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
기다리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등불과 기름의 참된 의미
등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사람의 육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등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이러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성경공부의 묘미라고 하겠으며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관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처럼 무조건 "믿으라!"
"덮어놓고 믿으라!"
이렇게 가르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을 펼처서 의문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바르게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첫째,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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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 구약 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면, 이는 보통 감람(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감람 열매를 짓눌러 으깨어서 기름이 나오면, 그것을 모아 질을 따라 분리했다.
감람 기름은 살림살이에도 쓰고 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썼다.
또한 감람 기름을 향료와 섞은 뒤에 임금 같은 사람들이나 특별한 물건들에 기름 붓는 데 썼다(기름 부음).
기름은 기쁨과 잔치를 상징한다.
기름 부음 / 기름 부음은 기름(감람 기름)을 머리와 몸에 바르거나 그 위에 붓는 식으로 했다.
이는 삶의 기쁨과 유복함을 표현하므로 상중에는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기름 부음은 종교 생활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나 사람, 곧 벧엘의 거룩한 돌(창 31:13)과 회막과 제단(출 30:26-29), 예언자(왕상 19:15-16)와 제사장(출 30:30)과 임금(삼상 10:1, 16:1, 13)에게 예언자나 제사장이 기름을 부었다.
임금에게 기름 붓는 것은 가나안과 애굽 지역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 배경은 기름을 부음으로써 군신 관계가 생겨난다는 생각에 있었던 것 같다.
곧 임금은 가장 높으신 임금이신 하나님에게서 권력을 위탁받았다는 것이다.
임금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삼상 24:7, 시 2:2).
나중에는 이 칭호가 다윗의 집안에서 나는 구원의 임금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인물을 가리키게 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히브리 말로는 '마쉬아흐'이다.(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자(4899) 마쉬아흐(mâshîyach) מָשִׁיחַ
어원 / 48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름부음을 받은(레 4:3, 삼상 24:6, 삼하 1:21, 사 45 :1), 기름 부은(삼하 19:21, 시 132:17),[명] 기름부음을 받은 자(삼상 2:10, 삼하 1:14, 대하 6:42), 기름 부음 받은 자(시 2:2,합 3:13).
구약 성경 / 38회 사용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들이 왕위에 오를 때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리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와 구세주로 택하여 임명하신 분을 일컫는 칭호이다.
기름 부음은 어떤 때는 그 기름 부음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을 상징했다(행 10:38).
기름은 또한 병을 치유하는 데 쓰였다(막 6:13, 약 5:14)
나드 / 나도 기름 / 히말라야 지역에서 자라는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뽑아낸 물질로써 만든 향유인데 쉽게 증발한다.
그처럼 먼 나라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막 14:3-5, 요 12:2-5 나드, 아 4:14 나도, 아 1:12 나도 기름)
둘째, 등이 상징하는 것
1. 등 - 사람의 몸
2. 등 - 등불
등잔, 등불 / 주전 300년경까지 등잔은 흙 사발로 만들어 그 가장자리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튀어나온 부분을 만들어 심지를 두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튀어나온 부분은 점점 더 주둥이 모양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등잔 가운데 기름 채우는 구멍과 심지를 둘
작은 구멍을 빼고는 닫힌 꼴을 하게 되었다.
연료로는 감람 기름이나 동물의 기름을 썼는데, 한 번 채워 넣으면 2-4시간 쓸 수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흙 등잔 대신에 쇠붙이로 만든 등잔을 썼다.
회막에는 등잔을 두지 않고 특별히 정교한 모양으로 만든 금
등잔대를 두었다(출 25:31-39).
등불(5216) 니르(nîyr) נִיר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어원 / 51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출 27:20, 삼상 3:3, 삼하 22:29, 왕상 11:36, 왕하 8:19, 대하 21:7, 습 1:12), 등잔대(출 40:4, 대상 28:15), 등(민 8:2, 대하13:11, 시 132:17), 등잔(출 25:37, 민 4:9, 슥 4:2).
구약 성경 / 8회 사용
등불, 불길(3940) 랍피드(lappîyd) לַפִּיד
어원 / ‘타오르다’는 뜻을 가진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횃불(창 15:17, 삿 7:16, 슥 12:6), 번개(출 20:18), 홰(삿 15:5), 재앙(욥 12:5).
구약 성경 / 4회 사용
셋째,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상징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중 한번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때라면 다른 한 번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였습니다.
여태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늘 성령 충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이 열 처녀를 크리스천에 비유하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크리스천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어리석은 5
처녀처럼 기름이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천년왕국 때 주님께로 돌아올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다’란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과 4절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의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더라, 그러나 현명한 자는 등불과 함께
자신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3절의 ‘took no oil’이란 표현이 눈에 들어오자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있던 기름이 떨어진 줄로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듣고 넘어갔었던 구절이었는데 5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이 없었음을 발견하자 잠시 멍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성경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살피며 정독했었고 또 그 과정에서 깨달았었던 다른 것들이 합쳐지며 화학작용처럼 일어난 것이긴 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가운데 이미 ‘vessel’ 즉 그릇이 성경에선 사람의 몸을 뜻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먹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 올렸다 내린
거룩한 빵 5덩이 밖에 없는데 같이 있는 자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았다면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삼상 21:5)”
여기서 소년들의 몸을 그릇으로 표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 대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바울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디모데에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땐 성경에서 그 단어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읽어보는데 그렇게 모든 구절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단어의 의미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예전에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lamp’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44구절 안에 총 50번
등장합니다.
50은 온전한 은혜와 속량 및 자유를 뜻하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뜻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창세기 15:17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처음 나옵니다.
시편 119:105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잠언 6:23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어느 날 열 처녀의 비유를 읽다가 어리석은 5 처녀는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없었고 현명한 5
처녀는 등불과 함께 자기들의 그릇(몸)에 기름을 가져갔더라는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법(등불)이 올
것이라는 언약은 알았지만, 그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은 정작 거부해서 성령(기름)은 없게 될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어
성취하신 성령의 법(말씀) 안에 기름인 성령을 받게 될 교회를 비유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등불 자체엔 당연히 기름이 있어 불이 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등불 자체에 기름이 있지만, 말씀 즉 성령의 법(등불)만
갖고 있지 그 말씀을 마음 가운데 믿어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의 전(기름을 담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고전 3:16), 그가
가진 성경이나 언약이 구원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이 비유를 현 지역 교회에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고 말씀을 마음에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그냥 성경책만 들고 다니는 church goer(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더구나 3절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든 묘사에서 복수로 쓰이는데 4절에 지혜로운 처녀들은 5명임에도 불구하고 ‘the
wise’란 단수로 표현하다가 ‘그들의 그릇들에’, ‘그들의 등불들’에서는 복수로 쓰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한
몸이요 한 영인 탓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에서 나오는 현명한 5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줄 수 없다고 9절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그릇에 담겨 있는 기름을 (몸에 임재하시는 성령) 나눠줄 방법이 없기에 너희 것을 사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로 와서 사라고 권면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7-18).”
그들은 이어지는 3:20에 보이듯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주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어리석은 5 처녀들은 11절에 다시 돌아와 지혜로운 자가 신랑과 함께
marriage(결혼)에-성경엔 wedding 즉 결혼식에 대한 비유도 나오지만, marriage 즉 결혼식을 포함한 결혼한
상태를 뜻하는 비유도 나옵니다-들어가게 되어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냥 문을 열어달라고만 하지 어디에도
기름을 사 왔더란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공중 재림) 사이에 있는 은혜의 때가 지난 후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God of Numbers : 10이란 숫자의 의미
‘10’이란 수는 어떤 것의 ‘fullness(충만, 완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엔
‘God said’란 문구가 10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God said : 하나님이 말씀하시다’란
문구가 창조 사역 개요를 담고 있는 1장에 10번 나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 히브리어 7단어, 영어 10단어로 구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7이 하나님, 특히
영의 완전수라면 10은 충만함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모두 각각의 알파벳에 고유의 수가 정해져 있어 숫자로도
환산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처럼 말씀과 숫자를 공부하다 보면, 성경은 결코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게 확연해집니다.
‘10’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곳곳에서도 보이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각 손과 발에 5개의 손(발)가락이 있고 두 손(발)에 10개의 손(발)가락으로 완전합니다. 숫자는 0-10까지 한 세트를 이루고 10이 되었을 때 다시 1부터 돌아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끝(충만함)이 이르고 심판이 이르렀던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개의 재앙이 심판의 충만함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5계명씩 두 판에 나뉘어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10개의 휘장, 10개의 기둥, 10개의 받침(sockets)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출 26, 27장). 민수기 14장 2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를 10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10은 시험, 불순종, 반역의 충만함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 전체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은 꽉 찬 ‘10’번 나옵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사람이 쓴 성경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이 쓰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킨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출 12장), 광야에서(민 9장),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수 5장), 히스기야 때(대하 30장), 요시아 때(대하 35장),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여러 방해와 어려움 끝에 성전 짓기를 마쳤을 때(스 6장), 예수님이 12살이셨을 때(눅 2장), 4복음서에 기록된 3번의(요 2장, 요 6장, 마 26장) 다른 유월절에 대한 기록.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유월절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치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니산월 14일이 되는 유월절에 쓰일 어린양을 취하는 날은 그달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12:3).
여기서 예리한 분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베드로와 바울에 연관돼서 유월절 절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오순절’로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힐 때는 ‘무교절’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과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 핀잔을 줄 땐 ‘성만찬: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유월절’을 지켰다고 나온 기록은 4복음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10번으로 끝납니다(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왕국에 대한 것도-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든 세상의 왕국이든-그 온전함(충만함)을 나타내는데 10이란 수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창조원리이기에 세상에서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뜻할 때 ‘열국’, ‘열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왕국은 다니엘서에 10개의 발가락과(단 2장) 10개의 뿔로 표현되는데(단 7장) 요한계시록에서도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용)의 뿔 10개로 표현됩니다(계 12, 13, 17장).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총 10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마 13, 22, 25장).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록 5명만 들어갔다 해도 10명의 처녀가 나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은 1개를 찾는 여자의 10드라크마나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이 10명의 종에게 나눠주는 은 10 므나에 대한 비유도(눅15, 19장)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10가지 종류의 불의한 자들이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 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 경우엔 불의의 충만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마서 8장 38-39절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끊을 수 없는 10가지의 권세나 능력이 등장합니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거된 10개의 권세가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fullness(충만, 완전)’을 나타내는 10에 대해 적었습니다.
God of Numbers: 5란 숫자의 의미
지금까지 성경구절을 통한 ‘40’이란 수가 갖는 의미와 ‘11’의 의미만을 살펴봤었습니다. 특히 ’11’에 대한 의미는 성경 11장들을 통해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모세오경과 역사서의 11장, 예언서와 신약의 11장). 오늘은 ‘5’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숫자 ‘5’는 통상적으로 ‘은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6장 8절인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룻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룻기 2장 2절인데,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입니다. 보아스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내용에서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룻 2:10)”
은혜란 가치 없고 연약한 것들에게 베풀어지는 대가 없고 일방적인 호의나 친절입니다. ‘5’는 특별히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해결책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피로 속량하여 이끌어내셨을 때 “한 횡렬에 다섯씩-by five in a rank”(출 13:18) 이끌어냈다고 성경은 서술합니다. 영어 킹제임스를 보면 “went up harnessed”라고 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의 이차적 의미로 “by five in a rank”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영어 킹제임스는 번역된 단어나 구절 옆에 이차적 의미를 적어놓을 때가 있는데 이 이차적 의미는 도리어 직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성경 버전마다 약간 다른데 ‘무장하고 나올 때에’ 혹은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로 번역됐습니다. 어차피 ‘한 횡렬에 다섯씩’이란 의미는 전쟁하러 나가는 군대 행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성인 남성만 60만 명이었는데 그 많은 무리를 한 행렬에 다섯씩 구성했을 리는 없고 ‘행렬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란 의미일 거라고 합니다. 어찌 됐거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내보내실 때 ‘by five’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0년 후(4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여호수아 1장 14절을 영어 킹제임스로 보면 이차적 의미로 ‘marshalled by five’, 즉 ‘다섯으로 정렬하여’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도 ‘무장하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첫 5개의 책은 ‘모세 5경’으로 불리는 성경의 기초로서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의의 필요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성막과 중요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엔 번제헌물, 음식헌물(소제), 화평헌물(화목제), 죄헌물, 범법헌물(속건제), 이렇게 5가지의 헌물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헌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사역을 예표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거룩한 관유(the holy anointing oil)’엔 5가지의 재료가 들어갑니다. 바로 몰약(500 세겔), 육계(250 세겔), 창포(250 세겔), 계피(500 세겔), 감람유(1 힌)인데, 만드는데 필요한 양도 5의 배수입니다. 거룩한 관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한없는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막의 구조와 건축 또한 5의 배수가 곳곳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은혜로만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뜰은 100큐빗에 50큐빗입니다. 성막뜰의 기둥들은 사면으로 20개, 20개, 10개, 10개, 모두 60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5 x 12, 즉 은혜의 통치를 의미합니다(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기둥들은 각각 5큐빗씩 떨어져 있었으며 높이도 5큐빗이었기에 성막뜰을 에워싸는 성막 천은 5 X 5, 즉 25큐빗의 넓이로 나뉘어 있었던 게 됩니다(출 27:9-19 참조). 여기에 번제단도 5 x 5였고 성소의 규격도 10 x 30였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 나오는 성소의 휘장을 보더라도 휘장 10장을 5장과 5장으로 나눠 묶되 한 세트당 50개의 고리를 만들라고 합니다(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2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경우 주셨던 약속으로 “너희 다섯이 백을 쫓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 5개의 물맷돌을 취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에 주실 회복의 은혜를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 다음과 같은 다섯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렘 33:11)” 이번에 글을 쓰면서 보니까 한국어 성경엔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이 구절에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탓에 ‘소리’가 6개가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과 원어로 찾아보시면 5개의 ‘소리’만 나옵니다. “The voice of joy, and the voice of gladness, the voice of the bridegroom, and the voice of the bride, the voice of them that shall say, Praise the LORD of hosts: for the LORD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and of them that shall bring the sacrifice of praise into the house of the LORD.”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인류의 구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리게 될 5가지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다니엘 2장엔 지금 있고 앞으로 올 5 왕국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5번째 왕국은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산에서 나온 손대지 않은 한 돌의 왕국, 즉 반석이신 예수님의 메시아 왕국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5개의 행각이 있었고(요 5:2),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10 처녀 중 5명은 지혜로웠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엔 5명의 여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라합, 룻, 다말, 밧세바, 마리아). 예수님은 떡 5덩어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2절에서 5 지역에 흩어져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혜로 부르신 5가지의 직분을 열거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God of Numbers: 50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은혜의 수 ‘5’에 이어서 은혜의 완전 수 ‘50’이 갖는 성령의 법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그전에 지난번 글에 대해 들어온 코멘트를 잠깐 소개하자면, 숫자 ‘5’가 죽음의 수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5’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고 죽었다’란 표현이 네 군데 나오기 때문입니다(삼하 2:23, 삼하 3:27, 삼하 4:6, 삼하 20:10). 모두 전쟁이나 다툼 중에 죽은 것으로 아사헬이 에브넬의 창끝에 맞아 죽으면서, 에브넬이 아사헬에 대한 복수로 요압에게 찔려 죽으면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바아나와 레갑에게 암살당하면서, 아마사가 요압에게 살해되면서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이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히브리 원어 ‘hahomes’는 킹제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배’로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킹제임스가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이 히브리 단어는 실질적인 히브리 단어 ‘5’와 관련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히브리/영어 사전인 ‘스트롱 사전’도 ‘hahomes’를 ‘chomesh’란 어원과 연결해 ‘배’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 ‘chomesh’란 어원에 대해 읽어보면 더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하며 오직 위 4구절에만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에서 인간의 ‘배’를 뜻하는 히브리 어원은 ‘chomesh’가 아닌 ‘beten’입니다. 이 점이 이상해서 ‘5’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를 찾아보자 의문이 금방 풀렸습니다. 5의 어원은 ‘chamesh’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배의 어원’이라는 ‘chomesh’와 모음 한 자 빼고 같습니다. 어차피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읽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맞다고 생각되는 모음을 넣어 이해해야 하는 언어이기에 ‘ch-m-sh’와 같은 자음들 사이에 어떤 모음을 넣느냐에 따라 다른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5(chamesh)’가 쓰인 구절들을 찾아보면 ‘hames’란 파생어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킹제임스가 성경이 4번 밖에 나오지 않는 ‘hahomes’를 ‘다섯-hames’과 연관 지어 번역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찌 되었든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은 결국 배나 옆구리 쪽을 찔렸다는 것이긴 합니다.
‘다섯 번째 갈비뼈’란 번역이 더 납득이 가지만 ‘5’란 숫자가 죽음보다는 은혜를 뜻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7’이란 수가 하나님의 완전수, 성령의 수, 교회의 수 등으로 대부분 등장하지만 ‘7 악령’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몰아낸 7 귀신, 사람에게서 나갔던 악령이 자기보다 더 악한 7 악령을 데려와 그 사람의 형편이 더욱 나빠졌다는 예수님의 비유 내용 등등). 그렇다고 ‘7’이란 수를 마귀의 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5’란 수 역시 성경 전체를 훑어보면 은혜의 수요, 언약과 예배의 수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실 때도 5가지의 짐승(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을 가져오게 하십니다(창 15:9). 이처럼 그 수에 대한 바로 된 의미를 알 때 성경에 4번 등장하는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아 죽었다’란 의미가 도리어 확연해집니다(세상 및 창조물을 의미하는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갈비뼈는 몸의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나 방패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 밑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갈비뼈를 비껴가 급소를(장기) 찔렸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빗나가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임한 것이 은혜입니다. 열 처녀 중 다섯은 성령의 은혜로 결혼식에 참석해 영생을 얻었고 다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영적 의미와 조명은 여길 눌러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0은 어떤 것의 ‘fullness’를 의미하는 완전수입니다(충만을 의미하는 10은 여길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은혜의 수 ‘5’를 곱하게 되면 온전한 은혜, 즉 속량 및 자유를 상징하는 50이 됩니다. 성령은 주님이 부활하신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은혜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 해인 50년째는 희년으로, 모든 빚이 탕감되고 포로된 자가 풀려나며 뺏겼던 땅을 되찾게 되는 구원과 자유와 회복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에스더 여왕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하만이 50 큐빗 교수대에 달려 죽는 장면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만은 모르드게를 거기에 매달고 이스라엘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구원으로 이스라엘은 오히려 원수를 갚고 하만과 10 아들은 죽습니다(에 5:14; 7:9).
성경 전체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등불에 대한 좀더 자세한 해석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4장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고 나오는데 이 ‘켜진 등불’ 즉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단어가 전체 성경에 50번 등장한다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복된 상태’, 즉 ‘복’을 뜻하는 ‘makarios(마카리오스)’란 단어도 신약에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큐빗, 넓이가 50큐빗, 높이가 30큐빗이었습니다(창 6: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은혜를 구할 때 ‘50명’의 의인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엔 거기서 ‘5’명이 부족한 ‘45’명이래도 멸하시겠냐고 한 후, 40, 30, 20, 10까지 내려갑니다. 그렇게 단 10명의 의인이라도 발견된다면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이 경우엔 은혜를 입을 의인의 완전수가 됩니다(창 18장).
이전 글에서도 적었듯이 모세의 성막 뜰은 길이 100큐빗에 넓이 50큐빗입니다. 50과 50의 배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막 휘장을 걸 50개의 고리(loops)와 50개의 갈고리(taches)가 나옵니다(출 36:17-18). 이것은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발견되는 진리인데, 에스겔 40장, 42장, 45장을 보게 되면 5와 50의 배수가 성전과 성소의 치수로 곳곳에서 발견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값으로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릴 때 가장 높은 액수로 책정된 것이 50세겔이었는데, 성인 남성의 20-60살까지 여기 해당합니다(레 27:3).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인 밭의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할 때도 보리 한 호멜지기를 은 50 세겔로 계산하라고 나옵니다(레 27:16). 레위인들의 직무는 평생이지만 성막에서의 시무는 30세에서 50세까지였습니다(민 4장). 아합왕 때 이사벨은 주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되는데 이때 오바댜는 100명의 선지자를 숨겨주고 먹일 때 50명씩(by fifty) 숨겨줬습니다(왕상 18). 누가복음 7장 41-42절에서 예수님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5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란 질문을 하십니다.
이상 50에 대해 다뤘습니다.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God of Numbers: 8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새로운 시작, 거듭남, 혹은 새 창조를 뜻하는 8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성령)의 완전수인 7에서 1을 더한 8은 재생, 혹은 부활을 뜻하기도 합니다. 일주일은 7일이기에 8번째 날은 새로운 첫날이 됩니다. 음계도 8번째 음은 첫 음과 같습니다.
‘33이란 숫자의 의미’에 적었듯이 ‘언약’이란 단어는 방주로 들어가는 노아와 연결되어 창세기 6장에 처음 나오며(창 6:18), 이전 세상은 물로 모두 멸망하고 노아와 그 자손들로 새롭게 시작하는 9장엔 7번 언급되어 총 8번 쓰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축복을 다시 노아와 3아들에게 주신 부분이니 재생의 의미와 맞습니다. 또한 다시는 물로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새로운 언약을 “언약”이 8번째로 나오는 9장에 주셨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은 사람이 쓸 수 없는 책임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물에 쓸려 가버린 옛 세상 가운데서 방주로 들어가 구원된 사람들도 8명이며(벧전 3:20), 새 세상으로 나온 노아를 성경은 ‘8번째 사람’으로 칭합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 번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KJV-밷후 2:5).” 즉, 창세기 때의 새 세상은 8명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8번째로 나오는 창 6장 9절의 후반부는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and Noah walked with God-KJV)”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이삭이 8일째 됐을 때 할례를 줍니다(창 21:4). 구약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예표하며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리는 것(골 2:11)’으로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는 것(엡 4: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자인 것입니다(빌 3:3).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직을 위해 7일 동안 거룩히 구분했으며(레 8:33) 8일째 되는 날 시무했습니다(레 9:1). 장막절은 7일 동안 진행됐으며 8일째 되는 날엔 거룩한 집회가 있었습니다(레 23:36).
모세의 진영에서 성막은 8개 진영에 의해 2중으로 보호되고 있었습니다(증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바깥쪽엔 3지파씩 묶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뉘어 진을 쳤습니다(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쪽엔 성막을 중심으로 레위인들(고핫, 게르손, 므라리) 3진영이 서남북 방향에, 그리고 모세와 제사장들(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동쪽으로 진을 칩니다(민 2-3장).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은 진영의 가장 중심부에, 8진영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렇게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진영의 모습은 십자가의 모형이기도 하며 거듭난 자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고(삼상 16:10-11; 17:12), 솔로몬은 새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께 ‘하늘에서 들으시고’란 표현을 8번에 걸쳐 쓰며 간구합니다(왕상 8장과 대하 6장에서). 또한 재림하신 예수님의 천년왕국 때 있을 에스겔의 성전은 바깥 뜰에서 안쪽 문간으로 올라가는 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겔 40:31, 34, 37). 그리고 땅에서의 천년 통치가 끝날 무렵,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단이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게 되고(계 20:7-10)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며 하늘과 땅도 사라지게 됩니다(계20:11-14). 그 후 사망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영원토록 임하는데(계21:1-4), 이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새 예루살렘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계 21:22).
신약, 즉 새로운 언약은 총 8명의 기자에 의해 쓰였습니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유다 바울).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눅 9:27)”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8일)쯤 되어(눅 9:28)”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 ‘transfiguration(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장차 올 왕국(나라)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주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 새로운 출생(다시 태어남)에 대해 나누시는 부분엔 ‘born(태어남)’이란 단어가 8번 등장하며(요 3:1-8),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물(water)’이 8번, 우물이(well) 5번(은혜를 뜻하는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등장합니다(요 4:4-15).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8일째 되는 날, 즉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첫날’ 즉 8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목격하지 못한 도마에게 ‘8일 후에(요 20:26)’ 나타나셔서 의심을 새 생명에 이르는 믿음으로 바꿔주십니다. 골로세서 3장 12절에서 14절엔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갖춰야 할 7개의 덕목이 열거되는데(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이 모든 것 위에 온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을 더하여 8개가 됩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다음 8단계로(6개로 가득하고 2개가 없는) 설명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그리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은 킹제임스 영어성경으로 찾아보면 신약에 총 8번 등장합니다.
이상이 새로운 시작, 거듭남, 새 창조, 재생 및 부활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상고입니다.
God of Numbers:2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나눔(분리), 또는 증인(증언, 확증)’을 의미하는 숫자 2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서 2를 만든 경우엔 ‘나눔, 분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에 같은 하나가 덧붙여진 경우엔 오히려 ‘확증, 증인(증언)’을 의미하기에 숫자 2는 그 뜻조차도 이중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 1:6-8). 같은 물이었지만 하늘 위, 하늘 아래 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물이 창조 때 나뉘었다면 땅이 나뉜 시기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הָאָ֔רֶץ(하아레스)’로 ‘땅, 지구’란 의미이며 창세기 1장부터 구약에 총 93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10장에서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던 시기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던 일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뉘었지만 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2가 갖는 ‘나뉨과 증언’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떤 일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을 악용한 악인들은 두 가짜 증인들을 내세워 의인이었던 나봇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신 17:6, 19:15; 왕상 21:10, 13; 마 18:16, 26:60;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계 11:3).
성경은 두 인물이나 사건을 대조해서 선과 악,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룻과 오르바, 한나와 브닌나,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유다와 북이스라엘, 나봇과 아합,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두 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굽을 심판하실 때 에굽 땅과 고센 땅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분리)하셨습니다(출 8:23). 롯 역시 두 천사에 의해 소돔에서 분리됩니다(창 19장).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을 입습니다(엡 4:22-25).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2가 갖는 나뉨의 의미를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마 7:13-14).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7:17-18).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의 집과 어리석은 자가 지은 모래 위의 집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마 7:24-27). 또한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안가고, 안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는 두 아들(마 21:28-31).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집 밖에 있는 맏이에 대한 비유도 그러합니다(눅 15:11). 예수님은 또한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한쪽을 미워하고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한쪽을 경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4:40-41).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은 육체를 따라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약속을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로 나뉩니다(갈 4:22-26).
성경엔 두 종류의 부활도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어떤 부활에 속하냐에 따라 두 개의 다른 심판석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은 상급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지만(고전 3:10-15; 고후 5:10), 나머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석 앞에 나타납니다(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두 번의 죽음을 겪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히 9:27)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수치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단 12:2)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20:14-15). 그러나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을(단 12:2)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계 20:6).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6).
요셉의 때에 바로가 꿨던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나타내는 두 번의 꿈도 이런 2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꿈의 내용은 7년 흉년과 7년 풍년으로 나뉘어 있는 동시에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꾼 것은 그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창 41:32)”이란 의미로 겹쳐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명의 인물이나 사건을 덧붙이는 것을 통해 성경은 악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증인을 세웁니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완연했던 악을 증거합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경배하러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단과 벧엘에 세운 두 마리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우상숭배를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의 증인은 나답과 아비후, 발락과 발람, 아합과 이세벨, 빌라도와 헤롯,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 증인들은, 엘닷과 메닷(민 11:26),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두 번 정탐꾼을 보냅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기에 12명을 보내지만 이들 중 2명만(갈렙과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게 되는 말기에는 아예 2명만(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은 비느하스와 갈렙이었습니다) 보내는데 이들은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과 크신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 안나와 시몬, 바울과 바나바,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증인들로 짝을 지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에 패역한 세대였던 바리세인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부터 왔던 남방의 여왕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입니다(마12:41-42).
예수님의 12제자 중 선두그룹에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형제로 짝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선포하려고 내보내셨을 때에도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누가복음 10장).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보냈던 동물들이 둘씩 짝지어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악한 세대의 멸망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리란 약속도 주십니다(마 18:19).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었습니다(눅 9:30-31).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도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란 증언을 줍니다(행 1:10-11).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2 증인이 나옵니다(계 11장).
성막을 제조할 때 주요 성분이었던 금과 조각목은(출 25-27) 예수님의 신성(금)과 인성(조각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도 증언을 뜻하는 두 개의 돌판에 주셨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긍휼의 자리)와 순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양쪽 끝에 있던 두 그룹도 언약의 증인입니다(출 25:18-20). 레위기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하나는 속죄헌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레 5:7).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몸에 일곱 번 뿌린 후 들에 놓아줍니다(14:4-7). 또한 속죄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해 제비를 뽑습니다(레위기 16장). 여호와를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의 것으로 뽑힌 염소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전가한 후 아사셀의 것으로 광야에 놓아줍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날인 오순절에 올리는 ‘고운 밀가루에 누룩 넣은 빵 두 덩이(레 23:17)’도 2가 갖는 이중적인 의미에 충실합니다. 유일하게 누룩 넣은 빵을 올릴 수 있는 풍요와 감사를 상징하는 오순절의 빵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지만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합작이며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동역으로 지어집니다(왕상 5:18). 솔로몬이 성전 입구에 세웠던 두 놋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란 뜻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인데, 이 두 기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예표합니다.
4 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마태복음엔 이런 두 증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명의 귀신 들린 자들(마 8:28)과 두 명의 장님들(마 9:27, 20:30)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불신에 눈 멀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2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또한 성경은 구약을 ‘율법자와 선지자’ 둘로 함축해 일컫기도 합니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행 13:15, 24:14, 28:23; 롬 3:21). 성경엔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을 약 7년 전쯤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받은 조명과 깨달음은 ‘이름을 두 번 부르심’이란 글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이신 ‘성자’ 예수님은 특별히 숫자 2의 특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두 가지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증언 및 증인에 대한 특징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땅에서 난 첫째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시며(고전 15:4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계 3:14). 예수님이 두 번 반복해서 쓰셨던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을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찾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자신이 은혜의 법, 즉 성령의 법(5*5)의 증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증오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선상에서 쏟아내신 ‘물과 피’로 ‘속죄와 정결’의 온전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분하셨습니다(겔 16:4; 엡 5:26; 히10:22).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던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 중엔 ‘paroxusmos(파록수스모스)’와 ‘hekousiós(헤쿠시오스)’가 있는데 ‘분리와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맞게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등장합니다. 이런 걸 발견할 때마다 성경의 위대함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원어 연구 2탄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od of Numbers:3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부활, 영적 완전함, 혹은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수 3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3은 7과 함께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4개의(3, 7, 10, 12) 완전수 중 가장 첫 번째 숫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적인 3분이시며 한 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그분께만 있는 3가지 특성이 있는데, ‘전능’, ‘전지’, ‘무소 부재(편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걸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모든 걸 아시며, 또 모든 곳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빚어진 우리도 영과 혼과 육, 3부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영혼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각, 말, 행동이란 3가지 영역으로 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도 삼차원인데,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숫자가 3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도 3가지 특성이 있는데, 햇빛은 ‘빨강, 초록, 파랑’의 원색이며, “빛, 에너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도 ‘동물, 식물, 광물’로 나뉘며 물체는 ‘고체, 액체, 기체’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며 완성되는데, 주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과거) 이제도 계시고(현재) 장차 오실 이(미래)”시기에(계1:8, 4:8) 영원히 계십니다.
3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숫자 중 하나이며 따라서 자주 등장하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이 가져왔던 3가지 산물인 포도와 무화과, 그리고 석류(민 13:23)는 하나님 약속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3개월간 모세를 숨겨 키우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후 3개월간 침례 요한의 엄마인 엘리사벳과 지내다 돌아옵니다. 신명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3가지 직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들 가운데서 택하사 일으키실 왕(신 17:15), 제사장(신18:3-5), 그리고 선지자(신18:15)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도피성을 둘 것을 명령하시는데,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동쪽 땅에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지정했고(신 4:41-4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을 3구역으로 나눠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두라고 명령했습니다(신19:2-3).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너희의 지경을 넓혀 말씀하신 땅을 다 주실 경우, 3개의 도피성을 더 구별하라고(신19:8-9) 했기에, 도피성의 수는 최대 9개(3+3+3, 3X3)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3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 6:10), 3번의 7일(21일)을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단 10:2).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스랍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3번에 걸쳐 찬양하고 요한계시록에서 4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3번 외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주 하나님께 올립니다(계 4:8-9).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금, 몰약, 유향’ 3가지의 선물을 받으셨으며, 12살이 되셨을 때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3일간 잃어버리지만, 성전에서 다시 찾습니다(눅 2:46).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 시험받으실 때도 3단계로 받으셨는데, 돌을 떡으로 만들라, 성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절하고 세상 왕국들을 받으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3번에 걸쳐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첫 번째는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였고(마 3:17; 막 1:11; 눅 3:22), 두 번째는 변화산에서 3명의 제자 앞에서 변용하셨을 때였고(마 17:15; 막 9:7; 눅 9:35), 세 번째는 십자가 선상에서였습니다(요 12:28). 그런데 이런 기록이 성경에 총 7번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3과 7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번번이 발견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7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7절기는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초막절)’인데 크게는 ‘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장막절(초막절)’ 3절기로 묶기도 합니다. 봄절기인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이 무교절을 지키는 일주일 안팎으로 오기 때문이고, 가을절기인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 대략 3주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여호와를 뵈러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올라올 것을 명령하십니다(출 23:14-17; 신 16:16).
창조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물 위로 올라오게(드러나게) 하시는데(창 1:9),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죽음에서 3명의 사람을 부활시키신(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요 14:6). 예수님은 표적을 찾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즉,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영어로는 3 days and 3 nights:낮 세 번과 밤 세 번) 땅속에 있을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 기도하신 후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받으셨고 제3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막 15:25) 온 땅에 총 3시간의(제6시에서 9시까지) 어둠이 임합니다(막 15:33-34).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3개의 언어로(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칭이 적혔었는데, 이는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나라, 백성, 방언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요 19:20). 예수님 좌우에 2명의 죄인이 십자가에 박혔었기에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가 있었고(요 19:18), 주님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4). 이런 주님에 대해 땅에서 증거하는 3가지는 “영과 물과 피”이며(요일 5:8) 주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3번에 걸쳐 기도하십니다(요 17:11-23).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3가지 덕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어떤 것의 ‘완성, 성취, 완벽, 완전’을 의미하는 3의 역할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인간의 연약함과 허황함을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것으로 성취했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3번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회복시키십니다. 3년 동안 열매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셨고(눅 13:7)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3번 보여주는 것으로 이방인 구원을 향한 완벽한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죄의 유혹과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3단계로 오며 멸망은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유 1:11)’ 3길을 따라 완성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삼위일체를 흉내내어 용, 짐승, 거짓 선지자로 등장합니다(계 13장). 요한계시록에는 다섯 번째 나팔에서 시작해서 일곱 번째 나팔로 마치는 3개의 화가 나오는데(계8:13; 9:12; 11:14), 이 3구절에 ‘화’란 단어가 7번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 유황” 3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습니다(계9:15-18). 또한 개구리 같은 3 더러운 영이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계16:13-14). 이에 맞춰 하나님의 3천사도 3가지 촉구와 경고를 합니다(계14:6-16). 첫 번째 천사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며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바벨론은 “사망, 애통함, 흉년” 3가지의 재앙으로 멸망하는데(계18:8) 다니엘서에서는 ‘세고(메네), 달아보고(데겔), 나뉘어(베레스)’ 멸망당합니다(단 5:26-28). 요한계시록 18장 9절에서 17절까지 바벨론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3부류의 사람들(땅의 왕들, 땅의 상인들, 바다의 선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6으로(숫자 6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눠 적혀있습니다(9절:왕들, 11절:상인들, 17절: 모든 선장, 선객들, 선원들,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3은 거룩하게 분리된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노아와 3 아들(창 6:10), 욥의 3 딸(욥 1:2, 42:13)과 3 친구(욥 2:11)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게 욥에겐 7 아들이 있었기에 자녀가 총 10이 됩니다(충만을 뜻하는 완전수 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욥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완전수 3, 7, 10이 자녀의 수에도 다 들어가 있어 얼마나 충만한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람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마 22:32). 이스라엘은 세상(에굽)과 거룩히 구분되기 위해 광야로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예배) 드립니다(출 5:3). 하나님은 사무엘을 3번에 걸쳐 부르시는(삼상 3:8) 것으로 그를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느부가넷살 왕에 의해 7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에 던져진 3 사람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단 3:19, 23). 에스겔서에 나오는 3명의 의인은 노아, 다니엘, 욥(겔 14:14)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벗)’로 3번(대하 20:7; 사 41:8; 약 2:23)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의 삶에도 3이란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이했던 3명의 손님(창 18:2), 그들을 섬기기 위해 사라가 준비한 3스아의 고운 가루(창 18:6),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산까지 갔던 3일의 길이 그렇습니다(창 22:3).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을 때 준비한 5가지의 헌물은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였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헌물이 5와 3의 숫자로 이뤄졌듯이, 모세의 성막은 숫자 5와 깊은 연관이 있었고 성전은 숫자 3입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성전 모두 ‘지성소, 성소, 성막뜰’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3층의 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왕상 6:6), 에스겔의 성전은 3면이 30개의 3층 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겔 41:5-6). 노아의 방주도 3층이었으며(창 6:16) 사도 바울은 삼천층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봤습니다(고후 12:1-2). 솔로몬의 성전에서 놋을 부어 만든 바다는 둘레가 30 규빗이었고 12마리의 소가 받치고 있었는데 북서남동으로 3마리씩 놓여있었습니다(왕상 7:23, 25).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인데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어 총 12문이 있습니다(계21:13).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3명의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납니다(왕상 17:9-24).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3번 펴서 엎드려 살려냅니다. 3은 부활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에녹처럼 하늘로 옮기시는데, 그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혹시 땅 어딘가에 그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 3일을 찾은 후에 포기합니다(왕하 2:17). 두 번째는 엘리사에 의해 수넴 여인의 아이가 살아납니다. 이때 엘리사는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아이의 눈에 자기 눈을, 그리고 아이의 손에 자기 손을 얹고 아이 몸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3단계를 걸쳐 살아난 아이는 7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뜹니다.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왕하 4:34-35). 세 번째는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해서 일어났던 경우입니다(왕하 13:21).
이렇게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3번,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3번 일어나는데, 제7번째 부활인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완전한 부활’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 영원히 살게 하는 능력의 부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성경에 3번(행 11:26, 26:28; 벧전 4:16) 나오며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3일 반 만에 부활합니다(계 11:11). 그리고 신약은 3의 3배수(3X3X3)인 27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God of Numbers: 4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세상, 창조물을 의미하는 숫자 4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창조 4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4가지를 위해(징조, 계절, 날, 해)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띄우시는 것으로 하늘 단장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땅 위로는 4개의 강줄기가 동서남북 4방향으로 흐르도록 하십니다(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따라서 4란 수는 세상 창조와 그 안의 창조물을 뜻합니다.
예언서(에스겔, 요한계시록)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영적 생물이 나오는데 그들은 사자, 소,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창조물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사자가 맹수라면(길들여지지 않은 동물들) 소는 가축(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들), 사람, 그리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이 이 4개의 영적 생물로 압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70퍼센트가 물, 즉 바다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그룹 중에 바다를 대표하는 생물이 빠져있습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용 또는 옛 뱀으로 불리는 사단(계20:2)이 바다의 생물과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파충류를 대표했었습니다. ‘사단 장’으로 불리는 에스겔 28장에 보면 9개의 보석으로 치장하고 불탄 돌들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성산과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나옵니다. 이 그룹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많은 무역(물품)으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법과 횡포를 행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침받았다고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에스겔 28장 16절에 ‘무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맞게 번역된 건지 알고 싶어 원어로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흥미롭게도 ‘무역, 또는 물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רְכֻלָּה(뤠쿨라오)’는 구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에스겔에서 나왔고 모두 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겔 26:12; 28:5, 16, 18). 에스겔 26장은 두로란 나라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28장은 사단에 빗댄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만 쓰인 ‘무역, 물품’이란 단어가 세상을 뜻하는 4번 등장한다는 게 성경의 묘미입니다. 이런 신기함이 성경 연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앞으로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수의 강만 있지 바다가 없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계21:1; 22:1). 성경은 이런 사단을 4개의 명칭으로(용, 옛 뱀, 마귀, 사단) 부릅니다(계20:2).
어찌됐거나 이 그룹은 ‘덮는(סָכַךְ:소콱) 그룹’이었기에 4개의 그룹들 위를 덮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룹들 중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였기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세상 창조물을 대표하는 그룹은 4가 아닌 5가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5란 숫자로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잘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였겠지만(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하며 하늘의 질서를 깼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며 땅의 질서마저 깨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질서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회복시키시고 화평케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앉아계십니다(히 10:12). 이런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한 조명을 쓴 글은 여길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4란 숫자는 2로 나눌 수 있는 첫 숫자이기에 둘로 분리되어 이중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4가 뜻하는 ‘세상’이란 단어가 그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구원의 대상인 창조물들과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요 3:16)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통치하는 죄악 된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요일 2:15-17).
타락 이후 모든 창조물이 함께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는(롬 8:19-22)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4 복음서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적시며 흐르던 4개의 강줄기가 모든 창조물에게 물을 공급했듯이, 성경엔 모든 창조물을 구원해줄 생명수가 4 복음서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4 복음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그룹에도 비유되는데 마태는 사자(왕), 마가는 소(종), 누가는 사람(인자), 요한은 독수리(하나님)입니다(이런 4 복음서에 대한 비교는 여길 누르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4 단계로(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행 1:8).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성경엔 총 4개의 가지(branch)가 나옵니다. ‘한 의로운 가지(a righteous Branch 렘 23:5)’, ‘그 종 가지(servant the Branch 슥 3:8)’, ‘그 가지(The Branch 슥 6:12)’, 그리고 ‘여호와의 가지(branch of the LORD 사 4:2)’입니다. 이 4개의 가지들도 순서대로 마태(왕), 마가(종), 누가(사람), 그리고 요한(하나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총 4번의 꿈으로 주의 사자로부터 지시받는 기록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데려오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마 1:20-21). 두 번째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니 에굽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마 2:13). 세 번째는 이제 안전하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마 2:19-20). 네 번째는 갈릴리 지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마 2:22).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예수님의 겉옷을 4명의 군인이 4개로 나누어 가집니다(요 19:23).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4개의 증거와(표적들, 기사들, 여러가지 능력, 성령의 은사) 함께 증언하셨습니다(히 2:4). 주님은 자신이 재림하실 수 있는 시각을 4개의 시간대로(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나눠 말씀하십니다(막 13:35).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을 차례대로 통치할 4개의 세상 왕국이 나옵니다(단 2:31-36). 이 왕국들은 하늘의 4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바다에서 나오게 된 큰 4개의 짐승에(사자, 곰, 표범, 열 뿔이 달린 짐승) 비유되기도 합니다(단 7장). 다니엘서에는 또한 4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첫 번째 왕인 느부갓네살(단 1-4장), 마지막 왕인 벨사살(단 5장), 메대 왕인 다리오(단 5장, 6장), 바사 왕인 고레스(단 6장, 10장)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된 밭은 4종류의 마음 상태에 비유되면서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길 가, 돌밭, 기시떨기, 좋은 땅). 또한 마지막 때에 4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에 불어 해하지 못하도록 땅 4 모퉁이에 서서 땅 4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계7:1). 그리고 성경은 세상을 심판할 4개의 재앙(전쟁, 기근, 역병, 지진)을 주로 언급합니다(마 24장, 계 6장). 마태복음 24장 7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니까 역병이 빠져 있길래 원본과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어떤 헬라어 원본을 보느냐에 따라 4가지 재앙이 다 나온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영어 킹제임스에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에 역시 4가지의 중한 벌을(칼, 기근, 사나운 짐승, 역병)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겔 14:21).
천지창조를 담고 있는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물(creature)’이란 단어가 4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민족과 나라가 나눠지고 세워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나눠지게 된 4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야벳은 땅(영토), 언어, 종족, 민족(창 10:5)으로 나뉘었고 함과 셈은 각각 족속, 언어, 지방, 나라(창 10:20, 31)로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세상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4개의 단어로(족속, 방언, 백성, 나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단어가 모두 쓰인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만 딱 4번 등장한다는 것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계5:9, 7:9, 11:9, 14:6).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에서도 4개의 장소에 있는(하늘, 땅 위, 땅 아래, 바다)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4개의 단어로(찬송, 존귀, 영광, 권능) 높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덮고 있던 천은 4겹이었는데, 맨 밑은 성막천, 그 위는 염소털, 그 다음은 수양가죽, 그리고 맨 바깥쪽은 해달가죽이었습니다(출 26장). 맨 안쪽에 있던 성막천은 4가지 색실로 수놓은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흰 베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의 큐빅 모양입니다(계21:16).
욥기에는 욥 외에 4 사람이 등장해서 설전하는데 욥의 3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여인이 등장하며(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하와란 이름은 성경 전체에 4번 등장합니다(창 3:20, 4:1; 딤 2:13; 고후 11:3). 시편 107편은 성경에서 같은 구절이 유일하게 4번 나오는 권입니다(107:8, 15, 21, 31). 잠언에는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이(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 나옵니다(잠 30:24-28). 무지개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구약에 2번, 신약에 2번 등장합니다(창 9; 겔1:28; 계4:3, 10:1). 스가랴서에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4개의 뿔과 그 뿔들을 떨어뜨릴 4명의 목수가 나옵니다(슥 1:18-21). 또한 4병거와 4가지 색의 4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늘의 4바람으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슥 6:1-5).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4가지의 육체를 얘기하는데 사람, 짐승, 새, 물고기입니다(고전 15:39).
4는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개념으로도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동서남북 4방향, 4대 원소 (흙 물 불 공기),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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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4:17;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등(람파스)
2985. 람파스(lampas) λαμπάς, άδος, ἡ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 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눅 15:8;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 '졸며'라는 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밤중에(*,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요 14:16).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οἷδα)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성경문답] 등불 기름을 나눠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을까요?
[질문]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세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열 처녀
비유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할 때 나누어 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열 처녀 모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답변]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당신만의 특유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의 특성과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그
해석법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답변한 내용이 객관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질문자께서도 스스로 점검하실 수
있고 또 추가적인 의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비유와 수수께끼
비유란 화자(話者)가 어떤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빗대어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주로 직유, 은유, 속담, 설화 같은 문학적 수식법을 동원합니다.
비유에
대비해 수수께끼는 그 이야기와 표현법이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사기 9:1-21에는 세겜의 시민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자 이 소식을 들은 요담은 '숲속 나무'의 수수께끼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숲속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순서대로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청하니 가시나무는 자기의 권세에 나무들이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동의했습니다.
요담은 세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가장 못한 사람을 왕으로 뽑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나무들은 이야기 속의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예를 들어 누룩의
비유(마 13:33)에서처럼 떡을 만드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유의 대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고 항상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수수께끼는 듣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의 범위 이상으로 해석을 확대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비유의
주제와 큰 줄기만 붙들어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지엽적인 내용과 세밀한 표현에까지 억매여선 안 됩니다.
2.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뜻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비유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이까?"(마13:10)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5)고 대답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씀의 권위를 받아 들이는 자와 전혀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자로 확연하게 둘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려고 비유 속에 비밀장치를 했거나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으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유의 주제를 한 마디로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비유의 주제가 단순히 도덕적 계명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또 말씀하신 당사자의 권위도 당연히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대신에 마음이 순수하고 가난한 자는 구태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약성경을 꿰 뚫고 있었으며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던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도덕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더러 외식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주님의 지적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가운데 숨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번도 헛되고 그른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주님을 자칭 도덕 군자들이 앞장 서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교만한 그들로선 비유의 주제인 천국을 못알아 듣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예수님 당신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진리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만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는 오늘 날의 독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자라면 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비유는 지금도 여전히 비유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만 열어 놓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이 종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주님의 통치는 마지막 때까지 연기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뜻 그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관한 비밀이 열릴 것이지만 완악한 자에게는 감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기 싫어서나 소수의 사람만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원하며 또 그 동안 심판이 취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라도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3.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
비유가 갖는 문학 기법상의 특성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뜻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객관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표현에 천국에 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배경은 항상 메시야의 구원과 더불어 새롭게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말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현실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해석이나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거의 모든 비유가 사전에 어떤 질문에 대답하거나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피고 제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석이 그런 질문과 상황에 벗어난 것이라면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해석이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비유에 동원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알아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에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비유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보편적인 상황과 실제로 가능한 사건을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낡은 술 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에선 당시의 포도주 저장하는 법을 모르면 정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4. 열 처녀 비유의 해석
위에서
말한 비유 해석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이 열 처녀 비유를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기 쉽게 먼저 당시 문화적 관습부터 살피고
다음에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찾고 마지막으로 천국이라는 주제에 대비해 그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4.1.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결혼 예식은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먼저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종교적 예식에 따른 결혼식을 치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노는 혼인잔치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에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나가 그들을 마중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를 데려 오는 신랑 일행을 저녁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기다렸다가 혼인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등이 횃불인지 호롱불인지 불명하지만 어쨌든 둘 다 기름을 담거나 적시는 용기가 작아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을 갖고 다니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이런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되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했으나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들고 있는 등불에만 채우고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4.2.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
예수님은 24:1-41까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관해 예언하셨습니다. 24:42부터 25장 마지막까지 마지막 심판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5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각 비유마다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그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24:42-44의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45-51의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두 번째 비유는 성도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고도 지혜롭게 잘 감당하면 예수님 재림 시에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과 앞 선 두 비유를 전제로 해서 마지막 때라는 연속되는 주제를 가진 세 번째 교훈이라는 근본적인 이해를 갖고 해석해야 합니다. 25:1에 "그 때에"라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의미하며 그 때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 집에서 치를 혼인잔치의 때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신랑이 더디 옴과 같이 재림의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마땅히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행동하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여 재림이 더디 올지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3.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해석
비유를 해석하는 세 가지 원칙은 '천국과 문맥과 당시 관습'에 바탕을 두라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약 세부적인 부분의 해석이 주제와 상관이 없거나 당시의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 배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님께서 제기한 슬기로운 처녀가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줬더라면 다 같이 열명 모두 구원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고 그 뜻은 선합니다만 비유의 해석 원칙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조금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하신 비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그 뜻을 풀어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비유 마13:3-9 해석 13:19-23)와 가라지의 비유(비유 마13:24-30 해석
13:37-43)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비유들을 해석하지 않은 이유는 이 모범적인 해석에 비추어 다른 것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로선 이 두 비유 뿐만 아니라 모든 비유에 나오는 설명들에 관해 누구나 잘 알고 직접 시행하고 있는
풍습이라 구체적으로 따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그 두 비유를 해석한 것에 따르면
마지막 때와 천국을 소원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태도에 관해서만 말씀하셨지 주제 외의 부분은 일절 다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거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다른 세밀한 표현을 두고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등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불을 켜지 못하는 자는 도적이나 불청객 취급을 받았지 기름을 나눠준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나눠주기를 거절하는 것이 비난 받을 행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런 부분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밀하게 예비하는 습관이나 품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 때에 본인이 주님과 어떻게 교제했으며 얼마나 주의 자녀답게 살았느냐를 의미합니다.
비유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로 합시다. 신랑의 친구로 초대 받은 자라면 신부 집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신랑의 성격이 혹시 더디 올 수 있는지, 아니면 신부 집이 집안이 넓어 예식이 오래 걸릴 수 있다든지, 날씨가 나빠 시간이 지체 될 수도 있다든지 더디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랑과의 교제가 평소 그 만큼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심판은 불시에 닥칩니다. 그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 놓을 자신의 신앙 상태와 신자로서의 자세(등불의 기름)를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시쳇말로 하듯이 마누라 치마 끝을 잡았다고 남편이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는 하나님과 본인의 일 대 일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믿었다고 아들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 기름의 비유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것이 바로 그뜻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이나 복음의 일군에게 가서 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각 자가 개별적으로 회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는 거부의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에 게을리 하거나 혼자서만 천국을 가려는 이기주의나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로 평가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
드린 대로 불시에 찾아 온 종말의 때에 각 자의 심판은 자기가 이 땅에서 천국을 소원하고 준비된 자인가 아니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원어적인 표현으로도 이중의 부정어가 첨가 되어 함께 쓰기에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아 꾸어 주면 꾸어 준 자도 기름이 모자라 아무도
신랑을 맞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뜻은 처녀를 여섯 명이나 여덟 명도 아니고 꼭
열명이라고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열은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이기도 합니다.
열 처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 받기를 소원하시지만 구원의 기준은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그런 앎이 없는 자가 등불에 기름을 준비 안 한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행 혹은 전도의
열심과는 상관 없이 구원 받지 못할 자가 교회 안에서도 반드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에서 쓰인 '알다'는 원어의 뜻이 단순한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혼인 당일 날 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부터 신랑과 신실하고도 계속된 교제를 통해 일 대 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비유의 주제는 24:42, 25:13에서 주님이 결론
지었듯이 항상 깨어 있으되 더디 올 수 있으니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락하지 말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평생을
걸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