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궤(언약궤, 법궤, 증거궤) 안에는 두 돌판(율법판, 증거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모세의 지팡이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9에서는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언약궤가 솔로몬 성전에 안치될 당시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언약궤 안에 모세 때에는 3종류의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2종류는 분실되고 솔로몬왕 때에는 1종류만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사울왕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 빼앗겼는데 (삼상4:11,17) 그 때 2종류는 분실하고 1종유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2종류나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언약궤 안에는 처음부터 1종류인 두 율법판만 들어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명히 율법판은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출애굽기40:20에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라고 했고, 신명기10:5에도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했고, 민수기17:10-11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왜 3종류가 있었다고 한 것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구약의 율법과 제도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관하게 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로 보면 그것들이 언약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3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https://nykcn.org/eonyaggwe-culaegubgi-25-10-22
언약궤(言約櫃)
계약(契約)의 궤(櫃)란 무엇입니까?
언약궤 즉 계약의 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설계대로 만든 신성한 상자였습니다.
계약의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돌판 즉 ‘증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동영상 자료
1. https://www.youtube.com/watch?v=qum9uvS6uVI
2. https://www.youtube.com/watch?v=o32r4gRT70k
3. https://www.youtube.com/watch?v=ceZHlc55HCg
신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 9장과 요한계시록 11장에 소개됩니다.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언약궤에 대한 질문(출 25:10-22, 37:1-9) 1. 언약궤를 만든 나무는?(10절)
2. 언약궤의 크기는?(10절)
장 : 2 규빗 반
광 : 1규빗 반
고 : 1규빗 반
3. 궤를 둘러 싼 것은?(11절)
4. 증거판을 어디에 두었나?(16, 21절)
5. 속죄소를 만든 재료는?(17절)
(시은좌)
6. 그룹을 만든 재료는?(18절)
다양한 명칭
증거궤(출애굽기 30:6)
법궤(레위기 16:2)
언약궤(여호수아 3:3)
여호와의 궤(여호수아 4:11)
하나님의 궤(사무엘상 3:3)
언약 넣은 궤(역대하 6:11)
주의 능력의 궤(역대하 6:41)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일곱째 나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여호수아 3:15-17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만나 항아리(출애굽기 16:1-36)- 애급에서 나온 후 이월 십오일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시험하리라(4b)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민수기 17:1-10)
-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출애굽기 32:1-20, 34:1-35)
-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신명기 10:5b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 불신과 우상숭배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만나 항아리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 : 불신과 우상숭배 예레미야 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언약궤의 역사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
출애굽기 25:16, 25:21)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 증거판 / 5715, 에두트(ʽêdûwth) עֵדוּת 1. 하나님의 계율, 율법
* 넣으라 / 5414, 나탄(nâthan) נָתַן 1. 주다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출 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 16:33-34)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왕상 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 사라진 것들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1차
가. 40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586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첫째, 만나 /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출애굽기 16장)
2.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수기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둘째, 아론의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250명이 직접적으로 죽고 불평에 동참한 자 14700명도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셋째,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3000명이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6. 적용
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가 없다는 것은 성경 원본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사본이나 번역본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출간되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혁한글판만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은데 사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이전에는 King James Version만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번역본들은 무시했었다가 이런 선입견이 없어진 후 수많은 번역본이 나왔으며 그 중에 훌륭한 번역본들이
많습니다.
서로의 미흡한 것을 보안하다보면 원본에 더 가까운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을
의거하면 그 안에는 세 가지 곧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은 두
돌판만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9절
역대하 5장 10절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이말씀과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과의 다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도 과거에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언약궤가 성막에 있을 때의 말씀이고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기록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는 세 가지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다윗 시대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안을 쳐다 볼 때 꺼냈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4-5년
전 앞의 두 군데 말씀과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7장의 말씀을 토대로 언약궤 안에는 항상 두 돌판만 있었고 다른 두 성물은
언약궤 앞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 16:33-34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장 4절에서 만나를 증거판 혹은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가만
생각하면 누가 감히 언약궤에 손을 대어 뚜겅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성물을 만질 수 있었겠습니까?
레위 사람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가지 않고 수레에 실고 가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무의식중에 언약궤를 붙들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과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열어 보았을 때도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만져보기도 전에 쳐다 본 즉시 수많은 사람들(오만 칠십
명-표준새번역, NRSV, KJV등등, 칠십 명-NIV, 현대인의 성경, NIV, RSV, NRSV등등 우리가 주로 보는
개역성경에는 (오만)칠십 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제 생각에도 작은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아 칠십 명이
맞는 것 같음)이 즉사한 사건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안’이라는
헬라어 ‘엔’은 보통 ‘안에’라고 해석하지만 그 외에도 ‘에,’ ‘위에,’ ‘에게,’ ‘가운데,’ ‘중에,’ ‘동안’ 영어에서
‘with’(마 16:28; 요일 5:6), ‘by'(롬 5:9; 히 9:22; 계 1:5)로도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이나 그 앞에 있는 만나를 담은 금항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같이 묶어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엔'을 ‘그 안’이 아닌 단순히 ‘거기에’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 거기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이와 같이
전치사 하나를 ‘안’으로 해석하느냐 ‘에’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안’이 아닌 ‘에’로 해석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약의 말씀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증거판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판 앞에 두라는 말씀으로 그 안에 두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을 언약궤에 옆으로 세워 놓았을 리 만무하고 가장 먼저 두 돌판을 넣어 바닥에 놓았을 것이기 때문에 만나를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증거판 위에다 얹어 놓으라고 명령하시지 그 앞에다 놓으라고 명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의
증거판이나 민수기 17장의 증거궤나 히브리 원어는 ‘에두트’로 똑같은 단어로서 언약궤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성물, 곧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증거궤 곧 언약궤 앞에 두었던 것이지 그 안에 넣은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세 가지가 다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언약궤의 크기가 가로 이 규빗 반(약 113cm) 세로와 높이가 일
규빗 반(약 68cm)으로써 항아리, 지팡이뿐만 아니라 두 돌판이 들어가기에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팡이가 지금
노인들이 갖고 다니는 지팡이만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지만 그 당시 지팡이는 단순히 걷는데 의지하는 작은 지팡이가
아니라 양을 치는데도 사용하고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사람의 키보다도 긴 지팡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 안에 언약의 두
돌판, 곧 증거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언약궤 혹은 증거궤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지요.
‘그 안에’를
언약궤 안으로 해석하고 있어 히브리서 9장 4절 말씀의 해석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가 무척 두렵고
떨립니다.
성경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사본들과 번역본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Trinity 신학교 교수인 Wayne
Grudem교수가 언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약 1000년의 차이가 있는 두 사본을 살펴보아도 많은 차이가 없으며 그것도 주로
접속사나 전치사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경의 양피지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인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산 사본이 원본과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번역들도 원본과 별 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구원 얻는데 충분한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Grudem 교수는 “만일 사본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실수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실수로 잘못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계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수정하므로 성경 원본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연구하면서 묵상하기를 원하시고, 성경의 비밀과 난해한 부분의 해석들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심으로 모든 비밀과 해석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확실히 알게 되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법궤에 대한 상상도
법궤가 만들어 진 것은 BC 144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만들었습니다.
아래 사진들도 모두 상상도이거나 상상 모형도의 사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성경의 내용은 특히 구약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세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가지가 들어가있다는 것은 신약 히브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 십계명 돌판(두번째) 돌판을 법궤(증거궤)에 넣은 것은 맞습니다.
출애굽기 22장입니다.
첫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출 32장) 다시 새 돌판을 받습니다(출 34장).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 지며”(출 25:16)
그런데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16: 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호멜(Homer. חֹמֶר, Homer)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민수가 17: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즉 구약 성경에는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함께 넣어졌다는 구체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볼 때 광야의 성막이 자주 이동하는 동안 이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런 랍비들의 성경 해석을 따라 히브리서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이미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솔로몬 시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만 나중 솔로몬이 B.C. 959년 경 성전을 짓고 나서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고 확인할 때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열왕기상 8: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돌판을 제외한 만나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광야 40년 동안에 한시적으로 법궤 안에 넣어져 보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후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광야의 성막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 법궤도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주전 약 586년 전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은 약탈되고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핵심 귀족과 인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때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언약궤 곁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책을 법궤 안에 넣지 않은 이유는 수시로 율법책을 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1:24-26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정말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며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 자체가 주술적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법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듭남과
변화가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에 이용하는 에벤에셀 전투에서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도록 놔두십니다.
법궤 숭배가 아니라 내면의 개혁이 중요함을 가르쳐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회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시고 법궤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훗날 바벨론 포로로 이스라엘이 잡혀갔을 때 예레미야는 이 법궤에 대한 문제를 정확하게 신앙적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언을 남깁니다.
이 부분을 대단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3:16-17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2달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고 1년 가까이 시내산 기슭에 머물며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립한 후 훈련받고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10장에 이르러 드디어 광야로 떠난다.
출애굽 후 만 1년 1개월 5일이 지난 때였고(B.C.1445년) 시내산에 도착한 때로부터는 만 11개월 5일이 지난 때였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2월 20일에 머물던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향한다.
드디어 BC 1445년 2월 20일(민수기 10:11)
구름이 증거의 장막에서 떠올랐다.
두렵고 떨렸다. 막막한 평탄치 않은 광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광야! 거치지 않을수는 없는 것인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광야였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
-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
블레셋의 해안 도시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다.
▶(수
13:3)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동맹을 결성한 막강한 블레셋 군대; 그
길외에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는 가나안에 갈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바란광야. 수르광야, 에담광야,
신광야, 네겝광야, 시내광야 가 놓여있다. (인생에도 그런 피할 수 없이 나아가야하는 광야가 있다!)
두려웠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저 광야,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바란)광야로 나아가면서 2지파의 맨 앞장 서서 간 것이 법궤였다.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길(바란광야)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10: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가 기도한다!
모세도 두려웠다.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운다. 원래는 정찰 수색대를 앞세워야하는데 군인들이 아니라 법궤를 앞세웠다. 봐도 봐도 막막한 광야,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불안하고 두려웠다. 믿고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진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들이 광야길을 걸어간 것을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길도 그러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간다.
<그대에게 가는 길> 방기순; 복음성가 가수; 서울교회지휘자;
그대에게 가는 길 (하나님께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겐 힘이 되었지
이제는 내가 길이 되어 그대를 향해 가리니
그대에게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첫사랑을 향한 그리움, 고향을 향한 그리움, 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힘이 되었을까?
법궤였다.
그 법궤가 전진할 때는 가장 앞에 있었다.
진을 칠 때는 그 법궤가 12지파의 가운데에 있었다.
▶ 영어성경은 노아방주, 모세의 갈대상자를 ARK로 번역했다(원어, 테바)
그리고 법궤도 나무상자라는 의미에서 ARK로 번역했다.
노아 방주와 모세 갈대상자의 특징은 방향과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노나 돛이 없다. 이끄시는대로 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야한다.
그런데 법궤 속의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는 기적의 상징 뿐만 아니라 사실은 죄의 상징이요, 은총의 상징이었다.
▶
만나, 출애굽기 16장 배고파 죽겠다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다(16: 1-12절 7번 원망이라는 말이 나타남) ▶ 원망과 불평은
성격이나 습관이 아니라 죄이다! [민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오래 하면서 서슬프게도 노예근성의 언어, 불평과 원망의 언어습관이 생겼고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기대고 의존하고 나눌 줄을 모르고 드릴 줄을 모르고, 공짜근성, 거지 근성이 생겼다.
▶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불평은 죄인된 인간의 저열한 성품을 만족시키는 쾌감이 있다.
불평을 듣는 것도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욥->입술로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욥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불평은 마귀의 언어요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다.
▶
아론의 지팡이 사건 [민16:2]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으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게 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까지 나게 한 사건!! 250명이 죽은 사건!
더 나아가 불평에 동참한 자 일만사천7백명도 죽는다. 그런데 또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다. 살구나무;
깨어 지켜보시고 지키신다는 뜻이다.
▶ 십계명의 돌판도 두번째 돌판이다. 불신으로 우상을 만들어 춤추는 백성들! 분노로 깨뜨린 돌판, 출 32장, 34장 다시 만들어주신 돌판, 또 용서해주셨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이제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뜨거운 눈물의 고백이다!
십계명 돌판의 불신, 만나의 원망, 아론지팡이의 교만과 거역, 그리고 용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받았다. 기회를 얻었다. 고쳐보겠습니다! 소망을 다시 세운다. 그 은혜로 살겠습니다!!
▶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한다. 돌판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상징한다. 만나는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
예수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즉 예수님을 믿는자에게는 길이 열리고 소망의 싹이 트고 열매를 맺으며,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이 있고 만나로 상징되는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충만할 것이다!
인생의 광야길이 힘들어도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함께 법궤를 메고 가는 한 반드시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만나를 내려주시며! 진리로 사는 자의 만족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아시는가? 여호수아 4장의 기적! 40년 광야의 마지막 순간의 기적!! 그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가정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마음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삶의 길에 법궤가 있는가?
인생이라는 광야길,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오늘도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는다.

출애굽기 25:8-10, 16.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언약궤의 구조
가로가 2.5규빗, 세로가 1.5규빗, 높이가 1.5규빗(111 x 67 x 67cm)
궤를 만든 재료는 "조각목" 즉 "아카시아나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안팎을 금으로 입혔으며 둘레에 금테 장식이 있었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덮개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금으로
만든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얼굴은 덮개를 향해 있었으며 날개가 덮개 위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궤의 네 다리 위에는 금으로 주조한 고리가 각각 한 개씩 있었습니다. 그 고리에 금을 입힌 아카시아나무 채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
채를 이용해 궤를 운반했습니다.—
출애굽기 25:10-21; 37:6-9.
-
-
위치. 처음에 궤는 장막의 지성소에 놓여 있었습니다. 장막은 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숭배를 위한 이동식 천막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백성은 그 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40:3, 21)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6:2; 히브리서 9:7) 나중에 궤는 솔로몬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로 옮겨졌습니다.—열왕기상 6:14, 19.
-
목적. 궤는 신성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물품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궤는 속죄일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레위기 16:3, 13-17.
-
내용물. 궤에 처음으로 보관한 물품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40:20) 나중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도 그 궤에 보관했습니다. (히브리서 9:4; 출애굽기 16:33, 34; 민수기 17:10) 그 금항아리와 지팡이는 그 후 언젠가 궤에서 꺼낸 것 같습니다. 궤를 성전으로 옮겼을 때는 그 물품들이 궤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8:9.
-
운반. 궤는 레위 사람들이 아카시아나무 채를 사용해 어깨에 메고 옮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7:9; 역대기상 15:15) 채가 항상 궤에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은 궤를 만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5:12-16) 궤를 운반할 때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칸막이 휘장”으로 궤를 덮었습니다.—민수기 4:5, 6. *
-
상징적 의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성소의 궤 위와 이스라엘 진영에 있었던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와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레위기 16:2; 민수기 10:33-36) 또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셨다”고 말하는데, 이 그룹들은 궤의 덮개에 있었던 두 그룹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상 4:4; 시편 80:1) 따라서 그 그룹들은 여호와의 “병거의 표상”이었습니다. (역대기상 28:18) 궤에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므로, 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후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시편 9:11.
-
명칭. 성경은 그 신성한 상자를 지칭하는 데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중에는 “‘증언’의 궤”, “계약의 궤”, “여호와의 궤”, “주[여호와]의 힘의 궤” 등이 있습니다.—민수기 7:89; 여호수아 3:6, 13; 역대기하 6:41.
궤의 덮개는 “화목 덮개” 즉 “자비의 자리”라고 불렸습니다. (역대기상 28:11;
영문 킹 제임스 성경) 이 표현은 속죄일에 덮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덮개를
향해, 덮개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느님과 화목하게 하는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 죄를 속하고 덮었습니다.—레위기 16:14-17.
계약의 궤가 지금도 존재합니까?
계약의 궤가 지금도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 궤와 관련이 있는 계약이 예수의 희생에 근거한 “새 계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궤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예레미야 31:31-33; 히브리서 8:13; 12:24) 따라서 성경은 계약의 궤가 더는 없어도 하느님의 백성이 아쉬워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3:16.
새 계약이 맺어진 후에 사도 요한은 환상에서 계약의 궤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 계시록 11:15, 19) 이 상징적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그분이 새 계약을 축복하신다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궤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의 궤가 있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 사람들과 전투를 할 때 진영에 그 궤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이스라엘 사람의 불충실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 7:1-6) 오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의 궤를 전쟁터로 운반해 갔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들이 진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2; 4:1-11)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전쟁에서 계약의 궤를 빼앗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때까지 그들에게 질병으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사무엘상 5:11–6:5.
언약궤의 능력(사무엘하 6:6-12)
이스라엘의 출애굽 광야 생활 때,
시내산에 오른 모세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고 성막의 제조법과 절기와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와 같은 지시하심에 따라 모세는
성막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진 것은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다.
여호수아 이후에는 주로 '언약궤(Ark of Covenant)'라고 불렀고, '법궤(Ark)'라고도 불렀다.
모세 /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
여호수아 이후 / 언약궤(Ark of Covenant), 법궤(Ark)
언약궤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형이며, 하나님 능력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언약궤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저주와 축복이 결정되기도 했다.
'증거궤' 혹은 '언약궤'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예표해 주는 것일까?
진실과 성실함으로 이를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언약궤
1. 설계와 제조 :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제공하신 것들은 십계명의 두 돌 판과 성막 제조법과 절기와 제사법이다.
성막을 제조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정교함이 요구된 것은 단연 '하나님의 언약궤'였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궤(Ark)를 만들고 그 위에 덮게 즉, 속죄소를 만들어 그
위 양 끝에는 날개를 편 천사가 언약궤를 내려 보고 있게 만들어졌다.
하나님께 설계도를 받은 모세는 손재주가 특별한
브살렐로 하여금 이를 제작하고, 순금을 입혀 황금빛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 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두었다.
이는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예표해 주고 있다.
성부(聖父) 하나님의 예표 : 십계명의 두 돌판(말씀의 하나님)
성자(聖子) 예수님의 예표 : 만나를 담은 항아리(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성령(성령) 하나님의 예표 :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성령의 능력)
2. 보호와 보존 :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벽을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으며, 그 안에 뜰이 있고 뜰 안에 번제단과 물두멍을 만들어 두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으며, 가장 깊은 곳에 지성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었다.
성소
오른쪽에는 떡상, 왼쪽에는 정금등대, 중앙 깊은 곳에는 분향단이 자리했으며, 분향단 뒤에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 지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매년 한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진행할 때에는 성막의 모든 기구를 레위인이
운반했으며, 특히 언약궤는 덥게로 싸고 체를 고리에 매어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주의해서 운반해야만 했다.
3. 상징과 능력 :
성막의 뜰은 해와 달과 별의 자연의 빛이 비춰지고, 성소 안에는 정금등대의 불이 있었으며, 지성소 안에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쉐키나)만이 빛났다.
지성소 임한 하나님의 임재는 천국에서 오직 하나님 영광의 빛만이 비춤을 예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나타나심이며, 그곳에서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곳, 즉 속죄소가 되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옹위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언약궤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하게 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언약궤로 인해 저주 받은 자들
언약궤를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소홀이 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 자들 역시 성경에 기록돼 있다.
1.엘리
제사장(삼상 4-6장)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워 나가 승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에 옮겼다. 이 안에는 언약궤를 마치 불신자들이 사용하는 부적처럼 임시방편으로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업신여기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 좋을 대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블레셋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으며, 전쟁에서 자신의 두 아들도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는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또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 3만 명이 죽었으며, 엘리의 후손에게 복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됐다.
한편,
블레셋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취한 후 나라에 하나님의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블레셋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7개월 만에
젖을 뗀 어미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려 보낸다. 이때 벧세메스 사람 70명이 언약궤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뚜껑을 열었다 죽는다.
2. 사울왕 :
사울은 40세에 왕이 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생각도 안 했고 방문하지도 않았다. 법궤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교만해 져 자신이 제사장
직분까지 수행 하려고 했던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 결국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이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해 자기 칼에 스스로 엎어져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3. 웃사(삼하 6장)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삼만 명을 거느리고 산지 아비나답 집을 방문해, 오랫동안 방치해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야효가 수레를 몰게 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도중 수레가 다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궤를 붙들었다. 이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는 여호와의 궤 옆에서 즉사한다. 이것을 본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들여오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았다.
언약궤로 인해 축복 받은 자들
1. 여호수아 :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완강한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시고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을 건네고 여리고 성을 섬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시대로
준행하여 여호수아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에발산에 한 단을 세우고 여호와의 율법을 돌에 새기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 앞에서
그리심산(축복) 쪽이나 에발산(저주) 쪽에 서게 하였다. 이는 언약궤는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저주가
됨을 말해준다(수8:32-33). 오랜 세월이 지나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마을)에 모이게 한 뒤,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을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선언하고 축복의 길을 가게
됐다.
2. 오벧에돔(11절) :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언약궤를 신령과 진정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 온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고 누리게 된다.
3. 다윗 (12절 이하) :
언약궤로 인해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복 받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 성으로 오게 되었다. 다윗은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면서 자기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기뻐하고 즐거워 했다.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 후손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리라(행13:22)”고
약속하신다.
실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약속은 불분명하고, 또한 약속이 없는 증거 역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언약궤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이며, 또한 이 축복이 분명히 임하게 됨을 증거해주는 증거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름 역시
'언약궤' 그리고 '증거궤'인 것이다.
오늘날의 증거궤, 언약궤는 무엇일까?
오늘
날 과연 언약궤는 무엇이며,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그런데 오히려 언약궤 자체는 사라져야만 함이 마땅하다.
증거궤, 언약궤는 영원한 축복의 모형이었으며, 축복의 본체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속죄와 속건 제물이 되심으로 은혜와 축복 증거 그 자체가 되셨다.
신약에 와서는 축복과 저주를 갈라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며 이것은 복음(Gospel)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영생의 길이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고 증거한다. 사람이 구원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즉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요3:14).
외적인 증거궤, 언약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의 구원을 확실하고 진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내 심령의 중심에 모신다면, 주님의 임재를 항상 체험하며 매일 기쁨과 평강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공부
1. 성막의 기구들을 말하고 그것들이 성막의 어디에 놓였는가?
2. 언약궤가 어떻게 제조되었고 보관 되었으며 어떻게 운반해야 했는가?
3. 언약궤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4. 언약궤로 인하여 축복을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5. 오늘날에 언약궤의 실체는 어떻게 되었고 왜 그래야한 했으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언약궤를 무엇, 누구에게 비유해서 생각해야 할 것인가?
6. 사울 왕의 잘못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말해보라.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지난날에 가졌던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 생각을 말해보라.
2.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오늘날 현재는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가 말해보라.
언약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문제는 수세기 동안 신학자, 성경 연구자 및 고고학자들을 매료시킨 질문입니다.
왕이 된지 십팔
년째 되던 해에 유다의 요시야 왕은 언약궤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돌려 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역대하
35:1-6; 열왕기하 23:21-23).
그것이 언약궤가 놓인 위치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입니다.
그 뒤 40년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10년이 안 되어서,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남겨진 것을 가져가고 성전과 성읍을 불에 태워 흙더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가져갔습니까?
성읍과 함께 파괴되었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 시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에 성전을 습격했을 때
처럼, 누군가가 언약궤를 치워서 안전하게 숨겼던 것입니까?
시삭이 언약궤를 가져갔다면 어떻게 요시야 왕이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돌려 놓으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언약궤가 애굽에 있었다면 (“잃어버린 성궤의 침략자들”의 줄거리처럼), 레위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9은 언약궤가 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몇몇 사람들은 이 구절 때문에 언약궤가 하늘로 옮겨져서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하늘에 대한 환상에서 본 언약궤는 아마도 모세가 지은 언약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에 있는 물건들이 "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히브리서 9:23)이며,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성소 자체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히브리서 8:5)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1장은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사건을 알리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다룹니다.
요한이 하늘에 있는 언약궤를 잠깐 보게 된 것은 아마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과
함께 계시며, 진정한 예배가 곧 회복될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경에 속하지는 못한
마카베오기 하권(2 Maccabees)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바벨론 침략 직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장막과 언약궤를 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유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그 산으로 갔습니다(느보산. 신명기
31:1-4). 예레미야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장막과 언약궤와 향단을 넣을 수 있는 동굴 속의 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그곳에 두고 입구를 막았습니다"(2:4-5). 그러나 "그를 따라온 사람들 중에는 산으로 올라오면서 길을 표시하려고
의도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그들에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시 모으고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주께서는 이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며, 모세
시대처럼,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될 것을 기도했을 때처럼, 구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2:6-8).
이 간접적인(2:1 참조)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록 그 자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언약궤의 위치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는 랍비
슐로모 고렌(Shlomo Goren)과
예후다 겟츠(Yehuda Getz)의
주장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언약궤를 훔쳐가기 전에 성전의 산 밑에 숨겨져서 그곳에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행하게도,
성전 산은 지금 이슬람교의 거룩한 장소인 바위 사원 Dome of the Rock이 있는 곳이며, 지역 무슬림 공동체는 그곳의
발굴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 고렌과 겟츠의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탐험가
벤딜 존스(Vendyl Jones)는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발견된 유물인 쿰란 동굴 3번의 수수께끼 같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 Copper Scroll가 바벨론 침략이 있기 전에 언약궤를 포함한 여러 귀중한 보물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실제
보물지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두루마리에 열거된 필수적인 지리적 경계표를 아무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몇 학자들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는 마카비하 2:1및 4절과
관련된 실제 기록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입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이었던 그레엄 핸콕 Graham Hancock은 1992년에 <암호와
봉인: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 The Sign and the Seal: The Quest for the Lost Ark
of Covenant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언약궤가 고대 에티오피아 도시인 악숨 Aksum에 있는
시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B. A. S. E 협회의 탐험가 로버트 코르누크 Rovert
Cornuke도 언약궤가 지금 악숨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언약궤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자 마이클 샌더스 Michael Sanders는 이스라엘의 드야하랴 Djaharya 마을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사원에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아직 그곳에서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아일랜드 전통은 언약궤가 아일랜드의 타라 Tara 언덕 아래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아일랜드의
“무지개 끝에 있는 아일랜드의 금 냄비” 전설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론 와이어트 Ron Wyatt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갈보리 산 아래에서 보았고, 톰 크로체 Tom Crotser는 느보 산 곁에 있는 비스가 산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고고학 공동체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지지받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결국, 언약궤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케베오기 하권의 저자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친히 다시 오실 때까지는
잃어버린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언약궤에 담긴 세 가지가. 관련구절 히브리서 9:3-5
나.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언약궤의 역사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출" " ( 25:16)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출"( 16:33)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 "( 17:5)
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민"( 17:10)
다.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왕상" ~"( 8:9)
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대하" ~"( 5:10)
라. 사라진 것들
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차: 1
가) 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40- 2 -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2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586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5.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 1)
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2) , 3)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1) 만나
가)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출 장( 16 )
(2)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
늘 민( 11:5)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2) 아론의 지팡이
가)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명이 직접적으로 죽고불평에 동참한 자 명도 죽음: 250 , 14700- 4 -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 "
3)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가)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명이 죽음3000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다.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해도 쌌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라.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적용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 , )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출애굽기 25:10-16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성막에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의 금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을 지나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있으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 여호와(יְהֹוָה,
LORD)의 궤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법 즉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법궤라고 부른
것이며 또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불렀기 떄문에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판이 들어있는 궤이므로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우리는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말씀 안에 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the ark of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번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옛날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단어가 나오면 발음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여호봐 יְהֹוָה)"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으면 글자만 보아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맛소라 학파가 모음부호를 추가하면서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추가하여 만들어진 소리가 "여호와" "야훼"입니다. 그후 70인역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것을 계승하여 헬라어로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주님께서 우리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11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단강)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궤는
백성들보다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으며, 요단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백성들이
모두 무사히 건너자 다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또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도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성을 돌며 그곳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하신 약속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징벌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상징하고 있는 마귀와 원수가 되어 이땅에 오셔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하난미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만나셨고 모세에게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셨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선전 안의 모든 기물은 새로 만들었지만, 이 언약궤 만큼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언약궤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2규빗 반(114cm, 4 feet), 넓이와 높이가 1규빗 반(68.4cm, 2.5 feet)의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씌운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이처럼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물은 그것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거나 아니면 정금으로만 만들거나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책을 보면, 예전에는 책 가장자리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으로
성경의 테두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붉은 색은 사라지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막을 연구하면서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색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므로 금색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소
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들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만을 예표합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도 하는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은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가시 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본 것은 떨기나무의 불꽃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30절을 보면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즉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6절에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외롭게 자라는데, 이것은 이사야 53장2-3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든 언약궤는 이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정금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9장28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는 사도 요한이 용모가 변화되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두 돌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택한 대제사장은 아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 역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 이외의
다른이가 예수님 역할을 할 경우에는 다 죽을 것이라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옆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역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을 넣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9절과 역대하 5장10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6장33-34절에는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수기 17장1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민 17:10)
그런데 히브리서 9장4절을 보면,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로
성막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를 이동할 때에는 언약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었기 때문에 언약궤 안에 그 3가지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가 쓰여진 배경은 성막시대가 끝나고 솔로몬의 성전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더 이상 언약궤가 이동될 필요가 없으므로
원래대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9장과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5장을 비교하면서 성막을 이동하면서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분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대로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만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왕은 말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던 왕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 안에 두
돌판만을 넣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언약궤도 떡상처럼 4개의 발(feet)에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서 이동할 때에 그 고리에 채(긴 막대기)를 끼어서 메고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발'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파암(פַּעַם)'은 '모퉁이'(corner)라는 뜻도 있고 '발'(foot)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rner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foo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위쪽 코너에 고리를 만들어놓은 모습이었고, 그런 것은 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은
4개의 발이 있고 거기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아랫부분에 있는 발에 고리를 달아서 메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언약궤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거룩한 물건에 함부로 몸이 닿지 않도록 매우 세밀하게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하여서 가는 도중에 소가 날뛰는 바람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특별히 구별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 사람들의 풍속대로 새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궤를 메고 가도록 네 모퉁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놓았고, 그 고리에 집어넣어서 들고 갈 '채'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은 고리보다는 바퀴가 훨씬 편하며,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소가 끌고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서 소가 끌고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뻬어내지 말찌며"라며 언약궤를 메고갈 '채'를 고리에 항상 끼워두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메고가야할 성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이렇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까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합리적이며 편리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예배드릴 동안 예배당의 의자가 편한지, 목사님의 설교는 길지 않은지,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만 한지,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핀 다음 교회 시설을 살펴봅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에오콘이 없는 교회를
싫어하며 아이들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다닙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고 만족해야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궤의 모퉁이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금으로 씌운 막대기(채)를 끼워놓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면 즉시 채를 어깨에 메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된 상태로 주인의 명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항상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은 "설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즉시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아무리 준비하라고 해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 몇 번을 말해야 간신히 그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0장33-34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으며, 진을 칠 때에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진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또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보호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서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tablets of stone)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tablets of the heart)에 한 것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둘어있는 것이
'증거궤'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써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엉뚱한
말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런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어?"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저런 분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쩔쩔 매며 어찌할 줄 몰라서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고싶다면서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다가가서
"아니다. 이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고 우울해서 이렇게 낙망하면서 살 시간이 없다. 내 모든 시간은 빛으로서
살아가야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둠을 내쫓고 빛을 밝히 비추어주며 썩어가는 곳에는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며 또
소금이 간을 고르게 하듯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말을 해주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라며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언약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인과
성도는 매우 다릅니다.
교인은 알곡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중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곡이며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거룩을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 말씀의 칼로 단호히 무찌르고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말씀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또한 말씀의 파수꾼으로서 죄의 길로 달려가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궤 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삶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