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나드 한 근 / 300데나리온



순전한 나드 한 근에 담긴 존재와 삶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중략)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게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중략)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1~9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인에 대한 묘사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직접적으로 밝힌 요한복음과 달리,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한 여인', 심지어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앞 장면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신의 절망과 상실감에 매몰되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심각한 불신앙과 원망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시몬)은 여인이 주님께 향유를 부을 때 죄인이 기름 붓는다는 점에 주목해 예수님을 판단하려 했다.
결국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왔던 것이고 그 때문에 주님 발 앞에 철저히 엎드렸던 것이다.

​향유 옥합과 여인의 태도에 대한 묘사

4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지극히 값진 향유'라고 설명하는데, 특별히 '순전한 한 나드' '옥합'으로 묘사된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이같은 향유는 당시 화폐가격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인데, 장례에도 쓰였고 여인이 혼인할 때 예물 혹은 지참금처럼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 부음이라고 묘사했다. 과연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던 의미를 정말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마리아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나의 이해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께 순간의 불신으로 얼마나 큰 불경죄를 지었고 그것이 주님께 아픔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지극한 회한과 슬픔으로 마리아가 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믿지 못했고 주님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 죄로 인해 주님과 끊어지고 멀어졌다는 절망과 죄책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길... 그것은 미천한 자신이 주님 발앞에 고꾸라져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굴복시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순전한 나드 향유는 공기 중에서 변질되기 쉽기 때문에 밀봉된 옥합에 담겨 있었고, 그 옥합을 깨뜨릴 때 딱 한 번 쓸 수 있는 소량이라서 진귀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는데, 젊은 여인에게 머리카락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자신의 존재와 모든 삶을 통째로 드려 주님을 경배했다. 나의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것만 택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러지지 않은 가장 깊고 은밀한 심연의 한가운데서부터 끄집어올려진 100% 순복, 헌신의 의지가 주님께 '순전한 한 나드'이며 이것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는 것이 가장 투박하고 진심어린 행위이다.

올해 이 말씀을 레마로 받은 나의 존재가 주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드려져야 했다. 무익하고 죄인 그대로인 나는 왕 되신 주님 앞에 내 존재가 철저히 깨져야만 주님께 드려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어둠과 쓴뿌리, 정욕과 아집, 불신앙과 죄성까지 까발려지고 온전히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굴복시켜야 한다. 마리아도 이 아픔과 온전한 헌신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온전한 신부이자 제자로 변화할 수 있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구속 사역에 일부로 끼워맞춰졌던 것이다.

​주변인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

앞서 말했듯이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건을 통해 마음 속에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여인을 죄인으로 정죄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목소리 높였으며, 심지어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악심을 품었다. 요한복음의 말씀에서는 특히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가룟 유다의 은밀한 악심을 지적함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심중까지 다 알고 계심을 전하는 것 같다. 나는 내적 고통과 어둠의 심연을 뚫고 나아가 주님께 바쳐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주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편에 서서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존재가 될 것인가?

​예수님의 결론에 대한 묘사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여인의 행위가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대단한 영광 아닌가?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표현보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더라'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썼다. 사도 요한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이 장면을 온전히 예수님의 관점에서 느끼고 기록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사랑과 믿음이 '향기'라는 감각으로 기억되었고, 이후의 세대에 여인의 믿음이 기억되리라는 예언을 이같은 감각적 묘사로 아름답게 기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 역시 감동적이다. 회한과 눈물로 드렸던 마리아의 절절한 사랑이 주님께 인정받고 죄사함을 받는 대목이 참 아름답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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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1. 옥합을 깨뜨린 향유[나드]는 무엇일까?

성경에 나오는 나드(또는 나도)
(막 14:3∼9)와 (요 12:3∼8)에, 순전한 나드는 값비싼 향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값은 1옥합(향수병)에 300데나리온이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품삯에 해당되므로, 300데나리온이면 약 1년치의 품삯에 맞먹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박물학자 프리니는, 나드 향유의 원료가 되는 나드초의 뿌리 1파운드(453g)의 가격이, 100데나리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름을 짰으므로 10∼15배의 높은 값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나 히브리인들은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화한을 손님의 머리에 씌울 뿐 아니라,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시체를 장사할 때에도 향유를 발라서 방부처리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귀한 손님(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분)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값비싼 나드 옥합을 깨뜨려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이를 보고 비싼 것을 낭비했다고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고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시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아가 1:12에서 "왕의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라고 말했고, 아가 4:13에서는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다"라고 했으며, 아가 4:14에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모든 귀한 향품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들은 나드가 비싸고 귀한 무역상품으로, 왕이나 부자 또는 귀족들만 쓸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토록 값비싼 나드는 무엇이었을까요?

2. 나드는 무엇인가?

나드는 히말라야 산맥의 3,000미터 고지에 자생하는 마타리과에 속한 다년초입니다. 히말라야, 부탄, 네팔, 티베트, 인도동부 등이 나드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드는 인도산의 다른 향료나 약제와 함께 중동지역으로 거래된 역사가 오랜 진귀한 향료였습니다.

나드는 학명을 Nardostachys Jatamanse DC라고 하며, 영어명은 Spikenard, Indian Nard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향기를 풍긴다는 뜻의 말인 nalada가, 히브리어 Nerd, 그리스어 Nardos, 라틴어 Nardus, 시리아와 페루샤어는 Nardin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나드 향료를 Sunbul hindi(Indian spike), 즉 이삭같이 생긴 인도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서, 나드초의 생김과 원산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드초는 키가 15∼30㎝로 자라는데, 잎이 크고 꽃은 연분홍색 잔꽃이 꽃대 끝에 뭉쳐서 핍니다. 그리고 근경에는 털이 덮여 있어서, 피기 전에는 이삭처럼 보히고, 근경 밑쪽에 굵은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와 근경에 강렬한 방향(芳香) 정유성분이 있습니다. 잎이 벌어지기 전에 뿌리와 근경을 파내어서 건조시킨 것을, 나드 뿌리(Nardus Root)라 하여 약으로 사용합니다. 약초일 때는 주로 이뇨·위장약으로 사용하며 복통·두통등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료로 만들 때는, 근경을 파내어서 바로 방향성분을 증류하여, 다른 기름과 섞어서 나드 향유를 만듭니다. 휘발하기 쉬우므로, 옥합(아라파스티제 향료병)에 넣어 밀봉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수출했는데, 사용할 때는 이것을 깨뜨려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강한지, 향을 깨뜨리면 방에 나드 향이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드 향유는 지금도 인도에서 여자들의 머릿기름의 향유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대 유럽에서는 값비싼 향유로 즐겨쓰던 것이, 지금은 향이 너무 짙어서 향료로 쓰이지 않고, 신경 안정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료  ("성서의 식물" 최영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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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심리학(Motivation Psychology)

인간의 행동의 근본적인 힘을 말하는 '동기'가 어떻게 발생되는지, 이를 활용해서 어떻게 업무 생산성이나 삶에서의 행복을 획득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동기 심리학은 당신의 '커리어(Career)' 방향성을 올바르게 안내하기 위해서 제가 꾸준히 공부하고 있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동기 심리학은 당신이 외적 동기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입각한 커리어를 밟을 때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외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외재적 동기는 말 그대로 외부적 보상이나 처벌과 같이 외부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금전적 보상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금전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금전적 보상', '금전적 처벌'은 외재적 동기라고 말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당신이 만약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또는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래와 행동이 바로 전형적인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입니다. 

•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밤을 새워 중간 고사 준비를 하는 것
•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
• 와이프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집안 청소를 하는 것
• 무료 음료 한 잔을 먹기 위해서 똑같은 카페를 지속적으로 방문 하는 것
•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 과속을 하지 않는 것
• 급여를 받기 위해서 오늘도 지옥철에 몸을 밀어넣는 것
•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 멋진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
•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2. 내재적 동기란 무엇인가?

반면 내내적 동기는 말 그대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내부 요인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동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순전히 '즐거워서' 하는 경우라면 이는 전형적으로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촉발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동기에 의한 행동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것
•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
•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하나뿐인 딸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 재정적 '독립'을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
• 내적 성장을 위해서 전혀 해보지 않은 경험을 추구하는 것
•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봉사활동을 하는 것
• 자존감을 향상시키고자 매주 피트니스 센터에 방문하는 것
•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

3. 외재적 동기 vs. 내재적 동기


그렇다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 둘 중 어느 동기가 좋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가 더 좋은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돈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교양인 같아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기 심리학에서는 이런 가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적 성장보다 돈을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외재적 동기를 더 우선시 여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돈도 좋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내재적 동기를 우선시 여길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의 삶과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를 모두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성장'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하루에 한 끼를 겨우 사먹을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면 당신은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영화 배우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결국 자신들의 꿈을 못 이루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내재적 가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지언정, '금전적 보상'이라는 외재적 가치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심리학 연구 논문들은 인간의 내재적 동기가 한 사람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지만, 외재적 동기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된 이후에 내재적 동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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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외적 보상에 의해서 무언가를 하게 될지라도,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행동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동기를 '내재화' 시키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현재까지 제가 축적한 동기 심리학적 지식을 토대로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생산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기계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창의적인 업무: 외재적 동기 + 내재적 동기

만약 당신이 '일'을 중요시 여김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 굶지 않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굶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외재적 동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 기계적인 일을 한다면 생산성도 올라가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조적인 일은 다릅니다. 창조적인 일의 경우 일정한 보상을 넘어선 이후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외재적 동기가 아니라 내재적 동기에 의해서 그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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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적 동기가 충만한 예술가들에게 '돈'이라는 보상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게 할 경우에는 오히려 예술성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죠. 

당신의 커리어 방향성을 고민하고 선택할 때에는, 당신이 외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 내재적 동기에 입각한 선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하며, 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예수의 비유 중 네 제목은 합당한가?

 

이번 개정판에서는 독자들이 내용을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개역 한글판에서는 없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그 소제목 중 몇은 외국어 성경에서나 이전의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서 붙인 것과 다르다. 그것은 그 소제목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에 일치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마 13:1-23)

본래의 개역성경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1995년 개정판 신약성경에서 소제목을 붙였다 (이미1967년의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소제목을 붙여 왔다). 그런데, 이들 소제목 가운데에서 그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마 13:1-23의 내용을 보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네 가지 다른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한 것이다.

 

2)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 비유 (눅 15:4-7)

본문의 내용을 보면, 결코 잃은 양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3)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 (눅 15:8-10)

이 본문에서도 그 내용으로 보아 드라크마의 비유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이다. 그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눅 15:11-32)

이 본문은 흔히󰡐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의 초점이 결코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물론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상의 4 가지 소제목을 우리말 성경 개정판에서 그 본문의 내용과 일치시켜 바로잡은 것은 참으로 전 세계를 두고도 획기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 중 최근 또 최우수 번역이라고 하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년, 번역위원장 Bruce M. Metzger) 에서도 보면 마태 13장의 소제목은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 15장의 3 가지 비유도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잃은 양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Lost Coin’ (잃은 동전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and His Brother’ (탕자와 그의 형의 비유) 등으로 되어 있어 그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나 주역(마 13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 13의 목자, 여인, 아버지)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과 귀신 들림


정신병 & 귀신 들림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은?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난히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신 갈릴리 지역이 가진 지역적 특성(예루살렘과 달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역) 도 작용하였겠지요.
심지어 벙어리 들린 귀신(요즘은 보기 힘든)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벙어리 들리면 모두 귀신 들린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여기 귀신들림과 단순 정신병(단순히 육체적 물리적 무질서에 의한 마음병)의 차이를 살펴봅시다(구분은 하나 때로는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기억하고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실어즘과 귀신들림을 꼭 구분합시다!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분별 12 가지(눅 11:13-28) 

1. 귀신 들린자는 자신이 귀신들린 것을 아나 깊은 정신병은 자신이 정신병인것조차 모른다.
2. 귀신들리면 때로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나 물리적 단순 정신병은 무덤덤하고 허약하다.
3. 귀신들리면 투시, 예언, 비밀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 정신병은 그런 초능력이 전혀 없다.
4. 귀신들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때로 이상한 방언을 하고 남에게 귀신들림이 전이 된다. 단순 육체적 무질서에서 오는 정신병은 남에게 전이되지 않으며 이상한 말을 하기는 하나 단순한 중얼거림이다.
5. 귀신들린 자는 급속한 치유가 가능한 경우가 많다. 단순 정신병은 대체적으로 치유가 장기적이다. 
6. 귀신들린자는 극도의 공포심이 있다.
오래된 정신병은 이런 수준의 공포심은 없다.
다만 오래지 않은 약한 정신병의 경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우울증과 공포심이 올 수 있으니 잘 분별할 것. 
7. 귀신들린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정신병인 경우에도 초기 자살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정상인도 자살 시도하므로)
오래된 깊은 정신병의 경우 자살에 무덤덤해진다. 

8. 귀신들린자는 약물효과가 별로 없다(나중 역효과가 나거나 더 악화 가능성도 존재).
정신병에는 약물로 인한 조절과 효과가 있다. 

9. 귀신들린자는 눈이 빛나고 음침하다.
정신병자는 눈의 촛점이 흐리고 흐리멍텅하다
(정상인이 볼 때 정상인과 눈이 다르므로 판단이 어렵거나 귀신이 속이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할 것). 

10.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나 여러 종교들과 교주에 대해 유난히 지나친 반응을 하나
정신병자는 평균 수준 이상의 특별한 반응이 없다. 

11. 귀신들린자는 귀신들린 것을 나타내거나 속이려하나 정신병자는 그냥 횡설수설한다. 

12. 귀신들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될 수 있다.
정신병자는 유능한 의사를 찾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겨야 한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소유한 아주 난감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할 것. 

세 가지 참고 사항: 

1). 참된 귀신 추방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세와 긍휼로 가능하다. 
타 종파 사람들이나 퇴마사, 무당들도 축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들 귀신 축사는 귀신 축사가 아닌 귀신에게 놀아나는 경우(귀신이 오히려 귀신 쫓는 자들을 가지고 노는 경우임)임을 명심할 것.  그러므로 잠시 상황이 호전 되는 듯하나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오히려 악화(영적, 육적 악화) 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미숙한 도구요 오직 주님이 하십니다. 

2)귀신을 상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에 빠졌던 사람들을 오래 상담하면서 느꼈던 것은 귀신을 쫓는 것과 이 두 경우를 분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들이 마치 무슨 능력 많은 것처럼 떠벌릴 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능력 있다는 사람들도 횡설수설하거나 제가 볼 때 아무런 효험이 없거나 오히려 악화 시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룰 때는 내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3) 귀신이 떠나간 후가 더욱 중요하다. 
귀신 축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뒤가 문젭니다. 귀신이 떠나간 후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거나 신앙이 병들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기억하고 분별하고 치유하고 치유 받아 이 문제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긍흉하심 안에서 참 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회복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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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한의학]
정신병과 귀신들림

김양규 원장

정신병의 90%는 정신분열증이다.
정신분열증은 요즘 ‘조현병’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그 주된 증상은 환각과 망상의 두 가지다.
환각과 망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과잉분비가 원인이라고 하는 학설이 주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도파민은 흥분성 호르몬인데 이것이 적당량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과잉 분비되면 환각과 망상과 같은 이상증상들이 생길 수 있다.

환각이란 환청, 환시, 환미, 환취, 환촉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의 하나라도 있으면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 중에 환청이 제일 많고 환시는 그 다음으로 많다.

망상에는 사고 장애와 감정 장애가 있다. 즉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는 것과 이상한 감정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망상과 환각을 모두 갖고 있으면 이를 정신분열증이라 한다. 이중에 한 가지만 있을 때는 분열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은 한방에서는 ‘기란’(氣亂)이라고 하는데 기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기는 항상 가볍게 팽팽 도는즉 순기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기가 거꾸로 도는 역기 현상이나, 기가 체하거나 막히는 기체, 기색, 기가 어지럽게 도는 기란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분
열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방에서는 기의 순환을 바르게 해주는 약재를 써서 치료한다. 우리 몸의 가슴 윗 부분은 항상 물이 있어서 시원해야 하고, 배꼽 아래쪽은 불이 있어서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이것이 반대로 돼 가슴 윗부분이 더우면서 열이 나고, 배꼽 아래쪽이 차가우면서 시리게 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증상이 생기게 된다.

가슴 위로 열이 차올라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정신이 분열되거나 우울에 빠지는 등등의 증상이 생기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므로 육체를 치료하므로 당연 치료될 수 있는 문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귀신들림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완전히 다르다.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요, 정신분열증은 육체의 문제이다. 정신은 육체의 한부분이요, 육체에 속하기 때문에 육체가 약해질 때에 정신이 약해진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물론 영과 정신을 완전히 구분할 순 없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귀신들림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약물에 대해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귀신들린 자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귀신들린 자를 약물로 치료했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나 부인은 귀신들린 자에게
는 꼭 있는 요소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그러지는 않는다.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또한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들린 자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면서 적대시 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결코 그렇지 않다.

괴력에 대한 문제도 확연하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괴력이 없다. 담을 뛰어넘거나 쇠사슬을 끊는 괴력이 없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은 그런 괴력이 있다. 그건 귀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건만 봐도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정신분열증상이 있으면 귀신들린 것으로 오 해하고 ‘기도해야 낫는다’면서 일체의
약물치료 거부와 함께 기도원으로 가게 만든다.

정신적인 질환도 육체 질환의 한 부분이며 분명히 약을 쓰면 치료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사회에서는 이런 병을 왜 이단시할까. 이건 중대한 문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다. 정
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마녀에게 사로잡혔다고 하면서 화형 시켰던 처절한 흑역사가 우리 종교사에 분명히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기나 배탈로 고생할 수 있고 수술을 받을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약해지고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찾아 가족치료나 환경 개선과 집단치료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를 할 생각보다, 사람을 도외시하며 매장시키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식한 처술이다.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구분할 줄 알자.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 무슨 병이든 영적인 유혹과 시험을 받고 사탄의 틈탈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지식 없는 사람들의 예사로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실족케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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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VS정신질환 구별 어떻게함? 

성경에 귀신들린자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별 기준들이 생긴다. 

(1) 예수 혐오

정신병자는 예수님을 그다지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예 관심이 없을때가 많다. 

반면 귀신들린자는 예수님을 극도로 싫어한다.

(2) 논리적 대화 

귀신들린자는 논리가 탁월하며 지식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는 논리가 엉성하거나 비현실적이다. 

(3) 특별한 신체능력

귀신들린자는 종종 힘이 쎄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슈퍼파워는 없다. 

예) 막5:34-35

(4) 특별한 영적능력

귀신들린자는 점쟁이처럼 사람의 생각을 꽤둟어보거나, 과거 or 미래에 대한 정확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런 영적 능력은 없다. 

(5) 약물효과

정신병자는 특정 약 복용으로 증세의 호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귀신들린자는 그렇지 않다. 

(6) 탁월한 공격적 거짓말

귀신의 특징중 하나가 거짓말이다. 이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심정과 영혼을 파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거짓말로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주지 못한다. 

(7) 이중적 실존

정신병자는 자신의 인격과 몸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귀신들린자는 또 다른 영적 자아가 지배권을 휘두르며 그 몸을 이용해서 말한다. 이때 귀신들린자는 자기 몸 안의 귀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한다. 

(8) 치료 시간

귀신들린 자는 즉시 귀신들리거나,

귀신이 나가면 즉시 치료되거나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서서히 나빠지거나, 서서히 호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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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들림

귀신들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영향의 한 가지 측면은 자기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귀신은 인간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이든, 어떠한 행위이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로 그 곳을 지배하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림의 특징으로 특별한 신체적인 힘, 분노 폭발, 인격분열, 천리안이나 예지 같은 초자연적인 감각 능력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덧붙이면 옷을 벗고 돌아다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 기괴한 행위 등이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교역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보고한 사례 연구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 속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도덕적인 타락, 우울증, 분명한 백치 상태에 빠짐, 황홀경에 빠짐, 극단적인 공격성, 무의식에 빠짐, 입에 거품을 묾, 기도와 성경 읽기 등 광범위한 종교적 활동에 저항함, 배운 바 없는 언어를 이야기 함, 환상, 고통, 의기소침, 불결한 생각, 성적·감각적 ·적대적인 본능의 행동에 강박 관념을 갖거나 참여함, 정죄 하는 선언이나 살해, 자살과 같은 행위를 하라고 명하는 음성을 들음, 자살 강박 관념 등이다.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음 몇 가지의 두드러진 징후를 나타낸다.

첫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초능력을 종종 발휘하여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갈거나 광란을 부리거나 남을 저주하고 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절교를 하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한다.

둘째로,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빈번히 경멸적인 웃음을 던진다.

셋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적 징후는 가끔 투시력이나 비상한 지식을 갖게 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인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귀신들린 자들의 특정적 징후는 밖으로 표출되는 심한 내면의 갈등적 현상이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성격분열 혹은 성격 파탄이라고 표현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항시 좌정된 마음으로 일정한 목표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해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인데 귀신들린 자들은 늘 좌불 안상으로 두리번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하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정신의학자인 스코트 팩(Peck M. Scott)은 자기의 저서에서 귀신들림의 음성적 증상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귀신들림은 지속적이며 파괴적이고 남을 희생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둘째, 귀신들림은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여기고 공적인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존대 받고자 하는 집착이 매우 강하다.
셋째, 귀신들림은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때론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인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위풍이 남에게 폭로되어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곧잘 표현한다.
다섯째, 마귀, 귀신의 압박에는 신체적 질병을 유발 할 수 있는 추악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책의 임상적 증상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귀신들림 현상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2.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격어 왔음을 볼 수 있으며, 아직 까지도 확실한 개념을 정립되지 못한 실정이다.

현재 지배적인 견해는 뇌에 기질적인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 감정, 시각, 행동 등 인격의 여러 측면에서 특히 사고의 기능에서 와해가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병 상태라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유전적 요인, 환경의 영항을 중시하는 심리사회적 요인, 뇌에 이상과 관계된 접근을 하는 신경해부학적 요인, 종교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원인 규명을 위한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열증의 병태생리가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질환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정신분열증 증상은 사고, 언어, 감정 행동, 지각, 의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증상들은 환자마다 다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한 환자에서도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들은 망상, 환청, 사고의 장애, 정서적 둔마, 자아 경계의 상실, 자발성 장애, 외부세계와의 단절, 움직임의 감소이다.
정신분열증을 진단하는 기준에는 망상(delusion), 환각(hallucination), 와해된 언어(disorganized speech), 심하게 와해된 행동이나 긴장증적 행동, 음성증상을 중요시 하여 진단하는 DSM - IV가 있다.

이 기준에 의하여 진단되는 정신분열증의 아형은 편집형(망상형), 해체형, 긴장형, 감별불능형, 잔류형이다. 이러한 복잡 다양한 정신분열증을 환자의 증상을 기준으로 정신분열증의 아형을 나누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신분열증 증상의 특징들을 기준으로 양성증상과 음성증상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기준이 제시되었다. 정신분열에 있어서 양성증상에는 환각, 환청, 환시, 망상, 말하기 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의지영역에서의 이상증상, 행동영역에서의 이상증상 있으며, 음성증상에는 감정둔마, 무언증, 무의욕, 무관심, 즐거움의 상실, 비사교적태도, 주의력 감소 등이 있다.

3.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비교

귀신의 영향과 정신장애는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양자의 증상이 광범위하게 중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주어진 사례에서 어떤 현상이 거기에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한 정신 정애와 신체적 근원에서 기인하지 않은 정신장애 사이에도 유사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증상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증상이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명확한 차이라고 한다면, 약물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는 정신분열증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귀신들림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치료에 있어서도 정신이상 현상에 대한 진단에 적절한 약물을 발견하기가 힘들며, 환자의 반응을 보면서 약물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듯 하면서도 반응이 신통치 않아 혼란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신경정신의학과 최영민 교수는 정신병과 구별하여 일반적인 귀신들림 현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는 지속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데 매우 교묘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순수하고 착한 성격을 보여주며, 남을 희생시키는 요령과 술수를 부리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둘째, 귀신들린 자는 자기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존경받으려는 집착을 보인다.
정신병에서도 물론 자기에 대해서 과대망상을 가질 수 있으나 대인과의 관계에서 존대를 원하기보다는 자기 홀로 그런 환상에 빠지며,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스스로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셋째, 귀신들린 자는 지적으로 악하게 왜곡되어 있으면서 때로 정신질환의 증상을 보이지만 정신병의 경우는 만성적인 퇴행성이 오지 않는 한 이러한 지적 능력의 장애는 없다.

넷째, 귀신들린 자들은 자신들의 허세가 남에게 폭로되고 위협받을 때 극심한 분노를 보인다.
반면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망상이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해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보기에 더욱 위축 되어 보인다.

정신분열의 증상과 귀신들림의 증상은 명확히 판단해 볼 때, 구별은 된다고 보지만 정신의학자는 정신분열로 인한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정신분열로 판단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진다고 볼 수 있으며, 귀신들림에 중점을 두어 판단하는 목회자나 영을 분별하는 자들은 귀신들림으로 인한 증상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기에 증상 하나 하나를 놓고 서로 연구하면서 판단하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4.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에 대한 돌봄

a. 의학적 돌봄
정신분열증 치료를 위한 처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약물치료이다. 항정신병 약물은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현저하게 감소시켜 주고 재발을 효과적으로 막아준다. 항정신병 약물은 몸속에 침범한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와는 달리 환자의 뇌 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의 활성도의 이상이 생간 것을 정상생리로 회복시켜 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항정신병약을 먹는데 있어서 우려할 수 있는 것은 부작용의 문제이다. 주로 도파민 활성도를 차단하는 항정신병 약물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부작용이 있다. 졸리움,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날 때 어지러움, 입이 마름, 코가 막힘, 눈이 어릿어릿함, 안절부절 못함, 근육이 굳어서 팔·다리 움직이는 것이 느림,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음, 햇볕에 예민해 얼굴이 쉽게 탐, 변비, 식욕증가 등의 부작용이 있다.
b. 목회적 돌봄
목회자는 정신분열에 있어서 미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가 발생하거나 환자의 가족들이 고민이 되어 상담할 때 목회자는 정신분열증에 있어서 전문병원이나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을 알려 주도록 해야 한다. 또한 환자가 의사 처방을 무시한 채로 병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할 때 목회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재발을 막기 위해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약을 복용하도록 권하고, 환자의 가족에게도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고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격려하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 가족적 돌봄
정신분열증이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생기는 병도 아니요, 부모가 잘못 키우거나 특별한 가정환경 때문에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 것도 아니다. 정신분열증은 사람에게 생기는 다른 모든 병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병일뿐이다. 심장병에 심장에 생기고, 폐병이 폐에 생기듯이 정신분열증은 사람이 뇌에 생기는 병일뿐이다. 마음에 생기는 병이 아니다.
d. 인지-행동 치료적 돌봄
정신병의 인지-행동 치료자의 주된 목표는 정신병적 증상으로 인한 고통과 기능장애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환자들이 경험하는 사고, 신념, 그리고 이미지가 인지-행동 치료자가 다루는 핵심적인 재료가 된다.
정신병의 핵심증상과 경험은 인지장애에서 비롯되는데, 지각의 이상과 자기 경험의 이상(예를 들면 환각)을 가져오는, 정보-처리에 관련된 기본인지과정의 장애와 망상을 이끌어내는 의식적 사정(査定)과 판단의 장애라는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인지-행동 치료의 넓은 목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는 정신병적 증상이 야기한 고통과 장해를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둘째는 감정적 교란을 경감시키기 위함이며, 셋째는 재발의 위험과 사회적 장애 수준을 줄이는 데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정신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 정신 재활(psychiatric rehabilitation)적 돌봄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하는 약물 이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약물 하나만으로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회복되기 어렵다. 정신장애의 고통을 겪었다는 경험이 남긴 자존심과 자신감의 손상, 그리고 잃어버린 기능력과 시간을 보충하는 문제는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영역이다. 재활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회복에는 치료와 재활이 함께 필요한 것이다.
정신재활은 오랫동안 정신과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기능력(functioning)을 개선하고, 그들이 선택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전문적인 개입(intervention)을 받으면서 성공적이고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내담자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특수한 기술들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담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능력 수준을 지원해 주거나 강화해 주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결어

목회현장에서도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대한 목회자의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 한다. 과거이 목회자들은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에 대한 뚜렷한 근거와 구별이 없이 대부분의 정신분열증을 귀신들림으로 판단하여 신앙치료만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또한 이러한 판단과 신앙적 치료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정신분열증을 보이는 환자에게 축사를 한다고 하여 오히려 내적 상처를 심화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오류는 목회자들이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아울러 영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의학적 치료 또한 그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의 원인을 마귀나 귀신들림과 같은 영적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이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는 생각은 현대 의학적 개념과 거리가 먼 반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치료의 방법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정신의학계의 이러한 입장은 영의 존재와 활동을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폐쇄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정신이상 증상은 전인치유의 맥락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환자는 단순히 신체적 치료만을 필요로 하는 질병의 사람만은 아니다.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까지 이해하고 치료영역을 넓혀야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정신병의 원인에 대하여 마귀나 귀신들림을 고려하지 않고 의학적 치료만 인정하는 입장과 모든 질병의 원인을 마귀 들림에 두고 축사의 방법을 통해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치료만 인정하는 입장을 절충하는 조화된 치료(전인적 치료)를 시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가 상호 존중해가면서 서로의 이해를 넓혀야 할 것이다. 곧,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은 그 증상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정신분열증 환자인지 귀신들린 것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전제로 정신의학적 치료와 영적인 치료 모두에 열린 의식이 필요하며 치료법에 있어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21세기 앞서가는 목회자는 정신이상 현상에 대하여 영적치료 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적 심리치료를 고려하는 지평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목회자들과 정신의학계에서 서로의 의견이나 치료에 있어서 서로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만남을 갖고 세미나나 포럼과 학술강연회를 통하여 상호이해의 길을 모색하고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해 치료의 방안에 대한 협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제공하기 위하여 본고는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이해의 지평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차이점과 유사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사나 목회자들에게 전인적 인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나타나는 양상은 너무도 비슷하여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진단할 뿐이지 확정된 결론은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단지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판단 근거라고 한다면, 귀신들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표시는 환자 이외의 새로운 인격이 표현되는 것이고, 정신분열증임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기준은 약물에 나타내는 반응여부에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영과 육의 전인적 접근이 요청된다. 정신이상현상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요인들이 서로 다양하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기 때문에 의학적 돌봄과 심리적 돌봄과 목회적 돌봄이 공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함께 나타나는 복합적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진단을 시도했다. 좀 드물지만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정말 그 환자의 정신이상 현상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를 원하는 제보자의 요청에 의하여 시도된 것이다. 제보자의 어머니의 정신이상현상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양상이 아주 복잡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두 가지 측면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분열적 측면과 귀신들림적 측면을 분석함을 통하여 정신분열과 귀신들림이 서로 비교가 되고 그 차이점과 유사점을 규명하는 가운데 정신이상현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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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분열의 구분법




평소에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저로서는 김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부분을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한 그리스도인이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어떻게 분별하고 이해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사례로 명쾌하게 분석한 따뜻한 목소리"로 쓰여진 김진의 『정신분열증에 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운데 부분적으로 요약한 글입니다.

※ 귀신들림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의 분별을 위한 시험적 분별점

1) 절대적 분별점  

(1) 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 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 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 막 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 행 16:16~19, 배가된 완력: 행 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소녀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정신 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 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지식을 말하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 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면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중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 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결국 동시적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상대적 분별점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띠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 일반인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 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진 경우를 정신과 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믄드믄하게 나타나, 어떤 때는 전혀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 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 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 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의 당부의 말씀 


제가 지금까지 주치의로서 직접담당한 환자의 수가 600명 이상이 되고 게다가 주치의로서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병동 또는 병원에서 알았던 환자들까지 합하면 수천 명을 훨씬 넘게 됩니다. 그렇게 알았던 환자 분들 중에서 앞서 언급한 분별점인 초능력의 행사나 영적인 특별한 능력을 보인 환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 기독 정신과 의사들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통계적으로 정신이사장들의 거의 대다수는 정신병에 의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많은 예들이 나오지만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확실한 사례는 거라사 걸인의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귀신이 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가 실지로 적어서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상자를 만났을 경우 우선 정신과적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역자와 상의하여 이러한 결정이 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또, 기독 정신과 의사들은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의 존재에 대해 늘 주의하여 살피는 의식을 키우고, 그러한 가운데 그러한 사례라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교역자에게 자문을 구하여 상의한 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귀신들림으로 판단이 된다면, 정신과 의사는 믿을 수 있는 교역자에게 의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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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림과 정신병의 차이
빙의, 귀신들림, 귀신들림과 헤리성 정체성 장애의 구분


저는 정신과의사로써 개인적으로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모두 믿습니다.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지요.. 묘하게 겹쳐져 있기도하고요..
귀신들림처럼 보이는사람이 나중에 정신병으로 판명되어 약을 먹고 좋아지기도 하고,
멀쩡해보이는사람이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신들림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정신병 환자들에게 퇴마사가 귀신을 좇을 때 더 악화됩니다.
정신질환 중에서 다중인격은 귀신들림처럼 다른 인격체가 표현되며,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분별점

(1)초능력의 동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결코 보일 수 없습니다.

주의집중이 강하게 이루어져 평상시보다 다소간 높은 능력을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는 15kg밖에 들지 못하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20kg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kg을 들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안에 있는 귀신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쇠사슬을 끊음:막5:1-20, 정확하게 점을 치는 것:행 16:16-19,배가된 완력:행19:16 등등)

참조하는 성경구절에는 귀신은 들렸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는 구절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16-19에는 귀신에 의해 앞일을 정확히 알아맞추는 소녀 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녀는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정신이상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정신이상을 나타내는 귀신은 귀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귀신이 나타내는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별점을 세우는데 좋은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정신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분은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정신 분열병을 앓는 분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전혀 배우지 않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으로 사람을 알아봄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사도 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 8:28-34, 막 5:1-20, 눅 8:26-39)의 거라사 걸인의 예, 행 16:16-19,19:13-16) 그러나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임

귀신들린 자들은 십자가, 성경, 성경구절, '예수님'이라는 호칭등 신앙적인 것들에 대해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정신병 환자도 무의식의 세계 내에 그런 것들에 대한 강한 컴플렉스가 형성되어 있다면,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컴플렉스 에 의한 반응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귀신에 의한 적대적인 것을 구분하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다른 인격체의 존재

이 분별점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인용한 것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다중인격장애를 다루면서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다중 인격과 다른 것은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한시점에서" 원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인격체가 자기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안다는 것입니다.결국 동시적 으로 두 인격체의 활동이 있는 경우는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그러나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약물에 대한 반응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과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은 다르다고 전제할 경우, 귀신들린 경우는 약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모두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면 귀신들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귀신들린 자들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럴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경우는 틀림없지만,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절대적 분별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증상의 시작 속도와 회복의 속도

- 정신병의 경우에는 '점진적',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순간적'


정신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신분열병은 대개 1-2년의 잠복기를 거치면서 발병하게 되고 증상의 전개양상도 점진적으로 악화 됩니다. 그 점진적 과정 속에 드물게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조울병 같은 경우는 3-4일에서 1주일 내에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빠른 '점진적' 과정을 밟습니다. 정신병의 잠복기의 변화는 전문가의 눈 에는 보이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파악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점진적인 증상악화의 연속성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증상에 의한 문제가 눈에 띄게 드러날 때에야 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 게 됩니다. 전문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는 점진적인 것이,일반인 에게는 돌연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돌연하다고 얘기하는 경우에 실제로 그러한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귀신들림의 경우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증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들림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이상은 전적으로 귀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정신이상이 나타날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 사이의 중간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즉,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변화의 과정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온 즉시로 활동을 하지 않고 서서히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별점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위의 원리는 회복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기만 하면 그 전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전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시니 바로 정상으로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 정신병의 회복은 결코 돌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이 분별하는데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 중 단기반응성 정신병은 다소 급작스러운 증상의 시작을 보이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이 이 분별점을 사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아 좋아졌다고 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라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리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약을 쓰지 않아도 거의 2주 이내,빠르면 1-2일 이내에 저절로 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기반응성 정신병의 경우는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오판하기 쉬운 것입니다.

역으로, 귀신들림에 의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경우로 축사에 의해 좋아지는 경우를 정신과의사들은 단기반응성 정신병으로 오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똑같이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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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상의 유무 사이의 관계, 특히 말과 사고의 영역에서

정신분열병의 초기에는 증상이 드문드문 나타나, 어떤 때는 아주 정상적이다가 어떤 때에는 증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악화되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간생활의 거의 전 시간에 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악화된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주 비논리적이고 조리가 없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되는 말과 사고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정상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조리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의 경우는 귀신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태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할 때는 아주 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활동을 멈출 때는 원래의 자기상태로 돌아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역시 정신분열병 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간 정상과 비정상을 판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분별점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두 세 가지 더 소개할 수도 있지만 비전문인에게는 혼란을 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정신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익히신 분들에게만 소개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면적인(cross-sectional)관점으로 보지 않고, 통시적인(longitudinal:그 시작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 전체를 통하여 보려는 자세) 관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분별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증상이 나타나는 한 시점에서만 놓고 비교한다면 귀신들림과 정신분열병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점차 어떻게 변화하면서 진전이 되었는 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 비교한다면, 분별하는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꼭 통시적인 흐름을 그려 보셔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병이 심리적 신체적 유전적 기질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인식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귀신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정신병과 귀신들림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차별화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차박사는 정신병인 경우 약물치료 및 재활상담치료가 효과적이며 귀신들림의 경우 단계별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즉 대상자가 현실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없는 혼란상태에 있을 때는 항정신성 약물치료를 한다.그리고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정신상태로 회복된 후엔 영적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를 통해 치료자는 귀신들림에 대한 개인적 배경,가족배경,신앙상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정신질환과 영적질환이 혼합됐을 경우엔 정신치료와 영적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2∼3주동안 자극받지 않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항정신성 약물,항불안제의 투여로 정신병적 상태를 회복시킨뒤 정신치료 문제의 파악 및 해결로 현실 적응력을 강화시킨다는 것.


 

아래는 Deep Bang의 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Deep Bang 의 구분에 의하면, 귀신들림은 죄, 악, 신경증, 또는 정신병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림의 원인이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증상면에서 정신병이나 악과 많은 부분이 관련되어 있지만, 원인으로 분리해 볼 때는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귀신들림이 해리성정체감장애와 분명히 구분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귀신들림은 다른 인격이 밖에서부터 인간의 내면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두개 이상의 인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던 외부 인격이 인간의 내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귀신들림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정말 귀신들림이 가능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또는, “지식과 과학이 한참 뒤쳐져 있던 옛날에나 먹힐만한 얘기지, 최첨단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신(악한 영)에 대한 얘기를 꼭 옛날 동화 속의 얘기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치부해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귀신들림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오랜 경험 있는 정신과의사, 심리학자, 또는 상담사는 적어도 한두 번 정도는 귀신들린 환자를 만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맨 처음에는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다 해도 매우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정신병 환자와 같이 처방하고 치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들이 정신병 환자와는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만약, 유능한 의사였다면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점점 많은 정신과의사와 정신건강을 위한 학회들이 귀신들림이나 영적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신과의사는 영적 문제를 DSM-IV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 이러한 움직임들을 고려할 때, 귀신들림이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Deep Bang 에 의하면, 인간 안에 한 사건으로 인해서 텅빈 공간이 형성 되었으며, 그 빈 공간 안에는 원래 하나님의 영이 존재해 있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웅덩이를 메우기 위해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돈, 명예, 권력, 섹스, 성공, 등등 수많은 것들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영 외에는 그 어떠한 것(욕망)도 자아의 갈망을 근본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아는 욕구불만을 경험하게 되며, 더 구체적으로 자아는 두려움/죄책감/불안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정.의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신경증과 정신병을 앓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귀신들림을 이해해보자. 귀신들림은 자아의 텅빈 그 공간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또 다른 영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웅덩이는 본래 영적 존재를 위한 곳이었기 때문에, 악한 영(귀신) 역시도 침범할 수 있는 곳이다. 귀신이 인간의 영혼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서, 하나님의 영이나 자아를 대신해서 주인 행세 하는 것이 바로 귀신들림의 실체이다.

귀신들림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첫째는, 자아가 자신의 영혼 안으로 귀신이 들어오도록 의지적으로 허락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영혼을 판다. 또는 영혼을 거래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는 자아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는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파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복수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단순한 호기심에 영혼을 팔기도 한다.

이와같은 영혼 거래 행위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역의 문화와 배경에 따라서 각기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영혼 거래 행위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의식의 내용이나 방법은 다르겠지만, 비밀스런(때로는 그룹으로) 의식행위를 행함으로써, 자아가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판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는 행위나, 제단 위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나, 특정 문구를 반복해서 읽는 행위 등이 있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진다. 특수한 약물을 복용하거나 격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자아가 제기능을 할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이끌어간다. 다시말하면, 자아의 기능(특히 사고와 의지)을 최소로 약화시킴으로써 무아지경(無我地境)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한다. 그 이유는 자아의 기능이 약한 그때에 귀신이 자아의 중심에, 즉 그 텅빈 웅덩이에 쉽게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 판매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무당이다. 사람들은 정말 용한 또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무당을 이렇게 부른다. “신이 내린 무당이다.” 말 그대로, 귀신이 무당 안에 내려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귀신이 자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당은 인간 이상의 능력들을 보여주곤 한다.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맞추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무당이 점을 치거나 귀신을 불러내는 일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을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아가기 위해서 자신만의 의식을 행한다. 특별한 의식 행위를 통해서 자아의 기능이 약해지면, 무의식(하나님의 영이 빠져 나감으로 형성된 것이 무의식이라 했다. 그 무의식에 귀신이 숨어들어가게 된다.)에 숨어 있던 귀신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영혼거래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아 안에 두개의 인격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일정 수준에 있어서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아가 지.정.의에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은 채로, 귀신과 함께 공존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아가 의지적(의)으로 귀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영혼거래자는 자신 안에 귀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지) 있으며,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자아 안에 있는 귀신을 경험(정)했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지.정.의 전체를 통해서 귀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영혼거래자의 자아는 귀신(악한 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지.정.의에 큰 문제없이 꼭 평상인과 같이 기능하며 살아간다. 굳이 영혼거래자와 보통 인간의 차이점을 밝혀본다면, 보통 자아의 중심은 무의식 상태로 텅 비어 있지만, 영혼거래자의 자아 중심에는 귀신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귀신이 자아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것이다.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이 자아의 지.정.의를 파괴하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이때는 자아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아의 영혼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자아의 허락없이 악한 영적 인격체가 자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상황을. 자아가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악한 영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는 상황을. 그리고 자아 안에서 강력하게 몸부림치는 악한 영을 경험할 때 느끼는 감정과 사고의 혼란과 고통을 상상해 보라.

이와 같은 자아와 악한 영 사이의 싸움으로 인해서 상처받는 쪽은 언제나 자아이다. 자아가 싸움에서 이겨낸다 할지라도 지.정.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언제든 제 2차, 3차의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만약에 자아가 싸움에서 패배하고 귀신이 승리하게 된 경우에는, 자아가 완전히 망가지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지.정.의 뿐 아니라, 인격과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 경우에는 자아가 기능을 거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옷차림이나 외모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며, 심한 공격성을 갖기도 하고, 백치 수순의 생활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귀신의 침입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처한 자아에게 자주 발생한다. 자아의 지.정.의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거나, 기능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이다. 중요한 사람의 죽음이나 불행과 같은 갑작스런 사건을 경험한 자아는 순간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와 폭발로 인해서 사고와 의지의 기능을 순간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한번 조화가 깨어지게 되면, 그 후유증은 심각하다. 많은 경우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점차 회복되지만, 어떤 경우는 심한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을 앓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정신병을 갖게 되기도 한다.(앞의 인숙의 예처럼) 그리고 더러는 귀신들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정 폭발이나 불행한 사건이 귀신들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감정 폭발은 일종의 자아 표현에 불과하고, 불행한 사건은 아무리 크고 심각하다 할지라도 외부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정.의의 기능 약화 역시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귀신에게 침입을 허용할 만한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자아의 기능 약화가 약점으로 작용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원인은 되지 못한다. 귀신의 침입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이유는 자아의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사고)에 있다.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 자아가 이후에 악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질 때가 있다.

“나는 죽어 마땅해.” “나는 쓰레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복수하겠어.” “죽일 거야.” “나는 하나님을 저주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해.” 등등과 같은 수없이 많은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들로 자아가 가득해지게 되면, 동시에 자아 안에 악한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고, 악한 의지가 형성되게 된다. 이와 같이 자아가 부정적이고 악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귀신이 침입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귀신의 영향력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귀신은 사람을 헤치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영적 존재다’라고 생각하지만, 귀신의 영향력은 자아가 믿고 인정하는데 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귀신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아에게는, 귀신이 어떤 능력이나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귀신에게 바쳐진 자아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의 존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미성숙한 어린 자아의 주위에 머물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그 자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권위를 부모로부터 양도 받은 귀신이 어린 자아에게 쉽게 접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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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은밀히 해야 하는가?


은밀히 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7:8-10.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비밀히(2927)

κρυπ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927

1. 감추인.  2. 막 4:22. 3. 숨은 것
발음 [ krüptŏs ]
어원 / 2928에서 유래
  • 1. 감추인, 비밀의.
    • a. [형용사] 막 4:22, 눅 12:2, 벧전 3:4.
    • b. [명사로 사용할 때] 숨은 것, 숨은 생각, 눅 8:17, 롬 2:16, 고전 14:25.
  • 관련 성경

    은밀한(마 6:6, 롬 2:16), 숨은(마 10:26, 눅 8:17, 벧전 3:4), 숨기는(막 4:22), 감추인(눅 12:2, 고전 4:5), 묻힌(요 7:4), 은밀히(요 7:10, 18:20), 이면적(롬 2:29).

* 2928  κρύπτω

1. 숨기다.  2. 감춰 두다. 3. 숨다
발음 [ krüptō ]

마태복음 6:6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 

마태복음 6:1-18
잠언 11:24-25
누가복음 6:38
누가복음 11:41
시편 50:15
이사야 58:6-9

​신약에서 경건(敬虔) - (헬) [유세베이아] : 유/(잘)+세베이아/(경외함으로 서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두려워함)으로 바르게 잘 서다, 행한다           하나님 면전(面前)에서 걷는다, 행한다

구약에서 경건 - (히) [할락 리페네 야웨]   할락 : 걷다. 행하다.

  리페네 : 면전에서(전치사)   야웨 :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는 자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서로 일치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자세를 가리킨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칼빈의 좌우명(座右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신앙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면전에서 사는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3가지 경건 생활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인데, 구제,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하고, 자랑하려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구제, 기도, 금식하라는 것이다.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1. 구제 생활 (1-4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신문 기자 부르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자신의 선행이 이미 칭찬받고, 박수도 받았으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구제하라.
그래야 하나님이 칭찬해 주고, 상도 주시고 갚아 주신다.

​구제는 마음을 담아 물질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로 구제하면 복을 받아 더 풍족해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富)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영적인 법칙이다.

전도서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구제하면 얼마 안 가서 도로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죄성이라는 것이다.
그 죄성은 욕심으로 나타나고,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물욕, 명예욕, 권세욕 같은 것들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욕심부린다.
그래서 욕심에 붙잡혀 사는데, 구제는 이러한 이기심, 욕심을 사라지게 한다.

누가복음 11: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정말, 구제에는 놀라운 축복이 들어 있다.
문제는 은밀히 해야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이것이 참된 경건한 생활이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구제가 된다.

2. 기도 생활 (5-6절)

기도는 정말 축복된 경건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고, 은혜 받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외식이라는 말이다.

기도가 자랑이 되면 기도의 은총과 축복을 놓치는 일이 된다.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왜 은밀히 기도하라고 할까요?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다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7-8절)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과 유혹을 받기도 하고,

실족하여 죄짓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환난을 당할 때도 있다.

환난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를 부르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환난에서 구원해 주고,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환난 중에 기도해야 하고, 또한 풍성한 삶(요 10:10)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즉,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 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되기 위하여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예배 때 많이 사용한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다. (마 6:9-13)

​

주기도문 안에는 6가지 간구가 있다.

☆ 대신 간구(3가지) :

①하나님의 이름

②하나님의 나라

③하나님의 뜻.

​

☆ 대인 간구(3가지) :

①공급 ②용서 ③보호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이고, 기도 중의 기도이다.

주기도문 마지막에 (대개)라는 말은 (호티)인데 왜냐하면(For)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

3. 금식 생활 (16-18절)

금식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금식기도 하면서, 티내지 말고, 금식기도 후에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금식은 자기 욕망에서 벗어날 때 할 수 있다.
금식은 식욕의 욕망을 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문제는 금식이 공로가 되고,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은밀히 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인가?

이사야 58:6-9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금식 기도하는 것이 귀하지만, 자랑 거리가 되고, 공로가 되면 안 된다.

모든 경건 생활은 하나님만 의식하고 해야 한다.

​

그리스도인에게 경건 생활은 정말 중요하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주의 사항과 함께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다.
구제, 기도, 금식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자랑하지 말라.
공로심으로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하라.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갚아 주신다는 말씀이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인정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령한 기쁨도 누리게 된다.

신학교 교훈 중에, [경건과 학문] 이란 것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신학교의 중요한 교훈이다.
경건이 없이는 아무리 신학과 학문을 많이 닦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경건한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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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구제(마태복음 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가 신앙의 생활을 영위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여도 우리의 신앙은 정상적이지 못할 것이며, 아울러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는 엉망으로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인정받지 못하며, 반면 사람과는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서로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하나님을 향하여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이러한 두 가지가 아름답게 균형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과의 관계는 구제한다는 말로서 즉,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선대할 것이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남에게 나누면서 의를 행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구제를 행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그분의 명령을 중시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합당한 삶을 행해 갈 때 아주 조심하여야 할 사항을 강조하시며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 나팔을 불지 말 것(2~)

미담(美談), 미행(美行), 미덕(美德) 등은 메마른 삶에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은 주님께서 지적하심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외식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심은 본장에서만 1절, 5절, 16절에 걸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연보와 봉사 그리고 더 나아가 구제하는 것까지 사람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행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유욕
가능한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입니다. 

둘째는 출세욕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출세의 본능입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
그 다음으로 내세우고 싶어 하는 명예의 욕망입니다.
인정을 받으려하고, 칭찬을 받고자하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본능입니다(마 23:2~7. 눅 18:11~12). 우리 역시 이러한 것들을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적이며, 육신적인 미혹됨에 빠지게 됩니다(요일 2:15~16).

‘선량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내용을 잘 알 것입니다(눅 10:30~37). 혹자는 이 사건이 만약에 후미진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거리 한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안보는 곳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이었기에 할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사람들이 보니까 하는척하면서 행세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사람에게 들려  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아뢰는 비밀스런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나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의 육신적 유혹을 이기고. 다만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아뢸 것입니다(빌 4:6. 골 4:2).

둘째, 구제는 은밀하게 할 것(3~4a).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삼대 덕목으로서 구제와 기도, 금식을 지적하십니다. 이것들은 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제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금식은 자신에 대한 행위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면의 행위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구제는 선행입니다. 예로부터 선행은 장려되었습니다. 선행만큼 칭찬 받을만한 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한 방법으로 자선행위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구제의 문제부터 지적하신 것입니다.

구제는 은밀히 해야 합니다. 자신까지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밀해야 참된 자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상급이 따릅니다. 사람의 칭찬을 원하게 되면 자선(慈善)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상급도 이미 받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려고” 무엇인가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이 말은 “구경거리로”라는 말입니다. 극장과 위선이라는 용어는 상호 연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배우들”을 말합니다.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우는 것이 배우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일에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나팔을 불었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당시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나팔을 불어서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적인 나팔이 아니라 “오버-액션” 즉 과장되게 떠벌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밖으로 시끄럽게 공포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나팔(의도적)을 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호화롭게 자기를 칭송하는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너그러움과 행위를 나타내려고 신문이나 방송에 그 사실을 발표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갈 2:10), 동시에 경건한 삶의 부분이 됩니다(약 1:26~27).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로다(시 41: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선행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명령은 여전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사도바울은 전도와 함께 중요한 또 하나가 구제라고 역설합니다(고후 8:1). 구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재물이 아깝지 않고 또 자만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제는 자신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팔을 불어 자신의 선행을 선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행하든 은밀하게 행하든 그러한 행위를 하늘 아버지께서 보십니다. 이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하는 일을 즉, 구제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다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처럼 감동스럽고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만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람들은 그를 몰라주었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그를 멸시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고 말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욥 6:2, 31:6).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 중에서도 하나님은 살피고 계시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믿음의 일들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진실해야만 하고 오직 그분께 인정받는 믿음의 행위를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십시다(계 2:23).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자세보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삶의 자세로 살아 갈 것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하다가 미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나를 보시고 계심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믿음의 행위를 살아갑시다.

셋째, 아버지께서 갚으심(4b~)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하나님만 보면서 행하는 자를 다 보시고 아시면서 반드시 갚아 보상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하면 그것을 보상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보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말없이 행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갈 6: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헛되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제 발견하십시다. 왜, 그토록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었는지,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한다고 하여도 왜, 열매가 없었는지, 부지런히 구제를 하여도 왜, 기쁨과 은혜가 없었는지, 도리어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미혹에 빠지고, 다툼이 생기며, 하지 않은 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의 일에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랑과 칭찬을 위하여서 그리고 세상의 허영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고 무엇보다 공명정대하신 하나님만이 알아주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행하기를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은밀한 기도(마태복음 6:5-8)

성경 공부 시간에 기도에 대한 교육을 이미 받은 대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우리의 대화의 대상이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와 대화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바를 기도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대화자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좁은 의미로는 바로 나 지신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양지 삼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시어,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나라에서 살고, 그곳에서 상 주시려고 우리를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며, 늘 돌보시는 분으로 24시간을 언제, 어디서나 그의 눈이 우리를 관찰하시며, 늘 함께 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의 존재로 보존하시기 위해 우리가 순수하고, 거짓이 없이 진실하며, 세상보다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다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하나님은 창조자요, 나는 피조물, 하나님은 아버지시오, 나는 그의 자녀,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진실이시오, 영원한 영적 존재이시며,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대화할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라시고, 자녀와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대화하시기를 바라시는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고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아주 자상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런 아버지와의 대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루 24시간을 연속적으로 가져야할 필수적인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바를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5-8절까지에서 주님이 주시는 3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3]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7-8절)

하나하나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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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절)
신자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만큼 서로 다투어 열심히 기도를 해오고 있는 과정에서 기도의 본질이 변화되어 오열되고, 부패된 기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뭐가 많은 줄 아세요? 가짜가 많은 것입니다. 귀하지 않을 것을 가짜로 만들 필요 없어요. 기도가 그토록 중요하다 하심은 가짜 기도가 있어서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에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매일 드리는 기도문 두 가지가 있어서, 이런 기도문을 암송해온 경과를 거치며 몇 가지 기도의 불순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성도에게 늘 따라야할 중요한 것이므로 자기의 경건을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귀의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 와서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도록 자랑을 위해, 자기가 아주 기도 열심히 하는 경건한 교인, 경건한 교회 지도자임을 보이려고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거리에나 회당에서 기도 흉내를 낸 것을 주님의 꿰뚫어 보시고, 이를 지적하시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기도를 했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시에 하나님 이름을 여러 번 들먹거렸으나 입술만 움직였지 마음으로는 않고, 사람의 눈을 생각했으며, 기도는 소리 크게 질러 하나님께 들리도록 한 것 같지만 그 기도는 결국 사람 귀의 높이까지만 올라가고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한 기도가 되므로 하나님이 들으실 몫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주실 상은 없고, 본인의 인간의 눈을 의식했던 대로 그 보상만으로 사는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팔아 우리를 샀는데 우리는 하나님 팔아 사람을 산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하지 말도록 권하십니다.

[2]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절)
6절 말씀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코 아버지께 얻기를 기도하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는 말은 첫째, 내가 기도하는데 내 주변에 들러리가 필요 없고, 증인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나와 하나님 둘만의 장소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내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고 전달할 수 있는 밀실을 말합니다. 골방이란 연극배우와 같이 사람을 의식하여, 소리를 크게 해야 한다든지, 이상한 소리를 내서 기도의 사람을 과시해야 한다거나 이상한 몸짓하여 능력이 역사한다는 흉내를 내서 보여야할 어떤 외적 요소가 없는 분위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골방이란 아주 작은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조용하고, 아무 방해받지 않은 곳을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넓은 들에서나, 산에서도 그 누구의 방해 없이 하나님과 내가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마음가짐이라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으며, 수 만 군중 틈에서도 이웃의 귀, 눈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드릴 수 있다면 그 곳도 골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은 골방에서도 내 마음이 집중이 되지 아니하고 설레 이는 마음으로 안정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므로 골방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는 참뜻을 깊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기도원에 가서 하는 것이 통념인데 혹시 기도원에서 내가 했던 기도가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의미에 어긋난다면 40일 금식기도도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 기도의 상은 누구에게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는 권면이십니다.

[3] 중언부언하지 말라 입니다(7-8절)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이웃에 살았고, 또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살았던 관계로 갈릴리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이방신에게 드리는 기도 모습에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신 앞에서 반복하여, 오랫동안 질질 기도를 끌어감으로 이방신도 지겹고 기도하는 사람도 지겹게 되는 기도 습관이 있었는데, 유대인들도 이를 닮아 오래 기도 하는 것은 경건의 정도를 의미하며, 오래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져, 기도를 오래하는 것으로 이력을 삼은 사실을 주님이 아시고 시정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중언부언이란 반복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오래 기도를 해야 철야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줄 알고, 특별한 의미도 없이 간절함도 없이, 감동도 없이, 시간을 늘리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있고, 좋은 기도의 낱말로 잘 짜여진 기도이나 내 마음이 살러지지 않은, 감동이 없는 외워진 기도나, 글로 써진 기도를 읽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준비 없는 기도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고, 듣는 이들로 혼잡케 하는 기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기도의 참뜻을 모르고 기도의 원칙을 전연 무시한 혼자만의 중얼거림일 수도 있습니다. 또 중언부언이란 기도하는 동안 생각을 딴 곳에 두고 하는 기도나 입버릇처럼 주님과 할렐루야를 섞어가며  이를 경건미를 내는 것이라 여기는 입버릇의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똑 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3번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3번이지만 더 많이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배를 탔는데, 파선되어 있다고 가정합시다. 밤새도록 ‘주여 살려주십시오’를 수 백 번 반복했어도 나를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전능 자 하나님이 계시고, 능력자의 힘을 필요로 하는 갈급함이 있고, 진실 된 표현이 있다면, 아무리 여러 번 반복되어도 중언부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7-8절에 보니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아는데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구할 것을 다 아신다는 말은 또 기도란 필요가 없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요청을 잘 알고 있으나, 필요 없이 긴 기도, 엿가락 느리듯 늘리는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표현하신 말씀인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길어진 기도의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은 길게 해야 한다는 오해, 준비 없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일이 되어진 상황 설명까지 다 설명이 필요하신 분 인줄 아는 기도, 하나님께 성경 공부를 시키는 기도, 지금 기도하는 참 목적을 바로 모르고 방황하는 이유로 기도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전 5:1-2에 “너는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은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아버지라도 준비하고, 정중하고, 진실하며, 요약하며, 분명하게 기도하므로 중언부언의 기도에서 치료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도 습관으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습관과 자기 경험도 좋지만 주님이 주신 기도의 처방에 따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기도가 있다고 지적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기도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귀에 관심이 가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하고 인간을 가르치거나 인간의 귀에 들려주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자기 기도가 중언부언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거리와 회당 즉 교회에서나 사람 보는 대해서만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 기도원에서만 하고 있고, 그런 것만 좋아하고 있는지? 기도원 기도를 높이 평가하고 골방에서 혼자 하는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 소리 내어 떠들어대는 기도를 조용한 소리로 드리고 기도보다 더 좋아하는지 우리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과 전연 상관없는 장소에서 우리 둘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로도 둘 사이에 방해가 되는 아무 것도 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이외의 다를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보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통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통해 소식 듣는 것 말고 직통 전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침에 일찍 QT Time을 갖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연속적인 경건과 기도가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진실 된 기도 통해 믿음이 더욱 향해지고 소망과 사랑과 확신을 늘려주는 그런 기도가 매일 연속되기를 원합니다. 짧은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마음이 실려진 기도가 응답 받는다고 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더욱 활력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카이로스, 크로노스, 호라의 차이와 의미


카이로스, 크로노스, 호라의 차이와 의미

크로노스의 시간 :

크로노스는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시간 관리와 계획을 통해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시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합니다.

χρό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550

1. 시간.  2. 유예(猶豫) - 망설이며 결행하지 않음, 집행유예
발음 [ chrŏnŏs ]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시간, 때, 마 25:19, 눅 8:27, 요 7:33, 행 8:11.
  • 2. 유예, 지체, 계 2:21, 10:6.

  • 관련 성경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카이로스의 시간 :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으로, 특정한 순간이나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적절한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강조하며, 기회와 행운의 신으로 묘사됩니다.
카이로스는 종종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빠른 결단력과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설명됩니다
정량화할 수 없으며, 특정한 사건이나 기회를 나타냅니다.
"올바른 순간"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며,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주관적인 경험과 관련이 깊습니다.

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 c.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 d.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 관련 성경
    때(마8:29, 눅8:13, 딤후3:1), 날(마16:3, 눅1:20, 고후6:2), 세월(골4:5), 연대(행17:26), 틈(행24:25), 현재(롬8:18, 히9:9), 기회(갈6:10), 항상(엡6:18).


호라의 시간 :

호라의 시간은 카이로스에 속한 시간으로 카이로스는 좀 더 긴 기간과 시기를 말합니다.
반면에 호라의 시간은 아주 짧은 잠시의 시간을 말합니다.

ὥ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5610

1. 때.  2. 시간. 3. 시간의 한토막
발음 [ hōra ]
  • 1.  때[낮의], 막11:11, 마14:15, 눅12:39, 40, 계3:3.
  • 2. 시간.
    • a. 시간의 한토막, 계9:15, 요11:9, 마20:12.
    • b. 짧은 시간, 잠깐, 계18:10,17,19, 요5:35, 고후7:8, 막15:25, 행2:15, 23:23, 마20:5, 막15:33, 눅23:44, 요4:6.
  • 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8:13, 막13:11, 눅 7:21, 행16:33, 계11:13.
  • 관련 성경
    시(時)(마8:13, 막15:33, 계3:3), 때(마14:15, 요4:53, 요일2:18), 시간(마20:12, 눅1:10, 14:17), 날(마24:42), 한때(요5:35), 잠시(고후7: 8), ~시(마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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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두 명의 신이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인데요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으로 몇 시 몇 분 몇 초입니다.
크로노스는 태양과 달, 수성에서 유래된 시간 단위인데요. 상대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현재, 순간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 뜻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데요.
아침에 눈을 떠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봅니다.
시계 속에는 3개의 시분초 침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데요 바로 크로노스 시간을 뜻합니다.
시계 속 시분초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고대 천문학자들은 밤하늘 천체를 바라보며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도는 횟수로 시간을 측정하였습니다.

① 첫 번째는 몇 시 / 아워(hour) 

hour 아워는 고대 이집트 태양신인 HORUSE (호루스)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호루스는 독수리 모양으로 상징되는데요 이것은 태양이 아침에 떠오르고 정오를 지나서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지듯 독수리도 하늘 높이 날아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두 번째 몇 분 / 분(minute)

분은 MINUTE인데요 어두운 밤 하늘에 떠 있는 달, MOON (문)이 유래입니다.

③ 세 번째는 몇 초 / 초(second)
 
초를 가리키는 시간은 세컨드(SECOND) 인데요 SECOND의 어원은 수성(MERCURY)입니다.
수성은 태양계 행성 중에서 태양 주위를 가장 빠르게 도는 행성이고요 태양 다음으로 2번째 위치하고 있어서 세컨드라고 합니다.

이처럼 시분초 를 이루는 세 개의 침이 크로노스를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현재 혹은 순간 시간을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카이로스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 사람, 물건 등 관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 있어야 합니다.
이때 휴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요. 쉬는 날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혹은 취미활동은 본질적으로는 일하는 것이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이며 이때 내면의 카이로스 시간과 마주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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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Κ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헬라어는 '때'(시간)를 표현하는 단어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이 두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의 때와 시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된다.

'크로노스'(Κρόνος)는 규칙적인 시간적 흐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의 어떤 특별한 시기를 뜻한다.

또 “때가 벌써 되었으니”(ὥρα ἡμᾶς ἐγείρω 호라 헤나스 에기로)라는 표현(은유)은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 안에서 어떤 특별한 때(카이로스와 비슷함)를 가리킨다(종종 요한복음에서 사용됨 / 참조, 요 16:25, 3:26; 고전 7:29; 10:11; 약 5:8; 벧전 4:7; 벧후 3:9-13; 요일 2:18; 계 1:3; 22:10).

•'카이로스'에 대한 몇가지 예문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때가 이르매" - '때'(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오실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에베소서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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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C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특징과 차이

시간을 뜻하는 단어 중에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두 개념을 구분하는 감각을 부지런히 길러서 잘 활용하면 매사 성공할 수 있다. 

먼저 각각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1. 크로노스 (Cronos)

크로노스란,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의 단위를 의미한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 이 크로노스이다. 1초와 1분 같은 단위들로 시간을 측정한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얼마나 빨리?' 와 같은 것들이 크로노스와 관련된 질문에 해당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시계나 달력의 숫자여야 한다.

2. 카이로스(Kairos)

카이로스는 양적인 시간이 아닌 질적인 시간을 말하며, '적절한 순간'을 의미한다.
'언제?', '정확한 시점은'이 카이로스와 관련된 질문이다.
위기나 기회 같은 순간에 대한 개념들도 모두 카이로스와 관련된 것이다.
타이밍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을 잘 잡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늘 '어느 타이밍에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모험을 시도하기 보다 말과 행동을 삼가는 편이 좋다. 우리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경우도 타이밍을 잘 잡아야 생긴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사이에 연관성도 있다. 양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카이로스를 붙잡을 수 없다. 크로노스가 채워진 다음에 카이로스도 의미가 생긴다.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고 타이밍을 살펴라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모두 타이밍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 때나 무턱대고 열심히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적절한 시점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기를 분별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또 좋은 시기가 왔을 때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항상 '이것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 일상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타이밍이 맞는지 살펴보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

 건전한 시간 의식을 기르려면 면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을 분별하는 감각이 생기면 시간관리 능력도 향상된다.

실생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감각 기르기

계획이나 시간표를 짤 때 반드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개념을 활용하자. 

즉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한다.

언제 그 일을 시작해야 하며(카이로스)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한가?(크로노스)
그리고 타이밍이 모든 일의 가치를 결정하므로, 시간표를 잘 때 카이로스를 먼저 고려한다.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 기준을 만들어 보자.

- 각각의 일이 얼만큼 시간이 걸리는지 예상하고 시간을 할당한다, (크로노스)

-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므로 아껴 쓴다, (크로노스)

- 중요한 일에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의미 없는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거나 최소한만 투자한다. (크로노스)

-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빨리 결과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크로노스)

 이때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적당히 투자해야 일이 이루어진다. 운전, 악기, 외국어 배우기 등이 여기 해당하며,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힌다.

- 최상의 상태일 때 노력을 최대한 집중한다. 그러면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다. (카이로스)

- 짧지만 의미 있는 연설을 하는 것이 (카이로스), 길고 지루한 연설을 하는 것 (크로노스)보다 낫다.

-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려라. (카이로스) 나쁜 시기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 적시에 결단을 내려라. (카이로스) 우물쭈물하면 기회를 놓친다. 직관과 경험을 잘 활용해 선택한다.

-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가끔은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크로노스)

출처 :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 습관 (유성은, 유미현 / 중앙경제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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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야기 '모모'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어른용 동화 (1973년 作) ​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

모모 - 미하엘 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모모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날부터인가 회색신사들이 나타나 "시간을 아껴야 행복해집니다."라며 시간을 쪼개라고 강요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모에게 오지 않는다.
모모는 사람들을 돌아오게 만드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준비하다 카시오페아라는 거북이와 박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시간의 근원을 깨달은 모모는 결국 회색 신사들을 해치우는데 성공한다.

이 소설의 첫마디에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왜 작가는 스스로 이상한 이야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문득 궁금해져 호기심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모모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바로 모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경청이다.
사람들은 모모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나도 수학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차근차근 말하며 풀어보곤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실수했던 점을 발견하고 또 해결방안이 나온다.
말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말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이러한 말 한마디는 경청이 있어야 시작되지 않나 싶다.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의 반대말으로 이 소설에서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잊었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모임에 나가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으면 주도적으로 말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왠지모르게 마음 한켠이 답답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 책을 읽으니 이 답답함은 내 얘기만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말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감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던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나도 앞으로는 모모처럼 다른사람을 잘 경청해주고 내 이야기를 먼저 하기보다는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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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주요 키워드, 즉 주제는 시간이다. 이 책에서는 시간을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라고 정의한다. 또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시간의 흐름에 대해 알고 있긴 하지만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아니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왜 시간을 아껴야하는 것일까? 열심히 살아서 얻는것은 무엇일까?

​

시간절약?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릴적의 나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은 너무 느리게 갔다. 하루종일 뛰어놀고 지쳐 잠들면 또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커갈수록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바삐 살다보니 어느순간 1년이 지나있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후회하던 찰나 금방 세월이 지나갔다. 어릴때는 시간이 많았고 지루할 새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항상 왜 이렇게 시간은 빨리가는지 고민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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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항상 빨리빨리를 외친다. 나는 커서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지.,, 일상 속의 작은 행복과 여유를 찾아야지... 다짐했지만 나도 어쩔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어느새 나도 빨리빨리를 외치고 산다. 짧은 줄도 기다리지 못하고 로딩창만 보면 한숨을 외치는 나..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겠다는 생각에 삶의 목표와 행복을 잊은채 사는것이 아닐까? 살다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지,,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꿈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일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

일상속에 지쳐가는 날엔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왜이렇게 빨리 늙을까...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야."라는 말에 내가 "에이~ 엄마 하루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게 즐겁지 않아요?"라고 답했던 장면이다.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가 매일 특별한 일들로 가득찬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서야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가고 학원가면 벌써 밤이다. 인생이 항상 같은 날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어릴 적의 나는 시간이 많았고, 행복했다. 언젠가부터는 내가 "시간없어.", "서둘러." 등과 같은 말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 왜 시간은 항상 모자란가? 나는 항상 남들처럼 바쁘게 살지만 왜 아직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나중에 다 잘되라고 그런거라고 하지만 이런 삶속에서 따뜻함은 잃어버린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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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온 말중에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소확행이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소확행이란 말처럼 심심할때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것, 외로울때 들을 노래가 있다는 것, 우울할 때 위로해줄 친구가 있다는 것... 바쁜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는 습관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하면서 작은 여유를 찾는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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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시간이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시간이란 나의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하나에 내 감정, 경험, 생각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금이다." 내 책상에 붙여놓은 문장이다. 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나온 말처럼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시간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기다린다는 것은 태양이 한 바퀴 돌 동안 땅 속에서 내내 잠을 자다가 드디어 싹을 틔우는 씨앗과 같은 거란다. 네 안에서 말이 자라나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야." 이 소설이 정의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하는 책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핑계로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교훈을 주는 책인 것 같다. 또한, 경청과 오랜 고민, 생각을 거친 뒤에 말을 해야함도 깨닫게 되었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을때까지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줄거리 요약)

작은 고대 원형극장의 폐허가 있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 어느 날 어린 고아 '모모'가 나타난다.
모모는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재능의 소유자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을 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는 정적에 귀기울여 시간의 노래를 듣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난하지만 마음씨 넉넉하던 마을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는 강박에 쫓기기 시작하고 각박한 분위기가 마을을 지배한다.
모모와 모모의 특별한 친구인 베포 할아버지는 이 사태를 퍼뜨린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인 '회색 신사'들과 맞닥뜨려 정체를 알게 되고, 이 때문에 시간저축은행의 표적이 된다.

모모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안내를 받아 시간의 관리자인 '호라 박사'의 집에 피신하고, 이곳에서 황금빛 사원에 들어가 위대한 시간의 진면목을 목격한다.

호라 박사가 관리하는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빼앗고 싶어하는 회색 일당은 끝내 모모를 추격해 호라 박사의 집을 포위해 시간을 오염시키기 시작한다.
호라 박사는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지만 위험천만한 작전을 세우고 모모와 카시오페이아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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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로노스 Chronos

-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  ·시계와 달력상에 나타나는 시간(절대적 양의 개념).
하루, 한 달, 일 년, 100년...

​2 카이로스 Kairos

- 특정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
·인간이 현실에서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시간 (상대적 질의 개념)

천천히, 급속히, 거꾸러...

격변기에는 카이로스의 1년이 크로노스 수백 년에 버금가는 중요한 시기일 수 있다 ​

​​인간에게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크로노스 안트로포스(Kronos Anthropos, 시간의 신으로서 인간)'로 살아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카이로스 안트로포스(Kairos Anthropos, 기회의 신으로서 인간)'로 살아가는 것이다.

​크로노스(시간의 신)의 상징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계다.
오늘날 크로노스의 상징물인 시계와 달력 속 기호로서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근대 산업 시대에 핵심 발명품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바로 시계라고 주장했다.

​시계는 하나의 도구다.
하지만 우리는 시계를 사용하면서부터 시계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시계는 우리 생각에 침투해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조끼 주머니에서 항상 시계를 빼어 들고서 "늦었어, 늦었어"라고 말하는 토끼가 등장한다.
여기서 토끼는 크로노스 안트로포스 모습을 상징한다.

​철학자 존 스미스에 따르면 크로노스 세계에서 중요한 질문들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등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주로 숫자로 표현된다.

​시계에서는 모든 하루가 똑같다.
하지만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비범한 작품 '기억의 연속성'은 시간에 대한 우리 인식이 주관적인 체험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그림에서 시계는 카망베르 치즈처럼 녹아 흐늘흐늘해져 있다.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도 '음향과 분노'에서 "시계 안의 조그만 바퀴들로 체크되는 시간은 이미 죽은 것이다.
시계를 멈출 때 시간은 생명을 얻는다"고 적었다.

​반대로 카이로스 세계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특성이 강조된다.
작가 린다 그린러는 작품 '굶주린 대양'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항해 초기에 시간 흐름은 거리로 측정된다.
이때 마일 수는 초침의 수많은 움직임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 선원들이나 나 역시 시간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시간 개념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 후 어장에 도착해서 그물을 던지게 되면 시간 흐름을 표시하는 척도는 거리에서 그물을 던진 횟수와 배 위로 던져 올린 고기 무게로 바뀐다.
선원들이 손목시계를 차는 법은 거의 없다."​

​카이로스(기회의 신)의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시계가 가리키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전략적 시간, 즉 각 사건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과 관계된 시간이다.
특히 카이로스적 시간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카이로스 세계에서는 '정확히 언제?'처럼 타이밍과 관계된 질문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질문'은 카이로스 안트로포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질문은 피터 드러커가 잭 웰치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이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은 지금 이 일을 새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기존에 불필요한 활동 때문에 소중한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주어진 기회를 붙잡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앞머리가 풍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기회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처럼 행동해야 할 적기를 지혜롭게 알아차려 기회를 붙잡음으로써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 안트로포스의 삶이다.​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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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에 대한 고찰                    

1.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평함이란 크기와 질량, 부피와 같이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단위에서의 그 절대 값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색하기를 즐겼던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의 시간을 찾아내었던 것 같다. 이 중 하나가 크로노스(c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의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정해진 크기와 단위를 가진 시간’이 이것과 가까워 보인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의 개념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카이로스는 ‘어떤 의미’를 가진 시간을 말한다. ‘시간이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카이로스를 시간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사용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게 되어 좀 더 능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크로노스는 단 한순간, 그것이 비록 단 일 초 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자신의 것을 빼앗길 수 없는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다. 크로노스로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 년을 365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일 분은 60초와 같이 수치를 통해 정량화가 가능하다. 

2.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시간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시간은 태초부터 있어온 것일까.’와 같이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우선 논외로 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본질을 따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우선 ‘시간을 사용한다’는 관점에서의 시간에게로 눈길을 가져가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하게 주어진 자유지만 스스로 그 결과를 책임져야’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행위이다. 

시간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제약을 가하려 하지 않기에,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크로노스의 소중함은 쉽게 잊혀 지기 일쑤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했던 것 같아 보인다. 카이로스의 개념에는 책임을 잊어버린 시간의 낭비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카이로스란 의미를 가진 시간이다. 어제 내가 보낸 24시간을 돌이켜 보자.  그 시간 중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24시간 전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인 것일까. 자신 있게 ‘분명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인 것일까. 

만약 그것이 1시간이나 그 이하뿐이라면 어제 나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는 24시간이었지만, 카이로스는 1시간이 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23시간이란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침 햇빛에 물안개가 사라지듯 그저 증발해버린 것일까.     

이렇듯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단위를 통해 일반화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특수화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래부터 있어온 타의적 개념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그 시간을 사용하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자의적 개념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i 24cm 33cm 1931 Museum of Modern ArtNew York City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i, 24 cm × 33 cm, 1931,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3.

시간 또한 개체이고 크로노스는 정량적인 개체로, 카이로스를 정성적인 개체로 여기게 된다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이 끼어들만한 틈을 여기저기에서 만들어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비록 그것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원래부터 있어온 것에 대한 무지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행위가 과학이고 그것에 의미를 담아 해석하려는 정성적이고 주관적인 행위가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생각의 걸음을 조금 더 앞으로 끌고 나가본다. 크로노스는 지극히 정량적이고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태초부터 주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다른 모든 것들처럼 크로노스 또한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띄고 있으며 그것을 동일한 크기와 분량으로 나누어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엔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생각하고 생각하던 ‘사고의 유희’가 어딘가 꼭꼭 숨겨져 있던 카이로스를 인간 세계로 끄집어내었고 그때부터 시간은 정성적 성질을 지닌 개체가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 하더라도 시간 또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된 이상 어떤 특정 구간에서는 반드시 연속성을 갖기 마련이었다. 이제 물질계로 끌려 내려온 크로노스에게 속성을 부여해가는 행위는, 예를 들어 크로노스를 글과 논리에 담아내는 행위와 같은, 생각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4.

그렇다면 정성적이고 가변적인 카이로스를 정량화할 순 없을까. 수학적으로 본다면 어느 특정 시점, 영에 가까운 지극히 짧은 시점에 대한 미분을 통해 카이로스를 크로노스화 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영에 가까운 순간에서 미분된 개체는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고 하더라도 정량화된 특정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일반화된 것이든 특수화한 것이든, 이 두 가지의 시간 모두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시야를 늘려가야만 한다.     

카이로스 또한 크로노스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가 해야 할 일은 객관의 크로노스를 아주 조금씩이나마 주관의 카이로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 삶이란 객관의 크로노스에서 주관의 카이로스를 찾아 쌓아 가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흘러간 크로노스 속 어딘가에 쌓아둔 카이로스를 찾아 만지작거리며 채색하는 것이, 희끗해진 머리에 문득 불어오는 바람을 그리 차갑게 만은 느껴지지 않게 만들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Vladimir)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과,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려 산을 올라야만 하는 시시포스(Sisypos, Sisyphus)의 시간 속에는 얼마만큼의 크로노스가 있는 것일까.

비록 물질계 속을 살아가야만 하지만 ‘생각하고 생각하는’ 본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크로노스는 얼마만큼의 카이로스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일까. 

태초 신에게서 부여받은 인간의 시간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 다른 시간은 없었을까. 혹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놓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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