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타 투 데우 알라(도리어) 타 톤 안드로폰

하나님의 일(things of God)
사람의 일(things of Men)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의외로 장차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고 이에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며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일’에 눈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를 보면 바로 앞에 벳새다의 맹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엔 맹인거지 바디메오를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예언, 제자들의 오해와 무관심,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 등이 나옵니다.
맹인을 고치는 이야기가 앞과 뒤에 나오고 그 가운데 위의 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예수님께 사람의 일을 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생각하고 구했던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이익이나 지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예고를 듣자 항변했다고 합니다.
항변의 원어 뜻은 ‘꾸짖으면서 말리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얼마나 대우받고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며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나 요한과 다른 열 제자도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나의 자리가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제자 중에 으뜸 된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사단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을 꾀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로 아담과 하와를 꾀었습니다.
가인은 자신보다 더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 또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은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견딜 수 없어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하기보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불러 주심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누가 봐도 저 자리는 내가 앉아야 할 자리인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가 바로 내가 해야 할 원래의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해서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리 때문에 마음 흔들려 하지 마시고 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데도 뭔가 현실에서 주어지는 게 없는 것 같고, 기대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예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때,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히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성인들은 천주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이여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 라고 하든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의 공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행위입니다. 직업에 따라 병의 종류에 따라 간구하는 성인들이 각각 있는데 예를 들자면 불임 여성은 “성 안토니” 관절염은 “성 야고보” 두통은 “성 데니스” 눈병은 “성 루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나라에 따라 2000-4000개의 성상(성인들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국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이교도들이 신들의 왕인 쥬피터(jupiter)와 그의 아내인 쥬노(juno)와 그 외의 다른 신들을 약간의 차등을 가지고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3: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둑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마지막 단원에 중세시대의 유골 도둑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의 유물이나 유골 등을 성유물이라 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신통력이 있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어 숭배하였습니다. 성물 숭배, 성인 숭배 사상입니다. 성인숭배 사상이란 이미 죽은 특정 인물을 중보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준다는 사상입니다. 유명한 성유물을 안치하고 있는 수도원은 순례자가 쇄도하고 순례자의 수만큼 헌금이 쌓이게 되었고 존귀한 유골이 있던 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저절로 영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원하거나 수도원을 부흥시키려면 유명한 성자의 유골을 모아 두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험한 유골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가 된 수도사도 생겼고, 전문적인 성유물 산업이 생겨나 성유물이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름 없던 유골도 오히려 도둑맞음으로 더 가치가 있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성유물을 위해 살아 있는 성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의 집성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가 성인이 될 것으로 예상을 했다고 합니다. 1274년 그가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큰 가마에 끓여서 분해하고 성유물로 분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1000년경, 성 롬알도스는 움브리아 산중에서 고행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덕행을 사모하는 마을 주민들이 그의 성유물을 다른 마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손쉽게 성유물로 만들어 버리자며 덮쳤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인의 유골이나 그의 유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성유물 유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사 중에는 성유물만 전문적으로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오늘 성경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된 노를 저으며 비린내 나는 고기와 일평생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고된 노를 젓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로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관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평생 갈릴리를 떠나지 못할 사람이 예수님이 다니는 곳 어이든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출세한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엄청난 칭찬의 소리와 대단한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면 적어도 좌의정이나 우의정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잡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여유롭게 살만한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 고난을 받으실 것, 죽임을 당할 것, 제 3일에 부활하실 것 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받고 버림바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반드시 버림받으시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하는 메시아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자신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죽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서 대접받고,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고,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다닌 것이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 건축을 잘하고 준공을 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강대상 앞 커튼을 하는데 장로님 마음대로 빨간색을 해 놓았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배경 커튼은 방송화면이기 때문에 파란색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장로님은 자기 고집대로 해 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이 야단을 치자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사람의 일, 자기 일을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을 듣자 예수님의 뜻을 막으려고 책망조로 훈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자신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조종자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더 의롭고 더 지혜로운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부 주제에 칭찬해 주니까 권위를 주니까 마치 자신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강도에게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 사역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게 때문에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받지 말고 죽지 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때 어디로 물러가라고 합니까? 내 뒤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제 신분을 알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지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생각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척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늘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과 사람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1.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선택하며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역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나누어질 때 “이 때로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점을 통해 마태복음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4장 16절까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 언약을 이루실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1:23),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1:21),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왕’(2:2;3:2,3)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2부는 4:17-16:20에서는 이 왕께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가르치며, 이적을 통해 그 나라를 보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5:1-7:29에서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8:1-10:42에서는 이적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11:1-16:20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새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왕(16:21-28:20)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수난과 죽음의 사역, 그리고 이어지는 부활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히9:28) 영원한 효력이 있는(히10:12) 제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바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런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3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17장 22-23절을 보세요. 20장 17-19절을 보세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16:22) 제자들은 매우 근심합니다(마17:23).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은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누가 높느냐고 다투고 있습니다(마20:20-)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일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구속사를 완성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철저히 이 구속사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2:15)”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23)”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1)”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5)”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56)”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9)”

2. 우리는 예수님처럼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확하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는 인기 몰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아 성취가 아닙니다. 각기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예수님을 좇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압니다. 그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 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첫째,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분명한 약속이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둘째,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한 성도 어느 날 없어집니다. 로마의 영광도 바벨론의 영광도 애굽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셋째,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니까 하루에 남자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중 어느 길을 택합니까? 멋진 베드로 의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두 길 중, 이 선택이 우리의 평생 선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16절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그 다음 내용들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서 가르치시니 라는 말은 이제야 가르치실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권을 가지고 영광과 존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과 죽으심을 받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간하다는 말은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간함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에게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베드로의 노력이 예수님께는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사단의 계략이라고 여기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합니다. 베드로의 말의 의미 속에 무엇이 사단적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경계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는 말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선하신데 어떻게 그런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나겠는가? 그렇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생각은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 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호의에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이 증명되며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많은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그리고 왜 죽으셔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가 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죄인을 대신하여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그리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분이 그리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이 아닌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방법과 뜻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내용 가운데 고난과 죽음은 분명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에 국한 된 것이기에 우리가 본받거나 따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것이 예수님께로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이나 방식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방식이며 방법임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가 따르며 순종해야 하며 삶의 원리와 자세로 삼아야 할 방식이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즉 신자라고 불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그 신자됨과 제자됨이 증명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아 사람의 방식과 방법을 쫓습니다. 그래서 교회됨을 성도 수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세속주의가 얼마나 교회에 가득 찼는가 하면 대부분이 교회의 크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넘어지게 함은 교회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증명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에 나를 위한 욕구나 주장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부인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영광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잘됨으로 증명하며 똑똑함으로 증명하며 남들 위에 있음으로 증명하며 무시당하지 않음으로 증명하라고 합니다. 사단을 따르는 자는 결코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어 냅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주장하며 자신이 옳다고 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을 교묘하게 바꾸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함으로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로 스스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꿰임에 빠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욱 우리의 무능함과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식하여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며 의지하며 의존함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아무리 비유라고 하더라도 모욕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어떤 사람을 책망한 일은 드믄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가 일부러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책망하신 이유를 알려면 이 말씀에 앞서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봉에 섰던 이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될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거된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이어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첫 구절인 마 16: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반론을 펼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은 ‘하나님이 당신께 자비를!’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안타까운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단 예수님께서 가야 할 인류 구원의 길을 말렸다는 게 베드로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고난, 십자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부정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까지 부정한 것처럼 묘사된 본문 이야기는 이상해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저 말씀을 들었다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리를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얻는다는 암시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삼일에...’라는 표현은 당시 이런 의미의 관용어였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여전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걸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 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부활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셨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부활이 전제된 것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항변한 것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수님에게 나쁜 것이니까 제자로서 말리는 게 당연했고, 부활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베드로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왤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즉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예고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위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조짐이 이미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유랑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거리가 먼 갈릴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유롭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회당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회당 책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 정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비판적인 사제들은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나 법조계도 비슷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검사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좀더 심해지면 퇴출당합니다. 이게 권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에서 볼 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회당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렸습니다. 때로는 수천 명씩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수록 유대교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 26:1-5절에 따르면 당시 최고 종교 권력자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치명적인 위기를 예수님이 왜 눈치 채지 못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제 가부간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다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갈릴리로 피했다가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략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싸움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라서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 영국과 싸워 대다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간디가 일제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국제 여론에 신경이라도 쓰는 정권이지만 당시 일본은 깡패 국가나 마찬가지여서 단식으로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인지, 정면충돌을 감행할 것인지, 우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걸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알렸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일은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나름으로 노후 설계를 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시 베드로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말렸을 겁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종교권력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 멋진 수도원을 짓고 책도 쓰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상대할 정도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한 판단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경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자동응답처럼 답을 얻을 수 있는 거도 아닙니다. 신학공부가 깊어져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도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 7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냥 갈릴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게 될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십시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베드로의 언행은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즉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니,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왜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베드로를 책망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 16: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무조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이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자체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애와 난치병 자체는 일상을 파괴합니다. 가난에 찌들면 삶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학적으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일상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고, 건강도 좋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생의 실패를 무조건 저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본문은 고난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자기 자신이 성취해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정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즉 주님께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즉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가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고 있어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서 삶의 온갖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와 하나 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 믿음, 그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본문을 볼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간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여기 ‘간하여’는 원어적으로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섭리 가운데 작정된 대로 행하시는데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몰라도 한참 모르고, 영적인 생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와 직분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그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책망 받게 된 원인

얼핏 생각하면 베드로의 말은 옳은 말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사단’이라고까지 몰아붙이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소위 ‘진심’이나 ‘진정’이라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육의 문제, 땅의 요소이지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성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베드로와 같은 고백도 못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예수님은 더하여 베드로의 고백까지도 불합격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심이나 진정이라고 하는 연약하고 감정적인 부분은 사단이 노리는 가장 교묘한 틈이며, 동시에 성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통로로 이용당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인간적인 진심을 빌미삼아 틈타려는 배후의 어둠까지 함께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진심과 진정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거짓 것들은 자동으로 따라 나갑니다. 인간의 진정으로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2:10-14). 신앙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영의 일과 육신의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롬 8: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합당한가, 사람의 생각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사 55:8-9). 마 22:15-22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세금 문제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먼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 편을 들면 안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각을 몰랐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렸다면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책망을 받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5-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 3:1-2). 자기 식대로 예배드리고 자기 식대로 기도하고 자기 식대로 봉사하며 직분 감당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셨습니다(히 2:17). 시간이 없다, 바쁘다 하면서 자기 사정을 핑계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손해보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속한 일’(히 5:1)에 충성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마 16:24).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만이 주관자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갈 2:20). 복 있는 사람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순종하는 가운데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시 1:1-3).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충성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손해보고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해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8:29).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받은 말씀도 놓치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 온 어리석은 모든 시간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시편46, 이사야18-24, 마가복음7-8, 시편150


사람은 죽기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잘 살기위해서 산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은 잘 죽기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셨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말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고, 못보는 자를 보게 하며,

오병이어로 이 세상에서는 먹을 수 없는 양식으로 무수한 사람을 먹인 것을 경험한 이후에,

베드로는 이런 고백을 한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8:29

 

드디어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예수님이 #그리스도이ㅇ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즉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말씀하셨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8:30~31

인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마태는 더 명확하게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인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

 

이 놀라운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들며, 그렇게 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8:33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예수님의길은 #죽음의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길도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 죽는 삶!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길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삶, 새 생명이 있다.

자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새 생명을 사는 삶,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삶,

나는 날마다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날마다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주님! 제가 죽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죽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살길 원합니다.

저의 길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도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개역한글 요 6:26-29)

  

세상에는 일에 내용들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할 일과 가정적으로 하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부엌에서 마당에서 들에서 할 일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너와 나 사이에 할 일은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는 일들도 얼마나 많은가? 단체적으로 국가적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할 일들이 있어서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니면 각가지 기술로 지혜롭게 서로 필요한 것들을 공유하면서 관계를 맺고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일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일 즉 썩어질 땅에 대한 일에 집중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 즉 영생을 얻기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있어도 영생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일만이 가치 있고 후일에 보장되어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늘에 속한 일이며 현세적인 일이면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보람된 일이다. 그러면서 내세적인 것인 동시에 영적이면서 소망과 기쁨을 주는 생명운동을 일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땅에 속한 것이며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항상 너와 나 사이에 경쟁의식을 가지게 한다.  

 

두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살펴본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어느 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간단하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냐? 누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냐? 오늘날 교회당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직분과 직책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서 직분 받고 영육의 복을 받아서 형통하다고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한 것에 대한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가? 성수주일, 기도생활, 헌금생활, 봉사생활, 이웃사랑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 순종의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날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1-24)

 

 

이때에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빌 2:19-22)

 

 

여기서 빌립보 교회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 지기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뜻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2-3) 여기서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진찰하고 있다. 먼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편지에서 ‘자기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서 구분해서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일’이나 ‘자기의 일’은 세상적이고 ‘하나님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비한 비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의 ‘지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학사전에 지식에 대한[知識,止息,智識] 뜻을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라고 했다. 영어로 지식을 ①knowledge ②understanding ③know-how라고 했다.

 

 

위키백과 사전에 ‘지식(知識)’은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 등을 포괄하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최근에는 한 사람 뿐 아니라 집단의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도 지식이라고 부른다.

 

 

넓은 뜻으로는 어떤 사물(事物)에 관하여 명료한 의식을 지니는 것으로서 알고 있는 내용, 알려진 사물의 뜻이 되기도 하며,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경험적 인식의 뜻이다. 좁은 의미, 즉 엄밀한 의미로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확실한 의식을 지식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사물의 성질, 다른 것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참된 판단을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지식은 억설이나 상상과는 달리 보편타당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고(思考)의 작용이 곁들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지식에 대한 뜻을 살펴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다. 어떤 지식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세상적인 교육을 통해서 배운 내용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식’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아는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생’과 결부시켰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오늘날 교회를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지식에 따라 열심을 내고 있는데 대한 것을 어떻게 진찰 할 것인가? 또한 예수님은 어떤 일에 열심을 요구하고 계실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교회당교회문화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그 결과 직분자로 선택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그 직분을 과시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일날 하루는 거의 교회당에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바른 신앙의 지식을 알고 열심 내는 증거일까? 과연 열심 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인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볼 과제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하자면 교회에서 저는 황현석 목사라고 불립니다.
황현석은 제 성과 이름이고 목사는 교회에서 제 신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교회에서는 성과 이름 뒤에
사모, 장로, 권사, 집사, 교우라고 해서
교회에서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배(禮拜) - 성전, 교회, 성도의 몸



예배(禮拜)

- 예도 예(禮), 절 배(拜)

예배(禮拜, Worship)는 '예도 예(禮)', '절, 굽힐 배(拜)' 자를 써서 '예를 갖추어 절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이다.
넓게 보면 구약시대 제사를 포함해 형태나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행위 전부를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으나, 보통은 기도와 찬양 등의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법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기독교 예배란 그리스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뿐이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은 모든 예배는 사실상 예배답지 못한 예배요, 부당한 예배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예배의 청중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청중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향유하는 것은 결코 간과될 수도 배제될 수도 없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7).
신약에서 언급된 예배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로 무지한 예배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 주위에 많은 우상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 23).

당시에 모르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예배한다. 우상과 형상에게 절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의 무지로부터 다양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둘째로 주님은 헛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15:9).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헛되고 무익한 것이다.

셋째로 주님은 성령안에서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안에서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요 4:24 ).

이것이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당시와 같이 오늘도 똑같이 사실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상태가 아닌 다만 성령에 의함과 진리(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예배를 강요하시지 않으시나 예배하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에 어떤 예배가 있어야 하는가? 물론 무지한 예배도 아니다. 사람의 교리나 계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한다. 신약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 우리는 초대교회가 다음의 다섯 항목으로 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직접적인 명령과 예로서 알수 있다.

1.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모였다. 비록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지만(딤후3:15) 바울은 그를 젊은 전도자로써 권고하고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1:15 )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예배하기 위해서 모였을 때 적용되는 말이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이다. 사도행전 10:7에서 바울이 형제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강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그들은 기도했다. 오순절 날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한 이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 주님의 백성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말씀할 기회를 갖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과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3. 그들은 찬양했다. 바울은 그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19) . 또 골3:16과 히 3:15을 읽어 보라. 두 가지 종류의 음악이 있다. 하나는 음성으로 하는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음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음악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음성으로 하는 음악을 요구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해야 된다고 말했다. 이는 기악을 배제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찬양을 했다. 수세기 후에 사람들은 기계적인 음악을 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않으셨고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기계적인 기도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기계적인 음악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그들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였다. 사도행전 20: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6:26-28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는 떡에 참예하며 피를 기념하는 잔, 즉 포도 열매에 참여하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늘까지도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다.

5. 그들은 연보를 드렸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에게 명령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때에 연보를 하지않게 하라" (고전 16:2). 아울러 고후 9:7을 읽어 보기를 바란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첫날에 모여서 (행 20:7, 고전 16:2 )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들은 자주 모였으며 모이면 기도 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삶을 지향했다(행 2:46, 5:42, 8:4).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관습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날 같은 예배의 행위에 참여해야 하므로 똑같은 훈계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함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배가 많은 전통과 형식으로 단조로운 활동과 기도의 반복이 거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배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관한 그분의 뜻을 보여 주셨고 이것은 사람이 조금도 변경해서는 안되게 하셨다.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주님의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히 1:2~3. 마 17:5. 막 9:7. 눅 9:35). 그때만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배가 무엇인가? 이사야 6:1-8 

1.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예배에 열심히 있는 것은 대부분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배웠습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시29:1-2)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있는" (worth)이라는 말과 추상명사를 만들기 위해거 "말 끝에 붙이는 말"(ship)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그 가치를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 (제사)는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가 있었는데, 어떤 예배든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했습니다. 그 제물은 소,양,비둘기 였습니다. 그 제물의 결정은 예배의 종류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양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다는 말입니다. 또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예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예배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는

첫째 예배는 흠이 없어야 하고,

둘째 모든 예배순서 진행에 흠이 없어야하며, 
셋째는 찬송과 기도가 항상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예배의 내영은 하나님과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알지 못하거나, 또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정해진 시간(주일)에 정해진 장소(예배당)에서 하나 첫째 변화입니다. 두 번째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가는 선교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속사람이 더욱 거룩해지고 또 하나님의 교회 에 충성스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예배 드림은 참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4. 예배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리는 공동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또 하나님의 부름으로 예배당에나오는 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는 구원받은 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의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끼리의 아름다운 코이노니아가 있어야합니다. 옆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드리는 예배는 좋은 예배가 될 수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복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까? 
3. 예배를 드림으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요4:19-24 
세계적으로 한국교회가 예배드림에 제일 열심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예배가 또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될까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형식이되고 나의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 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왜 드리는가를 알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려봅시다. 

1. 하나님은 예배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예배 드리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4:23). 이 말씀은 예배당에 와서 찬송하고 설교 듣는 정도의 사람 보다는 "신령과 진리 "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예배는 받아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나고대화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창 1:26) 그것은 당신과 교제하며 대화의 상대 즉 예배드리며 살 수 있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천국)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양과 경배로 가득찬나라입니다(계4-5장) 그 나라는 천지 만물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돌리고,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다시 드리며 업드려 경배합니다. 이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에 우리가 초대 받은 것입니다. 

2.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 

한국교회는 기도, 찬송, 헌금 그리고 예배드림에 열심 있는 교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런 행동이라고 한 빨트의 말에 의하면 바람직하고 자랑스런 교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린 만큼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첫째는 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교(shamanism)의 영향이고 또 주일을 거룩히 여기지 않거나 모이는데 등한히 여기는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히 복을 받는 길이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도와의 교제를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는것입니다. 

3. 예배는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드리는 것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드리20), 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계21-22장)이기도합니다.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며(출3:12),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베전 1:1)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어떠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위에 굳게서서(히11:1) 값지고 보람있게 살게 합니다(요 8:31-32) 
그런 점에서 예배는 폰 알멘이 주장한 것 같이 "구원의 축제"입니다. 
사실 기독교 예배는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며, 그것은 곧 우리의 구원의 축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기쁨 속에서 축제적인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는 예배를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햐 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구원하여 주신 은총에 대한 감격의 표시라고 말했지만 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배를 드려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1;26).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찾지않아도 고사를 지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것들은 인간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어 " 카할(qahal)"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 봉사, 교육, 정의의 실현 등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예배를 드리는데 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예배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당신은 복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3.구원 받은 감격이 당신을 예배드리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4.교회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라는 용어를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예배’와 그 외의 예배로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적 예배’란 개체교회가 전체교인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모아 다함께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공적 예배는 일주일 가운데 하루 ‘주의 날’이라 부르는 일요일 오전과 오후 혹은 저녁에 드리는 예배와 기독교 절기에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가능한 모든 개체교회 교인들이 참석해야 할 공적 예배는 주일에 한 번, 즉 주일 오전예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 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 예배는 예식이나 순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공적 예배 이외의 모든 예배, 즉 결혼예배와 장례예배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특수 목적 예배는 사실상 ‘각종 예배’로 분류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주일 아침에 모이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그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공적 예배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오전예배에 비해 오후예배는 교리교육이나 세례식 등과 같이 일종의 특수 목적과 연관된 예배일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제네바는 3-4개의 도시교회가 각기 예배시간을 달리함으로써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배려했다.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을 복원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은 개신교회가 세워지고 17-18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예배 전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8-19세기의 교회가 대부흥을 경험하면서 전통적 예배 형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교회부흥은 딱딱하고 조용한 예배형식을 활기차고 감동적인 예배로 이끌었다.
그 결과 예배형식이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지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예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신자, 양측 모두 중요하지만 동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통해서도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 즉 죄인이 예배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은혜 받지 않은 누구의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기 않기 때문이다.
은혜 받은 자만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를 피 없는 제사, 즉 감사의 제사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감사의 마음 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자는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예배를 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구경꾼의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세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예배의 자리에 빈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심령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뻐할 것이다.

준비된 심령 없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회개하고 감사하는 심령으로 예배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더욱 크고 놀라운 약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더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한 주간을 살아낼 각오를 다짐하는 것, 이것이 곧 예배의 선순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참석이 일종의 습관에 불과하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생기를 잃고 시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은혜에 대한 갈급한 심령이 없는 예배, 습관적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마른 장작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예배 시간에 잦은 하품과 졸음, 습관적인 잠, 그리고 딴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현상은 대부분의 경우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즉 은혜에 대한 간절함이나 절박함 없이 예배에 습관적으로 참석할 때 발생한다. 찬양할 때는 열정적인데 설교를 시작하면 곧장 단잠에 빠져드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주일예배가 이미 인간 중심적인 예배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예배는 구경이 아니라, 참여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한 자리로 초대하시는 영적 잔치다. 초대된 잔치 집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여하는 것은 잔치에 초청한 주인을 무시하는 일이요,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잔치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영혼의 잔치, 하늘 잔치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준비도 기대도 없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세요, 행위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도 가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예외적이요, 결코 일반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반드시 주신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마음, 준비된 심령으로 예배에 참석해야만 한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성취되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를 가장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는 은혜의 유일한 시여자이시며 약속의 온전한 성취자이신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찬양이든 기도이든 설교이든 모든 예배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대신에 특정한 사람이 주목을 받을 때 그 예배는 이미 예배답지 못한 예배, 타락한 예배일 가능성이 높다. 예배 순서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지만 그 모든 소리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 예배다. 각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폭포수처럼 그에게 쏟아 부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만이 진정한 하늘의 은혜다. 이런 점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예배자들은 설교자, 예배인도자, 찬양대원, 찬양인도자, 대표기도자 등과 같이 예배 순서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아닌, 청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예배를 예배답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예배를 허무는 독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바벨탑 증후군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은혜란 결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그것이 가능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마술을 부리고 싶어 안달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예배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때만 향유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다.

예배에서 어떤 순서를 맡은 자이건 마치 자신을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중재자인 것처럼 착각할 때 그는 곧장 중세의 사제나 부제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우상숭배의 자리로 변질시키는 주범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를 담당한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예배에서 맡은 자신의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하나님이 아닌, 청중에게서 듣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다.
칭찬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모든 예배 요소는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를 허물어버리고 대신에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강탈하는 행위의 추하고 악취 나는 예배로 변질시키는 주범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주목하는 예배가 되게 하라.
그러면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은혜를 향유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날 것이다.

예배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나머지는 모두 예배자일뿐이다.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헌금도 특별한 사람의 예배 행위이거나 모든 예배자의 개별적 예배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모두의,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거룩한 공동체적 예배 행위다.



장로교회 예배의 특성과 실제

- 장희종목사(명덕교회)

서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공예배는 성별된 장소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예배적인 측면에서 구속은 원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신 것이다. 예배를 단순하게 정의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장로교회 예배의 특성은 한 마디로 “언약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의 주도적인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언약 사상에 투철했던 인물들이었다. 우리의 신앙고백문서에는 언약이라는 어휘가 68회나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고백문 전체가 언약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도 언약적이어야 한다. 언약적 예배에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이 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기여하시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이런 표현들을 좀 더 신중하게 정의한다면, 언약의 당사자들은 동등한 신분은 아니다. 그러므로 상호 기여하는 부분도 대등한 종류나 범주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에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적이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나타난 이 언약의 기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선물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언약을 계속 유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갈 때에도 하나님께 받았던 것을 되돌려 드릴 뿐이다. 언약적 예배의 요소들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시는 요소와 목사를 통해서 혹은 목사 없이 예배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 구분된다.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고자 한다.



1. 주일 공예배의 첫 번째 부분은 「예배의 부름」, 「문안인사」, 「영광찬송」의 요소로 구성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부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예배를 찬송으로 시작했고, 츠빙글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 또는 기원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칼뱅은 예배의 시작을 「예배의 부름」과 「문안인사」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배의 부름」이란 votum 혹은 invocatio에서 유래한 말인데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는 부름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이 “부름” 혹은 “간청”을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만이 “우리의 도움”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배의 부름의 원형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중에 여호와의 궤가 쉴 때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모세가 여호와를 부르는 데서 본다.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민10:36)

「문안인사」는 「예배의 부름」에서 표현된 예배자의 고백과 간청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반응이시다. 칼뱅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 혹은 계1:4-5)를 사용했다. 이 문안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그 내용을 실제로 일어나게 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예배자가 「예배의 부름」을 통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문안인사」로 반응해 주신다. 이 “문안”을 통해 하나님은 예배의 개회부터 마칠 때까지 은혜와 평강을 약속하신다.

「영광찬송」에서 하나님의 「문안인사」를 받은 언약 백성들은 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 선하심, 전능하심, 영원하심 등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찬송을 부르게 된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개회 시 이 세 가지 요소 즉 「예배의 부름」, 하나님의 「문안인사」 그리고 「영광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이것이 예배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공예배의 두 번째 부분은 「십계명 선포」, 「죄의 공적 고백」, 「사죄 선포」, 「대표기도」, 「감사 찬송」의 요소로 진행된다.

「십계명선포」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선포하신 언약 선포문이다. 뒤이어지는 내용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십계명으로 요약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다. 이 언약의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옛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과 같이 자기의 모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모든 영적 속박에서 건져주신 분이심을 선포하신다. 예배자는 「십계명선포」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와 하나님이 되시고, 구속자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구속하신 그의 백성임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에게 마땅히 행해야할 바를 요구하신 계명이기도 하다. 십계명은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거울과 같다. 그래서 주일 공예배에서 십계명선포는 필수적이다. 언약백성으로 앞으로 행할 바를 강조한다면 설교 다음 순서에 배열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한 주간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개회순서들 다음에 배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죄의 공적 고백」은 많은 전통적 예배에서는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용서의 선언 혹은 사죄를 위한 기도의 요소를 가진다. 그렇게 해야 할 근거는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기대하는 예배에는 공동체의 고백이 필요하다. 죄악이 있는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사죄의 선포」 죄의 공적 고백의 시간이 끝나면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용된 구절을 가지고 은혜로운 사죄 선표를 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책임이며 권위이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대표기도」 이제 회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화해의 기반 위에서 예배가 진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 가운데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드리게 된다. 대표기도는 회중의 대표로서 전(全) 기독교의 필요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그리고 회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짧게, 분명하게 그러나 아버지 앞에 자식이 아뢰듯이 정중하고 겸손하게 해야 하며 예배의 흐름에 조화롭게 해야 한다. 바로 앞 순서에서 회중이 직접 죄의 공적 고백을 드리고 사죄선언의 말씀을 이미 받았으므로 회개를 위한 간구는 반복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감사를 받으실 것과 전 기도교적인 필요를 위한 간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감사 찬송」 여기에 해당하는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대한 선물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기꺼이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회중의 마음을 표현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기쁨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예배의 세 번째 부분으로 나아가게 된다.



3. 공예배의 세 번째 부분은 말씀 선포에 관한 부분으로서 「성경 열기 위한 기도」, 「성경봉독」, 「찬양대의 찬양」, 혹은 「축복을 위한 기도송」, 「말씀선포」, 「설교후 기도」,「화답찬송」 등의 요소로 구성할 수 있다.

「성경 열기 위한 기도」 이 기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성경을 열기 위한 기도이며, 설교자의 입을 열고, 회중의 마음을 열어 말씀의 씨가 마음 밭에 잘 심어지도록 하는 기도이다. 목사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 기도가 필요하다.

「성경봉독」 공예배에서 성경봉독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예배 중에 공적으로 성경을 봉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앉을 때 강해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것을 통해서 그의 배성을 축복하시고 교화하셨다. 공예배에서 성경봉독은 말씀을 전하는 책임 있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봉독한 말씀과 선포된 말씀 사이의 동등성 때문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목사들의 고유한 책임이기 때문에 읽는 것 역시 목사의 책임이다.

「찬양대의 찬양」 예배에서 성경봉독이 하나님 편에서 내려주시는 요소라고 하면 회중 편에서 올려져야 할 요소로는 ‘찬양대의 찬’양 혹은 ‘축복을 위한 기도송’이다. 이것은 사치스러운 순서가 아니라 언약적 예배의 아름다운 요소이다.

「말씀선포」 ‘설교는 기독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말씀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본질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강단에 서며,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전하고, 그 말씀의 권능을 선포하며 그의 백성들의 삶에 적용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그리고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와 확신 없이 이런 대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설교의 기능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언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가기 만들어낸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에 서서 받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령의 증거를 필요로 한다. 성령의 사역은 설교단과 회중석 사이에 영적 교제를 형성해 준다. 목사는 교회당 벽을 향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고 응답하는 회중의 마음을 향해 설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이 동시에 활동하는 사건이다. 설교가 선포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화답하면서 언약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즐기게 된다.

「설교후 기도」 설교 후에 방금 선포한 말씀을 먼저 언급하면서 설교를 들은 회중들이 그 말씀의 빛 속에서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설교한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독교회의 필요와 국가와 인류 사회의 상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기도의 내용은 항상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된 것과 명령받은 것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화답찬송」 설교자가 온 힘을 다해 말씀 사역과 기도드리고 아멘으로 끝내면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 후에는 설교에 대해 바르게 화답할 수 있는 찬송을 선택해야 한다. 모든 회중이 말씀선포에 마음을 열고 깊이 참여했다면 공예배의 아름다움이 그들을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4. 공예배의 네 번째 부분은 「신앙고백」, 「주기도」, 「성례전」의 요소로 구성된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예배 때에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중요한 예배 요소이다. 이러한 뜻에서 교회는 325년에 니케아 신경을, 404년에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채택하였다. 이 고백들은 공예배 시간에 언약백성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졌다. 예배순서에서의 위치는 루터의 독일어 미사와 츠빙글리의 독일어 예배에서는 성경봉독 다음에 놓았고 칼뱅과 부처의 예배에서는 설교 뒤에 그리고 성례전 앞에 놓았다.

「주기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며 전통적으로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다. 17세기경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는 주기도문이 너무 형식화 된 주문처럼 변질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 때 공예배에서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바로 회복되어 현대 모든 개혁교회에서는 중요한 예배 요소가 되어있다. 주기도문의 위치는 성례전이 있는 예배에서는 성찬기도 다음에 오는 것이 적절하다.

「성례전」에서 말씀과 성례의 관계는 성례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설교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말씀과 성례”라는 이순서는 성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인 설교를 들어야 한다. 설교가 귀를 위한 것이라며 성례는 눈을 위한 것이다. 성례전은 공예배에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사이의 대화의 연속이다. 성례전의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 받아들이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한 보장의 인을 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그 증표를 받는다. 이 약속과 인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 간에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5. 공예배의 다섯 번째 부분은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임직서약」, 「시벌 혹은 해벌」의 요소가 오는 순서다(2014년판 예전예식서 참고할 것).



6. 공예배의 여섯 번째 부분은 나눔의 사역 곧 「교제」, 「헌금」 등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다. 「교제」는 “공통의 유산을 서로 나누는 것”인데 우리는 한 아버지의 뜻과 말씀으로 잉태되어 한 아들의 피로 구원을 받아 한 성령의 거하실 처소가 됨으로 거룩한 교제 속에 들어간 자들이다. 성경은 이런 우리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sugkoinonus라고 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요,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사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만찬의 떡을 떼며 잔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서 교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연합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분과 교제한다.”라고 했다. 교제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나누면서 섬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점에 대해서 “또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도 연합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서로 교제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교제가 오순절에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는데 여기 “통용”이란 말이 “교제”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koina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도울 때 섬김을 받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한 부분이다.

「헌금」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정규적으로 행한 예배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었다. ‘사도의 가르침’, ‘성만찬’, ‘공적기도’와 함께 ‘구제헌금’ 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었다. 칼뱅은 이 점에서 마틴 부처를 따른다. 그러나 칼뱅은 부처나 외콜람피디우스 만큼 발전시키지는 않았으나 구제를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그는 고전 16:2을 언급하면서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주일)에 하라고 지정했다.”라고 했다.



7. 공예배의 폐회 부분은 「마침찬송」과 「강복선언」의 요소로 구성된다.

「마침 찬송」의 내용은 설교 본문의 주요한 메시지와 관계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주신 새 힘으로 성도는 이제 힘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과 결단을 강화하는 내용이면 더욱 좋다.

「강복선언」 공예배는 “기원” 곧 하나님의 문안으로 전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감싸여 시작한다. 강복선언은 다음 주일 공예배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날 동안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해 주실 것을 선언함으로 예배의 자리에서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는 순서이다. 그래서 이 엄숙한 강복선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복들을 들어 마시기 위하여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 그리고 영혼을 넓게 열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강복선언은 민6:24-26이나 고후13:13의 말씀으로 한다. 강복선언은 거룩한 기원이나, 예배의 끝을 알리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예배의 모든 요소들의 절정이다. 이제 삼위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 같은 삶의 현장이 두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개혁교회의 예배 순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심으로 마치게 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강복선언을 기도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강복선언은 공예배 후에 한 주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복임을 기억하고 공예배 이외에서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결언

주일 공예배를 누가 집례 해야 하는가? 공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는 교회의 공인된 직분자이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 예배는 언약적 특성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전 역사를 통해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한다. 이런 유형이 예배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계명 선포와 성경봉독, 말씀선포 등을 통해서 예배에 기여하신다. 그의 언약백성은 찬양과 감사와 기도로 화답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된 말씀으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하여 온 마음과 신실한 말로 화답한다. 이런 상호 기여의 특성이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이다.

이런 예배 원리에서 예배 집례는 누가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적절히 안내한다. 1640년대에 회집되었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는 공예배에서 “회중이 말씀을 봉독하는 것은 공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공예배에서의 설교는 “충분한 은사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정식으로 인정을 받아 이 직분에 부름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런 규범은 예배의 다른 요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에서 실행하는 안수 형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정하신 목회직무를 안수 받은 자들이 수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봉사의 직무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며,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교회에 목사를 주셨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위임한 무리를 양육하는 작은 목양자이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특별한 직무를 위임받았는데 그것은 다른 사역과는 구별된 말씀과 성례전을 거행할 직무이다.

그러므로 누가 예배를 집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공예배의 집례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는 직무를 위해 교회의 공인된 사람이어야 한다. 예배는 말씀과 성례와 함께 다른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찬양대의 찬양과 회중의 참회기도를 제외하고 예배의 모든 요소들은 모두 목사의 사역을 동반한다. 목사는 성경을 봉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의 양떼를 대신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한다.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이다.

1561년에 대륙의 개혁교회 진영에서 이미 공인된 벨직신앙 고백서는 “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개혁교회의 예배와 질서의 아름다움이다.

예배의 종류


오늘날 기독교는 초기 형태 사도시대나 속사도, 혹은 교부시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월만큼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신학적 발전이나 사회의 변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영적, 지적 각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기본적인 속내와는 다르게 그 형태와 모습이 천차만별이고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예배의 종류를 살펴 보는 것으로 부족하나마 예배의 중요성과 속성 이해의 전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크게 예배를 구분 짓는 속성을 기반으로 세부 종류를 나누고자 한다.

I. 예배 신학적 차이로 본 예배의 종류

기독교는 2천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는 통일성을, 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태와 그 신학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혼돈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모든 기독교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적인 고백으로 삼는 통일성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교회만이 갖는 고유한 신앙고백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예로써 루터교회는 자신들의 신조를 정리한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장로교의 뿌리인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영국국교회(성공회)는 '39개 신조'(the Anglican Thirty-Nine Articles)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그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나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예배의 핵심은 한결같이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인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그 기본적인 뜻에서는 일치한다 할 수 있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조의 정신에 따라 그 의미의 해석과 집례의 형태들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달라지고 있는 현상은 치열한 교파간의 경쟁과 싸움이 종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제는 예배의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감을 갖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을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각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대단원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케 한다. 그 결과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건전한 신앙고백과 역사적 전통을 유지해온 뿌리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고유한 예배 전통과 유산들을 서로 함께 나누고 교류하려는 경향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발견된다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각 교회들의 예배신학에 서로가 주의 깊게 경청하는 태도는 기독교 예배의 일치와 다양성을 발전시키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정교회의 예배신학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가토릭 교회의 예배신학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3. 루터교회의 예배신학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해보자.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4.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예배신학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5.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예배신학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명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6. 침례교회의 예배신학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재침례 교회 예배신학

재세례파는 교회를 신자들(believing disciples)의 근본적인 몸으로 본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의 발로가 곧 예배이며, 예배는 단순하고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는 믿음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또한 우리를 위해 인류의 역사를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또한 예배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맛보고 즐기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력소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 간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곧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장소이며, 우리의 다양한 삶의 현장들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재세례파들은 믿음의 소망(faith-vision)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예배형태가 규정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비전은 거의 5백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메노나이트, 형제단(Brethren),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와 몇몇 침례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다른 교파의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재세례파만의 독특한 점은 다음 아래의 내용들에서 볼 수 있다.
1) 성경의 권위-신조나 법전으로서가 아닌 믿고 복종해야 할 이야기로서 이 성경은 우리 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2)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유아세례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과 이 웃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만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앞과 믿음의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헌신을 결단한다.
3) 거듭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변화된 공동체의 모임이며 이들은 교회의 몸을 이 루는 다른 지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의 개인주의 는 용납될 수 없다.
4) 삶속에서의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고 따르는 제자된 삶을 살아야 한다.
5) 사랑의 윤리- 삶의 모든 관계속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마음과 의를 구하고 평화를 도모하며 화해의 관계를 유지하며, 낭비를 금하고, 검소하게 살며 환경을 소중 히 여기며 믿음을 나누고 신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세례파의 예배에서 이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한 뜻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목적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위에서 기술한 믿음의 고백대로 삶의 모든 부분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믿음안에서의 삶으로 재다짐케 하는데 있다.

8. 퀘이커 교회 예배신학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거하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관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 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 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 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 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 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 디 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 감리교(Wesleyan)의 예배신학

웨슬리의 예전 신학은 예배를 공적인 행위이상으로 정의하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배는 삶 전체,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소명과 관계한다. 신자들은 계속해서 행위와 사고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현실화시킨다. 존 웨슬리가 묘사했듯이,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믿음-새로 태어난 영혼의 눈-은 이 사랑을 이해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을 모방하고 경배하도록 우리가 이끌려지듯이, 우리를 예배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전통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전과 개인적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충만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 이상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는 묵상이며, 경배이다. 웨슬리가 말했듯이,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대면으로 인도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배와 헌신의 의미는 가장 초기부터 감리교 예배를 특징짓는 찬송의 표현속에서 발견된다. 찰스 웨슬리는 감리교 교리를 시와 가락으로 설정하는데 그의 신학적 활동의 온 힘을 기울였다.
예배는 예배자들에게서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하는 구원의 전 드라마를 일으키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도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서 정통해 있었고, 대체로 예배의 예전 형식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바나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에게 선교한 젊은 선교사 죠지아(Georgia)는 동방 정교회의 예전 텍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본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개정했다. 감리교의 부흥 절정기 때,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능하면 자주, 가급적 매일(그는 개인적으로 평균 일주일에 다섯 번의 성찬식을 받았다) 성찬식에 참석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는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성공회의 기도서를 추천했고, 그것의 개정편집을 미국 감리교도의 주일예배에서 사용토록 제공했다. 웨슬리는 어떤 것도 소홀히 될 수 없는 예배의 외적 형식과 그것의 내적 힘을 구별했다. 그는 신자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예배의 외적 형식을 지키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비판했다. 이들에게 웨슬리는 "참된 종교는 예배의 형식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예배 예전을 별로 중요치 않게 만드는 "영적 예배"를 주장하는 신자들을 비판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재하는 성령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Works, vol. 1, 532) 이들에게 웨슬리는 예배란 우리의 전인격과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예배란 소그룹의 양육, 금식, 성경읽기, 성만찬, 공적이고 개인적인 기도를 포함하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훈련 용어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여러 의식들과 예전들이 남용될 수 있지만, 그는 "남용이 제거되도록 하고 그 용도는 남게 하라. 이제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끊임없이 너의 영혼을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 속으로 갱신시키는데 사용하라."고 주장했다.(Works, vol. 1, 545). 이 외적 형식과 내적 힘의 연합이 웨슬리로 하여금 예전적 형식주의와 형식없는 주관주의 사이를 분리하여 유기적인 예배신학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하나님 임재의 객관적 실재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회중들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나아가는 것이다.

10.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교회의 예배신학

미국내 흑인들의 예배는 깊은 억압과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를 통하여 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경험하며 나아가 죄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얻게 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공통된 욕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신실하심, 그리고 억압의 사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기를 간구한다. 중생한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의 예배는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코이노니아의 장인 예배를 위해 모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세상속으로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는 두 죵류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카 흑인 개신교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아메리카 흑인 회중교회가 그것이며, 또한 단일 교단으로서 로마 가톨릭과 수 많은 크고 작은 분파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같은 통일성 아래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예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교단내의 다양한 예배 형태로 인해 미국내 흑인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진부한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메리카 흑인"(African-American)이라고 불리는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예배를 다루고자 한다. "아메리카 흑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화속에서 그들이 간직해온 아프리카의 고유한 유산과 미국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아프리카 흑인, 미국계 흑인 그리고 유대 기독교 신앙 전통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강제로 이주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이들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삶의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친근한 사랑으로 그들속에 다가오시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함께하심을 함께 이야기하며 나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배는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욕구와 기쁨, 갈등,그리고 희망 등,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된 삶의 욕구들을 발산한다. 주일의 공적인 예배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된다. 또한 이들의 예배 분위기는 삶 속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들을 간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배의 형태와 의식에도 변화를 끼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감사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적인 체험들은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예배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상황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나 주시며 성령님에 의해 마음문이 열리고 억눌린 영이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기 전일지라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예배에서 보게되는 "자유양식(liberation key)"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유양식은 과거 노예제도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은밀히 조직된 '덤불 은신처'의 분위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자유양식'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처음 발견되고 타올랐으며 지금도 흑인 복음송과 운율 찬송가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본성은 따로 구별된 예배 처소를 원했던 초기 전통 신학자들의 아프리카 원시 세계관에서 분명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며,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신앙의 고백을 표현하고 찬양으로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교파간의 차이로 인해 유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낼 때에도 미국의 흑인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자유케 된 그의 백성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과 '말한 대로 살자'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11.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예배신학

예배신학의 회복은 그리스도와 성경만을 위해 과거의 전통과 신조를 거부함으로 일어났다. 결국, 예배에 대한 모든 생각은 이 전제로부터 형성되어진 것이다. 예배 회복운동의 신학을 연구하고자 한 예배관련 서적과, 교회의 중심된 행위로서 대두된 예배의 신학을 토론하고자 한 노력들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로 예배 회복운동의 흐름들을 한정하려 했다. 그들은 '신학'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만약 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이야기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입장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배 회복운동의 경종을 울렸던 유명한 투쟁은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신앙의 변증들을 신자의 자격과 안수, 혹은 이 둘 모두를 결정하는 시험으로서 사용했다. 건전한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은 받아들여졌고,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회복운동의 창시자들은 이러한 신학의 오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들의 후예들도 '신학'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이렇듯 반지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신학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했다.
제자 교회들은 그들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회원이 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 정통적인 자격 시험인 신학의 사용을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과의 대화를 위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명료화하기 위한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신학의 목적은 신앙의 내용들을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에 입교하고자 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당신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이것은 비록 쉽게 풀어서 썼지만, 이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거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마16:16) 위와 같은 신앙고백은 매우 단순한 고백이다. 두번째 물음에서 '당신의'라는 단어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에 따라오는 개인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신학적인 중요한 또다른 물음을 대두시킨다. 비록 이 글이 기독론에 관련된 중요한 물음을 연구하는 글은 아니지만, 윌리암 R. 바(William Barr)는 이 주제를 연구한 훌륭한 책인 "제자들의 전통에서의 기독론: 하나의 평가와 제안"이 있는데, 이것은 캐넷 로랜스(Kenneth Lawrence)가 편집한 "Classic Themes of Disciples Theology"에 실려있다.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자'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죄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리의 희망이며 인생인가?" 만약 우리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예수는 인간이며, 어떤 방법으로 신이신가? 하는 것이다. M.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의 마가복음 연구인 'Truly Human/Truly Divine(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하나님)은 위와 같은 물음들을 오늘날의 제자회의 빛 아래서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스톤 캠벨(Stone-Campbell)의 회복운동으로부터 연유된 모든 분파들 중에, 성서에서 발견된 이 권위, 즉 "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것은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외침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각기 다른 지류들은 성경이 어떻게 연구되고,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12. 오순절계열(Holiness-Pentecostal)교회의 예배신학

이들 예배에 있어의 중요한 요소는 찬양이다. 찬양이란, 노래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경배요 증거인 것이다. 예배에서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사역들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찬양한다. 오순절 교회의 회중들에게 있어 예배의 초점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집회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찬양중에 거하시는" 분(시22:3)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합당한 찬양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해 약속된 자유함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다른 말들 즉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와 "모든 것을 적당히 하게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의 말씀대로 어떤 정해진 형태를 갖고 있는 다양한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이 기존 교회들의 냉담하고 형식화된 듯한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자의로 기존 교회들을 떠났든지, 혹은 떠날 것을 종용 받았던지 간에, 예전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언을 말하고(행2:4) 다른 영적 은사들-적어도 오순절 교리 중 이 부분의 지조격인 챨스 파햄(Charles Parham)에 따른-을 동반한 그들 자신의 성령 세례에 대한 열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공적 모임에서 비슷한 영적인 열렬함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실 일을 와서 보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시34:8)의 말씀과 함께 공공연한 초대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함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의 요구가 충족되는 예전들을 무의식적으로 발전시켰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창의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대중문화의 음악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즉 복음성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나는 지치고, 야윈, 그리고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예수께 왔었다오. 그런데 그가 나의 죄들을 없애 주셨소", "십자가에 달리신 내 주님을 모시지 않으채, 허영과 교만속에서 내가 보낸 수 많은 나날들이여"와 같은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성가곡들은 성경말씀에서 인용되었는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장)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시34장)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경배의 노래들, 그리고 초대와 선교적이고 복음적이고 그리고 부흥에 관계된 노래들, 그리고 계절에 의한 찬송가들은 모두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서 자유롭게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성령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오 주님, 지금 권능을 보내소서", "예수여 오셔서 지금 나를 채우소서", "오순절의 불이 떨어지고 있으니, 내개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라"와 같은 새로운 찬양들과 성가곡들이 쓰여졌다.
악기들은 당연히 찬양보다는 덜 중요하긴 했지만 보통 노래를 위한 반주로써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구세군의 금관 악기와 북들, 피아노와 오르간, 드럼, 탬버린, 그리고 키타와 같은 모든 것들이 대중 음악적인 표현 방식에서 수용되었다. 젊은 예배자들이 맨 먼저 현대적인 양식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수정하였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수용가능한 방식들로 예배에 통합시켰다. 회중을 교화시키는 것 그 이상으로 오순절 음악에 있어서 심미적이란 것은 없다. 대중 기도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진실성을 가라 앉히기 위한 어떠한 억제도 없이 오직 회중에 행하는 개인 기도에 불과하다. 열렬함과 자발성은 오순절 기도의 특징들이다. 오순절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서화된 기도들은 열등하며 비영적인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여 직접 지시받기 때문에 대중기도에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개인적인 문제들이 언급되어 질 수 있다. 또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님의 중재하심에 의해 인도될 때에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역시 기도 내용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만약 기도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도록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괜찮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기도자를 직접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 안에서의"기도란 단순히 예배자들의 언어에서 성령님께 향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 보통 방언이라고 불리우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형식들로 일어나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듣고자 할 때 예배자들의 언어로 통역이 뒤따르는 방언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통역도 추구되거나 기대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후자의 사용은 때때로 한 개인의 "기도언어"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고전14:4)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한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하게 기도하시는 분이시기에(롬8:26-27) 인간의 모든 장애들을 초월하는 중재의 일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언들 역시 독특한 기도의 행위들인데, 이것들은 모임중에서 누군가가 예배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고전14:3) 짧은 메시지들이지만, 그러나 방언 언어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13. 은사중심(A Charisma) 교회의 예배신학

성령님의 은사를 중심한 예배의 신학은 성령님과의 생생한 관계와 그리고 영적인 은사들의 회복을 강조하는데, 이 둘 모두는 예배에서 경험되어지는 것들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5:18-20)
은사주의 운동은 주로 성령님과 성령님의 선물들인 카리스마(즉 치유,예언, 기적, 방언, 기타등등)의 회복에 대한 강조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운동이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점들 중의 하나는 예배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 비록 정확하게 은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은, 하나의 주된 증거에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즉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는 우리의 입술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감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성령님의 역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요16:14),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과의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깊어 가는 결과를 가져온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사주의파"라는 말을 떠올릴 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거룩해진 얼굴과 손을 높이든 열광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열광적인 신앙과 몰입하는 기쁨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노래들, 성가곡들, 기타와 드럼, 박수와 춤, 예배 스탭들과 깃발, 악보와 O.H.P들, 예배 세미나와 그에 관계된 각종 회의 같은 것들이 교회에 등장하게 하였다. 왜 이러한 고정관념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은사주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인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많은 다른 교파들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은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은 아마도 모든 면에 있어서 침례교 은사운동과 동일한 신학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다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더욱 풍성케 하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경험하게 되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주의 운동의 예배 형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의 예배 유형의 다섯 가지 원칙들과 그들의 신학적인 기반들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은사주의의 다섯 가지 원칙은 첫째, 성령님의 중재하시는 현존은 예배자들의 성직자로서의 기능들을 활력있게 하신다. 둘째, 예배는 영과 혼과 몸의 전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의 행위는 명백한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리고 다섯째, 예배는 노래 이상의 것으로서 예배는 '섬김'인 것이다.

14. 열린 예배

4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과 예전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빈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런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개신교회는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도 그 노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열린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 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예배라면, 이것은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는 전도집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에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이라고 하는 예배학자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가 다분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열린 예배는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열린 예배의 본질과 그 방향성에 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배는 결코 회중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II. 절기에 따른 분류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 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III. 예배의 진행과 관점에 따른 분류

예배의 갱신은 예배 순서 몇 가지를 집어넣고 빼고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거기에 기초한 예배갱신의 원리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예배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순서를 정할 때에 비로소 좋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갱신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할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예배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1. 구어적(口語的)인 예배냐 상징적인 예배냐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지나치게 '듣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개신교 예배가 소위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 중요도에 있어서나 시간의 분량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 이외의 순서도 대부분 '구어'(spoken word)에 의존하여 있다. 한국 개신교 예배는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배가 '구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행될 때 과연 '하나님,'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등의 영적인 실재들이 설교를 포함한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예배에 참가하고 있는 회중이 과연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들 영적 실재들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예배의 표현양식이 언어를 통한 청각적 차원에만 의존할 때에 그만큼 예배의 풍부함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여질 수도 있다. 시각적 보조물을 사용하는 것은 복음선포에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후각, 미각은 물론 촉각까지도 사용하는 다차원의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중은 말하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5감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현존을 더 풍성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구어적 차원뿐만 아니라 비 구어적 차원을 또한 회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예배를 보다 더 상징적이고(symbolic) 은유적이고(metaphoric) 시적(poetic)인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며, 그 예배가 영적인 실재들에 관해 풍부함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될 것이다.

2. 산만한 예배냐 진행감 있는 예배냐
예배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군더더기나 어색함이 없이 매끈하고 진행감(sense of progre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요소들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하고, 이 선택된 요소들은 논리적이고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논리적 배열과 진행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순서들이 예배 순서 중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명백한 지시는 성서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위탁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행위 즉 헌신의 다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설교 직후에 오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 외에도 앉고 일어서는 동작, 눈을 뜨고 감는 순서 등은 예배학적인 고려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이 우리의 예배를 매끄러운 흐름과 진행감 있는 예배로 만들어 줄 것이다.

3. 초점이 흐려진 예배냐 초점이 뚜렷한 예배냐
좋은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배는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의 모든 순서는 이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도록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은 이와 거리가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설교의 주제가 예배의 주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은 예배의 현실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설교자의 의도가 예배 인도자와 기도자 그리고 성가대에게 미리 전달되지 않고, 따라서 각 참여자들이 제각각의 주제와 관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즉흥적 기도냐 쓰여진 기도냐
예배는 단순히 예배집을 읽거나 주보를 따라 그대로 훑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배 공동체가 기도할 때에 누구의 목소리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대표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것을 듣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창형식(unison)이 되어야 하는가? 또, 기도는 쓰여진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공 예배에서는 목사가 기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평신도 지도자도 기도할 수 있는가? 주중의 기도회에서 행해지는 기도는 주일 공 예배에서 되어지는 기도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한다.
특히 쓰여진 기도냐 아니면 즉흥적인 기도냐의 문제는 예배학에서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기도는 인쇄된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겨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교단적 차원의 예배집에 인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자가 개인적으로 미리 준비한 것을 읽는 것인가? 만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즉흥적인 것만이 성령의 역사인가? 이런 질문들은 매우 첨예한 토론의 주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쓰여진 기도문은 이미 3세기초의 것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때에 예배를 인도하고 회중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감독(bishop)이었다. 예배에서 그가 기도할 때에는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읽되, 본인이 원하면 쓰여진 그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량권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재량권이었다. 감독이 비록 자신의 언어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주어진 기도문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4세기를 넘어오면서 기도문은 쓰여진 채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는 기도는 16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어 일부 개신교회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5. 전통적인 예배냐 토착적인 예배냐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함께 가져야 한다.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천 년 동안 예배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것이 '기독교의' 예배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전통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이야말로 모든 교회의 예배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유산을 포함하고 있음을 현대교회는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초대교회의 전통들을 예배에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는 현대 교회들의 예배에서 회복된 '성만찬 기도'이다. 4세기에 사용되었던 성 바질(St. Basil)의 성만찬 기도는 성공회의 성만찬 기도 D로, 그리고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V로 부활되었으며,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I는 3세기초에 로마에서 씌여진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나오는 성만찬 기도의 부활이다. 이외에도 미국 연합감리교회나 미국 장로교회 등 많은 개신교회들은 성만찬 기도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요소들을 대거 포함시킨 성만찬 기도를 만들어서 예배에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회복한 또 다른 예는 바로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을 이룬 이상적이고 성서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말씀을 약화시키고 성례전만을 강조하였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례전을 약화시키고 말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개신교회들이 1년에 단 몇 차례의 성례전을 거행하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려온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씀과 성례전'으로 구성된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많은 개신교회들이 성만찬을 매주일 예배의 정규순서로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던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 짜여진 예배냐 융통성 있는 예배냐
바람직한 예배를 위한 두 번째 원리는 계획성과 융통성의 적절한 배합이다. 예배는 정교하게 계획되고 짜여져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하나의 연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예배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예배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목회자와 회중에게 공히 각인된 것은, '예배란 설교를 듣는 것'이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다보니 목사는 목사대로 자기가 할 설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또한 회중은 회중대로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잘하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다른 순서들은 장식물이나 보조순서로 전락된다. 이것은 결코 좋은 예배라 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교회는 한 주간에도 여러 번 드리는 예배의 홍수 속에서 목회자와 회중이 모두 단지 습관적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엄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매번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점검되어져야 하며,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융통성은 예배가 인간의 차원을 넘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계획되고 준비된 예배라고 하더라도 실제 예배의 상황에서는 보다 더 좋은 선택을 위하여 이미 계획된 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찬송가는 꼭 정해진 것만 불러야 한다거나, 아니면 찬송을 부를 때에 반드시 1절부터 4절까지 책에 있는 그대로 불러야만 한다는 생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바꾸어 부를 수도 있으며, 1절부터 4절까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다. 또 1절 혹은 3절만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떼제(Taize) 공동체는 짧은 찬송가를 수십 번씩 반복하여 부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 몇 번을 부를 것인가는 그때그때 결정한다. 이렇게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 성령께 의지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참여할 때에 단조롭지 않고 역동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인도자이다. 물론 회중과 인도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융통성이라고 하는 여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배 인도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영적으로 민감하여야 하며, 순간순간 성령에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7. 구경하는 회중이냐 참여하는 회중이냐
예배의 일차적인 요소는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의 행위였으며 성직자들이나 기타 인도자들만의 예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앞에서 열심히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여도 회중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회중이다. 회중이 누구냐에 따라 예배가 달라진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뉴욕의 같은 길 위에 위치해 있는 같은 교회라 하더라도 한인들의 교회와 남미인들의 교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예배를 보여준다. 한인들의 교회는 전형적인 한국의 개신교회들처럼 '점잖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반면에, 남미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찬송을 부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예배에서 회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회중이다. 회중이 얼마나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예배갱신을 위해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IV. 기타 분류

1. 시간에 따른 분류
새벽 예배: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새벽기도회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는 365일 예배적 자세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자세로 이해된다.
수요 예배: 흔히 3일 예배나 기도 예배로 불린다.
금요 예배: 보통 철야기도회를 겸하고 있다.
주일 예배: 대예배 혹은 정식예배로 불리지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전 성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 듯하다. 대예배 소예배 이런 것은 예배학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메인 기능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예배: 원래는 저녁예배였으나 최근 오후로 많이 변하는 추세다.
주일 저녁 예배: 산업화 다원화되면서 저녁예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규모에 따른 분류
가정 예배 : 보통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족 중심 예배다.
구역 예배 : 주중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작은 구성으로 구역별로 이루어진다.
회중 예배 : 주일 혹은 약속된 날에 전 성도가 모이는 것을 말한다.
연합 예배 : 개 교회보다는 지역 교회가 연합한 대형 예배를 말한다.

3. 특별 예배
헌당 예배, 목사 안수 예배, 결혼 예배, 장례 예배, 개업 예배, 졸업 예배, 입학 예배, 득남, 득녀 예배, 파송(여기에도 여러종류가 포함된다) 예배, 기타 감사 예배, 부흥 예배, 찬양 예배, 기도 예배, 서원 예배 등 다양한 예배가 존재한다.






예배순서는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고전14:26-33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 예배가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여기서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구원을 받았으니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을 [예배순서]라 합나다.좋은 예배순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순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심이고,또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살기를 원하심 입니다.(마22:37-40)둘째는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어 살기를 원하시며(마5:13-16)증인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습을 찾고, 항상 사명을 가지고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하는 곳이요, 형제 간에 불화하고 죽이게 하는 곳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가 어렵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가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대화함으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배는 <부르시고-만나고-파송한다>는 구조 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고 있는 "예배순서"는 어떻게 짜여져 있고 또 그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계시의 부분(하나님의 초청,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 있고 또 응답부분 (찬송,기도,헌금)이 있어 베의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져 예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배순서는 두 흐름 속에서 크게 세 토막으로 짜여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지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만남의 장소로 불러 주시고,

둘째로 부름 받아 나온 당신으 자녀들과 대화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 시키면서 삶에 용기와 소망을 주시며,

셋째로 그렇게 새로워진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변화시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순서는 [부르시고-만나시고-파송하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에배의 순서에도 하나의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세 토막으로 된 예배순서의 의미 

첮째 초막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초청의 
말씀"(call to worship)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용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감격으로 백성들이 춤을 추며 찬송을 불렀던것 같은 그 감격으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 기쁨에 앞서서,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화로다 나여" 하고 참회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던 것 같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개회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첮째 토막입니다. 
둘째 토막은 [말씀 속에서 만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우리와 대화를 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송과 헌금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으로 책임있게 살아갈 것을 고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의 정점은 "성찬"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또 함께 떡과 잔에 참여한 예배자들이 하나 됨을 확인한 것입니다(고전10:17) 다시 말하면 성찬에서 하나님과 우리 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깊은 코이노이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셋째 토막은 [세상으로의 파송과 복주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새로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맏기며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여기서 새로워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부른 뒤에, "파송의 말씀" 을 듣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며 (마 28:20)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며 보내는데 그것을 "축도" 라고 합니다. 
이런 예배순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뒤에 일주일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느끼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4. 예배순서들의 다양성 

예배순서는 2-3시간이 걸리는 "동방정교회" 예배로부터 예배순서가 전혀 없는 "퀘이커교회" 예배까지 다양합니다. 개신교의 예배순서의 틀은 대개 7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성찬을 예배의 중심에 두는 루터교와 성공회,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장로교,감리교,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그리고 예배순서 자체를 부인하며 삶을 예배로 보는 퀘이커교가 있고, 한국교회에 예배순서를 전해준 자유교회의 예배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순서는 말씀과 성찬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와 그후 약 5백년 동안의 예배순서 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우엇입니까? 
2. 예배순서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3. 개신교 예배의 틀은 몇가지나 있습니까?

IV. 예배의 요소(계시부분) 이해 

사도행전 2 :37-42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에 예배는 두 흐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부분인데 "초청의 말씀-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부분인데 "찬송- 기도-헌금" 입니다. 성찬예식도 계시의 부분이지만 다음 자세히 하기로 하 고 오늘은 계시부분의 [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에 대해서만 공부하겠습니다.

1. 예배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초청 (call to worship)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예배를 시작할 때에 강대상의 종을 치며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을 치는 것이나, 묵도를 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나, 외국의 예배 순서를 보나 예배의 시작은 묵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초청"(Call 
to Worship) 또는 예배의 부름 인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의 초청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더나가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대개 성경 구절을 읽기도 하지만, 교독문처럼 인도자와 회중이 주고 받는 형식도 있으며, 성가대가 노래로 초청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때의 성가대의 노래는 송영이 아니고 초청의 내용에 곡조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말씀선포인 성경봉독 (scriptual Lession) 

개신교는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봉독은 설교 하기 위한 예비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성경봉독 그 자체가 설교와 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책이 성경중에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복음서] 가 봉독 되었습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안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 분명히 해주기 때문에 [구약]도 읽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하여 사도들의 [서신]을 읽기 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어 왔지만, 4세기 경에 이르러 신약을 복음서에서 한 곳, 서신들에서 한 곳을 읽기 시작하여 예배시간에 성경을 세 곳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때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면 회중은 "아멘" 하며 화답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Preaching) 

설교는 영원한 복음을 현재화 하고, 개인화 하며, 현실화하는 신비라는 설교학의 어려운 설명 보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쉽게 이해합시다 . 행 10:33에 있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말씀이 설교가 무엇이고 또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위에서 말한 성경에서 [주께서 당신 (설교자) 에게 명하신 모든 것]이 설교 입니다. 즉 설교는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설교자에게 주어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봉독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전할까?"를 기도하며, 또 "어떻게 하면 이말 
씀 앞에서 결단할까?" 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옥토가 준비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 10:33에는 설교 를 듣는 태도도 가르쳐 주는데,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주님의 말씀" 을 듣기 위하여 지금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태도를 취할 때 은혜를 받게 되고 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 10:44). 고넬료는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림"(행10:24) 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전도 할 때에 니느웨 백성이 회개했던 이야기와 , 천사가 찾아 갔지만 듣지 않고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증명을 해 줍니다. 

4. 하나님의 이별의 인사인 축도(Benediction)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신 뒤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을 하는 것입니다. 축도는 이제 삶의 자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작별 인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우리의 인사와 크게 다른 인사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제 때가 가까운줄을 알고 두루 삼킬자를 찾아 다니는 곳이지만 그세상에서도 꼭 승리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있게 하겠다는 약속의 인사입니다. 모세와(출 3:12) 예레미야(렘1:8) 는 이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약속 (마28:20)을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1. 당신은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2.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3.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합니까? 
4.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확신합니까? 

V. 예배의 요소(응답부분) 이해

예배소서 5:15-21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 이기에 예배의 순서에는 두흐름이 있는데 , 
그첫번째 계시부분(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축도/)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충부히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은 두 번째의 응답부분인 [기도][찬송][헌금]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1. 예배에서의 기도 

1) 개인 기도와 공중기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내적인 교제를 가지게 될 때에 기도의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때의 기도는 내가 하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누가 기도를 인도하던지 간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전부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사람은 회중이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2) 기도의 유형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에 보통 4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묵도 다음에 [기원]을 합니다. 이것이 이 예배를 성령님이 도우셔서 모두 정성스럽게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는 첫 번에 [죄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6:1-8에 나오는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에서 나오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회기도"라고 하는 장로님들이 인도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회기도라기 보다는 "중보의 기도" 또는 "목회기도"라 불리어온 기도 입니다. 성도들의 시앙, 정으로운 사회, 건전한 나라, 세계 평화 등을 위하여 온 교회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승리하는 삶을 위해 있는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후기도]인데 설교의 말씀을 가지고 회중이 결단하는 시간이고, 네 번째는 예물을 드린 후에 [봉헌기도]는 복을 비는 내용보다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기도의 종류 
우리는 [자유기도] 만을 선교사들로부터 받았지만, 주기도문과 같은 [성문기도] (또는 예전기도)도 오랬동안의 전통을 가졌고, 성구영신 예배 때에 드렸던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교독식으로 드리는 [연도](Litant) 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충분한 내용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 전날이나,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와서 기도할 내용을 기록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록한것을 그대로 읽어도 훌륭한 기도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리는 찬송 

우리는 왜 찬송을 불러야 하고 또 어떻게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찬송은 유대교로부터 물려 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하여 주신 은총을 기리는 예식이니(출15:19-21.계511:14)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찬송] 과 [복음성가]입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멘" 이 있는 것은 찬송이고, 없는 것은 복음성가 라고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배시간은 찬송을 부르고, 예배시간이 아닌 때는 복음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설교를 들은 후에 결단을 표현하는 찬송을 부를때에는 아멘이 없는 것도 그 내용에 맞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순서에는 찬송이 4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다 다른 것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르는 것은 사 6:2-4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 나라를 체험했을 때에 천사들이 합창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회찬송"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초대교회 부터 이 찬송을 "영광송"(gldria patri)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실은 설교 후의 기도나 찬송이나 ,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적인 것입니다.

막지막 축도 전의 송영은 예배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에서 "송영"(送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에 예물을 바치면서 1장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에 마음을 보태서 감사와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인데 하나님은 아름다운의 하나님이기에 최선의 화음과 선율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찬양에 참여하여야 하기에 찬양의 중간이나 끝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3. 나와 나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리는 헌금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쳤던 것 같이 (마 2: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 같이 (요12:3),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께 무덤을 바쳤던 것 같이 (마27:57-61)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으로 나와 내 소유를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헌신 하겠다는 예배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배에서 이 시간이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 
1.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이 몇가지라고 생각합니까? 
2. 당신은 찬송을 부를 때에 흥분과 감격에서 불러본 일이 있습니까? 
3. 당신은 헌금시간에 어떤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까? 

VI. 성찬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2:43-47 

1. 예배에서의 성찬 

처음 교회의 예배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성경은 말했는데, 처음부터 예배에서 성찬이 규칙적으로 베풀어 진 것을 뜻합니다.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모였고(행20:7), 고린도 교인들은 "먹기 위해"(고전11:33) 매주 첫날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처음부터 성찬이 주일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기록상으로는 2세기 초에 순교자 져스틴이 로마 황제에게 보낸 변증서에 매 주일마다 
성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까지는 예배에서 성찬이 핵심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면 처음 교회에서부터 약 5백년까지는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이 되면서 점차 설교가 없어지고 성찬(미사)만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설교를 회복하여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려 했는데, 개신교는 점차로 설교만 있고 성찬이 없는 예배로 변했습니다. 다시 19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는 드리는 운동을 시작했고 최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들이 함 
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순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리마 예식서" 입니다. 

2. 성찬은 복음 전체를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요약으로써 표현됩니다. 그 사건을 집약해 오는 역사적 과정에서 성찬(미사) 중심의 예배도 생겼고(동방정교회,천주교,루터교회,성공회 등), 복음선포(설교) 중심의 예배도 생겼습니다.(장로교를 중심한 개신교들) 그 전통을 신학화 하고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배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인데, 예배는 이것을 설교로서 선포하고 성찬으로 행동화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식탁에 모여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적인 죽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그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이 무덤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성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감으로 그분과 우리가 하나를 이루며, 그분의 지체가 되어 살아가며, 함께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주님이 나타나시는 현장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복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선포하게 됨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 복음의 도전에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아났는데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지체로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주님 다시 오실 것인데 당신은 항상 때어 있습니까? 

3. 성찬에서 중요한 것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빵을 떼고 잔을 붓은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마 26:26-27) 라는 말씀에 따라 4가지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봉헌]과 [감사의 성별기도]와 [빵을 떼는 일]과 [나누어 주는일] 입니다. 

첫째, 봉헌인데 빵과 포도주를 식탁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드리면 그 일부를 성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물질 대신 헌금을 드림으로 봉헌의 의미가 희미해 졌고 또 개신교에서는 떡과 포도주를 성찬상에 미리 개인용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그 의미가 약화되었던 성입니다. 

둘째, 감사와 성별기도인데 주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감사의 기도가 예식에 나타난 것은 2세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3-4세기경에 와서는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인사][Sursum][목사의 기도][Sanctus][Anamnesis][구원에 대한 감사][Epiclesis][봉헌][중재와 기도] [송영][주기도]등으로 복잡해졌는데 칼빈은 "성찬 제정어" 와 "성별기도"만을 원했고 후에 개혁 교회는 [성령의 도움을 위한 기도](Epicleis)를 찾아 보탰던 것입니다. 성찬이 없을 때에는 이 기도를 설교 전에 했습니다. 

셋째, 손으로 하는 행위 곧 빵을 떼는 일입니다. 빵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파괴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집, 이기심, 자기자랑, 등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의 빵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떼야 하며 한 잔으로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목사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빵을 나누어 놓고, 잔들을 나누어 놓는 것은 선교사들이 미국의 자유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넷째, 빵과 잔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락방 예식의 완성인데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이며, 하나님께 나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잔을 받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6:53) 성찬을 받을 때에는 우리처럼 하는 방법도 있고, 성찬상으로 나와서 조용히 무릅을 꿇고 받는 것도 있습니다. 

VII.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

히브리 12:1-3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는 교회력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들이 [교회력](The Chistian Year) 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까운을 입고, 그 위에 색깔 있는 영 대를 두르고, 또 강대상에 드림천을 내리기도 하며, 대강절과 사순절 같은 교회력의 여러 절기들을 구체적으로 지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교회력은 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는데,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루터교를 제외하고) 교회력이 카토릭적인 제도라고하여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력이 사라졌다가, 1940년대부터 다시 교회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력은 한 해동안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한 중요한 계획입니다. 

1. 교회력의 시작과 그 의미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3대 절기인 [유월절][오순절][장막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음을 유월절을 통하여 늘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게 오순절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광야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장막절을 주었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재헌신을 하는 것을 축제라고 한다. 절기는 예배를 축제화 하게 합니 다. 
교회력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감사하며 주님 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주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또 성령을 주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함으로 한 해를 주님을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이 미국으로 가면서 [추수감사절-어버이 주일-어린이 주일]등이 보태졌고 또 한국에 오면서 [송구영신 예배-삼일절-광복절] 등의 예배가 더해 졌습니다. 

2. 구체적인 교회력 

교회력은 [성탄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세 절기를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하여 [대강절]을 설정했습니다. 
한 해를 주님 기다리면서 시작하라는 뜻이고, 또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의 비극을 두 번째 오실 때에 되풀이하지 말자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Christ-mas) 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역사 속에 오셨음 (His-Story)을 축하하면서,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그리스도(Christ)를 예배(Mas) 하게 합니다. 성탄절 후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 비로서 공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여 [현현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순절]을 두었습니다. 40일 간 자기를 살피며 참회하면서, 꾾을 것 끊고, 버릴것은 버림으로 믿음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날로 교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절기입니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부활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주일 밤이나 수요일과 새벽 기도회와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로 한 곳에 모여 10일 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 교화가 탄생한날을 기념하기 위해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은 약 6개월인데 다음 대강절까지를 왕국절 또는 [삼위일체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8월말일까지를 성령강림절로 하고 남은 3개월 동안을 삼위일체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3. 교회력의 색깔과 성서일과 

교회력은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색깔도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색깔이 주는 감정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이것이 정리되기까지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의미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영 대(stoic)와 드림천 (우리 교회에서는 성가대의 스카프와 강단의 주제 글씨 등도) 의 색깔이 대강절과 사순절에는 기다림과 참회의 색깔인 [보라색] 이고, 성탄절과 부활절은 순결과 환희와 승리의 색깔인 [초록색]을 씁니다. 
교회력에는 주님의 일생을 주심으로 성경을 배열해서 3년 주기로 성경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 성경은 [구약-서신-복음서]이렇게 3번을 읽는 것이 전통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이기에 2번 읽는 경우도 있고 , 세 번을 읽을 때에는 그 예언인 [구약]을 먼저 읽고, 복음이 어떻게 삶이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신]들을 읽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설교와는 상관없이 집사들에 의하여 예배 시간에 읽혀졌습니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기 

1. 교회력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합십니까? 
2. 교회력의 골격은 어떤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까? 
3. 교회력의 색갈:보라,흰색,빨강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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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가지

구약장이
~3분

왕이신 하나님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통하여 관계를 확인하시고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제사의 종류를 히브리어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가지

성경에 나타난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히브리어와 그 의미들

우리말 성경에는 "제사"나 "번제" 등의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제사를 뜻하는 히브리어가 다르기 때문에, 제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규례인 제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사용되는 히브리어도 다양한 편입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를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세 개

זֶבַח(쩨바ㅋ흐)

일반적으로 '희생' 혹은 '희생제물'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주로 예물이나 번제물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특히 זבח는 '화목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레위기 17:5,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מִנחָה(민ㅋ하)

일반적으로 '선물', '공물' 혹은 '제물'의 의미를 가진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야곱이 에서에게 주었던 선물을 나타낼 때 사용하거나 신하가 왕에게 드리는 공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도 מנח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미로 쓰일 때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곡식의 형태로 드렸던 '소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또, מנחה는 속죄의 개념은 있지 않으며 화목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5:15, 그의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십 분의 일 에바를 헌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

עֹלָה(올라)

'올라간다'는 뜻의 동사인 'עלה'(알라)에서 나온 명사로, '번제물' 혹은 '번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עלה라는 단어는 번제물을 완전히 불태울 때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עלה라고 표현한다고 일반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제사들 가운데 오직 עלה만이 제물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3: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기타 단어들

그 외에도, "קָרְבָּן"(코르반, 가까이 오게 하다, 레위기 1:2)은 "예물"로 개역개정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으며, "תְּנוּפָה"(테누파, 흔들다, 출 35:22)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예물"로 번역되었지만 '요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또, 출애굽기 25장 2절에서는 "תְּרוּמָה"(테루마)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나오는데, תרומה는 '기증물' 혹은 '헌물'로서 '제사장을 위한 제물의 부위' 혹은 '성전 건축을 위해 드린 헌물'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제사와 관련된 기타 히브리어 단어들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단어들의 히브리어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출애굽기 29장 18절에선 언급된 "אִשָּׁה"(잇샤)라는 단어는 '화제'로서, 불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 이사야 53장 10절에는 "אָשָׁם"(아샴)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속건 제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위반함" 혹은 "유죄" 그리고 "보상이나 배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우상인 바알에게 분향한 것에 대한 책망이 담긴 예레미야 11장 17절에서는 "קָטַר"(카타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의미는 '연기로 올려 보내는 제사' 혹은 '희생제물을 불사르는 제사'입니다.
  • 호세아 8장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지 않으신다는 책망의 말씀을 하면서 사용한 "הַבהָב"(하브하브)가 있는데, 그 의미는 '선물' 혹은 '제물'을 뜻합니다.

화목제(זבח השלמים, 쩨바ㅋ흐 하쉴라밈)의 의미

"זבח"(쩨바ㅋ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예물이나 선물"을 뜻하며 "השלמים"(하쉴라밈)은 "평화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된 상태에서 감사의 마음과 함께 평화의 관계를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제물을 드리는 제사자의 평화의 관계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제물을 나눠 먹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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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예배, 헬라어로 예배, 영어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로 본 예배의 의미 묵상.

우리 모두는 인생에 무엇인가를 쏟아내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크리스천이 평생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쏟아내는 예배. 이 예배의 의미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영어의 단어를 통해 돼새겨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 알아봤어요.

첫 번째로 히브리어로 예배는 한국식 발음으로 아바드와 샤하아가 있어요.

전문적이지 않아서 틀릴 수도 있으니 가볍게 참고만 부탁드려요.

아바드 :

종으로써 주인을 섬긴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좋은 노예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을 의미해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직장, 가정 등 모든 생애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듯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게 돼요.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정성을 다한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세상의 종은 노예로 살게 되지만 하나님의 종은 그분에게 속하게 되어 그분 안에서 자유롭게 되죠.

샤하아 :

경배하다, 부복하다, 굴복하다, 사지를 완전히 엎드리는 것을 말해요. 이 상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보좌만 드러난 상태를 의미해요.

아바드와 샤하아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주권자 되심을 드러내요. 찬양과 경배는 그분을 높여드리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해요. 나의 목소리와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아가는 것. 그분 앞에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닌 나는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 나의 것을 드리면 본전 생각이 나죠.

두 번째로 헬라어로 예배는 프로스퀘네오 라트레이아가 있어요.

프로스퀘네오 :

이 단어는 노예가 주은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말해요. 하지만 이러한 형태로 예배를 규정할 수 없어요. 마리아와 가롯 유다를 보며 예배의 행위로 우리는 배신을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해요. 이것은 정죄하고 넘어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장을 지우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전심으로 나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라트레이아 :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심기는 삶. 즉 주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주님만 사랑하는가? 아니면 우상도 함께 사랑하는가? 주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 수가 성의 여인의 이야기처럼 야곱의 우물 즉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유한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을 말해줘요.

결혼, 건강, 인정, 돈, 음란 이 모든 것보다 내 삶의 모든 것보다 나의 하나님이 크신지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영어로 예배는 worship이에요.

worship은 가치와(worth) + 신분(ship)의 합성으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즉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와 존귀를 돌리는 것을 말해요.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약 노동자의 1년 연봉)의 향유를 깨뜨렸고 유다는 노예 한 명의 가치인 은 30세겔(120데나리온)에 예수님을 넘겨주었어요.

그분은 우리 스스로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며 우리의 인생을 소비하길 원하시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한 분이시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소유를 누리길 원하세요. 그분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비교할 수 없는 선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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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7가지 히브리원어

제이비젼
1~2분

 -'찬양'의 7가지 히브리원어-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말로 쓰여진 말들도 그 히브리원어를 살펴보면 좀더 깊은 찬양의 의미 내지는 방법 등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원어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단어들이 나오지만 이 7가지의 단어가 
가장 대표적으로 쓰인 단어들이라고 합니당

1)할랄(시22:23)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60 여 회) 
*떠들석하게 어리석을 정도로 열광적으로 소리지르다, 으스대다, 빛내다. 
*"할렐루야"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2)테힐라(시34:1, 40:3, 65:2) 
*차원 높은 찬양, 할랄로 노래함 
*열광적인 찬양, 새로운 종류의 노래 
*이 어휘가 쓰여질 때마다 찬양 속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내포해준다. 
*특별한 종류의 노래 
*준비되어지지 않고 연습하지 아니한 노래들(영의 노래) 
*그리스도의 몸에 굉장한 일치(연합)를 가져다준다. 

3)샤박(시63:3) 
*요란한 소리를 하나님을 향해 지름, 외치다. 
*커다란 어조로 소리 치되 승리를 외치고 영광의 소리를 외치다. 

4)자마(시57:7) 
*현악기를 퉁기다, 악기로 하는 찬양. 우리의 음성은 부분적인 악기로 볼 수 있다.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음악을 만든다(한다)는 개념. 

5)야다(시7;17, 138:1, 대하20:19-21)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나 '토다'와는 다른 태도로 함. 
*공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로 찬양하다. 

6)토다(시50:23)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손을 벌려 감사함, 
믿음의 행위로 하는 찬양 

7)바락(시72:15, 103:1-2) 
*축복하다, 경애로 무릎을 꿇다. 
*작은 자가 위대한 자에게 나오다.







죽음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은 200년 넘게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반향 해 왔습니다.
성경 구절에서 죽음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 18:2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 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흙으로 돌아가라(창세기 3:19)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 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22)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경의 완곡 어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 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의를 찾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힘에 대한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여러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들완곡 어더 강하고 가혹한 용어 대신에 죽음에 대한 더 부드럽고 온화한 단어와 문구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죽음의 현실과 그 경험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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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길을 가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다윗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겼습니다. 죽음에 가까워 질 때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 께 충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솔로몬에게 그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데이비드는 '나는 온 땅의 길을 가고있다'( 열왕기 상 2 : 2) . 이 문구는 죽음이 모든 사람, 왕, 하인에게 공통적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인근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진 믿음은 이집트의 왕에 해당하는 파라오가 다시 살 수 있도록 보존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호흡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내면에서 호흡과 생명의 영 사이의 큰 연관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 하셨을 때,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콧 구멍으로들이 마셨고, 그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되었다'( 창세기 2 : 7 NIV) . 죽으면 '우리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12 : 7 NIV)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마지막 숨을 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가 복음 15:37) 그리고 '그의 영을 포기' (마태 복음 27:50).

그의 백성에게 모임

여러 번 성경은 사람들이 '흩어진'다음 다시 함께 '모인'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죽음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채집'을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마지막 숨을 쉬고 노년기, 노인, 삶에 만족하며 죽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모였습니다. ' (창세기 25 : 8 NIV) . 구절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보다 앞서 나간 신자들과 함께 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은 신자의 삶이 끝나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관심과 확신을 불러 일으 킵니다.



마지막 적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죽음이 온 땅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국 죽음이 영원히 멸망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죽음이 멸망 될 마지막 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6).



성경은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종종 죽음과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번역에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는 1,600 개 이상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단어 'maveth'(twm)와 그 파생어를 약 160번 사용하는데, 대부분 시편과 잠언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신약 성경은 죽음을 묘사하는 두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thanatos'(θάνατος)와 'nekros'(νεκρὸς)는 전자와 약 119번입니다.
단어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합니다.
지구상의 생명이 끝난 폭력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이미지 또는 죽음의 종류를 묘사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죽음 중 하나는 사람과 하나님이 분리 된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에덴 동산과 아담과 이브의 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2:16-17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 8:22, 디모데 전서 5:6
개인은 육체적 삶 전반에 걸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되돌릴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적 인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 된 두 번째 유형은 육체로부터 영혼과 영이 분리 된 죽음을 나타냅니다. 육체적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주님이 돌아 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겪지 않았지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개인이라는 두 가지 예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에녹(창세기 5: 23-24) 다른 하나는 엘리야(열왕기하 2:1, 11) .

영원한 죽음 또는 마지막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죽음을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25:41).
죽음은 악마, 악마 추종자, 악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간주됩니다.
마지막 죽음은 고통과 처벌의 장소이며 화재, 고통 및 고통으로 묘사됩니다. 마가복음 9:44-48) .
이것은 종종 신자들의 마지막 집을 묘사하는 '영생'의 배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해를 넓히는 다른 성구들

부드러운 완곡 어법과 여러 유형의 죽음에 대한 설명 외에도 성경은 죽음의 본질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암시하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와는 별도로 이러한 개념은 죽음을 더 잘 보여 주지만 함께 그 효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23rd시편은 장례식에서 말씀을 낭송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 위로와 희망을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을 걸을 때 악이 두렵지 않다'는 말에 집착한다. (시편 23 : 4) . 욥은 자신의 삶의 재난과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것을 더럽 히게하라'고기도했습니다. (욥 3 : 5) . 욥의 외침은 성경에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20 개의 언급 중 첫 번째입니다. 그림자는 그것이 닿는 것에 가까운 모든 것에 어둠을 드리 웁니다.

죽음의 침묵

침묵은 오싹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장소와 상황에서 차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길이가 오래 머무르면 침묵은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줍니다. 우리 친구와 가족의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에 홀로있는 침묵을 피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음을 묘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침묵의 장소로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시편 115 : 17).

죽음은 찌르다

죽음의 힘은 극복 할 수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힘이 찌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 죽음 이여, 당신의 승리는 어디입니까? 오 죽음이 어디 있니? (고린도 전서 15:55).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패배를 확보하셨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승리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17 NIV) . 아담 시대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죄를지었습니다. 로마서 3:23) .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 독자들에게 아담의 죄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5:12) . 그는 죽음을 직장에서 일한 대가로받는 임금과 비교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 로마서 6:23). 죄의 사역 때문에받는 월급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죽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예수님이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죽음을 버리고 생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디모데 후서 1:10) . 히브리 작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학 적 중요성을 공유합니다. '아이들은 살과 피가 있기 때문에 ( 의미 예수 ) 그들의 인간성을 너무나도 공유하여 그의 죽음으로 그는 죽음의 힘을 가진 자, 즉 악마의 힘을 깨뜨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평생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있었습니다. (히브리서 2 : 14-15 NIV).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니 죽는 것이 유익하다'(빌립보서 1:21)라고 적을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진짜이지만 슬픈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욕망은 '[우리] 죽음의 날이 우리 탄생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 : 2) . 죽음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특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위안과 확신과 희망이있을 수 있습니다.


잠들다

성경은 죽음과 수면을 50 번 이상 비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1 세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어로 문자 그대로 '기숙사'또는 '침실'을 의미하는 묘지를 '묘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의 마지막에 부활을 가져 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그의 재림까지 잠의 시간으로 보았다. 그들은 죽음이 신자가 '평안히 쉴'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수면 이미지를 사용한 일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 12 : 2- '땅의 먼지 속에서 잠자는 무리는 깨어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생에, 다른 사람들은 수치와 영원한 경멸을받을 것입니다.'(NIV).
  • 욥기 3 : 11-17- '지금은 평화롭게 누울 것입니다. 나는 잠들고 쉬고있을 것입니다. '(욥 3:13 NIV).
  • 요한 복음 11 : 11-14-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그들에게'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깨우려고 거기에 간다. ' 제자들은 '주님, 자면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가 자연스러운 잠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Lazarus는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NIV).
  • 데살로니가 전서 4 : 15-17- '여호와의 말씀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겨진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우리가 잠든 자들보다 앞서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 전서 4 : 14 NIV).

소천(召天)이란 용어는 성경적인가?

한국에 복음이 들어 온지 138년 
성철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적(入寂)이라 사용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타계 때는 선종(善終)이라고 했는데,
기독교 죽음인 소천이 성경적용어로 합당한지 인터뷰 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소천(召天)의 어원

소천이라는 용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통 상례(喪禮)의례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천이란 용어가 한국어사전, 한자사전 어디에도 기록 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어를 빌려서 만든 글자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에도 없고 정상적인 조어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렀습니다.
소천의 한자적인 뜻을 살펴보면 “부를 소(召)” “하늘 천(天)”자로 구성되어 있는 신조어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천의 어원적 뜻, 즉 소천(召天)은 ‘하나님을 부름’이란 뜻은 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 아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만들려면 차라리 천소(天召)로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학자 정재도선생“소천이란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한자어 ‘승천(昇天)을 본떠 기독교식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어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소천(召天)의 오류

“소천 하셨다”는 문장은 다소 오류가 있다고 필자는 봅니다.
다시 말하면 소천은 아무개가 “하늘(하나님)을 불렀다”라는 뜻이 됩니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하면 아무개가 “소천 함을 당하셨다”거나 “소천 함을 입으셨다”가 더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쉬운 우리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거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라는 표현이 더 나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됩니다.

이 소천이라는 용어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관례화되어 쓰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용어의 오류를 다시 지적하면서 “하나님(하늘)이 부르셨다”라는 뜻은 “소천(召天)”아니라 “천소(天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어와 동사가 뒤바뀐 소천(召天)은 큰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소천(召天)의 근원

1. 소천의 근원은 카톨릭에서 사용되어 기독교로 전해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2. 전통 종교적 사상에서 하늘 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갔다는 이교에서 들어온 용어 중에 하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1675) 북애자가 저술한<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보면,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 지 무릇 궐천년이니--태백산에 올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못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 못을 조천(朝天)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한웅천왕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朝天)는 것에서 우리 민족이 ‘죽었다“는 표현을 왜 ”돌아가셨다“라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천(朝天)에는 우리 민족 조상들의 정신세계에 내재된 신들의 세계 하늘로부터 근원한 우리민족이 죽어서 다시 본 고향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3. 일본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죽음을 승천(昇天)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이상하게도 우리말의 소천(召天)이 일본어로 (쇼오텡)과 발음상으로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천의 근원지를 일본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국전통 상례(喪禮)의 의미

상례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부터 시체를 매장해 묘지를 조성하고 가족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근신해 상복을 입는 방법과 일정한 기간 동안 상복을 다 입고 평상생활로 돌아갈 때까지의 각종 제례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를 말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갈무리하는 예라면 죽음의 예라는 뜻에서 사례(死禮)라고 해야 할 텐데, 사(死)로 쓰지 않고 상(喪)을 써서 상례(喪禮)라고 하는 까닭은 사(死)는 육신이 죽어 썩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사람노릇을 끝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死)는 소인(小人)의 죽음이요 종(終)은 군자(君子)의 죽음을 말하는바 사(死)와 종(終)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뜻인 상(喪)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전통 상례(喪禮)는 슬픔과 예가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용어들

한국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완곡어법을 써서 고인의 신분과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을 쓰는 것이 통례입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별세(別世.  세상을 하직한다는 말로 죽음을 뜻하고), 영면(永眠; 영원히 잠들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하는 말), 작고(作故;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 임금이 세상을 떠남), 불교에서는 입적(入寂; 불교에서 수도승의 죽음을 이르는 말, 또는 열반(涅槃)), 카톨릭에서는 선종(善終;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사람을 이르는 말), 기독교에서는 소천(召天), 등 모두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외에도 사망, 별세. 운명 등 우리말에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고유어로는 ‘죽다’에서부터 ‘숨지다‘., ’돌아가시다‘, ’세상을 뜨다‘.,’숨을 거두다‘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선종(善終)이나 입적(入寂) 열반(涅槃) 등은 정식 단어이지만 유독 소천(召天)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연유에는 '하늘의 부름'으로 쓰는 '소천'이 조어법상으론 '하늘을 부름'이란 뜻이 돼 잘못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냐는 지적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소천(召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최근에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 받고 또한 기독교계의 원로인 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신문 방송에서는 “정진경 ,김준곤 목사님의 소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기독교 신문 방송 기사는 똑 같이 “소천‘이란 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소천이란 용어 사용하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하고 생각 하면서 보편적으로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소천(召天)은 비록 신조어로서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천소을 받았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사전에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하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소천’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언뜻 듣기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생각돼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에도 없고, 어법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장례가 생기면, ‘고인이 소천했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천이란 용어가 국어사전과 한문사전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랜 옛날부터 구전돼 온 것은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에 등록된 신라부터 조선후기의 고문헌을 검색해 봐도 장례를 일컫는 소천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다만, 조선후기 김시습이 지은 매월당집에 ‘하늘의 재앙을 부르다’는 뜻의 ‘소천재’란 말이 사용된 정돕니다.
INT 노성두 / 한국고전번역원

‘소천’이란 말은 한문법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용어입니다.
부를 ‘소’에 하늘 ‘천’, 문법적으로 풀이하자면, ‘부르다’는 동사에 ‘하늘’이 목적어로 붙어 ‘하늘을 부르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이 누군가를 부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늘을 부른 것, 즉 주체가 하늘이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뜻 그대로 ‘하늘이 불렀다’고 표현하자면 ‘천소’가 맞습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일각에서는 단군신화에 ‘환웅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의 ‘조천’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일본인들이 죽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승천’ 즉 ‘쇼오텐’에서 음을 따 ‘소천’으로 발음하게 됐다고 추정,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해석을 내리기도 합니다.

INT 서재생 목사 // 대현교회, 승려출신 목회자
불교에는 타계, 혹은 입적, 천주교에는 선종 등 종교적 의미를 담은 고유한 명칭이 있습니다.
소천이라는 말이 역사도 불분명하고,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의 개발이 절실합니다.


'죽음과 사망' 硏究

1. 성경에서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각각 다른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2. 구약성경에서는 죽음과 사망을 같은 용어로 쓰여진 때도 있고 또 다르게 쓰여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이라는 단어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쓰여진 때가 있는가 하면 죄 값의 형벌인 사망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망도 육신의 죽음일 때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 적이 간혹 있으나 깊이 살펴보면 대부분은 죄 값의 사망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약에서는 죽음과 사망이란 용어를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했으니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사망은 죄 값으로 죽는 그 형벌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구약성경

1)죽으리라(죄 값의 사망)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2)죽었더라(육신의 죽음)

[(창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아담

[(창9: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 노아

[(신34:5-7)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 모세

3)돌아갔더라(육신의 죽음)

[(창25:7-8 )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아브라함

[(창35:28-29)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이삭

[(창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 야곱

4)사망(죄 값의 사망)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사망(육신의 사망)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신약성경

신약성경에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는 육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에 대한 형벌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죽음(육신의 죽음)

[(마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2. 사망(죄 값에 대한 형벌)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기에 사람의 별세는 신, 불신자간에 다 같으나, 죽음 곧 사망은 신, 불신자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의 사망은 심신의 기능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요, 불신자의 사망은 영육 자체와 그 기능이 다 사망을 받습니다.

1, 그러기에 신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성경에 상치가 되는 표현이 됩니다.
더욱이 순교의 죽음을 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더욱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그것은 순교를 했는데 죄의 값을 받았다는 사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상고하여 올바른 용어로 표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죽음과 사망이란 단어가 용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3.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요 하나는 죄의 값인 사망입니다.
순교는 육신의 죽음 형태 중에 한 성격을 표현한 용어입니다.

4. 그러기에 죽음, 사망, 돌아가셨다, 별세, 순교, 소천, 등은 각각 죽음의 형태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상통하기 위해서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도 구분해서 바로 적용하여야 상통에 막히는 오류와 실수가 없겠습니다.

5.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상통하는 용어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 근거가 되어야 하겠고 또 성경을 근거로 하더라도 치우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검색 결과

죽음(53) : 구약 38, 신약 15
사망(118) : 구약 73, 신약 45
죽으매(36) : 구약 32, 신약 4


교회 용어 바로잡기 /  “소천. 증경. 자벽. 고퇴를 아시나요?”

사회자’는‘인도자’
‘헌금’은‘봉헌’으로

교회 안에 비복음적인 언어, 국적 없는 신조어, 잘못 번역된 언어, 무례한 언어, 폭력적 인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용어를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은 한글을 훼손함은 물론 복음과 진리를 왜곡시킨다는 크나큰 우려의 목소리가 있어 왔다. 이런 점에서 최근 에 잘못 사용되고 있는 교회용어를 바로잡자는 움직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 용어 바로잡기 작업을 정리했다. <편집자 주>

교회 용어 바로잡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2년 예장통합총회에서‘기독교 용어 개정안’을상정한 이래 예장합동과 기장 등 각 교단에서 교회용어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또 지난해 말부터 교회문화연구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서도‘교회용어 바로잡기’운동에 동참하면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교회문화연구소(소장: 이의용)는 그동안 수집한 100여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교회용어 바로 쓰기’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잘못된 교회용어 사례들을 공개하고 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이 소장은“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중심이 돼 성경 찬송가 주기도문 사도신경에서부터 잘못된 교회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장이 제시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가 바로 ‘부목사’란 호칭.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르는데, 목회자의 권위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신분의 차이를 두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부목사’를 거쳐야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하는 용어다.
그냥 ‘목사’로 호칭하고, 부득이 구별해야 할 경우엔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부목사’는 권위주의 반영


‘평신도’라는 말도 적절치 않다. 평신도란 말이 교회 안의 낮은 계급으로 인식되고 특별한 계층이 있다는 의미로 왜곡되어 왔다. 평신도란 용어는 거룩한 무리란 뜻이 담긴‘성도’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찬송에‘특별송’과‘보통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용하는 ‘특송’이라는 용어보다 누가 부르든‘찬송’또는‘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소경’, ‘장님’, ‘문둥병자’,‘절뚝발이’등의 표현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써 교회 밖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시각장애인’, ‘나병환자’, ‘지체장애인’등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예배와 관련한 언어의 오용 또한 심각하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 좀 봐주세요”와 같이 잘못된 언어사용은 기독교 교리를 오도할 위험도 있다. 예배는 목사님이 봐주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다. “목사님, 개업 때 예배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옳다. 주일 낮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일컫는‘대예배’란 말 역시 잘못된 용어다. 예배는 등급이나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한 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다. ‘주일 예배’또는‘주일낮 예배’, ‘장년부 예배’로 지칭하면된다.

또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가 아닌 예식이다. 예배의‘사회자’는‘인도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마치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예배를 시작한다는 인상을 준다. 별 다른 이유를 달지 말고 바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서 유래한‘묵도’라는 말은‘묵상’으로 바꿔야 한다.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란 표현은 인도자가 교인들에게‘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성경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적합한 표현이다. ‘헌금’은‘봉헌’으로 바꾸는 것이 합당하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나타내지만.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는‘성도’가 바람직


기도와 관련해서도 잘못된 용어가 많다.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을‘중보자’라고 한다. ‘중보기도’보다는 남을 위한 특별한 기도란 의미의‘이웃을 위한 기도’또는‘도고’라고 하는 것이 맞다. 기도할 때 흔히‘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을 한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따라서‘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란 말은‘하나님, 복을 빌어주시옵소서’란 뜻이 된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하는 어이없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자주 쓰는 말 중‘감사하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셨습니다’등도 잘못된 표현으로 각각‘고마우신 하나님’, ‘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가 어법에 맞다. 또 공개적으로 함께 기도를 할 때‘주여 삼창’을 외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아버지를‘아버지여’라고 부르지 않듯이, 누구를 부를 때 함부로 ‘아무개여’라고 하지 않는다. ‘주님’‘예수님’이라 불러야 한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해 대표기도를해주시겠습니다”란 표현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수 없기 때문에‘대표’나‘대신’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다.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 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교회에서 쓰는 말 중 신조어도 많다. 전도 대상자를 가리키는‘태신자’란 용어는 보편적이지 않은 말이다. 앞으로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기도하는 사람에 대해‘태목사’‘태장로’라고 하면 얼마나 이상한가. ‘불신자’란 용어도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을‘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비신자’라고 하는 것이 좋다.

‘대표 기도’보다 ‘기도 인도’


“모 증경회장이 자벽으로 선출되신 회장에게 고퇴를 물려주고 휘장을 친히 분배했다.”이 문장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증경, 자벽, 고퇴, 휘장 등 전통적으로 써내려 온 회의용어들도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적인 의미도 없고 일반사회에서도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고퇴’는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마치’(망치)가 속되다고 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이다.
‘의사봉’이나 ‘사회봉’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벽’은 <조선철종실록>에 나오는 단어로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없이 자기 사람을 기용한다’는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자벽’보다는 ‘임명’ 이나 ‘지명’이 바람직하다.
중국 고대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로 ‘증경’은 ‘전’으로, 배지를 의미하는‘휘장’은‘꽃’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영결식’, ‘명복’, ‘삼우제’‘추도식’등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타종교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문제다.
‘장례예식’과 ‘하나님의 위로’, ‘첫 성묘’ ‘추모식’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결식’은‘영원한 이별’을, ‘명복’은 죽은 뒤 명계에 가서 받는 복을 뜻하는 타종교의 용어이다.
‘추도’란 ‘슬퍼한다’는 뜻으로,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별세하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어색하다.
‘추도’보다는‘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추모’란 말이 적절하다.

또 ‘재수’ ‘운수’ ‘운명’‘ 도로아미타불‘‘공염불‘‘손이 없는 날’‘사주팔자’‘명당자리’‘신주를 모신다’‘보살 같다’‘부처님 가운데 토막’‘신선놀음’‘도사’‘넋두리’‘도깨비 장난’‘일진’‘살’‘구신 같다’‘액’‘터줏대감’등도 무속이나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 등이 담겨져 있어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

교회생활

부목사 …………………………부교역자, 부목회자
특송 ………………………………………찬송, 찬양
평신도 ……………………………………성도, 신도
소경, 장님 ………………………………시각장애인
문둥병자 …………………한센씨병환자, 나병환자
절뚝발이 ………………………………지체장애인
불신자 ………………………………………비신자
도전을 주셨습니다…내 마음에 도전이 됐습니다
천당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X-mas, 크리스마스
……………………성탄절, 성탄일, 주님 오신 날
교회를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운이 좋았다………………………하나님의 은혜다
태신자 …………………………………전도 대상자
사모 ………………………………………목사 부인
애굽 …………………………………………이집트
다메섹 …………………………………다마스커스

예배 예식관련용어

주여, 예수여 …………………………주님, 예수님
묵도 ……………………………………………묵상
성경 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헌금 ……………………………………………봉헌
임직예배, 결혼예배, 추도예배 등
…………………임직예식, 결혼예식, 추도예식 등
대예배 …………………………주일예배, 장년예배
열린예배 …………………………………열린집회
성가대 ………………………………………찬양대
축제 ……………………………………………잔치
예배 봐준다……………………………예배 드린다

기도관련 용어

감사하신 하나님…………………고마우신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복을 주시옵소서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기도를 인도해 주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주님께서 삶을 주관해 주시고
중보기도
………도고의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청원기도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회의관련 용어

고퇴 …………………………………의사봉, 사회봉
자벽 ………………………………………임명, 지명
증경 ……………………………………………전
휘장 ………………………………………………꽃
사회자 ………………………………………인도자

장례관련 용어

추도식, 제사 …………………………………추모식
소천 ………………………별세, 하나님의 부르심
명복을 빕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삼우제 ………………………………………첫 성묘






죽음(死亡)

죽음, 죽이다, 잠

신약성경에서는 고전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어들이 죽음과 죽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생명을 통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일깨워 준다.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와 관련된 단어들 외에도 원래 의미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또 다른 용어들도 있다.
죽음과 죽는 것에 대한완곡어로서 초기로부터 줄곧 사용된 '잠' sleep(휘프노스[hypnos])이란 용어는 기독교 영역에서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타 용어들로는 카듀도(katheudo : 잠자다 to sleep)와 코이마오마이(koimaomai : 잠들다 to fall asleep)가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것이 시체이거나 또는 무생물체이거나 간에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이다. 텔류타오(teleutao)는 '끝나다' '끝 마치다' come to an end, finish를 의미하며 따라서 '죽다' to die를 의미한다.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폭력으로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다나토스(thanatos)어군과 네크로스(nekros) 어군의 단어들은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독특한 저의를 갖고 있다.

ajpokteivnw, 615

ajpokteivnw, 615(apokteino:, 아포크테이노). 죽이다, 살인하다 kill.

teleutavw, 5053(teleutao:, 텔류타오). 끝나다 come to an end, 죽다 die.

고전 헬라어문헌

1. 동사 아포크테이노(apokteino:, Homer)는 크테이노(kteino:: 죽이다 kill)에서 파생하였으며 타인의 목숨을(후기에는 자신의 생명도) 폭력으로 종식시키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죽이다' kill, have put to death, '살해하다' murder, '처형하다' execute를 의미할 수 있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텔로스(telos: → 목표 Goal, 끝 End)에서 파생했으며 호머(Homer)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입증되고 원래는 '끝내다' bring to an end(예: 어떤 사람의 일), '완성하다' to complete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다. 자동사의 의미로는 '끝나다', '마치다' come to an end, '이행되다', '성취되다' be fulfilled(예: 꿈이)를 의미하여 그 다음에 '죽다' to die, '생명을 잃다' to lose one's life도 나타낸다.

구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70인 역본에서 150회 이상 찾아볼 수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 어근인 하라그(harag: 죽이다 kill)와 무트(mut: 죽다 die, 특히 히필형으로는 죽게 하다 cause to die)를 번역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살인(4:8,가인의 살인), 사형 집행(32:27) 또는 거룩한 전쟁 중에 실시하는 대량 학살(31:7이하; 삼상 15:3)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심판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에도 나타난다(4:10; 9:1; 23:10).

2. 70인 역본 중의 약 70개 용례에서 텔류타오(teleutao:)는 히브리어 무트(mut: 죽다 die)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거의 항상 인간 생명의 만료나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죽음(예: 1:6; 1:2)과 갑작스러운 폭력에 의한 죽음(다나토 텔류테세이[thanato: teleute:sei]: 그가 죽음을 죽을 것이다 he will, or shall, die the death, 19:12; 21:16이하; 9:10)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는다.

신약성경

1. 아포크테이노(apoktein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에서 74회 나오며 특히 4개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15회)에 자주 나오며 5개의 용례만이 (바울) 서신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구절들 중 직접적인 사건 묘사나(14:5, 침례 '요한에 대한 헤롯왕의 의도. 참조: 6:19), 비유(포도원 일군들을 묘사한 12:5이하. 및 병행구들, 참조: 23:37 병행구), 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묵시 중 제자들과 관련된 예언의 말씀(24:9)을 막론하고 이 동사는 거의 항상 하나님의 사자들의 폭력에 의한 죽음을 언급한다. 세 공관 복음서의 수난 예언(8:31; 9:31; 10:34과 유사구절들)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점은 중추적인 의미를 지닌다. (p.3-419*) 죽음을 당하고 공격이(p. 3-419*) 집중된 증인(→ 증거 Witness)은 바로 → 아들 Son이다(참조: 살전 2:15). 요한복음에서는 아포크테이노(apokteino:)가 거의 항상 제테오(ze:teo:: 추구하다, 찾다 seek)나 불류오마이(bouleuomai: 계획하다 plan)와 함께 쓰인 점이 주목된다(예: 7:1; 19이하; 11:53). 제자들도 또한 이런 위협의 영역 안에 처한다(21:31; 23:12-14). 이 점은 특별히 6:11에 지적되어 있다(참조: 11:7에서도 짐승이 두 증인을 죽인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동사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처형과 관련하여 더 자주 사용된다(네 명의 말 탄 자들에 의하여, 6:8; 참조: 9:15-18; 19:21).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후기의 해석에 있어서 2:16은, 예수님이 자기 죽음을 통해 “원수된 것을” “죽였다”고, 다시 말하면 화목을 이루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비유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7:11에서는, 여기에서 하나의 권세로 간주되는 → 죄 Sin(하마르티아[hamartia])가 계명(→ 명령 Commandment; 엔톨레[entole:])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 계명은 인간에게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 갈등은 하나님 앞에 서도록 사람을 속이며 따라서 사망을 초래케 한다. 여기서 계명은 실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율법이다. 고후 3:6에서 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그람마(gramma: 문자 letter)가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는 달리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2. 텔류타오(teleutao:)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11회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중 3회는 구약성경에서 따온 인용구에서 나온다(15:4; 7:10; 9:48). 9:18(부정과거)과 11:39(완료분사)에서 이 동사는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는 점이 주목을 끄는데 이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소녀와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동일한 문맥에서 카듀도(katheudo:) 또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가 사용된 것은 이 사실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 동사는 헤롯 왕의 죽음에도 사용되었으며(2:19) 죽은 형제들의 비유(22:25)와 다윗, 야곱, 요셉(2:29; 7:15; 11:22)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언급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죽다' die를 뜻하는 지배적인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 다나토스[thanatos])이다. - L. Coenen

qavnato", 2288

qavnato", 2288(thanatos 다나토스). 죽음 death.

qanatovw, 2289(thanatoo: 다나토오). 죽이다 kill.

ajqanasiva, 110(athanasia 아다나시아). 불사, 불멸 immortality.

qnhvskw, 2348(thne:sko: 드네스코). 죽다 die.

ajpoqnhvskw, 599(apothne:sko: 아포드네스코). 죽다 die.

sunapoqnhvskw, 4880(synapothne:sko: 쉬나포드네스코).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

qnhtov", 2349(thne:tos 드네토스). 죽을, 죽음의, 죽음을 면치 못할 mortal.

고전 헬라어문헌

다나토스(thanatos, Homer)는 죽는 행동이나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위험, 죽음의 방법, 사형에도 사용된다. 이와 유사하게 다나토오(thanatoo:)는 어떤 사람을 '처형하다' to put someone to death, '죽이다' kill, '죽음의 위험으로 이끌다' lead into mortal danger를 의미한다. 죽음에 예속된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일찍이 호머(Homer) 시대에 드네토스(thne:tos: 죽음을 면치 못할, 죽을 mortal)로 묘사되었다. 인간은 호이 드네토이(hoi thne:toi: 죽음을 면치 못할 존재 the mortals)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신들은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를 소유한 자로 언급되어 있다.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인간이 수많은 불멸의 신들로 승격된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드네스코(thne:sko:: 죽다 die)와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끝나다, 만료되다 expire)(둘 다 호머의 저술에서)는 죽음의 행동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에 관한 언급에서는 복합어형인 쉬나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를 찾아볼 수 있다(Hdt. ; 참조: 과부를 화장하는 인도의 관습). (p.3-420*)

헬레니즘 시대에 다나토스(thanatos), 다나토오(thanatoo:), 드네스코(thne:sko:),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등의 용어들은 지적이고 영적인 죽음에도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1. 헬라인들이 비록 망령(→ 영혼 Soul)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거주하게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Homer, Od. 11, 204-222),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살아 움직이는 활동의 끝, 생명의 종결, 존재의 파멸을 의미했다. 죽음은 인류 공동의 운명이며, 죽음의 부정적인 면은 죽음이 지하세계에서 나온 일종의 악마나 괴물로서 의인화되어 나타날 때, 종종 명백하게 된다(Eur., Alcestis 28이하). 그들은 창조의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그들에게 “왜?” 라는 의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불멸이 선망의 대상이 된 신들의 본질적인 운명인 것처럼 본래부터 모든 사람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 사람의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불평이 자주 표현되어 있다(참조: Homer, Od. 11, 488).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 생명 life(조에[zo:e:])을 마음껏 즐기려는 요구가 대두되었다. 고전 15:32에 바울이 인용한 “재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격언은, 그 문제에 관한 헬라와 로마 사상의 여러 표현들과 일치한다(참조: Eur., Alcestis, 782이하). 제국시대 때 로마 사람의 거실에는 종종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진 해골의 그림이 있었다.이것은 순간의 쾌락도 놓치지 않으려는 하나의 초대장이다. 나이가 인생의 쾌락의 향유를 방해할 경우 사람은 곧 죽는 편이 낫다(Eur., Hecuba, 1104이하). 고대 세계의 큰 묘지들이 도시의 주 도로들을 따라 놓여 있었는데 이는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 즉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을 죽은 자들 가까이에 두기 위한 의도였다. 긴 인생을 누리고 난 후의 고귀한 죽음을 큰 축복으로 간주하였으며(Homer, Od., 11, 134이하) 죽음이 인생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임을 깨달음으로써 또한 위로를 받았다(Eur., Troades, 635이하).

2.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음의 공포는 심사숙고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추구되며 종종 사람은 그의 자녀들 안에 살아있다라는 견해가 나타난다(Mimnermus, Frag., 2, 13이하). 비문과 커다란 장례기념물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이 계속 살아남아 있게 해주며 고인의 행적은 후대에 선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런대로 죽음을 참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있어 유달리 특징적인 것은 죽음을 운명으로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업적의 한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삼는 것이다.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죽든지 또는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하든지 간에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중요하다(Eur., Heraclidae, 533이하). 그러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삶의 업적의 하나로 보일 수 있으므로 그것은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며, 특히 폴리스(→ 사람들 People)를 위한 죽음일 경우 죽은 자의 이름이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Eur., Heraclidae, 621이하).

(a) 플라톤의 사상에서 참다운 삶이란 순수한 자연적 환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쾌락 대신 덕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생활하는 인간에게는 죽음까지도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내가 죽음의 성질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이 생활의 악에서 도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런 철학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평온한 마음은 또한 죽음을 인류의 업적으로 변화시킨다(polis, 80e). 왜냐하면 죽음이란 종종 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쟁터 등에서 비열한 행동의 대가로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Apology, 38e-39b).

(b) 스토아학파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죽음의 본질적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자기자신을 죽음의 과정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 간주할 때 죽음은 그 공포의 힘을 상실한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을 죽음에서 자유를 느끼게 했으며 자기들의 존재를 하나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죽음의 세력에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없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가 진실로 죽은 사람이다(Epict., Dissertatrones, I, 19, 9). (p. 3-421*) 이와 같이 계속하여 자유로운 심정으로, 덕스러운 삶을 따라 평온하게 죽을 것을 각오함으로써 역시 죽음을 인간의 업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Seneca, Letters, 93; 101, 15). 그리고 이러한 업적은 자살을 통하여의식적으로 이룰 수도 있다. “인간이 어디서 끝이 나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원할 때 끝을 내라, 종말이 훌륭한가라는 점만이 중요할 뿐이다”(idem, 77, 20).

3. (a)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들 외에도 때때로 그 태도와 합쳐져 → 영혼 Soul의 불멸에 대한 신앙을 때로는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오르퓨스(Orpheus)교와 피타고라스(Pythagoras) 학파의 신비주의의 확실치 않은 근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플라톤(Plato)이 제일 먼저 그것에 대해 논의했으며 거기에, 도덕적 인격관의 결과인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죽을 때 영혼은 → 몸 Body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인간의 고통 받는 부분에서 고통 없는 것으로 자유롭게 된다(Phaedo, 80c이하). 철학자의 삶은 완전히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는데 전념하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이성 없는 육체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대망의 목표로 간주할 수 있다(Phaedo, 114a 이하). ([편집자주] The Rep., 10, 614-21은 생전의 행위에 대한 상벌과 관련된, 영혼전생[transmigration]설을 담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불멸에 대한 그런 견해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당시에 유행된 그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b) 스토아 학파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멸을 부정했다. 개인의 영혼은 우주에 충만한, 신의 우주적 영혼 속에 가라앉게 된다(→ 땅 Earth, 세상 World).

(c) 동방에서부터 등장한 신비적 종교에서는 인간이 생래적 필멸(mortal) 상태에서 입교의식에 의하여 신적 상태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입교 의식은 모시는 신의 생명력 중 한 몫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d) 영지주의(→ 지식 Knowledge, art. 기노스코[gino:sko:])에서는 플라톤의 온화한 인류학적인 육체-영혼의 이원론이 격화되어 날카롭게 대립되는 우주적 이원론이 되었다. 우주는 악마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며 육체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반면 영혼은 우주와는 분리된 → 빛 Light과 → 생명 Life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육체에 감금되었다. 실제적 죽음은 육체에 있어서는 생명이다. 육체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e)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는 플라톤의 견해와 영지주의의 신화가 결합되어 하나의 이론체계를 형성하였는데 이 이론에서는 감각세계를 넘어선 영혼의 여행 및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와 상승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immortality)가 헬레니즘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에서만 나타나는 것(솔로몬의 지혜서, 마카베오 4서)을 제외하면 이 어군의 모든 단어들을 70인 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의 용법은 고전 헬라어 문헌의 그것과 아주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다. 이 용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 상당어구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웨트(mawet: 죽음 death)나 무트(mut: 죽다 to die, 죽이다 kill)이다.

1. (a) 구약성경의 사상에 있어 죽음은 인간의 존재의 최후를 의미한다(삼하 12:15). “우리는 …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 사람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므로 마땅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3:19). 일단 영혼 혹은 망령이 스올(Sheol, → 지옥 Hell, art. 하데스[hade:s])에 내려가면 생명은 결코 되돌아 올 수 없다. 특히 이 점은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로부터의 분리를 죽음이 초래한다는 빈번한 불평에서 명백히 드러난다(6:5; 30:9; 88:5; 88:10이하; 38:11). 인간은 죽음의 공통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할 뿐이지 선택권은 없다(3:19; 집회서 14:18이하; 41:1-4). 만약 하나님이 그에게 장수를 허락하신다면 그래서 그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것을 성취한다면 그는 감사하고 만족해 한다(91:16; 15:15). 이것은 인간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탄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시 90). 삶이 병과 고생으로 망쳐졌을 경우 인간은, 마치 죽음이 인생의 여기저기에(p. 3-422*) 돌출해 있는 것과 같은 죽음과 지옥의 덫에 대해 기도를 할 수 있다(116:3; 116:8). 그러나 죽음이 본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두려워하게 된 것은 악이거나, 또는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 죄 Guilt에 대한 하나님의 → 징벌 Punishment을 뜻하는, 일찍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의 백성들의 사회에서 깨끗하게 없애기 위하여 죽음으로 개인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사회 자체가 개인을 정죄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성 전체에 미치는 → 심판 Judgment을 막기 위해서이다(신 13).

(b) 죽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멸은 창조적 의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은 불순종이라는 분명한 행동 때문에 일찍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타락 후에 그는 단지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라는 벌을 받았을 뿐이다. 시 90에서는 타락의 기사를 시사하고 있으며 → 죄 Sin와 죽음의 연관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거기의 사상에서도 인간의 죄에서 기인된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덧없이 빨리 지나가는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참조: 시 51; 14:2). 따라서 비록 죄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유일한 예외는 “승천”의 경우들임) 아담의 죄와 죽음의 결과로서 죽음이 유전된다는 언급은, 원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중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제일차적인 것은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 백성(→ 언약 Covenant; → 이스라엘 Israel) 간의 관계이므로 죽음은 믿음에 대한 위협을 제시하지 못하며 “왜?” 라는 의문이 죽음에 관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c) 더군다나 개인은 생명을 부여 받은 것이며 여호와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만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영웅적 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거나 또는 일어날 수 있다는 사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이 매우 민감하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알게 되는 경우라도 자살에의 유혹은, 자살이 일종의 인생의 부정일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또는 “훌륭한” 죽음을 원하는 욕망에 의해 억제된다. 사울이 전쟁에 패배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들이 죽은 후 자살했을 때도 이것이 그의 생명의 영웅적인 결말이라는 암시는전혀 없다(삼상 31; 참조: Ahithophel, 삼하 17:23).

(d) 간혹 여호와가 음부의 주(Lord)로 간주되기도 한다(139:8).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라도 여호와께 온전한 신뢰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73:23이하; 19:25). 후기의 → 부활 Resurrection 교리가 바로 이러한 구절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a)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여호와의 백성(→ 사람들 People)과 → 언약 Covenant 개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토라(Torah)에 대한 믿음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인화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31:29이하; 18:2).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죽음이 하나의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이 인간의 운명에적합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기원을 인간의 죄 속에서 추적하였다. 때 아닌 때 죽음뿐 아니라 죽음은 모두 죄로 인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창 2장과 창 3장의 타락기사에 관한 여호와 문서 기자의 전승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몇몇 학자들이 생각하였던 바로 그런 사상 경향이, 이 시기에는 강력한 형태로 확대되었다. 아담은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당신은그에게 당신의 금령(禁令)을 꼭 하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금령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즉시 당신은 곧 그와 그의 후예를 죽음으로 정하셨습니다”(에스드라하 3:7). “죄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여자로 인하여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집회서 25:24). 죄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아담에 의해 초래된 공통적 죽음의 운명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이런 동등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다(참조: 예: 시리아어 바룩묵시록 54:19: “아담은 자기자신의 영혼에만 책임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가 한 사람의 아담이 되었다” 그 외의 자료로는 SBI 815이하; Ⅲ 227이하가 있음).

(b) 이처럼 죽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운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닥쳐온 것으로 생각된 이상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이다. (p.3-423*) 따라서 유대의 묵시문헌에서, 세상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과 그 나라에서는 죄가 정복되고 죽음이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은26:1912:2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후에 이란의 사상의 도움으로 공식화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전 세대를 위해서도 신의 새로운 창조 행위로 죽음이 굴복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의인은 영생에 들어갈 것이며 의롭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죽음에 떨어질 것이다(에스드라하 7:31이하). → 부활 Resurrection art. anastasis, 구약성경)의 교리는 자연히 논쟁의 주제로 남았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지지했으며 사두개인들은 반대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부활될 것인지 혹은 이방인들도 부활될 것인지, 의인만 부활될 것인지 또는 의롭지 못한 사람도 부활될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분했다(후자의 경우는 심판을 받기 위해).

(c) 죽음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견해가 이러한 부활 사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비관적이 될 수도 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고전 3:19이하).

(d) 비유적인 의미로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면이 또한 증가한다. 30:15에서 우리는 이미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에서 죽음에 대한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참조: 21:8).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또는(에스겔서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때(18:21이하., 18:31이하)는 언제나 죽음이 발생한다. 여기서 죽음으로 간주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 관계의 파기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은 → 생명 Life으로 여겨진다.

(e) [편집자주] 19:25 이하에 함축된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하여는 로울리의 저서(H. H. Rowley, Job, 1970, 172이하)를 참조하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내가 육체 밖에서(RSV, without my flesh; 난외주, from my flesh; 히브리어: 밉베사리[mibbesari]) 하나님을 보리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현세에서의 욥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지만 로울리(Rowley)는, 그 앞의 구절들에서 욥이 금세에서의 자기의 정당성 입증에 대해 희망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이 구절이 사후 변호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3. 헬레니즘 시대를 특징 지우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변하여 인간 중심적인 영역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이원론적 사상이 다소간에 유대교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a) 따라서 → 영혼 Soul은 '불멸'로 간주되었다(솔로몬의 지혜서 3:4; 4:1; 15:3). 부활의 사상이 완전히 배제되고 영원한 비육체적 존재가 사후에 즉시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경우(마카베오 사서 16:13; 17:12)를 제외하고, 영혼은 하늘의 처소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머무르게 된다는 사상이 존재하였다(에디오피아어 에녹서 102이하; 에스드라하 7:88이하).

(b) 헬라 철학이 미친 영향으로 인한 또 하나의 결과는, 유대인 순교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과 이에 따라순교자들의 죽음이 영광스럽고(마카베오 사서 10:1) 덕스러운(마카베오 이서 6:31) 행위로서 찬양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c) 필로(Philo)는 육체를 영혼의, “약한 그리고 죽은 동료”로 묘사했으며 그래서 육체의 죽음, 즉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하는 것을 일종의 해방의 행동으로 보았다(Leg. All., 1, 107). 그는 헬라사상을 수용하여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사(死)를 경시하며 실제의 죽음을,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여 온갖 종류의 정욕과 악한 것들 밑에 영혼을 매장하는 상태로 간주한다(Leg. All. 1, 105이하).

(d) 요세푸스(Josephus)의 저서에, 유대 사령관 엘레아잘(Eleazar)이 마사다(Masada)의 요새에서 로마인들에게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을 설득한 장면이 나오는데 말하자면 이는 요세푸스가 엘레아잘(Eleazdr)로 하여금 통상적인 헬라적 사고방식을 구사하게 했다 하겠다. (p.3-424*) 명예롭게 살수 없다면 차라리 용감하게 죽어야 한다(War, 7, 341). 그렇게 훌륭하고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War, 7, 325이하)은 그러한 용기에 대한 경의를 뒤에 남기는 것이다(War, 7, 388).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죽는 자는 행운아로 여겨야 마땅하다(War, 7, 372). 더욱이 죽음은 영혼에게, 죽을 육체가 소유한 악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며-육체에 구속된 영혼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영혼을 본래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War, 7, 341이하).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War, 7, 340).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다나토스(thanatos: 죽음 death)는 약 120회 정도 나온다.
복음서에서는 거의 대부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바울의 저술에서는 주로 인류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나토오(thanatoo:: 죽이다 kill)는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11회 나타나며 드네토스(thne:tos: 죽을 운명의 mortal)는 6회 나오는데 모두 바울의 저술에서 사용되었다. 아포드네스코(apothne:sko:: 죽다 die)는 신약성경에서 113회 사용된다(드네스코 thne:sko: 는 6회 사용). 공관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는 드물게 사용된다. 그러나 한편 바울의 저서에서, 이 단어는 바울 이전의 통상적인 신앙고백 문구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5:8)이다. 쉰아포드네스코(synapothne:sko:: 어떤 사람과 함께 죽다 die together with someone)는 14:31; 고후 7:3; 딤후 2:11에 나온다. 마지막 예문에서만 이 단어가 기독론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아다나시아(athanasia: 불멸, 불사 immortality)는 3회 나온다. 고전 15:53 이하는 묵시적인 문맥 중 불멸을 “입는다 put on”라고 표현한다. 딤전 6:16에서 하나님만이 불멸을 소유한 유일한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1.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견해는 옛 유대의 견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교가 받은 헬레니즘적 영향은 거의 그 효과를 미치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견해가 유지되었다.드네토스(thne:tos: 죽을, 죽을 운명의 mortal)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마다 이 단어는 인간의 필멸성이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짐을 시사해 준다. 인간은 사망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4:16; 9:1 70인 역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불멸성을 가진 유일한 분(딤전 6:16)이신 반면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2:15). 유대교에서와 같이 죽음은 항상 개개인의 죽음으로 생각되며, 공동체의 존속적 생명을 언급함으로써 죽음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신약성경의 사상과 이질적인 것이다.

(a) 사실이 그렇다면 무엇이 죽음을 야기시키는가 라는 문제에 자연히 중요성이 부여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바울이 요약해 놓았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요”(6:23)이다.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마귀(사탄 Satan)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로 간주된다(2:14). 그러나 물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지옥 속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10:28; 2:23).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이유에 대한 문제가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이 학문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음을 우리가 명백히 알게 된 것은 죽음과의 관련성에서이다. 그 문제는 답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음을 하나의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학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죽음의 보편성 속에서 인간 유죄의 보편성과 구속의 보편적 필요성이 명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4:17)이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경우 인간은 자기자신을 그의 생명의 근본에서 잘라냄으로써 죽음에 예속하게 된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죽음의 현상은 인간 평생의 객관적인 상태를 밝혀 준다. 창조된 것, 즉 인간이 통제하는 자연적인 것에 의해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진정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시켰으며 따라서 자기자신을 가치 없는 것에다 넘겨주었다. 죽음을 향하여 진행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자기생명의 근본상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안에서 죄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생명을 다스리는 힘이며 따라서 급기야는 하나의 현재적 실체이다.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죄 속에 있는 한 삶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p.3-425*) 이것은 죄인에게 다음과 같이 울부짖게 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죽은 dead(→ 네크로스 nekros, 15:24; 15:32)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도 동일한 측면에서이다. 4 복음서에서도 또한 죽음과 생명이 존재의 현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자기존재의 신적 갈림길이되시는 예수님께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5:24; 8:51; 11:25).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서자기자신을 단절한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있는 사람이다(3:2).

(b) 인간의 유죄 상태와 필멸적 운명의 관계에 대하여 신약성경 기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숙고한 사람이 바울이다. 롬 1-4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구별 없이 죄를 지었으며 따라서 죽음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로 부름 받는다는 점을 여러 가지 논법으로 증명한 후 바울은 계속하여 5:12-21에서 이 논제들을 → 아담 Adam-그리스도 예포론의 도움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래된 생명은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5:12; 참조: 고전 15:21이하)라는 사실과 유사성을 지닌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으며 따라서 죄의 결과인 죽음이 단순히 우리 인간에게 유전되어 온 운명이라는 사상을 배격한다. 그는 죽음의 동적인 성격과 죽음이 개개인 자신들의 죄로 인한 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참조: G. Bornkamm, Aufsatze, I, 84이하).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와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술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승리인 구원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단지 인간 외부에서와 인간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항상 자기 자신의 행위(→ 일하다 Work)를 통하여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구원의 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이용할 때마다 죽음을 발견할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 율법 Law, → 죄 Sin 그리고 죽음은 모두 동등한 차원에 놓여 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16). 그러므로 율법에 근거하여 생명을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현 실체가 된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9이하).

만약 죽음이 인간의 죄의 역사적 결과로 간주된다면 인간의 죽음과 살아있는 다른 피조물들의 죽음의 “자연적” 연관성은, 인간이 아닌 생물들도 왜 똑같이 죽음에 예속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 당시 유대교의 사상과 같은 선에서(Gen. R. 12:5) “피조물”(→ 창조 Creation)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닌 인간의 죄의 결과로 허무한 것과 일시적인 것에 예속되었다고 대답한다. 피조물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8:19-22). 따라서 바울은 자연계의 죽음까지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c) 우리가 이제까지 언급해 온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간의 유죄상태를 명백히 나타내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서 죽음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간을 노예화하는 한 힘으로 여겨진다(2:15), 그러므로 죽음은 때때로 의인적 형태로 나타난다(20:14). 따라서 죽음의 불가피성에 관한 지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또는 영웅적인 죽음의 행위를 통하여 죽음의 공포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신약성경에서는 배제된다. 후자의 방법의 결과 오히려 죄를 강화시켰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인간 노력의 모든 태도를 하나하나 명확히 정죄할 때까지도, 다시 말해 인간이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진술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기사의 핵심점이다(→ 십자가 Cross, art. stauros, 신약성경 2). 이 진술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 부활 Resurrection과 믿는 자들의 칭의 또는 새 → 생명 Life에 대한 진술들과 거의 항상 연관되어 나타난다.

(a)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 문구들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보이시고”(고전 15:3이하),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p. 3-426*)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라고 진술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죽음대로 죽으셨으며(2:7이하; 2:1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초기의 신앙고백 문구가 지적해 주듯이 그는 실제로 죽었다(고전 15:3이하). 이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며(5:6이하; 살전 5:10; 2:9이하; 10:45),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진술들에 의하여 여러 방면으로 강조된 가르침이다(예: 고후 5:14이하; 벧전 3:18). 그의 죽음은 율법(7:4; 참조: 2:21), 죄(고후 5:21; 1:22; → 화해 Reconciliation), 우리의 죽음(5:9; 딤후 1:10; 2:14이하; 1:17이하)을 정복한다. 죽었다가 부활한 분이시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오실 분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된 것은 이 승리를 명백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며, (고전 11:26; 고후 5:14) 또한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2:21).

(b) 죽음에 대한 승리의 이 복음은 다른 많은 종류의 언어로 표현된다. 초창기에 널리 퍼졌던 하나의 개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 53에서 취한 개념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죄를 도말하는 화해의 희생제사로 본 것이다(→ 화해 Reconciliation, art. hilaskomai: 3:25이하; 바울 이전의 상용문구; 고전 11:42이하; 바울 이전의 성찬식 용어; 참조: 1:7; 벧전 1:18이하). 여기서 언약의 희생(14:24; 13:20)과 유월절 희생(고전 5:7)에 대한 구약의 사상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종의 대리 희생으로 보는(고후 5:21) 그와 관련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노예의 법에서 나타나는 개념인 속전(ransom)의 개념도 역시 빈번하게 나오지만 이것의 기독론적인 용법에서는 강력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구속 Redemption, art. lytron: 참조: 10:45; 3:13; 벧후 2:1).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은 죽음을 당한 구속자가 음부로 내려간다는 개념인데 거기서 마귀를 이기고 사람들을 그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2:14이하; 1:17이하; 참조: 벧전 3:19이하; 참조: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19722, 378-88).

제사와 법률 분야(화해, 속전, 대리)에서 차용한 언어의 어려움은 차용어가 과거의 유죄(guilt)의 짐으로부터, 그리고 그러한 유죄로 인한 벌인 미래에 닥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만을 표현하는데 있다. 그것은, 현재가 죄나 → 의 Righteousness의 영역, 죽음이나 생명의 영역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c) 그러므로 바울의 저서에서는 제사와 법률 분야에서 끌어온 신학적인 표현뿐 아니라 신비종교들과 영지주의의 언어도 사용하는데 이러한 종교들에 의해 제공된 영역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생명에 가져오는 효과를 아주 명확히 표현시켜 주기 때문이다([편집자주] Schmithals는 다음 저서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다: Gnosticism in Corinth, 1971과 Paul and the Gnostics, 1972. E. Yamanchi, Pre-Christian Gnosticism, 1973에서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영지주의를 본질상 기독교 이후의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 배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참조: F. L. Cross, ed., The Jung Codex, 1955. U. Bianchic, ed., Origins of Gnosticism, 1967. 신비종교들에 대하여는 G. Wagner, Pauline Baptism and the Mystery Religions, 1967; → 침례 Baptism). 신비종교들의 언어는 특히 → 침례 Baptism의 의미와 관련하여 발견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6:3이하).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찾을 기회의 영역이 되는 세상에 대하여(6:14), 세상의 예속화 시키는 권세들에 대하여(2:20; → 율법 Law), 율법의 노예 상태에 대하여(7:6), 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6:6),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대하여(고후 5:14이하)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구속자와 구속 받은 자의 본질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는 영지주의의 언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후 4:10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참조: 1:24).

(d) 바울 및 바울 이전의 전승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죽음의 세상에 예수님이(p. 3-427*) 오신(→ 오다 Come, art. erchomai) 전체 사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 십자가 Cross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로고스 Logos(→ 말씀 Word)의 성육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동시에 하나의 승귀로 볼 때 이것은 죽음을 이긴 보편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신적 증거다(12:33; 18:32).

(e) 그 시대의 종교적인 개념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한 방법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일차적으로 하나의 전기적인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어 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선한 대의명분을 위한 고귀한 사람이나 순교자의 죽음, 또는 정치적인 반역자의 죽음이나 재판의 부정함을 인한 희생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구원역사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사건으로 보며 그렇게 선포된다(6:10).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여러 진술들은 공통적으로 그 죽음을 “~을 대신한” 죽음으로 선포하고 있다(우리를 위하여, 5:8; 고전 15:3;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10:45; 14:24, 병행구절 26:28; 9:28; 10:15; “너희를 위하여” 고전 11:24, 참조: 22:19이하). 여기서의 의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함으로써 죄의 권세를 깨뜨려 죽음을 초래하는 → 율법 Law의 권세를 벗기며 율법의 효력이 끝나게 하고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그 권능을 빼앗는다는 것을 선포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가 있는 장소, 다시 말하면 죽음에서 찾으려 하며 자신을 생명의 근본으로 내어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독선으로 인한 근본적 죄를 범하게 만드는 강요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은 무죄로 방면되어(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됨), 적절한 창조의 신분을 부여 받으며(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새 생명을 부여 받는다.

3.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미 사망(또는 율법이나 죄)이 패배했다는 점과 이에 따라 생명의 약속이 현재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영지주의와 신비종교들로부터 취한 말들이 특별히 사용하였다.

(a) 예를 들어 바울의 저서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들을 비교하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0이하).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19이하).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 의문에 순종하느냐”(2:20).

이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수치”를 극복한 경우, 즉 인간이 그의 “옛” 자아, 즉 “옛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생명을 찾으려는 욕망이나 상상에 의한 의무감을 죽음에다 내어준 경우에는 곧 그리스도를 바로 여기에서 지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경험한다(참조: 고전 1:23이하). 참된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생명이며 자기자신이 자주적으로 성취하려는 의무감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b) 요한이 특별히 강조한 말씀들에서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요일 3:14). 자기자신을 계속 의롭게 하고자 하는(죽음을 가져오는) 의무적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죽음, 바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자신을 조건 없이 자기이웃에게 내어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c) 공관복음서에서 죽음이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은 특히 이적을 담고 있는 가시들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죽은 자의 소생을 수록한 기사들에 의하여 예증되고 있다.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5:36)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죽음의(p. 3-428*) 운명으로부터의 구원으로, 그리고 참된 생명의 시작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d) 그리스도인의 경우 여기에서 지금 죽음이 패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마침내 죽음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결과다. 그 이유는 사도의 가르침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죄의 권세가 파괴되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구원받고 그리하여 이미 그가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육체의 죽음이 인간을 계속 지배한다는 사실은 죄와 죽음 사이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신약사상의 초기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구별되지는 않았지만 죽음은 그 어떤 의미에서든 죄에 그 기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의 실태에 대한 고찰은 결과적으로 차이점이 주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자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지만(“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5:13) 그래도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든 죽음을 예상하고 있을 동안에는이 현상을 간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여러 가지 답이 주어졌다.

(a) 바울로서는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현상이 심판에 관하여 안전하다라는 생각을 경계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며 “이미 지금 now already”이라든가“아직 아니 not yet”라는 변증법을 전개한다. “최후의 적”인 죽음이 최후 마지막에 패배하기 위하여 남아 있다면(고전 15:26) 인간에게 아직 위험은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뜻대로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하여 완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원에 대한 말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과 더불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성령(→ 영 Spirit)을 받았지만 자기 육체의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다리고 있다(8:23; 고전 15:53). 죽음을 극복하는 미래에 있을 이 승리에 대한 기대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신앙을 확고하게 형성하는데, 이 부활은 바울에 의하면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전 15:12이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이 기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4:17)에 대한 소망이 믿음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후 5:1-10; 5:1-5). 신자라도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이하)는 확신은 다음과 같은 신자의 승리의 노래와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이 사상은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전개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죽는 것으로 간주하는 법을 배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또한 구원과 영생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난과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이다(고후 4:11이하; 1:20; 8:36이하).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죽음을 단순히 죽을 육체를 버리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누가는 이 사상을 독특한 방법으로 전개시켜 예수님의 죽음을 순교의 한 예로서 묘사하며, 스데반의 순교를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았다는 관점에서 묘사한다(7:54이하). 그가 물론 완전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무시하고 그런 사상을 전개하지만 여기서 그의 목적은 그 시대의 순교자들에게 그들이 겪어야만 할 죽음을 보는 긍정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려는 것이다.

(b) 요한은 신앙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광범위한 신학적 고찰 대상으로는 삼지 않는다. 그의 저서에서는 구원의 현재시제가 매우 철저하게 강조된 나머지 심판과 부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와 죽음 사이의 관련성까지도 함께 사라진다(5:28이하는 예외). 믿는 자들은 심판을 겪었으며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0:28). 그러므로 14:2 이하에서 우리는, 귀환 하시는 아들에 의해 아버지 집의 “거할 곳들”로 영접된다는 말씀을 읽어볼 수 있다. (p. 3-429*)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신자들의 죽음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c) 신약성경의 후기 저술들과 공관복음서에서까지, 우리가 요한의 저술들과 바울의 초기서신들에서 본 것처럼, 구원과 심판, 생명과 사망의 변증법에 대한 동일하고 강력한 관심을 찾아볼 수 없다(참조: 딤후 4:7이하; 3:7이하; 벧후 3:11이하). 구원의 현재적 경험에 대한 강조는 후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강력하고도 도덕적인 해석으로 점진적으로 대체되며 결과적으로 육체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에 은혜를 얻는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 2:11). 이와 같이 믿는 자도 심판에 임할 것이며 또한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를 것이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정죄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사망의 개념이 왜 생기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이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20:13이하).

(d) 동시에 또 다른 전승들은 공히,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인도하며 따라서 모든 생명의 출처이자 근원이 되시는 분께로 인도한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러한 사실을 넘어설 수 없음을 주장함과 동시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 이하의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면 안 된다고 역설함으로써, 특별히 기독교적 사망관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이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14: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이하; 참조: 1:20; 살전 4:13이하; 12:24-26; 14:13). W. Schmithals

kaqeuvdw, 2518

kaqeuvdw, 2518(katheudo:, 카듀도). 잠자다 sleep.

koimavw, 2837(koimaomai, 코이마오마이). 잠자다 sleep, 잠들다 fall asleep.

u{pno", 5258(hypnos, 휘프노스). 잠 sleep.

고전 헬라어문헌

1. 카듀도(katheudo:)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오직 '잠자다' sleep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반면 케이마이(keimai: 눕다 to lie)에서 파생한 동사 코이마오(koimao:)는 그 기본 의미로서 '(스스로를) 잠재우다', '잠자다' to lull(oneself), '잠들다' to sink into sleep를 뜻한다(Homer, IL., 11, 241). 특히 중간태나 수동태 형에서는 이 단어가 '자연스러운 잠' natural sleep이나, (설명 어구와 함께 또는 설명 어구 없이) '죽음' dying에 사용될 수 있다. 이 단어가 성적인 의미, 즉 '동침하다' to sleep together with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2. 휘프노스(hypnos; 인도-게르만어 supnos; 라틴어 sopor)는 호머 이후 '자연스럽게 오는 잠' natural sleep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데 이러한 잠은 사람을 상쾌하게 하거나 잠에 취하게 하여 그날의 무거운 짐을 잊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 우리는 활동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육체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철학자들이나 종교사상가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어떤 추론을 끌어내게 만들었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 연루되어 있는 상태인 깨어있는 의식상태와 동일시되는 것이므로 잠은 불가피하게 쓸모 없는 것으로, 방해스러운 것으로, 품위를 떨어드리는 것으로, 동물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일찍이 Heraclitus의 저술에서, 그리고 특히 Plato의 저술에서, 예: Plato, Republic, 9, 571c; 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95). 잠과 죽음 사이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신화에서 휘프노스(Hypnos)가 신 다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Homer, Ⅱ., 16, 671이하). 초기의 의술에서는 잠자는 것을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죽지 않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중간적, 물리적 단계라고 생각했다(참조: Aristotle, De somno et vigilia, p 453b 11이하). (p. 3-430*) 그러나 이 표현이 죽음을 뜻하는 완곡어법으로 사용한 것은 B. C. 2세기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후 1세기와 2세기 경에는 이러한 용법이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참조: E. Peek가 수집한 명문들, Griechische Grabgedichte, 1960). 이것은 그 용법이 헬레니즘 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

1. (a) 70인 역본에서 카듀도(katheudo:, 36회)는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 눕다 to lie down)를 번역하는데 사용된다(예: 삼상 3:2이하).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오는 잠'을 가리키며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이 명사 휘프노스(hypnos)에도적용된다. 휘프노스(hypnos)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셰나(shena': 잠자다 sleep)의 역어로 쓰이지만 51:39(휘프논 아이오니온[hypnon aio:nion]: 영원한 잠, 죽음 eternal sleep)과 14:12은 예외이다. 14:12도 문맥상(“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이 명사형과 명사형에서 파생한 동사 휘프노오(hypnoo:)가 죽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13:3, 휘프노소 에이스 다나톤[hypno:so: eis thanaton: 사망의 잠을 자다 to fall asleep into death]. 동사 휘프노오(hypnoo:: 잠자다 sleep)는 약 80회 등장한다.

(b)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그 양상이 다르다(약 150회. 이것 역시 주로 히브리어 샤카브[shakab]의 역어). 능동태 형은 오직 24:11왕상 17: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눕다' to lay down, 또는 '눕히다' make to lie down를 의미한다. 그 외에는 이 단어를 중간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눕다, 자다 lie down, 진을 치다 encamp, 눕다 lie). 그러므로 이 단어는 '잠자다' sleep를 의미하게 된다(예: 삼상 3:9, 카듀도[katheudo:]처럼). 특히 모세 5경에서는(코이마오마이 메타[koimaomai meta], 예: 19:32이하) 이 단어가 '함께 잠을 자다' sleep together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의 후기 기사들, 특히 역사적인 기사에 있어서 이 단어는 명예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죽다' to die라는 뜻을 획득하였다(예: 에코이메데 메타 톤 파테론 아우투[ekoime:the: meta to:n patero:n autou: 그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왕하, 대하에서 36회의 용례. 예: 왕하 14:16; 왕하 14:22; 왕하 14:29; 왕하 15:7; 왕하 15:22; 왕하 15:38; 대하 26:2; 대하 26:23). 이리하여 이 단어는 또한 아무런 설명구 없이 이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32:19이하; 14:12;'43:17; 50:11). 초기 문헌에서 이 단어는 이런의미로 간혹 사용되고 있다(예: 47:3; 5:27).

2. '죽다' to die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사카브(shakab)가 유대 랍비들에 의해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카듀도(katheudo:)와 휘프노스(hypnos)를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식' knowledge이나 '근신' watchfulness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육체적인 의미의 잠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일찍이 잇사갈의 유훈(Test. Iss) 9:9에서 이미 이 개념이 휘프노스 아이오니오스(hypnos aio:nios: 영원한 잠 eternal sleep, 다시 말하자면 죽음의 잠 sleepof death)이라는 형태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이 잠에서부터 고인이 깨어날 것이라는 저의가 함축되어 있다(참조: Test. Jud. 25:4, 엑쉬프니조[exhypnizo:]). 소위 중간 상태라고 불리우는 죽음(→ 영혼 Soul 구약성경)의 잠이라는 이 개념은 특히 유대 묵시문헌에서 더욱 발달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예: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91:10; 92:3)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약성경이 주는 가르침의 배경을 이룬다.

신약성경

1. 명사 휘프노스(hypnos: 잠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5회)와 동사 카듀도(katheudo:: 잠자다 to sleep)는 항상 문자 그대로 잠자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예: 1:24; 9:32; 11:13). 그러나 겟세마네 현장(26:40; 14:37; 22:45)과 살전 5:6에서 잠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근신의 결핍을 나타낸다. 한편 동사 코이마오마이(koimaomai: 잠자다 sleep;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중간태로만 사용)는 18회의 용례 중 15회가 '죽다' die를 의미한다. 오직 28:13; 22:4512:6에서만 이 단어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잠자다' to sleep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p. 3-431*) 비유적인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바울이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잠자고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죽은 사람을 묘사하기 위하여 분사 형태를 사용한다. 살전 4:13-15과 다시 고전 15:18; 고전 15:20에서 이 분사형들이, 예수님에 의한 죽은 자의 → 부활 Resurrection 또는 죽은 자의 다시 깨어남에 관한 문장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문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이와 동일한 것이 27:52이다. 잠과 죽음 사이에 공존하는 의미가 일찍이 호머(Homer)에게서도 이미 증명되며 70인 역본에서도 증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관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새 생명에로 부름 받을 사람과 이미 “잠든” 즉 죽은 사람을 동일시하려는 목적에 잘 부합된다.

고전 7:39; 고전 15:6; 고전 15:51에 나오는 코이마오마이(koimaomai)는 '죽다' to die의 정확한 상당어구로 사용되었다(참조: 7:60; 13:36; 벧후 3:4의 “조상”). 요한은 나사로의 부활기사인 11:11-14에서 제자들의 그릇된 이해를 보여주기 위하여 순전히 의도적으로 이 동사에 대한 고대의애매모호성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은 치유를 가져올 일종의 잠을 예수님이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도 아마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적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에 주의를 집중시키려 한 것이다. 이 권세를 이긴 자에게는 다나토스(thanatos)가 휘프노스(hypnos)에 지나지 않는다.

2. 살전 5:10에서만이 카듀도(katheudo:)가 죽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9:24과 그 병행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아페다넨(apethanen: 그녀가 죽었다)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아이의 상태가 예수님께는 최후의 되불러올 수 없는 상태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이다. L. Coenen

nekrov", 3498

nekrov", 3498(nekros, 네크로스). 죽은 dead, 죽은 사람 dead person.

nekrovw, 3499(nekroo:, 네크로오). 죽이다 put to death.

nevkrwsi", 3500(nekro:sis, 네크로시스). 죽음 death, 죽은 상태 deadness.

고전 헬라어문헌

1. '고생' trouble, '불운' misfortune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 어근 네크-(nek-)(참조: 라틴어. nex: 살인 murder, 죽음 death; neco: 죽이다 to kill; noceo: 해하다 to harm)에서부터 시어의 남성형 네퀴스(nekys: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와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네크로스(nekros)가 파생했다. 명사로서 이 단어는 '죽은 사람' dead person, '시체' corpse를 의미한다(예: Homer, Ⅱ., 6, 71). 핀다르(Pindar) 이후부터 이 단어는 형용사(죽은 dead)로 쓰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이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의 죽은 몸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으며(Pindar, Fragments, 203) 더 이상 프쉬케(→ 영혼 Soul)에 의해 생명이 주어질 수 없는 것 즉 단순한 물질에 불과함을 의미한다(Plotinus, 4, 7, 9).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to kill, 사형에 처하다 put to death, 종종 수동태로 사용되어 죽다 to die)와 죽어가는 과정이나 죽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는 의학 분야에서 유래한 헬레니즘 시대의 형태들이다. 이 단어들은 병으로 인한 신체 일부분의 탈저(mortification)를 가리킨다(Galen, 11, 265; 18(1), 156). 나중에 이 용어들은 자연계의 '얼어붙은 것' 나무(Corpus Medicorum Graecorum, 1908이하 v, 9, 1p 31, 5)나 땅(Plotinus, 5, 1, 2)을 가리킬 때,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마취의 효과(Corpus Medicorum Graecorum, v, 9, 1p 115, 11)에 까지 사용되었다.

2. 고전 헬라어 문헌 전체가 네크로스(nekros)를 문자상이 의미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일면 스토아 학파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특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형용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3개의 기준을 분류한다. 즉, (a) 네크로스(nekros)라는 것은 프쉬케(psyche:: 영혼 soul)나 누스(nous: → 마음 mind), 또는 영(spirit), 즉 의식의 세계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참조: M. Ant., 12, 3, 2). (b) 또한 네크로스(nekros)는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소마(so:ma: → 몸 body)이다. (p. 3-432*) 누스(nous)는 그 자체와 함께 이 소마를 좌지우지해야 한다. 소마는 조아(zo:a: 동물계 animal world; → 생명 Life)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일부분이며,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3, 3; 2, 19, 27; M. Ant., 9, 24). (c) 마지막으로 네크로스(nekros)는, 누스(nous)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기자신의 판단기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거짓 교사들이나 거짓 철학자 등이다(예: Epictetus, Dissertationes, 1, 9, 19; 3, 23, 28). 위의 세 정의는 모두,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의식(누스[nous])만이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누스(nous)의 지배하에 있지 않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동사와 명사 형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테드네코스(tethne:ko:s: 죽은 dead)와 같은 분사와 더불어 네크로스(nekros)는 약 60회 정도 나오며 대부분 명사이지만 형용사로도 사용된다. 지혜문헌, 토빗서(Tob), 유딧서(Jud.), 마카베오서(Macc)에 나오는 28개의 예들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상당어구가 없다. 그렇지만 그 외의 곳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분사인 메트(met: 이미 죽은 사람 one who has died, 즉 죽은 자 a dead person)를 번역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9:7; 11:6-7에서 이 단어로 할랄(chalal: 꿰뚫린 pierced, 살해된 slain)을 번역하고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시체를 의미하는 기타 단어들의 역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을 여전히 땅 위에서 볼 수 있든지 또는 이미 죽은 자의 영역에 장사했든지 간에(18:11)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률적으로 사용된다(예: 아브라함의 아내, 23:3이하; 소마타 네크라[so:mata nekra: 죽은 몸들 dead bodies, 시체들 corpses], 왕하 19:35). 죽은 사람은 장사된다(토빗. 2:8; 12:12). 만약 그들이 노출된 상태로 내버려져 있어서 짐승들에게 먹힌다면(7:33; 19:7; 28:26) 이것은 무시무시한 벌로 간주된다. 19:16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가 특별한 어감을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이 단어가 단지 살해 당한 것에 불과한 자와는 구별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이며(테드네코스[tethne:ko:s]의 경우와 같이), 또한 이 단어가 해골과 구별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네크로스(nekros)는 신원은 알아볼 수 있지만 생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본 장의 모세율법은 죽음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자 하나님의 영역이기도 한 생명의 영역 사이에 철저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죽은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깨끗하지 못한 자,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와 분리된 자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보지 못한다(9:5; 26:14; 참조: 88:4이하). 하나님은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하시지 않는다(88:10).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한다(115:17). 그들에게는 희망에 없으며(143:3; Wis. 13:10)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9:4). 이 모든 것은 주변세계에서 아주 일반적이었던 죽은 사람에 대한 숭배나 죽은 사람들의 신탁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종교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에야 비로소 부활의 소망이 시작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의인의 고난에 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망이 처음에는 죽음까지도 자신을 여호와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참조: 26:19; 집회서 48:5; 참조: 37:9)는 확신의 형태를 취한다. 한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후기 저서들에서만은 변화된 의미에서 우상들이 “죽은” 것으로 특징지워진다(솔로몬의 지혜서 15:5).

히브리어에서 메트(met)와 네페쉬(nepesh: 영혼 soul, 생명 life)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왜냐하면 네페쉬(nepesh)는 전인(whole man), 즉 그의 전 존재를 의미하며, 죽는다는 것은 인간 전체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0인 역본에서는 네크로스(nekros)가 프쉬케(psyche:: 영혼 soul)와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시적인 육체와 대조되는 영원한 → 영혼 Soul에 관한 헬라의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교리가 나중에 침투될 수 있는 길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2. 쿰란(Qumran)의 히브리어 문헌은 구약성경의 용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랍비문헌에서는 종종 비유적인 용법이 발견된다. (p. 3-433*) 불신앙인을 죽은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SB I 489, 8:22에 관한). 유대인의 18기도문(Eighteen Benedictions)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who makes the dead(함메팀[hammetim]) to live”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로(Philo)는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인 용법을 채택했으며 이와 아울러 영적인 것 그리고 지적인 것은 생명이며 감각에 예속한 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교리를 채용하였다.

신약성경

1. 신약성경에서 네크로스(nekros: 죽은 dead, 죽은 사람 a dead person)가 명사와 형용사로서 130회 나온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로마서, 고전 15장에서 다른 곳보다 다소 더 많이 나오며 요한의 서신들과 데살로니가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디모데후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동사 네크로오(nekroo:: 죽이다 kill)는 4:19; 3:5; 11:12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명사 네크로시스(nekro:sis: 죽음 death, 죽임 putting to death, 죽은 상태 deadness)는 4:19고후 4:10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4:19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끝났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헬레니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참조: 11:12과 성경 외의 문헌들). 고후 4:10에서 사도가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고 말한 네크로시스 투 예수(nekro:sis tou Ie:sou: “예수 죽인 것” the dying of Jesus)는 죽음의 특성인 고통과 힘의 상실이라는 증상들을 언급한 말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생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성례식을 통해?). 반면 3:5에서는 아마 금욕주의를 지지하는 반대자들이 사용한 언어를 채택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외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멜레(mele:: 지체들 members)를 육체와 그 지체들을 지배하는 욕망들로서 해석하여 이를 억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네크로스(nekros)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이 통상적인 헬라의 용법, 그리고 구약성경의 용법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의 상태가 더 이상 인간의 최후상태는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다. 75군데에서 네크로스(nekros)는 에게이로(egeiro:: 깨다, 눈을 뜨게 하다 to awaken), 아나스타시스(anastasis: → 부활 Resurrection)및, 기타 동족어들의 목적어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결합 형태가 보이는데 예를 들면 조오포이에오(zo:opoieo:: 살아나게 하다 to make alive; → 생명 life; 예: 4:17; 2:13)나 프로토토코스 에크(prototokos e:k: → ~에서 먼저 난(자) firstborn of; 예: 1:18; 1:5) 등과 결합되기도 한다.

(a) 용어들의 이런 연관성은 이 용어들의 기초가 되는 일련의 교리를 표현한다. 초기 바울 서신들(살전 1:10)에서부터 복음서들에 이르기까지(예: 27:64; 28:7; 20:9; 21:14) 그리고 나아가서는 1:20; 딤후2:8, 그리고 1:5과 같은 후기 본문들에까지, 기독교 → 선포 Proclamation의 토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특히 사도행전의 초기장들을 참조하라; 예: 3:15; 4:10; 10:40이하; 13:30, 34)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처음 난 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지금 살아 있다(2:8)는 사실에 관한 증거에 놓여 있다. 이 증거는 고전 15:3 이하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고전 15:12이하)이다.

(b)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다(위의 구약성경 1을 참조하라). 이런 한계선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메타 톤 네크론[meta to:n nekro:n]) 찾느냐”(24:5)라는 누가의 질문의 배경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 말씀이 12:27(병행구절 22:32; 20:38)에서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경우는 보편적 →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기대와 증거의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점에서 변화된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퀴리유세[kyrieuse:])이다. 또는 누가가 표현한 대로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10:42; 참조: 벧전 4:5)이시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거나 그의 능력의(p. 3-434*) 범위 밖에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관한 복음서들의 기사(9:23이하., 병행구 7:11이하., 특히 15절; 요 11장; 12:1; 12:9)는 이 주장을 생생하게 지지하며, 예언의 약속을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일들의 배경으로(11:5, 병행구절; 7:22) 주장한다. 여기서는 35:5이하와 61:1 이하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nekroi egeirontai: 죽은 자가 살아난다 the dead are raised up)의 첨가로 확대되어 있다. 더욱이 죽음의 정복이 그리스도-사건(Christ-event)의 핵심적인 요소로 생각되기 때문에, 10:8(참조: 16:17이하)에서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약속(병자가 회복될 것이며 → 귀신 demon이 쫓겨날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이 적용되며 또 바울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그러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20:9-12)는 것도 당연하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다(4:17; 4:24; 특히 고전 15:12이하; 12:25이하. 유사구절; 23:6; 5:21; 5:25). 일반적 부활은 이미 유대인의 대망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일반적 부활에 관하여는 또한 침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참조, 6:14 병행구). 일반적부활의 우선권이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에게 주어진다(고전 15:23; 살전 4:16; 14:13).

3. 네크로스(nekros)가 시체라는 문자적 의미로 쓰인 이런 문맥과는 다르게 쓰인 곳이 몇 군데 있다. 11:18; 20:5; 20:12 이하는 최후 → 심판 Judgment 때의 죽은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8:22과 병행구절 9:60에서는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나란히 놓고 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름을 거절하는 자를 … 죽은 자와 같은 수준”에 둔 것이다”(R. Bultmann, TDNT Ⅳ 893).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서 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9:26(간질병을 앓는 소년의 상태)와 28:4(수직하던 자들의 상태)에 나오는 네크로스(nekros)는 호스(ho:s: 와 같은 like, ~와유사한 in a simile)와 함께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옛 문자적 의미는 5:10(삽비라의 경우)에만 나온다.

4. (a) 스토아 학파의 저자들이 사용한 비유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탕자의 비유에서 누가는 한 아들을 “죽은” 아들이라고 불렀는데(15:24; 15:32) 이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탕자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떠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6:11; 6:13에서 침례의 교리에 관하여 성례적 용어로 이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네크루스 멘 테 하마르티아(nekrous men te: hamartia: 죄에 대하여 죽은 [자] dead to sin)로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아마 8:10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곳의 어법이 이원론적인듯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소마(so:ma: 몸 body)의 무익함에 대한 경멸적인 선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 영 Spirit과 혼(→ 영혼 Soul)까지도 바울에게는 사륵스(sarx: 육체 flesh)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구절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심판에, 따라서 죽음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이 점은 2:1; 2:5 그리고 2:13에 의해서도 확실히 볼 수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네크로스(nekros)의 상태가범죄(파라프토마신[parapto:masin]; → 죄 Sin)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본다.

(b) 비유적인 용법의 전형적인 예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진보한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6:1; 9:14에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 → 일하다 Work)
즉 그리스도 없는 사람의 행위로 인한 의(works-righteousness)가 네크로스(nekros)로 묘사된다.
약  2:17-26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약 피스티스(pistis: → 믿음 Faith)가 생활 속에서 외적인 증거를 낳지 못한다면 이러한 피스티스도 역시 죽은 것으로 특징지운다.
여기서 에르가(erga: 행위 works)를 다시 사용하였지만 이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죽음의 정복에 대한 믿음은, 죽음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까지도 고유하고 영구한 위치를 전혀 허락해 주지 않는다. - L. Coenen. (p.3-435*)
















태어 나기 전에 성경에 기록된 고레스


태어 나기 전에 성경에 기록된 고레스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 여름에 하루살이와 매미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해가 지게 되니 매미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하루살이야 오늘 우리 너무 재미있게 놀았어 이제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만나자 그리고 내일도 엄청 신나게 놀자 하루살이가 얘기합니다 응 내일이 뭔데 응 내일은 이제 해가 저 산넘어로 넘어가면 이제깜깜해 지지 그리고 하늘에 별들이 뜨지 그리고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것이 내일이야. 에이 내일이라는 것이 어디있어 해가 져서 밤이 되면 죽고 그것으로서 끝나는 것이지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가 아무리 내일을 부인한다 하여도 내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살이 얘기와는 상관없이 내일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아 이제 한 아이와 매미가 여름방학을 아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 여름이 끝나자 아이가 매미에게 이야기 합니다. 매미야 매미야 올 여름방학은 너 때문에 너무 너무 재미있었어. 우리 내년 여름방학 때 다시 만나자 응 내년이 뭔데. 자 너 내년을 모르니 내년은 이렇게 꽃아 다 떨어지고 또 나무들에서 낙엽이 다 떨어지고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리고 그리고 봄이 되어 따뜻해지고 꽃이 피면 그게 내년이 되는 거야. 야 내년이 어디 있어. 여름이 지나면 춥고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내년이란게 어디있어.

여러분 한 여름밖에 살 수 없는 매미가 아무리 내년을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미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년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보게 죄와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서 만나세. 아니 영원한 나라라니요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그럼 영원한 나라는 사람이 죽고나서 부활하여 나와 함께 영원히 사는 나라이네.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 사람이 늙어 죽고 나면 흙이 되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런 영원한 하늘나라같은 그런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평생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아무리 하늘을 이해할 수 없고 부인한다 하여도 하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 이외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시야를 열어줍니다. 과거와 현재와 매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줍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하지요 약속입니다. 여러분 약속은 내게 뭐뭐하겠다는 예언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가족들과도 약속을 하고 친구와 직장에서 뭐 하겠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 내 결심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언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행기가 한시간에 몇 km 날아가는지 아십니까? 한 시간에 약 900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또 빛은 1초에 약 30만km를 날아갑니다. 빛이 1초 똑딱하는 순간에 약 30만 km라 하니까 감이 잘 안오지만 그것을 다시 말하면 지구 7바퀴 반이라 합니다. 아마이런 소리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빛이 초에 30만 km로 날아간다고 하였을때 1년간 날아간다면 그 거리를 1광년이라 합니다. 그래서 광년이라는 것은 시간의 단위가 아니고 거리의 단위입니다.

1광년을 km로 환산하면 약 9조5천억 km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태양계라하는데 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입니다.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은하까지 거리는 약 200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솜씨가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엔 수천억개의 태양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서 운행하고 있고 이 우주의 질서는 아주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가 이나라가 정치와 경제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보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을 왜 주셨는가?

 

이제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은 그것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요14:29)

분명히 주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암3:7).

왜 우리에게 예언을 왜 주셨는가? 믿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언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예언된 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하는데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1900년전 BC1921년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지금 갈대아우르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굉장히 발전된 도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고고학적 자료들을 보면 갈대아우르엔 2층 집도 있었고 하수구도 있었고 굉장히 편리한 시설들을 사용하고 있었지요. 또 여자들이 바르는 화장품도 꽃가루를 배합하여 만든 아주 천연적인 화장품으로 그렇게 문명이 발달된 곳이 갈대아우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데라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직업은 무엇이냐 하면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이였지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직업은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 그런데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데 자기 아버지가 우상을 파는 것이 영 못마땅하였습니다.

어느날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밖에 좀 다녀 올테니까 가게좀 잘 봐라. 아버지가 떠나자 아브라함은 이 때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브라함은 몽둥이 가져와 그 가게 진열되어 있는 우상들을 때려 부쉈습니다. 그리고 밥을 가져다가 우상들 입에다 발라났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깜짝 놀랐지요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제가 우상님들이 배가 고플것 같아서 밥을 가져다 주었더니 얼마나 배고 고팠던지 먼저 먹으려다 서로 싸우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때끼 이놈아 아니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뭐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수 있다는 것이냐? 말도 안되는 이야기 하지좀 마라. 그렇게 꼼짝도 못하는 우상이 이렇게 싸움을 한단 말이냐 하면서 아브라함을 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버지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나무나 돌로 만든 이 우상들이 밥도 못먹고 꼼짝도 못하는 우상을 사람들에게 팔아서 뭘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도 우상장사를 할 정도로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 세상으로부터 그 분의 백성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불러 냄을 받은 무리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크레시아라 하지요 불러냄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기관이 아닙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사는 이 세상사람 들중에서 따로 불러냈셨습니다. 이렇게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교회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는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12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12아들중에서 11번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가서 가진 고생을 다하였지만 어쨌든 거기가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애굽에 7년 가뭄이 들었을때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정치를 잘 하였고 결국은 가나안에 계신 아비와 형제들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가 BC1706년 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애굽에 들어갔을 때는 총리 가족이었잖아요. 처음에 대접을 잘 받았지만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뽑아 주신 힉소스왕조가 멸망하자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인들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넜는데 그 때가 BC 1491년 경이었고요. 여러분 이 일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3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라. 즉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그들을 괴롭히리라. 14 또한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15:13-14)

모세가 요셉의 뼈를 취하니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출13:19)

요셉이 유언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이 땅에서 나가게 할 것이다 너희를 찾아오실 것이다. 그러니 나의 뼈를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요셉이 어떻게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갈 것이니까 여기서 나의 뼈를 가지고 나가라고 한 것이지요. 자 그래서 그 결과 출애굽기 12장 51절에

바로 그날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더라 고 하였습니다.

자 애굽땅에서 나왔는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약 300년 동안 사사시대가 펼쳐집니다. 사사시대는 지금으로 말한다면 재판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사시대때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지요? 솔로몬이었나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때 재판에 문제가 있거나 국가적인 위기가 닥치면 사사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여 줍니다. 사사들 중에는 여러분들이 잘아는 삼손 입다 사무엘 들이 있었습니다.

사사 : 옷니엘 예훗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둘라 야일 입다 입산엘른 압돈 삼손 엘리 사무엘

자 이러한 사사시대가 300년 동안 지난 다음 통일왕국시대가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나라를 보니까 다 왕이 있어요. 왕이 전쟁에 나가서 전쟁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고 하는 것이 좋아 보이거든요. 그래서 백성들이 사사에게 요구합니다. 자 우리도 하나님께 얘기해서 왕을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사사들은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면 안된다 왕이 있으면 여러 폐단들을 이야기 했진만 백성들이 듣지 않아서 왕을 뽑게 되었는데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뽑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뒤에는 유다지파의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왕까지 120년동안 통일왕국시대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나서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분열왕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왜 남방유다와 북방이스라엘로 갈라졌을까 ? 물론 결정적 계기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들으면 기분나쁠지는 모르지만 솔로몬 때문에 나라가 분열된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 때문에 나라가 강성해지었고 세계가 그를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지혜를 가졌고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로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그를 경배하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실이 다른 나라왕족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친족관계가 되므로 전쟁을 막을 수 있지요. 국가세력을 키울 수 있지요. 아마도 솔로몬이 그런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왕실간 결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라는 믿음이 확고한다면 이방 왕족들과 결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내가 이방여인과 결혼을 통해 정치적 세력을 더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결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방여인들이 결혼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하면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마 솔로몬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훌륭한 지혜를 받았으니까 이방여인들이 우상을 가져와도 나는 그런 문제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왕비가 왕궁에서 우상을 숭배하여도 솔로몬이 그것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아내와의 기싸움에서 졌거나 너무 관리할 우상들이 많아서인지 모르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왕궁에서 우상숭배가 허락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백성들이 보니 왕궁에서 우상을 숭배하는데 왜 나라고 못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의 죄는 일반 백성들의 죄 보다는 훨씬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편만하게 만든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시대에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남방 왕조는 멸망할 때 까지 한 왕조가 유지되었지만 북방왕조는 9번이나 왕조가 바뀌면서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살륙과 전쟁이 있었겠는가!

 

남방 유다왕국 :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북방이스라엘 :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스가랴 샬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13번째 유다왕 히스기야 왕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이야기 잘 아시지요 히스기야가 성전사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들 개혁하고 참 훌륭한 왕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개혁에 잘 순종하다가 노년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오지요 내가 났겠습니까? 죽을 것 같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사야가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말을 듣고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시는데 이사야 38장 5-8절을 보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날들에 십오년을 더하고...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여 주며 8 보라 내가 아하스의 해시계에서 내려간 각도들의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리라, 하라,하시니

생명을 연장해 주는 증거로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가는 것이 아주 과학적이지요? 네 비과학적입니다. 어떻게 태양이 뒤로 가든지 지구가 거꾸로 돌던지 해야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때 당시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천문학이 굉장히 발달된 나라였지요. 어느날 바벨론 학자들이 태양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거꾸로 돌았나? 그때 당시는 태양이 뒤로 물러갔다고 생각했지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학자들이 아무리 연구를 하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일이 이스라엘의 히스기야왕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서 우주의 질서가 뒤바뀌어진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벨론 학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에 사자를 파견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때가 바벨론에게 우주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이사야 39:2 히스기야가 그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여 자기의 귀한 물건과 은과 금과 향료와 귀한 기름이 있는 집과 또 자기의 온 병기고와 자기 보고에서 찾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더라. 그의 집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들에게 보여주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

여러분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얼마나 부자인줄 아십니까? 여러분도 돈 있으면 자랑하고 싶듯이 내 나라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주가 바뀌는 것 보셨지요 나에게 함부로 까불면 큰일 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랑의 기회를 삼았습니다. 이때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벨론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절호의 기회를 히스기야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신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이사야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5 그 때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6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것과 네 조상들이 이날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빌론으로 옮겨지고 하나도 남지 아니하리라. 7 또 그들이 네게서 나올 네 아들들 곧 네가 낳을 아들들 중에서 빼앗아 가리니 그들이 바빌론 왕의 궁궐에서 내시가 되리라, 하시니라.하매

8 그때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말씀한 주의 말씀이 선하나이다.하고 또 이르되, 나의 날들에는 화평과 진리가 있으리이다, 하니라.(사39:5-8)

자 이사야의 예언이 다니엘서 1장 1절에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유대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을 에워쌌더니. (단1:1) 차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여호야김 시대에 이사야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 다니엘서 1장 3-4절 보면 3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부나스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 4 곧 흠이 없으며 잘 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단1:3-4)

환관을 삼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자 이때 바벨론이 환관을 삼은 청년들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자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에 얘기하고 자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 느부갓네살의 통치 제이년에 느부갓넨살이 꿈들을 꾸매 그것들로 말미암아 그의 영이 근심하고 그의 잠이 깨서 달아나니라. 2 그때에 왕이 자기 꿈들을 왕에게 알려주도록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갈대아 사람들을 부르라고 명령하매 이에 그들이 와서 왕 앞에 서니라.(단2:1-2)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꿈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갈대아 마술사들 마법사들 점쟁들 다 불러왔지요 지난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느부갓네살이 일어나보았는데 기억이 안나는 거야 이제 그 꿈을 알아 내고자 다 불렀다는 거요

단 2:10-13 10 갈대아 사람들이 왕 앞에서 응답하여 이르되, 땅에는 왕의 그 일을 보여 줄 사람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왕이나 군주나 치리자도 이런 일들을 마술사나 별을 살피는 자나 갈대아 사람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나이다.

11 왕이 요구하시는 것은 드문 일이니이다.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서 그것을 보여 줄 자가 없나이다, 하매

12 왕이 이런 까닭으로 분노하고 심히 격노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멸하라고 명령하니라.

13 지혜자들을 죽이라는 칙령이 나아가니 그들이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았더라.

자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해석하지 못해서 다 죽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죽일려고 불러왔는데 다니엘이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장31- 35절

31오 왕이여, 왕이 보셨사온대, 보소서, 큰 형상이니이다. 이 큰 형상이 왕 앞에 섰는데 그것의 광채가 뛰어나며 그것의 형태가 두려웠고 32 이 형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그의 가슴과 두팔은 은이요, 그의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의 두다리는 쇠요, 진흙이었나이다. 34 왕이 보셨는데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깍아 낸 돌이 그 형상을 치되 쇠와 진흙으로 된 그의 두발을 쳐서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산산조각 나서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쓸려감으로 그것들의 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채웠나이다. 36그 꿈을 이러한즉 우리가 왕 앞에서 그것의 해석을 고하리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해석한 이 신상을 영상으로 잠간 보도록 하겠습니다.

37 오 왕이여, 왕은 왕들의 왕이시오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왕국과 권능과 세력과 영광을 주셨나이다.

38 사람들의 자녀들이 어느 곳에 거하든지 그분께서 들의 짐승들과 하늘이 날짐승들 곧 그것들을 왕의 손에 주시고 왕을 그 모든 것을 다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셨나니 왕은 이 금 머리니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곧 신상의 금머리라는 것입니다 여기나오는 각 신상의 부분들은 각 나라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다니엘이 살던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일어날 여러 나라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날 여러 나라들을 말하고 있는데 바벨론은 BC605년부터 BC 539년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였습니다. 실제 느브갓네살이 왕이 쓴 느브갓네살 편지라는 서판(편지)이 발견되었습니다.

-온 땅은 비할 데 없이 장엄한 여왕과 같은 도시에 무릎을 꿇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서판에 있는 기록은 위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 의해 바벨론의 영광이 들어났는데요 당시 무기나 군사력으로 이 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완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해석을 계속됩니다. 32절 39절 을 보면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9 왕 이후에 왕의 왕국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다른 놋 왕국이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셩경은 예언하기를 바벨론 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나서 바벨론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니 바벨론을 무너뜨린 나라는 메데바사입니다. BC539년 10월 13일 바벨론이 멸망하던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벨사살왕이 1000명의 귀족들과 파티를 하면서 성전에서 사용하는 은금 잔들을 가져와서 거기다 술을 따라 마시고 우상들을 찬양하고 광란의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렇게 한 참 주흥이 무르익고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쓰게 되지요 벨사살왕은 그 손가락과 그 글씨를 보면서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아무도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었지요 마침 은퇴해서 초야에 묻혀 있던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와서 글자를 해석해 주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니이다.

26 자 그것의 해석을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세셔서 그것을 끝내셨다는 것이요(5:26)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다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며(5:27) 28 베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니이다, 하니(5:28) 라고 다니엘이 글씨를 해석합니다. 드디어 끝이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바벨론 왕궁의 마지막 파티였습니다.

메대 페르샤가 어떻게 바벨론을 정복했을까

헤로도투스의 페르샤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보면

키케로는 헤로도투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책에는 페르샤가 바벨론을 어떻게 정복했는지 나와있는데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기 위해서 성을 먼저 포위했지요 그런데 성은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되어있어서 외성을 침입하더라도 내성 문만 닫으면 그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성이 함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 안으로 유프라테스강이 흘러가므로 밖에서 아무리 포위하고 있더라도 물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성안에는 20년 동안 먹을 양식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페르샤 군대가 포위하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고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고레스는 바벨론 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고민고민 하고있다가 .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는데 유프라테스강이 흘러들어가는 쪽과 나오는 쪽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상류로 가서 물길을 다른데로 돌렸다. 그래서 고레스는 명령하기를 강물이 무릎까지 수위가 낮아지면 성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에서 동시에 들어가서 바벨론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벨론 정복에 대해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사 44::27-28 27 깊음에게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 하는 자니라.

자 여기 표를 한번 보십시오

BC 740 이사야서 집필

BC 690 40장 이후 기록

BC 680 이사야 순교 므낫세에게 톱으로 켜 순교

BC 539 고레스 정복

고레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고레스가 태어낳기 150년전 고레스의 이름과 고레스가 어떻게 바벨론을 정복할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레스의 이름 칭호 행적에 대한 예언

사45:1-4 1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였으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3 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기름부음은 왕과 메시야를 기름부어 세우는 것이므로 고레스를 왕과 메시야 즉 구원자로 세웠다는 것이다.

4절 이스라엘을 위하여 칭호를 주었다는 것 왜 그랬을까 포로된 유대민족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키고 훼파된 예루살렘의 회복을 명하여야 할 왕이 바로 고레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라는 이름도 미리 기록하였고 그에게 왕이라는 칭호도 주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너는 나를 알지못할지라도 나는 너를 왕으로 삼았노라. 여러분 나중에 고레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레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서 5장에보면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되어있지요

단5:30-31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사람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였는데 그 때에 그는 육십이세가량이었더라.

9:1 메대 사람들의 씨에 속한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사람들의 영토를 다스릴 왕으로 세워진 첫해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면 바벨론을 점령한 것이 고레스인가 다리오인가? 성경과 충돌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럴때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 헬라역사가 크세노픈의 기록

1) 메대왕 아스티아게스(아하수에르)가 딸을 페르샤 캄비세스1세에게 시집보냄 여기서 고레스 출생

 

왜 딸을 페르샤로 보냈는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딸한데서 강물이 흘러나와 전 지역을 뒤덮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이 딸이 심창치 않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고 페르샤로 멀리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2)고레스 12살 때 아하스에르가 고레스를 메대로 불러 외할아버지에 의해 양육

3)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에 위험을 느낀 아하수에르가 고레스를 처단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

고레스가 메대를 페르샤에 병합하고(BC550) 할아버지를 선대하여 지방장관으로 보냄

4)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왕실 결혼으로 큰 싸움없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짐

5) 고레스는 메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하수에로의 아들 외숙부 시악사레스 2세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게 되는데 그가 다리오이다.

6)이러한 상황에서 고레스가 이끄는 메대 페르샤 연합군이 BC539년 10월 29일 바벨론 점령

7) 바벨론 정복 후 메대왕 다리오 (시악사레스2세)를 명목상 통일 페르샤 왕으로 세우고 그리고 그의 딸 카산다네와 결혼 메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62세의 장인을(6:31) 명목상 왕으로 앉혔고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자 고레스가 집권(BC 537)

 

다리오 원년의 사건 단9:2-3

2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책들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에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닫되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라는 것을 깨달으니라.

3 또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고정하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자 다니엘이 깨달은 것은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다니엘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아 우리가 칠십년이 마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백성들의 상태는 이곳이 좋다 여기가 문명이 발달해서 좋다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알고. 다니엘이 마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9장 이야기입니다. 이 기도는 간단한 기도가 아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그런 기도아닙니까 그래서 6장에 다니엘서는 시간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6장에 항상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항상 기도하니까 시기하는 다른 신하들이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집어던진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다니엘이 이런 기도를 할때에 모함을 받고 사자굴로 들어가서 살아나는 것이 9장과 6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고레스 원년의 사건( BC537)

단1:21 다니엘은 고레스왕의 제일년까지 계속해서 있었더라.

10:1에는 바사왕 고레스 제3년에 한 일이 다니엘에게 계시되었는데

왜 그럴까 원년까지 있었다고 하면서 삼년까지 있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다니엘에 있어서 원년은 아주 인상깊은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고레스 원년에 있었던 그 해를 기억하고 싶었다. 원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집권하고 정치자문을 위해 누구를 불렀을까요 바로 자기 장인 외숙부 다리오 때부터 신임을 받아오던 다니엘을 불렀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였으며 80이 넘은 경험이 많은 총리였다. 그리고 바벨론 총리였지만 바벨론 사람이 아니라 유대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에겐 바벨론도 페르샤도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고레스에겐 경계심이 없는 정치가였다. 그리고 일년전 다니엘의 사자굴의 사건을 처남으로부터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집권하면 다니엘을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니엘 보다 고레스가 더 간절했을 것이다. 자 이제 다니엘을 부릅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이라면 고레스를 만나러 갈 때 무엇을 준비하였을까요?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가지고 가야지요 다니엘을 그 예언을 압니다.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가지고 가서 고레스와 접견을 합니다.

왕이여 평안하옵소서 제가 왕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44장부터 45장까지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레스가 놀라는 모습을 한번 상상하여 보십시오

45:1,5

1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였으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5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으며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네게 띠를 띠어 주었으니

 

44::27-28 27 깊음에게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 하는 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골 3:12-14절에 나오는 7개의 덕목은 하나님의 선택자,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가 입는(put on) 옷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단어들로 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합니다.
긍휼은 ‘긍휼히 여기는 심정(bowels of mercies)’,
자비는 ‘친절(kindness)’,
겸손은 ‘겸손한 생각(humbleness of mind)’,
온유,
오래 참음,
용납은 ‘서로 참아주기(forbearing one another)’,
용서는 ‘서로 용서 (forgiving one another)’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 즉 ‘charity’를 입는 것입니다.

약 3:17절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즉 ‘순수하고(pure)’, ‘화평하고(peaceable)’, 관용 즉 ‘부드럽고(gentle)’, 양순 즉 ‘간청을 잘 들어주며(easy to be intreated)’,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즉 ‘차별 없고(without partiality) 위선이 없나니(without hypocrisy)’입니다.

약 3:17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땅에 속한, 관능적이고 마귀에 속한 지혜와 비교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
위에 열거된 성품은 그리스도의 것이니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창조 6000년 역사 가운데 인간의 한결같은 고민은 의식주 해결입니다. 죄가 들어오자 바로 무화과 잎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지어 입고(창 3:7), 저주받은 땅에서 힘들여 먹거리를 해결하니(창 3:17) 말입니다. 문명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오늘에도, 예수님이 오셨던 2000년 전에도, 의식주로 고민하는 상황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2000에 대한 조명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들풀도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34)’고 당부하셨을까요. 그랬던 주님도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없이(마 8:20) 이 땅 가운데 지내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제일 먼저 해결하려 한 게 벗은 몸을 가리는 것이었기에, 성경의 먹거리 변천사(‘노아의 때와 같이’ 참고)에 이어 오늘은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을지를 쓰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입고(put on, clothed), 벗고(put off, naked) 구절들을 모두 찾아보니 흥미롭게도 구약엔 실제 옷이나 신발이 나오는 반면 신약엔 영적인 것들이 나왔습니다. 아담의 무화과 잎으로 만든 첫 옷이 구약에 나오는 옷이라면 하나님께서 벗기고 입히신 가죽옷은 신약의 영적인 옷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려면 어떤 동물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죄로 인해 이때 일어난 첫 죽음은 아마도 양의 죽음일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신약으로도 이어집니다. 구약에서 범죄한 첫 사람을 양의 가죽으로 입히셨던 하나님은 신약에선 ‘세상 죄를 가져가는(takes away)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입히십니다.

따라서 성경은 ‘어둠의 행위를 벗고(롬 13:12)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고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여기서 ‘어둠의 행위(일)’란 ‘육신의 행위’며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정욕’을(롬 13:13-14) 말합니다. 또한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에 따라 부패한 옛사람(엡 4:22)’을 벗으라고 합니다. 이 ‘옛사람과 그의 행위(골 3:9)’는 ‘음행, 부정함, 무절제한 애정, 악한 욕정, 탐욕(우상숭배), 분노, 진노, 악의, 신성모독, 더러운 대화(부패한 대화), 거짓말, 도둑질, 소리 지름, 악독, 비방(엡 4:22-32; 골 3:2-10)’입니다.

‘어둠의 행위를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권고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라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성경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은 육신의 죄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린 사람들이며(골 2:11)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은(골 3:10)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 받은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하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노동하여 궁핍한 자에게 주는 선한 일을 하고 덕을 세우는 좋은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엡 4:23-29)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서로 순종하며 온유로 단장하고 겸손으로 옷 입어야(벧전 3:4-5, 5:5)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 친절(상냥함),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입고 서로 참고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같이 하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의 띠를 맵니다(골 3:12-14).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아 성령을 받은 ‘새 사람’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것이자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눈에 안약을 발라 볼 것을 권고(계 3:18)’하십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고 하신 것을 미루어 이들은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교회로 보낸 서신서임에도 불구하고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합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지 않은 자들도 있다’란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약속하신 흰옷은(계 3:5; 4:4)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는 옷이며(계 19:8) 그리스도를 따르는 군사들이 입는(계 19:14) ‘성도의 의(계 19:8; 엡 4:24; 롬1:17, 3:21-22)’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whole armor of God)를 입으라고(엡 6:11)’ 합니다. 빛의 갑옷(armor of light)을 입고 낮에 하듯이 정직하게 걸으며(롬 13:12) 낮에 속했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갑을 입고 구원의 소망으로 투구를 써야 합니다(살전 5:8).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으로 신어 준비하고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끌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말씀)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엡 6: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