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言約櫃) 11. 10. 2021


히브리서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궤(언약궤, 법궤, 증거궤) 안에는 두 돌판(율법판, 증거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모세의 지팡이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9에서는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언약궤가 솔로몬 성전에 안치될 당시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언약궤 안에 모세 때에는 3종류의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2종류는 분실되고 솔로몬왕 때에는 1종류만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사울왕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 빼앗겼는데 (삼상4:11,17) 그 때 2종류는 분실하고 1종유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2종류나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언약궤 안에는 처음부터 1종류인 두 율법판만 들어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명히 율법판은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출애굽기40:20에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라고 했고, 신명기10:5에도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했고, 민수기17:10-11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왜 3종류가 있었다고 한 것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구약의 율법과 제도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관하게 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로 보면 그것들이 언약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3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https://nykcn.org/eonyaggwe-culaegubgi-25-10-22

언약궤(言約櫃)
계약(契約)의 궤(櫃)란 무엇입니까?

언약궤 계약의 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설계대로 만든 신성한 상자였습니다.
계약의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돌판 즉 ‘증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동영상 자료

1. https://www.youtube.com/watch?v=qum9uvS6uVI

2. https://www.youtube.com/watch?v=o32r4gRT70k

3. https://www.youtube.com/watch?v=ceZHlc55HCg


신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 9장과 요한계시록 11장에 소개됩니다.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언약궤에 대한 질문(출 25:10-22, 37:1-9)

  1. 언약궤를 만든 나무는?(10절)

  2. 언약궤의 크기는?(10절)
                                             장 : 2 규빗 반
                                             광 : 1규빗 반
                                             고 : 1규빗 반

 3. 궤를 둘러 싼 것은?(11절)

  4. 증거판을 어디에 두었나?(16, 21절)

  5. 속죄소를 만든 재료는?(17절)
      (시은좌)
 
  6. 그룹을 만든 재료는?(18절)

다양한 명칭 

    증거궤(출애굽기 30:6)
    법궤(레위기 16:2)
    언약궤(여호수아 3:3)
    여호와의 궤(여호수아 4:11)
    하나님의 궤(사무엘상 3:3)
    언약 넣은 궤(역대하 6:11)
    주의 능력의 궤(역대하 6:41)

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요한계시록 11:19
(일곱째 나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여호수아 3:15-17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만나 항아리(출애굽기 16:1-36)
- 애급에서 나온 후 이월 십오일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시험하리라(4b)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민수기 17:1-10)
-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출애굽기 32:1-20, 34:1-35)
-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신명기 10:5b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 불신과 우상숭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만나 항아리 : 불순종과 원망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십계명 돌비 : 불신과 우상숭배

예레미야 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언약궤의 역사

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출애굽기 25:16, 25:21)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 증거판 / 5715, 에두트(ʽêdûwth) עֵדוּת
1. 하나님의 계율, 율법

* 넣으라 / 5414, 나탄(nâthan) נָתַן
1. 주다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출  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 16:33-34)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
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왕상 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라. 사라진 것들

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1차

가. 40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586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첫째, 만나 /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출애굽기 16장)
2.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수기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둘째, 아론의 지팡이 /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250명이 직접적으로 죽고 불평에 동참한 자 14700명도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셋째,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3000명이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6. 적용

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성경에는 오류가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가 없다는 것은 성경 원본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사본이나 번역본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출간되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혁한글판만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은데 사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이전에는 King James Version만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번역본들은 무시했었다가 이런 선입견이 없어진 후 수많은 번역본이 나왔으며 그 중에 훌륭한 번역본들이 많습니다.

서로의 미흡한 것을 보안하다보면 원본에 더 가까운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을 의거하면 그 안에는 세 가지 곧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은 두 돌판만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9절
역대하 5장 10절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이말씀과 히브리서 9장 4절의 말씀과의 다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도 과거에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언약궤가 성막에 있을 때의 말씀이고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기록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는 세 가지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다윗 시대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안을 쳐다 볼 때 꺼냈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4-5년 전 앞의 두 군데 말씀과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7장의 말씀을 토대로 언약궤 안에는 항상 두 돌판만 있었고 다른 두 성물은 언약궤 앞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 16:33-34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수기 17장 4절에서 만나를 증거판 혹은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가만 생각하면 누가 감히 언약궤에 손을 대어 뚜겅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성물을 만질 수 있었겠습니까?
레위 사람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가지 않고 수레에 실고 가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무의식중에 언약궤를 붙들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과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열어 보았을 때도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물건을 만져보기도 전에 쳐다 본 즉시 수많은 사람들(오만 칠십 명-표준새번역, NRSV, KJV등등, 칠십 명-NIV, 현대인의 성경, NIV, RSV, NRSV등등 우리가 주로 보는 개역성경에는 (오만)칠십 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제 생각에도 작은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아 칠십 명이 맞는 것 같음)이 즉사한 사건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안’이라는 헬라어 ‘엔’은 보통 ‘안에’라고 해석하지만 그 외에도 ‘에,’ ‘위에,’ ‘에게,’ ‘가운데,’ ‘중에,’ ‘동안’ 영어에서 ‘with’(마 16:28; 요일 5:6), ‘by'(롬 5:9; 히 9:22; 계 1:5)로도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이나 그 앞에 있는 만나를 담은 금항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같이 묶어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엔'을 ‘그 안’이 아닌 단순히 ‘거기에’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 거기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이와 같이 전치사 하나를 ‘안’으로 해석하느냐 ‘에’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안’이 아닌 ‘에’로 해석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약의 말씀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증거판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언약궤 안에 있는 증거판 앞에 두라는 말씀으로 그 안에 두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을 언약궤에 옆으로 세워 놓았을 리 만무하고 가장 먼저 두 돌판을 넣어 바닥에 놓았을 것이기 때문에 만나를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증거판 위에다 얹어 놓으라고 명령하시지 그 앞에다 놓으라고 명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기 16장증거판이나 민수기 17장증거궤나 히브리 원어는 ‘에두트’로 똑같은 단어로서 언약궤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성물, 곧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증거궤 곧 언약궤 앞에 두었던 것이지 그 안에 넣은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세 가지가 다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언약궤의 크기가 가로 이 규빗 반(약 113cm) 세로와 높이가 일 규빗 반(약 68cm)으로써 항아리, 지팡이뿐만 아니라 두 돌판이 들어가기에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팡이가 지금 노인들이 갖고 다니는 지팡이만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지만 그 당시 지팡이는 단순히 걷는데 의지하는 작은 지팡이가 아니라 양을 치는데도 사용하고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사람의 키보다도 긴 지팡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 안에 언약의 두 돌판, 곧 증거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언약궤 혹은 증거궤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지요.

‘그 안에’를 언약궤 안으로 해석하고 있어 히브리서 9장 4절 말씀의 해석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가 무척 두렵고 떨립니다.

성경 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사본들과 번역본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Trinity 신학교 교수인 Wayne Grudem교수가 언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약 1000년의 차이가 있는 두 사본을 살펴보아도 많은 차이가 없으며 그것도 주로 접속사나 전치사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경의 양피지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인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산 사본이 원본과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번역들도 원본과 별 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구원 얻는데 충분한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Grudem 교수는 “만일 사본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실수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실수로 잘못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계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수정하므로 성경 원본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연구하면서 묵상하기를 원하시고, 성경의 비밀과 난해한 부분의 해석들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심으로 모든 비밀과 해석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확실히 알게 되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법궤에 대한 상상도

법궤가 만들어 진 것은 BC 144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만들었습니다.

아래 사진들도 모두 상상도이거나 상상 모형도의 사진들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성경의 내용은 특히 구약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세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가지가 들어가있다는 것은 신약 히브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 십계명 돌판(두번째) 돌판을 법궤(증거궤)에 넣은 것은 맞습니다.
출애굽기 22장입니다.

첫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출 32장) 다시 새 돌판을 받습니다(출 34장).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 지며”(출 25:16)

그런데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16: 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호멜(Homer. חֹמֶר, Homer)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민수기 17:4
그 지팡이를 회막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민수가 17: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민수기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구약 성경에는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함께 넣어졌다는 구체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볼 때 광야의 성막이 자주 이동하는 동안 이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런 랍비들의 성경 해석을 따라 히브리서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이미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솔로몬 시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만 나중 솔로몬이 B.C. 959년 경 성전을 짓고 나서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고 확인할 때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열왕기상 8: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돌판을 제외한 만나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광야 40년 동안에 한시적으로 법궤 안에 넣어져 보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후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광야의 성막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 법궤도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주전 약 586년 전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은 약탈되고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핵심 귀족과 인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때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언약궤 곁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책을 법궤 안에 넣지 않은 이유는 수시로 율법책을 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1:24-26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정말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며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 자체가 주술적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법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듭남과 변화가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에 이용하는 에벤에셀 전투에서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도록 놔두십니다.

법궤 숭배가 아니라 내면의 개혁이 중요함을 가르쳐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회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시고 법궤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 훗날 바벨론 포로로 이스라엘이 잡혀갔을 때 예레미야는 이 법궤에 대한 문제를 정확하게 신앙적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언을 남깁니다.
이 부분을 대단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3:16-17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2달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고 1년 가까이 시내산 기슭에 머물며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립한 후 훈련받고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10장에 이르러 드디어 광야로 떠난다.

출애굽 후 만 1년 1개월 5일이 지난 때였고(B.C.1445년) 시내산에 도착한 때로부터는 만 11개월 5일이 지난 때였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2월 20일에 머물던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향한다.
드디어 BC 1445년 2월 20일(민수기 10:11)
구름이 증거의 장막에서 떠올랐다.

두렵고 떨렸다. 막막한 평탄치 않은 광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광야! 거치지 않을수는 없는 것인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광야였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
-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

블레셋의 해안 도시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다.

▶(수 13:3)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동맹을 결성한 막강한 블레셋 군대; 그 길외에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는 가나안에 갈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바란광야. 수르광야, 에담광야, 신광야, 네겝광야, 시내광야 가 놓여있다. (인생에도 그런 피할 수 없이 나아가야하는 광야가 있다!) 

두려웠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저 광야, 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바란)광야로 나아가면서 2지파의 맨 앞장 서서 간 것이 법궤였다.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길(바란광야)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10: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가 기도한다!

모세도 두려웠다.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운다. 원래는 정찰 수색대를 앞세워야하는데 군인들이 아니라 법궤를 앞세웠다. 봐도 봐도 막막한 광야,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불안하고 두려웠다. 믿고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진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들이 광야길을 걸어간 것을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길도 그러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간다.
<그대에게 가는 길> 방기순; 복음성가 가수; 서울교회지휘자;

그대에게 가는 길 (하나님께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겐 힘이 되었지

이제는 내가 길이 되어 그대를 향해 가리니

그대에게 가는 길 어디쯤 있을지 무작정 길을 나서다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들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첫사랑을 향한 그리움, 고향을 향한 그리움, 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힘이 되었을까?

법궤였다.
그 법궤가 전진할 때는 가장 앞에 있었다.
진을 칠 때는 그 법궤가 12지파의 가운데에 있었다.

▶ 영어성경은 노아방주, 모세의 갈대상자를 ARK로 번역했다(원어, 테바)
그리고 법궤도 나무상자라는 의미에서 ARK로 번역했다.
노아 방주와 모세 갈대상자의 특징은 방향과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노나 돛이 없다. 이끄시는대로 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야한다.

그런데 법궤 속의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는 기적의 상징 뿐만 아니라 사실은 죄의 상징이요, 은총의 상징이었다.
▶ 만나, 출애굽기 16장 배고파 죽겠다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다(16: 1-12절 7번 원망이라는 말이 나타남) ▶ 원망과 불평은 성격이나 습관이 아니라 죄이다! [민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오래 하면서 서슬프게도 노예근성의 언어, 불평과 원망의 언어습관이 생겼고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기대고 의존하고 나눌 줄을 모르고 드릴 줄을 모르고, 공짜근성, 거지 근성이 생겼다. 

▶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불평은 죄인된 인간의 저열한 성품을 만족시키는 쾌감이 있다. 불평을 듣는 것도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욥->입술로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욥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불평은 마귀의 언어요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다.
▶ 아론의 지팡이 사건 [민16:2]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으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게 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까지 나게 한 사건!! 250명이 죽은 사건! 더 나아가 불평에 동참한 자 일만사천7백명도 죽는다. 그런데 또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다. 살구나무; 깨어 지켜보시고 지키신다는 뜻이다.

▶ 십계명의 돌판도 두번째 돌판이다. 불신으로 우상을 만들어 춤추는 백성들! 분노로 깨뜨린 돌판, 출 32장,  34장 다시 만들어주신 돌판,  또 용서해주셨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이제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뜨거운 눈물의 고백이다!
십계명 돌판의 불신, 만나의 원망, 아론지팡이의 교만과 거역,  그리고 용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받았다. 기회를 얻었다. 고쳐보겠습니다! 소망을 다시 세운다. 그 은혜로 살겠습니다!!

▶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한다. 돌판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상징한다. 만나는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 예수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즉 예수님을 믿는자에게는 길이 열리고 소망의 싹이 트고 열매를 맺으며,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이 있고 만나로 상징되는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충만할 것이다!
인생의 광야길이 힘들어도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함께 법궤를 메고 가는 한 반드시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만나를 내려주시며! 진리로 사는 자의 만족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아시는가? 여호수아 4장의 기적! 40년 광야의 마지막 순간의 기적!! 그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가정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마음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삶의 길에 법궤가 있는가?
인생이라는 광야길,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오늘도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는다.













출애굽기 25:8-10, 16.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를 짓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이 되게 하고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언약궤의 구조


가로가 2.5규빗, 세로가 1.5규빗, 높이가 1.5규빗(111 x 67 x 67cm)
궤를 만든 재료는 "조각목" 즉 "아카시아나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안팎을 금으로 입혔으며 둘레에 금테 장식이 있었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덮개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금으로 만든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얼굴은 덮개를 향해 있었으며 날개가 덮개 위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궤의 네 다리 위에는 금으로 주조한 고리가 각각 한 개씩 있었습니다. 그 고리에 금을 입힌 아카시아나무 채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 채를 이용해 궤를 운반했습니다.— 출애굽기 25:10-21; 37:6-9.

  • 위치. 처음에 궤는 장막의 지성소에 놓여 있었습니다. 장막은 궤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숭배를 위한 이동식 천막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백성은 그 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40:3, 21)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6:2; 히브리서 9:7) 나중에 궤는 솔로몬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로 옮겨졌습니다.—열왕기상 6:14, 19.

  • 목적. 궤는 신성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물품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궤는 속죄일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레위기 16:3, 13-17.

  • 내용물. 궤에 처음으로 보관한 물품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40:20) 나중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도 그 궤에 보관했습니다. (히브리서 9:4; 출애굽기 16:33, 34; 민수기 17:10) 그 금항아리와 지팡이는 그 후 언젠가 궤에서 꺼낸 것 같습니다. 궤를 성전으로 옮겼을 때는 그 물품들이 궤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8:9.

  • 운반. 궤는 레위 사람들이 아카시아나무 채를 사용해 어깨에 메고 옮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7:9; 역대기상 15:15) 채가 항상 궤에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은 궤를 만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5:12-16) 궤를 운반할 때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칸막이 휘장”으로 궤를 덮었습니다.—민수기 4:5, 6*

  • 상징적 의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성소의 궤 위와 이스라엘 진영에 있었던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와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레위기 16:2; 민수기 10:33-36) 또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셨다”고 말하는데, 이 그룹들은 궤의 덮개에 있었던 두 그룹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상 4:4; 시편 80:1) 따라서 그 그룹들은 여호와의 “병거의 표상”이었습니다. (역대기상 28:18) 궤에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으므로, 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후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시편 9:11.

  • 명칭. 성경은 그 신성한 상자를 지칭하는 데 다양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중에는 “‘증언’의 궤”, “계약의 궤”, “여호와의 궤”, “주[여호와]의 힘의 궤” 등이 있습니다.—민수기 7:89; 여호수아 3:6, 13; 역대기하 6:41.

    궤의 덮개는 “화목 덮개” 즉 “자비의 자리”라고 불렸습니다. (역대기상 28:11; 영문 킹 제임스 성경) 이 표현은 속죄일에 덮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덮개를 향해, 덮개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느님과 화목하게 하는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 죄를 속하고 덮었습니다.—레위기 16:14-17.

계약의 궤가 지금도 존재합니까?

계약의 궤가 지금도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 궤와 관련이 있는 계약이 예수의 희생에 근거한 “새 계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궤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예레미야 31:31-33; 히브리서 8:13; 12:24) 따라서 성경은 계약의 궤가 더는 없어도 하느님의 백성이 아쉬워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3:16.

새 계약이 맺어진 후에 사도 요한은 환상에서 계약의 궤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 계시록 11:15, 19) 이 상징적인 궤는 하느님의 임재와 그분이 새 계약을 축복하신다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궤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의 궤가 있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 사람들과 전투를 할 때 진영에 그 궤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이스라엘 사람의 불충실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 7:1-6) 오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의 궤를 전쟁터로 운반해 갔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들이 진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2; 4:1-11)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전쟁에서 계약의 궤를 빼앗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때까지 그들에게 질병으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사무엘상 5:11–6:5.

계약의 궤의 역사

연도 (기원전)

사건

1513

브살렐과 그의 보조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부한 자재로 계약의 궤를 만들다.—출애굽기 25:1, 2; 37:1.

1512

모세가 장막과 함께 계약의 궤를 봉헌하고 제사장들의 임직식을 거행하다.—출애굽기 40:1-3, 9, 20, 21.

1512—1070 이후

여러 장소로 옮겨지다.—여호수아 18:1; 사사기 20:26, 27; 사무엘상 1:24; 3:3; 6:11-14; 7:1, 2.

1070 이후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다.—사무엘하 6:12.

1026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의 성전으로 옮겨지다.—열왕기상 8:1, 6.

642

요시야 왕이 다시 성전으로 옮겨 오다.—역대기하 35:3*

607 이전

성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다. 기원전 607년에 성전이 멸망되었을 때 바빌론으로 옮겨진 물품 목록이나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진 물품 목록에 그 궤는 나오지 않는다.—열왕기하 25:13-17; 에스라 1:7-11.

63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의 지성소를 확인하고는 그 궤가 없다고 말했다. *





언약궤의 능력(사무엘하 6:6-12)

이스라엘의 출애굽 광야 생활 때, 시내산에 오른 모세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고 성막의 제조법과 절기와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와 같은 지시하심에 따라 모세는 성막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진 것은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다. 여호수아 이후에는 주로 '언약궤(Ark of Covenant)'라고 불렀고, '법궤(Ark)'라고도 불렀다.

모세 / 하나님의 증거궤(Ark of Testimony)
여호수아 이후 / 언약궤(Ark of Covenant), 법궤(Ark)

언약궤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형이며, 하나님 능력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언약궤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저주와 축복이 결정되기도 했다.

'증거궤' 혹은 '언약궤'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예표해 주는 것일까?
진실과 성실함으로 이를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언약궤

1. 설계와 제조 :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제공하신 것들은 십계명의 두 돌 판성막 제조법절기제사법이다.

성막을 제조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정교함이 요구된 것은 단연 '하나님의 언약궤'였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궤(Ark)를 만들고 그 위에 덮게 즉, 속죄소를 만들어 그 위 양 끝에는 날개를 편 천사가 언약궤를 내려 보고 있게 만들어졌다.

하나님께 설계도를 받은 모세는 손재주가 특별한 브살렐로 하여금 이를 제작하고, 순금을 입혀 황금빛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 판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두었다.
이는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예표해 주고 있다.

성부(聖父) 하나님의 예표 : 십계명의 두 돌판(말씀의 하나님)
성자(聖子) 예수님의 예표 : 만나를 담은 항아리(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성령(성령) 하나님의 예표 :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성령의 능력)

2. 보호와 보존 :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벽을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으며, 그 안에 뜰이 있고 뜰 안에 번제단과 물두멍을 만들어 두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으며, 가장 깊은 곳에 지성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었다.

성소 오른쪽에는 떡상, 왼쪽에는 정금등대, 중앙 깊은 곳에는 분향단이 자리했으며, 분향단 뒤에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 지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매년 한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진행할 때에는 성막의 모든 기구를 레위인이 운반했으며, 특히 언약궤는 덥게로 싸고 체를 고리에 매어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주의해서 운반해야만 했다.

3. 상징과 능력 :

성막의 뜰은 해와 달과 별의 자연의 빛이 비춰지고, 성소 안에는 정금등대의 불이 있었으며, 지성소 안에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쉐키나)만이 빛났다.

지성소 임한 하나님의 임재는 천국에서 오직 하나님 영광의 빛만이 비춤을 예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나타나심이며, 그곳에서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곳, 즉 속죄소가 되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옹위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언약궤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하게 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언약궤로 인해 저주 받은 자들

언약궤를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소홀이 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 자들 역시 성경에 기록돼 있다.

1.엘리 제사장(삼상 4-6장)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워 나가 승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에 옮겼다. 이 안에는 언약궤를 마치 불신자들이 사용하는 부적처럼 임시방편으로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업신여기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기 좋을 대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블레셋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으며, 전쟁에서 자신의 두 아들도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는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또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 3만 명이 죽었으며, 엘리의 후손에게 복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됐다.

한편, 블레셋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취한 후 나라에 하나님의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블레셋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7개월 만에 젖을 뗀 어미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려 보낸다. 이때 벧세메스 사람 70명이 언약궤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뚜껑을 열었다 죽는다.

2. 사울왕 :

사울은 40세에 왕이 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생각도 안 했고 방문하지도 않았다. 법궤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교만해 져 자신이 제사장 직분까지 수행 하려고 했던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 결국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이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해 자기 칼에 스스로 엎어져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3. 웃사(삼하 6장)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삼만 명을 거느리고 산지 아비나답 집을 방문해, 오랫동안 방치해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야효가 수레를 몰게 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도중 수레가 다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궤를 붙들었다. 이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는 여호와의 궤 옆에서 즉사한다. 이것을 본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들여오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았다.

언약궤로 인해 축복 받은 자들

1. 여호수아 :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완강한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하시고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을 건네고 여리고 성을 섬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시대로 준행하여 여호수아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에발산에 한 단을 세우고 여호와의 율법을 돌에 새기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 앞에서 그리심산(축복) 쪽이나 에발산(저주) 쪽에 서게 하였다. 이는 언약궤는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저주가 됨을 말해준다(수8:32-33). 오랜 세월이 지나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마을)에 모이게 한 뒤,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을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선언하고 축복의 길을 가게 됐다.

2. 오벧에돔(11절) :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언약궤를 신령과 진정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 온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고 누리게 된다.

3. 다윗 (12절 이하) :

언약궤로 인해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복 받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 성으로 오게 되었다. 다윗은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면서 자기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기뻐하고 즐거워 했다.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 후손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리라(행13:22)”고 약속하신다.

실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약속은 불분명하고, 또한 약속이 없는 증거 역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언약궤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이며, 또한 이 축복이 분명히 임하게 됨을 증거해주는 증거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름 역시 '언약궤' 그리고 '증거궤'인 것이다.


오늘날의 증거궤, 언약궤는 무엇일까?

오늘 날 과연 언약궤는 무엇이며,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그런데 오히려 언약궤 자체는 사라져야만 함이 마땅하다. 증거궤, 언약궤는 영원한 축복의 모형이었으며, 축복의 본체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속죄와 속건 제물이 되심으로 은혜와 축복 증거 그 자체가 되셨다.

신약에 와서는 축복과 저주를 갈라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며 이것은 복음(Gospel)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영생의 길이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고 증거한다. 사람이 구원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즉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요3:14).

외적인 증거궤, 언약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의 구원을 확실하고 진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내 심령의 중심에 모신다면, 주님의 임재를 항상 체험하며 매일 기쁨과 평강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공부
1. 성막의 기구들을 말하고 그것들이 성막의 어디에 놓였는가?
2. 언약궤가 어떻게 제조되었고 보관 되었으며 어떻게 운반해야 했는가?
3. 언약궤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4. 언약궤로 인하여 축복을 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5. 오늘날에 언약궤의 실체는 어떻게 되었고 왜 그래야한 했으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언약궤를 무엇, 누구에게 비유해서 생각해야 할 것인가?
6. 사울 왕의 잘못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말해보라.

말씀 묵상과 나눔
1. 내가 지난날에 가졌던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 생각을 말해보라.
2.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오늘날 현재는 성경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가 말해보라.



언약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문제는 수세기 동안 신학자, 성경 연구자 및 고고학자들을 매료시킨 질문입니다.

왕이 된지 십팔 년째 되던 해에 유다의 요시야 왕은 언약궤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돌려 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역대하 35:1-6; 열왕기하 23:21-23).

그것이 언약궤가 놓인 위치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입니다.
그 뒤 40년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10년이 안 되어서,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남겨진 것을 가져가고 성전과 성읍을 불에 태워 흙더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가져갔습니까?
성읍과 함께 파괴되었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 시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에 성전을 습격했을 때 처럼, 누군가가 언약궤를 치워서 안전하게 숨겼던 것입니까?

시삭이 언약궤를 가져갔다면 어떻게 요시야 왕이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돌려 놓으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언약궤가 애굽에 있었다면 (“잃어버린 성궤의 침략자들”의 줄거리처럼), 레위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9은 언약궤가 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몇몇 사람들은 이 구절 때문에 언약궤가 하늘로 옮겨져서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하늘에 대한 환상에서 본 언약궤는 아마도 모세가 지은 언약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에 있는 물건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히브리서 9:23)이며,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성소 자체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히브리서 8:5)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1장은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사건을 알리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다룹니다.
요한이 하늘에 있는 언약궤를 잠깐 보게 된 것은 아마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과 함께 계시며, 진정한 예배가 곧 회복될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경에 속하지는 못한 마카베오기 하권(2 Maccabees)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바벨론 침략 직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장막과 언약궤를 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유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그 산으로 갔습니다(느보산. 신명기 31:1-4). 예레미야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장막과 언약궤와 향단을 넣을 수 있는 동굴 속의 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그곳에 두고 입구를 막았습니다"(2:4-5). 그러나 "그를 따라온 사람들 중에는 산으로 올라오면서 길을 표시하려고 의도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그들에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시 모으고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주께서는 이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며, 모세 시대처럼,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될 것을 기도했을 때처럼, 구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2:6-8).

이 간접적인(2:1 참조)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록 그 자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언약궤의 위치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는 랍비 슐로모 고렌(Shlomo Goren)예후다 겟츠(Yehuda Getz)의 주장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언약궤를 훔쳐가기 전에 성전의 산 밑에 숨겨져서 그곳에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행하게도, 성전 산은 지금 이슬람교의 거룩한 장소인 바위 사원 Dome of the Rock이 있는 곳이며, 지역 무슬림 공동체는 그곳의 발굴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 고렌과 겟츠의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탐험가 벤딜 존스(Vendyl Jones)는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발견된 유물인 쿰란 동굴 3번의 수수께끼 같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 Copper Scroll가 바벨론 침략이 있기 전에 언약궤를 포함한 여러 귀중한 보물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실제 보물지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두루마리에 열거된 필수적인 지리적 경계표를 아무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몇 학자들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는 마카비하 2:1및 4절과 관련된 실제 기록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입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이었던 그레엄 핸콕 Graham Hancock은 1992년에 <암호와 봉인: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 The Sign and the Seal: The Quest for the Lost Ark of Covenant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언약궤가 고대 에티오피아 도시인 악숨 Aksum에 있는 시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B. A. S. E 협회의 탐험가 로버트 코르누크 Rovert Cornuke도 언약궤가 지금 악숨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언약궤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자 마이클 샌더스 Michael Sanders는 이스라엘의 드야하랴 Djaharya 마을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사원에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아직 그곳에서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아일랜드 전통은 언약궤가 아일랜드의 타라 Tara 언덕 아래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아일랜드의 “무지개 끝에 있는 아일랜드의 금 냄비” 전설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론 와이어트 Ron Wyatt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갈보리 산 아래에서 보았고, 톰 크로체 Tom Crotser는 느보 산 곁에 있는 비스가 산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고고학 공동체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지지받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결국, 언약궤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케베오기 하권의 저자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친히 다시 오실 때까지는 잃어버린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언약궤에 담긴 세 가지

가. 관련구절 히브리서 9:3-5

나.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언약궤의 역사

가. 일반적 오해 언약궤 안에 세가지를 처음부터 보관을 했다 :

나. 구약 본문의 해석

1) 십계명 돌판을 법궤에 넣어 놓았음

가)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새로운 돌판을 받음
나)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출" " ( 25:16)

2)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음' '

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출"( 16:33)

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앞에 놓았음'

가) 그 지팡이를 희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 "( 17:5)
나)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민"( 17:10)
다. 신약적 추론

1) 구약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법궤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없음,
2) 히브리서의 근거
가) 기록 당시 랍비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따라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임
나) 광야 성막이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
추측할 수 있음
3) 구약에서 항아리와 지팡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두 둘판만 솔로몬 성전 시대까지 유지
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왕상" ~"( 8:9)
나)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대하" ~"( 5:10)
라. 사라진 것들
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차: 1
가) 년 광야 시대에 한시적으로 보관40- 2 -
나) 이후에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2) 법궤와 두 돌판 차: 2
가) 남유다 멸망까지 주전 약 년까지 솔로몬 성전에 보존586
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전 파괴시 발견되지 않음
3) 결과 남유다의 멸명과 함께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음:
마. 적용
1) 법궤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지우신 하나님
2) 보이는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음‘’
3. 법궤 안에 있는 상징
가. 법궤의 위치
1) 유대인의 세계관
가) 세계의 중심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 성전의 중심에 있는 지, ,
성소와 법궤
나)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의 법궤라고 생각함
2) 법궤의 능력
가) 주술적인 능력을 자동적으로 갖는 것이 아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음
(1)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님
(2) 법궤가 의미하는 것이 중요함 법궤의 의미를 무엇이 대신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 !!
(3)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렘( 3:16-17)
나. 법궤가 품고 있는 주요상징
1) 시은 좌 하나님의 임재( )
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함
나) 왕 또는 재판장이 앉아서 통치하고 판결하고 운영하는 것
2) 두 돌판 말씀의 샘( )
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자리
나)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
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 ( 7:89)
3) 속죄소
가) 죄의 사함이 일어나는 곳
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곳
다. 정리
1) 법궤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3 -
2)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 또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는
곳으로 언약궤는 여호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4. 삶 가운데 법궤와 함께 한다는 것
가. 이스라엘 출애굽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2
나. 시내 산에 도착 후 년 만에 율법과 성막을 건립 후 광야로 떠남1
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갈 수 없음 블레셋 다섯 거민( )
라. 광야 길로 가야 함
1) 바란수르 에담 신 네겝시내, , , , ,
2) 한 번도 가 본적없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광야
3) 광야 길에서 그 길을 인도하는 법궤
마. 법궤를 의지한 미지로의 여행 ' '
1) 전진할 때법궤가 가장 앞에 있었다,
2) 진을 칠 때법궤가 지파의 중앙에 있었다, 12
바. 적용
1) 인생이 이 땅을 사는 것은 참혹한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다
2) 이런 광야 길에 보호자와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 광야 인생길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4) 그 분의 임재와 인도와 보호를 구하며 믿음으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라
5. 세 가지 물건들
가. 법궤와 함께 하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항아리에 든 만나는 기적의 상 1)
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죄의 상징이며 은총의 2) , 3) 상징이다
나. 구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내용
1) 만나
가) 불순종과 원망
(1) 배고파 죽겠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출 장( 16 )
(2)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
늘 민( 11:5)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지는 하늘의 양식 만나
2) 아론의 지팡이
가) 불순종과 대적
(1) 고라 다단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
(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에 도전한 배역죄
(3) 결과 명이 직접적으로 죽고불평에 동참한 자 명도 죽음: 250 , 14700- 4 -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과 함께 함을 죽은 나무에 핀 살구꽃으로 확증하심
(1)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
(2) 살구꽃 깨어 지켜보고 있다: " "
3) 십계명의 두 돌판 사건
가) 불신과 우상숭배
(1)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예배하던 이스라엘
(2) 첫 번째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주신 돌판이 깨어짐
(3) 하나님께 헌약한 레위지파에 의해 적극적 우상숭배자 명이 죽음3000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받게 된 두 돌판
다. 적용 세 가지 물건이 든 언약궤를 메고 걷는다의 의미: ‘’
1) 하나님 앞에 우리는 큰 죄를 지었다
2) 그 큰 죄로 우리 전부는 다 진멸을 당해도 쌌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 기회를 주셨다
4) 그 기회를 주신 이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겠다
라. 신약의 빛으로 본 언약궤 안의 상징물들
1) 상징들
가)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
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상징‘’
다) 만나는 생명의 주는 양식을 상징‘’
2)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들
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이 나를 . .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다 .
마. 적용 언약궤와 그 언약궤 안에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 법궤를 의지해 인도함을 받아 걷고
2) 법궤에서 죄를 사함 받고
3) 법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이들을 향해
4) 이제는 그 법궤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 것을 권함

적용

가. 법궤가 가진 상징들 임재보호 인도 가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 , )를 기억하라
나. 눈에 보이는 법궤와 모든 기구들이 사라진 이유와 법궤를 대신하여 우리 가운데 법궤의 모든 상징들을 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묵상하라
다. 신약의 법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걷기를 선택하라



출애굽기 25:10-16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성막에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의 금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을 지나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있으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 여호와(יְהֹוָה, LORD)의 궤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법 즉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법궤라고 부른 것이며 또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불렀기 떄문에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판이 들어있는 궤이므로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우리는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말씀 안에 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the ark of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번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옛날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단어가 나오면 발음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여호봐 יְהֹוָה)"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으면 글자만 보아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맛소라 학파가 모음부호를 추가하면서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추가하여 만들어진 소리가 "여호와" "야훼"입니다. 그후 70인역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것을 계승하여 헬라어로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주님께서 우리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11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단강)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궤는 백성들보다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으며, 요단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백성들이 모두 무사히 건너자 다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또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도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성을 돌며 그곳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하신 약속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징벌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상징하고 있는 마귀와 원수가 되어 이땅에 오셔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하난미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만나셨고 모세에게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셨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선전 안의 모든 기물은 새로 만들었지만, 이 언약궤 만큼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언약궤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2규빗 반(114cm, 4 feet), 넓이와 높이가 1규빗 반(68.4cm, 2.5 feet)의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씌운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이처럼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물은 그것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거나 아니면 정금으로만 만들거나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책을 보면, 예전에는 책 가장자리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으로 성경의 테두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붉은 색은 사라지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막을 연구하면서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색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므로 금색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소 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들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만을 예표합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도 하는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은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가시 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본 것은 떨기나무의 불꽃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30절을 보면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즉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6절에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외롭게 자라는데, 이것은 이사야 53장2-3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든 언약궤는 이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정금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9장28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는 사도 요한이 용모가 변화되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두 돌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택한 대제사장은 아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 역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 이외의 다른이가 예수님 역할을 할 경우에는 다 죽을 것이라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옆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역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을 넣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9절과 역대하 5장10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6장33-34절에는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수기 17장1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민 17:10)

그런데 히브리서 9장4절을 보면,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로 성막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를 이동할 때에는 언약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었기 때문에 언약궤 안에 그 3가지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가 쓰여진 배경은 성막시대가 끝나고 솔로몬의 성전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더 이상 언약궤가 이동될 필요가 없으므로 원래대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9장과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5장을 비교하면서 성막을 이동하면서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분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대로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만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왕은 말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던 왕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 안에 두 돌판만을 넣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언약궤도 떡상처럼 4개의 발(feet)에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서 이동할 때에 그 고리에 채(긴 막대기)를 끼어서 메고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발'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파암(פַּעַם)'은 '모퉁이'(corner)라는 뜻도 있고 '발'(foot)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rner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foo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위쪽 코너에 고리를 만들어놓은 모습이었고, 그런 것은 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은 4개의 발이 있고 거기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아랫부분에 있는 발에 고리를 달아서 메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언약궤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거룩한 물건에 함부로 몸이 닿지 않도록 매우 세밀하게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하여서 가는 도중에 소가 날뛰는 바람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특별히 구별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 사람들의 풍속대로 새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궤를 메고 가도록 네 모퉁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놓았고, 그 고리에 집어넣어서 들고 갈 '채'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은 고리보다는 바퀴가 훨씬 편하며,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소가 끌고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서 소가 끌고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뻬어내지 말찌며"라며 언약궤를 메고갈 '채'를 고리에 항상 끼워두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메고가야할 성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이렇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까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합리적이며 편리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예배드릴 동안 예배당의 의자가 편한지, 목사님의 설교는 길지 않은지,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만 한지,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핀 다음 교회 시설을 살펴봅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에오콘이 없는 교회를 싫어하며 아이들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다닙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고 만족해야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궤의 모퉁이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금으로 씌운 막대기(채)를 끼워놓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면 즉시 채를 어깨에 메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된 상태로 주인의 명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항상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은 "설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즉시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아무리 준비하라고 해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 몇 번을 말해야 간신히 그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0장33-34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으며, 진을 칠 때에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진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또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보호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서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tablets of stone)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tablets of the heart)에 한 것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둘어있는 것이 '증거궤'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써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엉뚱한 말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런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어?"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저런 분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쩔쩔 매며 어찌할 줄 몰라서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고싶다면서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다가가서 "아니다. 이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고 우울해서 이렇게 낙망하면서 살 시간이 없다. 내 모든 시간은 빛으로서 살아가야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둠을 내쫓고 빛을 밝히 비추어주며 썩어가는 곳에는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며 또 소금이 간을 고르게 하듯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말을 해주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라며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언약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인과 성도는 매우 다릅니다.
교인은 알곡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중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곡이며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거룩을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 말씀의 칼로 단호히 무찌르고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말씀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또한 말씀의 파수꾼으로서 죄의 길로 달려가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궤 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삶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홍해(하나님의 은혜)와 요단


10 - 24 - 2021(주일) 오후 10:49
신명기 27장을 읽으면서...........

홍해와 요단
-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광야 생활(40년) 민수기 14:33-34

홍해(紅海, Redsea. 갈대의 바다)
요단(Jordan, 급한여울)

출애굽의 연대 : BC 1446년 아빕월(3-4월)
출애굽기 13:4

가나안 땅에 진입 : BC 1406년 아빕월(니산월)
여호수아 4:19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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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Jordan)

히브리어로 ‘야르덴’이라 부르는 요단강은 야라드(아래로 가다, 내려가다, 후손)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요단강은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 산악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까지 320㎞를 흐릅니다.
서쪽에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지방이 있고 동쪽에는 지금의 요르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아브람이 롯과 각자 거주지를 정할 때 처음 언급됩니다(창 13).
신약성경은 요단강을 그리스어로 ‘이오르다네스’라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곳입니다(막 1:5).

영어에서는 이오르다네스를 조르단(Jordan)으로 씁니다.
나라 이름 요르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정관사(the)를 함께 쓰면 요단강을 뜻합니다.
사람 이름이나 성씨로도 씁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에 요단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섬기면 사망과 저주가 임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8~19, 새번역)

모세는 이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30:14)



홍해(紅海. Red Sea)

홍해 (The Sea of Red) or 갈대바다 (The Sea of Reeds)

1. 홍해냐 갈대바다이냐?

 

얼마 된 이야긴데요, 네이트에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이 과학적으로 입증 될 수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속 101km/h에서 사람이 걸을 수 없다, 사람이 날라간다, 따라서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입증이다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조롱하는 댓글들이 싫어서, 뉴스를 좀 더 검색했는데요. 바람의 세기를 시속에서 분속으로 나누어 보면, 약 초속 28m 정도로, 바람의 세기로는 중간 정도의 태풍인 것 같았습니다.[1] 따라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에 대하여 그 과학적 개연성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사람들이 강풍에 가까스로 홍해를 건너 가는 장면이 있는데, 실로 그 정도의 장면이 되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컴퓨터모델링 실험과 역사적 기록을 통해 모세가 유대인들과 홍해를 건너올 때 발생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지중해 서편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2]

 

성경에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을 입증하여 그 허구점을 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의 사실성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도 그러한 사람들의 자료나 다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다큐에서는 위성 판독에 따르면 “깊은 홍해에 어느 지점에 불쑥 올라나온 구릉지가 있다”, 혹은 홍해 연안에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라는 등등, 성경의 그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전 과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주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론 그 과학적 반박과 입증들이 무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일반적인 자연현상과, 그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초월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갈대의 바다-홍해>

 

근데, 홍해가 아닌 갈대바다를 건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나름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원을 분석해서 나온 주장인데요. 여기서 저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Moses Spring. [3]

                                       

 3. 히브리 어원으로 따져서 “갈대(의) 바다”라고 주장.

 

흔히 갈대밭을 건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우리가 흔히 ‘홍해(The Red Sea)’라고 번역하는 ‘홍해’는 단어는 애초의 히브리원어- ‘yam suph’가 사실 '붉은 바다'라는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5] 요즘 약간의 주해가 달린 성경을 보면, 각주에 갈대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되어 진 것을 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원을 분석하면, 우리가 ‘홍해’라고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yam suph’ 인데요. 여기서 ‘붉다’에 해당하는 단어인 ‘suph’가 사실 히브리원어에서는 붉다라는 뜻이 없고, 일반적으로 ‘갈대’ 내지 ‘해초’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6]

 

그런데 이것이 후에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 역 성서(LXX)에서,히브리어의 Yam Suph란 단어를 지금의 ‘홍해’라는 뜻을 가진 Erythra Thallas라고 번역했고, 헬라어 성경에 기초한 영어 성경이 그것을 따라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란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갈대 바다 얌 수프(yam suph’)가 지금의 ‘홍해’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성경의 ‘갈대의 바다라고 (The Sea of Reeds)’ 를 왜 헬라어 성경이 히브리성경의 원어에 충실하지 않고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로 했느냐?"에 대해서, “홍해의 해초가 붉었기 때문에 그대로 썼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원어의 ‘단어 뜻’의 충실한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원어적 의미를 생각할 때, 번역성경에서의 ‘홍해(The Rea Sea)는 말은 틀린 번역이며, 따라서 갈대(의)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4. ‘갈대’지만 홍해는 그럼에도 ‘바다’이다

 

 ‘홍해’를 ‘갈대(의)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원적 근거만을 가지고 따지고 볼 때는, 그 타당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원적 근거 그러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 통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는 실질적으로바다’라는 것입니다.

 

n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람들이 수프(yam suph’) 그렇게(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으로 생각하고)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살펴보면 ‘yam suph’ (홍해이건, 갈대바다로 번역하든) 는 분명히 바다라는 것입니다.

V. 4-5 여호와께서 바다에 던졌고 (into the sea), 큰 물(The deep waters)이 바로/의 병거를 덮쳤다(NIV).

만약, 단지 ‘붉다’에 해당하는 ‘갈대’라는 어원만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했다면, 출애굽의 스토리는 마치, 여호와께서는 강한 동풍으로 바다와 같은 그 큰 갈대지역을 물벽이 있는 것처럼 가르시고, 물이 아닌 갈대들이 덮쳐(혹, 물이거나), 이에 바로의 군대들이 죽게 되었다는 전혀 문맥이나, 상황에도 맞지 않아, 이야기 진행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을 살펴보면, ‘빠져 죽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Erythra Thallasà여기서는 The Red Sea)’ 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어…”

 

마찬가지로 여기서 만약, 우리가 그 어원에 의해서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른다면, 위에서의 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지 갈대에 빠져 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우리가 홍해라는 지역과 연관하여 사용하는 그 ‘홍해’란 단어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기자(writer)와 또 그 시대의 독자나 청중들이 모두 똑같은 정황과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에게 있어서 ‘yam suph’ 갈대가 아닌 지금의 홍해와 연관한 바다와 연관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7]

 

즉, 구약에서 ‘갈대의 바다’라는 해당하는 원어를 ‘붉은바다’라고 번역해서 사용해도 신약시대-초대 교회 사람들이(신약의 기자들이나 독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모두 익숙한 바울이 또한 그 시대의 독자들이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예로, 구약성경의 사용되었던 각 성경의 제목이나 사용한 단어들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성경제목은 구약에서 쓰지 않았던 이름이지만, 헬라어에서는 구약성경의 그 의미를 반영해서 번역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8] 즉, 통용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장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홍해’ 역시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당시에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yam suph’는 지금의 언어학자나, 우리 같은 외국인이나,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문제지,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yam suph’ 그 사람들에게서 그 자체로 ‘yam suph’ 를 ‘갈대바다’으로 번역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홍해로 알고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좀 그렇긴 하지만, 비유하자면 우리는 짜장면을 먹지만, 방송에서는 자장면 (올바르기 때문에?) 먹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유가 어찌 하든, ‘짜장면’이나 혹은 ‘자장면’이나 하든 실지로 우리가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그 음식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yam suph’를 The Sea of Reeds 라 할지라도 그 것을 구태여 ‘갈대로 되어진 바다’ 혹은, 호수’[9]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10] 이는 마치 붕어빵을 구태여 언어분석하여 ‘붕어+빵으로 쪼개’어 붕어로 된 빵’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만약 ‘붕어빵’도 수 천-년이 지난 후에, 지금의 붕어빵이 사라지고, 기록에 남아 있는 붕어빵만 남아 있다면, 후손들이 실제 로 ‘붕어로 만든 빵’이라고 생각할지 누가 모르겠습니까? 즉, 갈대의 바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다의 한지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원만을 따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결론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역사적 고증을 따지고, 어떤 사람들은 언어나. 문학적 작품으로서 이해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것들은 실로 도움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어떤 이들은 ‘좌’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우’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민’과 ‘인민’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말씀을 읽음으로 믿음을 더욱 공고케 할 근거가 있음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께 권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구태여 그렇게 해석 함으로써, 감동적인 출애굽의 그 영광의 탈출이 너무나 조촐하게 만들지 않나요?

 The Sea of Red[4]

 

우리가 태도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를 건넜던 그 출애굽(Exodus)의 명~장면이- 물벽이 있는 바다에서, 연안으로, 근처 갈대로 이루어진 습지로, 그리고 갈대밭으로, 더 나아가 바다가 아닌 그냥 맨땅으로 돌아 건너가게 되며, 그렇게 따라갈 때, 우리의 믿음 또한 그 만큼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예화

  어떤 예화집에서 보았는데, 어떤 선생님이 홍해가 아닌 갈대밭을 건넜다고 학생들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더욱 크나큰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왜냐하면 “그 빠져죽을 수 없는 얇은 물에 애굽의 수 많은 병사들을 잠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1] <태풍세기>

태풍의 강도는 중심 최대풍속에 따라 나뉘는데 초속 17m 이상 25m 미만은 약, 초속 25m 이상 33m 미만은 중, 초속 33m 이상 44m 미만은 강이고 초속 44m 이상 바람이 불면 매우 강으로 분류됩니다: 강도 약에 해당하는 초속 20m의 바람만 불어도 아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초속 30m의 바람이 불면 태풍의 강도로는 중에 불과하지만 성인도 고개를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걷기도 서기도 힘듭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690942_5782.html

[5] The term in Hebrew is yam suph. Yam means "sea," and suph is generally thought to mean "reeds," "rushes" or possibly "seaweed." That is why some versions of the Bible call it "the Sea of Reeds" or "Reed Sea" instead of the Red Sea. water planta

 

[7]

The Red Sea (Arabic: البحر الأحمرAl Baḥr al aḥmar; Hebrew: Yam Soof ים סוף or Hayam Haadom הים האדום; Coptic: ⲫⲓⲟⲙ `ⲛϩⲁϩ Phiom Enhah or ⲫⲓⲟⲙ ̀ⲛϣⲁⲣⲓ Phiom ̀nšari; Tigrinya: ቀይሕ ባሕሪ Qeyih Bahri; Somali: Badda Cas) is a seawater inlet of the Indian Ocean, lying between Africa and Asia. Its connection to the ocean is in the south, through the Bab el Mandeb strait and the Gulf of Aden. To its north lie the Sinai Peninsula, the Gulf of Aqaba, and the Gulf of Suez (leading to the Suez Canal). It is underlain by the Red Sea Rift, which is part of the Great Rift Valley.

The Red Sea has a surface area of roughly 438,000 km2 (169,100 mi2),[1] is about 2250 km (1398 mi) long, and — at its widest point — 355 km (220.6 mi) wide. It has an average depth of 490 m (1,608 ft), and in the central Suakin Trough it reaches its maximum depth of 3,040 m (9,970 ft).[2]

The Red Sea also has extensive shallow shelves, noted for their marine life and corals. The sea is the habitat of over 1,000 invertebrate species and 200 types of soft and hard coral. It is the world's northernmost tropical sea, and has been designated a Global 200 ecoregion.

: The direct rendition of the Greek Erythra thalassa in Latin as Mare Erythraeum refers to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Indian Ocean, and also to a region on Mars.

 

[8] 창세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이 책의 첫 단어에서 따온 תשׁרב 곧 "태초에" (In the beginning)라는 것이었다. 영어 제목인 Genesis는 "자료 기원"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음역된 라틴어를 거쳐서 붙여졌다. 또, 출애굽기의 원래 제목은 히브리어로 ‘베엘레 쉬모트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이지만 이것 역시 후에 지금의 ‘Exodus’에 해당하는 ‘출애굽’ 그리고 한국어에서는 ‘출애굽기’로 바뀌게 되었음.

 

[9] 어원이나 정황을 따져서, 갈대(의)바다를 갈대호수라고 번역하시는 사람들도 있음; 예컨데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의 문제가 있는 것 처럼, 홍해라는 번역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 같다.




하나님의 만들어주신 길을 건넜다 


여호수아 3:15-17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속에 감추어진 길을 찾아 건넜다
홍해를 건너는 것
요단을 건너는 것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홍해는 물이 갈라진 길을 건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요단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내딛고 건넜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신앙이란? 
떠나는 것(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율법(토라. tôwrâh) תּוֹרָה

  • 법,  질서,  틀


신앙이란?
붙잡는  것(룻기 1:16b)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신앙이란?
절제(節制)하는 것(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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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사람은 태어나 자라는 과정 속에서 교육의 정도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갓난아이의 행동을 청소년들이 한다거나 성인 할 경우 저능아로 사회에서 장애인의 대우를 받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에게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자체가 허용되나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에게 무조건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패륜아로 낙인찍히는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자라면서 부모가 기뻐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 본인도 어린아이를 대하는 차원과 성인을 대하는 차원이 다름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선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위란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성도들의 문젭니다. 

요단을 건너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표현한다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성인이 된 상태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홍해를 건넜다면 광야생활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교육을 받고 자라 성인이 되었다면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즉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상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작금의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사고가 아닌가 사려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림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소멸시키고 받으려고만 하지 그 은혜를 활용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는 데는 등한히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었기에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그와 같은 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들도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외운다 할지라도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교만해져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님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만 관철시키려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부모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고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오늘날 기독교계는 사람의 신체적 발달 과정으로 본다면 지적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장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유업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벗어나야 요단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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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큰 강 홍해와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강을 건너는 방법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지 않을까봐 미리 애굽의 군사들을 동원하셔서 그들을 쫓아오게 하셨습니다.
죽어라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절대로 후퇴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앞에 홍해가 나타났습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었습니다.
절망은 곧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
그런 그들이 탄식이 하늘을 찌를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은혜의 바다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291번,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276번, 쉬운성경에는 234번 정도 나오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까지 고르게 퍼져있는 단어입니다.

레위기 / 역대상 / 아가 / 예레미야 애가 / 에스겔 / 호세아 / 아모스 / 오바댜 / 미가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 / 학개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요한 1서 / 요한 3서 / 에는 안 나옵니다.

66권의 책 중에서 17권에는 안 나오고, 49권에는 나오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성경이 무척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 다윗과 신약의 대표적 인물 바울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단어가 은혜입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두 가지만 설명을 해 드립니다.

첫째, 왕들, 혹은 강한 자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약자에게 무조건 적으로 베푸는 따뜻한 마음
저 사람 때문이 아나라 베푸는 이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혼나야 되는데 용서가 되는 것, 이 용서가 그 사람이 불쌍하고 의로와서가 아니라, 용서해주는 사람이 사랑이 많아서 용서가 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리스 인데 이 말은 ‘기뻐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이로’에서 유래됩니다.
흔히 카리스는 기쁨과 쾌락을 가져다 주거나 남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의미이었습니다.

-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가난은 그분이 짊어지시고 나에게 부유함을 주신 것

- 무지하게, 연약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그분이 기쁨으로 나에게 지혜와 강건함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 죄로 인해 지옥가게 생긴 것은 난데, 당신이 대신 그곳의 문을 닫아버리시고 나를 천국으로 밀 어 올리신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합니다.

갚을 수도 없는데 거저 받은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후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왔습니다.
전쟁에서 수도 없이 많이 이겼습니다.
물이 써서 먹지도 못할 만큼 나쁜 물이었는데 모세가 나무 가지를 던져 넣자 물이 달아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만나가 매일 내려왔습니다.
반석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니었는데 서서히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순간, 어려운 순간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유식이나 미음 혹은 죽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기도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한 신앙의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문제가 없이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심같이 만병통치약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음 믿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악하고 험한 세상을 믿음을 사용해서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앞에 포기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 하나 풀어가며 즐기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믿음위에 믿음이 쌓이고 또 믿음위에 믿음이 쌓여서 요단강 앞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이었기에 요단강 언덕까지 물이 차 올라있었습니다.
이 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강을 건널 수 있는 배 한척이 없었습니다.

200만 명과 수많은 짐승들이 있습니다.
1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 20만 척이 있어야 합니다.
100명이 탈 수 있는 큰 여객선 2만 척이 있어야 건널 수 있습니다.
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습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룹니다.
물론 이때 강을 건너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에 도착합니다.
30미터 폭이 40미터 50미터로 불어나 있고 급류가 흐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냥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이제 은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그 물에 네 발을 들여 놓으라고 하십니다.
은혜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믿음을 키운 바로 그 사람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싫다는 사람 하나 없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일치된 순종으로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믿음을 키웠습니다.
죽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돈을 벌었다 안 벌었다.
내가 이겼다 졌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됨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믿음의 힘이고 그게 40년 동안 그들이 길러온 내공이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거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힘차게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믿음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믿음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의 길, 행복의 길을 이어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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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적이 나타나지만 그중 출애굽 했을 때 홍해가 갈라진 사건과 40년 후 여리고로 진격해 갈 때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은 가히 상상이 잘 안되는 사건이다.

자연의 흐름을 한 민족의 행보를 위해 거스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고도 두렵지만 이 두사건을 함께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의 기적의 원리를 조금이라고 더 알기 원한다.

공통점

1. 물줄기가 갈라져 "마른 땅"이 나타났다
- 물줄기가 갈라진것도 기적이지만 바로 마른땅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기적

2. 장정 60만명이 도하했다
- 앞사람과의 간격을 1m로 생각해 보면 약 600km, 100명이 한줄로 갔다손 치더라도 폭 100m, 길이 6km의 대 장정. 거기에 계산에서 빠진 여자와 아이, 가축들까지 계산해 보면 4배정도 된다하면 약 100m폭의 24km의 대군이 건너갔다는 것.
요즈음 달의 영향으로 바닷길이 열린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적.

차이점

1. 도하 이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에게 쫒기는 상황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모세도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말했지만 돌아서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상황.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병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셨다(출 14:19, 23).
그러나 요단강 도하는 하나님의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담근 후 하나님의 다른 도움이 없이 강을 건너감

2. 도하 순간의 상황 :

출애굽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고,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담근 후 물이 갈라졌다.

3. 도하 이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이 바다에 수장되어 모세와 미리암의 승전가가 울려 퍼졌고 요단강은 요단강의 돌 12을 취해 제사장들이 섰던 장소에 쌓아 이를 기념함. 홍해 도하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마라에 도착해 물이 없다 불평하여 쓴물을 맛보았고,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4. 지도자들의 말 :

모세는 홍해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그가 행하신 일을 보라.하였고, 여호수아는 너희하나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계셔 너희에게 약속한 땅을 반드시 주리라.라고 하였다.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

1. 구원 받을 때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거룩함으로 충전받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
그 To-Be 모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그래도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로써 한번 갈길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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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장소)와 하나님 나라(속성)

일반적인 생각 /
 
1. 죽어서 가는 나라(영혼이 가는 곳)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나라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교회(에클레시아) :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통로

하늘 나라 : 장소




https://www.cjob.co.kr/christianity/593


사탄과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처음 두 명의 통치자이다.
둘 다 두 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둘 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사탄은 한 왕국의 왕관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다시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담에서 예수님까지의 역사는 천국, 즉 실제적인 땅의 왕국에 대한 역사가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천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왕관을 쓴 사탄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는 사탄의 개인 소유(고후 4:4)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떠한 간섭도, 특히 "성령의 칼"(히 4:12)로 부터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지구를 소제하고 단장하고 재장식해서 다음에 등장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일할 만한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지도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탄은 항상 사기를 높이고 낙관론을 신봉하게 함으로써,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고 혼란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하는 그 일들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저 위대한 "긍정적 사고가"의 입장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첫 번째 말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창 3:1)이다. 사탄의 유일한 문제는 6000년 간의 부패와 타락과 사회적 붕괴와 전쟁과 죽음 등을 직면하면서도 어떻게 이 높은 사기와 고조된 낙관론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마태복음 6:33-34)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절정이다.
주님께선 32절에서 청중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신 후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 6:32) 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교도들인 미국, 영국, 독일, 한국 등 이방인들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앞부분까지는 마찬가지이다(행 2:39; 3:22).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개인적인 아버지라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야 비로서 등장하는 새로운 계시이다. 산상설교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있었던, 다가오는 천년왕국의 규칙과 요소들의 윤곽을 잡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약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각각 어떤 나라인지 이미 공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달리 영적인 나라로서, “거듭나면” 들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공포되는 이 때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교회 시대의 성도들처럼 영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데, 이 영적인 상태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교회 시대에는 이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거듭남으로 들어가지만, 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행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나라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나라였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에는 완벽한 의가 요구되는 것이고, 이 “의”로 말미암아 이들은 천국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의는 엄청난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설교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다 이루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선 이들이 지키지 못할 의를 완성하시고자 죽어야 했으며, 그 의가 입혀졌을 때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아직까지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거듭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상황아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마태복음 5:20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지녀야 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의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경고하신다

 

 

   2)  마 19:24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라.』 (막 10:25, 눅 18:25)

 

 

19:24절 모든 학자들은 바늘의 귀 를 "낙타가 밤에 성문이 잠겼을 때 얻드려 기어가기 위해 그 무릎을 꿇어서 통고하는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 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분" 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눅 18:25 참조), 그런 문은 어떤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학자들의 다음 단계는 이 구절을 바꾸는 것이다. 페쉬타(시리아 어 역본)에는 낙타 대신에 "밧줄"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시간 낭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빈정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이것은 그분의 뛰어난 특성 중 하나이다), 또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다(핵심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과장하신 것이다).

 

  막 1: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1:1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전파하신 것과 같은 메시지가 아니다. 천국은 "문자적이고, 물이적이며, 눈에 보이는" 왕국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실현하시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눅 17: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1절)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도덕적인 의" 의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는(딤후 2:15) 이방인들이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신약에 놔 두신 가장 거대한 거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 계셨을 때에 이 두 왕국이 함께 존재하였다.' 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두 왕국의 왕이시다

 

  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 』

 

17절에서 전파하시기 시작한 천국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의 복음”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위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과, “천국”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천국”은 다윗의 보좌에서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왕의 의로운 통치가 있는,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다. 이 “다윗의 보좌”는 이스라엘과 관계된 것이고, 그래서 이 왕국(천국) 복음은 자연히 이스라엘과 관계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과 교회는 종종 동일시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교회는 분명히 다르다. 천국(왕국)은 갑자기 세워지는 반면(set up, 단 2:44) 교회는 세워져간다(built up, 엡 2:20). 천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는 반면(약 2:5) “교회의 상속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으나(마 8:12) “교회의 자녀들”은 없다. 교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왕국은 “몸”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 “성전”이다. 왕국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왕국이 임하도록 구하며(마 6:10)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반면(눅 19:12), 교회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임하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그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빈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진실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에게 이 얼마나 무례(?)한 반응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 하고 말하는 손님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님께서는 대꾸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어서 오십시요. 반갑습니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며 손님을 맞아들이지도 않으셨다. “누추합니다만, 여기 좀 앉으시지요.” 하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행은 맡아 놓았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니코데모는 이런 무례한 꼴을 생전 처음 당해 보았을 것이다.

 

누가 당신을 찾아와 “당신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적을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말했다면, 당신은 두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필경, “아, 네, 감사합니다. 그걸 알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저는 죽은 사람을 세 사람이나 살려 놓느라고 아주 바빴답니다. 아이구, 이런! 어서 들어오십시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수선을 떨며 갖은 친절을 다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손님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이렇게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한 분이셨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멀리 갈 것없이 요한복음 4장만 보아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와 같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대해 주셨던 그분의 온화하신 태도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어째서 이처럼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셨던가?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 2:24).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게 행세하던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입관 때문에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퉁명스럽게 대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니코데모가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이른바 “지식인”이었기에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말씀의 핵심을 꺼내셨던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를 흉내내는 현대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즉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뿐아니라 들어가는 것에 대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서 14: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성령 안에서 의를 누리는 그분의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바로 이 순간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화평과 기쁨을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나타난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비유를 하나 더 들어 말씀하시더라.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눅 19: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 이것은 미래에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더욱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눅 17:20), 본문은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것은 미래에 임할 천년왕국을 언급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3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면 ‘장차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를 일찌감치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할뿐더러,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지금 이 교회 시대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적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실제로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영적으로 존재하고, 천년왕국 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존재하게 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첫째, 지금 그 영적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둘째, 그 실제적으로 나타난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된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옳지, 예수님께서도 ‘물침례’ 구원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생각한다. 캠벨주의자들이 그렇고 로마 카톨릭이 또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다면 요한복음 3장 그 어디건 “침례”에 관한 언급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1절, 2절, 3절..., 35절, 36절, 처음부터 끝절까지 눈씻고 찾아 보라.

 

어디에 “침례”와 관련된 말씀이 단 한 군데, 단 한 마디라도 눈에 띄는가? 캠벨주의자들이나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 어디서건 “물” 소리만 나오면 “여기 보세요, 물침례 이야기가 여기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흥분해서 떠벌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또 이상한 것은 “침례”라는 말이 나올 때, 거기 “물”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구절에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시무룩해져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그들은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가 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돼 버린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 역시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모른 척 창 밖만 내다 본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하고 “물”은 “물침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되는 “물”이나 “생수” 역시 “물침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한복음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배에서 흐르리라는 생수의 강들 역시 “물침례”와는 거리가 멀다. “물침례”에 정신이 혼미해진 자들이 “물” 소리만 나와도 그게 모두 “물침례”와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히스테리 반응과 같은 병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코필드는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라는 에베소서 5:26의 말씀과 연관해서 모든 물은 “말씀”을 예표한다고 못박고 있다(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캠벨주의자들이나 카톨릭이 어째서 물만 나오면 그것을 침례와 연관지으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미스테리다.


그렇다면 “물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절에서 니코데모에게 먼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여기 5절에서 “물과 성령”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자, 니코데모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보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다. 『사람이 물과...』 즉 “사람이 어미의 태에서” 태어나고 나서, 또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간명하게 결론을 내려 주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

『육신으로 난 것』, 즉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거듭남이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신다.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일단 어미의 태 속에 잉태되어 그 태로부터 태어난다. 이것은 육신적인 출생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간명한 설명인가! 어미의 태는 물 주머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 그 아기는 물 속에 있게 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물이 생물학적인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을 산부인과 의사한테서 배운 게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 배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창 1:20). 이처럼 지구 상에 존재하는 최초의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

 

결국 요한복음 3:5의 “물로 태어남”은 생물학적인 출생을 의미하며, 그 사실을 성경 자체가 해석해 주고 있다. 물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물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없었다. 유대인이 받았던 침례는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들이 물침례를 받은 것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출생을 정결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는 말씀은 오늘날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령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해야 한다. “당신이 어미의 태로부터 태어난 출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이 그것만 붙잡고 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당신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말이다.

 

 

  6)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2:4-5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선명해진다.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와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 토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을 살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실천적인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도 없고 말씀에 실천적으로 순종하지도 않는 자가 말만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7)  계 12:10  『또 내가 들으니, 한 큰 음성이 하늘에서 말하기를 “이제 구원과 능력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는도다. 이는 우리 형제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고소하던 그 고소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사탄은 “고소자”나 “검사” 같은 부류의 적으로 지적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성도들을 환란 중간까지 고소해온 것을 듣는다. 환란 중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은 욥기 1,2장에서 그랬듯이 위 아래로 다니며 고소하고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다.

 

 

3.  천국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책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하시고 이제 침례인 요한의 예비로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려 하시는 왕국은 어떤 것인가? 그 왕국은 어떤 모습인가?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제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침례인 요한과 예수께서 전파하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것이다.  마태복음 3장부터는 마태복음의 주제인 “천국”에 관한 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3장을 들어가기에 앞서 천국에 관한 내용들을 분명히 알아야 하기에,  피터럭크만의 책들을 바탕으로 천국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이 부분의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1969>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1999>를 참조 바람.]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1)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이다.

 물론 이 세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인간들의 왕국”(단 4:32), “세상의 나라”(눅 4;5), “이 세상의 나라들”(계 11:15)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 개의 나라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이 천국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 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연결된 문맥인 5절에서는 “땅의 유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말하여 그 대상을 유대인에게 한정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12에서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라는 말은 천국을 영적인 나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 “사회운동가”, “해방자” 등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님의 조명 없이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이해가 전혀 없이 현상을 어느 정도만 보고 정확한 판단이 없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영적인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천국”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는 따로 있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나라들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을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동안은 땅에 속한 그 왕국을 더 강조하겠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는 이 왕국, 즉 천국이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제시되는 왕국과 메시야, 그리고 그 예언에 대한 성취와 성경에서 이 왕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 왕국은 마태복음의 주제가 되는 나라로서,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나라이며, 몸을 입고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거듭남과는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메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왕은 단지 초림에 그 예언을 모두 성취하시지 않았다. 구약의 기술을 자세히 보면 왕이 나타나시는 것에 대해 초림과 재림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다시 자세히 보면 그 촛점은 초림보다는 재림에 더 많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그 왕의 나타나심을 재림의 상황에 맞게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주제를 “재림”(His Advent 또는 His Second Advent)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과 연관해서 본다면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the kingdom)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 그것도 지상 왕국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관점을 가졌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그러한 “왕국”이 아니다. 지금부터 전개해 나갈 “천국”(왕국)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이해한다면 그러한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락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천국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인데, 이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거듭나지 않더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수 있는데(눅 1:32,33), 그 보좌는 결코 영적인 보좌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땅의 보좌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하늘나라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 (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령할 때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안되고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하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이므로 본 주제에서는 비켜나기로 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끌어 오신 두 왕국, 즉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두 왕국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나님은 이 두 왕국들을 어떻게 계획하셨으며, 이 왕국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이 왕국들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으며, 또 이 왕국들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가야 할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 와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왕국들 중에서도 특별히 “천국”에 촛점을 맞추어서 공부해 볼 것이다.


왕국에 대한 역사를 맨 처음부터 살펴본다면 창세기 1:1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우주를 만드셨다. 그는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그에게 굴복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한 존재를 세우셨는데, 그는 바로 모든 영적 세계의 우두머리인 한 그룹(cherub)이었다. 그는 루시퍼(Lucifer, 사 14:12)라고 불린다.

에스겔 28:14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

 

여기서 “투로의 왕”으로 묘사되는 그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고, 모든 아름다운 보석들과 또 북들과 관악기들이 그를 위해 있었다(13절). 그는 보좌를 덮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anointed cherub)이었다. 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뜻한다(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다. 우리는 지금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왕이다(왕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제사장이다(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정치적인 직책이라면 제사장은 영적인 직책이라는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에서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과 실제적인 통치의(정치적인) 나라(“천국”)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이다.

 

그가 타락하여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 14장에서는 그를 “바빌론 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사 14:4), 그를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던 자”(사 14:16)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이끌고 내려올 만한 권세가 있다(계 12:4). 그러나 그는 교만으로 타락했다. 그리고 그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이 두 왕국의 왕관을 빼앗으셨다.


 

 

 

 4)  루시퍼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통치할 새로운 왕을 

     창조하셨다. 그는 아담이다.

 

 (1)  창세기 1:28-30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subdue).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have dominion).』

 

이 구절은 인간에게 이 땅의 문화를 점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라고 주신 소위 “문화명령”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아담을 왕으로 임명하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왕권 위임”이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아담이 그 세계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은 실제적인 나라와 영적인 나라의 두 개의 왕관을 쓴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길고 긴 왕권 쟁탈전이 벌어진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으로 정해진 이 전쟁에서 사탄은 인간을 통해서 이 왕국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의 영은 죽었고 이후로 아담에게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으므로 영적 통치의 자격을 상실한다.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하나님께서 가져가 버리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저주를 하시는데, 창세기 3장에서 땅은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었고 아담은 땅에서 양식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고 평생동안 수고해야 했다(창 3:17-19). 그의 통치권은 땅에서 떠났고, 땅에 속한 실제적인 왕국(천국)의 왕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그가 빼앗긴 천국의 왕관은 루시퍼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사탄은 누가복음에서 과감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왕국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눅 4:6).

그리고 이때부터 영적인 왕국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인간 역사는 오로지 실제적인 왕국, 곧 천국과만 관계한다.


  (2)  세 번째로 이 왕국(천국)을 차지하는 인물은 노아이다.

 

창세기 9:1,2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

홍수 이후에 텅 빈 땅을 다시 채우는 임무를 맡은 노아에게는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과 거의 비슷한 언약이 주어지는데, 노아는 동물들에게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는 다시 이 땅의 왕국의 왕관을 쓴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노아도 실수함으로써 이 왕관을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창세기 9:21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의 실수로 함은 범죄하였고(창 9:24) 그의 아들 카나안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함의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시날 땅에 그의 왕국을 세운다(창 10:9-14). 그의 이름은 님롯(Nimrod)으로서, 그는 사탄의 한 유형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는다. 다시 이 왕국은 사탄에게 넘어간 것이다.


   (3)  이 왕국의 네번째 왕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18-21에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으며, 또 17:6에서는 『네게서 왕들이 나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왕국과 그의 씨와 이방 민족에 대한 언약이 맺어졌으며, 아브라함은 명실공히 “천국”의 왕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자신의 신정통치 왕국(천국)을 이루려고 계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에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들을 통하여 이 왕국의 약속은 이어져 온다.


창세기 15:13,14의 예언에 따라 이들은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영광의 탈출(출애굽)을 한다. 이 때에야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탄생하게 되고, 이 민족은 모세와 함께 한다.

신명기 33:5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다함께 모였을 때 그는(모세) 여수룬에서 왕이었도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이었다(신 5:24). 모세는 하나님과 항상 긴밀하게 대화했으며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의 “천국”을 이루시려는 계획 속에서 모세에게 그 왕의 위치를 부여하시고 권한을 주셨다. 모세는 표적과 이적을 행사하며 백성들을 이끌었다. 온 백성은 모세의 명령에 따랐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한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출 32:10).

 

그러나 이 왕은 좀 특별하다. 그는 단지 “천국”의 왕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창세기 49:10에서의 예언에 따르면 그 왕은 분명히 유다 지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모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자다(출 2:1).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인데, 이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기틀이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은 완전한 의의 통치이기 때문에 이 율법 또한 매우 엄격했다. 그러므로 이 모세는 다윗을 통하여 이루어질 왕국이 임하기 전에 그 왕국의 기틀을 잡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맡은 왕이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실수가 있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노함으로 바위를 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왕국은 인간들이 다스리기에 이토록 힘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국(천국)을 이루시기 이전에 율법을 주시고 그 왕국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놓기 위하여 준비하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카나안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 이후에는 여러 명의 재판관들을 통하여 그의 왕국(천국)을 다스리셨다(재판관기 2:16).

그러나 이 재판관들 중에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종종 있었으며, 이 재판관들이 죽은 이후에 백성들은 다시금 우상에게로 나아갔다. 결국 재판관들을 통하여도 이 “천국”은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이 재판관들은 재판관기 3:10의 옷니엘로 시작하여 사무엘까지 이르며(삼상 7:15), 그 이후에는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첫번째 왕은 사울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왕을 구했다(삼상 8장). 사울은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릇되이 나타난 자인데,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의 유형이다. 백성들은 ‘다른’ 왕을 받아들인 것이다.


   (4)  이번에 등장하는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메시야 왕의 가장 직접인

        유형인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이며(삼상 16:1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이다(삼상 16:1).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국을 약속하셨다.

사무엘하 7:12-16 『... 내가 네 몸에서 나올, 곧 네 뒤에 올 네 씨를 세우고, 내가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왕국이” 영원히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의 씨를 견고히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뒤에 오는 어떠한 왕도 다윗의 보좌에 대한 정통성이 없으면 “천국”의 왕관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아들”로 탄생하시고(마 1:1),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도 “다윗의 이름”으로 호산나 환호와 찬양을 받으셨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에 대한 관계는 마태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질 주요한 주제다.

그러나 다윗에게도 실패가 있었으니, 곧 힛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벌을 주셨다(삼하 12:10). 그래서 솔로몬이 등극할 때까지도 그는 아도니야와 싸워야 했다(왕상 1장).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이 솔로몬에게 이루어져 솔로몬에게 큰 왕국이 세워지고 성전이 세워졌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여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 하는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길을 트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서는 왕국이 분열되고 “천국”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에 한정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그의 씨에서 왕이 나타나리라는 계획을 계속 이루어 오시는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배도하여 나가지만 남쪽 유다 왕국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며 왕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신정국가(천국)는 실현되지 못하는데, 드디어 여코냐에 이르러서는 그 왕의 보좌의 정통성을 빼앗겨 유다 지파마저도 천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렘 22:30).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국이 전 우주에서부터 유다지방에 이르기까지 축소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이 왕국이 어떻게 축소되는지 주목하라 : 루시퍼(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 전 우주), 아담(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지구), 노아(천국 - 지구), 아브라함(천국 - 팔레스타인 땅), 모세(천국 - 팔레스타인 땅), 재판관들(천국 - 팔레스타인 땅), 다윗(천국 - 팔레스타인 땅), 르호보암(천국 - 유다 지파), 여코냐(없음), 예수 그리스도(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포로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였고, 백성들은 그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메시야는 민족의 해방자며, 이방 왕국들을 깨뜨리고 완전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세우는 자였다(단 2:44).

 

  (5) 그리고 그 메시야 왕은 마태복음 4장에서 드디어 나타나시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3장과 4장에서 각각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은 이 두 개의 왕국을 함께 가져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메시야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되었을 때(요 1:11; 19:14,15) 이 왕국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 버리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이방인에게도 확장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재림으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 때까지 천국은 신비스런 형태로 감추어지게 되지만(마 13장),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때 그 “천국”은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계 20장). 그 때가 되면 이사야에서 예언된 평화로운 세상, 곧 전쟁이 그치고 사자가 풀을 뜯으며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는 그러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사 11장).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며 이루려고 노력하는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다한 후 하늘과 땅이 불로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합쳐져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 계획하신 원래의 왕국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계 21,22장).


 

  5)  구약 시대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로 왕은 탄생했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팔레스타인 땅에다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왕국이 임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즉, 예언적 계보를 따라서 두 언약(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시어 왕의 자격을 갖추시고(정통성),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이미 예언들을 통해 메시야 사상이 이방인에게까지 있었고(마 2장), 그 메시야가 오시면 이방왕국들은 무너진다(단 2:44).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의 왕은 끊어졌으나 그 보좌에서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타나야 한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메시야의 통치,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완전한 신정통치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침례인 요한의 등장이다. 예언에 따라 나타나시는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인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베풀면서 천국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침례인 요한이 예비한 길은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점이다.

 

1 그 무렵에 침례인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2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니,

 

『그 무렵에』(마 3:1) 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중 처음 6개월 내에 있었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이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는 침례를 받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 무렵”이라는 말은 요한이 지속적으로 침례를 주며 천국 복음을 전파했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 중에 주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도 받으셨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누가복음 3:1,2에 나와 있다. 즉 『티베리오 카이사가 집권한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폰티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요, 갈릴리의 영주는 헤롯이고, 그의 아우 빌립은 이투레와 트라코니티 지방의 영주이며,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고, 안나스와 카야파가 대제사장들로 있을 때』이다. 카이사 아우구스토(눅 2:1)는 로마력 767년 8월 29일에 죽었는데, 그는 티베리오 카이사와 2년 동안 함께 통치했었다. 따라서 티베리오가 집권한 지 15년째라는 말은 아우구스토가 죽은 지 13년 후의 일로, 로마력 781년이란 말이다. (요한은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했으므로, 로마력으로 751년에 출생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출생하신 것이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린드버그의 <Christian Dogmatics>(p.392)를 보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절).

“천국”에 대해서는 앞 장인 ?천국? 부분에서 따로 긴 설명을 해 놓았다. 바로 여기에서 주석가들과 신학교들의 85%가 오류를 범한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성도들이 죽어서 안식하는 셋째 하늘의 낙원을 말하지 않는다. 이 왕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제적으로 이루실, 물리적이며 정치적인 왕국이다.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멸하신 후 홀로 우뚝 서게 될 그분의 왕국이다. 물론 그 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그 왕국의 전파와 거부와 회복에 관한 긴 역사가 왕과 더불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마 3:3 『이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그 사람이라. 말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하였더라. 』

 

본문은 이사야 40:3-8에서 가져온 인용이다. 누가복음 3:4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는데, 거기서도 역시 선지자 이사야의 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또 다른 이사야”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사야 1-39장은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그 이사야가 쓴 것이고, 40-66장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사야가 쓴 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소위 “제2이사야설”이라 부른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학자들은 한 책에서 다른 내용과 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제를 설명하면 무조건 저자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그 부분에서 이사야의 이름을 밝히면서 열두 번도 더 인용했다(롬 10:20, 마 3:3; 12:17, 눅 4:18, 롬 10:16 등). 이사야 39장과 40장을 갈라 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별히 그 “제2이사야”가 썼다는 부분에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속죄에 관한 장이 들어 있다(사 53장). 이러한 위대한 교리를 예언에서 빼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민수기 4:43에 따르면 레위인 사역자들은 모두 30세가 되어야 성전의 일을 수행할 수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제 30세가 되시어 그의 사역을 행하실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메시야 사역이 이루어지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여기 침례인 요한이 서 있다. 침례인 요한은 이사야에서 예언된 대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선두주자(forerunner)이다. 그는 예언된 엘리야(말 4:5)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이다.

 

그가 설교한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이다. 그리고 이 회개는 왕을 맞아들이는 준비가 되고,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 임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말라키 4:5-6과 누가복음 1:17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불순종한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시킬 것이다.

 

메시야 왕이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목자없는 양의 상태, 흩어져서 들짐승들의 먹이가 된 상태이다(겔 34:5, 마 9:36). 이 “엘리야”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와서(말 4:5) 그의 사역, 곧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그 방법은 침례이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푸는데,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회개”의 표시로 침례를 받는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이고, 이것은 천국이 임하기 전에 유대인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이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신정통치 국가를 의미한다.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에는 왕이 끊어졌고, 이제 그 보좌에 앉아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와야 한다. 그 왕을 유대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왕이 임하시기 전에 그 길을 닦아 놓는 사역을 침례인 요한이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아직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도 없었고, 거듭남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타난 침례인 요한의 설교는 지금 현시대에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부적합하다. 단지 왕국의 선행조건으로서 회개하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침례와 일치하는데, 메시야 왕국을 받아들이기 앞선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받는 침례를 요한의 침례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1)  『이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꿀이더라.』(마 3:4) 

 

이 구절은 열왕기하 1:8의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털의 사람이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러나 침례인 요한은 외모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하다.

 

구약에서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침례인 요한에게 적용된다. 말라키 4:5에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약속하시는데, 성령께선 그 약속을 누가복음 1:17에다 적용하고 있다. 또 마가복음 1:2-3은 침례인 요한에 대한 설명인데, 3절은 이사야 40:3의 예언이고 2절은 말라키 3:1의 예언으로서, 이사야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은 말라키 4장의 엘리야와 연결된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 요한이 엘리야임을 증거하셨다(마 11:7-14).

 

엘리야와 요한의 유사성은 적그리스도의 유형 앞에서 증거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구약의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선포했으며, 침례인 요한은 헤롯 앞에서 선포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적그리스도 앞에서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직전에 왕국이 임하는 조건을 형성시키는 사역을 하다가 목베임당해 죽는다. 침례인 요한은 헤롯에게 목베임당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 목베임당할 것이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계시록> 11:3-12을 보시오).

 

엘리야가 다시 온 뒤에 있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말라키에서는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말 4:5), 엘리야는 바로 이 날이 이르기 전에 나타나 사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라면 요한 이후에 “주의 크고 무서운 날”과 재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구약에서 “왕의 오심”(the Advent of the King)은 초림과 재림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신구약 성경을 모두 놓고 보니 초림과 재림이 구분되는 것이지 구약 선지자들의 관점으로 볼 때 초림과 재림은 하나의 사건으로, 단지 왕이 오시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재림의 사건들은 초림에 모두 성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재림은 2000년 후로 연기되었다.) 이 당시가 바로 구약 시대처럼 초림과 재림을 같이 보는 상황이었다. 즉 이제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이 이르고, 주님이 왕으로 임하시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침례인 요한이 등장하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마 3: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주위의 모든 지역에서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들을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이 침례는 분명히 물에 잠기는(immerse) 침례가 분명하다. 요단강 안에서(in) 주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회에서 물뿌려 “세례”(sprinkle) 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화가들의 그림에 보면, 예수님과 요한이 요단강 물에 허리쯤 잠기도록 들어가서, 요한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그림을 볼 수 있다.)

 

  (2) 신약적인 의미에서 침례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는 구원받은 후에 순종하는 간증이다. 성경에서 종종 침례가 구원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사도행전 2:28이 그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침례, 또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구원과는 관계없는 구절이다. 더욱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즉 침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그 모형의 행위를 함으로써 간증하는 것이다.

 

 7 그러나 그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의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고

 9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느니라.

10 또한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며,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욱 그렇다(마 23장). 요한은 9절에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기 때문이다(요 8:39).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이 사탄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똑같은 맥락에서 침례인 요한은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는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11절) 말은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씨임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씨를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다윗의 씨). 단지 그들이 할 일은 “다가오는 진노”, 즉 말라키 4장의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피하기 위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8절).

 

여기서 “독사들의 세대”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말이다. 잠언 30:11-13, 욥기 20:16, 시편 58:4, 미카 7:17 등이 이들과 연관되는 말씀인데, 이 각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말하는 문맥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이들은 “다가오는 진노”와 연관해서 등장하는데, 그때는 바로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 때이다. 이것은 재림 때에도 초림 때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 그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침례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실 지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또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다. 타작마당은 온 세상, 또는 이스라엘인데, 그는 알곡과 쭉정이의 분리 작업을 통해서 알곡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쭉정이에 속한 사람들은 심판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의 알곡과 쭉정이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19:16-22에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시편 1편에서는 복있는 사람을 주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악인은 ‘쭉정이’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과 관계된 백성이고, 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율법적인 의와 관계된다.

이 상황은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세우실 때 그분은 야곱에게서 불경건한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롬 11:26, 사 59:20). 이 날은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데, 그분은 이 날을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허물을 씻으실 것이고, 그 환란의 때에 알곡과 쭉정이는 분리되어, 이 심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요엘 2:29에 나타난 대로 주님은 주의 영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성령으로 보호하시지만, 자신들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들은 결국 쭉정이로 분류되어 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도 알곡이라고 말하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쭉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침례인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사역이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사람(계 12:17), 좀더 예언적으로 말하면 환란 시대에 끝까지 견디는 유대인(마 24:13)이 알곡의 범주에 들어간다.


  (3)  우리는 이 두 구절(11,12절)에서 3가지의 침례를 볼 수 있는데, 첫째, 요한의 물침례, 둘째, 성령침례, 셋째, 불침례이다. 이와 연관해서 성경에서는 7가지 침례가 나오는데, 한번 정리해 보자.


1. 모세의 침례(고전 10:2) : 이 침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지난 것과 구름기둥 아래서 행한 것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침례”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이 침례는 이스라엘 민족이 따로 부르심을 받은 민족의 표시이기도 하다(Called-out Assembly).

 

2. 요한의 침례(마 3:6) : 이 침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 즉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행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씻고 왕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행위이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손을 씻었다. 이것은 정결례인데, 죄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왕을 맞기 위해서 자기들의 죄를 씻는 정결례를 행해야 했다. 요한의 침례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요 1:31).

 

3. 십자가의 침례(마 20:22) :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각각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침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혹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을 이 침례와 연관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 침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4. 유대인의 침례(행 2:38) : 이 침례는 요한의 침례와도 연결된다. 둘 다 메시야 왕과 그 왕국을 받아들이기 위한 침례였고, 둘 다 죄를 씻기 위한 정결례로서의 침례였으며,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전 상태의 침례이다.

그러나 이 침례가 요한의 침례와 다른 것은, 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다렸던 왕이 오셨는데 그를 거부했다. 그들은 왕을 거부한 죄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왕을 거부한 그 죄를 씻으라고 설교한 것이고, 회개와 침례를 요구했다. 이것은 요한이 설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가 왕이 오시기 전에 왕을 영접할 자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면, 이 침례는 왕을 거부한 죄를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침례에는 표적이 따른다(행 2:43; 8:17; 19:6).

 

5. 이방인의 침례(행 10:48, 마 28:19) : 이 침례는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받는 침례로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고백이 필요하며, 그 공개적인 간증으로서 받는 침례이다. 이 침례는 구원을 이루거나 죄사함 받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 침례로는 구원받지 못하며, 그것은 단지 선한 양심의 고백일 뿐이다. 물은 모형이다(벧전 3:21). 이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곧 삼위일체 되신 주(Lord)의 이름으로 받는다(마 28:19, 행 10:48).

 

6. 영적 침례 또는 성령침례(고전 12:13, 엡 4:4-5, 마 3:11) : 이 침례는 세상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침례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는 이 침례를 말하면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 속하는 이 침례를 받은 성도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이 침례는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묻히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서 일어난다(고전 15:3-4). 그래서 성도가 물침례를 받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고, 또 부활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침례를 받아 능력을 행하는 것을 구분하는데,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침례는 방언을 말하는 침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소위 “능력”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성령의 외형적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 성령침례의 증거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침례는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것, 곧 구원받는 것이 성령침례이다.

 

7. 불 침례(마 3:11) : 많은 사람들은 이 불침례를 성령침례로 오해한다. 오순절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난 것은(행 2:3) 불이 아니었다. 그런 형태로 임하신 모습은 불로 침례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3:11의 불은 지옥 불을 의미한다. 그것은 심판의 불이다. 이것은 12절의 말씀과 연관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께서는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신다. 이것이 불로 받는 침례이다.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만약 성령침례를 받지 못하면 그는 불침례를 받게 된다. 이것을 모르고 불침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청중들을 지옥에 가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침례에 대해서는 말씀보존학회 간 <일곱 침례>를 참조하시오.)

 

  (4)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있는 요한에게 오셔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더라. (마 3:13)

 

14 그러나 요한이 말리며 말씀드리기를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니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니, 이에 그가 허락하더라.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이 침례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에게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알았었다. 물론 요한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 대중에게 증거하기도 했거니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침례는 물침례가 아니라 성령침례라는 것도 알았다.

 

요한은 은근히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와 침례를 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물침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는 회개하거나 자백할 만한 어떠한 죄도 없고, 정결례를 치러야 할 어떤 것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의식에 순종한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주님의 부활 후에는 물침례가 더 이상 유대인의 정결례로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롬 10:1-4). 따라서 침례를 통해서 의를 이루신다는 것은 십자가 이전 사건으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에게 침례를 통해 의를 이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는 것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개적인 간증일 뿐이고, 또 모형일 뿐이다(벧전 3:21).

 

(3장)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 보라, 하늘들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하시니라.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16절) 라는 표현을 보아, 침례는 물 속에 잠기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위대한 한 모형으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요나가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요나는 물속으로 던져져서 “잠겨졌다.” 그리고 죽었다. 그래서 침례란 죽어 묻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골 2:12, 롬 6:2-6).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분의 몸 안으로 “침례”받는다. 이것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연합을 이루며, 동시에 그분과 함께 죽고 묻히는 것이다. 또한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영적인 경험(성령침례)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에 대한 모형의 행위이다. 물을 뿌리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것들을 증거할 수 없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1:31), 주님은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셔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주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방법은 성령께서 비둘기 처럼 그 위에 앉으시는 것이었다(16절). 그리고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머무는 분이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포했다(요 1:32,33).

이때 하나님 신격의 삼위가 모두 이 자리에 함께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음성을 발하셨고, 아들께서는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께서는 아들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17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은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첫째 아들이시고, 또한 “독생자”이시다. 하나님께는 성령으로 태어난 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출생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분을 따라서 많은 아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지만, 그들 모두는 영적으로만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는 인간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 없이 어머니에게서만 태어나셨으니, 육신적으로도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말씀과 더불어 하늘이 열린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여기에서, 또 한 번은 마태복음 17:5에서, 또 한 번은 요한복음 12:28에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휴거”를 의미하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도 성경에서 세 번 나오는데, 그것은 잠언 25:7과 요한계시록 4:1과 계시록 11:12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명기 16:16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지켜야 할 세 개의 명절이 있다(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그리고 이 세 절기 또한 휴거와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요한계시록> 4:2의 주석을 보라.]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는데, 이 의(義)는 십자가의 의나 믿음의 의가 아니라 율법의 의이다. 믿음의 의는 로마서에 가서야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이 때는 아직 왕국의 상황이다. 예수께서는 아직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도 않았으며, 아직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표현되지도 않았다.

 

요한복음 1장은 마태복음 3장과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한다(요 1:30-34).

요한복음 1:29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지내신 이후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즉시” 광야로 인도되었다(막 1:12).
주님은 침례를 받으신 “그 다음날” 요한을 다시 만나러 가시지 않았고(요 1:29) 적어도 40일 후에 요한이 침례주고 있는 장소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이 침례받으시고 적어도 40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죄가 사해진다든지 하는 진리는 전혀 계시받지 못했으며,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율법의 의”와 “천국”이었을 뿐이다.

주님은 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육신을 입어야 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로 들어가셔야 했다. 율법의 일을 이루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의가 요구하는 그 요구에 맞추셔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요한계시록 19:1-6) / 10-20-2021

10월 21일 /2021(수) 오후 7:00

할렐루야(Hallelujah)의 뜻과 의미
알렐루야의 차이




(도입 이야기)

월남 전에 참여했다가 귀국하는 한국군이 승선한 배를 향하여 항구에 늘어선 수많은 월남의 아가씨들이 손을 흔들며 "웃기네!" "웃기네!" 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손을 흔들며 웃기네 웃기네 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느 병사가 월남을 떠나기 전에 서로 사귀던 아가씨가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별할 때 어떤 인사말을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웃기네!" "웃기네!" 하고 손을 흔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아가씨가 항구에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말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에 그 많은 월남 여자들이 월남을 떠나는 한국군 장병들을 향하여 "웃기네!" "웃기네!" 하고 손을 흔들며 울며 작별 인사를 하는데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참 어이없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웃기네! 라는 말은 분명히 작별 인사를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할렐루야 라는 용어도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할렐루야를 사용하는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설교자를 환영한다는 할렐루야!

설교자를 초청하고 강단에서 소개한 후 설교단에 오를 때 환영한다는 표현으로 할렐루야 라고 회중들에게 외치게 합니다.

조직신학자 이종성교수가 어느 교회 헌신 예배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설교단에 오를 때 교인들이 "할렐루야!" 하며 환호하자 고 이종성교수는 "여러분 사람을 향하여 할렐루야! 라고 환영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할렐루야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둘째는 설교자와 회중의 화합을 위한 할렐루야!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할렐루야!" 하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 하고 화답하게 합니다.
마치 이렇게 할렐루야 아멘이 크게 외칠 때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을 때 강사 목사님이 강단에 서시더니 할렐루야! 하고 회중에게 외쳤습니다.
회중들이 조용하자,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할렐루야에 화답할 줄 알아야 한다며 몇 차례 연습을 시킵니다.
어느 정도 회중들이 아멘 하고 크게 외칠 때 이제 은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교인들의 인사말 할렐루야!

교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할렐루야!" 라고 인사하면 "아멘!" 하고 화답합니다.

할렐루야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는 사람을 환영하는 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는 설교자와 청중의 분위기를 조절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할렐루야는 반드시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매우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과 바른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사용하는 것은 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시편과 요한계시록에서만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할렐루야 또한 성경속에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성경에서 할렐루야는 딱 두권에서만 쓰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과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입니다.

시편에서는 104편부터 150편에서 23번 할렐루야가 쓰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19장에서만 4번 할렐루야가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27번 할렐루야 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할렐루야의 뜻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세 단어가 합성된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할랄(halal) -  찬양하다, 밝게 비추다
둘째, - 너희
셋째, 야(Yah) - 야는 야훼의 축약형으로 여호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여호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화, 즉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히브리어 4자음 문자이다.

'요드, 헤, 와우, 헤'의 4자음으로 YHWH라고 합니다.
이 문자는 너무나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이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번역본에 따라서 "여호와" 또는 "야훼" 또는 "예호바(Jehovah)"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

할렐루야와 알렐루야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알렐루야는 라틴어

히브리어인 할렐루야를 다시 헬라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알렐루야라는 발음이 생겼다.

헬라어에는 강안 'ㅎ'발음이 없다. 그래서 보충하기 위해서 쉼표를 뒤집어 놓은 표시인 (') 문자를 써서 번역하였다.
그것이 알렐루야('allelouia)이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는 헬라어에서 사용하는 격음을 나타내는 부호가 없다.
그래서 그냥 [Alleluia] 라고 쓰게 되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지금의 알렐루야가 생겨났다.
곧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단지 나라별 종교별 전통에 따라 할렐루야라는 용어를 쓰기도, 알렐루야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9:1-6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1절에서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라고 외칠 때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죄에서 자유케 하는 구원과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셨냐면 바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 무엇이었냐면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다.

왜일까?
바로 구속의 경륜 안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신 걸까?
바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3절에서는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가로되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으로 할렐루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을 받은 표시로 음녀의 심판과 멸망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이것은 음녀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하여 지옥불에서 영원히 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4절
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만 해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만 해도,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구속해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더불어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까지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를 정말 거룩하고 존귀한 신분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존귀한 신분인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받은 자로서, 그리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거룩하고 존귀한 신분을 얻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봉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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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주 찬양 승리·감사의 표현

히브리어로 「주를 찬양하라」는 뜻.환희 승리 감사의 외침을 표시한다.
할렐루야는 이스라엘에 있어 예배 찬송의 말로 쓰인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번역되며
특히 시편 113∼118편은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린다.
예배때 감탄사로 사용되고 회중에게 찬미를 호소하기 위해 쓰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1-6에만 네 번 보이는데 대음부의 멸망에 대한 천사의 대환성에 관련되어 나온다.

고대에는 주로 사회자의 시편 기타낭독의 후렴 답구(답구)로서
혹은 축일의 기쁨을 나타내는 독창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종교적 감격을 나타내는데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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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시편 105: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06:1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찌어다 할렐루야.

시편 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

시편 113: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5: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 116:19
예루살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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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아멘, 진실로, 그러하도다)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인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에서 유래하였다.
아만은 칼형으로 '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바침하다'를 뜻하고,
니팔 형으로, '확 립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를 뜻하며,
히필형으로, '확고하다고 알 다, 믿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아멘의 의미는 '확실한, 확고한, 신실한, 진실한'이다.
부사로는 '확실 히, 진실로'를 의미하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그러할지어다, 그것 이 이루어 질지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반복 용법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예: 진실로 진실로 = 가장확실하게).

구약과 유대교에서의 아멘

1. 이 단어는 구약에서 개인 및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신자는 '아멘' 에 참예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아들이고 저주를 확증하고 송영에 찬동한다. 모 든 경우에 확실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는 인정이 암시되어 있다.

(a) 첫째로. 그 성취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일들의 수납을 확증하는 것이 다. 왕상1:36에서 브나냐는 솔로몬의 즉위식을 지시한 다윗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 한다. 이 경우 왕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도록 요청하고, 또한 이를 위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 다.

렘28:6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귀활시킬 것이라고 하는 하나냐 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외경 유딧 l3:20에서 백성들은 유딧을 축복하는 도성 의 지도자 우찌야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상의 실례에서 아멘으로 응답함으 로 응답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움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 다.

(b) 둘째로,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의 적용을 확증하는 것이다. 민5:22에서 간 음의 혐의를 받은 여인은 제사장의 저주에 관한 말에 두번 아멘으로 응답한다. 말 하자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와같은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렘11:5에서 예레미야는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한다. 신27:15-26에서 백성들은 레위 사 람이 열거하는 율법 위반자들에게 한 저주에 대하여 아멘으로 확증하였으며, 느예 l3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느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위협하에 서 아멘으로 자기네의 약속을 확증한다. 이러한 아멘은 만일 자신이 죄를 범하면 자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c) 셋째로, 송영에 응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찬동한다. 대표자나 찬양대 가 하나님을 송축하거나 그러한 기도를 할 때 백성들, 곧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하 였다(느8:6;). 시편의 권의 끝부분(4l:l3[l4]; 72:19; 89:52[53]; l06:48)에 나오는 찬미는 모두 아멘이 첨가된 송영으로 끝나는데 백성의 응답의 표시이다. 언급된 내용은 아멘을 통하여 확실하고 타당하고 구속력있는 것으로 확 증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도 (참으로)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 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

(d) 네째로, 아멘은 하나님의 명칭이나 속성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65:l6 에서 '아멘의 하나님'(한글개역: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해진다. 또는 하나님 자 신이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확증의 증인이기 때문에 아멘의 하나님으로 칭해진다 고 볼 수 있다.

2. 구약시대에 아멘이 화자(혹은 기자)가 자기 자신의 말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오직 한번 뿐인데, 세기 말엽에 메짜드 카샤비야후가 쓴 한 문 서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아멘, 내게는 잘못이 없읍니다'라고 한다.

3. 랍비들의 자료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확증하고 강조하는 대답으로만 발견될 뿐이다.
요제 차니나(R. Jose b. chanina, AD. 270년경)는 아멘에는 서약, 말의 수용, 그리고 말에 대한 확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a) 기도나 송영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b) 탄원, 축복이나 저주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그것에 속박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들은 어떤 송영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이 주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아멘을 말하는 사람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성전예배의 경우와 달리 회당 예배에서 회중은 예배 인도자가 선언 한 송영에, 그리고 아론의 세가지 축복기도(민 6:24이하)에 '아멘'으로 화답하였 다.

4. 어떤 사람이 쿰란 공동체에 가입할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데 반해, 레위인들은 베리알의 편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였다. 이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지 이러한 여러가지 송영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두번 아멘으로 화답하였다(신 27:l5-26).

신약성경에서의 아멘

신약성경에서 아멘은 27회 사용되었다.
바울서신에서는 14구절에 사용되었다. 

1. 말씀을 시작할 때에는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엄숙 하게'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오는 데, 주로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문구로 나온다(막 3:28; 눅 4:24).
이 단어의 반복용법 (아멘, 아멘)은 요한에 의해 요한복음에서만(25회) 사용되었으며,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가장 확실하게(요 l:5l; 3:3). 예수님은 아 멘으로 말씀을 시작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 드셨다.
그는 그 말씀들을 지지하시고 자신과 청증들을 그 말씀으로 구속하셨다.
이 말씀들은 그의 위엄과 권위의 표현이다.

2. 문장의 종결부분, 곧 기도나 송영의 끝부분에서 언급된 것을 강화하고 확증 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구약성서의 용법을 따라 역시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우에 아멘은 '그러하도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어다'(혹은 이러한 요청이 함축된 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l:25; 9:5; 11: 36; l6:27; 갈 1:5; 엡 3:2l; 빌 4:20; 딤전 l:l7; l; 벧전 4:ll; 계 1:6등).

3. 아멘은 회당에서 기독교 회증에게로 전해진 관례로, 성경을 읽거나 봉독한 자가 하나님께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따라서 언급된 것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삼는다(l6; 참조: 민5:22; 신27:l5이하; 느5:l3; 8:6).

고후l:2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보증되었 다고 보고 우리가 아멘으로 그것을 확증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것 으로 삼는다고 한다.

계22:20에서 교회는 '진실로'라는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여 그 약속을 확 증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의미에서 고후l:20과 같 은 의미를 가진다.

4. 요한계시록 3:l4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그를 실질적으로 아 멘의 역어인 참된 증인(시 89:37,38) 이라고 단정 지을 때 이 구절은 이사 : I6을 채택한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자기 안에서 선포되 어진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그의 응답에서 아멘으로 불리워 질 수 있다. - 아멘 -.





알파벳으로 써본 영적 지도의 특징(A - Z)



알파벳으로  영적 지도의 특징


Accept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Believe  믿는다.

Calls to support 가장 필요할 때 지원을 요청한다.

Don’t give up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Envisions 온전하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Forgive 따지지 말고 용서한다.

Give 조건없이 준다.

Help 깜짝 놀랄 방법으로 돕는다.

Invite 삶을 나누도록 초대한다.

Just likes to be with him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Keeps him honest and self-aware 정직하며 스스로를 알도록 계속 노력한다.

Love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

Makes you feel important 자존감을 갖게 한다.

Never judge 정죄하지 않고 책임을 느끼도록 돕는다.

Offers support 지원한다.

Picks you up 낙심될 때 일으켜 세운다.

Quiets the hurtsful memories 상처받은 기억과 현재의 두려움을 잠재운다.

Remembers him 특별한 날에 기억한다.

Sings the positive things 깎아 내리려 할 때 적극적인 면을 노래한다.

Tells the truth with love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

Understands him 현재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Values his thoughts and feelings 생각과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Walks beside him 그의 편에 서서 걷는다.

X-plains the things he does 그를 혼돈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Yells only when 들을 수 없을 때는 고함을 지른다.

Zaps him into excitement for 은혜 아름다움 기쁨 평화 봉사의 감격에 빠지게 하라

* 자료출처 /  W.Paul Jones  "영적 지도의 이론과 실천"에서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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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 도움이 되는 10가지 공식



하나님을, 보다 더 잘 믿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신, 하나님의 식을 잘 알고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동안의 인생살이와 목회를 하며 얻은, 신앙의 핵심 10가지를 통해 좀 더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의 성공과 영성의 충만과 영적 전쟁의 승리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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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갈망한다는 뜻이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많다. 잠잠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왕 십자가를 지려거든, 묵묵히 지고 가야 한다.

투덜거리면 훈련만 더 연장될 뿐이다.

우리는 남편(아내)과 자식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너무 말이 많다.

이렇고 저렇고 성경에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람이 좋다고 말씀하고 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깊이가 없다.

잠잠히 혹은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2. 끝까지 신뢰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대하고, 따른다.

그러나 끝까지 신뢰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한 번, 두 번, 신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열 번, 백 번, 천 번 신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신뢰하되 90% 신뢰한다. 그러나 100% 신뢰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몇 번, 혹은 가끔씩은 신뢰한다.

그러나 항상 그리고 끝까지 신뢰하는 일은, 잘못한다.

항상, 그리고 끝까지 신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3. 작은 일에 상처받지 말고 화를 자주 내지 마라.

우리는 일상에서 상처를 받고, 화를 자주 내고 산다. 그래서 인간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큰 일로 상처 받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예를 들면..

내가 보낸 문자에 답신이 없을 경우)에, 상처를 받고.. 누가 나를 평가한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크게 상처를 받는다. 그 이유는. 내 안에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일에, 혹은 하찮은 일에 버럭 화를 내곤 한다.

그리고 금방 돌이키긴 하지만 말이다. 상처와 화를 냄은 영성에, 치명적 해가 된다.

그리고 내가 받은 상처는, 또 누군가를 찌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낸 화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된다. 그러므로 상처를 잘 받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영성 지수가 아주 낮다. 직분과 나이와 상관없이 ...

4.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빼앗고, 넘어뜨리려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 마귀는, 오히려 불신자들, 연약한 자들은 건들지 않는 속성이 있다.

믿는 자들, 목회자들, 영성의 거인들을 결사적으로 넘어지게 하고, 공격하고, 무너뜨리려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무서워하라. 마귀와 타협하라. 마귀를 무시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를 꾸짖어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귀는 전면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게릴라전에 아주 능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작은 문제와 시험꺼리와 별의 별 달콤한 모습과.. 가장한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다. 그럴 때 마귀를 강하게 꾸짖고 대적해야 한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활용하여 말이다.

수시로 다가오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보혈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병마가 찾아왔을 때 병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친구로 삼으면 안 된다.

병을 대적하고, 예수 이름으로 꾸짖고, 웬만하면 드러눕지 말고, 건강할 때보다 더 씩씩하게 활동하라.

그러면 마귀는 아이고 이 사람은 건드려 봤자 소용없네 하고,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이다.

 

5. 입술의 권세를 활용하라.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돛대도 아니고, 엔진도 아니다. 배 앞쪽에 있는, 작은 방향키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열심도 충성도, 성결도, 의도, 의식도, 형식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이다.

혀는 작은 것이로되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고,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혀로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남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훈련에 몰입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리 죽겠어도~~ 힘들다, 어렵다, 안되겠지, 틀렸어, 내가 뭘 해,

기도해도 안 되잖아, 지금은 세계적인 불황이 아닌가? 이젠 다 틀렸어, 나는 소망이 없어 이런 말을, 내 뱉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말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다가.. 열매가 되어 내가 한 말의 열매를, 내가 따 먹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하고 살면, 좋은 열매를 따고 나쁜 말을 하고 살면 그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별의 별짓을 다 해도 나쁜 열매를, 딸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좋은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소망을 주는 말, 칭찬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언제나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한다. 나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왕 같은 족속이요, 사랑받고 사랑주고, 쓰임받기 위해 태어난 존귀한, 하나님의 걸 작품이라고 말이다.

6. 심고 거둠의 법칙을 적용하라.

성경의 기본적인 영적 원리 중에 하나는, 심어야 거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심은 대로 거두고 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한다는 뜻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 또한 없다.

시편에도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했다.

디모데전서에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라 했다.

우리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심고 산다.

그러나 썩지 않을 영생을 위하여 심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 못해 쪄들어 산다.

그러면서도 나는 역시, 믿음이 좋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걸 착각하며 거들먹거린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도적이라 부른다.

오늘날 교회 안에 직분자들 속에 합법적인 도적이 너무 많다.

아무것도 주를 위하여 심지도 않고, 무조건 복을 달라 조른다.

배짱도 좋다. 혹자는, 병아리 눈물만큼 심어놓고, 바다만한 기적을 달라 한다.

기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 선교와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심고 사는가? 심는 게 남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가?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심은 것만이 내 것이다.

시간을 심어라. 희생을 심어라. 눈물을 심어라. 물질로 심어라. 몸으로 심어라.

달란트로 심어라. 심음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많게 남겨라.

그리고 환란 때에, 주를 찾고 부르라.

그리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 주실 것이다.

​ 

7. 고난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라.

주 밖에서의 고난은, 불행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고난은 유익이며,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확성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일단 절망하고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난은 고통스런 일이며, 그 고난을 무게를, 스스로가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잇기 때문이며 고난을 통해 철이 들고, 성숙해 지기 때문이다.


마귀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성령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마귀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주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세우려 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생각나고, 기도가 생각나고, 말씀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며, 당신을 통해 무언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 중에 있을 때 절망이 생각나고, 원망이 떠오르고, 한숨부터 나온다면

어쩌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는, 고난이 없었으면 하지만 지나고 나면 고난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여, 능히 감당케 해 주시기도 하신다. 인생 중에, 고난이 없는 자는 없다.

다만 고난 중에, 하나님 없이 견디는 자가 있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하여 넉넉히 감당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도 지치게 하고, 절망도 친구도 삼는다.

그렇다고 고행주의나 고난을 즐기는 것은, 복음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난은 필연적이고 충분한, 은혜의 영향권이며, 그분의 주권아래 있는 피할 수 없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났을 때 이상히 여기거나, 화들짝 놀라 소란피울 일은 아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 아~ 또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무슨 축복과 유익을 주시려 하는가? 라고, 생각하면 되고 쓰디쓴 약을, 분석하지 않고 꿀꺽 삼키듯이 고난도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보혈 한 컵으로 꿀꺽 삼키라. 그러면 고난만이 주는 효험이, 나타날 것이다.

​ 

8. 실수나 죄책에 얽매이지 마라.

 

9. 자꾸만 비우는 훈련을 하라.

비움은 채움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채움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며 사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비움으로 채움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비우지 않고 채우기만 하면, 언젠가는 막히고 썩고 만다.

그러나 늘 비우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 인생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열두 광주리 가득히 거두는, 복을 더 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아이의 비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비움으로 절정에 이른다.

만일에 어린아이가 자기 것을 비우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자신들의 바구니를 비우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우리는 풍성한 채움을 원하면서도 실제의 삶속에서는 비우지 않고 채우기만 하는데, 집착하고 산다.

사렙다 과부가 문제 해결을 얻고, 기적을 체험하고, 복을 받은 것도 밀가루 반죽 그릇과, 기름병을 비울 때 일어났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수록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려 하라.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장 힘들고 곤고할 때, 묵상을 하고 말씀을 전한다.

내가 바닥일 때 내가 탈진 중일 때, 회복하고 소생하는 비법이다.

아무것도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한 방울 한 방울,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비우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의 심령은, 또 다시 충만하게 채워져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가장 힘들 때, 비우라. 가장 몸이 아플 때, 충성하라.

내 먹고 죽을 것도 없을 지경일 때.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라.

영적으로 곤고하고 삶이 고단할 때, 오히려 그때 많이 비우라.

나보다 더 어려운 자들을 찾아가 돌아보며, 허리를 굽혀 섬기라.

그 현장이, 갈릴리가 될 것이다. 채움의 샘이 솟아날 것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비우지 않고, 채우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늘 더부룩한 것이다.

잘 먹는 자가 건강한 자가 아니라, 잘 비우는 자가, 더 건강하다는

평범한 상식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기억하라.

우리는 비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지,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주님은 비우는 자에게, 열두 광주리 가득히 채우시는 좋으신 분이다.

 

10. 어떻게든 조용한 시간(Q.T)을 자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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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6가지 특징

 

미국 온라인 목회 상담 사이트 '파트너스인미니스트리'(Partners in ministry)에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6가지 특징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1. 영혼을 우선시하지 않고, 숫자를 우선시하는 교회
교회가 비즈니스처럼 운영되면 사람 대신 숫자에 중점을 두게 된다. 지난 주 예배 참석자는 몇 명이었나? 이번 가을에는 몇 개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인가? 예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십일조와 헌금을 거두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 리더십이 성공의 기준으로 이러한 숫자들에 집착할 때 그것은 교회가 세속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불건전한 징조이기도 하다. 건강한 교회의 중심적인 목표는 복음을 통해 강한 영적 크리스천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2. 교인들이 하나님보다 목사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교회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목사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목사님에 대한 교인들의 사랑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그러나 교회 권위자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을 위해 남겨둬야 하는 경배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를 전해야지, 교인들이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도록 유도해선 안 된다.

3.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교인만 우호적으로 대하는 교회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교인들에게만 우호적으로 대하면 교회 내에서 권위적인 환경이 조성돼 교인들의 영적 성장이 저해될 수 있다. 의견 불일치가 있다고 해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반항한다는 뜻은 아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이 품는 의문과 던지는 질문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공격으로만 해석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사람 뿐 아니라 다른 의견을 가진 교인들까지 사랑으로 품고 우호적으로 대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

4. 파벌이나 배타적인 집단이 있는 교회
건강하지 못한 교회에는 늘 파벌이 있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놓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배타적인 집단이 있을 때 교회 공동체의 평화는 깨진다. 또, 교회에 힘 센 파벌이 생기면 다툼과 험담이 끊이지 않으며, 화합과 통합 대신 분열이 생길 뿐이다.

5. 기도를 우선시하지 않는 교회
기도를 예배가 끝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일 쯤으로 여기는 교회는 영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감이다. 기도를 등한시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시를 알 수도 없으며, 순종할 수도 없다.

6. 제자를 양성하지 않는 교회 

주님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라 했다. 모든 교회가 선교사를 배출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교회는 적어도 교인들이 봉사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만약 교회 내에서 섬기는 사람 한 명을 구하려고 애 먹는 교회가 있다면 교인들이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이끄심을 따르고 있지 않다. 섬기는 사람이 없어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해 봉사하도록 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