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은 200년 넘게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반향 해 왔습니다.
성경 구절에서 죽음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 18:2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 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19)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 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22)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경의 완곡 어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 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의를 찾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힘에 대한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여러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들완곡 어더 강하고 가혹한 용어 대신에 죽음에 대한 더 부드럽고 온화한 단어와 문구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죽음의 현실과 그 경험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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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길을 가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다윗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겼습니다. 죽음에 가까워 질 때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 께 충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솔로몬에게 그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데이비드는 '나는 온 땅의 길을 가고있다'( 열왕기 상 2 : 2) . 이 문구는 죽음이 모든 사람, 왕, 하인에게 공통적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인근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진 믿음은 이집트의 왕에 해당하는 파라오가 다시 살 수 있도록 보존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호흡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내면에서 호흡과 생명의 영 사이의 큰 연관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 하셨을 때,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콧 구멍으로들이 마셨고, 그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되었다'( 창세기 2 : 7 NIV) . 죽으면 '우리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12 : 7 NIV)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마지막 숨을 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가 복음 15:37) 그리고 '그의 영을 포기' (마태 복음 27:50).

그의 백성에게 모임

여러 번 성경은 사람들이 '흩어진'다음 다시 함께 '모인'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죽음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채집'을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마지막 숨을 쉬고 노년기, 노인, 삶에 만족하며 죽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모였습니다. ' (창세기 25 : 8 NIV) . 구절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보다 앞서 나간 신자들과 함께 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은 신자의 삶이 끝나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관심과 확신을 불러 일으 킵니다.



마지막 적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죽음이 온 땅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국 죽음이 영원히 멸망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죽음이 멸망 될 마지막 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6).



성경은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종종 죽음과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번역에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는 1,600 개 이상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단어 'maveth'(twm)와 그 파생어를 약 160번 사용하는데, 대부분 시편과 잠언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신약 성경은 죽음을 묘사하는 두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thanatos'(θάνατος)와 'nekros'(νεκρὸς)는 전자와 약 119번입니다.
단어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합니다.
지구상의 생명이 끝난 폭력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이미지 또는 죽음의 종류를 묘사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죽음 중 하나는 사람과 하나님이 분리 된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에덴 동산과 아담과 이브의 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2:16-17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 8:22, 디모데 전서 5:6
개인은 육체적 삶 전반에 걸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되돌릴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적 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두 번째 유형은 육체로부터 영혼과 영이 분리 된 죽음을 나타냅니다. 육체적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주님이 돌아 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겪지 않았지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개인이라는 두 가지 예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에녹(창세기 5: 23-24) 다른 하나는 엘리야(열왕기하 2:1, 11) .

영원한 죽음 또는 마지막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죽음을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25:41).
죽음은 악마, 악마 추종자, 악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간주됩니다.
마지막 죽음은 고통과 처벌의 장소이며 화재, 고통 및 고통으로 묘사됩니다. 마가복음 9:44-48) .
이것은 종종 신자들의 마지막 집을 묘사하는 '영생'의 배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해를 넓히는 다른 성구들

부드러운 완곡 어법과 여러 유형의 죽음에 대한 설명 외에도 성경은 죽음의 본질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암시하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와는 별도로 이러한 개념은 죽음을 더 잘 보여 주지만 함께 그 효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23rd시편은 장례식에서 말씀을 낭송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 위로와 희망을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을 걸을 때 악이 두렵지 않다'는 말에 집착한다. (시편 23 : 4) . 욥은 자신의 삶의 재난과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것을 더럽 히게하라'고기도했습니다. (욥 3 : 5) . 욥의 외침은 성경에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20 개의 언급 중 첫 번째입니다. 그림자는 그것이 닿는 것에 가까운 모든 것에 어둠을 드리 웁니다.

죽음의 침묵

침묵은 오싹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장소와 상황에서 차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길이가 오래 머무르면 침묵은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줍니다. 우리 친구와 가족의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에 홀로있는 침묵을 피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음을 묘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침묵의 장소로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시편 115 : 17).

죽음은 찌르다

죽음의 힘은 극복 할 수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힘이 찌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 죽음 이여, 당신의 승리는 어디입니까? 오 죽음이 어디 있니? (고린도 전서 15:55).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패배를 확보하셨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승리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17 NIV) . 아담 시대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죄를지었습니다. 로마서 3:23) .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그는 죽음을 직장에서 일한 대가로받는 임금과 비교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 로마서 6:23). 죄의 사역 때문에받는 월급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죽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예수님이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죽음을 버리고 생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디모데 후서 1:10) . 히브리 작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학 적 중요성을 공유합니다. '아이들은 살과 피가 있기 때문에 ( 의미 예수 ) 그들의 인간성을 너무나도 공유하여 그의 죽음으로 그는 죽음의 힘을 가진 자, 즉 악마의 힘을 깨뜨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평생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있었습니다. (히브리서 2 : 14-15 NIV).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니 죽는 것이 유익하다'(빌립보서 1:21)라고 적을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진짜이지만 슬픈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욕망은 '[우리] 죽음의 날이 우리 탄생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 : 2) . 죽음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특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위안과 확신과 희망이있을 수 있습니다.


잠들다

성경은 죽음과 수면을 50 번 이상 비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1 세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어로 문자 그대로 '기숙사'또는 '침실'을 의미하는 묘지를 '묘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의 마지막에 부활을 가져 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그의 재림까지 잠의 시간으로 보았다. 그들은 죽음이 신자가 '평안히 쉴'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수면 이미지를 사용한 일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 12 : 2- '땅의 먼지 속에서 잠자는 무리는 깨어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생에, 다른 사람들은 수치와 영원한 경멸을받을 것입니다.'(NIV).
  • 욥기 3 : 11-17- '지금은 평화롭게 누울 것입니다. 나는 잠들고 쉬고있을 것입니다. '(욥 3:13 NIV).
  • 요한 복음 11 : 11-14-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그들에게'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깨우려고 거기에 간다. ' 제자들은 '주님, 자면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가 자연스러운 잠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Lazarus는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NIV).
  • 데살로니가 전서 4 : 15-17- '여호와의 말씀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겨진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우리가 잠든 자들보다 앞서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 전서 4 : 14 NIV).

소천(召天)이란 용어는 성경적인가?

한국에 복음이 들어 온지 138년 
성철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적(入寂)이라 사용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타계 때는 선종(善終)이라고 했는데,
기독교 죽음인 소천이 성경적용어로 합당한지 인터뷰 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소천(召天)의 어원

소천이라는 용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통 상례(喪禮)의례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천이란 용어가 한국어사전, 한자사전 어디에도 기록 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빌려서 만든 글자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에도 없고 정상적인 조어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렀습니다.
소천의 한자적인 뜻을 살펴보면 “부를 소(召)” “하늘 천(天)”자로 구성되어 있는 신조어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천의 어원적 뜻, 즉 소천(召天)은 ‘하나님을 부름’이란 뜻은 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 아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만들려면 차라리 천소(天召)로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학자 정재도선생“소천이란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한자어 ‘승천(昇天)을 본떠 기독교식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어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소천(召天)의 오류

“소천 하셨다”는 문장은 다소 오류가 있다고 필자는 봅니다.
다시 말하면 소천은 아무개가 “하늘(하나님)을 불렀다”라는 뜻이 됩니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하면 아무개가 “소천 함을 당하셨다”거나 “소천 함을 입으셨다”가 더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쉬운 우리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거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라는 표현이 더 나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됩니다.

이 소천이라는 용어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관례화되어 쓰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용어의 오류를 다시 지적하면서 “하나님(하늘)이 부르셨다”라는 뜻은 “소천(召天)”아니라 “천소(天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어와 동사가 뒤바뀐 소천(召天)은 큰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소천(召天)의 근원

1. 소천의 근원은 카톨릭에서 사용되어 기독교로 전해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2. 전통 종교적 사상에서 하늘 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갔다는 이교에서 들어온 용어 중에 하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1675) 북애자가 저술한<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보면,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 지 무릇 궐천년이니--태백산에 올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못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 못을 조천(朝天)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한웅천왕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朝天)는 것에서 우리 민족이 ‘죽었다“는 표현을 왜 ”돌아가셨다“라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천(朝天)에는 우리 민족 조상들의 정신세계에 내재된 신들의 세계 하늘로부터 근원한 우리민족이 죽어서 다시 본 고향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3. 일본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죽음을 승천(昇天)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이상하게도 우리말의 소천(召天)이 일본어로 (쇼오텡)과 발음상으로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천의 근원지를 일본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국전통 상례(喪禮)의 의미

상례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부터 시체를 매장해 묘지를 조성하고 가족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근신해 상복을 입는 방법과 일정한 기간 동안 상복을 다 입고 평상생활로 돌아갈 때까지의 각종 제례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를 말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갈무리하는 예라면 죽음의 예라는 뜻에서 사례(死禮)라고 해야 할 텐데, 사(死)로 쓰지 않고 상(喪)을 써서 상례(喪禮)라고 하는 까닭은 사(死)는 육신이 죽어 썩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사람노릇을 끝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死)는 소인(小人)의 죽음이요 종(終)은 군자(君子)의 죽음을 말하는바 사(死)와 종(終)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뜻인 상(喪)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전통 상례(喪禮)는 슬픔과 예가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들

한국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완곡어법을 써서 고인의 신분과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을 쓰는 것이 통례입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별세(別世.  세상을 하직한다는 말로 죽음을 뜻하고), 영면(永眠; 영원히 잠들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하는 말), 작고(作故;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 임금이 세상을 떠남), 불교에서는 입적(入寂; 불교에서 수도승의 죽음을 이르는 말, 또는 열반(涅槃)), 카톨릭에서는 선종(善終;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사람을 이르는 말), 기독교에서는 소천(召天), 등 모두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외에도 사망, 별세. 운명 등 우리말에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고유어로는 ‘죽다’에서부터 ‘숨지다‘., ’돌아가시다‘, ’세상을 뜨다‘.,’숨을 거두다‘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선종(善終)이나 입적(入寂) 열반(涅槃) 등은 정식 단어이지만 유독 소천(召天)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연유에는 '하늘의 부름'으로 쓰는 '소천'이 조어법상으론 '하늘을 부름'이란 뜻이 돼 잘못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냐는 지적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소천(召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최근에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 받고 또한 기독교계의 원로인 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신문 방송에서는 “정진경 ,김준곤 목사님의 소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기독교 신문 방송 기사는 똑 같이 “소천‘이란 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소천이란 용어 사용하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하고 생각 하면서 보편적으로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소천(召天)은 비록 신조어로서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천소을 받았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사전에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하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소천’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언뜻 듣기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생각돼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에도 없고, 어법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장례가 생기면, ‘고인이 소천했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천이란 용어가 국어사전과 한문사전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랜 옛날부터 구전돼 온 것은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에 등록된 신라부터 조선후기의 고문헌을 검색해 봐도 장례를 일컫는 소천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다만, 조선후기 김시습이 지은 매월당집에 ‘하늘의 재앙을 부르다’는 뜻의 ‘소천재’란 말이 사용된 정돕니다.
INT 노성두 / 한국고전번역원

‘소천’이란 말은 한문법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용어입니다.
부를 ‘소’에 하늘 ‘천’, 문법적으로 풀이하자면, ‘부르다’는 동사에 ‘하늘’이 목적어로 붙어 ‘하늘을 부르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이 누군가를 부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늘을 부른 것, 즉 주체가 하늘이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뜻 그대로 ‘하늘이 불렀다’고 표현하자면 ‘천소’가 맞습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일각에서는 단군신화에 ‘환웅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의 ‘조천’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일본인들이 죽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승천’ 즉 ‘쇼오텐’에서 음을 따 ‘소천’으로 발음하게 됐다고 추정,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해석을 내리기도 합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불교에는 타계, 혹은 입적, 천주교에는 선종 등 종교적 의미를 담은 고유한 명칭이 있습니다.
소천이라는 말이 역사도 불분명하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의 개발이 절실합니다.


'죽음과 사망' 硏究

1. 성경에서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각각 다른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2. 구약성경에서는 죽음과 사망을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다르게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이라는 단어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쓰여진 때가 있는가 하면 죄 값의 형벌인 사망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망도 육신의 죽음일 때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적이 간혹 있으나 깊이 살펴보면 대부분은 죄 값의 사망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약에서는 죽음과 사망이란 용어를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했으니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사망은 죄 값으로 죽는 그 형벌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구약성경

1)죽으리라(죄 값의 사망)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2)죽었더라(육신의 죽음)

[(창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아담

[(창9: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 노아

[(신34:5-7)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 모세

3)돌아갔더라(육신의 죽음)

[(창25:7-8 )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아브라함

[(창35:28-29)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이삭

[(창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 야곱

4)사망(죄 값의 사망)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사망(육신의 사망)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신약성경

신약성경에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육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에 대한 형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죽음(육신의 죽음)

[(마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2. 사망(죄 값에 대한 형벌)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기에 사람의 별세는 신, 불신자간에 다 같으나, 죽음 곧 사망은 신, 불신자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사망은 심신의 기능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요, 불신자의 사망은 영육 자체와 그 기능이 다 사망을 받습니다.

1, 그러기에 신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성경에 상치가 되는 표현이 됩니다.
더욱이 순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더욱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그것은 순교를 했는데 죄의 값을 받았다는 사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상고하여 올바른 용어로 표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용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3.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요 하나는 죄의 값인 사망입니다.
순교는 육신의 죽음 형태 중에 한 성격을 표현한 용어입니다.

4. 그러기에 죽음, 사망, 돌아가셨다, 별세, 순교, 소천, 등은 각각 죽음의 형태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상통하기 위해서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도 구분해서 바로 적용하여야 상통에 막히는 오류와 실수가 없겠습니다.

5.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상통하는 용어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 근거가 되어야 하겠고 또 성경을 근거로 하더라도 치우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검색 결과

죽음(53) : 구약 38, 신약 15
사망(118) : 구약 73, 신약 45
죽으매(36) : 구약 32, 신약 4


교회 용어 바로잡기 /  “소천. 증경. 자벽. 고퇴를 아시나요?”

사회자’는‘인도자’
‘헌금’은‘봉헌’으로

교회 안에 비복음적인 언어, 국적 없는 신조어, 잘못 번역된 언어, 무례한 언어, 폭력적 인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용어를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은 한글을 훼손함은 물론 복음과 진리를 왜곡시킨다는 크나큰 우려의 목소리가 있어 왔다. 이런 점에서 최근 에 잘못 사용되고 있는 교회용어를 바로잡자는 움직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 용어 바로잡기 작업을 정리했다. <편집자 주>

교회 용어 바로잡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2년 예장통합총회에서‘기독교 용어 개정안’을상정한 이래 예장합동과 기장 등 각 교단에서 교회용어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또 지난해 말부터 교회문화연구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서도‘교회용어 바로잡기’운동에 동참하면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교회문화연구소(소장: 이의용)는 그동안 수집한 100여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교회용어 바로 쓰기’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잘못된 교회용어 사례들을 공개하고 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이 소장은“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중심이 돼 성경 찬송가 주기도문 사도신경에서부터 잘못된 교회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장이 제시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가 바로 ‘부목사’란 호칭.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르는데, 목회자의 권위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신분의 차이를 두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부목사’를 거쳐야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하는 용어다.
그냥 ‘목사’로 호칭하고, 부득이 구별해야 할 경우엔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부목사’는 권위주의 반영


‘평신도’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평신도란 말이 교회 안의 낮은 계급으로 인식되고 특별한 계층이 있다는 의미로 왜곡되어 왔다. 평신도란 용어는 거룩한 무리란 뜻이 담긴‘성도’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찬송에‘특별송’과‘보통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용하는 ‘특송’이라는 용어보다 누가 부르든‘찬송’또는‘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소경’, ‘장님’, ‘문둥병자’,‘절뚝발이’등의 표현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써 교회 밖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시각장애인’, ‘나병환자’, ‘지체장애인’등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예배와 관련한 언어의 오용 또한 심각하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 좀 봐주세요”와 같이 잘못된 언어사용은 기독교 교리를 오도할 위험도 있다. 예배는 목사님이 봐주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옳다. 주일 낮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일컫는‘대예배’란 말 역시 잘못된 용어다. 예배는 등급이나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한 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다. ‘주일 예배’또는‘주일낮 예배’, ‘장년부 예배’로 지칭하면된다.

또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가 아닌 예식이다. 예배의‘사회자’는‘인도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마치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예배를 시작한다는 인상을 준다. 별 다른 이유를 달지 말고 바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서 유래한‘묵도’라는 말은‘묵상’으로 바꿔야 한다.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란 표현은 인도자가 교인들에게‘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성경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적합한 표현이다. ‘헌금’은‘봉헌’으로 바꾸는 것이 합당하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나타내지만.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는‘성도’가 바람직


기도와 관련해서도 잘못된 용어가 많다.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중보자’라고 한다. ‘중보기도’보다는 남을 위한 특별한 기도란 의미의‘이웃을 위한 기도’또는‘도고’라고 하는 것이 맞다. 기도할 때 흔히‘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을 한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따라서‘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은‘하나님, 복을 빌어주시옵소서’란 뜻이 된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하는 어이없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자주 쓰는 말 중‘감사하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셨습니다’등도 잘못된 표현으로 각각‘고마우신 하나님’, ‘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가 어법에 맞다. 또 공개적으로 함께 기도를 할 때‘주여 삼창’을 외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아버지를‘아버지여’라고 부르지 않듯이, 누구를 부를 때 함부로 ‘아무개여’라고 하지 않는다. ‘주님’‘예수님’이라 불러야 한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해 대표기도를해주시겠습니다”란 표현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수 없기 때문에‘대표’나‘대신’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다.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 신조어도 많다. 전도 대상자를 가리키는‘태신자’란 용어는 보편적이지 않은 말이다. 앞으로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기도하는 사람에 대해‘태목사’‘태장로’라고 하면 얼마나 이상한가. ‘불신자’란 용어도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을‘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비신자’라고 하는 것이 좋다.

‘대표 기도’보다 ‘기도 인도’


“모 증경회장이 자벽으로 선출되신 회장에게 고퇴를 물려주고 휘장을 친히 분배했다.”이 문장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증경, 자벽, 고퇴, 휘장 등 전통적으로 써내려 온 회의용어들도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적인 의미도 없고 일반사회에서도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고퇴’는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마치’(망치)가 속되다고 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이다.
‘의사봉’이나 ‘사회봉’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벽’은 <조선철종실록>에 나오는 단어로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없이 자기 사람을 기용한다’는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자벽’보다는 ‘임명’ 이나 ‘지명’이 바람직하다.
중국 고대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로 ‘증경’은 ‘전’으로, 배지를 의미하는‘휘장’은‘꽃’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영결식’, ‘명복’, ‘삼우제’‘추도식’등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타종교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문제다.
‘장례예식’과 ‘하나님의 위로’, ‘첫 성묘’ ‘추모식’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결식’은‘영원한 이별’을, ‘명복’은 죽은 뒤 명계에 가서 받는 복을 뜻하는 타종교의 용어이다.
‘추도’란 ‘슬퍼한다’는 뜻으로,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별세하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어색하다.
‘추도’보다는‘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추모’란 말이 적절하다.

또 ‘재수’ ‘운수’ ‘운명’‘ 도로아미타불‘‘공염불‘‘손이 없는 날’‘사주팔자’‘명당자리’‘신주를 모신다’‘보살 같다’‘부처님 가운데 토막’‘신선놀음’‘도사’‘넋두리’‘도깨비 장난’‘일진’‘살’‘구신 같다’‘액’‘터줏대감’등도 무속이나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 등이 담겨져 있어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

교회생활

부목사 …………………………부교역자, 부목회자
특송 ………………………………………찬송, 찬양
평신도 ……………………………………성도, 신도
소경, 장님 ………………………………시각장애인
문둥병자 …………………한센씨병환자, 나병환자
절뚝발이 ………………………………지체장애인
불신자 ………………………………………비신자
도전을 주셨습니다…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
천당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X-mas, 크리스마스
……………………성탄절, 성탄일, 주님 오신 날
교회를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운이 좋았다………………………하나님의 은혜다
태신자 …………………………………전도 대상자
사모 ………………………………………목사 부인
애굽 …………………………………………이집트
다메섹 …………………………………다마스커스

예배 예식관련용어

주여, 예수여 …………………………주님, 예수님
묵도 ……………………………………………묵상
성경 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헌금 ……………………………………………봉헌
임직예배, 결혼예배, 추도예배 등
…………………임직예식, 결혼예식, 추도예식 등
대예배 …………………………주일예배, 장년예배
열린예배 …………………………………열린집회
성가대 ………………………………………찬양대
축제 ……………………………………………잔치
예배 봐준다……………………………예배 드린다

기도관련 용어

감사하신 하나님…………………고마우신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복을 주시옵소서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기도를 인도해 주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주님께서 삶을 주관해 주시고
중보기도
………도고의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청원기도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회의관련 용어

고퇴 …………………………………의사봉, 사회봉
자벽 ………………………………………임명, 지명
증경 ……………………………………………전
휘장 ………………………………………………꽃
사회자 ………………………………………인도자

장례관련 용어

추도식, 제사 …………………………………추모식
소천 ………………………별세, 하나님의 부르심
명복을 빕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삼우제 ………………………………………첫 성묘






죽음(死亡)

죽음, 죽이다, 잠

신약성경에서는 고전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어들이 죽음과 죽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생명을 통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일깨워 준다.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와 관련된 단어들 외에도 원래 의미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또 다른 용어들도 있다.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한완곡어로서 초기로부터 줄곧 사용된 '잠' sleep(휘프노스[hypnos])이란 용어는 기독교 영역에서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타 용어들로는 카듀도(katheudo : 잠자다 to sleep)와 코이마오마이(koimaomai : 잠들다 to fall asleep)가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것이 시체이거나 또는 무생물체이거나 간에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이다. 텔류타오(teleutao)는 '끝나다' '끝 마치다' come to an end, finish를 의미하며 따라서 '죽다' to die를 의미한다.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폭력으로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다나토스(thanatos)어군과 네크로스(nekros) 어군의 단어들은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독특한 저의를 갖고 있다.

ajpokteivnw, 615

ajpokteivnw, 615(apokteino:, 아포크테이노). 죽이다, 살인하다 kill.

teleutavw, 5053(teleutao:, 텔류타오). 끝나다 come to an end, 죽다 die.

고전 헬라어문헌

1. 동사 아포크테이노(apokteino:, Homer)는 크테이노(kteino:: 죽이다 kill)에서 파생하였으며 타인의 목숨을(후기에는 자신의 생명도) 폭력으로 종식시키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죽이다' kill, have put to death, '살해하다' murder, '처형하다' execute를 의미할 수 있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텔로스(telos: → 목표 Goal, 끝 End)에서 파생했으며 호머(Homer)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입증되고 원래는 '끝내다' bring to an end(예: 어떤 사람의 일), '완성하다' to complete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다. 자동사의 의미로는 '끝나다', '마치다' come to an end, '이행되다', '성취되다' be fulfilled(예: 꿈이)를 의미하여 그 다음에 '죽다' to die, '생명을 잃다' to lose one's life도 나타낸다.

구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70인 역본에서 150회 이상 찾아볼 수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 어근인 하라그(harag: 죽이다 kill)와 무트(mut: 죽다 die, 특히 히필형으로는 죽게 하다 cause to die)를 번역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살인(4:8,가인의 살인), 사형 집행(32:27) 또는 거룩한 전쟁 중에 실시하는 대량 학살(31:7이하; 삼상 15:3)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심판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에도 나타난다(4:10; 9:1; 23:10).

2. 70인 역본 중의 약 70개 용례에서 텔류타오(teleutao:)는 히브리어 무트(mut: 죽다 die)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거의 항상 인간 생명의 만료나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죽음(예: 1:6; 1:2)과 갑작스러운 폭력에 의한 죽음(다나토 텔류테세이[thanato: teleute:sei]: 그가 죽음을 죽을 것이다 he will, or shall, die the death, 19:12; 21:16이하; 9:10)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는다.

신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에서 74회 나오며 특히 4개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15회)에 자주 나오며 5개의 용례만이 (바울) 서신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구절들 중 직접적인 사건 묘사나(14:5, 침례 '요한에 대한 헤롯왕의 의도. 참조: 6:19), 비유(포도원 일군들을 묘사한 12:5이하. 및 병행구들, 참조: 23:37 병행구), 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묵시 중 제자들과 관련된 예언의 말씀(24:9)을 막론하고 이 동사는 거의 항상 하나님의 사자들의 폭력에 의한 죽음을 언급한다. 세 공관 복음서의 수난 예언(8:31; 9:31; 10:34과 유사구절들)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점은 중추적인 의미를 지닌다. (p.3-419*) 죽음을 당하고 공격이(p. 3-419*) 집중된 증인(→ 증거 Witness)은 바로 → 아들 Son이다(참조: 살전 2:15). 요한복음에서는 아포크테이노(apokteino:)가 거의 항상 제테오(ze:teo:: 추구하다, 찾다 seek)나 불류오마이(bouleuomai: 계획하다 plan)와 함께 쓰인 점이 주목된다(예: 7:1; 19이하; 11:53). 제자들도 또한 이런 위협의 영역 안에 처한다(21:31; 23:12-14). 이 점은 특별히 6:11에 지적되어 있다(참조: 11:7에서도 짐승이 두 증인을 죽인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동사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처형과 관련하여 더 자주 사용된다(네 명의 말 탄 자들에 의하여, 6:8; 참조: 9:15-18; 19:21).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후기의 해석에 있어서 2:16은, 예수님이 자기 죽음을 통해 “원수된 것을” “죽였다”고, 다시 말하면 화목을 이루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비유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7:11에서는, 여기에서 하나의 권세로 간주되는 → 죄 Sin(하마르티아[hamartia])가 계명(→ 명령 Commandment; 엔톨레[entole:])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 계명은 인간에게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 갈등은 하나님 앞에 서도록 사람을 속이며 따라서 사망을 초래케 한다. 여기서 계명은 실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율법이다. 고후 3:6에서 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그람마(gramma: 문자 letter)가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는 달리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11회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중 3회는 구약성경에서 따온 인용구에서 나온다(15:4; 7:10; 9:48). 9:18(부정과거)과 11:39(완료분사)에서 이 동사는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는 점이 주목을 끄는데 이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소녀와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동일한 문맥에서 카듀도(katheudo:) 또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가 사용된 것은 이 사실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 동사는 헤롯 왕의 죽음에도 사용되었으며(2:19) 죽은 형제들의 비유(22:25)와 다윗, 야곱, 요셉(2:29; 7:15; 11:22)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언급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죽다' die를 뜻하는 지배적인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 다나토스[thanatos])이다. - L. Coenen

qavnato", 2288

qavnato", 2288(thanatos 다나토스). 죽음 death.

qanatovw, 2289(thanatoo: 다나토오). 죽이다 kill.

ajqanasiva, 110(athanasia 아다나시아). 불사, 불멸 immortality.

qnhvskw, 2348(thne:sko: 드네스코). 죽다 die.

ajpoqnhvskw, 599(apothne:sko: 아포드네스코). 죽다 die.

sunapoqnhvskw, 4880(synapothne:sko: 쉬나포드네스코).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

qnhtov", 2349(thne:tos 드네토스). 죽을, 죽음의, 죽음을 면치 못할 mortal.

고전 헬라어문헌

다나토스(thanatos, Homer)는 죽는 행동이나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위험, 죽음의 방법, 사형에도 사용된다. 이와 유사하게 다나토오(thanatoo:)는 어떤 사람을 '처형하다' to put someone to death, '죽이다' kill, '죽음의 위험으로 이끌다' lead into mortal danger를 의미한다. 죽음에 예속된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일찍이 호머(Homer) 시대에 드네토스(thne:tos: 죽음을 면치 못할, 죽을 mortal)로 묘사되었다. 인간은 호이 드네토이(hoi thne:toi: 죽음을 면치 못할 존재 the mortals)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신들은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를 소유한 자로 언급되어 있다.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인간이 수많은 불멸의 신들로 승격된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드네스코(thne:sko:: 죽다 die)와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끝나다, 만료되다 expire)(둘 다 호머의 저술에서)는 죽음의 행동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에 관한 언급에서는 복합어형인 쉬나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를 찾아볼 수 있다(Hdt. ; 참조: 과부를 화장하는 인도의 관습). (p.3-420*)

헬레니즘 시대에 다나토스(thanatos), 다나토오(thanatoo:), 드네스코(thne:sko:),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등의 용어들은 지적이고 영적인 죽음에도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1. 헬라인들이 비록 망령(→ 영혼 Soul)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거주하게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Homer, Od. 11, 204-222),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살아 움직이는 활동의 끝, 생명의 종결, 존재의 파멸을 의미했다. 죽음은 인류 공동의 운명이며, 죽음의 부정적인 면은 죽음이 지하세계에서 나온 일종의 악마나 괴물로서 의인화되어 나타날 때, 종종 명백하게 된다(Eur., Alcestis 28이하). 그들은 창조의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그들에게 “왜?” 라는 의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불멸이 선망의 대상이 된 신들의 본질적인 운명인 것처럼 본래부터 모든 사람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 사람의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불평이 자주 표현되어 있다(참조: Homer, Od. 11, 488).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 생명 life(조에[zo:e:])을 마음껏 즐기려는 요구가 대두되었다. 고전 15:32에 바울이 인용한 “재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격언은, 그 문제에 관한 헬라와 로마 사상의 여러 표현들과 일치한다(참조: Eur., Alcestis, 782이하). 제국시대 때 로마 사람의 거실에는 종종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진 해골의 그림이 있었다.이것은 순간의 쾌락도 놓치지 않으려는 하나의 초대장이다. 나이가 인생의 쾌락의 향유를 방해할 경우 사람은 곧 죽는 편이 낫다(Eur., Hecuba, 1104이하). 고대 세계의 큰 묘지들이 도시의 주 도로들을 따라 놓여 있었는데 이는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 즉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을 죽은 자들 가까이에 두기 위한 의도였다. 긴 인생을 누리고 난 후의 고귀한 죽음을 큰 축복으로 간주하였으며(Homer, Od., 11, 134이하) 죽음이 인생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임을 깨달음으로써 또한 위로를 받았다(Eur., Troades, 635이하).

2.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음의 공포는 심사숙고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추구되며 종종 사람은 그의 자녀들 안에 살아있다라는 견해가 나타난다(Mimnermus, Frag., 2, 13이하). 비문과 커다란 장례기념물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이 계속 살아남아 있게 해주며 고인의 행적은 후대에 선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런대로 죽음을 참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있어 유달리 특징적인 것은 죽음을 운명으로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업적의 한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삼는 것이다.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죽든지 또는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하든지 간에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중요하다(Eur., Heraclidae, 533이하). 그러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삶의 업적의 하나로 보일 수 있으므로 그것은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며, 특히 폴리스(→ 사람들 People)를 위한 죽음일 경우 죽은 자의 이름이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Eur., Heraclidae, 621이하).

(a) 플라톤의 사상에서 참다운 삶이란 순수한 자연적 환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쾌락 대신 덕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생활하는 인간에게는 죽음까지도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내가 죽음의 성질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이 생활의 악에서 도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런 철학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평온한 마음은 또한 죽음을 인류의 업적으로 변화시킨다(polis, 80e). 왜냐하면 죽음이란 종종 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쟁터 등에서 비열한 행동의 대가로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Apology, 38e-39b).

(b) 스토아학파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죽음의 본질적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자기자신을 죽음의 과정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 간주할 때 죽음은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을 죽음에서 자유를 느끼게 했으며 자기들의 존재를 하나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죽음의 세력에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없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가 진실로 죽은 사람이다(Epict., Dissertatrones, I, 19, 9). (p. 3-421*) 이와 같이 계속하여 자유로운 심정으로, 덕스러운 삶을 따라 평온하게 죽을 것을 각오함으로써 역시 죽음을 인간의 업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Seneca, Letters, 93; 101, 15). 그리고 이러한 업적은 자살을 통하여의식적으로 이룰 수도 있다. “인간이 어디서 끝이 나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원할 때 끝을 내라, 종말이 훌륭한가라는 점만이 중요할 뿐이다”(idem, 77, 20).

3. (a)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들 외에도 때때로 그 태도와 합쳐져 → 영혼 Soul의 불멸에 대한 신앙을 때로는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오르퓨스(Orpheus)교와 피타고라스(Pythagoras) 학파의 신비주의의 확실치 않은 근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플라톤(Plato)이 제일 먼저 그것에 대해 논의했으며 거기에, 도덕적 인격관의 결과인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죽을 때 영혼은 → 몸 Body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인간의 고통 받는 부분에서 고통 없는 것으로 자유롭게 된다(Phaedo, 80c이하). 철학자의 삶은 완전히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는데 전념하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이성 없는 육체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대망의 목표로 간주할 수 있다(Phaedo, 114a 이하). ([편집자주] The Rep., 10, 614-21은 생전의 행위에 대한 상벌과 관련된, 영혼전생[transmigration]설을 담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불멸에 대한 그런 견해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당시에 유행된 그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b) 스토아 학파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멸을 부정했다. 개인의 영혼은 우주에 충만한, 신의 우주적 영혼 속에 가라앉게 된다(→ 땅 Earth, 세상 World).

(c) 동방에서부터 등장한 신비적 종교에서는 인간이 생래적 필멸(mortal) 상태에서 입교의식에 의하여 신적 상태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입교 의식은 모시는 신의 생명력 중 한 몫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d) 영지주의(→ 지식 Knowledge, art. 기노스코[gino:sko:])에서는 플라톤의 온화한 인류학적인 육체-영혼의 이원론이 격화되어 날카롭게 대립되는 우주적 이원론이 되었다. 우주는 악마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며 육체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반면 영혼은 우주와는 분리된 → 빛 Light과 → 생명 Life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육체에 감금되었다. 실제적 죽음은 육체에 있어서는 생명이다. 육체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e)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는 플라톤의 견해와 영지주의의 신화가 결합되어 하나의 이론체계를 형성하였는데 이 이론에서는 감각세계를 넘어선 영혼의 여행 및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와 상승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immortality)가 헬레니즘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에서만 나타나는 것(솔로몬의 지혜서, 마카베오 4서)을 제외하면 이 어군의 모든 단어들을 70인 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의 용법은 고전 헬라어 문헌의 그것과 아주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다. 이 용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 상당어구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웨트(mawet: 죽음 death)나 무트(mut: 죽다 to die, 죽이다 kill)이다.

1. (a) 구약성경의 사상에 있어 죽음은 인간의 존재의 최후를 의미한다(삼하 12:15). “우리는 …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 사람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므로 마땅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3:19). 일단 영혼 혹은 망령이 스올(Sheol, → 지옥 Hell, art. 하데스[hade:s])에 내려가면 생명은 결코 되돌아 올 수 없다. 특히 이 점은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로부터의 분리를 죽음이 초래한다는 빈번한 불평에서 명백히 드러난다(6:5; 30:9; 88:5; 88:10이하; 38:11). 인간은 죽음의 공통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할 뿐이지 선택권은 없다(3:19; 집회서 14:18이하; 41:1-4). 만약 하나님이 그에게 장수를 허락하신다면 그래서 그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것을 성취한다면 그는 감사하고 만족해 한다(91:16; 15:15). 이것은 인간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탄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시 90). 삶이 병과 고생으로 망쳐졌을 경우 인간은, 마치 죽음이 인생의 여기저기에(p. 3-422*) 돌출해 있는 것과 같은 죽음과 지옥의 덫에 대해 기도를 할 수 있다(116:3; 116:8). 그러나 죽음이 본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두려워하게 된 것은 악이거나, 또는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 죄 Guilt에 대한 하나님의 → 징벌 Punishment을 뜻하는, 일찍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의 백성들의 사회에서 깨끗하게 없애기 위하여 죽음으로 개인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사회 자체가 개인을 정죄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성 전체에 미치는 → 심판 Judgment을 막기 위해서이다(신 13).

(b)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멸은 창조적 의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은 불순종이라는 분명한 행동 때문에 일찍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타락 후에 그는 단지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라는 벌을 받았을 뿐이다. 시 90에서는 타락의 기사를 시사하고 있으며 → 죄 Sin와 죽음의 연관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거기의 사상에서도 인간의 죄에서 기인된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덧없이 빨리 지나가는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참조: 시 51; 14:2). 따라서 비록 죄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유일한 예외는 “승천”의 경우들임) 아담의 죄와 죽음의 결과로서 죽음이 유전된다는 언급은, 원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중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제일차적인 것은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 백성(→ 언약 Covenant; → 이스라엘 Israel) 간의 관계이므로 죽음은 믿음에 대한 위협을 제시하지 못하며 “왜?” 라는 의문이 죽음에 관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c) 더군다나 개인은 생명을 부여 받은 것이며 여호와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만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영웅적 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거나 또는 일어날 수 있다는 사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이 매우 민감하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알게 되는 경우라도 자살에의 유혹은, 자살이 일종의 인생의 부정일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또는 “훌륭한” 죽음을 원하는 욕망에 의해 억제된다. 사울이 전쟁에 패배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들이 죽은 후 자살했을 때도 이것이 그의 생명의 영웅적인 결말이라는 암시는전혀 없다(삼상 31; 참조: Ahithophel, 삼하 17:23).

(d) 간혹 여호와가 음부의 주(Lord)로 간주되기도 한다(139:8).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라도 여호와께 온전한 신뢰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73:23이하; 19:25). 후기의 → 부활 Resurrection 교리가 바로 이러한 구절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a)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여호와의 백성(→ 사람들 People)과 → 언약 Covenant 개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토라(Torah)에 대한 믿음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인화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31:29이하; 18:2).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죽음이 하나의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이 인간의 운명에적합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기원을 인간의 죄 속에서 추적하였다. 때 아닌 때 죽음뿐 아니라 죽음은 모두 죄로 인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창 2장과 창 3장의 타락기사에 관한 여호와 문서 기자의 전승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몇몇 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바로 그런 사상 경향이, 이 시기에는 강력한 형태로 확대되었다. 아담은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당신은그에게 당신의 금령(禁令)을 꼭 하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금령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즉시 당신은 곧 그와 그의 후예를 죽음으로 정하셨습니다”(에스드라하 3:7). “죄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여자로 인하여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집회서 25:24). 죄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아담에 의해 초래된 공통적 죽음의 운명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이런 동등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다(참조: 예: 시리아어 바룩묵시록 54:19: “아담은 자기자신의 영혼에만 책임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가 한 사람의 아담이 되었다” 그 외의 자료로는 SBI 815이하; Ⅲ 227이하가 있음).

(b) 이처럼 죽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운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닥쳐온 것으로 생각된 이상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이다. (p.3-423*) 따라서 유대의 묵시문헌에서, 세상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과 그 나라에서는 죄가 정복되고 죽음이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은26:1912:2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후에 이란의 사상의 도움으로 공식화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전 세대를 위해서도 신의 새로운 창조 행위로 죽음이 굴복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의인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며 의롭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떨어질 것이다(에스드라하 7:31이하). → 부활 Resurrection art. anastasis, 구약성경)의 교리는 자연히 논쟁의 주제로 남았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지지했으며 사두개인들은 반대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부활될 것인지 혹은 이방인들도 부활될 것인지, 의인만 부활될 것인지 또는 의롭지 못한 사람도 부활될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분했다(후자의 경우는 심판을 받기 위해).

(c) 죽음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견해가 이러한 부활 사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비관적이 될 수도 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고전 3:19이하).

(d) 비유적인 의미로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면이 또한 증가한다. 30:15에서 우리는 이미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에서 죽음에 대한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참조: 21:8).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또는(에스겔서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때(18:21이하., 18:31이하)는 언제나 죽음이 발생한다. 여기서 죽음으로 간주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 관계의 파기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은 → 생명 Life으로 여겨진다.

(e) [편집자주] 19:25 이하에 함축된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하여는 로울리의 저서(H. H. Rowley, Job, 1970, 172이하)를 참조하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내가 육체 밖에서(RSV, without my flesh; 난외주, from my flesh; 히브리어: 밉베사리[mibbesari]) 하나님을 보리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현세에서의 욥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지만 로울리(Rowley)는, 그 앞의 구절들에서 욥이 금세에서의 자기의 정당성 입증에 대해 희망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이 구절이 사후 변호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3. 헬레니즘 시대를 특징 지우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변하여 인간 중심적인 영역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이원론적 사상이 다소간에 유대교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a) 따라서 → 영혼 Soul은 '불멸'로 간주되었다(솔로몬의 지혜서 3:4; 4:1; 15:3). 부활의 사상이 완전히 배제되고 영원한 비육체적 존재가 사후에 즉시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경우(마카베오 사서 16:13; 17:12)를 제외하고, 영혼은 하늘의 처소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머무르게 된다는 사상이 존재하였다(에디오피아어 에녹서 102이하; 에스드라하 7:88이하).

(b) 헬라 철학이 미친 영향으로 인한 또 하나의 결과는, 유대인 순교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순교자들의 죽음이 영광스럽고(마카베오 사서 10:1) 덕스러운(마카베오 이서 6:31) 행위로서 찬양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c) 필로(Philo)는 육체를 영혼의, “약한 그리고 죽은 동료”로 묘사했으며 그래서 육체의 죽음, 즉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하는 것을 일종의 해방의 행동으로 보았다(Leg. All., 1, 107). 그는 헬라사상을 수용하여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사(死)를 경시하며 실제의 죽음을,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여 온갖 종류의 정욕과 악한 것들 밑에 영혼을 매장하는 상태로 간주한다(Leg. All. 1, 105이하).

(d) 요세푸스(Josephus)의 저서에, 유대 사령관 엘레아잘(Eleazar)이 마사다(Masada)의 요새에서 로마인들에게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을 설득한 장면이 나오는데 말하자면 이는 요세푸스가 엘레아잘(Eleazdr)로 하여금 통상적인 헬라적 사고방식을 구사하게 했다 하겠다. (p.3-424*) 명예롭게 살수 없다면 차라리 용감하게 죽어야 한다(War, 7, 341). 그렇게 훌륭하고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War, 7, 325이하)은 그러한 용기에 대한 경의를 뒤에 남기는 것이다(War, 7, 388).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죽는 자는 행운아로 여겨야 마땅하다(War, 7, 372). 더욱이 죽음은 영혼에게, 죽을 육체가 소유한 악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며-육체에 구속된 영혼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영혼을 본래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War, 7, 341이하).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War, 7, 340).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는 약 120회 정도 나온다.
복음서에서는 거의 대부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바울의 저술에서는 주로 인류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나토오(thanato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11회 나타나며 드네토스(thne:tos: 죽을 운명의 mortal)는 6회 나오는데 모두 바울의 저술에서 사용되었다.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죽다 die)는 신약성경에서 113회 사용된다(드네스코 thne:sko: 는 6회 사용). 공관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는 드물게 사용된다. 그러나 한편 바울의 저서에서, 이 단어는 바울 이전의 통상적인 신앙고백 문구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5:8)이다. 쉰아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는 14:31; 고후 7:3; 딤후 2:11에 나온다. 마지막 예문에서만 이 단어가 기독론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는 3회 나온다. 고전 15:53 이하는 묵시적인 문맥 중 불멸을 “입는다 put on”라고 표현한다. 딤전 6:16에서 하나님만이 불멸을 소유한 유일한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1.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견해는 옛 유대의 견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교가 받은 헬레니즘적 영향은 거의 그 효과를 미치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견해가 유지되었다.드네토스(thne:tos: 죽을, 죽을 운명의 mortal)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마다 이 단어는 인간의 필멸성이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짐을 시사해 준다. 인간은 사망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4:16; 9:1 70인 역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불멸성을 가진 유일한 분(딤전 6:16)이신 반면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2:15). 유대교에서와 같이 죽음은 항상 개개인의 죽음으로 생각되며, 공동체의 존속적 생명을 언급함으로써 죽음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신약성경의 사상과 이질적인 것이다.

(a) 사실이 그렇다면 무엇이 죽음을 야기시키는가 라는 문제에 자연히 중요성이 부여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바울이 요약해 놓았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요”(6:23)이다.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마귀(사탄 Satan)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로 간주된다(2:14). 그러나 물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지옥 속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10:28; 2:23).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이유에 대한 문제가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이 학문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음을 우리가 명백히 알게 된 것은 죽음과의 관련성에서이다. 그 문제는 답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음을 하나의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학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죽음의 보편성 속에서 인간 유죄의 보편성과 구속의 보편적 필요성이 명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4:17)이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경우 인간은 자기자신을 그의 생명의 근본에서 잘라냄으로써 죽음에 예속하게 된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죽음의 현상은 인간 평생의 객관적인 상태를 밝혀 준다. 창조된 것, 즉 인간이 통제하는 자연적인 것에 의해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진정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시켰으며 따라서 자기자신을 가치 없는 것에다 넘겨주었다. 죽음을 향하여 진행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자기생명의 근본상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안에서 죄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생명을 다스리는 힘이며 따라서 급기야는 하나의 현재적 실체이다.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죄 속에 있는 한 삶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p.3-425*) 이것은 죄인에게 다음과 같이 울부짖게 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죽은 dead(→ 네크로스 nekros, 15:24; 15:32)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도 동일한 측면에서이다. 4 복음서에서도 또한 죽음과 생명이 존재의 현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자기존재의 신적 갈림길이되시는 예수님께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5:24; 8:51; 11:25).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서자기자신을 단절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있는 사람이다(3:2).

(b) 인간의 유죄 상태와 필멸적 운명의 관계에 대하여 신약성경 기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숙고한 사람이 바울이다. 롬 1-4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구별 없이 죄를 지었으며 따라서 죽음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로 부름 받는다는 점을 여러 가지 논법으로 증명한 후 바울은 계속하여 5:12-21에서 이 논제들을 → 아담 Adam-그리스도 예포론의 도움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래된 생명은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5:12; 참조: 고전 15:21이하)라는 사실과 유사성을 지닌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으며 따라서 죄의 결과인 죽음이 단순히 우리 인간에게 유전되어 온 운명이라는 사상을 배격한다. 그는 죽음의 동적인 성격과 죽음이 개개인 자신들의 죄로 인한 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참조: G. Bornkamm, Aufsatze, I, 84이하).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술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승리인 구원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단지 인간 외부에서와 인간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항상 자기 자신의 행위(→ 일하다 Work)를 통하여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구원의 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이용할 때마다 죽음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 율법 Law, → 죄 Sin 그리고 죽음은 모두 동등한 차원에 놓여 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16). 그러므로 율법에 근거하여 생명을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현 실체가 된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9이하).

만약 죽음이 인간의 죄의 역사적 결과로 간주된다면 인간의 죽음과 살아있는 다른 피조물들의 죽음의 “자연적” 연관성은, 인간이 아닌 생물들도 왜 똑같이 죽음에 예속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 당시 유대교의 사상과 같은 선에서(Gen. R. 12:5) “피조물”(→ 창조 Creation)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닌 인간의 죄의 결과로 허무한 것과 일시적인 것에 예속되었다고 대답한다. 피조물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8:19-22). 따라서 바울은 자연계의 죽음까지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c) 우리가 이제까지 언급해 온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간의 유죄상태를 명백히 나타내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서 죽음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간을 노예화하는 한 힘으로 여겨진다(2:15), 그러므로 죽음은 때때로 의인적 형태로 나타난다(20:14). 따라서 죽음의 불가피성에 관한 지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또는 영웅적인 죽음의 행위를 통하여 죽음의 공포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신약성경에서는 배제된다. 후자의 방법의 결과 오히려 죄를 강화시켰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인간 노력의 모든 태도를 하나하나 명확히 정죄할 때까지도, 다시 말해 인간이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진술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기사의 핵심점이다(→ 십자가 Cross, art. stauros, 신약성경 2). 이 진술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 부활 Resurrection과 믿는 자들의 칭의 또는 새 → 생명 Life에 대한 진술들과 거의 항상 연관되어 나타난다.

(a)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 문구들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보이시고”(고전 15:3이하),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p. 3-426*)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라고 진술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죽음대로 죽으셨으며(2:7이하; 2:1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초기의 신앙고백 문구가 지적해 주듯이 그는 실제로 죽었다(고전 15:3이하). 이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며(5:6이하; 살전 5:10; 2:9이하; 10:45),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진술들에 의하여 여러 방면으로 강조된 가르침이다(예: 고후 5:14이하; 벧전 3:18). 그의 죽음은 율법(7:4; 참조: 2:21), 죄(고후 5:21; 1:22; → 화해 Reconciliation), 우리의 죽음(5:9; 딤후 1:10; 2:14이하; 1:17이하)을 정복한다. 죽었다가 부활한 분이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오실 분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된 것은 이 승리를 명백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며, (고전 11:26; 고후 5:14) 또한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2:21).

(b) 죽음에 대한 승리의 이 복음은 다른 많은 종류의 언어로 표현된다. 초창기에 널리 퍼졌던 하나의 개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 53에서 취한 개념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죄를 도말하는 화해의 희생제사로 본 것이다(→ 화해 Reconciliation, art. hilaskomai: 3:25이하; 바울 이전의 상용문구; 고전 11:42이하; 바울 이전의 성찬식 용어; 참조: 1:7; 벧전 1:18이하). 여기서 언약의 희생(14:24; 13:20)과 유월절 희생(고전 5:7)에 대한 구약의 사상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종의 대리 희생으로 보는(고후 5:21) 그와 관련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노예의 법에서 나타나는 개념인 속전(ransom)의 개념도 역시 빈번하게 나오지만 이것의 기독론적인 용법에서는 강력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구속 Redemption, art. lytron: 참조: 10:45; 3:13; 벧후 2:1).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은 죽음을 당한 구속자가 음부로 내려간다는 개념인데 거기서 마귀를 이기고 사람들을 그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2:14이하; 1:17이하; 참조: 벧전 3:19이하; 참조: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19722, 378-88).

제사와 법률 분야(화해, 속전, 대리)에서 차용한 언어의 어려움은 차용어가 과거의 유죄(guilt)의 짐으로부터, 그리고 그러한 유죄로 인한 벌인 미래에 닥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만을 표현하는데 있다. 그것은, 현재가 죄나 → 의 Righteousness의 영역, 죽음이나 생명의 영역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c) 그러므로 바울의 저서에서는 제사와 법률 분야에서 끌어온 신학적인 표현뿐 아니라 신비종교들과 영지주의의 언어도 사용하는데 이러한 종교들에 의해 제공된 영역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생명에 가져오는 효과를 아주 명확히 표현시켜 주기 때문이다([편집자주] Schmithals는 다음 저서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다: Gnosticism in Corinth, 1971과 Paul and the Gnostics, 1972. E. Yamanchi, Pre-Christian Gnosticism, 1973에서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영지주의를 본질상 기독교 이후의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 배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참조: F. L. Cross, ed., The Jung Codex, 1955. U. Bianchic, ed., Origins of Gnosticism, 1967. 신비종교들에 대하여는 G. Wagner, Pauline Baptism and the Mystery Religions, 1967; → 침례 Baptism). 신비종교들의 언어는 특히 → 침례 Baptism의 의미와 관련하여 발견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6:3이하).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찾을 기회의 영역이 되는 세상에 대하여(6:14), 세상의 예속화 시키는 권세들에 대하여(2:20; → 율법 Law), 율법의 노예 상태에 대하여(7:6), 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6:6),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대하여(고후 5:14이하)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구속자와 구속 받은 자의 본질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는 영지주의의 언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후 4:10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참조: 1:24).

(d) 바울 및 바울 이전의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죽음의 세상에 예수님이(p. 3-427*) 오신(→ 오다 Come, art. erchomai) 전체 사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 십자가 Cross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로고스 Logos(→ 말씀 Word)의 성육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동시에 하나의 승귀로 볼 때 이것은 죽음을 이긴 보편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신적 증거다(12:33; 18:32).

(e) 그 시대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한 방법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일차적으로 하나의 전기적인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어 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선한 대의명분을 위한 고귀한 사람이나 순교자의 죽음, 또는 정치적인 반역자의 죽음이나 재판의 부정함을 인한 희생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구원역사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사건으로 보며 그렇게 선포된다(6:10).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여러 진술들은 공통적으로 그 죽음을 “~을 대신한” 죽음으로 선포하고 있다(우리를 위하여, 5:8; 고전 15:3;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10:45; 14:24, 병행구절 26:28; 9:28; 10:15; “너희를 위하여” 고전 11:24, 참조: 22:19이하). 여기서의 의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함으로써 죄의 권세를 깨뜨려 죽음을 초래하는 → 율법 Law의 권세를 벗기며 율법의 효력이 끝나게 하고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그 권능을 빼앗는다는 것을 선포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가 있는 장소, 다시 말하면 죽음에서 찾으려 하며 자신을 생명의 근본으로 내어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독선으로 인한 근본적 죄를 범하게 만드는 강요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은 무죄로 방면되어(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됨), 적절한 창조의 신분을 부여 받으며(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새 생명을 부여 받는다.

3.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미 사망(또는 율법이나 죄)이 패배했다는 점과 이에 따라 생명의 약속이 현재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영지주의와 신비종교들로부터 취한 말들이 특별히 사용하였다.

(a) 예를 들어 바울의 저서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들을 비교하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0이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19이하).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 의문에 순종하느냐”(2:20).

이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수치”를 극복한 경우, 즉 인간이 그의 “옛” 자아, 즉 “옛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생명을 찾으려는 욕망이나 상상에 의한 의무감을 죽음에다 내어준 경우에는 곧 그리스도를 바로 여기에서 지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경험한다(참조: 고전 1:23이하). 참된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생명이며 자기자신이 자주적으로 성취하려는 의무감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b) 요한이 특별히 강조한 말씀들에서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요일 3:14). 자기자신을 계속 의롭게 하고자 하는(죽음을 가져오는) 의무적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죽음, 바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자신을 조건 없이 자기이웃에게 내어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c) 공관복음서에서 죽음이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은 특히 이적을 담고 있는 가시들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죽은 자의 소생을 수록한 기사들에 의하여 예증되고 있다.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5:36)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죽음의(p. 3-428*) 운명으로부터의 구원으로, 그리고 참된 생명의 시작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d) 그리스도인의 경우 여기에서 지금 죽음이 패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마침내 죽음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결과다. 그 이유는 사도의 가르침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죄의 권세가 파괴되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구원받고 그리하여 이미 그가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육체의 죽음이 인간을 계속 지배한다는 사실은 죄와 죽음 사이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신약사상의 초기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구별되지는 않았지만 죽음은 그 어떤 의미에서든 죄에 그 기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의 실태에 대한 고찰은 결과적으로 차이점이 주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자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지만(“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5:13) 그래도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든 죽음을 예상하고 있을 동안에는이 현상을 간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여러 가지 답이 주어졌다.

(a) 바울로서는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현상이 심판에 관하여 안전하다라는 생각을 경계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며 “이미 지금 now already”이라든가“아직 아니 not yet”라는 변증법을 전개한다. “최후의 적”인 죽음이 최후 마지막에 패배하기 위하여 남아 있다면(고전 15:26) 인간에게 아직 위험은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뜻대로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하여 완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원에 대한 말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과 더불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성령(→ 영 Spirit)을 받았지만 자기 육체의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다리고 있다(8:23; 고전 15:53). 죽음을 극복하는 미래에 있을 이 승리에 대한 기대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신앙을 확고하게 형성하는데, 이 부활은 바울에 의하면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전 15:12이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이 기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4:17)에 대한 소망이 믿음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후 5:1-10; 5:1-5). 신자라도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이하)는 확신은 다음과 같은 신자의 승리의 노래와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이 사상은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전개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죽는 것으로 간주하는 법을 배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또한 구원과 영생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난과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이다(고후 4:11이하; 1:20; 8:36이하).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죽음을 단순히 죽을 육체를 버리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누가는 이 사상을 독특한 방법으로 전개시켜 예수님의 죽음을 순교의 한 예로서 묘사하며, 스데반의 순교를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았다는 관점에서 묘사한다(7:54이하). 그가 물론 완전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무시하고 그런 사상을 전개하지만 여기서 그의 목적은 그 시대의 순교자들에게 그들이 겪어야만 할 죽음을 보는 긍정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려는 것이다.

(b) 요한은 신앙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광범위한 신학적 고찰 대상으로는 삼지 않는다. 그의 저서에서는 구원의 현재시제가 매우 철저하게 강조된 나머지 심판과 부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와 죽음 사이의 관련성까지도 함께 사라진다(5:28이하는 예외). 믿는 자들은 심판을 겪었으며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0:28). 그러므로 14:2 이하에서 우리는, 귀환 하시는 아들에 의해 아버지 집의 “거할 곳들”로 영접된다는 말씀을 읽어볼 수 있다. (p. 3-429*)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신자들의 죽음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c) 신약성경의 후기 저술들과 공관복음서에서까지, 우리가 요한의 저술들과 바울의 초기서신들에서 본 것처럼, 구원과 심판, 생명과 사망의 변증법에 대한 동일하고 강력한 관심을 찾아볼 수 없다(참조: 딤후 4:7이하; 3:7이하; 벧후 3:11이하). 구원의 현재적 경험에 대한 강조는 후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강력하고도 도덕적인 해석으로 점진적으로 대체되며 결과적으로 육체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에 은혜를 얻는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 2:11). 이와 같이 믿는 자도 심판에 임할 것이며 또한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를 것이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정죄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사망의 개념이 왜 생기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이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20:13이하).

(d) 동시에 또 다른 전승들은 공히,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하며 따라서 모든 생명의 출처이자 근원이 되시는 분께로 인도한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러한 사실을 넘어설 수 없음을 주장함과 동시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 이하의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면 안 된다고 역설함으로써, 특별히 기독교적 사망관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이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14: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이하; 참조: 1:20; 살전 4:13이하; 12:24-26; 14:13). W. Schmithals

kaqeuvdw, 2518

kaqeuvdw, 2518(katheudo:, 카듀도). 잠자다 sleep.

koimavw, 2837(koimaomai, 코이마오마이).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

u{pno", 5258(hypnos, 휘프노스). 잠 sleep.

고전 헬라어문헌

1. 카듀도(katheudo:)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오직 '잠자다' sleep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반면 케이마이(keimai: 눕다 to lie)에서 파생한 동사 코이마오(koimao:)는 그 기본 의미로서 '(스스로를) 잠재우다', '잠자다' to lull(oneself), '잠들다' to sink into sleep를 뜻한다(Homer, IL., 11, 241). 특히 중간태나 수동태 형에서는 이 단어가 '자연스러운 잠' natural sleep이나, (설명 어구와 함께 또는 설명 어구 없이) '죽음' dying에 사용될 수 있다. 이 단어가 성적인 의미, 즉 '동침하다' to sleep together with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2. 휘프노스(hypnos; 인도-게르만어 supnos; 라틴어 sopor)는 호머 이후 '자연스럽게 오는 잠' natural sleep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데 이러한 잠은 사람을 상쾌하게 하거나 잠에 취하게 하여 그날의 무거운 짐을 잊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 우리는 활동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육체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철학자들이나 종교사상가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어떤 추론을 끌어내게 만들었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 연루되어 있는 상태인 깨어있는 의식상태와 동일시되는 것이므로 잠은 불가피하게 쓸모 없는 것으로, 방해스러운 것으로, 품위를 떨어드리는 것으로, 동물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일찍이 Heraclitus의 저술에서, 그리고 특히 Plato의 저술에서, 예: Plato, Republic, 9, 571c; 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95). 잠과 죽음 사이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신화에서 휘프노스(Hypnos)가 신 다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Homer, Ⅱ., 16, 671이하). 초기의 의술에서는 잠자는 것을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죽지 않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중간적, 물리적 단계라고 생각했다(참조: Aristotle, De somno et vigilia, p 453b 11이하). (p. 3-430*) 그러나 이 표현이 죽음을 뜻하는 완곡어법으로 사용한 것은 B. C. 2세기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후 1세기와 2세기 경에는 이러한 용법이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참조: E. Peek가 수집한 명문들, Griechische Grabgedichte, 1960). 이것은 그 용법이 헬레니즘 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

1. (a) 70인 역본에서 카듀도(katheudo:, 36회)는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 눕다 to lie down)를 번역하는데 사용된다(예: 삼상 3:2이하).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오는 잠'을 가리키며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이 명사 휘프노스(hypnos)에도적용된다. 휘프노스(hypnos)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셰나(shena': 잠자다 sleep)의 역어로 쓰이지만 51:39(휘프논 아이오니온[hypnon aio:nion]: 영원한 잠, 죽음 eternal sleep)과 14:12은 예외이다. 14:12도 문맥상(“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이 명사형과 명사형에서 파생한 동사 휘프노오(hypnoo:)가 죽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13:3, 휘프노소 에이스 다나톤[hypno:so: eis thanaton: 사망의 잠을 자다 to fall asleep into death]. 동사 휘프노오(hypnoo:: 잠자다 sleep)는 약 80회 등장한다.

(b)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그 양상이 다르다(약 150회. 이것 역시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의 역어). 능동태 형은 오직 24:11왕상 17: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눕다' to lay down, 또는 '눕히다' make to lie down를 의미한다. 그 외에는 이 단어를 중간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눕다, 자다 lie down, 진을 치다 encamp, 눕다 lie). 그러므로 이 단어는 '잠자다' sleep를 의미하게 된다(예: 삼상 3:9, 카듀도[katheudo:]처럼). 특히 모세 5경에서는(코이마오마이 메타[koimaomai meta], 예: 19:32이하) 이 단어가 '함께 잠을 자다' sleep together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의 후기 기사들, 특히 역사적인 기사에 있어서 이 단어는 명예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죽다' to die라는 뜻을 획득하였다(예: 에코이메데 메타 톤 파테론 아우투[ekoime:the: meta to:n patero:n autou: 그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왕하, 대하에서 36회의 용례. 예: 왕하 14:16; 왕하 14:22; 왕하 14:29; 왕하 15:7; 왕하 15:22; 왕하 15:38; 대하 26:2; 대하 26:23). 이리하여 이 단어는 또한 아무런 설명구 없이 이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32:19이하; 14:12;'43:17; 50:11). 초기 문헌에서 이 단어는 이런의미로 간혹 사용되고 있다(예: 47:3; 5:27).

2.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사카브(shakab)가 유대 랍비들에 의해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카듀도(katheudo:)와 휘프노스(hypnos)를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식' knowledge이나 '근신' watchfulness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육체적인 의미의 잠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일찍이 잇사갈의 유훈(Test. Iss) 9:9에서 이미 이 개념이 휘프노스 아이오니오스(hypnos aio:nios: 영원한 잠 eternal sleep, 다시 말하자면 죽음의 잠 sleepof death)이라는 형태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이 잠에서부터 고인이 깨어날 것이라는 저의가 함축되어 있다(참조: Test. Jud. 25:4, 엑쉬프니조[exhypnizo:]). 소위 중간 상태라고 불리우는 죽음(→ 영혼 Soul 구약성경)의 잠이라는 이 개념은 특히 유대 묵시문헌에서 더욱 발달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예: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91:10; 92:3)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약성경이 주는 가르침의 배경을 이룬다.

신약성경

1. 명사 휘프노스(hypnos: 잠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5회)와 동사 카듀도(katheudo:: 잠자다 to sleep)는 항상 문자 그대로 잠자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예: 1:24; 9:32; 11:13). 그러나 겟세마네 현장(26:40; 14:37; 22:45)과 살전 5:6에서 잠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근신의 결핍을 나타낸다. 한편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중간태로만 사용)는 18회의 용례 중 15회가 '죽다' die를 의미한다. 오직 28:13; 22:4512:6에서만 이 단어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잠자다' to sleep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p. 3-431*) 비유적인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바울이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잠자고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죽은 사람을 묘사하기 위하여 분사 형태를 사용한다. 살전 4:13-15과 다시 고전 15:18; 고전 15:20에서 이 분사형들이, 예수님에 의한 죽은 자의 → 부활 Resurrection 또는 죽은 자의 다시 깨어남에 관한 문장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문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이와 동일한 것이 27:52이다. 잠과 죽음 사이에 공존하는 의미가 일찍이 호머(Homer)에게서도 이미 증명되며 70인 역본에서도 증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관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새 생명에로 부름 받을 사람과 이미 “잠든” 즉 죽은 사람을 동일시하려는 목적에 잘 부합된다.

고전 7:39; 고전 15:6; 고전 15:51에 나오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죽다' to die의 정확한 상당어구로 사용되었다(참조: 7:60; 13:36; 벧후 3:4의 “조상”). 요한은 나사로의 부활기사인 11:11-14에서 제자들의 그릇된 이해를 보여주기 위하여 순전히 의도적으로 이 동사에 대한 고대의애매모호성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은 치유를 가져올 일종의 잠을 예수님이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도 아마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적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에 주의를 집중시키려 한 것이다. 이 권세를 이긴 자에게는 다나토스(thanatos)가 휘프노스(hypnos)에 지나지 않는다.

2. 살전 5:10에서만이 카듀도(katheudo:)가 죽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9:24과 그 병행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아페다넨(apethanen: 그녀가 죽었다)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아이의 상태가 예수님께는 최후의 되불러올 수 없는 상태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이다. L. Coenen

nekrov", 3498

nekrov", 3498(nekros, 네크로스). 죽은 dead, 죽은 사람 dead person.

nekrovw, 3499(nekroo:, 네크로오). 죽이다 put to death.

nevkrwsi", 3500(nekro:sis, 네크로시스). 죽음 death, 죽은 상태 deadness.

고전 헬라어문헌

1. '고생' trouble, '불운' misfortune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 어근 네크-(nek-)(참조: 라틴어. nex: 살인 murder, 죽음 death; neco: 죽이다 to kill; noceo: 해하다 to harm)에서부터 시어의 남성형 네퀴스(nekys: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와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네크로스(nekros)가 파생했다. 명사로서 이 단어는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를 의미한다(예: Homer, Ⅱ., 6, 71). 핀다르(Pindar) 이후부터 이 단어는 형용사(죽은 dead)로 쓰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이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의 죽은 몸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으며(Pindar, Fragments, 203) 더 이상 프쉬케(→ 영혼 Soul)에 의해 생명이 주어질 수 없는 것 즉 단순한 물질에 불과함을 의미한다(Plotinus, 4, 7, 9).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to kill, 사형에 처하다 put to death, 종종 수동태로 사용되어 죽다 to die)와 죽어가는 과정이나 죽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는 의학 분야에서 유래한 헬레니즘 시대의 형태들이다. 이 단어들은 병으로 인한 신체 일부분의 탈저(mortification)를 가리킨다(Galen, 11, 265; 18(1), 156). 나중에 이 용어들은 자연계의 '얼어붙은 것' 나무(Corpus Medicorum Graecorum, 1908이하 v, 9, 1p 31, 5)나 땅(Plotinus, 5, 1, 2)을 가리킬 때,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마취의 효과(Corpus Medicorum Graecorum, v, 9, 1p 115, 11)에 까지 사용되었다.

2. 고전 헬라어 문헌 전체가 네크로스(nekros)를 문자상이 의미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일면 스토아 학파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특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형용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3개의 기준을 분류한다. 즉, (a) 네크로스(nekros)라는 것은 프쉬케(psyche:: 영혼 soul)나 누스(nous: → 마음 mind), 또는 영(spirit), 즉 의식의 세계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참조: M. Ant., 12, 3, 2). (b) 또한 네크로스(nekros)는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소마(so:ma: → 몸 body)이다. (p. 3-432*) 누스(nous)는 그 자체와 함께 이 소마를 좌지우지해야 한다. 소마는 조아(zo:a: 동물계 animal world; → 생명 Life)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일부분이며,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3, 3; 2, 19, 27; M. Ant., 9, 24). (c) 마지막으로 네크로스(nekros)는, 누스(nous)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기자신의 판단기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거짓 교사들이나 거짓 철학자 등이다(예: Epictetus, Dissertationes, 1, 9, 19; 3, 23, 28). 위의 세 정의는 모두,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의식(누스[nous])만이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누스(nous)의 지배하에 있지 않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동사와 명사 형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테드네코스(tethne:ko:s: 죽은 dead)와 같은 분사와 더불어 네크로스(nekros)는 약 60회 정도 나오며 대부분 명사이지만 형용사로도 사용된다. 지혜문헌, 토빗서(Tob), 유딧서(Jud.), 마카베오서(Macc)에 나오는 28개의 예들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상당어구가 없다. 그렇지만 그 외의 곳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분사인 메트(met: 이미 죽은 사람 one who has died, 즉 죽은 자 a dead person)를 번역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9:7; 11:6-7에서 이 단어로 할랄(chalal: 꿰뚫린 pierced, 살해된 slain)을 번역하고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시체를 의미하는 기타 단어들의 역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을 여전히 땅 위에서 볼 수 있든지 또는 이미 죽은 자의 영역에 장사했든지 간에(18:11)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률적으로 사용된다(예: 아브라함의 아내, 23:3이하; 소마타 네크라[so:mata nekra: 죽은 몸들 dead bodies, 시체들 corpses], 왕하 19:35). 죽은 사람은 장사된다(토빗. 2:8; 12:12). 만약 그들이 노출된 상태로 내버려져 있어서 짐승들에게 먹힌다면(7:33; 19:7; 28:26) 이것은 무시무시한 벌로 간주된다. 19:16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가 특별한 어감을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이 단어가 단지 살해 당한 것에 불과한 자와는 구별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이며(테드네코스[tethne:ko:s]의 경우와 같이), 또한 이 단어가 해골과 구별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네크로스(nekros)는 신원은 알아볼 수 있지만 생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본 장의 모세율법은 죽음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자 하나님의 영역이기도 한 생명의 영역 사이에 철저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죽은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깨끗하지 못한 자,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와 분리된 자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보지 못한다(9:5; 26:14; 참조: 88:4이하). 하나님은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하시지 않는다(88:10).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한다(115:17). 그들에게는 희망에 없으며(143:3; Wis. 13:10)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9:4). 이 모든 것은 주변세계에서 아주 일반적이었던 죽은 사람에 대한 숭배나 죽은 사람들의 신탁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종교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에야 비로소 부활의 소망이 시작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의인의 고난에 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망이 처음에는 죽음까지도 자신을 여호와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참조: 26:19; 집회서 48:5; 참조: 37:9)는 확신의 형태를 취한다. 한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들에서만은 변화된 의미에서 우상들이 “죽은” 것으로 특징지워진다(솔로몬의 지혜서 15:5).

히브리어에서 메트(met)와 네페쉬(nepesh: 영혼 soul, 생명 life)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왜냐하면 네페쉬(nepesh)는 전인(whole man), 즉 그의 전 존재를 의미하며, 죽는다는 것은 인간 전체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0인 역본에서는 네크로스(nekros)가 프쉬케(psyche:: 영혼 soul)와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시적인 육체와 대조되는 영원한 → 영혼 Soul에 관한 헬라의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교리가 나중에 침투될 수 있는 길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2. 쿰란(Qumran)의 히브리어 문헌은 구약성경의 용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랍비문헌에서는 종종 비유적인 용법이 발견된다. (p. 3-433*) 불신앙인을 죽은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SB I 489, 8:22에 관한). 유대인의 18기도문(Eighteen Benedictions)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who makes the dead(함메팀[hammetim]) to live”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로(Philo)는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인 용법을 채택했으며 이와 아울러 영적인 것 그리고 지적인 것은 생명이며 감각에 예속한 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교리를 채용하였다.

신약성경

1. 신약성경에서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 죽은 사람 a dead person)가 명사와 형용사로서 130회 나온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로마서, 고전 15장에서 다른 곳보다 다소 더 많이 나오며 요한의 서신들과 데살로니가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디모데후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kill)는 4:19; 3:5; 11:12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 죽음 death, 죽임 putting to death, 죽은 상태 deadness)는 4:19고후 4:10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4:19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끝났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헬레니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참조: 11:12과 성경 외의 문헌들). 고후 4:10에서 사도가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고 말한 네크로시스 투 예수(nekro:sis tou Ie:sou: “예수 죽인 것” the dying of Jesus)는 죽음의 특성인 고통과 힘의 상실이라는 증상들을 언급한 말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생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성례식을 통해?). 반면 3:5에서는 아마 금욕주의를 지지하는 반대자들이 사용한 언어를 채택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외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멜레(mele:: 지체들 members)를 육체와 그 지체들을 지배하는 욕망들로서 해석하여 이를 억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네크로스(nekros)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이 통상적인 헬라의 용법, 그리고 구약성경의 용법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상태가 더 이상 인간의 최후상태는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다. 75군데에서 네크로스(nekros)는 에게이로(egeiro:: 깨다, 눈을 뜨게 하다 to awaken), 아나스타시스(anastasis: → 부활 Resurrection)및, 기타 동족어들의 목적어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결합 형태가 보이는데 예를 들면 조오포이에오(zo:opoieo:: 살아나게 하다 to make alive; → 생명 life; 예: 4:17; 2:13)나 프로토토코스 에크(prototokos e:k: → ~에서 먼저 난(자) firstborn of; 예: 1:18; 1:5) 등과 결합되기도 한다.

(a) 용어들의 이런 연관성은 이 용어들의 기초가 되는 일련의 교리를 표현한다. 초기 바울 서신들(살전 1:10)에서부터 복음서들에 이르기까지(예: 27:64; 28:7; 20:9; 21:14) 그리고 나아가서는 1:20; 딤후2:8, 그리고 1:5과 같은 후기 본문들에까지, 기독교 → 선포 Proclamation의 토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특히 사도행전의 초기장들을 참조하라; 예: 3:15; 4:10; 10:40이하; 13:30, 34)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처음 난 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지금 살아 있다(2:8)는 사실에 관한 증거에 놓여 있다. 이 증거는 고전 15:3 이하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고전 15:12이하)이다.

(b)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다(위의 구약성경 1을 참조하라). 이런 한계선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메타 톤 네크론[meta to:n nekro:n]) 찾느냐”(24:5)라는 누가의 질문의 배경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씀이 12:27(병행구절 22:32; 20:38)에서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경우는 보편적 →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기대와 증거의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점에서 변화된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퀴리유세[kyrieuse:])이다. 또는 누가가 표현한 대로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10:42; 참조: 벧전 4:5)이시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거나 그의 능력의(p. 3-434*) 범위 밖에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관한 복음서들의 기사(9:23이하., 병행구 7:11이하., 특히 15절; 요 11장; 12:1; 12:9)는 이 주장을 생생하게 지지하며, 예언의 약속을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일들의 배경으로(11:5, 병행구절; 7:22) 주장한다. 여기서는 35:5이하와 61:1 이하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nekroi egeirontai: 죽은 자가 살아난다 the dead are raised up)의 첨가로 확대되어 있다. 더욱이 죽음의 정복이 그리스도-사건(Christ-event)의 핵심적인 요소로 생각되기 때문에, 10:8(참조: 16:17이하)에서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약속(병자가 회복될 것이며 → 귀신 demon이 쫓겨날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이 적용되며 또 바울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그러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20:9-12)는 것도 당연하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다(4:17; 4:24; 특히 고전 15:12이하; 12:25이하. 유사구절; 23:6; 5:21; 5:25). 일반적 부활은 이미 유대인의 대망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일반적 부활에 관하여는 또한 침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참조, 6:14 병행구). 일반적부활의 우선권이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에게 주어진다(고전 15:23; 살전 4:16; 14:13).

3. 네크로스(nekros)가 시체라는 문자적 의미로 쓰인 이런 문맥과는 다르게 쓰인 곳이 몇 군데 있다. 11:18; 20:5; 20:12 이하는 최후 → 심판 Judgment 때의 죽은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8:22과 병행구절 9:60에서는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나란히 놓고 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름을 거절하는 자를 … 죽은 자와 같은 수준”에 둔 것이다”(R. Bultmann, TDNT Ⅳ 893).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 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9:26(간질병을 앓는 소년의 상태)와 28:4(수직하던 자들의 상태)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는 호스(ho:s: 와 같은 like, ~와유사한 in a simile)와 함께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옛 문자적 의미는 5:10(삽비라의 경우)에만 나온다.

4. (a) 스토아 학파의 저자들이 사용한 비유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탕자의 비유에서 누가는 한 아들을 “죽은” 아들이라고 불렀는데(15:24; 15:32) 이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탕자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떠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6:11; 6:13에서 침례의 교리에 관하여 성례적 용어로 이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네크루스 멘 테 하마르티아(nekrous men te: hamartia: 죄에 대하여 죽은 [자] dead to sin)로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아마 8:10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곳의 어법이 이원론적인듯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소마(so:ma: 몸 body)의 무익함에 대한 경멸적인 선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 영 Spirit과 혼(→ 영혼 Soul)까지도 바울에게는 사륵스(sarx: 육체 flesh)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구절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심판에, 따라서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이 점은 2:1; 2:5 그리고 2:13에 의해서도 확실히 볼 수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네크로스(nekros)의 상태가범죄(파라프토마신[parapto:masin]; → 죄 Sin)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본다.

(b) 비유적인 용법의 전형적인 예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진보한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6:1; 9:14에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 → 일하다 Work)
즉 그리스도 없는 사람의 행위로 인한 의(works-righteousness)가 네크로스(nekros)로 묘사된다.
약  2:17-26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약 피스티스(pistis: → 믿음 Faith)가 생활 속에서 외적인 증거를 낳지 못한다면 이러한 피스티스도 역시 죽은 것으로 특징지운다.
여기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를 다시 사용하였지만 이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죽음의 정복에 대한 믿음은, 죽음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까지도 고유하고 영구한 위치를 전혀 허락해 주지 않는다. - L. Coenen. (p.3-435*)
















태어 나기 전에 성경에 기록된 고레스


태어 나기 전에 성경에 기록된 고레스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 여름에 하루살이와 매미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해가 지게 되니 매미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하루살이야 오늘 우리 너무 재미있게 놀았어 이제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만나자 그리고 내일도 엄청 신나게 놀자 하루살이가 얘기합니다 응 내일이 뭔데 응 내일은 이제 해가 저 산넘어로 넘어가면 이제깜깜해 지지 그리고 하늘에 별들이 뜨지 그리고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것이 내일이야. 에이 내일이라는 것이 어디있어 해가 져서 밤이 되면 죽고 그것으로서 끝나는 것이지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가 아무리 내일을 부인한다 하여도 내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살이 얘기와는 상관없이 내일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아 이제 한 아이와 매미가 여름방학을 아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 여름이 끝나자 아이가 매미에게 이야기 합니다. 매미야 매미야 올 여름방학은 너 때문에 너무 너무 재미있었어. 우리 내년 여름방학 때 다시 만나자 응 내년이 뭔데. 자 너 내년을 모르니 내년은 이렇게 꽃아 다 떨어지고 또 나무들에서 낙엽이 다 떨어지고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리고 그리고 봄이 되어 따뜻해지고 꽃이 피면 그게 내년이 되는 거야. 야 내년이 어디 있어. 여름이 지나면 춥고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내년이란게 어디있어.

여러분 한 여름밖에 살 수 없는 매미가 아무리 내년을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미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년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보게 죄와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서 만나세. 아니 영원한 나라라니요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그럼 영원한 나라는 사람이 죽고나서 부활하여 나와 함께 영원히 사는 나라이네.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 사람이 늙어 죽고 나면 흙이 되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런 영원한 하늘나라같은 그런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평생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아무리 하늘을 이해할 수 없고 부인한다 하여도 하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 이외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시야를 열어줍니다. 과거와 현재와 매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줍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하지요 약속입니다. 여러분 약속은 내게 뭐뭐하겠다는 예언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가족들과도 약속을 하고 친구와 직장에서 뭐 하겠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 내 결심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언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행기가 한시간에 몇 km 날아가는지 아십니까? 한 시간에 약 900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또 빛은 1초에 약 30만km를 날아갑니다. 빛이 1초 똑딱하는 순간에 약 30만 km라 하니까 감이 잘 안오지만 그것을 다시 말하면 지구 7바퀴 반이라 합니다. 아마이런 소리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빛이 초에 30만 km로 날아간다고 하였을때 1년간 날아간다면 그 거리를 1광년이라 합니다. 그래서 광년이라는 것은 시간의 단위가 아니고 거리의 단위입니다.

1광년을 km로 환산하면 약 9조5천억 km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태양계라하는데 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입니다.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은하까지 거리는 약 200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솜씨가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엔 수천억개의 태양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서 운행하고 있고 이 우주의 질서는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가 이나라가 정치와 경제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보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을 왜 주셨는가?

 

이제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은 그것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요14:29)

분명히 주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암3:7).

왜 우리에게 예언을 왜 주셨는가? 믿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언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예언된 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하는데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1900년전 BC1921년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지금 갈대아우르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굉장히 발전된 도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고고학적 자료들을 보면 갈대아우르엔 2층 집도 있었고 하수구도 있었고 굉장히 편리한 시설들을 사용하고 있었지요. 또 여자들이 바르는 화장품도 꽃가루를 배합하여 만든 아주 천연적인 화장품으로 그렇게 문명이 발달된 곳이 갈대아우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데라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직업은 무엇이냐 하면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이였지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직업은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 그런데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데 자기 아버지가 우상을 파는 것이 영 못마땅하였습니다.

어느날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밖에 좀 다녀 올테니까 가게좀 잘 봐라. 아버지가 떠나자 아브라함은 이 때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브라함은 몽둥이 가져와 그 가게 진열되어 있는 우상들을 때려 부쉈습니다. 그리고 밥을 가져다가 우상들 입에다 발라났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깜짝 놀랐지요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제가 우상님들이 배가 고플것 같아서 밥을 가져다 주었더니 얼마나 배고 고팠던지 먼저 먹으려다 서로 싸우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때끼 이놈아 아니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뭐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수 있다는 것이냐? 말도 안되는 이야기 하지좀 마라. 그렇게 꼼짝도 못하는 우상이 이렇게 싸움을 한단 말이냐 하면서 아브라함을 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버지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나무나 돌로 만든 이 우상들이 밥도 못먹고 꼼짝도 못하는 우상을 사람들에게 팔아서 뭘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도 우상장사를 할 정도로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 세상으로부터 그 분의 백성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불러 냄을 받은 무리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크레시아라 하지요 불러냄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기관이 아닙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사는 이 세상사람 들중에서 따로 불러냈셨습니다. 이렇게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교회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는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12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12아들중에서 11번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가서 가진 고생을 다하였지만 어쨌든 거기가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애굽에 7년 가뭄이 들었을때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정치를 잘 하였고 결국은 가나안에 계신 아비와 형제들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가 BC1706년 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애굽에 들어갔을 때는 총리 가족이었잖아요. 처음에 대접을 잘 받았지만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뽑아 주신 힉소스왕조가 멸망하자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인들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넜는데 그 때가 BC 1491년 경이었고요. 여러분 이 일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3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라. 즉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그들을 괴롭히리라. 14 또한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15:13-14)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니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출13:19)

요셉이 유언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이 땅에서 나가게 할 것이다 너희를 찾아오실 것이다. 그러니 나의 뼈를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요셉이 어떻게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갈 것이니까 여기서 나의 뼈를 가지고 나가라고 한 것이지요. 자 그래서 그 결과 출애굽기 12장 51절에

바로 그날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더라 고 하였습니다.

자 애굽땅에서 나왔는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약 300년 동안 사사시대가 펼쳐집니다. 사사시대는 지금으로 말한다면 재판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사시대때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지요? 솔로몬이었나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때 재판에 문제가 있거나 국가적인 위기가 닥치면 사사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여 줍니다. 사사들 중에는 여러분들이 잘아는 삼손 입다 사무엘 들이 있었습니다.

사사 : 옷니엘 예훗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둘라 야일 입다 입산엘른 압돈 삼손 엘리 사무엘

자 이러한 사사시대가 300년 동안 지난 다음 통일왕국시대가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나라를 보니까 다 왕이 있어요. 왕이 전쟁에 나가서 전쟁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고 하는 것이 좋아 보이거든요. 그래서 백성들이 사사에게 요구합니다. 자 우리도 하나님께 얘기해서 왕을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사사들은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면 안된다 왕이 있으면 여러 폐단들을 이야기 했진만 백성들이 듣지 않아서 왕을 뽑게 되었는데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뽑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뒤에는 유다지파의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왕까지 120년동안 통일왕국시대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나서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분열왕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왜 남방유다와 북방이스라엘로 갈라졌을까 ? 물론 결정적 계기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들으면 기분나쁠지는 모르지만 솔로몬 때문에 나라가 분열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 때문에 나라가 강성해지었고 세계가 그를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지혜를 가졌고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로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그를 경배하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실이 다른 나라왕족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친족관계가 되므로 전쟁을 막을 수 있지요. 국가세력을 키울 수 있지요. 아마도 솔로몬이 그런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왕실간 결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라는 믿음이 확고한다면 이방 왕족들과 결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내가 이방여인과 결혼을 통해 정치적 세력을 더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결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방여인들이 결혼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하면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마 솔로몬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훌륭한 지혜를 받았으니까 이방여인들이 우상을 가져와도 나는 그런 문제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왕비가 왕궁에서 우상을 숭배하여도 솔로몬이 그것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아내와의 기싸움에서 졌거나 너무 관리할 우상들이 많아서인지 모르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왕궁에서 우상숭배가 허락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백성들이 보니 왕궁에서 우상을 숭배하는데 왜 나라고 못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의 죄는 일반 백성들의 죄 보다는 훨씬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편만하게 만든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시대에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남방 왕조는 멸망할 때 까지 한 왕조가 유지되었지만 북방왕조는 9번이나 왕조가 바뀌면서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살륙과 전쟁이 있었겠는가!

 

남방 유다왕국 :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북방이스라엘 :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스가랴 샬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13번째 유다왕 히스기야 왕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이야기 잘 아시지요 히스기야가 성전사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들 개혁하고 참 훌륭한 왕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개혁에 잘 순종하다가 노년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오지요 내가 났겠습니까? 죽을 것 같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사야가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말을 듣고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시는데 이사야 38장 5-8절을 보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날들에 십오년을 더하고...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여 주며 8 보라 내가 아하스의 해시계에서 내려간 각도들의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리라, 하라,하시니

생명을 연장해 주는 증거로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가는 것이 아주 과학적이지요? 네 비과학적입니다. 어떻게 태양이 뒤로 가든지 지구가 거꾸로 돌던지 해야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때 당시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천문학이 굉장히 발달된 나라였지요. 어느날 바벨론 학자들이 태양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거꾸로 돌았나? 그때 당시는 태양이 뒤로 물러갔다고 생각했지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학자들이 아무리 연구를 하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일이 이스라엘의 히스기야왕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서 우주의 질서가 뒤바뀌어진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벨론 학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에 사자를 파견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때가 바벨론에게 우주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이사야 39:2 히스기야가 그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여 자기의 귀한 물건과 은과 금과 향료와 귀한 기름이 있는 집과 또 자기의 온 병기고와 자기 보고에서 찾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더라. 그의 집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들에게 보여주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

여러분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얼마나 부자인줄 아십니까? 여러분도 돈 있으면 자랑하고 싶듯이 내 나라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주가 바뀌는 것 보셨지요 나에게 함부로 까불면 큰일 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랑의 기회를 삼았습니다. 이때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벨론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절호의 기회를 히스기야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신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이사야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5 그 때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6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것과 네 조상들이 이날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빌론으로 옮겨지고 하나도 남지 아니하리라. 7 또 그들이 네게서 나올 네 아들들 곧 네가 낳을 아들들 중에서 빼앗아 가리니 그들이 바빌론 왕의 궁궐에서 내시가 되리라, 하시니라.하매

8 그때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말씀한 주의 말씀이 선하나이다.하고 또 이르되, 나의 날들에는 화평과 진리가 있으리이다, 하니라.(사39:5-8)

자 이사야의 예언이 다니엘서 1장 1절에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유대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을 에워쌌더니. (단1:1) 차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여호야김 시대에 이사야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 다니엘서 1장 3-4절 보면 3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부나스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 4 곧 흠이 없으며 잘 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단1:3-4)

환관을 삼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자 이때 바벨론이 환관을 삼은 청년들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자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에 얘기하고 자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 느부갓네살의 통치 제이년에 느부갓넨살이 꿈들을 꾸매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의 영이 근심하고 그의 잠이 깨서 달아나니라. 2 그때에 왕이 자기 꿈들을 왕에게 알려주도록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갈대아 사람들을 부르라고 명령하매 이에 그들이 와서 왕 앞에 서니라.(단2:1-2)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꿈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갈대아 마술사들 마법사들 점쟁들 다 불러왔지요 지난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느부갓네살이 일어나보았는데 기억이 안나는 거야 이제 그 꿈을 알아 내고자 다 불렀다는 거요

단 2:10-13 10 갈대아 사람들이 왕 앞에서 응답하여 이르되, 땅에는 왕의 그 일을 보여 줄 사람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왕이나 군주나 치리자도 이런 일들을 마술사나 별을 살피는 자나 갈대아 사람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나이다.

11 왕이 요구하시는 것은 드문 일이니이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서 그것을 보여 줄 자가 없나이다, 하매

12 왕이 이런 까닭으로 분노하고 심히 격노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멸하라고 명령하니라.

13 지혜자들을 죽이라는 칙령이 나아가니 그들이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았더라.

자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해석하지 못해서 다 죽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죽일려고 불러왔는데 다니엘이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장31- 35절

31오 왕이여, 왕이 보셨사온대, 보소서, 큰 형상이니이다. 이 큰 형상이 왕 앞에 섰는데 그것의 광채가 뛰어나며 그것의 형태가 두려웠고 32 이 형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그의 가슴과 두팔은 은이요, 그의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의 두다리는 쇠요, 진흙이었나이다. 34 왕이 보셨는데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깍아 낸 돌이 그 형상을 치되 쇠와 진흙으로 된 그의 두발을 쳐서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산산조각 나서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쓸려감으로 그것들의 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채웠나이다. 36그 꿈을 이러한즉 우리가 왕 앞에서 그것의 해석을 고하리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해석한 이 신상을 영상으로 잠간 보도록 하겠습니다.

37 오 왕이여, 왕은 왕들의 왕이시오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왕국과 권능과 세력과 영광을 주셨나이다.

38 사람들의 자녀들이 어느 곳에 거하든지 그분께서 들의 짐승들과 하늘이 날짐승들 곧 그것들을 왕의 손에 주시고 왕을 그 모든 것을 다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셨나니 왕은 이 금 머리니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곧 신상의 금머리라는 것입니다 여기나오는 각 신상의 부분들은 각 나라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다니엘이 살던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일어날 여러 나라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날 여러 나라들을 말하고 있는데 바벨론은 BC605년부터 BC 539년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였습니다. 실제 느브갓네살이 왕이 쓴 느브갓네살 편지라는 서판(편지)이 발견되었습니다.

-온 땅은 비할 데 없이 장엄한 여왕과 같은 도시에 무릎을 꿇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서판에 있는 기록은 위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 의해 바벨론의 영광이 들어났는데요 당시 무기나 군사력으로 이 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완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해석을 계속됩니다. 32절 39절 을 보면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9 왕 이후에 왕의 왕국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다른 놋 왕국이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셩경은 예언하기를 바벨론 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나서 바벨론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니 바벨론을 무너뜨린 나라는 메데바사입니다. BC539년 10월 13일 바벨론이 멸망하던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벨사살왕이 1000명의 귀족들과 파티를 하면서 성전에서 사용하는 은금 잔들을 가져와서 거기다 술을 따라 마시고 우상들을 찬양하고 광란의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렇게 한 참 주흥이 무르익고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쓰게 되지요 벨사살왕은 그 손가락과 그 글씨를 보면서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아무도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었지요 마침 은퇴해서 초야에 묻혀 있던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와서 글자를 해석해 주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니이다.

26 자 그것의 해석을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세셔서 그것을 끝내셨다는 것이요(5:26)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다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며(5:27) 28 베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니이다, 하니(5:28) 라고 다니엘이 글씨를 해석합니다. 드디어 끝이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바벨론 왕궁의 마지막 파티였습니다.

메대 페르샤가 어떻게 바벨론을 정복했을까

헤로도투스의 페르샤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보면

키케로는 헤로도투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책에는 페르샤가 바벨론을 어떻게 정복했는지 나와있는데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기 위해서 성을 먼저 포위했지요 그런데 성은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되어있어서 외성을 침입하더라도 내성 문만 닫으면 그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성이 함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 안으로 유프라테스강이 흘러가므로 밖에서 아무리 포위하고 있더라도 물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성안에는 20년 동안 먹을 양식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가 포위하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고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고레스는 바벨론 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고민고민 하고있다가 .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는데 유프라테스강이 흘러들어가는 쪽과 나오는 쪽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상류로 가서 물길을 다른데로 돌렸다. 그래서 고레스는 명령하기를 강물이 무릎까지 수위가 낮아지면 성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에서 동시에 들어가서 바벨론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벨론 정복에 대해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사 44::27-28 27 깊음에게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 하는 자니라.

자 여기 표를 한번 보십시오

BC 740 이사야서 집필

BC 690 40장 이후 기록

BC 680 이사야 순교 므낫세에게 톱으로 켜 순교

BC 539 고레스 정복

고레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고레스가 태어낳기 150년전 고레스의 이름과 고레스가 어떻게 바벨론을 정복할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레스의 이름 칭호 행적에 대한 예언

사45:1-4 1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였으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3 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기름부음은 왕과 메시야를 기름부어 세우는 것이므로 고레스를 왕과 메시야 즉 구원자로 세웠다는 것이다.

4절 이스라엘을 위하여 칭호를 주었다는 것 왜 그랬을까 포로된 유대민족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키고 훼파된 예루살렘의 회복을 명하여야 할 왕이 바로 고레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라는 이름도 미리 기록하였고 그에게 왕이라는 칭호도 주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너는 나를 알지못할지라도 나는 너를 왕으로 삼았노라. 여러분 나중에 고레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레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서 5장에보면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되어있지요

단5:30-31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사람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였는데 그 때에 그는 육십이세가량이었더라.

9:1 메대 사람들의 씨에 속한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사람들의 영토를 다스릴 왕으로 세워진 첫해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면 바벨론을 점령한 것이 고레스인가 다리오인가? 성경과 충돌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럴때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 헬라역사가 크세노픈의 기록

1) 메대왕 아스티아게스(아하수에르)가 딸을 페르샤 캄비세스1세에게 시집보냄 여기서 고레스 출생

 

왜 딸을 페르샤로 보냈는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딸한데서 강물이 흘러나와 전 지역을 뒤덮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이 딸이 심창치 않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고 페르샤로 멀리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2)고레스 12살 때 아하스에르가 고레스를 메대로 불러 외할아버지에 의해 양육

3)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에 위험을 느낀 아하수에르가 고레스를 처단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

고레스가 메대를 페르샤에 병합하고(BC550) 할아버지를 선대하여 지방장관으로 보냄

4)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왕실 결혼으로 큰 싸움없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짐

5) 고레스는 메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하수에로의 아들 외숙부 시악사레스 2세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게 되는데 그가 다리오이다.

6)이러한 상황에서 고레스가 이끄는 메대 페르샤 연합군이 BC539년 10월 29일 바벨론 점령

7) 바벨론 정복 후 메대왕 다리오 (시악사레스2세)를 명목상 통일 페르샤 왕으로 세우고 그리고 그의 딸 카산다네와 결혼 메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62세의 장인을(6:31) 명목상 왕으로 앉혔고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자 고레스가 집권(BC 537)

 

다리오 원년의 사건 단9:2-3

2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책들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에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닫되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라는 것을 깨달으니라.

3 또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고정하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자 다니엘이 깨달은 것은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다니엘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아 우리가 칠십년이 마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백성들의 상태는 이곳이 좋다 여기가 문명이 발달해서 좋다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알고. 다니엘이 마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9장 이야기입니다. 이 기도는 간단한 기도가 아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그런 기도아닙니까 그래서 6장에 다니엘서는 시간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6장에 항상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항상 기도하니까 시기하는 다른 신하들이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집어던진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다니엘이 이런 기도를 할때에 모함을 받고 사자굴로 들어가서 살아나는 것이 9장과 6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고레스 원년의 사건( BC537)

단1:21 다니엘은 고레스왕의 제일년까지 계속해서 있었더라.

10:1에는 바사왕 고레스 제3년에 한 일이 다니엘에게 계시되었는데

왜 그럴까 원년까지 있었다고 하면서 삼년까지 있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다니엘에 있어서 원년은 아주 인상깊은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고레스 원년에 있었던 그 해를 기억하고 싶었다. 원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집권하고 정치자문을 위해 누구를 불렀을까요 바로 자기 장인 외숙부 다리오 때부터 신임을 받아오던 다니엘을 불렀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였으며 80이 넘은 경험이 많은 총리였다. 그리고 바벨론 총리였지만 바벨론 사람이 아니라 유대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에겐 바벨론도 페르샤도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고레스에겐 경계심이 없는 정치가였다. 그리고 일년전 다니엘의 사자굴의 사건을 처남으로부터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집권하면 다니엘을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니엘 보다 고레스가 더 간절했을 것이다. 자 이제 다니엘을 부릅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이라면 고레스를 만나러 갈 때 무엇을 준비하였을까요?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가지고 가야지요 다니엘을 그 예언을 압니다.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가지고 가서 고레스와 접견을 합니다.

왕이여 평안하옵소서 제가 왕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44장부터 45장까지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레스가 놀라는 모습을 한번 상상하여 보십시오

45:1,5

1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였으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5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으며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네게 띠를 띠어 주었으니

 

44::27-28 27 깊음에게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 하는 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골 3:12-14절에 나오는 7개의 덕목은 하나님의 선택자,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가 입는(put on) 옷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단어들로 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합니다.
긍휼은 ‘긍휼히 여기는 심정(bowels of mercies)’,
자비는 ‘친절(kindness)’,
겸손은 ‘겸손한 생각(humbleness of mind)’,
온유,
오래 참음,
용납은 ‘서로 참아주기(forbearing one another)’,
용서는 ‘서로 용서 (forgiving one another)’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 즉 ‘charity’를 입는 것입니다.

약 3:17절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즉 ‘순수하고(pure)’, ‘화평하고(peaceable)’, 관용 즉 ‘부드럽고(gentle)’, 양순 즉 ‘간청을 잘 들어주며(easy to be intreated)’,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즉 ‘차별 없고(without partiality) 위선이 없나니(without hypocrisy)’입니다.

약 3:17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땅에 속한, 관능적이고 마귀에 속한 지혜와 비교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
위에 열거된 성품은 그리스도의 것이니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창조 6000년 역사 가운데 인간의 한결같은 고민은 의식주 해결입니다. 죄가 들어오자 바로 무화과 잎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지어 입고(창 3:7), 저주받은 땅에서 힘들여 먹거리를 해결하니(창 3:17) 말입니다. 문명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오늘에도, 예수님이 오셨던 2000년 전에도, 의식주로 고민하는 상황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2000에 대한 조명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들풀도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34)’고 당부하셨을까요. 그랬던 주님도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없이(마 8:20) 이 땅 가운데 지내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제일 먼저 해결하려 한 게 벗은 몸을 가리는 것이었기에, 성경의 먹거리 변천사(‘노아의 때와 같이’ 참고)에 이어 오늘은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을지를 쓰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입고(put on, clothed), 벗고(put off, naked) 구절들을 모두 찾아보니 흥미롭게도 구약엔 실제 옷이나 신발이 나오는 반면 신약엔 영적인 것들이 나왔습니다. 아담의 무화과 잎으로 만든 첫 옷이 구약에 나오는 옷이라면 하나님께서 벗기고 입히신 가죽옷은 신약의 영적인 옷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려면 어떤 동물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죄로 인해 이때 일어난 첫 죽음은 아마도 양의 죽음일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신약으로도 이어집니다. 구약에서 범죄한 첫 사람을 양의 가죽으로 입히셨던 하나님은 신약에선 ‘세상 죄를 가져가는(takes away)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입히십니다.

따라서 성경은 ‘어둠의 행위를 벗고(롬 13:12)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고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여기서 ‘어둠의 행위(일)’란 ‘육신의 행위’며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정욕’을(롬 13:13-14) 말합니다. 또한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에 따라 부패한 옛사람(엡 4:22)’을 벗으라고 합니다. 이 ‘옛사람과 그의 행위(골 3:9)’는 ‘음행, 부정함, 무절제한 애정, 악한 욕정, 탐욕(우상숭배), 분노, 진노, 악의, 신성모독, 더러운 대화(부패한 대화), 거짓말, 도둑질, 소리 지름, 악독, 비방(엡 4:22-32; 골 3:2-10)’입니다.

‘어둠의 행위를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권고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라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성경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은 육신의 죄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린 사람들이며(골 2:11)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은(골 3:10)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 받은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하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노동하여 궁핍한 자에게 주는 선한 일을 하고 덕을 세우는 좋은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엡 4:23-29)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서로 순종하며 온유로 단장하고 겸손으로 옷 입어야(벧전 3:4-5, 5:5)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 친절(상냥함),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입고 서로 참고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같이 하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의 띠를 맵니다(골 3:12-14).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아 성령을 받은 ‘새 사람’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것이자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눈에 안약을 발라 볼 것을 권고(계 3:18)’하십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고 하신 것을 미루어 이들은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교회로 보낸 서신서임에도 불구하고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합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지 않은 자들도 있다’란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약속하신 흰옷은(계 3:5; 4:4)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는 옷이며(계 19:8) 그리스도를 따르는 군사들이 입는(계 19:14) ‘성도의 의(계 19:8; 엡 4:24; 롬1:17, 3:21-22)’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whole armor of God)를 입으라고(엡 6:11)’ 합니다. 빛의 갑옷(armor of light)을 입고 낮에 하듯이 정직하게 걸으며(롬 13:12) 낮에 속했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갑을 입고 구원의 소망으로 투구를 써야 합니다(살전 5:8).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으로 신어 준비하고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끌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말씀)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엡 6:11-17).

아리랑 민족 /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 /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다


창세기 10: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The region where they lived stretched from Mesha toward Sephar, in the eastern hill country.

 



아리랑의 의미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민요 '아리랑'은 깨달음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에게 민요 ‘아리랑’은 우리의 주식인 쌀밥과 같은 존재이다.
그만큼 익숙하고 널리 애창된다.
그런데 ‘아리랑’이 어떤 의미인지, 어디서 유래했는지, 언제부터 불렀는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기원설과 어원설로 다양한 견해만 존재할 뿐 정설이 없다.
이를 일컬어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아리랑 어원설엔 말도나 많다"고 하기도 한다.

아리랑이라는 말은 난랑(卵郞, 알랑)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고 발(光明)에서 알로, 다시 아리로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처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 아리랑설(我離娘說)로 보는 이도 있다.

서정범 교수는 '알라이요'의 알(卵)을 근원적인 것, 핵심으로서의 알(卵)로 설명한다.

김용운 교수는 ‘아리리요’를 ‘아 신이요’로 설명한다.
“아라리요는 '아 날이요'에서 나온 것이며 요즘 말로 하면 '아 신이요' 와 같다.

가령 “아라리 요 아라리 요 /~ /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라리 요 아라리 요” 에서와 같이 한스러운 노랫가락에서 '아라리 요'를 '아 신이요'의 뜻으로 새기고 들으면 한층 실감이 난다.
'아 날이요‘가 '아 나리요' 또는 '아라리 요' 가 되고 마침내 '아리랑' 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과 일본인3, 같은 씨앗에서 다른 꽃이 핀다》, 한길사)

우실하 교수는 중국 동북방 소수민족 에벵키(Ewenki)족이 아직도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 ‘아리’, ‘쓰리’ 등의 말을 쓰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리랑과 쓰리랑의 의미를 설명한다.
우 교수의 논문 <‘아리랑’·‘쓰리랑’의 의미와 어원(語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의 에벵키족은 북만주 동쪽 읍루(挹婁)지역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여 북방 대흥안령 자락과 흑룡강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대 우리 민족들과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어와 에벵키어는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에벵키어의 ‘아리랑’이라는 말은 주로 “맞이하다/영접하다”와 “이별이나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에벵키어가 한국어 속에 흡수되었다면 ‘아리랑’이라는 말은 님을 보내면서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 감수하다, 인내하다’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랑’의 이중적인 의미구조로 보면 님을 보내는 ‘이별의 아리랑’도 가능하지만 님을 맞이하는 ‘만남의 아리랑’도 가능하다고 우 교수는 설명한다.

이렇게 에벵키어를 참조하여 우 교수가 해석한 아리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해석1) 인내하자 인내하자 (님이 나와)다르구나.
(님이) 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2) 참자 참아내자 혼란스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해석3) 인정하자 인정하다(님이 나와)다르구나
(해석4) 감수하자 감사하자 어지럽구나
(님이)이별고개로 넘어간다

우 교수는 ‘쓰리랑’과 거의 유사한 발음을 지닌 에벵키어 SERERENG와 SERIRENG에서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가 된다”며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의 본래 의미는 ‘(사자의 영혼을) 맞이하세 맞이하세, (잠든 영혼이) 깨어났네 깨어났네’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아리랑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우 교수의 다음 설명이 도움 될 것이다.


“ ‘아리랑’은 고대 북방 샤마니즘의 ‘영혼을 맞이하다’는 의미에서, 2차장 풍속과 관련되어 이별의 슬픔을 ‘참다, 인내하다’의 의미가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쓰리랑’도 본래는 ‘잠든 영혼이 깨어나다’라는 의미에서 ‘깨다, 깨닫다, 알아차리다’ 등의 의미로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리고 있는 여러 지방의 아리랑 가사에 나타나는 ‘아리랑’‘쓰리랑’ 등은 전체 노래가사와 연관해서 보면, 본래적인 의미인 ‘영혼을 맞이하다’ ‘영혼이 깨어나다’라기 보다는 이별의 슬픔을 ‘참다/인내하다’, ‘알다/깨닫다’ 등의 파생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보아야 전체 노래가사와 어울리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2차장의 풍습이 일찍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은 민요 ‘아리랑’을 ‘나를 찾아가는 기쁨의 노래’로 풀이한다.(이승헌, 《한국인에게 고함》, 한문화, 참조) 이 총장은 아리랑을 ‘우리 민족의 얼이 영글고 영글어서 만들어진 영혼의 노래’라며 “겉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가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님이 삶의 영원한 근원, 참나, 커다란 민족적 자아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한국인에게 고함》을 토대로 아리랑의 의미를 알아보자.

깨달음의 노래로 보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 아리랑은 한자로 아리랑(我理朗)을 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 ‘내가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평상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아’를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 말이다.

아리랑에서 말하는 ‘아’는 그 개인의 역사가 생기기 이전의 근원적인 ‘나’, 이름이 있기 전의 ‘나’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의 실체이다. 그래서 ‘아’를 깨달은 사람은 참나를 깨달은 사람이며 모두가 다 하나이고 형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의미는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여, 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다 함께 누립시다.’ 이런 뜻이 된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여기서 ‘나’는 참나를 말한다. 그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참나를 버리고 거짓나를 위한 욕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십’은 통합, 완성,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깨달음을 이루지도 못하고 장애가 생긴다는 뜻이다.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인간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의 장애자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리랑은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큰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리랑을 부르는 것 아닐까.

"아리랑은 잠든 나를 깨우는 노래요,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는 힘을 가진 노래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영적인 노래이며 인류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깨달음의 노래이다.”

출처 :  K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아리랑'의 뜻을 아시나요

이종대씨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뜻이 고개 이름이나 '떠나간 님'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곧 '하느님'이라고 썼다.
'아리'는 하늘을 뜻하는 '알'의 변음(變音)이고, '랑(郞)'은 사내· 남편 외에도 '주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50년 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발굴된 8500년 전 토기에 새겨진 그림 문자를 근거로 들었다.
다섯 봉우리 산 위에 반달 같은 모양이 있고 그 위에 둥근 해가 있는 그림 문자였다.
이씨는 "학계에서는 이 그림이 아사달을 뜻한다고 보지만 사실 아리랑을 뜻한다"며 "직계 자손인 우리가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이씨를 만나봤다.
70세인 그는 전기제품 회사에 다니던 30년 전부터 우리 역사를 공부했는데 15년 전에 고대 그림 문자를 보고 아리랑의 뜻을 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을 내려고 했지만 출판사들이 거절해 작년에 자비로 40권을 찍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인터넷과 자료를 찾아봤다.
아리랑의 어원(語源)에 대해 30종 가까운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었다.
경복궁 중건 때 원납전을 내라는 말에 저항한 민초(民草)들이 '내 귀는 멀었다'며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이 기원이 됐다는 설, '밝(光)'의 고어인 '아리'와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 합쳐졌다는 양주동의 '아리령설', 고대 낙랑시대 교통의 관문이었던 자비령의 이름인 '아라'에서 유래했다는 이병도의 '낙랑설' 등이 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96년 최초의 아리랑 악보와 영문 가사를 남기면서 "한국인들에게 아리랑의 뜻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어원을 추적한 첫 연구는 1930년 일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조선 민요 아리랑'이었다.
'아이롱설'과 나를 버리고 떠난 임이라는 '아리랑(我離娘)설' 등 6가지 설을 들고 있다.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 박사는 이 논문이 "아리랑을 희화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1년 조선족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우리는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지만 우리 무형문화재로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된 러시아 학자 추지노브와 유게라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인종학적으로 고대 아리아족에서 갈려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아리아족과 아리랑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아리야'는 '신성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종대씨의 '하느님설'과 닮았다.

외국인들이 아리랑을 먼저 연구했고 지금도 세계를 뒤지며 다양한 방법으로 근원을 찾고 있으며 중국은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한반도에서만 찾고 있어서 그동안 여러 연구가 있었어도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바라지 않더라도 학자들이 각성해서 과학적 연구로 하루빨리 아리랑의 뜻을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후손 된 도리다.
"잘못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는 이씨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아리랑의 뜻, 아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Meaning of Arirang, Dr. Harry Cho, Soongsil University, Korea

문학박사 조용호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행가는 아니었다.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노랫말 속에는 특수한 문장으로 된 또 다른 아리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노랫말을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리랑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우선, 아리랑과 아라리요는 뜻 모르는 후렴구이므로 첫 행 전체가 의미가 없다.
둘째 행,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없는 허구의 장소인데, 그곳을 넘어가므로 또한 의미가 없다.
셋째 행, 나를 버리고 가시는으로 말을 올리면서 동시에 2행에서는 넘어간다,
4행에서는 발병난다 등으로 말을 내리고 있어 가시는 님에 대한 존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발병이 나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지, 십 리라는 거리와는 큰 상관이 없다.
꼭 발병이 나야 한다면, 한 발자국도 못 가서 발병난다 정도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서 반드시 발병이 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십 리도라는 표현을 보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동양문학이나 한국인의 관념상 십 리(4km)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어감을 갖고 있는데, 아리랑에서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조사 ‘도’와 같이 쓰이고 있어서, 십 리도라는 표현 자체가 틀린 용법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아리랑이라는 겨우 네 줄밖에 안 되는 노래는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된 곳이 없는 온통 의미 없는 후렴구 상태에 빠지게 된다.

노랫말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 이유는 미래를 예언하는 노래인 고려 참요 아리랑이 금지곡이 되었고, 민간에서 구전되며 민요화되는 과정 속에서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었으며, 이때, 가사의 일부분이 당시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참요나 고려가요 등에 나오는 문장 형태로 된 뜻을 모르는 후렴구들은 특수한 문장으로, 현재의 암호문에 해당한다.

​암호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는 아리랑 쓰리랑(啊女郞 是女郞)으로 아리랑은 신성한 아가씨(女郞)라는 뜻이다. 암호해독열쇠를 노랫말에 대입하여 600년 전의 언어로 재구하면 한문과 고려어로 된 다섯 개의 아리랑이 만들어진다.

​남녀 대화체로 된 한문 아리랑은, 충신은 한 임금만을 섬긴다는 불사이군을 나타내고, 고려 아리랑은 젊은 아가씨가 스님에게 “나를 베리고 가오 스님은!”이라는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인 남녀상열지사의 장면이 된다. 아리랑은 비교 문학상 중국 원대에 유행한 원곡(元曲)과 유사한 형태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가극으로 상연하였다. 남녀간 대화의 내용을 변형하면 가극 속의 주제가가 되며, 바로,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의 원형인 고려어로 된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시니이 마까서 발화병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니이 마'를 '십리도 몯'으로 바꿔, 노랫말의 외면적 의미를 달리 표현하게 된다. 고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는 심층 구조를 숨긴 채, 북으로 끌려가는 공녀의 한 맺힌 이야기를 표현하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곡애- 나마간다
날 바리고 가시- 니믄
십리도 몯 가서 발화병난다

​아리랑은 1392년 7월 28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던 왕조 교체기에 개경의 만수산 두문동에서 만들어졌다.
아리랑의 원형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넘어간다’를 ‘나마간다’, ‘가시는 님’은 조사가 생략된 형태의 ‘가시- 님’, 아리랑 고개는 '아리이랑 곡애(谷涯)'의 발음기호로 푸른 물결을 뜻하며,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 고개는 땅 위에 존재할 수 없었다.

​아리랑에는 푸른 물결을 뜻하는 아리 이랑과 신성한 아가씨를 뜻하는 아아 리랑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면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아 리랑이며, 아리랑 보다 더 오래된 구(舊)아리랑을 주의 깊게 잘 들어보면 '아리이랑 아리이랑 아라리로구료오'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리 이랑이다.
또한, ‘십 리도 못 가서’가 아니라 ‘신이 막가서’ 발병나는 것이며, 이것을 참요의 내용으로 풀이하면, 신이(臣李) 막가서, 즉, 역적 신(臣)하 이(李)가 막가서 고려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왕조를 부정하고, 고려를 부활시키자는 내용이 된다.
'십리도 못 가서'로 바뀐 가사는 공녀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한 맺힌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유신들은 참요 아리랑을 만들어 전국에 있는 동지들과 2년여에 걸쳐 비밀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경 만수산 두문동에서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온갖 형태의 참요들이 이에 화답하여 창화(唱和)하며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암호문 통신 체계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시작하였다.

​강강수월래과(나를 따라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剛剛隨我來過),
늴리리야(넌 어느 편이야?),
애루하(어떤가? 唉, 如何?),
지화-자(計画-하자, 계획하자),
어기여차(내가 돌아간다),
어강됴리(금방 도착한다. 我剛要到了),
애 야노 야노 야(노를 저어라),
마득사리(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니사득마? 你舍得嗎?),
쾌지나칭칭나네(감빵 갔다 나왔네. 감빵가게 될 거야),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니 아니랑께 역적 이는 임금이 아니고 신하랑께),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밤이 되니 더욱더 쓸쓸해진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린다),
두어렁셩(냉정한 이 세상이여! 對我冷淸!)

​그러나 1394년 11월 17일, 노랫말에 숨겨진 내용의 일부가 조선군 암호해독부대에 의해 풀이되어 두문동은 불태워져 말살되고 노래는 금지곡이 된다.

​금지곡 상태에서 구전되던 아리랑은 한양 천도로 인해 개경에서 한양으로 지역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언어적인 변화도 일어나게 된다. 물결을 뜻하던 '곡애를'은 땅 위에 있는 '고개를'로 오해되기 시작하고, '나마간다'는 '넘어간다', '바리고'는 '버리고', '발화병난다'는 '발병난다'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나룰 바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몯 가서 발병난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민간에서만 조심스럽게 불리던 고려의 아리랑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궁궐에서도 아리랑을 공연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노래로 공인되었고, 이를 통해 민족(民族)의 노래로 성장하게 된다.

​1926년 10월 1일, 민간에서 불리던 아리랑이 영화 속의 유행가로 편집되면서 노랫말에 변형이 일어난다. ‘가시는 님’이 ‘가는 님’이라는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인데, 이는 영화 가사를 편집한 사람들이 원래의 가사를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또한, 여말선초 이후에 노랫말이 민간에 구전되는 과정 속에서 미세한 변형이 일어났고, 구어체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발병난다’는 ‘발병이 나네’라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네

​이렇게 되면 십 리라는 거리는 명사십리 해당화 등과 같이 먼 거리를 뜻하게 되고, 이것과 결합되는 조사는 짧거나 모자라는 경우에만 쓰이는 ‘도’가 되어 ‘십 리도’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 된다.
그렇지만 노랫말을 편집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고, 노래를 부르는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다.

​변이와 지속의 과정 속에서 가사의 일부분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노래라는 것은 일정 부분 원형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다. 즉, 가시는 님, 발병난다 등의 표현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라는 부분만은 ‘십 리도 못 가서’라는 형태로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유행가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들의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은 한민족의 혼이고 민요의 정수가 되었다.

​지금부터의 아리랑은 뜻 모르는 후렴구의 노래가 아니다.
아리랑에 숨겨져 있던 애국애족의 정신과 조상의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을 전 세계에 알려 나가야 한다.
세계 속의 아리랑으로 부활(復活)시켜야 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혼을 세계인과 공유하며, 더불어 조화롭게 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Dr. Harry Cho's Decoding. By restoring the original form of Arirang by means of decryption, it is possible to know the nature of the song; secret song, song with political message in the early years of Chosun Dynasty(14C), song of lovers, theme song of theatre play, song of sadness, song of loyal servants, song of resistance militia, song as a reflection of the contemporary lifestyle, song of ethnic ethos (Han(恨) in Korean) prevalent nationwide.


하느님 = 한알님
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



08. 아리랑 고개의 의미


둘째는 고개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은 옛날 고대 국가인 낙랑(樂浪)의 남쪽에 있는 ‘자비령(慈悲嶺)’의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낙랑’은 ‘악랑(樂浪)’이라고도 읽으며, ‘아라’로도 발음이 된다고 하여, 나라 이름인 ‘아라’와 ‘자비령’의 옛이름으로 인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리랑’의 ‘아리’는 ‘밝다[光(광)]’의 어간인 ‘밝’의 옛말이고, ‘랑’은 ‘령(嶺)’의 전음(轉音: 다른 음으로 바뀐 음)으로 ‘아리랑 고개’는 ‘광명한 고개’라는 견해도 전한다.

셋째는 한자어(漢字語)에서 왔다는 설이다. 먼저 ‘아리랑’은 ‘我(나 아)+ 離(떠나갈 리)+娘(아가씨 낭)’의 뜻으로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나간다’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되었다 한다. 또 하나는 ‘아리랑’은 ‘我(나 아)+耳(귀 이)+聾(귀머거리 롱)’이라고도 하는데, 직역하면 ‘나는 귀머거리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속뜻은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를 의미하는 것이란다. 옛날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할 때, 나라는 어수선하고 부역에 끌려온 백성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끓으니 대원군이 말하길, “차라리 귀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서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넷째는 여음(餘音)에서 왔다는 설이다. 고려 속요(高麗俗謠)로 간주되는 청산별곡(靑山別曲)의 후렴구가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인데, 바로 이 후렴구의 ‘얄리얄리’가 ‘알리알리’를 거쳐 ‘아리아리’로 된 것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청산별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부분에서는 ‘청산에 살겠다’고 하였지만 뒷부분에서는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서 운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하리이까?’,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지낸다’ 등 대부분이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아리랑’은 한민족의 한의 정서가 엿보이는 노래기도 하다.

다섯째는 알{卵(란)}에서 왔다는 설이다. ‘아리랑’이나 ‘아라리요’에서 어근을 찾는다면 ‘알’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근 ‘알’은 ‘알[卵(란)]’과 의미가 상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옛날 설화에 의하면, 신라, 가야,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혁거세왕, 수로왕, 동명성왕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시조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알’은 한민족의 시조이기도 하고, 뿌리이기도 하며, 국가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개’는 민족의 수난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는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의 은유적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리랑 고개’의 ‘아리랑’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시조 즉 ‘알[卵(란)]’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아리랑 고개’에 대한 연구자와 연구물이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의 연구 내용은 나름대로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연구한 것이므로 앞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두가 ‘아리랑 고개’를 이해하는 데 의의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에 관련된 많은 연구물이 있지만, 필자는 그들의 연구 내용과는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선 ‘아리랑’의 ‘랑’은 고개를 뜻하는 ‘嶺(고개 령)’의 바뀐 음(音)으로 생각되며, ‘아리랑 고개’는 앞 글에서 언급되었던 두들기 고개, 재랭이 고개, 무릎 고개를 비롯하여 박달재 고개, 대관령 고개, 추풍령 고개처럼 실존하는 그런 고개가 아니다. 아리랑 고개는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보릿고개’처럼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한이 되어 머무르는 가상의 고개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아리랑’의 ‘랑’이 고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면 ‘아리랑’만 써도 되는데 왜 ‘아리랑 고개’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이 원래 천성이 착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에도 ‘일요일(日曜日)’ 하면 될 것을 ‘일요일날’이라고 하여 ‘날’을 더 붙여 주고, ‘역전(驛前)’을 ‘역전앞’, ‘우두(牛頭)’를 ‘우두머리’, ‘대하(大蝦)’를 ‘대하새우’, ‘청천(靑天)’을 ‘청천하늘’, ‘생률(生栗)을 ‘생률밤’, ‘황토(黃土)’를 ‘황토흙’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아리랑을 넘어간다’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더 쉽고 편하고 확실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아리랑’의 ‘아리’와 ‘쓰리랑’의 ‘쓰리’는 어떤 뜻일까? ‘아리’와 ‘쓰리’를 다른 곳에서 그 뜻을 찾으려 하지 말고 글자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리라 생각한다. ‘아리’는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는 뜻을 가진 어휘 ‘아리다’의 어간 ‘아리’로 보고, ‘쓰리’는 ‘마음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괴롭다’는 뜻을 가진 어휘 ‘쓰리다’의 어간 ‘쓰리’로 보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 고개’는 우리 한민족의 마음속에 한이 서려 있는 가상의 고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천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백성들은 끼니 한번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 허덕이며 살아왔고, 또한 5~6년에 한 번씩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지아비를 잃고, 자녀는 아버지를 잃으며 살아왔으니,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심정,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의 가슴속에 맺힌 그 한이 오죽하겠는가. 바로 이처럼 가슴에 한이 맺힌 고개가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넷째로는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도 이별의 한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신화와 전설 등에 의하면 ‘고개’는 이별의 장소였다. 앞 글에서 언급하였던 두들기 고개, 무릎 고개 그리고 그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전하는 유래처럼 ‘고개’에는 이승과 이별을 고(告)하고 저승으로 가는 별의 한이 서려 있기도 하다. ‘아리랑 고개’도 사랑하는 아들, 지아비 그리고 아버지와 가슴에 한이 맺힌 이별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아리랑 고개’의 노랫말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말은 아들, 지아비, 아버지와 같은 사랑하는 이들이 사지(死地)로 떠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고,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들이 전쟁터로 떠난 후에 그들의 생사(生死)가 염려되어 걱정하는 것이며, ‘눈이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말은 떠난 이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쌓여 간다는 뜻이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말은 전쟁이 끝나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뜻이라 생각된다.

하여튼 가난한 농부가 해마다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듯이, 아들을 잃은 늙은 어버이가, 지아비를 잃은 외로운 아내가,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자녀가 가슴에 한을 품고 평생을 넘어왔고 또 넘어가야 하는 고개이면서도 한편으로 고개 너머에는 이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이 있기를 기대하며 넘는 고개가 바로 한이 맺혀 아리고 쓰린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이론이 워낙 많고 정설로 굳어진 것이 없는지라 답답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대표적인 설은 다음과 같으며, 각기 제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리한 해석이 많은 듯 싶다.

1) 南師古(1509-1571)의 亞裡(아리)嶺설
2) 이승훈(1790)의 啞魯聾(아로롱)설
3) 황현(1900)의 阿里娘(‘아리랑’)설
4) 김지연(1930)의 閼英(알영)설
5) 권상노(1941)의 啞而聾설
6) 이병도(1961)의 樂浪(아라)설.
7) 양주동(1962)의 아리(明)嶺설.
8) 원훈의(1977)의 아리다(疼痛)설
9) 임동권(1980)의 後斂(助興)설
10) 정선 설화(1987)에서의 아리오(알리오)설
11) 김연갑(1988)의 메아리('메'의 탈락)설
12) 박민일(1988)의 啞剌唎(아라리)-阿賴耶(아라야)설
13) 정호완(1991)의 아리다-쓰리다(‘아리랑’<알?>-쓰리랑<슬?>)설
14) 정익섭의 얄리얄리얄라리설(국어국문학사전)
15) 김덕장의 我離娘(나는 아내를 여의었다)설
16) 남도산의 我耳聾(나는 귀가 먹었다)설
17) 강대호의 我難離(나는 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설
19) 일인 학자의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하자)설
20) 최재억의 卵郞(卵娘)설
21) 김재수의 阿娘(아랑 전설)설
22) 이능화의 兒限偉(상랑문의 아랑위 포랑동에서 유래)설
23) 이규태의 아린(여진어 차용)설
24) 서정범의 알(卵)아리요설
25) 김승국의 阿利嶺(크고 높은 고개)설

그러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하여서는 워낙 많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정설이라고 분명히 할 수는 없지만 국악인이라면 최소한 ‘아리랑’이란 이러 이러한 뜻을 갖고 있으며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러 이러하다라고 설명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지금까지 초ㆍ중등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면 유감스럽게도 대답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초?중등교육에 허점이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국제교류 현장에서 외국인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람들과 만날 때 마다 내 나름대로 연구하였던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 문체부와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아리랑 세계화사업의 일환으로, ‘마음을 이어주는 세계인의 노래, 아리랑 4집’ 음반을 지난 2월에 발매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물론 내가 전문적으로 어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학문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아리랑’에 대하여 어차피 굳어진 정설이 없고 내 나름대로의 설명의 근거가 있는 만큼 나는 감히 나의 주장을 피력해왔다.

내가 연구하고 생각해온 ‘아리랑’의 어원과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각 지방 ‘아리랑’의 후렴 구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낱말의 구성은 진도 ‘아리랑’의 가사(아리 아리 랑 쓰리 쓰리 랑 아라리가 났네)에 나타난 것처럼 ‘아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이고 ‘랑’은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래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을 보면 수도 서울을 가르고 흘러가는 오늘날의 ‘한강(漢江)’을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
(....., 잔불복의, 감출영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
-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2면 3행
釋文 : ......,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물론 아리수(阿利水)라는 명칭의 구성도 ‘아리’+‘수’일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강(江)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수(水)라고 불렀으니 ‘아리’+‘수’가 틀림없을 것이다. 한강도 옛날에는 한수(漢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즘도 한수 이북, 한수 이남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아리(阿利)’라는 한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우리말 음(音)을 한자로 차용하여 쓴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수(阿利水)’의 ‘아리(阿利)’라는 우리말은 무슨 뜻을 가진 것일까? 또한 ‘아리’라는 낱말은 한강의 ‘한(漢)’과는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을까?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한 프로그램인' 전국아리랑경연대회' 현장 모습.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오늘날 한강의 한자표기 ‘한(漢)’은 ‘큰’, 혹은 ‘위대한’이란 뜻으로 쓰인 순수 한국 고대어 ‘한’의 차음(借音) 표기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중국에 있는 강인 한수(漢水)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라는 설도 있다. 또한 한강 양안에 살던 고대인들은 한반도에서 원시 농경단계에 먼저 들어간 선진부족이었으며 '한'부족으로 불렸고 이들의 일부가 고조선 건국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한'부족이 그 후 한문자(漢文字)로 韓, 桓 등 여러 글자로 차음 표기됐다고 한다. 한강의 ‘한(漢)’을 우리의 고유한 말인 ‘한’의 한자 차용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한’과 ‘아리’는 같은 뜻이거나 비슷한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리’는 ‘크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리랑’의 ‘랑’은 어떤 뜻을 지닌 말일까? ‘아리랑’ 뒤에 항상 등장하는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라는 낱말이다. 왜 각 지방의 ‘아리랑’ 다음에는 반드시 고개라는 낱말이 따라 나올까? ‘랑’과 ‘고개’는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날 여행 중 대관령 고개를 우연히 넘다가 나의 뇌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말에는 같은 뜻의 형태가 겹쳐 글에 군살을 끼게 만드는 비경제적 동의중복(同意重複) 표현, 즉 겹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동의어가 많다보니 생긴 현상이다.


▲지난 10월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대규모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인' 뽐내라 아리랑' 행사의 한 장면.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예를 들어 추풍령고개(‘령’과 ‘고개’ 중복), 동해바다(‘해’와 ‘바다’ 중복), 약숫물(‘수’와 ‘물’의 중복), 무궁화꽃(‘화’와 ‘꽃’ 중복), 농번기철(‘기’와 ‘철’), 황토흙(‘토’와 ‘흙’ 중복), 초가집(‘가’와 ‘집’ 중복), 역전앞(‘전’과 ‘앞’ 중복), 족발(‘족’과 ‘발’ 중복), 고목나무(‘목’과 ‘나무’ 중복), 단발머리(‘발’과 ‘머리’ 중복) 등과 같은 동의 반복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추풍령의 ‘령(嶺)’은 고개‘령(嶺)’인데 그 뒤에 또 고개라는 같은 뜻의 우리말을 습관적으로 붙여 말하고 있듯이 ‘아리랑 고개’의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變音)으로 ‘랑’ 다음에 고개를 습관적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아리랑’의 ‘랑’을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아리랑 고개’는 ‘크고 높은 고개’로 해석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마을에는 임을 보내고 가신 임을 기다리는 고개가 어디에나 있었다.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의미를 지닌 특별한 장소였다. 각 지방에 퍼져있는 ‘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떠나는 임을 아쉬워하고, 돌아오지 않는 임을 원망하고 목 놓아 기다리는 한(恨)의 정서가 군데 군데 잘 배어져 있다.

정리해 본다면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아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리’는 ‘크고 높다’는 뜻을 가진 우리의 순수 고대어이며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서, ‘아리랑’은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라는 것이 우리 조상들에게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였으므로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한(恨)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각 지역에 퍼져있는 ‘아리랑’은 그 곡조와 가사가 서로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별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리랑’의 어원과 그 낱말이 갖는 상징성에 대하여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사람이라면 어린 자식들이나 혹은 외국인들이 물었을 때 옹색하나마 나름대로 답변할 말은 준비해두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출처 :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민족은 코레아인가?

로마서 10:9-10, 19-20, 이사야 55:5-6

우리나라가 2018년 2월 9일 부터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되는데 이번평창동계올림픽에는 92개국 2925명 선수가 참가하는데 역대 동계올림픽치고는 최대규모라고 한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전세계가 다시 한번 코레아를 주목하고 있다.

 30년전 1988년에도 하계올림픽이 열려서 코레아라는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때 보다 한국의 k-pop, 영화, 스마트폰, 첨단전자제품등을 통해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나는 전세계인들이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 축제를 통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이제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바란다 왜냐하면 한국기독교가 아주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부흥되었는지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국 와서 한국의 교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밤에 차를 타고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 십자가탑에서 비쳐지는 붉은 네온 십자가를 보게 된다면 한국의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스마트 산업보다도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성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계인들은 한국의 영적인 수준을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까지만 하여도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마귀에 의한 각종 우상숭배와 조상귀신 미신등 잡신을 섬기며 살았왔던 희망도 없고 꿈도 없는 버림받았던 민족이나 다름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권세잡은 자 사탄 마귀를 따라가는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사랑하사 130년전 미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사 복음을 듣게 하여 영적 어두움에서 깨어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명철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주의 말씀은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되어 영원한 영생을 간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변방있었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세계인들이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코리아가 전세계의 중심국가로 올라서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는 세계인들의 겨울스포츠를 2월 9일부터  평창에서 하게 되니 다시한번 우리나라가 전세계인들의 스포라이트를 받게 되었다는 것에 다시한번 자부심을 갖게 되며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지만 그들이 하나님말씀 듣기를 거부하므로써 언젠가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이방민족을 통해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모세도 언급하였고 이사야대언자도 언급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줄 민족이 우리민족이면 참 좋겠지요.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사65:   1.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찾아내었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아니하던 한 민족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라 보라 하였노라

개역성경에는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였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한 이방민족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한 개인도 전도하여야  돌아오듯이 이스라엘민족도 어느 한 이방민족이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민족을 백성이 아닌민족이며 어리석은 민족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그러면 그 민족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사24: 16  땅의 맽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사 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들로(모퉁이)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장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실 민족은 동쪽에 있으며  땅 끝에 있으며  땅 모퉁이에 있는 민족이라는 말씀이다.

롬 11:11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지게 되었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것을 그들이 질투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이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그들의 쇠퇴함이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많이 부요함이 되겠느냐?

25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29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는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이 오히려 이방민족에게 복음이 전하여졌고 그 이방민족을 통해 이스라엘이 부끄러워지면서 그 이방민족으로 부터 복음을 전하여 져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주장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 10: 9-11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또 성경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롬10장의 이 말씀은 그동안 개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였지 이스라엘도 개인이 구원받는것 처럼 이렇게 구원시킨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서 9장부터 11장 까지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런데 롬10: 19-20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알고 보면 이 부분 백성이 아닌 자들,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민족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11: 25 열방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고 마지막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하나의 피라믿을 쌓을 때  피라믿의 마지막 위에 얹히는 돌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란 돌이 놓이지기 위해서 전제된 조건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쌓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까지 되어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9:27)

70억 인구가 다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한 돌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민족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인데 그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롬10: 19-20은  사 55: 5  신32:21의 말씀이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신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나를 움직여 질투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헛된 것들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

하나님께선 이방인 한 민족을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인데 그 나라 백성들이 달려 온다는 것은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혹시 한국민족이 아닌가요?   그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행전 16장 6-8절을 통해서 보면 그 나라는가  아시아권의 한 나라라는 것이다. 아시아권이라고 써 있지는 않지만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라는 것이다.

왜 바울이 소아시아지역에서 자꾸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지방으로 즉 위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려고 하였는지 행14장을 보면  1차선교여행에서 바울은 그 지역에서 매도 맞으면서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였음에도 바울이 다시 그 쪽(아시아- 무시아- 비두니아)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의 소망은 아시아로 갈려고 했는데  성령님이 막으셨고 무시아에서 북쪽 비두니아쪽으로 갈려고 하였는데  주님의 영이 막으시고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바울을 불러서 마케도니아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본 후 즉 서쪽으로 복음의 행선지를 정했다. 바울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주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선 빨리 동쪽에 있는 이방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급박한 당위성 필연성 때문에 가급적이면 북쪽이면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 말은 아시아권의 한 나라가 맞는데 우리나라가 동쪽은 맞지만 과연 북쪽은 맞을까?

1999년 12월 31일 AM 00시 밀레니엄 시대를 알리기 위해 전세계 카메라 맨들이 동쪽에서 해드는 광경을 찍었는데 어디일까요?  그 시간 우리나라에서는 DJ가 보신각 종을 쳤는데 그 분이 종을 치면서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보다 동쪽에 있다고 이스라엘에서 정동쪽이 대한민국이라고 말을 하였는데 너무 신기한 말이지요.

물론 우리나라가 동쪽인 것만은 사실인데 북쪽으로 보기엔 이스라엘은 위도 35도이고 우리나라는 38도이니 이스라엘보다 3도 위이니 그렇네요.

동서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미국은 우리나라 보다 동쪽에 있지만 왜 미국사람을 동양놈하지 않고 서양놈이라고 하는가? 중요한 것은 기준이 어디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기준이 되면 우리보다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라고 하지만 세계지도는 중심 기준이 어디냐 하면 에스겔서 38:12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보듯이 이스라엘이 중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 서쪽을 정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동쪽은 맞지만 북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언론인들 카메라맨들이 밀레니엄 일출을 찍은 곳은 뉴질란드이었다. 뉴질란드가 지구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지역이라고 전세계 언론인이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뉴질란드에 볼 때 북쪽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사야 55:5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굉장히 강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정도 보고 우리나라라고 할 수는 없고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사야 말씀을 보자.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방인 어느 한 나라를 부를 것이고 그들이 너에게 달려올 것은 너의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속에는 그 나라는 단수이며 그들이 너에게 달려온다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복수이다. 이것은 뭐냐하면 그 나라 땅이 올 수는 없고 그 나라 백성들이 온다는 것이다. 왜 달려오냐 하면 이방인들이 너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 이방민족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부르다 to call = kara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이것을 명사로 하면 부르는 자 kore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주라고 하거나 그 분이름을 부르는 대명사 여러 가지 있는 가운데 하나가 하이다. 이 글자를 앞에다 하면 하가 되고 뒤에 두면 아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뉴엘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글지 합성어인 임마누엘 (히브리어: עִמָּנוּאֵל, Imanu'el)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사 7:14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마1: 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글자의 합성어를 예로 들었듯이  두 단어 합성어인 코레아도

코레아 :  히브리어로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코레아란 의미를 알고나면 말을 못할 정도이다.

유대인들에게 코레아라는 것이 단지 고유명사라고 알았지 한번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중요한 것은 한 이방민족이 복음을 갖고 그들에게 온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을 받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신앙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가 바로 주를 만날만한 때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55: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설교자들이 이 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5절 말씀이 전제 되어야 한다.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이렇게 이방인인 한 민족이 복음을 가지고 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요 가까이 계실 때에 악인은 그의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10 언제가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물이 다시 올라가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내 말은 언제가 반드시 성취하리라는 것이다. 만일 이 부분이 맞다면 우리는 로마서 10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부르셨다면 이 말씀이 왜 주요한 것인가 하면 초림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재림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시고자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자물쇠와 같다는 것인데 바로 이 키에 해당되는 또 다른 민족이 와서 자물쇠를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을 통해 로마서 10장은 누가 말해도 한 개인의 구원받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도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구원받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구원받기 위해선 한 이방민족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방민족은 언제 예언되어 있느냐 하면 ?

모세때 예언되어 있었고 이사야가 예언하였고   사도바울이 그것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롬10: 18-21에서 말하는 이방민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이렇게 예언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시기하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줄 이방민족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민족에게 복음을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시한번 반복된 말씀이지만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 지 아니하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북쪽을 거쳐 동쪽으로 갈려고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도 북한 우리 민족에 복음을 전해주고 싶듯이 바울의 심정도 이런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여 주는 민족이 만일 우리 민족이라고 결정났으니 한번 우리민족이 그 사명을 감당할 것을 가정 해보자. 우리민족은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있는 민족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라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민족이요 자물쇠인 이스라엘나라에 대해 복음의 키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요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내 교회 하나 잘 되는 것만 비젼이면 안되겠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꿈군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뭔가 하나의 구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교회끼리 경쟁적인 구도가 아니라 협력적인 구도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개인적인 비젼이나 교회적인 비젼은 있지만 민족적인 비젼 국가적인 비젼이 없으므로 이스라엘까지 복음화하는 전략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작은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들까지 새로운 부흥이 와야 하며 교단으로 분열된 기독교계가 하나로 통합하는 일부터 하여야 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우리가 이스라엘과 닮은 점이 있다.

이스라엘 독립 건국은 1948년 5월 14일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15일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왜 이나라들의 건국을 말하느냐 하면 만약 이스라엘이 건국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스라엘에 전하여 준다면 이것을 방해하여야 할 사탄의 세력이 있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원지 않고 또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원치 않다는 것을 안다. 나라가 세워졌다 할지라도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것은  누가 바로 이방인의 한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사단이 볼 때 가장 두려운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해주어 회복시키는 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부흥되도록 내버려 두면 될 까요? 만일 그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건국 당시 제2의 예루살렘이 어디냐 하면 평양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단의 전략에 의해 북한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 그래서 김일성을 통해서 1948년 9월 9일 북한을 사탄왕국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우상이 전역 어디에나 세워져 있는 사탄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종교로 분류하면 신도수가 1,900만인 세계10위 규모의 종교라는 것이 오늘날의 북한정권이다. “1950년대 시작된 주체사상은 북한이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관점에서 정부 주도의 사상이며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명백하게 하나의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다.

 

북한정권의 통치행태가 특히 유사(類似)기독교 성향을 띠고 있는 것같은 강한 종교적 색채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북한의 헌법보다 상위규범은 ‘조선로동당규약’이며, 그보다 상위규범은 ‘유일사상확립을 위한 10대원칙’이다. 金日成을 절대화하는 10대원칙은 기독교 10계명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10계명을 암송하듯, 북한주민들은 10대원칙을 달달 외워야 한다. 종교적 성소(聖所)에 해당하는 ‘金日成혁명사상연구실’은 북한 전역에 4∼5만 개나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교회  숫자 약 51,000개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북한의 金日成연구실 수는 남한의 교회수와 비슷하다.

  金日成 동상인 우상은 북한 전역에 약 35,000개에 달한다. 북한주민들은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는 영생할 것이다”라는 표어 아래 동상 앞에서 참배와 묵념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북한주민들은 이곳에서 가정의 대소사를 치르기도 한다. “북한은 국가라기 보다는 수령이 교주가 된 사교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리 김일성 교주의 사탄왕국이라 하여도 평양의 행정구역에는 선교구라는 행정구역이 있으며 전철역중에는 부흥역이라는 역이 있다. 우리 한국에도 없는 행정구역과  전철역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임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http://hansarang91.tistory.com/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가 우리 나라가 맞는다면 우리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조차 대한민국이 아닌가! 바울이 우리나라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맘에 와 닿는 느낌은 너무나 벅차고 큰 사명임을 생각나게 한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과거사로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가 왔었을 때는 메시야를 거절하고 배척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선 차별이 없다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의로와지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의를 쫓아 갔지만 율법의 의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제는 믿음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듯이 12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므로 한 개인도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어느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전했고 이사야가 다시 말했고  바울이 구약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롬10: 19-21 말씀이다.

  이 말씀을 지난 2000년 동안 이해를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 누구든지 구원받을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듯이 이스라엘도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개인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방으로 전달하였지만 2000년 동안 흩어져 살면서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특정한 민족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것을 말하였는데 이 말씀을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면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였던 말씀과 이사야가 하였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마지막 때 이방의 한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민족을 복음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이면서 북쪽인 나라. 저는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기를 확신하는 바이다.

바울의 의지와는  반대로 복음은 유럽을 향해서 진행하였다. 만일 바울의 의도대로 복음이 동쪽으로 왔다면   인도의 힌두문화에  변질되어 버렸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시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헬라문화를 택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헬라문화에선 창조주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서쪽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복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사야서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다.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 오리니 그 나라가  어느 한 민족이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달려온다는 것이다.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찾아야 할 때이므로 거절하지 말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보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땅이 열매를 맺게 하고 싹을 내게 하여 곡식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도 내 말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이방인들 중 한 민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줄 것을 이미 예언한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7-8, 7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 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런데 거기 한 민족을 부른다는 말씀이 있다. 이 부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어원이 카라입니다 그런데 부르는 자 명사로 하면 코레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표시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부르실 때는 아버지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유대인 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 때로는 하라고 하는데 뒤에 있으면 아로 발음 나는 것이다. 

 아 발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름이 코레아요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말하고 해석을 하면

히브리어로 코레아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이보다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한국과 이스라엘의 비교 (창세기10:21-32)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음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조상)

셈->....25.에벨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었으니 이는 그의 날들에 땅이 나뉘었기 때문이더라.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는데 (한국인의 조상 단군의 다른 이름)

창10: "30 그들이 거하는 곳은 네가 동쪽의 산 스발로 갈 때에 만나는 메사에서부터 시작되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아들들 곧 그들의 가족들과 언어들에 따라 그들의 영토들과 민족들대로 셈의 아들들이니라.

 32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 곧 그들의 세대들에 따라 그들의 민족들대로 노아의 아들들의 가족들이라. 홍수 이 후에 이들로 말미암아 땅에서 민족들이 나뉘었더라."

"욕단은 메사에서 스발로 가는 길에 동편산에 거주하였으니 메사는 모스크바, 스발은 시베리아다. 동편 산은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단군은 욕단과 관계 된 인물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한국의 조상들이 지켜온 열 두 절기 중

 정월대보름과 팔월대보름은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수장절과 의미가 동일하다.

8월 대보름인 추석이 성경의 수장절과 일치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욕단의 후손 한민족은 아리랑 하나님을 불렀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엘로힘 하나님을 불렀다. 아브라함은 초림 예수님의 족보의 조상이고, 욕단 단군 후손인 한민족은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후손들이 될 것이다."

이 코레아의 의미를 이해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한 이방나라를 한 이방민족을 부르시겠다고 하셨어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코레아라고 하는데 이 뜻을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주께서 부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 할 수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샬롬. 마라나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이었다!

아리랑은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찬송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의 유석근 목사 저서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 고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니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고서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 가사부터 복원하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는 ‘연음법칙’ 이다.
  왜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규칙이 있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벗이랑→버시랑”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접미사 이랑’의 합성어이다.  ‘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노아의 홍수후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하나님을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 창조주 하나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이었다.
  ⑥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랍어 성경책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라’라고 표기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⑦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너랑 나랑).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며 바로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본래 의미이다.
  ⑧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나온다. 그래서 ‘알’은 ‘모체요, ‘근원이요, ‘시작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⑨ 다만 우리 민족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나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⑩ 우리 나라 시조설화에 고구려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것, 신라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왕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 지도자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한알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므로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⑪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한알님(하나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⑫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의 핵심이었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작의 기원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⑬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시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성경원어인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의어이다.
   ⑭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큰 지식이다.
   ⑮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이다. 왜 그럴까? 경희대 서정범 교수(국문학과)는 그것이 ‘큰 알’(한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고,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한알님(하나님) 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엘)에서 왔으니 한알(엘)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 ‘알이랑민족’의 무덤 양식은 ‘한알’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고 밝힐 수 있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그 ‘고개’란 우리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 고원을 중국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를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 알이랑민족의 선조인 셈의 4대손 욕단의 가계는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창 10:21~30).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그러므로‘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배달)를 찾아 동방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전통 민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고 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이며 7천만 한민족의 노래를 넘어 70억 세계인이 함께 부르고 같이 보존해야 할 인류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은 이상의 논거와 같이 고증학적으로 풍부한 증거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은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이다.
 
그렇다면 알이랑이란 의미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나?
꼭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리랑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러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석근 목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연구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을 <알이랑민족>이라는 제목의 도서로 출간했다. 이것은 필자가 부여받은 시대적 사명이다.    
<알이랑민족> 244~282쪽에는 우리 조상들이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음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자료들이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유대민족 뿐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창조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어느 교수의 주장도 실은 그러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조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왜? 아브라함 이전 시대와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이방인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귀한 이방인들은 누구일까?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이방인 >  
  <알이랑민족>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어원이 ‘한알님’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알’에 관한 인문학적 지식과 이해의 폭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곧 ‘알’은 ‘천신’(天神)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일종의 원시 단어였다. 이 ‘알’에서 ‘엘’도 ‘얼’도  높은 분의 말씀을 뜻하는 ‘왈’(曰)도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한알님)은 가장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의미하는 단어 ‘일’(1)도 바로 ‘알’이 어원이다. ‘알’은 유일신으로서 오직 하나(1)이기 때문이다. 즉 ‘알’에서 ‘엘’ ‘얼’ ‘왈’ ‘일’ 등의 단어들이 전부 가지쳐 나왔다. 
  ‘알이랑’은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왜?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조상은 하나님을 아는 셈의 4대손 욕단이었기 때문이다(창 10:21~30). 에벨의 자손인 욕단의 가계는 형인 벨렉의 가계와 더불어 셈족 중에서도 선택된 특별한 종족이었다(창 10:21). 그러므로 에벨의 혈통인 이 두 계열은 셈족을 대표하는 족속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거룩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맥(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양으로 이주한 족속이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가계였다(창 10:30). 그런고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종족답게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고개 즉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는 ‘산지’를 넘어 동방의 새 땅(새파르=새바르=새발=새벌=스발)으로 멀리 천동(遷動)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명의 본원지인 동방 땅 끝에 도달하여 유일신 하나님(한알님)께 천제를 드리고 배달(밝달)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제천민족’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이랑’은 성경과 관계가 있다. ‘알이랑’은 한국인의 조상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외증(外證)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찬송가 ‘알이랑’은 기록된 계시인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민요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보다 국어학자, 그리고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는 음대 교수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8년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인 주영자 교수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직접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대를 방문, 음대교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의 원의에 대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해석은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한 해석이라고 했다. 고증학적인 증거 및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이다”는 이 해석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킬 이유는 조금도 없다.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신학자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 대학원장)는 <알이랑민족>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알이랑민족>은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성민(聖民)임을 외증 과 내증으로 증명한 역저이다. 외증으로는 역사적, 지리학적, 고고학적, 과학적인 사실을 연역적이고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불러온 민족의 노래 ‘알이랑’에 ‘하나님과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외증의 하나이다.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 &Christian College, Genesis University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사무엘 박사 역시 <알이랑민족>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강의하신다.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 자랑스러운 알이랑 민족 >
 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윤사무엘 박사(현 감람원선교신학원 총장)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윤사무엘 박사는 <한국교회와 신학>에서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신학"을 "한국의 신학"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적극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은사이신 신성종 교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전 충현교회 담임)는 유석근 목사의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해서 자신은 견해가 일치한다고 했다.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 연구하는 ‘아레오바고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단종파를 다루는 월간지 「현대종교」의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장기간 역임한 이영호 목사가 대표로 있다. 그는 지금도 ‘사이비종교 피해대책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단사이비집단을 척결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영호 목사는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대해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혀주는 도서로서 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침례신학대학의 원어교수를 역임한 김선기 목사(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는 <알이랑민족>의 추천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인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위시한 민족사관 학자들의 한국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오던 나에게 유석근 목사님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정리시켜 주는 통쾌한 저서였다.”
성막론의 권위자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는 CTS에서 "아리랑은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는 제목으로 연속 방송 특강을 했다. CT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청할 수 있다. 본 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아미(AMI) 선교회의 황용현 목사도 필자가 <알이랑민족> 에서 역설한 아리랑 찬송가론을 가르치신다.


   ‘알이랑교회’라는 교회 명칭 
  필자는 예장합동 교단에 소속된 목사로서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목양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은 “알이랑교회”이다. 원래는 ‘상동중앙교회’였는데 수년 전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알이랑교회’로 전 성도들의 결의를 얻어 교회명칭을 변경했다.
그런데 필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은 교회명칭을 변경하려면 반드시 노회의 정기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노회의 허락 없이 지교회 차원에서 임의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수 없다. 우리 교회 역시 ‘알이랑교회’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노회에서는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했다. 그 후에 교회명칭변경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이름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 이다. 아마 이런 교회이름은 전국에서 아직 하나뿐일 것이다. 


다시한번 정리하자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인데 연음법칙으로 인해 ‘아리랑’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찾으려면
가사부터  ‘알이랑’으로 복원해야 한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엘’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어원은 ‘한알님’이다

(한알님~하날님~하나님).   ‘이랑’은 ‘~와 함께’라는 조사이다(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그래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뜻이다.”

 아리랑의 원의(原意)를 풀어준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계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밖에서도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리랑은 우리나라민요를 뛰어넘어 전세계인들이 불러보는 인류 최초의 찬송가임을 알게 되었다.






매월 14일은 특별한 날




매월 14일은 특별한 날 


매월 14일마다 특정한 '14일 데이'가 있답니다.
1월~12월까지 도합 12개의 데이가 있는 셈이에요.
14일에 있는 만큼, 포틴데이(Fourteen Day), 혹은 포틴스데이(Fourteenth Day)라고 해요.
포틴스데이가 맞는거 같긴한데 줄인말이 대세인 시대라!
수많은 기념일들이 존재하지만 14일 데이의 특징은 전부 연인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랍니다.
연인에게 선물하고, 연인과 함께 하고... 말그대로 커플천국, 솔로지옥이죠...물론, 블랙데이가 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블랙데이는 좀 서글픈 느낌이 강하다고나 할까?
사실상 14일 데이는 커플(또는 연인)들을 위한 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4월 14일은 블랙데이! 짜장면을 먹는 날이에요.

 그리고, 대부분 특별한 데이의 경우, 마케팅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11월 11일 빼빼로데이 나 3월 3일 삼겹살데이처럼 말이죠), 이런 것을 일컬어 포틴데이 마케팅(Fourteen Day Market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모든 데이를 일컬어서는 데이 마케팅(Day Marketing)이라고 하구요.(결국, 상술이었던겐가!!!) 14일 데이만 있는게 아니고 일년을 기준으로 수많은 데이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데이 마케팅은 날짜가 겹치기도 한답니다.(11월 11일은 십일절이라고하는 11번가의 이벤트날이기도해요) 더군다나, 전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의외로 대부분 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함정!! 거의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알고 있어요. 화이트데이도 제가 알기로는 한국과 일본정도에만 있다고 알고 있어요. 결국, 커플들이 추억만드는 날인 동시에, 엄청 상업적인 날이에요.(누군가에게는 매출이 오르는 날...?)


11월 11일 빼빼로데이나 3월 3일 삼겹살데이 모두 데이마케팅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데이들이 있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월 14일이 특정한 데이가 있는 만큼, 12번의 데이가 있답니다. 하나씩 설명하기에 앞서서 어떤 날이 있는지 알아볼께요.
한글과 영어로 적어볼께요.
1월 14일 다이어리데이(Diary Day)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또는 밸런타인데이, Valentine Day)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1월 14일은 다이어리데이(Diary Day): 소중한 사람에게 다이어리를 주는 날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 또는 밸런타인데이)
모든 14일 데이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가장 유명한 데이,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요. 예전에는 발렌타인데이가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영어발음에 가까운 밸런타인데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 듯하네요. 사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14일 데이는 없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발렌타인데이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고백하는 의미로 초콜릿(초콜렛)을 주는 등의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단순히 좋아하는 이성(남자 또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랍니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는 3세기 로마제국 시절,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결혼이 가능했던 때에 발렌타인이라는 사제가 허락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한 것을 기리며 만들어진, 말 그대로 연인들의 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달콤한 초콜릿이 사랑의 매개체가 되는 거죠. 예전에는 주로 초콜릿을 주는게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요즘은 특별한 개성이 넘치는 선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그리고 한국 사람답게 드물게 떡을 선물하기도 한답니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의 경우, 세계적으로 발렌타인데이와 쌍벽을 이루고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우리나라와 일본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14일 데이에요. 발렌타인데이에 다채로운 선물이 오고가는 것 처럼, 화이트데이에도 사탕 뿐 아니라, 초콜릿을 포함한 개성있는 선물을 주기도 한답니다. 화이트데이의 유래는 에서 사탕업체들이 상술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어요. 14일 데이 중 가장 최초의 마케팅인 듯 하네요. 일본에서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와 몇 개의 나라가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발렌타인데이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성대하게 기념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은 여성이 초콜릿을 준 남성에게 답례한다는 의미가 있기도 해서 마음을 받아줄 것인지 결정하는 날이기도 해요^^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주는 날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앞에서 잠시 언급했었지만 매월 14일 데이를 서글프게 보내야하는 솔로들을 위한 날, 4월 14일 블랙데이에요. 14일 데이중에 유일하게 솔로를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받지 못한 솔로들끼리 한데 모여 쓸쓸이 짜장면을 먹는 날인데, 요즘은 솔로, 커플 상관없이 짜장면을 즐기는 날이기도 해요. 그리고 짜장라면 회사에서 마케팅을 해서 짜장라면 먹는 날이라고 크게 광고를 하기도 하죠. 거기에 후식으로는 아메리카노 같은 검은 계통의 옷을 입고, 검은 계통의 음식들을 먹어주는게 일반적인 블랙데이랍니다.(끝까지 뭔가 쓸쓸해지는...) 아무래도 솔로보다는 커플을 공략하는 것이 마케팅에 좋을테니까요. 블랙데이는 화이트데이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극한의 쓸쓸함을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해요. 하지만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로운 솔로들이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커플로 발전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기도 해요 @.@


4월 14일 블랙데이(Black day): 초콜릿과 사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과 함께 쓰디쓴 블랙커피를 먹는 날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5월 14일 로즈데이는 사랑하기 좋은 계절 5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로 연인이 되거나, 혹은 사랑이 깊어진 커플들이 이제는 장미를 선물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쯤되면 야외데이트하기도 좋은 날씨이고, 전국 곳곳에서는 장미축제가 벌어지기도 해요. 그리고 솔로들에게는 옐로데이(Yellow Day)이기도 한데, 이유는 블랙데이까지 커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노란 옷을 입고, 카레를 먹어야 솔로탈출 할 수 있다고 해요. 블랙데이에 짜장면 먹은 것도 짜증나는데, 별걸 다시켜요. 역시 커플천국,솔로지옥이라는... 노란색이 눈에 잘 보이니깐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함일까요...? @.@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날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6월 14일은 말 그대로 커플들이 키스하는 날, 키스데이인데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등을 통해 연인이 된 사람들이 키스를 하는 날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옛날처럼 남자들이 미적거리는 경우도 잘 없고, 남자가 미적거리면 여자들이 공격적인(?) 경우도 적지 않은 거 같아요. 진도(?)도 빠른 것이 요즘 세상인데, 이 때까지 키스안하고 시간이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어쨌든 이 때까지 키스를 못했다면, 공식적인(?) 기회가 아닐까 싶어요. 분위기있는 레스토랑, 그리고, 품격있게 와인 한 잔 등등... 좋은 자리를 만들어보세요^^


6월 14일 키스데이(Kiss Day): 연인들이 키스하는 날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7월 14일 실버데이는 실버(silver)라는 말 그대로 은으로 된 악세사리를 선물하는 날이에요. 연인사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무래도 반지, 커플링(couple ring)이 될테구요. 꼭 반지가 아니더라도,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 많은 악세사리가 있으니, 적절하게 골라서 하시면 될 거 같아요. 솔로들에게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 기회이기도 하지만 갑작스런 은 선물은 상대방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세요. 물론,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실버데이 역시 상술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지키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골드(gold)데이가 아닌만큼 조금은 부담이 적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실버데이는 친한 선배, 부모님 등 가까운 친한 연장자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날이라고도 하네요^^


7월 14일 실버데이(Silver Day): 은으로 된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날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매월 있는 14일 데이는 금전적인 부담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린데이의 경우 부담이 덜하고, 건강에도 좋은 포틴스데이랍니다. 8월 14일이면 정말 더울 때인데, 나무가 무성한 숲에 가서 산책도 하고 삼림욕도 하는 건전한 날이에요. 시원한 산에가서 피서를 하는 개념이죠. 그리고 8월 14일은 뮤직데이(Music Day)이기도 해요. 원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CD를 선물하는 날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음반이 아닌 음원이 일반화된 요즘은 락 페스티벌이나 클럽같은 곳에 가서 음악에 몸을 맡겨 신나게 즐기는 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린데이에 숲에 가는 커플은 많이 들어보지는 못한 것 같네요...@.@


8월 14일 그린데이(Green Day): 연인과 함께 숲에 가서 산책도 하고 삼림욕을 하는 날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요즘과 같이 스마트폰이나 DSLR이 대중화된 시점에서는 포토데이가 조금은 무의미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포토데이는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어서 같은 사진을 나눠 갖는 날을 말해요. 예전같이 필름사진기를 인화하던 시절이라면 의미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어디서든 사진찍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포토데이가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매일매일 기념사진찍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뭔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날짜를 따로 정해서 한다는 것이 어색한 듯 싶어요. 어쨌든 기념사진을 찍어서 같은 사진을 서로의 지갑에 넣고 다니게 되는 날이 포토데이랍니다.


9월 14일 포토데이(Photo Day): 커플이 함께 사진 찍는 날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블랙데이정도를 제외하면 지키는 사람들이 사실 많은 건 아닌데요. 10월 14일 와인데이의 경우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와인데이 당일 와인을 집 또는 밖에서 먹으면서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와인하면 역시 분위기를 잡는데 1등공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또는 와인바에서 가볍게 와인 한 잔하면서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꿈꾸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에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날이 아닐까요?


10월 14일 와인데이(Wine Day):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인먹는 날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11월 14일은 데이트의 필수 코스, 커플들이 영화관가는 날이에요. 원래 영화는 이성과 함께 보는 경우가 동성이랑 보는 경우보다 많은 편인데요. 특히, 이 날은 연인들이 영화보는 날이기 때문에 솔로분들은 이 날은 피하셔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추천해요^^; 크리스마스의 경우, 밖에 나가면 대부분 둘 씩 걸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요. 무비데이의 경우도 평소보다 커플들이 많기 때문에 솔로들에게는 조금 짜증날 수 있는 날이에요. 그리고 11월 14일은 오렌지데이(Orange Day)라고 하기도 해요. 쉽게 말해서 오렌지 먹는 날! 그래서 연인들이 함께 오렌지 주스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하실 수 있어요. @.@


11월 14일 무비데이(Movie Day): 커플끼리 영화보는 날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12월 14일은 연인끼리 포옹하는 날이랍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솔로들은 옆구리가 시리지만 (ㅠ.ㅠ) 커플은 따뜻하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죠. 커플이 된 지 시간도 많이 흐르다보면 포옹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단순히 추운 겨울을 녹이는 날이면서 돈도 전혀 들지 않는 날 같은데요. 이 날은 머니데이(Money Day)이기도 해요...@.@ 예상하셨듯이 돈 쓰는 날이기도 한데요. 머니데이가 아닌, 허그데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풍성해지는 시간이 아닐까요? ^^


12월 14일 허그데이(Hug Day): 연인끼리 포옹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