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 시대적 배경




사복음서 - 시대적 배경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본디오 빌라도 말고도 사복음서에는 "헤롯 왕"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러면 헤롯은 누구이고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멀쩡한 왕을 두고 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했는가? 또,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박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무심코 지나쳤던 "성경 속 사람들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대표적인 궁금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헤롯 "왕"을 두고 왜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을 하나?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을 하다가 왜 또 헤롯에게 보내나?

예수님 탄생 시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과 예수님을 심문한 헤롯은 동일 인물인가?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등장에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나?


위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신약 시대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흐름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복잡한 패권 다툼으로 인해 예수님 시기의 정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신약 시대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흐름


0. 구약 말기,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 그 후 팔레스타인 땅에서 패권 다툼 지속.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 > 페르시아 (200년) >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 (30년) >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00년) >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셀레우코스 왕조 (34년) > 유다 독립 (하스몬 왕조, 100년) > 로마 점령

1. 셀레우코스 왕조 후기, 유대교 탄압 정책에 반발한 마카비 혁명으로 하스몬 왕조 설립. (유대인 독립 국가)

2. 헤롯 가문은 본래 에돔 종족으로 하스몬 왕조에 정복 당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음. (헤롯 안티파터 1세, 대헤롯의 할아버지)


3.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이 정복 전쟁을 거듭 승리로 이끌며 팔레스타인 땅도 눈독들임.

4. 헤롯이 대세 폼페이우스를 도와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림. (헤롯 안티파터 2세, 대헤롯의 아버지)

5. 그 공으로 헤롯은 유대 집정관으로 임명. (하스몬 왕조의 힐카누스 2세는 왕에서 대제사장으로 강등)

6. 로마 실권 다툼으로 폼페이우스 실각. 다른 시저가 최초로 로마 통일. (헤롯은 유대 행정관, 힐카누스 2세는 지역 총독으로 임명)


7. 로마 정권 다툼 지속. 가이사가 충신 부루투스에게 살해됨. 그 사이 헤롯도 살해됨. 로마 상황도 불확실하고 부왕도 죽자 대헤롯은 일단 로마로 도망감.

8. 로마 대권 양강 구도 형성.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 vs. 신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9. 안토니우스가 대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 도망갔던 대헤롯은 다시 로마를 등에 업고 왕이 되어 유대로 금의환향.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안티고누스를 살해하고 예루살렘성 탈취.

10.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


>> 이 시기에 예수님 탄생. 

로마 황제 (Caesar) - 아우구스투스 (호적 정리 칙령을 내려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감.)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 (눅 2:1-5)

유대 왕 (King) - 대헤롯 (로마에 빌붙어 겨우 왕이 됐는데 나 말고 또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 명령함.)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 2:1-3)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 2:16)


11. 대헤롯 죽고 세 아들에게 지역 통치권 분할.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며 로마 황제를 "섬긴다"는 의미로 "분봉왕分封王"이라 칭함.)

(1) 아켈라오 - 유대, 사마리아, 에돔의 분봉왕. 로마의 유화 정책과 달리 폭압 정치로 폭동 일어남. 폭동은 로마의 개입으로 진정되고 아켈라오는 지금의 프랑스로 추방당함. 그 후, 유대 예루살렘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이 됨.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리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19-23)

>>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governor)이었음. 

본디오 빌라도는 대부분 서쪽 해안 도시인 가이사랴 궁전에서 지냈고 필요한 때만 예루살렘으로 내려갔음. 총독도 결국 시저의 수하이므로 유대인들이 총독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할 때 시저에 대한 충성을 논리로 압박했던 것임.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 19:12)


(2) 헤롯 안티파스 - 갈릴리, 베레아의 분봉왕.

>> 바로 이 헤롯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등장하는 인물.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말씀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왕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

요 4:46-54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동생 빌립의 아내를 차지한 일로 세례 요한에게 혼나고 그를 옥에 가둠. 후에 세례 요한을 죽임.   

그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이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마 14:1-10)

이후,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넘긴 것은 헤롯이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의 분봉왕이었기 때문.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눅 23:6-7)


(3) 빌립 - 갈릴리 북동부의 분봉왕. ‘가이사랴 빌립보'를 세운 그 빌립.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했다는 구절에서 나온 그 빌립. 자신을 왕으로 임명해 준 로마 황제에에 대한 감사 표시로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여 이름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지음. (더 자세한 이야기는 BIBLIA 참고)


12. 사도행전 이후, 헤롯 아그립바. 야고보 죽이고 베드로 옥에 가둠. 충에 먹혀 죽음.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행 12:1-2)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 12:23)


13. 헤롯 가문 마지막 왕, 헤롯 아그립바 2세. 사도 바울의 구원 간증을 들었던 왕 (행 25-26장)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행 25-26장)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 리더들


로마 황제와 유대 왕 외에도, 예수님 시대에 활동했던 유대인 리더들이 있었다.


산헤드린 공의회 - 유대인 최고의 자치 의결기관으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 등 유대 사회의 리더 71명으로 구성. 공식적인 주권은 로마 황제와 유대 왕에게 있었으나 사법적, 입법적, 행정적 기능을 어느 선까지는 자치적으로 해 온 기관.

대제사장 - 로마가 제사장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로마 황제나 헤롯 왕가에 빌붙어 백성을 착취하는 세력으로 타락함. 예수님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는 로마에 거금을 주고 로비. 성전에서 제사용품 전매청을 운영하여 유대 백성들을 대상으로 장사판을 벌임.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의 배경이 됨.)

요 2:13 - 16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비록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지만 유대인 리더들은 나름대로 법을 가지고 유대 사회를 이끄는 자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요 18: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따라서 로마 총독이나 헤롯 왕가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체제 안정을 위해서는 그들을 잘 구스를? 필요가 있었고 적어도 그들의 반발을 구태여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이렇게 나름의 공생 관계를 유지해 온 유대 사회에 나사렛 산 동네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듣보잡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며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 기존 유대 사회의 리더들은 시기심에 불타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을 단 번에 정리해 주는 구절이 있다. (위의 내용을 알고 읽으면 무슨 말인지 더 잘 이해가 된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1-2)


요약하면,

예수님 시대의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가 실질적인 짱,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그 다음, 헤롯 왕가는 로마에 빌붙은 꼬붕, 대제사장 무리는 유대 사회의 리더이나 로마의 눈치를 보며 이권 챙기기 바쁜 처지였다.


끝으로,

사도신경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사람은 과연 본디오 빌라도 한 사람 뿐인가?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단순히 본디오 빌라도라는 나쁜 놈 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기득권자들의 공동 작품"이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결국 그 모든 사람들의 권력욕, 인정욕, 시기, 이권 다툼, 탐욕 등이 함께 빚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그 모든 죄를 씻어주셨다.


가현설(假現說) / 도우시티즘(Docetism)





가현설(假現說)
도우시티즘(Docetism)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인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몸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참된 혈과 육의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이다.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였다.

가현설은 일부 기독교들이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발생한 극단적인 교리로서, 요한 교회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肉化) 사상을 통해 반박하였다(요한 1:14).

그노시스*라는 정신 사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에 대해 주장하는 견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현설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라,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제 예수 안에서만 스스로를 처음으로 드러내 보이신 참되고도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런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시다.
이 하나님은 악한 귀신인 여호와*와 그의 악한 피조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다(그랬다면 이는 이 악한 세상을 만들게 된 태초의 '사고'가 예수 안에서 거듭되었을 따름이고 사람의 '구속'을 위해 이루어진 바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 '겉보기로만'(가현설이란 용어는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의 헬라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의 몸과 결부되었고 수난을 겪으시기 전에 다시 그 몸을 버리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식'('그노시스')을 주심으로써 '구속'을 이루신 것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속에 이바지한 바는 전혀 없다.
이 가현설이 머리를 들자 신약 성경에서는 이를 반대한다(요 1:14; 요일 4:2-3. 딤전 2:5-6; 3:16도 참조).





천사론(天使論)





천사론(天使論)

우리들의 주위에는 인간들이 볼 수 있는 세계보다 훨씬 조밀하고 풍부하고 강력한 영계(a spirit world)가 있다.
우리들 사이에는 선한 영도 악한 영도 마음대로 다니고 있다.
이 영들은 번갯불 같은 빠른 속도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민첩하게 이동한다.
이 영들은 공중에 살고 있다.
어떤 영들은 우리들의 복리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또 다른 영들은 우리들을 해하려고 한다.
영감을 받은 성서 기록자들은 이 볼 수 없는 세계의 장막을 헤치고 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은 이 영계를 살펴 봄으로써 격려함을 받는 동시에 경고로 받게 된다.

개요(槪要)

I. 천사들(Angels)

1. 천사들의 본질

a. 피조물(Creatures)
b. 영들(Spirits)
c. 불멸(Immortal)
d. 다수(Numerous)
e. 무성(Sesless)

2. 천사의 분류

a.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
b. 천사장(The archangel)
c. 선택된 천사들(Elect angels)
d. 열국의 천사들(Angels of nations)
e. 그룹(Cherubim)
f. 스랍(Seraphim).

3. 천사의 특성

a. 순종(Obedient)
b. 경건(Reverent)
c. 현명(Wise)
d. 온유(Meek)
e. 강대함(Mighty)
f. 거룩(Holy)

4. 천사의 일

a. 하나님의 대행자(God's agents)
b. 하나님의 사자(God's messengers)
c. 하나님의 종(God's Servants)

II. 사탄(Satan)

1. 그의 기원(His Origin)
2. 그의 특성(His Character)
3. 그의 활동(His Activities)
4. 그의 운명(His Destiny)

III. 악한 영들 (Wicked Spirits)

1. 타락한 천사들(Fallen Angels)
2. 악마(Demons)

I. 천 사 들 (Angels)

1. 천사들의 본질

(a) 피조물(Creatures)

피조물은 창조함을 받은 존재를 말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에 의하여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우리들은 천사들이 창조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으나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한 그들이 사탄의 지배하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천사는 두 계급으로 나누이게 되었는데 즉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구분된다.
천사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계 19:10, 22:8, 9)
또는 인간은 천사들을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골 2:18).

(b). 영들(Spirits)

천사는 영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천사는 사람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자연적 조건들에 의하여 제하늘 받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아무런 자연의 수단을 이용치 않고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다닐 수 있다.
비록 천사들은 순수한 영들이지만 인간의 감각이 인지 할 수 있도록 인간의 형상을 취할 때도 있다.(창 19:1-3).

(c) 불멸(Immortal)

불멸이란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눅 20:34-35 속에서 예수님께서 사두개 교인들에게 부활한 성도들은 천사와 같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d) 다수(Numerous)

성경은 우리들에게 천사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7:10).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허다한 천군"(눅 2:13)
"천만 천사"(히 12:22)
천사들의 창조주는 "만군의 주"로서 묘사되어 있다.

(e) 무성(Sexless)

항상 천사는 남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실지는 천사들에게는 性이 없다.
천사들과 생산하여 자기들의 수를 번식시키지 않는다(눅 20:34-35).

2. 천사의 분류

"하늘 나라의 제일 법칙은 질서"이기 때문에 천사들을 그 계급과 활동에 의하여 분류해 봄이 좋을 것이다. 천사의 분류가 벧전 3;22속에 암시되어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라는 말로 분류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골1:16,엡1:20,21 참조)

(a) 주의 천사 (The Angel of the Lord)

"주의 천사"는 다른 천사로 부터 구별하여 하는 말이다. 이 주의 천사는 죄를

사할 권세도 있고 죄를 사하지 않을 권세도 갖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있다.(출23:20-23). 출32:34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 사자

가 네 앞서 가리라."그런데 출33:14 속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이 좀 다르다.

"네가 친히 (글자 그대로는 나의 얼굴)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사63:

9 속에는 위에 열거한 두 가지 표현이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

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

으셨으나." 이 천사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첫째로 이 천사에게는 여호화의 이름 곧 계시된 그의 품성이 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얼굴이다.즉 다시 말하면 그에게서 여호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런

고로 그는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다. 야곱이 하나

님과 천사를 동일시 한 것을 참고하라(창32:30,48:16). 이 신비스러운 주의 천

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좀더 나

가서 전세계의 구세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다운 의미에 있어

서 주의 천사는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b) 천사장 (The Archangel)

미가엘이 천사장이다 (유9,계12:7,살전4:16 참조) 미가엘은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호위하는 천사로 묘사되어 있다. (단12:1) 가브리엘 천사도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기술되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천사이다.

(눅1:18) 또 그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는 중대한 소식을 전해 주는 사명

을 받았다.(단8:16,9:21).

(c) 선택된 천사들 (Elect Angels)

아마 "선택된 천사들"은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을 때에 하나님 편에 충실

히 서 있었던 천사들을 가르키는 것으로 볼수 있다. (딤전5:21,마25:41).

(d) 열국의 천사들 (Angels of the Nations)

단 10:13,20을 볼 것 같으면 어떤 종류이나 호위하는 천사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호위하는 천사는 자기가 맡은 나라의 복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유

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단9:1,2) 다니엘은 그들의 귀환을 위하

여 금식과 기도하였다.삼 주일이 지난 후에 한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귀활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었다. 실은 파사의 천사가 유대인의 귀환을 반대

하였다. 아마 이들은 파사 나라를 지배하다 영향력을 상실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다니엘의

간청을 듣고 도와 줄 천사는 오직 이스라엘 나라를 호위하는 미가엘 밖에 없다

는 것을 말해 주었다. (단10:21). 파사의 천사나 헬라의 천사는 모두 유대인들

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찬성치 않았다 (단10:20). 신약의 "정사"(Principl

ities)라는 말은 아마 열국들을 지키는 천사들을 가르킬 것이다. 이 말은 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에게 모두 사용 되어졌다.(엡3:10,골2:15,엡6:12).

(e) 그룹 (The Cherubim)

그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응보와 (창3:24) 구속의 목적 (출25:22)과 관련

되어 있는 지위가 높은 천사인듯이 보인다. 이 그룹들은 각각 사자의 얼굴과 사

람의 얼굴과 황소의 얼굴과 독수리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룹의 피조물로서의 완전성 즉 사자와 같은 힘과 사람과 같은

지능과 독수리와 같은 속도와 황소와 같은 봉사를 의미한다. 이 그룹들의 구성

형체와 하나님과의 친근감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

님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확신을 준다(롬8:21).

(f) 스랍 (The Seraphim)

스랍은 이사야 6장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들은 스랍에 관하여 아는 바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스랍은 매우 계급이 놓은 천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열열한 사

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스랍이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열열한

자들 (burning ones)이다.)

3. 천사의 특성

(a) 순종 (Obedient)

천사들과 자기들이 맡은 사명을 지체하지 않고 또 의심치 않고 곧 수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마6:10,시103:20,유6, 벧전3:22 참조)

(b) 경건 (Reverent)

천사들의 최고의 활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느9:6,빌2:9-11,히1:6).

(c) 현명 (Wise)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격

언적 표현이다.천사의 지능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지능보다는 훨씬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지능도 필연적으로 유한한 것이다. 천사들은 우

리들의 생각을 직접 알 수 없다.(왕상8:39). 은혜의 신비성에 대한 천사들의 지

식은 제한되어 있다.(벧전1:12)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천사들

의 지적 개념은 우리들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기 때문에 천사의 마음 속

에 있는 단 하나의 개념이라할지도 우리들은 일생을 통하여 연구하여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천사들은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원수를 조롱치

않는다 (벧후2:11,유9).

(e) 강대함 (Mighty)

천사들은 "능력이 있다" (시103:20).

(f) 거룩 (Holy)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록한 천사들이다.

(계14:10).

4. 천사의 일

(a) 하나님의 대행자 (God's Agents)

하나님은 심판의 명령을 시행하는 집행자로서 천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창3:

24,민22:22-27,마13:39,41,49,16:27,24:31,막13:27,창19:1,삼하24:16,왕하19:

35,행12:23).

(b) 하나님의 사자 (God's Messengers)문자 그대로 천사는 사자를 의미한

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주셨다.

(1) 예고, 눅 1:11-20, 마 1:20, 21.

(2) 경고,마 2:13, 히 2:2.

(3) 지시, 마 28:2-6. 행 10:3. 단 4:13-17.

(4) 격려, 행 27:23, 창 28:12.

(5) 계시, 행  7:53. 갈 3:19, 히 2:2, 단 9:21-27.

(c) 하나님의 종 (God's Servants)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히 1:14).
천사들은 격려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는다 (마 4:11, 눅22:43,  왕상19:5).
보호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다. (창 16:7, 24:7, 출 23:20, 계7:1).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다.(민 20:16, 시 34:7, 91:11, 사 36:9, 단 6:22, 창 48:16, 마 26:53).
중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다.(슥 1:12, 계 8:3, 4)
의롭게 살다 죽은 사람을 수종들기 위하여 보냄을 받다.(눅 16:22).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18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위에 열거한 성경 구절들을 읽고나서 "수호의 천사"의 교리를 계통 세워 논술하였다.
그런데 이 수호의 천사의 교리는 신자 각 사람을 일생동안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특별한 천사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행전 12:15절을 미루어 볼 때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그들을 위한 수호의 천사들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 하였다는 암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물론 교리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사들이 모든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는 증거를 여러 곳에서 분명히 찾아 볼 수 있다.


양심


양심(良心) 4893. 수네이데시스(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발음 / 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1.  명사 의식, 고전 8:7, 히 10:2, 벧전 2:19.

  • 2.  명사 양심, 도덕의식, 롬 2:15, 고전 10:29, 고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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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거듭난 신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패는 사람들의 평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에 달려있으며, 인생 중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아니라 우리 삶의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평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삶을 깊이있게 상고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쫓아갈 수 없는 대단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와 실패, 수치와 슬픔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의 인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중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양심은 비교적 덜 중요하게 다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지표로 제시합니다. 더러운 양심은 참된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상고하면서 양심의 문제에 주목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기회)인가, 시험인가?
본문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밀고자들이 있어서 사울 왕에게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1). 사해 서안에 있는 엔게디 지역은 동굴이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시 3천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출동합니다. 사울은 갑자기 용변을 보려고 한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바로 그 굴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히브리어법입니다. 이미 어둠 속에 눈이 적응되어 있던 다윗에게 이것은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부하들은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4).” 언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룰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확신을 주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타당하고 그럴 듯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이런 기회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기회가 아닙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다윗은 칼을 뽑았습니다. 부하들은 드디어 시간이 왔고 지금은 그 순간이라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 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 끝을 칼로 조용히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일로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죽일 수도 있는 기회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마 그 순간은 다윗에게 가장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정이 어려운 것만큼 그 결정은 다윗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결정 여하에 따라서 다윗의 믿음 생활의 종말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을 희생하더라도, 믿음의 아름다운 자태를 묵살하더라도 왕위를 지금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를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하나님께서 내 손에 사울을 맡기신 것인가? 우연 치고는 너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사울을 처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편안하게 인도하시려는 것일까?

다윗의 부하들은 너무나 경솔하게 자신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해석하고 있는 전형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만을 생각할 때, 언제나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시험하시는가 하면, 그의 인내, 경건, 그리고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인내는 이 상황을 주님께서 명확하게 허락하실 때까지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경건은 과연 원수를 갚으려는 육의 소원을 영적 욕구에 복종시킬 것인가의 문제였으며, 믿음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믿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주신 기회냐,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행동을 결정하게 됩니다.

2. 양심과 믿음은 함께 한다.
이 상황 속에 있는 다윗을 성경은 매우 예리하게 기록합니다.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6).” 사울은 자기는 물론 부하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굴에서 나갔고 기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조금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 즉 다윗의 내면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예민하게 살아있는 양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가 느낀 양심의 가책은 죄책감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경건의 표지입니다. 다윗은 후일, 인구조사를 행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을 느끼게 됩니다(삼하 24:10).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가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지적하자 그는 또한 은폐하는 쪽 보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윗의 선한 양심은 이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느낀 잘못에 대한 가책이고, 둘째는 사람들(부하들)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까?

경건의 최상의 표지 중 하나는 양심이 민감한 것입니다. 양심이 죄악을 허용하고 타협함으로써 더럽혀지면, 믿음도 다 바닥나게 됩니다. 양심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양심은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양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들을 살펴보십시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다윗에게 양심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옷자락을 베었을 뿐임에도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부하들 중 누구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지만(오히려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이 부하들에게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부하들에게 고백합니다. 선한 양심은 아무도 문제삼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문제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예민한 양심이 뭔가를 느꼈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그로 인한 수치감과 죄책감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6).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여기서 재판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엘로힘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통치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개념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어 세우신 대리인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 개념 때문에, 다윗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을 뿐인데도 그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념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하나님이 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마음 곧 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다윗이 느낀 양심의 가책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가진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은 하나님 없는 양심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은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성경의 기준을 떠나도 너무나 많이 떠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옛날 이스라엘이란 국가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신약 성경도 권위자들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바울서신에서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에 너무나 우리는 길들여져 있습니다. 무엇이 다윗의 손을 막았습니까? 부하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손을 막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양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심어놓으신 도덕법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서 부모의 영향으로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와 같이 이 사회의 기대치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는 정신이상이나 정신병의 증상입니다. 죄인이 양심에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한다면 그것도 물론 정신병적 증세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써놓으셨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다면 이렇게 볼 수 밖에 없고 다윗의 행동이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 형상 안에 각인시켜놓으신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들을 심판하실때 양심이 그 증거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롬 2:14~15). 하나님께서는 인간 안에 이런 하나님의 도덕법을 양심으로 새겨놓으신 것입니다.

3.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간다.
사울이 굴에서 나간 후, 다윗이 사울의 뒤에서 외쳤습니다. “내 주 왕이여”하며 다윗은 땅에 엎드려 사울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처럼, 자신은 사울을 해할 의도가 없음을 그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자신의 결백을 말할 뿐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각오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솔직한 다윗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하늘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죄로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살아계시고 자신의 인생을 결산해야 할 심판주 앞에서 결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진실성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양심에 걸리는 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거듭난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편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증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요일 5:17). 심판날이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낼 것입니다. 그 날에 담대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사십시오. 오늘을 면하고 살아가고, 나의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진실은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결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억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것, 다윗이 했던 것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 법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이스라엘 왕이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자신을 좇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던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기를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방법입니다.

4. 굳어진 양심: 사울
사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울은 매우 격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말하면서 왕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소리 높여 웁니다. 그는 자신의 악함과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선함을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듯이, 다윗이 왕이 될 것과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도 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들을 선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울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울이 지금 보인 이 반응이 회개가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사울이 진실성이 없게 연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이 시간 자신의 감정에 진실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감동하게 만들었습니까? 다윗의 선함이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도 찔림이 된 것입니다. 비록 굳어진 양심이라도, 이렇게 반응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너무나 굳어져 있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압니다. 도덕적 양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양심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은혜의 자리 앞까지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양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양심이 움직일 때 사람은 기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악행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사울의 굳어진 양심 위에 점점 더 단단한 껍질을 형성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빠질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감동이 있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사울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속적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죽이려는 마음이었고, 이것은 그의 순간적 변덕이 아니라 지속적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잠깐 그의 굳어진 양심이 반응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순간적으로 비정상적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입니다. 양심이 그를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찔림은 찔림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행한 일과는 다른 반응인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선한 양심 안에 담겨진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행하는 회개이며, 이런 역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5. 교훈
A.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부르심(롬 12:21): 악인에게 인정받는 믿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육을 이기는 영의 승리를 봅니다. 죄를 이기는 은혜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와 싸워 이기는 법입니다. 원수의 격동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원수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그 표본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게는 원수 갚는 것이 용서하는 것보다 달고 시원합니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갑자기 편안해집니다. 왜 그렇지요? 공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공정함만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옥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의 은혜가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나에게 맡겨라.” 거듭난 자녀가 아니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말씀처럼 부당하고 괴로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파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죄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과 원수 갚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일에 맡는다면, 우리 죄악된 본성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더욱 잔인해지며 더욱 담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고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이렇게 보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원수 갚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우리의 믿음은 사울과 같은 악인을 통해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B.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예민해지고 지켜진다.
여러분, 양심을 지키고 사십시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을 선하고 예민한 양심으로 지키십시오. 이렇게 하려면, 양심을 거스려서 하는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예민하게 지키는 적극적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양심을 우리 속에 써놓으신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통해서 양심을 예민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의 양심은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다 다르기에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온전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의 고백인 시편 19편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살아있고 예민한 양심을 가졌던 다윗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7절부터 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7~14)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 길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C.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십니다. 양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신 것은 다윗이 그 긴긴 시간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쫓기며 살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의 양심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알았고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양심에 믿음을 더하시고 또 더하시고 또 더하여 주셨습니다.





1. 깨끗한 양심(a Pure Conscience)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2.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3. 찔림 받은 양심(a Stricken Conscience)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4. 더러워진 양심(a Defiled Conscience)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5. 악한 양심(an Evil Conscience)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6. 화인 맞은 양심(a Sealed Conscience)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깨끗한 양심(로마서 2:14~15)
A CLEAN CONSCIENCE

▶ 양심의 역기능(자포자기)

수잔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서 손쉬운 이혼을 유보하고, 먼저 남편에게 고통을 갚아줄 길을 모색했다.

남편이 아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임신 중의 아기를 고의로 낙태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낙태에 대한 죄책감이 훨씬 더 무거워서 양심에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자책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임신한 아이를 또 낙태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첫 번째는 남편이 미워서 낙태했고, 이번에는 자신이 미워서 또 낙태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포자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역기능이다.

자기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회개하면 되는데,

도리어 자포자기하는 죄를 더 범한다(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양심이 없었더라면, 자포자기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양심이 있는데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해서

마음이 괴로운 나머지 더 파국으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다.

 

철학자 붓지슈스키(J. Budziszewski)는 『양심의 복수』Revenge of Conscience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양심은 순기능이 있지만 잘못하면 역기능에 빠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을 순기능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양심은 죄를 깨닫게 하고 가급적 악한 일을 멀리 배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이것이 원래 양심의 순기능이다.

 

그런데, 양심이 역기능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위축되거나 겸손해져야 당연한데,

도리어 역작용으로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양심이 부패하면 순기능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패한) 양심은 연쇄적인 죄를 짓게 함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셔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고 애써 무시하려해도

양심의 정죄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성경에도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고 했다.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런데 이 가책을 무마하고 죄 값을 치러서 양심을 달래기 위해

→ 결과적으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더 큰 빚을 얻는 방식과 같다.

 

또한 양심의 가책은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역작용을 할 수 있다.

죄를 짓고 나서 들키면, 그것을 죄로 인정치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 가정/공동체/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둘러대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 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1. 변명, 합리화

일례로 ‘성 혁명’을 생각해 보자.

양심과 하나님의 법은 성관계를 부부관계 내에서만 허락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으로 타락해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양심의 찔림과 가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하면

그것을 변명, 합리화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식만 안 했을 따름이지 결혼한 것과 다름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하는 감정만 생기면, 결혼의 테두리를 무시하고, 서로 거리낌 없이

성관계를 가진다, 청소년, 장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둘러 댄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성 혁명의 시대니까...”

남들 다 하는 것은 -성경과 관계없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2. 일관적으로 변명함.

사람이 범죄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한 번 변명하게 되면,

그것을 일관적으로 계속 변명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탕 사먹고 나서는,

처음에 부모가 용돈을 주기로 해놓고 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그래서 야단맞으면 계속 일관적으로 밀어 붙이는데,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서, 사탕 사주기로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아서,

친구가 사탕 사먹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자기가 한 번 변명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변명하게 된다.

 

거짓말 같은 죄도 마찬가지다. 한 번 거짓말하면, 자기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관적으로 연쇄적인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남을 정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남을 정죄하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다른 정죄 거리를

찾는 것이 사람의 연약성이다.   

 

동성연애를 예로 들면,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계속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결과 혼인 신고에 의한 법적 부부로 인정,

(아이를 입양해서) 법적 자녀 인정, 나중에는 교회에서 결혼식 허용,

동성연애 목회자 안수 요구까지 계속 발전하게 된다.

동성연애가 정당한데, 나머지 다른 것도 하자가 없다는 일관적인 논리를 편다.  

 

▶3. 죄를 공개적으로 자랑함

낙태를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낙태를 찬성하는 시위집회를 가진다.

포르노를 회개하기보다, 언론 자유와 심의 과정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진다.

동성연애를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안락사를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한 병든 노인을 빨리 편하게 주사 한 방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

요즘은 병원에서 장례식까지 하므로 잘 하면 수익은 더 생긴다.

사람의 양심이 부패하면 못할 짓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수발하는 남은 가족을 돕는 일로 여긴다.(외국의 경우임)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4. 공범자와 연합함

헤롯과 빌라도는 과거 서로 적이었으나, 예수를 죽일 때 서로 친구가 되었다(눅 23:12).

술주정뱅이는 항상 술친구를 찾고, 10대 반항아들은 항상 몰려다닌다.

동성연애자들은 자기끼리 모임을 만들며 마약중독자들은 끊임없이 친구를 끌어들인다.

불공정한 상거래를 할 때도 담합한다. 교회에서도 대적하는 사람은 서로 당을 짓는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먼저’ 이런 악한 연합 관계를 끊는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부탁하셨다.

또한 마리아에겐 요한을 아들처럼 보살피라고 당부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서로 주안에서 한 가족처럼 선하게 연합한다.(히 10:24-25).

성도간의 관계는 ①청결한 마음 ②선한 양심 ③참 믿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다.

그렇게 되도록 권고하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딤전 1:5)

 

 

◑진실을 직면하라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은 끊임없이 자기를 정죄하든지 아니면 변명하게 만든다.

또는 둘 다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겉으로는 죄를 합리화하거나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양심이 바짝 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진실을 부인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진실을 뿌리치지 못해서

속병이 드는 경우이다.

 

▶메리의 경우

메리는 낙태 찬성 모임에 다니다가 낙태 합법화 요구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자기의 낙태 경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했는지를 간증(?)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낙태를 안 했더라면) 애기가 태어날 즈음에 그 고통은 극에 달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 자기는 여느 살인범과 다름없다고 자책했다.

이때까지 그녀가 낙태 찬성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자신의 양심의 고통에 의한 (반작용적인) 행동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직면하지 못하는 연약성이 있다.

그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피해버린다.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애쓴다.

아니면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떠들고 자랑한다. 그것이 직면하는 것 보다

덜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길이 있다면?

범죄 하기 이전의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죄의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면제받을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진실이(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진실을 직면하고 밝힐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되어진다.

 

◑깨끗케 하는 피

 

성경은 양심이 깨끗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14)

 

예수 피는 여러 가지 효험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범죄한 양심은 비로소 변명(적극)하거나

자책(소극)하는 일을 멈춘다. 더 나아가 하나의 사랑과 평화 가운데 거하는데, 그것은

범죄 하기 이전보다 더욱 깊은 행복이다.

 

예수님의 죄가 씻지 못할 만큼 무섭고 큰 죄는 없다.

예수님 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하이타이다. 찌든 때, 묶은 때도 쏙쏙 뺀다.

예수 피에 담궈서 빠지지 않는 얼룩은 없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천국에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계 7:14)

예수 피가 아니고서는 우리 양심을 절대로 깨끗케 할 수 없으며

예수 피가 깨끗케 하지 못할 만큼 더러운 양심도 이 세상에는 없다. 할렐루야!

 

▶다 끝냈다!

(It is finished! 요 19:30, 개역성경엔 “다 이루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던 모진 고통이 다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 피로 이루신 대속 사역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원어적으로 이 말은 상거래에서 “다 갚았다. 값이 다 치러졌다 paid in full"는 뜻이다. 

더 이상 갚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들의 죄 값은 완전히 치러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는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접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진 것이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갈레로

쫙 찢어졌다(마 27:51). 성전 휘장은 사람의 힘으로 찢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한

직조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높아서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단숨에

한 번 만에 찢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 성전 휘장이 두 개로 쫙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증거이다. 

 

성전 휘장은 수 백 년 동안 찢어지지 않고 굳게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님(지성소)과 사람을 분리하는 선이었다.

휘장 안의 지성소는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보좌요, 거하시는 곳이었다.

그곳은 아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으며, 오직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1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와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백성들은 모두 바깥에서 기다렸다.

일반 사람들은 거기 들어가기는커녕 속을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나님은 친히 그 휘장을 찢으셨다.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쳐진 휘장을 찢어 없애 버리셨고,

이제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친근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대제사장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일 번에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깨끗해진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동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더러워진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하는데 짐승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

아무리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 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간증(干證)


간증(干證)

방패 간(干), 증거 증(證)

1. 예수교인(--敎人)이 자기(自己)의 지은 죄(罪)를 고백(告白)하여 증명(證明)함.
2. 범죄(犯罪)에 관계(關係) 있는 증인(證人).

[명사] testimony, [동사] give a testimony

마태복음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Whoever acknowledges me before men, I will also acknowledge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But whoever disowns me before men, I will disown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하나님의 유머

기독교 철학자인 엘튼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의 저서 중에는 '그리스도의 유머'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하나님은 매우 유머가 풍부한 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유머 넘치는 분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께 다가가는 방법은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훨씬 더 친밀해질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경 속에 그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의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가 다 되어가고 그의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생산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웃기시네요.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 부부에게 약속한 자녀를 주셨고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웃기셨다는 뜻입니다.

한 여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저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조셉 톤 목사의 순교의 신앙과 순교의 신학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맡아 시무하셨던 조셉 톤 목사님은 너무 유명해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에게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차마 이 목사님을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였습니다.
그분은 미국으로 오셔서 여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분이 가는 곳마다 많은 신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 분은 위대한 목회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조셉 톤 목사님은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던 학교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쯤에는 공산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에 미국 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그 분은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낸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이 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 까봐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 29


루마니아에 조셉 톤(Joseph Ton)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인지라 당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그 목사님이 눈엣가시 같았지만 그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 가서 설교도 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훗날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에 미국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에게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렵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9–12분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 본문 - 빌립보서 1:29-30 >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는 행동하는 신앙인, 행동하는 신학자로 유명합니다. 1906년에 출생한 그는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 중에 수재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을 위해서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제국교회’로 통합시켜버렸습니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목사동행’을 결성하고 제국교회를 반대하는 ‘고백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들은 파면당하고, 투옥당하고, 교회가 폐쇄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히틀러의 악행에 저항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본훼퍼 목사입니다.

  1939년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초청교수로 있던 본훼퍼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갑니다. 미국과 독일에 있는 성도들이 ‘독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기독교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갑니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지 불과 두 달도 안 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본훼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943년 4월 5일 독일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9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에서 처형을 당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간 본훼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진한 자세로 기도를 드린 후 처형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짧게 기도한 후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았습니다. 수용소 의사인 피셔 휠슈트룽은 39세의 천재 신학자 본훼퍼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본훼퍼가 처형된 3주 뒤 히틀러는 자살했고, 1945년 5월 8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 본훼퍼는 기독교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1934년 덴마크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교회와 열방의 세계’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화설교를 했고,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피력했습니다. 평화는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군비증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야 실현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평화주의자인 목사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본훼퍼는 감옥에서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한다.’ 본훼퍼는 그 미친 운전사인 히틀러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려고 히틀러 암살조직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본훼퍼의 신학은 삶과 직결됩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와 순종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 설파했습니다.

  이런 본훼퍼의 설교나 삶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말이 거창하게 ‘행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야고보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야고보서 2:17)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표현된 삶을 성경은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신앙의 가치와 내 신앙의 삶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과 내가 행동하는 내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곳으로 몰려들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태복음 3:7-9)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정통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어떤 삶을 살든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아주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런 거짓된 생각을 버리라고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신대로 구원받은 자다운 삶의 모습이 없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이고, 헛된 것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믿음이라면 그에 걸맞는 삶의 모습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본훼퍼가 강조한 말로 한다면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의 신앙을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 건물의 설계도이고, 그 설계도에 맞춰 세워진 건물이 바로 신앙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건물을 세워가는 힘은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신앙이 만들어가는 신앙의 건물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설계도에 맞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계도와 다르게 세워진 건물은 아무리 크고 웅장하게 세워진다 하더라도 좋은 건물이 아니듯이, 우리의 신앙의 가치와 다르게 드러나는 삶은 결코 하나님께 기뻐하는 신앙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의 건물을 세워가는 힘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임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은혜가 더 자주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서 고난을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가볍게 만들고 결국에는 신앙이 왜곡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가 힘들다고 여기는 고난의 현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가 바로 믿음이 회복되는 자리이고, 고난의 자리가 믿음이 견고해지는 자리입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를 거대한 유혹 앞에 서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유혹은 거짓으로 치우치고 거짓으로 물들어감에도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풍성한 은혜로 인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었고, 우리가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내 의지나 내 지혜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두 번째 이유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란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우리를 고난의 자리로 내모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마태복음 7:14)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 좁은 길과 반대되는 것이 큰 문과 넓은 길입니다. 크고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갑니다.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좁고 협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안하고, 형통하고, 아무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힘든 투쟁이 있을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과 싸우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나를 둘러싼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고난과 역경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가 참된 신앙을 끌어안고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더욱 감사하고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그런 은혜가 주어지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금방 잊어버리고 자아도취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우쭐거리며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때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우리가 겸손해지고,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의 순간이고, 더 믿음을 의지하게 만드는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고난 속에 머물기를 원하시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고난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길을 가기보다는 기쁨과 형통의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시인처럼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삶이 복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나를 바르게 되돌아보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배워갈 수 있기에 고난당한 것이 때로는 내게 유익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때로 지금 내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그럴 때에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인도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기에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복을 가슴에 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난 없이는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신앙과 삶이 함께 가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 로마시대에 우리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 잡혀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 교회와 성도들은 더 바른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고, 더 복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주후 111년에 터키 북부 비두니아(Bithynia) 지역에 ‘플리니’(Plini)가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비두니아 지역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고 이방 신전들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총독이 임명되어 오자 어떤 사람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갖다 주며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플리니 총독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스파이가 교회에 잠입하여 동태를 파악한 후 총독에게 보고하였고, 폴리니 총독은 이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로마의 황제 트랴얀(Trajan)에게 보냈습니다.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황제에게 보낸 그 보고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낯선 사람이 와도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어느 나라 어디 출신인지 따지지 않았고, 노예나 여자들도 함께 어울려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스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났어도 끝까지 형제처럼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미소를 지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모일 때마다 서로 식사를 나누었고, 자기의 것을 스스럼없이 내놓아 가난한 자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없이 언제나 사자같이 담대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들은 진정으로 '참된 신자들이며, 그들의 교회는 참된 교회'라 판단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들을 체포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 순교의 현장에서 희생될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박해자들이 보아도 감동이 될 만큼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랑할 줄 알았고, 누구든 품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를 실천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그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엄청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거대한 로마의 권력을 이겨내고 부흥을 가져온 힘임 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바른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은 고난을 통해서 정제되고 힘을 얻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더욱 향기 나는 믿음을 붙들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고난 속에서도, 세상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교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신앙을 지키지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피의 순교’ 또는 ‘붉은 순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와 같이 신앙에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그런 붉은 순교, 피의 순교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교신앙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또 하나의 순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붉은 순교’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백색 순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백색 순교’라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피를 흘려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내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 하시는 곳에 사용되도록 기꺼이 내어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복음의 청빈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정결한 신부로 살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나를 포기하는 것, 내게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도록 하나님 앞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백색 순교입니다.

너무 편안하고 안일한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의 삶에 내 욕심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고난을 거부하고 형통하고 평안만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할 삶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정결한 마음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가치를 따라 바른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면 바로 그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