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실존 /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 사람 앞에서(코람 호모, 호미니부스)


2023년 2월 22일(재의 수요일) 사순절 제1일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는가?

두 종류의 실존 

사람의 삶을 두 종류의 실존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로마서 14:8)
(코람 데오) Coram Deo, Before God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한다.
2개의 라틴어 단어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 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 앞에서의 실존(갈라디아서 1:10, 마태복음 6:1)
(코람 호모) Coram Homo. Coram Hominibus, Before Men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열왕기하 22:1-20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들 눈치를 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모든 것의 동기입니다.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배우, 연기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번역을 하지 못하고 그냥 음역(音譯, transliteration)을 했습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합니다.
진짜 자기는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면을 보여줍니다.
자기 모습이 아니고 전혀 다른 인물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휘포크리테스, ‘외식하는 자’입니다.


다윗 왕조 제 17대 유다 왕인 요시야(640/639-609 재위)는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여덟 살에 즉위하여 31년 통치를 했다고 하니까 39세에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성경이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최고의 인생, A+ 인생이란 뜻입니다. 짧지만 제대로 살았어요.
삶이 이러면 좋겠는데 저 자신 꼴이 꿀꿀해 보일 때는 ‘난 너무 구질구질하게 길게 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22:2 말씀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했다”입니다. 의역을 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았다.” 

히브리어로 ‘베에이네이 아도나이’(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이를 라틴어로 옮기면 유명한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요시야는 모든 것을 지켜 보시고 중심을 보셔서 동기(動機)까지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짧고 굵게 최고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 잘 하려고 하는 ‘코람호모’에 그치지 않고 진정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의 노예 출신 교인들에게 권하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2-25). 

서러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서 교만한 인간 주인 앞에서 살지 말고 그들을 주인보다 더 높게 봐 주시는 진정한 주님이신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외식’,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연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지켜보시는 앞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합니다. 요시야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년 전 연변을 다녀오면서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용정을 찾아가 봤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치열한 젊음이었습니다. 코람데오의 마음이지요. 연기할 것인가,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중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중 하나가 성생활에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성경상으로 보았을때 아담이 외로울까 하여 하와를 만들어 주신걸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생활을 허용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모든걸 허락하셨다는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은 세상 사람들의 성생활과 구분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의 기준은 아마도 음심일 것이다.

세상적인 성생활은 안목의 정욕과 말초신경의 자극을 통한 만족을 극대화 시키는것임에 반해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은 사랑을 기반으로 둔 교류를 통해 영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관계여야 한다.

세상적 성관계는 타인이 보았을때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운 감정과 음심이 발동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성관계는 거룩하기 때문에 타인이 보아도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외로 많은것들을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선악과를 추구하고 결국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당신은 자녀들에게 기독교인 으로서의 성교육을 시키고 있는가?

청소년의 이성교제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자각해야 한다.

신앙이 무너지는건 방심에서 시작된다.

철저한 신앙의 추구는 치우친 신앙과 동의어가 절대 아니다.

긴장하고 허리띠를 동여메자!









Dietrich Bonhoeffer목사
왜 나치 정권때 조국으로 돌아가서 순교의 길을 걸었을까?

독일의 설교가요,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훼퍼 목사(1906-1945)는 히틀러의 독재 정권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몸소 보여준 참 신앙인 이었다.

16세때 이미 신학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깊은 사고력과 성찰력 까지도 겸비해 그의 나이 20세 때 이미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다. 

후대에 그를 평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훼퍼 목사를 존경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의 타고난 능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한평생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한순간 한순간을 아낌없이 삶을 살았다는 점에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본훼퍼 목사는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단에서, 교회에서, 방송에서 쉼 없이 외치며 선포했다.

이 때문에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연금되며, 감옥에까지 갇히는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아까워 하던 미국 유니온신학교의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 의해 1939년 6월 12일에 초대되어 교환교수로 미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그해 9월 1일에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자 본훼퍼 목사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동료들과 독일 백성들이 미치광이 히틀러 때문에 전쟁의 노예가 되고, 살상과 피 흘림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다시 독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이 때 그의 독일 행을 만류하며 미국에 남아 살 것을 권했던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게 본훼퍼 목사는 이런 편지를 남기게 된다.

나는 독일의 역사에서 어려운 시기를 독일의 크리스천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동료들과 같이 고난의 시기를 함께 보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후에 독일 크리스천의 재건에 동참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 훼퍼 목사는 독일에서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목적대로 히틀러를 향하여 준엄한 신앙의 양심을 선포하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20일 전인 1945 4 9 39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교 당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학자로서 자신의 뜻과 명예를 얼마든지 펼칠 수 있었던 본훼퍼 목사가 이런 삶을 살았던 이유는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 일 수 없다.

신약의 초대교회 시절에 비로소 안디옥에 살던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저들의 모습 속에 무엇인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남들이 아무리 상대방을 속이고 실속을 챙기는 그 순간에도 결코 남의 것을 취하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손해보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는 그 이상한 모습 때문에 드디어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본훼퍼목사의 삶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훼퍼목사는 독일의 격변기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았던 용기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der Einzelne/ individual)'의 삶이란?
Soeren Kierkegaard

모든 인간은 육신의 병을 품고 살 듯이 실존하는 모든 개인 역시 절망이라는 병을 품고 산다.

진정한 종교적 실존, 즉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죄는 법적인 죄나, 윤리적인 죄, 혹은 양심의 죄가 인간에게 주는 형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내적 형벌’을 경험케 한다.  이런 절망을 통과하지 못하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사유하는 사람이 아닌, 신앙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손쉬운 관념”이나, “도덕적 모범”으로 취급하고 있다. 죄 많은 우리의 자아에 죽음을 요구하는 고귀한 은총보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만물을 구원해 주신다는 값싼 일반 은총만을 받아들이고, 기대여 사는 믿음의 자세를 비판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을 기준 삼아 윤리적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종교적 패쇄성과 율법주의를 불러 온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앙의 틀’이라는 안전한 구조 속에 숨어, 자기를 기만하면, 주체적인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죄의 본질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 상태이다. 모든 죄는 그러한 정신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창세기 22장 ‘아케다 (the Aqedah: 히브리어로 ‘묶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묶어 놓은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경 구절은 믿는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손쉽게 간과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아브라함이 과연 신앙의 아버지인가? 라는 도발적인 질문과 의문을 갖게 된다. 먼저,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한 아브라함의 패륜적 결정이며, 하나님이 과연 살인 교사를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기존의 관습, 도덕, 윤리체계를 뛰어 넘는 시각과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아내, 사라하고 상의를 했다면 아내가 과연 이런 행동에 동의 했을까?  윤리적 범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생각과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기준에서 본다면 단순한 영아 살해 시도를 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전적으로 고귀하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윤리를 포기하는 압도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입장과 위치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존재 (단독자)인 것이다.”   단독자란 모든 사람중에 '오직 한 사람'을 지칭하는 동시에, '누구나'를 의미하는 절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에 부딪치는 것이다.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에 대하여는 죄를  짓는 것이며, 무리에게 조소와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위험에 자신을 내 맡기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윤리의 본질을 초월해서, 개별적인 종교적 실존을 결단했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 (개별자, der Einzelne)’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번째는 우리가 얼만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준엄하게 서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윤리체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그러한 윤리체계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둔갑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게된다. 신앙은 윤리의 대안이나 파괴자가 아니라, 윤리의 구원자이다. 기존 윤리 체계의 신앙적 틀에 이미 갇혀져 있다면 우리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Dietrich Bonhoeffer목사 (1906-1945)의 히틀러 암살 모의 예를 보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살인임을 알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신앙적 결단이 요구될 때가 있다.  히틀러를 살인하는 행동은 평화주의자라는 본훼퍼 목사 자신의 본성을 궁지로 몰아넣는 투쟁이자, 윤리체계를 명백히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체 그저 숨어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800년대, 덴마크는 사회 전체가 기독교 국가였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의 승리를 자축하며, 더 이상 종교의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확신할 때,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신다면,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다.”                                                 

사회 전체가 기독교가 된 덴마크에 진실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복음이 필요한 곳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이라고 보았다.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파문을 던지는 메시지 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인간의 존재 방식에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잘 돕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합니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방식은 신 존재의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과 신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엉뚱한 신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히 1:1,2).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야 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성경 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고, 모세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하셨으며,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하셨습니다. 완전함이나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이 둘도 결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완성이고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방식은 호흡을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 방식은 인간관계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 방식은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능력과 수준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신분에 따른 요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불의를 비판하는 일까지도 사랑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명분과 실천이 불일치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과 삶이 불일치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보다 신자들끼리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다투고 서로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에 있어서 비난 받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의 수준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믿음과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나 삶을 보고 믿음을 평가하지만, 엄격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의 윤리적 책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와 차원이 다른 믿음을 말하면서 또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 교회가 상처를 입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믿음과 윤리적 삶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목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론적 토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부응하는 행위를 하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업적 위주의 행위와 율법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서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구체적 신앙의 규범에 집착하기보다 새로운 신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존재 방식은 사랑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께 의존하여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어떤 글을 쓰기 전에, 설교하기 전에, 권면하기 전에, 책망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사랑이 목적이 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골 3:14, 고전 13:3, 요일 4:8 -









존 맥스웰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그는 “오늘을 사는 원칙”이라는 책에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10대 때, 내 사고는 긍정적인데 집중했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에게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인생의 우선적인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입니다. 

“20대 때, 내 사고는 나와 동료들과 구별시켰다.” 

  이것은 친구들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0대에 벌써 동료들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인생의 기쁨과 삶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0대 때, 내 사고는 나에게 청중과 추종자를 주었다.” 

  이것은 청중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추종자를 허락해주었다는 것입니다. 

“40대 때, 내 사고는 일을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일하는 데도 안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것입니다. 

“50대 때, 내 사고는 나를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일만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인격적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를 더 추가적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너무 다행인 것은 내가 여전히 사고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더불어 기독교적인 삶과 사고를 할 수 있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삶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에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말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