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禮拜) - 성전, 교회, 성도의 몸





05-10-2020(주일)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 진정"이란 "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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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 인격적 예배

윌리엄 템플

"예배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인격의 세 가지 요소는 양심, 생각, 의지라고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격적인 요소가 하나로 묶여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감정만 동의하는 예배(느낌으로 받는 은혜, 지적 동의에 따른 은혜, 나도 누리고 싶어하는 은혜)
삶의 적용이 없는 예배(상상, 다른 사람의 경우, 결단이 없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한국 다리놓는 사람들의 박정관 목사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간혹 지역봉사를 하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나 선교를 게을리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예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계시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접근해 보겠습니다. 자매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뻐지면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제들이 갑자기 멋을 내고 차를 청소하면 틀림없이 연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쓰고 시를 써서 읽어주기도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집앞을 찾아가기도하고,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데이트를 하고자 힙씁니다. 이제는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비로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어원적 의미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유래한 것으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할 때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

히브리어 동사 "샤하(shachah), 하와(chawah)"(창 18:2, 시 99:5)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 (proskuneo)"(요 4:23)는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혹은 입을 맟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맟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bad), 샤라트(sharat)"(신 10:12, 대상 16:4)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latreuo) 라트레이아(latreia)"(마 4:10, 롬 12:1, 행 13:2)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히브리어 동사 "야레(yare)"(렘 32:38-40, 신 6:13)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 (sebomai)"(마 15:8)는 "경외함,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위엄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어원과, 성서적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배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동사이다.
 
 1. 예배 본다(보러간다)
 2. 예배 드린다(드리러 간다)
 3. 예배
한다(하러 간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

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예식을 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 예배자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인간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Dr. David H Jung - Liberty University).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지으신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와 소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려 그 마음을 시원케 할 자들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Erickson, Millard. Christian Theology. The image of God 참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그분과 교제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여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창세기 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 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파라오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습니다. 내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3:12; 7:16; 8:1,20; 9:1,13; 10:3)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아낌없이 이땅에 흘리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깨어진 관계, 즉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작으로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땅에 보내어 죽이셔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찾아 드리셨습니다.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먼 곳에서 방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예배자들)를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가 예배로서의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예배의 두 요소인 성령과 진리를 제공하시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인 것이며, 다만 인간은 거기에 반응하고, 섬기고, 경외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5.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 중심이 될 때 예배는 무속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의 종교행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팽배한 인간 중심의 예배의 모습

- 자신의 물질 축복을 구하기 위한 예배

-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

- 영적 자기 만족이나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예배

-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드리는 예배

-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 드리는 예배

-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 드리는 예배

- 교회의 음악과 분위기가 좋아서 드리는 예배

A. W. 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진호 목사: 숨겨진 보물 예배: 예수 전도단)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욕심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배가 세속화되고 일종의 쇼와 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며, 자기 중심성위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논쟁이나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6.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기초가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정해신 시간과 장소에 모여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공중 예배' 혹은 '예배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공중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도 모든 연령의 모든 성도들이 한 믿음을 고백하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발각되어 잡혀가서 사나운 동물들에 뜯어먹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질 수 없듯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 예배해야만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의 선입견과 좁은 지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가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새롭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에 합당하고 정직하게 반응하여 한주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운동경기에 비교하면 목회자(순서의 담당자)는 선수로, 성령은 코치로, 성도들은 관중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코치로써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Dr. Vernon Whaley - Liberty University). 공중 예배 가운데 우리는 각각의 은사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가대와 찬양단으로, 안내와 헌금위원으로, 그리고 식사준비와 섬김을 통해서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갈고 다듬고 재발견하여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공중예배의 결과입니다. 공중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고백한 찬송과 기도와 결단은 삶 가운데서 반드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를 "어떠한 지정된 공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의식적 행위"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공간은 온세상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께서는 온땅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어떤 공간도 인간이 예배 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4).

우리의 일터도, 학교도, 퇴근 길도, 차동차도, 가정도, 바다와 산과 들과 우주도 예배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배는 의식적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자체가 예배(Life style worship)입니다. 이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이벤트나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공중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고 일주일 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예배가 아무리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감동적인 의식이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이중적인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잘 차려진 종교 예식을 드림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차려진 제사상을 찾는 귀신이 아니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중 예배(Corporate worship)와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반드시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이전에 온전한 예배 자체가 지니는 특성입니다. 공중 예배와 일주일 동안의 삶의 예배가 합쳐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8.예배와 선교 (전도)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설교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선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선교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선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선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와 공중예배가 균형잡혀서 우리 삶과 교회 가운데서 실현될 때 우리는 선교(전도) 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로서 예수께서 "천국은 누룩넣은 반죽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1-24 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리던 그리심산 입니다. 저 산은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공간과 전통에 구애 받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절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즉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읽었고,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시편과 선지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의 원리입니다.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려면 성령안에서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려면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해야 합니다. '영'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예배를 하게 되고, '진리'에만 치우치면 머리로만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배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은 경외심을 나타내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배가 '동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특정 시간에 특정 예식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를 제한하는 오해를 일으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으로 바꾸어갈 이 엄청난 특권인 예배를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 그것도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 드리지 않고,특정한 시간에, 예식과 제물만 올려드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전혀 무시한 채 이교도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 절에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솟구치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형식적 예배만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특권, 결코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절대로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끊임 없이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동안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오늘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나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는지, 죽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그분의 사랑안에 빠쳐 안식을 누리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는지, 그 음성을 듣고 어떻게 살기로 응답했는지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 이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대견한 자녀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중 예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예배자들이 되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족과 자족(디모데전서 6:6)


10-25-2023(수) 새벽 구은숙권사 질문

디모데전서 6:6
(한글 개역 성경)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NIV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새번역)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현대인)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

(공동번역)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헬라어)
에스틴 데 포리스모스 메가스 헤 유세베이아 메타 아우타르케이아스
εστιν   δε  πορισμος   μεγας   η    ευσεβεια   μετα      αυταρκειας

* 자족하는 마음 - 아우타르케이아스( αυταρκειας)

아우타르케이아스 - 명사형 /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 ας, ἡ 

1. 충분함
2. 만족
발음 [ autarkeia ]
어원 / 8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넉넉함(고후 9:8), 족함(딤전 6:6)
신약 성경 / 2회 사용

고린도후서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족(自足)과 지족(知足)이란 한자어는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번역할 때는 서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자족이나 지족이 큰 차이는 없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본문에서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
즉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만이 자족과 지족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福音)







복음(福音)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이 복음이란 말이 다른 종교에는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도, 유교에도, 몰몬교에도 복음이란 말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복음이란 말을 중심단어로 쓰고 있지 않는 가운데 오직 우리 기독교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이 말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른 종교서적에는 있지 않고 오직 성경에만 있는 이 복음이란 말의 의미는 "복된 소리" "기쁜 소식"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복음은 실로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두운 역사, 죽음의 역사, 멸망의 역사 속에 기적적으로 꿰뚫고 찾아온 하늘의 소식, 희망의 메시지, 생명의 음성이 바로 복음인 까닭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음이라는 말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말 대신 "승리하는 소식"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솨르"라는 말이 나오지만 신약성경이 담고 있는 "복음"이라는 내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 복음이란 말을 성경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도시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패배감에 휩싸여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들이 적군의 손에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다 해서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죽음직전의 순간, 저 멀리 들녘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잠깐만---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겼다.
승리했다" 한 전령병사가 외마디를 남기고 딱 쓰러져 죽고맙니다.
그 거리를 기념해서 마라톤이라는 기념경기가 올림픽에 채택된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 결정적으로 죽어가는 백성에게 결정적으로 사는 승리의 기쁜 소식, 생명의 복된 소식을 가지고 4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그 전령병사를 뭐라고 불렀냐면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왕이 매우 중대한 비밀의 소식을 전하려할 때 전령의 손에다 그 소식을 전하려하면, 도난 당하거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노예를 사서 그 노예의 머리털을 깍아 밀고난 후, 그 빡빡머리 위에 바늘에 먹물을 묻혀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기까지 기다렸다가 보냈는데, 이 때 이 노예를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의 비밀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결정적으로 죽게된 온 인류에게, 영원히 죽게된 우리들에게 사탄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 죽은 "유앙겔리 제스타이" 병사처럼, 만군의 주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유앙겔리 제스타이" 노예처럼, 하늘 영광 버리시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설명하면서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을 도입(픽업)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가스펠, 이밴젤리즘, 이밴젤리컬"은 "유앙겔리온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로고스)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 14)."
서신서에서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인류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유앙겔리온" 복음(gospel)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라, 옳게 살아라, 사상을 가져라, 도덕적으로 살아라, 착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윤리나 도덕, 사상이나 일반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영생을 담고 있는 바구니와도 같은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 있습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는 천국과 지옥을 가는 문제까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다"는 말 한마디로 합리화되고,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과 신앙 전통적인 자만심에 젖어사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다"고 질타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여러분! 원수는 어떤 사이입니까? 만나면 반드시 죽이는 것이 원수입니다. 아니면, 언젠가는 죽이도록 작정되어 있는 것이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고, 하나님은 그 범죄한 인간을 찾으면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있는 존재!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정의되었습니다. 키에르케골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에 붙여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라고 이름 붙은 사람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너나 할 것없이 누구나 다 죽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절망의 죽음 앞에서 "왜 이런 죽음이 왔느냐?"를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논리가 바로 "너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인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죽음에 붙여져버린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절대 절망에 빠져버린 우리인생들에게 보여주시는 절대희망의 생명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누가 죄인입니까?
그런데 죄 값을 누가 받고 죽었습니까? 설명되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골 부유한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란 그 가문의 4대째 독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그 집 가문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도시 대학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하숙집에서 하숙을 시켰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필요하다는 모든 것을 다 대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버지는 그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들을 찾아왔습니다. 물어 물어 학교 교실과 도서관을 다 찾아 다녔습니다. 결국, 하숙집 방문을 열고 잠자고 있는 그 사랑하는 4대독자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온통 역겨운 술냄새로 진동했고, 그 아들은 술집 여자와 누워있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그만 아버지의 손이 그 아들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에이 나쁜 놈아!" 혼이 난 이 아들이 "에이 씨!"하면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아들이 돌아오겠지 저녁까지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3개월 후에 어느 깊은 산골 감나무골 외딴 집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보는 순간, 아버지는 그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여러분, 잘못을 누가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용서를 빌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빌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못되고 잘못한 아들에게 애원하며 빌게 만든 것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핏줄의 생명이기에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 어떤 배신을 해도 이 아버지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찾고 찾아 다니다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애원하다 못해 절규하며 우리를 향하여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신 사건입니다.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죄 값으로 죽어가는 절대절망에 빠진 우리 인생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유업을 받아 누리는 절대희망을 갖게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다 바쳐도 아깝지 않는 그 하나님의 넓고 깊고 크신 엄청난 사랑이 이 시간도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드리는 예배가 그 강권하시는 사랑에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감사와 감격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이 십자가라는 사실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견디지 못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의 입을 열어보면 생이빨이 부러져있는 것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의가 다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의 죄 값이 얼마나 큰 가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사랑에 면면히 흘러내리는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유대 전통적으로도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로마서 3:23, 2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예수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0, 22
절 말씀에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율법을 따라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1-3)" 우리들로 하여금, 육신을 따라 죽는 삶이 아니라, 영을 따라 죽을 몸이 살리심을 입는 몸으로 새롭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롬8:14, 16, 17)"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3: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받은 자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적셔진 인생입니다. 그 피로 죄사함 받고, 그 피로 영생을 얻고, 그 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자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복"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피"에서 나왔습니다. 영어 단어에 복이란 말이 blessings, bliss란 말인데, 웹스터 사전에 찾아보니까 이 말이 blood "피" 특별히 "제단에 뿌려진 피"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제단에 뿌려진 우리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복음 얻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곧 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맛 본 자들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11절 말씀은 그 생활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즐거워 하는 삶! 이것이 생명의 복음! 피의 복음! 을 맛 본 자들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화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뜻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reconciliation! re(다시)+con(함께)+ciliation(살게된 것) 피의 복음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연합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 나라 이민족, 한국교회의 살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반목과 질시, 음모와 거짓, 술수와 모함으로 온통 나라가 진통하여 감기몸살 정도가 아니라 죽을 병에 걸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가 쩍쩍 갈라져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불신의 골이 너무도 깊고 넓어 총체적 위기감에 몰락해 가는 이 나라 이민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적셔지고 스며나는 생명의 복음이 소나기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생명의 피의 복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보여준 붉은 물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저는 모일간지에서 한 도시의 네거리에 가득 메운 붉은 인파의 십자가 모양을 항공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남과 북이 원수지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수혈되고 변화되어 만날 수 있다면, 연합하여 함께 누리는 통일의 즐거움이 머지않아 오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둘째, 화목이란 말에는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회복케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 61장의 예언대로 우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함을,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여러 가지 세상적인 것들로 눌려있는 심령, 가정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귀신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을 치유하심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권능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 회복케 하시는 부활의 능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년회장 출신의 한 젊은이가 몇 년 동안 저축한 비용으로 자비량 단기 선교를 나가겠다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단기 선교 1년 중국 오지를 갔다오려고 하는데 기도해 주시고 도움의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청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다음 "어렵운 일이나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보혈 찬송을 부르게나 그러면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걸세"

이 청년이 찾아간 선교지는 아주 오지인 시골 농촌이었는데, 한 농가의 마당에 서서 누가 없는가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 청년선교사의 서있는 집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것에 무슨 멧돼지 같은 새까만 짐승 한 마리를 메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멧돼지가 아니라,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는 시체와도 같은 병자였습니다.

"어이, 젊은 선교사 양반! 당신이 믿는다는 예수양반이 죽은 자를 살렸다던데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보여 주면 우리가 당신을 따라 예수를 믿고, 만일 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를 속인 댓가로 이 시체처럼 될 각오를 하쇼" 순간 이 젊은 선교사는 아찔했습니다. "잘못 걸렸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잠깐 눈을 감았습니다. 너무나 당황이 되어 어떻게 이 순간에 기도해야 될 지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 자기 앞에 나타나는 환상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떠나올 때, 기도해 주셨던 목사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보혈 찬송하게" 이 청년은 그 병자를 방안으로 옮기도록 부탁했습니다. 무슨 찬송을 할까 고민하는데 평소 교회에서 목사님과 온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별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젊은이였지만 여러번 불렀던 곡이라 1절은 가사를 외워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번에 부활의 능력 보여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망신! 이 젊은 놈 망신입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죄를 씻으신 주이름 찬송합시다" 찬송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10분이 지나고 20분, 30분쯤 지났는데 눈을 살짝 떠서 그 환자를 보는데 전혀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밖에서는 손에 삽과 괭이와 몽둥이를 든 동네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빈정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가는 시체를 살릴 수 있겠나, 빨리 포기 하는 편이 좋을걸, 어디 해볼 때 까지 한번 해보자구" 한 여름의 더위에 온통 몸이 땀으로 범벅이되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한시간 반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소생한 기미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목숨걸고 찬송을 부르는 그 청년선교사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소나기가 되어 그 병자의 온 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핏방울처럼…"

두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 청년이 살짝 눈을 뜨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그 새까만 멧돼지 같은 시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너무도 감격하여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이 당신의 죄를 완전히 씻어 버린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청년선교사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시체의 눈이 깜박거리며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당신이 살아난 것을 믿습니까?" 또 깜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예뻐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 선교사는 엎드려 이 시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구여질나는 시체의 냄새가 프랑스 향수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을찌어다"

그 시체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더니 이 청년 선교사의 손을 붙잡고 한발짝씩 마당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물론, 마당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 작은 예수 청년 선교사 앞에 엎드려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죽어가던 시체같은 병자가 젊은 선교사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이 젊은 선교사 역시 그 죽을 병자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 피의 복음, 부활의 복음은 죽이는 역사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오늘 이 순간 생명의 복음으로, 보혈피의 강력한 능력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학업과 자녀와 모든 행사 속에 역사되고 체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힘,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힘, 날마다 닥쳐오는 시험을 이기는 힘,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고 부정한 모든 것들을 맑히는 힘, 날마다 우리가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고,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이것이 바로 보혈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과 하나되고, 너와 내가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의 은총! 치유 받고 회복되는 감격과 감사가 차고 넘쳐서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하여 목숨 걸고 복음의 핵심인 피의 복음, 생명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모든 열방과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데 헌신하는 월드 크리스쳔의 사명완수! 그 선교의 삶을 "즐거워하는 삶"으로 누리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위 성경의 무오설(無誤說)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그 내용에 있어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이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데 대한 해석에는 학자들 간에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 예컨대, 종교, 도덕은 물론, 역사, 문화, 자연과학, 천문학 등에까지 정확한 진리를 천명하고 있다는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에 관해 정확한 진리를 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무오한 진리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첫째, 우리는 이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을 성경 본문 자체에서 볼 수 있는데, 딤후 3:15-17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고 하여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관한 규범임을 천명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성경을 기초로 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법칙’은 졸역; ‘규범’) 라고 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3년) 도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 (=행위)의 기준이 된다고 천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천명은 다른 여러 신앙고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성경 본문과 신앙고백 상의 분명한 서술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일부 신앙인 중에는 성경이 세상의 모든 사항에 대해서 절대적인,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만 하면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요, 더 보수 정통의 신앙인 줄로만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함께 그러한 주장을 하여왔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을 보면 그러한 이론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예수님 부활의 사건만 보더라도 네 복음서가 각각 부분적으로는 역사적인 사실을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17세기의 과학자 갈릴레오는 당시의 천문학인 천동설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것이 성경의 진리와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을 받아 강압에 의하여 지동설을 취소하였으나, 당시의 교회의 신앙이 진리에 위배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과 같이 성경의 내용 가운데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불일치나, 천문학적인 사실에 대하여 오류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성경의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한에서 정확무오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의 보도나 천문학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보도가 불일치한 것일지라도 그 저자가 기록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대로의 기록이므로 그 자체 진실한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천문학적인 오류도 오늘의 과학이나 천문학에서 보아 오류이지 그 당시로서는 결코 오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1세기의 신약성경 저자에게 20세기의 천문학적인 지식을 주시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 사실 때문에 성경을 믿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언약 신앙


구약의 계약 - 행위의 언약
신약의 계약 - 믿음의 언약


구약의 4대 언약

  1. 노아 언약(무지개)
  2. 아브라함 언약(할례)
  3. 모세 언약(십계명)
  4. 다윗 언약(영원한 왕위)


다윗의 언약

다윗이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예루살렘 정복’이다. 한 번도 정복한 적이 없는 여부스 사람들의 땅,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약속 성취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윗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이후 최초로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천 년 만에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사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하나님이 언약을 잊으셨거나 취소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약 성취의 언저리만 맴돌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천 년의 언약이 서려 있는 이 ‘언약의 땅’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일까? 다윗이 예루살렘 정복 이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법궤였고,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모신다. 그리고 너무 감사해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춤추는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제국의 아침’을 맞이한다.


하나님은 그 다윗에게 언약을 통해 마음껏 복을 부어주신다. 영원히 지속될 복, 이름하여 ‘다윗 언약’이다. 본문은 사무엘하의 하이라이트, 다윗 왕의 진정한 대관식과 같은 말씀이다. 로빈슨(Haddon Robinson)은 사무엘하 7장을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 했고,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사무엘서에서 가장 극적이며 신학적인 중심, 구약성경에서 복음적 신앙의 결정적 구절”이라 했다. 물론 이 언약도 하나님의 일방 선언만 있는 좀 독특한 형태이다. 그리고 ‘다윗 계약’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계약은 이익 추구를 목표로 하는 것, 사랑때문에 맺었기에 계약보다는 언약이라 불려야 할 것 같다. 


이 전에 맺었던 언약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이끈 가장 대표적인 언약은 창세기 15장의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고대 계약의식 형태로 맺었던 언약, 쌍방이 의무와 권리를 약정한 뒤 그 사이를 함께 지나가는 형태였다. 만일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반쪽으로 쪼개짐을 당해도 좋다는 의미(창15:18), 히브리어로 ‘카라트 베리트’는 ‘언약을 자르다’라는 말이다. 특이한 점은 이때 그 사이를 하나님만 지나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언약을 ‘무조건적 언약’이라고 한다. 하나님만 준수 의무를 지닌 언약, 하나님은 이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복 주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이끈 또 다른 언약은 시내 산 언약이었다. 이 언약은 ‘조건부 언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에 조건이 붙어 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출19:5),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지킬 때만 유효하다는 것,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율법을 들고 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제 너희가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며 경고했다. 훗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패망하는데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약이 파기된 결과였다. 

다윗과 맺은 언약
다윗 언약은 이런 시내 산에서의 조건부 계약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기나긴 도피생활 끝에 빈털터리로 왕이 된 다윗, 눈물 젖은 빵으로 연명하는 다윗을 줄곧 보고 계셨다. “언약이고 뭐고 다 싫습니다.” “누가 왕 시켜 달랬나요?” 그럴 법도 한데 꿋꿋하게 이겨내는 다윗이 대견스러우셨을까? 파격적인 언약을 맺으신다. 다윗의 갸륵한 마음 때문이다(2). 자신은 끝없이 받아 누리는 것 같고 아무것도 갚아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러운 다윗,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 살고 하나님은 여전히 천막생활 하신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다윗의 이 마음을 읽으신 하나님은 무조건적 언약을 맺으신다. 일방적인 축복, 다윗이나 그 후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될 정도랄까? 건축에 대해 축복하시고(13),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고 하신다. 7장에 ‘영원히’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등장한다. ‘메시야의 왕권’에 대한 전형적 예언이기도 한 이 언약의 효력이 영원하다는 것, 다윗의 성공과 실패와 상관이 없다.


사울 왕조는 시내 산 언약이 적용되어 잘못이 쌓여 심판을 당했지만 다윗 왕조는 잘못을 해도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약속, 더 이상 성전이나 법궤나 정당성을 위한 어떤 조치도 필요 없다. 이유 불문하고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다. 다윗 왕조의 안정과 번영은 곧 이스라엘의 안전과 번영, 그래서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라고 하셨다. 왕도 살고 민족도 살고, 이는 인간의 연약함도 감안한 조치다.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음을 아신다. 그래서 인간의 연약함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되게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무조건적 언약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 본래는 이방인, 하나님을 몰랐던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믿음 하나를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리고 무조건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다. 사랑 때문이다.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백성이다.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언약의 핵심은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이다.
7장은 ‘집’이라는 단어가 전체 내용을 이끈다(15회).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1)라고 했다.
흔히 평안하면 다른 생각을 하기 쉽지만 다윗은 아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답다.

오랜 세월 쫓기며 산 다윗, 발 뻗고 편히 쉴 곳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통일왕국의 왕이 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발 뻗고 누울 집, 왕궁이 생겼다.
그런데 여전히 천막생활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신경 쓰인다.
그렇다면 언약의 시발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이었다.
자기 편한 것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천막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다윗, 그 다윗이 너무 이뻐서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더 영화롭게 축복하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나님의 다윗을 향한 복(존귀한 이름) 선언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복(평안) 선언이다.
엄청난 복이다. 뭔가 해드리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실제로 해드린 것이 없었어도 하나님은 다윗의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제물로 여기고, 눌러 넘치는 복을 쏟아 부어주신다.
그래서 마음을 드리는 게 중요하다.

물론 이 언약 속에 당부의 말씀도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6~7).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나를 위하여 집을 지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집이 필요 없는 분, 어떤 건물도 하나님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런데 다윗이 처음으로 이 일을 시도한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다. 물론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이 너무 예쁘다. 그래서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9), ‘존귀한 이름’이 되게 하겠고(9), 온 나라가 평안하게 하겠다(11)고 하셨다.


또 다른 당부는 과거를 기억하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한낱 양치던 목동이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다(8).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해야 절제도 알고 감사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 언약에서 정작 당사자인 다윗은 뒷전에 있고 이를 중개하는 사람은 나단 선지자다. 직접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이 또한 다윗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 같다.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최고 권력자일지라도 주위의 충고, 듣기 싫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향한 경고도 주셨다. 잘못하면 회초리를 드신다는 것이다(14). 물론 사울 왕조처럼 버림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하면 징계하신다는 것, 징계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완전 망하는 징계가 아니다. 돌이키면 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여태껏 이스라엘과 맺어온 관계보다 더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겠다고 언약을 주셨다. 이는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언약이기도 하다(14).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언약 백성이 됐다. 




신약의 언약(십자가)


천사(天使)


천사(4398) 말라크(malʼak)  מַלְאַךְ   

1. 천사.  2. 다니엘 3:28.  3. 다니엘 6:22
발음 / 말라크[ malʼak ]
어원 / 4397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단 3:28), 천사(단 6: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 4397.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마락[ malʼâk ]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 16:7, 삿 2:1, 시 34:7), 천사(창 19:1, 삼하 24:16, 대하 32:21), 왕(삼하 11:1), 사신(사 14:32, 33:7), 파견자(나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천사론(天使論)


이사야 14:12-15 / 한글킹제임스 성경에서만 루시퍼라는 이름을 소개한다.

12.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
13.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15. 그러나 너는 지옥까지 끌어내려질 것이요, 구렁의 사면에까지 끌어내려지리라.

킹제임스 성경 - 루시퍼
한글 개역성경 - 계명성

히브리어 "헤렐"

הֵילֵל 스트롱번호 1966

1. 새벽별.  2. 계명성  3. 이사야 14:12
발음 / [ hêylêl ]
어원 / 1984에서 유래[‘밝음’이란 뜻에서]
관련 성경 / 계명성(사 14:12)
구약 성경 / 1회 사용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계명성'은 '할렐'로 표기되었는데,
동사 '할랄(비추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밝은 것,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이사야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계명성(morning star)’을 어떤 성경 초기 번역본에서는 ‘루시퍼(Lucifer. 타락한 천사, 사탄)’라고 번역해 놓았다.
라틴계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의 영향을 받은 영어번역본(New King James Verison)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성경공부를 하다가 계명성이 사탄 루시퍼를 가리킨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정말 계명성이 루시퍼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계명성’은 ‘할렐’로 표기되었는데, 동사 ‘할랄(비추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밝은 것,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뉴킹제임스 번역성경은 아마 계명성을 ‘빛을 가져오는 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초기 교부전통을 따라 무작정 루시퍼로 번역한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벌게이트와 뉴킹제임스가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루시퍼로 번역한 이유는 13절에 등장하는 “북극 집회의 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북쪽의 높은 산에 신들의 모임이 있다는 전설과 가나안 신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거나 인정해서라기보다 문화적 배경을 수사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칼뱅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계명성을 루시퍼로 이해하기보다 ‘교만한 바벨론 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본문과 앞뒤 문맥에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서려 했던 바벨론 왕은 스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떨어지게 된다(15절)는 것과 그의 멸망으로 그의 후손과 그의 시체는 매장지도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19절)는 구절은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자처하던 바벨론 왕이 얼마나 하늘을 찌를 듯 교만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허망한 제국의 영광만을 추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교만과 권력, 세상의 영광과 힘은 새벽 별이 뜨는 아침이 되면 부질없이 사라지는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새벽에 가장 먼저 떠올라 잠시 누리는 샛별과 같은 빛난 영광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게 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역사의 무대에 샛별처럼 등장한 신흥국가 바벨론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권세가 천하를 호령하고 수많은 열왕과 나라를 두려움에 빠뜨렸고(16절), 전성기 시절 바벨론 왕은 강력한 힘과 군사력으로 나라와 도시들을 짓밟고 모든 것을 초토화했다(17절).

교만한 바벨론 왕을 이사야는 ‘계명성’이라 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데, 2인칭 서술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 의지가 담긴 1인칭으로 전환해 선포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2절). 

이사야 선지자는 그 권력과 욕망의 속성을 파헤치며 계속해서 말한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4~15절). 

끝없는 교만과 자신의 영광에 도취된 바벨론 왕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를 맹렬하게 쏟아놓고 있다. 

“열방의 모든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 쌓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18~19절). 

이와 같은 문맥과 주석적 작업을 토대로 볼 때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타락한 천사 루시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제한시키기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바벨론 왕과 그 같은 교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해석할 때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 자료출처  / http://www.voamonline.com/ref-1/029_the-morning-star/morning-star.pdf
신광철목사

1. “계명성”- 천사의 상징인가, 사탄의 이름인가?


이사야 14:12에 나오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사탄의 이름인가, 아니면 천사를 상징하는가? 하는 문제로 킹제임스성경 우월주의자들과 기성 기독교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처럼 두 갈래로 관점이 갈려진 원인은 이사야 14:12의 히브리어 원어 “헬렐(shining one)을 다른 모든 역본들이 “샛별, 새벽별, 또는 계명성(the morning star)” 으로 번역하는 반면, 오직 킹제임스성경(1611)만 “헬렐(shining one)”을 “루시퍼(Lucifer)”로 번역하고 그것을 사탄의 고유 명사이름 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번역상에 그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다른 역본들은 모두 그리스어 필사본들(Greek Texts)에서 번역했지만, 킹제임스 성경(1611) 만은 라틴어 성경(Latin Vulgate)에서 그 구절을 인용해 넣었기 때문이다.

킹제임스성경(1611)은 이사야 14:12의 히브리어 “헬렐(shining one)”을 라틴어 “루시퍼”로 옮겨올 때 본래 첫 소문자로 표시된 “lucifer”를 대문자 “Lucifer”로 고친 후 그것을 사탄의 고유명사 이름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 우월주의자들은 개역 성경의“계명성(새벽별)”을 지적하면서 예수님께만 적용되는 “새벽별”을 어찌 사탄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킹제임스성경(1611) 이외의 성경은 모두 잘못된 성경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루시퍼”가 라틴어 성경(the Latin Vulgate)에서는 “별(day star-사14:12)”, “아침(the morning -욥11:17)”, “열두궁성
(Mazzaroth=Zodiac -욥 38:32)”, “아침(the morning -시 110:3)”, “샛별(the morning star -벧 후1:19)” 등 여러가지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틴어 성경에서 “루시퍼”는 인격체를 지칭하는 특별한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별과 관계된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아침의 별(샛별)”임을 나타낸다. 라틴어성경의 사용 예로 볼 때 “루시퍼(샛별) = 계명성(새벽별)” 이라는 등식이 나온다.

만일 킹제임스성경 우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루시퍼 = 사탄” 이라고 정의 한다면, 성경해석상에 큰 차질이 생긴다.
왜그럴까?
그것은 만일 라틴어 성경 구절을 킹제임스 흠정역에 “루시퍼 = 사탄” 이라는 원리로 대입해 보면 아래와 같이 혼란스런 성경해석이 나온다.

이사야 14:12
(라틴) “Quomodo cecidisti de cae lo, lucifer, qui mane oriebaris? Corruisti in terram, qui vulnerabas gentes?”
“너 아침의 아들 루시퍼(Lucifer =사탄)야, 네가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 . . . .” (킹흠정)

욥기 11:17
(라틴) “Et quasi meridianus fulgor consurget tibi ad vesperam; et cum te consumptum putaveris, orieris ut lucifer.”
“또 네 일생이 대낮보다 더 밝으리니 네가 빛을 발하여 아침(루시퍼=사탄)과 같이 될 것이요” (킹흠정)

욥기 38:32
(라틴) “Numquid producis luciferum in tempore suo, et vesperum super filios terrae consurgere facis?”
“네가 마자롯(Mazzroth=Zodiac: 열두궁성=사탄)을 제 철에 이끌어낼 수 있겠느냐? . . . .” (킹흠정)

시편 110:3
(라틴) “Tecum principium in die virtutis tuae in splendoribus sanctorum: ex utero, ante luciferum, genui te.”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아침(루시퍼=사탄)의 태에서 나오는 거룩함의 그 아름다운 것들로 자원하리니 . . . .” (킹흠정)

2.  베드로후서 1:19
(라틴) “Et habemus firmiorem propheticum sermonem: cui benefacitis attendentes . . . . et lucifer oriatur in cordibus vestris:”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루시퍼=사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 .” (킹흠정)

위에서 보듯이 킹제임스성경 우월주의자들은 “루시퍼”단어가 “사탄”의 이름이라고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 원어의 본 뜻을
무시하고는 바른 성경해석이 나올 수 없다. 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원어성경의 단어 유래와 그 의미
와 뜻을 살펴본다는 것은 성경해석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라틴어 원어의 의미로 볼 때 “루시퍼”라는 단어를 인격체인 “사탄”의 고유
이름으로 특별히 지명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1. 이사야 14:12-15의 내용 분석

위 본문의 내용을 분석해 본다면 아래와 같이 생각된다.
1) 서론 (12절) - 전체 요약
2) 본론 (13-14절) - 타락의 내용
3) 결론 (15절) - 운명적 심판 예고
1) 서론 - 전체 요약(12절)

성경은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 = 새벽별들 = 권능자의 아들들” 이라 하였고(욥38:7, 시29:1, 유1:6), 이 권능자의 아들들
중에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능히 비교하려 한 것(시89:6)이 바로 사14:12에 나오는 “아침의 아들, 빗나는 것(새벽별)” 이다.
결국 “아침의 아들, 헬렐(son of the morning, shining one)”은 하늘에서 떨어지게 되었다고 서론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2) 본론 - 타락의 내용(13-14절)
(1) 타락 이전의 상태
(욥38:7)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새벽별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들은 하나님 보좌에 둘려있는 그룹(Cherub)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기쁨의 찬송으로 화답하였다고 한다. 타락한 천사는 이 그룹들(새벽별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겔28:14-16), 사14:12에서 그 천사를 가리켜서 “아침의 아들, 빛나는 것(샛별, 새벽별, or 계명성)” 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늘 보좌에 둘려있는 그룹(Cherub)들은 1) 지키는 일(창3:22-24), 2) 하나님의 뜻을 실행(겔10:9-16), 3) 위엄과
거룩의 상징으로 속죄소와 언약궤에 표시되었는데(출37:7-9, 히9:5), 이들은 천사들 중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침의 아들 계명성(샛별)은 이 그룹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사14:12는 이 계명성이 어떻게
타락하고 정죄받아 천상에서 쫓겨났는가를 알려주고 있는데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라는 말로 시작한다.
Ý 욥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 = 하나님의 의회 - 시82:1)
하나님의 아들들 = 광명한 천사들(고후11:14) = 새벽별들 = 하늘 군대(the host of heaven , 단8:10)
지성을 갖춘 존재 , 곧

3.  (2) 타락의 내용
하나님의 아들들(새벽별들) 중에서 새벽별 하나가 타락하게된 내용이 사14:12-15, 겔28:13-17, 유1:6에 나온다.
(사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겔28:13-17)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 . .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 . .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 . .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유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Cherub)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새벽별들) 중 하나인 “아침의 아들 계명성(새벽별)”은 본래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음악을 잘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으나 어느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였다. 이사야 14:13-14과 시편89:6을 비교해 보면 그 천사의 타락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13절)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 . .” (14절) “. . .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시89:6)
“대저 궁창(heaven)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있는 자(들) 중에 여호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among the sons of mighty(천사들 중에)
Ref. Commentaries of
Alexander, Matthew, Wesley,
Geneva Bible(1599), British Family Bible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 (욥38:7)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유1:6)
“마음이 교만하여
지혜를 더럽힘” (겔28:17)
유1:6은 히브리어“헬렐”을 “천사”로 표현하였다

4
(3) “계명성”은 정죄 받기 전의 천사를 상징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 .”
여기서 “너(you)”는 곧 “아침의 아들, 계명성(헬렐: llyh)” 이며 정죄 받기 직전의 상태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별들이 빛을 거두리로다”라고 하였으므로(욜2:10, 3:15) 여기 “계명성”은 밤이나
어두움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살전5:5, 엡6:12) 본문에서는 빛을 발산하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son of the morning,
shining one) ” 발광체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3절)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myra-아림) . . . .”
(14절)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hmda-에다메) 하도다”
여기 13-14절의 내용도 “계명성”이 마음 속에서 타락의 동기를 드러냈지만 아직 “자기 처소”(유1:6)를 떠나지 않고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shining one)로 생각된다. 그래서 위의 “높이리라”(13절)는 동사가 미래형(Hiph)이며, “비기리라”(14절)는
동사도 미래형(Hitph)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계명성(shining one)아” 라고 부르신 것도, 그 싯점의 시제
(tense)로 볼 때 “계명성”이 아직 “자기 처소”(유1:6)에서 쫓겨나지 않고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shining one)로 생각된다.
3) 결론 - 운명적 심판 예고 (15절)
(15절)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지옥)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끌어내려지게 되리라 ( drWT 투라드)”
15절에서 천사에게 말씀하실 때 앞으로 있을 정죄된 심판을 예언적으로 표현하였다.
명칭의 변화
(12-14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 . . (15절)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 . . .”
미래형(Hoph) 수동태
you shall be brought down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 .” (벧후2:4)
시간적 전환점 이후는 미래형
사탄(@fc)헬렐(llyh)
뜻 = “대적하는 자”
대상21:1, 욥1,2장, 슥3:1,2
마4:10, 롬16:20, 고전5:5
살후2:9, 계2:9, 계12:9
계12:9, 계20:2, etc.
사탄 = 실제 이름
(어두움의 존재)
뜻 = “아침의 아들 새벽별”
욥38:7, 욥1:6, 욥2:1
시29:1, 시89:6
(sons of Mighty)
계명성(새벽별) = 상징적 표현
루시퍼(새벽별) = 상징적 표현
(빛나는 존재)
시간적 전환점
이후부터
명칭 변화
타락 이전 타락 이후
천사가 자기
처소를 떠나는
분깃점

5
아침의 아들 계명성(헬렐)이 타락한 이후 그 이름이 “사탄”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사탄”이란 이름은 구약에 19회,
신약에 36회나 사용되었다. 타락한 천사의 공식 이름은 “사탄”이다. 그런데 그 타락전 천사를 가리켜서 “루시퍼”라고
표현한 것은 킹제임스성경의 이사야 14:12에만 있을 뿐 다른 그리스어 역본 성경에는 없다.
(Latin) (Hebrew)
“루시퍼(샛별)” = “헬렐(새벽별, 계명성)” = “하나님의 아들들(새벽별들)”

2. 이사야 14:12의 다른 역본들
A. 아람어 구약성경 (Targm Jonathan)
고대 유대인들의 이사야서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한 타굼 조나단은 주후 5세기 경으로 보고 있는데 거기에 나온
사14:12의 내용은 “How hast thou been cast down from the height, who was resplendent among the sons of men
as the bright star(Venus) among the stars(별들 중에 밝은 별)” 로 되어있다(Stenning’s translation).
B. 70인역 그리스어 성경 (Septuagint Greek Version)
사도시대 이전의 70인역(Septuagint Greek Version)에서 사14:12의 히브리어 “헬렐”은 “ho heosphoros”로 기록되었는데
그 뜻은 “아침을 불러오는 새벽별(bringer of the morning, the morning-star)” 으로 표현되었으며(Liddell & Scott),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나오는 벧후 1:19에도 그리스어로 “heosphoros” 이고 뜻은 “샛별(the morning star)”로 되어있다.
C. 라틴어 성경 (the Latin Vulgate)
주후 400년경 제롬(Jerome)이 그 당시 읽혀지던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14:12에서 히브리어 “헬렐”을
라틴어 “루시퍼(Lucifer)”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라틴어 사전(Cassell’s Latin Dictionary)은 이 단어를 “형용사”라 하였고,
그 뜻은 “빛을 옮기는(light-bearing),” 또는 “빛을 가져오는(light-bringing)” 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형용사를 명사로
사용할 때는 “샛별(the morning star)”, 또는 별 중에 “금성(the Venus)”을 의미하였다.
D. 스페인 성경 (the Leina-Valera Spanish Version)
1602 년에 번역된 스페인어 성경에 히브리어 “헬렐”이 스패니쉬 “lucero”로 번역되었는데 그 뜻은 “샛별, 금성(morning
star, Venus, day-star)” 이다.
예수(새벽별) - 계22:16
예수 믿는 자(빛의 아들들) - 요12:36
믿음의 승리자(새벽별) - 계2:28, 단12:3
모두 동일한 상징적 비유의 표현이다.
새벽별 또는 계명성은 타락한 천사의 이름이 될
수 없고, 타락한 천사의 실제 이름은 사탄이
며, 계명성은 타락하기 전의 천사를 말한다.
사탄의 존재를 분명히 말하는 신약도 유1:6 에
보면 “헬렐”을 사탄이라 하지 않고
개인이름 아닌 일반적 “천사”로 번역했다.
son of the morning,
shining one
Ý 타락하여 천상에서 쫓겨난 천사의 성경적 공식 이름은 “루시퍼” 가 아니고 “사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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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루터의 독일어 성경 (Luther’s German Bible)
킹제임스성경(1611)의 배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터의 독일어 역본은 사14:12의 “헬렐”을 “새벽별(morgen stern =
morning star)”로 번역하였으며, 그의 강의록에서도 설명하기를 “그 아침의 아들 새벽별은 루시퍼로도 표현된다” 라고
하였다(Luther’s Works, Vol. 16, p.140). 그것은 A.D. 500-1500년 동안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F. 영어성경 역본들 (English Bibles)
위클립성경(Wycliffe’s Bible, 1300’s):
위클립이 라틴어에서 번역한 최초의 영어성경인데 라틴어 “루시퍼(Lucifer)”를 있는 그대로 이사야 14:12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보면 “그 라틴어(루시퍼)는 1611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어성경 역본에 외래어로 받아들여
졌고, 새벽별(the morning star)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라고 했다(Oxford English Dictionary, IX, p. 81)
제네바 성경(Beneva Bible, 1560):
제롬의 라틴어 성경이 A.D. 500 부터 A.D. 1500 년대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널리 퍼져 사용되어 있던 관계로 제네바
성경도 그 영향을 받아 사14:12에 라틴어 구절이 포함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14:12의 주해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는데 “해가 떠오르기 전의 아침 별을 루시퍼라 불렀다(for the morning starre*, that goeth before the sun, is
called lucifer”)” 라고 하였다. (* 주: starre는 star의 옛 영어)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1611):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자들이 독자들에게(The Translators to The Readers)”라는 서문이 있으며, 그 내용 중에 보면
“난외 주(Marginal Note)”가 성경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사14:12의 “O, Lucifer(오, 루시퍼야)”
구절의 난외 주를 보면 “or, O day starre(또는, 오 샛별이여)” 라고 되어있으니 킹제임스성경 우월자들도 “루시퍼”를
고유 대명사가 아니고 일반적 “샛별, 새벽별, or 계명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은 독자들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난외 주(marginal note)가 성경연구에 유익을 주는 것이니 본문(text)를 외면하여 난외
주를 채택하거나 동등한 의미를 선택한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을 아래와 같이 금지하였다(서문의 번호없는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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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라틴어 “루시퍼(Lucifer)”가 곧 영어로 “샛별, or 새벽별(day-star, or the morning star)” 과 동등한 의미라는 것이
번역자들의 주해임을 감안할 때, 킹제임스성경(1611) 우월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루시퍼 = 새벽별” 임을
인정하고 “루시퍼” 단어를 사탄의 고유 이름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또 킹제임스성경 1672년도 판에는 사14:12에 관하여 기록한 난외 주(a marginal note)에 “해가 돋기 전의 새벽별은
루시퍼라고도 불려진다” 라는 설명이 있다. “계명성(루시퍼)”는 고유 명사가 아니고 천사를 상징하는 “새벽별”일 뿐이다.
상징적 비유의 표현을 고유명사로 할 경우 성경해석에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신약에 나오는 “사자(lion)”이다.
벧전 5:8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lion)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계5:5 -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 . .”
여기서 “사자(lion)”는 마귀와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비유일 뿐이다.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인격체의 대명사로 적용하면 결국 “사자=마귀=예수”라는 모순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며,
“루시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새벽별=사탄=예수”라는 모순의 결과가 나온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14:12에서 빛을 발하던 천사가 정죄받아 하늘에서 쫓겨나면, 즉 “자기 처소를 떠난” 후에는(유1:6) “지옥에 던져 어
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시므로(벧후2:4)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빛을 잃은 후에는 “어
두움의 권세”요(눅22:53),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가 된다(엡6:12). 그렇게 되는 순간부터 그 인격체(individual)에 “사탄”
이라는 정식 이름이 주어졌다(구약-19회, 신약-36회). 타락한 천사에게 그외의 다른 어떤 고유 이름(마귀 예외)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야 14:12의 “아침의 아들 계명성(shining one, the son of the morning)은 현재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이니 그가
곧 “사탄(어두움의 권세)” 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계명성”의 라틴어 “루시퍼”도 사탄의 고유 이름이 아니라고 본다.


 
Lucifer : light-bearer
1. shining one, morning star, Lucifer
1a) of the king of Babylon and Satan(fig.)
2. (TWOT) 'Helel' describing the king of Babylon

'동트는 장면'이라는 뜻의 단어로부터 파생된 단어이며,
영어로는 "빛을 나르는 사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루시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세부설명으로 빛나는 물체나 금성(계명성), 루시퍼의 뜻이 첫번째로 소개되고, 두번째로 바빌론, 또는 사탄의 왕이라고 나오고, 세번째로 바빌론왕의 묘사라고 나옵니다.

이를 보면 헤렐의 제대로 된 영어번역은 Lucifer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처럼 1번의 뜻을 본따서 계명성으로 해석을 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성경처럼 악마의 왕으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이 역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혀 다른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말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맥적인 해석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빛을 가져다 준 사람이란 뜻을 원용하여 루시퍼와 프로메테우스가 같은 신 또는 악마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후 성경을 지극히 높으신 분, 하나님의 자리까지 탐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구렁의 사면까지 끌려내려간다고 합니다. 이는 개역성경 역시 지극히 높은 자와 같이 되고 싶어 하지만 구렁의 맨 밑으로 떨어뜨림을 당한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외경을 잠시 보고자 합니다.(기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외경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있을 줄로 알지만, 믿음의 반석이 아닌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참고자료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저 역시 기독교 장로회 교인입니다.)

외경 중 '아담과 하와의 생애' 12장에서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든 후에 모든 천사를 부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아담에게 경배를 하라고 시켰을 때, 한 천사가 자기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아담에게 경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경배하지 않았다가 하나님께 추방당하고, 이후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오르겠다는 욕심을 품게 된 한 천사가 나옵니다.

이 악마(타락천사)를 위 이사야서에 나오는 루시퍼는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맨 밑바닥, 구렁텅이까지 떨어지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기에, 타락천사를 루시퍼와 동일하게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헤렐(루시퍼)를 금성(계명성)이 아닌 사탄의 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성경의 전후맥락상으로도 더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정리를 한다면, 루시퍼는 바빌론의 왕, 사탄의 왕, 금성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다의어인 고유명사이고, 이에대한 해석 중 사탄의 왕이란 해석이 더 맞다는 생각입니다.

덧붙여서 헤렐(루시퍼)가 이렇게 전혀 다른 두가지 뜻을 가지게 된 배경은 유대인을 비롯한 아라비아 유목민족의 사고관념(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금성은 보통 태양이 뜨기 전에 하늘에 오르면서 육안으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보면 육안으로 느껴지는 크기도 태양과 비슷합니다. 때문에 태양보다 먼저 뜨는 가짜 태양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보다 먼저뜨는 가짜 태양' 이라는 이미지가 '선지자보다 먼저오는 가짜선지자'라는 이미지와 맞닿아 이렇게 다른 두가지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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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 가브리엘, 미가엘

가브리엘 : 하느님의 영웅(다니엘 8:16,  9:21)

뜻 /  하나님의 강한 자, 기쁜소식을 알리는 천사

1. 다니엘에게 두번 이상 나타났다(단 8:16, 9:21). 
2.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세례요한을 낳을 것을 알려주었다(눅 1:13-19).
3. 마리아에게 예수가 탄생할 것을 알려주었다(눅 1:26-33).

다니엘 8:16
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
And I heard a man's voice from the Ulai calling, "Gabriel, tell this man the meaning of the vision."

다니엘 9:21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while I was still in prayer, Gabriel, the man I had seen in the earlier vision, came to me in swift flight about the time of the evening sacrifice.

성서를 보면 구세주와 관련되어 가브리엘 대천사가 세상에 파견된 일이 세번 있다. 첫 파견은 구약시대에 다니엘 예언자에게 나타나 유다인들에게 구세주를 맞는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에언을 하게 했으며, 두번 째는 루가복음 1장 12-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그 아버지 즈카리아에게 주님의 선구자를 알려주었고, 세번째로는 동정마리아께 그녀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루시퍼 : 샛별, 금성, 계명성 - 밝게 빛나는 존재

루시퍼란: '샛별' 혹은 '밝게 빛나는 존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사탄의 이름은 아닙니다.
영문을 해석할때 루시퍼를 해석안하고 그냥 그대로 루시퍼라고 적어서 잘못 와전된것
입니다.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밝게 빛나는자여, 오 너는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이렇게 해야할거같습니다.성서엔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다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루시퍼는 이름이라고 나오지않습니다. 사탄의 이름은 사탄입니다.※yho5958인용

미가엘 :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다니엘 8:16, 9:21)

미카엘 대천사는 구약 신약 도처에 나타남을 보아 그가 주로 악마를 축출하는 임무를 가졌으며,요한 묵시록 12장 7-9에 의하면, 미카엘 대천사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위대한 권능을 가졌으므로 교회에서는 마귀를 물리치기 위한 기도 중에는 반드시 그의 도움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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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는 원래 '루시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로써 3대천사중 가장 높은 '대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힘은 세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높았죠(루시엘이 대천사장이었을땐, 예수님 탄생전. 즉 기원전의 일임.)
루시엘의 일은 찬양을 하는것이었는데..그 찬양하는것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루시엘의 찬양을 자주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천사가 루시엘을 따랐죠.
그러나, 루시엘은 갑자기 악한마음을 품게되었죠.
그래서 하늘에서는 엄청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하나님,하나님을 따르는 천사 VS 루시엘, 루시엘을 따르는천사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의 승리였죠.
하나님은 루시엘과 그의 천사들을 지상으로 쫒아내며,루시엘은 그 과정에서 '루시퍼'가 되었습니다.
루시퍼라는 네임은 대적자 라는뜻이죠.
루시퍼는 '사탄'이라는 존재가되서 모든 악한것의 군림하는 왕이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