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바라, 야차르, 아사, 바나)





창조(바라, 야차르, 아사, 바나)

창세기의 네 가지 창조 단어 분석(창1:1, 1:7, 1:27, 2:7, 2:18, 2:22)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라는 단어는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에는 각각의 의도가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바라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아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에서 인테리어 하듯이 형성하는 창조인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고
유에서 건축하는 단어인 바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분석하여 깨달으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직접 임하셔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 끼어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네 가지 창조 단어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에 어떤 창조를 하셨는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절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서 이 세상의 유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이미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끝마쳐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선택한 백성들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택을 받았습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베레쉬트(722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시작, 처음, 근본, 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근본이며 처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레쉬트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베이트는 집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 첫 번째 알파벳은 알레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일 최초로 쓰인 단어가 베이트입니다.
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베레쉬트라는 단어에 모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 의미로 ‘베레쉬트’를 해석해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면서 시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쉼과 안식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인간의 구원 계획도 끝내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사역을 완수시켰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절대 원죄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시니라’라는 단어는 바라(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태초에 만드시는데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고 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꼼꼼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 구석구석 만지셔서 창조하셨고 많은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강동사, 칼형 (Strong Verb, Qal)

https://m.cafe.daum.net/prosbible/jmF9/10?listURI=%2Fprosbible%2FjmF9

https://sermon-jesus.tistory.com/17949270


강동사는 어간이 모두 일반 자음으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동사들로서 규칙 동사라고도 하는데 단순형, 강의형 및 사역형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했다.

이 세 가지는 다시 태에 따라 일곱 가지로 세분되어 지는데, 여기서는 단순형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칼형에 대해 동사의 개념편에서 배운 순서대로 하나씩 구체적인 문법을 학습하기로 한다.
이후 각과에서 배우게 될 모든 형태의 동사에 관한 문법은 모두 같은 순서를 따라 전개될 것이다.

1. 시제 (Tense)

히브리어 시제는 완료시제와 미완료 시제의 두 가지 종류 밖에 없으며, 여기서는 직설법의 시제부터 살피기로 한다.

1) 완료시상(Perfect)

인칭

성수

단       수

인칭

성수

복       수

3

 ל󰖨󰙌    그가 죽였다

 (카-탈)

3

 וּל󰖮ꔈָק  그들이 죽였다

 (카-텔루-)

ה󰗚󰖮ꔈָק 그녀가 죽였다

(카-텔라-)

2

󰚛󰗡󰖨󰙌   네가 죽였다

 (카-탈-타-)

2

 ם󰚟󰗡󰖨󰙓 너희가 죽였다

  (케탈템)

󰚢󰗡󰖨󰙌   네가 죽였다

 (카-탈-트)

ן󰚟󰗡󰖨󰙓  너희가 죽였다

  (케탈텐)

1

י󰚝󰗡󰖨󰙌  내가 죽였다

 (카-탈-티-)

1

וּנ󰗡󰖨󰙌  우리가 죽였다

 (카-탈-누-)

① 변화표의 순서가 3인칭 남성 단수부터 시작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3인칭 남성 단수가 동사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② 완료형 동사는 인칭 대명사가 접미요소로 붙는다. 단, 3인칭의 경우는 단, 복수 모두 인칭대명사와 모양이 다르다.

③ 접미요소 결합에 따른 모음 변화

㉠ 3인칭 접미요소 ה󰚼(아-)와 וּ(우-)는 자신들이 액센트를 취함으로써     앞의 중간 어간(ט)의 모음을 쉐와(모음약화로 인한 유성쉐와)로 만든     다. 그러나 초두의 장모음은 그대로 남는데 메텍을 표시함으로써 카     메츠하툽과의 혼동을 피하게 해준다.

㉡ 자음 접미요소인 󰚛(타-), 󰚢(트), י󰚝(티-)와 וּנ(누-)는 액센트를 갖     지 못하기 때문에 모음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ל(라멛)이 쉐와     를 가진 것은 단순히 접미요소를 연결하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생긴      것으로 분절쉐와라고 부른다.

㉢ 중접미요소인 ם󰚟(템)과 ן󰚟(텐)는 자신들이 액센트를 가지면서 초두     의 개음절 장모음을 쉐와로 만든다.

④ 완료형은 동작이 끝난 모든 종류의 시상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완료형이 나타낼 수 있는 시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이다.

㉠ 단순과거 : ∼가 ∼하였다.

㉡ 현재완료 : ∼가 이제 막 ∼하였다.

㉢ 과거완료 : ∼가 ~하였었다.

㉣ 미래완료 : ∼가 ∼하였을 것이다.

2) 미완료시상(Imperfect)

인칭

성수

단       수

인칭

성수

복       수

3

 ל󰖬󰙓󰖹    그가

 (잌토-ㄹ)   죽일 것이다

3

וּל󰖮󰙓󰖹      그들이

 (잌텔루-)      죽일것이다

 ל󰖬󰙓󰚝  그녀가 

 (팈토-ㄹ)   죽일 것이다

ה󰗺󰗡󰖬󰙓󰚝   그녀들이

 (팈토-ㄹ나-)   죽일 것이다

2

 ל󰖬󰙓󰚝   네가

 (팈토-ㄹ)   죽일 것이다

2

 וּל󰖮󰙓󰚝     너희가

 (팈텔루-)      죽일 것이다

י󰗜󰖮󰙓󰚝  네가

 (팈텔리-)   죽일 것이다

 ה󰗺󰗡󰖬󰙓󰚝  너희가

 (팈토-ㄹ나)   죽일 것이다

1

ל󰖬󰙓󰔟   내가

 (엨토-ㄹ)   죽일 것이다

1

 ל󰖬󰙓󰗼     우리가

 (닠토-ㄹ)     죽일 것이다

※ 암기요령은 3인칭 남성 단수부터 접두자음과 접미요소를 떼어서 단수는 ‘이, 티, 티,      티-리, 에’로 외우고 복수는 ‘이-우, 티-나, 티-우, 티-나, 니’로 외운다.

① 미완료형 동사에는 완료형에서와 같은 접미요소 뿐 아니라 접두자음이 붙는다. 미완료형에 붙는 접미요소는 단수에는 2인칭 여성에만 붙고, 복수에는 모두 붙는다. 접두자음은 빠짐 없이 붙는다.

② 칼형의 미완료 시상의 주도 모음(어간의 중간 자음의 모음)은 세 종류가 있다.

㉠ 일반 동사는 󰛈(오-)이다. : ל󰖬󰙓󰖹(잌토-ㄹ, 그가 죽일 것이다)

㉡ 상태 동사(자동사)는 󰚽(아)이다. : ד󰔰󰗎󰖹(잌받, 그는 무거우리라)

㉢ ן󰚔󰗺(나-탄, 주다)류의 동사는 󰚿(에-)나 󰛀(에)를 가진다. : ן󰚞󰖹(잍테-ㄴ,       그가 줄 것이다)

③ 접두자음과 접미요소 결합에 따른 모음 변화

㉠ 접두자음은 바로 뒤에 오는 자음과 함께 폐음절을 이룬다. 따라서 바     로 뒤에 오는 어간의 첫 자음의 모음을 무성쉐와로 만든다.

㉡ 2인칭 여성 단수 접미요소인 י󰚾(이-)와 복수 3, 2인칭 남성 접미요     소인 וּ(우-)는 완료형에서와 같이 자신들이 액센트를 취함으로써 앞     의 중간 어간(ט)의 모음을 유성쉐와(반개음절)로 만든다.

㉢ 복수 3, 2인칭 여성 접미요소 ה󰗺(나-)는 액센트를 갖지 못하며, 따라     서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ל(라멛)의 쉐와는 분절쉐와이다.

④ 2인칭 여성 단수나 3, 2인칭 남성 복수처럼 모음으로 끝나는 형태를 가진 미완료형 동사의 끝음절을 폐음절로 만들기 위해 마지막에 ן(눈)이 첨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첨가 נ(눈)이라고 부른다.

        י󰙎󰔶󰕖󰚝    →   ןי󰙎󰔶󰕖󰚝               “네가 좇아 가리라”

        (틷베키-)        (틷베키-ㄴ 칼○미, 2여단)

        וּע󰗱󰚉󰚝   →  ןוּע󰗱󰚉󰚝             “너희가 들을 것이다”

       (티쉬메우-)      (티쉬메우-ㄴ 칼○미, 2남복)

⑤ 미완료형은 동작이 끝나지 않은 모든 종류의 시상을 표현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나타낸다.

㉠ 현재 : ∼가 ∼한다.

㉡ 미완료과거 : ∼가 ∼하고 있다.

㉢ 미래 : ∼가 ∼할 것이다.

㉣ 기타 명령법, 희구법, 가정법 등에서 아직 완료되지 않는 행동





바라라는 단어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인데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창조입니다. 창조에 바라의 단어를 쓰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복제동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라의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다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7절은 바야아스 엘로힘 에트 헤라키아 바야베델 베인 하마임 아쎄르 미타하트 라라키아 우베인 하마임 아쎄르 메알 라라키아 바예히 켄입니다.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게 됩니다.

‘만드사’라는 단어는 아사 6213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창조하다, 조각하다,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조각하듯이 세밀하게 우주의 넓은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조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은 즉시로 천지를 만드시고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며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창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은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문법입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셨는데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라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사 창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사 창조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다른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아사 창조로 아주 넓은 공간의 궁창을 이미 바라 창조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 창조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 바로 아사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아사 창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다가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사 창조입니다.

27절은 바이베라 엘로힘 에트 하아담 베찰모 베첼렘 엘로힘 바라 오토 자카르 우네케바 바라 오탐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자기 형상’이라는 단어는 첼렘 6754 명사 남성 단수입니다. 형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바로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실체를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죄를 짓기 전에는 거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단어인 ‘첼렘’의 히브리적 상형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되고 말씀으로 통제받아 가르침을 받고 익혀서 하나님을 갈망하여 바라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조하시되’라는 단어는 바라 1254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하셔서 즉시 창조에 착수하셔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으로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와우접속사는 하나님이 즉시 인간을 창조하셔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창조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하시고’라는 단어는 바라 1254 동사 칼(능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만들다, 창조되다, 지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와우접속사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똑같은 창조인데 문법이 다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계속 계획을 하셨다가 즉시로 바라 창조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던 창조는 이미 계획이 끝나고 창조된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제 자체가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이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실체를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림자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체를 따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자가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항상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고 육체의 삶만 살다가 끝나버립니다.

7절은 바이체르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 바이파흐 베아파이브 니쉐마트 하임 바예히 하아담 레네페쉬 하야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라로 창조하시고 이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 창조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흙으로 사람을 또 지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지으시고’라는 단어는 야차르 3335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꾸미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 창조하셨지만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차르 창조를 하시고 있는데 이 창조는 건물을 건축하고 나서 인테리어를 하여 더 완전하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더 완숙하게 꾸미고 구성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 창조로 완벽하게 무에서 유로 만드셔서 건물을 지으셨다면 야차르 창조는 그 건물에 인테리어를 꾸며서 더 정돈되어 건물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이제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숨을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꾸미고 형성하여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숨을 쉬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가 이제는 완전하게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야차르 창조는 겉 사람을 만드는 창조를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단어는 네페쉬 5315 명사 여성 단수입니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생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숨을 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형성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상태의 창조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특별히 에덴동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18절은 바요메르 아도나이 엘로힘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에에세 로 에제르 케네게도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야차르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지으시는 창조가 아사 창조입니다. 이미 여자는 하나님께서 바라 창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유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있습니다.

22절은 바이벤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첼라 아쎄르 라카흐 민 하아담 레이솨 바예비에하 엘 하아담입니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바나 1129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건축하다, 세우다, 증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창조는 바나 창조입니다. 바나 창조는 이미 바라 창조되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유에서 유를 만든 아사 창조물로 건축하는 창조를 말합니다. 아담의 갈빗대는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은 여자를 바나 창조하시는데 이미 이 여자는 앞에서 바라 창조된 자입니다. 이 여자를 건물을 증축하듯이 더 세밀하게 건축하여 세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건축하여 세워 더 확실하게 여자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아담의 배필을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철근도 들어가고 시멘트와 돌과 벽돌과 나무들이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몸에 있는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건축하는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바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즉시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완전한 모습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여자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세밀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하나님께서 건축하듯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똑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신경 쓰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면서 나아가는 신앙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창조」란 낱말로 사람과 짐승에 대하여 똑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람에 대한 「창조」와 짐승에 대한 「창조」란 낱말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에 대한 「창조」란 말은 「만드셨다」는 의미이지만 사람에 대한 「창조」는 「해산했다, 낳으셨다」는 의미입니다. ……?

don 형제가 좋은 질문을 했군요. 어떤 분이 그런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창세기 1:25에는 동물 창조에 대한 기록을 했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만드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사”입니다. 그런데 26에 사람을 만드시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만들고”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27에는 “창조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했군요. “만들고”는 여전히 “아사”입니다. 그러나 “창조하시고”는 “바라”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1에 “창조하시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어에 대하여 깊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제가 참고한 대로는 이 창조라는 말 “바라”에는 “해산했다, 낳으셨다”는 뜻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오직 창조주의 창조행위에 대하여서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사에도 그런 뜻을 발견하지 못했고요.

성경에 “바라”라는 말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된 것 같은데 칼 형과, 니팔 형과 피엘 형입니다. 이 문법적 말의 뜻을 저는 잘 모르지만, 칼 형 “바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행위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신 것입니다.(롬4:17)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세기 주석에서 “바라, 곧 ‘창조하다’란 동사는, 한 편으로는 전혀 힘들이지 않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재료에 대한 진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의미를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니팔 형은 일단 피동형으로 모면 됩니다. 피엘 형은 강조하려는 사실에 사용하지만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니팔 형은 창조 되었다. 또는 창조함을 받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피엘 형은 베어 넘기다, 베어 버리다는 뜻이 있네요. 그러나 해산하다 낳았다는 뜻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와 관련된 단어 세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바라, 아사, 야차르입니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바라는 그 물체자체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야차르는 주로 어떤 물체의 형태(모양을 만드는 것이나 형성하는 것)를 만드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고 했을 때 “지으시고”가 야차르입니다.
또 2:19에 동물들을 지으시고 라는 말도 야차르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에는 창조와 관련하여 이 세 단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단어들 중 어느 단어도 해산했다. 낳았다는 뜻이 있다고 기록한 참고서는 제게 없습니다. 그런 말을 쓰신 분은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것인가?

성경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신화이다.
성경을 신화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번역하는 수 많은 경우중 하나다. 성경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없다.
그렇게 해석하고 번역한 것에 문제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2절)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을 몇군데 살펴보면

문장의 주어는 '야웨 하나님' 동사는 '바나' 곧 만드시고 가 아닌 '세우다'의 뜻을 지닌 '바나'이다. '바라'도 아니고 '아사'도 아니고 '야차르'도 아닌 '바나'로 성경의 많은 경우 '쌓다' 혹은 '세우다'는 뜻을 지닌다.

문장의 목적어는 '갈빗대' 곧 '하체라'이다.
'갈빗대로'는 에트 하체라인데 목적격이다.
여자를 만든 재료인것처럼 번역하면서 '여자'를 목적어로 해석한 것은 오역중 오역이다.
대격부호 '에트' 까지 동원해서 목적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갈빗대로'가 아니라 '갈빗대를' 이 맞다.

갈빗대를 설명하는 관계절을 이어서 해석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세우셨다" 이다.

왜? '레이샤'이다.  '레' 전치사와 '이샤' 곧 여자(이샤)를 위하여(레) 이다.
따라서 이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이 여자를 위하여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를 세우시고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셨다.

히브리어 문장의 에트~  레~ 용법이다. ~을 위하여 ~을  ~하다는 용법의 문장이다.
(여자를 위하여 갈빗대를 세우셨다)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번역과 이해는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신화로 바꾸려는 음모가 담겨 있는 번역이다.

창세기 2장 22절은 그 뜻이 남자와 여자의 참된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갈빗뼈'가 세워져야 비로소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빗뼈가 남자에게서 뽑혀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온전한 관계, 제대로의 소통의 길이 열리기 위해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것과 동일하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를 바라보며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려하나, 그것은 자신의 가슴에서 뽑혀 세워진 뼈를 바라보며 하는 노래이다.

갈비뼈가 뽑힐 때, 살 점이 띁겨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마치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는 표현을 방불한다. 신약에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랑의 옆구리가 터지는 장면이다. 여자를 위해 갈빗뼈를 세우고 이를 양식과 음식으로 삼는 장면이다.

누구든 여자를 맞이하려면, 여자를 위하여 살과 피를 준비하고 세워야(단을 쌓듯이, 단을 세우듯이)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이며 소통의 원리이다. =휘오스=



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꿈과 환상과 예언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의인의 삶의 기초(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 낮의 광명에 이르느니라.  

이 말은 의인의 삶은 계속 빛 가운데 서게 될 것이며 가장 성숙한 모습으로 자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인도하는 예언적인 계시가 그 안에서 증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것입니다.
캄캄함이 온 땅을 덮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라가는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의 영광과 광명으로 덮여질 것이며 오히려 일어나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은 반드시 다르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의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듣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듣고 있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실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스가랴  7:11-12)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들을 수 있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그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마 7:24).
대부분의 경우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귀머거리는 곧 벙어리입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듣는 것을 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자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은 각 교회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자주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사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찌 믿지 못합니까?
어찌 조금도 변화 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의 믿지 못함을 주님께서 책망하셨지요.
3년이 넘게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듣고 또 들어도 사실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다른 많은 이들이 듣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의 소리였고 하늘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분은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마 13:13).
요즘 시대처럼 잘 들려지고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기위해 설교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로마서 11:8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못 듣는 자들의 문제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귀가 할례 받지 못함으로 듣지 못하는도다”(렘 6:10)

어떤 의미에서 귀머거리에게 왜 듣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귀머거리는 듣지 못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그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앞 못 보는 맹인에게도 왜 못 보냐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고 귀를 열어 듣게 해주는 것만이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들어야 살아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감각기관은 귀입니다.
듣는 것은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듣는 것은 특별히 영적인 것에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요 10:27).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주님은 강조했습니다(요 5:25).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4, 5)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기 위한 특별한 소리를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 주님의 언어는 이 땅의 소리와 다릅니다.
사람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소리가 우리 주변에 있으나 들을 수 있는 영역만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파를 타고 수많은 소리가 전달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습니다(행 22:9).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만이 한 시대에 바로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따랐고 순종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은 하나님이 우리와 대화하시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대화하실 때는 성령을 통해 하늘의 소리를 전달했습니다.
이 땅의 언어가 아닙니다.
영의 언어이며 하늘의 언어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어를 가르쳤고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나님은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요엘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분의 뜻을 알며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언어인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적)을 통한 계시적인 차원에서 대화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주님의 남녀종들이 예언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셨던 하늘의 언어를 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알며 그분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꿈과 환상과 음성(예언)은 성령을 통한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모든 꿈과 환상과 음성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되어야합니다.
이것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꿈과 환상과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영으로 대화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좇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언어를 모르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서로 대화할 수 없다면 사랑도 믿음도 친밀함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고전 2:9-10).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 알 수 있고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끌어 가셔야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계시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이 제한받지 않도록 그분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친밀함이 깊어지도록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을 수 있겠냐고 하셨지요.

아버지께서 보게 하시는 것을 말하고 듣게 하시는 것을 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의 일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하고 하나님의 일을 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기도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다시금 교회는 강력하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요 5:24).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만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 5:1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모두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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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최근 들어 교회 성장의 둔화, 사회적인 불안의 확산, 세속적인 오락 문화의 확산 등 어려운 목회 환경 때문에 사역자들이 불건전한 신비 운동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고 있다. 고신 총회는 예언, 환상, 쓰러짐, 금가루 현상, 입신 등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진행하는 집회에 대해 2013년 63회 총회에서 ‘극단적 신비주의’로 규정했다. 고신측은 63회 총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며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2013년 63회 고신 총회의 꿈, 환상, 예언, 직통 계시에 대한 연구 보고서다.

서 론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한 소위 ‘교회의 5대 직분 체제’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올바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집회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전수(impartation)할 수 있고, 과거와 같이 맹목적인 회개로 인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꿈이나 환상, 음성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 시대의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말함으로 많은 사람을 오도하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구약 시대의 예언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또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1:28, 2:16-17, 19). 타락 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참 3:8-19, 4:6-15). 하나님은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6:13-21, 7:1-4, 8:15-17, 9:1-17),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창 12:1-3, 13:14-17, 15:13-21, 17:1-22, 22:1-2 등),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였다(창 15:1, 28:12-16 등). 또 요셉에게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셨다(창 37:5-7, 9-11).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민 12:7-8), 여호수아, 사울, 사무엘, 다윗 등과도 말씀하셨다.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백성에게 계시하셨다. 심지어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인에게도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창 20:3-7, 40:5-23, 41:1-8 등).

그런데 선지자들 중에는 참 선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도 있다.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하셨는데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또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다(신 18:20).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만일 어떤 선지자가 말했는데 그 말에 ‘증험’(證驗)도 없고 ‘성취(成就)함’도 없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 18:22) 여기서 “증험도 없고”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 말(일)이 있지 아니하면”이고 “성취함도 없고”는 직역하면 “이 말이 오지(일어나지) 않으면”이다. 따라서 이 둘은 하나를 가리키는데, 곧 어떤 선지자라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란 말이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의 판단 여부는 그 예언한 말씀의 성취여부로 판단하게 된다(왕상 22:11-36, 렘 28장 참조).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리는 그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이다. 즉, 어떤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이고, 그가 말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니 죽이라고 말한다(신 13:1-5). 따라서 이적이나 능력보다도 또는 예언의 성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는 것이라면 그 선지자는 이적이나 기사, 또는 예언의 성취 여부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선지자에게도 이적과 기사, 또는 예언 성취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시험(試驗)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13:3).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적이나 성취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것을 조금 확대 적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그 어떤 능력이나 성취가 있더라도 거짓이요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초대 교회의 예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구약의 예언을 이루셨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다(히 1:1-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며, 또 기록해 주었다. 사도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들은 대부분 남아서 정경(正經)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안에는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선지자들’은 에베소서 3:5과 비교해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으며 그대로 되었다(행 11:28, 21:10-11). 전도자 빌립의 딸 넷도 ‘예언하는 자’라고 한다(행 21:9).

로마서 12:6에 보면 교회에 주신 은사들 가운데 ‘예언’(propheteia)이 나온다.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예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모든 활동을 다 포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예언 곧 하나님의 특별 은사 중의 하나로서 ‘새로운 것들을 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고전 12:10 참조). 헤르만 리덜보스는 이에 대해, 이것은 어떤 발언들을 하도록 강제되는 것을 말하는데 고전 14:3에 의하면 교회를 세우고 권면하며 격려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래의 일들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리덜보스의 견해는 대체로 맞다고 보지만, 그러나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이 꼭 제외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적지 않게 있었다. 따라서 차라리 박윤선 박사처럼 ‘예언 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 시대(시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적(單回的)인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고린도전서 14:3에 보면 ‘방언’(方言)에 비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현재 상태나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같은 장 24-25절에 보면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 한다. 여기에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난다’는 말을 보면, 이 에언이 꼭 권면과 위로의 말로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은사로서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예언 은사의 중단

이러한 특별한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중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완성되었으며, 또 다시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시록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19).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66권의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다 얻을 수 있으며, 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시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2세기의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새 예언’(nova prophetia)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들에게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지만, 나중에 이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것이 분명해지자 기성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한정 확장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正經)은 사도들의 시대로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교회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과격한 천년주의자들,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따라서 신구약 66권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규범이 되는 정경은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잘못이며 큰 재앙을 불러온다(계 22:18-19).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초대 교회에 역사했던 예언도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경의 완성이라는 계시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

요즘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직통계시라도 받는 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온갖 허튼 소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범람하여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주님(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를 가진 셈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주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풀어 주고 적용해 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직접 그 뜻을 나타내 주시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가끔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들에게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으로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음을 듣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박관준 장로나 안이숙 여사, 그리고 옥중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경우를 듣고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예언’이나 ‘계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로서의 예언은 사도시대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매우 예외적이고 긴급한 특수 상황에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인도하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꿈이나 환상, 육성은 더 이상 계시적인 방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자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보편적인 방편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환상이나 꿈을 해석하여 신적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꿈일 수도 있고, 허상을 본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단순히 심리적인 작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신비 체험을 주어서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경유이다(고후 11:13-15, 살후 2:11-12).

고린도후서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해야 한다(고전 14:29, 32, 살전 5:21, 요일 4:1).

고린도전서 14:29, 32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들의 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을 다 믿지 말고 오직 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래서 기록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그 체험이 그럴듯하고 확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으로 배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 체험을 의지하지 말고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붙들도록 해야 한다.

5. 성령의 인도와 인간의 죄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와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소위 그들의 ‘계시’ 또는 ‘예언’을 성경의 권위와 같은 차원에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요 16:13)은 우리가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실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을 받은 베드로드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였으며(갈 2:11-14),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문제로 서로 다투어 헤어졌다(행 15:36-41). 또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하였으며(벧후 3:16),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다(고후 11:30). 따라서 진리의 영이 오시면 사도들이 전혀 죄도 없고 실수도 없고 연약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우리에게는 중생 후에도 죄와 연약함이 남아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성령의 인도가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비록 행함이나 생활에 있어서 연약함이나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오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벧후 1:21). 이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8). 또한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11-12절). 베드로는 또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벧후 1:21). 특히 성경을 기록할 때에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조금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셨다고 보아야 한다(딤후 3:16).

이처럼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록에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인도와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를 성령의 ‘계시’(啓示, revelatio) 또는 ‘영감’(靈感, inspiratio)이라고 부르며, 후자를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일체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사도 이후 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소위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교황이 ‘강단에서’(ex cathedra) 말하는 것은 무오(無誤)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황 무오설을 지지하기 위해 그들은 성령의 특별 사역을 끌어들인다(마 16:18, 28:29, 요 14:16이하, 15:26, 16:12이하). 물론 그들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구별을 하기는 한다. 사도들에 대한 성령의 활동은 ‘계시’(revelatio)와 ‘영감’(inspiratio)에 있었지만, 교황에 대한 활동은 ‘조력’(assistentia)에 있다고 한다. ‘영감’에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초자연적이었지만, ‘조력’에 있어서 그것은 대개 교회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섭리’(providentia)의 돌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성경’과 같은 차원에 두는 것이며, 실제로는 성경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황이 신앙과 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무오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자료와 그 해석에 있어서, 곧 무엇이 성경과 전통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곧 그들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는 무오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교황’의 무오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를 절대화하는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다. 교회는 부패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부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교회는 아무리 숫자가 많고 만장일치의 결정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가 교회의 무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이것은 우리가 항상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항상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며,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방해받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와 기본적인 삶의 원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외의 어려운 주제들이나 성경 해석들에 있어서는 다 알지 못하며 때로 실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의 결정도 마찬가지며 국제회의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압도적인 다수로 총회에서 ‘동성연애’가 합법적이며 죄가 아니라고 결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면서 무당의 굿판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의 죄와 불순종을 가리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6. 자신의 특별한 체험을 객관화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압하는 위험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지만(요 14:26, 16:13, 롬 8:14, 갈 5:18), 그렇다고 우리를 무오한 상태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죄성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신이 특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것을 보편화하여 다른 교인들도 꼭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라고 생각할지라도 과연 그러한지 아닌지를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꿈이나 환성이나 음성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체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도 잘못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결코 객관적인 교리나 윤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 수 없다. 비록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하다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계시인 성경 말씀밖에 없다.

결 론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비록 아무리 큰 능력과 신기한 이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탄도 그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한다고 한다(계 13:13).

따라서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온다고 하였으며 (마 7:15),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였다(고후 11:14).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살후 2:12).

말세가 되면 이런 미혹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더욱 놀랍고 신기한 일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자 할 것이다. 이적을 행하며 능력이 나타나며 소위 예언이 성취되는 일 등이 일어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다(신 13: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며(요 14:21),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말세가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참 성도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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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0 / 꿈이나 환상, 계시를 주신 이유


10. 그러나 그가 이것을 생각하는데, 오호, 주님의 천사가, “요셉아! 다윗의 자손아! 네 여자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태복음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생각하는데' 여기서 '그'는 요셉이죠. 요셉이 마리아를 버리려는 생각을 한 상태입니다. 그 때 요셉에게 계시가 옵니다. '오호 주님의 천사가' 물론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꿈에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계시를 부정한다는 것은 계시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진리화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지 계시는 반드시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죠? 그리고 예수님도 살아계시죠? 천사도 있지요? 우리 안에 성령님도 계시죠? 우리는 영이죠? 당연히 계시가 있습니다. 계시는 있는데 주어지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을 때 주어집니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지식이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말씀의 지식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세부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은사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계시가 주어지는데 꿈으로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음성으로 10번 만났습니다. 이삭은 꿈으로 반 음성으로 반 이었습니다. 야곱은 꿈을 통해 계시가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저는 새로운 교회를 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저에게 아주 많은 은혜를 끼친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경호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압니다. 저는 계시를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꿈에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저는 '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가 요즘에 왜 어려움을 당하는지 아느냐?' 보통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굉장히 진실해 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는 모릅니다.'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고 진실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저는 모릅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대해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을 저에게 투영시키면서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과 저와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교회, 은혜롭다고 생각하는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꿈에 '경호야! 분당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일지라도 저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여 주시는데 제가 눈길을 걷고 있는 것과 분당에 있는 교회들을 보여주시면서 제가 다닐 교회와 그곳에서 앞으로 몇 년을 다닐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번도 분당에 있는 교회를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굉장히 긴 꿈이었지만 자세하게는 말씀 못 드리고 제가 요약해서 말씀 드린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따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계시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시를 가급적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꿈과 계시, 환상 같은 것들은 개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에 있는 꿈과 계시들은 100% 성령님에 의한 것이지만 어떻게 제가 제 꿈을 100%로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제가 저의 예를 들은 이유는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계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건 진리야!' 하고 공론화하거나 이 계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100% 맞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셉아! 다윗의 자손아!', '네 여자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지금 요셉이 마리아를 끊으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맞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생각을 꿈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난자와 정자가 아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것은 있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꿈을 통해서 '지금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알려 주는 것입니다.

꿈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20년 전에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성경을 번역할 목표가 마음에 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아랍어를 2년 공부하고 2년 뒤에 히브리어를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도 꿈을 꾸게 됩니다. 아주 희한한 꿈이었는데 저기 멀리서 저를 향해 글자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커다란 집채 같은 '음'이란 글자가 다가 왔습니다. 그 다음은 '복'자가 오고 '태'자가 오고 '마'자가 다가 왔습니다. 그 꿈의 초반부에 저에게 어떠한 음성이 들려왔느냐 하면 '경호야! 너 성경에서 중요한 곳이 어딘 줄 아느냐?' 저는 꿈속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모릅니다. 어디가 중요한지를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말씀 곧 '어디가 중요한지 아느냐'라는 질문과 동시에 '음, 복, 태, 마'라는 거대한 글자가 지나갑니다. 꿈이지만 난감했습니다. '어! 저게 무슨 글자야?' 그 다음에 '음, 복, 가, 마'라는 큰 집채 만한 글자가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 '음, 복, 가, 누' 또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 '음, 복, 한, 요'라는 큰 글자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경호야! 이 책들의 요약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셨고 '저는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제 앞에 '로마서'라는 큰 글자가 제게 다가오다가 잠깐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인줄 아느냐?' 저는 '당연히 모르죠.'라고 답했고 그 때 또 다시 저기 멀리서 제게로 한 요절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꿈 속 이었지만,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렇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보는 것과 동시에 저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일어나서 '갈라디아서 2:20이 뭐지?'하고 긴 시간 동안 묵상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어떤 말일까?' 아침에 그 말씀을 찾아 보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말씀에 대한 제목이 '복음의 요약'이라고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알긴 알았지만 깊이 묵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나름대로 어떤 길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요셉처럼 계획하고 작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꼭 원하시는 당신의 뜻이 우리랑 맞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에게 간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간섭하셔서 꿈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꿈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환상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를 맞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입신이나 유체이탈이나 이런 모든 계시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저는 꿈에 나온 메시지를 통해 제 생각을 바꿔서 드디어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를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뜻이 있으신데 우리가 그 뜻대로 가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시로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대부분 개인적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공론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린 꿈 얘기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꿈은 여러분이 적용해서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제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구약을 번역해야 하겠다는 제 의지의 전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진로와 방향을 말씀한 것이지 여러분이 적용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남들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으며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꿈 얘기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 요셉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리고 이제 뜻대로 사는 사람인데 그 뜻이 안 맞을 때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방향을 수정해 주십니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지금 그녀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영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나를 치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계획을 바꿔주시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꿈이나 계시나 환상을 통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길로 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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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환상의 구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참된 꿈들은 여러 가지 개체의 꾸러미 형태로 온다. 상상들의 혼합, 은유들, 비유들, 시들, 꿈들, 그리고 잠자는 중에 놀랄만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꿈은 환상과 다르게 오직 사람이 잠들었을 때에만 받게 된다. 꿈을 꾸는 것은 단지 밤중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꿈들은 영으로 받아진 후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마음 안으로 해석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꿈의 형상들을 받아들이고 진행시키는 그림 창고를 가지고 있다. 성결하게 하는 마음이 세상 사건들의 배경에 있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꿈들을 부패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환상은 계시의 시각적 인식이거나 우리의 영적 눈들을 통한 초자연적 사건이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꿈들보다 더 현실적이며 보다 더 사실적이다. 사람은 정신이 깨어있을 때에라도 환상을 받을 수 있다.

꿈들과 환상들 사이의 차이점들

꿈들

환상들

꿈을 꾸기 위해서는 정신이 잠이 들어야만 한다(창15:12-13). “해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리”

환상들은 무아지경, 환영, 그리고 신성한 광경들을 통한 정신의 경계심의 여러 각도들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열린 환상은 자연적인 눈들이 활짝 열린 가운데 받아들여진다.

꿈들은 항상 개인적 기반 위에서 경험된다

환상들은 그룹 환경 안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다.

(행22:6-9)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려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보지 못하더라”

꿈들은 사람의 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며, 대부분이 영과 영의 만남들이다.

(단7: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이것은 선견자의 사역 안에서 일반적인 꿈과 환상의 영역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환상들은 명백한 몸의 체험들 같이 신체적이거나 자연적 영역의 여러 각도들을 포함할 수 있다.

(행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꿈들은 보다 상징적이다

환상들은 보다 실제적이다

대부분의 꿈들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환상들은 선포되기 전에 주의 깊게 평가되어야 한다

꿈들은 종종 개인적 상징성과 함께 꿈꾸는 자를 위하여 보다 신적인 목적으로 형상화 된다. 새벽녘에 꾼 꿈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기에 애매모호함이 적다.

환상들은 선포되기 보다 실제적이고, 종종 보다 명백하여, 약간의 해석만을 요할 수 있다. 그것들은 때때로 신속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할 수도있다.

꿈들과 환상들의 상호작용

꿈들과 환상들은 꿈꾸는 자의 삶 안에서 많은 방법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꿈꾸는 자는 많은 징후들을 가질 수 있다. 외적이나 내적 환상들, 꿈속의 환상들, 환상 속의 환상들, 꿈 안의 꿈, 혹은 환상 속의 꿈들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의 다양한 결합들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꿈들이 순수하게 영적 경험들(혹은 영과 영의 만남들)임에 반하여, 환상들은 자연적 영역의 여러가지 단계들이 다르게 뒤얽힌 영적 만남들이다.

다니엘 선지자는 다니엘서 7장 1절에서 꿈과 환상의 상호작용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환상과 다르게 꿈은 꿈꾸는 자의 마음에 솟아오르며, 사람의 마음의 깊은 부분을 휘저어 놓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순수한 꿈들 가운데서는 주로 육체의 관여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꿈들 안의 몸의 움직임으로 여겨지는 것은 거의 대부분 환상들을 동반한 꿈들의 결과이다.

거의 대부분의 꿈꾸는 자들에게 꿈들 속에서의 영적 만남들의 대부분은 환상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꿈을 꾸고 있을 때, 육체의 관여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꿈과 환상의 영역으로부터 고통이 전해지는 것들처럼 보이는 것은 꿈꾸는 자가 깨어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꿈은 그것이 영과 영의 일이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들의 전이를 가질 수는 없다.

반면에 환상들은 자연적 영역 안에서 다양한 단계의 육체적 관여를 가진다. 예를 들면, 바울이 그의 회심 후에 삼일 동안 소경이 된 것과, 야곱이 하나님과의 환상적 만남 이후에 평생 다리를 절었던 것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 자신도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꿈들과 환상들의 미묘한 차이점들을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12:6)

하나님께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라고 하신 것은 친밀함이나, 혹은 보다 깊은 관계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를 그에게 알라기도 하고”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혹은 그의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것임에 반하여 환상들은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 오직 계시에 의해서인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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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수기 12:6)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2:28)

영성이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이다.

꿈과 환상과 예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의사 소통 수단으로 사용되져 왔다.(민수기12:6, 요엘2:28, 행2:17) 편견이나 선입관적인 사상들 혹은 비성경적인 견해들 때문에 이 마지막 시대 재림직전 꿈과 환상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란다.

꿈의 용어들  Dream Language

민수기 12:6 -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요엘2:28 -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꿈과 환상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꿈 =(헬: enupnion) -  꿈은 잠자는 동안에 나타나는 것

* 환상 = (헬: chizzayon) -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지로 보는것입니다.

환상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음성을 듣게 하신다.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귀중한 체험

1) 야곱의 꿈 (창28:10-22)

야곱은 꿈속에서 천사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야곱의 반응은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들을 실천에 옮겼다.

기름을 부어 단을 쌓고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

그는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면서 자신과 자손들을 보호해 주시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리겠다고 약합니다.

야곱의 꿈에 등장하는 사닥다리나 천사, 에스겔에 마른 해골 뼈로 가득찬 골짜기(겔37:1-10),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요셉, 다니엘 선지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2) 요셉의 꿈(창41:33-43) 요셉에게 꿈을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3) (마2:12) - 동방박사들의 꿈

4) (마2:13) -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꿈

2.꿈과 환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1. 꿈과 환상은 말세의 징보로서  믿는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어 보게 하시는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행2:16-18, 요엘2:28)

2.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민수기12:6)

구약
1. 아브라함(창15장), 2. 야곱(창28장), 3. 요셉(창37장), 4. 솔로몬

5. 다른 예들

신약
아나니아(행9:10), 2. 고넬료 (행10:1-8), 3. 베드로 (행10:9-16) 4. 바울 (행16:9),

사도 요한(계시록)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뜻을 전하기도 하십니다..(창28:10-15)야곱, (창37:5)요셉

(마1:20)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꿈

(행9:10)사울의 거듭남과 아나니아의 환상

(행10:3~10, 11:5)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을 통해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고 사역함

환상 고넬료에게도나타남

(행16:9)바울의 마게도니아인이 나타나고 그들이 말으로 하는 환상을 통해 선교의 방향이 달라짐

(창41장) - 바로

(마2:12) - 동방박사

(마2:13) -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꿈

 마태복음에 5가지 꿈

(행22:17-21), (욥33:13-18)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를 주시기도 한다 (열왕기상3:5)

꿈과 환상은 미래의 사건을 계시하고 예언하시기도 합니다.

환상을 통해 사명에 관한 명을 하시는것을 늘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합니다.

(단2:4) 침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스가랴의 환상 (눅1:22)

꿈과 환상은 믿음을 크게 해주고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게 해주실때가 있습니다.

(행18:9) - 고린도에서 바울의 환상

(행27:23) - 배의 파손에 대한 천사와 바울의 환상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대화를 나무시는 통로 이기도합니다. (민12:6), (신13:1)

기도 속에서 주님의 뜻을 잘모를때
꿈과 환상은 새로운 확신을 갖도록 돕기도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알려주심

꿈과 환상은 하나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시34:8), (잠25:2)

꿈과 환상은 우리의 마음의 진정한 상태를 보여줍니다.(욥33:13-18), (단2:26-30,47. 4:2)

마귀적인 꿈 (렘23:32, 슥10:2)도 있기에 잘분별하여 적용해야합니다. 

때로 환상 속에서 우리 영이 하나님께 말씀을 올리는것이 들리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영이 중보하시는 소리가 들리기도합니다..

느브가넷살의 꿈 - 다니엘 2,4장

빌라도의 부인의 꿈

마음속에 예리한 영상-야곱의 꿈 - 창28장

반복되는 꿈-바로의 꿈

아브라함에게 꿈속에서 말씀하심 - 창15:12-17  창20:7

야곱 - 창28:12, 31:10                 다니엘7장

아비멜렉 - 창20:3 라반 - 창31:24 

미디안인 - 사사기7:13-14  바로 - 창40:5        

느브갓네살 - 단2:1,4,36   동방박사 - 마2:12

빌라도의 부인 - 마27:19 
신약 - 마1:20, 2:12-13, 2:19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심

1. 시편29장 - 하나님의 음성은

2. 욥33:13-14 - 꿈과 환상으로

3. 행10:9-16 - 베드로는 음성으로

4. 계5:11, 살전4:16 - 천사의 음성,

5. 계1:15 - 많은 물소리

6. 창3:8 - 하나님의 거니시는 음성

7. 삼하5:23-25 - 행진하는 소리

8. 행13:2 -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6:13 -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실 것이요.        

9. 벧후1:21- 성령의 감동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10.출3:4 - 귀로 들을수 있는 음성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11.시85:8 - 속사람에게 평강으로 말씀하심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12. 고후12:1-4 - 삼층천 방문 -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음

13. 롬8:16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4. 벧후2:16 - 나귀

15. 야고보5:19-20 - 사람과 사람에게

16. 시편119:105 - 기록된 말씀

17. 히1:2 - 마지막날에 아들을 통해서

18. 요엘2:30-31 - 이적과 표적

음성을 듣자

1. 이사야28:23 -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 이사야50: 4-5   

3. 이사야30:18-21

그러나 계시를 볼수도 있습니다.엡1:17-18

성령님을 통해 볼수 있는것

잠언29:18,  열하6:14-18,  스가랴4:1-7,  다니엘7:1-13,  엡1:17-19
요한5:19-20

마태13:34  
스가랴의 밤에 보이는 환상 - 스가랴1-6장, 4:1 다니엘7:1,13-14

밖에서 보는 환상
엘리사 - 열하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엘리사를둘렀더라.

2) 스데반 - 행7:55-56

3) 꿈과 환상 - 행10:10-23,  행16:9-10

3. 환상은 선지자들의 나타난 사역이다

이사야
1) 성전 안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 이사야6장     

2) 골짜기의 환상 - 이사야22장

예례미야
1) 렘1:11 - 살구나무 가지   2) 렘1:13 - 꿇는 솥   3) 렘24:1-2 - 무화과 두광주리

에스겔
1) 겔1:3,12 -14,23      
2) 겔2:9       
3) 겔8-9장      
4) 겔10:1-7
5) 겔37:1-14 마른 뼈    
6) 겔40-48장 예루살렘 성전      
7) 겔47:1-12 물의 환상

다니엘
1) 단2:19   2) 단7:1-8     3) 단7:9-27   4) 단8:1-14 5) 단10장   6) 단11:2,  12:4 7) 단12:5-13
아모스
1) 7:12   2) 7:4   3) 7:7-8   4) 8:1-2   5) 9:1-3
스가랴
1) 1:8-11   2) 1:18-21   3) 3:1-5    4) 4장   5) 5:1-4   6) 6:1-8

환상 본 것에 대한 기록이 없는 선지자들 -
호세아, 요엘,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말라기

꿈과 환상은
행2:16-18, 요엘2:28
꿈과 환상은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이다. 행1:4,5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 민수기12:6
꿈과 환상에 대한 성서적인 예들 들면
1) 구약
1. 아브라함- 창15장   2. 야곱 - 창28장   3. 요셉 - 창37장  4. 솔로몬   5. 다른 예들 -

2) 신약
1. 아나니아 - 행9:10   2. 고넬료 - 행10:1-8   3. 베드로 - 행10:9-16
4. 바울 - 행16:9  5. 사도요한 - 계시록

환상을 통해 영적으로 어떤 마음인지 마음의 동기까지 알리실때가 있습니다. 
욥33:13-18 다니엘2:26-30,47  4:27

우리의 삶속에 내재하신 성령님이 기도로 깊이 나아가면  현재 마음의 동기를 알수 있을때가 잇습니다.

예언 - 미래 적인 것
지식의 말씀 - 계시하실때 혼상을 통해 알리시기도 합니다.

지혜의 말씀 - 영적인 방향 제시와 영적인 교훈을 주어 주님의뜻대로 살도록 도우실수 있게합니다. 

믿음의 은사 - 하나님의 믿는 영적인 능력

영분별 - 영적인 흐름을 알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심볼을 이해하자

창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예례미야15:19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말지니라

마태13:24-43
씨뿌리는 자 - 인자   밭은 - 세상     씨는 -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
가라지- 악한 자의 자녀    원수 - 마귀  추수 - 세상종말    추수꾼 - 천사들 그리스도의 심볼
떡 - 요 6:48   신랑 - 마9:15   가지 - 렘23:5   새벽별 - 계 22:16
양 - 계 5:6    용사 - 시 24:8    목자 - 벧전5:4   군대 장관 - 수5:14
종 - 사 53:11   사자 - 계 5:5    기초 - 사28:16   교회의 머리 - 엡5:23
빛 - 요8:2   성소 - 사 8:14    씻는샘 - 슥13:1  모퉁이돌 - 벧전2:6
왕 - 마21:5  반석 - 고전10:4  통치자 - 마2:6  의원[의사]- 마9:2
별 - 민24:17  장미 - 아가 2;1  심판자 - 행10:42  포도나무 - 요15:2
문 - 요10:7            

성도의 심볼
종 - 마25:21   신부 - 계21:3   소금 - 마5:13   나무들 - 시42:1  
몸 - 고전12:20   사슴 - 시42:1        아이 - 마11:25    독수리 - 시103:5
돌 - 벧전2:5   양들 - 사40:11  양떼 - 시78:52   경기자 - 고전9:24    
해 - 사사기5:31  군인 - 딤후2:3       별들 - 단12:3  물고기 - 마13:48
빛 - 마태5:14  보물 - 출19:5  보석 - 말3:17   가지들 - 요15:2  
사자 - 잠28:1   그릇 - 딤후2:20      비둘기 - 시68:13   어린아이 - 마18:3 
성령의 상징
물 - 약3:5   불 - 마3:11   바람 - 요3:8   기름 - 눅10:34
비 - 시72:6  비둘기 - 마3:16

사탄의 심볼
도적 - 요10:10   뱀 - 계12:9        붉은용 - 계12:3   번개 - 눅10:12

꿈의 배경
꿈들은 대게 꿈꾼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환경, 좌절, 결정, 승리, 두려움, 과거의 아픔, 오래된 문제들, 관계의 문제, 필요한 부분

기본적인 심볼의 뜻
1). 집 -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삶을 묘사할 때 사용하셨다. - 마태7장

당신의 삶의 중요한 시기를 말할 때

2). 사람 - 꿈꾸는 자의 삶의 부분적인 심볼
다른 사람들의 예언적인 상태를 말할 때, 그러나 해석이 필요함.

3). 운송수단 - 꿈꾼 자의 살림살이

4). 짐승들 - 꿈꾼 자의 삶, 느낌, 예언의 심볼,

5). 숫자들
1 - 하나님 하나의 연합   2 - 언약, 증인 3 - 삼위일체   4 - 지구4계절, 동서남북 5 - 은혜, 구속함, 5중사역   6 - 사람 7 - 완전수 8 - 새로운 시작 9 - 성령 10 - 심판 11 - 긍휼히 여기심 12 - 하나님의 정부 13 - 갑절의 축복,

6). 색 - 다양한 해석들
1. 파란색 - 소망, 치료, 자유, 성령. 
2. 흰  색 - 영광, 순결, 절대적인 것
3. 초록색 - 영생, 성장, 돈 
4. 노랑색 - 기쁨, 햇빛
5. 검정색 - 어두움                          6. 자주색 - 왕권
7. 빨강색 - 대속, 구원, 예수의 보혈, 용기, 노여움.

꿈의 해석에 대한 단계
1. 꿈에 들기전에 기도하라 -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 

2. 평안히 잠을 자라.

3. 준비하라 - 노트에 꿈을 기록하라.

4. 기도하라 - 해석을 위해서.

5. 꿈의 심볼들을 해석하라 - 필요하다면 - 성구사전,성경,사전

6. 꿈을 해석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라.

 7. 이 과정이 끝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내가 본 꿈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후 날짜를 적어놓고 적용할 것을 질문한다.

신약 - 마1:20, 2:13, 2:12, 2:19
적용 꿈의 해석을 위해 기도하라 - 단2:4  꿈을 기록하라 - 다니엘7:1

꿈의 해석에 대한 질문

1. 제목을 붙인다.

2. 간단, 명확한 중심내용, 상징들을 차례로 기록한다.

3. 강렬하게 느꼈던 태도와 감정은 무엇이었던가?

4. 이 꿈이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반응 할것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이 꿈이 나와 교회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6. 주제별로 잘 정리한다.

꿈과 환상의 예언적인 책임  이사야55:11

1. 죄와 불순종 - 삼하3:1

개인적인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 순종을 요구한다.

2. 두려움과 근심은 환상을 흐리게 한다

왕하6:8-엘리사의 종 게하시

사람들에게 주는 환상의 유익

1.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이루어진다.
2. 평강을 가져온다.
3. 성결, 거룩, 지혜를 가져온다.
4.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5.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다.
6. 지혜와 기름 부음을 풀어놔 준다.
7.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기쁨을 풀어놔 준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환상
행2:17, 행7:55-60 행9:1-9, 행10:1-2, 행10:9-16, 행16장,

구약 성경에 나타난 환상
창15:1, 겔11:24, 단4:13, 합2:2, 눅1:22 계9:7

환상을 잘 볼 수 있는 영성훈련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은밀하고 조용하게 하나님의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어 인간의 내면의 영력 깊이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능력과 눈을 갖도록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겉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마음의 기능을 절제시키고 영의 기능을 강화하는 집중훈련이다.
이 훈련은 초월명상이나 초능력 훈련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오해되어질 요소가 많다.
그러나 명상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목적이 인간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데 있다.

1. 성서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여 예언이나 환상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다.

2. 방언기도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3. 믿음으로 성서에 나타난 장면을 묵상하며 내 마음속에 영상화시킨다.

4. 내 영이 성경의 사건 속에 들어가 경험되어 지도록 최대한 믿음과 마음과 감정과 상상력을 성령님께 맡긴다.

5. 영적인 사건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환경 주변을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살펴본다.

6. 영적인 사건 속에서 내 영이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을 볼 수 있고 행동과 대화도 감각의 느낌도, 영적 싸움도 가능하다.

7. 내 영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잘 받기 위해 적절한 하나님의 찬양을 듣는 것이 좋다.

8. 이 과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내가 본 환상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후 날짜를 적어놓고 적용할 것을 질문한다.

환상을 통한 질문

1. 제목을 붙인다.

2. 간단, 명확한 중심내용, 상징들을 차례로 기록한다.

3. 강렬하게 느꼈던 태도와 감정은 무엇이었던가?

4. 이 환상이 내게 무엇을 깨eke게 해주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이 환상이 나와 교회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6. 주제별로 잘 정리한다.

사람들에게 주는 환상의 유익

1.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이루어진다.

2. 평강을 가져온다.

3. 성결, 거룩, 지혜를 가져온다.

4.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된다.

5.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다.

6. 지혜와 기름 부음을 풀어놔 준다.

7.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기쁨을 풀어놔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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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이혼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막 10:1-12; 마 19:3-12)과,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한 고린도 교인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고전 7장).
예수님은 복음의 초청을 혼인잔치로 비유한다(마 25장의 열 처녀 비유, 눅 14장의 잔치 비유 등).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 예수와 교회의 혼인잔치를 천국 모습으로 비유한다.
성경은 결혼이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종말론적 삶으로 홀로 사는 독신(비혼)에 대해서도, 예수님이나 바울은 똑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헬라어 명사 γάμος(가모스)는 기본적으로 '결혼식'(wedding) 혹은 결혼(marriage)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수형은 '결혼잔치'(wedding feast)를 뜻한다(마 22:2; 25:10).
또한 결혼식장(wedding hall)을 의미하기도 한다(마 22:10).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13번, 히브리서에 1번, 계시록에 2번 나온다.
‘결혼하다’라는 동사 γαμέω(가메오)는 신약성경에서 28번 나오고, 비슷한 뜻의 다른 동사 γαμίζω (가미조)는 7번 나온다.
γαμέω(가메오)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 가다’의 뜻이지만(마 5:32; 막 6:17; 눅 16:18),
간혹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 가다의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막 10:12).
γαμίζω (가미조)는 ‘시집 보내다’의 뜻으로 아버지가 딸을 시집 보내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노아의 날에 사람들이 홍수 심판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γαμέω), 시집 가고(γαμίζω) 있었다(마 24:38) 고 말씀하였는데, ‘시집 가다’의 의미는 정확히는 ‘시집 보내다’의 뜻이다.
당시 결혼문화는 ‘딸’의 결혼을 주관하시고 성사시키는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혼의 문제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하였다(마 19:3).
마태는 마가복음 자료(막 10:1-12)를 따르면서도 자신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주는 메시지를 위해 어느 정도 편집하였다.
‘모세의 이혼증서’(신 24:1)을 남발하는 당시의 비도덕적 남성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의 분파에서도 이미 논쟁이 있었다.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는 샴마이파는 신명기 24:1에서 이혼사유가 되는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을 성적 방종의 문제에만 적용하였지만, 자유로운 해석의 힐렐파는 아내로서 수치가 되는 일을 더 넓게 적용시켜,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를 쉽게 남발하게 되었다.
‘이혼증서'(ἀποστάσιον, 아포스타시온)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며, 본래는 그렇지 아니함을 말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창조(창 1:27),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창 2:24).
모세의 이혼증서는 왕의 제도(삼상 8:22)처럼 단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 a law of less good (차선의 법)일 뿐이다. 이것마저 남용하는 남자들의 방종에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어떤 이혼의 가능성도 언급하지 않았고,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만을 이혼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읍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여자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죄 많은 여인처럼 취급 당하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뜨거운 정오에 야곱의 샘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나왔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야 하는 필연의 사역(mission of must)으로, 먼저 우물가에서 기다리셨다. 여인은 성적으로 방종한 여인이 아니라, 다섯 남편으로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이혼증서를 받고 버려진 여인이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단지 여인을 성적으로 이용만 하는 동거남일 뿐이다. 여자는 여러 번 이혼당한 불행한 여인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사회는 그녀를 품지 못하고, 오히려 이혼한 사실로만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사회적 불행은 그녀를 영적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갈증으로 가득 차게 했고, 그것을 아시는 주님이 오신 것이다. 모세의 이혼법(차선의 법)보다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최선의 법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놀랍게도 ‘천국을 위한 고자’라는 삶의 방식을 추가한다(마 19:10-12).

이혼증서를 부정하는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 당시 남성들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때 주님은 결혼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비혼주의를 경계하며, ‘타고난/주어진 자’로서의 고자의 존재를 말씀한다. 단순한 비혼이 아니라, 은사로 주어져서 천국을 준비하는 비혼을 말씀하였다(마 19:12). 비혼(아가모스, ἄγαμος, 고전 7:8, 11, 32, 34)에 대한 삶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말한다. 물론 비혼(독신)의 삶은 종말론적 삶에 집중하며 복음전도자의 삶을 사는 자신을 모델로 말하고 있다(고전 7:7). 바울은 결혼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긍정과 이혼의 부정을 알기에, 그 말씀에 충실하면서,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라고 해서 결혼생활을 포기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룩한 땅 성지가 아닌 이방 땅과 이방 문화 속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살기를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 경우, 주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있지 않기에, 버림 받는 이혼이 아니라, 선택한 이혼이 성립될 수 있음을 자신의 의견으로 권고한다. 결혼과 비혼 모두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종말의 때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7:38).

    바울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제하였다. 비혼(ἄγαμος)을 말하며,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는 바울의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여 왔다. 하지만 바울이 나이 30세가 넘기까지 바리새인으로 살았고,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생육 가능한(able-bodied) 몸을 가지고 특별한 이유없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는 것을 유대교는 창조주의 뜻을 순복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기에, 바울이 결혼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율법은 생육하지 못하는 고자를 부정하게 여겨 공동체에서 소외시켰다. 바울은 결혼하였지만, 사도로서의 삶을 위해 졸혼한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한 곳에 살게 하고, 비혼처럼 살았을 지도 모른다. 빌립보 교회의 두 여인을 화해시키도록 바울이 부탁하는 제 3의 여인을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너’라고 하였다(빌 4:3). 이 존재를 흔히 동역자(fellow-worker)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이 여인을 바울의 아내라고 해석하였다. 이 단어의 헬라어 σύζυγος (수주고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결혼한 배우자(wedded pair)를 뜻하는 말이다. 바울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고전 9:5)고 말했을 때, 과거에 바리새인인 바울이나 부유했던 구브로 출신 바나바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의 권리를 포기하고 비혼(ἄγαμος)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더 타당하게 보인다. 

종말과 천국을 기다리는 삶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교회가 신부가 되고, 예복을 입은 손님이 되는 것에 집중하는 선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이런 삶은 태어난, 주어진 자의 삶임을 강조하였다. 창조주의 복이 있는 결혼, 천국을 기다리는 비혼, 어느 것이나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염병(染病)

염병(染病)

נֶגֶף (네게프) / מַגֵּפָה <막게파>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말은 오경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이 용어는 ‘전염병’을 줄인 말로서 우리말 사전에는 세 가지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1.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 / 2. 전염성을 가진 병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 3. 기분이 나쁘거나 못마땅할 때 감탄조로 하는 말(염병할). 오경 이외의 예언서나 성문서에는 “전염병”이란 단어만 나오며 “염병”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단어는 레26:25<데베르>; 민16:46(히17:11<네게프>); 민16:47(히17:12); 민16:48(히17:13); 민16:49(히17:14); 민16:50(히17:15); 민25:9; 민25:18; 민26:1; 민31:16; 신28:21에 모두 11회 언급된다. 한편, “전염병”이라는 단어는 출5:3; 민14:12에 두 차례 등장한다. 오경 이외의 문서들에는 “염병”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전염병”만 41회 나온다. 그 가운데 두 번은 신약성경에(눅21;11; 행24:5)에 들어있다.

출5:3; 민14:13에 “전염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דֶבֶר<데베르>인데, 이것을 레26:25; 신28:21에서는 “염병”이라고 옮겼다. 민수기에는 “염병”이란 단어가 열 차례 나오는데, 그 원어는 히브리어 דֶבֶר<데베르>가 아니라 נֶגֶף <네게프> 또는 그 동종어인 מַגֵּפָה <막게파>이다. 다시 말해, <네게프>나 <막게파>라는 단어는 민수기에 열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개정역 성경은 이를 일제히 “염병”이라고 번역했다(민16:46//히17:11<네게프>, 47//히12<네게프>, 48//히13<막게파>, 49//히14<막게파>, 50//히15<막게파>; 민25:8<막게파>, 9<막게파>, 18<막게파>; 26:1//히25:19<막게파>; 31:16<막게파>). 히브리어 <네게프>와 <막게파>는 ‘때리다/치다’를 의미하는 동사 <나가프>에서 파생한 명사들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치시니 죄인에게 재앙이 닥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네게프>라는 단어를 개정역은 “재앙”이라고 옮겼다(수22:17; 24:5).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죄인을 한 번 내리치시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동사 נָגַף<나가프>는 이러한 의미에 기대어, 죄인을 징벌하시려고 일으킨 전염병을 가리키는 명사 נֶגֶף<네게프>와 מַגֵּפָה<막게파>를 파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원수들을 치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동사 נָגַף<나가프>를 사용해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주님의 손길에 살짝 닿기만 해도 죄인은 큰 재앙을 당한다. 이런 관념을 나타내는 동사가 נָגַע <나가>인데, 이를 기초로 형성된 명사 נֶגַע <네가> 역시 큰 재앙을 가리킨다.

명사 נֶגֶף<네게프>는 성경에 일곱 차례 언급되며(사8:14), 모두 재앙, 곧 하나님께 내리시는 무서운 징벌을 함의한다. 그런가 하면, 명사 מַגֵּפָה<막게파>는 오경에 열 차례 언급되는데, 번역에 차이가 있다. 처음 언급된 출9:14과 두 번째 언급된 민14:37에서는 개정역 성경이 “재앙”이라고 옮겼지만, 민수기 16장 이하에 같은 단어가 여덟 차례 등장할 때는 모두 “염병”이라고 옮겼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의 재앙과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퍼진 염병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어기고 거역한 죄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데, 특히 민수기에서는 그 재앙이 두드러지게 염병으로 나타난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모세에게 반역한 고라와 다단의 무리들이 지진의 재앙으로 죽은 다음에 연달아 이스라엘에 염병이 퍼져서 무려 14,700명이나 죽었다(민16:49). 이스라엘이 브올의 꾐에 빠져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에 빠졌을 때도 24,000명이 죽었다(민25:9).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원리인 말씀을 어기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살다가 당하는 재앙이 염병인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욕심만 채운 결과, 인류는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다양한 천재지변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기후변화가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에 덩달아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것도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화석연료 사용과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고 플라스틱 생산도 멈춰야 한다. 우리의 식탁에 지나치게 자주 오르는 육식을 절제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탐욕에 기반한 생활습관에서 소박한 삶으로 전향해야 한다. 전쟁과 다툼을 중지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죄 많은 인류를 향하여,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모든 문명 생활을 중단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돌림병(데베르, דֱּבֶר  )

중세 말 서양에 흑사병이 돌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도시의 쥐가 옮긴 이 병은 흑사병 또는 페스트pest라는 병으로,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 이런 종류의 병을 전염병epidemic이라 부르는데, 대륙 전체를 휩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을 특별히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른다. 판데믹으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생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성경에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성서 시대에도 전염병이 많이 돌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이 언급하는 일곱 천사가 가진 일곱 재앙들 중에 서너 가지는 판데믹으로 보인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도 판데믹을 언급한다. 야훼께서 모세를 파견하여 히브리인들을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실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이 열 가지 재앙 중 애굽 전역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 판데믹이다(출9:3). 이 재앙을 가리켜 히브리어 본문은 דֱּבֶר (데베르)란 단어를 사용한다.

출9:3의 ‘데베르’는 한글역본들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개역은 “돌림병”, 새번역/공동역은 “병”, 가톨릭역은 “흑사병”이라고 번역했다. 영역본들은 pestilence라고 옮겼고, LXX는 σφόδρα (스포드라), VUL는 pestis라고 옮겼다. 애국 땅 전역에 사는 맏아들들과 가축의 첫 새끼들이 다 죽는 재앙이 맨 마지막에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는 출11:1에서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를 더 내리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것이 דֱּבֶר (데베르)임을 지시하고 있다. 마지막 재앙은 동물에게 한정되지 않고 사람에게까지 덮친 재앙이었다. 동물을 죽인 출9:3의 판데믹이 출11:1에서는 사람에게 확대되어 덮쳤다. 애굽의 모든 맏아들이 죽는 무서운 판데믹이 열 번째 재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해를 건넌 후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주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야훼의 신명 계시와 더불어 주께서는 애굽에 내린 판데믹 전염병을 회고하신다(출15:26). 히브리어로 מַחֲלָה (막할라)란 단어는 출23:25에도 나온다. 이 단어 역시 판데믹을 가리킨다.

전염병을 가리키는 דֱּבֶר (데베르)는 오경에는 출5:3; 9:15; 민14:12; 레26:25; 신38:21에 언급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 가운데(삼하 2413; 25;14) 백성에게 임하는 판데믹이 언급된다. 시편에는 91:3, 6에, 그리고 예언서에는 사14:12; 겔5:12; 호13:14; 암4:10 등에 판데믹이 나타난다.

신명기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 (신4:34)

여기에 시험, 표적, 기사, 전쟁, 강한 손, 펴신 팔, 큰 두려움이라는 일곱 가지 용어가 나열되어 있다.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해 야훼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들을 가리킨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역 가운데 택정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 원수들에게 내리시는 판데믹인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심판 사상을 잘못 이해하면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퍼뜨리시는 분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인류가 당하는 무서운 판데믹 재난을 자칫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하게 된다. 이러한 설교는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을 구원하려는 중보기도의 열정을 차단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죄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설교자 자신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 이처럼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해석은 명백히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화살을 받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멸종시키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력을 증대해 왔다. 특히 근대문명의 산업화가 그러했다. 인류는 탐욕으로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이 예견되고 있는 무서운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자연재해가 계속 닥치고, 인재들이 속출하며, 특히 신종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 공격으로 판데믹이 창궐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세상 죄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교회도 세상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기술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상 죄인들의 대열에서 교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도 그들의 폭력체제에 편승하여 스스로 권세를 구가해오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않았는가? 이 점을 스스로 자성하는 지점에서 교회는 세상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지며 고통을 분담하고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교회의 회개의 과제가 될 것이다.

판데믹은 인간이 잘못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야훼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려고 발생시키신 질병은 아니다. 이 질병 발생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는 말이다. 애굽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을 혹독하게 부리고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잘못으로 발생한 판데믹과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성경은 야훼께서 내리신 심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개에의 부름이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생활했더라면(창1:29; 2:8; 9:4-5; 레11장), 어떠한 판데믹도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출15:26)





















십일조(十一租)


십일조(十一租)

헬라어로 십일조는 아포데카토오우(ἀποδεκατόω)이다.
아포(ἀπο)는 "~로 부터"(from)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데카(δεκα)는 10이다.
그러므로 아포데카토오우의 직역은 "10으로부터 나온", 의역은 "10으로부터 나온 1"이 된다.
신약에서 십일조를 뜻하는 명사는 사용되지 않았다.
아포데카토오우는 동사로서 "십일조를 드리다"는 뜻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주로 바리새파가 드리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십일조 드리는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셨다.
누가복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누가복음 11:42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들이 십일조를 드렸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또한 마치 종교 세금처럼 형식화 되어 있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
십일조의 원래 뜻은 무엇일까?
종교세의 일종이었을까? 

십일조의 원래 의도를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는 십일조의 의미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십일조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해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은 "하나님의 것"과 "복받는 비결"이다.
모두 말라기 3장에 근거하고 있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말라기의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씀이다.
1/10을 바쳐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받는다니 수지 맞는 비결이 아닌가?
그런데, 과연 이 말씀이 십일조 정신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십일조 전통이 희미해지는 이스라엘 역사 후기에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격려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십일조라는 전통을 세우면서 주신 말씀은 아니다. 

십일조는 율법책에서 시작되었다.
신명기 14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신명기가 말하는 십일조의 우선 용처는 성전에 바치는 세금도, 레위인에게 주는 생활비도 아니고, 바친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에게나 레위인에게나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친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기 위함인데,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둔 곳에서" 먹고 마시는데 사용하라 규정한다.
다음 구절을 잘 읽어보자.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22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3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24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당신들은 그것을 2)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십시오.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이런 십일조의 용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상생활에 대비되는 종교생활이라고 일단 정의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소출 중에 내가 일상생활을 누리는데 9/10를 쓰고, 종교생활을 누리는데 그 중 1/10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9/10도, 1/10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용도가 다를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교회를 세워가면 그 유익은 다른 누가 아니라 세워가는 그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다. 

십일조의 두 번째 용도는 공적 자금이다. 가끔 십일조는 레위인 주는 헌금이라는 말을 듣는데, 성경이 하는 말은 아니다. 매년 드리는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을 위해 쓰고, 따로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모아 이 기금을 공적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말이다. 공적 자금의 용처에 레위인의 생활이 들어 있고, 나아가 "떠돌이 고아 과부"를 배불리 먹게하는 일이 들어 있다. 이 점도 신명기 14장에 쓰여 있고 별로 설명도 필요없다. 

28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십일조 전통을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원리"로 차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무엇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수입의 십일조?
어떤 수입의 십일조? 세전?
세후?
생활비의 십일조는 어떤가?
식비의 십일조는 어떤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자신 스스로 대답하며 원칙을 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십일조를 "서로 세워가는 원리"로 사용하지 않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순종(順從)


순종(順從) -  순종(ὑπακοή)에 대하여

기독교의 윤리적 덕목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한다면, ‘순종’(ὑπακοή)이라는 말이다.
‘순종하다’라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후파쿠오(ὑπακούω)이다(마 8:7, 막 1:27, 눅 17:6, 행 6:7, 롬 6:12, 엡 6:1, 빌 2:12, 살후 3:14, 벧전 3:6).

이 단어는 ὑπό와 ἀκούω의 합성동사로서 ‘∽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무엇의 권위 아래에 듣는다"는 것은 자신을 거기에 굴복시키며 드리는 헌신을 포함한 순복(obey)을 의미한다.
순종의 원래적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listen to, hearken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2:13에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문을 두드릴 때에, 계집종 로데가 베드로의 문두드림에 "영접하였다" 라고 할 때에, 단어 ὑπακούω가 쓰였다.

무엇인가의 신호에 듣고 응답하다의 의미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이다.
이 동사의 다음에는 주로 여격 명사들이 오는데, 사람이나, 혹은 복음, 믿음, 가르침,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목적어로 쓰였다.

순종하다의 반대말, ‘불순종하다’의 동사는 ‘듣지 않다’ ‘듣는 것을 거부하다’의 의미로 παρακούω(παρα+ ἀκούω)라고 표현된다.
이 뜻은 "∽ 곁에서, 나란히 듣다"의 의미로, 아래에서 듣는 것과 달리, 받아들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한다, 맞선다는의 뜻이 된다.

불순종(παρακοή)은 아래에 있으며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옆에서 대등하게 맞선다, 듣지 않는다 는 것이다(롬 5:19; 고후 10:6; 히 2:2).

순종하다 라고 번역되는 다른 동사는 후포타쏘(ὑποτάσσω, 눅 2:51; 10:17, 20; 롬 8:20; 엡 5:21)이다.
이 단어 역시 전치사 ὑπό와 동사 τάσσω의 합성동사인데, 직역하면 "∽의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 의 뜻이다.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에게 순종한다(눅 2:51)의는 것은 자발적 순종(voluntary submission)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동시에 강제적인 굴복(compulsive subordination)을 의미하기도 하여서, 70인의 제자는 귀신이 자신들에게 항복한다(ὑποτάσσω)고 예수님께 보고하며 기뻐하였다(눅 10:17, 21).

이 단어는 굴복(롬 8:7), 혹은 복종(롬 10:3, 고전 15:27))의 의미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권위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제적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다(엡 1:22; 5:24; 약 4:7; 벧전 3:22).

동시에 이 단어는 인간의 권위나 제도에 순복하라고 말할 때에도 쓰인다(롬 13:1; 고전 14:34; 골 3:18; 딛 2:5, 9; 3:1; 벧전 2:13, 18; 3:1).

사도행전에서는 순종하다의 의미로 한 특별한 동사를 쓰고 있다.

동사 페이사르케오(πειθαρχέω)는 πείθω와 ἄρχω의 합성동사인 데, 순종하다 혹은 듣다 로 번역하고 있다(행 5:29, 32; 27:21).
πείθω는 ‘설득하다’(persuade)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ἄρχω는 ‘처음이 되다, 우선이 되다’(be first)의 뜻이다.
그래서 이 합성동사의 의미는 "설득하여 우선이 되게 하다"의 뜻이 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공회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협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면서, 종교권력이나 인간의 지위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선포한다.

이들의 담대한 순종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삶이 바뀌었다.

πειθαρχέω의 단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설득되어서 예수를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체험하지 않고서, 무조건 믿고 순종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보고 들어서 고집스럽고 교만한 인생이 설득된 것이다.
예수를 인생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삶의 우선순위로 삼게 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하다(πειθαρχέω)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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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갈릴리 호수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은 "나는 죄인입니다"이다(눅 5:8).
원어로는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ἁμαρτωλός(하마르톨로스)는 sinful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직역은 "나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죄 된 사람입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인데, 이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죄"는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 

"죄" 문제는 종교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동물 제사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렸다.
레위기 4장은 동물제사가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27~30 일반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실수로,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 가운데서 하나를 어겨서, 그 허물로 벌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곧 자신이 지은 죄를 속하려고,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끌고 와서, 그 속죄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에,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곳에서 그 속죄제물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

이 단락은 일반 백성 한 명이 죄를 지었을 경우 암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지침을 보여준다. 이 단락 앞에는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3절), 이스라엘 온 회중이 공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13절), 최고 통치자가 죄를 지었을때(22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침이 담겨 있는데, 이 단락과 별로 다를 것 없다.  

"죄"가 있어야, 제사도 필요하고 제사장도 필요한 것이니, 종교는 대개 "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 교리도 "죄"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래는 이재철 목사가 쓴 <새신자반>의 목차이다. 론 다음에 인간론이 나오고, 기독론이 그 뒤를 잇는 것을 볼 수 있다. 2장 인간론이 주장하는 핵심은 하나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고, 성경의 계시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하고, 예배도 필요하고 교회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논리적 전개는 필요하지 않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흔히 "죄"를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설명한다. 충분한가? 성경이 말하는 "죄"를 이 문장은 포괄하고 있는가? 

성경은 "죄"에 대하여 더 풍부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범위를 살짝 좁혀 보자.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범죄"라고 한다. 성경에 이런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ex. 막 14:41-2), 이 글의 논의에서는 빼기로 하자. 범죄는 성경이 설명하는 죄이기 이전에 세상의 법률로 규정된 죄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범죄를 빼고나면,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죄인"의 용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특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죄"라고 여겼고, "그런 사람을 죄인"이라 여겼다. 

1.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상태를 "죄"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디모데전서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고백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유대교가 제시하는 율법 준수나 성전 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죄인이라 불렸다.  

누가복음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누가복음 18: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 9:1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3.초대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신앙적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불렀다.  

야고보서 4: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서 5:20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4.이방사람들, 곧 이스라엘 선민의식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여겼다. 

갈라디아서 2: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죄"와 "죄인"은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와 사람을 이르는 언어였다. "기준"이라는 것은 늘 "바운더리"로 작용한다. "죄"와 "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작용하였다기 보다는 사회적 바운더리로도 작용한 언어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2번의 죄 개념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맞닥뜨린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2번의 죄 개념을 통하여 형성된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 기준에 의해 밀려나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하기 위해 애쓰셨다. 예수님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고 자신들은 의로운 체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고 맞서 싸우기까지 하셨는데, 그 결과 죽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의미는,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이런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에서 나온 고백이다.  

반면 바울 사도는 4번의 죄 개념에 맞서 싸우셨다.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죄" 개념과 그것이 쌓아 올린 강고한 벽에 맞서 싸웠고, 그런 도전 중에 칭의론도 나오게 된 것이다. ]

성경의 죄 문제는 1번 개념이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이때 "죄인"은 인간의 한계성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종교적 권력과 규범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2번, 3번, 4번 죄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이런 죄 개념들이 "바운더리 마커"(boundary marker)로 작용하면서 죄는 약자들에 뒤집어 씌워지는 굴레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다 죽임 당하셨고, 바울 사도는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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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갚아주다)

헬라어 동사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신약성경에 48번이나 사용된 동사로서 전치사 ἀπό 와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결합된 복합동사로서, 성경에 많이 사용된 동사 δίδωμι(디도미, give)의 뜻을 다양한 의미로서 파생한다.

첫째 의미는 ‘주다’(give)의 의미를 강화하여 ‘내어주다’(give over)의 뜻으로 공회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였다(마 27:58). 또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되돌려주다’(give back)의 뜻을 가지고(눅 4:20; 9:42), 돈이나 빚을 되갚거나 보상하다(pay back)의 의미로도 확장되었다(마 18:25; 20:8).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상호교환의 의미가 있어서 물건을 사고 팔다(sell, 행 5:8; 7:9), 팔아 넘기다(히 12:16)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둘째 의미는 보상과 댓가로 갚아주다의 뜻이다(롬 2:6; 12:17; 계 22:12)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자신에게 의의 월계관이 주어질 것이다고 하였고(딤후 4:8), 예수님은 은밀히 구제하거나, 은밀히 기도하거나, 은밀히 금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 했다(마 6:4, 6, 18). 이 단어는 관념적으로 확장되어 ‘열매를 맺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계 22:2).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추상적으로 이런 의미로 확장된 것은 믿음의 싸움이나 경주 후에 받게 되는 보상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선물’ 곧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보상과 열매를 바라는 헌신과 희생의 응답을 말하고 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상과 영광이 주어지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심판이 있게 된다(계 2:6; 딤후 4;14; 마 16:27).

마지막으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더욱 관념화된 뜻을 가지고 있는 데, 부부의 의무를 다하다(고전 7:3), 부모에게 효도를 실천하다(fulfill, 딤전 5:4)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 맹세한 것을 지키다(keep)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마 5:33). 이러한 윤리적 차원의 단어사용은 맹세의 의무, 부부의 의무, 자녀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헬레니스트적 유대교라는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의 종교적 일상적 측면을 이 단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다’라는 뜻의 동사 δίδωμι(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416번). 빌립보서, 빌레몬서, 유다서를 제외하고 δίδωμι(디도미)는 모든 신약성경 책들에 나타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이다(목숨을 대속물로 주심, 막 10:45). 하나님이 인생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수많은 선물들이 있다. 이 단어의 주어로 사용된 ‘주신 자’(giver)가 하나님이신 것이 104개의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실천과 응답을 주어로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행 4:33), 자신이 행한 일을 셈하다(눅 16:2), 보고하다(마 12:36; 행 19:40; 히 13:17)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혜에 대하여 성도는 각자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말한 말과 행한 행위에 대하여 보고하고 변명하고 셈을 받아야 한다. 결국 성도의 삶은 두 단어에서 요약된다. 하나님의 선물을 강조하는 δίδωμι(디도미),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싸우고 있는 성도의 싸움과 달리는 영적 경주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열매로서의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의 삶이 성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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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ἔρως,  φῐλία,  ἀγάπη

사랑에 대한 그리스어가 셋이라고 한다.
에로스(ἔρως),
필리아(φῐλία),
아가페(ἀγάπη)가 그것이다.

사랑이라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단어가 이 셋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셋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각각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이 각각의 단어에 독특한 의미를 담아 사용하기 이전에 (또 이후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 단어들의 명사나 동사를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에도 이 세 단어 사이에는 두리뭉실한 구분이 있었다.
굳이 구분하여 말하자면,
아가페는 가장 넓고 얕은 사랑을,
에로스는 배타적이고(좁고) 진한 사랑을,
필리아는 그 중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다.
우리는 구호 단체를 통하여 얼굴 한번도 본적 없는 가난한 나라 아이에게 후원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행위가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런데 우리가 후원받는 아이를 방문하여 사귐을 갖고, 이제 그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면 아가페는 필리아로 발전된다.
우정이다.

그리고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 아이와 배타적인 사랑에 빠진다면 그 사랑은 에로스가 된다. 

이렇게 사용되던 세 단어에 누군가가 독특한 그 단어 만의 의미를 불어 넣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 셋 중 둘을 설명한다.  


아테네 출신 철학자들을 모은 이 한 장의 그림 한 가운데에 두 사람의 대표 철학자가 서 있다.
왼쪽에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가 이 책과 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랑은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육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에 대한 짧고 적절한 해석은 love of beauty 즉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여체가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순간이라 절대적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다고.
그 다음은 신의, 충성, 용맹과 같은 덕(virtue)이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고.
그리고나서 플라톤은, 절대적 아름다움은 결국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플라톤의 손가락은 에로스를 표현한 것이다.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가진 초월적 신이야 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주인이니,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신을 바라고 갈망하고 닮아가야 한다는 뜻을 손가락의 방향이 닮고 있다.
에로스는 이렇게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플라톤 옆에서 <윤리학(Ἠθικὰ)> Ἠθικὰ이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정면을 수평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책과 손은 필리아를 표현하고 있다.
필리아는 우정, 우애, 친애로 번역할 수 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무신론적이다.
그의 사랑의 범위가 초월을 향해 넓혀지지 않고 피조물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필리아는 친구 사이의 사랑이다.
이 때 친구는 인간 세계의 상하 기준으로 볼 때 동등하지 않은 관계일 수 있지만, 초월과 내재라는 이분법 틀로 볼 때는 모두 내재에 속한 존재들이기에 동등하다.

필리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이렇게 간단할리 없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로 적는다.
필리아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던 에로스와 필리아에 독특한 철학적 의미를 각각 담았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아가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신의 보편적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는 예수 이전 사람들에게 아주 낯선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철학자도 아가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이제는 흔해 빠진 크리세이(cliché) 가 되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생각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신이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인간이 신을 사랑해야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아가페에 담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을리 없다고, 그런 신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손에 무기력하게 죽은 십자가 사건과 그의 부활 사건은 다름아닌 아가페 사랑에 대한 증거라고.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실로 놀랍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아가페(ἀγάπη)

복음의 핵심에는 아가페(ἀγάπη)가 놓여 있다.
아가페를 사랑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에로스와 필리아도 사랑으로 번역된다.
각각의 사랑은 각각의 독특함을 가진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아래 다섯이 아가페의 특징이다.

1. 위로부터(from above)

요한일서 4: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아가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다.
받은 것 없이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복음이 아가페이고, 그 하늘 은혜가 아가페이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이 은혜가 내게 와 닿을 때 아가페를 만난 감격을 체험한다.

2. 댓가 바라지 않음(sacrificial)

요한복음 12:23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아가페가 증거되었다.
이 희생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희생이지만 곧 의미있는 희생이지만, 그렇다고 댓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바라는 것은 죽어 많은 열매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3. 조건 없음(unconditional)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복음을 설명하는 이 구절에서 사랑을 받은 대상이 "연약하고" "경건치 못하고" "죄인인" 사람이다. 강함과 경건과 의로움이 아가페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4. 받는 사람을 변화시킴(transformative)

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아가페의 능력이다.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변화된다.
변화에 대한 소망을 아가페의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5. 차고 넘침(pleroma)

충만으로 흔히 번역되는 플레로마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장면은 오병이어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가복음 6: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차고 넘쳤다] 


열두광주리에 차고 넘친 것과 같이 아가페이신 하나님의 본성은 차고 넘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충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향하여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아가페는 동적이고 운동한다.
받은 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하여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가페한다.

베드로전서 1: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위로부터"오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조건없이" 주어지고 "받는 사람을 변화시키면서" 계속 운동하여 "차고 넘치는" 사랑. 그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성이다.

에로스(ἔρως)

에로스(ἔρως)는 신약성서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명사형 에로스도 나타나지 않고 동사형 에라오(ἐράω)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군이 초대교회의 저자들인 Philo, Justin, Josephus, 속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의 작품에는 나타나는데 비해, 성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명사형 에로스만 74번 사용하였고, 필로는 에로스를 91번 사용한 것을 감안한다면, 성경이 에로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현상이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일점일획말씀묵상"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다행히 구약 칠십인역에 에로스의 동사형 에라오가 나타나는 곳이 있어, 이를 핑계로 에로스에 대한 묵상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잠언 4장 6절 말씀(LXX)이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고 권면할 때, "사랑하라"에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에스더 2장 17절은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 ."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성경 전체에 에로스-에라오가 사용된 예는 이 둘이다.

지금부터 쓸 에로스에 대한 글은 위의 두 구절에 대한 묵상글이 아니다.
두 구절을 핑계 삼아 "에로스"(동사형 에라오)에 대해 쓸 것이다.
성경에 빈번히 나오지 않는다 하여도, 에로스의 특별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묵상글을 쓴다.
에로스를 이해해야 아가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에로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먼저 에로스에는 세 차원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다. 

제일 먼저 기억할 용법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로서의 에로스이다.
특별한 의미없이 그냥 일상 언어 속의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에 관한 단어들, 말하자면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동사형 아가파오 에라오 필레오)는 일상 대화에서는 별로 뜻 구별없이 사용되어 "좋아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었다. 예를 들어 위에 인용한 두 구절

 잠언 4장 6절,
ἐράσθητι αὐτῆς(에라스쎄티 아우테스)

에스더 2장 16절 
ἠράσθη ὁ βασιλεὺς Εσθηρ(에라스쎄 호 바실레우스 에스쎄르)

에라오에는 아래에서 논할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 쓰인 에라오 대신 아가파오(ἀγαπάω)나 필레오(φιλέω)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상의 차이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일상의 언어로 사용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2세기 안디옥의 bishop이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순교당할 예정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길에 여러 통이 편지를 썼다.
그 중 하나의 수신자는 로마의 교인들이었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행여라도 자신의 순교를 막으려고 노력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편지가 담고 있었다.
순교야 말로 주님과 연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확신에서 온 당부였다.
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Ign. Rom. 7:2

ζῶν  ⸀γὰρ γράφω ὑμῖν, ἐρῶν τοῦ ἀποθανεῖν

조엔 가르 그라포 휘민, 에론 투 아포싸네인

번역하면, "비록 내가 아직 산 채로 여러분에게 편지하지만, 나는 정말 죽기를 사모한다." 이다.
이때 죽음은 물론 순교를 뜻한다.
성경 밖의 많은 에로스 용례 중에 이 구절을 예로 든 이유는, 순교처럼 거룩한 내용을 말할 때도 아가파오가 아니라 에라오를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전혀 에로스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용에도 에로스는 사용되었다.
일상의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의 언어로 뜻 차이 별로 없이 사용되던 "에로스-필리아-아가페"에 독특한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담기게 되었다.
아래에 필리아와 아가페에 대해 이미 쓴 글을 링크해 두었고, 이 글에서는 에로스의 철학적-신학적 의미를 다룰 것이다.

에로스의 두 번째 의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부정적 의미들이다.

여체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육체에 대한 사랑, 성적인(sexual) 사랑, 물질에 대한 사랑 등, 에로스는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의미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육욕의 에로스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향연>(심포지움)에서 이런 에로스에 대해 말하였고, 이런 에로스에 "통속적인"(πάν-δημος 판데모스)이라는 딱지를 붙인 바 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이데아를 향하여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것인데, 사다리 가장 아랫단을 차지하는 에로스가 통속적 에로스이다.
이 에로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나 아가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플라톤이 "천상적"(οὐράνιος 우라니오스) 에로스라고 이름 붙인 에로스이다.
일단, 에로스에 천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사실,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는 "천상적"이다.
그래서 단순히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적 에로스는 아가페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지금도 기독교 신앙 속에서 아가페와 경쟁 대립하고 있다. 

아래에서 에로스의 천상적 의미를 셋으로 나누어 짧게 설명하겠다.
아래의 정리는 안더스 니그렌이 쓴 <아가페와 에로스>(크리스챤다이제스트. 163쪽 이하)를 참고한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플라톤의 에로스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순수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이데아의 세계에 대비되는 이 세상은 이데아 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요 형상(images)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절대적 미美와 절대적 선善을 추구하는데, 처음에는 이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지만,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차차 궁극의 미와 선, 곧 이데아 세계의 미와 선을 추구하게 된다.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앞서 말한 "통속적 에로스"라면, 이데아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 이데아를 향한 상향의 움직임이 "천상의 에로스"이다.
플라톤의 에로스를 말할 때 보통은 이 "천상의 에로스"를 말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을 갈망하고, 알고, 닮고, 신과 하나되기 위한 일체의 상향 움직임이 에로스라 할 수 있다. 

에로스를 통하여 위를 향하는 이유는 미와 선을 획득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신을 향한 움직임이 고상해 들릴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또 이 점에서 에로스는 "자기중심적"이다.
신을 향해 나가는 움직임이 경건하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실은 자기중심적 욕구의 철학적-종교적 표현일 뿐이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희생적 타자중심적 성격은 에로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에로스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플로티노스에게 에로스는 핵심적 사상이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에 더한 것은 하향 개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 세계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감각 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향하는 일방향(상향)의 이데아론을 펼쳤다면, 플로티노스는 이데아로 올라가기 원하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데, 세상으로 유출(emanation) 되었기 때문에 위로 돌아가기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영혼의 신적 기원에 대해, 그리고 영혼의 하향-상향 움직임(Journey of the soul)을 주장한 것이다.
단순히 미와 선을 추구하여 상향하는 플라톤의 도식과 달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향해야 한다는 플로티노스의 도식은 상향 운동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에로스가 종교로 발전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밀의종교(Mystery religion)의 에로스

밀의종교를 세 번째로 말한다고 해서 에로스에 대한 사상의 전개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밀의종교 순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밀의종교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는 함께 발전하며 상호 영향을 끼쳤다. 

모든 밀의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이다. 물질세계와 육체에 갇힌 영혼의 구원, 곧 영혼의 상향, 곧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 목적을 위하여 밀의종교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교리와 제의를 발전시켰다.
디오니소스(Dionysus), 오피즘(Orphism), 아티스(Attis) 등이 그 예이다.
영혼의 상향을 위하여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밀의(密儀)"이다.   

간략히 첨가하자면, 영지주의 종교도 여기에 속한다.
영지주의를 밀의종교의 기독교 버전이라고 설명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밀의에 대해서 빌립복음서(Gospel of Philip)가 가장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다섯 종류의 거룩한 예식이 있는데, 그 마지막은 성찬식이 아니다.
성찬식은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서 뒤집어 써야 하는 망토(cloak)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예식은 밀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역시 쓰여있지 않다.
다만, 영혼이 육에서 해방되어 하늘을 향하여 떠나기 위해 그 밀의의식을 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플라톤주의가 설명하고 밀의종교가 추구하는 영혼의 상향(구원)이 바로 에로스이다.
상향의 전제는 영혼이 먼저 하향하였다는 것인데, 어떤 신화에서도 이 하향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
하향한 영혼이 갇히게 된 육체와 물질계는 탈출하여야 할 감옥이나 무덤 같은 곳이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는 소마세마(σῶμα-σημα) 사상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육체와 물질세계를 낮게 보거나 악하게 본다는 점이 신플라톤주의와 밀의종교 에로스의 특징이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에로스는

1. 상향운동
2. 획득적

3. 자기중심적
4. 육체와 물질세계 부정
5. 영혼만 중시한 영혼구원 교리

에로스는 아가페와 양립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정반대의 성격을 보인다. 

기독교는 에로스 종교인가 아가페 종교인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성당과 교회 건축 양식으로 경건을 표현해 온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 에로스 종교의 모양이 보인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찬송하며, 오직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양태에는 에로스 종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 교회의 존재 방식은 에로스가 아니라 오직 아가페이어야 한다.


아가페(ἀγάπη)와 필리아(φιλία)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신다.
한글로 읽으면 이 세 질문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세 번의 질문 중 앞에 두 번의 질문은 아가페(ἀγάπη)의 동사형인 아가파오를 사용하여 ἀγαπᾷς με(아가파스 메)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은 필리아(φιλία)의 동사인 필레오를 사용하여 φιλεῖς με(필레이스 메)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런 변화가 있었던 반면, 베드로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모두 필리아 동사를 사용하여 φιλῶ σε(필로 세)라고 대답하였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필레오 하느냐?
예,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묻게 된다.
아가페와 필리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용한 언어인 아가페 대신 필리아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필리아부터 이야기해 보자.
필리아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떠올리지만, 플라톤도 필리아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뤼시스라는 책에 필리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이 담겨 있는데, 필리아가 동성 간에 끌리는 호감이라고 했을 때 그 호감의 바탕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정리했다.  

유용성에 기초한 필리아, 즐거움에 기초한 필리아, 훌륭함에 기초한 필리아가 그것이다.
친구 관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상대방이 나에게 유용하든지, 내게 즐거움을 주든지, 아니면 내가 감동할만큼 훌륭할 때 우정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가페와 비교하여, 한가지만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가페의 첫째 정의는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사랑이다.
상대의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필리아는 조건적인 사랑이다.
상대가 가진 무언가에 끌려서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달리 말하면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의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필리아는 상호성이 작동하는 쌍방적인 사랑이다.
주고 받는 것이 똑같은 질과 양은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는 기초 위에 작동하는 사랑이 필리아이다. 

이 기본적 정의(definition)를 전제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고 명하신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가페이시다.
요한일서 4장 8절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가페로 충만하셔서 아가페를 특징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아가페는 운동성이 있다.
아가페가 정적일 수는 없다.
이 운동성을 충만이라고 한다.
아가페의 충만에서 나온 것이 이 세상의 창조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18). 
그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아가페 계명이다. 

그런데 베드로 입장에서는 아가페는 불가능하다.
아가페가 가장 수준 높은 사랑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면도 있지만,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가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사람인데, 이미 예수님에게 아가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는 사랑" "일방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시점부터 그 어떤 사랑을 예수님에게 주더라도, 그 사랑은 필리아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페하라" 하셨지만, 베드로가 끝내 "필리아 합니다" 한 것의 함의는, "주님, 이미 내가 받은 사랑이 큽니다"이다.
"주님, 내가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갚음이니 아가페가 아니라 필리아일 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이런 것 아닐까? 

베드로의 이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명령을 주셨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네 말처럼 네가 이미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갚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대상을 향하여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는 있으니 그렇게 하여라."  

"네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가페를 주신 예수님께서, 아가페를 받은 베드로에게, "네가 받은 것을 네 형제 자매에게 흘려주라" 요구하신 것이다.

1. 예수님처럼 일방적으로 줄 수 있으면 아가페가 되는데,
베드로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필리아로 대답하였다.

2. 예수님에게 받은 것을 예수님에게 돌려주는 쌍방성은 필리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이 주신 아가페를 다시 돌려달라 하지 않으셨다.
아가페는 다시 돌려 받는 것이 아니다.

3. 대신 예수님 자신에게 돌려주는 대신 형제 자매들에게 돌려주라 하셨다.

1번은 아가페, 2번은 필리아라면 3번은 무엇인가? 
내가 받은 사랑을 타자에게 흘려보내는 사랑 말이다.
베드로 입장에서, 베드로가 양들을 돌보며 줄 사랑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에게 먼저 받은 것을 주는 것이니 베드로가 할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주신 분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니 필리아도 아니다.
여기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사랑에 관한 전통적 철학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체인을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네가 받은 사랑으로 네 양을 먹이라".
목회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