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See, I will send you the prophet Elijah before that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comes.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엘리야"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짖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을까요?
과연 그 엘리야는 누구를 말할까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케 하는 것을 전연 제외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귀절에 선지자 엘리야(세례 요한)가 그 전(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인데 그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약 시대를 두려운 날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 멸망 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한다.

선지 엘리야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눅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함은

그 때에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개척하겠다는 뜻이다.
도덕적 개혁이 진정한 종교를 발생시킬 수는 없으나, 진정한 종교가 나타날 때에 그것을 영접할만한 준비는 될 수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다(눅 3:4-6).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1-3절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위대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4절에서 7절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정의는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명확한 사랑의 정의다. 마지막 8-13절에서는 모든 위대한 은사들이 사라지더라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있을 것 중 최고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확실히 사랑 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아무런 문맥 없이 사랑을 논하는 장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12장에서 시작된 은사에 관한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자기 뜻대로 나눠주신 은사, 교회의 각 지체를 돕고 섬기기 위해 주신 은사를 풍성히 누리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고(고전 1:7), 특히 그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였다(고전 1:5).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풍성한 은사를 가지고 질서 있게 서로를 돌보기는커녕 교회 가운데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 자기 은사를 더욱 크게 사용하기 위해 투쟁했다(고전 12:25, 31). 귀해 보이는 은사를 가진 자는 자만심에 빠졌고, 약해 보이는 지체는 무시당했다(고전 12:23-25). 쉽게 말해 은사가 탁월한 슈퍼스타가 많았지만, 팀플레이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족함 없이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교회를 위해 어떻게 은사를 활용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장을 시작하기 직전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한 마디로 “이제부터 내가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이다. 은사는 반드시 사랑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nothing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1-3절까지 바울은 각각의 구절을 조건문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만일 내가…”(If I)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가정이다(“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분명히 과장이 들어있다.

조건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최대한 발휘한 장면을 과장해서 묘사한다. 당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 언어를 가리켰는데, 바울은 “천사의 말”까지 하게 될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당시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의 일부를 전달하는 말씀 선포였는데, 바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라고 과장했다. “믿음”에 대해서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고 했고, 구제와 섬김에 대해서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과장법을 사용한 이유는 조건절 뒤에 반복해서 강조되는 이 표현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그 유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방언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을 달달 꿰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기는 대단한 일을 믿음으로 행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가진 소유물과 몸뚱이를 다 내어줘도 아무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살펴본 대로 고린도 교회엔 “언변과 지식”에 관한 은사가 풍성했다. 그래서 서로 방언과 예언을 하기 위해 싸우느라 모일 때마다 무질서한 예배가 벌어졌다. 누가 더 유창한 방언을 구사할 것인가? 천상의 소리를 낼 것인가? 누가 설교의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강단에서 불을 내릴 것인가? 탁월하고 지혜로운 지식을 쏟아낼 것인가? 누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가진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아무리 대단한 방언, 심지어 천사의 말을 구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쓸데없는 소음에 불과하고, 아무리 대단한 비밀과 지식을 설파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낫 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침의 은사가 사랑 없이 사용될 수 있을까? 나중에 4-7절까지 사랑의 아름답고 명확한 정의를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잠시 대략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이 사랑 없이 가르침의 은사가 사용될 수 있는 맹점을 보여줄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4절)

먼저, 오래 참음과 온유함 없이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가르침이다. 오래 참음과 온유는 굉장히 유사한 개념이다. 둘 다 절제와 관련된 덕목인데, 오래 참음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육신의 반응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라면, 온유는 그 대상에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권리를 내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덕목에 있어 가장 본이 되는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을 때 욕으로 갚지 않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권세로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벧전 2:23).

강단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사적으로 무언가 가르칠 때,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쉽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령 상대방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길 때, 우리는 참지 못하고 육신 적인 분노로 반응할 수 있다. 신실하게 말씀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을, 우리는 그 먼지를 상대방 머리 위에 부어버리고 싶어 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상담할 때, 목사나 교사가 가진 권위를 합당하지 않은 사사로운 이유로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때가 바로 우리의 가르침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때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 자의 영혼이 잘됨 같이 그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는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옛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내세울 만한 권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상대방의 선을 위해 절제하며 가르치는가?

사랑은…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절)

당신의 가르침에 시기, 자랑, 교만이 들어있다면 그 은사가 활용되는 것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여러 설교자가 있는 목회 현장에서 함께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협력 목자가 되기보다 더 많은 양을 자기편으로 끌고 가기 위한 경쟁 관계가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더 많은 성도가 따르는 설교자를 시기하고, 누가 그를 칭찬하거나 그 사람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우연이라도 듣게 되면 분노한다. 고린도 교회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품었던 마음이 바로 시기하는 마음이다.

설교 시간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봤는가?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자기 자랑을 한다. 혹은 교회 자랑을 한다. 설교 영상을 보고 외부에서 많은 사람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설교한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자랑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자기 의를 내세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교묘하게 자기 자랑을 한다. 자기가 이룬 업적과 자기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성경을 일천 번 읽었다고 자랑하거나, 어마어마한 헌금을 한다고 자랑하거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 얼마나 잘 됐는지 자랑하거나,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지 말하기 바쁜 설교자의 가르침을 들을 때, 거기에 얼마나 사랑이 담겨 있는지 생각해보라. 사랑은 절대로 시기나 자랑이나 교만과 함께할 수 없다. 그런 설교는 사랑이 없는 설교로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주께 모든 것을 받은 종은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구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성도 중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은 그 은사를 무례하게 행했는데, 성도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고, 그래서 무질서하게 은사를 사용했다. 방언을 사용할 때 통역이 없어 아무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데도, 자기 유익을 위해 유창한 방언을 구사하기 원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는 아주 무질서한 혼돈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무례함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유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사람을 충분히 배려한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예의를 갖출 것이다. 은사는 그 성격상 자신이 아닌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은 은사의 본성을 거스른다. 그래서 은사를 활용하는 동안(가르치는 동안) 듣는 이에게 무례하게 행하는데도 자기 유익을 추구하느라 그 폐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울리는 꽹과리처럼 유익이 없는 것이다.

교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 은사를 활용할 때 혹 무례히 행하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설교 시간에 특정인의 범죄를 지적하거나, 청중이 모두 아는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고 설교를 하거나, 초청받은 교회에 가서 부탁받은 것과 상관 없이 그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가르침을 주거나, 공격적인 말투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 등으로 충분히 불쾌감을 줄 수 있다. 그때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무례한 가르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팽배했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분열의 문제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가장 먼저 이 문제를 다뤘는데,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당을 지었다(고전 1:12). 이러한 분열은 그들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쾌감(성냄)이나 원한(악한 것을 생각). 이러한 악덕은 가르침 중에도 묻어 나왔을 것이다. 예언의 가르침을 마치고 나면 몇몇 사람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게 되어 있었다(고전 14:29). 바울이 지적한 분열의 문제가 심각했다면, 서로의 가르침을 분별할 때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일은 예리한 칼을 다루는 일과 같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쪼개는 양날 검과 같이 진리는 날카롭다. 가르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씀을 사용하면, 말씀은 영혼의 병든 부분을 도려내고 건강하게 만들어주지만, 분노와 원한으로 사용하면, 건강한 영혼을 해치고 병들게 할 수 있다.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다른 교회를 비난하거나, 원한이 있는 다른 교회를 조롱하기 위해 가르침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나를 비판한 타 교회 목사의 가르침을 이단처럼 묘사하거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잘못을 공적인 가르침 시간에 끄집어내어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은사 주의 교회나 기독교 번영신학을 퍼뜨리는 사람의 예시를 들 때 주의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게 분변하는 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그 분별을 사랑으로 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리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아무런 유익도 의미도 없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1-2절에 조건절로 설명한 방언(심지어 천사의 말까지 하는), 예언(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에 관한 가르침)에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이나 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가르침이 정말 위에서 제시한 사랑의 덕목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 사랑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6, 7절을 다루지 않았다. 

성범죄를 일으키고 나서 회개도 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는 한 목사의 교회 성도에게 “당신은 그의 죄가 아무렇지도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목사의 설교에서 나오는 능력을 보면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사용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수사학에 뛰어나고 청중을 울고 웃게 하며 어쩌면 영적 교훈을 가슴에 콕콕 박아주는 달변가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그 목사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절에 나오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랑의 특성 때문이다.



1.내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과 소질과 스펙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2.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사랑은 자신의 이익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장 4, 5, 7절

3. 사랑은 진리에 기뻐하며, 의롭지 않은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이 곧 관용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6절

4.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이다. 모든 지식, 은사, 능력 위에 사랑이 있다.
바울은 지속해서 지식, 은사, 능력의 기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3장 8~12절

5. 믿음, 소망, 사랑 모두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의 근본은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성경의 이해를 위한 과학적 근거 - 천둥과 번개. 실험실의 비밀 유투브(부활).



1. 번개와 천둥

옛날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는 하늘이 노해서 벼락을 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하늘의 신들 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인 제우스가 번개를 만든다고 믿었다.
번쩍이는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는 무서운 대상이자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하늘의 노여움?

실제로 천둥과 번개란 무엇일까?
국어표준대사전을 보면 천둥은 ‘뇌성과 번개를 동반하는 대기 중의 '방전 현상’으로 그리고 번개는 ‘구름과 구름, 구름과 대지 사이에서 공중 전기의 방전이 일어나 번쩍이는 불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실, 천둥이란 용어는 ‘하늘을 치다’라는한자어 천동(天動)에서 비롯한 말이다.


천둥과 번개 연구의 시작 – 프랭클린

천둥과 번개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부터 천둥과 번개도 전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1750년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프랭클린은 번개가 정전기와 같은 에너지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계획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1752년에는 진위가 확실치는 않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천둥과 번개가 치는 빗속에서 연을 띄우는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먼저 연을 늘어뜨린 다음, 연줄 끝에는 감전을 방지하기 위해 젖지 않은 명주 헝겊을 감았다.
그리고 연줄과 명주 리본을 연결한 자리에 금속열쇠를 매달고 연을 하늘에 띄웠다.
손을 금속열쇠에 가까이하면 구름 속의 전기가 내려와 있다가 손끝에 전달돼 방전하여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 느껴지고 관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연줄에 달린 열쇠에 손을 갖다 대자 손과 열쇠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열쇠를 '라이덴병'(전기를 저장해 두는 유리병)에 대고 전기를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연의 실험’으로 유명한 이 실험을 통해 프랭클린은 전기와 번개의 방전은 동일하다는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연구결과를 이용해 구름과 지면 사이로 전기가 흐르는 벼락의 피해를 막아주는 피뢰침을 만들었다.
피뢰침은 ‘프랭클린의 막대(Franklin's Rod)’라고도 불렸다. 

번개는 방전 현상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것은 적란운으로 불리는 소나기구름이다.
적란운은 위아래로 긴 구름으로 두께가 6~8킬로미터에 이르는 아주 두꺼운 구름이다. 적란운은 두께가 두껍기 때문에 낮은 고도에서는 물방울 그리고 꼭대기 근처에서는 얼음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적란운은 지표면이 매우 뜨겁게 가열될 때 많이 생기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북태평양고기압이 발달하는 여름철에 많이 생긴다. 여름철에 지표면이 가열돼 강한 상승기류가 생기고 상승된 공기는 포화·응결돼 소나기구름으로 발달한다.

구름은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들이 모인 덩어리인데, 구름을 구성하는 물방울이 상승기류로 인해 파열되면 파열된 물방울은 양으로 대전되고 주위의 공기는 음으로 대전한다. 보통 양으로 대전된 물방울은 위로 올라가고 음의 전하는 아래쪽에 머무는데, 이때 구름 속에 있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또는 구름의 음전기와 지면의 양전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전기가 번개이다. 즉, 번개는 구름과 구름 사이 또는 구름과 대지 사이에 일어나는 방전현상이다.

천둥은 번개로 가열된 공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나는 소리

번개가 치면 순간적으로 온도가 30,000도 가까이 상승하는데, 이 열에너지에 의해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가열되어 부피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나는 소리가 천둥이다. 천둥과 번개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번개는 빛의 속도로 그리고 천둥은 소리의 속도로 오기 때문에, 번개가 친 다음에 천둥소리가 들려오게 된다. 천둥이 들리는 범위는 약 20킬로미터이나 때에 따라서는 약 40킬로미터의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경우도 많다. 번개로부터 천둥까지의 시간(초)에 음속인 340미터/초를 곱하면 천둥이 일어나는 곳까지의 거리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천둥과 번개의 근원지에서 가까이 있으면 천둥과 번개를 동시에 듣고 보게 되며 멀어질수록 천둥과 번개의 시간차가 커진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1천6백만 건의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발생하고 있다.


1년에 1km2당 발생한 번개 빈도를 나타낸 세계지도. 콩고에서 가장 많은 번개가 발생했다.

노랑으로 갈수록 빈도가 높다. <출처: (cc) Citynoise at en.wikipedia>

일반 번개의 1,000배 이상 - 고층대기에서 발생하는 메가 번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번개는 구름 아래에서 생성된 것이지만, 구름 위에서 생기는 특수한 번개가 있다. 바로 ‘고층 대기 극한방전’ 현상인 ‘메가 번개(Megalightning)’가 그 주인공이다. 메가 번개는 구름 위에서 1밀리 초(1/1,000초)~1초 동안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번개인데, 크기가 수십 킬로미터로 일반 번개보다 1,000배 이상 크다.


1989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로버트 프란트 박사에 의해 메가 번개의 일종인 스프라이트가 최초로 관측됐으며, 최근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움란 이난 교수팀에 의해 스프라이트가 초고속카메라로도 촬영됐다. 그 결과 스프라이트는 고도 80~140킬로미터의 전리층에 발달하는데, 가로 40킬로미터 세로 75킬로미터의 거대한 해파리를 닮은 모양이며, 붉은색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속시간은 10~100밀리초(1밀리초=1,000분의 1초)이다. 스프라이트는 지상에서 벼락이 칠 때 함께 발생한다. 과학자들은 양전하와 산소 분자가 부딪혀 스프라이트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스프라이트.

다른 메가 번개인 블루 제트(Blue Jet)는 푸른색으로, 구름위에서 우주 방향으로 솟구친다. 고도 40~80킬로미터까지 치솟는데, 지속시간은 0.1~1밀리초로 스프라이트보다 짧다. 1989년에 호주지역을 통과하던 우주왕복선에 의해 최초로 관측됐다. 2001년 9월 14일 아레시보(Arecibo) 관측소가 관측한 블루 제트의 속도는 초속 50,000미터~250,000미터에 이르렀다. 엘브스(ELVES)는 수평방향으로 나타나는 메가 번개인데, 1990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는 대서양에서 고도 100킬로미터에 형성된, 붉은 색을 띄는 지름 400킬로미터인 도넛 모양의 엘브스를 촬영했다. 지속시간은 1밀리초이다. 그러나 메가 번개는 하늘 높은 곳에서 발생하고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에 아직까지 자세히 연구되지 못했다.

국내에서 메가 번개 관련 연구현황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다. 다만, 2009년 9월 18일 이화여자대학교 박일흥 교수팀이 국내에서 제작한 추적망원경(MTEL)을 우주로 발사하여 이를 통한 메가 번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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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 번개의 비밀(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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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s of Faith 실험실의 비밀(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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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01 / 24 / 2024 - )의 단계와 성령의 단계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는 것은 말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았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기근이 오자 애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또한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안 믿은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고 해도 순종한 것입니다.

이 때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좋은 예가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해도 사랑하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해도 내 욕심 때문에 잘 베풀지 못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들처럼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차이가 나니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유혹에도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고 악인들에게 미혹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보다 성경 말씀을 더 따라야 합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들의 믿음도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 정도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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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믿음(530) 에무나(ĕmûwnâh) אֱמוּנָה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ĕmûwnâh ]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 '그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영', '생명'(KJV,RSV)이라 번역할 수 있고, '욕망','욕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접미사 '그의'는 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펠라'는 '아팔'의 푸알형으로 본래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민 14:44). 이는 교만한 자의 심중이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런 심적 상태를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3:4,5; 40:10; 96:13; 119:75,138; 143:1).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친다.

믿음이란?

1. 정직한 것에서 시작한다.

2. 교만하지 않은 것이다.
-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나서는 것(민수기 14:44)

민수기 14:41-44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 의를 실천하려는 변함이 없는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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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공동번역)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새번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믿음이 적은 자들아(3640) 올리고피스토스(ŏligŏpistŏs) ὀλιγόπιστος, ον   

1. 믿음이 작은.  2. 마태복음 6:30. 3.  마태복음 8:26
발음 [ ŏligŏpistŏs ]
어원  / 3641과 4102에서 유래

뜻 풀이부
1. 믿음이 작은, 마 6:30, 8:26, 16:8, 눅 12:28.

적은(올리고스.  ŏligŏs) 3641  ὀλίγος, η, ον

1. 적은.  2. 두셋의.  3. 많지 않은
발음 [ ŏlig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피스티스(pistis)  4102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pĕithō ]

뜻풀이부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 18:4, 19:29.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 5:11, 갈 1:10.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 12:20, 14:19, 갈 1:10.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 28:14, 달래다, 요일 3:19.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 11:22, 갈 5:10, 빌 1:14.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 2:19, 히 13:18, 빌 1:6.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 17:4.
  b. 복종하다, 따르다, 롬 2:8, 갈 3:1, 히 13:17.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 20:6, 롬 8:38, 히 6:9.




오늘 있다가(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아궁이에(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들풀(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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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개혁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은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이것도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며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대부분 개혁교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8:15-17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19:1-7
1. 아볼로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믿는 것과 아는 것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성경 : 마태복음 16:15-17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란 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때문에 진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요14:12절은 금요기도회 때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7-9/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행17: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2: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그래서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지막 특징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계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엡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Question

하나님을 만나는 것
1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난생 처음 듣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신비적인 것인지? 아니면 지식적인 것인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Answer

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선지자들....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은혜로 대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 즉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며, 기도하고, 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복음의 일꾼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담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아룁니다.
그리고 찬송을 통해서 감사를 표현하고 그 이름을 높입니다.

3.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교회를 오랫 동안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공통점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아지지 않고, 찬송을 불러도 은혜가 되지 않으며, 자기 열심으로 말씀을 지키다가 교만해지거나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요 3장을 보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이며 선생이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였습니다.

4.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다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를 하다가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치의 병을 고침받음으로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도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나님을 만나시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1.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본다.
이 대답에 진심으로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면 이미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완료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만일 1)번의 질문에 "글세요!"나 "No"라고 대답한다면, 먼저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경우에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3. 기간을 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간절히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며 기도할 때에, 반드시 약속 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마태복음 6:28)


들의 백합화(마태복음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11            




백합화(크리논. krinŏn) κρίν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2918

1. 백합.  2. 마 6:28. 3. 눅 12:27.
발음 [ krinŏn ]

뜻풀이부

1. [기본형] 백합, 마 6:28, 눅 12:27.

한국의 백합화는 하얀색의 고결한 모습으로 부활주일에 강단 장식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백합화는 한국의 백합화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를(크리논, 마치 한국의 민들레) 말합니다.
야생화의 특징은 강한 생명력을 말합니다.

꽃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꽃에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백합화(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하여 보라(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세상의 염려는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꼭 일어날 일인 것처럼 염려를 했습니다.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처럼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까?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할까? 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염려를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도 없는 염려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준비하신 일에도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쓸 것들을 미리 다 아시고 준비하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염려를 했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괴롭게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알아서 맡아서 모두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염려는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행복한 내일을 기다리는 염려입니다.

기도로 이어지는 행복한 염려가 요즘의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는 먹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염려나 고통스러운 염려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잠자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 입고 사는 것도 참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계절이 뚜렷하게 변하는 우리나라는 철 따라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입을 옷도 많지 않았습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아이들이 가장 많이 기대하는 것이 새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아무 때나 옷을 사서 입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런 명절이 되어야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형제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많은 형제들에게 다 새 옷을 사 줄 수 없으니까 큰 형에게만 사 주고 동생들은 형의 옷을 물려받아서 입었습니다.
다 클 때까지 새 옷 한 번 입지 못하고 자란 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수고와 김쌈이라는 말을 같이 썼는데 정말 수고를 많이 해야 하는 일이 길쌈입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는 삼베옷이나 모시베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삼나무나 모시나무의 껍질로 만든 옷감을 말합니다.
나무의 씨를 뿌려서 자라면 잘라다가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 가느다랗게 찢어서 한 올 한 올 이어서 씨줄과 날줄로 베를 짜면 옷감이 됩니다.
말은 쉽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오늘날에는 길쌈을 하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면으로 만든 옷도 많이 입었습니다.
면으로 만든 천은 고려시대의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서 재배에 성공을 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목화나무를 심으면 열매 속에서 하얀 솜이 나옵니다.
그 솜으로 실을 만들어서 만든 천이 면입니다.
명주비단은 어디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누에를 키워서 누에가 입으로 실을 뿜어서 자기 집인 누에고치를 만들면 그 누에고치를 뜨거운 물에 넣고 삶아서 그 실을 다시 뽑아내는 것입니다.
길쌈은 참 어렵고 수고가 많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노력 때문에 의복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의복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인간들처럼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기 때문에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백합화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의 대표적인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합화를 보라고 할 때 꼭 백합화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생에서 자라는 들꽃들이나 이름 없는 들풀들까지도 다 입히시고 기르시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다음에 또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는 그래도 스스로 움직이면서 노력하면서 먹고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는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노력도 없이 피어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은 지는 들의 꽃과 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만물의 으뜸으로 특별히 만든 너희 인간들을 입히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돌보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하게 만드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의복을 위해서 걱정을 한다고 할 때 입을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라고 걱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어야 더 멋있게 보일까, 더 아름답게 보일까, 더 고급스럽게 보일까, 이런 것 때문에 염려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옷을 입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왕들이나 제사장의 옷도 아주 화려하게 입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 사극영화를 보면 신분에 따라 옷 입는 것이 다릅니다.
왕이나 신하들은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평민들은 그저 보통의 옷들을 입습니다.
오늘날도 그 사람이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아주 값이 비싼 일류메이커의 옷을 입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는데 정말 좋은 옷을 입으면 더 잘생긴 것 같고 못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도 비싼 옷을 사 입고 싶어 합니다.
학생들도 메이커가 없는 옷은 입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별 것도 아닌 옷들을 아주 비싸게 만들어서 그 옷을 입어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유혹을 합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옷 메이커가 있는 옷을 사 입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유행 따라 화려한 옷을 입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이 그 영광으로 입은 옷과 백합화가 입은 옷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최고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위가 왕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에 최고의 비싼 옷을 입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였기 때문에 당대의 최고의 디자인을 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아무리 최고의 기술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솜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 한 송이에게도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하얀 백합화, 빨간 장미, 코스모스, 국화 꽃,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예쁜지 키워보지 않으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 꽃들이 다 하나하나 자기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피었다가 지고 또 피는 것이 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그렇게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람은 겉만 화려하게 갖춘다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갖추어야 되는데 겉모양만 화려하게 갖추면 오히려 위선자가 되고 냄새나고 추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을 들에 핀 한 송이 꽃만도 못하다고 평가절하를 하셨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솔로몬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백성을 착취해서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군대를 강하게 하고 오직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특별한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영광은 돌리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 중에서 하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하는 구두를 신고 고급시계에 비싼 반지를 끼고 온갖 멋을 부리는 목사를 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와서 하나님 말씀이나 바르게 전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서 성도들이 충성을 해서 아무개 장로가 이 시계를 해 주고 아무개 집사가 이 양복을 해 주고 그런 자랑이나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고 말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고백한 그 사연도 알지 못하고 헛된 것 자랑하면서 들꽃 하나만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에게 배우는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이상야릇하고 사치스런 의복에 욕심을 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과 많은 물질을 투자하면서 유행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이런 사치와 자기 자랑을 극심한 죄라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성도들의 죄를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데 대해서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속사람은 그대로 두고 겉만 화려하게 가꾸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좋은 옷으로 사치를 하려는 것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옷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자기 자랑을 위해서, 자기 신분의 향상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치를 하기 위해서 염려하는 성도들에게도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비단 입는 옷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세상의 쾌락을 따라, 세상에서 더 화려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아보려고 하는 타락한 삶을 사는 인생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름 없는 들풀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없어지는 들풀도, 그가 살아있는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특별한 신분을 주시고, 자녀로까지 삼아 주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자기를 들어내려고 애를 쓰고, 얼마나 더 쾌락을 누리며 잘 살아보려고 염려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을 주신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 라고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옷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믿음이라는 말까지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맨 처음 옷을 입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입은 것이 최초의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짐승을 잡아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히셨습니다.옷은 죄를 가리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옷은 우리를 멋있게 폼 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가려주는 수단입니다.
옷을 잘 입어서 화려하게 치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옷을 입고 사는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아마 우리들에게는 형편없이 더러운 죄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고 있는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그런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 앞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서신 분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 깨끗한 세마포 옷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가려주는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를 때, 날 대신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에게 깨끗한 세마포 흰옷을 주시는데 그 옷은 나의 모든 죄악들을 완전히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옷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은 그 화려한 옷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그 세마포 흰옷이 나의 모든 죄를 가려주어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초라한 옷을 입고 살았든지 세상에서 내 신분이 어떠했든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보든지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깨끗한 세마포 흰 옷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이 세마포 옷을 주신다고 했는데 믿음이 없는 자처럼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없어서 먹을 것 때문에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그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좀 더 화려하게 살고 싶어서 좀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기 위해서 염려하고 계십니까?
그 염려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염려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시기 위해서 세마포 흰옷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마포 흰옷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 춤 출 그날을 바라보면서 염려를 다 버리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지에서 백합화는 어떤 꽃일까?

성경의 꽃 중 가장 잘 알려진 꽃이면서 가장 논쟁적인 꽃이 백합화다.
성지를 30여 년 간 가이드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백합화와 샤론의 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솔로몬과 연관돼 있고, 예수님의 꽃이요, 후에 예수님이 솔로몬과 백합화를 함께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백합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아마도 백합화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여기서 백합화가 어떤 꽃 이길래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 보다도 아름다운가?
게다가 여기에 쌍벽을 이루는 연관된 꽃이 샤론의 꽃이다.
아마도 찬송가 '샤론의 꽃 예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늘 궁금해 지는 꽃이다.
이 두 꽃이 연관이 되는 것은 바로 아가서 2장 1절에 함께 나온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백합화(쇼샨)로다"

백합화가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곳이 아가서다.
구약성경에 총 12번이 언급되는데 아가서에서만 8번이 나오니 말이다.
아가서에서는 수선화와 백합화가 함께 등장하며 이후 백합화라고 언급된 히브리어 꽃명은 쇼산나다.
함께 등장한 수선화는 하브쩰레트.
즉 샤론의 하브쩰레트요 골짜기의 쇼산나로다.
분명 다른 두 꽃인데 칠십인역과 라틴역에서는 이 두 꽃을 구분없이 봤다.
그게 반영된 것이 이사야서 35장 1절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하브쩰레트)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이 구절에서 아가서에서 수선화로 번역된 하브쩰레트를 이사야서는 백합화로 본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두 꽃을 같은 꽃으로 번역한 문학적인 관점. 왜 같은 꽃으로 보았을까?
이 관점이 이미 성지의 백합화가 무엇이냐에 힌트를 갖고 있다.

아가서에서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 한 것은 문자적인 두 꽃 이라기 보다는, 문학적인 들꽃의 총칭으로서 산지 골짜기의 백합화에서부터 해안평야 샤론의 수선화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피는 들꽃들이라는 것.
마치 한라에서 백두까지가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듯이, 또 창세기의 여자와 남자를 만드셨다는 표현도 모든 인류를 만드셨다라고 보는 문학적인 표현 말이다.

이 두 꽃을 혼용했던 중세시대 이후, 근대에 성경신학이 발달하면서 다시 쇼샨나는 백합화로 하브쩰레트는 수선화로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꽃은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쇼산나(백합화)는 세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하브쩰레트(수선화, 또는 들꽃)는 여러 줄기로 뻗어난 꽃으로 특징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절을 통해 설명하면, "주는 저산 밑에 백합" 할 때 백합은 쇼산나, "샤론의 꽃 예수" 할 때는 샤론의 꽃은 하바쩰레트(수선화 또는 들의 꽃)이다.

성지순례시 가이사랴-갈멜산을 오갈 때 샤론평야를 지나며 종종 부른 찬양이 '샤론의 꽃 예수'이다.
봄철의 차창 밖에 펼쳐진 그 수많은 꽃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진한 붉은 색 아네모네다.
그리고는 "저 돋보이는 붉은 꽃이 아네모네인데 바로 성경의 백합화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아네모네가 백합화가 되었는가?

"들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성지에서 아네모네를 가르키며 저 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라 하면 의하해 한다.
"흰색의 꽃이 아니였어요? "라고 되묻는다.
백합화는 흰꽃이라 생각했는데 붉은색 아네모네라니.
심지어 성지에서 백합화는 아네모네뿐만 아니라 들녘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을 백합화로 부른다는 것에 다시 한번 의아해 한다.
백합화를 이해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백합화의 백자가 흰백자가 아니라 일백백자라고 알면 된다.
그래서 백합화는 성지의 들에 피는 백 여 가지나 되는 들꽃의 총칭인 것이다.

들의 핀 아네모네를 보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백합구나"라고 생각하면 무난하다.
그러나 "근데 왜 붉은색 아네모네가 백합화지?" 라고 생각하면 아주 복잡해진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백합화가 붉은색 아네모네가 됐는가?
구약에서 백합화로 언급된 히브리어 이름인 '쇼샨나(쇼산)'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흰색 백합화(lily) 꽃들이 나타나고, '하브쩰레트'를 검색하면 나르키스(Narcissus)과의 여러 꽃들이 보여진다.
모두가 흰색의 꽃들이다.
붉은 색 꽃은 없다.
그런데 성지에서는 붉은 색 아네모네를 백합화라 소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주셨던 갈릴리의 산야에 피어난 봄꽃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바로 붉은 색의 아네모네다.
성지의 봄을 아름답게 수놓은 붉은 색의 꽃으로 치자면 당연히 아네모네가 있고 여기에 양귀비 아도니스가 모두 백합화에 해당한다.
피어나는 순서도 아네모네가 가장 먼저 피어나고 아도니스 그리고 양귀비가 이어 피어난다.
그러니 성지 봄은 1월부터 5월까지 온통 붉은색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하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입술을 백합화(아 5:13)로 비유한 것을 보면 백합화는 당연히 입술처럼 붉은색이 됐을 것이다.
이미 4장에서 네 입술은 홍색 실 같다(아 4:3)고 하니 두말할 나위가 없이 붉은 색이다.
여기에 더해 솔로몬 왕의 자주색 옷이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홍의에서도 자연스럽게 붉은색이 도출된 듯 하다.
성지에서 붉은색을 품은 대표적인 꽃이 아네모네인 것이다.

쇼산나(백합화)는 구약성경에 총 12번 언급되는데 그 중 8번이 아가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고 보면 솔로몬은 백합화를 참 좋아한 듯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전은 바로 이 솔로몬이 입은 그 어떤 의복도 이 백합화만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네모네는 성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꽃임에는 틀림없다.
솔로몬의 아름다운 의복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리라는 예찬은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이렇게 산천에 스스로 피어나니 말이다.
특히 더 아름다운 것은 토양이 좋은 꽃밭이 아니라 돌짝밭의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어로 아네모네를 칼라닛이라 부른다.
신부란 뜻이다. 봄의 신부.
참 어울리는 이름이다.
성지의 백합화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가시밭에서 더욱 돋보이는 꽃이기 때문이다.
황무지의 땅 가시밭에 대조되며 그 아름다움이 더욱 고조된다.
다음의 가사도 성지의 현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사실 백합화란 꽃이 어떤 꽃이냐는 것은 단지 사전적인 관심일 수 있다.
무슨 꽃이냐는 논쟁보다 그 꽃이 왜 언급되었는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들의 꽃은 그저 흔한 꽃이지만 인간이 온갖 권위와 사치로 꾸며놓은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아름답다는 것이요,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비유한 것이고, 이사야서에서는 황량한 사막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향기와 시각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쇼산(백합화)이 진짜 어떤 꽃인지 궁금해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성막의 놋바다를 설명하며 쇼샨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고 그 둘레는 잔 둘레와 같이 백합화의 모양을 만들었으니(대하 4:5, 왕상 7:26)" 놋다바의 모양을 했던 그 백합화가 진짜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들의 백합화, 아네모네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는 아네모네라는 아리따운 시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 바람의 신 제프로스가 아네모네를 사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포모노 궁전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제프로스는 아네모네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사랑을 이어갔고, 도저히 그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플로라는 마침내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꽃이 되자 바람의 신 제프로스는 그녀를 잊지 못해 봄이 되면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을 보내 화려한 꽃을 피게 했다.
그리하여 이 꽃에 ‘바람꽃’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아네모네의 꽃말과 관련된 이야기다.
해마다 2월말에서 3월이 되면 성지에는 아네모네가 만발하는데, 호수 주변에서 노란 겨자 꽃과 섞여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볼 수 있었다.
아네모네는 자생하는 빨간 들꽃으로 키가 작다.
바로 이 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百合花)’라고 한다(마 6:28).

* 일백 백, 합할 합, 꽃 화 -

그런데 어떻게 빨간 꽃을 백합이라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백합이란 ‘흰 꽃’이 아니다.

백은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이다.
백 개의 인편(鱗片)이 하나의 구근(球根)을 이루고 있어서 백합(百合)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꽃을 주님이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로 보는 이유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을 주신 장소가 갈릴리 호수 주변이고,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 아네모네는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꽃으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가(슬픔과 죽음의 의미) 그림 안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피사 대성당의 움베르토가 성지에서 가져온 흙 속에 아네모네의 알뿌리가 있어 이 흙을 사용한 십자군 순교자의 묘지에서 피와 같이 붉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순교자의 피가 되살아 난 것이라 믿게 되었고, 그후 유럽에서는 기적의 꽃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주님의 피에 비유되는 꽃이기도 하다.

들꽃이 만발한 성서의 땅을 순례하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는 말씀이 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판이나 사람이 보지 않는 숲속이나 나무 사이 여기저기 빨갛게 피어있는 아네모네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노란 겨자 꽃 만발한 들녘에 마치 빨간 점을 찍어놓듯 피어있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이런 대자연의 캔버스에 이런 엄청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들꽃 하나도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들의 백합화를 보라!’
들의 달맞이꽃을 보라!
들의 은방울꽃을 보라!
들의 패랭이꽃을 보라!
저 들의 한 떨기 이름 없는 꽃을 보라!
그 분의 형상인 자신을 보라!......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