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신명기 7:7)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신명기 7:7)

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밝힌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라서 택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는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신명기 7장 7-9절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



세상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우수하고, 가장 세련된 사람을 원합니

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지식과 경험과, 더 많은 자격증, 더 나은 학벌을 얻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일들이 이러한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 잘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유대 민족은 무엇 때문에 선택을 받았을까요? 다른 민족들보다 머리가 좋아서, 아니면 키가 커서, 아니면 강하고 아름다워서, 아니면 재능이 많아서, 아니면 믿음이 좋아서 선택을 받았을까요?

본문은 세상의 선택 원리와 정반대인 하나님의 선택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수많은 별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 조그마한 지구를 택하셨습니다. 지구 가운데서도 가나안의 조그마한 땅을 택하시고, 그 땅 가운데서도 여러 민족 가운데 가장 적은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너무나 작아서 유대 족속 중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는 베들레헴 성을 택하시고, 또 그 베들레헴 자체 안에서도 구유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구유에서부터 십자가에 까지 하나님의 선택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가나안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역사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그리고 광야에서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량한 광야에서 지낸 40년 동안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교 개혁자인 존 녹스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를 붙잡고 고백했습니다. “여보게 나도 이단이 될 뻔 했네. 어제 저녁 문득 내가 교회와 진리를 위하여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했으니 하나님도 조금은 나를 참작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네. 이때 내 머리를 스친 성경 말씀은 ‘네가 가진 것 중에 내가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 는 말씀이었네. 여보게, 나와 함께 기도하세.”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감명 깊은 기도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미국에 아이언사이드(Ironside)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박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들은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그 청년의 말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법대로 하는 것을 원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마도 자네는 지옥에 가야 마땅할 것일세.”

교회에서는 법보다 은혜가 앞서야 합니다.

세계 제일의 철강 왕으로 미국 재계를 주름 잡았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결혼한 그는 가족과 홀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사업에 최선을 다했으나 급기야는 파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온 식구가 빈손으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카네기는 마지막 수단으로 꿈과 미래가 있으나 모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땅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남은 돈과 어머니가 지니고 있었던 낡은 금반지와 아내에게 선물로 준 목걸이를 다 팔아 긁어모아 보았으나 역시 부족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친구 되시는 헨델슨 부인은 모자라는 뱃삯 20파운드를 선뜻 빌려 주었습니다. 언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멀리 낮선 땅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 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빌려 간 돈은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너무너무 고마워하고 감격해하며 거듭 약속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많은 고생을 참아가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덧 어렵게 모아둔 돈이 20파운드와 맞먹는 200달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200달러를 송금 수표로 바꾸고 난 다음, 그날 저녁 조촐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빚을 갚고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서로 축하하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했습니다.

이때 카네기는 상기된 얼굴로 가족 앞에 서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하여 평생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자임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됩시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재료가 나쁘면 나쁠수록 그런 재료로 예술품을 만든 사람의 명예는 더욱 더 위대해지는 것이고, 군대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런 적은 군대로 대승한 승리자의 영예는 더욱 더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기드온의 300명 용사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시대를 지나 사사시대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삿 2:10)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실 때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을 붙이지 아니 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고 하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두려워 떠는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고 1만 명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은 1만 명도 많다고 하시고, 다시 선택 과정을 거쳐 300명만 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 용사들을 통해 메뚜기의 중다함 같은(삿 7:12)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업에 복을 주시고, 자녀들이 잘 되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나이마에 사는 스탠리 팜(Stanley Pam)이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을 위한 사업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사업을 통해 최상의 것을 주께 드리며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영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사업을 하고 나에게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너는 단순히 종업원이 되어라. 끝까지 종업원으로 일하여라.”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스탠리는 회사 설립 신고를 할 때 회사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생애를 걸고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 동안 다른 기업처럼 여러 번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놀랍게 발전했으며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대로 월급을 받는 종업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부였던 록펠러는 많은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는데,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비롯해서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사회에 바쳤지만 자신이 세운 그 많은 대학과 교회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록펠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신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후 9:13), 그리고 구제(고후 9:9)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 하나님의 긍휼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은혜를 입고도 끝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매번 용서하셨고, 끝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라면 아무 수없이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신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면서 미천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미천한 자들을 택하셔서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곧 세리 마태를 택하셔서 신약의 최초 증인이 되게 하셨고, 과거에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셔서 부활을 최초로 알리는 반포자로 삼으셨고(마 16:9, 요 20:11-18),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을 택하셔서 가장 유력한 사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구원하시고 선택하셨는지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1장 1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죄인들도 바울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을 나태내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외에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그 공항은 라구아디아 공항입니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한 시장의 이름입니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아주 유명한 명 판사였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 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님, 저에게 한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 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버려둔데 여러분도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명 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여 그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 후 뉴욕 시민들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긍휼이 많은 판사라고 인정하였고 그는 후일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며 긍휼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도 적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전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질문]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다윗 혈통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초림하시기 위해 답이 없는 민족으로 그리고 지역상 전쟁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 몇 가지만 알려주십시오.

 

[답변]

 

가장 적은 민족이라 택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밝힌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라서 택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적은 민족이라면 주변의 큰 민족들로부터 여러모로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당신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처럼 주변 강대국들에게 계속 침략과 노략질을 당하고 나아가 그들의 식민지로서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들로 자리 잡게 한 가나안 땅도 아주 척박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말씀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말 그대로 일반적인 농업보다는 목축과 양봉 밖에 못할 정도로 산악지대나 황량한 땅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조한 사막 땅이 대부분입니다.

 

땅이 비옥해서 농업이 번창하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곳은 큰 강이 통과하는 주변 평야입니다. 나일 강 하구 삼각주를 곡창지대로 품고 있는 애굽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변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으로 불렸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그렇습니다. 이 두 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은 그 두 곳의 중간에 있는 황량한 지역이라 문명의 발전이 늦었을 뿐 아니라 두 문명권이 충돌하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항상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모든 악조건 가운데도 당신의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 당신께서 일용할 양식을 풍성히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실증적인 증거로 사십 년의 광야방황 중에도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로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것도 가데스 바네야에서의 당신을 거역한 죄 때문에 광야만 방황하다 죽게 되는 심판을 내렸음에도 말입니다. 일용할 평범한 양식이라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에 젖과 꿀 같은 고급한 음식 이상으로 맛나고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적은 민족을 택해서 당신만을 의지케 한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병을 준 후에 약을 주려는 목적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모습이자 이스라엘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응분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의도한 바가 결코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은 이스라엘더러 자기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려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민족이 아니라 한 개인을 택했다.

 

상기 본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벌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신명기는 그들이 광야를 방황하는 중에 새로 태어난 신세대에게 모세가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가장 적어서 택했다는 말씀도 모세가 출애굽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신세대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민족들을 비교 검토해서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정이 너무 딱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준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은 약 2백만 명으로 그렇게 적은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최강국 애굽의 바로가 이 백성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고 걱정할 정도였습니다.(출1:9,10)

 

이스라엘은 출애굽 전에 이미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와 맺은 언약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을 택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었습니다.(창12:1-3) 그것도 그 지역의 우상을 섬기던 가문에서 말입니다.(수24:2)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후에 얻었습니다.(창32:28) 그 뜻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뜻 대신에 당신의 택한 종으로 항상 당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것이라는 거룩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원래는 야곱의 개명한 이름 이스라엘이 그의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됨으로써 히브리 민족 전체와 나라를 대변하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열두 아들과 손주들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는 겨우 칠십 여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창46:27)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야곱 집안이라 민족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했던 집안이 애굽에서 사백 년 만에 바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창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선조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성취된 것입니다.(창15:5) 애굽으로 이주한 초기에는 요셉이 큰 공을 세웠기에 야곱의 후손 즉, 이스라엘은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얼마 안 가서 노예로 힘든 삶을 사는 가운데도 그렇게 번창한 것입니다. 최강대국의 노예로 지내니까 도적이나 전쟁의 위협이 없고 애굽도 그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숙식을 부족하지 않게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가문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뜨내기 집단이었습니다. 폭력이 난무하던 고대에서 가장 안전하게 후손을 번창시킬 수 있는 하나님만의 비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차고 넘치도록 기다리셨다가(창15:13-16)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거룩한 율법을 수여하고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조직 건국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택한 까닭은 한마디로 당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로 심판을 받고도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설파한 대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 안에 보여 알 수 있는데도 그분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고 있었습니다.(롬1:20-23) 그래서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라서 당신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계시해주고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며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것입니다.

 

십자가로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그런데 아브라함 또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정확하게는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은 그 타락의 원흉인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는 벌을 내렸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와 상관없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되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죽지만(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함), 사흘 만에 부활해서 흑암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실(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함)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 최초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했기에 원시복음이라고 칭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당신을 거역할 줄을 다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준 것입니다. 인간으로 스스로 자의에 따라 당신을 기뻐하며 교제 순종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류의 역사를 오직 이 원시복음이자 최초의 은혜 언약을 실현시키는 방식대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실현은 알다시피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그 언약이 실현되는 모습이 율법 아래에 난 자로 속량해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언급되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부터 율법 아래 있게 하여 예수님이 구속할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세우게 하고 그 운영과 통치의 기준인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준행함에 완전히 실패하고 도리어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식민지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율법을 지켜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 준행에 실패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으로 택한 셈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 어떤 민족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여 당신의 의에 들 수 없기에 그 실증적 증거를 이스라엘을 통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로선 약소국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면서 세상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보호 인도하셨습니다. 음란하게 우상숭배만 하던 세상에서 유일신 창조주 신앙을 갖게 하여서 당신의 백성답게 의롭게 살도록 율법까지 주셨습니다.(롬3;1,2) 그런 백성조차도 하나님의 의에 전혀 들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리에까지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은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본으로 선택 받은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율법은 당신의 진노를 이룰 뿐이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나, 기후와 풍토 뿐 아니라 그 민족성과 언어와 그들이 형성한 문화 전통 관습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은 그 진리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무대장치로 마련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실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계획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이 아니 아브라함이 택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특별히 이스라엘을 그 십자가가 실현되는 방향과 모습으로만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성경을 주시려는 목적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 당위성과 이유를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역사를 통해 밝혀주었습니다. 구약성경 내내 메시아가 오신다고 이백 번이 넘도록 예언하신 까닭입니다. 그 예언이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이스라엘을 이끌었으니 그들을 택한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이백 개가 넘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하는 시기와 장소와 모습도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이뤄졌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에 의해 세상에 전쟁이 중지되고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로마제국의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제국의 변방 식민지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실제로 아구스도 황제를 복음(good news=gospel)을 전해주는 자라고 신격화하여 칭송할 때였습니다. 아기 예수가 바로 그 때에 태어난 것은 현실적 안락과 풍요는 죄에 찌든 인간에게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십자가의 참 복음으로 대조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반드시 로마 제국의 십자가로 처형을 당하게끔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 나라들의 모든 역사까지 주관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만이 인간의 모든 죄악과 고난까지 짊어지신 완벽한 구속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겁하고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빌라도가 그 때 유다 총독이어야 했고 더 음흉한 헤롯이 유대 왕이어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골고다 십자가라는 창세전부터 있었던 각본에 따라 하나님이 완벽하게 주관한 것입니다.

 

복음서 기록을 잘 살펴보면 서로 원수 사이였던 유대인과 로마 이방인들이 힘을 합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사탄이 배후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인종 문화 종교에 구분 없이 미혹시키고 조종한 결과입니다. 사탄의 궤휼에 넘어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마저도 예수님이 다 주관하신 것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탄과 죄에 찌든 인간이 합작했던 그 모략을 완전히 깨트렸습니다. 흑암 아래 죄의 노예로 묶여있는 온 세상에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빛을 찬란히 비춘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전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당시 지중해 세계를 점령하여서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처럼 로마가 세상을 정복하면서 군대와 물자를 이동하기 좋게 만든 도로망이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전하기 좋게 하나님이 다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언어에는 특유의 리드미컬한 운율이 있습니다. 조상의 전승들을 암송하기 쉽게 하여서 구약성경을 대대로 기록 보존 유지하게끔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존하려는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승을 부릴 때에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한 목동에 의해 BC 2-3세기의 것으로 판명된 구약성경사본들(Dead Sea Scrolls)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그 발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구약성경이 현존하는 사본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사야서 53장이 예수님 오시기 훨씬 전에 유대인들이 익히 배워서 알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 측에선 그 기록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와 너무나 정밀하게 일치하므로 십자가 사건의 훨씬 후대 제자들 조작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발견으로 그 이론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구약성경은 원본대로 잘 보존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이사야서에서 53장을 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끝까지 당신을 거역할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일 것입니다.

 

주로 양피지에 쓰여진 성경이 이천년이 훨씬 넘는 그 오랜 세월 동안에 전혀 손상되지 않게끔 하나님이 보관해두었습니다. 아주 한적한 사해 근처의 컴컴한 동굴 안에서 가장 건조한 날씨에 따라 썩지 않도록 하나님이 숨겨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작이라는 비평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어린 목동에 의해서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해서 그것이 완전히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광대하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가 얼마나 엄청나며 놀랍고 은혜롭습니까?

 

누차 강조하지만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조성하여서 모든 인물과 사건들에 간섭 역사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라는 그 엄청난 은혜를 죄에 찌든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때에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바로 그 장소, 그 시간, 그 모습으로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관련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죄의 본성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한 채로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같이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택하여서 믿음을 심어주시고 당신의 종으로 당신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창 12:1~3, 벧전 2:9~10)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에게 덕담을 건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기도 좋고 듣고도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렇게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연하장을 보면 거의 복(福) 자가 들어갑니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옛날에는 주발에도 수저에도 이불에도 옷에도 복 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아주 특이하죠. 중국식당 같은 데 가 보면 복(福) 자를 거꾸로 써 붙여 놓은 걸 봅니다. 여러 가지 해석에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뒤집어 놓아야 복이 하늘에서 쏟아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복을 주로 육신적 혹은 물질적인 것에 치중해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유하고 움켜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소유보다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소유하고도 누리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나누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아주 특이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리고 나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복을 나누는 것을 가리켜 사명이라 부릅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더 큰 복이 임합니다. 그리고 큰 기쁨이 넘칩니다. 심지어 천국의 영광까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까지 복에 포함시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복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이거야 말로 참 복이요 큰 복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인데, 홍복(洪福)이란 단어가 있죠. 넓을 洪 자를 붙여서 홍복(洪福)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더 큰 복을 ‘홍복’이라고 불러봅니다.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홍복을 받기 위한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서, 아니 역사상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홍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홍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따라 하면 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비교되지 않는 참 복, 그리고 큰 복인 홍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 : 복의 근원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 지역(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땅, 고대문명 발상지)에 살던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불러내셨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집안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월신 즉 달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겁니다. 어떤 이유로 그를 선택하셨을까요? 그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축복하는 게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through you)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 보면 세 가지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큰 민족 즉 위대한 민족(great nation)을 이루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창대한 이름 즉 위대한 이름(great name)을 갖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 자체(blessing)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복의 근원’이라고 번역되어 있었죠.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것, 즉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에 보니까 그를 통해서 많은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명 인사였던 아브라함, 게다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겼던 그가 놀라운 축복을 받고, 더 나아가 많은 민족들에게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예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본래 아브람이었죠. ‘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비’ 즉 ‘많은 민족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약속,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복을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이뤄주신 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 범위가 엄청 넓습니다. 그래서 홍복이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복이 흐르고 넘쳐 많은 민족들에게 나누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의 원리입니다. 축복은 항상 사명과 짝을 이룹니다. 비유하면, 축복과 사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축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비유하면 마치 이런 겁니다. 세상의 축복은 저수지와 같습니다. 소유하고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나중에 썩어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성경의 축복은 강물과 같습니다. 축복을 받되 다른 데로 흘려보내니까 흐르고 넘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축복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창12:1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the land I will show you)으로 가라” 사람이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요즘도 그럴진대 고대에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그냥 믿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또 그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믿음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 후 아브라함이 어떻게 됐나요? 그의 생애 가운데 이 약속들의 상당 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75세까지 혈혈단신이던 그가 이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후손이 번창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세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 : 제사장 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그 다음 그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역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다르죠. 출19:5~6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my treasured possession)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을 내 소유 삼는다는 것은 특별 소유 즉 보배로운 존재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지중지하며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만 예뻐서 그런 게 아니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축복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거룩은 구별 즉 성별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민족들과 차별된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빛을 발함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 성경에 보면 ‘폰티펙스’(pontifex)라고 변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다리 놓은 사람(bridge-builder) 즉 중보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축복을 받고 끝내지 말고, 그 축복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눠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 다음에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19:5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 ”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런 이스라엘의 사명을 가리켜 ‘이방의 빛’의 역할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사49:6 “ ...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땅 끝은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혈통적인 이스라엘만 아니라 만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구약 이스라엘은 왜곡된 선민의식으로 자기들끼리만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다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는 선교가 이뤄지기는 하지만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신약 시대에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복의 근원 즉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3] 우리(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선택하신 이유 : 왕 같은 제사장

구약 이스라엘이 혈통을 중시했는데, 사실은 구약시대에도 혈통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무수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가운데 다말과 라합, 그리고 룻 같은 여인들이 모두 이방인입니다.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롬3:29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으면 다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이라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지만 이제 믿음으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는지 벧전2:9~10에 나와 있습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던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멸망할 인생을 이제 영생을 주시고 온갖 축복을 주십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들어가게 한 겁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 더 높은 치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참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홍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저와 여러분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해 주신 게 분명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극동 아시아 귀퉁이에 있는 한반도, 그야말로 땅 끝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130여 년 전 선교사들 통해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짧은 역사 가운데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적이란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말씀드리죠. 대한민국의 3대 기적! 뭔가요? 복음화의 기적, 경제 부흥의 기적, 그리고 민주화의 기적입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축복입니다. 1천만 성도에 5만 교회의 성장은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경제의 부흥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까, 우리나라가 3년 연속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수출액이 세계 7위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60년대 3대 웃음거리가 있었습니다. 수출 1천억 달러,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달성하고 마이카 시대를 이루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그 때 웃었던 게 진짜 웃기는 일입니다. 초과 달성했죠. 이제는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 개인에게도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고, 개인차가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 수 있도록 육신적 물질적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계속 축복만 받으려고 한다거나, 혹은 받은 축복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큰일이 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잘못 하면 추락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도 부정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가요?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이 만연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지수 1위입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축복만 받으려고 해서 그래요. 이제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국가도 축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오히려 저주이죠. 복의 근원 즉 축복의 통로가 될 때 비로소 축복이 행복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행20:35 “ ...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수년 전 서울대학교에 행복연구센터가 설립되어 국민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행복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 교과서를 편찬해서 중학교 200개에 보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연구소에서 강조하는 게 이겁니다. “이웃에게 행복을 주면 당시에게 생복이 찾아옵니다.”(Giving happiness gives you happiness.) 좋은 일이기는 한데 연구할 게 뭐 있나 싶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특히 우리는 복음의 빚진 나라입니다. 100년 동안 3천명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6.25 때 16개국에서 전투병을 보내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나라입니다. 인간적인 도리로 봐서도 축복을 나눠주는 사명을 감당하는 게 마땅합니다.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축복을 나누는 제사장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흘러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물물 원리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더 흘러들어오는 원리와 같습니다. 또 눅6:38 보면, 마중물 원리가 나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펌프에 물을 조금만 집어넣어도 많은 물이 퀄퀄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참여시켜 주십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 충성한 종에게 주인이 주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축복의 통로로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면 큰 기쁨이 넘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장차 천국이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여러분, 이제 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축복을 받고 싶습니까? 여전히 물질적 육신적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죠.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차원 더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를 깨닫고 아브라함처럼 홍복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백설 공주 동화책 수준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왕자님과 만나 오래 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결코 아닙니다. 축복을 받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축복을 소원하더라도 그 다음까지 포함해서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꿈과 비전을 담아 기도하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세상을 책망하리라(요한복음 16:8) /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요한복음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When he comes, he will convict the world of guilt in regard to sin and righteousness and judgment:

죄에 대하여(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죄란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될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And so I tell you, every sin and blasphemy will be forgiven men, but the blasphemy against the Spirit will not be forgiven.

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의에 대하여(요한복음 16:10)

의에 대하여(요한복음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in regard to righteousness,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where you can see me no longer;






심판에 대하여(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and in regard to judgment, because the prince of this world now stands condemned.

이 세상 임금은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으므로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잠언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시편 50:6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예수님의 비유 / 열 처녀,



예수님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

기다리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등불과 기름의 참된 의미

등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사람의 육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등은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등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이러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성경공부의 묘미라고 하겠으며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관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처럼 무조건 "믿으라!"
"덮어놓고 믿으라!"
이렇게 가르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을 펼처서 의문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바르게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첫째,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기름 / 구약 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면, 이는 보통 감람(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감람 열매를 짓눌러 으깨어서 기름이 나오면, 그것을 모아 질을 따라 분리했다.
감람 기름은 살림살이에도 쓰고 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썼다.
또한 감람 기름을 향료와 섞은 뒤에 임금 같은 사람들이나 특별한 물건들에 기름 붓는 데 썼다(기름 부음).
기름은 기쁨과 잔치를 상징한다.

기름 부음 / 기름 부음은 기름(감람 기름)을 머리와 몸에 바르거나 그 위에 붓는 식으로 했다.
이는 삶의 기쁨과 유복함을 표현하므로 상중에는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기름 부음은 종교 생활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나 사람, 곧 벧엘의 거룩한 돌(창 31:13)과 회막과 제단(출 30:26-29), 예언자(왕상 19:15-16)와 제사장(출 30:30)과 임금(삼상 10:1, 16:1, 13)에게 예언자나 제사장이 기름을 부었다.

임금에게 기름 붓는 것은 가나안과 애굽 지역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 배경은 기름을 부음으로써 군신 관계가 생겨난다는 생각에 있었던 것 같다.
곧 임금은 가장 높으신 임금이신 하나님에게서 권력을 위탁받았다는 것이다.
임금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삼상 24:7, 시 2:2).
나중에는 이 칭호가 다윗의 집안에서 나는 구원의 임금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인물을 가리키게 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히브리 말로는 '마쉬아흐'이다.(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자(4899) 마쉬아흐(mâshîyach)  מָשִׁיחַ 
1. 기름부음을 받은.  2. 삼하 1:21. 3. 단 9:25.
발음 / 마쉬아흐[ mâshîyach ]
어원 / 48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름부음을 받은(레 4:3, 삼상 24:6, 삼하 1:21, 사 45 :1), 기름 부은(삼하 19:21, 시 132:17),[명] 기름부음을 받은 자(삼상 2:10, 삼하 1:14, 대하 6:42), 기름 부음 받은 자(시 2:2,합 3:13).
구약 성경 / 38회 사용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


기름 / 기름 붓다 / 어떤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또는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기 위하여 올리브 기름을 붓거나 문지르는 것.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들이 왕위에 오를 때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리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와 구세주로 택하여 임명하신 분을 일컫는 칭호이다.
기름 부음은 어떤 때는 그 기름 부음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을 상징했다(행 10:38).
기름은 또한 병을 치유하는 데 쓰였다(막 6:13, 약 5:14)

나드 / 나도 기름  /  히말라야 지역에서 자라는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뽑아낸 물질로써 만든 향유인데 쉽게 증발한다.
그처럼 먼 나라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막 14:3-5, 요 12:2-5 나드, 아 4:14 나도, 아 1:12 나도 기름)

둘째, 등이 상징하는 것

1. 등 - 사람의 몸


2. 등 - 등불

등잔, 등불 / 주전 300년경까지 등잔은 흙 사발로 만들어 그 가장자리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튀어나온 부분을 만들어 심지를 두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튀어나온 부분은 점점 더 주둥이 모양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등잔 가운데 기름 채우는 구멍과 심지를 둘 작은 구멍을 빼고는 닫힌 꼴을 하게 되었다.
연료로는 감람 기름이나 동물의 기름을 썼는데, 한 번 채워 넣으면 2-4시간 쓸 수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흙 등잔 대신에 쇠붙이로 만든 등잔을 썼다.
회막에는 등잔을 두지 않고 특별히 정교한 모양으로 만든 금 등잔대를 두었다(출 25:31-39).

등불(5216) 니르(nîyr) נִיר 

1. 등불.  2. 항상 자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쓰임. 열왕기상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발음 / 니르[ nîyr ]
어원 / 51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출 27:20, 삼상 3:3, 삼하 22:29, 왕상 11:36, 왕하 8:19, 대하 21:7, 습 1:12), 등잔대(출 40:4, 대상 28:15), 등(민 8:2, 대하13:11, 시 132:17), 등잔(출 25:37, 민 4:9, 슥 4:2).
구약 성경 / 8회 사용


등불, 불길(3940) 랍피드(lappîyd) לַפִּיד 

1. 등불.  2. 불길
발음 / 랍피드[ lappîyd ]
어원 / ‘타오르다’는 뜻을 가진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횃불(창 15:17, 삿 7:16, 슥 12:6), 번개(출 20:18), 홰(삿 15:5), 재앙(욥 12:5).
구약 성경 / 4회 사용




셋째, 등불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상징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중 한번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때라면 다른 한 번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였습니다.
여태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늘 성령 충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이 열 처녀를 크리스천에 비유하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크리스천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어리석은 5 처녀처럼 기름이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천년왕국 때 주님께로 돌아올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다’란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과 4절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의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더라, 그러나 현명한 자는 등불과 함께 자신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3절의 ‘took no oil’이란 표현이 눈에 들어오자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있던 기름이 떨어진 줄로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듣고 넘어갔었던 구절이었는데 5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이 없었음을 발견하자 잠시 멍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성경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살피며 정독했었고 또 그 과정에서 깨달았었던 다른 것들이 합쳐지며 화학작용처럼 일어난 것이긴 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가운데 이미 ‘vessel’ 즉 그릇이 성경에선 사람의 몸을 뜻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사울에게서 도망칠 때 제사장 아히멜렉 만나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먹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 올렸다 내린 거룩한 빵 5덩이 밖에 없는데 같이 있는 자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았다면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삼상 21:5)”
여기서 소년들의 몸을 그릇으로 표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 바울에 대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바울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디모데에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20-21)”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땐 성경에서 그 단어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읽어보는데 그렇게 모든 구절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단어의 의미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예전에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lamp’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44구절 안에 총 50번 등장합니다.
50온전한 은혜속량자유를 뜻하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뜻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창세기 15:17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처음 나옵니다.

시편 119:105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잠언 6:23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어느 날 열 처녀의 비유를 읽다가 어리석은 5 처녀는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없었고 현명한 5 처녀는 등불과 함께 자기들의 그릇(몸)에 기름을 가져갔더라는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법(등불)이 올 것이라는 언약은 알았지만, 그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은 정작 거부해서 성령(기름)은 없게 될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어 성취하신 성령의 법(말씀) 안에 기름인 성령을 받게 될 교회를 비유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등불 자체엔 당연히 기름이 있어 불이 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등불 자체에 기름이 있지만, 말씀 즉 성령의 법(등불)만 갖고 있지 그 말씀을 마음 가운데 믿어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의 전(기름을 담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고전 3:16), 그가 가진 성경이나 언약이 구원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이 비유를 현 지역 교회에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고 말씀을 마음에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그냥 성경책만 들고 다니는 church goer(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더구나 3절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든 묘사에서 복수로 쓰이는데 4절에 지혜로운 처녀들은 5명임에도 불구하고 ‘the wise’란 단수로 표현하다가 ‘그들의 그릇들에’, ‘그들의 등불들’에서는 복수로 쓰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한 몸이요 한 영인 탓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에서 나오는 현명한 5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줄 수 없다고 9절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그릇에 담겨 있는 기름을 (몸에 임재하시는 성령) 나눠줄 방법이 없기에 너희 것을 사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로 와서 사라고 권면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7-18).”

그들은 이어지는  3:20에 보이듯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주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어리석은 5 처녀들은 11절에 다시 돌아와 지혜로운 자가 신랑과 함께 marriage(결혼)에-성경엔 wedding 즉 결혼식에 대한 비유도 나오지만, marriage 즉 결혼식을 포함한 결혼한 상태를 뜻하는 비유도 나옵니다-들어가게 되어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냥 문을 열어달라고만 하지 어디에도 기름을 사 왔더란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공중 재림) 사이에 있는 은혜의 때가 지난 후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God of Numbers : 10이란 숫자의 의미

‘10’이란 수는 어떤 것의 ‘fullness(충만, 완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엔 ‘God said’란 문구가 10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God said : 하나님이 말씀하시다’란 문구가 창조 사역 개요를 담고 있는 1장에 10번 나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 히브리어 7단어, 영어 10단어로 구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7이 하나님, 특히 영의 완전수라면 10은 충만함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모두 각각의 알파벳에 고유의 수가 정해져 있어 숫자로도 환산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처럼 말씀과 숫자를 공부하다 보면, 성경은 결코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게 확연해집니다.

‘10’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곳곳에서도 보이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각 손과 발에 5개의 손(발)가락이 있고 두 손(발)에 10개의 손(발)가락으로 완전합니다. 숫자는 0-10까지 한 세트를 이루고 10이 되었을 때 다시 1부터 돌아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끝(충만함)이 이르고 심판이 이르렀던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개의 재앙이 심판의 충만함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5계명씩 두 판에 나뉘어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10개의 휘장, 10개의 기둥, 10개의 받침(sockets)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출 26, 27장). 민수기 14장 2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를 10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10은 시험, 불순종, 반역의 충만함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 전체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은 꽉 찬 ‘10’번 나옵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사람이 쓴 성경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이 쓰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킨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출 12장), 광야에서(민 9장),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수 5장), 히스기야 때(대하 30장), 요시아 때(대하 35장),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여러 방해와 어려움 끝에 성전 짓기를 마쳤을 때(스 6장), 예수님이 12살이셨을 때(눅 2장), 4복음서에 기록된 3번의(요 2장, 요 6장, 마 26장) 다른 유월절에 대한 기록.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유월절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치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니산월 14일이 되는 유월절에 쓰일 어린양을 취하는 날은 그달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12:3).

여기서 예리한 분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베드로와 바울에 연관돼서 유월절 절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오순절’로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힐 때는 ‘무교절’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과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 핀잔을 줄 땐 ‘성만찬: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유월절’을 지켰다고 나온 기록은 4복음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10번으로 끝납니다(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왕국에 대한 것도-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든 세상의 왕국이든-그 온전함(충만함)을 나타내는데 10이란 수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창조원리이기에 세상에서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뜻할 때 ‘열국’, ‘열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왕국은 다니엘서에 10개의 발가락과(단 2장) 10개의 뿔로 표현되는데(단 7장) 요한계시록에서도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용)의 뿔 10개로 표현됩니다(계 12, 13, 17장).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총 10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마 13, 22, 25장).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록 5명만 들어갔다 해도 10명의 처녀가 나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은 1개를 찾는 여자의 10드라크마나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이 10명의 종에게 나눠주는 은 10 므나에 대한 비유도(눅15, 19장)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10가지 종류의 불의한 자들이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 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 경우엔 불의의 충만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마서 8장 38-39절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끊을 수 없는 10가지의 권세나 능력이 등장합니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거된 10개의 권세가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fullness(충만, 완전)’을 나타내는 10에 대해 적었습니다.

God of Numbers: 5란 숫자의 의미

지금까지 성경구절을 통한 ‘40’이란 수가 갖는 의미와 ‘11’의 의미만을 살펴봤었습니다. 특히 ’11’에 대한 의미는 성경 11장들을 통해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모세오경과 역사서의 11장, 예언서와 신약의 11장). 오늘은 ‘5’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숫자 ‘5’는 통상적으로 ‘은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6장 8절인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룻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구절은 룻기 2장 2절인데,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입니다. 보아스의 이름이 5번째로 나오는 내용에서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룻 2:10)”

은혜란 가치 없고 연약한 것들에게 베풀어지는 대가 없고 일방적인 호의나 친절입니다. ‘5’는 특별히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해결책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피로 속량하여 이끌어내셨을 때 “한 횡렬에 다섯씩-by five in a rank”(출 13:18) 이끌어냈다고 성경은 서술합니다. 영어 킹제임스를 보면 “went up harnessed”라고 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의 이차적 의미로 “by five in a rank”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영어 킹제임스는 번역된 단어나 구절 옆에 이차적 의미를 적어놓을 때가 있는데 이 이차적 의미는 도리어 직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성경 버전마다 약간 다른데 ‘무장하고 나올 때에’ 혹은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로 번역됐습니다. 어차피 ‘한 횡렬에 다섯씩’이란 의미는 전쟁하러 나가는 군대 행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성인 남성만 60만 명이었는데 그 많은 무리를 한 행렬에 다섯씩 구성했을 리는 없고 ‘행렬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란 의미일 거라고 합니다. 어찌 됐거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내보내실 때 ‘by five’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0년 후(4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여호수아 1장 14절을 영어 킹제임스로 보면 이차적 의미로 ‘marshalled by five’, 즉 ‘다섯으로 정렬하여’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도 ‘무장하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첫 5개의 책은 ‘모세 5경’으로 불리는 성경의 기초로서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의의 필요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5’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성막과 중요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엔 번제헌물, 음식헌물(소제), 화평헌물(화목제), 죄헌물, 범법헌물(속건제), 이렇게 5가지의 헌물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헌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사역을 예표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거룩한 관유(the holy anointing oil)’엔 5가지의 재료가 들어갑니다. 바로 몰약(500 세겔), 육계(250 세겔), 창포(250 세겔), 계피(500 세겔), 감람유(1 힌)인데, 만드는데 필요한 양도 5의 배수입니다. 거룩한 관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한없는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막의 구조와 건축 또한 5의 배수가 곳곳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은혜로만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뜰은 100큐빗에 50큐빗입니다. 성막뜰의 기둥들은 사면으로 20개, 20개, 10개, 10개, 모두 60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5 x 12, 즉 은혜의 통치를 의미합니다(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기둥들은 각각 5큐빗씩 떨어져 있었으며 높이도 5큐빗이었기에 성막뜰을 에워싸는 성막 천은 5 X 5, 즉 25큐빗의 넓이로 나뉘어 있었던 게 됩니다(출 27:9-19 참조). 여기에 번제단도 5 x 5였고 성소의 규격도 10 x 30였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 나오는 성소의 휘장을 보더라도 휘장 10장을 5장과 5장으로 나눠 묶되 한 세트당 50개의 고리를 만들라고 합니다(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2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경우 주셨던 약속으로 “너희 다섯이 백을 쫓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 5개의 물맷돌을 취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에 주실 회복의 은혜를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 다음과 같은 다섯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렘 33:11)” 이번에 글을 쓰면서 보니까 한국어 성경엔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이 구절에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탓에 ‘소리’가 6개가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과 원어로 찾아보시면 5개의 ‘소리’만 나옵니다. “The voice of joy, and the voice of gladness, the voice of the bridegroom, and the voice of the bride, the voice of them that shall say, Praise the LORD of hosts: for the LORD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and of them that shall bring the sacrifice of praise into the house of the LORD.”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인류의 구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리게 될 5가지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다니엘 2장엔 지금 있고 앞으로 올 5 왕국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5번째 왕국은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산에서 나온 손대지 않은 한 돌의 왕국, 즉 반석이신 예수님의 메시아 왕국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5개의 행각이 있었고(요 5:2),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10 처녀 중 5명은 지혜로웠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엔 5명의 여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라합, 룻, 다말, 밧세바, 마리아). 예수님은 떡 5덩어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2절에서 5 지역에 흩어져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혜로 부르신 5가지의 직분을 열거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God of Numbers: 50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은혜의 수 ‘5’에 이어서 은혜의 완전 수 ‘50’이 갖는 성령의 법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그전에 지난번 글에 대해 들어온 코멘트를 잠깐 소개하자면, 숫자 ‘5’가 죽음의 수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5’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고 죽었다’란 표현이 네 군데 나오기 때문입니다(삼하 2:23, 삼하 3:27, 삼하 4:6, 삼하 20:10). 모두 전쟁이나 다툼 중에 죽은 것으로 아사헬이 에브넬의 창끝에 맞아 죽으면서, 에브넬이 아사헬에 대한 복수로 요압에게 찔려 죽으면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바아나와 레갑에게 암살당하면서, 아마사가 요압에게 살해되면서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이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히브리 원어 ‘hahomes’는 킹제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배’로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킹제임스가 ‘다섯 번째 갈비뼈’로 번역한 이 히브리 단어는 실질적인 히브리 단어 ‘5’와 관련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히브리/영어 사전인 ‘스트롱 사전’도 ‘hahomes’를 ‘chomesh’란 어원과 연결해 ‘배’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 ‘chomesh’란 어원에 대해 읽어보면 더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하며 오직 위 4구절에만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에서 인간의 ‘배’를 뜻하는 히브리 어원은 ‘chomesh’가 아닌 ‘beten’입니다. 이 점이 이상해서 ‘5’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를 찾아보자 의문이 금방 풀렸습니다. 5의 어원은 ‘chamesh’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배의 어원’이라는 ‘chomesh’와 모음 한 자 빼고 같습니다. 어차피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습니다. 읽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맞다고 생각되는 모음을 넣어 이해해야 하는 언어이기에 ‘ch-m-sh’와 같은 자음들 사이에 어떤 모음을 넣느냐에  따라 다른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5(chamesh)’가 쓰인 구절들을 찾아보면 ‘hames’란 파생어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킹제임스가 성경이 4번 밖에 나오지 않는 ‘hahomes’를 ‘다섯-hames’과 연관 지어 번역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찌 되었든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은 결국 배나 옆구리 쪽을 찔렸다는 것이긴 합니다.

‘다섯 번째 갈비뼈’란 번역이 더 납득이 가지만 ‘5’란 숫자가 죽음보다는 은혜를 뜻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7’이란 수가 하나님의 완전수, 성령의 수, 교회의 수 등으로 대부분 등장하지만 ‘7 악령’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몰아낸 7 귀신, 사람에게서 나갔던 악령이 자기보다 더 악한 7 악령을 데려와 그 사람의 형편이 더욱 나빠졌다는 예수님의 비유 내용 등등). 그렇다고 ‘7’이란 수를 마귀의 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5’란 수 역시 성경 전체를 훑어보면 은혜의 수요, 언약과 예배의 수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실 때도 5가지의 짐승(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을 가져오게 하십니다(창 15:9). 이처럼 그 수에 대한 바로 된 의미를 알 때 성경에 4번 등장하는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맞아 죽었다’란 의미가 도리어 확연해집니다(세상 및 창조물을 의미하는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갈비뼈는 몸의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나 방패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 밑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갈비뼈를 비껴가 급소를(장기) 찔렸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빗나가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임한 것이 은혜입니다. 열 처녀 중 다섯은 성령의 은혜로 결혼식에 참석해 영생을 얻었고 다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영적 의미와 조명은 여길 눌러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0은 어떤 것의 ‘fullness’를 의미하는 완전수입니다(충만을 의미하는 10은 여길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은혜의 수 ‘5’를 곱하게 되면 온전한 은혜, 즉 속량 및 자유를 상징하는 50이 됩니다. 성령은 주님이 부활하신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은혜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 해인 50년째는 희년으로, 모든 빚이 탕감되고 포로된 자가 풀려나며 뺏겼던 땅을 되찾게 되는 구원과 자유와 회복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에스더 여왕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하만이 50 큐빗 교수대에 달려 죽는 장면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만은 모르드게를 거기에 매달고 이스라엘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구원으로 이스라엘은 오히려 원수를 갚고 하만과 10 아들은 죽습니다(에 5:14; 7:9).

성경 전체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등불에 대한 좀더 자세한 해석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4장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고 나오는데 이 ‘켜진 등불’ 즉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단어가 전체 성경에 50번 등장한다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복된 상태’, 즉 ‘복’을 뜻하는 ‘makarios(마카리오스)’란 단어도 신약에 정확히 50번 나온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큐빗, 넓이가 50큐빗, 높이가 30큐빗이었습니다(창 6: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은혜를 구할 때 ‘50명’의 의인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엔 거기서 ‘5’명이 부족한 ‘45’명이래도 멸하시겠냐고 한 후, 40, 30, 20, 10까지 내려갑니다. 그렇게 단 10명의 의인이라도 발견된다면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이 경우엔 은혜를 입을 의인의 완전수가 됩니다(창 18장).

이전 글에서도 적었듯이 모세의 성막 뜰은 길이 100큐빗에 넓이 50큐빗입니다. 50과 50의 배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막 휘장을 걸 50개의 고리(loops)와 50개의 갈고리(taches)가 나옵니다(출 36:17-18). 이것은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발견되는 진리인데, 에스겔 40장, 42장, 45장을 보게 되면 5와 50의 배수가 성전과 성소의 치수로 곳곳에서 발견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값으로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릴 때 가장 높은 액수로 책정된 것이 50세겔이었는데, 성인 남성의 20-60살까지 여기 해당합니다(레 27:3).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인 밭의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할 때도 보리 한 호멜지기를 은 50 세겔로 계산하라고 나옵니다(레 27:16). 레위인들의 직무는 평생이지만 성막에서의 시무는 30세에서 50세까지였습니다(민 4장). 아합왕 때 이사벨은 주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되는데 이때 오바댜는 100명의 선지자를 숨겨주고 먹일 때 50명씩(by fifty) 숨겨줬습니다(왕상 18). 누가복음 7장 41-42절에서 예수님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5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자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란 질문을 하십니다.

이상 50에 대해 다뤘습니다.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God of Numbers: 8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새로운 시작, 거듭남, 혹은 새 창조를 뜻하는 8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성령)의 완전수인 7에서 1을 더한 8은 재생, 혹은 부활을 뜻하기도 합니다. 일주일은 7일이기에 8번째 날은 새로운 첫날이 됩니다. 음계도 8번째 음은 첫 음과 같습니다.

33이란 숫자의 의미’에 적었듯이 ‘언약’이란 단어는 방주로 들어가는 노아와 연결되어 창세기 6장에 처음 나오며(창 6:18), 이전 세상은 물로 모두 멸망하고 노아와 그 자손들로 새롭게 시작하는 9장엔 7번 언급되어 총 8번 쓰입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축복을 다시 노아와 3아들에게 주신 부분이니 재생의 의미와 맞습니다. 또한 다시는 물로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새로운 언약을 “언약”이 8번째로 나오는 9장에 주셨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은 사람이 쓸 수 없는 책임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물에 쓸려 가버린 옛 세상 가운데서 방주로 들어가 구원된 사람들도 8명이며(벧전 3:20), 새 세상으로 나온 노아를 성경은 ‘8번째 사람’으로 칭합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 번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KJV-밷후 2:5).” 즉, 창세기 때의 새 세상은 8명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노아의 이름이 8번째로 나오는 창 6장 9절의 후반부는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and Noah walked with God-KJV)”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이삭이 8일째 됐을 때 할례를 줍니다(창 21:4). 구약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예표하며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리는 것(골 2:11)’으로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는 것(엡 4: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자인 것입니다(빌 3:3).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직을 위해 7일 동안 거룩히 구분했으며(레 8:33) 8일째 되는 날 시무했습니다(레 9:1). 장막절은 7일 동안 진행됐으며 8일째 되는 날엔 거룩한 집회가 있었습니다(레 23:36).

모세의 진영에서 성막은 8개 진영에 의해 2중으로 보호되고 있었습니다(증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바깥쪽엔 3지파씩 묶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뉘어 진을 쳤습니다(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쪽엔 성막을 중심으로 레위인들(고핫, 게르손, 므라리) 3진영이 서남북 방향에, 그리고 모세와 제사장들(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동쪽으로 진을 칩니다(민 2-3장).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은 진영의 가장 중심부에, 8진영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렇게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진영의 모습은 십자가의 모형이기도 하며 거듭난 자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고(삼상 16:10-11; 17:12), 솔로몬은 새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께 ‘하늘에서 들으시고’란 표현을 8번에 걸쳐 쓰며 간구합니다(왕상 8장과 대하 6장에서). 또한 재림하신 예수님의 천년왕국 때 있을 에스겔의 성전은 바깥 뜰에서 안쪽 문간으로 올라가는 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겔 40:31, 34, 37). 그리고 땅에서의 천년 통치가 끝날 무렵,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단이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게 되고(계 20:7-10)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며 하늘과 땅도 사라지게 됩니다(계20:11-14). 그 후 사망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영원토록 임하는데(계21:1-4), 이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새 예루살렘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계 21:22).

신약, 즉 새로운 언약은 총 8명의 기자에 의해 쓰였습니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유다 바울).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눅 9:27)”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8일)쯤 되어(눅 9:28)”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 ‘transfiguration(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장차 올 왕국(나라)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주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 새로운 출생(다시 태어남)에 대해 나누시는 부분엔 ‘born(태어남)’이란 단어가 8번 등장하며(요 3:1-8),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물(water)’이 8번, 우물이(well) 5번(은혜를 뜻하는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등장합니다(요 4:4-15).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8일째 되는 날, 즉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첫날’ 즉 8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목격하지 못한 도마에게 ‘8일 후에(요 20:26)’ 나타나셔서 의심을 새 생명에 이르는 믿음으로 바꿔주십니다. 골로세서 3장 12절에서 14절엔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갖춰야 할 7개의 덕목이 열거되는데(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이 모든 것 위에 온전하게 매는 띠인 사랑을 더하여 8개가 됩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다음 8단계로(6개로 가득하고 2개가 없는) 설명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그리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은 킹제임스 영어성경으로 찾아보면 신약에 총 8번 등장합니다.

이상이 새로운 시작, 거듭남, 새 창조, 재생 및 부활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상고입니다.

God of Numbers:2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나눔(분리), 또는 증인(증언, 확증)’을 의미하는 숫자 2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서 2를 만든 경우엔 ‘나눔, 분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에 같은 하나가 덧붙여진 경우엔 오히려 ‘확증, 증인(증언)’을 의미하기에 숫자 2는 그 뜻조차도 이중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 1:6-8). 같은 물이었지만 하늘 위, 하늘 아래 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물이 창조 때 나뉘었다면 땅이 나뉜 시기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הָאָ֔רֶץ(하아레스)’로 ‘땅, 지구’란 의미이며 창세기 1장부터 구약에 총 93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10장에서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던 시기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던 일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뉘었지만 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2가 갖는 ‘나뉨과 증언’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떤 일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을 악용한 악인들은 두 가짜 증인들을 내세워 의인이었던 나봇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신 17:6, 19:15; 왕상 21:10, 13; 마 18:16, 26:60;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계 11:3).

성경은 두 인물이나 사건을 대조해서 선과 악,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룻과 오르바, 한나와 브닌나,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유다와 북이스라엘, 나봇과 아합,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두 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굽을 심판하실 때 에굽 땅과 고센 땅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분리)하셨습니다(출 8:23). 롯 역시 두 천사에 의해 소돔에서 분리됩니다(창 19장).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을 입습니다(엡 4:22-25).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2가 갖는 나뉨의 의미를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마 7:13-14).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7:17-18).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의 집과 어리석은 자가 지은 모래 위의 집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마 7:24-27). 또한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안가고, 안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는 두 아들(마 21:28-31).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집 밖에 있는 맏이에 대한 비유도 그러합니다(눅 15:11). 예수님은 또한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한쪽을 미워하고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한쪽을 경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4:40-41).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은 육체를 따라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약속을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로 나뉩니다(갈 4:22-26).

성경엔 두 종류의 부활도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어떤 부활에 속하냐에 따라 두 개의 다른 심판석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은 상급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지만(고전 3:10-15; 고후 5:10), 나머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석 앞에 나타납니다(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두 번의 죽음을 겪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히 9:27)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수치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단 12:2)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20:14-15). 그러나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을(단 12:2)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계 20:6).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6).

요셉의 때에 바로가 꿨던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나타내는 두 번의 꿈도 이런 2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꿈의 내용은 7년 흉년과 7년 풍년으로 나뉘어 있는 동시에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꾼 것은 그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창 41:32)”이란 의미로 겹쳐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명의 인물이나 사건을 덧붙이는 것을 통해 성경은 악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증인을 세웁니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완연했던 악을 증거합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경배하러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단과 벧엘에 세운 두 마리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우상숭배를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의 증인은 나답과 아비후, 발락과 발람, 아합과 이세벨, 빌라도와 헤롯,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 증인들은, 엘닷과 메닷(민 11:26),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두 번 정탐꾼을 보냅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기에 12명을 보내지만 이들 중 2명만(갈렙과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게 되는 말기에는 아예 2명만(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은 비느하스와 갈렙이었습니다) 보내는데 이들은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과 크신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 안나와 시몬, 바울과 바나바,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증인들로 짝을 지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에 패역한 세대였던 바리세인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부터 왔던 남방의 여왕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입니다(마12:41-42).

예수님의 12제자 중 선두그룹에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형제로 짝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선포하려고 내보내셨을 때에도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누가복음 10장).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보냈던 동물들이 둘씩 짝지어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악한 세대의 멸망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리란 약속도 주십니다(마 18:19).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었습니다(눅 9:30-31).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도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란 증언을 줍니다(행 1:10-11).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2 증인이 나옵니다(계 11장).

성막을 제조할 때 주요 성분이었던 금과 조각목은(출 25-27) 예수님의 신성(금)과 인성(조각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도 증언을 뜻하는 두 개의 돌판에 주셨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긍휼의 자리)와 순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양쪽 끝에 있던 두 그룹도 언약의 증인입니다(출 25:18-20). 레위기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하나는 속죄헌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레 5:7).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몸에 일곱 번 뿌린 후 들에 놓아줍니다(14:4-7). 또한 속죄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해 제비를 뽑습니다(레위기 16장). 여호와를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의 것으로 뽑힌 염소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전가한 후 아사셀의 것으로 광야에 놓아줍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날인 오순절에 올리는 ‘고운 밀가루에 누룩 넣은 빵 두 덩이(레 23:17)’도 2가 갖는 이중적인 의미에 충실합니다. 유일하게 누룩 넣은 빵을 올릴 수 있는 풍요와 감사를 상징하는 오순절의 빵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지만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합작이며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동역으로 지어집니다(왕상 5:18). 솔로몬이 성전 입구에 세웠던 두 놋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란 뜻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인데, 이 두 기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예표합니다.

4 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마태복음엔 이런 두 증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명의 귀신 들린 자들(마 8:28)과 두 명의 장님들(마 9:27, 20:30)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불신에 눈 멀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2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또한 성경은 구약을 ‘율법자와 선지자’ 둘로 함축해 일컫기도 합니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행 13:15, 24:14, 28:23; 롬 3:21). 성경엔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을 약 7년 전쯤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받은 조명과 깨달음은 ‘이름을 두 번 부르심’이란 글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이신 ‘성자’ 예수님은 특별히 숫자 2의 특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두 가지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증언 및 증인에 대한 특징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땅에서 난 첫째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시며(고전 15:4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계 3:14). 예수님이 두 번 반복해서 쓰셨던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을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찾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자신이 은혜의 법, 즉 성령의 법(5*5)의 증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증오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선상에서 쏟아내신 ‘물과 피’로 ‘속죄와 정결’의 온전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분하셨습니다(겔 16:4; 엡 5:26; 히10:22).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던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 중엔 ‘paroxusmos(파록수스모스)’와 ‘hekousiós(헤쿠시오스)’가 있는데 ‘분리와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맞게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등장합니다. 이런 걸 발견할 때마다 성경의 위대함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원어 연구 2탄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od of Numbers:3이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부활, 영적 완전함, 혹은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수 3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3은 7과 함께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4개의(3, 7, 10, 12) 완전수 중 가장 첫 번째 숫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적인 3분이시며 한 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그분께만 있는 3가지 특성이 있는데, ‘전능’, ‘전지’, ‘무소 부재(편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걸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모든 걸 아시며, 또 모든 곳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빚어진 우리도 영과 혼과 육, 3부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영혼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생각, 말, 행동이란 3가지 영역으로 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도 삼차원인데,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숫자가 3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도 3가지 특성이 있는데, 햇빛은 ‘빨강, 초록, 파랑’의 원색이며, “빛, 에너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도 ‘동물, 식물, 광물’로 나뉘며 물체는 ‘고체, 액체, 기체’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며 완성되는데, 주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과거) 이제도 계시고(현재) 장차 오실 이(미래)”시기에(계1:8, 4:8) 영원히 계십니다.

3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숫자 중 하나이며 따라서 자주 등장하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이 가져왔던 3가지 산물인 포도와 무화과, 그리고 석류(민 13:23)는 하나님 약속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3개월간 모세를 숨겨 키우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후 3개월간 침례 요한의 엄마인 엘리사벳과 지내다 돌아옵니다. 신명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3가지 직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들 가운데서 택하사 일으키실 왕(신 17:15), 제사장(신18:3-5), 그리고 선지자(신18:15)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도피성을 둘 것을 명령하시는데,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동쪽 땅에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지정했고(신 4:41-4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을 3구역으로 나눠 3개의 도피성을 구별해서 두라고 명령했습니다(신19:2-3).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너희의 지경을 넓혀 말씀하신 땅을 다 주실 경우, 3개의 도피성을 더 구별하라고(신19:8-9) 했기에, 도피성의 수는 최대 9개(3+3+3, 3X3)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3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 6:10), 3번의 7일(21일)을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단 10:2).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스랍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3번에 걸쳐 찬양하고 요한계시록에서 4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3번 외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주 하나님께 올립니다(계 4:8-9).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금, 몰약, 유향’ 3가지의 선물을 받으셨으며, 12살이 되셨을 때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3일간 잃어버리지만, 성전에서 다시 찾습니다(눅 2:46).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 시험받으실 때도 3단계로 받으셨는데, 돌을 떡으로 만들라, 성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절하고 세상 왕국들을 받으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3번에 걸쳐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첫 번째는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였고(마 3:17; 막 1:11; 눅 3:22), 두 번째는 변화산에서 3명의 제자 앞에서 변용하셨을 때였고(마 17:15; 막 9:7; 눅 9:35), 세 번째는 십자가 선상에서였습니다(요 12:28). 그런데 이런 기록이 성경에 총 7번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3과 7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번번이 발견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7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7절기는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초막절)’인데 크게는 ‘무교절, 오순절(칠칠절), 장막절(초막절)’ 3절기로 묶기도 합니다. 봄절기인 ‘유교절, 무교절, 초실절’이 무교절을 지키는 일주일 안팎으로 오기 때문이고, 가을절기인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 대략 3주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여호와를 뵈러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올라올 것을 명령하십니다(출 23:14-17; 신 16:16).

창조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물 위로 올라오게(드러나게) 하시는데(창 1:9),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죽음에서 3명의 사람을 부활시키신(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요 14:6). 예수님은 표적을 찾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즉,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영어로는 3 days and 3 nights:낮 세 번과 밤 세 번) 땅속에 있을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 기도하신 후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받으셨고 제3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막 15:25) 온 땅에 총 3시간의(제6시에서 9시까지) 어둠이 임합니다(막 15:33-34).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3개의 언어로(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칭이 적혔었는데, 이는 십자가의 속죄가 모든 나라, 백성, 방언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요 19:20). 예수님 좌우에 2명의 죄인이 십자가에 박혔었기에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가 있었고(요 19:18), 주님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4). 이런 주님에 대해 땅에서 증거하는 3가지는 “영과 물과 피”이며(요일 5:8) 주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3번에 걸쳐 기도하십니다(요 17:11-23).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3가지 덕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어떤 것의 ‘완성, 성취, 완벽, 완전’을 의미하는 3의 역할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인간의 연약함과 허황함을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것으로 성취했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를 3번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회복시키십니다. 3년 동안 열매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셨고(눅 13:7)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3번 보여주는 것으로 이방인 구원을 향한 완벽한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죄의 유혹과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3단계로 오며 멸망은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유 1:11)’ 3길을 따라 완성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삼위일체를 흉내내어 용, 짐승, 거짓 선지자로 등장합니다(계 13장). 요한계시록에는 다섯 번째 나팔에서 시작해서 일곱 번째 나팔로 마치는 3개의 화가 나오는데(계8:13; 9:12; 11:14), 이 3구절에 ‘화’란 단어가 7번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 유황” 3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습니다(계9:15-18). 또한 개구리 같은 3 더러운 영이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계16:13-14). 이에 맞춰 하나님의 3천사도 3가지 촉구와 경고를 합니다(계14:6-16). 첫 번째 천사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촉구하고 두 번째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며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바벨론은 “사망, 애통함, 흉년” 3가지의 재앙으로 멸망하는데(계18:8) 다니엘서에서는 ‘세고(메네), 달아보고(데겔), 나뉘어(베레스)’ 멸망당합니다(단 5:26-28). 요한계시록 18장 9절에서 17절까지 바벨론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3부류의 사람들(땅의 왕들, 땅의 상인들, 바다의 선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6으로(숫자 6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눠 적혀있습니다(9절:왕들, 11절:상인들, 17절: 모든 선장, 선객들, 선원들,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3은 거룩하게 분리된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노아와 3 아들(창 6:10), 욥의 3 딸(욥 1:2, 42:13)과 3 친구(욥 2:11)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게 욥에겐 7 아들이 있었기에 자녀가 총 10이 됩니다(충만을 뜻하는 완전수 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욥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완전수 3, 7, 10이 자녀의 수에도 다 들어가 있어 얼마나 충만한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람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마 22:32). 이스라엘은 세상(에굽)과 거룩히 구분되기 위해 광야로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예배) 드립니다(출 5:3). 하나님은 사무엘을 3번에 걸쳐 부르시는(삼상 3:8) 것으로 그를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느부가넷살 왕에 의해 7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에 던져진 3 사람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단 3:19, 23). 에스겔서에 나오는 3명의 의인은 노아, 다니엘, 욥(겔 14:14)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벗)’로 3번(대하 20:7; 사 41:8; 약 2:23)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의 삶에도 3이란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이했던 3명의 손님(창 18:2), 그들을 섬기기 위해 사라가 준비한 3스아의 고운 가루(창 18:6),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리아산까지 갔던 3일의 길이 그렇습니다(창 22:3).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을 때 준비한 5가지의 헌물은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였습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헌물이 5와 3의 숫자로 이뤄졌듯이, 모세의 성막은 숫자 5와 깊은 연관이 있었고 성전은 숫자 3입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성전 모두 ‘지성소, 성소, 성막뜰’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3층의 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왕상 6:6), 에스겔의 성전은 3면이 30개의 3층 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겔 41:5-6). 노아의 방주도 3층이었으며(창 6:16) 사도 바울은 삼천층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봤습니다(고후 12:1-2). 솔로몬의 성전에서 놋을 부어 만든 바다는 둘레가 30 규빗이었고 12마리의 소가 받치고 있었는데 북서남동으로 3마리씩 놓여있었습니다(왕상 7:23, 25).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인데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어 총 12문이 있습니다(계21:13).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3명의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첫 번째는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납니다(왕상 17:9-24).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3번 펴서 엎드려 살려냅니다. 3은 부활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에녹처럼 하늘로 옮기시는데, 그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혹시 땅 어딘가에 그가 떨어진 것은 아닌지 3일을 찾은 후에 포기합니다(왕하 2:17). 두 번째는 엘리사에 의해 수넴 여인의 아이가 살아납니다. 이때 엘리사는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아이의 눈에 자기 눈을, 그리고 아이의 손에 자기 손을 얹고 아이 몸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3단계를 걸쳐 살아난 아이는 7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뜹니다. 여기서도 3과 7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왕하 4:34-35). 세 번째는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해서 일어났던 경우입니다(왕하 13:21).

이렇게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3번,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3번 일어나는데, 제7번째 부활인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완전한 부활’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 영원히 살게 하는 능력의 부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성경에 3번(행 11:26, 26:28; 벧전 4:16) 나오며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도 3일 반 만에 부활합니다(계 11:11). 그리고 신약은 3의 3배수(3X3X3)인 27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God of Numbers: 4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세상, 창조물을 의미하는 숫자 4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창조 4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4가지를 위해(징조, 계절, 날, 해)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띄우시는 것으로 하늘 단장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땅 위로는 4개의 강줄기가 동서남북 4방향으로 흐르도록 하십니다(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따라서 4란 수는 세상 창조와 그 안의 창조물을 뜻합니다.

예언서(에스겔, 요한계시록)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영적 생물이 나오는데 그들은 사자, 소,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창조물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사자가 맹수라면(길들여지지 않은 동물들) 소는 가축(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들), 사람, 그리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이 이 4개의 영적 생물로 압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70퍼센트가 물, 즉 바다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그룹 중에 바다를 대표하는 생물이 빠져있습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용 또는 옛 뱀으로 불리는 사단(계20:2)이 바다의 생물과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파충류를 대표했었습니다. ‘사단 장’으로 불리는 에스겔 28장에 보면 9개의 보석으로 치장하고 불탄 돌들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성산과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나옵니다. 이 그룹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많은 무역(물품)으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법과 횡포를 행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침받았다고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에스겔 28장 16절에 ‘무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맞게 번역된 건지 알고 싶어 원어로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흥미롭게도 ‘무역, 또는 물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רְכֻלָּה(뤠쿨라오)’는 구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에스겔에서 나왔고 모두 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겔 26:12; 28:5, 16, 18). 에스겔 26장은 두로란 나라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28장은 사단에 빗댄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만 쓰인 ‘무역, 물품’이란 단어가 세상을 뜻하는 4번 등장한다는 게 성경의 묘미입니다. 이런 신기함이 성경 연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앞으로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수의 강만 있지 바다가 없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계21:1; 22:1). 성경은 이런 사단을 4개의 명칭으로(용, 옛 뱀, 마귀, 사단) 부릅니다(계20:2).

어찌됐거나 이 그룹은 ‘덮는(סָכַךְ:소콱) 그룹’이었기에 4개의 그룹들 위를 덮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룹들 중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였기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세상 창조물을 대표하는 그룹은 4가 아닌 5가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5란 숫자로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잘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였겠지만(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하며 하늘의 질서를 깼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며 땅의 질서마저 깨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질서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회복시키시고 화평케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앉아계십니다(히 10:12). 이런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한 조명을 쓴 글은 여길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4란 숫자는 2로 나눌 수 있는 첫 숫자이기에 둘로 분리되어 이중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4가 뜻하는 ‘세상’이란 단어가 그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구원의 대상인 창조물들과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요 3:16)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통치하는 죄악 된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요일 2:15-17).

타락 이후 모든 창조물이 함께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는(롬 8:19-22)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4 복음서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적시며 흐르던 4개의 강줄기가 모든 창조물에게 물을 공급했듯이, 성경엔 모든 창조물을 구원해줄 생명수가 4 복음서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4 복음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그룹에도 비유되는데 마태는 사자(왕), 마가는 소(종), 누가는 사람(인자), 요한은 독수리(하나님)입니다(이런 4 복음서에 대한 비교는 여길 누르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4 단계로(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행 1:8).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성경엔 총 4개의 가지(branch)가 나옵니다. ‘한 의로운 가지(a righteous Branch 렘 23:5)’, ‘그 종 가지(servant the Branch 슥 3:8)’, ‘그 가지(The Branch 슥 6:12)’, 그리고 ‘여호와의 가지(branch of the LORD 사 4:2)’입니다. 이 4개의 가지들도 순서대로 마태(왕), 마가(종), 누가(사람), 그리고 요한(하나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총 4번의 꿈으로 주의 사자로부터 지시받는 기록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데려오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마 1:20-21). 두 번째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니 에굽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마 2:13). 세 번째는 이제 안전하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마 2:19-20). 네 번째는 갈릴리 지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마 2:22).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예수님의 겉옷을 4명의 군인이 4개로 나누어 가집니다(요 19:23).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4개의 증거와(표적들, 기사들, 여러가지 능력, 성령의 은사) 함께 증언하셨습니다(히 2:4). 주님은 자신이 재림하실 수 있는 시각을 4개의 시간대로(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나눠 말씀하십니다(막 13:35).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을 차례대로 통치할 4개의 세상 왕국이 나옵니다(단 2:31-36). 이 왕국들은 하늘의 4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바다에서 나오게 된 큰 4개의 짐승에(사자, 곰, 표범, 열 뿔이 달린 짐승) 비유되기도 합니다(단 7장). 다니엘서에는 또한 4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첫 번째 왕인 느부갓네살(단 1-4장), 마지막 왕인 벨사살(단 5장), 메대 왕인 다리오(단 5장, 6장), 바사 왕인 고레스(단 6장, 10장)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된 밭은 4종류의 마음 상태에 비유되면서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길 가, 돌밭, 기시떨기, 좋은 땅). 또한 마지막 때에 4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에 불어 해하지 못하도록 땅 4 모퉁이에 서서 땅 4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계7:1). 그리고 성경은 세상을 심판할 4개의 재앙(전쟁, 기근, 역병, 지진)을 주로 언급합니다(마 24장, 계 6장). 마태복음 24장 7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니까 역병이 빠져 있길래 원본과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어떤 헬라어 원본을 보느냐에 따라 4가지 재앙이 다 나온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영어 킹제임스에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에 역시 4가지의 중한 벌을(칼, 기근, 사나운 짐승, 역병)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겔 14:21).

천지창조를 담고 있는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물(creature)’이란 단어가 4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민족과 나라가 나눠지고 세워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나눠지게 된 4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야벳은 땅(영토), 언어, 종족, 민족(창 10:5)으로 나뉘었고 함과 셈은 각각 족속, 언어, 지방, 나라(창 10:20, 31)로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세상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4개의 단어로(족속, 방언, 백성, 나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단어가 모두 쓰인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만 딱 4번 등장한다는 것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계5:9, 7:9, 11:9, 14:6).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에서도 4개의 장소에 있는(하늘, 땅 위, 땅 아래, 바다)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4개의 단어로(찬송, 존귀, 영광, 권능) 높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덮고 있던 천은 4겹이었는데, 맨 밑은 성막천, 그 위는 염소털, 그 다음은 수양가죽, 그리고 맨 바깥쪽은 해달가죽이었습니다(출 26장). 맨 안쪽에 있던 성막천은 4가지 색실로 수놓은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흰 베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의 큐빅 모양입니다(계21:16).

욥기에는 욥 외에 4 사람이 등장해서 설전하는데 욥의 3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여인이 등장하며(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하와란 이름은 성경 전체에 4번 등장합니다(창 3:20, 4:1; 딤 2:13; 고후 11:3). 시편 107편은 성경에서 같은 구절이 유일하게 4번 나오는 권입니다(107:8, 15, 21, 31). 잠언에는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이(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 나옵니다(잠 30:24-28). 무지개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구약에 2번, 신약에 2번 등장합니다(창 9; 겔1:28; 계4:3, 10:1). 스가랴서에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4개의 뿔과 그 뿔들을 떨어뜨릴 4명의 목수가 나옵니다(슥 1:18-21). 또한 4병거와 4가지 색의 4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늘의 4바람으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슥 6:1-5).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4가지의 육체를 얘기하는데 사람, 짐승, 새, 물고기입니다(고전 15:39).

4는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개념으로도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동서남북 4방향, 4대 원소 (흙 물 불 공기),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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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에(*,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4:17;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등(람파스)

2985. 람파스(
lampas)  λαμπάς, άδος, ἡ 

1. 횃불
2. 등
발음 [ lampas ]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 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눅 15:8;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 '졸며'라는 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 밤중에(*,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요 14:16).

󰃨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οἷδα)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성경문답] 등불 기름을 나눠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을까요?


[질문]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세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열 처녀 비유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할 때 나누어 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열 처녀 모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답변]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당신만의 특유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의 특성과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그 해석법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답변한 내용이 객관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질문자께서도 스스로 점검하실 수 있고 또 추가적인 의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비유와 수수께끼 

비유란 화자(話者)가 어떤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빗대어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주로 직유, 은유, 속담, 설화 같은 문학적 수식법을 동원합니다. 

비유에 대비해 수수께끼는 그 이야기와 표현법이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사기 9:1-21에는 세겜의 시민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자 이 소식을 들은 요담은 '숲속 나무'의 수수께끼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숲속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순서대로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청하니 가시나무는 자기의 권세에 나무들이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동의했습니다.
요담은 세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가장 못한 사람을 왕으로 뽑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나무들은 이야기 속의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예를 들어 누룩의 비유(마 13:33)에서처럼 떡을 만드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유의 대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고 항상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수수께끼는 듣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의 범위 이상으로 해석을 확대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비유의 주제와 큰 줄기만 붙들어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지엽적인 내용과 세밀한 표현에까지 억매여선 안 됩니다.   

2.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뜻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비유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이까?"(마13:10)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5)고 대답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씀의 권위를 받아 들이는 자와 전혀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자로 확연하게 둘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려고 비유 속에 비밀장치를 했거나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으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유의 주제를 한 마디로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비유의 주제가 단순히 도덕적 계명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또 말씀하신 당사자의 권위도 당연히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대신에 마음이 순수하고 가난한 자는 구태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약성경을 꿰 뚫고 있었으며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던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도덕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더러 외식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주님의 지적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가운데 숨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번도 헛되고 그른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주님을 자칭 도덕 군자들이 앞장 서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교만한 그들로선 비유의 주제인 천국을 못알아 듣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예수님 당신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진리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만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는 오늘 날의 독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자라면 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비유는 지금도 여전히 비유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만 열어 놓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이 종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주님의 통치는 마지막 때까지 연기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뜻 그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관한 비밀이 열릴 것이지만 완악한 자에게는 감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기 싫어서나 소수의 사람만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원하며 또 그 동안 심판이 취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라도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3.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 

비유가 갖는 문학 기법상의 특성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뜻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객관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표현에 천국에 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배경은 항상 메시야의 구원과 더불어 새롭게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말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현실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해석이나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거의 모든 비유가 사전에 어떤 질문에 대답하거나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피고 제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석이 그런 질문과 상황에 벗어난 것이라면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해석이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비유에 동원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알아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에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비유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보편적인 상황과 실제로 가능한 사건을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낡은 술 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에선 당시의 포도주 저장하는 법을 모르면 정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4. 열 처녀 비유의 해석  

위에서 말한 비유 해석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이 열 처녀 비유를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기 쉽게 먼저 당시 문화적 관습부터 살피고 다음에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찾고 마지막으로 천국이라는 주제에 대비해 그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4.1.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결혼 예식은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먼저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종교적 예식에 따른 결혼식을 치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노는 혼인잔치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에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나가 그들을 마중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를 데려 오는 신랑 일행을 저녁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기다렸다가 혼인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등이 횃불인지 호롱불인지 불명하지만 어쨌든 둘 다 기름을 담거나 적시는 용기가 작아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을 갖고 다니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이런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되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했으나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들고 있는 등불에만 채우고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4.2.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

예수님은 24:1-41까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관해 예언하셨습니다. 24:42부터 25장 마지막까지 마지막 심판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5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각 비유마다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그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24:42-44의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45-51의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두 번째 비유는 성도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고도 지혜롭게 잘 감당하면 예수님 재림 시에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과 앞 선 두 비유를 전제로 해서 마지막 때라는 연속되는 주제를 가진 세 번째 교훈이라는 근본적인 이해를 갖고 해석해야 합니다. 25:1에 "그 때에"라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의미하며 그 때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 집에서 치를 혼인잔치의 때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신랑이 더디 옴과 같이 재림의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마땅히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행동하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여 재림이 더디 올지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3.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해석    

비유를 해석하는 세 가지 원칙은 '천국과 문맥과 당시 관습'에 바탕을 두라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약 세부적인 부분의 해석이 주제와 상관이 없거나 당시의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 배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님께서 제기한 슬기로운 처녀가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줬더라면 다 같이 열명 모두 구원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고 그 뜻은 선합니다만 비유의 해석 원칙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조금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하신 비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그 뜻을 풀어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비유 마13:3-9 해석 13:19-23)와 가라지의 비유(비유 마13:24-30 해석 13:37-43)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비유들을 해석하지 않은 이유는 이 모범적인 해석에 비추어 다른 것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로선 이 두 비유 뿐만 아니라  모든 비유에 나오는 설명들에 관해 누구나 잘 알고 직접 시행하고 있는 풍습이라 구체적으로 따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그 두 비유를 해석한 것에 따르면 마지막 때와 천국을 소원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태도에 관해서만 말씀하셨지 주제 외의 부분은 일절 다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거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다른 세밀한 표현을 두고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등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불을 켜지 못하는 자는 도적이나 불청객 취급을 받았지 기름을 나눠준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나눠주기를 거절하는 것이 비난 받을 행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런 부분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밀하게 예비하는 습관이나 품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 때에 본인이 주님과 어떻게 교제했으며 얼마나 주의 자녀답게 살았느냐를 의미합니다. 

비유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로 합시다. 신랑의 친구로 초대 받은 자라면 신부 집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신랑의 성격이 혹시 더디 올 수 있는지, 아니면 신부 집이 집안이 넓어 예식이 오래 걸릴 수 있다든지, 날씨가 나빠 시간이 지체 될 수도 있다든지 더디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랑과의 교제가 평소 그 만큼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심판은 불시에 닥칩니다. 그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 놓을 자신의 신앙 상태와 신자로서의 자세(등불의 기름)를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시쳇말로 하듯이 마누라 치마 끝을 잡았다고 남편이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는 하나님과 본인의 일 대 일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믿었다고 아들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 기름의 비유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것이 바로 그뜻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이나 복음의 일군에게 가서 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각 자가 개별적으로 회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는 거부의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에 게을리 하거나 혼자서만 천국을 가려는 이기주의나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로 평가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 드린 대로 불시에 찾아 온 종말의 때에 각 자의 심판은 자기가 이 땅에서 천국을 소원하고 준비된 자인가 아니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원어적인 표현으로도 이중의 부정어가 첨가 되어 함께 쓰기에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아 꾸어 주면 꾸어 준 자도 기름이 모자라 아무도 신랑을 맞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뜻은 처녀를 여섯 명이나 여덟 명도 아니고 꼭 열명이라고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열은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이기도 합니다.
열 처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 받기를 소원하시지만 구원의 기준은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그런 앎이 없는 자가 등불에 기름을 준비 안 한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행 혹은 전도의 열심과는 상관 없이 구원 받지 못할 자가 교회 안에서도 반드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에서 쓰인 '알다'는 원어의 뜻이 단순한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혼인 당일 날 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부터 신랑과 신실하고도 계속된 교제를 통해 일 대 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비유의 주제는 24:42, 25:13에서 주님이 결론 지었듯이 항상 깨어 있으되 더디 올 수 있으니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락하지 말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평생을 걸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 1896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 1896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찰스 M. 쉘돈(Charles M. sheldon, 1857-1946)

찰스 M. 쉘돈 목사님은 미국 뉴욕 출신으로 미국 동부의 우수한 대학교를 말하는 아이비 리그(Ivy League)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시고, 안도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미국 캔저스 주 토페카 지역에서 목사로 기독교사회윤리학과 기독교사회복지를 공부로 박사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공부를 깊이 하시면서 이를 실천하시려고 직접 이 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직장에서 쫓겨난 인쇄기술자인 것처럼 꾸미시고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목사님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도와주지도 않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 모습을 보시고 바로 이 책을 쓰셔서 교회에서 읽어주셨습니다.

이 책은 1897년 책으로 출판되어, 미국에서만도 3천만 권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이 책을 현대판으로 셀돈 목사님의 손자이신 거렛 W. 셀돈(Carrett W. Sheldon) 목사님이『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 현대판』을 1993년에 쓰셨습니다.

이책은 쉘돈 목사가 쓴 『In his steps』란 원명의 신앙소설이다. 1896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수천만권이 팔린 책이다. 한국에서도 종교분야에서 계속하여 베스트셀러 서열에 오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의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책을 대할 때에 어떤 이들의 시선은 예수님처럼 살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하는 동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라는 그들의 동기를 넘어, 그러한 생각과 자각을 주시는 분이 주님의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삶의 주인되시는 주님과 모든 생활과 환경과 상황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으로 사시고 일하시며, 그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께 시선을 주목하자. 무엇보다 자신들의 원하는 삶을 내려놓고 주님께 초점을 두고 전심으로 반응하는 그들의 삶은 오늘 우리의 삶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최선의 삶이 아닌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에 참예하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개인적인 추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아니다. 허다한 믿는 이들이 출발점을 타락과 죄에 두다보니 분명한 초점과 푯대를 잃어버리고,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의 관점을 놓치고 말았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때에 시작과 출발점은 사람의 타락과 죄를 짓기 이전의 창세전 하나님과 삼위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의도와 목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비밀이었다.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개인적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넘어 공동체적이고 집합적이며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며, 그분으로 살고 그분의 몸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자!"(블로그 도우미)

저자인 쉘돈 목사는 청년 목사 시절에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여 자신이 목회하는 도시를 헤멘적이 있었다. 그때 크리스천들의 냉대와 무관심 큰 충격을 받고 또 도전을 받았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낭독하여 주려는 의도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이 발행된 이래로 당대에 베스트셀러로 되었고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읽혀지며 수많은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쳐왔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맥스웰 목사는 가난으로 인하여 처자식을 잃고 일자리도 잃은 채로 길거리를 헤매는 한 인쇄공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이 맥스웰 목사에게 크리스천이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 인쇄공이 죽게되는 사건을 통하여 맥스웰 목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삶의 매 순간을 책임지기로 다짐한다. 다음 주일 신도들에게 같은 질문으로 도전한다. 이에 도전을 받은 교인들이 1년간을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다.

이런 변화가 마치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듯 사랑의 파문을 일으켜 나가게 된다는 내용이 이 책의 요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다시 한 번 물어야 할 질문이요 다짐이라 생각된다.

1. 일하고 싶은데 직장에서 쫓겨났다.

“여러분은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주심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2장 21절)

금요일 아침, 맥스웰 목사는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언제나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아침도 몇 시간째 성경 말씀을 보고, 설교에 필요한 책들을 많이 보고, 기도도 많이 하고, 많이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설교 준비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설교 준비가 아직도 끝나지 않아 속상해 하고 있는데, 아래층에선 자꾸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일단 설교 준비를 멈추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사모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누가 날 찾으면 지금 매우 바쁘니까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만나기 어렵다고 말해 줘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사모는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맥스웰 목사는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음~ 이번 주 설교할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이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설교할 내용을 꼼꼼하게 적어 나갔습니다. 시작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강조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고생하신 것에 대해서 전할 작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할 내용을 적고 보니 이번 주 설교가 잘 될 것 같았습니다. 설교 제목을 “예수님을 따라가는 세 단계”라고 붙이고 보니 제목이 짧으면서도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기분이 좋아서 제목과 성경말씀 그리고 정리한 설교 내용을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적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 1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갑작스런 소리에 기분이 상했지만 하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30-33살쯤 되어 보이는데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습니. 위와 아래의 옷 색깔도 안 어울리고, 지저분해 보이는데다 다림질도 안 한 건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거지인가? 우리 집이 목사집인 걸 알고 구걸하러 온 모양이구나. 바쁜데 돈을 좀 줘서 돌려보내면 될 거야. 아직 설교도 다 못 끝냈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저를 아십니까?”

“목사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요, 직장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님을 찾아 온 것은 목사님이라면 제게 일할 곳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실 것 같아서입니다. 목사님께선 많은 사람들을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아무 일이라도 저를 소개시켜 주시면…….” 한 청년의 말에 맥스웰 목사는 난처해 하며 대답했습니다.

“이거 어쩌지요? 많은 사람이 저에게 일할 곳을 얻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는데요, 이젠 그런 곳을 알려 주고 소개해 주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너무 어려워졌거든요. 또 저희 집에도 지금 당장은 일을 맡길 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하셨는데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년은 맥스웰 목사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 알겠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 가서 일할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청년의 모습이 어찌나 불쌍하게 보이는지 맥스웰 목사의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목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설교 준비를 이어갔습니다. 몇 시간 동안 고생해서 드디어 설교 준비를 끝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좀 전에 찾아왔던 남자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설교 준비에 바쁘다고 직장을 잃어버린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더 친절하게 대하고 식사라도 대접해드리면 좋았을 텐데……. 다른 데서 좋은 직장을 구하셨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저녁 때가 되어 맥스웰 목사와 사모는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사랑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젊은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거지인가?’ 싶고, ‘왜, 함부로 들어오는 건가?’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좀 불쌍해 보였습니다. 거지는 아니고 어떤 이유에선지 지쳐 보이고 힘이 없어보였습니다. 아마 어디 갈 곳이 없거나 뭔지는 모르지만 힘든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던 간식과 물이라도 전해 주려고 하려는데, 그 사람이 조용히 나가버렸습니다. 그제야 좀 더 빨리 도와줄 걸, 우리끼리 맛있는 간식 먹으면서 즐겁게 이야기하다 보니 그만 어려운 사람이 찾아왔는데 대접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무척 힘들어 보였는데 지금 어디서 저녁식사라도 잘 하시는 건지 궁금하고, 미안해요.”

이 말을 듣고는 맥스웰 목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마 그 젊은 남자는 여기에 왔다가 간 남자인 것 같소. 당신이 말한 그 남자와 비슷한 남자가 여기에도 왔었소. 나한테 일자리 좀 소개시켜 달라고 왔는데 내가 그만 거절하고 말았소. 난 도움을 요청한 그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소. 일자리를 못 구해 주더라도 들어오시라고 하고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건데……. 나도 영~ 미안한 생각이 들었소. 아마 우리 집에 왔다가 사랑유치원에 갔던 것 같소.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소. 이 사람들이 다시 좋은 직장을 찾아서 자기 가정도 행복해지면 좋을 텐데……. 나 원 참!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니,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소. 이거 참 걱정이오.” “그러게요. 경제가 좋아져서 모두들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일 아침, 요즘은 흐린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아주 날씨가 좋았습니다. 공기도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아주 맑고 고운 날씨였습니다. 교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교회 근처에서 만나는 교인들끼리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교인들은 좋은 옷에, 멋진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사실 이 교회는 레이몬드 시에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찬양대는 이 지역에서 최고를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레이몬드제일교회의 아침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찬양대가 찬양을 하였고, 설교를 하기 바로 전에는 고운 목소리로 찬양하는 레이첼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레이첼의 찬양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레이첼의 찬양이 끝나자, 맥스웰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준비한 설교를 해나갔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구원의 세 가지 단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늘 성실하게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또박또박 말씀을 전하기에 교인들은 맥스웰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졸거나 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듣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 설교가 끝나 있었습니다.

찬양과 설교가 끝나고 이제 예배 마지막 찬송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일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죄송합니다만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소리에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강대상 쪽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를 본 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아니! 저 사람이 거룩한 교회에 이리저리 몸도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 들어오다니……. 빨리 끌어내야겠어. 옷차림도 너무 지저분하잖아.’

이런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그 남자는 강대상 바로 앞에 설치된 마이크를 잡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인 여러분! 저는 술 취하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도 괴롭히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이렇게 말을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저는 몇 년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책을 만들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인쇄 기술자에요.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남자는 목이 메는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불쌍해 보이는 모습에 누구 하나 이 남자를 끌어내거나 말하지 못하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이 남자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아실 거에요. 몇 년 전에 새로 개발된 인쇄기계가 들어오면서 저 같은 인쇄기술자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기계가 저 같은 기술자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해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될 줄 몰랐고, 전혀 준비도 없었습니다. 저는 인쇄기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아마 저 뿐 아니라 이 기계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안타까운 것은 이 사람들 중에서 올 해만 해도 5명이나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저는 이 기계를 구입한 회사를 욕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요. 그저 저는 아무 일이라도 있으면 열심히 하려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습니다. 이렇게 직장을 알아보면서 다니다보니 저처럼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또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 같더니 교회 의자를 붙잡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실은요. 저는 이런 말을 하려고 나온 게 아니에요. 좀 전에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 때문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대로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갑자기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말일까요? 또 목사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하며 그 발자취는 곧 순종․믿음․사랑 그리고 ‘본받음’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요. 목사님은 어떻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며 본받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저는 일할 곳을 찾기 위해 레이몬드 시에서 안 가본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불쌍히 보고, 안타깝게 여겨 위로해 주고 걱정해 주는 말을 해주신 분은 오직 목사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져서 저처럼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나 거지들이 너무나 많다 보니까 귀찮아지셨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단지 사실대로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기 할 일을 내팽개치고 저 같은 사람에게 직업을 구해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전에 찬양대에서 ‘주와 함께 가려네’ 하는 찬송가를 불렀는데 과연 그 뜻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실업자들과 그 가족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아십니까?”

이 남자는 또 한 번 비틀거렸습니다. 서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꼭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 아내는 4달 전에 약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는 그만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잠시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저는 정말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랑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냄새나고 불편한 셋방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제 아내가 숨을 거두던 셋방의 주인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주인이 진짜로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려고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로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지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 정말로……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맥스웰 목사는 급히 “예배가 끝났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곧바로 이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제야 교인들도 이 사람 곁으로 와서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결심했어! 예수님을 따라 살겠어.

맥스웰 목사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이 사람을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병이 워낙 심해서인지 낫지를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는 맥스웰 목사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참 잘해 주셨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목사님처럼……하셨을거예요.”

“아, 아니에요. 제게 도와달라고 오셨을 때, 제가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요.” 결국 이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딸도 만나보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일주일 동안 이 사람을 간호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맥스웰 목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설교하면서 이 사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예배 때 우리 교회에 왔던 그 사람은 어제 새벽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제게 했던 말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마음이 아파서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교인들은 지난 주일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맥스웰 목사가 무슨 제안을 하려고 그럴까 하는 지 궁금해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어떤 일이든지 하기 전에 반드시 이 질문을 해보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리고 예수님이 하실 것 같은 대로 실천해 봅시다. 제 말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예배가 끝난 후, 교육관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은 여기저기서 이 제안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게 살겠다고 맹세를 해도 이걸 지킬 수 없을 거야.” “난, 한 번 해보고 싶어.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목사는 교회 마당에서 교인들을 배웅하고 교육관으로 걸어갔습니다. 목사는 ‘몇 명이나 모였을까?’ 하는 생각에 떨리는 손으로 교육관 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여 있다니…….’ 맥스웰 목사는 교육관에 모인 50명쯤 되는 교인들과 앞으로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보고 모든 일을 해나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 노먼 사장님의 예수님 따라 살기

레이몬드 일보의 노먼 사장은 어제 주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대해 물어보기로 결심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노먼 사장은 혼자서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나니, 편집장이 오늘 신문에 나올 중요한 기사를 가지고 사장실에 들어 왔습니다. 편집장은 기분 좋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어제 유원지에서 벌어졌던 프로 권투 기사입니다.”노먼 사장은 편집장이 보여 준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말했습니다.“이 기사는 우리 신문에 싣지 말게. 앞으로 이런 권투 기사는 우리 신문에선 안 다룰 거야.”

편집장은 노먼 사장의 갑작스런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장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다른 신문사들은 이 기사를 실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싣지 않으면 우리 신문을 돈 내고 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화를 낼 겁니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 기사를 싣지 않겠다는 겁니까?”

노먼 사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편집장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잘 들어보게. 자네도 예수님 믿는 사람이지? 그럼 한 번 물어보겠네. 만약 예수님이라면 서로 싸우게 하고서 그걸 보면서 내기를 하는 이런 권투 기사를 실으실까?”

“그, 그럴 리야……없겠죠.” “내 생각도 그래. 나는 앞으로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으로 우리 신문사를 운영할 작정이야. 나는 그렇게 약속을 했어. 자네도 내 뜻에 따라 주기를 바라네.”

편집장은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말했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기사만 신문에 싣는다면, 우린 손해만 보다가 망하고 말겁니다. 우리 시민들은 대부분 권투에 흥미를 갖고 있는데 당장 내일 권투기사가 실리지 않는다면 수천 명의 독자를 잃게 될 것이 뻔합니다.”

“편집장,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본받으며 살아야 하지 않나? 그게 당연한 일이잖아. 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기로 결심했네. 내 뜻에 따라주기 바라네.”

“사장님, 맞는 말씀이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 신문사는 한 달도 안 되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전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먼 사장의 결심은 완고했습니다. 결국 권투 기사는 레이몬드 일보에 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내에선 신문을 파는 어린이들이 외쳤습니다.

“신문이요, 신문! 권투 기사가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레이몬드 일보예요. 권투 기사가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야, 이놈아! 이리 와 봐! 뭐가 어쩌고 어째? 권투 기사가 한 줄도 없는데 어디 있다는 거야? 너 혹시 신문 잘못 가져온 거 아냐?” “어? 정말이네? 우리 신문에 권투 기사가 없잖아?” “권투 기사도 없는 신문을 팔려고 하다니! 빨리 돈 돌려줘! 다른 신문을 사야겠어!”

이렇게 되니 신문 파는 어린이들이 신문을 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퇴근하려다가 이를 알게 된 노먼 사장은 어린이들을 모두 불러서 팔지 못한 신문을 모두 사주었습니다.

4. 예수님이라면 이런 걸 신문에 내실까?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레이몬드 일보에는 권투 기사 사건에 대한 편지가 엄청나게 많이 왔습니다. 그중 대부분이 앞으로 신문을 더 이상 안 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먼 사장은 앞으로 신문사가 어려워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통의 편지는 달랐습니다. 이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예수님을 의지하시길 소원합니다. 주께선 반드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사장님께 힘을 주실 겁니다.”

노먼 사장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난과 협박을 하는데 단 한 사람만은 위로와 격려로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편지는 바로 맥스웰 목사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노먼 사장은 더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손해가 있더라도 끝까지 밀어붙이자.’

담배 회사는 광고 게재를 약속한 기간이 끝나는 대로 더 이상 신문에 광고를 싣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아마 권투 기사 때문에 신문을 보는 사람이 줄어든 것을 알고 결정한 것 같았습니다. 직원들은 광고를 하는 회사들이 신문에 광고를 내지 않는다면 신문사는 손해를 보다가 결국 망하게 될 거라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전처럼 신문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노먼 사장의 결심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노먼 사장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술, 담배, 폭력, 낯 뜨거운 광고 같은 것을 예수님이라면 신문에 내지 않으실 거야.’ 그런데 이렇게 하면 벌어들이는 돈보다 손해 보는 돈이 더 많게 되고, 결국에는 신문사는 망할지도 몰랐습니다. 노먼 사장의 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신문은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아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는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먼 사장은 일요일판 신문을 내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편집장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이런 불만에 노먼 사장은 화를 내지 않고 하나하나 그 이유를 설명해 줬습니다.

“나도 근로자들이 일요일에 쉬면서 볼 수 있게 도움이 될 만한 읽을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일요일판 신문은 예수님이라면 절대로 안 실으실 내용으로 싶어야 하잖아. 그러니 낼 수 없어. 직원 모두 방송실로 모이라고 해.”

노먼 사장은 모든 직원에게 자신의 약속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편집장이 또 항의를 했습니다.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생각은 많은 신문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 신문사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장님은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실 것입니다. 저희도 가족이 있는데 직장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의견에 다른 직원들도 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먼 사장은 자신의 결심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려워하고, 걱정하시는 걸 잘 압니다. 제 결정이 많은 사람에게 조롱을 받고 또 여러분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 앞에서 약속하였고 1년 동안 그 약속대로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1년 동안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여러분! 어떤 손해가 생겨도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일요일판 신문 발행을 없애고, 그 대신 토요일 저녁 신문의 양을 두 배로 늘려 발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직원 여러분 중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고, 하루를 편히 쉬면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을 겁니다.”

편집장은 노먼 사장의 생각에 불만을 품고 신문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노먼 사장이 간절하게 부탁해서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5. 예수님이 철도공사의 잘못을 알았다면?

주일 아침, 교인들은 한 주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이봐! 레이몬든 일보에서 일요일판 신문을 만들지 않기로 한 노먼 사장의 기사를 읽었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도 그 약속 때문인 것 같아. 아무리 약속이 중요해도 그렇지, 신문을 그런 식으로 만든다는 건 좀 이해 할 수 없어. 저기 좀 보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기도하고 있잖아.”

맥스웰 목사도 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맥스웰 목사는 차분하게 교인들에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오묘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일주일 내내 ‘예수라면 어떻게 설교하실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맥스웰 목사의 설교는 이전보다 더 힘이 넘쳐났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지난 주에 약속했던 교인들이 교육관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일주일 동안 예수님처럼 살려고 한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노먼 사장이 한 일들에 대해 감동을 하고는 함께 기도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맥스웰 목사는 파워즈 소장이 근무하고 있는 철도공작소로 갔습니다. 파워즈 소장은 목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약속하고부터 제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사에서 저에게 사용 권한을 준 이 방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일주일에 두세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15분 동안 하나님 말씀을 보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아, 이런 놀라운 계획이 있었군요.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을 하느라고 몸과 마음이 지친 노동자들이 쉬면서 이야기도 나누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처음 시작하는 장소에서 목사님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맥스웰 목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직장을 잃고 고생하다가 죽은 한 사람의 마지막 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이야.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가게 하신 뜻이 있었구나.’

목사는 파워즈 소장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그동안 교회와 노동자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오늘 집사님을 통해 거리감이 좁혀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300명쯤 되는 노동자들이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방안에 모였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이런 곳에서 말하는 게 처음이라 떨렸지만 열심히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철도공작소의 노동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일하러 갔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맥스웰 목사는 이 사람들이 쇠를 다루는 일들을 하니 몸집도 크고, 말도 사나고 거칠게 할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보기엔 거칠게 보이지만 마음들이 참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파워즈 소장은 맥스웰 목사를 배웅하고 나서 다시금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편안한 휴게실이 될 수 있도록 책상과 의자와 커피와 잔들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창고 정리를 하고는 사무실에 와보니 서류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나한테 온 건가? 어? 그런데 이건 내 것이 아니라 화물 수송부장에게 가야 할 서류가 잘못 온 거잖아?'

그런데 서류가 잘 보이게 되어 있어서 파워즈 소장는 그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서류를 보던 파워즈 소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서류를 통해 보니 자신의 철도 회사가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을 몰래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회사가 법을 어기고 있다니…….’

사실 이렇게 법을 어기는 일은 오래 전부터 해온 것으로 간부들은 이렇게 하는 걸 다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파워즈 소장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도둑이 이웃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를 했을 거야. 잘못된 걸 알고 그냥 넘어가는 건 안 되는 일이야. 내가 회사를 신고하면 어쩌면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러면 내 가족은 어떻게 살지? 또 회사와 싸워서 이긴다는 확신도 없어. 그러나 우리 회사가 도둑처럼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잖아. 그러나 내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아내와 딸은 나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생활을 해왔는데……. 만약 내가 회사를 신고하고 또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회사와 싸우다가 오해 받아서 어려운 일에 처한다면 나와 우리 가정은 끝장이 나고 말거야. 그렇다면 이 서류를 수송부로 돌려주고 모르는 척할까?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예수님이라면 이런 죄를 보시고 어떻게 하셨을까?’

저녁 6시가 되자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파워즈 소장은 퇴근하지 않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6. 제 노래를 예수님을 위해

또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레이첼은 교회 찬양대원으로 노래도 잘하고, 예쁜 얼굴로 많은 남자 청년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유명한 오페라 단장으로부터 대규모 순회공연을 함께하자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좋은 기회였지만 그렇게 하면 주일에 교회 찬양대를 못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레이첼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였지만 약속한 대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니 오페라 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은 것 같았습니다. 레이첼은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친구 버지니아를 찾아갔습니다. 버지니아의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가족이라곤 할머니와 오빠 롤린뿐이었습니다. 롤린이 말했습니다.

“레이첼, 너 오페라 단에 스카우트된다며? 소문이 쫘악~ 퍼졌어. 이 주일 전에 오페라 단장이 우리 교회 온 것을 많은 사람들이 봤어. 그때 그 단장은 예배를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니라 레이첼 너의 노래를 들으려고 왔었대.”

레이첼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오페라 단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저의 성공을 위해서 교회 찬양대를 포기하고 무대에 서지는 않을거예요.” “너라면 틀림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텐데……. 안 됐구나. 모든 사람들이 네 노래를 칭찬하던데…….” “모든 사람이라고요?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예요?” “그거야 주일마다 네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지.”

롤린과 레이첼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레이첼! 네가 이해해라. 롤린은 자기 아빠를 닮아서 말을 잘 꾸며서 못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나쁜 뜻은 아니야. 단지 우린 너의 장래 계획이 궁금해서 그런 거란다. 그러니 말해 줄 수 없겠니? 왜 그 좋은 오페라 단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니?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온다고!”

“할머니. 사실은 저도 오페라 단장님의 제의를 받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오페라 단원이 되면 유명한 무대에 서게 되고, 돈도 많이 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놓고 고민해 보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아름다운 목소리를 단지 돈 벌고 유명해지는 걸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맙소사,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가만히 듣고 있던 버지니아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레이첼은 1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을 했고 그 행동 기준에 따라 결정하기로 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 너무 어이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버지니아, 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약속한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맹세는 실제 생활에선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곧 후회할 거야. 버지니아, 너만이라도 그 따위 어리석은 생각에 절대로 빠져들지 마라. 알겠지?”

“할머니! 죄송해요. 저도 약속을 하였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했습니다.” “너도 어리석은 짓을 하니 참을 수가 없구나! 레이첼, 네 엄마가 네 결정에 대해 뭐라고 말하실까? 바보스러운 결정을 내렸다고 하실 거야. 그럼, 너의 고운 목소리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냐?”

“아직 무엇을 할까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무엇을 할 것인지도 생각해 놓지도 않고 좋은 제안을 거절부터 하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얘야! 좀 더 지혜로운 생각을 가져보렴. 만약 오페라 단장의 제의를 거절하면 언젠가 넌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해봐야 뭘 하겠냐. 아휴~ 한심한 애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버지니아는 레이첼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너는 잘 해낼 거야.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했으니 예수님이 너를 도와주실 거야.”

7. 예수님이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면

레이첼은 집으로 돌아와 버지니아 집에서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을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레이첼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를 내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하고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오페라 가수로서 경력을 쌓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말이냐?” “엄마,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그게…….”

“너는 오페라 단원이 되면 예수님께서 절대로 반대하는 걸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페라 단원이 되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잖아.”

“엄마 말이 맞는 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깊이 생각하고 나서 오페라 단장의 제의를 거절한 거야. 내 생각에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은 즐겁게 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기뻐하고 가치있고 보람된 일을 하기 위해 노래를 한다는 거야.”

“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당분간 우리 교회에서 계속 찬양을 부를 거야. 내년 봄까지 찬송을 부르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러면서 평일에는 렉탱글 아래쪽에 있는 ‘백십자회’에서 찬양을 부를 거야.” “레이첼,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그곳에 어떤 인간들이 우글거리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나도 잘 알아. 엄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가려는 거야. 몇 주 전부터 그레이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렉탱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대. 그 모임에서 예배를 도와줄 만한 찬양대 출신을 구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어. 그래서 난 그분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어. 엄마! 지금까지 우리가 가난하고 몸이 아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했어?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었잖아. 그리고는 이 세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쫓아서 살았잖아. 그래서 난 한 번쯤 내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는데 그게 잘못이야?”

“너, 지금 이 엄마를 가르치려는 거야?” 레이첼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레이첼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를 하고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엄마, 엄마도 알지. 버지니아 삼촌인 우리 동네 의사 웨스트 아저씨, 그 아저씨하고 렉탱글로 봉사하러 갈 거야. 엄마, 미안해. 난, 난……예수님과 약속을 했어. 난 꼭 가야해.” “레이첼, 왜 좋은 기회를 버리고 그런 고생을 하려고 하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구나.”

8. 예수님이라면 꼭 가야 할 곳

렉탱글은 레이몬드 시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또 술집과 도박장과 불결한 여관과 많은 공장 중에 철도공작소와 수화물 취급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웠습니다. 사람들도 욕을 많이 하고, 술 취한 사람들이 많고,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이곳을 바꿔보려고 목사들과 전도사들을 보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예수님을 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백십자회에 레이첼이 봉사하겠다고 온 거예요.

밤 9시가 넘어서 파워즈 소장은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듣던 아름다운 찬양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많이 듣던 아름다운 목소리네. 찬송을 부르는 저 목소리는 레이첼의 목소리 같은데……. 그럼 레이첼이 저 백십자회 전도모임에 왔다는 말인가?’

백십자회 그레이 전도사가 맥스웰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급히 찾아왔습니다. 그저께와 어젯밤에 레이첼의 아름다운 찬양 소리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천막 안으로 몰려들게 하였고, 또 들어설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도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저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는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제가 목사님을 뵈러 온 것은 오늘 밤에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셔서 설교해 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심한 목감기로 제대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제발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수요일 밤엔 저희 교회도 예배가 있지만 시간을 조정해서 꼭 가겠습니다.” 그레이 전도사는 맥스웰 목사의 허락에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맥스웰 목사와 그레이 전도사는 함께 손을 모으고는 렉탱글을 위한 구원과 전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수요예배를 마치고 교인들 20여 명과 함께 렉탱글에 있는 백십자회의 천막으로 갔습니다. 천막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그레이 전도사가 아니라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이 강단에 앉은 걸보고는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군데 저 위에 올라가 있는 거야?” “제일교회 목사래.” “뭐~ 제일교회? 부자들이 다니는 그 교회 목사야? 저 사람이 왜 왔어?” “저 놈을 당장 끌어내.” “아니야! 높은 분이 오셨는데 기회를 줘야지. 어이~ 목사, 노래나 한곡 하시지 그래?” “맞아. 맞아. 오랜만에 한 번 즐겁게 놀아보자고요.”

갑자기 어수선해지니까 맥스웰 목사는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레이첼에게 말했습니다. “찬양 한 곡 불러 줘요. 자매라면 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레이첼은 정성을 다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야! 저렇게 거친 사람들이 레이첼의 찬양으로 조용해지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모든 사람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감동 받고 있어.’

맥스웰 목사는 찬송이 끝나고 설교를 하였더니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사 일행도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은 정말 지독한 곳이야. 타락과 부패로 상처 입고 곪아 썩어 가는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먼저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술집을 없애기 위해 아무런 대항하는 운동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왔다는 겁니다. 오히려 술집을 허가하는 일에는 침묵을 지켜왔죠. 그럼, 예수님이라면 부패와 죄악의 근원이 되는 술 문화를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요? 아니면 술집운영에 반대하는 설교와 행동을 하셨다면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을까요? 죄의 근원이 되는 술 마시는 걸 그냥 인정하고 세금을 거둬들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만일 교인들 자신이 술집을 운영하거나 자신의 재산 일부를 술집 하는데 세를 내어준다면…… 예수님이라면 이런 행위를 좋아하셨을까요?” “어려운 문제네요. 예수님의 뜻을 아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일에 눈을 감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레이몬드 일보사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사회적으로 나쁜 광고와 일요일판을 없앤 것도 놀라운 일인데 정치인들을 상대로 과감하게 비판한 기사는 정말 충격적이야. 그동안 레이몬드 일보사는 집권당이 행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신뢰하고 지지해 왔는데 이제는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겠다고 정치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지 무척 궁금해져. 만약 레이몬드 일보사의 개혁 의지대로 정치인들의 압력에도 개혁해서 집권당의 정책과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지지한다면, 문제가 되는 정책은 시정이 되고 부패한 정치인들은 비판 받고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겠지. 신문사의 개혁 의지를 지켜보자고. 신문사의 개혁대로 된다면 우리나라 신용 등급도 좋아지고 부패가 없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지. 지금으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런데 레이몬드 일보의 개혁 의지에도 신문을 보던 사람들은 날마다 줄어만 갔습니다. 노먼 사장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9. 예수님이 사장이시라면

철도공작소 현장 소장인 파워즈는 회사에 정식적으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철도공사가 그동안 법을 어겨가며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것에 양심을 속이고 모르는 체할 수 없어서 불법 행위에 대한 서류를 조사 위원회에 제출하고 사표를 낸 거예요.

이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맥스웰 목사는 서둘러 파워즈 소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회사가 법을 어겼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표까지 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파워즈 소장은 맥스웰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자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사표를 냈으니 아마 파워즈 집사님에게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힘을 내세요. 우리 하나님이 집사님을 도와주실 겁니다.” 집으로 돌아온 맥스웰 목사는 파워즈 소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로 맹세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칭찬하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맥스웰 목사가 만난 사람마다 약속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이를 보면서 목사도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나도 이제 술집을 운영하는 허가를 반대하는 설교를 해야겠어.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에게 모욕을 준다고 해도 밀고 나가야겠어.’

10.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모인 곳

여전히 토요일 밤, 렉탱글에서 전도 집회가 열렸고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레이첼의 찬양을 들으려고 모여들곤 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야 레이첼의 찬양을 듣지.”

“맞아. 그렇지. 빨리 가자고!” 이를 지켜본 그레이 전도사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술렁거리긴 하지만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많이 변했어.’ 오늘 사람들은 그레이 전도사가 전하는 말씀을 조용히 잘 들었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레이첼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면서 말했습니다. “저……저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레이 전도사는 한 사람, 한 사람 안아 주고 기도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께선 당신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겁니다.” “전도사님, 저도 죄인입니다.” “저는 더 죄인……. 아주 악한 죄인입니다.” “전도사님! 저도 죄인입니다. 저도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습니까? 나쁜 짓을 너무나 많이 했는데도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일어나세요. 형제님!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모시면 모든 죄에서 용서함 받고,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전도사님, 저 같은 술집 여자도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상처입은 마음도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아! 정말인가요?” “그럼요,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시지도, 차별하시지도 않아요.” “저, 정말 저 같은 술집여자도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럼요. 용서하세요.” “전 그동안 너무 많은 죄를 지으면서 방탕하게 살아왔습니다.”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저도 이제부터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레이첼은 이 모습을 보면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말쑥한 차림의 청년도 자기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 저도 죄인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방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레이첼은 이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친구 버니지아의 오빠 롤린이었습니다. 렉탱글의 집회는 9시쯤 끝났지만 그레이 전도사는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기도를 하느라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전도모임이 마친 후, 레이첼과 같은 교회를 다니는 유명한 소설가 체이스도 함께 걸어갔습니다. 체이스는 오래 전부터 레이첼을 남몰래 혼자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체이스는 단 둘이 있는 이 시간에 레이첼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레이첼, 이제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지 않겠소.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이 말을 들은 레이첼은 너무도 당황스러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어째서 그런 고백을 오늘 밤에 하는 거예요? 오늘 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밤에 그런 고백을 하다니……. 죄송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고백한 게 잘못인가요? 레이첼, 당신은 절 좋아하지 않나요? 아니면 저의 사랑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에요.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들은 날인데 당신의 고백을 들으니 당황스러워요. 죄송해요. 당신의 고백에 아무런 대답도, 설명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늘 밤에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레이첼은 곰곰이 체이스의 사랑 고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오늘밤 체이스가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는데 왜 나도 모르게 그가 싫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밤 체이스는 오늘 밤 사람들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감격스러운 것에 감동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모습에 감동 받고 있는 표정이었어.’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레이먼드의 시민들은 도시 이곳저곳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옳은 일을 하려는 결심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철도공사의 법을 어기는 것을 신고한 파워즈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레이몬드 일보사의 노먼 사장의 개혁과 매우 가난하고 지저분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렉탱글에서 있었던 놀라운 전도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죄인이라고 회개한 사건, 레이첼이 유명한 오페라 단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백십자 전도모임과 함께 렉탱글에서 찬양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버지니아도 부자들의 친목회에서 품위있는 부자로 남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녀가 렉탱글의 전도 집회에 참여한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놀라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도 유명한 신학대학원을 나온 사람으로 부자들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목사답게 전에는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책을 많이 보고는 이를 세련된 말과 마치 유명한 방송국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하는 설교로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이제는 설교가 달라졌습니다. 많이 공부하고, 책을 많이 읽고, 말씀을 또박또박 전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말 잘하는 사람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맥스웰 목사의 설교와 기도에 교인들은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맥스웰 목사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술집에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했을 땐,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고, 정치인들도 매우 난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 중에는 자기는 술을 안 마시지만 자기 건물에 술집을 하도록 빌려 주어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술집은 장사가 잘 되어 돈을 많이 주니까 건물 주인인 교인들도 돈을 많이 벌고 있었고, 술이 잘 팔리니까 그것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았고, 정치인들은 그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았기에 술집을 반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맥스웰 목사는 힘차게 술집에 대한 반대를 설교하셨습니다. “술은 가난한 사람, 힘들고 괴로운 사람, 사업가, 정치인 등 모두에게 아주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술을 팔 수 있도록 허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주 큰 죄입니다.” 이렇게 맥스웰 목사가 술집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교인들이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이 어쩌자고 저러시지? 그냥 전처럼 어려운 문제는 빼고 설교하시면 되시는데……. 자꾸 술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시니 걱정이야. 술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없애야 하는 건 당연한데 술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심하니 이를 어떻게 해.” 렉탱글에서 시작된 전도와 회개운동이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11. 아는 것을 실천하는 운동

레이몬드 시에 있는 링컨대학교 마쉬 총장은 맥스웰 목사의 설교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마쉬 총장은 대학교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고, 학생들에게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뭔가 좀 더 가치있는 일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내가 짊어지고 나갈 십자가를 이제야 찾았어. 무겁기는 하겠지만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하실 것을 해나갈 거야. 나는 지금까지 우리 시의 공무원들이 시민들의 생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어. 잘못을 알면서도 내 일이 아니니까 그냥 모른 체 한거야. 하지만 이제는 진행 중인 우리 시의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훌륭한 사람이 후보가 되고 선출되도록 최대한 노력할 거야. 또 시민을 속이고 뇌물을 받고 정치적으로 속임수를 쓰는 후보자들을 가려내어 그들의 나쁜 점을 알려서 시민들에게 공정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이 사람들에 대한 반대 운동도 할 거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 너의 양심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

마쉬 총장은 이런 생각을 맥스웰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맥스웰 목사는 마쉬 총장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뭔가 다른 일을 할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은 지금까지 잘해 오시고 계신데 또 다른 일을 하신다니요?”

“예, 저는 지금까지 공부 많이 하고, 부자들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목사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이렇게 편하게 지내는 목사 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힘들더라도 제가 짊어질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싸움투성이인 렉탱글에 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그 사람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총장님은 거짓말과 부정부패로 타락한 우리 시를 개혁하는 데 힘쓰시고 저는 약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목, 목사님, 저도 열심히 힘쓰겠습니다. 이미 서약한 교인들과 힘을 합하여 우리 시가 바르게 되도록 할 겁니다. 모두가 함께하면 그 힘이 더 강해질 겁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큰 단체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단체를 통해 여럿이 함께 조직적으로 술과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단체를 만들어 힘 있게 활동하면 높은 사람들이나 정치하는 사람들도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왕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거, 보다 분명하게 계획을 세우고 확실하게 용기를 내어 힘을 발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말이 나온 김에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대대적인 캠페인을 해야 합니다. 마침 예비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비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만드는 것이 어떨까요?” “좋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마침내 예비 선거가 시민회관에서 공개적으로 열렸습니다. 이번에도 언제나 그런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서로를 욕하고 나쁜 소문을 내는 모습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시를 위해 충실히 일하실 분들로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지명된 후보자님들 중에 앞으로 우리 시를 이끌어 갈 시장, 시의원, 교육의원이 될 분들이 있습니다. 후보자들을 발표하기에 앞서 기독교인들의 요청에 의해, 링컨대학교 마쉬총장이 연설을 하겠습니다.”

마쉬 총장은 강단에 올라 충격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를 위해 일할 공직자 대부분은 그동안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공직자는 세금과 시민의 재산을 자신의 것처럼 자기 멋대로 사용하고 또 자기 맘대로 일을 처리하여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었습니다. 어떤 공직자는 잘못된 것을 없애는 데 앞장을 서야 하는데 오히려 부패한 행위를 하도록 도와주고, 뇌물을 받고는 허가를 해주었습니다. 여기 모인 후보자들은 대부분 제가 알기로는 부자로, 공부를 잘한 사람들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사람들 몰래 죄를 짓고, 법을 어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당에만 잘 보여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정당에 잘 보이려고 일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선거에서 당선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정당에서 나온 사람들과 후보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그걸 연설이라고 하냐! 시민들을 충동질하지 마라. 그냥 대학에서 학생들이나 가르쳐라. 너희 기독교인들은 조용히 교회에서 예배만 드려라.”

이에 맥스엘 목사가 말했습니다. “조용히들 하세요. 지금까지 공직자들이 부패한 삶을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시민들의 새로운 개혁운동을 지지합시다. 타락의 원인이 되는 술집을 없애버리고 부패한 후보자들을 뽑지 맙시다.”

“야, 이놈아! 설교를 할 거면 조용히 교회에서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우리를 범죄자로 몰아?” 급기야 사람들은 마쉬 총장님과 맥스웰 목사 일행에게 욕을 하고, 나눠 준 책자를 던졌습니다. 이렇게 되어 시민회관에서 벌어진 후보자 대회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2. 우리는 친구

토요일 오후, 버지니아는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려고 레이첼을 만나러 막 집을 나서려는데 친구들이 음악회에 가자고 찾아왔습니다. 버지니아는 친구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음악회 가는 것보다 렉탱글에 가보는 것이 어떨까?” “거긴 몹시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이잖아.” “그래도 한 번 가보자. 말로만 듣던 렉탱글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 “경찰을 한 명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곳은 위험하다고 들었어.” “걱정하지 마. 위험하지 않아.”

“버지니아! 너 요즘 레이첼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친구들을 설득한다면서 좀 우습지 않니?” “너,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워 보이니?” 버지니아와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렉탱글로 향했습니다. “야, 랙텡글은 말로만 듣던 대로 정말 지저분한 곳이구나! 사람들도 거칠게 보이고 옷차림도 지저분해 보이고!” “그만 가자, 더 이상 볼 것도 없을 것 같네.” “맞아. 너무 지저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행은 렉탱글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술에 취한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쓰러졌습니다. 이를 본 버지니아는 재빠르게 뛰어가서는 그 여자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롤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누…… 누구세요?” 여자는 버지니아를 쳐다 보았습니다. “너희는 먼저 가야겠어. 난 이분을 집에까지 바래다 줘야겠어.” “아니야. 우리가 도와줘야 되지 않니. 혼자서 부축하기 힘들 거야.”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여러분, 이 아가씨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이 있나요?”

“어차피 난 지옥에나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란 말이야. 악마가 지옥에서 날 기다리고 있잖아. 난 지옥에 떨어질 게 뻔하단 말이야.” 여자는 버지니아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여자를 안고 말했습니다. “롤린! 당신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을 아시고 당신을 지옥에서 해방시킬 거예요.”

“정,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절 구원해 주실까요?” “롤린! 우선 그레이 전도사님이 사시는 집으로 가요.” 친구들은 이런 버지니아를 보면서 수군댔습니다. “버지니아는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어.” 버지니아는 로린을 부축하였고, 친구들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버지니아는 다행히 그레이 전도사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버지니아는 한숨을 몰아쉬고는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집 주인이 가로막았습니다. “지금 전도사님이 안 계시니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지금 전도사님께서 안 계셔서 들어갈 수 없다고요?” “그래요. 만약 물건이 하나라도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내가 다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러니 전도사님이 오시면 그때 다시 오셔요.”

하는 수 없이 버지니아는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친구가 말했습니다. “저 여자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잖아. 그런데 너희 집에 데리고 가겠다니 말도 안 돼.” 지나가던 술 취한 사람들의 말도 들렸습니다.

“멀쩡하게 생긴 저 여자들은 누구야? 예쁜데? 옷도 멋지고……. 이봐, 아가씨들, 그 여자는 그냥 두고 우리하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놀다 가는 게 어때?” “그래, 이리 와서 우리하고 재미있게 놀자.” 버지니아는 이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택시를 불러 롤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집에 계신 할머니는 기가 막혔습니다. “이렇게 막 돼먹은 여자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온 거냐?” “할머니, 로린과 저는 친구예요.” “뭐라고, 이런 여자가 네 친구라고?” “예, 친구예요.” “뭐라고? 너 정말 제정신이냐?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기나 해.”

“할머니가 말씀 안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지금 술에 취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딸이에요. 전 이 친구가 무릎 꿇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악마가 이 친구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도 보았습니다.”

“얘야, 그건 말도 안 돼.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면 몸가짐도 바로 하고, 모범된 생활을 해야지, 술에 빠져 살다니…….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걸, 난 믿을 수가 없어. 너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라. 술이나 퍼마시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와 친구라니, 누가 그걸 믿겠어. 우리 집안은 품위있는 상류층 집안이고 또 권위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내는데 네가 바보같이 우리 집안에 먹칠하는 철없는 짓을 하고 다니다니…….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너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우리 집안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을 받을 거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 너 왜 이렇게 한심해졌어! 차라리, 저 여자와 우리 가족을 위해 알콜 중독자 보호소 같은 데로 보내. 돈은 내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렇게 하면 너는 좋은 일을 해서 좋고, 우리 집안도 좋잖아.”

“죄송해요. 할머니, 저 친구를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보내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습니다.” “괘씸한 것 같으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내 말대로 안 하겠다면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겠다. 넌 이 할머니보다 술 취한 저 따위 여자가 더 좋단 말이냐. 명심해라. 네가 저 따위 여자 때문에 이 할머니를 집밖으로 쫓아냈다고 사람들이 욕할 거야.”

13. 하나님, 도와주세요

할머니는 곧바로 짐을 싸서는 집을 나가버리셨고, 롤린 오빠는 급하게 할머니를 찾아서 기차역에 가 보았지만 벌써 할머니는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빠, 왜 혼자 돌아와?” “역에 가 보았지만 남부로 가는 열차는 이미 떠난 뒤였어. 할머니가 기차를 타고 떠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친구 말이 할머니가 매우 화가 나신 표정으로 남부로 가는 기차를 타시는 걸 보았대.”

“오빠, 나 때문이야.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은 안하고 고집만 피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남부에는 우리 친척들이 많이 사시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 불쌍한 아가씨가 너의 보살핌에 달려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사실 지금까지 우리 부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모른 체하면서 살았어. 이건 정말 잘못이야. 예수님이라면 아마 너처럼 하셨을 거야.”

다음날, 버지니아의 요청으로 의사가 와서 로린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술 가지고 와, 술! 나 술이 없으면 죽는단 말이야.” “롤린!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내야 해요.” “평소에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알콜 중독 증세로 정신 착란증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로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편안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버지니아는 의사의 말대로 로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정성껏 간호한 덕분에 로린은 다시 건강해졌습니다. 이제는 술도 끊고 좋은 일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4. 세상에, 로린이 죽다니

맥스웰 목사와 사람들은 거리를 다니면서 바르게 선거할 것과 술을 팔지 못하게 하자는 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일행을 가로막는 험상궂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하나같이 몽둥이를 지니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왜, 우리를 막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그래? 너희 기독교인들은 그냥 조용히 너희끼리 교회에서 예배나 잘할 것이지, 왜 교회 밖으로 나와서 야단이야! 너희가 교회에서 뭐 한다고 우리가 방해한 적 있어? 너희는 너희끼리 잘 살고, 우린 우리끼리 잘 살면 되잖아. 우리가 너희더러 술을 마시라고 안 하잖아. 예배 방해도 안 하고, 그런데 왜들 난리야.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야. 술을 팔든지, 마시든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못하게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술이 나쁜 건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쁜 걸 막자는 겁니다.” “뭐야! 도저히 말로 해선 안 되겠구먼. 우리 말 안 들으면 가만 안 둘 거야.” “폭, 폭력은 안 됩니다. 따질 일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폭력은 절대로 안 됩니다.” “폭력? 그래 우리도 폭력을 싫어해! 그런데 네 놈들이 먼저 말로 폭력을 해대잖아. 우리는 나쁜 놈들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뭐야! 못 알아들어? 이거 말로 해선 안 되겠어. 알아듣게 해주마. 저것들이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확실하게 알아듣게 하자! 하나도 남김없이 마구 부셔 버리자.” 마침 이 곳을 지나던 청년이 맥스웰 목사에게 왔습니다. 이 청년을 보고 마쉬 총장이 말했습니다.

“잘 왔어. 그래, 우리가 참아야 하나? 저 사람들이 우리를 나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는데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나?” “총장님! 저 사람들은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목사님이 술에 관한 반대 설교를 하고 또 이 시에서 술집을 몰아내기 위해 운동을 펼치시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화가 나서 저러는 겁니다. 저 사람들의 행동을 말릴 방법은 지금으로선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레이 전도사는 가슴을 쳤습니다. “아, 이제야 조금 전도가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줄 알았는데……. 이것이 뭐란 말이야!” “저 사람들과 계속해서 싸운다면 정말로 큰일입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요. 경찰의 도움을 받으면 저 사람들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저 사람들의 화를 달래고 거리를 좁히는 것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거친 행동이 날마다 이어지자 이제 막 술을 끊은 사람들이 예전의 생활 습관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 예수님, 이 나라에 악마 같은 술의 노예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그냥 보고만 있으실 건가요? 예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사회의 지도자들도 사업 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들 편을 들었고, 또 조직적으로 단합하여 제일교회와 렉탱글의 백십자회를 괴롭혔습니다. 마침내 토요일 레이먼드 시의회에서는 ‘술집을 폐쇄하느냐, 아니면 술집을 계속 운영하느냐?’를 두고 투표가 벌어졌습니다. 투표가 시작되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이 금지될까봐 술을 마구 사들였기 때문에 술이 엄청나게 많이 팔렸습니다. 시민들은 술을 없애야 한다는 사람들과 없애면 안 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져서 서로 싸우곤 했습니다. 렉탱글에서도 사람들끼리 서로 말다툼을 하고, 욕을 하면서 싸우곤 했습니다.

급기야 그레이 전도사의 백십자회 천막에 술 취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놈들아! 왜 우리를 못 살게 굴어?” “전도사님, 빨리 이곳을 피하십시오.” “저 천막에서 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매질을 합시다.” “여러분! 술집은 폐쇄되어야 합니다. 술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또 화를 내게 하고, 서로 싸우게 하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술집은 없어져야 합니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우리는 너희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우리를 괴롭혀? 지금 당장 반대운동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우리는 술집이 없어지기 전에는 이 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말로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봐주지 말고 저들과 싸웁시다.”

술집 주인들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쩌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싸움을 말려야 합니다.” “기어코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다니……. 기독교인들이 많이 다치겠어. 경찰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경찰도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 하고 있습니다. 술집 주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도 괜히 끼어들다가 자기들에게로 모른 체하는 것 같아요.” ‘이 일이 정말 심각하게 되어가는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투표 결과가 나온다면……. 아, 정말 대책이 안 나오는구나. 무질서한 술집 주인들의 폭력을 막을 길이 없구나.’

다행히 늦게라도 경찰이 와서 싸움을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큰 부상을 당했을 겁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폭력이 점점 심해져 가니 걱정이었습니다. “투표 마감시간인 6시가 다 되어가니 이제 렉탱글에 가서 선거 결과를 기다립시다. 여기서 저들과 부딪쳐봐야 부상자만 생기고 또 예수님은 우리가 싸우는 건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 때 맥스웰 목사를 알아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라. 저기 술집 반대 대장이 나타났다. 저 키가 크고 모자를 쓴 놈이 대장이다.” “맞아, 나도 저 놈이 설치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급하게 달려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투표 결과가 술집 폐쇄 쪽으로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제 사회지도층이라고 으스대던 사람들과 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힘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술집들이 문을 닫길 원합니다. 목사님! 지금 기뻐하실 때가 아닙니다. 우릴 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겨……경찰은 뭐하느라고 오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누군가가 던진 술병에 로린이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로린을 바라보았지만 로린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여기 한 아가씨가 당신들이 던진 술병에 맞아 죽었소. 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당신들은 모두가 살인자요. 자, 뭐든지 더 던져보시오. 이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 말에 술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정, 정말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혹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야?” 그레이 전도사는 죽은 로린을 안고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이 더러운 거리에 사는 죄인들아!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이지 마라. 술집을 허가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똑똑히 봐라. 너희가 죽인 아가씨다. 이제 막 술을 끊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한 아가씨다. 이래도 못 믿겠냐?” 경찰들은 이번에도 늑장을 부리다가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야 왔습니다.

15. 로린의 장례식

다음날 주일, 맥스웰 목사는 어젯 밤의 충격으로 제대로 설교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교인들은 레이먼드 시당국에서 결국 술집을 허가를 인정하는 쪽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투표에 이겼다는 소문이 근거없는 거짓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지도층과 상류층의 술수에 넘어가고 말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도 술집이 허가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이 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아가씨를 살해한 사람들에게 표를 던져 주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로 망할 것이며 저들에게 표를 찍어 준 기독교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먼 사장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우리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너무 약하게 일깨워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좀 더 강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신문을 만들었다면 그 불쌍한 아가씨가 술병에 맞아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 기독교인들이 술집을 폐쇄하는 데 투표를 했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다음날, 버지니아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린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16. 버지니아의 결심

버지니아는 로린의 죽음에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마치 자기 몸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구하려다가 술병에 맞아 죽은 것이라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버지니아는 레이첼을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나와 롤린 오빠는 렉탱글의 많은 땅을 살 거야.”

“갑자기 땅은 왜? 어떤 계획이라도 있는 거니?” “지금 백십자회 천막이 세워져 있는 땅은 오랫동안 소송에 걸려 있잖아. 난 법원에서 판결이 나는 대로 그 땅을 사들이려고 해. 난 오랫동안 가난한 이 동네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대해서 조사를 해봤어. 우선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를 못한 사람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위해, 또 로린 같은 술집 여자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집과 또 직업훈련소와 직업소개소를 만들 생각이야. 난 단지 그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돈만 대고 전문가들이 기독교복지 사업을 이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버지니아,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난 상상도 못해 봤는데……. 아무튼 하나님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고 모든 일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을 믿어.”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 봉사하고 희생을 한다고 해도 솔직히 이 도시에서 술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팔리고 술집이 번창하는 한 렉탱글 같은 추악하고 타락한 지역은 크게 바뀌지 않을 거야.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승리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

“나도 그렇게 될 것으로 믿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500명만 된다면 술집은 문을 닫게 될 거야. 레이첼, 네 목소리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힘이 담겨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해.” “맞아, 나도 어려운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고 싶어.”

“맞아, 그거야! 너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그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때? 학원과 악기 그 밖에 모든 비용은 내가 마련해 줄게. 너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잖아. 또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너에게 있잖아.”

“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할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고맙다. 친구야! 넌 나에게 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레이첼이 가고 나서 버지니아와 롤린 남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너, 정말 대단한 결심을 했구나.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레이첼의 결심도 정말 대단해.”

“맞아. 선뜻 그런 결심을 하긴 어려운데 말이야. 오빠, 예전처럼 레이첼에게 관심을 좀 가져 봐.” “무슨 말이야?” “내 생각에는 오빠가 좀 부드럽게 대하면 좋은데 딱딱하게 대하니까 좀 서운해 하는 것처럼 보였어.”

“너, 혹시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 아냐. 사실 난 이제껏 레이첼 이외에는 누구도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레이첼이 우리 집에 와서 오페라 단장의 제의를 거절하겠다고 말하던 날, 사실은 레이첼을 쫓아가서 좋아한다고 결혼해 줄 것을 말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 내가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대. 사실 레이첼의 말이 맞아. 그 때 난 삶의 목표가 없었어. 말하는 것도 생각 없이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행동하는 것도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고, 생각하는 것도 불량해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게 했어. 사실 난, 레이첼이 렉탱글에서 찬양을 부를 때 그 모습에 감동이 되어 회개하고 뉘우치게 되었어. 지금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 이제는 내 인생의 참된 목표를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레이첼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아. 또 그녀는 체이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체이스도 레이첼을 좋아하는데 내가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면 안 되잖아. 그렇지만 난 변함없이 레이첼을 사랑하고 있어.”

“오빠의 무뚝뚝한 마음을 이제야 알겠어.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 레이첼은 체이스의 청혼을 거절했대. 오빠가 회심하던 날 밤에 체이스의 행동에 실망을 했나봐. 오빠가 예전과 같은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면 나도 오빠에게 이런 말 안 해. 그런데 지금 오빠의 모습은 몰라보게 변했어. 그리고 오빠는 레이첼과 인생목표가 같고 또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아.”

“너,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라.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야. 난 아직 멀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레이첼에게 말하지 마라. 만약 또 레이첼에게 상처 주고 거절당하면 내 꼴이 더 우습게 될 것 같아.”

레이몬드 제일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치고 나면, 약속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모여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전 그동안 구체적인 액수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많은 손해를 입었습니다. 저희 신문을 읽는 사람도 줄어가고 있습니다.” “노먼 집사님, 사람들이 신문을 중단하는 이유가 뭔가요?”

“목사님! 그 이유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글을 안 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범죄 사건, 프로 권투와 같이 싸우고 때리는 것, 연예인의 문제를 다룬 것, 유명한 사람이 무슨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것, 성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 같은 것이에요. 이런 기사들을 많이 자세하게 실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신문에 광고를 받아야 하는데 광고를 내겠다는 회사들이 줄어든 것과 정치가 바르게 되도록 제 생각을 밝힌 것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계속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신문을 만들고, 또 정치적으로 바른 것을 쓰고, 남을 나쁘게 보는 걸 빼고 서로 칭찬하는 걸 쓰면 얼마 안 가서 우리 신문사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노먼 집사님,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신문사가 망하는 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고는 망하게 되면 안 됩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까?” “글쎄요. 목사님, 저는 그동안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문으로 그저 재미있게 하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독교 신문을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신문을 만든다고 해도 성공을 거둔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재산은 신문사 직원들의 손해를 안 보게 하려고 하다보니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신문이 만들어 지고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대학교처럼 기부도 받고, 후원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맞아. 버지니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기사와 기독교적인 편집 방향을 지켜 나가려면 처음에는 많은 돈을 들여야 하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그러니 기부금과 후원하는 회사나 단체 같은 것이 있어야할 거야.”

“만약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의무적으로 수백, 수천 부의 신문을 돈 주고 산다면 조금은 나아지겠지요. 그리고 누군가가 처음의 손해를 견디게 해줄 후원자가 있어야 하지요.” “맞아. 버지니아, 네가 아주 잘 알고 있구나.” “노먼 집사님, 기독교 신문을 만드는 데 제가 참여할게요. 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으니 후원하겠습니다.” “저, 정말이냐?” “한 50만 달러면 되겠습니까?” “그……그럼, 그만한 돈이면 충분하다.”

맥스웰 목사는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 버지니아와 노먼 집사님을 위해 박수를 보냅시다.” 버지니아는 손을 내저으면서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큰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얼마 전에야 제가 물려받은 재산이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현명한 투자 방법을 찾아냈다고 해서 칭찬을 받을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의 싸움에서 저는 레이몬드 일보사와 같은 양심적인 신문사를 기독교인들이 적극 도와주는 데 나섬으로 그 신문사가 우리의 입장을 잘 드러내도록 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17. 기독교 신문사가 생기다

다음날 버지니아는 새로운 연합기관으로 만들어지는 신문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맥스웰 목사와 함께 노먼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노먼 사장은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실 것으로 여겨지는 11가지의 원칙과 새로운 방침들을 적어 서류를 만들어서 목사와 버지니아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서류에 적힌 원칙과 새로운 방침대로 기독교 신문이 나오게 된다면 분명히 예수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이 서류의 내용대로만 신문을 만든다면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군요. 자, 그럼 이 약정서에 서명을 하십시오. 그리고 버지니아! 이 약정서 내용대로 50만 달러를 노먼 사장님에게 전해 주렴. 이제부터 이 시에서 기독교 일간지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좋아요.”

두 사람이 돌아가자 노먼 사장은 무릎 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노먼 사장은 전에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욕심을 채워 주기 위해 흥미 위주로 신문을 만들지만 이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신문 만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레이 전도사는 렉탱글에서 정해진 기간을 마치시고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이봐, 그레이 전도사도 이곳을 떠났으니 우리도 기독교인이 되어 이렇게 좋은 술도 못 마시는 친구들을 구해내자고.” “맞아. 그 친구들도 분명히 후회하고 있을 거야.”

사람들은 술을 끊은 사람들을 찾아가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보게 친구. 술이나 한 잔하자고. 내가 살게. 그레이 전도사도 이곳을 떠났는데 뭘 그리 두려워 해. 조금만 마신다고 죄가 되겠어.” 이런 유혹에 그만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역시 자넨 변한 것이 없어.”

이런 모습을 본 맥스웰 목사는 안타까워했습니다. ‘아! 그레이 전도사님이 안 계시니 안 되겠어! 내가 가야겠어!’ 맥스웰 목사는 매년 교회에서 휴가비를 받아 멋진 곳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매우 어려운 일을 겪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가족여행을 다녀오도록 하고는 렉탱글로 가서 전도하고 봉사했습니다.

“난 약속한 사람들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너무 지나친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맞아. 약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건 옳지 못해.” 교인 모두가 맥스웰 목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교인들은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모임도 갈수록 열정과 힘을 더해 갔습니다.

파워즈는 약속대로 일주일에 몇 번씩 철도공작소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과 하나님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길고 긴 무더위가 지나고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소설가인 체이스도 약속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더운 여름 내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소설만 썼습니다. 레이첼에게 사랑 고백했던 그날 밤 이후로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난 돈 때문에 명예나 인기 때문에 대중이 원하는 것을 쓰는 건 아닌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난 결국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닌가?’

그가 쓰는 소설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 잘 팔리게 하려고 쓰는 소설이었습니다. 체이스는 이렇게 자신이 쓰는 소설과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 것이 다른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연히 롤린과 레이첼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 체이스는 마음 속에서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결정하고는 처음에 생각한 대로 소설을 끝냈습니다.

18. 롤린, 새 사람이 되다

레이첼과 롤린은 우연히 만나서 같이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빠, 나 방금 버지니아를 만났어. 렉탱글의 땅 사는 일이 거의 끝나간대.” “그럴 거야. 오랫동안 소송에 묶여 있어서 어려웠지만 이제 곧 살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될 거야.”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레이첼은 롤린과 이야기를 하면서 롤린이 예전처럼 잘 생긴 얼굴로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던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자 버지니아는 백만 달러를 들여 렉탱글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을 해나갔습니다. 비어 있는 땅을 사서는 건물을 짓고, 지저분한 곳들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이 왔습니다. 레이몬드 제일교회에서 약속한 1년의 기간이 끝났지만 약속한 사람들은 이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생활 운동의 이야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9. 브루스 목사가 본 레이몬드 제일교회

시카고의 애비뉴교회 브루스 목사가 뉴욕에 사는 캑스턴 목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받는 사람 - 뉴욕의 사랑하는 친구 캑스턴 목사) 지금은 조용한 주일 밤이야. 난 너에게 이곳 레이몬드에서 본 놀라운 일들을 알려 주고 싶어서 편지를 쓰네. 너도 기억하지? 우리와 함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맥스웰……. 그는 언제나 잘 정돈된 옷차림과 차분하게 책을 읽는 자세로 우리 중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친구였지. 그는 레이몬드 시에서 가장 큰 레이몬드 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11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성실하게 살았어.

그런데 바로 1년 전 예배를 마친 후, 그는 놀라운 제안을 교인들에게 한 거야. 앞으로 1년간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으로 기도하면서 일을 진행해 나가기로. 교인들 중 몇 사람이 이 제안에 따르면서 놀라운 운동으로 발전하였어.

그는 언제나 꼼꼼하게 잘 준비된 원고로 설교를 하였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초점을 두고 열정적으로 전해. 그는 술집에 대한 공격을 분명히 하고 있어. 내가 그를 본 생각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좀 더 철저하게 특히 고난을 당하는 데 있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인 것 같아.

그들 중에는 ‘레이몬드 일보’의 노먼 사장이 있어. 그는 자신의 신문을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내는 것으로 바꿨어. 파워즈는 철도 공사 감독관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철도공사의 부정을 고발해냈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인 버지니아는 엄청난 돈을 아낌없이 기독교 일간지를 만드는 일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전도와 복지를 위해 내놓았어. 그리고 레이첼은 유면한 오페라 가수가 될 기회를 포기하고는 교회의 찬양대와 전도 집회 활동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노래교실을 열었어.

이들 유명한 사람들 이외에도 같은 약속을 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늘어갔고, 최근에는 레이몬드의 다른 교회 교인들도 몇 사람이 이 운동에 참여키로 했다고 하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레이몬드 제일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시카고와 뉴욕으로도 퍼져 나가기를 바라네. (보내는 사람 - 시카고에서 친구 브루스 목사)

20. 브루스 목사의 결심

브루스 목사는 맥스웰 목사의 친구였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1년 동안 레이몬드 제일 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듣고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카고로 돌아온 브루스 목사는 깊은 생각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는 목사로 잘 살아왔어. 그런데 맥스웰 목사와 레이몬드 제일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이렇게 편하게만 사는 게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만 같아.’

이런 생각으로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기도하다보니까 몸은 피곤하였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맥스웰 목사가 제안하고 이루어 가는 운동을 자신과 애비뉴 교회와 시카고 지역에서도 실천할 것을 말입니다.

21. 로즈와 펠리시아

시카고에는 레이첼의 사촌 동생인 로즈와 펠리시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자매의 아버지인 스터링은 아주 크고 멋진 집에서 사는 부자로 큰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몇 년 동안 잘 낫지 않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음악회에 갔다가 오면서 연극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런던의 그늘진 곳’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동생 펠리시아가 말했습니다. “언니, 나 저 연극 보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우리 시카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어딜까?” 그러자 언니 로즈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한 거야. 그런 사람들은 도와줘봐야 고마워하지도 않아. 그냥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사는 거야. 그렇게 정해진 거야. 이건 바꿀 수도 없어.” “언니, 그래도 목사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하셨잖아.”

“나도 들었어. 하지만 우리 같은 부자가 도와준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아. 레이먼드 시에 사는 레이첼이 말도 안되는 이상한 약속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편지를 받고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니? 난 레이첼이 언젠가는 그 성가신 일을 집어치우고 다시 오페라 단에 들어가서 멋지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 믿어. 요즘 레이먼드 시는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좀 이상해졌어.”

“레이첼 언니는 천막이 있던 자리에 새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 낡은 건물에서 가난한 아이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위해 찬양을 가르치고 있대.” “말도 안 돼. 그런 사람들이 수준 높은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줄이나 알겠어? 유명한 오페라 단에 가지 않고 무식한 사람들을 위해 귀한 재능을 낭비하다니……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그 앤 왜 그러는지 몰라! 레이첼이 우리 시카고에 와서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시카고를 발칵 뒤집어 놓을 텐데, 바보같이 아까운 목소리를 쓸데없는 데 낭비하다니…….”

“레이첼 언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아니면 이곳에 오지 않을 거야. 만약에……. 만약에 우리 브루스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레이몬드 제일교회 목사님처럼 제안하신다면 어떨까?”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브루스 목사는 그런 제안을 하실 분이 아니야.”

“레이첼 언니의 편지를 보면, 그런 약속 운동을 다른 교회에도 알릴 생각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중이래. 만약 그런 계획이 성공한다면 많은 교회와 교인들의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에이, 재미없어. 펠리시아, 그런 얘긴 그만하자. 그런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생각하기조차 싫다.”

22. 엄마를 위해 기도해 주렴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두 자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니,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 잘 드러난 감동적인 연극이었어. 다리 위의 장면 연기가 아주 훌륭했어. 다만 신사로 나온 남자 배우는 감정표현이 지나쳤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두 남자와 여자의 대화가 오가다가 서로 남매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 흥미로웠어.”

“나도 연극 재미있게 봤어.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표현한 장면은 좀 지나쳤어. 너무 끔찍했어. 무시무시해서 못 보겠더라. 소름끼치는 장면은 보여 주지 말았어야지.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언니, 실제로 그런 비참한 사람들이 있잖아.”

“그래도 비싸게 돈 주고 와서는 그런 불편한 장면을 보는 건 기분이 안 좋아.” 연극을 보고 와서는 언니는 대충 인사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펠리시아는 어머니에게 오늘 본 연극 이야기를 들려 줬습니다. “애야, 고맙다. 오늘은 이 엄마를 위해 기도해 줄래?” “그럼, 엄마,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왜 오늘따라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펠리시아, 난 요즘 마음이 불편해. 하루종일 네 아빠에 대해서 불길한 생각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어. 아빠의 사업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서 잠도 오지 않아. 그러니 날 위해 기도를 해다오.”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엄마.” “그래도 기도를 해다오.”

펠리시아는 떨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정성을 다해 어머니의 영혼과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이젠 편히 자도 돼. 엄마, 혹시 밤중에 마음이 불편하면 날 불러.” “펠리시아, 엄…… 엄마에게 뽀뽀해 주고 갈래?” “응, 엄마, 엄마 병이 빨리 낫길 기도할게. 엄마, 사랑해.”

23. 드디어 에비뉴 교회도 시작되다

주일이 되자 로즈와 펠리시아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평소에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교했는데 오늘은 좀 달랐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힘차게 전하셨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레이몬드 제일교회에서 시작된 약속 운동과 교인들의 변화된 삶을 말했습니다. 목사의 말에, 여러 교인들이 감동하고 놀라워했지만, 많은 교인들은 듣기 싫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갈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우리 교회도 레이몬드 제일교회에서 시작한 약속 운동을 시작할 것을 제안합니다. 예배 마친 후, 이 운동에 함께하실 분들은 남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면서 펠리시아는 말했습니다. “언니, 먼저 돌아가. 난 조금 있다 갈게.” “아니, 너 그럼…….” “언니는 이해 못할 거야. 난 지원자 모집에 참여할 거야.”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내 직장과 재산과 생각을 버리라는 거야. 말도 안 돼! 넌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그래. 아버지도 안 좋아하실 거야. 그런 일은 우리에게 괜한 어려움과 불편함만 줄 뿐이야.”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레이나 집사가 물었습니다. “로즈, 넌 약속하지 않고 그냥 갈거지.” “네. 전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해요. 사실 그 약속 운동은 너무 지나쳐요. 예수님을 믿는 것도 지나치면 안 좋은 거잖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약속 운동은 괜히 문제만 만들게 될 거야. 브루스 목사님은 아무 문제없이 잘 해오던 우리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셨어.” “맞아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번 일로 우리 교회는 약속 운동을 할 건지, 안 할 건지로 의견이 갈려서 싸우게 될지도 몰라. 다행인건 많은 교인들이 그 약속 운동을 반대해. 그러니 펠리시아, 너도 잘 생각해봐.” 로즈와 레이나 집사는 그렇게 가버렸지만 팰리시아는 남아서 약속 운동 모임에 갔습니다.

한참 후에 집에 돌아오자 펠리시아를 아버지가 불렀습니다. “너, 그 모임에 다녀온 거야? 그래. 한 10명 정도 모였니?” “아니야. 아빠, 한 100명 쯤 모였어.” “뭐야! 세상에! 100명이나 모였단 말이야?” “응, 아빠도 그 모임에 왔었으면 감동을 받고 뜨겁게 기도했을 거야.”

“뭐야! 내가 걱정했던 일들이 기어코 일어나고 말았어. 아무튼 난 네가 그런 일을 하는 거 반대다. 엉뚱한 생각마라. 알았어. 네 방으로 가서 쉬어라.” 펠리시아는 자기 방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브루스 목사는 찾아온 친구 에드워드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아주 중요한 일에 뛰어들었다는 소식 들었어. 그래서 너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어. “잘 왔어. 친구. 넌 그 약속 운동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지?” “그럼. 잘 알지. 난 네가 내 친구란 게 자랑스러워.”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 이제 우리 서로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운동을 펼쳐 나가야지.”

“그런데 브루스! 아마 쉽지만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에게 엄청난 어려움이 생길지도 몰라. 그렇지만 넌 반드시 이 일을 이루어나갈 걸 믿어. 아무리 어렵더라도 너처럼 다른 목사들도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약속하고 이를 지켜나간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거야.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게 안타깝다.”

“그래도 난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믿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또 많이 배운 사람들과 돈이 많은 사람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거야.” “네 말을 듣고 보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하하하! 역시 넌 멋진 진짜 좋은 목사야.”

두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에는 사모가 놀란 표정으로 서 계셨습니다. “여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여보,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오. 차근히 말해 봐요.”

“어… 어떻게 이런 일이……전, 말도 못하겠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제 어린 두 아가씨는 어떻게 하라고……, 세상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차근차근 말해 봐요.” “세상에……. 스터링 집사님이 자신의 총으로 자살을 하셨대요.”

24. 부모님이 돌아가시다

목사와 집사는 급히 스터링 집사 집으로 갔고,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총소리가 나서 급히 사장님 방으로 달려갔지만 사장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때 펠리시아 아가씨는 사모님 옆에 앉아 계셨고, 로즈 아가씨는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총소리를 듣고 뛰어 오셨습니다. 두 분은 사장님이 돌아가신 것을 보시고는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로즈 아가씨는 사모님 방으로 가서 사장님이 돌아가셨다고 알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모님은 그만 기절하셨습니다. 사모님이 정신을 차리신 후에 급히 목사님께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아. 어떻게……. 스터링 집사님이 이런 무시무시한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에드워드 목사는 젊은 시절, 스터링 부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해달라고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미 그녀는 목사가 될 에드워드보다는 돈 많은 스터링을 택하여 결혼하기로 했던 거예요. 브루스 목사와 에드워드 목사는 스터링 집사의 시신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가족들을 위로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목사들이 떠나고 나서 안정을 되찾은 스터링 부인은 로즈와 펠리시아를 불렀습니다. “애들아, 네 아빠를 직접 봐야겠다. 나를 부축해줘.” “안 돼요, 엄마! 편찮으시고 불편하신 몸으로……. 안 돼요. 안돼.” “부탁이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나를 좀 도와줘.” “알았습니다, 엄마!” 오랫동안 아픈 몸으로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펠리시아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스터링의 자살원인이 신문에 났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투자한 사업이 불과 한 달만에 잘못되어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던 거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남을 속이고 괴롭히면서 못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돈밖에 모르던 그가 이제 모든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도와줄 사람들을 알아보았으나 워낙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괴롭혀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스터링은 완전히 망하게 된 걸 알고는 총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 스터링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보다는 돈을 더 믿고 살았습니다. 돈만 믿고 살아온 그에게 이제 돈이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게 한 것입니.

스터링 부인의 죽음은 갑작스런 충격의 결과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남편이 버는 돈이 남을 속이고, 괴롭히고, 몰래 법을 어긴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알기에 남편에게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지만 남편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들 부부는 사이가 멀어졌고, 이런 일들이 스터링 부인에겐 병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 자매는 충격과 무서움으로 며칠 동안 잠도 못 자면서 지냈습니다. 로즈는 지금까지 돈이 많은 부자로 살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자매는 이제 멋지고 큰 집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자도 아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 계신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레이몬드 시에 사는 윈슬로 부인과 레이첼이 시카고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장례식이 마치자마자 두 자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모를 따라 레이먼드로 온 로즈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동생 펠리시아는 슬픈 생각을 잊고 힘을 얻으려고 기도하면서 렉탱글에서 이루어지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펠리시아는 뛰어난 요리 솜씨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신이 잘하는 일로 칭찬을 받으니 조금씩 슬픔도 이겨나가게 되었습니다.

버지니아는 펠리시아의 요리 솜씨에 놀라면서 그녀에게 렉탱글의 모든 식당을 맡겼습니다. 윈슬로 부인은 레이첼이 선택한 걸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레이먼드에 약속 운동이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에 감동을 받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도 렉탱글의 이웃돕기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펠리시아가 매일같이 요리를 하는 건 좀 반대였습니다.

“펠리시아, 너,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일 요리하는 건 네가 할 일이 못 돼. 이제는 그만 해도 돼.” “왜요? 이모. 제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러세요?” “아니야. 네가 만든 요리는 최고야. 아주 맛있어. 하지만 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아. 너도 뭔가 멋진 일을 해야지. 너 혹시, 이런 일을 계속할 생각은 아니겠지. 봉사는 시간날 때 가끔 하는 거야.”

“아니요. 이모, 저는 계속할지도 몰라요. 전 큰 도시에서 아주 깨끗하고 맛있고 몸에 좋은 요리를 싸게 만들어서 누구나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꿈이에요. 그리고 가난한 엄마들에게 값이 싼 재료를 가지고도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전 이런 일을 통해 로즈 언니와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펠리시아는 이렇게 분명한 꿈을 위해 열심히 요리로 봉사하다보니 렉탱글의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펠리시아는 “요리천사”라고 불렀습니다. 펠리시아는 못하는 요리가 없었습니다.

25. 이웃돕기를 위한 복지를 하다

브루스 목사가 애비뉴 교회에서도 약속 지키기 운동을 제안한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레이몬드 제일교회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일이 잘 진행되어 가는데 브루스 목사가 갑자기 사표를 냈습니다. 시카고 교회를 대표하는 에드워드 목사도 사표를 냈습니다. 이 일에 시카고 시민들은 놀랐습니다.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무슨 서운한 거나 불만이 있습니까?” “서운한 것도, 불만 같은 것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는 일에 놀라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브루스 목사와 내가 목사직에서 사표를 내고,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과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일을 하려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만약 우리가 저 멀리 아프리카 같은 곳의 선교사로 간다면 교인들과 시민들은 우리를 좋은 일을 한다고 박수쳐 주고 기도해 주실 겁니다. 예수님계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곳이 외국에서 선교를 하는 곳이든 가난하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예수님계서 원하시는 일을 할 겁니다.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고생한다. 이상하다. 불쌍하다.’ 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나누며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겁니다.”

26.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기로 해요

브루스 목사가 떠난 후에도 약속 운동을 맹세한 애비뉴 교회 교인들은 계속해서 그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목사님은 안 계시지만 예수님을 믿고 우리 끝까지 예수님께 약속한 운동을 계속 해나갑시다.”

시간이 흘러 다시 가을이 지나가고 시카고엔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식당을 발견하고는 들어갔습니다.

‘깨끗하고 먹고 싶도록 음식을 차려 놓았네?’ 브루스 목사를 발견한 펠리시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펠리시아, 너 언제 왔어?” “목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저를 찾아내셨습니다?” “금방 찾을 수 있지. 이런 가난한 구역에서 이렇게 깨끗하게 진열을 한 음식점은 이곳밖에 없거든”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어떻게 내게 알리지도 않고 시카고로 돌아왔냐! 이거 괘씸한데?” “목사님, 죄송해요. 저도 좀 바빴습니다. 제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게요.” “우와~이거 정말 네가 만들었어? 진짜 맛있어. 이런 맛은 처음이야!” “정말요? 목사님,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요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슨 계획일까 궁금한 데?” “어느 정도 가게가 잘 되면 이곳 사람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거예요. 그럼 여기 사는 사람들은 값싼 재료로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또 요리를 배워서 좋은 식당에 취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럼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목사님, 도움이 필요하면 꼭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목사님이 진행하시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복지 일에도 제가 할 일이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고맙다. 펠리시아, 우리 한 번 잘해 보자.”

27. 강도만난 목사

어느 날, 에드워드 목사는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모임이 끝나고 밤늦게 이웃돕기복지 기관으로 돌아오시다가 그만 무섭게 생긴 강도를 만났습니다.

“손 높이 들어, 빨리!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여 버릴 거야!” “아, 알았습니다.” “너, 가진 돈 다 내놔!” “이, 이것이 다입니다.” “뭐야! 이게 다야? 세상에!” “시계도 뺐어. 뺏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빼앗아.” “시계 말곤 아무것도 없네. 어휴! 신경질 나. 야, 이놈아! 돈 좀 가지고 다녀. 우리 같은 놈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강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에드워드 목사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가 갑자기 때리는 걸 말렸습니다. “그만해, 이 사람아. 그만하라고.” “왜 그래. 더 때려서 더 뺐어야 하는데.” “이 멍청아. 이 분은 에드워드 목사님이잖아.” “뭐라고. 정, 정말이야. 이 사람이 정말로?” “아니, 저를 아세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나요?”

“그럼요. 잘 알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목사님이신 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목사님은 이곳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왜 한참을 서 계셨습니까?” “바로 당신들 때문에 가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목사님, 우리 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어두워서 제대로 볼 수가 없군요.” “자, 그럼 가까이서 제 얼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니, 자네는 번즈 아닌가?” “네, 맞습니다. 15년 전 어느 날 밤, 뉴욕의 가난한 동네에 큰 불이 났을 때, 그 일로 아내와 아이를 잃었다고 하소연하던 그 남자입니다.” “맞아. 맞아.”

“목사님은 그날 밤 절 목사님 댁으로 데려가서 재워 주시고 다음날 하루 종일 마땅한 일자리를 구해 주시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도 하시고 직접 찾아가 주셨습니다. 그렇게 애써 주신 덕분에 드디어 커다란 창고를 지키는 현장소장으로 저를 취직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꼭 술을 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었지. 음~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겠지.”

“약속을 지켰냐고요? 저는 일주일도 못가서 다시 술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걸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재워 주시고는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저한테 기도하자고 말씀하신 일이 저에게는 커다란 감동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가 어렸을 때 항상 무릎을 꿇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거든요. 어느 날 밤 술 취해 돌아오신 아버지도 제 옆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던 일까지도 이제는 가슴 아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전 술에 빠져 지옥 같은 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린 게 얼마나 되었지? 누구나 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고생을 하지.” “저희가 강도짓을 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었습니다. 오늘처럼 허탕을 치는 날은 더욱 화가 납니다.” “내가 일자리를 구해 주면 이런 짓을 안 할 수 있겠나?” “소용없을 겁니다. 저희는 수백 번 마음을 고쳐먹었는데도 이 술을 끊지 못하고 이렇게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아니야! 자네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믿지 않아서 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던 거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네의 몸을 혼란하게 하는 술을 멀리 해야 하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하나님이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야.”

에드워드 목사가 진심으로 복음을 전하자 마침내 그들의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에드워드 목사는 그들을 설득해서 이웃돕기 복지관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다음날 에드워드 목사는 그들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번즈에게는 이웃돕기 복지관의 안내실 보조자리를 맡겼습니다.

28. 진심으로 이웃을 도우려면

안내실 보조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번즈는 이제부턴 술을 끊고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출근해서는 현관 앞을 청소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골목 건너편에 걸린 맥주집 간판이었습니다. 너무도 가까이에 맥주집이 있고, 큰 길 건너에도 두 개의 술집이 있었고, 그 아래쪽에도 세 개나 눈에 띄었습니다. 이건 마치 술집에 포위된 듯한 꼴이었습니다.

번즈는 이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청소를 하는데 갑자기 바로 맞은 편 맥주집 문이 열렸습니다. 거기서 술 냄새를 풍기면서 한 사람이 나왔고, 그 문으로 두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번즈에게 술 냄새가 전해졌습니다. 마침 번즈 앞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 술맛 좋다~ 아! 커억~ 이 향기로운 술 냄새. 실컷 술을 마셨으니 이제 집에 들어가서 자야겠다.”

그 순간 번즈는 견딜 수 없는 술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웠습니다. ‘읍! 안 돼! 안 돼! 안 돼! 유혹에 넘어가면 안 돼! 정신 차리고 빨리 길이나 쓸자.’ 그러다가도 자꾸만 풍겨오는 술 냄새가 번즈를 괴롭혔습니다. ‘아! 저, 맥주 냄새 죽이는구나. 에잇! 도대체 목사님은 대체 언제 출근하시는 거야! 왜? 아직 안 오시는 거야! 정말 술 냄새 때문에 미치겠네.’

번즈는 술 생각을 잊으려고 현관 입구를 10번도 더 쓸고 또 쓸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번즈 앞에 또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말했습니다. “어! 취한다. 오늘 아침은 술맛이 더 좋~다.” 번즈는 술냄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겨내야 해! 이겨내야 해! 아! 혀끝에 한 모금만 적셔 봤으면.’ 이렇게 애써 잊으려고 열심히 청소하던 번즈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맥주집 앞에 와 있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딱 한 잔만 마셔야지.’ 그렇게 작정하고 막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번즈의 목을 잡아당겼습니다. “뭐야! 누가 네 목을 잡아당겨. 이거 안 놔? 당장 꺼지지 못해?” 이렇게 말하고는 뒤돌아보면서 힘을 주어 주먹을 날리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목사님. 죄송합니다. 목, 목사님이신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자네한테 한 대 맞을 뻔 했어.” “목, 목사님, 딱 한잔만 할 게요. 그럼 다시는 안 마실게요.”

“뭐라고? 예수님께 약속을 해놓고 무슨 말인가? 약속을 지켜야지. 절대로 안 돼.” “자, 잘못했습니다.” “번즈, 자네, 간절히 기도해 보게. 내가 보기에 자넨 기도 외엔 술을 끊고 새 사람이 되는 길이 없어.” 번즈와 에드워드 목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번즈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기도하다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에드워드 목사도 번즈를 위해 기도하면서 번즈가 불쌍하게 여겨져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 저도 술을 끊고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유혹하는 악마에게서 구원해 주옵소서.’ ‘예수님! 불쌍한 번즈를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후, 번즈는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신이 났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아 주신 것 같았습니다. 이날 이후 번즈는 더 열심히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그날, 에드우드 목사는 브루스 목사와 함께 이 동네 술집과 그 땅 주인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날 두 목사는 술집을 하도록 땅이나 건물을 빌려 주고 세를 받는 주인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중 몇 명은 애비뉴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목사는 애비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집에 갔습니다. 그 사람은 오랜만에 자기가 존경하는 목사들이 온다니까 신이 나서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는 데 브루스 목사가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웃돕기 복지관 바로 옆 건물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클레이튼 집사님, 그 건물을 술집으로 빌려 주고 돈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놀란 클레이튼는 그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브루스 목사님! 사실 저도 교인들과 예수님처럼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기억하시죠?”“네, 기억합니다.”

“저도요. 그 건물에서 월세를 많이 주기에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또 아직은 계약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 저는 많은 돈을 물어 줘야 하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걸 생각하니 술집을 내보내지 못한 겁니다. 이 일로 저도 참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은 저를 시험하는 악마였고, 또 돈의 유혹 때문에 예수님을 멀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 건물을 술집으로 빌려 주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결심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약속한 대로 제가 많은 손해를 보겠지만 술집을 내보내겠습니다. 이제야 저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깟 돈이 뭐길래…….”

그로부터 며칠 후, 정말로 회관 바로 옆 맥주집이 없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건 클레이튼는 그 건물을 이웃돕기를 위해 바쳤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그 건물을 펠리시아에게 무료로 사용하도록 내주었습니다. 펠리시아는 기뻐하면서 그 건물에 무료 요리학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나 와서 무료로 요리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29. 예수님이 함께하세요

가을이 지나고 또 다시 혹독한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이웃돕기 복지관에서는 매일 아침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에드워드 목사와 브루스 목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아침에 웃으면서 이야기하다보면 하루가 참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신문에 놀라운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시에서 일어나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어떤 사람이 추위에 가족들이 얼어 죽을까봐 석탄 야석장에서 석탄 한 덩어리를 훔치다가 그만 총에 맞아 죽었다고 기사가 났어. 그는 몇 달 동안 일자리를 얻지 못해 방황해 왔고, 또 그에겐 아들 6명과 아내가 있는데 세들어 사는 방이 너무 좁아 한 아이는 벽장 속에서 잠을 잔다는 거야.” “이건 최악이야. 도저히 살 수가 없는 환경이야.”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면 복지기관이나 시청에 도움을 요청하지. 왜 안 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마 그 남자도 죽기 전에 수차례 도움을 요청했을 거야.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말뿐이었겠지. 결국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했겠지. 그렇게 된 원인은 그 남자에게 일자리가 없어서 생긴 일이야.” “어떻게 해요. 남은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남은 가족이 사는 곳이 어디죠?”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아주 가끼운 곳이야. ‘펜로스’야.”

“그러고 보니 내가 알기로는 펠로즈 씨가 그 지역의 반이나 되는 집을 갖고 있어.” “브루스 목사님, 팰로즈 씨도 애비뉴 교회에 다니는 집사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우리 예수님 믿고 교회 다니는 집사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서 돈을 벌다니. 이럴 수가!” “목사님들, 펠로즈라는 분이 두 분을 만나 뵈러 왔다는데요.” “그래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고 했는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들어봅시다.”

“브루스 목사님, 에드워드 목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 아침 신문을 보시고 많이 놀라셨을 줄 압니다. 저도 제가 세놓은 집에 살고 계신 분이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요즘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아시는 것처럼 저와 제 딸도 예수님처럼 살기로 약속한 교인 중에 하나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헌금도 했습니다.”

어느 날엔가 펠로즈는 딸과 길을 걷다가 딸의 물음에 난처함을 느꼈습니다. “아빠,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집을 내주는 거야? 저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매달 아빠에게 돈을 내야 하잖아.” 이건 딸의 말이 맞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았고, 몸이 아픈데 치료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 저 집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방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아빠, 집들이 다 낡아 보이는데, 꼭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월세를 받아야 해?” “얘야,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어른들이 하는 일에 너무 관심을 가지면 못써. 넌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알겠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시는 마지막 심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넌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너는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에 얼어 죽고 여름엔 무더위로 허덕이는데도 꼬박꼬박 월세를 받아야 하냐? 너는 그런 돈이 없어도 잘 사는 큰 부자인데도 말이다. 너는 약속했지. 예수님이라면 너처럼 행동을 했을까? 너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냐? 너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사랑을 준 적이 있냐? 너는 부자인 부모님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아서 공부도 많이 하고 행복한데 그 행복과 축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나누어 주었냐?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해준 것이 없단 말이야!”

펠로즈는 이렇게 밤마다 꿈에서 자신의 양심과 죄를 지적하여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난 총격 사건도 자신의 무관심 때문에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의 공포에 휩싸였고 변명도 못할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들, 제가 좀더 관심을 갖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몰라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집사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이시며, 용서이십니다. 우리 같이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펠로즈는 목사들과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실천해나갔습니다. 그는 총격사고로 슬픔에 잠긴 남은 가족에게 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고 집도 수리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가난하고, 아파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30. 예수님이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어느 날, 브루스 목사는 친구인 맥스웰 목사에게 교인들과 함께 시카고로 와달라고 초청했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이웃돕기 복지관의 큰 강당으로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강단에 올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엔 돈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아닌 사람, 피부색이 희거나 검은 사람,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 남자나 여자,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으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놀랍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이렇게 많이들 모였다니…….’ 맥스웰 목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였고, 레이몬드 제일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약속을 지켜나가는지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유롭게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제일 먼저 손을 든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맥스웰 목사님의 집에서 죽은 ‘잭 매님’이라는 사람은 저와 함께 2년 동안 같은 인쇄소에서 일한 친구입니다. 저는 그에게 돈을 빌렸지만 그가 직장에서 쫓겨나 뉴욕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돈을 갚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쇄기계가 또 들어오면서 저도 결국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새로운 발명품이라는 것은 좋은 건데 그걸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랑하라는 말씀이 과연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만 사랑합니다. 말고 행동이 다르고. 돈을 아주 좋아합니다.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지 하고,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이 말에 여기저기서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말 한 번 후련하게 하는군요. 당신 말에 찬성합니다.” “봉사를 해도 권위적이고 또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명예를 얻으려 할 겁니다.” 그 사람은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말로만 도와주어야 한다고 떠들 때, 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또 소리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관심을 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스스로 일자리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잘못입니까? 제 아내와 자식들은 저한테 너무나 귀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굶어 죽어야 합니까?”

맥스웰 목사는 눈물을 흘렸고 많은 기독교인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의 질문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질문이구나. 저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결국 세 가지 방법을 택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거지로 구걸하거나 아니면 자살 아니면 굶어 죽어야 한다. 과연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후에 맥스웰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저분과 똑같은 어려운 처지에서 예수님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노력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답변을 해 드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브루스 목사는 맥스웰 목사를 초청해서 불편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맥스웰 목사도 대답을 못하네. 괜히 초청해서 난처하게 만들었구나.’ 그런데 저 멀리서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말을 했습니다.

“저도 저 사람과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진짜 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는 살아남기 위해 거지처럼 구걸도 하고 또 여기저기 복지기관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아무튼 도둑질과 사기 치는 것을 빼곤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이런 비참한 생활에서도 예수님이라면 굶어 죽는 일은 절대로 안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말에 또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듣기엔 모두 쓸데없는 말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썩어서 치료할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 냄새가 날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진짜로 살아 있다면 나는 오직 한 가지, 제가 결혼하여 가정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때는 가정은 지옥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손에 세 아이들과 아내를 굶주림에서 지켜 주지 못한다면 그게 어디 행복이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건 죽는 것보다도 더 잔인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인 ‘칼센’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칼센은 더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수천, 수만 명이 있는데도 큰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돈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백화점에 가서 비싼 물건들을 사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치와 쾌락을 누리고 삽니다. 그리곤 일요일엔 교회 가서는 주신 축복에 감사하면서, 더 많은 축복을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며 구원 받았다고, 천국에 간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런 기독교인들 가운데 우리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목사님! 그런 기독교인들에게 오늘밤 이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살기로 약속 운동을 하라고 말씀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들은 목사님을 바보 아니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임은 쓸데없는 짓거리입니다. 약속 운동과 봉사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자들이나 배운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은 절대로 변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결국 뚜렷한 해결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정말 비참하고 슬픈 세상이구나!’

목사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 기독교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안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동안 레이몬드에서 겪은 그 어떤 어려움과 힘든 시간보다도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31. 순종하며 따라갑시다

맥스웰 목사는 브루스 목사의 초청으로 시카고에 왔기 때문에 강연을 마치고는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주일 아침과 저녁예배에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계획에 없던 일이고 준비도 못했기에 그냥 사양하려다가 마음속에서 꼭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자 맥스웰 목사는 초청 받은 교회로 갔습니다. 가보니 그 교회는 레이몬드 제일교회보다 한 10배는 더 커보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모인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려니 떨리기도 했지만 예수님이라면 용감하게 말씀을 전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설교자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설교를 했습니다.

“어제 저녁 저는 이웃돕기 복지관 큰 강당에서 어떤 사회운동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교회가 펼치는 새로운 사회개혁 운동은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웃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여유롭게 사는 것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가난해서 굶주리고, 몸이 아파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생활에만 관심 갖고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참된 기독교 정신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예수님이 받으신 여러 가지 시험을 우리도 똑같이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패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까요?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것일까요? 이렇게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님보다 돈과 유명해지는 것과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사랑한다면 달라지는 것이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위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양심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면 이 도시도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올바른 기독교를 다시금 되살려야 할 시대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저 말로만 겉으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 ‘예수님!’ 이렇게 부른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난 너를 전혀 모른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채찍을 맞으시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단지 죄인인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스런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고,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보답하기 위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맥스웰 목사는 예배를 마치고 나서 예수님처럼 살기로 약속할 사람들은 남으라고 하였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교회 입구에서 인사를 다 마치고 돌아와서 예배당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은 그동안 눈물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였기에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기를 약속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조용히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레이첼과 버지니아는 렉탱글에 복지관을 세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롤린은 레이첼과 결혼하여 함께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롤린과 버니지아의 할머니와 레이첼의 어머니 윈슬로 부인도 렉탱글에서 봉사활동을 레이몬드 제일교회 교인들과 함께 했습니다. 마쉬 총장은 링컨대학교 학생들에게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봉사하며 바르게 살 것을 가르치는 게 보였습니다. 파워즈는 가족과 친구들을 설득해가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버지니아와 노먼 사장은 기독교 신문을 만들었는데 이 신문의 영향력이 전국으로 펴져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체이스는 소설이 잘 팔려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날마다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면서 교회도 나가지 않고 매우 슬펴하면서 사는 게 보였습니다. 펠리시아의 언니 로즈도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했지만 스터링 부인처럼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울해보였습니다. 그러나 펠리시아는 스티븐이라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 진실하게 사는 남자와 결혼해서 화목하게 살면서 이웃 돕는 데 열심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브루스 목사와 에드워드 목사는 전도와 이웃돕기를 더 열심히 하는 게 보였습니다.

잠시 후 환상에서 깨어난 맥스웰 목사는 다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예수님의 뜻이 다시 살아나게 되도록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소서.’ 맥스웰 목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과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 손에 손잡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성육신적 선교론

(서 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영어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한문으로는 화육(化肉, 육신을 입으심) 혹은 도성인신(道成人身, 도가 사람이 되심)이라고 한다. 그가 하나님이심에도 하나님 되심을 고집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모름지기 선교사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작은 예수이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품을 떠나셨고 아들로서의 부귀, 영화를 다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선교사도 부모, 형제, 일가, 친척을 떠나고 좋은 것, 익숙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불편한 선교지로 가서 그곳의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물론 예수님처럼 그렇게 꼭 같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살도록 힘을 써야한다.


(본 론)

어떻게 선교지에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른 말로 예수님이라면 이 때 어떻게 하실까?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는 “In His Steps”(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1896년 미국의 조합교회 목사인 찰스 먼로 셸던(Charles Monroe Sheldon, 1857년-1946년)이 쓴 기독교소설이다. 한 때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팔에 WWJD라고 쓴 팔찌를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인 때가 있었다. 이 글자는 “What Would Jesus Do?"의 약자인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기준이 "예수님"이며 모든 행동과 삶을 그 분 중심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행동과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이 책은 1895년 초판이 발행되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삼천만부 이상이나 읽혀졌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의 레이몬드시에 헨리 맥스웰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레이몬드 제일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그가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찾아 왔다. 그는 인쇄공이었는데 새로운 인쇄기계가 나와서 거기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여 그만 실직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집안 상태가 나빠졌고 아내마저 그만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이들도 친척 집에 맡겨놓고 일자리를 구했지만 구하지 못하여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노라 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를 그냥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일자리를 하나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들도 친척 집에서 데리고 와서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스웰 목사는 난처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설교 준비에 방해되는 이 사람이 귀찮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에 제가 기도를 해 드릴께요”


그 남자는 쓸쓸하게 목사의 집을 떠나갔다. 그러나 이 일로 맥스웰 목사의 마음은 편치를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날 예배시간에 그 남자가 회중석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예배는 마쳤다. 그러자 그 남자가 회중석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섭섭한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그냥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저에게 일자리를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아무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성도들이 모두 놀라서 웅성거렸고 그 남자를 맥스웰 목사는 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었다. 그 남자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참 감사 합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아마도 목사님처럼 그렇게 하셨겠지요.” 이 말을 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다음 주일날 멕스웰 목사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오늘부터 일 년 동안 우리교회 교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이 질문을 하면서 살도록 합시다.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도 직장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반드시 이 질문을 하고 일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목사님의 이 제의에 교인들은 모두가 아멘이라고 대답을 했다.

사업을 하는 교인들은 그 사업을 하기 전에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질문을 하면서 모든 사업을 했고 변호사도 그 일을 하기 전에 이 질문을 하면서 자기 일을 했다. 그런데 일 년 뒤에 교인들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교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매일 이 질문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나 무슨 일을 앞두고 반드시 이 질문을 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받고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작은 예수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다. 성경 갈라디아서 2장20절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육체로서 이 세상을 살지 말고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작은 예수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나를 통해서 예수를 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성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님 대신 선교지에 보내어진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선교지에서 성육신되어 그 분의 선교를 잘 하시도록 수종 들어야 한다. 성육신 선교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내 속에서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만일 예수님이라면 나의 사역지에서는 어떻게 하실지 깊이 생각하며 그 분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서 성육신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3가지 면에서 살펴보자.


예수님처럼 생각해야 한다.

어느 날 기자가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에게 물었다.
“당신은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간디는 잠시 생각하더니 “흐음, 저는 예수님은 존경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왜 그렇죠?” 기자가 다시 물었다.
간디가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보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전혀 닮지도 않았고 닮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예수님을 닮을 수가 있겠는가?
마음은 곧 생각이다.
공동 번역 빌 2:3-8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각이다. 빌 2:3에서는 육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다투는 것이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이것이 헛된 영광이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바로 헛된 영광이다. 이것이 헛된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은 참된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이다. 헛된 영광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선교사는 이런 유혹에서 자유하기가 어렵다. 이사야 14장 12~14절을 보면, 헛된 영광을 구했던 존재를 볼 수 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여기서 우리는 루시퍼, 즉 사탄을 볼 수 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높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내가...내가.. 내가..”라는 말을 무려 여섯 번 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14절에서는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을 지으신 분으로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처럼, 자신도 경배 받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헛된 영광이다.


선교사는 사역지에서 자칫하면 자신이 사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려는 유혹이 있다. 그러나 모름지기 선교사는 끓임 없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고백했던 세례요한이어야 한다. 내가 해낸 사역이 아무리 잘 되었더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나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누가 나의 사역을 비판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역은 내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더러 선교사는 그 사역에 애착을 가질수록 내 사역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게다가 거기에 물질과 시간이 더 투자될수록 이 착각은 더 심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스럽게 여겨서 내게 그 일을 위임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다.


예수님처럼 말해야 한다.

말은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는 언어이다. 우리는 생각도 예수님처럼 해야 하지만 이 생각을 밖으로 나타낼 때도 예수님처럼 말해야 한다. 항상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라면 이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하실까? 라고 생각한 뒤에 말해야 한다. 그래야 말에 실수가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만큼 중요하다. 실제로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때론 평생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 주신 이 고귀한 입술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하여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그리고 선교에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TV 인기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토크쇼이다. 토크쇼는 주로 말하는 프로그램이다. 보통 토크쇼는 밤늦게 나와서 말하는 건데 이게 그렇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하루에 약 30번 대화를 하고 일생의 5분의 1을 말을 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하루 2만 단어정도를 말하고 여자는 남자보다 1.5배 정도 더 많은 3만 단어를 얘기한다고 한다. 커피숖에 가보면 남자들은 주로 커피를 마시는데 열중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커피를 주문해 놓고 커피는 안마시고 이야기 하느라 커피는 싸늘하게 식어만 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의 이 말에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한 말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앞으로 10년 후의 여러분의 미래를 알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예언하는 사람에게 찾아갈 필요가 없다. 10년 후의 여러분의 인생과 미래를 알기를 원한다면 오늘 여러분의 언어를 살펴보면 된다. 여러분이 지금 사용하는 말 가운데 불평의 언어를 내 뱉는가? 그렇다면 10년 후 여러분의 인생은 불평스러운 인생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굉장히 행복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10년 후에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야고보 사도는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예는 재갈이다. 나는 경마장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말 한 마리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보통 1000Kg에서 1500Kg이나 된다고 한다. 경주마, 잘 달리는 말들은 그렇게 크고 무겁다. 그러면 기수들의 보통 몸무게는 얼마인가? 세계적인 기수의 평균 몸무게는 42Kg이다. 45Kg이 넘으면 훌륭한 기수가 될 자격이 없다. 몸이 가벼워야 되니까 그렇다. 그런데 자기 몸무게의 약 50배나 나가는 이 말들이, 이 가냘픈 42Kg의 몸무게를 가진 기수에게 꼼짝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말의 입에 재갈이 물려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입에 물린 그 작은 쇠붙이 하나가 그 큰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가 두 번째로 든 예는 배이다. 오늘날의 배는 얼마나 큰가? 어떤 것은 수만 톤에 이르는 배들이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거제도에 있는 대우해양조선소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큰 배가 작은 키 하나로 방향이 마음대로 좌우된다고 하는데 더 놀랐다. 우리의 언어는 마치 우리의 인생의 키와 같다. 성경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뿐 아니라 때로 잘못 사용되면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불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말 때문에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세 번째 예로 불로 들었다. 우리는 가을에 낙엽이 떨어져 땅에 가득할 때 일어나는 산불의 무서움을 잘 알 것이다. 나무를 심고 키우는데 수많은 세월이 걸리지만 태우는데도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걸린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사나 선교사의 언어는 더욱 더 그렇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행 21장부터 26장까지 성전에서 체포된 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기까지 사도 바울은 적어도 여섯 번에 걸쳐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언어를 알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변호한 언어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이 여섯 번의 변호를 통해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던가? 오늘 우리의 언어의 모습이 사도 바울의 언어의 모습과 같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겠다.


1. 능동적인 언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와 환경에 따라 달리 말한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관찰해 보기 바란다. 상대방에 따라 그 말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윗사람에게 하는 말과 자기 부하 직원에게 하는 말이 틀린다. 교회 안에서 하는 말과 교회 밖에서 하는 말이 틀린다. 한 뚱뚱한 중년 부인이 돼지고기 반 근을 사기 위해 정육점에 들렀다. 그 정육점은 제법 큰 규모의 정육점이었다. 앞에서 손님을 맞는 점원이 있고, 고기를 썰어주는 점원이 따로 있었다. 이 손님을 맞는 점원이 뚱뚱한 부인이 나타나자 이렇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 참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굉장히 뚱뚱한데도 칭찬을 해 준 것이다. 이 부인은 기분이 좋았다. 이 점원이 "뭘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돼지고기 반 근만 주세요." 라고 했다. 그랬더니 미소를 짓던 점원이 획 뒤돌아서더니 인상을 바꾸며 그 여자가 뒤따라 온 줄도 모르고 그 고기 써는 점원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야! 저 돼지가 지 살 반 근만 달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귀싸대기 한 쪽이 날아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 얼굴을 가지고 얘기하는지 모른다. 대상에 따라 바뀐다. 그런가 하면 환경에 따라 말이 바뀐다. 사업이 잘 될 때 말이 다르고, 사업에 실패할 때 말이 달라진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 말이 틀리고 기분이 나쁠 때 말이 틀려진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환경의 지배를 받아 수동적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어떤 때는 성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해야 했다. 어떨 때는 민중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어떤 경우엔 산헤드린 공회 앞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다. 그리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이 모든 다른 대상자들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결같았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대상과 환경에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늘 한결같은 말씀을 쏟아놓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야고보 사도도 이 사실을 약 3장에서 이렇게 설명해 준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0,11절) 그 당시 이 야고보서를 받아 보던 많은 수신자들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던 것 같다. 어찌하여 샘물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모순이다" 즉, 불가능하다고 얘기한다.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한결같아야 한다. 사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화가 났을 때에도 한결같은 말을 해야 한다. 주께 간구 하자.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내 환경 가운데 폭풍이 불거나 잔잔하거나 내 앞 길이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에 상관없이, 우리는 성령의 샘물을 가졌으니 당연히 단물만 내어야 하며, 능동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2.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우리의 언어는 예수님의 언어가 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무슨 뜻일까? 우리 인간에 대한 설명 가운데 성선설(性善說)이 맞을까? 성악설(性惡說)이 맞을까? 성경은, 성악설을 지지한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좋은 말보다는 주로 나쁜 말을 더 잘 배운다. 좋은 말은 아무리 가르쳐도 잘 못 외우는데 나쁜 욕설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배운다. 요즘 언론에서 요즘 아이들의 언어가 욕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언어순화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보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소에 쓰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쁜 생각들을 그대로 쏟아낼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쏟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속에는 나쁜 생각이 있다. 문제는 그대로 나타낼 것이냐 해석해서 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누군들 그 마음에 미움이 없겠는가? 우리 모두는 섭섭함이 있고 원망이 있고 미움이 있고 마음속에 상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사람은 그 상처들을 올바로 해석한 다음에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있는 그 섭섭함과 미움을 그대로 쏟아내 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나쁜 말로 사람들을 정죄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한 다음에,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사도 바울의 언어가 이러했다. 바울은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2년이나 가둬 놓다니. 아무 죄도 정하지 않고, 2년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앞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은 자기의 결백을 위해 항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로 인해 자기의 인생 해석을 했다.


3. 선교적인 언어

또 하나는 선교적인 언어이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 베스도는 바울을 미치광이 취급을 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할 때가 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눈을 돌려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베스도는 몰라서 그렇다 치고,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라고 이야기 하자 아그립바 왕이 대답한 말이 무엇인가?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 때 사도 바울이 한 말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내가 오늘 이 결박한 것 외에는 오늘 나를 둘러 싼 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이다. 그는 이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증언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어떤가? 조금만 오해를 받아도 그것을 풀려고 애를 쓴다.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자신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수많은 말을 서슴지 않는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사용한 하루에 2만 단어씩 총 14만 단어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과연 몇 단어나 될까?


오늘날의 과학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했던 말을 다 녹음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수 십 억의 인구가 있지만, 사람의 목소리만큼 다양한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범죄수사에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목소리를 통해 범인을 잡아낸다. 어떻게 잡아내는가? 한 사람도 똑같은 주파수를 가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주파수가 다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면 이 말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는 느끼지 못해도 공중에 전파로 되어서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걸 내 목소리의 주파수에 맞는 수신기를 개발을 하기만 하면, 이 공중에 남아 있던 모든 말들이 그 녹음기로 쏴악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 때부터 마지막 죽으면서 뱉은 말까지 모두... 훗날 그 어느 날 우리가 일생동안 내뱉은 언어가 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고 하면, 과연 그 중에서 "주님! 내가 당신의 복음을 위해 이런 말들을 행했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과감하게 내어놓을 떳떳하게 내어놓을 언어가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말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한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가서 증인이 되라!"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다름 아닌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리 삶으로 전도하는 것을 많이 강조하지만, 우리는 말로도 전도해야 한다. 만일 바울의 말을 진열해 놓는다고 하면 80% 이상이 선교와 전도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언어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 옛날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런 기도를 주님 앞에 드렸다. "주여!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는 그의 정치의 신념을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신념으로 살아야 하는가?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향동하며 사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 일은 우리가 주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연합된' 까닭이다.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또한 성경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책임이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스림"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가 나의 주인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 가운데서, 혹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래서 그 죄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을 찾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전의 삶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의 감격이 시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도 화려하고 죄에 대하여 관대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의 종노릇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저 원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방법까지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죄가 너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 노릇은 '다스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한마디로 왕은 다스리는 자이다.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주관하는 자이다. 생명도 그의 것이나 다름없다. 사도 바울은 죄를 의인화 하고 그 죄를 왕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죄의 종노릇 하는 것은 결국 죄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죄가 곧 그 사람의 주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 구원은 법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구원 받기 전의 우리는 법적으로 죄와 사망 또는 마귀의 다스림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것은 상징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영적으로 실제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지만 또 한편으로 이 쪽 저 쪽을 분명하게 가릴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한 면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 편인가"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있을 때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친구들이 누구 편이가 분명히 밝히기를 바라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 소속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죄에 속해 있는가? 의에 속해 있는가? 분명히 밝히라는 것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 편에 서자.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상대하지 말자. 그러나 죄를 이기려고 죄와 싸우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죄를 이기려면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속할 때 죄를 이길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면 불의의 병기가 된다. 병기라는 것은 연장이나 도구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 아래 있으면 죄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의인화된 죄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병기로 굳이 번역한 것은 이것이 보다 더 전투적이기 때문이다. 죄의 병기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유행에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비웃는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의 병기, 의의 도구가 된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그는 하나님 쓰시기에 편리하고 유용한 연장이 될 것이다. 때론 병기가 되어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물리치기도 하고 사단의 세력을 깨뜨리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본받아 끓임 없이 죄와 불의와 싸우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도록 하며 사랑으로 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육신적 선교론(Incarnational misiology)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 이 땅에 우리의 모습으로 ‘성육’(Incarnation)하셨다(요1:14; 빌 2:5-8)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선교지로 보내어진 선교사는 작은 예수이며 그는 주님의 몸으로써 예수님의 제2의 성육신과 같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선교사는 선교지의 사람들을 자기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보다는 그들의 수준으로 낮아지려고 해야 한다.
소금이 녹아 들어가야 음식에 맛을 더해 주고, 빛이 스며들어서 어둠을 밝히듯이 선교사는 현지인의 삶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며 삶을 나눌 때 거기에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시작이 된다.
선교사의 롤 모델은 철저하게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기초가 되지 않은 그 어떤 선교의 이론도, 선교의 현장도 공허한 것이 된다.

성육신 원리(the Incarnational principle)는 요한복음 1:14, 13장 그리고 빌립보서 2:5-11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에서 말하는 바는

1. 낮아지심
2. 자기를 비우심
3. 배움
4. 문화를 넘어감
5. 수용자 중심
6. 섬김
7. 리더십 이양

이 모든 성육신의 원리가 예수님에게서 녹아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이 원리를 먼저 자신의 인격에 적용하며 또 사역에 적용할 때 거기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
선교사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끓임 없이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수종들 때 선교 사역에 진정한 열매가 맺혀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이 될 줄 믿는다.








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사랑(아하브)



진실(에메트) 인애(헤세드) 지식(다아트)

에메트 אֱמֶת

히브리어 <에메트 אֱמֶת >는 ‘진실/진리/성실/참/진실무망’따위로 번역되는 명사이다. 그리스어로는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라고 번역된다. 전도서에서 이 단어는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진리’(개역) 또는 ‘참됨’(새번역)이라고 번역되었다(전12:10).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피스티스 πίστις >라고도 번역된다(히11:1). 히영사전은 firmness / certainty 라고 정의한다.

<에메트>는 <헤세드 חֶסֶד >라는 단어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헤세드>는 자신의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시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음을 표현하여서 <에메트>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 둘이 나란히 사용되면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상용구가 된다.

오경에는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된 구절이 다섯 군데 나온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며느리를 구하려고 밧단아람으로 갈 때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인자<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자기에게도 보여 달라고 기도한다(창24:27). 그 늙은 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친척인 라반에게도 요구하였다(창24:49). 야곱이 에서를 상봉하기 전날 밤에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께 은혜<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다(창32:11, 개역). 임종을 앞둔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아들 요셉에게 부탁하면서 인애<헤세드>와 성실<에메트>을 요구하였다(창47:29, 개역). 믿음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시내산에서도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한 백성을 용서해주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진면목은 <락훔>, <한눈>, <에렉 아파임>, <헤세드>와 <에메트>, 다섯 가지의 단어들로 묘사하고 있다(출34:6).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나 거짓이 없이 진실하다.

<에메트>는 <아만 אָמַן >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 <아만>은 연약한 아기를 보살피는 부모가 보살피는 것에 비견하여 양육하고 키우는 강력한 후원행위를 가리킨다. 건물의 기둥을 가리키는 명사 <옴나 אֹמְנָה >도 이 동사에서 파생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튼튼한 기둥처럼 강력하게 떠받치고 계신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이나 장래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확실한 일이다. 이 사실을 확고히 믿는 것이 성서적 믿음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늘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곧 신자(信者)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의 기반을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신7:9). 여호와는 믿음의 조상들과 불변의 진실한 언약을 맺으시고 항상 자신의 백성을 확실하게 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시89:28).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의 믿음을 독려하였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7:8 개역),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아멘’이란 확언으로 끝맺는다. 지금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정말 참되고 확실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으로 <아멘 אָמֵן >이라 외치는 것이다.


“헤세드(חֶסֶד)”에 대하여 – 잠언 20장 28절에 대한 묵상


  • 어원적 의미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우리말 딱 한 단어로 번역하기 무척 까다로운 어휘입니다. 헤세드는 계약관계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전문용어로, 그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계약의 내용: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서로 잘 대해 주자.

2) 계약의 영속성: 한 번 맺은 계약은 쉽게 깨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세계에서 어떤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계약을 맺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서로 나쁘게 대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구두로 맺어진 계약이었습니다. 그 맺은 계약을 공식 문서로 공증 받고 감시, 감독할 상급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한번 맺은 계약은 쉽사리 파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약의 지속성, 혹은 영속성은 계약이 갖는 핵심적인 속성이 됩니다.

      창세기 21장 22-31절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은 헤세드의 두 가지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21:23 그런즉 너(아브라함)는 나(아비멜렉)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개역개정)

계약의 내용을 쉽게 정리하면, 서로 진실하게 행하고 잘 대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하나님께 맹세함으로써 그 지속성이 보장됩니다. 계약의 영속성을 위한 장치를 창세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21:30-31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두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떤 문서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주고 받음으로써 계약이 성립되고, 그 장소의 이름(“브엘세바” = 맹세의 우물)을 통해 그 계약이 후대에 계속 기억됩니다. 이 계약의 영속성을 보증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계약당사자 각자가 믿는 신에 대한 신앙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계약입니다. 여기서 맹세의 보증이 되는 “하나님(엘로힘)”은 유일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신(神)”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이민족 사이의 대화가 나타나는 창세기의 장면들에서 엘(אֵל)혹은 엘로힘(אֱלֹחִים)은 고대근동 전역에서 통용되는 표현이고, 반면에 여호와/야훼(יהוה)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신으로 특정됩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의 계약에 대한 창세기 31장 역시 헤세드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성경 본문입니다.

       창31: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창31: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계약의 내용은 자신(라반)의 딸들(레아와 라헬)에게 잘 대해 주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해를 가하지 않기로 하자는 것이고, 그 계약의 영속성은 돌무더기를 통해 표현됩니다. “증거의 돌”을 히브리어로는 “갈-에드(גַּלְעֵד)”라 하고, 아람어로는 “여가르-사하두타(יְגַר שָׁחֲדוּתָא)라고 합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창31:47). 그리고 이 계약은 각자가 믿는 신의 보증을 받습니다.

       창31: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히브리어 원문에는 “판단하옵소서”라는 동사는 복수동사로 되어 있습니다(이쉬페투יִשְׁפְּטוּ).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나홀(라반의 할아버지)이 믿는 신, 그 두 신이 이 계약의 보증인이 되어달라고.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창31:53).

  • 헤세드의 용례와 그 번역의 예들

계약의 두 가지 속성(잘 대해 줌과 오래 지속됨)은 헤세드(חֶסֶד)라는 계약언어로 하여금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도록 합니다.

1) ‘잘 대해 줌’에서 파생된 의미: 인자, 자비, 사랑, 인애 등

2) ‘오래 지속됨’에서 파생된 의미: 성실, 신실, 신뢰,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 등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어로 주로 쓰이는 인자(kindess), 자비(mercy), 사랑(love), 인애(loving-kindess) 등은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반면에 성실(faithfulness), 신실(trustworthiness), 신뢰(trust) 등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인 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번역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영어의 “steadfast love”라는 번역이 1) 잘 대해 줌(love)과 2) 오래 지속됨(steadfast)의 두 의미를 최대한 함께 담으려고 애쓴 번역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헤세드를 모두 “steadfast love”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헤세드의 용례 중에 두번째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근 아멘(אמן)에서 파생된 에메트(אֶמֶת)나 에무나(אֱמוּנָה) 등과 함께 쓰일 때는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오래 지속됨, 변함없음, 흔들림없음)이 강조되는 경우입니다. 어근 아멘(אמן) 역시 그 어원은 “토대가 굳건하다, 흔들림 없다(to be established firmly)”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세드와 에메트, 혹은 에무나는 서로 다른 개념의 단어가 아니라 비슷한 개념을 나타내는 ‘짝단어’라는 것입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를 우리말 번역은 습관적으로 “인자와 진리”로 번역하는데, 본문의 맥락을 무시한 이러한 기계적 번역을 저는 번역자의 의무를 충실히 하지 않은 ‘아주 게으른 번역’이라 칭합니다. 문맥과 상관없이 헤세드를 “인자”로 번역하는 경우는 우리말 번역 성경에 너무 많아 그 예를 다 들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 잠언 20장 28절의 헤세드  

잠언 20장 28절은 헤세드(חֶסֶד)와 에메트(אֶמֶת)가 동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개역개정: 왕은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헤세드)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새번역: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가 왕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보좌를 튼튼하게 한다.

       공동번역: 임금은 친절(헤세드)과 신실(에메트)로 스스로 보위하고 정의(헤세드)로 그 자리를 다져야 한다.

       카톨릭성경: 자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임금을 지켜 주고 정의(헤세드)가 그의 왕좌를 받쳐 준다.

대표적인 한글 성경들은 헤세드를 “인자, 친절, 자애”로 번역하고, 에메트는 “진리, 신실, 진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두 헤세드의 첫번째 의미가 부각된 번역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개역개정을 제외하고, 새번역과 공동번역, 카톨릭번역은 하반절의 헤세드를 모두 “정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세드의 두번째 의미에 해당하는 번역입니다. 우선 번역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개역개정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한 문장에 쓰인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한 것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새번역 등의 번역자들은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를 한 문장 안에 다 포함시키려고 노력한 것이겠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이 문맥에서 헤세드의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잠언 20장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지혜로운 왕”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진노”하고(2절) “심판 자리에” 앉아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8절). 하나님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를 미워하시고(10절), “속이는 저울”을 싫어하십니다(23절). 그는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시는 분입니다(26절). 이 모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분명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악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시고, 그분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선악 기준이 변함없이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잠언 20장 어디서도 인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8절에서 “인자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왕위가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그러나 다시 뼈에 사무치게 꾸짖고 벌을 내려서라도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이 묘사됩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30절).”

잠언 20장 전체의 문맥은 “인자, 친절, 자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헤세드는 첫번째 의미(“잘 대해 줌”)와는 관련 없이 두번째 의미(“변함없음, 흔들림 없음”)가 강조된 경우입니다. 왕의 자리는 친절과 자애,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확고한 가치관에 의해 보호되고 견고해 집니다. 따라서, 잠언 20장 2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변함없음(헤세드)과 확고함(에메트)이 왕을 보호하고, 그의 왕위는 변함없음으로 말미암아 확고해 진다.”

성경에 쓰인 헤세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맥락이 “잘 대해 줌”이 강조된 경우인가, 아니면 “변함없음, 흔들림 없음”이 강조된 경우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나게 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죄도 짓지 않았을 것 아닌가?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는가?
잘못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시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대답이 내려졌어도 이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존의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선악과(善惡果)’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장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이다. 이 장황한 명칭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다. 우선 <메에츠מֵעֵץ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메 מֵ>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from에 해당한다.
<에츠 עֵץ>는 ‘나무’이다.
<메에츠>는 ‘그 나무에서부터’ from the tree란 뜻이다.
이것을 창세기 2:17은 ‘나무의 열매’라고 옮긴 것이다.
그러나 <메에츠>가 나무의 열매만이 아니라 뿌리나 잎이나 가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열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퍼리פְּרִי >가 창3:3, 6에서 두 차례 등장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직접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에츠>는 열매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긴 호칭을 줄여서 사람들은 ‘선악과(善惡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다아트 הַדַּעַת>란 요소이다.

<하 הַ>는 정관사이고 <다아트 דַּעַת>는 ‘알다’란 동사 <야다 יָדַע>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앎/knowledge’이란 뜻이다. 여기에 <토브 우라아 טוֹב וָרָע>란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토브 טוֹב>는 ‘선(善)’, <라아 רַע>는 ‘악(惡)’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개념은 매우 폭이 넓다. <토브 טוֹב>는 ‘좋음/선/good/유익함/아름다움’이란 뜻으로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라아 רַע>는 ‘싫음/악/evil/나쁨/해로움/추함’이란 부정적인 개념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라고 줄여서 표현하지 않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열매’ 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일부러 장황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 나무를 굳이 한자어로 축약하여 표현하자면 ‘선악지식수(善惡知識樹)’가 될 것이고 그 열매는 ‘선악지식과(善惡知識果)’가 될 것이다. ‘선과 악’은 성서의 매우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헬레니즘의 핵심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선과 악의 문제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주제를 다루었고, 그들의 윤리학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헬레니즘에 있어서 ‘선과 악’을 판별하는 주체는 ‘나(에고)’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은 ‘선’이고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이다. 이러한 윤리적 인식론에서 ‘인간주의’(humanism)가 출발하며 그 범주 속에 이기주의(egoism) 또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가 포함된다. 창세기의 ‘선악지식과’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서의 저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는 본디 하나님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이 아니기에 모든 존재자를 다 품으시는 공공자(公共者), 또는 ‘공변성’(catholicity)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들을 살리는 공공자이기에 인간의 에고(ego)만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하다 하시면 사람에게도 좋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이 된다. 하나님에게 좋은 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에게도 좋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과 한마음이 될 때 그 사람은 모든 타자에게 유익한 존재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과 어긋나게 되어 공공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게 되었다(창3:23; 4:2). 사람은 하나님과 계속창조의 사역을 하면서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살면 더 이상 하나님과 동역할 수가 없게 된다. ‘선악지식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만든 리트마스 시험지이다. ‘선악지식과’를 먹지 말라고 엄금한 까닭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일을 도모하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선악지식과’를 먹는 행위 자체가 벌써 하나님과 딴생각을 품었다는 증거이며 공공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행위 자체는 이미 변질된 존재자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인 사람의 존재를 항상 점검하시기를 원하신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공공자이신 하나님에서부터 개별자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만물을 위해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는 개별자가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좋은 존재인지 나쁜 존재인지를 판단하려고 든다. 이로써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중심주의가 생겨났고, 공공의 유익을 추구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이기주의라는 불신앙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출23:33). 이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경계한다. 인간이 자기에게만 좋은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규열이 생기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저버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헛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를 살지 못하고 사람의 이기(에로스)를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의 진의가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은 헬레니즘의 에로스적 가치관과 질서를 가리켜서 ‘세상’(코스모스)라고 정의한다. ‘선악지식과’의 금령을 표현한 동사구는 히브리어로 <로 토칼 לֹא תֹאכַל>이다. 이는 ‘먹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의 동사구는 십계명에 아홉 차례나 등장한다(출20:1~17).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을 나타낸다. 창2:17의 금령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지시한다. 바울 사도는 이 금령을 해석한다.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다라고(롬3:30; 5:13, 20; 7:5, 7, 8, 9). 계명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된다. 선악과의 금령이 있었기에 사람의 죄성이 드러났다. 자신이 죄인인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모름지기 은혜를 아는 데 있다(갈2:22). 인간 실존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해에 재빠른 지식(self-interest)을 택할 것인가.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항상 시험과 검증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유한성이다. 사람은 로보트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공공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로 결단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동역자인 사람이 늘 결단하여 하나로 남아주기를 원하셨다. 사랑의 열정을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시험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께서는 시험을 통과하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 속에서 이 시험을 늘 통과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죄인의 실존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려는 속성을 품고 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사건들이 죄성을 증명해 준다(신명기9장; 출애굽기 15~18장; 민수기 10~20장). 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려는 유혹자였다. 응시자를 떨어뜨리려고 파견된 시험관이 사탄이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장이 기다린다. 시험은 성장을 향한 창조의 원리이다.


사랑 אַהֲבָה (아하바)


사랑(아하바. אַהֲבָה )

히브리어로 ‘사랑’을 아하바(אַהֲבָה) 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아헤브( אָהֵב )에서 파생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쉬(אִישׁ)”와 “잇샤(אִשָּׁה) – 남자와 여자에 대한 묵상

1. 어원에 대한 논쟁

‘남자, 남편’을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אִישׁ)와 ‘여자, 아내’를 뜻하는 잇샤(אִשָּׁה)의 어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오랜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두 단어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데, 꼼꼼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쉬에는 중간에 요드(י)가 있지만 잇샤에는 없고, 또 잇샤의 쉰(שׁ)은 중복되어 있는데 이쉬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단어의 어근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두 단어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이쉬의 어근은 알레프-바브-쉰(אושׁ)으로, 그 의미는 ‘강하다(strong)’이고, 반면에 잇샤의 어근은 알레프-눈-쉰(אנשׁ)으로, 뜻은 ‘약하다(weak), 부서지기 쉽다(fragile)’입니다. 어근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면 결국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주로 유대 랍비들이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가부장적인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해석일 뿐입니다.

2. 전통적 견해의 문제점

위의 주장은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쉬(남자)의 어근이라 알려진 알레프-바브-쉰(אושׁ)의 어원이 ‘강하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박약합니다. 우가릿어와 아랍어에서 알레프-바브-쉰은 동사로 ‘주다(give)’, 명사로 ‘선물(gift)’이라는 뜻이지 ‘강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HALOT 참조).

둘째, 이쉬(남자)의 복수형은 아나쉼(אֲנָשִׁים)으로, 잇샤(여자)의 어근과 동일한 알레프-눈-쉰(‘약하다, 부서지기 쉽다’)입니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이쉬(남자)의 어원이 ‘강하다’라면, 남자가 혼자 있을 때는(단수) 강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는(복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나옵니다.

셋째, 남녀를 포함한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에노쉬(אֱנוֹשׁ)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장대로라면, 남자(이쉬)는 강하지만, 사람(에노쉬)은 약하다는 또다시 말이 안 되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따라서, 이쉬(남자)와 잇샤(여자), 그리고 에노쉬(사람) 모두 알레프-눈-쉰(אנשׁ)이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합니다. (혹시, 왜 이쉬와 잇샤에 눈(נ)이라는 어근이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히브리어 자음 눈(נ)은 그 다음에 바로 따라오는 자음에 동화되는 경향(자음동화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스스로도 이쉬와 잇샤가 한 뿌리에서 나온 단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잇샤)라 부르리라 하니라

3. 이쉬(אִישׁ)와 잇샤(אִשָּׁה)의 공통 어근 알레프-눈-쉰(אנשׁ)의 의미와 성경의 용례

알레프-눈-쉰의 어원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약하고(weak) 부숴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근이 동사로 사용된 경우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데,

삼하12:15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וַיֵּאָנַשׁ)

다윗이 불의하게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얻은 아이는 약하게 태어났습니다(어원적인 의미에서는, 병들고 아프게 된 것보다는 연약하게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아이는 다윗의 금식기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죽고 맙니다.  

연약한 존재인 사람을 나타내는 에노쉬(אֱנוֹשׁ)는 검붉은 흙(아다마 אֲדָמָה)에서 만들어진 아담(אָדָם)과 평행어로 성경에 아주 흔하게 쓰입니다(사13:12, 51:12, 56:2, 시73:5, 90:3, 144:3 욥15:14, 25:4, 36:25 등).

이 중 몇 가지 본문을 살펴보면,

이사야 51:12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에노쉬)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아담)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시90:3 주께서 사람(에노쉬)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담)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에노쉬(אֱנוֹשׁ)는 흙 알갱이인 아담(אָדָם)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부숴지기 쉬운 인간 존재를 나타냅니다.
영어성경에서 주로 “mortal”로 번역되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나름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어의 어원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약한 존재입니다.
모두 죽을 존재이고, 한 포기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다마(אֲדָמָה)의 티끌에서 와서 다시 티끌로 돌아갈 존재일 뿐입니다.


성령과 율법(πνεῦμα vs. νόμος), 다른 점 네 가지


1.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한시적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에 비교하였다. 파이다고고스는 6-16세 정도의 어린 사람(파이스"παῖς)을 교육적으로 인도하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정교사와 다른 점은 배우는 장소로 오가는 길에 동행하고 배움 과정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직접 가르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파이스가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하라" "~하지 마라" 간섭하는 교육 책임자가 파이다고고스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이 파이다고고스와 같다고 비유하면서, 파이다고고스는 한 인물의 성장 단계에서 파이스(어린아이 + 청소년) 시절에만 필요한 존재이 듯 율법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역할하는 것이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두 구절의 말씀으로 이 점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6a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2. 율법은 행위를 변화시키고,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율법은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하여, "무엇 무엇은 하라" "무엇 무엇은 하지마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규정을 준다. 이런 규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어나서, 토라를 넘어 미드라쉬와 탈무드로 확대되었다. 죄가 되는 행위를 피하려는 노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수많은 죄된 행위들이 새롭게 규정된 것이다. 이 많은 규정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차치하고, 외울 수 있는 사람 조차 없게 되었다.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과 달리 성령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행위 하나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가 알아서 판단하고 실행할 문제이다. 다음 성구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나열한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를 로마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 명명하고, 생명과 평화의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3. 율법은 우리를 죄에 묶고, 성령은 우리를 해방한다.

아래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네 구절은 율법의 역할이 우리를 죄 아래 묶어 두는 것임을 알려 준다.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는 하지만,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율법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율법으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는 죄 아래 있게 되었다. 

로마서 3:19-20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로마서 6: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7:5, 8-10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 . .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근래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보여주는 것도 핵심은 같다. 죄가 무엇인지 판별하고 처벌하는 "새진리회"는 판별과 처벌만 할 수 있을 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의 공포에 묶이고 서로를 죄인으로 비난하는 세상이 되었다. 결국 그런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지옥"의 숨겨진 메시지이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해방하는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가 말한 성령, 요엘이 말한 성령, 예수에게 임한 성령 모두가 해방의 영이다. 

이사야 61:1-2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요엘 2:28-29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며 출정사를 대신 하심으로(누가복음 4:18-19), 예수님께서는 그와 동행하신 성령이 해방의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바울 서신에서 성령이 해방의 영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구절은 아래의 말씀이다. 

로마서 8: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아래 갈라디아서 말씀도 다르지 않은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4: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성령의 역할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로 인하여 정죄 받지 않고(롬 8:1), 죄된 길을 멀리하며(갈 5:16),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으며(롬 8:39),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담보로 (갈 4:7, 롬 8:17, 엡 1:15) 성령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묶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존재가 되었다. 

4. 율법은 문자이고, 성령은 바람이다.

율법은 문자이다. 모든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하는데, 행위에 대한 지시가 율법 규정으로 문자화 되고 나면, 이제 상황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문자화된 율법 규정은 생명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빚문서가 될 뿐이다. 

고린도후서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빌립보서 2:14, 20-2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 . .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 하니, 웬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은 바람과 같다. 어디에 적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갇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성령의 특징은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3: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그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쓰여진 대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성령의 방식이 아니다. 성령은, "무엇은 하라" "무엇은 하지마라"라는 온갖 규정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봄바람 처럼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도 바람처럼 살도록 인도하신다.   


히브리 알파벳의 의미

히브리 문자의 비밀

ת‘타브’ 십자, 표시 400

히브리어 글자 가운데 마지막 글자는 ‘타브’다. 그리고 이것은 이를 테면 히브리어 글자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인장이나 도장으로 묘사된다. 또한 의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장 또는 표식으로 불려지거나 보여진다. 현자들은 하나님의 표식은 ‘에메트’, 즉 진리, 라고 말한다. ‘알레프’는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멤’은 중간에 끼어 있으며, ‘타브’는 마지막 글자다. 하나님의 표식을 다른 말로, “모든 실재의 관점에서 여기에 진리가 있으며, 여기에 섭리가 있다”고 말한다.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의 마지막 글자는 ‘타브’이다. 그리고 처음 세 단어들의 마지막 글자들은 ‘에메트’, 즉 진리, 라는 철자이다. 우리는 창조의 시초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 째 날인 안식일을 얻는다. 세 단어들 “버락 엘로킴 마소트” 가운데 마지막 글자들로부터 하나님은 ‘에메트’를 판독하도록 만드셨다.

따라서 창조의 시초부터 하나님의 표식은 글자 ‘타브’로 끝나는 ‘에메트’이다. 그리고 창조 그 자체인 안식일의 최종 목표는 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정의 중요성에 관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배웠던 다른 글자들은 이 세상에서 유대인의 임무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브’가 하나님의 진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영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오듯, 영혼에 각인된다.

‘타브’는 실제로 두 개의 글자 ‘달렛’과 ‘눈’으로 구성되었다. 이 글자들은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의 철자가 된다. 매우 흥미롭게도 ‘단’은 광야를 지나는 지파 가운데 막내였으며, 그의 임무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이었다. 글자 ‘타브’가 알파벳의 맨 마지막 글자이듯, ‘타브’를 구성하는 두 글자 ‘단’ 또한 행진하는 대열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이 뒤에 남긴 것들을 깨끗이 치운다. 그 표식은 뒤에 남겨진 배경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표식과 형태는 이 세상의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 주변의 물리적 실체 안으로 새겨지는지에 대한 사례로는 화석들을 볼 수 있다. 영혼 차원에서는 영혼 환생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이전 생애가 바로 지금의 우리의 인생 속에 도장과 같이  새겨진다. 모든 실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뚜렷한 특징들이 화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성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는다.

‘단’은 또한 심판(judgment)을 나타낸다. 심판은 또한 모든 차원의 실체에 존재한다. 이 말은 완전한 심판을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영혼은 심판받고 글자 ‘타브’로 끝나는 죽게 되어야 만나게 되는 죽음 자체를 위한 세계와 바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고 그것은 또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심판 받고, 그 다음에 환생을 통해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신성 차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힘이 하나님의 네 글자 이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실체들 속에 가득하다고 말한다. 바로 네 글자 이름“엘로힘 이즈 헤세드 엔 구불라”, 즉 “친절을 사랑하고 압제를 심판하심”을 통해.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적대적인 방법이 아닌 자연의 법에 따른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 정연한 활동은 하나님의 구속과 통제 그리고 법과 질서의 표현이다.

글자 ‘타브’는 숫자 사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즉 우리가 죽음에 다가가서, 우리가 ‘타브’와 함께 끝나면서 만나지게 되는 죽은 후에 오는 세계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신성한 기쁨을 지닌 사백 개의 세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성한 기쁨이 있는 이 사백 개의 세계들은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라의 매장지를 산 아브라함과 관련 있다. 이 사라의 매장지를 취득하는 과정에 아브라함의 사려분별로 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땅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획득이다. 

글자 ‘타브’가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묵상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모든 종결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지, 어떻게 모든 주기(cycle)는 스스로 반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표식과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영혼 그리고 마음을 포함해서 모든 실체의 본질에 새겨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ש‘쉰’ 치아 300

현자들에 따르면 ‘쉰’은 불의 글자다. ‘쉰’을 자세히 보면, 세 개의 사선들이 있다. 사실상 히브리어의 불이라는 단어는 ‘이쉬’, 즉 ‘알레프 쉰’이다. ‘쉰’은 ‘불(fire)’이고, ‘알레프’는 ‘여기(at here)’이다. 우리는 불이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안다.

따라서 불은 여기 이를 테면, 타고 있는 불에 생명을 주고 있는 중이다. ‘쉰’의 세 사선들은 좌우대칭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글자들 가운데 가장 좌우대칭인 것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많은 ‘바브’와 ‘요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선들은 ‘바브’를 나타낸다. ‘바브’의 꼭대기는‘요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요드’가 있는 아랫부분에서 만난다. 따라서 다 합치면,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가 ‘쉰’을 구성한다. 이 일곱 요소들은 네 명의 어머니와 세 명의 아버지를 암시한다.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게 서로 뒤섞인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한쪽에는 규칙적인 세 선들의 ‘쉰’이 있고 다른 쪽에는 우리가 히브리 알파벳에서 보지 못하는 네 개의 사선들의 모호한 ‘쉰’이 있다. 이 일곱 개의 구성물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아내들을 나타낸다.

네 개의 ‘요드’와 세 개의 ‘바브’를 취하면, 이 모두는 오십 팔인데, 이는 은혜(grace)를 의미하는 ‘크레인’이란 단어다. 카발라주의는 좌우대칭의 개념이 이 ‘은혜’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은혜를 입는다. 이것은 모든 것이 이상이 없이 괜찮으며, 느낌이 좋고, 같이 관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은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단계가 있다. 단어 ‘크레인’이 토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때다. 그리고 그것은 노아에 대한 단어와 ‘크레인’은 반대로 하면 서로 같은 글자들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쉰’은 잠들어 있다는 ‘쉐이나’의 어근이고, 또한 평온을 의미하는 ‘샤난’의 어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느낌은 조용함이다. 반면에 ‘쉰’은 일정한 주기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해(year)’를 나타내는 ‘샤나’의 어근이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 그 자체인 ‘쉬누이’는 어근이 되는 ‘쉰’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사고를 가진다. ‘수면(sleep)’과 ‘평온(serenity)’은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해(year)는 물론 변화한다. “아닌 하샨 로쉬니티”, 즉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변치 않는다”. 여기서 단어 ‘변화하다’, 즉 ‘쉬니티’는 ‘쉰’이 근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최고의 개념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불변이시며,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만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고, 나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부동의 권능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불을 나타내는 ‘쉰’에 대한 하나의 사고이다. 우리가 불을 보면, 그것은 항상 춤추고 항상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에 녹아버린다. 우리는 양초의 불길에도 녹는다. 얼마 안 있어 거기에 은혜가 있다. 모닥불에 곧 평온함이 있고, 불길이 사라져 간다.

‘쉰’의 수의 값은 삼백이다. 심판의 이름인 ‘엘로킴’이란 이름을 취하면, 네 개의 철자로 구성된 그 단어의 글자들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알레프’는 ‘알레프’와 ‘페’로 구성된다. 등등. 이 글자들의 모든 수의 값은 삼백과 동일하다.

‘엘로킴’은 팔 십 칠이며, ‘하테바’, 즉 자연(nature), 와 동일하다. 따라서 ‘쉰’의 불에 최고의 결합은 힘이며,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전자기적인 에너지이다. 변화와 불변에 대한 또 다른 최고의 사례가 ‘쉰’에 의해 나타나듯, 우리는 ‘모든 유대의 가정’, 사실 ‘집에 있는 모든 방’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드나드는 정문에서다. 그리고 ‘아메트’는 글자 ‘쉰’이다. 단어 “메주사”는 “활동하는”을 의미하는 단어 “자즈” 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나가고 우리가 들어올 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메주자”에 입맞춘다.

아직도 역설적으로 “메주사”를 세울 때, 우리는 “리크볼라 메주사”라는 말로 축복한다. 영원한 곳에 ‘메주사’를 두기 위해, 많은 글자들에서 우리는 이 달려감과 되돌아옴의 개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그것이 ‘쉰’의 모습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불 자체를 본다. 불은 항상 움직이고 달려가고 그리고 되돌아온다.

‘쉰’과 연계될 수 있는 묵상은 불 속에 있는 활 모양의 것과 연계된다. 영혼의 불과 연결되기 위해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하기 원하며,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기 원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길 원한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ר‘레이쉬’ 뒷머리 100

‘레이쉬’는 단어 ‘로쉐’, 즉 머리, 와 관련 있으며,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신년은 ‘로쉬 하사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 해의 머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의 의미가 ‘태초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레이쉬 베레쉬트’는 ‘레이쉬’와 관계가 있다. 토라에 ‘레이쉬 타크마 이라 타샨’, 즉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의 근심이거나 하나님의 향기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다른 글자가 굽은 ‘레이쉬’의 모양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굽은’은 머리부터다. 머리가 굽었다.

머리는 지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는 지력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토라는 지혜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베레쉬트’, 즉 태초에, 에 대한 번역들 가운데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지혜와 함께 창조하셨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레이쉬’는 지혜, 이성과 함께 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굽어져 있음을 본다. ‘레이쉬’의 또 다른 의미 가운데 하나는 ‘라쉬’인데, 불쌍한 사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세상의 또 다른 관점에서 ‘레이쉬’는 그의 짐으로 인해 구부러진 불쌍한 사람을 굽게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관점에서 지성은 자신에게 우리가 자녀들과 관련될 수 있는 그런 많은 사례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큐 180을 가질 수 있는 자녀들에게 설명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가 이해하는 방식에 그것을 맡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이 먹은 교수나 의사는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그들의 학생들에게 맡겨야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그의 지혜가 토라를 통해 양도될 수 있도록 비상한 노력을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토라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에 암시되고 있는데, 모든 창조가 나오는 토라의 지혜는 또한 ‘로쉬’와 연계된다.

만일 ‘베레쉬트’의 글자들의 순서를 바꾸면, 그것은 ‘로쉬 바이트’, 즉 ‘집의 머리’, 가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집 안에 계시기 위해, 이를 테면 그의 무한한 실재, 그의 비상한 노력을 끝낸다. 카발라에서 사용되는 지력은 다양한 종류의 협력과 매우 관계가 깊다.

매일 매 순간은 믿을 수 없이 많은 자극 정보와 함께 되돌아온다. 두뇌의 지능은 모든 자극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우선순위를 통해 분류해야만 한다. 이것은 카발라에서 ‘하시툿’, 즉 명확화 방법’, 이라 불린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작업들은 히브리어로 ‘비루어’이다.

이 세상이 모든 것에 관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할 때, 지능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의 ‘레이쉬’를 쓴다. ‘레이쉬’가 또한 태초를 의미하는 ‘로쉬’를 의미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여태껏 ‘레이쉬’는 알파벳의 아주 끝자락에 나타난다. 그리고 ‘레이쉬’의 숫자 이백은 실제로 우리가 히브리 글자들에게 다가갔던 길의 중간 지점이다.

히브리 글자들은 일부터 사백까지의 값을 지닌다. 따라서 ‘레이쉬’는 비록 마지막 글자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숫자 상의 값은 중간이다. ‘레이쉬'는 처음부터 중간까지, 마지막까지 모든 실체에 스며듦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인, 토라의 지혜를 나타낸다.

‘레이쉬’에 대해 묵상한다는 것은 정화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기 위해,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준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ק‘코프’ 바늘귀 100

‘코프’는 스물 두 개의 표준 글자 가운데 한 글자가 선보다 아래에 고스란히 나와 있는 유일한 글자다. 우리가 ‘라메드’가 선 위에 있는 유일한 글자라고 배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 외에 이것은 글자 ‘차디’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리자가 그 글자를 ‘차디크’라고 불렀다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글자 ‘코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자 ‘짜디’를 참조한다.

이는 우리가 글자 ‘짜디’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은 창조 가운데 신성한 불꽃들을 찾아 그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내려가는 정의로운 사람, ‘차디크’이다. 글자 ‘코프’는 내려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이동, 즉 이 세상에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육체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전형인 것이다.

글자 ‘코프’, 즉 내려가는(going down), 와 보다 더 깊이 관련이 있을 때, ‘코프’는 ‘신성한(holy)’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카도쉬’를 시작한다. ‘코프’, 즉 내려 가는(going down), 의 또 다른 중요한 표명은 이 세상에서 임무를 완수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영혼이 육체 속으로 어떻게 내려 가는가 하는 것이다.

‘코프’는 신성, 즉 ‘카도쉬’, 을 의미한다. 반면에 반대말인 ‘클리바’, ‘껍데기(shells)’를 의미하는, 단어를 시작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신성의 불꽃들이 있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올가미(trap) 또는 껍데기(shells) 또는 용기(vessels)와 틀(blocks)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같은 글자가 서로 반대인 두 가지 의미들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들의 많은 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다. 신성함(holiness)과 ‘클리바’,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제는 외관으로부터, 즉 ‘클리바’로부터, 신성의 불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프’의 모양은 실제로 ‘레이쉬’와 ‘자인’의 두 개의 글자들로 구성된다. ‘레이쉬’는 ‘바브’와 ‘자인’이 선 아래에 가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글자 ‘잘’ 또는 ‘랄즈’의 글자들을 배열한 규정을 따른 결과이다. ‘잘’은 낯선(strange)이라는 의미다. 이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낯선 세계다. 그것은 복잡함과 비밀 그리고 떨어진 불꽃들로 가득하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 즉 이 세계에서 낯선 느낌, 을 가진 경험이 있다. 때로는 고독한 느낌, 이방인 같은 느낌 그리고 거기 아무도 없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랄즈’는 방법이 다르다. ‘랄즈’는 비밀(secret)을 의미한다. 숨은 뜻, 숨은 의도가 있는 비밀들은 모든 생소함 속에 새겨져 있다. ‘클리바’로부터 불꽃들을 추출하려는 생각은 생소하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 안에서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진다.

‘자인’과 ‘레이쉬’는 거기에서 영광의 근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의 유대인이 이 세계에서 지도자가 되고 대리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정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라. ‘코프’의 수는 백이다. ‘차디크’에서 우리는 이삭이라는 이름을 분석하였고, 우리는 이삭이 태어날 당시에 아브라함은 백세였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우리는 다른 글자들에서 어떤 수에 십 배수한 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백은 십의 십 배수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험을 가졌음을 보았다. 가장 위대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두 단어들 ‘라크 라카’는 백에 해당하고 오십과 오십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장 위대한 잠재력은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가려하였고, 구하려 하였으며, 열 가지 시험들을 통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가 백세에 아이를 낳은 이유다.

십의 열 배수는 백세의 나이에 이삭을 낳음과 동일하다. 후에 이삭은 그가 장성해서 농사하여 백배나 얻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깊은 잠재력으로부터 이삭을 낳을 때까지의 하나의 완전한 주기를 본다. 이삭에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다는 것은 글자 ‘코프’와 백이라는 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생소함을 얻고, 게다가 목적을 맡기기 위해 숨겨져 있는 불꽃들을 찾음으로서,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험들에게 우리의 완전한 잠재력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이 세계에 새로운 통찰력을 낳기 위해,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멤’ 40 상형 의미 : 물

‘멤’은 두 개의 모양을 지닌 다섯 개의 글자 가운데 하나이다. 단어 중간에 처음 나오는 형태와 단어의 마지막 글자로 나타나는 마지막 형태가 있다. 이런 ‘멤’의 두 가지 모습은 물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에서 물을 나타내는 단어 “마임”은 표준적인 ‘멤’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오는 ‘멤’으로 끝난다. 중간에 ‘요드’를 가진 표준적인 ‘멤’은 물의 형체를 나타낸다. 그것은 정사각형과 같다. 그런데 왼편에 벌어진 틈이 있는데, 이것은 열린 모습의 물들인 샘, 강, 시내를 나타내고, 마지막 ‘멤’은 닫힌 모습의 물들인 대양, 호수, 늪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임”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그 단어 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두 가지 형태의 ‘멤’으로 만들어 졌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방울처럼 생긴 ‘요드’는 물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방울들이다. 우리 모두는 물 없이 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물은 생명을 준다. 우리는 일주일, 아니 한 달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지만,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지구 표면의 70퍼세트가 물로 덮여있음을 안다. 또한 인간의 육체는 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함축된 내용은 생명에 대한 물과 연결된다.

탈무드에 “에인 마임 엘로 토라”, 즉 “토라가 바로 물인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토라에 나와 있는 물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토라에 대한 환영이라는 것이다. 물이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라는 생명을 준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네카 노베아 코 코흐마”, 즉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천천히 흘러가는 시내”. 그리고 카발라적으로 토라는 지혜, 즉 “(חכמה호크마 2451)”, 라고 불리는 곳으로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멤’은 “호크마”라는 단어에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생과 그리고 지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멤’은 히브리 글자 가운데 열세 번째 글자다. 열세 번째는 판독하면 단어 ‘아하바’, 즉 사랑, 이란 단어가 된다. 따라서 물처럼 속도가 떨어질 때 이것은 사랑과 관련된 몇 가지 능력과 연계된다. 물의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 준다. 십삼은 중요한 수인데, 그 이유는 “십삼 미돗 라흐민” 이라고 불리는 것의 수이기 때문이다. “더 슈로소스 미돗 라흐민”은 “긍휼의 열세 가지 모습들”이다. 십자가의 긍휼은 사랑과 관련된다. 따라서 ‘멤’은 생명, 사랑, 지혜 그리고 토라의 모든 개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십 인‘멤’의 수에서 매우 명백한데, 그 이유는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사십이라는 수는 토라 자체를 나타낸다. 그리고 ‘멤’의 모습에서 보듯, 정사각형이 된다. 우리가  글자들에 대한 많은 논의를 통해 배웠듯이, 이 글자들은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따라서 ‘멤’은 또한 전형적인 주기, 즉 자체만으로 이루어진 주기인 정사각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에서 사십과 함께 해야만 하는 매우 많은 다른 주기들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사십 일을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모세는 세 단계의 사십 일을 보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모세는 유대민족에 대해 용서를 간구하는 또 다른 사십일을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받는데 세 번째 사십 일을 보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어질 때, 노아 시대에 비가 사십 일 간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관계는 구 개월의 임신기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사십 개월인 구 개월 하고 사 주인 것이다. 탈무드는 임신기간 사십 주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태아에게 편안한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이다. 따라서 이 모든 관계들에서 우리는 ‘멤’이 지혜와 관련된 생명의 글자이고, 그리고 출생과 순환의 글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적절한 묵상은 물, 샘이나 강이나 시내 등, 의 형체를 상상하고, 어떤 의미에서 누군가의 육체를 그리고 누군가의 영혼을 에워쌈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하며, 그리고 토라의 지혜에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성실한 접속자들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צ‘차디’ 낚시 바늘 90

‘차디’는 위대한 카발라 학자인 ‘알리자 차디크’에 의해 명명되었다. 그는 ‘차디’의 다음 글자인 ‘코프’를 글자 ‘차디’에 추가했다. ‘코프’를 추가해서 ‘차디크’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로운 사람”, 즉 “거룩한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차디’의 모양은 ‘요드’와 쐐기꼴의 굽은 ‘눈’을 같이 가지고 있는 충성스러운 종을 의미한다고 배웠던 굽은‘눈’모양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차디크’를 정의 내릴 수 있게 한다. ‘차디크’는 하나님의 종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종이다.

그리고 적음이 많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글자 ‘요드’에 대한 서술이 그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차디크’는 어떤 의미에서 유기적인 세계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글자의 순서가 바뀌면, ‘차디’의 또 다른 의미는 ‘싸이드’, 즉 ‘뒤쫓아 잡는(to hunt)’이다.

이것은 카발라적 관점에서 ‘차디’의 실제적인 역할 기능을 나타낸다. ‘알리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 이전 세계는 창조의 빛을 처음의 그릇들 가운데 던졌고 그것들이 깨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깨지면, 거룩함 속에 있는 섬광들은 이 그릇들 각각이 있는 진열장인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에 의하면 티쿤의 세계, 수정된 세계라고 불리는 이 세계는 이전 세계의 깨진 그릇들로 만들어진다. 특별히 의로운 사람인 ‘차디크’에 대한 우리의 사명은 떨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뒤쫓고, 구하고, 찾아서 그것들을 끌어올리고, 그것들과 연계하고, 그것들을 듣고, 그것들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에서 ‘윳작’, 즉 ‘이삭’에 관해 말하는 것과 관련 있다. 토라에서는 ‘이삭’이 그의 입을 쫓았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이다. 이삭이 왜 감정의 사람인 ‘에서’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누가 진짜 잘못된 건지 그러나 카발라 학파는 말하기를 ‘윳작’이 커다란 잠재성을 근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밀폐된 외관으로 둘러 싸인 신성하지 않은 빛의 점들. 그리고 ‘윳작’은 실제로 ‘에서’의 이러한 점들을 추출하기 위해 추적하는 중이었다. Those who were from families convert from the seed of ‘Esau’. 따라서 전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굽은 ‘눈’ 모양의 ‘차디크’는 밑으로 내려가서 물리적 세계를 떠받치려 하는 중이고, ‘차디’의 수는 구십이다.

이것은 첫 번째 유대인의 자녀를 낳은 나이다. 그리고 잠재적으로 모든 유대인의 아이가 미래의 ‘차디’라고 말하는데, 최고의 (라메즈)는 그 안에 ‘차디’를 지닌 ‘윳작’의 이름으로 그 장면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의식에서 모든 사람은 ‘차디’이다.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는 ‘차디’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윳작’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요드’는 십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의 열 가지 시험을 나타낸다. 가장 위대한 시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디’는 구십과 동일한데, 구십은 사라가 생산한 나이다. 글자 ‘헤트’는 팔과 동일한데, 이는 할례를 행한 팔일을 나타낸다.

이삭은 팔 일 만에 할례를 한 첫 번째 유대 자녀이다. 마지막 글자인 ‘코프’는 백과 동일하다. 이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겸비해져서, 이삭이 태어난 아브라함의 나이다. 모든 요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간 이름 ‘윳작’에서 최고의 ‘레메즈’ 는 이를테면, 실체다.

궁극적인 생각에 대한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차디크 카타마 이후라크”인데, 즉 “그것은 야자수 꽃무 같은 ‘차디크’이다”. 꽃무 ‘페락’은 이백 팔십팔과 동일하다. ‘알리자’는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그릇이 깨짐으로 해서 떨어진 이백 팔십팔 개의 불꽃들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이 숫자는 떨어진 모든 불꽃들을 나타낸다. 그 이면에는 ‘차디크’가 이 모든 불꽃들을 도로 찾아서 하루 안에 그것들을 밝게 빛나게 만들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차디’라는 글자이든 또는 ‘엘리자’가 명명한 ‘차디크’이든,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내부를 깊이 살펴보는 것이고, 의로운, 신성한 것 안에 있는 핵심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굽어져서 세상의 짐을 지고 가는 ‘차디크’처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모든 세계에 치유와 조정과 숭고함을 가져오는 사명에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פ‘페’ 입, 80

‘페’는 입을 의미한다. 전형적인 에너지로서 그것은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글자들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말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말은 대단히 중요하고, 이 세상을 창조한다. 또한 인간은 말을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나는 잘못된 것을 말을 함으로써, 오랜 유대 관계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절한 말을 함으로써, 또는 적시에 올바른 말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거나 또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대단히 강력하다. 하나님이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항공우편 이동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항공우편 이동은,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는 것은 말하는 존재로 전환되었음을 단언한다.

다른 말로, 언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나타낸다. 추상적 사고의 관념은 말로 표현된다. 우리는 성문화 된 토라와 구전 토라라고 불리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구전 토라는 사천 년 동안의 법률, 전통 그리고 보다 정신적 가르침에 대한 편찬물이다. 그리고 대체로 천팔백 년 전에 전도활동의 내용이 쓰일 때까지, 진짜로 구전만 존재했던 이천 년 동안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구전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해서 학생을 맡기는 선생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문자적 의미에서 전환될 수 있는 구전 토라 “토라 슈 바우페”에 대한 표현은 말의 교사인 토라이다. 글자 ‘페’는 이런 의사소통의 개념을 나타내며, 시대를 초월해서 전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페’와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다. ‘페’를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페’의 안 쪽에 ‘베이트’가 있다. 이것은 글자가 글자 안에 있는 모든 글자들 가운데 유일하다. 아름다운 외관은 커다란 ‘베이트’로 시작하는 토라의 첫 번째 단어인 “베레쉬트”를 상고하게 한다. 그리고 글자 주변의 흰 공간을 상상하면 이를 테면, 창조하려는 세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같다.

이것은 놀라운 생각이고, 우리는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하나님의 입에 대한 이 표현이 실제 사용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백성의 리더인 사람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미피한두볼라’, 즉 권세의 입으로부터’, 가 나와 있는 토라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통해 유대 민족과 모든 인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나타낸 말씀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페’는 또한 능력이 되는데, 이것은 “여기 지금”을 의미한다. ‘페’는 소통(communication)을 그리고 ‘헤’는 표현(expression)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 지금” 있기 원하면,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의미에서 과거 또는 미래 또는 공상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곧바로 여기 지금 우리의 영혼을 보다 많이 표현하는 말을 할 것이다.

‘페’에 대한 묵상은 무엇보다도 모든 전통은 살아 있고, 분명하며, 모든 세대가 그것을 더해 가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전통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말의 중요성, 말의 능력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단어를 평가하기를 배우고, 그것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든 말이 치유와 사랑을 이 세상에 가져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ע‘아인’ 70

‘아인’은 눈을 의미한다. ‘아인’의 모양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활용해서 ‘아인’의 꼭대기에 두 개의 가지 모양의 것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각각은 눈을 나타내고 두 선은 내려가서 한 선과 만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중추신경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신경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물체와 같이 보일 수 있다.

이것은 그 생긴 모양에 ‘아인’의 의미를 연계하는 창조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방법이다. 토라에는 여러 번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아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물리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심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눈이란 “신성한 신의 섭리”, 즉 “하시카 하 프로티”라고 불리는 하나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살피시고, 통제하시며,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 나는 모든 것에 관여하신다. 이것이 신성한 신의 섭리이다. 토라에서 최고의 구절은 “이 해의 시작부터 이 해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을 두둔하신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왜 이 거룩한 나라로부터 이렇게 많은 종교인들과 종교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왜 모든 사람이 시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원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것이 이것들에 대한 이해 가운데 하나임을 배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해의 시작에서 그 해의 마지막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눈 때문이다. ‘아인’은 칠십에 해당한다. 우리는 어떤 수의 십 배수는 그 수의 완전한 계시라고 배웠다. 칠십은 칠의 십 배수이다. 갑자기 가장 전형적인 숫자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엿 새 동안 창조하시고 쉬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안식일을 가지게 되었다는 아주 전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는 같은 주기를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엿 새 동안 일하고 쉰다. 그러나 창조에 있어서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창조의 완성 그리고 창조의 목적 그 이상까지도 의미한다. 따라서 칠의 십 배수인 칠십은 상징적으로 칠십은 보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를 테면 하나님의 눈을 통해 모든 개개의 차원에서 그 목적이 얼마나 명백한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유대의 군인들이 광야로 갔을 때 노아의 자손들의 수 칠십을 안다. 광야에서의 장로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칠십 인의 멤버들. 이 모든 것들과 아울러 충분히 흥미롭게도 이것은 일과 칠십 사이의 관계성이다. 왜냐하면 노아와 그의 칠십 대의 자손들이 있다.

야곱과 칠십 명이 애굽에 이르렀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와 칠십 명의 다른 멤버들로 해서 실제 멤버는 칠십 일이다. 여기서 글자 ‘알레프’가 일에 해당함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수가 칠십인 ‘아인’이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서로 교체할 수 있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아인’으로부터 ‘알레프’로 그리고 ‘알레프’로부터 ‘아인’으로 교체한다. 전체적으로 그 단어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아인’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어떻게 존재하시는지, 그의 섭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다른 국면들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듯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싸멕’ 60 버팀목

‘싸멕’은 하나의 원이다. 원은 가장 전형적인 숫자 영의 모양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싸멕’은 원이 나타내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주위(surrounding)”의 개념, “에워싸다(surround)”의 히브리 단어는 ‘쏘벤’이고, ‘싸멕’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테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두 가지의 계시가 있음을 안다. “쏘베르 코 얼로민”, 즉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불리는 하나가 있으며, 그리고  “멀레이 코 얼로민”, 즉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세계를 감지하심”이다. ‘싸멕’은 주위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영혼의 차원에서, 원을 의미하는 ‘싸멕’은 환생의 개념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로 환생은 ‘길 구오’이다. ‘가우’는 실제 원을 의미하고, ‘길 구오’는 원 안에 있는 원의 개념이다. 원은 주기, 즉 반복적인 주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영혼의 차원에서 ‘싸멕’이 원을 나타내는 것처럼, 반복적인 주기들이 ‘싸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와 프로세스와 반복적인 원형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싸멕’은 도처에 원과 주기의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다. 우리는 그것을 계절의 바뀜에서 본다. 우리는 그것을 일 년을 주기로 나무의 나뭇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잎과 열매가 나는 나무에서 본다. 따라서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신성의 차원에서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순환하는 영혼의 차원에 까지, 만물이 이 세상에서 변천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은 순환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순환에 기초한다. “쏘메흐”, 즉 “지지함”, 를 의미하는 ‘싸멕’은 그 모습과 매우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하그”와 마찬가지로 “에워싸는 것”은 “지지”다. 여러 번에 걸쳐,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안락과 지지를 주기를 원할 때,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하그”를 주는데, 이는 그 사람을 지지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에 대한 물리적 표출이다.

실습 방식이 학생의 서계식일 때, 그것을 ‘스미카’, 즉 고래로부터의 방식, 라고 부른다. 선생은 자신의 두 손을 학생의 머리 위에 올리고, 그를 자신의 에너지로 에워싸고, 자신의 학생에게 모든 것을 주려는 바램을 가지고 행한 그 모든 것들의 대리인을 만든다.

In the put and the sum of (   ) rate a hundred-forty-fifth sum. 그것은 스물 두 개의 히브리 글자에 준해서 “다비드 말라크”에 의해 쓰여졌다. 오로지 한 글자만이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눈’이다. 우리가 과거 ‘눈’에 관해 배웠듯이, ‘눈’은 아주 열심인 종이다. But also (it) starts to (world) to fall, no fall. So “dalid” who himself is referred to in the term of by “naslat” as the fallen one. Literally the miscarriage did not want to put it on ‘ashurei’ which is a very joyous praise of God the idea is falling.

따라서 그는 글자 ‘눈’을 건너 뛰었다. 게다가 다음 구절은 “쏘메이 카샨두 콜린 무슐린”, 즉 하나님은 타락한 모든 자들을 도우신다, 이다. 따라서 그것은 글자 ‘눈’과 ‘싸멕’ 사이의 최상의 연계다. 원은 위든 아래든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원 위의 모든 점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하다. 모든 사람은 맞은편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다.

따라서 개개의 점이 어떤 의미에서 원에서는 무의미하므로, 현자들은 ‘싸멕’의 수인 육십을 사용해서 무효화라는 개념을 표현한다. 유대 전통에서 서클 댄싱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그 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더 큰 것도 더 작은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평등(equality)과 받듦(support)이 있다. 따라서 현자들은 누군가 앞으로 어떤 것이 무효화됨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육십이라는 수를 사용할 것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음식물 금기와 관련해서 만일 우유와 고기를 함께 섞으면, 그 음식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예를 들어, 우유가 기존의 육십 분의 일이거나 그보다 적은 양이 고기의 일부분이 되면, 그것은 먹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십 분의 일의 비율은 우유를 무효화 시킨다. 육십이 더 큰 부분 때문에 우유의 맛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자들이 계속해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잠은 죽음의 육십 분의 일이라 말한다. 꿀은 사막에 있는 사람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말한다. 불은 지옥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안식일은 도래할 세계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리며, 꿈은 예언의 육십 분의 일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육십의 개념은 한 사물이 다른 것에 포함되는 방법이며, 그리고 또한 다른 것으로 무효화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글자 ‘싸멕’에 대한 최고의 묵상은 하나님의 도우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생을 마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무가치한지 느끼는 대신에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위대한 도우심을 느끼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비밀

נ‘눈’ 50

(상형 : 물고기, 의미 : 구원, 탈출, 생명, 씨앗, 진리의 사역)

눈은 두 개의 모양을 가진 글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표준적인 ‘눈’은 그 모양에서 보다시피 굽어 있다. 단어의 끝에 위치하는 ‘눈’은 긴-귀 모양이다. 현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두 가지 형태 모두가 종, 충성스러운 종을 나타낸다. 히브리어 단어 ‘충성스러운’즉 ‘메트안만’은 굽은 모양의 ‘눈’으로 시작하고 긴-귀 모양의 ‘눈’으로 끝난다. 굽은 모양은 겸비한 상태의 복종하는 상태의 종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복종하는’ 은 좋은 어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최상의 찬사는 하나님이 모세를 “에딛 멧 안 마우” 즉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집에 모세처럼 충성스러운 종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아주 일상적인 것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하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된다라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자 ‘달렛’을 보는 것처럼 다시 보게 되는데 ‘달렛’ 또한 불쌍한 사람, 즉 겸비한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름에 두 개의 ‘달렛’을 가진 ‘달릿’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생이고, 가장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를 볼 수 있다.

토라에서 모세는 지구 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로 묘사된다. 이것은 리더의 강함은 겸비한 봉사자의 입장으로부터 나온다는 유대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훌륭한 도덕심에 관해 그리고 메시아, 즉 유대 민족의 궁극적인 리더, 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 된다. 그리고 이 견해 가운데 하나는 메시아의 이름이 ‘눈’이고 이것은 글자 ‘눈’에서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메시아와 관련된 시편의 한 구절로부터 왔다.

“이어 눈 쉬마르”는 ‘눈’의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는 글자 ‘눈’이 역설적으로 열심인 종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실제로 그가 모든 리더 가운데 가장 강한 리더인 것이다. 이것은 ‘눈’이 오십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십은 요벨의 해다. 일곱 번의 안식 주기인 사십구 년 다음 해가 오십 년인 요벨의 해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연한 부종들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 시간, 구속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눈’의 개념과 관련 있다. 토라는 이집트로부터 나온 오십 일째 되는 날 주어졌다. 우리는 사십구 일을 센다. 그리고 오십 번째 되는 날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는다.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하늘나라의 구속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궁극적 표현이다.

우리는 토라를 보기 전에 “나하세부쉬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글자 ‘눈’에 대한 의미 있는 묵상은 이 세계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힘의 근원임을 알기 위해 한 번은 순결한 겸비함과 결합되며 그리고 리더가 되기 위한 힘과 능력을 한층 더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