 준 바라.

우리가 그것들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주를 찬양함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다가올 세대에게 보이리로다.  (시78:2~4)

비유로 말씀하심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마13:34~35)

나 주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붙잡고 너를 지키며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들의 빛이 되게 내주리니 (사42:6)

이방인에게 빛이 되심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게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 (행13: 47~48)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

세상으로부터 불신 당하심

그러나 그분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으니 (요12:37)

내 원수 된 자들이 부당하게 나를 누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35:19)

미움을 당하심

내가 아무도 행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다 보았고 또 미워하였느니라. (요15:24)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3)

동족에게 배척당하심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요1:11)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사53:5)

죄인을 위해 희생당하심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롬5:6~8)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리니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리라.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스스로 목숨을 내 주심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으니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요10:17~18)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슥9:9)

나귀 새끼를 타심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 그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그것들 위에 얹고 그분을 그 위에 태우니 (마21:4~7)

참으로 내가 신뢰한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자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 (시41:9)

친구에게 배반당하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영으로 괴로워하사 증언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여 넘겨주리라, 하시매 (요13:21)

그분께서 아직 말씀하실 때에, 보라,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그분께 가까이 나오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느냐? 하시니 (눅22:47~4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값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하매 이에 그들이 은 서른 개를 달아 내 값으로 삼으니라. (슥11:12)

은 삼십에 팔리심

그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라 하는 자가 수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를 너희에게 넘겨주면 너희가 얼마를 내게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서른 개로 그와 언약을 맺거늘 (마26:14~15)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것 곧 그들이 나를 평가하여 매긴 그 상당한 값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에 내가 그 은 서른 개를 취해 주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슥11:13)

피 값으로 토기장의 밭을 삼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수제사장들이 그 은들을 거두며 이르되, 그것은 피 값이므로 그것들을 성전 보고에 넣어 두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 하고

의논한 뒤에 나그네들을 묻기 위해 그것들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그러므로 이 날까지 그 밭을 피 밭이라 하느니라. (마27:5~8)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곧 내 동료인 자를 치라.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지리니 내가 내 손을 돌이켜 작은 자들 위에 두리라. (슥13:7)

그를 따르던 자들이 도망함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의 양들이 널리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1)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성취하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그분을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26:56)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내 책임으로 떠넘기며  (시35:11)

거짓 고소를 당하심

이제 수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분을 대적할 거짓 증인을 구하되 아무도 찾지 못하더니 참으로 많은 거짓증인이 왔으나 그들이 아무도 찾지 못하였더라. 끝으로 두 명의거짓증인이 와서 이르되, 이 자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마26:59~61)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사53:7)

고소를 당하나 침묵하심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실 때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 (마27:12)

빌라도가 다시 그분께 물어 이르되, 네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너를 대적하려고 얼마나 많은 것을 증언하는지 보라, 하되 예수님께서 여전히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이에 빌라도가 이상히 여기더라. (막15:4~5)

그는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그는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도다. (사53:8)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심

빌라도가 수제사장들과 치리자들과 백성을 함께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을 내게로 데려와서 백성을 나쁜 길로 이끄는 자라 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그를 조사하였으되 너희가 고소하는 일들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아무잘못도 찾지 못하였고 내가 너희를 헤롯에게 보내었으나 그 역시 전혀 찾지 못하였도다. 보라, 그는 죽을 일을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를 징계하고 놓아주리라, 하니 …그들이 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이 사람을 없애 버리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매 빌라도가 그들에게 세 번째 이르되, 도대체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이유를 찾지 못하였나니 …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하니 그들과 수제사장들의 목소리가 이기니라. 빌라도가 그들이 요구한 대로 되도록 선고하고 … 예수님은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23: 13~25)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주고 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 (사50:6)

침 뱉음을 당하심

그분께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치더라. (마27:30)

오 군대들의 딸아, 이제 너는 군대들을 형성하여 모일지어다. 그가 우리를 치려고 에워쌌으니 그들이 막대기로 이스라엘의 재판관의 뺨을 치리로다. (미5:1)

매를 맞으심

이에 그들이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분을 주먹으로 치고 다른 자들은 손바닥으로 치며 (마26:67)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사53:5)

채찍에 맞으심

그때에 빌라도가 이런 까닭에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19:1)

자기들끼리 내 옷들을 나누고 내 겉 옷을 놓고 제비를 뽑나이다. (시22:18)

그분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음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뒤에 그분의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그들이 자기들끼리 내 옷들을 나누며 내 겉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나이다, 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마27:35)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려보며  (시22:14~17)

주의 : 다윗 왕 시대에는 십자가형이 없었고 돌로 쳐 죽이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십자가에 처형하는 방식은 BC200년경 로마인들이 받아들였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매 그들이 예수님을 맡아서 끌고 가니라. 그분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장소라 하는 곳으로 나가시니 이곳은 히브리어로 골고다라 하더라. 그들이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다른 두 사람도 그분과 함께 양쪽에 못 박으니 예수님은 한가운데 있더라. (요19:16~18)

…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범죄자들과 함께

못 박히심

그들이 그분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분의 오른편에 하나는 그분의 왼편에 있더라. (막15:27)

나를 보는 모든 자들이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주가 자기를 건지실 줄로 그가 신뢰 하였도다. 그분께서 그를 기뻐하셨으니 그를 건지시리로다, 하나이다. (시22:7~8)

나는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사오니 그들이 나를 보고 자기 머리를 흔들었나이다.  (시109:25)

멸시와 수치를 당하심

또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그분을 조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들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그분께서 그를 원하시면 이제 그를 건져 내실 것이라.그가 말하기를,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 (마27:39~44)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려보며  (시22:17)

사람들이 바라 봄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눅23:35)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시22:16)

 

손과 발을 찔리심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요20:27)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시22: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리로다. (슥12:10)

심장이 찔리심

그러나 군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4)

나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이 내 대적이 되었사오나 나는 스스로 기도할 뿐이니이다. (시109:4)

…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였느니라. (사53:12)

원수를 위해 기도하심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눅23:34)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는 일로부터 또 나의 울부짖는 말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나이까?  (시22:1)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라. (마27: 46)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 (시22:15)

십자가상에서 목이 마르심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 기록을 성취하시려고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그들이 또한 쓸개즙을 나의 먹을 것으로 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내게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였나이다. (시69:21)

쓸개와 식초를 받으심

이제 거기에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놓여 있으므로 그들이 해면을 식초로 적신 뒤에 우슬초에 달아 그분의 입에 대니라. (요19:29)

주의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 오 주 진리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구속 하셨나이다. (시31:5)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심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눅23:46)

그분께서 그의 모든 뼈를 지키시매 그것들 가운데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였도다. (시34:20) 

 

한 집에서 그것을 먹되 너는 그 고기를 조금이라도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말고 너희는 그 뼈를 꺾지 말지니라. (출12:46)

뼈가 꺾이지 않으심

이에 군사들이 가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그분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니라. (요19:32~ 33)

그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사53:9)

부자의 무덤에 묻히심

저녁이 되었을 때에 요셉이라 하는 아리마대의 부자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더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간청하매 이에 빌라도가 몸을 넘겨주라고 명령하거늘 요셉이 그 몸을 가져다가 깨끗한 아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것을 두고 큰 돌을 굴려 돌무덤 입구에 놓고 떠나갔더니 (마27:57~60)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 이다. (시16:10)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밝히 보이리로다.  (시118:17)

부활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족장 다윗에 대하여 거리낌 없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 그가 대언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서약으로 맹세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허리의 열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워 자기 왕좌에 앉히실 것을 알았고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더니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셨느니라. 우리가 다 그 일에 증인 이로다. (행2:29~32)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는구나. 그분은 일어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그들이 그분을 두었던 곳을 보라. 그러나 너희 길로 가서 그분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그분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그분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그분을 볼 것이라고 고하라, 하니라. (막16:6~7)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며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선물들을 받으시되 참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받으셨나니 이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68: 18)

승천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엡4:8)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110: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다윗은 하늘들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나 친히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니라. (행2:34~35)

이렇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 (막16: 19)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시118: 22~23)

버린 돌과 머릿돌이 되심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읽어 본적이 없느냐? (마21:42)

이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행4:11)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See, I will send you the prophet Elijah before that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comes.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엘리야"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짖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을까요?
과연 그 엘리야는 누구를 말할까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케 하는 것을 전연 제외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귀절에 선지자 엘리야(세례 요한)가 그 전(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인데 그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약 시대를 두려운 날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 멸망 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한다.

선지 엘리야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눅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함은

그 때에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개척하겠다는 뜻이다.
도덕적 개혁이 진정한 종교를 발생시킬 수는 없으나, 진정한 종교가 나타날 때에 그것을 영접할만한 준비는 될 수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다(눅 3:4-6).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1-3절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위대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4절에서 7절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정의는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명확한 사랑의 정의다. 마지막 8-13절에서는 모든 위대한 은사들이 사라지더라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있을 것 중 최고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확실히 사랑 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아무런 문맥 없이 사랑을 논하는 장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12장에서 시작된 은사에 관한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자기 뜻대로 나눠주신 은사, 교회의 각 지체를 돕고 섬기기 위해 주신 은사를 풍성히 누리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고(고전 1:7), 특히 그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였다(고전 1:5).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풍성한 은사를 가지고 질서 있게 서로를 돌보기는커녕 교회 가운데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 자기 은사를 더욱 크게 사용하기 위해 투쟁했다(고전 12:25, 31). 귀해 보이는 은사를 가진 자는 자만심에 빠졌고, 약해 보이는 지체는 무시당했다(고전 12:23-25). 쉽게 말해 은사가 탁월한 슈퍼스타가 많았지만, 팀플레이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족함 없이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교회를 위해 어떻게 은사를 활용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장을 시작하기 직전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한 마디로 “이제부터 내가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이다. 은사는 반드시 사랑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nothing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1-3절까지 바울은 각각의 구절을 조건문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만일 내가…”(If I)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가정이다(“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분명히 과장이 들어있다.

조건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최대한 발휘한 장면을 과장해서 묘사한다. 당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 언어를 가리켰는데, 바울은 “천사의 말”까지 하게 될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당시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의 일부를 전달하는 말씀 선포였는데, 바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라고 과장했다. “믿음”에 대해서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고 했고, 구제와 섬김에 대해서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과장법을 사용한 이유는 조건절 뒤에 반복해서 강조되는 이 표현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그 유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방언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을 달달 꿰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기는 대단한 일을 믿음으로 행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가진 소유물과 몸뚱이를 다 내어줘도 아무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살펴본 대로 고린도 교회엔 “언변과 지식”에 관한 은사가 풍성했다. 그래서 서로 방언과 예언을 하기 위해 싸우느라 모일 때마다 무질서한 예배가 벌어졌다. 누가 더 유창한 방언을 구사할 것인가? 천상의 소리를 낼 것인가? 누가 설교의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강단에서 불을 내릴 것인가? 탁월하고 지혜로운 지식을 쏟아낼 것인가? 누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가진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아무리 대단한 방언, 심지어 천사의 말을 구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쓸데없는 소음에 불과하고, 아무리 대단한 비밀과 지식을 설파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낫 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침의 은사가 사랑 없이 사용될 수 있을까? 나중에 4-7절까지 사랑의 아름답고 명확한 정의를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잠시 대략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이 사랑 없이 가르침의 은사가 사용될 수 있는 맹점을 보여줄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4절)

먼저, 오래 참음과 온유함 없이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가르침이다. 오래 참음과 온유는 굉장히 유사한 개념이다. 둘 다 절제와 관련된 덕목인데, 오래 참음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육신의 반응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라면, 온유는 그 대상에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권리를 내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덕목에 있어 가장 본이 되는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을 때 욕으로 갚지 않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권세로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벧전 2:23).

강단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사적으로 무언가 가르칠 때,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쉽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령 상대방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길 때, 우리는 참지 못하고 육신 적인 분노로 반응할 수 있다. 신실하게 말씀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을, 우리는 그 먼지를 상대방 머리 위에 부어버리고 싶어 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상담할 때, 목사나 교사가 가진 권위를 합당하지 않은 사사로운 이유로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때가 바로 우리의 가르침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때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 자의 영혼이 잘됨 같이 그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는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옛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내세울 만한 권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상대방의 선을 위해 절제하며 가르치는가?

사랑은…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절)

당신의 가르침에 시기, 자랑, 교만이 들어있다면 그 은사가 활용되는 것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여러 설교자가 있는 목회 현장에서 함께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협력 목자가 되기보다 더 많은 양을 자기편으로 끌고 가기 위한 경쟁 관계가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더 많은 성도가 따르는 설교자를 시기하고, 누가 그를 칭찬하거나 그 사람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우연이라도 듣게 되면 분노한다. 고린도 교회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품었던 마음이 바로 시기하는 마음이다.

설교 시간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봤는가?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자기 자랑을 한다. 혹은 교회 자랑을 한다. 설교 영상을 보고 외부에서 많은 사람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설교한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자랑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자기 의를 내세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교묘하게 자기 자랑을 한다. 자기가 이룬 업적과 자기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성경을 일천 번 읽었다고 자랑하거나, 어마어마한 헌금을 한다고 자랑하거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 얼마나 잘 됐는지 자랑하거나,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지 말하기 바쁜 설교자의 가르침을 들을 때, 거기에 얼마나 사랑이 담겨 있는지 생각해보라. 사랑은 절대로 시기나 자랑이나 교만과 함께할 수 없다. 그런 설교는 사랑이 없는 설교로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주께 모든 것을 받은 종은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구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성도 중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은 그 은사를 무례하게 행했는데, 성도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고, 그래서 무질서하게 은사를 사용했다. 방언을 사용할 때 통역이 없어 아무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데도, 자기 유익을 위해 유창한 방언을 구사하기 원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는 아주 무질서한 혼돈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무례함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유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사람을 충분히 배려한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예의를 갖출 것이다. 은사는 그 성격상 자신이 아닌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은 은사의 본성을 거스른다. 그래서 은사를 활용하는 동안(가르치는 동안) 듣는 이에게 무례하게 행하는데도 자기 유익을 추구하느라 그 폐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울리는 꽹과리처럼 유익이 없는 것이다.

교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 은사를 활용할 때 혹 무례히 행하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설교 시간에 특정인의 범죄를 지적하거나, 청중이 모두 아는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고 설교를 하거나, 초청받은 교회에 가서 부탁받은 것과 상관 없이 그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가르침을 주거나, 공격적인 말투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 등으로 충분히 불쾌감을 줄 수 있다. 그때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무례한 가르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팽배했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분열의 문제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가장 먼저 이 문제를 다뤘는데,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당을 지었다(고전 1:12). 이러한 분열은 그들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쾌감(성냄)이나 원한(악한 것을 생각). 이러한 악덕은 가르침 중에도 묻어 나왔을 것이다. 예언의 가르침을 마치고 나면 몇몇 사람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게 되어 있었다(고전 14:29). 바울이 지적한 분열의 문제가 심각했다면, 서로의 가르침을 분별할 때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일은 예리한 칼을 다루는 일과 같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쪼개는 양날 검과 같이 진리는 날카롭다. 가르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씀을 사용하면, 말씀은 영혼의 병든 부분을 도려내고 건강하게 만들어주지만, 분노와 원한으로 사용하면, 건강한 영혼을 해치고 병들게 할 수 있다.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다른 교회를 비난하거나, 원한이 있는 다른 교회를 조롱하기 위해 가르침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나를 비판한 타 교회 목사의 가르침을 이단처럼 묘사하거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잘못을 공적인 가르침 시간에 끄집어내어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은사 주의 교회나 기독교 번영신학을 퍼뜨리는 사람의 예시를 들 때 주의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게 분변하는 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그 분별을 사랑으로 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리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아무런 유익도 의미도 없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1-2절에 조건절로 설명한 방언(심지어 천사의 말까지 하는), 예언(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에 관한 가르침)에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이나 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가르침이 정말 위에서 제시한 사랑의 덕목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 사랑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6, 7절을 다루지 않았다. 

성범죄를 일으키고 나서 회개도 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는 한 목사의 교회 성도에게 “당신은 그의 죄가 아무렇지도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목사의 설교에서 나오는 능력을 보면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사용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수사학에 뛰어나고 청중을 울고 웃게 하며 어쩌면 영적 교훈을 가슴에 콕콕 박아주는 달변가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그 목사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절에 나오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랑의 특성 때문이다.



1.내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과 소질과 스펙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2.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사랑은 자신의 이익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장 4, 5, 7절

3. 사랑은 진리에 기뻐하며, 의롭지 않은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이 곧 관용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6절

4.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이다. 모든 지식, 은사, 능력 위에 사랑이 있다.
바울은 지속해서 지식, 은사, 능력의 기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3장 8~12절

5. 믿음, 소망, 사랑 모두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의 근본은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성경의 이해를 위한 과학적 근거 - 천둥과 번개. 실험실의 비밀 유투브(부활).



1. 번개와 천둥

옛날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는 하늘이 노해서 벼락을 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하늘의 신들 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인 제우스가 번개를 만든다고 믿었다.
번쩍이는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는 무서운 대상이자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하늘의 노여움?

실제로 천둥과 번개란 무엇일까?
국어표준대사전을 보면 천둥은 ‘뇌성과 번개를 동반하는 대기 중의 '방전 현상’으로 그리고 번개는 ‘구름과 구름, 구름과 대지 사이에서 공중 전기의 방전이 일어나 번쩍이는 불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실, 천둥이란 용어는 ‘하늘을 치다’라는한자어 천동(天動)에서 비롯한 말이다.


천둥과 번개 연구의 시작 – 프랭클린

천둥과 번개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부터 천둥과 번개도 전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1750년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프랭클린은 번개가 정전기와 같은 에너지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계획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1752년에는 진위가 확실치는 않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천둥과 번개가 치는 빗속에서 연을 띄우는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먼저 연을 늘어뜨린 다음, 연줄 끝에는 감전을 방지하기 위해 젖지 않은 명주 헝겊을 감았다.
그리고 연줄과 명주 리본을 연결한 자리에 금속열쇠를 매달고 연을 하늘에 띄웠다.
손을 금속열쇠에 가까이하면 구름 속의 전기가 내려와 있다가 손끝에 전달돼 방전하여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 느껴지고 관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연줄에 달린 열쇠에 손을 갖다 대자 손과 열쇠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열쇠를 '라이덴병'(전기를 저장해 두는 유리병)에 대고 전기를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연의 실험’으로 유명한 이 실험을 통해 프랭클린은 전기와 번개의 방전은 동일하다는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연구결과를 이용해 구름과 지면 사이로 전기가 흐르는 벼락의 피해를 막아주는 피뢰침을 만들었다.
피뢰침은 ‘프랭클린의 막대(Franklin's Rod)’라고도 불렸다. 

번개는 방전 현상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것은 적란운으로 불리는 소나기구름이다.
적란운은 위아래로 긴 구름으로 두께가 6~8킬로미터에 이르는 아주 두꺼운 구름이다. 적란운은 두께가 두껍기 때문에 낮은 고도에서는 물방울 그리고 꼭대기 근처에서는 얼음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적란운은 지표면이 매우 뜨겁게 가열될 때 많이 생기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북태평양고기압이 발달하는 여름철에 많이 생긴다. 여름철에 지표면이 가열돼 강한 상승기류가 생기고 상승된 공기는 포화·응결돼 소나기구름으로 발달한다.

구름은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들이 모인 덩어리인데, 구름을 구성하는 물방울이 상승기류로 인해 파열되면 파열된 물방울은 양으로 대전되고 주위의 공기는 음으로 대전한다. 보통 양으로 대전된 물방울은 위로 올라가고 음의 전하는 아래쪽에 머무는데, 이때 구름 속에 있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또는 구름의 음전기와 지면의 양전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전기가 번개이다. 즉, 번개는 구름과 구름 사이 또는 구름과 대지 사이에 일어나는 방전현상이다.

천둥은 번개로 가열된 공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나는 소리

번개가 치면 순간적으로 온도가 30,000도 가까이 상승하는데, 이 열에너지에 의해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가열되어 부피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나는 소리가 천둥이다. 천둥과 번개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번개는 빛의 속도로 그리고 천둥은 소리의 속도로 오기 때문에, 번개가 친 다음에 천둥소리가 들려오게 된다. 천둥이 들리는 범위는 약 20킬로미터이나 때에 따라서는 약 40킬로미터의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경우도 많다. 번개로부터 천둥까지의 시간(초)에 음속인 340미터/초를 곱하면 천둥이 일어나는 곳까지의 거리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천둥과 번개의 근원지에서 가까이 있으면 천둥과 번개를 동시에 듣고 보게 되며 멀어질수록 천둥과 번개의 시간차가 커진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1천6백만 건의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발생하고 있다.


1년에 1km2당 발생한 번개 빈도를 나타낸 세계지도. 콩고에서 가장 많은 번개가 발생했다.

노랑으로 갈수록 빈도가 높다. <출처: (cc) Citynoise at en.wikipedia>

일반 번개의 1,000배 이상 - 고층대기에서 발생하는 메가 번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번개는 구름 아래에서 생성된 것이지만, 구름 위에서 생기는 특수한 번개가 있다. 바로 ‘고층 대기 극한방전’ 현상인 ‘메가 번개(Megalightning)’가 그 주인공이다. 메가 번개는 구름 위에서 1밀리 초(1/1,000초)~1초 동안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번개인데, 크기가 수십 킬로미터로 일반 번개보다 1,000배 이상 크다.


1989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로버트 프란트 박사에 의해 메가 번개의 일종인 스프라이트가 최초로 관측됐으며, 최근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움란 이난 교수팀에 의해 스프라이트가 초고속카메라로도 촬영됐다. 그 결과 스프라이트는 고도 80~140킬로미터의 전리층에 발달하는데, 가로 40킬로미터 세로 75킬로미터의 거대한 해파리를 닮은 모양이며, 붉은색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속시간은 10~100밀리초(1밀리초=1,000분의 1초)이다. 스프라이트는 지상에서 벼락이 칠 때 함께 발생한다. 과학자들은 양전하와 산소 분자가 부딪혀 스프라이트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스프라이트.

다른 메가 번개인 블루 제트(Blue Jet)는 푸른색으로, 구름위에서 우주 방향으로 솟구친다. 고도 40~80킬로미터까지 치솟는데, 지속시간은 0.1~1밀리초로 스프라이트보다 짧다. 1989년에 호주지역을 통과하던 우주왕복선에 의해 최초로 관측됐다. 2001년 9월 14일 아레시보(Arecibo) 관측소가 관측한 블루 제트의 속도는 초속 50,000미터~250,000미터에 이르렀다. 엘브스(ELVES)는 수평방향으로 나타나는 메가 번개인데, 1990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는 대서양에서 고도 100킬로미터에 형성된, 붉은 색을 띄는 지름 400킬로미터인 도넛 모양의 엘브스를 촬영했다. 지속시간은 1밀리초이다. 그러나 메가 번개는 하늘 높은 곳에서 발생하고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에 아직까지 자세히 연구되지 못했다.

국내에서 메가 번개 관련 연구현황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다. 다만, 2009년 9월 18일 이화여자대학교 박일흥 교수팀이 국내에서 제작한 추적망원경(MTEL)을 우주로 발사하여 이를 통한 메가 번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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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 번개의 비밀(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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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s of Faith 실험실의 비밀(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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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01 / 24 / 2024 - )의 단계와 성령의 단계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는 것은 말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았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기근이 오자 애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또한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안 믿은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고 해도 순종한 것입니다.

이 때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좋은 예가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해도 사랑하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해도 내 욕심 때문에 잘 베풀지 못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들처럼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차이가 나니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유혹에도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고 악인들에게 미혹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보다 성경 말씀을 더 따라야 합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들의 믿음도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 정도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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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믿음(530) 에무나(ĕmûwnâh) אֱמוּנָה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ĕmûwnâh ]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 '그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영', '생명'(KJV,RSV)이라 번역할 수 있고, '욕망','욕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접미사 '그의'는 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펠라'는 '아팔'의 푸알형으로 본래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민 14:44). 이는 교만한 자의 심중이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런 심적 상태를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3:4,5; 40:10; 96:13; 119:75,138; 143:1).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친다.

믿음이란?

1. 정직한 것에서 시작한다.

2. 교만하지 않은 것이다.
-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나서는 것(민수기 14:44)

민수기 14:41-44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 의를 실천하려는 변함이 없는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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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공동번역)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새번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믿음이 적은 자들아(3640) 올리고피스토스(ŏligŏpistŏs) ὀλιγόπιστος, ον   

1. 믿음이 작은.  2. 마태복음 6:30. 3.  마태복음 8:26
발음 [ ŏligŏpistŏs ]
어원  / 3641과 4102에서 유래

뜻 풀이부
1. 믿음이 작은, 마 6:30, 8:26, 16:8, 눅 12:28.

적은(올리고스.  ŏligŏs) 3641  ὀλίγος, η, ον

1. 적은.  2. 두셋의.  3. 많지 않은
발음 [ ŏlig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피스티스(pistis)  4102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pĕithō ]

뜻풀이부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 18:4, 19:29.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 5:11, 갈 1:10.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 12:20, 14:19, 갈 1:10.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 28:14, 달래다, 요일 3:19.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 11:22, 갈 5:10, 빌 1:14.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 2:19, 히 13:18, 빌 1:6.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 17:4.
  b. 복종하다, 따르다, 롬 2:8, 갈 3:1, 히 13:17.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 20:6, 롬 8:38, 히 6:9.




오늘 있다가(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아궁이에(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들풀(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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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개혁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은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이것도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며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대부분 개혁교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8:15-17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19:1-7
1. 아볼로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믿는 것과 아는 것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성경 : 마태복음 16:15-17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란 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때문에 진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요14:12절은 금요기도회 때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7-9/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행17: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2: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그래서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지막 특징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계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Question

하나님을 만나는 것
1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난생 처음 듣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신비적인 것인지? 아니면 지식적인 것인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Answer

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선지자들....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은혜로 대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 즉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며, 기도하고, 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복음의 일꾼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담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아룁니다.
그리고 찬송을 통해서 감사를 표현하고 그 이름을 높입니다.

3.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교회를 오랫 동안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공통점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아지지 않고, 찬송을 불러도 은혜가 되지 않으며, 자기 열심으로 말씀을 지키다가 교만해지거나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요 3장을 보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이며 선생이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였습니다.

4.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다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를 하다가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을 고침받음으로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도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나님을 만나시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1.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본다.
이 대답에 진심으로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면 이미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완료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만일 1)번의 질문에 "글세요!"나 "No"라고 대답한다면, 먼저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경우에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3. 기간을 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간절히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며 기도할 때에, 반드시 약속 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