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200명 이름의 뜻과 의미
1. 가나안 - 노아의 저주를 받은 자
2. 가룟 유다 - 영원한 배반의 상징
3. 가말리엘 - 사도 바울의 스승
4. 가야바 - 정치적인 종교 지도자
5. 가인 - 첫 출생자, 첫 살인자
6. 갈렙 - 진취적인 믿음의 인물
7. 갓 - 암사자에 비유된 용맹한 지파
8. 고넬료 - 최초의 이방 세례 교인
9. 고라 - 땅에 삼키운 바 된 자
10. 고멜 - 방탕한 이스라엘의 상징
11. 골리앗 - 소년 다윗에게 패배한 거인
12. 기드온 - 이스라엘의 큰 용사
13. 나다나엘 - 거짓됨 없는 참 회의론자
14. 나단 - 충실한 여호와의 예언자
15. 나답과 아비후 - 불로 심판받은 불의의 제사장들
16. 나발 - 어리석은 자
17. 나봇 - 유업을 중시한 의로운 포도원 주인
18. 나사로 -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19. 나아만 - 문둥병을 치유받은 이방의 군대장관
20. 납달리 - 발 빠른 암사슴에 비유된 지파
21. 노아 -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
22. 누가 - 사랑받는 의사요 신의 깊은 문학가
23. 느부갓네살 -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방의 권세자
24. 느헤미야 -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유능한 정치가
25. 니고데모 - 중생의 도를 추구한 지식인
26. 니므롯 - 여호와를 대적한 최초의 영걸
27. 다니엘 -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28. 다말 -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유다의 며느리
29. 다윗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통치자
30. 단 - 우상숭배로 소멸된 지파
31. 데마 - 신앙의 길을 떠나 세상을 택한 자
32. 데메드리오 - 이해 타산으로 복음을 배척한 자
33. 도르가 - 구제와 선행의 여제자
34. 도마 - 진솔한 신앙의 회의론자
35. 두발가인 - 금속 가공의 시조
36. 드루실라 - 회개의 기회를 거부한 여인
37. 드보라 - 이스라엘의 유일한 여사사
38. 들릴라 - 재물에 미혹되어 사랑을 버린 여인
39. 디나 - 강간당한 비극의 소녀
40. 디도 - 신실한 복음 사역자
41. 디모데 - 경건한 젊은 목회자
42. 라멕 - 복수의 칼을 노래한 가인의 후손
43. 라반 -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
44. 라합 -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기생
45. 라헬 - 질투심 강한 믿음의 여인
46. 레아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인
47. 레위 - 참혹한 복수극의 주인공
48. 로데 - 베드로를 영접한 계집종
49. 로이스와 유니게 -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믿음의 여인들
50. 롯 - 세속에 물든 우유부단한 신앙인
51. 루디아 - 마게도나(마케도니아) 최초의 개종자
52. 룻 - 효성과 신앙이 뛰어난 모압 여인
53. 르우벤 - 장자권을 잃은 야곱의 맏아들
54. 르호보암 - 왕국의 분열을 초래한 왕
55. 리브가 - 야곱은 편애한 족장 이삭의 아내
56. 미가 - 복음의 조력자요 나눔의 사람
57. 마르다 - 헌신적인 봉사의 여인
58. 마리아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59. 마리아② - 주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
60. 마태 - 사도로 쓰임받은 세리
61. 막달라 마리아 -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간 여인
62. 맛디아 - 사도로 뽑힌 예수님의 증인
63. 멜기세덱 - 그리스도를 예표한 영원한 대제사장
64. 모르드개 - 하만의 궤계를 물리친 민족의 파수꾼
65. 모세 - 출애굽의 위대한 영도자
66. 므낫세① - 들소의 뿔 같은 지파
67. 므낫세② - 초기의 악정을 말년의 회개로 용서받은 왕
68. 미가 - 기복적 신앙을 가진 범신론자
69. 미갈 - 다윗을 사랑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여인
70. 미리암 - 최초의 여선지자
71. 바나바 -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72. 바디매오 - 믿음으로 고침받은 소경
73. 바라바 - 예수님 대신 놓임 받은 죄수
74. 바르실래(바실래) - 신실하고 겸손한 부호
75. 바울 - 위대한 복음 전도자
76. 발람 - 탐욕에 물든 술사
77. 밧세바 - 죄가 많으나 은총을 입은 여인
78. 베냐민 - 이스라엘을 지킨 파수꾼
79. 베드로 - 교회의 반석이 된 수석 사도
80. 보디발 - 아내의 농간에 놀아난 자
81. 보아스 - 책임질 줄 아는 덕망있는 신앙인
82. 뵈뵈 - 주의 종에게 정성을 다한 여집사
83. 브나야 - 충직한 신하의 표상
8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성심성의껏 교회를 섬긴 믿음의 부부
85. 비느하스 - 공의의 제사장
86. 빌라도 - 진리를 외면한 역사의 죄인
87. 빌레몬 - 사랑이 충만한 성도
88. 빌립 - 친구를 주께 인도한 복음의 증인
89. 사가랴 - 의심함으로 벙어리가 되었던 의인
90. 사독 - 신의를 지킨 제사장
9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 영원한 믿음의 친구들
92. 사라 - 모든 믿는 여성의 표상
93. 사무엘 - 최후의 사사
94. 사울 - 교만 때문에 버림받은 이스라엘 초대 왕
95. 삭개오 - 구원받은 세리장
96. 살로메 - 헌신적으로 주를 따른 여제자
97. 삼손 - 긴 머리털을 가진 힘센 용사
98. 세례 요한 - 주의 길을 예비한 광야의 선구자
99. 솔로몬 - 지혜의 왕
100. 스데반 - 초대교회 최초의 집사요 순교자
101. 스룹바벨 - 제2성전의 재건자
102. 스불론 - 미약했으나 용맹했던 지파
103. 시드기야 - 유다 왕국 최후의 왕
104. 시므온 - 잔인한 피의 보수자
105. 시므이 - 처세술에 능한 기회주의자
106. 실라 - 복음전파의 충실한 조력자
107. 아간 - 여호와의 물건을 훔친 자
108. 아나니아와 삽비라 - 거짓말로 주의 영을 시험한 부부
109. 아달랴 - 왕위를 찬탈한 잔학한 여왕
110. 아담 - 최초의 인간, 인류의 조상
111. 아도니야 - 솔로몬의 왕위에 도전한 자
112. 아론 - 제1대 대제사장
113. 아모스 - 공의의 선지자
114. 아벨 -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의인
115. 아볼로 - 탁월한 학문을 지닌 전도자
116. 아브넬 - 신의를 저버린 사울의 군장
117. 아브라함 - 영원한 믿음의 조상
118. 아비가일 - 총명한 믿음의 여인
119. 아비멜렉 - 심은 대로 거둔 악인
120. 아비새 - 용감한 다윗의 용사
121. 아비아달 -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한 자
122. 아사 - 태후의 위를 폐한 종교개혁자
123. 아셀 - 배타적인 지파
124. 아하스 - 철저한 우상숭배자
125. 아합 - 선지자들을 핍박한 바알 숭배자
126. 아히도벨 - 실패한 군사전략가
127. 아히야 - 왕국 분열을 선포한 무명의 선지자
128. 안나 - 대망 중에 예수님을 만난 여선지자
129. 안드레 - 실천적인 전도자
130. 압살롬 - 아비의 왕권에 대항한 자
131. 야고보① - 사도 중 최초의 선교자
132. 야고보② -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
133. 야곱 -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134. 얀네와 얌브레 -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
135. 에녹 -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
136. 에브라임 - 형보다 높임을 받은 아우
137. 에서 - 식물에 미혹된 망령된 자
138. 에스겔 -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139. 에스더 -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소유자
140. 에스라 - 율법에 능통한 학사
141. 에훗 - 단검으로 주의 구원을 이룬 왼손잡이 사사
142. 엘가나 - 아내의 결점까지 사랑한 남편
143. 엘르아살 - 아론의 직분을 승계한 대제사장
144. 엘리 - 자녀로 인해 몰락한 가문의 제사장
145. 엘리멜렉 - 약속의 땅을 떠난 자
146. 엘리사 -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킨 선지자
147. 엘리사벳 - 흠 없고 의로운 여인
148. 엘리야 - 병거 타고 승천한 선지자
149. 여로보암 -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왕
150. 여호람 - 결혼정책의 제물이 된 왕
151. 여호사밧 - 신앙으로 개혁에 힘쓴 왕
152. 여호수아 -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153. 예레미야 -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154. 예후 - 처절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
155. 오네시모 - 주 안에서 해방된 노예
156. 오르바 - 안일 속에 머물고 만 여인
157. 오므리 - 사마리아 성을 건설한 왕
158. 오바댜 - 하나님을 경외한 궁내대신
159. 옷니엘 -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
160. 와스디 - 폐위당한 정숙한 왕후
161. 요게벳 - 신앙으로 자녀를 키운 어머니
162. 요나 -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163. 요나단 - 다윗의 진정한 친구
164. 요셉① - 고난 후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예표
165. 요셉② - 의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
166. 요시야 - 율법서를 발견한 종교개혁자
167. 요아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왕
168. 요안나 - 감사의 헌신의 여제자
169. 요압 - 불의의 죄값을 치른 장군
170. 요엘 - 여호와의 날은 선포한 선지자
171. 요한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랑의 사도
172. 욥 - 완전한 동방의 의인
173. 우리아 - 충직한 신하의 표상
174. 웃시야 - 교만으로 천형을 받은 왕
175. 유다 - 메시아 후손을 약속받은 자
176. 유두고 - 바울의 이적으로 소생한 청년
177. 율리오 - 바울에게 호의를 베푼 로마 백부장
178. 이사야 -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179. 이삭 - 순종과 온유의 사람
180. 이새 - 메시아의 혈통을 이어나간 자
181. 이세벨 - 사악한 바알 숭배자
182. 이스마엘 - 육체를 따라 난 자
183. 이스보셋 - 사울 왕가의 마지막 왕
184. 입다 - 서자 출신의 사사
185. 잇사갈 -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지파
186. 하갈 - 쫓겨난 사라의 여종
187. 하만 - 자기 꾀에 빠진 유대인의 원수
188. 하와 - 인류의 첫 어머니
189. 학개 - 성전 재건을 독려한 선지자
190. 한나 - 기도의 어머니
191. 헤로디아와 살로메 - 희대의 간부(奸婦)와 그 딸
192. 헤롯 대왕 - 폭력과 불의의 왕
193. 헤롯 안디바 - 부도덕하며 우유부단한 왕
194. 헤만 - 충실한 성가대장
195. 호세아 - 회개를 호소한 사랑의 선지자
196. 홉니와 비느하스 - 악행을 일삼은 타락한 제사장들
197. 훌 - 모세를 도운 인물
198. 히람 - 성전건축을 자원한 두로 왕
199. 히스기야 - 신앙 부흥과 기도의 왕
200. 힐기야 -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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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이름의 뜻과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과 그 이후
교회의 반석이 된 사도
1. 베드로의 본명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3대 제자이자 수제자였는데,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요하나(히브리어)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요하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른 것인데,
"바"는 아람어로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요나는 '요하나'의 약칭입니다.
2. 예수님이 바꾸어준 이름 베드로의 뜻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준다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고, 그 이후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게바"(아람어) 즉, "베드로"(헬라어)로 바꾸어 줍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라는 말은 본명과 예수님이 변경한 이름을 두번 나열한 것으로서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한복음 1장 42절
게바 또는 베드로의 의미는 반석이라는 뜻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7-18절)
즉, 베드로의 위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가다.
1. 반석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위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의 이름을 받았고, 실제로도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고, 그것이 바로 당시 베드로가 믿고 있던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한복음 13장 37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은밀하게 뒤따라 간 그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공범이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게 되자, 자칫하면 자신도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무서운 현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두려움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무려 3번이나 부인하였는데, 특히 3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예수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였으며 결국 심한 자책감으로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장 60절 ~ 62절)
반석인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무섭고 냉혹한 현실과 두려움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여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의 의미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 그 첫 사랑에 불타오르거나 새로운 사람이 된 감격으로 그 이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후 수 없이 많이 넘어지고, 죄도 짓고 심지어 낙심하여 주저 앉게 되는 그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어 레전드 그리스도인이 되다.
1. 예수님을 부인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의 삶과 고민
베드로는 그 이후부터 다시 예전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건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으며 하루에도 수십번도 넘게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어부로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그 시간들보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구나. 예수님께 모든 제자들이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고 죽음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그 고백도 거짓이 아니라 당시 진심이었고, 또 그렇게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자신까지도 속였던 것이구나.
막상 무서운 현실이 닥치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주님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불과했구나.
내 자신의 벌거벗은 비참한 모습을 깨달은 지금 주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고, 이렇게 물고기나 다시 잡아야 하는 몸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예수님이 잊혀지지 않고 그 3년의 시간을 부인할 수도 없으며, 다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일까.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 동일한 현실이 닥치면 다시 예수님 부인할거야.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런데 또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2.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다시 만난 주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디베리아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리라고 하셨고, 그대로 따르자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위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바로 그 만남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누가복음 5장 4절 ~ 11절 중)
베드로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한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예수님이 바로 신적인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엎드러 졌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콜링하였고, 베드로는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좇았고, 바로 그 순간이 베드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처음 만나 뜨겁게 살아가다가 자신의 참된 모습과 비참함을 깨닫고 주저앉거나 낙심한 베드로를 주님은 처음 콜링한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다시 진실하게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사도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 외침을 듣고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바다로 뛰어 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처음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던 그 때처럼요.
베드로의 회복
예수님은 모닥불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고,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동일하게 3번 질문하였고, 베드로는 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사랑하느냐"
-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은 2번째까지 베드로에게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베드로는 2번 모두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답변하였으며, 마지막 예수님은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지 묻자,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적인 답변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베드로는 예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끝까지 따라갈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과 현실이 닥치게 되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고,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와 실체를 그때서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가슴과 영혼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 역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우정 정도로 사랑한다고 답변하였고, 주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부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책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자신의 정직한 실체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수준을 인식한 바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였으며,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박해가 무척 심한 상황에서 어느 성도가 배반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배반한 그 성도가 베드로 앞에 잡혀 와 살기 등등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베드로는 "용서하자"고 대답하였고,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죄인 중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 자리까지 이끄셨고, 자기 역시 그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사랑과 용서의 원천은 바로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예수님과 만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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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 /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라틴어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재임 26년 ~ 36년)
본티오 빌라도(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 유대의 속주로 다섯 번째 총독으로 유대인에 의해 고소된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한 인물이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에 따르면 ‘본티오 빌라도’는 예수를 고난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 당시 사건을 기록한 사복음서 등 성경 여러 곳에서는 본티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며 손을 씻고, 예수를 놓아주려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의 복음서 18:38)’
이외에도 요 18:31, 눅 23:20~23, 마 27:24~25, 마 27:19에 나와 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
천주교에서는 '본시오 빌라도'라고 하며,
정교회의 신앙고백과 개신교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로 옮기고 있다.
본티오는 이탈리아 남부 중앙에 있던 고대 부족 집단 삼니움(Samnium) 주민이 사용한 가족 성(姓) 중 하나로서, 삼니움 주민은 나중에 로마인이 되었다.
빌라도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후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대 속주의 총독을 지낸 것과 기독교 신약성서의 짧은 기록 및 몇몇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의 유다인 학대 정책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실록 15,44;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다전쟁 2,9,4;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7)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가혹해서 횡포를 휘둘렀고 반역자는 법적 판결 심사없이 처형했다. 갈릴리인의 학살은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눅 13:1).[1]
성서에 묘사된 본티오 빌라도[편집]
폰티우스 필라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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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오 시세리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폰티우스 필라투스(그림 가운데)가 좌측의 예수를 군중들에게 가리키고 있다. | |
로마 제국의 제5대 유다이아 총독 | |
임기 | 26년 ~ 36년 |
전임 |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
후임 | 마르켈루스 |
군주 | 티베리우스 |
신상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1세기 |
사망일 | 서기 39년 |
국적 | 로마 제국 |
빌라도의 이름은 “창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로마의 무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였으므로 그 부모님이 장차 장군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름값을 하였다.
창과 칼을 사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로마의 자랑스러운 장군이 되었다.
그의 이름자 앞에는 “본도에서 승리한 기사”라는 영예스러운 칭호(본디오)까지 붙이게 되었다.
빌라도는 무인으로서 정상에 서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자는 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와 총리 그리고 지방에서 각 도를 다스리고 있는 백여명이나 되는 분봉왕과 총독들이 로마 제국을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군복을 벗고 로마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총독이 되고 훗날 더 큰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는(AD 14-37, 디베료 가이사, 눅 3:1)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변방지역 유다 땅에는 여전히 불순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황제의 최측근인 총리 세야누스를 찾아가서 자신을 유다 총독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곳의 불온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그를 설득했다.
AD 26년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소원대로 제5대 로마 총독이 되어 유다 땅으로 들어왔다.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는 무인으로서는 대단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란의 조짐에 대해서는 과감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했다.
발본색원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29년 갈릴리 사람들의 반로마 움직임을 탐지하여 그 주모자들을 잡아서 처형한 사건이다.
그들의 피를 제물에 뿌려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눅 13:1).
빌라도의 공포 정치의 효과는 대단했다.
제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뒤로는 반감을 크게 표출하면서도 앞으로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열심당원들의 움직임도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그저 약간의 극소수 열혈분자들이 간헐적으로 테러 행위를 감행했을 뿐이다.
십년동안이나 공포 정치가 진행되고 난 후 AD 36년에 큰 사건이 터졌다.
여리고의 불순분자들이 그들의 성지인 그리심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빌라도는 과감하게 로마 군대를 몰고서 그들의 성역을 침범하여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일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마침내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에 이르기까지 빌라도의 철권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연대되어 크게 일어났다.
극한 대결로 발전할 경우 유대인들이 많은 피를 흘리게될 것이고 그 반로마 정서는 이웃 지방으로 확산될 것이 뻔했다.
이 점을 우려했던 로마 당국은 얼른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해버리고 말았다.
유다 총독으로 머무르지 아니하고 이를 새로운 출발점으로하여 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중앙무대 한 복판으로 진입하기를 원했던 빌라도의 꿈은 민심을 얻지 못하여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빌라도의 이름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그렇게 좋지아니한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최종 결정한 악의 화신이 본디오 빌라도이기 때문이다(마 27:36, 요 19:13-16).
그런데 이 견해는 약간 수정을 요하고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앞 길 창창한 자신의 장래를 이 때문에 망치지 아니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빌라도를 구석으로 몰아서 그와 같이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묘한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주어 빌라도가 그와 같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는 누구인가?
이들의 공동정범(共同正犯)적인 행위를 정확하게 따지지 아니한 채 본디오 빌라도만을 단독정범으로 몰아서 역사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옳지못한 처사이며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권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권세를 받아들이느냐하는 선택만이 인간의 몫인 것이다. 당사자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른다. 그렇지만 그 권세를 쥐어준 자와 그 권세를 발동시키도록 예수를 넘겨주고서 압력을 가한 자의 죄는 더 큰 것이다”(요 19:11).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빌라도의 약점이 다음과 같이 노출되고 있다.
첫째, 그는 정치적인 이슈에 있어서는 소신있는 입장표명과 확고한 행동으로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예수가 무죄이면 무죄방면해야 했으며 유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죄로 처벌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의 또다른 의미 “확고히 하다"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둘째, 책임회피에 급급하여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우겼다.
제사장에게(요 18:31), 헤롯 왕에게(눅 23:7, 12) 그 책임을 떠넘기다가 끝내는 유대인 대중들에게(눅 23:22-25) 예수의 핏값을 떠넘기는 비겁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셋째, 손을 물에 씻어서 잘못된 판결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마 27:24).
넷째, 예수를 잘못 사형시킨 책임을 추후 로마 당국으로부터 추궁받게될 것을 염려하여 예수가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자이므로 그를 처형하지 아니하면 반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역사를 날조했다(요 18:33, 39, 19:14-15, 19-22).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빌라도의 모습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강한 무인으로 보이고 싶었던 장본인 그래서 공포 정치를 과감하게 실시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였지만 그 내면은 비겁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출세하기 위하여 위아래 눈치를 보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성공 지향, 출세 지향적인 사고방식
둘째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권세 가운데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동화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마태복음 27:1-26)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이방인으로서 빌라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단지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잠시 등장했을
뿐인데, 어찌 이토록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 기독교인들이 수시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책임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고, 몇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노력하는 등,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비쳐지는데,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빌라도’라는 이름만이 사도신경에 선명히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저주스러운 이름이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총독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땅은 그의 유언대로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로마제국은 이들에게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다.
그 가운데 헤롯 대왕이 직접 통치하였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된 분봉왕은 아켈라오였다.
그는 부친 헤롯대왕의 성품을 쏙
빼닮아 잔인했다.
아켈라오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통치를 감행하다, 결국 AD6년
아구스도 황제의 재판을 받고 고울지방으로 추방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아켈라오가 추방된 뒤, 유대와
사마리아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로마는 총독을 파견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파견된 총독이
바로 빌라도이며, 그는 유대에 파견된 제5대 총독이었다. 로마는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황제 밑에 13명의 총독을 두고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그의
이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본디오 가문은 로마제국의 지방호족이었고,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으로 무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통해 볼 때, 로마제국 초기의 기사 가문 출신으로 어떤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아 로마제국에서
이같은 지위를 누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는 A.D.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이다.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다.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 공의회를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많은 세리들을 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A.D.6-7년에는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갈릴리지방의 유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하에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행 5:37 참조)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총독 빌라도는 그의 소유물 중에 대제사장의 의복도 포함되었는데, 빌라도가 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그는 그 의복을 가지고 가서 유대인들에게 빌려 주었다고 한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약 18년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직하다 AD36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직접 연관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았던,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잠시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다보니, 빌라도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그는 기사 가문 출신답게 무력을 앞세워 횡포를 일삼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총독 휘하의 군대 사령부를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황제의 상과 함께 그들의 군기들을 거룩한 신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유대 백성들은 격앙하여 떼를 지어 가이사랴로 몰려가 그에게 유대인의 종교에 대한 이러한 횡포를 중지해 달라고 탄원했다. 닷새동안 고집을 부리다가, 그리고 폭동을 진압하려는 부분적 시도도 해본 후 마침내 빌라도는 굴복한 적도 있다. 전임 총독들은 이러한 문제가 가져오는 심각한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일은 되도록 피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했으며 그 일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궁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져 있는 금도금한 방패를 걸어 놓았으며, 유대인들의 극심한 상소에 따라 디베료 황제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그것을 치우기를 거부했다. 그는 상수도 건설을 위하여 성전의 금고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이것은 또 한 차례의 폭동을 낳았고, 이 폭동은 폭도들뿐만 아니라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학살하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눅13:1에 잠시 언급되어 있듯이,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의 북쪽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남쪽의 전통적인 유대사람들에 비해 성품이 강렬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의 점령에 가장 끈덕지게 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빌라도는 갈릴리인들의 지하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그들을 무참히 죽였고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로마 경비병은 관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을 곤봉으로 쳐죽였다고 한다.
이같은 일들로 야기된 긴장은 빌라도의 위치를 약화시켰으며, 유대인의 불만은 로마에 계속 전달되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켰던 유대왕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빌라도는 ‘고지식하고 무자비하고 완고한 자’로 그려지고 있으며, 또한 ‘부패, 폭력, 강도, 학대, 억압, 불법적인 처형, 그리고 끊임없는 가장 가혹한 잔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빌라도는 A.D.36년 사마리아인들의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 조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평소 빌라도의 이같은 무자비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자칭 왕이라 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면, 쉽게 사형언도를 내릴 것으로 판단하고 빌라도에게로 몰려갔을 것이다.
한편,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분명히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당시에 빌라도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무죄한 사람을 유죄판결하는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만 것으로 볼 수 있다.
● 하지만, 빌라도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로마인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했고, 남의 말에 쉽게 부하뇌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기간이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예루살렘의 치안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그에게 끌려오게 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였다. 1)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자칭 왕이라고 했다.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처형을 요구하자, 때려서 놓으리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그 아내의 말대로 예수의 판결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다. 빌라도는 양심과 의협심에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편의 위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다.
지혜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현명하면 무엇하나? 로마의 최고학문을 배우면 무엇하나? 권력과 재물과 기술이 있으면 무엇하나?
진실되게, 바르게, 공명정대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용지물이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지혜는 간사가 된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패가망신케 하고,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된다. 어찌 빌라도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온갖 부정부패, 비리, 권력남용, 권모술수와 책임회피, 공갈협박, 무력, 테러...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어떤 핑계가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그의 소극성, 사특한 지혜, 권력 유지를 위한 권모술수는 예수를 죽였다. 백성의 고함 소리에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3일 밖에 잡아두지 못했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은 것은 3일에 불과했다.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이 되어 역사에서 물러갔으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 사흘의 고난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 어둠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은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이 넘칠 것이다. 믿음을 가졌기에 당하는 작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3일의 고난뿐이다. 짧은 고난이다. 롬8:18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예수님께서 심판받기 위해 총독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옆에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와 고함지르는 군중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한번 둘러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 순간, 진정으로 심문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 앞에서 재판받고 있는 것은 고함지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어떤 소리를 따라 가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양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처럼 끌려오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듯이 주님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심판자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억울함, 고달픔, 배신감,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누가 심판해 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까? 진정한 재판관, 최후의 심판자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여러분의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을 믿습니다.
●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민란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준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 예수를 사형토록 허락하고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손을 씻은 것으로 보아 약삭빠르고 직무에 무책임했던 사람. 아내의 지혜로운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아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물. 폭동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것으로 보아 잔학하고 반유대적 성향을 지닌 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빌라도와 관련된 몇몇 전설들과 창작된 이야기만이 전해올 따름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예수님 처형 무효로 해달라" 케냐 변호사 소송 제기
* 케냐 천주교 신부 / 돌라 인 디디스2000년 전 빌라도 재판을 무효하다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 하였다.

케냐에 거주하는 한 변호사가 국제사법재판소를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돌라 인디디스(Dola Indidis)라는 이름의 이 변호사는 전 케냐 법관의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며, 종교는 가톨릭이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와 당시 유대인 장로들, 헤롯 왕과 티베리우스(로마 황제, BC 42~AD 37), 이탈리아 정부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인디디스 변호사는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예수님의 존엄성을 되찾고 대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하는 소송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지난 2007년 처음으로 나이로비 소재 케냐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케냐 TV인터뷰에서 "예수님의 부당한 죽음의 증거는 성경으로부터 비롯됐다. 증거는 오늘날 성경의 기록으로, 누구도 성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전례를 통해 충분한 승소의 개연성이 보이는 사건"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사건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유로는 인디디스 변호사가 소송을 제기한 해당 국가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관할하는 UN 소속 국가 영토에서 벗어나 있음이 지적됐다.
사람들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왜 일주일 만에 처형당했나?
예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히스토리컬 픽션으로 풀어내다!
저항단체
지도자 유다는 로마의 점령을 전복시킬 계획의 시작으로 로마 병사를 암살한다.
엘르아살과 그의 아버지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도성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고 술책을
쓴다.
많은 백성이 메시아로 여겨 환호하는 인기 있는 선지자 예수에 관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 모두
다가올 유월절 기간에 사회 불안과 폭력 사태가 빚어질 것을 염려한다.
이런 긴장 상태의 와중에 예기치 않은 동맹 관계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 신약학자 애덤 윈은 역사상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 이야기를 신선한 상상으로 직조해 예수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구성해 낸다.
1세기 정황과 관련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윈의 내러티브는 복음서
기사의 여백을 메우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예수를 둘러싼 세계의 사회·정치·신앙 현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성경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 준다.
정치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정찰하고 정찰 당하는 이들,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로 가득했던 도성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책임 문제는 복잡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한 편에만 오롯이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누가 죽였는가?
이 책의 특징
- 히스토리컬 픽션(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복음서에 드러나지 않은 메시아 처형 사건의 행간을 속도감 있게 복원한다.
- 메시아 예수의 처형을 둘러싼 역사·정치·사회 현실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 로마와 유대, 빌라도, 열심당원,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메시아 처형에 관여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 마가복음, 로마제국을 깊이 연구한 신약학자가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메시아의 죽음에 대한 담대한 가설을 제공한다.
지은이 / 애덤 윈(ADAM WINN)
메리 하딘 베일러 대학의 기독교학 조교수이다. 풀러 신학교에서 신약 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IVP Academic, 2018), The Purpose of Mark's Gospel (Mohr Siebeck, 2008), Mark and the Elijah-Elisha Narrative (Wipf and Stock, 2010)가 있고, 편집한 책으로 An Introduction to Empire in the New Testament (SBL Press, 2016)가 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로마제국과 신약성경, 1세기 기독교 운동 속 기독론에 관심이 많다.
옮긴이 / 오현미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종교개혁 핵심질문』(복 있는 사람),
『주목할 만한 일상』(비아토르), 『폴 트립의 복음 묵상』(생명의말씀사),
『아름다운 안녕』, 『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이레서원), 『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CH북스), 『기독교 신앙 그 개념의 역사』(CUP),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죠이북스) 등의 책을 번역했다.
로마제국의 통치 방식이 지닌 특징은, 점령은 하되 해당 지역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평화를 지켜 준다는 점에 있었다.
다신교 체제의 로마 입장에서 유대 지역은 참으로 '괴랄한' 곳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일신 신앙과 제례를 철저히 고집하면서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 소요와 봉기가 끊이지 않았던 유대 땅은, 제국을 통째로 뒤흔들 큰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역 분봉왕(헤롯)과 총독(빌라도), 유대 대제사장(가야바)의 역학 관계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거기에 다양한 그룹(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등) 간 갈등까지 얽힌 유대 지역에 예수라는 갈릴리 '컨츄리' 선지자의 등장과 예루살렘 입성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점들은 이 책에서 적당한 상상을 더해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선다.
수많은 이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며 각자 뜨거운 욕망을 분출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1세기 이후로 예수는 항상 욕망의 정치 한가운데서 표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줄 평 : 정치와 종교의 욕망이 한데 어우러진 1세기 예루살렘의 그날들.
책을 덮은 뒤 '예수 없는 예수 소설'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 주인공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웠다.
최근 계속 출간되는 1세기 관련 신학 소설들이 건네는 교훈과도 결이 달라 보였다.
저자는 신약학자로서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 관련 최신 연구를 토대로 십자가 처형이 당대 정치·사회를 아우르는 다층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신중하고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1세기 자료와 복음서 사이를 줄타기해 그린 시대적 배경 위에, 열심당원, 밀정, 종교 지도자, 빌라도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예수 처형을 둘러싼 긴박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저자는 이 음모의 중심에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며 책임과 파문에서 빠져나갈 전략을 짠 빌라도를 위치시킨다.
십자가 처형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 탓으로 돌려 반유대주의의 비극이 펼쳐진 2000년 역사를 성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직전에 읽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현대문학)와 겹쳐 보다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다.
폴라 구더의 <이야기 뵈뵈>(에클레시아북스)에 비해 그저 배경 장치로만 등장하는 듯한 여성 서사의 공백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뭇 그리스도인이 줄곧 낭만적인 신앙 연애 대상으로만 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날것 그대로 보여 주는 스릴러 느낌이 흥미로웠다.
마치 새로 쓰일 <의인을 찾아서>(새물결플러스)의 각본 같았다.
읽는 이마다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줄 평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의미를 새롭게 구현한 역사 스릴러.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본디오·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치하에서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AD 26-36)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직접 주관하였던 인물로서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사도신경에서도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하였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원한과 감정으로 대립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필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특별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휘장을 사용하거나, 빌라도와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방패를 걸어 놓음으로서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또한 빌라도는 성전의 보물들을 압수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로와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강탈자와 포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13:1에 의하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극악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기 전에 그의 총독직을 위협하는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봉기는 로마군을
투입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속화시키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즉각 폭동을 일으켰다.
빌라도는 5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번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에 세운 「로마」기념비를 제거하라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아내의 청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석방시키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은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에 대한 판결을
바꾸어버리는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마리아의 거짓 선지자가 그리심산에서 성전보물을 찾아내겠다고 주장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으로
몰려 들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빌라도는 군중들이 갑자기 모임으로 인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유대인들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사마리아 지방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 때문에 빌라도는 AD
36년에 로마로 소환 당하고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주장에 의하면 네로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하며,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특히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던 그의 아내는 프로쿨라라고 알려져 있는데,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가 추앙을 받고 있으며, 희랍정교회는 그의 아내 프로쿨라만이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가. 제1차 총독 시대(AD 6년 ~ AD 41년)
헤롯 1세(Herod Ⅰ, BC 37년 ~ BC 4년)가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헤롯 왕조(BC 37년 ~ AD 70년)가 성립되었습니다. 헤롯 1세는 로마에 충성하며 유대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 시기 로마는 그를 통해 이 지역을 통제하였습니다.
BC 4년 헤롯 1세는 사망 직전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2세 등 3명의 아들에게 유대 왕국을 분할 상속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갈릴리, 베레아 지역을 분할 받았습니다.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인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아우라니티스, 드라고닛, 이두래를 분할 받았습니다.
AD 6년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의 가혹한 통치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 반란이 거듭되었고, 유대-사마리아 지역의 귀족들은 로마 제국 황제에게 헤롯 아켈라오를 숙청해 달라고 고소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August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아켈라오를 갈리아(Gaul) 지역 나르보덴시스로 추방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빈(Vienne) 지역입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총독(행정 장관)을 파견하여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에 의한 제1차 총독 시대는 AD 6년에서 AD 41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로마의 총독(행정 장관)은 행정 수도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머무르며 유대(유대-사마리아-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나. 유대 지역 5대 총독 : 본디오 빌라도
AD 26년 로마 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는 폰티우스 필라테(Pontius Pilate, AD 26년 ~ AD 36년)를 유대 지역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티베리우스를 디베료(Tiberiu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글 성경에서는 폰티우스 필라테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행정 장관)으로 부임하던 때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디베료가 카프리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근위병 세야누스가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갈릴리-베레아 지역의 분봉왕 헤롯(헤롯 안티파스)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행정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로마 제국 황제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를 저지하려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명령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기세에 눌려 가이사랴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수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성전세)를 유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AD 36년 본디오 빌라도가 사마리아 학살 사건으로 로마로 소환되었고, 자살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크리스트교도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콥트 교회 및 에티오피아 교회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와 그의 아내 프로쿨라(Procula)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다. 신약 성경과 본디오 빌라도
로마 제국 시대 유대의 5대 총독(행정 장관)으로 파견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고 십자가형에 처한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시기에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자신은 무죄하다고 말하며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그가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태복음 27:24)
본디오 빌라도는 AD 26년에서 AD 36년까지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1절의 내용을 보면 디베료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베료 15년은 AD 28년에 해당하며, 이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누가복음 3:1)
로마 제국의 역사와
성경 내용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CLC)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가
역사적(세계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경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고 소개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웃님들 함께 읽어주시고
주변에 소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를 소개드립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수메르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이르는 세계사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역사를
균형 있게 엮어낸
성경 이해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아시아사 및 서양 고대사,
특히 세계사 교과서에서 접하는
12개 고대 국가(문명)와
성경(성경 역사)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메르(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헤브라이,
페니키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의 역사는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과
역사적 무대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로 이해하는 성경 역사』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성경 역사)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12개 고대 국가(문명)의 역사와
성경 역사의 관련성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의 역사적 배경 이해에 갈급했던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의
지적 욕구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역사교육자이자
성경학을 전공한 그리스도인인
저자의 균형적 성경 이해 시도는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던 역사적 인물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이다.
AD 26년,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에 의해 유대 지역의 제5대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수리아 지역을 관할한 비텔리우스(Vittelius) 총독에 의해 면직되던 AD 36년까지 약 10년 간 유대에서 총독으로 있었다.
AD 26년 이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반면,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다.
복음서에 나타난 인상과는 달리 요세푸스나 필로는 그가 매우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잔인한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총독으로서의 빌라도 :
빌라도의 본군은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에는 분견대를 두었다.
당시 주둔군은 약 120명의 기병대와 2,500-3,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빌라도는 주로 가이사랴에 머물렀지만 유월절과 같이 이스라엘의 특별한 절기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며, 이때에는 병력을 보강해서 민란 방지를 위한 순찰을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총독으로서의 권한은 막강해서 사형 집행권을 비롯해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과 성전의 돈을 통제하는 한편 대제사장의 예복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절기 때만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산헤드린 공의회가 결정한 주요 재판 결과까지도 바꿀 수 있었다.
빌라도와 유대인과의 관계: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총독직을 맡으면서 황제의 상(像)이 그려진 로마 군기를 예루살렘에 세움으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그 군기는 가이사랴로 옮겨졌다.
필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관저에는 총독과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한 세트의 황금 방패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디베리우스 황제에게 진정이 들어와 그것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세워 두라고 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와 요세푸스는 빌라도가 성전 금고의 돈을 수로를 건설하는 데에 유용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복음 13:1-2은 빌라도가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의 본거지인 갈릴리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죽여, 희생자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이 성전 금고의 돈을 유용한 것으로 시위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입장과 무관하다는 입장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빌라도에 대한 헤롯의 적대감(눅 23:12)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 앞에서 재판 받도록 보낸 것(눅 13:4)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헤롯에 대한 유화 제스처임을 알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게 된 배경: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도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요 18:38)고 까지 말했다. 요한은 그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요 19:12)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다.
이는 고위층의 유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임기 중에 민란이나
큰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마 27:24-25).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에 대해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지만(마 27:24) 예수님의 재판 사건에서 사형을 언도한 그의 책임은 면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성을 증거해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었던 것으로 보아(마 27:19) 유대 지역으로 부임할 때(AD 26년) 그의 아내도 함께 왔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들이 부임지에 아내를 대동할 수 있다는 원로원의 결정이 이미 AD 21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마 27:19)이라고 불렀으며,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 대해 상관하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녀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 속에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무죄하심과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부당함을 증거해 주는 여러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기 묵시 문학에 의하면, 빌라도 아내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ula) 였으며,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도 희랍 정교회에 의해 추앙을 받고 있다.
바라바(Barabbas)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 수감되어 있었던 유명한 죄수로 폭도였으며 살인자였다(마 27:16; 눅 23:19).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할 때 군중들은 ‘바라바’라고 외쳤다(마 27:2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15).
그 후 바라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