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1. 하나님은 창조주(엘 로힘, Elohim)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여호와, Jehovah)
3.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엘 로이, El Roi)
4.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엘 샤다이, El Shaddai)
5.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엘 올람, El Olam)
6.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나함, Naham)
7. 하나님은 모든 것 다해 사랑하시는 분(엘 칸나 , El Kanna)
8.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여호와 치드케누, Jehovah Tsidkenu)
9.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여호와 이레, Jehovah Jireh)
10.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엘 엘리온, El Elyon)
11.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여호와 삼마, Jehovah Samma)
12.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분(챈, Chen)
13.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여호와 닛시, Jehovah Nissi)
14.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여호와 카도쉬, Jehovah Kadesh)
15. 하나님은 평강(여호와 샬롬, Jehovah Shalom)
16. 하나님은 우리의 왕(여호와 멜렉, Jehovah Melek)
17. 하나님은 치료자(여호와 라파, Jehovah Rapha)
18. 하나님은 부드러운 분(알룹, Al lup)
19. 하나님은 목자(여호와 로이, Jehova Roi)
20. 하나님은 능력(여호와 체바오트, Jehova Sebaot)
21.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여호와 추리, Jehova Tsuri)
22.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아도나이, Adonai)
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마누엘, Immanuel)
24. 하나님은 말씀(로고스, Logos)
25. 하나님은 용서 하시는 분(암모스, Amnos)
26. 하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자오 히도르, Zao Hydor)
27. 하나님은 빛(포스, Phos)
28. 하나님은 거룩한 영(프뉴마, Pneuma)
29. 하나님은 사랑(아가페, Agape)
30.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하사, Has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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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사무엘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니라
한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기쁨의 원천은 사무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수치와 고통에서 건져 내고 영예로운 위치로 올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대적 브닌나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응답해 주신 하나님보다 응답 자체를 더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나는 또한 세계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와는 다르게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이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번영과 쇠퇴, 행복과 불행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예언적 성격을 띱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왕권이 수립될 것을 내다봅니다. 이 왕권은 메시아의 모형인 다윗에서 첫 실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서 완전히 성취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대적을 깨뜨리시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왕입니다.
한나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단순한 감사 찬송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우주적인 메시아의 통치를 언급하는 구속사적인 대 예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찬송은 우주적 및 특히 경제, 출산, 신분, 등과 같은 개인적 문제에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세상만사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할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본 찬송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 하는 이상적인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임도 노래합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 멀지 않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세워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왕국의 건설을 준비할 자는 바로 사무엘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한나의 찬양은 사무엘의 소명을 미리 예시해 주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볼 때 한나의 찬양은 단순한 인간적 감성을 초월한, 성령에 감화되어 읊은 일종의 예언 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를 꿰뚫고 있으니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황금 열쇠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일명 ‘구약 교회의 송가’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구속의 찬가로는 미리암의 노래, 드보라의 노래, 그리고 신약의 마리아의 노래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여경지근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주경지근(主敬知根)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다섯 가지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씀을 사자성어로 간략하게 줄여서 성명한다면 "여경지근"이라고 하겠다.
첫째,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가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의 학업성취가 향상된다.
교육은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권위가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의 권위는 '권위주의'와는 구별돼야 한다. 진정한 권위는 교육에 있어 너무나 소중한 가치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육이 회복될 때 학업성취는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둘째, 경청할 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경청하게 될 때, 그 집중하는 태도는 그대로 학업 태도로 전이된다. 자녀가 당장 몇 점의 점수가 오르고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청하는 태도다. 왜냐하면 경청하는 태도는 고기잡는 법을 알아서 수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는, 지식을 얻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부모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공손한 자세로 눈을 부모님의 눈에 맞추면서 정성껏 경청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더 깊이 알아갈 때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고(벧후1:4), 그의 성품을 닮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맺게 되는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지혜의 샘과 같아서 지속적으로 학업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지금 성적이 높지 않아도 또한IQ가 높지 않아도 충성스럽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자녀는 향후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크리스천의 자녀교육 성공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녀교육의 성공은 우리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 일류 기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된 자들이다.
넷째, 비전과 꿈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저도 모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라는 비전과 꿈이 생기는데 이 비전과 꿈이야말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동기유발'이다. 왜 공부하는지를 알고 공부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공부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도 왜 공부하는지를 모른다. 대부분이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그리고 부모의 강제에 의해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공부한다. 그래서는 공부의 능률이 오를 리가 없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품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 대한 비전과 꿈은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갖게 된다. 이러한 교육의지를 지닌 학생에게는 학업성취의 향상이 따라 오게 된다.
우리 자녀들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것은 당장의 성적을 올리는 일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게 될 때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깨닫게 된다. 자기 인생의 목적이 생기게 되고 달려갈 방향이 잡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나의 달려갈 길'(행20:24)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마이 웨이'(My Way)를 깨닫게 되면 달려가게 되고, 그런 비전과 동기가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섯째, '통찰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이 땅의 보이는 실재가 아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떠서 초월을 바라봐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거룩한 상상이다. 이 상상이야말로 계시와의 접촉점이 된다.
실재하시는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는 이 거룩한 상상력이 계발된다. 이것은 엄청난 지혜의 보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고, 초월의 세계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모든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경외할 때 갖게 되는 통찰력은 마치 정찰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는 모퉁이길을 돌아설 때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랐지만, 높은 곳에서는 전체를 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갖게 되는 이 통찰력은 공간적으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준다.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가삭 어떻게 시작되서 어떻게 발전해서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녀들 개인의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도 갖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얻게 되는 이 지혜는 단지 지식과 정보를 얼마 더 습득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이 지혜는 모든 지식의 샘과 같아서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수많은 지식을 얻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더 많은 지식을 쌓는 일보다 먼저 이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신앙-태도-학업의 관계 구조다. 신앙과 태도, 그리고 학업은 서로 연결돼 있다. 여경지근의 원리는 바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권위를 인정하고 경청하게 되며 새 성품이 형성되며 꿈과 비전이 생기고 통찰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학업성취를 향상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성경적인 교육법은 이 세 가지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세우고 그래서 그의 태도가 달라지고 그 태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은사가 개발되도록 돕는 것"이라며 "신앙과 태도가 형성되지 않은 채, 억지로 공부시키며 학업 성적만을 올리려는 노력은 지혜롭지 못하다. 왜냐면 기본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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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로페 / 라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술로 나온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다른 경우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나눌 여호와 로페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배경 스토리
야곱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요셉을 통하여 애굽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7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215년이 지난 후 출애굽했을 당시에는 약 8500 배가 늘어난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늘어나고 번성하자 애굽의 바로 역시 이를 두려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이 늘어나 심히 강대해져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할수록 더욱 번성하고 늘어나니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니라.” (출애굽기 1:8-12)
그리고 바로는 늘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히브리어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이로 인하여 남자 아기들을 나일강에 던지라고 하는데 이 당시에 이미 아론은 태어났고 모세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런 명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아론과 모세는 3살 차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론은 나일강에 버리라는 바로의 명이 내려지기 전에 태어났기에 (하지만 산파들이 바로의 명을 어겼기에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숨기울 필요가 없었던 거 같습니다.
모세 또한 태어났을 때에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어머니인 요게벳이 모세를 3달 동안 숨기다가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보내어집니다. 이때 정말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의 딸은 아버지인 바로가 히브리인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를 불쌍히 여겨 히브리 사람 아기인 모세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누이인 미리암이 바로의 딸에게 유모를 부르자고 부탁하자 이를 허락하게 되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결국 모세를 양육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9) 정말 요게벳과 미리암의 지혜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젖을 떼기 전까지 양육하였는데 늦으면 3-4살까지 모세를 키웠던 것입니다. 요게벳은 모세가 장성하면서 아이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두가지 설이 모세와 바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한가지 설은 바로가 모세를 신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설은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를 탐탁지 않게 여겨 모함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이든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40년 동안 지내게 됩니다. 애굽의 왕자로써 애굽의 모든 학문과 기술 등은 습득하게 되고 애굽인처럼 자랐겠지만 모세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름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 광야로 쫓겨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에게 장가를 가 40년은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때를 정하시는 엘 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는데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까지 가서 떨기나무 불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에게 세우라고 요구하는 모세였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바로 앞에서 담대하게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비하신 유월절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 죽음을 면하게 하십니다. 쓴 나물, 무교병, 어린양은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유월절은 215년 동안의 애굽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출애굽하게 되는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다시 한번 홍해에서 바로가 이끌고 오는 군대들을 막으셔서 홍해를 가르셨으며 그 마른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게 하십니다.
여호와 로파 소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출애굽기 15장) 힘든 노예 생활을 마치게 해 주시고 자신들을 쫓던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멸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찬송하였을까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사 애굽에서부터 다시 자신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보며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었을까요? 비록 급하게 애굽 땅에 나오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애굽인들로부터 많은 보물도 받게 하시고 자신들을 압제하였던 바로의 손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위대한 분인지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지만 사흘 길을 행하는면서 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물 없이 삼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해 마음이 상했을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만나게 되지만 써서 마시지 못했는데 이때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물을 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질서를 지키면 물을 마셨을까요? 너무나 목이 마른 상황에서 물 속에 뛰어들어가 물을 마시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3일 동안 물을 못 마셔서 웬만하면 물을 그냥 마셨을텐데 물이 얼마나 쓰면 마시지 못했을까요? 그 실망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에는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삼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하니깐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자마자 물을 3일동안 마시지 못하게 하시고마시지도 못하는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셨을까요? (이는 모세가 그냥 백성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고 인도하심으로 마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만사형통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걱정 근심없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니, 그러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내가 어리석은 자 같이 말하나 나는 더하니라. 수고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에 갇히기도 더 자주 하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며 내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내가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으며, 세 번 파선하였는데 꼬빡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잦은 여행에 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중에서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자주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자주 굻고, 추우며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2:23-26)
이스라엘 백성도 이제 자유인으로 만사형통할 줄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흘 길에 물을 만나지 못하게 하시고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도 해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면 안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도 우리 모습을 직접 보게 해주시고 그 와중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긍휼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 속에 있는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그가 자신을 보고 가서 자기의 생김이 어떠한 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케 하는 완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23-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신실하게 붙잡고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사 출애굽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215년 동안 애굽에 지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다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었으므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부터 건져내신 것입니다.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기 15:2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여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여서 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 출애굽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15:26)
아니 아도나이 (여호와/야훼) 로페(카) – 히브리어 발음
여호와 로파의 뜻
로페카 어근 = 라파/Rapha (치료하다) = 본질적으로 치료해주시는 하나님
상징적인 의미로도 치료하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육체인 질병인 외에도 정신적, 영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치료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질병만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곳곳에는 치료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데 이 부분은 유대인들이 지적을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야훼 로파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라고 표현하심으로 구약에 나오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든 자들이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원을 찾아가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원이 있어도 환자가 먼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씻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의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 분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배워야 하는데 인정을 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 찾아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참된 치료자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특정한 의사와 약들을 그리고 다른 방법도 사용하시지만 성경을 보면 우린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아픔을 아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그런 도구를 통하여 우리가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들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아사 왕은 발에 중병을 앓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니의 말씀을 전한 선견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몇 학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에 병이 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음에도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역대하 16:12)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리게 되자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치료를 바로 해주실 수 있으셨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를 치료하십니다.
“이에 이사야가 명하여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그들이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열왕기하 20:7)
나아만 장군 또한 그 예 중 하나입니다.
“엘리사가 사람을 저에게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여전하여 네가 깨끗하게 되리라” 하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말하되 “보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환처 위에 손을 대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0-11)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눈먼자를 바로 고치실 수 있었지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고치신 적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 하는 뜻이라. 이에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9:6-7)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세상에서 최고의 의원에게 아뢴다 하여도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인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로 하고자 할 때에 내 마음이 낙담하는도다. 보라, 딸 내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여호와께서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내 백성은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도다’ 하는도다. 이는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두려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예레미야 8:18-22)
길르앗은 약재로 사용되는 유향으로 유명하고 의원들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약재로도 의원들도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치료자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이 우상 섬김인데 본질적인 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육체의 아픔과 상처도 치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자이신 여호와/야훼 로페에게 모든 것을 아뢰고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 또한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치료자이심을 고백하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이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사오니 이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같이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시편 38: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대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리로다.” (시편 103:1-4)
육신의 질병보다도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로 보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던지게 하셔서 물을 달게 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죄와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질병은 죄 때문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질병이 생겼을까요? 죄가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는 질병이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병과 죽음은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거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상함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로 너를 징계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리운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0:12-17)
그럼 우리가 겪는 모든 질병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만 병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또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원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리는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길 가실 때에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그의 제자들이 묻기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1-3)
다른 예는 바로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큼 의인이었음에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욥 자신도 육신적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욥을 위로하겠다고 온 세 친구들은 계속 욥을 죄인으로 몰며 회개하라고 하지만 욥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죄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므로 겪는 모든 질병이 죄의 댓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죄의 댓가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악한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대주재라고 고백도 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며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도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신장을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어찌하여 너희가 매를 더 맞겠느냐? 너희가 더욱 더 반역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거늘 상처를 짜고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사야 1:5-6)
이스라엘 백성들은 툭하면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라의 쓴 물보다 더 쓰고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자신들의 평가를 좋게 내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보이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만 스스로 높이며 자신 멋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대로 자신이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을 살피면 치료를 받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이를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데 바로 만나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을 의미합니다. 육일 동안은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고 육일 째에는 두 배로 거두고 제 칠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지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것을 쌓아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를 쌓아두어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지 못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쌓아두는 것 또한 썩어질 것입니다.
이는 질병 뿐만 아니라 영혼이 망하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것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질병말고도 죄의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분이 바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가득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서 순종할때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책임지고 인도해주시는 분이 바로 대주재이시고 창조주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 로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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