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없음이라는 구절의 의미


성경에 없음이라는 구절의 의미

마태복음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괄호의 의미?)
오래된 사본에는 없지만 후기에 기록된 사본에만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성경의 사본은 대략 5,800개 라고 합니다.
많은 사본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여 성경을 편집할 때 참고하였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장과 절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대분자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지면서 히브리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성경을 처음으로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칠십인 역이라고 합니다.

"없음"의 의미

마태복음 23:13-15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었으나 중요한 사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없음”이란 구절(13구절)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7:44, 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1
로마서 16:24

마태복음 17:20-21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킹제임스 흠정역 마태복음 17: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29의 말씀을 인용한 것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킹제임스 흠정역 마태복음 18:11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누가복음 19:10을 인용한 것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1. 성경의 저자는 몇 명인가? 40명

2. 성경은 몇 년 동안 기록되었나요? 1500, 1600년

3. 성경은 모두 몇 권인가요? 66권
구약 : 39권, 신약 27권

4. 성경 모두 몇 장인가요? 1189장
구약 : 929장, 신약 260장


5. 성경의 장을 구분한 것은?
13세기 영국 캔터베리 대감독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라틴어 성경

6. 성경의 절을 구분한 것은?
1551년 프랑스 스테파누스(Stephanus)
Stephanus Robertus, 1506~1559 그리스어 신약성경 4판

7. 성경의 절을 완성한 것은?
1560년 휘팅햄(William Whitingham) 

8.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9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 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무릇 모르드개의 시키는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일백 이십 칠도 유다인과 대신과 방백과 관원에게 전할쌔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과 유다인의 문자와 방언대로 쓰되.

9.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35
(한글 성경)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영어 성경) Jesus wept
(헬라어 성경)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표준새번역 성경 

손톱묶음 ( ) 

요한복음 1:38-42 / 랍비, 메시아, 게바

꺽쇠묶음 [ ]

마가복음 3:14 /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서 원본의 본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본문은 꺾쇠묶음 안에다가 넣었다.  

겹꺾쇠묶음 [[ ]]
마태복음 6:13 / 후대에 첨가된 본문으로 교회가 일찍부터 중요하게 여기고 읽어온 본문은 겹꺾쇠묶음

한글개역성경에서 괄호 묶음


축도의 성구


구약의 축도 민수기 6:24-26

신약의 축도 고린도후서 13:13

구약의 축도(아론)  민수기 6:24-26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신약의 축도(바울)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현대인의 성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새번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공동번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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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떤 곳에는 괄호로 표시가 되어있고, 또 어떤 부분에는 ‘절 없음’이란 표시가 나옵니다.
그냥 그런 표시 없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으면 혼돈되지 않고 더 좋겠는 데 왜 그런 표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nswer
성경은 약 40명의 저저에 의해 약 1500년 혹은 1600년에 걸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66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성경의 절 수는? 31,173절(구약 23,214절, 신약 7,959절)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이며,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단, 요한복음 11장 35절은 한글로는 그렇게 짧지 않게 보이지만 원어에는 두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영어로도 ‘Jesus wep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장은 13세기에 영국 캔터베리 대감독이었던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에 의해 라틴역 성경의 장이 시작되었고,
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스테파누스(Stephanus)에 의해 착수되었고 1560년 휘팅햄(William Whitingham)에 의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경 중에 괄호로 묶인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 절들이며, ‘절 없음’이란 표시도 사본에는 그 절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최대의 선물인 성경에 대한 여러 학자들과 신앙인들의 수고가 오늘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질문 /  
성경을 읽다 보면 (없음) 이라고 되어 있는 절들이 나옵니다.
(없음)이라고 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원래 성경에 있었는데, 후에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말인가요?

대답 / 

1. 원래 성경 저자들이 직접 기록했던 원본(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기록한 원본)은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만든 것입니다.
학자들은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성경 원본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2. 그런데 여러 가지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의 (마 6:13) 후반부를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기록된 부분이 괄호 안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후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있지만, 오래된 사본(더 중요함)에는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성경은 이 내용이 일부 사본에는 있지만 다른 사본에는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 구절을 괄호 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또 성경을 읽어 보면 질문한 것처럼 (없음)이라고 된 구절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비록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었지만, 원본에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역 성경의 (마 23:14)을 보면 (없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일부 사본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마 23:14)이 원본에는 없었는데, 이 내용을 후대에 사본 기록자가 첨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그 내용이 믿을 수 없지만, 일부 사본에는 포함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 절을 (없음)이라고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4. 이와 같이 성경 학자들은 성경 내용을 기록할 때에 괄호나, (없음), 또는 단어나 구절 아래에 난하주를 붙여서 사본 상의 문제가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본 상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여 성경 원본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돕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참고로 성경에 (없음)이라고 표시된 예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7:44,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1

로마서 16:24


민영진 목사님께

언젠가 햇순을 통해서 괄호 속 본문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있고 또 좋은 대답을 들었던 독자입니다.
요즘에 [새번역]으로 성서를 읽다가 ( ), [ ]. [[ ]] 이상 세 종류의 서로 다른 괄호가 사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을 지금 [새번역]으로 읽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그것은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일 것 같습니다.
같은 성경을 2004년 판 부터는 [성경전서 새번역]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돌머리 님께서 읽고 계시는 성경이 바로 이 [새번역]이라면 책 앞쪽 ‘일러두기’난에 이런 손톱묶음 ( ), 꺽쇠묶음 [ ]. 겹꺽쇠묶음 [[ ]] 등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있는 대로 간단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톱묶음 ( )

1) 본래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주석처럼 설명을 가한 본문을 이 괄호로 묶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 1장 38-42절을 보면 한 문단 안에 손톱묶음에 묶인 본문이 세 곳이나 나옵니다. 보시겠습니까?

35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

위의 경우는 ‘랍비’, ‘메시아’, ‘게바’는 다 히브리말입니다.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을 읽는 독자들, 특히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편집자가 그러한 히브리어를 번역해 주고 있는데, 그런 번역이 괄호 속에 들어 가 있습니다. ‘랍비’는 ‘선생’이란 뜻이고, ‘메시아’는 ‘그리스도’ 라는 뜻이고,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을 가졌다고 편집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길을 잃고 헤매는 본문도 손톱묶음 속에 넣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있었을 본문인데, 잘못 들어 와서 문맥의 흐름을 끊는 그런 본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솔로몬이 그 여왕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기록하는 왕상 10장 10-13절 안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본문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본문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런 다음에 여왕은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선사하였다. 솔로몬 왕은, 스바 여왕에게서 받은 것처럼 많은 향료를, 어느 누구에게서도 다시는 더 받아 본 일이 없다. 11 (오빌에서부터 금을 싣고 온 히람의 배들은, 대단히 많은 백단목과 보석을 가지고 왔는데, 12 왕은 이 백단목으로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계단을 만들고, 합창단원이 쓸 수금과 하프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백단목은 전에도 들여온 일이 없고, 오늘까지도 이런 나무는 본 일이 없다.) 13 솔로몬 왕은 스바의 여왕에게 왕의 관례에 따라 답례물을 준 것 밖에도, 그 여왕이 요구하는 대로,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 주었다. 여왕은 신하들과 함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오빌에서 금을 싣고 온 히람의 배들에 관한 기록(왕상 10:11-12)은 왕상 9장 27-28절 부근 어딘가에 놓여 있어야 할 본문입니다.


꺽쇠묶음 [ ]

이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서 원본의 본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본문은 꺾쇠묶음 안에다가 넣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새번역] 막 3:14)


겹꺾쇠묶음 [[ ]]

후대에 첨가된 본문이지만 교회가 일찍부터 중요하게 여기고 읽어온 본문은 겹꺾쇠묶음 속에 넣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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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성경은 독일의 쿠텐베르그1440년 경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전문 필사자(筆寫者)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베껴서(handwritten) 재판(再版)을 제작하고 보존 계승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간혹 후대의 필사자들이 그 의미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원문에는 없는 구절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자가 종이(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잉크와 펜을 사용해 직접 기록한 최초의 성경 원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일이 너무 지나 낡았던지 분실 소실 등의 이유로 다 없어졌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현존하는 고대 문서들의 거의 전부가 필사본입니다.
후대 필사자들이 참고한 성경원본도 자기들이 물려받은 또 다른 필사본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빙성과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까닭은 성경의 초기 필사자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정말로 보물 다루듯이 아주 소중하게 취급했습니다.

신약성경 필사도 믿음이 좋은 자만 맡았기에 누구라도 성경에 더하거나 제하면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다는 요한계시록 22:18-19의 경고를 엄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성경의 필사자들이 실수를 절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나 필사자들도 사람인지라 의도치 않은 오류가 나올 수 있고, 또 극히 부분적이지만 내용을 첨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수천 개가 넘게 남아있는 사본들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그런 오류 내지 추가 조항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원문의 의미를 손상하거나 비 진리적인 오류는 전혀 없고 무시해도 될 만한 사소한 것들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없음)으로 표시된 것은 초기의 권위 있는 다수의 사본들에는 없고 후대의 비교적 중요하지 않는 소수의 사본들에 다른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그렇다는 사실만 참조하면 되고 무시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추가 구절이 원문의 뜻에 모순 상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추가된 구절을 찾아서 기입해 넣고 함께 연결해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없음)이라고 표시된 기존의 성경이 더 권위 있는 초기사본의 번역본이므로 더욱 원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21의 "없음"에는 후대의 일부사본에 마가복음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을 인용해 놓았습니다.

필사자로선 19절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추가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고 이미 충분히 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11의 (없음)에도 누가복음 19:10의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추가구절은 무시하고, 사실상 주석서를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추가되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10절과 12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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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주로 쓰는 한극개역판 성경이나 NIV영어성경에 보면 신약성경에서 마17:21절 같이 "없음"으로 되어있는 성경절이 13구절 나오는데 원본이나 사본에 내용이 소실되어 내용이 확실하지 않아 번역이 안 된건가요 ?

그리고 말씀보존학회라는 곳에서는 킹제임스성경에서 번역된 킹제임스한글판에는 그 구절을 번역해 놓았는데 소실되었다면 어떤 과정이나 근거가 있어서 번역을 한 것입니까 ?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성경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가 궁금증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성서공회 홈페이지를 검색하다가 아래의 질문과 답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족할 만한 답변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더 좋은 답변을 드릴 만한 실력이 없어서 아래의 것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늘 말씀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질문:신약 성경 속에 (없음)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왜 이런 부분이 있습니까?

답변:

마태복음 17장 21절을 찾아보면, 본문이 있어야 할 곳에 본문은 없고, 그 대신에, 괄호가 쳐 있고 그 괄호 안에 "21절 없음"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난외주 1번을 보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그 지시를 따라서 난외주 1번을 보면, "어떤 사본에, 21절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본이 마가복음 9장 29절에서 따다가 첨가한 것입니다. 

 

18장 11절도, 본문이 없고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는, 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사본이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가져다가 여기에 첨가시킨 것입니다.

 

"-절 없음"이라고 된 부분은 고대 사본에 없는 본문입니다. 3세기 전후의 파피루스 사본이나, 4-5세기의 대문자 사본에는 없는 본문들입니다. 11세기 전후의 소문자 사본에만 나오는 본문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을 가지고 절을 구분하고 거기에 고유 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의 경우는, 절만 빼고, 절 번호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은 확대된 사본입니다. 확대된 내용은 다른 어느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련 구절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있는 난외주에서 거기에 첨가되어 있던 본문을 보면 결코 생소한 본문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절없음'이라는 구절이 신약성경에 13번 나타납니다.

왜 절이 없을까? 없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뺄 일이지하고 성도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입니다.

성경에 따라 밑에 작은 글씨로 다른 사본에는 '...' 구절이 있다고 설명해주는 성경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성경 중 대표적인 개역한글, 개역개정, 새번역,공동번역 성경은 동일하게 이 13곳을 제거하고 성경에 따라 밑에 각주로 설명을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KJV(킹 제임스 번역성경)의 한국 번역판에는 이 삭제된 구절들을 원문에 그대로 실어놓았습니다. 사실은 이 부분-삭제한 부분의 타당성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기도 합니다.

 

우선 킹 제임스번역 성경이 기초한 원어 성경은 비교적 훗날에 완성된 안디옥-비잔틴 계열(Byzantine family of manuscripts 500 to 1000 AD)-소문자 중심으로 기록된 사본들이 원문입니다. 이것을 흔히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성경에는 지금 삭제된 구절들이 모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킹 제임스 번역본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것이 바로 원본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구절들을 뺀 번역성경들은 비잔틴 계열의 원문보다 훨씬 오래전 존재하여 원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원어성경( ‘Alexandrian Family’ manuscripts 200 to 400 AD)-대문자 중심으로 기록된 사본들을 참고하여 지금 삭제된 내용들은 더 오래전에 존재하는 원본에는 없었던 것인데 훗날 첨가되었기 때문에 삭제하거나 또는 각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서로 부딪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한글성경이나 개역 개정성경은 이 알렉산드리아-오리겐 계통의 원본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것임은 맞습니다. 다만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계열의 성경 장절 구분이 일단은 1500년대에 성경을 인쇄한 프랑스 출신의 궁정 인쇄업자인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의 장절 구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어로 신약성경을 인쇄하면서 그리이스어학자인 아들의 도움을 받아 장절을 구분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 구절을 빼거나 넣는 것으로 신학적 토론이 치열한 성경의 '장절 구분'을 그냥 인쇄업자가 해냈다는 사실이 조금 실소가 나오긴 하는데 역사현실입니다. 신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면 인쇄업자가 해결해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성경은 원본에 더욱 가깝다고 여겨지는 신구약 원본에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신뢰할만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삭제된 문장들을 삽입해도 큰 신학적 오류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직접 읽어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삭제된 부분을  그대로 넣어야한다는- 킹제임스 버전 성경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토론 중에는 수긍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중요한 것은 그 본문을 넣고 빼는 것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리는데 있습니다.


아래는 대한성서공회의 답변입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절 없음"이라고 된 부분은 고대 사본에 없는 본문입니다. 3세기 전후의 파피루스 사본이나, 4-5세기의 대문자 사본에는 없는 본문들입니다. 11세기 전후의 소문자 사본에만 나오는 본문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을 가지고 절을 구분하고 거기에 고유 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의 경우는, 절만 빼고, 절 번호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은 확대된 사본입니다. 확대된 내용은 다른 어느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련 구절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있는 난외주에서 거기에 첨가되어 있던 본문을 보면 결코 생소한 본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 개정 신약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총 13절의 '없음'이 있습니다.

  1) 마태복음 17:21

  2) 마태복음 18:11

  3) 마태복음 23:14

  4) 마가복음 9:44

  5) 마가복음 9:46

  6) 마가복음 11:26

  7) 마가복음 15:28

  8) 누가복음 17;36

  9) 누가복음 23:17

10) 사도행전 행 8:37

11) 사도행전 15:34

12) 사도행전 28:29

13) 로마서 16:24

<직접 읽어보기>

전체문맥 이해를 위해 개역개정과 한글 KJV 앞 뒤 한절씩 추가했습니다.

1) 마태복음 17:21  

< 개역개정 성경>

[마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1]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마17:19]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따로 나아와서 말씀드리기를 "어찌하여 우리는 그를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하니

[마17: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져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니라.

[마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 

 

2)마태복음 18:11

< 개역개정 성경>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1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마18:9 또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뽑아 던져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을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마18:10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들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있느니라.

마18:11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


 

3) 마태복음 23:14

< 개역개정 성경>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4 (없 음)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한글 KJV번역 성경>

마23: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23:13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사람들에게 천국을 닫아 버려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

마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23:1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 

 

4) 마가복음  9:44

< 개역개정 성경>

 막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막9:42 또 나를 믿는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그의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3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5) 마가복음 9:46

< 개역개정 성경>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 음)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6 (없 음)

막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뻬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막9:43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5 네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6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7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뽑아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6) 마가복음11:26

< 개역개정 성경>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11:26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막11: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다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을 용서하시리라.

막11:26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더라. 

 

7) 마가복음 15:28

< 개역개정 성경>

 막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막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15:28 (없 음)

막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 한글 KJV번역 성경>

막15:26 죄명을 쓴 명패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였고

막15:27 주와 함께 강도 두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한 사람은 주의 오른편에, 또 한 사람은 주의 왼편에 있더라.

막15:28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

막15:29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짓는 자여,

 

8) 누가복음 17;36

< 개역개정 성경>

 눅17: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17:36 (없 음)

눅17: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눅17:35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눅17:36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눅17:37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어디니이까?"라고 하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함께 모이느니라."고 하시더라.

 

9) 누가복음 23:17

< 개역개정 성경>

 눅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눅23:17 (없 음)

눅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눅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눅23:15 헤롯 역시 잘못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로 보냈음이라. 보라, 그가 사형을 당할 만한 일을 행한 것이 없노라.

눅23:16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한 후 놓아 주겠노라."고 하니라.

눅23:17 (명절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게 되어 있더라.)

눅23:18 그러자 그들이 일체가 되어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처단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하니

눅23:19 (그는 그 성읍에서 난동을 부리고 살인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자더라.)

 

10) 사도행전 8:37

< 개역개정 성경>

 행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행8:37 (없음)

행8: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 한글 KJV번역 성경>

행8:36 그리하여 그들이 길을 따라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내시가 말하기를 "보라, 여기 물이 있도다. 내가 침례를 받는데 무슨 거침이 있느뇨?"라고 하니

행8:37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행8:38 그리고 나서 그가 마차를 세우라고 명한 다음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로 내려가서 빌립이 그에게 침례를 주니라.

 

11) 사도행전 15:34

< 개역개정 성경>

행15: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행15:34 (없음)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행15:33 그 곳에서 잠시 지체한 후 그 곳 형제들로부터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 사도들에게로 가려 하되

행15:34 실라는 오히려 그 곳에 머무는 것을 좋게 여기니라.

행15:35 바울과 바나바도 안티옥에 머물면서 많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전파하니라.

 

12)사도행전 28:29

< 개역개정 성경>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행28:29 (없 음)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한글 KJV번역 성경>

행2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고 하더라.

행28:29 그가 이 말을 마치니 유대인들이 자리를 뜨더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상당한 쟁론이 있더라.

행28:30 바울이 만 이 년을 자기 셋집에서 지내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여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이 담대함으로 하였더라. 

 

13) 로마서 16:24

< 개역개정 성경>

 롬16:22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3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16:24 (없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롬16:22 이 편지를 쓴 나 터티오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3 나와 온 교회의 집 주인인 가이오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도시의 재무관인 에라스토와 형제 쿠알토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 '없음' 본문만 따로 모음>  < 한글 KJV번역 성경>

1)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 

2) 마태복음 18:11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

3) 마태복음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4) 마가복음 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5) 마가복음 9:46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6) 마가복음 11:26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더라."

7) 마가복음 15:28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

8) 누가복음 17;36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9) 누가복음 23:17 "(명절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게 되어 있더라.)"

10) 사도행전 행 8:37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11) 사도행전 15:34 "실라는 오히려 그 곳에 머무는 것을 좋게 여기니라."

12) 사도행전 28:29 "그가 이 말을 마치니 유대인들이 자리를 뜨더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상당한 쟁론이 있더라."

13) 로마서 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신학적 입장은 조금 달라도 성경번역 역사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 것같아 참고로 싣습니다.

 

 

 

안티오크 계열
(ANTIOCHIAN LINE)

알렉산드리아 계열
(ALEXANDRIAN LINE)

①안티오크 원문(Antochian Text)

①알렉산드리아원문(Alexandrian Text)

②비잔틴 원문(Byzantine Text)

②이집트 원문(Egyptian Text)

③시리아 원문(Syrian Text)

③국부(지역) 원문(Local Text)

④황제 원문(Imperial Text)

④헤시키안 원문(Hesychian Text)

⑤종교개혁 원문(Reformation Text)

⑤소수 원문(Minority Text)

⑥보편적 원문(Universal Text)

 

⑦전통 원문(Traditional Text)

 

⑧수용 원문(Textus Rreceptus)

 

⑨다수 원문(Majority Text)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 삭제된(없는) 구절들

 

KJV(킹제임스)
NIV
개역 한글
마 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마 18:11
 인자가 온 것은 길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제'
(없음)
마 23:14
 화 있으리라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가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런즉 너희가 더욱 큰 정죄를 받으리라.
'삭제'
(없음)
막 7:16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삭제'
'15절을 잘라서 16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16절은 슬쩍 삭제해 버림'
막 9:44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막 9:46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막 11:26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더라.
'삭제'
(없음)
막 15:28
 그리하여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으니 말씀하시되, 또한 그분께서 범법자들과 함께 헤아림을 받으셨도다, 하였느니라.
'삭제'
(없음)
눅 17:36
 두 남자가 들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남게 되리라, 하시니라.
'삭제'
(없음)
눅 23:17
 (이는 그가 그 명절에 필히 한 사람을 그들에게 놓아 주어야 함이라.)
'삭제'
(없음)
요 5:4
 이는 천사가 어떤 때에 못에 내려와 물을 요동시키는데, 물이 요동한 후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케 됨이라.
'삭제'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행 8:37
 빌립이 말하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말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삭제'
(없음)
행 15:34
 실라는 거기 그대로 거하는 것을 기뻐하더라.
'삭제'
(없음)
행 24:7
 총대장 리시아스가 우리를 습격하여 심한 폭력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빼앗아 가고는
'삭제'
'8절을 잘라서 7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7절은 슬쩍 삭제해 버림'
행 28:29
 그가 이 말을 한 뒤에, 유다인들이 떠나 자기들끼리 큰 논쟁을 벌이더라.
'삭제'
(없음)
롬 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삭제'
(없음)
요일 5:7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삭제'
'6절의 끝부분을 잘라서 7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7절은 슬쩍 삭제해 버렸음'

 

 

이 구절들은 없어야 되는 구절인가?

이 구절들은 없어도 되는 구절인가?

이 구절들이 없기때문에 논쟁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고린도후서 2장]

17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과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갈라디아서 1장]

7 Which is not another; but there be some that trouble you, and would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신약성경에서 "없음"이 생기게 된 이유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절 없음... 27절, 28절, 29절 세 절에서 28절이 없는 내용이라면 굳이 '없음' 표시를 하지 않고 29절을 28절로 바꾸면 될텐데 왜 굳이 (없음)이라는 표시를 해놓았을까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약성경의 사본과 인쇄본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첫째, 사본이라 함은 필사본의 약자로 손으로 배껴 쓴 본문을 말합니다.

현재 신약성경의 사본은 2008년 4월 기준 5,760개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사본은 5천개가 넘는 방대한 양이 있지만, 어느 사본도 100% 일치하지 않는 특징을 지닙니다.
또한 후대의 사본일수록 고대의 사본보다 양이 많다는 특징 또한 가집니다.

둘째, 인쇄본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후 인쇄기에 의해 쓰인 성경 본문을 말합니다.

최초의 그리스어 인쇄본은 에라스무스 라는 사람이 찍어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6세기의 인문주의자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에라스무스가 히메네스라는 스페인의 추기경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이루어진 성경을 만들고 교황청의 허가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신도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히메네스의 성경에 대한 교황청의 허가가 오랜 기간 동안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최초의 그리스어 성서 인쇄본 제조자의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고작 몇개월에 걸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만들어냈고, 그가 구한 그리스어 사본은 12세기의 사본들이었습니다. 앞서 사본에 대해 말씀드릴 때, 사본은 후대로 갈수록 양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12세기의 열등한 사본을 가지고 그리스어 인쇄본을 만들었고, 그 이후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 형제들이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인쇄본을 토대로 여러 특성을 지닌 신약성서를 인쇄하였습니다.

첫째, 스테파누스의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제 3판과 제 4판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경이 밑에 주석이 달려있지요.
이를 본문 비평 장치라고 하는데, 스테파누스 제 3판 성경에서 본문 비평 장치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제 4판에는 최초로 장, 절 구분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장과 절을 구분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 절 구분은 엉성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누스 제 4판 성경 이후로 나온 성경들이 거의 다 이 성경의 장, 절 구분을 따랐기 때문에 오늘날 장과 절이 내용상 단락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둘째, 베자 성경은 이 성경이 제임스 왕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의 번역 대본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셋째, 엘제비어 형제의 성경에서 '수용본문(Textus Receptus,TR)'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용본문'이라는 말은 엘제비어 형제가 자신들의 성경을 홍보할 때 쓴 말입니다.
"귀하는 이제 모두에게 수용되는 성경 본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성경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절 없음 현상'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스테파누스의 성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스테파누스의 성경은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에라스무스 성경은 12세기의 그리스어 사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사본은 후대로 갈수록 양이 점점 많아진다는 말씀 또한 드렸습니다.

스테파누스의 성경에서 처음 장 절이 구분되었으나 이는 후대에 갈수록 첨가된 내용이지 고대 사본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테파누스 성경보다 훨씬 전 시대의 사본이 발견되고 있고 연구되고 있는 지금, 고대 사본에 신빙성을 부여하며 스테파누느 성경에 있던 절을 뺀 것이며, 따라서 절 없음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침례회, 말씀보존학회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성경이며, 나머지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 하는 주장 중에 '절 없음 현상'도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게 있느냐며, (없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린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없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린 것이 아닙니다.
후대로 갈수록 사본의 양이 점점 불어났던 것은, 이스라엘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을 배려하여 보충 구절이나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필사자들이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본보다 더 가치 있는 고대 사본을 토대로 성경을 번역했고, 이미 널리 쓰이는 스테파누스 성경식 장 절 구분을 같이 쓰면서 후대의 사본에만 있는 구절을 (없음)이라고 처리한 것입니다. 또 밑에 각주를 달아서, '어떤 사본에는 몇 절에 ~~라는 구절이 있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글이 성경을 읽다가 (없음)이라는 표시를 보고 혼란을 느꼈거나, 말씀보존학회의 궤변으로 기존 성경을 불신하게 된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료출처 /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민경식, 신약성서 손에 오기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8]

성서가 현대에 이른 경위

1800년에 16세의 메리라는 소녀는 성서 한 권을 사러 맨발로 40km 걸어갔습니다.
메리는 6년 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갔는데, 도착하여 보니 성경이 다 팔렸다는 애기를 듣자, 풀이 죽은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것을 본 교직자는 너무나 감동되어 자기 성서 한 권을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이 일 있은 후에 그 교직자는 성경을 필요로 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런던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논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 1804년 영국 및 외국 성서 공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취지는 - 저렴한 가격으로 성서를 여러 언어로 인쇄, 공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확산되어 1813년 성서공회가 독일, 네델란드, 덴마크, 러시아에 설립되었습니다.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수천 개가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번역 사업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직접 자신의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영어 성경 제임스 왕역을 근거로 번역 작업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인들이 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고 방식이 다르고, 표현 방법도 다르고, 본 적이 없고, 어떤 언어와도 비슷한 점이 없고, 사전이나 통역자가 없을 때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혼동을 일으킵니다.

예를들면 “하늘의 아버지”의 표현을- “창공의 빛깔을 띤 아버지”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현지인 교사의 도움으로 번역 작업을 하였습니다.
-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성서 번역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저드슨 선교사 부부였습니다 그는 미얀마어로 번역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824년 미얀마에서 국왕의 관리들이 이 선교사 집을 급습하였습니다.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몰래 번역된 성서 원고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선교사 남편은 국가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부인은 곧 출산할 예정이었지만, 베개 속에 원고를 넣어 옥중 남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부인은 이런 호된 시련에다 병까지 겹쳐 부인은 건강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남편이 석방된 지 얼마 안 되어 - 용감한 부인과 딸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남편은 가슴이 찢어질 듯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번역 일을 계속하여 1835년 미얀마 성서을 완역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서 번역을 위해 헌신적인 남녀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서의 확실성과 예수를 포함한 성서 인물들이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서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하였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먹구름같이 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7세기까지만 해도 신약 성서의 가장 오래 된 사본이 10세기, 즉 원본이 기록된 지 900년 이상이 흐른 후에 나온 것입니다. 내용의 변경이나 부주의한 복사자의 실수로 인해 그리스도의 소식이 손상되지 않았나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성서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학문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독일의 천부적인 언어학자인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입니다.

4년 동안 유럽 내의 최상의 도서관을 샅샅이 살펴본 후 - 1844년 5월에 고대 성서 사본을 찾기 위해 중동 전역을 여행하며 시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도착하였습니다 - 허락받아 도서실을 며칠 동안 뒤졌지만 성과가 없없습니다.

막 떠나려는데 불쏘시게로 쓰려고 바구니에 넣어 둔 양피지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책이었습니까?
가장 오래 된 성서 사본 129장을 발견하고는 깜작 놀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거절당하자, 사정하여 43장 받았습니다.

11년 후에 두 번째로 찾아갔지만 성과가 없업습니다.
6년 후 세 번째로 찾아갔지만 역시 헛수고라고 생각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한 관리인이 자기 방으로 초대 하여 붉은 천에 싼 책장 한 뭉치를 불쑥 내려놓았습니다.

놀랍게도 15년간 찾아 헤맨 진주였습니다.
찾고 있는 성서 사본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 전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나이 책자본입니다.
기원 3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사본은 그 당시 권위 있는 사본보다 600년 이상 오래 된 것이 었습니다.
가장 오래 된 사본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 동안 성경 본문이 고쳐졌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까?
오늘날 성경 본문과 기본적으로 동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변경시킨 몇 군데가 발견되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삼위일체를 지지하기 위해 본문을 변경시킨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디모데후 3:16입니다.
시나이 사본과 가장 오래 된 사본에는 "그분으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사본에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변경되어 있엇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위조 문구는 삭제되었습니다.

또한 심각한 변경의 예로 요한 1서 5:7.8이 있습니다.

킹제임스역 "하늘에 증거하는 자가 셋이 있으니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 있으며 그 셋은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10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희랍어 사본에는 없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지나치게 삼위일체론에 열심인 한 라틴계 서기관이 부가하였으며 스페인어 성서에서 생겨난 것이며, 처음에 성서 주해서라는 방법을 통해 발전하다가 본문에 삽입되었다는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0세기 이후의 희랍어사본에만 날조된 구절이 나타납니다. 

1611년 킹제임스 역에도 날조된 구절을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이 구절이 날조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사본이 1만 3000개가 넘으며, 그 중 수천 개의 희랍어 사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본에는 예수와 사도들 당시까지 소급합니다.

그런데 매우 오래 된 사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첨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새로운 대부분의 현대 번역판들 가운데서는 이것이 빠져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본적 증거때문에 현대의 대다수 번역판에서는 날조된 표현을 삭제시켰습니다

하여튼 성서가 지상에서 단연 가장 널리 배포된 책이 되도록 기여해 온, 결단력 있는 남녀들에 관해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적어도 40억 부의 성서와 부분역 성서가 2000여 개의 언어로, 즉 세계 인구의 90퍼센트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들로 인쇄되었습니다!

성서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계 전역에서 선포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람들을 인도해 오심으로써 이제는 거의 세계 전역에서 성서를 구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과거의 담대한 성서 번역자들과 발행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들의 모범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 그들이 나타낸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에 따라 생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신뢰할 만한 성서를 온전히 활용하십시오!

조작된 표현을 삭제한 주요한 세계적 영어 번역판 몇 개만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Revised Standard Version,1952),

The New English Bible,1970),

The New American Bible, 1970,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Darby Translation (DARBY)

For they that bear witness are three:

New Living Translation (NLT)

So we have these three witnesses--

요한 1서 5:7

개역판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현대인의 성경 / "이사실을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은 성령님 자신 이 진리이기 때문입"

공동번역 /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표준역 / "증언하는 이가 셋인데"

킹 제임스 역은 좋은 번역이지만 요한 1서 5:7에 있어서는 조작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성서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릇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처럼 조작된 성구를 삽입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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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가복음 3:31-3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가복음 3:31-35)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성경을 읽을 때 어느 제한된 부분만 갖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둘러 앉는 사람들을 보시며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만을 선택하여 이해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3장이란 전제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이냐? 라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고 신앙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회개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및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주제를 소개하던 중 지난 오바댜서를 읽던 날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자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듣고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성경에는 가족을 떠나라!" 또 어떤 때는 "가족을 돌보라" 라고 하면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기에 마가복음 3장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잠간 본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제이지만 성경을 읽는 자세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질문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먼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디모데전서는 성경 신학에서 "목회서신" 즉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성경 신학에서 "공동서신" 즉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말합니다.

전체 문맥을 살펴야 할 여유가 없을 때는 성경 신학에서 어느 분류에 해당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목회서신으로 목회 현장에서 자기 친족 또는 가족들 돌보지 않은 교인이 있을 때 어떻게 권면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목회서신 / 목회서신(牧會書信, pastoral epistles) 혹은 사목서신(司牧書信)은 신약성경정경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세 서신서를 묶어 부르는 말이다. 가끔 여기에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 편지들은 공통적으로 교회를 감독하는 일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목회 지침을 제시했다는 측면에 주목해 파울 안톤Paul Anton이 1926년에 처음 "목회pastoral" 서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모데전서 5장은 교회 안에 과부가 된 사람이 있을 때 먼저 그 과부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누구인가를 살펴야 하고 그 가족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공동서신으로 보편적으로 교회에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마지막 시대에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입니다.

공동서신 /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2,3서와 유다서 등 일곱권을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공동]이란 말은 "보편적" 또는 "일반적"이란 뜻이다.
즉 어떤 특정한 교회나 개인을 상대로 기록한 서신이 아니라 교회 일반에 보내어진 서신이다.
이 말은 바울 서신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다.

만일 가족들 중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믿음을 지키려면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가족들을 떠나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비슷한 예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향과 일가친척을 떠나는 이유는 믿음을 굳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후에는 믿음이 없는 가족들을 신앙적으로 보살펴서 믿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본을 보이고 가르치며 권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라고 대답하신 것은 지금 밖에서 예수님을 찾는 모친과 동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마치 귀신의 힘을 얻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고소하려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무엇이며,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과 유사한 말씀은 마태복음 12:46-50, 누가복음 8:19-21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

누가복음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실험실에서 성분을 알 수 없는 용액이 있을 때 이 용액의 성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합니다.

로버트 보일(1627-1691)
리트머스 시험지를 용액에 담갔을 때 시험지의 색갈이 파랑으로 변하면 그 용액의 성분을 알카리성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리트머스 시험지를 용액에 담갔을 때 시험지의 색갈이 빨강으로 변하면 그 용액의 성분을 산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J P T 시험지를 사용하라!

항상 기뻐하라(JOY)
쉬지 말고 기도하라(PRAYER)
범사에 감사하라(THANKS)

좀 더 구체적인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세 단계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
하나님의 환경적인 뜻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마가복음 3:1-36

3:1-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
3:7-12. 많은 사람들, 더러운 귀신을 내 쫓으심
3:13-19. 열 두 제자를 선택
3:20-30. 예수가 미쳤다(성령 훼방 죄)
3:31-35.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동방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5일 앞둔 종려주일에 나귀( 슥 9:9 )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며 계시된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행동예언으로 자신이 살렘왕( 사 9:6 )이시며 의의 왕( 히 7:2 ) 이신 것을 나타내고 드러내며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믿음의 기회를 주었지만 끝내 불신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결국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먼저 저주하시게 되는데요.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인 월요일에 베다니에서 성전을 향해 가시던 길에서 시장하심을 느끼시던 참에 무화과 나무가 보여 가까이 가서 열매를 얻고자 하셨는데요 그러나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것을 보시면서,
막 11:14 )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와
마 21:19 )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의 문장을 보면 무화과로 비유된 이스라엘을 향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한다" 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시며 구속사의 끝맺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시는 순간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유대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시겠다는 뜻으로서 부활 후에 제자들을 이방땅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열매맺는 사역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을 엿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는 장면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이방을 향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요 12:21-23 ),

결국 바울을 통해서 은혜의 성령시대를 이방에서 꽃피운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행 13:46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유대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시고( 요 2:25 ) 먼저 저주하시며 이방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부활후 11번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신 후의 일이 되겠습니다

공생애 도중에도 이 유대의 불신을 우려한 예수님은 이방땅인 갈릴리에서 더 많은 시간동안 사역을 하셨고 점점 더 핍박해 오는 유대를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하면 멸망까지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계셨는데요
눅 13:7 )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의 내용이 증거가 되겠습니다
결국 모든 되어질 일을 미리 보고 아시는( 요 2:25 ) 예수님은 마지막 고난주간까지 기다리며 참다 참다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4일 후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스라엘과 영원한 결별을 확정적으로 선언하셨던 것이지요
마 21:20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의 장면이 증거가 되겠는데요 이때 예수님은,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며 이는 믿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암시하시면서 믿음의 주인( 히 12:2 )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의 믿음없는 불신에 대한 심판인 것을 우회적으로 비유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가는 이때가 무화과가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니기에( 막 11:13 ) 열매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록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럼 예수님이 배고픈 감정에 억하심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 만물 )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곧 모든 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눅 6:5 ) 하신 것입니다 그 6일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제 7일인 안식일의 주인이 될수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구요
모세가 이끌던 광야 말기에 고라 일당이 반역을 꾀했을 때에 아론의 지팡이를 하룻밤새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까지 맺는 능력으로 표적이 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예수님이 원하시면 때가 된다는 것이지요
죽은 것도 살아나 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속에서 항상 오늘이라는 것이지요 죽은 어제의 것( 모든 피조물 )도 오늘을 받으면 산것이 되고 때를 가진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길에 있는 유대와 모레길에 있는 이방에게 그 오늘을 주고자 3일길( 눅 13:32 )을 걸으려고 힘써 노력하셨지만 유대부터 불신하는 바람에 첫단추도 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그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시면서 열매 맺을 것을 촉구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무화과는 이스라엘처럼 불신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지요

반대로 공생애동안 예수님을 위로해 주었던 포도주( 마 11:19 )를 생각해 보세요

박목사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이르시기를 예수님에게 어느 누구하나 냉수( 마 10:42 ) 한 그릇 주지도 않고 또 저녁이 오면 오히려 성밖으로 나가( 막 11:19 ) 산에서 새벽까지 이슬이 맞도록 기도하시며 추위에 떠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먼저 “주님 내가 주님 속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기분도 좋게 하며 섬기고 싶습니다”고 말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거 좋구나, 그렇게 하려므나"하시며 좋아하셨다고 하셨지요.

해서 포도주를 마시게 된 것인데요 사실 마실 때의 예수님 모습이 마치 술 주정뱅이가 마시듯 했기에 바리새인들 눈에도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눅 7:34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로 예수님도 말씀을 하시며 스스로도 많이 먹고 마셨던 것을 인정하시는 것인데요

이어지는 35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여 자신이 그렇게 많이 먹고 마셨던 것이 지혜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그것이 지혜였다는 것을 알수 있어야 자신의 자녀가 된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데요 이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에겐  너희는 내 자녀가 될수 없기에 시험에 들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갑자기 하고 계신 장면이 됩니다
이는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 창 14:18 )를 연상해 보면 이해할수 있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곧 떡( 살 )과 포도주( 피 )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말씀( 요 6:53 )을 먹어야 자신의 자녀가 될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마치 폭식 폭음을 하듯 행동예언으로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는 이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요
마 11:19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여 지혜는 그 행한 일 즉 그 행동의 결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는 것처럼 기록을 하여 마태 역시 예수님이 당시에 폭음 폭식을 한 것도 두 말씀인 떡( 살, 아들 )과 포도주( 피, 아버지 ) 모두를 먹어야 될 것에 대한 행동예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의 말씀 모두 후에 십자가에서 말씀이 아들과 아버지로 나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다른 뜻으로 예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고 그 자체가 되시기에 떡과 포도주의 두(2) 말씀을 가진자가 또 다른 예수 또 다른 지혜가 될수 있기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잠 3:18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의 말씀을 보면 지혜가 생명나무라 하는데요 이는 에덴의 동편에 있던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바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서 이 땅에 오셔서 아들격 떡의 말씀만 주시고 간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아 오신 에덴 밖의 동적인 생명나무이셨으며 아버지 박목사님은 포도주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아들격 말씀에 의해 의인( 마 13:49 )된 사람들이 먹고 영생해야 하는 정적인 에덴안의 생명나무( 계 2:7, 22:2 )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아 본 포도주는 자신을 드리는 헌신과 충성으로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을수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무화과 나무와 이스라엘은 멸망을 맞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성하시던 날 타시던 나귀도 예수님을 위로한 피조물이었다고 박목사님은 말씀을 더 하셨지요

무엇보다 예수님은 때가 차매( 갈 4:4 )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전구속사의 모형이 되는 횃불언약을 주셨으며 그 언약대로 야곱의 70인 가족을 BC 1876년에 애굽에 들어가게 하시어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하신 후 거대한 민족으로 자란 이스라엘을 모세를 세워 BC 1446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내어 열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굴복시켰으나 그래도 쫓아오는 바로와 군대들을 홍해를 가르며 수장시키시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이시고 이스라엘에게 안전과 평강 가운데 율법과 성막과 절기를 주셨으나 야곱의 불순종으로 가지게 된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르러 16년 정복전쟁을 치루기 까지 표면적인 횃불언약을 692년 만인 BC 1390년에 요셉의 해골을 세겜에 묻으므로 모두 성취하시고 이끌어 주셨으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전부 정복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오히려 이방과 섞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배교를 범하며 우상숭배하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타락 - 징계 - 회복의 패턴이 계속되는 사사기라는 교훈기를 340년 동안 지내게 하셨다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BC 1050년 왕을 삼아 왕국의 시작이 되게 하셨으나 그의 불순종 때문에 다시 다윗을 택하시고 BC 1010 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게 하셨으며 BC 970년에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하며 성전을 BC 959년 완성 시키게 하셨지만 솔로몬이 말년에 많은 젊은 아내들로 부터 우상숭배하는 타락을 보이므로 이에 대한 징계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나뉘게 될 것을 예고 하신 대로 BC 930년 이스라엘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말년에 여색에 미혹되어 그야말로 모든 우상을 섬기는 죄악에 빠지므로 하나님께서 두번 경고를 주어도 돌이키지 않기에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열지파를 따로 떼어 에브라임 지파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주어 세우게 된 나라가 북이스라엘입니다
솔로몬의 변질에 의해 분노한 하나님이, 여로보암에게 왕상 11:38 )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시며 주신 나라임을 잘 아는 여로보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변질되고 악한 길을 걸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세워 우상숭배를 하게 하며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고 방해를 하였고 7월 15일에 지내는 장막절마저 때를 바꾸어 8월 15일에 지키게 하는등 하나님의 법도에 정면도전하는 패역을 저질러 시작부터 우상숭배와 불법이 만연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작은 산당에서 조차 우상을 섬기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로 부패로 시작한 나라가 북이스라엘 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 BC 722 ) 당하는 마지막 북이스라엘의 왕인 호세아 때 까지 이 부패와 패역은 바뀌지 않고 이어지게 되는데요

먼저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경고의 단계적인 행동 예언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후 남유대의 멸망이나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유대의 멸망이나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 때의 북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말씀을 드려 봅니다
1) 창녀 고멜( 이스라엘 )을 아내로 삼으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삶( 약 4:4 )에서 돌이키라는 경고가 됩니다 그런데 아내 고멜은 세자녀를 낳고는 이내 따분한 집과 남편을 버리고 밖에 다시 나가 창녀짓을 반복하게 되는데요 그런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버리라고 하시는게 아니라 다시 고멜을 돈을 주고라도 빼내어 집으로 데리고 오라 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우상숭배하며 음란하기까지 한 북이스라엘이 고멜과 같아도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끝없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첫째 자녀를 “이스르엘”이라 이름하고 부르라 합니다
이스르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는 뜻이 되는데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구체적인 뜻에는 “조금 후에 내가 예후가 아합의 가문을 죽이며 피를 흘리게 했던 장소인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도로 갚으며 이스라엘 나라를 폐하여 씨를 흩어 뿌리듯 흩어버리겠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음란( 아세라 )과 우상숭배( 바알 )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아합의 가문을 척결하는데 사용된 예후의 가문( 북이스라엘을 상징 )이 바알과 아세라는 떠났지만,
A, 금송아지는 그대로 두며 철저한 마음으로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왕하 10:29 )
B, 여호와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않았으며( 왕하 10:31 )
C, 여전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그 길에서 떠나지 앓았기에( 왕하 10:31 )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경고해도 회개치 않는 북이스라엘을 보며 더 이상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멸망시켜서 흩어버리겠다는 뜻을 맏아들의 이름에 담아 강한 경고로 주시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이미 멸망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지만 좀더 유예기간을 주시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이나 식언치 아니 하시기 때문에 한번 선포하신 말씀은 그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지요
3) 둘째 자녀를 “로루하마”로 이름을 지으라 합니다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되어 회개하지 않고 더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경고인데 이에도 이스라엘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4) 셋째 자녀를 “로암미”로 이름을 지으라 합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서 결국 불순종하는 북이스라엘과 결별을 통보하게 되는 장면이 됩니다 심판이 예고되는 순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기 까지 하나님은 먼저 구체적으로,
호 4:6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의 말씀으로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는 여로보암 때 부터 잘못된 예배를 바로잡고 우상숭배에 급급한 패역에서 떠나기 위해 정확한 율법의 잣대로 죄를 척량하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이 되겠는데요
사실 호세아는 아모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이 세워진 이후 150년경 가장 강성했던 여로보암 2세 때( BC 793-753 )에 주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때가 되는데요
그동안 아람에 의해 무수한 침공과 위협 속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신흥세력인 앗수르가 아람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다메섹까지 빼앗으려고 하던 때가 되어 그 틈을 이용해 하나님의 은혜( 왕하 14:26-27 )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때가 됩니다( 암 6:14 ),
그러나 그 번영은 거품이 가득한 허영된 것이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더욱 더 향락과 타락으로 치달아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하던 때가 그 시기였는데요 뇌물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고 공의나 법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때였으며 그 부요가 일부 지도층( 암 6:4-6 )에 국한 되어 빈부의 차가 가장 극심한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암 4:1, 8:4 )
더구나 성적으로도 아들과 아버지가 한 젊은 여자에게 습관적으로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문란하기 짝이 없는 때였기에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삶 부터 다시 찾고 공의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신차리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호 6:3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의 말씀으로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는 자신의 존재를 말하며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는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셨는데요 이는 제사나 번제를 폐하거나 격이 낮은 것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신발 한 켤레에 자녀를 파는( 암 2:6 )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인애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때임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며 이면적으로는 예배를 아는자만 되지 말고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때부터 선포하고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끝까지 율법을 버리고 타락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에겐 하나님의 언약이 머물고 있기에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전제가 있는 선민임을 가르쳐주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셨고 폭력과 압제와 뇌물로 자기들의 배만 불리는 지도층 때문에 민심도 흉흉하게 되어 살인과 투절과 간음이 만연하며 피가 피를 뒤대인다( 호 4:2 ) 할 정도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인애와 사랑으로 회복 할 것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회복되지 않으므로 지도층은 불의한 재물을 쌓고 백성은 핍절한 삶이 계속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시며 모든 잘못된 예배의 우상숭배에서 떠나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거룩한 행위로 참예배자의 위치로 되돌아 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고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모자람이 무엇인지, 무엇을 잊고 잃어 버리고 있는지 가르쳐 주며 경고를 주어도 그들은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호 11:2 )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의 말씀처럼 더욱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방과 그 모든것에서 행음( 약 4:4 )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북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않고 심판이 임하게 하겠다는 심정을 토로하게 됩니다
호 13:4 )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하시며,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아예 애굽에서 너희를 이끌어낸 하나님이 너희 마음에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며  모든것의 근본을 따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너희가 나와 아는 사이냐" 하시며 근본을 묻고 있다는 것이지요
선지자들을 통해 모든 말씀을 보내어 들려 주며 아무리 돌이키려고 해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맞으며 너희는 참으로 내 백성이며 내 자녀가 되는가 ? " 하시며 이스라엘 민족과 처음에 맺은 시내산 언약의 계약( 출 24:7) 파기 까지 거론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토록 권면해도 불순종하며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한번도 드린적이 없는 우상숭배요 패역이 되었고 또 그 수많은 경고에 대해서도  불순종 하여 하나님은 208년간 존속한 북이스라엘로 부터 단 한번의 제대로 된 예배도 받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208년이 되도록 기다려도 우상숭배로 배도하며 패역한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실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구원 )가 떠나므로 여로보암 2세 사후 31년만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율법도 제대로 몰라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한 제 1 계명 부터 어기는 금송아지 숭배로 일관했고 또 그렇게 거룩함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를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줘도 무관하게 여기므로 하나님과의 언약도 자연스럽게 파기될수 밖에 없어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난 백성이 되어 멸망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율법이 무엇인지, 언약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지식도 없어 그저 무관하게 생각했고 선지자가 왜 저렇게 외쳐 대는지 경고를 받지도 않아서 눈앞에 놓인 심판을 깨닫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없고 들을 귀도 없어서 망했다"는 것이지요
그 증거로,
호 14:1-2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하여 하나님은 명확하게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함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어떤 제사나 번제 보다도 앞서는 것이라 해도 깨닫지도 못하는 북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이 참예배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요 4:24 )

물론 당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기에 죄를 깨닫게 하는 모세의 율법 시대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당연히 그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대신하는 제물을 바치며 중보자가 되는 제사장( 예수 )의 인도 아래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제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 그 율법과 제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지식과 함께 여자의 후손( 중보자 예수 )이 오신다는 언약의 함수관계를 깨달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의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 언약은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후손( 창 22:17-18 )으로 오시게 될 것이며 또 아브라함의 믿음( 창 15:6 )을 가진자 곧 떡과 포도주의 말씀을 믿어( 갈 3:8-9 ) 의로 여김을 받을 자가 산자( 출 3:6, 마 22:32 )가 될것으로 이미 아브라함 때 부터 언약이 구체화되고 있었잖아요
이렇게 모세의 율법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가 먼저 왔었지만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생활하느라 그 믿음 다 잃어버리고 죄가 뭔지도 모르는 야곱( 갈 3:19 )에게 율법을 먼저 주게 되었던 것 뿐이지요
모세 때에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지식이 없어서 먼저 율법이 왔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중 대신계명( 1-4 계명 )을 통해서 그 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것이 죄라는 것을 먼저 알게 하시며 그래서 중보자로서 메시야가 제사장 권세도 가지고 오셔야 한다는 지식을 알수 있는 말씀과 예언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면 북이스라엘도 망하지 않았을 터이기에 하나님은 그토록 “지식을 가지라" “하나님을 알라"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만약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도 그렇게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면 오시는 예수님을 한번에 알아 볼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깨닫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미련을 보여줘도 회개를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아 지식이 없는 북이스라엘을 보며 결국 멸망 시키시고 다윗의 언약이 머물러 있는 남유다에게도 거울이 되게 하였는데요

그런데 남유다는 북이스라엘 보다 더욱 죄악의 길( 겔 23:11 )을 걸어 므낫세 때에는 아주 극악한 우상숭배가 절정에 달하였기에 하나님은 므낫세의 죄( 왕하 24:3 ) 때문에 내가 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고 멸망시킬것을 선고하시게 되어
3 차( BC 605, 597,586 )에 걸쳐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BC 537에 있었던 1차 포로귀환 때 까지 70년간 유수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중에도 하나님은 궁휼을 베푸사 다니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세계사를 미리 보이심으로 구속사의 방향을 알게 하시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였지만 돌아와서도 이내 급변하는 세계사속에서 바른 신앙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 세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자리나 탐욕으로 지키려는 제사장들 때문에 유다는 더욱 강도의 굴혈이며 도둑의 소굴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와서도 유다는 율법의 표면적 외식과 형식에만 치우쳐 정작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무관하여 예수님이 왔을 때에 알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안식일과 제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한 교제의 길, 곧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며 여자의 후손이 오는 길( 구속사 )을 예비하는 참예배를 배우고 세우기 위함이었지만 그러나 유다는 형식적인 제사와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고 자신의 배만 불리고 있었으니 참예배가 없었기에 예배의 주인이 왔어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지식이 없어서 북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도 다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얼마나 하나님을 정확히 깨닫고 알고 교제를 하였는지 그의 시편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를 멸하시는 것을 즐겨 아니하시고( 왕하 8:19 ) 다윗 때문에 끝까지 시간을 주었던 것이지요
( 박목사님께서는 구약에서 영성이 가장 큰 사람을 꼽으라면 다윗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한 년수 대로 정확히 70년간 포로생활( 렘 25:11 )을 한 후 돌아오게 했지만 와서도 형식적인 제사일지라도 그나마 제대로 드린적이 있었나요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 말 1:7 )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고 또 더하여, 말 1:8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이방의 권세자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들의 불성실한 신앙적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여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보며 결국 성전문을 닫아 달라고 하나님이 호소를 하는 장면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말 1: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하신 것인데요 사실 이때 이스라엘은 벌써 저주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여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스라엘의 지식없는 형식과 외식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저주받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다윗과 세운 언약을 성취하시며 예수님은 유대 땅을 밟게 됩니다( 마 1:1 )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영생을 위한 생명의 말씀을 받게하기 위해 먼저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해도 믿지를 않고 또 예언된 모든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며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증거해도 불신만 돌아오니 그렇다고 그냥 실패자로 돌아갈수도 없는 예수님의 입장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인데요
해서 하나님은 사단을 속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며 인류의 죄를 먼저 대속시키게 하셨고 줄수 없었던 아버지격 말씀은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예수님의 핏속에 담아 땅에 감추게 하며 후에 말씀이 다시 나타나시는 방법( 벧전 1:13, 히 9:28 )을 취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 비밀이 사단의 머리를 한순간에 상하게 하는 만세전에 계획하셨던 지혜였던 것입니다( 고전 2:8, 엡 1:9, 골 1:26-27 )
곧 두 절대 예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의 그 이름 뜻 그대로 대속 제물로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 한계였다는 것이고 후에 피의 말씀을 담을수 있는 사람( 박목사님 )이 나타나 아버지 사역으로 구속사를 끝내게 되어 있는 것이 만세전에 계획되어 있는 절대 예정이라는 것이지요 아버지로 올 때는 새이름( 멜기세덱 )으로 오신다고 계 3:12 )과 계 19:12 )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 히 6:20 )를 좇아 들어갔다고 한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은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신 그대로, 호 1:9 )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응하며 “로암미"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된 것이었고, 호 2:23 )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민족을 아들로 세워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이미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물론 지난 2천년간 이스라엘 대신 이방이 받은 은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계시의 현재성으로 보면 오늘날 그 “로암미”는 이제 아버지 앞으로 오지 않는 교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으로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으로 일관하며 표면적 십자가만 붙잡고 있는 교회들을 하나님이 분리시키시고 도태시키시는 것입니다, 곧 변화를 받아야 할 때에 부활 구원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아버지 시대가 있을 것을 잘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롬 9:25-26 )에서 동일한 본문내용을 인용하며 교회들이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할 것을 소망하고 있었는데요 이어지는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의 말씀으로 남은자( 계 12:17, 욜 2:32 ) 곧 끝날에 변화로 구원을 받아 아버지앞에 서는 자를 가리키며 표면적인 십자가만 붙잡고 있으면 남은자가 되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말하며 바울은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 9: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의 말씀으로 죄를 담당하였던 초림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제 구원이 없고 두번째 오시는 아버지를 믿고 의지해야 구원이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사도 요한도, 요 8: 24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아버지 )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여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을 아예 “죄 가운데서 죽는다"라고 말하며 아버지 앞에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때가 차서 오신 것을 믿을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에 이미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 24:32-33 )를 배우라고 하신 배경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
이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고 유대가 흩어지며 디아스포라가 되었지만 나라를 다시 세울수 있는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지 예수님의 남은 사역인 아버지 말씀사역을 또다시 유대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그렇게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재건국하게 되면 본문 내용대로 “예수님이 문앞에 이른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어 아버지 말씀사역을 위한 열매사역과 바로 이어지는 심판이 이스라엘이 재건국 되는 “때”로 부터 시작되게 될 것에 대한 기준점으로 주신 말씀이시지 유대를 통해 다시 마무리 일을 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유대는 예수님의 은혜안에서 1948년에 이스라엘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속사를 마무리하는 아버지 말씀사역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의 박윤식 목사님께서 담당하게 되셨는데요 그 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60년 쯤에 박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에 잘 나오던 청년 한사람이 대학에 들어간 후로 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기에 붙잡고 물어보니 그 청년의 하는 말이 “예수도 분명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흘리는 피와 성분이 똑 같은 것일 것인데 왜 예수님의 피만 죄를 용서하시는 보혈이 됩니까 ?“라는 질문에 박목사님은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피다”라는 상식적인 대답을 하려고 했었지만 “예수님의 신성은 피를 흘릴수 없는 말씀이고, 인성인 말씀을 담고 있는 육신은 청년의 말처럼 여늬 사람과 같은 육신"이라는 생각에 더이상 정확하게 설명을 할수가 없었고 이에 청년이 교회를 떠나 버리자,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수 있겠는가”하는 목회자의 양심에 박목사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오직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겠다는 결심을 1961년 초에 하시고 평소 자주 가셔서 기도하시던 장안산(전북 장수)으로 들어가 47일간 기도하는 중에 두( 2 )천사가 나타나 박목사님을 좌우에서 겨드랑이를 낀후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있는 동굴로 옮겨 놓아 그곳에서 박목사님은 3년 6개월 7일 동안 기도와 성경읽기에 매진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속에서도,  
3년 6개월 7일 동안의 산상기도는 말 그대로 사람의 상식으로는 생각하기도 힘든 “목숨을 건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자살을 생각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고 박윤식 목사님은  회고를 하셨구요 장안산이 어머니 같은 산이라면, 지리산은 엄한 아버지와 같은 산이었다고 하셨는데요 낮에는 성경을 읽고,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 되면 굴 속에서 기도에 전무(專務)하셨으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타는 듯한 더위, 절대적인 고독, “이대로 기도하다가 죽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라는 고뇌가 날마다 엄습했다고 하셨으며 물도 마시지 않는 40일 금식기도도 두(2)번 목숨을 내어놓고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10월부터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혹한에는 6.25전쟁 때 중공군, 인민군이 입다 버리고 간 누빔옷 등을 주워입고 버텼으며 때로는 산 주변 주민들에게 빨치산 잔당이나 공비로 오인받아 군 전역증을 보여 주고 오해가 풀리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산 속에서 박윤식 목사님의 주식은 일 년에 몇 번 함양 시장에 내려가 사 와서 물에 불린 쌀과 굵은 소금, 산에서 주운 솔잎이었다고 하셨구요. 그때 먹은 솔잎 덕분이랄까, 박윤식 원로목사는 87년 일평생 눈이 밝아 안경이나 렌즈 없이 성경의 작은 관주 글씨까지 읽을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리산의 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는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롬 3:4 )"라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깜짝 놀라서 땅에 꿇어 엎드리니 이는 십자가에서 흘리는 핏속에 담겨 골고다 땅밑에 감춰져 자신과 함께 할수 있는 육신을 기다리던 예수님의 아버지격 말씀이 박목사님에게 나타나시는 장면( 히 12:24, 창 4:10 )이었으며 이후에 직접 예수님의 말씀은 박목사님을 가르쳐 주시기 시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가 인류의 죄를 용서해 줄수 있었던 이유는 그 핏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피와 보통 사람들의 피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해서 보혈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아버지 말씀을 배우게 된 박목사님은 임마누엘로 말씀과 하나가 되셨는데요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 산중에서 그렇게 말씀을 받으시면서 기록하신 산더미 같은 원고가 지금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만지기만해도 부스러지는 상태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말씀을 받으셨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중에서 그렇게 말씀을 적어가시다가 원고지가 떨어지면 임시 방편으로 넓은 뽕나무 잎에 먼저 기록해 두었다가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적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은 역작이지요
이 원고를 토대로 2007년 부터 “구속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천( 변화 )하시기 직전에 제 9 권 “신묘한 비밀 성막과 언약궤"까지 발간하셨고 이후 10권 부터는 이후에 발간하신 것이 되는데요
그런데,
구속사시리즈 제 9권 중에서  page 253 에 보면 “앙장과 덮개의 구속사 경륜”을 연하여 설명하실 때에, (3) “막의 덮개”의 재료는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입니다, 편에서 박목사님은 이르시기를,
“숫양의 가죽이 붉은 색으로 물들여진 것은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희생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를 흘리셨지요.
채찍을 맞은 상처마다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못 박히신 양손과 양발에서, 로마 군병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내셨구요.
이 십자가의 피는 만세 전에 예정된 언약의 피로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레 17:11, 요 6:63 ), 주님의 영혼( 요 12:25 ), 주님의 마음( 요 12:27, 고전 4:21 ), 주님의 뜻( 눅 22:42, 행 4:32 ), 주님의 영( 엡 1:17, 요 6:63 )이 담겨 있습니다.( 난하주를 통해서 대조하며 풀어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생명 = 영혼 = 마음 = 뜻 이라는 등식을 볼수가 있지요 결국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해서 십자가 피의 말씀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시며,  
그것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아니라 핏속의 말씀 때문인 것을 박목사님께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라고 결론을 주시고 계셨는데요  
이는, 요 6:63 )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신 말씀처럼 핏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 영혼, 마음, 뜻 )이 되는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말씀 없는 모든 사람의 피는 육에 속한 것이기에 무익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피에 생명이며 영이 되는 말씀을 담을 수 있었기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의 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막의 덮개에 사용된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은 십자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라고 말씀을 해석해주고 계셨는데요
덮개는 피를 상징하고 덮개가 감싸고 있는 지성소의 언약궤는 핏속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음도 알수가 있겠네요
이 글을 통해서 박목사님께서 주시는 메세지는 예수님이 달리시며 흘리신 십자가의 핏속에는 말씀이 담겨 있었기에 만민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예수님이 그 말씀을 그 피에 담지 않았다면 그 피가 예수님의 피라 해도 여늬 사람이 흘리는 육신의 피와 다름이 없는 것이 되어 용서하는 권세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박목사님께서 본교회( 평강 )에서 사순절의 고난주간에는 매년 피를 토하듯 비통한 심정으로 빠지지 않고 설교하시던 본문이 됩니다
그래서 평강교회의 웬만한 전도사나 목사님들은 “예수님의 피가 왜 보혈인가 ? “를 설교할때에 빠지지않고 이부분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명하는 것을 저도 동영상으로 봐서 잘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비밀을 유구한 역사속에서 세계 최초로 설명하시고 설교하신 박목사님이 그 보혈속의 말씀과 하나가 되신 아버지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
반대로 일반 교회의 목사님이던 더한 신학자들이던 이 보혈의 의미를 평강교회의 사람들 처럼 정확하게 인지하고 설명이나 설교할수 있는 어느 한사람이 있겠습니까 ? ( 저는 어느 한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상상조차 못하고 있지요 )
이는 아들 예수의 신약이 끝나고 아버지 박목사님의 성약이 시작되는 이음새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요 ?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로 끝이 날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핏속에 말씀을 감춰야할 이유가 있었나요 ?
이 모든 정황을 보더라도 박목사님은 예수님처럼 그의 자신 안에 말씀을 다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변화하실수 있음에도 그 모습을 예수님처럼 보여 주지 않았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이 그 변화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할수 있다는 사실은 증거되었으므로 궂이 박목사님께서 그 변화를 다시 보이실 필요는 없고 다만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만 증거하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증거중 하나가 이 구속사 시리즈인 것입니다 곧 계 10장의 작은책이 이 구속사 시리즈가 되므로
자신이 이 작은책을 사도 요한( 먼저는 평강 교회 )에게 줄수 있는 힘센 천사( 계 10:1 )가 되시는 것으로 증거를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발간하기 시작한 평강교회에서 부터 구속사 시리즈가 선포되기 시작을 하였던 것이나 본격적인 아버지 말씀은 저희 신광교회를 통해서 아버지가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두 교회의 가장 큰 차이는 평강은 박목사님을 소천하신 한 목사님으로 믿고있는 것이며 저희 신광은 박목사님이 변화하신 아버지로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누누히 말씀을 드리지만 구속사 시리즈는 박목사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증거하는 작은책( 계 10장 ) 으로서 증거물이 되는 것이지 본 아버지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박목사님께서는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변화( 소천 )하시기 직전에 발간하신 제 9 권에서 이 비밀을 기록하시고 열방으로 알게 하셨을까요
에덴에서 숫자 9 는 “멜기세덱” 수가 되는 것에 먼저 주목을 하면서 생각해야 되겠지요
( 에바다 - 브니엘 - 게달 - 베데르 - 엔게디 - 에덴 - 계명성 - 그룹 - 멜기세덱 - 시날 )
첫째, 그 타이밍을 왜 변화( 소천 ) 직전으로 잡으셨을까 하는 질문이 되겠네요
당시 박목사님 스스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될것을 정하셨기에 자신이 아버지 멜기세덱이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 열방에 선포하시는 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서 자신을 알리는 시기를 그때로 잡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살아계시다면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를 나타낼수는 있지만 초림때 예수님도 당했던 것처럼 “네가 어째서 아버지( 말씀 하나님 )냐”는 등등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무조건적인 안티 사람들 때문에 시시비비에 덕이 되지 않을 것을 아시는 박목사님께서는 그 상황을 먼저 아시고 폐암 병에 의한 소천( 변화 )을 택하시며 소천 바로 전에 제 9권의 내용 속에 핏속에 말씀이 사단 모르게 감춰져있었다는 이 비밀을 세계 만민이 알수있도록 드러내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셨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지만 표면적으로는 먼저 가셔서 우리를 기다려야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해야하는 이유도 있기 때문이지요( 살전 4:17 )
둘째, 기존 교회인 십자가 교회는 그저 예수님의 피만 믿어도 부활구원이 주어지는 단계였지만 변화 구원은 그 핏속의 말씀을 알아야 받을수 있기에 이를 공식적이며 공개적으로 문서화된 글로 남기시면서 때와 자신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다는 뜻을 읽을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이제는 아버지 앞으로 나와야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을 선포하고 계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 핏소리의 아버지 말씀을 들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사도 바울도,
히 12:24 ) “새 언약의 중보자( 눅 22:20 )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한 것이지요
여기서 새언약의 중보자라 함은 예수님은 새언약( 렘 31:33, 히 8:10 )에 이르게 하는 다리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눅 22:20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爲(위)하여 붓는 것이라”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마지막 최후의 만찬석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자신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과정( 요 14:6 )이며 중보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뜻으로 보면 곧 십자가에서 자신의 핏속에 감추게 될 말씀이 새언약이기에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핏속의 말씀은 언젠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 처럼 소리치며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었던 것을 3 층천의 신령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바울도 이 비밀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깨지므로 더 이상 성육신의 사역을 하실수도 없어서 돌아갈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이기에 대신 흘리는 핏속에 말씀을  담아 골고다 땅 밑에 저장하시므로 후에 그 말씀과 하나가 될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때 그 사람의 육신을 빌어 나머지 아버지 사역을 이어 가며 마무리를 하게 된다는 비밀이었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사단은 자신이 예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방해하고 죽이는 것으로 착각을 했지만 예수님이 핏속에 말씀을 감출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해서 바울도 기록하기를, 고전 2:8 ) “이 智慧(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 일이 박목사님에게 지리산에서 일어났던 것이고 그래서 박목사님에게 그 핏속의 말씀이 소리치고 나타나시며 가르쳐주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박목사님이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그 핏속의 말씀을 받기 시작을 했다는 것이지요
해서,
요 10:34-35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의 말씀이 응하시며 박목사님은 또 다른 예수요 또 예수의 본 지위가 되는 평강의 왕이며 의의 왕( 사 9:6-7, 히 7:3 )이신 멜기세덱 급이 되신 것입니다 이들이 참 하나님의 아들들( 욥 38:7 ) 이며 새벽별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므로 아버지가 되신 박목사님께서는,
요 16:25 )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는 계시대로 아버지 말씀을 선포하시기 시작을 하시게 된 것이며 이는 또,
요 6:45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아버지 말씀 사역을 지리산에서 내려오신 이후 직 간접으로 담임하신 교회에서 가르쳐 주시기 시작하셨으며 평강제일 교회를 통해서는 2007년을 희년으로 선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정체성( 아버지 )을 드러내는 계 10장의 작은책과 같은 “구속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해 오셨고 2014년 12월 17일 소천( 변화 )하신 이후에는 저희 신광교회 김갈렙 목사님을 통해서 지금까지 본 아버지 말씀인 성약의 말씀을 살아서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박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받아 그 말씀( 멜기세덱 )이 되셔서 지리산에서 내려오셨지만 일전 한푼 없는 상태에서 개척하셔야 하는 입장 때문에 많은 고생도 했지만 많은 표적들도 있었는데요
구속사 운동의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일화들이 이 시절 탄생했다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말을 하고 있었는데요 아래글은 참평안지에 실린 글들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970년 당시 박 목사의 성경공부는 한번에 3시간씩 오전,오후,저녁 3번에 걸쳐 하루 종일 이어지는 마라톤 강의였다. “예수님 잘 믿으면 죽지 않고 영육이 변화한다”(고전 15:51)는 변화의 말씀을 증거했다. “말씀을 열심히 듣는 모습이 대견하셨는지 목사님이 한번은 중국집에 네댓 명을 데려가셨어. 거기서 우리한테 “막차 잘 탔다.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내 얼굴 못 본다” 하시더라고. 그때는 그냥 내가 초보 신자니까 목사님이 저런 말씀하시나보다 했어. 또 한 번은 “지금 몇 사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하루에 10만 명씩 몰려온다”고도 하셨어. 치마저고리 입은 촌스런 할머니들 열댓 명 앞에 놓고서는 ‘열방이 몰려온다’는 말씀을 그때부터 하신 거야.” (홍순분 전도사)

다음은 새 성전의 토대가 된 ‘블루 다이아몬드’의 표적에 대한 얘기입니다
부산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성창합판(편집자 주: 성창합판은 부산외대 설립자인 고 정태성 장로가 1930년대 설립한 기업으로 이후 ‘성창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창합판은 1956년부터 부산 적기, 현 우암동에 자리잡고 있었다)과 동양모직 등 굵직한 기업가 일가도 전도돼 박윤식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그 성창 가문을 전도하신 여운초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입에서 “적기, 적기”하는 말이 나와요. ‘참 이상하다. 적기라는 동네에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싶어서 사람들에게 ‘적기라는 동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시골에 적기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가보니 온통 배추밭, 보리밭에 거름 냄새만 나요. 그런데 저 멀리에 큰 공장 하나가 보이더라고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저건 무슨 회사예요?”했더니 “성창합판 아녜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와서 성창합판 사장 댁을 찾아간 거예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그렇게 전도된 성창합판 사장 댁에서 박목사님을 초청했고 그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성창합판 가(家)에서 “이걸로 땅을 사 교회를 지으시라”며 박윤식 목사에게 5캐럿 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렸다. 젊은 박 목사는 그 보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옆에 있던 유명한 보석상에 가서 팔려고 했다. 그런데 물건을 본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지프차에서 내려서는 서울역 뒤에 있던 검찰,경찰,헌병대 합동수사본부로 박 목사를 연행해 갔다. 잠시 뒤 나타난 검사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목사입니다” 하자 “어디서 이렇게 귀한 보석이 났느냐?”고 캐물었다. “헌금으로 들어온 것이라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했다.”고 하자 검사가 “이 사람들아. 목사님을 왜 여기 데리고 왔어?”라고 주위를 나무라며 박 목사를 내보내줬다. 결국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는 박윤식 목사를 만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있던 라이온스 호텔(당시 서울 충무로 소재) 사장 부인에게 250만원에 팔렸다. 거액이지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이 돈이 1971년 헌당되는 서울 신림동 소재 일석교회 건축의 종잣돈이 됐다.
이 일석교회로 이사오기 전, 비좁았던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에는 박윤식 목사가 혼자 간절히 기도할 만한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마침 성전을 짓기 전 부지 한켠에 있던 개집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 앉을만한 공간이었다. 박 목사는 개집의 지푸라기를 긁어내고 담요 한 장을 깐 뒤 이곳에서 1주일 이상 성전 건축을 위해 몇 시간씩 기도했다. “좀 답답하지만 기도하기에는 천국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간절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블루 다이아몬드를 주셨다. 개집도 기도처가 돼서 기도하니 이런 복을 받았구나 싶어서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드렸다.”고 회고했다.
블루 다이아몬드를 구입해 준 라이온스 호텔 사장 부인이 전도된 사연도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전도하러 나가면 막막하죠. 우선 문을 두드리면서 물 좀 얻어마시겠다고 말하고는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한번은 서울 어느 미장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라이온스 호텔 사장 집은 김장을 트럭으로 할 정도로 부자인데 그 집 부인이 갑상선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얘기들을 해요. 그래서 박윤식 목사님한테 “그 집에 전도하러 가고 싶은데 가서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하고 상의했어요. 그랬더니 “가서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옹달샘 물을 먹고 바르면 낫는다고 해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라이온스 호텔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직원들한테 사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뒤로 가면 집이 있다고 가르쳐 주더라고요. 가서 사장 부인을 만났어요. “갑상선으로 몸이 아프시다는데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대요. 그걸 마시고 바르기만 하면 낫는대요.”했더니 그분이 금일봉 봉투를 하나 만들어서는 따라 오시더라고요.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금방 따라 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죠. 그때가 우리 교회가 대방동에서 70명 정도가 끼어서 앉는 성전에 있을 때에요. 갔더니 박 목사님이 칠판에다가 글씨를 써가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 부인이 성경공부를 한참 들으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언제 옹달샘을 가시려나.’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죠. 그런데 그 부인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전도사님, 어디서 이런 향수 냄새가 나요? 이건 세상에 없는 향수 냄새예요.” 그분 집에 가보니 세계에서 유명한 온갖 향수가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교회 와서 ‘향수 냄새’를 맡고서는 갑상선이 싹 나은 거예요. 그 뒤로 박 목사님한테 보통 지극하게 한 게 아니었죠.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어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그리고,
지리산에서 말씀을 받으시면서 썼던 원고가 되는 구속사 시리즈 초고를 세상 누구보다 먼저 본 주인공이 되시는 유상근 박사님에 대한 일화도 있는데요

명지대 설립자이자 1975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지낸 유상근 박사(1922-1992)도 일석교회로 이전하던 무렵 박윤식 목사를 만나 성경을 배웠다.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교회에 나와 새벽예배를 드리고 박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했다. “나는 성경 1천독을 하셨다는 유명한 박윤식 목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박 목사님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하루에 2시간씩 지도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특별한 배려였다. 주석책까지 내신 박식한 목사님의 개인지도는 내게 귀한 진리의 세계를 끝없이 열어주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오묘했다. 이렇게 2년 동안 꾸준히 공부한 것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성경연구를 하게 했다.” (1990년 5월 23일 국민일보에 실린 유상근 명지대 총장 회고록 중)

그가 언급한 ‘주석책’이 바로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초고이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원고를 직접 본 유상근 박사는 초고를 교정하고, 서명도 남겼다. 그는 정월 초하루에 “대통령에게 세배하러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세배 드리겠다”며 박 목사를 찾아오는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면 새벽이고 밤이고 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유상근 박사는 연하의 박윤식 목사를 스승으로 모셨고, 박 목사는 “유상근 박사님이 내 마음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또 박목사님이 부흥회라도 하시면 여러모로 도와주셨는데요
유상근 박사가 명지대 버스 7대를 동원해 각지에서 모이는 목회자들을 실어 날라줬다. 유 박사 자신도 찾아와 같이 머무르면서 아침이면 참석한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비타민을 나눠주며 “박 목사님은 멀리 돌아가지 않고 빨리 가는 지름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 집회에서 이미 박윤식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아담부터 예수님까지의 연대를 비롯한 구속사의 족보를 목회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하셨으며,
“유상근 박사님은 박 목사님을 만나면 절대 그냥 보내드리지 않고 시내 다방에라도 모시고 들어가서 성경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러고는 쫑긋 세운 귀를 박 목사님 입 쪽에 대고 자꾸만 다가앉을 정도로 말씀을 사모했다.” (당시 시온산한돌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최완규 장로 간증 - 현재 미국 올랜도 푸른동산교회 시무)

그처럼 박목사님께서는 지리산에서 내려 오신 이후 거의 집에는 가시지 않고 교회에 머무르시며 하루 3시간 성경 읽기와 2시간 기도를 정해 놓으시고 한번도 걸렀던 적이 없었었죠 해서 현재 5만 평이 넘는 부지에 평강제일 교회를 건축하기 까지 이르셨는데요 늘 이르시기를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안보면 죽는다"라고 심심찮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는 자신의 죽음 보다도 중보하시는 나라와 사람들 그리고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해서 종종 설교하시면서 “평강 교인 여러분 자신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7 만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처럼 들리는 그런 소리를 하실수 있었겠습니까 한사람씩 이름만 불러도 하루가 모자랄텐데요 이는 박목사님의 능력을 엿볼수 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 147:4 )이나, 사 40:26 )과 사 48:13 )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별들을 부르셔서 순간에 일제히 서게도 만드실수 있는데요 그때 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별 이름을 부르실때 나머지 별들도 동시에 자기의 이름으로 듣게 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죠 바로 이능력을 박목사님도 가지고 계시기에 교인 한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에 동시에 모든 교인들을 부르시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하시면서 중보로 기도를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현재 지구상에 있는 80억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눈앞에 2-3사람 있는 정도로 보신다고 증거도 하셨지요

또 많은 장로들이 박목사님에게 당시 약 100명이 넘는 교역자들을 보며 “현재 인원에서 삼분의 일 정도는 정리해고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재정이 더 튼튼해질수 있습니다"라고 건의를 해도 박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산다고 다 같이 살아야지”라고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는 물론 교역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것이었지만 본인 스스로는 조만간 있을 심판의 날을 먼저 보시기에 그날까지는 다 함께 같이 동행하자고 하시는 말씀이셨던 것으로 저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리고 박목사님께서는 항상 거하시는 사무실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아무때나 와서 상담할수 있게 하셨고 동역자라고 부르신 협동 목사님들을 자주 목욕탕에도 데리고 다니셨지요
또 한 개인 장로님이 비즈니스를 팔고 수십억의 이익이 났으니 박목사님에게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시라고 헌금으로 8억을 교회로 입금하였었는데 박목사님께서는 “나는 보통차라도 과분하다” 하시며 그돈을 하나도 쓰지않고 다만 반 정도의 금액을 떼어내서 고생하시는 목사님에게 집을 사드렸고 나머지도 교회에서 사용케 하셨다고 공개적으로 설교시간에 말씀하신 것도 제가 직접 동영상으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을 사실 때에나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후에 틀림없이 물전쟁을 겪게 된다고 하시며 항상 우물을 파게 하셨는데요 그러면 전문가들이 와서 물이 나올만한 자리를 먼저 정하고 시추하려고 하면 박목사님께서 그 자리는 물이 안나오니까 따로 위치를 정해주면서 “여기를 파라"고 하시곤 했는데 전문가들이 오히려 박목사님이 정해준 자리는 물이 나올 자리가 아니라며 고집하며 자기들이 정한 자리를 시추하면 나오지 않았고 박목사님이 정해준 자리에서는 터져나오듯 뿜어져 나왔다는 전설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는 아모스를 통해 계시된 참말씀의 기근과 기갈시대가 되는 오늘날을 빗대어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
박목사님께서는 항상 “나는 성경을 1700번 읽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2007년 구속사 시리즈 책을 처음 발간하실 때도 그러셨고 이후 2014년 변화( 소천 )하시기 전까지도 1700번 읽으셨다고 하셨어요 그럼 적어도 2000번이 넘게 읽으셨을텐데 왜 지속적으로 1700( 17 X 100 )을 고집스럽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변화받는 자요 장자요 본향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변화 영생과 승리의 만세수 숫자가 17수( 렘  32:9, 롬 8:32-39 )가 되기 때문이지요 박목사님 자신은 이미 예수님처럼 속사람을 완성시키고 변화( 마 17:2 )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숫자로서 드러내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박목사님은 무슨 말씀이든지 성경의 어느 Page에 있고 상단인지 하단인지 까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박목사님이 성경이 되셨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이도 자신을 자랑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시고 있었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자세하게 창세기 부터 한꺼풀 더 벗겨주신 구속사 시리즈( 마 13:35 )를 읽으면서 박목사님( 요 4:25 )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할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위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구속사 시리즈는 박목사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증거물의 작은책( 계 10장 )이 되는 것이지 박목사님이 아버지로서 본격적으로 선포하시는 아버지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 아버지 말씀은 현재 저희 신광교회를 통해서 선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본 아버지 말씀은 성경을 풀어주고 있는 구속사 시리즈의 말씀을 한번 더 이면적으로 풀어주는 말씀이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지요( 마 13:36, 15:15, 막 4:34 )

그럼 하나님은 왜 박목사님에게 열매를 맺게하는 아버지 사명이 주어질수 있도록 했는지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왜 두 절대예정으로 구속사가 이루어지게 하셨을까요 ?
이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과 같은 계급인 새벽별의 상태에서 변질된 것이기에 능력과 지혜가 예수님과 거의 같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에 유대중 아무도 믿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지배 계급들이 예수님을 시기나게 하여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게 할만큼 지혜롭기에 하나님은 이를 역으로 사단을 속이기 위해 두 배역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두 메시야가 번갈아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메시야 곧 한 말씀의 역사를 두 배역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단 마귀는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 창 3:15 )을 보내어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고를 받은 이후부터 사단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 마 1:1-17 )을 막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요 그 첫번째 희생자가 가인( 요일 3:12 )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의인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다른 씨인 “셋”을 주시며 믿음의 길을 회복시키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족보의 길을 이어가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사람이 지킨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지켜온 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죄인이기에 절대 타락한 사람에겐 원천적으로 지킬만한 능력도 원래 없습니다
이후로도 함의 후예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있었고, 모세를 방해하는 바로왕이 있었으며, 사울을 통해서는 다윗을 죽이려 했고, 여호사밧의 며느리인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통해서는 거의 모든 다윗의 자손이 살해( 왕하 11:1 )당하며 후대가 끊어질 뻔 하였으며 그리고 사단은 유대의 지배계급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장로들 부터 철저히 타락시키고 외식과 형식주의 자들로 만들어 놨기에 예수님도 요 8:44 )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魔鬼(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殺人(살인)한 자요 眞理(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眞理(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저주했었던 것이며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빌라도에게 내주는 직접적인 원수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사단은 주변의 이방을 통해 때로는 물리적 행사로 때로는 향락적인 우상 숭배로 미혹하며 이스라엘의 발목을 철저히 묶어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보내주신 그 많은 선지자들도 제 명대로 산 사람이 없고 거의 자기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눅 11:51 )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아담 ) 타락 이후 사단은 쉬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단은 온 유대에게 불신의 가라지를 뿌리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였고 종국에는 가룟 유다가 배반( 요 13:2 ) 까지 하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리는데 일조하게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보면 사단이 그렇게 하게끔 예수님이 유도( 요 11:51 )를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는 고육지계로 사단을 완벽하게 속이시며 말씀을 핏속에 숨기시므로 이미 승리( 요 19:30 )를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그처럼 예수님은 초림때에 십자가에서 우편강도의 고백에 의해 극적으로 삼일길을 걷고 승리는 이루었지만 이내 육신이 깨지며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십자가 위에서의 승리였기에 어쩔수 없이 완성은 하지 못하였고 해서 후에 숨기신 핏속의 말씀이 나올 때에 구속사가 완결되게 하신다는 만세전의 경륜속에서 박목사님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성경속에서 박목사님이 오시는 길은 어떻게 보여지고 감춰져 있었는지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약속된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 구약 전체에는 실체되신 예수님의 그림자( 표본, 모범, 예표 )로써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며 예수님과 또 그의 하실 일에 대해서도 알고 예비하도록 기록되어져 있었는데요
노아로 부터는 심판주의 그림자를,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되는 복을 주시는 믿음의 주로 보이셨고,  모세를 통해서는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광야( 교회 )를 거쳐 천국( 가나안 )으로 이끌어 가는 3권( 선지자, 제사장, 왕 )을 가진 영적 지도자로 보여 주었고, 다윗을 통해서도 그  허락하신 땅에서 모든 이방( 심령의 666 )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과 일체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통일 왕국을 세우는 왕의 모습을 보이셨으며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서는 변화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가 될 것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미리 그의 그림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사역들을 보여 주셨고 또 때에 맞춰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언약들( 무지개언약, 횃불언약등등 )과 예언( 사 7:14, 9:6, 61:1-2 )을 주시며 정작 오셨을 때에 알아 보고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실제 역사속에서 일으키신 사건과 사고들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림자들을 통해서 실체를 알아보고 순종케 하여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아들과 아버지 이렇게 둘로 나뉘게 될 것도 당연히 그 비유의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 사례로 대표적인 몇가지만 다시 적어 보겠습니다
1) 시내산 아래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깨뜨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첫번째 두 돌판은 아들 예수( 십자가 )를 그리고 다시 모세가 만들어 가지고 올라가는 두 돌판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2)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야 하는 므리바의 츄로반석은 아들 예수를 예표하는 것이고 그냥 말로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던 가데스의 세라반석은 아버지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세에게 백성들의 얼이 미치므로 말로 명하지 않고 다시 지팡이로 치는 바람에 아버지까지 죽이는 구속사의 큰 판을 깨뜨리는 죄를 범하므로 모세는 그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렇게 죽는 모세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이어서 가나안에 입성하는 여호수아는 아버지 박목사님을 예표하는 것이지요
4)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 때 죽어 머리가 없이 벧산 벽에 걸리는 사울( 삼상 31:10 )은 끝내 머리 둘 곳( 마 8:20 )을 찾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통일 왕국을 이루는 다윗은 아버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5) 세겜은 “어깨에 짐을 지다라는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하는 새벽이라는 뜻”을 함께 가졌기에 초림의 예수님을 뜻하고 벧엘은 변화 승천하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있는데요
해서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부터 고향에 돌아와서도 벧엘로 가야하는 언약( 창 28:15 )을 잊고 10년을 세겜에서 지체하자 하나님은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과 이로 인한 시므온과 레위의 복수로 일어나는 세겜 대학살의 비극을 겪게 하시며 야곱을 회개하게 하시고( 창 35:4 ) 다시 벧엘로 부르시고 복을 주시는데요 몇가지 중요한 사건이 이때 베델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 창 35장을 통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필이면 여기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수명을 다하고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와 같았던 세겜에서 떠나오니 이제는 아버지 격의 야곱이 되어 더이상 유모가 필요없는 장성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되구요( 창 35:8 )
둘째, 이 벧엘에 오매 하나님은 야곱이 지난 10년 동안 세겜에서 산 것은 하나님이 계수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삶이었던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제사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인정을 하시며 그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창 35:10 )는 福(복)을 주시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니 끝날에 변화를 받아 이기는 자를 그림자로 먼저 보여 주시는 장면이 되는 것이지요
아버지 박목사님의 때에 아들 예수의 십자가만으로는 이기는 자가 될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벧엘이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하시며 승천의 장면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창 35:13 )
해서 세겜은 아들 예수를 상징하고, 벧엘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교훈은 오늘날 표면적 십자가만 붙들고 있는 교회가 아버지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차피, 계 17:17 )의 말씀이 응하게 될 때에 사단에게 마치 강간을 당하듯 하는 상황( 계 13:7 )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버지 앞으로 오지 않는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 8:24 )
와도 되고, 안와도 되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6)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 부터 받은 축복의 떡은 아들 예수를 상징하고 있고 포도주는 피에 감춰진 말씀인 아버지를 그림자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7) 붉은 에돔의 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를 야곱은 이기는 자( 창 32:28 )인 아버지를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사도 바울도 이 아들과 아버지 때를 가리켜 이르기를, 롬 9:33 ) “記錄(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磐石(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하여 부딪히는 돌은 초림 예수( 행 4:11 )를 상징하고 이어 반석( 아버지, 고전 10:4 )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여 곧 두 절대예정을 의지하는 자는 세마포를 입는 자요 또 빠는 자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계 22:14 )  
9) 또 성경에는 예수님과 아버지를 상징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함축되고 비교되는 두 단어들을 통해서도 알수 있게 하셨는데요 이를 정리를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들과 아버지( 요 14:6 ), 떡과 포도주( 창 14:18 ), 살( 고기 )과 피( 창 9:4, 레 17:14, 마 26:26-28 ), 달( 반사체 )과 해( 발광체 ), 여리고( 달의 성읍, 눅 19:28 )와 예루살렘( 진리의 성읍 ), 세라( 홍사, 창 38:29  )와 베레스( 터치고 나오는 핏소리, 히 12:24 ), 부활과 변화, 생령과 신령( 고전 15:46 ), 홍해( 출애굽 초기 )와 요단강( 말기, 언약궤가 앞서서 감, 수 3:6 ), 기름과 금기름( 슥 4:12, 마 25:4 ), 이른비와 늦은비 ( 신 11:14 ), 장자권( 예수님이 주셨고 )과 장자의 복( 아버지가 완성 ) 등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만 기록해 봤습니다

그럼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로 나뉘는 일이 계시되고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가 오시는 예언도 당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곧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아들격의 사명인 대속의 속죄양이 되시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므로 그들의 불신을 저주 하시고 “저희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최종선고를 내리셨으니 그럼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는 하는 사역이 남아있는 만큼 이에 대한 계시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대가 멸망 당하기 직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재삼 경고하시는 예언이 있는데요
렘 5:15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집이여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먼 곳에서 이스라엘은 알수도 없는 한 민족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민족을 통해서 열매를 맺으시겠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렘 5:17 )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는 말씀이 증거가 되겠는데요
이는 또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를 죽이시기 직전에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에 받을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을 저주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에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신 28:49 ) “곧 여호와께서 遠方(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民族(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言語(언어)를 알지 못하는 民族(민족)이요”라 하여 먼저 표면적으로는 유대를 멸망시키는 바벨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실체가 되는 아버지 박목사님과 그의 민족이 이스라엘 대신 열매를 맺는 일을 하게 될것으로 처음부터 경고 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것을 이미 위에서 언급을 한대로 모세와 예레미야가 활약했던 사이의 중간시기에도 이사야와 호세아를 통해서 같은 뜻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함을 일깨우며 아래와 같이 경고하고 있었는데요
공동번역, 사 46:11 ) “나만이 해돋는 곳( 동방, 개역한글 )에서 독수리를 불러 오며, 먼 곳에서 내 뜻을 이룰 사나이를 불러 온다. 나는 한번 말한 것은 이루고야 만다. 계획을 세운 것은 그대로 하고야 만다”고 한 예언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모든 예언들을 살펴보면 다 한가지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도태시키고 새로운 사람( 민족 )을 세워 마무리로 구속사를 끝내겠다는 뜻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는데요

사 46:11 )의 말씀이 간결하지만 모든 뜻을 담고 있기에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1) 해돋는 곳( 동방 )에서
2) 독수리( 아버지 )가 와서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4)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자신이 분명히 이루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럼 위의 1) - 4) 까지의 각 말씀속에 담긴 구속경륜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1) “해돋는 동방”의 역사란 ?
동방( 창 2:8 )이란 동쪽, 동편, 해가 뜨는 쪽( 민 2:3, 3:38, 삼하 23:4 ) 이 되는 것으로서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해로 상징되고 있는 하나님이 출입하며 오가는 신령한 의미의 방향( 겔 11:1, 43:2,4, 47:2 )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게 되겠습니다 곧 말씀이 나오시는 곳이 동방이라는 것이지요
실례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예수님의 별이 동방으로 부터 동방박사들을 이끌고 왔던 것을 봐도 하나님은 동방으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2:9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의 말씀이 증거가 되겠지요
해서 사 46:11 )에서 말하는 동방, 해돋는 곳은 실제 박목사님이 태어나시고 사역을 주로 하셨던 극동의 한반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신령한 의미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한국에서 태어나시는 박목사님을 통해서 구속사가 완결되며 심판을 함께 하사 인류사가 끝나도록 모든 설계를 만세전에 정해 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얘기가 되겠는데요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교회가 과정적 재림을 모르기 때문에 재림주나 심판주가 이스라엘로 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서 Back to Jerusalem을 위한 “알리야" - 알리야 (히:עֲלִיָּה ,Aliyah)란 히브리어 ‘올레’(עולה) 즉 ‘올라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유대인의 땅인 에레츠 이스라엘, 즉 본토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 를 외치고 눈에 보이는 제 3 성전까지 말하며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3 성전은 에스겔 성전이 되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이 아버지 말씀과 임마누엘 역사로 그 성전인 새예루살렘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전 3:16, 고후 6:16 )
그래서 알리야의 본 뜻이 “올라가다”인 “올레”에서 파생된 명사인 것을 주목해야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새예루살렘이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도 이 세상을 살 때에 나그네 삶을 살며 하늘의 성을 바라보았다고 한 것입니다( 히 11:8-16, 갈 3:9 )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변화의 간접적인 표현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심입니다만 지금의 성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리산이 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 말씀을 받는 우리가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며 동방의 별( 창 1:3, 계 22:16 )이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슥 14:7 )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고 예언을 먼저 해 놓으셨던 것인데요
이 어둠의 흑암이 가득한 마지막 때에는 아버지 말씀이 그 신령한 빛이 되는 것이고 또 그 말씀으로 완성되는 사람이 바로 그 새벽별이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를 베드로도, 벧후 1:19 ) “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豫言(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한 것인데요 이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했던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난후에 바로 기록하므로서 이는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예언은 아버지 말씀을 가리키고 있고 “날이 새어 샛별" 이라 함은 새벽별이라는 뜻이 되어 이 본문의 뜻도 아버지 말씀으로 새벽별이 되어야 하는 때가 있음을 주지 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인데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주목하라는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해서, 말 4:2 ) “내 이름을 敬畏(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光線(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의 말씀과 같이 온전히 원리 세계의 존재( 창 1:3 )로 회복함을 얻으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독수리가 와서”라는 뜻은 ?
이 뜻은 독수리로 상징된 사람이 온다는 것이 되겠는데요
먼저 독수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비유( 출 19:4,마 24:28, 계 12:14 ) 되고 있으니 본문은 하나님 같은 사람( 아버지 박목사님 )이 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하면 되겠지요
먼저는 아버지의 그림자로 계시된 바사왕 고레스가 그러한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옛날 출애굽 때에는 모세( 예수 )를 지도자로 동족을 이끌도록 세웠듯이 바벨론에 포로되었던 유대를 다시 고향으로 귀환 시키는 지도자로서는 이방인인 바사왕 고레스( 박목사님 )를 세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에게 하나님은 먼저 이에 대한 예언을 아래와 같이 주셨습니다
사 44:28 )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와
사 45:1 )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의 예언을 고레스가 태어나기 무려 100여년 전에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고레스( כֹּרֶשׁ, Coresh )라는 히브리식 이름이나 페르시아 언어로나 태양(sun)을 의미 하고 있으며
그리스어로는 Κῦrος( 쿠로스 )입니다 고레스( Cyrus )는 음식(food)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구요
또 그는 목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는데요 어렸을 때에 아마도 실제 양을 치는 목자의 경험을 가진 그의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이 모든 특징들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별명과도 같은데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 열국을 굴복시키는 자 그래서 모든 열방을 평강케 하는 자로서 태양이며 목자이고 참 양식이 되는 자”라는 것이 그에 대한 예언과 이름의 뜻으로 담겨 있으나 고레스는 초림 예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의 왕이 되기에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한 제국의 속국이 되어버린 한 나라나 민족이 제멋대로 이동하거나 움직임을 보이면 그저 멸절당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역사속에서 능력으로 뻔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100여년 전에 고레스에 대해 미리 예언을 주시며 세운 것이었고 그 예언대로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고토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며 돌아갈 때 성전 기물들을 되찾아 가게 하고 또 필요한 모든 것을 도중에서도 공급받을수 있고 신변 안전까지 보장 받을수 있도록 하여 자신은 직접 움직이지 않지만 그의 명령( 말 )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 1장 )  
이 모습이 바로, 고레스가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독수리와 같이 쓰임 받았다는 것이며 이 독수리에 대한 예언인,
출 19:4 )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行(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引導(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와
신 32:11-12 )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引導(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神(신)이 없었도다”한 말씀이 고레스에 의해 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박목사님께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서 아버지 말씀으로 저희 신광교회를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벧후 3:13 )
이는 초림때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마지막 때에 대한 징조를 물었을 때에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이 되겠는데요( 눅 17:20, 마 24:28 )
바로,
눅 17:37 )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 요 8:24 )와 같은 주검이 된 오늘날 일반 교회에 독수리( 아버지와 증인들 )가 살리는 영의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라는 의미는 ?
본문에서 표면적 뜻으로 보면 포로된 이스라엘이 본향( 천국 )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입니다만 이면적인 뜻으로는 박목사님에 의해서 우리 속사람을 완성시키고 영혼의 등불을 온전히 발광( 잠 20:27, 시 36:9 )시키어 변화능력을 받아서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뜻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박목사님이 선포하시는 아버지 말씀을 깨달아 아버지 영( 롬 8:11 )으로 임마누엘하시는 역사를 통해 아버지 말씀과 하나가 되어 원리 세계의 빛( 창 1:3 )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곧 남은자( 계 12:17 )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깨달아 가며 임마누엘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이마에 아버지 이름을 인친다고 한 것입니다( 계 14:1 ) 아버지 사상으로 가득찬 정수리의 복을 충만히 받은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박목사님께서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시며 열매를 맺게하시려고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신광교회 김갈렙 목사님에게 말씀을 주시며 선포하게 하시고 격려하시며  함께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4)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이 분명히 이루시는 것으로 맹세하듯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속사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아들 예수님이 실행하셨으며 성령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초림때에도 예수님은 우주 하나님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 받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 요 1:1, 5:43 )으로서 오셨지만 사람들이 믿지를 못했지요 오늘날은 박목사님이 그 하나님 예수의 모든 전권을 이양받고 모든 일을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해서 지금은,
단 2:44 ) “이 列王(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永遠(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滅(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하신 그 의의 나라를 박목사님은 시온( 히 12:22 ), 곧 저희 신광교회에 세우시고 두 증인( 뜨인 돌 )들을 앞세워서 모든 나라( 사상 )를 굴복시키시고 있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단 2:45 )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의 말씀처럼 산( 아버지 )에서 뜨인 돌이라 했는데 그 뜨인 돌이 두 증인이 되어 세상 모든 사상과 종교들로 부터 박목사님께서 아버지라는 인정을 받아 내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사 28:16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한 돌 곧 뜨인 돌로서 두증인( 계 11 장 )의 역사를 뜻하시는 것인데요 이는 다윗이 다섯 물맷돌 중에서 첫번째 물맷돌로 골리앗( 만국의 사상 )의 미간을 맞추며 쓰러뜨린 사건의 실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두증인을 통해 아버지는 이기시며 남은자의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미 4:7 ) “그 저는 자로 남은 百姓(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强(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山(산)에서 이제부터 永遠(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의 말씀처럼 행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남은자들이 지금은, 계 12:6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라고 하신 것처럼 양육 받는 때가 되는데요
이는 1260일에서  30일을 더한 1290의 때를 지나 45일을 더한 1335일을 향해 가는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작한 1260일 부터 도합 75일를 더한 때가 아버지가 심판주로 오시는 1335일의 때가 되는 것인데요 그러므로 이 75일을 break down 해보면 30일과 또 한때 30일을 더하면 두때인 60일이 되는 데요 여기서 반때 15일을 더한 것이 “한때 두때 반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확히 그 1335일 직전의 때가 되어,
계 12:17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한 말씀이 응하는 때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기고 끝까지 남은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어떠한 근거로 이 마지막 때에 열매를 맺게하시는 일이 왜 하필이면 박목사님과 그의 민족에게 맡기게 된 것일까요 ?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 계열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셈족이었을까요 ?
셈은 노아의 세아들중 장자로서 다른 두 아들인 야벳과 함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예배를 드렸던 것을 하나님도 인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9:26 )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 함의 아들  )은 셈의 종이 되고”의 말씀처럼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다른 두아들과 영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는 장면이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셈의 자손으로 아르박삿이 있고 또 그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으며 또 셀라는 에벨을 낳았는데요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셈의 복이 이 에벨에게로 옮겨 가는 장면을 기록하여,
창 10:21 )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 하면서  
이제 “셈의 하나님”은 “에벨과 에벨의 온 자손 즉 두 아들인 벨렉과 욕단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된 것으로 기록을 하여 다른 자손들과는 이제 상관이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에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구별된 것일까요 에벨의 이름에 그 비밀이 담겨 있었는데요 에벨은 홍수 후 67년 되는 해에 태어났구요 그 이름의 뜻은 “건너다” 라는“아바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건너온 자”라는 뜻이 됩니다 먼저는 그 무렵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등장을 한 상태가 되어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이긴 결과로 바벨탑을 쌓으려고 기초가 놓이는 때였던 것을 추측해 볼때 에벨은 그 타락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려고 유브라데를 건너 시날 땅 바벨을 떠나므로 죄악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낸 자가 되었다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악을) 건너 온 자"라는 에벨의 이름 뜻이 증거가 되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의 원뜻도 “아바르, 건너다”에서 파생된 단어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바벨탑은 에벨이 34세 때 홍수 후 101년에 낳은 맏아들 벨렉의 때에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모든 것이 중지되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 창 10:25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 벨렉의 동생인 욕단도 이동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를 봤을 때에 에벨의 믿음에 복을 주시려고 그 복이 두 아들 벨렉과 욕단과 그들의 자손으로 이어지게 하신 것인데요 이 장자 벨렉을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이 오셨으나 예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고 도태되므로 나머지 마무리 사역은 당연히 에벨의 또 다른 아들인 욕단을 통해서 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시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 창 10:21 )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응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욕단족속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 창 10:30 )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하여 지금의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이지만 대한민국이 욕단족속이었기에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만세전에 세우신  구속경륜 속에서 아버지 박목사님을 한국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지리산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말씀과 하나가 되게 하시며 본격적인 구속사의 마무리 사역을 하시도록 한 것이니 그의 제자들( 두 증인 )도 당연히 박목사님의 주변에서 피택될수 밖에 없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다 유대인이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제자들도 다 한국사람인 욕단 족속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세계 만민에게 아버지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순서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지며 모든 분야( 문화, 영화, 군사, 농업, 의료, 교육, IT 등등 )에서 선두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 가는 것도 우연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 박목사님 )이 계신 곳이 우주의 중심이며 세계의 중심( 겔 38:12 )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나라요 민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 나라를 높이신다는 것이지요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이며( 신 28장의 복 )
셋째는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며 형통케 되는( 요삼 1:2 ) 하나님의 법칙이 발동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나라가 잘못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전쟁도 대신 싸워주시며 편( 신 28:7 )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래서 누누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며 참된 예배( 요 4:23 )로 박목사님을 높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12: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령적 禮拜(예배)니라”하신 말씀대로 우리몸을 드려 변화의 첫열매가 되어야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아벨이 그 옛날 자신이 변화의 첫 열매가 되어 아버지 아담이 쫓겨난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득 품고 항상 첫것으로 예배를 올려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그의 제물을 통해서 인정( 히 11:4 )을 하였던 것처럼 예배를 아벨처럼 알고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요 제물( 우리 자신 )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이 모든 구속사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
아니면 도태되고 쫓겨나게 되어 있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잖아요( 시 49:20 )
그래서
요 17:3 ) “영생이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로 죽어 부활한 것만 알아서는 구원이 없고 흘리는 핏속에 아버지 말씀을 담아 땅 밑에 저장해 놓았었는데 그 말씀이 박목사님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다시 나와 변화로 구속사가 마무리 된다는 비밀까지 알아야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표면과 이면의 온전한 십자가의 도이며 온전한 예수님( 아들 + 아버지 )을 안다고 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자신이 변화의 첫열매가 되기를 원하는 장자신앙을 담아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며  예배를 드린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알고 드리는 그런 예배를 열납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 영혼육이 흠없이 보전 되어진 참예배자가 되어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아들로만 알고 드리는 예배는 이제 우상숭배와 같은 이방종교와도 같은 것입니다
선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악한 것이 되었는데 그 사실 자체를 모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오히려 아버지 말씀 교회를 악한 이단이라 하며 막고 있으니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고 있는 죄악중의 죄악이 되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생명나무의 과실을 옆에 두고 선악과만 따 먹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바쳐도 인생으로서는 깨달을 수가 없고 또 사단이 그렇게 깨달을수 없도록 역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아시는 하나님이 배려로 먼저 말씀을 받고 깨달은 두 증인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는, 마 24:42-44 ) “깨어 예비하고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는 “Watch out”이란 의미로서 “주의해서 보라” 혹은 “주목하라”는 뜻이 되는데요 이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두 증인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는 “성경을 깨달아라"가 아니라 저희 교회 같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하면 혹시 “두 증인이 맞는지"를 주목하여 알아보고 따르는 것이 마지막 때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박목사님께서는 이 본문 말씀은 끝날에 “이정표”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말이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면 아버지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임마누엘( 롬 8:11 )로 하나가 되어 온전히 신령하게 되면 발광체가 되고 변화체를 이루면 눈앞에 와있는 그날에 풀무불 속에서도 넉넉히 그 불을 이기고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3:2 )

지금은 “두 증인” 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적어도 그들의 소리가 맞는지 상고하고 진위를 가릴수 있어야 살수 있다는 것이지요
부디 이기고 남은자가 되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3문(제4계명) 해설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3문(제4계명) 해설

도덕법으로서의 4계명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의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영속적 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계명 가운데 윤리적인 성격을 가진 규범들, 이를 테면,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의 명령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4계명인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는 의식법이나 시민법으로 취급하여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십계명 전체를 도덕법으로 본다면 4계명도 도덕법으로 보아야지 그것만 따로 떼어서 의식법이나 시민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분명히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4계명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

4계명은 예배를 언제 드릴 것인가 하는 ‘예배의 시기’에 대한 명령이다.

4계명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구약에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매우 중요했고 엄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안식일과 한국교회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안식일(토요일) 대신에 주일(일요일)을 지킨다.
그런데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생각하여 이 날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상당수의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날에 장년들은 생업을 중단했으며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운동회 같은 것도 금하였다.
오늘날 이런 입장이 다소 사라진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전혀 다른 날이라고 생각하여 주일에 일하거나 공부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이란 폐지되고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것을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전통을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안식일에 대한 논의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고 상당히 복잡하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주일을 성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성경적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하며,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정립한 후에,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안식일이 영원히 지켜져야 하는 영속적 규범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안식일 규정이 다른 모든 구약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별하여야 한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안식일 이해가 필요하다.
분명히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성취자이시며 주인이시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1) : 창조

구약에서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각각 나온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약 40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데, 십계명 가운데 유독 4계명이 두 책에서 다르게 나온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창조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창세기 2:2-3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여섯 날 동안 창조사역을 하시고, 이제 일곱째 날이 이르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복된 날이며 거룩한 날이다. 이 날은 다른 날들과 구별된다. 이 날은 특별한 날이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창조사역을 하시던 앞선 여섯 날과 달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없다. 이것은 일곱째 날의 무제한성, 곧 영원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안식이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을 만드신 것이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 창조의 완성이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실로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이처럼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안식의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을 가꾸고 돌보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궁극적인 목표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했다. 아담은 에덴 한 가운데 있던 생명나무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근원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교통하면서 안식을 향유해야 했다. 이것은 아담이 이미 안식 가운데 있었지만 보다 완전한 안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2) : 구속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러한 안식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이러한 구원은 과거에 출애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신 사건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역사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탄의 수중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구원사적인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신자들)이 애굽(사탄)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다. 즉 출애굽 사건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예표 한다.

우리는 출애굽의 구속사적인 의의를 생각하면서 십계명을 담고 있는 또 다른 본문인 신명기 5장을 읽어야 한다. 신명기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과 더불어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구원이 언급되어 있다. 즉 출애굽기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창조이지만 신명기 본문에는 그 이유가 구원인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하나님은 억압받던 자들을 구원하셔서 안식을 주셨다. 따라서 그 백성들은 구원을 감사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출애굽 1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지만, 신명기 5장에서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2세대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의 끔찍함을 기억하게 하시면서 안식의 귀중함을 가르치려 하셨다. 즉 1세대의 후손들로서의 2세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셨다. 2세대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후손들임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3) : 언약

출애굽기 31장에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31:12-13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여기서 “대대의 표징”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이어지는 16-17절에서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표징”으로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안식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복을 주시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어서 출애굽기 31:14-15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질 엄중한 형벌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죽음, 곧 생명의 끊어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안식일 준수는 어떤 종교적 절차 하나를 지키고 지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안식일을 위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린 형벌로 그들이 이웃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7:21-23).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이제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살펴보자.
안식일은 구약의 다른 절기나 규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참고. 막 2:28), 안식 그 자체이시다(마 11:28).
구약에는 안식일 외에도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데, ‘안식’과 관련된 모든 규례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안식’을 바라본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공적인 생애를 사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완전히 이루심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으며,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한 언약 가운데 있게 하셨다. 즉 위에서 언급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충족하셨다.

구약의 절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여기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제사시간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약시대의 제사시간들을 다시 지킴으로써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신 희생제사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기에 더 이상 율법조항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문자적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참된 안식일을 이미 지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 즉 안식일이 전망하는 메시아를 믿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으며,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도 반드시 일요일에 나타나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일요일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일요일이 가지는 특별한 가치를 드러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일 후 첫날에 안식하신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제는 안식일 다음날이 안식일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하며 교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 20:7의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언급과 고린도전서 16:2의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라는 언급에 잘 나와 있다. 이후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렀고(참고. 계 1:10), 이후부터 교회도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안식일 대신 주일에 모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이제 주일에 모인다. 즉 구약의 교회는 토요일(안식일)에 모였지만, 신약의 교회는 일요일(주일)에 모이는 것이다.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4계명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는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주일성수’(主日聖守)라고 부른다.
각자 흩어져 생활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되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즐거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이 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이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고, 천국에서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날이다. 참으로 이 날은 복되고 거룩하며 따라서 이 날을 지키는 것은 특권이요 은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일을 지켜야 한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함

하나님께서 주일에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시행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주일에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목사를 세우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장로를 세우셔서 교인들이 말씀을 듣고 실천하게 하시며, 집사를 세우셔서 교인들이 말씀을 실천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살피게 하신다.
특히 목사는 하나님께서 개체교회 회중들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서 전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주된 업무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는 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하나님께 예배드림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사 66:23).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말씀을 배워야 하고 성례(세례와 성찬)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께 공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서 주일에 행해지는 일 중에 예배를 대체할 그 어떠한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보다 다른 잡다한 프로그램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은 교회의 타락을 가속화할 것이다.
게다가 예배가 성경적 본질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어지는 모습은 안타깝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인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이러한 자선은 예배 시간에 헌금(연보)을 함으로써 가능하다(고전 16:2).

3. 영원한 안식을 바라봄

하나님께서는 주일에 우리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악한 행위들을 멈추며 주께서 주의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하고 그럼으로써 영원한 안식이 이생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신다.

히브리서 4:3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히브리서 4:9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의 순간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안식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일을 지킴으로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면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실현을 열렬히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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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전통에 깊이 매어 있다가 풀려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앞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그 외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교훈과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인의 잘못된 전통까지 지적하고 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와 안식일, 성경에 기록된 많은 유대 전통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림자로써 구원을 예시하는 것으로 그 날과 그 절기가 실체는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절기나 날에 매이게 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충분히 놓칠 수 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어떻게 지내야 주일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 주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각종 부서에서 봉사하며, 오전 예배를 드리고, 또 저녁 예배까지 참석하면 주일을 잘 지낸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기를 원하지만 의외로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것은 교회 교육에서 사각지대에 속한다. 주일 맞이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주일 맞이에 대한 글을 정리한다.


1. 안식일에서 시작된 주일

주일은 안식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식일을 모르고 주일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주일은 안식일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전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데 무엇을 버려야 하고, 또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첫 기록은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심과 관련이 있다. 창세기 2:1-3절에 ‘모든 창조의 일을 마치신 하나님은 제 칠 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는데 이것이 안식일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첫째 의미는 일에서 떠나 안식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면서 만약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주신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하셨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칠일 가운데 단지 하루를 쉬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안식일에 포함되어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이고, 또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구속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3)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평지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셨다. 신명기 5장 12-15절에 기록된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여기까지는 이미 언급된 안식일 규정과 동일하다. 하지만 15절에 구속의 의미를 더하셨는데,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의 의미 가운데 자유, 구속의 의미를 더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4) 안식일의 의미는 일로부터 안식,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 바로의 종이 되었다가 자유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 ‘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2.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을 보면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면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은 기억 (자호르/ rAk°z")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 (샤모르/ rAmæ²v ')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1)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심,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 바로의 노예되었다가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한 가지를 더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며,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르게 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한 것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곧 주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날이다.

2) 안식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정확한 해석과 바른 적용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더니 안식일은 역사에서 유대 민족을 구하였다고,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전통도 잘 지키면 마치 영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면, 주일처럼 지킨 안식일이 역사에서 유대 민족을 구하였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교단이나 각 교회 차원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킨다면, 개인은 경건함에 이를 것이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의 신뢰도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민 교회의 갈등도 상당 부분 해결될 것이며, 명목상 그리스도인 의 위치에서 실재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교회가 감당할 사명들을 충분히 감당해 갈 것으로 믿는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한 방법으로, 먼저 주일을 특별한 날로 알고 주일을 미리 준비한다 (Preparation).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Worship).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주일 식탁에 모여 만찬을 갖는다 (Sunday Family Meal).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주일 만찬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가지셨던 주의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거룩한 의식이었던 것처럼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 갖는 주일 만찬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은혜, 기쁨, 평화, 구원, 믿음을 더할 것이다. 주일 만찬 자리에서 구원을 기억하고, 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켜야 하는 지를 말하고,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1) 안식일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안식교, 하나님의교회(안상홍, 장길자), 엘리아선교회(박명호)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자생적인 안식교로서 각 교회마다 잡지나 문헌 자료를 보내는 생애의 빛(강병국)등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제 4계명인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는데, 특히 하나님의교회는 안식일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신천지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무교절과 칠칠절(맥추절), 초막절(수장절)을 착각하여 유월절과 초막절과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고 성경적으로 무지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유대력을 현재 양력으로 환산하여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안식일이란 어떤 날이며, 오늘날 우리는 과연 4계명에 있는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성경적인 안식일은 토요일이며,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안식일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날이 아니다. 십계명중 4계명을 성경대로 보면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며 "종도, 육축도, 손님까지도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8-12)


2) 성경적인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 아들, 딸, 여종, 남종, 객, 육축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날 (출20:10)
- 처소에서조차 나오지 못하는 날(출16:29)
- 불도 피울 수 없는 날(출35:3)
- 스스로 괴롭게 하는 속죄의 날(레23:32)
- 장사를 할 수 없는 날(느10:31)
- 성문을 닫으므로 성문 밖에 나갈 수 없음(느13:19)
- 오락을 하지 못함(사58:13)
- 짐을 지지 못하는 날(렘17:21-22)
- 정해진 거리를 갈 수 없는 날(행1:12)

가장 극적인 사항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여야 한다”(출31:15)는 구절로,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안식일을 성경대로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누가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까? 성경은 반드시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31:15)

즉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현재 교회를 다닐 수도 없다. 안식일에는 처소에서 나오지도 못하였으며, 먼 거리를 갈 수도 없고, 짐을 들지도 못하며, 불도 피우지 못하므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니 교회 봉사도 하기 어렵고, 매우 불편한 일이 될 것이다.

더욱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전체를 찾아 보아도 단 한구절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안식교가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근거로 다음 성경을 제시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23:3)

위 성경본문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면 정말로 일곱째 날 안식일은 성회를 드리는 날로만 해석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인용은 부분적인 성경인용이 되어진다. 앞뒤의 본문을 보면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레23:2-6)

이 성경본문은 일곱째 날 안식일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번 있는 절기안식일(무교절기)을 가르킨다. 안식교는 원래 안식절기는 폐하여졌으므로 지키지 않지만, 일곱째 날 안식일은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음 구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레23:7-8)

즉 일곱째 날만 성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첫날에도 성회로 모이라는 구절로서 안식일에 성회로 모이라는 구절이 아니다.


3) 예수와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켰다?

안식교회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예수님과 바울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눅4:16. 행17:2)는 성경구절을 제시한다. 즉 예수님과 바울도 율법과 규례대로 안식일이면 회당에 감으로서 안식일과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규례’(헬라어: 에토)는 ‘전례, 습관, 관습’이라는 해석이 올바른 번역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과 바울이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전례나 습관대로 회당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와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간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함 때문이며, 그 회당에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던 경우는 성경에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면 안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회당에 나가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즉 많은 유대인들을 동시에 만나기 위하여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며, 전도하기가 가장 쉬운 곳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나 바울의 경우,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늘 해오던 습관적인 전도사역이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그 ‘에토’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면, 마태복음 27:15에서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에토)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식교의 주장대로 ‘에토’가 ‘율법’이라고 해석하면, 본디오 빌라도마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켰던 것이 된다. 본문에서 ‘에토’(전례)는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 되면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또 사도행전17:2에서는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에토’라는 단어가 율법의 규례를 말한다면, 바울은 ‘자기 자신의 율법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이 된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에토)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17:2)

즉 사도바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에 가서 전례와 습관대로 유대인들을 전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10:1에서도 예수님은 모여드는 무리들을 위하여 "다시 전례(에토)대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전부터 자주 모여드는 무리들을 가르치셨던 전례와 습관대로 가르치셨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즉 ‘에토’라고 하는 헬라어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나 습관, 관습등을 의미한다. 실제로 행18:4를 보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며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기독교적인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또 예배란 십자가 사건 이후 기독교인에 의하여 드려진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였으며 그것은 성전에서 드려졌다.

 
 



4) 신약적인 안식일의 재조명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셨는데(마12:12),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파격적인 주장이 된다. 또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재해석하시는데 이것도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가르침이 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만 하며,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죽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즉 안식일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과 같은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관점이 아니다. 특히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 되어진다. 성경은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여섯 번째 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멈추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일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섭리하고 계신다.

히브리서에는 참 안식은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개념으로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라고 기록하였으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4:11)라고 말하고 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4-11)

즉 신약에서 안식일의 참 의미는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참 안식으로 재조명 되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다. 안식일은 문자적으로 일곱째 날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다. 구약성경의 안식일은 종말적이고 궁극적인 참 안식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모형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4-17)

신약에 와서 안식일이란 문자적이며 숫자적인 일곱째 날이 아니며, 모든 구약의 명절과 절기는 신약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래일의 그림자가 되며 몸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예를 들면 구약의 유월절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즉 유월절(페싸흐)은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예수님이 그 몸의 실체가 되신다.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하나님의 진노를 건너 뛰게(pass-over) 되었다. 신약에서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을 pass-over 시키는 실체가 되어진다.
또 오순절(칠칠절, 맥추절)도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신약에서 오순절은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열매맺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 안식일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였고, 안식은 바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을 상징한다. 또 초막절(수장절)은 마지막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장래의 그림자를 예표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캘빈은 안식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 4계명에는 모형적(typical) 요소들이 있다. 캘빈은 안식일 계명을 ‘예표’(figure)라고 부른 초대 교부들에게 동의했다. 그 분(예수) 자신이 진리이며, 그 분(예수)의 임재로 모든 모형들이 사라진다. 예수가 몸체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그림자는 뒤로 제쳐진다. 예수는 감히 말하건데,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안식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적으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천국에서의 안식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히 4:9).


5)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갈라디아교회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믿음뿐 아니라, 할례를 행하여야만 하며, 유대인의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들이었다. 오늘도 그러한 혼합율법주의자를 ‘갈라디안’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할례와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 갈라디아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4:10-11)

만약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구원에 중요한 일이었다면 신약성경은 몇번이라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단 한마디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절이 없다는 사실이며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일과 달리 예배를 위한 날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기념하여 공식예배일로 지정한 것이다. 안식일과 주일은 그 개념이 다르다. 안식일은 쉬어야 하는 날이지만, 주일은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날이다. 안식교나 하나님의교회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구원을 잃는다고 말하며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인을 받으며 남는 자손이 된다고 주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는 구원과 멸망의 조건이 되어진다는 것에 그들의 이단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구원이 오직 믿음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6)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가?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황제 이후부터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 그 문헌을 참고할 수 있는데, 그 문서를 보면 안식교와 안증회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➀ 이그나시우스의 편지

이그나시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으며 속사도 교부로 불려졌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각 교회에 7개의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는 트라쟌 황제 통치시기인 AD98-117년 사이에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 중에서 ‘마그네시아인들에게’(To the magnsians) 이라는 서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오래된 이야기로 인해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우리가 아직 유대주의의 관심을 계속 지킨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옛 관심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소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나쁜 누룩을 피하십시요.....” (The Christianity of Ignatius of Antioch, 1935, 5page: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66쪽))

‘주의 날’은 계시록 1:4의 ‘주의 날’을 뜻한다. 특히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라는 구절이 뜻하는 것은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주의 날’ 즉 주일에 대해서 초대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➁ 12사도의 교훈

12사도의 교훈은 그 유명한 ‘디다케’라고 불려진다. 그것은 속사도들의 작품이며,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수리아 지방의 초대교회의 교리문답과 교회규범을 한데 묶어 놓은 문서로서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주의 날’은 특별한 날이므로 ‘주의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먼저 죄를 고백함으로서 제사를 깨끗하게 드려야 합니다. 이웃과 불의한 사람은 화목할 때까지 여기에 참석하지 말 것입니다.”(기독교 고전전집 1권, 초기기독교교부 171-179,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77-78쪽)

이미 이그나시우스의 서신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의 날’을 지키자는 내용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으며, 그 날이 분명히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이 된다. 그런데 그 ‘주의 날’에 함께 모여 떡을 뗀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떡을 떼다”라는 구절은 성찬식을 뜻하며, 곧 예배를 드린 것을 말한다. (행2:42, 행20:7, 고전11:23-26) 성경은 주간 첫날에 떡을 떼려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➂ 바나바의 편지

주후 70-13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바나바의 서신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말하는 내용인데, 그 편지 15장에는 히브리서의 내용과 같이 안식일을 종말적으로 해석하며 기록하고 있었다.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면, 여덟째날은 주일을 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때에 가서야만 우리는 참으로 쉴 수 있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그리고 약속을 받은 후에만 참으로 안식할 수 있다. 여덟째 날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바 천년왕국의 안식 후에 마지막 영광을 바라본다.”(바나바서신 15장)

➃ 순교자 저스틴

“이 음식을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아무나 취할 수 없고, 오직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참되다고 믿는 사람들..... 거룩하게 된 그 음식물은 바로 성육하신 예수님의 살이요,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식 후에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은 것들을 서로 기억하도록 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부족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모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인하여 우리는 인류의 주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송축을 올립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한 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오래 읽습니다. 독경자가 읽기를 마칠 때에 사회자는 강론을 통해서 그 고상한 교훈들을 모방하도록 권면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 기도가 끝나면 빵과 물 탄 술을 가져오고, 그리고 사회자가 높이 들고 그 거룩해진 음식물을 나누어 주어 모두 받게 하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사들이 가져다 줍니다.....” (쇼트웰의 순교자저스틴의 성서강해, L.C.C. 66절 286page, 저스틴의 제1변증서)

저스틴은 아예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성찬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일요일에 ‘빵과 물 탄 술’을 나누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러한 역사와 년륜이 오래된 문헌적인 증거들이 19-20세기의 안식교나 21세기의 안증회의 교리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일까? 과연 초대교회에서 말한 ‘주의 날’이 언제였을까?

➄ 제롬

제롬도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교도들이 이 날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 나타나시고 공의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신 날이 바로 이 날이기 때문이다.”(Jerome, In die dominica Paschae Homilia, CCL 78. 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생명의 말씀사, 261쪽)

➅ 이레니우스의 주해서

초대교회의 어느 교부는 이레니우스의 저술에 대해서 주해서를 썼는데,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요일 예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 관습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하게 되었다. 리웅의 감독인 순교자 이레니우스가 부활절에 관해라는 논문에서 밝혔듯이, 이 관습은 사도 시대부터 생겼다. 여기서 그는 오순절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실을 언급한다. 오순절에는 주의 날과 같은 의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Iranaeus, Fragments from Lost Writtings of Irenaeus-Ante-Nicene Fathers)

➆ 일요일 휴업령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는데. 콘스탄틴황제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라고 강제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콘스탄틴황제는 321년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이미 일요일에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위하여 일요일 휴업령을 내린 것이며, 이런 교회사에 대한 문제는 교회사 서적을 확인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콘스탄틴 치하에서 기독교의 공인은 몇 가지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틴은 일요일이 로마의 다른 공휴일과 비슷한 공휴일이 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예배는 폭넓게 발전할 수 있었고 교회에는 더 많은 회중이 모일 수 있었다”(생명의말씀사, 교회사핸드북 144쪽).

“321년 교회들에게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그로써 합법적인 법인 자격을 부여하였다. 태양의 날(일요일)이자, 기독교의 첫날을 휴일로 정하고 그 날은 노동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기독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49-150쪽)

다시 말하여, 콘스탄틴이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어 예배일을 변경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콘스탄틴황제는 교회에게 각종 혜택을 주었고, 그 혜택의 일부로서 이미 예배를 드리던 일요일을 편리하게 하도록 휴일로 정하여 준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일인 주일은 기독교회의 초기부터 성수되었다. 그것은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을 지키는 유대교로부터의 이탈이었다. 한 주간의 첫날로 옮긴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마다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4세기초 콘스탄틴의 시대까지는 주일(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켜지지 못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의 이른 아침이나 늦은 시간에 예배모임을 가졌다.” (생명의 말씀사, 라이온사, 교회사 핸드북 9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 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은 우리 사고·삶·본질의 변화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 진리를 지켜 나가겠다는 고백 실천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일은 진리에 대한 앎과 믿음을 토대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안식일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다. 우리는 안식일을 준수하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 안식일 준수는 우리가 더 이상 일에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는 선언이다. 대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안식일에 우리는 영적 상태를 점검한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의무를 돌아보고 다시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현대 유대인들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온 이스라엘에 사이렌이 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준비한다.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가족과 함께 율법과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자기 삶을 점검하는 시간을 보낸다. 안식일은 무거운 짐과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시는 참된 선물이자 축복이다.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 오늘날 안식·주일 개념을 점검하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다. <주일, 거룩한 안식일>(생명의말씀사)을 쓴 아더 핑크는 총 8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1장에선 안식일 개념을 총괄적으로 설명한다. 안식일이 결혼 제도와 함께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결혼 제도를 율법에 명확하게 기록해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2장에서는 십계명 이전 안식일 규례를 설명한다. 우리는 안식일이 십계명 이후에 제정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창세기와 출애굽기 1~8장에도 안식일이 다양하게 기록돼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사용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창세기 2장 3-4절에 나타난 라멕은 자기 아들의 이름에 수고로운 일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창조주에 대한 감사를 담았다. 노아의홍수에서도 칠일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안식일이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모세는 애굽에 돌아가자마자 바로에게 자기 동포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안식일은 율법 제정 이전에도 있었다.

3장에서는 십계명을 통한 안식일 규례 갱신을 강조한다. 안식일은 십계명 중 제4계명이다. 이 위치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뜻한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인간 사랑'을 뜻한다. 안식일은 하나님 사랑의 마지막과 인간 사랑의 첫 시작에 위치한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4장에서는 안식일 규례의 오염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더럽힌 이스라엘에 국가적 재앙을 내리신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에 의해 함락됐다. 백성들은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더럽히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땅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70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이 다시금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5장부터는 안식일의 현대적 적용을 다룬다. 오늘날 우리는 일 중독에 사로잡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매일 노동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출애굽시키셨다. 광야 생활 중에는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만나도 허락하셨다.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6장은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다룬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의 날에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일주일의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이지만, 그 가운데 하루를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은 이날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

7장에는 안식일(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썼다. 먼저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가 없으면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킬 수 없다. 저자는 안식일을 구별하고 단지 일을 금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과 기쁨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예배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지만, 참된 기쁨이 없다면 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이다. 이에 대한 관심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정체성도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이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이견이 있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구별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주일을 철저히 준비하고 실천해, 하나님 말씀을 올바르게 알고 지키는 데 힘써야 한다.



안식일(安息日)이 주일(主日)로 바뀐 이유

안식일은 제 7일, 지금의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주일인 제 1일(첫째날), 지금의 일요일을 지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1.성경의 약속
구약에서부터 한 다른 날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2:11, 히4:7, 히7:18-19)

2.삼위 하나님의 모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주일에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속사(救贖史)의 중심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마28:1)
②성령님께서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행2:1)- 오순절은 지금의 주일임.
③하나님께서 주일에 계시를 주셨습니다.(계1:10)

3.사도들의 모범
예수님 제자였던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느끼고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 예배했습니다.
(행20:7, 고전16:2, 요19:20-25)

4.교부들의 모범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교부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The Ante-Nicence Fathers; 교부시대부터 AD325년 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

* 하나님은 그의 뜻을 직접적 진술로만이 아니라 역사적 섭리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


안식일(安息日) 지키는 규례

①구약의 규례
노동 행위 금지 (출20:9-10 ),
상거래 행위 금지 (느10:31,13:15-17),
여행 금지 (사58:13),
오락 금지 (사58:13),
사사로운 말 금지 (사58:13),
즐거워 하며 존귀히 여길 것 (사58:13).
예수님을 통해 주실 영원한 안식 예표 (골2:16-17, 요5:9, 계7;15-17, 21:3-4)

②신약의 규례
날자의 개념이 안식일(土)에서 주일(日)로 바뀜
(호2:11, 히7:18-19, 4:7-10, 마12:8,행20:7, 고전16:2, 요19:20-25).
안식일이 예표하는 실체이신 예수님의 부활 기념 (마28:1).
예배를 통한 영적 기쁨 강조 (눅4:16-17, 행20:7,13:42,16:13).
생명 살리는 일이 강조(마12:11-12, 요5:9-10).

③오늘날 지켜야 할 범주
외부적 방법 보다 영적 목적 중요 (요4:24).
소극적 의미 보다 적극적 의미 중요 (마12:11-12).
내용이 중요시된 다음엔 방법 차원의 규례도 필요 (마23:23).
외부적 규례가 내용을 더욱 온전케 함.

④약속된 복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함 (사58:14)
땅의 높은 곳에 올려 줌 (사58:14)
야곱의 업(業)으로 길러 줌(사58:14, 창28:15).

성을 보존해 주고 제사를 드리게 해줌(렘17:24-27).








미국의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과연 주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주일에 마켓에서 장을 보고,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혹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가? 아니면 부담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의식은 주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으면 해결된다. 이 기사는 주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이 기사는 강의의 두 번째 내용으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가 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기사의 종교개혁자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 입장과는 다른 청교도들의 연속성 입장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김남준 교수는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는 상징적이다.
 
한국교회의 이런 주일성수에 대한 혼란 속에 김남준 교수는 주일을 안식일 보다 모르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 주일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주일성수에 대한 강제적인 규제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 김남준 목사     ©뉴스파워 자료사진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청교도들의 입장-연속성 강조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개혁 신학자들은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신학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지금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었고, 그리스도가 그 그림자를 따라서 실체로 직접 오셨고, 그래서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성취된 것들이 우주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해 청교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안식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종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종말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의 차이가 나타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안식일의 계명을 언약백성이 하나님께 언약 백성답게 살기위해 연약한 육체를 제어하기위해 노동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배하는 것에 헌신하는 그 날이라는 좁은 생각을 뛰어넘어서 온 인류가 따라야 할 자연법적인 규범이라고 본 것이다. 그것에서 견해차이가 나온다. 이것은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의 이런 독특한 생각은 두 가지의 역사적인 문맥을 고려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배경은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3년부터 5년간 회의를 하면서 작성했다. 그때가 영국의 역사에서 전통적인 농업에서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가기 전에 공장제 가내수공업을 들어가는 시점이다. 영국은 당시에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농촌은 가난하고 농업을 주업으로 할 수가 없어서 남는 많은 인구들이 농업이 아니라 면화나 양털산업으로 몰려들었다. 그것들을 생산해서 무역을 통해 파는 일에 종사했다. 당시에 노동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규제가 없으니 시장에 의해 노동가격이 결정된다. 돈을 조금만 주어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노동조건이 악화된다. 그래서 16시간씩 근로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인 안식일을 엄격하게 계승함으로 국민복지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에게 주일시장 통행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일에는 시장을 지나가면 안된다. 사람들이 물건을 안사며 주일에는 시장에 문을 닫으라고 압력을 가한다. 공장에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면 일할 수밖에 없지만, 사장이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을 안지키면 교회에서 치리를 받는다고 하면 사장 한사람 때문에 수백 명의 공장직원들이 쉬게 된다. 직원들이 쉬면 교회에 나온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식적으로 나마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두번째 배경은 제임스 1세의 포고령이다. 왕이 청교도 위정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순시하다가 그곳 주민으로 부터 탄원서를 받는다. 그 지역은 청교도 위정자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주일에는 놀지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게 한다며 이것을 풀어달라고 했다. 쉬는 날이라고는 주일밖에 없는데 이날 운동도 하고 좀 놀고 싶다는 것.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스코트랜드에서 청교도에게 들볶이다가 내려온 사람이기에 청교도들이 세력이 커지고 그들 뜻대로 나라가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고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일부 지역만 허락했다가 다음해에는 모든 백성들이 지키도록 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엄격한 신앙생활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비중생자들과 비회심자 등 교회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이제 왕의 포고령에 힘을 얻어 뭉쳐서 교회의 지시에 따르는 대신 왕명을 따라야 한다고 반발하고 뛰쳐나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유연한 자세로 물러나면 신앙자체를 양보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정치적인 상황이 되었다. 사실 청교도들이 이런 미묘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특히 청교도들은 당시에 스코트랜드에서의 엄청난 박해, 잉글랜드에서의 엄청난 억압을 보면서 배교에 노이로제가 걸려있다. 정치적인 억압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배교하는 현실들을 보았기에 청교도들에게 배교는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배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입증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중생한 사람은 배교할 수 없으니 그들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런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강력하게 드라이버를 걸고 포고령을 준수하지 않는 1천명을 추방한다.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이런 비슷한 박해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했다. 똑 같은 상황이 그 당시에 벌어졌다. 사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남은 기록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가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니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청교도들이 왜 주일에 대해 엄격한 견해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공감이 갈 것이다. 우리도 만약에 일제 강점기에 그랬다면 강하게 나가서 완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를 주장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배경속에 당연히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안식일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안식일 대한 이야기를 직접 주일로 끌어온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는 수많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나온다. 그런데 개혁교회에 대표적인 신조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주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안나온다. 결국은 그 시대의 주일성수를 둘러싼 미묘한 그 당시의 역사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장로교가 세워질 때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고려하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엄격한 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조항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 얼마동안은 유대인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유대인들이 신약의 복음을 깨닫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기까지 잠정적인 시기였다.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당분간 유지되었던 것 같이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후 얼마간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던 방식을 주일성수에 적용했는데, 청교도들은 그것을 주일성수에 항구적인 모범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구약 안식일 제도가 가지는 자연법적 질서와 연결 지음으로 자신들의 엄격주의를 정당화했다. 그들이 안식일 제도와 주일 제도 사이에 신학적 연속성을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의 원조가 청교도가 아니라 이미 중세시대에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주의는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을 율법적으로 적용한 전통으로의 회기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청교도들의 태도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입장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사이에 신학적 불연속성을 강조했던 루터나 칼빈과는 달리 연속성을 주장한 조나단 에드워드도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신약의 주일제도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의 안식일이 그림자라고 보고 진짜 안식일을 통해서 의도하려고 했던 것이 주일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에서 못하게 한 것이 있다. 가학성 스포츠, 짐승들을 창으로 찌르는 것들은 주일하고는 안 맞는다고 해서 못하게 했다. 제임스 1세는 피흘리는 가학성 스포츠가 아닌 한 교인들이 주일예배를 마친 후 얼마든지 스포츠를 즐겨도 된다고 공포했는데, 여기에는 악기연주, 댄싱, 뛰기, 술잔치, 가면무도회까지 확대허용이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엄격한 주일성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싫어하게 만들 것이고, 주일에 스포츠와 오락을 허용함으로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이 미래에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는 국력을 기르는 길이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1618년에 나라전체에 시행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루터보다는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 존 낙스같은 사람은 칼빈에 의해 사사받았던 사람이다. 루터는 기질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사람들에게 권했지만, 칼빈은 천성적으로 샌님 같은 기질이 있어서 스포츠를 취향적으로 안좋아했다. 그랬기에 그러한 칼빈의 특성들이 청교도들에게 전수가 되어서 청교도들을 신체적인 활동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가하면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죄악시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에 몰두하게 될 때 인간의 쾌락과 육체의 즐거움에 빠져서 정신이 방탕해져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경에 집중하고 기도하고 이런것들이 흩어져서 불경건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경계 때문에 청교도들이 인간의 스포츠 활동에 대해 경건과 관련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스포츠를 통해 체력단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이 그런 육체적인 활동을 안해도 약해지는데 정신을 분산시켜서 경건을 흩어놓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을 특히 젊은 세대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1625년에 또 다른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주일에 저지러지는 여러 부패한 행동들의 처벌에 대한 법령"을 공포한다. 법령은 뜬금이 없다. 아버지가 공포한 스포츠 선언을 이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제임스 1세가 선언한 것이 너무 많은 자유를 주어서 주일에는 하면 안되는 일까지 한다며, 동물들을 학대하고 격투같은 가학적인 스포츠들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상당히 큰 액수 벌금이 규정되어 있었다. 왜 이 선언이 나왔는가 하면 이때는 의회가 왕당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의회파의 세력이 강해졌는데 의회파의 다수를 청교도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국왕에게 압력을 넣어서 아버지 스포cm 선언 폐지는 불가능했고, 이것이라고 발표하게 해서 그래서 더 이상 주일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방지를 한 선언이다.
 
이런 상황이 될 때 반발하는 사람도 나온다. 당연히 왕당파 윌리암 로드 같은 구교의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더 강력하게 선왕의 스포츠 선언을 밀어붙이고 주일에 청교도들의 방식으로 주일이 지켜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맞불을 놓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얼마나 그 사이에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는가. 청교도들이 양보하게되면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었기에 청교도 입장에서는 양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종교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은 안식일에 대한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진다. 안식일 제도 속에서 기독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온 인류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연법적이고 일반은총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어떤 인류애적인 자연법적인 규범의 토대를 안식일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니 청교도들은 주일보다는 안식일에 집착해야 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의미를 가졌지만 모든 인류가 그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리스도 이전에 온 인류와 관계가 된 사안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국가라는 권력이 이런 자연법적이며 창조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비참한 폐해들을 먼저 겪은 나라가 영국이다. 그런 속에서 영국사람들은 실제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기에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에 대한 자연법적 발상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고민없이 간단하게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할 성질이 아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엄격하게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개념을 중심축 자체를 안식일에 놓고 안식일 자체가 온 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적 자연법적 일부라고 보았다. 그들이 이상하게 안식일을 둔 그림자와 실체의 개념을 다른 것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그림자가 주어지고 그리스도에 와서 실체가 성립되었다고 안보고 오히려 거꾸로 본 것이다.
 
이 안식일에 이루어질 자연법적 질서는 모든 인류에게 자연법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데, 모든 나라들이 일반법으로라도 주일을 지키게끔 만들어 백성들의 안식시켜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에 대한 궁극적인 이상은 종말에나 실현되는데 종말까지 가는 이행의 과정이 주일이라고 보았기에 종교개혁자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느 부분까지 청교도들을 계승하고 어느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의 것들을 계승해야 할 것인가 미묘한 차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부딪치는 성수주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문제들이다.
 
오늘날의 주일성수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제임스 패커의 언급은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전통을 문자 그대로 우리시대에 적용하려는 방식에 대해 패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4계명의 적용을 우리 자신들에게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늘리고 연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기존의 적용을 물려받으라는 유혹에 저항하고(청교도들이 만들었으니 무조건 이대로 지키면 훌륭한 신앙이고 아니면 날라리 신앙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율법을 우리 자신이 상황에 현실적으로 재적용 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판단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어야 하는 원리들이 청교도의 해석에서 비할 수 없이 풍부하고 시사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커의 입장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켜야 되겠다는 정신자세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지만 청교도들이 그런 독특한 상황에서 만들어 놓은 독특한 해석의 산물인 여러가지 주일을 지키는 조항들을 시대에 대한 고려없이 우리가 그래도 받아들여서 흉내내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유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 파커의 생각이다. 주일을 지키는 태도와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첫째,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는 먼저 주일을 지키기 위한 사전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은 영혼을 위한 날이고 심령의 일을 위한 날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 전날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결정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토요일 저녁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수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자세에 대한 경계이다. 파커에 의하면 청교도들은 탁월한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규칙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들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성수에 규정을 파쇠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신약적인 확신도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떠 올리게 된다.
 
우리는 왜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서 우러나오고 우리의 현실에서 고민한 흔적이 뭍어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없이, 약 370년전 남의 나라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하는가? 당시 사람들 대부분 농경사회에서 살던 사람이고, 우리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도 고백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시대의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적실성 있게 할 수 없는가?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주일성수 규정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적용의 고민없이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처럼 주일성수의 의무는 우리와 상관이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고 규범없이 살아야 할 것인가?
 
고백과 현실의 격차에 대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고백에 있어 엄격한 주일성수를 말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대해서는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할것인가? 고백과 현실사이에 확대되는 격차 속에서 주일성수의 기준이 자기보다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는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는 방치해도 되는가? 엄격한 주일성수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과, 주일을 공휴일처럼 지내는 방종한 신도들의 양심가책 없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런 격차에 대한 현실적인 대처에 대해 의문에 제기된다.
 
장로교단 노회 당회가 확고히 표명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권징하고 치리하여 성수의 기강을 세우는 것이 어떨 것인가? 그럴수 없다면 용기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정당성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인가? 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사항들을 아디아포라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주일의 거룩함이나 구별됨에 대한 의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의 태도를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이에 주일성수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제언을 드린다.
 
1.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자
 
우리가 따르는 장로교단 헌법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을 제시한다. 이것들이 가지는 탁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오늘 날에도 상당부분의 아디아포라가 포함된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370년 전 왕정정치하에 농업사회인 영국에서 작성된 기존문서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결정이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장로회 1회 노회때 신경과 규칙을 정식으로 채용한 것이 대한예수장로회 최초의 헌장이었고 우리의 생각을 가미해 만든 예배모범이나 주일성수에 대한 기타 조항들이 첨삭을 거치며 개정되어 왔지만 한국교회의 적용되기에는 적실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한국교회가 초기에는 지식도 충분하지 않고 신학자들도 모자라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신앙기준으로 삼은 유서깊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가치는 탁월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20세기 사회주의 제국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 해체주의를 지나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 정오쯤 와 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쳐 첨단 미디어 환경속에서 글로벌 시대의 살고 있으며 여러가지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자기시대의 언어로 현실과 치열한 고민과 싸움 속에서 자기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의 큰 틀 안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에 주일성수에 대한 교단적인 합의를 담아내야 한다.
 
위의 내용은 제가 교단에 올린 헌의문이다. 지금 신학자들도 많이 있으니 모여서 1년이고 2년이고 전반적인 문제-교회정치, 성경, 신조 뿐만 아니라 환경, 역사, 남북분단, 인권, 세계등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열어놓고 최선을 다해서 성경의 기준과 역사적으로 내려온 정통신학,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고민들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소 불완전해도 표명하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후배 신학자들이 모여서 갱신하고 하는 일을, 독일같이 계속 끓임 없이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교회들이 표준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고 어떤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우리의 고백과 현실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간격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진지한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옛날 것을 받아놓고 우리는 그것으로 한다. 물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나 문서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가치의 탁월성에 대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깊이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다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2. 현실적으로 주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주일에 무엇을 사먹지 말라', '주일에 무엇을 하지말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는데 교인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모른다. 주일하면 학생들은 공차면 안되는 날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팔면 안되는 날이고, 모든 개념이 무엇을 못하는 날로만 새겨졌다. 그것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주일에 대해서는 안식일만큼도 모른다. 주일의 소중함을 알아야 잘 지킬 텐데 소중한 것을 모르니 잘지킬 수 없다.
 
청교도들은 강조점을 안식일에 두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자의 지침에 따라 강조점을 주일에 둔다.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어려서 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이 주일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이해되려면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소중하신 분이라는 것은 구속사역등이 모두 소중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인식될 때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구속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서 그것을 끌어오기 보다는 그것은 바라보아서 여기서 성취된 것이고 안식일이 아닌 주일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면 주의 시대가 온다.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그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한없이 기뻐하는 그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날이 오는데, 그날에 누릴 영적인 복락을 그림자로서 앞당겨서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 주일이다. 주일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이 특별히 상징적이 되어서 그 안에서 종말에 누릴 날에 온전한 영육의 안식을 누리면서 그 안에서 한없이 행복해 하는 것이 주일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일에 신학적인 의미를 잘 가르쳐야 한다.
 
3.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필요
 
몇해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여졌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사람들을 치리하는 것도 튼튼하게 유지되어야 할 훈육의 전통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주일을 다른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변화없이 치리받을까 무서워서 사먹을 것을 못 사먹고, 무엇을 할 것을 못하는 것으로 교회가 거룩해지지 않는다.
 
4.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주일성수에 대한 것은 아디아포라에 관한 사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칼빈과 나의 생각이다. 커다란 양보할 수 없는 두 원칙은 육체의 노동으로 부터 주일을 쉬자, 우리와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해서 말씀의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심령을 드리자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 일을 하도록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주일에 물건을 사는가 아닌가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1부 예배후 하루종일 쇼핑하고 노래하고 이것은 용인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교인에게 들었던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있다. 자녀가 주일 저녁에 친구들하고 영화구경을 한다고 야단쳤다는 것이다. 왜 영화를 보면 안되는가를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마음속에 뭔가 우리들이 확연하게 정리하지 않은 많은 생각이 있다. 만약에 딸이 마틴 루터가 나오는 종교영화이면 괜찮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제안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