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를 가르키는지에 대해서 몇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 - 유대인 랍비들의 견해 

    (Onkelos, Symmachus, Aben Ezra). 

2.  '천사' ( 욥 1:6;  2:1;  38:7; 단 3:25)란 견해 

  (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 

    (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이러한 해석들 가운데, 본문의 배경과 성경적 관례 

(cf. 신 32:5; 시 73:15;80:17; 호1:10), 

그리고 신학적 관점에서  세번째 해석이 가장 알맞습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의미 역시 위와 대조적으로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유대 랍비들, 

2.  인간의 딸들,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알맞습니다. 


묵상을 위한 적용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믿음의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외면적 아름다움과 세상적 화려함을 쫓아갈때 그 신앙은 타락의 길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의 것들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웠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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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6장 하나님의 아들들(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6:1-4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세 가지 학설

1.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담의 아들 가인 아벨 셋 중의 셋의 경건한 자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불경건한 자손들이라는 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고대 군주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지칭했고 사람의 딸들은 보통 사람들들을 가리킨다는 설3.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문자대로 일반 사람의 딸들이라는 설

성경 해석의 원칙

1.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2. 성경은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3. 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1.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6장 1절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의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는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아담 자손의 계보의 후손들이며 2절의 ‘사람의 딸들’이 그 자녀들 중의 딸들임을 알 수 있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는데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셋은 912세를 살았는데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노아 때 까지 이어지니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의 자녀들이 출생하였을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1) 다니엘 3장 25절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들과 같도다”

여기서 ‘신들의 아들’은 아람어 ‘바르 엘로힌’(בר אלהין)으로 칼빈은 천사라고 했다.

(2) 욥기 1장 6절(2:1; 38: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 1:6)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히브리어 ‘베네 하엘로힘’(בני האלהים)은 선한 천사들을 말한다(박윤선 주석).

이상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 천사들임을 알수 있다.

2)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1) 갈라디아서 3장 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헬라어 ‘휘오이 데우’(υἱοὶ θεοῦ)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신자를 가리킨다.

(2) 로마서 8장 19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기다림이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의 헬라어 ‘휘몬 투 데우’(υἱῶν τοῦ θεοῦ) 역시 예수님 재림시 신자들인 중생한 그리스도인들로 종말론적 영광에 입성할 것을 의미한다.

(3) 로마서 9:25-26와 호세아서 1:10-11

“25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지도자)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호 1:10-11)

위의 성구들은 흩어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모여서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말일에 일어날 장차 될 일을 호세아를 통해 예언했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증명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이방인들도 부르리라고 하였다.

Ⅱ. 성경을 문맥 안에서 해석하기

1. 셋의 후손은 모두 경건하고 가인의 후손은 모두 불경건한가?

 창세기 6:1-2의 “사람의 딸들”의 히브리어 ‘베놑 하아담(בנות האדם)은 영어로 ’doughters of men‘으로 불경건한 가인의 딸들이 아니며 창세기 5장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히브리어 ’베네 하엘로힘’(בני האלהים)은 영어로 ‘sons of the God’으로 경건한 셋의 아들들이 아니다.
가인의 딸들이 모두 불경건하며 셋의 아들들이 다 경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2절은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they married any of men were beautiful) 했는데 이는 특정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인의 후손인 딸들 전체가 아름다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셋의 아들들이 모두 경건할 수도 없다.
그리고 또한 홍수 심판은 경건한 아들들이 불경건한 딸들과 결혼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다.

Ⅲ.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기

1.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이 누구인가?

한글 성경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네필림(נפלים)’으로 ‘타락하다’, ‘떨어지다’, ‘버리다’의 뜻을 가진 동사 ‘나팔’(נפל)에서 왔다.
그러므로 ‘네필림’은 fallen one's로 ‘떨어진자’, ‘타락한 자’를 의미한다.

주전 2-3세기 때 70인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이다.
거기 창세기 6장 5절의 ‘네필림’은 헬라어 ‘호이 기간테스(οἱ γίγαντες)’로 ‘땅에서 난 자’, ‘타락한 자’로 타락한 천사를 의미한다.
천사는 하늘에서 난 자 인데 왜 땅에서 난 자인가?
유다서 1장 6절이 해답이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서 ‘자기 처소’란 헬라어 ‘이디온 오이케테리온’(ἴδιον οἰκητήριον으로서 ‘거할 처소’를 의미함으로 천사들의 거할 처소란 하늘나라인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아서 쫓겨나 유다서 6절이 말한 바 타락하여 ‘땅에서 난자’가 되었다.
이 땅으로 쫓겨난 타락한 천사와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장사요 거인인 ‘네필림’이라는 결론이다.

참고로, 외경 에녹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라고 했고 교회사가 요세프스도 동일하게 번역했으며 초대교회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순교자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엠브로스가 그랬고 현대에서 델리치, 빙크, 엉거, 척 스미스 등이 지지하였다.

Ⅳ.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이라는 설의 출처는?

초대교회 박해자로서 2세기 헬라 철학자 켈서스(celsus)는 예수는 유대인의 촌에서 왔고 엄마는 가난한 유대인이었는데 로마 군인과 간통하여 목수인 마리아의 아버지가 쫓아냈다고 하였다.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의 아들이다고 거짓 증언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집트에서 사술을 배워 유대서 사술을 부리며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정통성을 말살시키려고 편집하여 창세기 6장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이라고 하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이라고 창작했다.

이에 줄리언 황제가 동조했고 알렉산드리아 씨릴(Cyril of Alexandria)이 받아들여 기독교 정통성을 반박 보급했다.
이 이론을 어거스틴까지 받아들여 전파했고 칼빈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신학교가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Ⅴ.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

1. 천사가 죽지않는 것처럼 부활체는 죽지 않는다(막12:18-25)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 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떼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 천사가 결혼하지 않는 것처럼 부활체는 결혼하지 않는다(눅 20:34-38)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하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3. 그러나 사람의 모양으로 타락한 천사는 결혼한다.

1) 성경에 천사는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다(창 9:1-3)

1. 날이 저물 때에 두 천사가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으니 그들이 먹으니라.

여기서 천사는 씻고 먹고 자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다.

2) 성경에 육체로 온 천사는 성 교제를 할 수 있었다(창 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상관하리라’의 히브리어는 ‘베네드아’(ונדעה)이다.
동사 ‘야다’에서 왔으며 ‘야다’는 감각 기관을 통해 알며, 경험적을 ‘알다’의 뜻으로서 마음을 통해 알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상관하리라’를 영어성경에서는 'we have sex with them'으로 번역하였다.
타락한 동성연애자들인 소돔과 고모라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 성경에서 천사를 남자로 표현하였다(막 16:5-6)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은 영어성경에 ‘a young man dressed in a white robe’이며 헬라어에서 청년은 ‘네아니스코스’(νεανίσκος)로 분명히 남자 청년을 말한다.

Ⅵ. 셋의 자손이 모두 경건할 수 없는 이유

1. 노아의 사적에서 보는 경건(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 ‘이쉬 짣디크’(איש צדיק)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공정함과 의로움을 노력했다는 상대적인 의를 말하지 절대적 의를 말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 ‘타밈 하야’(תמים היה)는 ‘완수하는 자’로 흠과 티가 전혀 없는 도덕적 완전함을 의미한다기 보다 전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려는 도덕적인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천사는 젊은 남자로 표현하였으니 타락한 천사도 젊은 남자임에 틀림없고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네필림을 낳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UFO는 실제하며 타락한 천사 귀신의 장난으로 보고되고 있다.
저들이 사람의 딸들을 납치하여 타락한 천사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 성경의 일반적 용례(욥 1:6; 2:1; 38:7; 단 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1번 해석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다.
2번 해석은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3번 해석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 32:5; 시 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2. 인간의 딸들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 '부인'(4:19; 삿 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 20:14; 느 8:3)을 뜻하기도 한다.

삼는지라(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네피림

‘네피림’이란 히브리어의 ‘떨어지다(fall)’란 뜻을 지닌 ‘나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네피림’이란 단어를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으로 주장 하는 학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하게는 어떤 학자들은 ‘괴물(monster)’ 또는 ‘신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70인역(LXX)성경을 보면 ‘장부’란 뜻의 헬라어의 ‘기간테스’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벌겟역(Vulgate)성경과 킹제임스역(KJV)성경을 보면 ‘용사’ ‘거인’이란 뜻의 ‘자이언트(gian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나 혹은 천사와 인간 사이의 혼혈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네피림’을 그 신체적 특성상 장부나 거인으로 볼 수 있는 일단의 사람 혹은 족속을 가르키는 말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네피림’을 그 신체적 특성과 도덕적 특성까지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가해자’등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볼 때 노아 시대 당시의 ‘네피림’이란 거대한 신체를 지닌 ‘폭군들’ 내지는 ‘침략자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광야시대인 민수기 13장 33절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가나안 정탐꾼들이 돌아와 백성들에게 보고할 때 가나안 족속을 비유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네피림은 어떤 존재였는가?

네피림 (“타락한 자들, 거인들”)은 창세기 6:1-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성적인 관계로 태어난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 (마귀들)로서 직접 인간 여성들과 성적으로 교합하거나, 또는 인간 남성을 악령으로 사로잡아 인간 여성과 교합하였다고 봅니다.
이러한 교합은 네피림이라는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6:4).

마귀들이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성경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귀들은 일그러진 사악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우리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을 행한 뚜렷한 동기가 무엇일까에 대한 한 가지 추측은 메시아의 오심을 막기 위해 인간의 혈통을 오염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메시아가 뱀,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창세기 6 장에서 마귀들은 아마도 뱀의 패배를 막고, 죄 없는 "여자의 씨"가 태어날 수 없게 하려고 시도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시된 대답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그럴듯한 답변은 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히브리 전설과 여러 다른 전설들 (에녹서 및 여러 다른 성경 외 문서들)에 따르면, 그들은 대단히 큰 악행을 저질렀던 거인족으로서 영웅적인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큰 몸과 힘은 아마도 마귀적인 "DNA"와 인간의 유전이 혼합되면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가 주연 한 영화 “노아(Noah)"에 따르면, 네피림은 바위로 감싸인 타락한 천사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들에 대해 직접 말한 것은, 그들이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 이었다고 합니다(창세기 6:4)이.
네피림은 외계인, 천사, “감시자” 혹은 바위 괴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교합으로 생성된 육체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창세기 6:1-4).

네피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피림은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발생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네피림이 언급된 직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6:5-7).

하나님은 온 땅에 홍수를 내시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탄 동물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죽이셨습니다.
네피림을 포함한 다른 모든 생명체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창세기 6:11-22).

대홍수 후에도 네피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6:4은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귀들이 대홍수 이후에도 때때로 이러한 죄를 반복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홍수 이전과 비교해서 이런 일이 훨씬 적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3).

이 구절은 그곳에 네피림이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탐꾼의 생각에 자신들이 네피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덩치가 매우 큰 사람들을 보고는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네피림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는 홍수 이후에 마귀들이 다시 인간 여성들과 교합하여 더 많은 네피림을 생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네피림의 일부 특징이 노아의 며느리들 중에 한 며느리의 유전을 통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 “거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침략하는 동안 멸망하였고(여호수아 11:21-22),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사라졌습니다(신명기 3:11, 사무엘상 17 장).

오늘날 마귀들이 네피림을 생산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모든 마귀들을 고립시킴으로써, 마귀들과 인간들의 교합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신 것 같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은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라고 말합니다.

죄악을 저지른 모든 마귀들이 “갇힘” 바 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원래의 타락을 훨씬 더 넘어서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마귀들의 무리가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 여성들과 교합했던 마귀들이 바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진” 마귀들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더 이상 마귀들이 그러한 죄를 저지르게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네피림은 누구인가?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네피림의 해석에 대여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네피림은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셈 계열의 후손들과 세속적 전통을 이어받은 가인 계통의 후손들과의 결혼을 통하여 탄생된 비정상적인 거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네피림이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난 족속들이라면, 그러한 비정상적인 접촉과 탄생이 왜 그 당시에만 가능했느냐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정말로 영적 존재들과 인간들간의 성적 접촉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일들은 지금도 생겨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은 역사 초기에 영적 기원이 전혀 다른 인간들 사이의 육체적 접촉을 통하여 탄생된 영적 부조화의 존재들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영적인 지각력에 비해서 육체가 쓸데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발달된 존재들이었다. 이에 그들은 영적으로 둔감하여 이 땅에서 파괴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쓴 단어들이 여러 개 있다. 네피림도 이런 것들 중 하나로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그 동안 학자들간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과 이 '네피림'은 어떤 관계인가? 이들은 그들의 후손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들인가? 그리고 민13:33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네피림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본 거인과 창6:4의 네피림은 같은 것인가?

1. '네피림'과 '용사'
1) 같은 인물이라는 견해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후손들로 이 이야기는 영웅들의 유래를 설명한다. 드물게 쓰이는 말인 '네피림'(!ylypn)이 4절에서 '강한 자들', '영웅들'로 해석되는 것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을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의 결혼으로 보고 그 후손이 바로 거인이고 네피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네피림을 고대의 영웅들, 거인들로 보는 것은 칠십인역에서 유래한다.

2) 다른 인물이라는 견해
창6:4의 네피림이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이 아닌 고대의 다른 계층의 불경한 자들이다. 4절이 접속사 없이 시작한 것은 이들이 2절의 혼합 결혼으로 낳은 후손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에 난폭한 공격자들과 약탈자들이 널리 퍼져있었는데(4절) 네피림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 시작하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은 대개 사람의 딸과 하나님의 사람의 결혼을 셋 계통의 사람들과 가인 계통의 사람들의 혼합 결혼으로 보고 있다. 네피림은 타락한 자들로 압제자, 훼방자, 난폭한 자라는 뜻이다(Luther, Calvin, Keil, Murphy).

2. 민13:33과 네피림
1) 민13:33의 네피림
성경에서 창6:4 외에 네피림이 나오는 곳은 모직 민13:33뿐이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서 신장이 장대한 백성을 보았고(32절)또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낙 자손들은 목이 긴 자들의 자손을 뜻한다. 민13:33에서 네피림은 분명 칠십인역은 네피림을 기간테스(gigonte", 장부)로 번역하였고 불가타역은 giant(지안트, 거인, 용사)로 번역하였다.

2) 민13:33의 네피림과 창6:4의 네피림
벤함(G.J.Wenham)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민13:33의 네피림을 언급하면서 이 들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네피림은 거인이며 용사이고 혼합 결혼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칼라쉬(Kalisch)도 민13:33에 근거하여 칠십인역과 A.V.역 그리고 불가타역의 거인이란 번역을 지지한다. 그러나 민13:33에서 네피림이 사용된 것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그 땅 족속들의 모습이 마치 홍수 전 노아 시대의 네피림같이 장대하고 난폭하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민13:33의 아낙 자손들이 우연히 거인이었을지는 모르나 이들이 곧 창3:4의 네피림을 정의하여주지는 못한다. 창6:4의 네피림은 도덕적 이슈와 관련되고 민13:33의 네피림은 신체적인 것과 관계된다.

3. 천사인으로 보려는 시도
델리취(Delizsch)와 쿠르츠(Kurtz)는 네피림을 천사들이 낳은 천사인(天使人)으로 보려고 하였다. 델리취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가하려고 결심하셨을 때 거인들이 생겨났다. 또한 그 후에도 초 현세적인 존재들과 인간적인 존재들 사이에 이러한 부자연적인 관계가 지속되었을 때 이러한 거인들이 생겨났다"고 창6:4을 해석하였다. 쿠르츠(Kurtz)는 창6:4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네피림은 당시에 땅 위에 있었고 또한 이것이 있고 난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에게로 가서 아이들을 낳았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왔던 이 당시와 또한 그 후에도 그들은 네피림은 낳았다." 이들은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인 천사인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하고 무리한 잘못된 성경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4. 네피림
네피림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겔32:20-28이 창6:1-4을 암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lpn(나팔, 떨어지다)을 네피림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gigonte"(기간테스)는 땅과 하늘의 결합의 소산물인데 칠십인역은 네피림을 이 단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히브리어 어근인 lpn(나팔)은 '공격하라'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램48:32, 수11:7 욥1:15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이 동사 lpn(나팔)의 명사형은 공격자들, 약탈자들, 강도들이라는 뜻이다. 고대 역본 중 아퀼라역은 네피림을 oJi biaioi(호이 에피피프톤테스, 공격하는 자들)로 심마쿠스역은 (호이 비아이오이, 강력한 자들) 번역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네피림을 살펴보았다. 네피림은 천사의 후손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민3:33과 창6:4의 네피림은 같기는 하나 관점의 차이가 있다. 네피림은 노아 당시에 존재하였던 일군의 무법한 행패꾼이다. 강도,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로서 비도덕적인 인간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자들이 판을 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신다. 이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기간을 결정짓는 시금석이 된다.

용어 해설
1. 네피림
네피림의 어원적 의미는 한글 개역성경에는 '장부들', 칠십인역에는 '거인들'로 번역되었으며 때로는 영웅들, 강한 자 등이 의미로도 나타난다. 히브리어로는 !ylypn이며 그 어근은 naphal이고 '떨어지다", '타락하다' '쫓겨나다'의 뜻으로 쓰여진다. 네피림은 흔히 giant(거인)로 보고 있으나 타락한 폭력배와 같이 부도덕한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신의 영과 인간이 결합하여 생긴 묘한 신화적 존재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견해도 있다. 그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했다는 이론에 의하여 영이 없는 인간을 네피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많은 구약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네피림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경건한 자 또는 가인의 후손으로서 부도덕한 자로 보고 있다.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유다서 7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간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에서 다른 색을 따라 간음했다는 것을 천사와 간음한 것으로 보고있으나 헬라어 성경에는 다른 색(色)을 '다른 육'이라고 했다. 즉 다른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가 없는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창세기 5장과 6장의 연결로 본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왕상2:3, 5:7 시73:15 신32:5 호1: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을 의미한다.

3. 사람의 딸들
구약에서 '사람'이란 말은 통상적인 보통 인간을 의미하는 아담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딸'은 하나님의 아들'과 대구 적으로 쓰인다. 즉 가인의 자손으로 불경건한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경의치 않는 자들의 딸을 의미한다. 이들은 물질주의 문명을 이룬 가인의 자손들로서 허망되고 불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의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경건한 자손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 즉 셋의 경건한 후손들이 그들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들이 좋아하는대로 아내를 삼았다.

4. 천사
1) 천사의 정의 : 천사라는 의미의 영어angel은 '사자'를 의미하는 희랍어 aj ggeio"(앙겔로스)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성경에는 권능 있는 자들(시29:1 89:6), 거룩한 자들(시89:5, 7), 천군들(눅2:13), 만군들의 용어로도 사용된다.

2) 천사의 속성 :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들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창조한 장엄한 존재이다(시148:2-5). 천사들은 인간이 창조되기 오래 전에 창조되었으며(욥38:7),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재에서 자연계로 어떠한 물리적 장애의 방해도 받지 않고 뜻대로 왕복할 수 있다(행12:7). 그러나 그들은 전능한 존재는 아니다(시103:20). 천사들은 또한 최고의 지능과 지혜를 부여받았으나(상하4:17,20) 전지한 존재는 아니다(마24:36).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주장을 논박할 때 예수님은 천사들은 성적 존재가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천사는 인간적인 특성과 신적인 특성을 함께 지닌 피조적 존재이다.

3) 천사의 인간적 특성 : 천사들은 항상 인간의 형상으로 출현하나, 동물, 새 또는 물체와 같이 인간 이하의 형상으로는 출현하지 않는다. 주의 천사는 불과 구름 가운데서 말하고 당나귀를 통해 말하게 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 자신을 어느 쪽과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항상 옷을 입고 있다. 많은 경우에 천사들은 사람처럼 가장하여 처음에는 언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저녁식사의 손님으로 새 사람을 초대하였다. 한 천사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남아 있었고 다른 두 천사는 소돔으로 내려가 롯과 함께 밤을 지냈는데 롯은 그들을 사람으로 알고있었다(창18:2,19:1). 때때로 천사들은 매우 두려운 모습의 용모나 옷을 입은 남자로 자신을 나타내 보였다(눅24:4) 많은 경우에 천사들은 '사람' 또는 '사람의 모양'으로 기술되었다(겔40:3 단10:18 슥2:1). 이러한 실례를 통해서 볼 때 천사들은 즉각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얼마 후에 모습 그대로 인식되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천사들이 즉시 천사로 인식되기도 했다(신22:31 삼하24:17 눅1:11).



방주(8392) 테바( têbâh) תֵּבָה 

1. 궤,  2. 방주,  3. 상자
발음 / 테바(têbâh)
관련 성경 / 방주(창 6:14, 7:1, 9:10), 갈 상자(출 2:3), 상자(출 2:5)
구약 성경 / 28회 사용

아담 이후에 타락한 인류의 역사를 소개한 후에(창 5장)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세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태초에. 베레시트).
노예로만 살았던 백성들에게 쉼이 무엇인가를 깨우치시려고 하나님의 안식을 가르쳤습니다(안식. 솨바트).
애급의 바로 왕은 뱀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했던 백성들에게 뱀은 가장 간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존재라고 깨우칩니다(뱀. 나하쉬).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양만 갖춘 존재(형상. 데무트)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형상.체렘).
창세기 6장은 죄로 오염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 심판과 그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6:1-4.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의 발전 과정
6:5-7. 세상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염려
6:8-22. 노아를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방주를 건조하도록 명령하시는 내용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한 이해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 즉 가인의 후손은 사람의 딸들로서 불경건한 후예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가 아벨 대신 얻은 셋의 자손들은 경건한 자들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저주 받은 아들 함의 후손과 축복을 아들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네피림이란 거인들과 장부를 가리키는 듯하나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원어대로 소개할 뿐입니다.



18절. 언약
어원은 '먹다' 또는 '사이에' 그리고 '묶다'라는 뜻으로 추정, 아담에 이어 두번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급된 이 용어는 하나님이 택하신 당신 백성과 일방적으르 맺는 계약을 뜻한다. 자부. 아들들의 아내로서 즉 며느리들을 가리키는 바 이미 노아의 아들들이 가정을 꾸민 장년들임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이름(복합 명사)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1. 하나님은 창조주(엘 로힘, Elohim)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여호와, Jehovah)

3.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엘 로이, El Roi)

4.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엘 샤다이, El Shaddai)

5.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엘 올람, El Olam)

6.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나함, Naham)

7. 하나님은 모든 것 다해 사랑하시는 분(엘 칸나 , El Kanna)

8.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여호와 치드케누, Jehovah Tsidkenu)

9.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여호와 이레, Jehovah Jireh)

10.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엘 엘리온, El Elyon)

11.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여호와 삼마, Jehovah Samma)

12.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분(챈, Chen)

13.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여호와 닛시, Jehovah Nissi)

14.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여호와 카도쉬, Jehovah Kadesh)

15. 하나님은 평강(여호와 샬롬, Jehovah Shalom)

16. 하나님은 우리의 왕(여호와 멜렉, Jehovah Melek)

17. 하나님은 치료자(여호와 라파, Jehovah Rapha)

18. 하나님은 부드러운 분(알룹, Al lup)

19. 하나님은 목자(여호와 로이, Jehova Roi)

20. 하나님은 능력(여호와 체바오트, Jehova Sebaot)

21.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여호와 추리, Jehova Tsuri)

22.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아도나이, Adonai)

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마누엘, Immanuel)

24.  하나님은 말씀(로고스, Logos)

25.  하나님은 용서 하시는 분(암모스, Amnos)

26.  하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자오 히도르,  Zao Hydor)

27.  하나님은 빛(포스, Phos)

28.  하나님은 거룩한 영(프뉴마, Pneuma)

29.  하나님은 사랑(아가페, Agape)

30.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하사, Has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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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사무엘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니라

한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기쁨의 원천은 사무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수치와 고통에서 건져 내고 영예로운 위치로 올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대적 브닌나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응답해 주신 하나님보다 응답 자체를 더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나는 또한 세계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와는 다르게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이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번영과 쇠퇴, 행복과 불행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예언적 성격을 띱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왕권이 수립될 것을 내다봅니다. 이 왕권은 메시아의 모형인 다윗에서 첫 실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서 완전히 성취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대적을 깨뜨리시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왕입니다.
한나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단순한 감사 찬송을 넘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우주적인 메시아의 통치를 언급하는 구속사적인 대 예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찬송은 우주적 및 특히 경제, 출산, 신분, 등과 같은 개인적 문제에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세상만사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할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본 찬송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 하는 이상적인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임도 노래합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 멀지 않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세워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왕국의 건설을 준비할 자는 바로 사무엘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한나의 찬양은 사무엘의 소명을 미리 예시해 주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볼 때 한나의 찬양은 단순한 인간적 감성을 초월한, 성령에 감화되어 읊은 일종의 예언 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를 꿰뚫고 있으니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황금 열쇠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일명 ‘구약 교회의 송가’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구속의 찬가로는 미리암의 노래, 드보라의 노래, 그리고 신약의 마리아의 노래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여경지근 - 호와를 외하는 것이 식의
주경지근(主敬知根)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다섯 가지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란 말씀을 사자성어로 간략하게 줄여서 성명한다면 "여경지근"이라고 하겠다.

첫째,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가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의 학업성취가 향상된다.

교육은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권위가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의 권위는 '권위주의'와는 구별돼야 한다. 진정한 권위는 교육에 있어 너무나 소중한 가치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육이 회복될 때 학업성취는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둘째, 경청할 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경청하게 될 때, 그 집중하는 태도는 그대로 학업 태도로 전이된다. 자녀가 당장 몇 점의 점수가 오르고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청하는 태도다. 왜냐하면 경청하는 태도는 고기잡는 법을 알아서 수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는, 지식을 얻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부모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공손한 자세로 눈을 부모님의 눈에 맞추면서 정성껏 경청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더 깊이 알아갈 때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고(벧후1:4), 그의 성품을 닮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맺게 되는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지혜의 샘과 같아서 지속적으로 학업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지금 성적이 높지 않아도 또한IQ가 높지 않아도 충성스럽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자녀는 향후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크리스천의 자녀교육 성공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녀교육의 성공은 우리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 일류 기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된 자들이다.

넷째,  비전과 꿈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저도 모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 '저도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요'라는 비전과 꿈이 생기는데 이 비전과 꿈이야말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동기유발'이다. 왜 공부하는지를 알고 공부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공부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도 왜 공부하는지를 모른다. 대부분이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그리고 부모의 강제에 의해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공부한다. 그래서는 공부의 능률이 오를 리가 없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품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 대한 비전과 꿈은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갖게 된다. 이러한 교육의지를 지닌 학생에게는 학업성취의 향상이 따라 오게 된다.

우리 자녀들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것은 당장의 성적을 올리는 일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게 될 때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깨닫게 된다. 자기 인생의 목적이 생기게 되고 달려갈 방향이 잡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나의 달려갈 길'(행20:24)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마이 웨이'(My Way)를 깨닫게 되면 달려가게 되고, 그런 비전과 동기가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섯째, '통찰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근본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이 땅의 보이는 실재가 아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떠서 초월을 바라봐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거룩한 상상이다. 이 상상이야말로 계시와의 접촉점이 된다.

실재하시는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상상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는 이 거룩한 상상력이 계발된다. 이것은 엄청난 지혜의 보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고, 초월의 세계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모든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경외할 때 갖게 되는 통찰력은 마치 정찰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는 모퉁이길을 돌아설 때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랐지만, 높은 곳에서는 전체를 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갖게 되는 이 통찰력은 공간적으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준다.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가삭 어떻게 시작되서 어떻게 발전해서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녀들 개인의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도 갖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얻게 되는 이 지혜는 단지 지식과 정보를 얼마 더 습득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이 지혜는 모든 지식의 샘과 같아서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수많은 지식을 얻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더 많은 지식을 쌓는 일보다 먼저 이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신앙-태도-학업의 관계 구조다. 신앙과 태도, 그리고 학업은 서로 연결돼 있다. 여경지근의 원리는 바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권위를 인정하고 경청하게 되며 새 성품이 형성되며 꿈과 비전이 생기고 통찰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학업성취를 향상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성경적인 교육법은 이 세 가지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세우고 그래서 그의 태도가 달라지고 그 태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은사가 개발되도록 돕는 것"이라며 "신앙과 태도가 형성되지 않은 채, 억지로 공부시키며 학업 성적만을 올리려는 노력은 지혜롭지 못하다. 왜냐면 기본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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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저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였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하여 영원히 천국에 거하며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태초부터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2000여년 전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친히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의 보좌를 뒤로 하시고 이 세상에 까지 오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말로는 ‘사랑한다’ 또는 ‘믿는다’ 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란 것은 관계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없으며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단어들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예배,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하며 우리의 가지고 있는 모든 고난과 짐, 그리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바 아버지
생명의 근원이시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창조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용서도 하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하나님
전능자이시지만 절제하시는 하나님
영존하시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또한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
모든 것을 충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피난처요 요새요 방패이시고 산성이신 하나님
목자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므로 우리가 대면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의 눈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그 존재도 알 수 없고 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감사하게 담겨 있습니다. 위에 있는 목록은 정말 어떻게 보면 대표적인 하나님에 관한 표현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표현을 성경을 묵상하시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질문을 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께는 이름이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필요하실까요? 성경 곳곳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봉사를 하고 레아와 라헬을 포함한 가족을 데리고 이제 에서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 전에 야곱은 압복나루에서 다른 가족을 다 건네고 혼자 남아 하나님과 씨름을 날을 새도록 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 축복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 씨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에 야곱이 청하되 “원컨대, 당신의 이름을 내게 고하소서” 하니, 그 사람이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세기 32:29)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왜 이름을 묻느냐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 태움제를 드리며 천사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 마노아는 부인을 통해 삼손에 대해 계시를 받지만 다시 한번 그 계시를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천사가 다시 한번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시는데 이때 마노아는 하나님께 태움제를 드리며 이 질문을 합니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천사에게 묻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하리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사사기 13:17-18)

이 부분 (빨간 글씨)은 한국말 번역이 원어하고 다른 부분입니다. 영어와 원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Why askest thou thus after my name, seeing it is Wonderful?”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위에 빨간 글씨로 된 부분을 비교한다면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물었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 리스트 중에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한국말로는 여호와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히브리어는 . (나중에 ‘여호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헬라어로는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표현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지만 만 번 넘게 언급되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약 6518번) 여호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애굽의 왕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기를 위해 부르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주신 이름입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보옵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에흐예 (여호와)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에흐예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3-14)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특별히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사랑하고 관심이 가고 감사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욱 알기 원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런 만남과 시간을 통하여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 앞에서 하지 않게 되고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고쳐서라도 맞추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기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매우 적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일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싫어하시는 것들 여섯이 있고 또 그의 마음에 미워하시는 것들 일곱이 있으니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다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6:16-19)
이 외에도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증오하시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건 무엇일까요?
긍휼 성실, 진실, 사랑,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 통회하는 심령, 공의를 행하는 거, 곧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의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생이요 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거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갈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31-32)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지식은 정말 열심히 배워가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도 자식교육에 세상 교육만 강요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정작 가장 중요한 지식은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야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기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존재인지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초자연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이다 라고 주장하고 불가론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인 이유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신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어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허락하신 것이고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사람은 창조되고 얼마 후에 타락하게 된 것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오랫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에 대해 알았다면 사탄의 꾀임에 쉽게 넣어갔었을까요? 이 부분은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창조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고 확신이 없었던 것을 아닐까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축복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신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가 멸망하고 영원한 지옥불로 가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확실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 6:3)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태움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예배당에는 매주 출석하지만 과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매우 적은 수가 하나님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론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고 피가 피를 따를 뿐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1-6)

아무리 세상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저술하고 읽고 논문을 쓰고 연구하여도 이는 썩어질 것이지 절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꾀였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지식을 먼저 많이 습득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 잘 산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부자로 산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 하지만 돈 없어도 멋있고 신실하게 잘 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 중에는 잘 사는 사람들이 드문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잘못된 표현인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아둔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다시 이 표현을 제대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도 모를뿐더러 하나님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르면 망하는 것인데 이를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에서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외치지 않으며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나 싫어하는 것도 모르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크시고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보이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백히 저희 속에 있음이라.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격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느니라.” (로마서 1:19-2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셨지만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옛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 중에 시각적 모형으로 주신 제사 율법 그리고 여호와의 절기 등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가 이 아들로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세계도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2)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브리서 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도 이 마지막 날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셨고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로는 매우 쉬워 보이지만 이해하기 매우 힘든 부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여인의 뱃속에서부터 십자가 사건을 겪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셔서 죽음과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부터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모든 부분. 하늘의 보좌를 두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이 사역을 감당하셔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사랑과 은혜.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사람들은 이 부분에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부분입니까?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십계명 (3번째 계명)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2번을 걸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계명에서 3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부분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출애굽기 20:7)

유대인들이 이 부분을 신성모독죄라 하는데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성호 즉 하나님의 이름을 공부하는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영어로 보면 한국말로 번역된 3번째 계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어와 비교해 보면 한글성경은 원어에서 의도한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만 본다면 3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또는 실없이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Yehowah thy God in vain, for Yehowah will not hold him guiltless who taketh His name in vain.”

Take 나싸 (naw-saw) (한글로는 부르다 라고 번역이 된 부분입니다) 이를 원어에 더 충실히 번역을 한다면 한글성경에 있는 내용을 보완하여 수정할 수 있습니다.
Vain 솨브 (shawv)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거짓되게, 무익하게, 가치없게 가지고 다니면 죄 없다 아니하리니”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어에 충실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백성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인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거짓되게 무익하게 가지고 다니면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외에도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정말 열심히 부르짖지만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는 증거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이는 십계명 중에서 제 3 계명을 어긴 사람들의 예 중에 하나입니다. ‘주여’라며 하나님의 이름은 열심히 부르짖고 다니지만 정작 하나님의 자녀로써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주여 주여’ 말로만 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 91:14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사 5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렘 16:21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9:7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1,12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6,7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또한 나와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4: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2:32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시 79: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 2: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2.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축복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이 그리로 달려가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10)

하나님을 이름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는 것은 그 분을 관계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는 천국과 지옥, 풍성과 메마름 그리고 죽음과 영생의 차이점입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것임에도 그리고 너무나 확실하고 중요한 것임에도 이런 차이점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은 병거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리로다.” (시편 20:7)

구약 시대에는 병거와 말이 공격과 방어에 매우 귀하게 쓰였던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었던 믿음의 조상 중에 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제 병거와 말을 다른 것들로 비유할 수 있지만 과연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자랑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내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돈이나 권력 또는 다른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의지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느니라.” (잠언 21:31)

요즘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문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으로 썩어질 것들을 내세우고 자랑하고 다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다니면서도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계속 쫓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을 그 분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면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게 됩니다. 그 이름이 우리에게 견고한 망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지 환난의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성호를 한번 리스트 해봅시다. 이 중에는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성호/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중요한 단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필요하시지 않으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주신 이름들이 성경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라고 해야 할지 이름이라 할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지만 밑에는 우선 리스트만 먼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엘로힘 (~2500 번) –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데 이름이라 할지 title인지 공부할 부분입니다. (창세기 1장에 각 절마다 등장하는 성호가 엘로힘입니다)
여호와/야훼 (~6500 번) – 창세기 2장에 등장하며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기에 우린 이 이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이름에 관하여는 나중에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발음하면 큰일난다 생각하기에 아도나이라고 고쳐서 발음합니다.
아도나이 (~430 번) –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아도나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십계명 3번째 계명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도나이 (요드 + 헤 + 바우 + 헤)
야후 (요드 + 헤 + 바우) 아도나이에서 ‘헤’가 빠져서 서기관들이 실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성호도 있다. => 예후, 여호수아의 여호, 이사야의 ‘야’

나머지는 이제 위에 3 이름에 더해져서 불리어지는 것으로 (compound name)복합단어들입니다.

엘 엘리온 (여호와 엘리온) – 지존자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God the most high)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처음 쓰여집니다.
엘 로이 – 주는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갈이 만난 하나님)
엘 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 /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엘 울람 – 영원하신 하나님 /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로페 –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여호와 사바옷 – 만군의 여호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여호와 자딕/여호와 자디케노 –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이레 –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수양)
여호와 샬롬 –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로히 – 목자 (시편 23:1)
여호와 메코티신케 –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샴마 – 거기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 그 가운데 계신 자
야 – 여호와의 짧은 형태 (요드 + 헤) 할렐루야의 야가 이 형태입니다. (Praise God)

하나님의 이름을 배운다는 것 또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귀한 한 학기가 되도록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호 (엘 엘욘 / 엘리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배워가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와 대적하는 자가 바로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반응이 틀린 것이 참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배워가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한 부류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전지전능하심을 깨닫고 그 크신 보좌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게 되거나 하나님을 지존자와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믿고 교만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지존자로 고백하는 믿음의 조상 중에 한 분이십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지존자 하나님이라 인정하게 되는지 성경에 있는 스토리를 통해 알아봅시다.

창세기 14장에는 시날, 엘라살, 엘람, 그리고 고임 왕들이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그리고 소알 왕들과 전쟁을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전쟁에서 다섯 왕은 오고 있는 길에 있던 민족들과 거민들까지 몰아낸 넷 왕에게 밀려 도망가게 되는데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소식을 도망한 자 하나가 아브람에게 알리는데 아브람은 말도 안되는 기적을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집에서 훈련한 318명만을 거느리고 4 왕들을 치고 이기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브람의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댁이 아브람을 영접하러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더라.” (창세기 14:18)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여 말하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요 지존자 하나님이시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아브람의 대적을 그의 손에 붙이신 지존자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9-20)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요 지존자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고 맹세하노니”” (창세기 14:22)

아브람이 파한 4 왕들은 이미 5 왕들의 군대를 파한 군대였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무모하고 말도 설명이 되지 않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통해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장면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르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가족이 정착했었던 집을 버리고 조카인 룻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아브람은 이때 본토를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친척은 떠나지 못하고 룻과 함께 동행을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란 땅에 갔다가 아버지인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룻과 함께 가게 됩니다. 이때 아브람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왔지만 기근이 있어 애굽 땅에 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이제 보시요, 나 알기에 그대는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 그러므로 애굽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청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고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살겠노라” 하니라.” (창세기 12:11-13)

아브람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고 바로는 사라를 취하여 궁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며 신으로 대접을 받았던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브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무도 건들지 못하고 대적하거나 함부로 말도 할 수 없었던 바로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개입하셔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아내도 다시 얻었으며 많은 소유도 얻게 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브람은 알게 된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를 한 번에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을 아브람은 믿게 되고 애굽에서 떠나 네게브 지방으로 올라오면서 하나님께서 처음에 명령하신대로 친척인 롯과 헤어집니다. 이때 롯이 선택한 땅이 요단 온 들로 가 소돔에 정착하게 되고 롯과 헤어지고 나서야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면서 그 당시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 약속을 애굽 땅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주셨으면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을 했었을까요? 과연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미 나이가 75세가 넘었으며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도 아닌 자신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아브람은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럼 다시 14장에서 보인 아브람의 자세와 12장에서 나누었던 아브람의 자세의 다른 점을 살펴봅시다.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아브람의 행동과 성격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람이었지만 이런 아브람이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만을 데리고 4 왕의 연합군을 친 것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며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런 무모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아브람이 이런게 담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아내도 아니고 자신을 떠난 조카 롯을 위해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갑자기 무모한 행동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든든한 백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애굽에 있었던 사건이 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며 좌절했었을 아브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권세를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겼을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브람에게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에게 아내를 찾아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람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지고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살펴보면 아브람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자녀가 생길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간섭하시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 믿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무모한 행동은 성경의 문맥을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이 사건 후입니다. 멜기세덱은 지존자 하나님 곧 엘 엘룐의 제사장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엘 엘룐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존자이십니다. (God the Most High!)
창세기 11장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라지고 니므롯과 세미라미스를 통해 만들어진 거짓 종교 곧 우상을 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족보 중에 있는 데라마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인물이었을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미했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싶으셨던 것이고 아브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존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며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멜기세덱을 통해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심과 지존자 하나님이 저희의 대속주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시편 78:35)

다니엘에서 이 부분을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지존자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레슨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주인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살았을 때에는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바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바벨론이었습니다. 절대 왕정을 설립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왕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 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 기록된 대로 인류의 역사의 주인을 하나님이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존자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아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의 놀라움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2-3)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명한 말대로니 이는 지존자께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인생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 (다니엘 4:17)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다니엘 4:26)

다니엘의 꿈풀이에도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잊고 교만해 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라의 도성을 삼고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다니엘 4:30) 같이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 사람에게 쫓겨 하나님께서만이 지존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존자께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대하였나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 말하여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다니엘 4:34-35)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곧 지존자 하나님께서 지상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 엘룐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배우고 알아야 하며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을 먹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주권자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지존자가 아니시며 가장 높으신 분이 되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4,27)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되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하나님이 지존자이심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지 모르고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면 걱정하고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으며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지 해결하려다가 역부족인 것을 알게 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평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몸과 혼을 함께 지옥에 능히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28-31)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하여 영적인 세계 또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손에 맡겨져 있으며 하나님께서만이 이 세상의 지존자이시므로 주권자이시므로 다음 구절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요셉의 스토리를 예로 들어봅시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오해를 사 감옥에 까지 가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감옥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감옥에 간 것인데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망하고 쓴 소리를 하게 되고 미움만 가득차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쌓여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소서. 이는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신 것이니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당신들을 세상에 남겨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이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5,7-8)

요셉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었으므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들이나 하나님의 향한 원망을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엘 엘룐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원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엘 엘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면 이 말씀이 좀더 이해가 될 것이며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 엘룐이라는 것을 알면 마음에 평강이 생기고 세상적으로 힘들고 좌절할 수 있어도 감사함으로 쓴소리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주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로페 / 라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술로 나온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다른 경우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나눌 여호와 로페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배경 스토리

 

야곱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요셉을 통하여 애굽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7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215년이 지난 후 출애굽했을 당시에는 약 8500 배가 늘어난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늘어나고 번성하자 애굽의 바로 역시 이를 두려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이 늘어나 심히 강대해져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할수록 더욱 번성하고 늘어나니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니라.” (출애굽기 1:8-12)

 

그리고 바로는 늘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히브리어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이로 인하여 남자 아기들을 나일강에 던지라고 하는데 이 당시에 이미 아론은 태어났고 모세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런 명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아론과 모세는 3살 차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론은 나일강에 버리라는 바로의 명이 내려지기 전에 태어났기에 (하지만 산파들이 바로의 명을 어겼기에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숨기울 필요가 없었던 거 같습니다.

 

모세 또한 태어났을 때에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어머니인 요게벳이 모세를 3달 동안 숨기다가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보내어집니다. 이때 정말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의 딸은 아버지인 바로가 히브리인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를 불쌍히 여겨 히브리 사람 아기인 모세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누이인 미리암이 바로의 딸에게 유모를 부르자고 부탁하자 이를 허락하게 되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결국 모세를 양육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9) 정말 요게벳과 미리암의 지혜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젖을 떼기 전까지 양육하였는데 늦으면 3-4살까지 모세를 키웠던 것입니다. 요게벳은 모세가 장성하면서 아이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두가지 설이 모세와 바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한가지 설은 바로가 모세를 신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설은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를 탐탁지 않게 여겨 모함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이든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40년 동안 지내게 됩니다. 애굽의 왕자로써 애굽의 모든 학문과 기술 등은 습득하게 되고 애굽인처럼 자랐겠지만 모세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름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만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 광야로 쫓겨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에게 장가를 가 40년은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때를 정하시는 엘 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되는데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까지 가서 떨기나무 불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에게 세우라고 요구하는 모세였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바로 앞에서 담대하게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비하신 유월절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 죽음을 면하게 하십니다. 쓴 나물, 무교병, 어린양은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유월절은 215년 동안의 애굽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출애굽하게 되는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다시 한번 홍해에서 바로가 이끌고 오는 군대들을 막으셔서 홍해를 가르셨으며 그 마른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게 하십니다.

 

여호와 로파 소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출애굽기 15장) 힘든 노예 생활을 마치게 해 주시고 자신들을 쫓던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멸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찬송하였을까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사 애굽에서부터 다시 자신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보며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었을까요? 비록 급하게 애굽 땅에 나오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애굽인들로부터 많은 보물도 받게 하시고 자신들을 압제하였던 바로의 손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고 위대한 분인지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지만 사흘 길을 행하는면서 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물 없이 삼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해 마음이 상했을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만나게 되지만 써서 마시지 못했는데 이때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물을 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질서를 지키면 물을 마셨을까요? 너무나 목이 마른 상황에서 물 속에 뛰어들어가 물을 마시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3일 동안 물을 못 마셔서 웬만하면 물을 그냥 마셨을텐데 물이 얼마나 쓰면 마시지 못했을까요? 그 실망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에는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삼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하니깐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자마자 물을 3일동안 마시지 못하게 하시고마시지도 못하는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셨을까요? (이는 모세가 그냥 백성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고 인도하심으로 마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만사형통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걱정 근심없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니, 그러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내가 어리석은 자 같이 말하나 나는 더하니라. 수고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에 갇히기도 더 자주 하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며 내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내가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으며, 세 번 파선하였는데 꼬빡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잦은 여행에 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중에서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자주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자주 굻고, 추우며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2:23-26)

 

이스라엘 백성도 이제 자유인으로 만사형통할 줄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흘 길에 물을 만나지 못하게 하시고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도 해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면 안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도 우리 모습을 직접 보게 해주시고 그 와중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긍휼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 속에 있는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그가 자신을 보고 가서 자기의 생김이 어떠한 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케 하는 완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23-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신실하게 붙잡고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사 출애굽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215년 동안 애굽에 지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다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었으므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부터 건져내신 것입니다.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기 15:2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여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여서 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 출애굽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15:26)

아니 아도나이 (여호와/야훼) 로페(카) – 히브리어 발음

 

여호와 로파의 뜻

 

로페카 어근 = 라파/Rapha (치료하다) = 본질적으로 치료해주시는 하나님

상징적인 의미로도 치료하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육체인 질병인 외에도 정신적, 영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치료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질병만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곳곳에는 치료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데 이 부분은 유대인들이 지적을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야훼 로파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라고 표현하심으로 구약에 나오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든 자들이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원을 찾아가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원이 있어도 환자가 먼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씻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의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 분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배워야 하는데 인정을 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 찾아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참된 치료자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특정한 의사와 약들을 그리고 다른 방법도 사용하시지만 성경을 보면 우린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아픔을 아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그런 도구를 통하여 우리가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들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아사 왕은 발에 중병을 앓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나중에는 하나니의 말씀을 전한 선견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몇 학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에 병이 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음에도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역대하 16:12)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리게 되자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치료를 바로 해주실 수 있으셨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를 치료하십니다.

“이에 이사야가 명하여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그들이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열왕기하 20:7)

 

나아만 장군 또한 그 예 중 하나입니다.

“엘리사가 사람을 저에게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여전하여 네가 깨끗하게 되리라” 하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말하되 “보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환처 위에 손을 대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0-11)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눈먼자를 바로 고치실 수 있었지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고치신 적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 하는 뜻이라. 이에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9:6-7)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세상에서 최고의 의원에게 아뢴다 하여도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인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로 하고자 할 때에 내 마음이 낙담하는도다. 보라, 딸 내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여호와께서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내 백성은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도다’ 하는도다. 이는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두려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예레미야 8:18-22)

 

길르앗은 약재로 사용되는 유향으로 유명하고 의원들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약재로도 의원들도 치료가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치료자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이 우상 섬김인데 본질적인 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육체의 아픔과 상처도 치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자이신 여호와/야훼 로페에게 모든 것을 아뢰고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 또한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치료자이심을 고백하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이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사오니 이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같이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시편 38: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대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리로다.” (시편 103:1-4)

 

육신의 질병보다도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로 보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던지게 하셔서 물을 달게 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죄와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질병은 죄 때문일까요?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질병이 생겼을까요? 죄가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는 질병이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병과 죽음은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거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상함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로 너를 징계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리운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0:12-17)

 

그럼 우리가 겪는 모든 질병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만 병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또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원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리는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길 가실 때에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그의 제자들이 묻기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1-3)

 

다른 예는 바로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큼 의인이었음에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욥 자신도 육신적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욥을 위로하겠다고 온 세 친구들은 계속 욥을 죄인으로 몰며 회개하라고 하지만 욥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죄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므로 겪는 모든 질병이 죄의 댓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죄의 댓가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악한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대주재라고 고백도 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며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도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신장을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어찌하여 너희가 매를 더 맞겠느냐? 너희가 더욱 더 반역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거늘 상처를 짜고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사야 1:5-6)

 

이스라엘 백성들은 툭하면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라의 쓴 물보다 더 쓰고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자신들의 평가를 좋게 내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보이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만 스스로 높이며 자신 멋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대로 자신이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을 살피면 치료를 받기 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이를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데 바로 만나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을 의미합니다. 육일 동안은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고 육일 째에는 두 배로 거두고 제 칠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지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것을 쌓아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를 쌓아두어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지 못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쌓아두는 것 또한 썩어질 것입니다. 이는 질병 뿐만 아니라 영혼이 망하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것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질병말고도 죄의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분이 바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가득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서 순종할때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책임지고 인도해주시는 분이 바로 대주재이시고 창조주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 로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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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 엘 로이 (El Roi)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나 태움제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고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을 통해 배우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성호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면 그 분께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창조주이심을 깨달으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엘 로이 하나님의 성품

‘엘 로이’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지존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서를 살펴보면 엘로힘 (창조주 하나님 =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 (처음과 끝이신 하나님), 그리고 아도나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로 나열 되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셨으므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라는 여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인 엘 로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밀하고 숨겨져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보시고 듣는 분이 바로 엘 로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14장에 나오는 사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알고 계시며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또한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쪽 끝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존자와 같이 되리라” 하나.” (이사야 14:13-14)

하나님은 사단의 마음도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도 아십니다. 사단 역시 마음에 혼자 교만한 마음을 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으며 살펴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이사야 14:16)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눈같이 흰 양털 같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계시록 1:14)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모든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은밀한 것까지 다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관점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거 같습니다. 만약에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에는 첩을 들이거나 여종을 첩으로 주든지 하여 아들을 낳게 하여 낳은 그 아들로 대를 잇게 했던 거 같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스마엘과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별처럼 자손이 많게 해 주실거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엘 엘리온 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의 주권자라 배웠습니다. 우르 땅에서 나와 하란 땅을 걸쳐 가나안 땅에 왔으며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과 318명을 데리고 4 왕의 군대를 쳐서 이긴 사건 등 아브라함은 여러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의 소유주이신 지존자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정식적으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 또한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이때 아브람은 “대주재 여호와여, 무엇을 제게 주려 하시나이까?” 라고 되묻습니다. 이 장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만나고 얼마 후인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얼마 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선 아브람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나서 아브람 역시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계속 후사를 주시지 않자 아브람은 하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자신의 상속자는 자신의 피를 받지 않은 다메섹 엘리에셀이라 하나님께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며 그 후사를 통해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질 거라 약속하십니다. 이 부분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이미 75세의 나이가 지난 아브람, 그리고 후사도 없었던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 (창세기 15:6)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blood covenant 피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 탄생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75세 나이에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86세에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사래를 통해서 주실 거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니라. 다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세기 15:4)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2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옵션은 첩을 들이지 않고 끝까지 사래를 통해 후사를 낳는 방법과 다른 방법은 첩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세히 약속을 주지 않으셨으므로 아브람에게는 선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브람을 통해 난 자가 후사가 될 거라 하셨습니다) 75세 처음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아브람은 86세가 되어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언제쯤 자신에게 후사를 허락하실지 더 궁금해지고 조바심도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래가 첩을 들이자고 제안을 했을 때 아무런 반대없이 허락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사래의 제안을 반대하고 100세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브람의 후사는 사래를 통해 태어날 거라는 것을 말씀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이로 인하여 인류는 나누어지고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삭의 자손이고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후사는 사래를 통해 낳을거라 말씀하셨으면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문제도 없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브람이 86세이고 사래는 76세 였습니다.

아브람이 애굽 땅에 내려갔을 때에 사래는 바로의 첩으로 들어갈 뻔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로의 손에서 사래를 구하셔서 아브람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바로를 통하여 많은 제물과 남종 그리고 여종을 아브람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가 사래를 첩으로 삼으러 할 때 여종들을 많이 사래에게 주었을 텐데 이 중에 한 명이 하갈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애굽 여인이었던 하갈은 이렇게 아브람과 사래와 함께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하갈에 대해 나누면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래/사라의 관점

사래는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자신감이 없어졌을 것이고 가나안에 들어오고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의 사래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자식이 없었던 사래는 10년이란 괴로운 세월을 더 보내고 아브람에게 첩을 들이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 사래가 제안한 것이라는 것을 다음 구절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청켄대 나의 여종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나이다” (창세기 16:2)

사래는 분명히 자신이 자식을 얻을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래는 아브람에게 이 제안을 하면서 마음이 아팠을까요? 긴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하고 이 제안을 아브람에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제안을 듣고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하여 하갈은 여종에서 첩이 되었고 임신까지 하여 신분이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결점을 이용하여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만 봐서는 하갈이 성품이 착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교만하기도 하고 겸손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고하자 아브람은 사래에게 모든 것을 임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아브람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브람의 자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지만 아브람은 사래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래가 그 전에 하갈에게 멸시를 당하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래가 자신의 위치를 빼앗길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려워 했던 거 같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괴로워 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아브람의 사랑을 빼앗기거나 하갈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아브람이 혹시 하갈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첩으로 들이자고 제안했던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사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허락으로 사래는 하갈을 마음 놓고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하갈의 관점

사래가 애굽 땅에서 잠시 바로의 첩으로 들어갔을 때에 바로는 사래에게 많은 여종을 주었을 것입니다. 원래는 바로의 궁에 영원히 거했을 하갈인데 다시 바로가 사래를 아브람에게 보냈을 때 하갈 또한 가나안 땅으로 아브람과 함께 갔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 외에도 다른 여종이 있었을 것이지만 왜 하갈을 택했는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적은 처녀였을 것이고 사래 또한 평소에 하갈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므로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어느 점을 사래가 마음에 두고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들이자고 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었지만 위에서 나누었듯이 하갈은 교만해 집니다. 자신의 신분이 상승했다는 이유인지 모르지만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서부터 여종이었던 하갈이 갑자기 주인의 첩이 되어 자식까지 잉태하게 되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지만 만약 하갈이 겸손하고 온유했던 인물이라면 사래에게 끝까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한 이유는 아브람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하갈은 또한 자신이 도망치기 바로 직전까지는 자신이 아브람의 자식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아브람이 자신을 잡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 나오고서는 막막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함께 도망친 하갈은 답답했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직 태아 중에 있습니다) 이때 과연 하갈의 편은 누구였을까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나마 믿었던 아브람마저 사래의 손을 들어주었으므로 하갈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쳤으며 광야에 왔을 때에는 정말 막막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의 등장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사래의 여종이요 하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알고 계셨으며 축복도 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하갈에게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등장하셨을 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세기 16:8)
“이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주는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 엘 로이)’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갈이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자의 뒤를 보았는고” 함이더라.” (창세기 16:13)

여기가 바로 성경에서 단 한번 엘 로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진 곳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고 은밀하신 것도 다 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종의 위치로 평생 살아오고 믿었던 아브람마저 사래의 손을 들어준 상황에서 하갈은 더더욱 이 부분이 마음이 와닿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이름까지 지어주셨으며 축복까지 해 주신 하나님은 하갈에게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눈은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편 33: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살피시고 그의 귀를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되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 (베드로전서 3:12; 시편 34:15-16)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통해 힘을 얻고 하나님의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순종하라.”” (창세기 16:9)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권면하리로다” (시편 32:8)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니, 보라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세기 16:14)
Beer-Lahai-Roi = “well of Living One Who sees me”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을 함께 살게 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두가지 경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 행하는 자들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당하는 자들의 고통 또한 하나님께서 듣고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치유의 시작도 엘 로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 저희가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하는 것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59-60)

“그가 내 길을 감찰하시고, 내 걸음을 다 세시지 아니하느냐?” (욥기 31:4)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욥기 34:21)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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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목사 믿는 환자인가?
예수 믿는 신자인가?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일까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 관원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 죽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육신이 태어나고, 두 번째에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거듭나게 되어 중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이 한 번만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번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은 두 번의 사망, 즉 육신으로 죽어 영혼이 지옥에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사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없다고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두 번째 사망이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그 당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를 사함 받게 됨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도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사람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로,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0).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말씀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귀를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듣지 않겠습니까. 다 들으시고 다 아십니다. 기도할 때 말할 때, 다 들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소리와 영음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소리는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면 다 같이 듣습니다. 그러나 영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사울만 그 음성을 듣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영음은 한자리에 있어도 듣는 자가 있고, 듣는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영음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 지식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흘 만에 부활하신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때가 바로 사도 바울이 중생하는 순간이고, 두 번째 태어난 시간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에 주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오늘 제가 설교를 듣는 중에 주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해주세요.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저도 주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은 사업에 어려움이 생겨 하나님께 특별히 기도하던 중,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아버지, 오늘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다가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오셔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뿐 아니라, 환난이나 질고로 어려움 당할 때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는 기회요, 주의 음성 들을 기회요, 큰 축복받을 기회임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고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해지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이 임하니 그때서야 히스기야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회개했습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매 맞을 징조입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망할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아사 왕은 왕이 된 지 39년 되었을 때에 발에 중병이 들었습니다(대하 16:12). 그런데 병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깨닫고 회개할 텐데, 어려움을 당해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매를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⑴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늙어서 우상숭배를 많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9~10절에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책망하셨지만, 솔로몬은 완악하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깨달음도 없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망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망합니다.

⑵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준비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귀가 어두워져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의 공통점은 제 마음속에 주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며칠씩 기도하다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다.
그러면 저는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축복이 엄청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망했지만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어 얼마나 축복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든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축복을 받습니다. 평생 간증거리가 됩니다. 너무너무 행복해집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라야 참 신자입니다.

참 신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믿게 된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제일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귀한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을 때에 기쁨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금은보화를 다 바치고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우러나오는 마음의 기쁨으로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이라야 참신자입니다.

항상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들어봐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은혜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이 나의 인격을 보여주고, 내 믿음을 보여줍니다. 말이 내 사랑을 보여주고,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밤낮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셔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밤낮 불안과 걱정 속에서 원망 불평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제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나머지 열 명은 믿음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고 말했습니다. 완전히 믿음 없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없는 말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말 그대로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사야 3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영광의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려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망했고 유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믿음의 말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해서 모두 굶어죽게 됐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내일 하루만 지나면 기근이 해결될 것을 백성들에게 고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 말을 듣고 한 장관이 의심의 말을 하자 엘리사가 예언합니다.
열왕기하 7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병환자 네 사람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용기가 생겨서 가봤더니 이상하게 사람이 하나도 없고 먹을 것과 보물만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실컷 먹고 금은보화를 자기 장막에 쌓아 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성에 가서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에는 완전히 기근이 해결되었고, 사람들은 믿음 없는 말을 했던 장관을 밟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 없는 말을 한 사람은 믿음 없는 증거가 말로써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음 없는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믿음 없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하실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라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수록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다섯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못하면 두렵고 떨리고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참 신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고 양심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죄 짓는 데 담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정직하게 산 참 신자의 모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참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실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시편 94편 9~11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위해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십니다(잠 2:7).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은 완전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시편 112편 1~4절에 보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서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에 빠져도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자신도 복을 받고, 후손도 복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사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여러분도 참 신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Big Question)'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온라인 종교활동이 종교계 안팎에 파장을 낳고 있다. 온라인 미사·예배·법회는 성직자와 신자들 모두에게 새로운 종교환경이자 신앙생활로, 당혹감을 안기면서 동시에 기존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로 모여 하나 되는 오프라인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한편으로 신앙생활이 ‘특정 시간·장소에 모여야만 하는가’ 등 그동안 해본 적 없는 근본적 질문들도 제기된다. 한국 종교계에 ‘빅 퀘스천’이 던져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종교계가 방송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용에 적극 나서면서 종교계 온라인 활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도 들린다.

■ 신앙생활에 던져진 ‘빅 퀘스천’

코로나19로 종교계는 지난달 말 사상 처음으로 종교활동의 온라인 전환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온라인 신앙생활이 11일로 2~3주간 이어지면서 종교계에는 신앙생활의 형식·내용을 둘러싼 근원적 질문들이 나오고 있다.

특정 시간·공간에 모여야만 하는가, 이 시대 성당과 교회·사찰이 지니는 의미와 기능은 무엇인가, 종교시설 밖 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활동 한계는 어떤 것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이 같은 물음은 특히 온라인 주일예배를 놓고 다양한 견해가 나온 개신교에서 두드러진다. 최근 이길주 목사는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쓴 글에서 온라인 예배가 “교회건물에서만 예배한 교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큰 도전과 고민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건물에 모여 예배하지 않으면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가 고민하고, 일상이나 사회, 나 혼자의 공간에서도 예배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대형교회 목사도 “디지털시대에 온·오프라인 예배 문제, 목회나 선교활동,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신학적·신앙적·예배학적인 다양한 물음들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며 “향후 본격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불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원교구의 한 신부는 “이번 경험을 통해 성당·공동체적 모임의 귀중함을 새삼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개인적·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생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사찰의 한 스님도 “법랍 40년 동안 이런 도량을 경험하지 못했다”며 “‘주말에만 절이나 교회를 찾아 고개 숙일 생각 말고 평소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내용의 생전 법정 스님 법문을 떠올리는 요즘”이라고 밝혔다.

■ 종교계의 분기점 되나

온라인 종교활동이 지속되자 종교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성직자, 신자들은 서로 모이는 오프라인 종교활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다. 행신침례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 김관성 목사(49)는 “처음으로 신자분들이 모이지 않은 주일예배를 유튜브로 중계했는데 너무 어색하고 신앙적 흥이 나지 않았다”며 “저는 물론 다른 목회자들, 신자들도 모여 손잡고 안부 묻고 식사를 함께하는 공예배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은 종교계에 온라인 활동을 가속화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김관성 목사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예배에 부정적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향후 온라인 중계를 병행할 것”이라며 “주변 여러 목회자들도 공감하고 있어 이번 사태가 온라인 종교활동의 기폭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길주 목사도 문화선교연구원 웹진 글에서 온라인 예배를 위한 교회의 준비사항을 소개한 뒤 “이번 사태는 한국교회를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신교에 비해 온라인 활동에 소극적이던 천주교도 바뀌고 있다.

일부 교구는 교구장 주교의 집전 미사를 중계하거나 홈페이지·유튜브를 통한 영상 제공, 교구 차원과 신부 개인의 SNS 활용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 관계자는 “온라인 채널의 확산은 물론 소통을 위한 의지표현도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계도 전례 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산문 폐쇄 중인 합천 해인사는 최근 유튜브에 ‘해인사 TV’ 계정을 열고 예불·법회를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해인사 역사 1200년의 첫 시도”라며 불자들에게 “이를 통해 또 다른 신심과 감동을 만들어보자”고 당부했다.

그동안 선교·포교수단의 하나로만 여겨지던 온라인 활동이 종교계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신앙은 가끔 상식을 초월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 벼랑 끝에 섰을 때는 무엇인가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하늘에 맡기면 필히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지요. 암 환자에게도 신앙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친절한 의사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절한 의사를 넘어 주님의 의사가 되는 건 그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환자를 위해 손을 잡고 기도 드리지만 저의 힘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 환자 중에는 수혈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자도 있었습니다. 국선도 신봉자나 도를 믿는 교도도 있었고 스님도 몇 분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들과도 모두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합니다. 제가 대표로 기도하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아마 각자 자신의 신을 찾았을 겁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성공적으로 수술과 투병을 마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자포자기했던 환자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아나는 기적이 간혹 있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때도 예전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돌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게 되지요. 의사들의 평균 수명이 그 어떤 직업군보다 짧다는 통계를 보면, 의사들이 얼마나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는지 여실히 증명됩니다. 평생을 중압감과 싸우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빨리 지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 의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반쯤 죽었다 반쯤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의사 생활에 익숙해지더라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사는 거의 없을 겁니다. 수련의 시절, 환자가 죽으면 많은 수련의들이 술과 담배를 찾았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기도에 의지했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자 근심과 번민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가 찾아온 겁니다.


“부족한 제 힘으로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고치신다고 믿기에, 하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하는 의사가 됩니다. 힘들고 고통받는 암 환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들이 암을 꼭 이겨내게 하옵소서.”


삶이 좋은 것이고 죽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가진 편견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일 수 있습니다. 생사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는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곤 합니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매 순 간 환자에게 충실함으로써 주님의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암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엔 기도하세요. 치료를 열심히 받고 좋은 음식을 잘 먹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면서, 생사의 결정은 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암 치료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신에 대한 믿음처럼 의사에 대한 믿음도 환자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치료 과정에서 불신이 쌓입니다. 최악의 경우 병원을 옮기는 사태까지 발생하는데,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손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의사를 신처럼 여기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환자가 어떤 경우든 의사를 믿고 따를 수 있어야 치유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믿음이 의사도 살리고 환자도 살립니다.


기도의 힘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김재환감독

김재환 감독은 미국의 어느 유력 매체의 기자가 자신에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전하며 인터뷰의 말문을 열었다.

“그 기자가 어눌한 한국말로 이러더라, 한국 교회, 왜 이렇게 또라이예요?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풍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붉은 십자가다.
외국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은 곳은 무덤뿐이다.
내게는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가 무덤이 된 것처럼 보인다.”

김재환 감독의 신작 <쿼바디스>는 그 수많은 십자가들을 향한 냉철한 자성의 목소리이며, <트루맛쇼> <MB의 추억>에 이은 통렬한 풍자화다.

- <쿼바디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의 제목이라 낯익다. 제목을 패러디하려는 의도였나.

1951년 <쿼바디스>를 물론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맥락이 있다.
나는 나의 전작들을 ‘역지사지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트루맛쇼>에서는 미디어가 하는 행태 그대로를 빌려와 미디어를 찍어본 것이었고, <MB의 추억>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 유권자를 보는 것이었다.
<쿼바디스>에도 이런 역지사지의 면이 있다.
‘쿼바디스’라는 말뜻은 원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은 말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박해받을 때 냈던 신음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를 보며 오히려 예수님이 신음을 내고 계실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원래 그 말의 향방을 거꾸로 바꾸어서 지금 한국 교회에 묻고 싶었다.
신음하는 예수님이 한국 교회에 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교회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하고.

- 시사회는 좀 열어봤나, 반응은 어떤가.

=많이 했다. 의외로 70~80대 어르신들이 많이 오신다.
그분들에게 “51년 <쿼바디스>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닌가요?” 하고 물으면 다들 빙그레 웃으시며, 다 알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목사님들도 많이 보러 오셨다.
그분들은 잘 알고 있는 거다.
대형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위중한 한국 교회에 단지 빨간 약만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 기독교인인가.

=그렇다. 영화에서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던가?
(웃음)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기독교 영화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영화는 한국 교회의 민낯, 한국 교회의 욕망을 보자는 것이다.
<MB의 추억>으로 유권자의 욕망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처럼.
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 기독교 성공학의 결정판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로 비기독교인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었다.

- 한국 대형 교회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다. 관련자들도 등장하고. 소란스러워질 여지가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영화에 등장한 교회의 몇몇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나 걱정됐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진짜 웃긴 상황이다. 그들이 보러온 자리는 펀딩에 참여한 분들을 위한 유료 시사회였으니까, 이 사람들은 내 영화를 확인하려고 영화의 펀딩에 참여를 한 거다. (웃음)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법적으로 걸어도 내가 이긴다. 오히려 내가 서글픈 건 주변으로부터 “두렵지 않느냐, 어디 해외라도 잠시 다녀와라” 이런 말을 들을 때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닌 거다. 그래서 <쿼바디스>의 포스터에 메인 카피를 이렇게 적어놨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본래의 제 의미를 상실하여 이미 교회가 아닌 것들을 대상으로,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새삼 말하려니 오히려 허무하기까지 하다.

-참고한 자료들이 있는가.

=일단 많은 책을 참고했는데, 그중에서도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의 책 <다시 프로테스탄트>에 크게 빚졌다.
그 책에서는 한국 교회의 폐단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성직주의.
한국 교회가 목사들로 다 대표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장주의.
성장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설정해두고는 다른 모든 문제는 다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셋째, 승리주의.
세상을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전체 맥락의 구성에 있어서는 어떤 흐름을 따랐나.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라는 패러다임 안에 있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맥락화했다. 때로는 장소가 아주 중요했다. 예를 들면 평화 기도회에 참석한 조지 부시의 장면과 이랜드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을 연결시켜놓은 부분이 그렇다. 시간차는 나지만 둘 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상암월드컵경기장이다. 어떤 나라의 경우에는 부시를 전쟁 범죄자로까지 취급한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와서는 평화를 간증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간증하기 위해 섰던 월드컵경기장 그 아래층 홈에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기독교적 기업이라 자처하던 이랜드가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해고했고 그들의 농성이 있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우리나라의 민중과 교회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이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이 시무 장로로 있었던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 농성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랑의 교회 증축에 관한 언급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그 증축에 땅값까지 포함해 3천억원이 넘는 예산이 들어갔다.
영화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이슈들을 농축하고 있는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지금 한국 대형 교회의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부끄러운 면모를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 의존주의, 성직주의, 성장주의 등 많은 문제가 거기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교회의 목사는 “우리 교인들 중에 판검사가 몇명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직접 볼 수 있는 이 건물의 이미지로 영화를 열고 닫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마이클 모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미국의 다큐 감독 마이클 무어의 인상착의를 흉내냈다.

=가상의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모어’라고 이름 지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보면 그가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이름을 빌려와 패러디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책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온 부분들이 많다. 그 배경을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다가 한번씩 빵빵 터지는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같은 중세 시대의 종교 개혁자였다. 중세 유럽 기독교가 처한 상황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만연하는 한국 교회의 헌금 중시주의를 보자.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파는 것과 똑같은 거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해당 목사들의 인터뷰가 없다. 안 만나주던가.

=당연히 안 만나준다. 만나려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매번 따돌림 당했다. 돌아온 답변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그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웃음)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라니, 이 말, 정말 웃기지 않나. 목사님 만나는 게 예수님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조용기 목사에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 맞습니까?” 하고 감독이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조용기 목사의 법정 출두 장면이다.
날짜와 장소가 정해져 있었으니 미리 아침부터 기다릴 수 있었다.
카메라맨들을 건물 입구마다 보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내쪽으로 와서 마침 찍을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정해놓은 건 아니었다.
뭘 질문할까 생각했는데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내 마음속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을 따라보자, 했던 것인데 그 말이 나온 거다.
생각보다 내 울분이 컸었나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이 영화는 다큐와 픽션이 섞여 있는데, 성추행 파문을 일으켰던 전병욱 목사 부분을 묘사할 때는 다른 사안에서보다 픽션을 더 적극 활용했다.

=다른 분들 내용에서도 그런 극화된 환상 장면들이 좀 있었는데, 뺐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병욱 목사가 쓴 책의 내용을 피해자 여성들이 그에게 다시 읽어주는 장면이 꼭 필요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형 서점에서 팬 사인회를 하면 한 시간이 지나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나한테도 그분 책이 네권이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자기가 쓰는 글과 삶이 다른,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잘못한 것을 알지만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는 자의 고뇌를 표현하고도 싶었고. 그 부분만 환상이 들어갔는데, 많이 이상하던가?

-갑작스럽게 인물의 내면이 표현되는 장면이어서 돌출적으로 보였다. 다만 영화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호 기자, <뉴스타파> 최승호 PD 등도 픽션 부분에 등장하여 연기에 한몫하던데.

=<뉴스타파> 최승호 PD는 내 10년 선배다. 최 선배가 오래전에 <경찰청 사람들>이라는 프로를 했었다. 이번에는 마치 자신이 거기 나오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한 거다. (웃음) 그리고 이상호 선배는 기자하기 전에 KBS 슈퍼탤런트 최종 본선 무대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기독교 내부 개혁자들의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가 상당수 등장한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어떤 방점일 것이다.

=되도록 많은 관련 서적을 읽고 난 뒤에 그중 내가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분들을 선별했다. 그분들의 책의 내용과 이 영화가 어떤 접점을 이루기를 바랐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출연을 거절했다. 이 영화의 내용이 더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한 개혁에 관한 것인지, 단지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관한 것인지 의심스러워 그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대형 교회 관련한 인터뷰 자체가 싫다는 분들도 계셨다. 시달려서 싫다는 것이었다. <트루맛쇼>에서처럼 하나의 프레임을 정해놓고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체의 욕망과 방향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전반적인 개혁이나 변화를 바라는 관점이 잘 드러나기를 바랐다.

-인터뷰이 중 한분은 문제의 핵심을 “돈과 권력”으로 집약한다. 김홍도 목사가 그 예로 등장한다. 김 목사는 현재 법정 구속 상태다.

=어떤 분이 그런 농담을 하시더라. 전국을 돌며 <쿼바디스> 무대 인사를 함께해주어야 할 이 시점에 거기 계신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일가의 문제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린 물어야 한다. 당신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쿼바디스>가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나.

=늘 그랬다.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변화를 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미세한 변화들이 늘 감지되곤 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쿼바디스>도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일반적인 기독교 관련 휴먼다큐는 많이 있다. 나는 오히려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되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만 있다면, 이 영화를 본 몇 사람의 마음만이라도 바뀌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도마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김재환 감독은 비기독교인의 눈에 <쿼바디스>가 어떻게 비치는지 많이 궁금해했다.
답하자면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쿼바디스>는 사회적 상식에 관한 정당한 질문이 담긴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기독교 외부에서 내부를 단죄하거나 계몽하려는 대신 기독교 내부의 자정적 목소리를 모았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일이다.
김재환 감독 스스로가 그 일원 중 하나인 것은 당연하다.
그 방법이 풍자일 뿐이다.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 관한 한, 특히 대형 교회들의 정황에 관한 한, 김재환 감독은 당대의 에라스무스가 되기를 자청한 것 같다.

*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 10. 27-1536. 7. 12)
일반적으로 에라스무스라고 부른다.
네델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 인문주의자.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시학자.

이름 뒤에 Roterodamus를 붙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라틴어 필명이었다.
데시데리우스는 갈망(desire)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인 데시데리움(desiderium)의 변형이고, 에라스무스는 '사랑받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라스미오스(ἐράσμιος)의 변형이고, 로테르다무스는 네덜란드 도시인 ' 로테르담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형태이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쎄네파



바리새인(Pharisees)과 사두개인(Sadducees)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리새파


“바리새(Pharise)”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Pherushim)”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헬라)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헬라시대에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유 야훼 신앙이 점차적으로 약하여 지는 것을 우려하여 모세오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함을 보였던 유대교의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BC 135년경, 마카비 전쟁 이후로 유대교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당파로 발전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토라)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의 결과로서 제사장 계층보다는 유대인 일반인들, 성전보다는 회당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움직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에세네파,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교의 3대 분파의 하나로서 예수님 시대에는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들이 많았고 경건한 지도자와 존경받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3명 이상의 바리새파 회원 앞에서 십일조 및 결례 규정과 같은 바리새파의 규범을 엄격하게 잘 지킬 것을 맹세하고 1년 동안의 시험 기간과 같은 예비 기간을 거친 뒤에 바리새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들의 직계 가족까지

회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바리새파의 규범이란,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사람과는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이후의 삶, 부활, 그리고 천사들 및 영들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정확하고도 엄격한 적용 규칙들, 곧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도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의식상 부정을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엄격하게 피했습니다. 제사의 정결 문제나 음식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활약하였던 다니엘은 이러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적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며, 헤롯왕 시대에는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던 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강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헬라 시대에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던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지켰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248개는 긍정적이며 365개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첨가되어 많은 보조적인 율법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이러한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던 조항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련된 조항만 해도 39개나 되었다).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던 바리새파 율법학자는 “샴마이 파”로 보이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 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제사와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이들에게 예배란 피의 제사(성전의 제사장이 드렸던 예배)가 아니라 기도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이외의 예배장소로서 성전과 분리된 회당(Synagogue)을 많이 발달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대교의 중심이 된 회당을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김으로 발달시켰으며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운동이었던 바리새파의 활동 시기는 AD 2세기에서 AD 3 세기까지 이어졌고 바리새파는 변화하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성서해석에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유대교를 보존하고 전수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회당 교육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일은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AD 70년 유대사람들의 로마에 저항하는 폭동이 있었을 때 로마에서는 티투스 장군을 선두로 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성전이 없는 유대교로 변화되었고, 정치적 지배 세력을 지지하며 주로 권력층에 속하였던 제사장 그룹이었던 사두개파는 성전이 무너지면서 자연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력항쟁을 지지하던 젤롯파는 이스라엘이 패망하게 되면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종파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게 된 바리새파는 이후에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고, 성전 없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형성하여 유대교의 중요한 종파로 남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초기 기독교도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회당과 유대사회에서 축출하고, 추방하였으며, 기독교 전파와 형성을 유대교의 위험요소로 인지하여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약성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의 대부분은 반기독교, 반그리스도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생(Born Again)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체포하려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자신의 새 무덤을 내어 주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바리새인으로 알려졌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개파


BC 2세기경부터 AD 66-70년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종파가 사두개파입니다. 그 사두개(Sadducees)라는 이름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삼하8:17, 왕상2:35)”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을 편애하였으며, 율법해석에 있어서도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그에게 충성하였던 친인척들,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부유한 유대 귀족 가문들과 연합하여 성전을 관할하였는데, 이를 위해 성전에 “수호장”(성전 맡은 자, 행 4:1)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의 자치 사법기구였던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 왕궁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사두개인들이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지배한 것은 엄격한 금욕적 율법주의를 따르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절기에 성전예법이나 정결법 등과 같은 율법해석에 있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의견이 다를 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의 관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율법, 즉 기록된 성경(모세5경) 만을 인정하였지만, 이를 해석한 서기관들의 전승 기록과 장로들의 유전 율법들은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당시 유대의 보수적 기득권층을 대변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육신의 부활과 사후심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 등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정치적, 물질적 실리주의자들로 이들의 관심은 오직 현재 그들이 당면하고 있던 현실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악과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힘 안에 있으므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분별없음으로 인해서 불운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운명”)을 인간 역사에서 배제하고, 인간의 존재와 복을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만 제한시켰으며,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 성서에 예수님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만났던 사건을 마태복음 22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박히기 전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낼 때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서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2:24~28) “선생님, 모세는 ‘남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아내를 자기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일곱째까지 첫째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결국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 모두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찍 죽은 일곱형제의 예를 들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은 후에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그 동생들이 후사를 잇게 하여야 하는데 그의 형처럼 후사가 없이 죽게 되어 모세의 법에 따라 계속하여 그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30) “부활할 때에는 누구도 장가가거나, 시집 가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될 것이다.”

(누가복음 20:34~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장가가고 시집간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살 자격이 인정된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다시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바리새인 중의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대답에 감명을 받아서 칭찬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눅 20:39) “율법학자 몇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신약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마 3:7 ; 16:1-12), 많은 관점의 차이와 반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항상 연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대하여서 함께 힘을 합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과 의견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로 성경에 그리스도인이 된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행 15:5 ; 빌 3:5) 그리스도인이 된 사두개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의 한 종파였던 사두개파는 AD 66-70년 사이에 성전이 무너지면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비교



















“율법”에 있어서 바리새파는 기록된 율법인 모세5경과 더불어 구전되어온 율법도 인정되었지만 사두개파는 오직 기록되어진 율법인 모세5경만 인정되었습니다.


자유의지와 예정”에 있어서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예정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예정은 없다고 믿었으므로 모든 행동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의 생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따라서 영혼은 상과 벌을 내세에서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세에 받게 되는 벌은 영원한 지옥이며 영원한 상은 부활과 영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영혼불멸설을 부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배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지 부활과 영생이라는 다른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사”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였습니다.

성서의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결법”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모든 유대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회당을 그들의 근거지로 하였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는 율법을 준수함으로만 유지된다고 믿었던 반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Messiah)관”에 관하여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설(到來說)을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시딤(거룩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헤브라이즘이 종교의 순수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이상주의적이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제의(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만 보장된다면 어떠한 정치 체제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하는 실용주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제휴한 유대인의 중류계급인데 비하여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적 귀족계급이었으며 성전과 제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권력과 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계급이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조세프스는 바리새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공동체와 조화로운 관계를 창출해 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야비했으며 그들의 동료와의 대화에서 외국인(이방인)에게 하듯이 무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War 2.166)


에세네파와 셀롯(열심)당


“에세네”라는 명칭은 “경건한”, “거룩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특별히 거룩하다거나 경건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오실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신비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896년경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사독 문서들”이 에세네 집단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에세네파들은 이러한 유형의 정보를 적절한 시기까지 비밀로 간직할 것을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을 “마스킬림(지혜로운 사람)” 혹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혼란기에 유대인들을 인도할 자들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에세네파들은 멀리 떨어진 광야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았으며, 또 다른 에세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정결한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서들은 (즉, 사해사본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에세네파에 의해서 기록한 문서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실함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해 옆에 있는 쿰란 공동체 유적지



에세네파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공동체생활을 하던 유대교의 한 사조였습니다. 에세네파가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정착지가 쿰란(Qumran)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종말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와 격리되려는 경향을 보였던 종파입니다.


AD 70년에 있었던 유대항쟁의 와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궤멸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 공동체의 유적에서 현존하는 구약성서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이 1947년 베드윈 목동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사본들은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직도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실제로 에세네파인 사람들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몇몇 점의 문서들이 현재까지 잘 알려진 에세네 가르침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사두개파는 제사장 계층으로 세속적 권력에 깊이 빠져 있었고, 바리새파는 제사, 십일조, 경건 등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속사람의 변화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종교적 외형, 체면 등을 중시하였으며, 헤롯 당파는 세속적인 권력을 잡은 헤롯 왕권을 지지하고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당(셀롯당)은 당시 로마 지배세력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당시의 유대교적 삶으로부터 퇴각한 은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BC 130년부터 AD 70년경까지의 시기에 광야에서 고립된 집단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에세네인들은 광야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였던 종파였습니다.

에세네파는 세속과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세네파 가운데 여러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쿰란이라는 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한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는 다른 어떤 공동체 보다 엄격한 율법공동체였습니다.

쿰란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정결의식을 거행했으며 태양력을 사용하는 절기들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오시게 될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열심당 (Zealots)


열심당(Zealots)은 AD 1세기에 유대교의 영향력이 있는 당파였습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침공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소원이었던 이스라엘의 회복의 소망을 여지없이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어떤 집단들이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대항하여 침략군들을 격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게 된 열심당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민족적이고 애국적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을 선동하였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열심당 지도자는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였습니다. (행 5:37)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칙령으로 인하여 모든 유대 사람들이 호적을 하도록 하였을 때,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가 로마에 반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어떤 다른 나라의 세력에 의해서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격분하였던 것입니다.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것이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투쟁의 시작이었다고 관찰했는데, 이러한 투쟁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종식되었던 항쟁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AD 52-60) 열심당들은 “시카리”(Sicarii, “단검 사람들”)라고 알려진 급진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시카리”는 축제 동안에 군중들 틈에 섞여 있다가 그들의 품속에 숨겨온 단검으로 로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반역자라고 간주하여 찔러 죽이는 일을 자주 저질렀습니다.


AD 70년에 있었던 폭동을 진압하러 왔던 로마군대와 싸움을 하는 동안에 (AD 66-70) 그들(시카리)은 “마사다”에 있는 옛 유대의 요새로 도피해서 그 곳을 본부로 삼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2년 후까지도 저항하기를 끊이지 않았던 “마사다”를 로마 군대가 포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의 손에 잡혀 죽느니보다는 자결의 길을 택했는데, 자결한 숫자는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960명이었다고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항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사다 요새



유다는 비느하스(Phinehas), 엘리아, 마타디아스(Mattathias)에 의하여 세워진 열심의 전통을 따르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때문에 열심이라고 자신을 불렀습니다. 유다는 약속의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지배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이사(시져)에게 세금을 내야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고 대답을 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막 12:17)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던져진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의 배경이었습니다.


이들은 혁명적인 행동으로 새로운 메시아 왕국의 건설을 꿈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도 이전에 이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안 사람 “시몬”입니다. “가나안 사람”으로 번역된 “카나아니아”라는 아람어는 “셀롯 당원(열심 당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15:7)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났던 바라바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5:7)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살인을 저지른 폭도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의 전례대로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했지만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요청하였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열심(Zealot) 당원이었던 바라바 대신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막 15:15)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인간의 각 구성요소와도 같은 각 종파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사용하신 것입니다. 각 당파(종파)들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유익을 위하여 일했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이루는데 일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을 고발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고, 그를 사형선고 하도록 한 자들은 헤롯 당파였으며, 그리고 열심당원이었던 바라바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풀려났던 죄수, 바라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구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환영하면서 열광하였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으며,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잘못 된 점을 찾지 못하여 풀어주려고 하였지만 제사장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소요에 두려움을 느껴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내어 준 바가 되었는데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통적으로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들의 커다란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사면하여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례에 따라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단된 예수를 풀어주기 위하여 빌라도 총독은 군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놓아줄까, 아니면 바라바를 놓아줄까?”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그들을 선동하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던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채찍질 교회의 창문의 스테인 그라스 그림, 풀려나면서 좋아하는 죄수 바라바(Jesus Barabbas).


마태복음에서는 이 “바라바”라는 사람을 “이름이 잘 알려진 죄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소요와 폭동을 일으켰던 정치범이며, 폭동 중에 살인도 저지른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원래 “바라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수라는 이름이 바라바라는 흉악한 죄수의 이름과 함께 있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던 성서 사본가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들은 “바라바”라는 이름이 “바르 아바(아바의 아들, son of Father)”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아바”라는 이름은 당시에 존경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나 랍비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바르 아바”도 어떤 랍비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바”를 소개하기를, “그는 유명한 강도”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세기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때에는 “강도”라고 불렸던 죄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인 서민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는 “강도”들은 세롯(Zealot) 당의 한 멤버로서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던 상류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테러를 일삼으면서 강도질을 하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적용시킨다면 “홍길동”과 같이 “의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반 서민들은 비폭력 메시아로 자처하던 “예수 그리스도”보다 정의롭지 못하고 부패한 상류사회를 정면으로 대항하며 의적과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속 시원하게 활동하였던  “바라바”라는 의적강도를 예수님 대신에 풀어 달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항하여 테러를 일삼으면서 위험인물이었던 열심당원의 주요 인물이었던 “바라바”를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군중들이 원한다고해서 그렇게 손쉽게 내어 주었을 리가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아남게 되었던 “바라바”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가 나중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고 마침내 잊어지고 말았습니다.


에고 에이미(내니 두려워 말라) 마태복음 14:27, 요한복음 6:35. 48,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야훼 יהוה 여호와


  여호와(야훼의 히브리어)  요드-헤-와우-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을 물은 사람이 야곱, 모세, 마노아, 세 사람이다. 

야곱이 엉덩이뼈가 다치도록 밤새도록 주의 사자와 씨름(기도)하고 날이 새어 사자가 가려고 하자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가 자기의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고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서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났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그리고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탄생되고 하나님의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보내서 왔다고 해야 합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히브리어로는 “에예 아쇠르 에예”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는데, 영어로는 “I AM THAT I AM”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하였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에 “어찌하여 묻느냐?”라고 하며 대답하셨는데, 여러 가지 번역이 다 다르다.
우리말로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개역), ‘기묘자니라’(개정판)라고 했는데, 영어성경들은 “seeing it is secret?” “seeing it is Wonderful?” “It is a name of wonder” 등으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이때도 이름을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내 이름은 기묘하니라.”라고만 하신 것이었다.


영어 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고 거의 모두 LORD로 되어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이름이 필요하지 않는 단 한 분이시다.

‘에고 에이미’는 “나는 …이다”라는 번역으로 요한복음에 7번 나온다.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48, 51)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4. 나는 선한 목자다(10:10,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 빛, 구원의 문, 목자, 부활, 생명, 길, 진리, 포도나무시다.
즉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나는 …이다”의 ‘…’에 사랑, 소망, 믿음 등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을 넣고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믿을 수도 있다.
즉 “나(예수님)는 사랑이다”라고 넣고 그렇게 내 믿음대로, 성격대로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 5:43).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4).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요 17:26)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주소서.”(요 17:11-12) 


구약에서는 두려운 공의의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에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로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하셨다.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라고 하셨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탄은 ‘예수!’ 그 이름을 너무 싫어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누구나 다 외롭고 고달프고 괴롭고 힘들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불효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고 쓸쓸한 고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 악한 아버지도 있고 능력이 없어서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지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해 주실 수가 있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 내가 참포도나무이니 너희는 꼭 나에게 붙어있으라고 하셨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가지는 말라서 죽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꼭 붙어있어야 산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본 적이 없으나 너무나 잘 아는데 그것은 그분의 사상과 업적과 마음을 책에서 읽고 감동을 받고 그 이름을 알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이름이 없다면 그 업적과 사상을 알 수가 없고 구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는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하나다.
그런데 이름이 다르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이시고 그분이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고 그렇게 하시려고 오셨고 공의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 이름 예수, 너무나 좋은 나의 아버지, 당신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나요?
그 이름을 가지셨나요?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 누구를 부르다가 갈 것인지?

오직 한 분 예수님을 부르세요. 그 분께 당신을 맡기세요. 남편, 아내, 자녀들을 그분께 맡기고 안심하세요. 그러나 살아생전에 꼭 그분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저 하늘나라에서 꼭 놀라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받으소서. 아직 늦기 전에 ...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말씀하신 "나는 ~이다" ( I am~)라는 말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히브리어 <여호와(야훼)>와 같은 뜻을 가진다. 즉,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가 된다.

 יהוה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 야훼 יהוה  여호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는 생명의 떡이다." I am the bread of life. 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여러번 나타납니다.  여기의 '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ἐγώ εἰμι 인데 '에고 에이미'라고 발음합니다.영어로는  I Am~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요한복음 6:48)
 흔히 이 말씀들을 요한복음의 7가지  '나-말씀'( I-sayings)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누구이다라고  말한 부분이 7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7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영어성경은 NIV성경을 인용했는데 KJV도 마찬가지입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 : 35, 48)

Then Jesus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he who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John6:35]

I am the bread of life.[John6: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John8:12]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John9:5]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John10:7]

 
4. 나는 선한 목자다(10: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John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John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14:6]
 

7.  나는 참포도나무다(15:1)

"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John15:1]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이다"라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바로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4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있음!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 근거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야훼 יהוה 가 된 것이었습니다.

 

▶ (개역개정)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b)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c)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b. 70인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히> 나는 나다. c. 히> 나라는 분이)

▶ (한글 KJV)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나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니라.

▶ (KJV)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 (NIV)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구약성경 출애굽기 3:14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여호와-야훼- 아마 이 히브리 자음 4글자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한 글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으면서 히브리어 스펠링으로 말하자면 "요드-헤-와우-헤(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영어식으로 하자면 YHWH라는 자음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네 음절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이라고 부릅니다. 발음이 불분명합니다. 감히 발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야훼라고 (영어/Yahweh)라고 발음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יהוה

이 야훼 יהוה 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오랜 세월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으신 분, 존재하심 그 자체, 있으심, 누구의 설명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분.. 수많은 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어록에 바로 이 부분이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성경으로 알려진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 ->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늘 나오는 이 70인 번역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B.C. 300년 경 시대조류에 맞추어 세계인들에게 알리고자 히브리인 중에서 뛰어난 랍비들이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모여서 당시 세계언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입니다. LXX는 70이라는 숫자의 라틴어 기호입니다. 70여명의 당시 뛰어난 히브리 석학들이 모여서 책임지고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70인 번역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통해서 구약성경을 알게되는 즉 구약성경 반포작업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 편집,추가과정이 있어 훗날 구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70인 번역 LXX 헬라어 성경의 출애굽기 3:14절에서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래는 70인 번역성경 원문입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다시 강조하여 싣습니다. LXX-70인번역을 한 최고의 지성 랍비들이 히브리어 '야훼'를 "에고 에이미"로 번역했습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 LXX성경을 헬라어 원어로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셉츄어진트 http://bibledatabase.net/html/septuagint/

εγω ειμι =  יהוה

구약의 '여호와-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에 계속 이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언어 서술적 측면에서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영어로는 'I am'이라는 뜻으로서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야훼'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 것만은 아니고 일반적인 서술법에도 많이 쓰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고 에이미'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의 '야훼'가 같은 단어라는 이유 하나로 예수님의 신격(神格) 선언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상용어는 아람어를 쓰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이스어(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고 이 용어는 요한복음 저자의 헬라어 번역일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서 일반적 서술 중에 '에고 에이미'를 자주 인용한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분명히 그 의도를 담고 있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흔히 비판적 신학자 들이 말하는 대로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만들어 낸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분명히 선언하신 분임을 사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John8:24]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 KJV성경

[John8: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 NIV성경

윗 부분의 '내가 그인줄'이라는 말씀도 원어에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8: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인자를 들어올리는 그때에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나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노라.

[요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요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윗 부분의 붉은 밑줄 친 부분도 원문에는 모두 '에고 에이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야훼 הוהי 하나님이 됩니다.

즉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의도하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심에 대한 요한복음의 외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랍비나 사상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존경할 이유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세상엔 대단한 혁명가와 위대한 사상가와 랍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곧 이 '에고 에이미'를 생각하며 깨달은 진리였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롬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야훼(야웨, 히브리어: יהוה, 영어: Yahweh)는 하느님[1]의 이름을 일컫는[2]고대 히브리어 소리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탈출기) 3:1-14에 근거한 유대교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고유 이름이다.[3] 이전에는 히브리 글자에 모음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4 자음만이 남아 있다. 기원 1세기 이후에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미신적 전통이 유대인들에게 생겨나 발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의 정확한 발음은 잊혀지고 말았다.[4]

'야'에 대한 모음은 거의 확실한데[출처 필요], 여기에서 딴,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이름이 -야 또는 -야후로 끝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그리스어: Ιαβε라는 표기가 발견된다. (당시 발음법에 따르면 IPA: [jave]라고 읽게 됨.)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YHWH, YHVH, JHWH, JHVH라고 쓰고, 독일에서는 JHWH로 통일해서 쓴다.

[편집] 야훼와 테트라그라마톤

야훼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4문자 YHWH로 쓰여진 하느님의 고유 이름이며 정확한 실제 발음은 밝혀져 있지 않아 논란 거리에 있지만, 이 4글자 단어 자체는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부른다.[5] 유대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느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통치가 임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하느님"을 뜻하는 일반 명사 "엘로힘"으로 대체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 거룩한 이름은 발음할 수 없을만큼 너무 신성하게 치부되었으며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라는 낱말이나 이를 가리킬 때 하솀("이름")으로 불렸다. 그 밖에도 거룩한 이름을 뜻하는 솀 하메포라쉬라고도 불렸다. 6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 학자들은 아도나이나 엘로힘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YHWH의 발음을 모음 표기로 사용하였으며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의 기독교 학자들에게 채택되었다.[6]

19세기에 히브리 학자 빌헬름 게제니우스 (1786~1842년)는 초기 그리스어 사본, 신명에 대한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야훼"를 가장 사실적인 발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사마리아 전통에 이 이름의 발음을 보고하였다.[7] 그 결과 19세기와 20세기에 성경 학자들은 야훼라는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성경 학계에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6]

 

 

70인역성서 [七十人譯聖書, Septuaginta]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역(語譯) 구약성서.

본문
72명의 학자가 이 번역사업에 종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語) 원전의 ‘율법’ 부분을 가리키는데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다 ‘예언서’ ‘제서(諸書)’의 번역까지 포함시켜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번역된 고장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이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人)들의 요구에 따라 처음에는 BC 3세기 중엽에 ‘모세 5서(율법서)’가 번역되었고, 그뒤 약 100년 사이에 현재의 정경(正經)의 거의 전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성서 연구에는 물론, 언어학상으로도 중요한 자료인데, 신약성서의 문체와 사상을 연구하는 데 특히 귀중한 자료이다.

유래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본국에서 초청 온 72명의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70인역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과정에서 70인역의 번역과정이 예언자 모세가 야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는 과정에 유비되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72명이 번역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70인역이라는 말로 불리게 된다.

외경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없는 헬라어로만 기록된 성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외경이나 제2 정경으로 불리는 이 헬라어 성경들은 70인역 성경에 처음부터 포함된 것은 아니다.

현재 기독교에서는성공회, 로마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회에서 교회사를 통해 형성된 전통에 따라, 외경을 제2 정경이나 준 정경으로 존중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을 교회력에 맞게 배열한 성서정과에도 집회서등의 외경이 일부 나온다.

대본70인역의 대본은 마소라와 다른 제2의 히브리어 본문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실제로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본문은 주목할 만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마소라 본문 비평가들에게 70인역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70인역이 번역된 것은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과 같은 과정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디아스포라 유대인) 2, 3세들은 더이상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국어인 헬라어로 된 성경이 필요하였다. 이런 필요에 의해 히브리 성경 또는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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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문헌들이 언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는지는 문헌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명확하지 않다.
집필 연대가 가장 오래된 모세 오경을 학계의 다수설인 4전승설의 분류법을 따라 구분하여 검토해 보아도, 헤브라이 왕국기 이전의 시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경을 이루는 대부분의 나머지 후기 전승 문헌(사제계, 신명계)들은 유다왕국 멸망 후 신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하에서 '하시딤'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에 이미 완성되어진 것도 있지만, 많은 작품들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에스라의 뒤를 잇는 서기관 계급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가 분봉왕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 후예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후기 구약 문서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약 문헌들은 특별한 저자가 모두 만들어 낸 산물이라기 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저술가/필사자에 의해 내용들이 조금씩 윤색, 첨가됨으로서 비로소 현재의 성서로서 완성되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신봉자였고, 국제화를 특색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를 그가 정복한 넓은 지역에 유행시켰다. 알렉산더의 이런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그가 정복한 지역들은 삽시간에 헬라화되었고, 유다인들도 이러한 헬라화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헬라 세계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이른바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또다른 분봉왕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산하였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혹독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 통치 아래의 본토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헬라화 되어갔고,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서 점차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전통적 유다교의 보존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고, 종교적 생존에 위기를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제사장과 랍비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종교적 문화를 온존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70인역의 탄생이었다.

BC 3세기 경 모세 오경의 번역을 시작으로 이후 수백년에 걸쳐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서, 히브리 원본 문헌의 존재 여부를 알기 어려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새로이 번역된 성서의 목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70인역은, 원래의 히브리어 성서보다 그 권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그것은 기나긴 외경의 경전성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70인역은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이방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이방 유다인들은 70인역을 그들의 일반적인 성서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도, 사도 시기에도, 사도 이후의 시기에도 70인역은 헬라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모세 오경을 제외하고서는 인정되는 성서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중략 - 얌니야 회의 부분)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 문구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유스티누스, 폴리카르포, 로마의 클레멘스, 이레네오등은 이 문헌들을 폭 넓게 성서의 말씀으로서 이용하였다.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간 목록이 다른 점을 놓고서, 이미 그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70인역의 성서는 본래 '모세오경(토라)'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초대 기독교의 교부들은 성서의 범위를 성문서와 예언서등의 전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교부들은 70인역의 번역 과정에 대하여 아리스테아스나, 요세푸스가 미화시킨 기록들을 더욱 더 미화시켜, 70인이 각자 번역한 성서의 결과물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고 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못지 않은 영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그 견해를 일치시켰다.

70인역은 초대 교회의 기독교 교리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얌니야 회의와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유다교가 기독교를 배척하자, 초대 기독교 교회는 더욱 70인역에 집착하였다. 대다수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70인역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당대의 히브리어 원문 성경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더라도, 복음 기자들과 사도들도 70인역 성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을 들면서 하느님의 섭리로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게 성서의 내용이 변형된 것이라고 우기면서까지 70인역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70인역은 유대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한 책인 구약 39권에 유대인들이 외경으로 분류한 7권을 모두 다 번역한 책입니다.

1. 외경이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을 천주교에서 제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ical)] 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이를 외경이라고 합니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왔으며 1977년에 한국에서 나온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 번역성서'(1977)에서, [토비트]•[유딧]•[에스델](제1경전 [에스델]의 추가부분)•[지혜서]•[집회서]• [바룩]•[다니엘](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 등 9권의 외경이 있습니다.

2. 외경과 정경의 결정 외경이 성립된 유대교에서도 외경의 권위는 처음부터 의심 받아 왔으며 정경과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외경을 구분하였느냐고 한다면 이는 유대인들이며 그 시기는 불확실합니다.

성립시기가 정경보다 늦은 외경은 원래 최초 성립 시기부터 정경과는 다른 대접을 받아 온 것입니다.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었고 외경은 이 때 공식적으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제키엘]• [잠언]• [아가]• [전도서]• [에스델] 등이 이때 함께 경전이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초기부터 외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권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가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제2경전은 천주교에서 정경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신학자가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 구별하여 별도의 부록으로 엮어 넣고 "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자 "외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책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현재까지도 개신교 가운데서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권수에 대하여 말하자면 먼저 얌니아회의를 아셔야합니다.
얌니아종교회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A.D.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  즉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후에 뿔뿔이 흩어진 유다의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중해연안의 도시인 얌니아로 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얌니아의 율법학자들은 로마 당국에 얌니아에 율법학교를 세우고 자기네의 종교생활을 보장해  줄 것을 특별히 탄원을 하여 허락을 받습니다. 결국 유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한 후 얌니아는 많은 숫자의 유다교 율법학자들과 율법학교가 있는 도시가 됩니다.

여기서 A.D 90년경(혹은 100년경)에 유다교 종교회의가 개최가 됩니다.
이 회의에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 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의 경전목록을 확정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새로운 확정은 아니고 기원전 400년경, (일설에 의하면 에스라에 의해) 일차적으로 확정된 목록을 그대로 재확인한 셈입니다.
이때 이 회의가 경전목록에 해당하는 책들을 확정할 때 적용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 히브리어로 저술된 책
나. 모세오경의 정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책
다. 저술장소가 팔레스티나 내부인 책
라. 기원전 400년, 에스라 시대이전에 저술된 책

이렇게 하여 얌니아 회의 이전까지 유다교에서 주로 성서로 사용하고 있었던 70인역 성서(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부 책들을 유대교 경전목록에서는 제외시킵니다.
이 제외된 책들이 소위 말하는 가톨릭의 제2경전입니다.
가톨릭은 70인역 성경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유다교의 이 결정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즉 얌니아회의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약경전에서 차이가 확정되고난 후 중세에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부터 갈려 나올때 개신교에서는 이 얌니아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개신교 구약성경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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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고에이미'란 '나는 ......이다'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최초의 '에고에이미' 선언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냐고 모세가 묻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WHO I AM" (출 3:14)


'나는 곧... 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십니다. 


'에고에이미'는 바로 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선언하시는 말씀이 바로 '에고에이미'인 것입니다.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이 있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3.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4.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와 함께 요한복음에는 또한 일곱 개의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 개만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표적들을 '에고에이미'의 예증이요 예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일곱 개의 표적들과 연결하여 보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2:1-12)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 (4:46-54)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5:1-9)
  4.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 (6:1-15)
  5. 물 위를 걸으신 표적 (6:16-21)
  6.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신 표적 (9:1-7)
  7.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1-44)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요,
일곱 개의 표적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요, 그로 인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고에이미' 선언들을 통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 우리가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에고에이미' 선언과 표적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7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7번 사용된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게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3. 나는 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로마서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로마서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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