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민족 /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 /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다


창세기 10: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The region where they lived stretched from Mesha toward Sephar, in the eastern hill country.

 



아리랑의 의미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민요 '아리랑'은 깨달음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에게 민요 ‘아리랑’은 우리의 주식인 쌀밥과 같은 존재이다.
그만큼 익숙하고 널리 애창된다.
그런데 ‘아리랑’이 어떤 의미인지, 어디서 유래했는지, 언제부터 불렀는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기원설과 어원설로 다양한 견해만 존재할 뿐 정설이 없다.
이를 일컬어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아리랑 어원설엔 말도나 많다"고 하기도 한다.

아리랑이라는 말은 난랑(卵郞, 알랑)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고 발(光明)에서 알로, 다시 아리로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처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 아리랑설(我離娘說)로 보는 이도 있다.

서정범 교수는 '알라이요'의 알(卵)을 근원적인 것, 핵심으로서의 알(卵)로 설명한다.

김용운 교수는 ‘아리리요’를 ‘아 신이요’로 설명한다.
“아라리요는 '아 날이요'에서 나온 것이며 요즘 말로 하면 '아 신이요' 와 같다.

가령 “아라리 요 아라리 요 /~ /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라리 요 아라리 요” 에서와 같이 한스러운 노랫가락에서 '아라리 요'를 '아 신이요'의 뜻으로 새기고 들으면 한층 실감이 난다.
'아 날이요‘가 '아 나리요' 또는 '아라리 요' 가 되고 마침내 '아리랑' 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과 일본인3, 같은 씨앗에서 다른 꽃이 핀다》, 한길사)

우실하 교수는 중국 동북방 소수민족 에벵키(Ewenki)족이 아직도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 ‘아리’, ‘쓰리’ 등의 말을 쓰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리랑과 쓰리랑의 의미를 설명한다.
우 교수의 논문 <‘아리랑’·‘쓰리랑’의 의미와 어원(語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의 에벵키족은 북만주 동쪽 읍루(挹婁)지역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여 북방 대흥안령 자락과 흑룡강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대 우리 민족들과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어와 에벵키어는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에벵키어의 ‘아리랑’이라는 말은 주로 “맞이하다/영접하다”와 “이별이나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에벵키어가 한국어 속에 흡수되었다면 ‘아리랑’이라는 말은 님을 보내면서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 감수하다, 인내하다’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랑’의 이중적인 의미구조로 보면 님을 보내는 ‘이별의 아리랑’도 가능하지만 님을 맞이하는 ‘만남의 아리랑’도 가능하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이렇게 에벵키어를 참조하여 우 교수가 해석한 아리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해석1) 인내하자 인내하자 (님이 나와)다르구나.
(님이) 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2) 참자 참아내자 혼란스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3) 인정하자 인정하다(님이 나와)다르구나
(해석4) 감수하자 감사하자 어지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우 교수는 ‘쓰리랑’과 거의 유사한 발음을 지닌 에벵키어 SERERENG와 SERIRENG에서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가 된다”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의 본래 의미는 ‘(사자의 영혼을) 맞이하세 맞이하세, (잠든 영혼이) 깨어났네 깨어났네’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아리랑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우 교수의 다음 설명이 도움 될 것이다.


“ ‘아리랑’은 고대 북방 샤마니즘의 ‘영혼을 맞이하다’는 의미에서, 2차장 풍속과 관련되어 이별의 슬픔을 ‘참다, 인내하다’의 의미가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쓰리랑’도 본래는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에서 ‘깨다, 깨닫다, 알아차리다’ 등의 의미로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리고 있는 여러 지방의 아리랑 가사에 나타나는 ‘아리랑’‘쓰리랑’ 등은 전체 노래가사와 연관해서 보면, 본래적인 의미인 ‘영혼을 맞이하다’ ‘영혼이 깨어나다’라기 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참다/인내하다’, ‘알다/깨닫다’ 등의 파생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보아야 전체 노래가사와 어울리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2차장의 풍습이 일찍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은 민요 ‘아리랑’을 ‘나를 찾아가는 기쁨의 노래’로 풀이한다.(이승헌, 《한국인에게 고함》, 한문화, 참조) 이 총장은 아리랑을 ‘우리 민족의 얼이 영글고 영글어서 만들어진 영혼의 노래’라며 “겉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가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님이 삶의 영원한 근원, 참나, 커다란 민족적 자아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한국인에게 고함》을 토대로 아리랑의 의미를 알아보자.

깨달음의 노래로 보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을 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아리랑에서 말하는 ‘아’는 그 개인의 역사가 생기기 이전의 근원적인 ‘나’, 이름이 있기 전의 ‘나’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의 실체이다. 그래서 ‘아’를 깨달은 사람은 참나를 깨달은 사람이며 모두가 다 하나이고 형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의미는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다 함께 누립시다.’ 이런 뜻이 된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여기서 ‘나’는 참나를 말한다. 그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참나를 버리고 거짓나를 위한 욕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십’은 통합, 완성,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깨달음을 이루지도 못하고 장애가 생긴다는 뜻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인간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의 장애자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리랑은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큰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리랑을 부르는 것 아닐까.

"아리랑은 잠든 나를 깨우는 노래요,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는 힘을 가진 노래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영적인 노래이며 인류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깨달음의 노래이다.”

출처 :  K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아리랑'의 뜻을 아시나요

이종대씨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뜻이 고개 이름이나 '떠나간 님'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곧 '하느님'이라고 썼다.
'아리'는 하늘을 뜻하는 '알'의 변음(變音)이고, '랑(郞)'은 사내· 남편 외에도 '주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50년 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발굴된 8500년 전 토기에 새겨진 그림 문자를 근거로 들었다.
다섯 봉우리 산 위에 반달 같은 모양이 있고 그 위에 둥근 해가 있는 그림 문자였다.
이씨는 "학계에서는 이 그림이 아사달을 뜻한다고 보지만 사실 아리랑을 뜻한다"며 "직계 자손인 우리가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이씨를 만나봤다.
70세인 그는 전기제품 회사에 다니던 30년 전부터 우리 역사를 공부했는데 15년 전에 고대 그림 문자를 보고 아리랑의 뜻을 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을 내려고 했지만 출판사들이 거절해 작년에 자비로 40권을 찍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인터넷과 자료를 찾아봤다.
아리랑의 어원(語源)에 대해 30종 가까운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었다.
경복궁 중건 때 원납전을 내라는 말에 저항한 민초(民草)들이 '내 귀는 멀었다'며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이 기원이 됐다는 설, '밝(光)'의 고어인 '아리'와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 합쳐졌다는 양주동의 '아리령설', 고대 낙랑시대 교통의 관문이었던 자비령의 이름인 '아라'에서 유래했다는 이병도의 '낙랑설' 등이 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96년 최초의 아리랑 악보와 영문 가사를 남기면서 "한국인들에게 아리랑의 뜻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어원을 추적한 첫 연구는 1930년 일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조선 민요 아리랑'이었다.
'아이롱설'과 나를 버리고 떠난 임이라는 '아리랑(我離娘)설' 등 6가지 설을 들고 있다.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 박사는 이 논문이 "아리랑을 희화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1년 조선족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우리는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지만 우리 무형문화재로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된 러시아 학자 추지노브와 유게라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인종학적으로 고대 아리아족에서 갈려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아리아족과 아리랑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아리야'는 '신성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종대씨의 '하느님설'과 닮았다.

외국인들이 아리랑을 먼저 연구했고 지금도 세계를 뒤지며 다양한 방법으로 근원을 찾고 있으며 중국은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한반도에서만 찾고 있어서 그동안 여러 연구가 있었어도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바라지 않더라도 학자들이 각성해서 과학적 연구로 하루빨리 아리랑의 뜻을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후손 된 도리다.
"잘못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는 이씨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아리랑의 뜻, 아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Meaning of Arirang, Dr. Harry Cho, Soongsil University, Korea

문학박사 조용호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행가는 아니었다.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노랫말 속에는 특수한 문장으로 된 또 다른 아리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노랫말을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리랑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우선, 아리랑과 아라리요는 뜻 모르는 후렴구이므로 첫 행 전체가 의미가 없다.
둘째 행,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없는 허구의 장소인데, 그곳을 넘어가므로 또한 의미가 없다.
셋째 행, 나를 버리고 가시는으로 말을 올리면서 동시에 2행에서는 넘어간다,
4행에서는 발병난다 등으로 말을 내리고 있어 가시는 님에 대한 존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발병이 나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지, 십 리라는 거리와는 큰 상관이 없다.
꼭 발병이 나야 한다면, 한 발자국도 못 가서 발병난다 정도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서 반드시 발병이 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십 리도라는 표현을 보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동양문학이나 한국인의 관념상 십 리(4km)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어감을 갖고 있는데, 아리랑에서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조사 ‘도’와 같이 쓰이고 있어서, 십 리도라는 표현 자체가 틀린 용법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아리랑이라는 겨우 네 줄밖에 안 되는 노래는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된 곳이 없는 온통 의미 없는 후렴구 상태에 빠지게 된다.

노랫말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 이유는 미래를 예언하는 노래인 고려 참요 아리랑이 금지곡이 되었고, 민간에서 구전되며 민요화되는 과정 속에서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었으며, 이때, 가사의 일부분이 당시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참요나 고려가요 등에 나오는 문장 형태로 된 뜻을 모르는 후렴구들은 특수한 문장으로, 현재의 암호문에 해당한다.

​암호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아리랑 쓰리랑(啊女郞 是女郞)으로 아리랑은 신성한 아가씨(女郞)라는 뜻이다. 암호해독열쇠를 노랫말에 대입하여 600년 전의 언어로 재구하면 한문과 고려어로 된 다섯 개의 아리랑이 만들어진다.

​남녀 대화체로 된 한문 아리랑은, 충신은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불사이군을 나타내고, 고려 아리랑은 젊은 아가씨가 스님에게 “나를 베리고 가오 스님은!”이라는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인 남녀상열지사의 장면이 된다. 아리랑은 비교 문학상 중국 원대에 유행한 원곡(元曲)과 유사한 형태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가극으로 상연하였다. 남녀간 대화의 내용을 변형하면 가극 속의 주제가가 되며, 바로,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의 원형인 고려어로 된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시니이 마까서 발화병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니이 마'를 '십리도 몯'으로 바꿔, 노랫말의 외면적 의미를 달리 표현하게 된다. 고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는 심층 구조를 숨긴 채, 북으로 끌려가는 공녀의 한 맺힌 이야기를 표현하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십리도 몯 가서 발화병난다

​아리랑은 1392년 7월 28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던 왕조 교체기에 개경의 만수산 두문동에서 만들어졌다.
아리랑의 원형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넘어간다’를 ‘나마간다’, ‘가시는 님’은 조사가 생략된 형태의 ‘가시- 님’, 아리랑 고개는 '아리이랑 곡애(谷涯)'의 발음기호로 푸른 물결을 뜻하며,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존재할 수 없었다.

​아리랑에는 푸른 물결을 뜻하는 아리 이랑과 신성한 아가씨를 뜻하는 아아 리랑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면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아 리랑이며, 아리랑 보다 더 오래된 구(舊)아리랑을 주의 깊게 잘 들어보면 '아리이랑 아리이랑 아라리로구료오'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리 이랑이다.
또한, ‘십 리도 못 가서’가 아니라 ‘신이 막가서’ 발병나는 것이며, 이것을 참요의 내용으로 풀이하면, 신이(臣李) 막가서, 즉, 역적 신(臣)하 이(李)가 막가서 고려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왕조를 부정하고, 고려를 부활시키자는 내용이 된다.
'십리도 못 가서'로 바뀐 가사는 공녀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한 맺힌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유신들은 참요 아리랑을 만들어 전국에 있는 동지들과 2년여에 걸쳐 비밀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경 만수산 두문동에서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온갖 형태의 참요들이 이에 화답하여 창화(唱和)하며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암호문 통신 체계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시작하였다.

​강강수월래과(나를 따라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剛剛隨我來過),
늴리리야(넌 어느 편이야?),
애루하(어떤가? 唉, 如何?),
지화-자(計画-하자, 계획하자),
어기여차(내가 돌아간다),
어강됴리(금방 도착한다. 我剛要到了),
애 야노 야노 야(노를 저어라),
마득사리(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니사득마? 你舍得嗎?),
쾌지나칭칭나네(감빵 갔다 나왔네. 감빵가게 될 거야),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니 아니랑께 역적 이는 임금이 아니고 신하랑께),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밤이 되니 더욱더 쓸쓸해진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린다),
두어렁셩(냉정한 이 세상이여! 對我冷淸!)

​그러나 1394년 11월 17일, 노랫말에 숨겨진 내용의 일부가 조선군 암호해독부대에 의해 풀이되어 두문동은 불태워져 말살되고 노래는 금지곡이 된다.

​금지곡 상태에서 구전되던 아리랑은 한양 천도로 인해 개경에서 한양으로 지역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언어적인 변화도 일어나게 된다. 물결을 뜻하던 '곡애를'은 땅 위에 있는 '고개를'로 오해되기 시작하고, '나마간다'는 '넘어간다', '바리고'는 '버리고', '발화병난다'는 '발병난다'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나룰 바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몯 가서 발병난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민간에서만 조심스럽게 불리던 고려의 아리랑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궁궐에서도 아리랑을 공연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노래로 공인되었고, 이를 통해 민족(民族)의 노래로 성장하게 된다.

​1926년 10월 1일, 민간에서 불리던 아리랑이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면서 노랫말에 변형이 일어난다. ‘가시는 님’이 ‘가는 님’이라는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인데, 이는 영화 가사를 편집한 사람들이 원래의 가사를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또한, 여말선초 이후에 노랫말이 민간에 구전되는 과정 속에서 미세한 변형이 일어났고, 구어체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발병난다’는 ‘발병이 나네’라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네

​이렇게 되면 십 리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먼 거리를 뜻하게 되고, 이것과 결합되는 조사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쓰이는 ‘도’가 되어 ‘십 리도’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 된다.
그렇지만 노랫말을 편집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고, 노래를 부르는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다.

​변이와 지속의 과정 속에서 가사의 일부분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노래라는 것은 일정 부분 원형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다. 즉, 가시는 님, 발병난다 등의 표현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라는 부분만은 ‘십 리도 못 가서’라는 형태로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유행가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들의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은 한민족의 혼이고 민요의 정수가 되었다.

​지금부터의 아리랑은 뜻 모르는 후렴구의 노래가 아니다.
아리랑에 숨겨져 있던 애국애족의 정신과 조상의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을 전 세계에 알려 나가야 한다.
세계 속의 아리랑으로 부활(復活)시켜야 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혼을 세계인과 공유하며, 더불어 조화롭게 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Dr. Harry Cho's Decoding. By restoring the original form of Arirang by means of decryption, it is possible to know the nature of the song; secret song, song with political message in the early years of Chosun Dynasty(14C), song of lovers, theme song of theatre play, song of sadness, song of loyal servants, song of resistance militia, song as a reflection of the contemporary lifestyle, song of ethnic ethos (Han(恨) in Korean) prevalent nationwide.


하느님 = 한알님
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



08. 아리랑 고개의 의미


둘째는 고개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은 옛날 고대 국가인 낙랑(樂浪)의 남쪽에 있는 ‘자비령(慈悲嶺)’의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낙랑’은 ‘악랑(樂浪)’이라고도 읽으며, ‘아라’로도 발음이 된다고 하여, 나라 이름인 ‘아라’와 ‘자비령’의 옛이름으로 인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리랑’의 ‘아리’는 ‘밝다[光(광)]’의 어간인 ‘밝’의 옛말이고, ‘랑’은 ‘령(嶺)’의 전음(轉音: 다른 음으로 바뀐 음)으로 ‘아리랑 고개’는 ‘광명한 고개’라는 견해도 전한다.

셋째는 한자어(漢字語)에서 왔다는 설이다. 먼저 ‘아리랑’은 ‘我(나 아)+ 離(떠나갈 리)+娘(아가씨 낭)’의 뜻으로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나간다’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되었다 한다. 또 하나는 ‘아리랑’은 ‘我(나 아)+耳(귀 이)+聾(귀머거리 롱)’이라고도 하는데, 직역하면 ‘나는 귀머거리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속뜻은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를 의미하는 것이란다. 옛날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할 때, 나라는 어수선하고 부역에 끌려온 백성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끓으니 대원군이 말하길, “차라리 귀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서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넷째는 여음(餘音)에서 왔다는 설이다. 고려 속요(高麗俗謠)로 간주되는 청산별곡(靑山別曲)의 후렴구가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인데, 바로 이 후렴구의 ‘얄리얄리’가 ‘알리알리’를 거쳐 ‘아리아리’로 된 것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산별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부분에서는 ‘청산에 살겠다’고 하였지만 뒷부분에서는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서 운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하리이까?’,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지낸다’ 등 대부분이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아리랑’은 한민족의 한의 정서가 엿보이는 노래기도 하다.

다섯째는 알{卵(란)}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이나 ‘아라리요’에서 어근을 찾는다면 ‘알’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근 ‘알’은 ‘알[卵(란)]’과 의미가 상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옛날 설화에 의하면, 신라, 가야,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혁거세왕, 수로왕, 동명성왕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시조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알’은 한민족의 시조이기도 하고, 뿌리이기도 하며, 국가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개’는 민족의 수난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는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의 은유적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의 ‘아리랑’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시조 즉 ‘알[卵(란)]’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아리랑 고개’에 대한 연구자와 연구물이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의 연구 내용은 나름대로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연구한 것이므로 앞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두가 ‘아리랑 고개’를 이해하는 데 의의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에 관련된 많은 연구물이 있지만, 필자는 그들의 연구 내용과는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선 ‘아리랑’의 ‘랑’은 고개를 뜻하는 ‘嶺(고개 령)’의 바뀐 음(音)으로 생각되며, ‘아리랑 고개’는 앞 글에서 언급되었던 두들기 고개, 재랭이 고개, 무릎 고개를 비롯하여 박달재 고개, 대관령 고개, 추풍령 고개처럼 실존하는 그런 고개가 아니다. 아리랑 고개는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보릿고개’처럼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한이 되어 머무르는 가상의 고개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아리랑’의 ‘랑’이 고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면 ‘아리랑’만 써도 되는데 왜 ‘아리랑 고개’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 천성이 착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에도 ‘일요일(日曜日)’ 하면 될 것을 ‘일요일날’이라고 하여 ‘날’을 더 붙여 주고, ‘역전(驛前)’을 ‘역전앞’, ‘우두(牛頭)’를 ‘우두머리’, ‘대하(大蝦)’를 ‘대하새우’, ‘청천(靑天)’을 ‘청천하늘’, ‘생률(生栗)을 ‘생률밤’, ‘황토(黃土)’를 ‘황토흙’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아리랑을 넘어간다’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더 쉽고 편하고 확실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아리랑’의 ‘아리’와 ‘쓰리랑’의 ‘쓰리’는 어떤 뜻일까? ‘아리’와 ‘쓰리’를 다른 곳에서 그 뜻을 찾으려 하지 말고 글자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리라 생각한다. ‘아리’는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는 뜻을 가진 어휘 ‘아리다’의 어간 ‘아리’로 보고, ‘쓰리’는 ‘마음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괴롭다’는 뜻을 가진 어휘 ‘쓰리다’의 어간 ‘쓰리’로 보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 고개’는 우리 한민족의 마음속에 한이 서려 있는 가상의 고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천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백성들은 끼니 한번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 허덕이며 살아왔고, 또한 5~6년에 한 번씩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지아비를 잃고, 자녀는 아버지를 잃으며 살아왔으니,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심정,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의 가슴속에 맺힌 그 한이 오죽하겠는가. 바로 이처럼 가슴에 한이 맺힌 고개가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넷째로는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도 이별의 한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신화와 전설 등에 의하면 ‘고개’는 이별의 장소였다. 앞 글에서 언급하였던 두들기 고개, 무릎 고개 그리고 그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전하는 유래처럼 ‘고개’에는 이승과 이별을 고(告)하고 저승으로 가는 별의 한이 서려 있기도 하다. ‘아리랑 고개’도 사랑하는 아들, 지아비 그리고 아버지와 가슴에 한이 맺힌 이별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말은 아들, 지아비, 아버지와 같은 사랑하는 이들이 사지(死地)로 떠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고,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들이 전쟁터로 떠난 후에 그들의 생사(生死)가 염려되어 걱정하는 것이며, ‘눈이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말은 떠난 이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쌓여 간다는 뜻이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말은 전쟁이 끝나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뜻이라 생각된다.

하여튼 가난한 농부가 해마다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듯이, 아들을 잃은 늙은 어버이가, 지아비를 잃은 외로운 아내가,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자녀가 가슴에 한을 품고 평생을 넘어왔고 또 넘어가야 하는 고개이면서도 한편으로 고개 너머에는 이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이 있기를 기대하며 넘는 고개가 바로 한이 맺혀 아리고 쓰린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이론이 워낙 많고 정설로 굳어진 것이 없는지라 답답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대표적인 설은 다음과 같으며, 각기 제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리한 해석이 많은 듯 싶다.

1) 南師古(1509-1571)의 亞裡(아리)嶺설
2) 이승훈(1790)의 啞魯聾(아로롱)설
3) 황현(1900)의 阿里娘(‘아리랑’)설
4) 김지연(1930)의 閼英(알영)설
5) 권상노(1941)의 啞而聾설
6) 이병도(1961)의 樂浪(아라)설.
7) 양주동(1962)의 아리(明)嶺설.
8) 원훈의(1977)의 아리다(疼痛)설
9) 임동권(1980)의 後斂(助興)설
10) 정선 설화(1987)에서의 아리오(알리오)설
11) 김연갑(1988)의 메아리('메'의 탈락)설
12) 박민일(1988)의 啞剌唎(아라리)-阿賴耶(아라야)설
13) 정호완(1991)의 아리다-쓰리다(‘아리랑’<알?>-쓰리랑<슬?>)설
14) 정익섭의 얄리얄리얄라리설(국어국문학사전)
15) 김덕장의 我離娘(나는 아내를 여의었다)설
16) 남도산의 我耳聾(나는 귀가 먹었다)설
17) 강대호의 我難離(나는 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설
19) 일인 학자의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하자)설
20) 최재억의 卵郞(卵娘)설
21) 김재수의 阿娘(아랑 전설)설
22) 이능화의 兒限偉(상랑문의 아랑위 포랑동에서 유래)설
23) 이규태의 아린(여진어 차용)설
24) 서정범의 알(卵)아리요설
25) 김승국의 阿利嶺(크고 높은 고개)설

그러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하여서는 워낙 많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정설이라고 분명히 할 수는 없지만 국악인이라면 최소한 ‘아리랑’이란 이러 이러한 뜻을 갖고 있으며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러 이러하다라고 설명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지금까지 초ㆍ중등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면 유감스럽게도 대답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초?중등교육에 허점이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국제교류 현장에서 외국인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람들과 만날 때 마다 내 나름대로 연구하였던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 문체부와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아리랑 세계화사업의 일환으로, ‘마음을 이어주는 세계인의 노래, 아리랑 4집’ 음반을 지난 2월에 발매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물론 내가 전문적으로 어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학문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아리랑’에 대하여 어차피 굳어진 정설이 없고 내 나름대로의 설명의 근거가 있는 만큼 나는 감히 나의 주장을 피력해왔다.

내가 연구하고 생각해온 ‘아리랑’의 어원과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각 지방 ‘아리랑’의 후렴 구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낱말의 구성은 진도 ‘아리랑’의 가사(아리 아리 랑 쓰리 쓰리 랑 아라리가 났네)에 나타난 것처럼 ‘아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이고 ‘랑’은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래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을 보면 수도 서울을 가르고 흘러가는 오늘날의 ‘한강(漢江)’을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
(....., 잔불복의, 감출영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
-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2면 3행
釋文 : ......,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물론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의 구성도 ‘아리’+‘수’일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강(江)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수(水)라고 불렀으니 ‘아리’+‘수’가 틀림없을 것이다. 한강도 옛날에는 한수(漢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즘도 한수 이북, 한수 이남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아리(阿利)’라는 한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우리말 음(音)을 한자로 차용하여 쓴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수(阿利水)’의 ‘아리(阿利)’라는 우리말은 무슨 뜻을 가진 것일까? 또한 ‘아리’라는 낱말은 한강의 ‘한(漢)’과는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을까?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한 프로그램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현장 모습.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오늘날 한강의 한자표기 ‘한(漢)’은 ‘큰’, 혹은 ‘위대한’이란 뜻으로 쓰인 순수 한국 고대어 ‘한’의 차음(借音) 표기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중국에 있는 강인 한수(漢水)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라는 설도 있다. 또한 한강 양안에 살던 고대인들은 한반도에서 원시 농경단계에 먼저 들어간 선진부족이었으며 '한'부족으로 불렸고 이들의 일부가 고조선 건국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한'부족이 그 후 한문자(漢文字)로 韓, 桓 등 여러 글자로 차음 표기됐다고 한다. 한강의 ‘한(漢)’을 우리의 고유한 말인 ‘한’의 한자 차용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한’과 ‘아리’는 같은 뜻이거나 비슷한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리’는 ‘크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리랑’의 ‘랑’은 어떤 뜻을 지닌 말일까? ‘아리랑’ 뒤에 항상 등장하는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라는 낱말이다. 왜 각 지방의 ‘아리랑’ 다음에는 반드시 고개라는 낱말이 따라 나올까? ‘랑’과 ‘고개’는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날 여행 중 대관령 고개를 우연히 넘다가 나의 뇌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말에는 같은 뜻의 형태가 겹쳐 글에 군살을 끼게 만드는 비경제적 동의중복(同意重複) 표현, 즉 겹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동의어가 많다보니 생긴 현상이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인' 뽐내라 아리랑' 행사의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예를 들어 추풍령고개(‘령’과 ‘고개’ 중복), 동해바다(‘해’와 ‘바다’ 중복), 약숫물(‘수’와 ‘물’의 중복), 무궁화꽃(‘화’와 ‘꽃’ 중복), 농번기철(‘기’와 ‘철’), 황토흙(‘토’와 ‘흙’ 중복), 초가집(‘가’와 ‘집’ 중복), 역전앞(‘전’과 ‘앞’ 중복), 족발(‘족’과 ‘발’ 중복), 고목나무(‘목’과 ‘나무’ 중복), 단발머리(‘발’과 ‘머리’ 중복) 등과 같은 동의 반복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추풍령의 ‘령(嶺)’은 고개‘령(嶺)’인데 그 뒤에 또 고개라는 같은 뜻의 우리말을 습관적으로 붙여 말하고 있듯이 ‘아리랑 고개’의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變音)으로 ‘랑’ 다음에 고개를 습관적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아리랑’의 ‘랑’을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아리랑 고개’는 ‘크고 높은 고개’로 해석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마을에는 임을 보내고 가신 임을 기다리는 고개가 어디에나 있었다.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의미를 지닌 특별한 장소였다. 각 지방에 퍼져있는 ‘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떠나는 임을 아쉬워하고, 돌아오지 않는 임을 원망하고 목 놓아 기다리는 한(恨)의 정서가 군데 군데 잘 배어져 있다.

정리해 본다면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아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리’는 ‘크고 높다’는 뜻을 가진 우리의 순수 고대어이며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서, ‘아리랑’은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라는 것이 우리 조상들에게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였으므로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한(恨)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각 지역에 퍼져있는 ‘아리랑’은 그 곡조와 가사가 서로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별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사람이라면 어린 자식들이나 혹은 외국인들이 물었을 때 옹색하나마 나름대로 답변할 말은 준비해두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출처 :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민족은 코레아인가?

로마서 10:9-10, 19-20, 이사야 55:5-6

우리나라가 2018년 2월 9일 부터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되는데 이번평창동계올림픽에는 92개국 2925명 선수가 참가하는데 역대 동계올림픽치고는 최대규모라고 한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전세계가 다시 한번 코레아를 주목하고 있다.

 30년전 1988년에도 하계올림픽이 열려서 코레아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때 보다 한국의 k-pop, 영화, 스마트폰, 첨단전자제품등을 통해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나는 전세계인들이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 축제를 통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이제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바란다 왜냐하면 한국기독교가 아주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부흥되었는지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국 와서 한국의 교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밤에 차를 타고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 십자가탑에서 비쳐지는 붉은 네온 십자가를 보게 된다면 한국의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스마트 산업보다도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성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계인들은 한국의 영적인 수준을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까지만 하여도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마귀에 의한 각종 우상숭배와 조상귀신 미신등 잡신을 섬기며 살았왔던 희망도 없고 꿈도 없는 버림받았던 민족이나 다름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 마귀를 따라가는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사랑하사 130년전 미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사 복음을 듣게 하여 영적 어두움에서 깨어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명철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주의 말씀은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되어 영원한 영생을 간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변방있었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세계인들이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코리아가 전세계의 중심국가로 올라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는 세계인들의 겨울스포츠를 2월 9일부터  평창에서 하게 되니 다시한번 우리나라가 전세계인들의 스포라이트를 받게 되었다는 것에 다시한번 자부심을 갖게 되며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지만 그들이 하나님말씀 듣기를 거부하므로써 언젠가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이방민족을 통해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모세도 언급하였고 이사야대언자도 언급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줄 민족이 우리민족이면 참 좋겠지요.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사65:   1.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찾아내었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아니하던 한 민족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라 보라 하였노라

개역성경에는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였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한 이방민족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한 개인도 전도하여야  돌아오듯이 이스라엘민족도 어느 한 이방민족이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민족을 백성이 아닌민족이며 어리석은 민족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그러면 그 민족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사24: 16  땅의 맽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사 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들로(모퉁이)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장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실 민족은 동쪽에 있으며  땅 끝에 있으며  땅 모퉁이에 있는 민족이라는 말씀이다.

롬 11:11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지게 되었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것을 그들이 질투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이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그들의 쇠퇴함이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많이 부요함이 되겠느냐?

25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29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는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이 오히려 이방민족에게 복음이 전하여졌고 그 이방민족을 통해 이스라엘이 부끄러워지면서 그 이방민족으로 부터 복음을 전하여 져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주장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 10: 9-11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또 성경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롬10장의 이 말씀은 그동안 개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였지 이스라엘도 개인이 구원받는것 처럼 이렇게 구원시킨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서 9장부터 11장 까지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런데 롬10: 19-20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알고 보면 이 부분 백성이 아닌 자들,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민족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11: 25 열방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고 마지막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하나의 피라믿을 쌓을 때  피라믿의 마지막 위에 얹히는 돌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란 돌이 놓이지기 위해서 전제된 조건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쌓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까지 되어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9:27)

70억 인구가 다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돌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민족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인데 그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롬10: 19-20은  사 55: 5  신32:21의 말씀이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신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하나님께선 이방인 한 민족을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인데 그 나라 백성들이 달려 온다는 것은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혹시 한국민족이 아닌가요?   그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행전 16장 6-8절을 통해서 보면 그 나라는가  아시아권의 한 나라라는 것이다. 아시아권이라고 써 있지는 않지만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라는 것이다.

왜 바울이 소아시아지역에서 자꾸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지방으로 즉 위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려고 하였는지 행14장을 보면  1차선교여행에서 바울은 그 지역에서 매도 맞으면서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였음에도 바울이 다시 그 쪽(아시아- 무시아- 비두니아)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의 소망은 아시아로 갈려고 했는데  성령님이 막으셨고 무시아에서 북쪽 비두니아쪽으로 갈려고 하였는데  주님의 영이 막으시고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바울을 불러서 마케도니아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본 후 즉 서쪽으로 복음의 행선지를 정했다. 바울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주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선 빨리 동쪽에 있는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급박한 당위성 필연성 때문에 가급적이면 북쪽이면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 말은 아시아권의 한 나라가 맞는데 우리나라가 동쪽은 맞지만 과연 북쪽은 맞을까?

1999년 12월 31일 AM 00시 밀레니엄 시대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 카메라 맨들이 동쪽에서 해드는 광경을 찍었는데 어디일까요?  그 시간 우리나라에서는 DJ가 보신각 종을 쳤는데 그 분이 종을 치면서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보다 동쪽에 있다고 이스라엘에서 정동쪽이 대한민국이라고 말을 하였는데 너무 신기한 말이지요.

물론 우리나라가 동쪽인 것만은 사실인데 북쪽으로 보기엔 이스라엘은 위도 35도이고 우리나라는 38도이니 이스라엘보다 3도 위이니 그렇네요.

동서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미국은 우리나라 보다 동쪽에 있지만 왜 미국사람을 동양놈하지 않고 서양놈이라고 하는가? 중요한 것은 기준이 어디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기준이 되면 우리보다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라고 하지만 세계지도는 중심 기준이 어디냐 하면 에스겔서 38:12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보듯이 이스라엘이 중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 서쪽을 정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동쪽은 맞지만 북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언론인들 카메라맨들이 밀레니엄 일출을 찍은 곳은 뉴질란드이었다. 뉴질란드가 지구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지역이라고 전세계 언론인이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뉴질란드에 볼 때 북쪽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사야 55:5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굉장히 강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정도 보고 우리나라라고 할 수는 없고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사야 말씀을 보자.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방인 어느 한 나라를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속에는 그 나라는 단수이며 그들이 너에게 달려온다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복수이다. 이것은 뭐냐하면 그 나라 땅이 올 수는 없고 그 나라 백성들이 온다는 것이다. 왜 달려오냐 하면 이방인들이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 이방민족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부르다 to call = kara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이것을 명사로 하면 부르는 자 kore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주라고 하거나 그 분이름을 부르는 대명사 여러 가지 있는 가운데 하나가 하이다. 이 글자를 앞에다 하면 하가 되고 뒤에 두면 아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뉴엘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글지 합성어인 임마누엘 (히브리어: עִמָּנוּאֵל, Imanu'el)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사 7:14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마1: 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글자의 합성어를 예로 들었듯이  두 단어 합성어인 코레아도

코레아 :  히브리어로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코레아란 의미를 알고나면 말을 못할 정도이다.

유대인들에게 코레아라는 것이 단지 고유명사라고 알았지 한번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중요한 것은 한 이방민족이 복음을 갖고 그들에게 온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을 받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신앙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가 바로 주를 만날만한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55: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설교자들이 이 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5절 말씀이 전제 되어야 한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이렇게 이방인인 한 민족이 복음을 가지고 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요 가까이 계실 때에 악인은 그의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10 언제가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물이 다시 올라가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내 말은 언제가 반드시 성취하리라는 것이다. 만일 이 부분이 맞다면 우리는 로마서 10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부르셨다면 이 말씀이 왜 주요한 것인가 하면 초림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시고자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자물쇠와 같다는 것인데 바로 이 키에 해당되는 또 다른 민족이 와서 자물쇠를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을 통해 로마서 10장은 누가 말해도 한 개인의 구원받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도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구원받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구원받기 위해선 한 이방민족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방민족은 언제 예언되어 있느냐 하면 ?

모세때 예언되어 있었고 이사야가 예언하였고   사도바울이 그것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롬10: 18-21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이렇게 예언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시기하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줄 이방민족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민족에게 복음을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시한번 반복된 말씀이지만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 지 아니하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북쪽을 거쳐 동쪽으로 갈려고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도 북한 우리 민족에 복음을 전해주고 싶듯이 바울의 심정도 이런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여 주는 민족이 만일 우리 민족이라고 결정났으니 한번 우리민족이 그 사명을 감당할 것을 가정 해보자. 우리민족은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있는 민족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라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민족이요 자물쇠인 이스라엘나라에 대해 복음의 키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요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내 교회 하나 잘 되는 것만 비젼이면 안되겠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꿈군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뭔가 하나의 구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교회끼리 경쟁적인 구도가 아니라 협력적인 구도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개인적인 비젼이나 교회적인 비젼은 있지만 민족적인 비젼 국가적인 비젼이 없으므로 이스라엘까지 복음화하는 전략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작은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들까지 새로운 부흥이 와야 하며 교단으로 분열된 기독교계가 하나로 통합하는 일부터 하여야 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우리가 이스라엘과 닮은 점이 있다.

이스라엘 독립 건국은 1948년 5월 14일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15일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왜 이나라들의 건국을 말하느냐 하면 만약 이스라엘이 건국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스라엘에 전하여 준다면 이것을 방해하여야 할 사탄의 세력이 있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원지 않고 또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원치 않다는 것을 안다. 나라가 세워졌다 할지라도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것은  누가 바로 이방인의 한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사단이 볼 때 가장 두려운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해주어 회복시키는 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부흥되도록 내버려 두면 될 까요? 만일 그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건국 당시 제2의 예루살렘이 어디냐 하면 평양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단의 전략에 의해 북한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 그래서 김일성을 통해서 1948년 9월 9일 북한을 사탄왕국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우상이 전역 어디에나 세워져 있는 사탄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종교로 분류하면 신도수가 1,900만인 세계10위 규모의 종교라는 것이 오늘날의 북한정권이다. “1950년대 시작된 주체사상은 북한이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관점에서 정부 주도의 사상이며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명백하게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다.

 

북한정권의 통치행태가 특히 유사(類似)기독교 성향을 띠고 있는 것같은 강한 종교적 색채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북한의 헌법보다 상위규범은 ‘조선로동당규약’이며, 그보다 상위규범은 ‘유일사상확립을 위한 10대원칙’이다. 金日成을 절대화하는 10대원칙은 기독교 10계명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10계명을 암송하듯, 북한주민들은 10대원칙을 달달 외워야 한다. 종교적 성소(聖所)에 해당하는 ‘金日成혁명사상연구실’은 북한 전역에 4∼5만 개나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교회  숫자 약 51,000개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북한의 金日成연구실 수는 남한의 교회수와 비슷하다.

  金日成 동상인 우상은 북한 전역에 약 35,000개에 달한다. 북한주민들은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는 영생할 것이다”라는 표어 아래 동상 앞에서 참배와 묵념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북한주민들은 이곳에서 가정의 대소사를 치르기도 한다. “북한은 국가라기 보다는 수령이 교주가 된 사교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리 김일성 교주의 사탄왕국이라 하여도 평양의 행정구역에는 선교구라는 행정구역이 있으며 전철역중에는 부흥역이라는 역이 있다. 우리 한국에도 없는 행정구역과  전철역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임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http://hansarang91.tistory.com/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가 우리 나라가 맞는다면 우리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조차 대한민국이 아닌가! 바울이 우리나라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맘에 와 닿는 느낌은 너무나 벅차고 큰 사명임을 생각나게 한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방으로 전달하였지만 2000년 동안 흩어져 살면서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특정한 민족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것을 말하였는데 이 말씀을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면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였던 말씀과 이사야가 하였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마지막 때 이방의 한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민족을 복음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저는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기를 확신하는 바이다.

바울의 의지와는  반대로 복음은 유럽을 향해서 진행하였다. 만일 바울의 의도대로 복음이 동쪽으로 왔다면   인도의 힌두문화에  변질되어 버렸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시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헬라문화를 택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헬라문화에선 창조주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서쪽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복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사야서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다.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 오리니 그 나라가  어느 한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달려온다는 것이다.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찾아야 할 때이므로 거절하지 말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보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땅이 열매를 맺게 하고 싹을 내게 하여 곡식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도 내 말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이방인들 중 한 민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줄 것을 이미 예언한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7-8, 7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 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런데 거기 한 민족을 부른다는 말씀이 있다. 이 부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어원이 카라입니다 그런데 부르는 자 명사로 하면 코레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표시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부르실 때는 아버지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유대인 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 때로는 하라고 하는데 뒤에 있으면 아로 발음 나는 것이다. 

 아 발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름이 코레아요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말하고 해석을 하면

히브리어로 코레아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이보다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한국과 이스라엘의 비교 (창세기10:21-32)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음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조상)

셈->....25.에벨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었으니 이는 그의 날들에 땅이 나뉘었기 때문이더라.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는데 (한국인의 조상 단군의 다른 이름)

창10: "30 그들이 거하는 곳은 네가 동쪽의 산 스발로 갈 때에 만나는 메사에서부터 시작되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아들들 곧 그들의 가족들과 언어들에 따라 그들의 영토들과 민족들대로 셈의 아들들이니라.

 32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 곧 그들의 세대들에 따라 그들의 민족들대로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이라. 홍수 이 후에 이들로 말미암아 땅에서 민족들이 나뉘었더라."

"욕단은 메사에서 스발로 가는 길에 동편산에 거주하였으니 메사는 모스크바, 스발은 시베리아다. 동편 산은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단군은 욕단과 관계 된 인물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한국의 조상들이 지켜온 열 두 절기 중

 정월대보름과 팔월대보름은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수장절과 의미가 동일하다.

8월 대보름인 추석이 성경의 수장절과 일치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욕단의 후손 한민족은 아리랑 하나님을 불렀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엘로힘 하나님을 불렀다. 아브라함은 초림 예수님의 족보의 조상이고, 욕단 단군 후손인 한민족은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후손들이 될 것이다."

이 코레아의 의미를 이해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한 이방나라를 한 이방민족을 부르시겠다고 하셨어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코레아라고 하는데 이 뜻을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주께서 부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 할 수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샬롬. 마라나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었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의 유석근 목사 저서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 고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니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고서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 가사부터 복원하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는 ‘연음법칙’ 이다.
  왜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규칙이 있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벗이랑→버시랑”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접미사 이랑’의 합성어이다.  ‘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노아의 홍수후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하나님을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 창조주 하나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이었다.
  ⑥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랍어 성경책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라’라고 표기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⑦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너랑 나랑).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며 바로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본래 의미이다.
  ⑧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나온다. 그래서 ‘알’은 ‘모체요, ‘근원이요, ‘시작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⑨ 다만 우리 민족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⑩ 우리 나라 시조설화에 고구려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것, 신라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왕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 지도자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한알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므로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⑪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한알님(하나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⑫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의 핵심이었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작의 기원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⑬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시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성경원어인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의어이다.
   ⑭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큰 지식이다.
   ⑮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이다. 왜 그럴까? 경희대 서정범 교수(국문학과)는 그것이 ‘큰 알’(한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고,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한알님(하나님) 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엘)에서 왔으니 한알(엘)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 ‘알이랑민족’의 무덤 양식은 ‘한알’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고 밝힐 수 있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그 ‘고개’란 우리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 고원을 중국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를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 알이랑민족의 선조인 셈의 4대손 욕단의 가계는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창 10:21~30).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그러므로‘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배달)를 찾아 동방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전통 민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이며 7천만 한민족의 노래를 넘어 70억 세계인이 함께 부르고 같이 보존해야 할 인류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은 이상의 논거와 같이 고증학적으로 풍부한 증거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은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이다.
 
그렇다면 알이랑이란 의미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나?
꼭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리랑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러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석근 목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연구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을 <알이랑민족>이라는 제목의 도서로 출간했다. 이것은 필자가 부여받은 시대적 사명이다.    
<알이랑민족> 244~282쪽에는 우리 조상들이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음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자료들이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유대민족 뿐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창조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어느 교수의 주장도 실은 그러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조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왜? 아브라함 이전 시대와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이방인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귀한 이방인들은 누구일까?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이방인 >  
  <알이랑민족>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어원이 ‘한알님’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알’에 관한 인문학적 지식과 이해의 폭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곧 ‘알’은 ‘천신’(天神)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일종의 원시 단어였다. 이 ‘알’에서 ‘엘’도 ‘얼’도  높은 분의 말씀을 뜻하는 ‘왈’(曰)도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한알님)은 가장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의미하는 단어 ‘일’(1)도 바로 ‘알’이 어원이다. ‘알’은 유일신으로서 오직 하나(1)이기 때문이다. 즉 ‘알’에서 ‘엘’ ‘얼’ ‘왈’ ‘일’ 등의 단어들이 전부 가지쳐 나왔다. 
  ‘알이랑’은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왜?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조상은 하나님을 아는 셈의 4대손 욕단이었기 때문이다(창 10:21~30). 에벨의 자손인 욕단의 가계는 형인 벨렉의 가계와 더불어 셈족 중에서도 선택된 특별한 종족이었다(창 10:21). 그러므로 에벨의 혈통인 이 두 계열은 셈족을 대표하는 족속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거룩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맥(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양으로 이주한 족속이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가계였다(창 10:30). 그런고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종족답게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고개 즉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는 ‘산지’를 넘어 동방의 새 땅(새파르=새바르=새발=새벌=스발)으로 멀리 천동(遷動)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명의 본원지인 동방 땅 끝에 도달하여 유일신 하나님(한알님)께 천제를 드리고 배달(밝달)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제천민족’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이랑’은 성경과 관계가 있다. ‘알이랑’은 한국인의 조상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외증(外證)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찬송가 ‘알이랑’은 기록된 계시인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민요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보다 국어학자, 그리고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는 음대 교수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8년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인 주영자 교수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직접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대를 방문, 음대교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의 원의에 대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해석은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한 해석이라고 했다. 고증학적인 증거 및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이다”는 이 해석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킬 이유는 조금도 없다.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신학자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 대학원장)는 <알이랑민족>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알이랑민족>은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성민(聖民)임을 외증 과 내증으로 증명한 역저이다. 외증으로는 역사적, 지리학적, 고고학적, 과학적인 사실을 연역적이고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불러온 민족의 노래 ‘알이랑’에 ‘하나님과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외증의 하나이다.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 &Christian College, Genesis University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사무엘 박사 역시 <알이랑민족>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강의하신다.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 자랑스러운 알이랑 민족 >
 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윤사무엘 박사(현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윤사무엘 박사는 <한국교회와 신학>에서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신학"을 "한국의 신학"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적극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은사이신 신성종 교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전 충현교회 담임)는 유석근 목사의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해서 자신은 견해가 일치한다고 했다.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 연구하는 ‘아레오바고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단종파를 다루는 월간지 「현대종교」의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장기간 역임한 이영호 목사가 대표로 있다. 그는 지금도 ‘사이비종교 피해대책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단사이비집단을 척결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영호 목사는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대해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혀주는 도서로서 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침례신학대학의 원어교수를 역임한 김선기 목사(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는 <알이랑민족>의 추천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인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위시한 민족사관 학자들의 한국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오던 나에게 유석근 목사님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정리시켜 주는 통쾌한 저서였다.”
성막론의 권위자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는 CTS에서 "아리랑은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는 제목으로 연속 방송 특강을 했다. CT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청할 수 있다. 본 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아미(AMI) 선교회의 황용현 목사도 필자가 <알이랑민족> 에서 역설한 아리랑 찬송가론을 가르치신다.


   ‘알이랑교회’라는 교회 명칭 
  필자는 예장합동 교단에 소속된 목사로서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목양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은 “알이랑교회”이다. 원래는 ‘상동중앙교회’였는데 수년 전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알이랑교회’로 전 성도들의 결의를 얻어 교회명칭을 변경했다.
그런데 필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은 교회명칭을 변경하려면 반드시 노회의 정기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노회의 허락 없이 지교회 차원에서 임의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수 없다. 우리 교회 역시 ‘알이랑교회’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노회에서는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했다. 그 후에 교회명칭변경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이름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 이다. 아마 이런 교회이름은 전국에서 아직 하나뿐일 것이다. 


다시한번 정리하자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인데 연음법칙으로 인해 ‘아리랑’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찾으려면
가사부터  ‘알이랑’으로 복원해야 한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엘’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어원은 ‘한알님’이다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이랑’은 ‘~와 함께’라는 조사이다(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그래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뜻이다.”

 아리랑의 원의(原意)를 풀어준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계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밖에서도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리랑은 우리나라민요를 뛰어넘어 전세계인들이 불러보는 인류 최초의 찬송가임을 알게 되었다.






매월 14일은 특별한 날




매월 14일은 특별한 날 


매월 14일마다 특정한 '14일 데이'가 있답니다.
1월~12월까지 도합 12개의 데이가 있는 셈이에요.
14일에 있는 만큼, 포틴데이(Fourteen Day), 혹은 포틴스데이(Fourteenth Day)라고 해요.
포틴스데이가 맞는거 같긴한데 줄인말이 대세인 시대라!
수많은 기념일들이 존재하지만 14일 데이의 특징은 전부 연인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랍니다.
연인에게 선물하고, 연인과 함께 하고... 말그대로 커플천국, 솔로지옥이죠...물론, 블랙데이가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블랙데이는 좀 서글픈 느낌이 강하다고나 할까?
사실상 14일 데이는 커플(또는 연인)들을 위한 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4월 14일은 블랙데이! 짜장면을 먹는 날이에요.

 그리고, 대부분 특별한 데이의 경우, 마케팅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11월 11일 빼빼로데이 나 3월 3일 삼겹살데이처럼 말이죠), 이런 것을 일컬어 포틴데이 마케팅(Fourteen Day Market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모든 데이를 일컬어서는 데이 마케팅(Day Marketing)이라고 하구요.(결국, 상술이었던겐가!!!) 14일 데이만 있는게 아니고 일년을 기준으로 수많은 데이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데이 마케팅은 날짜가 겹치기도 한답니다.(11월 11일은 십일절이라고하는 11번가의 이벤트날이기도해요) 더군다나, 전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의외로 대부분 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함정!! 거의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알고 있어요. 화이트데이도 제가 알기로는 한국과 일본정도에만 있다고 알고 있어요. 결국, 커플들이 추억만드는 날인 동시에, 엄청 상업적인 날이에요.(누군가에게는 매출이 오르는 날...?)


11월 11일 빼빼로데이나 3월 3일 삼겹살데이 모두 데이마케팅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데이들이 있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월 14일이 특정한 데이가 있는 만큼, 12번의 데이가 있답니다. 하나씩 설명하기에 앞서서 어떤 날이 있는지 알아볼께요.
한글과 영어로 적어볼께요.
1월 14일 다이어리데이(Diary Day)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또는 밸런타인데이, Valentine Day)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1월 14일은 다이어리데이(Diary Day): 소중한 사람에게 다이어리를 주는 날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 또는 밸런타인데이)
모든 14일 데이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가장 유명한 데이,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요. 예전에는 발렌타인데이가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영어발음에 가까운 밸런타인데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 듯하네요. 사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14일 데이는 없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발렌타인데이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고백하는 의미로 초콜릿(초콜렛)을 주는 등의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단순히 좋아하는 이성(남자 또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랍니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는 3세기 로마제국 시절,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결혼이 가능했던 때에 발렌타인이라는 사제가 허락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한 것을 기리며 만들어진, 말 그대로 연인들의 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달콤한 초콜릿이 사랑의 매개체가 되는 거죠. 예전에는 주로 초콜릿을 주는게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요즘은 특별한 개성이 넘치는 선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그리고 한국 사람답게 드물게 떡을 선물하기도 한답니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의 경우, 세계적으로 발렌타인데이와 쌍벽을 이루고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우리나라와 일본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14일 데이에요. 발렌타인데이에 다채로운 선물이 오고가는 것 처럼, 화이트데이에도 사탕 뿐 아니라, 초콜릿을 포함한 개성있는 선물을 주기도 한답니다. 화이트데이의 유래는 에서 사탕업체들이 상술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어요. 14일 데이 중 가장 최초의 마케팅인 듯 하네요. 일본에서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와 몇 개의 나라가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성대하게 기념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은 여성이 초콜릿을 준 남성에게 답례한다는 의미가 있기도 해서 마음을 받아줄 것인지 결정하는 날이기도 해요^^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주는 날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앞에서 잠시 언급했었지만 매월 14일 데이를 서글프게 보내야하는 솔로들을 위한 날, 4월 14일 블랙데이에요. 14일 데이중에 유일하게 솔로를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받지 못한 솔로들끼리 한데 모여 쓸쓸이 짜장면을 먹는 날인데, 요즘은 솔로, 커플 상관없이 짜장면을 즐기는 날이기도 해요. 그리고 짜장라면 회사에서 마케팅을 해서 짜장라면 먹는 날이라고 크게 광고를 하기도 하죠. 거기에 후식으로는 아메리카노 같은 검은 계통의 옷을 입고, 검은 계통의 음식들을 먹어주는게 일반적인 블랙데이랍니다.(끝까지 뭔가 쓸쓸해지는...) 아무래도 솔로보다는 커플을 공략하는 것이 마케팅에 좋을테니까요. 블랙데이는 화이트데이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극한의 쓸쓸함을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해요. 하지만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로운 솔로들이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커플로 발전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기도 해요 @.@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초콜릿과 사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과 함께 쓰디쓴 블랙커피를 먹는 날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5월 14일 로즈데이는 사랑하기 좋은 계절 5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로 연인이 되거나, 혹은 사랑이 깊어진 커플들이 이제는 장미를 선물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쯤되면 야외데이트하기도 좋은 날씨이고, 전국 곳곳에서는 장미축제가 벌어지기도 해요. 그리고 솔로들에게는 옐로데이(Yellow Day)이기도 한데, 이유는 블랙데이까지 커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노란 옷을 입고, 카레를 먹어야 솔로탈출 할 수 있다고 해요. 블랙데이에 짜장면 먹은 것도 짜증나는데, 별걸 다시켜요. 역시 커플천국,솔로지옥이라는... 노란색이 눈에 잘 보이니깐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함일까요...? @.@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날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6월 14일은 말 그대로 커플들이 키스하는 날, 키스데이인데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등을 통해 연인이 된 사람들이 키스를 하는 날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옛날처럼 남자들이 미적거리는 경우도 잘 없고, 남자가 미적거리면 여자들이 공격적인(?) 경우도 적지 않은 거 같아요. 진도(?)도 빠른 것이 요즘 세상인데, 이 때까지 키스안하고 시간이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어쨌든 이 때까지 키스를 못했다면, 공식적인(?) 기회가 아닐까 싶어요. 분위기있는 레스토랑, 그리고, 품격있게 와인 한 잔 등등... 좋은 자리를 만들어보세요^^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연인들이 키스하는 날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7월 14일 실버데이는 실버(silver)라는 말 그대로 은으로 된 악세사리를 선물하는 날이에요. 연인사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무래도 반지, 커플링(couple ring)이 될테구요. 꼭 반지가 아니더라도,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 많은 악세사리가 있으니, 적절하게 골라서 하시면 될 거 같아요. 솔로들에게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 기회이기도 하지만 갑작스런 은 선물은 상대방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세요. 물론,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실버데이 역시 상술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지키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골드(gold)데이가 아닌만큼 조금은 부담이 적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실버데이는 친한 선배, 부모님 등 가까운 친한 연장자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날이라고도 하네요^^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은으로 된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날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매월 있는 14일 데이는 금전적인 부담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린데이의 경우 부담이 덜하고, 건강에도 좋은 포틴스데이랍니다. 8월 14일이면 정말 더울 때인데, 나무가 무성한 숲에 가서 산책도 하고 삼림욕도 하는 건전한 날이에요. 시원한 산에가서 피서를 하는 개념이죠. 그리고 8월 14일은 뮤직데이(Music Day)이기도 해요. 원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CD를 선물하는 날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음반이 아닌 음원이 일반화된 요즘은 락 페스티벌이나 클럽같은 곳에 가서 음악에 몸을 맡겨 신나게 즐기는 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린데이에 숲에 가는 커플은 많이 들어보지는 못한 것 같네요...@.@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연인과 함께 숲에 가서 산책도 하고 삼림욕을 하는 날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요즘과 같이 스마트폰이나 DSLR이 대중화된 시점에서는 포토데이가 조금은 무의미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포토데이는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어서 같은 사진을 나눠 갖는 날을 말해요. 예전같이 필름사진기를 인화하던 시절이라면 의미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어디서든 사진찍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포토데이가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매일매일 기념사진찍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뭔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날짜를 따로 정해서 한다는 것이 어색한 듯 싶어요. 어쨌든 기념사진을 찍어서 같은 사진을 서로의 지갑에 넣고 다니게 되는 날이 포토데이랍니다.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커플이 함께 사진 찍는 날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블랙데이정도를 제외하면 지키는 사람들이 사실 많은 건 아닌데요. 10월 14일 와인데이의 경우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와인데이 당일 와인을 집 또는 밖에서 먹으면서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와인하면 역시 분위기를 잡는데 1등공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또는 와인바에서 가볍게 와인 한 잔하면서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꿈꾸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에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날이 아닐까요?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인먹는 날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11월 14일은 데이트의 필수 코스, 커플들이 영화관가는 날이에요. 원래 영화는 이성과 함께 보는 경우가 동성이랑 보는 경우보다 많은 편인데요. 특히, 이 날은 연인들이 영화보는 날이기 때문에 솔로분들은 이 날은 피하셔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추천해요^^; 크리스마스의 경우, 밖에 나가면 대부분 둘 씩 걸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요. 무비데이의 경우도 평소보다 커플들이 많기 때문에 솔로들에게는 조금 짜증날 수 있는 날이에요. 그리고 11월 14일은 오렌지데이(Orange Day)라고 하기도 해요. 쉽게 말해서 오렌지 먹는 날! 그래서 연인들이 함께 오렌지 주스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하실 수 있어요. @.@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커플끼리 영화보는 날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12월 14일은 연인끼리 포옹하는 날이랍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솔로들은 옆구리가 시리지만 (ㅠ.ㅠ) 커플은 따뜻하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죠. 커플이 된 지 시간도 많이 흐르다보면 포옹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단순히 추운 겨울을 녹이는 날이면서 돈도 전혀 들지 않는 날 같은데요. 이 날은 머니데이(Money Day)이기도 해요...@.@ 예상하셨듯이 돈 쓰는 날이기도 한데요. 머니데이가 아닌, 허그데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풍성해지는 시간이 아닐까요? ^^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연인끼리 포옹하는 날



창조(바라, 야차르, 아사, 바나)





창조(바라, 야차르, 아사, 바나)

창세기의 네 가지 창조 단어 분석(창1:1, 1:7, 1:27, 2:7, 2:18, 2:22)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라는 단어는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에는 각각의 의도가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바라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에서 인테리어 하듯이 형성하는 창조인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건축하는 단어인 바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분석하여 깨달으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 단어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절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선택한 백성들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을 받았습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베레쉬트(722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베이트는 집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 첫 번째 알파벳은 알레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일 최초로 쓰인 단어가 베이트입니다.
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베레쉬트라는 단어에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 의미로 ‘베레쉬트’를 해석해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 계획도 끝내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켰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절대 원죄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바라(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꼼꼼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강동사, 칼형 (Strong Verb, Qal)

https://m.cafe.daum.net/prosbible/jmF9/10?listURI=%2Fprosbible%2FjmF9

https://sermon-jesus.tistory.com/17949270


강동사는 어간이 모두 일반 자음으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동사들로서 규칙 동사라고도 하는데 단순형, 강의형 및 사역형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했다.

이 세 가지는 다시 태에 따라 일곱 가지로 세분되어 지는데, 여기서는 단순형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칼형에 대해 동사의 개념편에서 배운 순서대로 하나씩 구체적인 문법을 학습하기로 한다.
이후 각과에서 배우게 될 모든 형태의 동사에 관한 문법은 모두 같은 순서를 따라 전개될 것이다.

1. 시제 (Tense)

히브리어 시제는 완료시제와 미완료 시제의 두 가지 종류 밖에 없으며, 여기서는 직설법의 시제부터 살피기로 한다.

1) 완료시상(Perfect)

인칭

성수

단       수

인칭

성수

복       수

3

 ל󰖨󰙌    그가 죽였다

 (카-탈)

3

 וּל󰖮ꔈָק  그들이 죽였다

 (카-텔루-)

ה󰗚󰖮ꔈָק 그녀가 죽였다

(카-텔라-)

2

󰚛󰗡󰖨󰙌   네가 죽였다

 (카-탈-타-)

2

 ם󰚟󰗡󰖨󰙓 너희가 죽였다

  (케탈템)

󰚢󰗡󰖨󰙌   네가 죽였다

 (카-탈-트)

ן󰚟󰗡󰖨󰙓  너희가 죽였다

  (케탈텐)

1

י󰚝󰗡󰖨󰙌  내가 죽였다

 (카-탈-티-)

1

וּנ󰗡󰖨󰙌  우리가 죽였다

 (카-탈-누-)

① 변화표의 순서가 3인칭 남성 단수부터 시작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3인칭 남성 단수가 동사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② 완료형 동사는 인칭 대명사가 접미요소로 붙는다. 단, 3인칭의 경우는 단, 복수 모두 인칭대명사와 모양이 다르다.

③ 접미요소 결합에 따른 모음 변화

㉠ 3인칭 접미요소 ה󰚼(아-)와 וּ(우-)는 자신들이 액센트를 취함으로써     앞의 중간 어간(ט)의 모음을 쉐와(모음약화로 인한 유성쉐와)로 만든     다. 그러나 초두의 장모음은 그대로 남는데 메텍을 표시함으로써 카     메츠하툽과의 혼동을 피하게 해준다.

㉡ 자음 접미요소인 󰚛(타-), 󰚢(트), י󰚝(티-)와 וּנ(누-)는 액센트를 갖     지 못하기 때문에 모음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ל(라멛)이 쉐와     를 가진 것은 단순히 접미요소를 연결하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생긴      것으로 분절쉐와라고 부른다.

㉢ 중접미요소인 ם󰚟(템)과 ן󰚟(텐)는 자신들이 액센트를 가지면서 초두     의 개음절 장모음을 쉐와로 만든다.

④ 완료형은 동작이 끝난 모든 종류의 시상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완료형이 나타낼 수 있는 시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이다.

㉠ 단순과거 : ∼가 ∼하였다.

㉡ 현재완료 : ∼가 이제 막 ∼하였다.

㉢ 과거완료 : ∼가 ~하였었다.

㉣ 미래완료 : ∼가 ∼하였을 것이다.

2) 미완료시상(Imperfect)

인칭

성수

단       수

인칭

성수

복       수

3

 ל󰖬󰙓󰖹    그가

 (잌토-ㄹ)   죽일 것이다

3

וּל󰖮󰙓󰖹      그들이

 (잌텔루-)      죽일것이다

 ל󰖬󰙓󰚝  그녀가 

 (팈토-ㄹ)   죽일 것이다

ה󰗺󰗡󰖬󰙓󰚝   그녀들이

 (팈토-ㄹ나-)   죽일 것이다

2

 ל󰖬󰙓󰚝   네가

 (팈토-ㄹ)   죽일 것이다

2

 וּל󰖮󰙓󰚝     너희가

 (팈텔루-)      죽일 것이다

י󰗜󰖮󰙓󰚝  네가

 (팈텔리-)   죽일 것이다

 ה󰗺󰗡󰖬󰙓󰚝  너희가

 (팈토-ㄹ나)   죽일 것이다

1

ל󰖬󰙓󰔟   내가

 (엨토-ㄹ)   죽일 것이다

1

 ל󰖬󰙓󰗼     우리가

 (닠토-ㄹ)     죽일 것이다

※ 암기요령은 3인칭 남성 단수부터 접두자음과 접미요소를 떼어서 단수는 ‘이, 티, 티,      티-리, 에’로 외우고 복수는 ‘이-우, 티-나, 티-우, 티-나, 니’로 외운다.

① 미완료형 동사에는 완료형에서와 같은 접미요소 뿐 아니라 접두자음이 붙는다. 미완료형에 붙는 접미요소는 단수에는 2인칭 여성에만 붙고, 복수에는 모두 붙는다. 접두자음은 빠짐 없이 붙는다.

② 칼형의 미완료 시상의 주도 모음(어간의 중간 자음의 모음)은 세 종류가 있다.

㉠ 일반 동사는 󰛈(오-)이다. : ל󰖬󰙓󰖹(잌토-ㄹ, 그가 죽일 것이다)

㉡ 상태 동사(자동사)는 󰚽(아)이다. : ד󰔰󰗎󰖹(잌받, 그는 무거우리라)

㉢ ן󰚔󰗺(나-탄, 주다)류의 동사는 󰚿(에-)나 󰛀(에)를 가진다. : ן󰚞󰖹(잍테-ㄴ,       그가 줄 것이다)

③ 접두자음과 접미요소 결합에 따른 모음 변화

㉠ 접두자음은 바로 뒤에 오는 자음과 함께 폐음절을 이룬다. 따라서 바     로 뒤에 오는 어간의 첫 자음의 모음을 무성쉐와로 만든다.

㉡ 2인칭 여성 단수 접미요소인 י󰚾(이-)와 복수 3, 2인칭 남성 접미요     소인 וּ(우-)는 완료형에서와 같이 자신들이 액센트를 취함으로써 앞     의 중간 어간(ט)의 모음을 유성쉐와(반개음절)로 만든다.

㉢ 복수 3, 2인칭 여성 접미요소 ה󰗺(나-)는 액센트를 갖지 못하며, 따라     서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ל(라멛)의 쉐와는 분절쉐와이다.

④ 2인칭 여성 단수나 3, 2인칭 남성 복수처럼 모음으로 끝나는 형태를 가진 미완료형 동사의 끝음절을 폐음절로 만들기 위해 마지막에 ן(눈)이 첨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첨가 נ(눈)이라고 부른다.

        י󰙎󰔶󰕖󰚝    →   ןי󰙎󰔶󰕖󰚝               “네가 좇아 가리라”

        (틷베키-)        (틷베키-ㄴ 칼○미, 2여단)

        וּע󰗱󰚉󰚝   →  ןוּע󰗱󰚉󰚝             “너희가 들을 것이다”

       (티쉬메우-)      (티쉬메우-ㄴ 칼○미, 2남복)

⑤ 미완료형은 동작이 끝나지 않은 모든 종류의 시상을 표현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나타낸다.

㉠ 현재 : ∼가 ∼한다.

㉡ 미완료과거 : ∼가 ∼하고 있다.

㉢ 미래 : ∼가 ∼할 것이다.

㉣ 기타 명령법, 희구법, 가정법 등에서 아직 완료되지 않는 행동





바라라는 단어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7절은 바야아스 엘로힘 에트 헤라키아 바야베델 베인 하마임 아쎄르 미타하트 라라키아 우베인 하마임 아쎄르 메알 라라키아 바예히 켄입니다.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라는 단어는 아사 6213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은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문법입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셨는데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다가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사 창조입니다.

27절은 바이베라 엘로힘 에트 하아담 베찰모 베첼렘 엘로힘 바라 오토 자카르 우네케바 바라 오탐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자기 형상’이라는 단어는 첼렘 6754 명사 남성 단수입니다.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 전에는 거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단어인 ‘첼렘’의 히브리적 상형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조하시되’라는 단어는 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와우접속사는 하나님이 즉시 인간을 창조하셔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하시고’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이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육체의 삶만 살다가 끝나버립니다.

7절은 바이체르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 바이파흐 베아파이브 니쉐마트 하임 바예히 하아담 레네페쉬 하야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로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지으시고’라는 단어는 야차르 3335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차르 창조는 겉 사람을 만드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단어는 네페쉬 531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18절은 바요메르 아도나이 엘로힘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에에세 로 에제르 케네게도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22절은 바이벤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첼라 아쎄르 라카흐 민 하아담 레이솨 바예비에하 엘 하아담입니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바나 1129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면서 나아가는 신앙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창조」란 낱말로 사람과 짐승에 대하여 똑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람에 대한 「창조」와 짐승에 대한 「창조」란 낱말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에 대한 「창조」란 말은 「만드셨다」는 의미이지만 사람에 대한 「창조」는 「해산했다, 낳으셨다」는 의미입니다. ……?

don 형제가 좋은 질문을 했군요. 어떤 분이 그런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창세기 1:25에는 동물 창조에 대한 기록을 했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만드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사”입니다. 그런데 26에 사람을 만드시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만들고”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27에는 “창조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했군요. “만들고”는 여전히 “아사”입니다. 그러나 “창조하시고”는 “바라”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1에 “창조하시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어에 대하여 깊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제가 참고한 대로는 이 창조라는 말 “바라”에는 “해산했다, 낳으셨다”는 뜻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오직 창조주의 창조행위에 대하여서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사에도 그런 뜻을 발견하지 못했고요.

성경에 “바라”라는 말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된 것 같은데 칼 형과, 니팔 형과 피엘 형입니다. 이 문법적 말의 뜻을 저는 잘 모르지만, 칼 형 “바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행위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신 것입니다.(롬4:17)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세기 주석에서 “바라, 곧 ‘창조하다’란 동사는, 한 편으로는 전혀 힘들이지 않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재료에 대한 진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의미를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니팔 형은 일단 피동형으로 모면 됩니다. 피엘 형은 강조하려는 사실에 사용하지만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니팔 형은 창조 되었다. 또는 창조함을 받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피엘 형은 베어 넘기다, 베어 버리다는 뜻이 있네요. 그러나 해산하다 낳았다는 뜻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와 관련된 단어 세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바라, 아사, 야차르입니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바라는 그 물체자체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야차르는 주로 어떤 물체의 형태(모양을 만드는 것이나 형성하는 것)를 만드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고 했을 때 “지으시고”가 야차르입니다.
또 2:19에 동물들을 지으시고 라는 말도 야차르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에는 창조와 관련하여 이 세 단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단어들 중 어느 단어도 해산했다. 낳았다는 뜻이 있다고 기록한 참고서는 제게 없습니다. 그런 말을 쓰신 분은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것인가?

성경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이다.
성경을 신화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번역하는 수 많은 경우중 하나다. 성경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없다.
그렇게 해석하고 번역한 것에 문제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2절)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을 몇군데 살펴보면

문장의 주어는 '야웨 하나님' 동사는 '바나' 곧 만드시고 가 아닌 '세우다'의 뜻을 지닌 '바나'이다. '바라'도 아니고 '아사'도 아니고 '야차르'도 아닌 '바나'로 성경의 많은 경우 '쌓다' 혹은 '세우다'는 뜻을 지닌다.

문장의 목적어는 '갈빗대' 곧 '하체라'이다.
'갈빗대로'는 에트 하체라인데 목적격이다.
여자를 만든 재료인것처럼 번역하면서 '여자'를 목적어로 해석한 것은 오역중 오역이다.
대격부호 '에트' 까지 동원해서 목적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갈빗대로'가 아니라 '갈빗대를' 이 맞다.

갈빗대를 설명하는 관계절을 이어서 해석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세우셨다" 이다.

왜? '레이샤'이다.  '레' 전치사와 '이샤' 곧 여자(이샤)를 위하여(레) 이다.
따라서 이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이 여자를 위하여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세우시고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셨다.

히브리어 문장의 에트~  레~ 용법이다. ~을 위하여 ~을  ~하다는 용법의 문장이다.
(여자를 위하여 갈빗대를 세우셨다)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번역과 이해는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신화로 바꾸려는 음모가 담겨 있는 번역이다.

창세기 2장 22절은 그 뜻이 남자와 여자의 참된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갈빗뼈'가 세워져야 비로소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빗뼈가 남자에게서 뽑혀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온전한 관계, 제대로의 소통의 길이 열리기 위해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것과 동일하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를 바라보며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려하나, 그것은 자신의 가슴에서 뽑혀 세워진 뼈를 바라보며 하는 노래이다.

갈비뼈가 뽑힐 때, 살 점이 띁겨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마치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는 표현을 방불한다. 신약에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랑의 옆구리가 터지는 장면이다. 여자를 위해 갈빗뼈를 세우고 이를 양식과 음식으로 삼는 장면이다.

누구든 여자를 맞이하려면, 여자를 위하여 살과 피를 준비하고 세워야(단을 쌓듯이, 단을 세우듯이)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이며 소통의 원리이다. =휘오스=



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꿈과 환상과 예언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의인의 삶의 기초(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 낮의 광명에 이르느니라.  

이 말은 의인의 삶은 계속 빛 가운데 서게 될 것이며 가장 성숙한 모습으로 자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인도하는 예언적인 계시가 그 안에서 증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것입니다.
캄캄함이 온 땅을 덮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라가는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의 영광과 광명으로 덮여질 것이며 오히려 일어나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은 반드시 다르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의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듣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듣고 있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실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스가랴  7:11-12)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들을 수 있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그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마 7:24).
대부분의 경우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귀머거리는 곧 벙어리입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듣는 것을 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자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은 각 교회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자주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사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찌 믿지 못합니까?
어찌 조금도 변화 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의 믿지 못함을 주님께서 책망하셨지요.
3년이 넘게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듣고 또 들어도 사실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다른 많은 이들이 듣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의 소리였고 하늘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분은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마 13:13).
요즘 시대처럼 잘 들려지고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기위해 설교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로마서 11:8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못 듣는 자들의 문제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귀가 할례 받지 못함으로 듣지 못하는도다”(렘 6:10)

어떤 의미에서 귀머거리에게 왜 듣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귀머거리는 듣지 못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그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앞 못 보는 맹인에게도 왜 못 보냐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고 귀를 열어 듣게 해주는 것만이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들어야 살아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감각기관은 귀입니다.
듣는 것은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듣는 것은 특별히 영적인 것에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요 10:27).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주님은 강조했습니다(요 5:25).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4, 5)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기 위한 특별한 소리를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 주님의 언어는 이 땅의 소리와 다릅니다.
사람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소리가 우리 주변에 있으나 들을 수 있는 영역만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파를 타고 수많은 소리가 전달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습니다(행 22:9).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만이 한 시대에 바로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따랐고 순종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은 하나님이 우리와 대화하시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대화하실 때는 성령을 통해 하늘의 소리를 전달했습니다.
이 땅의 언어가 아닙니다.
영의 언어이며 하늘의 언어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어를 가르쳤고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나님은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요엘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분의 뜻을 알며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언어인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적)을 통한 계시적인 차원에서 대화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주님의 남녀종들이 예언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셨던 하늘의 언어를 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알며 그분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은 성령을 통한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모든 꿈과 환상과 음성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되어야합니다.
이것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꿈과 환상과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영으로 대화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좇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언어를 모르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서로 대화할 수 없다면 사랑도 믿음도 친밀함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고전 2:9-10).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 알 수 있고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끌어 가셔야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계시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이 제한받지 않도록 그분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친밀함이 깊어지도록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을 수 있겠냐고 하셨지요.

아버지께서 보게 하시는 것을 말하고 듣게 하시는 것을 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의 일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하고 하나님의 일을 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기도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다시금 교회는 강력하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요 5:24).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만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 5:1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모두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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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최근 들어 교회 성장의 둔화, 사회적인 불안의 확산, 세속적인 오락 문화의 확산 등 어려운 목회 환경 때문에 사역자들이 불건전한 신비 운동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고 있다. 고신 총회는 예언, 환상, 쓰러짐, 금가루 현상, 입신 등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진행하는 집회에 대해 2013년 63회 총회에서 ‘극단적 신비주의’로 규정했다. 고신측은 63회 총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며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2013년 63회 고신 총회의 꿈, 환상, 예언, 직통 계시에 대한 연구 보고서다.

서 론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한 소위 ‘교회의 5대 직분 체제’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올바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집회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전수(impartation)할 수 있고, 과거와 같이 맹목적인 회개로 인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꿈이나 환상, 음성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 시대의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말함으로 많은 사람을 오도하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구약 시대의 예언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또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1:28, 2:16-17, 19). 타락 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참 3:8-19, 4:6-15). 하나님은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6:13-21, 7:1-4, 8:15-17, 9:1-17),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창 12:1-3, 13:14-17, 15:13-21, 17:1-22, 22:1-2 등),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였다(창 15:1, 28:12-16 등). 또 요셉에게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셨다(창 37:5-7, 9-11).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민 12:7-8), 여호수아, 사울, 사무엘, 다윗 등과도 말씀하셨다.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백성에게 계시하셨다. 심지어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인에게도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창 20:3-7, 40:5-23, 41:1-8 등).

그런데 선지자들 중에는 참 선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도 있다.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하셨는데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또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다(신 18:20).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만일 어떤 선지자가 말했는데 그 말에 ‘증험’(證驗)도 없고 ‘성취(成就)함’도 없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 18:22) 여기서 “증험도 없고”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 말(일)이 있지 아니하면”이고 “성취함도 없고”는 직역하면 “이 말이 오지(일어나지) 않으면”이다. 따라서 이 둘은 하나를 가리키는데, 곧 어떤 선지자라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란 말이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의 판단 여부는 그 예언한 말씀의 성취여부로 판단하게 된다(왕상 22:11-36, 렘 28장 참조).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리는 그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이다. 즉, 어떤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이고, 그가 말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니 죽이라고 말한다(신 13:1-5). 따라서 이적이나 능력보다도 또는 예언의 성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는 것이라면 그 선지자는 이적이나 기사, 또는 예언의 성취 여부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선지자에게도 이적과 기사, 또는 예언 성취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시험(試驗)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13:3).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적이나 성취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것을 조금 확대 적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그 어떤 능력이나 성취가 있더라도 거짓이요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초대 교회의 예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구약의 예언을 이루셨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다(히 1:1-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며, 또 기록해 주었다. 사도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들은 대부분 남아서 정경(正經)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안에는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선지자들’은 에베소서 3:5과 비교해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으며 그대로 되었다(행 11:28, 21:10-11). 전도자 빌립의 딸 넷도 ‘예언하는 자’라고 한다(행 21:9).

로마서 12:6에 보면 교회에 주신 은사들 가운데 ‘예언’(propheteia)이 나온다.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예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모든 활동을 다 포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예언 곧 하나님의 특별 은사 중의 하나로서 ‘새로운 것들을 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고전 12:10 참조). 헤르만 리덜보스는 이에 대해, 이것은 어떤 발언들을 하도록 강제되는 것을 말하는데 고전 14:3에 의하면 교회를 세우고 권면하며 격려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래의 일들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리덜보스의 견해는 대체로 맞다고 보지만, 그러나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이 꼭 제외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적지 않게 있었다. 따라서 차라리 박윤선 박사처럼 ‘예언 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 시대(시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적(單回的)인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고린도전서 14:3에 보면 ‘방언’(方言)에 비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현재 상태나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같은 장 24-25절에 보면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 한다. 여기에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난다’는 말을 보면, 이 에언이 꼭 권면과 위로의 말로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은사로서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예언 은사의 중단

이러한 특별한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중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완성되었으며, 또 다시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시록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19).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66권의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다 얻을 수 있으며, 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시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2세기의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새 예언’(nova prophetia)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들에게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지만, 나중에 이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것이 분명해지자 기성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한정 확장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正經)은 사도들의 시대로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교회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과격한 천년주의자들,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따라서 신구약 66권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규범이 되는 정경은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잘못이며 큰 재앙을 불러온다(계 22:18-19).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초대 교회에 역사했던 예언도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경의 완성이라는 계시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

요즘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직통계시라도 받는 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온갖 허튼 소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범람하여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주님(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를 가진 셈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주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풀어 주고 적용해 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직접 그 뜻을 나타내 주시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가끔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들에게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으로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음을 듣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박관준 장로나 안이숙 여사, 그리고 옥중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경우를 듣고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예언’이나 ‘계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로서의 예언은 사도시대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매우 예외적이고 긴급한 특수 상황에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인도하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꿈이나 환상, 육성은 더 이상 계시적인 방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자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보편적인 방편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환상이나 꿈을 해석하여 신적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꿈일 수도 있고, 허상을 본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단순히 심리적인 작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신비 체험을 주어서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경유이다(고후 11:13-15, 살후 2:11-12).

고린도후서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해야 한다(고전 14:29, 32, 살전 5:21, 요일 4:1).

고린도전서 14:29, 32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들의 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을 다 믿지 말고 오직 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래서 기록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그 체험이 그럴듯하고 확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으로 배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 체험을 의지하지 말고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붙들도록 해야 한다.

5. 성령의 인도와 인간의 죄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와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소위 그들의 ‘계시’ 또는 ‘예언’을 성경의 권위와 같은 차원에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요 16:13)은 우리가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실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을 받은 베드로드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였으며(갈 2:11-14),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문제로 서로 다투어 헤어졌다(행 15:36-41). 또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하였으며(벧후 3:16),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다(고후 11:30). 따라서 진리의 영이 오시면 사도들이 전혀 죄도 없고 실수도 없고 연약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우리에게는 중생 후에도 죄와 연약함이 남아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성령의 인도가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비록 행함이나 생활에 있어서 연약함이나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오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벧후 1:21). 이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8). 또한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11-12절). 베드로는 또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벧후 1:21). 특히 성경을 기록할 때에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조금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셨다고 보아야 한다(딤후 3:16).

이처럼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록에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인도와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를 성령의 ‘계시’(啓示, revelatio) 또는 ‘영감’(靈感, inspiratio)이라고 부르며, 후자를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일체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사도 이후 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소위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교황이 ‘강단에서’(ex cathedra) 말하는 것은 무오(無誤)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황 무오설을 지지하기 위해 그들은 성령의 특별 사역을 끌어들인다(마 16:18, 28:29, 요 14:16이하, 15:26, 16:12이하). 물론 그들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구별을 하기는 한다. 사도들에 대한 성령의 활동은 ‘계시’(revelatio)와 ‘영감’(inspiratio)에 있었지만, 교황에 대한 활동은 ‘조력’(assistentia)에 있다고 한다. ‘영감’에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초자연적이었지만, ‘조력’에 있어서 그것은 대개 교회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섭리’(providentia)의 돌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성경’과 같은 차원에 두는 것이며, 실제로는 성경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황이 신앙과 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무오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자료와 그 해석에 있어서, 곧 무엇이 성경과 전통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곧 그들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는 무오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교황’의 무오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를 절대화하는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다. 교회는 부패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부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교회는 아무리 숫자가 많고 만장일치의 결정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가 교회의 무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이것은 우리가 항상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항상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며,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방해받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와 기본적인 삶의 원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외의 어려운 주제들이나 성경 해석들에 있어서는 다 알지 못하며 때로 실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의 결정도 마찬가지며 국제회의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압도적인 다수로 총회에서 ‘동성연애’가 합법적이며 죄가 아니라고 결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면서 무당의 굿판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의 죄와 불순종을 가리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6. 자신의 특별한 체험을 객관화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압하는 위험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지만(요 14:26, 16:13, 롬 8:14, 갈 5:18), 그렇다고 우리를 무오한 상태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죄성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신이 특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것을 보편화하여 다른 교인들도 꼭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라고 생각할지라도 과연 그러한지 아닌지를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꿈이나 환성이나 음성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체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도 잘못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결코 객관적인 교리나 윤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 수 없다. 비록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하다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계시인 성경 말씀밖에 없다.

결 론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비록 아무리 큰 능력과 신기한 이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탄도 그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한다고 한다(계 13:13).

따라서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온다고 하였으며 (마 7:15),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였다(고후 11:14).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살후 2:12).

말세가 되면 이런 미혹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더욱 놀랍고 신기한 일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자 할 것이다. 이적을 행하며 능력이 나타나며 소위 예언이 성취되는 일 등이 일어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다(신 13: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며(요 14:21),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말세가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참 성도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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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0 / 꿈이나 환상, 계시를 주신 이유


10. 그러나 그가 이것을 생각하는데, 오호, 주님의 천사가, “요셉아! 다윗의 자손아! 네 여자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태복음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생각하는데' 여기서 '그'는 요셉이죠. 요셉이 마리아를 버리려는 생각을 한 상태입니다. 그 때 요셉에게 계시가 옵니다. '오호 주님의 천사가' 물론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꿈에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계시를 부정한다는 것은 계시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진리화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지 계시는 반드시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죠? 그리고 예수님도 살아계시죠? 천사도 있지요? 우리 안에 성령님도 계시죠? 우리는 영이죠? 당연히 계시가 있습니다. 계시는 있는데 주어지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을 때 주어집니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지식이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말씀의 지식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세부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은사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계시가 주어지는데 꿈으로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음성으로 10번 만났습니다. 이삭은 꿈으로 반 음성으로 반 이었습니다. 야곱은 꿈을 통해 계시가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저는 새로운 교회를 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저에게 아주 많은 은혜를 끼친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경호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압니다. 저는 계시를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꿈에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저는 '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가 요즘에 왜 어려움을 당하는지 아느냐?' 보통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굉장히 진실해 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는 모릅니다.'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고 진실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저는 모릅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대해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을 저에게 투영시키면서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과 저와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교회, 은혜롭다고 생각하는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꿈에 '경호야! 분당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일지라도 저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여 주시는데 제가 눈길을 걷고 있는 것과 분당에 있는 교회들을 보여주시면서 제가 다닐 교회와 그곳에서 앞으로 몇 년을 다닐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번도 분당에 있는 교회를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굉장히 긴 꿈이었지만 자세하게는 말씀 못 드리고 제가 요약해서 말씀 드린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따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계시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시를 가급적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꿈과 계시, 환상 같은 것들은 개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에 있는 꿈과 계시들은 100% 성령님에 의한 것이지만 어떻게 제가 제 꿈을 100%로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제가 저의 예를 들은 이유는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계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건 진리야!' 하고 공론화하거나 이 계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100% 맞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셉아! 다윗의 자손아!', '네 여자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지금 요셉이 마리아를 끊으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맞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생각을 꿈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난자와 정자가 아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것은 있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꿈을 통해서 '지금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알려 주는 것입니다.

꿈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20년 전에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성경을 번역할 목표가 마음에 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아랍어를 2년 공부하고 2년 뒤에 히브리어를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도 꿈을 꾸게 됩니다. 아주 희한한 꿈이었는데 저기 멀리서 저를 향해 글자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커다란 집채 같은 '음'이란 글자가 다가 왔습니다. 그 다음은 '복'자가 오고 '태'자가 오고 '마'자가 다가 왔습니다. 그 꿈의 초반부에 저에게 어떠한 음성이 들려왔느냐 하면 '경호야! 너 성경에서 중요한 곳이 어딘 줄 아느냐?' 저는 꿈속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모릅니다. 어디가 중요한지를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말씀 곧 '어디가 중요한지 아느냐'라는 질문과 동시에 '음, 복, 태, 마'라는 거대한 글자가 지나갑니다. 꿈이지만 난감했습니다. '어! 저게 무슨 글자야?' 그 다음에 '음, 복, 가, 마'라는 큰 집채 만한 글자가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 '음, 복, 가, 누' 또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 '음, 복, 한, 요'라는 큰 글자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경호야! 이 책들의 요약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셨고 '저는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제 앞에 '로마서'라는 큰 글자가 제게 다가오다가 잠깐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인줄 아느냐?' 저는 '당연히 모르죠.'라고 답했고 그 때 또 다시 저기 멀리서 제게로 한 요절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꿈 속 이었지만,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렇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보는 것과 동시에 저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일어나서 '갈라디아서 2:20이 뭐지?'하고 긴 시간 동안 묵상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어떤 말일까?' 아침에 그 말씀을 찾아 보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말씀에 대한 제목이 '복음의 요약'이라고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알긴 알았지만 깊이 묵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나름대로 어떤 길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요셉처럼 계획하고 작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꼭 원하시는 당신의 뜻이 우리랑 맞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에게 간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간섭하셔서 꿈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꿈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환상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를 맞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입신이나 유체이탈이나 이런 모든 계시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저는 꿈에 나온 메시지를 통해 제 생각을 바꿔서 드디어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를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뜻이 있으신데 우리가 그 뜻대로 가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시로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대부분 개인적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공론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린 꿈 얘기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꿈은 여러분이 적용해서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제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구약을 번역해야 하겠다는 제 의지의 전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진로와 방향을 말씀한 것이지 여러분이 적용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남들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으며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꿈 얘기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 요셉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리고 이제 뜻대로 사는 사람인데 그 뜻이 안 맞을 때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방향을 수정해 주십니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지금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나를 치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계획을 바꿔주시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꿈이나 계시나 환상을 통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길로 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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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환상의 구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참된 꿈들은 여러 가지 개체의 꾸러미 형태로 온다. 상상들의 혼합, 은유들, 비유들, 시들, 꿈들, 그리고 잠자는 중에 놀랄만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꿈은 환상과 다르게 오직 사람이 잠들었을 때에만 받게 된다. 꿈을 꾸는 것은 단지 밤중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꿈들은 영으로 받아진 후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마음 안으로 해석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꿈의 형상들을 받아들이고 진행시키는 그림 창고를 가지고 있다. 성결하게 하는 마음이 세상 사건들의 배경에 있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꿈들을 부패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환상은 계시의 시각적 인식이거나 우리의 영적 눈들을 통한 초자연적 사건이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꿈들보다 더 현실적이며 보다 더 사실적이다. 사람은 정신이 깨어있을 때에라도 환상을 받을 수 있다.

꿈들과 환상들 사이의 차이점들

꿈들

환상들

꿈을 꾸기 위해서는 정신이 잠이 들어야만 한다(창15:12-13). “해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리”

환상들은 무아지경, 환영, 그리고 신성한 광경들을 통한 정신의 경계심의 여러 각도들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열린 환상은 자연적인 눈들이 활짝 열린 가운데 받아들여진다.

꿈들은 항상 개인적 기반 위에서 경험된다

환상들은 그룹 환경 안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다.

(행22:6-9)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려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보지 못하더라”

꿈들은 사람의 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며, 대부분이 영과 영의 만남들이다.

(단7: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이것은 선견자의 사역 안에서 일반적인 꿈과 환상의 영역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환상들은 명백한 몸의 체험들 같이 신체적이거나 자연적 영역의 여러 각도들을 포함할 수 있다.

(행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꿈들은 보다 상징적이다

환상들은 보다 실제적이다

대부분의 꿈들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환상들은 선포되기 전에 주의 깊게 평가되어야 한다

꿈들은 종종 개인적 상징성과 함께 꿈꾸는 자를 위하여 보다 신적인 목적으로 형상화 된다. 새벽녘에 꾼 꿈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기에 애매모호함이 적다.

환상들은 선포되기 보다 실제적이고, 종종 보다 명백하여, 약간의 해석만을 요할 수 있다. 그것들은 때때로 신속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할 수도있다.

꿈들과 환상들의 상호작용

꿈들과 환상들은 꿈꾸는 자의 삶 안에서 많은 방법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꿈꾸는 자는 많은 징후들을 가질 수 있다. 외적이나 내적 환상들, 꿈속의 환상들, 환상 속의 환상들, 꿈 안의 꿈, 혹은 환상 속의 꿈들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의 다양한 결합들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꿈들이 순수하게 영적 경험들(혹은 영과 영의 만남들)임에 반하여, 환상들은 자연적 영역의 여러가지 단계들이 다르게 뒤얽힌 영적 만남들이다.

다니엘 선지자는 다니엘서 7장 1절에서 꿈과 환상의 상호작용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환상과 다르게 꿈은 꿈꾸는 자의 마음에 솟아오르며, 사람의 마음의 깊은 부분을 휘저어 놓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순수한 꿈들 가운데서는 주로 육체의 관여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꿈들 안의 몸의 움직임으로 여겨지는 것은 거의 대부분 환상들을 동반한 꿈들의 결과이다.

거의 대부분의 꿈꾸는 자들에게 꿈들 속에서의 영적 만남들의 대부분은 환상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꿈을 꾸고 있을 때, 육체의 관여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꿈과 환상의 영역으로부터 고통이 전해지는 것들처럼 보이는 것은 꿈꾸는 자가 깨어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꿈은 그것이 영과 영의 일이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들의 전이를 가질 수는 없다.

반면에 환상들은 자연적 영역 안에서 다양한 단계의 육체적 관여를 가진다. 예를 들면, 바울이 그의 회심 후에 삼일 동안 소경이 된 것과, 야곱이 하나님과의 환상적 만남 이후에 평생 다리를 절었던 것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 자신도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꿈들과 환상들의 미묘한 차이점들을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12:6)

하나님께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라고 하신 것은 친밀함이나, 혹은 보다 깊은 관계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를 그에게 알라기도 하고”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혹은 그의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것임에 반하여 환상들은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 오직 계시에 의해서인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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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수기 12:6)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2:28)

영성이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이다.

꿈과 환상과 예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의사 소통 수단으로 사용되져 왔다.(민수기12:6, 요엘2:28, 행2:17) 편견이나 선입관적인 사상들 혹은 비성경적인 견해들 때문에 이 마지막 시대 재림직전 꿈과 환상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란다.

꿈의 용어들  Dream Language

민수기 12:6 -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요엘2:28 -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꿈과 환상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꿈 =(헬: enupnion) -  꿈은 잠자는 동안에 나타나는 것

* 환상 = (헬: chizzayon) -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지로 보는것입니다.

환상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음성을 듣게 하신다.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귀중한 체험

1) 야곱의 꿈 (창28:10-22)

야곱은 꿈속에서 천사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야곱의 반응은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들을 실천에 옮겼다.

기름을 부어 단을 쌓고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

그는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면서 자신과 자손들을 보호해 주시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리겠다고 약합니다.

야곱의 꿈에 등장하는 사닥다리나 천사, 에스겔에 마른 해골 뼈로 가득찬 골짜기(겔37:1-10),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요셉, 다니엘 선지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2) 요셉의 꿈(창41:33-43) 요셉에게 꿈을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3) (마2:12) - 동방박사들의 꿈

4) (마2:13) -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꿈

2.꿈과 환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1. 꿈과 환상은 말세의 징보로서  믿는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어 보게 하시는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행2:16-18, 요엘2:28)

2.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민수기12:6)

구약
1. 아브라함(창15장), 2. 야곱(창28장), 3. 요셉(창37장), 4. 솔로몬

5. 다른 예들

신약
아나니아(행9:10), 2. 고넬료 (행10:1-8), 3. 베드로 (행10:9-16) 4. 바울 (행16:9),

사도 요한(계시록)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뜻을 전하기도 하십니다..(창28:10-15)야곱, (창37:5)요셉

(마1:20)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꿈

(행9:10)사울의 거듭남과 아나니아의 환상

(행10:3~10, 11:5)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을 통해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고 사역함

환상 고넬료에게도나타남

(행16:9)바울의 마게도니아인이 나타나고 그들이 말으로 하는 환상을 통해 선교의 방향이 달라짐

(창41장) - 바로

(마2:12) - 동방박사

(마2:13) -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꿈

 마태복음에 5가지 꿈

(행22:17-21), (욥33:13-18)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를 주시기도 한다 (열왕기상3:5)

꿈과 환상은 미래의 사건을 계시하고 예언하시기도 합니다.

환상을 통해 사명에 관한 명을 하시는것을 늘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합니다.

(단2:4) 침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스가랴의 환상 (눅1:22)

꿈과 환상은 믿음을 크게 해주고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게 해주실때가 있습니다.

(행18:9) - 고린도에서 바울의 환상

(행27:23) - 배의 파손에 대한 천사와 바울의 환상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대화를 나무시는 통로 이기도합니다. (민12:6), (신13:1)

기도 속에서 주님의 뜻을 잘모를때
꿈과 환상은 새로운 확신을 갖도록 돕기도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알려주심

꿈과 환상은 하나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시34:8), (잠25:2)

꿈과 환상은 우리의 마음의 진정한 상태를 보여줍니다.(욥33:13-18), (단2:26-30,47. 4:2)

마귀적인 꿈 (렘23:32, 슥10:2)도 있기에 잘분별하여 적용해야합니다. 

때로 환상 속에서 우리 영이 하나님께 말씀을 올리는것이 들리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영이 중보하시는 소리가 들리기도합니다..

느브가넷살의 꿈 - 다니엘 2,4장

빌라도의 부인의 꿈

마음속에 예리한 영상-야곱의 꿈 - 창28장

반복되는 꿈-바로의 꿈

아브라함에게 꿈속에서 말씀하심 - 창15:12-17  창20:7

야곱 - 창28:12, 31:10                 다니엘7장

아비멜렉 - 창20:3 라반 - 창31:24 

미디안인 - 사사기7:13-14  바로 - 창40:5        

느브갓네살 - 단2:1,4,36   동방박사 - 마2:12

빌라도의 부인 - 마27:19 
신약 - 마1:20, 2:12-13, 2:19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심

1. 시편29장 - 하나님의 음성은

2. 욥33:13-14 - 꿈과 환상으로

3. 행10:9-16 - 베드로는 음성으로

4. 계5:11, 살전4:16 - 천사의 음성,

5. 계1:15 - 많은 물소리

6. 창3:8 - 하나님의 거니시는 음성

7. 삼하5:23-25 - 행진하는 소리

8. 행13:2 -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6:13 -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실 것이요.        

9. 벧후1:21- 성령의 감동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10.출3:4 - 귀로 들을수 있는 음성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11.시85:8 - 속사람에게 평강으로 말씀하심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12. 고후12:1-4 - 삼층천 방문 -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음

13. 롬8:16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4. 벧후2:16 - 나귀

15. 야고보5:19-20 - 사람과 사람에게

16. 시편119:105 - 기록된 말씀

17. 히1:2 - 마지막날에 아들을 통해서

18. 요엘2:30-31 - 이적과 표적

음성을 듣자

1. 이사야28:23 -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 이사야50: 4-5   

3. 이사야30:18-21

그러나 계시를 볼수도 있습니다.엡1:17-18

성령님을 통해 볼수 있는것

잠언29:18,  열하6:14-18,  스가랴4:1-7,  다니엘7:1-13,  엡1:17-19
요한5:19-20

마태13:34  
스가랴의 밤에 보이는 환상 - 스가랴1-6장, 4:1 다니엘7:1,13-14

밖에서 보는 환상
엘리사 - 열하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엘리사를둘렀더라.

2) 스데반 - 행7:55-56

3) 꿈과 환상 - 행10:10-23,  행16:9-10

3. 환상은 선지자들의 나타난 사역이다

이사야
1) 성전 안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 이사야6장     

2) 골짜기의 환상 - 이사야22장

예례미야
1) 렘1:11 - 살구나무 가지   2) 렘1:13 - 꿇는 솥   3) 렘24:1-2 - 무화과 두광주리

에스겔
1) 겔1:3,12 -14,23      
2) 겔2:9       
3) 겔8-9장      
4) 겔10:1-7
5) 겔37:1-14 마른 뼈    
6) 겔40-48장 예루살렘 성전      
7) 겔47:1-12 물의 환상

다니엘
1) 단2:19   2) 단7:1-8     3) 단7:9-27   4) 단8:1-14 5) 단10장   6) 단11:2,  12:4 7) 단12:5-13
아모스
1) 7:12   2) 7:4   3) 7:7-8   4) 8:1-2   5) 9:1-3
스가랴
1) 1:8-11   2) 1:18-21   3) 3:1-5    4) 4장   5) 5:1-4   6) 6:1-8

환상 본 것에 대한 기록이 없는 선지자들 -
호세아, 요엘,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말라기

꿈과 환상은
행2:16-18, 요엘2:28
꿈과 환상은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이다. 행1:4,5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 민수기12:6
꿈과 환상에 대한 성서적인 예들 들면
1) 구약
1. 아브라함- 창15장   2. 야곱 - 창28장   3. 요셉 - 창37장  4. 솔로몬   5. 다른 예들 -

2) 신약
1. 아나니아 - 행9:10   2. 고넬료 - 행10:1-8   3. 베드로 - 행10:9-16
4. 바울 - 행16:9  5. 사도요한 - 계시록

환상을 통해 영적으로 어떤 마음인지 마음의 동기까지 알리실때가 있습니다. 
욥33:13-18 다니엘2:26-30,47  4:27

우리의 삶속에 내재하신 성령님이 기도로 깊이 나아가면  현재 마음의 동기를 알수 있을때가 잇습니다.

예언 - 미래 적인 것
지식의 말씀 - 계시하실때 혼상을 통해 알리시기도 합니다.

지혜의 말씀 - 영적인 방향 제시와 영적인 교훈을 주어 주님의뜻대로 살도록 도우실수 있게합니다. 

믿음의 은사 - 하나님의 믿는 영적인 능력

영분별 - 영적인 흐름을 알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심볼을 이해하자

창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예례미야15:19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말지니라

마태13:24-43
씨뿌리는 자 - 인자   밭은 - 세상     씨는 -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
가라지- 악한 자의 자녀    원수 - 마귀  추수 - 세상종말    추수꾼 - 천사들 그리스도의 심볼
떡 - 요 6:48   신랑 - 마9:15   가지 - 렘23:5   새벽별 - 계 22:16
양 - 계 5:6    용사 - 시 24:8    목자 - 벧전5:4   군대 장관 - 수5:14
종 - 사 53:11   사자 - 계 5:5    기초 - 사28:16   교회의 머리 - 엡5:23
빛 - 요8:2   성소 - 사 8:14    씻는샘 - 슥13:1  모퉁이돌 - 벧전2:6
왕 - 마21:5  반석 - 고전10:4  통치자 - 마2:6  의원[의사]- 마9:2
별 - 민24:17  장미 - 아가 2;1  심판자 - 행10:42  포도나무 - 요15:2
문 - 요10:7            

성도의 심볼
종 - 마25:21   신부 - 계21:3   소금 - 마5:13   나무들 - 시42:1  
몸 - 고전12:20   사슴 - 시42:1        아이 - 마11:25    독수리 - 시103:5
돌 - 벧전2:5   양들 - 사40:11  양떼 - 시78:52   경기자 - 고전9:24    
해 - 사사기5:31  군인 - 딤후2:3       별들 - 단12:3  물고기 - 마13:48
빛 - 마태5:14  보물 - 출19:5  보석 - 말3:17   가지들 - 요15:2  
사자 - 잠28:1   그릇 - 딤후2:20      비둘기 - 시68:13   어린아이 - 마18:3 
성령의 상징
물 - 약3:5   불 - 마3:11   바람 - 요3:8   기름 - 눅10:34
비 - 시72:6  비둘기 - 마3:16

사탄의 심볼
도적 - 요10:10   뱀 - 계12:9        붉은용 - 계12:3   번개 - 눅10:12

꿈의 배경
꿈들은 대게 꿈꾼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환경, 좌절, 결정, 승리, 두려움, 과거의 아픔, 오래된 문제들, 관계의 문제, 필요한 부분

기본적인 심볼의 뜻
1). 집 -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삶을 묘사할 때 사용하셨다. - 마태7장

당신의 삶의 중요한 시기를 말할 때

2). 사람 - 꿈꾸는 자의 삶의 부분적인 심볼
다른 사람들의 예언적인 상태를 말할 때, 그러나 해석이 필요함.

3). 운송수단 - 꿈꾼 자의 살림살이

4). 짐승들 - 꿈꾼 자의 삶, 느낌, 예언의 심볼,

5). 숫자들
1 - 하나님 하나의 연합   2 - 언약, 증인 3 - 삼위일체   4 - 지구4계절, 동서남북 5 - 은혜, 구속함, 5중사역   6 - 사람 7 - 완전수 8 - 새로운 시작 9 - 성령 10 - 심판 11 - 긍휼히 여기심 12 - 하나님의 정부 13 - 갑절의 축복,

6). 색 - 다양한 해석들
1. 파란색 - 소망, 치료, 자유, 성령. 
2. 흰  색 - 영광, 순결, 절대적인 것
3. 초록색 - 영생, 성장, 돈 
4. 노랑색 - 기쁨, 햇빛
5. 검정색 - 어두움                          6. 자주색 - 왕권
7. 빨강색 - 대속, 구원, 예수의 보혈, 용기, 노여움.

꿈의 해석에 대한 단계
1. 꿈에 들기전에 기도하라 -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 

2. 평안히 잠을 자라.

3. 준비하라 - 노트에 꿈을 기록하라.

4. 기도하라 - 해석을 위해서.

5. 꿈의 심볼들을 해석하라 - 필요하다면 - 성구사전,성경,사전

6. 꿈을 해석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라.

 7. 이 과정이 끝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내가 본 꿈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후 날짜를 적어놓고 적용할 것을 질문한다.

신약 - 마1:20, 2:13, 2:12, 2:19
적용 꿈의 해석을 위해 기도하라 - 단2:4  꿈을 기록하라 - 다니엘7:1

꿈의 해석에 대한 질문

1. 제목을 붙인다.

2. 간단, 명확한 중심내용, 상징들을 차례로 기록한다.

3. 강렬하게 느꼈던 태도와 감정은 무엇이었던가?

4. 이 꿈이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반응 할것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이 꿈이 나와 교회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6. 주제별로 잘 정리한다.

꿈과 환상의 예언적인 책임  이사야55:11

1. 죄와 불순종 - 삼하3:1

개인적인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 순종을 요구한다.

2. 두려움과 근심은 환상을 흐리게 한다

왕하6:8-엘리사의 종 게하시

사람들에게 주는 환상의 유익

1.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이루어진다.
2. 평강을 가져온다.
3. 성결, 거룩, 지혜를 가져온다.
4.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5.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다.
6. 지혜와 기름 부음을 풀어놔 준다.
7.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기쁨을 풀어놔 준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환상
행2:17, 행7:55-60 행9:1-9, 행10:1-2, 행10:9-16, 행16장,

구약 성경에 나타난 환상
창15:1, 겔11:24, 단4:13, 합2:2, 눅1:22 계9:7

환상을 잘 볼 수 있는 영성훈련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은밀하고 조용하게 하나님의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어 인간의 내면의 영력 깊이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능력과 눈을 갖도록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겉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마음의 기능을 절제시키고 영의 기능을 강화하는 집중훈련이다.
이 훈련은 초월명상이나 초능력 훈련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오해되어질 요소가 많다.
그러나 명상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목적이 인간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데 있다.

1. 성서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여 예언이나 환상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다.

2. 방언기도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3. 믿음으로 성서에 나타난 장면을 묵상하며 내 마음속에 영상화시킨다.

4. 내 영이 성경의 사건 속에 들어가 경험되어 지도록 최대한 믿음과 마음과 감정과 상상력을 성령님께 맡긴다.

5. 영적인 사건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환경 주변을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살펴본다.

6. 영적인 사건 속에서 내 영이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을 볼 수 있고 행동과 대화도 감각의 느낌도, 영적 싸움도 가능하다.

7. 내 영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잘 받기 위해 적절한 하나님의 찬양을 듣는 것이 좋다.

8. 이 과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내가 본 환상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후 날짜를 적어놓고 적용할 것을 질문한다.

환상을 통한 질문

1. 제목을 붙인다.

2. 간단, 명확한 중심내용, 상징들을 차례로 기록한다.

3. 강렬하게 느꼈던 태도와 감정은 무엇이었던가?

4. 이 환상이 내게 무엇을 깨eke게 해주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이 환상이 나와 교회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6. 주제별로 잘 정리한다.

사람들에게 주는 환상의 유익

1.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이루어진다.

2. 평강을 가져온다.

3. 성결, 거룩, 지혜를 가져온다.

4.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된다.

5.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다.

6. 지혜와 기름 부음을 풀어놔 준다.

7.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기쁨을 풀어놔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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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이혼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막 10:1-12; 마 19:3-12)과,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한 고린도 교인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고전 7장).
예수님은 복음의 초청을 혼인잔치로 비유한다(마 25장의 열 처녀 비유, 눅 14장의 잔치 비유 등).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 예수와 교회의 혼인잔치를 천국 모습으로 비유한다.
성경은 결혼이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종말론적 삶으로 홀로 사는 독신(비혼)에 대해서도, 예수님이나 바울은 똑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헬라어 명사 γάμος(가모스)는 기본적으로 '결혼식'(wedding) 혹은 결혼(marriage)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수형은 '결혼잔치'(wedding feast)를 뜻한다(마 22:2; 25:10).
또한 결혼식장(wedding hall)을 의미하기도 한다(마 22:10).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13번, 히브리서에 1번, 계시록에 2번 나온다.
‘결혼하다’라는 동사 γαμέω(가메오)는 신약성경에서 28번 나오고, 비슷한 뜻의 다른 동사 γαμίζω (가미조)는 7번 나온다.
γαμέω(가메오)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 가다’의 뜻이지만(마 5:32; 막 6:17; 눅 16:18),
간혹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 가다의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막 10:12).
γαμίζω (가미조)는 ‘시집 보내다’의 뜻으로 아버지가 딸을 시집 보내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노아의 날에 사람들이 홍수 심판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γαμέω), 시집 가고(γαμίζω) 있었다(마 24:38) 고 말씀하였는데, ‘시집 가다’의 의미는 정확히는 ‘시집 보내다’의 뜻이다.
당시 결혼문화는 ‘딸’의 결혼을 주관하시고 성사시키는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혼의 문제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하였다(마 19:3).
마태는 마가복음 자료(막 10:1-12)를 따르면서도 자신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주는 메시지를 위해 어느 정도 편집하였다.
‘모세의 이혼증서’(신 24:1)을 남발하는 당시의 비도덕적 남성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의 분파에서도 이미 논쟁이 있었다.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는 샴마이파는 신명기 24:1에서 이혼사유가 되는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을 성적 방종의 문제에만 적용하였지만, 자유로운 해석의 힐렐파는 아내로서 수치가 되는 일을 더 넓게 적용시켜,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를 쉽게 남발하게 되었다.
‘이혼증서'(ἀποστάσιον, 아포스타시온)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며, 본래는 그렇지 아니함을 말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창조(창 1:27),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창 2:24).
모세의 이혼증서는 왕의 제도(삼상 8:22)처럼 단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 a law of less good (차선의 법)일 뿐이다. 이것마저 남용하는 남자들의 방종에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어떤 이혼의 가능성도 언급하지 않았고,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만을 이혼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읍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여자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죄 많은 여인처럼 취급 당하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뜨거운 정오에 야곱의 샘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나왔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야 하는 필연의 사역(mission of must)으로, 먼저 우물가에서 기다리셨다. 여인은 성적으로 방종한 여인이 아니라, 다섯 남편으로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이혼증서를 받고 버려진 여인이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단지 여인을 성적으로 이용만 하는 동거남일 뿐이다. 여자는 여러 번 이혼당한 불행한 여인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사회는 그녀를 품지 못하고, 오히려 이혼한 사실로만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사회적 불행은 그녀를 영적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갈증으로 가득 차게 했고, 그것을 아시는 주님이 오신 것이다. 모세의 이혼법(차선의 법)보다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최선의 법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놀랍게도 ‘천국을 위한 고자’라는 삶의 방식을 추가한다(마 19:10-12).

이혼증서를 부정하는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 당시 남성들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때 주님은 결혼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비혼주의를 경계하며, ‘타고난/주어진 자’로서의 고자의 존재를 말씀한다. 단순한 비혼이 아니라, 은사로 주어져서 천국을 준비하는 비혼을 말씀하였다(마 19:12). 비혼(아가모스, ἄγαμος, 고전 7:8, 11, 32, 34)에 대한 삶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말한다. 물론 비혼(독신)의 삶은 종말론적 삶에 집중하며 복음전도자의 삶을 사는 자신을 모델로 말하고 있다(고전 7:7). 바울은 결혼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긍정과 이혼의 부정을 알기에, 그 말씀에 충실하면서,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라고 해서 결혼생활을 포기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룩한 땅 성지가 아닌 이방 땅과 이방 문화 속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살기를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 경우, 주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있지 않기에, 버림 받는 이혼이 아니라, 선택한 이혼이 성립될 수 있음을 자신의 의견으로 권고한다. 결혼과 비혼 모두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종말의 때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7:38).

    바울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제하였다. 비혼(ἄγαμος)을 말하며,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는 바울의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여 왔다. 하지만 바울이 나이 30세가 넘기까지 바리새인으로 살았고,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생육 가능한(able-bodied) 몸을 가지고 특별한 이유없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는 것을 유대교는 창조주의 뜻을 순복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기에, 바울이 결혼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율법은 생육하지 못하는 고자를 부정하게 여겨 공동체에서 소외시켰다. 바울은 결혼하였지만, 사도로서의 삶을 위해 졸혼한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한 곳에 살게 하고, 비혼처럼 살았을 지도 모른다. 빌립보 교회의 두 여인을 화해시키도록 바울이 부탁하는 제 3의 여인을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너’라고 하였다(빌 4:3). 이 존재를 흔히 동역자(fellow-worker)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이 여인을 바울의 아내라고 해석하였다. 이 단어의 헬라어 σύζυγος (수주고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결혼한 배우자(wedded pair)를 뜻하는 말이다. 바울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고전 9:5)고 말했을 때, 과거에 바리새인인 바울이나 부유했던 구브로 출신 바나바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의 권리를 포기하고 비혼(ἄγαμος)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더 타당하게 보인다. 

종말과 천국을 기다리는 삶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교회가 신부가 되고, 예복을 입은 손님이 되는 것에 집중하는 선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이런 삶은 태어난, 주어진 자의 삶임을 강조하였다. 창조주의 복이 있는 결혼, 천국을 기다리는 비혼, 어느 것이나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염병(染病)

염병(染病)

נֶגֶף (네게프) / מַגֵּפָה <막게파>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말은 오경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이 용어는 ‘전염병’을 줄인 말로서 우리말 사전에는 세 가지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1.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 / 2. 전염성을 가진 병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 3. 기분이 나쁘거나 못마땅할 때 감탄조로 하는 말(염병할). 오경 이외의 예언서나 성문서에는 “전염병”이란 단어만 나오며 “염병”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단어는 레26:25<데베르>; 민16:46(히17:11<네게프>); 민16:47(히17:12); 민16:48(히17:13); 민16:49(히17:14); 민16:50(히17:15); 민25:9; 민25:18; 민26:1; 민31:16; 신28:21에 모두 11회 언급된다. 한편, “전염병”이라는 단어는 출5:3; 민14:12에 두 차례 등장한다. 오경 이외의 문서들에는 “염병”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전염병”만 41회 나온다. 그 가운데 두 번은 신약성경에(눅21;11; 행24:5)에 들어있다.

출5:3; 민14:13에 “전염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דֶבֶר<데베르>인데, 이것을 레26:25; 신28:21에서는 “염병”이라고 옮겼다. 민수기에는 “염병”이란 단어가 열 차례 나오는데, 그 원어는 히브리어 דֶבֶר<데베르>가 아니라 נֶגֶף <네게프> 또는 그 동종어인 מַגֵּפָה <막게파>이다. 다시 말해, <네게프>나 <막게파>라는 단어는 민수기에 열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개정역 성경은 이를 일제히 “염병”이라고 번역했다(민16:46//히17:11<네게프>, 47//히12<네게프>, 48//히13<막게파>, 49//히14<막게파>, 50//히15<막게파>; 민25:8<막게파>, 9<막게파>, 18<막게파>; 26:1//히25:19<막게파>; 31:16<막게파>). 히브리어 <네게프>와 <막게파>는 ‘때리다/치다’를 의미하는 동사 <나가프>에서 파생한 명사들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치시니 죄인에게 재앙이 닥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네게프>라는 단어를 개정역은 “재앙”이라고 옮겼다(수22:17; 24:5).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죄인을 한 번 내리치시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동사 נָגַף<나가프>는 이러한 의미에 기대어, 죄인을 징벌하시려고 일으킨 전염병을 가리키는 명사 נֶגֶף<네게프>와 מַגֵּפָה<막게파>를 파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원수들을 치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동사 נָגַף<나가프>를 사용해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주님의 손길에 살짝 닿기만 해도 죄인은 큰 재앙을 당한다. 이런 관념을 나타내는 동사가 נָגַע <나가>인데, 이를 기초로 형성된 명사 נֶגַע <네가> 역시 큰 재앙을 가리킨다.

명사 נֶגֶף<네게프>는 성경에 일곱 차례 언급되며(사8:14), 모두 재앙, 곧 하나님께 내리시는 무서운 징벌을 함의한다. 그런가 하면, 명사 מַגֵּפָה<막게파>는 오경에 열 차례 언급되는데, 번역에 차이가 있다. 처음 언급된 출9:14과 두 번째 언급된 민14:37에서는 개정역 성경이 “재앙”이라고 옮겼지만, 민수기 16장 이하에 같은 단어가 여덟 차례 등장할 때는 모두 “염병”이라고 옮겼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의 재앙과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퍼진 염병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어기고 거역한 죄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데, 특히 민수기에서는 그 재앙이 두드러지게 염병으로 나타난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모세에게 반역한 고라와 다단의 무리들이 지진의 재앙으로 죽은 다음에 연달아 이스라엘에 염병이 퍼져서 무려 14,700명이나 죽었다(민16:49). 이스라엘이 브올의 꾐에 빠져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에 빠졌을 때도 24,000명이 죽었다(민25:9).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원리인 말씀을 어기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살다가 당하는 재앙이 염병인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욕심만 채운 결과, 인류는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다양한 천재지변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기후변화가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에 덩달아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것도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화석연료 사용과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고 플라스틱 생산도 멈춰야 한다. 우리의 식탁에 지나치게 자주 오르는 육식을 절제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탐욕에 기반한 생활습관에서 소박한 삶으로 전향해야 한다. 전쟁과 다툼을 중지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죄 많은 인류를 향하여,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모든 문명 생활을 중단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돌림병(데베르, דֱּבֶר  )

중세 말 서양에 흑사병이 돌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도시의 쥐가 옮긴 이 병은 흑사병 또는 페스트pest라는 병으로,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 이런 종류의 병을 전염병epidemic이라 부르는데, 대륙 전체를 휩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을 특별히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른다. 판데믹으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생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성경에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성서 시대에도 전염병이 많이 돌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이 언급하는 일곱 천사가 가진 일곱 재앙들 중에 서너 가지는 판데믹으로 보인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도 판데믹을 언급한다. 야훼께서 모세를 파견하여 히브리인들을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실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이 열 가지 재앙 중 애굽 전역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 판데믹이다(출9:3). 이 재앙을 가리켜 히브리어 본문은 דֱּבֶר (데베르)란 단어를 사용한다.

출9:3의 ‘데베르’는 한글역본들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개역은 “돌림병”, 새번역/공동역은 “병”, 가톨릭역은 “흑사병”이라고 번역했다. 영역본들은 pestilence라고 옮겼고, LXX는 σφόδρα (스포드라), VUL는 pestis라고 옮겼다. 애국 땅 전역에 사는 맏아들들과 가축의 첫 새끼들이 다 죽는 재앙이 맨 마지막에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는 출11:1에서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를 더 내리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것이 דֱּבֶר (데베르)임을 지시하고 있다. 마지막 재앙은 동물에게 한정되지 않고 사람에게까지 덮친 재앙이었다. 동물을 죽인 출9:3의 판데믹이 출11:1에서는 사람에게 확대되어 덮쳤다. 애굽의 모든 맏아들이 죽는 무서운 판데믹이 열 번째 재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해를 건넌 후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주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야훼의 신명 계시와 더불어 주께서는 애굽에 내린 판데믹 전염병을 회고하신다(출15:26). 히브리어로 מַחֲלָה (막할라)란 단어는 출23:25에도 나온다. 이 단어 역시 판데믹을 가리킨다.

전염병을 가리키는 דֱּבֶר (데베르)는 오경에는 출5:3; 9:15; 민14:12; 레26:25; 신38:21에 언급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 가운데(삼하 2413; 25;14) 백성에게 임하는 판데믹이 언급된다. 시편에는 91:3, 6에, 그리고 예언서에는 사14:12; 겔5:12; 호13:14; 암4:10 등에 판데믹이 나타난다.

신명기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 (신4:34)

여기에 시험, 표적, 기사, 전쟁, 강한 손, 펴신 팔, 큰 두려움이라는 일곱 가지 용어가 나열되어 있다.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해 야훼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들을 가리킨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역 가운데 택정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 원수들에게 내리시는 판데믹인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심판 사상을 잘못 이해하면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퍼뜨리시는 분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인류가 당하는 무서운 판데믹 재난을 자칫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하게 된다. 이러한 설교는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을 구원하려는 중보기도의 열정을 차단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죄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설교자 자신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 이처럼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해석은 명백히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화살을 받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멸종시키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력을 증대해 왔다. 특히 근대문명의 산업화가 그러했다. 인류는 탐욕으로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이 예견되고 있는 무서운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자연재해가 계속 닥치고, 인재들이 속출하며, 특히 신종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 공격으로 판데믹이 창궐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세상 죄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교회도 세상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기술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상 죄인들의 대열에서 교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도 그들의 폭력체제에 편승하여 스스로 권세를 구가해오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않았는가? 이 점을 스스로 자성하는 지점에서 교회는 세상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지며 고통을 분담하고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교회의 회개의 과제가 될 것이다.

판데믹은 인간이 잘못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야훼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려고 발생시키신 질병은 아니다. 이 질병 발생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는 말이다. 애굽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을 혹독하게 부리고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잘못으로 발생한 판데믹과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성경은 야훼께서 내리신 심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개에의 부름이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생활했더라면(창1:29; 2:8; 9:4-5; 레11장), 어떠한 판데믹도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출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