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할지라도(창세기 31:5)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아침에 감사합니다.


나의 원하는것 나의소원이

성취되지 않을 지라도

그 분께 감사합니다.


그 분은 늘 내 가는 길 앞서가시고

미리보셔서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열어 주시기에 감사합니다.


원하는것 주시지 않으시고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분 보시기에 내가 요구 하는것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내 생각보다

깊으시고 넗으셔서 늘 앞서가시고

멀리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시지 않을지라도

감사하고요

열어주지 않으실 지라도 

감사해요


그리하지 않으실지라도 

주님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해요


주님 당신이 옳은 길이고

주님 당신의 길이 바른길이고

주님 당신이 정답이기에


주님 당신을 

많이 많이 사랑하고 감사하고

찬양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The next time you feel like God can't use you.

하나님께서  당신을 쓰실 수 있을까 하 나약한 생각이들 때

Remember the following people.

다음의 사람들을 기억하세요.

NOAH was a drunk      노아는 술 취한 사람이었고

ABRAHAM was too old      아브라함은 너무 노쇠하였고

ISAAC was a daydreamer     이삭은 공상가였고

JACOB was a liar      야곱은 거짓말쟁이였고

LEAH was ugly        레아는 못 생겼었고

JOSEPH was abused     요셉은 학대를 받았었고

MOSES couldn't talk...     모세는 말을 잘 못했지요...

GIDEON was afraid...     기드온은 두려워 했고...

SAMPSON had long hair &was a womanizer...     삼손은 긴 머리에 ㅂㅏ람둥이였고...

RAHAB was a prostitute...     라합은 기생이었고...

JEREMIAH and TIMOTHY were  too young...     예레미아와 디모데는 너무 어렸었고...

DAVID had an adfair &was a murberer...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였지요...

ELlJAH was suicidal...     엘리야는 심한 우울증환자였고...

ISAIAH preached naked...     이사야는 벌거벗은 설교자였고...

JONAH ran from GOd...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NAOMI was a widow...     나오미는 과부였고...

JOHN the Baptist ate bugs...     세례요한은 벌레를 먹었고...

PETER denied christ...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고...

THE DISClPLES fell asleep   while praying...    제자들은 기도하다 잠이들었고...

MARTHA worried about everyrhing..     마르다는 모든일에 대해 근심하였고...

MARY MAGDALENE was demom   possessed...     막달라는 마리아는 귀신이 씌였었고...

The SAMARITAN WOMAN WAS  was divorced.. more than once!!.. 

사마리아의 여자는 이혼했었고...   그것도 한번이상...

ZACCHEUS was too small...     삭개오는 키가 넘 작았습니다...

PAUL was too religious...     바울은 넘 율법적이었고...

TIMOTHY had an ulcer...     디모데는 궤양이 있었고...

AND LASARUS WAS DEAD!!!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NO MORE EXCUSES!!!!!     이제 더 이상의 핑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쓰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1: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성경 인물(05-17-2023) 1. 세례 요한, 2. 말라기, 3. 엘리야, 4. 엘리사


성경의 인물

1. 세례 요한

2491. Ἰωάν(ν)ης, ου, ὁ

1. ‘요한’.  2. 세례요한.  3. 세베대의 아들 ‘요한’ 12제자 중 하나 이며 야고보의 동생
발음 / 이오안네스[ Iōannēs ]
어원 / 히브리어 31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요한(마 3:14), (사도) 요한(마 4:21), 요한(마가)(행 12:25)
신약 성경 / 135회 사용

* 히브리어 3110. יוֹחָנָן

1. 여호와께서 수여하셨다 : 여러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요하난’.  2. 다윗의 장군 중 두 사람.  3. 요시야 왕의 한 아들
발음 / 요하난 [ Yôwchânân ]
관련 성경 / 요하난(대상 3:15, 12:4,12)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세례 요한,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침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다.
동시에 신약시대의 시작을 여신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엘리야"였다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 그는 누구이며 엘리야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애

하나님이 보내심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무거운 세금과 학정(虐政)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야’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다만 메시야가 등장하기 전에는 한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메시야의 길을 미리 예비할 ‘엘리야’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말라기 3:1, 4:5~6 참조). 그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먼저 나타난 ‘엘리야’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 1:6~8

탄생 

세례 요한의 부친은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이며 모친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이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와 친척 관계였다.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아이를 갖고 싶어 늘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가랴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가랴가 이를 믿지 않았던 탓에 그는 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입이 닫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요한이 태어나자 자연히 사가랴도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가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당시 요한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하려 할 때, 주변의 친척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엘리사벳이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친척들이 사가랴의 의중을 알고자 아직 말을 못하던 그에게 서판을 전달했는데, 그도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명명한다고 쓰자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다고 한다(누가복음 1장 참조).

세례(침례)를 베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는 회개의 세례(침례)를 베풀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가복음 1:1~8

그는 많은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또 많은 이들이 제각각 자신이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를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그는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징수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군병들에게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자신의 받는 봉급에 만족하라”고 일러주는 등 회개의 방법을 묻는 이들에게 상세히 답변해주었다. 하지만 바리새인사두개인 등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를 받으려 할 때는 질책과 저주를 쏟아냈다. 앞서 열거한 이들과 달리 세례를 받으려는 그들의 행위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함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마태복음 3:7~9 참조).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또 당대의 기득권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야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에게 직접적으로 그의 정체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야도, 엘리야도 아니라고 밝히 말했다. 그럼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복음 1:23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세례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발언을 인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설명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구절은 이사야 40장 3~5절로써,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자’는 다름아닌 엘리야이므로(말라기 3:1, 4:5~6 참조), 결국 “내가 엘리야다”라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루시는 역사는 이처럼 성경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과의 만남

요한은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선지자로서 신약의 복음시대를 여시는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이전부터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증거해야 할 ‘메시야’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다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머리 위에 머무는 이를 보면, 그가 바로 메시야일 것이라는 정도만 알았다. 그 메시야를 기다리며 요한은 계속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드디어,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와 신약시대를 여는 구원자가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이 성사되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시라고 분명히 증거하였다. 메시야를 증거하는 엘리야의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죽음

이후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헤롯이 그것 외에도 몇 가지의 누명을 더 씌워 그를 잡아 감옥에 가뒀다. 헤롯은 당장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그러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민중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있어서 반란이 날까 염려가 돼서였다.

그 무렵 헤롯의 생일을 맞아 잔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서 헤롯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그때 헤롯은 그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다 줄 터이니 소원을 말하라 했는데, 아마 아이가 빌 소원이라는 게 기껏해야 얼마나 크겠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요망하게도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당돌하게도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그대로 전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헤롯은 아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맹세한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었고 잔치 자리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근심 끝에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았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는 그렇게 생을 마쳤다.

엘리야와의 관계

세례 요한을 엘리야에 빗대서 설명한 부분이 성경에 상당히 많은데, 요한과 엘리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1.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께서는 오리라 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3~14

이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앞서 설명했던 말라기 3장과 말라기 4장 5~6절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메시야의 임재(臨在)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라고 증거하신 이면에는 사실 한 가지의 메시지가 더 숨어 있다. 성경의 예언에 따르면 엘리야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 하는데, 요한이 증거했던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을 엘리야로 증거하셨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메시야다”라고 드러내신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제자들 중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2. 약대 털옷과 가죽띠

또한 세례 요한의 외형을 통해서도 그와 엘리야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약대 털옷과 가죽띠를 하고 다녔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싶겠지만, 바꿔서 생각해보자면 그렇게 별 것 아닌 내용이 왜 ‘구원을 위한 책’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합리적 의문도 가질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엘리야 역시 요한과 마찬가지로 털옷과 가죽띠가 그의 ‘시그니처 마크’였다.

과거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아하시야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 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완쾌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고자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왕의 명령을 수행하러 가던 사자에게 한 선지자가 나타났다. 그 선지자는 “바알세붑에게까지 갈 필요 없다.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의 신을 의지했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 사자가 그 말대로 왕에게 돌아가 이 말을 전달하자, 왕은 그 말을 한 선지자의 인상착의를 물었다. 이때 바로 그 선지자, 엘리야의 시그니처 마크가 등장한다.

“그는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디스베 사람 엘리야가 틀림없다.”

현대인의성경, 열왕기하 1:8

아하시야왕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둘렀다’라는 인상착의만 듣고도 그 선지자가 엘리야임을 알아챘다. 이처럼 엘리야의 증표는 털옷과 가죽띠였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털옷과 가죽띠를 한 것은 그것밖에 의복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자라는 알려주는 중요한 증표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 그가 못다 이룬 예언

요한은 엘리야의 사명을 가지고 왔지만 그 사명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1.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 직전에 나타나야 함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1, 5
사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의 등장 시기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기 전이다. 이날은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다 불에 사르는 날이며,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최후의 심판 날이다. 이 최후의 심판이 이르기 직전에 엘리야는 등장해야 하지만, 세례 요한이 등장한 이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아직 불에 타지지 않았고 온 인류는 뿌리와 가지를 막론하고 건재하기만 하다.

2. 아비와 자녀의 마음을 서로에게 돌이켜야 함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말라기 4:6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킬 방법은 무엇일까? 서로 대화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이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돌이켜지는 방법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옛날 남왕국 유다의 요시야왕 당시, 그는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자 하나님과 우상을 구분하게 되었고 나라 전역에서 우상을 전멸시켜 하나님께 그 마음을 온전히 드릴 수 있었다(열왕기하 23장 참조).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마음을 드리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인지 이방 잡신인지 결코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유월절을 지켰을 때는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서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엘리야가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온전한 예언 성취가 되려면 세례 요한이 유월절도 전파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침례에 대해서만 교훈할 뿐이었다.

결론

엘리야의 사명은 2천 년 전에 마쳐진 것이 아니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기 전에 다시 그 사명을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증표는 유월절이다.
잃어버렸던 유월절을 복구할 그는 털옷과 가죽띠로 자신의 정체를 은연중에 드러내실 것이다.
과연 마지막 때에 등장하실 엘리야는 누구일까?
성경을 심각히 연구해야만 그 답을 알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말라기

1. 인적 사항

    (1) 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천사'라는 뜻.

    (2) 말라기 선지자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음.

    (3) 소선지서 말라기서의 저자(말 1:1).

2. 시대적 배경

    말라기는 B.C. 444년 제3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로부터 자신의 예언서를 기록한 연대로 추정되는 B.C.430년까지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제3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유대 총독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첫 번째 사명으로 생각한 것은 먼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통해 제1차 포로 귀환(B.C.537년) 이후로 재건되기 시작한 신정 국가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이고 또 종교 개혁을 통해 선민의 면모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의 부패와 십일조와 헌물규례의 정비,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여 책망함으로써 종교적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3. 주요 생애

    사역 이전

    출생

    이스라엘의 타락 인식

    사역 이후

    제사장들의 범죄 지적과 회개 선포

    B.C.444-430년경

    말 1:6-2:9

    백성들의 범죄 지적과 회개 선포

    말 2:10-3:15

    말라기서 기록

    B.C. 430년경

    말 1;1

    죽음


4. 성  품

    (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불신감을 불식시킨 것을 볼 때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난 변론자(말 1:2-5).

    (2) '보라', '기억하라', '명령하노라' 등의 감탄사와 명령문이 많은 그의 예언을 통해 볼 때 매우 열정적이고 활기에 넘치는 신앙의 소유자(말 1:9 ; 2:1).

    (3) 모든 백성들이 성전 재건 이후 그 신앙이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부패한 때에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을 확신 있게 선포한 것으로 볼 때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분명한 자(말4:1-3).

5. 구속사적 지위

    (1)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자로서 메시야의 도래에 앞서 세례 요한이 올 것을 예언함(말3:1; 4:4-6). 이로써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교량 역할을 한 자.

    (2) 제2성전 재건 후에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즉각적으로 도래하지 않는 사실에 회의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자들에게 장차 임할 메시야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소망을 선포한 선지자(말 4:1-3).

    (3) 예배 의식의 내적인 면을 강조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외적 제사와 의식의 철저한 준수도 강조한 예언자(말 1:6-2:9 ; 3:7-12).

    (4) 구약 성경의 예언서 중 가장 변론적인 예언서의 저자.

6. 평가 및 교훈

    (1)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선지자들의 예언 대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자 많은 백성들은 절망과 회의, 그리고 영적 나태함에 빠져들어갔다. 이렇듯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다가도 즉각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절망과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 버리는 한계성을 자주 보인다. 그러나 말라기는 이처럼 절망에 빠져 회의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과거에 베푸신 은혜 등을 돌아보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실로 오늘날 세속적인 욕망에 쉽게 유혹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기 쉬운 우리 자신들에게 더욱 적절한 권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말라기는 성의 없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는 성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외칠 만큼 겉치레뿐인 형식적인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열심 있는 정직한 의식 준수를 강조하였다(1:6-2:9).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경외와 순종이 어울러진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인가를 돌아볼 일이다.

7. 핵심 성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구약성경 속 마지막 하나님의 사자 말라기 선지자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인도를 받아 성전과 성벽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형편이 좋아지지 않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경고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자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가는 연결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성경입니다.
기록된 시기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435∼425년경이라고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나의 사자’라는 이름 뜻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했어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풀려났습니다.
선지자의 인도를 받아 성전을 다시 세우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지자의 권고를 받아서 마음을 쏟아 성전과 성벽을 다시 지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과 성벽을 다 지었으니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번성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라가 회복되지 않고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과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 말라기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가 형식적으로 흘러갔습니다.
마음 없이 모양만 내어 흠 있고 병들고 더러운 제물을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라기 1:10)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 2:2)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

말라기 뒷부분에 보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에 보이는 형편만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눈에 보이는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특별한 소유를 삼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아끼겠다고 하셨습니다.

말라기는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져서 형편을 따라 살고,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지 못해서 부담을 피해 살아가려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엘리야



이스라엘 왕국에 비가 내리지 않고, 물이 말라가고 있었어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주님의 선지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몇몇 선지자를 죽이기까지 했어요. 왕과 왕비는 우상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어요. 하지만 선지자 엘리야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오랫동안 비를 내려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어요.

열왕기상 16:29~33; 17:1; 18:13

 

왕과 왕비는 엘리야에게 화가 났어요.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목숨이 위험하니 숨으라고 경고하셨어요.

열왕기상 17:2~3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개울로 이끄셨고, 새를 보내 음식을 가져다주셨어요.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 개울은 말라버렸고, 엘리야는 물이 없었어요.

열왕기상 17:4~7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멀리 떨어진 도시의 한 여인에게 인도하셨어요. 엘리야는 그녀에게 물과 빵을 줄 수 있는지 물었어요.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녀와 아들이 먹을 하루 치 음식과 물뿐이었어요.

열왕기상 17:8~12


엘리야는 그 음식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음식을 준다면, 주님께서 비가 다시 내리기 전까지 그녀의 가족을 위한 음식을 마련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어요.

열왕기상 17:13~14


여인은 엘리야를 위해 빵을 구웠어요. 그러자 기름과 밀가루가 늘어났어요! 엘리야와 그녀의 가족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음식이 생겼어요.

열왕기상 17:15~16


어느 날 여인의 아들이 아파서 죽게 되었어요. 그녀는 엘리야에게 왜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두셨는지 물었어요.

열왕기상 17:17~20


엘리야는 신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그녀의 아들을 축복하고 주님께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어요. 아이는 다시 숨을 쉬었고, 여인은 엘리야가 주님의 선지자임을 알았어요.

열왕기상 17:21~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엘리사


선지자  엘리사(Elisha)


강을 건넌 뒤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영적인 능력에 두 배를 나에게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어려운 것을 구하는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 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하면, 받지 못할 것이다. ( 열왕기하 2: 9-10)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로서 BC 892-BC 832년 사이에 북이스라엘에서 60년간 선지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엘리사는 그의 스승인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선생님의 영적인 능력에 두 배를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그러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보다 두 배가 큰 영적인 능력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유산상속법에 따르면 상속을 받게 되는 큰 아들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를 더 많이 받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들이 셋이 있으면, 유산을 네 개로 균등하게 나누어서, 첫째 아들에게 네 개 중 2개의 몫을 주고, 다른 두 아들은 각각 1개의 몫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은, 엘리사보다 두 배의 능력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엘리야의 제자로서 마치 첫째 아들처럼 다른 제자들보다 두 배로 그의 영적인 능력을 상속받겠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과 비슷한 기적들을 행합니다.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기도 하고, 엘리야의 옷으로 강을 가르기도 하고, 여리고 성의 물을 깨끗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빚을 남기고 죽은 제자를 위해, 기름 한 병을 가지고 많은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이를 가지고 빚을 갚고, 제자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했던 것처럼 작은 조각의 빵을 가지고, 백 명을 먹이고도 남기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문둥병에 걸린 아람 다마스커스 왕국의 장군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깨끗하게 고쳐줍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걸린 문둥병을 오늘날의 나병으로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짜라아스(Tzaraath)라는 단어인데, 이는 모세 율법에서 분류한 일종의 피부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히브리 성경이 셉투라이트(70인 번역)으로 처음 이방인들에게 소개될 때, 짜라아스에 대한 정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일률적으로 문둥병으로 번역하였는데, 실은 짜라아스는 문둥병이기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피부병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짜라아스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하다 걸리기도 하였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한 손에 짜리아스가 나게 했다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두 이를 문둥병으로 해석했지만, 실재로 모세 율법이 분류한 피부병에 한 종류일뿐잊 문둥병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짜리아스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복과 집 같은 사물에도 전염된다고 나오기 때문에, 문둥병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짜리아스가 사람뿐만 아니라 옷과 집에 퍼진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일종의 다양한 곰팡이 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18가지 흥미로운 사건

열왕기하의 시작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무시한 악한 왕 아하시야왕에 대하여 운명의 메세지를 전했고 왕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불말과 불수레 속에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합니다. 이 장면을 본 제자 엘리사는 그곳에서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엘리사 행적 1. 요단강물 가름

엘리사 간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함께 하심을 보여준 의미있는 사건이였습니다. 이후에 엘라사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엘리사 행적 2. 물 깨끗하게 함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곳을 물의 근원에 소금을 그 가운데 던져서 회복시켜 오늘날까지 이르게 합니다.

엘리사 행적 3. 대머리라고 놀리는 악한 젊은아이들를 죽임 

엘리사가 벧엘에서 길을 행할 때 젊은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하며 조롱하자 엘리사가 돌이켜 저주하니 수풀에서 곰이 나와 아이들 중에 42명을 죽였습니다. 이사건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고 백성 앞에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엘리사 행적 4. 골짜기의 개천을 많이/파라. 물이 흘러나와 가득해지고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하고 이루어짐

아합왕이 죽은 후에 모압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여 그 때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연합을 요청하고 에돔왕과 더불어 세명의왕이 모압을 치러갈때 행군 7일이 되어 육축과 사람이 먹을 물이 없어 여호람왕이 "슬프다. 여호와께서 세왕을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시는구나" 라고 한탄하자 여호사밧왕는 여호와께 물을 만한 선지자를 찾자 이스라엘 신복중에 한 사람이 엘리사를 추천하여 왕들은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왕을 봐서 여호람왕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너희가 바람도 비도 보지 못할것 이지만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목축들이 마시라" 고 하셨다 라고 예언하며 이것은 작은일이고 큰일은 모압을 이길것 이라고 말합니다.

아침에 소제를 드릴때에 물이 에돔편에서 흘러나와 그땅에 가득하고 모압 사람들이 해가 물에 비춰서 붉게 물들어 보여 상대편이 서로 싸워서 흘린 피로 잘못 알고 노략하러 왔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패하고 맙니다.

엘리사 행적 5. 빈그릇에 기름차게 함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채주가 두 아이를 종 삼으려 한다고 호소합니다. 그때 엘리사는 "어떻게 하랴/ 집에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 그릇을 빌리라/ 문을 닫고/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말씀합니다.

기름 한병이 전부인 과부는 두아들과 함께 그대로 행함으로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부어 다 채우고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비를 하게 합니다.


엘리사 행적 6.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림

엘리사를 주밀하게 섬기는 아들이 없는 여인에게 아들이 있게 될것을 말씀하고 1년후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어느정도 자라서 머리 아픔을 호소하고 죽습니다. 그때 갈멜산으로 찾아온 수넴여인을 쫓아가 죽은 아이에게로 가서 끈질긴 기도끝에 아이를 살려냅니다.


엘리사 행적 7. 독이 든 국의 해독하여 주린자를 도움

그땅에 흉년이 들어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와 함께 있을때 사환에게 생도들을 위해 큰솥을 걸고 국을 끓이라 합니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갔다가 야등덩굴 만나 그것으로 국을 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려고 할때 그솥에 사망의 독이 있어 먹지 못하자 엘리사가 가루를 그속에 넣어 독을 없어지게 합니다.

엘리사 행적 8. 떡 20개의 기적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온 사람이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립니다. 그것으로 엘리사는 사환에게 시켜 100명에게 먹게하라고 합니다. 사환은 의심하지만 "하나님이 말씀이 주어 먹게하라. 먹고 남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척의 축소판이라고 생각되는 기적을 엘리사가 행한 것입니다.

엘리사 행적 9. 나아만장군의 문둥병 고침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 고생할때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계집아이 종에게 엘리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람왕의 글과 함께 선물을 준비하여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 갑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에게 종을 보내 요단강에서 7번 목욕을 하면 깨끗하게 나을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사가 직접나와서 치유기도를 해줄것으로 생각했는데 홀대 받아 화가난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 깨끗한 강을 운운하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그의 종들이 나아만에게 병이 나을 수 만 있다면 더 어려운일을 시켜도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조언하자 엘리사의 말 대로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하고 나서 문둥병을 고칩니다.

엘리사 행적 10. 게하시의 문둥병 심판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나아만장군에게 엘리사가 필요한것 처럼 말하여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 집에 감추고 엘리사에게 거짓말 함으로 문둥병에 걸립니다.

엘리사 행적 11. 물위로 떠오른 도끼

선지자생도들이 함께 거한곳이 좁아 재목을 취해서 처소를 세우려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다가 한 사람이 빌러온 도끼로 나무를 벨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집니다. 그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엘리사 행적 12. 아람의 침략을 미리 방비한 기적들

엘리사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아람왕과 그 신하들의 전략을 간파하고 이스라엘왕에게 알려줌으로 미리 군사들을 보내 방비한것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엘리사 행적 13. 사환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보게함

아람왕이 자신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엘리사를 먼저 잡으려고 말과 병거와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으로 보냅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고 엘리사에게 보고 하며 "아아 내주여 어찌하리이까?" 라고 한탄하자 엘리사가 기도하여 사환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선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 행적 14. 아람군사들의 눈을 어둡게함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내려왔을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원컨대 저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데려가서 그곳에서 눈을 열어 보게 하고 포로로 전부 잡았으나 죽이지 않고 떡과 물를 주어 먹게하고 돌려보넵니다.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엘리사 행적 15. 사마리아의 굶주린백성과 불신장관 심판 식량해결   

벤하닷이 사마리아성을 포위하여 식량보급로가 막혀서 성안에 백성들이 배고픔에 서로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 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왕이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엘리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면 모든것이 다 회복될것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왕이 의지하는 장관이 "하나님이 하늘에 창문을 내신들 어찌 이런일이 있겠는가"라며 불신합니다. 엘리사는 " 네가 네 눈으로는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라고 예언하여 결국은 그 장관은 다음날 성문에서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게 됩니다.

엘리사 행적 16. 벤하닷의 죽음과 하사엘의 통치 예언

벤하닷이 병이 들어 하사엘에게 엘리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병이 낫겠는가를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 병은 날것이다. 그러나 정녕 죽으리라"고 예언하고 하사엘이 새로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못된일을 할것을 울며 말씀합니다.

하사엘은 벤하닷왕을 만나 엘리사가 병이 낫게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고 그 이튿날 이불에 물을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어서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엘리사 행적 17. 이스라엘이 수리아를 세번 이길것을 예언함

엘리사가 죽을 병에 들었을때 요아스왕이 저에게 가서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기와 마병이여" 라고 할때 엘리사가 "화살을 취하여 땅을 치소서" 하자 이에 세번을 치고 그치자 엘리사가 노하여 "왕이 5-6번을 쳤으면 아람을 완전히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살을 3번 친고로 그 수만큼만 이길것을 예언합니다

엘리사 행적 18. 죽은지 수년후에 한 시체를 살아나게함

엘리사가 죽어 장사지내고 해가 바뀌고 나서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묻고 있다가 도적 떼를 보고 놀라서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지고 달아났는데 그때에 그 시체의 뼈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그 사람이 살아나서 제발로 일어섰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북이스라엘 역대왕과 남유다의 역대왕 도표정리(05-17-2023 / 수)


북이스라엘 역대왕과 남유다의 역대왕 도표정리


북이스라엘 왕국

대수

이름

성경본문

연도(B.C.)

기간

비고

1

여로보암1세

왕상13:1~14:31

931~910

22년

북이스라엘의 창시자. 송아지 숭배 시작.

2

나답

왕상15:25~32

910~909

2년

여로보암 1세의 아들. 바아사에게 살해됨.

3

바아사

왕상15:33~16:7

909~886

24년

남유다 아사왕과 오랫동안 전쟁.

4

엘라

왕상16:8~14

886~885

2년

바아사의 아들. 술에 취하여 시므리에게 살해됨.

5

시므리

왕상16:15~20

885

7일

즉위 7일만에 오므리에게 패하여불타 죽음.

6

오므리

왕상16:21~28

885~874

12년

사마리아를 세움. 번영하였음.

7

아합

왕상16:29~22:40

874~853

22년

바알 숭배자였으며, 가장 악한왕으로 기록됨. 이세벨의 남편.

8

아하시야

왕상22:51~

왕하1:18

853~852

2년

아합의 아들. 병상에서 이방신에게 묻다가 엘리야의 책망 받음.

9

여호람

(요람)

왕하3:1~9:37

852~841

12년

아하시야의 형제. 형제들을 살해함. 예후에게 살해됨.

10

예후

왕하9:1~10:36

841~814

28년

바알 숭배자들을 몰살시켰으나,송아지 숭배는 계속함.

11

여호아하스

왕하13:1~9

814~798

17년

예후의 아들. 아람에게 침공당함.

12

요아스

왕하13:10~25

798~782

16년

여호아하스의 아들. 아람에게 빼앗긴 성읍 회복.

13

여로보암2세

왕하14:23~29

782~753

41년

요아스의 아들. 번영하였으나,우상숭배와 부패 만연.

14

스가랴

왕하15:8~12

753~752

6개월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살룸에게살해됨.

15

살룸

왕하15:13~15

752

1개월

즉위 1개월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됨.

16

므나헴

왕하15:16~22

752~742

10년

앗수르 왕 불에게 조공을 바침.

17

브가히야

왕하15:23~26

742~740

2년

므나헴의 아들. 베가에 의해 살해됨.

18

베가

왕하15:27~31

740~731

10년

앗수르의 침공으로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감. 호세아에게 살해됨.

19

호세아

왕하17:1~6

731~721

9년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함.



남유다 왕국

대수

이름

성경본문

연도(B.C.)

기간

비고

1

르호보암

대하10:1~12:16

931~913

17년

백성들의 뜻을 무시하여 왕국 분열을 초래함.

2

아비야

(아비얌)

대하13:1~22

왕상15:1~8

913~911

3년

르호보암의 아들. 여로보암과 전쟁하여 승리함.

3

아사

대하14:1~16:14

왕상15:9~24

911~870

41년

선한 왕. 하나님을 공경함. 우상숭배하는 모친 폐위.

4

여호사밧

대하17:1~20:37

왕상22:41~50

873~848

25년

아사의 아들. 선한 왕. 백성에게율법 교육. 아합과 연합하여 책망받음.

5

여호람

대하21:1~20

왕하8:16~24

848~841

8년

여호사밧의 아들.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함. 무서운 병으로죽음.

6

아하시야

대하22:1~9

왕하8:25~29

841

1년

여호람의 아들. 예후에 의해 살해됨.

7

아달랴

대하22:10~23:21

왕하11:1~21

841~835

6년

아하시야의 모친. 바알 숭배자.손자들을 학살.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으로 살해됨.

8

요아스

대하24:1~27

왕하12:1~21

835~796

40년

아하시야의 아들. 여호야다의 지원으로 7세에 즉위. 성전 보수.말년에는 우상 숭배.

9

아마샤

대하25:1~27

왕하14:1~22

796~767

29년

요아스의 아들. 정직했으나 에돔신 섬김.

10

웃시야

(아사랴)

대하26:1~23

왕하15:1~17

791~740

52년

아마샤의 아들. 정직했으나, 후에 교만으로 문둥병에 걸림.

11

요담

대하27:1~9

왕하15:32~38

750~736

16년

웃시야의 아들. 아버지의 섭정받음.

12

아하스

대하28:1~27

왕하16:1~20

736~716

16년

요담의 아들. 우상을 숭배하고아들을 불사름.

13

히스기야

대하29:1~32:33

왕하18:1~20:21

716~687

29년

아하스의 아들. 하나님을 경외함. 종교개혁 단행.

14

므낫세

대하33:1~20

왕하21:1~18

696~642

55년

히스기야의 아들. 우상을 숭배하고 아들을 불사름.

15

아몬

대하33:21~25

왕하21:19~25

642~640

2년

므낫세의 아들. 우상숭배자. 신하들에게 살해당함.

16

요시야

대하34:1~35:27

왕하22:1~23:37

640~608

31년

아몬의 아들. 하나님을 경외함.율법책을 발견하여 개혁 단행.

17

여호아하스

(살룸)

대하36:1~4

왕하23:30~34

608

3개월

요시야의 아들. 바로에 의해 폐위됨.

18

여호야김

(엘리아김)

대하36:5~8

왕하23:34~24:7

608~597

11년

여호아하스의 형제. 바로에 의해즉위. 바벨론 포로가 됨.

19

여호야긴

대하36:8~10

왕하24:6~17

597

3개월

여호야김의 아들. 3개월만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37년간 포로 생활.

20

시드기야

(맛다니야)

대하36:11~21

왕하24:1~25:30

597~586

11년

여호야긴의 아자비. 느부갓네살에 의해 즉위되었으나, 반역하여포로로 잡혀 감.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 현재(계속적) 수동태(체험적) 명령형(무제한적)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현재(계속적) 수동태(체험적)  명령형(무제한적)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바울은 본절에서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로 잠언 23:29-35을 인용하여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당시 술 취하는 일은 불신자 세계에 있어서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딤전 3:3; 딛 1:7;2:3, Wood, Foulkes, Hendriksen).
술 취함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활이 무절제하게 되고 방탕하기 쉽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소티아'는 술 취함의 현상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방종' 혹은 '돈과 육욕의 무절제한 낭비'를 의미했다(Wood).
이것은 신약성경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 방탕한 생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눅 15:1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로서 생활하려면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 곧 어리석음의 일을 금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와는 다르다(1:13; 4:30; 요 3:5;14:16; 롬 8:9; 고전 3:16).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는 단회적 사건인 반면에 '성령 충만'은 구원의 때뿐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행 4:8, 31;6:3, 5;9:17;13:9, 52)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행 10:38;11:24; 살전 1:5; 벧전 4:11, Lincoln).
즉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신 성령께서(롬 8:9; 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온전히 지배하며 인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충만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루스데'는 현재수동태 명령형이다.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1. '현재 시제'는 성령 충만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함을 시사한다(Lincoln).
2. '수동태'는 성령 충만이 인위적(人爲的) 체험이 아니라(갈 3:2, 5) 성령에 의해서 체험됨을 시사한다(Wood).
3. '명령형'은 성령 충만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Wood).

갈라디아서 3:2, 5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취하다(3182) 메두스코(mĕthüskō)  μεθύσκω 

1. 술취하게 하다.  2. 술취하다. 3. 누가복음 12:45
발음 / 메두스코[ mĕthüskō ]
관련 성경 / 취하게 되다(눅 12:45), 취하다(엡 5:18, 살전 5:7)
신약 성경 / 3회 사용

누가복음 12: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데살로니가전서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충만을 받으라(4137) 플레로오(plērŏō) πληρόω 

1. 가득하게 하다.  2. 시간을 채우다. 3. 마치다
발음 / 플레로오[ plērŏō ]
어원 / 미완료3인칭단수 ἐπλήρου, 미래 πλη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ήρωσα, 완료 πεπ λήρωκα, 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ηρώκει, 수동태, 미완료 ἐπλη- ρούμην, 수동태완료 πεπλήρωμαι, 수동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ήρωτο, 제1부정과거수동 ἐπληρώθην, 미래수동 πληρωθήσομαι, 413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지다(마2:23, 26:54), 이루다(마3:15, 27:9, 행3:18), 완전하게 하다(마5:17), 가득하다(마13:48, 고후7:4, 빌1:11), 채우다(마23:32, 골1:9), 차다(막1:15, 행7:30, 롬15:14), 메워지다(눅3:5), 응하다(눅4:21), 마치다(눅7:1, 행12:25, 13:25), 별세하다(눅9: 31), 충만하다(눅2:40, 요3:29, 행13:52, 엡1:23, 5:18, 골2:10), 응하게 하다(요15:25, 19:36), 지나다(행24:27), 편만하다(롬15:19), 풍족하다(빌4:18), 온전하다(계3:2)
신약 성경 / 87회 사용

* 4134. πλήρης, ες 
1. 가득 찬
발음 / 플레레스 [ plērēs ]
어원 / 4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찬(마 14:20, 막 6:43), 충실한(막 4:28), 충만한(눅 4:1), 심히 많은(행 9:36), 가득한(행 13:10, 19:28), 온전한(요이 1:8)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4130.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발음 / 플레도[ plēthō ]
관련 성경 /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 자료소개

1. https://blog.naver.com/kjyoun24/220504596216

2. 왜 한국 교회는 술·담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술·담배 금지 논의가 명확한 신학적 논리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 교회가 낙태·동성애 반대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신학적·성서적 근거를 끌어다 쓰는 반면에, 한국 교회의 술·담배 금지는 그 근거가 거의 최소한으로 제시된 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기독교인들이 술·담배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복음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가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예수님 별명이 먹보에 술꾼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도덕적 잣대에 갇히지 않으신다"거나, "술·담배는 아디아포라(선과 악이 명확한 문제가 아닌, 아무래도 괜찮은 '비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뜻)에 속한다" 같은 논의가 그것이다.

한국 교회는 미국 보수 교회의 판박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양자가 주된 의제로 삼는 윤리(도덕)적 쟁점은 꽤나 다르다.
미국 교회가 집중하는 '도덕 이슈'의 중심에 낙태와 동성애 문제가 있다면(그래서 종종 이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한국 교회의 중심에는 '술과 담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이 문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한국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을 적실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머리로는' 술·담배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일요일이 아닌 주중의 사석에서는 큰 거부감 없이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그 태도는 돌변한다.
이를테면 자신들이 주중에 술을 마시는 건 괜찮아도, 목사나 전도사, 혹은 교회의 책임 있는 사람이 술과 담배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왜 그럴까? 사실 이 문제는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술·담배 금지가 한국 교회의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방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담배 금지 : 구별 짓기를 통한 정체성 확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유독 한국 교회에서 술·담배가 중요한 도덕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선교 초기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통상적인 설명은 그 당시 조선은 술·담배·오입질의 문제가 심각한, '매우 타락한' 상태였고, 따라서 선교사들의 전략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교 전략'이란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타 문화권에 기독교를 전파한다고 할 때 교회는 여러 가지 전략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그 문화권의 언어로 복음을 번역하는 토착화의 전략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그것은 강고한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물론 이는 매우 복잡한 결들이 지나가고 있는 초기 선교 역사를 매우 단순하게 설명한 것임을 밝혀 둔다.)

선교사들은 이 중에서 구별 짓기 전략을 취했다.

첫째는 문명·비문명의 구별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는 '복음'이 하나의 '상류 문화' 혹은 '고상한 삶의 길'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각종 '문명적 삶'을 '복음'과 거의 동일시하여, 선교사가 들어가는 곳마다 '문화 전쟁' 또한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선교 전략에서 일부일처제·근대 교육·질병 관리 체계 등은 '복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두번째 전략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구별 짓기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일상의 도덕적·문화적 삶을 선교사들이 통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교회를 다닌다면(복음을 믿는다면) 술·담배·오입질을 그만두라"는 것. 교회가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기관'인 것은 단지 영적으로만 알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표징'을 요구한다. 한국 교회의 경우는 그 시작에 술·담배 금지가 핵심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 수행에서 기독교인들은 술과 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의 구별된 집단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토착화 전략이 추구하는 지난하며 어려운 성찰적 과정보다는 훨씬 더 쉬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교인됨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복음은 아주 단순한 것(예수 믿고 교회를 다녀서 이전의 술·담배 하던 습관이 사라지는 것)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선교사 자신들은 그다지 엄격하게 주초 금지를 지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선교 모국에서도 술·담배 문제가 그다지 기독교인들의 구별 짓기 코드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선교사들의 집에서는 가끔 와인 파티가 열리기도 했고, 골초 선교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일종의 '문명인으로서의 자유함' 정도로 여겨졌고, 그들의 지도를 받는 조선인 교인들은 상당히 엄격한 수준에서 술·담배를 금함으로써 자신들의 '구별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술·담배 문제가 '아디아포라'라고, 혹은 예수가 '먹보에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였다는 것을 긍정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술을 입에 댈 때 불편함을 느끼고,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보면 움찔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술과 담배가 도덕적 이슈나 기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르는 구별 짓기의 코드로서 오랫동안 습속화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술·담배를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인을 아무리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더라도, '기독교인 공동체의 어떤 유대감이나 소속감'이 그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보다도 기독교인의 기독교인 됨을 손쉽게 확인할 표지가 바로 술·담배 문제인 것이다.

복음은 '구별 짓기'인가?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을 하나의 '내용'으로, 특히 '기독교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으로 이해할 때 나는 결코 순수한 복음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래, 술·담배 문제는 복음의 본질이 아니니, 복음의 본질에나 집중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복음의 본질'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내용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물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코드들과 더불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선행, 따뜻한 성품, 형제자매애, 호칭, 교회의 용어들, 신학적 담론들, 예배 시의 신체 동작이나 방언 등 다양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무언지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한 영원히 복음은 한 '정체성 집단'의 것으로, 끊임없이 동일한 것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술·담배 금지 같은 유치한 기준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타자와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복음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이런 것일 때 '전도'는 언제나 타자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기독교인(공동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바로 (복음의 '시작'인) 1세기에 예수와 바울이 부딪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들의 적수였던 바리새인,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제나 '복음'과 '하느님나라'를 하나의 '구별 짓기'를 통해 이해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속되고자 했다. 하느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들의 수많은 선행, 할례 등의 의례들, '이방인'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체험들(우리는 손쉽게 유대교를 '율법의 종교'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로 이해하는 후대의 이해를 폐기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역시 '은혜'를 전면에 내세운 종교였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느님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항하여 '믿음'을 내세운다. 따라서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뭐든 간에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여 그들과 '구별 짓는' 관계가 아닌 '열린'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믿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조건으로 기능하고 말 것이다.

예수의 영구 혁명 : '복음'은 '교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이런 전략은 너무도 쉽게 구별 짓기의 전략으로 회수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걸 증명해 준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논한다. 사실 바울의 서신들(신약성서의 1/3에 해당한다)을 읽어 보면 바울 자신도 결코 일관된 전략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방향은 바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뭐,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지만, 그래도 교회 설립 운동은 해야 하겠고…. (이런 고민이야 오늘날 사회주의자들도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 혁명은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구별된 소집단(혁명가 집단)이 필요하고…' 하는 식으로.)

반면 예수의 전략은 그러한 회수가 좀 더 힘든 어떤 측면을 보여 준다. 예수의 삶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서, 특히 이른 시기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결코 어떤 '구별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그리고 어떤 '내부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껏 병을 고쳐 놓고는 동네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식인 것이다. 예수 복음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의 구별 짓기 전략에 맞서서 그 '구별'이 은폐·조장하는 폭력을 고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 선포는 바리새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구별의 논리 속에서 배제당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전략만 가지고 무슨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그런 공동체를 통한 어떤 혁명 전략을 수행하지 못하고 몸소 그런 구별의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점에서 예수 운동은, 그 '복음'은 어쩌면 '교회'라는 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영구 혁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략에 의해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 할지라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 교회가 결코 '닫힐 수 없는' 어떤 것임을 계속해서 증명해 내는 전거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그가 화석화한 하나의 기억으로 갇히지 않고 지금도 교회의 구별 짓기에 대항하는 존재로 살아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교회에 의한 예수의 신격화는 오히려 이 '부활하여서 지금도 구별 짓기를 철폐하는 예수'를 구별 짓기의 논리로 회수하여 안전한 동일성의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그리고 '구원'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아니라, 매 순간 구체적인 삶 속에서 동일시하는 어떤 폭력이나 배제로부터 벗어나는 '사건' 속에서만 잠시 잠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 교회가 강요하는 구별 짓기의 논리를 거부하는 주당들과 골초들이야말로 '예수 사건'을 체험하는 '복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동체 내부의 논리 속에서만 머무르려 하는 '착한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말이다.

출처 : NEWS M(http://www.newsm.com)

3. 한국교회사에서 본 금주 단연 운동 
- 이상규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한국교회는 한 때 금주,단연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술과 담배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음주나 흡연이 그 어느 측면에서도 이롭지 못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사회적 환경때문에 어쩔수 없이 우리 시대의 문화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전통인 금주 단연이 약화되고 있고, 그것은 교회가 지도할 사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적 사안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술과 담배에 대해 한국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를 뒤돌아보는 일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이 되리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초기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금주 단연운동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음주,흡연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에서의 금주,단연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교회 초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탄절에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또 장로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는 한때 흡연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화란 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주초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또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 중에도 흡연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흡연장면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말하자면 음주와 흡연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 곧 불간섭의 영역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문제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90년대를 거쳐가면서 그들은 술과 담배의 해악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금주와 단연은 신앙상의 유익과 건덕(建德)의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한국에서는 초기부터 술과 담배가 신앙생활은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손실, 그리고 극기나 절제등 국민 정신상 무익하다는 점을 가르쳐왔다.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는 아편 사용에 대하여는 엄격한 입장이었으나 음주,흡연문제는 비교적 관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정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평소 그처럼 착한 사람도 일단 술을 마시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과 음주로 인하여 패가망신한 경우를 수차 목격하자 금주,단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면에서나 생활자세에 있어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을 성수하고 노름을 범죄로 생각했으며 먹어도 유익이 없고, 안 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신자들에게 금주 단연을 권고하게 된 것은 주초의 심각한 폐단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의 악습과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금주,단연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0년대 후반기부터 금주,단연은 단순히 신앙생활의 유익이나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운동, 혹은 민족정신 함양운동의 차원에서 교회적으로 강조되었다. 


금주,단연운동의 초점 

선교사들은 금주 단연 운동의 추진 이유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말했는데 그 첫째는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술 먹다가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없지 않았다("계주론",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32호, 1897.9.8). 즉,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주,단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래서 우생학적으로 본 음주의 해독에 대해 강조하고 관계 연구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셋째는 개화 혹은 국민의식 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교회의 금주 단연 운동을 시기적으로 간단히 살펴보자. 


(1) 1900년 이전 

한국에서 금주 단연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금주 단연에 대한 권고와 경계가 있었음을 이미 말한 바이다.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는 술과 담배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는 입장이었으나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나갔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청교독적 신앙생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신앙적 유익과 사회적 개화를 위한 의도가 있었다. 즉, 술은 백성의 재산을 폐하여 백성을 점점 곤궁토록 만들며, 장부의 기운을 꺾어 회복하지 못하게 해서 건강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는 계주론을 전파하고 교인들과 일반 백성의 금주를 권고하였던 것이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했는데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교회의 금주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장로교도 이와 유사한 시기에 금주 단연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4월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에는 제주도에서 한 교인이 단주(斷酒)한 사실을 들어 "참 새로 난 사람"이라고 보도한 일이 있었다. 술의 폐해가 켰기 때문에 금주를 입신(入信)의 전환적 결단으로 보았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술의 해악을 지적하는 계주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야 모흔 제물을 빼아스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케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졍을 셩행케 하야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람용하며 부셰를 묵엄게 하고 유익한 일에 쓸 돈을 여러 백만금식 해로운 일에 허비하야 항상 이젼졍 군색하게 하니, 만일 술에 업새는 재물을 일용지물에 쓰면 사롱공상이 다 흥왕하고 돈 업서 어려워하는 괴로움이 구름갓치 헛터줄지니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업시할 물건이어날 오날날 어찌 그대로 두니 괴이하도다.("업시할 물건",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1897년 12월29일자) 

감리교의 조이스(Joice) 감독은1897년경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술 담배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1900년 감리교의 존스(G.H.Jones) 선교사는 전도인, 권사, 속장들의 모임에서 술을 마시는 교유들을 "즉시 출교"하겠노라고 경고한 일이 있었다. 장로교회의 새문안교회는 음주자를 치리한 일도 있었다. 이 교회은 음주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設)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초기 한국교회가 단연 운동을 전개한 것은 흡연으로 인한 신체적 해독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차츰 한국교회는 신체적 해독만이 아니라 도덕적 향상, 흡연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는 전(殿)으로서의 몸에 대한 신앙적 동기 등에서 단연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 및 도박의 금지, 축첩(蓄妾) 금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취급외었던 다짐이었다. 이 다섯 가지는 삶의 뚜렷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당시의 환경으로 볼 때 매우 힘겨운 요구였다. 그러나 이런한 결단을 통해 기독교인다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고, 성수주일, 금주 단연 등은 그 이후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표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선교사 노혜리(H.A.Rhodes)는 음주에 대한 경고의 글에서 "다행한 점은 조선의 불신자들은 신자는 의례히 금주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같이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교회는 절대 금주를 주장합니다. 신자는 금주 운동의 선험자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2) 190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이 운동은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국체보상운동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절제운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금주 단연 운동이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나 신앙상의 이유에서만이 아니고 민족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금주 단연함으로써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을 하자는 논리였다. 그것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상당한 정신적 효과가 있었다. 

1911년 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절제회'를 조직하여 1년동안 금주 단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가 조직되었고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계연회는 단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도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1941년까지)는 주일학교 '장(長)감(監)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는 1920년부터 각 지방 YMCA를 통해 금주 단연회를 주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감리교회도 각 지방에 금주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각 연회에 절제부를 두어 이 운동을 총괄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폐망케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 금지" 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 '금주가'가 19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장로교회의 경우는 음주만이 아니라 누룩의 제조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가 장로교 총회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1924년 함남노회는 누룩매매업에 관여하는 교인의 치리문제를 헌의하였는데, 총회에서는 "누룩 장사하는 교인에 대하여 치리할 문제는 본 당회가 권면하여 보고 그 형편에 따라 치리할 것"을 결의한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매년 1회씩 『구세신문』의 '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호 『구세신문』에 실린 "단음함이 가함"이라는 글에서는 "대개 술이라 하난 음식은 재앙과 패망과 죄악과 형벌을 이루난 바 좋지 못한 물건"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논지로 『구세신문』의 각 특집호는 술과 담배의 경제적, 건강상의 손실과 윤리적, 심령적 타락 가능성을 일깨웠고, 나아가 민족 경제의 문제까지 계몽하였다. 구세군의 이러한 운동에 사회 각층의 인사들이 조력하였고, 『구세신문』의 '금주호'는 가두 판매는물론 철도 공무원 전체에 대한 배부, 호별 방문 배부 등으로 널리 보급하였다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금주 결심을 촉발시켰고, 이것이 작성되어 구세군 본영에 송부되면서 절제운동은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일익을 감당했다. 이는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었고 현재도 구세군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계속되고 있다. 

절제운동이 이처럼 한국교회를 통해 전개되자 당시 언론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 운동을 격려하였다. 1934년 3월 2일자 『동아일보』는 "절제있는 생활"이라는 사설을 통해 삶의 목적이 여흥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술은 개인이나 사회에나 백해무익하다고 지적하였다. 또 "조선에서 1년에 1백70만 석의 술이 양조되고 있는 한, 해마다 조선 내에서 3,530만 원이란 거액의 돈을 담배 빨어 연기로 태워버리는 우맹한 행동이 유지되는 한 생활고를 운운하는 것은 광자(狂者)이다. 청년아 맹성(猛省)이 있을지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금주 단연 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35년 2월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 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뱃대를 꺾어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찬송가에는 금주를 권장하는 찬송가가 편입되어 널리 불리기도 했는데 이때 불린 금주가 중에는 이런 가사도 있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오 
건강기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2. 폐가망신될 독주는 
빚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후렴)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우리 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3) 1930년대 이후의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제정 노력 

한국교회는 1910년대 절제운동을 통해 금주 단연 운동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활동으로 전개하였는데, 이 절제운동을 단순히 국민의식 운동이나 정신운동으로만이 아니라 입법활동을 통해 법제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난 때는 1930년대였다.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1930년대 이후 미성년자의 금주 단연을 법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청소년을 음주와 흡연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미 1929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선기독교에 감리연회, 조선기독교 남감리4연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4단체 등은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 기성동맹회'를 조직하고 입법촉구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곧 와해되었다. 그후 1932년에는 앞서 말한 바처럼 '조선기독교 절제운동회'가 창립되었고, 1935년 12월 16일에는 이 조직을 중심으로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 촉성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윤치호(위원장), 정인과, 양주삼, 오긍선, 백낙준, 김창준, 이대위 드을 위원으로, 송상석을 총무로 한 이 촉성회는 포스터 제작, 순회강연, 위정당국 교섭, 여론 형성 등을 통해 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7년 6월에는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 실시에 관한 참고자료'를 제출하고 이 법을 실시해야 할 필요성과 이유를 설명하였다. 

특히 『금주신문』이라는 제호의 기관지를 발간하여 이 운동을 확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당시 총무였던 송상석 목사는 "무슨 까닭으로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법을 조선에는 실시하지 않느냐! 정부 당로자여! 빨리 각성하십시오. 우리들은 금반 양법을 조선에도 실시되도록 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당국의 색안경과 일부의 반대가 있는 것은 예상되지마는 천하 정의인도의 인사여, 하의 각 항에 대한 이해 있으시기 바라노라"고 하며 금주 단연법 제정의 필요성을 6가지로 정리하기도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이미 미성년자 흡연이 1900년 3월 6일자로 발표된 법률 제 33호로, 음주는 1922년 3월 29일 제정된 법률 제 20호로 각각 금지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 이와 같은 양법을 제정하는 데는 미온적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근본적으로 우민화 정책이었고 따라서 한국에 유곽의 설치와 공창(公娼)제도를 도입하고 아편이 공공연하게 판매되도록 허용했던 것을 보면 일제가 한국 청소년들의 건전한 육체와 정신 함양에 소극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1938년 3월 26일, 미성년자 금주 단연법이 칙령 제 145호로 법령으로 제정되어 1938년 4월 1일자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미성년자의 음주 및 흡연 금지를 위한 입법 요구 활동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얻을 결과였다. 이 당시 20세 이하는 미성년자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입법활동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4) 오늘의 현실 

이상에서 우리는 금주 단연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이를 금하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술과 담배는 신자의 생활과 건덕상 유익하지 않다고 보아 금지하였으나 일제하에서는 이를 거교회적 차원에서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정신을 계도하고 절제운동을 통해 국민정신 게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금주 단연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술과 담배가 신자의 순결한 삶을 위해서나, 육체의 건강에 조금도 유익하지 않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자명하다. 금주 단연은 우리들의 신앙 선배가 물려 준 소중한 전통으로, 이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계승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성결과 순결이 경시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구별된 삶의 방식은 그 자체가 가장 힘 있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18세기부터 금주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였고, 개인의 변화는 그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를 변화시켜 갔던 것이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금주와 단연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의 재고를 요구하고 있고, 실제로는 음주 흡연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절제하는 생활, 성결에의 촉구, 그리고 건덕의 차원에서도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승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계의 일부 목사들은 "아직도 술 담배가 문제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민족의 문제, 민중의 삶의 현실 같은 명분있는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지 아직까지 술과 담배로 공방을 벌여야 하느냐고 반론하고 있으나, 한 개인의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노력, 성결한 삶, 당연한 권리라도 이웃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건덕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가치를 마냥 경시해서는 안된다. 술과 담배는 우리의 사회적 환경과 삶의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이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살 그 자체가 이 시대를 향한 가장 힘 있는 개혁이 아닐까? 

- 자료출처 /  기독정보넷

4.

41. 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 술 담배가 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인은 왜 술과 담배를 하면 안되는 거지요?  
 
■ 가톨릭 신부님들은 술 담배에 구애받지 않는데 목사님들은 왜 술 담배를 안합니까?  
 
■ 교인들은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교회에서는 안마시는 척 하는 것은 위선적 이중생활이 아닙니까? 
 
예수님 시대 담배 있었다면 금하셨을 것  

한국교회 금주·금연 운동 사회에 큰 공헌
 

우선 전제할 것은 성서에는 담배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담배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만약 예수님 당시에 담배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담배를 금하셨을 것입니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의 건강뿐만 아니라, 옆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니까요. 그런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을 예수님이 권장하셨을 리 만무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그 거룩한 몸을 니코틴으로 파괴하지 않도록 하시오.”(참고/고전 3:16∼17)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에 관해서는 성서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술은 주로 포도주였는데, 당시에는 포도주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음식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포도주도 과하게 마실 경우, 노아가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야기처럼(창 9장), 실수와 방탕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엡 5:18)라고 경고했으며,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술을 즐기지 않는 자” 또는 “술에 탐닉하지 않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딤전 3:3, 8).

그리고 성서에는 일반 포도주 정도로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강한 술을 마셨던지, 독주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레 10:9, 사 28:7, 미 2:11 등 참고). 그리고 그 옛날에도 술자리를 2차, 3차로 옮겨 다니며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었던지, “늦게까지 술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폭탄주 같은 술이 있었던지 “혼합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술에 대해서는 긍정적 발언보다는 부정적 발언들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기적의 사건(요 2장)은 잔치에서 필수요소인 포도주가 동났을 때, 잔치를 잔치되게 하신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권면했습니다.

또 구약 아가서에서는 남녀간의 달콤한 사랑을 포도주에 비유한 표현들이 나옵니다(아 1:2, 7:9).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도 있지만 부정적인 보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잠 20:1),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다”(신 32:33), “음행의 포도주”(계 17:2) 등등.

이처럼 술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술취함으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실수와 방탕과 범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대와 오늘 우리 한국사회와의 시간적·공간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오늘날의 술 문제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궁극적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윤리적 기준은 약한 이웃에 있다  

저는 술 담배를 비롯해서 종교나 교단에 따라 금기시하는 제반 음식문제에 대해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할 윤리적 기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울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사도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줍니다. “나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내가 그 고기를 먹는 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평생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장). 즉 건강한 사람의 자유가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음식문제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권면합니다(롬 14:13∼15).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음(신앙수준, 의식, 지적수준 등)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어떤 음식을 삼가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술 문제에 대한 사회윤리적 기준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처신이 비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주금연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술과 담배 문제에 관해 생각해야할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점입니다. 금주금연운동은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교회 내부뿐 아니라 1910년대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YWCA, 기독교절제회 같은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사회의 절제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금주금연운동은 한국사회 전반에 상당히 긍정적 공헌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금주금연은 한국교회가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과 윤리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전통 속에는 ‘금욕과 절제’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금주금연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율과 청소년 흡연율이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실정에서, 또한 주폭(酒暴)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시한번 각성하여 금주금연을 실천하고,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고 보존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5. 초기 선교사들, 술·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장·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는 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 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가 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연 1회 ‘구세신문’에 ‘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년 2월 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 역사신학)


6.

술은 구원의 기준이나 훌륭한 신앙의 기준 아냐
오해 이유, 문화적·윤리적 관점 기준 없기 때문
선교사 교훈 따라 음주는 절주, 절주는 금주로
한 순간에 끊을 수도 없어, 하나님 은혜가 먼저
음주 자유로운 사람, 자신의 음주 정당화 말고
교회도 술 한 잔에 지옥 갈 것처럼 정죄 말아야

직장선교 사역을 오래 진행해 온 강하룡 목사(예함교회)가 지난 3월 27일 SNS에서 '크리스천의 음주 문제'를 정리한 글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 목사는 먼저 술에 대해 부정적인 성경 구절(민수기 6:2-3, 잠언 23:29-33; 31:4, 누가복음 1:15)과 긍정적인 성경 구절(시편 104:15, 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22:20, 요한복음 2:10-11) 등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먼저 술은 구원의 기준, 신앙의 기준이 아님을 전제하고자 한다. 구원의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다. 술 한 잔 마셨다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전제는 '술은 훌륭한 신앙의 기준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신앙의 기준은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순종하는 태도에 있다(마 28:19-20)"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지만, 직업인으로 엉망인 삶을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건강한 신앙은 음주 여부가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의 삶의 질로 평가돼야 한다"고 전했다.

셋째로는 "직업인들이 각자의 일을 주께 하듯,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다. 따라서 술은 신앙과 관련되어 비본질"이라며 "본질이 없으면 비본질에 목숨 걸게 된다. 술 문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국교회 신앙의 현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술과 신앙에 대하여 오해와 혼란이 많은 이유'로는 "술을 문화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 윤리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강하룡 목사는 "문화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의복 문화, 음식 문화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윤리는 옳고 그름이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며 "성경에서는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도, 윤리로 보는 관점도 있다"고 소개했다.

강 목사는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긍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신 첫 표적은 '양조(釀造)'였다"며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를 즐기셨고, 새 언약을 포도주로 제정하셨다"고 했다.

또 "술을 윤리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잠언 23장의 경우 심각한 술 취함에 대한 경고"라며 "술 취함은 분명하게 윤리적으로 옳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사회법에서도 술을 몇 잔 즐기는 것은 문화로 보지만, 주폭(酒暴)은 범죄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 중 나실인의 율례와 왕에게 주는 교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실인의 율례는 자원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에게 포도주 뿐만 아니라, 포도열매도 먹지 않도록 요구했다"며 "왕에게 포도주를 금한 것은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 식생활에서 어느 정도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절제의 미덕"이라고 평가했다.

강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술 문제와 관련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신앙 전통이 있다. 100년 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술을 윤리적인 문제로 규정했다"며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술을 윤리적 문제로 인식한다. 술을 윤리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민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선교사들의 그런 결정이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결정은 한국 교회에 축복"이라며 "술 문제는 이성 문제, 재정 문제, 폭력 문제 등 너무 많은 문제를 끌고 들오는 악의 통로와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하룡 목사는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결론에서 "교회 지도자들, 중직자들, 성숙한 자들의 경우 나실인의 서원, 왕에 대한 포도주 교훈, 바울의 절제 전통,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엄격한 절제가 성경의 가르침"이라며 "당연히 금주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말했다.

강 목사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신앙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음주하는 사람은 절주, 절주하는 사람은 금주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음주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짜피 한 순간에 술을 끊을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가 먼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음주에 자유로운 사람은 다른 크리스천에게 자신의 음주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권하고 싶다. 약한 자의 믿음과 삶을 보호하기 위해, 음주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마 18:6)"며 "단, 교회에서는 술 한 잔 하는 것에 대하여 지옥 갈 것처럼 정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술 한 잔 받는 것에 대해, 배도한 것처럼 몰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며 "과도하게 경직된 기준을 제시하다 보니 성도들은 반감을 가지게 되고, 결국 자원하는 절제, 경건의 유익보다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됐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7. 한국교회 금주전통의 발자취
  

본문


 

1925년경 한때 어깨띠를 두른 부녀자들이 ‘금주로 구국하자!’라고 적혀 있는 플래카드를 높이 치켜들고 광주 시내 밤거리를 돌면서 주점이나 요정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손님들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금주를 권하는 선전지를 열심히 나눠주었다. 이들은 또 장날이면 모여서 시장 한 귀퉁이에 플래카드를 세워놓고 합창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영문 모를 노랫소리에 이끌려 장터사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곤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빛내리

4. 천부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게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이 찬송은 이화여전 출신의 여류 성악가 임배세(林培世) 선생이 작사·작곡하여 1920년경부터 불러온 금주가로 알려져 있다. 좬신정찬송가좭(1931)에 포함되었고 좬합동찬송가좭(1949)에 실리기도 하였다. 이 금주가에서는  몸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1절), 패가망신하기 때문(2절), 술값 낼 돈으로 학교를 세워 자녀수양을 하기 위해서(3절), 재능과 귀체를 망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4절) 등을 금주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비록 좬합동찬송가좭 이후 더 이상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금주가가 교회에서 찬송으로 불렸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금주문화를 중요한 전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의 대부분에서는 금주를 지켜 마땅한 ‘교칙’(敎則)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금주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래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술, 선교사 눈에 비친 악습
주지하다시피 한국에 기독교를 전래한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이다. 이들 눈에 처음 비친 당시 조선의 풍습은, 도박·음주·싸움질 등 ‘아편을 피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모든 악습을 다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선 남자들은 노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만약 노름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었다면 자기의 아내를 노비로 팔아서까지 노름에 미쳐 버린다. 조선에서는 술 마시기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술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흰색의 걸쭉한 액체(막걸리)이고 다른 하나는 맑고 깨끗한 약주술이다. 이 술은 모두 쌀, 보리, 혹은 밀로 만든다. 주막은 안주를 곁들여 술을 먹는 사람들도 거의 매일 붐빈다.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감상주의자들 혹은 술주정꾼들이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인들의 생각은 단순하다. 그래서인지 사회적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락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조선인은 유순하고 예의 바른 이방인으로서 특이하게도 아편을 피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모든 악습을 다 갖고 있다.1)

초기 내한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춤추고 담배 피우고 노름하는 것을 죄로 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했다. 청교도적 신앙으로 비추어 볼 때, 도박·음주·흡연 등은 ‘사회적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락행위’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즉 청교도적 신앙의 실천은 선교사에게나 한국인들에게 ‘문명개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2)

술, 문명개화의 걸림돌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전파만이 아니라 문명개화에도 적잖은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2) 문명개화의 과제는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각종 악습을 철폐하고 문명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술을 통해 일어나는 각종 폐해를 목격했던 것이다. ‘가슴이 벌넉벌넉하고 미친 사람 같이 혹 처자를 때리며 혹 가산을 붓기도 하고 혹 남과 싸움도 하다가 술이 깬 후에는 사지가 아프고 구미가 없고 정신이 없어 마치 중병앓고 난 사람’3)같이 만드는 술은 선교사들에게 미개의 상징 또는 ‘문명개화의 걸림돌’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좬죠션크리스도인회보좭는 다음과 같이 술을 경계하고 있다.

개화를 크게 해하는 물건은 술인고로 옳게 생각하는 사람마다 이것을 없이하기에 힘쓸지니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私情)을 성행케하여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남용하며 부세를 무겁게 하고 유익한 일에 쓸 돈을 여러 백만금씩 해로운 일에 허비하여 항상 이전정 군색하게 하니 만일 술에 없애는 재물을 일용지물에 쓰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다 흥왕하고 돈 없어 어려워하는 괴롬이 구름같이 흩어질지니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이할 물건이어늘 오늘날까지 그대로 두니 괴이하도다.4)

즉 술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게 하는 빈궁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음주는 직접적인 금전적 지출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 하여 사무를 그르치고 국재를 남용하’게 하여 부가적인 지출 또한 유발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회비용적 차원에서 볼 때, 술을 마시는 데 드는 비용을 유익한 곳에 사용한다면 경제적 손실을 막고 미래의 수입에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한걸음 나아가 종교적 이유에서 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술을 조선 안에서 먹는 까닭에 그 백성이 가산을 패하며 점점 곤궁도 하며 고생을 하여 장부의 기운이 아무리 하여도 회복하지 못하며 또 술 먹는 것이 크리스도교의 큰 원수도 되려니와 교중 일에 방해가 되니 우리 교에 유전하는 말대로 무론 무슨 술이던지 도무지 일절 금단하며 우리가 우리 고향 교우에게 간절히 바라노니 온갖 마땅한 계책을 써서 조선 교우가 술을 일절 먹지 않게 하고 몸들이 모두 정결하게 하기와 또 조선 교우들에게 지금부터 술 금하는 글을 지어 동토 사람 가운데 힘써서 전파하라고 미이미교회 열두째 연환회에 결정을 하였사오니 교우들은 이 작정한 조건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힘써 이것 행하시기들을 바라옵.5)

이처럼 음주는 ‘크리스도교의 큰 원수도 되려니와 교중 일에 방해’되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금주하는 것은 ‘몸들이 모두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연회에서 금주를 결정하고, 교우들에게 ‘힘써 이것 행하시기들’을 바란다고 권유했다. 이즈음부터 음주는 기독교 안에서도 금기시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술 마시는 것은 영혼구원에도 문제 또는 범죄가 된다는 인식도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 주 예수를 믿던 사람은 만일 수화(水禍)에 몸은 죽더라도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호랑이나 사자에게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거니와 술먹다가 죽으면 어찌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리오. (중략) 또 술 먹는데 죄 되는 걸로 말하면 취토록 먹어 죄는 것이 아니라 한 모금만 마셔도 죄 되나니 그 먹음으로 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 되느니라. 처음에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아담 이와에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고 경계한 후에 배암이 꾀이는 소리를 듣고 그 실과를 볼 때에 곧 범죄하는 마음이 나고 한 번 따서 맛본 것이 큰 죄가 되었으니 그 먹음으로 죄가 아니오 마음으로 죄 되었느니라 그럼에 술 먹는 것도 그러하니.6)

술 먹다가 죽으면 영혼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음주는 아담이 저지른 원죄에 비견할 만한 중대한 죄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학적 음미의 필요성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술에 대한 당시의 엄중한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의 금주문제는 문명개화에서 강조되던 악습철폐에서 나아가, 종교적 이유에서 문제가 되고 팔요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음주를 비롯한 각종 악습의 전폐(全廢)를 거의 동등한 무게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은 우상숭배와 조상제사 폐지, 주일성수, 부모에 대한 효경, 가정의 순화와 더불어 축첩·음주·거짓말·잡기·간음 등의 악습 전폐 등을 세례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7) 감리교의 경우, 제12회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주를 결의하기도 하였다.8) 감리교 선교사 존스는 전도사들과 속장 등에게 술마시는 교인들은 출교시킬 것이고 다른 교회 교인이라면 감독에게 보고하여 책망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9)
이에 초기 한국 교인들은 술·담배·아편 등의 행위들을 죄로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예수를 믿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결심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제사·축첩 금지와 아울러 금주·금연은 이전과 구별되는 믿는 자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교인이 된다는 것은 금주·금연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금주와 금연을 했다기보다는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의해 결행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한국교인들은 스스로 금주·금연 실천을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당대적 과제로 부상했던 문명개화의 한 단면으로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시 선교사의 증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연관된 흥미 있는 사실 하나는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려는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악한 것은 그 모양도 버려라’고 하셨을 때 뜻하신 바, 새신자들은 사악한 이교도의 종교행위나 그럭저럭 용인되는 사회적 관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모두 그들의 생활에서 내몰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야 할 종교에 관련된 것들 가운데는 마술·점술·우상·주물·조상제사와 관계있는 위패와 제물들이 있다. 사악한 사회적 관습에는 축첩, 음주와 흡연 등이 있다. 때로 금연은 선교사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압박을 가한 사안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초기 기독교인들 자신의 이성으로 금연하였던 것이다.10)

술, 몸과 마음과 사회의 해독(害毒)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자금을 본국정부의 지원 없이 식민지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 주세법(1909)이 세율이 낮고 미비한 조항이 많다는 판단 하에 주세를 증진할 목적으로 1916년 주세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3.1운동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 좌절감은 자포자기적인 향락문화로 빠져 들게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요리집’, ‘카페’, ‘유곽’은 늘어만 갔다. 음주·흡연 등의 소비 또한 일제가 ‘주세령’을 실시한 의도에 부합할 정도로 늘어갔음은 물론이다. 연구에 의하면, 주세는 전체 조세량의 약 10.8%로 증가하였고, 연초세는 전체 조세량의 18%를 차지하며 총독부 재정수입의 주요기반이 되었다.11)
그런데 마침 미국에서 금주법(1919)이 실시되면서, 미국의 금주운동 상황, 또는 유명 인사들의 금주금연 사례가 좪기독신보좫 등의 교계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기독교 문명국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의 예는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금주법은 문명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편으로까지 인식되었다.12)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초교파적인 ‘기독교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주문화는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이라면 의례히 지켜야 할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에서 금주문제가 ‘패가망신’으로 대표되는 개인 윤리적 차원 또는 ‘영혼구원’과 관련된 종교적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절제운동’에서는 총독부 재정만 살찌우는 주초 소비를 절약하여,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고 파멸에 임한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었다.13)  기독교의 절제운동 초기부터 각 교회는 금주·금연을 통해 주초비를 저축하여 계를 조직한다든가 공동농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구체적 성과를 보였다. 본격적인 소비조합운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소비조합 설립운동은 ‘죠션교회의 나아갈 길’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절제운동은 교회연합운동 차원에서 초교파적으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매년 음력 1월 15일을 ‘전조선절제주일’로 지키기로 했다. 특히 1933년을 금주년으로 정해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고 전국 각 교회에서 동일한 순서로 금주선전을 추진하였다.14) 금주·금연 절제운동은 명실공이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전에 비해 금주의 논리가 정밀해졌다는 것이다. 술이 몸과 마음에 해독(害毒) 된다는 점을 의학적·과학적 논거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음주가 신체에 여(與)하는 해독을 거(擧)하면 심장마비, 혈관경화증, 뇌출혈, 면역소파괴, 매독, 결핵, 뇌막염, 정신병 등등이라 한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 음주의 해독이 호올노 자신에 지(止)할 뿐이아니오 자손후대에 까지 유전됨을 증명하였다.15)

술은 신체의 장기, 즉 심장을 마비시키고 혈관을 딱딱하게 하고 뇌출혈을 유발하여 몸을 위태하게 할 뿐만 아니라, 면역소를 파괴하여 신체를 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몸 건강에 아주 나쁜 존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신체에 대한 폐해는 자신의 몸에만 그치지 않고 자손후대에까지 유전으로 전이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술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에도 치명적인 독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일 의학박사 삘-씨 론(論)에 의하면 ‘주독(酒毒)은 혈구(血球)에 변동을 주어 뇌의 작용을 운둔(運鈍)케 하며 심하게 되면 경뇌막(硬腦膜)에 마비를 생(生)하야 정신운동이 저능하고 운동신경의 민활(敏活)한 활동력을 멸살(滅殺)식히며 결국은 정신이상까지 기(起)케 된다’고 하엿다. 그리고보니 금일(今日)에 우리 민족이 일반적으로 태정(怠情)하고 일하기를 실혀하며 낫잠을 조화하고 쾌활(快活)치 못한 것이 민족의 근성이 아니오 우리 선조의 과음한 인과적(因果的) 증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16)

음주는 뇌의 작용을 둔하게 만들어 뇌의 마비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운동신경을 말살하여 정신이상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이 게으르고 노동을 기피하고 성격이 쾌활치 못한 것은 민족의 근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과음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금주의 이유를 성서에서 찾고자 했다. 몸과 마음에 해독한 술인 바, “하느님께서 신성으로 거하시고저 하시는 성전이 된 우리 몸에 다가 미치게 하고 악하게 하는 술을 퍼 넣으며 담배내를 피워서 더럽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죄악”으로 여겼다.17) 즉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의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殿)’인 우리 몸을 술과 담배로 망쳐서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뿐만 아니라 좪신학지남좫의 기고문에는 금주의 근거가 되는 성서구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18) 인용하면, 레 10:9, 잠 20:1, 잠 23:20-21, 잠 23:29-30, 잠 31:4-7, 사 5:11;22, 마 24:47-51, 눅 21:34, 롬 13:13, 엡 5:18 등이다. 다시 말해 금주의 논리를 종교적 이유에 근거하기 위해서 ‘영혼구원’ 등의 논리로 제시하기 보다는, 성서에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훨씬 설득력을 더해 가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음주는 조선사회의 민생경제를 위협하는 해독으로 인식하고 있다.

주초(酒草)의 소비액은 실(實)노 놀날만하다. 최근 일년간에 조선의 주대(酒代)는 구천삼백여만원, 여귀에 연초대(煙草代)를 가(加)하면 적어도 일억사천만원 이상, 아 근난(饉難)한 우리 살님에 얼마나 거대한 소비인가. 동포의 팔할(八割)이 농민이라고 하면 이는 모다 그들의 혈한(血汗)이 석긴 신성한 재물이엇을 것이다. 이 거대한 금전(金錢)을 죄스럽게 낭비하는 배면(背面)에 빈곤한 세민(細民)은 얼마나 울고 잇스며, 기아선상(飢餓線上)에 방황하는 부상(不祥)한 생명은 그 수가 얼마나 많으냐.19)

즉 음주는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 살림살이에 막대한 낭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 논자는 이외에도, 양심의 마비, 사회질서 문란, 육체상 해독, 정신건강 침해, 역사적 근거 등을 들어 금주의 이유를 조목조목 논하고 있다.
또한 이 논자는 금주의 방책으로서, 국법의 제재, 일반적 금주교육, 종교의 감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종교의 감화를 제일 중요한 방책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국법의 제재나 일반적 금주교육은 일시적 효과밖에 얻을 수 없는 피상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철저하고 근본적인 방책은 기독교운동으로써 금주사업을 합리화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논하고 있다.

닫는 글
이상으로 한국교회 금주전통의 발자취를 대략 살펴보았다. 한국교회의 금주문화는 애초에 선교사들의 문명개화론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종교적 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금주를 세례의 조건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본보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즈음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선교사의 권유에 이끌려서라기보다는, 스스로 이성적 판단을 통해 금주·금연을 실행했다. 이는 당대의 문명개화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으로 여겨진다.
또한 3.1운동을 전후로 금주운동은 ‘사회를 개조하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교회는 주초비를 저축하여 계를 만들어 상호부조에 충당하기도 하였고, 절제운동을 통해 소비조합을 설립하여 경제적 자강을 모색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 또한 당대의 사회적 요청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응답이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금주전통을 교칙(敎則)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금주전통이 형성되어진 시대적 배경과 의미는 매우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국교회의 금주전통을 되짚어 보면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에게 요청되는 한국사회의 시대적 요청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치만 l  교수는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조교수이다.


8.
역사적 관점, 현대적 시각 조명 술과 담배는 기독교에서 금하고 있는 식품? 언뜻 듣기에도 기독교와 술, 담배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비교적 술과 담배에 자유로운 자유주의 신학이 널리 퍼진 오늘날에도 술과 담배 때문에 신앙적 갈등을 겪는 성도들이 비일비재하고 신앙인이 술과 담배를 하면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술, 담배와 함께 한국교회 신자들이 갈등하고 있는 또하나의 문제는 제사 부분이다. 제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현재까지 명료하지 않은 상태이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는 끊어진다’는 목회자 혹은 신자들의 말처럼 신앙심이 깊어지면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제사는 우상숭배로 기독교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신앙의 시작에 걸림돌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아직 술과 담배, 그리고 제사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떳떳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술과 담배, 그리고 정립되지 못한 제사문제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시각에서 짚어본다.한국교회의 숙제 `술·담배'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사실 술과 담배의 부정적인 시각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갖게됐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다보면 성탄절에 술을 빚어서 교인들과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나 예배 전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를 마치고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아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술과 담배 문제는 관대하게 처리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직접 들어온 수보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활동은 신앙적 내용보다는 사회 계몽적인 차원이 강했다.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사회 계몽적인 운동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한국실천신학연구소 박세환 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중설교가로 알려진 무디나 R. A. 토레이 또는 조지 휫필드의 영향을 받은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이었다. 당시 보수 청교도주의자들은 신앙운동으로 내면적인 경건 운동을 펼쳤으며 음주, 금연은 물론 껌을 씹는 것이나 연극을 보는 것까지 금할 정도로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해 철저히 금하고 있었다.” 당시 금주, 금연 운동은 부정적 사회상과 박세환 박사의 말처럼 신앙적인 면을 정화하기 위한 모두를 내포한 운동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선교사들에 의해 금주, 금연 운동이 펼쳐지자 금주, 금연 운동은 각 교단별로 확대되어 진행됐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펼쳤으며 같은 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교회의 금주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또한 장로교도 비슷한 시기에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금주, 금연을 강조했던 단적인 예가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음주자를 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문안교회는 음주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 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設)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고 실제 이 문제로 인해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기에 한국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제사 중지, 노름 및 도박의 금지, 축첩(蓄妾) 금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 받을 때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그러나 당초 대사회적 운동과 신앙적인 부분이 하나가 되어 시작되었던 금주, 금연 운동은 어느새 신앙적인 척도로 자리잡아왔다. 최근은 담배와 음주에 대한 폐해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속속히 드러나면서 점차 목소리가 줄고 있긴 하지만 술, 담배 금지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발도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얼마전 A 교회 황 모 장로는 술, 담배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한국에 방문한 한 미국인 목사님을 접대하던 중 미국인 목사님이 아무 거리낌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그 뒤로 황 모 장로는 자신이 배워온 신앙관으로서는 담배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는데 꽤 저명한 목사님이 담배를 피는 모습을 봤으니 갈등할 만도 하다. 어떤 이는 술, 담배를 금했던 당시의 상황과 현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계몽적인 차원에서도 현저히 틀리고 술과 담배가 가지고 있는 사회화의 기능, 즉 술 담배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에 대한 긍정적 면은 어떻게 해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기독교에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술과 담배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황 모 장로나 질문을 던진 사람의 문제는 술, 담배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모호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박세환 박사는 “기독교의 전통주의가 자유주의 신학론 때문에 변질된 결과”라고 말한다. 본지에서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기독인들을 대상으로 ‘기독인의 술, 담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 실시, 총 179명 중 126명(70.3%)이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과 담배는 이미 알게 모르게 기독인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술, 담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이 보편화되어 있음에도 거부를 표하는 것은 술, 담배에 대해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직장사역연구소 윤여길 목사는 이같은 모습이 사회적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에서 술, 담배를 거부한 것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지금은 윤리화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이 ‘기독교인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스스로를 억압해 자꾸 숨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회에 나가서는 술, 담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되어 ‘신앙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아직도 숨어서 담배 피고, 술마시는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마음이 복잡하다. 일반적인 통념대로 예수 믿고 신앙이 깊어지면 술, 담배는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술, 담배 하는 사람은 신앙이 없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변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다. 이제 술과 담배를 교리로 정하는 시대는 어느 정도 탈피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술과 담배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목회자도 술, 담배에 관한한 쉽게 말하지는 못한다.  결국 기독교인들의 술, 담배문제는 `신앙의 이중성'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에 대한 명확한 정립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가 돌출했다면 이제 한국교회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제사문제는 어떠한가? 제사의 문제 역시 처음 시작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제사문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술과 담배와는 달리 처음부터 거부했다. 1883년 서상윤이 만주에서 세례받고 돌아온 이후 1891∼1897년까지 세례자의 서약 일곱가지중에 제사를 거부하는 약속을 하게 했다. 때문에 당시에 신앙을 택하기 위해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제사의 문제가 거론된 이유로는 제사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재액이나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동기가 있다. 죽은 자를 대상으로한 신앙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예배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고 이는 십계명중 1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말라', 2계명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제사문제로 비교가 되는 곳이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지금도 제사를 허용하는데 사실 가톨릭 역시 처음에는 제사를 반대했다. 처음 가톨릭은 유교의 제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했고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자, 전라도의 윤지충, 권상연 등이 순교 당하는 신해박해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하는 등 강경한 입장있었다. 그러나 1939년 로마교황청이 제사 문제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표명 했고 신사참배나 조상숭배의식은 종교의미가 아니라 시민적 의식(civil rite)이라고 교황 피우스12세가 교서를 내린 이후 제사가 허용됐다. 물론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사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본지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총 179명 중 135명(75.4%)이 제사 참여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반면 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응답한 수가 29명(16.2%)에 불과해 아직까지 제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결과는 대체로 한국교회가 제사문제에 대해 우상숭배로 강하게 교육해 왔고 십계명에 우상숭배에 대해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제사 문제에 관해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요즈음 와서는 제사에 대해 미신적인 요소보다도 부모나 조상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겨났다. 즉 의무로써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학적 결론이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제2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사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제사문제에 대해 철저히 거부하는 이유로는 제사가 철학적으로 과거지향적인 순환론적 사고론이라는 것이다. 또 대부분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근거로 죽음 후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두절된 것으로 설명하고 제사를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으로 여기는 자체가 신앙적 모순이라고 말한다. 현재 기독교는 제사대신 추도예배나 추모예배를 드린다. 사실 추도예배는 1904년 중국의 중앙선교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제사 대신 추도식을 가진 것이 기원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도 `무당적 요소'나 `기복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것 같이 현재는 기독교는 대부분 추모·추도예배를 권장한다.  추모·추도예배가 제사를 못드리게 하는 대신 만들어진 것이지만 제사처럼 특별한 형식은 없다. 때문에 형식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그런데로 경동교회가 좋은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경동교회에서 제시하는 추모예식은 기본적으로 검소하면서도 정성을 다하되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상제례 특히 추모제(기제사) 때에 고인의 사진이 없어 추모제 의식에서 “중심(中心)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위패나 지방을 써 붙이지 아니하고 그 대신 “OOO씨 제 O주기 추모제”라고 화선지에 쓰고, 그 아래에 짧은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다고 제시하고 있다. 늘 문제시 되어왔던 절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돋보이는데 절이라는 형식을 예(禮)표현의 고유한 양식으로 보고 굳이 `절하는 예법'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으나 가족과 일가 친척 중에서 때와 장소를 따라 `절하는 예법'으로써 조의, 추도,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함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상제례시에 제사상 위에 음식물을 진설하는 문제는 고인이 생시에 즐기던 음식을 중심으로하여 정성스럽게 음식물을 마련하거나 고인의 수의 문제에 대해서도 복식예법에 필요한 형태로서 간소화한 수의를 입히는 등 나름대로의 예법을 설명한다. 하지만 추모예배가 제사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이 신앙의 내부적인 충돌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교회는 장례식과 기타 의례준칙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어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제사에 대해 타협이 없다. 새신자 중에는 이 때문에 교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특히 아직 유교적 풍습이 강한 상황에서 제사 반대만 고집하다가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실제로 여러 곳에서 이미 제사 문제로 충돌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조건 반대의 입장을 내세웠던 한국교회는 여기저기 유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수천년간 내려온 유교의 풍습을 기독교가 아무런 변질 없이 수용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며 제사를 기독교 신학에 맞춘다는 것이 애초부터 문제가 된다. 제사문제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숙제 그러나 더이상 고유한 한국의 문화를 뒤로한 채 서구 기독교의 문화 속에만 머무르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 정신을 살리며 우리 고유한 문화와 접목시키는 작업,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기독인이 마땅히 심사숙고 하며 내놓아야 할 과제다. 최성주 기

출처 : 복음인(http://www.ingn.net)

9.음주와 흡연에 대한 성서적 고찰 / 보수적 견해 / 진보적 견해

1. 술
(1) 술의 기원
술의 기원에 대하여 신화(神話)로 전해진 것은 에집트(EGYPT)에서는 오시리스(OSIRIS) 신이 곡물신에게 곡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며, 희랍신화에는 박카스 신이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과 아울러 포도주를 빚는 방법을 전했다 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스펜다라메트, 시리아의 몰로크, 리비아의 오라탈, 인도의 소마신(蘇麻神), 일본의 스사노오느미고도가 술을 만들었다 한다. 중국에서는 우왕의 딸 이적이 곡주를 만들어 드렸더니 우왕은 이것을 마신후 이 술로 인하여 후세에 반드시 몸을 망칠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술은 5천년전부터 있어 왔는데 한문자로 주(酒)는 두강(杜康)이 계세유시(癸歲酉時)에 양조를 시작 해서 "水"변에 "酉"자를 붙인 것. 또는 술독에서 더운 김이 나는 것과 술을 먹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합해서 "酒"자가 되었다고도 한다. 일본의 サケ는 시르게의 전용이라 한다. 이 술에 관하여 하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B.C1728-1676) 108-111조(주점(酒店)에 관한 법률)에는 술집 주모의 범죄는 사형, 화형, 투수(投水)로 처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설화는 고구려의 동명왕 주몽이 천제(千帝)의 아들 해모수가 응심연가에서 하백의 딸 3형제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만들어 먹여 취해서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서 주몽을 낳게 되었다는 고구려 건국담이 있다.
삼한시대 이전에도 제사와 잔치에 술을 썼고 동이전에는 마한에서 5월과 10월에 신에게 제사할 때 술을 썼으며 고구려전(傳)에는 신라주가 중국에까지 갔고, 고려시대에는 절에서도 술을 파는 폐단이 있었다고 하였다. 탁주, 청주이외에 소주도 고려시대, 이조시대에 유행되었다. 그리고 백제 다루왕 시대의 금주령, 세종대왕 26세시 금주권고, 중종, 효종, 숙종, 경종, 순종 시절에 때에 따라 술을 금한 사실은 이 땅의 술의 기원이 오래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과 술
성경에는 술에 대한 7가지 난제(難題)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한 것(딤전 5:23).
 2) 바울이 절주를 용납한 것(딤전 3:8).
 3) 구약시대에 제주로 사용한 것(민 15:5).
 4) 인심과 생명을 즐겁게 한다는 것(시 4:7).
 5) 멜기세덱,  족장들,  다윗의 음주(창 14:18, 대하 32:28), 성전의 수장(느             5:18).
 6) 예수의 포도주 사용(마 11:19).
 7) 예수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요 2:1-11)(예수님은 사람에게 해로운 것             은 만드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신구약 66권에서 술에 관계된 귀절 중 직접관계된 귀절은 212 귀절, 간접 관계된 귀절은 175귀절, 총계 387귀절이 있다. 이와같은 성경귀절을 살펴볼 때 성경의 금주훈은
  1) 술에 그 몸을 태운다(사 5:11).
  2) 술 취하는 자는 가난하여 진다(잠 23:21).
  3) 술에 미혹되는 자는 지혜가 없다(잠 20:1).
  4) 술을 즐기는 자는 사악한 자다(합 2:5).
  5) 술을 마시고 법을 잊어버린다(잠 31:5).
  6) 재앙, 근심, 투쟁, 번민이 있는 자다(잠 23:29-30).
  7)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전 6:10).
  8) 술의 위험을 경계하다(잠 23:31).
  9)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10) 참된 신앙생활은 술보다 더 기쁘다(시 4:7).
그 밖에 금지된 귀절과 실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역사문학에 나타난 것(레 10:9, 민 6:2-3, 신 29:5-6, 삿 13:4-14, 삼상              1:12)
  2) 지혜문학과 시편(잠 4:17, 21:7, 23:29, 31:4-5, 전 2:10, 10:19, 시 60:3,               107:27).
  3) 선지서(사 5:11, 12, 22, 28:7, 렘 35:14, 겔 44:21, 단 1:8, 5:3, 호 4:18,               7:5, 14, 암 4:1, 6:6, 미 2:11).
  4) 신약의 교훈(마 24:49, 눅 1:15, 7:33, 고전 5:11, 6:10, 갈 5:21, 살전 5:7,             딤전 3:3, 딛 1:7, 벧전 4:3).
  5) 성경의 술의 악한 실례
       노아의 추태(창 9:21), 룻의 딸들의 패륜(창 19:33), 금송아지 앞의 잔             치(출 32:4), 아론의 아들들의 급사(레 10:2), 세겜 사람들의 장담(사               9:27), 나발의 완고함(삼상 25:36), 아말렉의 참패(삼상 30:16), 우리야를             속임(삼하 11:13), 벤하닷의 패주(왕상 20:16), 아하스에로의 왕후 파면             (에 1:10), 벨사살왕 망국(단 5:4), 헤롯의 요한 참살(막 6:27).
  6) 금주가의 모범
       나실인(민 6:3), 마노아(삿 13:14), 레갑사람(렘 35:14), 다니엘(1:8,15),  세례 요한(눅 1:15).
노아가 포도를 재배할 때 악마가 와서 도와준다면서 양, 사자, 돼지, 원숭이의 썩은 피를 포도뿌리에 거름으로 주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마시면 처음에는 양같이 순하다가 사자같이 사납고, 돼지같이 더럽고, 원숭이같이 추태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탈무드).
(3) 술의 정체
 1) 술은 영양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술은 쌀, 보리, 고구마, 옥수수, 과실 등으로 빚는데 당분이 있는 액체에 효모균을 섞으면 발효해서 산소와 비타민은 없어지고 무수탄산과 알코올 곧 주정(酒精)이 되어 버린다.
영양물은 ① 질소를 포함한 단백질물로써 신체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적 영양물이요, ② 질소가 없는 전분 및 지방으로 연소해서 열을 발하는 호흡 영양물이다. 그러므로 쌀술 보리술은 쌀, 보리의 영양가를 그대로 지닌것이 아니다.
빵 두개는 한상자의 맥주보다 더 영양이 있다. 빵은 신체안에 저장되어 유조(有助)하지만 술성분은 위에 남아서 소회되지를 않고 즉시 혈액에 혼합되며 물에 녹은 알코올은 오줌으로 방출되고 호흡으로 즉시 발산해 버린다. 또한 맥주를 먹으면 배가 나오는 것은 덜 연소된 지방이 축척되기 때문이다. 만국의학 대회에서는 "알코올은 인체에 들어가서 영양의 효력은 전연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2) 백약지장(百藥之長)이 아니다.
한의학상으로 술은 덥게 하며, 불순한 기운을 헤치고, 적제된 울분을 내리며, 부간(扶肝), 양비, 후장위(厚腸胃)하고 피부를 윤택케 한다고 하지만 현대의학은 알코올은 생성세포를 죽이는 독물로써 발광, 간질, 정신허약, 신체 퇴폐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3) 술은 마취제요, 극약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취하는 맛 때문인데 취한다는 것은 마취작용이다. 술은 아편, 몰핀, 코카인과 같이 마취작용을 하여 세포의 원형질 가운데서 생리화학적 산화작용을 방해하여 근육의 동작, 신경, 정신의 기능의 둔화되어 지혜와 판단이 흐려지게 됨은 사격실습, 인쇄공의 채자( 豆), 학생의 수학, 운전기사의 위험감각이나 속도조절 등의 실험으로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4) 술의 습관성
술은 먹을수록 내주성과 내약성이 생겨서 중독이 되고 습성화해서 그 강도가 더해간다. 초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그것이 습관화 되므로 그 노예가 되어서 인격적 자유를 잃게 된다.
 5) 무서운 착각 현상
착각현상이란 오관기(五官器) 신경 또는 정신적 지각의 부분적 마취로 생기는 현상인데 그 착각 현상은 아래와 같다.


 6) 술과 변질 현상
술은 세포와 신경 마취, 착각케하고 조직 세포를 변질케해서 영구적으로 퇴화케하여 간장경변, 신장위축, 심장의 지방변성, 혈관의 경화, 중병, 불치병에 걸리게 한다.
 7) 술은 면역성을 파괴한다.
백혈구를 감약케하고 적혈구를 파괴한다. 술을 많이 먹는 자는 금주가보다 3배나 병에 더 잘 걸리며 12년간을 단명한다고 한다.
(4) 술의 해독
 1) 건강의 적
알코올이 신체 각 부분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a. 수분을 흡수하고 또 지방을 용해한다.
b. 마취작용을 일으킨다.
c. 뇌의 고상한 기능을 둔하게 한다.
d. 내장의 여러 기관이 알코올에 침식된다.
e. 중독성 해독.
f. 기만작용과 신경 파괴 작용.
g. 병에 대한 면역을 약하게 한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구공과 소화기(위장)을 해치며 심장, 혈관(동맥경화증), 간장(간경변증), 신장, 뇌 및 신경계통(정신병), 비만증, 피부병, 신진대사기 병, 결핵, 성병 등 각 병에 미치는 그 해독은 막대하다.
그 밖에 골치 때리는 주범(主犯)은 알데히드. 흥분제가 아닌 마취제이며 농도에 따라서 머리복잡, 수다스럽고, 걱정을 잊고, 다행감, 과대망상, 잔소리, 불평, 혼수, 전신마취,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술독 근처만 가도 취하고 알콜성 지방간은 48-72시간이 지나야 정상화되고, 간염, 간장염의 만성화, 판단력 감퇴, 작업능률 저하, 기억력, 학습력 저하, 혈액 100cc중 알콜 300MG면 급성중독, 다발성 신경염, 정신장애, 사시, 혈압상승, 영양실조, 천치의 원인이 된다.
 2) 유전과 우생학
알코올 중독으로 인하여 신체 구성 물질 가운데 특히 생식세포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손상을 입게 되는데 손상을 당하게 된 그 생식 세포로부터 발생하는 후손의 신체 또는 생식 세포에 결함이 생기게 하고 그 후손 역시 그와같은 불구적 생식 세포로 결함이 되어 그 후손들에게 결함을 전통 또는 유전케 한다.
 3) 술과 생명
① 음주가의 사망율, ② 음주가와 금주가의 생명비율, ③ 음주가와 금주가의 연령별 사망 비교표, ④ 보험가입자의 사망율 조사표, ⑤ 유아 사망율과 술, ⑥ 술꾼의 변사와 자살 등의 여러 통계표를 대조해 볼 때 음주가의 수명이 금주가의 그것 보다는 단명함은 확실하다.
 4) 술과 빈곤
술은 빈곤의 어머니다. 경제생활에서 본다면 빈곤의 최대 원인은 술임에 틀림없다. 영국에서 25%, 미국에서 24%, 독일에서 22.5%가 빈곤의 원인이 술이라는 것이 조사된 바 있다.
 5) 술과 능률
타이프 타자, 인쇄 식자공, 군대 행진, 사격명중, 시력측정 등에서 술로 인한 능률 저하가 증명되었다.
 6) 술과 범죄
주해(酒害)의 실증으로 음주 발악, 취중 만용(蠻勇), 취중 폭력 살인, 취중 윤리범, 취중 가정윤리 파괴, 취중 잔인무도한 악행, 음주 결례, 음주 변태 심리, 취중 강력범, 술꾼의 사교 실례, 취중 교통 재해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한국 절제 교육연구 사료집 송 상석편에는 술의 해독의 실증으로써 1933년부터 주요 일간신문에 보도된 천여종의 사실을 스크렙 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술의 해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술은 교통사고의 원인도 된다. 또한 술은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켜 파렴치한이 되게 하여 음란한 죄도 예사로이 범하게 되며, 난폭한 습성을 가진 자는 살인도 불사하는 예가 있다(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다음은 술이 술을, 마지막으로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
(5)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이해
 1) 알코올 중독이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① 생리적 문제가 따르는 신체적 원인 곧 내분비선의 분비가 고르지 못한데서 오는 경우. ② 심리적 원인으로서 알코올 중독은 심중의 문제들을 반영시킨 한 증상에 불과하다. 그네들은 마음과 인격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이로써 이중으로 병을 악화시킨다. ③ 사회적 원인으로는 돈을 벌며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술은 매력적 남성적 사교에 절대 필요한 것, 대인 관계에 꽃을 피우는 것, 그리고 인격 조절을 하는 매개물이라고 한다. ④ 철학적 종교적 요소로는 철학이나 종교에서 밝히듯이 생의 근본적 불안이 해소되지 않을 때 술에 탐닉한다.
 2) 중독자에 대한 지도자의 태도
① 윤리문제나 도덕적, 경제적 책임 추궁 보다는 지도자를 신뢰하고 자기의 무가치성, 무의미성, 무능성을 자각하고 병에서 재기하고자 하는 용기를 주어 인격의 전체적 변화 성장에 집중할 것. ② 전문지식, 기술, 통찰력, 긴밀성으로 그들의 문제를 꿰뚫고 동참할 것. ③ 상담자로서 양심을 괴롭히는 직선적 설교로 권고를 하되 비위맞춤을 피하고 자원해서 도움을 구하려는 분위기 조성과 불안의 심정을 같이 느끼는 태도가 중요하다. ④ 복음의 약으로 접근하여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고 마음의 병을 복음의 약으로 고쳐주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게 된다. 그러나 술꾼의 교정은 지극히 힘들다. 그것은 재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보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6) 음주의 이유와 음주의 길
왜 술을 마시는가를 연구해 볼 때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것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교제상, 원기 증가, 기분 전환, 습관성 등으로 대별되는데 또 다른 이유로는 남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하여, 불만족의 애정대신, 이상과 현실의 갈등으로, 책임회피, 수치, 열등감에서 탈출시도, 실패를 망각하고자, 성적 부조화와 혼란, 공포 불안에서 해방, 자기 비판의 죄악감을 축출, 자기처벌 수단, 생리적 고통 완화를 위해서 술을 마신다. 이러한 음주를 하므로서 미치는 해독은 건강손실, 수명단축, 지혜혼탁, 타락에의 길, 낭비, 가정파괴, 자손악화, 범죄, 사회풍기 손상, 유전, 영혼 멸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같은 해독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고자 하면 먼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금주를 단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금주의 방법은 술의 해독을 깊이 생각하고, 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회개하며, 단연코 금주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즉시 금주를 단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금주는 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금주를 계속할 것인가? 계속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금주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주주위를 공표하고 술집과 술자리에서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진격적(적극적) 태도를 취하며, 교회(신앙적 단체)에 소속,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술-위궤양-위암-성병-심장병-충심(衝心)-뇌일혈-발광-유전-죽음-적빈(赤貧)-가족이산-아내의 고생-자녀의 눈물은 모두 동의어다. 이러한 것을 깊이 명심하는 것도 금주의 동기를 도울 것이다.
* AA운동(Alcoholics Anonymous)
주해자 익명회라 하여 교파나 종파, 정치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회원 상호간의 금주문제 해결에 노력하는데 일본에서는 단주신생회, 단주벗의회, 단주호조회 등의 명목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금주 봉사회에서 시도한 적이 있다.
* 주객 감화원
스웨덴, 호주 등 여러나라는 주세(酒稅)의 일부를 법적으로 사용하여 술꾼 교정에 힘쓴다.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서 음주의 경향도 늘어나는데 교수, 기사, 기업가, 의사도 이 학습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자성관(自省館)을 열어서 50명을 수용하여 전문가의 지도하에 의학, 심리 및 신앙 감화로 구제를 추진하고 있다. 적당한 노동(폐품개작, 농장작업), 스포츠, 영화, 오락, 독서 등으로 심신의 위안을 주며 극히 실제적인 종교 예배로 감화를 주는데 6개월 혹 1년이 지나면 교정의 실효를 거두는 예도 많다.
(7) 한국인과 술
한국의 2천 4백만 술꾼은 1979년 한해 동안에 5,600억원어치의 술을 마셨다. 1973년에 1천 700억원이던 것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15가지 술 가운데 소주는 일인당 58명, 막걸리는 일인당 41되, 청주는 20세이상 남자가 평균 3병을 마신 셈이다. 5천억원이면 100억짜리 은행 50개, 50억짜리 대학 100개, 10억짜리 공장 500개를 세울수 있는데 이것을 마셔버린 것이다. 사무실이나 일터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잔 마시는 자들은 모두 중독자로 간주될 수 있다. 각국의 술의 소비율은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순이며 미국이 13위, 일본이 21위인데 한국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2. 담배
(1) 담배의 기원
담배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한국 절제 교육 연구 사료집), 대체로 원산지는 멕시코이며, 아메리카 토인들 사이에 퍼진것이 1492년 콜럼버스의 탐험대에 의하여 스페인에 전파되고 1558년 프랜시스코 퍼낼도스가 유럽으로 수입하였다. 16세기 말엽에는 포르투갈인에 의하여 인도, 동 아시아 및 일본에 전파되었다(일본은 1550-70). 한국에는 광해(光海) 10년 무오년(1618년)에 들어왔는데 처음 피운 사람은 계곡 장유씨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이익 선생은 이미 담배의 득실을 말하였는데, 유익된 점은 ① 담이 목구멍에서 잘 나오게 하고, ② 기(氣)역하고 침이 돌때, ③ 음식이 소화가 잘 안될 때, ④ 체하여 토산할 때, ⑤ 추울때 어한에 좋다고 하였다.
한편 해로운 것은 안으로 ① 정신을 해하고 밖으로 이목을 해하고, ② 두발이 속히 희게하고, ③ 얼굴이 창백하여지며, ④ 이가 삭고, ⑤ 피육이 여위고, ⑥ 속히 늙고, ⑦ 악취, ⑧ 재산소모, ⑨ 허송세월이라고 지적하였다.
(2) 담배의 해독
중추신경 계통 - 손떨리고 어지럽다.
심장맥관 - 심장고동 증가, 혈압 상승.
호흡기 계통 - 구공, 인후, 성대, 기관지 자극 - 기침.
소화기 - 식욕감퇴, 혈액순환 지장.
혈액 - 적혈구중 일산화탄소 증가 - 산소 운반율 감퇴
벤즈피렌 14종 - 발암 물질포함 - 간암 유발
* 흡연학생의 성적불량표
10-17세 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뉴욕의 D.L 로드교수가 담배를 피우는 학생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학생을 조사하여 나온 통계는 다음과 같다.


"냄새나는 호흡, 더러운 침, 구강암, 더러운 이, 피부 원동력이나 운동 능력 감소, 생산능력 격감, 7년 수명 단축, 둔한 두뇌, 약한 정신, 도덕적 및 정신적 감각 괴멸, 끊임없는 욕구불만의 노예, 위궤양, 미음미용(美音美容) 상해, 이(齒) 손상, 불면증, 영양실조"(岡田道 박사의 "煙草"에서).
담배는 ① 신경 진통제 ② 식욕증진 ③ 변비조절 ④ 살균 - 결핵균 사멸 ⑤ 살빼기 ⑥ 위안을 준다는 말은 합리성이 없으며 담배는 백해무일리(百害舞一利)일 뿐이다.

오늘의 연초독설(煙草毒說)
하루 1갑 이상을 피우면 수명은 6년이 단축되며 폐암 등으로 인한 사망율도 24배나 된다. 흡연하는 자는 비흡연자보다 사망율이 32%나 높다. 그리고 흡연자의 심장병, 혈관병, 기관지염, 늑막염, 폐기증, 위궤양, 12지장궤양, 간경변 등에 의한 사망율도 역시 높다. W.H.O(세계 보건기구)는 "자살이며 타살 행위다"고 강경하게 경고하였다.
담배는 니코틴 등 화학물질 200여종이 포함되어 있고, 그 중 타르색소는 발암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850℃에서 생성된 벤즈피렌은 실험 결과 쥐의 피부에서 암이 발생하였다. 담배의 니코틴 흡수량은 한개비에 1mg인데 급성중독이 되면 설사, 호흡이 거칠어지며, 마비 현상도 나타난다. 특히 임산부가 흡연을 하면 태아가 성장하는데 지장이 있다. 그리고 1일 25개피 피우는 끽연자는 사망율이 비끽연자보다 40배에 달한다. 간경변증에 의한 사망율도 역시 높으며, 동맥경화를 촉진하며 발병 가능성은 2배나 높다. 이 니코틴은 뇌에 허혈 발작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해독성을 지닌 담배는 서인도의 토바코라는 섬이름에서 유래하였다하며 니코틴은 1868년 빈(오스트리아)에서 존 니코트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그 중독 현상은 1868년 하인리히 및 투워루아크에 의해 밝혀졌으며 그 화학적 구조식은 1893년 빈네르에 의해 밝혀졌다.
(3) 담배를 피우는 이유
국제 금연 협의회 조사에 의하면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어른 세계를 향한 도전과, 호기심,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조상문씨의 조사에 의하면 호기심에서(30.8%), 친구와 어울리기 위해서(17.8%), 맛이 있어서(7.3%), 어른된 기분으로(6.5%)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왜 담배를 피우는가를 살펴볼 때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자극형 - 자극을 찾아서 - 피우고 싶고, 기분전환, 잠 깨우려고.
심심해서형 - 만지작 거리고, 불붙이고, 비벼서 끄는 취미.
쾌락형 - 끽연 자체에 쾌락을 느낌.
마음의 의지처형 - 울분, 불유쾌, 걱정, 속상할때 피움.
갈망형 - 안절부절하며 못참고 몹시 피우고 싶음.
습관형 - 무의식중, 재떨이에서 타는데 또 새 것을, 또는 입에 물고 있는 것                도 잊고서.
주전 3천년에 애굽에서 태양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예식에 대마초 끽연을 했고, 주전 7백년 흑 6백년에 헬라에서도 종교적 의식으로 대마초를 끽연했다. 서력 기원 초기에 담배 요법으로 환부에 연기를 쏘이게 했고, 주후 470 -620년간에 마야족도 종교의식으로 끽연을 했다. 곧 뿌리가 깊은 것이 습관 형성의 연유가 된 것이다.
(4) 한국인과 담배
1978년 한 해 동안에 한국의 끽연 인구 1천만명이 632억개비의 담배를 피워 1인당 6,320개비 곧 316갑이었다. 그 길이를 합치면 지구에서 달까지 7.6회, 서울에서 부산까지 6280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금액은 5,365억원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담배 생산량은 세계 제 8위, 수출은 세계 제 4위, 단보당 생산실적은 제 2위 그리고 1일 개인 평균 소비량은 14.9본(미국 10.4본. 영국,일본 각 8.8본, 서독 7.2본, 이탈리아 5.2본, 프랑스 5.1본)으로 세계에서 첫번째이다.
근자에는 학생층에도 담배피우는 자가 많아 중고교생 5명중 1명이 담배를 피운다하며 특히 여대생 가운데도 그 수효가 상당수에 이른다 한다. 한편 일본은 남자 2,915만명, 여자 647만명이 년간 2조8천5백70억 7,800만엔을 담배값으로 지불했으며, 미국은 5,300만명이 6,200개비를 피웠다. 그런데 1972년경에 한국인구 300만명 끽연자가 연간 1천억원 어치의 담배를 태운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위의 수치로 보아 엄청난 증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의 문제는 젊은 기독교인의 끽연 현상의 만연인데 어떤 조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1) 얼마나 피우는가?
1일 1갑 정도 : 25%,   2일 1갑 정도 : 37%,
1일 2갑 이상 : 6%,   가끔 : 10%,
절대금연 : 19%,    불답 : 3%
 2) 왜 피우는가?
정신 해독 : 23%,    심심풀이 : 22%,
대인 관계 : 20%,    습관 : 19%,
자극 : 9%,     기타 : 7%
 3) 왜 안피우는가?
불건강 : 57%,    생리적 혐오 : 21%,
비위생적: 12%,    죄책 : 10%
 4) 피우면서 갈등을 느꼈는가?
다소간 : 7%,    전연 안느낌 : 43%,
약간 거북스러움 : 42%,   불답 : 8%
 5) 교회의 흡연 문제 해결책은?
금지 : 8%,     불간섭 : 52%,
절제권장 : 37%,    불답 : 3%
이 조사는 교회 안에도 끽연의 악습이 만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교회가 시대의 추세를 따라서 추종되는 현상임을 말하는데 반면에 절대 금연을 고수하는 자도 많다.

3. 교회의 절제운동
3세기 교회생활 특징의 하나는 금식, 독신주의 수도원 생활이었고, 성 프랜시스 교단의 기초는 눅 9:1-6, 마 16:24-27의 빈고(貧苦)의 복음이었으며, 루터의 독일 크리스찬 귀족서한에는 ① 호사 사치금지, ② 향료 제한, ③ 음식의 남용, ④ 창가(娼街) 폐지였다. 그리고 칼빈의 제네바 교회훈련 제 4조는 무도, 도박, 취주, 음란가곡 금지였다.
금주운동의 시작은 1745년 웨슬레의 "음주 및 주류판매를 죄악시함"의 장정(章程) 설정에 기인하였다. 영국교회는 1818년, 미국교회는 1826년, 일본교회는 1876년에 노력하였는데 특히 1874년에 미국의 월라드 여사가 창설한 여자기독교 절제회로 이 운동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초기의 강령 7개조 중 제 7조는 술과 도박의 금지였으며(1905년 이전), 장로교회 단일총회시절(1912년)의 특별 교훈 제 3조에는 술, 아편, 담배를 금했다.
문헌상으로는 구세군신문 1910. 6월호에 "단음함이 가흠"이라 했고, 1916년에 현순 목사, 1917년에 노불 부인, 1918년에 김 장준목사가 기독신문에 금주를 논했다. 장로교회의 주일학교 절제통일 공과는 1917-1941년까지, 60공과에 금주를 다루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선교회에서, 1920년에는 YMCA에서 특히 1923년에는 틴링양의 발족으로 설취된 여자기독교 절제회를 통해서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구세군은 1921년 구세신문 금주 특집호 2만부를 시발하였고 감리교는 1923년 지방회에서, 1926년 연회에서, 장로교는 1928년에 상설 절제부를 조직했고 1932년 총회의 승인을 얻었다. 1932년에는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에서 1월 15일을 전국 금주주일로 정했다. 더우기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자산, 자급, 자립 운동으로 그 활동이 더욱 활발하였다.
장로교 선교회 절제본부는 1934년 1월 금주, 금연의 절제교육의 철저한 실천을 부탁하는 근청문(謹淸文)을 각 교회에 보냈다.
1936년 6월 1일 조선일보 사설에는 5월 5일 단오절의 기독교 금주운동 지지단체가 1,200임을 밝히고 당시 2천만 인구의 술값 4천만원(1인당 2원)을 경고했다.
한편 1948. 5. 10선거시에 미군정청은 전국에 금주령을 발표했다.
1978년 9월 7일에는 서울에서 송상석, 박형룡, 강신명 등 원로목사들이 한국기독교 절제회를 재건하고 고문, 임원, 실행위원을 선정하여 이 절제운동에 활력을 가하게 하였다.

4. 한국교회와 주초문제
(1) 주초문제로 교회는 많은 젊은이들을 상실하고 있다. 주초를 해도 교회생활이 가능한데 무작정 금하기에 그들은 2중인격, 혹은 자기 체념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다.
(2) 주초가 복음의 내용과 구원 사실에 위배되거나 저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3) 문제시 않을 것(성경에 계율적, 금욕적 금령이 없음)을 문제삼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를 낳는다.
(4)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고민을 해소하려고도 하지않음은 우리의 심각한 문제다.
(5) 다른 선도책이 없음도 또한 문제를 낳는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주초를 금하게 된 이유는
(1) 초창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복음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적 신앙 배경으로 금주 금연을 실천했다.
(2) 당시의 민중은 절망, 원한, 공허를 달래려고 술, 담배, 노름에 열중해서 이를 추방하고자 했고, 구한말 국체 보상운동으로 금주, 금연운동이 벌어졌다.
(3) 금주, 단연은 새 사람의 새 생활임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가지 배경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의 교리화가 되어있는 금주, 금연은 기호품으로 자유선택하도록 하되 복음에 취해서 술맛이나 담배맛을 잃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 안에는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자들이 적지않고 많은 젊은이들은 술, 담배 자체가 신앙생활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술, 담배를 하면서 교회에 나가고 있는 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술, 담배로 교회에서 평신도를 처벌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주초문제는 한국교회와 교인의 심각한 문제가 되어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술, 담배가 죄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① 바울의 말씀같이 주초를 하는 자와 아니하는 자 간에 서로 멸시와 판단을 말 것(롬 14:2-3). ② 주초로 성(聖) 속(俗)의 구별을 삼지말고 신앙 양심에 따를 것(고전 8:8). ③ 남에게 정죄될 일은 말 것(롬 14:15, 고전 8:9-10). ④ 절제 교육이 필요하다(고전 6:12, 8:9, 롬 14:20).
금주의 이유는 파생적인 죄를 범하는 죄원(罪源)이며, 한국인의 술 먹는 태도가 유별나서 술은 술로 보답하고자 하며, 건덕(建德)상 좋지 못하며 안하는 것이 하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문명 사회에서 술은 살인자의 역할을 하며, 범죄 부도덕의 증가를 촉발시킨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은 가정 경제 파탄, 인격 부조화, 자아와 용기상실, 만성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 바울, 사도들의 교훈을 따라 저스틴 마터, 클레멘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웨슬레 그리고 칼빈(신앙 생활의 3대적은 댄스, 도박, 음주라 함)은 금주를 강조했다. 또한 술은 아무 이익이 없고 절주(節酒)는 금주보다 힘들며 남을 실족케하고, 많은 선을 행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1) 담배 연기의 화학적 분석
 1) 니코틴은 중추신경계, 심장, 혈관에 유해한 작용.
 2) 타르분(分)은 피부암의 원인.
 3) 휘발성 자극물 10여종이 있어서 기관지계통에 유해한 작용을 하며 폐안            에 오염물질을 형성.
 4) 일산화 탄소는 관상 동맥혈전, 혈관 내면 질환을 유발.
(2) 끽연에 기인한 의료문제
 1) 폐암 : 과거 25년간 8배로 사망율이 증가했는데 27.15% 담배가 원인임.
 2) 관상동맥의 이상에 의한 심장병 : 끽연자 사망율은 2배 더 높음.
 3) 기관지염과 폐기종증 : 비끽연자보다 5배 위험.
 4) 기타 질환 : 위, 12지장궤양, 구강, 후두, 식도암, 방광암, 치은염(齒銀炎)                        등의 원인.
 5) 임신 : 매일 10개비 피우는 임산부는 태아의 성장이 지연되며 유산, 조                   산, 사산율이 증가하고 사망 영아를 출산할 위험이 높다.
 6) 여명(餘命) : 25세 남자가 하루 15-20개비의 담배를 피운다면 40.4년 밖                        에 못살지만 비끽연자는 48년을 살 수가 있다.
 7) 약물 의존 : 속히 습성화되며 대마초, 환각제 사용을 유발.
(3) 비용
35세부터 하루 25개비씩 65세까지 피운다면 약 420만원 가량 소비.
(4) 예방
담배의 해독을 인식하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손해될 것이 없고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며 교육상 좋다. 선생, 의사, 운동가, T.V연출자의 끽연벽이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아뭏든 담배는 습관성이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예방이 절대 필요하다.
(5) 도덕문제
열성적 그리스도인에게는 끽연은 육체, 마음, 영성에서 볼 때 바울의 고전 6:19-20의 말처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전이므로 끽연은 ① 건강해독, ② 불결, ③ 금전낭비, ④ 타인에게 폐, ⑤ 태도 불단정하게 되므로 피하는게 좋다.

5. 우리의 각오
서양의 통계는 끽연자의 10%는 10세때에, 65%는 고등학교 시절에 습성화 된다고 한다. 습관 형성의 중대한 시기는 12-14세이며 서양의 아동의 3인중 1인은 15세까지 상습 끽연자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남자 2,935만명, 여자 677만명이 끽연자인데 연간 3조5백70억7천8백만원이 담배값으로 지불되며, 미국은 5천5백만명이 6천4백억개비를 태웠다.
한국은 중고교생 5명에 한 명은 담배를 피운다는 보고가 있다.
민병기박사는 "자라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흡연과 음주의 해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인들부터 스스로 금연, 금주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적절한 여가 선용책과 함께 교육적, 제도적, 사회적 대책이 적극적으로 이루워져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금연을 알려주는 책자도 있다("당신도 담배를 끊을 수 있다" 권명달역, "담배가 깨끗이 끊어지는 책" 김성숙역).
금연을 위해서는 니코틴의 무서운 독을 익히 알고 타력(他力)주의를 버려야 한다. 점진주의도 안되고 즉시 즉각시작하여야 하는데 중(重)중독자는 금연을 해도 죽지는 않고 두어주간 병들 정도다. 또 상식적으로는 금연의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하며, 양을 줄이고 흡인할 때 연기의 양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금연의 방법이다. 그리고 흡연의 해독을 인식하고 스포츠 등으로 취미를 전환하여 금연하는 방법도 있다.
통속적으로 금연에 성공할 확률은 300분의 1이라 한다. 이와같이 금연이 매우 어려운 것을 실감할 때 어릴때부터 습성화 되지 않도록 주안에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 음주에 대하여
(1) 술에 대한 성경의 견해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의 해독과 신앙 건덕상의 이유로 주초(酒草)를 금했으며 이것이 좋은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여러가지 시비와 문제를 안게 되었다. 또 복음전도에 있어서 이미 주초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먼저 술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해 본다.
구약시대에 술을 마셔서 실수한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의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창 9:21의 노아, 창 19:30-38의 롯). 또한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은 언행과 판단을 가져옴으로 금주를 장려한 구약성경 귀절이 많이 있다(잠 20:1, 렘 25:15, 사 5;11, 28:7, 호 4:11). 그리고 특별한 사람은 술을 금해야 한다는 귀절이 있다(레 10:9, 렘 35:5-10, 겔 44:21). 그외에 나실인에게는 술을 금했으며 특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결심한 사실이 다니엘서 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포도주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생각한 귀절도 있고(창 14장, 27:28, 호 2:8),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출 29:40, 레 23:13). 특히 포도주는 양식과 함께 유대인의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느 5:15). 이렇게 구약은 금주와 허락하는 양면을 말하고 있다.
신약에는 포도주를 약으로 또는 주님의 피로 말씀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막 2:22, 눅 22:20, 요 2:1-11, 딤전 5:23). 이는 음주를 허락한 부분이다. 그러나 금주의 교훈은 더 많이 있는 것을 알수 있다(눅 1:15, 고전 5:11, 엡 5;18, 딤전 3:8, 딛 1:7, 2:3). 이렇게 신약도 허락하는 곳도 있고 금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 성경을 요약하여 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① 술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선하게 쓰면 선이 되고, 악하게 쓰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노아의 추태나 롯의 추행으로 보아 기타 음주자의 괴벽이나 술의 해독, 악한 일의 촉진제가 되는 것으로 보아 과음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③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겠다. 곧 제사장이나 레위사람들이 회막 성전에 들어 갈 때 술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④ 지도자는 마시지 말아야 겠다(직분자, 감독, 목사, 장로기타 신앙의 지도자는 건덕을 위해서 술을 금해야 할 것이다).
⑤ 그러나 약용으로는 쓸 수 있겠다. 이 말은 술을 권장하는 말이 아니다. 병자가 약용으로 쓸 수 있되 병이 나으면 안해야 한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은 마실 필요가 없겠다. 요사이는 좋은 약이 많으므로 특별히 술을 약으로 마셔야 할 병이 있겠는지는 의문이다.
⑥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요 2:13-22, 롬 12:1, 고전 3:16-17). 그러므로 마음과 같이 몸도 술의 해독과 술이 가져다 주는 잘못된 습관과 악행의 염려에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제재(制裁)를 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술을 조금 마시는 것은 분명히 죄가 아니요 구원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성경의 근본적인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음주가 비록 죄와 구원과는 무관하더라도 그 해독, 특히 술에 중독이 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술이 자신의 건강이나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손실을 끼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유익을 위해서 술을 조금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극력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는 일단 술을 마시는 사람을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복음을 전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하면서 여러가지로 지도해 나갈 것이요,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과거의 잘못된 생활의 구습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아직까지도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그 구습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도록 술이 주는 해독을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한다.
(2) 술이 주는 해독(害毒)
① 신체에 해롭다.
술의 주성분인 알콜은 사람의 힘(정력)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뇌신경의 작용을 방해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또한 몸의 각 기관에 알콜이 들어가면 그 작용이 둔화되고 이것이 오래 쌓이게 되면 몸의 각 기관세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나친 음주로 인하여 폐가망신한 사람을 많이 보고 있거니와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특히 성령께서 그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나친 음주는 신앙생활에 특히 신령한 생활에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② 정신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알콜은 또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둔화시키며 이것이 계속되면 정신계에 큰 영향을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소극적이요 나아가서는 퇴폐적, 부정적인 생각이 들도록 유도하는 확률이 높다. 자칫하면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③ 지적감퇴를 가져온다.
우리나라에서 1년간의 술 판매액은 도서 판매액의 수십배 또는 그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알콜의 과음은 사람을 지적으로 감퇴시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더우기 주초를 하는 임산부는 기형아를 출생시킬 확률이 금하는 사람의 몇배나 된다는 것도 이미 의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④ 경제적인 손실을 가져오며 이로 인해 가정불화의 주된 원인이 된다.
해마다 1년동안에 마셔 버리는 술로 인해서 엄청난 곡식과 돈이 낭비된다. 그리고 이 숫자는 해마다 늘어만 간다고 한다. 물질적인 손해도 손해이거니와 이로인해 겪게 되는 가정적인 어려움은 또 얼마겠는가! 또한 여러가지의 퇴폐풍조와 비도덕적인 행태는 어떠하겠는가? 이와같이 지나친 음주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악이 조장(助長)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알콜이 주는 해독은 여러 면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건덕을 위해 금주의 좋은 전통을 이어 받아온 한국교회는 더욱 이를 지켜 나가는 동시에 아직도 술의 마성(魔性)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와 관용의 입장에서 우선 교회로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신앙으로 지도하여 믿음의 힘으로 이러한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겠다. 또한 신자의 이유있는 음주는 건덕과 신앙양심에 맡기는 수 밖에 없겠다.

* 흡연에 대하여
(1) 담배에 대한 성경의 견해
성경에서 담배에 대해 언급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이는 그 당시에 담배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몇몇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담배에 대한 간접적인 성경의 견해라고 하지만 이는 성경해석을 잘못한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이다.
(2) 담배의 유래(由來)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Columbus) 탐험대의 일행은 이 신대륙에서 참으로 신기한 놀라운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 가운데는 그곳 원주민들이 불붙인 무엇을 입에 물고 빨아들이면서 코와 입으로 연기를 내뿜는 것도 있었다. 다름아닌 타바코(tabacco), 즉 담배였다. 이 때가 1492년 10월말 아니면 11월초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담배 피우는 습속(習俗)이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1500년대에 와서 스페인 사람, 포르투 사람들에게 전해지다가 차츰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한편 스페인이 필리핀을 침략하여 동양무역의 확장을 꾀한 것이 1565년이었으니 이즈음에 담배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에 일본의 해외무역자들에 의해 그들 나라로 수입되어 1570년에서 1580년 사이에 전국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1607년에 연초금령(煙草禁令)이라는 게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담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 수광의 지봉유설(之峯類說, 161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담바고는 다른 이름이 남영초(南靈草)이다. 근래(近來)에 왜국(倭國)에서 건너왔다"고 하고서는 담배가 무슨 약초인양 소개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실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임술(壬戌, 1622) 동래왜관에 큰 불이 났다. 이것은 왜인(倭人)들이 담배 피우기를 즐기는고로 담뱃불에서 옮겨 붙은 까닭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보다 좀 뒤의 기록으로서는 효종(孝宗) 후비(后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생부(生父)인 장유(張維)의 계곡만필(1635)에서도 볼 수 있다. 위의 기록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오기는 임진왜란(1592)때부터 비롯했다고 하겠다. 또한 고추와 호박도 이때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담배가 일본의 침략군에 의해서 묻어 들어왔는데 한일합방이후 1921년에 또 일본인이 처음으로 연초전매령을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924년에는 대구에 현대식 담배공장이 최초로 준공되었던 것이다.
(3) 담배의 용도 및 보급
담배의 줄기와 잎에는 니코틴(Nicotine) 성분이 들어 있다. 이것을 추출(抽出)하여 주로 유산 니코틴을 만들어서 살충제로 쓰기도 하나 잎으로 담배를 제조하는 것이 주된 용도이다. 상기한 지봉유설에 "잎을 따서 말리우고 열을 가한다. 병자가 담뱃대로 연기를 마시면 탄질기가 치료되고 취한 술을 깨워준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심고 사용도 하지마는 그 공(功)만 볼 것이 아니라 독(毒)이 있음을 알고 가볍게 사용치 말라"고 한 기록이 있다. 니코틴 소량을 물에 푼다면 아주 치명적인 독물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담배는 이렇도록 사람의 신체와 정신에 장해를 주는 해독 뿐인데도 인간생활의 매력적인 기호물로써 수많은 금연법과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 퍼졌고, 애연가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이로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 또한 막중한 것이다.
(4) 흡연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문제들
흡연은 과연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서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선물로써 곧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흡연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금연의 전통을 지켜오고 또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생활의 건덕과 열매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생활에 유익하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흡연은 복음을 받는데 있어서 조건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리스도인이 되고 안되는 어떤 자격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흡연은 위생상, 생활 에티겟상 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여러가지의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피우지 않는 우리의 입장만 너무 생각하지 말고 피우는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더우기 죄악시하거나 율법적으로 보려는 생각은 절대 금물인 것이다. 신자인데도 여러가지 사정으로 흡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는데 이들은 그들의 신앙이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흡연이 신앙생활에 유익하지 못하며 또한 여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끊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노력과 동시에 기도해야 할 것이다.

술과 담배와 교회

김 경재(한신대 교수, 목사)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 이것은 이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 살았던 예수의 별명이 됨직한 이름들이다. 고요한 산 속에 들어가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며 울부짖기도 하던 경건한 랍비, 전문적인 구약성경 해석자들보다 훨씬 더 깊고 권위있게 민중에게 구약성경을 풀이해 주던 훌륭한 선생, 수정같이 맑은 마음과 진리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밝은 눈으로 더러운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며 산상 수훈을 가르쳐 준 예수의 별명이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경건한 정통파 기독교 신자는 예수를 이렇게 모독할 수 있느냐고 펄펄 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건이라는 색안경을 벗어 버리고 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들은 예수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런 평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이 때문에 오히려 예수에게서 넉넉한 인간미를 느낄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는 공관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그대로 적어놓은 이른바 예수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쓴 예수의 일대기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별명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보아라, 저 사람은 먹고 마시기만 좋아하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합니다"(공동 번역 마태복음 11장 19절과 누가 복음 7장 34절)라는 말처럼 그때의 유대 사람들로 부터 항상 죄인으로만 업신여김을 받은 세리나 창녀들과 어울려 실컷 마시고 먹고 떠들기 좋아하는 예수가 요즈음 말로 술보, 먹보, 형편없는 패거리의 왕초와 같은 별명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낳은 역사가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인류의 역사 속에 소크라테스가 살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한때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살았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몇백 곱절이나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왕관을 쓰지 않은 왕 중의 왕, 창녀도 숙녀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학자도 무식장이도, 대통령도 막일꾼도, 신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를 한번 알게 되면 누구나 친한 친구처럼 느끼고 아무리 존경해도 자기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예수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쉬쉬 하고 있는 술과 담배를 놓고 어떻게 얘기했을까?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술을 먹으라고 권해 본 적도 없고 자기를 따르려면 반드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적도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처럼 술 한잔을 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남의 눈치를 살핀 적도 없고, 술은 자유롭게 마신다며 개화된 신앙을 뽐낸적도 없다.
예수가 살고 있던 그때의 이스라엘에는 담배가 없었으니까 성경에 담배 이야기는 없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가 보여 준 첫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빚어낸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때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그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 누구든지 서슴없이 마셨으며 석류, 사과, 대추, 곡식, 꿀 같은 것으로도 술을 빚었다.
예나 이제나 술이 있는 곳에는 독한 술이 있기 마련이고 독한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리고 도덕과 윤리의 생활이 깨어져, 끝내는 사람과 사회를 망치게 하는 것은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경엔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경고와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삼손과 같은 나실 사람들 중에는 종교의 전통에 따라 포도주뿐만 아니라 아예 포도 나무 열매에서 나는 것은 입에 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계율화되다시피한 술과 담배의 금기나 금욕주의는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예수의 생각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같았더라면 예수가 가나 마을에서 벌어진 혼인 잔치에서 술을 만들었다는 것이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신약 성경 속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디모데 전서 5장 23절의 "이제 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라는 말은 더욱 더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기독교에는 금연과 금주가 계율화 되다시피 했을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곧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은 곧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며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 해도 죄에 빠진 엉터리 교인이란 논리가 왜 자리잡게 되었을까? 이 우수꽝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부끄럽게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이 문제의 핵심과 그 문제성에 숨겨진 본질과 오해들을 웃으면서 이야기해 보자.
1885년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새로운 학문과 의료 기술과 복음을 들고 왔을 때 이미 한국에는 백년의 역사로 터를 잡은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혼돈과 황혼이 깃든 조선 시대 말기에 한국 사회에 들어온 개신교가 대원군의 서슬이나 위정척사파들의 살기에 눌려 요사이처럼 우뚝우뚝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서민층에 한번 뿌리를 내린 한국 개신교는 끊임없이 신자가 불었고 인간과 사회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힘은 폐쇄적인 봉건 사회 체제 아래서 수천년 동안 눌려 살던 한국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에게 시원한 샘물과 새로운 바람으로 받아들여져 갔다.
개신교의 복음은 수천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칭칭 감아왔던 혈연, 지연, 전통 따위의 쇠사슬을 풀어 주었고 벗을래야 벗어 버릴 수 없었던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었으며 칠흑처럼 캄캄하던 민중의 가슴 속에 환한 빛을 비추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한국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의 배경은 복음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청교도 형이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신앙, 헌신적인 뜨거운 정열, 경건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들은 이러한 종파 선교사들이 갖춘 훌륭한 점이다. 그러한 장점이 없고서야 편안하고 행복한 자기들 나라의 생활을 뒤에 두고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꼭꼭 막힌 쇄국의 나라에 와서 어떻게 젊음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정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다 바쳐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이 나라 민중의 찢겨진 마음을 복음으로 감싸고 의술로써 어루만지며, 미신과 악령과 폐쇄적인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행방시키려고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한글말 사전을 만들며, 문맹자들에게 글을 일깨움으로써 거의 반신불수가 되어 죽어가던 이 땅의 민중에게 새로운 피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언더우드, 아펜셀러, 게일, 맥켄지와 같이 위대한 선교사들이 모두 이삼십대의 청년 선교사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신앙의 배경이 복음주의와 경건주의라고 해서 그들의 관심이 술과 담배와 같은 작은 문제에 얽매일 사람들은 아니었다.
초가집 넓은 마루를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를 드리던 한국 초대 교회의 사진을 보면 1905년까지, 아니 그 뒤에도 교회당의 처마나 싸리 대문 이곳 저곳에 장죽이 천연스럽게 꽂혀 있는 광경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성경대로 살려는 순수한 정열로 불타 있었던 한국 초대 교인들은 성경이 주는 놀라운 힘과 복음의 빛으로 아주 새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한국 초대 교회 신도들이 점차로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술과 담배가 꼭 지켜야 하는 금기의 계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 사람된 사람의 자연스러운 변화 곧 거듭난 사람의 변화가 기호품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복음에 취한 사람들의 입에는 술과 담배의 맛은 시시해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 정신을 계승한 한국 기독교의 맥박이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인 지도자와 신도가 모두 이처럼 차원 높은 금주와 금연을 했지, 그 뒤에 잘못되어 간 것처럼 율법의 금기에 쫓겨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육이오 때에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순교하신 송창근 목사의 이야기이다. 송창근 목사는 오늘의 영락 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와 한국 신학 대학을 이끌어온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미국에 있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동포를 복음으로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약속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젊어서 김천 지방에서 목회를 할 적에 하루는 어느 마을의 "영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수는 교회의 직분 가운데 하나로서 나이가 지긋하고 신앙 생활을 오래한 신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송 목사가 같이 간 사람들과 영수 집에 불현듯 들어섰을 때 주인은 마침 마당에서 고추를 널면서 긴 곰방대에 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목사와 신도들을 보고 이 영수는 어찌할 줄 모르고 타고 있는 담뱃대를 엉겁결에 등 뒤에다 감추었다. 그때에 송 목사는 모른 척하지 않고 얼른 담뱃대를 빼어 주면서 "영수님, 등을 데지 않으셨읍니까?"고 물었다. 이 영수는 "목사님, 제가 속병이 있어서 약초를 좀..." 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데 송 목사가 얼른 그 말을 받아 "암, 약에는 개똥도 쓰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이 되어 예배를 보다가 송 목사는 "영수님은 속병 때문에 담배를 태우고 계시니까 모두들 그리 아시고 탓들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지금 들으면 우습고 재미있는 토막 이야기이긴 하지만 술과 담배를 금기로 삼아 가던 그때의 교회에서 술과 담배에 매이지 않은 목사와 신도의 모습을 보며 술과 담배에 관한 지혜로운 해답을 얻는다. 만일 어떤 목사나 장로가 참새구이 장수를 기어코 전도하려고 포장마차의 포장을 들추고 들어가, 오뎅 한 접시와 닭똥집 한 점을 시키고 소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세상살이 이야기를 했다면 그 다음날 그 목사와 장로는 지금까지 다녔던 교회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노회나 교회 기관에서 엄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목사나 장로가 대낮에 얼굴이 벌게 되어 다니는 꼴은 덕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우기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린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이 목사와 장로가 실제로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참새구이 장수 내외를 만나는 곳이 그때 그곳 뿐이어서 그 내외가 정성들여 만들어 파는 음식에 그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이런 저런 세상살이 얘기를 나다면 그것 자체는 아무 문제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상스러울 만큼 이러한 일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한국 교회에서는 금주와 금연이 율법화되었을까? 거기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지난 날의 역사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유럽 대륙 쪽의 선교 기관에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의 개신교파의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 주의와 경건주의를 따르는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열정과 희생적인 헌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강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들이 배우고 자라 온 사회 관습과 공동체 속의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닮아 가는 존재이다. 복음주의와 경건주의는 위에서 말한 훌륭한 점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정적으로 발전할 소지를 담고 있었다. 복음과 새 하늘을 우러러 섬기는 신앙은 잘못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멸시하는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갖게 만들고,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신자답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모든 것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갈라, 성스러운 것은 곧 좋은 것이고 세속적인 것은 곧 나쁜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삶의 태도로 발전시켜 종교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계율을 절대화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이러한 기질과 경향을 가진 한국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그때의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는 금주와 금연령을 제때에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조 말기는 부서진 배가 방향을 잃고 떠돌아 다니는 상태와 같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그 빛을 잃어 갔고 사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힘을 쓰지 못했으며 여기에 사회 지도 세력의 수탈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관료주의에 젖은 양반 계층의 몰락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 기강의 혼란으로 민중은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 나라의 민중이 그들의 혼 밑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절망과 원한과 공허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술과 담배와 노름뿐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사회 경제의 구조와 생산 양식이 제약되고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한 농촌 사회까지도 농한기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사랑방 구석에서 날 지새는 줄을 모르고 노름판을 벌였다. 가장이 노름 끝에 집 문서, 논 문서를 날리는 바람에 수많은 아낙네들이 울어야 했고 먹고 살 식량도 아쉬운 판에 밀주를 담그는 술장수는 번창해 갔다.
그때 한국 사회를 사회 병리학적으로 진단한 지도자들은 저마다 술독과 담배 연기와 노름 속에서 한국 혼이 썩어 가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민족이 사는 길은 민중의 속 정신이 다시 태어나서 당장 술과 담배와 노름 따위에서 손을 떼게 하는 길 밖에 없다는 뚜렷한 명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금주, 금연운동이 그때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청교도적인 기질과 공통 분모를 갖게 되었고 더우기 구한 말의 국체 보상 운동의 한가지 방법으로 한국 기독교계가 벌인 금연, 금주 운동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생활 규범으로 굳어져 가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이요,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옛 관습에서 손을 씻고 나온다는 것이므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옛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못된 것의 상징이요, 술과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새 사람, 새 정신으로 살겠다는 신앙의 상징이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열심히 일하는 초대 기독교 신자는 생활이 점점 윤택해져 갔고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한국의 새로운 중산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상인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술과 담배를 끊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한국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초기 개화 시대의 금주, 금연 운동이 한국 사회의 도덕 정화 기능과 건실한 생활상 형성에 기여한 높은 공헌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처음의 그 기백과 그 정신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생생한 영의 운동도 날이 지날수록 타율적인 율법으로 굳어져가는 것이 종교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듯하다.
한국 초대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벌였던 위대한 도덕 갱신 운동과 새 생활 혁신 운동, 그것의 한 방법으로 펼쳐진 금주, 금연 운동도 탁월한 초대 선교사들의 정신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이대, 삼대 선교사들과 또 그들에게서 철저한 타율적인 종교 교육을 받은 한국 교계 지도자들에 의해 금주와 금연이 마치 기독교인의 자격을 결정하고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표징으로 삼을 만한 절대 규범으로 바뀌어 갔다. 더우기 1905년의 한일 합방 뒤부터 절망스럽게 펼쳐져 가는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은 한국 교회의 신앙 형태를 점점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 곧 내세에 기우는 신령 중심의 금욕적인 기독교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기질은 참다운 청교도 정신의 적극적인 생활 자세 곧 개척자 정신과 개혁 정신과 근면하고 성실한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들을 발전 시키기보다 계율적인 도덕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의 한국 개신교로 하여금 무력한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와 이원론적인 굴레 속에서 신음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금주, 금연 운동 곧 영으로 시작한 운동이 육으로 끝마치게 된 한국 교회의 간략한 역사이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삼십년대까지 선교사가 공급해 주는 우유병 속의 우유만 먹고 자란 셈이었다. 세계 신학계의 움직임이나 기독교 유형에 다른 종류가 있는 줄도 몰랐고 있을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십년대부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서서히 미국으로 영국으로 캐나다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때에 유학을 떠날 정도면 쟁쟁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한국 교회에서는 이미 지도적인 인물로 누구나가 공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쓴 글과 논문을 읽고 훌륭한 사상에 마음이 움직여 꿈에라도 그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의 얼굴을 바로 맞대어 보기를 몹시도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막상 만난 대 신학자들은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과 함께 곰방대를 열심히 빨고, 저녁 식사 때는 부끄러움 없이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 속에서 자라고 또 신도들을 그렇게 가르쳐 온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모습이었고 분노마저 자아내는 태도였다. 술과 담배를 멋대로 마시고 피우는 그런 신학자로부터 올바른 복음과 신학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은 그들의 사람됨의 성실성까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견디다 못해 미국이나 캐나다 안에서도 좀더 보수적이고 경건한 학교로 옮겨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달이 가고 한해가 흘러 술과 담배를 즐기는 교수와의 인간적이고 학문적인 사귐이 깊어 갈수록 그들의 신앙과 학문과 인격이, 그들이 즐겨 마시고 피우는 술과 담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짧은 유학 생활이나마 나에게도 인상깊은 추억이 있다. 미국 시카고 북부 아이오아 주에 인구 십만의 교육 도시인 듀북이 있는데, 그곳에는 역사 깊은 대학과 신학교가 여럿 있었다. 어느해 가을 내가 택한 과목 가운데 "니코스 카차키스의 문학과 종교"라는 과목이 있었다. 이 과목은 강의와 세미나와 토론뿐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시청각 교육까지 하였다. 하루는 "희랍인 조르바"라는 흑백 영화를 보면서 주연으로 나온 안소니 퀸의 연기에 빠져 있는데 앞 자리에서 어느 미국인 친구가 치즈 한 덩어리와 술 한병을 넘져 주지 않는가? 밤 아홉시가 넘었으니까 이 시청각 교실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기숙사에 돌아가 자는 일 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 친구의 말은 우두커니 앉아서 싱겁게 영화만 보지 말고 뭘 좀 씹고 마시면서 보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그 친구는 비오는 날마다 나를 자기 차에 싣고 강의실까지 데려다 주는 믿을 만한 친구였다. 이미 그 친구의 진실성과 성실성과 헌신적인 삶의 태도 그리고 실력파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나에게는 그 친구가 건네주는 치즈 덩어리와 술병이 오히려 새롭게 보이고 멋있게 느껴졌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밤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고 집도 절도 없는 동양인 유학생 몇명만이 덩그렇게 빈 기숙사에 남아 자취를 하면서 연말의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듀북 신학교의 본부에서 좀 떨어진 가톨릭의 아퀴나스 신학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기숙사의 빈 방을 지키는 우리들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라운지에 가보니 벽난로에 장작불을 빨갛게 지피고 열 사람 남짓한 신부가 스무 가지가 넘는 술과 갖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크리스마스 전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그들의 음식에는 술과 담배가 적당히 끼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술과 담배에 먹히지 않았다. 술과 담배가 그들의 신앙과 경건과 학문을 털끝만치라도 방해를 하거나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에서는 사단과 악도 하나님을 봉사하는 머슴이 되어 버리듯이 그들에게 술과 담배는 우정과 친교를 두텁게 해 주는 다리 구실을 했다.

술과 담배가 사람의 몸에 끼치는 해독
은 의학에서도 이미 충분히 밝혀냈다. 담배 속에 들어있는 니코친이 끈적끈적한 타액으로 기관지에 착색된 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술이 사람의 몸에 끼치는 해독과 정도에 지나친 술로써 생기는 도덕의 파탄을 다시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술과 담배의 해로움과 술과 담배 때문에 빚어지는 실수가 아무리 엄청나다고 해도 그것들은 기호품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지 신앙이나 윤리의 본질과 관련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단이나 커피나 조미료를 다루듯이 술과 담배도 그와 같이 다루어야할 기호훔일 따름이다.
한국 교회는 술과 담배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야 한다. 이 말은 술과 담배를 권장하거나 도덕적인 절제 생활을 철폐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라는 따위의 세상 풍속에 얽매인 시시한 소식이 아니다. 복음은 술과 담배를 먹고 마시지 않아도 삶을 멋있고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주며 또한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워도 재미있고 알맞게 인간 관계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에 묶어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멋있는 삶은 취할 수 있는 삶이다. 다만 무엇에 취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예술에 취하고 학문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 자연에도 취한다. 술에 취하고 니코친의 향내에 취하는 것도 삶의 멋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에 취하고 반해서 예수 밖의 다른 것으로는 취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 여자 교육의 선구자인 김활란 박사가 독신으로 일생을 마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김활란 박사에게 독신주의가 당신의 삶의 철학이냐고 물었을 때, 김활란 박사는 자기가 독신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와 민중과 한국의 여자 교육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취해서 일하느라고 혼인할 틈도 정신도 없어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술과 담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매력과 향기에 취해서 술과 담배의 맛이 시시해져 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왜 존경하지 아니하겠는가? 한국 기독교인 모두가 예수의 사랑과 사람됨에 취하여 술과 담배의 맛쯤은 영원히 우습게 여기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그랬듯이 다른 단체를 이끌어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꾸준히 벌이는 힘있는 모체가 되어 사람들의 건강까지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제발 술과 담배를 못하게 하는 한국 교회의 계율에 매인 율법주의에서는 해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발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우는 사람들을 자기보다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도덕적인 교만과 종교적인 오만에서 하루바삐 벗어나기를 바란다.
술과 담배는 기호품이다. 복음을 들고 싸우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기껏 기호품을 쓰고 안쓰고 하는 문제를 놓고 신경과 정력을 쏟기엔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 많다. 문제다운 문제를 문제삼기 위해서 술과 담배문제에서 자유를 얻자. 그래야 복음이 가진 그 싱싱한 샘물을 민중에게 다시금 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 아랍, 흑인 등 다른 종족들에 비해 체질상 술에 훨씬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충남대 김 영진교수(생물학)가 지난 해 7월부터 남녀대학생 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인 집단에 있어서의 아세트알데히드탈수소효소의 유전인자결핍에 관한 연구"에서 나타난 것. 서독 함부르크대의 "괴테"박사가 고안한 모근추출법을 써서 "아세트알데히드탈수소효소유전인자"의 존재여부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이 조사분석결과, 남녀 학생모두 35%가 ALDH-1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ALDH란 알콜(술)성분이 체내에서 분해될때 생기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 초산으로 바꿔주는 대사효소로 ① - ④까지의 4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①형(型)이 가장 강력한 분해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술을 마시면 체내에 들어간 알콜성분은 알콜탈수소효소(ADH)에 의해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ALDH의 작용으로 초산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탄산가스와 물로 분해된다. 그런데 술의 대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세트알데히드의 분해과정이다. 왜냐하면 이 물질이 가장 많은 독성을 체내로 배출하기 때문에 빨리 분해되지 않을 경우 얼굴이 빨개지고 심박동이 빨라지며 위가 불편하거나 잠이 오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몸이 말을 안듣거나 인사불성이 되는 등 이른바 "취하게"되는 것이다. 어느 교수(동물학 교수)에 따르면, 서양사람의 경우 음주 후, 위의 고통 6%, 가슴두근거림 0%, 얼굴홍조 3%, 근육무기력증 3%, 어지럼증 9%, 졸리거나 잠에 빠짐 6%인데 비해 동양인은 위의 고통 53%, 가슴두근거림 26%, 얼굴에 홍조 44%, 근육무기력증 26%, 어지럼증 37%, 졸리거나 잠에 빠짐 51%로 서양인보다 최소 4배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ALDH결핍에 따른 체내 알콜거부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민족별 ALDH결핍률을 보면 미국, 유럽 등 서구인과 이집트, 수단 등의 아랍인, 라이베리아 등 흑인들의 경우 0.5%로 결핍률이 거의 없는데 비해 중남미 고지대의 인디언 69%, 베트남인 57%, 일본인 44%, 중국인 35%, 인도네시아인 39%는 ALDH가 없어 동양인이나 인디언이 술에 약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실제로 서양사람들의 경우 술을 마시면서 토하거나 졸기, 술마신 후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기힘든 것은 그들이 술을 천천히 마시는데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ALDH가 우리보다 풍부해 분해능력에서 앞선 때문이라는 것이 교수의 설명이다.

서양사람에게 알콜중독자가 많은 것도 ALDH가 풍부해 술을 마시는 능력이 좋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ALDH의 분량은 어떻게 결정되며 증가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다른 효소도 마찬가지지만 ALDH도 염색체속의 유전인자 안에 생산능력이 결정돼 선천적으로 타고 나기 때문에 민족마다, 또 사람에 따라 다른 비율로 ALDH결핍률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간혹 예전엔 술을 마시면 각종 거부 반응과 부작용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최근들어 주량이 부쩍 늘어 났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듭되는 음주로 염색체내의 ALDH 생산유전인자가 자극을 받아 생산량이 증가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한국 사람은 술에 약하기 때문에 폭주를 삼가고 마시더라도 ALDH의 분해능력 안에서 서서히 마시는 것이 현명한 음주법이다. ♣












통일한국을 위하여


통일한국을 위하여(에스겔 37:17)

그 막대기 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신사참배는 ‘차금법’ 문제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되돌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만일 모든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지도자들의 의견들이 분열되었고, 결국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모든 교회사가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둘째, 마귀는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일제는 이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고, 많은 지도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실제로 그렇게 믿은 사람들도 있었고, 강요 때문에 굴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믿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셋째, 마귀는 처음에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며,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점 더 심한 요구로 나아간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일제는 더 심한 것들을 강요했다.

천조대신이나 천황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주장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교회당 안에 간이신사를 설치하고 그것에 절하라고 해도, 예배시간에 신도예배를 함께 드리라고 해도, 목회자들에게 신도침례를 받으라고 해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수용했기 때문이다.

넷째, 마귀는 처음에는 양처럼 접근해서는 폭군으로 돌변한다

신사참배가 처음에는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타났지만, 일단 결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법적 결의가 중요하다

날치기 결의였지만, 총회에서 일단 결의가 이뤄지자 그것은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되었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총회의 결의나 법은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어떤 형태든 방관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통과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법과 같은 악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유사성이 있다.

첫째, 신사참배가 그 속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례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그 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숨기기 위해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선한 동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엄청난 죄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둘째, 신사참배가 조그만 것에서 시작해서 더 큰 배도로 이어진 것처럼, 동성애도 하나를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도 처음에는 동성 간의 애정을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하다가 지금은 동성 간 결합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또 처음에는 육체적 성전환만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다가 나중에는 육체적 성전환 없이 본인의 성정체성 주장만으로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일부다처제도 소위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보호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셋째,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는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했다가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됐다.

차별금지법 역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무서운 얼굴로 돌변하게 된다. 이미 이 법은 동성애 반대자에 대한 탄압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신사참배의 가장 큰 피해자가 기독교였듯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피해자도 기독교가 될 것이다.

넷째,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되자 다른 모든 배도의 근거가 된 것처럼, 동성애 역시 법으로 합법화되면 교육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죄악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학교에서는 동성애 옹호 조장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언론과 문화 예술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게 될 것이고, 삶의 현장에선 동성애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강요된 것처럼 차별금지법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일치단결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제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하나 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신사참배 문제는 차별금지법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거울’이다. 팬데믹 시대 신앙을 위협하는 갖가지 시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사를 더욱 깊이 연구해 나아갈 길을 찾자.

信行一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