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

예수는 교훈을 할 때 비유를 아주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가복음 4:33-34에서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 표현은 과장법적 표현으로 에수의 가르침 전체가 비유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만큼 비유를 많이 사용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 이야기》(이국진목사 저)에서 예수가 비유를 많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영적인 교훈의 난해성을 꼽는다.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이야기에 빗대어 가르쳐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류의 영원한 고전-신약성서》(정승우 저)에서 예수가 비유를 사용한 이유로 청중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이는 어설픈 설명일 뿐이다.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오래 전부터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에 각각의 의미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해석하는 방법인  알레고리가 많이 사용되었다.

* allegory[æləɡɔːri] 우화, 풍자 (→fable)a political allegory정치적 우화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거스틴"은 예수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은 아담을 상징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간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을 상징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준 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며,
여관은 교회를 상징하고,
다시 온다는 것은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배격되었고,
결국 율리허(Adolf Jülicher)는 알레고리를 배격하고 비유에는 오직 하나의 뜻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서게 되자, 비유 자체는 어떤 하나의 의미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 처럼 다양한 의미에 열려 있어서 해석자가 나름대로 창의적을 해석하는 것을 환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비유를 말했을 때, 그 때에 의도했던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비유(parable)를 통한 하나님 나라 가르침(I)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현실화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예수는 한편으로는 메시아적 권능적 치유사역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적 임재를 증시하시고, 다른편으로는 설교와 가르침 사역으로써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적 임박성을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basileia tou theou, the Kingdom of God)는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사역의 주제였다. 하나님 나라는 신구약의 주제요, 역사와 우주의 주제이며, 지구상에 사는 인류 개인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의 비유는 여러가지 다른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를 가르치나 이것들은 모두 통합적인 주제인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to come)에 집중되고 있다. 저자는 예수 비유를 주제 별로 하나님 나라 비유, 잃은 것 비유, 선한 목자 비유, 불의한 자 비유, 부유한 자 비유, 슬기로운 종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 종말론적 잔치 비유로 나누어 성찰해 보기로 한다. 이 다양한 주제들은 하나의 통합적인 큰 주제인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 비유

1) 씨뿌리는 자 비유(마 13:1-9; 막 4:3-9; 눅 8:4-8)

(1) 복음의 씨는 다양한 심령의 밭에 뿌려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씨뿌리는 자(the Sower) 비유”로 설명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9).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 자신이며, 이 비밀들은 그의 메시지와 사역의 효과들이다. 하나님 나라 비밀은 복음의 메시지 전파와 치유 사역이라는 복음의 씨를 통하여 뿌려진다. 씨가 뿌려져서 자라고 결실하는 데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다. 길가에 떨어진 씨들은 공중의 새들이 보이는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흙이 얇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들은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나 해가 돋아 올라 비취면 뿌리가 없어 말라죽어 버린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오나 가시가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옥토에 떨어진 씨들은 자라 무성하게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씨가 길가에 떨어져 새에 의하여 먹어 치우거나, 돌짝밭에 떨어져 말라 죽거나, 가시떨기에 짓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옥토에 떨어져 결실하는 다양한 모습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와 같다.

(2) 씨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예수는 씨 뿌리는 자(the Sower)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신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19-23).

예수의 해석에 의하면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 4:14). 예수는 복음의 씨가 뿌려진 심령의 다양한 상태를 묘사하신다. 길가에 뿌려진 자는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메시지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태가 악한 자라고 표현한 것을, 마가는 사탄(막 4:15)이라고 말한다. 돌밭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넘어지는 자(막 4:16-17)다.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막 4: 18-19)를 뜻한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인간과 사회 안에서 여러가지 시련과 박해를 거치면서 자란다. 복음의 씨는 결국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들의 마음과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막 4:13)와 달리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비유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로 표시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마 13:11a)

2) 가라지 비유(마 13:24-30)

(1) 하나님 나라는 추수때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것 같다.

예수는 가라지(the Weeds)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4-30).

씨 뿌리는 자가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밤에 원수들이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 그리하여 싹이 나고 자라날 때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보인다. 종들이 길쌈을 하면서 가라지를 뽑겠다고 주인에게 말한다.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한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지혜를 말한다. 주인은 추수까지 함께 자라게 두고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알곡은 곳간에 넣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라지는 밀밭에서 곡식과 함께 자라는 독보리를 일컫는데, 검은색 열매를 맺을 때에 구분이 된다. 이렇게 가려낸 가라지는 땔감으로 사용된다. 가라지는 마구 뽑을 것이 아니라 검은 색 열매를 맺어 알곡과 구분이 될 때 제거되는 것 처럼 때가 되면 지혜롭게 제거되어야 한다.

(2) 역사의 종말에는 가라지의 분리됨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이들에게 가라지 비유를 해설하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복음의 좋은 씨 뿌리는 자는 인자인 예수요 그의 제자들이다. 밭은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세상이다. 좋은 씨들은 천국의 아들들, 선인(善人)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악인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사탄이며, 추수 때는 이 세상의 끝인 종말 때다.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이 세상은 그냥 돌고 도는 영겁 회귀(die ewige Wiederkehr)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때를 향하여 가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심판이 일어 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신화적인 진술이라고 간주하나 이 비유는 문자 그대로 받아야 한다.

이 비유는 “세상 심판의 비유”(마 25: 31-46)와도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임금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이들에게 합당한 판결을 명하신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3-34, 45-46). 예수는 여기서 역사 종말 심판의 두가지 결과에 관하여 언급하고 계신다.

하나는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을 위하여 마련된 영벌의 길이다. 이 비유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영생과 영벌은 맹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사는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하여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 종말에는 두가지 종류의 판결이 있다: 영생과 영벌의 판결이다. 선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들어간다.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역사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선을 위한 고난과 박해에 대한 보상도 없으며 우리의 도덕 윤리적 행위에 대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 가라지는 미리 제거할 것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알곡을 거두는 데 있어서 그릇된 인본주의적 행동주의를 경계한다. 좋은 씨를 뿌린 자리에 가라지가 자라난 것을 보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것이며, 가라지는 불에 던지시고 알곡을 거두실 것이다. 가라지를 분리해 내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한다. 심판 시에 가라지는 가려질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의 선한 일에 힘쓰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구제와 돌봄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경외요 존경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종교적 신앙과 경건이란 이웃, 특히 소외된 자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3)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눅 13:18-19)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겨자씨(the Mustard Seed)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갈릴리 지방에서 많이 자생하는 십자화과(科) 식물(눅13:19)의 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극히 작은 것'(마17:20)의 대명사로 언급되나 성장하면 키가 4-5m나 되는 특징을 가진다. 겨자씨는 이처럼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씨다. 그 안에는 큰 나무가 들어 있다. 겉으로 볼 때 작아서 하찮은 것으로 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에서 싹이 나와서 줄기가 되고, 더 커서 가지가 되고, 더욱 크게 자라 큰 가지가 되고, 완숙하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 만한 거대한 겨자나무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는 초라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식하고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혀 크게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는 것처럼 되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등록 신자가 모두 참 신자라고 볼 수는 없다. 알곡(참) 신자와 가라지(명목) 신자가 모두 교회 안에 있으나, 이 구분은 종말에나 드러난다.

(2)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가 믿게 되는 공동체로서 묘사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작은 아브라함의 가족과 영세(零細)한 12지파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장되었다가 이스라엘의 배도와 귀양살이로 인해 남은 자들로 수렴되고 예수에게로 집중되었다. 예수로부터 다시 12제자, 120 제자들, 초대교회, 이방전도, 세계선교 등으로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었다. 신구교 합하여 2014년 기준으로 등록된 기독교인 수는 21억명 정도 된다. 한국에서는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천3백5만명(개신교: 967만명, 천주교:389만명, 2015년 기준) 정도 된다. 한국에서 개신교 19.7%·불교 15.5%로 1995·2005년 순위가 바뀌어 불교에 첫 역전하여 개신교가 1위가 되었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계시를 통하여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보고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6-27). 예수의 비유가 언급하는 겨자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이란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과 거기에 속하게 될 이방인을 지시하고 있다.

4) 씨의 성장 비유(막 4: 26-29)

(1) 하나님 나라는 씨가 자라 곡식 열매를 맺음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씨의 자람과 같다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 26-29).

하나님 나라는 밭이라는 이 세상에서 씨앗으로 현존한다. 씨앗은 미래를 품은 현재다. 씨앗 안에는 장차 올 것이 숨겨져 있다. 씨앗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자란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실한다.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이삭을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파되어 결신자를 만들고 이들이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전파자가 된다.

(2)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씨)이 발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 도래 시간을 계산하려고 하고,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프로그램에 의한 인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플로레타리아 독재라는 이상향을 당원들의 전략적 속임수와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실현하려다 70년 이데올로기 실험 가운데서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 실패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이상향을 추구하여,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과 인터넷 기술의 결합으로 인위적으로 도출하려고 하나 예기치 못한 여러가지 부작용이 도출되고 있다. 환경과 생태 오염과 파괴, 지구온난화, 인간의 소외, 부익부, 빈익빈 등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이상향 첨단기술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복음의 능력으로 실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 복음의 말씀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심령 가운데서 먼저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 자체가 가진 능력으로 역사의 추수 때를 가져 온다. 복음의 능력이란 예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다. 예수는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제자들에게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예언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25-28).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그가 지실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심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과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계신다.

(3)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희생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으심은 씨앗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취를 결실한다.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서로부터 많은 믿는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심판자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낫을 가지시고 알곡을 거두어 들이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 낫으로 추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犧牲)제물(祭物)이 되신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는 흰보좌의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1-12). 흰 보좌 앞에 죽은 자들이 보좌에 펴진 생명책과 행위책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최종의 심판에서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

5) 누룩 비유(마 13:33; 눅 13:20-21)

(1)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누룩(Leaven)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빵을 구울 때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 번에 빵을 굽고 남겨 놓았다가 띄운 반죽 한 조각을 뜸팡이로 썼다. 이런 식으로 누룩은 이스라엘의 집에 늘 비치되어 있어서 빵을 굽는 데 사용되었다. 누룩에는 퍼지는 성질이 있다. 이 퍼지는 성질로 인하여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게 하여 빵을 만들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에 퍼져 빵을 부풀게하는 누룩과 같다. 누룩은 발효를 통하여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 같이 변혁(transformation)을 야기한다. 이 변혁이란 복음의 능력에 의한 삶의 방식과 사고와 가치관의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선한 누룩이 되어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속에서 퍼지는 역할을 한다. 가정과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죄로 인하여 죽은 인류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속죄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한다. 예수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를 설립하였고, 거기서 안디옥 교회로 전파되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세우고 희랍교회와 로마교회를 세우고 박해를 거치면서도 로마제국을 점령하여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고 서구사회로 퍼져나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을 이루고 아프리카와 남미에 교회를 이루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아시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지구촌 오지(奧地)의 미지(未知)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있다.

6)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마 13:44)

(1) 하나님 나라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발견하고 전 소유를 팔아 사는 자와 같다

예수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the Hidden Treasure)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하나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아서 그것은 발견하는 자만 그 밭의 가치를 아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보화의 가치는 숨겨져 있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귀중한 것을 산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있다.

전도서 저자 솔로몬은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의 씨를 심어놓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모든 사람들의 초청됨과 그 진정한 가치의 은폐성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4). 이 구절에 의하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빛이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요 종교의 씨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 어두움이란 세상 내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부패한 인간은 자기에게 비쳐진 빛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 빛의 은폐성이다.

(2) 하나님 나라 보화(寶貨)를 발견한 자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를 구입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보화가 있는 밭을 그냥 값어치가 없는 일반적인 땅으로 간주하고 지나쳐간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헤롯왕과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 이들은 아기 예수 신분의 존귀성을 알기만 알았으나 그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과 생모의 마리아만 예수가 메시아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리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과부된지 38년이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다가” 아기 예수에 관하여 말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7-38). 시므온과 안나는 당시 마리아와 요셉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아기 예수의 비밀을 성령의 조명 속에서 알고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감추인 밭을 자기의 전 소유를 팔아서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소유를 모두 처분한다. 그리하고 이 밭을 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보화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발견하는 자만이 밭의 가치를 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항상 일상적인 삶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자연적인 눈을 가진 자에게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여태까지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숨겨진 보화가 있는 밭을 산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우리가 가진 모두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사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사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주기철, 손양원, 김관주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이 그들의 삶을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바쳤다.

7) 값진 진주(眞珠) 비유(마 13:45-46)

(1)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사는 장사와 같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값진 진주(the Pearl)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값진 진주도 아무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보는 눈이 있는 장사만이 그것의 진가(眞價)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비밀에 접하여 그 진리를 아는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진주를 산다. 복음을 아는 자는 복음을 얻기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는 헌신(獻身)을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어린 시절 부터 지켰다고 자랑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이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실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될 때 지체 없이 자기 모든 소유를 팔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구원을 재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오는 것이며 이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값진 진주를 산다는 것은 새로운 이윤창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긴박성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 값진 진주를 사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감추어 놓고 몰래 가서 자신의 집을 정리하고 그 모든 소유의 대가를 지불하고 값진 진주가 감추인 밭을 산다. 이것이 복음이다.

8) 그물의 비유(마 13:47-50)

(1) 하나님 나라는 물고기를 잡아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갈라내는 그물과 같다.

예수는 그물(the Net)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하나님 나라는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에 비유된다. 그물이 가득 차게 될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내버린다. 역사의 종말에 신인과 악인의 분리가 있다. 선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자는 풀무불이 있는 지옥에 던져 넣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2) 유신론적 이원론

어부들이 던지는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들어 온다. 물고기 가운데는 질(質) 좋은 물고기가 있고 질 안좋은 물고기가 있다. 어부가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안좋은 물고기는 버린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가라지 비유와 같다. 전도와 선교라는 그물은 선인과 악인을 공동체 안에 끌어 들인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함께 있다. 악한 자들을 미리 가려내거나 제거할 필요가 없다. 악한 자를 가려내고 제거하다가 선한 자까지 다치고 어려움을 당할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제한되고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악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회개할 수도 있고 선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시험에 빠지고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는 선한 자들의 것이며 악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풀무불에 던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신론적 이원론이 예수의 비유에는 핵심사상으로 지배하고 있다.

2. 잃은 것 비유

1) 잃은 양 비유(눅 15:3-7; 마 18:10-14)

(1)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의 기쁨

예수가 들려주시는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다음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하니님으로부터 소외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누가는 예수가 잃은 사람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누가는 이 장에서 세가지(양, 은전, 아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주인의 기쁨에 관한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무리에서 이탈한 양은 잃어버린 양이 된다. 개나 소나 고양이 같은 가축과 달리 양들은 자기 우리를 찾아오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목자가 양을 찾아와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늑대나 이리의 밥에 되어 버린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잃은 양을 찾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2)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연민

마태복음 비유에서는 누가복음에는 없는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첨가되어 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사람들은 큰 자에 대한 관심을 주로하며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잃어 버렸을 때 찾으려는 애착이 적고 찾다가 못찾으면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지극히 작은 소자를 찾은 것에 대하여 크게 기쁘하신다. 비유는 인간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저를 지키시고 저를 돌보신다. 심지어는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 하신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이며, 그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자기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작은 자, 소외자, 헐벗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큰 자, 권력자와 부자와 유명한 자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3) 의인 아흔 아흡보다 잃은 죄인 하나의 돌아옴을 기뻐함: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의 죄 때문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 된 것을 원치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긍휼을 베푸신 준비가 되어 계신다. 이미 예언자 에스겔은 죄인을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뜻을 그의 잃어버린 백성 이스라엘에 선포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겔 33:11).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하나님은 악인이 죄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악인이 돌이키면 그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악인의 숙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론을 말하고 있다.

예언자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약속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with justice)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예수는 메시아로서 예스겔이 예언한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 23-24).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가지시는 식사행위는 잃은 자들을 되 찾았을 때 맛보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 곁에 만연한 기쁨의 지상적 광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사면의 표징과 실행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앞으로 맛보게 될 영원한 복락의 선취다.

2) 잃은 은전(銀錢) 비유(눅 15:8-10)

(1)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전승된 비유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는 누가가 유일하게 전승해 주는 예수의 비유로서 다음이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8-10).

잃은 양 비유에서는 한 남자에 관하여 말하는데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에서는 한 여자에 관하여 말한다. 드라크마(δραχμα, drachma)는 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당시에 평민들의 집은 내부에 방 하나만 있었다. 출입문은 하나 있었으나 창문은 없었다. 그리고 바닥은 다진 진훍으로 되어 있다. 방안은 컴컴하다. 은전이 떨어졌을 경우 방안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켜서 빗자루로 집안을 쓴다. 그리하여 잃은 은전(銀錢)을 찾아낸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동전을 찾았을 경우 여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품삯을 찾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즐거움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기뻐하는 것과 같다.

(2) 잃은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의 즐거움

한 여인이 잃어버린 방바닥을 빗자루 쓸면서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발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서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고 기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기뻐한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천사들이 기쁨을 드라크마 하나를 잃고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즐거워하는 한 여인의 즐거움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느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소외된 자들을 찾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종교 특권층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 나병환자들, 혈루병자들(요 5:3),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고 저들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율법에 입각한 가치관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한 가치관을 교훈하고 있다. 인간들은 죄인을 멸시하고 의인을 칭송하기를 좋아하고 의인의 친구가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와 창기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이들이 바르고 건강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3) 잃은 아들(탕자) 비유(눅 15:11-32) :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1) 잃은 아들의 돌아옴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잃은 아들(the Prodigal Son) 비유는 다음이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잃은 아들(the Prodigal Son)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자유로 허락된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에 대하여 냉담하고 무감각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와 집, 가족, 자기 나라와 동족으로부터 멀리 떠나가서 오늘날 오랜지 족처럼 아주 사치스럽게 살며, 창녀들과 방탕한 삶을 살고 그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그 나라에 흉년이 와서 아주 삶이 어려운 시기에 그 나라의 백성 중 하나에게 의탁하여 살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백성의 법과 질서를 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돼지지기로 고용되어 부정한 동물인 돼지의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림을 면하려 하였는데 그것 조차도 거절되었다. 이는 탕자가 직면한 최악의 상태를 말한다.

탕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 무절제한 소모 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소모해버렸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상실해 버렸다. 탕자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인간 영혼의 모습이다. 거짓된 자유란 노예상태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떠나가 자율성의 주인이 되고자 한 탕자는 쾌락과 방종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지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소외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알려준다.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던 탕자는 비참한 노예가 된 것이고 이것은 스스로의 방종이 초래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최악의 고통 상태에서 비로소 자신의 본향을 생각한다. 그리고 겸손해지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생각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주고 잔치를 배설한다.

(2) 고통과 고난이란 인간을 정화시키는 수단

아들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가 돼지지기를 하면서도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굶주려 죽는다는 최악으로 낮아진 상태에서 비로소 자신의 고향과 아버지 집을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탕자가 당하는 역경은 그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 그리고 자신의 큰 죄와 허물을 깨달으면서 극도로 겸허해지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의 자격이 없고 단지 품꾼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 이러한 외롭고 고달픈 타국의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내몰리면서 여태까지 은폐되었던 사실, 아버지 집의 종들이 지금까지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자기보다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회심이란 아들로서 누리는 자신의 참된 존재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회심(conversion)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본래 모습(the original status)이란 하나님 형상의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영광스러운 숙명(glorious destiny)이다.

인간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과대 망상 속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각성하게 되고 전능자 하나님에게로 귀환하게 된다. 이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자신 본연의 처지에서 떠나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신의 소외된 처지를 깨닫고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역경과 고통 가운데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속에 있는 본향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마비되어 있는 종교성(종교의 씨)이 이러한 역경이라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발현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사회에 다가오는 흉년이라는 자연 재해와 인간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의 순기능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은 재난과 고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주에는 선한 신이 아니라 악한 신이 있으며, 그리고 우주와 역사에 부조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C. S. 루이스(Lewis)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 재해와 고통과 고난을 주셨다. 그리하여 인간의 신앙과 자기 존재 각성은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재난 속에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처한 고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알게되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 마치 메마른 황야에 비가 내리게 될 때 각종 초목이 싹을 내는 것과 같다.

(3) 인간의 성적 자유권(동성애, 성 매매)을 행사하는 오늘날 인간: 인간 존엄성 상실

오늘날 현대 인간은 계몽주의 이래로 정신적 탕자로서 기독교 전통이 강조해온 하나님의 법, 초월적 법(transcendent law)을 이탈하여 인간 이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쳐 오늘날 이성의 길까지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에 도달하였다. 모더니티는 그래도 규범과 가치의 통일성과 단일성과 품위를 존중했는데 포스트모더니티는 다원성과 다양성의 명목 아래 각종 무질서와 혼돈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
특히 2010년대에 들어와 구미(歐美)사회를 이미 장악한 동성애 축제인 퀴어축제가 한국사회에 들어와 매년 서울 시민의 휴식처인 서울광장에서 개최되면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허용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시민운동 샬롬나비는 2016년 6월 9일 ‘반동성애 다섯 명제’를 선언하였다:

1.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며 자연 질서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2. 동성애 문화축제(퀴어 축제)는 가족 공동체 해체하고 전통가치관 붕괴시킨다.
3. 동성애 문화축제는 개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공동체 질서를 해친다.
4.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를 한국 문화축제의 중심지인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것은 자신들의 성적인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켜 동성애 문화를 조장하려는 것이다.
5. 퀴어 축제는 성(性)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미화 내지는 동성애에 대한 옹호를 조장하는 것이다.

남녀 동성애자들은 에이즈(AIDS: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면역결핍증)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며, 남성동성애자들은 에이즈 외에 항문성교로 인한 항문 파열이라는 치명적 질환에 시달려 생명을 단축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문의들은 경고해주고 있다. 성(性)이란 가정 안의 부부 간 사랑의 확인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나갈 때 인간에게 주어진 개인과 가정의 천부적 존엄성은 무너지고 아버지를 떠나온 탕자가 돼지지기가 된 것처럼 방종과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4) 최악의 상태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조국을 떠나 타국에 가서 창녀와 동거하면서 호랑방탕하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였다. 그는 자기 민족을 떠나 타국으로 가서 생활했다. 그는 자기의 고향에서 섬기던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탕자는 그가 지녔던 최소한의 양심과 신앙과 규범에서도 이탈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자유의 남용 속에 살았다. 그러한 탕자는 흉년이라는 자연의 재앙과 함께 들어 닥친 주변 환경의 극도의 핍절에 영향을 받으면서 물질적 빈곤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호구지책을 위하여 낯선 나라의 사람에게 의탁하여 살았는데 돼지지기를 할 정도로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고 그나마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주려 죽음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최악의 상태로 낮아진 탕자는 절망과 자포자기의 상황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부르심을 그의 존재 밑바닥에서 체험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러한 탕자의 자기 독백은 그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본향을 갈망하는 것이며 우리 영혼의 심연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바같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안식을 누리지 못 살도록 한다: “우리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ad te)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5) 하늘 아버지는 여전히 반항하는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를 바라신다.

비유는 무례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자신을 떠난 아들이 집으로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긍휼이 크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준다. 비유가 그려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패역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은 에언자 호세아의 예언을 통하여 전해진다: “이스라엘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1-2). 비록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떠났으나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 같다. 성공하여 금의환향하는 아들이 아니라 유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모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긍휼의 마음을 느끼고 아들을 포옹하여 맞아 준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 20).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가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패역과 반항에서 돌이켜 자기에게로 돌아 오기를 원하신다.

탕자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적 상황을 알려준다. 탕자의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 받은 첫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은혜의 울타리, 선악과에 접근하지 말라는 금령을 이기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자유의지를 남용한 것을 비유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의 멀어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단절이요 자기 본연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의 소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자유의 만끽은 방종(放縱)이요 자기 본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인간의 진정한 자율성(true autonomy)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의 자유다. 인간 자유의 진정한 기반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보존이며, 그가 주시는 계명을 지킴이다. 이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고 얽매는 사슬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울타리요 보호막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원적 자유의 가능성이란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탕자의 진정한 자기 회복이란 그가 떠난 사랑하는 아버지로의 귀환에서만 실현된다.

모더니티(modernity)는 전통에 대한 거부와 자율적 인간 정신을 추구했으나, 이러한 모더니티의 극단성은 모든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를 산출했으며, 오늘날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가 지켜온 이성적 기준과 규범까지 해체함으로써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의 사람들은 구약 사사기의 사람들처럼 윤리와 가치의 규범을 해체하고 각자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여태까지 금지되어온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점차로 주변적 사례가 아니라 정상적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생물학적 성(sex)이 무시되고 사회학적 성(gender)으로 대체되면서 오늘날 21세기 사회에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성문화혁명이 몰려오고 있다.

(6) 탕자가 돌아 왔을 때 하늘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말했으나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단지 잃어버린 아들이 되돌아 온 것만으로 아버지에게는 족하다. 아버지는 실적이나 조건을 보지 아니하신다. 단지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 온 것만으로 족하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포용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목을 안음과 입맞춤은 용서의 표시이다(삼하 14:33; 창 45:15). 아버지는 종에게 잔치를 배설하라고 명하신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 반지를 끼우는 것은 그가 완전한 자격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폐인 된 아들을 단지 응급조처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폐인 된 자리에서 새롭게 아들된 자리로 끌어 올린다.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변혁적 사랑(transforming love)이라는 것을 시시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을 갈아 입힌다. 그 이유란 잃어버린 아들이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3). 아들은 자기 몫을 챙기고 아버지를 떠났을 때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상태에 있어서 이미 죽었다. 그런데 그 죽었던 아들이 회심함으로써 살아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율적으로 살면서 허랑방탕했던 자신의 죄을 뉘우치고 스스로 아들의 직분을 포기하고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하는 비천(卑賤)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이 좋은 옷이란 은총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에덴에서 지식의 실과를 먹고 범죄하여 수치를 느끼고 수풀에 숨은 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창 3:21).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권면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라칭거는 다음같이 해석한다: “교부들에게는 이 ‘가장 좋은 옷이란 잃어버린 은총의 옷’을 가르키는 것으로 인간이 태초에 입고 있다가 죄를 짓는 바람에 잃어버렸던 옷이다. 그런데 이제 그 ‘가장 좋은 옷’을 다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로서 입는 옷이다.”

아들의 돌아옴과 아버지의 용서는 그를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존재 관계,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존재 관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을 규정짓는 것이다. 다른 동식물이나 피조 생물들은 흙으로 지음으로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흙으로 빗어졌으나 하나님의 입김(성령)으로 생령이 되었다.

(7) 많은 죄 지은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아나 아버지 곁에 있는 큰 아들은 알지 못한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환영하는 태도에 비교하여 맏 아들의 동생에 대한 태도는 대조적이다. 맏아들은 성실한 아들이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는다(눅 15:25). 맏아들은 한 종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종은 대답한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눅 15:27). 이에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기는 커녕 화를 내면서 환영 잔치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는 데 아버지에게 불평을 틀어 놓는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맏아들은 성실한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밭을 잘 관리하였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였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있다는 사실, 그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맏아들은 자신의 처지만 생각했고 잃어버린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지 아니했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은 아버지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맏아들은 잘 믿는다는 신자들 오늘날 교회 안의 우리들일 수 있다. 율법의 차원에서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공로와 의만 내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율법의 의는 우리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자 한다. 이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그 이유를 말한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 31-32). 맏아들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누린 존재적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존재적 은혜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존재적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작은 아들과 맏아들이 느끼는 은혜는 그 순위가 바뀌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그의 잃어버린 관계에서부터 회복함으로 인하여 아버지와의 무조건적 사랑을 깊이 인식했다. 그런데 맏아들은 성실함으로 인하여 그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존재적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8) 종교적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의 위험성

비유의 마지막 단락(25절-32절)은 처음 1-2절에 세리와 죄인에 대조시킨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을 재론하고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로 가까이 오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에 대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예수의 비유 관점에서 보면 세리와 죄인은 둘째 아들, 종교적 경건을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맏아들에 해당한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분개하고 있는 맏아들을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보다 덜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는 아버지가 맏아들보다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작은 아들에 대한 기쁨이 맏아들에 대한 기쁨보다 큰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보다는 복음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이요, 인간은 율법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얻고 새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비유는 종말론적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잃은 자의 구원이라는 종말 때의 하나님 사업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할 마음의 준비가 안된 사람은 이로써 영생의 잔치에 스스로를 배제할 위험에 내맡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자신보다는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 사람의 구원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겸손한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성경은 종말론적 심판의 준엄함에 대한 측면을 항상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다.

3. 선한 목자 비유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이웃 사랑

(1)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비유는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어느 율법사가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 예수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 25b). 율법사는 예수가 이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자 하였다. 예수는 율법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통하여 스스로 대답하도록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사는 정확하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웃 사랑이라는 토라의 교훈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율법사는 예수에게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질문한다. 이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 30-37).

예수는 비유에서 유대사회의 지도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당연히 돌봐줄 이웃이라고 생각한 통념을 깨뜨리고 전혀 이웃으로 생각치 않았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자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진정한 이웃이란 단지 고향이 같다거나, 같은 학교를 나왔다거나, 인종이 같다거나, 피부색이 같다거나, 가문이 같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족이 다루고, 언어가 다르고, 성이 다르고, 고향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가문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고, 대화하고,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자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예수 자신이야 말로 당시 유대사회에서 변두리 출신으로 병든 자와 헐벗고 소외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2) 진정한 신앙은 이웃 사랑 실천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으로 결속된 공동체로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는 동족이었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누구나 서로에게 책임이 있으며 공동체 전체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각 개인은 자기 동족을 전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섞여 함께 사는 이주민만 동족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단자, 밀고자, 반역자들은 이웃으로 간주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합인으로 멸시받았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시하신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노상 강도짓이 자주 발생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았으나 지나쳐 버린다. 이들은 전문가들로서 종교적인 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신앙 문제와 율법 문제를 놓고 서로 논쟁하며 서로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곤궁을 간과하거나 그것을 보고도 못본체 지나쳐 버리는 위선(僞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상처에 싸매어주고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교의 모든 종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경멸을 당했다. 비유는 이런 사마리아인이 올바른 일을 행하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의로운 일을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뽐내는 집단 밖에서도 하나님의 뜻(자비와 긍휼)을 그들보다 훨씬 더 잘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교훈해준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잘 알았으나 율법의 기본 정신은 조항을 외우거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단지 율법 조항을 외우고 적용하는 자가 아니라 이웃의 곤경을 보고 이를 도우는 사랑과 긍훌의 마음을 가지는 자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긍휼히 여기고 그를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3)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리적 인간 이전에 참된 이웃으로 나타나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진정한 신앙인이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율법을 공부하고 외우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적용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종교적이고 교리적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이웃 사랑의 교리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소위 보수정통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는 성경 제일을 내세우고 하나님 주권을 내세우나 그들의 삶으로는 인본주의적으로 교단 연합 사업 선거에 돈봉투를 돌리고 사람들을 돈봉투로 회유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교단 일(심지어 신학대 총학장 선임)을 하는데 의당히 촌지(寸志)를 요구하고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권무술수를 사용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보수정통주의자라고 하나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심판날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자신들이 교리적으로 보수 정통을 내세우는 자들은 혹시나 이러한 실천적 무신론적 삶을 살지 않는가 깊이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라고 증언한다. 바울이 증언하는 것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표적과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삼층천의 비밀을 안다고 하드라도 그에게 성화(聖化)된 겸손과 자기 비움이 없으며, 이웃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의 역사의 본질은 표적이나 능력을 통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항상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철저한 관리를 통한 자기 비움과 겸손이요 섬김이다.

(4) 인류동포주의

여기서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특권 계층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멸시를 받은 무명의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사회에서는 이방인으로 취급받았고. 강도만난 자를 구해줄 아무런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불쌍히 보고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를 주막에 데러다 재우고 그의 숙박비까지 부담하여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사마리아인은 비록 이방인이나 예수께서 교훈하신 원수 사랑 계명을 실천한 자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b-28).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지만 내면의 긍휼과 사랑의 명령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익명의 다른 사람, 강도에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아가페의 실천자였다. 아가페란 “내가 해준 만큼 너도 해달라”(do ut des)는 등가 원칙을 깨뜨리고, 조건 없이 어려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긍휼행위다. 사마리아인은 아가페를 실천하였다. 그의 행위는 모든 인습적인 관행과 규범을 초월하였다. 이러한 자에게 예수가 말씀하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이라는 새로운 규범이 타당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다. 이 새로운 규범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도움이 필요로 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인류동포주의(cosmopolitanism)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는 이웃 사랑, 더 크게는 인류동포주의로서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 지구촌 사회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기업의 공세는 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이어 많은 토착민들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어 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 속에서 많은 토착민들이 저들의 토지와 삶의 근거를 상실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신매매, 섹스관광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오늘날 기업하는 기독실업인들은 저들이 신식민지 수탈의 대상이 아니라 개발과 발전의 혜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류애 경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각 나라의 정부기구와 대기업도 이들 저개발국가들이 개발과 발전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이들 노동력이 착취되지 않고 생존권과 인권이 존중되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기독론적 해석: 이웃 사랑의 동력자로서의 예수는 모든 종교를 능가

우리들은 교부들이 이미 시도한 바같이 이 비유를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예수 자신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사탄에게 침탈당한 인간 자신이다. 그리고 그를 구해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은 당시에 제사장이나 레위인 등 종교 특권층으로부터 경멸받았던 이방인이었다. 예수는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지역으로 있었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가난한 농촌출신으로서 정규적인 율법공부도 하지 못한 촌부(村夫)였다.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을 공부했으나 율법이라는 제도에 얽매어 있었다. 이처럼 사탄에 의하여 강탈당하여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여 쓰러진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령의 기름과 보혈의 포도주를 공급하여 살리고 교회라는 주막에 데리고 가서 쉬게 하고 중생의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해준 것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은 진정한 목자다.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 5:44)고 이웃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그의 생명을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주셔서 그의 생애 자체가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었다.

참 빛이 어두움에 비쳤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강도만난 자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참 빛을 비춰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 빛인 참 빛을 받아 새 생명, 광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참 빛을 받아 새 생명의 빛을 얻는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빛인 참 빛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 이웃 사랑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처소에서 낮선 사람들에게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이 사랑의 빛을 기독교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타종교인들(힌두교인, 무슬림, 불교인, 무교인, 유교인, 도교인, 각종 신비종교인들 등)에게도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교리는 바른 가르침이긴 하나 저들을 설득할 수 없으나 우리가 가진 이웃 사랑은 보편성을 지니고 저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신자들이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타종교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성에 새로운 점화(點火)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여기에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 간의 대화의 새로운 길이 있다.

2) 선한 목자 비유(요 10:1-15)

(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18).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비유로서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명료히 드러내시는 설교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나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이리가 오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달아나 양들이 희생을 당한다.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거짓 선지자나 정치 지도자나 양들을 수탈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선한 목자다.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양들을 구원하는 선한 목자다.

(2) 예수는 양의 문

예수는 그를 통하여 양들이 우리(sheep pen)를 들어 오고 나가는 통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요 10:2)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문을 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들은 따라간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3-4). 팔레스타인에서 밤이면 울타리나 담으로 에워싼 구역 안으로 양떼를 몰아 넣었으며, 문지기가 그리로 들어가는 문을 지켰다. 이른 아침에 목자들은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양떼를 끌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했다. 양들은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고 나가면서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손실 없이 사육되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인도함을 따른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예수가 문이라는 사실은 그의 양들인 신자들에게도 해당한다(요 10:9).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으로 가는 문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3) 문을 통하지 않는 자들은 절도, 강도, 삯꾼

예수는 양의 문(gate)을 통해서 들어 오신다. 그래서 그는 적법한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유일하게 적법한 출입문이다(요 10:7). 그를 제외하고 혹은 그를 스쳐 지나서 양떼에 손을 데려고 하는 자들은 절도요 강도이다. 절도나 강도는 목자가 아침에 나타나기 전에 밤중에 온다. 양의 목자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나, 절도나 강도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요 10:1)다. 절도나 강도나 삯꾼들은 예수보다 먼저 온 자들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요 10:13). 양들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요 10:5). 예수는 이 비유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절도요 삯꾼으로 암시하신다. 그 이유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예수의 증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 그리고 절도요 강도는 그외에도 정치 지도자나 거짓 예언자들나 거짓 메시아 등을 의미할 수 있다.

(4) 예수 외 다른 구원자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 내지 종교혼합주의 거부

선한 목자 비유는 양의 문인 예수 외에 다른 문으로 양을 인도하는 자를 절도, 강도, 삯꾼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자신만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살린 선한 목자인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 비유는 오늘날 WCC가 1970년대부터 인도 신학자 사마르타 등을 종교대화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종교대화를 시작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사마르타, 니터, 토마스 등 인도신학자들은 성경을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취급하고,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김영한, “WCC 핵심 사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 2013년 한국복음주의 조직신학회 가을학회 논문발표, 나사렛 대학교. 조직신학 연구,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2014 봄 여름, 제20호, 15-17.) 이 종교대화 프로그램은 이미 1968년 스위덴 웁살라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1989년 산 안토니오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는 “타종교 안에서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비기독교 종교들 사이에서 사역하시고, 하나님의 구원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고 있는 하나님은 타종교인들의 삶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990년 정초에 스위스 바아르(Baar)에서 WCC, 정교회, 가톨릭교회가 함께 논의하고 이끌어 낸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천명한다: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하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http://www.cyworld.com/dudrka8888/4734415) 이 선언문은 창조주 하나님 내지 성령이 타종교인들 즉, “산 신앙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과, 타종교들 속에서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대화에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2000년 WCC 산하 CWME는 다음같이 ‘그리스도 바깥 구원 가능성’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 이상의 두 문장 사이에는 긴장이 있으나, 이 긴장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05년도 선교와 전도문서: “교회의 치유선교” 선언문 73항에서 77항까지에서 CWME는 “다른 종교에서 유래된 치유요법, 즉 다양한 전통종교의 처방, 요가, 영기(靈氣)요법, 수기요법, 선(禪) 명상 등에 대한 개방성과 의존성은 교회와 기독교 관련의료기관에서 많이 토의되는 주제이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의 치유의 영성과 호환을 희망하며 “모든 치료수단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그리스도인은...기독교가 아닌 특정 종교의 세계관과 연관된 위험스러운 치료관습에 정성을 들인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겉보기에는 유익하게 보이는 치유 요법 뒤에 숨어 있는 악령의 힘이 자신의 파괴적인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WCC는 “다른 종교에 뿌리를 둔 치료 요법과 기(氣)치료 등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치료방법과 고대로부터 내려온 영적 전승을 교회 자체 안에서 재해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중립적으로 주장한다. WCC는 치유에 있어서도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 영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WCC는 전통종교 유산으로 말미암는 치유를 기독교에 혼합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창조자의 영과 창조신앙이 없는 범신론자들이나 다신론자들의 “능력”에 대해서 영분별의 필요성을 명료하게 주제화하지 않는다.

(5) 예수는 선한 목자: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목자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리고 예수는 양들이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희생을 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삯꾼이나 품꾼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획득이 주 관심사이며 양들과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양들을 잘 알고 이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예수는 자기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이 영생은 예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예수와 양들 사이의 관계는 그 깊이에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내적 관계에 정확히 상응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이 구절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심을 통한 예수의 대속 사건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영원한 구속의 섭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 무리에 들어 올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이란 부활절 이후에 이방민족 선교에 의하여 복음을 믿게 될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시사해주고 있다.

(6) “나는... 이다”(ego...eimi, I am...) 어법: 메시아적 자아의식 표현

예수는 “나는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이다“ 라고 “나는.. 이다” 어법을 사용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a),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b),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나는... 이다“의 어법은 이미 구약에서 절대적인 어법으로 나타난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b),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 48:12b).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어법은 하나님이 이방에 포로되어 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주관자요 주관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이다“ 어법은 예수 자신이 일반 사람이나 사물과 일치되는 내용을 넘어서는 계시적 절대적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έγὼ καί πατήρ έν ἐσμεν, The Father and I are one, 요 10:30). 이 문장은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절대적 어법이다. 이러한 어법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그의 신성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는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자기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8-11). 예수는 이 문장에서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격됨을 천명하신다. 우리는 그의 어법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한 것처럼 나사렛 예수가 자기의 메시아됨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성령으로 내면적으로 충만한 메시아적 자아의식 속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7)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지닌 메시아인 예수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예수는 자신의 권능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씀하신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여기서 나사렛 예수가 하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씀은 역사적 예수의 원천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핵심을 드러내는 계시적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한다. 안식일에 베데스타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도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여 대답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없애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요 10:33b)이라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는 그 증거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음과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메시아적 권능 사역과 자신 안에 아버지의 내주(內住)를 증언하신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모든 예수의 말씀과 치유에서 나타난 권능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료히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화된 것이다.



4. 불의한 자 비유

1) 부정직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1)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로운 처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경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부정직한 청지기(the Dishonest Steward) 비유를 말씀하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4절)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13).

부정직한 청지기(the Dishonest Manager) 비유에서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이 행한 사실을 듣고 자신을 해고할 것을 알고 이에 대비한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빚을 감면해준다. 교활한 청지기(shrewd steward)의 행한 일을 들은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 비유가 주는 가르침은 사라질 재물에 집착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자들과 소유를 나누어 영원한 거처(eternal dwellinghouse)에 저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재물(wealth)을 남용하여 잘못을 범했을 때,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려운 자들에게 저들의 빚을 감해주는 방식으로 불의한 재물을 바르고 충실하게 처리할 때 이들이 우리를 영원한 삶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재물은 소멸하지만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재물에 대한 지혜로운 사용법 교훈: 재물을 가난한 채무자들에게 나누어 줌.

예수는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기 위해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려주신다. 부정직한 청지기는 어느 부자의 재정관리를 담당하였다. 그는 주인의 재정을 관리하는 전반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고, 심지어는 주인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다. 이런 직무를 위임받은 청지기는 청렴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청지기는 자신에게 위탁된 자금을 잘못 관리하여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방만(放漫)하여 주인의 돈을 유용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주인은 청지기에게 “보던 일을 셈하라”(눅 16:2)고 위탁된 일에 대한 결산을 요구하였다. 결산을 본 후에 그 청지기를 해고하기 위하여 회계 관련 서류 제출을 요구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직무 사용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신다.

(3) 해고를 면할 묘안으로 청지기는 어려운 자들의 빚을 탕감.

청지기는 앞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궁리를 한다. 그는 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 자산관리를 불실하게 한 전과(前過) 때문에 그를 다시 재정관리로 고용할 자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빚진 자들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교활한 안을 생각해 낸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빚을 삭감해준다. 유대인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이자를 부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주석가들은 그 부자가 채무장부에 이자를 기록하지 않고 숨겼을 것이며 이 청지기가 그 돈을 횡령하여 재산을 축척하여 정식으로 액수를 기록하지 않고 숨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빚의 액수를 줄여준다고 해서 주인에게 손해가 될 것이 전혀 손해가 될 것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Bruce B. Barton, Dave Veerman, Linda K. Taylor, Luke, 『누가복음』, 620). 그는 이것이 나중에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당시 거래 계약은 기름과 밀인데 이것은 대표적인 생필품이었다. 토지를 근거로 한 임차 계약을 포함한 상업적 거래이었을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불러 상당한 빚을 탕감해주었다. 청지기가 행한 일은 문서 위조(僞造)요 사기극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교활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단 빚이 면제되자 청지기의 이러한 업무처리는 그 주인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게 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두 가지 악한 행위(낭비와 문서조작)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였다. 예수는 이를 세상의 관점보다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다.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는 구절이다.

(4) 세상의 아들이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롭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교(秘敎)지혜로 표현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more shrewd)”(눅 13:8b).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하는 내용과 비교(秘敎)지혜는 문맥상 곧 바로 연결되지 않는 점이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의 지혜는 이기적인 지혜라는 점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은 불의한 재물을 자신의 이득과 욕망 충족을 위하여 사용한다. 빛의 아들들은 세상의 불의를 미워하고 이 세상 사람들과 분리된다, 이러한 이분법이 초기 기독교에 확립되었다. 쿰란 문서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에 관한 이원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IQM). 예수께서 빛의 아들들과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는 이원론적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는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비유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의한 청지기를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민첩하고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데, 선민이라는 자들이 임박한 종말에 대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민들은 시대에 민감하지 않고 대처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신앙과 성실성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자기 생존과 유익을 위해 술수를 쓰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자기 소유를 팔고 구제함으로 하늘나라에 저축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자기 이윤과 욕망 충족을 위해 온갖 지혜를 창안해 낸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젠더시대에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은 세상의 아들들로서 자기들의 유익과 권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이기적 지혜를 발휘한다.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하여 동성애를 합법화하려고 하고 이들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동성애 비판자들을 처벌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한다. 이들은 이웃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이나 권리에 있어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빛의 아들들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이웃과 타자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고 헌신하고자 한다. 오늘날 구미(歐美)사회에서 세상의 아들들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 빛의 아들들에게 큰 법적 손실을 끼치고 이들이 가진 양심, 표현, 출판, 신앙의 자유에 법적 족쇄를 채우고 있다.

(5)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것이 영원한 보상을 준다: 지상의 선한 일은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진다.

부정직한 청지기의 행위가 칭찬받는 이유는 어려운 자들과 재물의 나눔이다. 예수는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이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을 참된 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우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의한”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불의한 재물'이란 부정한 재물을 뜻한다기 보다는 하늘의 보화와 대조되는 세상적인 재물, 즉 불의한 세대에 속한 재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unrighteous mammon)이란 “세속적인 소유,” 즉 이 불의한 시대의 특징을 지닌 재산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그것은 돈만을 뜻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재화들, 그리고 실로 우리가 여기서 갖고 있지만 내세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뜻한다. 재산, 능력, 학식, 시간, 명예, 권력 등은 이 생(生)에 속해 있지만 우리가 내세에 가지고 갈 수 없다.

'친구를 사귀라'란 세속적인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가지고 있는 재산, 능력, 학식, 시간, 명예, 권력을 사용하는 결과에 따라 결산(심판)을 하게 된다. “재물이 없어질 때에”(눅 16:9)란 우리가 죽을 때를 말한다.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행위구원으로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으로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가난한 자들과 물질을 나누어야 한다. 성도들은 저들의 친구가 되도록 우리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것은 도움을 받는 가난한 자들이 친구가 된 우리를 천국에서 영접할 것이라는 의미다.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자는 세상이 끝날 때 영원한 처소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는 말씀도 이웃에 대하여 위탁된 선물과 과제를 성실하게 관리하는 자가 천국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뚯한다. 그리고 사회적 선행은 썩지 않고 “너희의 것”(τὸ ὑμέτερον)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우리를 영접함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는 보상이 될 것이다.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거나 전도와 선교와 공익의 목적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지상의 투자는 천국을 위한 투자가 될 것이다.

(6)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것에 재물을 사용하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불의한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길은 자기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이란 불공평하고 불의가 편재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나 이 재물 자체는 중립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용권을 위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지배욕이 작동하게 될 때는 재물은 불의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된다. 그러나 이 재물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데 사용되면 재물은 하늘의 무한한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재물의 성격은 사용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될 때 불의한 재물은 의로운 재물이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e)는 독일 사업가인 쉰들러(Oskar Schindler)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들 집단 처형 가운데서 나치 독일 장교를 돈(뇌물, 불의한 재물)으로 환대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어 천 2백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는 실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들려주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 비유는 쉰들러의 이야기에서 가장 바르게 적중된다.

독일 나치시대에 어디서도 피난처가 없었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공장은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천국으로 통했다.
그 과정에서 쉰들러는 '한 인생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다.
그러나 절명의 위기가 곧 닥쳐온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그때 그는 잠 못이루는 번민 끝에 놀라운 선택을 한다.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유대인의 생명을 산 것이다.
'돈'에서 '생명의 고귀함'으로 그의 가치관이 확고하게 전환된 것이다.
무려 1,200명의 유대인이 그를 따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7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별의 순간,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한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전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한다. 그리고 외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 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했지.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그의 통곡은 계속되었다.
쉰들러야 말로 불의한 재물로 죽어가는 수많은 유대인 생명을
구해낸 불의한 재물에 대한 충성가라고 말할 수 있다.

(7) 재물(財物)신(神)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재물(돈)에 신기한 능력을 부여하셔서 재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교훈하신다. 돈은 물질이기 때문에 돈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권력을 섬기는 것이 된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재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간이 자기 욕망과 권력과 명예 추구를 버리기를 명하시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돈이나 부(富)가 아니라 돈과 부를 취급하는 인간의 태도다. 성경에는 바른 신앙을 가진 부자들(아브라함, 욥, 다윗, 솔로몬, 아리마대 요셉, 고넬료 등)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비극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이것들을 섬김의 대상(물신, 物神)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는 예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불의한 재물(이웃 착취와 이웃과의 불화)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재물 섬김과 불의한 행위를 버려야 한다. 돈이나 권력이나 재물은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란 지혜롭게 맡아 관리하고 이웃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맡기신 대부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섬긴다면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에서 자유로운 참다운 부요(富饒)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회적 공의를 이루도록 해야 하고, 재물이 하나님 섬기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참된 부요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8) 비유 해석에 있어서 종말론적 차원(하늘 나라의 영원한 보상을 위해 재물 사용)을 놓지 않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오늘날 신약학자들의 주석에 있어서 다드(C. H. Dodd)는 미래 준비 민첩성, 키스트메이커(Simon J. Kistemaker)는 즉각적인 상황판단에 중점을 둔다. 이들에 의하면 주인이 자기를 해고하고자 하는데 채무자들에게 빚을 감해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민접한 대처, 삶의 위기에 대한 상황판단과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포기)하여 대처하는 태도 변화가 비유의 중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미래 준비에 민첩하며 직면하는 위기 속에서 즉각적인 상황판단과 대처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재물을 소외자들과 나누며 천국에 저축하여 하나님과 결산하는 종말론적 차원을 약화시키고 있다.

윌리엄(F. E. Williams)는 윤리경영적 시사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경영학에서 대리인 이론으로서 위임받은 청지기의 권한을 사용하여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준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해 주인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이 청지기의 자기를 위한 경영적인 약삭빠름은 오늘날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태도이긴 하다. 하지만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긍휼과 나눔의 정신으로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누면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계산을 약화시키고 있다.

데릿(D. M. Derett)는 실리와 평판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중동문화의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비유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중동문화에서 주인은 청지기의 탕감으로 자신이 관용하다는 주민들의 평판을 즐겼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출애굽기 22장 25절(“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이 주인이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한 배경으로 본다. 피츠마이어( J. A. Fitzmyer)는 소작농을 배경으로 하는 부재지주의 경영인으로서 청지지가 탕감한 이자란 청지기의 구전(口錢)로서 그가 사업상 얻어질 자기 몫을 포기하였다고 해석한다. 이 관점은 비유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 역시 현세적인 실리와 평판에 치중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재물을 사회적 소외자와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결산을 등한시하고 있다.

이 비유의 더 중요한 의미는 임박한 미래 대처, 즉각적인 상황판단, 윤리경영적 시사, 실리와 평판이라기보다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앞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의 빚을 청산하는데 재물을 의롭게 사용함으로써 직무를 지혜롭게 했다는 것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이란 각종 탐욕(권력과 뇌물로 인한 부정부패)으로 오염된 것일찌라도 가난한 자들의 구제, 사회적 자선사업, 채무자들의 빚 탕감 등으로 선하게 사용될 때 현세적 삶의 개선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속적 배당금이 된다.

재물이란 죽음의 목전에서 더 이상 효용성이 없어진다. 재물은 지나가는 세상과 더불어 없어진다. 재물은 사회적 약자들의 구제 등 선한 용도로 사용될 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속적인 것으로서 가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빚 진자들의 빚을 탕감시킨 데 사용한 것처럼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도우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불의한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불의한 행위를 회개하도록 고무한다.

(9) 하나님 나라는 변혁적 정의를 가르친다: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은 세상경영방식과 다르다.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해고될 것을 알고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빚을 경감해 주였다. 그런데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의 일을 지혜로운 경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경영은 세상적인 경영에서는 정말 미련한 짓이며, 영구히 퇴출될 경영방식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경영은 세상 방식과 다르다. 하늘나라 경영은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는 경영이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해고된 후의 대비로서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가 생각하여 빚을 감해주는 이기적인 선을 행했다. 예수의 눈으로 볼 때 그 청지기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의 단호한 행동은 모범적이다. 이 일로 인하여 주인은 채무자로부터 자비하고 관대한 분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음으로 주인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8절).

주인은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그만 선행을 크게 보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를 사용하신다. 조엘 그린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Kingdom Economics)이라고 붙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호의의 확장에서 증명된다.“ 청지기의 채무자 탕감 목적도 주인의 유익보다는 빚진 자들로부터의 호의를 입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다.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에게 참된 것을 맡긴다”(눅 16:11)는 의미는 부도덕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눔으로써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정의(正義)는 이기적 정의였다. 하지만 주인은 불의한 청지가의 정의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포상해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를 말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주인은 사랑과 자비의 분이시며 우리의 자그만 이기적 정의 자체도 높혀서 차원 높은 진정한 이타적 정의로 만드시는 분이다. 이기적 정의를 이타적 정의로 높이는 것이 변혁적 정의다. 하나님 나라에는 죄인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로 허물을 덮어시는 초풍성의 은혜 법칙(a law of grace of superabundance)이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변혁적 정의다.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나의 행한 대로 그 행위만큼 나의 몫을 보상 받는 정의다. 이것은 세상의 율법적 정의다. 이에 반해서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는 하늘나라의 정의로서 세상의 정의보다 질적으로 차원 높은 정의다. 전혀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고, 그래서 주인이 관대하고 선한 분이라는 칭찬을 받게 했다는 비의도적 결과만을 가지고 의(義)를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변혁적 정의다. 이 하나님의 변혁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세상의 불의한 재물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거주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2) 불의한 재판관 비유(눅 18:1-8)

(1) 간청하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불의한 재판관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the Unjust Judge) 비유로 가르치신다: “어떤 시(市)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2-8).

불의한 재판관(the Unjust Judge) 비유에서 한 불의한 재판관이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과부의 지속적인 간청을 무시하다가 번거롭게 함을 인하여 들어 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눅 18:1).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이 할찌라고 과부의 지속적 간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늘 아버지는 그가 택하신 자들의 모든 간구를 넉넉히 들어주신다고 교훈하고 있다.

(2) 하나님은 밤낮 간구하는 택한 자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청을 무시하다가 그녀가 끈질기게 간청하니 번거로움을 인하여 그녀의 원한을 풀어줄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4b-5).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6-7). 예수는 무정하고 불의한 재판관도 번거로와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성도들이 간구를 들어 주실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무속 신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헌신의 삶 없는 재물 헌납은 무속 신에게 드리는 것으로 인격적 신에 대한 진실한 관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무속 신은 재물에 관심을 가지고 윤리성에 대한 관심은 없다. 무속 신 제사자들은 단지 무서워하여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신에게 뇌물을 드리는 것과 같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드린 제물에 대하여 예언자 사무엘은 다음같이 비판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순종과 인격적 헌납없는 사울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을 지니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기름이나 물질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물질에 깃든 제사자의 마음, 순종을 흡양하신다.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사는 방편이나 은혜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그칠 수 있으나 은혜는 언약관계로 지속한다.

(3) 인자가 올 때는 믿음을 보기 어려운 시대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b). 인자가 재림할 때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익으며 믿음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에 관한 예수의 예언적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0-12). 역사적으로 각 시대마다 큰 환란이 있었다. 476년 만족(蠻族, 게르만 족)의 칩입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 중세의 페스트로 인한 많은 인명 손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무너짐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2001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미국 맨허턴 공격과 함께 이슬람 근본주의 알카에다 집단 출현, 2014년 IS(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그룹이 세운 이슬람국가)로 인한 지하드 전쟁과 반대자들 집단 처형, 중동지역민들의 난민생활과 유럽 주요도시의 테러, 문화적으로 성(性)자유화 물결 속에서 간통을 개인의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 서구사회에서는 성매매 허용, 동성애 인정과 차별금지법 제정 등으로 21세기 지구촌 사회는 새로운 성적 문화충돌로 고통을 받고 있다.

오늘날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 화란, 미국 등의 교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동성애 성직자들을 안수하기에 이르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부산물로 예수 외에 다른 종교의 구원자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세력을 가지면서 주류 기독교를 점차 장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때를 예시하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다. 과학기술의 고도발전과 첨단 기술이 인간 평균수명을 연장하여 100세 시대를 열면서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는 가운데 전통 기독교 신앙도 세속주의에 물들어 편의주의적으로 변질되고 있다. 20세기 세계교회사에 유래없는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의 동력이 된 성수주일, 주일저녁,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및 기도원 운동의 영성이 약화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기독교는 다시 한번 선조들이 가졌던 청교도 신앙, 말씀 묵상과 공부, 에배의 회복, 기도와 전도에 힘씀과 성령의 충만, 거룩한 삶의 회복이 요청된다.(김명혁, “신앙의 선배님들이 지녔던 복음의 영성,” 기독교학술원 영성아카데미영성학 수사과정 2016년 9월 22일 가을학기 강의 원고)

3) 세리와 바리새인 비유(눅 18:9-14)

(1) 두 부류의 인간: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부류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부류

예수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세리와 바리새인”(the Tax-Collector and the Pharisee) 비유로 교훈하신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0-14)

세리와 바리새인(the Tax-Collector and the Pharisee)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기도드린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에 반해서 세리는 성전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멀리서서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드린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들보다는 더 많은 좋은 일을 행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만과 자기 행위의 의(義)를 자랑하였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자기 백성의 세금을 포탈하는 나쁜 짓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기의 의(義)를 하나님 앞에 자랑했으나 세리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하나님은 전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않고 후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을 받아주신다.

(2) 하나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이다: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자기 자신의 업적을 내세운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한 비애(悲哀) 때문에 그리고 회개와 속죄를 수행하는 관습에 따라서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였다. 이들의 경건성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 정위되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 서서 기도하였다”(마 6:5). 이들은 자선할 때에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었다(마 6:2). 이들의 경건은 하나님의 영광과 죄인에 대한 긍휼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하는 위선(僞善)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만(自慢) 속에서 자신들이 내면적으로 처한 결핍과 곤경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의 외형적 기도나 금식 같은 행위는 심령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이들은 동료 인간, 세리나 죄인들 등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졌다. 이들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눈이 멀은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진 불손한 태도에 상응한다. 하나님은 자만과 위선으로 경건을 치장한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만한 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이와는 반대로 세리들은 직업상 저지르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b)라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번제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즐겨하신다고 고백하였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자의 것이며, 온유한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고, 주변의 악과 불의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하고, 항상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의 뜻에 정위되어 있다.



5. 부유한 자 비유

1)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1)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과 부한 자에 대한 저주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부자와 나사로(The Rich Man and Lazarus) 비유에서 예수는 두 부류의 인간 형(型)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려준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in hell) the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

부자는 호의 호식하는 세상적으로 부유한 자들의 대표요 나사로는 부자들이 식탁에서 내던진 빵 부수러기 조차도 주워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대표다. 부자는 호화롭고 즐기고 방탕(放蕩)한 삶을 사는 자를 상징하며, 나사로는 세상에서 가난하나 경건한 삶을 사는 자를 상징한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을 깔보고 하나님을 비웃는 이들은 지상에서 성공을 거듭하면서 복이란 복은 다 누린다. 호의 호식하는 부자들은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이고, 자기 안에 있는 공허함을 억누려는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비록 무화과 나무의 소출은 적으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 보도된 예수께서 평지에서 행하신 축복과 저주 선언에 대한 일종의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0-26).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는 세상적인 부자에 대한 경고 내지 저주 선언과 세상적인 가난한 자에 대한 위로와 축복 선언이 동반되어 있다. 나사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대표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경건성의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나사로는 죽은 후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은총과 영광을 차지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죽어 화려한 장례식을 마친 후에 “죽은 자들의 나라”인 음부(陰府)에 들어간다. 음부(hell은 희랍어 Haidēs, 희브리어 Sheol이나 Gehenna의 번역)는 선한 자나 악한 자를 막론하고 죽은 자들의 거처이다. 나중에 거의 배타적으로 죽은 악인들의 처소로 사용되어졌다. 음부는 지옥, 즉 악인들을 위한 형벌 장소다: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b).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3-14). 예수는 유신론적 사후세계의 관점에서 천국과 지옥을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는 현세의 삶에 대한 판결로서 믿음의 선한 삶을 산 자들은 천국에서 복락과 안식의 삶을 살게되고, 세상의 열락과 악한 삶을 산 자들은 불못으로 불리워지는 지옥에서 보응과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

(2) 현세의 삶의 결과에 대한 내세 하나님 나라의 보상

비유에서 부자는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고 연락을 즐겼다. 거지 나사로는 피부병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서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워며 살았다. 거지 나사로가 신앙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그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속에 안긴 것으로 보아서 살았을 때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안식(安息)하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청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5-26). 아브라함은 내세는 현세의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는 건너갈 수 없는 심연(深淵)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에 부자는 청한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부자는 저승에서 온 사람이 현세로 가서 내세의 실재를 알리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부자는 저승에서 온 사람의 증언을 사람들이 믿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 지옥의 실재에 관한 징표로서 나사로를 저승에서 온 사람으로 자기 집 가족들에게 보내어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성경말씀을 하나님 나라와 지옥 실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와 표준으로 제시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란 구약의 증거를 말한다. 오늘날 신약시대 우리들에게는 신약의 증거가 보태진다. 신구약 성경 말씀의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저승에서 온 사람의 증언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는 인간의 체험적 진리로 대체(代替)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는 각종 각색의 인간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다양한 체험적 간증 이야기로 대체될 수 없다.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증거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최선의 증거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의 못자국을 만지고서야 믿는 도마를 행하여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나거나 내세를 보고 왔다는 신앙 간증이 반드시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나 박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동생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 기적에 의하여 많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층에서는 최고의회가 소집되어 나사로 부활 기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룬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군중이 동요하면 로마인들이 개입할 수 있는 안보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다. 이런 경우에는 나사로 부활 기적이 바른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자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드는 것이다(요 11:45-53). 기적 신앙이 전도의 만능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나 박해의 계기된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실재 그리고 이 세상의 질서와 다름

이 비유는 단지 내세에 대한 상징으로 끝나지 않고 보이는 세상의 배후에 영적 실재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실재에 관하여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부자가 머문 곳은 하데스(Hades, 음부)라고 하는데 그곳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로서 나중에 죽은 자를 최종 상태에 가두는 게헨나(Gehenna, 지옥)는 아니다. 부자가 음부(陰府)의 불꽃에서 고통 중에서 괴로워하면서 목이 타 갈증을 풀도록 천국의 청량수를 그 손가락 끝에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청은 받아들려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상호교류 불가하며, 연결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국과 지옥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두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설교에서 자주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눅 13: 28-29).

부자의 증언에 의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면(免)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눅 6:29)이라고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것이란 율법과 예언을 경청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매우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의 의무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그리고 부자가 만일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운명, 이행할 경우 받을 복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9-10). 이외에도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 여러 곳에 궁핍한 자 학대에 대한 형벌이 언급되어 있다(출 22장 20-26; 사 10:1-4; 암 2:6-16; 암 5:11-12; 암 8:4-10; 합 2:6-16). 죽은 자 가운데서 누군가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에서 실현되었다. 그런데 모세와 예언자들의 음성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부활소식과 부활하신 분이 새롭게 하신 회개의 요구와 복된 소식을 쉽사리 거부한다. 율법과 예언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는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나 성경은 곧 나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고 하셨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6086




비유 해석 중요 서적
  1.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
  2. 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이레서원, 2017)
  3.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 『예수님의 비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4. 존 팀머, 『하나님 나라 방정식: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5. 홍창표, 『하나님 나라와 비유』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4)
  6. 유진 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2008)
  7. 권성수,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횃불, 1993)
  8.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 (이레서원, 2001)
  9. 이국진,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 이야기』 온라인 출간 서적: http://iwbs.org/?p=76</ref>
  10. Craig L.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VP, 1990)

비유 목록

번호 사건 마태복음(마태오복음서) 마가복음(마르코복음서) 누가복음(루카복음서) 요한복음(요한복음서)
1 자라나는 씨
Mark 4:26-29

2 두 빚진 자

Luke 7:41-43
3 말 밑의 등불 Matthew 5:14-15 Mark 4:21-25 Luke 8:16-18
4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Luke 10:30-37
5 밤중의 벗

Luke 11:5-8
6 어리석은 부자

Luke 12:16-21
7 지혜롭고 어리석은 건축가 Matthew 7:24-27
Luke 6:46-49
8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Matthew 9:17-17 Mark 2:21-22 Luke 5:37-39
9 강한 자의 비유 Matthew 12:29-29 Mark 3:27-27 Luke 11:21-22
10 씨 뿌리는 자의 비유 Matthew 13:3-9 Mark 4:3-9 Luke 8:5-8
11 가라지 Matthew 13:24-30


1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Luke 13:6-9
13 겨자씨의 비유 Matthew 13:31-32 Mark 4:30-32 Luke 13:18-19
14 누룩 Matthew 13:33-33
Luke 13:20-21
15 진주의 비유 Matthew 13:44-46


16 물고기를 모는 그물 Matthew 13:47-50


17 감추인 보화 Matthew 13:44-44


18 비용의 예산

Luke 14:28-33
19 잃어버린 양 Matthew 18:10-14
Luke 15:4-6
20 용서하지 않는 종 Matthew 18:23-35


21 잃어버린 동전

Luke 15:8-9
22 방탕한 아들의 비유

Luke 15:11-32
23 불의한 청지기

Luke 16:1-13
24 부자와 나사로

Luke 16:19-31
25 주인과 하인

Luke 17:7-10
26 불의한 재판장

Luke 18:1-9
27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Luke 18:10-14
28 포도원의 품꾼들 Matthew 20:1-16


29 두 아들 Matthew 21:28-32


30 악한 농부들 Matthew 21:33-41 Mark 12:1-9 Luke 20:9-16
31 혼인잔치 Matthew 22:1-14
Luke 14:15-24
32 잎사귀 나는 무화과나무 Matthew 24:32-35 Mark 13:28-31 Luke 21:29-33
33 미더운 종 Matthew 24:42-51 Mark 13:34-37 Luke 12:35-48
34 열 처녀 Matthew 25:1-13


35 달란트와 므나 Matthew 25:14-30
Luke 19:12-27
36 양과 염소 Matthew 25:31-46


37 혼인잔치의 비유

Luke 14:7-14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
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
가 익으면 곧 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씨앗의 성장 원인은 씨앗 그 자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밭에 뿌려진 씨는 그 생명이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자라갑니다.
스스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추수 때에 밭에 곡식이 충실하게 여문 것을 보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래한 후에 성장해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있기 때문에 그 천국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그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것과 열심으로 수고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심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그 결실을 바로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심은 천국 복음을 자라나게 하여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수고의 결실을 즉시 얻지 못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치 씨앗을 심은 농부가 추수 때의 결실을 바라보며 날마다 맡은 일을 힘써 수고하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을 갖고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실로 천국 복음을 결실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심고 물주며 가꾸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고린도전서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나 그런 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풍성한 곡식의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천국 복음을 심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126:5-6, 고후 9:10).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는 사역자들만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자신들 안에 도래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 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맡은 일에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는 그를 하나님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서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일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방해와 장애도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호시탐탐 갖은 계략을 써서 미혹과 대적하는 일을 병행하여 믿는 자들을 주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자칫하면 믿음에 열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다든지 또는 배도의 길을 가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말고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음 생활에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결실 보게 될 것입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는 것은 굉장히 우매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베이컨은 우리가 학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편견이나 선입관에서 벗어나야 하며<우상론(偶傷論)>,
그 다음에 올바른 연구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귀납법>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자는 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사회적인 권력을 잡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당시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까지 들어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 이로 인해 걱정만 쌓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속담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22장에서는 “듣지 않으면 마음에 번뇌가 없다.”는 말로 무소유와 비어있음의 자유를 말합니다.
자연의 순리에 의해서 저절로 되는 것에 대하여 굳이 알지 못해도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알면 번뇌가 생기고 병이 되어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일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일을 망칠 때도 있습니다. <지네의 발 이야기; 15-20쌍, 170쌍>

물론 두 가지의 격언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좋겠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선택을 하며 지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동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고 지내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또한 꼭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

“스스로(은밀히) 자라는 씨”라는 제목의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하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바와 하느님이 이룩할 바 사이의 관계와 한계를 밝혀줍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그 씨가 싹이 트게 하는 땅과 자라면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역사의 흐름을 사람이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만들어집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로 온갖 비리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먹고 살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경제성장의 근간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입니다. 지금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우리가 기억하거나 알지 못해도 그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땅은 싹을 틔우고 하늘은 자라서 열매 맺게 합니다. 그 과정이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일은 땅과 하늘이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과 여유, 그리고 겸손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의 결과를 너무 성급하게 취하려 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일을 내가 책임지고 완성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설익은 열매를 취하거나 남의 몫를 빼앗는 사람들

인간이 담당하는 씨 뿌림의 원초적 노력으로 스스로 모든 것은 완성하겠다는 야욕이나 강제적 폭력을 구사하여 그것을 구축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비유는 한 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활동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적 힘이나 폭력의 사용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자기 행동의 결과를 바라면서 설익은 열매를 먹으려고 숙성제를 뿌리는 사람은 부도덕하거나 불의한 일을 합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결과를 자기가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역사에 대하여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자화자찬하면서 귀를 막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자화자찬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들어줄 수는 있지만, 전혀 국민들의 의사나 지지율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요즘 정치인들과 공무원의 상태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쌀소득등보전직접지불금” 제도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쌀 직불제는 “정부가 쌀 지배 농가 소득을 일정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해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쌀 산지 가격이 목표가격보다 낮으면 그 차이의 85%를 현금으로 보전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정부가 쌀 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지난 2005년 기존의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공공비축제로 전환하면서 벼농사 종사자의 소득 보전 수단으로 고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직불금을 수령한 공무원이 4만 명이 넘는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공개되고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의 직불금 신청으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불법수령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칼뱅의 신정독재와 ‘성시화’ 운동

개신교 역사에서 하느님 나라를 조급하게 이루려고 독재로 제네바를 통치했던 사람이 바로 칼뱅입니다. 제네바는 당시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 성경이었고 시의회· 행정· 사법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구현하는 데 쓰였습니다. 바로 ‘신정독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칼뱅이 지배한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인구 1만 6천여 명의 소도시 제네바에서는 58명이 사형(교수형 13명, 참수형 10명, 화형 35명)을 당했고, 76명은 추방당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습니다.

가톨릭의 교조주의에 맞서 관용의 정신을 말했던 칼뱅이었지만, 그는 제네바를 지배하면서 불관용의 화신으로 거듭났습니다. 칼뱅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톨릭을 이용해 삼위일체론의 오류를 지적한 스페인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제거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후 나중에 그를 체포한 칼뱅은 모든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즉 산 채로 불태우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칼뱅이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업적을 남겼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훗날 잘못을 깨달았고, 세르베투스가 화형된 자리에는 지금 “칼뱅의 결정은 종교개혁과 복음주의의 원칙인 ‘양심의 자유’에 어긋났다”는 자기비판을 담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 16세기 칼뱅의 망령이 21세기 한국에 부활했습니다. 서울을 봉헌한다고 망언을 한 이명박 씨를 시작으로 각 지자체별로 성시화 운동을 펼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시화 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준곤 목사는 “성시화 운동의 철학과 비전”이라는 글에서 노골적으로 “성시화 운동은 칼뱅의 제네바 성시운동을 모델로 한다.”고 합니다.

그들과 칼뱅이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그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을 향해 거룩해지는 일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욕심을 채우는 자기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과 이익을 채우기 위한 나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수고와 땀방울, 그리고 ......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40년을 살아오면서 구걸하던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이 사람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우리의 능력이나 신앙심(경건)으로 그를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이 말은 자칫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씨만 뿌리고 아무 일도 아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리고만 있으면 됩니까? 아니죠. 비록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땅과 하늘의 일이지만, 씨를 뿌리는 일뿐만 아니라 씨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밤과 낮에 자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일상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어쩔 수 없이 밤과 낮이 바뀌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농부에게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고 일과입니다.

한 톨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농부들의 수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밭을 갈아엎고 고르게 정리하고 잡초도 제거하고 거름을 주는 일은 농부의 일입니다. 쌀을 한자로 쌀 미(米)자를 쓰는 이유는 추수를 하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미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은 쌀알 하나를 만들려면 농부가 일곱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쌀알 한 알 한 알이 모두 고생과 노력의 산물입니다.

씨 뿌리고 가꾸는 사람의 수고와 함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뿌려 놓은 씨앗이 당장 싹이 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싹이 틀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에는 열매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 또한 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과 땅은 열매를 맺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더디더라도 기다려라. 믿음과 희망을 가져라. 하느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 씨 뿌리는 행동,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 믿음, 그 모험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모험 속에 하느님이 가담하게 되고, 그래서 추수는 약속됩니다.(시편 126:5-6) 그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할 때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하는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양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농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막 4장에는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막 4:1-9절로서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이야기
둘째는 26-29절로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이야기
셋째는 30-32절로 겨자씨에 대한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제3 독서는 위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

막 4:26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이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씨 뿌림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고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씨를 다룰 줄 안다는 것입니다. 수렵활동으로만 살았다면 인간 문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는 금년에 집 마당 한 구석에 대 여섯 평의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거기서 나는 채소를 먹습니다.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은 상추 종류고, 다음으로는 깻잎과 고추와 오이입니다. 앞으로 토마토와 가지와 호박이 나올 겁니다. 텃밭에 그물망으로 펜스를 쳤습니다. 펜스가 없으면 고라니가 다 먹어치웁니다. 동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수렵활동으로만 먹고 삽니다. 그들의 삶은 고단하고, 더 나가서 살벌하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인류 조상들도 그렇게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삶의 기본은 씨를 뿌리는 겁니다. 지금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이런 전통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를 주인공으로 놓고 말씀을 따라가 보십시오. 어느 농부의 손에 의해서 밭에 심겨졌습니다. 그는 어두운 땅 속에 갇혔습니다. 종자 씨 주머니에 담겨있을 때는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제 땅속에는 외톨이로 그 상황을 버텨내야만 합니다. 낮에는 따뜻한 온기가 있지만 밤이 되면 춥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피부가 썩기 시작하다가 몸체도 썩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몸에서 가녀린 줄기가 삐져나오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자기 몸을 뒤덮고 있던 흙을 걷어내고 세상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땅 밖은 별천지였습니다. 햇빛과 물과 탄소가 자신의 몸 안에서 생리적 작용을 일으키면서 몸이 쑥쑥 자랍니다. 자신의 몸이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힘이 자기를 그렇게 밀어 올리는 걸 느낄 뿐입니다.

 

농부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다시 보실까요? 그는 추수 때가 올 것을 기대하고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좋은 씨를 가려서 보관하고, 밭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쟁기질을 하고, 적당한 퇴비를 주는 겁니다. 씨를 뿌리고 며칠 뒤에 밭으로 나갔습니다. 아주 작은 떡잎이 보입니다. 얼마 후에는 부쩍 자란 줄기가 보였습니다. 때가 되자 이삭이 패고 열매가 달렸습니다. 그런 과정에 농부가 직접 관여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자고 씻고 먹고, 다른 일을 하다가, 나중에 씨가 움이 터서 자란 결과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막 4:28절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여기서 강조점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 것처럼, 또는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온갖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처럼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잠간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다 저절로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들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공기가 없으면 5분 이상 버텨낼 수 없습니다. 공기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지구 생태환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태양 빛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물도 필수입니다. 빛과 물은 인간이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닙니다. 공기와 태양과 물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대개의 걱정은 공연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밤잠을 못잡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실연당한 것으로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물론 감당하기 힘든 큰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파산하면 크게 낙담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견뎌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극단의 경우보다는 사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서 근심 걱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놓쳐서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막 4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다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이 건설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 종류의 집단이 거기에 속했습니다. 첫째는 사회 혁명가들입니다. 이들은 무력 혁명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평소에 칼을 품에 숨기고 다니다가 친(親)로마 매국노 등을 처단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계열에 속한 이가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둘째는 율법학자들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서기관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교 신학자들로서 율법을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일궈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실제 삶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는 이들입니다. 나름으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사회 정의를 세워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휴머니즘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가 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그런 노력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행하고 이루시는 겁니다. 이런 말이 멀리 느껴지시는지요. 오늘 제3 독서의 두 번째 비유를 읽으면 이 사실을 좀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겨자씨 비유

막 4:30-32절에는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겨자씨만이 아니라 씨는 다 작습니다. 코스모스와 채송화 씨는 웬만해서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지난 몸에 저는 집 마당 여러 곳에 해바라기 씨를 심었습니다. 그게 지금 6,70센티미터 크기로 자랐습니다. 앞으로 2-3미터 가까이 자랄 겁니다. 겨자씨는 더 작지만 3-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본문 32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와 줄기를 각각 따로 본 것으로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외계인이 본 것으로 합시다. 어떤 느낌이 들까요? 씨는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작습니다. 줄기는 씨에 비해서 수천, 수만, 수십만, 그 이상으로 큽니다. 모양도 완전히 다릅니다. 두 가지를 서로 연결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변해서 거대한 줄기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매일, 매순간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기적의 세계, 마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일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런 것에 눈을 뜬다면 다른 일로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공연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도사들에게나 어울리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당장 돈 벌고 인생 설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하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 신비와 그 능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건 곧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추상적으로만 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상투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물과 세상 이치와 인간관계와 역사를 뻔한 것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상투성입니다. 그런 상투성은 영혼을 질식시킵니다. 그런 삶은 실제 숨을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에게나 어울립니다.

 

예수 사건은 일종의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 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형제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혹은 메시아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최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양측 사이에 충돌이 심해지면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이를 주도한 집단은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대법원입니다.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볼품없는 겨자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생전에 이루신 일도 사실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는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생애라고 해봐야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80세를 살았고,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63세를 살았습니다.
이들은 이미 생존 시에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물적, 인적 토대를 탄탄하게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실패였습니다.
마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썩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운명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다는 것이 사도신경이 전하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었다는 본문에 딱 어울리는 일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벌어진 겁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은 일련의 씨 비유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운명이 하나님 나라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가복음 독자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설명에 실감이 덜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몰이해나 오해, 또는 무관심이 그 대답입니다. 너무 현란하여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이 세상의 삶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들어도 ‘그게 뭔데!’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죽어서 가게 될 천당인가, 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죽어 천당이야,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신앙언어와 세상언어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게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은 곧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걸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걸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완성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인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함으로써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쪽이 진리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이 그걸 그대로 인정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진리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옳은지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평화가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영혼의 풍요로움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씨 비유’ 두 가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씨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비유였습니다. 두 비유 모두 씨와 열매, 또는 씨와 줄기의 관계를 밑그림으로 합니다. 씨는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줄기와 꽃과 열매는 화려합니다. 지금 우리를 포함한 세상은 씨와 같습니다.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곧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를 믿는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씨처럼 볼품이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풍성한 꽃이나 열매입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기쁨과 평화의 능력이 그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연한 것으로 인해서 좌고우면, 일희일비, 좌불안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저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이런 삶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지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씨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렇습니다. 씨만 보면 꽃과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꽃과 열매는 씨에 은폐되어 있어서 신앙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일단 씨를 보지 말고 씨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삶의 조건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 약속된 미래에 비하면 지금 살아가는 조건의 차이는 미미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나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부활의 빛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친구나 가족이 많아서 늘 자랑스럽고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나 혼자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이나 생명이 완성될 부활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씨에는 약간의 상처가 있어도 생명만 남아 있으면 아무 상처가 없는 씨와 마찬가지로 결국 똑같은 꽃과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를 맺을 미래가 바로 저곳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멘!


















시편 119편 / 성경에서 가장 긴 장(176절) 말씀장


시편 : 5권으로 구성

제1권 / 1편 - 41편
제2권 / 42편 - 72편
제3권 / 73편 - 89편
제4권 / 90편-106편
제5권 / 107편 - 150편

시편 119편 / 성경에서 가장 긴 장(176절) 말씀장


영원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 (시편 제5권)

▶ 시편 제5권을 통해 감사와 찬양의 노래들을 공부한다.
▶ 시편 119편의 말씀에 대한 교훈과,
  120-134편의 올라가는 노래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을 자랑하는 제119편이 있다.

 총 176절로 구성되어 있는 119편은
 그 주제가 “말씀”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소위 “말씀장”이라고도 불린다. !!!

또한 히브리 알파벳 26자가
매 여덟 절씩 순차적으로 두운(頭韻)을 이루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히브리 시의 정수를 맛보게 되는 시편이다.

시편에는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 있다.
바로 시편 119편이다.
총 176절로 되어 있는 이 시의 전체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 이기 때문에
보통 “말씀장” 혹은 “말씀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

이 시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큰 주제가 다루어지는 가운데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뢰해야 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법규”나 “계명” 등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시가 구약 성경의 한 가운데에 있어서 그럴 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학적으로는
히브리 알파벳 22자가
순서대로 여덟 절씩
 총 176절에 두운을 이루고 있다.

1절에서 8절까지는 매 절이 “ אד”(알렙)으로 시작하고,
 9절에서 16절까지는 매 절이 בד“ ”(베드)로 시작하여,
 “ תד”(타우)에까지 이른다. (169-176절).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히브리 시의 정수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해 놓으신 것은
알렙에서 타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 이 으뜸이며,
그 말씀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것처럼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렙에서 타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의 주제여야 하고 모든 노래의 주제여야 한다. !!

우리의 언어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시인이라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라 할지라도
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물론 번역본에서는 이와 같은 두운을 맞추기 힘들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성경 ( [한글킹제임스성경]도 마찬가지.)에서는
매 여덟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마치 소제목처럼 붙여놓고 있다. !!!!!!!!!!!!!

우리가 비록 두운이 맞춰져 있는 히브리어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이 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만은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성경을 가리키는 명칭을 여덟 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의 법(1절), 그의 증거(2절), 그의 길(3절), 법규(4절),
규례(5절), 계명(6절), 의로운 명령(62절), 말씀(9절).
이어지는 절들에서도 이 용어들은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보물이다(14,72,127절).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재물보다 가치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의 상담자이고(24절),
우리 순례자들의 노래가 된다(54절).
또한 주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달며(103절),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된다(105,130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유산이며(111절),
우리를 정결케 하는 물과도 같다(9절).
성경은 우리에게 복을 주며(1,2절),
생명을 주고(25,37,40,50,88,93절), 힘을 준다(28절).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45절), 지혜롭게 한다(66,97-104절).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63절),
위로를 주며(50,76,82,92절), 방향을 제시해 준다(133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성경을 사랑해야 한다(97,159절).
 그리고 성경을 존중해야 한다 (72,127절).
성경을 공부해야 하며(7,12,18,26,27절), 마음에 간직해야 하고(11절),
 묵상해야 한다(15,23,48,78,97,99,148절).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12,27절).
무엇보다 성경을 신뢰해야 하며(42절),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지켜야 한다(1-8절).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 119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6. 올라가는 노래들

시편 제5권에는 “올라가는 노래”(song of degree)라는
매우 독특한 표제어가 붙어있는 15개의 시들이 있다(120-134편).

 대부분은 짧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윗의 저작임을 밝힌 시들은 네 편뿐이다(122,124,131,133편).

또한 “솔로몬을 위한” 올라가는 노래가 한 편 있는데(127편),
시편 전체에서 솔로몬이 언급된 제목은 단 두 편 뿐이다.

 나머지 한 편은 제72편으로 “솔로몬을 위한 시”라고 되어 있다.
둘 다 풍성한 복을 받는 내용이며,
솔로몬이 이룬 위대한 왕국과 잘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이 “올라가는 노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의견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것이다.

성전에 열 다섯 계단이 있는데,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부르는 노래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아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제목을 붙여 버렸다.
 물론 “성전에”라는 말은 원문 어디에도 없다.

이 견해는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증명될 수 있는 주장은 못된다.
 수많은 성전 성가대가 한 계단씩 올라가서
한 편 한 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카톨릭에서는
 “song of degree”를 “층계송”(層階頌, gradual song)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사 때 성경을 낭독하는 층대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물론 이것은 시편에서 말하는 “올라가는 노래”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서 “degree”는 각도, 단계 등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열 다섯 편의 시가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시편들을 읽어본다면 각 편이 넘어갈 때마다
점점 발전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의 시에서는 고난을 노래하고 뒤의 시에서는 승리를 노래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는 120편부터 순서대로 열 다섯 단계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세 편씩 묶어 단계적 발전을 다섯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발전 단계가 120, 121, 122편으로 이어지다가
123편으로 발전 되지 않고,
다시 123편에서 발전하기 시작해 125편으로 끝난다.
그리고 또 다시 세 번째 반복이 126편에서 시작하고,
 129편에서 네 번째 반복, 132편에서 다섯 번째 반복으로
발전 단계가 이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적 발전은 “고난 → 도우심 → 화평” 순이다.

120:1은 『내가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나를 들으셨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121:1-2은 『내가 나의 도움이 오는 산을 향하여 내 눈을 들어올리리니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께로부터 오는도다.』라고 노래한다.

이 찬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도우심을 바랄때,
 혹은 도우심을 받았을 때 드리는 감사 찬양이기도 하지만,
 문맥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도우심을 말한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라』(121:4).
 이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이라 말하여 교회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는 영적인 적용일 뿐 교리적인 해석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시편을 전체적으로 보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는 예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120편의 고난도 대환란과 연관된다.

 그리고 122편은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라.』(122:6)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사야 40:1-2의 “예루살렘의 위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메시야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이 누리는 화평을 말한다.

122:1-3에서는 “주의 전”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예루살렘의 번영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다윗 시대에 있었던 실제적인 번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언적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반복은 123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시인은 자비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멸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3절).
그리고 124편은 주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되셨음을 찬양한다(1절). ‘
그래서 이스라엘은 해방되고 승리한다(6,7절).
그리고 125편에서는 이 승리가 이스라엘 위의 화평으로 발전한다(5절).
세 번째 반복은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126:1).
그리고 “집을 세우는 것”으로 발전하는데(127:1),
이는 개인적으로는 각 성도 가정에 내리는 하나님의 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 집,” 즉 민족적 이스라엘이 굳게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128편에서는 “예루살렘의 번영”과 “이스라엘 위의 화평”으로 완성된다(5,6절).
네 번째 반복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적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129:5-8).
즉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130편에서는 주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고난에서의 구출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자백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주께 있으니...』(4절).
대환란 후에 그들은 회복되겠지만, 그것은 영적인 회복, 즉 회개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들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해 주실 것이다(8절).
그들은 용서를 비는 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린다(6절).
그리고 131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영원토록 주를 바라라고 권면한다(3절).
그들이 회복된 것은 자기들의 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야 한다(1절).

다섯 번째 반복은 고난받았던 다윗이 주의 성소를 간절히 바라는 노래다(132:1-5).
다윗이 주의 궤 앞에서 얼마나 주를 위해 열심을 다 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대상 15-17장).
이어지는 133편은 형제들이 하나되어 함께 거하는 것의 기쁨을 노래하는데(1절),
그것을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향유와 연관시킨다(2절).
이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그럼으로써 이 시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영적 축복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134편에서는 성소에서 주님을 송축하며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으로 끝난다(2,3절).

보는 바와 같이, 이 열 다섯 편의 올라가는 노래들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을 간략하게 노래한 시들이다.
시편 전체를 예언서에 비유한다면 이 올라가는 노래들은
 소선지서와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선지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올라가는 노래들은 시편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바,
예언적인 요소들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비록 고난을 받지만 영육간에 회복되어 번영을 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영적인 복을 충만히 받으리라는 기쁨의 노래들이기도 하다.

7. 영원한 찬양의 노래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은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146,147,148,149,150편).
이 뒷부분은 순수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예언적인 내용은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찬양의 이유에 대해서도 민족적이든 개인적이든 앞에서 다 말했었다.
이제는 그처럼 위대하신 주님에 대해서 찬양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과 그 위엄과 위대하심에 대해 찬양한다.

146편에서는 세상을 주관하시며 약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147편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148편에서는 천군천사들, 영적 존재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찬양을 선포한다.
 물론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잊지는 않는다(147:19; 148:14; 149:2).

149편에서는 왕과 함께 있는 군사들,
즉 성도들에게 주시는 크나큰 영광으로 인하여 찬양한다(149:5-9).
그리고 150편에서는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하여
마지막으로 힘차게 찬양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으로 시편은 위대한 예언서이며, 거대한 오라토리오다.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그분은 영원토록 송축받으실 왕이다.

 비록 예언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에 초점 맞춰 있지만,
이 모든 영광은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이요, 또 신부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영광을 주신 주님께
 어찌 감사와 찬양으로 송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한 찬양을 드리자.!!



성경에 없음이라는 구절의 의미


성경에 없음이라는 구절의 의미

마태복음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괄호의 의미?)
오래된 사본에는 없지만 후기에 기록된 사본에만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성경의 사본은 대략 5,800개 라고 합니다.
많은 사본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여 성경을 편집할 때 참고하였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장과 절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대분자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지면서 히브리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성경을 처음으로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칠십인 역이라고 합니다.

"없음"의 의미

마태복음 23:13-15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었으나 중요한 사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없음”이란 구절(13구절)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7:44, 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1
로마서 16:24

마태복음 17:20-21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킹제임스 흠정역 마태복음 17: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29의 말씀을 인용한 것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킹제임스 흠정역 마태복음 18:11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누가복음 19:10을 인용한 것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1. 성경의 저자는 몇 명인가? 40명

2. 성경은 몇 년 동안 기록되었나요? 1500, 1600년

3. 성경은 모두 몇 권인가요? 66권
구약 : 39권, 신약 27권

4. 성경 모두 몇 장인가요? 1189장
구약 : 929장, 신약 260장


5. 성경의 장을 구분한 것은?
13세기 영국 캔터베리 대감독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라틴어 성경

6. 성경의 절을 구분한 것은?
1551년 프랑스 스테파누스(Stephanus)
Stephanus Robertus, 1506~1559 그리스어 신약성경 4판

7. 성경의 절을 완성한 것은?
1560년 휘팅햄(William Whitingham) 

8.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9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 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무릇 모르드개의 시키는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일백 이십 칠도 유다인과 대신과 방백과 관원에게 전할쌔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과 유다인의 문자와 방언대로 쓰되.

9.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35
(한글 성경)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영어 성경) Jesus wept
(헬라어 성경)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표준새번역 성경 

손톱묶음 ( ) 

요한복음 1:38-42 / 랍비, 메시아, 게바

꺽쇠묶음 [ ]

마가복음 3:14 /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서 원본의 본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본문은 꺾쇠묶음 안에다가 넣었다.  

겹꺾쇠묶음 [[ ]]
마태복음 6:13 / 후대에 첨가된 본문으로 교회가 일찍부터 중요하게 여기고 읽어온 본문은 겹꺾쇠묶음

한글개역성경에서 괄호 묶음


축도의 성구


구약의 축도 민수기 6:24-26

신약의 축도 고린도후서 13:13

구약의 축도(아론)  민수기 6:24-26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신약의 축도(바울)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현대인의 성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새번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공동번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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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떤 곳에는 괄호로 표시가 되어있고, 또 어떤 부분에는 ‘절 없음’이란 표시가 나옵니다.
그냥 그런 표시 없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으면 혼돈되지 않고 더 좋겠는 데 왜 그런 표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nswer
성경은 약 40명의 저저에 의해 약 1500년 혹은 1600년에 걸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66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성경의 절 수는? 31,173절(구약 23,214절, 신약 7,959절)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이며,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단, 요한복음 11장 35절은 한글로는 그렇게 짧지 않게 보이지만 원어에는 두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영어로도 ‘Jesus wep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장은 13세기에 영국 캔터베리 대감독이었던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에 의해 라틴역 성경의 장이 시작되었고,
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스테파누스(Stephanus)에 의해 착수되었고 1560년 휘팅햄(William Whitingham)에 의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경 중에 괄호로 묶인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 절들이며, ‘절 없음’이란 표시도 사본에는 그 절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최대의 선물인 성경에 대한 여러 학자들과 신앙인들의 수고가 오늘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질문 /  
성경을 읽다 보면 (없음) 이라고 되어 있는 절들이 나옵니다.
(없음)이라고 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원래 성경에 있었는데, 후에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말인가요?

대답 / 

1. 원래 성경 저자들이 직접 기록했던 원본(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기록한 원본)은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만든 것입니다.
학자들은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성경 원본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2. 그런데 여러 가지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의 (마 6:13) 후반부를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기록된 부분이 괄호 안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후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있지만, 오래된 사본(더 중요함)에는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성경은 이 내용이 일부 사본에는 있지만 다른 사본에는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 구절을 괄호 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또 성경을 읽어 보면 질문한 것처럼 (없음)이라고 된 구절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비록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었지만, 원본에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역 성경의 (마 23:14)을 보면 (없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일부 사본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마 23:14)이 원본에는 없었는데, 이 내용을 후대에 사본 기록자가 첨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그 내용이 믿을 수 없지만, 일부 사본에는 포함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 절을 (없음)이라고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4. 이와 같이 성경 학자들은 성경 내용을 기록할 때에 괄호나, (없음), 또는 단어나 구절 아래에 난하주를 붙여서 사본 상의 문제가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본 상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여 성경 원본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돕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참고로 성경에 (없음)이라고 표시된 예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7:44,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1

로마서 16:24


민영진 목사님께

언젠가 햇순을 통해서 괄호 속 본문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있고 또 좋은 대답을 들었던 독자입니다.
요즘에 [새번역]으로 성서를 읽다가 ( ), [ ]. [[ ]] 이상 세 종류의 서로 다른 괄호가 사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을 지금 [새번역]으로 읽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그것은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일 것 같습니다.
같은 성경을 2004년 판 부터는 [성경전서 새번역]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돌머리 님께서 읽고 계시는 성경이 바로 이 [새번역]이라면 책 앞쪽 ‘일러두기’난에 이런 손톱묶음 ( ), 꺽쇠묶음 [ ]. 겹꺽쇠묶음 [[ ]] 등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있는 대로 간단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톱묶음 ( )

1) 본래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주석처럼 설명을 가한 본문을 이 괄호로 묶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 1장 38-42절을 보면 한 문단 안에 손톱묶음에 묶인 본문이 세 곳이나 나옵니다. 보시겠습니까?

35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

위의 경우는 ‘랍비’, ‘메시아’, ‘게바’는 다 히브리말입니다.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을 읽는 독자들, 특히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편집자가 그러한 히브리어를 번역해 주고 있는데, 그런 번역이 괄호 속에 들어 가 있습니다. ‘랍비’는 ‘선생’이란 뜻이고, ‘메시아’는 ‘그리스도’ 라는 뜻이고,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을 가졌다고 편집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길을 잃고 헤매는 본문도 손톱묶음 속에 넣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있었을 본문인데, 잘못 들어 와서 문맥의 흐름을 끊는 그런 본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솔로몬이 그 여왕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기록하는 왕상 10장 10-13절 안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본문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본문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런 다음에 여왕은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선사하였다. 솔로몬 왕은, 스바 여왕에게서 받은 것처럼 많은 향료를, 어느 누구에게서도 다시는 더 받아 본 일이 없다. 11 (오빌에서부터 금을 싣고 온 히람의 배들은, 대단히 많은 백단목과 보석을 가지고 왔는데, 12 왕은 이 백단목으로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계단을 만들고, 합창단원이 쓸 수금과 하프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백단목은 전에도 들여온 일이 없고, 오늘까지도 이런 나무는 본 일이 없다.) 13 솔로몬 왕은 스바의 여왕에게 왕의 관례에 따라 답례물을 준 것 밖에도, 그 여왕이 요구하는 대로,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 주었다. 여왕은 신하들과 함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오빌에서 금을 싣고 온 히람의 배들에 관한 기록(왕상 10:11-12)은 왕상 9장 27-28절 부근 어딘가에 놓여 있어야 할 본문입니다.


꺽쇠묶음 [ ]

이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서 원본의 본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본문은 꺾쇠묶음 안에다가 넣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새번역] 막 3:14)


겹꺾쇠묶음 [[ ]]

후대에 첨가된 본문이지만 교회가 일찍부터 중요하게 여기고 읽어온 본문은 겹꺾쇠묶음 속에 넣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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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성경은 독일의 쿠텐베르그1440년 경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전문 필사자(筆寫者)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베껴서(handwritten) 재판(再版)을 제작하고 보존 계승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간혹 후대의 필사자들이 그 의미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원문에는 없는 구절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자가 종이(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잉크와 펜을 사용해 직접 기록한 최초의 성경 원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일이 너무 지나 낡았던지 분실 소실 등의 이유로 다 없어졌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현존하는 고대 문서들의 거의 전부가 필사본입니다.
후대 필사자들이 참고한 성경원본도 자기들이 물려받은 또 다른 필사본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빙성과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까닭은 성경의 초기 필사자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정말로 보물 다루듯이 아주 소중하게 취급했습니다.

신약성경 필사도 믿음이 좋은 자만 맡았기에 누구라도 성경에 더하거나 제하면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다는 요한계시록 22:18-19의 경고를 엄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성경의 필사자들이 실수를 절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나 필사자들도 사람인지라 의도치 않은 오류가 나올 수 있고, 또 극히 부분적이지만 내용을 첨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수천 개가 넘게 남아있는 사본들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그런 오류 내지 추가 조항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원문의 의미를 손상하거나 비 진리적인 오류는 전혀 없고 무시해도 될 만한 사소한 것들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없음)으로 표시된 것은 초기의 권위 있는 다수의 사본들에는 없고 후대의 비교적 중요하지 않는 소수의 사본들에 다른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그렇다는 사실만 참조하면 되고 무시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추가 구절이 원문의 뜻에 모순 상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추가된 구절을 찾아서 기입해 넣고 함께 연결해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없음)이라고 표시된 기존의 성경이 더 권위 있는 초기사본의 번역본이므로 더욱 원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21의 "없음"에는 후대의 일부사본에 마가복음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을 인용해 놓았습니다.

필사자로선 19절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추가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고 이미 충분히 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11의 (없음)에도 누가복음 19:10의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추가구절은 무시하고, 사실상 주석서를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추가되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10절과 12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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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주로 쓰는 한극개역판 성경이나 NIV영어성경에 보면 신약성경에서 마17:21절 같이 "없음"으로 되어있는 성경절이 13구절 나오는데 원본이나 사본에 내용이 소실되어 내용이 확실하지 않아 번역이 안 된건가요 ?

그리고 말씀보존학회라는 곳에서는 킹제임스성경에서 번역된 킹제임스한글판에는 그 구절을 번역해 놓았는데 소실되었다면 어떤 과정이나 근거가 있어서 번역을 한 것입니까 ?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성경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가 궁금증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성서공회 홈페이지를 검색하다가 아래의 질문과 답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족할 만한 답변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더 좋은 답변을 드릴 만한 실력이 없어서 아래의 것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늘 말씀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질문:신약 성경 속에 (없음)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왜 이런 부분이 있습니까?

답변:

마태복음 17장 21절을 찾아보면, 본문이 있어야 할 곳에 본문은 없고, 그 대신에, 괄호가 쳐 있고 그 괄호 안에 "21절 없음"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난외주 1번을 보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그 지시를 따라서 난외주 1번을 보면, "어떤 사본에, 21절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본이 마가복음 9장 29절에서 따다가 첨가한 것입니다. 

 

18장 11절도, 본문이 없고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는, 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사본이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가져다가 여기에 첨가시킨 것입니다.

 

"-절 없음"이라고 된 부분은 고대 사본에 없는 본문입니다. 3세기 전후의 파피루스 사본이나, 4-5세기의 대문자 사본에는 없는 본문들입니다. 11세기 전후의 소문자 사본에만 나오는 본문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을 가지고 절을 구분하고 거기에 고유 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의 경우는, 절만 빼고, 절 번호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은 확대된 사본입니다. 확대된 내용은 다른 어느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련 구절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있는 난외주에서 거기에 첨가되어 있던 본문을 보면 결코 생소한 본문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절없음'이라는 구절이 신약성경에 13번 나타납니다.

왜 절이 없을까? 없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뺄 일이지하고 성도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입니다.

성경에 따라 밑에 작은 글씨로 다른 사본에는 '...' 구절이 있다고 설명해주는 성경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성경 중 대표적인 개역한글, 개역개정, 새번역,공동번역 성경은 동일하게 이 13곳을 제거하고 성경에 따라 밑에 각주로 설명을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KJV(킹 제임스 번역성경)의 한국 번역판에는 이 삭제된 구절들을 원문에 그대로 실어놓았습니다. 사실은 이 부분-삭제한 부분의 타당성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기도 합니다.

 

우선 킹 제임스번역 성경이 기초한 원어 성경은 비교적 훗날에 완성된 안디옥-비잔틴 계열(Byzantine family of manuscripts 500 to 1000 AD)-소문자 중심으로 기록된 사본들이 원문입니다. 이것을 흔히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성경에는 지금 삭제된 구절들이 모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킹 제임스 번역본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것이 바로 원본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구절들을 뺀 번역성경들은 비잔틴 계열의 원문보다 훨씬 오래전 존재하여 원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원어성경( ‘Alexandrian Family’ manuscripts 200 to 400 AD)-대문자 중심으로 기록된 사본들을 참고하여 지금 삭제된 내용들은 더 오래전에 존재하는 원본에는 없었던 것인데 훗날 첨가되었기 때문에 삭제하거나 또는 각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서로 부딪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한글성경이나 개역 개정성경은 이 알렉산드리아-오리겐 계통의 원본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것임은 맞습니다. 다만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원본에 가까운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계열의 성경 장절 구분이 일단은 1500년대에 성경을 인쇄한 프랑스 출신의 궁정 인쇄업자인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의 장절 구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어로 신약성경을 인쇄하면서 그리이스어학자인 아들의 도움을 받아 장절을 구분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 구절을 빼거나 넣는 것으로 신학적 토론이 치열한 성경의 '장절 구분'을 그냥 인쇄업자가 해냈다는 사실이 조금 실소가 나오긴 하는데 역사현실입니다. 신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면 인쇄업자가 해결해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성경은 원본에 더욱 가깝다고 여겨지는 신구약 원본에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신뢰할만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삭제된 문장들을 삽입해도 큰 신학적 오류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직접 읽어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삭제된 부분을  그대로 넣어야한다는- 킹제임스 버전 성경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토론 중에는 수긍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중요한 것은 그 본문을 넣고 빼는 것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리는데 있습니다.


아래는 대한성서공회의 답변입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절 없음"이라고 된 부분은 고대 사본에 없는 본문입니다. 3세기 전후의 파피루스 사본이나, 4-5세기의 대문자 사본에는 없는 본문들입니다. 11세기 전후의 소문자 사본에만 나오는 본문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을 가지고 절을 구분하고 거기에 고유 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의 경우는, 절만 빼고, 절 번호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11세기의 사본은 확대된 사본입니다. 확대된 내용은 다른 어느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련 구절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절 없음"이라는 표시가 있는 난외주에서 거기에 첨가되어 있던 본문을 보면 결코 생소한 본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 개정 신약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총 13절의 '없음'이 있습니다.

  1) 마태복음 17:21

  2) 마태복음 18:11

  3) 마태복음 23:14

  4) 마가복음 9:44

  5) 마가복음 9:46

  6) 마가복음 11:26

  7) 마가복음 15:28

  8) 누가복음 17;36

  9) 누가복음 23:17

10) 사도행전 행 8:37

11) 사도행전 15:34

12) 사도행전 28:29

13) 로마서 16:24

<직접 읽어보기>

전체문맥 이해를 위해 개역개정과 한글 KJV 앞 뒤 한절씩 추가했습니다.

1) 마태복음 17:21  

< 개역개정 성경>

[마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1]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마17:19]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따로 나아와서 말씀드리기를 "어찌하여 우리는 그를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하니

[마17: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져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니라.

[마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 

 

2)마태복음 18:11

< 개역개정 성경>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1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마18:9 또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뽑아 던져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을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마18:10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들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있느니라.

마18:11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


 

3) 마태복음 23:14

< 개역개정 성경>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4 (없 음)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한글 KJV번역 성경>

마23: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23:13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사람들에게 천국을 닫아 버려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

마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23:1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 

 

4) 마가복음  9:44

< 개역개정 성경>

 막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막9:42 또 나를 믿는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그의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3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5) 마가복음 9:46

< 개역개정 성경>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 음)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6 (없 음)

막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뻬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막9:43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5 네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막9:46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7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뽑아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니라. 

 

6) 마가복음11:26

< 개역개정 성경>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11:26 (없 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막11: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다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을 용서하시리라.

막11:26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더라. 

 

7) 마가복음 15:28

< 개역개정 성경>

 막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막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15:28 (없 음)

막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 한글 KJV번역 성경>

막15:26 죄명을 쓴 명패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였고

막15:27 주와 함께 강도 두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한 사람은 주의 오른편에, 또 한 사람은 주의 왼편에 있더라.

막15:28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

막15:29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짓는 자여,

 

8) 누가복음 17;36

< 개역개정 성경>

 눅17: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17:36 (없 음)

눅17: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눅17:35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눅17:36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눅17:37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어디니이까?"라고 하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함께 모이느니라."고 하시더라.

 

9) 누가복음 23:17

< 개역개정 성경>

 눅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눅23:17 (없 음)

눅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눅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 한글 KJV번역 성경>

눅23:15 헤롯 역시 잘못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로 보냈음이라. 보라, 그가 사형을 당할 만한 일을 행한 것이 없노라.

눅23:16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한 후 놓아 주겠노라."고 하니라.

눅23:17 (명절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게 되어 있더라.)

눅23:18 그러자 그들이 일체가 되어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처단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하니

눅23:19 (그는 그 성읍에서 난동을 부리고 살인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자더라.)

 

10) 사도행전 8:37

< 개역개정 성경>

 행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행8:37 (없음)

행8: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 한글 KJV번역 성경>

행8:36 그리하여 그들이 길을 따라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내시가 말하기를 "보라, 여기 물이 있도다. 내가 침례를 받는데 무슨 거침이 있느뇨?"라고 하니

행8:37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행8:38 그리고 나서 그가 마차를 세우라고 명한 다음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로 내려가서 빌립이 그에게 침례를 주니라.

 

11) 사도행전 15:34

< 개역개정 성경>

행15: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행15:34 (없음)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 한글 KJV번역 성경>

행15:33 그 곳에서 잠시 지체한 후 그 곳 형제들로부터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 사도들에게로 가려 하되

행15:34 실라는 오히려 그 곳에 머무는 것을 좋게 여기니라.

행15:35 바울과 바나바도 안티옥에 머물면서 많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전파하니라.

 

12)사도행전 28:29

< 개역개정 성경>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행28:29 (없 음)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한글 KJV번역 성경>

행2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고 하더라.

행28:29 그가 이 말을 마치니 유대인들이 자리를 뜨더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상당한 쟁론이 있더라.

행28:30 바울이 만 이 년을 자기 셋집에서 지내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여

행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이 담대함으로 하였더라. 

 

13) 로마서 16:24

< 개역개정 성경>

 롬16:22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3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16:24 (없음)

 < 한글 KJV번역 성경>

롬16:22 이 편지를 쓴 나 터티오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3 나와 온 교회의 집 주인인 가이오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도시의 재무관인 에라스토와 형제 쿠알토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롬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 '없음' 본문만 따로 모음>  < 한글 KJV번역 성경>

1)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 

2) 마태복음 18:11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

3) 마태복음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4) 마가복음 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5) 마가복음 9:46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6) 마가복음 11:26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더라."

7) 마가복음 15:28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

8) 누가복음 17;36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9) 누가복음 23:17 "(명절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게 되어 있더라.)"

10) 사도행전 행 8:37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11) 사도행전 15:34 "실라는 오히려 그 곳에 머무는 것을 좋게 여기니라."

12) 사도행전 28:29 "그가 이 말을 마치니 유대인들이 자리를 뜨더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상당한 쟁론이 있더라."

13) 로마서 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신학적 입장은 조금 달라도 성경번역 역사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 것같아 참고로 싣습니다.

 

 

 

안티오크 계열
(ANTIOCHIAN LINE)

알렉산드리아 계열
(ALEXANDRIAN LINE)

①안티오크 원문(Antochian Text)

①알렉산드리아원문(Alexandrian Text)

②비잔틴 원문(Byzantine Text)

②이집트 원문(Egyptian Text)

③시리아 원문(Syrian Text)

③국부(지역) 원문(Local Text)

④황제 원문(Imperial Text)

④헤시키안 원문(Hesychian Text)

⑤종교개혁 원문(Reformation Text)

⑤소수 원문(Minority Text)

⑥보편적 원문(Universal Text)

 

⑦전통 원문(Traditional Text)

 

⑧수용 원문(Textus Rreceptus)

 

⑨다수 원문(Majority Text)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 삭제된(없는) 구절들

 

KJV(킹제임스)
NIV
개역 한글
마 17:21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마 18:11
 인자가 온 것은 길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제'
(없음)
마 23:14
 화 있으리라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가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런즉 너희가 더욱 큰 정죄를 받으리라.
'삭제'
(없음)
막 7:16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삭제'
'15절을 잘라서 16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16절은 슬쩍 삭제해 버림'
막 9:44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막 9:46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삭제'
(없음)
막 11:26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더라.
'삭제'
(없음)
막 15:28
 그리하여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으니 말씀하시되, 또한 그분께서 범법자들과 함께 헤아림을 받으셨도다, 하였느니라.
'삭제'
(없음)
눅 17:36
 두 남자가 들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남게 되리라, 하시니라.
'삭제'
(없음)
눅 23:17
 (이는 그가 그 명절에 필히 한 사람을 그들에게 놓아 주어야 함이라.)
'삭제'
(없음)
요 5:4
 이는 천사가 어떤 때에 못에 내려와 물을 요동시키는데, 물이 요동한 후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케 됨이라.
'삭제'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행 8:37
 빌립이 말하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말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삭제'
(없음)
행 15:34
 실라는 거기 그대로 거하는 것을 기뻐하더라.
'삭제'
(없음)
행 24:7
 총대장 리시아스가 우리를 습격하여 심한 폭력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빼앗아 가고는
'삭제'
'8절을 잘라서 7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7절은 슬쩍 삭제해 버림'
행 28:29
 그가 이 말을 한 뒤에, 유다인들이 떠나 자기들끼리 큰 논쟁을 벌이더라.
'삭제'
(없음)
롬 1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삭제'
(없음)
요일 5:7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삭제'
'6절의 끝부분을 잘라서 7절로 만든 다음 원래의 7절은 슬쩍 삭제해 버렸음'

 

 

이 구절들은 없어야 되는 구절인가?

이 구절들은 없어도 되는 구절인가?

이 구절들이 없기때문에 논쟁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고린도후서 2장]

17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과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갈라디아서 1장]

7 Which is not another; but there be some that trouble you, and would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신약성경에서 "없음"이 생기게 된 이유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절 없음... 27절, 28절, 29절 세 절에서 28절이 없는 내용이라면 굳이 '없음' 표시를 하지 않고 29절을 28절로 바꾸면 될텐데 왜 굳이 (없음)이라는 표시를 해놓았을까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약성경의 사본과 인쇄본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첫째, 사본이라 함은 필사본의 약자로 손으로 배껴 쓴 본문을 말합니다.

현재 신약성경의 사본은 2008년 4월 기준 5,760개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사본은 5천개가 넘는 방대한 양이 있지만, 어느 사본도 100% 일치하지 않는 특징을 지닙니다.
또한 후대의 사본일수록 고대의 사본보다 양이 많다는 특징 또한 가집니다.

둘째, 인쇄본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후 인쇄기에 의해 쓰인 성경 본문을 말합니다.

최초의 그리스어 인쇄본은 에라스무스 라는 사람이 찍어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6세기의 인문주의자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에라스무스가 히메네스라는 스페인의 추기경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이루어진 성경을 만들고 교황청의 허가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신도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히메네스의 성경에 대한 교황청의 허가가 오랜 기간 동안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최초의 그리스어 성서 인쇄본 제조자의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고작 몇개월에 걸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만들어냈고, 그가 구한 그리스어 사본은 12세기의 사본들이었습니다. 앞서 사본에 대해 말씀드릴 때, 사본은 후대로 갈수록 양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12세기의 열등한 사본을 가지고 그리스어 인쇄본을 만들었고, 그 이후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 형제들이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인쇄본을 토대로 여러 특성을 지닌 신약성서를 인쇄하였습니다.

첫째, 스테파누스의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제 3판과 제 4판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경이 밑에 주석이 달려있지요.
이를 본문 비평 장치라고 하는데, 스테파누스 제 3판 성경에서 본문 비평 장치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제 4판에는 최초로 장, 절 구분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장과 절을 구분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 절 구분은 엉성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누스 제 4판 성경 이후로 나온 성경들이 거의 다 이 성경의 장, 절 구분을 따랐기 때문에 오늘날 장과 절이 내용상 단락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둘째, 베자 성경은 이 성경이 제임스 왕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의 번역 대본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셋째, 엘제비어 형제의 성경에서 '수용본문(Textus Receptus,TR)'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용본문'이라는 말은 엘제비어 형제가 자신들의 성경을 홍보할 때 쓴 말입니다.
"귀하는 이제 모두에게 수용되는 성경 본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성경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절 없음 현상'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스테파누스의 성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스테파누스의 성경은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에라스무스 성경은 12세기의 그리스어 사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사본은 후대로 갈수록 양이 점점 많아진다는 말씀 또한 드렸습니다.

스테파누스의 성경에서 처음 장 절이 구분되었으나 이는 후대에 갈수록 첨가된 내용이지 고대 사본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테파누스 성경보다 훨씬 전 시대의 사본이 발견되고 있고 연구되고 있는 지금, 고대 사본에 신빙성을 부여하며 스테파누느 성경에 있던 절을 뺀 것이며, 따라서 절 없음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침례회, 말씀보존학회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성경이며, 나머지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 하는 주장 중에 '절 없음 현상'도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게 있느냐며, (없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린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없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린 것이 아닙니다.
후대로 갈수록 사본의 양이 점점 불어났던 것은, 이스라엘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을 배려하여 보충 구절이나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필사자들이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본보다 더 가치 있는 고대 사본을 토대로 성경을 번역했고, 이미 널리 쓰이는 스테파누스 성경식 장 절 구분을 같이 쓰면서 후대의 사본에만 있는 구절을 (없음)이라고 처리한 것입니다. 또 밑에 각주를 달아서, '어떤 사본에는 몇 절에 ~~라는 구절이 있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글이 성경을 읽다가 (없음)이라는 표시를 보고 혼란을 느꼈거나, 말씀보존학회의 궤변으로 기존 성경을 불신하게 된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료출처 /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민경식, 신약성서 손에 오기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8]

성서가 현대에 이른 경위

1800년에 16세의 메리라는 소녀는 성서 한 권을 사러 맨발로 40km 걸어갔습니다.
메리는 6년 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갔는데, 도착하여 보니 성경이 다 팔렸다는 애기를 듣자, 풀이 죽은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것을 본 교직자는 너무나 감동되어 자기 성서 한 권을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이 일 있은 후에 그 교직자는 성경을 필요로 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런던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논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 1804년 영국 및 외국 성서 공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취지는 - 저렴한 가격으로 성서를 여러 언어로 인쇄, 공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확산되어 1813년 성서공회가 독일, 네델란드, 덴마크, 러시아에 설립되었습니다.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수천 개가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번역 사업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직접 자신의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영어 성경 제임스 왕역을 근거로 번역 작업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인들이 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고 방식이 다르고, 표현 방법도 다르고, 본 적이 없고, 어떤 언어와도 비슷한 점이 없고, 사전이나 통역자가 없을 때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혼동을 일으킵니다.

예를들면 “하늘의 아버지”의 표현을- “창공의 빛깔을 띤 아버지”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현지인 교사의 도움으로 번역 작업을 하였습니다.
-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성서 번역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저드슨 선교사 부부였습니다 그는 미얀마어로 번역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824년 미얀마에서 국왕의 관리들이 이 선교사 집을 급습하였습니다.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몰래 번역된 성서 원고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선교사 남편은 국가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부인은 곧 출산할 예정이었지만, 베개 속에 원고를 넣어 옥중 남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부인은 이런 호된 시련에다 병까지 겹쳐 부인은 건강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남편이 석방된 지 얼마 안 되어 - 용감한 부인과 딸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남편은 가슴이 찢어질 듯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번역 일을 계속하여 1835년 미얀마 성서을 완역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서 번역을 위해 헌신적인 남녀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서의 확실성과 예수를 포함한 성서 인물들이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서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하였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먹구름같이 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7세기까지만 해도 신약 성서의 가장 오래 된 사본이 10세기, 즉 원본이 기록된 지 900년 이상이 흐른 후에 나온 것입니다. 내용의 변경이나 부주의한 복사자의 실수로 인해 그리스도의 소식이 손상되지 않았나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성서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학문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독일의 천부적인 언어학자인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입니다.

4년 동안 유럽 내의 최상의 도서관을 샅샅이 살펴본 후 - 1844년 5월에 고대 성서 사본을 찾기 위해 중동 전역을 여행하며 시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도착하였습니다 - 허락받아 도서실을 며칠 동안 뒤졌지만 성과가 없없습니다.

막 떠나려는데 불쏘시게로 쓰려고 바구니에 넣어 둔 양피지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책이었습니까?
가장 오래 된 성서 사본 129장을 발견하고는 깜작 놀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거절당하자, 사정하여 43장 받았습니다.

11년 후에 두 번째로 찾아갔지만 성과가 없업습니다.
6년 후 세 번째로 찾아갔지만 역시 헛수고라고 생각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한 관리인이 자기 방으로 초대 하여 붉은 천에 싼 책장 한 뭉치를 불쑥 내려놓았습니다.

놀랍게도 15년간 찾아 헤맨 진주였습니다.
찾고 있는 성서 사본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 전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나이 책자본입니다.
기원 3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사본은 그 당시 권위 있는 사본보다 600년 이상 오래 된 것이 었습니다.
가장 오래 된 사본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 동안 성경 본문이 고쳐졌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까?
오늘날 성경 본문과 기본적으로 동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변경시킨 몇 군데가 발견되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삼위일체를 지지하기 위해 본문을 변경시킨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디모데후 3:16입니다.
시나이 사본과 가장 오래 된 사본에는 "그분으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사본에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변경되어 있엇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위조 문구는 삭제되었습니다.

또한 심각한 변경의 예로 요한 1서 5:7.8이 있습니다.

킹제임스역 "하늘에 증거하는 자가 셋이 있으니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 있으며 그 셋은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10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희랍어 사본에는 없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지나치게 삼위일체론에 열심인 한 라틴계 서기관이 부가하였으며 스페인어 성서에서 생겨난 것이며, 처음에 성서 주해서라는 방법을 통해 발전하다가 본문에 삽입되었다는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0세기 이후의 희랍어사본에만 날조된 구절이 나타납니다. 

1611년 킹제임스 역에도 날조된 구절을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이 구절이 날조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사본이 1만 3000개가 넘으며, 그 중 수천 개의 희랍어 사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본에는 예수와 사도들 당시까지 소급합니다.

그런데 매우 오래 된 사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첨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새로운 대부분의 현대 번역판들 가운데서는 이것이 빠져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본적 증거때문에 현대의 대다수 번역판에서는 날조된 표현을 삭제시켰습니다

하여튼 성서가 지상에서 단연 가장 널리 배포된 책이 되도록 기여해 온, 결단력 있는 남녀들에 관해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적어도 40억 부의 성서와 부분역 성서가 2000여 개의 언어로, 즉 세계 인구의 90퍼센트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들로 인쇄되었습니다!

성서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계 전역에서 선포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람들을 인도해 오심으로써 이제는 거의 세계 전역에서 성서를 구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과거의 담대한 성서 번역자들과 발행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들의 모범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 그들이 나타낸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에 따라 생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신뢰할 만한 성서를 온전히 활용하십시오!

조작된 표현을 삭제한 주요한 세계적 영어 번역판 몇 개만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Revised Standard Version,1952),

The New English Bible,1970),

The New American Bible, 1970,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Darby Translation (DARBY)

For they that bear witness are three:

New Living Translation (NLT)

So we have these three witnesses--

요한 1서 5:7

개역판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현대인의 성경 / "이사실을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은 성령님 자신 이 진리이기 때문입"

공동번역 /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표준역 / "증언하는 이가 셋인데"

킹 제임스 역은 좋은 번역이지만 요한 1서 5:7에 있어서는 조작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성서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릇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처럼 조작된 성구를 삽입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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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가복음 3:31-3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가복음 3:31-35)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성경을 읽을 때 어느 제한된 부분만 갖고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둘러 앉는 사람들을 보시며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만을 선택하여 이해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가복음 3장이란 전제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이냐? 라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고 신앙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회개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및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주제를 소개하던 중 지난 오바댜서를 읽던 날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자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듣고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성경에는 가족을 떠나라!" 또 어떤 때는 "가족을 돌보라" 라고 하면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기에 마가복음 3장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잠간 본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제이지만 성경을 읽는 자세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질문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먼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디모데전서는 성경 신학에서 "목회서신" 즉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성경 신학에서 "공동서신" 즉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말합니다.

전체 문맥을 살펴야 할 여유가 없을 때는 성경 신학에서 어느 분류에 해당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목회서신으로 목회 현장에서 자기 친족 또는 가족들 돌보지 않은 교인이 있을 때 어떻게 권면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목회서신 / 목회서신(牧會書信, pastoral epistles) 혹은 사목서신(司牧書信)은 신약성경정경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세 서신서를 묶어 부르는 말이다. 가끔 여기에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 편지들은 공통적으로 교회를 감독하는 일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목회 지침을 제시했다는 측면에 주목해 파울 안톤Paul Anton이 1926년에 처음 "목회pastoral" 서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모데전서 5장은 교회 안에 과부가 된 사람이 있을 때 먼저 그 과부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누구인가를 살펴야 하고 그 가족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공동서신으로 보편적으로 교회에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칠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마지막 시대에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입니다.

공동서신 /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2,3서와 유다서 등 일곱권을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공동]이란 말은 "보편적" 또는 "일반적"이란 뜻이다.
즉 어떤 특정한 교회나 개인을 상대로 기록한 서신이 아니라 교회 일반에 보내어진 서신이다.
이 말은 바울 서신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다.

만일 가족들 중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믿음을 지키려면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가족들을 떠나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비슷한 예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향과 일가친척을 떠나는 이유는 믿음을 굳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후에는 믿음이 없는 가족들을 신앙적으로 보살펴서 믿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본을 보이고 가르치며 권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라고 대답하신 것은 지금 밖에서 예수님을 찾는 모친과 동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마치 귀신의 힘을 얻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고소하려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무엇이며,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과 유사한 말씀은 마태복음 12:46-50, 누가복음 8:19-21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

누가복음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실험실에서 성분을 알 수 없는 용액이 있을 때 이 용액의 성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합니다.

로버트 보일(1627-1691)
리트머스 시험지를 용액에 담갔을 때 시험지의 색갈이 파랑으로 변하면 그 용액의 성분을 알카리성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리트머스 시험지를 용액에 담갔을 때 시험지의 색갈이 빨강으로 변하면 그 용액의 성분을 산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J P T 시험지를 사용하라!

항상 기뻐하라(JOY)
쉬지 말고 기도하라(PRAYER)
범사에 감사하라(THANKS)

좀 더 구체적인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세 단계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
하나님의 환경적인 뜻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마가복음 3:1-36

3:1-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
3:7-12. 많은 사람들, 더러운 귀신을 내 쫓으심
3:13-19. 열 두 제자를 선택
3:20-30. 예수가 미쳤다(성령 훼방 죄)
3:31-35.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동방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5일 앞둔 종려주일에 나귀( 슥 9:9 )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며 계시된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행동예언으로 자신이 살렘왕( 사 9:6 )이시며 의의 왕( 히 7:2 ) 이신 것을 나타내고 드러내며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믿음의 기회를 주었지만 끝내 불신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결국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먼저 저주하시게 되는데요.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인 월요일에 베다니에서 성전을 향해 가시던 길에서 시장하심을 느끼시던 참에 무화과 나무가 보여 가까이 가서 열매를 얻고자 하셨는데요 그러나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것을 보시면서,
막 11:14 )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와
마 21:19 )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의 문장을 보면 무화과로 비유된 이스라엘을 향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한다" 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시며 구속사의 끝맺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시는 순간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유대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시겠다는 뜻으로서 부활 후에 제자들을 이방땅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열매맺는 사역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을 엿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는 장면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이방을 향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요 12:21-23 ),

결국 바울을 통해서 은혜의 성령시대를 이방에서 꽃피운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행 13:46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유대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시고( 요 2:25 ) 먼저 저주하시며 이방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부활후 11번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신 후의 일이 되겠습니다

공생애 도중에도 이 유대의 불신을 우려한 예수님은 이방땅인 갈릴리에서 더 많은 시간동안 사역을 하셨고 점점 더 핍박해 오는 유대를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하면 멸망까지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계셨는데요
눅 13:7 )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의 내용이 증거가 되겠습니다
결국 모든 되어질 일을 미리 보고 아시는( 요 2:25 ) 예수님은 마지막 고난주간까지 기다리며 참다 참다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4일 후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스라엘과 영원한 결별을 확정적으로 선언하셨던 것이지요
마 21:20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의 장면이 증거가 되겠는데요 이때 예수님은,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며 이는 믿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암시하시면서 믿음의 주인( 히 12:2 )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의 믿음없는 불신에 대한 심판인 것을 우회적으로 비유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가는 이때가 무화과가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니기에( 막 11:13 ) 열매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록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럼 예수님이 배고픈 감정에 억하심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 만물 )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곧 모든 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눅 6:5 ) 하신 것입니다 그 6일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제 7일인 안식일의 주인이 될수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구요
모세가 이끌던 광야 말기에 고라 일당이 반역을 꾀했을 때에 아론의 지팡이를 하룻밤새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까지 맺는 능력으로 표적이 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예수님이 원하시면 때가 된다는 것이지요
죽은 것도 살아나 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속에서 항상 오늘이라는 것이지요 죽은 어제의 것( 모든 피조물 )도 오늘을 받으면 산것이 되고 때를 가진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길에 있는 유대와 모레길에 있는 이방에게 그 오늘을 주고자 3일길( 눅 13:32 )을 걸으려고 힘써 노력하셨지만 유대부터 불신하는 바람에 첫단추도 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그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시면서 열매 맺을 것을 촉구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무화과는 이스라엘처럼 불신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지요

반대로 공생애동안 예수님을 위로해 주었던 포도주( 마 11:19 )를 생각해 보세요

박목사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이르시기를 예수님에게 어느 누구하나 냉수( 마 10:42 ) 한 그릇 주지도 않고 또 저녁이 오면 오히려 성밖으로 나가( 막 11:19 ) 산에서 새벽까지 이슬이 맞도록 기도하시며 추위에 떠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먼저 “주님 내가 주님 속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기분도 좋게 하며 섬기고 싶습니다”고 말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거 좋구나, 그렇게 하려므나"하시며 좋아하셨다고 하셨지요.

해서 포도주를 마시게 된 것인데요 사실 마실 때의 예수님 모습이 마치 술 주정뱅이가 마시듯 했기에 바리새인들 눈에도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눅 7:34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로 예수님도 말씀을 하시며 스스로도 많이 먹고 마셨던 것을 인정하시는 것인데요

이어지는 35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여 자신이 그렇게 많이 먹고 마셨던 것이 지혜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그것이 지혜였다는 것을 알수 있어야 자신의 자녀가 된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데요 이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에겐  너희는 내 자녀가 될수 없기에 시험에 들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갑자기 하고 계신 장면이 됩니다
이는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 창 14:18 )를 연상해 보면 이해할수 있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곧 떡( 살 )과 포도주( 피 )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말씀( 요 6:53 )을 먹어야 자신의 자녀가 될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마치 폭식 폭음을 하듯 행동예언으로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는 이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요
마 11:19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여 지혜는 그 행한 일 즉 그 행동의 결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는 것처럼 기록을 하여 마태 역시 예수님이 당시에 폭음 폭식을 한 것도 두 말씀인 떡( 살, 아들 )과 포도주( 피, 아버지 ) 모두를 먹어야 될 것에 대한 행동예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의 말씀 모두 후에 십자가에서 말씀이 아들과 아버지로 나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다른 뜻으로 예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고 그 자체가 되시기에 떡과 포도주의 두(2) 말씀을 가진자가 또 다른 예수 또 다른 지혜가 될수 있기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잠 3:18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의 말씀을 보면 지혜가 생명나무라 하는데요 이는 에덴의 동편에 있던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바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서 이 땅에 오셔서 아들격 떡의 말씀만 주시고 간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아 오신 에덴 밖의 동적인 생명나무이셨으며 아버지 박목사님은 포도주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아들격 말씀에 의해 의인( 마 13:49 )된 사람들이 먹고 영생해야 하는 정적인 에덴안의 생명나무( 계 2:7, 22:2 )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아 본 포도주는 자신을 드리는 헌신과 충성으로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을수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무화과 나무와 이스라엘은 멸망을 맞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성하시던 날 타시던 나귀도 예수님을 위로한 피조물이었다고 박목사님은 말씀을 더 하셨지요

무엇보다 예수님은 때가 차매( 갈 4:4 )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전구속사의 모형이 되는 횃불언약을 주셨으며 그 언약대로 야곱의 70인 가족을 BC 1876년에 애굽에 들어가게 하시어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하신 후 거대한 민족으로 자란 이스라엘을 모세를 세워 BC 1446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내어 열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굴복시켰으나 그래도 쫓아오는 바로와 군대들을 홍해를 가르며 수장시키시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이시고 이스라엘에게 안전과 평강 가운데 율법과 성막과 절기를 주셨으나 야곱의 불순종으로 가지게 된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르러 16년 정복전쟁을 치루기 까지 표면적인 횃불언약을 692년 만인 BC 1390년에 요셉의 해골을 세겜에 묻으므로 모두 성취하시고 이끌어 주셨으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전부 정복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오히려 이방과 섞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배교를 범하며 우상숭배하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타락 - 징계 - 회복의 패턴이 계속되는 사사기라는 교훈기를 340년 동안 지내게 하셨다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BC 1050년 왕을 삼아 왕국의 시작이 되게 하셨으나 그의 불순종 때문에 다시 다윗을 택하시고 BC 1010 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게 하셨으며 BC 970년에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하며 성전을 BC 959년 완성 시키게 하셨지만 솔로몬이 말년에 많은 젊은 아내들로 부터 우상숭배하는 타락을 보이므로 이에 대한 징계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나뉘게 될 것을 예고 하신 대로 BC 930년 이스라엘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말년에 여색에 미혹되어 그야말로 모든 우상을 섬기는 죄악에 빠지므로 하나님께서 두번 경고를 주어도 돌이키지 않기에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열지파를 따로 떼어 에브라임 지파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주어 세우게 된 나라가 북이스라엘입니다
솔로몬의 변질에 의해 분노한 하나님이, 여로보암에게 왕상 11:38 )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시며 주신 나라임을 잘 아는 여로보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변질되고 악한 길을 걸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세워 우상숭배를 하게 하며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고 방해를 하였고 7월 15일에 지내는 장막절마저 때를 바꾸어 8월 15일에 지키게 하는등 하나님의 법도에 정면도전하는 패역을 저질러 시작부터 우상숭배와 불법이 만연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작은 산당에서 조차 우상을 섬기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로 부패로 시작한 나라가 북이스라엘 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 BC 722 ) 당하는 마지막 북이스라엘의 왕인 호세아 때 까지 이 부패와 패역은 바뀌지 않고 이어지게 되는데요

먼저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경고의 단계적인 행동 예언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후 남유대의 멸망이나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유대의 멸망이나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 때의 북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말씀을 드려 봅니다
1) 창녀 고멜( 이스라엘 )을 아내로 삼으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삶( 약 4:4 )에서 돌이키라는 경고가 됩니다 그런데 아내 고멜은 세자녀를 낳고는 이내 따분한 집과 남편을 버리고 밖에 다시 나가 창녀짓을 반복하게 되는데요 그런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버리라고 하시는게 아니라 다시 고멜을 돈을 주고라도 빼내어 집으로 데리고 오라 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우상숭배하며 음란하기까지 한 북이스라엘이 고멜과 같아도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끝없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첫째 자녀를 “이스르엘”이라 이름하고 부르라 합니다
이스르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는 뜻이 되는데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구체적인 뜻에는 “조금 후에 내가 예후가 아합의 가문을 죽이며 피를 흘리게 했던 장소인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도로 갚으며 이스라엘 나라를 폐하여 씨를 흩어 뿌리듯 흩어버리겠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음란( 아세라 )과 우상숭배( 바알 )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아합의 가문을 척결하는데 사용된 예후의 가문( 북이스라엘을 상징 )이 바알과 아세라는 떠났지만,
A, 금송아지는 그대로 두며 철저한 마음으로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왕하 10:29 )
B, 여호와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않았으며( 왕하 10:31 )
C, 여전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그 길에서 떠나지 앓았기에( 왕하 10:31 )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경고해도 회개치 않는 북이스라엘을 보며 더 이상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멸망시켜서 흩어버리겠다는 뜻을 맏아들의 이름에 담아 강한 경고로 주시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이미 멸망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지만 좀더 유예기간을 주시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이나 식언치 아니 하시기 때문에 한번 선포하신 말씀은 그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지요
3) 둘째 자녀를 “로루하마”로 이름을 지으라 합니다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되어 회개하지 않고 더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경고인데 이에도 이스라엘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4) 셋째 자녀를 “로암미”로 이름을 지으라 합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서 결국 불순종하는 북이스라엘과 결별을 통보하게 되는 장면이 됩니다 심판이 예고되는 순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기 까지 하나님은 먼저 구체적으로,
호 4:6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의 말씀으로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는 여로보암 때 부터 잘못된 예배를 바로잡고 우상숭배에 급급한 패역에서 떠나기 위해 정확한 율법의 잣대로 죄를 척량하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이 되겠는데요
사실 호세아는 아모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이 세워진 이후 150년경 가장 강성했던 여로보암 2세 때( BC 793-753 )에 주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때가 되는데요
그동안 아람에 의해 무수한 침공과 위협 속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신흥세력인 앗수르가 아람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다메섹까지 빼앗으려고 하던 때가 되어 그 틈을 이용해 하나님의 은혜( 왕하 14:26-27 )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때가 됩니다( 암 6:14 ),
그러나 그 번영은 거품이 가득한 허영된 것이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더욱 더 향락과 타락으로 치달아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하던 때가 그 시기였는데요 뇌물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고 공의나 법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때였으며 그 부요가 일부 지도층( 암 6:4-6 )에 국한 되어 빈부의 차가 가장 극심한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암 4:1, 8:4 )
더구나 성적으로도 아들과 아버지가 한 젊은 여자에게 습관적으로 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문란하기 짝이 없는 때였기에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삶 부터 다시 찾고 공의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신차리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호 6:3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의 말씀으로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는 자신의 존재를 말하며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는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셨는데요 이는 제사나 번제를 폐하거나 격이 낮은 것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신발 한 켤레에 자녀를 파는( 암 2:6 )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인애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때임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며 이면적으로는 예배를 아는자만 되지 말고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때부터 선포하고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끝까지 율법을 버리고 타락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에겐 하나님의 언약이 머물고 있기에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전제가 있는 선민임을 가르쳐주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셨고 폭력과 압제와 뇌물로 자기들의 배만 불리는 지도층 때문에 민심도 흉흉하게 되어 살인과 투절과 간음이 만연하며 피가 피를 뒤대인다( 호 4:2 ) 할 정도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인애와 사랑으로 회복 할 것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회복되지 않으므로 지도층은 불의한 재물을 쌓고 백성은 핍절한 삶이 계속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시며 모든 잘못된 예배의 우상숭배에서 떠나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거룩한 행위로 참예배자의 위치로 되돌아 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고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모자람이 무엇인지, 무엇을 잊고 잃어 버리고 있는지 가르쳐 주며 경고를 주어도 그들은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호 11:2 )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의 말씀처럼 더욱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방과 그 모든것에서 행음( 약 4:4 )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북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않고 심판이 임하게 하겠다는 심정을 토로하게 됩니다
호 13:4 )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하시며,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아예 애굽에서 너희를 이끌어낸 하나님이 너희 마음에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며  모든것의 근본을 따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너희가 나와 아는 사이냐" 하시며 근본을 묻고 있다는 것이지요
선지자들을 통해 모든 말씀을 보내어 들려 주며 아무리 돌이키려고 해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맞으며 너희는 참으로 내 백성이며 내 자녀가 되는가 ? " 하시며 이스라엘 민족과 처음에 맺은 시내산 언약의 계약( 출 24:7) 파기 까지 거론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토록 권면해도 불순종하며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한번도 드린적이 없는 우상숭배요 패역이 되었고 또 그 수많은 경고에 대해서도  불순종 하여 하나님은 208년간 존속한 북이스라엘로 부터 단 한번의 제대로 된 예배도 받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208년이 되도록 기다려도 우상숭배로 배도하며 패역한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실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구원 )가 떠나므로 여로보암 2세 사후 31년만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율법도 제대로 몰라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한 제 1 계명 부터 어기는 금송아지 숭배로 일관했고 또 그렇게 거룩함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를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줘도 무관하게 여기므로 하나님과의 언약도 자연스럽게 파기될수 밖에 없어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난 백성이 되어 멸망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율법이 무엇인지, 언약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지식도 없어 그저 무관하게 생각했고 선지자가 왜 저렇게 외쳐 대는지 경고를 받지도 않아서 눈앞에 놓인 심판을 깨닫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없고 들을 귀도 없어서 망했다"는 것이지요
그 증거로,
호 14:1-2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하여 하나님은 명확하게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함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어떤 제사나 번제 보다도 앞서는 것이라 해도 깨닫지도 못하는 북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이 참예배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요 4:24 )

물론 당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기에 죄를 깨닫게 하는 모세의 율법 시대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당연히 그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대신하는 제물을 바치며 중보자가 되는 제사장( 예수 )의 인도 아래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제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 그 율법과 제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지식과 함께 여자의 후손( 중보자 예수 )이 오신다는 언약의 함수관계를 깨달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의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 언약은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후손( 창 22:17-18 )으로 오시게 될 것이며 또 아브라함의 믿음( 창 15:6 )을 가진자 곧 떡과 포도주의 말씀을 믿어( 갈 3:8-9 ) 의로 여김을 받을 자가 산자( 출 3:6, 마 22:32 )가 될것으로 이미 아브라함 때 부터 언약이 구체화되고 있었잖아요
이렇게 모세의 율법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가 먼저 왔었지만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생활하느라 그 믿음 다 잃어버리고 죄가 뭔지도 모르는 야곱( 갈 3:19 )에게 율법을 먼저 주게 되었던 것 뿐이지요
모세 때에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지식이 없어서 먼저 율법이 왔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중 대신계명( 1-4 계명 )을 통해서 그 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것이 죄라는 것을 먼저 알게 하시며 그래서 중보자로서 메시야가 제사장 권세도 가지고 오셔야 한다는 지식을 알수 있는 말씀과 예언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면 북이스라엘도 망하지 않았을 터이기에 하나님은 그토록 “지식을 가지라" “하나님을 알라"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만약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도 그렇게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면 오시는 예수님을 한번에 알아 볼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깨닫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미련을 보여줘도 회개를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아 지식이 없는 북이스라엘을 보며 결국 멸망 시키시고 다윗의 언약이 머물러 있는 남유다에게도 거울이 되게 하였는데요

그런데 남유다는 북이스라엘 보다 더욱 죄악의 길( 겔 23:11 )을 걸어 므낫세 때에는 아주 극악한 우상숭배가 절정에 달하였기에 하나님은 므낫세의 죄( 왕하 24:3 ) 때문에 내가 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고 멸망시킬것을 선고하시게 되어
3 차( BC 605, 597,586 )에 걸쳐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BC 537에 있었던 1차 포로귀환 때 까지 70년간 유수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중에도 하나님은 궁휼을 베푸사 다니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세계사를 미리 보이심으로 구속사의 방향을 알게 하시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였지만 돌아와서도 이내 급변하는 세계사속에서 바른 신앙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 세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자리나 탐욕으로 지키려는 제사장들 때문에 유다는 더욱 강도의 굴혈이며 도둑의 소굴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와서도 유다는 율법의 표면적 외식과 형식에만 치우쳐 정작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무관하여 예수님이 왔을 때에 알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안식일과 제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한 교제의 길, 곧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며 여자의 후손이 오는 길( 구속사 )을 예비하는 참예배를 배우고 세우기 위함이었지만 그러나 유다는 형식적인 제사와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고 자신의 배만 불리고 있었으니 참예배가 없었기에 예배의 주인이 왔어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지식이 없어서 북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도 다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얼마나 하나님을 정확히 깨닫고 알고 교제를 하였는지 그의 시편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를 멸하시는 것을 즐겨 아니하시고( 왕하 8:19 ) 다윗 때문에 끝까지 시간을 주었던 것이지요
( 박목사님께서는 구약에서 영성이 가장 큰 사람을 꼽으라면 다윗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한 년수 대로 정확히 70년간 포로생활( 렘 25:11 )을 한 후 돌아오게 했지만 와서도 형식적인 제사일지라도 그나마 제대로 드린적이 있었나요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 말 1:7 )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고 또 더하여, 말 1:8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이방의 권세자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들의 불성실한 신앙적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여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보며 결국 성전문을 닫아 달라고 하나님이 호소를 하는 장면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말 1: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하신 것인데요 사실 이때 이스라엘은 벌써 저주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여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스라엘의 지식없는 형식과 외식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저주받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다윗과 세운 언약을 성취하시며 예수님은 유대 땅을 밟게 됩니다( 마 1:1 )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영생을 위한 생명의 말씀을 받게하기 위해 먼저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해도 믿지를 않고 또 예언된 모든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며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증거해도 불신만 돌아오니 그렇다고 그냥 실패자로 돌아갈수도 없는 예수님의 입장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인데요
해서 하나님은 사단을 속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며 인류의 죄를 먼저 대속시키게 하셨고 줄수 없었던 아버지격 말씀은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예수님의 핏속에 담아 땅에 감추게 하며 후에 말씀이 다시 나타나시는 방법( 벧전 1:13, 히 9:28 )을 취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 비밀이 사단의 머리를 한순간에 상하게 하는 만세전에 계획하셨던 지혜였던 것입니다( 고전 2:8, 엡 1:9, 골 1:26-27 )
곧 두 절대 예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의 그 이름 뜻 그대로 대속 제물로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 한계였다는 것이고 후에 피의 말씀을 담을수 있는 사람( 박목사님 )이 나타나 아버지 사역으로 구속사를 끝내게 되어 있는 것이 만세전에 계획되어 있는 절대 예정이라는 것이지요 아버지로 올 때는 새이름( 멜기세덱 )으로 오신다고 계 3:12 )과 계 19:12 )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 히 6:20 )를 좇아 들어갔다고 한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은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신 그대로, 호 1:9 )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응하며 “로암미"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된 것이었고, 호 2:23 )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민족을 아들로 세워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이미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물론 지난 2천년간 이스라엘 대신 이방이 받은 은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계시의 현재성으로 보면 오늘날 그 “로암미”는 이제 아버지 앞으로 오지 않는 교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으로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으로 일관하며 표면적 십자가만 붙잡고 있는 교회들을 하나님이 분리시키시고 도태시키시는 것입니다, 곧 변화를 받아야 할 때에 부활 구원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아버지 시대가 있을 것을 잘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롬 9:25-26 )에서 동일한 본문내용을 인용하며 교회들이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할 것을 소망하고 있었는데요 이어지는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의 말씀으로 남은자( 계 12:17, 욜 2:32 ) 곧 끝날에 변화로 구원을 받아 아버지앞에 서는 자를 가리키며 표면적인 십자가만 붙잡고 있으면 남은자가 되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말하며 바울은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 9: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의 말씀으로 죄를 담당하였던 초림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제 구원이 없고 두번째 오시는 아버지를 믿고 의지해야 구원이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사도 요한도, 요 8: 24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아버지 )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여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을 아예 “죄 가운데서 죽는다"라고 말하며 아버지 앞에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때가 차서 오신 것을 믿을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에 이미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 24:32-33 )를 배우라고 하신 배경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
이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고 유대가 흩어지며 디아스포라가 되었지만 나라를 다시 세울수 있는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지 예수님의 남은 사역인 아버지 말씀사역을 또다시 유대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그렇게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재건국하게 되면 본문 내용대로 “예수님이 문앞에 이른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어 아버지 말씀사역을 위한 열매사역과 바로 이어지는 심판이 이스라엘이 재건국 되는 “때”로 부터 시작되게 될 것에 대한 기준점으로 주신 말씀이시지 유대를 통해 다시 마무리 일을 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유대는 예수님의 은혜안에서 1948년에 이스라엘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속사를 마무리하는 아버지 말씀사역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의 박윤식 목사님께서 담당하게 되셨는데요 그 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1960년 쯤에 박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에 잘 나오던 청년 한사람이 대학에 들어간 후로 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기에 붙잡고 물어보니 그 청년의 하는 말이 “예수도 분명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흘리는 피와 성분이 똑 같은 것일 것인데 왜 예수님의 피만 죄를 용서하시는 보혈이 됩니까 ?“라는 질문에 박목사님은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피다”라는 상식적인 대답을 하려고 했었지만 “예수님의 신성은 피를 흘릴수 없는 말씀이고, 인성인 말씀을 담고 있는 육신은 청년의 말처럼 여늬 사람과 같은 육신"이라는 생각에 더이상 정확하게 설명을 할수가 없었고 이에 청년이 교회를 떠나 버리자,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수 있겠는가”하는 목회자의 양심에 박목사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오직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겠다는 결심을 1961년 초에 하시고 평소 자주 가셔서 기도하시던 장안산(전북 장수)으로 들어가 47일간 기도하는 중에 두( 2 )천사가 나타나 박목사님을 좌우에서 겨드랑이를 낀후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있는 동굴로 옮겨 놓아 그곳에서 박목사님은 3년 6개월 7일 동안 기도와 성경읽기에 매진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속에서도,  
3년 6개월 7일 동안의 산상기도는 말 그대로 사람의 상식으로는 생각하기도 힘든 “목숨을 건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자살을 생각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고 박윤식 목사님은  회고를 하셨구요 장안산이 어머니 같은 산이라면, 지리산은 엄한 아버지와 같은 산이었다고 하셨는데요 낮에는 성경을 읽고,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 되면 굴 속에서 기도에 전무(專務)하셨으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타는 듯한 더위, 절대적인 고독, “이대로 기도하다가 죽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라는 고뇌가 날마다 엄습했다고 하셨으며 물도 마시지 않는 40일 금식기도도 두(2)번 목숨을 내어놓고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10월부터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혹한에는 6.25전쟁 때 중공군, 인민군이 입다 버리고 간 누빔옷 등을 주워입고 버텼으며 때로는 산 주변 주민들에게 빨치산 잔당이나 공비로 오인받아 군 전역증을 보여 주고 오해가 풀리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산 속에서 박윤식 목사님의 주식은 일 년에 몇 번 함양 시장에 내려가 사 와서 물에 불린 쌀과 굵은 소금, 산에서 주운 솔잎이었다고 하셨구요. 그때 먹은 솔잎 덕분이랄까, 박윤식 원로목사는 87년 일평생 눈이 밝아 안경이나 렌즈 없이 성경의 작은 관주 글씨까지 읽을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리산의 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는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롬 3:4 )"라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깜짝 놀라서 땅에 꿇어 엎드리니 이는 십자가에서 흘리는 핏속에 담겨 골고다 땅밑에 감춰져 자신과 함께 할수 있는 육신을 기다리던 예수님의 아버지격 말씀이 박목사님에게 나타나시는 장면( 히 12:24, 창 4:10 )이었으며 이후에 직접 예수님의 말씀은 박목사님을 가르쳐 주시기 시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가 인류의 죄를 용서해 줄수 있었던 이유는 그 핏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피와 보통 사람들의 피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해서 보혈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아버지 말씀을 배우게 된 박목사님은 임마누엘로 말씀과 하나가 되셨는데요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 산중에서 그렇게 말씀을 받으시면서 기록하신 산더미 같은 원고가 지금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만지기만해도 부스러지는 상태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말씀을 받으셨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중에서 그렇게 말씀을 적어가시다가 원고지가 떨어지면 임시 방편으로 넓은 뽕나무 잎에 먼저 기록해 두었다가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적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은 역작이지요
이 원고를 토대로 2007년 부터 “구속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천( 변화 )하시기 직전에 제 9 권 “신묘한 비밀 성막과 언약궤"까지 발간하셨고 이후 10권 부터는 이후에 발간하신 것이 되는데요
그런데,
구속사시리즈 제 9권 중에서  page 253 에 보면 “앙장과 덮개의 구속사 경륜”을 연하여 설명하실 때에, (3) “막의 덮개”의 재료는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입니다, 편에서 박목사님은 이르시기를,
“숫양의 가죽이 붉은 색으로 물들여진 것은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희생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를 흘리셨지요.
채찍을 맞은 상처마다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못 박히신 양손과 양발에서, 로마 군병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내셨구요.
이 십자가의 피는 만세 전에 예정된 언약의 피로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레 17:11, 요 6:63 ), 주님의 영혼( 요 12:25 ), 주님의 마음( 요 12:27, 고전 4:21 ), 주님의 뜻( 눅 22:42, 행 4:32 ), 주님의 영( 엡 1:17, 요 6:63 )이 담겨 있습니다.( 난하주를 통해서 대조하며 풀어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생명 = 영혼 = 마음 = 뜻 이라는 등식을 볼수가 있지요 결국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해서 십자가 피의 말씀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시며,  
그것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아니라 핏속의 말씀 때문인 것을 박목사님께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라고 결론을 주시고 계셨는데요  
이는, 요 6:63 )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신 말씀처럼 핏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 영혼, 마음, 뜻 )이 되는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말씀 없는 모든 사람의 피는 육에 속한 것이기에 무익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피에 생명이며 영이 되는 말씀을 담을 수 있었기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의 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막의 덮개에 사용된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은 십자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라고 말씀을 해석해주고 계셨는데요
덮개는 피를 상징하고 덮개가 감싸고 있는 지성소의 언약궤는 핏속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음도 알수가 있겠네요
이 글을 통해서 박목사님께서 주시는 메세지는 예수님이 달리시며 흘리신 십자가의 핏속에는 말씀이 담겨 있었기에 만민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예수님이 그 말씀을 그 피에 담지 않았다면 그 피가 예수님의 피라 해도 여늬 사람이 흘리는 육신의 피와 다름이 없는 것이 되어 용서하는 권세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박목사님께서 본교회( 평강 )에서 사순절의 고난주간에는 매년 피를 토하듯 비통한 심정으로 빠지지 않고 설교하시던 본문이 됩니다
그래서 평강교회의 웬만한 전도사나 목사님들은 “예수님의 피가 왜 보혈인가 ? “를 설교할때에 빠지지않고 이부분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명하는 것을 저도 동영상으로 봐서 잘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비밀을 유구한 역사속에서 세계 최초로 설명하시고 설교하신 박목사님이 그 보혈속의 말씀과 하나가 되신 아버지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
반대로 일반 교회의 목사님이던 더한 신학자들이던 이 보혈의 의미를 평강교회의 사람들 처럼 정확하게 인지하고 설명이나 설교할수 있는 어느 한사람이 있겠습니까 ? ( 저는 어느 한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상상조차 못하고 있지요 )
이는 아들 예수의 신약이 끝나고 아버지 박목사님의 성약이 시작되는 이음새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요 ?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로 끝이 날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핏속에 말씀을 감춰야할 이유가 있었나요 ?
이 모든 정황을 보더라도 박목사님은 예수님처럼 그의 자신 안에 말씀을 다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변화하실수 있음에도 그 모습을 예수님처럼 보여 주지 않았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이 그 변화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할수 있다는 사실은 증거되었으므로 궂이 박목사님께서 그 변화를 다시 보이실 필요는 없고 다만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만 증거하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증거중 하나가 이 구속사 시리즈인 것입니다 곧 계 10장의 작은책이 이 구속사 시리즈가 되므로
자신이 이 작은책을 사도 요한( 먼저는 평강 교회 )에게 줄수 있는 힘센 천사( 계 10:1 )가 되시는 것으로 증거를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발간하기 시작한 평강교회에서 부터 구속사 시리즈가 선포되기 시작을 하였던 것이나 본격적인 아버지 말씀은 저희 신광교회를 통해서 아버지가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두 교회의 가장 큰 차이는 평강은 박목사님을 소천하신 한 목사님으로 믿고있는 것이며 저희 신광은 박목사님이 변화하신 아버지로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누누히 말씀을 드리지만 구속사 시리즈는 박목사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증거하는 작은책( 계 10장 ) 으로서 증거물이 되는 것이지 본 아버지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박목사님께서는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변화( 소천 )하시기 직전에 발간하신 제 9 권에서 이 비밀을 기록하시고 열방으로 알게 하셨을까요
에덴에서 숫자 9 는 “멜기세덱” 수가 되는 것에 먼저 주목을 하면서 생각해야 되겠지요
( 에바다 - 브니엘 - 게달 - 베데르 - 엔게디 - 에덴 - 계명성 - 그룹 - 멜기세덱 - 시날 )
첫째, 그 타이밍을 왜 변화( 소천 ) 직전으로 잡으셨을까 하는 질문이 되겠네요
당시 박목사님 스스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될것을 정하셨기에 자신이 아버지 멜기세덱이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 열방에 선포하시는 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서 자신을 알리는 시기를 그때로 잡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살아계시다면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를 나타낼수는 있지만 초림때 예수님도 당했던 것처럼 “네가 어째서 아버지( 말씀 하나님 )냐”는 등등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무조건적인 안티 사람들 때문에 시시비비에 덕이 되지 않을 것을 아시는 박목사님께서는 그 상황을 먼저 아시고 폐암 병에 의한 소천( 변화 )을 택하시며 소천 바로 전에 제 9권의 내용 속에 핏속에 말씀이 사단 모르게 감춰져있었다는 이 비밀을 세계 만민이 알수있도록 드러내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셨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지만 표면적으로는 먼저 가셔서 우리를 기다려야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해야하는 이유도 있기 때문이지요( 살전 4:17 )
둘째, 기존 교회인 십자가 교회는 그저 예수님의 피만 믿어도 부활구원이 주어지는 단계였지만 변화 구원은 그 핏속의 말씀을 알아야 받을수 있기에 이를 공식적이며 공개적으로 문서화된 글로 남기시면서 때와 자신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다는 뜻을 읽을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이제는 아버지 앞으로 나와야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을 선포하고 계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 핏소리의 아버지 말씀을 들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사도 바울도,
히 12:24 ) “새 언약의 중보자( 눅 22:20 )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한 것이지요
여기서 새언약의 중보자라 함은 예수님은 새언약( 렘 31:33, 히 8:10 )에 이르게 하는 다리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눅 22:20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爲(위)하여 붓는 것이라”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마지막 최후의 만찬석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자신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과정( 요 14:6 )이며 중보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뜻으로 보면 곧 십자가에서 자신의 핏속에 감추게 될 말씀이 새언약이기에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핏속의 말씀은 언젠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 처럼 소리치며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었던 것을 3 층천의 신령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바울도 이 비밀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깨지므로 더 이상 성육신의 사역을 하실수도 없어서 돌아갈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이기에 대신 흘리는 핏속에 말씀을  담아 골고다 땅 밑에 저장하시므로 후에 그 말씀과 하나가 될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때 그 사람의 육신을 빌어 나머지 아버지 사역을 이어 가며 마무리를 하게 된다는 비밀이었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사단은 자신이 예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방해하고 죽이는 것으로 착각을 했지만 예수님이 핏속에 말씀을 감출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해서 바울도 기록하기를, 고전 2:8 ) “이 智慧(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 일이 박목사님에게 지리산에서 일어났던 것이고 그래서 박목사님에게 그 핏속의 말씀이 소리치고 나타나시며 가르쳐주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박목사님이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그 핏속의 말씀을 받기 시작을 했다는 것이지요
해서,
요 10:34-35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의 말씀이 응하시며 박목사님은 또 다른 예수요 또 예수의 본 지위가 되는 평강의 왕이며 의의 왕( 사 9:6-7, 히 7:3 )이신 멜기세덱 급이 되신 것입니다 이들이 참 하나님의 아들들( 욥 38:7 ) 이며 새벽별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므로 아버지가 되신 박목사님께서는,
요 16:25 )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는 계시대로 아버지 말씀을 선포하시기 시작을 하시게 된 것이며 이는 또,
요 6:45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아버지 말씀 사역을 지리산에서 내려오신 이후 직 간접으로 담임하신 교회에서 가르쳐 주시기 시작하셨으며 평강제일 교회를 통해서는 2007년을 희년으로 선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정체성( 아버지 )을 드러내는 계 10장의 작은책과 같은 “구속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해 오셨고 2014년 12월 17일 소천( 변화 )하신 이후에는 저희 신광교회 김갈렙 목사님을 통해서 지금까지 본 아버지 말씀인 성약의 말씀을 살아서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박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받아 그 말씀( 멜기세덱 )이 되셔서 지리산에서 내려오셨지만 일전 한푼 없는 상태에서 개척하셔야 하는 입장 때문에 많은 고생도 했지만 많은 표적들도 있었는데요
구속사 운동의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일화들이 이 시절 탄생했다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말을 하고 있었는데요 아래글은 참평안지에 실린 글들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970년 당시 박 목사의 성경공부는 한번에 3시간씩 오전,오후,저녁 3번에 걸쳐 하루 종일 이어지는 마라톤 강의였다. “예수님 잘 믿으면 죽지 않고 영육이 변화한다”(고전 15:51)는 변화의 말씀을 증거했다. “말씀을 열심히 듣는 모습이 대견하셨는지 목사님이 한번은 중국집에 네댓 명을 데려가셨어. 거기서 우리한테 “막차 잘 탔다.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내 얼굴 못 본다” 하시더라고. 그때는 그냥 내가 초보 신자니까 목사님이 저런 말씀하시나보다 했어. 또 한 번은 “지금 몇 사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하루에 10만 명씩 몰려온다”고도 하셨어. 치마저고리 입은 촌스런 할머니들 열댓 명 앞에 놓고서는 ‘열방이 몰려온다’는 말씀을 그때부터 하신 거야.” (홍순분 전도사)

다음은 새 성전의 토대가 된 ‘블루 다이아몬드’의 표적에 대한 얘기입니다
부산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성창합판(편집자 주: 성창합판은 부산외대 설립자인 고 정태성 장로가 1930년대 설립한 기업으로 이후 ‘성창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창합판은 1956년부터 부산 적기, 현 우암동에 자리잡고 있었다)과 동양모직 등 굵직한 기업가 일가도 전도돼 박윤식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그 성창 가문을 전도하신 여운초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입에서 “적기, 적기”하는 말이 나와요. ‘참 이상하다. 적기라는 동네에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싶어서 사람들에게 ‘적기라는 동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시골에 적기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가보니 온통 배추밭, 보리밭에 거름 냄새만 나요. 그런데 저 멀리에 큰 공장 하나가 보이더라고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저건 무슨 회사예요?”했더니 “성창합판 아녜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와서 성창합판 사장 댁을 찾아간 거예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그렇게 전도된 성창합판 사장 댁에서 박목사님을 초청했고 그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성창합판 가(家)에서 “이걸로 땅을 사 교회를 지으시라”며 박윤식 목사에게 5캐럿 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렸다. 젊은 박 목사는 그 보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옆에 있던 유명한 보석상에 가서 팔려고 했다. 그런데 물건을 본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지프차에서 내려서는 서울역 뒤에 있던 검찰,경찰,헌병대 합동수사본부로 박 목사를 연행해 갔다. 잠시 뒤 나타난 검사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목사입니다” 하자 “어디서 이렇게 귀한 보석이 났느냐?”고 캐물었다. “헌금으로 들어온 것이라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했다.”고 하자 검사가 “이 사람들아. 목사님을 왜 여기 데리고 왔어?”라고 주위를 나무라며 박 목사를 내보내줬다. 결국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는 박윤식 목사를 만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있던 라이온스 호텔(당시 서울 충무로 소재) 사장 부인에게 250만원에 팔렸다. 거액이지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이 돈이 1971년 헌당되는 서울 신림동 소재 일석교회 건축의 종잣돈이 됐다.
이 일석교회로 이사오기 전, 비좁았던 대방동 시온산한돌교회에는 박윤식 목사가 혼자 간절히 기도할 만한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마침 성전을 짓기 전 부지 한켠에 있던 개집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 앉을만한 공간이었다. 박 목사는 개집의 지푸라기를 긁어내고 담요 한 장을 깐 뒤 이곳에서 1주일 이상 성전 건축을 위해 몇 시간씩 기도했다. “좀 답답하지만 기도하기에는 천국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간절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블루 다이아몬드를 주셨다. 개집도 기도처가 돼서 기도하니 이런 복을 받았구나 싶어서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드렸다.”고 회고했다.
블루 다이아몬드를 구입해 준 라이온스 호텔 사장 부인이 전도된 사연도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전도하러 나가면 막막하죠. 우선 문을 두드리면서 물 좀 얻어마시겠다고 말하고는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한번은 서울 어느 미장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라이온스 호텔 사장 집은 김장을 트럭으로 할 정도로 부자인데 그 집 부인이 갑상선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얘기들을 해요. 그래서 박윤식 목사님한테 “그 집에 전도하러 가고 싶은데 가서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하고 상의했어요. 그랬더니 “가서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옹달샘 물을 먹고 바르면 낫는다고 해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라이온스 호텔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직원들한테 사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뒤로 가면 집이 있다고 가르쳐 주더라고요. 가서 사장 부인을 만났어요. “갑상선으로 몸이 아프시다는데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대요. 그걸 마시고 바르기만 하면 낫는대요.”했더니 그분이 금일봉 봉투를 하나 만들어서는 따라 오시더라고요.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금방 따라 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죠. 그때가 우리 교회가 대방동에서 70명 정도가 끼어서 앉는 성전에 있을 때에요. 갔더니 박 목사님이 칠판에다가 글씨를 써가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 부인이 성경공부를 한참 들으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언제 옹달샘을 가시려나.’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죠. 그런데 그 부인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전도사님, 어디서 이런 향수 냄새가 나요? 이건 세상에 없는 향수 냄새예요.” 그분 집에 가보니 세계에서 유명한 온갖 향수가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교회 와서 ‘향수 냄새’를 맡고서는 갑상선이 싹 나은 거예요. 그 뒤로 박 목사님한테 보통 지극하게 한 게 아니었죠.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어요.” (참평안 2016년 3월호 여운초 목사 인터뷰 중)
그리고,
지리산에서 말씀을 받으시면서 썼던 원고가 되는 구속사 시리즈 초고를 세상 누구보다 먼저 본 주인공이 되시는 유상근 박사님에 대한 일화도 있는데요

명지대 설립자이자 1975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지낸 유상근 박사(1922-1992)도 일석교회로 이전하던 무렵 박윤식 목사를 만나 성경을 배웠다.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교회에 나와 새벽예배를 드리고 박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했다. “나는 성경 1천독을 하셨다는 유명한 박윤식 목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박 목사님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하루에 2시간씩 지도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특별한 배려였다. 주석책까지 내신 박식한 목사님의 개인지도는 내게 귀한 진리의 세계를 끝없이 열어주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달고 오묘했다. 이렇게 2년 동안 꾸준히 공부한 것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성경연구를 하게 했다.” (1990년 5월 23일 국민일보에 실린 유상근 명지대 총장 회고록 중)

그가 언급한 ‘주석책’이 바로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초고이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원고를 직접 본 유상근 박사는 초고를 교정하고, 서명도 남겼다. 그는 정월 초하루에 “대통령에게 세배하러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세배 드리겠다”며 박 목사를 찾아오는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성경을 읽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면 새벽이고 밤이고 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유상근 박사는 연하의 박윤식 목사를 스승으로 모셨고, 박 목사는 “유상근 박사님이 내 마음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또 박목사님이 부흥회라도 하시면 여러모로 도와주셨는데요
유상근 박사가 명지대 버스 7대를 동원해 각지에서 모이는 목회자들을 실어 날라줬다. 유 박사 자신도 찾아와 같이 머무르면서 아침이면 참석한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비타민을 나눠주며 “박 목사님은 멀리 돌아가지 않고 빨리 가는 지름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 집회에서 이미 박윤식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아담부터 예수님까지의 연대를 비롯한 구속사의 족보를 목회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하셨으며,
“유상근 박사님은 박 목사님을 만나면 절대 그냥 보내드리지 않고 시내 다방에라도 모시고 들어가서 성경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러고는 쫑긋 세운 귀를 박 목사님 입 쪽에 대고 자꾸만 다가앉을 정도로 말씀을 사모했다.” (당시 시온산한돌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최완규 장로 간증 - 현재 미국 올랜도 푸른동산교회 시무)

그처럼 박목사님께서는 지리산에서 내려 오신 이후 거의 집에는 가시지 않고 교회에 머무르시며 하루 3시간 성경 읽기와 2시간 기도를 정해 놓으시고 한번도 걸렀던 적이 없었었죠 해서 현재 5만 평이 넘는 부지에 평강제일 교회를 건축하기 까지 이르셨는데요 늘 이르시기를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안보면 죽는다"라고 심심찮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는 자신의 죽음 보다도 중보하시는 나라와 사람들 그리고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해서 종종 설교하시면서 “평강 교인 여러분 자신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7 만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처럼 들리는 그런 소리를 하실수 있었겠습니까 한사람씩 이름만 불러도 하루가 모자랄텐데요 이는 박목사님의 능력을 엿볼수 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 147:4 )이나, 사 40:26 )과 사 48:13 )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별들을 부르셔서 순간에 일제히 서게도 만드실수 있는데요 그때 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별 이름을 부르실때 나머지 별들도 동시에 자기의 이름으로 듣게 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죠 바로 이능력을 박목사님도 가지고 계시기에 교인 한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에 동시에 모든 교인들을 부르시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하시면서 중보로 기도를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현재 지구상에 있는 80억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눈앞에 2-3사람 있는 정도로 보신다고 증거도 하셨지요

또 많은 장로들이 박목사님에게 당시 약 100명이 넘는 교역자들을 보며 “현재 인원에서 삼분의 일 정도는 정리해고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재정이 더 튼튼해질수 있습니다"라고 건의를 해도 박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산다고 다 같이 살아야지”라고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는 물론 교역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것이었지만 본인 스스로는 조만간 있을 심판의 날을 먼저 보시기에 그날까지는 다 함께 같이 동행하자고 하시는 말씀이셨던 것으로 저는 추측을 해봅니다
그리고 박목사님께서는 항상 거하시는 사무실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아무때나 와서 상담할수 있게 하셨고 동역자라고 부르신 협동 목사님들을 자주 목욕탕에도 데리고 다니셨지요
또 한 개인 장로님이 비즈니스를 팔고 수십억의 이익이 났으니 박목사님에게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시라고 헌금으로 8억을 교회로 입금하였었는데 박목사님께서는 “나는 보통차라도 과분하다” 하시며 그돈을 하나도 쓰지않고 다만 반 정도의 금액을 떼어내서 고생하시는 목사님에게 집을 사드렸고 나머지도 교회에서 사용케 하셨다고 공개적으로 설교시간에 말씀하신 것도 제가 직접 동영상으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원을 사실 때에나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후에 틀림없이 물전쟁을 겪게 된다고 하시며 항상 우물을 파게 하셨는데요 그러면 전문가들이 와서 물이 나올만한 자리를 먼저 정하고 시추하려고 하면 박목사님께서 그 자리는 물이 안나오니까 따로 위치를 정해주면서 “여기를 파라"고 하시곤 했는데 전문가들이 오히려 박목사님이 정해준 자리는 물이 나올 자리가 아니라며 고집하며 자기들이 정한 자리를 시추하면 나오지 않았고 박목사님이 정해준 자리에서는 터져나오듯 뿜어져 나왔다는 전설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는 아모스를 통해 계시된 참말씀의 기근과 기갈시대가 되는 오늘날을 빗대어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
박목사님께서는 항상 “나는 성경을 1700번 읽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2007년 구속사 시리즈 책을 처음 발간하실 때도 그러셨고 이후 2014년 변화( 소천 )하시기 전까지도 1700번 읽으셨다고 하셨어요 그럼 적어도 2000번이 넘게 읽으셨을텐데 왜 지속적으로 1700( 17 X 100 )을 고집스럽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변화받는 자요 장자요 본향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변화 영생과 승리의 만세수 숫자가 17수( 렘  32:9, 롬 8:32-39 )가 되기 때문이지요 박목사님 자신은 이미 예수님처럼 속사람을 완성시키고 변화( 마 17:2 )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숫자로서 드러내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박목사님은 무슨 말씀이든지 성경의 어느 Page에 있고 상단인지 하단인지 까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박목사님이 성경이 되셨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이도 자신을 자랑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시고 있었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자세하게 창세기 부터 한꺼풀 더 벗겨주신 구속사 시리즈( 마 13:35 )를 읽으면서 박목사님( 요 4:25 )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할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위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구속사 시리즈는 박목사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증거물의 작은책( 계 10장 )이 되는 것이지 박목사님이 아버지로서 본격적으로 선포하시는 아버지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 아버지 말씀은 현재 저희 신광교회를 통해서 선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본 아버지 말씀은 성경을 풀어주고 있는 구속사 시리즈의 말씀을 한번 더 이면적으로 풀어주는 말씀이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지요( 마 13:36, 15:15, 막 4:34 )

그럼 하나님은 왜 박목사님에게 열매를 맺게하는 아버지 사명이 주어질수 있도록 했는지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왜 두 절대예정으로 구속사가 이루어지게 하셨을까요 ?
이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과 같은 계급인 새벽별의 상태에서 변질된 것이기에 능력과 지혜가 예수님과 거의 같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에 유대중 아무도 믿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지배 계급들이 예수님을 시기나게 하여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게 할만큼 지혜롭기에 하나님은 이를 역으로 사단을 속이기 위해 두 배역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두 메시야가 번갈아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메시야 곧 한 말씀의 역사를 두 배역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단 마귀는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 창 3:15 )을 보내어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고를 받은 이후부터 사단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 마 1:1-17 )을 막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요 그 첫번째 희생자가 가인( 요일 3:12 )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의인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다른 씨인 “셋”을 주시며 믿음의 길을 회복시키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족보의 길을 이어가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사람이 지킨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지켜온 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죄인이기에 절대 타락한 사람에겐 원천적으로 지킬만한 능력도 원래 없습니다
이후로도 함의 후예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있었고, 모세를 방해하는 바로왕이 있었으며, 사울을 통해서는 다윗을 죽이려 했고, 여호사밧의 며느리인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통해서는 거의 모든 다윗의 자손이 살해( 왕하 11:1 )당하며 후대가 끊어질 뻔 하였으며 그리고 사단은 유대의 지배계급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장로들 부터 철저히 타락시키고 외식과 형식주의 자들로 만들어 놨기에 예수님도 요 8:44 )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魔鬼(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殺人(살인)한 자요 眞理(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眞理(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저주했었던 것이며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빌라도에게 내주는 직접적인 원수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사단은 주변의 이방을 통해 때로는 물리적 행사로 때로는 향락적인 우상 숭배로 미혹하며 이스라엘의 발목을 철저히 묶어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보내주신 그 많은 선지자들도 제 명대로 산 사람이 없고 거의 자기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눅 11:51 )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아담 ) 타락 이후 사단은 쉬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단은 온 유대에게 불신의 가라지를 뿌리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였고 종국에는 가룟 유다가 배반( 요 13:2 ) 까지 하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리는데 일조하게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보면 사단이 그렇게 하게끔 예수님이 유도( 요 11:51 )를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는 고육지계로 사단을 완벽하게 속이시며 말씀을 핏속에 숨기시므로 이미 승리( 요 19:30 )를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그처럼 예수님은 초림때에 십자가에서 우편강도의 고백에 의해 극적으로 삼일길을 걷고 승리는 이루었지만 이내 육신이 깨지며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십자가 위에서의 승리였기에 어쩔수 없이 완성은 하지 못하였고 해서 후에 숨기신 핏속의 말씀이 나올 때에 구속사가 완결되게 하신다는 만세전의 경륜속에서 박목사님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성경속에서 박목사님이 오시는 길은 어떻게 보여지고 감춰져 있었는지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약속된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 구약 전체에는 실체되신 예수님의 그림자( 표본, 모범, 예표 )로써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며 예수님과 또 그의 하실 일에 대해서도 알고 예비하도록 기록되어져 있었는데요
노아로 부터는 심판주의 그림자를,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되는 복을 주시는 믿음의 주로 보이셨고,  모세를 통해서는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광야( 교회 )를 거쳐 천국( 가나안 )으로 이끌어 가는 3권( 선지자, 제사장, 왕 )을 가진 영적 지도자로 보여 주었고, 다윗을 통해서도 그  허락하신 땅에서 모든 이방( 심령의 666 )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과 일체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통일 왕국을 세우는 왕의 모습을 보이셨으며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서는 변화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가 될 것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미리 그의 그림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사역들을 보여 주셨고 또 때에 맞춰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언약들( 무지개언약, 횃불언약등등 )과 예언( 사 7:14, 9:6, 61:1-2 )을 주시며 정작 오셨을 때에 알아 보고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실제 역사속에서 일으키신 사건과 사고들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림자들을 통해서 실체를 알아보고 순종케 하여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아들과 아버지 이렇게 둘로 나뉘게 될 것도 당연히 그 비유의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 사례로 대표적인 몇가지만 다시 적어 보겠습니다
1) 시내산 아래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깨뜨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첫번째 두 돌판은 아들 예수( 십자가 )를 그리고 다시 모세가 만들어 가지고 올라가는 두 돌판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2)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야 하는 므리바의 츄로반석은 아들 예수를 예표하는 것이고 그냥 말로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던 가데스의 세라반석은 아버지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세에게 백성들의 얼이 미치므로 말로 명하지 않고 다시 지팡이로 치는 바람에 아버지까지 죽이는 구속사의 큰 판을 깨뜨리는 죄를 범하므로 모세는 그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렇게 죽는 모세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이어서 가나안에 입성하는 여호수아는 아버지 박목사님을 예표하는 것이지요
4)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 때 죽어 머리가 없이 벧산 벽에 걸리는 사울( 삼상 31:10 )은 끝내 머리 둘 곳( 마 8:20 )을 찾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통일 왕국을 이루는 다윗은 아버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5) 세겜은 “어깨에 짐을 지다라는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하는 새벽이라는 뜻”을 함께 가졌기에 초림의 예수님을 뜻하고 벧엘은 변화 승천하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있는데요
해서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부터 고향에 돌아와서도 벧엘로 가야하는 언약( 창 28:15 )을 잊고 10년을 세겜에서 지체하자 하나님은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과 이로 인한 시므온과 레위의 복수로 일어나는 세겜 대학살의 비극을 겪게 하시며 야곱을 회개하게 하시고( 창 35:4 ) 다시 벧엘로 부르시고 복을 주시는데요 몇가지 중요한 사건이 이때 베델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 창 35장을 통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필이면 여기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수명을 다하고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와 같았던 세겜에서 떠나오니 이제는 아버지 격의 야곱이 되어 더이상 유모가 필요없는 장성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되구요( 창 35:8 )
둘째, 이 벧엘에 오매 하나님은 야곱이 지난 10년 동안 세겜에서 산 것은 하나님이 계수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삶이었던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제사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인정을 하시며 그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창 35:10 )는 福(복)을 주시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니 끝날에 변화를 받아 이기는 자를 그림자로 먼저 보여 주시는 장면이 되는 것이지요
아버지 박목사님의 때에 아들 예수의 십자가만으로는 이기는 자가 될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벧엘이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하시며 승천의 장면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창 35:13 )
해서 세겜은 아들 예수를 상징하고, 벧엘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교훈은 오늘날 표면적 십자가만 붙들고 있는 교회가 아버지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차피, 계 17:17 )의 말씀이 응하게 될 때에 사단에게 마치 강간을 당하듯 하는 상황( 계 13:7 )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버지 앞으로 오지 않는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 8:24 )
와도 되고, 안와도 되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6)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 부터 받은 축복의 떡은 아들 예수를 상징하고 있고 포도주는 피에 감춰진 말씀인 아버지를 그림자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7) 붉은 에돔의 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를 야곱은 이기는 자( 창 32:28 )인 아버지를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사도 바울도 이 아들과 아버지 때를 가리켜 이르기를, 롬 9:33 ) “記錄(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磐石(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하여 부딪히는 돌은 초림 예수( 행 4:11 )를 상징하고 이어 반석( 아버지, 고전 10:4 )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여 곧 두 절대예정을 의지하는 자는 세마포를 입는 자요 또 빠는 자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계 22:14 )  
9) 또 성경에는 예수님과 아버지를 상징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함축되고 비교되는 두 단어들을 통해서도 알수 있게 하셨는데요 이를 정리를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들과 아버지( 요 14:6 ), 떡과 포도주( 창 14:18 ), 살( 고기 )과 피( 창 9:4, 레 17:14, 마 26:26-28 ), 달( 반사체 )과 해( 발광체 ), 여리고( 달의 성읍, 눅 19:28 )와 예루살렘( 진리의 성읍 ), 세라( 홍사, 창 38:29  )와 베레스( 터치고 나오는 핏소리, 히 12:24 ), 부활과 변화, 생령과 신령( 고전 15:46 ), 홍해( 출애굽 초기 )와 요단강( 말기, 언약궤가 앞서서 감, 수 3:6 ), 기름과 금기름( 슥 4:12, 마 25:4 ), 이른비와 늦은비 ( 신 11:14 ), 장자권( 예수님이 주셨고 )과 장자의 복( 아버지가 완성 ) 등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만 기록해 봤습니다

그럼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로 나뉘는 일이 계시되고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가 오시는 예언도 당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곧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아들격의 사명인 대속의 속죄양이 되시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므로 그들의 불신을 저주 하시고 “저희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최종선고를 내리셨으니 그럼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는 하는 사역이 남아있는 만큼 이에 대한 계시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대가 멸망 당하기 직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재삼 경고하시는 예언이 있는데요
렘 5:15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집이여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먼 곳에서 이스라엘은 알수도 없는 한 민족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민족을 통해서 열매를 맺으시겠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렘 5:17 )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는 말씀이 증거가 되겠는데요
이는 또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를 죽이시기 직전에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에 받을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을 저주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에 이미 경고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신 28:49 ) “곧 여호와께서 遠方(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民族(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言語(언어)를 알지 못하는 民族(민족)이요”라 하여 먼저 표면적으로는 유대를 멸망시키는 바벨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실체가 되는 아버지 박목사님과 그의 민족이 이스라엘 대신 열매를 맺는 일을 하게 될것으로 처음부터 경고 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것을 이미 위에서 언급을 한대로 모세와 예레미야가 활약했던 사이의 중간시기에도 이사야와 호세아를 통해서 같은 뜻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함을 일깨우며 아래와 같이 경고하고 있었는데요
공동번역, 사 46:11 ) “나만이 해돋는 곳( 동방, 개역한글 )에서 독수리를 불러 오며, 먼 곳에서 내 뜻을 이룰 사나이를 불러 온다. 나는 한번 말한 것은 이루고야 만다. 계획을 세운 것은 그대로 하고야 만다”고 한 예언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모든 예언들을 살펴보면 다 한가지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도태시키고 새로운 사람( 민족 )을 세워 마무리로 구속사를 끝내겠다는 뜻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는데요

사 46:11 )의 말씀이 간결하지만 모든 뜻을 담고 있기에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1) 해돋는 곳( 동방 )에서
2) 독수리( 아버지 )가 와서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4)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자신이 분명히 이루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럼 위의 1) - 4) 까지의 각 말씀속에 담긴 구속경륜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1) “해돋는 동방”의 역사란 ?
동방( 창 2:8 )이란 동쪽, 동편, 해가 뜨는 쪽( 민 2:3, 3:38, 삼하 23:4 ) 이 되는 것으로서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해로 상징되고 있는 하나님이 출입하며 오가는 신령한 의미의 방향( 겔 11:1, 43:2,4, 47:2 )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게 되겠습니다 곧 말씀이 나오시는 곳이 동방이라는 것이지요
실례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예수님의 별이 동방으로 부터 동방박사들을 이끌고 왔던 것을 봐도 하나님은 동방으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2:9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의 말씀이 증거가 되겠지요
해서 사 46:11 )에서 말하는 동방, 해돋는 곳은 실제 박목사님이 태어나시고 사역을 주로 하셨던 극동의 한반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신령한 의미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한국에서 태어나시는 박목사님을 통해서 구속사가 완결되며 심판을 함께 하사 인류사가 끝나도록 모든 설계를 만세전에 정해 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얘기가 되겠는데요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교회가 과정적 재림을 모르기 때문에 재림주나 심판주가 이스라엘로 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서 Back to Jerusalem을 위한 “알리야" - 알리야 (히:עֲלִיָּה ,Aliyah)란 히브리어 ‘올레’(עולה) 즉 ‘올라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유대인의 땅인 에레츠 이스라엘, 즉 본토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 를 외치고 눈에 보이는 제 3 성전까지 말하며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3 성전은 에스겔 성전이 되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이 아버지 말씀과 임마누엘 역사로 그 성전인 새예루살렘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전 3:16, 고후 6:16 )
그래서 알리야의 본 뜻이 “올라가다”인 “올레”에서 파생된 명사인 것을 주목해야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새예루살렘이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도 이 세상을 살 때에 나그네 삶을 살며 하늘의 성을 바라보았다고 한 것입니다( 히 11:8-16, 갈 3:9 )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변화의 간접적인 표현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심입니다만 지금의 성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리산이 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 말씀을 받는 우리가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며 동방의 별( 창 1:3, 계 22:16 )이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슥 14:7 )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고 예언을 먼저 해 놓으셨던 것인데요
이 어둠의 흑암이 가득한 마지막 때에는 아버지 말씀이 그 신령한 빛이 되는 것이고 또 그 말씀으로 완성되는 사람이 바로 그 새벽별이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를 베드로도, 벧후 1:19 ) “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豫言(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한 것인데요 이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했던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난후에 바로 기록하므로서 이는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예언은 아버지 말씀을 가리키고 있고 “날이 새어 샛별" 이라 함은 새벽별이라는 뜻이 되어 이 본문의 뜻도 아버지 말씀으로 새벽별이 되어야 하는 때가 있음을 주지 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인데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주목하라는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해서, 말 4:2 ) “내 이름을 敬畏(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光線(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의 말씀과 같이 온전히 원리 세계의 존재( 창 1:3 )로 회복함을 얻으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독수리가 와서”라는 뜻은 ?
이 뜻은 독수리로 상징된 사람이 온다는 것이 되겠는데요
먼저 독수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비유( 출 19:4,마 24:28, 계 12:14 ) 되고 있으니 본문은 하나님 같은 사람( 아버지 박목사님 )이 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하면 되겠지요
먼저는 아버지의 그림자로 계시된 바사왕 고레스가 그러한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옛날 출애굽 때에는 모세( 예수 )를 지도자로 동족을 이끌도록 세웠듯이 바벨론에 포로되었던 유대를 다시 고향으로 귀환 시키는 지도자로서는 이방인인 바사왕 고레스( 박목사님 )를 세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에게 하나님은 먼저 이에 대한 예언을 아래와 같이 주셨습니다
사 44:28 )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와
사 45:1 )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의 예언을 고레스가 태어나기 무려 100여년 전에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고레스( כֹּרֶשׁ, Coresh )라는 히브리식 이름이나 페르시아 언어로나 태양(sun)을 의미 하고 있으며
그리스어로는 Κῦrος( 쿠로스 )입니다 고레스( Cyrus )는 음식(food)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구요
또 그는 목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는데요 어렸을 때에 아마도 실제 양을 치는 목자의 경험을 가진 그의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이 모든 특징들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별명과도 같은데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 열국을 굴복시키는 자 그래서 모든 열방을 평강케 하는 자로서 태양이며 목자이고 참 양식이 되는 자”라는 것이 그에 대한 예언과 이름의 뜻으로 담겨 있으나 고레스는 초림 예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의 왕이 되기에 아버지 박목사님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한 제국의 속국이 되어버린 한 나라나 민족이 제멋대로 이동하거나 움직임을 보이면 그저 멸절당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역사속에서 능력으로 뻔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100여년 전에 고레스에 대해 미리 예언을 주시며 세운 것이었고 그 예언대로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고토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며 돌아갈 때 성전 기물들을 되찾아 가게 하고 또 필요한 모든 것을 도중에서도 공급받을수 있고 신변 안전까지 보장 받을수 있도록 하여 자신은 직접 움직이지 않지만 그의 명령( 말 )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 1장 )  
이 모습이 바로, 고레스가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독수리와 같이 쓰임 받았다는 것이며 이 독수리에 대한 예언인,
출 19:4 )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行(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引導(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와
신 32:11-12 )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引導(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神(신)이 없었도다”한 말씀이 고레스에 의해 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박목사님께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서 아버지 말씀으로 저희 신광교회를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벧후 3:13 )
이는 초림때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마지막 때에 대한 징조를 물었을 때에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이 되겠는데요( 눅 17:20, 마 24:28 )
바로,
눅 17:37 )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 요 8:24 )와 같은 주검이 된 오늘날 일반 교회에 독수리( 아버지와 증인들 )가 살리는 영의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라는 의미는 ?
본문에서 표면적 뜻으로 보면 포로된 이스라엘이 본향( 천국 )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입니다만 이면적인 뜻으로는 박목사님에 의해서 우리 속사람을 완성시키고 영혼의 등불을 온전히 발광( 잠 20:27, 시 36:9 )시키어 변화능력을 받아서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뜻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박목사님이 선포하시는 아버지 말씀을 깨달아 아버지 영( 롬 8:11 )으로 임마누엘하시는 역사를 통해 아버지 말씀과 하나가 되어 원리 세계의 빛( 창 1:3 )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곧 남은자( 계 12:17 )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깨달아 가며 임마누엘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이마에 아버지 이름을 인친다고 한 것입니다( 계 14:1 ) 아버지 사상으로 가득찬 정수리의 복을 충만히 받은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박목사님께서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시며 열매를 맺게하시려고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신광교회 김갈렙 목사님에게 말씀을 주시며 선포하게 하시고 격려하시며  함께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4)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이 분명히 이루시는 것으로 맹세하듯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속사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아들 예수님이 실행하셨으며 성령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초림때에도 예수님은 우주 하나님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 받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 요 1:1, 5:43 )으로서 오셨지만 사람들이 믿지를 못했지요 오늘날은 박목사님이 그 하나님 예수의 모든 전권을 이양받고 모든 일을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해서 지금은,
단 2:44 ) “이 列王(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永遠(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滅(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하신 그 의의 나라를 박목사님은 시온( 히 12:22 ), 곧 저희 신광교회에 세우시고 두 증인( 뜨인 돌 )들을 앞세워서 모든 나라( 사상 )를 굴복시키시고 있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단 2:45 )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의 말씀처럼 산( 아버지 )에서 뜨인 돌이라 했는데 그 뜨인 돌이 두 증인이 되어 세상 모든 사상과 종교들로 부터 박목사님께서 아버지라는 인정을 받아 내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사 28:16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한 돌 곧 뜨인 돌로서 두증인( 계 11 장 )의 역사를 뜻하시는 것인데요 이는 다윗이 다섯 물맷돌 중에서 첫번째 물맷돌로 골리앗( 만국의 사상 )의 미간을 맞추며 쓰러뜨린 사건의 실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두증인을 통해 아버지는 이기시며 남은자의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미 4:7 ) “그 저는 자로 남은 百姓(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强(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山(산)에서 이제부터 永遠(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의 말씀처럼 행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남은자들이 지금은, 계 12:6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라고 하신 것처럼 양육 받는 때가 되는데요
이는 1260일에서  30일을 더한 1290의 때를 지나 45일을 더한 1335일을 향해 가는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작한 1260일 부터 도합 75일를 더한 때가 아버지가 심판주로 오시는 1335일의 때가 되는 것인데요 그러므로 이 75일을 break down 해보면 30일과 또 한때 30일을 더하면 두때인 60일이 되는 데요 여기서 반때 15일을 더한 것이 “한때 두때 반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확히 그 1335일 직전의 때가 되어,
계 12:17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한 말씀이 응하는 때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기고 끝까지 남은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어떠한 근거로 이 마지막 때에 열매를 맺게하시는 일이 왜 하필이면 박목사님과 그의 민족에게 맡기게 된 것일까요 ?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 계열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셈족이었을까요 ?
셈은 노아의 세아들중 장자로서 다른 두 아들인 야벳과 함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예배를 드렸던 것을 하나님도 인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9:26 )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 함의 아들  )은 셈의 종이 되고”의 말씀처럼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다른 두아들과 영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는 장면이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셈의 자손으로 아르박삿이 있고 또 그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으며 또 셀라는 에벨을 낳았는데요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셈의 복이 이 에벨에게로 옮겨 가는 장면을 기록하여,
창 10:21 )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 하면서  
이제 “셈의 하나님”은 “에벨과 에벨의 온 자손 즉 두 아들인 벨렉과 욕단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된 것으로 기록을 하여 다른 자손들과는 이제 상관이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에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구별된 것일까요 에벨의 이름에 그 비밀이 담겨 있었는데요 에벨은 홍수 후 67년 되는 해에 태어났구요 그 이름의 뜻은 “건너다” 라는“아바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건너온 자”라는 뜻이 됩니다 먼저는 그 무렵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등장을 한 상태가 되어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이긴 결과로 바벨탑을 쌓으려고 기초가 놓이는 때였던 것을 추측해 볼때 에벨은 그 타락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려고 유브라데를 건너 시날 땅 바벨을 떠나므로 죄악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낸 자가 되었다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악을) 건너 온 자"라는 에벨의 이름 뜻이 증거가 되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의 원뜻도 “아바르, 건너다”에서 파생된 단어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바벨탑은 에벨이 34세 때 홍수 후 101년에 낳은 맏아들 벨렉의 때에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모든 것이 중지되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 창 10:25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 벨렉의 동생인 욕단도 이동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를 봤을 때에 에벨의 믿음에 복을 주시려고 그 복이 두 아들 벨렉과 욕단과 그들의 자손으로 이어지게 하신 것인데요 이 장자 벨렉을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이 오셨으나 예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고 도태되므로 나머지 마무리 사역은 당연히 에벨의 또 다른 아들인 욕단을 통해서 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시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 창 10:21 )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응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욕단족속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 창 10:30 )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하여 지금의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이지만 대한민국이 욕단족속이었기에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만세전에 세우신  구속경륜 속에서 아버지 박목사님을 한국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지리산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말씀과 하나가 되게 하시며 본격적인 구속사의 마무리 사역을 하시도록 한 것이니 그의 제자들( 두 증인 )도 당연히 박목사님의 주변에서 피택될수 밖에 없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다 유대인이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제자들도 다 한국사람인 욕단 족속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세계 만민에게 아버지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순서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지며 모든 분야( 문화, 영화, 군사, 농업, 의료, 교육, IT 등등 )에서 선두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 가는 것도 우연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 박목사님 )이 계신 곳이 우주의 중심이며 세계의 중심( 겔 38:12 )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나라요 민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 나라를 높이신다는 것이지요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이며( 신 28장의 복 )
셋째는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며 형통케 되는( 요삼 1:2 ) 하나님의 법칙이 발동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나라가 잘못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전쟁도 대신 싸워주시며 편( 신 28:7 )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래서 누누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은 아버지 박목사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며 참된 예배( 요 4:23 )로 박목사님을 높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12: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령적 禮拜(예배)니라”하신 말씀대로 우리몸을 드려 변화의 첫열매가 되어야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아벨이 그 옛날 자신이 변화의 첫 열매가 되어 아버지 아담이 쫓겨난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득 품고 항상 첫것으로 예배를 올려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그의 제물을 통해서 인정( 히 11:4 )을 하였던 것처럼 예배를 아벨처럼 알고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요 제물( 우리 자신 )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이 모든 구속사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
아니면 도태되고 쫓겨나게 되어 있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잖아요( 시 49:20 )
그래서
요 17:3 ) “영생이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로 죽어 부활한 것만 알아서는 구원이 없고 흘리는 핏속에 아버지 말씀을 담아 땅 밑에 저장해 놓았었는데 그 말씀이 박목사님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다시 나와 변화로 구속사가 마무리 된다는 비밀까지 알아야 구원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표면과 이면의 온전한 십자가의 도이며 온전한 예수님( 아들 + 아버지 )을 안다고 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자신이 변화의 첫열매가 되기를 원하는 장자신앙을 담아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며  예배를 드린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알고 드리는 그런 예배를 열납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 영혼육이 흠없이 보전 되어진 참예배자가 되어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아들로만 알고 드리는 예배는 이제 우상숭배와 같은 이방종교와도 같은 것입니다
선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악한 것이 되었는데 그 사실 자체를 모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오히려 아버지 말씀 교회를 악한 이단이라 하며 막고 있으니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고 있는 죄악중의 죄악이 되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생명나무의 과실을 옆에 두고 선악과만 따 먹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바쳐도 인생으로서는 깨달을 수가 없고 또 사단이 그렇게 깨달을수 없도록 역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아시는 하나님이 배려로 먼저 말씀을 받고 깨달은 두 증인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는, 마 24:42-44 ) “깨어 예비하고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는 “Watch out”이란 의미로서 “주의해서 보라” 혹은 “주목하라”는 뜻이 되는데요 이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두 증인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는 “성경을 깨달아라"가 아니라 저희 교회 같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하면 혹시 “두 증인이 맞는지"를 주목하여 알아보고 따르는 것이 마지막 때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박목사님께서는 이 본문 말씀은 끝날에 “이정표”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말이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면 아버지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임마누엘( 롬 8:11 )로 하나가 되어 온전히 신령하게 되면 발광체가 되고 변화체를 이루면 눈앞에 와있는 그날에 풀무불 속에서도 넉넉히 그 불을 이기고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3:2 )

지금은 “두 증인” 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적어도 그들의 소리가 맞는지 상고하고 진위를 가릴수 있어야 살수 있다는 것이지요
부디 이기고 남은자가 되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