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격(人格, 사람 인. 격식 격)이란 한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식을 갖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세 가지 격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
둘째는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

누가복음 15장에 두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을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눠 줄 재산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몫의 재산을 갖고 먼 도시로 나가서 신나게 즐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갖고 있던 재물은 모두 탕진되고 말았습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작은 아들은 남의 집에서 돼지를 먹이며 돼지가 먹는 사료 쥐엄열매로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집에는 여러 품군들이 있지만 그들은 배부른 일군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야 하겠다며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물질의 관계로 인식했던 작은 아들은 물질이 아니라 아버지와 종의 관계로 인식의 세계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다가갈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즉 새로운 관계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도깨비 방망이 또는 만능해결자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일은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바라시며,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 (창 3장)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되 친밀하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알았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직접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물은 만일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만일 우리가 이 선물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하나님을 포함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그 구절들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지혜를 구합니다 (야고보서 1:5).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소원을 아룁니다 (요한복음 15:1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5:8).
그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간격을 좁히기 위해 다리를 놓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5-17). 예수님은 죽기 전에 이 말씀을 하셨고,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성령은 간절하게 성령을 받고자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면서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권면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며,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 거룩한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악과 유혹에 대항해 싸울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다스려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23).

하나님과의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그것을 얻는 어떤 신비한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성경을 믿는 교회에 가입하여 다녀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이 우리를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즉시 변화를 볼 수 없을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고, 모든 진리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인격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혹은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마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고 익숙한 분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보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격이라는 말은 좀 어려운 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식, 의지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감성과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이 무엇인가요? 화가 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귀찮으면 짜증을 내기도 하고 기쁘면 웃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을 감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성을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책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를 보면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점점 자라나면서 사람의 이름을 배우게 되고 물건들의 이름을 배우게 되면서 지식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지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성과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는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자기의 감정만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너무 기쁘고 웃기더라도 어렵고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웃음을 참기도 하고, 너무 화가 나는데 화를 내면 싸울 것 같아서 화를 안내고 삭히기도 합니다.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래! 오늘은 짬뽕이야~ 하고 결정하는 것 그것이 의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감성, 지성,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나이가 많으신 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기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합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친구가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친구를 칭찬하기도 하고, 내가 이런 조언을 해주면 저 동생의 지식이 자라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동생의 수준에 맞게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들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격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나누고 싶은 내용은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인격적인 존재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인격이 있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정과 지성과 의지가 있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로봇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1) 감정이신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감정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화를 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웃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슬퍼서 눈물 흘리기도 하십니다.

신 5:9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혹은 그보다 훨씬 풍성한 감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감성적인 분이십니다.

(2) 지성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또한 지성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시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모든 것들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 147:4-5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를 다 세실 수 있고 별이 몇 개나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지혜는 끝이 없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3) 의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처럼 의지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살전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죄악과 선이 있으면 선을 선택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죄를 짓고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긍휼로 은혜로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호수아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이루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가 가진 의지보다 훨씬 차원을 넘게 강력하시고 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감정과 지식과 의지가 매우 많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보다 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4) 인격이신 하나님을 무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때에 어떻게 대하나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뭘 모르는 분이시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산다. 다른 사람은 무시하지 않고 신경쓰면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지성을 생각하면서 대하지지만 하나님은 없는 분 취급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에도 계신다. 우리가 혼자만의 시간에 혼자서 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우리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가 핸드폰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우리가 부모님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면서 뭘 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도 다 알고 듣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불평하거나 짜증나거나 화나거나 욕하거나 하는 생각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 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내 마음 속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르는게 없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리가 변화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까지 기다려주고 인내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오래 참고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없는 분 취급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내를 무시하는 꼴이 된다.

2.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바울의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해도 하나님이 정말로 옆에 있는 친구와 같이 가족과 같이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놀고 나누고 할 수 있는 인격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거짓말일 수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1) 사울 이야기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행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냥 싫어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옳지 못한 사람들 혹세우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감옥에 넣고 죽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살기 등등했고 그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길을 떠나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이 사울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이게 무슨일이래 하면서 땅에 업드려져서 어안이 벙벙하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 너무나 두렵기도 하고 해서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 오는 것입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자 사울은 깜짝 놀랍니다. 제가 당신을 박해한다구요? 당신이 누구신데요? 저는 아무도 박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사울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갑자기 닥친 이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완전히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돕는 위대한 복음 사역자로 위대한 사도로 성경 저자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사울과 같은 만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모습이 되어집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바꾸셔서 그가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대화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분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박해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라고 슬픈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뜻이 있어서 그를 만나시기로 뜻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에 그 길가에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 자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만남이 있다면 사람이 안변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만 변할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값진 일일까요? 얼마나 기쁜일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나야만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방향이 완전히 틀렸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고 박해했고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틀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그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라면 나도 좀 만나 주시라고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사건을 주시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시간이 허비되어서 너무 아깝다고 억울하다고 때를 쓰고 애원해야 합니다.

3.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와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인격이시고 그분은 신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는 요청을 드리고 그분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갈급한 사람이 되라.

먼저는 갈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갈급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갈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피조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이시고 창조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보다 높은 존재로서 생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내 삶의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음성이 들릴 때에 바닥에 바짝 업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짝 업드려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는 교만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십니다.

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내 모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라고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 제발 나좀 만나주시라고 눈물 흘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태도입니다.

(2) 마음이 정결한 자가 되자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를 만나주십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은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지 시험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요청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를 미워하십니다.

마4: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순결한 마음이 아닌 교만한 마음으로 대하길 바랍니다. 그것들의 꾀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수시로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수많은 거짓들 교만들 악한 말들 욕심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정결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애통하고 눈물 흘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사람이 되자.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지성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지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점에 있어서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과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적으로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히 11: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떠나가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감정이 썩 내키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기로 순종해야 합니다.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십니다. 그를 만나주십니다.

렘 29: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을 부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없으신 것 같아 느껴지고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록 더욱 하나님을 믿어보기로 선택하고 정말 살아계신지 정말 인격적으로 나를 만나주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미친 사람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해본 사람만이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4.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고 지성을 가지신 분이시고 무엇보다 의지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하나님과 함께 공감하는 그러한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만남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나요? 먼저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바짝 업드려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내 죄를 어찌할 수 없으니 하나님 해결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우리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만나시길 큰 복 얻는 시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다르게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전인격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모호하게 들릴 수 있으므로 간단히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속성)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능, 전지, 무소부재(편재(遍在)), 미리 아심, 영원, 지혜, 완전, 무한, 눈으로 볼 수 없음, 등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지전능을 좋아하고 또 그 중에서 축복, 사랑, 위로, 희망 등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대합니다. 실제 신앙인들 가운데 여기에만 초점을 맞춰서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의 보편적 신앙관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축복을 받을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고, 그 증거로 방언이나 신유나 계시 등 은사를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고,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이며, 방언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되고, 성령이 임해서 방언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요? 여기에 회의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사 즉 방언이나 계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거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우월감 혹은 이기를 추구하지 그리스도의 인격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사는 곧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연결선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은사를 주고 그 사람을 드러내기보다는 인격적으로 그를 통해 역사하기를 기뻐하신다고 봐야겠지요. 바울이 주장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는다는 것에 대치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사를 받음과 동시에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이 또한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표현을 빌자면, 인격은 지정의(知情意)의 3요소가 포함된 것이고, 지정의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격적 만남이라고 합니다만, 나는 이렇게 봅니다. 어떤 형태로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절대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희나 기쁨 가운데 선명하게 각인되는 경우도 있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됨으로 격하게 비천함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현상보다는 그 가운데 강렬하게 하나님을 절대자로 인식하거나 깊은 마음의 고백입니다. 그런 작용은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듣거나 어느 순간 다른 일 하다가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운명적인 역사라고 할까요(?) 그렇게 다가옵니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은 다른 사람의 분위기에 잘 휩쓸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적인 강렬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순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순수한 고백을 하게 되면 이런 것들로 우월적 존재가 된다고 생각지 않고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작용됩니다. 헌신! 우리 신앙이 상황에 휩쓸리고, 나도 모르게 좋고 나쁨이 반복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무엇이 좋아지냐고요? 형통해질까요? 은사가 충만해질까요? 아닙니다. 영혼의 심연에 뿌리를 둔 신앙을 갖고 주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긍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고난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고난을 어리석게 자청하지 않으려 하고, 고난 닥쳐도 고난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견디고 이겨나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힘과 희망을 갖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아니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 사람은 또 다시 새로운 만남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만남이요, 영원한 동행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남은 한순간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지향점을 갖고 계속 진행됩니다. 일단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은 길이 험하든, 황금 표지판으로 유혹하든(아마 마음은 잠깐 흔들릴지 모르죠.), 사탄이 유혹하는 쪽의 길이 금길이든 그것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이 길, 저 길을 들어서서 혼란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말하겠죠. “뭐 그리 바빠? 천천히 놀고 가!” 그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격적 만남이란 무슨 뜻인가요?

[질문] 인격적 관계라든지 인격적 만남이라는 표현을 가끔 듣게 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답변] 질문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가볍게 다룰 성질이 아닙니다.
질문의 정확한 의도가 틀림없이 기독교적 용례, 예컨대 “신앙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든지 “구원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전제”라고 말할 때의 정확한 뜻을 물으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의 용례에서 문자적 혹은 사전적 정의(定意)만으로는 그 해석에 턱 없이 부족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국어사전에선 ‘인격’을 네 가지로 구분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품격, 자격,
2. 법률적 행위의 주체,
3. 개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자격,
4. 자각이 있고 도덕상의 책임을 질 만한 자격이 있는 개체.
- 새국어대사전,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년간

일반적으로 ‘인격적’이라고 말할 때는 품성, 기질, 매너 등이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본능에 의존하지 않으며, 비이성적이거나 반윤리적이 아니며, 사회적 규범을 잘 따르기에 동물과 대비해 인간다운 기본 품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예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행전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러나 성경적 의미에선 반드시 하나님과 연관해서 사용되어집니다. (성경에서 인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바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용어입니다.) 특별히 창세기의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6,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지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외적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기에 그분을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고결한 신선처럼 상상해선 안 됩니다. 품성과 속성 등에서 닮게 창조되었다는 뜻인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형상은 하나님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듯이 인간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격은 동물과 다른 인간 특유의 모습으로 지성, 감정,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판단, 결단, 시행할 수 있는 총체적 능력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도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즉 한 인간이란 개체 전체가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상기의 사전적 정의 중에 성경적 의미와 가장 유사한 것은 4번입니다.) 물론 동물도 비록 그 수준이 낮긴 하지만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생존과 번식 목적에 따라 무조건 본능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목적과 별개로 스스로 어떤 일을 도모해 시행할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정의가 동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고급한 수준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지정의를 통괄할 수 있는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그분 뜻대로 살아야 하니까 그 뜻을 지각하고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영혼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인격이란 지정의뿐만 아니라 영혼도 포함된 한 개별 인간의 총괄적 특성이며, 인격적이란 동물과 다른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성경적 의미로는 인격적인 것과는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당연히 선하고 의롭게 행하게 되고 또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즉, 성경적으로 인격적인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정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뜻을 살피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부정적인 의미 즉 인격적 만남과 관계가 아닌 것부터 따져 보겠습니다.  

우선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 교리들이 납득되어 믿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죄 사함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리에 대해 단지 머리로만, 즉 지성과 의지만 동원하여 반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불신자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독교의 기도원에 올라갑니다. 또 울고 불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는 경우가 가끔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당장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온전한 신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초자연적 간섭만 있었는지 혹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 친구의 권유를 받아 불신자가 찬양, 간증, 치유 집회에 참석해 아주 감동될 수 있습니다. 뭔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 같고 자신 속에 쌓여 있던 모든 어둠이 가셔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단의 초대에 응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감정적 흥분에 부응해 결단한 것뿐이면 전인격이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성 감성 의지 중 하나 혹은 둘만 동원된 경우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셋이 다 동원되어도 영혼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작동되었다면 여전히 인격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란 개체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더 실감나는 표현으로는 뒤집어져야 합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또 그 바뀐 사람으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시적 부분적 변화만으로는 인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기 내면의 수양과 도덕적 삶의 표본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가르친 계명만 순종하는 것은 종교적 도덕적 만남과 관계일 수는 있어도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한 인간이 지정의와 영혼까지 총괄적으로 동원하여 최초로 나타내는 반응이 만남이며, 그 이후 죽어서 천국가기까지의 지속적인 반응이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선각자나 도덕적 스승으로서가 아닌 자기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평생을 두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령이 그 영혼에 간섭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최초의 반응은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온전한 인식과 그에 따른 철저하고도 전인적(全人的)인 회개여야 합니다. 단순히 자기가 범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반성하고 또 치명적으로 잘못된 습관 한두 개를 고쳐선 안 됩니다.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죄에 묶인 노예로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해 있었기에 죄스런 행위가 따라 나온 것이며, 그 근본적 발단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배반 심지어 저주했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 결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혹여 지식적 종교적으로 알았더라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지 않았던, 삶이 정말로 향방 없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고 만 완전한 허사였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또 그럼으로써 오직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따랐던 옛 생활이 이뤄낸 것이라고는 공허함과 갈급함과 더러움과 추함 뿐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면 그야말로 영원한 사망의 길로 흘러들어가 자기 인생에 소망이라고는 단 한 치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소망의 빛을 발견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이 영단번에 깨끗이 씻음 받아서 이전에 이 땅의 한시적 삶에만 목표를 두었던 인생을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진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제는 오직 그분의 신령하고도 거룩한 통치를 받아 그분 뜻에 따라 살며 천국에서 궁극적인 영광을 누릴 소망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인간의 지정의적 노력만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안에 타락했던 영혼을 성령께서 새롭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나와는 상관이 없고 까닭 없이 밉기만 했던 십자가 예수가 이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풍성한 새생명임을 확신하게 되고 아무 이유 없어도, 즉 자기가 처한 현실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좋기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제부턴 십자가의 아름다운 덕과 향기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또 실제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란 성령님의 간섭과 은혜로 십자가 예수님을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부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1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는 것, 특별히 이전의 자기와 같았던 자들을 하나님께 화목케 하는 직책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그분과의 관계입니다.

인격적 만남과 관계란 상식적으로도 만나야할 두 인격체가 있어야 하며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며 또 각자가 상대의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제 삼자, 혹은 책과 편지 같은 매개체를 통한 간접적 교류를 두고 인격적 관계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 개인의 내면적 수양, 자성, 묵상, 직관, 득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 계신 절대적 객체로서의 하나님과 조우가 있어야 하며 또 그 때에 그분에게 들은 말씀이 있어야 하며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전부를 건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요컨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려서 이제는 그분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종교적 개념, 사상, 원리, 신조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께 나아올 수 있는 길로는 오직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에 인격적으로 동참하는 자들에게만 열어 놓은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입니다. 지금도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한 죄인의 존재를 완전히 뒤집은 후에 그 삶과 인생을 이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거룩하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자 또한 오직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때에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 가운데 있음을 구체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인지하고 누리게 됩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애인과의 관계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관계면)

이사야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

본문에서 말씀하는 분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국가 신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고 말씀하신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전세계에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구별 받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돌보심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며, 또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신본주의의 길을 버리고 인본주의의 악을 따라서 살아가는 악한 자들에게 특별히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마 3:9, 갈 3:7),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안타까움을 가득 품으신 채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격(성도와의 관계면)

1) 구속자 하나님

디도서 1,2,3장에 보면 구주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대목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의 구속자시요” “구속자”라는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은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룻기에서는 '기업 무를 자'(룻 2:20 ; 3:9, 12, 13 ; 4:1, 3, 6, 8, 14)로 번역되었으며 구약에만 100회 이상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란 구약의 율법에서 온 것인데 상속 근친의 의무 규정입니다. 만일 가난한 친족이 빚 때문에 땅을 팔았다가 살 능력이 없으면 상속 근친이 값을 대신 치르고 사주어야 할 의무를 말하고 여호수아 30장 3절에서 9절에 보면 살인죄를 지어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피의 보수자’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는 것과 같이 원죄와 본죄로 죄인된 인간들에 대하여 이러한 '기업 무를 자'가 친히 되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들은 죄를 범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전 인간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고, 그 죄 문제와 사망의 문제, 마귀의 종된 문제, 지옥의 가난, 고통, 절망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는 죄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의 보배로운 피를 인간의 죄 값으로 치르셔서 이러한 문제들을 영원히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값없이 은혜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신 것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사랑과 체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6)

2) 교육자 하나님

한국의 교육 열풍이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중학생에게 물어 보니 한달에 과외비와 학비, 잡비등을 계산해 보니 5,60만원은 족히 든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 보통 한달에 100만원짜리 월급쟁이만큼 돈을 들여서라도 공부를 시키는 것이 한국 교육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의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한 자를 만드시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주셔서 의로 교육시키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가르치고”의 원어의 뜻은 ‘배우다, 가르치다, 훈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교육시키는 면을 봤읍니다만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 개망마니와 같이 예수를 몇 십년을 믿어도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서 숨이 죽지 않은 퍼런 배추 같은 인간, 배운 것을 금방 까먹고, 또 배워도 까먹는 인간, 알고도 행하지 못하여 고범죄를 무수히 짓는 우리 인간들을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쉬지 않고 영감과 진리로 인도하시고, 각종 환경을 직접 만들어 주셔서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예수님 닮은 사람을 만드시기를 원하셔서 교육시키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만 교육시키시기 위하여 모든 환경을 만들어도 주시고 인도도 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외롭게 혼자만 있는 것 같이 느껴 지는 환경도 주시고, 힘들고 지치고 어려워 하면 주변에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사랑과 은혜와 위안의 교제도 하도록 하시고, 때로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미치고 환장할만큼 기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때로는 홍해 앞, 사자굴, 풀무불, 굶주림, 병등 온갖 환경을 만들어 주시더라도 교육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셔서 만들어 주시는 줄 알고 감사함으로만 받고, 청종을 본능화 하는 삶만 함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수입만 보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3) 인도자 하나님

① 전지 전능자로

우리 하나님은 인도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인도자는 ‘밟다, 행진하다, 나아가다, 인도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의 사람으로 성장 해 가고 연습해 가는데 필요한 모든 환경으로만 인도하시는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인 줄을 잘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해 주심의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고도 광야에서 원망, 불평, 짜증, 시험하는 죄를 지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멸당한 교훈을 보고 우리는 어리석게 그 증인들의 부끄럽고 어리석은 길을 다시 답습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2장 16절에 보면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 분 일 초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며, 어떤 길이 생명길이며 사망길인지, 성공과 실패, 영광과 부끄러움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전지전능자로서 실패하지 않고, 헛수고 하지 않고, 짧은 나그네 인생을 통하여 온전하고, 거룩하고, 구비한 자로 만드시기 원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예수님으로

또한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선생님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기까지 낮아지심의 모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의 희생의 모범, 새벽기도와 철야 기도, 금식 기도, 강청의 기도와 같이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틈 나는 대로 이 동리 저 동리로 다니시면서 전도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면서 제자들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③ 성령으로

오늘날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우리가 당한 현실 현실마다 어떻게 언행심사를 하며 살아야 할지를 남김 없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기도 할 때에도,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 감동시켜 주시기도 하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남은 관건은 우리가 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기 위하여 얼마나 깨어서 그의 음성을 듣느냐 하는 것과 들은 대로 얼마나 실행을 하느냐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3. 청종을 본능화 합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끊임 없이 우리를 구속의 사랑으로, 범사에 유익하게 교육하시며,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영감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아니오’는 한 번도 되지 않고 청종으로만 나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이럴 때에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강과 같은 평강, 바다 물결 같은 의, 모래 같은 후손의 축복, 그 외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은사와 신령한 것들을 후히 주실 때 누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주인공,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인격적인 하나님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사도행전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 계셔서 행동하시는 인격적이신 신으로 계시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인격성을 강조하는 고백인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신 데, 자신을 역사 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것을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 여러 가지의 활동의 모습을 의미하는데,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루어 나가신다.

우리는 오늘 그와 같은 하나님을 살펴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인격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본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셔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 사랑을 충만히 갖고 계신다. 또 완전한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시며, 함께 거룩하신 의지를 갖고 계신다.

▶창세기 6:6 --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심

▶시편 103:8-13 -- 노하기를 더디 하심,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심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

▶창세기 18:19 --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들을 택하였나니

▶출애굽기 3:7 --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시편 115:3 --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셨나니,

▶요한복음 6:38 --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함이라,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활동은 무엇인가?

①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신다(창세기 1:3)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인격성에 따라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조한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사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런데 만약 우리 인간들이 주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를 거부하거나 그 관계를 깨트린다면 결국 불순종과 불 신앙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시대 시대마다 성경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해 오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②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신다(창세기 11;5, 시편 94:9)

하나님의 인격으로 거룩하게 지음을 받은 인간은 이제 그 인격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과 삶을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와 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떠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관리해 나아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을 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③ 하나님은 불의한 인간에 대해서는 진노하신다창세기 6:6, 신명기 1:37)

인간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이를 거역하고 물질에 푹 빠지거나, 세상의 허영만 들뜨거나, 죽은 형상인 우상을 섬길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맹렬하게 질투를 하시면서 진노하시는 것이다.(출애굽기 20:5)

하나님은 감정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 감정은 분노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백성들에 대하여(수 7:1)--아이 성이 패한 이유-아간이 하나님 뜻을 거역하고 물건을 훔침

▶불 신앙하는 백성들에 대하여(시78:21,22)--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함--노하심

▶우상 숭배하는 백성에 대하여(삿 2:11)--사사시대에 하나님 목전에서 바알을 섬김

▶잘못하는 백성에 대하여(삼하 6:7)--법궤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소가 뛰놀자 웃사가 거룩한 법궤를 붙듦--죽음

④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시편 114:4)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에 따라 섭리하시고 보존해 나아가시는데 분노해야 할 가운데서도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참으신다.(시78:38)--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을 때 진노하셨으나 여러번 돌이키심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참으신다.(롬3:25)--불의한 세상을 예수의 피로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참으심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도 참으신다.(창18:23-32)--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시는데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함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게실 당시 따르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사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눈에 안보이고 만져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보고 싶은 것은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고 하셨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을 보여주셨는가?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불의한 사람들에 대하여 한없이 거룩하신 분으로, 또 한없이 긍휼하신 분으로 나타나셨는데 이는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감정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사람들의 감정은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신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 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주셨다.

마5:-7:의 산상수훈을 보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탁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지혜롭다 해도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모든 지혜가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거룩에 기초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과 거룩에 기초를 둔 지성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이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셨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나아가셨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지성을 지셨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셨다.

인격적이란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결단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깊이 생각을 하셨다. 어떻게 하면 죽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주적으로 최대의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 결단이 바로 “성육신 하신 사건”이다. 또 하나의 최대 결단은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자신이 지니신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겟세마네의 결단”이다. 이러한 결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결단이다.

3.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는 서로간에 상업주의적 풍조에 물들어져 있다. 모든 것을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환경이 우리 마음과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구입하려고 해도 믿을 수 있는가? 가격이 합리적인가? 집을 구입하려고 해도 속고사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사귀려고 해도 이 사람은 신실하고 믿을 만 한가?

여러분들도 저를 청빙 할 때에 아마 신실한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처음 선택할 때는 그렇게 신중히 해야 한다.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를 잘못 선택하면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으며 잘못된 신앙 사상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에 대해서는 아마 안심하셔도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천사가 아니다. 천사와 같이 보지 말라. 사람은 다 실수를 한다. 우리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수를 변명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하늘나라 갈 때에는 성화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불신에 물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비인격적으로 섬기려고 하고 있다.(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을 대할 때에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마 22:37-40)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요 14:21, 히 6:16-18)



하나님의 본질 –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에피 톤 데오 톤 존타)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이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場)을 제공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받는다. 흔히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인격이라는 개념을 의인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격(person)이란 말이 라틴어의 persona(가면, 탈)에서 왔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활동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인격성은 살아있음에 그 특징이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행동하시는 '인격적인 신(神)'으로 계시해 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 행14:15)이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들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격'을 살펴봄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들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세 요소를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시고(참조; 창6:6; 시103:8-13)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요3:16) 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또 완전하신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며(참조; 창18:19; 출3:7; 행15:18), 거룩하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참조; 창3:15; 시115:3; 요6:38).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활동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과 만물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시고 계시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참조; 창1:3).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즉 '인격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인생들과 인격적인 대화로 사귐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깨뜨리고,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의 죄'인 셈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해오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히1:1)하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곧 '영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참조; 요일1:2,3).

둘째, 인생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십니다(참조; 창11:5; 시94:9). 인생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책임져야 할 근거는 바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사 모두를 듣고, 보고, 판단하고 계시는 데 있습니다.

셋째, 인생의 '불의'에 대해 진노하십니다(참조; 창6:6; 신1:37). 특히 인생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물질과 세상의 허영들을 '우상화'하는 것에는 맹렬한 '질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참조; 출20:5).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참조; 시114:4). 이와 같은 인격적 특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들을 따라서 만물을 창조, 섭리, 보존, 통치하십니다(참조; 행14:15; 느9:6; 시7:6,7).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음
인생들의 '불의'에 대한 '거룩한 의분'(참조; 마23장), 또 한없으신 '긍휼심'(참조; 마9:36; 요5:6)은 바로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 주신 예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생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이 땅으로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 주셨음
'산상 수훈'(마5-7장)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시던 그 뛰어나신 '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참조; 요8:3-9). 또 앞날에 대한 전지하신 통찰력들(참조; 마24장)은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거룩하신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보여 준 예가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임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그 자체입니다. '인생 구원'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 최대의 '결단'을 내리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며, 또한 모든 악의 세력들의 도전과 훼방을 물리치시고, 또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의 결단'(참조; 눅22:42)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의지적 행동'입니다.

3.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맺으려면 우리 인생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기적 '상업주의' 풍조에 물든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마저도 그와 같이 비인격적으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참조; 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으로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생들도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참조; 마22:37-40).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그 언약을 끝까지 의뢰하며, 그 언약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것임을 유념합시다(참조; 요14:21; 히6:16-18).


하나님의 본질 1 –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정체를 설명코자 하는 접근으로는 그 본질적 규명, 속성적인 접근,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갖는 명칭들과 신약에서 갖는 명칭들의 성격을 찾아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가 영이시고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우선 들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본질상유일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이신 까닭에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 순간에 읽으시므로 그 역사를 경영하여 나가시며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현재 세계는 물론 우주와 사후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 이러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인격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 사고자들의 '막연한 궁극자' 또는 우주 밖에서 세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절대자' 라는 개념의 신관과는 판이하다.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성부 하나님은 유일의 하나님인 까닭에 자연주의의 범신론 이나 서방종교의 다신론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는다. 더구나 인간들의 사고나 필요에 의하여 표상화되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타종교의 신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여 주는 자존적 존재이시다. 기독교에 있어 나타나는 독특한 신관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정체를 보다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나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거룩성이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스랍들이 거룩함을 강조하여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사6:2). 하나님은 또 영원하여 시작과 끝이 없으시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능성과 전지성을 겸유하고 계신다. 전능하시므로 무에서 유의 창조를 이끄셨으며 전지하시므로 자신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진하심은 곧 그 운동 거취의 무소부재하심에 귀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의 경영과 우주의 통치에서 일관되게 적용하여 오시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선하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성에 내재된 자비와 진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으심은 이 실천들의 세밀한 구체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니(프뉴마 호 데오스)
요한복음은 영(프뉴마)과 육(사르크스)을 구별하여 대립시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나타내고 후자는 세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육(사르크스)은 마귀(디아볼로스)나 세상(코스모스)과 같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프뉴마)이시다. 인간은 언제나 양자 택일의 책임 앞에 서있다(참조; 요3:6). 즉 육(사르크스)은 차안적이며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고, 영(프뉴마)은 피안적이며 신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는 것이다.

2) 신령과 진정으로(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영이신 하나님은 그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프뉴마)과 진리(알레데이아)를 요구하신다.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에서 즉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유사한 본성 안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다시 말해 참된 실재의 세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참된 실재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성육신하셨다. 참된 예배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참된 예배 곧 진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가장 적절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루아흐>로 묘사된 '영'은 '움직이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죄로 물들고 또 유한한 인생들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움직이는 바람'처럼 '무형적 존재'이시며, 동시에 '행동하는 인격자'이시며, 또 '생명의 근원'이심을 '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의 성서적 의미

1) '영'에 대한 일반적 인식
먼저 하나님을 '영'이라고 증언하는 성서적 '영'관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일반적인 '영'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루아흐>를 영어성경은 'Sprit'로 번역했고 한글성경은 그것을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원시적인 관념으로서의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는 '정령'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집 뒷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둘째, 미신적인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의 '귀신'이나 '유령'을 '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영혼'은 불멸 하기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한발 더 나아가 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미완의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본질적 철학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세계에 대한 관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양으로, 철학으로, 종교적 노력으로 이 불완전한 세계를 탈피하여 어떤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영적 세계'라고 여깁니다.

2) 성경적 증언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그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적인 특성'이라 한다면,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인생들을 가리켜 '육적 존재'라고 했습니다(참조; 사31:3;롬8:7;롬9:3-5).

2. '영'이신 하나님의 특성

1) 무형적 존재이심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영'은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이 '무형'이듯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라고 했고, 바울 사도도 그처럼 증언했습니다(참조; 롬1:20; 골1:15; 딤전6:16). 그렇다면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있는데(참조; 창32:30;출3:4;신34:10;사6:1)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말씀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상징을 통하여 가시적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참조; 창18:1; 출24:9,10). 죄인인 인간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비물질적 존재이심
'영'이라는 뜻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 속'(출20:4,5)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참조; 창3:8;왕상8:29;시34:15;사65:2) 등은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명의 근원자이심
'바람'은 '생명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겔1:12에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활동하고 있음을 환성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

1) 예배의 대상으로 여겨야 함
'육'적인 존재인 인생은 오직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밖에 없는 '본문'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만나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경배하고 신앙하는 자들만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2) 신령으로 섬겨야 함
'신령'(요4:24)은 '인간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적 존재이시기에 결코 물질적인 그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헌물'이 있다면 바로 '정신'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희망, 충성, 뜻'이 깃들어 있는 '정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진정한 '헌신'이요 '영적 예배'(롬12:1)가 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함
'진실'(요4:24)은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참조;요1:17).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비진리적인 인간적인 노력과 지혜와 수단으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모양'(롬8:3)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의 속성들

1. 하나님의 속성들과 이름들

(1) 이 교리를 고찰하는 목적 = 하나님을 아는 것

행17:(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요 4: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 이 교리에 접근하는 방법

2.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의 속성의 의미

[벧전 2: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3. 하나님의 인격적(비공유적) 속성

(1) 영원성과 불변성

[시 90: (1)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102: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3)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약 1:(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절대로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시는 관계의 모습은 변한다.

(2) 편재성

[렘 23: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시 139: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속성들은 경고이자 위로입니다.

(3) 전지하심

[시 147: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잠 15:(3)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시 147: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마 10: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출 3:(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눅 12: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히 4:(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행 15: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4) 전능하심

[엡 1: (11)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창 18: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눅 1: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창 1: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엡 1:(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5) 절대적 복되심

[딤전 1: (11)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하나님 자신의 지식과 사랑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6) 영광

[왕상 8: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딤전 6: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

1. 하나님의 도덕적(공유적) 속성

(1) 거룩하심(=일차적으로는 분리, 즉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함)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한다.

→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모세,욥,이사야,에스겔)

(사40:25)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벧전1: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구약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의 결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계시입니다.

율법과 성막과 제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고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합1: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요17: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일1:5)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시71: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행4: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3: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며 계시입니다.

거룩하심 계시의 목적 =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히12:28)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출19:16)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19:17)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출19:18)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출19: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19:20)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출19: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출19:22)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출19:23)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출19:2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 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출19:25)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의 참된 개념을 가르쳐 준다.

→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열하고 죄로 가득한 나여!”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념을 조금이라도 갖게 된다면, 당신은 즉시 자신이 비열하고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당신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방법은 당신의 행실이나 삶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p13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속죄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 십자가의 이중적 의미(거룩과 속죄)

(2) 의로우심(공의로우심)

의(공의)라는 의미(=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하심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드러나는 다양한 영역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요3: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엡2: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용서)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

하박국의 메시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다.

<의로운 자들에게 상주심>

(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로우심과 절대적 공의를 나타냄> →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만드십니다.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 선하심과 사랑(순서에 주의 : 거룩함>의와 공의>선하심과 사랑)

선하심과 사랑의 구분

(롬11: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시145:9)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신다.

(마5:45)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6: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행14:17)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 혹은 사랑)

(딛2: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눅1: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1: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롬9: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롬2: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9: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벧전3: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3: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하나님이 완악하고 악한 자들을 참으신다는 의미입니다.

(4) 신실하심

→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갑자기 손을 놓아 버리거나 당신을 저버리리라는 의심은 조금도 없이 당신이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분,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분, 당신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36:5)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사55: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고전1: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5: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마귀에게 말하십시오.

당신이 이미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당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당신이 용서받은 것을 보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는 것

(막11:22)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라”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당신 자신 안에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십시오.

2.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반틸 - 하나님은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
반틸(Cornelius Van Til)은 '숫자적인 단일성'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being)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숫자적인 동일성(an absolute numerical identity)을 현시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심지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는 한 인격이시다(He is one person).
우리가 한 인격적인 하나님(a personal God)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이라는 형용사가 붙여질 수 있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성을 가지신 어떤 본질(an essence)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격체이시다.


그렇지만 한 인격의 존재(being)안에는 우리는 성경에 의해 존재(being)의  어떤 구체적인 유형이나 또는 유적 유형(generic type) 안에서,
또 세 위격적 실재들(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에서 구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구분하여야만 한다." (Cornelius Van Til, An Inte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Phillipsburg, NJ:Pre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c. 1974) .pp 229-230.







하나님의 인격성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하나님이 스스로 여러 가지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우주의 창조, 인간의 창조, 가인의 저주, 홍수,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선택,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생애, 애굽에서의 복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왕정의 시작, 국가의 멸망, 포로생활과 해방 등은 결코 우연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작정된 거룩한 목적의 결과였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었다(창1:1, 17:8).

 

 하나님의 인격성은 하나님이 윤리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윤리성은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에서 계속적으로 정의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를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비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식하는 데에는 항상 윤리적인 복종이 요청되었다.

인간은 그러한 요청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수행하든가 완강하게 거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창12:1-5, 22:1).

 

 하나님의 인격성은 소위 신인동형론적 기능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걸어가시고, 말씀하시고, 미워하시고, 책망하시고, 분노하시고, 질투하시
고, 자기가 선택한 자를 사랑하신다(출20:5, 시7:11, 사45:5).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얼굴과 손과 등과 호흡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성을 밝혀 주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종교적인 경험에서 발견된다. 모든 종교 경험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지향한다.

인간의 예배와 기도는 인격적인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격적인 존재자의 실존이 증명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헬렌 켈러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좌절하지 않아"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건 가장 큰 축복이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이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1880년 6월 미국 앨라배마 주의 작은 시골에서 헬렌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별 탈 없이 건강한 여자아이였지만 두 살 무렵 뇌막염으로 추측되는 심한 열병을 앓은 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말도 배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절망했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헬렌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며 언어를 배웠고 문자를 습득했다.
몇 군데의 장애인 학교를 거친 뒤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대학인 래드클리프대를 졸업했다.

5개국어 배우고 에세이 발표

말도 배울 수 없을 거라는 주변의 우려를 깨고 그녀는 20대에 이미 5개국어를 습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 겸 사회 운동가로 미국과 전 세계를 돌며 8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50대의 헬렌이 눈을 떠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기적적인 상황을 가정한 글이다.
앞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하는 보석 같은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불평하지 말고 받아들여라”라는 말을 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세계 최고의 억만장자인 빌 게이츠의 말이다.
짐작컨대 공감하기보다는 분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데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한 게 과연 옳은 일이냐며 따질 것이다.
의견 차이는 있겠으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엄연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후진국에서 태어났다면”

빌 게이츠의 말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불공평하다.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끼리는 비교되기 쉬워 불공평함이 더 눈에 띌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 나라 밖을 보자. 선진국에서 태어나 사는 것과 제3세계에서 태어나 사는 것도 사실 불공평한 일이다. 세계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가정한다면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집 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여덟 명 안에 든다고 한다. 이 책의 독자들 각자가 얼마나 행복을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대부분 이 여덟 명 안에 들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식민지 시대나 봉건 왕조 시대, 설상가상으로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제명대로 살기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직접 비교하기에는 시공간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불공평을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우린 그나마 행복하니까 이대로 살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하는 게 올바른 생각이라는 얘기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문을 열 수 있다. 마음속에 불평불만을 가득 안고 산다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분개하긴 쉽지만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개선의 길을 도모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한다.

앤과 폴리의 역할도 소중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다 보면 그게 무엇이든 자산이 된다. 위기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기회’가 함께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련은 성공의 디딤돌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노력에 노력을 더한다면 언젠가 지금의 처지를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거기가 끝은 아니다. 세상은 시련에 주저앉는 이에게 더욱 가혹한 반면, 노력하는 이에게 보이지 않는 도움을 선사한다. 헨렌 켈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바로 헬렌의 가정교사였던 앤 설리번과 그녀의 뒤를 이은 보조자였던 폴리 톰슨이다. 앤과 폴리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헬렌의 눈과 귀가 돼 주었다. 이 둘은 헬렌에게 있어 부모 이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다.

하지만 앤과 폴리의 희생과 헌신은, 만약 헬렌이 불공평한 운명에 절망하고 좌절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헬렌의 성공적인 삶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밀고 나아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헬렌이 스스로를 도왔기에 운명의 여신이 그녀에게 앤과 폴리 같은 헌신적인 조력자들을 보낸 게 아닐까?

당신이 불평 속에 주저앉지 않는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당신을 도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주변에도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 등 당신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과 기도가 헛되게 하지 말자. 불평만 하고 살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기억해주세요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다 보면 그게 무엇이든 자산이 된다. 위기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기회’가 함께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련은 성공의 디딤돌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노력에 노력을 더한다면 언젠가 지금의 처지를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이른 비(10-11월)와 늦은 비(3-4월)




이른 비(10-11월)와 늦은 비(3-4월)
이스라엘의 우기 때에 내리는 축복의 비


이스라엘 우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자연적 특성과 기후를 알아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에서 축복의 단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나라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유적지 중 우기 때의 비를 저장해 식수로 쓰던 저수지가 많고,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거나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신명기 11:14~17
여호와께서 ···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 다른 신들을 섬기며 ···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의 여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지속된다.
우기가을과 봄이 시작되는 시점인 10월경에서 이듬해 4월경까지다.
이른 비, 겨울 비, 늦은 비가 내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른 비(Autumn Rain) - 가을에 내리는 첫 비

10~11월경인 가을에 내리는 첫 비를 가리킨다.
이른 비를 시작으로 우기가 시작된다.
여름철 건기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말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 없다.
농부는 농사 지을 준비를 갖추어놓고 메마른 땅을 보며 간절히 이른 비를 기다린다(야고보서 5:7).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해 2~3주가 지나면 들판은 푸른 초장으로 변한다.
농부들은 이때 밭을 갈고 파종한다.
이른 비가 적당한 시기에 내려야 제때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른 비는 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겨울 비(Winter Rain) - 겨울에 내리는 늦은 비, 장마비

겨울 비는 본격적인 장맛비로, 12~2월경에 내린다.
이스라엘에서는 건기를 대비해 이때 내리는 비를 저장해 사용했다.

늦은 비(Spring Rain)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봄비’라고도 불리는데 그야말로 단비다(스가랴 10:1).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 결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을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아모스 4:7).

이른 비 –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스라엘의 농사에서 때에 맞게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비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신명기 32:2, 에스겔 34:26, 시편 65:10). 비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복음사업’을 예표한다(마태복음 13:24~30, 37~39). 농사철 우기에 내리는 두 차례의 특별한 비,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농사를 위해 허락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시온의 자녀들아 ···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요엘 2:23)

이른 비의 역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던 2천 년 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 열흘간 전심으로 기도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허락된 성령의 역사로 예언이 성취되었다. 초대교회에는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오순절이 되자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 갑자기 ··· 혀처럼 생긴 불이 나타나더니 그것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와 닿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 그들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군중들은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 그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큰 소리로 ···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베드로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는데 그 날에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추가되었다.

(현대인의성경 사도행전 2:1~4, 6, 14, 36~37, 41)

늦은 비 – 초막절 성령시대의 역사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에 내리는 늦은 비는 영적 추수 때인 이 시대에 알곡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복음사업을 위해 내려주실 성령의 역사를 표상한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태복음 24:30~3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영적 추수기에 허락될 늦은 비 성령은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임하도록 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 초막절을 지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민족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스가랴 14:16~17)

(초막절)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7:37~39)

지금은 영적 결실기인 초막절 시대로, 추수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늦은 비 성령을 간구해야 할 때다. 간구하는 자들만이 늦은 비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될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늦은 비는 이스라엘의 곡식농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비다. 이스라엘의 주식인 밀과 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거둔다. 이른 비(히브리어: יוֹרֶה[요레],[1] 영어: former rain, early rain, autumn rain)는 태양력으로 10-11월경 우기가 시작될 때 내리는 가을비로, 건기 동안 메말랐던 땅을 적셔 경작하기 쉽게 해준다. 늦은 비(히브리어: מַלקוֹשׁ[말코쉬],[2] 영어: latter rain, spring rain)는 우기가 끝나가는 3-4월경에 내리는 봄비로, 추수 시기에 곡식의 결실을 풍성하게 해준다. 성경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인 성령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자연환경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의 자연환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지역은 고대부터 물이 귀했다.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주거지를 옮길 때마다 우물 때문에 분쟁을 겪거나 우물을 새로 파야 했다.[3]

  • 지형 및 농경
이스라엘은 국토의 60% 이상이 사막 지대다.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비교적 강수량이 풍부한 북부를 중심으로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지만 전체 국토의 20%밖에 되지 않는다.[4]
가을에 주식인 보리와 밀 농사를 시작해서 봄에 추수하고, 여름에 올리브와 포도, 석류 등 과일나무를 재배해 가을에 수확한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와 강우량이 많지 않은 지역의 식물들은 새벽에 생기는 이슬로 수분을 공급받아 생장(生長)한다.
  • 기후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사막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중해성 기후(Cs)로 분류되지만 사막 기후(BW)와 초원 기후(BS)인 지역도 있다. 연간 강수량은 500–750mm에 불과하며 지역적 편차도 매우 크다. 연간 기후는 크게 건기우기로 나뉘는데 여름철에는 이스라엘 전역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건기는 5월에서 9월까지이며 기온이 높고 건조하다. 우기는 10-11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이고 기온이 온화하고 다습하다.[5]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역할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비가 한 해 농사의 결과를 좌우하는데, 때에 맞게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단비'이자 축복의 상징이었다.[6][7][8][9][10] 반대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저주와도 같았다.[11][12]

  • 이른 비 :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초가을에 내리는 비다.
    이 무렵 곡식을 파종하므로 이른 비가 내려야 땅이 물러져서 곡식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여건이 갖춰진다.[13]

  • 늦은 비 : 우기가 마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곡식을 수확하기 직전에 내리며 '봄비' 또는 '축복의 비'라고도 한다.
    늦은 비는 농산물 증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추수기에 영양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곡식이 튼실하게 영글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에 맞게 내리는 늦은 비는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였다.[7][14][15][16]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성경적 의미

이스라엘의 곡식농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비유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전파해 영적 결실을 거두는 과정을 '밭에 좋은 씨를 뿌려 추수하는 것'에 비유하셨다.[17] 농사철에 내리는 특별한 비, 곧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의미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이스라엘의 곡식농사에 필수적이듯, 복음 사업이 완성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른 비 성령과 늦은 비 성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원전 8세기경, 선지자 요엘은 장차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요엘 2:23

이른 비 성령

이른 비에 대한 예언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던 2000년 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 10일간 힘써 기도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허락된 성령으로 성취되었다. 성령 강림 이후 하루 만에 제자가 3000명이나 늘었다. 이른 비 성령은 초대교회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사도행전 2:1–47

늦은 비 성령

요엘서의 예언은 사도 시대 오순절에 내린 이른 비 성령으로 일부 성취되었으며, 영적 추수 때인 세상 끝에 임하는 늦은 비 성령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그 후에 내가 내 신[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 요엘 2:1–31

하나님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징조가 있은 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한다고 하셨다. 요엘서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세상 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림과 세상 끝에 있을 징조를 알려주면서 "그때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 또한 사도 요한은 큰 환난에 앞서 하나님의 인을 치는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는' 징조가 있다고 기록했다.[19][20]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영적 추수기로 비유된 세상 끝에 나타난다.
늦은 비를 맞은 곡식이 영글어 곡간에 들어가듯, 영적 추수 때인 세상 끝에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알곡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이고 천국 복음 사업이 완성된다.[21][22]

늦은 비 성령 받는 방법

  • 하나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성도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실 '성령의 전'이다.[23][24] 하나님의 성령은 우상으로 더럽혀진 곳이나 가증한 곳에 계실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의로써는 성령을 받을 만한 정결한 성령의 전이 될 수 없기 때문에,[25]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하는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치셨다.[26] 또한 하나님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성령)를 내리지 않으신다.[27][28]하나님의 절기를 지킴으로 성도들이 성전인 자신을 정결케 할 때 늦은 비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은 늦은 비 성령 받는 조건이다.[16]예수 그리스도는 초막절 끝날에 성전에 서서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라고 외치셨는데, 이는 '성령'을 받으러 오라는 뜻이었다.[29] 그리스도께로 가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야 한다.[30]


  • 성령 받기를 구해야 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봄비, 곧 늦은 비를 받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교훈했다.[31] 예수님도 구하는 자에게 생수, 곧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30][29]

각주

  1. יוֹרֶה. 《네이버 고대 히브리어사전》.
  2. מַלקוֹשׁ. 《네이버 고대 히브리어사전》.
  3. 창세기 26:15–22.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 이삭이 ...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4. "2021년 이스라엘 농축산업 정보", 《KOTRA 해외시장뉴스》, 2021. 9. 8., "기후 및 지형으로 본 이스라엘의 농업 여건: 이스라엘의 국토면적(내륙 수면 면적 포함)은 22,072㎢로 한국의 1/5 정도 크기이며 경상북도의 면적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농업농촌개발부의 2020년 발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총 국토면적 대비 농경지 비중은 20% 수준이다. 골란 고원과 갈릴리, 이스르엘 골짜기 등 강수량이 풍부한 북부 산맥지대와 골짜기 지역을 중심으로 비옥한 땅이 형성되어 있어 북부지역에 농축산업이 주로 발달되어 있다."
  5. "2021년 이스라엘 농축산업 정보", 《KOTRA 해외시장뉴스》, 2021. 9. 8., "이스라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고온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대부분의 강수는 11월부터 3월 사이 겨울철에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
  6. 필립 J. 킹 외, 《고대 이스라엘 문화》, 임미영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137쪽, "팔레스타인에는 단지 두 계절이 있을 뿐이다. 비가 전혀 오지 않는 5,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 건기와 10월 중순부터 3월까지의 우기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비는 11월에서 2월 사이에 내린다. 히브리어에 비를 명칭하는 여러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을 보아 농업을 위한 강우량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른 비(요레<yôreh>)는 가을에 내려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 땅을 갈고 씨뿌릴 수 있는 조건들로 만든다. 겨울의 폭우인 게쉠(gešem)은 땅을 적시고 물 저장고를 채운다. 늦은 비 말코쉬(malqôš)는 밀과 보리가 자라도록 돕는다."
  7. 이동: 7.07.1신명기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8. 야고보서 5:7.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9. 시편 84:5-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10. 잠언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11. 아모스 4:7–8.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예레미야 3:2–3.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13. "이른 비",《CLP 성경사전》, 기독교문사, 2013, 1124쪽, "우기가 시작되는 초가을에 오는 비. 이 비가 내려야 땅이 물러져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비는 매우 중요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의 징표로서 늦은 비와 연결되었다(신 11:14; 시 84:6; 욜 2:23)."
  14. 욥기 29: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15.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16. 이동: 16.016.1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17. 마태복음 13:24–30, 37–39.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8. 마태복음 24:3, 29–31.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19. 요한계시록 6:12–13.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20. 요한계시록 7:1–3.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21. 마태복음 13:36–43.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22.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3.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24.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25. 로마서 3:9–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6.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27. 스가랴 13:1.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8. 스가랴 14:16–19.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29. 이동: 29.029.1요한복음 7:37–39. 명절[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0. 이동: 30.030.1요한복음 3: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31.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3)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로 우기가 겨울입니다.
겨울이 시작 되기 전 10월부터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씨를 뿌린 후,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파종 하는 시기에 내리는 이른 비가 한 해의 농사를 결정합니다.
겨울 동안 우기를 보낸 후, 3-4월 봄이 되어서 마지막 결실을 준비하면서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기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이 80%를 차지 하지만, 20%도 차지 하지 않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파종과 수확에 엄청난 역할을 차지 합니다.

비를 <가삼. gâsham - משג> 이라고 합니다.

גָּשַׁם 스트롱번호1652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삼[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גֹּשֶׁם 스트롱번호1656
1. ~에 비가 내리다
2. 에스겔 22:24.
발음 /  고셈[ gôshem ]
어원 /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를 얻다(겔 22: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652. 
גָּשַׁם 스트롱번호1652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삼[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늦은 비를 히브리어로 <말코쉬. malqôwsh -מלקוש> 라고 합니다.

מַלקוֹשׁ 스트롱번호4456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953.  לָקַשׁ 

1. 익다
2. 피엘형 : 늦과일을 모으다
발음 / 라카쉬[ lâqash ]
관련 성경 / 따다(욥 24:6).
구약 성경 / 1회 사용





성령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를 뜻합니다.
인생에서 은혜의 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일 것입니다.
인생에서 늦은 비,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어 주시는 은총을 부어 주시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없는 인생의 발걸음은 무척 삭막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영적인 추수의 계절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늦은 비를 이 땅에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늦은 비가 오늘도 심령에 부어 주실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셨던 이른 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은혜를 이제는 영혼을 적시는 늦은 비로 가득 채워 새 생명의 삶을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른 비(시편 84: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מוֹרֶה 스트롱번호4175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3384. יָרָה 스트롱번호3384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잠언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מַלקוֹשׁ 스트롱번호4456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953.  לָקַשׁ 

1. 익다,  2. 피엘형 : 늦과일을 모으다
발음 / 라카쉬[ lâqash ]
관련 성경 / 따다(욥 24:6).
구약 성경 / 1회 사용









순교자 이야기 - 손양원목사



손양원 목사님의 열 가지 감사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이라 쓴, '감사헌금 봉투' 애양원에 유품 전시”


신사참배 거부하고 투옥/
순교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
전도하다 총살순교 감사/
천국에 갔으니 마음 안심 감사/

전남 여수에 가면 애양원이 있습니다.
소록도가 생기기 전 손양원(孫良源)목사님(1902~1950년 9월 28일)께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1909년 4월 3일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 활동에 전념하던 오웬 선교사는 급성 폐렴으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오웬의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급히 광주로 오게 되는데 포사이드는 광주로 오던 중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두 아들 동인, 동신.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한센병환자를 치료한데에서 애양원의 설립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최초의 한센병치료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애양원 교회(예장 통합)의 제2대 담임목사인 손양원 목사님은 1939년 7월 14일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원탁회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애양원에 가면 손 목사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봉투 하나가 유리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바로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두 아들(동인, 동신)이 공산당 청년(안재선)에게 총살로 순교를 당한 직후 장례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바쳤던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그 감사헌금 봉투 겉면에는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 적혀있습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와중에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도 모든 예배를 정상으로 인도한 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이 한 인사말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장례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슬퍼하기보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장례식 후에 감사헌금 1만 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80원이었습니다.
1만원은 목사님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나중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기적을 이룹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과 영화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세계에서도 읽히고 있습니다.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어 있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인 정양순 사모에게 보낸 옥중서신인데, 병든 아내를 향해서도 감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손목사님도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시는데 동인, 동신 두 아들의 하관식을 하며 자신이 죽으면 이 자리에 묻으라고 하신 유언대로 세 부자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손동인 손동신 두 형제의 순교 이야기

‘손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주명준 교수는 “故 손양원 목사와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는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며 “기독교는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온 세상에 퍼졌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들 부자의 순교역사를 항상 되새기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실천적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동인·동신 형제의 죽음은) 좌우익 사상 갈등의 결과가 아니고, 신앙을 중심으로 한 싸움의 결과였다”면서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스러졌으나, 그들의 순교의 피는 오늘날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미국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는 크게 세 기둥을 중심으로 호남 선교에 집중했다.
바로 복음선교· 의료선교· 교육선교”라며 “그러나 이를 적용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은 지역의 기후·지리·역사·문화·종교적 특성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그 특성은 첫째로 호남은 한국의 곡창지대이면서도 주민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로 인해 배움이 적고,
셋째는 질병이 성행하지만 그 치료를 주로 무속에 의존하며,
넷째가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다는 것”

“이러한 요소들이 호남이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게 된 특성들이다.
특히 호남은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를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러한 순교의 정신은 조선조 말 의병운동 기간에, 일제시대의 삼일 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간에, 그리고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순교자를 대량으로 배출하게 했다”면서 “호남은 개신교 순교자 총 수(약 1천명)의 85% 정도를 배출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순교’ ‘증언’ ‘제자’가 한 단어에서 파생됐음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는 순교적 상황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그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며 “오늘 동인·동신 형제의 순교를 알리는 표지석의 설치는, ‘이들의 순교 이야기가 언젠가는 쓰일 것’이라고 했던 한 선교사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손동인과 손동신)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사회주의 계열 군인 일부가 봉기하였다.
이들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이어 순천까지도 점령하였다.
이 당시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은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봉기군들이 이들을 체포하여 총살하였다.

애양원교회에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 발생 나흘 뒤인 10월 25일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도들이 시신을 거두어 27일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동산에 묻었다.
이들이 총살될 때 애양원교회에서는 부흥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 주례까지 맡게 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최고의 산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날 손양원 목사의 마지막 인사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지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삼남삼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로 순교당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의 말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멸사봉공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전쟁통에 피신을 권유하는 주변 사람들의 강한 요청에도 자신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보신을 위해 자신만 안전을 찾아 떠날 수 없다는 그의 진정성에는 성경의 말씀을 현장에서 실천하겠다는 초기 기독교의 근원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다.

손양원목사님 두 아들의 순교

◈ 손양원 목사님, 두 아들의 순교 눅 23:46 / 11.03.24. 손동희 권사 간증 녹취(2/3)

◑갑작스레 찾아온 815 해방

나는 (손동희 권사) 고아원에서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동생 손동장과 함께 부산 구포 애린원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난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아원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낮이었는데, 큰 고목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서 고아원 원장 한정교 목사님과 열명 가량 되는 교인들이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서 대낮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는 보통 때의 예배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아주 예배가 막 그렇게 요란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한데 얽혀서 울고 불고, 손뼉을 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무슨 큰 난리가 난듯이 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그런 요란스런 예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참 별나게 예배를 드리는구나’하며, 그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보고 있었습니다.(당시 13살)
그랬더니 마침내 요란스런 예배가 끝났습니다.
끝나자마자 한정교 목사님은, 막 나 손동희를 찾았습니다.
저를 찾더니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너 그동안 고생 많았지? 오늘 해방이란다.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망했단다.
방금 일본 천황이 라디오에, 미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공포했단다.
이제 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서 나오시겠구나..’
저는 그때 그 나이에, 해방이 무엇이며, 일본 천황.. 이런 것도 다 모르겠고, 단 한 가지,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제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이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버님은 종신형을 선고 받아서, 죽어야만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아버님이 출옥하시는 것은 잊어버려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방으로 출옥하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고아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셨습니다.

1년 전(1944)에, 우리 가족은, 동인 오빠 징집 문제로,모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산에는 우리 둘만 고아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이 8월 17일경에 출옥하셔서 구포 애린원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뵌 아버지의 몰골은, 정말 거지 중에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고, 눈은 송장처럼 쑥 들어가 있었고, 거기에다 낡은 슬리퍼에, 푸른 죄수복 차림 그대로, 고아원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손목사님은, 여기 애린원에서, 옷도 갈아입으시고, 신발도 바꿔 신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를 보시더니 ‘이놈들아,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구나!’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함께 울었습니다.

◑ 주기철 목사님과 인연

손양원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던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주목사님은 손목사님보다 나이가 5살 위입니다.
평소에 손목사님은 ‘기철 형님, 기철 형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평양에서 투옥되셨으니, (~1944 옥사)
손목사님 보다는, 약 2년가량 앞서 옥고를 치르신 셈입니다.
그러므로 손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도,
앞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 정신을 이어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손목사님은, 평소에 주기철 목사님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손양원이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1929년에 졸업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에 부산초량교회를 시무하시면서, 경남성경학교에서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주1)에 간략 연대표 있음

손양원의 일기에 보면
‘주기철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는, 은혜의 부흥시간 이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 당신 신학생을 대단히 아끼셨다고 합니다.

‘손군,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지만,

많은 위인이 나타날 것 같으니, 위인전을 많이 읽으세요’ 하시면서

좋은 책도 많이 권면해 주셨다고 합니다.

 

▲주영해(장로)와 만남                                     *주기철 목사님 3남

애린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손목사님을,

저희가 만나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을 때,

조금 있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3남 주영해가 그때 저희랑 같이 애린원에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장 달려왔습니다.

 

(주영해의 부친 주기철 목사님은, 1944.04.21.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 후,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당시는 강도사 시절이었습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년도에, 신학교가 패쇄되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양원 목사님'으로 통일해서 쓰겠습니다.)

 

그는 막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더니, 손양원 목사님을 꽉 끌어안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해입니다.”

한 마디 하고는, 두 분이 서로 끌어안고 얼마나 목을 놓아 우시던지요...

 

그렇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 이제 감옥에서 순교하시고(1944),

해방이 되어, 그 아들 주영해를 만나보니까,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겠습니까?

두 분이 서로를 붙들고, 고아원 마당에서 한참을 서로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더니, 주영해 (당시 10대 후반)는 갑자기

고아원 마루 밑에 장작 패는 도끼가 있었는데,

그 도끼를 꺼내서 감아쥐더니, 어디론가 막 달려갔습니다.

고아원 원생들은, 우르르 그를 뒤따라갔습니다. 

 

그 애린원 근처 좀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에는 일본 신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그 우상 앞에 절하고 빌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주영해는 도끼를 치켜들더니, 단 한 방에 신사 우상을 찍어서 무너뜨리고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제 오빠 동인, 동신은, 부산에서 주영해와 친구였습니다.

나이도 비슷했고, 또한 통공장에 다닐 때, 주영해도 같이 공장에 다녔습니다.

두 집안 다, 아버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고,

두 집안 다, 소년가장들이 통공장에 다니면서, 가족 생계를 꾸릴 때였습니다.

                                                   *관련글/ 순교자와 남겨진 그 가족 이야기 


훗날 제가 주영해 장로를 한 번 만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애린원 고아원 시절에,

주영해 장로가 도끼로 신사 우상을 때려 부수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옛날을 추억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영해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서 순교했을 때도,

가장 먼저 우리 집에 쫓아와서    *부산 범내골

“사모님, 사모님, 방금 제 아버님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라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주영해와 함께, 해가 지도록 방에서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방이 되어서, 가족들이 여수 애양원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애양원을 떠나간 지 꼭 5년 만에, 그리운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왔습니다.

손목사님은 다시 애양원 목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그동안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때문에 다 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이제 해방과 함께,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학교를 쉬다보니,

학교에서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시 다닌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때 큰오빠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학년,

둘째오빠 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

저는 국민학교 4학년으로 각각 입학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13살

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엔들 상상 못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애양원 근처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부득이하여 우리는 애양원에서 50리 떨어진 순천에 자취방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형제들은, 순천 자취방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애양원 사택에 거주하시면서, 나환자들을 돌보셨지요.

 

저는 토요일과, 방학 때면, 애양원에 가서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구포의 고아원에서

‘내 평생 소원은 학교에 한 번 다녀보는 것’이었습니다.

 

길에서 가방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또 저희들끼리만 놉니다.

학교에 안 다니는 저는, 같이 놀 친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범내골 집에 와서, ‘엄마, 나도 학교 보내 줘’

‘안 돼! 학교에 가면 모두 신사참배 해야 되기 때문에 안 돼!’

 

그렇게 5년 동안 학교를 못 다니다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정말 하늘을 날아갈 듯 했습니다.

지금 늙은 제가, 저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즐거운 시절을 꼽으라면,

그때 순천에서 다시 국민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게 큰 태풍이 불어 닥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과 동인, 동신의 순교

 

▲큰 오빠 손동인을 마지막 본 날

제가 16살, 순천 매산여중 1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아침밥을 먹고, 소풍가방을 들쳐 메고, 대문을 막 나서는데,

갑자기 큰 오빠가 “동희야” 하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동인은,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소풍 준비를 많이 못했지?” 하면서

제 소풍가방에, 준비해온 과자 봉지를 넣어주고,

또한 용돈도 제게 주었습니다. 

 

“오빠 고마워요. 소풍 잘 다녀올게요.”

하면서 제가 늦을까봐 뛰어 나가는데,

“동희야!” 하면서 또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날 아침 동인 오빠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습니다.

오빠는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동희, 예쁜 동희, 너 오늘 소풍 잘 다녀와야 해!”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저희 오빠와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큰 오빠 동인이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쩌면 부모님 사랑만큼, 큰 오빠의 사랑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애양원 사택에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제가 소풍을 다녀왔을 때, 이미 두 오빠는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고, 즐겁게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소풍 다음날은, 학교에 수업이 없어서, 자취집으로 안 가고

저는 소풍 간 장소에서 막바로 애양원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서 쉰 그 다음날, 애양원으로 트럭이 한 대 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애양원 근처로는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트럭에는, 엣띤 공산당 학생들이

양손에 무기를 들고서 트럭에서 뛰어내리면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손양원 목사, 이리로 나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행히 그때 손목사님은, 출타 중이셨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신다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어머니와 저) 말을 믿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손목사님이 안 보이자,

그들은 집 천정에 대고, 총알을 난사했습니다.

그리고 죽창으로 마루 밑을 찌르며 휘저어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겁에 질려서, 현관문에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폭도들은 별 성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줄줄이 집안을 빠져나갔는데,

맨 마지막 폭도가 나가면서, 어머니께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당신 알고나 있소? 당신 아들 둘이 다 총살 당해 죽었소!”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동인아, 동신아!” 부르면서 나자빠지셨습니다.

 

엊그제까지 멀쩡하던 두 오빠가 죽었다는 말이,

우리 모녀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학생이 거짓말 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 아래 제가 소풍 나오던 날,

동인 오빠가, 저를 3번이나 불러 세우며, 애절하게 저를 바라보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다 일어난 후였습니다.)

 

▲저는 사실을 확인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늘 제 시각에 오던 기차는, 그날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지금 여수와 순천은, 공산당들이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순반란사건>이었습니다.                         1948.10.19 ~ 1주일간

그 여파로 그날 기차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천까지 뛰어가기로 했습니다. 약 50리, 20킬로 거리였습니다. 

순천에 가 보니, 공산당들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총칼을 메고,

트럭을 타고, 여수와 순천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사람(반동)이 보인다 싶으면, 총으로 쏘아버렸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사람들의 시신들이 길에 무수히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무수히 시신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전봇대에 매달아 놓은 시신, 불에 태워 죽인 시신..

 

     이 <여순반란사건>은 1주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그 죽은 사람의 숫자는,

     당시 전남 보건후생국 발표에 의하면, 3천5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제가 이런 시체들을 넘어서, 뛰어서 걸어서, 우리 오빠들의 자취집에 도착했습니다.

“큰 오빠, 작은 오빠” 제가 소리쳐 불렀지만,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마당 안을 보니, 그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핏자국을 보는 순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내 두 오빠가 죽었구나... 아이고...”

 

사람이 감정의 극에 도달하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오빠의 죽음을 확인하고, 제 신앙이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집사님은, 우리 집 옆방에서 애양원 목수 일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두 오빠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라도 치를 수 있도록, 다른 곳에 옮겨두었습니다.

 

저는 양집사를 따라서, 어느 산모퉁이 논구덩이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 가마니 위에, 우리 두 오빠의 시신이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몸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고,

이마와 가슴에는 총알자국이 수없이 나타나 있어서,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저는 그만 두 오빠의 시신 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망한 대상은, 공산당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때 원망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두 오빠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저 하늘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요?”

 

한 사람만 데려가도, 큰 충격인데,

어떻게 두 오빠를 한꺼번에 데려가신 일에.. 저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 착한 두 오빠의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이해 못 했습니다.

 

‘하나님, 두고 보세요. 내가 예수 믿는가 봐요.

나는 이런 하나님 절대 안 믿을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이런 잔인한 하나님은 있어도 믿지 않을 거야..’

 

저는 그날부터 신앙에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윤선홍, 나제민 님의 증언

당시 손동인은 25세, 손동신은 19세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너무나 허망하게 마쳤습니다.

 

그날은 1948.10.21.일이었습니다.

이날 두 분이 순교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윤선홍, 두 오빠가 순교하실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보신 분

나제민의 증언에 의하면, 두 오빠가 순교하신 후, 많이 도와주신 분, 나덕환 목사님의 아들

 

윤선홍, 나제민 두 분은 평소에 제 두 오빠와 매우 친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도 돕고, 주일학교도 도우면서 절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이 두 분은, 공산당의 참화를 피하여, 용케 살아났습니다.

 

그 두 분의 증언을 토대로, 손동인, 손동신의 순교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좌익 학생들(학교 동료들)에 의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석상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폭도 좌익 학생들은, 순천 우리 자취집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끌어내서, 밧줄로 묶고는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느냐?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자’며

때리는 폭도들을 뜯어 말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폭도가 ‘너희들은 기독학생회 회장이요, 예수쟁이들의 두목이다!’

그게 죄목이었습니다.

 

이제는 손동신까지 함께 얻어맞게 되었습니다.

폭도들은, 모두 평소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무지하게 두들켜 팬 후에,

손동인을 일으켜 세워, 밧줄에 맨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양손을 들어 올린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이 점거한 순천경찰서 뒷마당에

손동인을 그 사형장 의자에 먼저 앉혔습니다.

 

학생 한 명이 이렇게 윽박질렀습니다.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 사상 뽑아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협력할 것 같으면 살려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그러자 손동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나, 내 속에 신앙은 빼앗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내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자 “할 수 없다. 저 놈을 쏘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동생 손동신이 나섰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가로막았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세요.

형님은 장남입니다. 부모를 모셔야 하니,

형님은 살려주고, 그 대신 나를 쏘아 죽이시오.”

 

그렇게 손동신이 대신 죽겠다고 하니까, 손동인이 말했습니다.

“동신아, 너 왜 이러느냐?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너는 얼른 가서 내 대신 부모님을 모셔야 해!

그러다가 너 마저 죽어. 어서 집에 가, 어서 집에 가!”

 

이렇게 두 분은, 사형대에서, 서로 죽겠다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때 어떤 폭도 학생 한 명이,

손동신을 강제로 뜯어내었습니다.

뜯어내고는, 손동인의 두 눈에 수건을 가렸답니다.

이제 정말 최후가 임박했습니다.

 

손동인은 “너희들은 회개하여라. 나는 지금 곧 천국으로 간다.”

하면서 손동인은 양팔을 벌리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하나이다.”

그 말과 함께,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 손동신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형 손동인에게 막 달려갔습니다.

그 형을 끌어안고, 손동신은,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형님, 형님, 형님은 이제 천국 가셨습니다. 나도 형님 뒤를 따르렵니다.”

 

한참을 울고 나더니, 손동신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공산 폭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죄 없는 자를 죽입니까? 당신들은 그 죗값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회개 하십시오!”

 

그러자 학생 중에 한 명이 “저 놈도 마저 죽여 버릴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래, 저 놈도 마저 해 치우자”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손동신은

“나도 내 형님 가신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내 형님 신앙과 같다.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며 일어서서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좌익 학생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답니다.

“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처럼, 팔을 벌렸다.

자, 총을 맞을 터이니, 너희 하고 싶은 대로 쏠 테면 쏘아라!”

 

그러자 “야, 저놈 자기 형보다 더 지독한 놈이다.

저런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죽여버리자”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동신은 양팔을 벌린 채로, 하늘을 향해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시고, 저들을 회개시켜 주시옵시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기까지만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순간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손동신에게, 어떤 폭도 학생이 다가와서,

확인사살 두 발을 더 쏘았답니다.

그 사람이 바로 OOO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장례식과 그 이후

 

▲두 오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순천에서 애양원으로 왔습니다.

애양원의 뜰 한복판에, 두 분의 운구가 내려졌습니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동인아, 동신아!” 부르짖다가

몇 번이나 기절하고, 다시 깨곤 했습니다.

 

천 여 명에 달하는 온 애양원 식구들도 다 마당에 나와서

땅바닥을 치면서, 모두가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모두의 울음소리가 애양원을 차고 넘쳐서, 저 하늘에까지 닿는 듯 했습니다.

 

두 오빠의 장지는 애양원 안에 동도 섬이었습니다.

햇볕 잘 들고,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곳으로

두 오빠의 꽃상여를 앞세우고, 온 애양원 식구들이 그 뒤를 울며 뒤따랐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도 참 비참했습니다.

아버지도 인간이었습니다.

꽃상여 행렬의 맨 앞에서, 상여를 붙잡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또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인지 통곡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육신적 슬픔과, 영적 신앙이 교차되는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손목사님이 지으신 <9가지 감사>는 여러 자료에 소개되었으니,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합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 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손양원 목사님은 OOO을 양자 삼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난 터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동인이, 동신이 죽인 놈을 잡았다!’는 소리였습니다.

 

그 놈은, 손동인과 같은 학교, 같은 3학년 OOO으로 밝혀졌습니다.

(OOO은, 1979년에 소천 하셨고,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위하여, 본명을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 1주일 만에 모두 진압된 후

주모자와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심판하는 일이 진행되었는데,

OOO도 체포되어, 매를 무수히 맞고,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있을 사형집행날짜만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제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잡아 죽이리라고, 이를 갈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손목사님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손목사님은, OOO을 사형장에서 빼내어, 양자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설마 그럴 리가?’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님이 그 일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을 보고,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저는 펄쩍펄쩍 뛰면서, 울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그런 놈은 죽도록 내버려둬요.

그런 놈이 안 죽으면, 도대체 누가 반란의 책임을 지고 죽는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저를 달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이 아버지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고, 그 바람에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켰다.

 

그런데 OOO을 안 잡았으면 모르거니와, OOO을 잡았다는데, 내가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제1계명과 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제1계명과 2계명만 순종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만약 지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옛날에 감옥 살은 것도 다 헛 살은 것이다.

너희들 고생 시킨 것도, 헛고생이 되고 마느니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말로 저를 설득시켜도, 저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쌓인 한이 풀리려면, OOO이 죽어 없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두 오빠의 한이 풀린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16살이었던 저는, 그때 아버지의 말씀과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하면 용서로 되었지,

또 아들 삼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그 놈을 아들 삼으면,

제게는 그 원수가, 제 오빠가 되는 셈인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 하늘 아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막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들을 삼아야’ 하느니라.”

 

저는 아버지께 대들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죽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 그래서 그 계명 지키느라,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형직전에 처해 있던,

그 원수 같은 OOO을, 사정사정해서 빼 내어, 집으로 데려와 아들을 삼았습니다.

(나덕환 목사님이 OOO을 빼 내는데 힘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OOO을, 부산에 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저 손동희 권사는, OOO과 결국 화해 했습니다.

     1979년 OOO이 지병으로 죽기 직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손양원 목사님, 625와 순교 에서 나누었습니다. 

 

 

............................................

 

주1) 주기철 목사님 간단 약력

 

1897년 경남 창원군 옹천면 출생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 평양신학교 19회 졸업

1926년 봄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

1926~1931 6년간 초량교회 시무 중

일제의 신사참배 거절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반대 투쟁 시작

(이 시기 1929년 경, 경남성경학교에 로마서 강의하시던 중, 손양원 신학생 만남)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6년간 시무하심.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

1938~1944 감옥에서 옥고 후 순교

 

주체사상



주체사상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핵심교리

주체사상은 우선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주의 철학과 김일성수령 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주체사상은 칼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사상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변조한 사회주의이론이다.
김일성은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다. 예수를 믿든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이다.
종교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며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의식이 없어진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본래 주체사상의 교주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김일성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착실하게 참석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에는 중국 지린의 손정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했고 학생성가대 지휘를 맡을 정도로 교회활동을 활발히 했었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은 권사의 직분을 가졌고, 그의 외삼촌 강양욱은 목사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김일성은 기독교를 차용, 표절하였다.
어릴 때 배운 하나님 사상을 자기 우상화에 악용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기독교에서 파생된 ‘사생아’(bastard)라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기독교를 표절하고 벤치마킹해서 생겨난 사이비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신본주의 창조론을 대표한다면, 주체교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을 대변한다.
주체사상의 핵심교리는 “당의 유일사상 체제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과 수령무오설, 그리고 수령의 사회정치적 생명 수여설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사상 10대 원칙.
북한에서는 어릴 때부터 성경의 10계명을 표절한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세뇌를 받아 수령에게 절대복종과 절대충성을 다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목적은 김일성 3대를 위한 것이다.
주체사상, 10대 원칙, 노동당 강령 등이 3대 신격화를 위해 종교적 경전과 같이 성문화되어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10대 원칙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해야 한다.

②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⑧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여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지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⑩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여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수령무오설.
주체사상은 수령 김일성(김정은)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으며, 그 권위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법령체계는 김정은의 교시, 로동당 규약, 당강령 및 지침, 헌법, 내각의 정령 및 지침의 순서로 되어 있다. 교황무오설과 같이 수령은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신격화되어 사소한 것도 모독하면 안 되고 심지어 수령과 관련된 물품(사진)도 신성시되어야 한다. 수령무오설에 물든 공산주의자 문재인도 그의 통치 기간에 적폐청산,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등 정책을 결정한 후에 정책수정을 하지 않는 특징을 보였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주체사상이 종교적 신앙으로 심화된 것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 완성되면서부터이다. 인간에게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한한 육체적 생명과 영원한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수령에게서 수여받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대를 두고 계승할 수 있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지만,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생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항존법 10계명이 있듯이, 북한은 10대 원칙이라는 율법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서 김정은에게 충성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주체교는 10대원칙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행위구원론으로 10대 원칙과 주체사상은 동의어로 통한다. 북조선에서 허용되는 종교는 주체사상교 뿐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동포는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모두 “총 폭탄 정신, 수령결사옹위 정신, 자폭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

기독교에서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할 때, 주체교에서는 자아비판을 통한 인간개조를 말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위해서는 교양과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을 수정해 인간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의 핵심 두 가지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인간중심철학 사상과 매사에 수령의 뜻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수령제일주의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제일주의이다. 북한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다. 그리고 건설과 혁명의 주인은 인민이 아니고 수령의 지시를 받는 노동당이다. 북한에서의 자주는 인민의 자주가 아니라 수령의 자주이다.

북한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인 차원에서 수령의 신화와 관련된 모든 장소를 ‘혁명 전적지’와 ‘혁명사적지’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순례의 대상으로 삼으며,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소, 공장 등에 예배의 장소인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꾸며 주기적으로 주체사상의 교리와 신화를 학습하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생활총화’회합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김씨 3대는 언제나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다. 주체사상에서 김일성은 성부 하나님에 해당하며, 김정일은 성자 하나님, 그리고 주체사상(김정은)은 성령에 해당한다.

주체사상에는 반일, 반미사상이 깔려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의식화한다. [김일성, 그이는 하나님]이라는 책에 북한의 신앙고백이 나와 있다. “전능하사 당과 인민을 영도하시는 김일성 주석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김정일 동지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공산당으로 잉태하사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저리로서 인민을 해방하러 오시리라. 아멘.“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하늘 아래 두 하나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기독교의 종교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전 인민의 주체사상화를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이다. 무신론적 주사파가 가장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것도 기독교이다.

수령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수령론을 지속시키기 위해 북한은 수령세습이라는 신화를 한 가지 더 추가했다. 김일성의 피를 물려받은 김정일에게 이 신화가 세습되고 다시 김정은에게 이 신화를 세습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수령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인데, 사회정치적 생명론에 따라 뇌수는 김일성 수령이고, 당은 혈관이며, 인민은 신체의 각 지체라고 믿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종교의 불모지로

ANC : 한때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북한지역이 이제는 ‘종교탄압의 중심지’가 됐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홍알벗 기자의 보도입니다.

“왜 죽었냐고 하니까 종교를 해 가지고 그랬대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물을 한 모금도 안 먹여서 말려 죽였다고 했어요.”

북한에서 종교를 믿다 발각돼 고문을 받고 죽은 주민을 봤다는 어느 한 탈북자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9일 ‘2016 북한종교자유백서’를 발간하고,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는 찾을 수 없다고 폭로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1만 1천 7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99.6%는 ‘북한에서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98.8%는 평양이 아닌 지방에서 당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예배처소를 본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은 종교를 ‘마약’이라 규정하고 주민들이 종교를 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북한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규정돼 있지만 북한 당국은 실제로 주민들의 종교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탄압이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의 강력한 단속과 규제에도 2000년 이후부터는 비밀종교모임, 즉 지하교회에 참석하거나 성경책을 본 경험이 있는 탈북자가 부쩍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종교 활동에 대한 처벌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2.8%는 종교활동을 하다 적발돼 노동교화형을 받는 것을 목격했으며, 11.4%는 교화소로, 그리고 51.8%는 정치범수용소행이라고 답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의 전체 정치범 수용소에 약 12만명이 수감돼 있는데 그 중 3분의 1 또는 4분의 1은 종교활동 때문에 붙잡혀 온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탈북자들에 따르면 특히 지하종교활동을 벌인 북한주민들은 북한 보위부들에게 체포되고 구타, 고문, 처형까지 당할 수 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1940년대 말만 해도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만큼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평양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평양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이유

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가 개최됐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와 언어 습득을 마치고 평양, 안주 등 5개군을 관할하는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한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 명 정도였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한말 열강들과의 통상교섭이 시작된 이래 평양은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파견되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1891년 북장로회의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립한 이후 평양과 그 일대인 관서지방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다.
미국 북장로회가 평양에서 활발히 선교를 하고 문화교류를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19세기 말 조선 서북부는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고아와 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돌 볼 선교사역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평양선교부에서는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고, 이에 많은 선교사들이 평양과 관서지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둘째,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은 서울 중심의 양반사회와 달리 자립적인 중산층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 기독교 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게 됐다.
평양 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아왔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북방민족에 맞서 싸우며 상당히 호전적이었는데 문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중앙세력과 맞지 않았다.
또한 조선 초 세조가 김종서를 제거한 이후 관서지역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아예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관서지방 무사들의 무과 응시를 금지 시켰고, 후대 국왕인 성종은 이러한 세조의 명을 아예 경국대전에 기록하게 했다.
한참 뒤에 정조가 관서지역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관서 지역의 차별은 더욱 심해져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차별 때문에 평양 일대에서는 양반 사족의 형성이 약했고, 아무리 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관료로 출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현실과 유리된 유교적 지식이나 형식에 거리를 두며 자신의 생계를 직접 꾸려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며 대청(代淸)무역과 상업을 통해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기에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기독교 신앙 전파를 했을 때 관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된 장로교회의 683개 중 관서지방에 있던 것이 362개로 전체의 과반수를 넘는다.
아울러 한말 근대식 학교 설립도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했는데, 1910년 7월 기준 전국 사립학교 2천 82개교 가운데 장로교,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755교였으며 이중 과반수가 관서지방에 세워졌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평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분단으로 인해 평양은 미국과 가장 적대적인 지역이 됐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비핵화 방안에 대해 합의하면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가 한층 진전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한 것과 관련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루 속히 북한과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하고 과거처럼 다시 경제와 문화교류를 추진하길 기대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 , 2018년 9월

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은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 (“朝鮮의 예루살렘 平壤에: 十字軍의 閱兵式,” 『東亞日報』, 1934년 9월 5일.)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

1915년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거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인구 6만의 10%인 6천 명의 교인들이 여러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와 예배로 안식일을 성수했기 때문에 시내가 적막했다. 장로교회는 장대현(1,157), 신학교(770), 창전리(408), 산정현(385), 남문외(348) 5개 교회 3,068명이었고, 감리교회는 남산현(1,158), 전구리(238), 염점리(160), 이문리(85) 4개 교회 1,631명이었다.(“평양과 기독교,” 『기독신보』, 1915. 2. 19.) 교인 천 명이 넘는 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북장로회는 서북부인 신양리와 경창리 일대에 洋村을 형성하고 선교사 사택들, 숭실학당, 숭실대학, 신학교, 남녀성경학교, 숭의여학교, 외국인학교, 제중원 등의 건물이 들어선 넓은 선교지부를 형성했다. 북감리회는 그 아래 대찰리, 순영리, 남산정에 걸치는 지역에 선교지부를 조성하고, 선교사 사택, 기홀의원, 광혜의원, 광성학교 등의 기관을 운영했다.

평양 교회는 1919년 삼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기독교 민족주의를 실천했다. 5개 장로교회의 한국인 담임목사 중 장대현의 길선주, 남문외의 김선두(총회장) 등 4명이 투옥되었고, 13명의 장로도 체포되어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숭실 재학생 체포령이 내렸다. 시골에서 19개의 장로교회가 불탔다. 26개 교회와 학교들이 3개월 이상 문을 닫았다.

1924년 장로교회는 시내에 6처의 교회(연화동교회 추가)에 약 4,000명의 교인이 있었고, 주변 평양노회 지역을 합하면 교회 120여 처, 교인 21,000여 명, 학교 30여 개에 달하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감리교회는 남산현, 유정, 신양리 등 16 교회에 신도는 2,300여 명이었다. 또한 600여 명의 천주교회와 200명의 회중교회(치리자 이낙순)와 50명의 안식교회가 있었다.(김기전·차상찬, “조선문화 기본조사-평남도호,” 『개벽』[1924년 9월], 62.)

당시 인구 비율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도시는 선천, 재령, 평양, 경성 순이었다. 1925년 평안북도 선천은 인구 만 명 중 절반이 교인이라 ‘기독교 王國’으로, 황해도 재령은 ‘기독교 天下’로, 평안남도 평양은 ‘기독교 首都’ 혹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서북 기독교 시대였다. 선교 개시 한 세대 만에 기생의 도시 ‘조선의 소돔’을 거룩한 기독교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만든 평양 기독교는 개선가를 부르면 토마스 순교 60주년을 기념했다. 

1920년대 전환기적 상황: 신세대 신사조의 등장

1920년대는 전통적인 조선이 사라지고 반권위주의로 무장한 신세대가 등장한 전환기였다. 총독부의 문화정치 아래 다양한 한글 신문 잡지가 발간되고, 일본어 서적을 통해 청년들이 신사상을 수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신문 잡지를 통해 과학(진화론),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담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했다. 신여성들은 반가부장제와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신구 세대 소통이 단절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했다. 경제 침체로 평지에는 소작인, 산간엔 화전민이 증가했다.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학생의 동맹 휴학이 줄을 이었다.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하는 한인이 폭증하여 1920년 북간도에만 40만 명 이상이 거주했다.

총독부는 일본 불교와 일본 조합교회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과 종교를 친일화하려고 재정을 지원하여 급성장시켰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기성교회의 다카하시 목사는 경찰의 후원을 받아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미국 선교사를 떠나 조합교회에 가입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강압적 선전과 친정부 정책은 역효과를 내어 조합교회는 쇠퇴했다.

아시아 민족주의의 고조로 교계는 선교사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 독립하는 토착화를 논의했다. 1923년 중국 복주에서 열린 한중일 남북감리회 대표자 회의는 감독 추천권과 선교회 재산 처리권을 양도해 줄 것을 미국 본부에 요구했다. 1923년 YMCA 총무 이상재는 신임 선교사들에게 “당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미국인임을 잊는 것이오.”라고 충고하고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 1925년 12월 만국선교위원회 의장 모트가 서울에서 개최한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보완하고, 경제 문제, 청년층 선교, 선교사의 권한 이양과 한인과의 협력과 자립 문제, 예루살렘선교대회(1928) 등을 토론했다. 한석진 목사는 선교사들의 장기 체류와 지도권 유지는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되므로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1926년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허시모 의사가 과일을 훔친 소년의 얼굴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쓴 사건은 반기독교-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1930년 미국 남북 감리회 한국 선교회들이 하나의 조선감리회로 통합된 것은 자치와 연합의 결실이었으나 쇠퇴하던 감리교회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조선: 반기독교 운동

1920년대의 강력한 신사상은 공산주의였고 반기독교운동을 동반했다. 평양 기독교가 세력을 자랑하며 현실을 외면하자 사회주의자들은『개벽』지를 통해 목사와 장로의 타락을 공격했다. 

그러나 평양은 세력으로나 인수로나 예수교회가 제일 크니까 그 사회의 인물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앗다-참 평양이야 말로 목사님도 많고 장로님도 많다. 교회에 가면 물론이어니와 책사에를 가도 목사, 장로, 포목전에를 가도 목사, 장로, 연회에 가도 목사, 장로, 냉면집에를 가도 목사, 장로, 심지어 코머리(퇴기)집에 가도 목사, 장로(쉬-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간통사건 소송자도 장로, 고리대금업자도 목사, 장로다. 아주 목사 장로의 대풍년들었다. (김기전·차상찬, 앞의 글, 66.) 

개신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신문 잡지의 여론을 주도했는데, 가장 신랄한 비판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회칠한 무덤처럼 비정치적인 종교 공간으로 만들고 교권을 가진 기득권층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의 조선’이라는 비판이었다. 개신교가 40년간 한글 보급, 교육, 의료, 여권 신장 등 많은 기여를 했으나, 이제는 현실도피적인 인물만 모여 사회 정의와 평화와 빈부 문제를 외면한다. 정치경제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며, “언제나 요단강을 건널까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국에 매어 달아두고” 현실을 저주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있다. 높은 예배당과 선교사와 장로의 큰 주택 아래 개미집 같은 오막살이에서 신자들은 예배당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堅志洞人, “「에루살넴의 朝鮮」을 바라보면서, 朝鮮基督敎 現狀에 對한 所感,” 『開闢』 [1925년 7월], 55~56.)

기독교 왕국 선천에서도 경제가 침체되자 50명의 일본인 창녀가 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기생을 가진 7개의 고급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宣川에도 花柳界 大繁昌,” 『조선일보』, 1924. 5. 12.) 1929년 선천에는 안식일 성수가 깨어졌고, 교인들은 골목 안에서 밀주를 마신다고 고발했다. (김진구, “北隊,” 『別乾坤』 [1929년 8월], 148.)

장로교회는 계급 모순을 외면하고 김익두의 ‘치유’ 중심의 부흥회로 민중에 접근했다.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뜬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은사 지속론자들은 『죠션예수교회 이적 명증』(1921)을 발간하고 황해노회는 헌법의 은사 중지 조항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도와 안수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기적 전매 특허자’요 과거 미신보다 더 혹세무민하는 ‘개명한 미신’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고등 무당’으로 비판하고, 부흥회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이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총독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공격했다. “기독교회여! 灰칠한 무덤과 가튼 예루살넴의 朝鮮이여! 福잇슬진저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고 저주했다. 박헌영(朴憲永, 1900~56)은 기독교가 서구 제국주의의 영토 이권 확장의 수족이 되었으며, 조선에 미신을 선전하여 금력과 군벌에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므로, 기독교를 퇴치하기 위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한다고 주장했다. (朴憲永, “歷史上으로 본 基督敎의 內面,” 『開闢』 (1925년 11월): 64~69.) 

1927년 5월에 쑥섬에서 열린 순교기념사업전도회의 첫 토마스 순교 추모예배에서 설교하는 마페트 목사

토마스 순교자 만들기, 1925~31년

평양 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근본주의와 평양 성시화 작업으로 대응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처형된 토마스 목사의 순교 기념사업을 위해 전기 출판과 기념교회 설립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1926년 마페트를 중심으로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27년 순교기념사업전도회가 발족되고 5월에 쑥섬에서 첫 순교 추모예배를 드린 후, 9월 총회 때 토마스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공식 천명했다. 숭의여중 영어교사 오문환(吳文煥, 1903~1962)은 수집한 구전 자료를 중심으로 『도마스 牧師傳』(1928)을 출판했다. 『평양노회 지경각교회 사기』(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공저, 1925)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것을 발전시켜, 그가 강가의 군중에게 성경을 던졌으며,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조선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순교의 영웅이 탄생했다. 

근본주의 선언: “종교변호선언,” 1927년

미국에서 1910년대 중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근본주의가 형성되었다. 1923년 미국 북장로회 총회는 근본주의 “5대 필수 원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1924년 성서 무오성을 부인하는 ‘어번 선언’이 나왔고, 1925년 ‘스코프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이 승리했다. 192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가 구프린스턴 신학(전통 칼뱅주의)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천명하자, 메이첸을 중심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신학적 전환기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근본주의로 방향을 정했다. 구약학 교수 어드맨과 1924년 조직신학 교수로 평양에 온 레널즈와 신임 박형룡 교수는 『神學指南』을 통해 반종교 담론을 비판했다. 어드맨은 구프린스턴 켈로그 교수의 A Handbook of Comparative Religion(1899)을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소개했다. 1900년대 학생자원운동의 교과서로 사용된 이 책은 기독교의 우월성, 유일성, 초월성을 양보하지 않고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런 책을 반종교운동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시대착오였으며 지적인 나태였다.

1927년 조선 북장로회는 반종교운동에 대해 『神學指南』에 “종교 변호 선언서”를 발표하고 9개 항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 기독교와 사회: 이웃을 사랑하되 중생이 사회 발전의 근본이다. 2) 성서와 신앙: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기초이다. 3) 과학과 기적: 성서의 모든 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4) 예수의 인성과 신성: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는다. 5) 그리스도교의 처세: 견고한 지식 위에 생활한다. 6)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7)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8) 타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종교로 천상천하에 유일하다. 9) 신조: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믿는다. (“재죠션북쟝로션교회의 종교변호션언셔,”『神學指南』[1927년 1월]: 5~9.) 근본주의 5대 교리의 수용이었다. 이후 박형룡은 반기독교운동, 진화론,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근본주의의 전사로 나섰다. 

교회 분쟁: 노령화와 노회주의 승리로 교인 대량 유출 사태

1920년대는 교회 분쟁 시대였다. 교회는 내부 분열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1918년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조선기독교회를, 1923년 경북노회 이만집 목사가 자치교회를 분립한 것은 선교사가 지배하는 노회에 대한 반발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인 목사의 부정, 불륜, 노령화로 인한 지도력 부재에 대해 교인이 반발하면서 분쟁이 증가했다.

교회 분규와 노회 치리에 대한 항의 사태는 1923년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새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건축위원(김선두 목사, 정일선 목사)이 “돈을 먹었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유임과 분가를 놓고 투표한 결과 목사들의 유임이 결정되었다. 헌법대로 처리되었으나 교인의 불만은 잠복했다. 1926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에 감염된” 청년들이 변인서 목사를 중심으로 길선주 목사와 장로들에게 지도력 부족으로 사직을 요구하자 분쟁이 지속되었다. 당회와 길 목사를 비난하는 청년들의 선언서가 배부되고, 임시노회와 특별시찰회가 열리고, 강단이 장악되는 파행과 대치가 지속되었다. 결국 변 목사를 시골 교회에 임명하고, 길 목사는 성역 25주년 기념식 후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후 지속된 장로교회 분란 사태에서 교권을 가진 선교사와 당회는 개교회 문제는 노회가 결정한다는 노회주의 원칙으로 청년층의 개혁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30~40대 장로가 많았다. 이들로 구성된 당회가 청장년의 의사를 당회와 노회에 반영했다면 분규는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중주의와 노회주의가 충돌할 때 당회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장로교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평신도 회중주의가 질식되었다.

교회의 노령화와 노회의 교권주의는 교인 감소를 초래했다. 헌금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의무 잃은 신자’(오늘날의 ‘가나안 성도’)가 양산되는 교인 유출 현상이 일어났다. 1916년 장대현교회 교인 2,000명 중에 1897년에 방문한 자신을 본 사람이 16명뿐인 사실에 놀랐던 스피어 총무는 1926년 방문 때에도 동일 현상을 확인했다. 한 해 5,521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나, 입교자 중 사라진 자가 7,447명으로 사망자를 고려해도 기존 교인들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고 있었다. 1916년~27년 10년간 인구 400만이 증가할 때 예수교인은 20만 명이 줄어(7.5% 감소) 전체 인구의 1.4%로 축소되었다. 

맺음말

1927년 한 신자는 교회가 쇠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쇠퇴 원인은 첫째, 사상 문제로 교회는 사상계 지배 능력이 없어 세속 사상에 요동한다. 둘째, 경제 문제로 사회 경제가 피폐하여 교회는 재정 핍절로 현상 유지를 못한다. 해결책은 첫째, 반계급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통해 민중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무산계급, 농민, 빈민, 노동자와 멀어져 있다. 둘째, 자각적 전도인과 자각적 신자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직업적 목회자는 부자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적 설교를 하거나 특정 계급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다. 피동적 신자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신자는 순교적 정신을 배양하고 자율적인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익명, "敎會 衰退의 原因과 希望," 『기독신보』, 1927년 1월 5일.)

1920년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나왔을 때 교회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독교’ 담론이 등장했을 때에도 의제는 무시하고 안티-기독교 행동만 비판했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 개신교회는 세습한 중대형교회 300개, 가나안 성도 200만 명, 이단 50만 명을 양산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첫 쇠퇴기였던 1920년대의 담론과 대응을 복기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는 반복된다. 교회가 1920년대나 1980년대나 2007년처럼 ‘조선의 예루살렘’ 담론에 취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수구화의 길을 가면, 바로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죄로 침체와 굴욕과 분쟁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한다. 화려했던 평양 기독교와 서북 기독교가 사라져 버린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

<옥성득 약력>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07년 1월 2일 평양 장대현 교회 부흥 운동 "배위량 선교사(베어드)

31년 후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 의식이다

65년 후
1972년
만수대 광장에 20미터 김일성동상 건립


장대현교회가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다니…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복음이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가장 뜨겁게 전파되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고 그 중심은 평양이었다.
복음의 중심지답게 평양에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성경학교가 있었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들이 평양의 신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07년 평양에서는 1906년의 미국 아주사 부흥보다 더 위대한 부흥이라고 평가되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시작 되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성도들의 회개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3.5배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평양대부흥운동은 1909년의 100만인구령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100년간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외국 언론들은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양의 모습은 어떤가?
놀랍게도 현재 평양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극심히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권 및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오픈도어선교회는 기독교 박해국가 명단을 발표, 이들 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북한을 4년 연속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국가’로 지목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나라가 북한이며, 지난 한 해에만 북한에서는 수백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장대현교회였다.
예배당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은 평양의 중심지에 있어서, 장대현교회는 명실상부하게 평양 주민들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장대재 언덕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이른바 ‘혁명적 언어’로 개명되어 ‘만수대’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지금 유명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
1972년 북한정권은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 참배객은 꽃다발을 반드시 준비해야 하고, 헌화한 다음 “2, 3m 뒤로 물러서서 2, 3초 동안 동상을 우러러 본다”라는 행동지침도 있다.
인도하는 사람이 “수령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평양 출신 한 탈북자는 “묵념이라 아니라 살아있는 수령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에서 요란하게 내세우는 구호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 김일성 동상은 일찍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백성이 절하도록 명령했던 그 거대한 우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사망했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지였던 장대현교회는 지금 이렇게 만수대광장(김일성 광장)으로 변해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어 있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역전이 되었을까?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공산독재정권이 둥지를 틀고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흑암과 저주의 땅이 된 북한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근이 들어 300만명이 아사(餓死)했다.
그리고 현재 차이나 대륙에는 5만명의 탈북 난민들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탈북 남성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고, 탈북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차이나 남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가정부나 매춘부 신세가 된다.
어떤 탈북 여성들은 신부를 구할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한족(漢族) 가정으로 팔려가 차이나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70년이 차면 황무함이 마치게 하소서!

어찌하여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이 ‘사단의 견고한 진’이 되어 북한이 이렇게 저주와 흑암의 땅이 되었나?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치욕스러운 교단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바로 ‘평양’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장로교 총회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므로 받아들인다”고 가결했다.
그 후 한국교회 모든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하였다.

하나님께서 1907년에 평양에 큰 부흥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평양은 이가봇(삼상 4:21)이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의 수도가 되었고,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은 오늘날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는 ‘만수대광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은 무신론 공산독재정권의 폭정 아래 포로생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의 황무함을 그치게 해달라고 울며 간구한다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그 당을 고쳐주실 줄 믿는다.
우리는 평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북한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의 구원과 평양의 회복을 위해 거룩한 손을 들고 애통하며 기도하자.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말할 때, 우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해 가는데 하나님은 두 민족을 선택하셨다. 유대인과 한민족이다. 축구경기로 예를 들면, 전반전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았다면, 이제 후반전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을 차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민족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는가? 

이를 위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있었던 성령강림 대 부흥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임재와 동일한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특징 중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의 제자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주 놀라운 증언이다. 그런데 평양 대부흥이 이런 놀라운 회개의 사건이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 증언에 의하면, 평양은 기생이 가장 많아 음란한 곳이었고 폭력배들이 들끓는 타락한 도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이야말로 교회를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선교부에 보고한다. 그런데 성령임재를 경험한 평양시는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초상집과 같았다 한다. 기생집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온순해지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성수주일을 지키기 위해 시내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평양의 거상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어서 예수를 믿지 않던 상인조차 팔 물건을 공급받지 못해 문을 닫아야 했단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지금 세계에 두 강대국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군사대국 일본, 하나는 기독교대국 조선이다" 라고 보도했다. 뉴욕트리뷴은 "지금 기독교가 조선의 품격을 바꿔 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주일 아침이면 평양시 280개 교회에서 울려 펴지는 종소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한다. 장대현교회 출신 성도의 말에 의하면, 당시 복음을 듣고 전도 받아 장대현교회를 출석했던 성도의 수가 1 천명이 넘었다 한다. 이 증언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그래서 이것을 목격한 당시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양을 가리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아닌 복음전도를 위해 필수적 사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복음전도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 초기복음이 유대인사회에서 이방인사회로 전해지기 위해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세례가 반드시 필요했던 사건이라면, 이제 복음이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를 지나 땅끝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전해지기 위해선 평양 대부흥의 성령세례 사건이 필수적인 사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한민족을 선택하셨다는 증거다.   

복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흘러간다.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졌고, 특히 영국에서 미국 땅으로 옮겨졌다. 영국 프리머스 항을 출발한 청교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프리머스 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교회를 세웠다. 미국인들은 조상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프리머스항 근처에 큰 기념비(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한 여성입상과 그 입상을 받들고 있으며 동서남북을 향한 네개의 좌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입상 발취에 '신앙(Faith)'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그리고 좌상의 발취에 교육(Education), 자유(Liberty), 도덕(Morality), 법(Law)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미국 최초 이민자 청교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신앙을 기초로 미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미국의 건국이념은 점차 세속화되었다. 16 대 미국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를 새롭게 하길 원했다. 링컨대통령은 성경에서 비롯된 인권사상에 맞지 않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그의 마음은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문에 잘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링컨 대통령은 미국남북전쟁이 끝나기 전 1865년 암살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일까?  링컨대통령이 암살 당한 후 1년 뒤, 1866년 최초로 중국말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 미국상선 제너럴셔호먼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평양에 입항한 토마스선교사(Robert J. Thomas)는 제대로 선교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순교 당했지만, 그가 전달한 중국말 성경은 능력을 발휘했다. 

'야소 (예수의 조선말)을 믿으라'고 외치며 박춘권에게 건네진 중국말 성경은 그 곁에서 순교현장을 지켜보던 소년 최치량에 의해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전달된다. 박영식은 성경을 받아 자기 집 도배지로 사용했는데 박영식이 훗날 벽지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훗날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미국 북장로교회 평양 선교사로 부임한 사무엘 마펫이 그곳에 우연히 묵으면서 그곳에서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한다. 이 널다리골교회는 훗날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현장이었던 '장대현교회'로 불려진다.

너무 극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소아시아, 유럽, 미국을 지나 태평양을 넘어 이렇게 한국땅에 도착했는데 그복음이 평양 대부흥의 본거지인 장대현교회의 모체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하게하고 평양의 대부흥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의롭다.    

한민족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조선땅에 전해진 성경과 기독서적을 읽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통해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 '개인인격존중사상,' '자유사상,' '만민평등사상'을 깨닫는다.

한성감옥에서 1903년 '신학월보'에 기고한 그의 글은 다음과 같다.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럼으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順便)하고 순리된 바로다...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훗날 프린스턴에 유학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을 기초로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이승만대통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처럼, 성경 위에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1866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 최치량이 주운 중국어 성경의 행보, 1903년 이승만의 회심과 깨우침, 1907년 평양 대부흥,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한민족을 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