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Arianism, ─派]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 일파이다.
그는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서기 361년)까지 겹치자 아리우스파는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 381년)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은 초대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였다. 예수를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정도로 이해했던 에비온주의자,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특별한 능력을 받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론자, 구약의 성부가 곧 예수라고 주장한 양태론자 등 예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릇된 이해가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등장 이후 60여 년은 그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리우스는 누구이며, 무엇을 주장 했나

아리우스(250년 경∼334년 경)는 루키아노스의 제자였다. 루키아노스는 “인간에 불과한 예수 속에 신적 능력이 들어가 그를 점점 신화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양자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한 인물이었다.

“예수는 피조된 존재로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아리우스는 핵심 주장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아리우스가 저술한 『Thalia』(편집자 주: 연회)가 아직 남아 있지 않아 “아리우스의 사상은 반대파의 저술을 통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대개 아리우스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만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개발하게 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1)면서도, 아리우스 주장의 기본 주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다며 세 가지로 진술했다.2)

1.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2. 아들은 기원과 지위에 있어서 피조물 가운데 으뜸가는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된 존재이다.

3. 아들이 여러 세계들의 창조자이므로 그것들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시간보다 먼저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목창균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편집자 주: 아리안에 대한 네 가지 담화(혹은 논거)를 인용해 “아리우스는 아들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그보다 못한 제2의 하나님 또는 명목상 하나님으로 보았다”라고 설명했다.3)


아리우스의 주장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óγoς – “말씀”, “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렸고 어부들까지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동방 각지로 여행하며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교직자들로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도시대 이후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리우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당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바로 아타나시우스였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리비아의 감독 데오나스, 세쿤더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파의 반격

2년 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 하거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이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여 유배를 떠나게 했다.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황제

336년 아리우스가 죽고 다음 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었다.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공론화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기에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얼마 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아리우스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는 감독들에게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전에 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

얼마 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켜 그들의 지도자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양 진영의 군대가 접전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으므로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으며 엘류시니아인의 신비 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로마 황제가 가진 대제사장직(Pontifex-Maximus : 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사장으로서 신과 백성을 중재하는 직분이다. 예전부터 로마 황제는 태양신 교의 대제사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따라 교회에 간섭하였다)을 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자 그동안 소외됐던 이교가 활성화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그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주자는 생각으로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감독들이 율리아누스와 이교를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하였다.

로마 제국의 분열과 아리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 반달, 동고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이 민족들은 가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중세 종교 암흑 세기를 주도한 가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 할만하다.

니케아 신조의 한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모호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은 쉽게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부분에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 일이 같아서 일체라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런 성경 지식의 부재 때문에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 교리로서 전해오고 있다.

성경의 진리, 성삼위일체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이다(미 4장 1∼2절).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알기에(호 4장 1∼6절),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 놓았다.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지만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고전 4장 5절).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요 6장 45절)라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씀을 깨닫게 된 우리는 성부로서, 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하겠다.



아다나시우스 [Athanasius]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 교부(敎父, 295-373년). 319년 부제(副祭)가 되었고, 325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異端說)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명성을 얻어 이듬해 알렉산더 주교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어 46년간 섬겼다.

그러나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 파에 밀려 335년 라인랜드(Rhineland)에 있는 트리에르(Trier)로 유배되었다(1차).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콘스탄티우스가 즉위하자 귀환하였으나 339년 사순절에 다시 로마로 추방되었다가(2차) 346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교회를 돌보며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356년 제국 전체를 평정한 황제는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군대에 쫓겨 이집트 여러 곳을 유랑해야 했다(3차).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많은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파의 주교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 후 361년 이교도(비기독교인)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이듬해 다시 추방되었다(4차).

363년 율리아누스가 죽자 복귀하였고, 365-6년 잠시 추방당한 것(5차)을 제외하고는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니케아 공회의 결의를 확고히 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결국 그는 다섯 번이나 교구에서 추방되고, 17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그가 죽은 지 8년 뒤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됨으로써 아리우스 파에 대한 완전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의 종속주의적 그리스도론에 대항하고,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로고스로 보아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one substance, 동질)라고 주장했다. 또 성령과 하나님과도 동질을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 신관을 완성시켰는데 이 입장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혹자는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혼자서 기독교를 이교적 합리주의의 혼란에서 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아리우스주의'를 보라.

아타나시우스의 등장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인기를 얻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주교들을 소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을 복잡하게 만들어 되살려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4)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인기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아리우스에 대한 더욱 끈질긴 비판은 알렉산더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경 부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맡았다. 아타나시우스는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아리우스는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고 밝혔다. 또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며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했다.

니케아 공의회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 현, 터키령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공의회. 제1차 니케아(㉮ 니체아) 공의회는 제1차 공의회에 해당하며,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서 소집되고, 각지의 주교 318명(전승에 의함. 실제로는 250명 이하)이 참가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교 공인 후 최초의 전체적 집회이며,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전의 취지도 있었는데, 본래의 본적은 교의문제, 즉 아리우스가 제기한 아버지인 하나님(㉮ 하느님)과 자식인 그리스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의 해결이었다. 결국 회의는 팔레스타인의 세례용 신조(이론도 있다)에 아버지와 아들 <호모우시오스(동일실체)>의 말을 보충한 것을 <니케아 신조>로서 채택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 자를 파문할 것을 정했고 그 결과 아리우스는 추방되었다. 또한 부활제일의 산정법을 결정하고, 20조로 된 교회규정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는 후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가 반아리우스의 입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아리우스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못미쳤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제7회 공의회에 해당하며, 787년에 이코노클라즘의 해결을 위해서 비잔틴 황비 이레네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이콘파괴파가 연히에리아 회의(754)의 결의를 취소하고, 이콘 숭배는 신에 대한 참된 숭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고, 이콘 숭배를 옹호했다. 그러나 서방의 프랑크 교회는 이 결의를 우상숭배의 부활로 해석해서 동방 교회를 비난했다. 또한 비잔틴제국에서는 9세기 초에 이코노클라즘이 재발했다.

알렉산더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리우스는 루키아노스의 제자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는 동시에 같은 안디옥 학파의 유세비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을 추방한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로마의 각 지역에서 조력자들을 얻게 된다. 결국 323년부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집회를 따로 개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5)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단순한 신학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의 질서와 통일성을 헤치는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자문관을 파송해 양측을 중재하길 원했지만 실패했고, 325년 교회의 지도자들을 니케아로 소집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동서방교회의 주교는 1800명 정도로 예상되는데 그중 300여 명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0여 명 외에도 주교들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 부제 등 다양한 신학 전문가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니케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크게 세 파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 유세비우스가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성자는 피조물이며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의 반대자들이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했는데,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셋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편집자 주: 아리우스의 지지자와 다른 인물)가 이끄는 중도파였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가 아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즉 성부와 성자가 유사한 본질을 가졌다고 말했다.
중도파는 수적으로는 가장 우세했다.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으로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교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칼 투르먼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본질(substance)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이후의 신학적 논의들의 궁극적인 틀을 설정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육신하신 예수의 위격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6)라고 평가했다.

니케아 이후 오히려 힘을 얻은 아리우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사태의 종식이라기보다 논란의 가중화로 이어졌다.
애초에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간 것 자체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했고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우스의 지지자인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아리우스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찬에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반기를 들었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파문과 복직을 반복했는데 그의 유배생활을 합치면 약 17년 이라고 한다.

상황은 점점 아리우스에게 유리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로마는 세 명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분할해 다스렸다. 그 중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형제의 죽음 이후 로마의 단독황제가 되면서 아리우스주의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7)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아노모이오스(anomoios, 상이본질)라고 불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an, 유사본질)라고 불리는 세미 아리우스파, 호모에안(homoean, 동류본질)이라고 불리는 중도 온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 분파 중 극단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점점 과격해 지자 일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하고 갑바도기아의 교부 삼인방인 가이사랴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등장해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 주교들의 활약으로 니케아 신조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했다.8)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소집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채택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6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아리우스 논쟁이 종식되는 순간 이었다. 칼 투르먼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범교회적으로 보편적인 정통 신앙을 정의하는 표준이 되었다. … 이 신조는 성령의 신성에 관해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적절히 묘사한다”라고 평가한다.9)

아리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60여 년간의 논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알려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로 가는 길 381년,
서방 신학을 지지하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니케야에서 첫 번 공의회로 모인 325년 이후 두 번째로 가진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신학적 패배를 맛본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포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교회가 니케야 신조를 옹호하는 한 파와, 온갖 정치력을 동원하여 이에 반대하는 다른 파로 분리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이들의 대립이 중단되었다. 니케야 신조를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는 이단을 정죄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완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노플 회의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결사적인 방해공작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교회의 방향성을 더욱 상실하게 하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중도파’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중도파’는 그 당시 대립하고 있던 양쪽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상대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닌 흑백논리의 싸움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비유사파’라고 부른다. 성자와 성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자와 성부가 동일하다고 보는 니케야파를 ‘동일본질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도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유사본질파’라고 부른다. ‘유사본질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사상을 따른 세 사람, 즉 체사레아, 에메사, 그리고 니코메디아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 후에 픽타비스의 주교 힐라리우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니케야 신조가 정의한 ‘동일본질’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 간의 ‘유사한 개념’을 새롭게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교회의 내분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믿었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심지어 이들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커다란 힘을 형성한 적도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동일본질파’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진리에 맞서서 대항했던 ‘비유사파’와 ‘유사본질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협소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지적받기도 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치는 진리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 교부 아타나시우스 교회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를 때까지 진리를 수호하며 험한 길을 걸어간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295?-373)이다. 그가 신약성경의 정경,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목록을 367년에 처음 교회에 소개하였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그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의 모함과 위협을 물리치고, 성경의 진리는 오직 하나뿐임을 증명한 상록수와 같은 인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이교도 논박”, “성육신에 대하여”, ”아리우스파 반박론“ 그리고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에 잘 정리하여 놓았다. 여기에 성경적 진리를 변증하며 이단을 대항하는 그의 노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성자는 성자와 동일하다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말씀(성자)을 하나님의 작품으로부터 제외시켜 창조주로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 높이고, 본성상 성자시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면, 그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그를 포함한 피조물 각각에 대해서 ‘피조물이되 피조물들 중 하나와 같지 않은’이라고 하여야 한다. 당신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소생’을 ‘발생한 혹은 창조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만들어진 작품’처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20). 잠언 8장 22장의 내용은 마치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이 성경구절을 옳게 해석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성부를 가리켜 ‘주’라고 한다. 자기가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로부터 유출된 말씀이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성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50). 이 성경구절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받은 사역에 대한 언급이란 설명이 옳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니라,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유출’은 ‘나왔다’ 또는 “낳았다‘라는 뜻으로서, 그가 본질상 성부와 동일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독생하신 분이다. 또한 창조계로 내려오사 많은 형제를 만드셨기 때문에 ’장자‘이시다”(아리수스파 반박론 2, 62). 성자와 성부는 동질일 뿐 아니라 분리될 수도 없다. 서로 안에 계시는, 즉 상화 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된 것들은 성자 안에 참여함으로써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성자 자신은 참여에 의한 성자가 아니라, 성부의 본래의 소생이다... 그는 성부의 샘에서 나오신 생명으로서, 그 안에서 만물이 생명을 얻고 실재적 존재를 얻는다”(아리우스파 반박론 3, 1).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은 ‘단일신론’을 주장하였던 사벨리우스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벨리우스는 성자는 근본적으로 성부와 하나이지만, 그가 필요에 따라 성부가 되었다가 성자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씀이셨고 아무것도 그를 가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만물을 포괄하셨다. 그는 온 창조계 안에 계시되, 본질적 존재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 안에 계실 때도 그 육신에 생명을 주셨다. 동시에 온 우주에 생명을 주고 계셨고, 만물에 임재하여 계셨다”(성육신에 대하여, 17). 성자는 분명 성부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속한 것을 지니고 계신다.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자신이 하나님 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게된 것이다.

성경이 보인다
- 에스더 4:1-17; 요한복음 11:16; 디모데후서 3:12-4:8; 유다서 1:17-21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상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흑백논리’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을 부인하거나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는 매우 지혜롭다. 하나님을 도전하여, 성도가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전문가이다. 이 사회는 ‘흑백논리’를 들먹거리며 성도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칼과 총을 대신하여, 새롭게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고 넘어뜨리는 영적 무기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대상은, 중용 또는 평화주의이다. 신앙보다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할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분명히 하자.

성도들은 ‘흑백논리자’들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을 동시에 지녀야한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재(4700)  σποδός, οῦ, ἡ 

1. 재,  2. 마태복음 11:21,  3. 누가복음 10:13
발음 / 스포도스(spŏdŏs)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마 11:21, 눅 10:13, 히 9:13)
신약 성경 / 3회 사용

마태복음 11:21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0:13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히브리서 9: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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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을 결정하는 방법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
매년 춘분이 지난 만월 후 첫번째 맞이하는 주일

재의 수요일의 기원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 고난 주간, 사순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순절(부활절 전 40일)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러나 부활절이나 고난 주간 등과 다르게, 재의 수요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관행은 약 11세기 경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는 예식은 모든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과 이삼십 년 전에야 미국 내에서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재의 수요일이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재를 사용하던 교회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구약시대부터 재는 사람들의 참회 표시였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옷을 찢으며 참회하였다(사무엘하 13:19, 에스더 4:1, 다니엘 9:3). 혹은 잿더미 가운데서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하였다.
재를 이용한 참회의 기도는 신약시대에서도 계속되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다고, 누가복음 10:13과 마태복음 11:21에도 기록되어 있다. 

왜 하필 재인가?

구약시대 번제에 쓰이던 동물이나 그 동물의 피, 불 등이 아니라, 왜 재를 사용하는가?
재는 구약시대부터 참회 혹은 회개할 때 사용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에서 재는 인간의 유한한 삶과 회개의 표시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창조될 때 흙(재)로 지음 받았고 우리가 죽을 때 몸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잘못을 느끼고 후회하고 원상태로 되돌리고 싶을 때, 재를 머리에 놓고 베옷을 입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회개하였다. 

어떤 종류의 재를 사용하는가?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아무 종류의 재를 사용할 수 없다.
일 년 전 종려주일(부활 주일 전 주)에 사용되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잘 말려서 태워서 거기서 나온 재와 약간의 오일을 섞어서 재의 수요일에 사용한다.
2000년 전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아 예수는 그를 반기던 바로 그 사람들이 죽이라는 외침을 듣게되었다.
기쁨의 종려나무 가지는 슬픔의 재가 되었다. 

그 재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재를 가지고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은 이마에 십자가 형태의 재를 표시한다.
재는 우리가 모두 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우리의 죄를 떠오르게 하며,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용서를 떠오르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매일 죄를 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으며, 회개하고 참회하며 예수께 돌아올 때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강력한 표식이다.

재의 수요일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추이다. 비록 우리 한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예배이며 의식이지만, 재의 수요일을 지키고 기념하는 것은 사순절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재의 수요일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깨닫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예배로 시작된다. 재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바르는 의식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놓겠다는 결심하는 시간이다.
또한 앞으로 사순절(40일) 동안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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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동안 하루 한끼 금식하며 한끼 금식한 것을 특별 헌금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지진 구호금, 북한 동포 양식 후원금, 노숙자 후원금........ 등
특별헌금은 각 교회마다 교회 형편에 맞추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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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귀신(鬼神) 프뉴마 아카다르토스




더러운 귀신(鬼神) An evil spirit

한글 개역 성경에서 "더러운 귀신" 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신약에서만 "25구절" 입니다.

마태복음 : 4
마가복음 : 11
누가복음 : 7
사도행전 : 2
요한계시록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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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에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1. 의학적 방법
2. 음식 치료
3. 자연 요법
4. 귀신 축출

의학과 음식과 자연 치유는 인간의 육체만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을 내쫓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므로 육체도 함께 치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의학적 방법이 현대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신을 내쫓는 것은 인간을 전인적 치유하는 과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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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귀신의 집(마태복음 12:43, 누가복음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When an evil spirit comes out of a man, it goes through arid places seeking rest and does not find it.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When an evil spirit comes out of a man, it goes through arid places seeking rest and does not find it. Then it says, 'I will return to the house I left.'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여 바알세붑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귀신의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비유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비슷한 현상을 드러내어 쉽게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 판단으로 알 수가 없고  성령의 비추임으로만 알수 있고 믿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거룩한 것 진주인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제국으로 여기고 크기나 규모로 판단하는 자들이 장난질 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육신의 귀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은 성령의 비추임이 없이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성령의 조명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예수님을 성인군자로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성인의 가르침 정도로만 알게 될 것이고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마귀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며 당연히 천국과 지옥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게 될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지식인들의 서재에는 성경이 꽂혀 있다고 한다.

일본에는 16세기에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개신교는 1859년에 전파되어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빠르게 성경이 전해졌는데도 지금 일본의 기독교인구는 1프로도 안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개신교 비율이 인구대 17프로인데 10년전에는 25프로까지 육박했지만 지금은 교회의 세속화로 10프로 정도가 떨어졌다. 

일본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멧세지로 믿지 않고 교양서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도 여러 종교중에 하나로 보기 때문에 예수를 혼합종교중에 하나로 보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이 극히 적다고 한다.

일본은 여러 종교들과 개인 수호신까지 합하면 800만개나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본은 귀신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가르침이나 정신수양하는 방편으로 여기거나 세상의 복을 받는 기복으로 여기는는 자의 마음은 수많은 귀신들의 집이 된다.

더러운 귀신

예수님은 귀신을 칭할 때 더러운 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 ἀκάθαρτον  πνεῦμα)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대인들은 사탄이나 옛뱀 또는 마귀를 더러운 영(the unclean spirit)라고 불렀다.
사탄은 주로 구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이고 마귀는 신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인데 같은 종류이다.
사탄이나 마귀는 하나의 거대한 악한 영이다.
그러나 그 사탄안에 수많은 귀신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귀신들이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꼬이고 미혹케하는데 적그리스도인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따르는 이단들과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세상권세자인 군왕들이 가운데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것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마귀와 더불어 불과 유황못인 지옥에 던저질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20:10에서 말씀하고 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귀신은 더러운 귀신인데 이 더러운( á̓κάθαρτος unclean )이란 뜻은 무엇일가?

단순하게 말하면 깨끗한(pure clean)의 반대뜻이다.

무엇을 깨끗하다고 할수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순전하신 분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순전하시고 깨끗하신 분인데  마귀가 더러운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요 악이요 죄이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반대로 행하기 때문에 더러운 영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더러움울 규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편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반대편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 외의 것으로는 무엇으로도 거룩함과 더러움을 결정한 기준이 없다.

더러운 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마귀에게 속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마귀의 행동대원격인 귀신을 의미한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왜 나갔을까?
그것은 더러운 귀신의 특성 때문인데 우리가 옛말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러있지 못하고 온 곳을 다 헤집고 싸돌아다니는 것이 역마살인데 이것은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란 뜻이다

귀신은 한 자리에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을 옮겨다니면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한다.더러운 귀신이 이 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귀신은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아간다.
옛날사람들은 귀신이 나무나 바위나 집이나 길에 붙어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귀신은 결코 사람을 떠나서 살수 없다.
귀신이 거하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가 사복음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뛰쳐나와서 예수님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종종 나오고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명령하셔서 귀신들린 사람의 병이나 정신을 고쳐주셔서 멀쩡하게 만들어 주시는 사건이 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거처로 삼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줄만한 어떤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더러운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더러운 귀신이 편히 쉴 안식처는 물없는 곳이란 뜻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물없는( ἀνύδρων) 곳은 어떤 곳일까?

유대인들은 더러운 귀신이 물없는 곳 즉 모래사막이나 풀이 없고 황량한 황무지에 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없는 곳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메마른 황무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도 귀신이 깊은 산속이나 오래된 고목에 거한다고 믿고 산의 바위아래나 고목나무 아래서 귀신을 부르는 고사를 지낸다.
무속인들이 귀신을 부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더 강하고 센 귀신을 등에 업고 굿을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나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이나 다닐 수도 있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집을 떠나 여기저기 다닐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집에 와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처럼 더러운 귀신도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 있고 광야나 산에도 다닐수도 있고 하지만 쉴곳은 사람의 마음인데 예수님은 귀신이 쉴 곳은 물 없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물 없는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물은 거룩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물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한 마음은 더럽고 황량하며 강퍅하고 사막과 같이 메마른 영혼이다.

더러운 귀신은 특성상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안에 거하기를 좋아한다.
더러운 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5:19-2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귀신은 이런 더러운 생각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 속에 들어가면 매우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적 정결의 함정

그런데 이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으로부터 나가서 물없는 곳을 찾아다닌 이유는 이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정결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인데 바리새인들은 한때 모세의 율법으로 일시적으로 또는 반복적으로 지킴으로 그 마음이 정결케 되어지기도 했다.
율법이나 인간의 강한 의지나 노력도 어느 정도 어느 기간동안에는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한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 들어선 길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실천하여 마침내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죽을 힘을 다해 죄와 욕심을 억누를 수 있지만 인간은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기 때문에 한 번 방심하면 순간적으로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율법이나 인간의 의지노력 수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과거에 노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나서 후회하며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잘라내었는데 나중에는 발가락으로 놀음질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에 양도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믿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욕을 없앨까 날마다 노력했는데 그 음욕이 없어지지 않아 어느 날 산기도중에 돌을 들어 자신의 음부를 쳐서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려다가 결국 이단 교주가 되고 말았다.

죄를 끊으려는 이 몸부림이 얼마나 처참한가?
그렇다고 해서 정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인간의 의지 수련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 인내함으로 죄를 없이한다든지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비극이 되어진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때 잠시마음이 깨끗해져서 더러운 귀신이 그들에게서 떠나간 것이다.

어쨌든 잠깐이지만 모세의 율법으로 깨끗해지기는 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노력으로 수련으로 잠시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은 "어 이 사람이 마음이 깨끗해졌네"  하면서 귀신 적성상 맞지 않으므로 나와서 다른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부터 나간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더러운 영혼을 찾고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수련으로 죄를 억누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으로 마음을 깨끗케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더러운 귀신은 왜 다른 더러운 영혼을 찾지 못했을까?

이 세상에 더러운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쉴곳을 찾지 못했다는 뜻을 잘 생각해보자

쉬기를(ἀνάπαυσιν rest) 구하되(ζητοῦν seeking)  그러나( καὶ  but) 찾지 못했다( μὴ  εὑρίσκον not finds)

여기서 쉬기를 (아나파우시스ἀνάπαυσιs)이라는 말은 막간 잠깐( intermission )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막간을 이용해서 라는 말을 하는데 연극공연할 때 일 막이 끝나고 이 막이 시작되기 전 잠깐의 휴식시간인데 이 때 관객들은 음료수를 마신다든지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마음을 율법이나 도덕 또는 수련등으로 깨끗하게 청소하는 그 잠깐 사이에  더러운 귀신이 잠시 가 있을 곳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안을 청소하면서 애들아 잠깐 밖에 나가 놀다가 엄마가 청소 다하면 들어와라고 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 왜냐면 어머니 생각은 애들이 집안에 바글바글있으면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잠시애들한테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막간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흥미있고 신나는 일들을 찾아 다녔는데 더러운 귀신이 찾아다닌 것은 악하고 못되고 더러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충동질했던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은 말 그대로 악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못된 짓 악한 짓 아주 혐오스럽고 더러운 그런 쓰레기같은 자들을 찾아다니는 악동들이 바로 귀신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러운 귀신은 좋아할만한 그런 악하고 더러운 짓들을 하는 자들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귀신들도 종류가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그 앞에 귀신들의 특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셨다.
벙어리귀신, 더러운귀신, 일곱귀신, 군대귀신, 꼬부라져 펴지못하게 하는 귀신 등 예수님은 귀신들이 인간에게 정신병과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지고 들어가며 귀신이 하는 일들을 병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장님이 앞을 보기도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사람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며 병증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귀신들도 다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귀신은 어떤 귀신인가?

바리새인들 즉 율법주의라는 외식과 위선의 귀신이며 교만과 사람차별이라는 귀신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지식적이며 고상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더러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사냥하는 귀신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 있는 더러운 귀신은 양반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도덕군자요 법을 잘지키는 자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떠받듬을 받는 자들속에 있는 위선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악함을 우리 주님은 드러내고 계신다.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곳을 탐색해봤지만 자신의 특성과 맞는 위선자들을 찾지 못하고 다시 나왔던 그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다.

또한 거짓말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시기질투하는 귀신 남을 비판하고 악담하는 귀신 자살하는 귀신등등 귀신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 귀신들은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 들어간다.

우리가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원망과 저주와 앙심을 계속 품고 있다가 귀신의 충동으로 들어와서 결국 끔찍한 악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죄든지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죄된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므로 언젠가 그 죄를 좋아하는 귀신이 들어와서 실제로 그 죄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샤마니즘에 보면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다가 사람들 속에 들어온다는 말을 무당들이 하는데 이것은 다 귀신의 속임수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결코 이 세상에 있을수 없고 단지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이 죽은 자들의 흉내를 내어서 마치 전생이 있는 것처럼 죽은 영혼을 달래주어서 보내주어야 한다고 해서 마귀가 사람들에게 제사(섬김)을 받아먹으려는 수작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전생체험이나 무당이 죽은 자의 혼을 불러들인다는 초혼의식은 완전히 마귀의 장난질이다. 

결코 무당이 죽은 부모의 영혼이나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들어가서 심판을 기다린다. 

그래서 죽은 자는 다시 세상에 불러올수도 머물수도 없다. 

불교에서 49제를 하는 것은 구천에 떠돌아 다니는 죽은 사람의 혼이 49일째에 저승으로 가는데 잘 보내줘야 한다고 하면서 고인의 가족들에게 돈이나 절에 필요한 물건을 바치라고 한다.

죽은 영혼을 이용해서 돈벌어먹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라! 

실상 카톨릭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 선행을 하면 그가 지옥에서 연옥으로 올라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헌금을 뜯어낸다.

무당 점쟁이도 죽은 자의 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도 죽은 자를 위해 명복을 빈다든지 어떤 기념비나 기념회를 만들기 위해 헌금을 요구한다면 귀신의 짓거리이며 저주받을 일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귀의 하수인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고 오직 살아있는 가족들이나 친척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행을 행해야 한다.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오다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귀신이 나왔던 사람에게 돌아가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은 깨끗해졌는는데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깨끗이 청소한 사람의 맹점은 그 마음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빈집 빈 마음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모세의 율법과 구제와 금식과 기도로 자신들을 청소했지만 그 마음속에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빈 영혼으로 두었던 것이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정돈된 영혼에 주인이 없다는 사실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아주 구미가 당기고 굉장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소제되고 정리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온갖 더러운 것들로 다시 채우는 일이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흥미있고 매우 쇼킹한 뉴스는 너무나 착하고 도덕적이고 예의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 갑자기 사기를 쳤다든지 뇌물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 뉴스에 토픽으로 장식된다.

고아원이나 장애자 시설을 운영하는 목사나 신부 혹은 스님이 횡령을 하고 아이들에게 몹쓸짓을 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사람들은 매우 흥분하면서 그럴수가 있어 그게 사람이야 하고 난리가 난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착하고 법없이도 살 사람인데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강도짓을 했데 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적인 마음을 가진 자의 삶을 더럽고 음란하게 어지럽히는 것이 더러운 귀신들의 아주 재미난 활동인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거룩하고 의의 사자같이 보였던 교회 목사가 성추행이니 그룸밍 성범죄니 하고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의 입에 매우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된다.

마치 어머니가 깨끗하게 집안을 청소했는데 철없는 자식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 흙뭍은 옷을 털지도 않고 더러운 손과 발도 깨끗해진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때를 뭍히면서 깔깔대고 재미있는 놀이라고 하듯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과 같다.

얼마나 악동들인가?

  지식으로 가득차고 윤리와 도덕으로 가득한 인격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가지런히 정돈된 마음을 음란함과 탐욕으로 외식과 위선으로 더럽혀놓는 악동들이 바로 더러운 귀신들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군자이고 법을 잘지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사람들앞에서 선비같고 점잖은 사람도 그가 혼자 있을 때 또는 그 마음속에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나는 아니다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의지 자기의 도덕과 자기의 법으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믿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러운 귀신이 일곱이 들어가 상태가 전보다 더 악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점점 더 더러워져서 나중은 처음상태보다 7배나 더 악한 더러운 귀신들의 집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씀하신 귀신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 도덕군자들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이를 갈았던 것이다. 
주님은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겉으로 법을 잘지키고 도덕적이며  모범적이고 착한 척하지만 너희들의 영혼은 7마리 더러운 귀신의 잡탕질하는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영혼의 집에 주인을 모셔야 한다.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수 없다.
왜냐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부터 인간의 영혼은 쭉 빈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네 인생은 네 거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속삭인다.
그래서 케세라 세라 네 인생이니 마음껏 즐겨라 하고 귀신은 속살거린다.
내가 내 영혼을 주인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대고 내 인생은 내것이라고 아무리 소리질러봐도 소용없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켜주지 않아도 바로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내가 왜 이러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할때가 있다.
이러한 자책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한다.
착한 것같은 사람도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뜻과 달리 행동하는 자기를 보고 놀랜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누군가 있다는 뜻이다.
그 영혼의 주인이 더러운 귀신이라면 점점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은 일곱 귀신의 거처가 될 것이다.
일곱 귀신은 단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완벽한 악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혹시 일곱귀신이 들렸다고 해도 회생의 가능성을 있다.
왜냐하면 일곱귀신이 들린 막달라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하나님으로 영접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일곱귀신에 매여서 인생을 포기할 정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맞이했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 여인이 되었다.

우리의 영혼이 더러운 귀신의 집이나 난장판이 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전혀 없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 주가 되시고 장차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러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로 모시고 내 영혼의 집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내 영혼에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가 거하시고 내 영혼의 주인이 되실 때 더러운 귀신들은 왔다가도 혼비백산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앞에 갈 때까지 더러운 귀신들은 우리의 영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의와 거룩함은 결코 도덕이나 율법 선행 수도 지식 인격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현 시대에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변태적행동과 탐욕으로 부끄러운 짓을 행하고 권력자들이 음란과 정욕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선생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행하고 목사가 스님이 신부가 외간 여자들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본다.

우리 자신이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러한 더러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혼속에 이 더러움이 깊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더러운 귀신이 탐하고 유혹하는 더러움을 우리가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거룩함 밖에는 없다.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붙잡아 모셔놓을 때 우리는 모든 더러움을 이겨낼 수 있고 어떤 종류의 귀신도 다 쫓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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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귀신(1140) 다이모니온(daimŏniŏn)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1. 신성,  2. 마귀,  3.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발음 / 다이모니온(daimŏniŏn)
관련 성경 / 귀신(마 7:22, 요 7:20, 딤전 4:1), 신(행 17:18)
신약 성경 / 63회 사용

마태복음 8: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프뉴마톤 아카다르톤(4151 169) 프뉴마 아카다르토스

4151.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 1:17), 귀신(마 8:16, 눅 4:36, 요 16:18), 마음(마 26:41, 막 8:12), 영혼(마 27:50, 눅 23:46, 요 19:30), 중심(막 2:8), 하나님의 말씀(행 18: 5), 영(눅 24:37, 39, 엡 1:17), 빛(엡 5:9), 한마음(빌 1:27), 기운(살후 2:8), 바람(히 1:7), 생기(계 11:11, 13:15).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169. ἀκάθαρτος, ον 
1. 불순한,  2. 신성과 밀접할 수 없는,  3. 에베소서 5:1
발음 / 아카다르토스(akathartŏ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508 ‘정결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더러운(마 10:1, 계 18:2), 깨끗하지 아니한 (행 10:14), 깨끗하지 못한(고전 7:14), 부정한 (고후 6:17)
신약 성경 / 32회 사용


마태복음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가복음 1: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ried out.

마가복음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3:2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마가복음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마가복음 5: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마가복음 5: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마가복음 6: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마가복음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마가복음 9: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누가복음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누가복음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누가복음 8: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누가복음 9: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누가복음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누가복음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사도행전 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요한계시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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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1:21-28)

문명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귀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허구적인 존재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천사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그 생명력을 잃게 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영적인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귀신들을 쫓아내버린 것이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크게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과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며,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이신 하나님을 위시하여 온갖 종류의 영들이 존재하며 활동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 두 세상을 모두 섭렵하며, 또 그 두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영적인 존재들을 그 주인공들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과 그 세상을 채우고 있는 영들이야말로 많은 사건들 속에 진정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와 “더러운 귀신”이 만나 격돌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둘 모두 그 실체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이 사건에서 귀신을 빼버린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을 이해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이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전체에 걸쳐 오직 하나뿐인 성전(Temple)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안식일에 각자의 마을에 있는 회당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오늘날의 예배당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2절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의 그것은 권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자, 귀신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영적인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귀신이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 사이에 대화를 보자면, 이 둘은 서로가 어떤 존재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서로를 향하여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이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들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놀라워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두려워서 떨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컴컴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켜면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벌레들이나 쥐들이 황급히 몸을 감추듯이, 이 더러운 귀신 또한 예수님의 빛 앞에 그 정체가 밝히 드러나고 두려워 떨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제압하시고, 이 귀신 들려 비참해진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며, 또 이 싸움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회당에서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곳에 “더러운 귀신”이 버젓이 드나들며 대놓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밤낮으로 손발을 씻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왜 유대인들은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을까요? 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가 없었을까요? 야고보서 4:7,8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이기고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마음 속의 죄들을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온 마음을 들여 생각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속에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귀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마귀를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 이들의 이러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면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권세가 없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 (authorit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을 “권세 있는 자”라고 하며 (22절), 또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합니다 (27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신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도 주십니다. 마가복음 3:14,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면서 그들을 부르시는 세 가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인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귀신 또한 어둠의 세계를 주관하는 일종의 영적 권세자(spiritual force of evil)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을 무서워하는 대신 이를 대적하고, 제어하고,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제자들의 신분이 “땅에 속한 사람(earthly being)”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 (heavenly being)”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치하는 영적인 권세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하나님의 권세는 밝은 눈과 같다(Divine authority is like the single eye)”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밝은 눈”이란 마태복음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If your eye is single - KJV)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를 똑바로 보시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권세에 순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사로잡으며 나의 밝은 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보이고, 귀신은 귀신으로 보이고, 빛은 빛으로 보이고, 어둠은 어둠으로 보입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되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게 되고, 대적할 것을 대적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권세가 내 안에 살아있어서 마귀를 대적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여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고 대적한 이야기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여 거의 죽음에 눈 앞에 보일 지경이 되신 예수님께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에게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몹시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이 마귀의 말은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벌써 돌멩이가 떡으로 보이고, 유혹하는 마귀가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떡”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잘 아시고 오직 이 하나님께 순복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항상 밝은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눈으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을 막으려 할 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3).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며 그 뜻을 이루는데 온 몸과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는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정말 바늘 구멍만큼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가 예수님께 밝은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귀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며, 또 자신들이 지금 마귀의 권세 아래 있음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악한 영들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영(이사야 11:2)이시며,
또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영(로마서 8:15)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악한 마귀의 더러운 귀신을 분별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권세자가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하여 잘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요한복음 4:24),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영입니다 (요한복음 6:63).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또한 영적 싸움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베소서 6:12).

우리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고 이 영적 싸움을 능히 감당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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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왕 바알세불 곧 사탄마귀는 이미 진 자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40일이 지난 시점에 예수님과 맞붙어서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KO패 당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3대 0으로 판정승할 때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12제자들과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쫓는 권세를 위임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기간에는 판정승한 것으로 인하여 사탄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을 쫓아내었고,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KO승한 것을 바탕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 권세를 위임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쫓아내야 한다.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마 12:28).
귀신이 쫓겨나가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귀신을 쫓았는데도 그가 떠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알고 보면 쉬운 일이지만 모를 때에는 당황할 수도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성도의 신앙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는 귀신(鬼神, 다이모니온)이 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며, 귀신이 얼마나 많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몰라 귀신에게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귀신을 알아야 귀신을 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어떤 존재이며 성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이외에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귀신의 공격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귀신을 그냥 방치함으로 귀신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도 적잖게 있는 것 같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고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가?  

성도들이 귀신들에게 나갈 것을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나가야 하는가?
나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들은 왜 성도들의 축사 명령에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귀신은 패배자(敗北者)이기 때문이다.

귀신의 대장인 사탄 마귀가 성도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이미 패했기 때문이다(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귀신들도 자기들의 대장을 이긴 예수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세를 처음에는 당신 혼자 사용하셨지만, 이내 그러한 권세를 12제자들에게도 위임하셨다(마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으며(눅 10:1),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위임하셨다(막 16:1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예수께서 주어진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다.

누가복음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왜냐하면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벧후 2:19).

베드로후서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영계에도 엄연히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놀라운 법칙이다.
그런데 귀신들의 왕(지배자)인 마귀가 예수님과 한 판 붙어 싸웠을 때 마귀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귀는 그때 예수님에게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그리고 십자가에서 마귀는 완전히 패배당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마저 주님께 내어주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마 4장에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때 예수께서 마귀와 처음으로 한 판 붙으셨다.
그때만해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 그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을 것이이다. 아니면 자기의 부하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2)"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마귀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에게 시험을 받으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에는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는가?
그것은 "기록된 말씀"을 사용해서였다.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고 댓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귀는 의식주의 유혹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가 없음을 알고는 새로운 시도에 들어간다.

이제는 마귀도 기록된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시도한 것이다.
우선 그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으니라(마 4:6)"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최종적으로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가서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내게 엎으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저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마 4:10)"이라고 댓구하심으로 물리치셨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얼마동안 떠나야 했다.
마귀는 예수께 3대 0 판정패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 자로서 마귀의 부하들은 예수님에게 복종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가운데 하나라도 마귀의 말에 순종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거나, 성전에서 뛰어내렸다면, 그는 마귀의 말처럼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취했을 수는 있으나, 그때부터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에서는 누구의 말에 순종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든지 순종한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도 마귀의 말에 순종하고 말았으니, 예수님도 그만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 순간에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예수께서 뛰어내리 때에는 천사가 와서 그를 받들어 지켜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뛰어내지지 않았다.
마귀의 말에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 마귀의 말에 순종했다면, 우리는 전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마귀에게 진 자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어릴 적부터 기적을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께서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 그는 아직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 예수님은 그 어떤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했으며, 귀신을 쫓아내시지도 아니하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이후에 마귀에게 한 판 승부를 벌여서,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이제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신 것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고, 보게 되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여 예수께서 귀신의 왕(통치자)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중에 왜 우리 믿는 이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2:29의 말씀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말씀에 나오는 "강한 자"는 귀신의 왕(통치자) 바알세불인 사탄 마귀(루시퍼)를 가리키며, 강한 자의 집 안에 있는 세간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 이름의 명령은 이미 승리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귀신들로 하여금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귀신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가해짐으로 그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마가복음 5:7~9).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우리가 귀신들에게 명령하면 영적 질서가 세워진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신 하나님으로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괴로움이 임한다.
나갈 때까지 더욱 더 큰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과 명령이 칼이 되고 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명령하는 말씀이 칼이 되면, 칼은 밖으로 나가서 귀신에게 계속해서 엄청나게 타격을 가한다.
그리고 명령하는 말씀이 불이 되면, 귀신들을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명령할수록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한 번 내쫓으려고 했다면 계속해서 꾸짖어야 한다.
그가 떠나갈 때까지 말이다.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령할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명령해야 하는가?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어쩡쩡한 태도나 부탁조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럼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꾸짖어서 쫒아내야 한다(마가복음 1:25, 9: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unning to the scene, he rebuked the evil spirit. "You deaf and mute spirit," he said,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꾸짖어"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귀신도 인격체이므로 자신을 꾸짖는지 부탁하는지를 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는 이제는 그가 사람 속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고지하고 그 사람에게서 떠나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직접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도만 "꾸짖"었지만,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현장과 대상에 대해서도 꾸짖으셨다.
특히 베드로의 장로가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에는 열병을 꾸짖으셨으며(눅 4:39), 심지어 자연의 기본적인 힘들 즉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다(막 4:39).
왜냐하면 질병과 바람 가운데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So he bent over her and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She got up at once and began to wait on them.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명령하여 쫓아내야한다(마가복음 5:7~9)

귀신에게 떠나나갈 것을 명령하고 나간 다음에는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다짐시키듯 명령해야 한다(막5:7~9).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으나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당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12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그냥 귀신이 순종하며 떠나갔는데, 나 자신이 명령했을 때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를 다시 확인해보아야 한다.
귀신이 떠나지 않는 데에는 다음의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어서다.
그때에는 그만한 이유들을 제거해주고 명령해야 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가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갖고 있을 때 귀신은 잘 떠나가지 않는다.

죄를 완전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떠나간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 3:8).
그러니 자기가 그 사람 속에 들어있을 합법적인 이유가 있는데 왜 떠나가려고 하겠는가? 그냥 버티려고 할 것이다.

둘째, 귀신들린 자에게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군대귀신처럼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을 때에는 잘 떠나가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때에는 "너 말고 다른 귀신도 함께 떠나 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셋째, 귀신들린 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는 귀신이 없다고 말하거나, 벌써 귀신들린 지가 몇 년쯤 되어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아니한다.

귀신은 계급이 높을수록 자기를 잘 감춘다.
이제 맨 밑의 귀신들은 금방 자신을 드러내지만, 오래된 높은 계급의 귀신은 어찌하든지 자신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합법적인 이유들이 있으면 안 떠난다.

예를 들어, 과거에 무당집에 살면서 그 집의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거나, 굿하면서 귀신에게 절을 한 일이 있다거나, 점을 친 일이 있다거나 하면 귀신들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우상숭배한 죄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한 뒤에 하나님께 분명하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또한 자기 몸에 귀신이나 용같은 문신을 새기고 있거나, 용반지를 타고 있거나, 용바클을 허리띠로 차고 있거나, 집 안에 옛날에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하거나 간직했던 물건이 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벽에 걸쳐져 있는 사진이 남아있을지라도 귀신은 잘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했던 물건이 있으면 전부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귀신은 잘 안 떠나간다.

다섯째, 귀신더러 떠나가도록 명령하는 축사자가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저쪽에 있는 귀신의 숫자가 내가 기도함으로 나를 돕도록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보다 숫자가 많을 때에 귀신들은 잘 안떠난다.

예수님께서도 변화산 아래에서 9명의 제자들이 자신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묻자,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기도의 분량이 어느정도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이 저절로 겁을 먹고 떠나간다.

귀신이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신도 사람의 눈을 통해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된다.

첫째, 지체하면 할 수록 귀신은 고통이 더 가중 될 것이다.

"너는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했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떠나가지 않는다면 너는 떠나지 않을수록 더 괴로울 껄.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가는 것이 좋을 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귀신들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면, 귀신은 그순간부터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명령하는 그 말씀이 이 귀신에게는, 때로는 칼이 되어 귀신을 잘라버리고, 때로는 불이 되어 귀신을 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지 않더라도 급하게 마음을 먹지 말라.
느긋한 마음을 먹으라.
"네가 떠나지 않을수록 너는 더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만 손해보는 거야"하고 생각하고 있으라라.

둘째, 귀신의 속임수에 놀라지 말라

감히 네가 누구에게 들어와서 이 장난질을 하는거야! 하고 생각하라.
이미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었기에 죄사함을 받은 자요, 예수님에 대한 믿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들, 장차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자에게 감히 종(노예)인 주제에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구나.
감히 겁도 없이 말이야! 라고 생각하라.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당황해하며 포기하면 귀신들도 우리들의 마음을 다 알고 더욱 겁을 상실한 자가 되어간다.

귀신은 영물이다.
귀신도 영물이기에 귀신같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놈들도 다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도 영적 세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비록 능력있는 존재라도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을 결코 행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들의 불법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사람을 점거하고 있을 때에는 과감히 쫓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저놈도 사람의 몸 속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은 죄들이 있으면 회개하라.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물건들과 문신을 찾아내어 제거하라.
그리고 과감히 그들에게 선포하라.
꾸짖으면서 나갈 것을 명령하라.
나가지 않을수록 자기만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들에게 명령하라.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하는데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꾸짖으라.
내 입에서 나가는 명령과 말씀이 저들에게 칼이 되고 꽃히고 불이 되어 태워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쫓으라.
그리고 단호하게 떠나갈 것을 계속 명령하라.
떠나갈 때까지.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이르면, 버티다가 버티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후에 떠나가게 된다.
귀신도 상당히 끈질긴 놈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며, 단호함이나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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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복음(마태복음 24:14)


천국 복음(마태복음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3대 사역을 동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가르치며
2.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며
3. 고쳐 주셨다

세 가지 사역 중에서도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더욱 열심을 내셨습니다.
가르치고 고치신 것도 결국은 모두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경을 배우고 병 고침을 받고도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기쁜 소식를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를 데려 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생의 기쁨은 죽어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Jesus went through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그리스도인들이 뜨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있고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질때 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쳐야 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것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정거장에 불과합니다.우리가 돌아가서 영원토록 살아야 할 집은 천국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선포하고 사시는 지구촌의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복음을 논할 때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삼일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온 인류에게 가장 복된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되고 있는 복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만을 믿으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온전한 복음에 못미치는 복음입니다. 성경에서 진정한 의미의 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5:3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신5:6,7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복음이란

피조물이 창조주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때 생명을 얻게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순종할 때 생명을 얻게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 천국 복음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래와 같이 재차 증거하시고 계셨을 뿐입니다.

 

"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4,15

 

 

여기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약성경을 뒤엎는 새로운 복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주어져 있던 그 천국복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에 이미 존재하는 천국복음을 폐하고 새로운 다른 복음을 증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하여 완성케 하려 오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런 온줄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5:17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구약시대 이미 주어져 있던 그 천국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더 밝히 알려주셔서 그것을 "완전케 하려 함"이었습니다. 

천국복음을 오해하고 있었던 구약 이스라엘은 사랑과 공의의 법인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얽어매는 올무로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사랑과 공의를 발현하는 생명의 원천으로 보기보다는 사람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도구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복음을 다시 재해석 주셨던 것입니다.

"나의 백성아 하나님의 율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지 그것으로 서로 구속하고 얽어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오해하지 말라.
내가 이제 내 아버지의 사명대로 이 땅에서 피 흘려 죽어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에게 확증할 것이며 그 사랑의 확증이 너희의 패역하고 굳은 심령을 변화시키어 다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여 지키는 존재들 즉 서로 사랑하는 거듭난 존재들로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로 인해 한층 강화되고 완전케 될 천국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새언약의 본질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36:26~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니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1:31, 33)

예수님은 구약의 천국복음을 대치하는 다른 새로운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에 담긴 그 복음 그대로를 증거하시되 한층 강화되고 완전케 된 복음을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에 순종하면 생명을 얻는다"라는 천국 복음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판에 새기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하셨고 또한 미래의 재림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구약과 율법을 폐기하는 새로운 구원의 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복음을 크게 곡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더 높이고 완전케 하여 인류로 하여금 그 법에 더욱 순종케 하려 하심이었지 구약과 율법을 폐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면죄부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겠습니다.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4-15)

"너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19:17)

"나는 그의 명령(계명)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한복음 12:50)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겸비하고 낮아져서 애통하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자신의 의로움을 포기하고 또한 교만과 위선을 벗어버려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굴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스스로 낮아져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천국복음을 완전케 하는 당신의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로 깨닫는 사람은 그 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천국 복음에 굴복케 될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명기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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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복음"과 "영원한 복음"

주님께서 감람산에 앉았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물어보기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물어볼 때 대답하시기를 "난리를 무서워하지 말고 미혹에 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할 것이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데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시었고,

요한계시록 14:6이하에는 영원한 복음을 가졌는데 바벨론을 심판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에 있어서는 첫째로 시대를 구분해야 됩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세상 끝이 온다고 하였고 영원한 복음을 전할 때는 바벨론을 심판할 때라고 한 것을 보면 천국 복음은 은혜시대에 전할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심판기에 전할 복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은혜시대의 복음은 죄인을 불러서 중생을 받게 하는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바벨론 세상이 한 시간에 불탈 때에 영과 육이 아울러 구원을 받되 이 땅위에 남은 백성으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하는 복음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밀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 복음은 영원한 영생의 나라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인데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증거하므로 사망 아래 다스림을 받던 죽은 영들이 중생을 받는 동시에 몸은 죽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는 것을 목적한 것이니 이것은 십자가로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속죄 구령의 역사입니다.

주님 오시기 전(구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는 때이니 죽은 영들이 중생받는 일은 없으므로 복음을 전하는 때가 아니요 다만 조상적부터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신 하나님을 율법에 의하여 속죄제로 공경하는 때요, 천국 복음을 전할 때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아무런 죄인이라도 회개하는 즉시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었다가 천년 왕국이 지난 다음에 심판의 부활에서 생명의 부활을 받아 천국의 영원한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영원한 복음은 천년 왕국의 백성으로 들어갈 자들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앞에 절하는 자는 다 죽게 되는 재앙이 내릴 때에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보호를 받아 지상 왕국에 들어가는 백성들을 위하여 전하는 복음입니다.

세세 왕권을 받을 자는 두 가지로 봅니다.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순교한 자는 주 재림시에 왕권으로 부활을 하고, 영원한 복음을 환란 가운데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던 자는 재림시에 변화 성도로 왕권을 받아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권은 복음을 전하던 자에게 있되 순교를 하기까지 전한 자에게 있고, 시민권은 천국 복음을 받아 영혼이 구원받은 자에게 있습니다. 영원한 복음을 목숨바쳐 죽기까지 전하지는 못했지만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자는 다 천년 왕국의 종족(백성)이 됩니다.

다시 세밀히 말하자면 천국 복음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전한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에게 심판과 새 시대를 가르친 복음인데 이것은 바벨론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복구된 사실을 들어 인간 종말의 심판과 새 시대를 가르친 것입니다(계 10:7).  이것이 우리가 다시 예언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성경 기록의 목적을 통해 말하자면,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전할 복음을 세밀히 가르친 것은 선지서와 계시록이요, 천국 복음이라는 것은 한날 한시에 구원받는 복음이 아니고 심판기가 올 때까지 온 세상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했으므로 많은 글이 쓰여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의 날에 온 세상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하고 남은 백성이 될 자는 지상 축복을 받는 동시에 영원한 천국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묵시로 받은 선지서와 계시록은 정확한 종말의 다림줄이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은 직접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이 축복을 받은 자는 자동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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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원과 몸의 구속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구원이란 육체는 아담의 죄의 유전(원죄)으로 풀과 같이 쓰러지나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는 자 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자범죄가 사해지는 구원을 말한다.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사도들의 사명은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모든 육체는 풀이요" 한 것은 이사야 40:6~8절을 인용한 것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영혼구원.

예수님도,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다.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나면, 마 24:21~22 "이는 그 때에 큰 환란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다. 큰 환란이 오는데 환란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셨으니 영과 육이 아울러 해를 당하는 커다란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 큰 환란 때를 성경은 또 다른 말로 신원의 날이라 부른다.

주 재림 시(時)는 영육이 아울러 구원받아야 지상에서 1,000년간 안식을 얻게 된다. 천년안식은 영만도 아니요, 육만도 아닌 영과 육이 완전히 조화롭게 사는 곳이요, 에덴창조의 원리가 충만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영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영과 육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구원도 영과 육의 "큰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뜻이요, 이를 시대적으로 완성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경륜아래 이루어지는 ①율법과 ②은혜와 ③심판과 ④새 시대라는 것이다.

은혜시대에 들어와서 율법을 말하는 자는 바리새인이요, 심판 때 와서 은혜만을 주장하는 자도 같은 부류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때에 따라 순종하는 자라야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는 것도 성경이 전해주는 교훈 중 하나이다(마 24:45. 전 3:1,17. 8:5~6).

영혼구원과 육체구원은 부활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1차부활 시(時)에 살아날 자는 두 부류인데, 먼저는 그간 주 안에서 주의 증거로 인해 원수에게 목 베임 받은 순교자들이요, 살아있는 생존성도 중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말씀을 증거한 끝에 사흘 반 죽었다가 생기 받고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되는 변화성도들이다(계 7:3~8).  이들이 1차부활의 주인공들인데, 이들을 제외한,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갈 길은 3년 반 대환란으로 떨어지는 길과, 하나님의 새 일의 교훈을 듣고 회개하여 3년 반동안 예비처(계 12:6. 사 11:11~12, 33:20~24)에서 보호받아 새 시대의 백성(흰 옷 입은 큰 무리/계 7:13~)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또한 이 모든 환란이 임하기 전에 죽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사 57:1~2)도 있다. 순교하지는 못했지만, 믿고 죽어 낙원에 들어간 모든 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받은 상태인데, 이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고 백보좌 심판 때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구원 얻으므로 얻는 결과는 천국의 시민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 안에 죽은 자들과는 다르다. 큰 환란이 있고, 예비처가 있고, 3일반 죽었다가 생기받고 올라가는 일이 바로 인류역사 6000년 중 우리를 위해 이 시대에만 준비된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144,000 반열에도 못 들고, 예비처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단이 권세를 갖고 나와 천하만국을 미혹할 때 그 미혹에 걸리면 결국 육체가 짐승 칼에 죽임을 당한다는 진리이다. 이래도 육체구원이 성경에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육이 주의 천사로 보호받고 살아야 새 시대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육이 변화받고 살아야 새 시대의 왕권이 될 수 있다. 우리 앞에 남겨져 있는 이 큰 육체구원(보호)의 사명의 문제를 기독교가 "영혼구원" 이외에는 이단이라 말한다면 영락 없이 종말의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2.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마 24:37절에 하신 말씀 - 육체구원


노아의 영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20년간 방주를 짓는 초인적인 믿음을 보여주었다. 홍수를 차단하여 사람을 살려주는 방주는 육체가 타는 것이다. 육체가 방주에 탄다 함은 코로 물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노아의 영은 이미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즉 방주건축은 홍수로부터 육체를 살리는 것을 목적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계 9:1~12 첫째 화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인 맞은(계 7:2~. 학 2:23) 무리만 황충 떼의 피해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작정인데, 이 무리는 어떤 교파나 어떤 인물을 중심하여 모인 단체가 아니라 전 세계 영적 이스라엘 12지파에 퍼져있는(계 7:4~8) 하나님의 참된 양 떼들이 주님의 피로산 말씀(계시록)과 예언의 등불(예언서)을 믿고 하나된 데서부터 자연스레 하나된 무리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성령이 모아주시는 단체란 뚯이다.

인간이 제 머리로 누가 참 종이며 누가 구원받을 만한 자인지를 판단하여 선포하는 것은 교만중에도 최고 교만이라 하겠다. 그래서 인간은 다만 전 세계에 다시 예언하기만 하면 된다(계 10:11). 다시 예언하는 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도구로 쓰이는 것 뿐임을 알고 주의 마음으로 외쳐야 한다. 주인의 마음을 갖는 것과 주인행세를 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여 다시 예언해야만 하나님이 살리기로 예정된 자들이 듣고 막대기로 참깨 털 듯이 톡톡 튀어 나오게 될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사 28:23~29). 그러므로 주께서는 전 세계에 빛을 밝힐 순금등대 촛대 역사는 사람의 힘이나 능(能)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神)으로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슥 4:6).

하나님의 인 맞은 종이 세계 앞에 순식간에 드러나지는 것은 5개월뿐이요, 마귀 편에서 황충 떼가 나와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자들을 해하는 기간도 이 5개월뿐이다(계 9:3~5).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참 종 노아를 알아보지도 않고 천대 멸시하던 자들이 홍수에 썩어 없어진 것도 5개월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던 노아에게는 도리어 홍수가 창일하여 지구를 뒤덮었던 150일 간의 기간이 편안한 구원의 처소가 되었음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강력한 5개월의 교훈이다(창 7:24). 5개월 환란은 중요하다. 성경을 다 뒤져봐도 5개월은 창세기에서 한 번, 그리고 종말에 계시록에서 한 번, 총 두 번만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 환란기간이 불순종하는 종들을 철저히 가려내어 고통주는 기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홍수가 무릎까지, 가슴까지 턱 밑까지 올라오던 당시 상황을 묵상해 보라. 입 속으로 물이 벌컥벌컥 치고 들어온다...  살기 위해 발꿈치를 들며 안간힘을 쓸 때 키작은 내 새끼들은 벌써 사라져 보이지 않고... 한 뼘만 더 차오르면 그들 두 눈은 이제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송장 눈이 되고 만다. 물은 입과 코를 지나고... "살고 싶어..."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심호흡을 한 후, 단 몇 초라도 생명을 연장하려는 마지막 안간힘....... 두 눈만 물밖에 내놓은 시골 논의 개구리새끼처럼 두 눈만 빼꼼 물 밖으로 나와 있는 불순종자들의 최후... 그러나 그들이 그 눈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지켜보아야만 하는게 하나 있다. 보지 않고 죽고 싶어도 하나님은 보게 하신다. 무엇이겠는가? .... 그렇다! 바로 방주이다. 미친 영감 노아가 일평생 손가락질과 비방과 조롱을 받으며 지어낸 방주이다.

구약은 모두가 종말에 행해질 일들을 미리 보여주신 역사적 사건들일 뿐이다(사 46:10. 히 10:1. 롬 15:4. 고전 10:11).

① 선악과 법 ② 혼혈금지법 ③ 방주법 ④ 할례법 ⑤ 율법들은 모두가 육체에 행한 예법들이었다(히 7:16, 9:10). 그러나 신약의 ⑥ 십자가 법은 육체는 풀과 같이 썩되 영혼은 주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기워 살리움 받는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법(롬 3:27)이다. 비록 육체는 풀과 같이 썩을지라도 마지막 날에 예수의 피로 산 자들은 부활하여 영원무궁 안식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쓰러져간 것이다..  ☞ 하나님의 시대적인 7대법

그러나 최종적인 종말 재림 때는 노아 때처럼 영과 육이 아울러 구원을 얻으니 구원받지 못할 자는 영육이 철저히 망하되 택자들은 전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천사 미카엘(단 12:1~)이 동원되는 것이다(노아 때 죽은 사람들이 그 영까지 옥에 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벧전 3:18~20). 이 때의 마지막 법은 ⑦ 예언의 법으로서, 예언서의 남은 모든 말씀이 환란시대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되 그 가운데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초막절 역사로 살리움 받는 데는 농부가 알곡을 한 알갱이도 떨어뜨리지 않음같이(암 9:9) 행해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예언의 법이 이루어지는 이 시대는 사도들처럼 육체가 풀과 같이 쓰러질 것만 외치며 영혼구원을 전하면 1등이 아니다. 예수의 피를 빨리 믿고 영혼 구원 얻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위에 피로 산 말씀(계 5:1~7)까지 믿고 순종케 하여 영·육 간에 완전한 축복을 받아 아름다운 새 시대를 차지하라고 전하는 때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를 가르키는지에 대해서 몇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 - 유대인 랍비들의 견해 

    (Onkelos, Symmachus, Aben Ezra). 

2.  '천사' ( 욥 1:6;  2:1;  38:7; 단 3:25)란 견해 

  (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 

    (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이러한 해석들 가운데, 본문의 배경과 성경적 관례 

(cf. 신 32:5; 시 73:15;80:17; 호1:10), 

그리고 신학적 관점에서  세번째 해석이 가장 알맞습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의미 역시 위와 대조적으로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유대 랍비들, 

2.  인간의 딸들,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알맞습니다. 


묵상을 위한 적용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믿음의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외면적 아름다움과 세상적 화려함을 쫓아갈때 그 신앙은 타락의 길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의 것들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웠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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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6장 하나님의 아들들(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6:1-4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세 가지 학설

1.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담의 아들 가인 아벨 셋 중의 셋의 경건한 자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불경건한 자손들이라는 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고대 군주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지칭했고 사람의 딸들은 보통 사람들들을 가리킨다는 설3.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문자대로 일반 사람의 딸들이라는 설

성경 해석의 원칙

1.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2. 성경은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3. 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1.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6장 1절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의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는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아담 자손의 계보의 후손들이며 2절의 ‘사람의 딸들’이 그 자녀들 중의 딸들임을 알 수 있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는데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셋은 912세를 살았는데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노아 때 까지 이어지니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의 자녀들이 출생하였을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1) 다니엘 3장 25절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들과 같도다”

여기서 ‘신들의 아들’은 아람어 ‘바르 엘로힌’(בר אלהין)으로 칼빈은 천사라고 했다.

(2) 욥기 1장 6절(2:1; 38: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 1:6)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히브리어 ‘베네 하엘로힘’(בני האלהים)은 선한 천사들을 말한다(박윤선 주석).

이상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 천사들임을 알수 있다.

2)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1) 갈라디아서 3장 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헬라어 ‘휘오이 데우’(υἱοὶ θεοῦ)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신자를 가리킨다.

(2) 로마서 8장 19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기다림이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의 헬라어 ‘휘몬 투 데우’(υἱῶν τοῦ θεοῦ) 역시 예수님 재림시 신자들인 중생한 그리스도인들로 종말론적 영광에 입성할 것을 의미한다.

(3) 로마서 9:25-26와 호세아서 1:10-11

“25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지도자)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호 1:10-11)

위의 성구들은 흩어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모여서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말일에 일어날 장차 될 일을 호세아를 통해 예언했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증명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이방인들도 부르리라고 하였다.

Ⅱ. 성경을 문맥 안에서 해석하기

1. 셋의 후손은 모두 경건하고 가인의 후손은 모두 불경건한가?

 창세기 6:1-2의 “사람의 딸들”의 히브리어 ‘베놑 하아담(בנות האדם)은 영어로 ’doughters of men‘으로 불경건한 가인의 딸들이 아니며 창세기 5장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히브리어 ’베네 하엘로힘’(בני האלהים)은 영어로 ‘sons of the God’으로 경건한 셋의 아들들이 아니다.
가인의 딸들이 모두 불경건하며 셋의 아들들이 다 경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2절은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they married any of men were beautiful) 했는데 이는 특정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인의 후손인 딸들 전체가 아름다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셋의 아들들이 모두 경건할 수도 없다.
그리고 또한 홍수 심판은 경건한 아들들이 불경건한 딸들과 결혼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다.

Ⅲ.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기

1.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이 누구인가?

한글 성경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네필림(נפלים)’으로 ‘타락하다’, ‘떨어지다’, ‘버리다’의 뜻을 가진 동사 ‘나팔’(נפל)에서 왔다.
그러므로 ‘네필림’은 fallen one's로 ‘떨어진자’, ‘타락한 자’를 의미한다.

주전 2-3세기 때 70인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이다.
거기 창세기 6장 5절의 ‘네필림’은 헬라어 ‘호이 기간테스(οἱ γίγαντες)’로 ‘땅에서 난 자’, ‘타락한 자’로 타락한 천사를 의미한다.
천사는 하늘에서 난 자 인데 왜 땅에서 난 자인가?
유다서 1장 6절이 해답이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서 ‘자기 처소’란 헬라어 ‘이디온 오이케테리온’(ἴδιον οἰκητήριον으로서 ‘거할 처소’를 의미함으로 천사들의 거할 처소란 하늘나라인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아서 쫓겨나 유다서 6절이 말한 바 타락하여 ‘땅에서 난자’가 되었다.
이 땅으로 쫓겨난 타락한 천사와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장사요 거인인 ‘네필림’이라는 결론이다.

참고로, 외경 에녹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라고 했고 교회사가 요세프스도 동일하게 번역했으며 초대교회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순교자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엠브로스가 그랬고 현대에서 델리치, 빙크, 엉거, 척 스미스 등이 지지하였다.

Ⅳ.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이라는 설의 출처는?

초대교회 박해자로서 2세기 헬라 철학자 켈서스(celsus)는 예수는 유대인의 촌에서 왔고 엄마는 가난한 유대인이었는데 로마 군인과 간통하여 목수인 마리아의 아버지가 쫓아냈다고 하였다.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의 아들이다고 거짓 증언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집트에서 사술을 배워 유대서 사술을 부리며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정통성을 말살시키려고 편집하여 창세기 6장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이라고 하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이라고 창작했다.

이에 줄리언 황제가 동조했고 알렉산드리아 씨릴(Cyril of Alexandria)이 받아들여 기독교 정통성을 반박 보급했다.
이 이론을 어거스틴까지 받아들여 전파했고 칼빈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신학교가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Ⅴ.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

1. 천사가 죽지않는 것처럼 부활체는 죽지 않는다(막12:18-25)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 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떼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 천사가 결혼하지 않는 것처럼 부활체는 결혼하지 않는다(눅 20:34-38)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하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3. 그러나 사람의 모양으로 타락한 천사는 결혼한다.

1) 성경에 천사는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다(창 9:1-3)

1. 날이 저물 때에 두 천사가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으니 그들이 먹으니라.

여기서 천사는 씻고 먹고 자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다.

2) 성경에 육체로 온 천사는 성 교제를 할 수 있었다(창 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상관하리라’의 히브리어는 ‘베네드아’(ונדעה)이다.
동사 ‘야다’에서 왔으며 ‘야다’는 감각 기관을 통해 알며, 경험적을 ‘알다’의 뜻으로서 마음을 통해 알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상관하리라’를 영어성경에서는 'we have sex with them'으로 번역하였다.
타락한 동성연애자들인 소돔과 고모라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 성경에서 천사를 남자로 표현하였다(막 16:5-6)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은 영어성경에 ‘a young man dressed in a white robe’이며 헬라어에서 청년은 ‘네아니스코스’(νεανίσκος)로 분명히 남자 청년을 말한다.

Ⅵ. 셋의 자손이 모두 경건할 수 없는 이유

1. 노아의 사적에서 보는 경건(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 ‘이쉬 짣디크’(איש צדיק)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공정함과 의로움을 노력했다는 상대적인 의를 말하지 절대적 의를 말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 ‘타밈 하야’(תמים היה)는 ‘완수하는 자’로 흠과 티가 전혀 없는 도덕적 완전함을 의미한다기 보다 전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려는 도덕적인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천사는 젊은 남자로 표현하였으니 타락한 천사도 젊은 남자임에 틀림없고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네필림을 낳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UFO는 실제하며 타락한 천사 귀신의 장난으로 보고되고 있다.
저들이 사람의 딸들을 납치하여 타락한 천사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 성경의 일반적 용례(욥 1:6; 2:1; 38:7; 단 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1번 해석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다.
2번 해석은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3번 해석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 32:5; 시 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2. 인간의 딸들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 '부인'(4:19; 삿 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 20:14; 느 8:3)을 뜻하기도 한다.

삼는지라(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네피림

‘네피림’이란 히브리어의 ‘떨어지다(fall)’란 뜻을 지닌 ‘나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네피림’이란 단어를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으로 주장 하는 학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하게는 어떤 학자들은 ‘괴물(monster)’ 또는 ‘신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70인역(LXX)성경을 보면 ‘장부’란 뜻의 헬라어의 ‘기간테스’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벌겟역(Vulgate)성경과 킹제임스역(KJV)성경을 보면 ‘용사’ ‘거인’이란 뜻의 ‘자이언트(gian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나 혹은 천사와 인간 사이의 혼혈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네피림’을 그 신체적 특성상 장부나 거인으로 볼 수 있는 일단의 사람 혹은 족속을 가르키는 말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네피림’을 그 신체적 특성과 도덕적 특성까지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가해자’등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볼 때 노아 시대 당시의 ‘네피림’이란 거대한 신체를 지닌 ‘폭군들’ 내지는 ‘침략자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광야시대인 민수기 13장 33절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가나안 정탐꾼들이 돌아와 백성들에게 보고할 때 가나안 족속을 비유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네피림은 어떤 존재였는가?

네피림 (“타락한 자들, 거인들”)은 창세기 6:1-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성적인 관계로 태어난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 (마귀들)로서 직접 인간 여성들과 성적으로 교합하거나, 또는 인간 남성을 악령으로 사로잡아 인간 여성과 교합하였다고 봅니다.
이러한 교합은 네피림이라는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6:4).

마귀들이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성경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귀들은 일그러진 사악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우리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을 행한 뚜렷한 동기가 무엇일까에 대한 한 가지 추측은 메시아의 오심을 막기 위해 인간의 혈통을 오염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메시아가 뱀,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창세기 6 장에서 마귀들은 아마도 뱀의 패배를 막고, 죄 없는 "여자의 씨"가 태어날 수 없게 하려고 시도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시된 대답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그럴듯한 답변은 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히브리 전설과 여러 다른 전설들 (에녹서 및 여러 다른 성경 외 문서들)에 따르면, 그들은 대단히 큰 악행을 저질렀던 거인족으로서 영웅적인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큰 몸과 힘은 아마도 마귀적인 "DNA"와 인간의 유전이 혼합되면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가 주연 한 영화 “노아(Noah)"에 따르면, 네피림은 바위로 감싸인 타락한 천사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들에 대해 직접 말한 것은, 그들이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 이었다고 합니다(창세기 6:4)이.
네피림은 외계인, 천사, “감시자” 혹은 바위 괴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교합으로 생성된 육체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창세기 6:1-4).

네피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피림은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발생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네피림이 언급된 직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6:5-7).

하나님은 온 땅에 홍수를 내시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탄 동물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죽이셨습니다.
네피림을 포함한 다른 모든 생명체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창세기 6:11-22).

대홍수 후에도 네피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6:4은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귀들이 대홍수 이후에도 때때로 이러한 죄를 반복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홍수 이전과 비교해서 이런 일이 훨씬 적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3).

이 구절은 그곳에 네피림이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탐꾼의 생각에 자신들이 네피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덩치가 매우 큰 사람들을 보고는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네피림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는 홍수 이후에 마귀들이 다시 인간 여성들과 교합하여 더 많은 네피림을 생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네피림의 일부 특징이 노아의 며느리들 중에 한 며느리의 유전을 통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 “거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침략하는 동안 멸망하였고(여호수아 11:21-22),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사라졌습니다(신명기 3:11, 사무엘상 17 장).

오늘날 마귀들이 네피림을 생산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모든 마귀들을 고립시킴으로써, 마귀들과 인간들의 교합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신 것 같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은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라고 말합니다.

죄악을 저지른 모든 마귀들이 “갇힘” 바 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원래의 타락을 훨씬 더 넘어서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마귀들의 무리가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 여성들과 교합했던 마귀들이 바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진” 마귀들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더 이상 마귀들이 그러한 죄를 저지르게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네피림은 누구인가?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네피림의 해석에 대여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네피림은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셈 계열의 후손들과 세속적 전통을 이어받은 가인 계통의 후손들과의 결혼을 통하여 탄생된 비정상적인 거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네피림이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난 족속들이라면, 그러한 비정상적인 접촉과 탄생이 왜 그 당시에만 가능했느냐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정말로 영적 존재들과 인간들간의 성적 접촉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일들은 지금도 생겨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은 역사 초기에 영적 기원이 전혀 다른 인간들 사이의 육체적 접촉을 통하여 탄생된 영적 부조화의 존재들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영적인 지각력에 비해서 육체가 쓸데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발달된 존재들이었다. 이에 그들은 영적으로 둔감하여 이 땅에서 파괴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쓴 단어들이 여러 개 있다. 네피림도 이런 것들 중 하나로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그 동안 학자들간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과 이 '네피림'은 어떤 관계인가? 이들은 그들의 후손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들인가? 그리고 민13:33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네피림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본 거인과 창6:4의 네피림은 같은 것인가?

1. '네피림'과 '용사'
1) 같은 인물이라는 견해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후손들로 이 이야기는 영웅들의 유래를 설명한다. 드물게 쓰이는 말인 '네피림'(!ylypn)이 4절에서 '강한 자들', '영웅들'로 해석되는 것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을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의 결혼으로 보고 그 후손이 바로 거인이고 네피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네피림을 고대의 영웅들, 거인들로 보는 것은 칠십인역에서 유래한다.

2) 다른 인물이라는 견해
창6:4의 네피림이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이 아닌 고대의 다른 계층의 불경한 자들이다. 4절이 접속사 없이 시작한 것은 이들이 2절의 혼합 결혼으로 낳은 후손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에 난폭한 공격자들과 약탈자들이 널리 퍼져있었는데(4절) 네피림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 시작하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은 대개 사람의 딸과 하나님의 사람의 결혼을 셋 계통의 사람들과 가인 계통의 사람들의 혼합 결혼으로 보고 있다. 네피림은 타락한 자들로 압제자, 훼방자, 난폭한 자라는 뜻이다(Luther, Calvin, Keil, Murphy).

2. 민13:33과 네피림
1) 민13:33의 네피림
성경에서 창6:4 외에 네피림이 나오는 곳은 모직 민13:33뿐이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서 신장이 장대한 백성을 보았고(32절)또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낙 자손들은 목이 긴 자들의 자손을 뜻한다. 민13:33에서 네피림은 분명 칠십인역은 네피림을 기간테스(gigonte", 장부)로 번역하였고 불가타역은 giant(지안트, 거인, 용사)로 번역하였다.

2) 민13:33의 네피림과 창6:4의 네피림
벤함(G.J.Wenham)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민13:33의 네피림을 언급하면서 이 들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네피림은 거인이며 용사이고 혼합 결혼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칼라쉬(Kalisch)도 민13:33에 근거하여 칠십인역과 A.V.역 그리고 불가타역의 거인이란 번역을 지지한다. 그러나 민13:33에서 네피림이 사용된 것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그 땅 족속들의 모습이 마치 홍수 전 노아 시대의 네피림같이 장대하고 난폭하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민13:33의 아낙 자손들이 우연히 거인이었을지는 모르나 이들이 곧 창3:4의 네피림을 정의하여주지는 못한다. 창6:4의 네피림은 도덕적 이슈와 관련되고 민13:33의 네피림은 신체적인 것과 관계된다.

3. 천사인으로 보려는 시도
델리취(Delizsch)와 쿠르츠(Kurtz)는 네피림을 천사들이 낳은 천사인(天使人)으로 보려고 하였다. 델리취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가하려고 결심하셨을 때 거인들이 생겨났다. 또한 그 후에도 초 현세적인 존재들과 인간적인 존재들 사이에 이러한 부자연적인 관계가 지속되었을 때 이러한 거인들이 생겨났다"고 창6:4을 해석하였다. 쿠르츠(Kurtz)는 창6:4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네피림은 당시에 땅 위에 있었고 또한 이것이 있고 난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에게로 가서 아이들을 낳았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왔던 이 당시와 또한 그 후에도 그들은 네피림은 낳았다." 이들은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인 천사인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하고 무리한 잘못된 성경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4. 네피림
네피림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겔32:20-28이 창6:1-4을 암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lpn(나팔, 떨어지다)을 네피림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gigonte"(기간테스)는 땅과 하늘의 결합의 소산물인데 칠십인역은 네피림을 이 단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히브리어 어근인 lpn(나팔)은 '공격하라'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램48:32, 수11:7 욥1:15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이 동사 lpn(나팔)의 명사형은 공격자들, 약탈자들, 강도들이라는 뜻이다. 고대 역본 중 아퀼라역은 네피림을 oJi biaioi(호이 에피피프톤테스, 공격하는 자들)로 심마쿠스역은 (호이 비아이오이, 강력한 자들) 번역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네피림을 살펴보았다. 네피림은 천사의 후손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민3:33과 창6:4의 네피림은 같기는 하나 관점의 차이가 있다. 네피림은 노아 당시에 존재하였던 일군의 무법한 행패꾼이다. 강도,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로서 비도덕적인 인간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자들이 판을 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신다. 이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기간을 결정짓는 시금석이 된다.

용어 해설
1. 네피림
네피림의 어원적 의미는 한글 개역성경에는 '장부들', 칠십인역에는 '거인들'로 번역되었으며 때로는 영웅들, 강한 자 등이 의미로도 나타난다. 히브리어로는 !ylypn이며 그 어근은 naphal이고 '떨어지다", '타락하다' '쫓겨나다'의 뜻으로 쓰여진다. 네피림은 흔히 giant(거인)로 보고 있으나 타락한 폭력배와 같이 부도덕한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신의 영과 인간이 결합하여 생긴 묘한 신화적 존재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견해도 있다. 그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했다는 이론에 의하여 영이 없는 인간을 네피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많은 구약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네피림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경건한 자 또는 가인의 후손으로서 부도덕한 자로 보고 있다.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유다서 7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간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에서 다른 색을 따라 간음했다는 것을 천사와 간음한 것으로 보고있으나 헬라어 성경에는 다른 색(色)을 '다른 육'이라고 했다. 즉 다른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가 없는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창세기 5장과 6장의 연결로 본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왕상2:3, 5:7 시73:15 신32:5 호1: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을 의미한다.

3. 사람의 딸들
구약에서 '사람'이란 말은 통상적인 보통 인간을 의미하는 아담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딸'은 하나님의 아들'과 대구 적으로 쓰인다. 즉 가인의 자손으로 불경건한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경의치 않는 자들의 딸을 의미한다. 이들은 물질주의 문명을 이룬 가인의 자손들로서 허망되고 불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의 외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경건한 자손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 즉 셋의 경건한 후손들이 그들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들이 좋아하는대로 아내를 삼았다.

4. 천사
1) 천사의 정의 : 천사라는 의미의 영어angel은 '사자'를 의미하는 희랍어 aj ggeio"(앙겔로스)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성경에는 권능 있는 자들(시29:1 89:6), 거룩한 자들(시89:5, 7), 천군들(눅2:13), 만군들의 용어로도 사용된다.

2) 천사의 속성 :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들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창조한 장엄한 존재이다(시148:2-5). 천사들은 인간이 창조되기 오래 전에 창조되었으며(욥38:7),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재에서 자연계로 어떠한 물리적 장애의 방해도 받지 않고 뜻대로 왕복할 수 있다(행12:7). 그러나 그들은 전능한 존재는 아니다(시103:20). 천사들은 또한 최고의 지능과 지혜를 부여받았으나(상하4:17,20) 전지한 존재는 아니다(마24:36).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주장을 논박할 때 예수님은 천사들은 성적 존재가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천사는 인간적인 특성과 신적인 특성을 함께 지닌 피조적 존재이다.

3) 천사의 인간적 특성 : 천사들은 항상 인간의 형상으로 출현하나, 동물, 새 또는 물체와 같이 인간 이하의 형상으로는 출현하지 않는다. 주의 천사는 불과 구름 가운데서 말하고 당나귀를 통해 말하게 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 자신을 어느 쪽과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항상 옷을 입고 있다. 많은 경우에 천사들은 사람처럼 가장하여 처음에는 언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저녁식사의 손님으로 새 사람을 초대하였다. 한 천사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남아 있었고 다른 두 천사는 소돔으로 내려가 롯과 함께 밤을 지냈는데 롯은 그들을 사람으로 알고있었다(창18:2,19:1). 때때로 천사들은 매우 두려운 모습의 용모나 옷을 입은 남자로 자신을 나타내 보였다(눅24:4) 많은 경우에 천사들은 '사람' 또는 '사람의 모양'으로 기술되었다(겔40:3 단10:18 슥2:1). 이러한 실례를 통해서 볼 때 천사들은 즉각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얼마 후에 모습 그대로 인식되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천사들이 즉시 천사로 인식되기도 했다(신22:31 삼하24:17 눅1:11).



방주(8392) 테바( têbâh) תֵּבָה 

1. 궤,  2. 방주,  3. 상자
발음 / 테바(têbâh)
관련 성경 / 방주(창 6:14, 7:1, 9:10), 갈 상자(출 2:3), 상자(출 2:5)
구약 성경 / 28회 사용

아담 이후에 타락한 인류의 역사를 소개한 후에(창 5장)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세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태초에. 베레시트).
노예로만 살았던 백성들에게 쉼이 무엇인가를 깨우치시려고 하나님의 안식을 가르쳤습니다(안식. 솨바트).
애급의 바로 왕은 뱀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했던 백성들에게 뱀은 가장 간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존재라고 깨우칩니다(뱀. 나하쉬).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양만 갖춘 존재(형상. 데무트)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형상.체렘).
창세기 6장은 죄로 오염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 심판과 그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6:1-4.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의 발전 과정
6:5-7. 세상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염려
6:8-22. 노아를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방주를 건조하도록 명령하시는 내용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한 이해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 즉 가인의 후손은 사람의 딸들로서 불경건한 후예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가 아벨 대신 얻은 셋의 자손들은 경건한 자들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은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저주 받은 아들 함의 후손과 축복을 아들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네피림이란 거인들과 장부를 가리키는 듯하나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원어대로 소개할 뿐입니다.



18절. 언약
어원은 '먹다' 또는 '사이에' 그리고 '묶다'라는 뜻으로 추정, 아담에 이어 두번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급된 이 용어는 하나님이 택하신 당신 백성과 일방적으르 맺는 계약을 뜻한다. 자부. 아들들의 아내로서 즉 며느리들을 가리키는 바 이미 노아의 아들들이 가정을 꾸민 장년들임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