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장소)와 하나님 나라(속성)
일반적인 생각 /
1. 죽어서 가는 나라(영혼이 가는 곳)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나라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교회(에클레시아) :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통로
하늘 나라 : 장소
https://www.cjob.co.kr/christianity/593
사탄과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처음 두 명의 통치자이다.
둘 다 두 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둘 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사탄은 한 왕국의
왕관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다시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담에서
예수님까지의 역사는 천국, 즉 실제적인 땅의 왕국에 대한 역사가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천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왕관을 쓴 사탄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는 사탄의 개인 소유(고후
4:4)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떠한 간섭도, 특히 "성령의 칼"(히 4:12)로 부터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지구를 소제하고
단장하고 재장식해서 다음에 등장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일할 만한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지도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탄은 항상 사기를 높이고 낙관론을 신봉하게 함으로써,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고 혼란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하는 그 일들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저 위대한
"긍정적 사고가"의 입장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첫 번째 말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창 3:1)이다.
사탄의 유일한 문제는 6000년 간의 부패와 타락과 사회적 붕괴와 전쟁과 죽음 등을 직면하면서도 어떻게 이 높은 사기와 고조된
낙관론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마태복음 6:33-34)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절정이다.
주님께선 32절에서 청중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신 후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 6:32) 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교도들인 미국, 영국, 독일, 한국 등 이방인들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앞부분까지는 마찬가지이다(행
2:39; 3:22).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개인적인 아버지라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야 비로서
등장하는 새로운 계시이다. 산상설교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있었던, 다가오는 천년왕국의 규칙과 요소들의 윤곽을 잡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약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각각 어떤 나라인지 이미 공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달리 영적인 나라로서, “거듭나면” 들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공포되는 이
때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교회 시대의 성도들처럼 영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데, 이 영적인 상태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교회 시대에는 이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거듭남으로 들어가지만, 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행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나라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나라였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에는 완벽한 의가 요구되는 것이고, 이 “의”로 말미암아 이들은 천국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의는 엄청난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설교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다 이루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선 이들이 지키지 못할 의를 완성하시고자 죽어야 했으며, 그 의가 입혀졌을 때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아직까지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거듭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상황아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마태복음 5:20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지녀야 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의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경고하신다
2) 마 19:24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라.』 (막 10:25, 눅 18:25)
19:24절 모든 학자들은 바늘의 귀 를 "낙타가 밤에 성문이 잠겼을 때 얻드려 기어가기 위해 그 무릎을 꿇어서 통고하는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 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분" 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눅 18:25 참조), 그런 문은 어떤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학자들의 다음 단계는 이 구절을 바꾸는 것이다. 페쉬타(시리아 어 역본)에는 낙타 대신에 "밧줄"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시간 낭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빈정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이것은 그분의 뛰어난 특성 중 하나이다), 또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다(핵심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과장하신 것이다).
막 1: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1:1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전파하신 것과 같은 메시지가 아니다. 천국은 "문자적이고, 물이적이며, 눈에 보이는" 왕국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실현하시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눅 17: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1절)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도덕적인 의" 의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는(딤후 2:15) 이방인들이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신약에 놔 두신 가장 거대한 거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 계셨을 때에 이 두 왕국이 함께 존재하였다.' 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두 왕국의 왕이시다
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 』
17절에서 전파하시기 시작한 천국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의 복음”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위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과, “천국”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천국”은 다윗의 보좌에서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왕의 의로운 통치가 있는,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다. 이 “다윗의 보좌”는 이스라엘과 관계된 것이고, 그래서 이 왕국(천국) 복음은 자연히 이스라엘과 관계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과 교회는 종종 동일시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교회는 분명히 다르다. 천국(왕국)은 갑자기 세워지는 반면(set up, 단 2:44) 교회는 세워져간다(built up, 엡 2:20). 천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는 반면(약 2:5) “교회의 상속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으나(마 8:12) “교회의 자녀들”은 없다. 교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왕국은 “몸”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 “성전”이다. 왕국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왕국이 임하도록 구하며(마 6:10)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반면(눅 19:12), 교회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임하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그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빈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진실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에게 이 얼마나 무례(?)한 반응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 하고 말하는 손님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님께서는 대꾸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어서 오십시요. 반갑습니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며 손님을 맞아들이지도 않으셨다. “누추합니다만, 여기 좀 앉으시지요.” 하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행은 맡아 놓았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니코데모는 이런 무례한 꼴을 생전 처음 당해 보았을 것이다.
누가 당신을 찾아와 “당신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적을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말했다면, 당신은 두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필경, “아, 네, 감사합니다. 그걸 알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저는 죽은 사람을 세 사람이나 살려 놓느라고 아주 바빴답니다. 아이구, 이런! 어서 들어오십시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수선을 떨며 갖은 친절을 다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손님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이렇게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한 분이셨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멀리 갈 것없이 요한복음 4장만 보아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와 같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대해 주셨던 그분의 온화하신 태도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어째서 이처럼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셨던가?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 2:24).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게 행세하던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입관 때문에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퉁명스럽게 대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니코데모가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이른바 “지식인”이었기에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말씀의 핵심을 꺼내셨던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를 흉내내는 현대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즉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뿐아니라 들어가는 것에 대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서 14: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성령 안에서 의를 누리는 그분의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바로 이 순간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화평과 기쁨을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나타난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비유를 하나 더 들어 말씀하시더라.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눅 19: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 이것은 미래에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더욱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눅 17:20), 본문은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것은 미래에 임할 천년왕국을 언급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3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면 ‘장차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를 일찌감치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할뿐더러,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지금 이 교회 시대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적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실제로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영적으로 존재하고, 천년왕국 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존재하게 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첫째, 지금 그 영적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둘째, 그 실제적으로 나타난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된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옳지, 예수님께서도 ‘물침례’ 구원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생각한다. 캠벨주의자들이 그렇고 로마 카톨릭이 또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다면 요한복음 3장 그 어디건 “침례”에 관한 언급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1절, 2절, 3절..., 35절, 36절, 처음부터 끝절까지 눈씻고 찾아 보라.
어디에 “침례”와 관련된 말씀이 단 한 군데, 단 한 마디라도 눈에 띄는가? 캠벨주의자들이나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 어디서건 “물” 소리만 나오면 “여기 보세요, 물침례 이야기가 여기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흥분해서 떠벌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또 이상한 것은 “침례”라는 말이 나올 때, 거기 “물”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구절에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시무룩해져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그들은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가 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돼 버린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 역시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모른 척 창 밖만 내다 본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하고 “물”은 “물침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되는 “물”이나 “생수” 역시 “물침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한복음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배에서 흐르리라는 생수의 강들 역시 “물침례”와는 거리가 멀다. “물침례”에 정신이 혼미해진 자들이 “물” 소리만 나와도 그게 모두 “물침례”와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히스테리 반응과 같은 병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코필드는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라는 에베소서 5:26의 말씀과 연관해서 모든 물은 “말씀”을 예표한다고 못박고 있다(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캠벨주의자들이나 카톨릭이 어째서 물만 나오면 그것을 침례와 연관지으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미스테리다.
그렇다면 “물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절에서 니코데모에게 먼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여기 5절에서 “물과
성령”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자, 니코데모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보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다. 『사람이 물과...』 즉 “사람이 어미의 태에서” 태어나고 나서, 또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간명하게 결론을 내려 주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
『육신으로 난 것』, 즉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거듭남이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신다.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일단 어미의 태 속에 잉태되어 그 태로부터 태어난다. 이것은 육신적인 출생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간명한 설명인가! 어미의 태는 물 주머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 그 아기는 물 속에 있게 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물이 생물학적인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을 산부인과 의사한테서 배운 게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 배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창 1:20). 이처럼 지구 상에 존재하는 최초의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
결국 요한복음 3:5의 “물로 태어남”은 생물학적인 출생을 의미하며, 그 사실을 성경 자체가 해석해 주고 있다. 물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물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없었다. 유대인이 받았던 침례는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들이 물침례를 받은 것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출생을 정결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는 말씀은 오늘날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령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해야 한다. “당신이 어미의
태로부터 태어난 출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이 그것만 붙잡고 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당신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말이다.
6)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2:4-5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선명해진다.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와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 토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을 살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실천적인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도 없고 말씀에 실천적으로 순종하지도 않는 자가 말만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7) 계 12:10 『또 내가 들으니, 한 큰 음성이 하늘에서 말하기를 “이제 구원과 능력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는도다. 이는 우리 형제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고소하던 그 고소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사탄은
“고소자”나 “검사” 같은 부류의 적으로 지적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성도들을 환란 중간까지 고소해온 것을
듣는다. 환란 중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은 욥기 1,2장에서 그랬듯이 위 아래로 다니며 고소하고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다.
3. 천국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책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하시고 이제 침례인 요한의 예비로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려 하시는 왕국은 어떤 것인가? 그 왕국은 어떤 모습인가?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제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침례인 요한과 예수께서 전파하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것이다. 마태복음 3장부터는 마태복음의 주제인 “천국”에 관한 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3장을 들어가기에 앞서 천국에 관한 내용들을 분명히 알아야 하기에, 피터럭크만의 책들을 바탕으로 천국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이 부분의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1969>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1999>를 참조 바람.]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1)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이다.
물론 이 세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인간들의 왕국”(단 4:32), “세상의 나라”(눅 4;5), “이 세상의 나라들”(계 11:15)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 개의 나라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이 천국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 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연결된 문맥인 5절에서는 “땅의 유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말하여 그 대상을 유대인에게 한정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12에서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라는 말은 천국을 영적인 나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 “사회운동가”, “해방자” 등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님의 조명 없이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이해가 전혀 없이 현상을 어느 정도만 보고 정확한 판단이 없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영적인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천국”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는 따로 있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나라들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을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동안은 땅에 속한 그 왕국을 더 강조하겠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는 이 왕국, 즉 천국이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제시되는 왕국과 메시야, 그리고 그 예언에 대한 성취와 성경에서 이 왕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 왕국은 마태복음의 주제가 되는 나라로서,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나라이며, 몸을 입고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거듭남과는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메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왕은 단지 초림에 그 예언을 모두 성취하시지 않았다. 구약의 기술을 자세히 보면 왕이 나타나시는 것에 대해 초림과 재림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다시 자세히 보면 그 촛점은 초림보다는 재림에 더 많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그 왕의 나타나심을 재림의 상황에 맞게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주제를 “재림”(His Advent 또는 His Second Advent)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과 연관해서 본다면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the kingdom)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 그것도 지상 왕국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관점을 가졌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그러한 “왕국”이 아니다. 지금부터 전개해 나갈 “천국”(왕국)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이해한다면 그러한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락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천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인데, 이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거듭나지 않더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수 있는데(눅 1:32,33), 그 보좌는 결코 영적인 보좌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땅의 보좌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 (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령할 때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안되고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하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이므로 본 주제에서는 비켜나기로 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끌어 오신 두 왕국, 즉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두 왕국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나님은 이 두 왕국들을 어떻게 계획하셨으며, 이 왕국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이 왕국들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으며, 또 이 왕국들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가야 할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 와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왕국들 중에서도 특별히 “천국”에 촛점을 맞추어서 공부해 볼 것이다.
왕국에 대한 역사를 맨 처음부터 살펴본다면 창세기 1:1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우주를 만드셨다. 그는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그에게 굴복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한 존재를 세우셨는데, 그는 바로 모든 영적 세계의 우두머리인 한 그룹(cherub)이었다. 그는 루시퍼(Lucifer, 사 14:12)라고 불린다.
에스겔 28:14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
여기서 “투로의 왕”으로 묘사되는 그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고, 모든 아름다운 보석들과 또 북들과 관악기들이 그를 위해 있었다(13절). 그는 보좌를 덮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anointed cherub)이었다. 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뜻한다(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다. 우리는 지금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왕이다(왕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제사장이다(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정치적인 직책이라면 제사장은 영적인 직책이라는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에서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과 실제적인 통치의(정치적인) 나라(“천국”)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이다.
그가 타락하여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 14장에서는 그를 “바빌론 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사 14:4), 그를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던
자”(사 14:16)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이끌고 내려올 만한 권세가 있다(계 12:4). 그러나
그는 교만으로 타락했다. 그리고 그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이 두 왕국의 왕관을 빼앗으셨다.
4) 루시퍼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통치할 새로운 왕을
창조하셨다. 그는 아담이다.
(1) 창세기 1:28-30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subdue).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have dominion).』
이 구절은 인간에게 이 땅의 문화를 점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라고 주신 소위 “문화명령”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아담을 왕으로 임명하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왕권 위임”이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아담이 그 세계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은 실제적인 나라와 영적인 나라의 두 개의 왕관을 쓴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길고 긴 왕권 쟁탈전이 벌어진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으로 정해진 이 전쟁에서 사탄은 인간을 통해서 이 왕국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의 영은 죽었고 이후로 아담에게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으므로 영적 통치의 자격을 상실한다.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하나님께서 가져가 버리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저주를 하시는데, 창세기 3장에서 땅은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었고 아담은 땅에서 양식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고 평생동안 수고해야 했다(창 3:17-19). 그의 통치권은 땅에서 떠났고, 땅에 속한 실제적인 왕국(천국)의 왕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그가 빼앗긴 천국의 왕관은 루시퍼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사탄은 누가복음에서 과감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왕국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눅 4:6).
그리고 이때부터 영적인 왕국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인간 역사는 오로지 실제적인 왕국, 곧 천국과만 관계한다.
(2) 세 번째로 이 왕국(천국)을 차지하는 인물은 노아이다.
창세기 9:1,2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
홍수 이후에 텅 빈 땅을 다시 채우는 임무를 맡은 노아에게는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과 거의 비슷한 언약이 주어지는데, 노아는 동물들에게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는 다시 이 땅의 왕국의 왕관을 쓴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노아도 실수함으로써 이 왕관을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창세기 9:21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의 실수로 함은 범죄하였고(창 9:24) 그의 아들 카나안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함의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시날 땅에 그의 왕국을 세운다(창 10:9-14). 그의 이름은 님롯(Nimrod)으로서, 그는 사탄의 한 유형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는다. 다시 이 왕국은 사탄에게 넘어간 것이다.
(3) 이 왕국의 네번째 왕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18-21에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으며, 또 17:6에서는 『네게서 왕들이 나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왕국과 그의 씨와 이방 민족에 대한 언약이 맺어졌으며, 아브라함은 명실공히 “천국”의 왕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자신의 신정통치 왕국(천국)을 이루려고 계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에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들을 통하여 이 왕국의 약속은 이어져 온다.
창세기 15:13,14의 예언에 따라 이들은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영광의 탈출(출애굽)을 한다. 이 때에야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탄생하게 되고, 이 민족은 모세와 함께 한다.
신명기 33:5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다함께 모였을 때 그는(모세) 여수룬에서 왕이었도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이었다(신 5:24). 모세는 하나님과 항상 긴밀하게 대화했으며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의 “천국”을 이루시려는 계획 속에서 모세에게 그 왕의 위치를 부여하시고 권한을 주셨다. 모세는 표적과 이적을 행사하며 백성들을 이끌었다. 온 백성은 모세의 명령에 따랐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두 멸하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한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출 32:10).
그러나 이 왕은 좀 특별하다. 그는 단지 “천국”의 왕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창세기 49:10에서의 예언에 따르면 그 왕은 분명히 유다 지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모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자다(출 2:1).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인데, 이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기틀이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은 완전한 의의 통치이기 때문에 이 율법 또한 매우 엄격했다. 그러므로 이 모세는 다윗을 통하여 이루어질 왕국이 임하기 전에 그 왕국의 기틀을 잡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맡은 왕이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실수가 있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노함으로 바위를 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왕국은 인간들이 다스리기에 이토록 힘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국(천국)을 이루시기 이전에 율법을 주시고 그 왕국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놓기 위하여 준비하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카나안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 이후에는 여러 명의 재판관들을 통하여 그의 왕국(천국)을 다스리셨다(재판관기 2:16).
그러나 이 재판관들 중에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종종 있었으며, 이 재판관들이 죽은 이후에 백성들은 다시금 우상에게로 나아갔다. 결국 재판관들을 통하여도 이 “천국”은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이 재판관들은 재판관기 3:10의 옷니엘로 시작하여 사무엘까지 이르며(삼상 7:15), 그 이후에는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첫번째 왕은 사울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왕을 구했다(삼상 8장). 사울은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릇되이 나타난 자인데,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의 유형이다. 백성들은 ‘다른’ 왕을 받아들인 것이다.
(4) 이번에 등장하는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메시야 왕의 가장 직접인
유형인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이며(삼상 16:1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이다(삼상 16:1).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국을 약속하셨다.
사무엘하 7:12-16 『... 내가 네 몸에서 나올, 곧 네 뒤에 올 네 씨를 세우고, 내가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왕국이” 영원히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의 씨를 견고히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뒤에 오는 어떠한 왕도 다윗의 보좌에 대한 정통성이 없으면 “천국”의 왕관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아들”로 탄생하시고(마 1:1),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도 “다윗의 이름”으로 호산나 환호와 찬양을 받으셨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에 대한 관계는 마태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질 주요한 주제다.
그러나 다윗에게도 실패가 있었으니, 곧 힛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다. 그 사건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벌을 주셨다(삼하 12:10). 그래서 솔로몬이 등극할 때까지도 그는 아도니야와 싸워야 했다(왕상 1장).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이 솔로몬에게 이루어져 솔로몬에게 큰 왕국이 세워지고 성전이 세워졌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여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 하는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길을 트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서는 왕국이 분열되고 “천국”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에 한정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그의 씨에서 왕이 나타나리라는 계획을 계속 이루어 오시는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배도하여 나가지만 남쪽 유다 왕국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며 왕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신정국가(천국)는 실현되지 못하는데, 드디어 여코냐에 이르러서는 그 왕의 보좌의 정통성을 빼앗겨 유다 지파마저도 천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렘 22:30).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국이 전 우주에서부터 유다지방에 이르기까지 축소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이 왕국이 어떻게 축소되는지 주목하라 : 루시퍼(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 전 우주), 아담(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지구), 노아(천국 - 지구), 아브라함(천국 - 팔레스타인 땅), 모세(천국 - 팔레스타인 땅), 재판관들(천국 - 팔레스타인 땅), 다윗(천국 - 팔레스타인 땅), 르호보암(천국 - 유다 지파), 여코냐(없음), 예수 그리스도(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포로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였고, 백성들은 그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메시야는 민족의
해방자며, 이방 왕국들을 깨뜨리고 완전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세우는 자였다(단 2:44).
(5) 그리고 그 메시야 왕은 마태복음 4장에서 드디어 나타나시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3장과 4장에서 각각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은 이 두 개의 왕국을 함께 가져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메시야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되었을 때(요 1:11; 19:14,15) 이 왕국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 버리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이방인에게도 확장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재림으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 때까지 천국은
신비스런 형태로 감추어지게 되지만(마 13장),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때 그 “천국”은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계 20장). 그 때가 되면 이사야에서 예언된 평화로운 세상, 곧 전쟁이 그치고 사자가 풀을 뜯으며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는 그러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사 11장).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며 이루려고 노력하는 “천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다한 후 하늘과 땅이 불로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합쳐져서 하나님께서 맨 처음 계획하신 원래의 왕국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계 21,22장).
5) 구약 시대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로 왕은 탄생했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팔레스타인 땅에다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왕국이 임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즉, 예언적 계보를 따라서 두 언약(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시어 왕의 자격을 갖추시고(정통성),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이미 예언들을 통해 메시야 사상이 이방인에게까지 있었고(마 2장), 그 메시야가 오시면 이방왕국들은 무너진다(단 2:44).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의 왕은 끊어졌으나 그 보좌에서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타나야 한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메시야의 통치,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완전한 신정통치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침례인 요한의 등장이다. 예언에 따라 나타나시는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인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베풀면서 천국 복음을 전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침례인 요한이 예비한 길은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점이다.
1 그 무렵에 침례인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2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니,
『그 무렵에』(마 3:1) 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중 처음 6개월 내에 있었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순간이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는 침례를 받으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 무렵”이라는 말은 요한이 지속적으로 침례를 주며 천국 복음을 전파했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 중에 주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도 받으셨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누가복음 3:1,2에 나와 있다. 즉 『티베리오 카이사가 집권한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폰티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요, 갈릴리의 영주는 헤롯이고, 그의 아우 빌립은 이투레와 트라코니티 지방의 영주이며,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고, 안나스와 카야파가 대제사장들로 있을 때』이다. 카이사 아우구스토(눅 2:1)는 로마력 767년 8월 29일에 죽었는데, 그는 티베리오 카이사와 2년 동안 함께 통치했었다. 따라서 티베리오가 집권한 지 15년째라는 말은 아우구스토가 죽은 지 13년 후의 일로, 로마력 781년이란 말이다. (요한은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했으므로, 로마력으로 751년에 출생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출생하신 것이다. 이 기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린드버그의 <Christian Dogmatics>(p.392)를 보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절).
“천국”에 대해서는 앞 장인 ?천국? 부분에서 따로 긴 설명을 해 놓았다. 바로 여기에서 주석가들과 신학교들의 85%가 오류를 범한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성도들이 죽어서 안식하는 셋째 하늘의 낙원을 말하지 않는다. 이 왕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제적으로 이루실, 물리적이며 정치적인 왕국이다.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멸하신 후 홀로 우뚝 서게 될 그분의 왕국이다. 물론 그 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그 왕국의 전파와 거부와 회복에 관한 긴 역사가 왕과 더불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마 3:3 『이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그 사람이라. 말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하였더라. 』
본문은 이사야 40:3-8에서 가져온 인용이다. 누가복음 3:4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는데, 거기서도 역시 선지자 이사야의 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또 다른 이사야”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사야 1-39장은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그 이사야가 쓴 것이고, 40-66장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사야가 쓴 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소위 “제2이사야설”이라 부른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학자들은 한 책에서 다른 내용과 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제를 설명하면 무조건 저자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그 부분에서 이사야의 이름을 밝히면서 열두 번도 더 인용했다(롬 10:20, 마 3:3; 12:17, 눅 4:18, 롬 10:16 등). 이사야 39장과 40장을 갈라 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별히 그 “제2이사야”가 썼다는 부분에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속죄에 관한 장이 들어 있다(사 53장). 이러한 위대한 교리를 예언에서 빼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민수기 4:43에 따르면 레위인 사역자들은 모두 30세가 되어야 성전의 일을
수행할 수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제 30세가 되시어 그의 사역을 행하실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메시야 사역이 이루어지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여기 침례인 요한이 서 있다.
침례인 요한은 이사야에서 예언된 대로 왕의 길을 예비하는 선두주자(forerunner)이다. 그는 예언된 엘리야(말 4:5)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이다.
그가 설교한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이다. 그리고 이 회개는 왕을 맞아들이는 준비가 되고,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 임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말라키 4:5-6과 누가복음 1:17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불순종한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시킬 것이다.
메시야 왕이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목자없는 양의 상태, 흩어져서 들짐승들의 먹이가 된 상태이다(겔 34:5, 마 9:36). 이 “엘리야”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와서(말 4:5) 그의 사역, 곧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그 방법은 침례이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푸는데,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회개”의 표시로 침례를 받는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이고, 이것은 천국이 임하기 전에 유대인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이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신정통치 국가를 의미한다. 여코냐 이후에 다윗의 보좌에는 왕이 끊어졌고, 이제 그 보좌에 앉아 의로 통치하실 왕이 나와야 한다. 그 왕을 유대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왕이 임하시기 전에 그 길을 닦아 놓는 사역을 침례인 요한이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아직 이 당시에는 신약성경도 없었고, 거듭남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타난 침례인 요한의 설교는 지금 현시대에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부적합하다. 단지 왕국의 선행조건으로서 회개하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침례와 일치하는데, 메시야 왕국을 받아들이기 앞선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받는 침례를 요한의 침례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1) 『이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꿀이더라.』(마 3:4)
이 구절은 열왕기하 1:8의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털의 사람이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러나 침례인 요한은 외모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하다.
구약에서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침례인 요한에게 적용된다. 말라키 4:5에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약속하시는데, 성령께선 그 약속을 누가복음 1:17에다 적용하고 있다. 또 마가복음 1:2-3은 침례인 요한에 대한 설명인데, 3절은 이사야 40:3의 예언이고 2절은 말라키 3:1의 예언으로서, 이사야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은 말라키 4장의 엘리야와 연결된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 요한이 엘리야임을 증거하셨다(마 11:7-14).
엘리야와 요한의 유사성은 적그리스도의 유형 앞에서 증거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구약의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선포했으며, 침례인 요한은 헤롯 앞에서 선포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적그리스도 앞에서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직전에 왕국이 임하는 조건을 형성시키는 사역을 하다가 목베임당해 죽는다. 침례인 요한은 헤롯에게 목베임당했고, 재림 때 엘리야는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 목베임당할 것이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계시록> 11:3-12을 보시오).
엘리야가 다시 온 뒤에 있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말라키에서는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말 4:5), 엘리야는 바로 이 날이 이르기 전에 나타나 사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라면 요한 이후에 “주의 크고 무서운 날”과 재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구약에서 “왕의 오심”(the Advent of the King)은 초림과 재림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신구약 성경을 모두 놓고 보니 초림과 재림이 구분되는 것이지 구약 선지자들의 관점으로 볼 때 초림과 재림은 하나의 사건으로, 단지 왕이 오시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재림의 사건들은 초림에 모두 성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재림은 2000년 후로 연기되었다.) 이 당시가 바로 구약 시대처럼 초림과 재림을 같이 보는 상황이었다. 즉 이제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이 이르고, 주님이 왕으로 임하시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침례인 요한이 등장하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마 3: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주위의 모든 지역에서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들을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이 침례는 분명히 물에 잠기는(immerse) 침례가 분명하다. 요단강 안에서(in) 주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회에서 물뿌려 “세례”(sprinkle) 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화가들의 그림에 보면, 예수님과 요한이 요단강 물에 허리쯤 잠기도록 들어가서, 요한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그림을 볼 수 있다.)
(2) 신약적인 의미에서 침례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는 구원받은 후에 순종하는 간증이다. 성경에서 종종 침례가 구원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사도행전 2:28이 그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침례, 또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구원과는 관계없는 구절이다. 더욱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즉 침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그 모형의 행위를 함으로써 간증하는 것이다.
7 그러나 그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의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고
9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느니라.
10 또한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며,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욱 그렇다(마 23장). 요한은 9절에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기 때문이다(요 8:39).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이 사탄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똑같은 맥락에서 침례인 요한은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는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11절) 말은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씨임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씨를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다윗의 씨). 단지 그들이 할 일은 “다가오는 진노”, 즉 말라키 4장의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피하기 위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8절).
여기서 “독사들의 세대”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말이다. 잠언 30:11-13, 욥기 20:16, 시편 58:4, 미카 7:17 등이 이들과 연관되는 말씀인데, 이 각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말하는 문맥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이들은 “다가오는 진노”와 연관해서 등장하는데, 그때는 바로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 때이다. 이것은 재림 때에도 초림 때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 그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침례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실 지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또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다. 타작마당은 온 세상, 또는 이스라엘인데, 그는 알곡과 쭉정이의 분리 작업을 통해서 알곡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쭉정이에 속한 사람들은 심판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의 알곡과 쭉정이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19:16-22에서는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시편 1편에서는 복있는 사람을 주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악인은 ‘쭉정이’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과 관계된 백성이고, 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율법적인 의와 관계된다.
이 상황은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세우실 때 그분은 야곱에게서 불경건한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롬 11:26, 사 59:20). 이 날은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데, 그분은 이 날을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허물을 씻으실 것이고, 그 환란의 때에 알곡과 쭉정이는 분리되어, 이 심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요엘 2:29에 나타난 대로 주님은 주의 영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성령으로 보호하시지만, 자신들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들은 결국 쭉정이로 분류되어 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도 알곡이라고 말하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쭉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침례인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사역이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사람(계 12:17), 좀더 예언적으로 말하면 환란 시대에 끝까지 견디는 유대인(마 24:13)이 알곡의 범주에 들어간다.
(3) 우리는 이 두 구절(11,12절)에서 3가지의 침례를 볼 수 있는데, 첫째, 요한의 물침례, 둘째, 성령침례, 셋째, 불침례이다. 이와 연관해서 성경에서는 7가지 침례가 나오는데, 한번 정리해 보자.
1. 모세의 침례(고전 10:2)
: 이 침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지난 것과 구름기둥 아래서 행한 것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침례”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이 침례는 이스라엘 민족이 따로 부르심을 받은 민족의 표시이기도 하다(Called-out Assembly).
2. 요한의 침례(마 3:6) : 이 침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 즉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행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씻고 왕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행위이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손을 씻었다. 이것은 정결례인데, 죄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왕을 맞기 위해서 자기들의 죄를 씻는 정결례를 행해야 했다. 요한의 침례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요 1:31).
3. 십자가의 침례(마 20:22) :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각각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침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혹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을 이 침례와 연관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 침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4. 유대인의 침례(행 2:38) : 이 침례는 요한의 침례와도 연결된다. 둘 다 메시야 왕과 그 왕국을 받아들이기 위한 침례였고, 둘 다 죄를 씻기 위한 정결례로서의 침례였으며, 둘 다 왕국이 임하기 전 상태의 침례이다.
그러나 이 침례가 요한의 침례와 다른 것은, 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다렸던 왕이 오셨는데 그를 거부했다. 그들은 왕을 거부한 죄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왕을 거부한 그 죄를 씻으라고 설교한 것이고, 회개와 침례를 요구했다. 이것은 요한이 설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가 왕이 오시기 전에 왕을 영접할 자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면, 이 침례는 왕을 거부한 죄를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침례에는 표적이 따른다(행 2:43; 8:17; 19:6).
5. 이방인의 침례(행 10:48, 마 28:19) : 이 침례는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받는 침례로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고백이 필요하며, 그 공개적인 간증으로서 받는 침례이다. 이 침례는 구원을 이루거나 죄사함 받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 침례로는 구원받지 못하며, 그것은 단지 선한 양심의 고백일 뿐이다. 물은 모형이다(벧전 3:21). 이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곧 삼위일체 되신 주(Lord)의 이름으로 받는다(마 28:19, 행 10:48).
6. 영적 침례 또는 성령침례(고전 12:13, 엡 4:4-5, 마 3:11) : 이 침례는 세상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침례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는 이 침례를 말하면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 속하는 이 침례를 받은 성도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이 침례는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묻히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서 일어난다(고전 15:3-4). 그래서 성도가 물침례를 받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고, 또 부활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침례를 받아 능력을 행하는 것을 구분하는데,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침례는 방언을 말하는 침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소위 “능력”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성령의 외형적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을 행하는 것이 성령침례의 증거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침례는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것, 곧 구원받는 것이 성령침례이다.
7. 불 침례(마 3:11) : 많은 사람들은 이 불침례를 성령침례로 오해한다. 오순절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난 것은(행 2:3) 불이 아니었다. 그런 형태로 임하신 모습은 불로 침례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3:11의 불은 지옥 불을 의미한다. 그것은 심판의 불이다. 이것은 12절의 말씀과 연관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는 분께서는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신다. 이것이 불로 받는 침례이다.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만약 성령침례를 받지 못하면 그는 불침례를 받게 된다. 이것을 모르고 불침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청중들을 지옥에 가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침례에 대해서는 말씀보존학회 간 <일곱 침례>를 참조하시오.)
(4)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있는 요한에게 오셔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더라. (마 3:13)
14 그러나 요한이 말리며 말씀드리기를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니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니, 이에 그가 허락하더라.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이 침례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에게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를 알았었다. 물론 요한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 대중에게 증거하기도 했거니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침례는 물침례가 아니라 성령침례라는 것도 알았다.
요한은 은근히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와 침례를 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물침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는 회개하거나 자백할 만한 어떠한 죄도 없고, 정결례를 치러야 할 어떤 것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의식에 순종한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주님의 부활 후에는 물침례가 더 이상 유대인의 정결례로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롬 10:1-4). 따라서 침례를 통해서 의를 이루신다는 것은 십자가 이전 사건으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에게 침례를 통해 의를 이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는 것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개적인 간증일 뿐이고, 또 모형일 뿐이다(벧전 3:21).
(3장)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 보라, 하늘들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하시니라.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16절) 라는 표현을 보아, 침례는 물 속에 잠기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위대한 한 모형으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요나가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요나는 물속으로 던져져서 “잠겨졌다.” 그리고 죽었다. 그래서 침례란 죽어 묻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골 2:12, 롬 6:2-6).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분의 몸 안으로 “침례”받는다. 이것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연합을 이루며, 동시에 그분과 함께 죽고 묻히는 것이다. 또한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고 묻히고 부활했다는 영적인 경험(성령침례)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에 대한 모형의 행위이다. 물을 뿌리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것들을 증거할 수 없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1:31),
주님은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셔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주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방법은 성령께서 비둘기 처럼
그 위에 앉으시는 것이었다(16절). 그리고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머무는 분이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포했다(요 1:32,33).
이때 하나님 신격의 삼위가 모두 이 자리에 함께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음성을 발하셨고, 아들께서는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께서는 아들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17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은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첫째 아들이시고, 또한 “독생자”이시다. 하나님께는 성령으로 태어난 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출생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분을 따라서 많은 아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지만, 그들 모두는 영적으로만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는 인간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 없이 어머니에게서만 태어나셨으니, 육신적으로도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말씀과 더불어 하늘이 열린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여기에서, 또 한 번은 마태복음 17:5에서, 또 한 번은 요한복음 12:28에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휴거”를 의미하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도 성경에서 세 번 나오는데, 그것은 잠언 25:7과 요한계시록 4:1과 계시록 11:12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명기 16:16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지켜야 할 세 개의 명절이 있다(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그리고 이 세 절기 또한 휴거와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요한계시록> 4:2의 주석을 보라.]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의 침례에 순종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는데, 이 의(義)는
십자가의 의나 믿음의 의가 아니라 율법의 의이다. 믿음의 의는 로마서에 가서야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이 때는 아직
왕국의 상황이다. 예수께서는 아직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도 않았으며, 아직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표현되지도 않았다.
요한복음 1장은 마태복음 3장과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한다(요 1:30-34).
요한복음 1:29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지내신 이후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즉시” 광야로 인도되었다(막
1:12).
주님은 침례를 받으신 “그 다음날” 요한을 다시 만나러 가시지 않았고(요 1:29) 적어도 40일 후에 요한이
침례주고 있는 장소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식한 것은 예수님이
침례받으시고 적어도 40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죄가
사해진다든지 하는 진리는 전혀 계시받지 못했으며,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율법의 의”와 “천국”이었을 뿐이다.
주님은 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육신을 입어야 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로 들어가셔야 했다. 율법의 일을 이루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의가 요구하는 그 요구에 맞추셔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