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신앙의 신학적 의미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태초에(베레쉬트)
-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때
- 시간의 시작
하나님(엘로힘)
- 엘루하의 복수
-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복수형으로 하나가 된 단수
천지(
-
창조(바라)
창조하다 - 바라,아사,야차르, 바나
히브리 원어에는 ‘창조하다’ 즉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라, 아사, 야차르, 바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사, 야차르, 바나’는 영어로 ‘make, form, buil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3가지 단어는 ‘있는
재료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라’라는 단어는 ‘무로부터의 창조, 즉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무언가 존재하게 하는 유의 상태로 만드는 창조 행위, create'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라’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과 관련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워치만 니의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에 대한 해석 (이는 지방교회의 해석입니다.)
출처 --- 기본교문서선교회 창조의 신비 워치만 니/ 윤무길 역 12페이지
창세기의 첫 두장에서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세개의 다른 말이 사용되어 있다.
1) 바라 -- 미리 존재하는 재료의 도움 없이 존재케하는 것
2) 아사 --- 이것은 바라와는 매우 다르다.
바라가 아무런 재료도 없이 창조한다는 뜻을 지칭하는데 반해 "아사"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 부터 만들거나 형성하거나 작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수는 의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창조할 수는 없다.
창조기사의 6일 동안의 일들은 주로 아사의 차원에 속한다.
3) 야차르 --- 이것은 도공이 진흙으로 하듯이 모양이나 형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낱말은 창2:7에 사용되어 있다.
창조한은 무에서 부터 성립시킨 것을 의미하고
지었고는 일정한 형태로 이루었음을 지칭하며
만들었느니라는 앞서 존재한 재료로부터 제작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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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드 ====> 비판
재창조설을로 맞추기위에 워치만 니는
바라는 create로 아사를 make로, 야차르를 form이 라고 제한 해서만 사용하는데
이 해석이 창세기 안에서만 봐도 충돌 됩니다.
기본형을 적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바라
(창 2:4)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 바라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 아사
(창 1:21하)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새: 바라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짐승.새 -- 야차르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 -- 아사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사람 --- 바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 사람 --- 야차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히브리어를 모른 다는 것 이 창세기만 봐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구약성경 다른 부분도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는 혼용하여 사용되는 것을 여러구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창조뿐만 아니라 섭리에 해당하는 분에도 사용됩니다. --> 안찾겠습니다.
벌콥 신론에 창조개요라는 부분에서 이를 설명하니 보려면 그 부분을 찾아보세요.
재창조설로 신학을 전개하니 그 구조의 틀이 무너지면 워치만 니 신학 전반이 무너지는 겁니다.
어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정말 원문을 알았을까요?
창세기 1장과 2장부분만이라도 원어로 제대로 살폈어도 그런 전개 안했을 텐데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사역(창1:1, 1:7, 1:27, 2:7, 2:18, 2:22)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상황에 맞추어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בראשית(베레쉬트. 7225)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의 히브리적 의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계획도 끝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창조하시니라’ ברא(바라. 1254)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 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바라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 עשה(아사. 6213)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아사(עשׂה)'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아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자기형상’ צלם(첼렘. 6754)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첼렘’의 히브리적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창조하시되’ ברא(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조하시고’ ברא(바라. 1254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 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바라”라는 말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된 것 같은데 칼 형과, 니팔 형과 피엘 형입니다. 이 문법적 말의 뜻을 저는 잘 모르지만, 칼 형 “바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행위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신 것입니다.(롬4:17)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세기 주석에서 “바라, 곧 ‘창조하다’란 동사는, 한 편으로는 전혀 힘들이지 않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재료에 대한 진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의미를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설명이지요.
니팔 형은 일단 피동형으로 모면 됩니다. 피엘 형은 강조하려는 사실에 사용하지만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니팔 형은 창조 되었다. 또는 창조함을 받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피엘 형은 베어 넘기다, 베어 버리다는 뜻이 있네요. 그러나 해산하다 낳았다는 뜻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와 관련된 단어 세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바라, 아사, 야차르입니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바라는 그 물체자체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야차르는 주로 어떤 물체의 형태(모양을 만드는 것이나 형성하는 것)를 만드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고 했을 때 “지으시고”가 야차르입니다. 또 2:19에 동물들을 지으시고 라는 말도 야차르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에는 창조와 관련하여 이 세 단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단어들 중 어느 단어도 해산했다. 낳았다는 뜻이 있다고 기록한 참고서는 제게 없습니다. 그런 말을 쓰신 분은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지으시고’ יצר(야차르. 3335 와우 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찰(יצר)'은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것을 가리킨다(2:7.9).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야찰)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창세기에서 '바라'. '아사', '야찰'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귀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그 예로 '바라'는 (1)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그전 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은 정확무오한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된 그야말로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는 책임을 새삼 인지할 수
있다(마 5:18). 즉 우리는 '바라'뿐 아니라 모든 성경 원어를 분석, 연구할 때마다 성경은 단어 하나에 이르기 까지 영감된
책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이제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창조하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의미와 그 기사의 정확성을 간추려 보자.
(1)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2)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3)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다(시33:6-9; 렘10:12).
(4)또한 이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일소시켜 준다.
'창조'라는
개념조차도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와 기존물질을 변형하여 새롭게 제작하는 것과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은 합리적인
것이다. 한편 이 '바라'라는 단어는 사 40-66장에도 약 20번이나 언급되면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다.
즉 (1)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다(사42:5; 45:7-9).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종에게 말씀하신다.
(이사야 42:5)
(2)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다(사 43:1,15).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 지 말아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이사야 43:1)
(3)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분이시다(사 65: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4)인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심(사 42:5-9:49:5,6)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이사야 42:5)
이외에도 다윗의 참회시에도 볼 수 있듯 하나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새 창조의 근원이심(시 51:10; 고후 5:17)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생령’ נפש(네페쉬. 5315)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 בנה(바나. 1129 와우 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쁘신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대열에서 함께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크게 두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초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베리쉬트'라는
단어인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정관사'(the)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1장 1절에는 'in the
beginning'이 아닌 'in beginning'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면, '정관사'(the)가 있을 때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완벽하게 문장이 끝나는
'독립절'로 해석되지만, 정관사(the)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라고 1장 1절이 2절과 연결되는
'연결절'로 해석됩니다.
1장 1절이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끝나는 '독립절'인가, 아니면 1장 2절과 연결되는 '연계절'인가에
따라 '창조'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본문에는 정관사(the)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문자적 변역을 하고 있는 영어 성경(NRSV, ESV
등)과 한글 성경이 정관사(the)를 넣어 기록하는 이유는 정관사(the)가 없음에도 독립절로 사용된 예가 창세기 외의 다른
성경에서도 많기 때문입니다(레 2:12, 신 33:21; 느 12:44; 잠 4:7; 사 46:10; 암 6:6 등)
창세기 1장
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로 번역된 구절 'בְּרֵאשִׁ֗ית'이 창조 이야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관용구로도 사용된 것이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에레미야 26: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니라.(에레미야 27: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예레미야 28:1)
유다 왕 시드기야가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엘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예레미야 49:34)
또한 전치사 없이 사용된 'רֵאשִׁ֤ית' 단어는 늘 정관사가 있는 것으로 풀이한다.(창세기 10:10, 출애굽기 23:19, 34:26, 레위기 2:12, 23:10, 민수기 15:20, 24:20, 신명기 18:4, 21:17, 26:10, 33:21, 사무엘상 15:21, 역대하 31:5, 느헤미야 10:37, 욥 40:19, 시편 78:51, 105:36, 111:10, 잠언 1:7, 4:7, 8:22, 17:14, 예레미야 2:3, 49:35, 에스겔 20:40, 48:14, 아모스 6:1, 미가 1:13)
이런 점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하면서, "정관사가 없더라도 문장을 정관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 목적있는 창조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h)입니다.
이 단어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주어가 있어야 하며,
둘째로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고,
셋째로는 주어의 의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합니다.
즉, 주어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때 '바라'(Bara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로 표기한 히브리어 단어는 'בָּרָ֣א'이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그가 창조하다'의 뜻이다.
영어로 음역할 때에는 'Barah'가 아니라 'Bara'(bā·rā) 정도로 표기한다.
바라(בָּרָ֣א)의 마지막 철자는 h로 옮길 수 없다.
신성윤 교수는, "구약성서에서 '바라' 동사는 모두 38회 나온다.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이사야이다.
20회. '바라'가 항상 하나님이 주어로 나오는 것은 맞다."고 말한다.
바라가
조건이 맞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하면서 그 첫번째 조건으로 주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동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칭(1인칭, 2인칭, 3인칭), 성(남성, 여성), 수(단수, 쌍수, 복수)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바라'라는
단어가 주어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표현은 조금 자연스럽지 못하다. 비록 창세기 1장에서 '바라'(그가 창조하다)가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단어가
같이 사용되고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별도의 주어 표시 없이도 가끔은 사용되곤 했다. (창세기 1:27 하반절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 בָּרָ֥א אֹתָֽם)
"주어의 의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합니다. 즉, 주어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때 '바라'(Bara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뒤에서 그가 언급한 단어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도 사용한 단어 יָצַר도 토기장이의 목적과 의도, 의지가 담겨있다는 면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바라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에서 인테리어 하듯이 형성하는 창조인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건축하는 단어인 바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분석하여 깨달으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 단어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절은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베에트 하아레츠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선택한 백성들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을 받았습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베레쉬트 722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베이트는 집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 첫 번째 알파벳은 알레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일 최초로 쓰인 단어가 베이트입니다. 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베레쉬트라는 단어에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 의미로 ‘베레쉬트’를 해석해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 계획도 끝내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켰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절대 원죄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꼼꼼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바라라는 단어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7절은 바야아스 엘로힘 에트 헤라키아 바야베델 베인 하마임 아쎄르 미타하트 라라키아 우베인 하마임 아쎄르 메알 라라키아 바예히 켄입니다.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라는 단어는 아사 6213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은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문법입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셨는데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다가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사 창조입니다.

27절은 바이베라 엘로힘 에트 하아담 베찰모 베첼렘 엘로힘 바라 오토 자카르 우네케바 바라 오탐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자기 형상’이라는 단어는 첼렘 6754 명사 남성 단수입니다.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 전에는 거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단어인 ‘첼렘’의 히브리적 상형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조하시되’라는 단어는 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와우접속사는 하나님이 즉시 인간을 창조하셔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하시고’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이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육체의 삶만 살다가 끝나버립니다.

7절은 바이체르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 바이파흐 베아파이브 니쉐마트 하임 바예히 하아담 레네페쉬 하야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로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지으시고’라는 단어는 야차르 3335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차르 창조는 겉 사람을 만드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단어는 네페쉬 531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18절은 바요메르 아도나이 엘로힘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에에세 로 에제르 케네게도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22절은 바이벤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첼라 아쎄르 라카흐 민 하아담 레이솨 바예비에하 엘 하아담입니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바나 1129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면서 나아가는 신앙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 신학이 근본이다
일원론으로 본 세상
시작과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은 먼저 특정한 목적을 정하고 그다음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과 계획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의 세계를 창조했고 또다시 말씀으로 창조하며 이들을 채워 나갔다. 추상적인 주제(主題 : theme)인 창조 목적이 형상적인 소재(素材 : material)라 할 창조 세계를 통해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영적 세계를 물질세계로 표현시키는 행위로 초월(超越 : transcendence)과 내재(內在 : immanence) 사이 조화로운 관계를 설명한다. 창조 기사는 이원론(二元論 : dualism)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해를 위해 초월과 내재를 분리시킬 수 있다.
창조된 우주와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돕는 구조와 기능을 가진다(롬 1:19~20). 즉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설명한다. 자연 계시를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도 알 수 있다. 단 두 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창조 기사가 성경의 나머지 계시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 창조 기사의 중요성을 덜 인식했다. 논리 영역은 물론 역사 영역에서도 초월과 내재 사이 관계를 강제로 분리시켰다. 창조 신학의 일원론이 무시되었다. 그 결과 창조 신학도 거의 무시되고 창세기 3장부터 기독교 신학이 출발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완강하게 부정한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추어진 작정과 목적 그리고 의지를 제일 처음 드러냈다. 창조 신학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계시들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려진다. 창조 기사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창조 세계는 유기체이다
우주와 만물은 모두 하나의 창조물에서 기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첫째 날 하나님은 원형적 우주(창 1:1)와 비물리적인 빛(3~4)을 창조했다. 원형적인 우주는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성령이 물 위에 운행했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원형적 우주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재자(主宰者)란 뜻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렘 31:7 참조)."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 22:28)."
하나님은 질서의 신(神)이다(고전 14:33).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우주는 서서히 안정적인 구조를 드러내며 질서 정연하게 존재했다. 이 구조 안에서 우주와 만물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이 점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될 수 없다.
만물의 주재자인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라는 몸의 머리였고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그 몸을 유지하며 보존하고 섭리하며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첫날 비물리적인 빛을 창조했고 아울러 성령이 창조된 세상 위에 늘 운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사단의 존재와 그 활동을 억제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 세계가 유기체와 같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도 잘 증명된다. 창조 과정은 주기성(週期性)을 보여 준다.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 모두 우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뭍(육지)의 순서로 창조가 진행된다. 첫째 주기인 첫 삼일 동안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었다면 둘째 주기인 두 번째 삼일 동안 그 시공에 거주할 피조물들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두 주기들은 서로 유기적이다.
창조의 날들이 지날수록 창조 세계도 점점 더 완벽해졌다. 여섯째 날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고 걸작인 인간이 창조되었다. 6일간의 창조 행위는 인간을 위한 창조 과정 자체였다. 인간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창조주를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벽해야 했다.
넷째 날 창조물인 우주의 천체들도 결국 인간을 위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 1:14)." 태양은 일과 쉼을 결정해 주는 주야를 인류 사회를 위해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사계절, 일자와 연한까지 정해 주어 덕분에 인류 사회는 규칙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태양의 주기적인 운행 덕분에 인류 사회는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보존 내지 유지시켜 준다. 이 덕분에 인류 사회는 활동에 필요한 양식을 늘 얻을 수 있다(창 1:29). 태양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태양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였다(창 1:12, 21, 24, 25). 창조 세계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있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부분들이 있다. 이 부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맡은 역할과 기능을 소유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도 무용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각 은사대로', '각 기능대로', '각 역할대로', '각 사명대로' 또는 '각 직분대로' 만물이 지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각 종류대로'란 표현은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進化論: evolution)을 완전히 부정한다.
진화론적 사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냐 또는 더 크냐?'라는 상대적 이분법과 생물들 사이 천적 관계를 주장하는 대립적 이분법. 이런 사고에 의하면 피조물들 중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이나 약한 것들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못 가진다. 또는 천적 관계로 어느 한 쪽은 다른 쪽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 세계는 오로지 강자(强者)와 승자(勝者)만의 소유물이다.
학자들은 진화론으로 인류 사회를 분석한다. 모든 사회적 현상이나 인류의 역사를 상대적 또는 대립적 이분법에 따라 재평가한다. 우생학이나 인종 개량학 그리고 공산주의 등등은 모두 진화론의 결과물이다. 영웅인 강자와 승자만 높게 평가되고 나머지는 약자나 패자로 무시된다. 사람들에게 승리와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 차이가 너무나 크다. 앞에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모든 만물은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에 것은 나타난 현상이나 결과에 근거를 두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앞에 것은 미천한 것도 중요하게 보지만 뒤에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은 창조 세계의 타락 이전과 이후 사이 차이에서 나온다.
타락 이후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넘겨졌다. 사단은 자연 세계는 물론 인류 사회에서 하나님의 반대자로 등장하며 하나님이 세운 모든 조화를 무너트린다. 이 때문에 이원론이 맞고 일원론이 틀린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해와 반대는 일시적이다. 유일한 창조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고자 여전히 세상을 통치한다. 그러므로 창조 신학은 인류 사회를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6일 창조 과정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통섭적인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며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그런 학문적, 과학적 연구 방법은 성경이 처음부터 권하지 않는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은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이 달성할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지어졌다. 창조 기사는 통섭적 과학 방법을 주장한다.
신국론이 창조 신학의 중심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6일째 날 마지막 창조물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창조 결과를 은혜로 받고 누리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면 되었다. 창조주는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이런 영광과 찬송과 명예를 받길 원했다(시 102:18, 사 43:7, 21 60:21, 61:3, 엡 1:6, 14, 21).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한 방법으로 창조해야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복사본으로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통치권(창 1:28)을 넘겼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처럼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설 것이다(엡 1:4~5).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는 인간 존재의 출발은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은사와 능력을 인간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가 품는 신학적 의미이다. 신의 일을 맡은 인간은 신의 성품에도 참여한다(벧후 1:4 참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이성, 지식, 도덕, 감성 그리고 예술 면에서 은사를 소유한다. 이로써 불완전한 인간은 세 단계를 거쳐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문화 사명을 수행하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침을 받은 인간. 이것은 신약성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칭의, 아들로 살아가는 성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는 영화.
문화 사명은 세 분야로 구성된다. 문화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한 것이다(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 신앙과 종교 영역). 이 사명은 인간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명한다(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 윤리와 사회 인문과학의 영역) 그리고 자연은 문화 명령을 수행할 또 다른 무대이다(자연과 사람 사이 관계, 자연과학의 영역). 이것들이 신앙 삶을 구성한다. 신앙은 윤리나 과학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도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신학과 각종 과학은 모두 하나님나라를 위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신학은 앞의 두 가지 관계만 중요하게 보았다. 셋째 관계는 비교적 무시되었다. 물질세계를 저급한 것으로 보는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파괴의 원인은 바로 이원론에 있다. 그러나 창조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가 자연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의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명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 1:26). 기독교는 자연 세계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관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른 관계들과 동등하게 자연과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은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을 배척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가 효과적으로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안식일을 정하고(창 2:1~3) 에덴동산을 창설했으며(8~15절) 선악과 규례를 주었고(16~17절) 그리고 가정을 세웠다(18~25절).
일주일 중 마지막 날 인류는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창조 기사를 묵상해야 한다. 육적 쉼이 영적 쉼을 겸할 때 진정한 쉼이 된다. 이로써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늘 창조주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돌릴 것이다. 이를 잊는다면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미천한 짐승처럼 살 것이다.
에덴동산은 문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거지이며 동시에 출발점이다. 문화 사명은 에덴동산의 영역을 세상으로 점점 더 확장시켜 나감으로 훌륭하게 수행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며 하나님나라가 저절로 이 세상에 건설된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장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받는 곳이다. 여기서 배우고 습득한 후 에덴 밖에서 실천할 수 있다.
선악과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 사명이라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길을 따라 수행하여야 한다. 일만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길을 따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조건으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며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이를 창조 언약(창 2:17)이라 한다.
이런 삶과 사명 수행을 통해 인류는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완전한 순종자만이 하나님이 마련한 완전한 낙원에 이를 것이다. 이 낙원의 기업을 얻는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완성인 영화 단계이다.
그러나 순종은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미 낙원 에덴에 살고 있다(칭의, justification). 그런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은 인류는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성화, sanctification). 그러나 노력의 정도에 따라 받을 상급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정 제도는 문화 사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꾼들은 가정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제도, 부부 제도 그리고 가정 제도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신성하다. 최초의 가정은 바로 교회와 학교와 정부 노릇을 했다. 가장이 목사, 교사 그리고 왕의 역할을 맡는다. 구약시대로 말한다면 가장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이다. 가정은 인류 사회라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 교육장과 훈련장이다. 이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출된다.
남녀 관에서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차이가 발견된다. 보편적 창조 기사를 말하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동등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수평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 창조를 기록한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남자는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왕적 존재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 관계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가정에선 창세기 2장의 가르침을 그러나 가정 밖 사회에선 창세기 1장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와의 저주(16절)를 예로 든다. 그러나 본문도 가정을 배경 한다. 즉 가정 안에서 여자는 남편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 밖 사회에서 남녀 사이 성적 차별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문화 사명의 수행과 은사 면에서 여자를 남자와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명이 수행되는 인류의 문화 영역은 너무나 다양하다. 효과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려면 남자와 여자 사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자의 우월성은 현대사회 이전 농업 시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 육체적인 힘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시대 몸의 힘보다 머리의 힘인 지식이 더 중요해졌다. 여자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다원화 시대 여자가 활동할 수 있는 분야들은 참으로 많다. 이 모든 일들을 남자들만 감당할 수 없다. 학자들은 여성의 노동력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전 인류 사회는 한 사람의 유능한 리더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 시대 유능한 전문가들은 참으로 많다. 이젠 조직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내는 리더가 필요하다. 이 리더십에 권위적인 남성보다 모성적인 여성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남녀 관은 이런 시대와 사회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인류 사회도 일인 지도자만 고집하는 권위주의보다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평등주의를 요구한다. 이제 인류 사회는 여성 지도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교회와 성도가 노력해야 할 다섯 가지 일들이 있다. 성경 말씀의 고수, 문화 사명 수행, 주일 성수, 교회의 보존 그리고 경건한 가정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대로 창조 신학의 가르침들이다. 이들에 힘쓴다면 교회는 산 위에 켜진 등불처럼 만인 위에 비출 것이며 성도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나라도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더 빨리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교회도 인간 사회도 모두 사는 길이다.
결론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종국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를 대리자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모든 신학들의 목표이며 방향이다. 모든 신학들은 신국론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엡 1:4~5)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상으로 선택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이다. 그리고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의 목적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피택자들로 표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거룩한 신분 획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양자 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각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 이후에도 성도의 삶에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를 닮은 형제들로 그를 세우기 위함이다.
피택자들은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형제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이다. 결국 하나님의 가정이 곧 하나님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진면목이다. 창세전 세워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즉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창조주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창조 후 인류 사회는 바로 하나님의 가정의 상징이며 모형으로 하나님나라였다.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전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었다. 문화 사명은 바로 이를 목표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학적 주제들은 결국 하나님나라라는 제 일차적인 주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창조 신학은 이런 논리적인 진리 체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문화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사실은 부활주인 예수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계 1:5 참조)." 만물의 으뜸이라면 지금도 예수님이 세상 역사를 주관한다.
비록 보이는 차원은 아니라도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져야 한다. 이것은 문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 부활주 예수님도 은사들을 나누어 주며 신자들을 돕는다. 먼저 예수님은 성도의 인격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영역이 세상으로 확대되도록 일한다. 이 점에서 신약시대 교회는 창조 기사의 에덴동산 같고 구약시대의 가나안 땅과 같다. 그리고 신약시대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거점이며 출발지이다.
결론적으로 헬라인의 이원론은 창조 신학에 안 맞는다. 성도는 히브리인의 일원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일원론과 이원론은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면에서…인류 삶의 내용과 성격은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일원론을 택하여야 한다.
사단이 아직도 활동함으로 이원론이 맞는 듯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연단의 기회가 되지만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는 파멸케 하는 유혹이 된다. 결국 사단은 자기 일로 참주인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줄 뿐이다.
기독교와 성도는 이원론에서 나온 대립적 또는 상대적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일원론에 근거를 둔 논리적 이분법에 따라 사고해야 한다. 일원론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도 유익하다(롬 8:28).
그러나 사물을 상대적으로 또는 대립적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은 사물의 다른 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게 만듦으로 성숙한 그리고 지혜로운 판단을 방해한다(창 3:6~24). 흑백논리에 따라 산다면 편협한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신앙 삶의 내용인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파괴된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이며 그가 원하는 바이다. 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고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사고로 살아야 한다.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름으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사실은 창조 기사의 신학이란 다른 신학들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성취나 완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대표자로 세운 뜻과 목적이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창 3:15).
예수는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47)이 되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하여야 한다고 말했다(요 3:1~16). 오늘날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성취된다. 기독론, 구원론과 성령론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해 하나님나라는 성취 내지 완성된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열쇠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인류의 참소망이다(딤전 1:1). 마라나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개념들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육신의 첫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다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의 존재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관념들은 그 관념의 주창자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상 체계가 그들에 의하여 소개되거나 종합되었을지라도 이제 그 사상 체계는 그 주창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단순히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핵으로 둘러싸며 존재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1:1)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요1:3) 이 말씀은 이제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구원론의 차원과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를 마련해 주는가? 성육신 사건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육신 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 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 이며 '참 사랑' 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다음에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 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 1:1)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육신의 개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때문이다. 이는 성육신의 개념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Image, 이미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리 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여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또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homoiousios)본성을 가졌을 뿐인가(아리우스)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homoousios)본성을 가졌는가?(아타나시우스)" 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 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조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그리스도밖에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저 추상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하며 무한하며 불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멸하지 않으며(죽지 않으며-유한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image: 이미지)은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골 1:15)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요15:13)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image: 이미지)을 얻을 수 있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념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 안에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와 순종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 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삭의 양태를 요청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계를 부정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 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하여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부활의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 11:25-26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인간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죽음은 인간에게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게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는 모습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낯선 자세이다. 기독교 신앙은 또한 죽음이 던지우는 그림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오직 생물학적인 단계의 마지막에만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은 죽음의 다양한 세력과 그림자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심지어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죽음은 아직도 자신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죽음의 현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활 신앙이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또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부활 항목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이 곧 부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신학자들은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고, 당시에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부활에
관한 논의가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한 긍정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불트만에 따르면, "부활에 대한 신앙이란 단지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 부활 그 자체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오직 제자들의 부활 신앙만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트만에 반대하여 우리의 신앙이 부활의 기초가 아니라, 역으로 부활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됨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역사적 행위 속에 기초한 신앙임을 말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현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누구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분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분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은 부활 사건이 예수의
구속(救贖)의 십자가의 맥락 안에서, 곧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살펴져야 할 것임을 뜻한다. 예수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계에
대항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준 것을 의미한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부활의 일차적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과 관련하여 살펴질 때 그 뜻이 분명히 밝혀지는데, 그 세력은 곧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력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세력은 언제나 다음의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도전한다: 죄, 율법, 죽음.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며, 율법 아래 놓여 있고,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바울은 죄의 댓가로서 죽음이 찾아왔음을 지적하면서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33)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피고용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또는 어떤 것을 성취하건 간에 결국에는 사망의 세력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날 때,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사망은 우리에게 우리의 봉급을 나누어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 있는 사람들과 피조물을 향한 구원론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정당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뜻하는 사건이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였음을 또한 말한다. 이 "사흘"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여호와께서 ...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체를 흐르는 구원사의 사건 속에 살펴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흘만에"라는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하나의 사건의 두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무리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삼일간의 간격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는 독립된 구체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구체적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활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양 극단의 부활 이해를 거부해야 한다.
한
편으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은 하나의 실존주의 신앙의 사후(事後) 반성과 성찰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다. 부활
사건이 주관적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객관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역사 실증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역사적 실증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부활 사건의 정당성 여부를 걸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변호함에 있어서 은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게 되는 유혹이다.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부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사건은 예수의 지상의 삶의 단순한 환원이 아니며 시체의 본래대로의 환원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궁극이전의(penultimate) 삶의 연장이 아니라 궁극적인(ultimate) 삶과 세계의 도래이다. 궁극적인 세계와
삶의 도래는 궁극 이전의 물음과 범주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바울이
부활 사건의 의미 맥락을 증명과 실증에 두지 아니하고, "전파"와 "신앙"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부활 사건의 적합한 맥락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파와 신앙"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헛된 것임을 말하면서,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전파와 신앙"이 살아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전 15:14)
바울은
왜 실증과 증명이 아니라, 전파와 신앙을 부활 사건 이해의 올바른 맥락으로 제시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세계의 연장이 아닌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의 모든
범주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활 사건의 전적인 새로움에 대한 반증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이 세계 안에서
증명가능한 사건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이 세계의 일부분의 사건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의 전체 의미 맥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이란 이전의 삶의 소생이거나 이전 세계의 단순한 연장(延長)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실존적 차원으로만
축소해서는 곤란하다. 불트만이 지적하고 있듯이, 부활 사건은 분명히 우리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새로운 지평은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의
포괄적 틀이 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로 옮기셨음을 말한다.
성경은 신앙의 단순한 실존주의적 주관화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이미 결정적으로 선취된(anticipated)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음"(고후 5:17)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 것을 단지 실존의 영역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 죽음의 세력의 영역이 포괄적이듯이, 부활의 생명이 다스리는 영역도 포괄적이기에 개인의 차원이나 영혼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역사의 종말에 우리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
믿사옵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피조물의 역사에 있어서 유래가 없는 첫 사건이었으나, 그것이 마지막 사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부활 장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모든 인간, 아니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선취되어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가운데 부활한 것과
같이, 모든 성도도 육체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의 상태가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하늘과 땅 사이의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부활 이해에서 정면으로 거부된다. 성도의
최종적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함에 있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부활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중심으로 부활 신앙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부활 이해는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부활 신앙의 실천적 의미를 "죄악된
세계 아래 있는 운명론에의 도전" 속에서 찾는다. 부활 사건은 이 세계가 폐쇄된 세계이며 이제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는
운명론적인 선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차원은 부활 신앙의 변혁적인 차원이다. 이제 참 물음은 부활을
인식적으로 믿느냐, 아니냐의 지적인 차원만의 물음이 아니다. 참 물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와 현실에 들어섬으로써 새
역사의 변혁 속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분리되어 있어서 여전히 죄, 사망, 율법 가운데 있느냐의 실존과 역사 변혁의 물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파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피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죽음의 실재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의 실재에 대해서 도피하는 소극적 자세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에 기초한 부활 신앙 가운데 죽음의 실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저항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선취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죽음과 죽음의 세력이 마지막이라고 외치는 모든 죽음의 운명론에 대항하여
부활 사건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예기적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죽음의 실재를 진지하게 대면함을 지적하였다. 이제 우리는 여기
결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는 부활의 현실과 실재를 더욱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과, 그리하여 죽음을 모든 삶의
궁극적인 실재로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두 장면의 회상(回想)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50년 전, 4월 9일 (부활절 즈음하여) 독일의 플로센부르그의 한 감옥에서 본회퍼라는 젊은 목사가 교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제3제국의 전제적 통치에 대항하여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가 투옥되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앞두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 주간을 보낸 영국인 장교 페인 베스트는 본회퍼 목사의 마지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본회퍼
목사는 짤막한 예배를 인도하였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다. ... 그가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마자 문이 열렸고, 사복을 입은 인상이 나쁜 두 사람이 들어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가도록
준비하라." 이 말은 거기에 있던 모든 죄수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교수형을 뜻했다.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때 그는 나를 끌어 다니며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삶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부활 신앙을 몸소 실천한 본회퍼는 자신의 미완성 작품인 "윤리학"에서 죽음의 우상화를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은 현재 우리 가운데 횡행하고 있는 죽음의 우상화를 뿌리째 뒤흔든다. 죽음이 최후의 것이라면,
지상의 삶은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약 1900년 전 고대 근동의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이 로마 제국의 세력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그를
따르던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팔았으며, 나머지 제자들은 그의 체포와 죽음의 사건 가운데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장면을 보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들이 지녔던 실낱같은 희망의 마지막이라고'. 그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새 역사를 향한 새로운 행진은 시작되었고, 오늘도 그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발 아래 짓밟히고 살해당한 모든 것의 부활을 믿는다. ...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열린 무덤의 틈새를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끝없는 흐름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바로 그것이 부활절이며, 바로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