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실존 /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 사람 앞에서(코람 호모, 호미니부스)


2023년 2월 22일(재의 수요일) 사순절 제1일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는가?

두 종류의 실존 

사람의 삶을 두 종류의 실존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로마서 14:8)
(코람 데오) Coram Deo, Before God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한다.
2개의 라틴어 단어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 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 앞에서의 실존(갈라디아서 1:10, 마태복음 6:1)
(코람 호모) Coram Homo. Coram Hominibus, Before Men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열왕기하 22:1-20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들 눈치를 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모든 것의 동기입니다.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배우, 연기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번역을 하지 못하고 그냥 음역(音譯, transliteration)을 했습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합니다.
진짜 자기는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면을 보여줍니다.
자기 모습이 아니고 전혀 다른 인물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휘포크리테스, ‘외식하는 자’입니다.


다윗 왕조 제 17대 유다 왕인 요시야(640/639-609 재위)는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여덟 살에 즉위하여 31년 통치를 했다고 하니까 39세에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성경이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최고의 인생, A+ 인생이란 뜻입니다. 짧지만 제대로 살았어요.
삶이 이러면 좋겠는데 저 자신 꼴이 꿀꿀해 보일 때는 ‘난 너무 구질구질하게 길게 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22:2 말씀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했다”입니다. 의역을 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았다.” 

히브리어로 ‘베에이네이 아도나이’(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이를 라틴어로 옮기면 유명한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요시야는 모든 것을 지켜 보시고 중심을 보셔서 동기(動機)까지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짧고 굵게 최고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 잘 하려고 하는 ‘코람호모’에 그치지 않고 진정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의 노예 출신 교인들에게 권하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2-25). 

서러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서 교만한 인간 주인 앞에서 살지 말고 그들을 주인보다 더 높게 봐 주시는 진정한 주님이신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외식’,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연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지켜보시는 앞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합니다. 요시야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년 전 연변을 다녀오면서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용정을 찾아가 봤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치열한 젊음이었습니다. 코람데오의 마음이지요. 연기할 것인가,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중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중 하나가 성생활에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성경상으로 보았을때 아담이 외로울까 하여 하와를 만들어 주신걸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생활을 허용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모든걸 허락하셨다는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은 세상 사람들의 성생활과 구분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의 기준은 아마도 음심일 것이다.

세상적인 성생활은 안목의 정욕과 말초신경의 자극을 통한 만족을 극대화 시키는것임에 반해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은 사랑을 기반으로 둔 교류를 통해 영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관계여야 한다.

세상적 성관계는 타인이 보았을때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운 감정과 음심이 발동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성관계는 거룩하기 때문에 타인이 보아도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외로 많은것들을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선악과를 추구하고 결국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당신은 자녀들에게 기독교인 으로서의 성교육을 시키고 있는가?

청소년의 이성교제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자각해야 한다.

신앙이 무너지는건 방심에서 시작된다.

철저한 신앙의 추구는 치우친 신앙과 동의어가 절대 아니다.

긴장하고 허리띠를 동여메자!









Dietrich Bonhoeffer목사
왜 나치 정권때 조국으로 돌아가서 순교의 길을 걸었을까?

독일의 설교가요,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훼퍼 목사(1906-1945)는 히틀러의 독재 정권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몸소 보여준 참 신앙인 이었다.

16세때 이미 신학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깊은 사고력과 성찰력 까지도 겸비해 그의 나이 20세 때 이미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다. 

후대에 그를 평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훼퍼 목사를 존경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의 타고난 능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한평생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한순간 한순간을 아낌없이 삶을 살았다는 점에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본훼퍼 목사는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단에서, 교회에서, 방송에서 쉼 없이 외치며 선포했다.

이 때문에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연금되며, 감옥에까지 갇히는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아까워 하던 미국 유니온신학교의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 의해 1939년 6월 12일에 초대되어 교환교수로 미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그해 9월 1일에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자 본훼퍼 목사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동료들과 독일 백성들이 미치광이 히틀러 때문에 전쟁의 노예가 되고, 살상과 피 흘림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다시 독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이 때 그의 독일 행을 만류하며 미국에 남아 살 것을 권했던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게 본훼퍼 목사는 이런 편지를 남기게 된다.

나는 독일의 역사에서 어려운 시기를 독일의 크리스천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동료들과 같이 고난의 시기를 함께 보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후에 독일 크리스천의 재건에 동참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 훼퍼 목사는 독일에서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목적대로 히틀러를 향하여 준엄한 신앙의 양심을 선포하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20일 전인 1945 4 9 39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교 당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학자로서 자신의 뜻과 명예를 얼마든지 펼칠 수 있었던 본훼퍼 목사가 이런 삶을 살았던 이유는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 일 수 없다.

신약의 초대교회 시절에 비로소 안디옥에 살던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저들의 모습 속에 무엇인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남들이 아무리 상대방을 속이고 실속을 챙기는 그 순간에도 결코 남의 것을 취하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손해보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는 그 이상한 모습 때문에 드디어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본훼퍼목사의 삶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훼퍼목사는 독일의 격변기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았던 용기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der Einzelne/ individual)'의 삶이란?
Soeren Kierkegaard

모든 인간은 육신의 병을 품고 살 듯이 실존하는 모든 개인 역시 절망이라는 병을 품고 산다.

진정한 종교적 실존, 즉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죄는 법적인 죄나, 윤리적인 죄, 혹은 양심의 죄가 인간에게 주는 형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내적 형벌’을 경험케 한다.  이런 절망을 통과하지 못하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사유하는 사람이 아닌, 신앙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손쉬운 관념”이나, “도덕적 모범”으로 취급하고 있다. 죄 많은 우리의 자아에 죽음을 요구하는 고귀한 은총보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만물을 구원해 주신다는 값싼 일반 은총만을 받아들이고, 기대여 사는 믿음의 자세를 비판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을 기준 삼아 윤리적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종교적 패쇄성과 율법주의를 불러 온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앙의 틀’이라는 안전한 구조 속에 숨어, 자기를 기만하면, 주체적인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죄의 본질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 상태이다. 모든 죄는 그러한 정신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아케다 (the Aqedah: 히브리어로 ‘묶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묶어 놓은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경 구절은 믿는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손쉽게 간과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아브라함이 과연 신앙의 아버지인가? 라는 도발적인 질문과 의문을 갖게 된다. 먼저,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한 아브라함의 패륜적 결정이며, 하나님이 과연 살인 교사를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기존의 관습, 도덕, 윤리체계를 뛰어 넘는 시각과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아내, 사라하고 상의를 했다면 아내가 과연 이런 행동에 동의 했을까?  윤리적 범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생각과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기준에서 본다면 단순한 영아 살해 시도를 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전적으로 고귀하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윤리를 포기하는 압도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입장과 위치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존재 (단독자)인 것이다.”   단독자란 모든 사람중에 '오직 한 사람'을 지칭하는 동시에, '누구나'를 의미하는 절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에 부딪치는 것이다.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에 대하여는 죄를  짓는 것이며, 무리에게 조소와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위험에 자신을 내 맡기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윤리의 본질을 초월해서, 개별적인 종교적 실존을 결단했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 (개별자, der Einzelne)’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번째는 우리가 얼만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준엄하게 서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윤리체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그러한 윤리체계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둔갑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게된다. 신앙은 윤리의 대안이나 파괴자가 아니라, 윤리의 구원자이다. 기존 윤리 체계의 신앙적 틀에 이미 갇혀져 있다면 우리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Dietrich Bonhoeffer목사 (1906-1945)의 히틀러 암살 모의 예를 보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살인임을 알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신앙적 결단이 요구될 때가 있다.  히틀러를 살인하는 행동은 평화주의자라는 본훼퍼 목사 자신의 본성을 궁지로 몰아넣는 투쟁이자, 윤리체계를 명백히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체 그저 숨어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800년대, 덴마크는 사회 전체가 기독교 국가였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의 승리를 자축하며, 더 이상 종교의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확신할 때,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신다면,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다.”                                                 

사회 전체가 기독교가 된 덴마크에 진실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복음이 필요한 곳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이라고 보았다.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파문을 던지는 메시지 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인간의 존재 방식에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잘 돕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합니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방식은 신 존재의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과 신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엉뚱한 신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히 1:1,2).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야 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성경 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고, 모세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하셨으며,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하셨습니다. 완전함이나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이 둘도 결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완성이고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방식은 호흡을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 방식은 인간관계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 방식은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능력과 수준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신분에 따른 요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불의를 비판하는 일까지도 사랑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명분과 실천이 불일치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과 삶이 불일치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보다 신자들끼리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다투고 서로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에 있어서 비난 받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의 수준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믿음과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나 삶을 보고 믿음을 평가하지만, 엄격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의 윤리적 책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와 차원이 다른 믿음을 말하면서 또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 교회가 상처를 입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믿음과 윤리적 삶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목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론적 토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부응하는 행위를 하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업적 위주의 행위와 율법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서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구체적 신앙의 규범에 집착하기보다 새로운 신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존재 방식은 사랑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께 의존하여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어떤 글을 쓰기 전에, 설교하기 전에, 권면하기 전에, 책망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사랑이 목적이 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골 3:14, 고전 13:3, 요일 4:8 -









존 맥스웰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그는 “오늘을 사는 원칙”이라는 책에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10대 때, 내 사고는 긍정적인데 집중했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에게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인생의 우선적인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입니다. 

“20대 때, 내 사고는 나와 동료들과 구별시켰다.” 

  이것은 친구들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0대에 벌써 동료들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인생의 기쁨과 삶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0대 때, 내 사고는 나에게 청중과 추종자를 주었다.” 

  이것은 청중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추종자를 허락해주었다는 것입니다. 

“40대 때, 내 사고는 일을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일하는 데도 안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것입니다. 

“50대 때, 내 사고는 나를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일만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인격적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를 더 추가적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너무 다행인 것은 내가 여전히 사고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더불어 기독교적인 삶과 사고를 할 수 있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삶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에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말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세 가지 - 창조, 성육신, 부활


창조 신앙의 신학적 의미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태초에(베레쉬트)
-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때
- 시간의 시작

하나님(엘로힘)
- 엘루하의 복수
-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복수형으로 하나가 된 단수

천지(
-

창조(바라)

창조하다 - 바라,아사,야차르, 바나

히브리 원어에는 ‘창조하다’ 즉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라, 아사, 야차르, 바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사, 야차르, 바나’는 영어로 ‘make, form, buil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3가지 단어는 ‘있는 재료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라’라는 단어는 ‘무로부터의 창조, 즉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무언가 존재하게 하는 유의 상태로 만드는 창조 행위, create'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라’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과 관련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에 대한 해석 (이는 지방교회의 해석입니다.)

 

출처 --- 기본교문서선교회 창조의 신비 워치만 니/ 윤무길 역   12페이지

 

창세기의 첫 두장에서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세개의 다른 말이 사용되어 있다.

1) 바라 -- 미리 존재하는 재료의 도움 없이 존재케하는 것

 

2) 아사 --- 이것은 바라와는 매우 다르다.

바라가 아무런 재료도 없이 창조한다는 뜻을 지칭하는데 반해 "아사"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 부터 만들거나 형성하거나 작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수는 의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창조할 수는 없다.

창조기사의 6일 동안의 일들은 주로 아사의 차원에 속한다.

 

3) 야차르 --- 이것은 도공이 진흙으로 하듯이 모양이나 형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낱말은 창2:7에 사용되어 있다.

 

창조한은 무에서 부터 성립시킨 것을 의미하고

지었고는 일정한 형태로 이루었음을 지칭하며

만들었느니라는 앞서 존재한 재료로부터 제작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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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드 ====> 비판

 

재창조설을로 맞추기위에 워치만 니는
바라는 create로 아사를 make로, 야차르를 form이 라고 제한 해서만 사용하는데
이 해석이 창세기 안에서만 봐도 충돌 됩니다.

기본형을 적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바라
(창 2:4)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 바라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 아사
(창 1:21하)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새: 바라

(창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짐승, 가축, 땅에 기는 것 -- 아사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짐승.새 -- 야차르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 -- 아사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사람 --- 바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 사람 --- 야차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히브리어를 모른 다는 것 이 창세기만 봐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구약성경 다른 부분도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는 혼용하여 사용되는 것을 여러구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창조뿐만 아니라 섭리에 해당하는 분에도 사용됩니다.  --> 안찾겠습니다.

벌콥 신론에 창조개요라는 부분에서 이를 설명하니 보려면 그 부분을 찾아보세요.

재창조설로 신학을 전개하니 그 구조의 틀이 무너지면 워치만 니 신학 전반이 무너지는 겁니다. 

어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정말 원문을 알았을까요?

창세기 1장과 2장부분만이라도  원어로 제대로 살폈어도 그런 전개 안했을 텐데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사역(창1:1, 1:7, 1:27, 2:7, 2:18, 2:22)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상황에 맞추어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בראשית(베레쉬트. 7225)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의 히브리적 의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계획도 끝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창조하시니라’ ברא(바라. 1254)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 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바라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 עשה(아사. 6213)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아사(עשׂה)'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아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자기형상’ צלם(첼렘. 6754)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첼렘’의 히브리적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창조하시되’ ברא(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조하시고’ ברא(바라. 1254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 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바라”라는 말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된 것 같은데 칼 형과, 니팔 형과 피엘 형입니다. 이 문법적 말의 뜻을 저는 잘 모르지만, 칼 형 “바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행위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신 것입니다.(롬4:17)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세기 주석에서 “바라, 곧 ‘창조하다’란 동사는, 한 편으로는 전혀 힘들이지 않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재료에 대한 진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의미를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설명이지요.

니팔 형은 일단 피동형으로 모면 됩니다. 피엘 형은 강조하려는 사실에 사용하지만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니팔 형은 창조 되었다. 또는 창조함을 받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피엘 형은 베어 넘기다, 베어 버리다는 뜻이 있네요. 그러나 해산하다 낳았다는 뜻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와 관련된 단어 세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바라, 아사, 야차르입니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바라는 그 물체자체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야차르는 주로 어떤 물체의 형태(모양을 만드는 것이나 형성하는 것)를 만드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고 했을 때 “지으시고”가 야차르입니다. 또 2:19에 동물들을 지으시고 라는 말도 야차르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에는 창조와 관련하여 이 세 단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단어들 중 어느 단어도 해산했다. 낳았다는 뜻이 있다고 기록한 참고서는 제게 없습니다. 그런 말을 쓰신 분은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지으시고’ יצר(야차르. 3335 와우 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찰(יצר)'은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것을 가리킨다(2:7.9).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야찰)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창세기에서 '바라'. '아사', '야찰'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귀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그 예로 '바라'는 (1)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그전 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은 정확무오한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된 그야말로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는 책임을 새삼 인지할 수 있다(마 5:18). 즉 우리는 '바라'뿐 아니라 모든 성경 원어를 분석, 연구할 때마다 성경은 단어 하나에 이르기 까지 영감된 책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이제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창조하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의미와 그 기사의 정확성을 간추려 보자.

(1)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2)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3)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다(시33:6-9; 렘10:12).
(4)또한 이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일소시켜 준다.

'창조'라는 개념조차도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와 기존물질을 변형하여 새롭게 제작하는 것과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은 합리적인 것이다. 한편 이 '바라'라는 단어는 사 40-66장에도 약 20번이나 언급되면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다.

즉 (1)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다(사42:5; 45:7-9).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종에게 말씀하신다.
(이사야 42:5)

(2)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다(사 43:1,15).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 지 말아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이사야 43:1)

(3)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분이시다(사 65: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4)인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심(사 42:5-9:49:5,6)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이사야 42:5)

이외에도 다윗의 참회시에도 볼 수 있듯 하나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새 창조의 근원이심(시 51:10; 고후 5:17)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생령’ נפש(네페쉬. 5315)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 בנה(바나. 1129 와우 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쁘신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대열에서 함께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크게 두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초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베리쉬트'라는 단어인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정관사'(the)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1장 1절에는 'in the beginning'이 아닌 'in beginning'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면, '정관사'(the)가 있을 때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완벽하게 문장이 끝나는 '독립절'로 해석되지만, 정관사(the)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라고 1장 1절이 2절과 연결되는 '연결절'로 해석됩니다.
1장 1절이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끝나는 '독립절'인가, 아니면 1장 2절과 연결되는 '연계절'인가에 따라 '창조'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본문에는 정관사(the)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문자적 변역을 하고 있는 영어 성경(NRSV, ESV 등)과 한글 성경이 정관사(the)를 넣어 기록하는 이유는 정관사(the)가 없음에도 독립절로 사용된 예가 창세기 외의 다른 성경에서도 많기 때문입니다(레 2:12, 신 33:21; 느 12:44; 잠 4:7; 사 46:10; 암 6:6 등)

창세기 1장 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로 번역된 구절 'בְּרֵאשִׁ֗ית'이 창조 이야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관용구로도 사용된 것이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에레미야 26: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니라.(에레미야 27: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예레미야 28:1)

유다 왕 시드기야가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엘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예레미야 49:34)

​또한 전치사 없이 사용된 'רֵאשִׁ֤ית' 단어는 늘 정관사가 있는 것으로 풀이한다.(창세기 10:10, 출애굽기 23:19, 34:26, 레위기 2:12, 23:10, 민수기 15:20, 24:20, 신명기 18:4, 21:17, 26:10, 33:21, 사무엘상 15:21, 역대하 31:5, 느헤미야 10:37, 욥 40:19, 시편 78:51, 105:36, 111:10, 잠언 1:7, 4:7, 8:22, 17:14, 예레미야 2:3, 49:35, 에스겔 20:40, 48:14, 아모스 6:1, 미가 1:13)

​이런 점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하면서, "정관사가 없더라도 문장을 정관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 목적있는 창조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h)입니다.
이 단어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주어가 있어야 하며,
둘째로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고,
셋째로는 주어의 의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합니다.
즉, 주어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때 '바라'(Bara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로 표기한 히브리어 단어는 'בָּרָ֣א'이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그가 창조하다'의 뜻이다.
영어로 음역할 때에는 'Barah'가 아니라 'Bara'(bā·rā) 정도로 표기한다.
바라(בָּרָ֣א)의 마지막 철자는 h로 옮길 수 없다.

​신성윤 교수는, "구약성서에서 '바라' 동사는 모두 38회 나온다.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이사야이다.
20회. '바라'가 항상 하나님이 주어로 나오는 것은 맞다."고 말한다.

​바라가 조건이 맞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하면서 그 첫번째 조건으로 주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동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칭(1인칭, 2인칭, 3인칭), 성(남성, 여성), 수(단수, 쌍수, 복수)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바라'라는 단어가 주어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표현은 조금 자연스럽지 못하다. 비록 창세기 1장에서 '바라'(그가 창조하다)가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단어가 같이 사용되고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별도의 주어 표시 없이도 가끔은 사용되곤 했다. (창세기 1:27 하반절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 בָּרָ֥א אֹתָֽם)

​"주어의 의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합니다. 즉, 주어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때 '바라'(Bara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뒤에서 그가 언급한 단어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도 사용한 단어 יָצַר도 토기장이의 목적과 의도, 의지가 담겨있다는 면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바라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에서 인테리어 하듯이 형성하는 창조인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건축하는 단어인 바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분석하여 깨달으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 단어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절은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베에트 하아레츠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선택한 백성들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을 받았습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베레쉬트 722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베이트는 집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 첫 번째 알파벳은 알레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일 최초로 쓰인 단어가 베이트입니다. 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베레쉬트라는 단어에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 의미로 ‘베레쉬트’를 해석해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 계획도 끝내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켰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절대 원죄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꼼꼼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바라라는 단어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7절은 바야아스 엘로힘 에트 헤라키아 바야베델 베인 하마임 아쎄르 미타하트 라라키아 우베인 하마임 아쎄르 메알 라라키아 바예히 켄입니다.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라는 단어는 아사 6213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은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문법입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셨는데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다가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사 창조입니다.

27절은 바이베라 엘로힘 에트 하아담 베찰모 베첼렘 엘로힘 바라 오토 자카르 우네케바 바라 오탐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자기 형상’이라는 단어는 첼렘 6754 명사 남성 단수입니다.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 전에는 거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단어인 ‘첼렘’의 히브리적 상형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조하시되’라는 단어는 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와우접속사는 하나님이 즉시 인간을 창조하셔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하시고’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이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육체의 삶만 살다가 끝나버립니다.

7절은 바이체르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 바이파흐 베아파이브 니쉐마트 하임 바예히 하아담 레네페쉬 하야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로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지으시고’라는 단어는 야차르 3335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차르 창조는 겉 사람을 만드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단어는 네페쉬 531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18절은 바요메르 아도나이 엘로힘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에에세 로 에제르 케네게도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22절은 바이벤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첼라 아쎄르 라카흐 민 하아담 레이솨 바예비에하 엘 하아담입니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바나 1129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면서 나아가는 신앙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 신학이 근본이다

일원론으로 본 세상

기독교의 성경만 우주의 창조를 기록한다(창 1:1). 창조주는 한 분이다.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주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신이란 뜻이다. 그리고 창조 기사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다스린다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창조주 하나님인 여호와(창 2:4)는 인격적 신(神)이다.

시작과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은 먼저 특정한 목적을 정하고 그다음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과 계획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의 세계를 창조했고 또다시 말씀으로 창조하며 이들을 채워 나갔다. 추상적인 주제(主題 : theme)인 창조 목적이 형상적인 소재(素材 : material)라 할 창조 세계를 통해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영적 세계를 물질세계로 표현시키는 행위로 초월(超越 : transcendence)과 내재(內在 : immanence) 사이 조화로운 관계를 설명한다. 창조 기사는 이원론(二元論 : dualism)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해를 위해 초월과 내재를 분리시킬 수 있다.

창조된 우주와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돕는 구조와 기능을 가진다(롬 1:19~20). 즉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설명한다. 자연 계시를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도 알 수 있다. 단 두 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창조 기사가 성경의 나머지 계시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 창조 기사의 중요성을 덜 인식했다. 논리 영역은 물론 역사 영역에서도 초월과 내재 사이 관계를 강제로 분리시켰다. 창조 신학의 일원론이 무시되었다. 그 결과 창조 신학도 거의 무시되고 창세기 3장부터 기독교 신학이 출발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완강하게 부정한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추어진 작정과 목적 그리고 의지를 제일 처음 드러냈다. 창조 신학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계시들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려진다. 창조 기사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창조 세계는 유기체이다

우주와 만물은 모두 하나의 창조물에서 기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첫째 날 하나님은 원형적 우주(창 1:1)와 비물리적인 빛(3~4)을 창조했다. 원형적인 우주는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성령이 물 위에 운행했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원형적 우주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재자(主宰者)란 뜻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렘 31:7 참조)."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 22:28)."

하나님은 질서의 신(神)이다(고전 14:33).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우주는 서서히 안정적인 구조를 드러내며 질서 정연하게 존재했다. 이 구조 안에서 우주와 만물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이 점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될 수 없다.

만물의 주재자인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라는 몸의 머리였고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그 몸을 유지하며 보존하고 섭리하며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첫날 비물리적인 빛을 창조했고 아울러 성령이 창조된 세상 위에 늘 운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사단의 존재와 그 활동을 억제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 세계가 유기체와 같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도 잘 증명된다. 창조 과정은 주기성(週期性)을 보여 준다.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 모두 우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뭍(육지)의 순서로 창조가 진행된다. 첫째 주기인 첫 삼일 동안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었다면 둘째 주기인 두 번째 삼일 동안 그 시공에 거주할 피조물들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두 주기들은 서로 유기적이다.

창조의 날들이 지날수록 창조 세계도 점점 더 완벽해졌다. 여섯째 날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고 걸작인 인간이 창조되었다. 6일간의 창조 행위는 인간을 위한 창조 과정 자체였다. 인간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창조주를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벽해야 했다.

넷째 날 창조물인 우주의 천체들도 결국 인간을 위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 1:14)." 태양은 일과 쉼을 결정해 주는 주야를 인류 사회를 위해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사계절, 일자와 연한까지 정해 주어 덕분에 인류 사회는 규칙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태양의 주기적인 운행 덕분에 인류 사회는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보존 내지 유지시켜 준다. 이 덕분에 인류 사회는 활동에 필요한 양식을 늘 얻을 수 있다(창 1:29). 태양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태양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였다(창 1:12, 21, 24, 25). 창조 세계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있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부분들이 있다. 이 부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맡은 역할과 기능을 소유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도 무용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각 은사대로', '각 기능대로', '각 역할대로', '각 사명대로' 또는 '각 직분대로' 만물이 지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각 종류대로'란 표현은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進化論: evolution)을 완전히 부정한다.

진화론적 사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냐 또는 더 크냐?'라는 상대적 이분법과 생물들 사이 천적 관계를 주장하는 대립적 이분법. 이런 사고에 의하면 피조물들 중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이나 약한 것들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못 가진다. 또는 천적 관계로 어느 한 쪽은 다른 쪽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 세계는 오로지 강자(强者)와 승자(勝者)만의 소유물이다.

학자들은 진화론으로 인류 사회를 분석한다. 모든 사회적 현상이나 인류의 역사를 상대적 또는 대립적 이분법에 따라 재평가한다. 우생학이나 인종 개량학 그리고 공산주의 등등은 모두 진화론의 결과물이다. 영웅인 강자와 승자만 높게 평가되고 나머지는 약자나 패자로 무시된다. 사람들에게 승리와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 차이가 너무나 크다. 앞에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모든 만물은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에 것은 나타난 현상이나 결과에 근거를 두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앞에 것은 미천한 것도 중요하게 보지만 뒤에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은 창조 세계의 타락 이전과 이후 사이 차이에서 나온다.

타락 이후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넘겨졌다. 사단은 자연 세계는 물론 인류 사회에서 하나님의 반대자로 등장하며 하나님이 세운 모든 조화를 무너트린다. 이 때문에 이원론이 맞고 일원론이 틀린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해와 반대는 일시적이다. 유일한 창조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고자 여전히 세상을 통치한다. 그러므로 창조 신학은 인류 사회를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6일 창조 과정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통섭적인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며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그런 학문적, 과학적 연구 방법은 성경이 처음부터 권하지 않는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은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이 달성할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지어졌다. 창조 기사는 통섭적 과학 방법을 주장한다.

신국론이 창조 신학의 중심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6일째 날 마지막 창조물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창조 결과를 은혜로 받고 누리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면 되었다. 창조주는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이런 영광과 찬송과 명예를 받길 원했다(시 102:18, 사 43:7, 21 60:21, 61:3, 엡 1:6, 14, 21).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한 방법으로 창조해야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복사본으로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통치권(창 1:28)을 넘겼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처럼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설 것이다(엡 1:4~5).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는 인간 존재의 출발은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은사와 능력을 인간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가 품는 신학적 의미이다. 신의 일을 맡은 인간은 신의 성품에도 참여한다(벧후 1:4 참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이성, 지식, 도덕, 감성 그리고 예술 면에서 은사를 소유한다. 이로써 불완전한 인간은 세 단계를 거쳐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문화 사명을 수행하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침을 받은 인간. 이것은 신약성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칭의, 아들로 살아가는 성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는 영화.

문화 사명은 세 분야로 구성된다. 문화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한 것이다(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 신앙과 종교 영역). 이 사명은 인간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명한다(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 윤리와 사회 인문과학의 영역) 그리고 자연은 문화 명령을 수행할 또 다른 무대이다(자연과 사람 사이 관계, 자연과학의 영역). 이것들이 신앙 삶을 구성한다. 신앙은 윤리나 과학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도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신학과 각종 과학은 모두 하나님나라를 위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신학은 앞의 두 가지 관계만 중요하게 보았다. 셋째 관계는 비교적 무시되었다. 물질세계를 저급한 것으로 보는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파괴의 원인은 바로 이원론에 있다. 그러나 창조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가 자연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의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명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 1:26). 기독교는 자연 세계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관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른 관계들과 동등하게 자연과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은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을 배척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가 효과적으로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안식일을 정하고(창 2:1~3) 에덴동산을 창설했으며(8~15절) 선악과 규례를 주었고(16~17절) 그리고 가정을 세웠다(18~25절).

일주일 중 마지막 날 인류는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창조 기사를 묵상해야 한다. 육적 쉼이 영적 쉼을 겸할 때 진정한 쉼이 된다. 이로써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늘 창조주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돌릴 것이다. 이를 잊는다면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미천한 짐승처럼 살 것이다.

에덴동산은 문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거지이며 동시에 출발점이다. 문화 사명은 에덴동산의 영역을 세상으로 점점 더 확장시켜 나감으로 훌륭하게 수행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며 하나님나라가 저절로 이 세상에 건설된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장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받는 곳이다. 여기서 배우고 습득한 후 에덴 밖에서 실천할 수 있다.

선악과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 사명이라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길을 따라 수행하여야 한다. 일만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길을 따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조건으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며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이를 창조 언약(창 2:17)이라 한다.

이런 삶과 사명 수행을 통해 인류는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완전한 순종자만이 하나님이 마련한 완전한 낙원에 이를 것이다. 이 낙원의 기업을 얻는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완성인 영화 단계이다.

그러나 순종은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미 낙원 에덴에 살고 있다(칭의, justification). 그런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은 인류는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성화, sanctification). 그러나 노력의 정도에 따라 받을 상급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정 제도는 문화 사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꾼들은 가정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제도, 부부 제도 그리고 가정 제도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신성하다. 최초의 가정은 바로 교회와 학교와 정부 노릇을 했다. 가장이 목사, 교사 그리고 왕의 역할을 맡는다. 구약시대로 말한다면 가장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이다. 가정은 인류 사회라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 교육장과 훈련장이다. 이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출된다.

남녀 관에서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차이가 발견된다. 보편적 창조 기사를 말하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동등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수평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 창조를 기록한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남자는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왕적 존재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 관계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가정에선 창세기 2장의 가르침을 그러나 가정 밖 사회에선 창세기 1장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와의 저주(16절)를 예로 든다. 그러나 본문도 가정을 배경 한다. 즉 가정 안에서 여자는 남편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 밖 사회에서 남녀 사이 성적 차별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문화 사명의 수행과 은사 면에서 여자를 남자와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명이 수행되는 인류의 문화 영역은 너무나 다양하다. 효과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려면 남자와 여자 사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자의 우월성은 현대사회 이전 농업 시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 육체적인 힘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시대 몸의 힘보다 머리의 힘인 지식이 더 중요해졌다. 여자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다원화 시대 여자가 활동할 수 있는 분야들은 참으로 많다. 이 모든 일들을 남자들만 감당할 수 없다. 학자들은 여성의 노동력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전 인류 사회는 한 사람의 유능한 리더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 시대 유능한 전문가들은 참으로 많다. 이젠 조직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내는 리더가 필요하다. 이 리더십에 권위적인 남성보다 모성적인 여성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남녀 관은 이런 시대와 사회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인류 사회도 일인 지도자만 고집하는 권위주의보다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평등주의를 요구한다. 이제 인류 사회는 여성 지도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교회와 성도가 노력해야 할 다섯 가지 일들이 있다. 성경 말씀의 고수, 문화 사명 수행, 주일 성수, 교회의 보존 그리고 경건한 가정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대로 창조 신학의 가르침들이다. 이들에 힘쓴다면 교회는 산 위에 켜진 등불처럼 만인 위에 비출 것이며 성도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나라도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더 빨리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교회도 인간 사회도 모두 사는 길이다.

결론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종국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를 대리자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모든 신학들의 목표이며 방향이다. 모든 신학들은 신국론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엡 1:4~5)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상으로 선택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이다. 그리고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의 목적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피택자들로 표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거룩한 신분 획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양자 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각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 이후에도 성도의 삶에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를 닮은 형제들로 그를 세우기 위함이다.

피택자들은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형제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이다. 결국 하나님의 가정이 곧 하나님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진면목이다. 창세전 세워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즉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창조주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창조 후 인류 사회는 바로 하나님의 가정의 상징이며 모형으로 하나님나라였다.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전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었다. 문화 사명은 바로 이를 목표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학적 주제들은 결국 하나님나라라는 제 일차적인 주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창조 신학은 이런 논리적인 진리 체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문화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사실은 부활주인 예수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계 1:5 참조)." 만물의 으뜸이라면 지금도 예수님이 세상 역사를 주관한다.

비록 보이는 차원은 아니라도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져야 한다. 이것은 문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 부활주 예수님도 은사들을 나누어 주며 신자들을 돕는다. 먼저 예수님은 성도의 인격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영역이 세상으로 확대되도록 일한다. 이 점에서 신약시대 교회는 창조 기사의 에덴동산 같고 구약시대의 가나안 땅과 같다. 그리고 신약시대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거점이며 출발지이다.

결론적으로 헬라인의 이원론은 창조 신학에 안 맞는다. 성도는 히브리인의 일원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일원론과 이원론은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면에서…인류 삶의 내용과 성격은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일원론을 택하여야 한다.

사단이 아직도 활동함으로 이원론이 맞는 듯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연단의 기회가 되지만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는 파멸케 하는 유혹이 된다. 결국 사단은 자기 일로 참주인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줄 뿐이다.

기독교와 성도는 이원론에서 나온 대립적 또는 상대적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일원론에 근거를 둔 논리적 이분법에 따라 사고해야 한다. 일원론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도 유익하다(롬 8:28).

그러나 사물을 상대적으로 또는 대립적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은 사물의 다른 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게 만듦으로 성숙한 그리고 지혜로운 판단을 방해한다(창 3:6~24). 흑백논리에 따라 산다면 편협한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신앙 삶의 내용인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파괴된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이며 그가 원하는 바이다. 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고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사고로 살아야 한다.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름으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사실은 창조 기사의 신학이란 다른 신학들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성취나 완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대표자로 세운 뜻과 목적이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창 3:15).

예수는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47)이 되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하여야 한다고 말했다(요 3:1~16). 오늘날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성취된다. 기독론, 구원론과 성령론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해 하나님나라는 성취 내지 완성된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열쇠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인류의 참소망이다(딤전 1:1). 마라나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개념들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육신의 첫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다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의 존재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관념들은 그 관념의 주창자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상 체계가 그들에 의하여 소개되거나 종합되었을지라도 이제 그 사상 체계는 그 주창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단순히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핵으로 둘러싸며 존재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1:1)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요1:3) 이 말씀은 이제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구원론의 차원과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를 마련해 주는가? 성육신 사건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육신 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 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 이며 '참 사랑' 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다음에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 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 1:1)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육신의 개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때문이다. 이는 성육신의 개념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Image, 이미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리 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여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또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homoiousios)본성을 가졌을 뿐인가(아리우스)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homoousios)본성을 가졌는가?(아타나시우스)" 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 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조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그리스도밖에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저 추상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하며 무한하며 불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멸하지 않으며(죽지 않으며-유한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image: 이미지)은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골 1:15)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요15:13)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image: 이미지)을 얻을 수 있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념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 안에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와 순종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 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삭의 양태를 요청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계를 부정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 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하여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부활의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인간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게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는 모습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낯선 자세이다. 기독교 신앙은 또한 죽음이 던지우는 그림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오직 생물학적인 단계의 마지막에만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은 죽음의 다양한 세력과 그림자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심지어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죽음은 아직도 자신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죽음의 현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활 신앙이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또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부활 항목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이 곧 부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신학자들은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고, 당시에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부활에 관한 논의가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한 긍정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불트만에 따르면, "부활에 대한 신앙이란 단지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 부활 그 자체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오직 제자들의 부활 신앙만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트만에 반대하여 우리의 신앙이 부활의 기초가 아니라, 역으로 부활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됨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역사적 행위 속에 기초한 신앙임을 말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누구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분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분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은 부활 사건이 예수의 구속(救贖)의 십자가의 맥락 안에서, 곧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살펴져야 할 것임을 뜻한다. 예수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계에 대항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준 것을 의미한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부활의 일차적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과 관련하여 살펴질 때 그 뜻이 분명히 밝혀지는데, 그 세력은 곧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력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세력은 언제나 다음의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도전한다: 죄, 율법, 죽음.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며, 율법 아래 놓여 있고,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바울은 죄의 댓가로서 죽음이 찾아왔음을 지적하면서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33)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피고용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또는 어떤 것을 성취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세력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날 때,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사망은 우리에게 우리의 봉급을 나누어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 있는 사람들과 피조물을 향한 구원론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정당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뜻하는 사건이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였음을 또한 말한다. 이 "사흘"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여호와께서 ...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체를 흐르는 구원사의 사건 속에 살펴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흘만에"라는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하나의 사건의 두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무리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삼일간의 간격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는 독립된 구체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구체적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활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양 극단의 부활 이해를 거부해야 한다.

 

한 편으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은 하나의 실존주의 신앙의 사후(事後) 반성과 성찰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다. 부활 사건이 주관적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객관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역사 실증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역사적 실증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부활 사건의 정당성 여부를 걸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변호함에 있어서 은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게 되는 유혹이다.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부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사건은 예수의 지상의 삶의 단순한 환원이 아니며 시체의 본래대로의 환원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궁극이전의(penultimate) 삶의 연장이 아니라 궁극적인(ultimate) 삶과 세계의 도래이다. 궁극적인 세계와 삶의 도래는 궁극 이전의 물음과 범주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바울이 부활 사건의 의미 맥락을 증명과 실증에 두지 아니하고, "전파"와 "신앙"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부활 사건의 적합한 맥락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파와 신앙"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헛된 것임을 말하면서,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전 15:14)


바울은 왜 실증과 증명이 아니라, 전파와 신앙을 부활 사건 이해의 올바른 맥락으로 제시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세계의 연장이 아닌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의 모든 범주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활 사건의 전적인 새로움에 대한 반증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이 세계 안에서 증명가능한 사건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이 세계의 일부분의 사건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의 전체 의미 맥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이란 이전의 삶의 소생이거나 이전 세계의 단순한 연장(延長)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실존적 차원으로만 축소해서는 곤란하다. 불트만이 지적하고 있듯이, 부활 사건은 분명히 우리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새로운 지평은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의 포괄적 틀이 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로 옮기셨음을 말한다. 성경은 신앙의 단순한 실존주의적 주관화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이미 결정적으로 선취된(anticipated)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음"(고후 5:17)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 것을 단지 실존의 영역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 죽음의 세력의 영역이 포괄적이듯이, 부활의 생명이 다스리는 영역도 포괄적이기에 개인의 차원이나 영혼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역사의 종말에 우리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 믿사옵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피조물의 역사에 있어서 유래가 없는 첫 사건이었으나, 그것이 마지막 사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부활 장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모든 인간, 아니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선취되어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가운데 부활한 것과 같이, 모든 성도도 육체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의 상태가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하늘과 땅 사이의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부활 이해에서 정면으로 거부된다. 성도의 최종적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함에 있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부활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중심으로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부활 이해는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실천적 의미를 "죄악된 세계 아래 있는 운명론에의 도전" 속에서 찾는다. 부활 사건은 이 세계가 폐쇄된 세계이며 이제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는 운명론적인 선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차원은 부활 신앙의 변혁적인 차원이다. 이제 참 물음은 부활을 인식적으로 믿느냐, 아니냐의 지적인 차원만의 물음이 아니다. 참 물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와 현실에 들어섬으로써 새 역사의 변혁 속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분리되어 있어서 여전히 죄, 사망, 율법 가운데 있느냐의 실존과 역사 변혁의 물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파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피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죽음의 실재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도피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에 기초한 부활 신앙 가운데 죽음의 실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저항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선취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이 마지막이라고 외치는 모든 죽음의 운명론에 대항하여 부활 사건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예기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죽음의 실재를 진지하게 대면함을 지적하였다. 이제 우리는 여기 결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는 부활의 현실과 실재를 더욱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과, 그리하여 죽음을 모든 삶의 궁극적인 실재로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두 장면의 회상(回想)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50년 전, 4월 9일 (부활절 즈음하여) 독일의 플로센부르그의 한 감옥에서 본회퍼라는 젊은 목사가 교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제3제국의 전제적 통치에 대항하여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가 투옥되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앞두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 주간을 보낸 영국인 장교 페인 베스트는 본회퍼 목사의 마지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본회퍼 목사는 짤막한 예배를 인도하였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다. ... 그가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마자 문이 열렸고, 사복을 입은 인상이 나쁜 두 사람이 들어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가도록 준비하라." 이 말은 거기에 있던 모든 죄수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교수형을 뜻했다.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때 그는 나를 끌어 다니며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삶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부활 신앙을 몸소 실천한 본회퍼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인 "윤리학"에서 죽음의 우상화를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은 현재 우리 가운데 횡행하고 있는 죽음의 우상화를 뿌리째 뒤흔든다. 죽음이 최후의 것이라면, 지상의 삶은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약 1900년 전 고대 근동의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이 로마 제국의 세력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그를 따르던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팔았으며, 나머지 제자들은 그의 체포와 죽음의 사건 가운데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장면을 보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들이 지녔던 실낱같은 희망의 마지막이라고'. 그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새 역사를 향한 새로운 행진은 시작되었고, 오늘도 그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발 아래 짓밟히고 살해당한 모든 것의 부활을 믿는다. ...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열린 무덤의 틈새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끝없는 흐름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바로 그것이 부활절이며, 바로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

















성경의 각종 물건 상징


성경의 각종 물건 상징

 

Noah's Ark(노아의 방주)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그 심판 속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의 약속과 예비를 상징한다.
또한 구약 성경에 나타는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type)이기도 하다. (창세기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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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 of the covenant(언약궤)

"Ark"의 글자적 의미는 "대형상자, 궤"를 뜻한다. 언약궤는 성막(구약 출애굽 때 만든 성막)의 가장 중요한 성물이다. 성막 안 언약궤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며, 그의 영광이 나타는 곳이다.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 상자이며, 순금으로 겉이 싸여져 있고, 순금으로된 속죄판( mercy seat, 시은좌)이라 불리는 뚜껑으로 덮여있다. 속죄판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두 그룹(cherubim, 파수꾼, 천사(?))이 날개를 펴고 뚜껑을 덮고 있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 만나가 담긴 단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구약의 언약궤가 모세의 율법을 속죄판이라는 뚜껑으로 덮여 있고, 가려져 있는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으로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가려지고, 해방됨을 상징하며, 언약궤의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계시다.(출애굽기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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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Arks(세 개의 보물상자)

세 개의 보물상자는 예수 탄생을 경배하였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받힌 보물상자이다.
박사들은 세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성경에는 동방박사의 수가 3명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세 보물에 근거하여 3명의 동방박사라고 한다.)
황금 - 왕 중 왕 , 유향 - 주세주, 몰약 - 예수의 십자가 고난(죽음)

 

Banner(깃발)

Banner는 승리의 상징이다.
보통 Banner 에는 죄와 죽음에 승리하신 그리스도 부활의 승리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환상 속에 십자가를 보고 난 후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의 깃발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때론 세례요한 같은 성자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이사야 11:12 주님께서, 뭇 나라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세우시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방에서 그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Beehive(벌집)

벌집은 다소 현대적 상징으로서 교회를 상징한다.
"벌집은 정육각 기둥 모양의 독방이 병렬적으로 묶여 소반을 만들어 벌집을 형성한다.(두산백과사전)" 벌집은 각자 다른 독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함께 같은 벌집을 만든다. 마치 성도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영적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만, 함께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과 같다.(고린도 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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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종)

종은 예배로의 부름과 세상에 선포되어지는 복음을 상징한다.

 

Book(책)

책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상징한다. 열려진 책은 진리 혹은 계시를 묘사한다. 닫혀진 책은 성도들의 이름을 담고 있거나, 최후의 심판, 성자들의 말씀을 담긴 것을 묘사한다. 책을 들고 있는 사도는 신약성경을 저자들이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보통 두루마리 성경을 들고 있다) 세례 요한, 스데반, 맛디아, 제자 시몬 등의 성자들은 보통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절기: 삼위일체

 

Candle(초) 

초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에 집중하도록 한다. 제단에 있는 두 개의 초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낸다. 성도들 역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았다. (마태 5:14)

 

Candlestick(촛대 -일곱가지)

일곱가지 촛대는 보통 -"menorah" 라 불리며 유대교 회당에서 많이 쓰인다. 기독교에서 일곱가지 촛대는 성령의 7 가지 은사를 묘사한다.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이사야 11:2)

 


Censer(향로)

향로는 예배에서 향을 담아 태우는 용기이다. 이것은 향이 위로 피어오르듯이 성도들의 기도도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것과 성도들이 하나님께 향을 받치는 것을 상징한다. 시편 141:2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Chalice (성배) 

성배는 성만찬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을 상징한다.(마태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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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ice and Cross(십자가가 있는 성배)

십자가가 있는 성배는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신 그 순종의 상징이다. 성배 위에 끝이 뾰족한 고난의 십자가(Passion Cross)를 둔다. 마태 26:39 (겟세마네에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절기: 사순절, 성 월요일, 목요일, 금요일

 

Circle(원)

원은 시작과 끝이 없기에, 영원함을 상징한다. 보통 신에 대해 표현할 때 원의 상징을 사용한다.

 

Circles - Entwined(셋 얽혀있는 원) 

세 원이 얽혀있는 이 문양은 삼위일체의 상징이다. 원은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속성을 묘사하고, 세 원이 얽혀 있는 것은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일체임을 상징한다.


 Trinity - Good4Joy

Coat and Dice (옷과 주사위) 

옷과 주사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의 겉옷은 네 몫으로 나누어 병사들이 차지하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한 병사가 차지하였다(요한 19:23-24). 이것은 시편 22:18의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절기 : 성(고난)주간

 

Coins(동전)

동전들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30개의 동전과 돈주머니는 유다의 배신을 묘사한다.(마태 26:14)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Crook(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

목자들의 지팡이는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요한 10:11-16). 또한 이것은 다윗 왕의 상징으로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경배한 목자들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귀하게 장식된 지팡이는 "Crosier"(프랑스어로 십자가를 나르는 자 "Cross Bearer"라고 부르며 주교나 대수도원장의 교회적 지위와 권위의 상징으로 쓰인다.

 

Crown(왕관) 

왕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보통 왕중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디모데 전 6:13-16). 또한 신앙의 상급인 영생을 "생명의 면류관"으로 묘사한다(계시록 2:10). 세 왕관은 아기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의 상징이다. 절기 : 부활절, 그리스도 왕 주일

 

Crown of Thorns(가시면류관)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과 함께 그려진다.
가시면류관은 우리에게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조롱하던 병사들을 생각나게 한다.(마태 27:27-29)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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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gger(단도)

단도는 배신의 성경적 상징이다.

 

Door(문)

문은 요한복음(10:7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에서 가져온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또한 기도에로의 초대이며(마태 7:7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사랑의 상징(계시록 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이다.

 

Doorposts(문설주) 

양의 피가 발라진 문설주와 상인방(문의 가로대)은 첫 번 유월절(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실 때 장자의 죽음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셨다. 그 때 문입구에 양의 피를 이스라엘 집은 심판을 면하였다. 출애굽기 12:21-23)을 묘사한 상징이다. 이 구약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미리 암시한 사건이다. 절기 :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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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wer and Basin (물병-주둥이가 넓은 물단지 와 대야-물동이)

물병과 대야는 청결(순결) 예식을 묘사한다. 물병과 대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두가지 성경적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만찬 후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의 도(봉사)를 몸소 행하여 가르치셨다. (요한 13:1-20) 다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피(십자가 형 재판)에 대한 자기 책임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물을 가져다가 자기 손을 씻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다 것을 몰랐다. (마태 27:24)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Eye(눈)

보고 계신 눈동자는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든 계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후기 르네상스 동안에, 눈동자는 빛 광선이 있는 삼각형 안에 그려졌고, 이것은 무한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묘사한다.

 

Flame(Fire 불길-불) 

불길의 혀는 성령의 상징이며, 성령의 기름부음과 권능의 상징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의 머리 위에 임하였던 성령의 강림을 묘사한다.(사도행전2:1-4) 불은 또한 영적인 열정을 상징한다. 한편 불길은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도 한다. (마태 25:41) 성자들이 불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그(녀)의 신앙적 열심을 묘사한 것이다.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Flame(Seven fold 7-불길) 7-

불길은 성령의 7가지 선물을 의미한다.. -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회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 이사야 11:2-3)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Flaming Sword(불칼) 

불칼은 심판의 상징이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 천사(그룹)들과 불칼을 동산 동에 세워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 (창세기 3:24)

 

Fountain(분수)

분수, 혹은 우물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께서 수가 마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며, 그 여자와의 대화 중에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4장) 요한 4:13-1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Gate(문)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열려진 문은 천국의 입구 또는 하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복음의 초대를 상징한다. 문은 또한 죽음의 문과 영생에서 분리된 것을 묘사한다.(마태 16:18, 이사야 38:10) 문은 추방(에덴동산에서)을 상징할 수도 있다.(계시록 22;14) 문은 최후의 심판 때에 저주(심판)에서 정의(선함, 의)를 구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부셔진 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정복된 죽음 지옥 권세를 상징한다.

 

Hand of God - Manus Dei (하나님의 손-권능)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다. AD 8C 동안 유일한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이며, 하나님의 권능으로도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주권, 섭리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손은 각 손가락의 접히거나, 뻗힌 형태에 따라 여러 의미를 나타낸다. 5 손가락 모두를 움켜쥔 형태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상징한다. 엄지, 검지, 가운뎃손가락은 뻗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접힌 형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징이다. 검지는 뻗히고, 가운뎃손가락을 꼬아서 C를 만들고, 엄지를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끼워 다른 C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약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Harp(하프)

하프는 다윗이 사울왕의 정신병을 쫓기 위해 하프를 연주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사무엘 상 16장) 하프는 시편의 상징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악기의 상징이다.

 

Keys(열쇠) 

열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는 교회의 권위를 상징한다. 두 개의 열쇠는 이중의 의미를 묘사한다. 

하나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열린 하나님나라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굳게 닫힌 하나님나라를 의미한다. 뒤집어진 십자가에 그려진 열쇠는 베드로의 상징이다. 베드로는 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으며(마태 16장), 베드로는 순교할 때 감히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부탁하여 십자가에 뒤집혀 매달려 순교하였다.

 

Ladder(사닥다리)

사닥다리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 쓰인 기구 중의 하나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보통 해면을 꿴 갈대와 함께 그려지는 바, 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신포주를 해면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한 것을 묘사한다.(마태 27:48) 또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치던 중 베델에 잠들었을 때, 꿈에 천사가 사닥다리(층계, 계단)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을 생각나게 한다. (창세기 28장)

 

Lamp(등불)

등불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으로 쓰인다. 마태 25장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지혜로운 다섯 처녀, 어리석은 다섯, 다섯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가득 담고, 깨어 신랑을 기다렸다.)에서 유래된 상징이다. 때론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으로 쓰이며, 그 의미는 촛대와 같다. 등불은 팔레스틴 지방의 오일램프 모양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Lamps-Seven(7개의 등불) 

일곱 개의 등불은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을 의미한다.. - 지혜, 총명, 모략, 권능, 지식, 하나님을 경회하는 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wisdom, understanding, counsel, might, knowledge, fear of the Lord, and delight in the Lord. 이사야 11:2-3) 절기 : 성령강림절(오순절)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상징이다.(마태 14:) 또한 생명의 양식(떡)이신 예수님을 묘사한다.(요한 6:)

 

Luther's Seal(루터의 봉인)

이 봉인은 루터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가운데 검은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참혹한 희생을 상징한다. 붉은 심장은 신앙에 의해 생기는 사랑, 기쁨 평화를 상징한다. 하얀 장미는 천사와 축복받은 영혼들은 상징한다. 푸른 바탕은 천국의 기쁨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금색 원 둘레는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상징한다.

 

Mortar and Pestle (절구와 공이)

약제사의 절구는 의사인 두 성인 , 성 Cosmas(?)와 Damian(나환자의 성인)의 상징이다. 때때로 성 누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Nails(못) 

못은 예수님의 십자사 형에서 사용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 못은 보통 세 개를 그리는데 이는 에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임을 상징한다.

 

Nimbus(Halo, 후광)

후광은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머리 뒤에 원 모양으로 그려진다. 단순한 원 모양의 후광은 영원성을 상징한다. 예수님 머리 뒤에 세 갈래의 광선과 함께 그려진 후광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한다.

 

Oil(기름-올리브)

구약성서에서 기름(올리브)은 주를 위해 성결 예식을 행할 때 쓰이며(레위기 8:10-13 ),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징인 바 주께서 특별한 임무를 주기 위해 사람을 기름부어 선택하신다. (사무엘 상 10:1,시편 89:20) 신약성서에는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의 상징이다.

 

Pearl(진주) 

진주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 '값진 진주' 에 근거하였다. 마태 13:45-46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또한 마태복음은 진주를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마태 7:6 "진주를 돼지 앞에에 던지지 말아라").

 

Plumb Line(다림줄, 추가 달린 수직 측량 줄)

다림줄은 이사야와 아모스 예언자에 의해 사용된 심판의 상징이다. (아모스 7:7-8) 때때로 다림줄을 들고 있는 예수님을 그리는 바 이는그가 인간 영혼의 재판관 임을 상징한다.

 

Quatrefoil(네 잎-클로버) 

네 잎(클로버)는 사 복음서의 저자 -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상징한다.

 

Rainbow(무지개)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노아의 대홍수(창세기 9장)에서 유래된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언약)의 표로서 무지개를 하늘에 두셨다. 무지개는 때때로 예수님의 왕관에 그려지기도 하하는데, 이는 그의 영광과 최후의 심판을 상징한다.

 

Rock(바위)

바위는 보통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인다. (마태 7장 - 반석위의 집)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 물을 내어 목말라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민수기 20장) 때론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 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상징할 수 도 있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페트로스)의 이름이 '반석(페트라)'과 같기에 주께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 16장)

 

Scales(천칭 저울, 천칭의 접시)

천칭은 심판의 상징이다. 보통 재림 예수님의 최후 심판을 상징한다. 또한 미카엘 천사를 연상케 하는데, 미카엘 

천사는 죽은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책무를 가졌다.

 

Scepter(홀 笏)

왕의 홀(지팡이, 지휘봉)은 권위의 상징이다. 왕관과 같이 있는 홀은 모든 창조물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창세기 49:10, 히브리 1:8) 절기 : 예수승천주일, 그리스도 왕 주일

 

Scourge and Pillar(채찍과 기둥) 

채찍은 그리스도 고난의 상징이다. 보통 기둥과 함께 그리는데, 이는 예수께서 기둥에 묶여 채찍을 맞았기 때문이다. (요한 19장) 절기 : 고난주간

 

Scroll(두루마리)

두루마리는 여러 의미를 담고잇는 상징이다. 두루마리 안에는 선택받은 사람(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따라서 두루마리는 최후의 심판과 영생의 종말론적 상징이다.(계시록 5:6-9) 때때로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야고보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Seal(봉인) 

봉인은 하나님의 약속 혹은 각인(Mark)상징이다. 하나의 봉인은 성결의 의미를 가진다. 구약의 제사장들의 '에봇'(제사장의 옷)과 모자에 12지파의 이름을 봉인(인장)처럼 새긴 보석을 달았다.(출애굽기 28장)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표하기 위해 인(봉인)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고린도 후 1:20-22) 봉인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힐 때 그 무덤 입구를 돌로 막고 로마병사들이 봉인 한 것을 묘사하기도 한다.(마태 27:62-66)

 

7 Seals(일곱 봉인) 

일곱 봉인은 최후의 심판의 상징이다. 이는 계시록 5장, 일곱 봉인이 있는 두루마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일곱봉인이 있는 두루마리나 책을 가진 모습으로도 그려진다.

 

Ship(배)

배는 교회의 상징이다. 믿음의 사람들을 대 홍수에서 안전하게 구해주신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하여 제자들의 배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 사건(마가 4장)에 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돛에 십자가를 그려 진 배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배는 또한 여러 성자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되기도 한다.(성 유다 등) 큰 교회당의 회중 석을 "nave" 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배"라는 뜻이다.

 

Skull(두개골, 해골)

두개골은 육체적, 정신적 모든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 아래에 놓여있는 두개골은 보통 아담의 해골로 이해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고린도 전 15:20-22)

 

Square(정사각형) 

정사각형은 세상(지구)의 사방을 상징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복음서 기자를 상징한다. 아주 적은 경우이지만 살아있는(죽은 성자와는 구별된) 사람에게 후광을 그릴 때 사각으로 그리기도한다.

 

Steeple(뾰족탑)

교회의 뾰족탑은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주목하여, 그 영혼이 하늘로 향하도록 도와준다. 뾰족탑은 중세기 고딕 교회 양식에서 유래하였다. 뾰족탑 위에는 보통 십자가를 달아 멀리서도 잘 보이며, 성도들을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뾰족탑에 종을 달아, 그 종소리를 울려 성도들을 예배에로 

초대하는 기능도 하였다.

 

Sun of Righteousness(의로운 태양

태양은 보통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특히 예언자적인 상징이다. 말라기 4:2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절기 : 대강절

 

Sword(검)

검은 여러 의미의 상징이다. 천칭 저울과 같이 그려진 검은 대천사장 미카엘의 상징이다. 악마와 불신앙에 대항하여 물리치는 것을 상징한다. 열려진 책과 함께 그려진 검은 성령의 검을 상징한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를 상징한다.(에베소 6:17) 검은 성 바울과 검으로 처형당한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Tablets of Ston (돌판)

돌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그림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 (토라 - 모세오경 혹은 구약성경 전체)을 상징한다.(출애굽기 31:18) 십계명의 돌판은 보통 왼쪽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1-4계명), 오른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5-10계명) 법이 그려진다.

 

Torch (햇불) 

햇불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이다. 때때로 확신에 찬 순교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Tower(탑, 성채) 

탑 혹은 성채(Fortress)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시편 94:22) 또한 삼위일체를 묘사하기 위해 성채의 창문을 세 개 만들도록 한 성 바바라를 상징하기도 한다.

 

Trumpet(트럼펫, 나팔) 

나팔은 '최후의 심판', '부활', '예배로의 부름' 의 상징이다. 나팔은 여호수아(여리고성을 돌며 나팔을 불었다 - 여호수아 6장)와 기드온(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나팔을 불며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 사사기 7장)을 생각나게 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을 찬양함, 성회, 전쟁에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 등을 묘사한다.

 

Wheel(바퀴)

바퀴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다.
불타는 바퀴는 때때로 아담과 이브의 에덴 추방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한다.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하나님의 옥좌를 눈과 날개로 덮힌 불타는 바퀴로 그려지기도한다. (에스겔 1:15-17)
이 이유로 불타는 바퀴는 에스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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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e(멍에)

멍에는 보통 힘겨운 수고 혹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수고를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의 뜻으로 쓰셨다. 멍에는 결혼과 같은 다른 사람을 향한 충성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마태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Winds in my Mind












거룩 / 성(聖)


거룩 :
성(聖) / 성스러울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참조 / 북방 임(壬) 6918. 카도쉬(qâdôwsh) דוֹש

성결과 정결
정결(淨潔)은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은혜의 사건 즉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경(聖潔)은 구원 받은 후 부활의 은혜를 누리는사건이라고 하겠다.

6918. 카도쉬(qâdôwsh) 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3. 레위기 21:6
발음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21:8, 신23:14).
구약 성경 /116회 사용

뜻풀이부

1. 형용사 거룩한, 레 11:44, 45, 19:2.
  • a. 형용사 [옳고 진실된 것을 판단하는 하나님께 사용되어] 욥6 : 1 0 , 시2 2 : 4 ( 3 ) ,99:3,9, 111:9, 사6:3, 40:25, 합3:3,[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에게 사용되어] 사1:4, 5:19,24, 10:17,20, 12:6,17:7, 29:19,23.
  • b. 형용사 [제사장에게 사용되어] 레21:6, 민6:5, 시106:16.
  • c.형용사 [경건한 사람에게 사용되어] 레11:44, 신7:6, 사4:3.
  • d.형용사 [신성한, 거룩한 장소에 사용되어] 출29:31, 레6:9(16),19(26), [하나님의 거룩한 날들에 사용되어] 느8:10,11,[성소에 사용되어] 시46:5(4), 사57:15.
  • e.형용사 복수 קְדוֹשִׁים
  • f.형용사 [여호와께 사용되어] 지극히 거룩한, 수24:19, 잠9:10, 30:3, 호12:1(11:12)
  • g.형용사 거룩한 것[들]. ㉠ [천사들] 신33:3, 욥5:1, 15:15, 시89:6(5),8(7), 단8:13, 슥14:5. ㉡ [하나님에 대해 경건한 성도들] 신33:3, 시16:3, 34:10(9), 단8:24.

* 6942. 카다쉬(qâdâsh)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 28),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뜻풀이부

  • 1.원형 거룩하다, 깨끗하다 
  • 2.원형 거룩하다, 신성하다.
    • a.원형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사65:5, 성스러운 것을 만져서 성스럽게 된 사람에게 사용되어, 출29:37, 30:29, 레6:11(18),20(27). 
    • b.원형 거룩한 예배를 위해 정해진 성물들,출29:21, 민17:2(16:37), 거룩한 것을 만짐으로써 거룩해진 것들, 신22:9, 삼상21:6(5), 학2:12.
    • c.원형 니팔형
    • d.원형 거룩하게 여겨지다, [בְּ를 수반하여] 레10:3, 22:32, 자신을 거룩하게 내보이다, 민20:13, 겔20:41, 28:22,25, 36:23, 38:16, 39:27
    • e.원형 성스럽게 되다, 출29:43.
    • f.원형 피엘형
    • g.원형 ~를 거룩하게 여기다, [하나님으로서]신32:51, [제사장으로서] 레21:8,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다, 출20:8
    • h.원형 거룩함을 선언하다[하나님께 사용되어], [안식일을] 창2:3, [백성을] 레20:8, 21:8, [금식을] 욜1:14, 2:15, [총회를] 왕하10:20.
    • i.원형 신성시하다, [제사장을] 출28:41, 29:1, 삼상7:1, [제단과 성전을] 출29:36,왕상8:64, [이스라엘 백성을] 출19:10,14, 수7:13, [새 건물을] 느3:1, [산을] 출19:23, 거룩한 의식을 거행하다,[제사로서] 출13:2, [전투를 위한 전사들로서] 렘51:27.
    • j.원형 푸알형: [분사형으로] 신성한[제사장이나 거룩한 것들에 사용되어], 대하26:18,31:6, 사13:3, 겔48:11.
    • k.원형 히필형
    • l.원형 ~를 거룩하게 여기다, 민20:12, 사8:13, 29:23
    • m.원형 거룩해지다, ~를 거룩하다고 선언하다, 왕상9:3, 렘1:5.
    • n.원형 거룩하게 하다, [하나님께] 레27:14,삿17:3, 삼하8:11.
    • o.원형 힛파엘형
    • p.원형 깨끗하게 하다, 정화시키다, 출19:22,삼하11:4, 대하5:11, 29:15
    • q.원형 거룩하게 보이다, 겔38:23.

    • r.원형 의식을 거행하다, 절기를 지키다, 사30:29.

거룩이란 정의를 "구별하다(카다쉬)' 라고 합니다.
왜 구별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였을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애굽의 노예생활 430년에서 구원을 받은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무려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한 노예로 살았습니다.
노예근성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도 여전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만 먹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기 생각과 자기 결정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장차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들이 먹고 즐기는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므로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레위기 12장은 산모의 출혈
레위기 13장은 문둥병의 진단
레위기 14장은 문둥병의 정결
레위기 15장은 유출병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7월 14일) 욤 키퍼






거룩이란 한자의 의미는 "임금처럼 듣고 말을 하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임금이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평안하게 지켜주는 것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녀들을 임금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 5. 21 - 1843. 3. 25)은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1835년부터 1843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현재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삶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할 때 후보자가 거룩한 사람인가를 평가하는 항목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리더의 고결함보다 재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듯 보입니다.
정말로 거룩함이 여전히 영적 리더들에게 중요한 것일까요?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명사 '거룩함'(holiness)은 '거룩한'(holy)'이라는 형용사와 '신성하게 하다'(sanctify) 곧 '거룩하게 만들다'라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의미에서 보면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놓음, 구별, 성별, 그분께 이관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성도, 성자라는 뜻이 되는데, 이 단어들은 헌신과 동화(同化)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여기서 헌신이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을, 동화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모방하고 순응하는 행위를 각각 뜻합니다.
거룩함은 크게 4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1. 거룩함은 나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마음'은 개인의 내적 삶의 핵심과 초점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이란 동기부여의 근원이고 열정이 자리를 잡는 장소일 뿐 아니라 모든 사고 작용의 원천이며 특히 양심이 위치한 곳입니다. 거룩함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함은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의 바른 목적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 목적은 올바른 성취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수행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동기의 문제까지 포함합니다.
거룩한 사람에게,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일은 피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의 행동을 유발케 하는 목표, 열정, 욕망, 갈망, 열망, 목적, 그리고 충동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이 능동적이며 민감하게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거룩함은 나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기질'이란 어떤 특별한 반응과 행동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온갖 요소들을 말합니다.
기질은 나로 하여금 환경(상황, 사물, 사람)과 내가 늘 하던 대로 '거래하게' 만듭니다.
기질은 성격을 형성하는 원료이고, 성격은 기질을 사용해 우리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이며, 개성은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으로 최종 결과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부터 기질의 희생자로 전락하거나 그러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속한 기질이 지닌 단점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단점과 관련된 죄는 발견하기가 아주 어렵고 처리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거룩한 인격자들은 자신의 성품 속에 각각의 기질이 지니는 단점은 모두 배제한 채 장점만 종합하여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또 나의 기질이 나를 유혹하기 위해 던지는 독특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3. 거룩함은 나의 인간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거룩해진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뜻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간성으로 존재 안에서 인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해지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닮으려면 바른 인간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인간성을 지니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같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제임스 필립은 "거룩함이란 제대로 알고 보면 멋지고 하나님의 사랑만큼 온유하고 아름답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아름다움은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성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입니다.

4. 거룩함은 내가 맺는 관계와 관련이 있다.

거룩한 삶을 영위하려면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가족과 교회와 사회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야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얻게 된다는 사고는, 아무래도 진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함이란 분명히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세상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제임스 필립은 그리스도인 중에 상대방에게 공감하기를 싫어하고 항상 자신만 조명을 받으려고 노력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결국 이러한 증상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모든 관계를 망친다고 조언합니다.
필립의 말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만 하면 팽창되었던 우리의 자아는 본래의 크기로 축소되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사적인 면이나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성령님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며, 오직 일편단심과 전심으로,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고 그분의 능력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의 향기입니다. 이 한 주간도, 영적 리더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과 속(聖과 俗)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Make every effort to live in peace with all men and to be holy; 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

성인 성(聖), 성스러울 성(聖) = 귀 이(耳) + 𦔻(성인 성) + 壬(북방 임)

풍속 속(俗) = 사람 인(人) + 골 곡(谷) / 골짜기, 깊은 굴 - 𠔁(나눌 별) + 口(입 구)


인간을 종교적 인간(성스러운 인간)과 세속적인 인간으로 나눈다.
종교적 인간은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간의 비균질성,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에 더 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적 실제를 계시한다.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은 고정점, 방향성,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한다. 속된 경험은 공간이 균질적이고 중성적이며 참된 방향성 불가능,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을 나타낸다.

 

보통 교회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 나눔의 표상이고, 천상의 예루살렘을 모방한 것이다.속세에 있는 성스러운 곳, 집의 문지방과 문 역시 공간의 연속성의 단절이며 징표이다. 성스러운 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땅을 정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아그니(불의 신)에게 바치는 불의 제단은 신의 세계와 교류로 소우주적 규모로 천지창조의 재현하는 것으로, 정화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우주화이다. 인간은 신들의 작품인 우주를 인간의 척도로 재현하고 모방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우주산, 성스러운 산과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세계 축으로 신전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은 마을의 성전이나 예배소(우주적 상징)으로 구현된다. 즉 우리의 세계가 코스모스화된다. 집과 주거의 성화를 통해 공간을 코스모스화한다. 주거는 자신을 위해 건설한 우주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낙성식 등으로 구현된다. 종교적인 건축은 원시적인 주거 구조 안에 현존하는 우주론적 상징을 넘겨받아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은 세계의 모방, 초월적인 모델의 지상에서의 재현이며 세계의 재성화이다.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의 의미.

 기원의 시간, 우주창조의 시간(성스러운 시간의 원형)이 우리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더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과 속된 시간, 일상적인 시간으로 구분한다. 종교적 인간은 의례의 도움을 받아 별 위험 없이 일상적 시간 지속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여행한다.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축제에 참여는 성스러운 시간이 최초의 출현과 맞닥뜨리는 것이고, 성소에서의 예배는 속된 시간 지속의 단절이다. 축제는 신화적(종교적)사건의 기념제, 그 사건을 제현, 세계창조의 의미로 제의상의 작업이며 신의 모방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자는 신화적 사건과 동시대인이 되고, 영원한 현재로 생명의 성스러운 차원이 회복되며,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 존재의 신성성을 체험한다.

 

“인간은 위로 열려 있는 장소, 즉 신들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신들과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신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다. 태초에 일어난 신화적인 옛날, 기원의 시간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 강박관념,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존재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신화는 시간의 시초, 최초에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으로서 성스러운 역사를 이야기(신비를 계시하는 것)하는 창조의 보고이다. 성스러운 것이야말로 실재중의 실재로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성스러운 것이 모든 현실적 실존의 중추적 원인으로 신화는 모든 의례 및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 대한 모범적인 모델을 확립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은 자신이 오직 인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의 신성과 종교 그리고 인간의 실존.

자연은 종교적 의미로 충만되고, 세계는 코스모스이다. 하늘의 신성성은 천상의 신들, 무한 초월한 것, 절대적이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아득하게 먼 것, 감추어진 신, 종교체험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농경으로 여러 신은 구체적이고 두드러진 힘의 상징으로 변모하였다. 보통 물은 존재 가능성의 원천, 죄를 씻어냄 정화와 재생을 세례는 대홍수의 반복, 인간과 신과 유사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 신이 창조한 인간 역시 자신을 소우주로 인식한다. ‘나는 하늘이요, 그대는 땅이다’. 우주적 자연에너지와 정신의 통합은 신비적인 의례로 인간이 미리 운명 지어진 모범적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한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은 죽음을 탈신성화, 고정된 거주지는 어떤 실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이의 파괴는 절대적 자유선택 한 것이다.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로 우주적 가치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일상생활 수확, 달력, 가입식,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는 인간에게 각인되고, 그에 따라 의례에 따른다. 결혼은 모두 긴장과 위험을 내포하며 따라서 위기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통과의례에 의하여 수행되고, 죽음 역시 의례가 필요로 한다. “죽은 자는 그 자신의 사후의 운명을 경정하는 일정한 시련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공동체에 의해 승인되고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출생의 상징과 죽음의 상징이 나란히 나타나고, 죽음을 통과의례로 변형하여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근대사회와 신성.

“비종교적인 인간은 탄생, 결혼, 죽음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모든 통과는 그 의례적 성격을 상실해 버렸다.” 로 변하고 있다. 하나의 진보는 종교적 인간의 상황과 그 정신적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다. 비종교적 인간은 탈신성화의 산물이며, 세속적인 인간은 인간 실존의 탈신성화 과정의 결과이다. 그러나 근대인이라고 해도 위장된 신화와 타락한 의례를 많이 가지고 있기에, 인간적 조건과 공존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속적인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가 축적과 변용 그리고 모방이지만, 인간은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이 주는 의미.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종교의 예를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종교학이라는 학문에서 종교는 주로 그 기능적인 정의 “한 집단의 사람들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수단이 되는 믿음과 관습체계- J. M. 잉그”,

 

종교의 시작과 왜 종교가 생겼을까? 지배를 위한 수단, 지배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중적 구조(성과 속)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종교현상의 특수구조로 종교의 본질 이해, 그들 현상의 역사적 연관으로 종교 역사 해명과 서설한다. 낯선 신앙은 기존 종교관행과 비교, 전통적 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종교사의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낯선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그 내부에, 바로 그 중심에 몸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가치를 향해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한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판별함에 있어 우리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 가장 그릇된 행위에 있어서조차 초인간적, 신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방법론도 잘 안내해준다.

 

종교로 본 고대인, 종교는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 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고, 이미 사라져 버렸다. 과거는 종교의 그늘 아래에 살아왔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우리는 항상 현재로만 살고 있으나, 과거라는 그 기억의 저장고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에, 은연중 문화나 풍속에 지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원시인의 종교성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같이 보이다. 그 당시 종교라고 할만한 믿음과 지능이 있었는지.

 

우리나라 문화에서 태어남과 백일잔치, 돌잔치, 각종 시험과 입시, 축하와 애도 등 대학교, 군대에 신입생이나 신참을 환영하는 모임, 집단이데올로기와 개인에서 그 성스러움과 속됨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 세계는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민속 등은 사라져 가고, 물질적인 문명과 거대 종교의 우산아래 머물러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의문의 동물이다. 이 수많은 의문들은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항상 진행형이다. 종교는 인간의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리, 그러나 지배하는 종교는 사라지고 사랑의 종교로 변할 것을 희망한다.

 

엘리아테는 <요가>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한창 인도에 관심이 많은 때, 그 알고 싶음의 욕구로 여러 책을 읽어보았지만, 참고할만한 책은 적었다. 그러다 발견한 보물 같은 책, 요가의 다양한 면 잘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다른 책들, 문화와 종교에서의 상징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 종교학이나 민속학의 중요한 문헌인 것 같다. 성과 속 같은 책들을 통해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과 종교와 민속이라는 것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해준다.





거룩함의 정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말은 절대적인 완전함과 순전함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다.

이 말이 사람이나 다른 대상물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함이란 "구별"이라는 부정적인 개념과 "헌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특히 죄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으므로 죄와 질병과 귀신을 이길 권세를 받은 것이다(막 16:15-18).
죄를 이길 수 있는 이 권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진실로 거듭났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게 해준다(행 1:8).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분이 나를 죄로부터 건져내셨다."

거룩함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5)는 말씀만큼이나 강한 진리이며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중생의 경험 이후에는 육체와 거듭난 영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은 거룩함을 위한 싸움이며,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이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것이다.

구별의 필요성.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자신처럼 거룩한 백성을 요구하신다.(벧전 1:15-16).
아담과 하와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죄는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든지 죄로부터 분리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신(神)인 마귀의 자녀들이다.(요일 3:10, 고후 4:4).
둘 사이의 중립이 되는 사람들은 없다.
이 두 부류는 서로 다르며 구별된다.
하나는 거룩한 백성들-거룩한 제사장들이다.(벧전 2:9).
다른 하나는 부정한 백성들이다.
이 부정한 세계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요구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 6:17).

산 제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구절 말씀은 거룩함과 분리에 더 깊은 의미를 전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의 희생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거룩해야 하며 이 세상과 분리되어야만 한다.

거룩함은 성령이 주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다.
성화(聖化,즉 분리)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시작되며, 믿음과 회개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를 통해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충만과 내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벧전 1:2).
오늘날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법은 석판(石版)에 쓰여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런 법도 없는 분이시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도 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나님의 법을 성령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양심으로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감화와 확신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는 거룩함의 근본적인 기초(基礎)가 내주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직접 가르쳐준다.

방금 전에 우리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확증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거룩함은 성령 충만한 교사와 목사가 가르쳐준다.

요한1서 2:27은 무슨 의미인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 구절 말씀은 단순히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기초적인 거룩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령이 충만한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베소서 4:11-12에 따르면 교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함이란 오직 온전함을 위한 싸움이며, 이 사역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

거룩함은 성경이 가르쳐준다.

성경은 한 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무수한 상황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그 사역의 목적이다.
성경은 모든 문화와 시대와 상황 속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침을 제시해준다.
거룩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행동과 태도를 말해주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서 기대하시는 행동과 태도를 가르쳐 준다.

거룩함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빌립보서 2: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각 개인이 구원을 위한 자신의 법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 객인이 경외(敬畏)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궁극적으로 개인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중생의 체험 이후에 각 개인은 경주의 마지막까지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끝까지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히 3:14)

개인적인 확신.

각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으므로, 각 개인은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령을 받은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교사들과 성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확신이나 또는 불확신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특정한 문제에 대해 자신 스스로가 답을 구해야 한다.
물론, 성경의 어떤 분명한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확신이 되며, 자신이 그것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는 없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다른 신자(信者)는 함께 느끼지 못하는 확신을 주실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 사람의 배경이나 또는 어떤 분야에서의 그의 연약함 때문에 필요한 것일 것이다.
혹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과의 더 밀착된 관계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확신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5,23).
동시에,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확신을 깎아 내려서는 안되며 존중해 주어야만 한다.(롬 14:2-6).
하나님은 개인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축복하실 것이다.
이런 특별한 헌신을 통해서 특별한 축복이 오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法制化)할 수 없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해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역자는 영적 권위가 있으며, 실제로 성도들 사이에서 행동과 의복의 표준을 정할 책임이 있다.
사역자는 신자(信者)들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서를 올려야 할 것이다.(히 13:17).
그러나, 사역자가 "겸손으로 옷 입으시오"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거룩함이 없다면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함은 법제화할 수 없다
- 그것은 마음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거듭난 이후에, 성도는 성령이 주신 거룩한에 대한 근본적인 본능을 가지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성령 충만한 목자에게 배운 것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거역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교파들과 교회들을 비교하려고 애쓴다.
교파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지켜진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사단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하다.
법이나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정도 죄를 피하게 할 수 있지만, 오직 사랑만이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과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려는 소망을 우리 안에 생겨나게 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嗜好)나 편리함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이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신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편지 내용에 따라 살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 안에 계신 그의 성령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또한, 비록 우리의 육신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즐거이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요 14:25; 요일 2:3 ).
반면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거룩함에 대한 몇가지 기본 원리.

성경은 참된 거룩함의 필수적인 요소를 가르쳐준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
이 세가지 성경구절은 실제 성결 생활의 핵심을 묘사한다.
거룩함에 대한 어떤 특정한 기준을 세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
먼저, 우리는 죄악의 세상처럼 행동해서도 안되며, 또 그런 모습으로 비쳐져서도 안된다.
심지어 우리는 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죄의 모양을 가진 것이라도 피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는 세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얼마나 세상과 닮을 수 있는가?" 또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도는 어디까지인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 조절과 억제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영(靈)에 복종해야 한다.
절제(節制)란 또한 모든 일을 극도로 또는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종, 타협, 또는 세속화의 한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되며, 또한 스스로 의로움, 위선, 그리고 겉치레의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서도 안된다.
세상을 본받지 않으며 모든 일에 절제하는 원리는 본서에서 논의되는 모든 분야에 대해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며, 그래서 우리는 죄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행 1:8; 롬8:4).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롬 8: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즉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우리는 죄인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만 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97: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악을 미워하게 된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 존재로서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더욱 공격적이고 거침없이 말하며 외향적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더욱 보수적이거나 태평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이 왕으로서 다스린다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차이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들의 본래의 성품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는 악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역자는 죄에 대해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근본적인 성품에 상관없이 그는 죄를 구별하고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사역자의 태도.

사역자는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책임이 있다(겔 3:17-19).
사역자는 또한 죄를 열거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엇이 죄인지를 알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역자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준을 세울 의무가 있다.
이 기준들은 성도들 특히 지도자나 타(他)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방문객(또는 초신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역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은 죄를 참을 수 없으며, 사역자로 하여금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게 만든다.
성령은 사역자로 하여금 필요할 때에는 담대하게 사람들을 꾸짖고 훈계하게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감동이 사역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힘을 주도록 성령은 그의 삶 속에서 왕으로서 다스려야 한다.
비난하는 데 빠른 사람, 빨리 분노하는 사람, 참을성이 없는 사람도 성령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훈계하는 데 있어서 친절하고 온유해질 것이며, 사람들의 죄악을 볼 때에 사랑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넘쳐야만 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 설교하게 될 것이다.(욜 2:28).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므로, 사역자도 역시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며, 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할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역자는 그의 마음속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너무 태평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를 싫어해서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 성격상 저는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할 수 없어요.
저는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를 할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죄에 빠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을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되기 때문이다.
참 사랑을 온유함 이상의 어떤 것이다.
만일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한다.
그가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역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은 사역자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전달자로서 부적합하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설교하지는 않는다.
사역자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나 농담꾼이 아니다.
물론, 설교단에서 유머나 상상 또는 창작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의 기본적인 소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단지 어떤 사람이 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계속 죄악 속에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사역자는 성령으로 재충만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은 약한 그리스도인일 뿐이며 절대 지도자는 아닌 것이다.

사역자는 전달자일 뿐이며 저자(著者)가 아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는 위대한 목자장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사역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없다.
사역자는 단지 전달자에 불과하다.
우편배달부가 편지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불법이다.
편지 수령인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우편배달부를 비난할 권리가 없으며, 그에게 내용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우편배달부는 저자가 아니며, 내용을 바꾸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할뿐이다.
사역자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는 없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이해해야할 성구들.

죄와 거룩함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 이해해야할 필수적인 중요 성구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6장과 8장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총괄주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죄의 법

(롬 7:20).

바울은 이 세상에는 모세의 법(法)이나 양심의 법(法)보다 더 큰 죄의 법(法)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구약의 법이나 정신적 동의와 이성적 추론의 과정이 사람의 속에 내재된 기본적인 죄의 본성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 죄의 법은 또한 죄의 본성, 옛 사람, 옛 본성, 첫 아담, 육신 등으로 불린다.

성령의 법

(롬 8:2).

성령의 법은 유일하게 죄의 법보다 더 큰 법(法)이다.
이것만이 사람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이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사람의 내면에 새로운 본성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본성은 죄를 소원하지 않으며, 그 안에 하나님의 법과 소원을 포함하고 있다.
선행이 성령의 법을 대치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 3:9).

이 성구는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연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를 통해 위의 성구가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음식이 당신을 병이 나게 만든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전 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행동이 당신이 매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당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앞의 두 경우에 있어서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은 신체적으로 그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나 지식적으로 그것을 꺼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본성에 의해 죄로부터 스스로를 자제(自制)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이 죄를 이길 힘과 승리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죄에 대하여 죽음

(롬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그 다음 몇 구절은 계속해서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회개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섬겨서는 안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롬 6:7).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과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본다면, 죽은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죽은 사람의 뺨을 때리든지 혹은 그 사람의 눈앞에서 천만 원이라는 돈을 흔들어 보이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죄에 대한 어떤 유혹에도 우리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히 죽었고, 우리 인생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롬 8:38-39).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귀신, 천사, 사람, 시험, 환난, 시간이나 환경 등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권세가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사단 자신도 우리를 우리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9; 요일 5:18).
그러나 그리스도인 자신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깨어버리고 배교할 수 있는 것이다(롬 11:20-22; 벧후 2:20-22).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요일 1:8).

이 성구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자주 오용(誤用)되어왔다.
이 구절은 죄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옛 본성은 억제된 채로 그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는 아직 변화되지 않았고,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
그래서 요한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 속에서 어느 시점에 자신의 죄의 본성이 뿌리째 뽑혀버렸다는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신자(信者)와 그의 죄의 본성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이 있지만, 죄의 본성이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사실상, "죄에 대하여 죽은"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신자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요점이다.
"죄인-성도"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거룩한 성품을 주셨으며,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셨다.
성령은 영원히 성도 안에 내주(內住)하면서 죄에 대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인을 도와주신다.
예를 들면, 사람이 라디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악한 본성이나 옛 사람을 이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이 그리스도인이 듣기에 부적합한 것이라면, 그는 그저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는 라디오가 자신의 사고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성령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한, 그는 죄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죄를 꺼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 영역에서 완전히 다스리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다른 주인에게 굴복시키는 것이고, 그 주인의 종이 된 것이다(롬 6:16).
90퍼센트 그리스도인이나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없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그리스도인은 죄인인가?

앞에 언급한 구절로 조명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입장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사람은 스스로를 사단의 영향 아래, 그리고 죄의 본성 아래로 떨어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 사람은 즉시 우리의 대언자이며 모사(謀士)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요일 2:1).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직접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히 4:14; 요일 1:9)

개인적인 기도.

예수님께서 하는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게 되므로, 개인적인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에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절대로 안된다.
오히려 즉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든 아니면 우리 자신이 직접 말로 간구하든,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으며, 우리를 은밀한 죄와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전 11:31).
우리는 또한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도는 회중 앞에서 소리를 내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이길 수 있는 힘을 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과 영의 더러운 것

(고후 7:1).

바울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구절에서 "육"은 육신적인 요소를 뜻하고 "영"은 사람 속에 있는 영적인 요소를 뜻한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육과 영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향한 음욕을 마음의 간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죄이며, 육신은 실제로 간음을 행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여전히 죄이다.
하나님께는 마음속의 미움이 실제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깨끗케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기 위해서 육과 영을 깨끗케 해야 한다.

육은 단지 영이 거하는 거처일 뿐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즉시 싸움-육과 영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되는 이 전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성령이 이 전쟁에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실 것이다(딤후 2:5).

사단의 메시지.

마귀는 우리에게, 우리가 아직 육신 안에 있으며 또 육신이 약하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없다고 믿게 하려고 애쓴다.
그는 우리가 매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것도 사실이다(롬 8:3).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히 2:14).
예수께서는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기셨으며, 그분이 우리의 본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우리도 역시 육신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함.

성경은 우리가 완전한 데로 자라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2절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하고, 빌립보서 3장 15절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기"위하여 5가지 사역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절대적인 완전함과 상대적인 완전함은 구별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절대적인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이 성장 과정이 진행되는 중에라도, 우리가 적절하게 성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완전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 개월 된 아기도, 비록 이(齒)가 나지 않았고 완전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걸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완전한 아기인 것이다.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이것은 완전한 것인데, 나이에 알맞게 적당하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후에도 이 아이가 여전히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과 싹은 아직 사과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그 꽃은 작은 푸른 공 모양이 될 것이며, 그 후에 익게 될 것이다.
각 단계마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다.
이 예는 우리가 완전해지라는 권면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며 우리의 잘못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처음 중생의 체험을 한 바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완전함의 다른 수준으로 인한 관용.

어떤 사람들은 다름 사람들보다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듭날 때, 그들은 훌륭한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이교도나 무신론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할지라도 완전함의 수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마 7:1).
특히,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거룩함의 어떤 기준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성도를 완전하게 되도록 감독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성령과 사역자의 일이다.

성도뿐만 아니라 교회도 완전함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성도들의 배경과 초석(礎石)에 달려있다.
그것은 또한 사역자에게 달려있기도 한다.
어떤 사역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심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양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없다.
또 어떤 사역자들은 자신의 개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므로 그 양들은 완전한 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이 장(章)을 쓴 목적은 거룩함이란 일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일 순종해야 하는 계명임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벧전 1: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질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임을 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티나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엡 5:27).
만약 우리에게 주름이나 얼룩이 생기면, 우리의 회개를 통해 예수의 보혈로 그것을 즉시 씻어야 한다(요일 2:1).

성령은 우리에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우리의 옛 본성이 죄와 세상을 향해 죽어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의롭다함(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다함)을 받았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단순히 중생의 체험을 하고 거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자.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마태복음 5:38-48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거룩은 영어로 “Holiness”라고 하고, 온전은 영어로 “Perfec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말 같지만,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우리 인간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당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을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레위기의 말씀은 그 배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나서,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광야에서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삶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겁니다. 현재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별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별은 선택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특권의식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었으니까 특권의식을 갖고 자기 의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성경은 “성도”라고 칭합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완벽하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공자님의 제자들이 더 잘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목적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윤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렇게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로 바뀌었는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셔서 부활시키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날인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주일)은 그냥 쉬는 날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시간이 쉬는 날에 나를 귀찮게 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배가 쉬는 날 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이건 거룩한 주일을 전혀 모르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처럼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별하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전은 왜 거룩한 장소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한 겁니다.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예배 하는 거룩한 백성! 모두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입니다. 시간이 중요하고, 장소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은혜입니까?

 

십자가가 왜 거룩합니까? 십자가는 원래 전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범죄자 중에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범죄가 가장 추악합니까? 최근에 뉴스를 보니까,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 살 먹은 아들은 때려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 때문에 평소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매일 때렸답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 살 먹은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추악하죠? 또 반대로 이런 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집안 어른한테 받은 세뱃돈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추악하죠?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추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형시키던 형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이 십자가라고 증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구별하셔서, 십자가를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추악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좀 이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올바른 이웃관계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7절 말씀에 “형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8절 말씀에 “네 자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5장 4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을 가족이라는 범주,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내가 굶고 있는데 밭에 있는 이삭을 모두 거두어 갈 수 없습니다. 가족 것인데, 내 것인데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억압하고 착취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저주하거나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미워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원수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족과 나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나 저지를 수 있는 것들이지, 가족이나 나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진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그들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햇볕을 악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농사, 즉 먹고 사는 일에 꼭 필요한 비를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시냐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불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고 하늘 나라의 법칙을 이 땅에 펼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구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모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그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덧입혀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해지는 겁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덕과 윤리가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붙들고 거룩한 백성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거룩에 대한 교훈

한눈에 남의 결점 보는 사람은 예리한 사람입니다.
보고 비판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냥 덮어주는 사람은 푸근한 사람입니다.
그 결점 보완해주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돕고도 말이 없으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겉모습은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택함 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란 걸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분의 겉모습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구세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정신병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모세처럼 홍해바다를 가르거나 엘리야처럼 불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저 하나님의 세계와 몇 가지의 이적과 참 말씀만을 전하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영접 받은 우리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참 구세주이고 진정 거룩하신 분이시란걸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흠이 없고 죄가 없고 티가 없는 분이시란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겉모습에 반해 주님을 아버지로 영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의 학벌이나 외모 ,어떠한 외부적인 바탕을 보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런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지 못하고 “겉만 ” 치중하는 서기간과 바리새인의 거룩함을 닮아가려 합니다.

레위기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시편 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요한복음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거룩한 사람

거룩한 사람은 주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내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과 마음을 하나로 합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성형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줍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빛은 성형으로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입니다.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연스럽게’ 거룩해 지는 사람입니다.

‘인위적으로’  거룩해 지려고 스스로를 꾸미며 포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 영생의 아름다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자연스러운’미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일부러 신령한척 하거나 성스러워 보이려 하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려고도, 능력을 나타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을 감추고 마음자세를 낮추며 주님만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외모가 아닌 심령에서,  겉이 아닌 속에서 진실함을 보이기에 주님의 기준이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도행전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로마서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사람은 겉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숨은 마음을 보신답니다.

베드로 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겉만 ‘ 거룩해 보이려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서기간과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3: 25-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누가 복음 11:39-41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진정한 거룩함은 우리 속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사회적 부와명예, 매력과 외모, 은사능력과 엘리트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심령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랍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이요.

레위기 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채찍질에 누더기 옷을 입고 복음을 전하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라 칭함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닮아갔던 거룩함은 세상의 화려한 거룩함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진리를 사랑했고 말씀을 사랑했고 천국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겉만 치중하고 외식하길 좋아하던 서기간과 바리새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속이 하나님을 닮은 진정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자신의 겉을 드러내는 거룩함이 아닌, 진정 심령 에서부터 빛이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마태복음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은 모세에게 회막을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천막입니다.
구별된 장소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그 공간에 제한을 받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때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재앙이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용납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이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반드시 회막문으로 그것을 가져와서 잡아야 했습니다. 그 피는 오직 하나님께 대속의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흘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분별하게 그들의 탐욕대로 살아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가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양식을 위해서도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회막 앞에서 모든 짐승을 잡으라는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성찬이 되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메추라기떼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은 탐욕으로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우리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

회막 문앞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음란한 방법으로 섬기던 숫염소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음란한 방법이라는 말은 몸을 파는 여인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음란한 여인의 자녀와 같습니다.

어떻게 그 음란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은 가정 안에서 소중한 선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서 일어나는 성적 행위는 극히 잘못된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준비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사람들은 혼인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배우자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와 요구가 없다면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기뻐하시는 성전입니다.
음란한 여인이 되지 마십시오.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로 폄하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고픔, 목마름은 거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러운 것, 기어다니는 것 근처에도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가장 크고 존귀한 보물은 거룩이다.
레위기 1-10장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인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에 관해 알려 주었다면
11장-15장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죄와 죄의 오염 요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교제에 의한 부정(11:),
출생에 대한 부정(12:),
문둥병에 의한 부정(13:-14:),
유출병에 의한 부정(15:)이다.

1.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거룩한 생명이다.

주의 이름이 복음이다.

① 예수 - 죄를 씻고 벗어나게 하는 생명: 죄, 타락한 세상과의 관계
② 그리스도 - 성령의 생명(거룩한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
③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 종자가 거룩한 씨, 하나님의 씨이다.
④ 임마누엘 -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내 안에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주신 이 거룩한 생명을 잘 관리하고 훈련하여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2. 거룩은 나의 죄악된 존재를 인정하는 것 (12:)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 여자 아이를 낳으면 80일간 정결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는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출산에 따른 피, 분비물등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출생이 부정함을 알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정결기간이 지난후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다.
이는 속죄제를 통해 존재 자체가 오염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제는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나의 존재 전체를 드리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 믿은 이후에 무엇을 버렸는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옛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자.

3. 거룩은 하나님의 세우신 영적질서, 권위에 복종하는 것 13:-14:

문둥병의 영적의미는 무엇일까?

1) 문둥병은 불치의 병으로 처음에는 외부에 나타나다가 점점 살이 썩는 무서운 병이다.
문둥병의 특징은 확산성이다. 부정적 영향력을 자꾸 끼치면 영적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다.
2) 성경에는 영적 교훈으로 문둥병을 죄의 모형으로 삼았다.(시 38:5, 11)
성경에 나타난 문둥병은 미리암의 문둥병(민 12:1-10), 게하시의 문둥병(왕하 5:20-27), 웃시야 왕의 문둥병(대하 26:16-21) 등이 있다. 모두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문둥병이 생겼다. 영적지도자를 대적하면 기름부음이 끊어진다. 영적 문둥병에 걸린다.
3) 문둥병이 들면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성소에서 쫒겨났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쫒겨나 진 밖에서 거해야 했다.
4) 문둥병이 들면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했다. (레 13:45-46)
5) 문둥병은 몸(존재) 안에 있고 옷(우리의 행위)에 있고 집 안(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있다. 6) 문둥병에 의한 부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회개하고 순종함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나아만의 경우는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다.

4. 거룩은 자신의 내면을 제제 하는 것 (15:)

절제되지 않는 피의 유출과 설정은 우리 속에 절제 되지 않는 죄의 가득함을 상징한다.
욕심, 혈기, 고집, 증오, 거짓됨, 악한 생각 등 우리 속에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악한 것들이 가득함을 안다. 유출병도 속죄제와 번제를 드림으로 정결케 된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을 좋아하신다. 더러운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자. 하나님의 성전답게 거룩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자.

5. 거룩은 거룩한 영향력을 받고 주는 것 (11:)

정결한 사람,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2-3) - 구별이 있고 말씀의 반추를 위해 수고가 있는 사람

2)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9)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람(지느러미)과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 (비늘)

3)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씨를 음식으로 먹는 새(13-19)
- 부정한 새들은 씨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고기와 사망에게 삼킨바 된 사체를 찾아 먹는다.

(1) 맹금류 - 매와 독수리 :만나면 쏘아대고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2) 고독한 새들 - 올빼미나 당아새, 까마귀: 하나님의 사람은 우울함이나 슬픈 정서 가운데 살면 안된다.

(3) 불결한 것을 먹고사는 새들 - 뱀을 먹고사는 황새이다. 또 벌레를 먹고사는 새도 부정하다고 했다. 우리 자신들이 모든 부정한 것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부정한 것에 빠져 있는 자들과의 교제까지도 삼가야 한다.

4) 날개가 있고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21-22)
-세상에서 살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 문화, 지적 정보들, 주변상황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거룩한 사람들은 공급의 통로를 하나님께로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하다. 이방문화를 조심하자.




눈동자(스가랴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표현합니다.
눈동자(케이셔 에네카) - 눈 안의 작은 사람처럼 /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것

시편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동성애(同性愛)에 대한 신학적 고찰 / 이상원 교수

 親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단체와 활동에 대한 상징으로 무지개를 내세웠는데, 이들이 내세우는 무지개 색상은 여섯 개입니다.
일곱 개를 내세웠다면 더 큰 혼란에 생겼을 텐데, 동성애자들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통해서 여섯 색상을 내세웠든지 간에 여섯 색상 무지개는 동성애자들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동성애의 영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분홍 - 섹슈얼리티
빨강 - 삶
주황 - 치유
노랑 - 태양
초록 - 자연
청록 - 예술
남색 - 조화
보라 - 정신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숫자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무지개 색의 의미

 -
무지개가 7색이라고 알려지게 된 건 뉴턴이 스펙트럼 실험으로 찾아낸 연속 스펙트럼의 색을 토대로,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에 따라서 색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빨 [RED]

"의미 : 공격적, 남성적, 사랑, 역동적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빨간색은 확실히 체력, 건강, 생명력을 상징하는 색이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향적이고 적극적, 정력적, 충동적인데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빨간색을 좋아한다. 
게다가 야심적인 성격도 있어서 가끔 앞뒤를 안 가리고 행동을 하는 일도 있다. 
불행한 일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사람들을 비난하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를 잘한다. 
통상적으로 단조로운 일에는 곧 싫증을 낸다. 
내성적인 경향이 부족한 만큼 자신의 단점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냉정하고 객관적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자기자신도 알고 있다.

주 [ORANGE]

"의미 : 명랑, 따뜻함, 다정함, 외향적

주황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주황은 사회적인 색으로 불리는데 발랄하며 명예를 상징한다. 
주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러울 정도로 건강에 넘쳐 빈부, 총명함과 어리석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며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이해심이 빠르다. 
이야기할 때는 깊이는 없지만 유창하다. 
사람이 좋아보이며 사교적이고 혼자서 외톨이로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

주황을 좋아하는 타입은 미혼인 채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독신 남성과 독신여성이 많이 눈에 띈다.

노 [YELLOW]

"의미 : 고귀함, 경고, 밝음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노란색은 심리적인 고민에 호소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표정 또한 풍부해 많은 사람들에게 다스함을 안겨준다. 
늘 파티의 중심인물이며 사람들 중에 최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그들은 때로 책임을 회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항상 칭찬받고 싶어한다.

초 [GREEN]

"의미 : 평온, 편안, 치료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초록색은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는 색으로 희망, 회복, 평화를 나타내며 기품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좋아한다. 
초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솔직하고 사회의식이 있으며 도덕심이 풍부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약간 말이 많기는 하지만 매우 뛰어난 교육자도 많이 있다. 
그들은 꽤나 사교적이고 군집성이 있는데 사실은 농촌의 조용함과 평화쪽을 더욱 
사랑한다.

파 [BLUE]

"의미 : 평온함, 고요, 편안, 우울

파랑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굽힐 줄을 모르고 나쁘게 표현하면 독선적이다. 
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자신의 목적이나 근거를 위장한다.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룹에 참가하기를 좋아한다. 
또 감성이 뛰어나고 자제심이 있다. 
반드시 선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 행동, 복장에 매우 신경을 쓴다.

남 [INDIGO]

"의미 : 차가움, 우울, 무거움

남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남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극성이 부족하며 웬만한 일에도 감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 [PURPLE]

"의미 : 고귀함, 병, 불안, 지저분함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

보라색은 고귀함과 지저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색이다.
주변상황에 따라서 극단으로 바뀌는 색이라 할 수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지향성이 있고 예술가에 압도적으로 많다.
일반적으로 소화하기 매우 힘든 색이다.

 LGBT    -

  • 빨강
    빨강은 안전색채로 정지, 금지의 뜻으로 방화, 금지표지, 소화기 경보기, 긴급정지등에 쓰인다.
    색채 중에 가장 자극적, 감정을 고조시킨다. 빨간색은 태양이나, 불, 피, 혁명을 연상시키므로 정열과 열정, 적극성, 흥분 등을 상징하기도 하며, 위험이나 경고를 표출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으로도 많이 사용되며, 검정색과 함께 사용하면 공포, 죽음, 악마 등을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빨강에 흰색을 섞으면 분홍색이 되는데, 이는 파스텔 톤으로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심리적으로 빨강은 부정적인 사고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며, 활기와 야망을 갖게 한다.
  • 주황
    주황은 시각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난색이며, 약동, 활력, 만족, 적극 등을 상징한다.
    채도가 높은 빨강과 노랑의 중간색인 주황은 명랑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융화가 잘된다.
    주황은 식욕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산업현장의 안전색채로 사용하고 있다.
    주황에 흰색을 섞으면 밝은 베이지색이나 갈색 등으로 변하게 된다.
    이때는 은은하고, 따뜻한 자연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심리적으로 주황은 기능저하를 막아주고, 감정을 자유롭도록 도와준다.
  • 노랑
    유채색 중에서 명도와 채도가 가장 높은 색으로서 명랑, 생동감, 즐거움 등의 느낌을 준다.
    또한 가장 이상적인 노랑인 황금색은 황금, 돈 등을 상징하여 권위, 풍요로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안전색채에서는 '주의'의 뜻을 가지고 있다.
    노랑과 검정의 줄무늬로 된 색채는 명시도가 가장 높게 되므로 눈에 가장 먼저 띄게 된다.
    동양의 방위색에서도 노랑은 중앙과 대지를 나타내고 있다.
    심리적으로 노랑은 자신감과 낙천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도록 도움을 준다.
  • 녹색(초록)
    녹색은 자연 속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색으로 평화, 안전, 휴식 등을 상징하고 있다.
    노랑과 파랑의 혼합색인 녹색은 온도감에서는 중성색에 속하므로 강렬한 느낌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므로 가장 친근한 색으로 전개될 수 있다.
    안전색에서는 안전과 행 및 구급, 구호의 뜻을 가졌으며, 대피장소와 방향, 비상구, 진행신호기, 구급상자, 보호기구상자, 들것의 위치, 구호소 등의 표지로 활용되고 있다.
    심리적으로 녹색은 스트레스와 격한 감정을 차분하게 도와주며,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 파랑
    파랑은 전세계적으로 기호도가 가장 높은 색으로 상쾌함,  신선함, 물, 차가움 등을 나타낸다. 또한 냉정, 신비로움 등을 느끼게 한다.
    파랑색은 문학적인 표현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파란 꿈', '파란 잎새' '파랑새' '청운의 꿈' 등의 표현이 있다.
    또한 한색의 대표적인 색으로 차가운 느낌과 침정(진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심신의 회복력과 신경계통의 색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심리적으로 파랑은 불면증을 완화시키며, 명료성, 창조성을 증가시킨다.
  • 남색
    남색은 파랑계통의 느낌을 가지면서도 좀 더 깊고, 차가운 물을 연상케 한다. 또한 심원, 추위, 깊은 계곡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어둡고 둔하며 수축성과 후퇴성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신경계통과 눈의 피로 회복에 사용된다. 심리적으로 남색은 정신병 치료에 효과적이며,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진정제 역할도 하게 된다.
  • 보라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혼합된 색으로서 우아함, 화려함, 풍부함, 고독, 추함등의 다양한 느낌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왕실의 색으로도 사용된 보라색은 품위 있는 고상함과 함께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게도 한다.
    중성적인 보라색은 예술감, 신앙심을 자아내기도 하며, 푸른 기운이 많은 보라는 장엄함, 위엄 등의 깊은 느낌을 주며, 붉은 색 기운이 많은 보라는 여성적, 화려함 등을 나타낸다. 심리적으로 보라는 쇼크나 두려움을 해소하고, 불안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정신적인 보호 기능을 한다.





그리고 육(6)은 일곱(7)에서 하나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따라서 육(6)은 영적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에게만 있는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려고 시도했다가 타락하여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땅으로 내쫓겼던 마귀 · 사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666은 사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계 13:18).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여섯 색상 무지개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은 동성애가 사탄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원래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 이 세상을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담은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은 일곱 색상 무지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상징이 동성애자들에 의해서 살짝 변형된 모습으로 사탄 활동의 상징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무지개라는 말을 하면 동성애가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지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회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상징들 가운데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고 기독교의 아름다운 유산을 소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무지개의 진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말을 하면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동성애에 관련된 세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는데,
첫째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둘째는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셋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을 같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종말의 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性) 질서를 정해놓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은 문화대명령(文化大命令)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문화대명령은 뒷부분부터 거꾸로 차례대로 내용을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땅을 정복하는 임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이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명령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둘째, 인간이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둘만의 힘만으로는 하늘과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손을 낳아야 하고 계속해서 많은 후손이 태어나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채워야 합니다.

셋째, 문화대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창세기 1장 27절에서 사용된 남자와 여자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말로 남자 혹은 여자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의 유형은 “잇쉬”, 남자이고 하나는 “잇샤”, 여자입니다.
우리말로는 잇쉬는 남자, 잇샤는 여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잇쉬와 잇샤는 몸과 영혼을 모두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2~24절까지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잇쉬와 잇샤입니다.

창세기 2장의 맥락에서는 전인적인 삶 속에서 영위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면 잇쉬와 잇샤는 어떤 관계 있을까요?
잇쉬와 잇샤는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동등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능에서는 여자, 곧 잇샤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음을 말함으로써 잇쉬와 잇샤의 두 관계가 동등한 관계가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언어학적으로도 뒷받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 기능에서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남자를 의미하는 잇쉬를 어간으로 해서 모음 하나가 붙어서 여자를 의미하는 잇샤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언어학적으로 볼 때 잇쉬라는 어간이 없으면 잇샤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은 잇샤가 지음 받은 과정에서도 확인됩니다.
잇샤는 잇쉬의 갈비뼈를 재료로 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잇쉬의 갈비뼈를 빼고는 잇샤의 지음 받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창세기 2장 24절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잇쉬와 잇샤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으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합니다.
육신의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잇쉬는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서 여자와 합해야 합니다.
“합하다”는 잇쉬와 잇샤의 두 몸이 하나로 융합되어서 신체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하나의 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합하다”로 번역된 동사 “다바크” 밀착하다”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며,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다, 가깝게 접근해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다바크”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가 근접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잇쉬와 잇샤가 가까이 근접해서 지낼 때 무엇을 목표로 생활해야 하느냐? 한 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룰 지로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은 미완료 문장으로 보통 명령형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부부가 지향해야 하는 푯대, 목표를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한 몸에 도달하는 부부는 거의 없습니다.
이쉬와 이쉬아가 부모를 떠나 부부가 되면 바로 한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된 시간은 이쉬와 이쉬아는 한 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둘째, “합해서”와 한 몸

합해서와 한 몸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인 “한 몸”도 신체적으로 융합이 되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자웅동체(雌雄同體) 또는 양성적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잇쉬와 잇샤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로서 하나로 융합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습니다.

셋째, “한 몸”은 상호보완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섞일 수 없는 독립된 두 개체가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기능의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가까이 접근하거나 밀착해서 온전하게 작동되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능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말은 잇쉬와 잇샤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에 있어서 남자, 존재에 있어서 여자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우나 기능에서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

넷째, 성경에서 “몸”은 히브리어는 “바싸르”, 헬라어는 “소마(σŵμα)”로 이는 단지 신체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일이 없고 몸과 영혼이 어우러져 몸을 가지고 현세 안에서 영위하는 삶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싸르”는 관계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한 몸”은 잇쉬와 잇샤가 생각 · 행동 · 생활에 있어서 서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서로 보완해 가면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되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는데, 그것은 “자카르”와 “네케바”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는 바로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카르”와 “네케바” 사이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관계를 전제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영혼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체를 묘사할 때 잇쉬와 잇샤를 사용한 모세는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하였습니다.
“자카르와 네케바”는 인간과 영혼이 없는 다른 동물에게 공통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자카르는 수컷”, “네케바는 암컷”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체 구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했다는 것은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성 정체성이나 성별을 결정할 때 영혼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생물학적 신체구조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젠더 이론(Gender theory)”을 거부합니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성 정체성과 성별은 염색체와 생식기 구조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염색체가 XY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보에 따라 남성 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남자이고, 염색체가 XX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도에 따라서 여성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여자입니다. 성별과 성 정체성을 결정할 때는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주관적인 정서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자카르와 네케바”도 상호보완적으로 역시 이해해야 합니다. “자카르와 자카르”가 성관계하거나 “네케바와 네케바”가 성관계를 하면 성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문화대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 · 생식계라는 4대 핵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는 다른 신체의 도움이 없이 한 몸 안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식계만은 다른 성(性)을 가진 배우자와 관계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남성 생식기는 정자만을 생산하고 여성 생식기는 난자를 생산하는데, 정자 혼자로는 자녀 생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을 할 수 없고 난자 역시 출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카르와 네케바”는 성(性)과 출산에 관한 한 그 특성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는 자궁이 없기에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수 없고 이는 여성 고유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산 자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창 3:20) 그뿐 아니라 남자는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울 수가 없습니다. 호르몬 분비에서도 “자카르와 네케바”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의 경우는 네케바보다 평균 약 일천 배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
창세기 9:20- 27

인류의 첫 시조인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한 인류는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여덟 식구를 – 노아, 노아 아내, 세 아들 셈, 함, 야벳과 아들의 세 아내 -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 때문에 현대의 인류 문명과 연속성을 가진 문명은 사실상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여덟 식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말한다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 문명권인 수메르 문명,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이집트 문명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9: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 이후, 노아 가족들의 활동에 관한 특별한 기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9장 20~27절까지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 이 사건이 특별히 들어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노아의 홍수가 끝난 이후에 인류문명이 시작되는 시초를 알리면서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장막에 누웠을 때 세 아들이 아버지 노아에게 한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단순하게 보면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지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기를 피하고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가려 주었고 동시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난 노아가 함이 자기 몸을 보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무리가 뒤따릅니다.

첫째, 누군가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우발적인 행위가 무서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이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는 관행, 즉 우발적으로 어떤 사람의 벗은 몸을 스쳐 지나가듯이 봤다면 이 행위가 굉장히 저주를 받을 만큼 무서운 행위가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관행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둘째, 노아가 저주를 내렸다는 말은 함이 한 행동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 아니고 인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도덕적 악행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심각한 죄가 아니고 함이 악의가 없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인데 이런 행동에 대해서 노아가 후손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무서운 저주까지 내렸다고 하면 노아는 아주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이 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저주를 내린 것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술에서 깨어나서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저주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의 행동을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것은 함인데, 왜 엉뚱하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행동을 다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실제로 원문으로 본문을 분석해보고 그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면 함의 행동이 근친 간의 동성 강간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꾼이 되었고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창세기 9장 20절에 포도 수확을 한 다음에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었다”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벌거벗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갈라”인데, 본문에서는 태(態)가 히트파엘 형이라는 태(態)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일곱 개의 태(態)가 있는데, 그중에서 히트파엘형은 제일 나중에 나오는 태(態)입니다.
(칼형, 니팔형, 피엘형, 푸알형, 히필형, 호팔형, 히트파엘형)
히트파엘 형은 일종의 수동재귀동사로서 “자기 스스로 옷을 벗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벗겨지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수동적인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동사입니다.
제 판단에는 두 번째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 술에 취한 사람이 스스로 옷을 벗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옷을 입은 대로 잠들고 옷을 벗어야 하겠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술 취한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옷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잠자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주사 습관은 옛날이랑 오늘날과 거의 똑같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겨 주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잠든 노아의 옷을 누가 왜 벗겼느냐? 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하체를 가린 옷을 평범한 상황에서 벗게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벗깁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습니까?
옷을 벗길 이유가 없고 본인 자신도 벗을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면 당연히 벗긴 부분을 담요 등으로 가려 주거나 다른 옷을 입혀 주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옷이 벗겨진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벗긴 다음에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행위가 아닙니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벌거벗다”라는 단어가 “스스로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겨짐을 당한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사람의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행위를 뜻하는 용어로 대부분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와 근친적인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표현할 때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낸다”라고 표현합니다.

신명기 27: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2:30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에스겔 22:10
‘네 가운데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구합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 말씀은 모두 성관계를 표현하는 구절들입니다.
또한, 강간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벗은 몸을 드러낸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7:3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16:37
‘~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23:10
‘그들이 그 하체를 드러내고 그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그 누명을 여자에게 드러내었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문을 행함이니라’,

23:29
‘~ 너를 벌거벗겨 적신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음행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들은 모두 강간을 의미합니다.

자기 스스로 옷을 벗는 행위도 간음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에스겔 16:36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를 성적인 수치스러움을 뜻하는 헬라어 “아스케모쉬네(부끄러운 일)”으로 번역했는데, 바울로마서 1:27에서 “성교”를 가리키는 데 바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자기가 스스로 몸을 드러내서 벌거벗은 몸이 되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김을 당하든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관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22절 전반절은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기록합니다.
22절 첫 절이 “함이 장막 안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시작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함은 아버지의 장막 안에 이미 머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함이 장막 밖에 있다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하체를 흘낏 본 것이 아닙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다음에 장막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은 있는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은 장막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벗겼든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든지 했던 것입니다.

벌거 벗다벌거 벗기다”라는 표현이 모두 성관계를 의미하고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함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근친적인 동성 간의 강간을 범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론을 강화해주는 것은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라는 구절입니다.

레위기 20:17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이 구절은 형제와 자매간의 근친 성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모세가 레위기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면, 노아의 경우에도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22절의 하반절은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도 함이 우연히 아버지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라면 납득이 안됩니다.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것이 민망했다면 옷을 입혀 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함은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입혀주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냥 벗은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서 두 형제에게 의도적으로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하게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채로 장막 안에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아버지 노아가 깨어난 후에 바로 세 아들에 대해서 축복과 저주를 담은 미래 예고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함도 상속과 관련된 운명을 결정하는 미래 예고가 곧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함은 막내이기 때문에 상속과 관련하여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어떤 형태로든 상속권을 빼앗아 오려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삐뚤어져서 노아에 대하여 근친적인 동성간의 간음을 범하도록 이끌었다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삽입하는 입장에서 남성 동성애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되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아버지와 형들의 권세를 박탈하고 족장인 아버지를 계승하는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겁탈하고 그 사실을 일부러 형들에게 알려서 형들에게 도전한 것 아닌가? 라는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함의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치고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고 얼굴을 돌이켜서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23절) 셈과 함께 야벳이 가지고 들어 온 옷은 외투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옷이 노아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옷이 장막 밖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노아는 술을 마시고 취하고 장막에 들어갈 때까지는 외투를 입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외투가 밖에 나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누군가가 외투를 밖으로 가지고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장막 안에 있던 함이 노아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성관계를 가진 증거로써 외투를 가지고 나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면 외투를 가지고 덮어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외투를 가지고 들어가서 하체를 덮어줄 때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이들은 뒷걸음으로 들어갔고 아버지의 하체를 덮을 때에도 얼굴을 돌려서 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이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본다는 것이 부도덕한 성적 일탈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마침내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24절) 노아는 가나안에 무서운 저주를 내립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저주의 내용도 함이 아버지 노아에 대하여 성행위를 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합니다.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함이 성행위를 한 것인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함이 노아와 더불어 성관계를 가진 것은 자녀 출산과 관련 있는 정액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에 함의 자녀인 가나안에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저주는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야벳의 미래 예고를 할 때 한 번 나옵니다.

“가나안은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장 27절 함이 셈과 야벳을 누르고 상속권을 빼앗으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너 혼 좀 나봐라”하고 노아는 거꾸로 함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되는 벌을 내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

가나안의 아비 함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시작된 삶의 시초부터 근친 간에 남성 동성 간의 강간행위를 하는 것으로 출발했고 이후 강한 부족은 근친상간 동성애와 수간(獸姦)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런 관행이 고대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그리고 이집트 문명권에 동성 간의 성관계, 특히 남성 간의 성관계를 퍼뜨리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후 가나안 부족은 성적인 일탈 행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남자 간의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열왕기상 14장 24절에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8장 3절은 “너희가 거주하던 땅 애급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로 행하지 말고” 가나안과 애급 땅에 동성애가 편만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애급에도 편만하다는 뜻인데, 그러면서 레위기 18장 6절~23절까지 애급 땅과 가나안 땅에서 성행하는 풍속의 중요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부 일탈한 성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23절에서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은 가나안 부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풍속은 가나안 부족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0장 전(前)장이 부족의 왜곡된 다양한 풍속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레위기 20장 10~21절에 성생활에 관한 것들이 나옵니다.
애급과 가나안의 왜곡된 성생활의 풍속은 세 가지입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근친 간의 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들 사이의 성관계이고(동성애. 同性愛)
또 다른 하나는 동물과의 성관계입니다(수간. 獸姦)

여기서 이제 세 번째 고대 근동에 나타난 동성애를 검토하겠습니다.
함으로부터 시작된 남성 동성 간의 타락한 성교 관행은 고대 근동 문명권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주전 2000년경에 등장한 메소포타미아의 법전인 “중기 앗시리아제국법”에 보면 남성 간의 성관계 때문에 발생한 법정소송 사건을 다룬 두 개의 판례가 있습니다.

하나의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같은 귀족 계급의 남자 동료가 많은 남자와 지속해서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 남자가 이 소문이 진실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명예훼손죄로 곤장 50대, 일 년 동안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 거세당함, 납 1달란트를 지불하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 판례는 동성애 그 자체를 다루지 않고 명예훼손죄를 다루는 판례입니다.
그러나 이 판례는 동성애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첫째로 당시 아시리아 안에서 동성애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어떤 남자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 명예훼손 사유가 되고 있다는 말은 동성 간의 성행위가 잘못된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남자 동료와 성관계를 했는데, 그의 행동이 사실로 확인되면 사람들이 그 남자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하고 거세시키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는 남성 동성 간의 성관계가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주전 7세기 이전 어느 시점의 문서로 알려진 바벨론의 예언 문서인 “숨마 알루(Sum-ma Alu)”라는 문서에 38개의 예언이 나오는데. 이 예언들 가운데 다섯 개가 남자 동성 간의 성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섯 개의 예언들 가운데 두 개는 동성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남자가 남자 동료를 대상으로 뒤에서 성교하는데, 이는 항문성교를 말합니다.
뒤에서 성교하면 그는 자기 동료들과 형제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삽입 당하는 자를 힘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남자가 남자 성전(聖殿) 창부(娼夫)와 성관계를 하면 가혹한 운명, 근심이나 환란이 그를 떠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가혹한 운명을 물리치는 주술과 같은 행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섯 개의 예언 가운데 세 개는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세 번째 예언은 남자가 궁정 시종과 성관계를 하면 두려운 일들로 일 년 내내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예언은 남자 창부처럼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는 감옥 안의 남자, 이는 허가증이 없이 남자 창부의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킵니다. 이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예언은 집에서 태어난 남자 노예와 성관계를 가지는 남자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들은 남성 간의 성관계, 삽입하는 입장이든 아니면 삽입을 당하는 입장이든 성관계가 액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니까 남성 간의 성관계가 어떤 사람들은 길조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 흉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주전 7세기경의 문서로 알려진 “주문 연감”이라는 책에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 남자에 대한 여자의 사랑, 남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을 모두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언명은 고대 근동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가 상하 권력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일반화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親동성애 진영에서 고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별한 권력 관계라든지 신전 숭배 의식 안에서의 동성애만 문제가 되었을 뿐이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동성애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도 동성애가 이방 문명권에 편만하였었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신화(神話)에도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길가메쉬 신화에 등장하는 “이난나(Inannna)”라는 여신은 양성애(兩性愛)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남창이 사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화인 “이난나의 하계 강화”라는 문헌을 보면 남창들은 여신을 하계로부터 해방되는 일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창들은 질병이나 기타 곤경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대적을 물리치고 성공을 가져오는 마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남창들은 여자처럼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여성성의 상징인 물레가락을 들고 황홀경의 춤을 추면서 거세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여신은 이들을 남자인 동시에 여자, 개(犬)인 동시에 여자로 전환시켰습니다.
남창들은 돈을 받고 남성 성기를 받아들이는 여성 역할을 하면서 항문 성교를 했습니다.
남창과 성교를 가진 남자는 이 성교를 통해서 여신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상의 삶에서는 남창들은 심한 멸시를 당했고 신전에서는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일상에서는 멸시를 당했습니다.
개(犬)라고 불리는 이유는 성교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남창들은 “엔키神(Enki)”의 손톱 밑에 있는 때를 재료로 해서 지음 받은 것으로 폄하되고 깨어진 항아리에 비유되었습니다.
남창들은 도시의 쟁기, 도시의 쟁기는 남근을 상징합니다.
도시의 쟁기를 가지고 어둠 빵을 먹고 살고 도시의 하수구에서 물을 마시고 술주정뱅이와 목마른 자들로부터 뺨 때림을 당하는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동성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관문서(棺文書) “카펜텍스트(coffin texts)”에 보면 남자 신들을 포함해서 신들이 태양신 라(Ra)의 음경을 삼킬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남성 간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땅의 신 게브(Geb)의 음경은 그의 상속자이자 아들의 두 엉덩이 사이에 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묘사는 남성간의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특히, 남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행위는 신이 가는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신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런 관점을 반응합니다.
아툼 신(Atum)이 나를 주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두 엉덩이 사이에 삽입했기 때문이다.”

바로왕 뉴세레(Niuserre)는 주전 2,600년경 사람인데, 뉴세레의 시대의 두 미조사(美爪士, 네일 아트)와 미용사들의 무덤에 있는 그림에는 두 남자가 손을 잡고 껴안고 코를 만져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왕 이크 나톤(Akhenaten)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의 사위인 스멘카레(Smenkhkare)의 턱을 쓰다듬고 있는데, 이 묘사도 남성 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입니다.

후기 헤라클레오폴리탄 비문에는 삽입하는 성인과 받아들이는 청년 간의 동성 성교 행위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형사 기소의 대상이 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주전 15세기경에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死者─書)”라는 문헌에 보면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변호하면서 하는 고백 안에 “나는 나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나는 남자 연인과 성관계를 같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에드푸 비문(the Edfu inscriptions)”이라는 곳에는 여성화된 겁쟁이 혹은 수동적인 남자 성관계 파트너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간의 성관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도 역시 정죄당했습니다.

호루스(Horus)세트(Seth)의 신화, 주전 1160년경에 등장한 문헌이라고 보는데, 호루스(Horus)와의 동성관계에서 남자의 역할을 하는 세트(Seth)은 호루스(Horus)가 잠든 사이에 호루스(Horus)의 두 엉덩이 사이에 사정했고, 이때 신들이 크게 비명을 지르고 트림을 하면서 호루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호루스(Horus)는 정액을 섿의 음식에 섞어 넣는 방법으로 응수했습니다.
호루스(Horus)는 상추의 즙이 정액과 그 당시 동일시 되었는데, 이것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세트(Seth)의 항문에 사정을 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남성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자는 수치를 당하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첫째, 고대 근동에서는 주로 남자들과의 성관계가 언급되어 있고 문헌상으로는 여성들과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언명이 없습니다.
둘째,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성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중에도 특별히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자기 권력 밑에 있는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진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셋째, 남자들 간의 성관계에 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권의 평가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남자들 간의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남자들 간의 신들과 만나는 통로로 인식되었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삽입하는 행위는 상대방을 힘으로 지배하는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남자들과의 성관계는 사회적 범죄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문명권에서 두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사람은 일정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형벌이 거세시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남성간의 성관계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레위기 20장 13절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

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특히 삽입을 당하는 것은 이방 문명권에서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남성 창부가 이방 신전에서는 신과 교통하는 통로 역할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신전 밖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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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팔


두 나팔, 쇼파르(שןפך)와 요벨(ג'ובל)

레위기 25:8-12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요벨(3104) יֹבֵל 

1. 뿔 나팔 소리,  2. 은 나팔의 신호, 3. 악기
발음 [ yôwbêl ]
어원 / 혼성. 293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나팔(출19:13), 희년(레25:10,54, 27:18), 양각나팔(수6:4,5,6).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쇼파르(7782)  שׁוֹפָר

1. 나팔
발음 [ shôwphâr ]
어원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팔(출19:16, 삿3:27, 슥9:14), 뿔나팔(레25:9, 왕상1:34,39).
구약 성경 / 72회 사용

9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에 관한 말씀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이 헷갈려 하는 것이 49년째의 안식년과 50년째의 안식년이 두 번 이어지기에 지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안식년이 중복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6개월 앞당겨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억지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10절의 말씀처럼 희년은 오십 년이 되는 해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 여섯째 해에는 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21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매 안식년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속죄일(7월 10일)에 전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같은 속죄일에 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뿔 나팔인데 다른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안식년의 뿔 나팔은 '쇼파르(שןפך)'로써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그런데 희년에도 같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었는데 '요벨(ג'ובל)'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속죄일에는 한 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장막절)로 이어지는 축제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돌이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한 해 주신 풍성한 수확에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희년의 속죄일은 대속죄일로 나팔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곧 마지막 때의 심판과 영혼의 추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요벨'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심판의 장면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나팔 소리는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가 공포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판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불신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때입니다.

또한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에는 구원받은 자(십사만 사천)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영혼의 추수가 끝나고 하늘 곳간에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곧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뤄질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쇼파르' 나팔은 이미 2천 년 전에 울려 퍼졌습니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우리에게 '쇼파르'의 나팔로써 자유를 선포하신 반면에, 재림 예수님은 '요벨'의 나팔로써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두려움에 떠는 자가 있고, 기쁨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을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년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희년의 규례는 안식년의 규례를 강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던 자들은 본래의 기업을 되찾고(레위기 25:10, 39-43, 54),
땅과 집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레위기 25:23-34).
또한 모든 빚을 탕감을 받았습니다(레 25:35-38).

​이와같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자연으로 하여금 본래의 위치와 역할로 회복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년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해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0-31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올려지신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자가용을 타고 와서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희년의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신은 부활하기 전까지 속박을 당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참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본래의 기업, 즉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기업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찬양하는 삶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육체를 위해 심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을 위해 심는 자입니다(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한 자들은 마지막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들입니다(시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수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수확은 마지막 때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소망을 가진 자, 희년의 복을 받은 자들의 모습니다.

​교회 안에 팽배해진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움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들이 하는 말은 성경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수준의 의를 가지고 교회를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과 '평등'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눈에는 가진 그리스도인은 적폐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등'을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이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평등'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까지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진작 청렴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립니다.
참으로 위선자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의 논리라면 이 땅에 모든 자들은 죄를 짓던 안 짓던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만든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달란트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라는 주님의 말씀을 악용하여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경은 술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지만 술 마시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합니다(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 중에 바람피우는 자도 있고 술 취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과는 어쩔 수 없이 사업이나 업무 관계상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짓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자들과는 교제조차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를 무조건 용납하라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심히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3:2-5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주님이 공중 재림하시면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다 마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소유했던지 그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주님을 만나러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적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포도즙 틀을 밟을 때에 저들은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하늘로서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지금 현재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며 그것은 결코 누구에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희년을 지키는 것을 포기했지만, 주님께서는 어둠의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눅 4:18, 주의 성령이 네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네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참 자유자는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이 이뤄지는 은혜의 해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연약한 육체 가운데 있기에, 자기 육체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는 삶이 희년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