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양심(良心) 4893. 수네이데시스(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발음 / 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1.  명사 의식, 고전 8:7, 히 10:2, 벧전 2:19.

  • 2.  명사 양심, 도덕의식, 롬 2:15, 고전 10:29, 고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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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거듭난 신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패는 사람들의 평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에 달려있으며, 인생 중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아니라 우리 삶의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평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삶을 깊이있게 상고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쫓아갈 수 없는 대단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와 실패, 수치와 슬픔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의 인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중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양심은 비교적 덜 중요하게 다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지표로 제시합니다. 더러운 양심은 참된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상고하면서 양심의 문제에 주목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기회)인가, 시험인가?
본문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밀고자들이 있어서 사울 왕에게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1). 사해 서안에 있는 엔게디 지역은 동굴이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시 3천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출동합니다. 사울은 갑자기 용변을 보려고 한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바로 그 굴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히브리어법입니다. 이미 어둠 속에 눈이 적응되어 있던 다윗에게 이것은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부하들은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4).” 언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룰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확신을 주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타당하고 그럴 듯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이런 기회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기회가 아닙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다윗은 칼을 뽑았습니다. 부하들은 드디어 시간이 왔고 지금은 그 순간이라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 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 끝을 칼로 조용히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일로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죽일 수도 있는 기회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마 그 순간은 다윗에게 가장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정이 어려운 것만큼 그 결정은 다윗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결정 여하에 따라서 다윗의 믿음 생활의 종말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을 희생하더라도, 믿음의 아름다운 자태를 묵살하더라도 왕위를 지금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를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하나님께서 내 손에 사울을 맡기신 것인가? 우연 치고는 너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사울을 처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편안하게 인도하시려는 것일까?

다윗의 부하들은 너무나 경솔하게 자신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해석하고 있는 전형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만을 생각할 때, 언제나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시험하시는가 하면, 그의 인내, 경건, 그리고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인내는 이 상황을 주님께서 명확하게 허락하실 때까지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경건은 과연 원수를 갚으려는 육의 소원을 영적 욕구에 복종시킬 것인가의 문제였으며, 믿음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믿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주신 기회냐,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행동을 결정하게 됩니다.

2. 양심과 믿음은 함께 한다.
이 상황 속에 있는 다윗을 성경은 매우 예리하게 기록합니다.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6).” 사울은 자기는 물론 부하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굴에서 나갔고 기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조금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 즉 다윗의 내면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예민하게 살아있는 양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가 느낀 양심의 가책은 죄책감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경건의 표지입니다. 다윗은 후일, 인구조사를 행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을 느끼게 됩니다(삼하 24:10).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가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지적하자 그는 또한 은폐하는 쪽 보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윗의 선한 양심은 이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느낀 잘못에 대한 가책이고, 둘째는 사람들(부하들)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까?

경건의 최상의 표지 중 하나는 양심이 민감한 것입니다. 양심이 죄악을 허용하고 타협함으로써 더럽혀지면, 믿음도 다 바닥나게 됩니다. 양심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양심은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양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들을 살펴보십시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다윗에게 양심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옷자락을 베었을 뿐임에도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부하들 중 누구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지만(오히려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이 부하들에게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부하들에게 고백합니다. 선한 양심은 아무도 문제삼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문제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예민한 양심이 뭔가를 느꼈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그로 인한 수치감과 죄책감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6).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여기서 재판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엘로힘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통치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개념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어 세우신 대리인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 개념 때문에, 다윗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을 뿐인데도 그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념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하나님이 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마음 곧 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다윗이 느낀 양심의 가책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가진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은 하나님 없는 양심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은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성경의 기준을 떠나도 너무나 많이 떠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옛날 이스라엘이란 국가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신약 성경도 권위자들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바울서신에서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에 너무나 우리는 길들여져 있습니다. 무엇이 다윗의 손을 막았습니까? 부하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손을 막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양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심어놓으신 도덕법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서 부모의 영향으로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와 같이 이 사회의 기대치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는 정신이상이나 정신병의 증상입니다. 죄인이 양심에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한다면 그것도 물론 정신병적 증세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써놓으셨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다면 이렇게 볼 수 밖에 없고 다윗의 행동이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 형상 안에 각인시켜놓으신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들을 심판하실때 양심이 그 증거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롬 2:14~15). 하나님께서는 인간 안에 이런 하나님의 도덕법을 양심으로 새겨놓으신 것입니다.

3.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간다.
사울이 굴에서 나간 후, 다윗이 사울의 뒤에서 외쳤습니다. “내 주 왕이여”하며 다윗은 땅에 엎드려 사울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처럼, 자신은 사울을 해할 의도가 없음을 그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자신의 결백을 말할 뿐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각오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솔직한 다윗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하늘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죄로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살아계시고 자신의 인생을 결산해야 할 심판주 앞에서 결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진실성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양심에 걸리는 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거듭난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편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증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요일 5:17). 심판날이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낼 것입니다. 그 날에 담대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사십시오. 오늘을 면하고 살아가고, 나의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진실은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결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억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것, 다윗이 했던 것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 법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이스라엘 왕이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자신을 좇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던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기를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방법입니다.

4. 굳어진 양심: 사울
사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울은 매우 격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말하면서 왕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소리 높여 웁니다. 그는 자신의 악함과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선함을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듯이, 다윗이 왕이 될 것과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도 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들을 선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울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울이 지금 보인 이 반응이 회개가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사울이 진실성이 없게 연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이 시간 자신의 감정에 진실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감동하게 만들었습니까? 다윗의 선함이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도 찔림이 된 것입니다. 비록 굳어진 양심이라도, 이렇게 반응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너무나 굳어져 있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압니다. 도덕적 양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양심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은혜의 자리 앞까지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양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양심이 움직일 때 사람은 기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악행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사울의 굳어진 양심 위에 점점 더 단단한 껍질을 형성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빠질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감동이 있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사울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속적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죽이려는 마음이었고, 이것은 그의 순간적 변덕이 아니라 지속적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잠깐 그의 굳어진 양심이 반응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순간적으로 비정상적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입니다. 양심이 그를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찔림은 찔림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행한 일과는 다른 반응인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선한 양심 안에 담겨진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행하는 회개이며, 이런 역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5. 교훈
A.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부르심(롬 12:21): 악인에게 인정받는 믿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육을 이기는 영의 승리를 봅니다. 죄를 이기는 은혜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와 싸워 이기는 법입니다. 원수의 격동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원수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그 표본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게는 원수 갚는 것이 용서하는 것보다 달고 시원합니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갑자기 편안해집니다. 왜 그렇지요? 공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공정함만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옥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의 은혜가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나에게 맡겨라.” 거듭난 자녀가 아니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말씀처럼 부당하고 괴로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파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죄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과 원수 갚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일에 맡는다면, 우리 죄악된 본성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더욱 잔인해지며 더욱 담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고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이렇게 보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원수 갚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우리의 믿음은 사울과 같은 악인을 통해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B.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예민해지고 지켜진다.
여러분, 양심을 지키고 사십시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을 선하고 예민한 양심으로 지키십시오. 이렇게 하려면, 양심을 거스려서 하는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예민하게 지키는 적극적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양심을 우리 속에 써놓으신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통해서 양심을 예민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의 양심은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다 다르기에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온전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의 고백인 시편 19편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살아있고 예민한 양심을 가졌던 다윗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7절부터 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7~14)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 길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C.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십니다. 양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신 것은 다윗이 그 긴긴 시간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쫓기며 살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의 양심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알았고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양심에 믿음을 더하시고 또 더하시고 또 더하여 주셨습니다.





1. 깨끗한 양심(a Pure Conscience)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2.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3. 찔림 받은 양심(a Stricken Conscience)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4. 더러워진 양심(a Defiled Conscience)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5. 악한 양심(an Evil Conscience)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6. 화인 맞은 양심(a Sealed Conscience)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깨끗한 양심(로마서 2:14~15)
A CLEAN CONSCIENCE

▶ 양심의 역기능(자포자기)

수잔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서 손쉬운 이혼을 유보하고, 먼저 남편에게 고통을 갚아줄 길을 모색했다.

남편이 아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임신 중의 아기를 고의로 낙태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낙태에 대한 죄책감이 훨씬 더 무거워서 양심에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자책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임신한 아이를 또 낙태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첫 번째는 남편이 미워서 낙태했고, 이번에는 자신이 미워서 또 낙태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포자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역기능이다.

자기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회개하면 되는데,

도리어 자포자기하는 죄를 더 범한다(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양심이 없었더라면, 자포자기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양심이 있는데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해서

마음이 괴로운 나머지 더 파국으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다.

 

철학자 붓지슈스키(J. Budziszewski)는 『양심의 복수』Revenge of Conscience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양심은 순기능이 있지만 잘못하면 역기능에 빠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을 순기능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양심은 죄를 깨닫게 하고 가급적 악한 일을 멀리 배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이것이 원래 양심의 순기능이다.

 

그런데, 양심이 역기능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위축되거나 겸손해져야 당연한데,

도리어 역작용으로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양심이 부패하면 순기능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패한) 양심은 연쇄적인 죄를 짓게 함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셔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고 애써 무시하려해도

양심의 정죄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성경에도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고 했다.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런데 이 가책을 무마하고 죄 값을 치러서 양심을 달래기 위해

→ 결과적으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더 큰 빚을 얻는 방식과 같다.

 

또한 양심의 가책은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역작용을 할 수 있다.

죄를 짓고 나서 들키면, 그것을 죄로 인정치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 가정/공동체/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둘러대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 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1. 변명, 합리화

일례로 ‘성 혁명’을 생각해 보자.

양심과 하나님의 법은 성관계를 부부관계 내에서만 허락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으로 타락해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양심의 찔림과 가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하면

그것을 변명, 합리화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식만 안 했을 따름이지 결혼한 것과 다름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하는 감정만 생기면, 결혼의 테두리를 무시하고, 서로 거리낌 없이

성관계를 가진다, 청소년, 장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둘러 댄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성 혁명의 시대니까...”

남들 다 하는 것은 -성경과 관계없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2. 일관적으로 변명함.

사람이 범죄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한 번 변명하게 되면,

그것을 일관적으로 계속 변명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탕 사먹고 나서는,

처음에 부모가 용돈을 주기로 해놓고 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그래서 야단맞으면 계속 일관적으로 밀어 붙이는데,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서, 사탕 사주기로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아서,

친구가 사탕 사먹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자기가 한 번 변명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변명하게 된다.

 

거짓말 같은 죄도 마찬가지다. 한 번 거짓말하면, 자기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관적으로 연쇄적인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남을 정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남을 정죄하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다른 정죄 거리를

찾는 것이 사람의 연약성이다.   

 

동성연애를 예로 들면,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계속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결과 혼인 신고에 의한 법적 부부로 인정,

(아이를 입양해서) 법적 자녀 인정, 나중에는 교회에서 결혼식 허용,

동성연애 목회자 안수 요구까지 계속 발전하게 된다.

동성연애가 정당한데, 나머지 다른 것도 하자가 없다는 일관적인 논리를 편다.  

 

▶3. 죄를 공개적으로 자랑함

낙태를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낙태를 찬성하는 시위집회를 가진다.

포르노를 회개하기보다, 언론 자유와 심의 과정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진다.

동성연애를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안락사를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한 병든 노인을 빨리 편하게 주사 한 방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

요즘은 병원에서 장례식까지 하므로 잘 하면 수익은 더 생긴다.

사람의 양심이 부패하면 못할 짓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수발하는 남은 가족을 돕는 일로 여긴다.(외국의 경우임)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4. 공범자와 연합함

헤롯과 빌라도는 과거 서로 적이었으나, 예수를 죽일 때 서로 친구가 되었다(눅 23:12).

술주정뱅이는 항상 술친구를 찾고, 10대 반항아들은 항상 몰려다닌다.

동성연애자들은 자기끼리 모임을 만들며 마약중독자들은 끊임없이 친구를 끌어들인다.

불공정한 상거래를 할 때도 담합한다. 교회에서도 대적하는 사람은 서로 당을 짓는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먼저’ 이런 악한 연합 관계를 끊는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부탁하셨다.

또한 마리아에겐 요한을 아들처럼 보살피라고 당부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서로 주안에서 한 가족처럼 선하게 연합한다.(히 10:24-25).

성도간의 관계는 ①청결한 마음 ②선한 양심 ③참 믿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다.

그렇게 되도록 권고하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딤전 1:5)

 

 

◑진실을 직면하라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은 끊임없이 자기를 정죄하든지 아니면 변명하게 만든다.

또는 둘 다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겉으로는 죄를 합리화하거나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양심이 바짝 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진실을 부인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진실을 뿌리치지 못해서

속병이 드는 경우이다.

 

▶메리의 경우

메리는 낙태 찬성 모임에 다니다가 낙태 합법화 요구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자기의 낙태 경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했는지를 간증(?)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낙태를 안 했더라면) 애기가 태어날 즈음에 그 고통은 극에 달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 자기는 여느 살인범과 다름없다고 자책했다.

이때까지 그녀가 낙태 찬성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자신의 양심의 고통에 의한 (반작용적인) 행동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직면하지 못하는 연약성이 있다.

그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피해버린다.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애쓴다.

아니면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떠들고 자랑한다. 그것이 직면하는 것 보다

덜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길이 있다면?

범죄 하기 이전의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죄의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면제받을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진실이(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진실을 직면하고 밝힐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되어진다.

 

◑깨끗케 하는 피

 

성경은 양심이 깨끗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14)

 

예수 피는 여러 가지 효험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범죄한 양심은 비로소 변명(적극)하거나

자책(소극)하는 일을 멈춘다. 더 나아가 하나의 사랑과 평화 가운데 거하는데, 그것은

범죄 하기 이전보다 더욱 깊은 행복이다.

 

예수님의 죄가 씻지 못할 만큼 무섭고 큰 죄는 없다.

예수님 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하이타이다. 찌든 때, 묶은 때도 쏙쏙 뺀다.

예수 피에 담궈서 빠지지 않는 얼룩은 없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천국에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계 7:14)

예수 피가 아니고서는 우리 양심을 절대로 깨끗케 할 수 없으며

예수 피가 깨끗케 하지 못할 만큼 더러운 양심도 이 세상에는 없다. 할렐루야!

 

▶다 끝냈다!

(It is finished! 요 19:30, 개역성경엔 “다 이루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던 모진 고통이 다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 피로 이루신 대속 사역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원어적으로 이 말은 상거래에서 “다 갚았다. 값이 다 치러졌다 paid in full"는 뜻이다. 

더 이상 갚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들의 죄 값은 완전히 치러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는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접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진 것이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갈레로

쫙 찢어졌다(마 27:51). 성전 휘장은 사람의 힘으로 찢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한

직조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높아서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단숨에

한 번 만에 찢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 성전 휘장이 두 개로 쫙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증거이다. 

 

성전 휘장은 수 백 년 동안 찢어지지 않고 굳게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님(지성소)과 사람을 분리하는 선이었다.

휘장 안의 지성소는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보좌요, 거하시는 곳이었다.

그곳은 아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으며, 오직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1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와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백성들은 모두 바깥에서 기다렸다.

일반 사람들은 거기 들어가기는커녕 속을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나님은 친히 그 휘장을 찢으셨다.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쳐진 휘장을 찢어 없애 버리셨고,

이제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친근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대제사장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일 번에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깨끗해진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동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더러워진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하는데 짐승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

아무리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 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