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과 진정"이란 "영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을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와 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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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 인격적 예배
윌리엄 템플
"예배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인격의 세 가지 요소는 양심, 생각, 의지라고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격적인 요소가 하나로 묶여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감정만 동의하는 예배(느낌으로 받는 은혜, 지적 동의에 따른 은혜, 나도 누리고 싶어하는 은혜)
삶의 적용이 없는 예배(상상, 다른 사람의 경우, 결단이 없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한국 다리놓는 사람들의 박정관 목사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간혹 지역봉사를 하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나 선교를 게을리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예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계시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접근해
보겠습니다. 자매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뻐지면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제들이 갑자기 멋을 내고 차를 청소하면 틀림없이
연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쓰고 시를 써서 읽어주기도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집앞을 찾아가기도하고,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데이트를 하고자 힙씁니다. 이제는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비로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어원적 의미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유래한 것으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할 때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
히브리어 동사 "샤하(shachah),
하와(chawah)"(창 18:2, 시 99:5)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 (proskuneo)"(요 4:23)는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혹은 입을 맟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맟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bad),
샤라트(sharat)"(신 10:12, 대상 16:4)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latreuo) 라트레이아(latreia)"(마 4:10, 롬 12:1, 행 13:2)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히브리어 동사 "야레(yare)"(렘
32:38-40, 신 6:13)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 (sebomai)"(마 15:8)는 "경외함,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위엄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어원과, 성서적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배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동사이다.
1. 예배 본다(보러간다)
2. 예배 드린다(드리러 간다)
3. 예배 한다(하러 간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
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예식을
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 예배자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인간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Dr. David H Jung - Liberty University).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지으신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와 소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려 그 마음을 시원케 할 자들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Erickson, Millard. Christian Theology. The image of God 참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그분과 교제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여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창세기 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 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파라오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습니다. 내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3:12; 7:16;
8:1,20; 9:1,13; 10:3)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아낌없이 이땅에 흘리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깨어진 관계, 즉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작으로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땅에 보내어 죽이셔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찾아 드리셨습니다.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먼 곳에서 방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예배자들)를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가 예배로서의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예배의 두 요소인 성령과 진리를 제공하시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인 것이며, 다만 인간은 거기에 반응하고, 섬기고, 경외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5.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 중심이 될 때 예배는 무속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의 종교행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팽배한 인간 중심의 예배의 모습
- 자신의 물질 축복을 구하기 위한 예배
-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
- 영적 자기 만족이나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예배
-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드리는 예배
-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 드리는 예배
-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 드리는 예배
- 교회의 음악과 분위기가 좋아서 드리는 예배
A. W. 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진호 목사: 숨겨진 보물 예배: 예수 전도단)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욕심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배가 세속화되고 일종의 쇼와 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며, 자기 중심성위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논쟁이나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6.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기초가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정해신 시간과 장소에 모여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공중 예배' 혹은 '예배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공중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도 모든 연령의 모든 성도들이 한 믿음을 고백하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발각되어 잡혀가서 사나운 동물들에 뜯어먹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질 수 없듯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 예배해야만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의 선입견과 좁은 지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가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새롭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에 합당하고 정직하게 반응하여 한주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운동경기에 비교하면 목회자(순서의 담당자)는 선수로, 성령은 코치로, 성도들은 관중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코치로써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Dr. Vernon Whaley - Liberty University). 공중 예배 가운데 우리는 각각의 은사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가대와 찬양단으로, 안내와 헌금위원으로, 그리고 식사준비와 섬김을 통해서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갈고 다듬고 재발견하여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공중예배의 결과입니다. 공중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고백한 찬송과 기도와 결단은 삶 가운데서 반드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를 "어떠한 지정된 공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의식적 행위"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공간은 온세상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께서는 온땅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어떤 공간도 인간이 예배 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4).
우리의 일터도, 학교도, 퇴근 길도, 차동차도, 가정도, 바다와 산과 들과 우주도 예배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배는 의식적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자체가 예배(Life style worship)입니다. 이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이벤트나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공중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고 일주일 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예배가 아무리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감동적인 의식이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이중적인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잘 차려진 종교 예식을 드림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차려진 제사상을 찾는 귀신이 아니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중 예배(Corporate worship)와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반드시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이전에 온전한 예배 자체가 지니는 특성입니다. 공중 예배와 일주일 동안의 삶의 예배가 합쳐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8.예배와 선교 (전도)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설교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선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선교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선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선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와 공중예배가 균형잡혀서 우리 삶과 교회 가운데서 실현될 때 우리는 선교(전도) 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로서 예수께서 "천국은 누룩넣은 반죽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1-24 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리던 그리심산 입니다. 저 산은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공간과 전통에 구애 받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절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즉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읽었고,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시편과 선지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의 원리입니다.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려면 성령안에서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려면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해야 합니다. '영'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예배를 하게 되고, '진리'에만 치우치면 머리로만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배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은 경외심을 나타내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배가 '동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특정 시간에 특정 예식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를 제한하는 오해를 일으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으로 바꾸어갈 이 엄청난 특권인 예배를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 그것도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 드리지 않고,특정한 시간에, 예식과 제물만 올려드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전혀 무시한 채 이교도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 절에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솟구치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형식적 예배만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특권, 결코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절대로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끊임 없이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동안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오늘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나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는지, 죽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그분의 사랑안에 빠쳐 안식을 누리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는지, 그 음성을 듣고 어떻게 살기로 응답했는지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 이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대견한 자녀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중 예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예배자들이 되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