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각종 물건 상징


성경의 각종 물건 상징

 

Noah's Ark(노아의 방주)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그 심판 속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의 약속과 예비를 상징한다.
또한 구약 성경에 나타는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type)이기도 하다. (창세기 7장)

          Image 9462575

Ark of the covenant(언약궤)

"Ark"의 글자적 의미는 "대형상자, 궤"를 뜻한다. 언약궤는 성막(구약 출애굽 때 만든 성막)의 가장 중요한 성물이다. 성막 안 언약궤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며, 그의 영광이 나타는 곳이다.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 상자이며, 순금으로 겉이 싸여져 있고, 순금으로된 속죄판( mercy seat, 시은좌)이라 불리는 뚜껑으로 덮여있다. 속죄판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두 그룹(cherubim, 파수꾼, 천사(?))이 날개를 펴고 뚜껑을 덮고 있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 만나가 담긴 단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구약의 언약궤가 모세의 율법을 속죄판이라는 뚜껑으로 덮여 있고, 가려져 있는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으로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가려지고, 해방됨을 상징하며, 언약궤의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계시다.(출애굽기 25장)

 2510-22 -


Three Arks(세 개의 보물상자)

세 개의 보물상자는 예수 탄생을 경배하였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받힌 보물상자이다.
박사들은 세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성경에는 동방박사의 수가 3명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세 보물에 근거하여 3명의 동방박사라고 한다.)
황금 - 왕 중 왕 , 유향 - 주세주, 몰약 - 예수의 십자가 고난(죽음)

 

Banner(깃발)

Banner는 승리의 상징이다.
보통 Banner 에는 죄와 죽음에 승리하신 그리스도 부활의 승리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환상 속에 십자가를 보고 난 후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의 깃발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때론 세례요한 같은 성자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이사야 11:12 주님께서, 뭇 나라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세우시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방에서 그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Beehive(벌집)

벌집은 다소 현대적 상징으로서 교회를 상징한다.
"벌집은 정육각 기둥 모양의 독방이 병렬적으로 묶여 소반을 만들어 벌집을 형성한다.(두산백과사전)" 벌집은 각자 다른 독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함께 같은 벌집을 만든다. 마치 성도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영적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만, 함께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과 같다.(고린도 전 12:12)

       PNG   PSD    - Pngtree

 

Bell(종)

종은 예배로의 부름과 세상에 선포되어지는 복음을 상징한다.

 

Book(책)

책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상징한다. 열려진 책은 진리 혹은 계시를 묘사한다. 닫혀진 책은 성도들의 이름을 담고 있거나, 최후의 심판, 성자들의 말씀을 담긴 것을 묘사한다. 책을 들고 있는 사도는 신약성경을 저자들이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보통 두루마리 성경을 들고 있다) 세례 요한, 스데반, 맛디아, 제자 시몬 등의 성자들은 보통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절기: 삼위일체

 

Candle(초) 

초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에 집중하도록 한다. 제단에 있는 두 개의 초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낸다. 성도들 역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았다. (마태 5:14)

 

Candlestick(촛대 -일곱가지)

일곱가지 촛대는 보통 -"menorah" 라 불리며 유대교 회당에서 많이 쓰인다. 기독교에서 일곱가지 촛대는 성령의 7 가지 은사를 묘사한다.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이사야 11:2)

 


Censer(향로)

향로는 예배에서 향을 담아 태우는 용기이다. 이것은 향이 위로 피어오르듯이 성도들의 기도도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것과 성도들이 하나님께 향을 받치는 것을 상징한다. 시편 141:2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Chalice (성배) 

성배는 성만찬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을 상징한다.(마태 26:27)



     - iStock

Chalice and Cross(십자가가 있는 성배)

십자가가 있는 성배는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신 그 순종의 상징이다. 성배 위에 끝이 뾰족한 고난의 십자가(Passion Cross)를 둔다. 마태 26:39 (겟세마네에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절기: 사순절, 성 월요일, 목요일, 금요일

 

Circle(원)

원은 시작과 끝이 없기에, 영원함을 상징한다. 보통 신에 대해 표현할 때 원의 상징을 사용한다.

 

Circles - Entwined(셋 얽혀있는 원) 

세 원이 얽혀있는 이 문양은 삼위일체의 상징이다. 원은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속성을 묘사하고, 세 원이 얽혀 있는 것은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일체임을 상징한다.


 Trinity - Good4Joy

Coat and Dice (옷과 주사위) 

옷과 주사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의 겉옷은 네 몫으로 나누어 병사들이 차지하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한 병사가 차지하였다(요한 19:23-24). 이것은 시편 22:18의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절기 : 성(고난)주간

 

Coins(동전)

동전들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30개의 동전과 돈주머니는 유다의 배신을 묘사한다.(마태 26:14)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Crook(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

목자들의 지팡이는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요한 10:11-16). 또한 이것은 다윗 왕의 상징으로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경배한 목자들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귀하게 장식된 지팡이는 "Crosier"(프랑스어로 십자가를 나르는 자 "Cross Bearer"라고 부르며 주교나 대수도원장의 교회적 지위와 권위의 상징으로 쓰인다.

 

Crown(왕관) 

왕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보통 왕중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디모데 전 6:13-16). 또한 신앙의 상급인 영생을 "생명의 면류관"으로 묘사한다(계시록 2:10). 세 왕관은 아기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의 상징이다. 절기 : 부활절, 그리스도 왕 주일

 

Crown of Thorns(가시면류관)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과 함께 그려진다.
가시면류관은 우리에게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조롱하던 병사들을 생각나게 한다.(마태 27:27-29)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png  PNGWing
 

Dagger(단도)

단도는 배신의 성경적 상징이다.

 

Door(문)

문은 요한복음(10:7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에서 가져온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또한 기도에로의 초대이며(마태 7:7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사랑의 상징(계시록 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이다.

 

Doorposts(문설주) 

양의 피가 발라진 문설주와 상인방(문의 가로대)은 첫 번 유월절(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실 때 장자의 죽음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셨다. 그 때 문입구에 양의 피를 이스라엘 집은 심판을 면하였다. 출애굽기 12:21-23)을 묘사한 상징이다. 이 구약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미리 암시한 사건이다. 절기 : 고난주간

1330        Shutterstock

 

Ewer and Basin (물병-주둥이가 넓은 물단지 와 대야-물동이)

물병과 대야는 청결(순결) 예식을 묘사한다. 물병과 대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두가지 성경적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만찬 후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의 도(봉사)를 몸소 행하여 가르치셨다. (요한 13:1-20) 다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피(십자가 형 재판)에 대한 자기 책임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물을 가져다가 자기 손을 씻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다 것을 몰랐다. (마태 27:24)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Eye(눈)

보고 계신 눈동자는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든 계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후기 르네상스 동안에, 눈동자는 빛 광선이 있는 삼각형 안에 그려졌고, 이것은 무한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묘사한다.

 

Flame(Fire 불길-불) 

불길의 혀는 성령의 상징이며, 성령의 기름부음과 권능의 상징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의 머리 위에 임하였던 성령의 강림을 묘사한다.(사도행전2:1-4) 불은 또한 영적인 열정을 상징한다. 한편 불길은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도 한다. (마태 25:41) 성자들이 불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그(녀)의 신앙적 열심을 묘사한 것이다.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Flame(Seven fold 7-불길) 7-

불길은 성령의 7가지 선물을 의미한다.. -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회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 이사야 11:2-3)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Flaming Sword(불칼) 

불칼은 심판의 상징이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 천사(그룹)들과 불칼을 동산 동에 세워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 (창세기 3:24)

 

Fountain(분수)

분수, 혹은 우물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께서 수가 마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며, 그 여자와의 대화 중에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4장) 요한 4:13-1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Gate(문)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열려진 문은 천국의 입구 또는 하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복음의 초대를 상징한다. 문은 또한 죽음의 문과 영생에서 분리된 것을 묘사한다.(마태 16:18, 이사야 38:10) 문은 추방(에덴동산에서)을 상징할 수도 있다.(계시록 22;14) 문은 최후의 심판 때에 저주(심판)에서 정의(선함, 의)를 구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부셔진 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정복된 죽음 지옥 권세를 상징한다.

 

Hand of God - Manus Dei (하나님의 손-권능)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다. AD 8C 동안 유일한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이며, 하나님의 권능으로도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주권, 섭리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손은 각 손가락의 접히거나, 뻗힌 형태에 따라 여러 의미를 나타낸다. 5 손가락 모두를 움켜쥔 형태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상징한다. 엄지, 검지, 가운뎃손가락은 뻗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접힌 형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징이다. 검지는 뻗히고, 가운뎃손가락을 꼬아서 C를 만들고, 엄지를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끼워 다른 C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약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Harp(하프)

하프는 다윗이 사울왕의 정신병을 쫓기 위해 하프를 연주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사무엘 상 16장) 하프는 시편의 상징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악기의 상징이다.

 

Keys(열쇠) 

열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는 교회의 권위를 상징한다. 두 개의 열쇠는 이중의 의미를 묘사한다. 

하나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열린 하나님나라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굳게 닫힌 하나님나라를 의미한다. 뒤집어진 십자가에 그려진 열쇠는 베드로의 상징이다. 베드로는 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으며(마태 16장), 베드로는 순교할 때 감히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부탁하여 십자가에 뒤집혀 매달려 순교하였다.

 

Ladder(사닥다리)

사닥다리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 쓰인 기구 중의 하나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보통 해면을 꿴 갈대와 함께 그려지는 바, 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신포주를 해면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한 것을 묘사한다.(마태 27:48) 또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치던 중 베델에 잠들었을 때, 꿈에 천사가 사닥다리(층계, 계단)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을 생각나게 한다. (창세기 28장)

 

Lamp(등불)

등불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으로 쓰인다. 마태 25장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지혜로운 다섯 처녀, 어리석은 다섯, 다섯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가득 담고, 깨어 신랑을 기다렸다.)에서 유래된 상징이다. 때론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으로 쓰이며, 그 의미는 촛대와 같다. 등불은 팔레스틴 지방의 오일램프 모양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Lamps-Seven(7개의 등불) 

일곱 개의 등불은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을 의미한다.. -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회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 이사야 11:2-3)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상징이다.(마태 14:) 또한 생명의 양식(떡)이신 예수님을 묘사한다.(요한 6:)

 

Luther's Seal(루터의 봉인)

이 봉인은 루터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가운데 검은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참혹한 희생을 상징한다. 붉은 심장은 신앙에 의해 생기는 사랑, 기쁨 평화를 상징한다. 하얀 장미는 천사와 축복받은 영혼들은 상징한다. 푸른 바탕은 천국의 기쁨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금색 원 둘레는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상징한다.

 

Mortar and Pestle (절구와 공이)

약제사의 절구는 의사인 두 성인 , 성 Cosmas(?)와 Damian(나환자의 성인)의 상징이다. 때때로 성 누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Nails(못) 

못은 예수님의 십자사 형에서 사용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 못은 보통 세 개를 그리는데 이는 에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임을 상징한다.

 

Nimbus(Halo, 후광)

후광은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머리 뒤에 원 모양으로 그려진다. 단순한 원 모양의 후광은 영원성을 상징한다. 예수님 머리 뒤에 세 갈래의 광선과 함께 그려진 후광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한다.

 

Oil(기름-올리브)

구약성서에서 기름(올리브)은 주를 위해 성결 예식을 행할 때 쓰이며(레위기 8:10-13 ),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징인 바 주께서 특별한 임무를 주기 위해 사람을 기름부어 선택하신다. (사무엘 상 10:1,시편 89:20) 신약성서에는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의 상징이다.

 

Pearl(진주) 

진주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 '값진 진주' 에 근거하였다. 마태 13:45-46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또한 마태복음은 진주를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마태 7:6 "진주를 돼지 앞에에 던지지 말아라").

 

Plumb Line(다림줄, 추가 달린 수직 측량 줄)

다림줄은 이사야와 아모스 예언자에 의해 사용된 심판의 상징이다. (아모스 7:7-8) 때때로 다림줄을 들고 있는 예수님을 그리는 바 이는그가 인간 영혼의 재판관 임을 상징한다.

 

Quatrefoil(네 잎-클로버) 

네 잎(클로버)는 사 복음서의 저자 -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상징한다.

 

Rainbow(무지개)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노아의 대홍수(창세기 9장)에서 유래된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언약)의 표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 무지개는 때때로 예수님의 왕관에 그려지기도 하하는데, 이는 그의 영광과 최후의 심판을 상징한다.

 

Rock(바위)

바위는 보통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인다. (마태 7장 - 반석위의 집)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 물을 내어 목말라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민수기 20장) 때론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 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상징할 수 도 있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페트로스)의 이름이 '반석(페트라)'과 같기에 주께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 16장)

 

Scales(천칭 저울, 천칭의 접시)

천칭은 심판의 상징이다. 보통 재림 예수님의 최후 심판을 상징한다. 또한 미카엘 천사를 연상케 하는데, 미카엘 

천사는 죽은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책무를 가졌다.

 

Scepter(홀 笏)

왕의 홀(지팡이, 지휘봉)은 권위의 상징이다. 왕관과 같이 있는 홀은 모든 창조물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창세기 49:10, 히브리 1:8) 절기 : 예수승천주일, 그리스도 왕 주일

 

Scourge and Pillar(채찍과 기둥) 

채찍은 그리스도 고난의 상징이다. 보통 기둥과 함께 그리는데, 이는 예수께서 기둥에 묶여 채찍을 맞았기 때문이다. (요한 19장) 절기 : 고난주간

 

Scroll(두루마리)

두루마리는 여러 의미를 담고잇는 상징이다. 두루마리 안에는 선택받은 사람(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따라서 두루마리는 최후의 심판과 영생의 종말론적 상징이다.(계시록 5:6-9) 때때로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야고보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Seal(봉인) 

봉인은 하나님의 약속 혹은 각인(Mark)상징이다. 하나의 봉인은 성결의 의미를 가진다. 구약의 제사장들의 '에봇'(제사장의 옷)과 모자에 12지파의 이름을 봉인(인장)처럼 새긴 보석을 달았다.(출애굽기 28장)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표하기 위해 인(봉인)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고린도 후 1:20-22) 봉인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힐 때 그 무덤 입구를 돌로 막고 로마병사들이 봉인 한 것을 묘사하기도 한다.(마태 27:62-66)

 

7 Seals(일곱 봉인) 

일곱 봉인은 최후의 심판의 상징이다. 이는 계시록 5장, 일곱 봉인이 있는 두루마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일곱봉인이 있는 두루마리나 책을 가진 모습으로도 그려진다.

 

Ship(배)

배는 교회의 상징이다. 믿음의 사람들을 대 홍수에서 안전하게 구해주신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하여 제자들의 배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 사건(마가 4장)에 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돛에 십자가를 그려 진 배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배는 또한 여러 성자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되기도 한다.(성 유다 등) 큰 교회당의 회중 석을 "nave" 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배"라는 뜻이다.

 

Skull(두개골, 해골)

두개골은 육체적, 정신적 모든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 아래에 놓여있는 두개골은 보통 아담의 해골로 이해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고린도 전 15:20-22)

 

Square(정사각형) 

정사각형은 세상(지구)의 사방을 상징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복음서 기자를 상징한다. 아주 적은 경우이지만 살아있는(죽은 성자와는 구별된) 사람에게 후광을 그릴 때 사각으로 그리기도한다.

 

Steeple(뾰족탑)

교회의 뾰족탑은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주목하여, 그 영혼이 하늘로 향하도록 도와준다. 뾰족탑은 중세기 고딕 교회 양식에서 유래하였다. 뾰족탑 위에는 보통 십자가를 달아 멀리서도 잘 보이며, 성도들을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뾰족탑에 종을 달아, 그 종소리를 울려 성도들을 예배에로 

초대하는 기능도 하였다.

 

Sun of Righteousness(의로운 태양

태양은 보통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특히 예언자적인 상징이다. 말라기 4:2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절기 : 대강절

 

Sword(검)

검은 여러 의미의 상징이다. 천칭 저울과 같이 그려진 검은 대천사장 미카엘의 상징이다. 악마와 불신앙에 대항하여 물리치는 것을 상징한다. 열려진 책과 함께 그려진 검은 성령의 검을 상징한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를 상징한다.(에베소 6:17) 검은 성 바울과 검으로 처형당한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Tablets of Ston (돌판)

돌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그림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 (토라 - 모세오경 혹은 구약성경 전체)을 상징한다.(출애굽기 31:18) 십계명의 돌판은 보통 왼쪽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1-4계명), 오른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5-10계명) 법이 그려진다.

 

Torch (햇불) 

햇불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이다. 때때로 확신에 찬 순교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Tower(탑, 성채) 

탑 혹은 성채(Fortress)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시편 94:22) 또한 삼위일체를 묘사하기 위해 성채의 창문을 세 개 만들도록 한 성 바바라를 상징하기도 한다.

 

Trumpet(트럼펫, 나팔) 

나팔은 '최후의 심판', '부활', '예배로의 부름' 의 상징이다. 나팔은 여호수아(여리고성을 돌며 나팔을 불었다 - 여호수아 6장)와 기드온(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나팔을 불며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 사사기 7장)을 생각나게 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을 찬양함, 성회, 전쟁에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 등을 묘사한다.

 

Wheel(바퀴)

바퀴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다.
불타는 바퀴는 때때로 아담과 이브의 에덴 추방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한다.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하나님의 옥좌를 눈과 날개로 덮힌 불타는 바퀴로 그려지기도한다. (에스겔 1:15-17)
이 이유로 불타는 바퀴는 에스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Image 22440663

 

Yoke(멍에)

멍에는 보통 힘겨운 수고 혹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수고를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의 뜻으로 쓰셨다. 멍에는 결혼과 같은 다른 사람을 향한 충성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마태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Winds in my Mind












거룩 / 성(聖)


거룩 :
성(聖) / 성스러울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참조 / 북방 임(壬) 6918. 카도쉬(qâdôwsh) דוֹש

성결과 정결
정결(淨潔)은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은혜의 사건 즉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경(聖潔)은 구원 받은 후 부활의 은혜를 누리는사건이라고 하겠다.

6918. 카도쉬(qâdôwsh) 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3. 레위기 21:6
발음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21:8, 신23:14).
구약 성경 /116회 사용

뜻풀이부

1. 형용사 거룩한, 레 11:44, 45, 19:2.
  • a. 형용사 [옳고 진실된 것을 판단하는 하나님께 사용되어] 욥6 : 1 0 , 시2 2 : 4 ( 3 ) ,99:3,9, 111:9, 사6:3, 40:25, 합3:3,[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에게 사용되어] 사1:4, 5:19,24, 10:17,20, 12:6,17:7, 29:19,23.
  • b. 형용사 [제사장에게 사용되어] 레21:6, 민6:5, 시106:16.
  • c.형용사 [경건한 사람에게 사용되어] 레11:44, 신7:6, 사4:3.
  • d.형용사 [신성한, 거룩한 장소에 사용되어] 출29:31, 레6:9(16),19(26), [하나님의 거룩한 날들에 사용되어] 느8:10,11,[성소에 사용되어] 시46:5(4), 사57:15.
  • e.형용사 복수 קְדוֹשִׁים
  • f.형용사 [여호와께 사용되어] 지극히 거룩한, 수24:19, 잠9:10, 30:3, 호12:1(11:12)
  • g.형용사 거룩한 것[들]. ㉠ [천사들] 신33:3, 욥5:1, 15:15, 시89:6(5),8(7), 단8:13, 슥14:5. ㉡ [하나님에 대해 경건한 성도들] 신33:3, 시16:3, 34:10(9), 단8:24.

* 6942. 카다쉬(qâdâsh)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 28),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뜻풀이부

  • 1.원형 거룩하다, 깨끗하다 
  • 2.원형 거룩하다, 신성하다.
    • a.원형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사65:5, 성스러운 것을 만져서 성스럽게 된 사람에게 사용되어, 출29:37, 30:29, 레6:11(18),20(27). 
    • b.원형 거룩한 예배를 위해 정해진 성물들,출29:21, 민17:2(16:37), 거룩한 것을 만짐으로써 거룩해진 것들, 신22:9, 삼상21:6(5), 학2:12.
    • c.원형 니팔형
    • d.원형 거룩하게 여겨지다, [בְּ를 수반하여] 레10:3, 22:32, 자신을 거룩하게 내보이다, 민20:13, 겔20:41, 28:22,25, 36:23, 38:16, 39:27
    • e.원형 성스럽게 되다, 출29:43.
    • f.원형 피엘형
    • g.원형 ~를 거룩하게 여기다, [하나님으로서]신32:51, [제사장으로서] 레21:8,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다, 출20:8
    • h.원형 거룩함을 선언하다[하나님께 사용되어], [안식일을] 창2:3, [백성을] 레20:8, 21:8, [금식을] 욜1:14, 2:15, [총회를] 왕하10:20.
    • i.원형 신성시하다, [제사장을] 출28:41, 29:1, 삼상7:1, [제단과 성전을] 출29:36,왕상8:64, [이스라엘 백성을] 출19:10,14, 수7:13, [새 건물을] 느3:1, [산을] 출19:23, 거룩한 의식을 거행하다,[제사로서] 출13:2, [전투를 위한 전사들로서] 렘51:27.
    • j.원형 푸알형: [분사형으로] 신성한[제사장이나 거룩한 것들에 사용되어], 대하26:18,31:6, 사13:3, 겔48:11.
    • k.원형 히필형
    • l.원형 ~를 거룩하게 여기다, 민20:12, 사8:13, 29:23
    • m.원형 거룩해지다, ~를 거룩하다고 선언하다, 왕상9:3, 렘1:5.
    • n.원형 거룩하게 하다, [하나님께] 레27:14,삿17:3, 삼하8:11.
    • o.원형 힛파엘형
    • p.원형 깨끗하게 하다, 정화시키다, 출19:22,삼하11:4, 대하5:11, 29:15
    • q.원형 거룩하게 보이다, 겔38:23.

    • r.원형 의식을 거행하다, 절기를 지키다, 사30:29.

거룩이란 정의를 "구별하다(카다쉬)' 라고 합니다.
왜 구별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였을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애굽의 노예생활 430년에서 구원을 받은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무려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한 노예로 살았습니다.
노예근성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도 여전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기 생각과 자기 결정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장차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들이 먹고 즐기는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므로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레위기 12장은 산모의 출혈
레위기 13장은 문둥병의 진단
레위기 14장은 문둥병의 정결
레위기 15장은 유출병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7월 14일) 욤 키퍼






거룩이란 한자의 의미는 "임금처럼 듣고 말을 하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임금이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평안하게 지켜주는 것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녀들을 임금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 5. 21 - 1843. 3. 25)은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1835년부터 1843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현재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삶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할 때 후보자가 거룩한 사람인가를 평가하는 항목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리더의 고결함보다 재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듯 보입니다.
정말로 거룩함이 여전히 영적 리더들에게 중요한 것일까요?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명사 '거룩함'(holiness)은 '거룩한'(holy)'이라는 형용사와 '신성하게 하다'(sanctify) 곧 '거룩하게 만들다'라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의미에서 보면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놓음, 구별, 성별, 그분께 이관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성도, 성자라는 뜻이 되는데, 이 단어들은 헌신과 동화(同化)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여기서 헌신이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을, 동화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모방하고 순응하는 행위를 각각 뜻합니다.
거룩함은 크게 4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1. 거룩함은 나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마음'은 개인의 내적 삶의 핵심과 초점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이란 동기부여의 근원이고 열정이 자리를 잡는 장소일 뿐 아니라 모든 사고 작용의 원천이며 특히 양심이 위치한 곳입니다. 거룩함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함은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의 바른 목적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 목적은 올바른 성취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수행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동기의 문제까지 포함합니다.
거룩한 사람에게,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일은 피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의 행동을 유발케 하는 목표, 열정, 욕망, 갈망, 열망, 목적, 그리고 충동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이 능동적이며 민감하게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거룩함은 나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기질'이란 어떤 특별한 반응과 행동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온갖 요소들을 말합니다.
기질은 나로 하여금 환경(상황, 사물, 사람)과 내가 늘 하던 대로 '거래하게' 만듭니다.
기질은 성격을 형성하는 원료이고, 성격은 기질을 사용해 우리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이며, 개성은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으로 최종 결과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부터 기질의 희생자로 전락하거나 그러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속한 기질이 지닌 단점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단점과 관련된 죄는 발견하기가 아주 어렵고 처리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거룩한 인격자들은 자신의 성품 속에 각각의 기질이 지니는 단점은 모두 배제한 채 장점만 종합하여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또 나의 기질이 나를 유혹하기 위해 던지는 독특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3. 거룩함은 나의 인간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거룩해진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뜻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간성으로 존재 안에서 인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해지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닮으려면 바른 인간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성을 지니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같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제임스 필립은 "거룩함이란 제대로 알고 보면 멋지고 하나님의 사랑만큼 온유하고 아름답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아름다움은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성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입니다.

4. 거룩함은 내가 맺는 관계와 관련이 있다.

거룩한 삶을 영위하려면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가족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야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얻게 된다는 사고는, 아무래도 진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함이란 분명히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세상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제임스 필립은 그리스도인 중에 상대방에게 공감하기를 싫어하고 항상 자신만 조명을 받으려고 노력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결국 이러한 증상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모든 관계를 망친다고 조언합니다.
필립의 말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만 하면 팽창되었던 우리의 자아는 본래의 크기로 축소되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사적인 면이나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성령님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며, 오직 일편단심과 전심으로,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고 그분의 능력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의 향기입니다. 이 한 주간도, 영적 리더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과 속(聖과 俗)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Make every effort to live in peace with all men and to be holy; 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

성인 성(聖), 성스러울 성(聖) = 귀 이(耳) + 𦔻(성인 성) + 壬(북방 임)

풍속 속(俗) = 사람 인(人) + 골 곡(谷) / 골짜기, 깊은 굴 - 𠔁(나눌 별) + 口(입 구)


인간을 종교적 인간(성스러운 인간)과 세속적인 인간으로 나눈다.
종교적 인간은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간의 비균질성,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에 더 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적 실제를 계시한다.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은 고정점, 방향성,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한다. 속된 경험은 공간이 균질적이고 중성적이며 참된 방향성 불가능,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을 나타낸다.

 

보통 교회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 나눔의 표상이고, 천상의 예루살렘을 모방한 것이다.속세에 있는 성스러운 곳, 집의 문지방과 문 역시 공간의 연속성의 단절이며 징표이다. 성스러운 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땅을 정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아그니(불의 신)에게 바치는 불의 제단은 신의 세계와 교류로 소우주적 규모로 천지창조의 재현하는 것으로, 정화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우주화이다. 인간은 신들의 작품인 우주를 인간의 척도로 재현하고 모방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우주산, 성스러운 산과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세계 축으로 신전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은 마을의 성전이나 예배소(우주적 상징)으로 구현된다. 즉 우리의 세계가 코스모스화된다. 집과 주거의 성화를 통해 공간을 코스모스화한다. 주거는 자신을 위해 건설한 우주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낙성식 등으로 구현된다. 종교적인 건축은 원시적인 주거 구조 안에 현존하는 우주론적 상징을 넘겨받아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은 세계의 모방, 초월적인 모델의 지상에서의 재현이며 세계의 재성화이다.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의 의미.

 기원의 시간, 우주창조의 시간(성스러운 시간의 원형)이 우리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더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과 속된 시간, 일상적인 시간으로 구분한다. 종교적 인간은 의례의 도움을 받아 별 위험 없이 일상적 시간 지속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여행한다.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축제에 참여는 성스러운 시간이 최초의 출현과 맞닥뜨리는 것이고, 성소에서의 예배는 속된 시간 지속의 단절이다. 축제는 신화적(종교적)사건의 기념제, 그 사건을 제현, 세계창조의 의미로 제의상의 작업이며 신의 모방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자는 신화적 사건과 동시대인이 되고, 영원한 현재로 생명의 성스러운 차원이 회복되며,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 존재의 신성성을 체험한다.

 

“인간은 위로 열려 있는 장소, 즉 신들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신들과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신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다. 태초에 일어난 신화적인 옛날, 기원의 시간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 강박관념,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존재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신화는 시간의 시초, 최초에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으로서 성스러운 역사를 이야기(신비를 계시하는 것)하는 창조의 보고이다. 성스러운 것이야말로 실재중의 실재로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성스러운 것이 모든 현실적 실존의 중추적 원인으로 신화는 모든 의례 및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 대한 모범적인 모델을 확립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은 자신이 오직 인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의 신성과 종교 그리고 인간의 실존.

자연은 종교적 의미로 충만되고, 세계는 코스모스이다. 하늘의 신성성은 천상의 신들, 무한 초월한 것, 절대적이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아득하게 먼 것, 감추어진 신, 종교체험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농경으로 여러 신은 구체적이고 두드러진 힘의 상징으로 변모하였다. 보통 물은 존재 가능성의 원천, 죄를 씻어냄 정화와 재생을 세례는 대홍수의 반복, 인간과 신과 유사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 신이 창조한 인간 역시 자신을 소우주로 인식한다. ‘나는 하늘이요, 그대는 땅이다’. 우주적 자연에너지와 정신의 통합은 신비적인 의례로 인간이 미리 운명 지어진 모범적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한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은 죽음을 탈신성화, 고정된 거주지는 어떤 실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이의 파괴는 절대적 자유선택 한 것이다.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로 우주적 가치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일상생활 수확, 달력, 가입식,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는 인간에게 각인되고, 그에 따라 의례에 따른다. 결혼은 모두 긴장과 위험을 내포하며 따라서 위기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통과의례에 의하여 수행되고, 죽음 역시 의례가 필요로 한다. “죽은 자는 그 자신의 사후의 운명을 경정하는 일정한 시련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공동체에 의해 승인되고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출생의 상징과 죽음의 상징이 나란히 나타나고, 죽음을 통과의례로 변형하여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근대사회와 신성.

“비종교적인 인간은 탄생, 결혼, 죽음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모든 통과는 그 의례적 성격을 상실해 버렸다.” 로 변하고 있다. 하나의 진보는 종교적 인간의 상황과 그 정신적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다. 비종교적 인간은 탈신성화의 산물이며, 세속적인 인간은 인간 실존의 탈신성화 과정의 결과이다. 그러나 근대인이라고 해도 위장된 신화와 타락한 의례를 많이 가지고 있기에, 인간적 조건과 공존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가 축적과 변용 그리고 모방이지만, 인간은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이 주는 의미.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종교의 예를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종교학이라는 학문에서 종교는 주로 그 기능적인 정의 “한 집단의 사람들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수단이 되는 믿음과 관습체계- J. M. 잉그”,

 

종교의 시작과 왜 종교가 생겼을까? 지배를 위한 수단, 지배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중적 구조(성과 속)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종교현상의 특수구조로 종교의 본질 이해, 그들 현상의 역사적 연관으로 종교 역사 해명과 서설한다. 낯선 신앙은 기존 종교관행과 비교, 전통적 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종교사의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낯선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그 내부에, 바로 그 중심에 몸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가치를 향해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한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판별함에 있어 우리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 가장 그릇된 행위에 있어서조차 초인간적, 신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방법론도 잘 안내해준다.

 

종교로 본 고대인, 종교는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고, 이미 사라져 버렸다. 과거는 종교의 그늘 아래에 살아왔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우리는 항상 현재로만 살고 있으나, 과거라는 그 기억의 저장고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에, 은연중 문화나 풍속에 지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원시인의 종교성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같이 보이다. 그 당시 종교라고 할만한 믿음과 지능이 있었는지.

 

우리나라 문화에서 태어남과 백일잔치, 돌잔치, 각종 시험과 입시, 축하와 애도 등 대학교, 군대에 신입생이나 신참을 환영하는 모임, 집단이데올로기와 개인에서 그 성스러움과 속됨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세계는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민속 등은 사라져 가고, 물질적인 문명과 거대 종교의 우산아래 머물러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의문의 동물이다. 이 수많은 의문들은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항상 진행형이다. 종교는 인간의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리, 그러나 지배하는 종교는 사라지고 사랑의 종교로 변할 것을 희망한다.

 

엘리아테는 <요가>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한창 인도에 관심이 많은 때, 그 알고 싶음의 욕구로 여러 책을 읽어보았지만, 참고할만한 책은 적었다. 그러다 발견한 보물 같은 책, 요가의 다양한 면 잘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다른 책들, 문화와 종교에서의 상징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 종교학이나 민속학의 중요한 문헌인 것 같다. 성과 속 같은 책들을 통해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과 종교와 민속이라는 것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해준다.





거룩함의 정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말은 절대적인 완전함과 순전함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다.

이 말이 사람이나 다른 대상물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함이란 "구별"이라는 부정적인 개념과 "헌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특히 죄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으므로 죄와 질병과 귀신을 이길 권세를 받은 것이다(막 16:15-18).
죄를 이길 수 있는 이 권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진실로 거듭났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게 해준다(행 1:8).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분이 나를 죄로부터 건져내셨다."

거룩함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5)는 말씀만큼이나 강한 진리이며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중생의 경험 이후에는 육체와 거듭난 영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은 거룩함을 위한 싸움이며,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이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것이다.

구별의 필요성.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자신처럼 거룩한 백성을 요구하신다.(벧전 1:15-16).
아담과 하와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죄는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든지 죄로부터 분리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신(神)인 마귀의 자녀들이다.(요일 3:10, 고후 4:4).
둘 사이의 중립이 되는 사람들은 없다.
이 두 부류는 서로 다르며 구별된다.
하나는 거룩한 백성들-거룩한 제사장들이다.(벧전 2:9).
다른 하나는 부정한 백성들이다.
이 부정한 세계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요구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 6:17).

산 제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구절 말씀은 거룩함과 분리에 더 깊은 의미를 전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의 희생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거룩해야 하며 이 세상과 분리되어야만 한다.

거룩함은 성령이 주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다.
성화(聖化,즉 분리)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시작되며, 믿음과 회개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를 통해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충만과 내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벧전 1:2).
오늘날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법은 석판(石版)에 쓰여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런 법도 없는 분이시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도 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나님의 법을 성령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양심으로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감화와 확신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는 거룩함의 근본적인 기초(基礎)가 내주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직접 가르쳐준다.

방금 전에 우리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확증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거룩함은 성령 충만한 교사와 목사가 가르쳐준다.

요한1서 2:27은 무슨 의미인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 구절 말씀은 단순히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기초적인 거룩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령이 충만한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베소서 4:11-12에 따르면 교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함이란 오직 온전함을 위한 싸움이며, 이 사역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

거룩함은 성경이 가르쳐준다.

성경은 한 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무수한 상황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그 사역의 목적이다.
성경은 모든 문화와 시대와 상황 속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침을 제시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행동과 태도를 말해주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서 기대하시는 행동과 태도를 가르쳐 준다.

거룩함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빌립보서 2: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각 개인이 구원을 위한 자신의 법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 객인이 경외(敬畏)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궁극적으로 개인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중생의 체험 이후에 각 개인은 경주의 마지막까지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끝까지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히 3:14)

개인적인 확신.

각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으므로, 각 개인은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령을 받은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교사들과 성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확신이나 또는 불확신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특정한 문제에 대해 자신 스스로가 답을 구해야 한다.
물론, 성경의 어떤 분명한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확신이 되며, 자신이 그것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는 없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다른 신자(信者)는 함께 느끼지 못하는 확신을 주실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 사람의 배경이나 또는 어떤 분야에서의 그의 연약함 때문에 필요한 것일 것이다.
혹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과의 더 밀착된 관계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확신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5,23).
동시에,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확신을 깎아 내려서는 안되며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롬 14:2-6).
하나님은 개인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축복하실 것이다.
이런 특별한 헌신을 통해서 특별한 축복이 오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法制化)할 수 없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해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역자는 영적 권위가 있으며, 실제로 성도들 사이에서 행동과 의복의 표준을 정할 책임이 있다.
사역자는 신자(信者)들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서를 올려야 할 것이다.(히 13:17).
그러나, 사역자가 "겸손으로 옷 입으시오"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거룩함이 없다면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할 수 없다
- 그것은 마음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거듭난 이후에, 성도는 성령이 주신 거룩한에 대한 근본적인 본능을 가지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성령 충만한 목자에게 배운 것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거역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교파들과 교회들을 비교하려고 애쓴다.
교파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지켜진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하다.
법이나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정도 죄를 피하게 할 수 있지만, 오직 사랑만이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과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려는 소망을 우리 안에 생겨나게 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嗜好)나 편리함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이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신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편지 내용에 따라 살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 안에 계신 그의 성령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또한, 비록 우리의 육신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즐거이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요 14:25; 요일 2:3 ).
반면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거룩함에 대한 몇가지 기본 원리.

성경은 참된 거룩함의 필수적인 요소를 가르쳐준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
이 세가지 성경구절은 실제 성결 생활의 핵심을 묘사한다.
거룩함에 대한 어떤 특정한 기준을 세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
먼저, 우리는 죄악의 세상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며, 또 그런 모습으로 비쳐져서도 안된다.
심지어 우리는 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죄의 모양을 가진 것이라도 피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는 세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얼마나 세상과 닮을 수 있는가?" 또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도는 어디까지인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 조절과 억제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영(靈)에 복종해야 한다.
절제(節制)란 또한 모든 일을 극도로 또는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종, 타협, 또는 세속화의 한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되며, 또한 스스로 의로움, 위선, 그리고 겉치레의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서도 안된다.
세상을 본받지 않으며 모든 일에 절제하는 원리는 본서에서 논의되는 모든 분야에 대해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며, 그래서 우리는 죄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행 1:8; 롬8:4).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롬 8: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즉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우리는 죄인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만 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97: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악을 미워하게 된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 존재로서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더욱 공격적이고 거침없이 말하며 외향적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더욱 보수적이거나 태평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이 왕으로서 다스린다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차이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들의 본래의 성품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는 악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역자는 죄에 대해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근본적인 성품에 상관없이 그는 죄를 구별하고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사역자의 태도.

사역자는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책임이 있다(겔 3:17-19).
사역자는 또한 죄를 열거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엇이 죄인지를 알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역자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준을 세울 의무가 있다.
이 기준들은 성도들 특히 지도자나 타(他)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방문객(또는 초신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역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은 죄를 참을 수 없으며, 사역자로 하여금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게 만든다.
성령은 사역자로 하여금 필요할 때에는 담대하게 사람들을 꾸짖고 훈계하게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감동이 사역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힘을 주도록 성령은 그의 삶 속에서 왕으로서 다스려야 한다.
비난하는 데 빠른 사람, 빨리 분노하는 사람, 참을성이 없는 사람도 성령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훈계하는 데 있어서 친절하고 온유해질 것이며, 사람들의 죄악을 볼 때에 사랑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넘쳐야만 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 설교하게 될 것이다.(욜 2:28).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므로, 사역자도 역시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며,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역자는 그의 마음속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너무 태평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를 싫어해서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 성격상 저는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어요.
저는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를 할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죄에 빠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을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되기 때문이다.
참 사랑을 온유함 이상의 어떤 것이다.
만일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한다.
그가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역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은 사역자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전달자로서 부적합하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설교하지는 않는다.
사역자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나 농담꾼이 아니다.
물론, 설교단에서 유머나 상상 또는 창작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의 기본적인 소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단지 어떤 사람이 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계속 죄악 속에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사역자는 성령으로 재충만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은 약한 그리스도인일 뿐이며 절대 지도자는 아닌 것이다.

사역자는 전달자일 뿐이며 저자(著者)가 아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는 위대한 목자장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사역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없다.
사역자는 단지 전달자에 불과하다.
우편배달부가 편지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다.
편지 수령인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우편배달부를 비난할 권리가 없으며, 그에게 내용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우편배달부는 저자가 아니며, 내용을 바꾸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할뿐이다.
사역자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는 없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이해해야할 성구들.

죄와 거룩함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 이해해야할 필수적인 중요 성구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6장과 8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총괄주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죄의 법

(롬 7:20).

바울은 이 세상에는 모세의 법(法)이나 양심의 법(法)보다 더 큰 죄의 법(法)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구약의 법이나 정신적 동의와 이성적 추론의 과정이 사람의 속에 내재된 기본적인 죄의 본성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 죄의 법은 또한 죄의 본성, 옛 사람, 옛 본성, 첫 아담, 육신 등으로 불린다.

성령의 법

(롬 8:2).

성령의 법은 유일하게 죄의 법보다 더 큰 법(法)이다.
이것만이 사람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이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사람의 내면에 새로운 본성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본성은 죄를 소원하지 않으며, 그 안에 하나님의 법과 소원을 포함하고 있다.
선행이 성령의 법을 대치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 3:9).

이 성구는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연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를 통해 위의 성구가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음식이 당신을 병이 나게 만든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전 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행동이 당신이 매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당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앞의 두 경우에 있어서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은 신체적으로 그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나 지식적으로 그것을 꺼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본성에 의해 죄로부터 스스로를 자제(自制)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이 죄를 이길 힘과 승리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죄에 대하여 죽음

(롬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그 다음 몇 구절은 계속해서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회개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섬겨서는 안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롬 6:7).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과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본다면, 죽은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죽은 사람의 뺨을 때리든지 혹은 그 사람의 눈앞에서 천만 원이라는 돈을 흔들어 보이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죄에 대한 어떤 유혹에도 우리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히 죽었고, 우리 인생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롬 8:38-39).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귀신, 천사, 사람, 시험, 환난, 시간이나 환경 등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권세가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사단 자신도 우리를 우리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9; 요일 5:18).
그러나 그리스도인 자신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깨어버리고 배교할 수 있는 것이다(롬 11:20-22; 벧후 2:20-22).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요일 1:8).

이 성구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자주 오용(誤用)되어왔다.
이 구절은 죄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옛 본성은 억제된 채로 그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는 아직 변화되지 않았고,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
그래서 요한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 속에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죄의 본성이 뿌리째 뽑혀버렸다는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신자(信者)와 그의 죄의 본성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이 있지만, 죄의 본성이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사실상, "죄에 대하여 죽은"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신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요점이다.
"죄인-성도"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거룩한 성품을 주셨으며,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셨다.
성령은 영원히 성도 안에 내주(內住)하면서 죄에 대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인을 도와주신다.
예를 들면, 사람이 라디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악한 본성이나 옛 사람을 이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이 그리스도인이 듣기에 부적합한 것이라면, 그는 그저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는 라디오가 자신의 사고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성령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한, 그는 죄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죄를 꺼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 영역에서 완전히 다스리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다른 주인에게 굴복시키는 것이고, 그 주인의 종이 된 것이다(롬 6:16).
90퍼센트 그리스도인이나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그리스도인은 죄인인가?

앞에 언급한 구절로 조명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입장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사람은 스스로를 사단의 영향 아래, 그리고 죄의 본성 아래로 떨어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 사람은 즉시 우리의 대언자이며 모사(謀士)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요일 2:1).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직접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히 4:14; 요일 1:9)

개인적인 기도.

예수님께서 하는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게 되므로, 개인적인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에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절대로 안된다.
오히려 즉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든 아니면 우리 자신이 직접 말로 간구하든,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으며, 우리를 은밀한 죄와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전 11:31).
우리는 또한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도는 회중 앞에서 소리를 내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이길 수 있는 힘을 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과 영의 더러운 것

(고후 7:1).

바울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구절에서 "육"은 육신적인 요소를 뜻하고 "영"은 사람 속에 있는 영적인 요소를 뜻한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육과 영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향한 음욕을 마음의 간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죄이며, 육신은 실제로 간음을 행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여전히 죄이다.
하나님께는 마음속의 미움이 실제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깨끗케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기 위해서 육과 영을 깨끗케 해야 한다.

육은 단지 영이 거하는 거처일 뿐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즉시 싸움-육과 영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되는 이 전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성령이 이 전쟁에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실 것이다(딤후 2:5).

사단의 메시지.

마귀는 우리에게, 우리가 아직 육신 안에 있으며 또 육신이 약하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없다고 믿게 하려고 애쓴다.
그는 우리가 매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것도 사실이다(롬 8:3).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히 2:14).
예수께서는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기셨으며, 그분이 우리의 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우리도 역시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함.

성경은 우리가 완전한 데로 자라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2절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하고, 빌립보서 3장 15절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기"위하여 5가지 사역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절대적인 완전함과 상대적인 완전함은 구별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절대적인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이 성장 과정이 진행되는 중에라도, 우리가 적절하게 성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완전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 개월 된 아기도, 비록 이(齒)가 나지 않았고 완전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걸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완전한 아기인 것이다.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이것은 완전한 것인데, 나이에 알맞게 적당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후에도 이 아이가 여전히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과 싹은 아직 사과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그 꽃은 작은 푸른 공 모양이 될 것이며, 그 후에 익게 될 것이다.
각 단계마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다.
이 예는 우리가 완전해지라는 권면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며 우리의 잘못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처음 중생의 체험을 한 바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완전함의 다른 수준으로 인한 관용.

어떤 사람들은 다름 사람들보다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듭날 때, 그들은 훌륭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이교도나 무신론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할지라도 완전함의 수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마 7:1).
특히,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거룩함의 어떤 기준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성도를 완전하게 되도록 감독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성령과 사역자의 일이다.

성도뿐만 아니라 교회도 완전함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성도들의 배경과 초석(礎石)에 달려있다.
그것은 또한 사역자에게 달려있기도 한다.
어떤 사역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심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양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없다.
또 어떤 사역자들은 자신의 개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므로 그 양들은 완전한 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이 장(章)을 쓴 목적은 거룩함이란 일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일 순종해야 하는 계명임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벧전 1: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질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임을 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티나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엡 5:27).
만약 우리에게 주름이나 얼룩이 생기면, 우리의 회개를 통해 예수의 보혈로 그것을 즉시 씻어야 한다(요일 2:1).

성령은 우리에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우리의 옛 본성이 죄와 세상을 향해 죽어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의롭다함(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다함)을 받았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단순히 중생의 체험을 하고 거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자.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마태복음 5:38-48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거룩은 영어로 “Holiness”라고 하고, 온전은 영어로 “Perfec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말 같지만,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우리 인간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당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을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레위기의 말씀은 그 배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나서,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광야에서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삶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겁니다. 현재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별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별은 선택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특권의식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었으니까 특권의식을 갖고 자기 의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성경은 “성도”라고 칭합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완벽하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공자님의 제자들이 더 잘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목적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윤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렇게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로 바뀌었는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셔서 부활시키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날인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주일)은 그냥 쉬는 날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시간이 쉬는 날에 나를 귀찮게 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배가 쉬는 날 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이건 거룩한 주일을 전혀 모르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처럼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별하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전은 왜 거룩한 장소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한 겁니다.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예배 하는 거룩한 백성! 모두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입니다. 시간이 중요하고, 장소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은혜입니까?

 

십자가가 왜 거룩합니까? 십자가는 원래 전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범죄자 중에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범죄가 가장 추악합니까? 최근에 뉴스를 보니까,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 살 먹은 아들은 때려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 때문에 평소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매일 때렸답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 살 먹은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추악하죠? 또 반대로 이런 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집안 어른한테 받은 세뱃돈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추악하죠?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추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형시키던 형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이 십자가라고 증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구별하셔서, 십자가를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추악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좀 이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올바른 이웃관계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7절 말씀에 “형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8절 말씀에 “네 자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5장 4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을 가족이라는 범주,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내가 굶고 있는데 밭에 있는 이삭을 모두 거두어 갈 수 없습니다. 가족 것인데, 내 것인데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억압하고 착취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저주하거나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미워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원수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족과 나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나 저지를 수 있는 것들이지, 가족이나 나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진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그들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햇볕을 악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농사, 즉 먹고 사는 일에 꼭 필요한 비를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시냐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불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고 하늘 나라의 법칙을 이 땅에 펼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구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모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그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덧입혀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해지는 겁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덕과 윤리가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붙들고 거룩한 백성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거룩에 대한 교훈

한눈에 남의 결점 보는 사람은 예리한 사람입니다.
보고 비판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냥 덮어주는 사람은 푸근한 사람입니다.
그 결점 보완해주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돕고도 말이 없으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겉모습은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택함 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란 걸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분의 겉모습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구세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정신병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모세처럼 홍해바다를 가르거나 엘리야처럼 불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저 하나님의 세계와 몇 가지의 이적과 참 말씀만을 전하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영접 받은 우리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참 구세주이고 진정 거룩하신 분이시란걸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흠이 없고 죄가 없고 티가 없는 분이시란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겉모습에 반해 주님을 아버지로 영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의 학벌이나 외모 ,어떠한 외부적인 바탕을 보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런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지 못하고 “겉만 ” 치중하는 서기간과 바리새인의 거룩함을 닮아가려 합니다.

레위기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시편 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요한복음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거룩한 사람

거룩한 사람은 주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내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과 마음을 하나로 합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성형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줍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빛은 성형으로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입니다.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연스럽게’ 거룩해 지는 사람입니다.

‘인위적으로’  거룩해 지려고 스스로를 꾸미며 포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 영생의 아름다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자연스러운’미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일부러 신령한척 하거나 성스러워 보이려 하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려고도, 능력을 나타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을 감추고 마음자세를 낮추며 주님만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외모가 아닌 심령에서,  겉이 아닌 속에서 진실함을 보이기에 주님의 기준이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도행전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로마서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사람은 겉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숨은 마음을 보신답니다.

베드로 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겉만 ‘ 거룩해 보이려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서기간과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3: 25-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누가 복음 11:39-41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진정한 거룩함은 우리 속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사회적 부와명예, 매력과 외모, 은사능력과 엘리트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심령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랍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이요.

레위기 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채찍질에 누더기 옷을 입고 복음을 전하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라 칭함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닮아갔던 거룩함은 세상의 화려한 거룩함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진리를 사랑했고 말씀을 사랑했고 천국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겉만 치중하고 외식하길 좋아하던 서기간과 바리새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속이 하나님을 닮은 진정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자신의 겉을 드러내는 거룩함이 아닌, 진정 심령 에서부터 빛이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마태복음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은 모세에게 회막을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천막입니다.
구별된 장소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그 공간에 제한을 받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때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재앙이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용납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이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반드시 회막문으로 그것을 가져와서 잡아야 했습니다. 그 피는 오직 하나님께 대속의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흘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분별하게 그들의 탐욕대로 살아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가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양식을 위해서도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회막 앞에서 모든 짐승을 잡으라는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성찬이 되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메추라기떼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은 탐욕으로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우리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

회막 문앞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음란한 방법으로 섬기던 숫염소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음란한 방법이라는 말은 몸을 파는 여인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음란한 여인의 자녀와 같습니다.

어떻게 그 음란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은 가정 안에서 소중한 선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서 일어나는 성적 행위는 극히 잘못된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준비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사람들은 혼인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배우자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와 요구가 없다면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기뻐하시는 성전입니다.
음란한 여인이 되지 마십시오.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로 폄하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고픔, 목마름은 거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러운 것, 기어다니는 것 근처에도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가장 크고 존귀한 보물은 거룩이다.
레위기 1-10장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인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에 관해 알려 주었다면
11장-15장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죄와 죄의 오염 요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교제에 의한 부정(11:),
출생에 대한 부정(12:),
문둥병에 의한 부정(13:-14:),
유출병에 의한 부정(15:)이다.

1.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거룩한 생명이다.

주의 이름이 복음이다.

① 예수 - 죄를 씻고 벗어나게 하는 생명: 죄, 타락한 세상과의 관계
② 그리스도 - 성령의 생명(거룩한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
③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 종자가 거룩한 씨, 하나님의 씨이다.
④ 임마누엘 -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내 안에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주신 이 거룩한 생명을 잘 관리하고 훈련하여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2. 거룩은 나의 죄악된 존재를 인정하는 것 (12:)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 여자 아이를 낳으면 80일간 정결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는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출산에 따른 피, 분비물등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출생이 부정함을 알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정결기간이 지난후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다.
이는 속죄제를 통해 존재 자체가 오염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제는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나의 존재 전체를 드리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 믿은 이후에 무엇을 버렸는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옛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자.

3. 거룩은 하나님의 세우신 영적질서, 권위에 복종하는 것 13:-14:

문둥병의 영적의미는 무엇일까?

1) 문둥병은 불치의 병으로 처음에는 외부에 나타나다가 점점 살이 썩는 무서운 병이다.
문둥병의 특징은 확산성이다. 부정적 영향력을 자꾸 끼치면 영적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다.
2) 성경에는 영적 교훈으로 문둥병을 죄의 모형으로 삼았다.(시 38:5, 11)
성경에 나타난 문둥병은 미리암의 문둥병(민 12:1-10), 게하시의 문둥병(왕하 5:20-27), 웃시야 왕의 문둥병(대하 26:16-21) 등이 있다. 모두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문둥병이 생겼다. 영적지도자를 대적하면 기름부음이 끊어진다. 영적 문둥병에 걸린다.
3) 문둥병이 들면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성소에서 쫒겨났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쫒겨나 진 밖에서 거해야 했다.
4) 문둥병이 들면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했다. (레 13:45-46)
5) 문둥병은 몸(존재) 안에 있고 옷(우리의 행위)에 있고 집 안(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있다. 6) 문둥병에 의한 부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회개하고 순종함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나아만의 경우는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다.

4. 거룩은 자신의 내면을 제제 하는 것 (15:)

절제되지 않는 피의 유출과 설정은 우리 속에 절제 되지 않는 죄의 가득함을 상징한다.
욕심, 혈기, 고집, 증오, 거짓됨, 악한 생각 등 우리 속에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악한 것들이 가득함을 안다. 유출병도 속죄제와 번제를 드림으로 정결케 된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을 좋아하신다. 더러운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자. 하나님의 성전답게 거룩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자.

5. 거룩은 거룩한 영향력을 받고 주는 것 (11:)

정결한 사람,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2-3) - 구별이 있고 말씀의 반추를 위해 수고가 있는 사람

2)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9)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람(지느러미)과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 (비늘)

3)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13-19)
- 부정한 새들은 씨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고기와 사망에게 삼킨바 된 사체를 찾아 먹는다.

(1) 맹금류 - 매와 독수리 :만나면 쏘아대고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2) 고독한 새들 - 올빼미나 당아새, 까마귀: 하나님의 사람은 우울함이나 슬픈 정서 가운데 살면 안된다.

(3) 불결한 것을 먹고사는 새들 - 뱀을 먹고사는 황새이다. 또 벌레를 먹고사는 새도 부정하다고 했다. 우리 자신들이 모든 부정한 것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부정한 것에 빠져 있는 자들과의 교제까지도 삼가야 한다.

4) 날개가 있고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21-22)
-세상에서 살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 문화, 지적 정보들, 주변상황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거룩한 사람들은 공급의 통로를 하나님께로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하다. 이방문화를 조심하자.




눈동자(스가랴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표현합니다.
눈동자(케이셔 에네카) - 눈 안의 작은 사람처럼 /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것

시편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동성애(同性愛)에 대한 신학적 고찰 / 이상원 교수

 親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단체와 활동에 대한 상징으로 무지개를 내세웠는데, 이들이 내세우는 무지개 색상은 여섯 개입니다.
일곱 개를 내세웠다면 더 큰 혼란에 생겼을 텐데, 동성애자들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통해서 여섯 색상을 내세웠든지 간에 여섯 색상 무지개는 동성애자들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동성애의 영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분홍 - 섹슈얼리티
빨강 - 삶
주황 - 치유
노랑 - 태양
초록 - 자연
청록 - 예술
남색 - 조화
보라 - 정신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숫자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무지개 색의 의미

 -
무지개가 7색이라고 알려지게 된 건 뉴턴이 스펙트럼 실험으로 찾아낸 연속 스펙트럼의 색을 토대로,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에 따라서 색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빨 [RED]

"의미 : 공격적, 남성적, 사랑, 역동적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빨간색은 확실히 체력, 건강, 생명력을 상징하는 색이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향적이고 적극적, 정력적, 충동적인데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빨간색을 좋아한다. 
게다가 야심적인 성격도 있어서 가끔 앞뒤를 안 가리고 행동을 하는 일도 있다. 
불행한 일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사람들을 비난하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를 잘한다. 
통상적으로 단조로운 일에는 곧 싫증을 낸다. 
내성적인 경향이 부족한 만큼 자신의 단점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냉정하고 객관적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자기자신도 알고 있다.

주 [ORANGE]

"의미 : 명랑, 따뜻함, 다정함, 외향적

주황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주황은 사회적인 색으로 불리는데 발랄하며 명예를 상징한다. 
주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러울 정도로 건강에 넘쳐 빈부, 총명함과 어리석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며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이해심이 빠르다. 
이야기할 때는 깊이는 없지만 유창하다. 
사람이 좋아보이며 사교적이고 혼자서 외톨이로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

주황을 좋아하는 타입은 미혼인 채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독신 남성과 독신여성이 많이 눈에 띈다.

노 [YELLOW]

"의미 : 고귀함, 경고, 밝음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노란색은 심리적인 고민에 호소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표정 또한 풍부해 많은 사람들에게 다스함을 안겨준다. 
늘 파티의 중심인물이며 사람들 중에 최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그들은 때로 책임을 회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항상 칭찬받고 싶어한다.

초 [GREEN]

"의미 : 평온, 편안, 치료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초록색은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는 색으로 희망, 회복, 평화를 나타내며 기품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좋아한다. 
초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솔직하고 사회의식이 있으며 도덕심이 풍부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약간 말이 많기는 하지만 매우 뛰어난 교육자도 많이 있다. 
그들은 꽤나 사교적이고 군집성이 있는데 사실은 농촌의 조용함과 평화쪽을 더욱 
사랑한다.

파 [BLUE]

"의미 : 평온함, 고요, 편안, 우울

파랑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굽힐 줄을 모르고 나쁘게 표현하면 독선적이다. 
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자신의 목적이나 근거를 위장한다.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룹에 참가하기를 좋아한다. 
또 감성이 뛰어나고 자제심이 있다. 
반드시 선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 행동, 복장에 매우 신경을 쓴다.

남 [INDIGO]

"의미 : 차가움, 우울, 무거움

남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남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극성이 부족하며 웬만한 일에도 감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 [PURPLE]

"의미 : 고귀함, 병, 불안, 지저분함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보라색은 고귀함과 지저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색이다.
주변상황에 따라서 극단으로 바뀌는 색이라 할 수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지향성이 있고 예술가에 압도적으로 많다.
일반적으로 소화하기 매우 힘든 색이다.

 LGBT    -

  • 빨강
    빨강은 안전색채로 정지, 금지의 뜻으로 방화, 금지표지, 소화기 경보기, 긴급정지등에 쓰인다.
    색채 중에 가장 자극적, 감정을 고조시킨다. 빨간색은 태양이나, 불, 피, 혁명을 연상시키므로 정열과 열정, 적극성, 흥분 등을 상징하기도 하며, 위험이나 경고를 표출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으로도 많이 사용되며, 검정색과 함께 사용하면 공포, 죽음, 악마 등을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빨강에 흰색을 섞으면 분홍색이 되는데, 이는 파스텔 톤으로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심리적으로 빨강은 부정적인 사고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며, 활기와 야망을 갖게 한다.
  • 주황
    주황은 시각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난색이며, 약동, 활력, 만족, 적극 등을 상징한다.
    채도가 높은 빨강과 노랑의 중간색인 주황은 명랑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융화가 잘된다.
    주황은 식욕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산업현장의 안전색채로 사용하고 있다.
    주황에 흰색을 섞으면 밝은 베이지색이나 갈색 등으로 변하게 된다.
    이때는 은은하고, 따뜻한 자연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심리적으로 주황은 기능저하를 막아주고, 감정을 자유롭도록 도와준다.
  • 노랑
    유채색 중에서 명도와 채도가 가장 높은 색으로서 명랑, 생동감, 즐거움 등의 느낌을 준다.
    또한 가장 이상적인 노랑인 황금색은 황금, 돈 등을 상징하여 권위, 풍요로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안전색채에서는 '주의'의 뜻을 가지고 있다.
    노랑과 검정의 줄무늬로 된 색채는 명시도가 가장 높게 되므로 눈에 가장 먼저 띄게 된다.
    동양의 방위색에서도 노랑은 중앙과 대지를 나타내고 있다.
    심리적으로 노랑은 자신감과 낙천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도록 도움을 준다.
  • 녹색(초록)
    녹색은 자연 속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색으로 평화, 안전, 휴식 등을 상징하고 있다.
    노랑과 파랑의 혼합색인 녹색은 온도감에서는 중성색에 속하므로 강렬한 느낌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므로 가장 친근한 색으로 전개될 수 있다.
    안전색에서는 안전과 행 및 구급, 구호의 뜻을 가졌으며, 대피장소와 방향, 비상구, 진행신호기, 구급상자, 보호기구상자, 들것의 위치, 구호소 등의 표지로 활용되고 있다.
    심리적으로 녹색은 스트레스와 격한 감정을 차분하게 도와주며,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 파랑
    파랑은 전세계적으로 기호도가 가장 높은 색으로 상쾌함,  신선함, 물, 차가움 등을 나타낸다. 또한 냉정, 신비로움 등을 느끼게 한다.
    파랑색은 문학적인 표현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파란 꿈', '파란 잎새' '파랑새' '청운의 꿈' 등의 표현이 있다.
    또한 한색의 대표적인 색으로 차가운 느낌과 침정(진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심신의 회복력과 신경계통의 색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심리적으로 파랑은 불면증을 완화시키며, 명료성, 창조성을 증가시킨다.
  • 남색
    남색은 파랑계통의 느낌을 가지면서도 좀 더 깊고, 차가운 물을 연상케 한다. 또한 심원, 추위, 깊은 계곡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어둡고 둔하며 수축성과 후퇴성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신경계통과 눈의 피로 회복에 사용된다. 심리적으로 남색은 정신병 치료에 효과적이며,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진정제 역할도 하게 된다.
  • 보라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혼합된 색으로서 우아함, 화려함, 풍부함, 고독, 추함등의 다양한 느낌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왕실의 색으로도 사용된 보라색은 품위 있는 고상함과 함께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게도 한다.
    중성적인 보라색은 예술감, 신앙심을 자아내기도 하며, 푸른 기운이 많은 보라는 장엄함, 위엄 등의 깊은 느낌을 주며, 붉은 색 기운이 많은 보라는 여성적, 화려함 등을 나타낸다. 심리적으로 보라는 쇼크나 두려움을 해소하고, 불안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정신적인 보호 기능을 한다.





그리고 육(6)은 일곱(7)에서 하나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따라서 육(6)은 영적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에게만 있는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려고 시도했다가 타락하여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땅으로 내쫓겼던 마귀 · 사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666은 사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계 13:18).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여섯 색상 무지개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은 동성애가 사탄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원래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 이 세상을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담은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은 일곱 색상 무지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상징이 동성애자들에 의해서 살짝 변형된 모습으로 사탄 활동의 상징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무지개라는 말을 하면 동성애가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지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회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상징들 가운데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고 기독교의 아름다운 유산을 소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무지개의 진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말을 하면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동성애에 관련된 세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는데,
첫째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둘째는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셋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을 같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종말의 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性) 질서를 정해놓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은 문화대명령(文化大命令)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문화대명령은 뒷부분부터 거꾸로 차례대로 내용을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땅을 정복하는 임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이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명령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둘째, 인간이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둘만의 힘만으로는 하늘과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손을 낳아야 하고 계속해서 많은 후손이 태어나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채워야 합니다.

셋째, 문화대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창세기 1장 27절에서 사용된 남자와 여자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말로 남자 혹은 여자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의 유형은 “잇쉬”, 남자이고 하나는 “잇샤”, 여자입니다.
우리말로는 잇쉬는 남자, 잇샤는 여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잇쉬와 잇샤는 몸과 영혼을 모두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2~24절까지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잇쉬와 잇샤입니다.

창세기 2장의 맥락에서는 전인적인 삶 속에서 영위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면 잇쉬와 잇샤는 어떤 관계 있을까요?
잇쉬와 잇샤는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동등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능에서는 여자, 곧 잇샤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음을 말함으로써 잇쉬와 잇샤의 두 관계가 동등한 관계가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언어학적으로도 뒷받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 기능에서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남자를 의미하는 잇쉬를 어간으로 해서 모음 하나가 붙어서 여자를 의미하는 잇샤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언어학적으로 볼 때 잇쉬라는 어간이 없으면 잇샤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은 잇샤가 지음 받은 과정에서도 확인됩니다.
잇샤는 잇쉬의 갈비뼈를 재료로 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잇쉬의 갈비뼈를 빼고는 잇샤의 지음 받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창세기 2장 24절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잇쉬와 잇샤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으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합니다.
육신의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잇쉬는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서 여자와 합해야 합니다.
“합하다”는 잇쉬와 잇샤의 두 몸이 하나로 융합되어서 신체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하나의 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합하다”로 번역된 동사 “다바크” 밀착하다”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며,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다, 가깝게 접근해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다바크”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가 근접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잇쉬와 잇샤가 가까이 근접해서 지낼 때 무엇을 목표로 생활해야 하느냐? 한 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룰 지로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은 미완료 문장으로 보통 명령형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부부가 지향해야 하는 푯대, 목표를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한 몸에 도달하는 부부는 거의 없습니다.
이쉬와 이쉬아가 부모를 떠나 부부가 되면 바로 한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된 시간은 이쉬와 이쉬아는 한 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둘째, “합해서”와 한 몸

합해서와 한 몸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인 “한 몸”도 신체적으로 융합이 되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자웅동체(雌雄同體) 또는 양성적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잇쉬와 잇샤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로서 하나로 융합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습니다.

셋째, “한 몸”은 상호보완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섞일 수 없는 독립된 두 개체가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기능의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가까이 접근하거나 밀착해서 온전하게 작동되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능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말은 잇쉬와 잇샤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에 있어서 남자, 존재에 있어서 여자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우나 기능에서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

넷째, 성경에서 “몸”은 히브리어는 “바싸르”, 헬라어는 “소마(σŵμα)”로 이는 단지 신체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일이 없고 몸과 영혼이 어우러져 몸을 가지고 현세 안에서 영위하는 삶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싸르”는 관계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한 몸”은 잇쉬와 잇샤가 생각 · 행동 · 생활에 있어서 서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서로 보완해 가면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되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는데, 그것은 “자카르”와 “네케바”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는 바로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카르”와 “네케바” 사이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관계를 전제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영혼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체를 묘사할 때 잇쉬와 잇샤를 사용한 모세는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하였습니다.
“자카르와 네케바”는 인간과 영혼이 없는 다른 동물에게 공통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자카르는 수컷”, “네케바는 암컷”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체 구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했다는 것은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성 정체성이나 성별을 결정할 때 영혼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생물학적 신체구조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젠더 이론(Gender theory)”을 거부합니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성 정체성과 성별은 염색체와 생식기 구조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염색체가 XY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보에 따라 남성 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남자이고, 염색체가 XX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도에 따라서 여성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여자입니다. 성별과 성 정체성을 결정할 때는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주관적인 정서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자카르와 네케바”도 상호보완적으로 역시 이해해야 합니다. “자카르와 자카르”가 성관계하거나 “네케바와 네케바”가 성관계를 하면 성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문화대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 · 생식계라는 4대 핵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는 다른 신체의 도움이 없이 한 몸 안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식계만은 다른 성(性)을 가진 배우자와 관계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남성 생식기는 정자만을 생산하고 여성 생식기는 난자를 생산하는데, 정자 혼자로는 자녀 생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을 할 수 없고 난자 역시 출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카르와 네케바”는 성(性)과 출산에 관한 한 그 특성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는 자궁이 없기에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수 없고 이는 여성 고유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산 자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창 3:20) 그뿐 아니라 남자는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울 수가 없습니다. 호르몬 분비에서도 “자카르와 네케바”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의 경우는 네케바보다 평균 약 일천 배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
창세기 9:20- 27

인류의 첫 시조인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한 인류는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여덟 식구를 – 노아, 노아 아내, 세 아들 셈, 함, 야벳과 아들의 세 아내 -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 때문에 현대의 인류 문명과 연속성을 가진 문명은 사실상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여덟 식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말한다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 문명권인 수메르 문명,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이집트 문명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9: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 이후, 노아 가족들의 활동에 관한 특별한 기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9장 20~27절까지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 이 사건이 특별히 들어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노아의 홍수가 끝난 이후에 인류문명이 시작되는 시초를 알리면서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장막에 누웠을 때 세 아들이 아버지 노아에게 한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단순하게 보면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지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기를 피하고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가려 주었고 동시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난 노아가 함이 자기 몸을 보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무리가 뒤따릅니다.

첫째, 누군가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우발적인 행위가 무서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이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는 관행, 즉 우발적으로 어떤 사람의 벗은 몸을 스쳐 지나가듯이 봤다면 이 행위가 굉장히 저주를 받을 만큼 무서운 행위가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관행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둘째, 노아가 저주를 내렸다는 말은 함이 한 행동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 아니고 인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도덕적 악행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심각한 죄가 아니고 함이 악의가 없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인데 이런 행동에 대해서 노아가 후손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무서운 저주까지 내렸다고 하면 노아는 아주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이 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저주를 내린 것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술에서 깨어나서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저주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의 행동을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것은 함인데, 왜 엉뚱하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행동을 다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실제로 원문으로 본문을 분석해보고 그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면 함의 행동이 근친 간의 동성 강간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꾼이 되었고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창세기 9장 20절에 포도 수확을 한 다음에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었다”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벌거벗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갈라”인데, 본문에서는 태(態)가 히트파엘 형이라는 태(態)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일곱 개의 태(態)가 있는데, 그중에서 히트파엘형은 제일 나중에 나오는 태(態)입니다.
(칼형, 니팔형, 피엘형, 푸알형, 히필형, 호팔형, 히트파엘형)
히트파엘 형은 일종의 수동재귀동사로서 “자기 스스로 옷을 벗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벗겨지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수동적인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동사입니다.
제 판단에는 두 번째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 술에 취한 사람이 스스로 옷을 벗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옷을 입은 대로 잠들고 옷을 벗어야 하겠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술 취한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옷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잠자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주사 습관은 옛날이랑 오늘날과 거의 똑같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겨 주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잠든 노아의 옷을 누가 왜 벗겼느냐? 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하체를 가린 옷을 평범한 상황에서 벗게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벗깁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습니까?
옷을 벗길 이유가 없고 본인 자신도 벗을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면 당연히 벗긴 부분을 담요 등으로 가려 주거나 다른 옷을 입혀 주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옷이 벗겨진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벗긴 다음에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행위가 아닙니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벌거벗다”라는 단어가 “스스로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겨짐을 당한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사람의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행위를 뜻하는 용어로 대부분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와 근친적인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표현할 때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낸다”라고 표현합니다.

신명기 27: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2:30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에스겔 22:10
‘네 가운데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구합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 말씀은 모두 성관계를 표현하는 구절들입니다.
또한, 강간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벗은 몸을 드러낸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7:3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16:37
‘~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23:10
‘그들이 그 하체를 드러내고 그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그 누명을 여자에게 드러내었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문을 행함이니라’,

23:29
‘~ 너를 벌거벗겨 적신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음행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들은 모두 강간을 의미합니다.

자기 스스로 옷을 벗는 행위도 간음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에스겔 16:36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를 성적인 수치스러움을 뜻하는 헬라어 “아스케모쉬네(부끄러운 일)”으로 번역했는데, 바울로마서 1:27에서 “성교”를 가리키는 데 바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자기가 스스로 몸을 드러내서 벌거벗은 몸이 되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김을 당하든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관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22절 전반절은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기록합니다.
22절 첫 절이 “함이 장막 안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시작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함은 아버지의 장막 안에 이미 머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함이 장막 밖에 있다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하체를 흘낏 본 것이 아닙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다음에 장막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은 있는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은 장막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벗겼든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든지 했던 것입니다.

벌거 벗다벌거 벗기다”라는 표현이 모두 성관계를 의미하고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함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근친적인 동성 간의 강간을 범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론을 강화해주는 것은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라는 구절입니다.

레위기 20:17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이 구절은 형제와 자매간의 근친 성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모세가 레위기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면, 노아의 경우에도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22절의 하반절은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도 함이 우연히 아버지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라면 납득이 안됩니다.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것이 민망했다면 옷을 입혀 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함은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입혀주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냥 벗은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서 두 형제에게 의도적으로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하게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채로 장막 안에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아버지 노아가 깨어난 후에 바로 세 아들에 대해서 축복과 저주를 담은 미래 예고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함도 상속과 관련된 운명을 결정하는 미래 예고가 곧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함은 막내이기 때문에 상속과 관련하여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어떤 형태로든 상속권을 빼앗아 오려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삐뚤어져서 노아에 대하여 근친적인 동성간의 간음을 범하도록 이끌었다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삽입하는 입장에서 남성 동성애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되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아버지와 형들의 권세를 박탈하고 족장인 아버지를 계승하는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겁탈하고 그 사실을 일부러 형들에게 알려서 형들에게 도전한 것 아닌가? 라는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함의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치고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고 얼굴을 돌이켜서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23절) 셈과 함께 야벳이 가지고 들어 온 옷은 외투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옷이 노아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옷이 장막 밖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노아는 술을 마시고 취하고 장막에 들어갈 때까지는 외투를 입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외투가 밖에 나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누군가가 외투를 밖으로 가지고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장막 안에 있던 함이 노아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성관계를 가진 증거로써 외투를 가지고 나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면 외투를 가지고 덮어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외투를 가지고 들어가서 하체를 덮어줄 때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이들은 뒷걸음으로 들어갔고 아버지의 하체를 덮을 때에도 얼굴을 돌려서 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이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본다는 것이 부도덕한 성적 일탈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마침내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24절) 노아는 가나안에 무서운 저주를 내립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저주의 내용도 함이 아버지 노아에 대하여 성행위를 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합니다.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함이 성행위를 한 것인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함이 노아와 더불어 성관계를 가진 것은 자녀 출산과 관련 있는 정액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에 함의 자녀인 가나안에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저주는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야벳의 미래 예고를 할 때 한 번 나옵니다.

“가나안은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장 27절 함이 셈과 야벳을 누르고 상속권을 빼앗으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너 혼 좀 나봐라”하고 노아는 거꾸로 함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되는 벌을 내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

가나안의 아비 함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시작된 삶의 시초부터 근친 간에 남성 동성 간의 강간행위를 하는 것으로 출발했고 이후 강한 부족은 근친상간 동성애와 수간(獸姦)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런 관행이 고대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그리고 이집트 문명권에 동성 간의 성관계, 특히 남성 간의 성관계를 퍼뜨리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후 가나안 부족은 성적인 일탈 행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남자 간의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열왕기상 14장 24절에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8장 3절은 “너희가 거주하던 땅 애급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로 행하지 말고” 가나안과 애급 땅에 동성애가 편만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애급에도 편만하다는 뜻인데, 그러면서 레위기 18장 6절~23절까지 애급 땅과 가나안 땅에서 성행하는 풍속의 중요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부 일탈한 성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23절에서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은 가나안 부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풍속은 가나안 부족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0장 전(前)장이 부족의 왜곡된 다양한 풍속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레위기 20장 10~21절에 성생활에 관한 것들이 나옵니다.
애급과 가나안의 왜곡된 성생활의 풍속은 세 가지입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근친 간의 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들 사이의 성관계이고(동성애. 同性愛)
또 다른 하나는 동물과의 성관계입니다(수간. 獸姦)

여기서 이제 세 번째 고대 근동에 나타난 동성애를 검토하겠습니다.
함으로부터 시작된 남성 동성 간의 타락한 성교 관행은 고대 근동 문명권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주전 2000년경에 등장한 메소포타미아의 법전인 “중기 앗시리아제국법”에 보면 남성 간의 성관계 때문에 발생한 법정소송 사건을 다룬 두 개의 판례가 있습니다.

하나의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같은 귀족 계급의 남자 동료가 많은 남자와 지속해서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 남자가 이 소문이 진실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명예훼손죄로 곤장 50대, 일 년 동안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 거세당함, 납 1달란트를 지불하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 판례는 동성애 그 자체를 다루지 않고 명예훼손죄를 다루는 판례입니다.
그러나 이 판례는 동성애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첫째로 당시 아시리아 안에서 동성애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어떤 남자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 명예훼손 사유가 되고 있다는 말은 동성 간의 성행위가 잘못된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남자 동료와 성관계를 했는데, 그의 행동이 사실로 확인되면 사람들이 그 남자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하고 거세시키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는 남성 동성 간의 성관계가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주전 7세기 이전 어느 시점의 문서로 알려진 바벨론의 예언 문서인 “숨마 알루(Sum-ma Alu)”라는 문서에 38개의 예언이 나오는데. 이 예언들 가운데 다섯 개가 남자 동성 간의 성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섯 개의 예언들 가운데 두 개는 동성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남자가 남자 동료를 대상으로 뒤에서 성교하는데, 이는 항문성교를 말합니다.
뒤에서 성교하면 그는 자기 동료들과 형제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삽입 당하는 자를 힘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남자가 남자 성전(聖殿) 창부(娼夫)와 성관계를 하면 가혹한 운명, 근심이나 환란이 그를 떠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가혹한 운명을 물리치는 주술과 같은 행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섯 개의 예언 가운데 세 개는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세 번째 예언은 남자가 궁정 시종과 성관계를 하면 두려운 일들로 일 년 내내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예언은 남자 창부처럼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는 감옥 안의 남자, 이는 허가증이 없이 남자 창부의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이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예언은 집에서 태어난 남자 노예와 성관계를 가지는 남자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들은 남성 간의 성관계, 삽입하는 입장이든 아니면 삽입을 당하는 입장이든 성관계가 액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니까 남성 간의 성관계가 어떤 사람들은 길조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 흉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주전 7세기경의 문서로 알려진 “주문 연감”이라는 책에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 남자에 대한 여자의 사랑, 남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을 모두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언명은 고대 근동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가 상하 권력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일반화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親동성애 진영에서 고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별한 권력 관계라든지 신전 숭배 의식 안에서의 동성애만 문제가 되었을 뿐이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성애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도 동성애가 이방 문명권에 편만하였었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신화(神話)에도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길가메쉬 신화에 등장하는 “이난나(Inannna)”라는 여신은 양성애(兩性愛)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남창이 사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화인 “이난나의 하계 강화”라는 문헌을 보면 남창들은 여신을 하계로부터 해방되는 일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창들은 질병이나 기타 곤경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대적을 물리치고 성공을 가져오는 마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남창들은 여자처럼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여성성의 상징인 물레가락을 들고 황홀경의 춤을 추면서 거세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여신은 이들을 남자인 동시에 여자, 개(犬)인 동시에 여자로 전환시켰습니다.
남창들은 돈을 받고 남성 성기를 받아들이는 여성 역할을 하면서 항문 성교를 했습니다.
남창과 성교를 가진 남자는 이 성교를 통해서 여신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상의 삶에서는 남창들은 심한 멸시를 당했고 신전에서는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일상에서는 멸시를 당했습니다.
개(犬)라고 불리는 이유는 성교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남창들은 “엔키神(Enki)”의 손톱 밑에 있는 때를 재료로 해서 지음 받은 것으로 폄하되고 깨어진 항아리에 비유되었습니다.
남창들은 도시의 쟁기, 도시의 쟁기는 남근을 상징합니다.
도시의 쟁기를 가지고 어둠 빵을 먹고 살고 도시의 하수구에서 물을 마시고 술주정뱅이와 목마른 자들로부터 뺨 때림을 당하는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동성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관문서(棺文書) “카펜텍스트(coffin texts)”에 보면 남자 신들을 포함해서 신들이 태양신 라(Ra)의 음경을 삼킬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남성 간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땅의 신 게브(Geb)의 음경은 그의 상속자이자 아들의 두 엉덩이 사이에 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묘사는 남성간의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특히,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신이 가는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신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런 관점을 반응합니다.
아툼 신(Atum)이 나를 주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두 엉덩이 사이에 삽입했기 때문이다.”

바로왕 뉴세레(Niuserre)는 주전 2,600년경 사람인데, 뉴세레의 시대의 두 미조사(美爪士, 네일 아트)와 미용사들의 무덤에 있는 그림에는 두 남자가 손을 잡고 껴안고 코를 만져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왕 이크 나톤(Akhenaten)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의 사위인 스멘카레(Smenkhkare)의 턱을 쓰다듬고 있는데, 이 묘사도 남성 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입니다.

후기 헤라클레오폴리탄 비문에는 삽입하는 성인과 받아들이는 청년 간의 동성 성교 행위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형사 기소의 대상이 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주전 15세기경에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死者─書)”라는 문헌에 보면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변호하면서 하는 고백 안에 “나는 나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나는 남자 연인과 성관계를 같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에드푸 비문(the Edfu inscriptions)”이라는 곳에는 여성화된 겁쟁이 혹은 수동적인 남자 성관계 파트너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간의 성관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도 역시 정죄당했습니다.

호루스(Horus)세트(Seth)의 신화, 주전 1160년경에 등장한 문헌이라고 보는데, 호루스(Horus)와의 동성관계에서 남자의 역할을 하는 세트(Seth)은 호루스(Horus)가 잠든 사이에 호루스(Horus)의 두 엉덩이 사이에 사정했고, 이때 신들이 크게 비명을 지르고 트림을 하면서 호루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호루스(Horus)는 정액을 섿의 음식에 섞어 넣는 방법으로 응수했습니다.
호루스(Horus)는 상추의 즙이 정액과 그 당시 동일시 되었는데, 이것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세트(Seth)의 항문에 사정을 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남성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자는 수치를 당하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첫째, 고대 근동에서는 주로 남자들과의 성관계가 언급되어 있고 문헌상으로는 여성들과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언명이 없습니다.
둘째,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성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중에도 특별히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자기 권력 밑에 있는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진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셋째, 남자들 간의 성관계에 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권의 평가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남자들 간의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남자들 간의 신들과 만나는 통로로 인식되었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삽입하는 행위는 상대방을 힘으로 지배하는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남자들과의 성관계는 사회적 범죄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문명권에서 두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사람은 일정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형벌이 거세시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남성간의 성관계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레위기 20장 13절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

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특히 삽입을 당하는 것은 이방 문명권에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남성 창부가 이방 신전에서는 신과 교통하는 통로 역할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신전 밖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 나팔


두 나팔, 쇼파르(שןפך)와 요벨(ג'ובל)

레위기 25:8-12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요벨(3104) יֹבֵל 

1. 뿔 나팔 소리,  2. 은 나팔의 신호, 3. 악기
발음 [ yôwbêl ]
어원 / 혼성. 293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나팔(출19:13), 희년(레25:10,54, 27:18), 양각나팔(수6:4,5,6).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쇼파르(7782)  שׁוֹפָר

1. 나팔
발음 [ shôwphâr ]
어원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팔(출19:16, 삿3:27, 슥9:14), 뿔나팔(레25:9, 왕상1:34,39).
구약 성경 / 72회 사용

9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에 관한 말씀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이 헷갈려 하는 것이 49년째의 안식년과 50년째의 안식년이 두 번 이어지기에 지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안식년이 중복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6개월 앞당겨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억지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10절의 말씀처럼 희년은 오십 년이 되는 해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 여섯째 해에는 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21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매 안식년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속죄일(7월 10일)에 전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같은 속죄일에 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뿔 나팔인데 다른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안식년의 뿔 나팔은 '쇼파르(שןפך)'로써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그런데 희년에도 같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었는데 '요벨(ג'ובל)'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속죄일에는 한 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장막절)로 이어지는 축제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돌이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한 해 주신 풍성한 수확에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희년의 속죄일은 대속죄일로 나팔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곧 마지막 때의 심판과 영혼의 추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요벨'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심판의 장면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나팔 소리는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가 공포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판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불신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때입니다.

또한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에는 구원받은 자(십사만 사천)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영혼의 추수가 끝나고 하늘 곳간에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곧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뤄질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쇼파르' 나팔은 이미 2천 년 전에 울려 퍼졌습니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우리에게 '쇼파르'의 나팔로써 자유를 선포하신 반면에, 재림 예수님은 '요벨'의 나팔로써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두려움에 떠는 자가 있고, 기쁨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을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년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희년의 규례는 안식년의 규례를 강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던 자들은 본래의 기업을 되찾고(레위기 25:10, 39-43, 54),
땅과 집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레위기 25:23-34).
또한 모든 빚을 탕감을 받았습니다(레 25:35-38).

​이와같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자연으로 하여금 본래의 위치와 역할로 회복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년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해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0-31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올려지신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자가용을 타고 와서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희년의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신은 부활하기 전까지 속박을 당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참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본래의 기업, 즉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기업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찬양하는 삶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육체를 위해 심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을 위해 심는 자입니다(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한 자들은 마지막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들입니다(시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수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수확은 마지막 때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소망을 가진 자, 희년의 복을 받은 자들의 모습니다.

​교회 안에 팽배해진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움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들이 하는 말은 성경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수준의 의를 가지고 교회를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과 '평등'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눈에는 가진 그리스도인은 적폐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등'을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이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평등'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까지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진작 청렴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립니다.
참으로 위선자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의 논리라면 이 땅에 모든 자들은 죄를 짓던 안 짓던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만든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달란트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라는 주님의 말씀을 악용하여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경은 술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지만 술 마시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합니다(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 중에 바람피우는 자도 있고 술 취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과는 어쩔 수 없이 사업이나 업무 관계상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짓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자들과는 교제조차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를 무조건 용납하라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심히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3:2-5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주님이 공중 재림하시면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다 마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소유했던지 그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주님을 만나러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적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포도즙 틀을 밟을 때에 저들은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하늘로서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지금 현재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며 그것은 결코 누구에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희년을 지키는 것을 포기했지만, 주님께서는 어둠의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눅 4:18, 주의 성령이 네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네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참 자유자는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이 이뤄지는 은혜의 해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연약한 육체 가운데 있기에, 자기 육체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는 삶이 희년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팔복(마태복음 5:3-10) 복 받을 사람(시편 1:1-6) 회개의 사람(시편 51:1-19)


* 04-08-2023(토) 새벽 묵상 시간에

신앙생활과 더불어 생활신앙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이제까지는 주로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밝고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생활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겠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결과물은 대형교회를 세운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활신앙의 결과물은 세상은 대형교회가 세워지기 전보다 더 부패했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신앙의 결과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파송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겠다.
그 말씀의 근거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이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鹽)

鹵(소금 로(노)) + 𠂉(-) + 臣(신하 신) + 皿(그릇 명)

鹽자는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鹽자는 監(볼 감)자와 鹵(소금 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監자는 대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금이라는 글자로는 이미 鹵자가 있지만 鹽자는 식용 소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다.
이미 가공한 상태의 소금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키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마솥에 끓여서 증발시키는 방법이었다.
鹽자는 대야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監자를 응용해 가마솥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소금을 뜻하는 鹵(로)와 음과 함께 짜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監(감→염)으로 이루어짐. 소금의 뜻. 암염과 구별(區別)하여 사람이 만든 소금의 뜻으로 쓰임.

너희는 세상의 빛(光)

⺌(작을 소) + 兀(우뚝할 올)


光자는 ‘빛’이나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光자는 儿(어진사람 인)자와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光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빛이 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光자를 보면 儿자 위로 火(불 화)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 주위가 매우 밝게 빛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光자는 ‘빛’이나 ‘비추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火(화 ☞ 불)과 사람인(人(=亻) ☞ 사람)部의 합자(合字).
「사람이 횃불을 들고 밝게 비추고 있다」는 뜻이 합(合)하여 「빛」을 뜻함.
또 전(轉)하여 「번영하다」로 되고 가차(假借)하여 「광대(廣大)ㆍ광원(廣遠)」의 뜻.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1월의 암송 성구(마태복음 5:3-10)

팔복의 사람 / 복 있는 사람(마태복음 5:3-12)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세 가지의 시험을 예수께서는 모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성경의 말씀으로 다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다.
가르치며(Teacning)과 복음을 선포하며(Preaching)과 병을 고치시는(Healing) 일을 하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따라와 이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이를 '산상보훈'이라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시며 설교를 시작하신다.
과연 복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생각해 보며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복 있는 자는?

1. 심령이 가난한 자

- 세상에서 사람은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성경은 실제로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을 때, 그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워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어진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31)에서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마9:23-24)고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 다윗, 솔로몬, 다니엘은 부자였다. 이뿐 아니라 세리장 삭개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등등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를 섬겼던 여인들(눅8:2-3)도 있다. 저들은 물질은 부요했으나 심령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마음이 가난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겸손한(Humble) 자들이란 말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다.

2. 애통하는 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밝은 빛을 통해 자신을 볼 때, 비로서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자신을 보려해도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도 발견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잣대로 자신을 측량해 볼 때,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전능자 앞에서 선 자신을 볼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와 애통함이 따라 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된다. 곧바로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고 고백하였다.

3. 온유한 자

- 온유하다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야생마는 아주 다루기 힘들다. 그러나 잘 길들여지고 재갈을 물리어진 말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주인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와 같이 온유한 자는 자기 욕심이나 자만이나 분노를 잘 절제하며 자기 일을 잘 감당하는 자를 말한다.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니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고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굶주린 자는 먹을 음식을 구하며, 목마른 자는 마실 물을 찾는다. 목마른 사슴은 시냇물을 찾아 헤맨다. 복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의(Righteousness)'를 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의는 법적인 용어이다. 죄를 범하여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무죄여서 처벌을 면하느냐의 문제다.

성경은 원래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한다. 모두 죄인이며, 죄인은 다 그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죄인이 형벌을 면하려면 법정에서 재판장의 선처를 바라며 의롭다고 인정되어지길 간청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애통이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는 단계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재판장에게 자기의 형벌을 탕감해주길 간구하며 매달리는 단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마침내 의롭다함을 인정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고, 영생을 누리는 길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며 다시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되며 진실되이 의의 길을 걸어가길 원하는 자들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



6. 마음이 청결한 자

-





7. 온유한 자

-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인 사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말이다. 죄 지은 자를 결코 그냥 놓아 줄 수 없으심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다. 그러나 이 죄의 결과가 형벌임을 심각히 깨닫고 심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고 매달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그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대속의 은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었음을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명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고 성경은 말한다. 죄사함의 은총을 통해 의롭다함을 입고 영생을 얻는 자만이 참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된다. 이러한 자들이 모두 그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요삼1:2)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건강을 잘 유지하려면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신앙인은 영육간에 강건함을 잘 유지하기 위해 매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잘 섭취하고 행함으로 말씀 생활을 하며 매일 자신이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023년 2월의 암송 성구(시편 1:1-6)

복 받을 사람









2023년 3월의 암송 성구(시편 51:1-19)

회개의 사람(다윗)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따라 내 죄과(transgression)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iniquity)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sin)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죄과"는 하나님의 권위와 율법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죄악"은 마땅히 지켜야 할 모습에 왜곡 혹은 변형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시편은 영혼의 해부학"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로 인하여 죄를 짓고 회개한 참회의 시로 인간의 죄를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죄과(트랜스그레션. transgression) 위반
둘째는 죄악(이니쿼디. iniquity) 부정
셋째는 죄(신. sin) 죄

세 개의 용어를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 단어로 페샤(Transgression), 아온(Iniquity), 하타(Sin) 라고 합니다.

첫째는 죄과 : 페샤
둘째는 죄악 : 아온
셋째는 죄 : 하타

죄과(Transgression) 페샤 / 고의적인 죄,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 

죄과는 "침해하다, 침범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고의로 어기고 반항하는 마음과 행동의 죄를 죄과라 합니다.
이와 같은 죄를 시편 19편에서는 "고범죄" 라고 하였습니다.
죄과는 "고의적인 죄" 즉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고의적으로 범하고 어긴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기질이 있어서 하나님 말씀이 옳은 줄 알면서도 이것을 침해하고 침범하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과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반항하여 대적하는 것이 죄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일축해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깁니다.
자기 추구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연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전에 양도천목사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계룡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육체의 욕망이 힘들게 하므로 고환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제하기 어려웠으면 이렇게 자기 몸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고통을 선택하였을까요?
그런데 노년에 다른 사람의 고환을 돈을 주고 사겠다고 광고를 하여 더 놀라게 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하나님의 힘으로 절제하고 다스려야지 인간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죄악(Iniquity) 아온 /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마음  

아온이란 "온전한 것을 구부러 뜨리다(Make it crooked), 뒤집다(Perverted)"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삐뚤어져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야 속이 시원한 변태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마음이 죄악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악독, 즉 악하고 독한 마음"이 들어있기에 자식을 키워도 똑바로 자라는 애들이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구부러진 마음 악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계속적인 진실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러한 죄과들이 말갛게 씻겨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씻기다'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몸을 씻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고 특별히 옷을 빠는데 사용되는 단어인데 아주 심하게 더렵혀져 있는 옷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아주 강하게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교회학교 유아부에 다닐 때 부장 권사님에게 사무엘이 헌금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께서 동전 한 개만 헌금주머니에 넣는다고 일러주셨습니다.
당시 헌금을 하도록 동전을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한 개는 다른 주머니에 감춘 것입니다.
당시 동전의 용도를 전혀 모를 때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의 본성이 참 악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죄악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Sin) 하타 /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가 

하타란 단어는 “과녁을 빗나가다” “미달이 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타”의 개념은 "길을 잘못 들다", "코스에서 이탈이 되다" 라는 으로도 사용합니다.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하는 것이 이미 목표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가야할 길과 인생의 코스를 분명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죄과, 죄악, 죄”란 세 단어는 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기도 하는데 죄는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육적인 문제를 포괄하는 용어로서 모든 인간의 본질이며 현주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병을 고치려면 먼저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병의 상태를 알아 고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론을 말하기에 앞서 인간의 죄 즉 “인죄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이방인의 죄를 다루고 있고 로마서 2장에서는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으며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표에서 벗아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나라 안에서 밧세바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간 우리아의 아내를 데려와서 동침하는 하타라는 죄를 범하는 것은 한 때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맞설 수 있는 믿음이었으나 그 믿음이 항상 다윗을 지켜주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우주를 망가뜨리고, 사람들의 삶을 오염시키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성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상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용서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에서부터 그리고 이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내 죄과를 도말(途抹)하소서

본절이 두 개의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앞 부분의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죄과'(페솨. 6588)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Delitzsch, Weiser).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과'를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1. 밧세바와의 간통(삼하 11:2-4)
2. 그 남편 우리아 살해(삼하 11:14-17)

두가지의 죄를 범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

죄과(페솨. 6588)  פֶּשַׁע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페솨(peshaʽ)
관련 성경 / 허물(창 31:36, 왕상 8:50, 잠 10:12), 악(출 34:7, 겔 33:12), 범함(레 16:16), 죄악(민 14:18, 욥 35:6, 사 24:20), 죄(욥 34:37, 시 19:13, 잠 28:2),죄과(잠 17:19, 사 59:20), 범죄(잠 29:6,22), 패역(사 57:4).
구약 성경 / 93회 사용

 '도말하소서'(*, 므헤)는 '문지르다', '부드럽게 하다', '없애다'는 뜻이며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차용증서를 없앨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범죄 사실을 지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69:28;출 32:32). 한편 고대 바벨론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범죄 사실을 토판(土版)에 기록했고, 용서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 토판을 깨어버렸다고 한다(Kraus).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죄악'(아온. 5771)은 '구부리다', '왜곡하다'는 뜻의 '아와'(*)에서 유래한 말로 '사악함', '왜곡'의 의미이다(Delitzsch).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악한 의도'를 가리킨다(L. Kohler). 그리고 '씻기시며'의 '카바스'(*)는 원래 '짓밟다'라는 뜻인데 옷감을 발로 밟아서 씻는다는 의미에서 '씻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9:10, 14;삼하 19:24). 상징적으로 렘 2:22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죄악을 씻어 없앤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정화 의식은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죄악(아온. 5771)  עָוֹן 
1. 사악.  2. 부패한 행동.  3.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아온(ʽâvôn)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 4:13), 죄악(창 15:16, 삼상 3:13, 겔 4:6), 죄(출 20:5, 민 30:15, 애 4:6), 죄책(출 28:38), 악(출 34:7, 신 19:15, 잠 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16:21, 욥33:9, 사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14 : 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헤트. 2403)는 '빗나가다', '상실하다', '범죄하다'는 뜻의 '하타'에서 유래한 말로 '범죄', '과오' 혹은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깨끗이 제하소서'(타헤르)는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적으로도 정결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이다(레 13:6, 13). 이것은 곧 다윗이 죄의 오염을 나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죄(하타트) 2403  חַטָּאָת 

1. 죄.  2. 속죄제.  3. 우상에 대하 적용되기도 함
발음 / 하타트(chaṭṭâʼth)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חָטָא 
1. 벗어나다.  2. 비틀거리다.  3. 사사기 20:16
발음 / 하타(châṭâʼ)







󰃨 대저(*, 키) - '왜냐하면'의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은 다윗이 1,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죄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본절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1, 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가 진실되며 또한 간절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동사 '아오니'(*, 에다)가 본 문구의 주어가 1인칭 단수임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1인칭 단수인칭대명사 '나는'(*, 아니)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A.Cohen). 한편'아오니'의 기본형인 '야다'(*)는 단순한 지적(知的) 앎이 아닌 체험적 앎을 가리킨다(호 6:3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결국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뼈에 사무칠 만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시51편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원한 속죄와 단번속죄를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었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때 그 죄를 해결하는 비결은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신자들이 혹 어떤 실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기 이전에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롬8:31-39).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지의 여부는 오직 그 회개 기도의 질의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시32:5).

Ⅰ. 죄에 대한 인식(3)

“대저”-“왜냐하면”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除)하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간구하였는데, 그가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단락이 3,4절입니다.

다윗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1,2절에서 “죄과”, “죄악”, “죄”로 자신의 죄를 이미 세 가지의 용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죄과”는 국가적, 도덕적,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죄과”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타나는데, 다윗은 밧세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일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까지 그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과에 대해 “아오니” 즉 알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말한 고백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음이 강력하게 내포되었습니다. 즉 1인칭 단수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아오니”라는 단어에는 다윗이 자신의 죄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오니”는 히브리어 “yadah(야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남녀가 결혼을 의미하는 “동침”이라는 의미로,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한 것은 그는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것이 큰 죄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에 그 죄책으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 죄가 그 영혼을 끝까지 괴롭힐 것입니다.

Ⅱ. 죄의 성격(4)

죄의 일차적인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한 것은 그가 범한 죄가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범죄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의 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인간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인식-“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범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죄든지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아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동침하는 것을 거절하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즉 다윗은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조차 사양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그의 영혼을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양심의 메아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어떤 관계냐? 왜 밧세바를 왕궁으로 끌어들였느냐? 우리아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아는 누가 죽였느냐? 우리아는 왜 죽였느냐? 이런 송사가 그의 양심으로부터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루어졌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3:7)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의로우며 순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이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즉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범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은 순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범죄를 따라 정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3,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며 순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기기보다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정죄하실 수도, 용서하실 수도 있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원죄와 자범죄 / 영적 유전



원죄와 자범죄 / 영적 유전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에게는 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상식처럼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에게 본성으로 주어진 내적 죄성은 어떻게 유전되게 되었을지 궁금함을 느낌니다.
죄성을 하나님께서 심겨 두신 것인지 사단에 의해 심겨진 것인지?

아담에게 죄가 침투하여 더려워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언약 파기)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도 소용없는 영원한 저주를 선고하셨습니다.
그때 아담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임했습니다.

1. 법적인 죄인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로 약정한 하나님과의 첫 언약에 근거하여 법적인 죄인이 되었습니다.

2. 실질적인 죄인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완전한 순정 상태였고, 그 때 아담의 몸과 영혼,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성전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효력을 입은 성도에게 하나님(성령)이 친히 임하시어 내주(동거생활)하시는 것처럼,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의 몸과 영혼,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언약을 파기한 직후 아담은 실질적으로 더러워졌습니다.
법적으로만 사형수(죄인)로 전락한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죄에 오염된 죄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범죄 직후 죄의 부패과 오염이 아담에게 침투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 기능을 가능하게 했던 아담의 순정상태가 붕괴되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시자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죄성(죄의 오염, 죄의 부패)이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기되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초기에 죄의 전가 자체를 부정하는 신학이 출현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아담의 죄가 이후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악은 교육, 환경, 정치 구조 등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너지게 됩니다.

어거스틴초대교회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조금 약화된 형태로 천주교의 중심적 신학으로 자리잡고 말았습니다.
알미니우스라는 인물에 의해 그 사상이 조금 더 약화된 모습으로 종교개혁 교회들 속으로도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실질적 죄성(죄의 오염)이 그 후손들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부분적으로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하나님의 은혜가 무너집니다.
대신 그 자리에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께 반응하고 협력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인본주의가 자리하게 됩니다.

개혁신학은 아담의 죄의 유전(전가)을 부정하는 신학을 거부합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아담의 죄는 분명히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유전됩니다.
그 결과 누구도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경우가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의 종으로 태어나서 구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가르침입니다.
완전한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자력으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여 주시고, 은혜로 그리스도 앞으로 불러주시고, 은혜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심으로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주시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죄의 유전의 방식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의 유전이 부모와 조상들의 결혼(섹스)과 혈통의 유전적 요소들을 통해 전달되어 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죄성이 결혼(섹스, 출산)과 혈통의 유전자들을 통해 아버지에게 물려졌고, 아버지의 죄성이 그 같은 방식으로 아들에게 물려진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죄악된 피를 깨끗한 피로 가름하여 구원을 준다는 문선명, 박태선 등의 이단들의 핵심 사상이 일면 타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의 죄성이 아담과 후대 인간들의 결혼(섹스)을 통해 후손에게 죄성을 담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방식, 즉 물리적 유전의 방식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왔으므로 (효력이 있건 없건 간에) 이단들이 피가름을 운운하는 것이 약간의 타당성을 가지게 만듭니다.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도 물리적인 방식의 죄의 유전을 말하였으나,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신학자들이 작성한 문건들 속에도 죄가 물리적 유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유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문서들은 성경처럼 하나님의 영감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므로 무시할 수 있습니다.

완전순정의 상태로 지어져 몸과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기도 했던 아담은 범죄한 후 즉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는 성경의 말씀에서 죄성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죄성을 주입시키는 주사 바늘을 아담의 혈관에 꽂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아담의 몸이나 두뇌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범죄 이후 즉시 아담에게 죄의 오염과 부패가 생겨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이 하나님과의 첫 언약에 근거하여 아담에게 영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실질적인 죄성(죄의 오염) 또는 물리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인 방식으로 사람에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체결한 첫 언약을 파기할 때 죄가 영적인 방식으로 아담에게 유입돤 것처럼,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죄가 유전된다고 설명해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기질과 성격을 유전받은 것은 사실이고, 자라는 과정의 환경과 경험에 의해서 사람에게 그릇된 성향들이 더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교육과 환경 속에서 살아도 인간은 단 하루도 천사로 살지 못합니다.
아담의 첫 언약 파기 죄에 근거하여,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저주가 작용하여 죄에 대한 책임과 실질적인 죄성이 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터고나는 죄성에 대한 바른 설명은 ‘영적 유전’입니다.
결코 부모의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지는 물리적, 실질적 유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청교도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신학의 자칭 전문가가 되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사람의 죄성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는 주장을 하다 저에게 지적받자 저의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서 저를 형사고소를 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후 어떤 교단의 세 개의 노회가 그 분의 이단성을 조사하여 이단으로 규정해 달라는 헌의가 올라갔다고 합니다.
죄가 영적으로 유전됨을 부정하고 실질적으로 물리적으로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주장입니다.
영적 유전을 부정하면, 어떤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3. 범책은 부모로부터 전달(propagation)받는 방식

벌책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매개 없이 전가(imputation)되는 방식입니다.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오염의 생식법에 의한 전달의 교리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영적 전가를 주장했다.”

“원죄가 부모를 매개로 전달된다는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며 동시에 그 결과는 전통적 원죄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통교의에서 성화란 죄의 바로 이렇게 우리 몸과 영혼에 스며있는 죄의 실제적 세력을 제거로 설명하는데 ...”

“우리 몸에 베여있는 실질적인 원죄의 세력에 대한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죄, 유전죄, 자연법칙(롬 5:12-14)


기독교 구원의 정점(頂點)

바울은 5장 1-1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왜 이 땅에서는 여전히 환난을 겪어야하는지, 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해야하는지, 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희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구원은 하늘 가나안에 입성하는데서 완성된다. 그런데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세상에서 뽑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입성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공동체에 가입한 것을 말한다. 갈릴리 호수를 놓고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그리했던 것처럼, 이편을 떠나 저편으로 가는 배를 탄 것과 같다. 저편 가나안에 데려다줄 배를 탔다고 해서 폭풍의 위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저편 가나안에 데려다 줄 배는 교회공동체이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이다. 바울이 언급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바로 이 구원의 배에 오른 것이고, 순례공동체에 합류한 것을 말한다.

가나안입성의 마지막 관문(關門)은 요단강이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이다. 육신이 죽어야 저편 하늘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가나안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부활을 구원의 정점에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어야 하늘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지만, 죽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부활을 받아야 소용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하늘 가나안에 이르기 위한 부활을 영혼부활 혹은 영적구원, 주님 재림 시(時)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기 위한 부활을 육체부활 혹은 육체구원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아 거듭남을 체험하고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을 영적구원 혹은 영혼부활이라고 부른다. 이 영적구원 혹은 영혼부활은 하늘 가나안입성과 장차올 세계(올람하바, Olam Ha-Ba)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성을 보장하는 시민권일 뿐 아니라, 육체부활과 육체구원의 약정서와 같아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이 약정서에 기록된 보증금과 찍힌 인감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였기 때문이다. 멸망의 세계의 특징은 죄와 죽음이다. 그러나 하늘 가나안의 특징은 부활과 생명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부활과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논증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5장 12-21절에서 죽음과 생명의 근원문제를 다룬다. 죽음의 원인은 죄에 있고, 생명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류 최초로 죄와 죽음을 세상에 끌어들인 아담과 그것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부활과 생명을 세상에 끌어들인 예수님을 대조시켜 설명하였다.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이다. 원죄와 유전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12절에서 바울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죄와 유전죄

아담의 원죄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이란 점이다.
인간이 죄와 허물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문제와 인간이면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하는 문제의 해답이 인간이 피조물이란 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가 없으시고, 죄를 범하지 않으시며, 영원하시기 때문에 죽지 않으신다. 죽지 않는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죽는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제든지 선악과는 먹게 되어 있다. 또 먹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에 운명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운명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때문에 우리가 죽을 운명이 되었거나 죄인이 된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최초로 죄가 생겼고, 또 최초로 죽음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처럼, 똑같이 그들의 후손들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죽은 것처럼 그들의 후손들도 죽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되어서 죄인이 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처럼 모든 인간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죄만 아니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이 죄를 짓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이었다면 모르겠으나 현 우주의 상태나 법칙상으로는 불가능하다. <주: 에덴동산이었더라도 피조물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 자연법칙 또는 열역학2법칙(엔트로피)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소멸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조세계에서 죽음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법칙이다. 이런 죽음현상은 자연이 불완전하기 때문인데, 불완전한 것 자체가 죄가 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가 따르고, 오류와 실수는 죄를 만든다.

아담이 최초의 죄인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지은 죄를 원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가 유전된다고 결정하려면 쾌 긴 해설이 필요하다. 아담에서 보았듯이, 유전죄가 없이도 인간은 죄를 짓게 되고 그 삯으로 죽는다. 죄지을 성질(罪性)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본능에 있다. 육체의 본능이 죄의 뿌리요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 본능이 아담의 범죄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본능이 작동한 때문이다. 본능은 피조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면서 선과 악 모두를 택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죄와 허물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시간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본능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을 입는 부활이다. 부활한 자들의 세계에는 죄성(罪性)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전죄와 자연법칙

바울은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아담의 의(義)와 그리스도의 의(義)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소개되었고, 죽음이 지배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서 죄 사함의 은총이 세상에 소개되었고, 생명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담으로 인해서 상실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넘치게 보상되고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더욱 넘치게’(much more)란 말을 세 번 사용하였다.

로마서 5장 12-14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범죄가 시작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시작되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죄할만한 법이 없었다. 여기서 법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시내산에서 언약의 내용으로 주신 토라(Torah) 즉 성문율법을 말한다. 이 성문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이 있었다는 말은 그 때에도 인간행위를 심판할 어떤 법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만일 법이 없었다면, 죄도 없었을 것이고, 죽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망은 죄의 삯이므로 사망은 성문율법이 없던 때의 사람들에게도 죄의 실재를 입증하고, 어떤 법의 실재를 입증한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에서 하나님의 자연(일반)계시를 이해할 만한 이성의 법과 양심의 법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성문율법이 아니더라도 이성의 법과 양심의 법으로도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하였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인간은 율법의 정죄여부를 떠나서, 또 아담이 불순종하여 죄를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누구도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아담이후 죽음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아니한 갓난아기는 왜 죽는가?
자연법칙 때문인가?
아담의 죄 때문인가?
자연법칙은 아담의 죄 때문에 생겼는가?
태초부터 있었는가?
만일 죽음의 법칙(엔트로피)인 자연법칙이 아담의 죄 때문에 시작되었다면, 피조물의 죽음이 아담의 죄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를 유전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죄의 결과가 자연법칙이라면, 피조물의 죽음은 범죄여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
죄를 모르는 갓난아기가 병으로 죽었다면, 그 죽음은 자연법칙 때문이고, 아담의 죄 때문이란 설명이 가능해진다.
아담의 죄값이 자연법칙에 남아 죄가 없는 갓난아기까지 죽게 하였으므로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주는 영향은 육체의 죽음에 국한되므로, 유전죄가 갓난아기의 영혼까지 해치지는 못한다.

영혼의 죽음은 자범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불행한 육체죽음을 맞는다할지라도, 자범죄가 없는 갓난아기의 영혼의 죽음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물(對物)관계가 전혀 없는 갓난아기에게 하나님과의 원수 됨, 인간과의 원수 됨, 자연과의 원수 됨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으면 죄도 없다.
갓난아기는 자의식이 없으므로 자기 죄를 회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회개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선언은 육체의 죽음일 뿐, 영혼의 죽음이 포함되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죄가 과연 유전되는가?

아담이 지은 원죄가 어떻게 모든 후손에게 자동으로 유전이 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 자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쉬운 말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원죄를 바로 이해하려면?

광복직후부터 최근에 반공법이 개정될 때까지 한국에선 아버지가 빨갱이면 그 자녀들의 사회적 활동도 크게 제한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대 왕정시대에 반역죄를 범하면 일가친척 모두를 멸한 것 같은 미개한 제도였지만 그만큼 공산주의사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심각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를 불문하고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접하면 아마도 이런 연좌제(連坐制)부터 제일 먼저 연상될 것입니다.
최초인간이 범한 죄가 어떻게, 하나님이 공언한대로(출 34:7) 삼사 대까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아니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적용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도덕적 혹은 영적 성질을 지닌 죄가 유전이라는 생물학적 방식을 통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가 스스로의 자각으로 죄를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옭아매어 놓고는 심판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분의 공의는 형편없이 굽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어른은 몰라도 최소한 스스로의 지각과 판단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의 아이들만이라도 사고로 일찍 죽더라도 심판에서 모면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죄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죄자범죄로 세분해서 구분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통칭해서 죄라고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영적 문제인 죄가 생물학적 방식인 유전으로 계승될 수 없다는 생각도 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기독교의 교리도 반드시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고 드러난 진리에 비추어 해석을 해야 함에도 부분적, 문자적 해석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원죄 교리는 기독교의 대속구원의 진리가 형성되는 시발점이자 그 구원관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구속 계획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원죄가 발생한 당시부터 따지지 말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유전 방식으로 관심이 쏠림, 성경 전부를 인간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부터 역으로 추적할 필요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어떤 신앙상의 의문이나 오해는 반드시 성경말씀으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고 가르쳤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해야 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원죄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오해입니다.
따라서 원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예수님의 언급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당혹스런 과제는 간혹 그 반대를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거나 망외(望外)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반대를 흔히들 저주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부나 연인이 저주하면서까지 헤어진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 내지는 미련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즉, 어떤 관심조차 끌지 못하게 되었기에 헤어집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며, 또 그 역의 역도 성립하기에 사랑의 본질은 관심을 쏟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죄의 경우도 흔히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따져 볼 수도 있어야 올바르게, 최소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죄의 본질,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 예수님의 원죄에 관한 가르침, 역으로 따져본 원죄 등의 순서로 이 문제를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와 범죄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간음죄에 대해서 가르친 것으로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우선 행동으로 간음한 것만 간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명문으로 된 율법 내지 사회법 즉 실정법(實定法-the positive law)을 어긴 죄일 뿐입니다. 남에게 잘못된 행동을 범하지 않고 감옥에만 안 가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개념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까지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바보라고 욕하는 자도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까지 말했습니다.(마5:21,22) 무슨 뜻입니까? 남에게 아무런 현실적 피해를 주지 않고도 말이나 마음으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같이 죄의 범위를 가장 심오하고도 정확하게 확장시켜 가르치셨던 분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충분히 생각해낼, 최소한 이해할 수는 있는 개념입니다. 이는 인간 양심에 심겨져 있어서 인간들끼리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도덕률(道德律-the moral law)을 어긴 것에 해당됩니다. 실정법에 도덕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실정법의 규정에 없더라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나 각자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마음으로 짓는 죄를 남에게 피해를 전혀 끼치지 않고 악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니까 죄가 아니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것도 외부에 안 드러난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본인의 사고활동 즉,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하여 행한 행위입니다. 자발적, 의도적, 능동적 판단과 선택과 행함 없이 마음으로 음욕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가장 먼저 죄(sin)와 범죄(crime-우리말로 더 적당한 표현이 없어 범죄로 표현함)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그 분류 방식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간단한 분류와 성경에서 말하는 더 포괄적인 분류,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우선 실정법을 어긴 행동은 범죄(crime)이며 그 행위의 주체는 범인(criminal)인 반면에, 도덕률을 어긴 행동은 죄(sin)이며 또 그 사람은 죄인(sinner)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상 양심이 있는 자라면 감옥 갈 범죄는 짓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도덕적, 종교적 죄를 짓고 있음을 시인하고 또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실토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가 규정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히브리어 ‘하타’는 “올바른 목표를 벗어나다”는 것이며, 신약에서 헬라어 ‘하말티아’도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난 것, 목표를 잘못 정한 것, 그래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것,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해선 안 될 행동을 하는 것, 등등이 전부 죄입니다. 따라서 실정법을 위반한 민사 혹은 형사적인 죄, 도덕률을 위반한 윤리적 죄, 종교 계명을 위반한 종교적 죄 모두가 이 두 용어가 의미하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근본 특성

그런데 죄의 진정한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죄와 범죄를 구분하여 상관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말해 평소 어떤 행위가 죄라고 확신하는 자는 여간해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감정에 취해 우발적으로 간음하거나, 교통법규 같이 세부 내용을 몰라 위반하는 경우 말고는 말입니다.

결국 도덕률을 어기는 자가 실정법도 같이 어기지, 도덕률은 잘 지키면서 실정법만 어기는 법은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범죄는 죄에서부터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범죄 하나만 따로 떼 내어서 죄의 본질에 대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도덕적 죄도 반드시 원죄와 연결해서 따져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 the Original Sin)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위에서 말한 죄와 범죄 어디에 속하는지, 혹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입니까? 아담이 하나님이 정하신 금령을 위반했기에 과녁을 벗어났다는 성경적 의미의 죄인 것은 분명한데 왜 구태여 원죄라고 명명하는 것입니까? 인류 최초로 지은 죄라서 그렇습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아담 때는 법과 윤리는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만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분명히 제정했지만, 인간사회를 관장하는 현대적 의미의 실정법과 도덕률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범죄나 죄의 성격과는 달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원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쉽게 말해 진짜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행동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사고의 활동 즉, 몸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내면의 지정의를 움직인 행위입니다.

진짜 죄의 본질,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순종 혹은 배반하기로 작정하게 만든 더 근본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로 싫어한 것입니다.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왕이었던 그분을 폐위시키고 자기 소견(所見)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살고자하는데 하나님마저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란 물질계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선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며 실제로 동산의 주인은 그분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가시적 형상입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언제 어디서든 보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권위의 상징이자, 아니 그분 당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를 넘어 그분 당신을 먹어치운 것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범죄와 죄의 관계를 선악과 사건에 대입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는 실정법을 어긴 범죄(crime)입니다. 범죄 이전에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따 먹어야 봐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죄(sin)입니다. 죄 이전에 자기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이 원죄(the Original Sin)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아담 개인이 범한 역사적 최초의 죄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의 본질을, 나아가 죄가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모든 도덕적 죄든, 실정법을 위반하는 죄든 간에 그 출발은 하나님을 배제한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하나님 대신에 사단을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죄를 없애거나 씻으려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선 결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돌아가 봅시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잘 생긴 이성에 대해 순간적으로 호감을 품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인남녀 중에 단 한명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성적 관계를 가져보려고 환상을 품고서 궁리하고 계책을 모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솔직히 말해 마음으로 짓는 간음죄에서조차 자유로울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만약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아예 눈을 뽑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든지, 세상은 장님들만의 천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자적 의미대로 명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부 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행한 사람도 있었지만, 죄를 그만큼 철저하고도 심각하게 취급하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는 죄를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 즉, 구원과 심판에 연관해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으로 간음하거나 말로 살인하지 않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듯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아무도 미치지 못해 모두가 죽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간음과 살인에 관한 기존의 도덕적 계명을 원죄라는 영적 진리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가르친 셈입니다.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3-7)

아직까지는 가인이 실정법과 도덕률 어느 것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고 견책했지만 당장 그 순간에, 최소한 제사를 드릴 때에, 아벨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가인도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사를 드렸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아담으로부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법을, 아담은 또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어 준 사건에서 직접 그분으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인의 안색이 변한 사실만 두고 견책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당신께서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왜 네가 화를 내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죄를 행했기에 제물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낯을 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을 것이 아니라 아예 따질 일 자체가 없었고 하나님도 제물을 열납해 주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제물을 바칠 때에 이미 죄를 행했고 죄의 소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과 도덕률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경배까지 했는데도 죄를 행했다니 무슨 뜻입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알긴 알 되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바쳤지만 가인은 그저 형식적 의무적으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드림으로써 첫 소산을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 소산이란 그 전부를 대표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모든 수확 전부가 오직 하나님께로 왔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을 함께 그것도 먼저 열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에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수확물도 전부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하나님이 벌줄까 두려워 생색 내지 겉치레로 바쳤던 것뿐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심지어 죄를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죄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선이자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항상 자기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자연스레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언제든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인의 마음(영혼)의 상태, 즉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제 멋대로 하려는 것이 원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의 원죄가 가인에게만 나타나고 아벨에게는 이전되지 않았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가인과 아벨 둘 다 아담으로부터 이미 신앙 교육,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산 체험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전심과 진심으로 항복하라고 권면 교육했습니다. 그 전도를 받아들인 아벨은 첫 소산과 자신의 전부를 드렸지만, 길 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같은 마음을 끝까지 고집한 가인은 아버지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뿐입니다.

원죄는 인간존재의 실상

한 마디로 원죄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기에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마음 상태로부터 다른 모든 죄와 범죄들이 파생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가인의 경우가 그랬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과자나 장난감을 서로 가지려고, 그것도 친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웁니다.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대로 고집만 피웁니다. 죄가 무엇인지 지각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벌써 죄는 항상 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몸에 밴 행태입니다. 그 마음이 이미 원죄로 인해 부패된 상태에 빠져서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원죄란 아담이 범한 개별적 죄를 넘어서 아담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실상(實狀)을 죄와 연관해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상태가 결과적으로 그러하니까 그 현상을 잘 설명할 목적만으로 차후에 별도의 신학사상을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최초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꺼이 고의로 적극적으로 거역했으며 또 그 후손 모두의 영적 실체도 그 선조가 원죄를 범했을 때와 똑 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너무나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인간존재의 실상을 한 마디로 대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심히 보기 좋게 창조하였는데 그분을 배역한 이후로 이 땅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오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존재”라고 정의(定意)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들이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 존재, 선하게 태어나서 환경에 따라 악해지는 존재, 악하게 태어났지만 교육으로 선하게 바뀔 수 있는 존재, 선하고 능력이 많아 스스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존재 등등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 보면 죄의 본질이 행위의 죄가 됩니다. 또 원죄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교만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의하면 자칫 도덕적 성품으로 제한됩니다. 나아가 단순히 죄성(sinful nature) 즉, 실정법이나 도덕률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자 하는 천성, 죄를 짓게 하는 성질, 죄가 많은 성질로 되어서 죄를 짓게 되는 가능성으로만 국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죄로 인해 결과 된 상태이자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모습일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이 과녁을 벗어난 것, 특별히 목표를 잘못 정했기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당연히 원죄에도 해당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아야 참된 인간의 복락을 누리며 인간끼리 진실 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데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원죄입니다.

범죄 하여 두려움과 수치심에 빠져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찾으신 것이 행선지를 몰라 숨바꼭질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해서 숨은 곳이 결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일단 하나님을 멀리하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서로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도덕적 죄가 따랐지 않습니까?  

자꾸만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 같은 신학적 용어에 괘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죄가 성경의 명시적 표현이 아니듯이 이런 용어들 또한 성경에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한 마디로 잘 표현했듯이 원죄도 모든 자연인의 영혼의 실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신학적 용어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도 “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한 용어인 것입니다.

먼저 원죄의 ‘유전’은 암에 잘 걸리는 체질을 유전 받듯이 죄가 자식에게 승계된다는 생물학적 개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로 물든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인간 실존의 영속성”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전가’는 인간이 속죄 받기 위해 스스로 피 흘려 죽을 수는 없으므로 희생양에게 안수하여 죄를 옮겨 가게 하여 죽이는 것 같이,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그 후손에게 옮기셨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란 대사(大使)는 비록 한 개인이지만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효력을 가지듯 아담은 인간의 대표이기에 그가 지은 원죄도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효력을 미친다는 설명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범한 후에 실제로 진행된 결말은 어떠합니까? 잘 아시는 대로 죄를 범한 세 당사자와 피조세계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들은 궁극적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사항은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타락한 채로 영생을 하면 구원할 방도가 영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었던 영생을 이제는 천국에 가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인간에게 죄가 들어가서 타락한 상태가 이어진다 해도 다른 구원의 방도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사단의 머리를 부수는 것입니다.(창3:15)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구원 받은 방도였던 가죽옷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 스스로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타락할 것까지 아시고도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사단의 유혹을 허락했던 이유는 태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다른 말로 원죄와 그에 대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이론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을 오직 성경의 기록에 의거하여 인간 이성이 도출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학적으로 최대한 잘 설명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마음이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후손들 모두가 타고 났다는 것입니다. 그 전해진 방식을 성경은 생명나무를 하늘로 옮기고 인간을 낙원에서 쫓겨낸 것으로 진술하지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의 신비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이 모든 세대, 인종, 지역, 문화, 관습, 종교에 관계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이해하기 좋은 방식으로 함축한 용어가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죄가 후손에게 이어진 최초의 예는 위에서 살펴 본대로 가인이었고 그 이후 구약의 수많은 죄인들의 기록 또한 그 사실을 보증합니다. 원죄가 왜 죄도 없는 아들에게 유전되느냐는 부분에 집착하다 보면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경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구속 계획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역으로 원죄를 보지 않으면 유전이라는 방식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를 태우듯이 원죄의 유전만 추적하다가는 성경 전체를 불사르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죄에 대한 입장

그럼 과연 예수님은 원죄에 대해선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또 가르쳤습니까? 우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간음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원죄교리를 간접적으로 내포시겼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분명하게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밥을 먹자 장로의 법을 무시했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는 것보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은 단순히 위생이나 율법 준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했기에 바리새인만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행동으로 보았으며 그런 사고활동을 주관하는 인간 존재의 더 깊은 내면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혼 내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고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그 존재가 악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로의 법(실정법이자 도덕법도 포함함)을 어겼다고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할 것을 약속하며 그 의미를 강론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오래 전에 밤중에 찾아온 유대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 사람을 책망할 것인데 그 죄의 본질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실정법이나 도덕률을 위반한 것과는 하등 관계없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종교의 자유는 오히려 가장 큰 덕목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주시겠다는 은혜를 의도적, 적극적으로 거부했기에 심판받을 죄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성령이 하는 역할은 당연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그분의 십자가 구원 사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사도도 신령한 것 즉,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얻었던 바울 자신의 체험에 따라 진술한 복음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신자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을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만,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선행이나 귀한 업적을 쌓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가, 특별히 구원을 얻는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위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는 인간이 결코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분의 십자가의 의를 통해 누구나 갖고 있는 원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되었던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범죄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를 없애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31:29,30)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각자의 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한탄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죄를 짓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리라 예언한 것이지만 성경은 항상 이중, 삼중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모든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을 도저히 얻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재앙 대신에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고 부활하는 방안이 아니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그 외의 방안으로는 오직 재앙뿐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바로 이 내용이 원죄라는 뜻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이는 또 바울 사도가 로마서 1-3장 걸쳐 말한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상태를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원죄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간에,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명시적 표현이 없을지라도 신구약에 일관되게, 특별히 예수님이 인정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 원죄론

이제 마지막으로 만약 원죄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역설적으로 한 번 따져 봅시다. 모든 인간이, 특별히 아이들은 더더욱, 죄 없이 태어난 후에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 옳다면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아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죄인이 아닌 상태로 태어났지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질 결과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야 하든지, 아니면 그 중에는 죄를 짓지 않아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도 생겨야 합니다. 만약 두 번째 경우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생각해볼 여지조차 없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전자의 경우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구원을 얻어야만 할 실제적인 죄인인 셈입니다.

그럼 다시 과연 그 죄를 스스로 없앨 수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씻어주어야만 가능한지라는 두 가지 과제에 봉착됩니다. 여기서도 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히 부인되는 반면에 오직 후자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요와 가치가 발생합니다. 어떤 경우를 상정하든지 간에 원죄가 유전되기에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부인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자동으로 부인됩니다. 오직 원죄가 유전되어야만 십자가가 유효해집니다.

물론 원죄를 이런 식의 논리 게임으로 설명해선 충분치 않습니다. 대신에 바울처럼 신자 본인이 자기가 구원받은 체험에 비추어 진지하게 회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는지 여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상식적 의미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멋대로 살려는 심성과 고집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과연 자기가 하고 있는 혹은 소원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는 가인처럼 형제를 비롯해 누구라도 미워했는지 아니했는지, 나아가 아담처럼 하나님마저 싫어했는지 아니했는지를 정말 솔직하게 따져 보라는 뜻입니다.

또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는 명제가 맞으려면 당연히 구원도 그에 상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것만 깨끗케 하면 죄인의 상태에서 다시 죄인이 아니었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범죄든 죄든 스스로 회개하면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던 원죄마저도 스스로 뉘우치고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납득이 쉽게 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와 다르게, 정확히는 하나 더 나아간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아주 확고하게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칭송을 받을 정도의 의인이라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과는 사실상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영혼의 내면에 도무지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스스로 회개를 해도, 심지어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믿고 있음에도 자기가 죄인임은 분명하고, 어떤 방식을 동원해도 구원 받았다는 아니 받을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스스로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죄인이 먼저 의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모든 면에서 니고데모보다 더 의로웠을 것입니다. 절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를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확신하여 기를 쓰고 핍박했던 이유는 그만큼 자기가 의롭다는데 자신감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로선 아무 선행도 하지 않은 살인자마저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준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을 하자 사람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는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이 죄인 중의 괴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자기를 그 상태 그대로 두신 채 의인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고 십자가 복음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바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실정법을 어긴 적은 아예 없으며 혹시라도 도덕률을 어겼을 때는 틀림없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음하고 말로도 살인할 수 있다는 영역까지는 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그런 죄를 스스로 깨우쳤다 해도 더더욱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회개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단순한 의미의 원죄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으로만 따져도 그들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 다 예수님에 대해선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다시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칠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간혹 하나님을 알고 믿기는 믿되 잘못 믿고 있는 점을 완전히 수정하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와 그 죽음이 미치는 결과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그럼 당연히 의인 내지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그분을 배역한 원죄 하에 태어남으로서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그분의 의에는 어느 누구도 미칠 수 없고 또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원죄란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분의 존재를 자기에게서 지워버린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이 사단의 종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옮기고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도 바로 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인간 특별히 그 영혼을 주관할 공중 권세를 사단에게 위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은혜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바로 이것이 원죄의 궁극적 실상입니다. 사단은 인간더러 세상에서 형통하고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고 심지어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선행을 많이 쌓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만은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원죄 하에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살펴보고 또 작금의 모든 상황을 보아도 실제로 분명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자마자 귀신들이 가장 먼저 메시아임을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여 ...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막1;24) 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자기들의 수괴인 사단에게 한시적으로 맡겨졌던 공중권세를 빼앗고 완전한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하지는 않고 단지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오라고만 명령했습니다. 당신의 재림 때까지 여전히 세상을,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을 사단의 권세 아래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원죄란 인간이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스스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적한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믿긴 하되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주관하는 권능자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조금 의로운 자라 해야 자신이 범죄한 것이나 윤리적으로 잘못한 일을 스스로 회개하고 고백할 대상으로만 간주합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철두철미하게 부패된 죄인이라고는 절대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광채가 그 영혼에 비취지 못한 상태입니다.     

니고데모는 몰라도 바울의 경우는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 스스로 자부했던 자입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자기는 죽어야 마땅하고 또 예수를 몰랐다면 당연히 영원한 죽음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격정적인 바울에 비해 아주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니고데모마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잘 모르면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었으니 지옥 간다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속에서 나오는 것이 계속해서 죄악뿐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을 좋은 것으로 서로 많이 손쉽게 빨리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 있기에 죄악만 확대 생산될 뿐입니다.

간혹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가 인간 사회에선 분명히 의롭게 보이는 선행이나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먹고 남는 것으로 적선했거나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는 인간끼리는 절대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붙어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구원의 유일한 길

인간이 죄인인지라 죄를 짓는다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야만 구원이 유효해집니다.
그 외의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또 죄인을 의인으로 그 존재 전체를 바꾸는 것은 오직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끊고서 성령이 임재 내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의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초자연적 간섭이 일어난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내주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고안해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 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거듭남의 의미는 바로 자신의 존재 전부가 자기가 바라보아도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뿐이라고 겸비하고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부모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아담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로만 심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술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받는 유일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각 개인이 그분을 믿지 아니한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를 자신이 깨달아 믿었다고 말하는 신자나 또 그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단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 다른 글에서 누차 밝힌 바 있듯이, 성령의 간섭과 인간의 지정의적 인식이 상호 모순 충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먼저입니다. 성령의 간섭이 먼저라면 그 간섭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선택을 거친 전적인 은혜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마치 인간이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표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셔야 할 것은 성경은 신학적 논문이나 주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인간으로선 인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초자연적 간섭이 먼저 있고 그에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두 절차가 있는데 그중 인간 쪽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마치 유전, 전가, 대표성 등의 교리가 원죄의 한 부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듯이 말입니다.

간혹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 볼 때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또 하나님을 스스로 깨달아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었기에 그분의 의를 이루려는 도덕성과 그분께 돌아가려는 영성이 아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의 니고데모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이 아닌 사울이 바로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들 둘 다 성령의 간섭 없이는 예수를 믿지 못했지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작금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자신의 옛사람이 철저하게 죽어 없어지는 절차가 실종되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양 가르칩니다. 행위 구원에 대비해 믿음의 구원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스스로 믿으려 결단하는 것 자체도 사고활동 즉, 일종의 행위입니다.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대신하는 인간 쪽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나는 깨달아서 믿었는데 너는 깨닫지 못해 못 믿고 있다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벌써 인간끼리 도덕성과 영성에서 우월의 차이가 생깁니다. 우월한 자가 구원 받으면 인간 쪽에 구원 받는 자격과 조건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릅니다. 나아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을 인정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져 버립니다.   

거듭남이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단순히 하나님을 멀리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 썩어빠져서 진정한 의라고는 단 하나도 산출하지 못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망이라고는 없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종교적 의를 행했다 해도 여전히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게 둔 위치에서 행한 것임을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sinful nature)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담이 저질렀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에게 전승되어 있던 원죄의 굴레가 성령님의 역사로 완전히 벗기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은 정말로 자신의 실체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여 완전히 죽고 또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한 죄인이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의 전부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유효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가 단순히 그 구원을 유효케 하는 신학적 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속에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