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 God's Mind & Man's Mind(마태복음 16:2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3) 
God's Mind & Man's Mind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But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 stumbling block to Me; for you are not setting your mind on God's interests, but man's.

(도입 이야기)

스토코프스키(Stokovsky)는 런던 출생의 폴란드계 교향악단 지휘자로 유명하다.
그는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1912년~1936년 까지 필라델피아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가 어느 날 베토벤의 오버츄어(overture)란 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 곡은 연주 도중에 무대에서가 아니라 관중석 뒤쪽에서 트럼펫 솔로 연주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일종의 깜짝 연주인 것이다.
스토코프스키는 멋진 폼으로 신나게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관현악단은 우렁찬 화음을 만들어냈고 이윽고 관중석 2층에서 트럼펫 연주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지휘자는 관중석 쪽으로 획 몸을 돌려 트럼펫 연주자에게 연주 시작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선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휘자의 얼굴은 순간 불을 퍼부었다.
결국 그날의 관현악 연주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럼 트럼펫 연주자는 어찌된 것일까?
그는 엉뚱한 봉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는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던 수위가 트럼펫을 들고 관객석 뒤로 올라가는 연주자의 팔을 뒤로 비틀어 꼼짝도 못하게 하면서 의기양양해 있었다.

“이 미친 녀석아 !
네가 오늘 연주를 방해하여 망치려고 작정한게지 어림도 없다.
이런데서 나팔을 불도록 내가 그대로 버려둘 줄 알았니?”
수위는 자기 나름대로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을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그날의 연주를 망쳐버린 장본인은 바로 그 수위였던 것이다.

수위는 수위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주회를 위해서는 수위가 한 일은 결코 칭찬 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수위가 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러나 수위라는 자리에서 보면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소통이라고 하겠습니다.

(전개 이야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시다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예,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던데요.”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칭찬하셨다.

1. 바요나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
2. 네 이름을 이제부터 베드로라고 부를 것이다.
3.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4.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쇄를 주리니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 열리고,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히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곧바로 예수께서 비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을 예고하셨다.
그러자 이에 조금 전에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주님께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심하게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분간하지 못했다.
주님을 감동시킨 탁월한 신앙고백으로 반석이라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순간 사단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던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처럼 가깝다.
일 년 52주 휴가도 반납한 채 교회에서 땀 흘려 봉사하며 일하는 성도들이나 교단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들 중에 애초부터 사람의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너도나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뼈 빠지게 열심히 일 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그 일은 결국 문제만 남기고 말게 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할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적용을 위한 이야기)

일이란 영어 단어에서 work가 아니라 mind라고 합니다.
일을 마치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

참조 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21절), 사람의 일,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입니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Chrysostom).

일 -  5426. 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생각을 가지다
발음  / 포르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5424. φρήν, φρενός, ἡ
1. 생각,  2. 이해,  3. 고린도전서 14:20
발음  / 프랜(phrēn)
어원 /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고전 14:20).
신약 성경 / 2회 사용

예수를 바르게 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요한복음 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Therefore they said to Him, "What shall we do, so that we may work the works of God?"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has sent.


예수를 바르게 잘 믿으려면?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로마서 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역대상 24:5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이는 성소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가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도 있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도 있음이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전도서 11:5
바람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예수님은 벳새다 마을의 빈들에서 5,000명 이상의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특히 누가복음 9장 11절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전에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며,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무리를 배불리 먹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와 다르게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여 다시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찾을 때 당시 유대인처럼 먹을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찾는 것이 우리의 물질적인 복과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시 유대인이 예수님을 찾았던 목적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그 말씀을 듣고 무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 6:28) 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명백히 밝혀 주셨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피스튜에테”라는 단어로 지속적인 믿음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며,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거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사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하였다(행 22:3-4; 빌3:5-6).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고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이처럼 예수님을 찾지만, 그것이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 또는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동행일기 제자훈련인 “With Jesus Ministry” 운동을 하는 유기성 목사는 설교를 통해 “조심스럽지만,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다. 또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해도, 주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있다면 무슨 만족이 있겠나”라며, “주님이 낯선 분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면 이보다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일들은 우상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일이 진정한 하나님 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10:41-42에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이나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하거나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상이 있다고 한 것은 어떤 일을 한 것보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하나님께 의미 있음을 말해 준다.

헨리 블랙바기 목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동참케 하시는지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쳐 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하나님은 자녀와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알리시고 초청하신다는 내용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은 자기 일을 도와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여 천동설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주권자 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알아 그분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셔서 역사하시고 당신의 일에 사람들을 참여시킬 때에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길을 아는 것이 필수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해지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그분을 계속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을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빌 2:13).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이유이다. 스바냐 3장 7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말씀하시는데, 자녀가 하는 일로 인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분이심을 알려 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예수님께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무디(D. L. Moody)는 “인간은 깨어진 그릇과 같으므로 계속 충만하게 되는 방법은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 깨어진 그릇을 가져다 놓는 방법밖에 없다.”라면서, 깨어진 존재 같은 우리가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성령님을 의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는 관계 회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칼빈은 회개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로 속죄와 중생의 체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히 8:12; 10:17). “기억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와 또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죄의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회개와 믿음은 회복된 관계로 귀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스스로 쌓아 올린 업적도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Jesus).
요한복음 6:29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Jn 6:29, NIV) Jesus answered, "The work of God is th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야”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봉사, 전도와 선교만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 (고전 12:3)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음은 지적동의나 신념이 아닌 관계이다.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며 동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음 날도 예수님을 찾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바다를 건너지도 않으신 예수님이 어디에도 없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와서까지 예수님을 만납니다.
참 열심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를 고치시고 5000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신 분이라면 개인적으로는 건강 걱정이나 생계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적으로는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 정치적∙민족적 해방 왕으로서 이스라엘에 풍요와 영광을 가져오는 부푼 꿈에 열렬히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표적을 보았지만 표적이 의미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건지 묻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배부름, 썩을 양식에 관심이 있었고 영생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 자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실지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란 율법을 준수하며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인정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행위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신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를 통한 ‘자람’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영접함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말씀의 순종과 삶의 성숙과 성화로 그리고 마침내 영생의 영광인 영화로 이어지는 성도의 신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과연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요? 유대인들처럼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다녔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떡을 구하며 헤매는 모습은 없는지요?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이후 기적 자체만을 구하다가 많은 수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납니다(요6:66).

무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며 축복해주시는 것은 아닌가 해서,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요? 반대로 열심히 봉사한 만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이 땅의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갚아 주실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부활



예수는 죽은 후에 부활한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죽은 후에 어떻게 될 지 궁금해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도 세상을 떠난 후에 그를 다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죽고 나면 그렇게 멋진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죽음은 모든 의식이 종말하는 것일 뿐일까요?

예수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삶이 끝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놀라운 주장을 했습니다. “내가 부활이며 삶이다. 나를 믿는 자는 다른 이들처럼 죽더라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증인들에 따르면 당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3일간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거의 2000년이란 시간동안 희망을 가진 이유가 이러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 후에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신론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몸은 썩겠지만, 내 정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1] 러셀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땅에 묻힌 후에 살아있는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수를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식사도 같이 하고, 몸에 손을 대보기도 했으며 40일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된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확실한 증거가 존재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독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정말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 온 것이라면, 자신에 대한 주장, 삶의 의미와 죽음 후의 운명에 대한 말이 모두 사실이 되는 셈입니다.

예수가 정말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 온 것이라면, 예수 외에는 삶의 의미와 죽음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근본은 거짓이 되는 셈입니다. 신학자 R.C. 스프라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신의 힘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다른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갖지 못한 자격을 증명한 것입니다. 부처도 죽었습니다. 마호메트도 죽었습니다. 모세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살아있습니다.[2]

여러 회의론자들은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회의론자들 중 한 명인 존 맥다웰은 부활의 증거를 찾는 데에만 700시간 넘게 노력했습니다. 맥다웰은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가해진 가장 사악하고 비열하며 비정한 거짓이거나,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사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3] 후일 맥다웰은 자신이 쓴 고전 “판단이 필요한 새로운 증거(The New 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환상적인 사실일까요? 아니면 사악한 거짓일까요? 그 답을 얻으려면 역사상의 증거를 살펴보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조사한 회의론자들이 직접 발견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냉소주의자들과 회의론자들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들이 증거를 공정하게 평가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고 인정했습니다.[4] 역사학자 조셉 캠벨은 자신의 PBS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증거도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5] 지저스 세미나(Jesus Seminar)의 존 도미닉 크로상과 같은 다른 학자들도 캠벨과 동의합니다.[6] 이러한 회의론자 중에서 자신의 관점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한 회의론자는 냉소주의자들과 반대로 증거에 관심을 갖습니다. “회의론자란 무엇인가?(What is a Skeptic?)”라는 회의론 전문 잡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회의론이라 함은… 이성을 모든 생각에 적용하는 것이며, 그 예외가 되는 “성스러운 소”라는 개념은 절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회의론자들은 어떤 현상이 실제이거나 어떤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습니다. “회의론자”라는 말은 즉, 반드시 설득력있는 증거가 제시되어야만 믿는다는 뜻입니다.”[7]

러셀이나 크로상과 같은 회의론자와 달리 진정한 회의론자 중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일 수 있는 이 조사의 내용과, 증거를 분석한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정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까요?

자기 예언

예수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배신당하게 되며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살아 돌아온다고 말했습니다. 계획 치고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무슨 이유였을까요? 예수는 청중의 요구에 따라 공연을 하는 엔터테이너가 아니었으며, 그 대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진정한 메시아였음을 증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서학자 윌버 스미스는 예수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후 3일 만에 살아나 죽은 자들 사이에서 돌아온다는 말을 했을 당시 예수가 만약 자신이 살아날 것임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제자들의 헌신을 더 오래 기대했다면 이는 바보나 했음직한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도 감히 그런 말을 한 경우가 없습니다.[8]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이미 명확하게 제자들에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대로 사기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진짜 죽었다면) 살아나기 전에 어떻게 죽었을까요?

끔찍한 죽음, 그리고. . . ?

브레이브하트(Braveheart), 로드 워리어(Road Warrior) 등으로 유명한 배우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다면 예수의 마지막 생전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에 빨간 필터를 대고 찍는 게 나았을 정도로) 영화의 못 보신 장면이 있었다면, 신약의 아무 복음서에서 뒤쪽을 펼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는 예언한 대로 제자 중 한 명인 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했고 체포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주재한 모의 재판에서 예수는 반역죄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형을 선고받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예수는 로마식으로 끈이 9개 달린 채찍으로 처참히 맞는데 이 채찍에는 뼈와 쇳조각이 달려있어 맞는 사람의 살을 찢을 정도입니다. 몇 번이고 주먹과 발로 맞고 심지어 침까지 맞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의 집행관은 나무망치로 무거운 쇠못을 예수의 손목과 발에 박습니다. 마지막으로 땅에 구멍을 파고, 절도죄로 잡힌 도둑들이 매달린 십자가 사이에 예수의 십자가를 넣었습니다.

예수는 이 상태로 약 6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 즉 유월절에 양을 제물로 바치는 그 시간에(뭔가 너무 상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아람어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고 숨을 마쳤습니다.[9]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10]

그위 권세와 생명의 기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암울한 깊은 어둠 속에서 꿈이 깨졌습니다. 전 영국 대법관인 헤일셤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비극은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고, 완전히 도덕적이며, 금욕적면서 어두운 인물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점이 아닙니다. 이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바로 젊고, 생명력이 넘치며 기쁨이 가득한 청년, 바로 생명 그 자체의 구주였으며, 온전한 기쁨을 찾아 사람들이 따랐던 정말로 사람을 끌어 당기는 존재였다는 것이 비극입니다.”[11]

빌라도는 십자가에 박혔던 예수의 몸을 땅에 묻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피와 물이 섞여 흘러나오는 모습을 통해 예수가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는 보통 피를 흘리지 않지만 인간의 심방은 멈춘 후에 피를 저장해 두며 바깥쪽에 있는 주머니는 수심낭이라 불리며 혈청이 담겨있습니다.”[12] 예수가 죽은 것으로 확인되자 그의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져 아리마데의 요샙의 무덤에 묻혔습니다.옆에 있던 로마 병사들이 무덤을 봉인했으며 24시간 감시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J. P. 모어랜드 박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혼동에 빠졌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신이 보낸 존재임을 더 이상 믿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라면 메시아가 목숨을 잃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 운동이 완전히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13]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로마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승리했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운동이 멈춘 것이 아니었으며, 기독교도 오늘날 세계 최대의 종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묻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피터 스타인펠즈는 예수가 죽고 3일이 지난 후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처형된 후 그 추종자들은 혼란스러워하고 겁먹은 모습에서 갑작스런 변화를 겪었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예수와 앞으로 나타날 왕국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결국 이들은 왕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었을까요?”[14]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알려진 사건에 대해서 타당한 설명은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으며, 모두 신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 “부활” 자체가 음모였습니다.

• 제자들은 환영을 보았습니다.

•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 실제 사건입니다.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 지 한 가지씩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진짜 죽었을까요?

“말리는 완전히 죽은 것이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Christmas Carol)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디킨스는 곧 벌어질 일의 초자연적인 성격에 대해 독자가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기 TV 프로그램인 CSI의 등장인물이 부활에 대해 조사한다면 증거를 짜맞추기 전에, 실제로 시체가 존재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간혹 시체인 줄 알았던 사망자가 영안실에서 몸을 움직이고 결국 살아났다는 뉴스도 보도됩니다. 그런 일이 예수에게도 일어난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음에도 생명을 유지했으며 무덤 속의 차갑고 습한 공기 덕분에 살아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의학적 증거와는 맞지 않습니다. 미국 의학 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회보에서는 소위 말하는 “기절 이론”이 말도 안되는 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역사 및 의학적 증거에서는 예수가 죽었음이 명백합니다. 예수의 오른쪽 갈비뼈 사이를 찌른 창은 오른쪽 폐을 뚫었을 뿐 아니라 심낭과 심장도 뚫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15] 하지만 이 이론에 대해서도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회의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의견을 들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비기독교 역사학자가 만든 보고서에서 그러한 의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언급한 비기독교 역사학자는 3명이 있습니다.

먼저 루시안(c.120 – c.180)은 예수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힌 궤변가(철학자)라고 불렀습니다.[16]

요세푸스(c.37 – c.100)는 “이 때 현자인 예수가 나타났는데 그는 놀라운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우리 중에 이끄는 자들은 예수를 비난했으며, 그를 사랑한 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였다”라고 적었습니다.[17]

타키투스(c. 56 – c.120)는 “그의 이름이 유래한 크리스튀스(Christus)는 우리의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18]

이는 마치 고문서 기록실에서, 1세기의 어느 화창한 봄날에 ‘예루살렘 포스트 정도의 이름을 가진 신문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사망했다고 1면 기사 처리한 걸 발견하는 느낌입니다. 상당히 잘 찾아낸 결과물이며, 마무리도 잘 된 듯 합니다.

사실 기독교인이나 로마인 또는 유대인이 남긴 역사 기록 중에서 예수의 죽음 또는 땅에 묻혔던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경우는 없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회의론자인 학자들도 예수가 죽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유명한 회의론자인 제임스 테이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가 로마 정부의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했음을 고려한다면 예수의 사망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19] 회의론적으로 악명높은 지저스 세미나의 공동 설립자인 존 도미닉 크로상 역시 예수가 실제로 살았으며 사망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점은 어떠한 역사학자의 말과 같이 확실합니다.”[20]

역사적 및 의학적 증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앞서 말한 다섯가지 중 첫번째는 잊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예수는 분명히 죽은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빈 무덤의 문제

진정한 사학자라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이미 죽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학자들은 예수의 몸이 어떻게 무덤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영국의 언론인인 프랭크 모리슨 박사는 처음에는 부활이 거짓이거나 사기라고 생각하고 이를 증명하는 책을 쓰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21] 이 책은 유명해지긴 했지만 모리슨 박사의 의도와는 다른 이유였습니다.

모리슨은 먼저 빈 무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무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한 의원인 아리마데의 요셉의 무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공의회 의원의 자리는 마치 록 스타와 다름없었습니다. 공의회 의원이 누구인지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실존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무덤은 잘 알려진 곳에 있었을 것이며 찾기도 쉬웠을 것이므로, 예수가 “묘지에서 사라졌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모리슨은 “빈 무덤설”이 거짓임에도 왜 예수의 적들이 이를 허용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예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그 즉시 모든 이야기가 틀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으로 예수의 적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며, 이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웨스턴 미시건 대학의 고대사 교수인 폴 마이어 박사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모든 증거를 면밀하고 공정하게 검토했다면, 예수가 묻힌 무덤이 사실 부활절의 첫 날 아침부터 비어있었다는 결론도 정당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 이야기는 허구가 됩니다.”[22]

유대인 지도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잘 훈련된 4명에서 16명 사이의 로마 병사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쉬 맥도웰은 이 병사들이 일반적인 군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경비병들이 잠들거나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랬음을 나타내는 역사적 근거가 다수 있습니다. 이 병사들은 옷이 벗겨졌으며, 이 옷을 태운 불에 산 채로 화형당하거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박혔습니다. 이 경비병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으며 어떤 원인으로든 실패를 두려워했습니다.”[23]

누구라도 이 경비병들 몰래 2톤이나 되는 묘비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묘비는 치워졌고, 예수의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예수의 몸이 어디서든 발견될 것이었다면 그 적들은 즉시 부활이 거짓이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법정 변호사 협회(California Trial Lawyers Association)에서 회장을 맡았던 바 있는 톰 앤더슨은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니만큼 단 한 명의 역사학자나 증인 또는 반대주의자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다고 기록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부활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역사의 침묵은 너무나 조용합니다.[24]

그리하여 실제적인 증거가 없으며, 이 알려진 이의 무덤이 비어버린 상태에서, 모리슨은 예수의 시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증거를 확실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묘지 도굴?

모리슨은 계속해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지 동기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부활이라는 건 시체를 도둑맞은 사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사학자 폴 존슨은 자신의 저서 “유대인의 역사(A History of the Jews)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갈수록 많은 이들이,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25]

무덤은 정말로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체가 없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이 깜짝 놀랐을까요?(게다가 자신들이 정말로 시체를 훔쳤을 경우에도)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이들은 슬퍼하거나 몸을 숨기지 않고 살아있는 예수를 보았다는 주장을 두려움없이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증인의 말에 따르면 예수가 갑자기 추종자들의 눈앞에 실제로 나타났으며, 여자들이 먼저 보았다고 합니다. 모리슨은 왜 공모자들이 여성을 음모의 중심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1세기 당시 여성은 권리나 개성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열악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리슨은 이 음모가 성공하려면 공모자들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 예수를 먼저 보았다고 묘사해야 했다고 추리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여성들이 예수를 먼저 만졌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빈 무덤도 먼저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제자들도 모두 예수를 10번 이상, 각기 다른 상황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증인들은 예수가 손과 발을 보여주고 만져보라고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식사도 함께 하고 이후 한 번은 500명이 넘는 추종자들 앞에 살아있는 모습을 나타냈다고도 합니다.

법학자인 존 워릭 몽고메리는 “서기 56년 당시 [사도 바울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난 예수를 보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살아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6ff.)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 퍼뜨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26]

성서학자 가이슬러와 튜렉도 이에 동의합니다.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 사도 바울은 증인으로 추정되는 명단을 제시했을까요? 그런 노골적인 거짓말로는 고린도서를 읽은 이들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27]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가 가이사랴에 모인 군중에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행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생명을 앗아갔지만 하나님은 3일 후 예수님께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0:39-41)

영국 성서학자 마이클 그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했음은 고대의 어떤 사건만큼이나 사실임이 입증된 일입니다. 부활이 실제라는 점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이란 불가능합니다.”[28]


일관성

증인들의 말이 모리슨의 회의론에 대해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역시 제자들의 행동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역사학자, 심리학자, 회의론자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역사적 사실은 그 전까지 11명의 겁쟁이에 불과하던 이들이 갑자기 모욕과 고문, 죽음까지 이기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자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지 거짓말을 하려고 몸을 바쳐서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까요?

911 테러를 감행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이 믿기만 한다면 잘못된 믿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거짓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위해 순교하려는 의지는 광기라 할 수 있습니다. 폴 리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실이라 믿는 것을 위해, 비록 그것이 실제로는 거짓이라 할 지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29]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살아있다는 진정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제자들이 거짓으로 밝혀진 사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부활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로 공모했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명예를 위해 굴복하지 않고 수십년을 지내는 게 가능했을까요? 모어랜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적 영달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하며, 특히 고난은 이익이 줄어들 때 더욱 그렇습니다.”[30]

닉슨 대통령 재직 시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척 콜슨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거짓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부활이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워터게이트를 통해 배운 사실입니다. 어떻게 깨달았냐고요? 12명의 사람들이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이 주장을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들 모두 그 때문에 매를 맞고 고문 당했으며 돌에 맞았고 감옥에도 갔습니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워터게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12명의 사람들이 연루된 사건이었지만, 이들은 단 3주도 거짓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열 두 제자가 40년 동안 거짓말을 계속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31]

이 남녀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리슨은 이 점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단순히 설명할 수 없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사실은 바로… 이 제자들에게서 강한 확신이 왔다는 것이며, 그 확신은 예수가 무덤에서 살아서 나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변화입니다.”[32]


제자들은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뚱뚱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엘비스 프레슬리가 던킨 도너츠 매장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난 밤에 외계인들이 뭔가 실험을 하고 있던 우주선에 끌려갔다는 생각도 합니다. 간혹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관점으로만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심란한 나머지 예수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강해져서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가능한 일일까요?

미국 기독상담자협회장을 역임했던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는 환영으로 인해 제자들의 행동이 급격하게 변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콜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환영은 개인적인 변화입니다. 그 특성상 한 번에 단 한 사람만이 특정한 환영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환영은 없습니다.”[33]

심리학자 토마스 J. 소어번에 따르면 환영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마음의 안정성을 가진 5백명의 사람들이 시각, 청각, 감각 등 다양한 느낌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결국 환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절대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34]

게다가 환영에 대한 심리학적으로 간절함이 너무나 강해서 마음에서 환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초기 교회의 주요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바울 두 사람 모두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기쁨에 대한 기대나 바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만났다는 주장을 너무가 강력하게 내세웠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경우 기독교에 대한 초기 탄압을 주도했기에 그의 변화는 예수가 부활하여 그에게 나타났다는 그 자신의 증언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환영 이론도 그다지 답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부활을 부정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있을까요?

거짓에서 전설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일부 회의론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한 두 사람의 거짓말 또는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전설은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면서 미화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능한 시나리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에는 3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 먼저, 전설은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여러 증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고대 로마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A. N. 셔윈-화이트는 부활에 대한 소식이 전설로 진전되기에는 너무 빨리 퍼졌다고 주장합니다.[35]

• 두 번째로 전설은 구전으로 발전하게 되며 입증이 가능한 현대 역사 문서와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은 부활이 있은 후 30년 내에 작성되었습니다.[36]

• 세 번째로 전설 이론은 빈 무덤이라는 사실 또는 예수가 살아 있었다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제자들의 신념으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37]

그러므로 전설 이론은 이 놀라운 주장을 부인하기 위한 다른 시도들보다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 않은 듯 합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실제로 역사가 바뀌었으며 그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부활이라는 전설은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거대한 역사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까요?


기독교는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모리슨은 “어떻게 그런 작은 움직임이 로마 제국뿐 아니라 유대인 조직의 치밀한 통제를 넘어설 수 있었는 지”에 대해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승리했을까요?

모리슨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20년도 되지 않아 이 갈릴리 농부들의 주장은 유대 교회를 무너뜨렸으며…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했음에도 가장 큰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기독교는 도대체 어떻게 승리한 것일까요?”[38]

모든 점을 감안하고,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예수가 죽은 십자가 위에서, 제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도망갔을 때 무너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독교를 확고히 했습니다.

J. N. D. 앤더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한 무리의 패배한 겁쟁이들이 하루는 윗층 방에서 벌벌 떨다가 단 며칠 만에 어떠한 탄압도 막을 수 없는 집단으로 재탄생했으며, 이러한 변화를 말도 안되는 조작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심리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39]

놀라운 결론

전설, 환영, 부검상 오류 등은 모두 제외되었으며, 빈 무덤에 대한 확실한 증거, 예수의 부활을 본 상당수의 증인, 그리고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설명할 수 없는 변화와 세상에 미친 영향 등을 알게 된 모리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리슨은 다른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제목은 이렇습니다. 누가 돌을 움직였는가?(Who Moved the Stone?)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새롭게 내린 결론을 정리했습니다. 모리슨은 사건의 진실이 명백하게 나타날 때까지 단순히 일련의 증거를 하나씩 좇아왔습니다. 그가 놀란 점은 이 증거들로 인해 부활에 대해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회의론자였던 모리슨은 이 책의 첫 장인 “쓰이기를 거부한 책(The Book That Refused to Be Written)”에서 어떻게 해서 이 증거들이 자신에게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잘 알려진 길을 따라 숲을 지나려 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 도달한 것과 비슷합니다.”[40]

모리슨 외 다른 이들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회의론자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한 결과 인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존재조차 의심했던 C. S. 루이스의 경우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설득당한 경우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주 역사상 완벽하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항상 잠겨있던 문이 정말 처음으로 강제로 열린 것입니다.” [41]

부활에 대한 증거를 인정한 다른 회의론자들의 경우도 살펴보겠습니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교수

부활이 단순한 전설이라고 생각했으나 모리슨처럼 생각을 바꾼 이들 중에는 세계 최고의 법학자인 사이몬 그린리프 박사도 있습니다. 그린리프는 하버드 법대를 키워낸 인물입니다. 그는 3권으로 된 법학의 걸작이자 “법 관련 서적 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증거의 법칙에 대한 논문(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을 쓰기도 했습니다.[42] 현대 미국의 재판제도는 아직도 그린리프가 구성한 증거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하버드 재직 시절 학생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는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중 3명이 그의 증거의 규칙을 부활에 적용해 보라는 반론을 던졌습니다.

수없이 재촉을 받은 후에야 그린리프 교수는 학생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증거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사용한 그는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린리프 교수가 역사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예수가 실제로 무덤에서 살아 나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강력함에 할 말을 잃을 뿐이었습니다. 그린리프의 회의론은 인간의 역사를 뒤바꾼 사건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련의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행동이 변한 점은 가장 혼란스러웠습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제자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사실에 적용한 그린리프 교수는 결국 결론을 내렸습니다.

놀랍게도 입장을 뒤바꾼 교수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직후 일어난 사건들을 말해 주는 가장 좋은 설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명석한 법학자이자 이전까지 무신론자였던 그에게도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43]

그린리프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전도사의 증언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증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책의 결론에서 부활에 대한 진실을 찾는 이라면 공정한 자세로 증거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증거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편견이 없고 법정에서처럼 정직하게 증거를 검토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입니다.[44]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예수가 죽음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돌아왔다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삶의 의미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신께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예수 자신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까요?

이곳을 클릭하면 “왜 예수인가?”를 읽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한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이곳을 클릭하시면 예수가 다음 삶의 의미에 대해 내린 중요한 질문의 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가?”

아래에서 응답을 공유하여 더 알아보기

아니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 기도하고 예수님을 저의 삶으로 초대했습니다.
예, 기도하고 저의 삶을 예수님께 다시금 봉헌하였습니다.
아니요, 저는 이미 예수님을 저의 삶에 받아들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애굽기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성경 검색(젖과 꿀이 흐르는 땅) (구약 19회)
출애굽기 4회
레위기 1회
민수기 3회
신명기 6회
여호수아 1회
예레미야 2회
에스겔 2회

  • 네게브(광야, 황야) 70%

민수기 16:13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 고라, 르우벤의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 아비람, 벨렛의 아들 온
  족장 250명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

* 고라 일당의 반역

신명기 11:10-11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애급 /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땅
기근 시 애급으로 양식을 구하러 떠났다 

창세기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람 99세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는다

출애굽기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레위기 18:27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 골육지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 어미, 계모, 자매,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숙모.....등

창세기 10:15-18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 창세기 10:6 /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레위기 18:26-27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더러워진 땅에서
거룩한 삶을 회복하므로
그 땅의 더러워진 것을 몰아내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의 세상으로
세워나갈 수 있다는 소망의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황야와 같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 수 있다. 

신명기 11:10-11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신명기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경 검색을 통하여 구약에서 19회 사용된 것으로 낱타난다.

출애굽기 4회
레위기 1회
민수기 3회
신명기 6회
여호수아 1회
예레미야 2회
에스겔 2회

출애굽기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첫째,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땅

애급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애급으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제부터 주권을 갖고 살아가는 땅이 될 것을 말합니다.

젖과 꿀이란 그 땅에서 생산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애급처럼 비옥한 땅이 아니므로 젖은 목축을 통한 산물이며 꿀은 양봉을 통한 산물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지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막과 같은 황령한 땅에서 자유인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을 상징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땅

비옥한 땅이 아니므로 반드시 농사철이 되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려야만 경작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비를 내려 주시므로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에 약속된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우기에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른비와 늦은비’로 비유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자연적 특성과 기후를 알아야 한다.

이른비와 늦은비는 이스라엘에서 축복의 단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나라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유적지 중 우기 때의 비를 저장해 식수로 쓰던 저수지가 많고,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거나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신명기 11:14~17)

이스라엘의 여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지속된다. 우기는 가을과 봄이 시작되는 시점인 10월경에서 이듬해 4월경까지다. 이른비, 겨울비, 늦은비가 내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른비(Autumn Rain)는 10~11월경인 가을에 내리는 첫 비를 가리킨다. 이른비를 시작으로 우기가 시작된다. 여름철 건기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말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 없다. 농부는 농사 지을 준비를 갖추어놓고 메마른 땅을 보며 간절히 이른비를 기다리는 것이다(야고보서 5:7).

이른비가 내리기 시작해 2~3주가 지나면 들판은 푸른 초장으로 변한다. 농부들은 이때 밭을 갈고 파종한다. 이른비가 적당한 시기에 내려야 제때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른비는 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겨울비는 본격적인 장맛비로, 12~2월경에 내린다. 이스라엘에서는 건기를 대비해 이때 내리는 비를 저장해 사용했다.

늦은비(Spring Rain)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봄비’라고도 불리는데 그야말로 단비다(스가랴 10:1).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 결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늦은비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을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아모스 4:7).

 

이른비 –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스라엘의 농사에서 때에 맞게 내리는 이른비와 늦은비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비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신명기 32:2, 에스겔 34:26, 시편 65:10). 비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복음사업을 예표한다. 농사철 우기에 내리는 두 차례의 특별한 비, 이른비와 늦은비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농사를 위해 허락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시온의 자녀들아 ···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비와 늦은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요엘 2:23)

이른비의 역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던 초림 예수님 당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 열흘간 전심으로 기도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허락된 성령의 역사로 예언이 성취되었다. 초대교회에는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1~41)



1. 가나안 땅에 대하여  

가나안(Canan)은 "저지(抵地)" 즉 "낮은 땅" 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티나의 고대 명칭의 하나이다.
보통 요단강 서편의 지역을 가리킨다.
애굽과 메소보다미아의 교류지로서, 옛부터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일컬어졌다(출 3:8,신 6:3).
이미 이곳은 아브람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질 것이 약속되어 있었다(창 12:7,출 6:4,레 25:38).

아마르나 문서(이집트의 고문서)에 따르면, BC 3000년 무렵 셈족이 여기에 거주했고, BC 2200∼BC 2000년 이집트인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BC 15세기에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그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BC 11세기에는 이집트 세력이 가나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곧  출애굽 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인솔된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2.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리 말에는 '문전옥답(門前沃畓)'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듯이, 고대근동 지역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는 표현이 있습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유목민이나 반유목민들이 가장 선호는 목축을 하기에 좋은 땅을 상징한 것이지요.

'꿀'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벌꿀이 아니라 당도가 높아서 당시 사람들이 좋아했으며, 아랍인들이 주식으로 사용한 '대추야자(date palm)'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추야자는 '종려나무'의 일종인데 늙은 나무의 끝에 상처를 내어 받은 수액을 발효시켜 야자술을 만들며, 이것을 증류한 것이 아라크(arrack)입니다. 

열매는 크게 감미형 ·약감미형 ·건조형의 3가지로 분류하는데, 건조형은 낙타대추야자라고 하며 아랍인의 주식(主食)으로 이용됩니다.

조건이 좋으면 대추야자나무 한그루에서 해마다 약 100kg의 열매가 열립니다.
대추야자나무 세 그루가 있으면 한 사람이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나 아랍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대추야자를 쉽고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젖과 꿀(대추야자)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 생겼으니, 목축과 농사가 풍요한 땅, 먹고 살기 좋은 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된 것이지요.  

3. 기브온에 대한 화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순종한 것은 아니니까? 기브온에 대한 화친도 그런 맥락헤서 볼 수 있겠지요.

 


기브온(Gibeon)

팔레스틴 중부의 산악지에 있던 히위 사람의 도성이었는데(수9:3,17), 예루살렘의 서북쪽 9㎞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에 집'(ej-Jib, 학자에 따라서는 `엘 집, el-Jib'로도 표기된다)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유력한 성읍으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시에는 그비라, 브에롯, 기럇 여아림의 왕들과 협의하여 그 지도권을 장악하고 책략을 꾸며 이스라엘과 화친하였다(수 9:3-17). 그들의기만이 드러났을 때에도 여호수아는 계약의 의무를 지켜 그들을 아모리 사람 연합군의 내습으로부터도 보호하였다(수 10:1-15). 가나안 땅 분배시에 기브온은 베냐민의 기업으로 되고(수 18:25), 후에는 레위 자손의 성읍으로 되었다(수 21:7). 사울 왕의 사후에 일어난 내란 때에 이스보셋과 다윗을 각각 대표하는 아브넬과 요압은 `기브온 못'(삼하 2:13)가에서 양 군을 교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승패를 결정하기 위해 쌍방에서 각각 12명의 대표군사를 뽑아 일대 일로 싸우게 하였다. 서로 옆구리를 찌르고 같이 죽었으므로 그 곳을 `헬갓핫수림'(「날카로운 칼의 밭」)이라 불렀다(삼하 2:15). 기브온은 후에 다윗과 블레셋 사람의 교전장으로 되었다(삼하 5:25에서는 `게바'로 되어 있다. 병행 기사 대상 14:16에는 `기브온'). 또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것은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였다(삼하 20:8). 사울 왕은 단기였기 때문에 많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나 유족들은 사울의 자손 중에서 7사람을내 놓으라 요구하여 이들을 죽임으로써 복수했다(삼하 21:1-).기브온은 옛부터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며, 실로 함락 후는 여호와의 성막이 이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한다(대상 16:39,21:29). 솔로몬은 왕으로서의 첫 희생을 이 기브온의 산당에서 드렸다(왕상 3:4과 9:2 비교). 기브온은 유대 왕 르호보암의 제 5년(BC 921)에 애굽 왕시삭(BC 935-915 재위)이 침략한 팔레스틴 중부의 성읍 중 하나로서, 그의 비석에기록되어 있다. 기브온은 선지자 하나냐의 출신지였다(렘 28:1). BC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후 거기서 도망한 사람들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나간 `기브온 큰 물'이 인용되고 있다(렘 41:12). 이 성읍의 주민은 바벨론에서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복구에 협력했다(느 3:7).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AD 66년 10월 케스티우스(Cestius)는 "벧호론을 거쳐 올라와 예루살렘에서 9㎞쯤 떨어진 가바오(Gabao,Gabawv, 구약성경의 '기브온')라고 하는 장소에 그의 진영을 쳤다"고 한다.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넓은 골짜기로 된 분지의 중앙에는 60m 정도의 장타원형 내지는 계란형의 구릉이 있다. 그 구릉은 평원에서 윗쪽으로 큰 계단을 이루고 있는 석회암의수평층으로 되어 있어 올라가기 힘들다. 성읍은 북단의 넓은 정상에 있다. 성읍 동남쪽 구릉에서 퍽 아랫쪽에 아름다운 샘이 있다. 인공적으로 판 지하의 저수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이 성읍에의 거주는 초기 청동기 시대(BC 3100-2100)부터 시작하여 철기 시대 Ⅱ기(BC 900-550)까지 이르고 있었다. 성읍의 면적은 6.4ha로서 상당히 큰 성읍이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구릉 주위는 비옥한 고원인데, 감람ㆍ포도 재배가 성하다. 이 발굴은프리챠드(J.B. Prichard)에 의해 전후 5회에 걸쳐 행해졌다(1955-57,1559-60, 1962). 각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파편이 많이 출토되었으나, 특히 진귀한것은 56개의 `항아리'의 손잡이인데, 그 중 24개에는 `기브온'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BC 7세기의 일군의 포도주 저장굴이 발견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포도주 수송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기브온에서는 두 종류의 급수 설비가 발견되었다. `기브온 못'(삼하 2:13)은 이 나선상 계단이 내부에 설치된 못을 가리킨다. 전에는 `못'을 성읍의 동북쪽에 있는 장방형의 저수지(11×18m, 깊이 2-2.4m)와 동일시하였는데, 그것은 로마 시대의 축조였기 때문에그것은 시대 착오이다. 로마 시대(BC 63-AD 325) 초기에는 기브온에 재거주가 실시되었지만, 그때는 `로마 평화'(Pax Romana)의 안전성을 반영하여 성읍은 무방비 상태로개방되어 있었다. 기브온 성벽은 2기에 걸쳐 구축되었는데, 전기의 것은 BC 12세기, 후기의것은 BC 10세기에 존재했으며, BC 7세기까지 존속했다. 후자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약 134m가발굴되었다.성벽의 두께는 평균 4m이며, 전장은 954m로 계산된다.

 

늦은비 – 초막절 성령시대의 역사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에 내리는 늦은비는 영적 추수 때인 이 시대에 알곡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복음사업을 위해 내려주실 성령의 역사를 표상한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태복음 24:30~31)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영적 추수기에 허락될 늦은비 성령은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임하도록 되어 있다.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스가랴 14:16~17)

명절 끝 날 곧 큰 날(초막절)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37~39)

지금은 영적 결실기인 초막절 시대로, 추수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늦은비 성령을 간구해야 할 때다. 그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의 실체이신 하늘 어머니께로 나아오는 자들만이 늦은비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될 것이다.




셋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탕이 비옥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을까?

땅이 비옥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므로 농사가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다(신명기 11:13-17)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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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약속의 땅
<성경말씀>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출애굽기 3장 7절-8절
<교독> 교독문 43(마태복음 6장)
<찬송> 278, 369

<주석> 애굽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출 3;7)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3:8)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셨다.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험난한 광야의 생활을 거쳐 막상 도착한 그 약속의 땅은 “젖과 꿀“로 상징되는 ‘풍요의 땅’이 아니었다. 양의 젖이나 벌통의 꿀이 풍부하여 먹고 마시고도 남아 넘쳐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매순간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민족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척박하고 황량한 땅이었다.(삿 1장)
“젖과 꿀”이 물질적 풍요를 의미한다면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성과는 먼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본래적 의미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신앙적 관계’에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젖은 ‘어미’가 ‘새끼’에게 전달하는 ‘생명의 양식’이다. 또한 무방비적인 새끼를 향한 본능적인 사랑이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사랑으로 풍요하고, 젖을 빠는 새끼의 모습은 화이다. 젖으로 말미암아 잇대어진 어미와 새끼의 사랑과 평화로운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한 방울의 ‘꿀’을 모으기 위해 수많은 벌들이 하나같이 협동하여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수고한다. 그러나 그 꿀은 어느 한 개체의 소유로 주장되지 않으며, 어느 한 개체가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꿀은 공동체 정신의 과정이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과 협동과 평화의 공동체에로의 약속이다.(이상 KNCC 간 <교회와 세계> 2005년 가을호 ,86-87쪽, 유경동 글‘기독교의 경제윤리: 희망은 있는가?’ 중에서 발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현세적 축복, 물질적인 축복, 개인주의적 축복으로 믿는다면, 역사적 지리적 현장과도 맞지 않으며, 성경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도 모순이 된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 중, 현세적 축복, 물질적 축복이 믿음의 많고 적음의 기준이라고 믿고 있다.
세계는 한국이 두 가지의 기적을 이룬 나라라고 한다. 가장 빨리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가장 빨리 교회 성장을 이룬 나라.

<예화>
1) 2004년 현재 한국의 경제는 세계 11위이다.(내일 신문, 2005년 8월 9일 자).
세계 11번째로 축복 받는 나라이다.
2) 1960년 총인구비 기독교인은 4.6%, 6십7만 명(1981년 기사연간 <기독교 사정>,)
2004년 총인구비 기독교인 21.4%, 1천 3백만명 (한국갤럽 2004년,<타임 매거진> 2005년 7월)
경제 성장, 양적 성장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축복이라면 우리나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통계도 있다.
<예화>
3) 한국의 자살인구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에 4위이며 지난 10년 전보다 2.4배가 늘었다.(상기 <교회와 세계> 78쪽, 참조 지난 10년 동안의 인구증가율은 0.9%-연합통신 간 <2004년 연감>)
* 60억 재산가 할머니가 재산을 둘러 싼 자녀들의 분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다.
4) OECD 국가들 가운데 두 번째로 가장 소득이 불균형한 나라이다.(경향신문 2005년 8월 9일)
*우리나라의 주택보급률이 102.2%이지만 무주택자가 45%이다.
*총인구의 1%가 총사유지 51,5%를 소유하고 있다.
*상위 10%계층의 소득은 하위 10% 계층의 소득의 15.28배 (내일신문 2005년 8월 3일)
5) 정부는 우리나라의 빈곤층 인구가 700만 명이 넘었다고 발표했다(경향 2005 년 8월 26일)
그런 신앙에 따라 이런 예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백성은 결코 축복받은 백성이 아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34절은 재물과 이 세상적인 염려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좀이나 동록(銅綠)이 해하고 도적이 도적질하지 하는 땅 위에 쌓아 두지 말고 그것들이 해하지 않는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19-20절). 하나님과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다(24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입을 것, 먹을 것, 세상의 축복도 이에 더하시리라 약속하신다( 25-34절).

<결론>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현세적 축복, 물질적 축복의 여하로 판단된다는 믿음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다.
앞서 인용한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7년 동안 750만 명이 개신교를 떠나갔다고 한다.
개신교에 대한 사회 호감도는 12.3%며 개신교를 싫어하는 6가지 중에 사회 봉사와 이웃사랑 부족, 사리사욕과 지나친 물질주의가 들어 있다.
혹시나 한국의 개신교회가 ‘젖과 꿀’을 물질적 축복으로 간주하여, 못사는 사람은 벌 받아 못 살고, 잘 사는 사람은 복 받아 잘 산다고 가르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


팔레스틴의 꿀

(풍습) 사사기 14:8-9

본문에는 삼손이 죽인 사자의 주검에 벌의 무리와 꿀이 있었고, 그래서 삼손이 그 꿀을 취하여 먹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야생벌들이 팔레스틴에 많이 서식하였고, 또 당시에 야생벌에게서 꿀을 얻어 음식으로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팔레스틴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는 등 꿀을 비유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풍습과 성경 상에 나타난 꿀의 이용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 꿀의 용도

고대로부터 꿀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더없이 친근한 음식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는 꿀벌들이 무척 흔했기 때문에 바위에 뚫린 구멍이나 나무, 혹은 광야에서 쉽게 꿀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설탕이 생산되기 전에는 음식을 달게 하는 데 꿀이 최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빵이나 과자를 만드는데 꿀을 사용했고, 생선에도 꿀을 발라 먹었다.
또한 꿀은 당시 사람들이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영양 공급원이었다.(잠언 25장에서 꿀과 건강 참조).
그래서 그들은 꿀을 약으로도 사용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유익한 선물로도 사용 되었다. (삼하 17:29, 왕상 14:3).
이렇듯 꿀은 매우 인기가 있는 식품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후기에 양봉(養蜂)을 하여 외국에 수출을 할 정도로 굴을 풍부하게 생산하였다.(겔 27:17).

2. 꿀에 대한 성경의 비유

여호와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을 약속하셨다.(출 3:8).
이것은 팔레스틴이 꿀벌이 살만한 조건 즉, 비가 적게 오고 날씨가 따뜻하며 들에는 여러 가지 꽃들로 향기가 퍼지는 땅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에 있어서 꿀은 더없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시편과 잠언의 기자들은 꿀을 비유의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즉 여호와의 규례가 꿀보다 달고(시 19:9-10), 선한 말이 꿀과 같으며(잠 16:24), 또한 지혜와 지식이 영혼에 꿀과 같다고 했다.(잠 24:13-14). 그리고 솔로몬의 아가에서 신랑 신부가 꿀의 달콤함을 노래하고 있다.(아 4:11, 5:1).

그러나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꿀을 넣은 식품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릴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레 2:11).
이는 꿀이 발효 작용과 관계가 있는 바, 곧 발효 시키는 물질은 죄악을 상징하였기 때문이었다. (레위기 23장 꿀과 발효와 누룩 참조) 

3.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팔레스틴에는 꿀벌의 자생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꿀은 중요한 영양원과 감미료소서 이스라엘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다.
야생에 꿀벌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곳이 얼마나 많은 꽃이 피는 풀과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어디서나 꿀을 얻을 수 있었고 많은 목초지가 있었으므로 목축하기에 최적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본문에는 삼손이 죽은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채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벌은 썩은 시체에는 모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사자는 살이 완전히 뜯겨 나간 채 뼈대만 남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여우나 솔개가 남은 살을 먹었을 것이고, 또한 개미들이 그 남은 조각을 모두 먹은 다음에 완전히 자연적 미라가 되어있는 사자의 뼈가 굴벌의 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이라가 되고 그래서 별로 냄새를 풍기지 않게 되는 일은 실제로 기후가 더운 나라에서 간혹 보여지는 진기한 현상이다.
이처럼 성경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팔레스틴의 풍습과 풍토를 알아보는 것은 성경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이는 성경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계시된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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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성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라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요?

팔레스틴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대 광야와 네게브 사막을 지나는 동안 한가지 의문을 갖는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약속의 땅은 매우 비옥할 것으로 생각했던 환상이 황량하고 메마른 지역들을 보면서 점차 흐려지기 때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른 말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란 말로 이해해도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성경의 역사 지리적인 배경을 공부하던 필자도 초기에는 그 의미가 사뭇 궁금했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표현에 대한 주석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독일학자인 벤징거(Benzinger)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리스의 신화적인 배경에서 신들의 음식인 젖과 꿀의 땅’으로 해석하였다. 벤징거는 가나안을 신들의 땅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레쓰만(Greβmann)은 이 표현은 ‘가나안을 낙원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바벨론의 신화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레쓰만은 요엘 3:18절 (요엘 3:28. 그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앙드레케커(André Caquot)는 위의 내용을 우가릿의 한 내용(ANET 140)과 연결시켜 이해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가나안이 비옥한 땅이란 사실은 고대의 여러 문헌들만 아니라 (Sinuhe's story, Thutmose III's inscriptions) 성경에도 종종 나타난다(신4:21, 7:13, 8:7, 11:10, 28:3, 창13:10, 레26:4).

요세푸스의 기록이 나로마의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책에도 나타난다.
아모스 9:13절(“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에 근거하여 이것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후트만(Houtman)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욥기 20:17절(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에 근거하여 시적 표현에서 비롯된 과장법으로써, 젖과 꿀이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표현은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학자요 랍비인 모쉐 데이빗 카수토(Moshe David Cassuto)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광야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가나안 땅을 가리켜 처음 사용했던 표현으로, 그 의미는 목축을 통해서는 젖을 그리고 농업을 통한 각종 나무로부터 벌의 꿀처럼 많은 실과를 거둘 수 있는 배경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는 확대되어 각종 실과를 풍성하게 소출하는 가나안 땅을 포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군들이 포도, 석류, 무화과 및 그 해의 소산들을 가져 오면서 보고하는 내용을 참고하면: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이것이 그 실과들입니다(민 13:27).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명한 유대 학자인 나훔 마타티아스 사르나(Nahum Mattathias Sarna)는 젖과 꿀이 흐르는 표현을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럽게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이 표현은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대해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내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이르려 하노라 (출 3:8).

(이상하게도 약속의 땅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이 표현을 한차례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출애굽기 3장 8절 이후에는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 이 표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후기 가나안 시대 곧 출애굽 직전에 제한된다. 사실 가나안이나 요단 동편에서 흉년이 발생할 때에는 이 지역에 생활하던 유목민들은 일시적으로 이집트의 델타지역으로 피신했던 경우는 고대 역사적인 문헌들을 통해 자주 대할 수 있다. 성경에도 그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창12, 20, 26).

성경에서 꿀은 약 50번 정도 나타난다.
양봉에 의한 꿀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찍 생산되었지만 정작 성경에서 이 부분은 언급이 없다.
성경에서 꿀에 의한 꿀은 삼손과 요나단의 두 차례 기록되었을 뿐이다.
히브리어의 꿀에 해당되는 드바쉬는 벌에 의한 꿀과 과일 시럽 모두 의미한다(출 43:11, 아 5:1, 시 81:16, 대하 31:5, 삼하 17:29,
사7:15, 22)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생활했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지역은 흉년을 피한 이주민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성경의 역사 지리학자인 데니스 발리(Denis Baly)는 이 표현을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 땅이 꼭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 광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땅’이란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민수기 16:13-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브엘세바 평야의 황량한 전경을 찍은 사진이다)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 표현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들의 의견들을 거의 망라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성경을 탐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나안 땅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던 후기 가나안 시대의 역사 지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지정학적인 측면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곧 가나안 땅은 상호 국제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민들은 무역이 아닌 목축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국제 무역은 오히려 페니키아에서 활기를 띠었다.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의 대표적인 산물들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시 104:15)

열방들이 혹시 주의 백성들에게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면서 이 땅으로부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욜 2:17-19).

위에 언급한 세가지 산물들에 대한 성경의 다른 기록들을 참고한다.

창 27:28, 37, 신 7:13, 11:14, 12:17, 14:23, 18:4, 28:51, 33:28, 왕하 18:32, 대하 31:5, 32:28, 느 5:11, 10:39, 13:5,12, 시 4:7, 사 36:17, 애 2:12, 호 2:5, 8, 22, 욜 1:10, 학 1:11.

2. 후기 가나안 시대(Late Bronze Age)

가나안 땅의 정착 인구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되었다.

네게브는 크게 황폐되었다.
중기 가나안 시대(Middle Bronze Age)에 번성했던 주요 성읍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황폐되었다.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곳은 브엘세바 인근, 중앙 산지, 그리고 요단 계곡이 대표적이다.
실로, 벧술, 여리고, 헤브론은 중기 가나안 시대에 견고한 성읍이었지만, 후기 가나안 시대에 이르라 작은 촌락으로 전락되었다.
텔 아줄(Tell el-Ajjul)과 텔 나길라(Tel Nagila)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농사를 위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정착했던 사마리아 중앙 산지에서는 중기 가나안 시대의 수 많은 작은 도성들이 후기 가나안 시대에 들어서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지역의 경제 구조가 농경에서 유목 생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램고프나(RamGophna)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대에 가나안은 크게 황폐되었고 도시의 수도 현저히 감소되었다.
특히 후기 가나안 시대의 초기인 주전16세기 이집트의 힉소스가 추방될 당시 가나안은 심각하게 유린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중기 가나안 시대의 주요 성읍들은 계속 남았다 (라기스, 게셀, 므깃도, 벧산, 하솔).
특히 하솔은 후기 가나안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성읍으로 남았다.
그리고 해안평야, 쉐펠라, 이스르엘, 벧산 골짜기 주변으로 작은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당시 경제적인 한 주요활동은 해상무역이었다.
지중해 연안에 형성된 항구들로는 텔아부하밤(Tell Abu Hawam) 쉬크모나(Shiqmona), 텔나미(Tell Nami), 텔미갈(Tel Michal), 텔모르(Tel Mor)가 있다.) 후기 가나안 시대의 말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던 시대이다.

3. 이집트 시누헤 문서

애굽과 가나안 정착 시대보다는 앞선 때이지만, 가나안 땅에 대해 잘 표현된 고대 이집트의 시누헤 문서가 있다.
주전 20세기 초반에 속한 시누헤 문서에 나타난 가나안 땅에 대한 내용이다. 

그곳은 야(Yaa)라 부르는 땅이다.
그 곳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가득하였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주가 흔하였다.
꿀은 넘치고 올리브는 풍부하였다.
각종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실과들이 열렸다.
보리도 있었다.
양과 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나를 그 땅의 가장 뛰어난 지파의 지도자로 삼았다.
매일의 양식으로 빵이 준비되었으며 포도주는 일용한 음료로 마련되었다.
나를 위하여 사막의 야생 고기 대신 (집에서 기른) 고기가 요리되었고 구워진 닭 요리가 내 식탁에 마련되었다. . . . .
나를 위한 온갖 종류의 음식이 마련되었고 우유로 만든 각종 요리들이 준비되었다 (ANET 18-22).

주전 20세기 초반의 시누헤 문헌에 야(Yaa)는 상당히 발달된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야(Yaa)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올리브, 각종 나무에서 생산되는 실과,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들이 언급되었는데, 이것들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여기의 농산물들은 보통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수확하고, 밀, 보리는 늦봄에서 시작하여 여름 내내 추수하는 곡식이다.
학자들은 야(Yaa)의 위치를 갈릴리 호수의 동쪽, 골란 고원의 기름진 평야로 이해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해서 한 마디로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두리뭉실하게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기 위해 부르신 때이다.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출 3:17).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약속의 땅(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표현 방법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은 일부 기름진 곳에서는 곡식을, 일부 척박한 곳에서는 가축을 돌보므로 젖을 구할 수 있는 땅이다.

아모스 7: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신명기 11:12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첨예하게 공존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시선은 늘 그곳에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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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와 아열대성 기후가 교차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5월 중순경에 시작되는 여름 동안 이스라엘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고 고온 건조한 날씨만이 계속된다.
그러나 10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는 겨울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5개월 가까이 지속된다.
하늘의 비만을 의존하여 경작하는 이스라엘 농업은, 겨울 우기 동안만 가능한 셈이다.

겨울 우기 동안 내리는 비는 세 종류로 구분된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내리는 이른 비(10월 경)와 겨울 우기가 끝나는 마지막 기간에 내리는 늦은 비(4월 경), 그리고 이 두 기간 사이에 내리는 겨울비 등이 그것이다.
겨울비를 장맛비라고도 부른다.

이 세 종류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비가 겨울비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각각 전체 강우량의 15%에 불과한 반면, 겨울비는 70%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양이 훨씬 적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비록 강우량은 미미하지만, 그것이 농작물에 끼치는 영향과 중요성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즉 이른 비가 내려야만 여름 동안 메말라 있던 땅이 젖고 부드러워져 파종이 가능하게 된다. 늦은 비는 겨울 우기 동안 자란 곡식들을 더욱 충실하게 맺게 하는 역할을 한다. 비록 적은 양이긴 하지만, 적당한 때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작물 재배에 있어서 많은 양의 겨울비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비는 인간 삶과 직결된 필수적 요소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두의 목이 타게 되어 있고, 삶은 가뭄으로 인하여 핍절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비를 내려 주신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요 복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복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양’의 겨울비가 아니라 ‘질’의 이른 비와 늦은 비이다. 이것은 성경의 강조점이 양보다 기능과 역할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트’로서, ‘대답하다’를 의미하는 ‘아나’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에트’는 필요에 부합하는 최적의 때라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결정적 기회의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이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린다 하여도, 그것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아니다. 파종과 가꿈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기회와 여건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회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와 성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라”(신 28:12)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때를 따라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신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런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과까지도 주실 것이라는 일방적인 기대감을 갖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는 뜻이다. ‘복’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베라카’는 기본적으로 ‘생산성의 회복’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우리에게 내려주신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기회와 복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우리의 꿈을 정성껏 심고 가꾸는 성실한 손, 그리고 미래에 주어질 결실을 인내로 바라보며 기다리는 깊고 깨끗한 비전의 눈, 이것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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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지순례객들이 이스라엘에 처음 와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이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이스라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메마르고 척박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땅이 푸른 풀밭과 아름다운 들꽃으로 뒤덮혀 아름다울 때도 있다. 우기가 거의 끝날 무렵인 3월, 특히 중순께 사해 지역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칠고 메마른 유다 광야조차도 수천송이씩 무리지어 피어오른 푸르고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들꽃들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광경도 4월에 들어서면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급격히 사라진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좋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부터 버려야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최초에는 목축을 하기에 좋은 땅을 의미하는 관용 표현이었다(민수 16,13 참조). 아브라함이 반 유목민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아주 적합한 땅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벼농사를 짓는 농부였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름이 흐르는 땅'(기름진 옥토)을 약속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가나안 땅을 다소 과장시켜 생산성이 좋은 땅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사막 유목민들이나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먹을 음식이 풍부한 땅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서에서는 젖과 꿀, 혹은 그러한 것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젖과 꿀은 대표적 고단백질 음식이었다. '젖'이란 성서에서 목축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목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경제수단이었다.

이스라엘 땅 자체가 사막에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목축은 이스라엘 여건에 적합한 경제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목축에서 대표적 동물이었던 양은 이스라엘 제사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제물이었다.

젖과 꿀로 만든 음식들은(2 사무 17,28 참조) 고대사회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교역 물품들이었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봉헌되는 물건이기도 했다(2역대 31,5 참조).

 "무엇이 꿀보다 달겠느냐?"(판관 14,18 참조)는 표현처럼 성서는 달콤한 것을 비교하는 여러가지 표현에 꿀을 사용했다. 잠언에서 꿀은 즐거움과 건강함을 주는 선한 말에 비유되고 있다(잠언 16,24 참조).

그런가 하면 꿀은 또한 하느님 말씀(시편 19,10 참조), 지혜(잠언 24, 13 참조) 혹은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과 같이 다양한 즐거움과 유익함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처럼 분명히 젖과 꿀은 고대사회에서 높이 평가되는 값진 물건들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양식으로 주셨던 만나는 그 맛이 벌꿀과자 맛 같다고 표현되고 있다(출애 16,31). 그래서 죄인들에게 젖과 꿀은 허락될 수 없는 양식이기도 했다(욥기 20,17 참조).

 그러나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비옥한 땅이라 할 때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제 지리적 상황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땅에 관한 대표적 표현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스라엘의 실제 현실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다양한 역사 경험과 신앙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좋은 땅을 의미하는 성서 히브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축복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축복성은 땅의 풍요로움이라는 외형적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과 신앙적 관계성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평화신문


https://www.cjob.co.kr/christianity/1392


질문: 이스라엘 성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라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요? (학술원 신학생)
답변: 이주섭 목사 (성서지리연구소, Atlanta, GA, USA_

팔레스틴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대 광야와 네게브 사막을 지나는 동안 한가지 의문을 갖는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약속의 땅은 매우 비옥할 것으로 생각했던 환상이 황량하고 메마른 지역들을 보면서 점차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 표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른 말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란 말로 이해해도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성경의 역사 지리적인 배경을 공부하던 필자도 초기에는 그 의미가 사뭇 궁금했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표현에 대한 주석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독일학자인 벤징거(Benzinger)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리스의 신화적인 배경에서 신들의 음식인 젖과 꿀의 땅’으로 해석하였다. 벤징거는 가나안을 신들의 땅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레쓰만(Greβmann)은 이 표현은 ‘가나안을 낙원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바벨론의 신화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레쓰만은 요엘 3:18절 (요엘3:28절: 그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앙드레케커(André Caquot)는 위의 내용을 우가릿의 한 내용(ANET 140)과 연결시켜 이해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가나안이 비옥한 땅이란 사실은 고대의 여러 문헌들만 아니라 (Sinuhe's story, Thutmose III's inscriptions) 성경에도 종종 나타난다(신4:21, 7:13, 8:7, 11:10, 28:3, 창13:10, 레26:4). 요세푸스의 기록이 나로마의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책에도 나타난다.)과 아모스 9:13절(“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에 근거하여 이것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후트만(Houtman)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욥기 20:17절(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에 근거하여 시적 표현에서 비롯된 과장법으로써, 젖과 꿀이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표현은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학자요 랍비인 모쉐 데이빗 카수토(Moshe David Cassuto)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광야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가나안 땅을 가리켜 처음 사용했던 표현으로, 그 의미는 목축을 통해서는 젖을 그리고 농업을 통한 각종 나무로부터 벌의 꿀처럼 많은 실과를 거둘 수 있는 배경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는 확대되어 각종 실과를 풍성하게 소출하는 가나안 땅을 포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군들이 포도, 석류, 무화과 및 그 해의 소산들을 가져 오면서 보고하는 내용을 참고하면: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이것이 그 실과들입니다(민13:27).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명한 유대 학자인 나훔 마타티아스 사르나(Nahum Mattathias Sarna)는 젖과 꿀이 흐르는 표현을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럽게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이 표현은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대해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내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이르려 하노라 (출 3:8).(이상하게도 약속의 땅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이 표현을 한차례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출애굽기3:8절 이후에는 자주 나타난다. 그래서 이 표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후기 가나안 시대 곧 출애굽 직전에 제한된다. 사실 가나안이나 요단 동편에서 흉년이 발생할 때에는 이 지역에 생활하던 유목민들은 일시적으로 이집트의 델타지역으로 피신했던 경우는 고대 역사적인 문헌들을 통해 자주 대할 수 있다. 성경에도 그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 (창12, 20, 26). 성경에서 꿀은 약 50번 정도 나타난다. 양봉에 의한 꿀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찍 생산되었지만 정작 성경에서 이 부분은 언급이 없다. 성경에서 꿀에 의한 꿀은 삼손과 요나단의 두 차례 기록되었을 뿐이다. 히브리어의 꿀에 해당되는 드바쉬는 벌에 의한 꿀과 과일 시럽 모두 의미한다(출43:11, 아5:1, 시81:16, 대하31:5, 삼하17:29, 사7:15, 22)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생활했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지역은 흉년을 피한 이주민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성경의 역사 지리학자인 데니스 발리(Denis Baly)는 이 표현을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 땅이 꼭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 광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땅’이란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민수기 16:13-14절에 기록되기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브엘세바 평야의 황량한 전경을 찍은 사진이다)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 표현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들의 의견들을 거의 망라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성경을 탐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나안 땅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던 후기 가나안 시대의 역사 지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곧 가나안 땅은 상호 국제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민들은 무역이 아닌 목축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국제 무역은 오히려 페니키아에서 활기를 띠었다.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의 대표적인 산물들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시 104:15)이다. 열방들이 혹시 주의 백성들에게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면서 이 땅으로부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욜 2:17-19).( 위에 언급한 세가지 산물들에 대한 성경의 다른 기록들을 참고한다: 창27:28, 37, 신7:13, 11:14, 12:17, 14:23, 18:4, 28:51, 33:28, 왕하18:32, 대하31:5, 32:28, 느5:11, 10:39, 13:5,12, 시4:7, 사36:17, 애2:12, 호2:5, 8, 22, 욜1:10, 학1:11)

2) 후기 가나안 시대(Late Bronze Age)에 가나안 땅의 정착 인구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되었다. 네게브는 크게 황폐되었다. 중기 가나안 시대(Middle Bronze Age)에 번성했던 주요 성읍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황폐되었다.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곳은 브엘세바 인근, 중앙 산지, 그리고 요단 계곡이 대표적이다. 실로, 벧술, 여리고, 헤브론은 중기 가나안 시대에 견고한 성읍이었지만, 후기 가나안 시대에 이으러 작은 촌락으로 전락되었다. 텔 아줄(Tell el-Ajjul)과 텔 나길라(Tel Nagila)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농사를 위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정착했던 사마리아 중앙 산지에서는 중기 가나안 시대의 수 많은 작은 도성들이 후기 가나안 시대에 들어서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지역의 경제 구조가 농경에서 유목 생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램고프나(RamGophna)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대에 가나안은 크게 황폐되었고 도시의 수도 현저히 감소되었다. 특히 후기 가나안 시대의 초기인 주전16세기 이집트의 힉소스가 추방될 당시 가나안은 심각하게 유린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중기 가나안 시대의 주요 성읍들은 계속 남았다 (라기스, 게셀, 므깃도, 벧산, 하솔). 특히 하솔은 후기 가나안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성읍으로 남았다. 그리고 해안평야, 쉐펠라, 이스르엘, 벧산 골짜기 주변으로 작은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당시 경제적인 한 주요활동은 해상무역이었다. 지중해 연안에 형성된 항구들로는 텔아부하밤(Tell Abu Hawam) 쉬크모나(Shiqmona), 텔나미(Tell Nami), 텔미갈(Tel Michal), 텔모르(Tel Mor)가 있다.) 후기 가나안 시대의 말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던 시대이다.

3) 비록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시대보다는 앞선 때이지만, 가나안 땅에 대해 잘 표현된 고대 이집트의 시누헤 문서가 있다. 주전 20세기 초반에 속한 시누헤 문서에 나타난 가나안 땅에 대한 내용이다: 그곳은 야(Yaa)라 부르는 땅이다. 그 곳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가득하였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주가 흔하였다. 꿀은 넘치고 올리브는 풍부하였다. 각종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실과들이 열렸다. 보리도 있었다. 양과 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나를 그 땅의 가장 뛰어난 지파의 지도자로 삼았다. 매일의 양식으로 빵이 준비되었으며 포도주는 일용한 음료로 마련되었다. 나를 위하여 사막의 야생 고기 대신 (집에서 기른) 고기가 요리되었고 구워진 닭 요리가 내 식탁에 마련되었다. . . . . 나를 위한 온갖 종류의 음식이 마련되었고 우유로 만든 각종 요리들이 준비되었다 (ANET 18-22).

주전 20세기 초반의 시누헤 문헌에 야(Yaa)는 상당히 발달된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야(Yaa)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올리브, 각종 나무에서 생산되는 실과,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들이 언급되었는데, 이것들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여기의 농산물들은 보통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수확하고, 밀, 보리는 늦봄에서 시작하여 여름 내내 추수하는 곡식이다. 학자들은 야(Yaa)의 위치를 갈릴리 호수의 동쪽, 골란 고원의 기름진 평야로 이해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해서 한 마디로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두리뭉실하게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기 위해 부르신 때이다: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출 3:17).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약속의 땅(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표현 방법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은 일부 기름진 곳에서는 곡식을, 일부 척박한 곳에서는 가축을 돌보므로 젖을 구할 수 있는 땅이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암7:14)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첨예하게 공존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시선은 늘 그곳에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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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8:8
보리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소산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주요 산물은 밀, 보기,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 꿀이라고 하였다.


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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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신명기 11:8-12)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대부분의 신자들, 아니 많은 목회자들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란 당시로선 일용하는 필수 식품이 아니라 기호 식품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런 식품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아주 풍요로운 땅으로 쉽게 단정짓고는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이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생산된다는 의미로 "흐른다"라고 표현했듯이 가나안 땅의 주산물은 물론 젖과 꿀입니다만 땅 자체가 풍요롭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젖과 꿀이 주산품이라는 것은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라는 의미인데 곡물을 심을 수없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아리조나 사막 지역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보호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너무 덥고 메마른 모래 땅이라 염소와 꿀벌을 치고 토산품을 만들어 파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그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파종한 후에 채소 밭에 발로 물대기"를 할 수 있는 애굽 땅과 비교했습니다.
수차(水車)를발로 저어 물을 댈 수 있는 비옥한 평지라 채소나 곡물을 심기만 하면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우선 채소와 곡물을 심을만한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혹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실 정도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일용할 주 식품인 곡물과 채소를 경작할만한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호 식품은 양으로 따지면 조금만 생산해도 사실은 아주 많은 양이 됩니다.
기호식품이란 주 식품에 첨가해서 아주 적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고 또 매일 젖과 꿀만 먹고 살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쌀 수십만 톤과  꿀 1 톤이 먹일 수있는 사람 수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당시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 습관을 감안하면 젖과 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최고급 식품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흐르는"이란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정작 신자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왜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그 크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서야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과 가데스 바네야와 광야에서의 온갖 반역으로 인해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모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해답을 본문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신년초)부터 세말(歲末-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척박하여 산물이 희귀한 땅이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년365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풍족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의 땅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 살기를 하나님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 수단에 절대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계명대로만 살아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정한 이유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주는 백성들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한 마디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삶의 세밀한 구석부터 전 인생을 걸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존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멸시와, 환경의 풍족함이나 궁핍함에 굴복하지 않고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신 8:3)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살면 젖과 꿀은커녕 마실  물마저 없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방황해도 주리거나 갈하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으며 발이 부릍지 않게 해줄 하나님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정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젖과 꿀을 싫컷 맛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젖과 꿀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발로 물 대는 애굽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탐심을 좇아 살고(골 3:5) 있습니까?
진정한 젖과 꿀을 사모하기에 땅이 물을 흡수하는 험한 산과 골짜기에서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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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땅

팔레스틴의 남쪽과 동쪽은 사막이며, 국토의 대부분은 광야와 거친 땅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이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칭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 땅을 ‘약속의 땅, 에레쯔 이스라엘, 하아레쯔, 이스라엘, 유다, 시온, 필리스티나, 성지’로 불렸던 이름들이 다양하다.

성경외 고대 근동의 역사에도 이 땅을 가리키는 명칭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리우샤(Hariu-sha), 아모리의 땅(the land of Amurru), 레테누(Retenu), 자히(Djahi), 호리 족속의 땅(the land of Hurru), 가나안 땅(the Land of Canaan) 이 있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표현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만약 이 표현을 땅의 비옥도에 맞추어 생각하면 혼란에 빠진다.

팔레스틴은 외부적으로 보아 흠모할 만하거나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여건을 고루 갖춘 곳이 아니다.
팔레스틴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이 결코 땅의 비옥도에 맞추어 사용된 표현이 아님을 곧 알게 된다.
왜냐하면, 국토의 절반을 사막이 차지하며, 남아 있는 땅 가운데서도 중앙산지의 거의 대부분은 황량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에, 중앙 산지의 남쪽 절반은 유대 광야가 차지하고 있음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지울 수 없는 이런 의구심으로 많은 학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에 주목하여 나름대로 자신들의 의견들을 피력하였다.

독일학자인 Benzinger는, 그리스의 신화적인 배경에서 젖과 꿀을 신들의 음식으로 이해하였다.

Greβmann은 주장하기를, 이 표현은 가나안을 낙원으로 묘사한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 바벨론의 신화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Greβmann은 요엘 3:18아모스 9:13에 근거하여, 이것은 종말론적인 선지자들의 표현으로 주장하였다.

Houtman욥기 20:17 에 근거하여 시적 표현에서 비롯된 과장법으로써 젖과 꿀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같은 표현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사막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대 근동의 시각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Cassuto의 입장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유목민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표현으로 목축을 통해서는 젖을 그리고 사람의 손길을 거쳐 각종 나무로부터는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꿀벌의 꿀처럼 많은 실과를 거둘 수 있다는 배경에서 사용된 말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는 보다 확장되어 각종 풍부한 실과를 생산하는 가나안 땅을 포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N. Sarna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럽게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반어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 대한 형용사적인 표현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출 3:8)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하였던 델타 지역은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흉년을 피하기 위해 이주한 지역으로써 정착하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D. Baly는 이 표현은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이 절대적으로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 사막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땅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민 16:13-14).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이다.

앞서 소개한 여러 내용과 함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의 전반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가나안은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국제간 무역을 이룰 수 있는 자연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리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주민들은 무역 보다는 주로 목축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무역은 오히려 페니키아에서 활기를 띠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산물은 세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마음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시 104:15)이다. 열방들이 혹시 주의 백성들을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할 때에 YHWH께서는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이 땅으로부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욜 2:17-19)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후기 가나안 시대에 들어 팔레스틴의 인구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하였다.

네게브와 같은 지역들은 크게 황폐되었으며 중기 가나안 시대의 중요한 도시들은 전부 파괴 또는 부분적으로 황폐되었다. 특히 브엘세바 골짜기(Beersheba valley), 중앙 산지(central hill country), 요단 계곡(Jordan valley)이 대표적이다. 실로, 벧술, 여리고 그리고 헤브론은 중기 가나안 시대에 견고한 도시였으나 후기 가나안 시대에 들어 매우 열악한 도시로 전락하였다. Tell el-Ajjul과 Tel Nagila 역시 같은 입장에 처하였다. 농사를 위하여 형성된 에브라임과 므낫세 산지에서는 중기 가나안 시대의 많은 조그만 성읍들이 후기 가나안 시대에는 거의 모두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지역 사람들의 경제 구조가 농경에서 유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비록 후기 가나안 시대는 아니지만 주전 20세기에 속한 고대 이집트의 시누헤 이야기를 일부 소개하면: 그곳은 Yaa라 부르는 땅이었다. 그 땅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그득하였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가 더 흔하였다. 꿀은 넘치고 올리브는 풍부하였다. 각종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실과들이 있었다. 보리도 있었다. 양과 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나를 그 땅의 가장 뛰어난 지파의 지도자로 삼았다. 매일의 양식으로 빵이 준비되었으며 포도주는 일용한 음료로 마련되었다. 나를 위하여 사막의 야생 고기 대신 (집에서 기른) 고기를 요리하였고 구워진 닭은 내 앞에 진설되었다....... 나를 위한 온갖 종류의 음식을 만들었으며 우유로 각종 요리들이 마련되었다 (ANET 18-22).

기록으로 보아 시누헤가 머문 장소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발달된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 중에서 연중 생산되는 농산물은 올리브와 온갖 종류의 실과가 열린 나무들,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들로써 이것들은 가나안의 산지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이 농산물들은 보통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추수한다. 그리고 밀, 보리들은 늦 봄에 시작 여름 내내 추수하는 곡물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통일된 사회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시누헤 이야기와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서 발견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신 8: 7-10).

밀과 보리는 골짜기에서 생산되며 포도와 무화과 석류, 감람은 산지에서 생산되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여기에서 꿀이란 꿀벌에 의한 꿀과 함께 종려 나무의 열매로부터 얻는 시럽일 가능성이 크다. 히브리어로 꿀이란 ‘드바쉬’인데 우리의 조청과 같은 과일 시럽을 꿀(드바쉬)이라 불렀다. 종려 나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꿀은 요단 계곡과 사해 주변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또 다른 예를 다윗의 관료들을 열거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상 27:25-31).

아스마웨는 왕의 곳간을 맡았고... 요나단은 밭과 성읍과 촌과 산성의 곳간을 맡았고... 에스리는 밭가는 농부를 거느렸고... 시므이는 포도원을 맡았고... 삽디는 포도원의 소산 포도주 곳간을 맡았고... 바알하난은 평야의 감람나무와 뽕나무를 맡았고... 요아스는 기름 곳간을 맡았고... 시드래는 사론에서 먹이는 소떼를 맡았고... 사밧은 골짜기에 있는 소떼를 맡았고... 오빌은 약대를 맡았고... 예드야는 나귀를 맡았고... 야시스는 양떼를 맡았으니...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양한 관점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가져올 수 있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작지만 그러나 고대 문명이 교차되는 이 땅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셨고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성경은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다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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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틴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대 광야와 네게브 사막을 지나는 동안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약속의 땅은 매우 비옥할 것으로 생각했던 환상이, 황량하고 메마른 지역들을 보면서 점차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 표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른 말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란 말로 이해해도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성경의 역사·지리적인 배경을 공부하던 필자도 초기에는 그 의미가 사뭇 궁금했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표현에 대한 주석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독일학자인 벤징거(Benzinger)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리스의 신화적인 배경에서 신들의 음식인 젖과 꿀의 땅”으로 해석하였다. 벤징거는 가나안을 신들의 땅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레쓰만(Greβmann)은 이 표현은 “가나안을 낙원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바벨론의 신화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레쓰만은 요엘 3장 18절과 아모스 9장 13절에 근거하여 이것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후트만(Houtman)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욥기 20장 17절에 근거하여 “시적 표현에서 비롯된 과장법으로, 젖과 꿀이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이 표현은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학자요 랍비인 모쉐 데이빗 카수토(Moshe David Cassuto)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광야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가나안 땅을 가리켜 처음 사용했던 표현으로, 그 의미는 목축을 통해서는 젖을, 그리고 농업을 통한 각종 나무로부터 벌의 꿀처럼 많은 실과를 거둘 수 있는 배경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는 확대되어 각종 실과를 풍성하게 소출하는 가나안 땅을 포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명한 유대 학자 나훔 마타티아스 사르나(Nahum Mattathias Sarna)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표현을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럽게 해소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이 표현은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내가 …(중략)…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중략)… 이르려 하노라”(출 3:8).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생활했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지역은, 흉년을 피한 이주민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성경의 역사·지리학자인 데니스 발리(Denis Baly)는 이 표현을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 땅이 꼭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 광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땅”으로 이해하였다. 민수기 16장 13-14절에 기록되기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 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들을 제기했다.
비록 일부이지만 이 표현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들의 의견들을 거의 망라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성경을 탐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나안 땅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던 후기 가나안 시대의 역사·지리적인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지정학적인 측면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곧 상호 국제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민들은 무역이 아닌 목축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국제 무역은 오히려 페니키아에서 활기를 띠었다.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의 대표적인 산물들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시 104:15)이다. 열방들이 혹시 주의 백성들에게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면서 이 땅으로부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욜 2:17-19).

2. 후기 가나안 시대(Late Bronze Age)

가나안 땅의 정착 인구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되었다. 네게브는 크게 황폐되었다. 중기 가나안 시대(Middle Bronze Age)에 번성했던 주요 성읍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황폐되었다.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곳은 브엘세바 인근, 중앙 산지, 그리고 요단 계곡이 대표적이다. 실로, 벧술, 여리고, 헤브론은 중기 가나안 시대에 견고한 성읍이었지만, 후기 가나안 시대에 이르러 작은 촌락으로 전락되었다. 텔 아줄(Tell el-Ajjul)과 텔 나길라(Tel Nagila)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농사를 위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정착했던 사마리아 중앙 산지에서는 중기 가나안 시대의 수많은 작은 도성들이 후기 가나안 시대에 들어서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지역의 경제 구조가 농경에서 유목 생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후기 가나안 시대의 말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던 시대이다.  

3.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시대보다는 앞선 때이지만,

가나안 땅에 대해 잘 표현된 고대 이집트의 시누헤 문서가 있다.
주전 20세기 초반에 속한 시누헤 문서에 나타난 가나안 땅에 대한 내용이다.

“그곳은 야(Yaa)라 부르는 땅이다. 그 곳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가득하였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주가 흔하였다. 꿀은 넘치고 올리브는 풍부하였다. 각종 나무에는 온갖 종류의 실과들이 열렸다. 보리도 있었다. 양과 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중략)… 그는 나를 그 땅의 가장 뛰어난 지파의 지도자로 삼았다. 매일의 양식으로 빵이 준비되었으며 포도주는 일용한 음료로 마련되었다. 나를 위하여 사막의 야생 고기 대신 (집에서 기른) 고기가 요리되었고 구워진 닭 요리가 내 식탁에 마련되었다. …(중략)… 나를 위한 온갖 종류의 음식이 마련되었고 우유로 만든 각종 요리들이 준비되었다”(ANET 18-22). 
 
주전 20세기 초반의 시누헤 문헌에 야(Yaa)는 상당히 발달된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야(Yaa)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는 올리브, 각종 나무에서 생산되는 실과,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들이 언급되었는데, 이것들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여기의 농산물들은 보통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수확하고, 밀, 보리는 늦봄에서 시작하여 여름 내내 추수하는 곡식이다. 학자들은 야(Yaa)의 위치를 갈릴리 호수의 동쪽, 골란 고원의 기름진 평야로 이해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해서 한 마디로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두루뭉수리하게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기 위해 부르신 때이다: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출 3:17).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약속의 땅(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표현 방법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은 일부 기름진 곳에서는 곡식을, 일부 척박한 곳에서는 가축을 돌봄으로 젖을 구할 수 있는 땅이다.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첨예하게 공존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시선은 늘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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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言約櫃) 11. 10. 2021


히브리서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궤(언약궤, 법궤, 증거궤) 안에는 두 돌판(율법판, 증거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모세의 지팡이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9에서는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언약궤가 솔로몬 성전에 안치될 당시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언약궤 안에 모세 때에는 3종류의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2종류는 분실되고 솔로몬왕 때에는 1종류만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사울왕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 빼앗겼는데 (삼상4:11,17) 그 때 2종류는 분실하고 1종유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2종류나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언약궤 안에는 처음부터 1종류인 두 율법판만 들어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명히 율법판은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출애굽기40:20에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라고 했고, 신명기10:5에도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했고, 민수기17:10-11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왜 3종류가 있었다고 한 것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구약의 율법과 제도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관하게 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로 보면 그것들이 언약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3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https://nykcn.org/eonyaggwe-culaegubgi-25-10-22

언약궤(言約櫃)
계약(契約)의 궤(櫃)란 무엇입니까?

언약궤 계약의 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설계대로 만든 신성한 상자였습니다.
계약의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돌판 즉 ‘증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동영상 자료

1. https://www.youtube.com/watch?v=qum9uvS6uVI

2. https://www.youtube.com/watch?v=o32r4gRT70k

3. https://www.youtube.com/watch?v=ceZHlc55HCg


신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 9장과 요한계시록 11장에 소개됩니다.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언약궤에 대한 질문(출 25:10-22, 37:1-9)

  1. 언약궤를 만든 나무는?(10절)

  2. 언약궤의 크기는?(10절)
                                             장 : 2 규빗 반
                                             광 : 1규빗 반
                                             고 : 1규빗 반

 3. 궤를 둘러 싼 것은?(11절)

  4. 증거판을 어디에 두었나?(16, 21절)

  5. 속죄소를 만든 재료는?(17절)
      (시은좌)
 
  6. 그룹을 만든 재료는?(18절)

다양한 명칭 

    증거궤(출애굽기 30:6)
    법궤(레위기 16:2)
    언약궤(여호수아 3:3)
    여호와의 궤(여호수아 4:11)
    하나님의 궤(사무엘상 3:3)
    언약 넣은 궤(역대하 6:11)
    주의 능력의 궤(역대하 6:41)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일곱째 나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여호수아 3:15-17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만나 항아리(출애굽기 16:1-36)
- 애급에서 나온 후 이월 십오일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시험하리라(4b)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민수기 17:1-10)
-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출애굽기 32:1-20, 34:1-35)
-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신명기 10:5b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 불신과 우상숭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만나 항아리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 : 불신과 우상숭배

예레미야 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언약궤의 역사

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출애굽기 25:16, 25:21)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 증거판 / 5715, 에두트(ʽêdûwth) עֵדוּת
1. 하나님의 계율, 율법

* 넣으라 / 5414, 나탄(nâthan) נָתַן
1. 주다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출  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 16:33-34)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
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왕상 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라. 사라진 것들

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1차

가. 40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586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첫째, 만나 /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출애굽기 16장)
2.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수기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둘째, 아론의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250명이 직접적으로 죽고 불평에 동참한 자 14700명도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셋째,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3000명이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6. 적용

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가 없다는 것은 성경 원본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사본이나 번역본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출간되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혁한글판만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은데 사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이전에는 King James Version만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번역본들은 무시했었다가 이런 선입견이 없어진 후 수많은 번역본이 나왔으며 그 중에 훌륭한 번역본들이 많습니다.

서로의 미흡한 것을 보안하다보면 원본에 더 가까운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을 의거하면 그 안에는 세 가지 곧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은 두 돌판만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9절
역대하 5장 10절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이말씀과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과의 다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도 과거에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언약궤가 성막에 있을 때의 말씀이고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기록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는 세 가지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다윗 시대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안을 쳐다 볼 때 꺼냈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4-5년 전 앞의 두 군데 말씀과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7장의 말씀을 토대로 언약궤 안에는 항상 두 돌판만 있었고 다른 두 성물은 언약궤 앞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 16:33-34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장 4절에서 만나를 증거판 혹은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가만 생각하면 누가 감히 언약궤에 손을 대어 뚜겅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성물을 만질 수 있었겠습니까?
레위 사람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가지 않고 수레에 실고 가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무의식중에 언약궤를 붙들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과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열어 보았을 때도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만져보기도 전에 쳐다 본 즉시 수많은 사람들(오만 칠십 명-표준새번역, NRSV, KJV등등, 칠십 명-NIV, 현대인의 성경, NIV, RSV, NRSV등등 우리가 주로 보는 개역성경에는 (오만)칠십 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제 생각에도 작은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아 칠십 명이 맞는 것 같음)이 즉사한 사건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안’이라는 헬라어 ‘엔’은 보통 ‘안에’라고 해석하지만 그 외에도 ‘에,’ ‘위에,’ ‘에게,’ ‘가운데,’ ‘중에,’ ‘동안’ 영어에서 ‘with’(마 16:28; 요일 5:6), ‘by'(롬 5:9; 히 9:22; 계 1:5)로도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이나 그 앞에 있는 만나를 담은 금항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같이 묶어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엔'을 ‘그 안’이 아닌 단순히 ‘거기에’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 거기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이와 같이 전치사 하나를 ‘안’으로 해석하느냐 ‘에’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안’이 아닌 ‘에’로 해석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약의 말씀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증거판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판 앞에 두라는 말씀으로 그 안에 두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을 언약궤에 옆으로 세워 놓았을 리 만무하고 가장 먼저 두 돌판을 넣어 바닥에 놓았을 것이기 때문에 만나를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증거판 위에다 얹어 놓으라고 명령하시지 그 앞에다 놓으라고 명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기 16장증거판이나 민수기 17장증거궤나 히브리 원어는 ‘에두트’로 똑같은 단어로서 언약궤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성물, 곧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증거궤 곧 언약궤 앞에 두었던 것이지 그 안에 넣은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세 가지가 다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언약궤의 크기가 가로 이 규빗 반(약 113cm) 세로와 높이가 일 규빗 반(약 68cm)으로써 항아리, 지팡이뿐만 아니라 두 돌판이 들어가기에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팡이가 지금 노인들이 갖고 다니는 지팡이만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지만 그 당시 지팡이는 단순히 걷는데 의지하는 작은 지팡이가 아니라 양을 치는데도 사용하고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사람의 키보다도 긴 지팡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 안에 언약의 두 돌판, 곧 증거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언약궤 혹은 증거궤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지요.

‘그 안에’를 언약궤 안으로 해석하고 있어 히브리서 9장 4절 말씀의 해석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가 무척 두렵고 떨립니다.

성경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사본들과 번역본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Trinity 신학교 교수인 Wayne Grudem교수가 언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약 1000년의 차이가 있는 두 사본을 살펴보아도 많은 차이가 없으며 그것도 주로 접속사나 전치사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경의 양피지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인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산 사본이 원본과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번역들도 원본과 별 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구원 얻는데 충분한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Grudem 교수는 “만일 사본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실수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실수로 잘못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계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수정하므로 성경 원본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연구하면서 묵상하기를 원하시고, 성경의 비밀과 난해한 부분의 해석들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심으로 모든 비밀과 해석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확실히 알게 되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법궤에 대한 상상도

법궤가 만들어 진 것은 BC 144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만들었습니다.

아래 사진들도 모두 상상도이거나 상상 모형도의 사진들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성경의 내용은 특히 구약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세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가지가 들어가있다는 것은 신약 히브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 십계명 돌판(두번째) 돌판을 법궤(증거궤)에 넣은 것은 맞습니다.
출애굽기 22장입니다.

첫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출 32장) 다시 새 돌판을 받습니다(출 34장).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 지며”(출 25:16)

그런데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16: 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호멜(Homer. חֹמֶר, Homer)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민수가 17: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구약 성경에는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함께 넣어졌다는 구체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볼 때 광야의 성막이 자주 이동하는 동안 이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런 랍비들의 성경 해석을 따라 히브리서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이미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솔로몬 시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만 나중 솔로몬이 B.C. 959년 경 성전을 짓고 나서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고 확인할 때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열왕기상 8: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돌판을 제외한 만나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광야 40년 동안에 한시적으로 법궤 안에 넣어져 보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후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광야의 성막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 법궤도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주전 약 586년 전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은 약탈되고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핵심 귀족과 인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때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언약궤 곁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책을 법궤 안에 넣지 않은 이유는 수시로 율법책을 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1:24-26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정말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며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 자체가 주술적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법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듭남과 변화가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에 이용하는 에벤에셀 전투에서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도록 놔두십니다.

법궤 숭배가 아니라 내면의 개혁이 중요함을 가르쳐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회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시고 법궤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 훗날 바벨론 포로로 이스라엘이 잡혀갔을 때 예레미야는 이 법궤에 대한 문제를 정확하게 신앙적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언을 남깁니다.
이 부분을 대단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3:16-17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2달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고 1년 가까이 시내산 기슭에 머물며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립한 후 훈련받고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10장에 이르러 드디어 광야로 떠난다.

출애굽 후 만 1년 1개월 5일이 지난 때였고(B.C.1445년) 시내산에 도착한 때로부터는 만 11개월 5일이 지난 때였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2월 20일에 머물던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향한다.
드디어 BC 1445년 2월 20일(민수기 10:11)
구름이 증거의 장막에서 떠올랐다.

두렵고 떨렸다. 막막한 평탄치 않은 광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광야! 거치지 않을수는 없는 것인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광야였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
-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

블레셋의 해안 도시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다.

▶(수 13:3)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동맹을 결성한 막강한 블레셋 군대; 그 길외에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는 가나안에 갈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바란광야. 수르광야, 에담광야, 신광야, 네겝광야, 시내광야 가 놓여있다. (인생에도 그런 피할 수 없이 나아가야하는 광야가 있다!) 

두려웠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저 광야,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바란)광야로 나아가면서 2지파의 맨 앞장 서서 간 것이 법궤였다.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길(바란광야)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10: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가 기도한다!

모세도 두려웠다.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운다. 원래는 정찰 수색대를 앞세워야하는데 군인들이 아니라 법궤를 앞세웠다. 봐도 봐도 막막한 광야,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불안하고 두려웠다. 믿고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진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들이 광야길을 걸어간 것을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길도 그러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간다.
<그대에게 가는 길> 방기순; 복음성가 가수; 서울교회지휘자;

그대에게 가는 길 (하나님께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겐 힘이 되었지

이제는 내가 길이 되어 그대를 향해 가리니

그대에게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첫사랑을 향한 그리움, 고향을 향한 그리움, 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힘이 되었을까?

법궤였다.
그 법궤가 전진할 때는 가장 앞에 있었다.
진을 칠 때는 그 법궤가 12지파의 가운데에 있었다.

▶ 영어성경은 노아방주, 모세의 갈대상자를 ARK로 번역했다(원어, 테바)
그리고 법궤도 나무상자라는 의미에서 ARK로 번역했다.
노아 방주와 모세 갈대상자의 특징은 방향과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노나 돛이 없다. 이끄시는대로 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야한다.

그런데 법궤 속의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는 기적의 상징 뿐만 아니라 사실은 죄의 상징이요, 은총의 상징이었다.
▶ 만나, 출애굽기 16장 배고파 죽겠다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다(16: 1-12절 7번 원망이라는 말이 나타남) ▶ 원망과 불평은 성격이나 습관이 아니라 죄이다! [민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오래 하면서 서슬프게도 노예근성의 언어, 불평과 원망의 언어습관이 생겼고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기대고 의존하고 나눌 줄을 모르고 드릴 줄을 모르고, 공짜근성, 거지 근성이 생겼다. 

▶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불평은 죄인된 인간의 저열한 성품을 만족시키는 쾌감이 있다. 불평을 듣는 것도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욥->입술로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욥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불평은 마귀의 언어요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다.
▶ 아론의 지팡이 사건 [민16:2]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으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게 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까지 나게 한 사건!! 250명이 죽은 사건! 더 나아가 불평에 동참한 자 일만사천7백명도 죽는다. 그런데 또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다. 살구나무; 깨어 지켜보시고 지키신다는 뜻이다.

▶ 십계명의 돌판도 두번째 돌판이다. 불신으로 우상을 만들어 춤추는 백성들! 분노로 깨뜨린 돌판, 출 32장,  34장 다시 만들어주신 돌판,  또 용서해주셨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이제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뜨거운 눈물의 고백이다!
십계명 돌판의 불신, 만나의 원망, 아론지팡이의 교만과 거역,  그리고 용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받았다. 기회를 얻었다. 고쳐보겠습니다! 소망을 다시 세운다. 그 은혜로 살겠습니다!!

▶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한다. 돌판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상징한다. 만나는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 예수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즉 예수님을 믿는자에게는 길이 열리고 소망의 싹이 트고 열매를 맺으며,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이 있고 만나로 상징되는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충만할 것이다!
인생의 광야길이 힘들어도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함께 법궤를 메고 가는 한 반드시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만나를 내려주시며! 진리로 사는 자의 만족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아시는가? 여호수아 4장의 기적! 40년 광야의 마지막 순간의 기적!! 그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가정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마음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삶의 길에 법궤가 있는가?
인생이라는 광야길,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오늘도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는다.













출애굽기 25:8-10, 16.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를 짓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이 되게 하고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언약궤의 구조


가로가 2.5규빗, 세로가 1.5규빗, 높이가 1.5규빗(111 x 67 x 67cm)
궤를 만든 재료는 "조각목" 즉 "아카시아나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안팎을 금으로 입혔으며 둘레에 금테 장식이 있었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덮개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금으로 만든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얼굴은 덮개를 향해 있었으며 날개가 덮개 위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궤의 네 다리 위에는 금으로 주조한 고리가 각각 한 개씩 있었습니다. 그 고리에 금을 입힌 아카시아나무 채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 채를 이용해 궤를 운반했습니다.— 출애굽기 25:10-21; 37:6-9.

  • 위치. 처음에 궤는 장막의 지성소에 놓여 있었습니다. 장막은 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숭배를 위한 이동식 천막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백성은 그 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40:3, 21)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6:2; 히브리서 9:7) 나중에 궤는 솔로몬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로 옮겨졌습니다.—열왕기상 6:14, 19.

  • 목적. 궤는 신성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물품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궤는 속죄일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레위기 16:3, 13-17.

  • 내용물. 궤에 처음으로 보관한 물품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40:20) 나중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도 그 궤에 보관했습니다. (히브리서 9:4; 출애굽기 16:33, 34; 민수기 17:10) 그 금항아리와 지팡이는 그 후 언젠가 궤에서 꺼낸 것 같습니다. 궤를 성전으로 옮겼을 때는 그 물품들이 궤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8:9.

  • 운반. 궤는 레위 사람들이 아카시아나무 채를 사용해 어깨에 메고 옮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7:9; 역대기상 15:15) 채가 항상 궤에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은 궤를 만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5:12-16) 궤를 운반할 때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칸막이 휘장”으로 궤를 덮었습니다.—민수기 4:5, 6*

  • 상징적 의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성소의 궤 위와 이스라엘 진영에 있었던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와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레위기 16:2; 민수기 10:33-36) 또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셨다”고 말하는데, 이 그룹들은 궤의 덮개에 있었던 두 그룹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상 4:4; 시편 80:1) 따라서 그 그룹들은 여호와의 “병거의 표상”이었습니다. (역대기상 28:18) 궤에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므로, 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후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시편 9:11.

  • 명칭. 성경은 그 신성한 상자를 지칭하는 데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중에는 “‘증언’의 궤”, “계약의 궤”, “여호와의 궤”, “주[여호와]의 힘의 궤” 등이 있습니다.—민수기 7:89; 여호수아 3:6, 13; 역대기하 6:41.

    궤의 덮개는 “화목 덮개” 즉 “자비의 자리”라고 불렸습니다. (역대기상 28:11; 영문 킹 제임스 성경) 이 표현은 속죄일에 덮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덮개를 향해, 덮개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느님과 화목하게 하는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 죄를 속하고 덮었습니다.—레위기 16:14-17.

계약의 궤가 지금도 존재합니까?

계약의 궤가 지금도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 궤와 관련이 있는 계약이 예수의 희생에 근거한 “새 계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궤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예레미야 31:31-33; 히브리서 8:13; 12:24) 따라서 성경은 계약의 궤가 더는 없어도 하느님의 백성이 아쉬워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3:16.

새 계약이 맺어진 후에 사도 요한은 환상에서 계약의 궤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 계시록 11:15, 19) 이 상징적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그분이 새 계약을 축복하신다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궤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의 궤가 있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 사람들과 전투를 할 때 진영에 그 궤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이스라엘 사람의 불충실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 7:1-6) 오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의 궤를 전쟁터로 운반해 갔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들이 진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2; 4:1-11)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전쟁에서 계약의 궤를 빼앗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때까지 그들에게 질병으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사무엘상 5:11–6:5.

계약의 궤의 역사

연도 (기원전)

사건

1513

브살렐과 그의 보조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부한 자재로 계약의 궤를 만들다.—출애굽기 25:1, 2; 37:1.

1512

모세가 장막과 함께 계약의 궤를 봉헌하고 제사장들의 임직식을 거행하다.—출애굽기 40:1-3, 9, 20, 21.

1512—1070 이후

여러 장소로 옮겨지다.—여호수아 18:1; 사사기 20:26, 27; 사무엘상 1:24; 3:3; 6:11-14; 7:1, 2.

1070 이후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다.—사무엘하 6:12.

1026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의 성전으로 옮겨지다.—열왕기상 8:1, 6.

642

요시야 왕이 다시 성전으로 옮겨 오다.—역대기하 35:3*

607 이전

성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다. 기원전 607년에 성전이 멸망되었을 때 바빌론으로 옮겨진 물품 목록이나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진 물품 목록에 그 궤는 나오지 않는다.—열왕기하 25:13-17; 에스라 1:7-11.

63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의 지성소를 확인하고는 그 궤가 없다고 말했다. *





언약궤의 능력(사무엘하 6:6-12)

이스라엘의 출애굽 광야 생활 때, 시내산에 오른 모세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고 성막의 제조법과 절기와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와 같은 지시하심에 따라 모세는 성막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진 것은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다. 여호수아 이후에는 주로 '언약궤(Ark of Covenant)'라고 불렀고, '법궤(Ark)'라고도 불렀다.

모세 /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
여호수아 이후 / 언약궤(Ark of Covenant), 법궤(Ark)

언약궤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형이며, 하나님 능력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언약궤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저주와 축복이 결정되기도 했다.

'증거궤' 혹은 '언약궤'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예표해 주는 것일까?
진실과 성실함으로 이를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언약궤

1. 설계와 제조 :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제공하신 것들은 십계명의 두 돌 판성막 제조법절기제사법이다.

성막을 제조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정교함이 요구된 것은 단연 '하나님의 언약궤'였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궤(Ark)를 만들고 그 위에 덮게 즉, 속죄소를 만들어 그 위 양 끝에는 날개를 편 천사가 언약궤를 내려 보고 있게 만들어졌다.

하나님께 설계도를 받은 모세는 손재주가 특별한 브살렐로 하여금 이를 제작하고, 순금을 입혀 황금빛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 판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두었다.
이는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예표해 주고 있다.

성부(聖父) 하나님의 예표 : 십계명의 두 돌판(말씀의 하나님)
성자(聖子) 예수님의 예표 : 만나를 담은 항아리(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성령(성령) 하나님의 예표 :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성령의 능력)

2. 보호와 보존 :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벽을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으며, 그 안에 뜰이 있고 뜰 안에 번제단과 물두멍을 만들어 두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으며, 가장 깊은 곳에 지성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었다.

성소 오른쪽에는 떡상, 왼쪽에는 정금등대, 중앙 깊은 곳에는 분향단이 자리했으며, 분향단 뒤에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 지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매년 한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진행할 때에는 성막의 모든 기구를 레위인이 운반했으며, 특히 언약궤는 덥게로 싸고 체를 고리에 매어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주의해서 운반해야만 했다.

3. 상징과 능력 :

성막의 뜰은 해와 달과 별의 자연의 빛이 비춰지고, 성소 안에는 정금등대의 불이 있었으며, 지성소 안에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쉐키나)만이 빛났다.

지성소 임한 하나님의 임재는 천국에서 오직 하나님 영광의 빛만이 비춤을 예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나타나심이며, 그곳에서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곳, 즉 속죄소가 되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옹위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언약궤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하게 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언약궤로 인해 저주 받은 자들

언약궤를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소홀이 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 자들 역시 성경에 기록돼 있다.

1.엘리 제사장(삼상 4-6장)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워 나가 승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에 옮겼다. 이 안에는 언약궤를 마치 불신자들이 사용하는 부적처럼 임시방편으로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업신여기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 좋을 대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블레셋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으며, 전쟁에서 자신의 두 아들도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는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또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 3만 명이 죽었으며, 엘리의 후손에게 복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됐다.

한편, 블레셋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취한 후 나라에 하나님의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블레셋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7개월 만에 젖을 뗀 어미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려 보낸다. 이때 벧세메스 사람 70명이 언약궤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뚜껑을 열었다 죽는다.

2. 사울왕 :

사울은 40세에 왕이 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생각도 안 했고 방문하지도 않았다. 법궤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교만해 져 자신이 제사장 직분까지 수행 하려고 했던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 결국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이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해 자기 칼에 스스로 엎어져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3. 웃사(삼하 6장)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삼만 명을 거느리고 산지 아비나답 집을 방문해, 오랫동안 방치해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야효가 수레를 몰게 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도중 수레가 다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궤를 붙들었다. 이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는 여호와의 궤 옆에서 즉사한다. 이것을 본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들여오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았다.

언약궤로 인해 축복 받은 자들

1. 여호수아 :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완강한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시고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을 건네고 여리고 성을 섬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시대로 준행하여 여호수아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에발산에 한 단을 세우고 여호와의 율법을 돌에 새기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 앞에서 그리심산(축복) 쪽이나 에발산(저주) 쪽에 서게 하였다. 이는 언약궤는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저주가 됨을 말해준다(수8:32-33). 오랜 세월이 지나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마을)에 모이게 한 뒤,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을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선언하고 축복의 길을 가게 됐다.

2. 오벧에돔(11절) :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언약궤를 신령과 진정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 온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고 누리게 된다.

3. 다윗 (12절 이하) :

언약궤로 인해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복 받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 성으로 오게 되었다. 다윗은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면서 자기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기뻐하고 즐거워 했다.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 후손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리라(행13:22)”고 약속하신다.

실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약속은 불분명하고, 또한 약속이 없는 증거 역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언약궤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이며, 또한 이 축복이 분명히 임하게 됨을 증거해주는 증거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름 역시 '언약궤' 그리고 '증거궤'인 것이다.


오늘날의 증거궤, 언약궤는 무엇일까?

오늘 날 과연 언약궤는 무엇이며,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그런데 오히려 언약궤 자체는 사라져야만 함이 마땅하다. 증거궤, 언약궤는 영원한 축복의 모형이었으며, 축복의 본체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속죄와 속건 제물이 되심으로 은혜와 축복 증거 그 자체가 되셨다.

신약에 와서는 축복과 저주를 갈라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며 이것은 복음(Gospel)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영생의 길이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고 증거한다. 사람이 구원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즉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요3:14).

외적인 증거궤, 언약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의 구원을 확실하고 진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내 심령의 중심에 모신다면, 주님의 임재를 항상 체험하며 매일 기쁨과 평강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공부
1. 성막의 기구들을 말하고 그것들이 성막의 어디에 놓였는가?
2. 언약궤가 어떻게 제조되었고 보관 되었으며 어떻게 운반해야 했는가?
3. 언약궤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4. 언약궤로 인하여 축복을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5. 오늘날에 언약궤의 실체는 어떻게 되었고 왜 그래야한 했으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언약궤를 무엇, 누구에게 비유해서 생각해야 할 것인가?
6. 사울 왕의 잘못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말해보라.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지난날에 가졌던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 생각을 말해보라.
2.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오늘날 현재는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가 말해보라.



언약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문제는 수세기 동안 신학자, 성경 연구자 및 고고학자들을 매료시킨 질문입니다.

왕이 된지 십팔 년째 되던 해에 유다의 요시야 왕은 언약궤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돌려 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역대하 35:1-6; 열왕기하 23:21-23).

그것이 언약궤가 놓인 위치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입니다.
그 뒤 40년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10년이 안 되어서,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남겨진 것을 가져가고 성전과 성읍을 불에 태워 흙더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가져갔습니까?
성읍과 함께 파괴되었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 시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에 성전을 습격했을 때 처럼, 누군가가 언약궤를 치워서 안전하게 숨겼던 것입니까?

시삭이 언약궤를 가져갔다면 어떻게 요시야 왕이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돌려 놓으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언약궤가 애굽에 있었다면 (“잃어버린 성궤의 침략자들”의 줄거리처럼), 레위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9은 언약궤가 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몇몇 사람들은 이 구절 때문에 언약궤가 하늘로 옮겨져서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하늘에 대한 환상에서 본 언약궤는 아마도 모세가 지은 언약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에 있는 물건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히브리서 9:23)이며,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성소 자체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히브리서 8:5)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1장은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사건을 알리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다룹니다.
요한이 하늘에 있는 언약궤를 잠깐 보게 된 것은 아마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과 함께 계시며, 진정한 예배가 곧 회복될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경에 속하지는 못한 마카베오기 하권(2 Maccabees)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바벨론 침략 직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장막과 언약궤를 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유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그 산으로 갔습니다(느보산. 신명기 31:1-4). 예레미야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장막과 언약궤와 향단을 넣을 수 있는 동굴 속의 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그곳에 두고 입구를 막았습니다"(2:4-5). 그러나 "그를 따라온 사람들 중에는 산으로 올라오면서 길을 표시하려고 의도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그들에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시 모으고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주께서는 이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며, 모세 시대처럼,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될 것을 기도했을 때처럼, 구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2:6-8).

이 간접적인(2:1 참조)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록 그 자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언약궤의 위치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는 랍비 슐로모 고렌(Shlomo Goren)예후다 겟츠(Yehuda Getz)의 주장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언약궤를 훔쳐가기 전에 성전의 산 밑에 숨겨져서 그곳에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행하게도, 성전 산은 지금 이슬람교의 거룩한 장소인 바위 사원 Dome of the Rock이 있는 곳이며, 지역 무슬림 공동체는 그곳의 발굴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 고렌과 겟츠의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탐험가 벤딜 존스(Vendyl Jones)는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발견된 유물인 쿰란 동굴 3번의 수수께끼 같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 Copper Scroll가 바벨론 침략이 있기 전에 언약궤를 포함한 여러 귀중한 보물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실제 보물지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두루마리에 열거된 필수적인 지리적 경계표를 아무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몇 학자들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는 마카비하 2:1및 4절과 관련된 실제 기록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입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이었던 그레엄 핸콕 Graham Hancock은 1992년에 <암호와 봉인: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 The Sign and the Seal: The Quest for the Lost Ark of Covenant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언약궤가 고대 에티오피아 도시인 악숨 Aksum에 있는 시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B. A. S. E 협회의 탐험가 로버트 코르누크 Rovert Cornuke도 언약궤가 지금 악숨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언약궤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자 마이클 샌더스 Michael Sanders는 이스라엘의 드야하랴 Djaharya 마을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사원에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아직 그곳에서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아일랜드 전통은 언약궤가 아일랜드의 타라 Tara 언덕 아래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아일랜드의 “무지개 끝에 있는 아일랜드의 금 냄비” 전설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론 와이어트 Ron Wyatt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갈보리 산 아래에서 보았고, 톰 크로체 Tom Crotser는 느보 산 곁에 있는 비스가 산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고고학 공동체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지지받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결국, 언약궤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케베오기 하권의 저자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친히 다시 오실 때까지는 잃어버린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언약궤에 담긴 세 가지

가. 관련구절 히브리서 9:3-5

나.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언약궤의 역사

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출" " ( 25:16)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출"( 16:33)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 "( 17:5)
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민"( 17:10)
다.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왕상" ~"( 8:9)
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대하" ~"( 5:10)
라. 사라진 것들
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차: 1
가) 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40- 2 -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2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586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5.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 1)
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2) , 3)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1) 만나
가)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출 장( 16 )
(2)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
늘 민( 11:5)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2) 아론의 지팡이
가)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명이 직접적으로 죽고불평에 동참한 자 명도 죽음: 250 , 14700- 4 -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 "
3)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가)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명이 죽음3000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다.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해도 쌌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라.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적용

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 , )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출애굽기 25:10-16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성막에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의 금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을 지나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있으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 여호와(יְהֹוָה, LORD)의 궤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법 즉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법궤라고 부른 것이며 또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불렀기 떄문에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판이 들어있는 궤이므로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우리는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말씀 안에 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the ark of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번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옛날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단어가 나오면 발음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여호봐 יְהֹוָה)"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으면 글자만 보아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맛소라 학파가 모음부호를 추가하면서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추가하여 만들어진 소리가 "여호와" "야훼"입니다. 그후 70인역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것을 계승하여 헬라어로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주님께서 우리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11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단강)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궤는 백성들보다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으며, 요단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백성들이 모두 무사히 건너자 다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또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도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성을 돌며 그곳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하신 약속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징벌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상징하고 있는 마귀와 원수가 되어 이땅에 오셔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하난미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만나셨고 모세에게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셨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선전 안의 모든 기물은 새로 만들었지만, 이 언약궤 만큼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언약궤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2규빗 반(114cm, 4 feet), 넓이와 높이가 1규빗 반(68.4cm, 2.5 feet)의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씌운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이처럼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물은 그것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거나 아니면 정금으로만 만들거나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책을 보면, 예전에는 책 가장자리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으로 성경의 테두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붉은 색은 사라지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막을 연구하면서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색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므로 금색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소 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들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만을 예표합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도 하는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은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가시 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본 것은 떨기나무의 불꽃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30절을 보면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즉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6절에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외롭게 자라는데, 이것은 이사야 53장2-3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든 언약궤는 이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정금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9장28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는 사도 요한이 용모가 변화되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두 돌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택한 대제사장은 아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 역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 이외의 다른이가 예수님 역할을 할 경우에는 다 죽을 것이라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옆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역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을 넣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9절과 역대하 5장10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6장33-34절에는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수기 17장1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민 17:10)

그런데 히브리서 9장4절을 보면,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로 성막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를 이동할 때에는 언약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었기 때문에 언약궤 안에 그 3가지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가 쓰여진 배경은 성막시대가 끝나고 솔로몬의 성전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더 이상 언약궤가 이동될 필요가 없으므로 원래대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9장과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5장을 비교하면서 성막을 이동하면서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분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대로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만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왕은 말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던 왕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 안에 두 돌판만을 넣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언약궤도 떡상처럼 4개의 발(feet)에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서 이동할 때에 그 고리에 채(긴 막대기)를 끼어서 메고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발'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파암(פַּעַם)'은 '모퉁이'(corner)라는 뜻도 있고 '발'(foot)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rner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foo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위쪽 코너에 고리를 만들어놓은 모습이었고, 그런 것은 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은 4개의 발이 있고 거기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아랫부분에 있는 발에 고리를 달아서 메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언약궤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거룩한 물건에 함부로 몸이 닿지 않도록 매우 세밀하게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하여서 가는 도중에 소가 날뛰는 바람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특별히 구별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 사람들의 풍속대로 새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궤를 메고 가도록 네 모퉁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놓았고, 그 고리에 집어넣어서 들고 갈 '채'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은 고리보다는 바퀴가 훨씬 편하며,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소가 끌고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서 소가 끌고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뻬어내지 말찌며"라며 언약궤를 메고갈 '채'를 고리에 항상 끼워두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메고가야할 성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이렇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까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합리적이며 편리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예배드릴 동안 예배당의 의자가 편한지, 목사님의 설교는 길지 않은지,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만 한지,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핀 다음 교회 시설을 살펴봅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에오콘이 없는 교회를 싫어하며 아이들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다닙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고 만족해야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궤의 모퉁이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금으로 씌운 막대기(채)를 끼워놓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면 즉시 채를 어깨에 메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된 상태로 주인의 명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항상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은 "설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즉시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아무리 준비하라고 해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 몇 번을 말해야 간신히 그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0장33-34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으며, 진을 칠 때에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진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또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보호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서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tablets of stone)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tablets of the heart)에 한 것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둘어있는 것이 '증거궤'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써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엉뚱한 말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런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어?"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저런 분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쩔쩔 매며 어찌할 줄 몰라서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고싶다면서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다가가서 "아니다. 이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고 우울해서 이렇게 낙망하면서 살 시간이 없다. 내 모든 시간은 빛으로서 살아가야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둠을 내쫓고 빛을 밝히 비추어주며 썩어가는 곳에는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며 또 소금이 간을 고르게 하듯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말을 해주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라며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언약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인과 성도는 매우 다릅니다.
교인은 알곡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중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곡이며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거룩을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 말씀의 칼로 단호히 무찌르고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말씀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또한 말씀의 파수꾼으로서 죄의 길로 달려가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궤 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삶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홍해(하나님의 은혜)와 요단


10 - 24 - 2021(주일) 오후 10:49
신명기 27장을 읽으면서...........

홍해와 요단
-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광야 생활(40년) 민수기 14:33-34

홍해(紅海, Redsea. 갈대의 바다)
요단(Jordan, 급한여울)

출애굽의 연대 : BC 1446년 아빕월(3-4월)
출애굽기 13:4

가나안 땅에 진입 : BC 1406년 아빕월(니산월)
여호수아 4:19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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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Jordan)

히브리어로 ‘야르덴’이라 부르는 요단강은 야라드(아래로 가다, 내려가다, 후손)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요단강은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 산악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까지 320㎞를 흐릅니다.
서쪽에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지방이 있고 동쪽에는 지금의 요르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아브람이 롯과 각자 거주지를 정할 때 처음 언급됩니다(창 13).
신약성경은 요단강을 그리스어로 ‘이오르다네스’라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곳입니다(막 1:5).

영어에서는 이오르다네스를 조르단(Jordan)으로 씁니다.
나라 이름 요르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정관사(the)를 함께 쓰면 요단강을 뜻합니다.
사람 이름이나 성씨로도 씁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에 요단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섬기면 사망과 저주가 임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8~19, 새번역)

모세는 이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30:14)



홍해(紅海. Red Sea)

홍해 (The Sea of Red) or 갈대바다 (The Sea of Reeds)

1. 홍해냐 갈대바다이냐?

 

얼마 된 이야긴데요, 네이트에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이 과학적으로 입증 될 수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속 101km/h에서 사람이 걸을 수 없다, 사람이 날라간다, 따라서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입증이다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조롱하는 댓글들이 싫어서, 뉴스를 좀 더 검색했는데요. 바람의 세기를 시속에서 분속으로 나누어 보면, 약 초속 28m 정도로, 바람의 세기로는 중간 정도의 태풍인 것 같았습니다.[1] 따라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에 대하여 그 과학적 개연성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사람들이 강풍에 가까스로 홍해를 건너 가는 장면이 있는데, 실로 그 정도의 장면이 되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컴퓨터모델링 실험과 역사적 기록을 통해 모세가 유대인들과 홍해를 건너올 때 발생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지중해 서편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2]

 

성경에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을 입증하여 그 허구점을 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의 사실성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도 그러한 사람들의 자료나 다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다큐에서는 위성 판독에 따르면 “깊은 홍해에 어느 지점에 불쑥 올라나온 구릉지가 있다”, 혹은 홍해 연안에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라는 등등, 성경의 그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전 과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주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론 그 과학적 반박과 입증들이 무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일반적인 자연현상과, 그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초월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갈대의 바다-홍해>

 

근데, 홍해가 아닌 갈대바다를 건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나름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원을 분석해서 나온 주장인데요. 여기서 저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Moses Spring. [3]

                                       

 3. 히브리 어원으로 따져서 “갈대(의) 바다”라고 주장.

 

흔히 갈대밭을 건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우리가 흔히 ‘홍해(The Red Sea)’라고 번역하는 ‘홍해’는 단어는 애초의 히브리원어- ‘yam suph’가 사실 '붉은 바다'라는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5] 요즘 약간의 주해가 달린 성경을 보면, 각주에 갈대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되어 진 것을 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원을 분석하면, 우리가 ‘홍해’라고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yam suph’ 인데요. 여기서 ‘붉다’에 해당하는 단어인 ‘suph’가 사실 히브리원어에서는 붉다라는 뜻이 없고, 일반적으로 ‘갈대’ 내지 ‘해초’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6]

 

그런데 이것이 후에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 역 성서(LXX)에서,히브리어의 Yam Suph란 단어를 지금의 ‘홍해’라는 뜻을 가진 Erythra Thallas라고 번역했고, 헬라어 성경에 기초한 영어 성경이 그것을 따라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란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갈대 바다 얌 수프(yam suph’)가 지금의 ‘홍해’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성경의 ‘갈대의 바다라고 (The Sea of Reeds)’ 를 왜 헬라어 성경이 히브리성경의 원어에 충실하지 않고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로 했느냐?"에 대해서, “홍해의 해초가 붉었기 때문에 그대로 썼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원어의 ‘단어 뜻’의 충실한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원어적 의미를 생각할 때, 번역성경에서의 ‘홍해(The Rea Sea)는 말은 틀린 번역이며, 따라서 갈대(의)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4. ‘갈대’지만 홍해는 그럼에도 ‘바다’이다

 

 ‘홍해’를 ‘갈대(의)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원적 근거만을 가지고 따지고 볼 때는, 그 타당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원적 근거 그러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 통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는 실질적으로바다’라는 것입니다.

 

n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람들이 수프(yam suph’) 그렇게(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으로 생각하고)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살펴보면 ‘yam suph’ (홍해이건, 갈대바다로 번역하든) 는 분명히 바다라는 것입니다.

V. 4-5 여호와께서 바다에 던졌고 (into the sea), 큰 물(The deep waters)이 바로/의 병거를 덮쳤다(NIV).

만약, 단지 ‘붉다’에 해당하는 ‘갈대’라는 어원만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했다면, 출애굽의 스토리는 마치, 여호와께서는 강한 동풍으로 바다와 같은 그 큰 갈대지역을 물벽이 있는 것처럼 가르시고, 물이 아닌 갈대들이 덮쳐(혹, 물이거나), 이에 바로의 군대들이 죽게 되었다는 전혀 문맥이나, 상황에도 맞지 않아, 이야기 진행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을 살펴보면, ‘빠져 죽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Erythra Thallasà여기서는 The Red Sea)’ 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어…”

 

마찬가지로 여기서 만약, 우리가 그 어원에 의해서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른다면, 위에서의 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지 갈대에 빠져 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우리가 홍해라는 지역과 연관하여 사용하는 그 ‘홍해’란 단어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기자(writer)와 또 그 시대의 독자나 청중들이 모두 똑같은 정황과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에게 있어서 ‘yam suph’ 갈대가 아닌 지금의 홍해와 연관한 바다와 연관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7]

 

즉, 구약에서 ‘갈대의 바다’라는 해당하는 원어를 ‘붉은바다’라고 번역해서 사용해도 신약시대-초대 교회 사람들이(신약의 기자들이나 독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모두 익숙한 바울이 또한 그 시대의 독자들이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예로, 구약성경의 사용되었던 각 성경의 제목이나 사용한 단어들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성경제목은 구약에서 쓰지 않았던 이름이지만, 헬라어에서는 구약성경의 그 의미를 반영해서 번역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8] 즉, 통용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장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홍해’ 역시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당시에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yam suph’는 지금의 언어학자나, 우리 같은 외국인이나,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문제지,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yam suph’ 그 사람들에게서 그 자체로 ‘yam suph’ 를 ‘갈대바다’으로 번역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홍해로 알고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좀 그렇긴 하지만, 비유하자면 우리는 짜장면을 먹지만, 방송에서는 자장면 (올바르기 때문에?) 먹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유가 어찌 하든, ‘짜장면’이나 혹은 ‘자장면’이나 하든 실지로 우리가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그 음식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yam suph’를 The Sea of Reeds 라 할지라도 그 것을 구태여 ‘갈대로 되어진 바다’ 혹은, 호수’[9]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10] 이는 마치 붕어빵을 구태여 언어분석하여 ‘붕어+빵으로 쪼개’어 붕어로 된 빵’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만약 ‘붕어빵’도 수 천-년이 지난 후에, 지금의 붕어빵이 사라지고, 기록에 남아 있는 붕어빵만 남아 있다면, 후손들이 실제 로 ‘붕어로 만든 빵’이라고 생각할지 누가 모르겠습니까? 즉, 갈대의 바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다의 한지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원만을 따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결론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역사적 고증을 따지고, 어떤 사람들은 언어나. 문학적 작품으로서 이해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것들은 실로 도움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어떤 이들은 ‘좌’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우’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민’과 ‘인민’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말씀을 읽음으로 믿음을 더욱 공고케 할 근거가 있음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께 권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구태여 그렇게 해석 함으로써, 감동적인 출애굽의 그 영광의 탈출이 너무나 조촐하게 만들지 않나요?

 The Sea of Red[4]

 

우리가 태도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를 건넜던 그 출애굽(Exodus)의 명~장면이- 물벽이 있는 바다에서, 연안으로, 근처 갈대로 이루어진 습지로, 그리고 갈대밭으로, 더 나아가 바다가 아닌 그냥 맨땅으로 돌아 건너가게 되며, 그렇게 따라갈 때, 우리의 믿음 또한 그 만큼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예화

  어떤 예화집에서 보았는데, 어떤 선생님이 홍해가 아닌 갈대밭을 건넜다고 학생들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더욱 크나큰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왜냐하면 “그 빠져죽을 수 없는 얇은 물에 애굽의 수 많은 병사들을 잠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1] <태풍세기>

태풍의 강도는 중심 최대풍속에 따라 나뉘는데 초속 17m 이상 25m 미만은 약, 초속 25m 이상 33m 미만은 중, 초속 33m 이상 44m 미만은 강이고 초속 44m 이상 바람이 불면 매우 강으로 분류됩니다: 강도 약에 해당하는 초속 20m의 바람만 불어도 아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초속 30m의 바람이 불면 태풍의 강도로는 중에 불과하지만 성인도 고개를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걷기도 서기도 힘듭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690942_5782.html

[5] The term in Hebrew is yam suph. Yam means "sea," and suph is generally thought to mean "reeds," "rushes" or possibly "seaweed." That is why some versions of the Bible call it "the Sea of Reeds" or "Reed Sea" instead of the Red Sea. water planta

 

[7]

The Red Sea (Arabic: البحر الأحمرAl Baḥr al aḥmar; Hebrew: Yam Soof ים סוף or Hayam Haadom הים האדום; Coptic: ⲫⲓⲟⲙ `ⲛϩⲁϩ Phiom Enhah or ⲫⲓⲟⲙ ̀ⲛϣⲁⲣⲓ Phiom ̀nšari; Tigrinya: ቀይሕ ባሕሪ Qeyih Bahri; Somali: Badda Cas) is a seawater inlet of the Indian Ocean, lying between Africa and Asia. Its connection to the ocean is in the south, through the Bab el Mandeb strait and the Gulf of Aden. To its north lie the Sinai Peninsula, the Gulf of Aqaba, and the Gulf of Suez (leading to the Suez Canal). It is underlain by the Red Sea Rift, which is part of the Great Rift Valley.

The Red Sea has a surface area of roughly 438,000 km2 (169,100 mi2),[1] is about 2250 km (1398 mi) long, and — at its widest point — 355 km (220.6 mi) wide. It has an average depth of 490 m (1,608 ft), and in the central Suakin Trough it reaches its maximum depth of 3,040 m (9,970 ft).[2]

The Red Sea also has extensive shallow shelves, noted for their marine life and corals. The sea is the habitat of over 1,000 invertebrate species and 200 types of soft and hard coral. It is the world's northernmost tropical sea, and has been designated a Global 200 ecoregion.

: The direct rendition of the Greek Erythra thalassa in Latin as Mare Erythraeum refers to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Indian Ocean, and also to a region on Mars.

 

[8] 창세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이 책의 첫 단어에서 따온 תשׁרב 곧 "태초에" (In the beginning)라는 것이었다. 영어 제목인 Genesis는 "자료 기원"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음역된 라틴어를 거쳐서 붙여졌다. 또, 출애굽기의 원래 제목은 히브리어로 ‘베엘레 쉬모트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이지만 이것 역시 후에 지금의 ‘Exodus’에 해당하는 ‘출애굽’ 그리고 한국어에서는 ‘출애굽기’로 바뀌게 되었음.

 

[9] 어원이나 정황을 따져서, 갈대(의)바다를 갈대호수라고 번역하시는 사람들도 있음; 예컨데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의 문제가 있는 것 처럼, 홍해라는 번역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 같다.




하나님의 만들어주신 길을 건넜다 


여호수아 3:15-17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속에 감추어진 길을 찾아 건넜다
홍해를 건너는 것
요단을 건너는 것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홍해는 물이 갈라진 길을 건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요단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내딛고 건넜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신앙이란? 
떠나는 것(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율법(토라. tôwrâh) תּוֹרָה

  • 법,  질서,  틀


신앙이란?
붙잡는  것(룻기 1:16b)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신앙이란?
절제(節制)하는 것(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사람은 태어나 자라는 과정 속에서 교육의 정도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갓난아이의 행동을 청소년들이 한다거나 성인 할 경우 저능아로 사회에서 장애인의 대우를 받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에게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자체가 허용되나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에게 무조건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패륜아로 낙인찍히는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자라면서 부모가 기뻐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 본인도 어린아이를 대하는 차원과 성인을 대하는 차원이 다름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선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위란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성도들의 문젭니다. 

요단을 건너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표현한다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성인이 된 상태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홍해를 건넜다면 광야생활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교육을 받고 자라 성인이 되었다면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즉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상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작금의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사고가 아닌가 사려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림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소멸시키고 받으려고만 하지 그 은혜를 활용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는 데는 등한히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었기에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그와 같은 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들도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외운다 할지라도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교만해져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님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만 관철시키려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부모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고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오늘날 기독교계는 사람의 신체적 발달 과정으로 본다면 지적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장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유업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벗어나야 요단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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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큰 강 홍해와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강을 건너는 방법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지 않을까봐 미리 애굽의 군사들을 동원하셔서 그들을 쫓아오게 하셨습니다.
죽어라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절대로 후퇴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앞에 홍해가 나타났습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었습니다.
절망은 곧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
그런 그들이 탄식이 하늘을 찌를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은혜의 바다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291번,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276번, 쉬운성경에는 234번 정도 나오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까지 고르게 퍼져있는 단어입니다.

레위기 / 역대상 / 아가 / 예레미야 애가 / 에스겔 / 호세아 / 아모스 / 오바댜 / 미가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 / 학개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요한 1서 / 요한 3서 / 에는 안 나옵니다.

66권의 책 중에서 17권에는 안 나오고, 49권에는 나오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성경이 무척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 다윗과 신약의 대표적 인물 바울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단어가 은혜입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두 가지만 설명을 해 드립니다.

첫째, 왕들, 혹은 강한 자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약자에게 무조건 적으로 베푸는 따뜻한 마음
저 사람 때문이 아나라 베푸는 이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혼나야 되는데 용서가 되는 것, 이 용서가 그 사람이 불쌍하고 의로와서가 아니라, 용서해주는 사람이 사랑이 많아서 용서가 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리스 인데 이 말은 ‘기뻐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이로’에서 유래됩니다.
흔히 카리스는 기쁨과 쾌락을 가져다 주거나 남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의미이었습니다.

-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가난은 그분이 짊어지시고 나에게 부유함을 주신 것

- 무지하게, 연약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그분이 기쁨으로 나에게 지혜와 강건함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 죄로 인해 지옥가게 생긴 것은 난데, 당신이 대신 그곳의 문을 닫아버리시고 나를 천국으로 밀 어 올리신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합니다.

갚을 수도 없는데 거저 받은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후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왔습니다.
전쟁에서 수도 없이 많이 이겼습니다.
물이 써서 먹지도 못할 만큼 나쁜 물이었는데 모세가 나무 가지를 던져 넣자 물이 달아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만나가 매일 내려왔습니다.
반석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니었는데 서서히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순간, 어려운 순간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유식이나 미음 혹은 죽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기도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한 신앙의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문제가 없이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심같이 만병통치약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음 믿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악하고 험한 세상을 믿음을 사용해서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앞에 포기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 하나 풀어가며 즐기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믿음위에 믿음이 쌓이고 또 믿음위에 믿음이 쌓여서 요단강 앞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이었기에 요단강 언덕까지 물이 차 올라있었습니다.
이 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강을 건널 수 있는 배 한척이 없었습니다.

200만 명과 수많은 짐승들이 있습니다.
1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 20만 척이 있어야 합니다.
100명이 탈 수 있는 큰 여객선 2만 척이 있어야 건널 수 있습니다.
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습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룹니다.
물론 이때 강을 건너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에 도착합니다.
30미터 폭이 40미터 50미터로 불어나 있고 급류가 흐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냥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이제 은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그 물에 네 발을 들여 놓으라고 하십니다.
은혜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믿음을 키운 바로 그 사람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싫다는 사람 하나 없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일치된 순종으로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믿음을 키웠습니다.
죽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돈을 벌었다 안 벌었다.
내가 이겼다 졌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됨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믿음의 힘이고 그게 40년 동안 그들이 길러온 내공이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거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힘차게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믿음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믿음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의 길, 행복의 길을 이어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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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적이 나타나지만 그중 출애굽 했을 때 홍해가 갈라진 사건과 40년 후 여리고로 진격해 갈 때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은 가히 상상이 잘 안되는 사건이다.

자연의 흐름을 한 민족의 행보를 위해 거스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고도 두렵지만 이 두사건을 함께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의 기적의 원리를 조금이라고 더 알기 원한다.

공통점

1. 물줄기가 갈라져 "마른 땅"이 나타났다
- 물줄기가 갈라진것도 기적이지만 바로 마른땅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기적

2. 장정 60만명이 도하했다
- 앞사람과의 간격을 1m로 생각해 보면 약 600km, 100명이 한줄로 갔다손 치더라도 폭 100m, 길이 6km의 대 장정. 거기에 계산에서 빠진 여자와 아이, 가축들까지 계산해 보면 4배정도 된다하면 약 100m폭의 24km의 대군이 건너갔다는 것.
요즈음 달의 영향으로 바닷길이 열린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적.

차이점

1. 도하 이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에게 쫒기는 상황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모세도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말했지만 돌아서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상황.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병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셨다(출 14:19, 23).
그러나 요단강 도하는 하나님의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담근 후 하나님의 다른 도움이 없이 강을 건너감

2. 도하 순간의 상황 :

출애굽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고,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담근 후 물이 갈라졌다.

3. 도하 이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이 바다에 수장되어 모세와 미리암의 승전가가 울려 퍼졌고 요단강은 요단강의 돌 12을 취해 제사장들이 섰던 장소에 쌓아 이를 기념함. 홍해 도하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마라에 도착해 물이 없다 불평하여 쓴물을 맛보았고,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4. 지도자들의 말 :

모세는 홍해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그가 행하신 일을 보라.하였고, 여호수아는 너희하나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계셔 너희에게 약속한 땅을 반드시 주리라.라고 하였다.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

1. 구원 받을 때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거룩함으로 충전받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
그 To-Be 모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그래도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로써 한번 갈길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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