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順從) - 순종(ὑπακοή)에 대하여
기독교의 윤리적 덕목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한다면, ‘순종’(ὑπακοή)이라는 말이다.
‘순종하다’라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후파쿠오(ὑπακούω)이다(마 8:7, 막 1:27, 눅 17:6, 행 6:7, 롬
6:12, 엡 6:1, 빌 2:12, 살후 3:14, 벧전 3:6).
이 단어는 ὑπό와 ἀκούω의 합성동사로서 ‘∽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무엇의 권위 아래에 듣는다"는 것은 자신을 거기에 굴복시키며 드리는 헌신을 포함한
순복(obey)을 의미한다.
순종의 원래적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listen to, hearken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2:13에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문을 두드릴 때에,
계집종 로데가 베드로의 문두드림에 "영접하였다" 라고 할 때에, 단어 ὑπακούω가 쓰였다.
무엇인가의 신호에 듣고 응답하다의
의미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이다.
이 동사의 다음에는 주로 여격 명사들이 오는데, 사람이나, 혹은 복음, 믿음, 가르침,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목적어로 쓰였다.
순종하다의 반대말, ‘불순종하다’의 동사는 ‘듣지 않다’ ‘듣는 것을 거부하다’의 의미로
παρακούω(παρα+ ἀκούω)라고 표현된다.
이 뜻은 "∽ 곁에서, 나란히 듣다"의 의미로, 아래에서 듣는 것과 달리,
받아들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한다, 맞선다는의 뜻이 된다.
불순종(παρακοή)은 아래에 있으며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옆에서
대등하게 맞선다, 듣지 않는다 는 것이다(롬 5:19; 고후 10:6; 히 2:2).
순종하다 라고 번역되는 다른
동사는 후포타쏘(ὑποτάσσω, 눅 2:51; 10:17, 20; 롬 8:20; 엡 5:21)이다.
이 단어 역시 전치사
ὑπό와 동사 τάσσω의 합성동사인데, 직역하면 "∽의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 의 뜻이다.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에게 순종한다(눅
2:51)의는 것은 자발적 순종(voluntary submission)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동시에 강제적인
굴복(compulsive subordination)을 의미하기도 하여서, 70인의 제자는 귀신이 자신들에게
항복한다(ὑποτάσσω)고 예수님께 보고하며 기뻐하였다(눅 10:17, 21).
이 단어는 굴복(롬 8:7), 혹은 복종(롬
10:3, 고전 15:27))의 의미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권위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제적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다(엡 1:22; 5:24; 약 4:7; 벧전 3:22).
동시에 이 단어는 인간의 권위나
제도에 순복하라고 말할 때에도 쓰인다(롬 13:1; 고전 14:34; 골 3:18; 딛 2:5, 9; 3:1; 벧전 2:13,
18; 3:1).
사도행전에서는 순종하다의 의미로 한 특별한 동사를 쓰고 있다.
동사 페이사르케오(πειθαρχέω)는
πείθω와 ἄρχω의 합성동사인 데, 순종하다 혹은 듣다 로 번역하고 있다(행 5:29, 32; 27:21).
πείθω는
‘설득하다’(persuade)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ἄρχω는 ‘처음이 되다, 우선이 되다’(be first)의 뜻이다.
그래서
이 합성동사의 의미는 "설득하여 우선이 되게 하다"의 뜻이 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공회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협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면서, 종교권력이나 인간의 지위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선포한다.
이들의 담대한 순종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삶이 바뀌었다.
πειθαρχέω의 단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설득되어서 예수를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체험하지 않고서, 무조건 믿고 순종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보고 들어서 고집스럽고 교만한 인생이 설득된 것이다.
예수를 인생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삶의
우선순위로 삼게 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하다(πειθαρχέω)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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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갈릴리 호수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은 "나는 죄인입니다"이다(눅 5:8).
원어로는 ἀνὴρ
ἁμαρτωλός εἰμι(아네르 하마르톨로스 에이미)
ἁμαρτωλός(하마르톨로스)는 sinful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직역은 "나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죄 된 사람입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인데, 이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죄"는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
"죄" 문제는 종교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동물 제사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렸다.
레위기 4장은 동물제사가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27~30 일반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실수로,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 가운데서 하나를 어겨서, 그 허물로 벌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곧 자신이 지은 죄를 속하려고,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끌고 와서, 그 속죄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에,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곳에서 그 속죄제물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
이 단락은 일반 백성 한 명이 죄를 지었을 경우 암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지침을 보여준다. 이 단락 앞에는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3절), 이스라엘 온 회중이 공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13절), 최고 통치자가 죄를 지었을때(22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침이 담겨 있는데, 이 단락과 별로 다를 것 없다.
"죄"가 있어야, 제사도 필요하고 제사장도 필요한 것이니, 종교는 대개 "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 교리도 "죄"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래는 이재철 목사가 쓴 <새신자반>의 목차이다. 론 다음에 인간론이 나오고, 기독론이 그 뒤를 잇는 것을 볼 수 있다. 2장 인간론이 주장하는 핵심은 하나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고, 성경의 계시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하고, 예배도 필요하고 교회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논리적 전개는 필요하지 않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흔히 "죄"를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설명한다. 충분한가? 성경이 말하는 "죄"를 이 문장은 포괄하고 있는가?
성경은 "죄"에 대하여 더 풍부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범위를 살짝 좁혀 보자.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범죄"라고 한다. 성경에 이런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ex. 막 14:41-2), 이 글의 논의에서는 빼기로 하자. 범죄는 성경이 설명하는 죄이기 이전에 세상의 법률로 규정된 죄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범죄를 빼고나면,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죄인"의 용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특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죄"라고 여겼고, "그런 사람을 죄인"이라 여겼다.
1.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상태를 "죄"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디모데전서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고백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유대교가 제시하는 율법 준수나 성전 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죄인이라 불렸다.
누가복음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누가복음 18: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 9:1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3.초대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신앙적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불렀다.
야고보서 4: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서 5:20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4.이방사람들, 곧 이스라엘 선민의식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여겼다.
갈라디아서 2: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죄"와 "죄인"은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와 사람을 이르는 언어였다. "기준"이라는 것은 늘 "바운더리"로 작용한다. "죄"와 "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작용하였다기 보다는 사회적 바운더리로도 작용한 언어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2번의 죄 개념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내내 맞닥뜨린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2번의 죄 개념을 통하여 형성된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 기준에 의해 밀려나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하기 위해 애쓰셨다. 예수님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고 자신들은 의로운 체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고 맞서 싸우기까지 하셨는데, 그 결과 죽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의미는,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이런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에서 나온 고백이다.
반면 바울 사도는 4번의 죄 개념에 맞서 싸우셨다.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죄" 개념과 그것이 쌓아 올린 강고한 벽에 맞서 싸웠고, 그런 도전 중에 칭의론도 나오게 된 것이다. ]
성경의
죄 문제는 1번 개념이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이때 "죄인"은 인간의 한계성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종교적 권력과 규범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2번, 3번, 4번 죄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이런 죄 개념들이 "바운더리 마커"(boundary marker)로 작용하면서 죄는 약자들에 뒤집어 씌워지는
굴레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다 죽임 당하셨고, 바울 사도는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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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갚아주다)
헬라어 동사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신약성경에 48번이나 사용된 동사로서 전치사 ἀπό 와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결합된 복합동사로서, 성경에 많이 사용된 동사 δίδωμι(디도미, give)의 뜻을 다양한 의미로서 파생한다.
첫째 의미는 ‘주다’(give)의 의미를 강화하여 ‘내어주다’(give over)의 뜻으로 공회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였다(마 27:58). 또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되돌려주다’(give back)의 뜻을 가지고(눅 4:20; 9:42), 돈이나 빚을 되갚거나 보상하다(pay back)의 의미로도 확장되었다(마 18:25; 20:8).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상호교환의 의미가 있어서 물건을 사고 팔다(sell, 행 5:8; 7:9), 팔아 넘기다(히 12:16)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둘째 의미는 보상과 댓가로 갚아주다의 뜻이다(롬 2:6; 12:17; 계 22:12)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자신에게 의의 월계관이 주어질 것이다고 하였고(딤후 4:8), 예수님은 은밀히 구제하거나, 은밀히 기도하거나, 은밀히 금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 했다(마 6:4, 6, 18). 이 단어는 관념적으로 확장되어 ‘열매를 맺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계 22:2).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추상적으로 이런 의미로 확장된 것은 믿음의 싸움이나 경주 후에 받게 되는 보상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동사 δίδωμι(디도미)가 ‘선물’ 곧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보상과 열매를 바라는 헌신과 희생의 응답을 말하고 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상과 영광이 주어지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심판이 있게 된다(계 2:6; 딤후 4;14; 마 16:27).
마지막으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더욱 관념화된 뜻을 가지고 있는 데, 부부의 의무를 다하다(고전 7:3), 부모에게 효도를 실천하다(fulfill, 딤전 5:4)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 맹세한 것을 지키다(keep)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마 5:33). 이러한 윤리적 차원의 단어사용은 맹세의 의무, 부부의 의무, 자녀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헬레니스트적 유대교라는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의 종교적 일상적 측면을 이 단어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다’라는 뜻의 동사 δίδωμι(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416번). 빌립보서, 빌레몬서, 유다서를 제외하고 δίδωμι(디도미)는 모든 신약성경 책들에 나타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이다(목숨을 대속물로 주심, 막 10:45). 하나님이 인생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수많은 선물들이 있다. 이 단어의 주어로 사용된 ‘주신 자’(giver)가 하나님이신 것이 104개의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실천과 응답을 주어로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행 4:33), 자신이 행한 일을 셈하다(눅 16:2), 보고하다(마 12:36; 행 19:40; 히 13:17)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혜에 대하여 성도는 각자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말한 말과 행한 행위에 대하여
보고하고 변명하고 셈을 받아야 한다. 결국 성도의 삶은 두 단어에서 요약된다. 하나님의 선물을 강조하는 δίδωμι(디도미),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싸우고 있는 성도의 싸움과 달리는 영적 경주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열매로서의
ἀποδίδωμι(아포디도미),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의 삶이 성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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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ἔρως, φῐλία, ἀγάπη
사랑에 대한 그리스어가 셋이라고 한다.
에로스(ἔρως),
필리아(φῐλία),
아가페(ἀγάπη)가 그것이다.
사랑이라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단어가 이 셋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셋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각각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이 각각의 단어에
독특한 의미를 담아 사용하기 이전에 (또 이후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 단어들의 명사나 동사를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에도 이 세 단어 사이에는 두리뭉실한 구분이 있었다.
굳이 구분하여 말하자면,
아가페는 가장 넓고 얕은 사랑을,
에로스는 배타적이고(좁고) 진한 사랑을,
필리아는 그 중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다.
우리는 구호 단체를 통하여 얼굴 한번도 본적 없는 가난한 나라 아이에게 후원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행위가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런데 우리가 후원받는 아이를 방문하여 사귐을 갖고, 이제 그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면 아가페는 필리아로 발전된다.
우정이다.
그리고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 아이와 배타적인 사랑에 빠진다면 그
사랑은 에로스가 된다.
이렇게 사용되던 세 단어에 누군가가 독특한 그 단어 만의 의미를 불어 넣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 셋 중 둘을 설명한다.
아테네
출신 철학자들을 모은 이 한 장의 그림 한 가운데에 두 사람의 대표 철학자가 서 있다.
왼쪽에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가 이 책과 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랑은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육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에
대한 짧고 적절한 해석은 love of beauty 즉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여체가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순간이라 절대적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다고.
그 다음은 신의, 충성, 용맹과 같은 덕(virtue)이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고.
그리고나서 플라톤은, 절대적 아름다움은 결국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플라톤의 손가락은 에로스를 표현한 것이다.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가진 초월적 신이야 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주인이니,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신을 바라고 갈망하고 닮아가야 한다는 뜻을 손가락의 방향이 닮고 있다.
에로스는 이렇게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플라톤 옆에서 <윤리학(Ἠθικὰ)> Ἠθικὰ이라는 책을 들고 손으로 정면을 수평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책과 손은 필리아를 표현하고 있다.
필리아는 우정, 우애, 친애로 번역할 수 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무신론적이다.
그의 사랑의 범위가 초월을 향해 넓혀지지 않고 피조물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필리아는 친구 사이의 사랑이다.
이 때 친구는 인간 세계의 상하 기준으로 볼 때 동등하지 않은 관계일 수
있지만, 초월과 내재라는 이분법 틀로 볼 때는 모두 내재에 속한 존재들이기에 동등하다.
필리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이렇게 간단할리 없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로 적는다.
필리아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사랑의 의미로 사용되던 에로스와 필리아에 독특한 철학적 의미를 각각 담았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아가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신의 보편적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는 예수 이전 사람들에게 아주 낯선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철학자도 아가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이제는 흔해 빠진
크리세이(cliché) 가 되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생각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신이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인간이 신을 사랑해야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아가페에 담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을리 없다고, 그런 신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손에 무기력하게 죽은 십자가 사건과 그의 부활 사건은
다름아닌 아가페 사랑에 대한 증거라고.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실로 놀랍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아가페(ἀγάπη)
복음의 핵심에는 아가페(ἀγάπη)가 놓여 있다.
아가페를 사랑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에로스와 필리아도 사랑으로 번역된다.
각각의 사랑은 각각의 독특함을 가진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아래 다섯이 아가페의 특징이다.
1. 위로부터(from above)
요한일서 4: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아가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다.
받은 것 없이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복음이 아가페이고, 그 하늘 은혜가 아가페이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이 은혜가 내게 와 닿을 때 아가페를 만난 감격을 체험한다.
2. 댓가 바라지 않음(sacrificial)
요한복음 12:23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아가페가 증거되었다.
이 희생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희생이지만
곧 의미있는 희생이지만, 그렇다고 댓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바라는 것은 죽어 많은 열매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3. 조건 없음(unconditional)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복음을 설명하는 이 구절에서 사랑을 받은 대상이 "연약하고" "경건치 못하고" "죄인인" 사람이다. 강함과 경건과 의로움이 아가페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4. 받는 사람을 변화시킴(transformative)
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아가페의 능력이다.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변화된다.
변화에 대한 소망을 아가페의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
5. 차고 넘침(pleroma)
충만으로 흔히 번역되는 플레로마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장면은 오병이어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가복음 6: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차고 넘쳤다]
열두광주리에 차고 넘친 것과 같이 아가페이신 하나님의 본성은 차고 넘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충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향하여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아가페는 동적이고 운동한다.
받은 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하여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가페한다.
베드로전서 1: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위로부터"오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조건없이" 주어지고 "받는 사람을 변화시키면서" 계속 운동하여 "차고 넘치는" 사랑. 그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성이다.
에로스(ἔρως)
에로스(ἔρως)는 신약성서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명사형 에로스도 나타나지 않고 동사형 에라오(ἐράω)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군이 초대교회의 저자들인 Philo, Justin, Josephus, 속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의 작품에는 나타나는데 비해, 성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명사형 에로스만 74번 사용하였고, 필로는
에로스를 91번 사용한 것을 감안한다면, 성경이 에로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현상이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일점일획말씀묵상"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다행히 구약 칠십인역에 에로스의 동사형 에라오가
나타나는 곳이 있어, 이를 핑계로 에로스에 대한 묵상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잠언 4장 6절 말씀(LXX)이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고 권면할 때, "사랑하라"에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에스더 2장
17절은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 ."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에라오가 사용되었다.
성경 전체에
에로스-에라오가 사용된 예는 이 둘이다.
지금부터 쓸
에로스에 대한 글은 위의 두 구절에 대한 묵상글이 아니다.
두 구절을 핑계 삼아 "에로스"(동사형 에라오)에 대해 쓸 것이다.
성경에 빈번히 나오지 않는다 하여도, 에로스의 특별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묵상글을 쓴다.
에로스를 이해해야 아가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에로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먼저 에로스에는 세 차원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다.
제일 먼저 기억할 용법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로서의 에로스이다.
특별한 의미없이 그냥 일상 언어 속의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에 관한 단어들, 말하자면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동사형 아가파오 에라오 필레오)는 일상 대화에서는 별로 뜻 구별없이 사용되어 "좋아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었다. 예를 들어 위에 인용한 두 구절
잠언 4장 6절,
ἐράσθητι αὐτῆς(에라스쎄티 아우테스)
에스더 2장 16절
ἠράσθη ὁ βασιλεὺς Εσθηρ(에라스쎄 호 바실레우스 에스쎄르)
에라오에는 아래에서 논할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 쓰인 에라오 대신
아가파오(ἀγαπάω)나 필레오(φιλέω)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상의 차이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저 일상의 언어로 사용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2세기 안디옥의 bishop이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순교당할 예정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길에 여러 통이 편지를 썼다.
그 중 하나의 수신자는 로마의
교인들이었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행여라도 자신의 순교를 막으려고 노력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편지가 담고 있었다.
순교야 말로
주님과 연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확신에서 온 당부였다.
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Ign. Rom. 7:2
ζῶν ⸀γὰρ γράφω ὑμῖν, ἐρῶν τοῦ ἀποθανεῖν
조엔 가르 그라포 휘민, 에론 투 아포싸네인
번역하면,
"비록 내가 아직 산 채로 여러분에게 편지하지만, 나는 정말 죽기를 사모한다." 이다.
이때 죽음은 물론 순교를 뜻한다.
성경
밖의 많은 에로스 용례 중에 이 구절을 예로 든 이유는, 순교처럼 거룩한 내용을 말할 때도 아가파오가 아니라 에라오를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전혀 에로스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내용에도 에로스는 사용되었다.
일상의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의 언어로 뜻 차이 별로 없이 사용되던 "에로스-필리아-아가페"에 독특한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담기게 되었다.
아래에 필리아와 아가페에 대해 이미 쓴 글을 링크해 두었고, 이 글에서는 에로스의
철학적-신학적 의미를 다룰 것이다.
에로스의 두
번째 의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부정적 의미들이다.
여체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육체에 대한 사랑, 성적인(sexual) 사랑, 물질에
대한 사랑 등, 에로스는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의미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육욕의 에로스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향연>(심포지움)에서 이런 에로스에 대해 말하였고, 이런 에로스에 "통속적인"(πάν-δημος
판데모스)이라는 딱지를 붙인 바 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이데아를 향하여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것인데, 사다리 가장 아랫단을
차지하는 에로스가 통속적 에로스이다.
이 에로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나 아가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플라톤이 "천상적"(οὐράνιος 우라니오스) 에로스라고 이름 붙인
에로스이다.
일단, 에로스에 천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사실,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는
"천상적"이다.
그래서 단순히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적 에로스는 아가페의
강력한 경쟁자였고, 지금도 기독교 신앙 속에서 아가페와 경쟁 대립하고 있다.
아래에서 에로스의 천상적 의미를 셋으로 나누어 짧게 설명하겠다.
아래의 정리는 안더스 니그렌이 쓴 <아가페와 에로스>(크리스챤다이제스트. 163쪽 이하)를 참고한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플라톤의
에로스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순수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이데아의 세계에 대비되는 이 세상은 이데아 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요 형상(images)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절대적 미美와 절대적 선善을 추구하는데, 처음에는 이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지만,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차차 궁극의
미와 선, 곧 이데아 세계의 미와 선을 추구하게 된다.
세상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앞서 말한 "통속적 에로스"라면,
이데아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움직임, 이데아를 향한 상향의 움직임이 "천상의 에로스"이다.
플라톤의 에로스를 말할 때 보통은 이
"천상의 에로스"를 말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을 갈망하고, 알고, 닮고, 신과 하나되기 위한 일체의 상향 움직임이
에로스라 할 수 있다.
에로스를 통하여 위를 향하는 이유는 미와 선을 획득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신을 향한 움직임이 고상해 들릴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에로스의 기본 성격은 획득적이다.
또 이 점에서 에로스는 "자기중심적"이다.
신을 향해 나가는 움직임이 경건하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실은 자기중심적 욕구의 철학적-종교적 표현일 뿐이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희생적 타자중심적 성격은 에로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에로스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플로티노스에게 에로스는 핵심적 사상이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에 더한 것은 하향 개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 세계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감각 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향하는 일방향(상향)의 이데아론을 펼쳤다면, 플로티노스는 이데아로 올라가기
원하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데, 세상으로 유출(emanation) 되었기 때문에 위로 돌아가기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영혼의 신적 기원에 대해, 그리고 영혼의 하향-상향 움직임(Journey of the soul)을 주장한 것이다.
단순히 미와 선을 추구하여 상향하는 플라톤의 도식과 달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향해야 한다는 플로티노스의 도식은
상향 운동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에로스가 종교로 발전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밀의종교(Mystery religion)의 에로스
밀의종교를 세 번째로 말한다고 해서 에로스에 대한 사상의 전개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밀의종교 순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밀의종교와 플라톤/신플라톤주의는 함께 발전하며 상호 영향을 끼쳤다.
모든
밀의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이다. 물질세계와 육체에 갇힌 영혼의 구원, 곧 영혼의 상향, 곧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
목적을 위하여 밀의종교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교리와 제의를 발전시켰다.
디오니소스(Dionysus), 오피즘(Orphism),
아티스(Attis) 등이 그 예이다.
영혼의 상향을 위하여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밀의(密儀)"이다.
간략히 첨가하자면, 영지주의 종교도 여기에 속한다.
영지주의를
밀의종교의 기독교 버전이라고 설명하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밀의에 대해서 빌립복음서(Gospel of Philip)가
가장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다섯 종류의 거룩한 예식이 있는데, 그 마지막은 성찬식이 아니다.
성찬식은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서
뒤집어 써야 하는 망토(cloak)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예식은 밀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역시 쓰여있지 않다.
다만,
영혼이 육에서 해방되어 하늘을 향하여 떠나기 위해 그 밀의의식을 행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플라톤주의가
설명하고 밀의종교가 추구하는 영혼의 상향(구원)이 바로 에로스이다.
상향의 전제는 영혼이 먼저 하향하였다는 것인데, 어떤
신화에서도 이 하향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
하향한 영혼이 갇히게 된 육체와 물질계는 탈출하여야 할 감옥이나 무덤 같은 곳이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는 소마세마(σῶμα-σημα) 사상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육체와 물질세계를 낮게 보거나 악하게 본다는
점이 신플라톤주의와 밀의종교 에로스의 특징이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에로스는
1. 상향운동
2. 획득적
3. 자기중심적
4. 육체와 물질세계 부정
5. 영혼만 중시한 영혼구원 교리
에로스는 아가페와 양립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정반대의 성격을 보인다.
기독교는
에로스 종교인가 아가페 종교인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성당과 교회 건축 양식으로 경건을 표현해 온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
에로스 종교의 모양이 보인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찬송하며, 오직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양태에는
에로스 종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 교회의 존재 방식은 에로스가 아니라 오직 아가페이어야
한다.
아가페(ἀγάπη)와 필리아(φιλία)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신다.한글로 읽으면 이 세 질문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세 번의 질문 중 앞에 두 번의 질문은 아가페(ἀγάπη)의 동사형인 아가파오를 사용하여 ἀγαπᾷς με(아가파스 메)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은 필리아(φιλία)의 동사인 필레오를 사용하여 φιλεῖς με(필레이스 메)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런 변화가 있었던 반면, 베드로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모두 필리아 동사를 사용하여 φιλῶ σε(필로 세)라고 대답하였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나를 필레오 하느냐?
예,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묻게 된다.
아가페와 필리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용한 언어인 아가페 대신 필리아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필리아부터 이야기해 보자.
필리아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떠올리지만, 플라톤도 필리아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뤼시스라는 책에 필리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이 담겨 있는데, 필리아가 동성 간에 끌리는 호감이라고 했을 때 그 호감의 바탕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정리했다.
유용성에 기초한 필리아, 즐거움에 기초한 필리아, 훌륭함에
기초한 필리아가 그것이다.
친구 관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상대방이 나에게 유용하든지, 내게 즐거움을 주든지, 아니면 내가
감동할만큼 훌륭할 때 우정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가페와 비교하여, 한가지만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가페의 첫째 정의는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사랑이다.
상대의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필리아는 조건적인 사랑이다.
상대가 가진 무언가에 끌려서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달리 말하면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의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 아가페이다.
이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필리아는 상호성이 작동하는 쌍방적인 사랑이다.
주고 받는 것이 똑같은 질과 양은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는 기초 위에
작동하는 사랑이 필리아이다.
이 기본적 정의(definition)를 전제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고 명하신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가페이시다.
요한일서
4장 8절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가페로 충만하셔서 아가페를 특징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아가페는 운동성이 있다.
아가페가 정적일 수는 없다.
이 운동성을 충만이라고 한다.
아가페의 충만에서 나온 것이 이 세상의
창조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18).
그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아가페 계명이다.
그런데 베드로 입장에서는 아가페는 불가능하다.
아가페가 가장
수준 높은 사랑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면도 있지만,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가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사람인데, 이미 예수님에게 아가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는 사랑" "일방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시점부터 그 어떤 사랑을 예수님에게 주더라도, 그 사랑은 필리아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페하라" 하셨지만, 베드로가 끝내 "필리아 합니다" 한 것의 함의는,
"주님, 이미 내가 받은 사랑이 큽니다"이다.
"주님, 내가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갚음이니 아가페가 아니라 필리아일 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이런 것 아닐까?
베드로의 이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명령을 주셨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네 말처럼 네가 이미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갚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대상을 향하여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는 있으니 그렇게 하여라."
"네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가페를 주신 예수님께서, 아가페를 받은 베드로에게, "네가 받은 것을 네 형제 자매에게 흘려주라" 요구하신 것이다.
1. 예수님처럼 일방적으로 줄 수 있으면 아가페가 되는데,
베드로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필리아로 대답하였다.
2. 예수님에게 받은 것을 예수님에게 돌려주는 쌍방성은 필리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이 주신 아가페를 다시 돌려달라 하지 않으셨다.
아가페는 다시 돌려 받는 것이 아니다.
3. 대신 예수님 자신에게 돌려주는 대신 형제 자매들에게 돌려주라 하셨다.
1번은
아가페, 2번은 필리아라면 3번은 무엇인가?
내가 받은 사랑을 타자에게 흘려보내는 사랑 말이다.
베드로 입장에서, 베드로가
양들을 돌보며 줄 사랑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에게 먼저 받은 것을 주는 것이니 베드로가 할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주신 분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니 필리아도 아니다.
여기서 아가페와 필리아 경계가 허물어졌다.
사랑에 관한 전통적 철학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체인을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네가 받은 사랑으로 네 양을 먹이라".
목회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