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막시즘



문화막시즘
기독교와의 문화전쟁

문화막시즘과 한국교회의 생존전략

김승규 변호사(법무부장관, 국정원장 역임, 한국기독문화연구소장)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우리의 생각, 가치관과 사상을 말한다.
종전의 유럽과 미국사회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과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가정을 중시하고 성적순결을 강조하며,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고,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 기독교사상을 파괴하는 새로운 생각, 가치관, 윤리의 씨앗을 뿌린 후, 그 위에 마르크스주의를 주입해야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특히 성해방(Free Sex), 동성연애, 급진적 페미니즘, 젠더 이데올로기, 종교다원주의, 인종갈등조장(백인우월주의 강력히 비판), 권위부정(지도자, 교사, 어른, 부모에 대한) 등을 가르치며 막스주의를 미국 내에 퍼뜨렸다.

특히 미국의 2차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게 강력하게 가르쳐 오늘날 미국을 사회주의ㆍ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
미국의 민주당은 소위 ‘딥스테이트(Deep-State, 기득권 정치세력 혹은 그림자정부)’세력, 주류 언론(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거대 다국적기업, 빅테크놀로지그룹(트위터, 페이스북 등) 등과 손을 잡고 전 세계를 전체주의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다 지난 대통령 선거 배후에 중국이 깊이 관여한 정황이 있다고 트럼프 측은 발언하고 있다.
선거를 둘러싼 미국 내 공화당과 민주당간 싸움은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반기독교와의 싸움인 것을 우리 교회는 알아야 한다.

미국 민주당은 동성애, 낙태를 옹호하며, 혐오방지법을 제정·시행하였으며, 지난 대선과정에서 보듯이 부패하고 많은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위와 같은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미국의 교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전 세계 기독교인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미국을 다스렸던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는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교회에 큰 영향을 주는 문제이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반역하는 문화 막시즘의 위험성에 대하여 공부하고 교인들을 가르치며, 이것을 우리 한국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잠언 29:2)

문화막시즘이란 무엇인가?

정일권 교수(전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기독교 문화를 해체해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난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헌법체제의 대한민국에서 공론화되고 있는 사회주의 성혁명 운동과 성정치 운동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동성애 운동, 퀴어이론과 퀴어신학 그리고 젠더 이데올로기 등의 사상적 뿌리는 문화막시즘이다. 문화막시즘은 자본주의가 붕괴되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을 기독교 문화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문화막시즘은 기독교 문화에 대한 문화전쟁을 선포하면서 문화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성혁명 개념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빌헬름 라이히의 『성혁명』이라는 책의 원제는 『문화전쟁 속의 성』 이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가 지향한 성혁명이 기독교 성도덕에 대한 문화전쟁임을 명백하게 잘 보여준다. 기독교 문화에 대한 문화혁명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성혁명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화막시즘은 유럽에서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21세기 유럽은 68 세대가 아니라,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세대인 89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89세대에 속한다. 사회주의 성혁명과 성정치 운동으로부터 파생된 동성애 운동, 퀴어이론과 퀴어문화축제, 젠더주의 그리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등은 모두 문화막시즘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문화막시즘은 21세기 유럽에서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막시스트들은 위선적인 윤리의 잘못된 기준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체성 위기에 처하도록 몰고 간다.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 이 계획은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화막시즘은 급진적 성혁명을 통해서 문화혁명을 이루기 원했다. 급진적 성교육의 최초 시행자는 헝가리 볼셰비키 문화담당자였던 루카치이다. 그는 부모와 학교의 권위, 가족에 대한 애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문화혁명을 시도하였다.

성혁명을 통한 문화혁명

현대적 의미의 성교육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시작한 게오르크 루카치가 최초로 사회적으로 대규모로 보급시켰다. 그 목적은 이를 구실로 전통적인 서구의 가치관을 전복하려는 것이다. 1919년 루카치는 단명한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학교에서 급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노골적인 방식으로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연애와 성교를 유도했다. 루카치는 문화테러리즘이라는 기관을 조직했다. 루카치는 헝가리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부모와 가정, 가족애라는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진적 성교육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루카치는 막시즘을 사회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성적 쾌락을 지향하는 성교육을 시행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우리는 사회주의적 폭력혁명을 시도하지 않으며, 문화교육으로 점진적으로 침투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에서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문화막시즘에 의하면, 이제 약자, 희생자, 성소수자 등이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주체가 되었다.

제도권 진입을 통한 문화적 헤게모니 장악시도

그람시는 중장기적인 문화막시즘을 제도권 안에 전파함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고자 했다. 독일 68 학생 문화혁명 세대들이 구호로 외쳤던 “제도권으로의 행진”은 이후 실제로 성공을 거두어서, 이 68 학생 운동권 출신들은 독일의 정부, 경제, 대학의 주요 요직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좌파적 담론은 사회전반에 걸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문화막시즘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기독교 문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문화혁명은 무엇보다도 성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918년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공산주의 혁명 운동 실패 이후 서구막시즘을 추구한 학자들은 왜 러시아와 중국과는 달리 서구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 원인을 기독교 문화에서 발견했다. 기독교 문화를 해체해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그들은 보았다. 사회주의 성혁명과 성정치를 통한 기독교 문화의 해체와 전복이라는 중장기적 전략을 문화막시즘은 선택한 것이다.

문화막시즘의 황혼

현 정부에 들어와서 국내에서도 사회주의가 낭만적으로 복권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국내 언론과 방송에서는 유럽 68 운동과 대한민국의 86 운동권을 비교하면서, 문화막시즘과 사회주의적 성혁명과 성정치를 추구했던 유럽 68 운동이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소개되기도 한다. 21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저물고 있고 철지난 유럽사회주의 운동을 한국의 86운동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독일의 68운동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

송다니엘 목사(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유럽 사회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모습을 유지했으나, 오늘날에는 문화막시즘의 영향으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로 세속화, 에로틱화, 반권위화되었다.

송다니엘 목사는 신학공부차 독일에 가서 근 40년을 체류하면서 독일 사회를 연구했다.
독일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독특한 사고 구조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독일의 역사, 철학, 문화 등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68학생혁명 이후의 사회현상, 특히 독일 젊은이들의 사고에 깊숙이 침투된 네오막시즘(문화막시즘)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68운동이란 무엇인가?

68운동은 유럽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미국과 심지어 일본에서도 일어난 신좌파(New Left) 운동으로서, 1968년에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으므로 68운동이라고 하며, 학생이 주도했고 사회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컸으므로 68 학생혁명이라고도 한다.

신좌파는 공산당, 특히 스탈린의 공산당 정치에 실망한 좌파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한 새로운 좌파들을 총칭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 이후 유럽에서 공산당 국가들이 실패하자, 좌파 중에서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파)계열에서 이들의 이론을 많이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좌파들은 네오막시스트들인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오늘날 68혁명이라고 하면, 네오막시즘을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독일 사회를 지속해서 변화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제외하고서는 독일 사회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오막시즘(신마르크스주의)는 미국에서 그의 비판자들이 문화막시즘이라고 칭한 이후, 한국에서도 보통 이들을 부를 때 문화막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문화막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네오막시즘을 자세히 알려면 적어도 두 권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하나는 호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과 마르쿠제“에로스와 문명”이다.
국내에 이것이 번역되어 있으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 내년 2-3월에 발행할 목적으로 필자가 해설서를 쓰고 있다.
이들의 가르침이 네오막시즘 / 문화막시즘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을 단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들은 인간의 큰 불행, 즉 전쟁이나 불평등이 억압으로부터 온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고, 세상에도 평화가 오고 유토피아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이들에 따르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인데, 이것을 성도덕과 권위이다.

독일에서는 녹색정당이 이 이념을 정치에 반영한 것이 꽃을 피워, 현재 독일 사회는 상당한 정도로 문화막시즘화 되어 있다.
독일 사회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권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정책을 추진하는 좌파정부가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면 오히려 독일 상황을 추월할 수 있다.
완전한 성적 자유는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좀 예민한 사람은 TV도 보기 어렵다.
너무나도 추악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성적 자유와 반권위 문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이것은 문화막시즘이 성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자체를 성애화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의 에로스화, 사회의 에로스와, 인간의 성애화(Sexualization).
이를 통해 인간 존재가 해방되어 억압이 없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 사고와 감정까지도 성애화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성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실현하는 것, 아무 때나 원할 때에 성행위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렇게 해야 억압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유보가 있기는 하다.
현재의 문화막시즘은 아직 여기까지 주장하지는 않지만, 근본 원리는 같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조기 성교육이 중요하다.
유아기부터 가지고 있는 성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유치원에서는 이것을 실천하는 곳이 늘어난다.
성에 눈을 뜨기 전부터 성행위와 자위를 가르친다.

이들 독일인이 왜 이러한 괴물과 같이 되었을까?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지금 독일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형상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문명화되었다고 믿었던 독일인이 왜 히틀러를 따라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억압이라는 데에서 대답을 찾았다.

사람은 왜 물질적인 풍요에도 행복하지 못하고, 사람 사이에는 반목이 있고, 국가 간에는 전쟁이 빈번하며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이것은 억압에 큰 원인이 있다.
인간은 성적으로 억압당하고 권위로 억압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의식에서 개조되어야 한다.

인간을 이렇게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면 사회적 유토피아가 온다고 이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명감으로 인간과 사회를 에로틱하게 만들고 의식까지도 개조한다.
한국에서는 전교조가 전위부대로 맹렬하게 실행한다.

문화막시즘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들의 구호는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기관을 통한 전진)으로서, 교육기관, 입법기관과 같은 사회의 중요한 공공기관에 이들이 포진함으로써 법령의 개정과 교육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이들의 전술이다. 이러한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므로, 지금 독일에서는 이러한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깊게 적용되었다. 이것 때문에 각성한 기독교인이나 보수적인 사람, 집단에서 반발하고 시위를 할지라도 이미 큰 물결은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안당(AfD)가 인기를 얻고 있으나(전국적으로 10-15% 지지율), 이미 문화막시즘에 경도된 언론은 이들을 나치라고 비판한다. 대안당 회원 중에는 나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스펙트럼의 세계관과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공공기관을 통해 문화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독일의 연방 건강 계몽국은 2017년 학교와 어린이집에 공문을 보내 입학적년기 전의 아동을 위한 조기 성교육을 위한 미디어 패키지를 주문할 수 있게 하였다(80유로). 링크를 클릭하면 누구나 선전문을 볼 수 있다:

“어린이집 상자 – 발견하기, 보기, 느끼기!”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집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책과 그림들, 인형도 있는데, 나체의 아이들 그림도 포함하고 있다. 그림에서 루츠라는 아이의 성기(고환과 음경), 린다라는 여자아이의 여자 성기를 볼 수 있다. 교사를 위한 안내서에는, 교사가 실수한 척하여 바지가 내려오게 하여 아이들이 교사의 성기를 발견하고 느끼게끔 하라고 권고한다. 교육부가 이렇게 저질적인 것을 교사에게 권한다! 어린이가 성인의 성기를 보고 오히려 충격을 받아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을까? 인간이 프로이트의 이론대로 그렇게 철저한 성적 존재인가? 내가 2020년 2월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미 절판되어 새로운 판이 나온다고 예고되었다. 그만큼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

대안당(AfD)의 마틴 호만에 따르면 2017부터 2019말까지 학교와 어린이집에만 약 1600개가 나갔다고 한다. 호만에 따르면, 이렇게 교육을 받게 되면,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주위 환경이나 생각이 성에 맞추게 된다고 한다. 그는 세 살짜리가 성에 무슨 관심이 있겠냐고 반문하면서 아이는 아이답게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애를 그 정도로 세뇌시킬 정도라면 학교에서는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다. 성을 터부시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타파하려고 한다. 이것이 네오막시즘 사회의 에로틱화 프로그램이다. 이것이 모두 공공연하게 실행되고, 이것이 사회 분위기를 주도하므로, 이러한 배경에서 어린이들이 성인에게 매력적인 먹잇감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사회문제를 일으키므로 독일 의회에서 Cyber Grooming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유럽은 성인 남자가 어린이들에게 chat으로 접근해서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10세 된 소녀가 엄마와 함께 차를 타면서 “엄마, 나 방금 엄마와 섹스하는 것을 생각했어”라는 말을 해서, 엄마가 당장에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를 정신과에 데려가서 이 문제가 공개되었다. 10세 된 소녀가 엄마와 섹스한다는 생각이 말이 되는가? 전혀 말이 안 되지만, 독일에서는 말이 된다. 네오 막시즘은 Erotisierung/ Sexualisierung der Gesellschaft(사회를 에로틱하게 만들자!)를 추구하고 녹색정당과 좌파는 이 이론을 근거로 사회를 섹스화 시키려고 제도적으로 교육기관부터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10세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면, chat에서 누가 자기도 어린애라고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몇 마디 말은 나눈 후에 “너 가끔 밑을 애무하니?”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 아이가 자기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내게 하고 그 어른 남자는 자기 성기와 섹스 사진을 보내어, 나중에 어른이 조사해 보니 휴대전화기에 그러한 사진이 꽉 찼다고 한다. 1년 후에 그 아이가 혼란에 빠져서 엄마와 섹스하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녹색정당과 좌파는 이러한 변태성욕을 정상이라고 한다. 단지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한 것을 범죄로 인정한다. 의회에서 대안당(AfD)이 범죄를 목적으로 나이를 속이는 것을 처벌하는 법안을 상정했으나 좌파 계열(Die Linke, Die Gruenen, SPD)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범죄를 목적으로 나이를 속이는 것이 왜 죄가 되지 않는가? 하긴 이들에게는 섹스는 자유니까!

얼마 있으면 10세 된 아들이 “(아빠에게) 철수야 오늘 나하고 섹스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68혁명이 한창 진행될 무렵, 녹색정당에서 1970-1980년 대에 성인 남자와 소년이 항문 sex하는 것을 합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이 지금은 잠잠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또 나올 것이다. 독거 노인에게 sex 대금을 지급하자는 제안도 나왔으나 묵살되었다. 나도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이것이 음란하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합법적이며 다수의 의결을 거친 것이므로 비판은 할지라도 항거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회를 섹스화시키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폭력이 없어지고 생산력이 늘어나고 인간다워진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력이나 정신질환이 줄어들고, 전쟁도 사라진다. 유토피아가 온다. 물론 섹스화만 시켜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다른 프로그램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한국에는 이러한 일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잠깐 살펴보았다.

전학연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성욕 자극하는 성교육 교과서! 이것이 바로 3월부터 학생 손에 쥐어질 교과서 모습이다. 성 교육은 가관의 진수이다. 섹스할 권리 부추김, 콘돔 사용법까지.. 나이에 안 맞는 성교육에 충격받은 학생은 잉태를 수치로 여겨 부모를 회피한다니 이것이 교육이며 교과서 역할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교육으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 살리는 교육이 아닌 죽이기 교육이다. 우리 전국학부모는 아이들 영혼을 말살하고 가정을 해체하며 국가 근본을 흔드는, 편향되고 추악한 교과서에 심히 분노한다. 이런 교과서로 배우느니 학교를 안 보내고 싶고 모르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 3월 아이들 손에 이 책이 가기 전에 당장 배포를 금지하라!”

이들에게 가시와 같은 집단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수적 기독교를 멸시하는 발언을 한다. 세속화된 국가교회도 이에 합세한다. 교회에서 반발하지만 메스컴에서 이러한 글을 실어주지 않으므로 교회는 잠잔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독일에서 경건한 기독교가 고사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시에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 미국의 타락(The Corruption of America)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 미국의 타락(The Corruption of America)

● 출처 : 유튜브 제목 ‘헐리우드 아역배우들이 망가지는 이유(러닝타임 : 20분14초)

(※ 본 요약본은 아래의 유튜브(20분) 영상의 자막을 텍스트로 읽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받아 쓴 스크립트(script)입니다.)

● 오리지날 영상은 Cultural Marxism: The Corruption of America(러닝타임 : 1시간 38분 38초), 다큐멘터리 각본 및 감독 James Jaeger(2010년 6월 출시)입니다.

1.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ctness) = 문화적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

(Ted Baehr 인터뷰)

"미국은 문화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혁명을 겪었습니다.

  호전적 세속주의가 고개를 들며 지식인들의 발목을 잡았고 1960년대부터는 대학생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문화전쟁은 전국에서 시작됐습니다.

  세속주의가 학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헐리우드를 장악하고 정계의 일부를 장악했습니다.

  나라를 통째로 장악한 건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화전쟁의 기반입니다.

  세속주의는 호전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전통을 무시합니다.
性 혁명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세속주의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나라가 아닙니다.
도덕, 사회, 문화, 신학에 대해 생각이 다른 두 나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전쟁의 결과는 둘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번성하고 다른 하나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정치, 경제 분야에선 소련을 이겼지만 문화전쟁에선 졌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지금 이 나라에 팽배해 있고 이 나라의 문화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주의자들은 그 문화에 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래이션)

미국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정확히 뭘까요?

공산주의자들은 총과 무기가 아닌 가치와 사고로 미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지금부터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칼 마르크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발상이 있었지요.

그의 발상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나 악한 적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악한 적이란 자본주의였습니다.

자본주의란 개인과 기업이 생산수단을 활용해 원하는 만큼 돈을 버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는 그 발상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는 국가가 생산수단과 생산된 제품들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공정히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연합하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뭉치길 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를 다스리고 싶어 했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공산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행히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동자들은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자국을 먼저 생각했고 상대국과 맞서 싸웠습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마르크스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죠.

프랑스, 독일, 영국 노동자들은 아버지의 조국을 위해 기쁘게 싸웠습니다.

마르크스의 발상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지요.

노동자들은 상대국보다 자국, 자국 교회, 자국의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그들은 자신들의 집, 차, 난로 같은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무계급 사회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투표도 안했고 정부를 타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나래이션)

마르크스의 발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의 제자들은 세상을 차지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형을 사는 동안 여러 계획을 세웠고 그의 계획은 ‘교도소 노트북’이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책에서, “노동자들의 연합은 긴 행진이 끝난 뒤 이뤄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연합은 긴 행진이 끝난 뒤 이뤄질 것이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말하자면 문화를 장악해 사람들의 사고를 바꾸려는 것이죠. 

사람들은 애국, 하나님, 조국 등을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은 마르크스주의 실현에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고를 파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관, 신학교, 교회, 언론, 헐리우드 등을 통해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코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적 사고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도록 반 기독교 정서를 확산시켰습니다.

자기들이 거부했던 것들을 많은 사람들도 거부하도록 만들고 결국엔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것을 차지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로 말이죠"

(나래이션)

노동자들을 집결시켜 무력을 사용해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 예술, 영화, 문학, 교육, 신학, 언론, 잡지, 그리고 오늘날 매스 미디어라고 불리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뿌리내리겠다는 말이죠.

기관들을 향한 그러한 행진이 끝나면 마르크스주의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조용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Ted Baehr 인터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문화를 파괴해야 하고 그들이 말하는 문화는 기독교 문화입니다.

‘서양 문명’이라 불리기도 했죠"

(G. Edward Griffin 인터뷰)

"사람들을 종교기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면 도움이 필요할 때 종교기관 대신 정부를 찾게 됩니다.

또한 당혹스런 일이 생겼을 때 말씀을 통해 해답을 찾지 않고 정부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으면 정부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종교를 공격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정부만 바라보는 정부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래이션)

우리는 이제껏 마르크스주의의 지혜를 보고 자본주의의 어리석음을 보도록 주입 또는 세뇌당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문은 열리게 되고 입헌 공화국의 문은 닫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의 성공은 미국 헌법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프랑크푸르트 학파


잠시 뒤로 되돌리겠습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미국에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면,

1923년 마르크스 공산당 회원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한 기관을 설립했고 그 기관의 이름을 ‘사회연구소’로 정했습니다.

나중에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알려지게 되었죠.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지도를 받았던 이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옛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목격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들이 뭉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었죠.

더 나아가 그들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맞았던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적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 뒤에 번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만트라는 노동자들을 뭉치게 하기 위해선 서양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G. Edward Griffin 인터뷰)

"그들은 집단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미국을 문화를 통해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가치나 개념을 소개하여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게 만들고 그 가치를 잃게 만들면 가족 구성원에게 받을 수 있었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그들은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엔 정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대로 하게 됩니다."

(나래이션)

하지만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반 마르크스주의, 반 유대주의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신들의 이념과 함께 독일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은 컬럼비아 대학의 도움을 받아 뉴욕 시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긴 행진이 정확히 무엇이며 누가 그 행진에 참여했을까요?

(루 콕스 목소리)

“사회를 혁명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세계적 가치관을 바꾸려면 혁명을 통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도입하는 길 밖에 없다."

(나래이션)

루 콕스가 미국에게 준 선물은 문화적 테러였습니다.

교육기관을 통해 그가 나눠 준 선물의 내용을 보면 사랑은 공짜다,

일부일처제는 구식이다, 종교는 삶과 무관하다,

중산층의 사고는 진부하다 등이 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성적인 관습에 저항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와 서양문화의 핵심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은 결국 성 혁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약에 쩔은 베이비붐 세대가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자라온 나라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물리적으론 같은 나라지만 실제로 우린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이 나라를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어린이들도 사로잡았습니다.
아주 여러 분야에서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래이션)

그람시는 비록 1937년에 죽었지만 그의 책, ‘교도소 노트북’은 서양을 비 기독교화 시키는데 청사진 역할을 하였습니다.

(히피족 인터뷰 목소리)

“인류문명은 무려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 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기독교적 가치에 뿌리를 둔 나라는 그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결코 전복시킬 수 없다.

하지만 뿌리를 자르고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이 필요하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권력은 잘 익은 과일처럼 우리의 무릎 위로 떨어질 것이다.”

(나래이션)

자유를 갈망하고 권력에 저항하기 원했던 베이비붐 세대들은 그람시의 미끼를 기꺼이 받아 먹고 대마초나 피우기 원했습니다.    

공부는 때려치고 록 앤 롤이나 듣자구요

안토니오 그람시는 교도소 안에서 정말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마르크스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먼저 붕괴되는 것이었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1960년대에 교회는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섹스와 사탄에 대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목사가 어린 소년을 성추행하는 장면도 버젖이 삽입했습니다.

모든 영화는 모든 연령대의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저질 영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19금 영화들이 82%를 차지했습니다.

일주일에 4천4백만이 극장을 찾았는데 1천7백만으로 줄어들었죠.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교회가 포기해 버렸습니다.

학교 내 기도시간도 포기하고 더 이상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존슨 대통령이 501c3법안을 통과시켜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불허했고 교회는 그 법에 굴복했습니다.

학교 내에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든 법에도 굴복했습니다.

정부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의 압력에도 굴복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총체적 붕괴였어요.

이런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지만 교회가 다시 부흥하지 않으면 기독교 문화는 절대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G. Edward Griffin 인터뷰)

"특정한 발상과 개념을 계속 주입시켜 집산주의가 무르익도록 만듭니다.

그런 뒤 문제가 생기면 빅 브라더 정부를 찾게 만듭니다.

집산주의란 모든 중요한 사업에는 국민이 반대를 하든 말든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고 그런 뒤 강제로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냅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집산주의의 본질은 강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되어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강제성을 띄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함께 힘을 합쳐 극복하기 원하는 사회적 문제보다 더 부정적인 일에 참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수가 대의를 위해 결정한 것이니 아무말 말고 따라오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반면에 개인주의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지라도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강제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나래이션)

마르크스에 뒤질세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석학 한 두명은 그들만의 몇 가지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비판이론이란 기존에 수용된 모든 기준을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링컨은 정직했다, 가정은 안식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다, 건국자들은 자유를 믿었다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판이론이란 명분으로 미국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만 들먹이기 시작했고 책, 영화, TV, 학교 심지어 성직자를 통해서까지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세뇌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죽였다, 아버지들은 가부장적이다, 하나님은 죽었다, 건립자들은 노예들을 부렸다 등이 있습니다.

기존 세대들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성에 굶주린 성차별주의자들이다, 외국인혐오주의자들이다, 인디언들을 죽인자들이다, 반유대주의자들이다 등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들은 점점 그러한 비판들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곧 영화나 음악에 이러한 비판들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청소년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이론은 특별히 찰스 맨슨이나 존 레논 같은 사람들에게 더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자유러웠고 풍족했으며 특혜를 많이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이 지루하다고 느꼈고 결국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동을 온몸으로 반겼습니다.

마치 그것이 캘리포니아의 태양인양 말이죠.

가정의 죽음, 자유로부터 탈출, 사회주의 군중 심리, 성(性)혁명, 섹스의 즐거움, 권위주의적 인격 등의 책들은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인격이란 책은 특히 많이 팔렸는데 이유는 이 책이 가부장 제도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제도는 중요한 기독교 문화였죠.

영화에서도 가부장적 가정은 성적 억압이 심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그려졌습니다.

(Ted Baehr 인터뷰)

"가족 구성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함께 일하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일하고 돕는 과정 속에서 사랑이 깊어지고 완전해 집니다.
가정에서 그런 것들이 훈련되면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좋은 구성원은 사회에서도 좋은 구성원이 됩니다.

결혼은 기독교 문화에서 특히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영원히 한 몸이 되는 것이 결혼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나래이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중산층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중산층의 기본 토대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결국 미국의 경제 엔진도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경제 엔진이 힘을 잃으면 헌법을 토대로 세워진 정치 구조와 자본주의는 붕괴될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원하는 사회가 되려면 네 가지 목표가 달성되야 합니다.

1. 가정 파괴
2. 사유 재산 파괴
3. 종교 파괴
4. 국가 파괴


그렇게 되면 국가는 결국 구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전락합니다.

그렇습니다.

비판이론은 사악하지만 천재적입니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꿈에만 그리던 일을 이룰지도 모르겠습니다.

(패트릭 J. 뷰캐넌 인터뷰)

"대법원은 헌법을 왜곡했고 주법원에 부여된 권위를 찬탈했습니다.

또한 세속적 관점과 가치를 미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각 주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항들도 독단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래이션)

이번엔 마르크스가 이긴 것 같아 보입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만 따지는 베이비붐 세대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적 비관론에 완전히 잠겨 나무만 보지 숲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영을 하며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를 온몸으로 흡수합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그들의 가치로 촘촘히 엮어왔습니다.

“우리는 너희를 묻어버릴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이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현대 혼란의 근원인 문화 마르크스주의가 사방에 퍼지고 있다

노동자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많이 사라진 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지금 문화계, 학계, 언론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 날로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네오마르크스주의 (역자 주: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입장을 달리하는 모든 유형의 마르크스주의를 통칭)의 또 다른 이름은 “문화 마르크스주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의 원동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지식인들이다. 노동자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많이 사라진 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지금 문화계, 학계, 언론계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1891-1937)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 주체”로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려면 기존의, 주로 기독교의 문화와 도덕을 파괴하고 갈 길을 잃은 대중들을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신조로 인도할 문화 지도층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러한 운동의 목표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세계 정부의 설립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

레닌과 소련

레닌이 이끌었던 러시아 혁명의 가해자들은 러시아에서의 승리가 전 세계 혁명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를 위한 것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1917년 러시아의 산업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 중에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농부들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운동이 아니라 전문적인 혁명가 집단의 결과물이었다. 볼셰비키 정당과 소련의 초대 정부의 구성원들, 또한 강압적인 정부 기구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소련 혁명의 실체는 러시아 사람들을 차르 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혁명의 도약대가 되고자 함이었다.

세계 1차 대전과 그 직후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여겼던 마르크스주의가 착각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의 예를 통해 사회주의가 독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주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사회주의 독재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사회주의가 성공하려면, 그 전에 기존의 문화가 달라져야 했다. 문화 지배가 정치 지배에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 지배와 정치 지배가 병행되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문화를 지배하려고 고군분투할 때,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지난 몇 십 년간, 이른바 소위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PC)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미국 정부는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장착했다.

2001년 조지 부시 (George W. Bush)가 대통령 특권으로 국가의 비상상태를 선언한 이후 미국은 여전히 비상령 (the emergency law)이 유효한 상태임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는 듯하다. 같은 해에 발생한 9/11 테러는 애국법 (Patriot Act)이 제정되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프리덤 하우스 (Freedom House, 전 세계의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시장 및 국제언론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비영리 인권단체)가 발표한 미국의 “자유 종합 지수(Aggregate Index of Freedom)가 95점에서 2018년 86점으로 하락하였다.

도덕적 부패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어서 지배력을 확장한다. 이를 위해 대중매체와 공공교육은 사람들을 계몽하지 않고 혼란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길로 이끈다. 대중 매체와 교육 기관이 하는 일이란 사회 내부에 편을 갈라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누어진 집단의 정체성은 더욱 더 명확해지고 부당한 처우의 내역과 압제의 역사는 더욱 더 세밀해 진다.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사회적 지위도 얻고, 특별지원, 존경, 사회적 포용을 얻는 권리도 손에 쥐게 된다.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는 필수라고 간주되는 재정지출 목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건강, 교육, 노인복지, “취약”계층, ”박해 받는” 계층, “억압 받는” 계층 등등. 그것이 실제이든 아니면 그렇다고 상상하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이런 것을 무한정 지원하다 보면 국가의 재정은 부패하고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빌미 삼아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문제들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다. 사실 이러한 제도적 실패를 야기한 것은 국가의 규제이고, 재정 불량 상태는 과도한 공공 부채 때문인데 말이다.

정계, 언론계, 사법계까지 쉬지 않고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 마약과의 전쟁, 고혈압 퇴치 전쟁, 비만 퇴치를 위한 무기한 투쟁을 주장하는 캠페인. 물리쳐야 할 적들의 목록은 매일 길어지고 있다. 인종차별주의, 외국인 혐오, 반(反) 이슬람주의,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이런 운동의 완벽한 본보기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 즉 PC다. 바로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갖지 못하도록 싸우는 전쟁이다. 일반인들은 역겨운 행동들이, 특히 예술을 추종한다는 미명 아래 행하는 추잡한 행위들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참아야 하는 반면, 금지어와 금지된 견해들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대중의 의견은 용인된 한정적인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공개적인 토론은 황폐해지는 반면, 급진적인 다양한 의견들은 은밀히 숨어서 꽃을 피우게 된다.

문화 마르스크주의자들은 위선적인 윤리의 잘못된 기준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체성 위기에 처하도록 몰고 간다.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 이 계획은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PC의 독재”이며 그것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손에 있다. 신(新) 정통 교리의 수호자들은 새로운 성직자 계급으로서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들을 지배한다. 개인의 도덕성 파괴는 최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한 필수 관문이다.

지식인들의 아편

네오마르크스주의 숭배자들은 주로 지식인들이다. 노동자들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생산과정이라는 경제 현실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사회주의가 내놓는 약속이 쓰레기임을 알고 있다. 노동운동의 결과로 사회주의는 세워질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의 가해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항상 피해자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지식인 계층의 당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잔학성을 글, 책, 영화, 음악, 그림으로 은폐하고 사회주의에 그럴듯해 보이는 과학적 지성의 옷, 심미적 옷, 및 도덕적 옷을 입히는 것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몫이었다. 사회주의 선전 속에 등장하는 새로운 체제는 공정하기도 하고 생산적인 것 같기도 하다.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젠가 전권 (全權)을 손에 쥐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명령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네오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알면 기절할 만큼 놀랄 일이 있다.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면, 사실 “지식인들의 독재”는 결코 점잖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권력을 잡은 후 일어났던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피해자가 될 것이다. 이는 결국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도 일어났던 일들이었고, 지식인들이 일으켰던 혁명에서 맨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단두대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일찍이 혁명을 지지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로베스피에르도 있었다.

극작가 게오르그 뷰크너 (Georg Büchner)의 연극, ‘당통의 죽음 (Donton’s Death)’에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사투르누스 (Saturn,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신으로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처럼, 혁명은 자신의 아이들을 집어 삼킨다.” 하지만, 혁명은 정신적 아버지들을 먹어 치운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늘날 문화 마르크스주의를 고취시키는 바로 그 지식인들이, 세계정복의 계획이 성공하면, 숙청의 맨 앞줄에 서게 될 것이다.

결론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역사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체제에 대항하는 시위행진은 계속 있었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전 세계 체제 전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향을 바꿀 시간이 아직 있다. 문화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응하려면, 그것의 내재적 약점을 주목해야 한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고 그 기본 교리 (철저한 무산자화, 역사 결정주의, 자본주의의 완전한 붕괴)를 제거한 만큼 문화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이전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이 되었다.

신좌파 (New Left: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 및 정치적 운동을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의 계승자인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모순된 입장을 뒤죽박죽 선전하고 있다.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집단의 갈등을 조장하는 특질 때문에 독재에 필수적인 응축된 정치력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오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반대로, 네오마르크주의에 내재된 모순 때문에 문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현대 서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근원지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위험한 규모로 막 팽창하려고 한다.

이 글은 https://fee.org/articles/cultural-marxism-is-the-main-source-of-modern-confusion-and-its-spread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저자 : Antony Mueller




주 예수의 강림(데살로니가전서 2:19)



주 예수의 강림(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

* 3952. 강림(降臨) 파루시아(parŏusia) παρουσία, ας, ἡ 

1. 현존.  2. 오심. 3. 고린도후서 7:6
발음 / 파루시아[ parŏusia ]
어원 /  3918의 현재분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임함(마 24:3, 벧후 3:12), 강림(고전 15:23, 살전 2:19, 약 5:7), 옴(고전 16:17, 고후 7:6, 7)
신약 성경 / 24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현존, 임재, 고후 10:10.
  • 2. 명사 오심, 강림, 내림.
    • a. 명사 [인간에 대해서] 고후 7:6, 7, 빌 1:26.
    • b. 명사 [특수한 전문 술어로서 그리스도가 세상 마지막에 임하시는 일을 가리킴] 재림, 마 24:3, 살전 4:15, 약 5:7.
      c. 명사 [적그리스도의 출현] 살후 2:9.

* 3381. 강림(降臨) 야라드(yâradיָרַד


1. 내려가다.  2. 창세기 24:16.  3. 시편 107:23
발음 / 야라드[ yârad ]
관련 성경 / 내려오다(창 43:20, 출 11:8, 삼상 23:6), 내리다(출 9:19, 시 133:2, 삼상 6:15), 강림하다(출 19:18, 민 11:17, 시 144:5), 내려가다(창 44:26, 삼상 10:8, 겔 31:18), 나아가다(수 16:7, 왕하 20:11, 사 38:8), 흐르다(시 119:136, 애 1:16),빠지다(사 5:14, 민 16:33), 나아오다(사 38:8),내려지다(렘 13:18), 낮아지다(겔 30:6, 신 28:43), 나오다(미 1:3), 엎드러뜨리다(학 2:22), 엎드러지다(슥 11:2), 함락시키다(신 20:20),헐다(신 28:52), 파괴하다(사 32:19), 가다(창 42:2), 떠나다(삼상 15:6), 밟다(욜 3:13), 들어가다(삼상 26:10, 사 38:18), 흘리다(렘 14:17,애 2:18, 삼상 21:13), 떨어지다(겔 31:12), 내려가다(욘 1:3), 흘러내리다(신 9:21,  수 3:13,16),흘러가다(수 3:16), 이르다(삼상 9:27, 왕하 6:33), 띄우다(시 107:23), 항해하다(사 42:10), 걷다(민 4:5), 달아내리다(수 2:18, 삼상 19:12), 숙이다(애 2:10), 떨어뜨리다(겔 31:16), 떼어내다(출 33:5), 낮추다(시 56:7, 59:11), 내려놓다(창 44:11), 돌아오다(신 1:25), 인도하다(삼상 30:15, 왕하 11:19), 이끌어 내리다(왕상 1:53), 헐다(잠 21:22), 끌어내리다(렘 49:16, 51:40), 복종하게 하다(삼하 22:48), 떨어짐을 당하다(사 14:15)
구약 성경 / 379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내려가다[산에서 내려가거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경우 사용됨].
    • a. 원형 [샘이나 강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창24:16,45, 출2:5, 수17:9,왕상18:44.
    • b. 원형 [바다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시107:23, 사42:10.
    • c.원형 [배에서 상륙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룻3:3,6, 삼상9:27, 왕하6:18.
    • d.원형 [높은 곳에서 평지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창12:10,26:2이하, 46:3.㉡ [블레셋이나 바닷가로] 창38:1, 삼상13:20, 23:6,8,11.㉢ [사마리아로] 왕상22:2, 왕하8:29,10:13.
    • e.원형 [남쪽나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 삼상25:1, 26:2.
    • f. 원형 [주] 무생물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 g. 원형 [밑으로 흘러내리는 강] 신9:21.
    • h. 원형 [소나기]시72:6.
    • i. 원형 [아랫방향이나 남쪽으로 지나가는 길과 경계선] 민34:11,12, 수18:13이하
  • 2. 원형 던져지다, 떨어지다, 쓰러지다, 내려지다, 죽다, 무너지다, 함락하다.
    • a.원형 [살해된 사람이나 짐승] 사34:7.
    • b.원형 [번영하다 망하여 궁핍해진 사람들]신28:43.
    • c.원형 [벽이나 담] 신28:52.
    • d.원형 [베어진 나무] 사32:19, 슥11:2.
    • e.원형 [파괴된 도시] 신20:20.
    • f. 원형 히필형 הוֹרִיד: 내려오게 하다, 창42:38,44: 29,31.
    • g. 원형 사람과 관련될 경우. ㉠ 파멸시키다, 창44:21, 삿7:4. ㉡ 내려놓다[동아줄로], 수2:15,18. ㉢ 내려보내다[지옥으로], 삼상2:6, 겔26:20. ㉣ 내던지다, 시56:8(7). ㉤ 허물어뜨리다, 넘어뜨리다, 사10:13. ㉥ 정복하다, 삼하22:48
    • h. 원형 사물과 관련될 경우. ㉠ 싣고가다, 창37:25, 43:11,22. ㉡ 내려보내다, 창24:18,46, 민4:5. ㉢ 흘러내리게 하다, 삼상21:14(13), 욜2:23. ㉣ 파멸시키다, 잠21:22, 호7:12.
    • i. 원형 호팔형 הוּרַד: 창39:1, 사14:11.



성경에서 강림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 39
- 구약 23, 신약 16

1. 창세기 11: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2. 출애굽기 19: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3. 출애굽기 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4. 출애굽기 19:20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5. 출애굽기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출애굽기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7. 출애굽기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8. 민수기 11: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9. 민수기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10. 민수기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11. 신명기 33:2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12. 사사기 5: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13. 사사기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14. 사무엘하 22:10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5. 느헤미야 9:13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16. 시편 18: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7. 시편 144:5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18. 이사야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19. 이사야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찌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산과 그 영 위에서 싸울 것이며

20. 이사야 64: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21. 이사야 64: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22. 이사야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23. 미가 1:3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24. 누가복음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5.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6. 데살로니가전서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7.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8. 데살로니가전서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9. 데살로니가전서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30.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31.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32. 데살로니가후서 1: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33. 데살로니가후서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34. 데살로니가후서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35. 야고보서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36. 야고보서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37. 베드로후서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38. 베드로후서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39. 요한일서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59 년부터 1576 년까지 독일의
팔라티네이트 지역을 다스렸던 프레드릭 III 세의 요청에 의해서
1563 년도에 하이델베르그시에서 작성되었다. 본 요리문답은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 그리고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있는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에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고안되었다. 오랜 전통은 본 요리문답의 저자로
자카리아스 울시누스 (Zacharias Ursinus)와 캐스퍼 올리비아누스
(Caspar Olevianus)를 공동저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사실 요리문답의
프로젝트는 프레드릭 III 세의 지휘 아래 여러 목회자들과 대학의
신학자들의 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울시누스는 아마도 그 팀의
주요저자로 그리고 올리비아누스는 그보다 적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작성된 직후 1563 년도 1 월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한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본문에 약간을 첨가한 두번째와 세번째
독일어 판, 그리고 라틴어 번역이 같은 해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세번째 독일어 판은 1563 년도 11 월 15 일에 작성된
팔라티네이트 교회헌법에 포함되었는데, 그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 개의 주일로 구성되어서 주일의 오후 예배에 사용되도록
하였다. 그렇게 사용하면 요리문답 전체를 1 년의 설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돌트총회에서 1619 년도에 인준된 직후에
개혁교회들 사이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문서 중에서 현재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따듯하게 받아들여지는 요리문답으로 남아있다.
본 요리문답에 포함된 관련 성경구절들 대부분은 초기 독일어와
라틴어 판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미개혁교회 (CRC)의
1975 년도 총회가 타당하다고 인준한 것들이다



제 1 주일
제 1 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1
사나 죽으나 2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4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6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7
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8
내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9
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10
1) 고린도전서 6:19-20
2) 로마서 14:7-9
3) 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4) 베드로전서 1:18-19; 요한일서 1:7-9; 2:2
5) 요한복음 8:34-36; 히브리서 2:14-15 ; 요한일서 3:1-11
6)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21:16-18
7) 요한복음 6:39-40; 10:27-30; 데살로니가후서 3:3; 베드로전서 1:5
8) 로마서 8:28
9) 로마서 8:15-16; 고린도후서 1:21-22; 5:5; 에베소서 1:13-14
10) 로마서 8:1-17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타 투 데우 알라(도리어) 타 톤 안드로폰

하나님의 일(things of God)
사람의 일(things of Men)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의외로 장차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고 이에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며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일’에 눈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를 보면 바로 앞에 벳새다의 맹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엔 맹인거지 바디메오를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예언, 제자들의 오해와 무관심,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 등이 나옵니다.
맹인을 고치는 이야기가 앞과 뒤에 나오고 그 가운데 위의 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예수님께 사람의 일을 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생각하고 구했던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이익이나 지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예고를 듣자 항변했다고 합니다.
항변의 원어 뜻은 ‘꾸짖으면서 말리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얼마나 대우받고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며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나 요한과 다른 열 제자도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나의 자리가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제자 중에 으뜸 된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사단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을 꾀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로 아담과 하와를 꾀었습니다.
가인은 자신보다 더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 또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은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견딜 수 없어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하기보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불러 주심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누가 봐도 저 자리는 내가 앉아야 할 자리인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가 바로 내가 해야 할 원래의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해서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리 때문에 마음 흔들려 하지 마시고 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데도 뭔가 현실에서 주어지는 게 없는 것 같고, 기대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예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때,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히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성인들은 천주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이여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 라고 하든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의 공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행위입니다. 직업에 따라 병의 종류에 따라 간구하는 성인들이 각각 있는데 예를 들자면 불임 여성은 “성 안토니” 관절염은 “성 야고보” 두통은 “성 데니스” 눈병은 “성 루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나라에 따라 2000-4000개의 성상(성인들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국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이교도들이 신들의 왕인 쥬피터(jupiter)와 그의 아내인 쥬노(juno)와 그 외의 다른 신들을 약간의 차등을 가지고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3: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둑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마지막 단원에 중세시대의 유골 도둑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의 유물이나 유골 등을 성유물이라 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신통력이 있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어 숭배하였습니다. 성물 숭배, 성인 숭배 사상입니다. 성인숭배 사상이란 이미 죽은 특정 인물을 중보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준다는 사상입니다. 유명한 성유물을 안치하고 있는 수도원은 순례자가 쇄도하고 순례자의 수만큼 헌금이 쌓이게 되었고 존귀한 유골이 있던 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저절로 영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원하거나 수도원을 부흥시키려면 유명한 성자의 유골을 모아 두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험한 유골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가 된 수도사도 생겼고, 전문적인 성유물 산업이 생겨나 성유물이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름 없던 유골도 오히려 도둑맞음으로 더 가치가 있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성유물을 위해 살아 있는 성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의 집성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가 성인이 될 것으로 예상을 했다고 합니다. 1274년 그가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큰 가마에 끓여서 분해하고 성유물로 분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1000년경, 성 롬알도스는 움브리아 산중에서 고행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덕행을 사모하는 마을 주민들이 그의 성유물을 다른 마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손쉽게 성유물로 만들어 버리자며 덮쳤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인의 유골이나 그의 유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성유물 유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사 중에는 성유물만 전문적으로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오늘 성경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된 노를 저으며 비린내 나는 고기와 일평생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고된 노를 젓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로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관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평생 갈릴리를 떠나지 못할 사람이 예수님이 다니는 곳 어이든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출세한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엄청난 칭찬의 소리와 대단한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면 적어도 좌의정이나 우의정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잡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여유롭게 살만한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 고난을 받으실 것, 죽임을 당할 것, 제 3일에 부활하실 것 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받고 버림바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반드시 버림받으시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하는 메시아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자신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죽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서 대접받고,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고,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다닌 것이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 건축을 잘하고 준공을 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강대상 앞 커튼을 하는데 장로님 마음대로 빨간색을 해 놓았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배경 커튼은 방송화면이기 때문에 파란색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장로님은 자기 고집대로 해 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이 야단을 치자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사람의 일, 자기 일을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을 듣자 예수님의 뜻을 막으려고 책망조로 훈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자신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조종자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더 의롭고 더 지혜로운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부 주제에 칭찬해 주니까 권위를 주니까 마치 자신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강도에게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 사역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게 때문에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받지 말고 죽지 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때 어디로 물러가라고 합니까? 내 뒤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제 신분을 알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지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생각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척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늘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과 사람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1.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선택하며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역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나누어질 때 “이 때로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점을 통해 마태복음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4장 16절까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 언약을 이루실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1:23),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1:21),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왕’(2:2;3:2,3)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2부는 4:17-16:20에서는 이 왕께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가르치며, 이적을 통해 그 나라를 보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5:1-7:29에서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8:1-10:42에서는 이적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11:1-16:20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새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왕(16:21-28:20)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수난과 죽음의 사역, 그리고 이어지는 부활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히9:28) 영원한 효력이 있는(히10:12) 제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바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런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3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17장 22-23절을 보세요. 20장 17-19절을 보세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16:22) 제자들은 매우 근심합니다(마17:23).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은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누가 높느냐고 다투고 있습니다(마20:20-)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일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구속사를 완성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철저히 이 구속사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2:15)”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23)”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1)”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5)”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56)”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9)”

2. 우리는 예수님처럼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확하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는 인기 몰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아 성취가 아닙니다. 각기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예수님을 좇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압니다. 그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 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첫째,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분명한 약속이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둘째,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한 성도 어느 날 없어집니다. 로마의 영광도 바벨론의 영광도 애굽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셋째,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니까 하루에 남자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중 어느 길을 택합니까? 멋진 베드로 의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두 길 중, 이 선택이 우리의 평생 선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16절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그 다음 내용들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서 가르치시니 라는 말은 이제야 가르치실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권을 가지고 영광과 존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과 죽으심을 받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간하다는 말은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간함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에게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베드로의 노력이 예수님께는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사단의 계략이라고 여기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합니다. 베드로의 말의 의미 속에 무엇이 사단적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경계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는 말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선하신데 어떻게 그런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나겠는가? 그렇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생각은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 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호의에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이 증명되며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많은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그리고 왜 죽으셔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가 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죄인을 대신하여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그리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분이 그리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이 아닌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방법과 뜻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내용 가운데 고난과 죽음은 분명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에 국한 된 것이기에 우리가 본받거나 따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것이 예수님께로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이나 방식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방식이며 방법임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가 따르며 순종해야 하며 삶의 원리와 자세로 삼아야 할 방식이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즉 신자라고 불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그 신자됨과 제자됨이 증명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아 사람의 방식과 방법을 쫓습니다. 그래서 교회됨을 성도 수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세속주의가 얼마나 교회에 가득 찼는가 하면 대부분이 교회의 크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넘어지게 함은 교회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증명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에 나를 위한 욕구나 주장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부인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영광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잘됨으로 증명하며 똑똑함으로 증명하며 남들 위에 있음으로 증명하며 무시당하지 않음으로 증명하라고 합니다. 사단을 따르는 자는 결코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어 냅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주장하며 자신이 옳다고 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을 교묘하게 바꾸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함으로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로 스스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꿰임에 빠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욱 우리의 무능함과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식하여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며 의지하며 의존함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아무리 비유라고 하더라도 모욕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어떤 사람을 책망한 일은 드믄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가 일부러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책망하신 이유를 알려면 이 말씀에 앞서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봉에 섰던 이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될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거된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이어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첫 구절인 마 16: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반론을 펼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은 ‘하나님이 당신께 자비를!’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안타까운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단 예수님께서 가야 할 인류 구원의 길을 말렸다는 게 베드로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고난, 십자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부정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까지 부정한 것처럼 묘사된 본문 이야기는 이상해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저 말씀을 들었다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리를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얻는다는 암시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삼일에...’라는 표현은 당시 이런 의미의 관용어였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여전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걸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 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부활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셨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부활이 전제된 것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항변한 것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수님에게 나쁜 것이니까 제자로서 말리는 게 당연했고, 부활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베드로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왤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즉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예고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위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조짐이 이미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유랑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거리가 먼 갈릴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유롭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회당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회당 책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 정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비판적인 사제들은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나 법조계도 비슷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검사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좀더 심해지면 퇴출당합니다. 이게 권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에서 볼 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회당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렸습니다. 때로는 수천 명씩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수록 유대교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 26:1-5절에 따르면 당시 최고 종교 권력자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치명적인 위기를 예수님이 왜 눈치 채지 못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제 가부간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다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갈릴리로 피했다가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략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싸움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라서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 영국과 싸워 대다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간디가 일제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국제 여론에 신경이라도 쓰는 정권이지만 당시 일본은 깡패 국가나 마찬가지여서 단식으로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인지, 정면충돌을 감행할 것인지, 우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걸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알렸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일은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나름으로 노후 설계를 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시 베드로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말렸을 겁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종교권력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 멋진 수도원을 짓고 책도 쓰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상대할 정도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한 판단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경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자동응답처럼 답을 얻을 수 있는 거도 아닙니다. 신학공부가 깊어져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도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 7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냥 갈릴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게 될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십시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베드로의 언행은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즉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니,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왜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베드로를 책망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 16: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무조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이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자체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애와 난치병 자체는 일상을 파괴합니다. 가난에 찌들면 삶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학적으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일상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고, 건강도 좋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생의 실패를 무조건 저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본문은 고난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자기 자신이 성취해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정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즉 주님께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즉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가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고 있어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서 삶의 온갖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와 하나 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 믿음, 그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본문을 볼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간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여기 ‘간하여’는 원어적으로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섭리 가운데 작정된 대로 행하시는데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몰라도 한참 모르고, 영적인 생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와 직분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그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책망 받게 된 원인

얼핏 생각하면 베드로의 말은 옳은 말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사단’이라고까지 몰아붙이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소위 ‘진심’이나 ‘진정’이라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육의 문제, 땅의 요소이지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성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베드로와 같은 고백도 못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예수님은 더하여 베드로의 고백까지도 불합격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심이나 진정이라고 하는 연약하고 감정적인 부분은 사단이 노리는 가장 교묘한 틈이며, 동시에 성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통로로 이용당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인간적인 진심을 빌미삼아 틈타려는 배후의 어둠까지 함께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진심과 진정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거짓 것들은 자동으로 따라 나갑니다. 인간의 진정으로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2:10-14). 신앙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영의 일과 육신의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롬 8: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합당한가, 사람의 생각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사 55:8-9). 마 22:15-22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세금 문제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먼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 편을 들면 안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각을 몰랐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렸다면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책망을 받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5-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 3:1-2). 자기 식대로 예배드리고 자기 식대로 기도하고 자기 식대로 봉사하며 직분 감당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셨습니다(히 2:17). 시간이 없다, 바쁘다 하면서 자기 사정을 핑계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손해보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속한 일’(히 5:1)에 충성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마 16:24).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만이 주관자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갈 2:20). 복 있는 사람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순종하는 가운데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시 1:1-3).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충성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손해보고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해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8:29).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받은 말씀도 놓치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 온 어리석은 모든 시간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시편46, 이사야18-24, 마가복음7-8, 시편150


사람은 죽기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잘 살기위해서 산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은 잘 죽기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셨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말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고, 못보는 자를 보게 하며,

오병이어로 이 세상에서는 먹을 수 없는 양식으로 무수한 사람을 먹인 것을 경험한 이후에,

베드로는 이런 고백을 한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8:29

 

드디어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예수님이 #그리스도이ㅇ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즉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말씀하셨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8:30~31

인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마태는 더 명확하게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인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

 

이 놀라운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들며, 그렇게 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8:33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예수님의길은 #죽음의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길도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 죽는 삶!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길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삶, 새 생명이 있다.

자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새 생명을 사는 삶,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삶,

나는 날마다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날마다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주님! 제가 죽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죽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살길 원합니다.

저의 길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도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개역한글 요 6:26-29)

  

세상에는 일에 내용들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할 일과 가정적으로 하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부엌에서 마당에서 들에서 할 일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너와 나 사이에 할 일은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는 일들도 얼마나 많은가? 단체적으로 국가적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할 일들이 있어서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니면 각가지 기술로 지혜롭게 서로 필요한 것들을 공유하면서 관계를 맺고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일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일 즉 썩어질 땅에 대한 일에 집중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 즉 영생을 얻기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있어도 영생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일만이 가치 있고 후일에 보장되어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늘에 속한 일이며 현세적인 일이면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보람된 일이다. 그러면서 내세적인 것인 동시에 영적이면서 소망과 기쁨을 주는 생명운동을 일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땅에 속한 것이며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항상 너와 나 사이에 경쟁의식을 가지게 한다.  

 

두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살펴본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어느 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간단하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냐? 누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냐? 오늘날 교회당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직분과 직책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서 직분 받고 영육의 복을 받아서 형통하다고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한 것에 대한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가? 성수주일, 기도생활, 헌금생활, 봉사생활, 이웃사랑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 순종의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날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1-24)

 

 

이때에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빌 2:19-22)

 

 

여기서 빌립보 교회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 지기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뜻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2-3) 여기서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진찰하고 있다. 먼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편지에서 ‘자기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서 구분해서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일’이나 ‘자기의 일’은 세상적이고 ‘하나님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비한 비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의 ‘지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학사전에 지식에 대한[知識,止息,智識] 뜻을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라고 했다. 영어로 지식을 ①knowledge ②understanding ③know-how라고 했다.

 

 

위키백과 사전에 ‘지식(知識)’은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 등을 포괄하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최근에는 한 사람 뿐 아니라 집단의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도 지식이라고 부른다.

 

 

넓은 뜻으로는 어떤 사물(事物)에 관하여 명료한 의식을 지니는 것으로서 알고 있는 내용, 알려진 사물의 뜻이 되기도 하며,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경험적 인식의 뜻이다. 좁은 의미, 즉 엄밀한 의미로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확실한 의식을 지식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사물의 성질, 다른 것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참된 판단을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지식은 억설이나 상상과는 달리 보편타당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고(思考)의 작용이 곁들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지식에 대한 뜻을 살펴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다. 어떤 지식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세상적인 교육을 통해서 배운 내용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식’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아는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생’과 결부시켰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오늘날 교회를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지식에 따라 열심을 내고 있는데 대한 것을 어떻게 진찰 할 것인가? 또한 예수님은 어떤 일에 열심을 요구하고 계실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교회당교회문화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그 결과 직분자로 선택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그 직분을 과시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일날 하루는 거의 교회당에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바른 신앙의 지식을 알고 열심 내는 증거일까? 과연 열심 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인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볼 과제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하자면 교회에서 저는 황현석 목사라고 불립니다.
황현석은 제 성과 이름이고 목사는 교회에서 제 신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교회에서는 성과 이름 뒤에
사모, 장로, 권사, 집사, 교우라고 해서
교회에서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배(禮拜) - 성전, 교회, 성도의 몸



예배(禮拜)

- 예도 예(禮), 절 배(拜)

예배(禮拜, Worship)는 '예도 예(禮)', '절, 굽힐 배(拜)' 자를 써서 '예를 갖추어 절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이다.
넓게 보면 구약시대 제사를 포함해 형태나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행위 전부를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으나, 보통은 기도와 찬양 등의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법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기독교 예배란 그리스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뿐이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은 모든 예배는 사실상 예배답지 못한 예배요, 부당한 예배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예배의 청중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청중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향유하는 것은 결코 간과될 수도 배제될 수도 없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7).
신약에서 언급된 예배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로 무지한 예배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 주위에 많은 우상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 23).

당시에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예배한다. 우상과 형상에게 절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의 무지로부터 다양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둘째로 주님은 헛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15:9).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헛되고 무익한 것이다.

셋째로 주님은 성령안에서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안에서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요 4:24 ).

이것이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당시와 같이 오늘도 똑같이 사실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상태가 아닌 다만 성령에 의함과 진리(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예배를 강요하시지 않으시나 예배하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에 어떤 예배가 있어야 하는가? 물론 무지한 예배도 아니다. 사람의 교리나 계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한다. 신약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 우리는 초대교회가 다음의 다섯 항목으로 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직접적인 명령과 예로서 알수 있다.

1.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모였다. 비록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지만(딤후3:15) 바울은 그를 젊은 전도자로써 권고하고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1:15 )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예배하기 위해서 모였을 때 적용되는 말이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이다. 사도행전 10:7에서 바울이 형제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강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그들은 기도했다. 오순절 날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한 이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 주님의 백성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말씀할 기회를 갖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과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3. 그들은 찬양했다. 바울은 그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19) . 또 골3:16과 히 3:15을 읽어 보라. 두 가지 종류의 음악이 있다. 하나는 음성으로 하는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음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음악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음성으로 하는 음악을 요구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해야 된다고 말했다. 이는 기악을 배제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찬양을 했다. 수세기 후에 사람들은 기계적인 음악을 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않으셨고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기계적인 기도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기계적인 음악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그들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였다. 사도행전 20: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6:26-28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는 떡에 참예하며 피를 기념하는 잔, 즉 포도 열매에 참여하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늘까지도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다.

5. 그들은 연보를 드렸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에게 명령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때에 연보를 하지않게 하라" (고전 16:2). 아울러 고후 9:7을 읽어 보기를 바란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첫날에 모여서 (행 20:7, 고전 16:2 )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들은 자주 모였으며 모이면 기도 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삶을 지향했다(행 2:46, 5:42, 8:4).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관습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날 같은 예배의 행위에 참여해야 하므로 똑같은 훈계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함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배가 많은 전통과 형식으로 단조로운 활동과 기도의 반복이 거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배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관한 그분의 뜻을 보여 주셨고 이것은 사람이 조금도 변경해서는 안되게 하셨다.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주님의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히 1:2~3. 마 17:5. 막 9:7. 눅 9:35). 그때만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배가 무엇인가? 이사야 6:1-8 

1.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예배에 열심히 있는 것은 대부분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배웠습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시29:1-2)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있는" (worth)이라는 말과 추상명사를 만들기 위해거 "말 끝에 붙이는 말"(ship)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그 가치를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 (제사)는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가 있었는데, 어떤 예배든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했습니다. 그 제물은 소,양,비둘기 였습니다. 그 제물의 결정은 예배의 종류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양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다는 말입니다. 또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예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예배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는

첫째 예배는 흠이 없어야 하고,

둘째 모든 예배순서 진행에 흠이 없어야하며, 
셋째는 찬송과 기도가 항상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예배의 내영은 하나님과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알지 못하거나, 또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정해진 시간(주일)에 정해진 장소(예배당)에서 하나 첫째 변화입니다. 두 번째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가는 선교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속사람이 더욱 거룩해지고 또 하나님의 교회 에 충성스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예배 드림은 참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4. 예배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리는 공동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또 하나님의 부름으로 예배당에나오는 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는 구원받은 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의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끼리의 아름다운 코이노니아가 있어야합니다. 옆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드리는 예배는 좋은 예배가 될 수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복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까? 
3. 예배를 드림으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요4:19-24 
세계적으로 한국교회가 예배드림에 제일 열심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예배가 또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될까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형식이되고 나의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 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왜 드리는가를 알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려봅시다. 

1. 하나님은 예배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예배 드리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4:23). 이 말씀은 예배당에 와서 찬송하고 설교 듣는 정도의 사람 보다는 "신령과 진리 "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예배는 받아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나고대화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창 1:26) 그것은 당신과 교제하며 대화의 상대 즉 예배드리며 살 수 있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천국)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양과 경배로 가득찬나라입니다(계4-5장) 그 나라는 천지 만물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돌리고,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다시 드리며 업드려 경배합니다. 이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에 우리가 초대 받은 것입니다. 

2.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 

한국교회는 기도, 찬송, 헌금 그리고 예배드림에 열심 있는 교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런 행동이라고 한 빨트의 말에 의하면 바람직하고 자랑스런 교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린 만큼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첫째는 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교(shamanism)의 영향이고 또 주일을 거룩히 여기지 않거나 모이는데 등한히 여기는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히 복을 받는 길이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도와의 교제를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는것입니다. 

3. 예배는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드리는 것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드리20), 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계21-22장)이기도합니다.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며(출3:12),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베전 1:1)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어떠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위에 굳게서서(히11:1) 값지고 보람있게 살게 합니다(요 8:31-32) 
그런 점에서 예배는 폰 알멘이 주장한 것 같이 "구원의 축제"입니다. 
사실 기독교 예배는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며, 그것은 곧 우리의 구원의 축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기쁨 속에서 축제적인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는 예배를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햐 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구원하여 주신 은총에 대한 감격의 표시라고 말했지만 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배를 드려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1;26).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찾지않아도 고사를 지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것들은 인간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어 " 카할(qahal)"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 봉사, 교육, 정의의 실현 등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예배를 드리는데 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예배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당신은 복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3.구원 받은 감격이 당신을 예배드리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4.교회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라는 용어를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예배’와 그 외의 예배로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적 예배’란 개체교회가 전체교인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모아 다함께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공적 예배는 일주일 가운데 하루 ‘주의 날’이라 부르는 일요일 오전과 오후 혹은 저녁에 드리는 예배와 기독교 절기에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가능한 모든 개체교회 교인들이 참석해야 할 공적 예배는 주일에 한 번, 즉 주일 오전예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 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 예배는 예식이나 순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공적 예배 이외의 모든 예배, 즉 결혼예배와 장례예배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특수 목적 예배는 사실상 ‘각종 예배’로 분류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주일 아침에 모이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그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공적 예배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오전예배에 비해 오후예배는 교리교육이나 세례식 등과 같이 일종의 특수 목적과 연관된 예배일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제네바는 3-4개의 도시교회가 각기 예배시간을 달리함으로써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배려했다.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을 복원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은 개신교회가 세워지고 17-18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예배 전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8-19세기의 교회가 대부흥을 경험하면서 전통적 예배 형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교회부흥은 딱딱하고 조용한 예배형식을 활기차고 감동적인 예배로 이끌었다.
그 결과 예배형식이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지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예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신자, 양측 모두 중요하지만 동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통해서도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 즉 죄인이 예배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은혜 받지 않은 누구의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기 않기 때문이다.
은혜 받은 자만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를 피 없는 제사, 즉 감사의 제사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감사의 마음 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자는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예배를 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구경꾼의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세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예배의 자리에 빈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심령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뻐할 것이다.

준비된 심령 없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회개하고 감사하는 심령으로 예배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더욱 크고 놀라운 약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더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한 주간을 살아낼 각오를 다짐하는 것, 이것이 곧 예배의 선순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참석이 일종의 습관에 불과하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생기를 잃고 시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은혜에 대한 갈급한 심령이 없는 예배, 습관적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마른 장작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예배 시간에 잦은 하품과 졸음, 습관적인 잠, 그리고 딴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현상은 대부분의 경우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즉 은혜에 대한 간절함이나 절박함 없이 예배에 습관적으로 참석할 때 발생한다. 찬양할 때는 열정적인데 설교를 시작하면 곧장 단잠에 빠져드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주일예배가 이미 인간 중심적인 예배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예배는 구경이 아니라, 참여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한 자리로 초대하시는 영적 잔치다. 초대된 잔치 집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여하는 것은 잔치에 초청한 주인을 무시하는 일이요,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잔치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영혼의 잔치, 하늘 잔치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준비도 기대도 없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세요, 행위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도 가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예외적이요, 결코 일반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반드시 주신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마음, 준비된 심령으로 예배에 참석해야만 한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성취되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를 가장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는 은혜의 유일한 시여자이시며 약속의 온전한 성취자이신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찬양이든 기도이든 설교이든 모든 예배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대신에 특정한 사람이 주목을 받을 때 그 예배는 이미 예배답지 못한 예배, 타락한 예배일 가능성이 높다. 예배 순서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지만 그 모든 소리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 예배다. 각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폭포수처럼 그에게 쏟아 부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만이 진정한 하늘의 은혜다. 이런 점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예배자들은 설교자, 예배인도자, 찬양대원, 찬양인도자, 대표기도자 등과 같이 예배 순서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아닌, 청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예배를 예배답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예배를 허무는 독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바벨탑 증후군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은혜란 결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그것이 가능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마술을 부리고 싶어 안달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예배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때만 향유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다.

예배에서 어떤 순서를 맡은 자이건 마치 자신을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중재자인 것처럼 착각할 때 그는 곧장 중세의 사제나 부제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우상숭배의 자리로 변질시키는 주범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를 담당한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예배에서 맡은 자신의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하나님이 아닌, 청중에게서 듣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다.
칭찬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모든 예배 요소는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를 허물어버리고 대신에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강탈하는 행위의 추하고 악취 나는 예배로 변질시키는 주범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주목하는 예배가 되게 하라.
그러면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은혜를 향유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날 것이다.

예배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나머지는 모두 예배자일뿐이다.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헌금도 특별한 사람의 예배 행위이거나 모든 예배자의 개별적 예배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모두의,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거룩한 공동체적 예배 행위다.



장로교회 예배의 특성과 실제

- 장희종목사(명덕교회)

서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공예배는 성별된 장소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예배적인 측면에서 구속은 원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신 것이다. 예배를 단순하게 정의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장로교회 예배의 특성은 한 마디로 “언약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의 주도적인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언약 사상에 투철했던 인물들이었다. 우리의 신앙고백문서에는 언약이라는 어휘가 68회나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고백문 전체가 언약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도 언약적이어야 한다. 언약적 예배에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이 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기여하시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이런 표현들을 좀 더 신중하게 정의한다면, 언약의 당사자들은 동등한 신분은 아니다. 그러므로 상호 기여하는 부분도 대등한 종류나 범주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에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적이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나타난 이 언약의 기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선물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언약을 계속 유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갈 때에도 하나님께 받았던 것을 되돌려 드릴 뿐이다. 언약적 예배의 요소들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시는 요소와 목사를 통해서 혹은 목사 없이 예배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 구분된다.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고자 한다.



1. 주일 공예배의 첫 번째 부분은 「예배의 부름」, 「문안인사」, 「영광찬송」의 요소로 구성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부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예배를 찬송으로 시작했고, 츠빙글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 또는 기원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칼뱅은 예배의 시작을 「예배의 부름」과 「문안인사」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배의 부름」이란 votum 혹은 invocatio에서 유래한 말인데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는 부름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이 “부름” 혹은 “간청”을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만이 “우리의 도움”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배의 부름의 원형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중에 여호와의 궤가 쉴 때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모세가 여호와를 부르는 데서 본다.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민10:36)

「문안인사」는 「예배의 부름」에서 표현된 예배자의 고백과 간청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반응이시다. 칼뱅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 혹은 계1:4-5)를 사용했다. 이 문안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그 내용을 실제로 일어나게 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예배자가 「예배의 부름」을 통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문안인사」로 반응해 주신다. 이 “문안”을 통해 하나님은 예배의 개회부터 마칠 때까지 은혜와 평강을 약속하신다.

「영광찬송」에서 하나님의 「문안인사」를 받은 언약 백성들은 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 선하심, 전능하심, 영원하심 등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찬송을 부르게 된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개회 시 이 세 가지 요소 즉 「예배의 부름」, 하나님의 「문안인사」 그리고 「영광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이것이 예배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공예배의 두 번째 부분은 「십계명 선포」, 「죄의 공적 고백」, 「사죄 선포」, 「대표기도」, 「감사 찬송」의 요소로 진행된다.

「십계명선포」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선포하신 언약 선포문이다. 뒤이어지는 내용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십계명으로 요약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다. 이 언약의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옛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과 같이 자기의 모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모든 영적 속박에서 건져주신 분이심을 선포하신다. 예배자는 「십계명선포」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와 하나님이 되시고, 구속자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구속하신 그의 백성임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에게 마땅히 행해야할 바를 요구하신 계명이기도 하다. 십계명은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 주일 공예배에서 십계명선포는 필수적이다. 언약백성으로 앞으로 행할 바를 강조한다면 설교 다음 순서에 배열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한 주간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개회순서들 다음에 배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죄의 공적 고백」은 많은 전통적 예배에서는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용서의 선언 혹은 사죄를 위한 기도의 요소를 가진다. 그렇게 해야 할 근거는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기대하는 예배에는 공동체의 고백이 필요하다. 죄악이 있는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사죄의 선포」 죄의 공적 고백의 시간이 끝나면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용된 구절을 가지고 은혜로운 사죄 선표를 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책임이며 권위이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대표기도」 이제 회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화해의 기반 위에서 예배가 진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 가운데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드리게 된다. 대표기도는 회중의 대표로서 전(全) 기독교의 필요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그리고 회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짧게, 분명하게 그러나 아버지 앞에 자식이 아뢰듯이 정중하고 겸손하게 해야 하며 예배의 흐름에 조화롭게 해야 한다. 바로 앞 순서에서 회중이 직접 죄의 공적 고백을 드리고 사죄선언의 말씀을 이미 받았으므로 회개를 위한 간구는 반복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감사를 받으실 것과 전 기도교적인 필요를 위한 간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감사 찬송」 여기에 해당하는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대한 선물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기꺼이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회중의 마음을 표현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기쁨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예배의 세 번째 부분으로 나아가게 된다.



3. 공예배의 세 번째 부분은 말씀 선포에 관한 부분으로서 「성경 열기 위한 기도」, 「성경봉독」, 「찬양대의 찬양」, 혹은 「축복을 위한 기도송」, 「말씀선포」, 「설교후 기도」,「화답찬송」 등의 요소로 구성할 수 있다.

「성경 열기 위한 기도」 이 기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성경을 열기 위한 기도이며, 설교자의 입을 열고, 회중의 마음을 열어 말씀의 씨가 마음 밭에 잘 심어지도록 하는 기도이다. 목사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 기도가 필요하다.

「성경봉독」 공예배에서 성경봉독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예배 중에 공적으로 성경을 봉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앉을 때 강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것을 통해서 그의 배성을 축복하시고 교화하셨다. 공예배에서 성경봉독은 말씀을 전하는 책임 있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봉독한 말씀과 선포된 말씀 사이의 동등성 때문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목사들의 고유한 책임이기 때문에 읽는 것 역시 목사의 책임이다.

「찬양대의 찬양」 예배에서 성경봉독이 하나님 편에서 내려주시는 요소라고 하면 회중 편에서 올려져야 할 요소로는 ‘찬양대의 찬’양 혹은 ‘축복을 위한 기도송’이다. 이것은 사치스러운 순서가 아니라 언약적 예배의 아름다운 요소이다.

「말씀선포」 ‘설교는 기독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말씀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본질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강단에 서며,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전하고, 그 말씀의 권능을 선포하며 그의 백성들의 삶에 적용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그리고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와 확신 없이 이런 대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설교의 기능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언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가기 만들어낸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에 서서 받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령의 증거를 필요로 한다. 성령의 사역은 설교단과 회중석 사이에 영적 교제를 형성해 준다. 목사는 교회당 벽을 향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고 응답하는 회중의 마음을 향해 설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이 동시에 활동하는 사건이다. 설교가 선포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화답하면서 언약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즐기게 된다.

「설교후 기도」 설교 후에 방금 선포한 말씀을 먼저 언급하면서 설교를 들은 회중들이 그 말씀의 빛 속에서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설교한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독교회의 필요와 국가와 인류 사회의 상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기도의 내용은 항상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된 것과 명령받은 것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화답찬송」 설교자가 온 힘을 다해 말씀 사역과 기도드리고 아멘으로 끝내면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 후에는 설교에 대해 바르게 화답할 수 있는 찬송을 선택해야 한다. 모든 회중이 말씀선포에 마음을 열고 깊이 참여했다면 공예배의 아름다움이 그들을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4. 공예배의 네 번째 부분은 「신앙고백」, 「주기도」, 「성례전」의 요소로 구성된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예배 때에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중요한 예배 요소이다. 이러한 뜻에서 교회는 325년에 니케아 신경을, 404년에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채택하였다. 이 고백들은 공예배 시간에 언약백성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졌다. 예배순서에서의 위치는 루터의 독일어 미사와 츠빙글리의 독일어 예배에서는 성경봉독 다음에 놓았고 칼뱅과 부처의 예배에서는 설교 뒤에 그리고 성례전 앞에 놓았다.

「주기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며 전통적으로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다. 17세기경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는 주기도문이 너무 형식화 된 주문처럼 변질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 때 공예배에서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바로 회복되어 현대 모든 개혁교회에서는 중요한 예배 요소가 되어있다. 주기도문의 위치는 성례전이 있는 예배에서는 성찬기도 다음에 오는 것이 적절하다.

「성례전」에서 말씀과 성례의 관계는 성례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설교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말씀과 성례”라는 이순서는 성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인 설교를 들어야 한다. 설교가 귀를 위한 것이라며 성례는 눈을 위한 것이다. 성례전은 공예배에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사이의 대화의 연속이다. 성례전의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 받아들이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한 보장의 인을 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그 증표를 받는다. 이 약속과 인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간에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5. 공예배의 다섯 번째 부분은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임직서약」, 「시벌 혹은 해벌」의 요소가 오는 순서다(2014년판 예전예식서 참고할 것).



6. 공예배의 여섯 번째 부분은 나눔의 사역 곧 「교제」, 「헌금」 등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다. 「교제」는 “공통의 유산을 서로 나누는 것”인데 우리는 한 아버지의 뜻과 말씀으로 잉태되어 한 아들의 피로 구원을 받아 한 성령의 거하실 처소가 됨으로 거룩한 교제 속에 들어간 자들이다. 성경은 이런 우리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sugkoinonus라고 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요,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사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만찬의 떡을 떼며 잔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서 교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연합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분과 교제한다.”라고 했다. 교제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나누면서 섬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점에 대해서 “또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도 연합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서로 교제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교제가 오순절에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는데 여기 “통용”이란 말이 “교제”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koina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도울 때 섬김을 받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한 부분이다.

「헌금」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정규적으로 행한 예배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었다. ‘사도의 가르침’, ‘성만찬’, ‘공적기도’와 함께 ‘구제헌금’ 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었다. 칼뱅은 이 점에서 마틴 부처를 따른다. 그러나 칼뱅은 부처나 외콜람피디우스 만큼 발전시키지는 않았으나 구제를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그는 고전 16:2을 언급하면서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주일)에 하라고 지정했다.”라고 했다.



7. 공예배의 폐회 부분은 「마침찬송」과 「강복선언」의 요소로 구성된다.

「마침 찬송」의 내용은 설교 본문의 주요한 메시지와 관계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주신 새 힘으로 성도는 이제 힘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과 결단을 강화하는 내용이면 더욱 좋다.

「강복선언」 공예배는 “기원” 곧 하나님의 문안으로 전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감싸여 시작한다. 강복선언은 다음 주일 공예배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날 동안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해 주실 것을 선언함으로 예배의 자리에서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는 순서이다. 그래서 이 엄숙한 강복선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복들을 들어 마시기 위하여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 그리고 영혼을 넓게 열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강복선언은 민6:24-26이나 고후13:13의 말씀으로 한다. 강복선언은 거룩한 기원이나, 예배의 끝을 알리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예배의 모든 요소들의 절정이다. 이제 삼위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 같은 삶의 현장이 두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개혁교회의 예배 순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심으로 마치게 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강복선언을 기도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강복선언은 공예배 후에 한 주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복임을 기억하고 공예배 이외에서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결언

주일 공예배를 누가 집례 해야 하는가? 공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는 교회의 공인된 직분자이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 예배는 언약적 특성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전 역사를 통해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한다. 이런 유형이 예배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계명 선포와 성경봉독, 말씀선포 등을 통해서 예배에 기여하신다. 그의 언약백성은 찬양과 감사와 기도로 화답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된 말씀으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하여 온 마음과 신실한 말로 화답한다. 이런 상호 기여의 특성이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이다.

이런 예배 원리에서 예배 집례는 누가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적절히 안내한다. 1640년대에 회집되었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는 공예배에서 “회중이 말씀을 봉독하는 것은 공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공예배에서의 설교는 “충분한 은사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정식으로 인정을 받아 이 직분에 부름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런 규범은 예배의 다른 요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에서 실행하는 안수 형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정하신 목회직무를 안수 받은 자들이 수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봉사의 직무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며,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교회에 목사를 주셨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위임한 무리를 양육하는 작은 목양자이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특별한 직무를 위임받았는데 그것은 다른 사역과는 구별된 말씀과 성례전을 거행할 직무이다.

그러므로 누가 예배를 집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공예배의 집례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는 직무를 위해 교회의 공인된 사람이어야 한다. 예배는 말씀과 성례와 함께 다른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찬양대의 찬양과 회중의 참회기도를 제외하고 예배의 모든 요소들은 모두 목사의 사역을 동반한다. 목사는 성경을 봉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의 양떼를 대신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한다.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이다.

1561년에 대륙의 개혁교회 진영에서 이미 공인된 벨직신앙 고백서는 “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개혁교회의 예배와 질서의 아름다움이다.

예배의 종류


오늘날 기독교는 초기 형태 사도시대나 속사도, 혹은 교부시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월만큼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신학적 발전이나 사회의 변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영적, 지적 각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기본적인 속내와는 다르게 그 형태와 모습이 천차만별이고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예배의 종류를 살펴 보는 것으로 부족하나마 예배의 중요성과 속성 이해의 전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크게 예배를 구분 짓는 속성을 기반으로 세부 종류를 나누고자 한다.

I. 예배 신학적 차이로 본 예배의 종류

기독교는 2천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는 통일성을, 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태와 그 신학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혼돈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모든 기독교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적인 고백으로 삼는 통일성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교회만이 갖는 고유한 신앙고백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예로써 루터교회는 자신들의 신조를 정리한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장로교의 뿌리인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영국국교회(성공회)는 '39개 신조'(the Anglican Thirty-Nine Articles)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그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나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예배의 핵심은 한결같이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인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그 기본적인 뜻에서는 일치한다 할 수 있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조의 정신에 따라 그 의미의 해석과 집례의 형태들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달라지고 있는 현상은 치열한 교파간의 경쟁과 싸움이 종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제는 예배의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감을 갖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을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각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대단원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케 한다. 그 결과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건전한 신앙고백과 역사적 전통을 유지해온 뿌리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고유한 예배 전통과 유산들을 서로 함께 나누고 교류하려는 경향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발견된다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각 교회들의 예배신학에 서로가 주의 깊게 경청하는 태도는 기독교 예배의 일치와 다양성을 발전시키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정교회의 예배신학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가토릭 교회의 예배신학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3. 루터교회의 예배신학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해보자.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4.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예배신학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5.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예배신학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명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6. 침례교회의 예배신학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재침례 교회 예배신학

재세례파는 교회를 신자들(believing disciples)의 근본적인 몸으로 본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의 발로가 곧 예배이며, 예배는 단순하고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는 믿음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또한 우리를 위해 인류의 역사를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또한 예배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맛보고 즐기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력소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 간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곧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장소이며, 우리의 다양한 삶의 현장들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재세례파들은 믿음의 소망(faith-vision)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예배형태가 규정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비전은 거의 5백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메노나이트, 형제단(Brethren),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와 몇몇 침례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다른 교파의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재세례파만의 독특한 점은 다음 아래의 내용들에서 볼 수 있다.
1) 성경의 권위-신조나 법전으로서가 아닌 믿고 복종해야 할 이야기로서 이 성경은 우리 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2)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유아세례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과 이 웃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만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앞과 믿음의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헌신을 결단한다.
3) 거듭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변화된 공동체의 모임이며 이들은 교회의 몸을 이 루는 다른 지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의 개인주의 는 용납될 수 없다.
4) 삶속에서의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고 따르는 제자된 삶을 살아야 한다.
5) 사랑의 윤리- 삶의 모든 관계속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마음과 의를 구하고 평화를 도모하며 화해의 관계를 유지하며, 낭비를 금하고, 검소하게 살며 환경을 소중 히 여기며 믿음을 나누고 신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세례파의 예배에서 이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한 뜻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목적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위에서 기술한 믿음의 고백대로 삶의 모든 부분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믿음안에서의 삶으로 재다짐케 하는데 있다.

8. 퀘이커 교회 예배신학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거하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관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 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 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 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 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 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 디 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 감리교(Wesleyan)의 예배신학

웨슬리의 예전 신학은 예배를 공적인 행위이상으로 정의하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배는 삶 전체,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소명과 관계한다. 신자들은 계속해서 행위와 사고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현실화시킨다. 존 웨슬리가 묘사했듯이,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믿음-새로 태어난 영혼의 눈-은 이 사랑을 이해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을 모방하고 경배하도록 우리가 이끌려지듯이, 우리를 예배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전통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전과 개인적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충만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 이상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는 묵상이며, 경배이다. 웨슬리가 말했듯이,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대면으로 인도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배와 헌신의 의미는 가장 초기부터 감리교 예배를 특징짓는 찬송의 표현속에서 발견된다. 찰스 웨슬리는 감리교 교리를 시와 가락으로 설정하는데 그의 신학적 활동의 온 힘을 기울였다.
예배는 예배자들에게서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하는 구원의 전 드라마를 일으키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도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서 정통해 있었고, 대체로 예배의 예전 형식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바나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에게 선교한 젊은 선교사 죠지아(Georgia)는 동방 정교회의 예전 텍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본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개정했다. 감리교의 부흥 절정기 때,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능하면 자주, 가급적 매일(그는 개인적으로 평균 일주일에 다섯 번의 성찬식을 받았다) 성찬식에 참석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는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성공회의 기도서를 추천했고, 그것의 개정편집을 미국 감리교도의 주일예배에서 사용토록 제공했다. 웨슬리는 어떤 것도 소홀히 될 수 없는 예배의 외적 형식과 그것의 내적 힘을 구별했다. 그는 신자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예배의 외적 형식을 지키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비판했다. 이들에게 웨슬리는 "참된 종교는 예배의 형식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예배 예전을 별로 중요치 않게 만드는 "영적 예배"를 주장하는 신자들을 비판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재하는 성령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Works, vol. 1, 532) 이들에게 웨슬리는 예배란 우리의 전인격과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예배란 소그룹의 양육, 금식, 성경읽기, 성만찬, 공적이고 개인적인 기도를 포함하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훈련 용어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여러 의식들과 예전들이 남용될 수 있지만, 그는 "남용이 제거되도록 하고 그 용도는 남게 하라. 이제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끊임없이 너의 영혼을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 속으로 갱신시키는데 사용하라."고 주장했다.(Works, vol. 1, 545). 이 외적 형식과 내적 힘의 연합이 웨슬리로 하여금 예전적 형식주의와 형식없는 주관주의 사이를 분리하여 유기적인 예배신학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하나님 임재의 객관적 실재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회중들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나아가는 것이다.

10.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교회의 예배신학

미국내 흑인들의 예배는 깊은 억압과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를 통하여 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경험하며 나아가 죄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얻게 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공통된 욕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신실하심, 그리고 억압의 사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기를 간구한다. 중생한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의 예배는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코이노니아의 장인 예배를 위해 모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세상속으로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는 두 죵류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카 흑인 개신교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아메리카 흑인 회중교회가 그것이며, 또한 단일 교단으로서 로마 가톨릭과 수 많은 크고 작은 분파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같은 통일성 아래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예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교단내의 다양한 예배 형태로 인해 미국내 흑인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진부한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메리카 흑인"(African-American)이라고 불리는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예배를 다루고자 한다. "아메리카 흑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화속에서 그들이 간직해온 아프리카의 고유한 유산과 미국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아프리카 흑인, 미국계 흑인 그리고 유대 기독교 신앙 전통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강제로 이주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이들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삶의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친근한 사랑으로 그들속에 다가오시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함께하심을 함께 이야기하며 나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배는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욕구와 기쁨, 갈등,그리고 희망 등,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된 삶의 욕구들을 발산한다. 주일의 공적인 예배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된다. 또한 이들의 예배 분위기는 삶 속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들을 간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배의 형태와 의식에도 변화를 끼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감사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적인 체험들은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예배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상황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나 주시며 성령님에 의해 마음문이 열리고 억눌린 영이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기 전일지라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예배에서 보게되는 "자유양식(liberation key)"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유양식은 과거 노예제도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은밀히 조직된 '덤불 은신처'의 분위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자유양식'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처음 발견되고 타올랐으며 지금도 흑인 복음송과 운율 찬송가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본성은 따로 구별된 예배 처소를 원했던 초기 전통 신학자들의 아프리카 원시 세계관에서 분명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며,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신앙의 고백을 표현하고 찬양으로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교파간의 차이로 인해 유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낼 때에도 미국의 흑인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자유케 된 그의 백성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과 '말한 대로 살자'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11.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예배신학

예배신학의 회복은 그리스도와 성경만을 위해 과거의 전통과 신조를 거부함으로 일어났다. 결국, 예배에 대한 모든 생각은 이 전제로부터 형성되어진 것이다. 예배 회복운동의 신학을 연구하고자 한 예배관련 서적과, 교회의 중심된 행위로서 대두된 예배의 신학을 토론하고자 한 노력들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로 예배 회복운동의 흐름들을 한정하려 했다. 그들은 '신학'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만약 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이야기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입장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배 회복운동의 경종을 울렸던 유명한 투쟁은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신앙의 변증들을 신자의 자격과 안수, 혹은 이 둘 모두를 결정하는 시험으로서 사용했다. 건전한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은 받아들여졌고,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회복운동의 창시자들은 이러한 신학의 오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들의 후예들도 '신학'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이렇듯 반지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신학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했다.
제자 교회들은 그들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회원이 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 정통적인 자격 시험인 신학의 사용을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과의 대화를 위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명료화하기 위한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신학의 목적은 신앙의 내용들을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에 입교하고자 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당신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이것은 비록 쉽게 풀어서 썼지만, 이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거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마16:16) 위와 같은 신앙고백은 매우 단순한 고백이다. 두번째 물음에서 '당신의'라는 단어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에 따라오는 개인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신학적인 중요한 또다른 물음을 대두시킨다. 비록 이 글이 기독론에 관련된 중요한 물음을 연구하는 글은 아니지만, 윌리암 R. 바(William Barr)는 이 주제를 연구한 훌륭한 책인 "제자들의 전통에서의 기독론: 하나의 평가와 제안"이 있는데, 이것은 캐넷 로랜스(Kenneth Lawrence)가 편집한 "Classic Themes of Disciples Theology"에 실려있다.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자'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죄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리의 희망이며 인생인가?" 만약 우리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예수는 인간이며, 어떤 방법으로 신이신가? 하는 것이다. M.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의 마가복음 연구인 'Truly Human/Truly Divine(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하나님)은 위와 같은 물음들을 오늘날의 제자회의 빛 아래서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스톤 캠벨(Stone-Campbell)의 회복운동으로부터 연유된 모든 분파들 중에, 성서에서 발견된 이 권위, 즉 "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것은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외침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각기 다른 지류들은 성경이 어떻게 연구되고,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12. 오순절계열(Holiness-Pentecostal)교회의 예배신학

이들 예배에 있어의 중요한 요소는 찬양이다. 찬양이란, 노래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경배요 증거인 것이다. 예배에서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사역들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찬양한다. 오순절 교회의 회중들에게 있어 예배의 초점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집회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찬양중에 거하시는" 분(시22:3)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합당한 찬양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해 약속된 자유함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다른 말들 즉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와 "모든 것을 적당히 하게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의 말씀대로 어떤 정해진 형태를 갖고 있는 다양한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이 기존 교회들의 냉담하고 형식화된 듯한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자의로 기존 교회들을 떠났든지, 혹은 떠날 것을 종용 받았던지 간에, 예전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언을 말하고(행2:4) 다른 영적 은사들-적어도 오순절 교리 중 이 부분의 지조격인 챨스 파햄(Charles Parham)에 따른-을 동반한 그들 자신의 성령 세례에 대한 열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공적 모임에서 비슷한 영적인 열렬함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실 일을 와서 보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시34:8)의 말씀과 함께 공공연한 초대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함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의 요구가 충족되는 예전들을 무의식적으로 발전시켰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창의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대중문화의 음악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즉 복음성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나는 지치고, 야윈, 그리고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예수께 왔었다오. 그런데 그가 나의 죄들을 없애 주셨소", "십자가에 달리신 내 주님을 모시지 않으채, 허영과 교만속에서 내가 보낸 수 많은 나날들이여"와 같은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성가곡들은 성경말씀에서 인용되었는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장)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시34장)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경배의 노래들, 그리고 초대와 선교적이고 복음적이고 그리고 부흥에 관계된 노래들, 그리고 계절에 의한 찬송가들은 모두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서 자유롭게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성령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오 주님, 지금 권능을 보내소서", "예수여 오셔서 지금 나를 채우소서", "오순절의 불이 떨어지고 있으니, 내개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라"와 같은 새로운 찬양들과 성가곡들이 쓰여졌다.
악기들은 당연히 찬양보다는 덜 중요하긴 했지만 보통 노래를 위한 반주로써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구세군의 금관 악기와 북들, 피아노와 오르간, 드럼, 탬버린, 그리고 키타와 같은 모든 것들이 대중 음악적인 표현 방식에서 수용되었다. 젊은 예배자들이 맨 먼저 현대적인 양식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수정하였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수용가능한 방식들로 예배에 통합시켰다. 회중을 교화시키는 것 그 이상으로 오순절 음악에 있어서 심미적이란 것은 없다. 대중 기도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진실성을 가라 앉히기 위한 어떠한 억제도 없이 오직 회중에 행하는 개인 기도에 불과하다. 열렬함과 자발성은 오순절 기도의 특징들이다. 오순절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서화된 기도들은 열등하며 비영적인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여 직접 지시받기 때문에 대중기도에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개인적인 문제들이 언급되어 질 수 있다. 또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님의 중재하심에 의해 인도될 때에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역시 기도 내용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만약 기도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도록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괜찮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기도자를 직접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 안에서의"기도란 단순히 예배자들의 언어에서 성령님께 향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 보통 방언이라고 불리우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형식들로 일어나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듣고자 할 때 예배자들의 언어로 통역이 뒤따르는 방언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통역도 추구되거나 기대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후자의 사용은 때때로 한 개인의 "기도언어"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고전14:4)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한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하게 기도하시는 분이시기에(롬8:26-27) 인간의 모든 장애들을 초월하는 중재의 일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언들 역시 독특한 기도의 행위들인데, 이것들은 모임중에서 누군가가 예배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고전14:3) 짧은 메시지들이지만, 그러나 방언 언어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13. 은사중심(A Charisma) 교회의 예배신학

성령님의 은사를 중심한 예배의 신학은 성령님과의 생생한 관계와 그리고 영적인 은사들의 회복을 강조하는데, 이 둘 모두는 예배에서 경험되어지는 것들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5:18-20)
은사주의 운동은 주로 성령님과 성령님의 선물들인 카리스마(즉 치유,예언, 기적, 방언, 기타등등)의 회복에 대한 강조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운동이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점들 중의 하나는 예배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 비록 정확하게 은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은, 하나의 주된 증거에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즉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는 우리의 입술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감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성령님의 역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요16:14),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과의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깊어 가는 결과를 가져온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사주의파"라는 말을 떠올릴 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거룩해진 얼굴과 손을 높이든 열광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열광적인 신앙과 몰입하는 기쁨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노래들, 성가곡들, 기타와 드럼, 박수와 춤, 예배 스탭들과 깃발, 악보와 O.H.P들, 예배 세미나와 그에 관계된 각종 회의 같은 것들이 교회에 등장하게 하였다. 왜 이러한 고정관념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은사주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인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많은 다른 교파들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은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은 아마도 모든 면에 있어서 침례교 은사운동과 동일한 신학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다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더욱 풍성케 하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경험하게 되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주의 운동의 예배 형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의 예배 유형의 다섯 가지 원칙들과 그들의 신학적인 기반들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은사주의의 다섯 가지 원칙은 첫째, 성령님의 중재하시는 현존은 예배자들의 성직자로서의 기능들을 활력있게 하신다. 둘째, 예배는 영과 혼과 몸의 전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의 행위는 명백한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리고 다섯째, 예배는 노래 이상의 것으로서 예배는 '섬김'인 것이다.

14. 열린 예배

4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과 예전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빈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런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개신교회는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도 그 노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열린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 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예배라면, 이것은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는 전도집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에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이라고 하는 예배학자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가 다분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열린 예배는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열린 예배의 본질과 그 방향성에 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배는 결코 회중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II. 절기에 따른 분류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 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III. 예배의 진행과 관점에 따른 분류

예배의 갱신은 예배 순서 몇 가지를 집어넣고 빼고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거기에 기초한 예배갱신의 원리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예배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순서를 정할 때에 비로소 좋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갱신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할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예배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1. 구어적(口語的)인 예배냐 상징적인 예배냐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지나치게 '듣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개신교 예배가 소위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 중요도에 있어서나 시간의 분량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 이외의 순서도 대부분 '구어'(spoken word)에 의존하여 있다. 한국 개신교 예배는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배가 '구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행될 때 과연 '하나님,'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등의 영적인 실재들이 설교를 포함한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예배에 참가하고 있는 회중이 과연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들 영적 실재들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예배의 표현양식이 언어를 통한 청각적 차원에만 의존할 때에 그만큼 예배의 풍부함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여질 수도 있다. 시각적 보조물을 사용하는 것은 복음선포에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후각, 미각은 물론 촉각까지도 사용하는 다차원의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중은 말하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5감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현존을 더 풍성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구어적 차원뿐만 아니라 비 구어적 차원을 또한 회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예배를 보다 더 상징적이고(symbolic) 은유적이고(metaphoric) 시적(poetic)인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며, 그 예배가 영적인 실재들에 관해 풍부함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될 것이다.

2. 산만한 예배냐 진행감 있는 예배냐
예배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군더더기나 어색함이 없이 매끈하고 진행감(sense of progre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요소들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하고, 이 선택된 요소들은 논리적이고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논리적 배열과 진행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순서들이 예배 순서 중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명백한 지시는 성서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위탁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행위 즉 헌신의 다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설교 직후에 오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 외에도 앉고 일어서는 동작, 눈을 뜨고 감는 순서 등은 예배학적인 고려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이 우리의 예배를 매끄러운 흐름과 진행감 있는 예배로 만들어 줄 것이다.

3. 초점이 흐려진 예배냐 초점이 뚜렷한 예배냐
좋은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배는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의 모든 순서는 이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도록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은 이와 거리가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설교의 주제가 예배의 주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은 예배의 현실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설교자의 의도가 예배 인도자와 기도자 그리고 성가대에게 미리 전달되지 않고, 따라서 각 참여자들이 제각각의 주제와 관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즉흥적 기도냐 쓰여진 기도냐
예배는 단순히 예배집을 읽거나 주보를 따라 그대로 훑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배 공동체가 기도할 때에 누구의 목소리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대표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것을 듣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창형식(unison)이 되어야 하는가? 또, 기도는 쓰여진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공 예배에서는 목사가 기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평신도 지도자도 기도할 수 있는가? 주중의 기도회에서 행해지는 기도는 주일 공 예배에서 되어지는 기도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한다.
특히 쓰여진 기도냐 아니면 즉흥적인 기도냐의 문제는 예배학에서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기도는 인쇄된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겨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교단적 차원의 예배집에 인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자가 개인적으로 미리 준비한 것을 읽는 것인가? 만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즉흥적인 것만이 성령의 역사인가? 이런 질문들은 매우 첨예한 토론의 주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쓰여진 기도문은 이미 3세기초의 것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때에 예배를 인도하고 회중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감독(bishop)이었다. 예배에서 그가 기도할 때에는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읽되, 본인이 원하면 쓰여진 그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량권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재량권이었다. 감독이 비록 자신의 언어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주어진 기도문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4세기를 넘어오면서 기도문은 쓰여진 채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는 기도는 16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어 일부 개신교회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5. 전통적인 예배냐 토착적인 예배냐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함께 가져야 한다.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천 년 동안 예배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것이 '기독교의' 예배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전통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이야말로 모든 교회의 예배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유산을 포함하고 있음을 현대교회는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초대교회의 전통들을 예배에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는 현대 교회들의 예배에서 회복된 '성만찬 기도'이다. 4세기에 사용되었던 성 바질(St. Basil)의 성만찬 기도는 성공회의 성만찬 기도 D로, 그리고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V로 부활되었으며,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I는 3세기초에 로마에서 씌여진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나오는 성만찬 기도의 부활이다. 이외에도 미국 연합감리교회나 미국 장로교회 등 많은 개신교회들은 성만찬 기도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요소들을 대거 포함시킨 성만찬 기도를 만들어서 예배에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회복한 또 다른 예는 바로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을 이룬 이상적이고 성서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말씀을 약화시키고 성례전만을 강조하였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례전을 약화시키고 말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개신교회들이 1년에 단 몇 차례의 성례전을 거행하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려온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씀과 성례전'으로 구성된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많은 개신교회들이 성만찬을 매주일 예배의 정규순서로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던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 짜여진 예배냐 융통성 있는 예배냐
바람직한 예배를 위한 두 번째 원리는 계획성과 융통성의 적절한 배합이다. 예배는 정교하게 계획되고 짜여져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하나의 연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예배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예배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목회자와 회중에게 공히 각인된 것은, '예배란 설교를 듣는 것'이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다보니 목사는 목사대로 자기가 할 설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또한 회중은 회중대로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잘하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다른 순서들은 장식물이나 보조순서로 전락된다. 이것은 결코 좋은 예배라 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교회는 한 주간에도 여러 번 드리는 예배의 홍수 속에서 목회자와 회중이 모두 단지 습관적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엄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매번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점검되어져야 하며,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융통성은 예배가 인간의 차원을 넘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계획되고 준비된 예배라고 하더라도 실제 예배의 상황에서는 보다 더 좋은 선택을 위하여 이미 계획된 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찬송가는 꼭 정해진 것만 불러야 한다거나, 아니면 찬송을 부를 때에 반드시 1절부터 4절까지 책에 있는 그대로 불러야만 한다는 생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바꾸어 부를 수도 있으며, 1절부터 4절까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다. 또 1절 혹은 3절만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떼제(Taize) 공동체는 짧은 찬송가를 수십 번씩 반복하여 부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 몇 번을 부를 것인가는 그때그때 결정한다. 이렇게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 성령께 의지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참여할 때에 단조롭지 않고 역동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인도자이다. 물론 회중과 인도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융통성이라고 하는 여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배 인도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영적으로 민감하여야 하며, 순간순간 성령에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7. 구경하는 회중이냐 참여하는 회중이냐
예배의 일차적인 요소는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의 행위였으며 성직자들이나 기타 인도자들만의 예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앞에서 열심히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여도 회중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회중이다. 회중이 누구냐에 따라 예배가 달라진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뉴욕의 같은 길 위에 위치해 있는 같은 교회라 하더라도 한인들의 교회와 남미인들의 교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예배를 보여준다. 한인들의 교회는 전형적인 한국의 개신교회들처럼 '점잖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반면에, 남미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찬송을 부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예배에서 회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회중이다. 회중이 얼마나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예배갱신을 위해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IV. 기타 분류

1. 시간에 따른 분류
새벽 예배: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새벽기도회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는 365일 예배적 자세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자세로 이해된다.
수요 예배: 흔히 3일 예배나 기도 예배로 불린다.
금요 예배: 보통 철야기도회를 겸하고 있다.
주일 예배: 대예배 혹은 정식예배로 불리지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전 성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 듯하다. 대예배 소예배 이런 것은 예배학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메인 기능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예배: 원래는 저녁예배였으나 최근 오후로 많이 변하는 추세다.
주일 저녁 예배: 산업화 다원화되면서 저녁예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규모에 따른 분류
가정 예배 : 보통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족 중심 예배다.
구역 예배 : 주중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작은 구성으로 구역별로 이루어진다.
회중 예배 : 주일 혹은 약속된 날에 전 성도가 모이는 것을 말한다.
연합 예배 : 개 교회보다는 지역 교회가 연합한 대형 예배를 말한다.

3. 특별 예배
헌당 예배, 목사 안수 예배, 결혼 예배, 장례 예배, 개업 예배, 졸업 예배, 입학 예배, 득남, 득녀 예배, 파송(여기에도 여러종류가 포함된다) 예배, 기타 감사 예배, 부흥 예배, 찬양 예배, 기도 예배, 서원 예배 등 다양한 예배가 존재한다.






예배순서는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고전14:26-33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 예배가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여기서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구원을 받았으니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을 [예배순서]라 합나다.좋은 예배순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순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심이고,또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살기를 원하심 입니다.(마22:37-40)둘째는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어 살기를 원하시며(마5:13-16)증인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습을 찾고, 항상 사명을 가지고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하는 곳이요, 형제 간에 불화하고 죽이게 하는 곳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가 어렵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가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대화함으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배는 <부르시고-만나고-파송한다>는 구조 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고 있는 "예배순서"는 어떻게 짜여져 있고 또 그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계시의 부분(하나님의 초청,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 있고 또 응답부분 (찬송,기도,헌금)이 있어 베의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져 예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배순서는 두 흐름 속에서 크게 세 토막으로 짜여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지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만남의 장소로 불러 주시고,

둘째로 부름 받아 나온 당신으 자녀들과 대화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 시키면서 삶에 용기와 소망을 주시며,

셋째로 그렇게 새로워진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변화시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순서는 [부르시고-만나시고-파송하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에배의 순서에도 하나의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세 토막으로 된 예배순서의 의미 

첮째 초막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초청의 
말씀"(call to worship)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용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감격으로 백성들이 춤을 추며 찬송을 불렀던것 같은 그 감격으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 기쁨에 앞서서,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화로다 나여" 하고 참회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던 것 같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개회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첮째 토막입니다. 
둘째 토막은 [말씀 속에서 만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우리와 대화를 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송과 헌금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으로 책임있게 살아갈 것을 고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의 정점은 "성찬"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또 함께 떡과 잔에 참여한 예배자들이 하나 됨을 확인한 것입니다(고전10:17) 다시 말하면 성찬에서 하나님과 우리 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깊은 코이노이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셋째 토막은 [세상으로의 파송과 복주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새로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맏기며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여기서 새로워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부른 뒤에, "파송의 말씀" 을 듣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며 (마 28:20)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며 보내는데 그것을 "축도" 라고 합니다. 
이런 예배순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뒤에 일주일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느끼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4. 예배순서들의 다양성 

예배순서는 2-3시간이 걸리는 "동방정교회" 예배로부터 예배순서가 전혀 없는 "퀘이커교회" 예배까지 다양합니다. 개신교의 예배순서의 틀은 대개 7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성찬을 예배의 중심에 두는 루터교와 성공회,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장로교,감리교,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그리고 예배순서 자체를 부인하며 삶을 예배로 보는 퀘이커교가 있고, 한국교회에 예배순서를 전해준 자유교회의 예배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순서는 말씀과 성찬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와 그후 약 5백년 동안의 예배순서 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우엇입니까? 
2. 예배순서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3. 개신교 예배의 틀은 몇가지나 있습니까?

IV. 예배의 요소(계시부분) 이해 

사도행전 2 :37-42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에 예배는 두 흐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부분인데 "초청의 말씀-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부분인데 "찬송- 기도-헌금" 입니다. 성찬예식도 계시의 부분이지만 다음 자세히 하기로 하 고 오늘은 계시부분의 [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에 대해서만 공부하겠습니다.

1. 예배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초청 (call to worship)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예배를 시작할 때에 강대상의 종을 치며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을 치는 것이나, 묵도를 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나, 외국의 예배 순서를 보나 예배의 시작은 묵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초청"(Call 
to Worship) 또는 예배의 부름 인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의 초청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더나가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대개 성경 구절을 읽기도 하지만, 교독문처럼 인도자와 회중이 주고 받는 형식도 있으며, 성가대가 노래로 초청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때의 성가대의 노래는 송영이 아니고 초청의 내용에 곡조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말씀선포인 성경봉독 (scriptual Lession) 

개신교는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봉독은 설교 하기 위한 예비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성경봉독 그 자체가 설교와 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책이 성경중에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복음서] 가 봉독 되었습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안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 분명히 해주기 때문에 [구약]도 읽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하여 사도들의 [서신]을 읽기 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어 왔지만, 4세기 경에 이르러 신약을 복음서에서 한 곳, 서신들에서 한 곳을 읽기 시작하여 예배시간에 성경을 세 곳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때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면 회중은 "아멘" 하며 화답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Preaching) 

설교는 영원한 복음을 현재화 하고, 개인화 하며, 현실화하는 신비라는 설교학의 어려운 설명 보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쉽게 이해합시다 . 행 10:33에 있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말씀이 설교가 무엇이고 또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위에서 말한 성경에서 [주께서 당신 (설교자) 에게 명하신 모든 것]이 설교 입니다. 즉 설교는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설교자에게 주어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봉독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전할까?"를 기도하며, 또 "어떻게 하면 이말 
씀 앞에서 결단할까?" 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옥토가 준비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 10:33에는 설교 를 듣는 태도도 가르쳐 주는데,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주님의 말씀" 을 듣기 위하여 지금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태도를 취할 때 은혜를 받게 되고 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 10:44). 고넬료는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림"(행10:24) 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전도 할 때에 니느웨 백성이 회개했던 이야기와 , 천사가 찾아 갔지만 듣지 않고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증명을 해 줍니다. 

4. 하나님의 이별의 인사인 축도(Benediction)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신 뒤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을 하는 것입니다. 축도는 이제 삶의 자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작별 인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우리의 인사와 크게 다른 인사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제 때가 가까운줄을 알고 두루 삼킬자를 찾아 다니는 곳이지만 그세상에서도 꼭 승리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있게 하겠다는 약속의 인사입니다. 모세와(출 3:12) 예레미야(렘1:8) 는 이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약속 (마28:20)을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1. 당신은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2.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3.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합니까? 
4.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확신합니까? 

V. 예배의 요소(응답부분) 이해

예배소서 5:15-21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 이기에 예배의 순서에는 두흐름이 있는데 , 
그첫번째 계시부분(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축도/)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충부히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은 두 번째의 응답부분인 [기도][찬송][헌금]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1. 예배에서의 기도 

1) 개인 기도와 공중기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내적인 교제를 가지게 될 때에 기도의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때의 기도는 내가 하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누가 기도를 인도하던지 간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전부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사람은 회중이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2) 기도의 유형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에 보통 4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묵도 다음에 [기원]을 합니다. 이것이 이 예배를 성령님이 도우셔서 모두 정성스럽게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는 첫 번에 [죄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6:1-8에 나오는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에서 나오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회기도"라고 하는 장로님들이 인도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회기도라기 보다는 "중보의 기도" 또는 "목회기도"라 불리어온 기도 입니다. 성도들의 시앙, 정으로운 사회, 건전한 나라, 세계 평화 등을 위하여 온 교회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승리하는 삶을 위해 있는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후기도]인데 설교의 말씀을 가지고 회중이 결단하는 시간이고, 네 번째는 예물을 드린 후에 [봉헌기도]는 복을 비는 내용보다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기도의 종류 
우리는 [자유기도] 만을 선교사들로부터 받았지만, 주기도문과 같은 [성문기도] (또는 예전기도)도 오랬동안의 전통을 가졌고, 성구영신 예배 때에 드렸던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교독식으로 드리는 [연도](Litant) 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충분한 내용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 전날이나,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와서 기도할 내용을 기록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록한것을 그대로 읽어도 훌륭한 기도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리는 찬송 

우리는 왜 찬송을 불러야 하고 또 어떻게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찬송은 유대교로부터 물려 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하여 주신 은총을 기리는 예식이니(출15:19-21.계511:14)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찬송] 과 [복음성가]입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멘" 이 있는 것은 찬송이고, 없는 것은 복음성가 라고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배시간은 찬송을 부르고, 예배시간이 아닌 때는 복음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설교를 들은 후에 결단을 표현하는 찬송을 부를때에는 아멘이 없는 것도 그 내용에 맞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순서에는 찬송이 4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다 다른 것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르는 것은 사 6:2-4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 나라를 체험했을 때에 천사들이 합창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회찬송"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초대교회 부터 이 찬송을 "영광송"(gldria patri)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실은 설교 후의 기도나 찬송이나 ,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적인 것입니다.

막지막 축도 전의 송영은 예배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에서 "송영"(送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에 예물을 바치면서 1장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에 마음을 보태서 감사와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인데 하나님은 아름다운의 하나님이기에 최선의 화음과 선율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찬양에 참여하여야 하기에 찬양의 중간이나 끝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3. 나와 나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리는 헌금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쳤던 것 같이 (마 2: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 같이 (요12:3),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께 무덤을 바쳤던 것 같이 (마27:57-61)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으로 나와 내 소유를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헌신 하겠다는 예배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배에서 이 시간이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 
1.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이 몇가지라고 생각합니까? 
2. 당신은 찬송을 부를 때에 흥분과 감격에서 불러본 일이 있습니까? 
3. 당신은 헌금시간에 어떤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까? 

VI. 성찬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2:43-47 

1. 예배에서의 성찬 

처음 교회의 예배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성경은 말했는데, 처음부터 예배에서 성찬이 규칙적으로 베풀어 진 것을 뜻합니다.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모였고(행20:7), 고린도 교인들은 "먹기 위해"(고전11:33) 매주 첫날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처음부터 성찬이 주일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기록상으로는 2세기 초에 순교자 져스틴이 로마 황제에게 보낸 변증서에 매 주일마다 
성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까지는 예배에서 성찬이 핵심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면 처음 교회에서부터 약 5백년까지는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이 되면서 점차 설교가 없어지고 성찬(미사)만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설교를 회복하여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려 했는데, 개신교는 점차로 설교만 있고 성찬이 없는 예배로 변했습니다. 다시 19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는 드리는 운동을 시작했고 최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들이 함 
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순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리마 예식서" 입니다. 

2. 성찬은 복음 전체를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요약으로써 표현됩니다. 그 사건을 집약해 오는 역사적 과정에서 성찬(미사) 중심의 예배도 생겼고(동방정교회,천주교,루터교회,성공회 등), 복음선포(설교) 중심의 예배도 생겼습니다.(장로교를 중심한 개신교들) 그 전통을 신학화 하고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배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인데, 예배는 이것을 설교로서 선포하고 성찬으로 행동화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식탁에 모여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적인 죽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그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이 무덤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성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감으로 그분과 우리가 하나를 이루며, 그분의 지체가 되어 살아가며, 함께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주님이 나타나시는 현장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복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선포하게 됨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 복음의 도전에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아났는데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지체로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주님 다시 오실 것인데 당신은 항상 때어 있습니까? 

3. 성찬에서 중요한 것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빵을 떼고 잔을 붓은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마 26:26-27) 라는 말씀에 따라 4가지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봉헌]과 [감사의 성별기도]와 [빵을 떼는 일]과 [나누어 주는일] 입니다. 

첫째, 봉헌인데 빵과 포도주를 식탁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드리면 그 일부를 성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물질 대신 헌금을 드림으로 봉헌의 의미가 희미해 졌고 또 개신교에서는 떡과 포도주를 성찬상에 미리 개인용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그 의미가 약화되었던 성입니다. 

둘째, 감사와 성별기도인데 주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감사의 기도가 예식에 나타난 것은 2세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3-4세기경에 와서는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인사][Sursum][목사의 기도][Sanctus][Anamnesis][구원에 대한 감사][Epiclesis][봉헌][중재와 기도] [송영][주기도]등으로 복잡해졌는데 칼빈은 "성찬 제정어" 와 "성별기도"만을 원했고 후에 개혁 교회는 [성령의 도움을 위한 기도](Epicleis)를 찾아 보탰던 것입니다. 성찬이 없을 때에는 이 기도를 설교 전에 했습니다. 

셋째, 손으로 하는 행위 곧 빵을 떼는 일입니다. 빵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파괴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집, 이기심, 자기자랑, 등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의 빵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떼야 하며 한 잔으로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목사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빵을 나누어 놓고, 잔들을 나누어 놓는 것은 선교사들이 미국의 자유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넷째, 빵과 잔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락방 예식의 완성인데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이며, 하나님께 나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잔을 받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6:53) 성찬을 받을 때에는 우리처럼 하는 방법도 있고, 성찬상으로 나와서 조용히 무릅을 꿇고 받는 것도 있습니다. 

VII.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

히브리 12:1-3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는 교회력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들이 [교회력](The Chistian Year) 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까운을 입고, 그 위에 색깔 있는 영 대를 두르고, 또 강대상에 드림천을 내리기도 하며, 대강절과 사순절 같은 교회력의 여러 절기들을 구체적으로 지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교회력은 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는데,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루터교를 제외하고) 교회력이 카토릭적인 제도라고하여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력이 사라졌다가, 1940년대부터 다시 교회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력은 한 해동안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한 중요한 계획입니다. 

1. 교회력의 시작과 그 의미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3대 절기인 [유월절][오순절][장막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음을 유월절을 통하여 늘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게 오순절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광야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장막절을 주었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재헌신을 하는 것을 축제라고 한다. 절기는 예배를 축제화 하게 합니 다. 
교회력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감사하며 주님 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주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또 성령을 주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함으로 한 해를 주님을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이 미국으로 가면서 [추수감사절-어버이 주일-어린이 주일]등이 보태졌고 또 한국에 오면서 [송구영신 예배-삼일절-광복절] 등의 예배가 더해 졌습니다. 

2. 구체적인 교회력 

교회력은 [성탄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세 절기를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하여 [대강절]을 설정했습니다. 
한 해를 주님 기다리면서 시작하라는 뜻이고, 또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의 비극을 두 번째 오실 때에 되풀이하지 말자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Christ-mas) 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역사 속에 오셨음 (His-Story)을 축하하면서,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그리스도(Christ)를 예배(Mas) 하게 합니다. 성탄절 후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 비로서 공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여 [현현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순절]을 두었습니다. 40일 간 자기를 살피며 참회하면서, 꾾을 것 끊고, 버릴것은 버림으로 믿음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날로 교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절기입니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부활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주일 밤이나 수요일과 새벽 기도회와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로 한 곳에 모여 10일 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 교화가 탄생한날을 기념하기 위해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은 약 6개월인데 다음 대강절까지를 왕국절 또는 [삼위일체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8월말일까지를 성령강림절로 하고 남은 3개월 동안을 삼위일체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3. 교회력의 색깔과 성서일과 

교회력은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색깔도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색깔이 주는 감정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이것이 정리되기까지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의미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영 대(stoic)와 드림천 (우리 교회에서는 성가대의 스카프와 강단의 주제 글씨 등도) 의 색깔이 대강절과 사순절에는 기다림과 참회의 색깔인 [보라색] 이고, 성탄절과 부활절은 순결과 환희와 승리의 색깔인 [초록색]을 씁니다. 
교회력에는 주님의 일생을 주심으로 성경을 배열해서 3년 주기로 성경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 성경은 [구약-서신-복음서]이렇게 3번을 읽는 것이 전통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이기에 2번 읽는 경우도 있고 , 세 번을 읽을 때에는 그 예언인 [구약]을 먼저 읽고, 복음이 어떻게 삶이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신]들을 읽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설교와는 상관없이 집사들에 의하여 예배 시간에 읽혀졌습니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기 

1. 교회력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합십니까? 
2. 교회력의 골격은 어떤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까? 
3. 교회력의 색갈:보라,흰색,빨강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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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가지

구약장이
~3분

왕이신 하나님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통하여 관계를 확인하시고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제사의 종류를 히브리어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가지

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와 그 의미들

우리말 성경에는 "제사"나 "번제" 등의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제사를 뜻하는 히브리어가 다르기 때문에, 제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규례인 제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사용되는 히브리어도 다양한 편입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를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개

זֶבַח(쩨바ㅋ흐)

일반적으로 '희생' 혹은 '희생제물'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주로 예물이나 번제물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특히 זבח는 '화목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레위기 17:5,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מִנחָה(민ㅋ하)

일반적으로 '선물', '공물' 혹은 '제물'의 의미를 가진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야곱이 에서에게 주었던 선물을 나타낼 때 사용하거나 신하가 왕에게 드리는 공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도 מנח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미로 쓰일 때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곡식의 형태로 드렸던 '소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또, מנחה는 속죄의 개념은 있지 않으며 화목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5:15, 그의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십 분의 일 에바를 헌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

עֹלָה(올라)

'올라간다'는 뜻의 동사인 'עלה'(알라)에서 나온 명사로, '번제물' 혹은 '번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עלה라는 단어는 번제물을 완전히 불태울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עלה라고 표현한다고 일반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제사들 가운데 오직 עלה만이 제물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3: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기타 단어들

그 외에도, "קָרְבָּן"(코르반, 가까이 오게 하다, 레위기 1:2)은 "예물"로 개역개정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으며, "תְּנוּפָה"(테누파, 흔들다, 출 35:22)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예물"로 번역되었지만 '요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또, 출애굽기 25장 2절에서는 "תְּרוּמָה"(테루마)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나오는데, תרומה는 '기증물' 혹은 '헌물'로서 '제사장을 위한 제물의 부위' 혹은 '성전 건축을 위해 드린 헌물'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제사와 관련된 기타 히브리어 단어들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단어들의 히브리어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출애굽기 29장 18절에선 언급된 "אִשָּׁה"(잇샤)라는 단어는 '화제'로서, 불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 이사야 53장 10절에는 "אָשָׁם"(아샴)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속건 제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위반함" 혹은 "유죄" 그리고 "보상이나 배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우상인 바알에게 분향한 것에 대한 책망이 담긴 예레미야 11장 17절에서는 "קָטַר"(카타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의미는 '연기로 올려 보내는 제사' 혹은 '희생제물을 불사르는 제사'입니다.
  • 호세아 8장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신다는 책망의 말씀을 하면서 사용한 "הַבהָב"(하브하브)가 있는데, 그 의미는 '선물' 혹은 '제물'을 뜻합니다.

화목제(זבח השלמים, 쩨바ㅋ흐 하쉴라밈)의 의미

"זבח"(쩨바ㅋ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예물이나 선물"을 뜻하며 "השלמים"(하쉴라밈)은 "평화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된 상태에서 감사의 마음과 함께 평화의 관계를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제물을 드리는 제사자의 평화의 관계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제물을 나눠 먹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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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예배, 헬라어로 예배, 영어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로 본 예배의 의미 묵상.

우리 모두는 인생에 무엇인가를 쏟아내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크리스천이 평생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쏟아내는 예배. 이 예배의 의미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영어의 단어를 통해 돼새겨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 알아봤어요.

첫 번째로 히브리어로 예배는 한국식 발음으로 아바드와 샤하아가 있어요.

전문적이지 않아서 틀릴 수도 있으니 가볍게 참고만 부탁드려요.

아바드 :

종으로써 주인을 섬긴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좋은 노예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을 의미해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직장, 가정 등 모든 생애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듯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게 돼요.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정성을 다한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세상의 종은 노예로 살게 되지만 하나님의 종은 그분에게 속하게 되어 그분 안에서 자유롭게 되죠.

샤하아 :

경배하다, 부복하다, 굴복하다, 사지를 완전히 엎드리는 것을 말해요. 이 상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보좌만 드러난 상태를 의미해요.

아바드와 샤하아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주권자 되심을 드러내요. 찬양과 경배는 그분을 높여드리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해요. 나의 목소리와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아가는 것. 그분 앞에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닌 나는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 나의 것을 드리면 본전 생각이 나죠.

두 번째로 헬라어로 예배는 프로스퀘네오 라트레이아가 있어요.

프로스퀘네오 :

이 단어는 노예가 주은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말해요. 하지만 이러한 형태로 예배를 규정할 수 없어요. 마리아와 가롯 유다를 보며 예배의 행위로 우리는 배신을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해요. 이것은 정죄하고 넘어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장을 지우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전심으로 나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라트레이아 :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심기는 삶. 즉 주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주님만 사랑하는가? 아니면 우상도 함께 사랑하는가? 주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 수가 성의 여인의 이야기처럼 야곱의 우물 즉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유한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을 말해줘요.

결혼, 건강, 인정, 돈, 음란 이 모든 것보다 내 삶의 모든 것보다 나의 하나님이 크신지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영어로 예배는 worship이에요.

worship은 가치와(worth) + 신분(ship)의 합성으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즉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와 존귀를 돌리는 것을 말해요.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약 노동자의 1년 연봉)의 향유를 깨뜨렸고 유다는 노예 한 명의 가치인 은 30세겔(120데나리온)에 예수님을 넘겨주었어요.

그분은 우리 스스로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며 우리의 인생을 소비하길 원하시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한 분이시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소유를 누리길 원하세요. 그분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비교할 수 없는 선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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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7가지 히브리원어

제이비젼
1~2분

 -'찬양'의 7가지 히브리원어-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말로 쓰여진 말들도 그 히브리원어를 살펴보면 좀더 깊은 찬양의 의미 내지는 방법 등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원어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단어들이 나오지만 이 7가지의 단어가 
가장 대표적으로 쓰인 단어들이라고 합니당

1)할랄(시22:23)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60 여 회) 
*떠들석하게 어리석을 정도로 열광적으로 소리지르다, 으스대다, 빛내다. 
*"할렐루야"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2)테힐라(시34:1, 40:3, 65:2) 
*차원 높은 찬양, 할랄로 노래함 
*열광적인 찬양, 새로운 종류의 노래 
*이 어휘가 쓰여질 때마다 찬양 속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내포해준다. 
*특별한 종류의 노래 
*준비되어지지 않고 연습하지 아니한 노래들(영의 노래) 
*그리스도의 몸에 굉장한 일치(연합)를 가져다준다. 

3)샤박(시63:3) 
*요란한 소리를 하나님을 향해 지름, 외치다. 
*커다란 어조로 소리 치되 승리를 외치고 영광의 소리를 외치다. 

4)자마(시57:7) 
*현악기를 퉁기다, 악기로 하는 찬양. 우리의 음성은 부분적인 악기로 볼 수 있다.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음악을 만든다(한다)는 개념. 

5)야다(시7;17, 138:1, 대하20:19-21)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나 '토다'와는 다른 태도로 함. 
*공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로 찬양하다. 

6)토다(시50:23)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손을 벌려 감사함, 
믿음의 행위로 하는 찬양 

7)바락(시72:15, 103:1-2) 
*축복하다, 경애로 무릎을 꿇다. 
*작은 자가 위대한 자에게 나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