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하나님의 은혜)와 요단


10 - 24 - 2021(주일) 오후 10:49
신명기 27장을 읽으면서...........

홍해와 요단
-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광야 생활(40년) 민수기 14:33-34

홍해(紅海, Redsea. 갈대의 바다)
요단(Jordan, 급한여울)

출애굽의 연대 : BC 1446년 아빕월(3-4월)
출애굽기 13:4

가나안 땅에 진입 : BC 1406년 아빕월(니산월)
여호수아 4:19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단(Jordan)

히브리어로 ‘야르덴’이라 부르는 요단강은 야라드(아래로 가다, 내려가다, 후손)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요단강은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 산악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까지 320㎞를 흐릅니다.
서쪽에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지방이 있고 동쪽에는 지금의 요르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아브람이 롯과 각자 거주지를 정할 때 처음 언급됩니다(창 13).
신약성경은 요단강을 그리스어로 ‘이오르다네스’라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곳입니다(막 1:5).

영어에서는 이오르다네스를 조르단(Jordan)으로 씁니다.
나라 이름 요르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정관사(the)를 함께 쓰면 요단강을 뜻합니다.
사람 이름이나 성씨로도 씁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에 요단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섬기면 사망과 저주가 임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8~19, 새번역)

모세는 이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30:14)



홍해(紅海. Red Sea)

홍해 (The Sea of Red) or 갈대바다 (The Sea of Reeds)

1. 홍해냐 갈대바다이냐?

 

얼마 된 이야긴데요, 네이트에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이 과학적으로 입증 될 수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속 101km/h에서 사람이 걸을 수 없다, 사람이 날라간다, 따라서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입증이다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조롱하는 댓글들이 싫어서, 뉴스를 좀 더 검색했는데요. 바람의 세기를 시속에서 분속으로 나누어 보면, 약 초속 28m 정도로, 바람의 세기로는 중간 정도의 태풍인 것 같았습니다.[1] 따라서 강풍에 의해서 홍해를 가른 기적에 대하여 그 과학적 개연성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사람들이 강풍에 가까스로 홍해를 건너 가는 장면이 있는데, 실로 그 정도의 장면이 되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컴퓨터모델링 실험과 역사적 기록을 통해 모세가 유대인들과 홍해를 건너올 때 발생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지중해 서편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2]

 

성경에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을 입증하여 그 허구점을 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의 사실성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도 그러한 사람들의 자료나 다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다큐에서는 위성 판독에 따르면 “깊은 홍해에 어느 지점에 불쑥 올라나온 구릉지가 있다”, 혹은 홍해 연안에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라는 등등, 성경의 그 사실성에 대해서 과학적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전 과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주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론 그 과학적 반박과 입증들이 무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일반적인 자연현상과, 그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초월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갈대의 바다-홍해>

 

근데, 홍해가 아닌 갈대바다를 건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나름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원을 분석해서 나온 주장인데요. 여기서 저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Moses Spring. [3]

                                       

 3. 히브리 어원으로 따져서 “갈대(의) 바다”라고 주장.

 

흔히 갈대밭을 건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우리가 흔히 ‘홍해(The Red Sea)’라고 번역하는 ‘홍해’는 단어는 애초의 히브리원어- ‘yam suph’가 사실 '붉은 바다'라는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5] 요즘 약간의 주해가 달린 성경을 보면, 각주에 갈대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되어 진 것을 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원을 분석하면, 우리가 ‘홍해’라고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yam suph’ 인데요. 여기서 ‘붉다’에 해당하는 단어인 ‘suph’가 사실 히브리원어에서는 붉다라는 뜻이 없고, 일반적으로 ‘갈대’ 내지 ‘해초’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6]

 

그런데 이것이 후에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 역 성서(LXX)에서,히브리어의 Yam Suph란 단어를 지금의 ‘홍해’라는 뜻을 가진 Erythra Thallas라고 번역했고, 헬라어 성경에 기초한 영어 성경이 그것을 따라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란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갈대 바다 얌 수프(yam suph’)가 지금의 ‘홍해’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성경의 ‘갈대의 바다라고 (The Sea of Reeds)’ 를 왜 헬라어 성경이 히브리성경의 원어에 충실하지 않고 지금의 ‘홍해/The Sea of Red’로 했느냐?"에 대해서, “홍해의 해초가 붉었기 때문에 그대로 썼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원어의 ‘단어 뜻’의 충실한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원어적 의미를 생각할 때, 번역성경에서의 ‘홍해(The Rea Sea)는 말은 틀린 번역이며, 따라서 갈대(의)바다(The Sea of Reed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4. ‘갈대’지만 홍해는 그럼에도 ‘바다’이다

 

 ‘홍해’를 ‘갈대(의)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원적 근거만을 가지고 따지고 볼 때는, 그 타당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원적 근거 그러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 통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는 실질적으로바다’라는 것입니다.

 

n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람들이 수프(yam suph’) 그렇게(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으로 생각하고)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살펴보면 ‘yam suph’ (홍해이건, 갈대바다로 번역하든) 는 분명히 바다라는 것입니다.

V. 4-5 여호와께서 바다에 던졌고 (into the sea), 큰 물(The deep waters)이 바로/의 병거를 덮쳤다(NIV).

만약, 단지 ‘붉다’에 해당하는 ‘갈대’라는 어원만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했다면, 출애굽의 스토리는 마치, 여호와께서는 강한 동풍으로 바다와 같은 그 큰 갈대지역을 물벽이 있는 것처럼 가르시고, 물이 아닌 갈대들이 덮쳐(혹, 물이거나), 이에 바로의 군대들이 죽게 되었다는 전혀 문맥이나, 상황에도 맞지 않아, 이야기 진행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을 살펴보면, ‘빠져 죽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Erythra Thallasà여기서는 The Red Sea)’ 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어…”

 

마찬가지로 여기서 만약, 우리가 그 어원에 의해서 바다가 아닌 갈대지역을 통과하다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른다면, 위에서의 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지 갈대에 빠져 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우리가 홍해라는 지역과 연관하여 사용하는 그 ‘홍해’란 단어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기자(writer)와 또 그 시대의 독자나 청중들이 모두 똑같은 정황과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에게 있어서 ‘yam suph’ 갈대가 아닌 지금의 홍해와 연관한 바다와 연관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7]

 

즉, 구약에서 ‘갈대의 바다’라는 해당하는 원어를 ‘붉은바다’라고 번역해서 사용해도 신약시대-초대 교회 사람들이(신약의 기자들이나 독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모두 익숙한 바울이 또한 그 시대의 독자들이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예로, 구약성경의 사용되었던 각 성경의 제목이나 사용한 단어들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성경제목은 구약에서 쓰지 않았던 이름이지만, 헬라어에서는 구약성경의 그 의미를 반영해서 번역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8] 즉, 통용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장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홍해’ 역시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당시에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yam suph’는 지금의 언어학자나, 우리 같은 외국인이나,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문제지,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yam suph’ 그 사람들에게서 그 자체로 ‘yam suph’ 를 ‘갈대바다’으로 번역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홍해로 알고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좀 그렇긴 하지만, 비유하자면 우리는 짜장면을 먹지만, 방송에서는 자장면 (올바르기 때문에?) 먹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유가 어찌 하든, ‘짜장면’이나 혹은 ‘자장면’이나 하든 실지로 우리가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그 음식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yam suph’를 The Sea of Reeds 라 할지라도 그 것을 구태여 ‘갈대로 되어진 바다’ 혹은, 호수’[9]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10] 이는 마치 붕어빵을 구태여 언어분석하여 ‘붕어+빵으로 쪼개’어 붕어로 된 빵’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만약 ‘붕어빵’도 수 천-년이 지난 후에, 지금의 붕어빵이 사라지고, 기록에 남아 있는 붕어빵만 남아 있다면, 후손들이 실제 로 ‘붕어로 만든 빵’이라고 생각할지 누가 모르겠습니까? 즉, 갈대의 바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다의 한지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원만을 따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결론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역사적 고증을 따지고, 어떤 사람들은 언어나. 문학적 작품으로서 이해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것들은 실로 도움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어떤 이들은 ‘좌’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우’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민’과 ‘인민’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말씀을 읽음으로 믿음을 더욱 공고케 할 근거가 있음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께 권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구태여 그렇게 해석 함으로써, 감동적인 출애굽의 그 영광의 탈출이 너무나 조촐하게 만들지 않나요?

 The Sea of Red[4]

 

우리가 태도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홍해를 건넜던 그 출애굽(Exodus)의 명~장면이- 물벽이 있는 바다에서, 연안으로, 근처 갈대로 이루어진 습지로, 그리고 갈대밭으로, 더 나아가 바다가 아닌 그냥 맨땅으로 돌아 건너가게 되며, 그렇게 따라갈 때, 우리의 믿음 또한 그 만큼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예화

  어떤 예화집에서 보았는데, 어떤 선생님이 홍해가 아닌 갈대밭을 건넜다고 학생들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에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더욱 크나큰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왜냐하면 “그 빠져죽을 수 없는 얇은 물에 애굽의 수 많은 병사들을 잠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1] <태풍세기>

태풍의 강도는 중심 최대풍속에 따라 나뉘는데 초속 17m 이상 25m 미만은 약, 초속 25m 이상 33m 미만은 중, 초속 33m 이상 44m 미만은 강이고 초속 44m 이상 바람이 불면 매우 강으로 분류됩니다: 강도 약에 해당하는 초속 20m의 바람만 불어도 아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초속 30m의 바람이 불면 태풍의 강도로는 중에 불과하지만 성인도 고개를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걷기도 서기도 힘듭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690942_5782.html

[5] The term in Hebrew is yam suph. Yam means "sea," and suph is generally thought to mean "reeds," "rushes" or possibly "seaweed." That is why some versions of the Bible call it "the Sea of Reeds" or "Reed Sea" instead of the Red Sea. water planta

 

[7]

The Red Sea (Arabic: البحر الأحمرAl Baḥr al aḥmar; Hebrew: Yam Soof ים סוף or Hayam Haadom הים האדום; Coptic: ⲫⲓⲟⲙ `ⲛϩⲁϩ Phiom Enhah or ⲫⲓⲟⲙ ̀ⲛϣⲁⲣⲓ Phiom ̀nšari; Tigrinya: ቀይሕ ባሕሪ Qeyih Bahri; Somali: Badda Cas) is a seawater inlet of the Indian Ocean, lying between Africa and Asia. Its connection to the ocean is in the south, through the Bab el Mandeb strait and the Gulf of Aden. To its north lie the Sinai Peninsula, the Gulf of Aqaba, and the Gulf of Suez (leading to the Suez Canal). It is underlain by the Red Sea Rift, which is part of the Great Rift Valley.

The Red Sea has a surface area of roughly 438,000 km2 (169,100 mi2),[1] is about 2250 km (1398 mi) long, and — at its widest point — 355 km (220.6 mi) wide. It has an average depth of 490 m (1,608 ft), and in the central Suakin Trough it reaches its maximum depth of 3,040 m (9,970 ft).[2]

The Red Sea also has extensive shallow shelves, noted for their marine life and corals. The sea is the habitat of over 1,000 invertebrate species and 200 types of soft and hard coral. It is the world's northernmost tropical sea, and has been designated a Global 200 ecoregion.

: The direct rendition of the Greek Erythra thalassa in Latin as Mare Erythraeum refers to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Indian Ocean, and also to a region on Mars.

 

[8] 창세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이 책의 첫 단어에서 따온 תשׁרב 곧 "태초에" (In the beginning)라는 것이었다. 영어 제목인 Genesis는 "자료 기원"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음역된 라틴어를 거쳐서 붙여졌다. 또, 출애굽기의 원래 제목은 히브리어로 ‘베엘레 쉬모트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이지만 이것 역시 후에 지금의 ‘Exodus’에 해당하는 ‘출애굽’ 그리고 한국어에서는 ‘출애굽기’로 바뀌게 되었음.

 

[9] 어원이나 정황을 따져서, 갈대(의)바다를 갈대호수라고 번역하시는 사람들도 있음; 예컨데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의 문제가 있는 것 처럼, 홍해라는 번역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 같다.




하나님의 만들어주신 길을 건넜다 


여호수아 3:15-17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속에 감추어진 길을 찾아 건넜다
홍해를 건너는 것
요단을 건너는 것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홍해는 구원을 위한 물 세례
요단은 성화를 위한 성령 세례 



홍해는 물이 갈라진 길을 건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요단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내딛고 건넜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신앙이란? 
떠나는 것(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율법(토라. tôwrâh) תּוֹרָה

  • 법,  질서,  틀


신앙이란?
붙잡는  것(룻기 1:16b)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신앙이란?
절제(節制)하는 것(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사람은 태어나 자라는 과정 속에서 교육의 정도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갓난아이의 행동을 청소년들이 한다거나 성인 할 경우 저능아로 사회에서 장애인의 대우를 받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에게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자체가 허용되나 성인이 된 후로는 부모에게 무조건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패륜아로 낙인찍히는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자라면서 부모가 기뻐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 본인도 어린아이를 대하는 차원과 성인을 대하는 차원이 다름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선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위란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성도들의 문젭니다. 

요단을 건너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표현한다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성인이 된 상태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홍해를 건넜다면 광야생활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교육을 받고 자라 성인이 되었다면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즉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상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작금의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사고가 아닌가 사려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림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소멸시키고 받으려고만 하지 그 은혜를 활용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는 데는 등한히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었기에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그와 같은 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들도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외운다 할지라도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교만해져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엔 부모님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만 관철시키려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부모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고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오늘날 기독교계는 사람의 신체적 발달 과정으로 본다면 지적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장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유업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널 때의 모습을 벗어나야 요단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큰 강 홍해와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강을 건너는 방법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지 않을까봐 미리 애굽의 군사들을 동원하셔서 그들을 쫓아오게 하셨습니다.
죽어라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절대로 후퇴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앞에 홍해가 나타났습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었습니다.
절망은 곧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
그런 그들이 탄식이 하늘을 찌를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은혜의 바다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291번,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276번, 쉬운성경에는 234번 정도 나오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까지 고르게 퍼져있는 단어입니다.

레위기 / 역대상 / 아가 / 예레미야 애가 / 에스겔 / 호세아 / 아모스 / 오바댜 / 미가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 / 학개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요한 1서 / 요한 3서 / 에는 안 나옵니다.

66권의 책 중에서 17권에는 안 나오고, 49권에는 나오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성경이 무척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 다윗과 신약의 대표적 인물 바울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단어가 은혜입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두 가지만 설명을 해 드립니다.

첫째, 왕들, 혹은 강한 자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약자에게 무조건 적으로 베푸는 따뜻한 마음
저 사람 때문이 아나라 베푸는 이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혼나야 되는데 용서가 되는 것, 이 용서가 그 사람이 불쌍하고 의로와서가 아니라, 용서해주는 사람이 사랑이 많아서 용서가 되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리스 인데 이 말은 ‘기뻐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이로’에서 유래됩니다.
흔히 카리스는 기쁨과 쾌락을 가져다 주거나 남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의미이었습니다.

-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가난은 그분이 짊어지시고 나에게 부유함을 주신 것

- 무지하게, 연약하게 태어난 것은 난데,,

그분이 기쁨으로 나에게 지혜와 강건함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 죄로 인해 지옥가게 생긴 것은 난데, 당신이 대신 그곳의 문을 닫아버리시고 나를 천국으로 밀 어 올리신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합니다.

갚을 수도 없는데 거저 받은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후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왔습니다.
전쟁에서 수도 없이 많이 이겼습니다.
물이 써서 먹지도 못할 만큼 나쁜 물이었는데 모세가 나무 가지를 던져 넣자 물이 달아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만나가 매일 내려왔습니다.
반석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니었는데 서서히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순간, 어려운 순간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유식이나 미음 혹은 죽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기도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한 신앙의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문제가 없이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심같이 만병통치약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음 믿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악하고 험한 세상을 믿음을 사용해서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앞에 포기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 하나 풀어가며 즐기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믿음위에 믿음이 쌓이고 또 믿음위에 믿음이 쌓여서 요단강 앞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이었기에 요단강 언덕까지 물이 차 올라있었습니다.
이 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강을 건널 수 있는 배 한척이 없었습니다.

200만 명과 수많은 짐승들이 있습니다.
1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 20만 척이 있어야 합니다.
100명이 탈 수 있는 큰 여객선 2만 척이 있어야 건널 수 있습니다.
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습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룹니다.
물론 이때 강을 건너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에 도착합니다.
30미터 폭이 40미터 50미터로 불어나 있고 급류가 흐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냥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이제 은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그 물에 네 발을 들여 놓으라고 하십니다.
은혜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믿음을 키운 바로 그 사람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싫다는 사람 하나 없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일치된 순종으로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믿음을 키웠습니다.
죽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돈을 벌었다 안 벌었다.
내가 이겼다 졌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됨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믿음의 힘이고 그게 40년 동안 그들이 길러온 내공이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거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힘차게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믿음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믿음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의 길, 행복의 길을 이어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에는 여러 가지 기적이 나타나지만 그중 출애굽 했을 때 홍해가 갈라진 사건과 40년 후 여리고로 진격해 갈 때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은 가히 상상이 잘 안되는 사건이다.

자연의 흐름을 한 민족의 행보를 위해 거스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고도 두렵지만 이 두사건을 함께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의 기적의 원리를 조금이라고 더 알기 원한다.

공통점

1. 물줄기가 갈라져 "마른 땅"이 나타났다
- 물줄기가 갈라진것도 기적이지만 바로 마른땅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기적

2. 장정 60만명이 도하했다
- 앞사람과의 간격을 1m로 생각해 보면 약 600km, 100명이 한줄로 갔다손 치더라도 폭 100m, 길이 6km의 대 장정. 거기에 계산에서 빠진 여자와 아이, 가축들까지 계산해 보면 4배정도 된다하면 약 100m폭의 24km의 대군이 건너갔다는 것.
요즈음 달의 영향으로 바닷길이 열린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적.

차이점

1. 도하 이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에게 쫒기는 상황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모세도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말했지만 돌아서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상황.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병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셨다(출 14:19, 23).
그러나 요단강 도하는 하나님의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담근 후 하나님의 다른 도움이 없이 강을 건너감

2. 도하 순간의 상황 :

출애굽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고,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담근 후 물이 갈라졌다.

3. 도하 이후의 상황 :

출애굽은 애굽인들이 바다에 수장되어 모세와 미리암의 승전가가 울려 퍼졌고 요단강은 요단강의 돌 12을 취해 제사장들이 섰던 장소에 쌓아 이를 기념함. 홍해 도하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마라에 도착해 물이 없다 불평하여 쓴물을 맛보았고,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4. 지도자들의 말 :

모세는 홍해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그가 행하신 일을 보라.하였고, 여호수아는 너희하나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계셔 너희에게 약속한 땅을 반드시 주리라.라고 하였다.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

1. 구원 받을 때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거룩함으로 충전받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
그 To-Be 모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그래도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로써 한번 갈길을 가봐야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