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γάμος, 가모스)에 대하여


결혼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이혼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막 10:1-12; 마 19:3-12)과,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한 고린도 교인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고전 7장).
예수님은 복음의 초청을 혼인잔치로 비유한다(마 25장의 열 처녀 비유, 눅 14장의 잔치 비유 등).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 예수와 교회의 혼인잔치를 천국 모습으로 비유한다.
성경은 결혼이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종말론적 삶으로 홀로 사는 독신(비혼)에 대해서도, 예수님이나 바울은 똑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헬라어 명사 γάμος(가모스)는 기본적으로 '결혼식'(wedding) 혹은 결혼(marriage)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수형은 '결혼잔치'(wedding feast)를 뜻한다(마 22:2; 25:10).
또한 결혼식장(wedding hall)을 의미하기도 한다(마 22:10).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13번, 히브리서에 1번, 계시록에 2번 나온다.
‘결혼하다’라는 동사 γαμέω(가메오)는 신약성경에서 28번 나오고, 비슷한 뜻의 다른 동사 γαμίζω (가미조)는 7번 나온다.
γαμέω(가메오)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 가다’의 뜻이지만(마 5:32; 막 6:17; 눅 16:18),
간혹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 가다의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막 10:12).
γαμίζω (가미조)는 ‘시집 보내다’의 뜻으로 아버지가 딸을 시집 보내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노아의 날에 사람들이 홍수 심판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γαμέω), 시집 가고(γαμίζω) 있었다(마 24:38) 고 말씀하였는데, ‘시집 가다’의 의미는 정확히는 ‘시집 보내다’의 뜻이다.
당시 결혼문화는 ‘딸’의 결혼을 주관하시고 성사시키는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혼의 문제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하였다(마 19:3).
마태는 마가복음 자료(막 10:1-12)를 따르면서도 자신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주는 메시지를 위해 어느 정도 편집하였다.
‘모세의 이혼증서’(신 24:1)을 남발하는 당시의 비도덕적 남성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의 분파에서도 이미 논쟁이 있었다.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는 샴마이파는 신명기 24:1에서 이혼사유가 되는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을 성적 방종의 문제에만 적용하였지만, 자유로운 해석의 힐렐파는 아내로서 수치가 되는 일을 더 넓게 적용시켜,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를 쉽게 남발하게 되었다.
‘이혼증서'(ἀποστάσιον, 아포스타시온)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며, 본래는 그렇지 아니함을 말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창조(창 1:27),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창 2:24).
모세의 이혼증서는 왕의 제도(삼상 8:22)처럼 단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 a law of less good (차선의 법)일 뿐이다. 이것마저 남용하는 남자들의 방종에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어떤 이혼의 가능성도 언급하지 않았고,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만을 이혼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읍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여자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죄 많은 여인처럼 취급 당하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뜨거운 정오에 야곱의 샘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나왔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야 하는 필연의 사역(mission of must)으로, 먼저 우물가에서 기다리셨다. 여인은 성적으로 방종한 여인이 아니라, 다섯 남편으로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이혼증서를 받고 버려진 여인이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단지 여인을 성적으로 이용만 하는 동거남일 뿐이다. 여자는 여러 번 이혼당한 불행한 여인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사회는 그녀를 품지 못하고, 오히려 이혼한 사실로만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사회적 불행은 그녀를 영적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갈증으로 가득 차게 했고, 그것을 아시는 주님이 오신 것이다. 모세의 이혼법(차선의 법)보다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최선의 법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놀랍게도 ‘천국을 위한 고자’라는 삶의 방식을 추가한다(마 19:10-12).

이혼증서를 부정하는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 당시 남성들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때 주님은 결혼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비혼주의를 경계하며, ‘타고난/주어진 자’로서의 고자의 존재를 말씀한다. 단순한 비혼이 아니라, 은사로 주어져서 천국을 준비하는 비혼을 말씀하였다(마 19:12). 비혼(아가모스, ἄγαμος, 고전 7:8, 11, 32, 34)에 대한 삶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말한다. 물론 비혼(독신)의 삶은 종말론적 삶에 집중하며 복음전도자의 삶을 사는 자신을 모델로 말하고 있다(고전 7:7). 바울은 결혼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긍정과 이혼의 부정을 알기에, 그 말씀에 충실하면서,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라고 해서 결혼생활을 포기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룩한 땅 성지가 아닌 이방 땅과 이방 문화 속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살기를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 경우, 주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있지 않기에, 버림 받는 이혼이 아니라, 선택한 이혼이 성립될 수 있음을 자신의 의견으로 권고한다. 결혼과 비혼 모두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종말의 때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7:38).

    바울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제하였다. 비혼(ἄγαμος)을 말하며,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는 바울의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여 왔다. 하지만 바울이 나이 30세가 넘기까지 바리새인으로 살았고,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생육 가능한(able-bodied) 몸을 가지고 특별한 이유없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는 것을 유대교는 창조주의 뜻을 순복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기에, 바울이 결혼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율법은 생육하지 못하는 고자를 부정하게 여겨 공동체에서 소외시켰다. 바울은 결혼하였지만, 사도로서의 삶을 위해 졸혼한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한 곳에 살게 하고, 비혼처럼 살았을 지도 모른다. 빌립보 교회의 두 여인을 화해시키도록 바울이 부탁하는 제 3의 여인을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너’라고 하였다(빌 4:3). 이 존재를 흔히 동역자(fellow-worker)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이 여인을 바울의 아내라고 해석하였다. 이 단어의 헬라어 σύζυγος (수주고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결혼한 배우자(wedded pair)를 뜻하는 말이다. 바울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고전 9:5)고 말했을 때, 과거에 바리새인인 바울이나 부유했던 구브로 출신 바나바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의 권리를 포기하고 비혼(ἄγαμος)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더 타당하게 보인다. 

종말과 천국을 기다리는 삶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교회가 신부가 되고, 예복을 입은 손님이 되는 것에 집중하는 선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이런 삶은 태어난, 주어진 자의 삶임을 강조하였다. 창조주의 복이 있는 결혼, 천국을 기다리는 비혼, 어느 것이나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염병(染病)

염병(染病)

נֶגֶף (네게프) / מַגֵּפָה <막게파>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말은 오경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이 용어는 ‘전염병’을 줄인 말로서 우리말 사전에는 세 가지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1.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 / 2. 전염성을 가진 병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 3. 기분이 나쁘거나 못마땅할 때 감탄조로 하는 말(염병할). 오경 이외의 예언서나 성문서에는 “전염병”이란 단어만 나오며 “염병”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염병”이라는 단어는 레26:25<데베르>; 민16:46(히17:11<네게프>); 민16:47(히17:12); 민16:48(히17:13); 민16:49(히17:14); 민16:50(히17:15); 민25:9; 민25:18; 민26:1; 민31:16; 신28:21에 모두 11회 언급된다. 한편, “전염병”이라는 단어는 출5:3; 민14:12에 두 차례 등장한다. 오경 이외의 문서들에는 “염병”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전염병”만 41회 나온다. 그 가운데 두 번은 신약성경에(눅21;11; 행24:5)에 들어있다.

출5:3; 민14:13에 “전염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דֶבֶר<데베르>인데, 이것을 레26:25; 신28:21에서는 “염병”이라고 옮겼다. 민수기에는 “염병”이란 단어가 열 차례 나오는데, 그 원어는 히브리어 דֶבֶר<데베르>가 아니라 נֶגֶף <네게프> 또는 그 동종어인 מַגֵּפָה <막게파>이다. 다시 말해, <네게프>나 <막게파>라는 단어는 민수기에 열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개정역 성경은 이를 일제히 “염병”이라고 번역했다(민16:46//히17:11<네게프>, 47//히12<네게프>, 48//히13<막게파>, 49//히14<막게파>, 50//히15<막게파>; 민25:8<막게파>, 9<막게파>, 18<막게파>; 26:1//히25:19<막게파>; 31:16<막게파>). 히브리어 <네게프>와 <막게파>는 ‘때리다/치다’를 의미하는 동사 <나가프>에서 파생한 명사들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치시니 죄인에게 재앙이 닥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네게프>라는 단어를 개정역은 “재앙”이라고 옮겼다(수22:17; 24:5).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죄인을 한 번 내리치시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동사 נָגַף<나가프>는 이러한 의미에 기대어, 죄인을 징벌하시려고 일으킨 전염병을 가리키는 명사 נֶגֶף<네게프>와 מַגֵּפָה<막게파>를 파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원수들을 치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동사 נָגַף<나가프>를 사용해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주님의 손길에 살짝 닿기만 해도 죄인은 큰 재앙을 당한다. 이런 관념을 나타내는 동사가 נָגַע <나가>인데, 이를 기초로 형성된 명사 נֶגַע <네가> 역시 큰 재앙을 가리킨다.

명사 נֶגֶף<네게프>는 성경에 일곱 차례 언급되며(사8:14), 모두 재앙, 곧 하나님께 내리시는 무서운 징벌을 함의한다. 그런가 하면, 명사 מַגֵּפָה<막게파>는 오경에 열 차례 언급되는데, 번역에 차이가 있다. 처음 언급된 출9:14과 두 번째 언급된 민14:37에서는 개정역 성경이 “재앙”이라고 옮겼지만, 민수기 16장 이하에 같은 단어가 여덟 차례 등장할 때는 모두 “염병”이라고 옮겼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의 재앙과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퍼진 염병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어기고 거역한 죄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데, 특히 민수기에서는 그 재앙이 두드러지게 염병으로 나타난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모세에게 반역한 고라와 다단의 무리들이 지진의 재앙으로 죽은 다음에 연달아 이스라엘에 염병이 퍼져서 무려 14,700명이나 죽었다(민16:49). 이스라엘이 브올의 꾐에 빠져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에 빠졌을 때도 24,000명이 죽었다(민25:9).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원리인 말씀을 어기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살다가 당하는 재앙이 염병인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욕심만 채운 결과, 인류는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다양한 천재지변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기후변화가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에 덩달아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것도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화석연료 사용과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고 플라스틱 생산도 멈춰야 한다. 우리의 식탁에 지나치게 자주 오르는 육식을 절제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탐욕에 기반한 생활습관에서 소박한 삶으로 전향해야 한다. 전쟁과 다툼을 중지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죄 많은 인류를 향하여,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모든 문명 생활을 중단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돌림병(데베르, דֱּבֶר  )

중세 말 서양에 흑사병이 돌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도시의 쥐가 옮긴 이 병은 흑사병 또는 페스트pest라는 병으로,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 이런 종류의 병을 전염병epidemic이라 부르는데, 대륙 전체를 휩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을 특별히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른다. 판데믹으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생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성경에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성서 시대에도 전염병이 많이 돌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이 언급하는 일곱 천사가 가진 일곱 재앙들 중에 서너 가지는 판데믹으로 보인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도 판데믹을 언급한다. 야훼께서 모세를 파견하여 히브리인들을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실 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이 열 가지 재앙 중 애굽 전역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 판데믹이다(출9:3). 이 재앙을 가리켜 히브리어 본문은 דֱּבֶר (데베르)란 단어를 사용한다.

출9:3의 ‘데베르’는 한글역본들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개역은 “돌림병”, 새번역/공동역은 “병”, 가톨릭역은 “흑사병”이라고 번역했다. 영역본들은 pestilence라고 옮겼고, LXX는 σφόδρα (스포드라), VUL는 pestis라고 옮겼다. 애국 땅 전역에 사는 맏아들들과 가축의 첫 새끼들이 다 죽는 재앙이 맨 마지막에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는 출11:1에서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를 더 내리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것이 דֱּבֶר (데베르)임을 지시하고 있다. 마지막 재앙은 동물에게 한정되지 않고 사람에게까지 덮친 재앙이었다. 동물을 죽인 출9:3의 판데믹이 출11:1에서는 사람에게 확대되어 덮쳤다. 애굽의 모든 맏아들이 죽는 무서운 판데믹이 열 번째 재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해를 건넌 후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주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야훼의 신명 계시와 더불어 주께서는 애굽에 내린 판데믹 전염병을 회고하신다(출15:26). 히브리어로 מַחֲלָה (막할라)란 단어는 출23:25에도 나온다. 이 단어 역시 판데믹을 가리킨다.

전염병을 가리키는 דֱּבֶר (데베르)는 오경에는 출5:3; 9:15; 민14:12; 레26:25; 신38:21에 언급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 가운데(삼하 2413; 25;14) 백성에게 임하는 판데믹이 언급된다. 시편에는 91:3, 6에, 그리고 예언서에는 사14:12; 겔5:12; 호13:14; 암4:10 등에 판데믹이 나타난다.

신명기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 (신4:34)

여기에 시험, 표적, 기사, 전쟁, 강한 손, 펴신 팔, 큰 두려움이라는 일곱 가지 용어가 나열되어 있다.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해 야훼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들을 가리킨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역 가운데 택정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 원수들에게 내리시는 판데믹인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심판 사상을 잘못 이해하면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퍼뜨리시는 분이 구약성서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인류가 당하는 무서운 판데믹 재난을 자칫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하게 된다. 이러한 설교는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을 구원하려는 중보기도의 열정을 차단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죄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설교자 자신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 이처럼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해석은 명백히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화살을 받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멸종시키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력을 증대해 왔다. 특히 근대문명의 산업화가 그러했다. 인류는 탐욕으로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이 예견되고 있는 무서운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자연재해가 계속 닥치고, 인재들이 속출하며, 특히 신종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 공격으로 판데믹이 창궐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세상 죄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교회도 세상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기술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상 죄인들의 대열에서 교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도 그들의 폭력체제에 편승하여 스스로 권세를 구가해오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않았는가? 이 점을 스스로 자성하는 지점에서 교회는 세상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지며 고통을 분담하고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교회의 회개의 과제가 될 것이다.

판데믹은 인간이 잘못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야훼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려고 발생시키신 질병은 아니다. 이 질병 발생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는 말이다. 애굽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을 혹독하게 부리고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잘못으로 발생한 판데믹과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성경은 야훼께서 내리신 심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개에의 부름이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생활했더라면(창1:29; 2:8; 9:4-5; 레11장), 어떠한 판데믹도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출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