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clear land for yourselves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If you are so numerous," Joshua answered, "and if the hill country of
Ephraim is too small for you, go up into the forest and clear land for
yourselves there in the land of the Perizzites and Rephaites.
개척(開拓) : 열 개(開), 넓힐 척(拓)
1. 거친 땅을 일구어 논, 밭을 만듦.
2. 새로운 분야(分野), 운명(運命), 전도(傳道) 따위를 엶.
3.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함.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받은 은혜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을 받았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지겠다고 남들보다 더
누려보겠다고 하며 감사하기보다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은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공연히 짜증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할 수 있으면 자기 지분을 더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공동체에서는 집단 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한국에서는 노사분쟁이 해마다 일어납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띠고 때로는 삭발을
하고 때로는 공장을 폐쇄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약사와 의사 사이에 처방분쟁이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 사이에 수사권 분쟁이
있습니다.
양의사들과 한의사들 사이에 영역 분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잘 해보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지나치면 우리 부서, 우리 목장, 우리
그룹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지도자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특권 계층의 요구를 절제시키고 자발적으로 섬김의 정신을
갖게 함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파로부터 쉽지 않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살펴보면서 믿음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나아가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요셉
지파의 불평 : 더 많은 분깃을 주소서(17:14)
본문은 요셉 자손과 여호수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복을 주셔서 큰 지파가 되었는데 제비를 뽑아 한 몫만 유산으로 받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들의 말에는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특별히 복을 주셨듯이 여호수아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과 요구는 여호와께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뽑은 제비는 여호와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며 그의 땅 분배는
모세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인 요셉의 후손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그에 따른 특혜를 요구합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 최강대국인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7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졌기에 야곱의 가정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그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잘
대접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범한 죄까지도 용서해주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해서 고센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400여년이
지나는 동안 70명이었던 가족이 장정만 60만 명, 가족까지 따진다면 200만 이상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한 가족이 애굽으로 건너가 한
민족을 이루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런 공로를 생각해서 요셉 자손은 자기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분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기로만 따지면 므낫세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의 크기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넓었습니다.
므낫세는 요단
동편의 바산과 길르앗 영토를 얻었으며, 요단 서편에도 이스르엘 골짜기를 경계로 하는 비옥한 영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므깃도와 벧 스안과
같은 주요한 성읍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 받은 땅까지 합하면 요셉 지파가 얻은 땅의 면적은 모든 지파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었으면 감사해야 하고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섭섭하다고 따집니다.
우리처럼 큰 민족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호수아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선 요셉 지파의 대표들은
다 여호수아의 친인척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누군가 말했듯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칫하면 여호수아도 요셉 지파의 편을 들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답변 : 스스로 개척하라(17:15)
요셉 지파의 요구는 자칫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다른 지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요구를 들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다른 지파에 비하면 넉넉하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책망할만한데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림 산지가 네가 너무 좁”다고 하며 그들의 불평을 받아줍니다.
그러면서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한 분깃은 정착과정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고, 다른 한 분깃은 이제 요셉 지파의 노력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서 받기를 바라지 말고 원하는 땅을 스스로 나가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유다 지파가 그랬습니다.
한 분깃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받았을 뿐 아니라, 갈렙을 통하여 새로운 산지를 개척하여 지경을 넓혔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 방법이고 이제
요셉 지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이 큰 민족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요셉의 변명 : 그 땅은 넉넉지 않고 그들은 철병거를
가졌나이다(17:16)
요셉 지파가 더 많은 땅을 요구할 때에 자신들이 '큰 민족'이기 때문에 더 큰 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니 자신들은 힘이 부족하다고 꼬리를 내립니다.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주저하는 두 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
번째는 가서 개척하라는 땅이 자기들에게 좁다는 것입니다.
얻어 보았자 좁은 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서
정복해야 할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은 철병거가 고사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이기고 그 땅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전쟁할 때 누구의 힘으로 싸웠습니까?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여리고를 누구의 힘으로
정복하였습니까?
기브온 전투를 남부지역을 정복한 것이 누구의 힘으로 된 것입니까?
강력한 북쪽 지역의 가나안 족속을 누구의 힘으로 물리쳤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히였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적들의 강함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후손임을 내세워 쉽게 땅을 더 분배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 속에 안주하다 보니 어느 새 앉은뱅이의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들의 능력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너희가 큰 민족이라면 힘도 클 것이고 그렇다면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요, 만일 스스로 개척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다면 주어진 땅으로 충분하니까 받은 것에 만족하며 그냥 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면 : 너는 큰 민족이니 네가 개척하라(17:17-18)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 즉 한 분 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맞는 말입니다.
요셉 자손은 큰 민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큰 민족, 큰 권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셉 자손들뿐만 아니라, 열두
지파가 다 강하고 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쫓아내리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상속’의 의미를 포함한 단어로서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은 철병거를 이길 수 없는 자신들의 부족한 능력을 언급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중심을 봅니다.
의지가 없어 순종하지 않는 것은 능력이 없어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능력’이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18절에 ‘너’라는 단어를
네 번씩이나 사용하면서 요셉 자손의 결단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큰 민족'임을 알고, '큰 권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견고한 성을 차지하고 지키고 있어도,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군사력에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요셉 자손은 반드시
승리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큰 민족이지만, 땅은 당신이 빼앗아서 나에게 달라'는 요셉 자손의 부탁은 사실 알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힘써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힘써 찾는 자에게 찾게 될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 뒤로 물러선 자에게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다면 그만큼 내가 힘써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지혜를 받고,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남들보다 더 건강하면, 남들보다 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더욱 수고 하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1.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창세기 48:5을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야곱으로부터 두 몫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축복에 의해 두 지파를 이룬 요셉
자손은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므낫세 지파는 절반은 동편에서 절반은 서편에서 몫을 얻었기에 사실상 두 몫을
배정받은 셈입니다.
따라서 요셉 지파에게는 므낫세 지파 몫으로 두 몫, 에브라임 지파 몫으로 한 몫 도합 세 지파의 몫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7:3을 보면 슬로브핫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습니다.
보통 아들이 없으면 그 땅들은 모두 삼촌이나 다른 친척의 아들들에게
상속이 되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그 땅을 상속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이미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앞에 나아가서 더 많은 몫을 요청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 직전에 행한 인구 계수에 따르면 므낫세 지파가 52,700명,
에브라임 지파가 32,500명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반은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기 때문에 남은 두 지파를 합해도 6만 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다른 지파들-유다, 단, 잇사갈, 스블론-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훨씬 좋은 땅을 차지한
그들이 감사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특권이란 한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권리를 말합니다.
요셉 자손들이 한 분깃을 더 달라는 제안은 공동체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집단 이기주의를 대변합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룹들이 있는 공동체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요셉 자손들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빙자하여 자신들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요구하자 여호수아는 다른 지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산간 지역과 가나안 족속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점령하여
개척하도록 제안했습니다.
갈렙의 본
요셉 자손의 특권의식과 그들의 소극적인 모습은 갈렙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갈렙은 이미 정복된 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달라고 했는데 요셉 자손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갈렙은 헤브론 성읍이 매우 크고 견고하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요셉 자손은
자신들과 싸울 가나안 거민들이 철병거를 가졌다면서 올라가기를 주저합니다. 갈렙은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가나안 정복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섰는데 요셉
자손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파라 자부하면서도 앞장서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못하고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철병거로 무장한 헤브론
산지를 제게 주십시오. 내 나이 85세로되 장정과 더불어 싸울 힘이 있사오니 이 산지를 제게 주시옵소서” 담대하게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복과 특권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언약한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의 본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가장 마지막에
기업을 받습니다. 그는 자기보다도 이스라엘 지파들의 기업 분배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세라를 얻습니다(19:50) 그는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지어야만 하는 성을 선택했습니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은 가장 특권층에 속한 분이 오신 것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당신의 특권적 지위를 한 번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산골 동네에서 자라셨습니다. 공생애 시작 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면서 사십일
금식 후에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무리는 예수님에게 내려오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럴 능력이 있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과 백성들을 돕고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특권적 지위를 악용하였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위선자라 부르시며 질타를 하셨습니다. 먼저 가장
큰 특권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만을 위해 사용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합니다.
2.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19장에 보면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의 기업 분배를
다룹니다. 이들은 인구가 매우 많은 지파였지만 배당받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셉 지파처럼 왜 적은 땅을 주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제비를 뽑아 기업을 얻은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불공평해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적당하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공평을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연약한 지체를 받아
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과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이웃의 관계에서도 성령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들은 형제나 자매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특권이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유보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큰 자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양보는커녕 도리어 자기 몫을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3. 개척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사고 팔
때에 좀 독특한 방법으로 매매한다고 합니다.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우선 양을
가파른 산비탈에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러
넓은 풀밭에서 풀을 뜯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양이 되고, 살찌는 양이 됩니다.
그러나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지금은 편안하고 쉽지만
결국은 계곡의 무서운 협곡 바닥에 이르러 계곡물에 휩쓸려 죽거나, 풀이 없어서 굶주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버리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개척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진짜 큰 사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파괴적이고 비판적이며 시시비비 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각을
가질 때 우리의 사고력이 창의적이 되고 생산적이 되지만 마귀의 시각을 가질 때 말은 많아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현재의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만들어질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후에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장차 활동할 지경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철병거가 기다리는 그 산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둘 중의 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치면서 땅을 정복하려 한
갈렙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두려움에 떨던 열 명의 정탐꾼의 자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4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갈렙은 헤브론을 차지하는 비전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성은 여전히 크고 견고하였습니다.
그의 눈에 여전히 아낙 자손이
보였습니다.
85세 된 자신의 연약함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길임을 알기에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셉
지파들에게도 가나안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철병거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을 계산하고 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산지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 이루어놓은 자리를 그냥 차지하기 원합니다.
열심히
뛰기보다 편안하게 쉬고 싶어합니다.
복은 받고 싶지만 대가를 치루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매력적이지만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몸은 고달파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정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임을 깨달으며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를 다스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우리 것이라고 이미
선포하신 분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려갈 길이 멀고 철병거가 있어도 갈렙처럼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믿음으로 개척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게으르게 앉아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자들은 결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특권 의식을 버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과
양보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함께 나아가며 마침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분깃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영역을 요구하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아직도 미개척지인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땅을 개척하여 기업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곳은 산악지대라 자신들에게 넉넉한 곳이 되지 못하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 살기 때문에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면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비록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
우리는 더 많은 분깃의 영토를 요구하며 불평하는 요셉지파에게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찾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그들이 맡은 몫이 그들에게 적은 것이라고 불만족하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비옥한 가나안 중심부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지파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땅을 배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내세우면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셔서 그 후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닙니다.
요셉지파가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원인은, 그들은 질보다 양에 치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단 동 서편의 좋은 땅을 차지했음에도 양적으로 볼 때에 자기 지파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적은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교하는 데서입니다. 요셉지파는 자기 지파의 다른 지파와 비교하면서 불평했습니다. 내 조건이 하나님 앞에서 최상의 것임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다른 지파와 비교하는 데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지파는 이기적임으로 불평했습니다. 요셉지파는 자기들 중심의 이기적인 판단에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1000원을 잃어 버려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아이에게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더 크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1000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2000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이기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요셉지파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부정적이 됨으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에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이고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사람이 있다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평했습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양적이거나 비교적이고 이기적 태도에서 자유하고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인 태도 속에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의 모습 갖추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의 불평과 불만족하는 요청에 여호수아는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지역을 더 분배해주면서 그 땅을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와 산림지역이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원주민이 있어서 개척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고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그 끝가지 네 것이 되리라”(17-18)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창조성이 있음을 주지시킨 것입니다. 얼마든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척하다”고 쓰인 히브리어 ‘바라’라는 말은 ‘베어 넘기다’는 뜻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세기 1:1.
구약 성경 / 48회 사용
비디오 같은 특수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사게 되면 사용자 편람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잘 읽고서 사용하면 그 기계의 최고의 성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용자 편람을 주셨는데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창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간직해야 할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라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수도원의 요리사가 되는 길만이 열리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수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하찮아 보이긴 하지만 수도원 요리사의 일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수도원요리사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들어간 젊은이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공부하고 기도할 때에 젊은이는 음식을 만들면서 “주여, 제가 만드는 음식들이 저들의 영과 육을 살찌우는 하늘의 만나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에는 “주여, 이 그릇들이 깨끗케 되는 것처럼 주 예수께서 제 마음도 깨끗케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불을 지필 때에는 “이 불길처럼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수도사들의 마음속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요리사로서의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활자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이었고 찬송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수도원에 요리사로 들어온 지도 7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착실하게 기도생활을 해온 그에게 수도사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세월이 지난 뒤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리버만이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든 한 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리버만은 아홉 살 때 단돈 5달러를 들고 미국에 이민하여 맨하튼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버만은 일흔 네 살에 은퇴한 후 노인정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둑 파트너가 약속을 어겨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에 한 젊은 봉사요원이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지요” 라고 종용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리버만은 화실을 찾았고 그때부터 10주간 교육을 받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나이 여든 한 살 때, 일약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로 불리었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는 백 한 살에 스물 두 번 째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인생을 살도록 인생의 중요한 편람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부여하신 편람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창조적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5가지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실패의 기억을 오래 남겨두지 말라. 둘째, 자기비하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셋째, 사업은 위기를 즐기는 게임이다. 넷째,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면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다섯째, 실패는 마지막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요 네게는 힘이 있다고 격려하며 창조의 역사를 이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삶을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고 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요셉의 후손들로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자부심 강한 요셉 자손이 그렇게 나약하고 비겁하게 바뀐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가 차지하라는 땅을 향하여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철병거가 있다”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 없고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미국의 실업가로서 체신부장관을 지냈고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정확한 경영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투자해 구입한 물건들은 엄청난 이윤을 남겼습니다. 워너메이커가 투자하는 것은 항상 최고의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2달라 50센트를 주고 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나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가난한 소년시절 성경을 읽고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믿음을 배웠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대부호의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요셉지파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평과 불만족에서 자유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창조적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용기를 가짐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땅과 같은 현실을 요셉지파의 축복의 땅을 만들듯 변화시켜 가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는 위대한 축복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