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 열 처녀,



예수님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

기다리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등불과 기름의 참된 의미

등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사람의 육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등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이러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성경공부의 묘미라고 하겠으며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관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처럼 무조건 "믿으라!"
"덮어놓고 믿으라!"
이렇게 가르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을 펼처서 의문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바르게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첫째,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기름 / 구약 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면, 이는 보통 감람(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감람 열매를 짓눌러 으깨어서 기름이 나오면, 그것을 모아 질을 따라 분리했다.
감람 기름은 살림살이에도 쓰고 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썼다.
또한 감람 기름을 향료와 섞은 뒤에 임금 같은 사람들이나 특별한 물건들에 기름 붓는 데 썼다(기름 부음).
기름은 기쁨과 잔치를 상징한다.

기름 부음 / 기름 부음은 기름(감람 기름)을 머리와 몸에 바르거나 그 위에 붓는 식으로 했다.
이는 삶의 기쁨과 유복함을 표현하므로 상중에는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기름 부음은 종교 생활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나 사람, 곧 벧엘의 거룩한 돌(창 31:13)과 회막과 제단(출 30:26-29), 예언자(왕상 19:15-16)와 제사장(출 30:30)과 임금(삼상 10:1, 16:1, 13)에게 예언자나 제사장이 기름을 부었다.

임금에게 기름 붓는 것은 가나안과 애굽 지역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 배경은 기름을 부음으로써 군신 관계가 생겨난다는 생각에 있었던 것 같다.
곧 임금은 가장 높으신 임금이신 하나님에게서 권력을 위탁받았다는 것이다.
임금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삼상 24:7, 시 2:2).
나중에는 이 칭호가 다윗의 집안에서 나는 구원의 임금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인물을 가리키게 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히브리 말로는 '마쉬아흐'이다.(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자(4899) 마쉬아흐(mâshîyach)  מָשִׁיחַ 
1. 기름부음을 받은.  2. 삼하 1:21. 3. 단 9:25.
발음 / 마쉬아흐[ mâshîyach ]
어원 / 48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름부음을 받은(레 4:3, 삼상 24:6, 삼하 1:21, 사 45 :1), 기름 부은(삼하 19:21, 시 132:17),[명] 기름부음을 받은 자(삼상 2:10, 삼하 1:14, 대하 6:42), 기름 부음 받은 자(시 2:2,합 3:13).
구약 성경 / 38회 사용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


기름 / 기름 붓다 / 어떤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또는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기 위하여 올리브 기름을 붓거나 문지르는 것.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들이 왕위에 오를 때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리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와 구세주로 택하여 임명하신 분을 일컫는 칭호이다.
기름 부음은 어떤 때는 그 기름 부음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을 상징했다(행 10:38).
기름은 또한 병을 치유하는 데 쓰였다(막 6:13, 약 5:14)

나드 / 나도 기름  /  히말라야 지역에서 자라는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뽑아낸 물질로써 만든 향유인데 쉽게 증발한다.
그처럼 먼 나라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막 14:3-5, 요 12:2-5 나드, 아 4:14 나도, 아 1:12 나도 기름)

둘째, 등이 상징하는 것

1. 등 - 사람의 몸


2. 등 - 등불

등잔, 등불 / 주전 300년경까지 등잔은 흙 사발로 만들어 그 가장자리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튀어나온 부분을 만들어 심지를 두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튀어나온 부분은 점점 더 주둥이 모양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등잔 가운데 기름 채우는 구멍과 심지를 둘 작은 구멍을 빼고는 닫힌 꼴을 하게 되었다.
연료로는 감람 기름이나 동물의 기름을 썼는데, 한 번 채워 넣으면 2-4시간 쓸 수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흙 등잔 대신에 쇠붙이로 만든 등잔을 썼다.
회막에는 등잔을 두지 않고 특별히 정교한 모양으로 만든 금 등잔대를 두었다(출 25:31-39).

등불(5216) 니르(nîyr) נִיר 

1. 등불.  2. 항상 자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쓰임. 열왕기상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발음 / 니르[ nîyr ]
어원 / 51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출 27:20, 삼상 3:3, 삼하 22:29, 왕상 11:36, 왕하 8:19, 대하 21:7, 습 1:12), 등잔대(출 40:4, 대상 28:15), 등(민 8:2, 대하13:11, 시 132:17), 등잔(출 25:37, 민 4:9, 슥 4:2).
구약 성경 / 8회 사용


등불, 불길(3940) 랍피드(lappîyd) לַפִּיד 

1. 등불.  2. 불길
발음 / 랍피드[ lappîyd ]
어원 / ‘타오르다’는 뜻을 가진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횃불(창 15:17, 삿 7:16, 슥 12:6), 번개(출 20:18), 홰(삿 15:5), 재앙(욥 12:5).
구약 성경 / 4회 사용




셋째, 등불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상징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중 한번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때라면 다른 한 번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였습니다.
여태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늘 성령 충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이 열 처녀를 크리스천에 비유하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크리스천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어리석은 5 처녀처럼 기름이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천년왕국 때 주님께로 돌아올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다’란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과 4절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의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더라, 그러나 현명한 자는 등불과 함께 자신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3절의 ‘took no oil’이란 표현이 눈에 들어오자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있던 기름이 떨어진 줄로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듣고 넘어갔었던 구절이었는데 5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이 없었음을 발견하자 잠시 멍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성경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살피며 정독했었고 또 그 과정에서 깨달았었던 다른 것들이 합쳐지며 화학작용처럼 일어난 것이긴 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가운데 이미 ‘vessel’ 즉 그릇이 성경에선 사람의 몸을 뜻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사울에게서 도망칠 때 제사장 아히멜렉 만나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먹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 올렸다 내린 거룩한 빵 5덩이 밖에 없는데 같이 있는 자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았다면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삼상 21:5)”
여기서 소년들의 몸을 그릇으로 표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 바울에 대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바울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디모데에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땐 성경에서 그 단어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읽어보는데 그렇게 모든 구절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단어의 의미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예전에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lamp’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44구절 안에 총 50번 등장합니다.
50온전한 은혜속량자유를 뜻하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뜻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창세기 15:17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처음 나옵니다.

시편 119:105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잠언 6:23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어느 날 열 처녀의 비유를 읽다가 어리석은 5 처녀는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없었고 현명한 5 처녀는 등불과 함께 자기들의 그릇(몸)에 기름을 가져갔더라는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법(등불)이 올 것이라는 언약은 알았지만, 그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은 정작 거부해서 성령(기름)은 없게 될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어 성취하신 성령의 법(말씀) 안에 기름인 성령을 받게 될 교회를 비유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등불 자체엔 당연히 기름이 있어 불이 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등불 자체에 기름이 있지만, 말씀 즉 성령의 법(등불)만 갖고 있지 그 말씀을 마음 가운데 믿어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의 전(기름을 담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고전 3:16), 그가 가진 성경이나 언약이 구원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이 비유를 현 지역 교회에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고 말씀을 마음에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그냥 성경책만 들고 다니는 church goer(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더구나 3절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든 묘사에서 복수로 쓰이는데 4절에 지혜로운 처녀들은 5명임에도 불구하고 ‘the wise’란 단수로 표현하다가 ‘그들의 그릇들에’, ‘그들의 등불들’에서는 복수로 쓰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한 몸이요 한 영인 탓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에서 나오는 현명한 5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줄 수 없다고 9절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그릇에 담겨 있는 기름을 (몸에 임재하시는 성령) 나눠줄 방법이 없기에 너희 것을 사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로 와서 사라고 권면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7-18).”

그들은 이어지는  3:20에 보이듯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주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어리석은 5 처녀들은 11절에 다시 돌아와 지혜로운 자가 신랑과 함께 marriage(결혼)에-성경엔 wedding 즉 결혼식에 대한 비유도 나오지만, marriage 즉 결혼식을 포함한 결혼한 상태를 뜻하는 비유도 나옵니다-들어가게 되어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냥 문을 열어달라고만 하지 어디에도 기름을 사 왔더란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공중 재림) 사이에 있는 은혜의 때가 지난 후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God of Numbers : 10이란 숫자의 의미

‘10’이란 수는 어떤 것의 ‘fullness(충만, 완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엔 ‘God said’란 문구가 10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God said : 하나님이 말씀하시다’란 문구가 창조 사역 개요를 담고 있는 1장에 10번 나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 히브리어 7단어, 영어 10단어로 구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7이 하나님, 특히 영의 완전수라면 10은 충만함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모두 각각의 알파벳에 고유의 수가 정해져 있어 숫자로도 환산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처럼 말씀과 숫자를 공부하다 보면, 성경은 결코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게 확연해집니다.

‘10’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곳곳에서도 보이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각 손과 발에 5개의 손(발)가락이 있고 두 손(발)에 10개의 손(발)가락으로 완전합니다. 숫자는 0-10까지 한 세트를 이루고 10이 되었을 때 다시 1부터 돌아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끝(충만함)이 이르고 심판이 이르렀던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개의 재앙이 심판의 충만함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5계명씩 두 판에 나뉘어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10개의 휘장, 10개의 기둥, 10개의 받침(sockets)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출 26, 27장). 민수기 14장 2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를 10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10은 시험, 불순종, 반역의 충만함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 전체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은 꽉 찬 ‘10’번 나옵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사람이 쓴 성경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이 쓰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킨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출 12장), 광야에서(민 9장),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수 5장), 히스기야 때(대하 30장), 요시아 때(대하 35장),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여러 방해와 어려움 끝에 성전 짓기를 마쳤을 때(스 6장), 예수님이 12살이셨을 때(눅 2장), 4복음서에 기록된 3번의(요 2장, 요 6장, 마 26장) 다른 유월절에 대한 기록.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유월절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치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니산월 14일이 되는 유월절에 쓰일 어린양을 취하는 날은 그달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12:3).

여기서 예리한 분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베드로와 바울에 연관돼서 유월절 절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오순절’로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힐 때는 ‘무교절’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과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 핀잔을 줄 땐 ‘성만찬: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유월절’을 지켰다고 나온 기록은 4복음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10번으로 끝납니다(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왕국에 대한 것도-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든 세상의 왕국이든-그 온전함(충만함)을 나타내는데 10이란 수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창조원리이기에 세상에서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뜻할 때 ‘열국’, ‘열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왕국은 다니엘서에 10개의 발가락과(단 2장) 10개의 뿔로 표현되는데(단 7장) 요한계시록에서도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용)의 뿔 10개로 표현됩니다(계 12, 13, 17장).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총 10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마 13, 22, 25장).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록 5명만 들어갔다 해도 10명의 처녀가 나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은 1개를 찾는 여자의 10드라크마나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이 10명의 종에게 나눠주는 은 10 므나에 대한 비유도(눅15, 19장)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10가지 종류의 불의한 자들이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 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 경우엔 불의의 충만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마서 8장 38-39절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끊을 수 없는 10가지의 권세나 능력이 등장합니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거된 10개의 권세가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fullness(충만, 완전)’을 나타내는 10에 대해 적었습니다.

God of Numbers: 5란 숫자의 의미

지금까지 성경구절을 통한 ‘40’이란 수가 갖는 의미와 ‘11’의 의미만을 살펴봤었습니다. 특히 ’11’에 대한 의미는 성경 11장들을 통해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모세오경과 역사서의 11장, 예언서와 신약의 11장). 오늘은 ‘5’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숫자 ‘5’는 통상적으로 ‘은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6장 8절인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룻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룻기 2장 2절인데,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입니다. 보아스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내용에서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룻 2:10)”

은혜란 가치 없고 연약한 것들에게 베풀어지는 대가 없고 일방적인 호의나 친절입니다. ‘5’는 특별히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해결책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피로 속량하여 이끌어내셨을 때 “한 횡렬에 다섯씩-by five in a rank”(출 13:18) 이끌어냈다고 성경은 서술합니다. 영어 킹제임스를 보면 “went up harnessed”라고 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의 이차적 의미로 “by five in a rank”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영어 킹제임스는 번역된 단어나 구절 옆에 이차적 의미를 적어놓을 때가 있는데 이 이차적 의미는 도리어 직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성경 버전마다 약간 다른데 ‘무장하고 나올 때에’ 혹은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로 번역됐습니다. 어차피 ‘한 횡렬에 다섯씩’이란 의미는 전쟁하러 나가는 군대 행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성인 남성만 60만 명이었는데 그 많은 무리를 한 행렬에 다섯씩 구성했을 리는 없고 ‘행렬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란 의미일 거라고 합니다. 어찌 됐거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내보내실 때 ‘by five’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0년 후(4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여호수아 1장 14절을 영어 킹제임스로 보면 이차적 의미로 ‘marshalled by five’, 즉 ‘다섯으로 정렬하여’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도 ‘무장하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첫 5개의 책은 ‘모세 5경’으로 불리는 성경의 기초로서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의의 필요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성막과 중요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엔 번제헌물, 음식헌물(소제), 화평헌물(화목제), 죄헌물, 범법헌물(속건제), 이렇게 5가지의 헌물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헌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사역을 예표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거룩한 관유(the holy anointing oil)’엔 5가지의 재료가 들어갑니다. 바로 몰약(500 세겔), 육계(250 세겔), 창포(250 세겔), 계피(500 세겔), 감람유(1 힌)인데, 만드는데 필요한 양도 5의 배수입니다. 거룩한 관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한없는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막의 구조와 건축 또한 5의 배수가 곳곳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은혜로만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뜰은 100큐빗에 50큐빗입니다. 성막뜰의 기둥들은 사면으로 20개, 20개, 10개, 10개, 모두 60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5 x 12, 즉 은혜의 통치를 의미합니다(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기둥들은 각각 5큐빗씩 떨어져 있었으며 높이도 5큐빗이었기에 성막뜰을 에워싸는 성막 천은 5 X 5, 즉 25큐빗의 넓이로 나뉘어 있었던 게 됩니다(출 27:9-19 참조). 여기에 번제단도 5 x 5였고 성소의 규격도 10 x 30였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 나오는 성소의 휘장을 보더라도 휘장 10장을 5장과 5장으로 나눠 묶되 한 세트당 50개의 고리를 만들라고 합니다(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2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경우 주셨던 약속으로 “너희 다섯이 백을 쫓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 5개의 물맷돌을 취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에 주실 회복의 은혜를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 다음과 같은 다섯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렘 33:11)” 이번에 글을 쓰면서 보니까 한국어 성경엔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이 구절에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탓에 ‘소리’가 6개가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과 원어로 찾아보시면 5개의 ‘소리’만 나옵니다. “The voice of joy, and the voice of gladness, the voice of the bridegroom, and the voice of the bride, the voice of them that shall say, Praise the LORD of hosts: for the LORD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and of them that shall bring the sacrifice of praise into the house of the LORD.”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인류의 구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리게 될 5가지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다니엘 2장엔 지금 있고 앞으로 올 5 왕국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5번째 왕국은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산에서 나온 손대지 않은 한 돌의 왕국, 즉 반석이신 예수님의 메시아 왕국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5개의 행각이 있었고(요 5:2),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10 처녀 중 5명은 지혜로웠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엔 5명의 여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라합, 룻, 다말, 밧세바, 마리아). 예수님은 떡 5덩어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2절에서 5 지역에 흩어져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혜로 부르신 5가지의 직분을 열거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God of Numbers: 50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은혜의 수 ‘5’에 이어서 은혜의 완전 수 ‘50’이 갖는 성령의 법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그전에 지난번 글에 대해 들어온 코멘트를 잠깐 소개하자면, 숫자 ‘5’가 죽음의 수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5’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고 죽었다’란 표현이 네 군데 나오기 때문입니다(삼하 2:23, 삼하 3:27, 삼하 4:6, 삼하 20:10). 모두 전쟁이나 다툼 중에 죽은 것으로 아사헬이 에브넬의 창끝에 맞아 죽으면서, 에브넬이 아사헬에 대한 복수로 요압에게 찔려 죽으면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바아나와 레갑에게 암살당하면서, 아마사가 요압에게 살해되면서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이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히브리 원어 ‘hahomes’는 킹제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배’로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킹제임스가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이 히브리 단어는 실질적인 히브리 단어 ‘5’와 관련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히브리/영어 사전인 ‘스트롱 사전’도 ‘hahomes’를 ‘chomesh’란 어원과 연결해 ‘배’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 ‘chomesh’란 어원에 대해 읽어보면 더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하며 오직 위 4구절에만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에서 인간의 ‘배’를 뜻하는 히브리 어원은 ‘chomesh’가 아닌 ‘beten’입니다. 이 점이 이상해서 ‘5’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를 찾아보자 의문이 금방 풀렸습니다. 5의 어원은 ‘chamesh’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배의 어원’이라는 ‘chomesh’와 모음 한 자 빼고 같습니다. 어차피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읽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맞다고 생각되는 모음을 넣어 이해해야 하는 언어이기에 ‘ch-m-sh’와 같은 자음들 사이에 어떤 모음을 넣느냐에  따라 다른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5(chamesh)’가 쓰인 구절들을 찾아보면 ‘hames’란 파생어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킹제임스가 성경이 4번 밖에 나오지 않는 ‘hahomes’를 ‘다섯-hames’과 연관 지어 번역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찌 되었든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은 결국 배나 옆구리 쪽을 찔렸다는 것이긴 합니다.

‘다섯 번째 갈비뼈’란 번역이 더 납득이 가지만 ‘5’란 숫자가 죽음보다는 은혜를 뜻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7’이란 수가 하나님의 완전수, 성령의 수, 교회의 수 등으로 대부분 등장하지만 ‘7 악령’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몰아낸 7 귀신, 사람에게서 나갔던 악령이 자기보다 더 악한 7 악령을 데려와 그 사람의 형편이 더욱 나빠졌다는 예수님의 비유 내용 등등). 그렇다고 ‘7’이란 수를 마귀의 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5’란 수 역시 성경 전체를 훑어보면 은혜의 수요, 언약과 예배의 수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실 때도 5가지의 짐승(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을 가져오게 하십니다(창 15:9). 이처럼 그 수에 대한 바로 된 의미를 알 때 성경에 4번 등장하는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아 죽었다’란 의미가 도리어 확연해집니다(세상 및 창조물을 의미하는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갈비뼈는 몸의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나 방패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 밑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갈비뼈를 비껴가 급소를(장기) 찔렸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빗나가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임한 것이 은혜입니다. 열 처녀 중 다섯은 성령의 은혜로 결혼식에 참석해 영생을 얻었고 다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영적 의미와 조명은 여길 눌러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0은 어떤 것의 ‘fullness’를 의미하는 완전수입니다(충만을 의미하는 10은 여길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은혜의 수 ‘5’를 곱하게 되면 온전한 은혜, 즉 속량 및 자유를 상징하는 50이 됩니다. 성령은 주님이 부활하신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은혜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 해인 50년째는 희년으로, 모든 빚이 탕감되고 포로된 자가 풀려나며 뺏겼던 땅을 되찾게 되는 구원과 자유와 회복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에스더 여왕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하만이 50 큐빗 교수대에 달려 죽는 장면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만은 모르드게를 거기에 매달고 이스라엘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구원으로 이스라엘은 오히려 원수를 갚고 하만과 10 아들은 죽습니다(에 5:14; 7:9).

성경 전체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등불에 대한 좀더 자세한 해석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4장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고 나오는데 이 ‘켜진 등불’ 즉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단어가 전체 성경에 50번 등장한다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복된 상태’, 즉 ‘복’을 뜻하는 ‘makarios(마카리오스)’란 단어도 신약에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큐빗, 넓이가 50큐빗, 높이가 30큐빗이었습니다(창 6: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은혜를 구할 때 ‘50명’의 의인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엔 거기서 ‘5’명이 부족한 ‘45’명이래도 멸하시겠냐고 한 후, 40, 30, 20, 10까지 내려갑니다. 그렇게 단 10명의 의인이라도 발견된다면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이 경우엔 은혜를 입을 의인의 완전수가 됩니다(창 18장).

이전 글에서도 적었듯이 모세의 성막 뜰은 길이 100큐빗에 넓이 50큐빗입니다. 50과 50의 배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막 휘장을 걸 50개의 고리(loops)와 50개의 갈고리(taches)가 나옵니다(출 36:17-18). 이것은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발견되는 진리인데, 에스겔 40장, 42장, 45장을 보게 되면 5와 50의 배수가 성전과 성소의 치수로 곳곳에서 발견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값으로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릴 때 가장 높은 액수로 책정된 것이 50세겔이었는데, 성인 남성의 20-60살까지 여기 해당합니다(레 27:3).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인 밭의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할 때도 보리 한 호멜지기를 은 50 세겔로 계산하라고 나옵니다(레 27:16). 레위인들의 직무는 평생이지만 성막에서의 시무는 30세에서 50세까지였습니다(민 4장). 아합왕 때 이사벨은 주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되는데 이때 오바댜는 100명의 선지자를 숨겨주고 먹일 때 50명씩(by fifty) 숨겨줬습니다(왕상 18). 누가복음 7장 41-42절에서 예수님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5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란 질문을 하십니다.

이상 50에 대해 다뤘습니다.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God of Numbers: 8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새로운 시작, 거듭남, 혹은 새 창조를 뜻하는 8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성령)의 완전수인 7에서 1을 더한 8은 재생, 혹은 부활을 뜻하기도 합니다. 일주일은 7일이기에 8번째 날은 새로운 첫날이 됩니다. 음계도 8번째 음은 첫 음과 같습니다.

33이란 숫자의 의미’에 적었듯이 ‘언약’이란 단어는 방주로 들어가는 노아와 연결되어 창세기 6장에 처음 나오며(창 6:18), 이전 세상은 물로 모두 멸망하고 노아와 그 자손들로 새롭게 시작하는 9장엔 7번 언급되어 총 8번 쓰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축복을 다시 노아와 3아들에게 주신 부분이니 재생의 의미와 맞습니다. 또한 다시는 물로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새로운 언약을 “언약”이 8번째로 나오는 9장에 주셨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은 사람이 쓸 수 없는 책임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물에 쓸려 가버린 옛 세상 가운데서 방주로 들어가 구원된 사람들도 8명이며(벧전 3:20), 새 세상으로 나온 노아를 성경은 ‘8번째 사람’으로 칭합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 번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KJV-밷후 2:5).” 즉, 창세기 때의 새 세상은 8명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8번째로 나오는 창 6장 9절의 후반부는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and Noah walked with God-KJV)”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이삭이 8일째 됐을 때 할례를 줍니다(창 21:4). 구약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예표하며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리는 것(골 2:11)’으로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는 것(엡 4: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자인 것입니다(빌 3:3).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직을 위해 7일 동안 거룩히 구분했으며(레 8:33) 8일째 되는 날 시무했습니다(레 9:1). 장막절은 7일 동안 진행됐으며 8일째 되는 날엔 거룩한 집회가 있었습니다(레 23:36).

모세의 진영에서 성막은 8개 진영에 의해 2중으로 보호되고 있었습니다(증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바깥쪽엔 3지파씩 묶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뉘어 진을 쳤습니다(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쪽엔 성막을 중심으로 레위인들(고핫, 게르손, 므라리) 3진영이 서남북 방향에, 그리고 모세와 제사장들(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동쪽으로 진을 칩니다(민 2-3장).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은 진영의 가장 중심부에, 8진영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렇게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진영의 모습은 십자가의 모형이기도 하며 거듭난 자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고(삼상 16:10-11; 17:12), 솔로몬은 새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께 ‘하늘에서 들으시고’란 표현을 8번에 걸쳐 쓰며 간구합니다(왕상 8장과 대하 6장에서). 또한 재림하신 예수님의 천년왕국 때 있을 에스겔의 성전은 바깥 뜰에서 안쪽 문간으로 올라가는 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겔 40:31, 34, 37). 그리고 땅에서의 천년 통치가 끝날 무렵,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단이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게 되고(계 20:7-10)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며 하늘과 땅도 사라지게 됩니다(계20:11-14). 그 후 사망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영원토록 임하는데(계21:1-4), 이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새 예루살렘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계 21:22).

신약, 즉 새로운 언약은 총 8명의 기자에 의해 쓰였습니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유다 바울).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눅 9:27)”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8일)쯤 되어(눅 9:28)”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 ‘transfiguration(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장차 올 왕국(나라)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주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 새로운 출생(다시 태어남)에 대해 나누시는 부분엔 ‘born(태어남)’이란 단어가 8번 등장하며(요 3:1-8),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물(water)’이 8번, 우물이(well) 5번(은혜를 뜻하는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등장합니다(요 4:4-15).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8일째 되는 날, 즉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첫날’ 즉 8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목격하지 못한 도마에게 ‘8일 후에(요 20:26)’ 나타나셔서 의심을 새 생명에 이르는 믿음으로 바꿔주십니다. 골로세서 3장 12절에서 14절엔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갖춰야 할 7개의 덕목이 열거되는데(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이 모든 것 위에 온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을 더하여 8개가 됩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다음 8단계로(6개로 가득하고 2개가 없는) 설명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그리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은 킹제임스 영어성경으로 찾아보면 신약에 총 8번 등장합니다.

이상이 새로운 시작, 거듭남, 새 창조, 재생 및 부활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상고입니다.

God of Numbers:2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나눔(분리), 또는 증인(증언, 확증)’을 의미하는 숫자 2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서 2를 만든 경우엔 ‘나눔, 분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에 같은 하나가 덧붙여진 경우엔 오히려 ‘확증, 증인(증언)’을 의미하기에 숫자 2는 그 뜻조차도 이중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 1:6-8). 같은 물이었지만 하늘 위, 하늘 아래 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물이 창조 때 나뉘었다면 땅이 나뉜 시기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הָאָ֔רֶץ(하아레스)’로 ‘땅, 지구’란 의미이며 창세기 1장부터 구약에 총 93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10장에서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던 시기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던 일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뉘었지만 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2가 갖는 ‘나뉨과 증언’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떤 일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을 악용한 악인들은 두 가짜 증인들을 내세워 의인이었던 나봇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신 17:6, 19:15; 왕상 21:10, 13; 마 18:16, 26:60;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계 11:3).

성경은 두 인물이나 사건을 대조해서 선과 악,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룻과 오르바, 한나와 브닌나,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유다와 북이스라엘, 나봇과 아합,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두 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굽을 심판하실 때 에굽 땅과 고센 땅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분리)하셨습니다(출 8:23). 롯 역시 두 천사에 의해 소돔에서 분리됩니다(창 19장).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을 입습니다(엡 4:22-25).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2가 갖는 나뉨의 의미를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마 7:13-14).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7:17-18).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의 집과 어리석은 자가 지은 모래 위의 집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마 7:24-27). 또한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안가고, 안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는 두 아들(마 21:28-31).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집 밖에 있는 맏이에 대한 비유도 그러합니다(눅 15:11). 예수님은 또한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한쪽을 미워하고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한쪽을 경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4:40-41).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은 육체를 따라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약속을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로 나뉩니다(갈 4:22-26).

성경엔 두 종류의 부활도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어떤 부활에 속하냐에 따라 두 개의 다른 심판석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은 상급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지만(고전 3:10-15; 고후 5:10), 나머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석 앞에 나타납니다(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두 번의 죽음을 겪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히 9:27)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수치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단 12:2)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20:14-15). 그러나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을(단 12:2)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계 20:6).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6).

요셉의 때에 바로가 꿨던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나타내는 두 번의 꿈도 이런 2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꿈의 내용은 7년 흉년과 7년 풍년으로 나뉘어 있는 동시에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꾼 것은 그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창 41:32)”이란 의미로 겹쳐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명의 인물이나 사건을 덧붙이는 것을 통해 성경은 악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증인을 세웁니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완연했던 악을 증거합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경배하러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단과 벧엘에 세운 두 마리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우상숭배를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의 증인은 나답과 아비후, 발락과 발람, 아합과 이세벨, 빌라도와 헤롯,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 증인들은, 엘닷과 메닷(민 11:26),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두 번 정탐꾼을 보냅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기에 12명을 보내지만 이들 중 2명만(갈렙과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게 되는 말기에는 아예 2명만(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은 비느하스와 갈렙이었습니다) 보내는데 이들은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과 크신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 안나와 시몬, 바울과 바나바,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증인들로 짝을 지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에 패역한 세대였던 바리세인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부터 왔던 남방의 여왕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입니다(마12:41-42).

예수님의 12제자 중 선두그룹에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형제로 짝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선포하려고 내보내셨을 때에도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누가복음 10장).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보냈던 동물들이 둘씩 짝지어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악한 세대의 멸망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리란 약속도 주십니다(마 18:19).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었습니다(눅 9:30-31).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도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란 증언을 줍니다(행 1:10-11).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2 증인이 나옵니다(계 11장).

성막을 제조할 때 주요 성분이었던 금과 조각목은(출 25-27) 예수님의 신성(금)과 인성(조각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도 증언을 뜻하는 두 개의 돌판에 주셨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긍휼의 자리)와 순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양쪽 끝에 있던 두 그룹도 언약의 증인입니다(출 25:18-20). 레위기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하나는 속죄헌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레 5:7).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몸에 일곱 번 뿌린 후 들에 놓아줍니다(14:4-7). 또한 속죄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해 제비를 뽑습니다(레위기 16장). 여호와를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의 것으로 뽑힌 염소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전가한 후 아사셀의 것으로 광야에 놓아줍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날인 오순절에 올리는 ‘고운 밀가루에 누룩 넣은 빵 두 덩이(레 23:17)’도 2가 갖는 이중적인 의미에 충실합니다. 유일하게 누룩 넣은 빵을 올릴 수 있는 풍요와 감사를 상징하는 오순절의 빵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지만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합작이며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동역으로 지어집니다(왕상 5:18). 솔로몬이 성전 입구에 세웠던 두 놋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란 뜻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인데, 이 두 기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예표합니다.

4 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마태복음엔 이런 두 증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명의 귀신 들린 자들(마 8:28)과 두 명의 장님들(마 9:27, 20:30)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불신에 눈 멀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2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또한 성경은 구약을 ‘율법자와 선지자’ 둘로 함축해 일컫기도 합니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행 13:15, 24:14, 28:23; 롬 3:21). 성경엔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을 약 7년 전쯤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받은 조명과 깨달음은 ‘이름을 두 번 부르심’이란 글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이신 ‘성자’ 예수님은 특별히 숫자 2의 특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두 가지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증언 및 증인에 대한 특징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땅에서 난 첫째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시며(고전 15:4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계 3:14). 예수님이 두 번 반복해서 쓰셨던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을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찾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자신이 은혜의 법, 즉 성령의 법(5*5)의 증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증오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선상에서 쏟아내신 ‘물과 피’로 ‘속죄와 정결’의 온전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분하셨습니다(겔 16:4; 엡 5:26; 히10:22).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던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 중엔 ‘paroxusmos(파록수스모스)’와 ‘hekousiós(헤쿠시오스)’가 있는데 ‘분리와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맞게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등장합니다. 이런 걸 발견할 때마다 성경의 위대함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원어 연구 2탄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od of Numbers:3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부활, 영적 완전함, 혹은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수 3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3은 7과 함께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4개의(3, 7, 10, 12) 완전수 중 가장 첫 번째 숫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적인 3분이시며 한 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그분께만 있는 3가지 특성이 있는데, ‘전능’, ‘전지’, ‘무소 부재(편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걸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모든 걸 아시며, 또 모든 곳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빚어진 우리도 영과 혼과 육, 3부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영혼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각, 말, 행동이란 3가지 영역으로 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도 삼차원인데,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숫자가 3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도 3가지 특성이 있는데, 햇빛은 ‘빨강, 초록, 파랑’의 원색이며, “빛, 에너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도 ‘동물, 식물, 광물’로 나뉘며 물체는 ‘고체, 액체, 기체’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며 완성되는데, 주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과거) 이제도 계시고(현재) 장차 오실 이(미래)”시기에(계1:8, 4:8) 영원히 계십니다.

3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숫자 중 하나이며 따라서 자주 등장하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이 가져왔던 3가지 산물인 포도와 무화과, 그리고 석류(민 13:23)는 하나님 약속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3개월간 모세를 숨겨 키우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후 3개월간 침례 요한의 엄마인 엘리사벳과 지내다 돌아옵니다. 신명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3가지 직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들 가운데서 택하사 일으키실 왕(신 17:15), 제사장(신18:3-5), 그리고 선지자(신18:15)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도피성을 둘 것을 명령하시는데,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동쪽 땅에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지정했고(신 4:41-4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을 3구역으로 나눠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두라고 명령했습니다(신19:2-3).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너희의 지경을 넓혀 말씀하신 땅을 다 주실 경우, 3개의 도피성을 더 구별하라고(신19:8-9) 했기에, 도피성의 수는 최대 9개(3+3+3, 3X3)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3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 6:10), 3번의 7일(21일)을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단 10:2).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스랍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3번에 걸쳐 찬양하고 요한계시록에서 4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3번 외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주 하나님께 올립니다(계 4:8-9).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금, 몰약, 유향’ 3가지의 선물을 받으셨으며, 12살이 되셨을 때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3일간 잃어버리지만, 성전에서 다시 찾습니다(눅 2:46).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 시험받으실 때도 3단계로 받으셨는데, 돌을 떡으로 만들라, 성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절하고 세상 왕국들을 받으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3번에 걸쳐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첫 번째는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였고(마 3:17; 막 1:11; 눅 3:22), 두 번째는 변화산에서 3명의 제자 앞에서 변용하셨을 때였고(마 17:15; 막 9:7; 눅 9:35), 세 번째는 십자가 선상에서였습니다(요 12:28). 그런데 이런 기록이 성경에 총 7번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3과 7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번번이 발견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7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7절기는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초막절)’인데 크게는 ‘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장막절(초막절)’ 3절기로 묶기도 합니다. 봄절기인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이 무교절을 지키는 일주일 안팎으로 오기 때문이고, 가을절기인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 대략 3주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여호와를 뵈러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올라올 것을 명령하십니다(출 23:14-17; 신 16:16).

창조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물 위로 올라오게(드러나게) 하시는데(창 1:9),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죽음에서 3명의 사람을 부활시키신(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요 14:6). 예수님은 표적을 찾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즉,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영어로는 3 days and 3 nights:낮 세 번과 밤 세 번) 땅속에 있을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 기도하신 후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받으셨고 제3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막 15:25) 온 땅에 총 3시간의(제6시에서 9시까지) 어둠이 임합니다(막 15:33-34).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3개의 언어로(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칭이 적혔었는데, 이는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나라, 백성, 방언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요 19:20). 예수님 좌우에 2명의 죄인이 십자가에 박혔었기에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가 있었고(요 19:18), 주님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4). 이런 주님에 대해 땅에서 증거하는 3가지는 “영과 물과 피”이며(요일 5:8) 주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3번에 걸쳐 기도하십니다(요 17:11-23).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3가지 덕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어떤 것의 ‘완성, 성취, 완벽, 완전’을 의미하는 3의 역할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인간의 연약함과 허황함을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것으로 성취했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3번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회복시키십니다. 3년 동안 열매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셨고(눅 13:7)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3번 보여주는 것으로 이방인 구원을 향한 완벽한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죄의 유혹과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3단계로 오며 멸망은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유 1:11)’ 3길을 따라 완성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삼위일체를 흉내내어 용, 짐승, 거짓 선지자로 등장합니다(계 13장). 요한계시록에는 다섯 번째 나팔에서 시작해서 일곱 번째 나팔로 마치는 3개의 화가 나오는데(계8:13; 9:12; 11:14), 이 3구절에 ‘화’란 단어가 7번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 유황” 3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습니다(계9:15-18). 또한 개구리 같은 3 더러운 영이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계16:13-14). 이에 맞춰 하나님의 3천사도 3가지 촉구와 경고를 합니다(계14:6-16). 첫 번째 천사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며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바벨론은 “사망, 애통함, 흉년” 3가지의 재앙으로 멸망하는데(계18:8) 다니엘서에서는 ‘세고(메네), 달아보고(데겔), 나뉘어(베레스)’ 멸망당합니다(단 5:26-28). 요한계시록 18장 9절에서 17절까지 바벨론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3부류의 사람들(땅의 왕들, 땅의 상인들, 바다의 선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6으로(숫자 6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눠 적혀있습니다(9절:왕들, 11절:상인들, 17절: 모든 선장, 선객들, 선원들,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3은 거룩하게 분리된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노아와 3 아들(창 6:10), 욥의 3 딸(욥 1:2, 42:13)과 3 친구(욥 2:11)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게 욥에겐 7 아들이 있었기에 자녀가 총 10이 됩니다(충만을 뜻하는 완전수 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욥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완전수 3, 7, 10이 자녀의 수에도 다 들어가 있어 얼마나 충만한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람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마 22:32). 이스라엘은 세상(에굽)과 거룩히 구분되기 위해 광야로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예배) 드립니다(출 5:3). 하나님은 사무엘을 3번에 걸쳐 부르시는(삼상 3:8) 것으로 그를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느부가넷살 왕에 의해 7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에 던져진 3 사람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단 3:19, 23). 에스겔서에 나오는 3명의 의인은 노아, 다니엘, 욥(겔 14:14)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벗)’로 3번(대하 20:7; 사 41:8; 약 2:23)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의 삶에도 3이란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이했던 3명의 손님(창 18:2), 그들을 섬기기 위해 사라가 준비한 3스아의 고운 가루(창 18:6),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산까지 갔던 3일의 길이 그렇습니다(창 22:3).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을 때 준비한 5가지의 헌물은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였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헌물이 5와 3의 숫자로 이뤄졌듯이, 모세의 성막은 숫자 5와 깊은 연관이 있었고 성전은 숫자 3입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성전 모두 ‘지성소, 성소, 성막뜰’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3층의 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왕상 6:6), 에스겔의 성전은 3면이 30개의 3층 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겔 41:5-6). 노아의 방주도 3층이었으며(창 6:16) 사도 바울은 삼천층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봤습니다(고후 12:1-2). 솔로몬의 성전에서 놋을 부어 만든 바다는 둘레가 30 규빗이었고 12마리의 소가 받치고 있었는데 북서남동으로 3마리씩 놓여있었습니다(왕상 7:23, 25).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인데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어 총 12문이 있습니다(계21:13).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3명의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납니다(왕상 17:9-24).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3번 펴서 엎드려 살려냅니다. 3은 부활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에녹처럼 하늘로 옮기시는데, 그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혹시 땅 어딘가에 그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 3일을 찾은 후에 포기합니다(왕하 2:17). 두 번째는 엘리사에 의해 수넴 여인의 아이가 살아납니다. 이때 엘리사는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아이의 눈에 자기 눈을, 그리고 아이의 손에 자기 손을 얹고 아이 몸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3단계를 걸쳐 살아난 아이는 7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뜹니다.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왕하 4:34-35). 세 번째는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해서 일어났던 경우입니다(왕하 13:21).

이렇게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3번,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3번 일어나는데, 제7번째 부활인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완전한 부활’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 영원히 살게 하는 능력의 부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성경에 3번(행 11:26, 26:28; 벧전 4:16) 나오며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3일 반 만에 부활합니다(계 11:11). 그리고 신약은 3의 3배수(3X3X3)인 27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God of Numbers: 4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세상, 창조물을 의미하는 숫자 4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창조 4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4가지를 위해(징조, 계절, 날, 해)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띄우시는 것으로 하늘 단장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땅 위로는 4개의 강줄기가 동서남북 4방향으로 흐르도록 하십니다(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따라서 4란 수는 세상 창조와 그 안의 창조물을 뜻합니다.

예언서(에스겔, 요한계시록)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영적 생물이 나오는데 그들은 사자, 소,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창조물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사자가 맹수라면(길들여지지 않은 동물들) 소는 가축(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들), 사람, 그리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이 이 4개의 영적 생물로 압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70퍼센트가 물, 즉 바다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그룹 중에 바다를 대표하는 생물이 빠져있습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용 또는 옛 뱀으로 불리는 사단(계20:2)이 바다의 생물과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파충류를 대표했었습니다. ‘사단 장’으로 불리는 에스겔 28장에 보면 9개의 보석으로 치장하고 불탄 돌들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성산과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나옵니다. 이 그룹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많은 무역(물품)으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법과 횡포를 행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침받았다고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에스겔 28장 16절에 ‘무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맞게 번역된 건지 알고 싶어 원어로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흥미롭게도 ‘무역, 또는 물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רְכֻלָּה(뤠쿨라오)’는 구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에스겔에서 나왔고 모두 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겔 26:12; 28:5, 16, 18). 에스겔 26장은 두로란 나라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28장은 사단에 빗댄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만 쓰인 ‘무역, 물품’이란 단어가 세상을 뜻하는 4번 등장한다는 게 성경의 묘미입니다. 이런 신기함이 성경 연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앞으로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수의 강만 있지 바다가 없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계21:1; 22:1). 성경은 이런 사단을 4개의 명칭으로(용, 옛 뱀, 마귀, 사단) 부릅니다(계20:2).

어찌됐거나 이 그룹은 ‘덮는(סָכַךְ:소콱) 그룹’이었기에 4개의 그룹들 위를 덮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룹들 중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였기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세상 창조물을 대표하는 그룹은 4가 아닌 5가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5란 숫자로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잘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였겠지만(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하며 하늘의 질서를 깼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며 땅의 질서마저 깨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질서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회복시키시고 화평케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앉아계십니다(히 10:12). 이런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한 조명을 쓴 글은 여길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4란 숫자는 2로 나눌 수 있는 첫 숫자이기에 둘로 분리되어 이중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4가 뜻하는 ‘세상’이란 단어가 그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구원의 대상인 창조물들과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요 3:16)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통치하는 죄악 된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요일 2:15-17).

타락 이후 모든 창조물이 함께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는(롬 8:19-22)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4 복음서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적시며 흐르던 4개의 강줄기가 모든 창조물에게 물을 공급했듯이, 성경엔 모든 창조물을 구원해줄 생명수가 4 복음서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4 복음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그룹에도 비유되는데 마태는 사자(왕), 마가는 소(종), 누가는 사람(인자), 요한은 독수리(하나님)입니다(이런 4 복음서에 대한 비교는 여길 누르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4 단계로(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행 1:8).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성경엔 총 4개의 가지(branch)가 나옵니다. ‘한 의로운 가지(a righteous Branch 렘 23:5)’, ‘그 종 가지(servant the Branch 슥 3:8)’, ‘그 가지(The Branch 슥 6:12)’, 그리고 ‘여호와의 가지(branch of the LORD 사 4:2)’입니다. 이 4개의 가지들도 순서대로 마태(왕), 마가(종), 누가(사람), 그리고 요한(하나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총 4번의 꿈으로 주의 사자로부터 지시받는 기록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데려오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마 1:20-21). 두 번째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니 에굽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마 2:13). 세 번째는 이제 안전하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마 2:19-20). 네 번째는 갈릴리 지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마 2:22).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예수님의 겉옷을 4명의 군인이 4개로 나누어 가집니다(요 19:23).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4개의 증거와(표적들, 기사들, 여러가지 능력, 성령의 은사) 함께 증언하셨습니다(히 2:4). 주님은 자신이 재림하실 수 있는 시각을 4개의 시간대로(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나눠 말씀하십니다(막 13:35).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을 차례대로 통치할 4개의 세상 왕국이 나옵니다(단 2:31-36). 이 왕국들은 하늘의 4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바다에서 나오게 된 큰 4개의 짐승에(사자, 곰, 표범, 열 뿔이 달린 짐승) 비유되기도 합니다(단 7장). 다니엘서에는 또한 4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첫 번째 왕인 느부갓네살(단 1-4장), 마지막 왕인 벨사살(단 5장), 메대 왕인 다리오(단 5장, 6장), 바사 왕인 고레스(단 6장, 10장)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된 밭은 4종류의 마음 상태에 비유되면서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길 가, 돌밭, 기시떨기, 좋은 땅). 또한 마지막 때에 4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에 불어 해하지 못하도록 땅 4 모퉁이에 서서 땅 4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계7:1). 그리고 성경은 세상을 심판할 4개의 재앙(전쟁, 기근, 역병, 지진)을 주로 언급합니다(마 24장, 계 6장). 마태복음 24장 7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니까 역병이 빠져 있길래 원본과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어떤 헬라어 원본을 보느냐에 따라 4가지 재앙이 다 나온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영어 킹제임스에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에 역시 4가지의 중한 벌을(칼, 기근, 사나운 짐승, 역병)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겔 14:21).

천지창조를 담고 있는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물(creature)’이란 단어가 4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민족과 나라가 나눠지고 세워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나눠지게 된 4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야벳은 땅(영토), 언어, 종족, 민족(창 10:5)으로 나뉘었고 함과 셈은 각각 족속, 언어, 지방, 나라(창 10:20, 31)로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세상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4개의 단어로(족속, 방언, 백성, 나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단어가 모두 쓰인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만 딱 4번 등장한다는 것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계5:9, 7:9, 11:9, 14:6).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에서도 4개의 장소에 있는(하늘, 땅 위, 땅 아래, 바다)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4개의 단어로(찬송, 존귀, 영광, 권능) 높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덮고 있던 천은 4겹이었는데, 맨 밑은 성막천, 그 위는 염소털, 그 다음은 수양가죽, 그리고 맨 바깥쪽은 해달가죽이었습니다(출 26장). 맨 안쪽에 있던 성막천은 4가지 색실로 수놓은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흰 베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의 큐빅 모양입니다(계21:16).

욥기에는 욥 외에 4 사람이 등장해서 설전하는데 욥의 3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여인이 등장하며(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하와란 이름은 성경 전체에 4번 등장합니다(창 3:20, 4:1; 딤 2:13; 고후 11:3). 시편 107편은 성경에서 같은 구절이 유일하게 4번 나오는 권입니다(107:8, 15, 21, 31). 잠언에는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이(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 나옵니다(잠 30:24-28). 무지개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구약에 2번, 신약에 2번 등장합니다(창 9; 겔1:28; 계4:3, 10:1). 스가랴서에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4개의 뿔과 그 뿔들을 떨어뜨릴 4명의 목수가 나옵니다(슥 1:18-21). 또한 4병거와 4가지 색의 4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늘의 4바람으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슥 6:1-5).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4가지의 육체를 얘기하는데 사람, 짐승, 새, 물고기입니다(고전 15:39).

4는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개념으로도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동서남북 4방향, 4대 원소 (흙 물 불 공기),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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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에(*,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4:17;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등(람파스)

2985. 람파스(
lampas)  λαμπάς, άδος, ἡ 

1. 횃불
2. 등
발음 [ lampas ]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 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눅 15:8;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 '졸며'라는 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 밤중에(*,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요 14:16).

󰃨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οἷδα)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성경문답] 등불 기름을 나눠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을까요?


[질문]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세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열 처녀 비유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할 때 나누어 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열 처녀 모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답변]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당신만의 특유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의 특성과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그 해석법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답변한 내용이 객관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질문자께서도 스스로 점검하실 수 있고 또 추가적인 의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비유와 수수께끼 

비유란 화자(話者)가 어떤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빗대어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주로 직유, 은유, 속담, 설화 같은 문학적 수식법을 동원합니다. 

비유에 대비해 수수께끼는 그 이야기와 표현법이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사기 9:1-21에는 세겜의 시민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자 이 소식을 들은 요담은 '숲속 나무'의 수수께끼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숲속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순서대로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청하니 가시나무는 자기의 권세에 나무들이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동의했습니다.
요담은 세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가장 못한 사람을 왕으로 뽑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나무들은 이야기 속의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예를 들어 누룩의 비유(마 13:33)에서처럼 떡을 만드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유의 대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고 항상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수수께끼는 듣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의 범위 이상으로 해석을 확대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비유의 주제와 큰 줄기만 붙들어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지엽적인 내용과 세밀한 표현에까지 억매여선 안 됩니다.   

2.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뜻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비유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이까?"(마13:10)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5)고 대답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씀의 권위를 받아 들이는 자와 전혀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자로 확연하게 둘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려고 비유 속에 비밀장치를 했거나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으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유의 주제를 한 마디로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비유의 주제가 단순히 도덕적 계명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또 말씀하신 당사자의 권위도 당연히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대신에 마음이 순수하고 가난한 자는 구태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약성경을 꿰 뚫고 있었으며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던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도덕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더러 외식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주님의 지적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가운데 숨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번도 헛되고 그른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주님을 자칭 도덕 군자들이 앞장 서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교만한 그들로선 비유의 주제인 천국을 못알아 듣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예수님 당신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진리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만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는 오늘 날의 독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자라면 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비유는 지금도 여전히 비유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만 열어 놓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이 종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주님의 통치는 마지막 때까지 연기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뜻 그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관한 비밀이 열릴 것이지만 완악한 자에게는 감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기 싫어서나 소수의 사람만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원하며 또 그 동안 심판이 취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라도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3.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 

비유가 갖는 문학 기법상의 특성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뜻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객관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표현에 천국에 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배경은 항상 메시야의 구원과 더불어 새롭게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말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현실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해석이나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거의 모든 비유가 사전에 어떤 질문에 대답하거나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피고 제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석이 그런 질문과 상황에 벗어난 것이라면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해석이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비유에 동원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알아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에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비유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보편적인 상황과 실제로 가능한 사건을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낡은 술 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에선 당시의 포도주 저장하는 법을 모르면 정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4. 열 처녀 비유의 해석  

위에서 말한 비유 해석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이 열 처녀 비유를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기 쉽게 먼저 당시 문화적 관습부터 살피고 다음에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찾고 마지막으로 천국이라는 주제에 대비해 그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4.1.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결혼 예식은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먼저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종교적 예식에 따른 결혼식을 치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노는 혼인잔치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에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나가 그들을 마중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를 데려 오는 신랑 일행을 저녁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기다렸다가 혼인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등이 횃불인지 호롱불인지 불명하지만 어쨌든 둘 다 기름을 담거나 적시는 용기가 작아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을 갖고 다니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이런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되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했으나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들고 있는 등불에만 채우고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4.2.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

예수님은 24:1-41까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관해 예언하셨습니다. 24:42부터 25장 마지막까지 마지막 심판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5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각 비유마다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그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24:42-44의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45-51의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두 번째 비유는 성도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고도 지혜롭게 잘 감당하면 예수님 재림 시에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과 앞 선 두 비유를 전제로 해서 마지막 때라는 연속되는 주제를 가진 세 번째 교훈이라는 근본적인 이해를 갖고 해석해야 합니다. 25:1에 "그 때에"라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의미하며 그 때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 집에서 치를 혼인잔치의 때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신랑이 더디 옴과 같이 재림의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마땅히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행동하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여 재림이 더디 올지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3.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해석    

비유를 해석하는 세 가지 원칙은 '천국과 문맥과 당시 관습'에 바탕을 두라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약 세부적인 부분의 해석이 주제와 상관이 없거나 당시의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 배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님께서 제기한 슬기로운 처녀가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줬더라면 다 같이 열명 모두 구원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고 그 뜻은 선합니다만 비유의 해석 원칙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조금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하신 비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그 뜻을 풀어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비유 마13:3-9 해석 13:19-23)와 가라지의 비유(비유 마13:24-30 해석 13:37-43)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비유들을 해석하지 않은 이유는 이 모범적인 해석에 비추어 다른 것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로선 이 두 비유 뿐만 아니라  모든 비유에 나오는 설명들에 관해 누구나 잘 알고 직접 시행하고 있는 풍습이라 구체적으로 따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그 두 비유를 해석한 것에 따르면 마지막 때와 천국을 소원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태도에 관해서만 말씀하셨지 주제 외의 부분은 일절 다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거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다른 세밀한 표현을 두고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등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불을 켜지 못하는 자는 도적이나 불청객 취급을 받았지 기름을 나눠준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나눠주기를 거절하는 것이 비난 받을 행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런 부분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밀하게 예비하는 습관이나 품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 때에 본인이 주님과 어떻게 교제했으며 얼마나 주의 자녀답게 살았느냐를 의미합니다. 

비유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로 합시다. 신랑의 친구로 초대 받은 자라면 신부 집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신랑의 성격이 혹시 더디 올 수 있는지, 아니면 신부 집이 집안이 넓어 예식이 오래 걸릴 수 있다든지, 날씨가 나빠 시간이 지체 될 수도 있다든지 더디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랑과의 교제가 평소 그 만큼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심판은 불시에 닥칩니다. 그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 놓을 자신의 신앙 상태와 신자로서의 자세(등불의 기름)를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시쳇말로 하듯이 마누라 치마 끝을 잡았다고 남편이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는 하나님과 본인의 일 대 일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믿었다고 아들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 기름의 비유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것이 바로 그뜻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이나 복음의 일군에게 가서 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각 자가 개별적으로 회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는 거부의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에 게을리 하거나 혼자서만 천국을 가려는 이기주의나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로 평가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 드린 대로 불시에 찾아 온 종말의 때에 각 자의 심판은 자기가 이 땅에서 천국을 소원하고 준비된 자인가 아니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원어적인 표현으로도 이중의 부정어가 첨가 되어 함께 쓰기에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아 꾸어 주면 꾸어 준 자도 기름이 모자라 아무도 신랑을 맞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뜻은 처녀를 여섯 명이나 여덟 명도 아니고 꼭 열명이라고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열은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이기도 합니다.
열 처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 받기를 소원하시지만 구원의 기준은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그런 앎이 없는 자가 등불에 기름을 준비 안 한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행 혹은 전도의 열심과는 상관 없이 구원 받지 못할 자가 교회 안에서도 반드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에서 쓰인 '알다'는 원어의 뜻이 단순한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혼인 당일 날 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부터 신랑과 신실하고도 계속된 교제를 통해 일 대 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비유의 주제는 24:42, 25:13에서 주님이 결론 지었듯이 항상 깨어 있으되 더디 올 수 있으니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락하지 말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평생을 걸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사랑(아하브)



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에메트 אֱמֶת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 >는 ‘진실/진리/성실/참/진실무망’따위로 번역되는 명사이다. 그리스어로는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라고 번역된다. 전도서에서 이 단어는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진리’(개역) 또는 ‘참됨’(새번역)이라고 번역되었다(전12:10).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피스티스 πίστις >라고도 번역된다(히11:1). 히영사전은 firmness / certainty 라고 정의한다.

<에메트>는 <헤세드 חֶסֶד >라는 단어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헤세드>는 자신의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시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음을 표현하여서 <에메트>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 둘이 나란히 사용되면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상용구가 된다.

오경에는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된 구절이 다섯 군데 나온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며느리를 구하려고 밧단아람으로 갈 때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인자<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자기에게도 보여 달라고 기도한다(창24:27). 그 늙은 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친척인 라반에게도 요구하였다(창24:49). 야곱이 에서를 상봉하기 전날 밤에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께 은혜<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다(창32:11, 개역). 임종을 앞둔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아들 요셉에게 부탁하면서 인애<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요구하였다(창47:29, 개역). 믿음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시내산에서도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한 백성을 용서해주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진면목은 <락훔>, <한눈>, <에렉 아파임>, <헤세드>와 <에메트>, 다섯 가지의 단어들로 묘사하고 있다(출34:6).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나 거짓이 없이 진실하다.

<에메트>는 <아만 אָמַן >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 <아만>은 연약한 아기를 보살피는 부모가 보살피는 것에 비견하여 양육하고 키우는 강력한 후원행위를 가리킨다. 건물의 기둥을 가리키는 명사 <옴나 אֹמְנָה >도 이 동사에서 파생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튼튼한 기둥처럼 강력하게 떠받치고 계신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이나 장래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확실한 일이다. 이 사실을 확고히 믿는 것이 성서적 믿음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늘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곧 신자(信者)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의 기반을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신7:9). 여호와는 믿음의 조상들과 불변의 진실한 언약을 맺으시고 항상 자신의 백성을 확실하게 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시89:28).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의 믿음을 독려하였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7:8 개역),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아멘’이란 확언으로 끝맺는다. 지금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정말 참되고 확실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으로 <아멘 אָמֵן >이라 외치는 것이다.


“헤세드(חֶסֶד)”에 대하여 – 잠언 20장 28절에 대한 묵상


  • 어원적 의미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우리말 딱 한 단어로 번역하기 무척 까다로운 어휘입니다. 헤세드는 계약관계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전문용어로, 그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계약의 내용: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서로 잘 대해 주자.

2) 계약의 영속성: 한 번 맺은 계약은 쉽게 깨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세계에서 어떤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계약을 맺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서로 나쁘게 대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구두로 맺어진 계약이었습니다. 그 맺은 계약을 공식 문서로 공증 받고 감시, 감독할 상급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맺은 계약은 쉽사리 파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약의 지속성, 혹은 영속성은 계약이 갖는 핵심적인 속성이 됩니다.

      창세기 21장 22-31절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은 헤세드의 두 가지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21:23 그런즉 너(아브라함)는 나(아비멜렉)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개역개정)

계약의 내용을 쉽게 정리하면, 서로 진실하게 행하고 잘 대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하나님께 맹세함으로써 그 지속성이 보장됩니다. 계약의 영속성을 위한 장치를 창세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21:30-31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두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떤 문서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주고 받음으로써 계약이 성립되고, 그 장소의 이름(“브엘세바” = 맹세의 우물)을 통해 그 계약이 후대에 계속 기억됩니다. 이 계약의 영속성을 보증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계약당사자 각자가 믿는 신에 대한 신앙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계약입니다. 여기서 맹세의 보증이 되는 “하나님(엘로힘)”은 유일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신(神)”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이민족 사이의 대화가 나타나는 창세기의 장면들에서 엘(אֵל)혹은 엘로힘(אֱלֹחִים)은 고대근동 전역에서 통용되는 표현이고, 반면에 여호와/야훼(יהוה)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신으로 특정됩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의 계약에 대한 창세기 31장 역시 헤세드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성경 본문입니다.

       창31: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창31: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계약의 내용은 자신(라반)의 딸들(레아와 라헬)에게 잘 대해 주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해를 가하지 않기로 하자는 것이고, 그 계약의 영속성은 돌무더기를 통해 표현됩니다. “증거의 돌”을 히브리어로는 “갈-에드(גַּלְעֵד)”라 하고, 아람어로는 “여가르-사하두타(יְגַר שָׁחֲדוּתָא)라고 합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창31:47). 그리고 이 계약은 각자가 믿는 신의 보증을 받습니다.

       창31: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히브리어 원문에는 “판단하옵소서”라는 동사는 복수동사로 되어 있습니다(이쉬페투יִשְׁפְּטוּ).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나홀(라반의 할아버지)이 믿는 신, 그 두 신이 이 계약의 보증인이 되어달라고.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창31:53).

  • 헤세드의 용례와 그 번역의 예들

계약의 두 가지 속성(잘 대해 줌과 오래 지속됨)은 헤세드(חֶסֶד)라는 계약언어로 하여금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도록 합니다.

1) ‘잘 대해 줌’에서 파생된 의미: 인자, 자비, 사랑, 인애 등

2) ‘오래 지속됨’에서 파생된 의미: 성실, 신실, 신뢰,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 등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어로 주로 쓰이는 인자(kindess), 자비(mercy), 사랑(love), 인애(loving-kindess) 등은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반면에 성실(faithfulness), 신실(trustworthiness), 신뢰(trust) 등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인 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번역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영어의 “steadfast love”라는 번역이 1) 잘 대해 줌(love)과 2) 오래 지속됨(steadfast)의 두 의미를 최대한 함께 담으려고 애쓴 번역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헤세드를 모두 “steadfast love”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헤세드의 용례 중에 두번째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근 아멘(אמן)에서 파생된 에메트(אֶמֶת)나 에무나(אֱמוּנָה) 등과 함께 쓰일 때는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없음)이 강조되는 경우입니다. 어근 아멘(אמן) 역시 그 어원은 “토대가 굳건하다, 흔들림 없다(to be established firmly)”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세드와 에메트, 혹은 에무나는 서로 다른 개념의 단어가 아니라 비슷한 개념을 나타내는 ‘짝단어’라는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를 우리말 번역은 습관적으로 “인자와 진리”로 번역하는데, 본문의 맥락을 무시한 이러한 기계적 번역을 저는 번역자의 의무를 충실히 하지 않은 ‘아주 게으른 번역’이라 칭합니다. 문맥과 상관없이 헤세드를 “인자”로 번역하는 경우는 우리말 번역 성경에 너무 많아 그 예를 다 들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 잠언 20장 28절의 헤세드  

잠언 20장 28절은 헤세드(חֶסֶד)와 에메트(אֶמֶת)가 동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개역개정: 왕은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헤세드)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새번역: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가 왕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보좌를 튼튼하게 한다.

       공동번역: 임금은 친절(헤세드)과 신실(에메트)로 스스로 보위하고 정의(헤세드)로 그 자리를 다져야 한다.

       카톨릭성경: 자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임금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왕좌를 받쳐 준다.

대표적인 한글 성경들은 헤세드를 “인자, 친절, 자애”로 번역하고, 에메트는 “진리, 신실, 진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두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부각된 번역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개역개정을 제외하고, 새번역과 공동번역, 카톨릭번역은 하반절의 헤세드를 모두 “정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에 해당하는 번역입니다. 우선 번역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개역개정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한 문장에 쓰인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한 것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새번역 등의 번역자들은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를 한 문장 안에 다 포함시키려고 노력한 것이겠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이 문맥에서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잠언 20장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지혜로운 왕”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진노”하고(2절) “심판 자리에” 앉아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8절). 하나님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를 미워하시고(10절), “속이는 저울”을 싫어하십니다(23절). 그는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시는 분입니다(26절). 이 모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분명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악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시고, 그분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선악 기준이 변함없이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잠언 20장 어디서도 인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8절에서 “인자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왕위가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그러나 다시 뼈에 사무치게 꾸짖고 벌을 내려서라도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이 묘사됩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30절).”

잠언 20장 전체의 문맥은 “인자, 친절, 자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헤세드는 첫번째 의미(“잘 대해 줌”)와는 관련 없이 두번째 의미(“변함없음, 흔들림 없음”)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왕의 자리는 친절과 자애,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확고한 가치관에 의해 보호되고 견고해 집니다. 따라서, 잠언 20장 2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변함없음(헤세드)과 확고함(에메트)이 왕을 보호하고, 그의 왕위는 변함없음으로 말미암아 확고해 진다.”

성경에 쓰인 헤세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맥락이 “잘 대해 줌”이 강조된 경우인가, 아니면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경우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나게 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죄도 짓지 않았을 것 아닌가?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는가?
잘못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시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대답이 내려졌어도 이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존의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선악과(善惡果)’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장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이다. 이 장황한 명칭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다. 우선 <메에츠מֵעֵץ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메 מֵ>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from에 해당한다.
<에츠 עֵץ>는 ‘나무’이다.
<메에츠>는 ‘그 나무에서부터’ from the tree란 뜻이다.
이것을 창세기 2:17은 ‘나무의 열매’라고 옮긴 것이다.
그러나 <메에츠>가 나무의 열매만이 아니라 뿌리나 잎이나 가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열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퍼리פְּרִי >가 창3:3, 6에서 두 차례 등장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직접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에츠>는 열매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긴 호칭을 줄여서 사람들은 ‘선악과(善惡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다아트 הַדַּעַת>란 요소이다.

<하 הַ>는 정관사이고 <다아트 דַּעַת>는 ‘알다’란 동사 <야다 יָדַע>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앎/knowledge’이란 뜻이다. 여기에 <토브 우라아 טוֹב וָרָע>란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토브 טוֹב>는 ‘선(善)’, <라아 רַע>는 ‘악(惡)’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개념은 매우 폭이 넓다. <토브 טוֹב>는 ‘좋음/선/good/유익함/아름다움’이란 뜻으로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라아 רַע>는 ‘싫음/악/evil/나쁨/해로움/추함’이란 부정적인 개념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라고 줄여서 표현하지 않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열매’ 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일부러 장황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 나무를 굳이 한자어로 축약하여 표현하자면 ‘선악지식수(善惡知識樹)’가 될 것이고 그 열매는 ‘선악지식과(善惡知識果)’가 될 것이다. ‘선과 악’은 성서의 매우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헬레니즘의 핵심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선과 악의 문제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주제를 다루었고, 그들의 윤리학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헬레니즘에 있어서 ‘선과 악’을 판별하는 주체는 ‘나(에고)’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은 ‘선’이고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이다. 이러한 윤리적 인식론에서 ‘인간주의’(humanism)가 출발하며 그 범주 속에 이기주의(egoism) 또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가 포함된다. 창세기의 ‘선악지식과’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서의 저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는 본디 하나님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이 아니기에 모든 존재자를 다 품으시는 공공자(公共者), 또는 ‘공변성’(catholicity)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들을 살리는 공공자이기에 인간의 에고(ego)만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하다 하시면 사람에게도 좋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이 된다. 하나님에게 좋은 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에게도 좋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과 한마음이 될 때 그 사람은 모든 타자에게 유익한 존재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과 어긋나게 되어 공공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게 되었다(창3:23; 4:2). 사람은 하나님과 계속창조의 사역을 하면서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살면 더 이상 하나님과 동역할 수가 없게 된다. ‘선악지식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만든 리트마스 시험지이다. ‘선악지식과’를 먹지 말라고 엄금한 까닭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일을 도모하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선악지식과’를 먹는 행위 자체가 벌써 하나님과 딴생각을 품었다는 증거이며 공공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행위 자체는 이미 변질된 존재자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인 사람의 존재를 항상 점검하시기를 원하신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공공자이신 하나님에서부터 개별자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만물을 위해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는 개별자가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좋은 존재인지 나쁜 존재인지를 판단하려고 든다. 이로써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중심주의가 생겨났고, 공공의 유익을 추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이기주의라는 불신앙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출23:33). 이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경계한다. 인간이 자기에게만 좋은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규열이 생기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저버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헛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를 살지 못하고 사람의 이기(에로스)를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의 진의가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은 헬레니즘의 에로스적 가치관과 질서를 가리켜서 ‘세상’(코스모스)라고 정의한다. ‘선악지식과’의 금령을 표현한 동사구는 히브리어로 <로 토칼 לֹא תֹאכַל>이다. 이는 ‘먹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의 동사구는 십계명에 아홉 차례나 등장한다(출20:1~17).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을 나타낸다. 창2:17의 금령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지시한다. 바울 사도는 이 금령을 해석한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다라고(롬3:30; 5:13, 20; 7:5, 7, 8, 9). 계명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된다. 선악과의 금령이 있었기에 사람의 죄성이 드러났다. 자신이 죄인인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모름지기 은혜를 아는 데 있다(갈2:22). 인간 실존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해에 재빠른 지식(self-interest)을 택할 것인가.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항상 시험과 검증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유한성이다. 사람은 로보트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공공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로 결단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동역자인 사람이 늘 결단하여 하나로 남아주기를 원하셨다. 사랑의 열정을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시험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께서는 시험을 통과하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 속에서 이 시험을 늘 통과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죄인의 실존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려는 속성을 품고 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사건들이 죄성을 증명해 준다(신명기9장; 출애굽기 15~18장; 민수기 10~20장). 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려는 유혹자였다. 응시자를 떨어뜨리려고 파견된 시험관이 사탄이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장이 기다린다. 시험은 성장을 향한 창조의 원리이다.


사랑 אַהֲבָה (아하바)


사랑(아하바. אַהֲבָה )

히브리어로 ‘사랑’을 아하바(אַהֲבָה) 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아헤브( אָהֵב )에서 파생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쉬(אִישׁ)”와 “잇샤(אִשָּׁה) – 남자와 여자에 대한 묵상

1. 어원에 대한 논쟁

‘남자, 남편’을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אִישׁ)와 ‘여자, 아내’를 뜻하는 잇샤(אִשָּׁה)의 어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오랜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두 단어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데, 꼼꼼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쉬에는 중간에 요드(י)가 있지만 잇샤에는 없고, 또 잇샤의 쉰(שׁ)은 중복되어 있는데 이쉬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단어의 어근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두 단어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이쉬의 어근은 알레프-바브-쉰(אושׁ)으로, 그 의미는 ‘강하다(strong)’이고, 반면에 잇샤의 어근은 알레프-눈-쉰(אנשׁ)으로, 뜻은 ‘약하다(weak), 부서지기 쉽다(fragile)’입니다. 어근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면 결국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주로 유대 랍비들이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가부장적인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해석일 뿐입니다.

2. 전통적 견해의 문제점

위의 주장은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쉬(남자)의 어근이라 알려진 알레프-바브-쉰(אושׁ)의 어원이 ‘강하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박약합니다. 우가릿어와 아랍어에서 알레프-바브-쉰은 동사로 ‘주다(give)’, 명사로 ‘선물(gift)’이라는 뜻이지 ‘강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HALOT 참조).

둘째, 이쉬(남자)의 복수형은 아나쉼(אֲנָשִׁים)으로, 잇샤(여자)의 어근과 동일한 알레프-눈-쉰(‘약하다, 부서지기 쉽다’)입니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이쉬(남자)의 어원이 ‘강하다’라면, 남자가 혼자 있을 때는(단수) 강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는(복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나옵니다.

셋째, 남녀를 포함한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에노쉬(אֱנוֹשׁ)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장대로라면, 남자(이쉬)는 강하지만, 사람(에노쉬)은 약하다는 또다시 말이 안 되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따라서, 이쉬(남자)와 잇샤(여자), 그리고 에노쉬(사람) 모두 알레프-눈-쉰(אנשׁ)이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합니다. (혹시, 왜 이쉬와 잇샤에 눈(נ)이라는 어근이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히브리어 자음 눈(נ)은 그 다음에 바로 따라오는 자음에 동화되는 경향(자음동화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스스로도 이쉬와 잇샤가 한 뿌리에서 나온 단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잇샤)라 부르리라 하니라

3. 이쉬(אִישׁ)와 잇샤(אִשָּׁה)의 공통 어근 알레프-눈-쉰(אנשׁ)의 의미와 성경의 용례

알레프-눈-쉰의 어원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약하고(weak) 부숴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근이 동사로 사용된 경우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데,

삼하12:15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וַיֵּאָנַשׁ)

다윗이 불의하게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얻은 아이는 약하게 태어났습니다(어원적인 의미에서는, 병들고 아프게 된 것보다는 연약하게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아이는 다윗의 금식기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죽고 맙니다.  

연약한 존재인 사람을 나타내는 에노쉬(אֱנוֹשׁ)는 검붉은 흙(아다마 אֲדָמָה)에서 만들어진 아담(אָדָם)과 평행어로 성경에 아주 흔하게 쓰입니다(사13:12, 51:12, 56:2, 시73:5, 90:3, 144:3 욥15:14, 25:4, 36:25 등).

이 중 몇 가지 본문을 살펴보면,

이사야 51:12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에노쉬)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아담)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시90:3 주께서 사람(에노쉬)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담)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에노쉬(אֱנוֹשׁ)는 흙 알갱이인 아담(אָדָם)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부숴지기 쉬운 인간 존재를 나타냅니다.
영어성경에서 주로 “mortal”로 번역되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나름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의 어원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모두 죽을 존재이고, 한 포기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다마(אֲדָמָה)의 티끌에서 와서 다시 티끌로 돌아갈 존재일 뿐입니다.


성령과 율법(πνεῦμα vs. νόμος), 다른 점 네 가지


1.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한시적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에 비교하였다. 파이다고고스는 6-16세 정도의 어린 사람(파이스"παῖς)을 교육적으로 인도하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정교사와 다른 점은 배우는 장소로 오가는 길에 동행하고 배움 과정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직접 가르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파이스가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하라" "~하지 마라" 간섭하는 교육 책임자가 파이다고고스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이 파이다고고스와 같다고 비유하면서, 파이다고고스는 한 인물의 성장 단계에서 파이스(어린아이 + 청소년) 시절에만 필요한 존재이 듯 율법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역할하는 것이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두 구절의 말씀으로 이 점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6a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2. 율법은 행위를 변화시키고,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율법은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하여, "무엇 무엇은 하라" "무엇 무엇은 하지마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규정을 준다. 이런 규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어나서, 토라를 넘어 미드라쉬와 탈무드로 확대되었다. 죄가 되는 행위를 피하려는 노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수많은 죄된 행위들이 새롭게 규정된 것이다. 이 많은 규정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차치하고, 외울 수 있는 사람 조차 없게 되었다.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과 달리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행위 하나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가 알아서 판단하고 실행할 문제이다. 다음 성구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나열한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로마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 명명하고,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3. 율법은 우리를 죄에 묶고, 성령은 우리를 해방한다.

아래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네 구절은 율법의 역할이 우리를 죄 아래 묶어 두는 것임을 알려 준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는 하지만,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율법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율법으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는 죄 아래 있게 되었다. 

로마서 3:19-20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로마서 6: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7:5, 8-10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 . .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근래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보여주는 것도 핵심은 같다. 죄가 무엇인지 판별하고 처벌하는 "새진리회"는 판별과 처벌만 할 수 있을 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의 공포에 묶이고 서로를 죄인으로 비난하는 세상이 되었다. 결국 그런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지옥"의 숨겨진 메시지이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해방하는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가 말한 성령, 요엘이 말한 성령, 예수에게 임한 성령 모두가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 61:1-2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요엘 2:28-29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며 출정사를 대신 하심으로(누가복음 4:18-19), 예수님께서는 그와 동행하신 성령이 해방의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바울 서신에서 성령이 해방의 영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구절은 아래의 말씀이다. 

로마서 8: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아래 갈라디아서 말씀도 다르지 않은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4: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성령의 역할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로 인하여 정죄 받지 않고(롬 8:1), 죄된 길을 멀리하며(갈 5:16),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으며(롬 8:39),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담보로 (갈 4:7, 롬 8:17, 엡 1:15) 성령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묶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존재가 되었다. 

4. 율법은 문자이고, 성령은 바람이다.

율법은 문자이다. 모든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하는데, 행위에 대한 지시가 율법 규정으로 문자화 되고 나면, 이제 상황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문자화된 율법 규정은 생명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빚문서가 될 뿐이다. 

고린도후서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빌립보서 2:14, 20-2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 . .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 하니, 웬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은 바람과 같다. 어디에 적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갇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성령의 특징은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3: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그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쓰여진 대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성령의 방식이 아니다. 성령은, "무엇은 하라" "무엇은 하지마라"라는 온갖 규정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봄바람 처럼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도 바람처럼 살도록 인도하신다.   


히브리 알파벳의 의미

히브리 문자의 비밀

ת‘타브’ 십자, 표시 400

히브리어 글자 가운데 마지막 글자는 ‘타브’다. 그리고 이것은 이를 테면 히브리어 글자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인장이나 도장으로 묘사된다. 또한 의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장 또는 표식으로 불려지거나 보여진다. 현자들은 하나님의 표식은 ‘에메트’, 즉 진리, 라고 말한다. ‘알레프’는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멤’은 중간에 끼어 있으며, ‘타브’는 마지막 글자다. 하나님의 표식을 다른 말로, “모든 실재의 관점에서 여기에 진리가 있으며, 여기에 섭리가 있다”고 말한다.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의 마지막 글자는 ‘타브’이다. 그리고 처음 세 단어들의 마지막 글자들은 ‘에메트’, 즉 진리, 라는 철자이다. 우리는 창조의 시초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 째 날인 안식일을 얻는다. 세 단어들 “버락 엘로킴 마소트” 가운데 마지막 글자들로부터 하나님은 ‘에메트’를 판독하도록 만드셨다.

따라서 창조의 시초부터 하나님의 표식은 글자 ‘타브’로 끝나는 ‘에메트’이다. 그리고 창조 그 자체인 안식일의 최종 목표는 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정의 중요성에 관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배웠던 다른 글자들은 이 세상에서 유대인의 임무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브’가 하나님의 진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영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오듯, 영혼에 각인된다.

‘타브’는 실제로 두 개의 글자 ‘달렛’과 ‘눈’으로 구성되었다. 이 글자들은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의 철자가 된다. 매우 흥미롭게도 ‘단’은 광야를 지나는 지파 가운데 막내였으며, 그의 임무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이었다. 글자 ‘타브’가 알파벳의 맨 마지막 글자이듯, ‘타브’를 구성하는 두 글자 ‘단’ 또한 행진하는 대열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이 뒤에 남긴 것들을 깨끗이 치운다. 그 표식은 뒤에 남겨진 배경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표식과 형태는 이 세상의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 주변의 물리적 실체 안으로 새겨지는지에 대한 사례로는 화석들을 볼 수 있다. 영혼 차원에서는 영혼 환생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이전 생애가 바로 지금의 우리의 인생 속에 도장과 같이  새겨진다. 모든 실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뚜렷한 특징들이 화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성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는다.

‘단’은 또한 심판(judgment)을 나타낸다. 심판은 또한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이 말은 완전한 심판을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영혼은 심판받고 글자 ‘타브’로 끝나는 죽게 되어야 만나게 되는 죽음 자체를 위한 세계와 바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고 그것은 또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심판 받고, 그 다음에 환생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신성 차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힘이 하나님의 네 글자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실체들 속에 가득하다고 말한다. 바로 네 글자 이름“엘로힘 이즈 헤세드 엔 구불라”, 즉 “친절을 사랑하고 압제를 심판하심”을 통해.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적대적인 방법이 아닌 자연의 법에 따른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 정연한 활동은 하나님의 구속과 통제 그리고 법과 질서의 표현이다.

글자 ‘타브’는 숫자 사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즉 우리가 죽음에 다가가서, 우리가 ‘타브’와 함께 끝나면서 만나지게 되는 죽은 후에 오는 세계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신성한 기쁨을 지닌 사백 개의 세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성한 기쁨이 있는 이 사백 개의 세계들은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라의 매장지를 산 아브라함과 관련 있다. 이 사라의 매장지를 취득하는 과정에 아브라함의 사려분별로 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땅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획득이다. 

글자 ‘타브’가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묵상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종결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지, 어떻게 모든 주기(cycle)는 스스로 반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표식과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영혼 그리고 마음을 포함해서 모든 실체의 본질에 새겨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ש‘쉰’ 치아 300

현자들에 따르면 ‘쉰’은 불의 글자다. ‘쉰’을 자세히 보면, 세 개의 사선들이 있다. 사실상 히브리어의 불이라는 단어는 ‘이쉬’, 즉 ‘알레프 쉰’이다. ‘쉰’은 ‘불(fire)’이고, ‘알레프’는 ‘여기(at here)’이다. 우리는 불이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안다.

따라서 불은 여기 이를 테면, 타고 있는 불에 생명을 주고 있는 중이다. ‘쉰’의 세 사선들은 좌우대칭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글자들 가운데 가장 좌우대칭인 것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많은 ‘바브’와 ‘요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선들은 ‘바브’를 나타낸다. ‘바브’의 꼭대기는‘요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요드’가 있는 아랫부분에서 만난다. 따라서 다 합치면,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가 ‘쉰’을 구성한다. 이 일곱 요소들은 네 명의 어머니와 세 명의 아버지를 암시한다.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게 서로 뒤섞인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한쪽에는 규칙적인 세 선들의 ‘쉰’이 있고 다른 쪽에는 우리가 히브리 알파벳에서 보지 못하는 네 개의 사선들의 모호한 ‘쉰’이 있다. 이 일곱 개의 구성물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아내들을 나타낸다.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를 취하면, 이 모두는 오십 팔인데, 이는 은혜(grace)를 의미하는 ‘크레인’이란 단어다. 카발라주의는 좌우대칭의 개념이 이 ‘은혜’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은혜를 입는다. 이것은 모든 것이 이상이 없이 괜찮으며, 느낌이 좋고, 같이 관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은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단어 ‘크레인’이 토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때다. 그리고 그것은 노아에 대한 단어와 ‘크레인’은 반대로 하면 서로 같은 글자들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쉰’은 잠들어 있다는 ‘쉐이나’의 어근이고, 또한 평온을 의미하는 ‘샤난’의 어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느낌은 조용함이다. 반면에 ‘쉰’은 일정한 주기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해(year)’를 나타내는 ‘샤나’의 어근이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 그 자체인 ‘쉬누이’는 어근이 되는 ‘쉰’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사고를 가진다. ‘수면(sleep)’과 ‘평온(serenity)’은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해(year)는 물론 변화한다. “아닌 하샨 로쉬니티”, 즉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변치 않는다”. 여기서 단어 ‘변화하다’, 즉 ‘쉬니티’는 ‘쉰’이 근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최고의 개념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불변이시며,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만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고, 나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부동의 권능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불을 나타내는 ‘쉰’에 대한 하나의 사고이다. 우리가 불을 보면, 그것은 항상 춤추고 항상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에 녹아버린다. 우리는 양초의 불길에도 녹는다. 얼마 안 있어 거기에 은혜가 있다. 모닥불에 곧 평온함이 있고, 불길이 사라져 간다.

‘쉰’의 수의 값은 삼백이다. 심판의 이름인 ‘엘로킴’이란 이름을 취하면, 네 개의 철자로 구성된 그 단어의 글자들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알레프’는 ‘알레프’와 ‘페’로 구성된다. 등등. 이 글자들의 모든 수의 값은 삼백과 동일하다.

‘엘로킴’은 팔 십 칠이며, ‘하테바’, 즉 자연(nature), 와 동일하다. 따라서 ‘쉰’의 불에 최고의 결합은 힘이며,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전자기적인 에너지이다. 변화와 불변에 대한 또 다른 최고의 사례가 ‘쉰’에 의해 나타나듯, 우리는 ‘모든 유대의 가정’, 사실 ‘집에 있는 모든 방’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드나드는 정문에서다. 그리고 ‘아메트’는 글자 ‘쉰’이다. 단어 “메주사”는 “활동하는”을 의미하는 단어 “자즈” 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나가고 우리가 들어올 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메주자”에 입맞춘다.

아직도 역설적으로 “메주사”를 세울 때, 우리는 “리크볼라 메주사”라는 말로 축복한다. 영원한 곳에 ‘메주사’를 두기 위해, 많은 글자들에서 우리는 이 달려감과 되돌아옴의 개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그것이 ‘쉰’의 모습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불 자체를 본다. 불은 항상 움직이고 달려가고 그리고 되돌아온다.

‘쉰’과 연계될 수 있는 묵상은 불 속에 있는 활 모양의 것과 연계된다. 영혼의 불과 연결되기 위해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하기 원하며,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기 원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길 원한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ר‘레이쉬’ 뒷머리 100

‘레이쉬’는 단어 ‘로쉐’, 즉 머리, 와 관련 있으며,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신년은 ‘로쉬 하사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 해의 머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의 의미가 ‘태초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레이쉬 베레쉬트’는 ‘레이쉬’와 관계가 있다. 토라에 ‘레이쉬 타크마 이라 타샨’, 즉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의 근심이거나 하나님의 향기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다른 글자가 굽은 ‘레이쉬’의 모양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굽은’은 머리부터다. 머리가 굽었다.

머리는 지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는 지력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토라는 지혜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베레쉬트’, 즉 태초에, 에 대한 번역들 가운데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지혜와 함께 창조하셨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레이쉬’는 지혜, 이성과 함께 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굽어져 있음을 본다. ‘레이쉬’의 또 다른 의미 가운데 하나는 ‘라쉬’인데, 불쌍한 사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세상의 또 다른 관점에서 ‘레이쉬’는 그의 짐으로 인해 구부러진 불쌍한 사람을 굽게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관점에서 지성은 자신에게 우리가 자녀들과 관련될 수 있는 그런 많은 사례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큐 180을 가질 수 있는 자녀들에게 설명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가 이해하는 방식에 그것을 맡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이 먹은 교수나 의사는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그들의 학생들에게 맡겨야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그의 지혜가 토라를 통해 양도될 수 있도록 비상한 노력을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에 암시되고 있는데, 모든 창조가 나오는 토라의 지혜는 또한 ‘로쉬’와 연계된다.

만일 ‘베레쉬트’의 글자들의 순서를 바꾸면, 그것은 ‘로쉬 바이트’, 즉 ‘집의 머리’, 가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집 안에 계시기 위해, 이를 테면 그의 무한한 실재, 그의 비상한 노력을 끝낸다. 카발라에서 사용되는 지력은 다양한 종류의 협력과 매우 관계가 깊다.

매일 매 순간은 믿을 수 없이 많은 자극 정보와 함께 되돌아온다. 두뇌의 지능은 모든 자극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우선순위를 통해 분류해야만 한다. 이것은 카발라에서 ‘하시툿’, 즉 명확화 방법’, 이라 불린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작업들은 히브리어로 ‘비루어’이다.

이 세상이 모든 것에 관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할 때, 지능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의 ‘레이쉬’를 쓴다. ‘레이쉬’가 또한 태초를 의미하는 ‘로쉬’를 의미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여태껏 ‘레이쉬’는 알파벳의 아주 끝자락에 나타난다. 그리고 ‘레이쉬’의 숫자 이백은 실제로 우리가 히브리 글자들에게 다가갔던 길의 중간 지점이다.

히브리 글자들은 일부터 사백까지의 값을 지닌다. 따라서 ‘레이쉬’는 비록 마지막 글자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숫자 상의 값은 중간이다. ‘레이쉬'는 처음부터 중간까지, 마지막까지 모든 실체에 스며듦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인, 토라의 지혜를 나타낸다.

‘레이쉬’에 대해 묵상한다는 것은 정화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기 위해,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준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ק‘코프’ 바늘귀 100

‘코프’는 스물 두 개의 표준 글자 가운데 한 글자가 선보다 아래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유일한 글자다. 우리가 ‘라메드’가 선 위에 있는 유일한 글자라고 배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 외에 이것은 글자 ‘차디’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리자가 그 글자를 ‘차디크’라고 불렀다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글자 ‘코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자 ‘짜디’를 참조한다.

이는 우리가 글자 ‘짜디’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은 창조 가운데 신성한 불꽃들을 찾아 그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내려가는 정의로운 사람, ‘차디크’이다. 글자 ‘코프’는 내려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이동, 즉 이 세상에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육체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전형인 것이다.

글자 ‘코프’, 즉 내려가는(going down), 와 보다 더 깊이 관련이 있을 때, ‘코프’는 ‘신성한(holy)’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카도쉬’를 시작한다. ‘코프’, 즉 내려 가는(going down), 의 또 다른 중요한 표명은 이 세상에서 임무를 완수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영혼이 육체 속으로 어떻게 내려 가는가 하는 것이다.

‘코프’는 신성, 즉 ‘카도쉬’, 을 의미한다. 반면에 반대말인 ‘클리바’, ‘껍데기(shells)’를 의미하는, 단어를 시작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신성의 불꽃들이 있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올가미(trap) 또는 껍데기(shells) 또는 용기(vessels)와 틀(blocks)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같은 글자가 서로 반대인 두 가지 의미들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들의 많은 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다. 신성함(holiness)과 ‘클리바’,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제는 외관으로부터, 즉 ‘클리바’로부터, 신성의 불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프’의 모양은 실제로 ‘레이쉬’와 ‘자인’의 두 개의 글자들로 구성된다. ‘레이쉬’는 ‘바브’와 ‘자인’이 선 아래에 가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글자 ‘잘’ 또는 ‘랄즈’의 글자들을 배열한 규정을 따른 결과이다. ‘잘’은 낯선(strange)이라는 의미다. 이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낯선 세계다. 그것은 복잡함과 비밀 그리고 떨어진 불꽃들로 가득하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 즉 이 세계에서 낯선 느낌, 을 가진 경험이 있다. 때로는 고독한 느낌, 이방인 같은 느낌 그리고 거기 아무도 없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랄즈’는 방법이 다르다. ‘랄즈’는 비밀(secret)을 의미한다. 숨은 뜻, 숨은 의도가 있는 비밀들은 모든 생소함 속에 새겨져 있다. ‘클리바’로부터 불꽃들을 추출하려는 생각은 생소하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 안에서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진다.

‘자인’과 ‘레이쉬’는 거기에서 영광의 근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의 유대인이 이 세계에서 지도자가 되고 대리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정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라. ‘코프’의 수는 백이다. ‘차디크’에서 우리는 이삭이라는 이름을 분석하였고, 우리는 이삭이 태어날 당시에 아브라함은 백세였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우리는 다른 글자들에서 어떤 수에 십 배수한 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백은 십의 십 배수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험을 가졌음을 보았다. 가장 위대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두 단어들 ‘라크 라카’는 백에 해당하고 오십과 오십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장 위대한 잠재력은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가려하였고, 구하려 하였으며, 열 가지 시험들을 통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가 백세에 아이를 낳은 이유다.

십의 열 배수는 백세의 나이에 이삭을 낳음과 동일하다. 후에 이삭은 그가 장성해서 농사하여 백배나 얻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깊은 잠재력으로부터 이삭을 낳을 때까지의 하나의 완전한 주기를 본다. 이삭에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다는 것은 글자 ‘코프’와 백이라는 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생소함을 얻고, 게다가 목적을 맡기기 위해 숨겨져 있는 불꽃들을 찾음으로서,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험들에게 우리의 완전한 잠재력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이 세계에 새로운 통찰력을 낳기 위해,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멤’ 40 상형 의미 : 물

‘멤’은 두 개의 모양을 지닌 다섯 개의 글자 가운데 하나이다. 단어 중간에 처음 나오는 형태와 단어의 마지막 글자로 나타나는 마지막 형태가 있다. 이런 ‘멤’의 두 가지 모습은 물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에서 물을 나타내는 단어 “마임”은 표준적인 ‘멤’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오는 ‘멤’으로 끝난다. 중간에 ‘요드’를 가진 표준적인 ‘멤’은 물의 형체를 나타낸다. 그것은 정사각형과 같다. 그런데 왼편에 벌어진 틈이 있는데, 이것은 열린 모습의 물들인 샘, 강, 시내를 나타내고, 마지막 ‘멤’은 닫힌 모습의 물들인 대양, 호수, 늪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임”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그 단어 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두 가지 형태의 ‘멤’으로 만들어 졌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방울처럼 생긴 ‘요드’는 물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방울들이다. 우리 모두는 물 없이 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물은 생명을 준다. 우리는 일주일, 아니 한 달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지만,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지구 표면의 70퍼세트가 물로 덮여있음을 안다. 또한 인간의 육체는 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함축된 내용은 생명에 대한 물과 연결된다.

탈무드에 “에인 마임 엘로 토라”, 즉 “토라가 바로 물인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토라에 나와 있는 물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토라에 대한 환영이라는 것이다. 물이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라는 생명을 준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네카 노베아 코 코흐마”, 즉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천천히 흘러가는 시내”. 그리고 카발라적으로 토라는 지혜, 즉 “(חכמה호크마 2451)”, 라고 불리는 곳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멤’은 “호크마”라는 단어에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생과 그리고 지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멤’은 히브리 글자 가운데 열세 번째 글자다. 열세 번째는 판독하면 단어 ‘아하바’, 즉 사랑, 이란 단어가 된다. 따라서 물처럼 속도가 떨어질 때 이것은 사랑과 관련된 몇 가지 능력과 연계된다. 물의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 준다. 십삼은 중요한 수인데, 그 이유는 “십삼 미돗 라흐민” 이라고 불리는 것의 수이기 때문이다. “더 슈로소스 미돗 라흐민”은 “긍휼의 열세 가지 모습들”이다. 십자가의 긍휼은 사랑과 관련된다. 따라서 ‘멤’은 생명, 사랑, 지혜 그리고 토라의 모든 개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십 인‘멤’의 수에서 매우 명백한데, 그 이유는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사십이라는 수는 토라 자체를 나타낸다. 그리고 ‘멤’의 모습에서 보듯, 정사각형이 된다. 우리가  글자들에 대한 많은 논의를 통해 배웠듯이, 이 글자들은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따라서 ‘멤’은 또한 전형적인 주기, 즉 자체만으로 이루어진 주기인 정사각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에서 사십과 함께 해야만 하는 매우 많은 다른 주기들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 일을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모세는 세 단계의 사십 일을 보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모세는 유대민족에 대해 용서를 간구하는 또 다른 사십일을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받는데 세 번째 사십 일을 보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어질 때, 노아 시대에 비가 사십 일 간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관계는 구 개월의 임신기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사십 개월인 구 개월 하고 사 주인 것이다. 탈무드는 임신기간 사십 주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태아에게 편안한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이다. 따라서 이 모든 관계들에서 우리는 ‘멤’이 지혜와 관련된 생명의 글자이고, 그리고 출생과 순환의 글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적절한 묵상은 물, 샘이나 강이나 시내 등, 의 형체를 상상하고, 어떤 의미에서 누군가의 육체를 그리고 누군가의 영혼을 에워쌈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하며, 그리고 토라의 지혜에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성실한 접속자들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צ‘차디’ 낚시 바늘 90

‘차디’는 위대한 카발라 학자인 ‘알리자 차디크’에 의해 명명되었다. 그는 ‘차디’의 다음 글자인 ‘코프’를 글자 ‘차디’에 추가했다. ‘코프’를 추가해서 ‘차디크’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로운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차디’의 모양은 ‘요드’와 쐐기꼴의 굽은 ‘눈’을 같이 가지고 있는 충성스러운 종을 의미한다고 배웠던 굽은‘눈’모양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차디크’를 정의 내릴 수 있게 한다. ‘차디크’는 하나님의 종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종이다.

그리고 적음이 많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글자 ‘요드’에 대한 서술이 그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차디크’는 어떤 의미에서 유기적인 세계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글자의 순서가 바뀌면, ‘차디’의 또 다른 의미는 ‘싸이드’, 즉 ‘뒤쫓아 잡는(to hunt)’이다.

이것은 카발라적 관점에서 ‘차디’의 실제적인 역할 기능을 나타낸다. ‘알리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 이전 세계는 창조의 빛을 처음의 그릇들 가운데 던졌고 그것들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깨지면, 거룩함 속에 있는 섬광들은 이 그릇들 각각이 있는 진열장인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에 의하면 티쿤의 세계, 수정된 세계라고 불리는 이 세계는 이전 세계의 깨진 그릇들로 만들어진다. 특별히 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에 대한 우리의 사명은 떨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뒤쫓고, 구하고, 찾아서 그것들을 끌어올리고, 그것들과 연계하고, 그것들을 듣고, 그것들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에서 ‘윳작’, 즉 ‘이삭’에 관해 말하는 것과 관련 있다. 토라에서는 ‘이삭’이 그의 입을 쫓았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이다. 이삭이 왜 감정의 사람인 ‘에서’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누가 진짜 잘못된 건지 그러나 카발라 학파는 말하기를 ‘윳작’이 커다란 잠재성을 근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밀폐된 외관으로 둘러 싸인 신성하지 않은 빛의 점들. 그리고 ‘윳작’은 실제로 ‘에서’의 이러한 점들을 추출하기 위해 추적하는 중이었다. Those who were from families convert from the seed of ‘Esau’. 따라서 전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굽은 ‘눈’ 모양의 ‘차디크’는 밑으로 내려가서 물리적 세계를 떠받치려 하는 중이고, ‘차디’의 수는 구십이다.

이것은 첫 번째 유대인의 자녀를 낳은 나이다. 그리고 잠재적으로 모든 유대인의 아이가 미래의 ‘차디’라고 말하는데, 최고의 (라메즈)는 그 안에 ‘차디’를 지닌 ‘윳작’의 이름으로 그 장면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의식에서 모든 사람은 ‘차디’이다.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는 ‘차디’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윳작’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요드’는 십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의 열 가지 시험을 나타낸다. 가장 위대한 시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디’는 구십과 동일한데, 구십은 사라가 생산한 나이다. 글자 ‘헤트’는 팔과 동일한데, 이는 할례를 행한 팔일을 나타낸다.

이삭은 팔 일 만에 할례를 한 첫 번째 유대 자녀이다. 마지막 글자인 ‘코프’는 백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겸비해져서, 이삭이 태어난 아브라함의 나이다. 모든 요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간 이름 ‘윳작’에서 최고의 ‘레메즈’ 는 이를테면, 실체다.

궁극적인 생각에 대한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차디크 카타마 이후라크”인데, 즉 “그것은 야자수 꽃무 같은 ‘차디크’이다”. 꽃무 ‘페락’은 이백 팔십팔과 동일하다. ‘알리자’는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그릇이 깨짐으로 해서 떨어진 이백 팔십팔 개의 불꽃들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이 숫자는 떨어진 모든 불꽃들을 나타낸다. 그 이면에는 ‘차디크’가 이 모든 불꽃들을 도로 찾아서 하루 안에 그것들을 밝게 빛나게 만들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차디’라는 글자이든 또는 ‘엘리자’가 명명한 ‘차디크’이든,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내부를 깊이 살펴보는 것이고, 의로운, 신성한 것 안에 있는 핵심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굽어져서 세상의 짐을 지고 가는 ‘차디크’처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모든 세계에 치유와 조정과 숭고함을 가져오는 사명에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פ‘페’ 입, 80

‘페’는 입을 의미한다. 전형적인 에너지로서 그것은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글자들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말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말은 대단히 중요하고, 이 세상을 창조한다. 또한 인간은 말을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나는 잘못된 것을 말을 함으로써, 오랜 유대 관계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절한 말을 함으로써, 또는 적시에 올바른 말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거나 또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대단히 강력하다. 하나님이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항공우편 이동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항공우편 이동은,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는 것은 말하는 존재로 전환되었음을 단언한다.

다른 말로, 언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나타낸다. 추상적 사고의 관념은 말로 표현된다. 우리는 성문화 된 토라와 구전 토라라고 불리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구전 토라는 사천 년 동안의 법률, 전통 그리고 보다 정신적 가르침에 대한 편찬물이다. 그리고 대체로 천팔백 년 전에 전도활동의 내용이 쓰일 때까지, 진짜로 구전만 존재했던 이천 년 동안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구전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해서 학생을 맡기는 선생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문자적 의미에서 전환될 수 있는 구전 토라 “토라 슈 바우페”에 대한 표현은 말의 교사인 토라이다. 글자 ‘페’는 이런 의사소통의 개념을 나타내며, 시대를 초월해서 전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페’와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다. ‘페’를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페’의 안 쪽에 ‘베이트’가 있다. 이것은 글자가 글자 안에 있는 모든 글자들 가운데 유일하다. 아름다운 외관은 커다란 ‘베이트’로 시작하는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를 상고하게 한다. 그리고 글자 주변의 흰 공간을 상상하면 이를 테면, 창조하려는 세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같다.

이것은 놀라운 생각이고, 우리는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하나님의 입에 대한 이 표현이 실제 사용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백성의 리더인 사람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미피한두볼라’, 즉 권세의 입으로부터’, 가 나와 있는 토라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통해 유대 민족과 모든 인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나타낸 말씀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페’는 또한 능력이 되는데, 이것은 “여기 지금”을 의미한다. ‘페’는 소통(communication)을 그리고 ‘헤’는 표현(expression)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 지금” 있기 원하면,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의미에서 과거 또는 미래 또는 공상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곧바로 여기 지금 우리의 영혼을 보다 많이 표현하는 말을 할 것이다.

‘페’에 대한 묵상은 무엇보다도 모든 전통은 살아 있고, 분명하며, 모든 세대가 그것을 더해 가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전통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말의 중요성, 말의 능력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단어를 평가하기를 배우고, 그것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든 말이 치유와 사랑을 이 세상에 가져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ע‘아인’ 70

‘아인’은 눈을 의미한다. ‘아인’의 모양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활용해서 ‘아인’의 꼭대기에 두 개의 가지 모양의 것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각각은 눈을 나타내고 두 선은 내려가서 한 선과 만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중추신경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신경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물체와 같이 보일 수 있다.

이것은 그 생긴 모양에 ‘아인’의 의미를 연계하는 창조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방법이다. 토라에는 여러 번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아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물리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심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눈이란 “신성한 신의 섭리”, 즉 “하시카 하 프로티”라고 불리는 하나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살피시고, 통제하시며,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 나는 모든 것에 관여하신다. 이것이 신성한 신의 섭리이다. 토라에서 최고의 구절은 “이 해의 시작부터 이 해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을 두둔하신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왜 이 거룩한 나라로부터 이렇게 많은 종교인들과 종교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왜 모든 사람이 시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원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것이 이것들에 대한 이해 가운데 하나임을 배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해의 시작에서 그 해의 마지막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눈 때문이다. ‘아인’은 칠십에 해당한다. 우리는 어떤 수의 십 배수는 그 수의 완전한 계시라고 배웠다. 칠십은 칠의 십 배수이다. 갑자기 가장 전형적인 숫자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엿 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안식일을 가지게 되었다는 아주 전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는 같은 주기를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엿 새 동안 일하고 쉰다. 그러나 창조에 있어서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창조의 완성 그리고 창조의 목적 그 이상까지도 의미한다. 따라서 칠의 십 배수인 칠십은 상징적으로 칠십은 보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를 테면 하나님의 눈을 통해 모든 개개의 차원에서 그 목적이 얼마나 명백한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유대의 군인들이 광야로 갔을 때 노아의 자손들의 수 칠십을 안다. 광야에서의 장로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칠십 인의 멤버들. 이 모든 것들과 아울러 충분히 흥미롭게도 이것은 일과 칠십 사이의 관계성이다. 왜냐하면 노아와 그의 칠십 대의 자손들이 있다.

야곱과 칠십 명이 애굽에 이르렀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와 칠십 명의 다른 멤버들로 해서 실제 멤버는 칠십 일이다. 여기서 글자 ‘알레프’가 일에 해당함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수가 칠십인 ‘아인’이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서로 교체할 수 있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아인’으로부터 ‘알레프’로 그리고 ‘알레프’로부터 ‘아인’으로 교체한다. 전체적으로 그 단어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아인’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어떻게 존재하시는지, 그의 섭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다른 국면들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듯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싸멕’ 60 버팀목

‘싸멕’은 하나의 원이다. 원은 가장 전형적인 숫자 영의 모양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싸멕’은 원이 나타내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주위(surrounding)”의 개념, “에워싸다(surround)”의 히브리 단어는 ‘쏘벤’이고, ‘싸멕’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테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두 가지의 계시가 있음을 안다. “쏘베르 코 얼로민”, 즉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불리는 하나가 있으며, 그리고  “멀레이 코 얼로민”, 즉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세계를 감지하심”이다. ‘싸멕’은 주위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영혼의 차원에서, 원을 의미하는 ‘싸멕’은 환생의 개념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로 환생은 ‘길 구오’이다. ‘가우’는 실제 원을 의미하고, ‘길 구오’는 원 안에 있는 원의 개념이다. 원은 주기, 즉 반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영혼의 차원에서 ‘싸멕’이 원을 나타내는 것처럼, 반복적인 주기들이 ‘싸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와 프로세스와 반복적인 원형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싸멕’은 도처에 원과 주기의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다. 우리는 그것을 계절의 바뀜에서 본다. 우리는 그것을 일 년을 주기로 나무의 나뭇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잎과 열매가 나는 나무에서 본다. 따라서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신성의 차원에서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순환하는 영혼의 차원에 까지, 만물이 이 세상에서 변천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은 순환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순환에 기초한다. “쏘메흐”, 즉 “지지함”, 를 의미하는 ‘싸멕’은 그 모습과 매우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하그”와 마찬가지로 “에워싸는 것”은 “지지”다. 여러 번에 걸쳐,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안락과 지지를 주기를 원할 때,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하그”를 주는데, 이는 그 사람을 지지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에 대한 물리적 표출이다.

실습 방식이 학생의 서계식일 때, 그것을 ‘스미카’, 즉 고래로부터의 방식, 라고 부른다. 선생은 자신의 두 손을 학생의 머리 위에 올리고, 그를 자신의 에너지로 에워싸고, 자신의 학생에게 모든 것을 주려는 바램을 가지고 행한 그 모든 것들의 대리인을 만든다.

In the put and the sum of (   ) rate a hundred-forty-fifth sum. 그것은 스물 두 개의 히브리 글자에 준해서 “다비드 말라크”에 의해 쓰여졌다. 오로지 한 글자만이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눈’이다. 우리가 과거 ‘눈’에 관해 배웠듯이, ‘눈’은 아주 열심인 종이다. But also (it) starts to (world) to fall, no fall. So “dalid” who himself is referred to in the term of by “naslat” as the fallen one. Literally the miscarriage did not want to put it on ‘ashurei’ which is a very joyous praise of God the idea is falling.

따라서 그는 글자 ‘눈’을 건너 뛰었다. 게다가 다음 구절은 “쏘메이 카샨두 콜린 무슐린”, 즉 하나님은 타락한 모든 자들을 도우신다, 이다. 따라서 그것은 글자 ‘눈’과 ‘싸멕’ 사이의 최상의 연계다. 원은 위든 아래든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원 위의 모든 점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하다. 모든 사람은 맞은편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다.

따라서 개개의 점이 어떤 의미에서 원에서는 무의미하므로, 현자들은 ‘싸멕’의 수인 육십을 사용해서 무효화라는 개념을 표현한다. 유대 전통에서 서클 댄싱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그 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더 큰 것도 더 작은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평등(equality)과 받듦(support)이 있다. 따라서 현자들은 누군가 앞으로 어떤 것이 무효화됨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육십이라는 수를 사용할 것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음식물 금기와 관련해서 만일 우유와 고기를 함께 섞으면, 그 음식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예를 들어, 우유가 기존의 육십 분의 일이거나 그보다 적은 양이 고기의 일부분이 되면, 그것은 먹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십 분의 일의 비율은 우유를 무효화 시킨다. 육십이 더 큰 부분 때문에 우유의 맛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자들이 계속해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잠은 죽음의 육십 분의 일이라 말한다. 꿀은 사막에 있는 사람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말한다. 불은 지옥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안식일은 도래할 세계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리며, 꿈은 예언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육십의 개념은 한 사물이 다른 것에 포함되는 방법이며, 그리고 또한 다른 것으로 무효화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글자 ‘싸멕’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의 도우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생을 마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무가치한지 느끼는 대신에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위대한 도우심을 느끼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נ‘눈’ 50

(상형 : 물고기, 의미 : 구원, 탈출, 생명, 씨앗, 진리의 사역)

눈은 두 개의 모양을 가진 글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표준적인 ‘눈’은 그 모양에서 보다시피 굽어 있다. 단어의 끝에 위치하는 ‘눈’은 긴-귀 모양이다. 현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두 가지 형태 모두가 종, 충성스러운 종을 나타낸다. 히브리어 단어 ‘충성스러운’즉 ‘메트안만’은 굽은 모양의 ‘눈’으로 시작하고 긴-귀 모양의 ‘눈’으로 끝난다. 굽은 모양은 겸비한 상태의 복종하는 상태의 종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복종하는’ 은 좋은 어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최상의 찬사는 하나님이 모세를 “에딛 멧 안 마우” 즉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집에 모세처럼 충성스러운 종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아주 일상적인 것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하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된다라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자 ‘달렛’을 보는 것처럼 다시 보게 되는데 ‘달렛’ 또한 불쌍한 사람, 즉 겸비한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름에 두 개의 ‘달렛’을 가진 ‘달릿’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생이고, 가장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를 볼 수 있다.

토라에서 모세는 지구 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로 묘사된다. 이것은 리더의 강함은 겸비한 봉사자의 입장으로부터 나온다는 유대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훌륭한 도덕심에 관해 그리고 메시아, 즉 유대 민족의 궁극적인 리더, 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 된다. 그리고 이 견해 가운데 하나는 메시아의 이름이 ‘눈’이고 이것은 글자 ‘눈’에서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메시아와 관련된 시편의 한 구절로부터 왔다.

“이어 눈 쉬마르”는 ‘눈’의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는 글자 ‘눈’이 역설적으로 열심인 종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실제로 그가 모든 리더 가운데 가장 강한 리더인 것이다. 이것은 ‘눈’이 오십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십은 요벨의 해다. 일곱 번의 안식 주기인 사십구 년 다음 해가 오십 년인 요벨의 해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연한 부종들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 시간, 구속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눈’의 개념과 관련 있다. 토라는 이집트로부터 나온 오십 일째 되는 날 주어졌다. 우리는 사십구 일을 센다. 그리고 오십 번째 되는 날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는다.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하늘나라의 구속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궁극적 표현이다.

우리는 토라를 보기 전에 “나하세부쉬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글자 ‘눈’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이 세계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힘의 근원임을 알기 위해 한 번은 순결한 겸비함과 결합되며 그리고 리더가 되기 위한 힘과 능력을 한층 더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문화막시즘



문화막시즘
기독교와의 문화전쟁

문화막시즘과 한국교회의 생존전략

김승규 변호사(법무부장관, 국정원장 역임, 한국기독문화연구소장)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우리의 생각, 가치관과 사상을 말한다.
종전의 유럽과 미국사회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과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가정을 중시하고 성적순결을 강조하며,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고,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 기독교사상을 파괴하는 새로운 생각, 가치관, 윤리의 씨앗을 뿌린 후, 그 위에 마르크스주의를 주입해야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특히 성해방(Free Sex), 동성연애, 급진적 페미니즘, 젠더 이데올로기, 종교다원주의, 인종갈등조장(백인우월주의 강력히 비판), 권위부정(지도자, 교사, 어른, 부모에 대한) 등을 가르치며 막스주의를 미국 내에 퍼뜨렸다.

특히 미국의 2차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게 강력하게 가르쳐 오늘날 미국을 사회주의ㆍ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
미국의 민주당은 소위 ‘딥스테이트(Deep-State, 기득권 정치세력 혹은 그림자정부)’세력, 주류 언론(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거대 다국적기업, 빅테크놀로지그룹(트위터, 페이스북 등) 등과 손을 잡고 전 세계를 전체주의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다 지난 대통령 선거 배후에 중국이 깊이 관여한 정황이 있다고 트럼프 측은 발언하고 있다.
선거를 둘러싼 미국 내 공화당과 민주당간 싸움은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반기독교와의 싸움인 것을 우리 교회는 알아야 한다.

미국 민주당은 동성애, 낙태를 옹호하며, 혐오방지법을 제정·시행하였으며, 지난 대선과정에서 보듯이 부패하고 많은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위와 같은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미국의 교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전 세계 기독교인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미국을 다스렸던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는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교회에 큰 영향을 주는 문제이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반역하는 문화 막시즘의 위험성에 대하여 공부하고 교인들을 가르치며, 이것을 우리 한국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잠언 29:2)

문화막시즘이란 무엇인가?

정일권 교수(전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 문화를 해체해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난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헌법체제의 대한민국에서 공론화되고 있는 사회주의 성혁명 운동과 성정치 운동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동성애 운동, 퀴어이론과 퀴어신학 그리고 젠더 이데올로기 등의 사상적 뿌리는 문화막시즘이다. 문화막시즘은 자본주의가 붕괴되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을 기독교 문화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문화막시즘은 기독교 문화에 대한 문화전쟁을 선포하면서 문화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성혁명 개념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빌헬름 라이히의 『성혁명』이라는 책의 원제는 『문화전쟁 속의 성』 이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가 지향한 성혁명이 기독교 성도덕에 대한 문화전쟁임을 명백하게 잘 보여준다. 기독교 문화에 대한 문화혁명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성혁명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화막시즘은 유럽에서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21세기 유럽은 68 세대가 아니라,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세대인 89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89세대에 속한다. 사회주의 성혁명과 성정치 운동으로부터 파생된 동성애 운동, 퀴어이론과 퀴어문화축제, 젠더주의 그리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등은 모두 문화막시즘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문화막시즘은 21세기 유럽에서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막시스트들은 위선적인 윤리의 잘못된 기준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체성 위기에 처하도록 몰고 간다.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 이 계획은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화막시즘은 급진적 성혁명을 통해서 문화혁명을 이루기 원했다. 급진적 성교육의 최초 시행자는 헝가리 볼셰비키 문화담당자였던 루카치이다. 그는 부모와 학교의 권위, 가족에 대한 애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문화혁명을 시도하였다.

성혁명을 통한 문화혁명

현대적 의미의 성교육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시작한 게오르크 루카치가 최초로 사회적으로 대규모로 보급시켰다. 그 목적은 이를 구실로 전통적인 서구의 가치관을 전복하려는 것이다. 1919년 루카치는 단명한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학교에서 급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노골적인 방식으로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연애와 성교를 유도했다. 루카치는 문화테러리즘이라는 기관을 조직했다. 루카치는 헝가리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부모와 가정, 가족애라는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진적 성교육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루카치는 막시즘을 사회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성적 쾌락을 지향하는 성교육을 시행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우리는 사회주의적 폭력혁명을 시도하지 않으며, 문화교육으로 점진적으로 침투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에서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문화막시즘에 의하면, 이제 약자, 희생자, 성소수자 등이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주체가 되었다.

제도권 진입을 통한 문화적 헤게모니 장악시도

그람시는 중장기적인 문화막시즘을 제도권 안에 전파함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고자 했다. 독일 68 학생 문화혁명 세대들이 구호로 외쳤던 “제도권으로의 행진”은 이후 실제로 성공을 거두어서, 이 68 학생 운동권 출신들은 독일의 정부, 경제, 대학의 주요 요직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좌파적 담론은 사회전반에 걸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문화막시즘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기독교 문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문화혁명은 무엇보다도 성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918년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공산주의 혁명 운동 실패 이후 서구막시즘을 추구한 학자들은 왜 러시아와 중국과는 달리 서구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 원인을 기독교 문화에서 발견했다. 기독교 문화를 해체해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그들은 보았다. 사회주의 성혁명과 성정치를 통한 기독교 문화의 해체와 전복이라는 중장기적 전략을 문화막시즘은 선택한 것이다.

문화막시즘의 황혼

현 정부에 들어와서 국내에서도 사회주의가 낭만적으로 복권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국내 언론과 방송에서는 유럽 68 운동과 대한민국의 86 운동권을 비교하면서, 문화막시즘과 사회주의적 성혁명과 성정치를 추구했던 유럽 68 운동이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소개되기도 한다. 21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저물고 있고 철지난 유럽사회주의 운동을 한국의 86운동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독일의 68운동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

송다니엘 목사(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유럽 사회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모습을 유지했으나, 오늘날에는 문화막시즘의 영향으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로 세속화, 에로틱화, 반권위화되었다.

송다니엘 목사는 신학공부차 독일에 가서 근 40년을 체류하면서 독일 사회를 연구했다.
독일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독특한 사고 구조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독일의 역사, 철학, 문화 등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68학생혁명 이후의 사회현상, 특히 독일 젊은이들의 사고에 깊숙이 침투된 네오막시즘(문화막시즘)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68운동이란 무엇인가?

68운동은 유럽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미국과 심지어 일본에서도 일어난 신좌파(New Left) 운동으로서, 1968년에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으므로 68운동이라고 하며, 학생이 주도했고 사회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컸으므로 68 학생혁명이라고도 한다.

신좌파는 공산당, 특히 스탈린의 공산당 정치에 실망한 좌파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한 새로운 좌파들을 총칭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 이후 유럽에서 공산당 국가들이 실패하자, 좌파 중에서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파)계열에서 이들의 이론을 많이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좌파들은 네오막시스트들인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오늘날 68혁명이라고 하면, 네오막시즘을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독일 사회를 지속해서 변화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서는 독일 사회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오막시즘(신마르크스주의)는 미국에서 그의 비판자들이 문화막시즘이라고 칭한 이후, 한국에서도 보통 이들을 부를 때 문화막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문화막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네오막시즘을 자세히 알려면 적어도 두 권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하나는 호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과 마르쿠제“에로스와 문명”이다.
국내에 이것이 번역되어 있으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 내년 2-3월에 발행할 목적으로 필자가 해설서를 쓰고 있다.
이들의 가르침이 네오막시즘 / 문화막시즘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을 단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들은 인간의 큰 불행, 즉 전쟁이나 불평등이 억압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고, 세상에도 평화가 오고 유토피아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이들에 따르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인데, 이것을 성도덕과 권위이다.

독일에서는 녹색정당이 이 이념을 정치에 반영한 것이 꽃을 피워, 현재 독일 사회는 상당한 정도로 문화막시즘화 되어 있다.
독일 사회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권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정책을 추진하는 좌파정부가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면 오히려 독일 상황을 추월할 수 있다.
완전한 성적 자유는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좀 예민한 사람은 TV도 보기 어렵다.
너무나도 추악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성적 자유와 반권위 문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이것은 문화막시즘이 성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자체를 성애화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의 에로스화, 사회의 에로스와, 인간의 성애화(Sexualization).
이를 통해 인간 존재가 해방되어 억압이 없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 사고와 감정까지도 성애화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성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실현하는 것, 아무 때나 원할 때에 성행위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렇게 해야 억압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유보가 있기는 하다.
현재의 문화막시즘은 아직 여기까지 주장하지는 않지만, 근본 원리는 같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조기 성교육이 중요하다.
유아기부터 가지고 있는 성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유치원에서는 이것을 실천하는 곳이 늘어난다.
성에 눈을 뜨기 전부터 성행위와 자위를 가르친다.

이들 독일인이 왜 이러한 괴물과 같이 되었을까?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지금 독일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형상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문명화되었다고 믿었던 독일인이 왜 히틀러를 따라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억압이라는 데에서 대답을 찾았다.

사람은 왜 물질적인 풍요에도 행복하지 못하고, 사람 사이에는 반목이 있고, 국가 간에는 전쟁이 빈번하며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이것은 억압에 큰 원인이 있다.
인간은 성적으로 억압당하고 권위로 억압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의식에서 개조되어야 한다.

인간을 이렇게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면 사회적 유토피아가 온다고 이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명감으로 인간과 사회를 에로틱하게 만들고 의식까지도 개조한다.
한국에서는 전교조가 전위부대로 맹렬하게 실행한다.

문화막시즘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들의 구호는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기관을 통한 전진)으로서, 교육기관, 입법기관과 같은 사회의 중요한 공공기관에 이들이 포진함으로써 법령의 개정과 교육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이들의 전술이다. 이러한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므로, 지금 독일에서는 이러한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깊게 적용되었다. 이것 때문에 각성한 기독교인이나 보수적인 사람, 집단에서 반발하고 시위를 할지라도 이미 큰 물결은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안당(AfD)가 인기를 얻고 있으나(전국적으로 10-15% 지지율), 이미 문화막시즘에 경도된 언론은 이들을 나치라고 비판한다. 대안당 회원 중에는 나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스펙트럼의 세계관과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공공기관을 통해 문화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독일의 연방 건강 계몽국은 2017년 학교와 어린이집에 공문을 보내 입학적년기 전의 아동을 위한 조기 성교육을 위한 미디어 패키지를 주문할 수 있게 하였다(80유로). 링크를 클릭하면 누구나 선전문을 볼 수 있다:

“어린이집 상자 – 발견하기, 보기, 느끼기!”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집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책과 그림들, 인형도 있는데, 나체의 아이들 그림도 포함하고 있다. 그림에서 루츠라는 아이의 성기(고환과 음경), 린다라는 여자아이의 여자 성기를 볼 수 있다. 교사를 위한 안내서에는, 교사가 실수한 척하여 바지가 내려오게 하여 아이들이 교사의 성기를 발견하고 느끼게끔 하라고 권고한다. 교육부가 이렇게 저질적인 것을 교사에게 권한다! 어린이가 성인의 성기를 보고 오히려 충격을 받아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을까? 인간이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그렇게 철저한 성적 존재인가? 내가 2020년 2월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미 절판되어 새로운 판이 나온다고 예고되었다. 그만큼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

대안당(AfD)의 마틴 호만에 따르면 2017부터 2019말까지 학교와 어린이집에만 약 1600개가 나갔다고 한다. 호만에 따르면, 이렇게 교육을 받게 되면,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주위 환경이나 생각이 성에 맞추게 된다고 한다. 그는 세 살짜리가 성에 무슨 관심이 있겠냐고 반문하면서 아이는 아이답게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애를 그 정도로 세뇌시킬 정도라면 학교에서는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다. 성을 터부시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타파하려고 한다. 이것이 네오막시즘 사회의 에로틱화 프로그램이다. 이것이 모두 공공연하게 실행되고, 이것이 사회 분위기를 주도하므로, 이러한 배경에서 어린이들이 성인에게 매력적인 먹잇감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사회문제를 일으키므로 독일 의회에서 Cyber Grooming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유럽은 성인 남자가 어린이들에게 chat으로 접근해서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10세 된 소녀가 엄마와 함께 차를 타면서 “엄마, 나 방금 엄마와 섹스하는 것을 생각했어”라는 말을 해서, 엄마가 당장에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를 정신과에 데려가서 이 문제가 공개되었다. 10세 된 소녀가 엄마와 섹스한다는 생각이 말이 되는가? 전혀 말이 안 되지만, 독일에서는 말이 된다. 네오 막시즘은 Erotisierung/ Sexualisierung der Gesellschaft(사회를 에로틱하게 만들자!)를 추구하고 녹색정당과 좌파는 이 이론을 근거로 사회를 섹스화 시키려고 제도적으로 교육기관부터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10세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면, chat에서 누가 자기도 어린애라고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몇 마디 말은 나눈 후에 “너 가끔 밑을 애무하니?”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 아이가 자기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내게 하고 그 어른 남자는 자기 성기와 섹스 사진을 보내어, 나중에 어른이 조사해 보니 휴대전화기에 그러한 사진이 꽉 찼다고 한다. 1년 후에 그 아이가 혼란에 빠져서 엄마와 섹스하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녹색정당과 좌파는 이러한 변태성욕을 정상이라고 한다. 단지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한 것을 범죄로 인정한다. 의회에서 대안당(AfD)이 범죄를 목적으로 나이를 속이는 것을 처벌하는 법안을 상정했으나 좌파 계열(Die Linke, Die Gruenen, SPD)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범죄를 목적으로 나이를 속이는 것이 왜 죄가 되지 않는가? 하긴 이들에게는 섹스는 자유니까!

얼마 있으면 10세 된 아들이 “(아빠에게) 철수야 오늘 나하고 섹스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68혁명이 한창 진행될 무렵, 녹색정당에서 1970-1980년 대에 성인 남자와 소년이 항문 sex하는 것을 합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은 잠잠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또 나올 것이다. 독거 노인에게 sex 대금을 지급하자는 제안도 나왔으나 묵살되었다. 나도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이것이 음란하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합법적이며 다수의 의결을 거친 것이므로 비판은 할지라도 항거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회를 섹스화시키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폭력이 없어지고 생산력이 늘어나고 인간다워진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력이나 정신질환이 줄어들고, 전쟁도 사라진다. 유토피아가 온다. 물론 섹스화만 시켜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다른 프로그램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한국에는 이러한 일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잠깐 살펴보았다.

전학연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성욕 자극하는 성교육 교과서! 이것이 바로 3월부터 학생 손에 쥐어질 교과서 모습이다. 성 교육은 가관의 진수이다. 섹스할 권리 부추김, 콘돔 사용법까지.. 나이에 안 맞는 성교육에 충격받은 학생은 잉태를 수치로 여겨 부모를 회피한다니 이것이 교육이며 교과서 역할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교육으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 살리는 교육이 아닌 죽이기 교육이다. 우리 전국학부모는 아이들 영혼을 말살하고 가정을 해체하며 국가 근본을 흔드는, 편향되고 추악한 교과서에 심히 분노한다. 이런 교과서로 배우느니 학교를 안 보내고 싶고 모르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 3월 아이들 손에 이 책이 가기 전에 당장 배포를 금지하라!”

이들에게 가시와 같은 집단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수적 기독교를 멸시하는 발언을 한다. 세속화된 국가교회도 이에 합세한다. 교회에서 반발하지만 메스컴에서 이러한 글을 실어주지 않으므로 교회는 잠잔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독일에서 경건한 기독교가 고사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시에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 미국의 타락(The Corruption of America)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 미국의 타락(The Corruption of America)

● 출처 : 유튜브 제목 ‘헐리우드 아역배우들이 망가지는 이유(러닝타임 : 20분14초)

(※ 본 요약본은 아래의 유튜브(20분) 영상의 자막을 텍스트로 읽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받아 쓴 스크립트(script)입니다.)

● 오리지날 영상은 Cultural Marxism: The Corruption of America(러닝타임 : 1시간 38분 38초), 다큐멘터리 각본 및 감독 James Jaeger(2010년 6월 출시)입니다.

1.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ctness) =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Ted Baehr 인터뷰)

"미국은 문화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혁명을 겪었습니다.

  호전적 세속주의가 고개를 들며 지식인들의 발목을 잡았고 1960년대부터는 대학생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문화전쟁은 전국에서 시작됐습니다.

  세속주의가 학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헐리우드를 장악하고 정계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나라를 통째로 장악한 건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화전쟁의 기반입니다.

  세속주의는 호전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전통을 무시합니다.
性 혁명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세속주의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나라가 아닙니다.
도덕, 사회, 문화, 신학에 대해 생각이 다른 두 나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전쟁의 결과는 둘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번성하고 다른 하나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정치, 경제 분야에선 소련을 이겼지만 문화전쟁에선 졌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지금 이 나라에 팽배해 있고 이 나라의 문화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주의자들은 그 문화에 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래이션)

미국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정확히 뭘까요?

공산주의자들은 총과 무기가 아닌 가치와 사고로 미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지금부터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칼 마르크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발상이 있었지요.

그의 발상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나 악한 적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악한 적이란 자본주의였습니다.

자본주의란 개인과 기업이 생산수단을 활용해 원하는 만큼 돈을 버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는 그 발상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는 국가가 생산수단과 생산된 제품들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공정히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연합하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뭉치길 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를 다스리고 싶어 했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공산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행히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동자들은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자국을 먼저 생각했고 상대국과 맞서 싸웠습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마르크스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죠.

프랑스, 독일, 영국 노동자들은 아버지의 조국을 위해 기쁘게 싸웠습니다.

마르크스의 발상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지요.

노동자들은 상대국보다 자국, 자국 교회, 자국의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그들은 자신들의 집, 차, 난로 같은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무계급 사회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투표도 안했고 정부를 타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나래이션)

마르크스의 발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의 제자들은 세상을 차지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형을 사는 동안 여러 계획을 세웠고 그의 계획은 ‘교도소 노트북’이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책에서, “노동자들의 연합은 긴 행진이 끝난 뒤 이뤄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연합은 긴 행진이 끝난 뒤 이뤄질 것이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말하자면 문화를 장악해 사람들의 사고를 바꾸려는 것이죠. 

사람들은 애국, 하나님, 조국 등을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은 마르크스주의 실현에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고를 파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관, 신학교, 교회, 언론, 헐리우드 등을 통해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코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적 사고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도록 반 기독교 정서를 확산시켰습니다.

자기들이 거부했던 것들을 많은 사람들도 거부하도록 만들고 결국엔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것을 차지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로 말이죠"

(나래이션)

노동자들을 집결시켜 무력을 사용해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 예술, 영화, 문학, 교육, 신학, 언론, 잡지, 그리고 오늘날 매스 미디어라고 불리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뿌리내리겠다는 말이죠.

기관들을 향한 그러한 행진이 끝나면 마르크스주의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조용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Ted Baehr 인터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문화를 파괴해야 하고 그들이 말하는 문화는 기독교 문화입니다.

‘서양 문명’이라 불리기도 했죠"

(G. Edward Griffin 인터뷰)

"사람들을 종교기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면 도움이 필요할 때 종교기관 대신 정부를 찾게 됩니다.

또한 당혹스런 일이 생겼을 때 말씀을 통해 해답을 찾지 않고 정부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으면 정부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종교를 공격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정부만 바라보는 정부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래이션)

우리는 이제껏 마르크스주의의 지혜를 보고 자본주의의 어리석음을 보도록 주입 또는 세뇌당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문은 열리게 되고 입헌 공화국의 문은 닫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의 성공은 미국 헌법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프랑크푸르트 학파


잠시 뒤로 되돌리겠습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미국에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면,

1923년 마르크스 공산당 회원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한 기관을 설립했고 그 기관의 이름을 ‘사회연구소’로 정했습니다.

나중에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알려지게 되었죠.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지도를 받았던 이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옛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목격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들이 뭉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었죠.

더 나아가 그들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맞았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적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 뒤에 번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만트라는 노동자들을 뭉치게 하기 위해선 서양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G. Edward Griffin 인터뷰)

"그들은 집단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미국을 문화를 통해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가치나 개념을 소개하여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게 만들고 그 가치를 잃게 만들면 가족 구성원에게 받을 수 있었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그들은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엔 정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대로 하게 됩니다."

(나래이션)

하지만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반 마르크스주의, 반 유대주의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신들의 이념과 함께 독일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은 컬럼비아 대학의 도움을 받아 뉴욕 시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긴 행진이 정확히 무엇이며 누가 그 행진에 참여했을까요?

(루 콕스 목소리)

“사회를 혁명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세계적 가치관을 바꾸려면 혁명을 통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도입하는 길 밖에 없다."

(나래이션)

루 콕스가 미국에게 준 선물은 문화적 테러였습니다.

교육기관을 통해 그가 나눠 준 선물의 내용을 보면 사랑은 공짜다,

일부일처제는 구식이다, 종교는 삶과 무관하다,

중산층의 사고는 진부하다 등이 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성적인 관습에 저항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와 서양문화의 핵심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은 결국 성 혁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약에 쩔은 베이비붐 세대가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자라온 나라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물리적으론 같은 나라지만 실제로 우린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이 나라를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어린이들도 사로잡았습니다.
아주 여러 분야에서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래이션)

그람시는 비록 1937년에 죽었지만 그의 책, ‘교도소 노트북’은 서양을 비 기독교화 시키는데 청사진 역할을 하였습니다.

(히피족 인터뷰 목소리)

“인류문명은 무려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 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기독교적 가치에 뿌리를 둔 나라는 그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결코 전복시킬 수 없다.

하지만 뿌리를 자르고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이 필요하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권력은 잘 익은 과일처럼 우리의 무릎 위로 떨어질 것이다.”

(나래이션)

자유를 갈망하고 권력에 저항하기 원했던 베이비붐 세대들은 그람시의 미끼를 기꺼이 받아 먹고 대마초나 피우기 원했습니다.    

공부는 때려치고 록 앤 롤이나 듣자구요

안토니오 그람시는 교도소 안에서 정말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마르크스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먼저 붕괴되는 것이었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1960년대에 교회는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섹스와 사탄에 대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목사가 어린 소년을 성추행하는 장면도 버젖이 삽입했습니다.

모든 영화는 모든 연령대의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저질 영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19금 영화들이 82%를 차지했습니다.

일주일에 4천4백만이 극장을 찾았는데 1천7백만으로 줄어들었죠.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교회가 포기해 버렸습니다.

학교 내 기도시간도 포기하고 더 이상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존슨 대통령이 501c3법안을 통과시켜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불허했고 교회는 그 법에 굴복했습니다.

학교 내에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든 법에도 굴복했습니다.

정부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의 압력에도 굴복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총체적 붕괴였어요.

이런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지만 교회가 다시 부흥하지 않으면 기독교 문화는 절대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G. Edward Griffin 인터뷰)

"특정한 발상과 개념을 계속 주입시켜 집산주의가 무르익도록 만듭니다.

그런 뒤 문제가 생기면 빅 브라더 정부를 찾게 만듭니다.

집산주의란 모든 중요한 사업에는 국민이 반대를 하든 말든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고 그런 뒤 강제로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냅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집산주의의 본질은 강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되어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강제성을 띄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함께 힘을 합쳐 극복하기 원하는 사회적 문제보다 더 부정적인 일에 참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수가 대의를 위해 결정한 것이니 아무말 말고 따라오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반면에 개인주의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지라도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강제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나래이션)

마르크스에 뒤질세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석학 한 두명은 그들만의 몇 가지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비판이론이란 기존에 수용된 모든 기준을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링컨은 정직했다, 가정은 안식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다, 건국자들은 자유를 믿었다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판이론이란 명분으로 미국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만 들먹이기 시작했고 책, 영화, TV, 학교 심지어 성직자를 통해서까지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세뇌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죽였다, 아버지들은 가부장적이다, 하나님은 죽었다, 건립자들은 노예들을 부렸다 등이 있습니다.

기존 세대들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성에 굶주린 성차별주의자들이다, 외국인혐오주의자들이다, 인디언들을 죽인자들이다, 반유대주의자들이다 등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들은 점점 그러한 비판들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곧 영화나 음악에 이러한 비판들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청소년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이론은 특별히 찰스 맨슨이나 존 레논 같은 사람들에게 더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자유러웠고 풍족했으며 특혜를 많이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이 지루하다고 느꼈고 결국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동을 온몸으로 반겼습니다.

마치 그것이 캘리포니아의 태양인양 말이죠.

가정의 죽음, 자유로부터 탈출, 사회주의 군중 심리, 성(性)혁명, 섹스의 즐거움, 권위주의적 인격 등의 책들은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인격이란 책은 특히 많이 팔렸는데 이유는 이 책이 가부장 제도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제도는 중요한 기독교 문화였죠.

영화에서도 가부장적 가정은 성적 억압이 심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그려졌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가족 구성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함께 일하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일하고 돕는 과정 속에서 사랑이 깊어지고 완전해 집니다.
가정에서 그런 것들이 훈련되면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좋은 구성원은 사회에서도 좋은 구성원이 됩니다.

결혼은 기독교 문화에서 특히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영원히 한 몸이 되는 것이 결혼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나래이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중산층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중산층의 기본 토대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결국 미국의 경제 엔진도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경제 엔진이 힘을 잃으면 헌법을 토대로 세워진 정치 구조와 자본주의는 붕괴될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원하는 사회가 되려면 네 가지 목표가 달성되야 합니다.

1. 가정 파괴
2. 사유 재산 파괴
3. 종교 파괴
4. 국가 파괴


그렇게 되면 국가는 결국 구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전락합니다.

그렇습니다.

비판이론은 사악하지만 천재적입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꿈에만 그리던 일을 이룰지도 모르겠습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대법원은 헌법을 왜곡했고 주법원에 부여된 권위를 찬탈했습니다.

또한 세속적 관점과 가치를 미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각 주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항들도 독단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래이션)

이번엔 마르크스가 이긴 것 같아 보입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만 따지는 베이비붐 세대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적 비관론에 완전히 잠겨 나무만 보지 숲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영을 하며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를 온몸으로 흡수합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그들의 가치로 촘촘히 엮어왔습니다.

“우리는 너희를 묻어버릴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이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현대 혼란의 근원인 문화 마르크스주의가 사방에 퍼지고 있다

노동자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많이 사라진 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지금 문화계, 학계, 언론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 날로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네오마르크스주의 (역자 주: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입장을 달리하는 모든 유형의 마르크스주의를 통칭)의 또 다른 이름은 “문화 마르크스주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의 원동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지식인들이다. 노동자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많이 사라진 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지금 문화계, 학계, 언론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1891-1937)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 주체”로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려면 기존의, 주로 기독교의 문화와 도덕을 파괴하고 갈 길을 잃은 대중들을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신조로 인도할 문화 지도층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러한 운동의 목표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세계 정부의 설립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

레닌과 소련

레닌이 이끌었던 러시아 혁명의 가해자들은 러시아에서의 승리가 전 세계 혁명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를 위한 것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1917년 러시아의 산업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 중에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농부들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운동이 아니라 전문적인 혁명가 집단의 결과물이었다. 볼셰비키 정당과 소련의 초대 정부의 구성원들, 또한 강압적인 정부 기구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소련 혁명의 실체는 러시아 사람들을 차르 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혁명의 도약대가 되고자 함이었다.

세계 1차 대전과 그 직후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여겼던 마르크스주의가 착각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예를 통해 사회주의가 독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주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사회주의 독재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사회주의가 성공하려면, 그 전에 기존의 문화가 달라져야 했다. 문화 지배가 정치 지배에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 지배와 정치 지배가 병행되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문화를 지배하려고 고군분투할 때,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지난 몇 십 년간, 이른바 소위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PC)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미국 정부는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장착했다.

2001년 조지 부시 (George W. Bush)가 대통령 특권으로 국가의 비상상태를 선언한 이후 미국은 여전히 비상령 (the emergency law)이 유효한 상태임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는 듯하다. 같은 해에 발생한 9/11 테러는 애국법 (Patriot Act)이 제정되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프리덤 하우스 (Freedom House, 전 세계의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시장 및 국제언론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비영리 인권단체)가 발표한 미국의 “자유 종합 지수(Aggregate Index of Freedom)가 95점에서 2018년 86점으로 하락하였다.

도덕적 부패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어서 지배력을 확장한다. 이를 위해 대중매체와 공공교육은 사람들을 계몽하지 않고 혼란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길로 이끈다. 대중 매체와 교육 기관이 하는 일이란 사회 내부에 편을 갈라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누어진 집단의 정체성은 더욱 더 명확해지고 부당한 처우의 내역과 압제의 역사는 더욱 더 세밀해 진다.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사회적 지위도 얻고, 특별지원, 존경, 사회적 포용을 얻는 권리도 손에 쥐게 된다.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는 필수라고 간주되는 재정지출 목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건강, 교육, 노인복지, “취약”계층, ”박해 받는” 계층, “억압 받는” 계층 등등. 그것이 실제이든 아니면 그렇다고 상상하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이런 것을 무한정 지원하다 보면 국가의 재정은 부패하고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빌미 삼아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문제들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다. 사실 이러한 제도적 실패를 야기한 것은 국가의 규제이고, 재정 불량 상태는 과도한 공공 부채 때문인데 말이다.

정계, 언론계, 사법계까지 쉬지 않고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 마약과의 전쟁, 고혈압 퇴치 전쟁, 비만 퇴치를 위한 무기한 투쟁을 주장하는 캠페인. 물리쳐야 할 적들의 목록은 매일 길어지고 있다. 인종차별주의, 외국인 혐오, 반(反) 이슬람주의,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이런 운동의 완벽한 본보기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 즉 PC다. 바로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갖지 못하도록 싸우는 전쟁이다. 일반인들은 역겨운 행동들이, 특히 예술을 추종한다는 미명 아래 행하는 추잡한 행위들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참아야 하는 반면, 금지어와 금지된 견해들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대중의 의견은 용인된 한정적인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공개적인 토론은 황폐해지는 반면, 급진적인 다양한 의견들은 은밀히 숨어서 꽃을 피우게 된다.

문화 마르스크주의자들은 위선적인 윤리의 잘못된 기준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체성 위기에 처하도록 몰고 간다.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 이 계획은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PC의 독재”이며 그것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손에 있다. 신(新) 정통 교리의 수호자들은 새로운 성직자 계급으로서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들을 지배한다. 개인의 도덕성 파괴는 최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한 필수 관문이다.

지식인들의 아편

네오마르크스주의 숭배자들은 주로 지식인들이다. 노동자들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생산과정이라는 경제 현실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사회주의가 내놓는 약속이 쓰레기임을 알고 있다. 노동운동의 결과로 사회주의는 세워질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의 가해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항상 피해자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지식인 계층의 당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잔학성을 글, 책, 영화, 음악, 그림으로 은폐하고 사회주의에 그럴듯해 보이는 과학적 지성의 옷, 심미적 옷, 및 도덕적 옷을 입히는 것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몫이었다. 사회주의 선전 속에 등장하는 새로운 체제는 공정하기도 하고 생산적인 것 같기도 하다.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젠가 전권 (全權)을 손에 쥐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명령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네오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알면 기절할 만큼 놀랄 일이 있다.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면, 사실 “지식인들의 독재”는 결코 점잖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권력을 잡은 후 일어났던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피해자가 될 것이다. 이는 결국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도 일어났던 일들이었고, 지식인들이 일으켰던 혁명에서 맨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단두대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일찍이 혁명을 지지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로베스피에르도 있었다.

극작가 게오르그 뷰크너 (Georg Büchner)의 연극, ‘당통의 죽음 (Donton’s Death)’에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사투르누스 (Saturn,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신으로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처럼, 혁명은 자신의 아이들을 집어 삼킨다.” 하지만, 혁명은 정신적 아버지들을 먹어 치운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늘날 문화 마르크스주의를 고취시키는 바로 그 지식인들이, 세계정복의 계획이 성공하면, 숙청의 맨 앞줄에 서게 될 것이다.

결론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역사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체제에 대항하는 시위행진은 계속 있었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전 세계 체제 전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향을 바꿀 시간이 아직 있다. 문화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응하려면, 그것의 내재적 약점을 주목해야 한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고 그 기본 교리 (철저한 무산자화, 역사 결정주의, 자본주의의 완전한 붕괴)를 제거한 만큼 문화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이전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이 되었다.

신좌파 (New Left: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 및 정치적 운동을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의 계승자인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모순된 입장을 뒤죽박죽 선전하고 있다.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집단의 갈등을 조장하는 특질 때문에 독재에 필수적인 응축된 정치력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오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반대로, 네오마르크주의에 내재된 모순 때문에 문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현대 서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근원지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위험한 규모로 막 팽창하려고 한다.

이 글은 https://fee.org/articles/cultural-marxism-is-the-main-source-of-modern-confusion-and-its-spread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저자 : Antony Mueller




주 예수의 강림(데살로니가전서 2:19)



주 예수의 강림(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

* 3952. 강림(降臨) 파루시아(parŏusia) παρουσία, ας, ἡ 

1. 현존.  2. 오심. 3. 고린도후서 7:6
발음 / 파루시아[ parŏusia ]
어원 /  3918의 현재분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임함(마 24:3, 벧후 3:12), 강림(고전 15:23, 살전 2:19, 약 5:7), 옴(고전 16:17, 고후 7:6, 7)
신약 성경 / 24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현존, 임재, 고후 10:10.
  • 2. 명사 오심, 강림, 내림.
    • a. 명사 [인간에 대해서] 고후 7:6, 7, 빌 1:26.
    • b. 명사 [특수한 전문 술어로서 그리스도가 세상 마지막에 임하시는 일을 가리킴] 재림, 마 24:3, 살전 4:15, 약 5:7.
      c. 명사 [적그리스도의 출현] 살후 2:9.

* 3381. 강림(降臨) 야라드(yâradיָרַד


1. 내려가다.  2. 창세기 24:16.  3. 시편 107:23
발음 / 야라드[ yârad ]
관련 성경 / 내려오다(창 43:20, 출 11:8, 삼상 23:6), 내리다(출 9:19, 시 133:2, 삼상 6:15), 강림하다(출 19:18, 민 11:17, 시 144:5), 내려가다(창 44:26, 삼상 10:8, 겔 31:18), 나아가다(수 16:7, 왕하 20:11, 사 38:8), 흐르다(시 119:136, 애 1:16),빠지다(사 5:14, 민 16:33), 나아오다(사 38:8),내려지다(렘 13:18), 낮아지다(겔 30:6, 신 28:43), 나오다(미 1:3), 엎드러뜨리다(학 2:22), 엎드러지다(슥 11:2), 함락시키다(신 20:20),헐다(신 28:52), 파괴하다(사 32:19), 가다(창 42:2), 떠나다(삼상 15:6), 밟다(욜 3:13), 들어가다(삼상 26:10, 사 38:18), 흘리다(렘 14:17,애 2:18, 삼상 21:13), 떨어지다(겔 31:12), 내려가다(욘 1:3), 흘러내리다(신 9:21,  수 3:13,16),흘러가다(수 3:16), 이르다(삼상 9:27, 왕하 6:33), 띄우다(시 107:23), 항해하다(사 42:10), 걷다(민 4:5), 달아내리다(수 2:18, 삼상 19:12), 숙이다(애 2:10), 떨어뜨리다(겔 31:16), 떼어내다(출 33:5), 낮추다(시 56:7, 59:11), 내려놓다(창 44:11), 돌아오다(신 1:25), 인도하다(삼상 30:15, 왕하 11:19), 이끌어 내리다(왕상 1:53), 헐다(잠 21:22), 끌어내리다(렘 49:16, 51:40), 복종하게 하다(삼하 22:48), 떨어짐을 당하다(사 14:15)
구약 성경 / 379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내려가다[산에서 내려가거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경우 사용됨].
    • a. 원형 [샘이나 강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창24:16,45, 출2:5, 수17:9,왕상18:44.
    • b. 원형 [바다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시107:23, 사42:10.
    • c.원형 [배에서 상륙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룻3:3,6, 삼상9:27, 왕하6:18.
    • d.원형 [높은 곳에서 평지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창12:10,26:2이하, 46:3.㉡ [블레셋이나 바닷가로] 창38:1, 삼상13:20, 23:6,8,11.㉢ [사마리아로] 왕상22:2, 왕하8:29,10:13.
    • e.원형 [남쪽나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삼상25:1, 26:2.
    • f. 원형 [주] 무생물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 g. 원형 [밑으로 흘러내리는 강] 신9:21.
    • h. 원형 [소나기]시72:6.
    • i. 원형 [아랫방향이나 남쪽으로 지나가는 길과 경계선] 민34:11,12, 수18:13이하
  • 2. 원형 던져지다, 떨어지다, 쓰러지다, 내려지다, 죽다, 무너지다, 함락하다.
    • a.원형 [살해된 사람이나 짐승] 사34:7.
    • b.원형 [번영하다 망하여 궁핍해진 사람들]신28:43.
    • c.원형 [벽이나 담] 신28:52.
    • d.원형 [베어진 나무] 사32:19, 슥11:2.
    • e.원형 [파괴된 도시] 신20:20.
    • f. 원형 히필형 הוֹרִיד: 내려오게 하다, 창42:38,44: 29,31.
    • g. 원형 사람과 관련될 경우. ㉠ 파멸시키다, 창44:21, 삿7:4. ㉡ 내려놓다[동아줄로], 수2:15,18. ㉢ 내려보내다[지옥으로], 삼상2:6, 겔26:20. ㉣ 내던지다, 시56:8(7). ㉤ 허물어뜨리다, 넘어뜨리다, 사10:13. ㉥ 정복하다, 삼하22:48
    • h. 원형 사물과 관련될 경우. ㉠ 싣고가다, 창37:25, 43:11,22. ㉡ 내려보내다, 창24:18,46, 민4:5. ㉢ 흘러내리게 하다, 삼상21:14(13), 욜2:23. ㉣ 파멸시키다, 잠21:22, 호7:12.
    • i. 원형 호팔형 הוּרַד: 창39:1, 사14:11.



성경에서 강림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 39
- 구약 23, 신약 16

1. 창세기 11: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2. 출애굽기 19: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3. 출애굽기 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4. 출애굽기 19:20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5. 출애굽기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출애굽기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7. 출애굽기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8. 민수기 11: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9. 민수기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10. 민수기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11. 신명기 33:2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12. 사사기 5: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13. 사사기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14. 사무엘하 22:10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5. 느헤미야 9:13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16. 시편 18: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7. 시편 144:5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18. 이사야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19. 이사야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찌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산과 그 영 위에서 싸울 것이며

20. 이사야 64: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21. 이사야 64: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22. 이사야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23. 미가 1:3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24. 누가복음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5.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6. 데살로니가전서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7.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8. 데살로니가전서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9. 데살로니가전서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30.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31.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32. 데살로니가후서 1: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33. 데살로니가후서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34. 데살로니가후서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35. 야고보서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36. 야고보서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37. 베드로후서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38. 베드로후서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39. 요한일서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 년부터 1576 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 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
(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 년도 1 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 년도 11 월 15 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 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 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 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 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제 1 주일
제 1 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1
사나 죽으나 2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4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6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7
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8
내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9
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10
1) 고린도전서 6:19-20
2) 로마서 14:7-9
3) 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4) 베드로전서 1:18-19; 요한일서 1:7-9; 2:2
5) 요한복음 8:34-36; 히브리서 2:14-15 ; 요한일서 3:1-11
6)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21:16-18
7) 요한복음 6:39-40; 10:27-30; 데살로니가후서 3:3; 베드로전서 1:5
8) 로마서 8:28
9) 로마서 8:15-16; 고린도후서 1:21-22; 5:5; 에베소서 1:13-14
10) 로마서 8: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