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타 투 데우 알라(도리어) 타 톤 안드로폰

하나님의 일(things of God)
사람의 일(things of Men)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의외로 장차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고 이에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며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일’에 눈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를 보면 바로 앞에 벳새다의 맹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엔 맹인거지 바디메오를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예언, 제자들의 오해와 무관심,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 등이 나옵니다.
맹인을 고치는 이야기가 앞과 뒤에 나오고 그 가운데 위의 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예수님께 사람의 일을 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생각하고 구했던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이익이나 지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예고를 듣자 항변했다고 합니다.
항변의 원어 뜻은 ‘꾸짖으면서 말리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얼마나 대우받고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며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나 요한과 다른 열 제자도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나의 자리가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제자 중에 으뜸 된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사단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을 꾀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로 아담과 하와를 꾀었습니다.
가인은 자신보다 더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 또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은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견딜 수 없어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하기보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불러 주심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누가 봐도 저 자리는 내가 앉아야 할 자리인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가 바로 내가 해야 할 원래의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해서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리 때문에 마음 흔들려 하지 마시고 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집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데도 뭔가 현실에서 주어지는 게 없는 것 같고, 기대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예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때,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히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성인들은 천주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이여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 라고 하든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의 공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행위입니다. 직업에 따라 병의 종류에 따라 간구하는 성인들이 각각 있는데 예를 들자면 불임 여성은 “성 안토니” 관절염은 “성 야고보” 두통은 “성 데니스” 눈병은 “성 루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나라에 따라 2000-4000개의 성상(성인들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국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이교도들이 신들의 왕인 쥬피터(jupiter)와 그의 아내인 쥬노(juno)와 그 외의 다른 신들을 약간의 차등을 가지고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3: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둑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마지막 단원에 중세시대의 유골 도둑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의 유물이나 유골 등을 성유물이라 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신통력이 있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어 숭배하였습니다. 성물 숭배, 성인 숭배 사상입니다. 성인숭배 사상이란 이미 죽은 특정 인물을 중보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준다는 사상입니다. 유명한 성유물을 안치하고 있는 수도원은 순례자가 쇄도하고 순례자의 수만큼 헌금이 쌓이게 되었고 존귀한 유골이 있던 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저절로 영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원하거나 수도원을 부흥시키려면 유명한 성자의 유골을 모아 두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험한 유골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가 된 수도사도 생겼고, 전문적인 성유물 산업이 생겨나 성유물이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름 없던 유골도 오히려 도둑맞음으로 더 가치가 있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성유물을 위해 살아 있는 성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의 집성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가 성인이 될 것으로 예상을 했다고 합니다. 1274년 그가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큰 가마에 끓여서 분해하고 성유물로 분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1000년경, 성 롬알도스는 움브리아 산중에서 고행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덕행을 사모하는 마을 주민들이 그의 성유물을 다른 마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손쉽게 성유물로 만들어 버리자며 덮쳤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인의 유골이나 그의 유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성유물 유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사 중에는 성유물만 전문적으로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오늘 성경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된 노를 저으며 비린내 나는 고기와 일평생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고된 노를 젓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로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관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평생 갈릴리를 떠나지 못할 사람이 예수님이 다니는 곳 어이든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출세한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엄청난 칭찬의 소리와 대단한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면 적어도 좌의정이나 우의정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잡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여유롭게 살만한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 고난을 받으실 것, 죽임을 당할 것, 제 3일에 부활하실 것 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받고 버림바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반드시 버림받으시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하는 메시아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자신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죽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서 대접받고,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고,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다닌 것이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 건축을 잘하고 준공을 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강대상 앞 커튼을 하는데 장로님 마음대로 빨간색을 해 놓았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배경 커튼은 방송화면이기 때문에 파란색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장로님은 자기 고집대로 해 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이 야단을 치자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사람의 일, 자기 일을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을 듣자 예수님의 뜻을 막으려고 책망조로 훈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자신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조종자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더 의롭고 더 지혜로운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부 주제에 칭찬해 주니까 권위를 주니까 마치 자신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강도에게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 사역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게 때문에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받지 말고 죽지 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때 어디로 물러가라고 합니까? 내 뒤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제 신분을 알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지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생각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척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늘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과 사람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1.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선택하며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역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나누어질 때 “이 때로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점을 통해 마태복음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4장 16절까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 언약을 이루실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1:23),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1:21),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왕’(2:2;3:2,3)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2부는 4:17-16:20에서는 이 왕께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가르치며, 이적을 통해 그 나라를 보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5:1-7:29에서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8:1-10:42에서는 이적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11:1-16:20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새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왕(16:21-28:20)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수난과 죽음의 사역, 그리고 이어지는 부활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히9:28) 영원한 효력이 있는(히10:12) 제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바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런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3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17장 22-23절을 보세요. 20장 17-19절을 보세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16:22) 제자들은 매우 근심합니다(마17:23).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은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누가 높느냐고 다투고 있습니다(마20:20-)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일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구속사를 완성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철저히 이 구속사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2:15)”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23)”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1)”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5)”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56)”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9)”

2. 우리는 예수님처럼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확하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는 인기 몰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아 성취가 아닙니다. 각기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예수님을 좇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압니다. 그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 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첫째,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분명한 약속이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둘째,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한 성도 어느 날 없어집니다. 로마의 영광도 바벨론의 영광도 애굽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셋째,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니까 하루에 남자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중 어느 길을 택합니까? 멋진 베드로 의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두 길 중, 이 선택이 우리의 평생 선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16절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그 다음 내용들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서 가르치시니 라는 말은 이제야 가르치실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권을 가지고 영광과 존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과 죽으심을 받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간하다는 말은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간함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에게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베드로의 노력이 예수님께는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사단의 계략이라고 여기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합니다. 베드로의 말의 의미 속에 무엇이 사단적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경계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는 말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선하신데 어떻게 그런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나겠는가? 그렇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생각은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 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호의에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이 증명되며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많은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그리고 왜 죽으셔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가 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죄인을 대신하여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그리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분이 그리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난이 아닌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방법과 뜻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내용 가운데 고난과 죽음은 분명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에 국한 된 것이기에 우리가 본받거나 따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것이 예수님께로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이나 방식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방식이며 방법임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가 따르며 순종해야 하며 삶의 원리와 자세로 삼아야 할 방식이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즉 신자라고 불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그 신자됨과 제자됨이 증명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아 사람의 방식과 방법을 쫓습니다. 그래서 교회됨을 성도 수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세속주의가 얼마나 교회에 가득 찼는가 하면 대부분이 교회의 크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넘어지게 함은 교회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증명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 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기에 나를 위한 욕구나 주장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부인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영광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잘됨으로 증명하며 똑똑함으로 증명하며 남들 위에 있음으로 증명하며 무시당하지 않음으로 증명하라고 합니다. 사단을 따르는 자는 결코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어 냅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주장하며 자신이 옳다고 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을 교묘하게 바꾸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함으로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로 스스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꿰임에 빠짐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욱 우리의 무능함과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식하여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며 의지하며 의존함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아무리 비유라고 하더라도 모욕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어떤 사람을 책망한 일은 드믄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가 일부러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책망하신 이유를 알려면 이 말씀에 앞서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봉에 섰던 이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될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거된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이어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첫 구절인 마 16: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반론을 펼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은 ‘하나님이 당신께 자비를!’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안타까운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단 예수님께서 가야 할 인류 구원의 길을 말렸다는 게 베드로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고난, 십자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부정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까지 부정한 것처럼 묘사된 본문 이야기는 이상해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저 말씀을 들었다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리를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얻는다는 암시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삼일에...’라는 표현은 당시 이런 의미의 관용어였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여전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걸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 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부활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셨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부활이 전제된 것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항변한 것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수님에게 나쁜 것이니까 제자로서 말리는 게 당연했고, 부활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베드로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왤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즉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예고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위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조짐이 이미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유랑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거리가 먼 갈릴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유롭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회당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회당 책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 정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비판적인 사제들은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나 법조계도 비슷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검사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좀더 심해지면 퇴출당합니다. 이게 권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에서 볼 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회당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렸습니다. 때로는 수천 명씩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수록 유대교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 26:1-5절에 따르면 당시 최고 종교 권력자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치명적인 위기를 예수님이 왜 눈치 채지 못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제 가부간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다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갈릴리로 피했다가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략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싸움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라서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 영국과 싸워 대다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간디가 일제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국제 여론에 신경이라도 쓰는 정권이지만 당시 일본은 깡패 국가나 마찬가지여서 단식으로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인지, 정면충돌을 감행할 것인지, 우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걸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알렸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일은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나름으로 노후 설계를 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시 베드로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말렸을 겁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종교권력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 멋진 수도원을 짓고 책도 쓰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상대할 정도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한 판단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경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자동응답처럼 답을 얻을 수 있는 거도 아닙니다. 신학공부가 깊어져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도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 7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냥 갈릴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게 될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십시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베드로의 언행은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즉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니,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왜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베드로를 책망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 16: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무조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이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자체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애와 난치병 자체는 일상을 파괴합니다. 가난에 찌들면 삶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학적으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일상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고, 건강도 좋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생의 실패를 무조건 저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본문은 고난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자기 자신이 성취해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정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즉 주님께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즉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가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고 있어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서 삶의 온갖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와 하나 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 믿음, 그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본문을 볼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간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여기 ‘간하여’는 원어적으로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섭리 가운데 작정된 대로 행하시는데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몰라도 한참 모르고, 영적인 생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와 직분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그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책망 받게 된 원인

얼핏 생각하면 베드로의 말은 옳은 말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사단’이라고까지 몰아붙이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소위 ‘진심’이나 ‘진정’이라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육의 문제, 땅의 요소이지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성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베드로와 같은 고백도 못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예수님은 더하여 베드로의 고백까지도 불합격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심이나 진정이라고 하는 연약하고 감정적인 부분은 사단이 노리는 가장 교묘한 틈이며, 동시에 성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통로로 이용당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인간적인 진심을 빌미삼아 틈타려는 배후의 어둠까지 함께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진심과 진정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거짓 것들은 자동으로 따라 나갑니다. 인간의 진정으로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2:10-14). 신앙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영의 일과 육신의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롬 8: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합당한가, 사람의 생각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사 55:8-9). 마 22:15-22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세금 문제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먼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 편을 들면 안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각을 몰랐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렸다면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책망을 받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5-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 3:1-2). 자기 식대로 예배드리고 자기 식대로 기도하고 자기 식대로 봉사하며 직분 감당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셨습니다(히 2:17). 시간이 없다, 바쁘다 하면서 자기 사정을 핑계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손해보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속한 일’(히 5:1)에 충성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마 16:24).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만이 주관자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갈 2:20). 복 있는 사람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순종하는 가운데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시 1:1-3).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충성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손해보고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해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8:29).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받은 말씀도 놓치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 온 어리석은 모든 시간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시편46, 이사야18-24, 마가복음7-8, 시편150


사람은 죽기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잘 살기위해서 산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은 잘 죽기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셨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말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고, 못보는 자를 보게 하며,

오병이어로 이 세상에서는 먹을 수 없는 양식으로 무수한 사람을 먹인 것을 경험한 이후에,

베드로는 이런 고백을 한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8:29

 

드디어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예수님이 #그리스도이ㅇ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즉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말씀하셨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8:30~31

인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마태는 더 명확하게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인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

 

이 놀라운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들며, 그렇게 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8:33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예수님의길은 #죽음의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길도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 죽는 삶!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길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삶, 새 생명이 있다.

자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새 생명을 사는 삶,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삶,

나는 날마다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날마다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주님! 제가 죽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죽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살길 원합니다.

저의 길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도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개역한글 요 6:26-29)

  

세상에는 일에 내용들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할 일과 가정적으로 하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부엌에서 마당에서 들에서 할 일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너와 나 사이에 할 일은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는 일들도 얼마나 많은가? 단체적으로 국가적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할 일들이 있어서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니면 각가지 기술로 지혜롭게 서로 필요한 것들을 공유하면서 관계를 맺고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일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일 즉 썩어질 땅에 대한 일에 집중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 즉 영생을 얻기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있어도 영생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일만이 가치 있고 후일에 보장되어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늘에 속한 일이며 현세적인 일이면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보람된 일이다. 그러면서 내세적인 것인 동시에 영적이면서 소망과 기쁨을 주는 생명운동을 일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땅에 속한 것이며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항상 너와 나 사이에 경쟁의식을 가지게 한다.  

 

두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살펴본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어느 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간단하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냐? 누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냐? 오늘날 교회당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직분과 직책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서 직분 받고 영육의 복을 받아서 형통하다고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한 것에 대한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가? 성수주일, 기도생활, 헌금생활, 봉사생활, 이웃사랑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 순종의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날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1-24)

 

 

이때에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빌 2:19-22)

 

 

여기서 빌립보 교회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 지기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뜻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2-3) 여기서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진찰하고 있다. 먼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편지에서 ‘자기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해서 구분해서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일’이나 ‘자기의 일’은 세상적이고 ‘하나님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비한 비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의 ‘지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학사전에 지식에 대한[知識,止息,智識] 뜻을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라고 했다. 영어로 지식을 ①knowledge ②understanding ③know-how라고 했다.

 

 

위키백과 사전에 ‘지식(知識)’은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 등을 포괄하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최근에는 한 사람 뿐 아니라 집단의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도 지식이라고 부른다.

 

 

넓은 뜻으로는 어떤 사물(事物)에 관하여 명료한 의식을 지니는 것으로서 알고 있는 내용, 알려진 사물의 뜻이 되기도 하며,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경험적 인식의 뜻이다. 좁은 의미, 즉 엄밀한 의미로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확실한 의식을 지식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사물의 성질, 다른 것과의 관계 등에 관하여 참된 판단을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지식은 억설이나 상상과는 달리 보편타당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고(思考)의 작용이 곁들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지식에 대한 뜻을 살펴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다. 어떤 지식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세상적인 교육을 통해서 배운 내용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식’이란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아는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생’과 결부시켰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오늘날 교회를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지식에 따라 열심을 내고 있는데 대한 것을 어떻게 진찰 할 것인가? 또한 예수님은 어떤 일에 열심을 요구하고 계실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교회당교회문화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그 결과 직분자로 선택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그 직분을 과시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일날 하루는 거의 교회당에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바른 신앙의 지식을 알고 열심 내는 증거일까? 과연 열심 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인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볼 과제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하자면 교회에서 저는 황현석 목사라고 불립니다.
황현석은 제 성과 이름이고 목사는 교회에서 제 신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교회에서는 성과 이름 뒤에
사모, 장로, 권사, 집사, 교우라고 해서
교회에서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가복음 8:27-38)

 
우리는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의 이름은 말 그대로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예수이고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예수의 신분을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말로는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때도 많은데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한자어로 기독(基督)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소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하는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봐도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예수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무슨 뜻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야와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말이고 그리스도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언어인 헬라말입니다.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서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던 시대는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을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로 보면 그리스도는 어렵고 힘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면 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이고 말씀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언자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예수 당시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하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를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이미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대를 이어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볼 때는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께서 제사장이라고 하면 이 역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왕이라고 하면 헤롯 왕과 로마제국에 대해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예수로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31절에서는 자기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믿는 예수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것을 이해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한 것은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아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직접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복음 8:33).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5절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이 말씀에 나오는 목숨을 잃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은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목숨을 잃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일이라고,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기들의 전부입니다.
이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니까
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말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며 따랐던 일에 더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생명을 잃어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잃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는 편한 길, 고통 없는 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겪으셨으니까
우리는 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난하셨으니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천대받으셨으니까
나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예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만 지시고 나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모두 예수만 감당하시고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믿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멸시와 천대도 예수만 받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좋은 것만 누리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나는 어떻게든 부유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모든 환란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실할수록 반드시 해야 되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익만 바라는 믿음은 결코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버리는 믿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