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11-13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For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s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Therefore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when the day of evil comes, you may be able to
stand your ground, and after you have done everything, to stand.
영적 생활을 하는 주체가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먼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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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활(靈的 生活) Spiritual Life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영적 생활에 성공하면 영적 예배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영적 예배에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생활을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두 가지 측면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란 쉽게 설명한다면 “교회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예수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게 돌은 던지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사울이란 청년이 함께 있었는데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는다고 확신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잡아다가 예루살렘 공회에 고소하는데 스데반의
신앙은 무엇이고 나의 신앙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교회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무송판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고 합니다.
발바닥에 뾰쪽한 못이 박히며 붉은 피가 떨어질 때에도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며 그 위를 걷습니다.
보다 못한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멈추게 합니다.
스데반과 주기철목사는 왜 그런 고통과 핍박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만일
신앙이란 교회에서만 행동하는 것이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예수 중심이었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통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신앙이 내 삶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증거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소통되는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대부분 거룩한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도저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런 신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의 신앙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을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세 젊은이들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세 젊은이들을 결박하여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데 바벨론의 군사들은 너무 뜨거워 그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세 젊은이들은 풀무불 속에서 쓰러지지도 않고 걷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또 한 사람이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너무 놀라서 세 젊은이들에게 풀무불 속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세 젊은이들은 머리털 한가락도 불에 그슬리지 않고
풀무불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바벨론 식의 생활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영적생활을 위한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영적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 방법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이 마치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 것은 어린 마음에 울컥하는 분노가 아닙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은 골리앗과 같은 장군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의 갑옷으로 다윗을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왕의 갑옷이 어린 다윗에게는 갑옷이 아니라 거추장스런 것입니다. 어른들은 세상을
여전히 갑옷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외치며 평소에 다윗이 사용하던 물매
돌을 갖고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다윗의 형은 동생 다윗에게 너는 집에서 양이나 지켜야지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인 가치와 세상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적 싸움의 대상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둘째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갖는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통치자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빛이 들어가면 모두 물러가야 합니다.
어두움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거짓의 힘과 능력 앞에서 진실과 참된 것이 물러서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린도서 14:20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악을 악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적을 일으키거나 사람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므로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악한 일을 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사정을 들었던 어느 분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목사님,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위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당장 예배할 수 없다면 저희 사업장에 오셔서 예배하세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만난 적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까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또는 교단 안에서도 그런 사람을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싸우면 그것은 선한 방법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을 잘 하려면 믿음의 흔드는 주된 세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덴동산을 낙원과 같다고 말합니다.
낙원이란 악한 것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간교한 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뱀의 간교함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도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 3:1b)
여자가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와에게 말씀하셨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정확하게 그 말씀 즉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아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믿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으로 하나 될 수 없고 아는 것도 하나 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우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18).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정체가 곧 악한 영들입니다. 영적 생활을 하면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혈과 육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묻는다면 내 성질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질을 그렇게 만들고 반응하도록 주도하는 세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란 인물은 아주 연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겁이 많았던지 밀을 타작하며 넓은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겁이 많고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용사로 돌변하여 주위 적들을 당당하게 물치 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력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신앙생활의 범위를 이제는 생활신앙의 자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풍조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육체의 몸으로 세상을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일서 2:18, 2:22, 4:3, 요한이서 1:7)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기롱하는 자들(유다서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기롱하는 자들이란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신앙생활은 잘 하면서도 생활신앙은 무시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셋째는 불법의 성행(마태복음 24:12)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은 지켜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 후에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안방에 누워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 “함” 이란 아들이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두 형제들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알렸습니다. 함이 두 형제들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후에 노아는 함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함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함의
잘못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함은 내가 본 것을 본 그대로 전달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왜 함을 저주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가족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스데반의 간구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기도가 무르익어 성숙할 때 행동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교인들이 모두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마침 어느 장로님의 부인되는 권사님에게 집사님이 “권사님,
요즈음 왜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나오시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공장의 일이
요즘 바쁘다고 해요! 나도 우리 장로님 미워 죽겠어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에게 “권사님, 장로님을
주님이 사랑하시는데 주님이 사랑하는 장로님을 권사님이 미워하면 될까요?” 그러자 권사님께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회로 모였을 때 마침 그 장로님에게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정말 열심히 참석하셨는데 외지로 출타하는 일이 없다면 반드시 그 시간을 지켰습니다.
사랑은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왈복이란
사형수에 대한 누나의 사랑은 누가 들어도 충격적입니다. 왜 모두가 외면하는 사형수를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서 감싸주고 사랑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남매지간이기 때문이며 누나의 마음에는 동생의 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내가 신사람의 모습을 고린도전서에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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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 신령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지배를 받는다.
신령한 사람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면, 육에 속한 사람도 하루 세 끼 식사를 한다.
영에 속한 사람도 하루 세 끼 식사를 해야 한다.
먹는 것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을 위하여 먹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하여 먹는다.
육을 위하여 먹을 때는 음식이 줄어들고 없어지는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영으로 먹을 때는 음식이 즐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은 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를 드릴 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음식을 누가 먹는다고 합니까?
죽은 조상의 신(영혼)이 와서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귀신이 먹는다는 것은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제사 음식을 바치는 사람의 정성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무당은 귀신이 음식을 먹으면 먹은 표시를 하는데 그 표시를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무당은 볼 수 있다고 하며 귀신이 그 음식을 먹고 내가 먹었다는 표시로 침을 뱉거나 심지어 똥을 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더러운 영이 짓밟은 음식이므로 영적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일에 관심을 갖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책을 읽을 때 육에 속한 사람은 지식을 얻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 원리를 터득합니다.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십자가와 영적 생활
교회를 다니면 영적인 삶,
경건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십자가와 영적 생활에 대해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고,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엡1:3),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골1:9,3:16),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며(고전12:1,14:1)
그 받은 은사들로 교회를 세우고(고전14:2),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고(골1:9),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영적인 사악함을
대적하며(엡6:12)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영적인 생명을 지닌 성도들이
영적인 생각을 하며(롬8:6),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말씀은
영적인 젖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이 아닌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을 들으며(고전2:14), 영적인 것을
뿌림으로써(고전9:11)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성경에 정의된 영적인 것이란 의미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신비하고 신령스러우면서도 묘한
어떤 것을 느끼거나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크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이
터지거나 신유나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영적인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영적 생활의 핵심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집중시키며, 그 속에서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중국의 유명한 성경
교사였던 워치만 니 형제는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서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가장 무서운 일은 육신의 힘으로
영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아(self)에서
나온 것인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구분이 없이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을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자신의
타고난 성품과 힘으로 너무나 성실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믿음 좋은 사람, 영적인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경우입니다. 가인처럼 자신의 땀으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하고, 육신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얕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을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며,
신앙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로부터 영적이요, 경건하며, 헌신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성령을 속인 죄로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간교해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돕거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자주
꿉니다. 이들은 자기 부인 대신 자기 영광을 취하며, 수치와
모욕대신 칭찬과 자랑이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이 된다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런
욕구입니다. 거듭난 속 사람은 영적인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가 영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이며, 자신을 낮추며,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추구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한마디로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기도하고, 주님을 부릅니다. 영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을 내 세우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화>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를 많이 쓴 ‘화니 크로스비’ 자매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십자가로 가까이, 나의 갈길 다가도록’ 등이 그녀가
쓴 찬송시에 곡을 붙인 것들입니다. 평생 8,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썼는데, 그녀는 태어난지 6주 째에 눈에 작은
염증으로 인해 치료를 받다가 의사의 부주의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화니크로스비의
생애’(1903)에서 그녀는 ‘제가 평생동안 시각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복된 섭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시력을 잃게 했던 의사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그 지역을 떠났지만 크로스비는 다시 그
의사를 만난다면 저를 시각 장애인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 위에 머무르게 하는 승리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그녀의 고백을 계속 들어봅시다. “만약 제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제 주의를 끄는 많은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결코 수천 편의
시들을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어려서 시각을 잃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주었는데, 10살 때 구약 성경의 첫 네
권과 사복음서를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잃어 버렸지만 그는 영적인 보화를 볼 수 있는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몸이
아파서, 약해서 주님을 섬기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함은 결코 주님을 섬기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런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흔히 영적 생활은 돈 많고, 지혜가 많고, 가정이 안정되고,
직장이 탄탄하고, 몸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약한 이들이 오히려 훨씬 더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쉽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8:26).
경건한 성도들은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합니다(롬15:1).
하나님은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하십니다(고후12:9).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고후11:30, 고후12:5), 연약함 가운데 세계
선교의 대업을 감당했습니다(갈4:1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의 힘을 꺾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를 폐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대신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실천한다는 것은 약하고
어리석고 수치스런 삶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전달자였던
바울이 자신에 대해 자랑하고 기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열성이나 흠잡힐 것없는 인격이나 높은 학문적
성취나 많은 열매를 맺은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 같으면 자서전을 쓰고, 강연회나
다닐만한 때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첫째,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나를 통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약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십시오.
둘째,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부활의
능력을 맛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먼저 죽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사람만이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자랑했고,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영적 생활의 비결은
십자가에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 안에 두는데
있었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기쁨이었던 것은 그로인해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고, 날마다 속 사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이 있고,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자랑하고 기뻐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손실로 여겼고, 잃어버렸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비록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도 하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뿐더러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4-8).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십자가의 진리와는 정반대로 연약함이 없이
곧 바로 강해지고, 죽음이 없이 곧 바로 부활과 새로워짐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통하지 않은 채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든, 기도를
하든, 찬송을 하든 무슨 열심을 내든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텅빈 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 열성은 나의 육신을 기쁘게 해 주지만 속 사람을
새롭게 하고,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란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20년간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선교 사업을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탄식을 했습니다.
물론 건물도 남아 있고, 본국에서 훌륭한 선교사로 알려져
매년 간증도 했고, 선교지에서는 나름대로 지위도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허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진리를
놓쳐 버린 데 있었습니다.
누구도 연약함을 자랑하지
않고, 누구도 날마다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자신들이 못생긴 것을
자랑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더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고, 몸매 관리를 하느라 온갖 정성과 시간을 다
쏟아 버립니다. 못 생긴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예쁜 것보다
못 생긴 사람이 훨씬 위험에 덜 노출되며, 죄의 유혹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얼굴 가꾸는데 돈 안 쓰고, 신경 안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거기다 얼굴이 못생기면 겉모습에
반해서 정신없이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보고 찾는
남편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데는 못생긴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전도를 해도
얼굴보고 따라 오는 사람이 없고, 온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구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찬
형제들은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잘생기고 학벌 좋고, 돈 많은 형제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
형제들이 교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오히려 그들은 교회 와서 기가 죽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의해서 자신들이 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것이 교회에서도 강하고, 세상 지혜가
영적으로도 지혜가 되고, 세상의 지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지위가 되며, 세상의 부(副)가 교회 내에서도 영적인 부(副)가
되어 버린 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교회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데
어느 정도의 세상 학벌이 필요하고, 재력이 필요하고,
지위가 필요하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를 세워 두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5).
십자가를 버린 영적
생활은 영적 생활이 아니라 마귀적인 생활이요, 육신적인
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고,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으며, 장사지낸 바 되었고,
일으킴 받았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헬렌 켈러나
화니 크로스비, 안요한 목사(낮은데로 임하소서)처럼
신체적으로 눈이 멀거나 어느 한 곳이 부러지고,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죄에 눈이 멀고 귀가 멀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롬6:2, 611).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고, 우리의 귀는 더
이상 세상을 들을 수 없고, 우리의 혀는 더러운 것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살아
있는 한 영적인 눈은 결코 시력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정과 욕심을 느끼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결코 그 안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의 눈과 입이 죽음에 처해지지 않고 살아서 육신의 온갖
정욕을 채워 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물리적으로 눈이
죽은 맹인, 물리적인 입이 죽는 벙어리가 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세상과 죄에 대해 죽음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
몸을 주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눈과 입과 귀와 손과 발과 머리,
생각을 모두 죽음에 처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여기서부터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죄의
도구를 의의 도구로 바꾸어 줍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과
몸을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주고 사셨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 3:13-18에는
우리 육신의 지체들이 어떻게 죄의 도구가 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돌무덤이라. 그들이 자기 혀로 속임수를 쓰나니 그들의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은 저주와 악독으로
가득하며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므로 파멸과 고통이
그 길에 있어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3-18).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은 모두 저주와 죄의
도구들입니다. 이외에도 우리 신체의 각 부분들은 합력해서
악을 이루고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손은 사악함으로
더럽혀져 있었습니다(행2:23). [이는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며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너희 혀가 사악한 것을 내기
때문이니라.](사59:3). 이런 까닭에 우리 손은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8)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법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며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데
빠르고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이니라. 황폐와 파멸이
그들의 길에 있으며](사59:7). 생각의 어떠함이 그
사람의 어떠함입니다. 잠언 기자의 말대로 [이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 사람도 그러하기
때문이라....](잠23:7a).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그 사람의 됨됨이(인격)가
되고,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마음,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가지게
해 줍니다.
우리의 마음(가슴)은
거짓되고 사악하여 모든 것보다 더욱 그러합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고치거나 개조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신10:16).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우리의 배는 섬김을 받고
신이 되었습니다(빌3:19). 우리는 듣기에 둔한 귀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이를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듣는 가려운
귀라고 말합니다(딤후4:3, 마13:15). 양심은 더럽혀져 있습니다(딛1:15,
히1:22). 목은 굳어 있고 뻣뻣하며 반역적입니다(잠29:1).
눈꺼풀은 위로 치켜들어져 교만합니다(잠30:13). 차라리
눈이나 귀나 입이나 손, 발을 다치거나 잃어버린 장애인들은
이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더럽고 추악한 육신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피를 통해
정결케 하심으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으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어떤 것도 주님 앞에 드릴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룩함을 사모하고, 경건한
생활을 원하며, 영적인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누구나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찬송을 하고, 기타
여러 가지 권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동안
수없이 경험한대로 만족스런 영적 생활을 하는데 실패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배제한 채 기도했고,
십자가를 배제한 채 성경을 읽었고, 십자가를 제쳐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차례도 자신이 만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와 모욕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마땅한 더러운 죄인이요, 불타는 흑암의 깊은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서 인정해 보지 않았고,
나야말로 ‘내 안에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거하지 않는 죄 덩어리요, 부정한 물건 같은
그런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서 인식해 보지 않은 채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과 피의 공로에
대한 진리가 너무나 희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 대하여 주신 증거를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죽으셔서 구원해 주신 사실은 놀랍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만 내가 그분과 함께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만큼 죄인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기꺼이 내어놓고,
죽음에 처하지 않습니다. 욥과 같이 자신을 미워 해 본 적도
없고,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통탄해 본 적도 없고, 이사야처럼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사6:5a)란 고백도 없이 자신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착하고, 어느 정도는 쓸만한 구석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단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함께 못박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 덩어리며, 나의
자아는 철저히 부패했으며, 부정한 물건 같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한 시라도 더 신속하게 갈보리의 십자가로
달려가 그분의 죽음과 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은 성도로서, 다시 한번 갈보리의
죽음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영적인 생활,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인이 성도의 삶을 살 수 없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생각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롬8:7). 육신적인 사람은 죄 아래 팔린
삶을 삽니다(롬7:14).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적인체
우쭐대며 다른 성도들의 유업의 상급을 빼앗아 버립니다(골2:18).
반면 영적인 자들은 온유한 영으로 잘못에 빠진 형제들을
회복시키고 자신을 성찰합니다(갈6:1). 영적인 자들은 성경을
주의 명령인 줄로 알고 믿음으로 순종합니다(고전14:37).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세와 말씀에 대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신적인 성도와
영적인 성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고전3:1).
영에 속한 자는 감각들을 단련하여 의의 말씀들을 다루며,
그것으로 선악을 분별할 줄 압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 승리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에 속한 교리들은 먹지도 못하며,
헌신이 무엇인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서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파당을 짓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세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연인의
삶이 처음입니다. 이 때는 영이 거듭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전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육신대로 육신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며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고 다투며, 육신의
소욕이 영적인 욕구를 압도합니다. 이 때는 자아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생활을 하는 줄로 착각 속에
삽니다. 다음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영적인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선포하며 날마다 십자가의 거침을 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수치를 개의치 않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왔고, 십자가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고, 그분의
강력한 능력이 완전해 지고, 부활의 권능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날마다 나의 자아 위에 놓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삶, 영적인 삶,
경건한 삶이란 바로 십자가 위에 자신을 내 던진 삶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험한 십자가를 붙들겠다는 찬송가의
가사 그대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가장 영적인 삶이요, 풍요한 삶임을 기억합시다.
지난 시간에 이어
십자가와 영적 생활에 대해서 좀 더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고
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영적 생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때문에 저희 교회 성도들이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 영적인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나야 하며,
새롭게 되어야 십자가의 피로 단숨에 해결됩니다. 우리는
몸이 늘 씻겨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영 역시
씻겨져야 합니다. 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없다면 영적인
새로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우리의 영은 육신과 마찬가지로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끗해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물로 씻음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영은 말씀의 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마26:41)고
변명하지만, 육신적인 성도들은 영이 약하고 육신이 너무
강합니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은
어린 시절 몸이 자라나면서 그의 영이 자라났습니다(눅1:80,
눅2:40).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날까지 광야에 있더라.](눅1:80)-침례인
요한,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예수
그리스도. 성도들 역시 거듭난 이후로 영이 강건해야 하며,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말합니다. 육신의 성장
원리나 영의 성장 원리는 거의 같습니다. 육신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이 필요하듯이 영도 운동이 필요합니다(딤전4:7-8).
성경은 우리의 육신을 겉 사람이라고 말하고, 영을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엡3:16).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엡3:16). 속 사람을 자라나게
하십니다(고전3:6-7,벧후 3:18)3). 영적 생활이란 영의 출생,
영적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몸은 잘못된 음식으로 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영적 지식과 설교, 성경
공부는 우리의 영을 상하게 합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몸은 영을 표출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이는 가지가 나무 뿌리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드러내는
도구이듯이 눈에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드러내고, 구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을 드러내야 하며, 우리의 행위는 우리 안에
이루신 주의 구원을 드러내는 수단(빌2:12-13)이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영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2:1)라고 말했습니다. 거듭난 영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간사할 수 있고, 더러워질 수 있고,
질투에 사로잡힐 수 있고(질투의 영), 비뚤어진 영을 가질 수
있으며(사19:14)있습니다. 때로 주님은 거짓을 믿고 싶어하는
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영을 주시기도 하시며, 사악한
자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으로 인하여
물을 주사](느9:20)라고 주님을 찬양했는데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심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영을 가져야 하며(시34:18),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시51:10).
우리는 우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눅9:55)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생각이 못되었구나! 너희 사상,
너희 가치관이 틀려 먹었구나! 성격이 되먹지 못했구나!
무식한 놈들이구나!라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영’의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체질이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잘 말하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릅니다. 의사들은 자신의 몸의 상태를
모르고 덤비는 자들을 볼 때 한심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건강에 유의하라고 충고합니다. 목자들은 양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늘 주의하면서 가르쳐 주고, 영적 필요를
공급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영에 속해
있습니까? 성격적으로 몇 가지 예를 참고 해 보면서
여러분들의 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잠11:13). 남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격의
문제 이전에 그 사람이 지닌 영의 문제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을 busybodies합니다(살후3:11, 딤전5:13,
벧전4:15).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를 돌보는
일보다 남의 교회 성도를 돌보느라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자신은 영이 뜨겁다고 생각하는
반면 성경은 신실한 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겸손한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잠16:19). 남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자신을 돌아보아 동일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성찰하는 사람을 온유의 영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갈6:1). 믿음의 영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고후4:13). 한나는 자식이 없을 때 슬픈 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삼상1:15). 질투의 영을 지니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걸립니다(민5:14). 엘리야는 주를 위해 심히
질투하였습니다(왕상19:4). 이는 그 사람의 성격의 문제 이전에
그 사람이 지닌 영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위해
우리의 영에 대해 민감함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영이 짓눌릴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속에서 짓눌리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황폐하나이다.](시143:4). 이는 영과 정신 상태, 영과
우리의 마음과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 문제로 고민하던 사도 바울은 몇 몇 사람으로
인해 속이 다 시원해진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8).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우리말다운 표현을 고르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는
정도입니다. 영의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은 우리의 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여기서 우리는 영과 몸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몸이나 감정이 상하듯이 영은 상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을 상하게 하는 것은 비뚤어진 혀와 마음의 슬픔입니다. [온전한
혀는 생명 나무이나 비뚤어진 혀는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하나 마음의
슬픔은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성경에는 때로 성령과
거듭난 성도의 영이 헷갈릴 정도로 구분이 안가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령인지, 인간의
영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입니다. 흔히 대·소문자로
구분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롬7:6). 이는 율법이나
의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난 이후에 우리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감정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영은 뜨거워 질 수도 있고(롬12:11,
행18:25), 영이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마5:3). 우상 숭배에 빠진
아테네를 본 바울은 영이 격동하였으며(행17:16),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회개를 통해 그의 영이 활력을 얻었습니다(고후7:13).
영이 조급한 사람이 있고(잠14:29, 전7:9), 거만한 영이 있고(잠16:18),
뛰어난 영을 지닌 사람이 있고(잠17:27), 영이 겸손한 자들이
있으며(잠29:23), 참는 영이 있고, 영이 교만한 자들도
있습니다(전7:8). 이런 것은 성격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삶의 문제에 앞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모두 삶의 문제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문제가 풀리면 삶의
문제는 대부분 저절로 풀리게 마련입니다.
몸은 오감각으로 인해
혼에 인식이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 역시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은 육신으로 느끼거나 자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을 밝히며, 지각을 초월한 깨달음을
주며, 완악하고 반역적인 의지를 제거하여 순종하는 의지를
줍니다. 이제 믿음으로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가짐으로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본성에 속한 사람,
육신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이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본성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고전2:14).
이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본성을 거스르고, 본성을 파괴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 아래 있으며, 육신의
본성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롬7:25),
육신을 따르는 자이며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롬8: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추구합니다(롬8:8). 육신에 속한 자들은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며(고전3:3), 파당을 짓습니다(고전3:4). 이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유업의 상속을 얻지 못합니다(골2:18).
이들은 육신을 따라 살며, 육신을 따라 싸웁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기회로 삼고(갈5:13),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며, 육신을 자랑하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킵니다(갈6:12-13). 성경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지목된 자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빌3:18).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저히 육신을 처형하고, 처리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육신을 죽음에
처함으로써 아무도 더 이상 육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육신의 지혜를 뽐내지 못하게 하며, 자아를 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을
처리하여 영에 속한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 선포와 책망과 징계, 바로
잡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합니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구원의 핵심이 갈보리의
십자가였듯이 영적 생활의 핵심 역시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란 공산주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활동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가운데 사상 전향을 하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서 복역하는 죄수들입니다. 대부분은
사상 전향을 하고 형량을 마치고 자유롭게 살지만 몇몇은
끝끝내 감옥에서 죽음의 그날까지 전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국에서 분류할 때 비전향 장기수들은 감옥에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전향한 장기수들은 당국의 권고를 받아서 사상 전향서를
쓰고, 각서를 쓰고 한국인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나고, 친구들이 생각나고 돌아갈 수 있으면
가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더 문제를 일으키고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 역시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사상 전향과
동시에 자신이 왔던 북한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북한을
무덤에 묻어 버리고, 자신 또한 북한에 대해서 죽었다고
선포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전념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생활이 지긋지긋했고,
다시 보내 준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고,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자유가 좋고, 자본주의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아직도 북한 사투리를 쓰고
여전히 이북식 요리를 좋아할지 몰라도 그곳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라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영적인 성도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혐오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수시로 과거로 왔다갔다합니다. 믿음에서 율법으로
성령에서 육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처방전으로 내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Backsliding(타락)의 치유책은 십자가뿐입니다. 배교의
치유책은 갈보리의 십자가로 눈을 돌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3:1).
말세에는 영적인 자들이
미친 자로 취급받습니다. 호세아 9:7에 이르기를, [징벌(懲罰)의
날들이 이르렀고 보응(報應)의 날들이 이르렀은즉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 것이라. 네 불법이 많고 미워함이
크므로 대언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영적인 자는 미친 자가
되었느니라.](호9:7)고 말씀합니다. 징벌의 날과
보응의 날은 대환란의 날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종말을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삶이란 신비하고 감정이 흥분되고
놀라운 체험의 연속적인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갈보리의 십자가를 받아 들인 사람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닌
사람입니다. 복음은 영적 선물입니다(롬1:11).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라고 했는데 그는 복음
선포와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을 영적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미 영적인 것에 참여한 것입니다(롬15:27). 성도들은 영적인
것을 뿌리고, 영적 음식을 먹으며, 영적 음료를 마시고(고전
10:3-4), 영적 은사들에 대해 알고(고전12:1), 영적 은사를
사모하며(고전14:1), 그 은사들을 활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고전14:2). 우리는 육신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그러므로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롬1:9),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롬8:14).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계시해 주시며(고전2:10),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우리를 인치시며(엡1:13)
보호하십니다. 무릇 영적인 삶을 한 구절로 요약하자면
빌립보서 3:3입니다.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빌3:3).
영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생각을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의 명령인 줄
알고(고전14:37),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면 온유의 영으로
바로 잡아 주고 자신을 살펴보며(갈6:1),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화답하며(엡5:19),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합니다(엡6:12). 영적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순종하며](고후10:5). 흔히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우리가 남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먼저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 높이는 모든 것을 갈보리 십자가로
무너뜨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십자가를 통해 사로
잡아와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생활의
본질인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양날 선 검이란 사실에 동의하지만 남 벨
생각만 하지 자신이 먼저 그 칼에 베어짐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말씀의 칼에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가 찔러 쪼개임을 당한 성도들이 이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도 아는 법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의 문제들로 싸우고 다투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적들로 인한 어려움이 아닌
자신들의 내부 문제로 곤혹을 치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늘 어려움을 당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높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합니다. 영적인 사람들만이 영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이 자신에게
그대로 체험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 누리며(엡1:3),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에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워진 사람이며(골1:9),
그리스도의 말씀이 속에 풍부히 거하므로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며(골3:16),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며(벧전2:5a),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벧전2:5).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이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롬12:1).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주님께 드리는 헌물입니다(빌4:18).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
형제들을 돕는 헌물은 달콤한 향기며, 받으실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빌4:18).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찬양과
감사입니다(힙13: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영적인 사람들이 드리는 영적인 희생물은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히13:16).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이러한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영의 사역자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우리가 영의 사역자로서 영의 직무를 감당하면 구약의 어떤
대언자나 제사장들이 가졌던 직무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8)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순종은 우리를 성령 충만에 이르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책을 쓴 제시 팬 루이스는 성도가 성령을 쫓아
행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1. 영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모든 일은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생각의 어떠함은 그 사람의 어떠함이며(잠23:7),
생각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오 땅아,
들으라. 보라, 이 백성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것은/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니라.](렘6:19).
2.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입니다. 금욕과 고행의 삶은 자신이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반면 영적인 삶이란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나
역시 그 십자가에서 함께 처리된 것으로 믿는다면 여러분의
몸은 더 이상 불의의 도구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롬8:14).
성령의 인도를 받는 다는 것은 신적 음성을 듣거나 빛을
보거나 어떤 신기한 기적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드온이 썼던 방식을 지금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 일을 8월 30일 오후 5시까지 이루어 주시면 주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아니면 아닌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아니면 평소 일상 수입이 하루 1000불이라면
오늘 수입은 1823불 이상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 이런
식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기드온의 기도 방법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은밀히 많이 퍼져 있는 하나님의 인도 방식이 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초기 감리교도들은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아무 곳이나 펴서 첫 번째 들어오는 구절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고, 쟌 웨슬레 역시 그런 방법을
자주 애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것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성경적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감각들을 단련하여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1:9-10절은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데 우리는 이런 분별력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4. 영적 생명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7:38-39). 주님은 우리 안에 생명이
밖으로 흘러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뿜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구원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라(work it out-빌2:13)고 말씀하셨습니다.
5.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을 통해 점점 강성해지고,
주님의 도우심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영적 생활입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를 통해서 일하시고, 십자가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충만을 이루어 줍니다. 제가 오늘 증거한 이
말씀들은 성경을 통해서 영적 생활이 무엇이며, 영적인
사람이 누구이며, 십자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요약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해 살아 가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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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가르침(디모데전서 6:1-10)
1절부터 10절에서 바울은 종들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을 다룬다. 1절과 2절에서 그는 종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3절에서
그는 갑자기 다르게 가르치는 것과 건전한 말씀에 착념치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7절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종들을 다루는 것과 다른 교훈들은 거의 관계가 없는 듯하며 다른 교훈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장 1절부터 10절에서 바울은 이것들을 함께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3절의 시작에 있는
「만일(if)」이라는 말과 7절의 시작에 있는 「이는(for)」이라는 말에 의해 지적되어진다. 이러한 말들이 그 구절들의 처음에
사용된 것은 그 구절들이 앞 절들의 연속임을 가리킨다.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만일(if)」이나 「이는(for)」과 같은 작은 단어도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종종 이와 같이 작은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빛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단지 우리로
생각의 이어짐을 볼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빛이 임하는 길을 마련한다.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매우 많은
빛을 받았으며,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빛과 영의 방법으로 성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에는 여러 종류의 신학이 있다. 어떤 신학교들은 현대주의 신학을 가르치며,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예수는 단지 하나의
사람이었으며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순교의 행동에 불과하며 그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어떤 세상의 일반 대학들의 신학부에서는 종교와 신학을 단지 사람의 문화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신학교들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을 가르친다. 그럼에도 진리에 관한 표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오늘날 미국에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표준의 신학은 그 근원이 형제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그와 같은 가르침들은 널리 알려진
스코필드 박사와 그의 관주 성경과 통신 교육과정에 의하여 형성되어졌다. 스코필드는 형제회의 거의 모든 가르침들을 채택했지만
형제회의 방법으로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은 거절했다. 형제회 가운데서 인도하는 교사는 다비(J. N. Darby)였다. 다비의
저서들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을 신학자라고 칭하는 어떤 사람들도 높은 경지의 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1925
년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께 그가 아는 바에 따라 어떠한 책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장 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인지 묻는 편지를 썼다. 젊은 믿는 이로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으려고 매우 애썼다. 나는
창세기 첫 구절로부터 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이해하기 원했다. 니 형제님께서는 나에게 그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아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다비의 성경 주해 (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라고 말했다. 8년 후에 그는 나에게 다섯 권으로 된 이 책 한 질을 주었다.
다비(J.
N. Darby)와 그의 동료들은 위대한 성경 교사들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성경은 그 전의 어떤 이들에게보다 형제회의 교사들에게
더 많이 열렸다. 이 형제회 교사들은 성경을 단지 전통이나 흑백 문자를 따라 안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신선한 빛에
따라 알았다. 주님에 의해 빛 비췸을 받음으로 그들은 말씀 안에 있는 많은 진리에 대한 많은 이상과 계시를 받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성경을 죽은 문자로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지리(地理)나 역사(歷史)에 대하여 잘 알고, 그들은
또한 성경의 어떤 기초적인 가르침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계시나 빛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허탄한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어떤 성경의 교리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심지어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조차도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50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루터교의 목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편 중독자였다. 그가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됨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는 전혀 빛이나 계시가 없었다. 어느 날 노르웨이로부터 온 거듭남의 전파에 매우 영향력
있었던 나이든 여자 전도자가 집회 후에 이 루터교 목사 앞에 멈추어 서서 그가 거듭났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거듭났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단지 그의 얼굴을 쳐다봄으로써 그가 거듭나지 않았음을 안다고 말했다. 이 루터교 목사는 모욕을 받자 이
여자 전도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그날 밤에 그녀를 죽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성령은 그를 비추어 그를 꾸짖었다.
그는 회개했고 주님 앞에서 울었다. 다음날 아침 이 여자 전도자가 그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집회 가운데서 이 목사는 커다란 감동으로 그의 간증을 했다. 이것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구원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루터교 목사의 경우가 성경을 단지 흑백 문자에 따라 아는 것과 거룩한 빛의
비췸에 따라 아는 것의 차이를 예로 보여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많은 허탄한 이야기들이 있다.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소위 기적들을 행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오순절 목사는 나에게 기적적으로 금으로 입혀진 치아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른 오순절 사역자는 어떤 집회에서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기적적으로 중국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디모데전서에 있는 사도의 가르침은 허탄한 이야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더욱이 이 서신에는 기적적인 것들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 반대로 5장 2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동역 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기적적인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디모데에게 인간적이 되며,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의 건강을 돌볼 것을 권면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어떤 빛이나 계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단지 흑백 문자에 따라 말씀을 가르칠 뿐이며
지리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당신은 어디에서 디모데전서 1장 4절로부터 신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주제의
메시지를 들어보았는가? 주님의 긍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고 그의 진리를 알게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평판 있는
신학자들이나 교수들이 비판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할지라도 회복역과 라이프-스타디를 연구하기 바란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책들을
연구한다면 그들이 빛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Ⅰ. 멍에 아래 있는 종들
6 장 2절과 3절, 그리고 6장 6절과 7절에 있는 논리적인 연결을 생각해 보자. 6장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명한다. 훼방을 받는다는 말은 나쁘게 말하는 것, 비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섬기라고 명한다. 바울은 2절을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는 말로 끝맺는다.
Ⅱ. 돈을 사랑하는 이들
A. 다르게 가르침
그리고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만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건강한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을 따른 가르침에 착념치 아니하면 그는 교만으로 눈이 먼 자니라』고 말한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 삼은 사도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한 말」은 생명의 건강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건전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공급으로서 건강한 가르침을 사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요 6:63). 그러므로 그것들은 건강한 말씀이다. 주님의 건강한 말씀은 경건에 따른 가르침의 근본이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특별히 어떤 방면에서 가르쳐졌을 때 그것들은 경건에 따른 가르침이 된다. 주님의 사신 말씀은 항상 경건-그리스도를 사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산출한다.
다르게
가르치는 것에 관한 6장 3절에 있는 바울의 말은 심지어 종들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주 예수의 건강한 말씀에 따른 것임을
가리킨다. 바울의 가르침은 경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건강한 말씀에 착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그들은 경건에 따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2절과 3절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이 있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경륜의 건강한 말씀에 따라야 한다. 심지어 어린이 집회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주 예수의 건강한
말씀을 따르는 원칙 안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경건에 따른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B. 교만으로 눈이 멂
6 장 4절과 5절에서 바울은 다르게 가르치며 건강한 말씀에 착념치 않는 자는 『교만으로
눈이 멀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변론과 언쟁으로 병든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생각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끊임없는 말다툼과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오느니라』고
말한다. 주님의 건강한 말씀과 달리하는 가르침들은 항상 그들을 눈멀게 하는 자만심을 가진 사람들의 교만으로부터 생긴다.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확정된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교만으로 눈이 멀어서 고의로 다르게 가르쳤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과 똑같이 가르치는 것은 창피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내가 중국에 있었을 때 워치만 니 형제님과 똑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매우 기뻐했었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나는 가능한 한 심지어 니 형제님이 사용한 똑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역을 수행해 나가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4 절에서 바울은 「변론 … 으로 병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말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다투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여기에서 「병」은 3절에 있는 「건강」과 반대되는 것이다.
6 장 4절에서 훼방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3장 8절에서처럼 여기에서의 훼방은 사람을 향하여 욕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5절에서 『생각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끊임없는 말다툼과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았다. 헬라어로 「끊임없는 말다툼」은 「그칠 새 없는 싸움」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러한 말다툼들은 생각
안에서 부패되고 악화된, 그리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빼앗긴 궁핍한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헬라어로 「잃어버리다」라는 말은
그들이 진리를 소유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치워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가 결핍된 것이다.
5 절에서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물질적인 이득 또는 이익이 남는 장사-으로 만든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한 갈망은 어떤 이들이 다르게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와 같이 교만과 이익이나 부(富)를 위한 갈망 때문에
오늘날 어떤 이들은 다르게 가르친다. 교만은 명성과 좋은 평판을 원하는 것과 관계있고, 이익은 돈이나 물질적인 유익과 관계있다.
C. 지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
6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은 큰 이익이니라』고 말한다. 「지족」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빈센트는 『밖의 것들에 대한 갈망이나 결핍에 반대되는 내적인 자족이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말이다.』라고 말한다. 「큰 이익」이라는 표현은 이익을 얻는 큰 수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로 이 시대의 축복-경건에 자족을 더한 것과 이 시대의 탐욕과 걱정으로부터 자유함-을 암시한다.
5 절과 6절에서의 이익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그를 7절부터 10절에 있는 돈을 사랑하는 이들을 다루는 문제로 이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6절과 7절을 연결하는 접속사 「이는(for)」을 사용한다.
다시
한 번 나는 우리가 이러한 세세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생명과 빛과 영의 방법으로 성경을 아는 데 이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성경을 지리나 역사로 아는 것보다 더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더 많은 구절들을 암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긍휼과 우리보다 앞서간 위대한 성경 교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빛을 보여 주셨음을 간증할 수 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영을 주셨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다. 『주의 말씀에 들어감은 빛을 주나이다』(시 119:130). 더욱이 주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63).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영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주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집에서 자라나셨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분이 놀라운 빛과 생명과 영을 가지고
계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빛과 생명과 영을 갖는 것은 어떤 사람의 학식이나 학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배웠다는
확신이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빛과 생명과 영을 방해할 수 있다.
6 장 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그분을 신뢰하며, 편견과 산만함이 없이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그분에 의하여 살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지혜롭게 정해진 것이다.
8 절은 『우리가 먹을 것과 가릴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계속한다. 가린다(covering)는 말은 입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거하는 것도 포함할 수 있다. 만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필요를 위한 충분한 공급을 갖는 것이다.
D. 부하게 되려는 갈망
9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부하게 되려고 결심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로 하여금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결심은 부하게 되려는 강한 갈망과 관계있다. 이것은 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탐욕적인 사람을 시험 안으로 인도한다. 어떤 이들은 실제적으로 부하나 다른 이들은 오직 부하게 되려는 갈망만을
가지고 있다. 이 악한 갈망이 그들을 침륜시키고 멸망시킨다. 여기에서 침륜은 멸망을 포함하고, 멸망은 일시적인 형벌과 영원한
형벌 둘 다를 의미한다. 부하게 되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은 올무에 빠지고 덫에 걸리며, 또한 많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니
이는 곧 사람들로 하여금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잠기게 하는 것이다.
10 절에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결론짓는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그것을 뿌리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사모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열망하고 동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났으며 그들은 우리 믿음의 내용인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진리로부터 탈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