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十一租)


십일조(十一租)

헬라어로 십일조는 아포데카토오우(ἀποδεκατόω)이다.
아포(ἀπο)는 "~로 부터"(from)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데카(δεκα)는 10이다.
그러므로 아포데카토오우의 직역은 "10으로부터 나온", 의역은 "10으로부터 나온 1"이 된다.
신약에서 십일조를 뜻하는 명사는 사용되지 않았다.
아포데카토오우는 동사로서 "십일조를 드리다"는 뜻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주로 바리새파가 드리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십일조 드리는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셨다.
누가복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누가복음 11:42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들이 십일조를 드렸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또한 마치 종교 세금처럼 형식화 되어 있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
십일조의 원래 뜻은 무엇일까?
종교세의 일종이었을까? 

십일조의 원래 의도를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는 십일조의 의미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십일조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해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은 "하나님의 것"과 "복받는 비결"이다.
모두 말라기 3장에 근거하고 있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말라기의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씀이다.
1/10을 바쳐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복"을 받는다니 수지 맞는 비결이 아닌가?
그런데, 과연 이 말씀이 십일조 정신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십일조 전통이 희미해지는 이스라엘 역사 후기에 십일조를 독려하기 위한 격려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십일조라는 전통을 세우면서 주신 말씀은 아니다. 

십일조는 율법책에서 시작되었다.
신명기 14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신명기가 말하는 십일조의 우선 용처는 성전에 바치는 세금도, 레위인에게 주는 생활비도 아니고, 바친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에게나 레위인에게나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친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기 위함인데,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둔 곳에서" 먹고 마시는데 사용하라 규정한다.
다음 구절을 잘 읽어보자.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22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3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24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당신들은 그것을 2)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십시오.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이런 십일조의 용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상생활에 대비되는 종교생활이라고 일단 정의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소출 중에 내가 일상생활을 누리는데 9/10를 쓰고, 종교생활을 누리는데 그 중 1/10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9/10도, 1/10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용도가 다를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교회를 세워가면 그 유익은 다른 누가 아니라 세워가는 그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다. 

십일조의 두 번째 용도는 공적 자금이다. 가끔 십일조는 레위인 주는 헌금이라는 말을 듣는데, 성경이 하는 말은 아니다. 매년 드리는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을 위해 쓰고, 따로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모아 이 기금을 공적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말이다. 공적 자금의 용처에 레위인의 생활이 들어 있고, 나아가 "떠돌이 고아 과부"를 배불리 먹게하는 일이 들어 있다. 이 점도 신명기 14장에 쓰여 있고 별로 설명도 필요없다. 

28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십일조 전통을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원리"로 차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무엇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수입의 십일조?
어떤 수입의 십일조? 세전?
세후?
생활비의 십일조는 어떤가?
식비의 십일조는 어떤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자신 스스로 대답하며 원칙을 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십일조를 "서로 세워가는 원리"로 사용하지 않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순종(順從)


순종(順從) -  순종(ὑπακοή)에 대하여

기독교의 윤리적 덕목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한다면, ‘순종’(ὑπακοή)이라는 말이다.
‘순종하다’라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후파쿠오(ὑπακούω)이다(마 8:7, 막 1:27, 눅 17:6, 행 6:7, 롬 6:12, 엡 6:1, 빌 2:12, 살후 3:14, 벧전 3:6).

이 단어는 ὑπό와 ἀκούω의 합성동사로서 ‘∽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무엇의 권위 아래에 듣는다"는 것은 자신을 거기에 굴복시키며 드리는 헌신을 포함한 순복(obey)을 의미한다.
순종의 원래적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listen to, hearken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2:13에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문을 두드릴 때에, 계집종 로데가 베드로의 문두드림에 "영접하였다" 라고 할 때에, 단어 ὑπακούω가 쓰였다.

무엇인가의 신호에 듣고 응답하다의 의미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이다.
이 동사의 다음에는 주로 여격 명사들이 오는데, 사람이나, 혹은 복음, 믿음, 가르침,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목적어로 쓰였다.

순종하다의 반대말, ‘불순종하다’의 동사는 ‘듣지 않다’ ‘듣는 것을 거부하다’의 의미로 παρακούω(παρα+ ἀκούω)라고 표현된다.
이 뜻은 "∽ 곁에서, 나란히 듣다"의 의미로, 아래에서 듣는 것과 달리, 받아들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한다, 맞선다는의 뜻이 된다.

불순종(παρακοή)은 아래에 있으며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옆에서 대등하게 맞선다, 듣지 않는다 는 것이다(롬 5:19; 고후 10:6; 히 2:2).

순종하다 라고 번역되는 다른 동사는 후포타쏘(ὑποτάσσω, 눅 2:51; 10:17, 20; 롬 8:20; 엡 5:21)이다.
이 단어 역시 전치사 ὑπό와 동사 τάσσω의 합성동사인데, 직역하면 "∽의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 의 뜻이다.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에게 순종한다(눅 2:51)의는 것은 자발적 순종(voluntary submission)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동시에 강제적인 굴복(compulsive subordination)을 의미하기도 하여서, 70인의 제자는 귀신이 자신들에게 항복한다(ὑποτάσσω)고 예수님께 보고하며 기뻐하였다(눅 10:17, 21).

이 단어는 굴복(롬 8:7), 혹은 복종(롬 10:3, 고전 15:27))의 의미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권위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제적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다(엡 1:22; 5:24; 약 4:7; 벧전 3:22).

동시에 이 단어는 인간의 권위나 제도에 순복하라고 말할 때에도 쓰인다(롬 13:1; 고전 14:34; 골 3:18; 딛 2:5, 9; 3:1; 벧전 2:13, 18; 3:1).

사도행전에서는 순종하다의 의미로 한 특별한 동사를 쓰고 있다.

동사 페이사르케오(πειθαρχέω)는 πείθω와 ἄρχω의 합성동사인 데, 순종하다 혹은 듣다 로 번역하고 있다(행 5:29, 32; 27:21).
πείθω는 ‘설득하다’(persuade)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ἄρχω는 ‘처음이 되다, 우선이 되다’(be first)의 뜻이다.
그래서 이 합성동사의 의미는 "설득하여 우선이 되게 하다"의 뜻이 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공회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협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면서, 종교권력이나 인간의 지위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선포한다.

이들의 담대한 순종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삶이 바뀌었다.

πειθαρχέω의 단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설득되어서 예수를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체험하지 않고서, 무조건 믿고 순종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보고 들어서 고집스럽고 교만한 인생이 설득된 것이다.
예수를 인생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삶의 우선순위로 삼게 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하다(πειθαρχέω)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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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갈릴리 호수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은 "나는 죄인입니다"이다(눅 5:8).
원어로는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ἁμαρτωλός(하마르톨로스)는 sinful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직역은 "나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죄 된 사람입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인데, 이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죄"는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 

"죄" 문제는 종교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동물 제사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렸다.
레위기 4장은 동물제사가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27~30 일반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실수로,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 가운데서 하나를 어겨서, 그 허물로 벌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곧 자신이 지은 죄를 속하려고,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끌고 와서, 그 속죄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에,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곳에서 그 속죄제물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

이 단락은 일반 백성 한 명이 죄를 지었을 경우 암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지침을 보여준다. 이 단락 앞에는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3절), 이스라엘 온 회중이 공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13절), 최고 통치자가 죄를 지었을때(22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침이 담겨 있는데, 이 단락과 별로 다를 것 없다.  

"죄"가 있어야, 제사도 필요하고 제사장도 필요한 것이니, 종교는 대개 "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 교리도 "죄"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래는 이재철 목사가 쓴 <새신자반>의 목차이다. 론 다음에 인간론이 나오고, 기독론이 그 뒤를 잇는 것을 볼 수 있다. 2장 인간론이 주장하는 핵심은 하나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고, 성경의 계시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하고, 예배도 필요하고 교회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논리적 전개는 필요하지 않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흔히 "죄"를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설명한다. 충분한가? 성경이 말하는 "죄"를 이 문장은 포괄하고 있는가? 

성경은 "죄"에 대하여 더 풍부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범위를 살짝 좁혀 보자.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범죄"라고 한다. 성경에 이런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ex. 막 14:41-2), 이 글의 논의에서는 빼기로 하자. 범죄는 성경이 설명하는 죄이기 이전에 세상의 법률로 규정된 죄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범죄를 빼고나면,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죄인"의 용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특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죄"라고 여겼고, "그런 사람을 죄인"이라 여겼다. 

1.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상태를 "죄"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디모데전서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고백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유대교가 제시하는 율법 준수나 성전 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죄인이라 불렸다.  

누가복음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누가복음 18: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 9:1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3.초대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신앙적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불렀다.  

야고보서 4: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서 5:20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4.이방사람들, 곧 이스라엘 선민의식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여겼다. 

갈라디아서 2: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죄"와 "죄인"은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와 사람을 이르는 언어였다. "기준"이라는 것은 늘 "바운더리"로 작용한다. "죄"와 "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작용하였다기 보다는 사회적 바운더리로도 작용한 언어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2번의 죄 개념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맞닥뜨린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2번의 죄 개념을 통하여 형성된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 기준에 의해 밀려나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하기 위해 애쓰셨다. 예수님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고 자신들은 의로운 체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고 맞서 싸우기까지 하셨는데, 그 결과 죽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의미는,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이런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에서 나온 고백이다.  

반면 바울 사도는 4번의 죄 개념에 맞서 싸우셨다.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죄" 개념과 그것이 쌓아 올린 강고한 벽에 맞서 싸웠고, 그런 도전 중에 칭의론도 나오게 된 것이다. ]

성경의 죄 문제는 1번 개념이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이때 "죄인"은 인간의 한계성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종교적 권력과 규범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2번, 3번, 4번 죄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이런 죄 개념들이 "바운더리 마커"(boundary marker)로 작용하면서 죄는 약자들에 뒤집어 씌워지는 굴레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다 죽임 당하셨고, 바울 사도는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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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갚아주다)

헬라어 동사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신약성경에 48번이나 사용된 동사로서 전치사 ἀπό 와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결합된 복합동사로서, 성경에 많이 사용된 동사 δίδωμι(디도미, give)의 뜻을 다양한 의미로서 파생한다.

첫째 의미는 ‘주다’(give)의 의미를 강화하여 ‘내어주다’(give over)의 뜻으로 공회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였다(마 27:58). 또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되돌려주다’(give back)의 뜻을 가지고(눅 4:20; 9:42), 돈이나 빚을 되갚거나 보상하다(pay back)의 의미로도 확장되었다(마 18:25; 20:8).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상호교환의 의미가 있어서 물건을 사고 팔다(sell, 행 5:8; 7:9), 팔아 넘기다(히 12:16)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둘째 의미는 보상과 댓가로 갚아주다의 뜻이다(롬 2:6; 12:17; 계 22:12)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자신에게 의의 월계관이 주어질 것이다고 하였고(딤후 4:8), 예수님은 은밀히 구제하거나, 은밀히 기도하거나, 은밀히 금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 했다(마 6:4, 6, 18). 이 단어는 관념적으로 확장되어 ‘열매를 맺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계 22:2).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추상적으로 이런 의미로 확장된 것은 믿음의 싸움이나 경주 후에 받게 되는 보상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선물’ 곧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보상과 열매를 바라는 헌신과 희생의 응답을 말하고 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상과 영광이 주어지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심판이 있게 된다(계 2:6; 딤후 4;14; 마 16:27).

마지막으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더욱 관념화된 뜻을 가지고 있는 데, 부부의 의무를 다하다(고전 7:3), 부모에게 효도를 실천하다(fulfill, 딤전 5:4)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 맹세한 것을 지키다(keep)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마 5:33). 이러한 윤리적 차원의 단어사용은 맹세의 의무, 부부의 의무, 자녀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헬레니스트적 유대교라는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의 종교적 일상적 측면을 이 단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다’라는 뜻의 동사 δίδωμι(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416번). 빌립보서, 빌레몬서, 유다서를 제외하고 δίδωμι(디도미)는 모든 신약성경 책들에 나타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이다(목숨을 대속물로 주심, 막 10:45). 하나님이 인생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수많은 선물들이 있다. 이 단어의 주어로 사용된 ‘주신 자’(giver)가 하나님이신 것이 104개의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실천과 응답을 주어로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행 4:33), 자신이 행한 일을 셈하다(눅 16:2), 보고하다(마 12:36; 행 19:40; 히 13:17)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혜에 대하여 성도는 각자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말한 말과 행한 행위에 대하여 보고하고 변명하고 셈을 받아야 한다. 결국 성도의 삶은 두 단어에서 요약된다. 하나님의 선물을 강조하는 δίδωμι(디도미),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싸우고 있는 성도의 싸움과 달리는 영적 경주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열매로서의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의 삶이 성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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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ἔρως,  φῐλία,  ἀγάπη

사랑에 대한 그리스어가 셋이라고 한다.
에로스(ἔρως),
필리아(φῐλία),
아가페(ἀγάπη)가 그것이다.

사랑이라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단어가 이 셋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셋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각각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이 각각의 단어에 독특한 의미를 담아 사용하기 이전에 (또 이후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 단어들의 명사나 동사를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에도 이 세 단어 사이에는 두리뭉실한 구분이 있었다.
굳이 구분하여 말하자면,
아가페는 가장 넓고 얕은 사랑을,
에로스는 배타적이고(좁고) 진한 사랑을,
필리아는 그 중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다.
우리는 구호 단체를 통하여 얼굴 한번도 본적 없는 가난한 나라 아이에게 후원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행위가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런데 우리가 후원받는 아이를 방문하여 사귐을 갖고, 이제 그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면 아가페는 필리아로 발전된다.
우정이다.

그리고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 아이와 배타적인 사랑에 빠진다면 그 사랑은 에로스가 된다. 

이렇게 사용되던 세 단어에 누군가가 독특한 그 단어 만의 의미를 불어 넣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 셋 중 둘을 설명한다.  


아테네 출신 철학자들을 모은 이 한 장의 그림 한 가운데에 두 사람의 대표 철학자가 서 있다.
왼쪽에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가 이 책과 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랑은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육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에 대한 짧고 적절한 해석은 love of beauty 즉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여체가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순간이라 절대적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다고.
그 다음은 신의, 충성, 용맹과 같은 덕(virtue)이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고.
그리고나서 플라톤은, 절대적 아름다움은 결국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플라톤의 손가락은 에로스를 표현한 것이다.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가진 초월적 신이야 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주인이니,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신을 바라고 갈망하고 닮아가야 한다는 뜻을 손가락의 방향이 닮고 있다.
에로스는 이렇게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플라톤 옆에서 <윤리학(Ἠθικὰ)> Ἠθικὰ이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정면을 수평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책과 손은 필리아를 표현하고 있다.
필리아는 우정, 우애, 친애로 번역할 수 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무신론적이다.
그의 사랑의 범위가 초월을 향해 넓혀지지 않고 피조물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필리아는 친구 사이의 사랑이다.
이 때 친구는 인간 세계의 상하 기준으로 볼 때 동등하지 않은 관계일 수 있지만, 초월과 내재라는 이분법 틀로 볼 때는 모두 내재에 속한 존재들이기에 동등하다.

필리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이렇게 간단할리 없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로 적는다.
필리아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던 에로스와 필리아에 독특한 철학적 의미를 각각 담았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아가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신의 보편적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는 예수 이전 사람들에게 아주 낯선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철학자도 아가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이제는 흔해 빠진 크리세이(cliché) 가 되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생각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신이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인간이 신을 사랑해야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아가페에 담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을리 없다고, 그런 신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손에 무기력하게 죽은 십자가 사건과 그의 부활 사건은 다름아닌 아가페 사랑에 대한 증거라고.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실로 놀랍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아가페(ἀγάπη)

복음의 핵심에는 아가페(ἀγάπη)가 놓여 있다.
아가페를 사랑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에로스와 필리아도 사랑으로 번역된다.
각각의 사랑은 각각의 독특함을 가진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아래 다섯이 아가페의 특징이다.

1. 위로부터(from above)

요한일서 4: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아가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다.
받은 것 없이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복음이 아가페이고, 그 하늘 은혜가 아가페이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이 은혜가 내게 와 닿을 때 아가페를 만난 감격을 체험한다.

2. 댓가 바라지 않음(sacrificial)

요한복음 12:23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아가페가 증거되었다.
이 희생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희생이지만 곧 의미있는 희생이지만, 그렇다고 댓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바라는 것은 죽어 많은 열매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3. 조건 없음(unconditional)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복음을 설명하는 이 구절에서 사랑을 받은 대상이 "연약하고" "경건치 못하고" "죄인인" 사람이다. 강함과 경건과 의로움이 아가페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4. 받는 사람을 변화시킴(transformative)

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아가페의 능력이다.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변화된다.
변화에 대한 소망을 아가페의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5. 차고 넘침(pleroma)

충만으로 흔히 번역되는 플레로마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장면은 오병이어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가복음 6: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차고 넘쳤다] 


열두광주리에 차고 넘친 것과 같이 아가페이신 하나님의 본성은 차고 넘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충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향하여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아가페는 동적이고 운동한다.
받은 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하여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가페한다.

베드로전서 1: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위로부터"오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조건없이" 주어지고 "받는 사람을 변화시키면서" 계속 운동하여 "차고 넘치는" 사랑. 그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성이다.

에로스(ἔρως)

에로스(ἔρως)는 신약성서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명사형 에로스도 나타나지 않고 동사형 에라오(ἐράω)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군이 초대교회의 저자들인 Philo, Justin, Josephus, 속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의 작품에는 나타나는데 비해, 성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명사형 에로스만 74번 사용하였고, 필로는 에로스를 91번 사용한 것을 감안한다면, 성경이 에로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현상이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일점일획말씀묵상"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다행히 구약 칠십인역에 에로스의 동사형 에라오가 나타나는 곳이 있어, 이를 핑계로 에로스에 대한 묵상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잠언 4장 6절 말씀(LXX)이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고 권면할 때, "사랑하라"에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에스더 2장 17절은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 ."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성경 전체에 에로스-에라오가 사용된 예는 이 둘이다.

지금부터 쓸 에로스에 대한 글은 위의 두 구절에 대한 묵상글이 아니다.
두 구절을 핑계 삼아 "에로스"(동사형 에라오)에 대해 쓸 것이다.
성경에 빈번히 나오지 않는다 하여도, 에로스의 특별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묵상글을 쓴다.
에로스를 이해해야 아가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에로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먼저 에로스에는 세 차원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다. 

제일 먼저 기억할 용법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로서의 에로스이다.
특별한 의미없이 그냥 일상 언어 속의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에 관한 단어들, 말하자면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동사형 아가파오 에라오 필레오)는 일상 대화에서는 별로 뜻 구별없이 사용되어 "좋아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었다. 예를 들어 위에 인용한 두 구절

 잠언 4장 6절,
ἐράσθητι αὐτῆς(에라스쎄티 아우테스)

에스더 2장 16절 
ἠράσθη ὁ βασιλεὺς Εσθηρ(에라스쎄 호 바실레우스 에스쎄르)

에라오에는 아래에서 논할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 쓰인 에라오 대신 아가파오(ἀγαπάω)나 필레오(φιλέω)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상의 차이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일상의 언어로 사용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2세기 안디옥의 bishop이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순교당할 예정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길에 여러 통이 편지를 썼다.
그 중 하나의 수신자는 로마의 교인들이었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행여라도 자신의 순교를 막으려고 노력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편지가 담고 있었다.
순교야 말로 주님과 연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확신에서 온 당부였다.
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Ign. Rom. 7:2

ζῶν  ⸀γὰρ γράφω ὑμῖν, ἐρῶν τοῦ ἀποθανεῖν

조엔 가르 그라포 휘민, 에론 투 아포싸네인

번역하면, "비록 내가 아직 산 채로 여러분에게 편지하지만, 나는 정말 죽기를 사모한다." 이다.
이때 죽음은 물론 순교를 뜻한다.
성경 밖의 많은 에로스 용례 중에 이 구절을 예로 든 이유는, 순교처럼 거룩한 내용을 말할 때도 아가파오가 아니라 에라오를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전혀 에로스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용에도 에로스는 사용되었다.
일상의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의 언어로 뜻 차이 별로 없이 사용되던 "에로스-필리아-아가페"에 독특한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담기게 되었다.
아래에 필리아와 아가페에 대해 이미 쓴 글을 링크해 두었고, 이 글에서는 에로스의 철학적-신학적 의미를 다룰 것이다.

에로스의 두 번째 의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부정적 의미들이다.

여체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육체에 대한 사랑, 성적인(sexual) 사랑, 물질에 대한 사랑 등, 에로스는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의미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육욕의 에로스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향연>(심포지움)에서 이런 에로스에 대해 말하였고, 이런 에로스에 "통속적인"(πάν-δημος 판데모스)이라는 딱지를 붙인 바 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이데아를 향하여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것인데, 사다리 가장 아랫단을 차지하는 에로스가 통속적 에로스이다.
이 에로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나 아가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플라톤이 "천상적"(οὐράνιος 우라니오스) 에로스라고 이름 붙인 에로스이다.
일단, 에로스에 천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사실,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는 "천상적"이다.
그래서 단순히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적 에로스는 아가페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지금도 기독교 신앙 속에서 아가페와 경쟁 대립하고 있다. 

아래에서 에로스의 천상적 의미를 셋으로 나누어 짧게 설명하겠다.
아래의 정리는 안더스 니그렌이 쓴 <아가페와 에로스>(크리스챤다이제스트. 163쪽 이하)를 참고한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플라톤의 에로스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순수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이데아의 세계에 대비되는 이 세상은 이데아 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요 형상(images)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절대적 미美와 절대적 선善을 추구하는데, 처음에는 이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지만,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차차 궁극의 미와 선, 곧 이데아 세계의 미와 선을 추구하게 된다.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앞서 말한 "통속적 에로스"라면, 이데아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 이데아를 향한 상향의 움직임이 "천상의 에로스"이다.
플라톤의 에로스를 말할 때 보통은 이 "천상의 에로스"를 말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을 갈망하고, 알고, 닮고, 신과 하나되기 위한 일체의 상향 움직임이 에로스라 할 수 있다. 

에로스를 통하여 위를 향하는 이유는 미와 선을 획득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신을 향한 움직임이 고상해 들릴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또 이 점에서 에로스는 "자기중심적"이다.
신을 향해 나가는 움직임이 경건하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실은 자기중심적 욕구의 철학적-종교적 표현일 뿐이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희생적 타자중심적 성격은 에로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에로스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플로티노스에게 에로스는 핵심적 사상이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에 더한 것은 하향 개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 세계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감각 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향하는 일방향(상향)의 이데아론을 펼쳤다면, 플로티노스는 이데아로 올라가기 원하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데, 세상으로 유출(emanation) 되었기 때문에 위로 돌아가기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영혼의 신적 기원에 대해, 그리고 영혼의 하향-상향 움직임(Journey of the soul)을 주장한 것이다.
단순히 미와 선을 추구하여 상향하는 플라톤의 도식과 달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향해야 한다는 플로티노스의 도식은 상향 운동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에로스가 종교로 발전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밀의종교(Mystery religion)의 에로스

밀의종교를 세 번째로 말한다고 해서 에로스에 대한 사상의 전개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밀의종교 순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밀의종교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는 함께 발전하며 상호 영향을 끼쳤다. 

모든 밀의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이다. 물질세계와 육체에 갇힌 영혼의 구원, 곧 영혼의 상향, 곧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 목적을 위하여 밀의종교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교리와 제의를 발전시켰다.
디오니소스(Dionysus), 오피즘(Orphism), 아티스(Attis) 등이 그 예이다.
영혼의 상향을 위하여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밀의(密儀)"이다.   

간략히 첨가하자면, 영지주의 종교도 여기에 속한다.
영지주의를 밀의종교의 기독교 버전이라고 설명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밀의에 대해서 빌립복음서(Gospel of Philip)가 가장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다섯 종류의 거룩한 예식이 있는데, 그 마지막은 성찬식이 아니다.
성찬식은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서 뒤집어 써야 하는 망토(cloak)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예식은 밀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역시 쓰여있지 않다.
다만, 영혼이 육에서 해방되어 하늘을 향하여 떠나기 위해 그 밀의의식을 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플라톤주의가 설명하고 밀의종교가 추구하는 영혼의 상향(구원)이 바로 에로스이다.
상향의 전제는 영혼이 먼저 하향하였다는 것인데, 어떤 신화에서도 이 하향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
하향한 영혼이 갇히게 된 육체와 물질계는 탈출하여야 할 감옥이나 무덤 같은 곳이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는 소마세마(σῶμα-σημα) 사상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육체와 물질세계를 낮게 보거나 악하게 본다는 점이 신플라톤주의와 밀의종교 에로스의 특징이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에로스는

1. 상향운동
2. 획득적

3. 자기중심적
4. 육체와 물질세계 부정
5. 영혼만 중시한 영혼구원 교리

에로스는 아가페와 양립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정반대의 성격을 보인다. 

기독교는 에로스 종교인가 아가페 종교인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성당과 교회 건축 양식으로 경건을 표현해 온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 에로스 종교의 모양이 보인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찬송하며, 오직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양태에는 에로스 종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 교회의 존재 방식은 에로스가 아니라 오직 아가페이어야 한다.


아가페(ἀγάπη)와 필리아(φιλία)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신다.
한글로 읽으면 이 세 질문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세 번의 질문 중 앞에 두 번의 질문은 아가페(ἀγάπη)의 동사형인 아가파오를 사용하여 ἀγαπᾷς με(아가파스 메)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은 필리아(φιλία)의 동사인 필레오를 사용하여 φιλεῖς με(필레이스 메)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런 변화가 있었던 반면, 베드로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모두 필리아 동사를 사용하여 φιλῶ σε(필로 세)라고 대답하였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필레오 하느냐?
예,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묻게 된다.
아가페와 필리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용한 언어인 아가페 대신 필리아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필리아부터 이야기해 보자.
필리아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떠올리지만, 플라톤도 필리아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뤼시스라는 책에 필리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이 담겨 있는데, 필리아가 동성 간에 끌리는 호감이라고 했을 때 그 호감의 바탕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정리했다.  

유용성에 기초한 필리아, 즐거움에 기초한 필리아, 훌륭함에 기초한 필리아가 그것이다.
친구 관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상대방이 나에게 유용하든지, 내게 즐거움을 주든지, 아니면 내가 감동할만큼 훌륭할 때 우정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가페와 비교하여, 한가지만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가페의 첫째 정의는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사랑이다.
상대의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필리아는 조건적인 사랑이다.
상대가 가진 무언가에 끌려서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달리 말하면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의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필리아는 상호성이 작동하는 쌍방적인 사랑이다.
주고 받는 것이 똑같은 질과 양은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는 기초 위에 작동하는 사랑이 필리아이다. 

이 기본적 정의(definition)를 전제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고 명하신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가페이시다.
요한일서 4장 8절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가페로 충만하셔서 아가페를 특징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아가페는 운동성이 있다.
아가페가 정적일 수는 없다.
이 운동성을 충만이라고 한다.
아가페의 충만에서 나온 것이 이 세상의 창조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18). 
그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아가페 계명이다. 

그런데 베드로 입장에서는 아가페는 불가능하다.
아가페가 가장 수준 높은 사랑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면도 있지만,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가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사람인데, 이미 예수님에게 아가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는 사랑" "일방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시점부터 그 어떤 사랑을 예수님에게 주더라도, 그 사랑은 필리아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페하라" 하셨지만, 베드로가 끝내 "필리아 합니다" 한 것의 함의는, "주님, 이미 내가 받은 사랑이 큽니다"이다.
"주님, 내가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갚음이니 아가페가 아니라 필리아일 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이런 것 아닐까? 

베드로의 이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명령을 주셨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네 말처럼 네가 이미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갚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대상을 향하여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는 있으니 그렇게 하여라."  

"네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가페를 주신 예수님께서, 아가페를 받은 베드로에게, "네가 받은 것을 네 형제 자매에게 흘려주라" 요구하신 것이다.

1. 예수님처럼 일방적으로 줄 수 있으면 아가페가 되는데,
베드로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필리아로 대답하였다.

2. 예수님에게 받은 것을 예수님에게 돌려주는 쌍방성은 필리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이 주신 아가페를 다시 돌려달라 하지 않으셨다.
아가페는 다시 돌려 받는 것이 아니다.

3. 대신 예수님 자신에게 돌려주는 대신 형제 자매들에게 돌려주라 하셨다.

1번은 아가페, 2번은 필리아라면 3번은 무엇인가? 
내가 받은 사랑을 타자에게 흘려보내는 사랑 말이다.
베드로 입장에서, 베드로가 양들을 돌보며 줄 사랑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에게 먼저 받은 것을 주는 것이니 베드로가 할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주신 분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니 필리아도 아니다.
여기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사랑에 관한 전통적 철학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체인을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네가 받은 사랑으로 네 양을 먹이라".
목회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토 프뉴마 메 스벤뉘테

공동번역 /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현대인의 성경 /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지 말며

성령이란 단어에 정관사 "토"가 있습니다.
따라서 막연한 성령이 아니라 "그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소멸치'의 헬라어 '스벤뉘테'는 '불을 끄다'(quench, extinguish)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며'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듯 성경은 성령을 '불'로 묘사한 예가 많이 있다(마  3:11; 눅 3:16; 12:49; 행 2:3).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광신적 태도가 만연했음에 비해(고전 12-14장),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오히려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배격하는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570. 소멸하다(스벤누미. sbĕnnümi) σβέννυμι


1. 불을 끄다. 2. 냉각시키다
발음 / 스벤누미[ sbĕnnümi ]
관련 성경 / 끄다(마 12:20), 꺼져 가다(마 25:8), 꺼지다(막 9:48), 소멸하다(살전 5:19), 멸하다(히 11:34)
신약 성경 / 8회 사용
성령은 소멸되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성령이 거짓 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다는 말의 의미

성경에는 많은 상징과 그림(묘사) 같은 문학적인 요소들이 들어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들입니다.
성경이 성령을 묘사하는 상징 중 하나는 불입니다.

불은 정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전염병이 돌 때 어떻게 전염물질을 제거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불은 빛과 열을 내며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성경의 기초위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도록 건축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당신의 삶을 타오르는 불처럼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타오르는 관목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순식간에 타오른 뒤 재가되고 맙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보았던 떨기나무 불꽃은 달랐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애굽기 3:2).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산소와 연료가 계속공급되어야 합니다.
메마른 광야의 떨기나무는 여기저기에 조금씩 존재하는 하찮은 관목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의 불꽃은 떨기나무를 원료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꽃은 스스로 타오르는 불로써 연료공급이 필요하지 않으며, 결코 소멸하지도 않는 불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존하여 존재를 유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의 특징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지만 결코 소진되거나 재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것을 연료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것을 우리에게 흘러보내셔서 우리가 계속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십니다.
빛과 열을 내는 존재로 이 세상에 아름다운 기여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바람이 불 때, 불은 더욱 맹렬하게 타오릅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성경을 묵상하면 성령은 더욱 더 맹렬하게 우리의 삶속에서 타오릅니다. 물을 끼얹거나 모래나 소화기로 공기를 차단하면 불을 곧 소멸하고 맙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면 성령은 소멸하는 불처럼 되고 맙니다. 또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성령의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방해해도 성령은 소멸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즐거움과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데살로니가전서 5:19)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 성령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존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잘못된 것들을 행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막고 방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며 또 우리를 인격으로 대하십니다.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가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야고보서 4:6).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케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는 감정을 가지게 하다"입니다. 보통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진"슬프게 한다"는 표현을 일상에서는 더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케 한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거나 슬프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주 타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죽거나, 친한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는 일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태도, 행동,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이나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모님께 불순종할 때 우리는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과 성령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거나, 악의적인 말을 하거나 또는 다투고 싸울 때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본다고 믿지 않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도 성령을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 것이 된다"고 칼벵(Calvin)은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십니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확증하고 보충해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이 보증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던 우리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승리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렇듯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받을 수 있는 보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슬퍼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걸고 우리를 지지해주고 보증이 되어준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심어주는 일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성령의 열매와 신의 성품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사과나무에서 바나나가 열린 것을 본 적 있나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고 바나나나무는 바나나를 열매 맺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사과나 바나나와 같은 것들과는 당연히 다른 것으로 영적인 열매이며 동시에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당신의 행동과 당신의 말과 당신의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 즉,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변화된 성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이 열매는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당신 안에 있는 당신의 깊은 존재가 모든 방면에서 성품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당신이 맺어야만 하는 열매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런 것을 막을 율법은 없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 열매들은 당신이 성령께 다스림을 받을 때, 성령을 듣고 순종할 때에 자연스럽게 맺게 되는 열매들입니다. 건물로 비유한다면 성령께서 당신의 삶을 건축했을 때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반면에 당신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 때에 맺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쁜 열매들입니다. 예를 들면, 화내는 것, 질투, 시기, 자신만을 아는 이기심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령에 순종할 때에 당신은 이러한 것들과는 반대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성령의 열매는 더 크고 튼실하게 더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열매를 사람들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지요? 좋은 열매입니까?

사랑(LOVE) - 고린도전서 13장.

희락(JOY) - 베드로전서 1:3-9.

화평(PEACE) - 요한복음 14:27 / 참고, 빌 4:7

오래 참음(PATIENCE) -  베드로전서 2:22.

자비(KINDNESS) - 디도서 3:1-8.

양선(GOODNESS) - 베드로전서 2:11-12.

충성(FAITHFULNESS) - 빌립보서 2:5-8.

온유(GENTLENESS) - 마태복음 11:28-30.

절제(SELF-CONTROL) - 고린도전서 9:24-27.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8가지 성품

1.믿음(믿음에 덕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첫번째로 가져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11:3)"

믿음의 우선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거짓되고 속이는 가설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의 실체는 거짓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의 어두움이 짙을수록 하나님 창조의 진리가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대로 밝히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진화론이 맞는 것 처럼 배우고 따라 갑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지금까지 속여 왔습니다.
이 모든 세계가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은 없습니다.
오직 태초에 계신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곧 진리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1:3)"


만물이 있다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입니다.

엘로힘은 삼위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삼위하나님이란 위가 삼위로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라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자


예수께서 앞장 서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경대로

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자는 영원구원을 받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의 음성으로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

고백하는 자가가 되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로마서10:10)"


(3) 보이지 않은 내세가 있음을 믿는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보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은 저 세상의 내세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자가 되십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들림받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서11;6)"


믿음은 보이지 않은 실상을 믿는 것이 믿음의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11:1)"


믿음은 이 세상의 현상을 초월하여 저 세상의 실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적이 없어도 계신다는 것을 믿고

다시 오심을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현상은 저 세상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잠깐이지만 저 세상은 영원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공간의 하늘과 물질의 땅과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초월하는 저 세상의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되십시다.

보이는 땅의 세계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은 하늘세계가 있음을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은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2. 덕(믿음에 덕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가장 우선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은 덕입니다.

덕은 지식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고 덕을 빼버린 지식을 가진 자라면 덕이 없으므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연약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를 쉽습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덕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입니다.

덕을 두 글자로 하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또는 겸손입니다.

온유함은 밝고 옳고 착하고 빛나고 겸손함과 예의바른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에 지식은 아주 많은데 덕이 없으므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자들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마11:28~30)"


상처받은 자들이 치료를 받을려고 예수님에게 감으로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덕이 없으면 교만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말을 가려서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 뱉으면 상처가 깊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가진 자로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위로 받고 쉼을 얻어 존경받는 믿음에 덕을

가진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지식 (덕에 지식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가지는 자입니다.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지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모르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세계교회협의회가 WCC입니다.

WCC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WCC에 가입되어 종교다원주의를 따라가는 것을 배도라 부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WCC는 세계종교통합의 가증한 행위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신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유일하신 하나니을 믿는 유일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WCC는 배도하는 교회되게 합니다.

​기독교는 WCC를 반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기독교 교단이 WCC에 가입되어 따라가는 것은 가증한 행위입니다.

​배도는 7년 환난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일어나는 징조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전2;3)"

오늘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가져야겠습니다.

​덕에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은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교회 안에 실상 종말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 영적으로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지식이 가득차면 교회가 세상의 물결로

말미암아 가라앉을 위기가 됩니다.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에 관한 종말론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과 깨어 준비할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덕에 지식을 가지는 것은 지혜와 지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지식을 가졌다면 짐승의 표 666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계13:18)"

종말을 살면서 세상 지식으로만 가져 망할 것이 아니라

세상 끝의 일어날 징조를 아는 지식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마라나타 신앙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4. 절제(지식에 절제를)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입니다.

지식 다음에 따를 것은 절제입니다.

말세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세에는 사람이 결정하여 마음가는대로 행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가지 유일한 정통성을 깨트리고 다양한 것을 인정하여

유일한 진리를 부정합니다.

유일신이 없고 다양성을 가지는 신들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타락으로 절제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순종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타락하지 않은 절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10:25)“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으로 내 몸을 쳐서 복종함으로

타락하지 않은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지식에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 하고 싶은대로 다양성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여

절제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5. 인내(절제에 인내를)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합니다.

날이 갈수록 넉넉한 마음이 쫓기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멈추었을 때 어디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는 참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신의 성품에 참예화는 자가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로 오래참는 인내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1:2~4)“

 

말세에 그리스도인이 주님 오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 결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계속적인 불의한 공격을 받아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갑절의 축복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고

성내기도 더디해야 할 것입니다.

 

6. 경건(인내에 경건을)

 

인내에 다음으로 가져야 할 것은 경건입니다.

경건은 신앙을 가진 표시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내세에 약속이 있게 하십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우상숭배가 가득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WCC를 따르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내에 경건을 가져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건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경건의 능력을 가집니다.

 

7. 형제 우애 (경건에 형제 우애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입니다.

공산주의는 동무라고 부르지만 실상 형제 우애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동무는 같은 사상을 가진 자이지만 거짓

사상으로 형제 우애를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우리 민족끼리라 말하여여도

형제 우애를 무너뜨려 형제를 억압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 우애를 잔인하게 짖밟아 사랑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정신으로 자유 통일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하는 자유를 가지는 진실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기만하고 속이는 악한 영에 사로 잡힌 주사파가 박멸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주사파가 전향한다는 것은 담배를 끓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가 없습니다.

주종관계란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주종관계란 주인은 종을 지배하고 종은 주인의

권력에 눌려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주종관계가 아닌

형제 우애입니다.

형제 우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사랑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내게랴

(빌레몬서1:16)“

 

8. 사랑 (형제 우애에 사랑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7)”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져가는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하는 자가 됩시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다.

처음도 사랑이요 나중도 사랑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사랑으로 출발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사랑의 공급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된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두려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유다원주의에 속한 WCC를 반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공산주의를 반대합니다.

공산주의는 형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가짐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복주의와 복음주의 /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



기복주의와 복음주의

기복신앙이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 때문에 위태롭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기복신앙을 경계하면서도, 복을 얻고자 하는 신도들의 강렬한 욕구를 외면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에 그 의미를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이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창 12:2).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요구하는” 왜곡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신앙이 오히려 정상적인 신앙인 양 그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왜 교회가 나가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한 거름음 더 나아간다면 구원 받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자리에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비록 그 구원이 전적으로 저 세상 천국에서 실현된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고 저 세상 천국에 가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왜 나쁜 것인가?
“이 세상에 ‘나뿐’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기복신앙의 폐단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바로 이런 “나뿐”이라는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복신앙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결단코 떨쳐버려야 할 신앙양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목회자로부터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기복신앙으로 온통 뒤범벅이 된 듯하다.

기복신앙의 정체와 한국 교회의 실태

기복(祈福)이란 복(福)을 구하는 것이요, 신앙(信仰)이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복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풀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믿고 따르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결과적으로 목적은 복을 구하는데 있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 이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양태일 뿐이라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우려하는 기복신앙의 양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적”이라는 말과 “기복신앙”이란 말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발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 실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자신의 물질적, 육체적 복을 위해 비는 미성숙한, 더 심하게 말하면 천박한 신앙일 뿐이다.

여기서 미성숙한 신앙이란 자신의 건강, 재물, 출세 등만을 위해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을 말한다. “1일 3善이면 天福이 내리고, 1일 3惡이면 天災가 임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민중도교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의 무교적 민간신앙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신앙양태인데, 이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목적이 복을 얻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될 때, 그것은 바로 저차원적인 종교윤리가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저차원적인 윤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기복신앙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기복신앙을 자제하고 좀더 남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온통 복 받으라고 외치고, 부자 되라고 축원한다.

심지어 복 받지 못하고 부자 되지 못하면 신앙이 없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받아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 한국 교회의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는 이가 별로 없다.


이런 교회의 기복신앙은 외적 성장주의로 빠르게 치닫는다. 이 교회의 외적 성장주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한국 교회들은 크고 안정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회의 1순위는 언제나 “교회 키우기,” “교인 늘리기”에 집중되어 있다.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다.

이것은 교인수와 직결되는 문제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몰려들어야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의 토대 위에 큰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가 주일성수를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동시에 교인수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지려면 헌금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매우 확실한 담보가 아닐 수 없다. 그밖에 각종 헌금들이 교인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전도를 왜 하는가? 교인 늘리기 위해서인가? 교회 안에만 옹기종기 몰려있는 한국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무기력함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표현이다. 10의 1이 아니라 10의 3이면 어떻고 10의 5면 어떠랴. 하지만 왜 감사는 꼭 헌금(돈)으로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 초기에는 “날연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날”(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감사의 방법을 좀더 다양화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교회까지 덩달아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란 말이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 헌금(돈)을 드려라”로 들리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강조하며 걷어들인 헌금은 대체로 어디에 사용되는가? 역시 1순위는 제 교회 짓기에 들어간다. 한국 교회의 “교회건축 신드롬”은 교회 기복신앙의 결정체다. 이것은 교회당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도 교회당을 성전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구약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던 신앙이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모범인가?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로 대체되었다.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갇힌 하나님은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 교회는 바로 신자 자신들이요,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어디나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면 교회당이요, 예배당인 것이다. 
  


둘째,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기 때문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해,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양태가 아니다.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철새처럼 복을 장담하는 그런 신앙의 대상으로 옮겨다닐 것인가?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실 어떤 상급을 위해서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상주실 것을 믿으라고도 했다(히11:6). 그러니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대로 또 행한 만큼 충분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상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저급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인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면 보상을 기대하고 효도하지는 않는다. 그런 어른이 있다면 그는 미숙한 “어른 아이”일 뿐이다.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양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교회 건축헌금을 종용하면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만큼 확실한 투자는 없으니 힘껏 헌금을 하자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헌금은 가장 확실한 투자라니.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사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제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수표를 남발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는가?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달콤한 약속을 하신 분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한다(마13:23). 

셋째, 기복신앙은 복음의 정신과도 상극(相剋)되기 때문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 조건들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눅6:20),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이며(마5:1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모와 형제 자매도 버린 자(눅14:26)라고 했다. 반대로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요(막10:15, 마18:3, 눅18: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라고 했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경계한다(요일2:16). 오히려 예수께서는 영혼의 유익에 되지 않으면 눈도 빼고 손도 찍어내라 하셨다(마5:29-30). 자기 자신도 버리고 죽기까지 제자의 삶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재물/ 명예/ 권력)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복을 비는 것과 큰 고목 밑에서 복을 비는 것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세상의 잡신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기복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일 수 없다. 그러니 기복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해석에서 영적인 의미를 놓치고 문자적으로 집착하게 되며, 단장취의(斷章取意)하는 문제가 빈번하게 자행된다.


기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복신앙의 기도는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은 제 한 몸 잘 되기를 바라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분이시지만,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분은 아니시다. 결코 하나님은 차별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고통 당해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신앙이다. 내 아들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복적 기도는 다른 학생 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부모가 다 자기 아들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가 아닌 기복신앙의 기도는 당연히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기도, 이런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다. 통성기도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기도라는데 있다. 통성기도가 다 잘못된 기도는 아니지만, 대개 통성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원하는 것만 목청껏 외치다 말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기복신앙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어린 아이처럼 떼를 부리며 간구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이 형통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억압과 고통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웃 성도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교회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는 말든, 우리 교회에만 성도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 하나님의 기본 법칙, 서로 나누라는 명령을 파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되고, 내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다른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기복신앙은 은사 위주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착각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자기 희생과 섬김의 덕목은 어느 틈엔가 빠져버리고 만다.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를 내세우며 성도들을 혹세우민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3.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제자도 실천뿐!

1) 기복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딤후3:16).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누가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기복신앙은 누가 바로 잡아주는가? 평신도라도 나서야 한다. 아니 평신도가 나설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마지막 열매가 절제(갈5:23)라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그 밖에서도 절제의 미덕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행24:25; 고전9:25; 딤전3:2, 11; 딛1:8; 2:2; 벧후1:6). 절제신앙과 기복신앙은 반대말이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제할 수 없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는다.

2) 복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신 분이다. 심지어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분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재산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보상심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왜 우리는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위해 그토록 사력을 다해 간구하는가?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그의 제자가 가는 길은 제자도(弟子道)다. 제자도는 십자가의 길로 통한다. 그런데 이 길은 기복신앙과 전혀 무관한 길이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길이다. 과연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그보다도 먼저 우리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4. 마무리

언제부터인가 성경을 직접 읽을 줄 아는 젊은이와 의식있는 성도들이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감히 평신도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목사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 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 없는 종교, 맥빠진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목사의 설교에서 기복신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것인가? 그렇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신앙이다. 교회는 결단코 이 기복신앙의 늪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도 교회의 성도도 모두 기복신앙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기복신앙을 멀리 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에 대해서


교회용어 사전에서는 기복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 즉 신앙 대상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형통과 소원 성취와 입신양명(立身揚名), 무병장수와 자손 번영 등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초보적이고 현세적(現世的)인 신앙 행태를 말한다.”

  기복신앙은 자신이나 가족의 물질적인 충족(富)과 건강과 형통같은 욕망, 즉 세속적인 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종교를 너무 과다하게 믿는 형태를 말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무속종교나 불교등은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기복신앙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는 분명히 기복신앙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가 기복신앙적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답변하기 쉬운 주제가 아니며, 우리가 기독교의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에, 자칫하면 우리나라의 교회 체계나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미 뿌리깊은 기복신앙으로 치우쳤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필자는 기독교의 본질과 목적은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때로는 기복신앙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즉 가족이 아프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에, 혹은 사업이 어려울 때에 우리는 당연히 기도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느 목사가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일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없다" 혹은 "하나님은 어떤 병도 고쳐주지 않으며 가족들을 위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는 결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기독교는 기복적인 신앙을 상당히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복신앙적 형태가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질병의 신유나 귀신 축사를 강조하는 어떤 목사는 그러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으며, 예수님도 그런 사역을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일들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교회와 목사의 본질적인 사역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은 구원이며 영생이 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적 성향은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해온 요인으로서 ‘성령의 역사’나 ‘한국인의 기질’ 등의 이유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복신앙적인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부흥 집회가 기복적인 신앙체계를 갖춘 것은 6.25 전쟁 이후 물질적 궁핍감과 정신적인 공허감에서 비롯되기 시작해 1970년대 이후에 절정에 달했다고 학자들은 공감한다. 이런 토양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기독교의 집회 형태가 기도원, 부흥회 등이다. (물론 모든 부흥회나 기도원이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현재의 신앙체계는 그와 같은 방식이 비판을 받을 정도로 수준과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또 극단적인 기복신앙은 질병과 사고등 저주와 재앙을 가져다 주는 상대를 마귀로 인식하여, 마귀를 쫓음으로 축복을 찾는 것을 교회의 주된 임무로 여기게 되었고, 일부 교회와 기도원등에서 현세적인 축복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증거로 강조되었고, 헌금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상적인 행위로 강조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복신앙은 교회의 성장주의와 대형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기복적 신앙 위주로 설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소위 삼박자 구원과 같은 은사남용주의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번영신학이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집을 이사하거나, 사업처를 개업하거나, 차를 새로 사면, 무속신앙인들은 굿을 하는 대신에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려왔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무속신앙인들의 굿과 액땜의 의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는 어떤 궂은 일을 당하게 되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자는 기복적인 신앙 자체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 역시 자신과 사역과 가족의 평안과 건강을 위하여 항상 기도한다. 또한 우리가 기복신앙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 곳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12:2) 또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하셨다.(갈3:8-9) 또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육축까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신28:3-6)

사실 성경에는 복에 관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성경은 욥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끝까지 신앙을 지킨 욥에게 전의 소유의 갑절을 주셨으며(욥42:10)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욥42:13)

  그러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무조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너무 강조함으로서 자칫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과 목적이 간과되어지는 그러한 형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복의 형태가 성경적임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그저 현세에서 복을 받자고 예수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려하는 견해로서 올바른 내용이다. 자칫 질병을 고쳐달라거나 물질적으로 잘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무속신앙에서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따위의 저속한 주술적, 기복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께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와 동일시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체제였다는 것이 신약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복의 개념이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잘먹고 잘사는 그런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영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순교를 당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생(eternal life)을 받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어야 한다.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 기복신앙은 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목적과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 팔복은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적인 요소와 정반대의 것이 되어진다. 또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반대가 되는 조건들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는 자이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회평케 하는 자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마5:3-10)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하늘의 상이 클 것”(마5:11-12)이었다.


반대로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 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이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분리하여 이것을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구분한다(요일2:16).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을 나무라셨으며(눅12:34) 부자의 곳간에 쌓아둔 곡식과 물건도 그날 밤에 부자의 영혼을 찾아가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강조하셨다(눅12:19-21). 특히 예수님은 그 부자에 대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는자”(눅12:21)라고 정의하셨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반드시 어렵게 힘들여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어떤 행함과 노력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재물과 부, 육체적인 정욕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의 시험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의식주/ 명예/ 권력)을 단절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부와 육체적인 정욕을 추구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셨고(마19:24, 막10:25, 눅18:25), 하나님과 맘몬의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다.(마6:24, 눅16:13)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속주의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물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 주님보다 앞설 수 없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2-3)

  또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갈5:10)라고 바울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오직 복을 위하여 비는 것은 성황당에서 복을 비는 무속신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가 지나치게 되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가 된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기복만을 위한 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0-12)

  이러한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의 정욕을 위한 기복신앙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으며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내 가족과 친지의 어려운 상황과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신앙이 아니며(약5:14)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물질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점은 기복적인 축복이 나의 신앙과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신앙과 기도가 부족한 결과이며 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 케이스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억압과 고통과 질병과 가난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또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아니면 혹시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가정만을 위해, 나의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될 수도 있고, 내 교회가 더욱 부흥되기 위해 다른 개척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만이 더욱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직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는 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형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여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어느 극소수 교인은 어느 교회 목사가 혹은 어느 교회가 용하다 혹은 신통하다고 하며 교회를 옮겨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오직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다 건강하고 다 부유하며 다 복을 받는가? 만일 질병이 있거나 부유하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한 교인은 저주를 받았고, 혹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더욱이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형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간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혹간은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설교가 결코 될 수 없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하며(마13:23) 그 천국복음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셋째, 기복신앙은 은사 남용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혼동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이사로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존재로 이해하는 신비주의와 유사한 것이 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곧 내가 초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며, 그 능력이 나의 물질적인 축복을 돕는 방편으로 알게 되며, 영적인 은사가 그 증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간혹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일방적으로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만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와 건강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수험생을 위한 40일 특별기도회와 일천번제와 같은 기도회도 열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성령의 동행에 대한 증거는 가시적인 은사의 남용이나 개인적인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다. 재물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형제의 궁핍함을 도와야 한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7)

또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연보액수가 많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즉 넉넉한 사람의 많은 건축헌금보다 어린아이의 저금통의 동전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2-4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곧 가치관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 가치관이란 세속적인 욕망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을지라도, 결코 거듭난 사람이 못된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본질이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 진정한 거듭남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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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인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인 사람을 보았는가. 성경 안이나 밖이나 예수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만사형통을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왜 사람들을 욕심쟁이로 만들어버리는가. 성스러운 기도가 어찌 욕심쟁이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기도는 알라딘 램프가 아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피상적이고 즉물적 인간이 되었는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자로서 생명과 풍성한 인생을 산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현자들, 그리고 모든 종교적 천재들, 그리고 오늘날 심리학자들까지도 물질과 풍요와 성공은 '행복의 덫'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성공을 하고, 큰 차를 사고, 더 큰 집에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한없이 탐욕적이고 야수적인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되었다.

지금 어떤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가. 큰 교회,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복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복주의란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기복주의를 가르친 적이 없다. 기복주의는 구약의 바알이즘이요, 신약에서 맘몬이즘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지금 미신화, 마술화, 심리화, 인본주의화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선전을 그대로 이루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과 엄연히 다르다.

진리의 신앙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불행한가. 진정한 위로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너무 철학적이라 생각하는가.

성경은 이 유한한 인생, 허망한 인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비결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그런 것이라면 가장 저속한 샤머니즘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축복의 혁명>(뉴스앤조이)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웬만한 목사님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 풍성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부자와 성공을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이것이 소위 '소비자 중심 교회'다.

황금 송아지 만드는 한국 교회

이 시대의 영성 지도자인 유진 피터슨은 <그 길을 걸으라>에서 '소비자 중심 교회는 적그리스도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콜슨도 <이것이 교회다>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소비자 중심적'인 전형적인 사건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론의 황금 송아지 사건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작금의 한국 교회 여기저기에서도 황금 송아지 상을 볼 수 있다.

2007년 평양성령강림 100주년 기념행사 설교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를 본문으로 '한국 교회는 죽었다'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설교했음을 고백했다. 금년 1월 강변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모임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장로와 교인이 걸려 성경이 전하는 말씀을 반 토막 잘라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다. 놀랍게도 지금이나 그때나 영광의 메시아를 찾고 있는 것은 같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십자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 1:29)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롬 5: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이 시대에 기복주의가 불행하게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필자는 기복주의야말로 가장 타락하고 저속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기복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과 교제가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목회자들은 기도를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순진한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동과 다름이 없다. 얼마나 천박한 기독교인가. 그러기에 1,000만 명의 교인을 자랑하지만 이토록 무력한 교회가 되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도덕적 백치들이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도덕적 저능아로 취급 받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만이 기복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지난 3년 동안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 '적극적 사고방식'을 중시하고 있다. 필자는 그 책이 나오자마자 <축복의 혁명> 개정판에서 그 심각성을 말하였거니와 2007년에는 이동원 목사가, 2008년에는 옥한흠 목사가 이 책의 비기독교성을 지적하였다. 두란노서원은 이 책으로 100억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버젓이 비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소위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없다

복음서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으신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서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받을 고난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룩한 십자가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십자가를 알고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알아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십자가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기복주의에 대한 대안과 제자의 모습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처치'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 교회 전문가들로 하여금 3년 동안 교회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지만 예수의 제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빌 하이벨스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그 내용을 시인했고, 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교인 숫자보다 제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한 시대가. 제자는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능력을 위로부터 덧입어 자기 비움과 자기 부인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혈과 육으로 하나님나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바울의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성화를 향하는 바울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변혁적이고 사회 변혁적인 급진성과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급진성과 혁명성을 잃어버리고 있지 아니한가. 오히려 많은 교회들이 점점 보수화·각질화되는 안타까움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롬 12:2)

교회는 이 땅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물신을 향한 도덕적 집단 투항이 일어나는 이때, 교회는 창조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공격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로핑크가 쓴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에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과 같은 '대조사회'를 이룸으로써만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요, 하나님나라의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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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기복주의 비판

기복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에 두지 않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신앙 습성입니다.
특히 한국인은 뿌리 깊은 기복주의적인 습성으로 인해 모든 종교에서 기복주의적인 습성을 보임으로써
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 연연합니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이러한 습성에 편승하여 교리적인 설교보다는 축복적인 설교를 하고, 교회에
많이 바쳐야 더 큰 복을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관습을 만들게 됩니다.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 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모든 복음은 영에 관한 말씀이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썩을 육신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육신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혼이 살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육신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위하고 섬기고 사랑하면 예수님이 내 앞날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내 육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헌신할 때 예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진리를 듣기는 싫어합니다.
바울 사도도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교인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는 육신의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한국 기복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S 교회의 교리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S 교회 교리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육신적인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육신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참된 목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죄의 몸을 멸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진 거듭난 새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S 교회는 성령체험과 기복주의로 크게 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죄 짓지 말고 경건하게 살라는 말씀보다는 영적 체험을 주거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대부분 듣기는 커녕
귀를 막고 싫어하거나 잔인하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고, 금욕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재림보다는 이 세상을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적 교회는 기업과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운영되며, 성경적 진리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주입시켜 우민화 함으로써 말 잘 듣는 목사 추종 세력으로 양성시킵니다.

디모데후서 4/4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


빌립보서 3/18~19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

성경은 마지막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명확히 명시하는데, 사람들이 기독교의 근본된 교리가 믿어지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이 많으므로 싫어하고,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축복적이고 향락적인 설교를 해 주는
선생(목사)들을 많이 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성경에 근거 없이 목사의 사업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파멸의 길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색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 있는 진리대로 믿지 않고, 내 욕심에 따라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상숭배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탄의 형상이 아니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금 송아지를 보고 십계명 돌판을 내 던지며 대노했고, 금 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어갔습니다.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S 교회는 삼중축복을 중심교리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S 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적 축복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청산받고 마치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가 청산되고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의 창문이 활짝 열려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모든 지식이 창문을 통해 비치는 밝은 태양처럼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되고(고전 2:9,10),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롬 12:2).

2. 환경적 축복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쫓겨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다(마 27:46).
성경은 예수님의 환경적인 난과 저주의 대속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고후 8:9; 갈 3:13).
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시고 피 흘리심으로 저주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미움, 불안과 초조, 공포와 절망, 좌절감과 죽음, 죄책, 정죄 등 모든 가시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평화의 강물이 흐르고 삶 속에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

3. 육체적 축복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육체적 질병과 죽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남은 생애를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입각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파괴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의 육체를 부활시킴으로 우리는 연약함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살려 주는 영이 되었으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 육체가 부활할 생명의 씨앗을 얻게 된다(고전 15:42-45).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도 변화되어 공중 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살전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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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복주의와 이상주의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문을 따라 열심히 예수를 찾았고 미리 예수께서 가실 곳을 예측하여 먼저 가서 몰려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무리는 모두 예수를 찾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기대도 있었고 모인 회중이 공동으로 구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각각의 기대는 계층별로 형편따라 구하는 차이가 있었고 공통적으로는 함께 구하는 것은 저들 유대민족으로 함께 바라는 이상대로 유대나라 회복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을 보면 성령의 역사로 거룩케 되는 은혜로써 부름받아 교회되는 경우는 매우 적고 대체적으로 당시 유대무리처럼 예수를 통해 각자 기대를 얻고 이루려고 모여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별로 구분하여 나누어 보면 기독교 기복주의와 기독교 이상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복주의>

기복주의 혹은 기복신앙은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기복이란 "복받기 위해 빈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인 종교의 목적이 다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허물로 죽어 육체가 된 인생들이 죄의 본성을 따라 욕심, 욕망으로 사는 것 인데 그것이 끝없이 욕구하는 대로 되지 않기에 그것을 신앙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대체적으로 기복주의가 많습니다.
기독교가 이교화 되어간다는 상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다는 약속된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약속된 영원한 하늘의 복에는 관심없고 자기들이 필요로 하고 더 기대하는 바대로의 세상복을 위해 주를 찾고 모든 신앙의 행위를 그 목적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늘 계시되어 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를 통한 메시야왕국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저들 나들대로 메시야를 통한 기대들을 품고 그틀을 만들어 놓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를 상류층,중류층,
하류층으로 나누어 볼때 상류층은 메시야를 통해 기득권회복과 그 더이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기대의 복으로 바랬고 , 중류층은 갈등과 혼란과 전쟁이 없는 평안의 안정의 행복을 기대했고,
하류층은 메시야를 통해 형편적 문제해결과 신분적 상승의 기대 복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님은 자신들의 기대의 복을 채워주지 않고
그나라와 그의 전하자 점점 불신하고 멀리하며 아예 거짓 메시야 이단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실제 당시 유대인들을 보면 예수께서 하신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고 더욱 열심히 밤이고 새벽이고 생활의 해결사로 예수를 찾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저들의 삶의 해결사로 임금삼으려 하자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요6:14~15)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26-27)
즉 썩을 복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요 영생할 복을 주러 오신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에 모여든 무리들이나 오늘날 예수 이름으로 모여든 대체적인 무리들이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 세상영광이나 형편적으로 복된 것을 얻으려 하고 그것이 원하는대로 안되는 문제들을 해결받으려고 모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사람들의 기대의 세상복을 말하는 교회가 많고 그러한 곳에 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교회들이 그런 무리들로 성장하여 대형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교회고 목회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주께서 역사하시는 신령한 축복으로 그나라를 나타내는 거룩한 교회로 서가는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신령한 복을 증거 합니다. 그것은 전혀 사람들이 기대하는 차원의 복이 아닙니다.
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엡 1:3-5)

원래 복이라는 것은 저주에서 화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고 그 형벌을 살아가는 진노의 존재들입니다.
전도서 5:17을 보면 죄의 형벌을 살아가는 인생이 된 인간들에 대해 잘 말씀했는데 보면,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죄와 그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으로 불행힌 인생이 무엇인들 진정으로 복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원하는 그 어떤 기대의 복이 넘치게 되었다 하여도 죄로 인한 저주와 그 진노의 형벌은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도 여호와의 복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라.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 33:29)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라겠느냐" (마 16:26)라고 말씀하심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은 욕망적인 온 천하적이고 부귀영화고 그것을 얻고 누리고자 주를 찾고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기독교 기복주의가 그렇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내 기대대로 넘치길 바라고 또한 나를 통해 오병이어같은 역사가 소원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형벌인 저주와 죽음의 인생 상태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복과 그 구원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하늘의 신령한 참 복을.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사는 참복은 세상 형편이나 조건이 있고 없고 많고 적고 상관없이 하나님나라를 구원의 능력으로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요 하박국서지자처럼 모든것이 되는 것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세상상태는 전쟁의 소식으로 불안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기뻐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참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믿음을.통해 세상을 살게 하려는 기복적인 교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

이상주의는 망상주의와는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이 궁극적으로 최상이 됨을 바라는 중심입니다.
보편적 개념에서 이상은 도덕적, 미적, 사회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를 말하며 바람직한 좋은 상태를 완전히 갖추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이상주의자들은 완전한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믿고 합력하려는 것이 기독교 이상주의 자들입니다.그래서 이들은 공동체적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기독교 연합운동을 많이 합니다.

복음이란 용어 개념을 보면 "구원의 소식", "평화의 소식",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합니다.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은 여기서 "좋은 소식"을 자기들이 기대하는 가장 좋은 상태로 바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은 주를 통해 지상낙원을 바랍니다.
구원도 그들의 지향하는 이상실현이고 평화도 인류가 세계가
함께 공존하며 좋은 세상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공감하는 행복을 지향합니다.
이성적 좋은세상 이성적 좋은 관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 7:7-11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비유하여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자가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과 우리가 기대하며 바라는 좋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은 구원이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같은 말씀인 누가복음 11:13에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한 하나님나라 구원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은 복음이 말하는 좋은 소식으로서 인간적 이성적 행복이나 이상을 말하며 평화도 세상 평화를 말하고 모두 함께 계층 없이 박애젹으로 잘사는 사회실현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박애주의자고 인권주의자고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갇힌 자 등을 그 형편에서 건져주고 계층도 없는 좋은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 오셔서 반대 무리와 저항하다가 잡혀 죽으신 혁명가로 여깁니다.

결국 이들은 지상천국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도시 성시화 운동도 벌이고 사회정의구현이나 인권운동도 벌입니다.
기복신앙은 좀더 개인주의적이라면 기독교이상주의자들은 공동체적입니다.
세상 사회와 더불어 새시대 좋은 세상 구현이 이들의 구원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18:36)는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시대 기독교 일반 신앙의 흐름을 보면 과거 어렵고 과도기적인 시대에 찾던 기복적인 신앙보다 형편이 좋아진 이젠 기독교 이상주의인 인본주의신앙이 더 공감 확대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형편은 좋아지고
높아진 학벌이나 세계적 소통의 매체를 통한 다원적인 이성적 지식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시대는 인본주의 신앙이 판치는 시대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가 각 교파에서 많은 공감을 형성하며 같은 이념이나 시대적문화 까지 조화된체 사회와 공조를 이루며 현대교회들로 크게 자리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말씀함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합당한 신앙 입장>

오늘날 교회라 하면서 모여서 주로 구하는 부류들로 나누어 보면 자기유익을 구하는 부류들(기복주의)
과 사회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부류들(이상주의)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수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구원의 유익을 구하는
역사적 정통신앙의 개혀파가 있습니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기복을 구하든지, 이상주의를 지향하든지, 각각 그렇게 맞추어 주는 다른 복음이 넘치든지, 십자가의 도인 복음의 진리만
증거되고 거룩히 따르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바로 성령이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역사적 정통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된 교회구원을 지향하는 개혁파 교회가 맞다면
오로지 복음의 합달한 신앙을 위해 일심하고 합력해야 합니다.(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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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기복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회

눈먼 기독교(6)

중미 멕시코에 수백 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종교가 있다. ‘산타 무에르떼’라고 불리는 이 종교의 신(神)은 해골바가지 형상에 한 손에 낫을 든 흉측한 모습이다. 중남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 가톨릭이 변질되어 성모 마리아가 신의 자리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데, 멕시코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생 토착신이 마리아의 자리를 대신해서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이다.[1] 이 종교를 받드는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간구했더니 부자가 되고, 감옥에서 일찍 나오고, 병이 나았다고 열렬하게 자랑한다. 혹시 이들이 후진적 사고를 가졌기에 그런 유치한 신앙심을 가진 것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삼중큰스님 정해년 마지막 강연회 “황금돼지해 어떻게 운(運)을 받을 것인가?!” 대충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해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삼중큰스님 강연회에 오시면 길이 있고 희망이 보입니다. 참석하시는 모든 분께 영험한 황금돼지부적(지갑소지용)을 드립니다. 그동안 삼중원을 도와주신 감사의 보답으로 재물, 사업, 혼사, 이사, 매매, 취직, 승진, 시험, 건강 운 등 종합운세를 전문분야별 유명한 스님 세 분께서 무료로 봐 드립니다.

이 문구는 일간신문에 게재된 어느 유명 스님의 강연 광고다. 부처의 도(道)를 따르는 중이 중생들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운수대통(運數大通)하는 길을 알려주겠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생활밀착형 종교로 자리 잡는 데는 이런 기복성향의 포교가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기복 종교의 대명사는 무속신앙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술(易術)산업 규모는 연 4조여 원, 역술인이 45만여 명, 인터넷 역술 사이트가 200여 개에 이른다. 로봇이 커피를 타주고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점(占)치고 굿하는 모습은 음지에서 오히려 더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런 기복 신앙에서 자유로운 상태인가?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우리나라 목사 가운데 ‘억만장자 협회’를 만들어 그 협회의 장(長)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 목사가 있다. 이 목사가 쓴 책 가운데 『억만장자가 되는 12가지 비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당신의 가정과 기업, 교회의 재정이 두 배로 풍성해질 것이며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다’이다. 이 책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돼 있는데, ‘우주의 재벌 총수 하나님 아버지’, ‘기름 부음이 넘치는 억만장자가 되라’, ‘역경을 초월하는 억만장자가 되라’ 등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고 소위 ‘억만장자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이 소감문이라고 올려놓은 글을 보면 어이가 없어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책대로 실천하여 1년에 140억을 벌었습니다”, “수만 평의 땅과 여러 채 빌딩을 사게 되었어요”, “모든 성도들이 십일조가 아닌 오분의 일을 냅니다” 등의 내용이다.

이 시대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내듯 비진리가 진리를 몰아내는 시대가 된지 오래다. 성경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고, 죄성을 만족시키는, 무늬만 기독교인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몰아내고 있는 현상이 날로 확장되고 있다. 세속과 교회를 칼로 무 베듯 나누는 이원론이 썩 바람직한 가치관은 아니지만, 이 시대는 오히려 세속주의(secularism)가 교회를 집어삼키는 것을 조심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세속주의의 중심에는 역시 돈과 성공이 자리 잡고 있다.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는 결국 돈을 섬기는 배금주의와[2] 다를 바 없고, 성공이라는 신화는 기독 신앙의 수단화와 다르지 않다.

게리 토마스라는 영성 신학자는 “참된 믿음의 잣대는 얼마나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내어 맡겨졌느냐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내려놓음과 자기 비움 그리고 전적 의탁이라는 모습으로 참 기독교 신앙을 검증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는 재물의 다소(多少)와 지위의 고저(高低) 그리고 명성의 유무(有無)가 영성의 기준이 돼버렸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유명한 기독교인은 영성(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고, 그 반대는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지는 풍조가 은근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는 “성직자들 사이에, 죄나 속죄와 같은 성경 언어를 희석시킨 나머지, 예수를 자신의 행복과 자아 완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가 있다. 이 시대의 성직자마저도 예수 이름을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면, 과연 이 시대에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진리와 기복신앙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교회의 모습이 처량하고 안쓰럽다.


[1] 남미 페루에는 돈다발이나 주택, 승용차 같은 것의 미니어처를 마리아 상 앞에 놓고 기도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돈, 집, 차가 생긴다고 믿는 가톨릭 신앙이 퍼져 있다.

[2] 拜金主義, mammonism, 맘몬주의








기도(祈禱)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경로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방식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영으로 감동 받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없으면 정상적인 영적 생활을 할 수 없고, 더욱이 성령님의 역사를 따를 수도 없다.
또한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기도 성경구절 22가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 구절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은 큰 도움과 위로가 된다. 막연한 마음과 두려움, 불안함이나 의심이 들 때도 성경 구절을 붙잡고 기도하면 힘을 얻을 수 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진실하게 기도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그래야 늘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기도일까? 바로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감춤 없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할 말이 있다고 생각되고, 마음속이 아주 환하게 된다. 

진실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속에 평안을 얻게 되고 누림이 있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4)

1.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2.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3.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 예레미야 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5. 예레미야 33: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6. 사무엘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7.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8. 시편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9. 시편 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0. 시편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1. 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12.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13. 마태복음 6:6~7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14. 마태복음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5. 마태복음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16.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17. 누가복음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18.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19.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20. 야고보서 1:5-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21. 야고보서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22. 요한일서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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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방법 - 올바른 기도를 위해 꼭 알아야 할 4가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직접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러나 기도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지?

아래의 4가지 정확한 기도 실행법을 통해 그 답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정확한 기도법
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입니다.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정확한 기도법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정확한 기도법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정확한 기도법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하나님께 상달되는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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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기도는 언제해야 하나요?

(1) ( 항상 )해야 합니다

눅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 항상 )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낙심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항상)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 항상 )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판토테[모든 것에] 라는 말로서 영어로 언제나,항상 [always] 과 뜻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의미는 ( 모든 만사 )에 기도로 시작해야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일에는 낙심할 일들이 있으며 이를 막는 방패와 같은 것이 기도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2) ( 아침 )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시5:3 여호와여 ( 아침 )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아침 )혹은 ( 새벽 )에 기도하는 것은 구약의 왕들이나 예수님이 주로 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은 조용하고 하루의 ( 첫 ) 시작을 알리는 때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이 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신앙의 결단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 링컨 )은 백악관에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이른 아침마다 흐느끼며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남북전쟁의 승리의 원동력은 링컨과 온 국민의 기도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3) 하루 ( 세 ) 번 시간을 정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
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 세 )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윗은 영적 회복을 위해 ( 아침 ) ( 정오 ) ( 저녁 )에 기도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통해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한 조서를 어기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순교자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기도의 결과는 용서와 회복(다윗) 그리고 사자굴에서도 살아남는 기적(다니엘)을 경험하였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1) 기도는 온 ( 마음 )과 온 ( 뜻 )을 다해 그리고 온 ( 힘 )을 다해 간절히 해야 합니다.
(2) 거룩한 ( 회개 )의 삶을 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3) ( 외식 )하며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6:5-8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 외식 )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 상 )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 골방 )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외식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  입니다. 이는 ( 가면 )을 쓴 해설자가 독백하는 가사를 대화체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에게서 유래된 말입니다. 즉, 얼굴과 내면이 다른 사람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기도하는 사람과 말이 ( 가면 )을 쓴 자처럼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를 좋아하여 거짓된 삶을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가면을 쓴 거짓 기도를 버리고 행동과 마음이 일치되는 기도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기도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4) ( 중언부언 )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말을 ( 더듬다 )에서 유래된 말로써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계속함으로써
오랜 시간을 보내는 기도방식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 핵심적인 ) 말을 간결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래 기도하는 것은 전략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제목과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한 후에 기도를 시작하는 것도 이러한 잘못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장소

기도의 장소는 어디인가요?

(1) 기도 장소는 ( 어느 곳이든지 ) 가능합니다.
딤전2:8 그러므로 ( 각처 )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기도의 ( 장소 )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 어디에서나 ) 기도할 수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바로 ( 성도 )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 집 )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 중 남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각처에서 기도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각처는 헬라어 뜻으로 ( 모든 )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2) 예수님이 추천하신 기도 장소는 ( 골방 )입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 골방 )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왜 예수님께서는 ( 골방 )기도를 명령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하는 목적이 아버지 하나님
만을 만나 비밀스럽게 대화하며 영적교제를 가지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타인에
게 공개되어 자신의 기도시간이나 모습이 ( 자랑 )이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 보상 )을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시기에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주는 은혜를 충분히 ( 겸손 )하게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예: 통회하는 회개, 신비한 경험들)

(3) ( 산 )이나 ( 교회 예배당 )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막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 산 )으로 가시니라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 성전 )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기도는 어느 곳이든지 가능하지만,예수님은 정해진 장소인 ( 산 )으로 갔습니다. 늘 기도하던( 산 )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 아무에게도 ( 방해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공개적인 기도처인 ( 성전 )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기도했습니다. 공식적 기도처인 ( 예배당 )에서 기도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과 영적 교제 시간을 갖으며 공동체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갖는 것 역시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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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기도, 그 관습과 전통

들어가는 말  
기독교인들이 실제의 삶에서 신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실천적 토대를 언급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터인데, 그 중에서 '기도'가 위치한 자리가 앞머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어보인다. 그만큼 기도는 중요하다. 따라서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들이는 노력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의 대부분이 기도의 영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모습에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우일까? 기도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 영성적인 면뿐만 아니라, 기도의 문화가 형성되어 온 과정과 그 관습, 그리고 전통을 이해함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중요한 기도의 관습과 전통이 기독교의 기초와 맞닿아 있는 유대교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이 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비록 유대교라는 제한된 배경만을 다루고 있지만, 기도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교의 기도 
기도의 형식 내지는 습관 그리고 대상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종교적 현상으로서의 기도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지하면, 기독교의 뿌리랄 수도 있는 유대교 안에 기도의 전통과 습관이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사도행전 3장 1절을 보면, "제 구시(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라는 구절이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유대교의 기도관습에 익숙해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의 전통에서 볼 때, 우리의 기도 관습은 대단히 개인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통일된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유대교의 그것은 훨씬 더 양식화되어있고 규범화되어 있으며, 보다 공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네 예배에서 기도는 '목회기도' 내지는 '회개기도'의 형식으로, 그리고 '주기도' 등의 순서로 한 두 차례 목차에 오르는 것으로 역할을 끝내고 있으며, 개인이 시간을 내어 자원해서 드리는 기도의 측면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예배와 기도를 따로 구별해 낼 수가 없다. 그들의 예배는 기도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도는 공식적인 것이다. 물론, 개인 기도 역시 매일 드리는 상시적인 기도 습관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만, 워낙 그들의 삶이 공식적인 기도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개인 기도라는 구분된 시간의 필요성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달력이 기본적으로 예전적인(liturgical) 시간 구분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더 분명해진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기도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설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유대교의 기도의 가장 기본 단위는 '하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루'의 연속이 곧 절기(festival)로 연결된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기는 유월절(페싸흐), 오순절(샤부오트), 그리고 초막절(쑤코트)이며, 이 절기에 드리는 기도가 따로 공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절기들로 가득 찬 한 해의 문을 여는 시기가 유대 달력상 신년이며, 이 때를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일년의 시작, 혹은 머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러한 절기에, 그리고 매일마다 드려지는 기도의 관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기도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 글에서 지면 관계상 유대교의 모든 기도를 소개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도를 몇 가지 골라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매일 드리는 기도(Daily Prayers)  
유대교에서는 하루에 드리는 기도를 세 차례로 규정하고 있다:

(1) 아침기도(샤하리트);
(2) 오후기도(민하);
(3) 저녁 혹은 밤기도(마아리브).

이렇게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해 놓은 것은 하루를 기준으로 나타나는 시간의 변화(해 뜰 무렵, 석양 무렵, 밤)에 맞춘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루에 드리는 세 번의 제사(아침, 석양 무렵, 그리고 밤) 시간과 연결해 놓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바빌론 탈무드, 베라코트 4:1).

매일 드리는 기도는 안식일과 절기 기도의 기본형태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기도자에게는 몸을 깨끗하게 할 것이 요구된다. 몸을 씻고,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도드리는 장소는 개인의 집이나 회당, 둘 다 가능하다. 어떤 장소이건 청결해야 하며, 사람을 자극하는 향내나 냄새가 나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 시간은 대략 한 차례의 기도에 낮 시간의 1/3 정도가 소요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탈무드(아루크, 58:1)는 낮과 밤을 열 두 시간씩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한 차례의 기도 시간은 네 시간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네 시간 동안 물리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이다. 랍비 요하난은 "사람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바빌론 탈무드, 베라코트, 21a)라고 말했는데, 그 뜻은 어느 사람이건 하루종일 하나님 앞에서 그와 교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식위에 존재하는 '마음'은 기도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러한 점은 기독교나 유대교나 다를 것이 없다. 

(1) 아침기도(샤하리트)


아침기도는 우선 '아침의 축복문'(비르코트 하샤하르)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대예전(Jewish liturgy)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은 "하나님은 자신을 끊임없이 역사 속에, 자연속에, 그리고 인간의 매일 삶 속에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전은 이러한 '신적 계시'(divine revelation)를 강조하고 확인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아침에 드리는 축복문에는 그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것이 계속해서 지속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 다음 순서는 '찬양의 노래'(페수케이 데지므라)로서, 묵상(meditation)과 찬양이 결합되어있는 시간이다. 우리의 예배로 치자면, 공식 예배 전에 신자들이 교회에 일찍 나와서 묵상하고 찬양하는 시간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이 시간에는 시편 84편 5절, 144편 15절이 불리워지고 난 후에 시편 145편 전체가 기도문으로서 암송된다. 찬양이 끝나면 공식예배가 시작되며, 우리가 잘아는 '쉐마'(들으라!)가 기도문으로 드려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쉐마는 일종의 신앙고백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도신경 암송과 같은 성격을 갖고있다. 그들은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체성과 그 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쉐마는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6장 4절-9절('하나님 나라의 신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 외에도, 신명기 11장 13절-21절('지켜야 할 계명들'), 그리고 민수기 15장 37절-41절('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상기')등의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 순서는 '서서 드리는 기도'(아미다)이다. 미쉬나(Mishnah)에서 그저 단순히 '기도'(???? 테필라)라고 표현되어있는 것은 모두 '아미다'를 지칭할 정도로 대표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도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모든 헌신에 관한 기사들을 그 내용으로 하고있다. 기도자들은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 모두 서 있어야 하며, 이러한 전통은 에스겔 1장 17절에 천사들이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데서 비롯되었다. '아미다'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는데(찬양, 간구, 감사), 이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자연스런 기도의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드려지는 기도는 '간구'(타하눈, supplication)이다. 기도의 중심인 '아미다'가 끝나면 '마침기도'(the concluding prayer)를 드림으로 예배가 끝나는데, '아미다'와 '마침기도' 중간에 드리는 기도가 '타하눈'이다. 이 기도는 기도자의 헌신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기도로서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다소 긴 형태의 기도가 드려지고 나머지 요일에는 짧은 기도가 드려진다. 간구가 끝나고 예배가 마쳐지기 전에 유대인들은 '케리아트 토라'(토라 낭독) 시간을 가진다. 이 시간은 기도 드리는 시간은 아니지만, 유대교 예배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유대인들의 회당(synagogue)에 가보면, 예배당 전면에 화려하게 치장해놓은 커다란 상자를 볼 수 있는데, 그 안에는 토라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안식일 예배 시에는 사람들이 토라를 상자에서 꺼내 토라를 들고 예배당 전체를 한 바퀴 돈 후에 짜여진 순서대로 낭독자들이 나와서 막대기('손'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막대기)를 짚어가면서 토라를 낭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안식일에는 강론이 뒤따르지만 매일 예배에는 강론이 없다. 토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따로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토라 낭독은 일주일에 삼일 이상을 걸러서는 절대로 안된다. 아침기도가 마쳐질 시간이 되면, 기도자들은 시편 145편을 '마침기도'(concluding prayer)로 암송한다. 

(2) 오후기도(민하):

원래 '민하'라는 이름은 엘리야가 바알의 제사장들과 적대했던 상황에서 드려졌던 희생제사(왕상 18:29, 36)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유대인들이 매일 오후에 드렸던 제사를 중심으로한 예배를 의미한다. '민하'는 기본적으로 '아미다'를 중심으로 드려지는 예배이며, '아미다'를 드리기 전에 찬양기도(페수케이 데지므라)에 사용되는 시편 145편을 읽음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기도에서는 모든 간구나 헌신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민하'에서 '아미다'는 묵상으로 드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후에 짧은 '타하눈'을 드림으로써 오후기도를 마치게 된다. 오늘날에는 오후 열두 시 삼십 분에서 해질 녘 사이의 시간에 '민하'가 드려지며, 가장 최적의 시간은 오후 세 시 삼십 분에서 네 시 사십오분까지, 혹은 어두워지기 한 시간 반 전까지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3장 1절의 '구시 기도시간'은 오후기도로 이해함이 타당해 보인다. 

(3) 저녁, 혹은 밤기도(마아리브):

저녁기도는 기본적으로 아침기도와 그 형태가 거의 흡사하다. 단지 예배를 여는 시작기도와 마침기도가 없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따라서 저녁기도 역시 '쉐마'와 '아미다'가 그 중심이다. 저녁기도는 시작기도 대신에 시편 78편 38절과 20편 10절을 암송함으로 드려진다. '타하눈'은 저녁기도에서 생략되며, '아미다'를 드린 후에 '알레이누'라는 찬양을 드림으로써 예배를 마치게 된다. 저녁기도를 드리는 때는 탈무드에 의하면 "육안으로 별 세 개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 질 때"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그저 해가 진 직후 정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 예전에서는 전통적으로 '민하'가 드려진 직후 저녁기도를 잇따라 드리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2. 안식일에 드리는 기도(the Sabbath Prayers)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주머니를 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혹시나 주머니에 물건이 들어있으면, 안식일에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옮기는 일을 하게 될까봐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만큼,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날이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일주일의 첫 날부터 안식일을 위해서 준비하며 좋은 음식을 그 때부터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식일은 창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쉼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으라"고 하셨던 것을 그들은 잊지 않는다. 그래서 안식일은 촛불을 켜는 일과 함께 시작된다. 촛불은 흔히 금요일 해지기 전에 켜지며, 촛불을 켜면 평상시에 드리던 '민하'를 조금 일찍 시작함으로써 안식일 기도를 시작한다. '민하'에 이어 역시 '마아리브'를 드리는데, '타하눈'은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기도가 마쳐지면 부모가 아이들을 전례에 따라 축복하는 관습이 있으며,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나눈다. 요즘에는 금요일의 이른 저녁에 '마아리브'를 드리는 것이 현실 여건상 어렵기 때문에 밤 늦은 시간에 '마아리브'를 드리는 것도 허용되고 있다. 안식일 아침이 되면, 아침기도(예배)를 드리는데, 평상시에 드리던 기도보다 몇가지 성경귀절이 첨가되어 조금 길어진 기도를 드림으로써 안식일 아침예배가 드려진다. 아침예배를 마치면, 매일 드리던 희생제사에 잇대어 특별한 안식일 제사를 드린다. 유대인들은 예전에서 '연속성' (continuity)을 무엇보다 중시해서 매일드리는 희생제사를 먼저 드린 후에야 이어서 안식일 제사를 드린다(민 28장, 29장; 바빌론탈무드, 요마 33b). 통상적으로 아침예배 전에는 음료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음식이든지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병이 있는 경우는 예외),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유대인들은 함께 금요일 저녁과 같은 형태의 공동식사를 한다. 이어서 '민하'를 드리고 난 후에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마아리브'를 드림으로써 안식일 예배를 마감하게 된다. 

3. 절기에 드리는 기도(Festival Prayers) 

(1) 유월절(페싸흐):

유월절은 팔 일동안 지속되는 유대교의 절기로서 우리가 알다시피 대단히 중요한 절기이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날 저녁에는 평상시에 드리는 것과 같은 '민하'와 '마아리브'를 드리는데, 단지 안식일처럼 촛불이 켜진다는 점이 다르다. 그날 밤에는 다 함께 모여서 유월절 식사를 하는데, 이것에 관한 관습과 전통을 기록한 책을 '하가다'라고 하며, 유월절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무교병과 쓴 나물 그리고 구운고기를 먹는 식사와 더불어 부모들은 유월절이 갖는 해방과 자유의 정신을 출애굽기 13장 8절에 근거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왜 이날은 다른 날과는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유월절 첫날은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안식일에 드리는 아침기도를 드린다. 토라낭독 시간에는 특별히 출애굽기 12장 21절-51절을 읽으며 이에 상응하는 '하프타라'(성경의 토라 이외의 부분)로서 시편 24편과 29편이 낭독된다. '민하'와 '마아리브' 역시 안식일에 준하는 기도로 드려진다. 둘째 날 역시 첫째 날과 똑같은 예배와 기도가 드려지며, 낭독하는 시편에 있어서만 조금 차이가 있다. 셋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일종의 '준 명절'(semiholidays)로서 지켜진다. 이 나흘 동안은 다른 평상시에 드리는 것과 똑같은 세 차례의 매일기도를 드리며, 약간의 제약은 있지만 일하는 것도 허용된다. 특이한 것은 이 기간동안에는 결혼식을 치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처음 이틀과는 달리 무교병을 먹어야하는 의무에서도 풀려난다. 따라서 이 기간동안에는 유월절 식사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칠일 째와 팔일 째는(이스라엘은 칠일째만, 다른 지역에서는 이틀 동안) 유월절의 처음 이틀 동안처럼 거룩하게 여겨지므로, 그 이틀과 똑 같은 행사와 기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오순절(샤부오트):

유월절이 끝나고 나서 오순절이 시작될 때까지의 기간을 '쎄피라'(counting)라고 한다. '쎄피라'가 끝나면 오순절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삼대명절 가운데 두 번째로 맞는 절기이며, 이 절기에 관한 역사비평적 이해가 어떠하건 간에,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그들의 역사 속에서 추수 감사절로 여겨왔다. 따라서 단순히 날짜의 셈을 의미하는 오순절(샤부오트, 신 16:10-12)이라는 명칭 외에도 '추수명절'(하그 하카찌르, 출 23:16; 34:22)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미쉬나에 의하면, 이 절기에는 유월절과 같은 수준의 기도와 예배가 드려져야 하며, 낭독하는 성경만 다를 뿐이다. 흔히 첫째 날에는 출애굽기 19장, 20장 그리고 민수기 28장 26절-31절이 낭독되며, '하프타라'로서는 에스겔서가 읽혀진다. 둘째 날에는 신명기와 하박국 말씀이 읽혀지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절기의 첫날에는 온 밤을 새워서 잠을 자지 않고 토라를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설에 의하면, 잠들어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둥과 번개를 사용해서라도 깨워서 말씀을 공부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이 전통은 중시되고 있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둘째 날에는 룻기를 읽는 관습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룻이 이스라엘에 돌아온 때가 오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다윗이 오순절에 죽었다는 전설에 기초해서 룻이 다윗의 선조이므로 룻기를 읽는다든지, 혹은 룻기가 성문서(케투빔)의 제일 첫 번째 책이므로 오순절에는 룻기를 선택해서 낭독한다는 설명들이 있다. 

(3) 초막절(쑤코트):

레위기 23장 42절, 43절에서 비롯된 쑤코트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그 안에 농업문화가 갖는 추수 감사의 성격이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다른 절기들처럼, 처음 이틀은 거룩한 날로 지키며 중간의 나흘은 '준 명절'로 지킨다. 유월절과 오순절에 드리는 예배의 형식이 그대로 이 절기에 드려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마지막 이틀은 다른 절기와는 달리 '쉐미니 앗쩨레트' 그리고 '심핫 토라'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적인 절기로 지켜진다는 점이다. 이 두 명절은 초막절을 마감하면서 기쁨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특히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대망을 마음 속에 확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절기가 시작되기 나흘 전부터는 금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축제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반드시 나무와 풀로 지은 '초막'(쑤카)을 만들어 그 안에서 지내는 체험을 해야 한다. 초막을 만드는 규정은 미쉬나와 탈무드 속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가는 말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와 관련해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관습과 전통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절기에 드려지는 기도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삶은 하루 하루, 일주일, 그리고 일년 내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예배가 형식으로 드려지는 무미 건조함을 탈피하는 생기로 가득 차 있기만 하다면, 이러한 기도의 전통은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저명한 유대교 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쉘(Abraham J. Heschel)은 그의 책 Man's Quest for God에서 랍비 메이어(R. Meir)의 입을 빌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신발 고치는 사람이 기도 때문에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의 고객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어서 해질 녘에 일을 끝낸 후에야 신발을 받아서 밤새 새벽까지 그것들을 수리한 후에 그들이 일 나가기 전에 배달을 해야했으니, 그에게 기도시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가 그저 내 뱉을 수 있었던 말은 고작해야, "이런, 아직도 아침기도를 못 드렸네…아이구"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헤쉘은 이것이야 말로 한숨 속에 숨어있는 생활인의 위대한 기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도가 공식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스며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기도는 위대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 늘 하나님과 마주하는 기도의 시간에 이러한 열정까지 소유한 기도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유대인의 일상 기도에 관한 정리

유대인은 매일 하루 세차례에 걸쳐서 기도시간을 가진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테필라(Tefilla, 혹은 복수형태로 테필로트)라고 한다. 이 기도시간에 사용되는 여러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기도책을 시두르(Siddur)라고 한다. 탈무드에 의하면, 하루 세차례씩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루 세차례씩 봉헌물이 올려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각각 아침기도, 오후기도, 저녁기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도는 개인기도와 공중기도가 있는데, 공중기도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도회 정족수(보통10명)가 채워져야 하며, 기도회정족수를 히브리어로 민얀(Minyan)이라 한다.

하루 세차례 드리는 기도시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아침기도 : 샤하리트(Shacharit, “아침 빛”이라는 의미)

오후기도 : 민하(Mincha, 소제(素祭, 곡식으로 드리는 봉헌)를 의미)

저녁기도 : 마아리브(Ma’ariv, “일몰”의 의미임) 혹은 아르비트(Arvit, “저녁”의 의미)

위에 열거된 매일 드리는 세차례 기도시간외에 안식일이나 절기, 월삭등 특별한 날에 드리는 기도시간이 있는데, 그것을 무사프(Musaf, “추가”의 의미임)라고 한다. 또한 매년 속죄일(욤키푸르)에 특별히 드리는 기도시간이 있는데, 네일라(Neila, 영어로는 “closing”으로서, “결산”혹은 “마무리”의 의미)라고 한다.

매일 드리는 세차례의 기도 시간중 아침기도시간(샤하리트)의 과정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나머지 기도시간도 대동소이하다.

(1) 비르코트 하-샤하르(birkot ha-shachar, “morning blessing”의 의미)

(2) 페수케이 데지므라(Pesukei D'Zimrah, “찬양시(詩)”의 의미) ; 시편100, 145~150, 출애굽기14~15장등으로 구성됨

(3) 쉐마(Shema)

(4) 아미다(Amidah, “일어서서 드리는 기도”의 의미); 이것은 매일 드리는 세차례 기도시간에 모두 포함되는 중심이 되는 기도순서이며, 19개의 찬송시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18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쉐모네 에스레이(Shemoneh Esrei, "18"의 의미)라고도 불리는데, 야브네(Yavneh; AD70년 예루살렘 성전파괴후 산헤드린이 거처를 옮긴 지역)시절에 1개가 추가되어 현재는 19개이다.

1. 아보트 Avot (조상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함

2. 게부로트 Gevurot  (능력);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찬양함

3. 케두샤트 하쉠 Kedushat ha-Shem (성호);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함

4. 비나 Binah (명철); 우리에게 명철과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함

5. 테슈바 Teshuvah (회개); 토라를 지키는 삶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간구함

6. 셀리하 Selichah (용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함

7. 게울라 Geulah (구속);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8. 레푸아 Refuah (치유); 치유를 간구함

9. 비르카트 하샤님 Birkat HaShanim (풍년); 풍년을 기원함

10. 갈루요트 Galuyot ("diasporas");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땅으로 다시 모일 것을 간구함

11. 비르카트 하딘 Birkat HaDin (공의); 공의의 회복을 간구함

12. 비르카트 하미님Birkat HaMinim (이단); 이단을 멸하여 주시기를 간구 (*야브네 당시 첨가된 항목)

13. 짜디킴 Tzadikim (의인); 의인에 대한 축복을 간구함

14. 보네 예루샬라임 Bo'ne Yerushalayim (예루살렘의 재건); 예루살렘의 재건을 간구함

15. 비르카트 다비드 Birkat David (다윗의 자손); 메시아의 도래를 간구함

16. 테필라 Tefillah (기도);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시기를 간구함

17. 아보다 Avodah (성전제사); 성전제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구함

18. 호다 Hoda'ah (감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

19. 심 샬롬 Sim Shalom (큰 평강);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를 간구함

(5) 타하눈(Tachanun, “간구”의 의미)

(6) 케리아트 하토라(K'riat HaTorah, “토라를 봉독함”의 의미)

(7) 알레이누(Aleinu, ”우리의 의무”의 의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임을 고백하는 폐회송



Jewish Prayer

유태인기도 ɪləs]; 영어: Yiddish davening דאַוון davn '기도하다')는 랍비 유대교 준수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도문입니다.
종종 지침과 설명이 포함된 이러한 기도문은 전통적인 유대인 기도서인 Siddur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봉사"로서의 기도는 원칙적으로 율법에 근거한 계명입니다. 이것은 유태인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시대를 초월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특정 기도문을 암송하라는 랍비의 요구 사항은 남성과 여성에 따라 다릅니다. 유대인 남성은 특정 시간 범위 내에서 매일 세 번의 기도(zumanim)를 암송해야 하는 반면, 많은 접근 방식에서는 여성이 한 번만 기도하도록 요구합니다. 또는 특정 구절을 하루에 두 번 암송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매일 세 번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침기도: Shacharit 또는 Shacharit (שַחֲרִית, "새벽에") 오후 기도: Mincha 또는 Minha(מִנְחָ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드리는 밀가루 제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저녁 기도: Arvit (עַרְבִית, "저녁의") 또는 Maariv (מַעֲרִית, "밤을 가져오다") 안식일과 공휴일에는 두 가지 추가 예배가 낭독됩니다. Mussaf(모사프, "추가")는 안식일, 유대교의 주요 명절(Chor Hamoyed 포함) 및 Rosh Chodesh에 정교회 및 보수파 회중이 읽습니다. Neelas (נְעִילָה, 'Closing')는 Yom Kippur에서만 외칩니다. 개인 기도와 미니안으로 알려진 정족수가 필요한 합동 기도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다음을 포함할 수 있는 합동 기도가 선호됩니다.

전통에 따르면 현재의 표준기도 중 많은 부분이 초기 제2성전 시대(기원전 516년 – 서기 70년)에 그랜드 카운슬의 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기도문은 분명히 현대적이지만 종종 성경의 관용구를 사용합니다.
현대 경건 예배의 주요 구조는 탄나 시대(서기 1-2세기)에 고정되었으며, 일부 추가 사항과 축복의 정확한 텍스트는 나중에 나타납니다. 유대인의 기도서는 중세 초기 바빌로니아 시오니즘 시대(서기 6~11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Ashkenazi, Sephardi, Yemen, Eretz Israel 등 또는 Hasidism 및 Chabad와 같은 최근 전례 발명품. 그러나 차이점은 유사점에 비해 미미합니다. 대부분의 유대 전례는 전통적인 선율과 은유에 따라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회당은 특히 안식일과 공휴일에 회중의 기도를 인도할 목적으로 전문가나 평신도 하잔(칸토르)을 임명하거나 고용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9편]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내 고백 되기를


시편 기자들의 일상생활:

말씀ㆍ기도ㆍ찬송은 시편 기자들의 일상생활입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4절)"고 한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왜 기도하나요?


1. 기도는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반 종교에도 기도의 행위는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기도가 더 진지하고 엄숙한 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도를 받으실 대상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기도를 받고 응답하는 분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 에 따라 크리스천이 드리는 기도는 타 종교와 차이를 보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고 우리가 말씀대로 기도하면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기도는 악을 선으로 바꾸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2~3절)"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은 선을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지만 하나님은 이와 반대로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는 요셉이 당했던 어려운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인 요셉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말씀이 이를 잘 대변하지요.


3.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17~18 말씀)"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평탄한 일만 있을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까닭없는 모함과 공격을 받기도 하고 힘든 일을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내 귀에 모함이나 조롱, 비방하는 말이 들린다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한 사람만 속임과 미움을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믿음의 신앙인들도 이유없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다윗의 고백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바꾸어 기도로 이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 모두는 기도를 가까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안에서 복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 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 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반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신경이 참 고백이 되려면 그 고백이 사도들이나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닌 내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첫 부분부터 아주 중요한 고백이 나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모순과 무능함과 연약함과 끈기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님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원형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부르짖어 기도했고 아주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간구’입니다. 삼손도 간구합니다. 다윗도 간구합니다. 기도는 소리를 내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조용히 되새김질 하며 나의 삶을 돌이켜 보고 하나님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어가게 합니다. 기도는 간절하게 부르짖고 말씀은 묵상을 하며, 돌이킬 것과 따라갈 것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그런데 이 부르짖는 기도를 하다 보니까 회개가 어려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귀와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지요. 부르짖는 기도를 하다 보니까 공통분모를 위한 기도는 가능한데 나 자신만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어색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서 기도할 때 자꾸만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회개와 결단의 기도보다는 다른 사람 들으라고 자랑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더욱 그랬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어느새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기도가 자기 자랑으로 바뀌었습니다. 형식은 여전히 부르짖는 것이었으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도가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만 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본문이 아닙니다.
원형적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골방에서 부르짖어도 되고, 회중앞에서 부르짖어도 됩니다. 중요한 핵심은 기도의 대상이 결코 사람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기도가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묵상과 침묵이 강조됩니다. 결국 기도하다가 잠을 자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유혹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부르짖음이요 간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그랬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도 그랬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결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꺽어버리려면 역시 부르짖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억제하는 것도 탄식과 부르짖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담은 간절함도 부르짖음에서 시작됩니다.
은밀한 중에 골방에서는 기도의 대상을 가르치시기 위한 표현이셨습니다.
기도의 방법은 여전히 부르짖음과 간구입니다. 예수님도 부르짖으셨습니다. 바울 목사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은밀한 중에 침묵으로 기도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큐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보니 교회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목회자만 남은 교회가 절반이나 됩니다.
저희에게 오셔서 부르짖는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본래적 기도가 회복되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