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에이미(내니 두려워 말라) 마태복음 14:27, 요한복음 6:35. 48,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야훼 יהוה 여호와


  여호와(야훼의 히브리어)  요드-헤-와우-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을 물은 사람이 야곱, 모세, 마노아, 세 사람이다. 

야곱이 엉덩이뼈가 다치도록 밤새도록 주의 사자와 씨름(기도)하고 날이 새어 사자가 가려고 하자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가 자기의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고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서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났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그리고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탄생되고 하나님의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보내서 왔다고 해야 합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히브리어로는 “에예 아쇠르 에예”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는데, 영어로는 “I AM THAT I AM”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하였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에 “어찌하여 묻느냐?”라고 하며 대답하셨는데, 여러 가지 번역이 다 다르다.
우리말로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개역), ‘기묘자니라’(개정판)라고 했는데, 영어성경들은 “seeing it is secret?” “seeing it is Wonderful?” “It is a name of wonder” 등으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이때도 이름을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내 이름은 기묘하니라.”라고만 하신 것이었다.


영어 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고 거의 모두 LORD로 되어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이름이 필요하지 않는 단 한 분이시다.

‘에고 에이미’는 “나는 …이다”라는 번역으로 요한복음에 7번 나온다.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48, 51)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4. 나는 선한 목자다(10:10,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 빛, 구원의 문, 목자, 부활, 생명, 길, 진리, 포도나무시다.
즉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나는 …이다”의 ‘…’에 사랑, 소망, 믿음 등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을 넣고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믿을 수도 있다.
즉 “나(예수님)는 사랑이다”라고 넣고 그렇게 내 믿음대로, 성격대로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 5:43).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4).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요 17:26)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주소서.”(요 17:11-12) 


구약에서는 두려운 공의의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에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로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하셨다.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라고 하셨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탄은 ‘예수!’ 그 이름을 너무 싫어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누구나 다 외롭고 고달프고 괴롭고 힘들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불효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고 쓸쓸한 고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 악한 아버지도 있고 능력이 없어서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지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해 주실 수가 있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 내가 참포도나무이니 너희는 꼭 나에게 붙어있으라고 하셨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가지는 말라서 죽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꼭 붙어있어야 산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본 적이 없으나 너무나 잘 아는데 그것은 그분의 사상과 업적과 마음을 책에서 읽고 감동을 받고 그 이름을 알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이름이 없다면 그 업적과 사상을 알 수가 없고 구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는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하나다.
그런데 이름이 다르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이시고 그분이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고 그렇게 하시려고 오셨고 공의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 이름 예수, 너무나 좋은 나의 아버지, 당신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나요?
그 이름을 가지셨나요?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 누구를 부르다가 갈 것인지?

오직 한 분 예수님을 부르세요. 그 분께 당신을 맡기세요. 남편, 아내, 자녀들을 그분께 맡기고 안심하세요. 그러나 살아생전에 꼭 그분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저 하늘나라에서 꼭 놀라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받으소서. 아직 늦기 전에 ...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말씀하신 "나는 ~이다" ( I am~)라는 말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히브리어 <여호와(야훼)>와 같은 뜻을 가진다. 즉,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가 된다.

 יהוה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 야훼 יהוה  여호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는 생명의 떡이다." I am the bread of life. 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여러번 나타납니다.  여기의 '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ἐγώ εἰμι 인데 '에고 에이미'라고 발음합니다.영어로는  I Am~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요한복음 6:48)
 흔히 이 말씀들을 요한복음의 7가지  '나-말씀'( I-sayings)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누구이다라고  말한 부분이 7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7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영어성경은 NIV성경을 인용했는데 KJV도 마찬가지입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 : 35, 48)

Then Jesus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he who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John6:35]

I am the bread of life.[John6: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John8:12]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John9:5]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John10:7]

 
4. 나는 선한 목자다(10: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John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John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14:6]
 

7.  나는 참포도나무다(15:1)

"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John15:1]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이다"라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바로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4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있음!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 근거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야훼 יהוה 가 된 것이었습니다.

 

▶ (개역개정)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b)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c)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b. 70인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히> 나는 나다. c. 히> 나라는 분이)

▶ (한글 KJV)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나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니라.

▶ (KJV)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 (NIV)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구약성경 출애굽기 3:14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여호와-야훼- 아마 이 히브리 자음 4글자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한 글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으면서 히브리어 스펠링으로 말하자면 "요드-헤-와우-헤(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영어식으로 하자면 YHWH라는 자음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네 음절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이라고 부릅니다. 발음이 불분명합니다. 감히 발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야훼라고 (영어/Yahweh)라고 발음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יהוה

이 야훼 יהוה 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오랜 세월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으신 분, 존재하심 그 자체, 있으심, 누구의 설명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분.. 수많은 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어록에 바로 이 부분이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성경으로 알려진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 ->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늘 나오는 이 70인 번역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B.C. 300년 경 시대조류에 맞추어 세계인들에게 알리고자 히브리인 중에서 뛰어난 랍비들이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모여서 당시 세계언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입니다. LXX는 70이라는 숫자의 라틴어 기호입니다. 70여명의 당시 뛰어난 히브리 석학들이 모여서 책임지고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70인 번역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통해서 구약성경을 알게되는 즉 구약성경 반포작업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 편집,추가과정이 있어 훗날 구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70인 번역 LXX 헬라어 성경의 출애굽기 3:14절에서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래는 70인 번역성경 원문입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다시 강조하여 싣습니다. LXX-70인번역을 한 최고의 지성 랍비들이 히브리어 '야훼'를 "에고 에이미"로 번역했습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 LXX성경을 헬라어 원어로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셉츄어진트 http://bibledatabase.net/html/septuagint/

εγω ειμι =  יהוה

구약의 '여호와-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에 계속 이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언어 서술적 측면에서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영어로는 'I am'이라는 뜻으로서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야훼'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 것만은 아니고 일반적인 서술법에도 많이 쓰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고 에이미'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의 '야훼'가 같은 단어라는 이유 하나로 예수님의 신격(神格) 선언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상용어는 아람어를 쓰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이스어(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고 이 용어는 요한복음 저자의 헬라어 번역일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서 일반적 서술 중에 '에고 에이미'를 자주 인용한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분명히 그 의도를 담고 있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흔히 비판적 신학자 들이 말하는 대로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만들어 낸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분명히 선언하신 분임을 사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John8:24]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 KJV성경

[John8: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 NIV성경

윗 부분의 '내가 그인줄'이라는 말씀도 원어에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8: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인자를 들어올리는 그때에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나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노라.

[요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요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윗 부분의 붉은 밑줄 친 부분도 원문에는 모두 '에고 에이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야훼 הוהי 하나님이 됩니다.

즉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의도하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심에 대한 요한복음의 외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랍비나 사상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존경할 이유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세상엔 대단한 혁명가와 위대한 사상가와 랍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곧 이 '에고 에이미'를 생각하며 깨달은 진리였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롬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야훼(야웨, 히브리어: יהוה, 영어: Yahweh)는 하느님[1]의 이름을 일컫는[2]고대 히브리어 소리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탈출기) 3:1-14에 근거한 유대교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고유 이름이다.[3] 이전에는 히브리 글자에 모음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4 자음만이 남아 있다. 기원 1세기 이후에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미신적 전통이 유대인들에게 생겨나 발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의 정확한 발음은 잊혀지고 말았다.[4]

'야'에 대한 모음은 거의 확실한데[출처 필요], 여기에서 딴,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이름이 -야 또는 -야후로 끝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그리스어: Ιαβε라는 표기가 발견된다. (당시 발음법에 따르면 IPA: [jave]라고 읽게 됨.)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YHWH, YHVH, JHWH, JHVH라고 쓰고, 독일에서는 JHWH로 통일해서 쓴다.

[편집] 야훼와 테트라그라마톤

야훼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4문자 YHWH로 쓰여진 하느님의 고유 이름이며 정확한 실제 발음은 밝혀져 있지 않아 논란 거리에 있지만, 이 4글자 단어 자체는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부른다.[5] 유대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느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통치가 임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하느님"을 뜻하는 일반 명사 "엘로힘"으로 대체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 거룩한 이름은 발음할 수 없을만큼 너무 신성하게 치부되었으며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라는 낱말이나 이를 가리킬 때 하솀("이름")으로 불렸다. 그 밖에도 거룩한 이름을 뜻하는 솀 하메포라쉬라고도 불렸다. 6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 학자들은 아도나이나 엘로힘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YHWH의 발음을 모음 표기로 사용하였으며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의 기독교 학자들에게 채택되었다.[6]

19세기에 히브리 학자 빌헬름 게제니우스 (1786~1842년)는 초기 그리스어 사본, 신명에 대한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야훼"를 가장 사실적인 발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사마리아 전통에 이 이름의 발음을 보고하였다.[7] 그 결과 19세기와 20세기에 성경 학자들은 야훼라는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성경 학계에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6]

 

 

70인역성서 [七十人譯聖書, Septuaginta]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역(語譯) 구약성서.

본문
72명의 학자가 이 번역사업에 종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語) 원전의 ‘율법’ 부분을 가리키는데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다 ‘예언서’ ‘제서(諸書)’의 번역까지 포함시켜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번역된 고장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이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人)들의 요구에 따라 처음에는 BC 3세기 중엽에 ‘모세 5서(율법서)’가 번역되었고, 그뒤 약 100년 사이에 현재의 정경(正經)의 거의 전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성서 연구에는 물론, 언어학상으로도 중요한 자료인데, 신약성서의 문체와 사상을 연구하는 데 특히 귀중한 자료이다.

유래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본국에서 초청 온 72명의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70인역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과정에서 70인역의 번역과정이 예언자 모세가 야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는 과정에 유비되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72명이 번역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70인역이라는 말로 불리게 된다.

외경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없는 헬라어로만 기록된 성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외경이나 제2 정경으로 불리는 이 헬라어 성경들은 70인역 성경에 처음부터 포함된 것은 아니다.

현재 기독교에서는성공회, 로마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회에서 교회사를 통해 형성된 전통에 따라, 외경을 제2 정경이나 준 정경으로 존중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을 교회력에 맞게 배열한 성서정과에도 집회서등의 외경이 일부 나온다.

대본70인역의 대본은 마소라와 다른 제2의 히브리어 본문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실제로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본문은 주목할 만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마소라 본문 비평가들에게 70인역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70인역이 번역된 것은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과 같은 과정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디아스포라 유대인) 2, 3세들은 더이상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국어인 헬라어로 된 성경이 필요하였다. 이런 필요에 의해 히브리 성경 또는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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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문헌들이 언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는지는 문헌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명확하지 않다.
집필 연대가 가장 오래된 모세 오경을 학계의 다수설인 4전승설의 분류법을 따라 구분하여 검토해 보아도, 헤브라이 왕국기 이전의 시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경을 이루는 대부분의 나머지 후기 전승 문헌(사제계, 신명계)들은 유다왕국 멸망 후 신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하에서 '하시딤'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에 이미 완성되어진 것도 있지만, 많은 작품들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에스라의 뒤를 잇는 서기관 계급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가 분봉왕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 후예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후기 구약 문서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약 문헌들은 특별한 저자가 모두 만들어 낸 산물이라기 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저술가/필사자에 의해 내용들이 조금씩 윤색, 첨가됨으로서 비로소 현재의 성서로서 완성되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신봉자였고, 국제화를 특색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를 그가 정복한 넓은 지역에 유행시켰다. 알렉산더의 이런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그가 정복한 지역들은 삽시간에 헬라화되었고, 유다인들도 이러한 헬라화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헬라 세계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이른바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또다른 분봉왕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산하였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혹독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 통치 아래의 본토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헬라화 되어갔고,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서 점차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전통적 유다교의 보존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고, 종교적 생존에 위기를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제사장과 랍비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종교적 문화를 온존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70인역의 탄생이었다.

BC 3세기 경 모세 오경의 번역을 시작으로 이후 수백년에 걸쳐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서, 히브리 원본 문헌의 존재 여부를 알기 어려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새로이 번역된 성서의 목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70인역은, 원래의 히브리어 성서보다 그 권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그것은 기나긴 외경의 경전성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70인역은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이방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이방 유다인들은 70인역을 그들의 일반적인 성서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도, 사도 시기에도, 사도 이후의 시기에도 70인역은 헬라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모세 오경을 제외하고서는 인정되는 성서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중략 - 얌니야 회의 부분)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 문구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유스티누스, 폴리카르포, 로마의 클레멘스, 이레네오등은 이 문헌들을 폭 넓게 성서의 말씀으로서 이용하였다.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간 목록이 다른 점을 놓고서, 이미 그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70인역의 성서는 본래 '모세오경(토라)'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초대 기독교의 교부들은 성서의 범위를 성문서와 예언서등의 전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교부들은 70인역의 번역 과정에 대하여 아리스테아스나, 요세푸스가 미화시킨 기록들을 더욱 더 미화시켜, 70인이 각자 번역한 성서의 결과물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고 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못지 않은 영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그 견해를 일치시켰다.

70인역은 초대 교회의 기독교 교리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얌니야 회의와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유다교가 기독교를 배척하자, 초대 기독교 교회는 더욱 70인역에 집착하였다. 대다수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70인역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당대의 히브리어 원문 성경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더라도, 복음 기자들과 사도들도 70인역 성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을 들면서 하느님의 섭리로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게 성서의 내용이 변형된 것이라고 우기면서까지 70인역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70인역은 유대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한 책인 구약 39권에 유대인들이 외경으로 분류한 7권을 모두 다 번역한 책입니다.

1. 외경이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을 천주교에서 제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ical)] 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이를 외경이라고 합니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왔으며 1977년에 한국에서 나온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 번역성서'(1977)에서, [토비트]•[유딧]•[에스델](제1경전 [에스델]의 추가부분)•[지혜서]•[집회서]• [바룩]•[다니엘](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 등 9권의 외경이 있습니다.

2. 외경과 정경의 결정 외경이 성립된 유대교에서도 외경의 권위는 처음부터 의심 받아 왔으며 정경과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외경을 구분하였느냐고 한다면 이는 유대인들이며 그 시기는 불확실합니다.

성립시기가 정경보다 늦은 외경은 원래 최초 성립 시기부터 정경과는 다른 대접을 받아 온 것입니다.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었고 외경은 이 때 공식적으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제키엘]• [잠언]• [아가]• [전도서]• [에스델] 등이 이때 함께 경전이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초기부터 외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권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가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제2경전은 천주교에서 정경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신학자가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 구별하여 별도의 부록으로 엮어 넣고 "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자 "외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책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현재까지도 개신교 가운데서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권수에 대하여 말하자면 먼저 얌니아회의를 아셔야합니다.
얌니아종교회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A.D.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  즉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후에 뿔뿔이 흩어진 유다의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중해연안의 도시인 얌니아로 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얌니아의 율법학자들은 로마 당국에 얌니아에 율법학교를 세우고 자기네의 종교생활을 보장해  줄 것을 특별히 탄원을 하여 허락을 받습니다. 결국 유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한 후 얌니아는 많은 숫자의 유다교 율법학자들과 율법학교가 있는 도시가 됩니다.

여기서 A.D 90년경(혹은 100년경)에 유다교 종교회의가 개최가 됩니다.
이 회의에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 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의 경전목록을 확정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새로운 확정은 아니고 기원전 400년경, (일설에 의하면 에스라에 의해) 일차적으로 확정된 목록을 그대로 재확인한 셈입니다.
이때 이 회의가 경전목록에 해당하는 책들을 확정할 때 적용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 히브리어로 저술된 책
나. 모세오경의 정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책
다. 저술장소가 팔레스티나 내부인 책
라. 기원전 400년, 에스라 시대이전에 저술된 책

이렇게 하여 얌니아 회의 이전까지 유다교에서 주로 성서로 사용하고 있었던 70인역 성서(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부 책들을 유대교 경전목록에서는 제외시킵니다.
이 제외된 책들이 소위 말하는 가톨릭의 제2경전입니다.
가톨릭은 70인역 성경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유다교의 이 결정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즉 얌니아회의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약경전에서 차이가 확정되고난 후 중세에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부터 갈려 나올때 개신교에서는 이 얌니아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개신교 구약성경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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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고에이미'란 '나는 ......이다'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최초의 '에고에이미' 선언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냐고 모세가 묻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WHO I AM" (출 3:14)


'나는 곧... 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십니다. 


'에고에이미'는 바로 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선언하시는 말씀이 바로 '에고에이미'인 것입니다.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이 있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3.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4.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와 함께 요한복음에는 또한 일곱 개의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 개만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표적들을 '에고에이미'의 예증이요 예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일곱 개의 표적들과 연결하여 보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2:1-12)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 (4:46-54)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5:1-9)
  4.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 (6:1-15)
  5. 물 위를 걸으신 표적 (6:16-21)
  6.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신 표적 (9:1-7)
  7.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1-44)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요,
일곱 개의 표적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요, 그로 인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고에이미' 선언들을 통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 우리가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에고에이미' 선언과 표적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7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7번 사용된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게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3. 나는 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로마서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로마서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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