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clear land for yourselves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If you are so numerous," Joshua answered, "and if the hill country of Ephraim is too small for you, go up into the forest and clear land for yourselves there in the land of the Perizzites and Rephaites.

개척(開拓) : 열 개(開), 넓힐 척(拓)

1. 거친 땅을 일구어 논, 밭을 만듦.
2. 새로운 분야(分野), 운명(運命), 전도(傳道) 따위를 엶.
3.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함.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받은 은혜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을 받았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지겠다고 남들보다 더 누려보겠다고 하며 감사하기보다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은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공연히 짜증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할 수 있으면 자기 지분을 더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공동체에서는 집단 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한국에서는 노사분쟁이 해마다 일어납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띠고 때로는 삭발을 하고 때로는 공장을 폐쇄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약사와 의사 사이에 처방분쟁이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 사이에 수사권 분쟁이 있습니다.
양의사들과 한의사들 사이에 영역 분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잘 해보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지나치면 우리 부서, 우리 목장, 우리 그룹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지도자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특권 계층의 요구를 절제시키고 자발적으로 섬김의 정신을 갖게 함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파로부터 쉽지 않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살펴보면서 믿음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나아가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요셉 지파의 불평 : 더 많은 분깃을 주소서(17:14)

본문은 요셉 자손과 여호수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복을 주셔서 큰 지파가 되었는데 제비를 뽑아 한 몫만 유산으로 받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들의 말에는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특별히 복을 주셨듯이 여호수아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과 요구는 여호와께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뽑은 제비는 여호와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며 그의 땅 분배는 모세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인 요셉의 후손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그에 따른 특혜를 요구합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 최강대국인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7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졌기에 야곱의 가정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그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잘 대접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범한 죄까지도 용서해주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해서 고센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400여년이 지나는 동안 70명이었던 가족이 장정만 60만 명, 가족까지 따진다면 200만 이상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한 가족이 애굽으로 건너가 한 민족을 이루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런 공로를 생각해서 요셉 자손은 자기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분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기로만 따지면 므낫세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의 크기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넓었습니다.
므낫세는 요단 동편의 바산과 길르앗 영토를 얻었으며, 요단 서편에도 이스르엘 골짜기를 경계로 하는 비옥한 영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므깃도와 벧 스안과 같은 주요한 성읍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 받은 땅까지 합하면 요셉 지파가 얻은 땅의 면적은 모든 지파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었으면 감사해야 하고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섭섭하다고 따집니다.
우리처럼 큰 민족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호수아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선 요셉 지파의 대표들은 다 여호수아의 친인척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누군가 말했듯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칫하면 여호수아도 요셉 지파의 편을 들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답변 : 스스로 개척하라(17:15)

요셉 지파의 요구는 자칫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다른 지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요구를 들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다른 지파에 비하면 넉넉하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책망할만한데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림 산지가 네가 너무 좁”다고 하며 그들의 불평을 받아줍니다.
그러면서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한 분깃은 정착과정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고, 다른 한 분깃은 이제 요셉 지파의 노력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서 받기를 바라지 말고 원하는 땅을 스스로 나가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유다 지파가 그랬습니다.
한 분깃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받았을 뿐 아니라, 갈렙을 통하여 새로운 산지를 개척하여 지경을 넓혔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 방법이고 이제 요셉 지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이 큰 민족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요셉의 변명 : 그 땅은 넉넉지 않고 그들은 철병거를 가졌나이다(17:16)


요셉 지파가 더 많은 땅을 요구할 때에 자신들이 '큰 민족'이기 때문에 더 큰 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니 자신들은 힘이 부족하다고 꼬리를 내립니다.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주저하는 두 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 번째는 가서 개척하라는 땅이 자기들에게 좁다는 것입니다.
얻어 보았자 좁은 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서 정복해야 할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은 철병거가 고사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이기고 그 땅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전쟁할 때 누구의 힘으로 싸웠습니까?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여리고를 누구의 힘으로 정복하였습니까?
기브온 전투를 남부지역을 정복한 것이 누구의 힘으로 된 것입니까?
강력한 북쪽 지역의 가나안 족속을 누구의 힘으로 물리쳤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히였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적들의 강함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후손임을 내세워 쉽게 땅을 더 분배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 속에 안주하다 보니 어느 새 앉은뱅이의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들의 능력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너희가 큰 민족이라면 힘도 클 것이고 그렇다면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요, 만일 스스로 개척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다면 주어진 땅으로 충분하니까 받은 것에 만족하며 그냥 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면 : 너는 큰 민족이니 네가 개척하라(17:17-18)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 즉 한 분 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맞는 말입니다.
요셉 자손은 큰 민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큰 민족, 큰 권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셉 자손들뿐만 아니라, 열두 지파가 다 강하고 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쫓아내리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상속’의 의미를 포함한 단어로서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은 철병거를 이길 수 없는 자신들의 부족한 능력을 언급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중심을 봅니다.

의지가 없어 순종하지 않는 것은 능력이 없어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능력’이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18절에 ‘너’라는 단어를 네 번씩이나 사용하면서 요셉 자손의 결단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큰 민족'임을 알고, '큰 권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견고한 성을 차지하고 지키고 있어도,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군사력에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요셉 자손은 반드시 승리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큰 민족이지만, 땅은 당신이 빼앗아서 나에게 달라'는 요셉 자손의 부탁은 사실 알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힘써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힘써 찾는 자에게 찾게 될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 뒤로 물러선 자에게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다면 그만큼 내가 힘써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지혜를 받고,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남들보다 더 건강하면, 남들보다 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더욱 수고 하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1.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창세기 48:5을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야곱으로부터 두 몫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축복에 의해 두 지파를 이룬 요셉 자손은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므낫세 지파는 절반은 동편에서 절반은 서편에서 몫을 얻었기에 사실상 두 몫을 배정받은 셈입니다.
따라서 요셉 지파에게는 므낫세 지파 몫으로 두 몫, 에브라임 지파 몫으로 한 몫 도합 세 지파의 몫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7:3을 보면 슬로브핫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습니다.
보통 아들이 없으면 그 땅들은 모두 삼촌이나 다른 친척의 아들들에게 상속이 되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그 땅을 상속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이미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앞에 나아가서 더 많은 몫을 요청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 직전에 행한 인구 계수에 따르면 므낫세 지파가 52,700명, 에브라임 지파가 32,500명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반은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기 때문에 남은 두 지파를 합해도 6만 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다른 지파들-유다, 단, 잇사갈, 스블론-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훨씬 좋은 땅을 차지한 그들이 감사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특권이란 한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권리를 말합니다.
요셉 자손들이 한 분깃을 더 달라는 제안은 공동체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집단 이기주의를 대변합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룹들이 있는 공동체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요셉 자손들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빙자하여 자신들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요구하자 여호수아는 다른 지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산간 지역과 가나안 족속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점령하여 개척하도록 제안했습니다.

갈렙의 본

요셉 자손의 특권의식과 그들의 소극적인 모습은 갈렙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갈렙은 이미 정복된 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달라고 했는데 요셉 자손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갈렙은 헤브론 성읍이 매우 크고 견고하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요셉 자손은 자신들과 싸울 가나안 거민들이 철병거를 가졌다면서 올라가기를 주저합니다. 갈렙은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가나안 정복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섰는데 요셉 자손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파라 자부하면서도 앞장서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못하고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철병거로 무장한 헤브론 산지를 제게 주십시오. 내 나이 85세로되 장정과 더불어 싸울 힘이 있사오니 이 산지를 제게 주시옵소서” 담대하게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복과 특권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언약한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의 본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가장 마지막에 기업을 받습니다. 그는 자기보다도 이스라엘 지파들의 기업 분배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세라를 얻습니다(19:50) 그는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지어야만 하는 성을 선택했습니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은 가장 특권층에 속한 분이 오신 것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당신의 특권적 지위를 한 번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산골 동네에서 자라셨습니다. 공생애 시작 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면서 사십일 금식 후에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무리는 예수님에게 내려오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럴 능력이 있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과 백성들을 돕고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특권적 지위를 악용하였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위선자라 부르시며 질타를 하셨습니다. 먼저 가장 큰 특권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만을 위해 사용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합니다.

2.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19장에 보면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의 기업 분배를 다룹니다. 이들은 인구가 매우 많은 지파였지만 배당받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셉 지파처럼 왜 적은 땅을 주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제비를 뽑아 기업을 얻은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불공평해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적당하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공평을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연약한 지체를 받아 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과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이웃의 관계에서도 성령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들은 형제나 자매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특권이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유보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큰 자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양보는커녕 도리어 자기 몫을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3. 개척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사고 팔 때에 좀 독특한 방법으로 매매한다고 합니다.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우선 양을 가파른 산비탈에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러 넓은 풀밭에서 풀을 뜯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양이 되고, 살찌는 양이 됩니다.
그러나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지금은 편안하고 쉽지만 결국은 계곡의 무서운 협곡 바닥에 이르러 계곡물에 휩쓸려 죽거나, 풀이 없어서 굶주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버리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개척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진짜 큰 사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파괴적이고 비판적이며 시시비비 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각을 가질 때 우리의 사고력이 창의적이 되고 생산적이 되지만 마귀의 시각을 가질 때 말은 많아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현재의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만들어질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후에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장차 활동할 지경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철병거가 기다리는 그 산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둘 중의 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치면서 땅을 정복하려 한 갈렙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두려움에 떨던 열 명의 정탐꾼의 자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4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갈렙은 헤브론을 차지하는 비전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성은 여전히 크고 견고하였습니다.
그의 눈에 여전히 아낙 자손이 보였습니다.
85세 된 자신의 연약함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길임을 알기에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셉 지파들에게도 가나안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철병거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을 계산하고 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산지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 이루어놓은 자리를 그냥 차지하기 원합니다.
열심히 뛰기보다 편안하게 쉬고 싶어합니다.
복은 받고 싶지만 대가를 치루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매력적이지만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몸은 고달파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정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임을 깨달으며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를 다스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우리 것이라고 이미 선포하신 분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려갈 길이 멀고 철병거가 있어도 갈렙처럼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믿음으로 개척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게으르게 앉아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자들은 결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특권 의식을 버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과 양보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함께 나아가며 마침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분깃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자 여호수아는 각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중 요셉지파는 요단 동 서편 지역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분배받은 영토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분깃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지파는 큰 지파이고 두 지파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분깃만 받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에게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더 많은 영역을 요구하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아직도 미개척지인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땅을 개척하여 기업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곳은 산악지대라 자신들에게 넉넉한 곳이 되지 못하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 살기 때문에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면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비록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

  우리는 더 많은 분깃의 영토를 요구하며 불평하는 요셉지파에게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찾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그들이 맡은 몫이 그들에게 적은 것이라고 불만족하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비옥한 가나안 중심부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지파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땅을 배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내세우면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셔서 그 후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닙니다.

  요셉지파가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원인은, 그들은 질보다 양에 치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단 동 서편의 좋은 땅을 차지했음에도 양적으로 볼 때에 자기 지파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적은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교하는 데서입니다. 요셉지파는 자기 지파의 다른 지파와 비교하면서 불평했습니다. 내 조건이 하나님 앞에서 최상의 것임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다른 지파와 비교하는 데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지파는 이기적임으로 불평했습니다. 요셉지파는 자기들 중심의 이기적인 판단에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1000원을 잃어 버려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아이에게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더 크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1000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2000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이기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요셉지파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부정적이 됨으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에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이고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사람이 있다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평했습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양적이거나 비교적이고 이기적 태도에서 자유하고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인 태도 속에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의 모습 갖추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의 불평과 불만족하는 요청에 여호수아는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지역을 더 분배해주면서 그 땅을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와 산림지역이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원주민이 있어서 개척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고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그 끝가지 네 것이 되리라”(17-18)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창조성이 있음을 주지시킨 것입니다. 얼마든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척하다”고 쓰인 히브리어 ‘바라’라는 말은 ‘베어 넘기다’는 뜻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개척하다(1254) 바라(bârâʼ)  בָּרָא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세기 1:1.
발음 / 바라[ bârâʼ ]
관련 성경 / 창조하다(창 1:1, 시 89:12, 렘 31:22), 만들다(사 4:5), 짓다(말 2:10, 사 45:7, 57:19), 행하다(출 34:10), 지음을 받다(시 148:5, 겔 21:30, 28:13), 창조되다(창 5:2, 사 48:7), 개척하다(수 17:15, 18), 죽이다(겔 23:47), 나오다(겔 21:19), 살지게 하다(삼상 2:29).
구약 성경 / 48회 사용

회사에서 중요한 물품을 생산하면 그 물품과 함께 딸려 보내는 사용자 편람이란 작은 안내 책자가 있습니다.
비디오 같은 특수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사게 되면 사용자 편람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잘 읽고서 사용하면 그 기계의 최고의 성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용자 편람을 주셨는데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창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간직해야 할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라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수도원의 요리사가 되는 길만이 열리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수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하찮아 보이긴 하지만 수도원 요리사의 일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수도원요리사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들어간 젊은이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공부하고 기도할 때에 젊은이는 음식을 만들면서 “주여, 제가 만드는 음식들이 저들의 영과 육을 살찌우는 하늘의 만나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에는 “주여, 이 그릇들이 깨끗케 되는 것처럼 주 예수께서 제 마음도 깨끗케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불을 지필 때에는 “이 불길처럼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수도사들의 마음속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요리사로서의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활자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이었고 찬송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수도원에 요리사로 들어온 지도 7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착실하게 기도생활을 해온 그에게 수도사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세월이 지난 뒤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리버만이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든 한 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리버만은 아홉 살 때 단돈 5달러를 들고 미국에 이민하여 맨하튼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버만은 일흔 네 살에 은퇴한 후 노인정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둑 파트너가 약속을 어겨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에 한 젊은 봉사요원이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지요” 라고 종용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리버만은 화실을 찾았고 그때부터 10주간 교육을 받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나이 여든 한 살 때,  일약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로 불리었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는 백 한 살에 스물 두 번 째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인생을 살도록 인생의 중요한 편람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부여하신 편람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창조적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5가지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실패의 기억을 오래 남겨두지 말라. 둘째, 자기비하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셋째, 사업은 위기를 즐기는 게임이다. 넷째,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면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다섯째, 실패는 마지막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요 네게는 힘이 있다고 격려하며 창조의 역사를 이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삶을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고 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요셉의 후손들로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자부심 강한 요셉 자손이 그렇게 나약하고 비겁하게 바뀐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가 차지하라는 땅을 향하여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철병거가 있다”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 없고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미국의 실업가로서 체신부장관을 지냈고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정확한 경영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투자해 구입한 물건들은 엄청난 이윤을 남겼습니다. 워너메이커가 투자하는 것은 항상 최고의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2달라 50센트를 주고 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나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가난한 소년시절 성경을 읽고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믿음을 배웠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대부호의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요셉지파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평과 불만족에서 자유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창조적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용기를 가짐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땅과 같은 현실을 요셉지파의 축복의 땅을 만들듯 변화시켜 가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는 위대한 축복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중보 기도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1.중보기도의 정의

디모데전서 2: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모든 사람들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

2. 중보기도는 누가 하는가?
 
우리는 성전입니다. (막 11:15-17) 성전의 용도 : '만민의 기도'하는 집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목적을 따라 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3.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는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창 12:1-3에서 하나님의 약속 :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 아브라함은 자기의 삶을 드리면서 나만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나를 통해 온 족속이 축복받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우리의 시야가 열려있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는 것.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온 땅을 축복하시는 비밀입니다.


4. 조지 뮬러의 기도

"내가 기도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겔 22:30)

-스웨덴의 중보기도자 옐 : "예, 나는 하나님께서 이일에 나를 쓰시도록, 중보 기도자의 삶을 살도록 준비가 끝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으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중보(中保) 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1. 중재자
2. 갈라디아서 3:19
발음 / 메시테스[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319. 메소스(mĕsŏs)  μέσος, η, ον 
1. 중간의
2. 마태복음 25:6
3. 중앙
발음 / 메소스[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운데(마 10:16), 중에서(고전 5:2), 한 가운데(막 3:3), 속에(눅 8:7), 사이로(눅 17:11), 정오(행 26:13).
신약 성경 / 58회 사용

* 3326. 메타(mĕta) μετά
1. ~와 함께
2. ~가운데
3. ἧνμετά τῶν θηρίων: 그는 들짐승들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발음 / 메타[ mĕta ]
관련 성경 / 후에(요 2:12), ~와 함께(마 4:21, 살전 3:13), 동행하고(마 5:41), 으로(엡 4:2), 더불어(갈 4:25), 데리고(마 20:20), 지나면(마26:2), 가지고(마 26:47), 다음(마 27:62), 만에(막 8:31), 겸하여(막 10:30), 타고(계 1:7), 동류로(눅2 2: 37), 가운데서(눅 24:5), 뒤에(히 9:3), 겸한 (엡 6:23), 취하여(히 9:19), 후로는(히 10:16), 에게(계 1:12).
신약 성경 / 473회 사용



중재자,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中保(메시테스)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6번 쓰였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 3번, 히브리서에 3번 도합 6번이 쓰였다.
메시테스는
메시테스는 메소스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메소스는 가운데라는 뜻이다.

중재나 중보라는 말이다.
중재나 중보는 사람과 사람간에 문제라면 사람이 중재나 중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이 하나님과 사람간에 생겨진 문제라면 사람이 중보할 수가 없다.
사람과는 대등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중재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중재하겠느냐'
(한글개역, 각각 "판결하시려니와", "간구하겠느냐").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무엇인가?
중보가 무엇인가?
구약성도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있었다.
모세였다.
모세 이후에는 데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역할을 했었다.
그것도 1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가지도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같이 약속의 중보자가 오시기까지라고 했다.

이 약속의 중보자를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할을 그의 참된 대제사장 직분의 기능으로 보았다.
(참조: 히 5:6; 5:10;  6:20; 7:17; 7:21; 7:26; 8:1).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 "새 언약의 중보"(히9:15), "새 언약의 중보"(히12:24)이시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모세가 있기전 즉 율법이 있기 전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그 언약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네 씨”를 말한다.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오 또 언약의 중보의 성취자가 된다.(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혼이 돌아가시니라.

한문의 중보(中保)라는 글을 잘 보시라.
中자는 말할 것도 없고 保자를 보시게 되면 나무 위에 한 분을 볼 수 있다.
나무 위에 그 한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세 때분터 예수 때가지의 중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한 사람이었다.(오시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이제는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내가 니루었다”(요19:30)고 하셨음은 곧 중보를 성취하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이 한 분뿐이라면 한분 뿐인 것이다.

왜 사람들이 Roma catholic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틴 루터가 이것을 개혁하기 위하여 몸을 던졌던 것인데 이제 와서 개신교가 종교개혁전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외에 그 누구도 개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중보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
중보의 성취로 완전한 중보자가 되시는 분의 이름이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가 기도할 깨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계시는 분이 누구신가?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시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시다.
중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다.

성도가 기도할 때 응답을 주시는 것은 중보자들의 기도 대문이 아니라 중보의 이름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분 예수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중보자이시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 과 하나님 사이에 사람을 개입시키지 말라!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직접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간혹 다름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때는 누구의이름으로 기도하는가?
그 때 불려지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중보자이시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가.
기도는 성도들에게 허락한 하나님께서 그 자식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혜와도 같은 것이다.
여러분들도 자신을 위해서도 형제를 위해서도 중보자가 되시는 그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중보자의 이름으로 크게 역사하실 것이다.
중보자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그 기도와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은 크게 응답하실 것이다.

갈라디아서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디모데전서 2:5에서 메시테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께 인류를 대표하는 중보자이시다(Oepke 619).
그는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입하여, 인간의 죄가 깨뜨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회복하신 것이다.






Ⅱ. 중보기도의 능력


1. 기도의 능력을 사람들이 일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결과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When man works, man works, When man prays, God works."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2. 중보기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1990년 이전과 1990년 이후의 세계변화 (소련의 붕괴)
미국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부흥 : 한 노인의 기도
한국에서 일어난 1907년의 부흥 : 원산에서 선교사들의 기도 (1903년)
웨일즈의 부흥운동 : 사회의 악이 사라짐


3.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


Ⅲ. 중보기도자가 서 있어야 할 곳


1. 결렬된 곳 : 틈이 있는곳

모세의 기도 :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의 중보
"하나님, 차라리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없어질지언정 이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옵소서."

중보기도자는 그 죄악을 자기 것인양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심판하지 아니하시도록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중보기도는 땅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회복) -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면에서 주님께서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벽 위

중보기도자는 파수꾼입니다. (아모스 3:17)

- 파수꾼같이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은,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은 성벽 위에 두시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시야가 넓어져서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예레미야의 예언 :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것과 70년 만에 돌이키겠다는 말씀 (렘29:10, 렘 25:11-12)

- 다니엘의 기도 : 예레미야서 말씀을 읽고 금식하며 기도함 (단 9:1-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겔36:33-37)

-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그 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벽위에 올라갈 때에 아직까지 되지 않는 일들, 아직 볼 수 없는 일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3. 중보 기도의 사이클

;기도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백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출발하는게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
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필요를 보는 시점에 이릅니다.
-이제 무엇이 필요한지를 하나님께 듣고 나면, 비전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시점이라고 합니다.
-기도의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구한 것에 응답하셨고,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게됨.

;응답된 시점
-실제로 성취된 것입니다.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에 대해서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 경건의 시간
기도시간 -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보여 주신 것들과 무엇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그 내용을 적어 놓으면 훗날에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볼 수 있도록 중보기도노트 준비할 것


4. 영적전쟁터
 
-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29)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보기도자로 부르신다는 것은 전쟁터로 부르신 것이란 사실은 가르쳐 주십니다.
원수 마귀와 연약한 자들 사이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예배의 방향성 :


예배는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예배는 원수 마귀에 대한 전쟁으로써의 예배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IV. 중보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렘 33:2-3)


-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쌍방향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잠잠히 기다림으로 시작하라,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하라


2.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슥 4:6)
 
- 우리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내 힘이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 나
가야 합니다.


3. 방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 방언으로 기도하면, 무엇을 기도할 지 그 내용과 기도의 능력을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의 성령
의 능력에 민감하게 하고,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히도록 하고,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지를 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V. 듣는 기도는 기다리는 삶에서 연습된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2.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 기도는 쌍방향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행하는 것이고, 신뢰는 내가 할 수 없는 그 영역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3. 우리는 듣기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 많이 듣고 연습하고 우리 귀가 날카로워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 가야 합니다.


ⅤI. 중보기도를 해야 할 영역들.


1. 중보기도를 해야 할 가장 큰 제목은 열방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8)"

- 중보기도로 우리가 가 본적이 없는 땅일지라도 기도를 통해서 밟을 수 있다.
열방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는 먼저 국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9개의 최변방 지역 (9 프론티어)

a. 최변방은 공산권 (러시아, 중국, 북한)
b. 모슬렘 (터키, 이집트, 리비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c. 불교권 (태국, 일본, 대만, 스리랑카)
d. 힌두권 (인도, 네팔)
e. 명목상의 교회가 있는곳 (유럽)
f. 미전도 종족 - 24000여개의 종족이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함
g.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h. 대도시 사람들 (중국, 인도, 러시아, 캐나다등의 인구 100만 이상의 거대도시에는 복음의 사각지대가 있음)
I. 세계의 작은 절반 - 20세 미만의 인구


2. 중보기도의 두 번째 대상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의 권세를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잠 29:2, 딤전 2:1)

-권세 있는 사람들,

- 언론 : 매스미디어, 신문, 방송, TV, 인터넷

- 불의한 지도자들의 악함을 드러내주시도록 기도.


* 7개의 국가 구성 요소들 (7 Mind Molders)

- 정치, 경제, 교육, 매스컴 예술, 종교, 가정
a. 정치 -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드러나도록 기도
b. 경제 - 하나님의 정직하신 성품이 나타나도록 기도
c. 교육 -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도록
d. 매스컴 -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e. 예술 -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나도록
f. 교회 -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도록 (영적지도자, 교회부흥)
g. 가정 -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도록

3. 각자가 속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각 교회, 교회 영적 지도자. 교회부흥


ⅥI. 효과적인 기도


1. 우리속에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
(시편 66:18, 시편 139:23, 24)


2.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는을 인정하십시오 (롬 8:26)


3. 무엇을 기도해야겠다는 생각들, 소원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등을 내려놓으십시오 (잠언 3:5-6, 잠언 28:26, 사55:8,9)


4. 성령께서 당신을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엡 5:18, 히 11:6)


5. 이제부터 갖게 될 놀라운 기도시간에 대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십시오.


6. 기도를 방해 하려는 악한 영들을 강력하게 대적하십시오 (약 4:7)


7.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립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말씀하십시오. (요 10:27)


8.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기도를 인도하시거나 확인시켜 주실 수 있도록 항상 성경을 펼쳐놓고 기도하십시오 (시편 119:105)


9.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기도를 마쳤을 때는 놀라운 기도의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찬양으로 마치십시오 (롬 11:36)


ⅦI.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


1.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2.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합니다.

3. 나라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5. 일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6. 하나님께서 교회안에 선교의 열정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7.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합니다.

8.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깨어진 마음을 교회안에 주시도록, 또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세상의 지도를 바꾸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큰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바로 그 중보기도 자로 부르신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대머리


대머리(bald. 케레아흐. קֵרֵחַ)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머리를 대머리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유전적으로 머리카락이 없거나 매우 적어서 뒤통수나 정수리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자연적으로 탈모가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



레위기 13:40
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NIV. When a man has lost his hair and is bald, he is clean.
KJV. And the man whose hair is fallen off his head, he is bald; yet is he clean
NASB. Now if a man loses the hair of his head, he is bald; he is clean.

* 대머리(7142) / 케레아흐(qêrêach) קֵרֵחַ 

1.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2. 레위기 13:40, 3. 열왕기하 2:23.
발음 / 케레아흐[ qêrêac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머리의(레 13:40). [명] 대머리(왕하 2:23).
구약 성경 / 2회 사용

얄왕기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 [레위기 13:41]
앞머리가 빠져도 그는 이마 대머리니 정하니라

3. [레위기 13:42]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문둥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함이라

4. [레위기 13:43]
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찌니 그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한 문둥병과 같으면

5. [레위기 21:5]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6. [열왕기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7. [이사야 3: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8. [예레미야 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9. [에스겔 7:18]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10. [아모스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1. [미가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찌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찌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뒷 머리가 없는 기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입니다.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을 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시라큐스라는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모습을 묘사해 보면 발에 날개가 붙어 있고 앞머리에는 무성한 머리카락이 있는 반면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습니다.
이 이상한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리시퍼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

왜 날개가 발에 달렸습니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왜 당신의 앞머리는 그렇게 무성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왜 뒷머리는 대머리입니까? 지나가면 도저히 다시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머리도 감사할 조건이 있다

  ①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됩니다. 날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③ 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④ 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사도 대머리였습니다.

  ⑤ 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습니다.

  ⑥ 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립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입니다.


대머리 때문에 죽다

그리스의 극작가인 Aeschylus는 거북이에 의해 죽었다.
거북이가 머리 위를 날던 독수리의 발톱에서 떨어졌는데 독수리는
Aeschylus의 대머리를 바위로 착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미 1:16)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가운데, 나실인이 있습니다.

민수기 6:5절을 보면,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라고 말했습니다.

 

사사기 13:5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 삼손을 낳았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삼손은 그의 힘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들릴라에게,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17)고 말했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깎였을 때, 그의 힘이 빠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서, 놋 줄로 그를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공자가 지은 “효경”에 보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함이 효지시야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몸과 피부와 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의 양반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짐승의 도리이고, 머리털을 묶어,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895년, 일본의 강압으로,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아멘.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비참하게 멸망을 당한 것처럼,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처참하게 파괴되어지고, 약탈되어지고, 백성들은 머나먼 바벨론까지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머리털은 능력과 권능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구별된 자들은 머리털을 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고 있던 집은 불태워지고, 가진 양식은 약탈당하고, 자녀들은 험악한 병사들에게 붙잡혀, 머나먼 이국 땅으로 끌려가는데, 애통해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의 괴로움과 슬픔과 애통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하 25:7절을 보면,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그의 눈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살랐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성물들을 약탈해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끌려가는 자녀들은 머리털이 없는 독수리처럼, 머리털이 깎이어,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부모들도, 자신의 머리털을 대머리처럼 깎아, 그 괴로움을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노예로 끌려가는 자녀들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쓰라린 슬픔을 머리털을 깎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어린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녀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는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한다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척 스미스, 그렉 로리, 라울 리즈 목사님 등이 모두 대머리이다.
그냥 재미있게 나와 헤어 스타일이 같아서 좋았다.


▣ 마을을 지킨 쑥대머리 총각

100년 전 전라도 문경이라는 마을에 출신을 알 수 없는 한 총각이 들어왔다.
얼굴은 곰보인데다 너무나 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생김새였지만 마음은 착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쑥대머리 총각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일할 때는 구수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느 해 여름,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가축과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포졸들이 나와 겨울이 될 때까지 마을을 떠나 있으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쑥대머리 총각만 홀로 남았다.
겨울이 되어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소, 돼지, 염소, 강아지 등 동물들이 그대로 있었고, 곳간마다 햇곡식도 그대로 쌓여 있었다.
폐허가 된 줄 알았던 사람들은 깨끗한 마을을 보고 '누군가가 마을을 지켰나보다'라는 생각을 한 뒤 쑥대머리 총각을 떠올리고 그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쑥대머리 총각은 전염병을 이기고 마을을 돌보느라 지칠대로 지쳐 쓰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만 피하기에 급급했던 것을 뉘우치며 쑥 대머리 총각을 정성껏 돌보았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다.
며칠을 울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호화스런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그 뒤 돈을 모아 땅을 사서 그 땅에서 나온 곡식으로 쑥대머리총각의 제사를 올렸는데 오늘날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대머리 아저씨 이발소 간 날




머리칼이 3개인 아저씨가 이발소에 갔다.
자신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면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머리 좀 따주쇼!!
이발사 아저씨: 헥;;......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그러나 이발사 아저씨는 정성스럽게 머리를 땋아 내렸다.
그런데.... 아차차!!
그만 머리칼이 하나가 빠진것이었따.

대머리를 아저씨는 무척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가름마나 타쥬쇼!!!
이발사 아저씨: 컥;;....!

이번만큼은 저얼대로 실수를 안해야 겠다싶어
이발사 아저씨는 조심조심 가름마를 타 나갔다.

그런데.... 헉스;;이게 웬일인가???
또 머리칼 하나가 빠져 버린것이었따.

대머리 아저씨는 무척 화를 내며.
아자씨 무스발라서 세워라도 쥬쇼!!!!

이발사 아저씨: 힉!!....;;;
이발사 아저씨가 그만 넘 쫄았는지

무스를 발라 세우는 도중
또다시 마지막 남은 머리칼 마저 빠지고 말았던 것이었었었따아~~~~~~~.
이발사 아저씨는 이제 죽었구나 싶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데.....
대머리 아저씨 "왈.

대머리아저씨: (모든걸 포기한듯이)

:

:

:

광이나 내쥬쇼!!!!!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신명기 7:7)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신명기 7:7)

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밝힌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라서 택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는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신명기 7장 7-9절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



세상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우수하고, 가장 세련된 사람을 원합니

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지식과 경험과, 더 많은 자격증, 더 나은 학벌을 얻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일들이 이러한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 잘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유대 민족은 무엇 때문에 선택을 받았을까요? 다른 민족들보다 머리가 좋아서, 아니면 키가 커서, 아니면 강하고 아름다워서, 아니면 재능이 많아서, 아니면 믿음이 좋아서 선택을 받았을까요?

본문은 세상의 선택 원리와 정반대인 하나님의 선택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수많은 별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 조그마한 지구를 택하셨습니다. 지구 가운데서도 가나안의 조그마한 땅을 택하시고, 그 땅 가운데서도 여러 민족 가운데 가장 적은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너무나 작아서 유대 족속 중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는 베들레헴 성을 택하시고, 또 그 베들레헴 자체 안에서도 구유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구유에서부터 십자가에 까지 하나님의 선택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가나안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역사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그리고 광야에서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량한 광야에서 지낸 40년 동안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교 개혁자인 존 녹스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를 붙잡고 고백했습니다. “여보게 나도 이단이 될 뻔 했네. 어제 저녁 문득 내가 교회와 진리를 위하여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했으니 하나님도 조금은 나를 참작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네. 이때 내 머리를 스친 성경 말씀은 ‘네가 가진 것 중에 내가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 는 말씀이었네. 여보게, 나와 함께 기도하세.”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감명 깊은 기도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미국에 아이언사이드(Ironside)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박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들은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그 청년의 말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법대로 하는 것을 원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마도 자네는 지옥에 가야 마땅할 것일세.”

교회에서는 법보다 은혜가 앞서야 합니다.

세계 제일의 철강 왕으로 미국 재계를 주름 잡았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결혼한 그는 가족과 홀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사업에 최선을 다했으나 급기야는 파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온 식구가 빈손으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카네기는 마지막 수단으로 꿈과 미래가 있으나 모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땅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남은 돈과 어머니가 지니고 있었던 낡은 금반지와 아내에게 선물로 준 목걸이를 다 팔아 긁어모아 보았으나 역시 부족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친구 되시는 헨델슨 부인은 모자라는 뱃삯 20파운드를 선뜻 빌려 주었습니다. 언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멀리 낮선 땅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 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빌려 간 돈은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너무너무 고마워하고 감격해하며 거듭 약속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많은 고생을 참아가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덧 어렵게 모아둔 돈이 20파운드와 맞먹는 200달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200달러를 송금 수표로 바꾸고 난 다음, 그날 저녁 조촐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빚을 갚고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서로 축하하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했습니다.

이때 카네기는 상기된 얼굴로 가족 앞에 서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하여 평생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자임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됩시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재료가 나쁘면 나쁠수록 그런 재료로 예술품을 만든 사람의 명예는 더욱 더 위대해지는 것이고, 군대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런 적은 군대로 대승한 승리자의 영예는 더욱 더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기드온의 300명 용사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시대를 지나 사사시대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삿 2:10)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실 때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을 붙이지 아니 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고 하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두려워 떠는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고 1만 명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은 1만 명도 많다고 하시고, 다시 선택 과정을 거쳐 300명만 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 용사들을 통해 메뚜기의 중다함 같은(삿 7:12)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업에 복을 주시고, 자녀들이 잘 되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나이마에 사는 스탠리 팜(Stanley Pam)이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을 위한 사업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사업을 통해 최상의 것을 주께 드리며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영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사업을 하고 나에게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너는 단순히 종업원이 되어라. 끝까지 종업원으로 일하여라.”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스탠리는 회사 설립 신고를 할 때 회사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생애를 걸고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 동안 다른 기업처럼 여러 번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놀랍게 발전했으며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대로 월급을 받는 종업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부였던 록펠러는 많은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는데,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비롯해서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사회에 바쳤지만 자신이 세운 그 많은 대학과 교회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록펠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신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후 9:13), 그리고 구제(고후 9:9)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 하나님의 긍휼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은혜를 입고도 끝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매번 용서하셨고, 끝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라면 아무 수없이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신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면서 미천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미천한 자들을 택하셔서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곧 세리 마태를 택하셔서 신약의 최초 증인이 되게 하셨고, 과거에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셔서 부활을 최초로 알리는 반포자로 삼으셨고(마 16:9, 요 20:11-18),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을 택하셔서 가장 유력한 사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구원하시고 선택하셨는지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1장 1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인 중의 괴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여러 세대에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죄인들도 바울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을 나태내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외에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그 공항은 라구아디아 공항입니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한 시장의 이름입니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아주 유명한 명 판사였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 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님, 저에게 한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 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버려둔데 여러분도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명 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여 그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 후 뉴욕 시민들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긍휼이 많은 판사라고 인정하였고 그는 후일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며 긍휼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도 적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전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질문]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다윗 혈통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초림하시기 위해 답이 없는 민족으로 그리고 지역상 전쟁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 몇 가지만 알려주십시오.

 

[답변]

 

가장 적은 민족이라 택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밝힌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라서 택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적은 민족이라면 주변의 큰 민족들로부터 여러모로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당신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처럼 주변 강대국들에게 계속 침략과 노략질을 당하고 나아가 그들의 식민지로서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들로 자리 잡게 한 가나안 땅도 아주 척박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말씀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말 그대로 일반적인 농업보다는 목축과 양봉 밖에 못할 정도로 산악지대나 황량한 땅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조한 사막 땅이 대부분입니다.

 

땅이 비옥해서 농업이 번창하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곳은 큰 강이 통과하는 주변 평야입니다. 나일 강 하구 삼각주를 곡창지대로 품고 있는 애굽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변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으로 불렸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그렇습니다. 이 두 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은 그 두 곳의 중간에 있는 황량한 지역이라 문명의 발전이 늦었을 뿐 아니라 두 문명권이 충돌하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항상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모든 악조건 가운데도 당신의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 당신께서 일용할 양식을 풍성히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실증적인 증거로 사십 년의 광야방황 중에도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로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것도 가데스 바네야에서의 당신을 거역한 죄 때문에 광야만 방황하다 죽게 되는 심판을 내렸음에도 말입니다. 일용할 평범한 양식이라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에 젖과 꿀 같은 고급한 음식 이상으로 맛나고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적은 민족을 택해서 당신만을 의지케 한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병을 준 후에 약을 주려는 목적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모습이자 이스라엘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응분의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의도한 바가 결코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은 이스라엘더러 자기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려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민족이 아니라 한 개인을 택했다.

 

상기 본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벌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신명기는 그들이 광야를 방황하는 중에 새로 태어난 신세대에게 모세가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가장 적어서 택했다는 말씀도 모세가 출애굽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신세대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민족들을 비교 검토해서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정이 너무 딱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준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은 약 2백만 명으로 그렇게 적은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최강국 애굽의 바로가 이 백성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고 걱정할 정도였습니다.(출1:9,10)

 

이스라엘은 출애굽 전에 이미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와 맺은 언약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을 택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었습니다.(창12:1-3) 그것도 그 지역의 우상을 섬기던 가문에서 말입니다.(수24:2)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후에 얻었습니다.(창32:28) 그 뜻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뜻 대신에 당신의 택한 종으로 항상 당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것이라는 거룩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원래는 야곱의 개명한 이름 이스라엘이 그의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됨으로써 히브리 민족 전체와 나라를 대변하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열두 아들과 손주들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는 겨우 칠십 여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창46:27)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야곱 집안이라 민족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했던 집안이 애굽에서 사백 년 만에 바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창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선조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성취된 것입니다.(창15:5) 애굽으로 이주한 초기에는 요셉이 큰 공을 세웠기에 야곱의 후손 즉, 이스라엘은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얼마 안 가서 노예로 힘든 삶을 사는 가운데도 그렇게 번창한 것입니다. 최강대국의 노예로 지내니까 도적이나 전쟁의 위협이 없고 애굽도 그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숙식을 부족하지 않게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가문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뜨내기 집단이었습니다. 폭력이 난무하던 고대에서 가장 안전하게 후손을 번창시킬 수 있는 하나님만의 비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차고 넘치도록 기다리셨다가(창15:13-16)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거룩한 율법을 수여하고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조직 건국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택한 까닭은 한마디로 당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로 심판을 받고도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설파한 대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 안에 보여 알 수 있는데도 그분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고 있었습니다.(롬1:20-23) 그래서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라서 당신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계시해주고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며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것입니다.

 

십자가로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그런데 아브라함 또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정확하게는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은 그 타락의 원흉인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는 벌을 내렸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와 상관없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되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죽지만(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함), 사흘 만에 부활해서 흑암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실(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함)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 최초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했기에 원시복음이라고 칭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당신을 거역할 줄을 다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준 것입니다. 인간으로 스스로 자의에 따라 당신을 기뻐하며 교제 순종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류의 역사를 오직 이 원시복음이자 최초의 은혜 언약을 실현시키는 방식대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실현은 알다시피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그 언약이 실현되는 모습이 율법 아래에 난 자로 속량해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언급되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부터 율법 아래 있게 하여 예수님이 구속할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세우게 하고 그 운영과 통치의 기준인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준행함에 완전히 실패하고 도리어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식민지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율법을 지켜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 준행에 실패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으로 택한 셈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 어떤 민족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여 당신의 의에 들 수 없기에 그 실증적 증거를 이스라엘을 통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로선 약소국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면서 세상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보호 인도하셨습니다. 음란하게 우상숭배만 하던 세상에서 유일신 창조주 신앙을 갖게 하여서 당신의 백성답게 의롭게 살도록 율법까지 주셨습니다.(롬3;1,2) 그런 백성조차도 하나님의 의에 전혀 들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리에까지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은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본으로 선택 받은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율법은 당신의 진노를 이룰 뿐이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나, 기후와 풍토 뿐 아니라 그 민족성과 언어와 그들이 형성한 문화 전통 관습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은 그 진리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무대장치로 마련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실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계획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이 아니 아브라함이 택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특별히 이스라엘을 그 십자가가 실현되는 방향과 모습으로만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성경을 주시려는 목적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 당위성과 이유를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역사를 통해 밝혀주었습니다. 구약성경 내내 메시아가 오신다고 이백 번이 넘도록 예언하신 까닭입니다. 그 예언이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이스라엘을 이끌었으니 그들을 택한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이백 개가 넘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하는 시기와 장소와 모습도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이뤄졌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에 의해 세상에 전쟁이 중지되고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로마제국의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제국의 변방 식민지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실제로 아구스도 황제를 복음(good news=gospel)을 전해주는 자라고 신격화하여 칭송할 때였습니다. 아기 예수가 바로 그 때에 태어난 것은 현실적 안락과 풍요는 죄에 찌든 인간에게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십자가의 참 복음으로 대조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반드시 로마 제국의 십자가로 처형을 당하게끔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 나라들의 모든 역사까지 주관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만이 인간의 모든 죄악과 고난까지 짊어지신 완벽한 구속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겁하고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빌라도가 그 때 유다 총독이어야 했고 더 음흉한 헤롯이 유대 왕이어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골고다 십자가라는 창세전부터 있었던 각본에 따라 하나님이 완벽하게 주관한 것입니다.

 

복음서 기록을 잘 살펴보면 서로 원수 사이였던 유대인과 로마 이방인들이 힘을 합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사탄이 배후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인종 문화 종교에 구분 없이 미혹시키고 조종한 결과입니다. 사탄의 궤휼에 넘어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마저도 예수님이 다 주관하신 것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탄과 죄에 찌든 인간이 합작했던 그 모략을 완전히 깨트렸습니다. 흑암 아래 죄의 노예로 묶여있는 온 세상에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빛을 찬란히 비춘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전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당시 지중해 세계를 점령하여서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처럼 로마가 세상을 정복하면서 군대와 물자를 이동하기 좋게 만든 도로망이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전하기 좋게 하나님이 다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언어에는 특유의 리드미컬한 운율이 있습니다. 조상의 전승들을 암송하기 쉽게 하여서 구약성경을 대대로 기록 보존 유지하게끔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존하려는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승을 부릴 때에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한 목동에 의해 BC 2-3세기의 것으로 판명된 구약성경사본들(Dead Sea Scrolls)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그 발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구약성경이 현존하는 사본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사야서 53장이 예수님 오시기 훨씬 전에 유대인들이 익히 배워서 알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 측에선 그 기록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와 너무나 정밀하게 일치하므로 십자가 사건의 훨씬 후대 제자들 조작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발견으로 그 이론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구약성경은 원본대로 잘 보존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이사야서에서 53장을 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끝까지 당신을 거역할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일 것입니다.

 

주로 양피지에 쓰여진 성경이 이천년이 훨씬 넘는 그 오랜 세월 동안에 전혀 손상되지 않게끔 하나님이 보관해두었습니다. 아주 한적한 사해 근처의 컴컴한 동굴 안에서 가장 건조한 날씨에 따라 썩지 않도록 하나님이 숨겨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작이라는 비평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어린 목동에 의해서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해서 그것이 완전히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광대하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가 얼마나 엄청나며 놀랍고 은혜롭습니까?

 

누차 강조하지만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조성하여서 모든 인물과 사건들에 간섭 역사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라는 그 엄청난 은혜를 죄에 찌든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계획하신 때에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바로 그 장소, 그 시간, 그 모습으로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관련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죄의 본성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한 채로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같이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택하여서 믿음을 심어주시고 당신의 종으로 당신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창 12:1~3, 벧전 2:9~10)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에게 덕담을 건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기도 좋고 듣고도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렇게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연하장을 보면 거의 복(福) 자가 들어갑니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옛날에는 주발에도 수저에도 이불에도 옷에도 복 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아주 특이하죠. 중국식당 같은 데 가 보면 복(福) 자를 거꾸로 써 붙여 놓은 걸 봅니다. 여러 가지 해석에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뒤집어 놓아야 복이 하늘에서 쏟아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복을 주로 육신적 혹은 물질적인 것에 치중해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유하고 움켜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소유보다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소유하고도 누리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나누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아주 특이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리고 나누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복을 나누는 것을 가리켜 사명이라 부릅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더 큰 복이 임합니다. 그리고 큰 기쁨이 넘칩니다. 심지어 천국의 영광까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까지 복에 포함시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복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이거야 말로 참 복이요 큰 복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인데, 홍복(洪福)이란 단어가 있죠. 넓을 洪 자를 붙여서 홍복(洪福)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더 큰 복을 ‘홍복’이라고 불러봅니다.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홍복을 받기 위한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서, 아니 역사상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홍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홍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따라 하면 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비교되지 않는 참 복, 그리고 큰 복인 홍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 : 복의 근원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 지역(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땅, 고대문명 발상지)에 살던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불러내셨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집안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월신 즉 달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겁니다. 어떤 이유로 그를 선택하셨을까요? 그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축복하는 게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through you)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 보면 세 가지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큰 민족 즉 위대한 민족(great nation)을 이루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창대한 이름 즉 위대한 이름(great name)을 갖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 자체(blessing)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복의 근원’이라고 번역되어 있었죠.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것, 즉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에 보니까 그를 통해서 많은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명 인사였던 아브라함, 게다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겼던 그가 놀라운 축복을 받고, 더 나아가 많은 민족들에게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예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본래 아브람이었죠. ‘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비’ 즉 ‘많은 민족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약속,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복을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이뤄주신 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 범위가 엄청 넓습니다. 그래서 홍복이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복이 흐르고 넘쳐 많은 민족들에게 나누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의 원리입니다. 축복은 항상 사명과 짝을 이룹니다. 비유하면, 축복과 사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축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비유하면 마치 이런 겁니다. 세상의 축복은 저수지와 같습니다. 소유하고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나중에 썩어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성경의 축복은 강물과 같습니다. 축복을 받되 다른 데로 흘려보내니까 흐르고 넘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축복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창12:1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the land I will show you)으로 가라” 사람이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요즘도 그럴진대 고대에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그냥 믿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또 그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믿음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 후 아브라함이 어떻게 됐나요? 그의 생애 가운데 이 약속들의 상당 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75세까지 혈혈단신이던 그가 이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후손이 번창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세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 : 제사장 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그 다음 그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역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다르죠. 출19:5~6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my treasured possession)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을 내 소유 삼는다는 것은 특별 소유 즉 보배로운 존재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지중지하며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만 예뻐서 그런 게 아니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축복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거룩은 구별 즉 성별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민족들과 차별된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빛을 발함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 성경에 보면 ‘폰티펙스’(pontifex)라고 변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다리 놓은 사람(bridge-builder) 즉 중보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축복을 받고 끝내지 말고, 그 축복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눠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 다음에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19:5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 ”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런 이스라엘의 사명을 가리켜 ‘이방의 빛’의 역할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사49:6 “ ...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땅 끝은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혈통적인 이스라엘만 아니라 만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구약 이스라엘은 왜곡된 선민의식으로 자기들끼리만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다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는 선교가 이뤄지기는 하지만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신약 시대에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복의 근원 즉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3] 우리(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선택하신 이유 : 왕 같은 제사장

구약 이스라엘이 혈통을 중시했는데, 사실은 구약시대에도 혈통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무수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가운데 다말과 라합, 그리고 룻 같은 여인들이 모두 이방인입니다.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롬3:29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으면 다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이라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지만 이제 믿음으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는지 벧전2:9~10에 나와 있습니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던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멸망할 인생을 이제 영생을 주시고 온갖 축복을 주십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들어가게 한 겁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 더 높은 치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참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홍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저와 여러분 우리 한국인들은 정말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해 주신 게 분명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극동 아시아 귀퉁이에 있는 한반도, 그야말로 땅 끝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130여 년 전 선교사들 통해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짧은 역사 가운데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적이란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말씀드리죠. 대한민국의 3대 기적! 뭔가요? 복음화의 기적, 경제 부흥의 기적, 그리고 민주화의 기적입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축복입니다. 1천만 성도에 5만 교회의 성장은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경제의 부흥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까, 우리나라가 3년 연속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수출액이 세계 7위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60년대 3대 웃음거리가 있었습니다. 수출 1천억 달러,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달성하고 마이카 시대를 이루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그 때 웃었던 게 진짜 웃기는 일입니다. 초과 달성했죠. 이제는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 개인에게도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고, 개인차가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 수 있도록 육신적 물질적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계속 축복만 받으려고 한다거나, 혹은 받은 축복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큰일이 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잘못 하면 추락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도 부정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가요?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이 만연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지수 1위입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축복만 받으려고 해서 그래요. 이제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국가도 축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오히려 저주이죠. 복의 근원 즉 축복의 통로가 될 때 비로소 축복이 행복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행20:35 “ ...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수년 전 서울대학교에 행복연구센터가 설립되어 국민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행복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 교과서를 편찬해서 중학교 200개에 보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연구소에서 강조하는 게 이겁니다. “이웃에게 행복을 주면 당시에게 생복이 찾아옵니다.”(Giving happiness gives you happiness.) 좋은 일이기는 한데 연구할 게 뭐 있나 싶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특히 우리는 복음의 빚진 나라입니다. 100년 동안 3천명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6.25 때 16개국에서 전투병을 보내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나라입니다. 인간적인 도리로 봐서도 축복을 나눠주는 사명을 감당하는 게 마땅합니다.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축복을 나누는 제사장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흘러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물물 원리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더 흘러들어오는 원리와 같습니다. 또 눅6:38 보면, 마중물 원리가 나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펌프에 물을 조금만 집어넣어도 많은 물이 퀄퀄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참여시켜 주십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 충성한 종에게 주인이 주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축복의 통로로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면 큰 기쁨이 넘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장차 천국이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여러분, 이제 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축복을 받고 싶습니까? 여전히 물질적 육신적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죠.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차원 더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를 깨닫고 아브라함처럼 홍복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백설 공주 동화책 수준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왕자님과 만나 오래 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결코 아닙니다. 축복을 받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축복을 소원하더라도 그 다음까지 포함해서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꿈과 비전을 담아 기도하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세상을 책망하리라(요한복음 16:8) /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요한복음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When he comes, he will convict the world of guilt in regard to sin and righteousness and judgment:

죄에 대하여(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죄란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될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And so I tell you, every sin and blasphemy will be forgiven men, but the blasphemy against the Spirit will not be forgiven.

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의에 대하여(요한복음 16:10)

의에 대하여(요한복음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in regard to righteousness,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where you can see me no longer;






심판에 대하여(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and in regard to judgment, because the prince of this world now stands condemned.

이 세상 임금은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으므로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잠언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시편 50:6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