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Arianism, ─派]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 일파이다.
그는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서기 361년)까지 겹치자 아리우스파는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서기 381년)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은 초대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였다. 예수를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정도로 이해했던 에비온주의자,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특별한 능력을 받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론자, 구약의 성부가 곧 예수라고 주장한 양태론자 등 예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릇된 이해가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등장 이후 60여 년은 그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리우스는 누구이며, 무엇을 주장 했나

아리우스(250년 경∼334년 경)는 루키아노스의 제자였다. 루키아노스는 “인간에 불과한 예수 속에 신적 능력이 들어가 그를 점점 신화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양자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한 인물이었다.

“예수는 피조된 존재로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아리우스는 핵심 주장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아리우스가 저술한 『Thalia』(편집자 주: 연회)가 아직 남아 있지 않아 “아리우스의 사상은 반대파의 저술을 통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대개 아리우스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만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개발하게 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1)면서도, 아리우스 주장의 기본 주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다며 세 가지로 진술했다.2)

1.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2. 아들은 기원과 지위에 있어서 피조물 가운데 으뜸가는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된 존재이다.

3. 아들이 여러 세계들의 창조자이므로 그것들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시간보다 먼저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목창균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편집자 주: 아리안에 대한 네 가지 담화(혹은 논거)를 인용해 “아리우스는 아들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그보다 못한 제2의 하나님 또는 명목상 하나님으로 보았다”라고 설명했다.3)


아리우스의 주장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óγoς – “말씀”, “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렸고 어부들까지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아리우스는 동방 각지로 여행하며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교직자들로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도시대 이후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리우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당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바로 아타나시우스였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리비아의 감독 데오나스, 세쿤더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파의 반격

2년 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 하거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이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여 유배를 떠나게 했다.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황제

336년 아리우스가 죽고 다음 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었다.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공론화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기에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얼마 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아리우스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는 감독들에게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전에 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

얼마 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켜 그들의 지도자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양 진영의 군대가 접전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으므로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으며 엘류시니아인의 신비 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로마 황제가 가진 대제사장직(Pontifex-Maximus : 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사장으로서 신과 백성을 중재하는 직분이다. 예전부터 로마 황제는 태양신 교의 대제사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따라 교회에 간섭하였다)을 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자 그동안 소외됐던 이교가 활성화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그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주자는 생각으로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감독들이 율리아누스와 이교를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하였다.

로마 제국의 분열과 아리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 반달, 동고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이 민족들은 가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중세 종교 암흑 세기를 주도한 가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 할만하다.

니케아 신조의 한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모호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은 쉽게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부분에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 일이 같아서 일체라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런 성경 지식의 부재 때문에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 교리로서 전해오고 있다.

성경의 진리, 성삼위일체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이다(미 4장 1∼2절).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알기에(호 4장 1∼6절),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 놓았다.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지만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고전 4장 5절).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요 6장 45절)라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씀을 깨닫게 된 우리는 성부로서, 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하겠다.



아다나시우스 [Athanasius]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 교부(敎父, 295-373년). 319년 부제(副祭)가 되었고, 325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異端說)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명성을 얻어 이듬해 알렉산더 주교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어 46년간 섬겼다.

그러나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 파에 밀려 335년 라인랜드(Rhineland)에 있는 트리에르(Trier)로 유배되었다(1차).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콘스탄티우스가 즉위하자 귀환하였으나 339년 사순절에 다시 로마로 추방되었다가(2차) 346년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교회를 돌보며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356년 제국 전체를 평정한 황제는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군대에 쫓겨 이집트 여러 곳을 유랑해야 했다(3차).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많은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파의 주교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 후 361년 이교도(비기독교인)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이듬해 다시 추방되었다(4차).

363년 율리아누스가 죽자 복귀하였고, 365-6년 잠시 추방당한 것(5차)을 제외하고는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니케아 공회의 결의를 확고히 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결국 그는 다섯 번이나 교구에서 추방되고, 17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그가 죽은 지 8년 뒤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됨으로써 아리우스 파에 대한 완전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의 종속주의적 그리스도론에 대항하고,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로고스로 보아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one substance, 동질)라고 주장했다. 또 성령과 하나님과도 동질을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 신관을 완성시켰는데 이 입장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혹자는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혼자서 기독교를 이교적 합리주의의 혼란에서 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아리우스주의'를 보라.

아타나시우스의 등장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인기를 얻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주교들을 소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을 복잡하게 만들어 되살려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4)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인기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아리우스에 대한 더욱 끈질긴 비판은 알렉산더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경 부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맡았다. 아타나시우스는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아리우스는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고 밝혔다. 또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며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했다.

니케아 공의회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 현, 터키령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공의회. 제1차 니케아(㉮ 니체아) 공의회는 제1차 공의회에 해당하며,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서 소집되고, 각지의 주교 318명(전승에 의함. 실제로는 250명 이하)이 참가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교 공인 후 최초의 전체적 집회이며,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전의 취지도 있었는데, 본래의 본적은 교의문제, 즉 아리우스가 제기한 아버지인 하나님(㉮ 하느님)과 자식인 그리스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의 해결이었다. 결국 회의는 팔레스타인의 세례용 신조(이론도 있다)에 아버지와 아들 <호모우시오스(동일실체)>의 말을 보충한 것을 <니케아 신조>로서 채택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 자를 파문할 것을 정했고 그 결과 아리우스는 추방되었다. 또한 부활제일의 산정법을 결정하고, 20조로 된 교회규정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는 후의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가 반아리우스의 입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아리우스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못미쳤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제7회 공의회에 해당하며, 787년에 이코노클라즘의 해결을 위해서 비잔틴 황비 이레네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이콘파괴파가 연히에리아 회의(754)의 결의를 취소하고, 이콘 숭배는 신에 대한 참된 숭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고, 이콘 숭배를 옹호했다. 그러나 서방의 프랑크 교회는 이 결의를 우상숭배의 부활로 해석해서 동방 교회를 비난했다. 또한 비잔틴제국에서는 9세기 초에 이코노클라즘이 재발했다.

알렉산더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리우스는 루키아노스의 제자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는 동시에 같은 안디옥 학파의 유세비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을 추방한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로마의 각 지역에서 조력자들을 얻게 된다. 결국 323년부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집회를 따로 개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5)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단순한 신학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의 질서와 통일성을 헤치는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자문관을 파송해 양측을 중재하길 원했지만 실패했고, 325년 교회의 지도자들을 니케아로 소집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동서방교회의 주교는 1800명 정도로 예상되는데 그중 300여 명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0여 명 외에도 주교들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 부제 등 다양한 신학 전문가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니케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크게 세 파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 유세비우스가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성자는 피조물이며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의 반대자들이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했는데,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셋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편집자 주: 아리우스의 지지자와 다른 인물)가 이끄는 중도파였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가 아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즉 성부와 성자가 유사한 본질을 가졌다고 말했다.
중도파는 수적으로는 가장 우세했다.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으로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교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칼 투르먼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본질(substance)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이후의 신학적 논의들의 궁극적인 틀을 설정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육신하신 예수의 위격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6)라고 평가했다.

니케아 이후 오히려 힘을 얻은 아리우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사태의 종식이라기보다 논란의 가중화로 이어졌다.
애초에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간 것 자체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했고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우스의 지지자인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아리우스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찬에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반기를 들었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파문과 복직을 반복했는데 그의 유배생활을 합치면 약 17년 이라고 한다.

상황은 점점 아리우스에게 유리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로마는 세 명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분할해 다스렸다. 그 중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형제의 죽음 이후 로마의 단독황제가 되면서 아리우스주의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7)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아노모이오스(anomoios, 상이본질)라고 불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an, 유사본질)라고 불리는 세미 아리우스파, 호모에안(homoean, 동류본질)이라고 불리는 중도 온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 분파 중 극단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점점 과격해 지자 일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하고 갑바도기아의 교부 삼인방인 가이사랴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등장해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 주교들의 활약으로 니케아 신조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했다.8)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소집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채택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6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아리우스 논쟁이 종식되는 순간 이었다. 칼 투르먼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범교회적으로 보편적인 정통 신앙을 정의하는 표준이 되었다. … 이 신조는 성령의 신성에 관해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적절히 묘사한다”라고 평가한다.9)

아리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60여 년간의 논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알려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로 가는 길 381년,
서방 신학을 지지하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니케야에서 첫 번 공의회로 모인 325년 이후 두 번째로 가진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신학적 패배를 맛본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포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교회가 니케야 신조를 옹호하는 한 파와, 온갖 정치력을 동원하여 이에 반대하는 다른 파로 분리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이들의 대립이 중단되었다. 니케야 신조를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는 이단을 정죄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완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노플 회의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결사적인 방해공작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교회의 방향성을 더욱 상실하게 하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중도파’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중도파’는 그 당시 대립하고 있던 양쪽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상대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닌 흑백논리의 싸움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비유사파’라고 부른다. 성자와 성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자와 성부가 동일하다고 보는 니케야파를 ‘동일본질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도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유사본질파’라고 부른다. ‘유사본질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사상을 따른 세 사람, 즉 체사레아, 에메사, 그리고 니코메디아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 후에 픽타비스의 주교 힐라리우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니케야 신조가 정의한 ‘동일본질’을 거부하고, 성부와 성자 간의 ‘유사한 개념’을 새롭게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교회의 내분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믿었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심지어 이들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커다란 힘을 형성한 적도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동일본질파’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진리에 맞서서 대항했던 ‘비유사파’와 ‘유사본질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협소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지적받기도 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치는 진리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 교부 아타나시우스 교회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를 때까지 진리를 수호하며 험한 길을 걸어간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295?-373)이다. 그가 신약성경의 정경,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목록을 367년에 처음 교회에 소개하였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그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의 모함과 위협을 물리치고, 성경의 진리는 오직 하나뿐임을 증명한 상록수와 같은 인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이교도 논박”, “성육신에 대하여”, ”아리우스파 반박론“ 그리고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에 잘 정리하여 놓았다. 여기에 성경적 진리를 변증하며 이단을 대항하는 그의 노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성자는 성자와 동일하다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말씀(성자)을 하나님의 작품으로부터 제외시켜 창조주로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 높이고, 본성상 성자시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면, 그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그를 포함한 피조물 각각에 대해서 ‘피조물이되 피조물들 중 하나와 같지 않은’이라고 하여야 한다. 당신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소생’을 ‘발생한 혹은 창조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만들어진 작품’처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20). 잠언 8장 22장의 내용은 마치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이 성경구절을 옳게 해석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는 성부를 가리켜 ‘주’라고 한다. 자기가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로부터 유출된 말씀이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성부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아리우스파 반박론 2, 50). 이 성경구절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받은 사역에 대한 언급이란 설명이 옳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니라,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유출’은 ‘나왔다’ 또는 “낳았다‘라는 뜻으로서, 그가 본질상 성부와 동일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독생하신 분이다. 또한 창조계로 내려오사 많은 형제를 만드셨기 때문에 ’장자‘이시다”(아리수스파 반박론 2, 62). 성자와 성부는 동질일 뿐 아니라 분리될 수도 없다. 서로 안에 계시는, 즉 상화 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된 것들은 성자 안에 참여함으로써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성자 자신은 참여에 의한 성자가 아니라, 성부의 본래의 소생이다... 그는 성부의 샘에서 나오신 생명으로서, 그 안에서 만물이 생명을 얻고 실재적 존재를 얻는다”(아리우스파 반박론 3, 1).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은 ‘단일신론’을 주장하였던 사벨리우스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벨리우스는 성자는 근본적으로 성부와 하나이지만, 그가 필요에 따라 성부가 되었다가 성자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씀이셨고 아무것도 그를 가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만물을 포괄하셨다. 그는 온 창조계 안에 계시되, 본질적 존재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육신 안에 계실 때도 그 육신에 생명을 주셨다. 동시에 온 우주에 생명을 주고 계셨고, 만물에 임재하여 계셨다”(성육신에 대하여, 17). 성자는 분명 성부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속한 것을 지니고 계신다.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자신이 하나님 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게된 것이다.

성경이 보인다
- 에스더 4:1-17; 요한복음 11:16; 디모데후서 3:12-4:8; 유다서 1:17-21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상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흑백논리’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을 부인하거나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는 매우 지혜롭다. 하나님을 도전하여, 성도가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전문가이다. 이 사회는 ‘흑백논리’를 들먹거리며 성도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칼과 총을 대신하여, 새롭게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고 넘어뜨리는 영적 무기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대상은, 중용 또는 평화주의이다. 신앙보다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할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분명히 하자.

성도들은 ‘흑백논리자’들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을 동시에 지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