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마태복음 5:3-10) 복 받을 사람(시편 1:1-6) 회개의 사람(시편 51:1-19)


* 04-08-2023(토) 새벽 묵상 시간에

신앙생활과 더불어 생활신앙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이제까지는 주로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밝고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생활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겠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결과물은 대형교회를 세운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활신앙의 결과물은 세상은 대형교회가 세워지기 전보다 더 부패했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신앙의 결과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파송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겠다.
그 말씀의 근거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이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鹽)

鹵(소금 로(노)) + 𠂉(-) + 臣(신하 신) + 皿(그릇 명)

鹽자는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鹽자는 監(볼 감)자와 鹵(소금 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監자는 대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금이라는 글자로는 이미 鹵자가 있지만 鹽자는 식용 소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다.
이미 가공한 상태의 소금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키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마솥에 끓여서 증발시키는 방법이었다.
鹽자는 대야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監자를 응용해 가마솥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소금을 뜻하는 鹵(로)와 음과 함께 짜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監(감→염)으로 이루어짐. 소금의 뜻. 암염과 구별(區別)하여 사람이 만든 소금의 뜻으로 쓰임.

너희는 세상의 빛(光)

⺌(작을 소) + 兀(우뚝할 올)


光자는 ‘빛’이나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光자는 儿(어진사람 인)자와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光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빛이 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光자를 보면 儿자 위로 火(불 화)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 주위가 매우 밝게 빛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光자는 ‘빛’이나 ‘비추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火(화 ☞ 불)과 사람인(人(=亻) ☞ 사람)部의 합자(合字).
「사람이 횃불을 들고 밝게 비추고 있다」는 뜻이 합(合)하여 「빛」을 뜻함.
또 전(轉)하여 「번영하다」로 되고 가차(假借)하여 「광대(廣大)ㆍ광원(廣遠)」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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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의 암송 성구(마태복음 5:3-10)

팔복의 사람 / 복 있는 사람(마태복음 5:3-12)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세 가지의 시험을 예수께서는 모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성경의 말씀으로 다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다.
가르치며(Teacning)과 복음을 선포하며(Preaching)과 병을 고치시는(Healing) 일을 하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따라와 이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이를 '산상보훈'이라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시며 설교를 시작하신다.
과연 복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생각해 보며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복 있는 자는?

1. 심령이 가난한 자

- 세상에서 사람은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성경은 실제로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을 때, 그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워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어진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31)에서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마9:23-24)고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 다윗, 솔로몬, 다니엘은 부자였다. 이뿐 아니라 세리장 삭개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등등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를 섬겼던 여인들(눅8:2-3)도 있다. 저들은 물질은 부요했으나 심령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마음이 가난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겸손한(Humble) 자들이란 말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다.

2. 애통하는 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밝은 빛을 통해 자신을 볼 때, 비로서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자신을 보려해도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도 발견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잣대로 자신을 측량해 볼 때,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전능자 앞에서 선 자신을 볼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와 애통함이 따라 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된다. 곧바로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고 고백하였다.

3. 온유한 자

- 온유하다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야생마는 아주 다루기 힘들다. 그러나 잘 길들여지고 재갈을 물리어진 말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주인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와 같이 온유한 자는 자기 욕심이나 자만이나 분노를 잘 절제하며 자기 일을 잘 감당하는 자를 말한다.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니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고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굶주린 자는 먹을 음식을 구하며, 목마른 자는 마실 물을 찾는다. 목마른 사슴은 시냇물을 찾아 헤맨다. 복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의(Righteousness)'를 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의는 법적인 용어이다. 죄를 범하여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무죄여서 처벌을 면하느냐의 문제다.

성경은 원래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한다. 모두 죄인이며, 죄인은 다 그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죄인이 형벌을 면하려면 법정에서 재판장의 선처를 바라며 의롭다고 인정되어지길 간청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애통이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는 단계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재판장에게 자기의 형벌을 탕감해주길 간구하며 매달리는 단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마침내 의롭다함을 인정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고, 영생을 누리는 길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며 다시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되며 진실되이 의의 길을 걸어가길 원하는 자들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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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이 청결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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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온유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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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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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인 사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말이다. 죄 지은 자를 결코 그냥 놓아 줄 수 없으심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다. 그러나 이 죄의 결과가 형벌임을 심각히 깨닫고 심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고 매달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그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대속의 은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었음을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명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고 성경은 말한다. 죄사함의 은총을 통해 의롭다함을 입고 영생을 얻는 자만이 참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된다. 이러한 자들이 모두 그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요삼1:2)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건강을 잘 유지하려면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신앙인은 영육간에 강건함을 잘 유지하기 위해 매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잘 섭취하고 행함으로 말씀 생활을 하며 매일 자신이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023년 2월의 암송 성구(시편 1:1-6)

복 받을 사람









2023년 3월의 암송 성구(시편 51:1-19)

회개의 사람(다윗)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따라 내 죄과(transgression)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iniquity)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sin)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죄과"는 하나님의 권위와 율법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죄악"은 마땅히 지켜야 할 모습에 왜곡 혹은 변형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시편은 영혼의 해부학"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죄를 짓고 회개한 참회의 시로 인간의 죄를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죄과(트랜스그레션. transgression) 위반
둘째는 죄악(이니쿼디. iniquity) 부정
셋째는 죄(신. sin) 죄

세 개의 용어를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 단어로 페샤(Transgression), 아온(Iniquity), 하타(Sin) 라고 합니다.

첫째는 죄과 : 페샤
둘째는 죄악 : 아온
셋째는 죄 : 하타

죄과(Transgression) 페샤 / 고의적인 죄,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 

죄과는 "침해하다, 침범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고의로 어기고 반항하는 마음과 행동의 죄를 죄과라 합니다.
이와 같은 죄를 시편 19편에서는 "고범죄" 라고 하였습니다.
죄과는 "고의적인 죄" 즉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고의적으로 범하고 어긴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기질이 있어서 하나님 말씀이 옳은 줄 알면서도 이것을 침해하고 침범하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과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반항하여 대적하는 것이 죄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일축해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깁니다.
자기 추구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연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전에 양도천목사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계룡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육체의 욕망이 힘들게 하므로 고환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제하기 어려웠으면 이렇게 자기 몸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고통을 선택하였을까요?
그런데 노년에 다른 사람의 고환을 돈을 주고 사겠다고 광고를 하여 더 놀라게 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하나님의 힘으로 절제하고 다스려야지 인간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죄악(Iniquity) 아온 /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마음  

아온이란 "온전한 것을 구부러 뜨리다(Make it crooked), 뒤집다(Perverted)"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삐뚤어져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야 속이 시원한 변태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마음이 죄악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악독, 즉 악하고 독한 마음"이 들어있기에 자식을 키워도 똑바로 자라는 애들이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계속적인 진실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러한 죄과들이 말갛게 씻겨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씻기다'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몸을 씻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고 특별히 옷을 빠는데 사용되는 단어인데 아주 심하게 더렵혀져 있는 옷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아주 강하게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교회학교 유아부에 다닐 때 부장 권사님에게 사무엘이 헌금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께서 동전 한 개만 헌금주머니에 넣는다고 일러주셨습니다.
당시 헌금을 하도록 동전을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한 개는 다른 주머니에 감춘 것입니다.
당시 동전의 용도를 전혀 모를 때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의 본성이 참 악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죄악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Sin) 하타 /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가 

하타란 단어는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타”의 개념은 "길을 잘못 들다", "코스에서 이탈이 되다" 라는 으로도 사용합니다.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하는 것이 이미 목표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가야할 길과 인생의 코스를 분명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죄과, 죄악, 죄”란 세 단어는 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기도 하는데 죄는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육적인 문제를 포괄하는 용어로서 모든 인간의 본질이며 현주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병을 고치려면 먼저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병의 상태를 알아 고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론을 말하기에 앞서 인간의 죄 즉 “인죄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이방인의 죄를 다루고 있고 로마서 2장에서는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으며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표에서 벗아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나라 안에서 밧세바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간 우리아의 아내를 데려와서 동침하는 하타라는 죄를 범하는 것은 한 때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맞설 수 있는 믿음이었으나 그 믿음이 항상 다윗을 지켜주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우주를 망가뜨리고, 사람들의 삶을 오염시키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성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상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용서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에서부터 그리고 이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내 죄과를 도말(途抹)하소서

본절이 두 개의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앞 부분의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죄과'(페솨. 6588)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Delitzsch, Weiser).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과'를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1. 밧세바와의 간통(삼하 11:2-4)
2. 그 남편 우리아 살해(삼하 11:14-17)

두가지의 죄를 범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

죄과(페솨. 6588)  פֶּשַׁע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페솨(peshaʽ)
관련 성경 / 허물(창 31:36, 왕상 8:50, 잠 10:12), 악(출 34:7, 겔 33:12), 범함(레 16:16), 죄악(민 14:18, 욥 35:6, 사 24:20), 죄(욥 34:37, 시 19:13, 잠 28:2),죄과(잠 17:19, 사 59:20), 범죄(잠 29:6,22), 패역(사 57:4).
구약 성경 / 93회 사용

 '도말하소서'(*, 므헤)는 '문지르다', '부드럽게 하다', '없애다'는 뜻이며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차용증서를 없앨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범죄 사실을 지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69:28;출 32:32). 한편 고대 바벨론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범죄 사실을 토판(土版)에 기록했고, 용서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 토판을 깨어버렸다고 한다(Kraus).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죄악'(아온. 5771)은 '구부리다', '왜곡하다'는 뜻의 '아와'(*)에서 유래한 말로 '사악함', '왜곡'의 의미이다(Delitzsch).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악한 의도'를 가리킨다(L. Kohler). 그리고 '씻기시며'의 '카바스'(*)는 원래 '짓밟다'라는 뜻인데 옷감을 발로 밟아서 씻는다는 의미에서 '씻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9:10, 14;삼하 19:24). 상징적으로 렘 2:22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죄악을 씻어 없앤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정화 의식은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죄악(아온. 5771)  עָוֹן 
1. 사악.  2. 부패한 행동.  3.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아온(ʽâvôn)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 4:13), 죄악(창 15:16, 삼상 3:13, 겔 4:6), 죄(출 20:5, 민 30:15, 애 4:6), 죄책(출 28:38), 악(출 34:7, 신 19:15, 잠 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16:21, 욥33:9, 사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14 : 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헤트. 2403)는 '빗나가다', '상실하다', '범죄하다'는 뜻의 '하타'에서 유래한 말로 '범죄', '과오' 혹은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깨끗이 제하소서'(타헤르)는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적으로도 정결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이다(레 13:6, 13). 이것은 곧 다윗이 죄의 오염을 나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죄(하타트) 2403  חַטָּאָת 

1. 죄.  2. 속죄제.  3. 우상에 대하 적용되기도 함
발음 / 하타트(chaṭṭâʼth)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חָטָא 
1. 벗어나다.  2. 비틀거리다.  3. 사사기 20:16
발음 / 하타(châṭâʼ)







󰃨 대저(*, 키) - '왜냐하면'의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은 다윗이 1,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죄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본절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1, 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가 진실되며 또한 간절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동사 '아오니'(*, 에다)가 본 문구의 주어가 1인칭 단수임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1인칭 단수인칭대명사 '나는'(*, 아니)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A.Cohen). 한편'아오니'의 기본형인 '야다'(*)는 단순한 지적(知的) 앎이 아닌 체험적 앎을 가리킨다(호 6:3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결국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뼈에 사무칠 만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시51편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원한 속죄와 단번속죄를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었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때 그 죄를 해결하는 비결은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신자들이 혹 어떤 실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기 이전에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롬8:31-39).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지의 여부는 오직 그 회개 기도의 질의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시32:5).

Ⅰ. 죄에 대한 인식(3)

“대저”-“왜냐하면”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除)하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간구하였는데, 그가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단락이 3,4절입니다.

다윗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1,2절에서 “죄과”, “죄악”, “죄”로 자신의 죄를 이미 세 가지의 용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죄과”는 국가적, 도덕적,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죄과”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타나는데, 다윗은 밧세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일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까지 그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과에 대해 “아오니” 즉 알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말한 고백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음이 강력하게 내포되었습니다. 즉 1인칭 단수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아오니”라는 단어에는 다윗이 자신의 죄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오니”는 히브리어 “yadah(야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남녀가 결혼을 의미하는 “동침”이라는 의미로,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한 것은 그는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것이 큰 죄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에 그 죄책으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 죄가 그 영혼을 끝까지 괴롭힐 것입니다.

Ⅱ. 죄의 성격(4)

죄의 일차적인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한 것은 그가 범한 죄가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범죄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의 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인간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인식-“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범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죄든지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아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동침하는 것을 거절하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즉 다윗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조차 사양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그의 영혼을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양심의 메아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어떤 관계냐? 왜 밧세바를 왕궁으로 끌어들였느냐? 우리아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아는 누가 죽였느냐? 우리아는 왜 죽였느냐? 이런 송사가 그의 양심으로부터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루어졌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3:7)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의로우며 순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이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즉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범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3,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며 순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기기보다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정죄하실 수도, 용서하실 수도 있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원죄와 자범죄 / 영적 유전



원죄와 자범죄 / 영적 유전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에게는 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상식처럼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에게 본성으로 주어진 내적 죄성은 어떻게 유전되게 되었을지 궁금함을 느낌니다.
죄성을 하나님께서 심겨 두신 것인지 사단에 의해 심겨진 것인지?

아담에게 죄가 침투하여 더려워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언약 파기)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도 소용없는 영원한 저주를 선고하셨습니다.
그때 아담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임했습니다.

1. 법적인 죄인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로 약정한 하나님과의 첫 언약에 근거하여 법적인 죄인이 되었습니다.

2. 실질적인 죄인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완전한 순정 상태였고, 그 때 아담의 몸과 영혼,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성전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효력을 입은 성도에게 하나님(성령)이 친히 임하시어 내주(동거생활)하시는 것처럼,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의 몸과 영혼,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언약을 파기한 직후 아담은 실질적으로 더러워졌습니다.
법적으로만 사형수(죄인)로 전락한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죄에 오염된 죄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범죄 직후 죄의 부패과 오염이 아담에게 침투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 기능을 가능하게 했던 아담의 순정상태가 붕괴되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시자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죄성(죄의 오염, 죄의 부패)이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기되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초기에 죄의 전가 자체를 부정하는 신학이 출현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아담의 죄가 이후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악은 교육, 환경, 정치 구조 등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너지게 됩니다.

어거스틴초대교회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조금 약화된 형태로 천주교의 중심적 신학으로 자리잡고 말았습니다.
알미니우스라는 인물에 의해 그 사상이 조금 더 약화된 모습으로 종교개혁 교회들 속으로도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실질적 죄성(죄의 오염)이 그 후손들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부분적으로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하나님의 은혜가 무너집니다.
대신 그 자리에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께 반응하고 협력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인본주의가 자리하게 됩니다.

개혁신학은 아담의 죄의 유전(전가)을 부정하는 신학을 거부합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아담의 죄는 분명히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유전됩니다.
그 결과 누구도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경우가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구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가르침입니다.
완전한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자력으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여 주시고, 은혜로 그리스도 앞으로 불러주시고, 은혜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심으로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주시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죄의 유전의 방식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의 유전이 부모와 조상들의 결혼(섹스)과 혈통의 유전적 요소들을 통해 전달되어 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죄성이 결혼(섹스, 출산)과 혈통의 유전자들을 통해 아버지에게 물려졌고, 아버지의 죄성이 그 같은 방식으로 아들에게 물려진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죄악된 피를 깨끗한 피로 가름하여 구원을 준다는 문선명, 박태선 등의 이단들의 핵심 사상이 일면 타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의 죄성이 아담과 후대 인간들의 결혼(섹스)을 통해 후손에게 죄성을 담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방식, 즉 물리적 유전의 방식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왔으므로 (효력이 있건 없건 간에) 이단들이 피가름을 운운하는 것이 약간의 타당성을 가지게 만듭니다.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도 물리적인 방식의 죄의 유전을 말하였으나,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신학자들이 작성한 문건들 속에도 죄가 물리적 유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유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문서들은 성경처럼 하나님의 영감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므로 무시할 수 있습니다.

완전순정의 상태로 지어져 몸과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기도 했던 아담은 범죄한 후 즉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는 성경의 말씀에서 죄성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죄성을 주입시키는 주사 바늘을 아담의 혈관에 꽂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아담의 몸이나 두뇌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범죄 이후 즉시 아담에게 죄의 오염과 부패가 생겨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이 하나님과의 첫 언약에 근거하여 아담에게 영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실질적인 죄성(죄의 오염) 또는 물리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인 방식으로 사람에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체결한 첫 언약을 파기할 때 죄가 영적인 방식으로 아담에게 유입돤 것처럼,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죄가 유전된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기질과 성격을 유전받은 것은 사실이고, 자라는 과정의 환경과 경험에 의해서 사람에게 그릇된 성향들이 더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교육과 환경 속에서 살아도 인간은 단 하루도 천사로 살지 못합니다.
아담의 첫 언약 파기 죄에 근거하여,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저주가 작용하여 죄에 대한 책임과 실질적인 죄성이 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터고나는 죄성에 대한 바른 설명은 ‘영적 유전’입니다.
결코 부모의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지는 물리적, 실질적 유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청교도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신학의 자칭 전문가가 되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사람의 죄성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는 주장을 하다 저에게 지적받자 저의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서 저를 형사고소를 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후 어떤 교단의 세 개의 노회가 그 분의 이단성을 조사하여 이단으로 규정해 달라는 헌의가 올라갔다고 합니다.
죄가 영적으로 유전됨을 부정하고 실질적으로 물리적으로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주장입니다.
영적 유전을 부정하면, 어떤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3. 범책은 부모로부터 전달(propagation)받는 방식

벌책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매개 없이 전가(imputation)되는 방식입니다.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오염의 생식법에 의한 전달의 교리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영적 전가를 주장했다.”

“원죄가 부모를 매개로 전달된다는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며 동시에 그 결과는 전통적 원죄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통교의에서 성화란 죄의 바로 이렇게 우리 몸과 영혼에 스며있는 죄의 실제적 세력을 제거로 설명하는데 ...”

“우리 몸에 베여있는 실질적인 원죄의 세력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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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유전죄, 자연법칙(롬 5:12-14)


기독교 구원의 정점(頂點)

바울은 5장 1-1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왜 이 땅에서는 여전히 환난을 겪어야하는지, 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해야하는지, 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희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구원은 하늘 가나안에 입성하는데서 완성된다. 그런데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세상에서 뽑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입성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공동체에 가입한 것을 말한다. 갈릴리 호수를 놓고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그리했던 것처럼, 이편을 떠나 저편으로 가는 배를 탄 것과 같다. 저편 가나안에 데려다줄 배를 탔다고 해서 폭풍의 위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저편 가나안에 데려다 줄 배는 교회공동체이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이다. 바울이 언급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바로 이 구원의 배에 오른 것이고, 순례공동체에 합류한 것을 말한다.

가나안입성의 마지막 관문(關門)은 요단강이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이다. 육신이 죽어야 저편 하늘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가나안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부활을 구원의 정점에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어야 하늘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지만, 죽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부활을 받아야 소용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하늘 가나안에 이르기 위한 부활을 영혼부활 혹은 영적구원, 주님 재림 시(時)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기 위한 부활을 육체부활 혹은 육체구원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아 거듭남을 체험하고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을 영적구원 혹은 영혼부활이라고 부른다. 이 영적구원 혹은 영혼부활은 하늘 가나안입성과 장차올 세계(올람하바, Olam Ha-Ba)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성을 보장하는 시민권일 뿐 아니라, 육체부활과 육체구원의 약정서와 같아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이 약정서에 기록된 보증금과 찍힌 인감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였기 때문이다. 멸망의 세계의 특징은 죄와 죽음이다. 그러나 하늘 가나안의 특징은 부활과 생명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부활과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논증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5장 12-21절에서 죽음과 생명의 근원문제를 다룬다. 죽음의 원인은 죄에 있고, 생명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류 최초로 죄와 죽음을 세상에 끌어들인 아담과 그것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부활과 생명을 세상에 끌어들인 예수님을 대조시켜 설명하였다.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이다. 원죄와 유전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12절에서 바울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죄와 유전죄

아담의 원죄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이란 점이다.
인간이 죄와 허물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문제와 인간이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하는 문제의 해답이 인간이 피조물이란 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가 없으시고, 죄를 범하지 않으시며, 영원하시기 때문에 죽지 않으신다. 죽지 않는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죽는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제든지 선악과는 먹게 되어 있다. 또 먹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에 운명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운명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때문에 우리가 죽을 운명이 되었거나 죄인이 된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최초로 죄가 생겼고, 또 최초로 죽음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처럼, 똑같이 그들의 후손들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죽은 것처럼 그들의 후손들도 죽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되어서 죄인이 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처럼 모든 인간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죄만 아니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이 죄를 짓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이었다면 모르겠으나 현 우주의 상태나 법칙상으로는 불가능하다. <주: 에덴동산이었더라도 피조물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 자연법칙 또는 열역학2법칙(엔트로피)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소멸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조세계에서 죽음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법칙이다. 이런 죽음현상은 자연이 불완전하기 때문인데, 불완전한 것 자체가 죄가 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가 따르고, 오류와 실수는 죄를 만든다.

아담이 최초의 죄인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지은 죄를 원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가 유전된다고 결정하려면 쾌 긴 해설이 필요하다. 아담에서 보았듯이, 유전죄가 없이도 인간은 죄를 짓게 되고 그 삯으로 죽는다. 죄지을 성질(罪性)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본능에 있다. 육체의 본능이 죄의 뿌리요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 본능이 아담의 범죄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본능이 작동한 때문이다. 본능은 피조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면서 선과 악 모두를 택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죄와 허물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시간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본능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을 입는 부활이다. 부활한 자들의 세계에는 죄성(罪性)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전죄와 자연법칙

바울은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아담의 의(義)와 그리스도의 의(義)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소개되었고, 죽음이 지배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서 죄 사함의 은총이 세상에 소개되었고, 생명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담으로 인해서 상실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넘치게 보상되고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더욱 넘치게’(much more)란 말을 세 번 사용하였다.

로마서 5장 12-14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범죄가 시작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시작되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죄할만한 법이 없었다. 여기서 법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시내산에서 언약의 내용으로 주신 토라(Torah) 즉 성문율법을 말한다. 이 성문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이 있었다는 말은 그 때에도 인간행위를 심판할 어떤 법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만일 법이 없었다면, 죄도 없었을 것이고, 죽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망은 죄의 삯이므로 사망은 성문율법이 없던 때의 사람들에게도 죄의 실재를 입증하고, 어떤 법의 실재를 입증한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에서 하나님의 자연(일반)계시를 이해할 만한 이성의 법과 양심의 법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성문율법이 아니더라도 이성의 법과 양심의 법으로도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하였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인간은 율법의 정죄여부를 떠나서, 또 아담이 불순종하여 죄를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누구도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아담이후 죽음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아니한 갓난아기는 왜 죽는가?
자연법칙 때문인가?
아담의 죄 때문인가?
자연법칙은 아담의 죄 때문에 생겼는가?
태초부터 있었는가?
만일 죽음의 법칙(엔트로피)인 자연법칙이 아담의 죄 때문에 시작되었다면, 피조물의 죽음이 아담의 죄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를 유전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죄의 결과가 자연법칙이라면, 피조물의 죽음은 범죄여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
죄를 모르는 갓난아기가 병으로 죽었다면, 그 죽음은 자연법칙 때문이고, 아담의 죄 때문이란 설명이 가능해진다.
아담의 죄값이 자연법칙에 남아 죄가 없는 갓난아기까지 죽게 하였으므로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주는 영향은 육체의 죽음에 국한되므로, 유전죄가 갓난아기의 영혼까지 해치지는 못한다.

영혼의 죽음은 자범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불행한 육체죽음을 맞는다할지라도, 자범죄가 없는 갓난아기의 영혼의 죽음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물(對物)관계가 전혀 없는 갓난아기에게 하나님과의 원수 됨, 인간과의 원수 됨, 자연과의 원수 됨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으면 죄도 없다.
갓난아기는 자의식이 없으므로 자기 죄를 회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회개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선언은 육체의 죽음일 뿐, 영혼의 죽음이 포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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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가 과연 유전되는가?

아담이 지은 원죄가 어떻게 모든 후손에게 자동으로 유전이 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 자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쉬운 말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원죄를 바로 이해하려면?

광복직후부터 최근에 반공법이 개정될 때까지 한국에선 아버지가 빨갱이면 그 자녀들의 사회적 활동도 크게 제한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대 왕정시대에 반역죄를 범하면 일가친척 모두를 멸한 것 같은 미개한 제도였지만 그만큼 공산주의사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심각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를 불문하고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접하면 아마도 이런 연좌제(連坐制)부터 제일 먼저 연상될 것입니다.
최초인간이 범한 죄가 어떻게, 하나님이 공언한대로(출 34:7) 삼사 대까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아니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적용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도덕적 혹은 영적 성질을 지닌 죄가 유전이라는 생물학적 방식을 통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가 스스로의 자각으로 죄를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옭아매어 놓고는 심판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분의 공의는 형편없이 굽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어른은 몰라도 최소한 스스로의 지각과 판단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의 아이들만이라도 사고로 일찍 죽더라도 심판에서 모면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죄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죄자범죄로 세분해서 구분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통칭해서 죄라고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영적 문제인 죄가 생물학적 방식인 유전으로 계승될 수 없다는 생각도 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기독교의 교리도 반드시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고 드러난 진리에 비추어 해석을 해야 함에도 부분적, 문자적 해석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원죄 교리는 기독교의 대속구원의 진리가 형성되는 시발점이자 그 구원관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구속 계획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원죄가 발생한 당시부터 따지지 말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유전 방식으로 관심이 쏠림, 성경 전부를 인간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부터 역으로 추적할 필요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어떤 신앙상의 의문이나 오해는 반드시 성경말씀으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고 가르쳤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해야 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원죄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오해입니다.
따라서 원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예수님의 언급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당혹스런 과제는 간혹 그 반대를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거나 망외(望外)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반대를 흔히들 저주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부나 연인이 저주하면서까지 헤어진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 내지는 미련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즉, 어떤 관심조차 끌지 못하게 되었기에 헤어집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며, 또 그 역의 역도 성립하기에 사랑의 본질은 관심을 쏟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죄의 경우도 흔히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따져 볼 수도 있어야 올바르게, 최소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죄의 본질,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 예수님의 원죄에 관한 가르침, 역으로 따져본 원죄 등의 순서로 이 문제를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와 범죄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간음죄에 대해서 가르친 것으로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우선 행동으로 간음한 것만 간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명문으로 된 율법 내지 사회법 즉 실정법(實定法-the positive law)을 어긴 죄일 뿐입니다. 남에게 잘못된 행동을 범하지 않고 감옥에만 안 가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개념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까지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바보라고 욕하는 자도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까지 말했습니다.(마5:21,22) 무슨 뜻입니까? 남에게 아무런 현실적 피해를 주지 않고도 말이나 마음으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같이 죄의 범위를 가장 심오하고도 정확하게 확장시켜 가르치셨던 분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충분히 생각해낼, 최소한 이해할 수는 있는 개념입니다. 이는 인간 양심에 심겨져 있어서 인간들끼리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도덕률(道德律-the moral law)을 어긴 것에 해당됩니다. 실정법에 도덕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실정법의 규정에 없더라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나 각자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마음으로 짓는 죄를 남에게 피해를 전혀 끼치지 않고 악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니까 죄가 아니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것도 외부에 안 드러난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본인의 사고활동 즉,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하여 행한 행위입니다. 자발적, 의도적, 능동적 판단과 선택과 행함 없이 마음으로 음욕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가장 먼저 죄(sin)와 범죄(crime-우리말로 더 적당한 표현이 없어 범죄로 표현함)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그 분류 방식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간단한 분류와 성경에서 말하는 더 포괄적인 분류,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우선 실정법을 어긴 행동은 범죄(crime)이며 그 행위의 주체는 범인(criminal)인 반면에, 도덕률을 어긴 행동은 죄(sin)이며 또 그 사람은 죄인(sinner)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상 양심이 있는 자라면 감옥 갈 범죄는 짓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도덕적, 종교적 죄를 짓고 있음을 시인하고 또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실토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가 규정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히브리어 ‘하타’는 “올바른 목표를 벗어나다”는 것이며, 신약에서 헬라어 ‘하말티아’도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난 것, 목표를 잘못 정한 것, 그래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것,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해선 안 될 행동을 하는 것, 등등이 전부 죄입니다. 따라서 실정법을 위반한 민사 혹은 형사적인 죄, 도덕률을 위반한 윤리적 죄, 종교 계명을 위반한 종교적 죄 모두가 이 두 용어가 의미하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근본 특성

그런데 죄의 진정한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죄와 범죄를 구분하여 상관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말해 평소 어떤 행위가 죄라고 확신하는 자는 여간해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감정에 취해 우발적으로 간음하거나, 교통법규 같이 세부 내용을 몰라 위반하는 경우 말고는 말입니다.

결국 도덕률을 어기는 자가 실정법도 같이 어기지, 도덕률은 잘 지키면서 실정법만 어기는 법은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범죄는 죄에서부터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범죄 하나만 따로 떼 내어서 죄의 본질에 대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도덕적 죄도 반드시 원죄와 연결해서 따져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 the Original Sin)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위에서 말한 죄와 범죄 어디에 속하는지, 혹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입니까? 아담이 하나님이 정하신 금령을 위반했기에 과녁을 벗어났다는 성경적 의미의 죄인 것은 분명한데 왜 구태여 원죄라고 명명하는 것입니까? 인류 최초로 지은 죄라서 그렇습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아담 때는 법과 윤리는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만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분명히 제정했지만, 인간사회를 관장하는 현대적 의미의 실정법과 도덕률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범죄나 죄의 성격과는 달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원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쉽게 말해 진짜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행동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사고의 활동 즉, 몸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내면의 지정의를 움직인 행위입니다.

진짜 죄의 본질,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순종 혹은 배반하기로 작정하게 만든 더 근본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로 싫어한 것입니다.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왕이었던 그분을 폐위시키고 자기 소견(所見)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살고자하는데 하나님마저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란 물질계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선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며 실제로 동산의 주인은 그분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가시적 형상입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언제 어디서든 보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권위의 상징이자, 아니 그분 당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를 넘어 그분 당신을 먹어치운 것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범죄와 죄의 관계를 선악과 사건에 대입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는 실정법을 어긴 범죄(crime)입니다. 범죄 이전에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따 먹어야 봐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죄(sin)입니다. 죄 이전에 자기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이 원죄(the Original Sin)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아담 개인이 범한 역사적 최초의 죄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의 본질을, 나아가 죄가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모든 도덕적 죄든, 실정법을 위반하는 죄든 간에 그 출발은 하나님을 배제한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하나님 대신에 사단을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죄를 없애거나 씻으려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선 결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돌아가 봅시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잘 생긴 이성에 대해 순간적으로 호감을 품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인남녀 중에 단 한명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성적 관계를 가져보려고 환상을 품고서 궁리하고 계책을 모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솔직히 말해 마음으로 짓는 간음죄에서조차 자유로울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만약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아예 눈을 뽑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든지, 세상은 장님들만의 천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자적 의미대로 명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부 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행한 사람도 있었지만, 죄를 그만큼 철저하고도 심각하게 취급하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는 죄를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 즉, 구원과 심판에 연관해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으로 간음하거나 말로 살인하지 않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듯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아무도 미치지 못해 모두가 죽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간음과 살인에 관한 기존의 도덕적 계명을 원죄라는 영적 진리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가르친 셈입니다.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3-7)

아직까지는 가인이 실정법과 도덕률 어느 것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고 견책했지만 당장 그 순간에, 최소한 제사를 드릴 때에, 아벨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가인도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사를 드렸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아담으로부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법을, 아담은 또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어 준 사건에서 직접 그분으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인의 안색이 변한 사실만 두고 견책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당신께서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왜 네가 화를 내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죄를 행했기에 제물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낯을 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을 것이 아니라 아예 따질 일 자체가 없었고 하나님도 제물을 열납해 주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제물을 바칠 때에 이미 죄를 행했고 죄의 소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과 도덕률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경배까지 했는데도 죄를 행했다니 무슨 뜻입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알긴 알 되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바쳤지만 가인은 그저 형식적 의무적으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드림으로써 첫 소산을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 소산이란 그 전부를 대표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모든 수확 전부가 오직 하나님께로 왔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을 함께 그것도 먼저 열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에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수확물도 전부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하나님이 벌줄까 두려워 생색 내지 겉치레로 바쳤던 것뿐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심지어 죄를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죄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선이자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항상 자기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자연스레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언제든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인의 마음(영혼)의 상태, 즉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제 멋대로 하려는 것이 원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의 원죄가 가인에게만 나타나고 아벨에게는 이전되지 않았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가인과 아벨 둘 다 아담으로부터 이미 신앙 교육,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산 체험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전심과 진심으로 항복하라고 권면 교육했습니다. 그 전도를 받아들인 아벨은 첫 소산과 자신의 전부를 드렸지만, 길 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같은 마음을 끝까지 고집한 가인은 아버지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뿐입니다.

원죄는 인간존재의 실상

한 마디로 원죄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기에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마음 상태로부터 다른 모든 죄와 범죄들이 파생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가인의 경우가 그랬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과자나 장난감을 서로 가지려고, 그것도 친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웁니다.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대로 고집만 피웁니다. 죄가 무엇인지 지각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벌써 죄는 항상 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몸에 밴 행태입니다. 그 마음이 이미 원죄로 인해 부패된 상태에 빠져서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원죄란 아담이 범한 개별적 죄를 넘어서 아담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실상(實狀)을 죄와 연관해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상태가 결과적으로 그러하니까 그 현상을 잘 설명할 목적만으로 차후에 별도의 신학사상을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최초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꺼이 고의로 적극적으로 거역했으며 또 그 후손 모두의 영적 실체도 그 선조가 원죄를 범했을 때와 똑 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너무나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인간존재의 실상을 한 마디로 대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심히 보기 좋게 창조하였는데 그분을 배역한 이후로 이 땅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오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존재”라고 정의(定意)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들이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 존재, 선하게 태어나서 환경에 따라 악해지는 존재, 악하게 태어났지만 교육으로 선하게 바뀔 수 있는 존재, 선하고 능력이 많아 스스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존재 등등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 보면 죄의 본질이 행위의 죄가 됩니다. 또 원죄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교만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의하면 자칫 도덕적 성품으로 제한됩니다. 나아가 단순히 죄성(sinful nature) 즉, 실정법이나 도덕률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자 하는 천성, 죄를 짓게 하는 성질, 죄가 많은 성질로 되어서 죄를 짓게 되는 가능성으로만 국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죄로 인해 결과 된 상태이자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모습일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이 과녁을 벗어난 것, 특별히 목표를 잘못 정했기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당연히 원죄에도 해당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아야 참된 인간의 복락을 누리며 인간끼리 진실 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데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원죄입니다.

범죄 하여 두려움과 수치심에 빠져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찾으신 것이 행선지를 몰라 숨바꼭질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해서 숨은 곳이 결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일단 하나님을 멀리하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서로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도덕적 죄가 따랐지 않습니까?  

자꾸만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 같은 신학적 용어에 괘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죄가 성경의 명시적 표현이 아니듯이 이런 용어들 또한 성경에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한 마디로 잘 표현했듯이 원죄도 모든 자연인의 영혼의 실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신학적 용어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도 “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한 용어인 것입니다.

먼저 원죄의 ‘유전’은 암에 잘 걸리는 체질을 유전 받듯이 죄가 자식에게 승계된다는 생물학적 개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로 물든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인간 실존의 영속성”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전가’는 인간이 속죄 받기 위해 스스로 피 흘려 죽을 수는 없으므로 희생양에게 안수하여 죄를 옮겨 가게 하여 죽이는 것 같이,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그 후손에게 옮기셨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란 대사(大使)는 비록 한 개인이지만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효력을 가지듯 아담은 인간의 대표이기에 그가 지은 원죄도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효력을 미친다는 설명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범한 후에 실제로 진행된 결말은 어떠합니까? 잘 아시는 대로 죄를 범한 세 당사자와 피조세계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들은 궁극적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사항은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타락한 채로 영생을 하면 구원할 방도가 영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었던 영생을 이제는 천국에 가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인간에게 죄가 들어가서 타락한 상태가 이어진다 해도 다른 구원의 방도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사단의 머리를 부수는 것입니다.(창3:15)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구원 받은 방도였던 가죽옷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 스스로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타락할 것까지 아시고도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사단의 유혹을 허락했던 이유는 태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다른 말로 원죄와 그에 대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이론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을 오직 성경의 기록에 의거하여 인간 이성이 도출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학적으로 최대한 잘 설명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마음이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후손들 모두가 타고 났다는 것입니다. 그 전해진 방식을 성경은 생명나무를 하늘로 옮기고 인간을 낙원에서 쫓겨낸 것으로 진술하지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의 신비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이 모든 세대, 인종, 지역, 문화, 관습, 종교에 관계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이해하기 좋은 방식으로 함축한 용어가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죄가 후손에게 이어진 최초의 예는 위에서 살펴 본대로 가인이었고 그 이후 구약의 수많은 죄인들의 기록 또한 그 사실을 보증합니다. 원죄가 왜 죄도 없는 아들에게 유전되느냐는 부분에 집착하다 보면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경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구속 계획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역으로 원죄를 보지 않으면 유전이라는 방식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를 태우듯이 원죄의 유전만 추적하다가는 성경 전체를 불사르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죄에 대한 입장

그럼 과연 예수님은 원죄에 대해선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또 가르쳤습니까? 우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간음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원죄교리를 간접적으로 내포시겼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분명하게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밥을 먹자 장로의 법을 무시했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는 것보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은 단순히 위생이나 율법 준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했기에 바리새인만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행동으로 보았으며 그런 사고활동을 주관하는 인간 존재의 더 깊은 내면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혼 내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고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그 존재가 악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로의 법(실정법이자 도덕법도 포함함)을 어겼다고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할 것을 약속하며 그 의미를 강론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오래 전에 밤중에 찾아온 유대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 사람을 책망할 것인데 그 죄의 본질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실정법이나 도덕률을 위반한 것과는 하등 관계없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종교의 자유는 오히려 가장 큰 덕목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주시겠다는 은혜를 의도적, 적극적으로 거부했기에 심판받을 죄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성령이 하는 역할은 당연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그분의 십자가 구원 사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사도도 신령한 것 즉,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얻었던 바울 자신의 체험에 따라 진술한 복음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신자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을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만,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선행이나 귀한 업적을 쌓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가, 특별히 구원을 얻는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위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는 인간이 결코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분의 십자가의 의를 통해 누구나 갖고 있는 원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되었던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범죄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를 없애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31:29,30)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각자의 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한탄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죄를 짓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리라 예언한 것이지만 성경은 항상 이중, 삼중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모든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을 도저히 얻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재앙 대신에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고 부활하는 방안이 아니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그 외의 방안으로는 오직 재앙뿐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바로 이 내용이 원죄라는 뜻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이는 또 바울 사도가 로마서 1-3장 걸쳐 말한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상태를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원죄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간에,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명시적 표현이 없을지라도 신구약에 일관되게, 특별히 예수님이 인정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 원죄론

이제 마지막으로 만약 원죄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역설적으로 한 번 따져 봅시다. 모든 인간이, 특별히 아이들은 더더욱, 죄 없이 태어난 후에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 옳다면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아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죄인이 아닌 상태로 태어났지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질 결과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야 하든지, 아니면 그 중에는 죄를 짓지 않아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도 생겨야 합니다. 만약 두 번째 경우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생각해볼 여지조차 없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전자의 경우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구원을 얻어야만 할 실제적인 죄인인 셈입니다.

그럼 다시 과연 그 죄를 스스로 없앨 수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씻어주어야만 가능한지라는 두 가지 과제에 봉착됩니다. 여기서도 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히 부인되는 반면에 오직 후자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요와 가치가 발생합니다. 어떤 경우를 상정하든지 간에 원죄가 유전되기에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부인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자동으로 부인됩니다. 오직 원죄가 유전되어야만 십자가가 유효해집니다.

물론 원죄를 이런 식의 논리 게임으로 설명해선 충분치 않습니다. 대신에 바울처럼 신자 본인이 자기가 구원받은 체험에 비추어 진지하게 회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는지 여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상식적 의미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멋대로 살려는 심성과 고집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과연 자기가 하고 있는 혹은 소원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는 가인처럼 형제를 비롯해 누구라도 미워했는지 아니했는지, 나아가 아담처럼 하나님마저 싫어했는지 아니했는지를 정말 솔직하게 따져 보라는 뜻입니다.

또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는 명제가 맞으려면 당연히 구원도 그에 상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것만 깨끗케 하면 죄인의 상태에서 다시 죄인이 아니었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범죄든 죄든 스스로 회개하면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던 원죄마저도 스스로 뉘우치고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납득이 쉽게 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와 다르게, 정확히는 하나 더 나아간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아주 확고하게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칭송을 받을 정도의 의인이라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과는 사실상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영혼의 내면에 도무지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스스로 회개를 해도, 심지어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믿고 있음에도 자기가 죄인임은 분명하고, 어떤 방식을 동원해도 구원 받았다는 아니 받을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스스로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죄인이 먼저 의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모든 면에서 니고데모보다 더 의로웠을 것입니다. 절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를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확신하여 기를 쓰고 핍박했던 이유는 그만큼 자기가 의롭다는데 자신감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로선 아무 선행도 하지 않은 살인자마저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준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을 하자 사람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는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이 죄인 중의 괴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자기를 그 상태 그대로 두신 채 의인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고 십자가 복음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바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실정법을 어긴 적은 아예 없으며 혹시라도 도덕률을 어겼을 때는 틀림없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음하고 말로도 살인할 수 있다는 영역까지는 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그런 죄를 스스로 깨우쳤다 해도 더더욱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회개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단순한 의미의 원죄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으로만 따져도 그들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 다 예수님에 대해선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다시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칠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간혹 하나님을 알고 믿기는 믿되 잘못 믿고 있는 점을 완전히 수정하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와 그 죽음이 미치는 결과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그럼 당연히 의인 내지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그분을 배역한 원죄 하에 태어남으로서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그분의 의에는 어느 누구도 미칠 수 없고 또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원죄란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분의 존재를 자기에게서 지워버린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이 사단의 종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옮기고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도 바로 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인간 특별히 그 영혼을 주관할 공중 권세를 사단에게 위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은혜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바로 이것이 원죄의 궁극적 실상입니다. 사단은 인간더러 세상에서 형통하고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고 심지어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선행을 많이 쌓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만은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원죄 하에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살펴보고 또 작금의 모든 상황을 보아도 실제로 분명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자마자 귀신들이 가장 먼저 메시아임을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여 ...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막1;24) 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자기들의 수괴인 사단에게 한시적으로 맡겨졌던 공중권세를 빼앗고 완전한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하지는 않고 단지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오라고만 명령했습니다. 당신의 재림 때까지 여전히 세상을,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을 사단의 권세 아래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원죄란 인간이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스스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적한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믿긴 하되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주관하는 권능자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조금 의로운 자라 해야 자신이 범죄한 것이나 윤리적으로 잘못한 일을 스스로 회개하고 고백할 대상으로만 간주합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철두철미하게 부패된 죄인이라고는 절대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광채가 그 영혼에 비취지 못한 상태입니다.     

니고데모는 몰라도 바울의 경우는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 스스로 자부했던 자입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자기는 죽어야 마땅하고 또 예수를 몰랐다면 당연히 영원한 죽음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격정적인 바울에 비해 아주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니고데모마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잘 모르면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었으니 지옥 간다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속에서 나오는 것이 계속해서 죄악뿐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을 좋은 것으로 서로 많이 손쉽게 빨리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 있기에 죄악만 확대 생산될 뿐입니다.

간혹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가 인간 사회에선 분명히 의롭게 보이는 선행이나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먹고 남는 것으로 적선했거나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는 인간끼리는 절대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붙어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구원의 유일한 길

인간이 죄인인지라 죄를 짓는다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야만 구원이 유효해집니다.
그 외의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또 죄인을 의인으로 그 존재 전체를 바꾸는 것은 오직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끊고서 성령이 임재 내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의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초자연적 간섭이 일어난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내주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고안해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 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거듭남의 의미는 바로 자신의 존재 전부가 자기가 바라보아도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뿐이라고 겸비하고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부모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아담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로만 심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술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받는 유일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각 개인이 그분을 믿지 아니한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를 자신이 깨달아 믿었다고 말하는 신자나 또 그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단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 다른 글에서 누차 밝힌 바 있듯이, 성령의 간섭과 인간의 지정의적 인식이 상호 모순 충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먼저입니다. 성령의 간섭이 먼저라면 그 간섭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선택을 거친 전적인 은혜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마치 인간이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표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셔야 할 것은 성경은 신학적 논문이나 주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인간으로선 인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초자연적 간섭이 먼저 있고 그에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두 절차가 있는데 그중 인간 쪽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마치 유전, 전가, 대표성 등의 교리가 원죄의 한 부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듯이 말입니다.

간혹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 볼 때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또 하나님을 스스로 깨달아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었기에 그분의 의를 이루려는 도덕성과 그분께 돌아가려는 영성이 아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의 니고데모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이 아닌 사울이 바로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들 둘 다 성령의 간섭 없이는 예수를 믿지 못했지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작금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자신의 옛사람이 철저하게 죽어 없어지는 절차가 실종되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양 가르칩니다. 행위 구원에 대비해 믿음의 구원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스스로 믿으려 결단하는 것 자체도 사고활동 즉, 일종의 행위입니다.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대신하는 인간 쪽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나는 깨달아서 믿었는데 너는 깨닫지 못해 못 믿고 있다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벌써 인간끼리 도덕성과 영성에서 우월의 차이가 생깁니다. 우월한 자가 구원 받으면 인간 쪽에 구원 받는 자격과 조건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릅니다. 나아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을 인정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져 버립니다.   

거듭남이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단순히 하나님을 멀리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 썩어빠져서 진정한 의라고는 단 하나도 산출하지 못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망이라고는 없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종교적 의를 행했다 해도 여전히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게 둔 위치에서 행한 것임을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sinful nature)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담이 저질렀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에게 전승되어 있던 원죄의 굴레가 성령님의 역사로 완전히 벗기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은 정말로 자신의 실체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여 완전히 죽고 또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한 죄인이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의 전부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유효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가 단순히 그 구원을 유효케 하는 신학적 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속에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입니다.







주의 보혈(03-04-2023)



주의 보혈(寶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 피의 복음" 이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

루터는 성경을 짜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떨어지고, 신약을 짜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떨어진다.

그런데 구약의 희생제사에 드리는 짐승의 피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잠겨 있다.

구약의 희생 제사를 이런 순서로 드려졌다.

1. 희생 제물에게 죄인이 손을 얹어 안수한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다.

2.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목을 따서 쏟아지는 피를 받아 제단에 붓는다.
피를 붓는다는 것은 그 죄에 대해 생명으로 값을 치루었다는 의미이다.

3. 짐승의 각을 떠서 토막을 낸 다음, 번제단 위에서 불태운다.
이것은 죄의 완전한 소멸을 가리킨다.

4. 그 재를 죄인에게 뿌려 그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선포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 뜰에는 희생제물로 죽어간 수많은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그 짐승들이 흘린 피가 가득하다.
그 짐승들이 번제단에서 불태워진 냄새가 가득하다.
성전은 희생 제물의 죽음과 죄인의 새 생명이 교차하는 곳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여러분, 피비린내를 맡아보셨습니까?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역합니다. 이처럼 피는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두려움을 자아내는 끔찍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난히 피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리고 피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강조합니다. 또한 단순히 피라고 부르지 않고 보혈 즉 보배로운 피라고 묘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유월절의 의식중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는 것이 있습니다.
피를 보고 심판의 천사가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반드시 짐승을 죽여 고기는 번제로 태워서 드리고 피는 그릇에 담아 지성소에 가지고 가서 속죄소에 뿌리며 백성들의 죄를 사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강조합니다. 구약의 유월절의 피도 , 제사에서 속죄소에서 뿌리는 짐승의 피도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피에 대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가듭나니.. ]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깊고 넓도다..] 등 너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의 역사가 강한 곳에서는 보혈의 찬양을 많이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본문에서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의를 위하여 아름답게 죽은 많은 의인들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람의 피를 향하여서도 보배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가리켜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가리켜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피는 죄없는 몸에서 흐른 것이기 때문에 보배롭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죄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원죄도 없습니다. 그 몸에서 순환되는 피는 한 번도 죄를 짓는데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그 피는 깨끗하고 보배로운 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율법과  의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혈은 사망의 권세를 파괴했으며 지옥과 마귀의 권세도 파괴하여 버렸습니다. 보혈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출구를 제공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사망에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 즉 보혈에는 어떤 힘이 담겨 있을까요?

1. 보혈에는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유월절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음으로 치실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유대인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갔습니다. 피를 보고서는 심판을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고전 5:7에는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참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마음에 뿌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보혈을 뿌림받은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성경 히9:22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빼버리면 우리의 죄를 용서할 방법도 다 사라집니다.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루터에게 책을 펴 보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  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었읍니다.
그 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읍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읍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읍니다.
그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히고 낙심되었읍니다. 
그때에 위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지우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록하라.'고 말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습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길 밖에 다른 것이 없읍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아서 거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아야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아서 거룩한 것이 아니고 더럽고 추악한 죄로 더럽혀졌으나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사함받은 사람만이 거룩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의 보혈은 하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줍니다. 히10:19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보혈을 힘입어 죄인이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잇는 담력을 얻게 됩니다. 보혈이 없이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가 드러나 심판받고 저주받을까봐 두렵고 떨리고 고개를 들 수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용기가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은혜와 복을 간구하기조차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확신하고 보혈을 의지하여 죄사함받기를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여 죄책감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2. 보혈에는 죄의 행실에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힘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망령된 행실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잇습니다. 아무리 오래되고 깊이 뿌리박힌 못된 버릇이라도 예수님의 피뿌림을 받으면 끊을 수 잇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교육도 태어날 때의 성질까지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어떤 것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성에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감옥을 수없이 드나들던 아들이 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싱클레어야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각서를 써라." 그러나 싱클레어는 그동안 자신이 쓴 각서를 합치면 방 하나를 도배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면서 각서 쓰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팔을 걷어 올려 칼로 혈관을 끊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어미의 피로 각서를 써라" 몇 년 후에 싱클레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피로 각서를 써도 끊지 못하던 내 더러운 죄의 버릇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끊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수를 믿은 지체중에 마약의 중독으로부터 해방된 이도 있습니다. 이분이 성령을 받고는 고백하기를 "목사님 성령 충만의 정반대는 마약중독입니다." 라고 알려주더라구요. 가장 인간을 비참하게 파괴시키는 것이요, 끊기 어려운 독입니다. 감옥에 몇 개월동안 지내고도 나오는 그날로 다시 하게되는 무서운 것이 마약이랍니다. 그런데 은혜받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살게 되니 마약도 다 끊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 교회안에 알콜중독된이가 예수믿고 술 끊고 해방된 이도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 습관이 끈질기게 따라다녀서 괴로우십니까?  여러분의 의지를 총동원하여 싸워도 이길 수 없어서 절망이 되십니까? 입술로 죄를 짓는 습관, 행동으로 죄를 짓는 습관, 마음으로 죄를 짓는 습관 등 죄의 습관은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집요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보혈을 힘입으십시오.  죄의 유혹이 덤벼들때 예수님의 보혈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보혈을 의지하여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명령한다. 죄의 습관은 끊어져라." 또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앞에 죄의 행실은 항복하라." 보혈의 힘을 의지하는 여러분에게서 죄의 습관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는 그 어떤 권세, 그 어떤 인물보다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 죄를 사하는 능력, 망령된 행실과 죄의 습관을 이기는 능력,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게 하는 담대함을 주는 능력 등 수 많은 큰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을 확신하고 힘입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보혈에는 죄의 존재를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죄의 존재 즉 악한 영이 숨어서 역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가정에서 숨어 역사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도 숨어들어 교묘하게 이간시키기도 하고 죄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할 뿐 그 배후에 마귀, 사단의 역사가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젝 헤이포드 목사님이 반 누이스 교회에 부임해 갔을 때입니다. 무언가 답답하게 하는 끈적끈적한 존재가 목사님을 짓누르고 낙담케 만들었습니다. 어느날 오후에 교회당 강단 근처에서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예배당 지붕을 받치고 있는 서깨래위에 작고 어두운 구름 같은 물체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순간 성령께서 그것이 사단의 권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필요도 없으며 계속 찬양함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헤이포드 목사님은 아무도 없을 때 예배당안을 거닐며 박수를 치며 소리 높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악한 영을 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성령님안에서 기뻐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성도들과 더불어 여러곡의 찬송을 부르고 경배하며 주님의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교회안에 밝아졌습니다. 엄청난 기쁨과 자유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교회를 억누르고 있던 악한 영이 떠나고 성도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목사님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살던 이전 거주자는 아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들은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후에 무서운 환각현상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가정이 이사하자 마자 네명의 자녀들이 모두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2주 후에 잠자리에 들려는데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를 집을 정결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준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는 문인방과 문설주에 포도즙을 바르고 보혈을 힘입어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녀들을 불러 모아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평안한 잠과 건강에 관한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지속되는 질병이 즉각 사라졌으며 보혈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베드로 사도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야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는 벧전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집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피흘리셨으나 그 피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뿌려집니다.  그 피가 뿌려짐으로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깨끗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보혈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느끼지만 어떻게 죄를 해결받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보혈로 죄의 잔 뿌리인 나쁜 습관까지 해결주시는 것을 모릅니다. 보혈로 죄의 존재인 마귀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모르고 짓눌려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보혈의 비밀을 알고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고 신앙생활하며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를 여러분 마음에 뿌리고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악한 영을 결박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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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1.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12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14절)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15절)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이 놀라운 십자가 보혈에 온전히 잠기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 보혈의 능력을 온 몸으로, 삶으로 체험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 보혈의 능력으로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새로워진 인생,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 모든 생명은 피에 존재합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어떤 사고가 났을 때, 수혈을 하여 환자의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 육체에 피가 빠져나가면 살지 못합니다.
피에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의학이 수혈을 통해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17C 초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미 이 사실을 기원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인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레위기는 기원전 약 1400년 전 기록된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사망의 길에서 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구약에서 행해지던 동물의 피로 인한 속죄 제사들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행해지는 그림자며 예표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것이 이미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 보혈에 대한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첫째며 기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보혈에 대해 증거하는 성경의 말씀이 다만 지식으로서 내 머릿속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레마의 말씀으로 살아서 역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생명과 빛과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공생애 중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사복음서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를 중점적으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도 없이 믿음도 없이 피로 죄를 씻어 달라고 하면 큰 효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말씀을 믿는 만큼 역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는,
예수님에 보혈에 대해 증거하는 성경 말씀을 조그만 노트나 수첩에 직접 필기하셔서 자주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시고 그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 보혈에 대한 성경 구절을 기도할 때에 직접 적용하세요.
보혈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수첩에 기록하셨고 소리 내셔 읽으셨고, 머리가 좋으신 분들은 외우시기까지 했습니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기도할 때 말씀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기록되었으되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라(요 6:54-55)
제가 주님의 피를 마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다는 말씀을 제가 믿습니다(계 1:5)

주여, 저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게 해주소서.
저의 영뿐만이 아니라, 혼도, 육체도 깨끗이 씻어주소서.
죄에 빠져 고통받는 저를 불쌍하게 여겨주소서.
제가 이 사망의 길에서 진정으로 돌이키길 결단합니다.

주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신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를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언약을 제가 굳게 붙드오니 저의 죄를 씻어주소서. 부디 말씀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저의 죄를 알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골 2:15)
제가 모든 것을 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부디 제 안의 더러운 죄들을 씻어주시고, 억눌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소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나의 죄를 알게 해달라고 간구 드리고, 또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곳에서 나의 죄를 발견해나가세요. 신약은 물론이거니와 구약 율법에 죄명들이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특히나 민수기,신명기) 그 말씀을 통해 나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해나갈 때,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죄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죄들을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기도하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내 입으로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며 회개한다고 기도하며 말씀을 드리세요. 그런 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달라고 기도드리세요.

주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이며, 죄인 된 제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갔던 지난 일들을 회개합니다. 이 죄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소서.

주님, 오늘은 구약 율법을 통해서 부모에게 복종치 않는 것이 큰 죄임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줄곧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이 죄 회개합니다. 주여, 부디 사망의 길에서 저를 돌이키게 하소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저의 죄를 씻어주소서.


* 영적 전쟁을 해나가는 도중 수많은 훼방이 있을 것입니다.

- 사탄과 악한 영들은 거짓 사상과 생각을 불어넣고 세뇌합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너 모르신대, 예수님의 피는 너와 상관없어, 너는 거듭났다, 구원됐으니까 믿어라. 이런 것들입니다. 단호하게 물리치세요. 예수님의 피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효력을 미칩니다. 물론 이미 거듭난 사람의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의 믿음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주 세미한 믿음이라 하더라도 믿는 만큼 역사하여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물리치셔야 합니다.

- 주변의 방해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자꾸 분노케 한다든지 죄를 짓도록 미혹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시끄럽게 하고 괴롭힐 수도 있고 병이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꿈으로 공포심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한 영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에 자신들의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공포심을 준다는 것은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고, 내가 올바른 길로 잘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허하시지 않으면 목숨을 거두어가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귀한 영혼을 죽이라고 허락하실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시간 이상 집중하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만, 틈나는 대로 단 10분이라도 매일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악한영의 훼방이 많으시면 죽기를 각오하는 심정으로 단 하루나 이틀이라도 좋으니 틈틈이 할 수 있는 만큼 금식을 병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혈과 말씀을 힘입어 하는 기도와 금식 기도는 가장 강력합니다.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는 말씀이 킹제임스에 있습니다.
심각한 종류는 금식도 병행하셔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인생, 이것이 전부입니다

<2021년 다니엘 기도회> 조회수 44만 회의 그 간증!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24일간
실존하는 영적 세계에서 깨달은 참된 복음!

‘예수, 보혈, 구원’의 능력이 문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목숨을 걸고서라고 꼭 붙들고 전해야 할 복음의 엑기스!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고 붙잡으라!

저자는 “나와 함께 광야로 가자.”라는 부르심에 따라 2017년 8월, 멕시코의 선교지로 떠났다.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의 부르심이었기에 남다른 결심을 해야 했지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 교통사고를 통해 실재하는 영적세계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영적세계가 반드시 있다는 것과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영혼을 취하고 조종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떠는 것은 ‘예수, 보혈,’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이며, 예수님이 우리 삶을 통틀어 값있게 여기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시간 뿐임을 저자의 간증을 통해 사진처럼 선명하게 알려 주신다.
이 책은 복음에 대한 강력한 간증서이다. 믿는 사람은 더욱 복음으로 무장하고 ‘예수, 보혈, 구원’을 전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실재하는 영적세계에 대해 눈을 뜰 뿐만 아니라, 심판 날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믿음에 반응하게 될 것이다.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Arianism, ─派]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 일파이다.
그는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서기 361년)까지 겹치자 아리우스파는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 381년)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은 초대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였다. 예수를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정도로 이해했던 에비온주의자,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특별한 능력을 받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론자, 구약의 성부가 곧 예수라고 주장한 양태론자 등 예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릇된 이해가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등장 이후 60여 년은 그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리우스는 누구이며, 무엇을 주장 했나

아리우스(250년 경∼334년 경)는 루키아노스의 제자였다. 루키아노스는 “인간에 불과한 예수 속에 신적 능력이 들어가 그를 점점 신화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양자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한 인물이었다.

“예수는 피조된 존재로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아리우스는 핵심 주장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아리우스가 저술한 『Thalia』(편집자 주: 연회)가 아직 남아 있지 않아 “아리우스의 사상은 반대파의 저술을 통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대개 아리우스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만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개발하게 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1)면서도, 아리우스 주장의 기본 주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다며 세 가지로 진술했다.2)

1.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2. 아들은 기원과 지위에 있어서 피조물 가운데 으뜸가는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된 존재이다.

3. 아들이 여러 세계들의 창조자이므로 그것들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시간보다 먼저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목창균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편집자 주: 아리안에 대한 네 가지 담화(혹은 논거)를 인용해 “아리우스는 아들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그보다 못한 제2의 하나님 또는 명목상 하나님으로 보았다”라고 설명했다.3)


아리우스의 주장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óγoς – “말씀”, “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렸고 어부들까지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동방 각지로 여행하며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교직자들로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도시대 이후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리우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당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바로 아타나시우스였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리비아의 감독 데오나스, 세쿤더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파의 반격

2년 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 하거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이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여 유배를 떠나게 했다.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황제

336년 아리우스가 죽고 다음 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었다.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공론화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기에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얼마 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아리우스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는 감독들에게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전에 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

얼마 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켜 그들의 지도자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양 진영의 군대가 접전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으므로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으며 엘류시니아인의 신비 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로마 황제가 가진 대제사장직(Pontifex-Maximus : 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사장으로서 신과 백성을 중재하는 직분이다. 예전부터 로마 황제는 태양신 교의 대제사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따라 교회에 간섭하였다)을 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자 그동안 소외됐던 이교가 활성화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그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주자는 생각으로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감독들이 율리아누스와 이교를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하였다.

로마 제국의 분열과 아리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 반달, 동고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이 민족들은 가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중세 종교 암흑 세기를 주도한 가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 할만하다.

니케아 신조의 한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모호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은 쉽게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부분에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 일이 같아서 일체라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런 성경 지식의 부재 때문에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 교리로서 전해오고 있다.

성경의 진리, 성삼위일체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이다(미 4장 1∼2절).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알기에(호 4장 1∼6절),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 놓았다.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지만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고전 4장 5절).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요 6장 45절)라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씀을 깨닫게 된 우리는 성부로서, 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하겠다.



아다나시우스 [Athanasius]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 교부(敎父, 295-373년). 319년 부제(副祭)가 되었고, 325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異端說)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명성을 얻어 이듬해 알렉산더 주교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어 46년간 섬겼다.

그러나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 파에 밀려 335년 라인랜드(Rhineland)에 있는 트리에르(Trier)로 유배되었다(1차).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콘스탄티우스가 즉위하자 귀환하였으나 339년 사순절에 다시 로마로 추방되었다가(2차) 346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교회를 돌보며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356년 제국 전체를 평정한 황제는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군대에 쫓겨 이집트 여러 곳을 유랑해야 했다(3차).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많은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파의 주교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 후 361년 이교도(비기독교인)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이듬해 다시 추방되었다(4차).

363년 율리아누스가 죽자 복귀하였고, 365-6년 잠시 추방당한 것(5차)을 제외하고는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니케아 공회의 결의를 확고히 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결국 그는 다섯 번이나 교구에서 추방되고, 17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그가 죽은 지 8년 뒤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됨으로써 아리우스 파에 대한 완전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의 종속주의적 그리스도론에 대항하고,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로고스로 보아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one substance, 동질)라고 주장했다. 또 성령과 하나님과도 동질을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 신관을 완성시켰는데 이 입장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혹자는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혼자서 기독교를 이교적 합리주의의 혼란에서 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아리우스주의'를 보라.

아타나시우스의 등장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인기를 얻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주교들을 소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을 복잡하게 만들어 되살려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4)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인기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아리우스에 대한 더욱 끈질긴 비판은 알렉산더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경 부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맡았다. 아타나시우스는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아리우스는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고 밝혔다. 또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며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했다.

니케아 공의회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 현, 터키령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공의회. 제1차 니케아(㉮ 니체아) 공의회는 제1차 공의회에 해당하며,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서 소집되고, 각지의 주교 318명(전승에 의함. 실제로는 250명 이하)이 참가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교 공인 후 최초의 전체적 집회이며,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전의 취지도 있었는데, 본래의 본적은 교의문제, 즉 아리우스가 제기한 아버지인 하나님(㉮ 하느님)과 자식인 그리스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의 해결이었다. 결국 회의는 팔레스타인의 세례용 신조(이론도 있다)에 아버지와 아들 <호모우시오스(동일실체)>의 말을 보충한 것을 <니케아 신조>로서 채택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 자를 파문할 것을 정했고 그 결과 아리우스는 추방되었다. 또한 부활제일의 산정법을 결정하고, 20조로 된 교회규정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는 후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가 반아리우스의 입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아리우스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못미쳤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제7회 공의회에 해당하며, 787년에 이코노클라즘의 해결을 위해서 비잔틴 황비 이레네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이콘파괴파가 연히에리아 회의(754)의 결의를 취소하고, 이콘 숭배는 신에 대한 참된 숭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고, 이콘 숭배를 옹호했다. 그러나 서방의 프랑크 교회는 이 결의를 우상숭배의 부활로 해석해서 동방 교회를 비난했다. 또한 비잔틴제국에서는 9세기 초에 이코노클라즘이 재발했다.

알렉산더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리우스는 루키아노스의 제자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는 동시에 같은 안디옥 학파의 유세비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을 추방한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로마의 각 지역에서 조력자들을 얻게 된다. 결국 323년부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집회를 따로 개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5)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단순한 신학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의 질서와 통일성을 헤치는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자문관을 파송해 양측을 중재하길 원했지만 실패했고, 325년 교회의 지도자들을 니케아로 소집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동서방교회의 주교는 1800명 정도로 예상되는데 그중 300여 명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0여 명 외에도 주교들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 부제 등 다양한 신학 전문가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니케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크게 세 파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 유세비우스가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성자는 피조물이며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의 반대자들이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했는데,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셋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편집자 주: 아리우스의 지지자와 다른 인물)가 이끄는 중도파였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가 아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즉 성부와 성자가 유사한 본질을 가졌다고 말했다.
중도파는 수적으로는 가장 우세했다.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으로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교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칼 투르먼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본질(substance)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이후의 신학적 논의들의 궁극적인 틀을 설정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육신하신 예수의 위격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6)라고 평가했다.

니케아 이후 오히려 힘을 얻은 아리우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사태의 종식이라기보다 논란의 가중화로 이어졌다.
애초에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간 것 자체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했고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우스의 지지자인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아리우스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찬에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반기를 들었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파문과 복직을 반복했는데 그의 유배생활을 합치면 약 17년 이라고 한다.

상황은 점점 아리우스에게 유리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로마는 세 명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분할해 다스렸다. 그 중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형제의 죽음 이후 로마의 단독황제가 되면서 아리우스주의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7)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아노모이오스(anomoios, 상이본질)라고 불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an, 유사본질)라고 불리는 세미 아리우스파, 호모에안(homoean, 동류본질)이라고 불리는 중도 온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 분파 중 극단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점점 과격해 지자 일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하고 갑바도기아의 교부 삼인방인 가이사랴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등장해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 주교들의 활약으로 니케아 신조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했다.8)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소집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채택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6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아리우스 논쟁이 종식되는 순간 이었다. 칼 투르먼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범교회적으로 보편적인 정통 신앙을 정의하는 표준이 되었다. … 이 신조는 성령의 신성에 관해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적절히 묘사한다”라고 평가한다.9)

아리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60여 년간의 논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알려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로 가는 길 381년,
서방 신학을 지지하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니케야에서 첫 번 공의회로 모인 325년 이후 두 번째로 가진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신학적 패배를 맛본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포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교회가 니케야 신조를 옹호하는 한 파와, 온갖 정치력을 동원하여 이에 반대하는 다른 파로 분리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이들의 대립이 중단되었다. 니케야 신조를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는 이단을 정죄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완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노플 회의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결사적인 방해공작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교회의 방향성을 더욱 상실하게 하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중도파’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중도파’는 그 당시 대립하고 있던 양쪽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상대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닌 흑백논리의 싸움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비유사파’라고 부른다. 성자와 성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자와 성부가 동일하다고 보는 니케야파를 ‘동일본질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도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유사본질파’라고 부른다. ‘유사본질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사상을 따른 세 사람, 즉 체사레아, 에메사, 그리고 니코메디아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 후에 픽타비스의 주교 힐라리우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니케야 신조가 정의한 ‘동일본질’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 간의 ‘유사한 개념’을 새롭게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교회의 내분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믿었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심지어 이들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커다란 힘을 형성한 적도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동일본질파’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진리에 맞서서 대항했던 ‘비유사파’와 ‘유사본질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협소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지적받기도 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치는 진리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 교부 아타나시우스 교회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를 때까지 진리를 수호하며 험한 길을 걸어간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295?-373)이다. 그가 신약성경의 정경,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목록을 367년에 처음 교회에 소개하였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그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의 모함과 위협을 물리치고, 성경의 진리는 오직 하나뿐임을 증명한 상록수와 같은 인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이교도 논박”, “성육신에 대하여”, ”아리우스파 반박론“ 그리고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에 잘 정리하여 놓았다. 여기에 성경적 진리를 변증하며 이단을 대항하는 그의 노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성자는 성자와 동일하다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말씀(성자)을 하나님의 작품으로부터 제외시켜 창조주로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 높이고, 본성상 성자시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면, 그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그를 포함한 피조물 각각에 대해서 ‘피조물이되 피조물들 중 하나와 같지 않은’이라고 하여야 한다. 당신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소생’을 ‘발생한 혹은 창조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만들어진 작품’처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20). 잠언 8장 22장의 내용은 마치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이 성경구절을 옳게 해석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성부를 가리켜 ‘주’라고 한다. 자기가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로부터 유출된 말씀이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성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50). 이 성경구절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받은 사역에 대한 언급이란 설명이 옳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니라,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유출’은 ‘나왔다’ 또는 “낳았다‘라는 뜻으로서, 그가 본질상 성부와 동일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독생하신 분이다. 또한 창조계로 내려오사 많은 형제를 만드셨기 때문에 ’장자‘이시다”(아리수스파 반박론 2, 62). 성자와 성부는 동질일 뿐 아니라 분리될 수도 없다. 서로 안에 계시는, 즉 상화 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된 것들은 성자 안에 참여함으로써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성자 자신은 참여에 의한 성자가 아니라, 성부의 본래의 소생이다... 그는 성부의 샘에서 나오신 생명으로서, 그 안에서 만물이 생명을 얻고 실재적 존재를 얻는다”(아리우스파 반박론 3, 1).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은 ‘단일신론’을 주장하였던 사벨리우스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벨리우스는 성자는 근본적으로 성부와 하나이지만, 그가 필요에 따라 성부가 되었다가 성자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씀이셨고 아무것도 그를 가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만물을 포괄하셨다. 그는 온 창조계 안에 계시되, 본질적 존재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 안에 계실 때도 그 육신에 생명을 주셨다. 동시에 온 우주에 생명을 주고 계셨고, 만물에 임재하여 계셨다”(성육신에 대하여, 17). 성자는 분명 성부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속한 것을 지니고 계신다.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자신이 하나님 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게된 것이다.

성경이 보인다
- 에스더 4:1-17; 요한복음 11:16; 디모데후서 3:12-4:8; 유다서 1:17-21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상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흑백논리’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을 부인하거나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는 매우 지혜롭다. 하나님을 도전하여, 성도가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전문가이다. 이 사회는 ‘흑백논리’를 들먹거리며 성도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칼과 총을 대신하여, 새롭게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고 넘어뜨리는 영적 무기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대상은, 중용 또는 평화주의이다. 신앙보다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할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분명히 하자.

성도들은 ‘흑백논리자’들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을 동시에 지녀야한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재(4700)  σποδός, οῦ, ἡ 

1. 재,  2. 마태복음 11:21,  3. 누가복음 10:13
발음 / 스포도스(spŏdŏs)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마 11:21, 눅 10:13, 히 9:13)
신약 성경 / 3회 사용

마태복음 11:21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0: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히브리서 9: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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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을 결정하는 방법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
매년 춘분이 지난 만월 후 첫번째 맞이하는 주일

재의 수요일의 기원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 고난 주간, 사순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순절(부활절 전 40일)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러나 부활절이나 고난 주간 등과 다르게, 재의 수요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관행은 약 11세기 경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는 예식은 모든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과 이삼십 년 전에야 미국 내에서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재의 수요일이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재를 사용하던 교회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구약시대부터 재는 사람들의 참회 표시였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옷을 찢으며 참회하였다(사무엘하 13:19, 에스더 4:1, 다니엘 9:3). 혹은 잿더미 가운데서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하였다.
재를 이용한 참회의 기도는 신약시대에서도 계속되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다고, 누가복음 10:13과 마태복음 11:21에도 기록되어 있다. 

왜 하필 재인가?

구약시대 번제에 쓰이던 동물이나 그 동물의 피, 불 등이 아니라, 왜 재를 사용하는가?
재는 구약시대부터 참회 혹은 회개할 때 사용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에서 재는 인간의 유한한 삶과 회개의 표시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창조될 때 흙(재)로 지음 받았고 우리가 죽을 때 몸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잘못을 느끼고 후회하고 원상태로 되돌리고 싶을 때, 재를 머리에 놓고 베옷을 입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회개하였다. 

어떤 종류의 재를 사용하는가?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아무 종류의 재를 사용할 수 없다.
일 년 전 종려주일(부활 주일 전 주)에 사용되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잘 말려서 태워서 거기서 나온 재와 약간의 오일을 섞어서 재의 수요일에 사용한다.
2000년 전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아 예수는 그를 반기던 바로 그 사람들이 죽이라는 외침을 듣게되었다.
기쁨의 종려나무 가지는 슬픔의 재가 되었다. 

그 재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재를 가지고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은 이마에 십자가 형태의 재를 표시한다.
재는 우리가 모두 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우리의 죄를 떠오르게 하며,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용서를 떠오르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매일 죄를 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으며, 회개하고 참회하며 예수께 돌아올 때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강력한 표식이다.

재의 수요일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추이다. 비록 우리 한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예배이며 의식이지만, 재의 수요일을 지키고 기념하는 것은 사순절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재의 수요일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깨닫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예배로 시작된다. 재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바르는 의식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놓겠다는 결심하는 시간이다.
또한 앞으로 사순절(40일) 동안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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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동안 하루 한끼 금식하며 한끼 금식한 것을 특별 헌금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지진 구호금, 북한 동포 양식 후원금, 노숙자 후원금........ 등
특별헌금은 각 교회마다 교회 형편에 맞추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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