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장소)와 하나님 나라(속성)

일반적인 생각 /
 
1. 죽어서 가는 나라(영혼이 가는 곳)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나라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교회(에클레시아) :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통로

하늘 나라 : 장소




https://www.cjob.co.kr/christianity/593


사탄과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처음 두 명의 통치자이다.
둘 다 두 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둘 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사탄은 한 왕국의 왕관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다시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담에서 예수님까지의 역사는 천국, 즉 실제적인 땅의 왕국에 대한 역사가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천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왕관을 쓴 사탄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는 사탄의 개인 소유(고후 4:4)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떠한 간섭도, 특히 "성령의 칼"(히 4:12)로 부터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지구를 소제하고 단장하고 재장식해서 다음에 등장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일할 만한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지도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탄은 항상 사기를 높이고 낙관론을 신봉하게 함으로써,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고 혼란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하는 그 일들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저 위대한 "긍정적 사고가"의 입장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첫 번째 말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창 3:1)이다. 사탄의 유일한 문제는 6000년 간의 부패와 타락과 사회적 붕괴와 전쟁과 죽음 등을 직면하면서도 어떻게 이 높은 사기와 고조된 낙관론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마태복음 6:33-34)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절정이다.
주님께선 32절에서 청중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신 후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 6:32) 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교도들인 미국, 영국, 독일, 한국 등 이방인들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앞부분까지는 마찬가지이다(행 2:39; 3:22).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개인적인 아버지라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야 비로서 등장하는 새로운 계시이다. 산상설교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있었던, 다가오는 천년왕국의 규칙과 요소들의 윤곽을 잡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약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각각 어떤 나라인지 이미 공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달리 영적인 나라로서, “거듭나면” 들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공포되는 이 때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교회 시대의 성도들처럼 영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데, 이 영적인 상태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교회 시대에는 이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거듭남으로 들어가지만, 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행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나라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나라였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에는 완벽한 의가 요구되는 것이고, 이 “의”로 말미암아 이들은 천국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의는 엄청난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설교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다 이루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선 이들이 지키지 못할 의를 완성하시고자 죽어야 했으며, 그 의가 입혀졌을 때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아직까지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거듭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상황아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마태복음 5:20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지녀야 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의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경고하신다

 

 

   2)  마 19:24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라.』 (막 10:25, 눅 18:25)

 

 

19:24절 모든 학자들은 바늘의 귀 를 "낙타가 밤에 성문이 잠겼을 때 얻드려 기어가기 위해 그 무릎을 꿇어서 통고하는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 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분" 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눅 18:25 참조), 그런 문은 어떤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학자들의 다음 단계는 이 구절을 바꾸는 것이다. 페쉬타(시리아 어 역본)에는 낙타 대신에 "밧줄"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시간 낭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빈정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이것은 그분의 뛰어난 특성 중 하나이다), 또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다(핵심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과장하신 것이다).

 

  막 1: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1:1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전파하신 것과 같은 메시지가 아니다. 천국은 "문자적이고, 물이적이며, 눈에 보이는" 왕국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실현하시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눅 17: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1절)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도덕적인 의" 의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는(딤후 2:15) 이방인들이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신약에 놔 두신 가장 거대한 거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 계셨을 때에 이 두 왕국이 함께 존재하였다.' 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두 왕국의 왕이시다

 

  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 』

 

17절에서 전파하시기 시작한 천국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의 복음”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위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과, “천국”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천국”은 다윗의 보좌에서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왕의 의로운 통치가 있는,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다. 이 “다윗의 보좌”는 이스라엘과 관계된 것이고, 그래서 이 왕국(천국) 복음은 자연히 이스라엘과 관계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과 교회는 종종 동일시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교회는 분명히 다르다. 천국(왕국)은 갑자기 세워지는 반면(set up, 단 2:44) 교회는 세워져간다(built up, 엡 2:20). 천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는 반면(약 2:5) “교회의 상속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으나(마 8:12) “교회의 자녀들”은 없다. 교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왕국은 “몸”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 “성전”이다. 왕국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왕국이 임하도록 구하며(마 6:10)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반면(눅 19:12), 교회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임하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그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빈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진실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에게 이 얼마나 무례(?)한 반응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 하고 말하는 손님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님께서는 대꾸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어서 오십시요. 반갑습니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며 손님을 맞아들이지도 않으셨다. “누추합니다만, 여기 좀 앉으시지요.” 하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행은 맡아 놓았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니코데모는 이런 무례한 꼴을 생전 처음 당해 보았을 것이다.

 

누가 당신을 찾아와 “당신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적을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말했다면, 당신은 두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필경, “아, 네, 감사합니다. 그걸 알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저는 죽은 사람을 세 사람이나 살려 놓느라고 아주 바빴답니다. 아이구, 이런! 어서 들어오십시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수선을 떨며 갖은 친절을 다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손님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이렇게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한 분이셨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멀리 갈 것없이 요한복음 4장만 보아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와 같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대해 주셨던 그분의 온화하신 태도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어째서 이처럼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셨던가?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 2:24).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게 행세하던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입관 때문에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퉁명스럽게 대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니코데모가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이른바 “지식인”이었기에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말씀의 핵심을 꺼내셨던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를 흉내내는 현대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즉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뿐아니라 들어가는 것에 대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서 14: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성령 안에서 의를 누리는 그분의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바로 이 순간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화평과 기쁨을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나타난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비유를 하나 더 들어 말씀하시더라.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눅 19: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 이것은 미래에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더욱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눅 17:20), 본문은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것은 미래에 임할 천년왕국을 언급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3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면 ‘장차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를 일찌감치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할뿐더러,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지금 이 교회 시대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적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실제로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영적으로 존재하고, 천년왕국 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존재하게 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첫째, 지금 그 영적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둘째, 그 실제적으로 나타난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된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옳지, 예수님께서도 ‘물침례’ 구원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생각한다. 캠벨주의자들이 그렇고 로마 카톨릭이 또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다면 요한복음 3장 그 어디건 “침례”에 관한 언급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1절, 2절, 3절..., 35절, 36절, 처음부터 끝절까지 눈씻고 찾아 보라.

 

어디에 “침례”와 관련된 말씀이 단 한 군데, 단 한 마디라도 눈에 띄는가? 캠벨주의자들이나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 어디서건 “물” 소리만 나오면 “여기 보세요, 물침례 이야기가 여기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흥분해서 떠벌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또 이상한 것은 “침례”라는 말이 나올 때, 거기 “물”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구절에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시무룩해져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그들은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가 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돼 버린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 역시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모른 척 창 밖만 내다 본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하고 “물”은 “물침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되는 “물”이나 “생수” 역시 “물침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한복음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배에서 흐르리라는 생수의 강들 역시 “물침례”와는 거리가 멀다. “물침례”에 정신이 혼미해진 자들이 “물” 소리만 나와도 그게 모두 “물침례”와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히스테리 반응과 같은 병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코필드는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라는 에베소서 5:26의 말씀과 연관해서 모든 물은 “말씀”을 예표한다고 못박고 있다(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캠벨주의자들이나 카톨릭이 어째서 물만 나오면 그것을 침례와 연관지으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미스테리다.


그렇다면 “물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절에서 니코데모에게 먼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여기 5절에서 “물과 성령”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자, 니코데모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보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다. 『사람이 물과...』 즉 “사람이 어미의 태에서” 태어나고 나서, 또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간명하게 결론을 내려 주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

『육신으로 난 것』, 즉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거듭남이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신다.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일단 어미의 태 속에 잉태되어 그 태로부터 태어난다. 이것은 육신적인 출생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간명한 설명인가! 어미의 태는 물 주머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 그 아기는 물 속에 있게 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물이 생물학적인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을 산부인과 의사한테서 배운 게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 배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창 1:20). 이처럼 지구 상에 존재하는 최초의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

 

결국 요한복음 3:5의 “물로 태어남”은 생물학적인 출생을 의미하며, 그 사실을 성경 자체가 해석해 주고 있다. 물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물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없었다. 유대인이 받았던 침례는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들이 물침례를 받은 것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출생을 정결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는 말씀은 오늘날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령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해야 한다. “당신이 어미의 태로부터 태어난 출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이 그것만 붙잡고 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당신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말이다.

 

 

  6)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2:4-5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선명해진다.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와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 토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을 살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실천적인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도 없고 말씀에 실천적으로 순종하지도 않는 자가 말만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7)  계 12:10  『또 내가 들으니, 한 큰 음성이 하늘에서 말하기를 “이제 구원과 능력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는도다. 이는 우리 형제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고소하던 그 고소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사탄은 “고소자”나 “검사” 같은 부류의 적으로 지적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성도들을 환란 중간까지 고소해온 것을 듣는다. 환란 중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은 욥기 1,2장에서 그랬듯이 위 아래로 다니며 고소하고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다.

 

 

3.  천국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책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하시고 이제 침례인 요한의 예비로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려 하시는 왕국은 어떤 것인가? 그 왕국은 어떤 모습인가?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제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침례인 요한과 예수께서 전파하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것이다.  마태복음 3장부터는 마태복음의 주제인 “천국”에 관한 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3장을 들어가기에 앞서 천국에 관한 내용들을 분명히 알아야 하기에,  피터럭크만의 책들을 바탕으로 천국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이 부분의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1969>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1999>를 참조 바람.]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1)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이다.

 물론 이 세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인간들의 왕국”(단 4:32), “세상의 나라”(눅 4;5), “이 세상의 나라들”(계 11:15)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 개의 나라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이 천국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 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연결된 문맥인 5절에서는 “땅의 유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말하여 그 대상을 유대인에게 한정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12에서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라는 말은 천국을 영적인 나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 “사회운동가”, “해방자” 등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님의 조명 없이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이해가 전혀 없이 현상을 어느 정도만 보고 정확한 판단이 없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영적인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천국”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는 따로 있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나라들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을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동안은 땅에 속한 그 왕국을 더 강조하겠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는 이 왕국, 즉 천국이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제시되는 왕국과 메시야, 그리고 그 예언에 대한 성취와 성경에서 이 왕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 왕국은 마태복음의 주제가 되는 나라로서,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나라이며, 몸을 입고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거듭남과는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메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왕은 단지 초림에 그 예언을 모두 성취하시지 않았다. 구약의 기술을 자세히 보면 왕이 나타나시는 것에 대해 초림과 재림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다시 자세히 보면 그 촛점은 초림보다는 재림에 더 많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그 왕의 나타나심을 재림의 상황에 맞게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주제를 “재림”(His Advent 또는 His Second Advent)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과 연관해서 본다면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the kingdom)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 그것도 지상 왕국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관점을 가졌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그러한 “왕국”이 아니다. 지금부터 전개해 나갈 “천국”(왕국)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이해한다면 그러한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락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천국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인데, 이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거듭나지 않더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수 있는데(눅 1:32,33), 그 보좌는 결코 영적인 보좌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땅의 보좌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하늘나라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 (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령할 때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안되고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하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이므로 본 주제에서는 비켜나기로 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끌어 오신 두 왕국, 즉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두 왕국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나님은 이 두 왕국들을 어떻게 계획하셨으며, 이 왕국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이 왕국들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으며, 또 이 왕국들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가야 할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 와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왕국들 중에서도 특별히 “천국”에 촛점을 맞추어서 공부해 볼 것이다.


왕국에 대한 역사를 맨 처음부터 살펴본다면 창세기 1:1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우주를 만드셨다. 그는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그에게 굴복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한 존재를 세우셨는데, 그는 바로 모든 영적 세계의 우두머리인 한 그룹(cherub)이었다. 그는 루시퍼(Lucifer, 사 14:12)라고 불린다.

에스겔 28:14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

 

여기서 “투로의 왕”으로 묘사되는 그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고, 모든 아름다운 보석들과 또 북들과 관악기들이 그를 위해 있었다(13절). 그는 보좌를 덮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anointed cherub)이었다. 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뜻한다(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다. 우리는 지금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왕이다(왕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제사장이다(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정치적인 직책이라면 제사장은 영적인 직책이라는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에서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과 실제적인 통치의(정치적인) 나라(“천국”)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이다.

 

그가 타락하여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 14장에서는 그를 “바빌론 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사 14:4), 그를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던 자”(사 14:16)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이끌고 내려올 만한 권세가 있다(계 12:4). 그러나 그는 교만으로 타락했다. 그리고 그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이 두 왕국의 왕관을 빼앗으셨다.


 

 

 

 4)  루시퍼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통치할 새로운 왕을 

     창조하셨다. 그는 아담이다.

 

 (1)  창세기 1:28-30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subdue).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have dominion).』

 

이 구절은 인간에게 이 땅의 문화를 점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라고 주신 소위 “문화명령”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아담을 왕으로 임명하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왕권 위임”이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아담이 그 세계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은 실제적인 나라와 영적인 나라의 두 개의 왕관을 쓴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길고 긴 왕권 쟁탈전이 벌어진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으로 정해진 이 전쟁에서 사탄은 인간을 통해서 이 왕국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의 영은 죽었고 이후로 아담에게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으므로 영적 통치의 자격을 상실한다.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하나님께서 가져가 버리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저주를 하시는데, 창세기 3장에서 땅은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었고 아담은 땅에서 양식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고 평생동안 수고해야 했다(창 3:17-19). 그의 통치권은 땅에서 떠났고, 땅에 속한 실제적인 왕국(천국)의 왕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그가 빼앗긴 천국의 왕관은 루시퍼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사탄은 누가복음에서 과감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왕국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눅 4:6).

그리고 이때부터 영적인 왕국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인간 역사는 오로지 실제적인 왕국, 곧 천국과만 관계한다.


  (2)  세 번째로 이 왕국(천국)을 차지하는 인물은 노아이다.

 

창세기 9:1,2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

홍수 이후에 텅 빈 땅을 다시 채우는 임무를 맡은 노아에게는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과 거의 비슷한 언약이 주어지는데, 노아는 동물들에게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는 다시 이 땅의 왕국의 왕관을 쓴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노아도 실수함으로써 이 왕관을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창세기 9:21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의 실수로 함은 범죄하였고(창 9:24) 그의 아들 카나안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함의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시날 땅에 그의 왕국을 세운다(창 10:9-14). 그의 이름은 님롯(Nimrod)으로서, 그는 사탄의 한 유형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는다. 다시 이 왕국은 사탄에게 넘어간 것이다.


   (3)  이 왕국의 네번째 왕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18-21에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으며, 또 17:6에서는 『네게서 왕들이 나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왕국과 그의 씨와 이방 민족에 대한 언약이 맺어졌으며, 아브라함은 명실공히 “천국”의 왕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자신의 신정통치 왕국(천국)을 이루려고 계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에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들을 통하여 이 왕국의 약속은 이어져 온다.


창세기 15:13,14의 예언에 따라 이들은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영광의 탈출(출애굽)을 한다. 이 때에야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탄생하게 되고, 이 민족은 모세와 함께 한다.

신명기 33:5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다함께 모였을 때 그는(모세) 여수룬에서 왕이었도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이었다(신 5:24). 모세는 하나님과 항상 긴밀하게 대화했으며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의 “천국”을 이루시려는 계획 속에서 모세에게 그 왕의 위치를 부여하시고 권한을 주셨다. 모세는 표적과 이적을 행사하며 백성들을 이끌었다. 온 백성은 모세의 명령에 따랐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한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출 32:10).

 

그러나 이 왕은 좀 특별하다. 그는 단지 “천국”의 왕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창세기 49:10에서의 예언에 따르면 그 왕은 분명히 유다 지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모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자다(출 2:1).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인데, 이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기틀이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은 완전한 의의 통치이기 때문에 이 율법 또한 매우 엄격했다. 그러므로 이 모세는 다윗을 통하여 이루어질 왕국이 임하기 전에 그 왕국의 기틀을 잡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맡은 왕이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실수가 있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노함으로 바위를 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왕국은 인간들이 다스리기에 이토록 힘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국(천국)을 이루시기 이전에 율법을 주시고 그 왕국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놓기 위하여 준비하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카나안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 이후에는 여러 명의 재판관들을 통하여 그의 왕국(천국)을 다스리셨다(재판관기 2:16).

그러나 이 재판관들 중에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종종 있었으며, 이 재판관들이 죽은 이후에 백성들은 다시금 우상에게로 나아갔다. 결국 재판관들을 통하여도 이 “천국”은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이 재판관들은 재판관기 3:10의 옷니엘로 시작하여 사무엘까지 이르며(삼상 7:15), 그 이후에는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첫번째 왕은 사울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왕을 구했다(삼상 8장). 사울은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릇되이 나타난 자인데,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의 유형이다. 백성들은 ‘다른’ 왕을 받아들인 것이다.


   (4)  이번에 등장하는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메시야 왕의 가장 직접인

        유형인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이며(삼상 16:1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이다(삼상 16:1).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국을 약속하셨다.

사무엘하 7:12-16 『... 내가 네 몸에서 나올, 곧 네 뒤에 올 네 씨를 세우고, 내가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왕국이” 영원히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의 씨를 견고히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뒤에 오는 어떠한 왕도 다윗의 보좌에 대한 정통성이 없으면 “천국”의 왕관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아들”로 탄생하시고(마 1:1),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도 “다윗의 이름”으로 호산나 환호와 찬양을 받으셨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에 대한 관계는 마태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질 주요한 주제다.

그러나 다윗에게도 실패가 있었으니, 곧 힛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벌을 주셨다(삼하 12:10). 그래서 솔로몬이 등극할 때까지도 그는 아도니야와 싸워야 했다(왕상 1장).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이 솔로몬에게 이루어져 솔로몬에게 큰 왕국이 세워지고 성전이 세워졌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여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 하는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길을 트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서는 왕국이 분열되고 “천국”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에 한정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그의 씨에서 왕이 나타나리라는 계획을 계속 이루어 오시는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배도하여 나가지만 남쪽 유다 왕국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며 왕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신정국가(천국)는 실현되지 못하는데, 드디어 여코냐에 이르러서는 그 왕의 보좌의 정통성을 빼앗겨 유다 지파마저도 천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렘 22:30).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국이 전 우주에서부터 유다지방에 이르기까지 축소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이 왕국이 어떻게 축소되는지 주목하라 : 루시퍼(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 전 우주), 아담(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지구), 노아(천국 - 지구), 아브라함(천국 - 팔레스타인 땅), 모세(천국 - 팔레스타인 땅), 재판관들(천국 - 팔레스타인 땅), 다윗(천국 - 팔레스타인 땅), 르호보암(천국 - 유다 지파), 여코냐(없음), 예수 그리스도(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포로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였고, 백성들은 그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메시야는 민족의 해방자며, 이방 왕국들을 깨뜨리고 완전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세우는 자였다(단 2:44).

 

  (5) 그리고 그 메시야 왕은 마태복음 4장에서 드디어 나타나시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3장과 4장에서 각각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은 이 두 개의 왕국을 함께 가져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메시야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되었을 때(요 1:11; 19:14,15) 이 왕국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 버리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이방인에게도 확장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재림으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 때까지 천국은 신비스런 형태로 감추어지게 되지만(마 13장),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때 그 “천국”은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계 20장). 그 때가 되면 이사야에서 예언된 평화로운 세상, 곧 전쟁이 그치고 사자가 풀을 뜯으며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는 그러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사 11장).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며 이루려고 노력하는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다한 후 하늘과 땅이 불로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합쳐져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 계획하신 원래의 왕국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계 21,22장).


 

  5)  구약 시대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로 왕은 탄생했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팔레스타인 땅에다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왕국이 임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즉, 예언적 계보를 따라서 두 언약(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시어 왕의 자격을 갖추시고(정통성),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이미 예언들을 통해 메시야 사상이 이방인에게까지 있었고(마 2장), 그 메시야가 오시면 이방왕국들은 무너진다(단 2:44).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의 왕은 끊어졌으나 그 보좌에서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타나야 한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메시야의 통치,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완전한 신정통치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침례인 요한의 등장이다. 예언에 따라 나타나시는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인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베풀면서 천국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침례인 요한이 예비한 길은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점이다.

 

1 그 무렵에 침례인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2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니,

 

『그 무렵에』(마 3:1) 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중 처음 6개월 내에 있었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이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는 침례를 받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 무렵”이라는 말은 요한이 지속적으로 침례를 주며 천국 복음을 전파했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 중에 주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도 받으셨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누가복음 3:1,2에 나와 있다. 즉 『티베리오 카이사가 집권한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폰티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요, 갈릴리의 영주는 헤롯이고, 그의 아우 빌립은 이투레와 트라코니티 지방의 영주이며,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고, 안나스와 카야파가 대제사장들로 있을 때』이다. 카이사 아우구스토(눅 2:1)는 로마력 767년 8월 29일에 죽었는데, 그는 티베리오 카이사와 2년 동안 함께 통치했었다. 따라서 티베리오가 집권한 지 15년째라는 말은 아우구스토가 죽은 지 13년 후의 일로, 로마력 781년이란 말이다. (요한은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했으므로, 로마력으로 751년에 출생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출생하신 것이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린드버그의 <Christian Dogmatics>(p.392)를 보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절).

“천국”에 대해서는 앞 장인 ?천국? 부분에서 따로 긴 설명을 해 놓았다. 바로 여기에서 주석가들과 신학교들의 85%가 오류를 범한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성도들이 죽어서 안식하는 셋째 하늘의 낙원을 말하지 않는다. 이 왕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제적으로 이루실, 물리적이며 정치적인 왕국이다.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멸하신 후 홀로 우뚝 서게 될 그분의 왕국이다. 물론 그 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그 왕국의 전파와 거부와 회복에 관한 긴 역사가 왕과 더불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마 3:3 『이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그 사람이라. 말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하였더라. 』

 

본문은 이사야 40:3-8에서 가져온 인용이다. 누가복음 3:4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는데, 거기서도 역시 선지자 이사야의 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또 다른 이사야”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사야 1-39장은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그 이사야가 쓴 것이고, 40-66장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사야가 쓴 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소위 “제2이사야설”이라 부른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학자들은 한 책에서 다른 내용과 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제를 설명하면 무조건 저자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그 부분에서 이사야의 이름을 밝히면서 열두 번도 더 인용했다(롬 10:20, 마 3:3; 12:17, 눅 4:18, 롬 10:16 등). 이사야 39장과 40장을 갈라 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별히 그 “제2이사야”가 썼다는 부분에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속죄에 관한 장이 들어 있다(사 53장). 이러한 위대한 교리를 예언에서 빼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민수기 4:43에 따르면 레위인 사역자들은 모두 30세가 되어야 성전의 일을 수행할 수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제 30세가 되시어 그의 사역을 행하실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메시야 사역이 이루어지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여기 침례인 요한이 서 있다. 침례인 요한은 이사야에서 예언된 대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선두주자(forerunner)이다. 그는 예언된 엘리야(말 4:5)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이다.

 

그가 설교한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이다. 그리고 이 회개는 왕을 맞아들이는 준비가 되고,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 임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말라키 4:5-6과 누가복음 1:17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불순종한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시킬 것이다.

 

메시야 왕이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목자없는 양의 상태, 흩어져서 들짐승들의 먹이가 된 상태이다(겔 34:5, 마 9:36). 이 “엘리야”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와서(말 4:5) 그의 사역, 곧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그 방법은 침례이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푸는데,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회개”의 표시로 침례를 받는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이고, 이것은 천국이 임하기 전에 유대인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이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신정통치 국가를 의미한다.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에는 왕이 끊어졌고, 이제 그 보좌에 앉아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와야 한다. 그 왕을 유대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왕이 임하시기 전에 그 길을 닦아 놓는 사역을 침례인 요한이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아직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도 없었고, 거듭남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타난 침례인 요한의 설교는 지금 현시대에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부적합하다. 단지 왕국의 선행조건으로서 회개하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침례와 일치하는데, 메시야 왕국을 받아들이기 앞선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받는 침례를 요한의 침례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1)  『이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꿀이더라.』(마 3:4) 

 

이 구절은 열왕기하 1:8의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털의 사람이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러나 침례인 요한은 외모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하다.

 

구약에서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침례인 요한에게 적용된다. 말라키 4:5에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약속하시는데, 성령께선 그 약속을 누가복음 1:17에다 적용하고 있다. 또 마가복음 1:2-3은 침례인 요한에 대한 설명인데, 3절은 이사야 40:3의 예언이고 2절은 말라키 3:1의 예언으로서, 이사야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은 말라키 4장의 엘리야와 연결된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 요한이 엘리야임을 증거하셨다(마 11:7-14).

 

엘리야와 요한의 유사성은 적그리스도의 유형 앞에서 증거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구약의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선포했으며, 침례인 요한은 헤롯 앞에서 선포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적그리스도 앞에서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직전에 왕국이 임하는 조건을 형성시키는 사역을 하다가 목베임당해 죽는다. 침례인 요한은 헤롯에게 목베임당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 목베임당할 것이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계시록> 11:3-12을 보시오).

 

엘리야가 다시 온 뒤에 있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말라키에서는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말 4:5), 엘리야는 바로 이 날이 이르기 전에 나타나 사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라면 요한 이후에 “주의 크고 무서운 날”과 재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구약에서 “왕의 오심”(the Advent of the King)은 초림과 재림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신구약 성경을 모두 놓고 보니 초림과 재림이 구분되는 것이지 구약 선지자들의 관점으로 볼 때 초림과 재림은 하나의 사건으로, 단지 왕이 오시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재림의 사건들은 초림에 모두 성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재림은 2000년 후로 연기되었다.) 이 당시가 바로 구약 시대처럼 초림과 재림을 같이 보는 상황이었다. 즉 이제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이 이르고, 주님이 왕으로 임하시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침례인 요한이 등장하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마 3: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주위의 모든 지역에서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들을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이 침례는 분명히 물에 잠기는(immerse) 침례가 분명하다. 요단강 안에서(in) 주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회에서 물뿌려 “세례”(sprinkle) 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화가들의 그림에 보면, 예수님과 요한이 요단강 물에 허리쯤 잠기도록 들어가서, 요한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그림을 볼 수 있다.)

 

  (2) 신약적인 의미에서 침례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는 구원받은 후에 순종하는 간증이다. 성경에서 종종 침례가 구원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사도행전 2:28이 그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침례, 또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구원과는 관계없는 구절이다. 더욱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즉 침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그 모형의 행위를 함으로써 간증하는 것이다.

 

 7 그러나 그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의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고

 9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느니라.

10 또한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며,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욱 그렇다(마 23장). 요한은 9절에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기 때문이다(요 8:39).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이 사탄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똑같은 맥락에서 침례인 요한은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는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11절) 말은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씨임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씨를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다윗의 씨). 단지 그들이 할 일은 “다가오는 진노”, 즉 말라키 4장의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피하기 위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8절).

 

여기서 “독사들의 세대”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말이다. 잠언 30:11-13, 욥기 20:16, 시편 58:4, 미카 7:17 등이 이들과 연관되는 말씀인데, 이 각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말하는 문맥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이들은 “다가오는 진노”와 연관해서 등장하는데, 그때는 바로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 때이다. 이것은 재림 때에도 초림 때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 그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침례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실 지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또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다. 타작마당은 온 세상, 또는 이스라엘인데, 그는 알곡과 쭉정이의 분리 작업을 통해서 알곡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쭉정이에 속한 사람들은 심판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의 알곡과 쭉정이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19:16-22에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시편 1편에서는 복있는 사람을 주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악인은 ‘쭉정이’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과 관계된 백성이고, 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율법적인 의와 관계된다.

이 상황은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세우실 때 그분은 야곱에게서 불경건한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롬 11:26, 사 59:20). 이 날은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데, 그분은 이 날을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허물을 씻으실 것이고, 그 환란의 때에 알곡과 쭉정이는 분리되어, 이 심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요엘 2:29에 나타난 대로 주님은 주의 영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성령으로 보호하시지만, 자신들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들은 결국 쭉정이로 분류되어 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도 알곡이라고 말하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쭉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침례인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사역이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사람(계 12:17), 좀더 예언적으로 말하면 환란 시대에 끝까지 견디는 유대인(마 24:13)이 알곡의 범주에 들어간다.


  (3)  우리는 이 두 구절(11,12절)에서 3가지의 침례를 볼 수 있는데, 첫째, 요한의 물침례, 둘째, 성령침례, 셋째, 불침례이다. 이와 연관해서 성경에서는 7가지 침례가 나오는데, 한번 정리해 보자.


1. 모세의 침례(고전 10:2) : 이 침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지난 것과 구름기둥 아래서 행한 것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침례”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이 침례는 이스라엘 민족이 따로 부르심을 받은 민족의 표시이기도 하다(Called-out Assembly).

 

2. 요한의 침례(마 3:6) : 이 침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 즉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행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씻고 왕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행위이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손을 씻었다. 이것은 정결례인데, 죄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왕을 맞기 위해서 자기들의 죄를 씻는 정결례를 행해야 했다. 요한의 침례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요 1:31).

 

3. 십자가의 침례(마 20:22) :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각각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침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혹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을 이 침례와 연관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 침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4. 유대인의 침례(행 2:38) : 이 침례는 요한의 침례와도 연결된다. 둘 다 메시야 왕과 그 왕국을 받아들이기 위한 침례였고, 둘 다 죄를 씻기 위한 정결례로서의 침례였으며,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전 상태의 침례이다.

그러나 이 침례가 요한의 침례와 다른 것은, 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다렸던 왕이 오셨는데 그를 거부했다. 그들은 왕을 거부한 죄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왕을 거부한 그 죄를 씻으라고 설교한 것이고, 회개와 침례를 요구했다. 이것은 요한이 설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가 왕이 오시기 전에 왕을 영접할 자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면, 이 침례는 왕을 거부한 죄를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침례에는 표적이 따른다(행 2:43; 8:17; 19:6).

 

5. 이방인의 침례(행 10:48, 마 28:19) : 이 침례는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받는 침례로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고백이 필요하며, 그 공개적인 간증으로서 받는 침례이다. 이 침례는 구원을 이루거나 죄사함 받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 침례로는 구원받지 못하며, 그것은 단지 선한 양심의 고백일 뿐이다. 물은 모형이다(벧전 3:21). 이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곧 삼위일체 되신 주(Lord)의 이름으로 받는다(마 28:19, 행 10:48).

 

6. 영적 침례 또는 성령침례(고전 12:13, 엡 4:4-5, 마 3:11) : 이 침례는 세상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침례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는 이 침례를 말하면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 속하는 이 침례를 받은 성도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이 침례는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묻히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서 일어난다(고전 15:3-4). 그래서 성도가 물침례를 받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고, 또 부활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침례를 받아 능력을 행하는 것을 구분하는데,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침례는 방언을 말하는 침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소위 “능력”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성령의 외형적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 성령침례의 증거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침례는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것, 곧 구원받는 것이 성령침례이다.

 

7. 불 침례(마 3:11) : 많은 사람들은 이 불침례를 성령침례로 오해한다. 오순절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난 것은(행 2:3) 불이 아니었다. 그런 형태로 임하신 모습은 불로 침례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3:11의 불은 지옥 불을 의미한다. 그것은 심판의 불이다. 이것은 12절의 말씀과 연관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께서는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신다. 이것이 불로 받는 침례이다.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만약 성령침례를 받지 못하면 그는 불침례를 받게 된다. 이것을 모르고 불침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청중들을 지옥에 가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침례에 대해서는 말씀보존학회 간 <일곱 침례>를 참조하시오.)

 

  (4)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있는 요한에게 오셔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더라. (마 3:13)

 

14 그러나 요한이 말리며 말씀드리기를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니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니, 이에 그가 허락하더라.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이 침례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에게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알았었다. 물론 요한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 대중에게 증거하기도 했거니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침례는 물침례가 아니라 성령침례라는 것도 알았다.

 

요한은 은근히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와 침례를 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물침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는 회개하거나 자백할 만한 어떠한 죄도 없고, 정결례를 치러야 할 어떤 것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의식에 순종한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주님의 부활 후에는 물침례가 더 이상 유대인의 정결례로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롬 10:1-4). 따라서 침례를 통해서 의를 이루신다는 것은 십자가 이전 사건으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에게 침례를 통해 의를 이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는 것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개적인 간증일 뿐이고, 또 모형일 뿐이다(벧전 3:21).

 

(3장)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 보라, 하늘들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하시니라.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16절) 라는 표현을 보아, 침례는 물 속에 잠기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위대한 한 모형으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요나가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요나는 물속으로 던져져서 “잠겨졌다.” 그리고 죽었다. 그래서 침례란 죽어 묻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골 2:12, 롬 6:2-6).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분의 몸 안으로 “침례”받는다. 이것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연합을 이루며, 동시에 그분과 함께 죽고 묻히는 것이다. 또한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영적인 경험(성령침례)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에 대한 모형의 행위이다. 물을 뿌리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것들을 증거할 수 없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1:31), 주님은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셔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주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방법은 성령께서 비둘기 처럼 그 위에 앉으시는 것이었다(16절). 그리고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머무는 분이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포했다(요 1:32,33).

이때 하나님 신격의 삼위가 모두 이 자리에 함께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음성을 발하셨고, 아들께서는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께서는 아들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17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은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첫째 아들이시고, 또한 “독생자”이시다. 하나님께는 성령으로 태어난 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출생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분을 따라서 많은 아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지만, 그들 모두는 영적으로만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는 인간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 없이 어머니에게서만 태어나셨으니, 육신적으로도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말씀과 더불어 하늘이 열린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여기에서, 또 한 번은 마태복음 17:5에서, 또 한 번은 요한복음 12:28에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휴거”를 의미하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도 성경에서 세 번 나오는데, 그것은 잠언 25:7과 요한계시록 4:1과 계시록 11:12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명기 16:16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지켜야 할 세 개의 명절이 있다(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그리고 이 세 절기 또한 휴거와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요한계시록> 4:2의 주석을 보라.]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는데, 이 의(義)는 십자가의 의나 믿음의 의가 아니라 율법의 의이다. 믿음의 의는 로마서에 가서야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이 때는 아직 왕국의 상황이다. 예수께서는 아직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도 않았으며, 아직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표현되지도 않았다.

 

요한복음 1장은 마태복음 3장과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한다(요 1:30-34).

요한복음 1:29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지내신 이후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즉시” 광야로 인도되었다(막 1:12).
주님은 침례를 받으신 “그 다음날” 요한을 다시 만나러 가시지 않았고(요 1:29) 적어도 40일 후에 요한이 침례주고 있는 장소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이 침례받으시고 적어도 40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죄가 사해진다든지 하는 진리는 전혀 계시받지 못했으며,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율법의 의”와 “천국”이었을 뿐이다.

주님은 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육신을 입어야 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로 들어가셔야 했다. 율법의 일을 이루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의가 요구하는 그 요구에 맞추셔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요한계시록 19:1-6) / 10-20-2021

10월 21일 /2021(수) 오후 7:00

할렐루야(Hallelujah)의 뜻과 의미
알렐루야의 차이




(도입 이야기)

월남 전에 참여했다가 귀국하는 한국군이 승선한 배를 향하여 항구에 늘어선 수많은 월남의 아가씨들이 손을 흔들며 "웃기네!" "웃기네!" 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손을 흔들며 웃기네 웃기네 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느 병사가 월남을 떠나기 전에 서로 사귀던 아가씨가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별할 때 어떤 인사말을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웃기네!" "웃기네!" 하고 손을 흔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아가씨가 항구에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말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에 그 많은 월남 여자들이 월남을 떠나는 한국군 장병들을 향하여 "웃기네!" "웃기네!" 하고 손을 흔들며 울며 작별 인사를 하는데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참 어이없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웃기네! 라는 말은 분명히 작별 인사를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할렐루야 라는 용어도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할렐루야를 사용하는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설교자를 환영한다는 할렐루야!

설교자를 초청하고 강단에서 소개한 후 설교단에 오를 때 환영한다는 표현으로 할렐루야 라고 회중들에게 외치게 합니다.

조직신학자 이종성교수가 어느 교회 헌신 예배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설교단에 오를 때 교인들이 "할렐루야!" 하며 환호하자 고 이종성교수는 "여러분 사람을 향하여 할렐루야! 라고 환영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할렐루야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둘째는 설교자와 회중의 화합을 위한 할렐루야!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할렐루야!" 하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 하고 화답하게 합니다.
마치 이렇게 할렐루야 아멘이 크게 외칠 때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을 때 강사 목사님이 강단에 서시더니 할렐루야! 하고 회중에게 외쳤습니다.
회중들이 조용하자,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할렐루야에 화답할 줄 알아야 한다며 몇 차례 연습을 시킵니다.
어느 정도 회중들이 아멘 하고 크게 외칠 때 이제 은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교인들의 인사말 할렐루야!

교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할렐루야!" 라고 인사하면 "아멘!" 하고 화답합니다.

할렐루야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는 사람을 환영하는 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는 설교자와 청중의 분위기를 조절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할렐루야는 반드시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매우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과 바른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사용하는 것은 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시편과 요한계시록에서만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할렐루야 또한 성경속에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성경에서 할렐루야는 딱 두권에서만 쓰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과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입니다.

시편에서는 104편부터 150편에서 23번 할렐루야가 쓰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19장에서만 4번 할렐루야가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27번 할렐루야 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할렐루야의 뜻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세 단어가 합성된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할랄(halal) -  찬양하다, 밝게 비추다
둘째, - 너희
셋째, 야(Yah) - 야는 야훼의 축약형으로 여호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여호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화, 즉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히브리어 4자음 문자이다.

'요드, 헤, 와우, 헤'의 4자음으로 YHWH라고 합니다.
이 문자는 너무나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이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번역본에 따라서 "여호와" 또는 "야훼" 또는 "예호바(Jehovah)"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

할렐루야와 알렐루야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알렐루야는 라틴어

히브리어인 할렐루야를 다시 헬라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알렐루야라는 발음이 생겼다.

헬라어에는 강안 'ㅎ'발음이 없다. 그래서 보충하기 위해서 쉼표를 뒤집어 놓은 표시인 (') 문자를 써서 번역하였다.
그것이 알렐루야('allelouia)이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는 헬라어에서 사용하는 격음을 나타내는 부호가 없다.
그래서 그냥 [Alleluia] 라고 쓰게 되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지금의 알렐루야가 생겨났다.
곧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단지 나라별 종교별 전통에 따라 할렐루야라는 용어를 쓰기도, 알렐루야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9:1-6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1절에서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라고 외칠 때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죄에서 자유케 하는 구원과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셨냐면 바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 무엇이었냐면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다.

왜일까?
바로 구속의 경륜 안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신 걸까?
바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3절에서는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가로되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으로 할렐루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을 받은 표시로 음녀의 심판과 멸망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이것은 음녀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하여 지옥불에서 영원히 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4절
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만 해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만 해도,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구속해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더불어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까지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를 정말 거룩하고 존귀한 신분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존귀한 신분인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받은 자로서, 그리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거룩하고 존귀한 신분을 얻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봉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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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주 찬양 승리·감사의 표현

히브리어로 「주를 찬양하라」는 뜻.환희 승리 감사의 외침을 표시한다.
할렐루야는 이스라엘에 있어 예배 찬송의 말로 쓰인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번역되며
특히 시편 113∼118편은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린다.
예배때 감탄사로 사용되고 회중에게 찬미를 호소하기 위해 쓰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1-6에만 네 번 보이는데 대음부의 멸망에 대한 천사의 대환성에 관련되어 나온다.

고대에는 주로 사회자의 시편 기타낭독의 후렴 답구(답구)로서
혹은 축일의 기쁨을 나타내는 독창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종교적 감격을 나타내는데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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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시편 105: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06:1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찌어다 할렐루야.

시편 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

시편 113: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5: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 116:19
예루살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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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아멘, 진실로, 그러하도다)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인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에서 유래하였다.
아만은 칼형으로 '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바침하다'를 뜻하고,
니팔 형으로, '확 립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를 뜻하며,
히필형으로, '확고하다고 알 다, 믿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아멘의 의미는 '확실한, 확고한, 신실한, 진실한'이다.
부사로는 '확실 히, 진실로'를 의미하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그러할지어다, 그것 이 이루어 질지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반복 용법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예: 진실로 진실로 = 가장확실하게).

구약과 유대교에서의 아멘

1. 이 단어는 구약에서 개인 및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신자는 '아멘' 에 참예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아들이고 저주를 확증하고 송영에 찬동한다. 모 든 경우에 확실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는 인정이 암시되어 있다.

(a) 첫째로. 그 성취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일들의 수납을 확증하는 것이 다. 왕상1:36에서 브나냐는 솔로몬의 즉위식을 지시한 다윗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 한다. 이 경우 왕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도록 요청하고, 또한 이를 위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 다.

렘28:6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귀활시킬 것이라고 하는 하나냐 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외경 유딧 l3:20에서 백성들은 유딧을 축복하는 도성 의 지도자 우찌야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상의 실례에서 아멘으로 응답함으 로 응답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움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 다.

(b) 둘째로,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의 적용을 확증하는 것이다. 민5:22에서 간 음의 혐의를 받은 여인은 제사장의 저주에 관한 말에 두번 아멘으로 응답한다. 말 하자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와같은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렘11:5에서 예레미야는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한다. 신27:15-26에서 백성들은 레위 사 람이 열거하는 율법 위반자들에게 한 저주에 대하여 아멘으로 확증하였으며, 느예 l3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느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위협하에 서 아멘으로 자기네의 약속을 확증한다. 이러한 아멘은 만일 자신이 죄를 범하면 자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c) 셋째로, 송영에 응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찬동한다. 대표자나 찬양대 가 하나님을 송축하거나 그러한 기도를 할 때 백성들, 곧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하 였다(느8:6;). 시편의 권의 끝부분(4l:l3[l4]; 72:19; 89:52[53]; l06:48)에 나오는 찬미는 모두 아멘이 첨가된 송영으로 끝나는데 백성의 응답의 표시이다. 언급된 내용은 아멘을 통하여 확실하고 타당하고 구속력있는 것으로 확 증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도 (참으로)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 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

(d) 네째로, 아멘은 하나님의 명칭이나 속성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65:l6 에서 '아멘의 하나님'(한글개역: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해진다. 또는 하나님 자 신이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확증의 증인이기 때문에 아멘의 하나님으로 칭해진다 고 볼 수 있다.

2. 구약시대에 아멘이 화자(혹은 기자)가 자기 자신의 말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오직 한번 뿐인데, 세기 말엽에 메짜드 카샤비야후가 쓴 한 문 서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아멘, 내게는 잘못이 없읍니다'라고 한다.

3. 랍비들의 자료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확증하고 강조하는 대답으로만 발견될 뿐이다.
요제 차니나(R. Jose b. chanina, AD. 270년경)는 아멘에는 서약, 말의 수용, 그리고 말에 대한 확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a) 기도나 송영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b) 탄원, 축복이나 저주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그것에 속박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들은 어떤 송영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이 주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아멘을 말하는 사람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성전예배의 경우와 달리 회당 예배에서 회중은 예배 인도자가 선언 한 송영에, 그리고 아론의 세가지 축복기도(민 6:24이하)에 '아멘'으로 화답하였 다.

4. 어떤 사람이 쿰란 공동체에 가입할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데 반해, 레위인들은 베리알의 편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였다. 이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지 이러한 여러가지 송영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두번 아멘으로 화답하였다(신 27:l5-26).

신약성경에서의 아멘

신약성경에서 아멘은 27회 사용되었다.
바울서신에서는 14구절에 사용되었다. 

1. 말씀을 시작할 때에는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엄숙 하게'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오는 데, 주로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문구로 나온다(막 3:28; 눅 4:24).
이 단어의 반복용법 (아멘, 아멘)은 요한에 의해 요한복음에서만(25회) 사용되었으며,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가장 확실하게(요 l:5l; 3:3). 예수님은 아 멘으로 말씀을 시작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 드셨다.
그는 그 말씀들을 지지하시고 자신과 청증들을 그 말씀으로 구속하셨다.
이 말씀들은 그의 위엄과 권위의 표현이다.

2. 문장의 종결부분, 곧 기도나 송영의 끝부분에서 언급된 것을 강화하고 확증 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구약성서의 용법을 따라 역시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우에 아멘은 '그러하도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어다'(혹은 이러한 요청이 함축된 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l:25; 9:5; 11: 36; l6:27; 갈 1:5; 엡 3:2l; 빌 4:20; 딤전 l:l7; l; 벧전 4:ll; 계 1:6등).

3. 아멘은 회당에서 기독교 회증에게로 전해진 관례로, 성경을 읽거나 봉독한 자가 하나님께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따라서 언급된 것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삼는다(l6; 참조: 민5:22; 신27:l5이하; 느5:l3; 8:6).

고후l:2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보증되었 다고 보고 우리가 아멘으로 그것을 확증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것 으로 삼는다고 한다.

계22:20에서 교회는 '진실로'라는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여 그 약속을 확 증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의미에서 고후l:20과 같 은 의미를 가진다.

4. 요한계시록 3:l4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그를 실질적으로 아 멘의 역어인 참된 증인(시 89:37,38) 이라고 단정 지을 때 이 구절은 이사 : I6을 채택한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자기 안에서 선포되 어진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그의 응답에서 아멘으로 불리워 질 수 있다. - 아멘 -.





알파벳으로 써본 영적 지도의 특징(A - Z)



알파벳으로  영적 지도의 특징


Accept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Believe  믿는다.

Calls to support 가장 필요할 때 지원을 요청한다.

Don’t give up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Envisions 온전하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Forgive 따지지 말고 용서한다.

Give 조건없이 준다.

Help 깜짝 놀랄 방법으로 돕는다.

Invite 삶을 나누도록 초대한다.

Just likes to be with him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Keeps him honest and self-aware 정직하며 스스로를 알도록 계속 노력한다.

Love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

Makes you feel important 자존감을 갖게 한다.

Never judge 정죄하지 않고 책임을 느끼도록 돕는다.

Offers support 지원한다.

Picks you up 낙심될 때 일으켜 세운다.

Quiets the hurtsful memories 상처받은 기억과 현재의 두려움을 잠재운다.

Remembers him 특별한 날에 기억한다.

Sings the positive things 깎아 내리려 할 때 적극적인 면을 노래한다.

Tells the truth with love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

Understands him 현재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Values his thoughts and feelings 생각과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Walks beside him 그의 편에 서서 걷는다.

X-plains the things he does 그를 혼돈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Yells only when 들을 수 없을 때는 고함을 지른다.

Zaps him into excitement for 은혜 아름다움 기쁨 평화 봉사의 감격에 빠지게 하라

* 자료출처 /  W.Paul Jones  "영적 지도의 이론과 실천"에서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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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 도움이 되는 10가지 공식



하나님을, 보다 더 잘 믿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신, 하나님의 식을 잘 알고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동안의 인생살이와 목회를 하며 얻은, 신앙의 핵심 10가지를 통해 좀 더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의 성공과 영성의 충만과 영적 전쟁의 승리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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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갈망한다는 뜻이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많다. 잠잠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왕 십자가를 지려거든, 묵묵히 지고 가야 한다.

투덜거리면 훈련만 더 연장될 뿐이다.

우리는 남편(아내)과 자식과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너무 말이 많다.

이렇고 저렇고 성경에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람이 좋다고 말씀하고 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깊이가 없다.

잠잠히 혹은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2. 끝까지 신뢰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대하고, 따른다.

그러나 끝까지 신뢰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한 번, 두 번, 신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열 번, 백 번, 천 번 신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신뢰하되 90% 신뢰한다. 그러나 100% 신뢰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몇 번, 혹은 가끔씩은 신뢰한다.

그러나 항상 그리고 끝까지 신뢰하는 일은, 잘못한다.

항상, 그리고 끝까지 신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3. 작은 일에 상처받지 말고 화를 자주 내지 마라.

우리는 일상에서 상처를 받고, 화를 자주 내고 산다. 그래서 인간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큰 일로 상처 받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예를 들면..

내가 보낸 문자에 답신이 없을 경우)에, 상처를 받고.. 누가 나를 평가한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크게 상처를 받는다. 그 이유는. 내 안에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일에, 혹은 하찮은 일에 버럭 화를 내곤 한다.

그리고 금방 돌이키긴 하지만 말이다. 상처와 화를 냄은 영성에, 치명적 해가 된다.

그리고 내가 받은 상처는, 또 누군가를 찌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낸 화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된다. 그러므로 상처를 잘 받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영성 지수가 아주 낮다. 직분과 나이와 상관없이 ...

4.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빼앗고, 넘어뜨리려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 마귀는, 오히려 불신자들, 연약한 자들은 건들지 않는 속성이 있다.

믿는 자들, 목회자들, 영성의 거인들을 결사적으로 넘어지게 하고, 공격하고, 무너뜨리려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무서워하라. 마귀와 타협하라. 마귀를 무시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를 꾸짖어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귀는 전면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게릴라전에 아주 능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작은 문제와 시험꺼리와 별의 별 달콤한 모습과.. 가장한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다. 그럴 때 마귀를 강하게 꾸짖고 대적해야 한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활용하여 말이다.

수시로 다가오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보혈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병마가 찾아왔을 때 병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친구로 삼으면 안 된다.

병을 대적하고, 예수 이름으로 꾸짖고, 웬만하면 드러눕지 말고, 건강할 때보다 더 씩씩하게 활동하라.

그러면 마귀는 아이고 이 사람은 건드려 봤자 소용없네 하고,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이다.

 

5. 입술의 권세를 활용하라.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돛대도 아니고, 엔진도 아니다. 배 앞쪽에 있는, 작은 방향키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열심도 충성도, 성결도, 의도, 의식도, 형식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이다.

혀는 작은 것이로되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고,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혀로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남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훈련에 몰입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리 죽겠어도~~ 힘들다, 어렵다, 안되겠지, 틀렸어, 내가 뭘 해,

기도해도 안 되잖아, 지금은 세계적인 불황이 아닌가? 이젠 다 틀렸어, 나는 소망이 없어 이런 말을, 내 뱉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말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다가.. 열매가 되어 내가 한 말의 열매를, 내가 따 먹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하고 살면, 좋은 열매를 따고 나쁜 말을 하고 살면 그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별의 별짓을 다 해도 나쁜 열매를, 딸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좋은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소망을 주는 말, 칭찬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언제나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한다. 나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왕 같은 족속이요, 사랑받고 사랑주고, 쓰임받기 위해 태어난 존귀한, 하나님의 걸 작품이라고 말이다.

6. 심고 거둠의 법칙을 적용하라.

성경의 기본적인 영적 원리 중에 하나는, 심어야 거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심은 대로 거두고 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한다는 뜻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 또한 없다.

시편에도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했다.

디모데전서에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라 했다.

우리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심고 산다.

그러나 썩지 않을 영생을 위하여 심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 못해 쪄들어 산다.

그러면서도 나는 역시, 믿음이 좋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걸 착각하며 거들먹거린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도적이라 부른다.

오늘날 교회 안에 직분자들 속에 합법적인 도적이 너무 많다.

아무것도 주를 위하여 심지도 않고, 무조건 복을 달라 조른다.

배짱도 좋다. 혹자는, 병아리 눈물만큼 심어놓고, 바다만한 기적을 달라 한다.

기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 선교와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심고 사는가? 심는 게 남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가?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심은 것만이 내 것이다.

시간을 심어라. 희생을 심어라. 눈물을 심어라. 물질로 심어라. 몸으로 심어라.

달란트로 심어라. 심음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많게 남겨라.

그리고 환란 때에, 주를 찾고 부르라.

그리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 주실 것이다.

​ 

7. 고난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라.

주 밖에서의 고난은, 불행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고난은 유익이며,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확성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일단 절망하고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난은 고통스런 일이며, 그 고난을 무게를, 스스로가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잇기 때문이며 고난을 통해 철이 들고, 성숙해 지기 때문이다.


마귀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성령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마귀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주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세우려 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생각나고, 기도가 생각나고, 말씀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며, 당신을 통해 무언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 중에 있을 때 절망이 생각나고, 원망이 떠오르고, 한숨부터 나온다면

어쩌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는, 고난이 없었으면 하지만 지나고 나면 고난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여, 능히 감당케 해 주시기도 하신다. 인생 중에, 고난이 없는 자는 없다.

다만 고난 중에, 하나님 없이 견디는 자가 있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하여 넉넉히 감당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도 지치게 하고, 절망도 친구도 삼는다.

그렇다고 고행주의나 고난을 즐기는 것은, 복음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난은 필연적이고 충분한, 은혜의 영향권이며, 그분의 주권아래 있는 피할 수 없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났을 때 이상히 여기거나, 화들짝 놀라 소란피울 일은 아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 아~ 또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무슨 축복과 유익을 주시려 하는가? 라고, 생각하면 되고 쓰디쓴 약을, 분석하지 않고 꿀꺽 삼키듯이 고난도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보혈 한 컵으로 꿀꺽 삼키라. 그러면 고난만이 주는 효험이, 나타날 것이다.

​ 

8. 실수나 죄책에 얽매이지 마라.

 

9. 자꾸만 비우는 훈련을 하라.

비움은 채움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채움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며 사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비움으로 채움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비우지 않고 채우기만 하면, 언젠가는 막히고 썩고 만다.

그러나 늘 비우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 인생을, 열어주실 뿐만 아니라.. 열두 광주리 가득히 거두는, 복을 더 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아이의 비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비움으로 절정에 이른다.

만일에 어린아이가 자기 것을 비우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자신들의 바구니를 비우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우리는 풍성한 채움을 원하면서도 실제의 삶속에서는 비우지 않고 채우기만 하는데, 집착하고 산다.

사렙다 과부가 문제 해결을 얻고, 기적을 체험하고, 복을 받은 것도 밀가루 반죽 그릇과, 기름병을 비울 때 일어났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수록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려 하라.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장 힘들고 곤고할 때, 묵상을 하고 말씀을 전한다.

내가 바닥일 때 내가 탈진 중일 때, 회복하고 소생하는 비법이다.

아무것도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한 방울 한 방울,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비우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의 심령은, 또 다시 충만하게 채워져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가장 힘들 때, 비우라. 가장 몸이 아플 때, 충성하라.

내 먹고 죽을 것도 없을 지경일 때.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라.

영적으로 곤고하고 삶이 고단할 때, 오히려 그때 많이 비우라.

나보다 더 어려운 자들을 찾아가 돌아보며, 허리를 굽혀 섬기라.

그 현장이, 갈릴리가 될 것이다. 채움의 샘이 솟아날 것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비우지 않고, 채우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늘 더부룩한 것이다.

잘 먹는 자가 건강한 자가 아니라, 잘 비우는 자가, 더 건강하다는

평범한 상식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기억하라.

우리는 비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지,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주님은 비우는 자에게, 열두 광주리 가득히 채우시는 좋으신 분이다.

 

10. 어떻게든 조용한 시간(Q.T)을 자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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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6가지 특징

 

미국 온라인 목회 상담 사이트 '파트너스인미니스트리'(Partners in ministry)에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6가지 특징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1. 영혼을 우선시하지 않고, 숫자를 우선시하는 교회
교회가 비즈니스처럼 운영되면 사람 대신 숫자에 중점을 두게 된다. 지난 주 예배 참석자는 몇 명이었나? 이번 가을에는 몇 개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인가? 예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십일조와 헌금을 거두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 리더십이 성공의 기준으로 이러한 숫자들에 집착할 때 그것은 교회가 세속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불건전한 징조이기도 하다. 건강한 교회의 중심적인 목표는 복음을 통해 강한 영적 크리스천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2. 교인들이 하나님보다 목사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교회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목사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목사님에 대한 교인들의 사랑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그러나 교회 권위자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을 위해 남겨둬야 하는 경배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를 전해야지, 교인들이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도록 유도해선 안 된다.

3.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교인만 우호적으로 대하는 교회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교인들에게만 우호적으로 대하면 교회 내에서 권위적인 환경이 조성돼 교인들의 영적 성장이 저해될 수 있다. 의견 불일치가 있다고 해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반항한다는 뜻은 아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이 품는 의문과 던지는 질문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공격으로만 해석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사람 뿐 아니라 다른 의견을 가진 교인들까지 사랑으로 품고 우호적으로 대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

4. 파벌이나 배타적인 집단이 있는 교회
건강하지 못한 교회에는 늘 파벌이 있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놓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배타적인 집단이 있을 때 교회 공동체의 평화는 깨진다. 또, 교회에 힘 센 파벌이 생기면 다툼과 험담이 끊이지 않으며, 화합과 통합 대신 분열이 생길 뿐이다.

5. 기도를 우선시하지 않는 교회
기도를 예배가 끝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일 쯤으로 여기는 교회는 영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감이다. 기도를 등한시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시를 알 수도 없으며, 순종할 수도 없다.

6. 제자를 양성하지 않는 교회 

주님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라 했다. 모든 교회가 선교사를 배출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교회는 적어도 교인들이 봉사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만약 교회 내에서 섬기는 사람 한 명을 구하려고 애 먹는 교회가 있다면 교인들이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이끄심을 따르고 있지 않다. 섬기는 사람이 없어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해 봉사하도록 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구원의 방주(베드로전서 3:20)


구원의 방주(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노아시대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방주다.
방주(테바)에 들어간 자는 살고, 방주를 거부한 자는 다 죽었다.
“이 방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교회”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올바른 답을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답했을 때 그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함께 나누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교회라는 답이 틀린 답이 될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그렇게 목숨이 달린 중요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방주가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교회라고 대답했을때 그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교회(individual church)주의자들은 매 주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생각하며 답했을 것이고, 개인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각자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로마 카톨릭의 신도들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당들의 전체 모임 자체라는 의미로 교회라 답했을 것이고,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방주로 이끌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방주의 의미와 동일한 교회의 참된 의미는 분명히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나, 교파주의, 혹은 교회가 갖는 지엽적인 제한성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갖는 많은 의미 가운데 한 두 가지의 지엽적 의미로 방주의 의미를 국한시킨다면,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개념은 정확하게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교회 의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방주 밖으로 끌어내어 물에 처 넣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방주”는 “교회”라는 답은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교파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지상교회시대에서는 오해되기가 쉬운 표현이다. 오히려 방주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를 내가 이렇게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참다운 의미, 사명을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교회이다”(The biggest obstacle for evangelism today is church). 부인하고도 싶고, 받아 들이고 싶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현 상황이 그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오기를 거부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다. 이런 씁쓸한 유머가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한인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중 두 노인이 싸우게 되었다. 아무리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자 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고…”


교회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부흥이 아니다 – 물론 교회부흥은 원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부흥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개교회 부흥이 교회의 참된 목표인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개교회가 약해지고, 심지어 “없어지게 되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소금과 빛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소금은 그저 소금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음식 속에서 자신이 없어짐으로 그 음식을 싱싱하게 유지시킬 때 “소금다운” 것이다. 빛도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써 어둠을 밝힐 때 빛답다고 할 수 있다. 환한 대낮의 양초불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불은 아무리 작은 양초라도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내적 성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건재하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아픔과 어두움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성장이라면 그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감당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본질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을 매고, 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6:19). 즉 천국의 상황을 가장 잘 소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소개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혹은 성도)가 잘못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태 23:13).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사명을 주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맨 위에 머리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몸 역할로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의 발 아래 만물, 즉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코 세상의 정치가, 경제가, 학자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정치가들이 운영하는 세상에 왜 이렇게 죄가 만연한가?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이 진정한 소망과 가치관을 주는가? 왜 세상은 이토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다원주의로 흘러 가는가? 경제가들이 섬기는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라고.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것 같아서 신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 개개인(개인이 성전이므로-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마18:20), 개교회, 교단, 교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교회 등이 공동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일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 교회가 된다.
(The church is only the church when it is for others)


마태복음 16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그 날에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는 날이다. 그 평가는 결코 세상적 기준으로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학력, 재력, 지위 등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영역에서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느냐 안 했느냐에 하나님은 평가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다.


그 때 받을 상급을 신약성경에서는 면류관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약에 모두 몇 개의 면류관이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 면류관은 어떤 자들에게 주는 것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면류관이 나온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2-4), 의의 면류관(딤후4:8), 그리고 가시 면류관(요19:2). 이 면류관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면류관은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전도”와 “양육”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 목회자와 개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 “Prayer Summit”이라고 한다.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에도 이 Prayer Summit 모임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며, 일 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기도만 하는(?) 이상한 수련회를 한다. 이 때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올해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물론 서로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회자가 이 Prayer Summit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coordinate한 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사역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연합(unity)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뛰신 분이시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한 분이셨기에 누구나 다 그 분의 마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 분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그 분의 머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중보기도, 감사기도의 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누구에게나 감사한 일, 감격적인 일이다. 반면 내 나라 건설은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회가 그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에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진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로의 결정마저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맡긴다면 그는 참다운 의미의 방주를 이룩한 것이다. 학사에서 석사, 석사에서 박사과정에로의 진급을 학문과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속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상급학교로 진급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 속에는 내 인생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평강과 기쁨 속에 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학비 때문에 진로결정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어느 정도 고난에 대한 인내가 따른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성도가 잘 할 때 그 성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성도 간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이웃 교회를 위하여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섬기려는 노력을 할 때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건설 목표는 단지 지역교회, 한인교회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는 4-5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 한인교회에는 미국교회는 없는 커다란 영적 장점이 있다. 곧, 기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열정 등은 여느 미국교회가 따라오기 힘든 큰 장점이 된다. 물론 미국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도 많다. 그들은 좀 더 오랜 역사 속에서 정립된 성숙함, 합리성, 경험 등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인교회들이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인교회들은 보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안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와 흑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간에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아시안 교회가 들어가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아시안 교인들은 백인들과도 관계를 가질 수 있고, 흑인들과도 동감의 면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다.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날로 다양하게 되어가는 인종들을 어떻게 융화로 이끌어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숨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United States”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는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한국 교회가 수난을 당하더니, 아직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는 <다빈치 코드> 몸살을 앓고 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혈통 비밀을 최후의 만찬에 남겨두었다는데서 명명된 '다빈치의 암호'(코드). 그 허망한 암호는 책의 뼈대를 이루는 몇 가지 토대에 대한 허구와 왜곡과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술에 취했던 노아가 자기 손자 가나안을 저주하는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자기 방에 벌거벗고 누웠다.
아버지 천막에 우연히 혹은 용무가 있어 들렀던 둘째 아들(함)이 그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은 채로 덮어주었다.
술이 깬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손자(가나안)를 저주했던 것이다.
이 구절은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한 잘못 때문에 손자가 저주를 받는다?
가나안이 할아버지의 만취(滿醉)와 관련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날벼락 맞은 가나안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창세기가 기록되었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오래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정당화하고자 언급하는 서술 기법의 하나 혹은 예언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나름으로의 단점이 있다.

즉 성경에 따르면, 가나안(자손)을 종으로 삼으리라던 셈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람과 앗수르 사람들도 포함되며, 함 족속에는 가나안 사람들(시돈, 헷, 예부스, 아모르, 기즈가스, 히위, 아르크, 신, 아르바드, 스마르, 하마르 족속)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도 포함되며, 야벳 족속에는 소아시아와 유럽인이 포함된다.

다시 말하자면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족속이 연루된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후예들이 셈과 야벳의 후손들의 비천한 종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이 후대 이스라엘인들의 편에서 가나안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야벳 족속의 후예들(즉 백인)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화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문맥상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자신이 함과 야벳에게 비천한 종노릇을 하게 하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술 취한 노아와 저주받은 가나안에게 돌아오게 된다.
노아의 저주가 가나안에게만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저주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노아의 '누드 폭로'에 가나안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한다.
그것도 가장 큰 기여(?)를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가나안만이 할아버지 노아에게 저주를 받았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가나안에 대한 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은 범죄까지 들추어내어 가나안에게 내려진 중징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 순종한 의인, 노아가…

결국 우리의 관심은 다시 술 취한 노아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것이 큰 죄악이었던가?
아니면 벌거벗음을 형제들에게 알린 것이 큰 죄악이었던가?

구약의 다른 구절에서는 (상징적으로) 다른 사람을 술 취하게 하여 그의 벌거벗음을 엿보는 행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합 2:15).

또 다른 구절에서 계모와 성관계를 맺어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18장).

심지어 롯의 딸들은 그와 성관계를 맺는데 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노아의 술 취함과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본 일 사이에 성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본문에 대한 연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노아 코드를 원점에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노아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노아는 의인이며 당시 사람들 중에서 흠 없는 자였으며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6:9).

노아는 두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는 당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인이었으며, 하나님 명령에 따라 언약을 맺고 방주를 지었다.
그는 동물을 모아 방주에 올라감으로써 하나님 명령을 완수했다.

그리고 의인으로 묘사되는 노아 이야기가 마지막에 술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가 손자 가나안을 저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종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노아의 술 취함과 저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뜻을 준행하고 준수한 의인이라고 불렸는데, 설마 노아가 술이 덜 깨서 손자를 저주했겠는가.
계속 이런 관점을 유지한다면 이 사건은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노아 이야기 패턴은 구약에서 희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노아 이야기와 사사기 혹은 열왕기에서의 사사들이나 왕들에 대한 평가를 비교해보면 노아의 술 취함과 저주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하나님의 소명과 성령의 인도 속에서도 계속 의심하고 하나님과 흥정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개인적인 정욕에 사용했던 사사들이 한둘이었던가.

사울의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계속 제사하게 했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의롭다고 불렸던 히스기야와 요시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노아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아 코드에 음모론은 없다

이제 노아의 저주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지만, 노아와 그의 아들을 축복하셨다(9:1).
그러나 말년에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었던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뒤,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가나안을 저주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세 아들을 축복하셨지만, 노아는 함의 아들을 저주함으로써 자기의 벌거벗음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던 함을 저주한 것은 아닌가?

이것이 노아의 저주 사건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다.

만약 노아가 함의 아들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저주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버지(노아)의 벌거벗음을 드러나게 한데 대한 보복이었던가? 아니면 노아가 술이 덜 깨서 대상을 잘못 골랐던가?
물론 이것은 구원론적 의미는 아니다.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린 일은 의로운 일이지만, 죄 없는 손자를 저주한 행위는 의롭지 못한 행위다.

이와 같이 노아의 코드에 음모론은 없다.
다만 '의인' 노아의 잘못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노아와 같은가, 아니면 셈과 야벳과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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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죄는 함이 지었는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창세기 9:22-25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여기서 성도들이 자주 제기하는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함이 행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무서운 저주를 할 수가 있는가?
왜 함이 아닌 함의 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매우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 주었을 뿐인데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한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들킨 사실로 인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고 말했지만 24에서 노아는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함이 눈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나갔다면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는 노아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노아는 술에서 깨고 나서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간 일은 자기에게(unto him)에게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함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몸에 성추행 또는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면 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18:6-7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녀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는 근친 상간, 동성연애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노아의 증언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7:22에서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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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노아의 하체를 본 일이 왜 잘못된 일일까요?

그 대답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된 후, 자신들이 벗고 있는 점이나, 서로의 알몸을 보는 일은 악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벗었음을 깨달았다는 점을 통해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벗은 몸을 드러내는 일이나, 벗은 몸을 보는 일은 악, 또는 나쁜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셈과 야벳의 행동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뒤돌아 선 채로 아버지에게 옷을 덮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악의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미 아버지의 벗은 몸, 하체를 본 함은 악을 행하였고, 그것은 함의 죄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저주

술에서 깬 노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됩니다.
함이 자신의 하체를 본 일과 나머지 두 아들이 자신의 하체를 보지 않고 옷을 덮어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노아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둘째 아들을 향해 이런 선포를 합니다.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냥 ‘종이 되라’도 아니고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실 셈과 야벳에 대한 축복은 축복이라기보다 함에 대한 저주의 연장선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주 받는 사람의 이름이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함의 장자도 아닌 넷째 아들인 가나안입니다.
게다가 아들을 향한 이런 저주 역시도 우리의 정서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성경이 가진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간다고 했을 때, 아주 초반부인 창세기 9장에서 이 저주의 선포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의 생각을 품게 됩니다.

‘가나안은 저주 받았다.’ 그 인식을 가지고 이후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의도입니다.

단순한 개인으로의 함과 가나안이 아니라 우리가 뒤이어 읽어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민족으로의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즉 노아의 저주는 함과 가나안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함의 자손이 이루게 될 민족, 특히 가나안의 민족들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그 저주의 연장선에서 가나안은 셈과 야벳을 섬겨야 한다는,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확정을 노아가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 성경의 의도가 있었기에 이 사건 뒤, 창세기 10장에서는 세 아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저주받은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를 머릿속에 심어 두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야벳의 족보이고 그 다음은 ‘가장 천한 종’이 되어야 할 함의 족보이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 ‘가장 천한 종’ 함의 족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은 이 중 두 아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번역해줍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이고 ‘붓’은 ‘리비아’입니다.

‘붓’의 경우에는 그 자손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나머지 세 형제의 자손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구스’의 자손은 이름보다는 그들이 정착한 지역을 보시면 어떤 민족인지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들의 정착지는 바벨과 앗수르입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 자체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그 자손 중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가나안’의 자손들은 우리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를 통해 끊임없이 보게 될 이름들이기에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족보가 재미있는 이유는, 함의 자손들은 훗날 이스라엘 주변에 거대 제국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가장 천한 종’이 되었어야 할 함의 자손들은 오히려 거대 제국을 이루어냅니다.
반면에 축복을 받았던 셈은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의 자손들은 멀리 멀리 서아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가서야 정착하게 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실제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축복을 받은 자손들은 그저 그런 민족을 이루었고,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은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날린 제국들, 거대 제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듯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훗날 이스라엘은 이집트 포로기를 거쳤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혹시나 이 내용에 따른 지도를 보시고 싶어서 인터넷이나 성서지도를 찾아보신다면, 그 지도의 내용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성서지도는 대게 서양에서 나온 지도들을 기반으로 번역만 해놓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이야기가 너무 심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셈은 근동의 조상, 야벳은 서아시아의 조상, 함은 아프리카의 조상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았고, 지도에도 그 의도가 여실하게 반영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서지도를 찾아보시려면 지도의 지명과 성경에 나타난 이름들을 직접 대조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축복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팩트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그 역사를 통하여 현재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창세기가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를 여기에서 논할 이유는 없겠지만, 학자들은 창세기가 바벨론 포로기에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보수 교회가 이야기하듯이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도, 사건이 발생한 순간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의 문제는 분명 축복과 저주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난 축복과 저주는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건 분명히 동일한 한 가지의 고백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거대한 제국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자신들은 비록 초라하고 처량한 신세일지언정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못사는 사람들의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궁색한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고백이 초라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강대국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거대 제국을 이룬 나라들처럼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제국을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하고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잘 살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고백은 결코 그 길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 처절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악함 위에 제국을 세우느니, 때로는 힘들지 몰라도, 선함 속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돈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은 맘모니즘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숭배하는 풍조라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의 풍요를 간구합니다. 부를 쌓아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목회자는 부를 바라는 성도님을 향해서 노아가 함에게 했던 데로 저주를 해야 옳습니다. 저주를 받았던 함의 자손들이 셈이나 야벳의 자손들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가 부를 바란다면 당연히 저주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고 정말로 저주를 바라는 성도님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저주의 결과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저주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곳에 세상적인 부와 권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비록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쓰신다고 선포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뿐이지,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함께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지만,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요나에서 볼 수 있듯이, 앗수르의 니느웨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닌 평안, 샬롬입니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부와 권력이 모든 것인 세상입니다.
마음의 평안보다 세상에서의 즐거움, 부와 권력이 더 필요하시다면 그 길로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 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악을 멀리하고 선한 길에 서시기 바랍니다.
함과 같이 부지중에라도 악한 일을 행하지 마시고, 삶의 어떤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되실 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작은 아들은 왜 탕자인가?

첫째,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
-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죄악이었다.
마치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산은 땅(기업)입니다.
땅을 현금화하려면 급하게 팔아야 합니다.
급매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먼 나라로 떠났다!
- 요즈음은 아버지를 떠나 외국으로 이민을 가는 자녀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는 출생지가 곧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를 떠난다는 것은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고향 공동체
친족 공동체 

셋째, 재산을 탕진 후 돼지를 친다!
- 돼지는 매우 불결한 동물이었다.
한국인에게는 돼지 꿈은 복을 상징한다.

탈무드에는 쥐엄멸매를 먹어야 회개가 가능하다.

현대에서는 쥐엄열매가 부자들이 먹는 건강 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한국에서 꽁보리밥이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의 먹거리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건강식으로 즐겨 찾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사용한 가르침입니다.
이 비유에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모두 갖춘 종합적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호로자식

대한민국의 욕.
보통 자식, 새끼 앞에 붙여 사용한다.
후레자식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호로가 오랑캐라는 뜻이니, 호로자식 / 새끼는 오랑캐의 자식 / 새끼라는 뜻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는 화냥녀처럼 전형적인 민간어원설이다.

호로는 '~홀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부모없는 자식이라는 뜻.
일종의 패드립이다.

* 패드립패륜애드립의 합친 신조어로 부모님을 욕하는 방식의 욕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욕을 잘 쓰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대체로 이 욕의 뜻을 알고 쓰신다.
또한 호로자식이나 호로새끼는 조선 사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국어 어휘 역사>

‘호래자식’은 옛 문헌에서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19세기 말의 <한불자전>(1880)에 보이는 ‘홀에식’이 그나마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호래자식’ 및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후레자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호로자식(胡虜--)’ 설이 있어 왔다. 

흉노족을 비롯한 몽고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오랑캐들의 등쌀에 시달려 밉던 차에 ‘호래자식, 후레자식’의 ‘호래, 후레’가 오랑캐를 뜻하는 ‘호로(胡虜)’와 음이 비슷하자 상호 결부시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민간어원이다.

‘호래’는 ‘홀의’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한불자전>(1880)이나 <한영자전>(1897)에 보이는 ‘홀에식’, 그리고 <큰사전>(1957)에 보이는 ‘홀의아들’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홀에’나 ‘홀의’의 ‘홀’은 ‘홀어미, 홀아비’에 보이는 ‘홀’과 같이 ‘짝이 없는 하나’를 뜻하고, ‘에’와 ‘의’는 속격 조사이다. 따라서 ‘홀에식’은 ‘홀것의 자식’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즉, ‘홀어미 혼자서 키운 자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애비 없는 호래자식”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호래자식’이 ‘여자 혼자서 키운 자식’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호래자식’과 뜻이 유사한 ‘후레자식’이 있는데, 이는 ‘호래자식’과 모음의 차이를 가지는 것으로 역시 동일한 기원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한국에서는 한마을에 꼭 한 사람의 호로자식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마을의 온갖 추태는 다 부리고 무법천지에다가 땡강, 술먹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폭력사고는 다 저지르고 범죄는 혼자 다 저지르고
그럼 호로자식는 어떤 유래에서 나왔나?
임진왜란 후
멍청한 이씨조선은 한 번의 국난을 당하면서도
실리를 찾지를 못하고 또 한번의 국치를 당하는데
바로 만주족의 침입을 자초하면서
침입을 바로 당하면서 얼마 후 서울, 당시의 한양이 점령을 당했다.
만주족들은 애, 늙은이 한 것없이 여자란 여자들은 모두 겁탈을 했고,그 중에서 반반한 여자들은 모두 만주로 데려갔다.
나주에 그런 여자들을 데리고 왔지만 그때 돌아 온 여자들이 환양녀,즉 환양년
그리고 청군,즉 후금군인에게 겁탈을 당한 여자에게서 나은 자식들은 호로자식,즉 호로자식이다.
보통 한국에서 호로자식라면 아버지없는 편모슬하에서
오냐,오냐하면서 길러 세상무서운 줄 모르고 오직 편애만
하면서 길러져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공공의 이익이라고 없고 오직 자기자신만 알고 매를 들고 꾸짖지 않고 자란 아이들을 말한다.
그럼,외노센터에 물어보자,
불법체류외국인에게도 컴퓨터교육도 시키고 그러는데
한국인이 주인이 이 나라에 와 한국과 같이 사는 방법,
즉 법과 관습에 대하여 교육을 시킨 적이 있는가?
한번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이들이 과연 한국법이 어떤 것인지 알겠는가?
당신은 이들을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으로만 생각하고 편애만 해왔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과연 이들을 꾸짖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했는가?
한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즉 한국인에게 피해만 주는 호로자식을 스스로 양산하고 있는 단체로 변질되 있다고 생각지 않는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아라.
올해에만 외국인범죄로 죽은 한국사람만 거의 100명에 이른다.

스스로 호로자식을 양산하고 있지를 않았는지.






탕자의 비유 (Parable of the Prodigal Son)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소개됩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 (15:3-7)

둘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15:8-10)

드라크마(drachma)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화폐 한 데나리온(denarius)과 비슷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실제로는 0.88의 가치
1 drachma (Biblical Greek) = 0.8831168831169 denarius (Biblical Roman)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 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는 노동자 열흘의 품삯의 값어치 입니다.


셋째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15:11-32)

이 세 가지 비유들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 같은 주제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비유들을 이용해서 이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자들”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하신 뜻을 섬기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기억해 봅니다(에베소서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만일 내 혈액형이 특수한 혈액형이 되어 응급 환자가 발생할 때 아무나 수혈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희귀한 혈액입니다.
어느 날 병원 응급실에서 방송국에 연락하여 특수한 혈액을 찾습니다.
지금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합니다.
같은 혈액형의 사람이 응급실에 와서 수혈을 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듣던 어느 경건한 부부가 병원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환자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담당 의사가 "예, 유산 상속으로 서로 다투다 가족들이 칼부림하여 심각한 상처로 인하여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환자입니다."
담당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니, 이런 사람에게 내 소중한 피를 줄 수 없지..." 하며 응급실을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 위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하여 용서받을 자격이 있느냐?"
그 순간 자기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환자에게 수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9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9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오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장 1-2절에 따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하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며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이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은 상종해서는 안 될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이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들을 얼마나 온유하게 대하셨는지는 1절 말씀이 잘 드러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합니다.
마치 양들이 그들의 목자를 둘러싸고 따라다니듯이, 온 동네의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에워싸고 앉아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즐거워하고 또 주님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립니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아버지의 미소”가 감도는 참으로 천국과도 같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섬기라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대신 그들을 “더러운 죄인”으로 정죄하며 배척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로막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곧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둘째 아들은 그것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가져온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끼니조차 채울 수 없는 매우 궁핍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두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아버지가 이 둘째 아들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은 일부 아버지의 탓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아들이 먼 나라에서 가서 거기서 잘 살고 성공을 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물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그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유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와는 많이 다른 매우 독특한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우선 “자유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며 “완전한 사랑”을 주십니다.
동시에 이 관계는 “불가분의 연합의 관계”입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생존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으며, 또 아버지는 그 아들을 도로 찾을 때까지는 결코 쉴 수도 없고 평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연합”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 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이 자유로 인해 아버지는 아들을 붙잡아둘 수 없으며, 이 연합으로 인해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떠나서 성공할 수도 또 행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 사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두 질문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그 자녀와 완전히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늘 “극진한 사랑”으로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시고,

1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32)에서도,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싫어하는 맏아들을 붙들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회개”야 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누가복음 5:32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뇌우치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개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물을 허비한 둘째 아들은 “아 내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다.
앞으로는 돈도 절약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무엇인가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회개이고 또 나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보면 회개가 아닙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더욱 멀어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과 자존심과 미련을 모두 뒤로 한 채 “즉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사단의 거짓(falsehood)에 속아 일어난 것이라면,
“회개”는 예수님의 진리(truth)를 통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진리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하시며 풍요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영광스러우신가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가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하고 두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서 참된 회개 곧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된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탄식합니다.

(17절).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제 정신이 돌아와서”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들은 이 부분을 “When he came to his sense” 또는 “When he came to himself”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리”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떠나 비참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탄식에는 “아버지의 풍요로움”과 “자신의 가난함”이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사단 마귀의 거짓에서 깨어나 밝은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6절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둘째 아들은 곧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이전에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고 당당하게 요구했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지만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전혀 그러실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직 멀리 보이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고는 그를 측은이 여기며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일러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더 나아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옆에 앉히고 어루만지며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의 이 말은 그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드러냅니다.
아버지에게는 사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에게는 또 다른 “착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이 “잃어버린 아들”에게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첫째 비유 곧 “잃은 양의 비유”에서 더욱 절실하게 드러납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는 나머지 99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착한” 양들보다도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한 마리의 “뿔난” 양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뿔난 양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나요?” 하며 아버지에게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 보다는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버지는 이것을 “마땅하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명을 어김이 없이 아버지를 섬겨왔지만, 어떤 점에서 보면 그도 사실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했으며, 또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은혜 밖에 거하면서, 노예처럼 두려움에 떨며 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내 영혼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죄인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작은 목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며 또 그 마음에 합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 아버지가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들어준다.
그러나, 그 아들은 방탕하고 재산을 낭비하여 결국 궁핍해진다.
더이상 버티지 못한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서 자기를 종으로서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아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지않고 크게 환영 축제를 마련한 것이다.
이에 질투심을 느낀 형이 환영 축제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이 네것이며 둘째 아들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왔으니 축제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구속에 관련된 비유로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주화의 비유와 함께 세번째 마지막 비유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두 자녀를 향한 사랑과 두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의 관계에서 미묘한 관계를 볼 수 있다.

보통 너와 나의 쌍방 관계에서는 불화나 불통이 있더라도 관계 회복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세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갖고 살아가면 미묘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본심에서 일어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과 교회에서도 자주 일어나게 됨을 보게 된다.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고 조화된 관계로 이루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집을 떠난 외적 탕자 둘째 아들 (11-21절)

1. 자부심(Pride)

둘째 아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여 아버지에게 종용하여 자기의 분깃을 받아 냈고 그 후 며칠 안 되어 아비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했고 궁핍하게 되었다.(14절)

2. 진실함(True)

그는 궁핍하여 돼지를 치는 일을 하는 곳에 취직하여 일하였다.
그럼에도 극심한 궁핍 가운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어서 더욱 굶주림에 허덕이며 지내야 했다(16절).
그는 처참한 굶주림에서 자기가 치고 있던 돼지의 음식인 쥐엄 열매를 슬쩍 먹어 자기 배를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주인의 허락 없었기에 그것을 먹지 않았다.
이를 볼 때 참으로 진실한 자임을 알 수 있다.

3. 결단력(Decision)

그는 처참한 상황에서 스스로 돌이켰다(17절). 그리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9절)고 결단하였다. 스스로 돌이킴의 결단은 좌절과 낙담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것이다.

4. 실천력(Practical Ability)


그는 결단한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절) 진정한 회개는 결단을 가져오고 결단은 행동에 옮겨진다.

5. 겸손함(Humility)


그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서 “내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21절)라고 말했다. 아비 집을 떠날 때는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아비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온유와 겸손한 자가 되어 돌아왔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을 온유와 겸손한 자로 변화시킨다.

집에 있는 내적 탕자 첫째 아들(25-30절)

1. 게으름(Laziness)

첫째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25절).
어디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그가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면 빨리 집에 들어가 몸을 씻고 쉬려고 했을 것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짐을 알고 곧 장 들어가서 자기가 직접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나 확인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종까지 불러서 그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의 행동을 볼 때 그가 아비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으며 밭에서도 어떻게 무엇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있었다가 중요함이 아니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2 질투심(Jealousy)

그는 자기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찐 소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노하였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이 돌아왔음에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는 아비 집에서 계속 살고 있었지만 전혀 아버지나 자기 동생을 생각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자기중심 위주의 삶만 살아온 것이다.

3. 비방함(Slander)

그는 동생에 대한 악평을 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원문엔 당신의 아들)”(30절)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 동생”이라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의 관계를 미묘한 삼각관계로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우린 Trinity(삼위일체)의 관계를 더욱 깨달아 알고 실천해 가는 것이 참 성도일 것이다.

4. 자만심(Conceit)

그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절)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만과 교만과 자기 의에 취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5. 불평함(Complaining)

그는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데 왜 자기와 자기 친구들을 위해 염소새끼도 주지 않았느냐고 아버지께 불평분만을 토로한다. 그는 중요한 부자지간과 형제 지간의 관계보다 자기 친구 지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왜 아버지가 자기 친구를 위해 염소새끼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어야 하는가? 자기 동생이 떠날 때 자기도 아버지로부터 분깃을 이미 받았다. 이미 자기 소유된 것에서 자기가 자기 친구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아버지도 함께 불러서 대접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는 아비 집에 살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나 않는가?

3. 두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눅15:20-24, 31-32)

1) 집을 떠난 탕자 아들을 향한 아버지 사랑 - 둘째가 자기 분깃을 달라고 졸라댈 때 아버지는 “아직은 아닌데” 하면서도 “그래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하면서 분깃을 내 주었다. 집을 나간 둘째의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그가 돌아올 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Compassion)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 라는 말씀에서. 집을 나간 탕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신 얻었다고 즐거워했다.

2) 집에 있던 탕자를 향한 아버지 사랑 - 둘째가 돌아와 기뻐하며 잔치석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엔 첫째가 어디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잔치석을 떠나 밖에 나가 첫째를 만나고 그에게 집에 들어가자고 권했다. 집을 나갔던 둘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나 집 안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첫째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똑 같았다. 그 때 첫째가 자기의 동생에 대한 험담을 털어놓고 또 자기에 대한 불평불만을 발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고 말했다.

3) 미묘한 삼각관계 - 인간관계에서 너와 나만의 쌍방관계에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기에 불화가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곧 화해가 잘 이루어진다. 그런데 삼각관계는 미묘한 관계이며 이의 해결은 그렇게 쉽지 않다. 이 미묘한 관계의 원인 첫째는 비교의식이다. 이 미묘한 관계는 아버지가 형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동생의 생각에서 그는 아버지께 내 분깃을 달라고 졸라서 받아 낸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다시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은 아버지가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또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아버지의 모든 재산 자기 것이 되리라는 자기에게 옹졸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묘한 삼각관계의 해결책?

두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알았다면 삼각관계의 불화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이 있다.

1. 잃은 양 한 마리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
2. 잃은 한 드라크마와 잃지 않는 아홉 드라크마
3. 집을 나간 아들과 집에 있는 아들

비유의 핵심은 잃은 것도 잃지 않은 것과 마찬 가지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는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 개인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말고 항상 위를 바라보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옆의 이웃 형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두 아들이 사랑의 아버지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으며 이 가정의 미묘한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이 비유에서 미묘한 관계는 아담과 두 아들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사람들의 각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이 미표한 관계가 일어나고 있다.

즉 인간 역사와 함께 비교의식과 세상 욕심로 인해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 즉 삼위일체의 신비한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노라면 우리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신비한 사랑의 관계로 승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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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요한복음 8:1-11)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이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멕시코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었다.
노인 앞에는 양파 스무 줄이 걸려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맙니까?”
“10센트라오.” 포타라모는 말했다.
“두 줄에는 얼맙니까?”
“20센트라오.”
“세 줄에는요”
“30센트라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되오.” 인디언이 말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스무 줄 전부를 팔 수 없소.” 인디언이 대답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다.

그러자 인디언이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지나가던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돈벌이보다 더불어 사는 이들을 중시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인디언 포타라모의 삶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삶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켄 가이어는 우리에게 성스러움이란 다분히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하며 일상의 순간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보려면 걸음을 늦추고 더욱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살아봅시다!

그러면서 인디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준다.

“인디언의 삶에는 꼭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기도의 의무, 매일 신을 찾아 뵙는 의무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일의 예배는 날마다 먹는 양식보다 더 필수적인 것이다.


인디언은 동틀 무렵 일어나 물가로 내려간다.
그리고 차고 깨끗한 물을 얼굴에 한 움큼 끼얹거나 아예 전신을 물에 담근다.
목욕 후에는 밝아 오는 여명, 지평선 위로 춤추는 태양을 향해 똑바로 서서 침묵의 기도를 드린다.
이 예배는 동료 간에도 서로 먼저 가거나 뒤따르거나 해야지 같이 가는 법은 결코 없다.
아침의 태양, 신선한 대지, 위대한 침묵의 신을 영혼마다 단독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날마다 아침 햇살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고, 내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의무는 무엇이며, 매일의 예배는 내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야고보의 표현을 빌면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로 가득 차 있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태도는 희망에 찬 외경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또 하루의 선물과 함께 우리 앞에 밝아오는 새 아침마다 우리는 희망에 찬 외경의 태도로 하루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 새로운 하루는 어찌 보면 평범한 것들 속에 비범한 것들이 있는 성찬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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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 사랑
동일시(Identification)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감람산(산 기도) 예수님의 기도의 자리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  기도 후에 가르치는 일에 열심(기도한 후에 무엇을 하는가?)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  잔인한 월권 행위(죄인은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법관의 임무)
* 내로남불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돌로 치라 :

로마의 정권에 대한 도전                    
유대 민간인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로 치지 말라 :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것(산헤드린 공의회에 대항)
죄인으로 취급될 것

  • 고슴도치 딜레마(The hedgehog dilemma)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각자 자기를 먼저 심판하라(남의 눈에 티, 내 눈의 들보)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남을 정죄하는 월권행위를 부정, 영적 사죄의 증거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사죄의 능력(죄를 사하시는 권세)



베드로전서(1 Peter)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공동번역)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공동번역
또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음 수요일 성경 / 창세기 9: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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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왜 노아는 아들을 저주하는가?
창세기 9:20-27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
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벌거벗었다는 것은 죄를 드러낸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나뭇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이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셨다.
   죄를 용서하셨다.
   용서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22. 가나안
의 아비 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을 레위기 18장 6절에서는 아비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하여 성적 범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성경을 근거로 확대 해석하여 함이 아버지를 성적으로 범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자적으로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본 것입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려주며 너희들도 가서 보라고 한 행동입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
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왜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까?

창세기 10:6
함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공동번역)
함의 아들은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

가나안(낮은 땅, 자주 빛 땅)은 (검다, 더웁다)의 마지막 아들입니다.
함에 대한 저주가 막내 아들 가나안에게 내렸습니다.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할까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나안의 저주입니다.
사실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아들은 여럿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잘못은 노아가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실수를 가리지 못한 것은 노아의 아들 함입니다.
가나안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노아가 왜 가나안을 저주 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질문 / 왜 함 대신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25절에 보면, 분명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조롱을 한 것은 함인데 노아가 저주하는 대상은 함의 아들 가나안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죄를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고 앞에 나온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푼다는 것이 더 강조되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거의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는 족속 전체를 저주한 듯 보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가나안 자손은 죄다 노예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것도 가나안의 후손 전체가 저주를 받게 되었나요?

아버지 노아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셈과 야벳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셈 아래로 들어가 셈의 축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보여지는데, 셈이 장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축복을 가져간 것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저의 해석이 잘못된 건가요?

성경난제 해석의 두 원칙

질문하신 주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기록된 부분 내에서도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상황이 노정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나옵니다.

합리적 유추가 힘든 성경 난제들을 해석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바탕을 두고 접근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는 여타 영적 원리나 다른 구절들과 비추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과는 달리 완전하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모순되고 불합리한 처사를 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저주에 불공평성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전후 사정에 따르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벌 받았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비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말씀에 대한 질문자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하나님에게나, 원죄라는 성경 원리에 아비가 공산당이면 아들도 빨갱이 취급하는 것 같은 연좌제는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반드시 개인별로 이뤄질 뿐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빨이 시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이 굽어지게 만드는 해석은, 해석자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해도, 틀린 것입니다.

또 아비 함의 죄 때문에 아들 가나안이 벌 받았다는 해석도 잘못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 설명이 논리적으로 그럴싸해도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왜 함은 저주 받지 않았는가?

이에 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몇 개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려고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 후손들을 저주한 것

둘째는 함이 노아의 막내아들인 것 같이 가나안도 막내이므로 같은 원리로 벌을 받은 것

이 두 해석은 아비가 받을 벌을 무죄한 아들에게, 그것도 같은 막내아들이라는 이유로 내리는 하나님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기계적인 하나님이 되어버리기에 잘못된 해석입니다.  

가나안이 아비의 수치를 먼저 보고 아비 함에게 일러바쳤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대한 변증은 분명히 됩니다.
상당한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는 유추이긴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자의적으로 유추했다는 약점이 생깁니다.  

셋째는 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 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25-27절에 나타나는 가나안과 셈과 야벳이 문맥상 의미로는 그 개인보다 종족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장래 일을 예언하는 예가 종종 있기에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해석하면 함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모순이 나타납니다.  

넷째는 가나안도 이미 죄악에 빠져서 함과 같은 잘못을 평소에도 잘 저지르고 다님을 조부인 노아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잘못에 따라 벌하는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비추어 볼 때에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결정적 난점에 대해 "Hard Sayings of the Bible"(성경의 난제들, Kaiser, Davids, Bruce, Brauch 공저, IVP 1996 발간)이란 책에 아주 타당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

노아는 그의 아들을 저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함과 그의 두 형들은 노아와 함께 하나님이 이미 축복한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창 9:1).
노아든 어느 누구든 그 축복을 저주로 바꿀 수는 없다.
민수기 22-24장의 발람의 예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함이 노아에게 잘못을 범한 당사자이기에 벌 받아 마땅하지만, 노아로선 이미 하나님이 직접 축복한 그를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아비와 같이 동일한 죄의 성향을 보이기에 그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 여타 기록에 따른 해석이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택정하여 은혜로 주신 구원이 취소 불가능함을 이미 여기서도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함의 잘못으로 그 후손이 다 벌 받아야 한다면 성경은 다른 아들들도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창세기 10:6에 따르면 함에게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노아는 가나안만 지적해서 저주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었고, 가나안만 평소에 죄를 많이 범하는 줄 노아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타당성이 붙습니다.

상기에 인용한 책에선 가나안의 잘못을 함과 같은 성향 즉, 성적 문란함으로 해석하고 또 그런 성향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선 그런 증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고, 율법에서 성적범죄에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이유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 지역에 있었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제국조차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근동 지역을 정복한 후에 그들의 도가 지나친 성적 타락에 대해 놀랬다고 그 책에서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성령의 간섭으로 예언한 것도,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가나안 족속이 저주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체적 실현 여부보다는 노아 때에 이미 예언한 것이 달성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그런 족속에게마저 한없는 인자와 긍휼로 회개하기를 오래 동안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년 간 노예 살이 시키면서도 가나안 땅에 죄악이 차고 넘칠 때까지 그 진멸을 미루었습니다.

성경의 이중적 예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의견이 일치됩니다.
우선 노아의 손자 대에서 세부적으로 종족들이 나눠지지만, 세 아들 중에 야벳은 백인종,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들의 조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해서 인종 간의 우열을 비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말해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황인은 그 다음에, 흑인은 맨 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백인종이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역사를 따지면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은 오히려 셈족에 의해서였습니다.
최근에는 황인종의 도약이 두드러집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흑인들의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구절을 인종 간의 우열의 차이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비성경적이자 반역사적 해석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종차별적 저주는 더더욱 아닙니다.
분명 가나안 족속만 저주받았지 구스의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오역해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킨 잘못을 범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대에 이 두 제도를 금지시킨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노예제도는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에 의해,
인종차별은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본문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예언입니다.
성경에는 장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 본인은 구체적으로 전혀 몰라도 성령의 간섭으로 묵시적으로, 때로는 아주 생생한 묘사를 통해 예언하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그런 예언들은 한 사건보다는 점층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예언적 안목"(Biblical 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이중적 성취"(Dual or Dynamic Fulfillment)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본문의 예언도 역사적으로 수차에 걸쳐 달성된 것으로 봅니다.
먼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의 경우를 봅시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관용구입니다.
가장 비참한 종이라는 뜻이지 종들이 된 여러 종족들 밑에 있는 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예가 자기 밑에 노예를 둔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입니다.    

이 예언은 먼저 가나안 족속들이 셈 족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또 비천한 종의 신세가 됨으로서 달성되었습니다(수 9:23, 왕상 9:20-21)

여호수아 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긷는 자가 되리라.

열왕기상 9:20-21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 있는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정말로 “가나안은 셈의 종이”(26절) 되었습니다.
또 후대에 야벳 족속인 페르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 등에 의해서 가나안 족속인 페니키아가 철저히 정복당했습니다.  

27절에서 우선 “야벳을 창대케 하사”의 문자적 의미는 넓은 공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벳은 14종족의 선조가 되었고(창 10:2-5)
또 그 후손인 백인들이 헬라와 로마 제국을 이루었고 또 근대 유럽과 현대 미국에서 창대케 되었습니다.

또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중근동과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해서 제국에 편입시킴으로써 달성되었습니다.

야벳이 셈의 장막(지역)에 거한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에서 ‘그’라는 대명사가 받는 의미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셈족으로 받으면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종이 된 것으로, 또 야벳으로 받아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달성된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이중적 예언이 문자적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도 자주 내포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구원이 셈 족속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셈이 장자라서기 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택정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그 장막에 거하게 하시되 창대케 한 후라고 말합니다.
셈의 장막은 당연히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영적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벳 족속이 처음 얼마 동안은 셈 족속과 종교적 영적으로 분리되겠지만 나중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족속도 야벳의 종이 되므로 언젠가는 동일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결국 이 저주의 예언은, 성경의 다른 저주의 예언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당장은 심판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통해 모든 열방을 셈의 장막으로 모을 것이 즉, 이방인의 구원 계획이 선포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지만 동시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제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만 있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범죄했지만 동일하게 궁극적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먼저 저주의 예언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오랜 인내 후에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유대에서 발원되어 사마리아를 통과하고 유럽을 거쳐 차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건너오는데 근 이천 년이 걸리긴 했지만 구원의 약속도 달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게 이뤄지고 여전히 세상에는 온갖 고난과 죄악이 넘치는 것 같아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으로선 주님을 다시 보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역사 완성을 곧바로 내일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셈의 장막 밖에 있었던(인종적 의미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우리로선 그 안으로 불러주신 은혜만도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경성하여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과 사람 앞에 그분의 빛을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처럼 정미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또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9:20-21.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 홍수가 있은 후 노아 가족이 포도 농사를 짓고 그것을 수확한 후에 노아가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말씀을 했는데 홍수 후에 노아는 술에 취해서 옷을 다 벗고 잠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일을 행한 것은 노아이며 노아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함이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문제는 가나안의 아비 함입니다.
물론 노아가 술에 취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가 보았으면 그 허물을 가려 주었어야 하는데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 형제들로 그 아비의 하체를 가리게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원인 제공자는 노아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처신을 잘 했더라면 함이 굳이 노아가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지 않았어도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로 노아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술에서 깨어난 후에 일어나서 가나안을 저주 합니다

창세기 9: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실 저주를 받아야 하면 함이 받아야 하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잘 때 그것을 본 사람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 아비 함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함의 자녀들 가운데 가나안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공동번역 / 의 아들은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

물론 노아의 행위는 잘못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아비의 행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실수를 보고 특히 부모의 실수를 보고 그것을 가려주지 못하는 아들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가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부모가 아무리 실수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내 부모가 정말 싫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는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싫어하고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부모를 싫어할 수도 있고 또 집에 들어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부모의 잘못입니다.
부모는 이런 일을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자녀가 싫어하는 행동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녀가 보기에 못 마땅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탐탁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보기에는 탐탁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내색하는 자녀는 저주를 받을지니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이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존경하고 공경을 했다면 설령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잘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가 그것을 덮어주기 보다는 그 형제들도 와서 보라고 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행위를 보고 경홀히 여기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는 잘못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이 그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함이 노아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기가 아비의 벌거벗은 것을 덮어 주었어야 합니다.
함은 자기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비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오히려 드러냈습니다.

함이 저주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노아가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함이 그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더라도 그 허물을 가리워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그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그 허물을 가리우기보다는 오히려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서 허물을 들춰내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내 아버지와 부모가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유산이 많고 또 나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라도 그 부모를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부자라서 내가 그 풍족함을 누릴 수 있어서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가 없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태어나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성도가 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악인도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 합니다.

성도는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내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부모겠습니까?
나에게 술 취한 부모가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이 너무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섭리는 정말 오묘합니다.
그것을 다 깨달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 보아야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완전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더라도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허물이 보일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라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도 때로는 그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짐이 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은 노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아비 노아를 사랑했다면 설령 술에 취해 더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아비의 허물을 감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함은 노아의 믿음을 본 것이 아니라 노아의 행위를 보고 그것이 못 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잔다면 아마 쳐다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는 저런 아버지가 있냐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아니 술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어 자기가 보기에 못 마땅하면 그 아비를 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은 그 아비 노아를 공경 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함이 잘못을 했으면 그 당사자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왜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말씀을 많이 보아왔고 또 들어 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성도의 견인을 말하면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보게 됩니까?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목사들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한번 구원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율법주의 목사들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잘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성도들이 열심을 낼까 말까 한데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잘못을 해도 끝까지 구원한다고 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아무 것도 안할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자세히 가르쳐 주어도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욱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의 차이겠지만 성도의 견인을 믿는 성도는 정말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더욱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도의 견인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함은 노아와 함께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방주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노아의 아들이야 아니냐를 논하기 이전에 방주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의 부인과 그리고 세 아들 그리고 세 자부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방주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로 들여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라고 꼭 들어가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들이라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한 자를 사람이 저주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함은 그 아비 허물을 가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아비 노아가 술 취해 벌거벗고 자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함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주에 들여보내 주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 함이 자기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자주를 받아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함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노아가 함을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아들 함이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정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노아가 함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함을 송사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노아는 얼마든지 함을 저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견인입니다

한번 의인은 영원하기 때문에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저주를 한다 해도 그 저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됩니다.
노아의 저주가 강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 강합니까?
노아가 아무리 저주를 한다 해도 함은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노아의 방주는 약속의 기업을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기업을 주신 자에게 절대로 변치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바꿀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바꾸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함은 기업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노아의 저주로 그것이 변해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보증을 해 주셨습니다.

한번 보증한 것이 내 실수로 인하여 변해진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매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함과 같은 실수로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실수를 안 하고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우리 육체는 역시 오늘도 함과 같이 저주를 받을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의롭다 하신 성도는 다시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죄가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의인을 송사할 수 없으며 저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에 들어간 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내 육체는 아직도 함과 같지만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도입니다

 

지금 이 시대 저주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결코 저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예로는 함과 같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송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저주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설령 내가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하는 죄를 지었다 해도 나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저주를 해서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면 내가 저주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라면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내가 함과 같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 이제는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설령 누군가 나를 저주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그 아들 함이 한 행위로는 반드시 누군가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의롭다 한 함을 저주할 수 없어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아 주셨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함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그 아비 함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 대신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저주 받게 하셨습니다.

함은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나도 또한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저주를 대신 받아 주는 이가 없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대신 저주 받는 것을 모형으로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모형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노아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살아가면서 설령 실수를 하고 죄를 짓는다 해도 이미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설령 누가 나를 저주 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송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송사 못합니다.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인 노아도 함을 송사할 수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함을 저주할 수 없어 대신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은 족보가 없기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으며 종으로서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는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과 사랑은 동일시 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라는 표현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하나님의 사랑"

찬송 85장 구주를 생각만해도

1절.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절.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찬송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찬송가 상단 왼쪽에는 작사자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Bernard of Clairvaux’
번역하면 "클레르보의 버나드"

버나드 즉 베르나르가 쓴 192행의 라틴어 시인 ‘예수의 이름에 붙이는 노래’를 영국 찬송 작가인 에드워즈 케스월(E. Caswall; 1814~1878)이 발췌해 번역한 것이며 다이케스(J. B. Dykes, 1866)가 곡을 붙여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을 생각만 해도
달콤함으로 나의 가슴이 가득하나이다.
그러나 더욱 달콤한 것은 당신의 얼굴을 보는 일
당신의 임재 안에 안식하는 일입니다.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고, 마음으로 말할 수 없고
기억으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복되신 이름보다 더 달콤한 것을,
오 인류의 구주시여!
오, 회개하는 모든 심령의 소망이여
오, 모든 온유한 자들의 기쁨이여
타락한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자비하십니까!
구하는 자에게 얼마나 선하십니까!

 
베르나르의 고백은 ‘은혜롭다’는 표현보다는 ‘감미롭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늘의 평안을 체험하게 합니다.
베르나르는 85장 외에도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과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도 작시했습니다.
멜로디를 넣어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가사를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62장 4절 가사는 체험적 신앙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사랑 못 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나 주만 생각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중세 신비주의 신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인식을 넘어 신비의 체험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하나님의 사랑"은 베르나르의 가장 중요한 저서입니다.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신앙을 맛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제임스 M. 후스톤이 베르나르의 사상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서문을 기록했습니다.
후스톤은 베르나라의 신학을 서문의 소제목에서 보여주듯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실존적 경험,
2. 사랑의 일차적인 중요성,
3. 성경적인 성경 이해,
4. 참된 인간성의 기초:성경적 인간학,
5. 영적 우정.

베르나르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경험’입니다.
어거스틴이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했다면,
베르나르는 앎의 궁극적인 방식이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나는 경험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합니다.
베르나르에 의하면 신앙은 경험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은 근대 후기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 운동이나 18세기 부흥운동도 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선 영혼의 고귀함’이란 제목을 가지고 사람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존재 방식을 갖는지를 밝힙니다.

3장에서는 ‘은혜와 자유의지’라는 화두를 가지고 상세하게 다룹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이란 주제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관상해야 할 것인가를 다룹니다.
2부는 이 책의 핵심이자 주제입니다.

6장에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사상의 정수를 담은 사랑의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

3부에서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이란 제목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논합니다.

4부 ‘영적 우정’에서는 책의 부록이자 결론에 해당하며 영적 우정이 갖는 독특성을 설명합니다.

제1부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고귀함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기억에 의해 회상하는 것
둘째는 기능인 이해에 의해 분별
셋째는 기능인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포옹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신의 전으로 삼으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는 평화를 갈구하고 진리를 묵상하고 자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기억, 이해, 의지라는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우리의 예배와 모방이다.’
하나님을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 돌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죄악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비열하고, 나약하고, 변덕스럽고,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단단히 부여잡아야 한다.

영성 생활에는 세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는 동물적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영적 상태이다.

동물적 단계에서는 ‘감각이 지배하는 삶’이다.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 단순성을 갖게 된다.
묵상과 거룩한 독서를 통해 영성 훈련을 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인 이성적 상태는 동물적 상태에서 약간 진보한 것이다.
외향적인 덕을 추구하고, 영성을 추구하는 단계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처럼 복된 삶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마지막 영적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사람의 모든 사고(思考)의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선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사상은 지성이 되고, 사랑이 된다. ‘사상에 대한 이해는 사랑에 대한 묵상’이다.
결국 하나님을 닮게 되며, 인간의 완성 단계에 이른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는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기능은 구원의 유일한 주체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이시며,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동물적 욕망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동물적 욕망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른다.’
자유의지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분명하고도 습관적인 영이다. 의지가 없다면 동의도 없다.

인간에게는 ‘본성’ ‘영광’ ‘은혜’라는 삼중적 자유가 있다.
본성은 곧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영광은 ‘비판으로부터의 자유’
은혜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결된다.
악한 의지는 악마에게 속한 반면, ‘선한 의지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
악마는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죄는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을 상실했다.
비록 의지의 능력을 손상되지 않았으나 참된 지혜와 실질적인 도덕적인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회복된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인간에게 있는 선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약 1:17)
구원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인간이 행하는 선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결국 하나님을 선택하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현대 개혁주의 신학과 상이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칼빈과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 타락했으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중세의 신학 자체가 베르나르 사후에 급진적으로 인간적 공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왜곡되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핀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르나르의 후대 사람으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쪽으로 의지의 자유를 설명해 나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주장 자체만으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현대의 개혁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2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


사랑은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육체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러나 범죄 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또한 육욕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모임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들 속에 함께 거하신다. 거룩한 모임에는 영적 가르침이 필요하고, 기도와 정화의 순서가 필요하다.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기에 이른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퇴보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남용하며, 육적 욕망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고, 이성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랑에는 오감이 있다. 촉각,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시각이 있다. 이것은 비유인데 육체는 오감을 통해 존재할 수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하나님은 만지고, 맛보고, 맡고, 듣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맛’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고, 체험하고, 말씀을 듣고, 보게 된다.



[베르나르의 사랑의 네 단계]



사랑의 1단계 : 사람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을 이기적 사랑이라 한다.



사랑의 2단계 : 인간은 자신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축복을 위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



사랑의 3단계 :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영적으로 높은 단계의 사랑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을 맛보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알고 사랑한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는 이유다.



사랑의 4단계 : 인간은 하나님은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다시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이것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움이다. 자신을 죄에 방임하거나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제3부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



[3부는 아가서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다룰 때 함께 다루겠습니다.]



제4부 영적 우정


[이 글은 1125년경 티에리의 수도원장이었던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윌리엄이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나눈 대화 형식의 글입니다. 또한 다른 몇 수도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글입니다. 일관성 없는 서신들이기 때문에 요약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문장을 발췌하겠습니다.]


“사랑이 사심 없는 열심을 영혼 안에 채울 때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우정은 탐욕이 가득한 눈과 밖을 향한 귀에서 시작됩니다.”

“영적인 우정에는 이익이라는 동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체의 품위를 위하여 갈망됩니다.”

“동등성은 참된 우정의 특성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우정이 없는 어떠한 행복도 거의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영적 우정은 순수한 동기들을 보존하는 일로 시작됩니다.”

“당신의 친구를 영혼의 동료로 삼으려면 ... 서로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정에 특권으로 주어지는 열매는 친구를 신뢰하고 자신을 위탁할 수 있는 안정성입니다.”

“우정을 특징짓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애정, 안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정은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3. 나가면서


중세 신비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사의 큰 흐름을 ‘문자와 성령’이란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면 신비주의는 ‘성령’에 가깝습니다. 문자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교회사는 설교와 신학, 성경해석에 관련된 관점이며, 교리를 세우고 체계를 세우는 과정 속에서 강조됩니다. 반대로 성령 중심의 해석은 교리화로 인해 교회가 화석화되고 역동성과 생명력을 잃었을 때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합니다. 오순절 부흥 운동과 주기별로 일어나는 대각성 운동은 성령에 중심을 두고 교회사를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두 주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나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운동이 일어나면 기도와 찬양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읽기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와 부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두 주제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를 흐름을 살펴보면 문자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가 균형이란 중심에서 파동처럼 이동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성령 운동에 가까우며, 하나님을 관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하려는 영적 갈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신비주의를 이해하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영적 대각성 운동의 특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도 대각성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18세기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 등도 중세 신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차갑게 이해하려는 시대가 있는 반면, 필립 슈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이나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처럼 감성적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 시대가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경건주의나 부흥 운동과 맥을 같이하면서 지성을 넘어 감성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성향입니다. 감성적 하나님 이해는 위험하지만 풍성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시와 설교들은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중세 신비주의는 중요한 신앙의 해석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리적으로 혼돈스럽고, 개혁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의 신앙관은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려는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속 주의에 물든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으로 삶으로 실천할 때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 신비주의는 약간의 오류를 갖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영적으로 조명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온통 사랑 고픈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미치도록 매어달리는 것도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가 비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허전한 빈 자리를 메우려고 재물에, 권력에, 지식에, 일에, 쾌락에, 육신적 사랑에, 사람들에게 분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종말이 가까워지면 세상에 불법이 많이 행해질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면 이 시대가 종말이 가까운 때니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만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인 영이 죽었던 빈 껍질만의 사람일 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영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즉 성도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받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붓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랑 고픈 세상에 세워진 교회가 부어줄 사랑이 없습니다.

소설가 이동철 씨의 글 중에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논픽션이 있습니다.
그 소설 중간에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 때문에 영업을 못하게 된 한 창녀가 교회에 항의를 합니다.
그 창녀는 술에 잔뜩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달려 고함을 지릅니다.

“이 자식들아! 우리가 너희보고 밥을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 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말입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사랑 고픈 사람들의 메마른 교회에 대한 항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때에도 세리와 창녀, 종들과 병든 자들 등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여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먼 자,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거지 바디매오, 세리장 삭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일곱 귀신들렸던 마리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 고아와 과부 등. 예수님께서는 세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정죄보다는 연민의 정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사랑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한계가 있는 가 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물음에는 ‘아가페(대가없는 신적인 사랑)’의 사랑이었고, 베드로의 대답에는 ‘필레오(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인과 똑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분명히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런 사랑이 거짓 사랑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대가 없이 베푸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처럼 똑 같은 사랑은 할 수 없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는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사랑을 내 속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처럼 사랑의 시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충만할 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랑도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9-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일4: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랑을 서로 나누면 온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사해(死海)처럼 썩게 됩니다. 썩은 물에는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도 흐르지 않고 혼자만의 것으로 고여 있으면 아무런 가치도 발휘할 수 없는 썩은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27:5절에서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면책’이란 ‘서로 대면한 상태에서 꾸짖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표현되지 않는 숨겨진 사랑은 차라리 대면하여 꾸짖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될 때에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어짐으로서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을 소유한 우리가 이 세상을 외면한다면 주님 말씀처럼 사랑은 급속하게 식어져 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흐르게 합시다. 사랑이 메말라 갈라터지는 사람들의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젖어들게 합시다. 가장 가까운 믿음의 식구들과 가족들로부터 시작합시다. 비록 서툰 몸짓이라 할지라도 흐르고 또 흐르면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의 강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고 베풂으로서 더욱 풍요로운 사랑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