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무슨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실까요?
성경에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구원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나이가 많든 적든, 정상인이든 장애인이든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 자체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종말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것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최고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였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고 살고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내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이 세상에 있고, 나에 관한 것에 있고, 육신적인 문제에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이 곧 나의 관심과 소원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안타까운 것은 “돈을 벌려다 건강을 잃고난 후 건강을 되찾으려고 그 돈을 다 잃어버리는 것.” “장래를 위해서만 살다가 현재의 삶도 미래의삶도 모두 헛되이 잃고 마는것.”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영원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는 것.”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시는 말씀은 “사랑하는 이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은 단 몇초 밖에 걸리지 않으나 그 상처가 아무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단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니라.” “내가 여기 네곁에 이렇게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회개하고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자녀들로 인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이는 세상의 복만을 위해 살며, 잠시 행복만을 즐기려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상주심을 위해 잠시 고난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히 11:24-26)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가 가진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와 권세, 건강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원하시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이라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려 하고, 적은 것에라도 그져 감사하려 하고, 힘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려 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흘리신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베푸시는 축복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뿐 아니라 보이는 세계에서도 말로 다할 수 없이 풍성합니다. 축복받을 그릇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 회복하기

교회에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 재정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한 성도가 그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대화인지 모른다. 만일 교회가 성도들을 숫자로만 생각한다면 성도수 자랑, 건물과 헌금 자랑, 또는 힘자랑으로 부패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숫자로 생각지 않으시고 개개인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부르는 분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사랑, 오직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은 온통 우리를 위해 전전긍긍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죄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죄를 치유해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가에 관심을 갖고 대할 때가 많아 관계가 불행해진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에 있었다. 12명의 사도를 세우셨고, 70인의 제자를 세우셨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이 여러 부분에 있었던 것 같지만 가장 큰 관심은 사람에게 있었고 그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일꾼 즉 제자가 되도록 도우셨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의 이익추구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복을 누릴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하나님, 저는 사람이 너무 싫습니다. 인간들이 너무 나를 괴롭힙니다. 저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제가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때 하나님은 두 가지를 깨닫게 하셨는데 하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분의 최고의 관심의 대상이요, 둘째는 개개인은 하나님이 만든 걸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너도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목회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찾아가라는 명령에도 회피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우리도 자기 이익에 맞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을 대할 때 여러 합리화를 갖고 무관심하거나 미워한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이 교회에 찾아왔을 때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기뻐하는가, 아니면 교회의 조직체에 들어와 어떤 유익이 있을까를 계산하고 있는가? 주변에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다. 북쪽에는 복음과 축복이 필요한 형제들이 있다. 눈을 들어 이 땅의 민족들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희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5:21-23)

좋아하는 후배와 점심을 함께 할 때 그는 살면서 일어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내가 새벽기도를 간 사이 한 번도 깨지 않던 젖먹이 아이가 우는 바람에 그날은 새벽잠을 설쳤다고 했습니다. 후배는 아이가 칭얼대자 엄마 젖을 빨며 편안히 자던 아이를 생각해 아빠의 젖을 물렸나 봅니다. 하도 급하니까 시도했던 모양인데 어디 통할 일입니까! 같은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한마디 했습니다.

“아이가 찾은 것은 젖이 아니라, 바로 엄마이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대화에서 여인의 관심은 예배하는 장소, 시간 등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예배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입니다. 영적인 찬양은 드리는 찬송, 즉 음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와 찬양에 대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 14:15)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들의 심령은 무지와 습관 때문에 바리새인처럼 경건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실제의 모습은 하나님 밖에서 역사나 전통을 고수하는 자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경건한 음악을 찾기 위해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고전이란 무엇이며, 고전시대에 음악을 만든 크리스천들이 추구했던 경건 사상과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경건 사상의 본질은 서로 다른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의 음악은 성경이 말하는 음악 형식과 동일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특정 시대의 작품 스타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된 심령으로 드릴 수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는 자, 경건의 모양만을 갖춘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내적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20절은 음악의 목적과 기능을 규정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영적인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의 첫 구절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는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진정)와 이해(마음) 없이는 찬양의 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로 드리는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드리는 심령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찬양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 찬양은 균형을 잃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찬양에는 신령과 진정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는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야 하며, 또한 진리에 기초해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보기에 아름다운 찬양이라 하더라도 드리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관심인 ‘신령과 진정’ 밖이라면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영적인 찬양은 음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찬양하기에 앞서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최선의 찬양을 위하여

1. 에베소서 5장 18-20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3. 거룩한 찬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요한복음 3:16-17)



흔히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심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하는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육체적 본능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동물적 수준의 사람이라고 말들 합니다. 반면에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 앞서고,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복종시켜가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르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먹고 입고 사는  이러한 육신적인 생활이란 어떤 사람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거기가 거깁니다. 특별히 유별날 것이 따로 없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요, 그 생각과 관심일 것입니다. 즉, 생각의 바탕, 생각의 고향 즉, 그 사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됨의 가치기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성장에 관하여 매슬로우(Maslow)라는 발달 심리학자가 발표한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육체적인 욕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이 문제가 되고, 아울러 생리적인 욕구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이 동물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안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고통과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며, 되도록이면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소속의 욕구입니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친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바램을 갖게 됩니다. 모임에 끼어들기를 바라고 거기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존중의 욕구 즉, 자기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이렇게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는 데에서 확인이 됩니다. 육체적, 생리적 욕구가 채워짐으로 행복해 하던 사람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된다면,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를 채우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이 채워져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 중에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확인함으로 행복함을 갖게 되는 자기실현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성숙해짐에 따라 관심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행동여하, 추구하는 삶의 농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10월 9일은 우리 한국에서는 한글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날을 기념하여 제정한 날입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우리 민족은 우리만의 고유한 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왜 다른 할 일도 많이 있었을 텐데, 굳이 한글을 만드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훈민정음(한글의 옛말)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원문대로 읽으면 “내가 이를 어엿비 여겨”라는 말인데, 이 “어엿비”란 말은 “불쌍히 여겨”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는 바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서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종대왕의 관심은 백성들에게 있었고, 그것도 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글창제라는 귀한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관심이 사랑과 연결되게 된다면, 여기에는 그 사랑이 역사하는 놀라운 일이 만들어지는 귀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관심이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생명의 문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돈의 가치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을 때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돈은 아무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바로 생명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건강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인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 인간 자신보다 인간의 생명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가인(Cain), 그가 자기 동생 아벨(Abel)을 죽이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이었지만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다는 염치없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염치없는 가인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은 살고 싶어 하는 가인을 하나님은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을 죽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살인하지 못하도록 율법을 제정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공통적 관심사인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그 생명을 대하는 내용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든지, 병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도록 건강하게 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현실적 관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The Eternal Life)” 곧 “영생”이 되도록 하는데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영생”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는 씌어지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거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할 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현실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양옆에 있는 십자가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편의상 이들을 두 강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십자가라는 참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한 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어려운 고통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들이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하는 동료를 꾸짖으면서, “네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받는 것이라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그러하지 않아. 이 사람은 잘못 행한 것이 없어”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 하였습니다. 이 두 강도의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관점을 봅니다. 한 강도는 생명을 현세적 가치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영원한 가치로 보았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현실적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의 것으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로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도 좋겠습니다만, 예수님은 누구에게 응답하셨는가를 보십시다. 그것은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의 생명이 당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우리는 죽음 후의 모습에만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나의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대할 수 있는 변화된 사고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젖줄과 연결함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기술 과학 문명이 가장 발달된 세상, Post Modernism의 세상 등등. 그런데 종교적으로 현대를 표현하기를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신학자요 목사인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사람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본회퍼는 “장차 올 세상은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본회퍼가 언급하는 이러한 성숙한 세상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이 점점 줄어지고 인간의 역할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즉, 교회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이 세상의 역할이 점점 커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몸이 아프면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을 찾습니다. 옛날에는 동네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마을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목사를 중심으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거나, 아주 안 오면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에 만일 이런 식으로 처신하면 오히려 미신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영역에서 세속의 영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는 더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의 부분들을 만들어, 못쓰게 된 부분은 바꿀 수도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조작하여 인간의 생명까지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을 아주 오래오래 연장시키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심 깊은 사람의 유전자를 이식한다한들 그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대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이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데에까지 그 관심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숙한 세상에서도 고유하게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이 영생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에서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관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스스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지심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요 3:16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요 3:17은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이 나타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구원을 받는 그 일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부르심에 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우리의 주변의 삶에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 호라오(ὁράω ),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에이도(εἶδω),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블레포’(βλέπω)







요한복음 20:24-29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ὁράω) 고로 믿는구나. 보지(εἴδω)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오늘날 도마의 이름 앞에는 자주 "의심많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의심많은 도마"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도마를 믿음이 없고 의심 많은 사람의 상징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설교자들로부터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글 성경을 보면, 도마의 태도는 "보지(εἴδω) 않고는 믿지 않겠다"(25절) 였고, 예수께서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하신 뒤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NIV성경은 "Stop doubting and believe"라며 "의심을 멈추고 믿어라"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 같은 그의 말과는 반대로 주님을 보자(ὁράω 호라오)마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며 그의 믿음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육의 눈으로 못자국을 보고(εἴδω 에이도)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20: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고 했을 때, "보았다"라는 헬라어 "호라오(ὁράω)"는 마음으로 보고 깨닫고, 체험을 통해 보는 것 즉 육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것을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보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인 것을 깨달아 알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도마가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말의 "보다"라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는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을 말한다.
"에이도"에서 ‘우상’이라는 ‘에이돌론’(εἴδωλον), 영어의 아이돌(idol)이 유래된 것만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육의 눈과 영의 눈으로 보는 차이

에이도와 호라오는 둘다 "보다"라는 뜻을 갖고있는데, 에이도는 호라오 안에 속해있는 단어이다.
예수께서 한 문장 안에서 "보다"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신 것과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마태가 굳이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기록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헬라어 중에 '보다'라는 단어들을 보면,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포함하면서 어떤 것들은 더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 눈으로 보는 것(옵타노마니 ὀπτάνομαι,옵타노 ὀπτάνω 마 5:8, 17:3, 눅 17:22) 

(2)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에이도 εἶδω 마 2:2) 

(3) 자세히 보는 것, 관찰하는 것(떼아오마이 θεάομαι, 떼오레오 θεωρέω 마 6:1, 11:7, 눅 24:37) 

(4) 보는 능력, 알아차리는 것, 주의하는 것(삼가...) (블레포 βλέπω 마 12:22, 막 13:33, 롬 7:23) 

(5) 여러 상황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예언적으로 보는 것,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쓰임 (호라오 ὁράω 눅 1:22, 요 1:18)

그러면,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위의 뜻으로 다시 보자.

"너는 나를 본(ὁράω)(5)고로 믿는구나. 보지(εἴδω)(2)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특히 예수께서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태복음 5장의 8복과 똑같은 패턴이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영생의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마 5:3) 

"...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따라서 이 말씀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나를 (5)믿음의 눈으로 보았기에(영적으로 보고 알았기에) 믿었구나. (2) (영생을 소유한) 복된 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 버리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Blessed are ..."라는 패턴으로 쓰인 말씀들은 영생을 소유한 거듭난 자들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믿음(faith)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believe) 자가 되라"(27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어번역은 다른 단어를 사용했으나 헬라어 원어는 둘 다 피스토스(πιστός)로 쓰였다. 이는 성령의 열매인 '충성'이며(갈 5:22) 거듭나지 않은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으므로 중생한 크리스천의 믿음을 말한다. 따라서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ἄπιστος)는 거듭나지 않은 자(without Christian faith)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도마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네가 왜 그렇게 영생이 없는 세상 사람처럼 말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이다.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보고 경험해 보아야 믿겠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말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보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2:39, 16:4). 즉 우리가 모르거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주님이신지,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지를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고 그것을 경험해야 믿겠다고 하는 것을 "악하고 음란하다"라고 말씀한다. 즉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표적을 구하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했던 것을 알고있던 도마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며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는 주님을 본 순간(호라오) 즉 영적으로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기를 부인하며 종의 자리로 내려가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믿음이 없고 의심많은 제자들

성경에는 도마의 이름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의심이 많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모든 제자들 또는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1) 5병2어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며 유령인 줄 알았는데 주께서 안심시켜 주신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며 무서워 빠지는 것을 보며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다(마 14:31).

(2)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다(마 8:26).

(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함을 보며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눅 24:25).

(4)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고 예수께서는 그때에 그들에게 왜 의심하느냐고 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눅 24:38-41)

(5)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와서 예수님을 뵈었으나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17).

칭찬받은 도마

왜 주께서 이렇게 도마를 칭찬해 주셨을까? 그것은 주님을 뵙자마자 도마는 정말로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알았기에 못자국과 옆구리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나 도마는 "나의 주"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다.

게다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하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말렸으나, 스승의 마음은 반드시 그곳에 가려고 한다는 것을 파악한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라고 제자들을 설득했다.

베드로는 항상 "다른 이들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며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내가"라고 했던 반면, 주님에 대한 고백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도마는 항상 "우리"라고 말하므로 제자 공동체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 앞에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며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에 "네가 복이 있다"(Blessed are you)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도마가 주님을 알아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자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육안으로만 판단하며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는 그들에게 복이 있다(blessed are they)고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은 현실로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하며, 현실과 반대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는 것은 거듭난 자가 아니며,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도마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찾아와서 비록 책망을 하시더라도 결국 믿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그 사람을 찾아오시고 찾아오신 그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이 없이는 유명무실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거나, 내가 주님을 찾아간다거나, 내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이들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올림픽 등 경기에 나가서 메달을 따서 혹은 멋진 음악을 연주하여 또는 선한 일을 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영광은 주께서 홀로 받으시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 영광이지, 우리가 영광을 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여 주님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교만을 다 내려놓고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자기를 부인한 자만이 영생을 소유한 "복있는 자"가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적용] 

당신은 지금 어떤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눈으로 보고 판단해버리고 결론을 짓는 믿음없는 육안으로 세상과 주님을 보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성령안에서 하늘의 지혜와 믿음의 눈을 갖고 복이 있는 자로서 세상과 주님을 보고 알고 있는가? 베드로와 도마처럼 "네가 복이 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았는가? 나는 정말로 영생을 소유한 자인가? 나는 아직도 표적을 구하며 주님을 시험하는 우상숭배자인가? 아니면, 도마처럼 확인하지 않아도 영의 눈이 떠져서 주님을 알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가?

[기도 제목] 

1)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모든 언행에 믿음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믿는 자로 살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3) 주님의 평강이 세상의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게 하옵소서

4)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하며 사는 것을 뛰어넘어 나의 신앙 고백을 하며 살아가게 인도하옵소서.

5) 나의 어떠한 행위로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항상 나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6)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영적 간음을 행치 말고, 믿음이 없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해 보아야 믿겠다고 하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7)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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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보다”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다'라는 의미를 좀 더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호라오(ὁράω )

'보다' 라는 뜻을 갖은 동사로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깨닫다 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요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 요 3:11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언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2.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응시하다, 보여지다'( 눈으로, 향한 것처럼, 관찰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 요 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 에이도(εἶδω)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바라봄으로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도는 ‘우상’이라는 ‘에이돌로’(εἴδωλο)에서 유래되었으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 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는 뜻을 가지고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5. 블레포’(βλέπω)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원어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자각에 관하여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이러한 다야한 의미의 단어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분명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

첫째로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에서

둘째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

셋째로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로 그

넷째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에서

다섯째로 깨달아 알게 되는(ὁράω ) 인지함으로 보게 되는 단계로 그 깊음이 다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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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하다, 살펴보다.

조심하다, 삼가다, 돌아보다, 향하였더라
1,조심하다 :  ble,pete         2,힘쓰는 자임이라 : evrga,zetai
고전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전16:10)  VEa.n de. e;lqh| Timo,qeoj( ble,pete( i[na avfo,bwj
        ge,nhtai pro.j u`ma/j\ to. ga.r e;rgon kuri,ou evrga,zetai w`j kavgw,\
1) 조심하다 :  ble,pete
1.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블레포(Aeschyl. 이래)는 '보다 see'를 의미하며, 호라오(oJravw, 3708: 보다)에서보다 눈의 기능에 더 강조를 둔다. 따라서 블레포는 '눈이 멀다'의 반대어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심지어 '통찰(간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블레포는 70인역본에서 130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 파나, 하자'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블레포는 70인역본에서 '보는 것, 인지하거나 보는 능력, 환상' 등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블레포는 신약성경에서 132회 나오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감각-지각작용 중에서 단순히 '보는 능력' the capacity to see 을 뜻한다(마12:22; 눅7:21).
(b) '조사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마5:28; 계5:3이하).
(c) 블레포는 '주의하다, ∼에 주의를 기울이다'(막13:33; 고전1:26), '어떤 것을 주의하다'(고후10:7), '혹은 조심하다'와 같은 지적인 기능들을 나타낸다.
(d)  블레포는 비유적으로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혹은 '관찰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롬7:23; 히2:9).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라는 말을 할 때, 블레포(blepo)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
(1) 조심하는 일?
조심하는 일은 '보다 see'를 의미하며, 호라오(oraw 보다)에서보다 눈의 기능에 더 강조를 둔다.
따라서 블레포는 '눈이 멀다'의 반대어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심지어 '통찰(간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막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1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13: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21: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행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빌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히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요이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보라]) 하더니

2) 디모데가 가는데 조심할 일이 무엇인가?
조심하라는 말이 “관심 있게 지켜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번역이 조심하다고 했으니 이해가 좀 어렵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을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사람들의 모델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교회 안박으로 지며 졸 것이 있어야 한다.
남들은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알고 살아야 한다.

(계6:3) Kai. o[te h;noixen th.n sfragi/da th.n deute,ran(
h;kousa tou/ deute,rou zw,|ou le,gontoj( :Ercou) Kai. blevpe.
계6: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보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계6: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보라]) 하기로
계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  bleyousin]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3) 힘쓰는 자임이라 : evrga,zetai ← e[rgon(에르곤) 일, 행위 work.
(고전16:10)  VEa.n de. e;lqh| Timo,qeoj( ble,pete( i[na avfo,bwj             ge,nhtai pro.j u`ma/j\ to. ga.r e;rgon kuri,ou evrga,zetai w`j kavgw,\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르곤(Homer 이래)은 폐어 에르고(e[rgw: 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일, 행위' work를 의미한다. 호머로부터 자주 나오는 이 단어들은 행동이나 적극적인 열심을 나타낸다.
어떤 날을 받아서 수고한 것이 아니고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과 힘쓰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임을 보아야 한다.
주의 일은 힘쓸 것 없이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주의 일이기 때문이다.




영적 생활 - 경건,


에베소서 6:11-13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For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s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Therefore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when the day of evil comes, you may be able to stand your ground, and after you have done everything, to stand.

영적 생활을 하는 주체가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먼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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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활(靈的 生活) Spiritual Life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들에게 대함이라.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영적 생활에 성공하면 영적 예배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영적 예배에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생활을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두 가지 측면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란 쉽게 설명한다면 “교회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예수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게 돌은 던지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사울이란 청년이 함께 있었는데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는다고 확신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잡아다가 예루살렘 공회에 고소하는데 스데반의 신앙은 무엇이고 나의 신앙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교회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무송판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고 합니다.
발바닥에 뾰쪽한 못이 박히며 붉은 피가 떨어질 때에도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며 그 위를 걷습니다.
보다 못한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멈추게 합니다.

스데반과 주기철목사는 왜 그런 고통과 핍박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만일 신앙이란 교회에서만 행동하는 것이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예수 중심이었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통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신앙이 내 삶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증거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소통되는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대부분 거룩한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도저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런 신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의 신앙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을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세 젊은이들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세 젊은이들을 결박하여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데 바벨론의 군사들은 너무 뜨거워 그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세 젊은이들은 풀무불 속에서 쓰러지지도 않고 걷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또 한 사람이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너무 놀라서 세 젊은이들에게 풀무불 속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세 젊은이들은 머리털 한가락도 불에 그슬리지 않고 풀무불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바벨론 식의 생활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영적생활을 위한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영적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 방법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이 마치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 것은 어린 마음에 울컥하는 분노가 아닙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은 골리앗과 같은 장군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의 갑옷으로 다윗을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왕의 갑옷이 어린 다윗에게는 갑옷이 아니라 거추장스런 것입니다. 어른들은 세상을 여전히 갑옷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외치며 평소에 다윗이 사용하던 물매 돌을 갖고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다윗의 형은 동생 다윗에게 너는 집에서 양이나 지켜야지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인 가치와 세상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적 싸움의 대상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둘째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갖는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통치자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빛이 들어가면 모두 물러가야 합니다.
어두움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거짓의 힘과 능력 앞에서 진실과 참된 것이 물러서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린도서 14:20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악을 악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적을 일으키거나 사람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므로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악한 일을 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사정을 들었던 어느 분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목사님,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위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당장 예배할 수 없다면 저희 사업장에 오셔서 예배하세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만난 적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까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또는 교단 안에서도 그런 사람을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싸우면 그것은 선한 방법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을 잘 하려면 믿음의 흔드는 주된 세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덴동산을 낙원과 같다고 말합니다.
낙원이란 악한 것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간교한 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뱀의 간교함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도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 3:1b)

여자가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와에게 말씀하셨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정확하게 그 말씀 즉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아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믿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으로 하나 될 수 없고 아는 것도 하나 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우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18).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정체가 곧 악한 영들입니다. 영적 생활을 하면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혈과 육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묻는다면 내 성질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질을 그렇게 만들고 반응하도록 주도하는 세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란 인물은 아주 연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겁이 많았던지 밀을 타작하며 넓은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겁이 많고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용사로 돌변하여 주위 적들을 당당하게 물치 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력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신앙생활의 범위를 이제는 생활신앙의 자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풍조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육체의 몸으로 세상을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일서 2:18, 2:22, 4:3, 요한이서 1:7)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기롱하는 자들(유다서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기롱하는 자들이란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신앙생활은 잘 하면서도 생활신앙은 무시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셋째는 불법의 성행(마태복음 24:12)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은 지켜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 후에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안방에 누워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 “함” 이란 아들이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두 형제들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알렸습니다. 함이 두 형제들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후에 노아는 함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함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함의 잘못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함은 내가 본 것을 본 그대로 전달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왜 함을 저주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가족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스데반의 간구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기도가 무르익어 성숙할 때 행동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교인들이 모두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마침 어느 장로님의 부인되는 권사님에게 집사님이 “권사님, 요즈음 왜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나오시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공장의 일이 요즘 바쁘다고 해요! 나도 우리 장로님 미워 죽겠어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에게 “권사님, 장로님을 주님이 사랑하시는데 주님이 사랑하는 장로님을 권사님이 미워하면 될까요?” 그러자 권사님께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회로 모였을 때 마침 그 장로님에게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정말 열심히 참석하셨는데 외지로 출타하는 일이 없다면 반드시 그 시간을 지켰습니다.

사랑은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왈복이란 사형수에 대한 누나의 사랑은 누가 들어도 충격적입니다. 왜 모두가 외면하는 사형수를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서 감싸주고 사랑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남매지간이기 때문이며 누나의 마음에는 동생의 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내가 신사람의 모습을 고린도전서에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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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 신령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지배를 받는다.
신령한 사람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면, 육에 속한 사람도 하루 세 끼 식사를 한다.
영에 속한 사람도 하루 세 끼 식사를 해야 한다.
먹는 것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을 위하여 먹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하여 먹는다.
육을 위하여 먹을 때는 음식이 줄어들고 없어지는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영으로 먹을 때는 음식이 즐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은 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를 드릴 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음식을 누가 먹는다고 합니까?
죽은 조상의 신(영혼)이 와서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귀신이 먹는다는 것은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제사 음식을 바치는 사람의 정성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무당은 귀신이 음식을 먹으면 먹은 표시를 하는데 그 표시를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무당은 볼 수 있다고 하며 귀신이 그 음식을 먹고 내가 먹었다는 표시로 침을 뱉거나 심지어 똥을 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더러운 영이 짓밟은 음식이므로 영적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일에 관심을 갖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책을 읽을 때 육에 속한 사람은 지식을 얻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 원리를 터득합니다.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십자가와 영적 생활


교회를 다니면 영적인 삶, 경건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십자가와 영적 생활에 대해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고,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엡1:3),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골1:9,3:16),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며(고전12:1,14:1) 그 받은 은사들로 교회를 세우고(고전14:2),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고(골1:9),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영적인 사악함을 대적하며(엡6:12)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영적인 생명을 지닌 성도들이 영적인 생각을 하며(롬8:6),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말씀은 영적인 젖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이 아닌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을 들으며(고전2:14), 영적인 것을 뿌림으로써(고전9:11)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성경에 정의된 영적인 것이란 의미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신비하고 신령스러우면서도 묘한 어떤 것을 느끼거나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크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이 터지거나 신유나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영적인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영적 생활의 핵심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집중시키며, 그 속에서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중국의 유명한 성경 교사였던 워치만 니 형제는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서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가장 무서운 일은 육신의 힘으로 영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아(self)에서 나온 것인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구분이 없이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을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자신의 타고난 성품과 힘으로 너무나 성실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믿음 좋은 사람, 영적인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경우입니다. 가인처럼 자신의 땀으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하고, 육신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얕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을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며, 신앙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로부터 영적이요, 경건하며, 헌신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성령을 속인 죄로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간교해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돕거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자주 꿉니다. 이들은 자기 부인 대신 자기 영광을 취하며, 수치와 모욕대신 칭찬과 자랑이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이 된다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런 욕구입니다. 거듭난 속 사람은 영적인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가 영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이며, 자신을 낮추며,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추구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한마디로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기도하고, 주님을 부릅니다. 영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을 내 세우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화>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를 많이 쓴 ‘화니 크로스비’ 자매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십자가로 가까이, 나의 갈길 다가도록’ 등이 그녀가 쓴 찬송시에 곡을 붙인 것들입니다. 평생 8,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썼는데, 그녀는 태어난지 6주 째에 눈에 작은 염증으로 인해 치료를 받다가 의사의 부주의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화니크로스비의 생애’(1903)에서 그녀는 ‘제가 평생동안 시각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복된 섭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시력을 잃게 했던 의사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그 지역을 떠났지만 크로스비는 다시 그 의사를 만난다면 저를 시각 장애인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 위에 머무르게 하는 승리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계속 들어봅시다. “만약 제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제 주의를 끄는 많은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결코 수천 편의 시들을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어려서 시각을 잃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주었는데, 10살 때 구약 성경의 첫 네 권과 사복음서를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잃어 버렸지만 그는 영적인 보화를 볼 수 있는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몸이 아파서, 약해서 주님을 섬기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함은 결코 주님을 섬기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런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흔히 영적 생활은 돈 많고, 지혜가 많고, 가정이 안정되고, 직장이 탄탄하고, 몸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약한 이들이 오히려 훨씬 더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쉽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8:26). 경건한 성도들은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합니다(롬15:1). 하나님은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하십니다(고후12:9).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고후11:30, 고후12:5), 연약함 가운데 세계 선교의 대업을 감당했습니다(갈4:1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의 힘을 꺾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를 폐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대신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실천한다는 것은 약하고 어리석고 수치스런 삶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전달자였던 바울이 자신에 대해 자랑하고 기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열성이나 흠잡힐 것없는 인격이나 높은 학문적 성취나 많은 열매를 맺은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 같으면 자서전을 쓰고, 강연회나 다닐만한 때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첫째,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나를 통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약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십시오. 둘째,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부활의 능력을 맛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먼저 죽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사람만이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자랑했고,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영적 생활의 비결은 십자가에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 안에 두는데 있었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기쁨이었던 것은 그로인해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고, 날마다 속 사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이 있고,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자랑하고 기뻐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손실로 여겼고, 잃어버렸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비록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도 하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뿐더러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4-8).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십자가의 진리와는 정반대로 연약함이 없이 곧 바로 강해지고, 죽음이 없이 곧 바로 부활과 새로워짐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통하지 않은 채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든, 기도를 하든, 찬송을 하든 무슨 열심을 내든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텅빈 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 열성은 나의 육신을 기쁘게 해 주지만 속 사람을 새롭게 하고,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란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20년간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선교 사업을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탄식을 했습니다. 물론 건물도 남아 있고, 본국에서 훌륭한 선교사로 알려져 매년 간증도 했고, 선교지에서는 나름대로 지위도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허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진리를 놓쳐 버린 데 있었습니다. 누구도 연약함을 자랑하지 않고, 누구도 날마다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자신들이 못생긴 것을 자랑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더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고, 몸매 관리를 하느라 온갖 정성과 시간을 다 쏟아 버립니다. 못 생긴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예쁜 것보다 못 생긴 사람이 훨씬 위험에 덜 노출되며, 죄의 유혹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얼굴 가꾸는데 돈 안 쓰고, 신경 안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거기다 얼굴이 못생기면 겉모습에 반해서 정신없이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보고 찾는 남편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데는 못생긴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전도를 해도 얼굴보고 따라 오는 사람이 없고, 온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구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찬 형제들은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잘생기고 학벌 좋고, 돈 많은 형제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 형제들이 교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오히려 그들은 교회 와서 기가 죽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의해서 자신들이 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것이 교회에서도 강하고, 세상 지혜가 영적으로도 지혜가 되고, 세상의 지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지위가 되며, 세상의 부(副)가 교회 내에서도 영적인 부(副)가 되어 버린 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교회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데 어느 정도의 세상 학벌이 필요하고, 재력이 필요하고, 지위가 필요하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를 세워 두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5). 십자가를 버린 영적 생활은 영적 생활이 아니라 마귀적인 생활이요, 육신적인 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고,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으며, 장사지낸 바 되었고, 일으킴 받았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헬렌 켈러나 화니 크로스비, 안요한 목사(낮은데로 임하소서)처럼 신체적으로 눈이 멀거나 어느 한 곳이 부러지고,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죄에 눈이 멀고 귀가 멀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롬6:2, 611).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고, 우리의 귀는 더 이상 세상을 들을 수 없고, 우리의 혀는 더러운 것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살아 있는 한 영적인 눈은 결코 시력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정과 욕심을 느끼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결코 그 안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의 눈과 입이 죽음에 처해지지 않고 살아서 육신의 온갖 정욕을 채워 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물리적으로 눈이 죽은 맹인, 물리적인 입이 죽는 벙어리가 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세상과 죄에 대해 죽음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 몸을 주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눈과 입과 귀와 손과 발과 머리, 생각을 모두 죽음에 처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여기서부터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죄의 도구를 의의 도구로 바꾸어 줍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과 몸을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주고 사셨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 3:13-18에는 우리 육신의 지체들이 어떻게 죄의 도구가 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돌무덤이라. 그들이 자기 혀로 속임수를 쓰나니 그들의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은 저주와 악독으로 가득하며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므로 파멸과 고통이 그 길에 있어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3-18).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은 모두 저주와 죄의 도구들입니다. 이외에도 우리 신체의 각 부분들은 합력해서 악을 이루고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손은 사악함으로 더럽혀져 있었습니다(행2:23). [이는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며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너희 혀가 사악한 것을 내기 때문이니라.](사59:3). 이런 까닭에 우리 손은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8)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법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며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데 빠르고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이니라. 황폐와 파멸이 그들의 길에 있으며](사59:7). 생각의 어떠함이 그 사람의 어떠함입니다. 잠언 기자의 말대로 [이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 사람도 그러하기 때문이라....](잠23:7a).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그 사람의 됨됨이(인격)가 되고,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마음,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가지게 해 줍니다. 우리의 마음(가슴)은 거짓되고 사악하여 모든 것보다 더욱 그러합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고치거나 개조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신10:16).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우리의 배는 섬김을 받고 신이 되었습니다(빌3:19). 우리는 듣기에 둔한 귀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이를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듣는 가려운 귀라고 말합니다(딤후4:3, 마13:15). 양심은 더럽혀져 있습니다(딛1:15, 히1:22). 목은 굳어 있고 뻣뻣하며 반역적입니다(잠29:1). 눈꺼풀은 위로 치켜들어져 교만합니다(잠30:13). 차라리 눈이나 귀나 입이나 손, 발을 다치거나 잃어버린 장애인들은 이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더럽고 추악한 육신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피를 통해 정결케 하심으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으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어떤 것도 주님 앞에 드릴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룩함을 사모하고, 경건한 생활을 원하며, 영적인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누구나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찬송을 하고, 기타 여러 가지 권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동안 수없이 경험한대로 만족스런 영적 생활을 하는데 실패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배제한 채 기도했고, 십자가를 배제한 채 성경을 읽었고, 십자가를 제쳐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차례도 자신이 만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와 모욕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마땅한 더러운 죄인이요, 불타는 흑암의 깊은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서 인정해 보지 않았고, 나야말로 ‘내 안에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거하지 않는 죄 덩어리요, 부정한 물건 같은 그런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서 인식해 보지 않은 채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과 피의 공로에 대한 진리가 너무나 희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 대하여 주신 증거를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죽으셔서 구원해 주신 사실은 놀랍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만 내가 그분과 함께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만큼 죄인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기꺼이 내어놓고, 죽음에 처하지 않습니다. 욥과 같이 자신을 미워 해 본 적도 없고,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통탄해 본 적도 없고, 이사야처럼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사6:5a)란 고백도 없이 자신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착하고, 어느 정도는 쓸만한 구석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단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함께 못박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 덩어리며, 나의 자아는 철저히 부패했으며, 부정한 물건 같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한 시라도 더 신속하게 갈보리의 십자가로 달려가 그분의 죽음과 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은 성도로서, 다시 한번 갈보리의 죽음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영적인 생활,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인이 성도의 삶을 살 수 없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생각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롬8:7). 육신적인 사람은 죄 아래 팔린 삶을 삽니다(롬7:14).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적인체 우쭐대며 다른 성도들의 유업의 상급을 빼앗아 버립니다(골2:18). 반면 영적인 자들은 온유한 영으로 잘못에 빠진 형제들을 회복시키고 자신을 성찰합니다(갈6:1). 영적인 자들은 성경을 주의 명령인 줄로 알고 믿음으로 순종합니다(고전14:37).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세와 말씀에 대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신적인 성도와 영적인 성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고전3:1). 영에 속한 자는 감각들을 단련하여 의의 말씀들을 다루며, 그것으로 선악을 분별할 줄 압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 승리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에 속한 교리들은 먹지도 못하며, 헌신이 무엇인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서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파당을 짓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세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연인의 삶이 처음입니다. 이 때는 영이 거듭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전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육신대로 육신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며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고 다투며, 육신의 소욕이 영적인 욕구를 압도합니다. 이 때는 자아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생활을 하는 줄로 착각 속에 삽니다. 다음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영적인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선포하며 날마다 십자가의 거침을 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수치를 개의치 않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왔고, 십자가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고, 그분의 강력한 능력이 완전해 지고, 부활의 권능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날마다 나의 자아 위에 놓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삶, 영적인 삶, 경건한 삶이란 바로 십자가 위에 자신을 내 던진 삶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험한 십자가를 붙들겠다는 찬송가의 가사 그대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가장 영적인 삶이요, 풍요한 삶임을 기억합시다. 지난 시간에 이어 십자가와 영적 생활에 대해서 좀 더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고 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영적 생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때문에 저희 교회 성도들이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 영적인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나야 하며, 새롭게 되어야 십자가의 피로 단숨에 해결됩니다. 우리는 몸이 늘 씻겨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영 역시 씻겨져야 합니다. 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없다면 영적인 새로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우리의 영은 육신과 마찬가지로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끗해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물로 씻음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영은 말씀의 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마26:41)고 변명하지만, 육신적인 성도들은 영이 약하고 육신이 너무 강합니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은 어린 시절 몸이 자라나면서 그의 영이 자라났습니다(눅1:80, 눅2:40).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날까지 광야에 있더라.](눅1:80)-침례인 요한,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예수 그리스도. 성도들 역시 거듭난 이후로 영이 강건해야 하며,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말합니다. 육신의 성장 원리나 영의 성장 원리는 거의 같습니다. 육신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이 필요하듯이 영도 운동이 필요합니다(딤전4:7-8). 성경은 우리의 육신을 겉 사람이라고 말하고, 영을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엡3:16).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엡3:16). 속 사람을 자라나게 하십니다(고전3:6-7,벧후 3:18)3). 영적 생활이란 영의 출생, 영적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몸은 잘못된 음식으로 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영적 지식과 설교, 성경 공부는 우리의 영을 상하게 합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몸은 영을 표출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이는 가지가 나무 뿌리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드러내는 도구이듯이 눈에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드러내고, 구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을 드러내야 하며, 우리의 행위는 우리 안에 이루신 주의 구원을 드러내는 수단(빌2:12-13)이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영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2:1)라고 말했습니다. 거듭난 영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간사할 수 있고, 더러워질 수 있고, 질투에 사로잡힐 수 있고(질투의 영), 비뚤어진 영을 가질 수 있으며(사19:14)있습니다. 때로 주님은 거짓을 믿고 싶어하는 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영을 주시기도 하시며, 사악한 자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으로 인하여 물을 주사](느9:20)라고 주님을 찬양했는데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심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영을 가져야 하며(시34:18),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시51:10). 우리는 우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눅9:55)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생각이 못되었구나! 너희 사상, 너희 가치관이 틀려 먹었구나! 성격이 되먹지 못했구나! 무식한 놈들이구나!라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영’의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체질이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잘 말하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릅니다. 의사들은 자신의 몸의 상태를 모르고 덤비는 자들을 볼 때 한심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건강에 유의하라고 충고합니다. 목자들은 양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늘 주의하면서 가르쳐 주고, 영적 필요를 공급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영에 속해 있습니까? 성격적으로 몇 가지 예를 참고 해 보면서 여러분들의 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잠11:13). 남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격의 문제 이전에 그 사람이 지닌 영의 문제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을 busybodies합니다(살후3:11, 딤전5:13, 벧전4:15).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를 돌보는 일보다 남의 교회 성도를 돌보느라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자신은 영이 뜨겁다고 생각하는 반면 성경은 신실한 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겸손한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잠16:19). 남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자신을 돌아보아 동일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성찰하는 사람을 온유의 영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갈6:1). 믿음의 영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고후4:13). 한나는 자식이 없을 때 슬픈 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삼상1:15). 질투의 영을 지니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걸립니다(민5:14). 엘리야는 주를 위해 심히 질투하였습니다(왕상19:4). 이는 그 사람의 성격의 문제 이전에 그 사람이 지닌 영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위해 우리의 영에 대해 민감함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영이 짓눌릴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속에서 짓눌리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황폐하나이다.](시143:4). 이는 영과 정신 상태, 영과 우리의 마음과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 문제로 고민하던 사도 바울은 몇 몇 사람으로 인해 속이 다 시원해진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8).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우리말다운 표현을 고르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는 정도입니다. 영의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은 우리의 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여기서 우리는 영과 몸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몸이나 감정이 상하듯이 영은 상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을 상하게 하는 것은 비뚤어진 혀와 마음의 슬픔입니다. [온전한 혀는 생명 나무이나 비뚤어진 혀는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하나 마음의 슬픔은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성경에는 때로 성령과 거듭난 성도의 영이 헷갈릴 정도로 구분이 안가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령인지, 인간의 영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입니다. 흔히 대·소문자로 구분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롬7:6). 이는 율법이나 의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난 이후에 우리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감정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영은 뜨거워 질 수도 있고(롬12:11, 행18:25), 영이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마5:3). 우상 숭배에 빠진 아테네를 본 바울은 영이 격동하였으며(행17:16),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회개를 통해 그의 영이 활력을 얻었습니다(고후7:13). 영이 조급한 사람이 있고(잠14:29, 전7:9), 거만한 영이 있고(잠16:18), 뛰어난 영을 지닌 사람이 있고(잠17:27), 영이 겸손한 자들이 있으며(잠29:23), 참는 영이 있고, 영이 교만한 자들도 있습니다(전7:8). 이런 것은 성격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삶의 문제에 앞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모두 삶의 문제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문제가 풀리면 삶의 문제는 대부분 저절로 풀리게 마련입니다. 몸은 오감각으로 인해 혼에 인식이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 역시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은 육신으로 느끼거나 자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을 밝히며, 지각을 초월한 깨달음을 주며, 완악하고 반역적인 의지를 제거하여 순종하는 의지를 줍니다. 이제 믿음으로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가짐으로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본성에 속한 사람, 육신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이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본성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고전2:14). 이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본성을 거스르고, 본성을 파괴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 아래 있으며, 육신의 본성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롬7:25), 육신을 따르는 자이며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롬8: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추구합니다(롬8:8). 육신에 속한 자들은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며(고전3:3), 파당을 짓습니다(고전3:4). 이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유업의 상속을 얻지 못합니다(골2:18). 이들은 육신을 따라 살며, 육신을 따라 싸웁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기회로 삼고(갈5:13),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며, 육신을 자랑하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킵니다(갈6:12-13). 성경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지목된 자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빌3:18).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저히 육신을 처형하고, 처리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육신을 죽음에 처함으로써 아무도 더 이상 육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육신의 지혜를 뽐내지 못하게 하며, 자아를 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을 처리하여 영에 속한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 선포와 책망과 징계, 바로 잡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합니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구원의 핵심이 갈보리의 십자가였듯이 영적 생활의 핵심 역시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란 공산주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활동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가운데 사상 전향을 하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서 복역하는 죄수들입니다. 대부분은 사상 전향을 하고 형량을 마치고 자유롭게 살지만 몇몇은 끝끝내 감옥에서 죽음의 그날까지 전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국에서 분류할 때 비전향 장기수들은 감옥에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전향한 장기수들은 당국의 권고를 받아서 사상 전향서를 쓰고, 각서를 쓰고 한국인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나고, 친구들이 생각나고 돌아갈 수 있으면 가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더 문제를 일으키고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 역시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사상 전향과 동시에 자신이 왔던 북한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북한을 무덤에 묻어 버리고, 자신 또한 북한에 대해서 죽었다고 선포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전념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생활이 지긋지긋했고, 다시 보내 준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고,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자유가 좋고, 자본주의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아직도 북한 사투리를 쓰고 여전히 이북식 요리를 좋아할지 몰라도 그곳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라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영적인 성도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혐오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수시로 과거로 왔다갔다합니다. 믿음에서 율법으로 성령에서 육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처방전으로 내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Backsliding(타락)의 치유책은 십자가뿐입니다. 배교의 치유책은 갈보리의 십자가로 눈을 돌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3:1). 말세에는 영적인 자들이 미친 자로 취급받습니다. 호세아 9:7에 이르기를, [징벌(懲罰)의 날들이 이르렀고 보응(報應)의 날들이 이르렀은즉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 것이라. 네 불법이 많고 미워함이 크므로 대언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영적인 자는 미친 자가 되었느니라.](호9:7)고 말씀합니다. 징벌의 날과 보응의 날은 대환란의 날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종말을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삶이란 신비하고 감정이 흥분되고 놀라운 체험의 연속적인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갈보리의 십자가를 받아 들인 사람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닌 사람입니다. 복음은 영적 선물입니다(롬1:11).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라고 했는데 그는 복음 선포와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을 영적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미 영적인 것에 참여한 것입니다(롬15:27). 성도들은 영적인 것을 뿌리고, 영적 음식을 먹으며, 영적 음료를 마시고(고전 10:3-4), 영적 은사들에 대해 알고(고전12:1), 영적 은사를 사모하며(고전14:1), 그 은사들을 활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고전14:2). 우리는 육신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그러므로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롬1:9),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롬8:14).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계시해 주시며(고전2:10),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우리를 인치시며(엡1:13) 보호하십니다. 무릇 영적인 삶을 한 구절로 요약하자면 빌립보서 3:3입니다.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빌3:3). 영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생각을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의 명령인 줄 알고(고전14:37),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면 온유의 영으로 바로 잡아 주고 자신을 살펴보며(갈6:1),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하며(엡5:19),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합니다(엡6:12). 영적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순종하며](고후10:5). 흔히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우리가 남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먼저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 높이는 모든 것을 갈보리 십자가로 무너뜨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십자가를 통해 사로 잡아와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생활의 본질인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양날 선 검이란 사실에 동의하지만 남 벨 생각만 하지 자신이 먼저 그 칼에 베어짐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말씀의 칼에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가 찔러 쪼개임을 당한 성도들이 이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도 아는 법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의 문제들로 싸우고 다투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적들로 인한 어려움이 아닌 자신들의 내부 문제로 곤혹을 치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늘 어려움을 당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높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합니다. 영적인 사람들만이 영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자신에게 그대로 체험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 누리며(엡1:3),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에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워진 사람이며(골1:9), 그리스도의 말씀이 속에 풍부히 거하므로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며(골3:16),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며(벧전2:5a),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벧전2:5).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이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롬12:1).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주님께 드리는 헌물입니다(빌4:18).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 형제들을 돕는 헌물은 달콤한 향기며, 받으실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빌4:18).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찬양과 감사입니다(힙13: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히13:16).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이러한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영의 사역자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우리가 영의 사역자로서 영의 직무를 감당하면 구약의 어떤 대언자나 제사장들이 가졌던 직무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8)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순종은 우리를 성령 충만에 이르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책을 쓴 제시 팬 루이스는 성도가 성령을 쫓아 행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1. 영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모든 일은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생각의 어떠함은 그 사람의 어떠함이며(잠23:7), 생각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오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니라.](렘6:19). 2.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입니다. 금욕과 고행의 삶은 자신이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반면 영적인 삶이란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나 역시 그 십자가에서 함께 처리된 것으로 믿는다면 여러분의 몸은 더 이상 불의의 도구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8:14). 성령의 인도를 받는 다는 것은 신적 음성을 듣거나 빛을 보거나 어떤 신기한 기적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드온이 썼던 방식을 지금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 일을 8월 30일 오후 5시까지 이루어 주시면 주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아니면 아닌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아니면 평소 일상 수입이 하루 1000불이라면 오늘 수입은 1823불 이상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 이런 식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기드온의 기도 방법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은밀히 많이 퍼져 있는 하나님의 인도 방식이 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초기 감리교도들은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아무 곳이나 펴서 첫 번째 들어오는 구절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고, 쟌 웨슬레 역시 그런 방법을 자주 애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것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성경적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감각들을 단련하여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1:9-10절은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데 우리는 이런 분별력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4. 영적 생명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7:38-39). 주님은 우리 안에 생명이 밖으로 흘러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뿜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구원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라(work it out-빌2:13)고 말씀하셨습니다. 5.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을 통해 점점 강성해지고, 주님의 도우심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영적 생활입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를 통해서 일하시고, 십자가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충만을 이루어 줍니다. 제가 오늘 증거한 이 말씀들은 성경을 통해서 영적 생활이 무엇이며, 영적인 사람이 누구이며, 십자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요약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해 살아 가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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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가르침(디모데전서 6:1-10)

 

1절부터 10절에서 바울은 종들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을 다룬다. 1절과 2절에서 그는 종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3절에서 그는 갑자기 다르게 가르치는 것과 건전한 말씀에 착념치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7절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종들을 다루는 것과 다른 교훈들은 거의 관계가 없는 듯하며 다른 교훈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장 1절부터 10절에서 바울은 이것들을 함께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3절의 시작에 있는 「만일(if)」이라는 말과 7절의 시작에 있는 「이는(for)」이라는 말에 의해 지적되어진다. 이러한 말들이 그 구절들의 처음에 사용된 것은 그 구절들이 앞 절들의 연속임을 가리킨다.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만일(if)」이나 「이는(for)」과 같은 작은 단어도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종종 이와 같이 작은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빛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단지 우리로 생각의 이어짐을 볼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빛이 임하는 길을 마련한다.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매우 많은 빛을 받았으며,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빛과 영의 방법으로 성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에는 여러 종류의 신학이 있다. 어떤 신학교들은 현대주의 신학을 가르치며,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예수는 단지 하나의 사람이었으며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순교의 행동에 불과하며 그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어떤 세상의 일반 대학들의 신학부에서는 종교와 신학을 단지 사람의 문화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신학교들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을 가르친다. 그럼에도 진리에 관한 표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오늘날 미국에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표준의 신학은 그 근원이 형제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그와 같은 가르침들은 널리 알려진 스코필드 박사와 그의 관주 성경과 통신 교육과정에 의하여 형성되어졌다. 스코필드는 형제회의 거의 모든 가르침들을 채택했지만 형제회의 방법으로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은 거절했다. 형제회 가운데서 인도하는 교사는 다비(J. N. Darby)였다. 다비의 저서들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을 신학자라고 칭하는 어떤 사람들도 높은 경지의 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1925 년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께 그가 아는 바에 따라 어떠한 책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장 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인지 묻는 편지를 썼다. 젊은 믿는 이로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으려고 매우 애썼다. 나는 창세기 첫 구절로부터 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이해하기 원했다. 니 형제님께서는 나에게 그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아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다비의 성경 주해 (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라고 말했다. 8년 후에 그는 나에게 다섯 권으로 된 이 책 한 질을 주었다.

다비(J. N. Darby)와 그의 동료들은 위대한 성경 교사들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성경은 그 전의 어떤 이들에게보다 형제회의 교사들에게 더 많이 열렸다. 이 형제회 교사들은 성경을 단지 전통이나 흑백 문자를 따라 안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신선한 빛에 따라 알았다. 주님에 의해 빛 비췸을 받음으로 그들은 말씀 안에 있는 많은 진리에 대한 많은 이상과 계시를 받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성경을 죽은 문자로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지리(地理)나 역사(歷史)에 대하여 잘 알고, 그들은 또한 성경의 어떤 기초적인 가르침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계시나 빛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허탄한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어떤 성경의 교리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심지어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조차도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50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루터교의 목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편 중독자였다. 그가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됨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는 전혀 빛이나 계시가 없었다. 어느 날 노르웨이로부터 온 거듭남의 전파에 매우 영향력 있었던 나이든 여자 전도자가 집회 후에 이 루터교 목사 앞에 멈추어 서서 그가 거듭났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거듭났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단지 그의 얼굴을 쳐다봄으로써 그가 거듭나지 않았음을 안다고 말했다. 이 루터교 목사는 모욕을 받자 이 여자 전도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그날 밤에 그녀를 죽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성령은 그를 비추어 그를 꾸짖었다. 그는 회개했고 주님 앞에서 울었다. 다음날 아침 이 여자 전도자가 그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집회 가운데서 이 목사는 커다란 감동으로 그의 간증을 했다. 이것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구원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루터교 목사의 경우가 성경을 단지 흑백 문자에 따라 아는 것과 거룩한 빛의 비췸에 따라 아는 것의 차이를 예로 보여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많은 허탄한 이야기들이 있다.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소위 기적들을 행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오순절 목사는 나에게 기적적으로 금으로 입혀진 치아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른 오순절 사역자는 어떤 집회에서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기적적으로 중국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디모데전서에 있는 사도의 가르침은 허탄한 이야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더욱이 이 서신에는 기적적인 것들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 반대로 5장 2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동역 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기적적인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디모데에게 인간적이 되며,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의 건강을 돌볼 것을 권면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어떤 빛이나 계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단지 흑백 문자에 따라 말씀을 가르칠 뿐이며 지리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당신은 어디에서 디모데전서 1장 4절로부터 신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주제의 메시지를 들어보았는가? 주님의 긍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고 그의 진리를 알게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평판 있는 신학자들이나 교수들이 비판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할지라도 회복역과 라이프-스타디를 연구하기 바란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책들을 연구한다면 그들이 빛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Ⅰ. 멍에 아래 있는 종들

6 장 2절과 3절, 그리고 6장 6절과 7절에 있는 논리적인 연결을 생각해 보자. 6장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명한다. 훼방을 받는다는 말은 나쁘게 말하는 것, 비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섬기라고 명한다. 바울은 2절을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는 말로 끝맺는다.

Ⅱ. 돈을 사랑하는 이들

A. 다르게 가르침

그리고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만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건강한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을 따른 가르침에 착념치 아니하면 그는 교만으로 눈이 먼 자니라』고 말한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 삼은 사도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한 말」은 생명의 건강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건전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공급으로서 건강한 가르침을 사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요 6:63). 그러므로 그것들은 건강한 말씀이다. 주님의 건강한 말씀은 경건에 따른 가르침의 근본이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특별히 어떤 방면에서 가르쳐졌을 때 그것들은 경건에 따른 가르침이 된다. 주님의 사신 말씀은 항상 경건-그리스도를 사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산출한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에 관한 6장 3절에 있는 바울의 말은 심지어 종들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주 예수의 건강한 말씀에 따른 것임을 가리킨다. 바울의 가르침은 경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건강한 말씀에 착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그들은 경건에 따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2절과 3절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이 있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경륜의 건강한 말씀에 따라야 한다. 심지어 어린이 집회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주 예수의 건강한 말씀을 따르는 원칙 안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경건에 따른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B. 교만으로 눈이 멂

6 장 4절과 5절에서 바울은 다르게 가르치며 건강한 말씀에 착념치 않는 자는 『교만으로 눈이 멀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변론과 언쟁으로 병든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생각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끊임없는 말다툼과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오느니라』고 말한다. 주님의 건강한 말씀과 달리하는 가르침들은 항상 그들을 눈멀게 하는 자만심을 가진 사람들의 교만으로부터 생긴다.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확정된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교만으로 눈이 멀어서 고의로 다르게 가르쳤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과 똑같이 가르치는 것은 창피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내가 중국에 있었을 때 워치만 니 형제님과 똑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매우 기뻐했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나는 가능한 한 심지어 니 형제님이 사용한 똑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역을 수행해 나가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4 절에서 바울은 「변론 … 으로 병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말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다투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여기에서 「병」은 3절에 있는 「건강」과 반대되는 것이다.

6 장 4절에서 훼방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3장 8절에서처럼 여기에서의 훼방은 사람을 향하여 욕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5절에서 『생각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끊임없는 말다툼과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았다. 헬라어로 「끊임없는 말다툼」은 「그칠 새 없는 싸움」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러한 말다툼들은 생각 안에서 부패되고 악화된, 그리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빼앗긴 궁핍한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헬라어로 「잃어버리다」라는 말은 그들이 진리를 소유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치워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가 결핍된 것이다.

5 절에서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물질적인 이득 또는 이익이 남는 장사-으로 만든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한 갈망은 어떤 이들이 다르게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와 같이 교만과 이익이나 부(富)를 위한 갈망 때문에 오늘날 어떤 이들은 다르게 가르친다. 교만은 명성과 좋은 평판을 원하는 것과 관계있고, 이익은 돈이나 물질적인 유익과 관계있다.

C. 지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

6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은 큰 이익이니라』고 말한다. 「지족」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빈센트는 『밖의 것들에 대한 갈망이나 결핍에 반대되는 내적인 자족이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말이다.』라고 말한다. 「큰 이익」이라는 표현은 이익을 얻는 큰 수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로 이 시대의 축복-경건에 자족을 더한 것과 이 시대의 탐욕과 걱정으로부터 자유함-을 암시한다.

5 절과 6절에서의 이익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그를 7절부터 10절에 있는 돈을 사랑하는 이들을 다루는 문제로 이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6절과 7절을 연결하는 접속사 「이는(for)」을 사용한다.

다시 한 번 나는 우리가 이러한 세세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생명과 빛과 영의 방법으로 성경을 아는 데 이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성경을 지리나 역사로 아는 것보다 더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더 많은 구절들을 암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긍휼과 우리보다 앞서간 위대한 성경 교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빛을 보여 주셨음을 간증할 수 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영을 주셨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다. 『주의 말씀에 들어감은 빛을 주나이다』(시 119:130). 더욱이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63).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영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주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집에서 자라나셨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분이 놀라운 빛과 생명과 영을 가지고 계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빛과 생명과 영을 갖는 것은 어떤 사람의 학식이나 학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배웠다는 확신이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빛과 생명과 영을 방해할 수 있다.

6 장 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그분을 신뢰하며, 편견과 산만함이 없이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그분에 의하여 살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지혜롭게 정해진 것이다.

8 절은 『우리가 먹을 것과 가릴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계속한다. 가린다(covering)는 말은 입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거하는 것도 포함할 수 있다. 만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필요를 위한 충분한 공급을 갖는 것이다.

D. 부하게 되려는 갈망

9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부하게 되려고 결심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로 하여금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결심은 부하게 되려는 강한 갈망과 관계있다. 이것은 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탐욕적인 사람을 시험 안으로 인도한다. 어떤 이들은 실제적으로 부하나 다른 이들은 오직 부하게 되려는 갈망만을 가지고 있다. 이  악한 갈망이 그들을 침륜시키고 멸망시킨다. 여기에서 침륜은 멸망을 포함하고, 멸망은 일시적인 형벌과 영원한 형벌 둘 다를 의미한다. 부하게 되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은 올무에 빠지고 덫에 걸리며, 또한 많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니 이는 곧 사람들로 하여금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잠기게 하는 것이다.

10 절에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결론짓는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그것을 뿌리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사모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열망하고 동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났으며 그들은 우리 믿음의 내용인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진리로부터 탈선되었다.










십계명(十誡命) - 안식일,





안식일의 규례

예수님의 안식일 개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유대인의 모든 절기가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지킬 것인가만 연구했지 왜 지켜야 하는지는 질문하거나 연구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는 ‘왜’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 목적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규칙들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위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중요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몇 가지 규칙에 집착하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협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미슈나’라는 규정집이 있는데 거기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서른아홉가지 목록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 말씀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극적이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지켰습니다.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따라 거룩한 바리새인인지 아닌지를 평가했습니다.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주전 167년경 당시 안티오푸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군인들이 안식일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방어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죽음도 각오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판합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을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이오?’”(1~2절).
제자들이 배가고파 길을 지나다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신명기 율법을 보면 배가고픈 사람들이 추수 전후 밀 이삭을 먹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대신 밀 이삭을 먹을 때 낫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포도밭에서 포도를 먹는 것은 허용하지만 바구니는 들고 가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낫을 대면 욕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먹을 만큼만 먹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어하신 것입니다.

포도밭에 바구니를 들고 가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이 안식일인 것이 문제입니다. 안식일에 먹은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타작행위로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문제를 삼았습니다. 참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종교적 규칙을 어긴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갔을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이라는 떡을 얻어먹고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자신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된 떡을 먹었지만 하나님은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히멜렉도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아히멜렉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규정은 사람을 죽이는 규정이 아닙니다. 살리는 규정이다. 인간의 필요를 억누르고 무시하는 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규정도 뛰어 넘으십니다. 어떤 종교적 규칙도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은 대부분 종교분쟁입니다. 이념분쟁입니다. 민족 간의 갈등, 극단적인 테러주의자들은 잘못된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위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잘못된 종교적 위선이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버려도 되는 전통, 지키지 않아도 되는 종교적 규칙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억눌려 있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존중하고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잘못된 일을 행하는지, 고소할 트집이 없는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킵니다. 회당가운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소할 일을 찾기 위해 엿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9절).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자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신 후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병을 고치는 것도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확대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의논했습니다”(11절).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이 펴지는 기적을 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에 놀라지 않고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으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든 종교적 규칙을 어긴 것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종교생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만듭니다.


기독교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상해지는 이유는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규칙을 잘 행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어기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장애가 고쳐지는 역사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규칙을 어겼다는 것에 집착해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신앙의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지, 아니면 죽이든지 악한 일을 행하는지가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그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맞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문제는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종교적 규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면 모든 율법을 이루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은 일,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일을 정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규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증거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도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병이 38년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응급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응급환자만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팔을 고치신 이후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왜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걸어다느냐는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는데 그 사건을 보고 놀라지 않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병만 고쳐주셨으면 바리새인들이 흠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을 어기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핍박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유대 사람들은 이 말 때문에 더욱 더 예수를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요 5:16~18).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의도적으로 깨뜨렸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에 해당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제도입니다. 성경에는 창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안식, 인간이 지켜야 될 안식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생명을 주십니다. 안식일이라고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태양은 뜨고 우주는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안식일을 의식하고 그 날을 피해 병을 고쳤다면 권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 규례를 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잘못된 종교적 위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왜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왜 쉬라고 했을까요. 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이 사람을 부리게 됩니다.또 안식일을 통해 우리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쉼을 명령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참된 주인을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 것인가’에 집착하면 종교적 규칙이 주인이 됩니다. 종교적 규칙을 만든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종교적 규칙에 갇히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종교적 위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묵상하다 ‘왜’ 행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사람을 얽매는 종교적 교회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해야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 위선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합니다.



아더 핑크, 「주일, 거룩한 안식일」 1부. 안식일의 제정과 의미

주일, 거룩한 안식일

아더 핑크 / 생명의 말씀사

내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그분의 길과 관련해직접 목격한 것 가운데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고, 복음과 그것의 원천이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일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안식을 상징하는 주님의 날일 것이다.

존 오웬

1. 안식일 규례의 제정

안식일은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제정되어 유래되어 온 제도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기 오래전에 이미 '안식의 날'을 정해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제정하셨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2:2,3)

일곱째 날이 곧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안식일을 본래의 영광스러운 위치로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존의 제도, 곧 창조 당시에 제정된 제도로 간주했고, 그것을 더욱 강화했다.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안식일의 의무는 그 어떤 것보다 앞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게 만들고 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안식일을 정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첫 번째 제도다. 안식일은 처음부터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제도로 정해졌다. 안식일은 지금은 사라진 낙원의 영광에 온통 둘러싸여 있을 때도 인간에게 유익했다. 앞으로 얻어야 할 더 위대한 낙원의 영광을 얻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라는 부르심이 오늘날에는 특히 더 유익하다." - 페트릭 페어번

안식은 단순히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최초의 안식을 누리셨지만, 그것은 일체의 활동을 중단한 안식이 아니었다. 창조라는 하나님의 사역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분의 섭리 사역, 수많은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사역은 계속되었다. 휴식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 인간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생산적인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잠시 포기하더라도 안식일을 통해 심신이 새로운 활력을 얻고, 영혼이 크게 고양되며,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관심의 증대와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 그것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분깃이 되고, 항상 그분께로 되돌아가 지극한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써 넘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 페트릭 페어번

안식일은 복된 날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고, 그날을 지키면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기 위해 제정되지 않았다. 그날은 무거운 짐이 아닌 축복이다.

안식일은 구별된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안식일을 지켜 거룩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정하셨다. 창조주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안식일은 노동이 이루어지는 다른 엿새의 날과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신 것은 그날을 엄숙히 성별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토대로 그날에 모든 일과 활동이 오롯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요구하신다. 인간은 하늘과 땅이라는 광대한 극장에 펼쳐진 하나님의 무한한 선과 정의와 능력과 지혜를 일평생 탐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마땅히 기울여야 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특별히 따로 구별하셨다." - 존 칼빈

일곱째 날은 영속적이다. 창조기사에는 일곱째 날이 끝나 지나갔다는 암시가 없다. 여기에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 안식일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할 날이라는 중요한 암시가 있다.

2. 십계명 이전의 안식일 규례

세상의 창조는 족장들이 믿었던 중요한 신앙의 원리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족장들이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신 전통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족장들이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엄숙히 예배했다는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예배했음이 틀임없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일곱을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숫자로 간주했다. 일곱이라는 신비로운 숫자에 부여된 신성한 의미가 안식일에서 비롯했음이 틀림없다.

- 노아가 새를 날려 보냈던 때의 7일 기준

- 아브라함이 따로 구별한 일곱 암양 새끼

-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구혼할 때 7년

- 야곱이 에서에게 한 일곱번의 절

- 욥의 친구들이 애곡한 칠 일

시간을 일주일 단위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의 무엇을 토대로 한 것일까? 그것은 실질적이고 인위적인 구분, 곧 권위에 근거한 구분이다. 역사적인 연대표들은 모두 그런 식의 시간 구분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서 그 기원과 목적일 발견할 수 있다.

○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당도하기 전,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다시 안식일의 규례를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만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셨다. 이는 당시에 새로운 정신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기대해도 될 만큼 그것 대한 지식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었다.

3. 십계명을 통해 안식일 규례가 새롭게 갱신된다

○ ​네 번째 안식일의 계명에는 다른 계명들과 다르게 '기억하라'는 특별한 명령이 주어졌다. 이런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안식일이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식일을 함부로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는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안식일 계명은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닌다. 안식일은 과거의 유대인들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똑같이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의무다. 우리는 일곱째 날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바침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시간을 관장하시는 주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안식일 준수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이 필요하다.

십계명을 통해 안식일 제도를 새롭게 회복하고 강화하셨다. 하나님이 강퍅한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해 언약을 맺으신 것은 순전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은혜는 항상 의를 통해 통치하며,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장 경이로운 방식으로 시내산에서 자신의 율법을 새롭게 하고, 안신일의 규례를 그 중심에 올려놓으셨다.

"기억하라"

창조와 안식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며, 그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라. 안식일은 세상의 수고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은혜로운 날이요,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날이다. 이날은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안식을 예표한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행복에 관심을 기울시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잘 보여준다.

○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을 속된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전히 바쳐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따로 구별하신 시간을 조금이라도 훔쳐 악한 일아니 세속적인 활동에 사용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도둑질하는 죄에 해당한다.

4. 안식일 규례의 오염과 하나님의 심판

안식일은 아무런 보호책이 없다. 안식일은 울타리가 없는 포도밭과 같아서 숲에서 나온 수퇘지나 들짐승들이 마구 짓밟아 망쳐놓기 쉽다. 그러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 상태를 시험하는 안식일의 기능이 더더욱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행위를 통해 더욱 노골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분의 율례를 업신여기며, 그분의 안식일을 더렵혔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우리를 위한 경고다.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겔20:13,14)

○ 하나님은 자신의 경고를 정확하게 행동으로 옮기셨다. 안식일을 더럽힌 결과로 국가적인 재앙이 임했다. 성전과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렘17:27)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날을 쾌락과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날로 변질시키고 있다. 만일 회계하고 행위를 고치지 않으면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게 될 뿐이다.

5. 안식일 규례는 오늘날에도 지속되는가?

기독교의 안식일은 구약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예고되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예언의 영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장차 복음의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고 예고하신 율법은 바로 십계명이었다. 그들 안에서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섬기기 될 것이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2)

- 복음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의 경건함을 나타내는 뚜렷한 특징으로 언급되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사56:6)

○ ​안식일의 은혜로운 본질과 특성이 기독교의 특징과 성격에 완벽하게 일치한다.

- 하나님이 안식의 날을 정하신 이유는 피조물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은혜로운 규정은 새 언약의 성격과 취지에도 똑같이 적절하게 부합한다.

- 복음의 근본적인 특징이 박애를 실천하는 데 있고, 동정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친절과 사랑으로 돌아보는 것에 있다. 안식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존중하셨고, 그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다.

○ ​복음의 위대한 목적이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려면 주님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안식의 날이 꼭 필요하다. 안식일의 거룩한 휴식과 경건한 활동은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일에 익숙해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특권을 누리도록 허용된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날을 즐거워하고 사랑한다. 복음의 정신에 더욱 깊이 심취하고, 마음에 거룩한 율법을 기록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할수록 안식일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일컬으며 더욱 열심히 지키게 된다.







2부.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언약이 바뀌면 잇따라 그 목적도 바뀌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방식도 바뀌고, 안식의 날도 바뀔 수밖에 없다.

존 오웬

1. 첫째 날(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폐지하는 것일까?

예배를 드리는 날로 정해진 첫째 날은 "주의 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는 첫째 날이 주님이 일곱째 날에 붕하신 것과 같은 똑같은 타당성을 지닌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아담에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일곱째 날이 지녔던 특징들이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모두 옮겨졌다.

○ 네 번째 계명의 실질적인 내용은 한 주간의 어느 요일을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7분의 1을 하나님을 구별하여 기념(예배)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 결론: 한 주간의 마지막 말에서 첫째 날로 요일이 바뀌고, 그것이 더 나은 또 하나의 언약과 연관을 맺음으로써 더 고귀하고 영광스로운 사역을 기념하는 날로 변경되었다고 해서 그 본래의 의무가 폐지되고, 또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2. 새 언약이 요일의 변화를 요구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유대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복음의 신앙으로 세상에 전할 적절한 표징이나 증언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을 나타내는 외적 표징이었던 할례를 폐지하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교의 안식일을 폐지하고, 세례를 기독교의 독특한 표징으로 삼으신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갈3:27) 한 주간의 첫째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제정하셨다.

○ 물질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장엄하고 복된 창조, 곧 죄나 사탄이 훼손할 수 없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 구원 사역은 그 중요성과 가치에 있어서 첫번째 창조 사역을 능가한다.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의 날을 변경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예수님은 새 창조의 머리이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요, 영화롭게 된 인성의 원형이자 보증으로서 그날에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결론: 우리는 요일의 변화를 안식일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그 복된 제도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낙원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낙원을 얻었고, 언약이 깨지고 기업이 훼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언약이 비준되었으며, 요동하지 않는 왕국이 임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자연의 언약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안식일의 표징이 주어졌다면 그보다 더 고귀한 사역과 언약은 더더욱 힘서 지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런 변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것이 제정된 본래의 목적을 이루도록 돕는 한편,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그 신성함을 일깨우고, 그날을 사랑스럽게 여기게끔 민들어 줄 특성을 새롭게 부여하기 위해서다.

페트릭 페이번


3. 한 주간의 첫째 날이 기독교의 안식일이라는 증거

이런 변화가 구약 시대에 이미 분명하게 다양한 예표와 그림자를 통해 암시되었다. 여덟째 날은 새로운 순환의 첫째 날이었다. 그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구약성경은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여덟째 날이 그리스도께서 안식에 들어가신 날이자 그분의 백성이 그것을 기념하며 안식하는 날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 태어난지 여덟째 되는 날 시행하는 할례(창17:12)

- 여덟째 되는 날에 드릴 수 있는 희생제물(레22:27)

- 여덟째 날에 완결된 대제사장 봉헌 예식(레9:1)

- 부정하게 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여덟째 날(민6:10)

- 첫 열매의 이삭 단을 제사장에게 갖다 주는 여덟째 날(레23:11)

- 성전 봉헌 때 거룩하게 구별된 여덟째 날(대하7:9)

위의 사실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그분은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셨고, 하나님은 그분이 드린 희생 제사를 받아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영원히 거룩하게 구별되셨으며, 자기 백성을 위해 죄를 속량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한 주간 내내 제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다가 그들이 안식 후 첫째 날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다시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은 그분이 그날을 제자들과 만나는 날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식 후 첫째 날에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다. 이는 그날이 기독교의 안식일로 새롭게 제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초대 교회가 한 주간의 첫째 날을 기념했다. 사도들과 그들의 감독 아래 있던 교회가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되는 일을 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히브리서 4장은 새로운 안식일을 명확하게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이 '어느 날'을 한정해 정하셨다고 선언헀다. 그는 8절에서는 과거의 '일곱째 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날이 제정되었다는 증거로 '다른 날'을 언급했다. 9절에서는 그 다른 날과 그것이 기념하는 안식을 '사타티스모스'(안식일을 지키는 것)로 일컬었고, 10절에서는 안식일이 바뀐 이유(그리스도께서 안식에 들어가셨기 때문)를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으로 일컬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을 마치고 한 주간의 첫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로 자기 백성이 어느 날에 안식을 지켜야 할지를 결정하셨다.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의무는 무엇이든 모두 주의 날로 이전했다. 그런 의무를 그날에 이행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유대교의 안식일보다 더 우월하고, 더 탁월하고,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 요세비우스


3부. 안식일(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늘의 영광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준비가 되어 그 안식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주님의 거룩한 날에 성령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리처드 백스터

1. 안식일(주일)은 구별되어야 할 날이다

안식일이 '주의 날'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주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날을 정하고, 복되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외적인 헌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악한 것은 무엇이든 삼가야 할 뿐 아니라, 시간이나 정력과 같은 평범한 것들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날의 전부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오전 예배에 참석했다가 오후와 저녁에는 육신을 즐겁게 하는 속된 활동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주일의 일부를 우리의 것으로 도둑질하는 것이다.


2. 일하지 말라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일, 그리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일.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대로 손으로 하는 일이든 사무를 보는 일이든,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상관없이 일과 노동을 일체 중단해야 한다.

인간은 매주 하루는 휴식해야 한다. 이 법칙은 남편이나 아내, 주인이나 종, 짐을 나르는 가축 등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니며 똑같이 적용된다. 공적 생활은 물론 개인 생활,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 주부가 주일에 일주일치 밀린 빨래를 모두 하게 된다면 주부에게는 오히려 주일이 일주일 가운데서 가장 힘든 날이 될 수 있다.

세상의 일은 중단해야 하지만 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육체의 휴식도 중요하지만 영적 안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진정한 안식은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에 있다.


3. 즐거워해야 할 날이다

"이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안식일에는 거룩한 기쁨이 우리 마음에서 가득 흘러 넘쳐나야 한다. 안식일은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우리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반갑게 맞이하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할 수 있는 심령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부활하신 구세주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 살아 계셔야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분을 통해 죄가 끝났고, 죄악이 용서받았으며, 영원한 의가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잠자는 백성들이 부활할 것을 보장하는 증거요 원형이다.

찬양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마음의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깊이 묵상하고 노래해야 한다.


4. 두려움으로 지키지 말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억지로 하는 노예의 노동이 아닌, 즐겁고 기꺼운 자녀의 섬김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복종과 예배는 두려움과 노예적인 태도가 아니라 은혜와 기쁨과 자유의 정신과 경건한 마음으로 드려져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들, 곧 유대인들을 영적 속박 상태에 처하게 만든 것들로부터 구원받았다. 우리의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 하나님은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때, 외적인 의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엄격하고 꼼꼼하게 지키는 것보다 진지하고 단순한 마음과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복음이 가르치는 복종의 정신과 특성에 따라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의무를 마음으로 온전히 감당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지 외적인 의무에 관한 규칙들을 더 늘려 그것들을 꼼꼼하게 지키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작은 실수가 아니다" - 존 오웬


5. 영적 자유와 육신적인 방종을 구별하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 말씀은 실천적 경건을 위한 근본 원리를 제시한다. 계명이 확실하게 주어지지 않은 문제를 다룰 때는 항상 이 원리를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 이 말씀은 가정생활과 사생활, 공적 예배와 관련된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을 규정하는 일반 원리에 해당한다. 이 원리에 주의하면 많은 문제들을 처리하는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 많은 논쟁을 피할 수 있고, 악감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잘 해걀할 수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사랑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는 물론, 지금도 피해야 한다. 속된 오락을 일삼거나 하찮고 무익한 대화를 나누는 등 세속적인 관심사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6. 안식일(주일)을 위한 준비

○ 토요일에 세상의 일이나 집안일을 미리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처리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준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주일 음식은 최대한 간단하게 간소하게 준비하고, 가능하면 토요일에 미리 준비한다.

○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생각도 없고 기도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맞이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광스러움을 생각하며, 죄와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업에 대한 걱정이나 세상의 염려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각이 산만해지지 않고 주님께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7. 안식일(주일)에 해야 할 일

거룩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날을 가장 유익하게 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덕스럽게 하는 설교 말씀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과 똑같은 영적 은혜를 다른 신자들에게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공적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큰 도움이 된다.

○ 안식일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물건을 사고팔거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일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교 모임이나 불필요한 방문으로 인해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된다.

○ 주님의 날에 불필요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안식일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그날은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과 베푸신 복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가정 교육은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다.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실천적인 적용을 제시하라. 가장들은 가족들의 영원한 영적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병자와 노인들을 찾아보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할수록 항상 선을 행하신 주님의 기쁨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안식일 / 하나님의 교회의 교리

안식일은 폐지된 율법인가?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는가?

1. 예수님과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켰는가?

눅 4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규례란 "법 규, 법식 례"로 하나님의 법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자기 규례"라고 하셨으니,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법으로 지킨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안식일을 규례로 지켰다.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안식일을 규례로 삼고, 거룩히 지켜야 한다.

2. 안식일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

출 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안식일을 왜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셨을까? 만약 안식일이 폐지될 율법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안식일이 결코 폐하여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날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선포하셨다. 네 번째 계명으로 선포하실 때,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기기까지 하셨다.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반포하신 역사를 통해 증명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안식일을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삼아야 한다.

3.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안식일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피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단번에 십자가에서 들리심으로 피를 흘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거룩한 영적제사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곧 거룩한 산 제사이다(롬12:1).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려 제사를 드렸다.

짐승의 피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없으므로 매 안식일마다 양을 잡아야 했으며, 짐승을 잡는 과정과 절차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 이루어져야 될 엄숙한 진리였으므로 특별히 제사장 지파를 선별하시고 제사를 집전하게 하셨다.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일을 하지 않고, 불을 피우지 않는 등 엄격한 율법 안에서 안식일을 맞이해야 했다.

구약 안식일의 어린 양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한다. 어린 양의 피를 흘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 안식일마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제사를 드린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산 제사인 예배를 말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거룩함에 나아가는 귀한 율법이다. 어찌 이 귀한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4. 구약 율법의 안식일이냐? 새 언약의 안식일이냐?

갈 4:9~10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골 2:14~16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구약 율법은 그림자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모형에 불과하다. 거룩한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짐승이 필요치 않다. 신약시대에는 거룩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 제사를 드리게 된다. 성도들을 가리켜 모두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안식일에 제사를 집전하듯, 반드시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벧전2:9)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 

위 구절의 내용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불과한 구약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쓴 구절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주된 내용은 "왜 구약의 방식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드리는 안식일, 유월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했다. 이들의 핍박이 두려웠던 성도들이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드려지는 안식일을 이해하지 못한 성도들은 구약의 방식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깨우쳤다.

"구약 방식으로 드려지는 절기, 월삭, 안식일은 무익하다. 왜 천한 초등 학문에 불과한 방식으로 절기를 지키려 하느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의문에 쓴 증서(구약율법)을 도말하셨다. 구약의 방식은 이제 끝이 났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인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로 너희를 폄론(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구약과 신약의 안식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짓 목자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무수히 존재한다. 

5. 결코 안식일은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해주셨던 예수님(마12:1), 또한 안식일에 고창병 든 환자를 고쳐준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구약시대 안식일은 제사장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백성들이 지키는 안식일이 구별되어 있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양을 잡고, 불을 피우며, 제사를 집전한다. 백성들은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불을 피우지 않는 것으로 참여하였다.

신약 시대의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양으로 희생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사형식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성도들 모두 영적으로 제사장이다(벧전2:9). 그래서 신약 시대 성도들은 반드시 제사를 집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안식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셨다. 즉 예배를 드리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참여했던 구약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의 희생의 실체가 나타나셨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지 않은가? 그래서 안식일을 당신의 희생으로 드려질 예배로 본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자도 고치시고,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던 것이다. 구약 방식은 이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니, 백성된 자인 우리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주인의 뜻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한다. 즉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생전예수재(預修齋)




생전예수재(預修齋)

죽은 후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 생전에 부처에게 공덕을 쌓는 불교의례.
예수칠재(預修七齋),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정의
죽은 후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 생전에 부처에게 공덕을 쌓는 불교의례.

개설
죽은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러지는 의례를 천도재(薦度齋)라고 한다면, 죽기 전에 미리 재를 지내어 명부시왕전에 덕을 쌓아 극락왕생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생긴 의례로 예수칠재(預修七齋) 또는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라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에 시왕신앙과 관련된 기록이 있고, 고려 후기에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적지 않게 도설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시왕신앙이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행사내용
예수재를 지내기 위해서는 설단을 장엄하게 장식할 뿐만 아니라, 어산과 작법을 화려하게 펼친다.
예수재 설단은 상단·중단·하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은 증명단(證明壇), 하단은 부속단(附屬壇)이며 중앙의 중단은 단 설치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상단에 모셔지는 신격들은 비로자나불[法身佛], 노사나불[報身佛], 석가모니불[化身佛]을 모신 삼신불단(三神佛壇)을 중심으로 동쪽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여타 보살들과 육대천조(六大天曹),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신다. 그리고 서쪽에는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사방천왕(四方天王) 등의 위목(位目)을 모신다.

중앙의 중단은 다시 상·중·하로 세분화하여 예수재에서 가장 중요하게 모셔지는 시왕을 중상단에 모신다.

하판관(下判官)에서부터 위계에 따라 각기 중중단과 중하단을 마련한다. 그리고 하단에 조관단(曹官壇), 사자단(使者壇), 마구단(馬廐壇) 등을 둔다.

예수재는 시종일관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는 재를 지내게 되면 장수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재는 당일의례로 마무리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칠일마다 세 번의 재를 올려 21일 만에 끝내기도 하고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生)이 정해 질 때까지 중음계(中陰界)에 머물게 됨으로 매 칠일마다 총 일곱 번의 재를 올려 49일이 되어서야 끝맺음을 한다.

현황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경전을 읽어야 하는 빚을 지니게 된다. 이는 삶을 위한 인간의 본질적 의무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경전 읽음을 대신하여 예수재를 올리는데, 이때에 현금으로 산 지전(紙錢)을 시왕전에 받쳐 빚을 갚게 되는 것이다. 예수재는 『예수시왕생칠재의(預修十王生七齋儀)』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시간 흐름과 함께 중국 도교의 시왕신앙(十王信仰)을 수용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파악된다. 예수재 의문에 대한 것은 『범음집(梵音集)』, 『작법귀감(作法龜鑑)』, 『석문의범(釋門儀範)』 등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예수재는 불자들의 현세적 길복을 추구하는 기복불교(祈福佛敎)의 한 면이다. 그렇지만 ‘미리[預] 닦는다[修]’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자기수행의 점검과 선행 기원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예수(預修) 실천이란 곧 방생하는 것이라고 설법한다. 이는 예수재가 사후 극락왕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생전 남을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재를 지내기 위해서는 설단을 장엄하게 장식할 뿐만 아니라, 어산과 작법을 화려하게 펼친다.
예수재 설단은 상단·중단·하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은 증명단(證明壇), 하단은 부속단(附屬壇)이며 중앙의 중단은 단 설치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상단에 모셔지는 신격들은 비로자나불[法身佛], 노사나불[報身佛], 석가모니불[化身佛]을 모신 삼신불단(三神佛壇)을 중심으로 동쪽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여타 보살들과 육대천조(六大天曹),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신다.
그리고 서쪽에는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사방천왕(四方天王) 등의 위목(位目)을 모신다.

중앙의 중단은 다시 상·중·하로 세분화하여 예수재에서 가장 중요하게 모셔지는 시왕을 중상단에 모신다.

하판관(下判官)에서부터 위계에 따라 각기 중중단과 중하단을 마련한다.
그리고 하단에 조관단(曹官壇), 사자단(使者壇), 마구단(馬廐壇) 등을 둔다.

예수재는 시종일관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는 재를 지내게 되면 장수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재는 당일의례로 마무리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칠일마다 세 번의 재를 올려 21일 만에 끝내기도 하고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生)이 정해 질 때까지 중음계(中陰界)에 머물게 됨으로 매 칠일마다 총 일곱 번의 재를 올려 49일이 되어서야 끝맺음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