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은 200년 넘게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반향 해 왔습니다.
성경 구절에서 죽음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 18:2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 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19)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 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22)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죽음에 대한 성경의 완곡 어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 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의를 찾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힘에 대한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여러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들완곡 어더 강하고 가혹한 용어 대신에 죽음에 대한 더 부드럽고 온화한 단어와 문구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죽음의 현실과 그 경험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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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길을 가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다윗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겼습니다. 죽음에 가까워 질 때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 께 충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솔로몬에게 그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데이비드는 '나는 온 땅의 길을 가고있다'( 열왕기 상 2 : 2) . 이 문구는 죽음이 모든 사람, 왕, 하인에게 공통적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인근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진 믿음은 이집트의 왕에 해당하는 파라오가 다시 살 수 있도록 보존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호흡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내면에서 호흡과 생명의 영 사이의 큰 연관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 하셨을 때,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콧 구멍으로들이 마셨고, 그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되었다'( 창세기 2 : 7 NIV) . 죽으면 '우리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12 : 7 NIV)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마지막 숨을 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가 복음 15:37) 그리고 '그의 영을 포기' (마태 복음 27:50).
그의 백성에게 모임
여러 번 성경은 사람들이 '흩어진'다음 다시 함께 '모인'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죽음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채집'을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마지막 숨을 쉬고 노년기, 노인, 삶에 만족하며 죽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모였습니다. ' (창세기 25 : 8 NIV) . 구절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보다 앞서 나간 신자들과 함께 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은 신자의 삶이 끝나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관심과 확신을 불러 일으 킵니다.
마지막 적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죽음이 온 땅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국 죽음이 영원히 멸망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죽음이 멸망 될 마지막 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6).
성경은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종종 죽음과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번역에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는 1,600 개 이상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단어 'maveth'(twm)와 그 파생어를 약 160번 사용하는데, 대부분 시편과 잠언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신약 성경은 죽음을 묘사하는 두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thanatos'(θάνατος)와
'nekros'(νεκρὸς)는 전자와 약 119번입니다.
단어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합니다.
지구상의
생명이 끝난 폭력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이미지 또는 죽음의 종류를 묘사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죽음 중 하나는 사람과 하나님이 분리 된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에덴 동산과 아담과 이브의 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2:16-17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 8:22, 디모데 전서 5:6
개인은 육체적 삶 전반에 걸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되돌릴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적 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두 번째 유형은 육체로부터 영혼과 영이 분리 된 죽음을 나타냅니다. 육체적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주님이 돌아 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겪지 않았지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개인이라는 두 가지 예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에녹(창세기 5: 23-24) 다른 하나는 엘리야(열왕기하 2:1, 11) .
영원한 죽음 또는 마지막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죽음을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25:41).
죽음은 악마, 악마 추종자, 악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간주됩니다.
마지막 죽음은 고통과 처벌의 장소이며 화재, 고통 및 고통으로 묘사됩니다. 마가복음 9:44-48) .
이것은 종종 신자들의 마지막 집을 묘사하는 '영생'의 배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해를 넓히는 다른 성구들
부드러운 완곡 어법과 여러 유형의 죽음에 대한 설명 외에도 성경은 죽음의 본질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암시하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와는 별도로 이러한 개념은 죽음을 더 잘 보여 주지만 함께 그 효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23rd시편은 장례식에서 말씀을 낭송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 위로와 희망을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을 걸을 때 악이 두렵지 않다'는 말에 집착한다. (시편 23 : 4) . 욥은 자신의 삶의 재난과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것을 더럽 히게하라'고기도했습니다. (욥 3 : 5) . 욥의 외침은 성경에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20 개의 언급 중 첫 번째입니다. 그림자는 그것이 닿는 것에 가까운 모든 것에 어둠을 드리 웁니다.
죽음의 침묵
침묵은 오싹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장소와 상황에서 차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길이가 오래 머무르면 침묵은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줍니다. 우리 친구와 가족의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에 홀로있는 침묵을 피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음을 묘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침묵의 장소로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시편 115 : 17).
죽음은 찌르다
죽음의 힘은 극복 할 수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힘이 찌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 죽음 이여, 당신의 승리는 어디입니까? 오 죽음이 어디 있니? (고린도 전서 15:55).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패배를 확보하셨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승리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17 NIV) . 아담 시대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죄를지었습니다. 로마서 3:23) .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그는 죽음을 직장에서 일한 대가로받는 임금과 비교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 로마서 6:23). 죄의 사역 때문에받는 월급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죽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예수님이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죽음을 버리고 생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디모데 후서 1:10) . 히브리 작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학 적 중요성을 공유합니다. '아이들은 살과 피가 있기 때문에 ( 의미 예수 ) 그들의 인간성을 너무나도 공유하여 그의 죽음으로 그는 죽음의 힘을 가진 자, 즉 악마의 힘을 깨뜨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평생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있었습니다. (히브리서 2 : 14-15 NIV).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니 죽는 것이 유익하다'(빌립보서 1:21)라고 적을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진짜이지만 슬픈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욕망은 '[우리] 죽음의 날이 우리 탄생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 : 2) . 죽음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특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위안과 확신과 희망이있을 수 있습니다.
잠들다
성경은 죽음과 수면을 50 번 이상 비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1 세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어로 문자 그대로 '기숙사'또는 '침실'을 의미하는 묘지를 '묘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의 마지막에 부활을 가져 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그의 재림까지 잠의 시간으로 보았다. 그들은 죽음이 신자가 '평안히 쉴'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수면 이미지를 사용한 일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 12 : 2- '땅의 먼지 속에서 잠자는 무리는 깨어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생에, 다른 사람들은 수치와 영원한 경멸을받을 것입니다.'(NIV).
- 욥기 3 : 11-17- '지금은 평화롭게 누울 것입니다. 나는 잠들고 쉬고있을 것입니다. '(욥 3:13 NIV).
- 요한 복음 11 : 11-14-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그들에게'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깨우려고 거기에 간다. ' 제자들은 '주님, 자면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가 자연스러운 잠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Lazarus는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NIV).
- 데살로니가 전서 4 : 15-17- '여호와의 말씀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겨진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우리가 잠든 자들보다 앞서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 전서 4 : 14 NIV).
소천(召天)이란 용어는 성경적인가?
한국에 복음이 들어 온지 138년
성철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적(入寂)이라 사용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타계 때는 선종(善終)이라고 했는데,
기독교 죽음인 소천이
성경적용어로 합당한지 인터뷰 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소천(召天)의 어원
소천이라는 용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통 상례(喪禮)의례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천이란 용어가 한국어사전, 한자사전 어디에도 기록 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빌려서 만든 글자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에도 없고 정상적인 조어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렀습니다.
소천의 한자적인 뜻을 살펴보면 “부를 소(召)” “하늘 천(天)”자로 구성되어 있는 신조어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천의 어원적 뜻, 즉 소천(召天)은 ‘하나님을 부름’이란 뜻은 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 아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만들려면 차라리 천소(天召)로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학자 정재도선생은 “소천이란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한자어 ‘승천(昇天)을 본떠 기독교식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어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소천(召天)의 오류
“소천 하셨다”는 문장은 다소 오류가 있다고 필자는 봅니다.
다시 말하면 소천은 아무개가 “하늘(하나님)을 불렀다”라는 뜻이
됩니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하면 아무개가 “소천 함을 당하셨다”거나 “소천 함을 입으셨다”가 더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쉬운 우리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거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라는 표현이 더 나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됩니다.
이 소천이라는 용어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관례화되어 쓰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용어의 오류를 다시 지적하면서 “하나님(하늘)이 부르셨다”라는 뜻은 “소천(召天)”아니라 “천소(天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어와 동사가 뒤바뀐 소천(召天)은 큰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소천(召天)의 근원
1. 소천의 근원은 카톨릭에서 사용되어 기독교로 전해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2. 전통 종교적 사상에서 하늘 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갔다는 이교에서 들어온 용어 중에 하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1675) 북애자가 저술한<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보면,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 지 무릇 궐천년이니--태백산에
올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못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
못을 조천(朝天)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한웅천왕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朝天)는 것에서 우리 민족이 ‘죽었다“는 표현을 왜 ”돌아가셨다“라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천(朝天)에는 우리
민족 조상들의 정신세계에 내재된 신들의 세계 하늘로부터 근원한 우리민족이 죽어서 다시 본 고향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3. 일본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죽음을 승천(昇天)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이상하게도 우리말의 소천(召天)이 일본어로 (쇼오텡)과 발음상으로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천의 근원지를 일본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국전통 상례(喪禮)의 의미
상례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부터 시체를 매장해 묘지를 조성하고 가족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근신해 상복을 입는 방법과 일정한 기간 동안 상복을 다 입고 평상생활로 돌아갈 때까지의 각종 제례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를 말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갈무리하는 예라면 죽음의 예라는 뜻에서 사례(死禮)라고 해야 할 텐데, 사(死)로 쓰지 않고 상(喪)을 써서
상례(喪禮)라고 하는 까닭은 사(死)는 육신이 죽어 썩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사람노릇을 끝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死)는
소인(小人)의 죽음이요 종(終)은 군자(君子)의 죽음을 말하는바 사(死)와 종(終)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뜻인 상(喪)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전통 상례(喪禮)는 슬픔과 예가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들
한국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완곡어법을 써서 고인의 신분과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을 쓰는 것이 통례입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별세(別世. 세상을 하직한다는 말로 죽음을 뜻하고), 영면(永眠; 영원히 잠들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하는 말),
작고(作故;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 임금이 세상을 떠남), 불교에서는 입적(入寂;
불교에서 수도승의 죽음을 이르는 말, 또는 열반(涅槃)), 카톨릭에서는 선종(善終;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사람을 이르는 말), 기독교에서는 소천(召天), 등 모두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외에도 사망, 별세.
운명 등 우리말에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고유어로는 ‘죽다’에서부터 ‘숨지다‘., ’돌아가시다‘, ’세상을
뜨다‘.,’숨을 거두다‘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선종(善終)이나 입적(入寂) 열반(涅槃) 등은
정식 단어이지만 유독 소천(召天)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연유에는
'하늘의 부름'으로 쓰는 '소천'이 조어법상으론 '하늘을 부름'이란 뜻이 돼 잘못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냐는 지적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소천(召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최근에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 받고 또한
기독교계의 원로인 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신문 방송에서는 “정진경 ,김준곤 목사님의
소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기독교 신문 방송 기사는 똑 같이 “소천‘이란 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소천이란 용어 사용하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하고 생각 하면서 보편적으로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소천(召天)은 비록 신조어로서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천소을 받았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사전에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하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소천’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언뜻 듣기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생각돼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에도 없고, 어법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장례가 생기면, ‘고인이 소천했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천이란 용어가 국어사전과
한문사전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랜 옛날부터 구전돼 온 것은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에 등록된 신라부터 조선후기의
고문헌을 검색해 봐도 장례를 일컫는 소천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다만, 조선후기 김시습이 지은 매월당집에 ‘하늘의 재앙을
부르다’는 뜻의 ‘소천재’란 말이 사용된 정돕니다.
INT 노성두 / 한국고전번역원
‘소천’이란 말은
한문법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용어입니다.
부를 ‘소’에 하늘 ‘천’, 문법적으로 풀이하자면,
‘부르다’는 동사에 ‘하늘’이 목적어로 붙어 ‘하늘을 부르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이 누군가를 부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늘을
부른 것, 즉 주체가 하늘이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뜻 그대로 ‘하늘이 불렀다’고 표현하자면 ‘천소’가
맞습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일각에서는 단군신화에 ‘환웅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의 ‘조천’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일본인들이 죽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승천’ 즉 ‘쇼오텐’에서 음을 따 ‘소천’으로 발음하게 됐다고 추정,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해석을 내리기도 합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불교에는 타계, 혹은
입적, 천주교에는 선종 등 종교적 의미를 담은 고유한 명칭이 있습니다.
소천이라는 말이 역사도 불분명하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의 개발이 절실합니다.
'죽음과 사망' 硏究
1. 성경에서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각각 다른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2. 구약성경에서는 죽음과 사망을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다르게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이라는 단어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쓰여진 때가 있는가 하면 죄 값의 형벌인 사망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망도 육신의 죽음일 때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적이 간혹 있으나 깊이 살펴보면 대부분은 죄 값의 사망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약에서는 죽음과 사망이란 용어를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했으니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사망은 죄 값으로 죽는 그 형벌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구약성경
1)죽으리라(죄 값의 사망)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2)죽었더라(육신의 죽음)
[(창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아담
[(창9: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 노아
[(신34:5-7)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 모세
3)돌아갔더라(육신의 죽음)
[(창25:7-8 )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아브라함
[(창35:28-29)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이삭
[(창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 야곱
4)사망(죄 값의 사망)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사망(육신의 사망)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신약성경
신약성경에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육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에 대한 형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죽음(육신의 죽음)
[(마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2. 사망(죄 값에 대한 형벌)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기에 사람의 별세는 신, 불신자간에 다 같으나, 죽음 곧 사망은 신, 불신자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사망은 심신의 기능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요, 불신자의 사망은 영육 자체와 그 기능이 다 사망을 받습니다.
1, 그러기에 신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성경에 상치가 되는 표현이 됩니다.
더욱이 순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더욱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그것은 순교를 했는데 죄의 값을 받았다는 사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상고하여 올바른 용어로 표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용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3.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요 하나는 죄의 값인 사망입니다.
순교는 육신의 죽음 형태 중에 한 성격을 표현한 용어입니다.
4. 그러기에 죽음, 사망, 돌아가셨다, 별세, 순교, 소천, 등은 각각 죽음의 형태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상통하기 위해서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도 구분해서 바로 적용하여야 상통에 막히는 오류와 실수가 없겠습니다.
5.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상통하는 용어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 근거가 되어야 하겠고 또 성경을 근거로 하더라도 치우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검색 결과
죽음(53) : 구약 38, 신약 15
사망(118) : 구약 73, 신약 45
죽으매(36) : 구약 32, 신약 4
교회 용어 바로잡기 / “소천. 증경. 자벽. 고퇴를 아시나요?”
‘사회자’는‘인도자’
‘헌금’은‘봉헌’으로
교회 안에 비복음적인 언어, 국적 없는 신조어, 잘못 번역된 언어, 무례한 언어, 폭력적 인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용어를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은 한글을 훼손함은 물론 복음과 진리를 왜곡시킨다는 크나큰 우려의 목소리가 있어 왔다. 이런 점에서 최근 에 잘못 사용되고 있는 교회용어를 바로잡자는 움직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 용어 바로잡기 작업을 정리했다. <편집자 주>
교회 용어 바로잡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2년 예장통합총회에서‘기독교 용어 개정안’을상정한 이래 예장합동과 기장 등 각 교단에서 교회용어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또 지난해 말부터 교회문화연구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서도‘교회용어 바로잡기’운동에 동참하면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교회문화연구소(소장: 이의용)는 그동안 수집한 100여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교회용어 바로 쓰기’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잘못된 교회용어 사례들을 공개하고 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이 소장은“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중심이 돼 성경 찬송가 주기도문 사도신경에서부터 잘못된 교회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장이 제시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가 바로 ‘부목사’란 호칭.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르는데, 목회자의 권위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신분의 차이를 두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부목사’를 거쳐야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하는 용어다.
그냥 ‘목사’로 호칭하고, 부득이 구별해야 할 경우엔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부목사’는 권위주의 반영
‘평신도’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평신도란 말이 교회 안의 낮은 계급으로
인식되고 특별한 계층이 있다는 의미로 왜곡되어 왔다. 평신도란 용어는 거룩한 무리란 뜻이 담긴‘성도’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찬송에‘특별송’과‘보통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용하는 ‘특송’이라는 용어보다 누가
부르든‘찬송’또는‘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소경’, ‘장님’, ‘문둥병자’,‘절뚝발이’등의 표현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써
교회 밖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시각장애인’, ‘나병환자’, ‘지체장애인’등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예배와 관련한
언어의 오용 또한 심각하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 좀 봐주세요”와 같이 잘못된 언어사용은 기독교 교리를 오도할 위험도 있다.
예배는 목사님이 봐주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옳다. 주일 낮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일컫는‘대예배’란 말 역시 잘못된 용어다. 예배는 등급이나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한 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다. ‘주일 예배’또는‘주일낮 예배’, ‘장년부 예배’로 지칭하면된다.
또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가 아닌 예식이다. 예배의‘사회자’는‘인도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마치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예배를 시작한다는 인상을 준다. 별 다른 이유를 달지 말고 바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서 유래한‘묵도’라는 말은‘묵상’으로 바꿔야 한다.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란 표현은 인도자가 교인들에게‘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성경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적합한 표현이다. ‘헌금’은‘봉헌’으로 바꾸는 것이 합당하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나타내지만.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는‘성도’가 바람직
기도와 관련해서도 잘못된 용어가 많다.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중보자’라고 한다. ‘중보기도’보다는 남을 위한 특별한 기도란
의미의‘이웃을 위한 기도’또는‘도고’라고 하는 것이 맞다. 기도할 때 흔히‘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을 한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따라서‘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은‘하나님, 복을 빌어주시옵소서’란 뜻이 된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하는 어이없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자주 쓰는 말 중‘감사하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셨습니다’등도 잘못된 표현으로 각각‘고마우신 하나님’, ‘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가 어법에 맞다. 또 공개적으로 함께 기도를 할 때‘주여 삼창’을 외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아버지를‘아버지여’라고 부르지 않듯이, 누구를 부를 때 함부로 ‘아무개여’라고 하지 않는다. ‘주님’‘예수님’이라 불러야 한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해 대표기도를해주시겠습니다”란 표현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수 없기 때문에‘대표’나‘대신’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다.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 신조어도 많다. 전도 대상자를 가리키는‘태신자’란 용어는 보편적이지 않은 말이다. 앞으로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기도하는 사람에 대해‘태목사’‘태장로’라고 하면 얼마나 이상한가. ‘불신자’란 용어도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을‘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비신자’라고 하는 것이 좋다.
‘대표 기도’보다 ‘기도 인도’
“모 증경회장이 자벽으로 선출되신 회장에게 고퇴를 물려주고 휘장을 친히 분배했다.”이 문장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증경, 자벽, 고퇴, 휘장 등 전통적으로 써내려 온 회의용어들도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적인 의미도 없고 일반사회에서도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고퇴’는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마치’(망치)가 속되다고 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이다.
‘의사봉’이나 ‘사회봉’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벽’은 <조선철종실록>에 나오는 단어로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없이 자기 사람을 기용한다’는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자벽’보다는 ‘임명’ 이나 ‘지명’이 바람직하다.
중국
고대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로 ‘증경’은 ‘전’으로, 배지를 의미하는‘휘장’은‘꽃’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영결식’,
‘명복’, ‘삼우제’‘추도식’등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타종교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문제다.
‘장례예식’과 ‘하나님의 위로’,
‘첫 성묘’ ‘추모식’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결식’은‘영원한 이별’을, ‘명복’은 죽은 뒤 명계에 가서 받는 복을
뜻하는 타종교의 용어이다.
‘추도’란 ‘슬퍼한다’는 뜻으로,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별세하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어색하다.
‘추도’보다는‘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추모’란 말이 적절하다.
또 ‘재수’ ‘운수’ ‘운명’‘ 도로아미타불‘‘공염불‘‘손이 없는 날’‘사주팔자’‘명당자리’‘신주를 모신다’‘보살 같다’‘부처님 가운데 토막’‘신선놀음’‘도사’‘넋두리’‘도깨비 장난’‘일진’‘살’‘구신 같다’‘액’‘터줏대감’등도 무속이나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 등이 담겨져 있어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
교회생활
부목사 …………………………부교역자, 부목회자
특송 ………………………………………찬송, 찬양
평신도 ……………………………………성도, 신도
소경, 장님 ………………………………시각장애인
문둥병자 …………………한센씨병환자, 나병환자
절뚝발이 ………………………………지체장애인
불신자 ………………………………………비신자
도전을 주셨습니다…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
천당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X-mas, 크리스마스
……………………성탄절, 성탄일, 주님 오신 날
교회를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운이 좋았다………………………하나님의 은혜다
태신자 …………………………………전도 대상자
사모 ………………………………………목사 부인
애굽 …………………………………………이집트
다메섹 …………………………………다마스커스
예배 예식관련용어
주여, 예수여 …………………………주님, 예수님
묵도 ……………………………………………묵상
성경 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헌금 ……………………………………………봉헌
임직예배, 결혼예배, 추도예배 등
…………………임직예식, 결혼예식, 추도예식 등
대예배 …………………………주일예배, 장년예배
열린예배 …………………………………열린집회
성가대 ………………………………………찬양대
축제 ……………………………………………잔치
예배 봐준다……………………………예배 드린다
기도관련 용어
감사하신 하나님…………………고마우신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복을 주시옵소서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기도를 인도해 주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주님께서 삶을 주관해 주시고
중보기도
………도고의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청원기도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회의관련 용어
고퇴 …………………………………의사봉, 사회봉
자벽 ………………………………………임명, 지명
증경 ……………………………………………전
휘장 ………………………………………………꽃
사회자 ………………………………………인도자
장례관련 용어
추도식, 제사 …………………………………추모식소천 ………………………별세, 하나님의 부르심
명복을 빕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삼우제 ………………………………………첫 성묘
죽음(死亡)
죽음, 죽이다, 잠
신약성경에서는 고전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어들이 죽음과 죽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생명을 통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일깨워 준다.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와 관련된 단어들 외에도 원래 의미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또 다른 용어들도 있다.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한완곡어로서 초기로부터 줄곧 사용된 '잠' sleep(휘프노스[hypnos])이란 용어는 기독교 영역에서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타 용어들로는 카듀도(katheudo : 잠자다 to sleep)와 코이마오마이(koimaomai : 잠들다 to fall asleep)가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것이 시체이거나 또는 무생물체이거나 간에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이다. 텔류타오(teleutao)는 '끝나다' '끝 마치다' come to an end, finish를 의미하며 따라서 '죽다' to die를 의미한다.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폭력으로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다나토스(thanatos)어군과 네크로스(nekros) 어군의 단어들은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독특한 저의를 갖고 있다.
ajpokteivnw, 615
ajpokteivnw, 615(apokteino:, 아포크테이노). 죽이다, 살인하다 kill.
teleutavw, 5053(teleutao:, 텔류타오). 끝나다 come to an end, 죽다 die.
고전 헬라어문헌
1. 동사 아포크테이노(apokteino:, Homer)는 크테이노(kteino:: 죽이다 kill)에서 파생하였으며 타인의 목숨을(후기에는 자신의 생명도) 폭력으로 종식시키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죽이다' kill, have put to death, '살해하다' murder, '처형하다' execute를 의미할 수 있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텔로스(telos: → 목표 Goal, 끝 End)에서 파생했으며 호머(Homer)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입증되고 원래는 '끝내다' bring to an end(예: 어떤 사람의 일), '완성하다' to complete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다. 자동사의 의미로는 '끝나다', '마치다' come to an end, '이행되다', '성취되다' be fulfilled(예: 꿈이)를 의미하여 그 다음에 '죽다' to die, '생명을 잃다' to lose one's life도 나타낸다.
구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70인 역본에서 150회 이상 찾아볼 수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 어근인 하라그(harag: 죽이다 kill)와 무트(mut: 죽다 die, 특히 히필형으로는 죽게 하다 cause to die)를 번역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살인(창 4:8,가인의 살인), 사형 집행(출 32:27) 또는 거룩한 전쟁 중에 실시하는 대량 학살(민 31:7이하; 삼상 15:3)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심판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에도 나타난다(암 4:10; 암 9:1; 겔 23:10).
2. 70인 역본 중의 약 70개 용례에서 텔류타오(teleutao:)는 히브리어 무트(mut: 죽다 die)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거의 항상 인간 생명의 만료나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죽음(예: 출 1:6; 수 1:2)과 갑작스러운 폭력에 의한 죽음(다나토 텔류테세이[thanato: teleute:sei]: 그가 죽음을 죽을 것이다 he will, or shall, die the death, 출 19:12; 출 21:16이하; 암 9:10)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는다.
신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에서 74회 나오며 특히 4개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15회)에 자주 나오며 5개의 용례만이 (바울) 서신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구절들 중 직접적인 사건 묘사나(마 14:5, 침례 '요한에 대한 헤롯왕의 의도. 참조: 막 6:19), 비유(포도원 일군들을 묘사한 막 12:5이하. 및 병행구들, 참조: 마 23:37 병행구), 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묵시 중 제자들과 관련된 예언의 말씀(마 24:9)을 막론하고 이 동사는 거의 항상 하나님의 사자들의 폭력에 의한 죽음을 언급한다. 세 공관 복음서의 수난 예언(막 8:31; 막 9:31; 막 10:34과 유사구절들)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점은 중추적인 의미를 지닌다. (p.3-419*) 죽음을 당하고 공격이(p. 3-419*) 집중된 증인(→ 증거 Witness)은 바로 → 아들 Son이다(참조: 살전 2:15). 요한복음에서는 아포크테이노(apokteino:)가 거의 항상 제테오(ze:teo:: 추구하다, 찾다 seek)나 불류오마이(bouleuomai: 계획하다 plan)와 함께 쓰인 점이 주목된다(예: 7:1; 19이하; 11:53). 제자들도 또한 이런 위협의 영역 안에 처한다(행 21:31; 행 23:12-14). 이 점은 특별히 계 6:11에 지적되어 있다(참조: 계 11:7에서도 짐승이 두 증인을 죽인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동사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처형과 관련하여 더 자주 사용된다(네 명의 말 탄 자들에 의하여, 계 6:8; 참조: 계 9:15-18; 계 19:21).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후기의 해석에 있어서 엡 2:16은, 예수님이 자기 죽음을 통해 “원수된 것을” “죽였다”고, 다시 말하면 화목을 이루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비유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롬 7:11에서는, 여기에서 하나의 권세로 간주되는 → 죄 Sin(하마르티아[hamartia])가 계명(→ 명령 Commandment; 엔톨레[entole:])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 계명은 인간에게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 갈등은 하나님 앞에 서도록 사람을 속이며 따라서 사망을 초래케 한다. 여기서 계명은 실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율법이다. 고후 3:6에서 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그람마(gramma: 문자 letter)가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는 달리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11회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중 3회는 구약성경에서 따온 인용구에서 나온다(마 15:4; 막 7:10; 막 9:48). 마 9:18(부정과거)과 요 11:39(완료분사)에서 이 동사는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는 점이 주목을 끄는데 이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소녀와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동일한 문맥에서 카듀도(katheudo:) 또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가 사용된 것은 이 사실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 동사는 헤롯 왕의 죽음에도 사용되었으며(마 2:19) 죽은 형제들의 비유(마 22:25)와 다윗, 야곱, 요셉(행 2:29; 행 7:15; 히 11:22)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언급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죽다' die를 뜻하는 지배적인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 다나토스[thanatos])이다. - L. Coenen
qavnato", 2288
qavnato", 2288(thanatos 다나토스). 죽음 death.
qanatovw, 2289(thanatoo: 다나토오). 죽이다 kill.
ajqanasiva, 110(athanasia 아다나시아). 불사, 불멸 immortality.
qnhvskw, 2348(thne:sko: 드네스코). 죽다 die.
ajpoqnhvskw, 599(apothne:sko: 아포드네스코). 죽다 die.
sunapoqnhvskw, 4880(synapothne:sko: 쉬나포드네스코).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
qnhtov", 2349(thne:tos 드네토스). 죽을, 죽음의, 죽음을 면치 못할 mortal.
고전 헬라어문헌
다나토스(thanatos, Homer)는 죽는 행동이나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위험, 죽음의 방법, 사형에도 사용된다. 이와 유사하게 다나토오(thanatoo:)는 어떤 사람을 '처형하다' to put someone to death, '죽이다' kill, '죽음의 위험으로 이끌다' lead into mortal danger를 의미한다. 죽음에 예속된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일찍이 호머(Homer) 시대에 드네토스(thne:tos: 죽음을 면치 못할, 죽을 mortal)로 묘사되었다. 인간은 호이 드네토이(hoi thne:toi: 죽음을 면치 못할 존재 the mortals)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신들은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를 소유한 자로 언급되어 있다.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인간이 수많은 불멸의 신들로 승격된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드네스코(thne:sko:: 죽다 die)와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끝나다, 만료되다 expire)(둘 다 호머의 저술에서)는 죽음의 행동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에 관한 언급에서는 복합어형인 쉬나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를 찾아볼 수 있다(Hdt. ; 참조: 과부를 화장하는 인도의 관습). (p.3-420*)
헬레니즘 시대에 다나토스(thanatos), 다나토오(thanatoo:), 드네스코(thne:sko:),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등의 용어들은 지적이고 영적인 죽음에도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1. 헬라인들이 비록 망령(→ 영혼 Soul)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거주하게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Homer, Od. 11, 204-222),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살아 움직이는 활동의 끝, 생명의 종결, 존재의 파멸을 의미했다. 죽음은 인류 공동의 운명이며, 죽음의 부정적인 면은 죽음이 지하세계에서 나온 일종의 악마나 괴물로서 의인화되어 나타날 때, 종종 명백하게 된다(Eur., Alcestis 28이하). 그들은 창조의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그들에게 “왜?” 라는 의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불멸이 선망의 대상이 된 신들의 본질적인 운명인 것처럼 본래부터 모든 사람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 사람의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불평이 자주 표현되어 있다(참조: Homer, Od. 11, 488).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 생명 life(조에[zo:e:])을 마음껏 즐기려는 요구가 대두되었다. 고전 15:32에 바울이 인용한 “재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격언은, 그 문제에 관한 헬라와 로마 사상의 여러 표현들과 일치한다(참조: Eur., Alcestis, 782이하). 제국시대 때 로마 사람의 거실에는 종종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진 해골의 그림이 있었다.이것은 순간의 쾌락도 놓치지 않으려는 하나의 초대장이다. 나이가 인생의 쾌락의 향유를 방해할 경우 사람은 곧 죽는 편이 낫다(Eur., Hecuba, 1104이하). 고대 세계의 큰 묘지들이 도시의 주 도로들을 따라 놓여 있었는데 이는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 즉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을 죽은 자들 가까이에 두기 위한 의도였다. 긴 인생을 누리고 난 후의 고귀한 죽음을 큰 축복으로 간주하였으며(Homer, Od., 11, 134이하) 죽음이 인생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임을 깨달음으로써 또한 위로를 받았다(Eur., Troades, 635이하).
2.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음의 공포는 심사숙고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추구되며 종종 사람은 그의 자녀들 안에 살아있다라는 견해가 나타난다(Mimnermus, Frag., 2, 13이하). 비문과 커다란 장례기념물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이 계속 살아남아 있게 해주며 고인의 행적은 후대에 선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런대로 죽음을 참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있어 유달리 특징적인 것은 죽음을 운명으로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업적의 한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삼는 것이다.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죽든지 또는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하든지 간에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중요하다(Eur., Heraclidae, 533이하). 그러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삶의 업적의 하나로 보일 수 있으므로 그것은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며, 특히 폴리스(→ 사람들 People)를 위한 죽음일 경우 죽은 자의 이름이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Eur., Heraclidae, 621이하).
(a) 플라톤의 사상에서 참다운 삶이란 순수한 자연적 환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쾌락 대신 덕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생활하는 인간에게는 죽음까지도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내가 죽음의 성질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이 생활의 악에서 도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런 철학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평온한 마음은 또한 죽음을 인류의 업적으로 변화시킨다(polis, 80e). 왜냐하면 죽음이란 종종 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쟁터 등에서 비열한 행동의 대가로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Apology, 38e-39b).
(b) 스토아학파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죽음의 본질적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자기자신을 죽음의 과정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 간주할 때 죽음은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을 죽음에서 자유를 느끼게 했으며 자기들의 존재를 하나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죽음의 세력에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없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가 진실로 죽은 사람이다(Epict., Dissertatrones, I, 19, 9). (p. 3-421*) 이와 같이 계속하여 자유로운 심정으로, 덕스러운 삶을 따라 평온하게 죽을 것을 각오함으로써 역시 죽음을 인간의 업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Seneca, Letters, 93; 101, 15). 그리고 이러한 업적은 자살을 통하여의식적으로 이룰 수도 있다. “인간이 어디서 끝이 나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원할 때 끝을 내라, 종말이 훌륭한가라는 점만이 중요할 뿐이다”(idem, 77, 20).
3. (a)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들 외에도 때때로 그 태도와 합쳐져 → 영혼 Soul의 불멸에 대한 신앙을 때로는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오르퓨스(Orpheus)교와 피타고라스(Pythagoras) 학파의 신비주의의 확실치 않은 근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플라톤(Plato)이 제일 먼저 그것에 대해 논의했으며 거기에, 도덕적 인격관의 결과인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죽을 때 영혼은 → 몸 Body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인간의 고통 받는 부분에서 고통 없는 것으로 자유롭게 된다(Phaedo, 80c이하). 철학자의 삶은 완전히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는데 전념하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이성 없는 육체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대망의 목표로 간주할 수 있다(Phaedo, 114a 이하). ([편집자주] The Rep., 10, 614-21은 생전의 행위에 대한 상벌과 관련된, 영혼전생[transmigration]설을 담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불멸에 대한 그런 견해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당시에 유행된 그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b) 스토아 학파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멸을 부정했다. 개인의 영혼은 우주에 충만한, 신의 우주적 영혼 속에 가라앉게 된다(→ 땅 Earth, 세상 World).
(c) 동방에서부터 등장한 신비적 종교에서는 인간이 생래적 필멸(mortal) 상태에서 입교의식에 의하여 신적 상태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입교 의식은 모시는 신의 생명력 중 한 몫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d) 영지주의(→ 지식 Knowledge, art. 기노스코[gino:sko:])에서는 플라톤의 온화한 인류학적인 육체-영혼의 이원론이 격화되어 날카롭게 대립되는 우주적 이원론이 되었다. 우주는 악마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며 육체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반면 영혼은 우주와는 분리된 → 빛 Light과 → 생명 Life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육체에 감금되었다. 실제적 죽음은 육체에 있어서는 생명이다. 육체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e)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는 플라톤의 견해와 영지주의의 신화가 결합되어 하나의 이론체계를 형성하였는데 이 이론에서는 감각세계를 넘어선 영혼의 여행 및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와 상승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immortality)가 헬레니즘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에서만 나타나는 것(솔로몬의 지혜서, 마카베오 4서)을 제외하면 이 어군의 모든 단어들을 70인 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의 용법은 고전 헬라어 문헌의 그것과 아주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다. 이 용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 상당어구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웨트(mawet: 죽음 death)나 무트(mut: 죽다 to die, 죽이다 kill)이다.
1. (a) 구약성경의 사상에 있어 죽음은 인간의 존재의 최후를 의미한다(삼하 12:15). “우리는 …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 사람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므로 마땅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창 3:19). 일단 영혼 혹은 망령이 스올(Sheol, → 지옥 Hell, art. 하데스[hade:s])에 내려가면 생명은 결코 되돌아 올 수 없다. 특히 이 점은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로부터의 분리를 죽음이 초래한다는 빈번한 불평에서 명백히 드러난다(시 6:5; 시 30:9; 시 88:5; 시 88:10이하; 사 38:11). 인간은 죽음의 공통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할 뿐이지 선택권은 없다(창 3:19; 집회서 14:18이하; 41:1-4). 만약 하나님이 그에게 장수를 허락하신다면 그래서 그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것을 성취한다면 그는 감사하고 만족해 한다(시 91:16; 창 15:15). 이것은 인간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탄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시 90). 삶이 병과 고생으로 망쳐졌을 경우 인간은, 마치 죽음이 인생의 여기저기에(p. 3-422*) 돌출해 있는 것과 같은 죽음과 지옥의 덫에 대해 기도를 할 수 있다(시 116:3; 시 116:8). 그러나 죽음이 본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두려워하게 된 것은 악이거나, 또는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 죄 Guilt에 대한 하나님의 → 징벌 Punishment을 뜻하는, 일찍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의 백성들의 사회에서 깨끗하게 없애기 위하여 죽음으로 개인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사회 자체가 개인을 정죄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성 전체에 미치는 → 심판 Judgment을 막기 위해서이다(신 13).
(b)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멸은 창조적 의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은 불순종이라는 분명한 행동 때문에 일찍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타락 후에 그는 단지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라는 벌을 받았을 뿐이다. 시 90에서는 타락의 기사를 시사하고 있으며 → 죄 Sin와 죽음의 연관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거기의 사상에서도 인간의 죄에서 기인된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덧없이 빨리 지나가는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참조: 시 51; 시 14:2). 따라서 비록 죄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유일한 예외는 “승천”의 경우들임) 아담의 죄와 죽음의 결과로서 죽음이 유전된다는 언급은, 원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중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제일차적인 것은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 백성(→ 언약 Covenant; → 이스라엘 Israel) 간의 관계이므로 죽음은 믿음에 대한 위협을 제시하지 못하며 “왜?” 라는 의문이 죽음에 관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c) 더군다나 개인은 생명을 부여 받은 것이며 여호와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만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영웅적 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거나 또는 일어날 수 있다는 사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이 매우 민감하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알게 되는 경우라도 자살에의 유혹은, 자살이 일종의 인생의 부정일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또는 “훌륭한” 죽음을 원하는 욕망에 의해 억제된다. 사울이 전쟁에 패배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들이 죽은 후 자살했을 때도 이것이 그의 생명의 영웅적인 결말이라는 암시는전혀 없다(삼상 31; 참조: Ahithophel, 삼하 17:23).
(d) 간혹 여호와가 음부의 주(Lord)로 간주되기도 한다(시 139:8).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라도 여호와께 온전한 신뢰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시 73:23이하; 욥 19:25). 후기의 → 부활 Resurrection 교리가 바로 이러한 구절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a)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여호와의 백성(→ 사람들 People)과 → 언약 Covenant 개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토라(Torah)에 대한 믿음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인화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렘 31:29이하; 겔 18:2).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죽음이 하나의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이 인간의 운명에적합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기원을 인간의 죄 속에서 추적하였다. 때 아닌 때 죽음뿐 아니라 죽음은 모두 죄로 인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창 2장과 창 3장의 타락기사에 관한 여호와 문서 기자의 전승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몇몇 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바로 그런 사상 경향이, 이 시기에는 강력한 형태로 확대되었다. 아담은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당신은그에게 당신의 금령(禁令)을 꼭 하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금령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즉시 당신은 곧 그와 그의 후예를 죽음으로 정하셨습니다”(에스드라하 3:7). “죄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여자로 인하여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집회서 25:24). 죄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아담에 의해 초래된 공통적 죽음의 운명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이런 동등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다(참조: 예: 시리아어 바룩묵시록 54:19: “아담은 자기자신의 영혼에만 책임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가 한 사람의 아담이 되었다” 그 외의 자료로는 SBI 815이하; Ⅲ 227이하가 있음).
(b) 이처럼 죽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운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닥쳐온 것으로 생각된 이상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이다. (p.3-423*) 따라서 유대의 묵시문헌에서, 세상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과 그 나라에서는 죄가 정복되고 죽음이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은사 26:19과 단 12:2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후에 이란의 사상의 도움으로 공식화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전 세대를 위해서도 신의 새로운 창조 행위로 죽음이 굴복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의인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며 의롭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떨어질 것이다(에스드라하 7:31이하). → 부활 Resurrection art. anastasis, 구약성경)의 교리는 자연히 논쟁의 주제로 남았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지지했으며 사두개인들은 반대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부활될 것인지 혹은 이방인들도 부활될 것인지, 의인만 부활될 것인지 또는 의롭지 못한 사람도 부활될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분했다(후자의 경우는 심판을 받기 위해).
(c) 죽음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견해가 이러한 부활 사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비관적이 될 수도 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고전 3:19이하).
(d) 비유적인 의미로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면이 또한 증가한다. 신 30:15에서 우리는 이미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에서 죽음에 대한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참조: 렘 21:8).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또는(에스겔서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때(겔 18:21이하., 겔 18:31이하)는 언제나 죽음이 발생한다. 여기서 죽음으로 간주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 관계의 파기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은 → 생명 Life으로 여겨진다.
(e) [편집자주] 욥 19:25 이하에 함축된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하여는 로울리의 저서(H. H. Rowley, Job, 1970, 172이하)를 참조하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내가 육체 밖에서(RSV, without my flesh; 난외주, from my flesh; 히브리어: 밉베사리[mibbesari]) 하나님을 보리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현세에서의 욥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지만 로울리(Rowley)는, 그 앞의 구절들에서 욥이 금세에서의 자기의 정당성 입증에 대해 희망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이 구절이 사후 변호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3. 헬레니즘 시대를 특징 지우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변하여 인간 중심적인 영역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이원론적 사상이 다소간에 유대교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a) 따라서 → 영혼 Soul은 '불멸'로 간주되었다(솔로몬의 지혜서 3:4; 4:1; 15:3). 부활의 사상이 완전히 배제되고 영원한 비육체적 존재가 사후에 즉시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경우(마카베오 사서 16:13; 17:12)를 제외하고, 영혼은 하늘의 처소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머무르게 된다는 사상이 존재하였다(에디오피아어 에녹서 102이하; 에스드라하 7:88이하).
(b) 헬라 철학이 미친 영향으로 인한 또 하나의 결과는, 유대인 순교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순교자들의 죽음이 영광스럽고(마카베오 사서 10:1) 덕스러운(마카베오 이서 6:31) 행위로서 찬양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c) 필로(Philo)는 육체를 영혼의, “약한 그리고 죽은 동료”로 묘사했으며 그래서 육체의 죽음, 즉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하는 것을 일종의 해방의 행동으로 보았다(Leg. All., 1, 107). 그는 헬라사상을 수용하여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사(死)를 경시하며 실제의 죽음을,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여 온갖 종류의 정욕과 악한 것들 밑에 영혼을 매장하는 상태로 간주한다(Leg. All. 1, 105이하).
(d) 요세푸스(Josephus)의 저서에, 유대 사령관 엘레아잘(Eleazar)이 마사다(Masada)의 요새에서 로마인들에게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을 설득한 장면이 나오는데 말하자면 이는 요세푸스가 엘레아잘(Eleazdr)로 하여금 통상적인 헬라적 사고방식을 구사하게 했다 하겠다. (p.3-424*) 명예롭게 살수 없다면 차라리 용감하게 죽어야 한다(War, 7, 341). 그렇게 훌륭하고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War, 7, 325이하)은 그러한 용기에 대한 경의를 뒤에 남기는 것이다(War, 7, 388).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죽는 자는 행운아로 여겨야 마땅하다(War, 7, 372). 더욱이 죽음은 영혼에게, 죽을 육체가 소유한 악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며-육체에 구속된 영혼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영혼을 본래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War, 7, 341이하).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War, 7, 340).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는 약 120회 정도 나온다.
복음서에서는 거의 대부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바울의 저술에서는 주로 인류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나토오(thanato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11회 나타나며 드네토스(thne:tos: 죽을 운명의 mortal)는 6회 나오는데 모두 바울의 저술에서 사용되었다.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죽다 die)는 신약성경에서 113회 사용된다(드네스코 thne:sko: 는 6회 사용). 공관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는 드물게 사용된다. 그러나 한편 바울의 저서에서, 이 단어는 바울 이전의 통상적인 신앙고백 문구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롬 5:8)이다. 쉰아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는 막 14:31; 고후 7:3; 딤후 2:11에 나온다. 마지막 예문에서만 이 단어가 기독론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는 3회 나온다. 고전 15:53 이하는 묵시적인 문맥 중 불멸을 “입는다 put on”라고 표현한다. 딤전 6:16에서 하나님만이 불멸을 소유한 유일한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1.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견해는 옛 유대의 견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교가 받은 헬레니즘적 영향은 거의 그 효과를 미치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견해가 유지되었다.드네토스(thne:tos: 죽을, 죽을 운명의 mortal)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마다 이 단어는 인간의 필멸성이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짐을 시사해 준다. 인간은 사망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마 4:16; 사 9:1 70인 역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불멸성을 가진 유일한 분(딤전 6:16)이신 반면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히 2:15). 유대교에서와 같이 죽음은 항상 개개인의 죽음으로 생각되며, 공동체의 존속적 생명을 언급함으로써 죽음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신약성경의 사상과 이질적인 것이다.
(a) 사실이 그렇다면 무엇이 죽음을 야기시키는가 라는 문제에 자연히 중요성이 부여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바울이 요약해 놓았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이다.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마귀(사탄 Satan)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로 간주된다(히 2:14). 그러나 물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지옥 속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마 10:28; 계 2:23).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이유에 대한 문제가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이 학문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음을 우리가 명백히 알게 된 것은 죽음과의 관련성에서이다. 그 문제는 답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음을 하나의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학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죽음의 보편성 속에서 인간 유죄의 보편성과 구속의 보편적 필요성이 명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이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경우 인간은 자기자신을 그의 생명의 근본에서 잘라냄으로써 죽음에 예속하게 된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죽음의 현상은 인간 평생의 객관적인 상태를 밝혀 준다. 창조된 것, 즉 인간이 통제하는 자연적인 것에 의해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진정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시켰으며 따라서 자기자신을 가치 없는 것에다 넘겨주었다. 죽음을 향하여 진행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자기생명의 근본상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안에서 죄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생명을 다스리는 힘이며 따라서 급기야는 하나의 현재적 실체이다.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죄 속에 있는 한 삶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p.3-425*) 이것은 죄인에게 다음과 같이 울부짖게 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죽은 dead(→ 네크로스 nekros, 눅 15:24; 눅 15:32)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도 동일한 측면에서이다. 4 복음서에서도 또한 죽음과 생명이 존재의 현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자기존재의 신적 갈림길이되시는 예수님께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요 5:24; 요 8:51; 요 11:25).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서자기자신을 단절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있는 사람이다(계 3:2).
(b) 인간의 유죄 상태와 필멸적 운명의 관계에 대하여 신약성경 기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숙고한 사람이 바울이다. 롬 1-4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구별 없이 죄를 지었으며 따라서 죽음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로 부름 받는다는 점을 여러 가지 논법으로 증명한 후 바울은 계속하여 롬 5:12-21에서 이 논제들을 → 아담 Adam-그리스도 예포론의 도움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래된 생명은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참조: 고전 15:21이하)라는 사실과 유사성을 지닌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으며 따라서 죄의 결과인 죽음이 단순히 우리 인간에게 유전되어 온 운명이라는 사상을 배격한다. 그는 죽음의 동적인 성격과 죽음이 개개인 자신들의 죄로 인한 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참조: G. Bornkamm, Aufsatze, I, 84이하).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술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승리인 구원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단지 인간 외부에서와 인간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항상 자기 자신의 행위(→ 일하다 Work)를 통하여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구원의 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이용할 때마다 죽음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 율법 Law, → 죄 Sin 그리고 죽음은 모두 동등한 차원에 놓여 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16). 그러므로 율법에 근거하여 생명을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현 실체가 된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이하).
만약 죽음이 인간의 죄의 역사적 결과로 간주된다면 인간의 죽음과 살아있는 다른 피조물들의 죽음의 “자연적” 연관성은, 인간이 아닌 생물들도 왜 똑같이 죽음에 예속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 당시 유대교의 사상과 같은 선에서(Gen. R. 12:5) “피조물”(→ 창조 Creation)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닌 인간의 죄의 결과로 허무한 것과 일시적인 것에 예속되었다고 대답한다. 피조물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롬 8:19-22). 따라서 바울은 자연계의 죽음까지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c) 우리가 이제까지 언급해 온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간의 유죄상태를 명백히 나타내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서 죽음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간을 노예화하는 한 힘으로 여겨진다(히 2:15), 그러므로 죽음은 때때로 의인적 형태로 나타난다(계 20:14). 따라서 죽음의 불가피성에 관한 지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또는 영웅적인 죽음의 행위를 통하여 죽음의 공포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신약성경에서는 배제된다. 후자의 방법의 결과 오히려 죄를 강화시켰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인간 노력의 모든 태도를 하나하나 명확히 정죄할 때까지도, 다시 말해 인간이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진술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기사의 핵심점이다(→ 십자가 Cross, art. stauros, 신약성경 2). 이 진술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 부활 Resurrection과 믿는 자들의 칭의 또는 새 → 생명 Life에 대한 진술들과 거의 항상 연관되어 나타난다.
(a)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 문구들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보이시고”(고전 15:3이하),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p. 3-426*)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라고 진술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죽음대로 죽으셨으며(빌 2:7이하; 히 2:1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초기의 신앙고백 문구가 지적해 주듯이 그는 실제로 죽었다(고전 15:3이하). 이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며(롬 5:6이하; 살전 5:10; 히 2:9이하; 막 10:45),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진술들에 의하여 여러 방면으로 강조된 가르침이다(예: 고후 5:14이하; 벧전 3:18). 그의 죽음은 율법(롬 7:4; 참조: 갈 2:21), 죄(고후 5:21; 골 1:22; → 화해 Reconciliation), 우리의 죽음(롬 5:9; 딤후 1:10; 히 2:14이하; 계 1:17이하)을 정복한다. 죽었다가 부활한 분이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오실 분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된 것은 이 승리를 명백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며, (고전 11:26; 고후 5:14) 또한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갈 2:21).
(b) 죽음에 대한 승리의 이 복음은 다른 많은 종류의 언어로 표현된다. 초창기에 널리 퍼졌던 하나의 개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 53에서 취한 개념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죄를 도말하는 화해의 희생제사로 본 것이다(→ 화해 Reconciliation, art. hilaskomai: 롬 3:25이하; 바울 이전의 상용문구; 고전 11:42이하; 바울 이전의 성찬식 용어; 참조: 엡 1:7; 벧전 1:18이하). 여기서 언약의 희생(막 14:24; 히 13:20)과 유월절 희생(고전 5:7)에 대한 구약의 사상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종의 대리 희생으로 보는(고후 5:21) 그와 관련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노예의 법에서 나타나는 개념인 속전(ransom)의 개념도 역시 빈번하게 나오지만 이것의 기독론적인 용법에서는 강력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구속 Redemption, art. lytron: 참조: 막 10:45; 갈 3:13; 벧후 2:1).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은 죽음을 당한 구속자가 음부로 내려간다는 개념인데 거기서 마귀를 이기고 사람들을 그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히 2:14이하; 계 1:17이하; 참조: 벧전 3:19이하; 참조: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19722, 378-88).
제사와 법률 분야(화해, 속전, 대리)에서 차용한 언어의 어려움은 차용어가 과거의 유죄(guilt)의 짐으로부터, 그리고 그러한 유죄로 인한 벌인 미래에 닥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만을 표현하는데 있다. 그것은, 현재가 죄나 → 의 Righteousness의 영역, 죽음이나 생명의 영역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c) 그러므로 바울의 저서에서는 제사와 법률 분야에서 끌어온 신학적인 표현뿐 아니라 신비종교들과 영지주의의 언어도 사용하는데 이러한 종교들에 의해 제공된 영역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생명에 가져오는 효과를 아주 명확히 표현시켜 주기 때문이다([편집자주] Schmithals는 다음 저서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다: Gnosticism in Corinth, 1971과 Paul and the Gnostics, 1972. E. Yamanchi, Pre-Christian Gnosticism, 1973에서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영지주의를 본질상 기독교 이후의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 배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참조: F. L. Cross, ed., The Jung Codex, 1955. U. Bianchic, ed., Origins of Gnosticism, 1967. 신비종교들에 대하여는 G. Wagner, Pauline Baptism and the Mystery Religions, 1967; → 침례 Baptism). 신비종교들의 언어는 특히 → 침례 Baptism의 의미와 관련하여 발견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롬 6:3이하).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찾을 기회의 영역이 되는 세상에 대하여(갈 6:14), 세상의 예속화 시키는 권세들에 대하여(골 2:20; → 율법 Law), 율법의 노예 상태에 대하여(롬 7:6), 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롬 6:6),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대하여(고후 5:14이하)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구속자와 구속 받은 자의 본질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는 영지주의의 언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후 4:10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참조: 골 1:24).
(d) 바울 및 바울 이전의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죽음의 세상에 예수님이(p. 3-427*) 오신(→ 오다 Come, art. erchomai) 전체 사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 십자가 Cross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로고스 Logos(→ 말씀 Word)의 성육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동시에 하나의 승귀로 볼 때 이것은 죽음을 이긴 보편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신적 증거다(요 12:33; 요 18:32).
(e) 그 시대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한 방법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일차적으로 하나의 전기적인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어 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선한 대의명분을 위한 고귀한 사람이나 순교자의 죽음, 또는 정치적인 반역자의 죽음이나 재판의 부정함을 인한 희생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구원역사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사건으로 보며 그렇게 선포된다(롬 6:10).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여러 진술들은 공통적으로 그 죽음을 “~을 대신한” 죽음으로 선포하고 있다(우리를 위하여, 롬 5:8; 고전 15:3;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막 10:45; 막 14:24, 병행구절 마 26:28; 히 9:28; 눅 10:15; “너희를 위하여” 고전 11:24, 참조: 눅 22:19이하). 여기서의 의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함으로써 죄의 권세를 깨뜨려 죽음을 초래하는 → 율법 Law의 권세를 벗기며 율법의 효력이 끝나게 하고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그 권능을 빼앗는다는 것을 선포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가 있는 장소, 다시 말하면 죽음에서 찾으려 하며 자신을 생명의 근본으로 내어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독선으로 인한 근본적 죄를 범하게 만드는 강요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은 무죄로 방면되어(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됨), 적절한 창조의 신분을 부여 받으며(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새 생명을 부여 받는다.
3.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미 사망(또는 율법이나 죄)이 패배했다는 점과 이에 따라 생명의 약속이 현재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영지주의와 신비종교들로부터 취한 말들이 특별히 사용하였다.
(a) 예를 들어 바울의 저서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들을 비교하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이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19이하).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 의문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수치”를 극복한 경우, 즉 인간이 그의 “옛” 자아, 즉 “옛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생명을 찾으려는 욕망이나 상상에 의한 의무감을 죽음에다 내어준 경우에는 곧 그리스도를 바로 여기에서 지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경험한다(참조: 고전 1:23이하). 참된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생명이며 자기자신이 자주적으로 성취하려는 의무감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b) 요한이 특별히 강조한 말씀들에서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요일 3:14). 자기자신을 계속 의롭게 하고자 하는(죽음을 가져오는) 의무적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죽음, 바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자신을 조건 없이 자기이웃에게 내어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c) 공관복음서에서 죽음이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은 특히 이적을 담고 있는 가시들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죽은 자의 소생을 수록한 기사들에 의하여 예증되고 있다.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죽음의(p. 3-428*) 운명으로부터의 구원으로, 그리고 참된 생명의 시작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d) 그리스도인의 경우 여기에서 지금 죽음이 패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마침내 죽음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결과다. 그 이유는 사도의 가르침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죄의 권세가 파괴되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구원받고 그리하여 이미 그가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육체의 죽음이 인간을 계속 지배한다는 사실은 죄와 죽음 사이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신약사상의 초기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구별되지는 않았지만 죽음은 그 어떤 의미에서든 죄에 그 기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의 실태에 대한 고찰은 결과적으로 차이점이 주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자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지만(“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롬 5:13) 그래도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든 죽음을 예상하고 있을 동안에는이 현상을 간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여러 가지 답이 주어졌다.
(a) 바울로서는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현상이 심판에 관하여 안전하다라는 생각을 경계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며 “이미 지금 now already”이라든가“아직 아니 not yet”라는 변증법을 전개한다. “최후의 적”인 죽음이 최후 마지막에 패배하기 위하여 남아 있다면(고전 15:26) 인간에게 아직 위험은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뜻대로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하여 완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원에 대한 말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과 더불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성령(→ 영 Spirit)을 받았지만 자기 육체의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다리고 있다(롬 8:23; 고전 15:53). 죽음을 극복하는 미래에 있을 이 승리에 대한 기대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신앙을 확고하게 형성하는데, 이 부활은 바울에 의하면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전 15:12이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이 기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롬 4:17)에 대한 소망이 믿음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후 5:1-10; 롬 5:1-5). 신자라도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이하)는 확신은 다음과 같은 신자의 승리의 노래와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이 사상은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전개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죽는 것으로 간주하는 법을 배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또한 구원과 영생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난과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이다(고후 4:11이하; 빌 1:20; 롬 8:36이하).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죽음을 단순히 죽을 육체를 버리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누가는 이 사상을 독특한 방법으로 전개시켜 예수님의 죽음을 순교의 한 예로서 묘사하며, 스데반의 순교를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았다는 관점에서 묘사한다(행 7:54이하). 그가 물론 완전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무시하고 그런 사상을 전개하지만 여기서 그의 목적은 그 시대의 순교자들에게 그들이 겪어야만 할 죽음을 보는 긍정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려는 것이다.
(b) 요한은 신앙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광범위한 신학적 고찰 대상으로는 삼지 않는다. 그의 저서에서는 구원의 현재시제가 매우 철저하게 강조된 나머지 심판과 부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와 죽음 사이의 관련성까지도 함께 사라진다(요 5:28이하는 예외). 믿는 자들은 심판을 겪었으며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0:28). 그러므로 요 14:2 이하에서 우리는, 귀환 하시는 아들에 의해 아버지 집의 “거할 곳들”로 영접된다는 말씀을 읽어볼 수 있다. (p. 3-429*)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신자들의 죽음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c) 신약성경의 후기 저술들과 공관복음서에서까지, 우리가 요한의 저술들과 바울의 초기서신들에서 본 것처럼, 구원과 심판, 생명과 사망의 변증법에 대한 동일하고 강력한 관심을 찾아볼 수 없다(참조: 딤후 4:7이하; 딛 3:7이하; 벧후 3:11이하). 구원의 현재적 경험에 대한 강조는 후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강력하고도 도덕적인 해석으로 점진적으로 대체되며 결과적으로 육체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에 은혜를 얻는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 2:11). 이와 같이 믿는 자도 심판에 임할 것이며 또한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를 것이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정죄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사망의 개념이 왜 생기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이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계 20:13이하).
(d) 동시에 또 다른 전승들은 공히,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하며 따라서 모든 생명의 출처이자 근원이 되시는 분께로 인도한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러한 사실을 넘어설 수 없음을 주장함과 동시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 이하의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면 안 된다고 역설함으로써, 특별히 기독교적 사망관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이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이하; 참조: 빌 1:20; 살전 4:13이하; 요 12:24-26; 계 14:13). W. Schmithals
kaqeuvdw, 2518
kaqeuvdw, 2518(katheudo:, 카듀도). 잠자다 sleep.
koimavw, 2837(koimaomai, 코이마오마이).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
u{pno", 5258(hypnos, 휘프노스). 잠 sleep.
고전 헬라어문헌
1. 카듀도(katheudo:)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오직 '잠자다' sleep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반면 케이마이(keimai: 눕다 to lie)에서 파생한 동사 코이마오(koimao:)는 그 기본 의미로서 '(스스로를) 잠재우다', '잠자다' to lull(oneself), '잠들다' to sink into sleep를 뜻한다(Homer, IL., 11, 241). 특히 중간태나 수동태 형에서는 이 단어가 '자연스러운 잠' natural sleep이나, (설명 어구와 함께 또는 설명 어구 없이) '죽음' dying에 사용될 수 있다. 이 단어가 성적인 의미, 즉 '동침하다' to sleep together with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2. 휘프노스(hypnos; 인도-게르만어 supnos; 라틴어 sopor)는 호머 이후 '자연스럽게 오는 잠' natural sleep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데 이러한 잠은 사람을 상쾌하게 하거나 잠에 취하게 하여 그날의 무거운 짐을 잊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 우리는 활동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육체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철학자들이나 종교사상가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어떤 추론을 끌어내게 만들었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 연루되어 있는 상태인 깨어있는 의식상태와 동일시되는 것이므로 잠은 불가피하게 쓸모 없는 것으로, 방해스러운 것으로, 품위를 떨어드리는 것으로, 동물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일찍이 Heraclitus의 저술에서, 그리고 특히 Plato의 저술에서, 예: Plato, Republic, 9, 571c; 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95). 잠과 죽음 사이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신화에서 휘프노스(Hypnos)가 신 다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Homer, Ⅱ., 16, 671이하). 초기의 의술에서는 잠자는 것을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죽지 않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중간적, 물리적 단계라고 생각했다(참조: Aristotle, De somno et vigilia, p 453b 11이하). (p. 3-430*) 그러나 이 표현이 죽음을 뜻하는 완곡어법으로 사용한 것은 B. C. 2세기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후 1세기와 2세기 경에는 이러한 용법이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참조: E. Peek가 수집한 명문들, Griechische Grabgedichte, 1960). 이것은 그 용법이 헬레니즘 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
1. (a) 70인 역본에서 카듀도(katheudo:, 36회)는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 눕다 to lie down)를 번역하는데 사용된다(예: 삼상 3:2이하).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오는 잠'을 가리키며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이 명사 휘프노스(hypnos)에도적용된다. 휘프노스(hypnos)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셰나(shena': 잠자다 sleep)의 역어로 쓰이지만 렘 51:39(휘프논 아이오니온[hypnon aio:nion]: 영원한 잠, 죽음 eternal sleep)과 욥 14:12은 예외이다. 욥 14:12도 문맥상(“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이 명사형과 명사형에서 파생한 동사 휘프노오(hypnoo:)가 죽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시 13:3, 휘프노소 에이스 다나톤[hypno:so: eis thanaton: 사망의 잠을 자다 to fall asleep into death]. 동사 휘프노오(hypnoo:: 잠자다 sleep)는 약 80회 등장한다.
(b)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그 양상이 다르다(약 150회. 이것 역시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의 역어). 능동태 형은 오직 창 24:11과 왕상 17: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눕다' to lay down, 또는 '눕히다' make to lie down를 의미한다. 그 외에는 이 단어를 중간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눕다, 자다 lie down, 진을 치다 encamp, 눕다 lie). 그러므로 이 단어는 '잠자다' sleep를 의미하게 된다(예: 삼상 3:9, 카듀도[katheudo:]처럼). 특히 모세 5경에서는(코이마오마이 메타[koimaomai meta], 예: 창 19:32이하) 이 단어가 '함께 잠을 자다' sleep together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의 후기 기사들, 특히 역사적인 기사에 있어서 이 단어는 명예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죽다' to die라는 뜻을 획득하였다(예: 에코이메데 메타 톤 파테론 아우투[ekoime:the: meta to:n patero:n autou: 그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왕하, 대하에서 36회의 용례. 예: 왕하 14:16; 왕하 14:22; 왕하 14:29; 왕하 15:7; 왕하 15:22; 왕하 15:38; 대하 26:2; 대하 26:23). 이리하여 이 단어는 또한 아무런 설명구 없이 이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겔 32:19이하; 욥 14:12;'사 43:17; 사 50:11). 초기 문헌에서 이 단어는 이런의미로 간혹 사용되고 있다(예: 창 47:3; 삿 5:27).
2.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사카브(shakab)가 유대 랍비들에 의해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카듀도(katheudo:)와 휘프노스(hypnos)를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식' knowledge이나 '근신' watchfulness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육체적인 의미의 잠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일찍이 잇사갈의 유훈(Test. Iss) 9:9에서 이미 이 개념이 휘프노스 아이오니오스(hypnos aio:nios: 영원한 잠 eternal sleep, 다시 말하자면 죽음의 잠 sleepof death)이라는 형태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이 잠에서부터 고인이 깨어날 것이라는 저의가 함축되어 있다(참조: Test. Jud. 25:4, 엑쉬프니조[exhypnizo:]). 소위 중간 상태라고 불리우는 죽음(→ 영혼 Soul 구약성경)의 잠이라는 이 개념은 특히 유대 묵시문헌에서 더욱 발달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예: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91:10; 92:3)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약성경이 주는 가르침의 배경을 이룬다.
신약성경
1. 명사 휘프노스(hypnos: 잠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5회)와 동사 카듀도(katheudo:: 잠자다 to sleep)는 항상 문자 그대로 잠자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예: 마 1:24; 눅 9:32; 요 11:13). 그러나 겟세마네 현장(마 26:40; 막 14:37; 눅 22:45)과 살전 5:6에서 잠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근신의 결핍을 나타낸다. 한편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중간태로만 사용)는 18회의 용례 중 15회가 '죽다' die를 의미한다. 오직 마 28:13; 눅 22:45과 행 12:6에서만 이 단어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잠자다' to sleep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p. 3-431*) 비유적인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바울이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잠자고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죽은 사람을 묘사하기 위하여 분사 형태를 사용한다. 살전 4:13-15과 다시 고전 15:18; 고전 15:20에서 이 분사형들이, 예수님에 의한 죽은 자의 → 부활 Resurrection 또는 죽은 자의 다시 깨어남에 관한 문장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문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이와 동일한 것이 마 27:52이다. 잠과 죽음 사이에 공존하는 의미가 일찍이 호머(Homer)에게서도 이미 증명되며 70인 역본에서도 증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관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새 생명에로 부름 받을 사람과 이미 “잠든” 즉 죽은 사람을 동일시하려는 목적에 잘 부합된다.
고전 7:39; 고전 15:6; 고전 15:51에 나오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죽다' to die의 정확한 상당어구로 사용되었다(참조: 행 7:60; 행 13:36; 벧후 3:4의 “조상”). 요한은 나사로의 부활기사인 요 11:11-14에서 제자들의 그릇된 이해를 보여주기 위하여 순전히 의도적으로 이 동사에 대한 고대의애매모호성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은 치유를 가져올 일종의 잠을 예수님이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도 아마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적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에 주의를 집중시키려 한 것이다. 이 권세를 이긴 자에게는 다나토스(thanatos)가 휘프노스(hypnos)에 지나지 않는다.
2. 살전 5:10에서만이 카듀도(katheudo:)가 죽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 9:24과 그 병행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아페다넨(apethanen: 그녀가 죽었다)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아이의 상태가 예수님께는 최후의 되불러올 수 없는 상태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이다. L. Coenen
nekrov", 3498
nekrov", 3498(nekros, 네크로스). 죽은 dead, 죽은 사람 dead person.
nekrovw, 3499(nekroo:, 네크로오). 죽이다 put to death.
nevkrwsi", 3500(nekro:sis, 네크로시스). 죽음 death, 죽은 상태 deadness.
고전 헬라어문헌
1. '고생' trouble, '불운' misfortune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 어근 네크-(nek-)(참조: 라틴어. nex: 살인 murder, 죽음 death; neco: 죽이다 to kill; noceo: 해하다 to harm)에서부터 시어의 남성형 네퀴스(nekys: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와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네크로스(nekros)가 파생했다. 명사로서 이 단어는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를 의미한다(예: Homer, Ⅱ., 6, 71). 핀다르(Pindar) 이후부터 이 단어는 형용사(죽은 dead)로 쓰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이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의 죽은 몸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으며(Pindar, Fragments, 203) 더 이상 프쉬케(→ 영혼 Soul)에 의해 생명이 주어질 수 없는 것 즉 단순한 물질에 불과함을 의미한다(Plotinus, 4, 7, 9).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to kill, 사형에 처하다 put to death, 종종 수동태로 사용되어 죽다 to die)와 죽어가는 과정이나 죽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는 의학 분야에서 유래한 헬레니즘 시대의 형태들이다. 이 단어들은 병으로 인한 신체 일부분의 탈저(mortification)를 가리킨다(Galen, 11, 265; 18(1), 156). 나중에 이 용어들은 자연계의 '얼어붙은 것' 나무(Corpus Medicorum Graecorum, 1908이하 v, 9, 1p 31, 5)나 땅(Plotinus, 5, 1, 2)을 가리킬 때,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마취의 효과(Corpus Medicorum Graecorum, v, 9, 1p 115, 11)에 까지 사용되었다.
2. 고전 헬라어 문헌 전체가 네크로스(nekros)를 문자상이 의미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일면 스토아 학파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특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형용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3개의 기준을 분류한다. 즉, (a) 네크로스(nekros)라는 것은 프쉬케(psyche:: 영혼 soul)나 누스(nous: → 마음 mind), 또는 영(spirit), 즉 의식의 세계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참조: M. Ant., 12, 3, 2). (b) 또한 네크로스(nekros)는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소마(so:ma: → 몸 body)이다. (p. 3-432*) 누스(nous)는 그 자체와 함께 이 소마를 좌지우지해야 한다. 소마는 조아(zo:a: 동물계 animal world; → 생명 Life)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일부분이며,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3, 3; 2, 19, 27; M. Ant., 9, 24). (c) 마지막으로 네크로스(nekros)는, 누스(nous)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기자신의 판단기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거짓 교사들이나 거짓 철학자 등이다(예: Epictetus, Dissertationes, 1, 9, 19; 3, 23, 28). 위의 세 정의는 모두,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의식(누스[nous])만이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누스(nous)의 지배하에 있지 않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동사와 명사 형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테드네코스(tethne:ko:s: 죽은 dead)와 같은 분사와 더불어 네크로스(nekros)는 약 60회 정도 나오며 대부분 명사이지만 형용사로도 사용된다. 지혜문헌, 토빗서(Tob), 유딧서(Jud.), 마카베오서(Macc)에 나오는 28개의 예들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상당어구가 없다. 그렇지만 그 외의 곳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분사인 메트(met: 이미 죽은 사람 one who has died, 즉 죽은 자 a dead person)를 번역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겔 9:7; 겔 11:6-7에서 이 단어로 할랄(chalal: 꿰뚫린 pierced, 살해된 slain)을 번역하고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시체를 의미하는 기타 단어들의 역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을 여전히 땅 위에서 볼 수 있든지 또는 이미 죽은 자의 영역에 장사했든지 간에(신 18:11)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률적으로 사용된다(예: 아브라함의 아내, 창 23:3이하; 소마타 네크라[so:mata nekra: 죽은 몸들 dead bodies, 시체들 corpses], 왕하 19:35). 죽은 사람은 장사된다(토빗. 2:8; 12:12). 만약 그들이 노출된 상태로 내버려져 있어서 짐승들에게 먹힌다면(렘 7:33; 렘 19:7; 신 28:26) 이것은 무시무시한 벌로 간주된다. 민 19:16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가 특별한 어감을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이 단어가 단지 살해 당한 것에 불과한 자와는 구별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이며(테드네코스[tethne:ko:s]의 경우와 같이), 또한 이 단어가 해골과 구별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네크로스(nekros)는 신원은 알아볼 수 있지만 생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본 장의 모세율법은 죽음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자 하나님의 영역이기도 한 생명의 영역 사이에 철저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죽은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깨끗하지 못한 자,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와 분리된 자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보지 못한다(전 9:5; 사 26:14; 참조: 시 88:4이하). 하나님은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하시지 않는다(시 88:10).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한다(시 115:17). 그들에게는 희망에 없으며(시 143:3; Wis. 13:10)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 9:4). 이 모든 것은 주변세계에서 아주 일반적이었던 죽은 사람에 대한 숭배나 죽은 사람들의 신탁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종교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에야 비로소 부활의 소망이 시작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의인의 고난에 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망이 처음에는 죽음까지도 자신을 여호와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참조: 사 26:19; 집회서 48:5; 참조: 겔 37:9)는 확신의 형태를 취한다. 한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들에서만은 변화된 의미에서 우상들이 “죽은” 것으로 특징지워진다(솔로몬의 지혜서 15:5).
히브리어에서 메트(met)와 네페쉬(nepesh: 영혼 soul, 생명 life)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왜냐하면 네페쉬(nepesh)는 전인(whole man), 즉 그의 전 존재를 의미하며, 죽는다는 것은 인간 전체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0인 역본에서는 네크로스(nekros)가 프쉬케(psyche:: 영혼 soul)와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시적인 육체와 대조되는 영원한 → 영혼 Soul에 관한 헬라의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교리가 나중에 침투될 수 있는 길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2. 쿰란(Qumran)의 히브리어 문헌은 구약성경의 용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랍비문헌에서는 종종 비유적인 용법이 발견된다. (p. 3-433*) 불신앙인을 죽은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SB I 489, 마 8:22에 관한). 유대인의 18기도문(Eighteen Benedictions)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who makes the dead(함메팀[hammetim]) to live”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로(Philo)는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인 용법을 채택했으며 이와 아울러 영적인 것 그리고 지적인 것은 생명이며 감각에 예속한 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교리를 채용하였다.
신약성경
1. 신약성경에서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 죽은 사람 a dead person)가 명사와 형용사로서 130회 나온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로마서, 고전 15장에서 다른 곳보다 다소 더 많이 나오며 요한의 서신들과 데살로니가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디모데후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kill)는 롬 4:19; 골 3:5; 히 11:12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 죽음 death, 죽임 putting to death, 죽은 상태 deadness)는 롬 4:19과 고후 4:10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롬 4:19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끝났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헬레니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참조: 히 11:12과 성경 외의 문헌들). 고후 4:10에서 사도가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고 말한 네크로시스 투 예수(nekro:sis tou Ie:sou: “예수 죽인 것” the dying of Jesus)는 죽음의 특성인 고통과 힘의 상실이라는 증상들을 언급한 말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생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성례식을 통해?). 반면 골 3:5에서는 아마 금욕주의를 지지하는 반대자들이 사용한 언어를 채택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외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멜레(mele:: 지체들 members)를 육체와 그 지체들을 지배하는 욕망들로서 해석하여 이를 억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네크로스(nekros)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이 통상적인 헬라의 용법, 그리고 구약성경의 용법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상태가 더 이상 인간의 최후상태는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다. 75군데에서 네크로스(nekros)는 에게이로(egeiro:: 깨다, 눈을 뜨게 하다 to awaken), 아나스타시스(anastasis: → 부활 Resurrection)및, 기타 동족어들의 목적어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결합 형태가 보이는데 예를 들면 조오포이에오(zo:opoieo:: 살아나게 하다 to make alive; → 생명 life; 예: 롬 4:17; 골 2:13)나 프로토토코스 에크(prototokos e:k: → ~에서 먼저 난(자) firstborn of; 예: 골 1:18; 계 1:5) 등과 결합되기도 한다.
(a) 용어들의 이런 연관성은 이 용어들의 기초가 되는 일련의 교리를 표현한다. 초기 바울 서신들(살전 1:10)에서부터 복음서들에 이르기까지(예: 마 27:64; 마 28:7; 요 20:9; 요 21:14) 그리고 나아가서는 엡 1:20; 딤후2:8, 그리고 계 1:5과 같은 후기 본문들에까지, 기독교 → 선포 Proclamation의 토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특히 사도행전의 초기장들을 참조하라; 예: 3:15; 4:10; 10:40이하; 13:30, 34)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처음 난 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지금 살아 있다(계 2:8)는 사실에 관한 증거에 놓여 있다. 이 증거는 고전 15:3 이하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고전 15:12이하)이다.
(b)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다(위의 구약성경 1을 참조하라). 이런 한계선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메타 톤 네크론[meta to:n nekro:n]) 찾느냐”(눅 24:5)라는 누가의 질문의 배경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씀이 막 12:27(병행구절 마 22:32; 눅 20:38)에서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경우는 보편적 →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기대와 증거의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점에서 변화된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퀴리유세[kyrieuse:])이다. 또는 누가가 표현한 대로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행 10:42; 참조: 벧전 4:5)이시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거나 그의 능력의(p. 3-434*) 범위 밖에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관한 복음서들의 기사(마 9:23이하., 병행구 눅 7:11이하., 특히 15절; 요 11장; 요 12:1; 요 12:9)는 이 주장을 생생하게 지지하며, 예언의 약속을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일들의 배경으로(마 11:5, 병행구절; 눅 7:22) 주장한다. 여기서는 사 35:5이하와 사 61:1 이하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nekroi egeirontai: 죽은 자가 살아난다 the dead are raised up)의 첨가로 확대되어 있다. 더욱이 죽음의 정복이 그리스도-사건(Christ-event)의 핵심적인 요소로 생각되기 때문에, 마 10:8(참조: 마 16:17이하)에서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약속(병자가 회복될 것이며 → 귀신 demon이 쫓겨날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이 적용되며 또 바울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그러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행 20:9-12)는 것도 당연하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다(롬 4:17; 롬 4:24; 특히 고전 15:12이하; 막 12:25이하. 유사구절; 행 23:6; 요 5:21; 요 5:25). 일반적 부활은 이미 유대인의 대망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일반적 부활에 관하여는 또한 침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참조, 막 6:14 병행구). 일반적부활의 우선권이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에게 주어진다(고전 15:23; 살전 4:16; 계 14:13).
3. 네크로스(nekros)가 시체라는 문자적 의미로 쓰인 이런 문맥과는 다르게 쓰인 곳이 몇 군데 있다. 계 11:18; 계 20:5; 계 20:12 이하는 최후 → 심판 Judgment 때의 죽은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 8:22과 병행구절 눅 9:60에서는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나란히 놓고 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름을 거절하는 자를 … 죽은 자와 같은 수준”에 둔 것이다”(R. Bultmann, TDNT Ⅳ 893).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 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막 9:26(간질병을 앓는 소년의 상태)와 마 28:4(수직하던 자들의 상태)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는 호스(ho:s: 와 같은 like, ~와유사한 in a simile)와 함께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옛 문자적 의미는 행 5:10(삽비라의 경우)에만 나온다.
4. (a) 스토아 학파의 저자들이 사용한 비유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탕자의 비유에서 누가는 한 아들을 “죽은” 아들이라고 불렀는데(눅 15:24; 눅 15:32) 이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탕자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떠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롬 6:11; 롬 6:13에서 침례의 교리에 관하여 성례적 용어로 이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네크루스 멘 테 하마르티아(nekrous men te: hamartia: 죄에 대하여 죽은 [자] dead to sin)로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아마 롬 8:10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곳의 어법이 이원론적인듯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소마(so:ma: 몸 body)의 무익함에 대한 경멸적인 선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 영 Spirit과 혼(→ 영혼 Soul)까지도 바울에게는 사륵스(sarx: 육체 flesh)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구절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심판에, 따라서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이 점은 엡 2:1; 엡 2:5 그리고 골 2:13에 의해서도 확실히 볼 수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네크로스(nekros)의 상태가범죄(파라프토마신[parapto:masin]; → 죄 Sin)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본다.
(b) 비유적인 용법의 전형적인 예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진보한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 6:1; 히 9:14에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 → 일하다 Work)
즉 그리스도 없는 사람의 행위로 인한 의(works-righteousness)가 네크로스(nekros)로 묘사된다.
약 2:17-26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약 피스티스(pistis: → 믿음 Faith)가 생활 속에서 외적인 증거를 낳지 못한다면 이러한 피스티스도 역시 죽은 것으로 특징지운다.
여기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를 다시 사용하였지만 이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죽음의 정복에 대한 믿음은, 죽음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까지도 고유하고 영구한 위치를 전혀 허락해 주지 않는다. - L. Coenen. (p.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