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양심(良心) 4893. 수네이데시스(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발음 / 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1.  명사 의식, 고전 8:7, 히 10:2, 벧전 2:19.

  • 2.  명사 양심, 도덕의식, 롬 2:15, 고전 10:29, 고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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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거듭난 신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패는 사람들의 평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에 달려있으며, 인생 중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아니라 우리 삶의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평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삶을 깊이있게 상고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쫓아갈 수 없는 대단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와 실패, 수치와 슬픔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의 인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중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양심은 비교적 덜 중요하게 다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지표로 제시합니다. 더러운 양심은 참된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상고하면서 양심의 문제에 주목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기회)인가, 시험인가?
본문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밀고자들이 있어서 사울 왕에게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1). 사해 서안에 있는 엔게디 지역은 동굴이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시 3천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출동합니다. 사울은 갑자기 용변을 보려고 한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바로 그 굴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히브리어법입니다. 이미 어둠 속에 눈이 적응되어 있던 다윗에게 이것은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부하들은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4).” 언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룰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확신을 주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타당하고 그럴 듯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이런 기회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기회가 아닙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다윗은 칼을 뽑았습니다. 부하들은 드디어 시간이 왔고 지금은 그 순간이라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 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 끝을 칼로 조용히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일로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죽일 수도 있는 기회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마 그 순간은 다윗에게 가장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정이 어려운 것만큼 그 결정은 다윗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결정 여하에 따라서 다윗의 믿음 생활의 종말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을 희생하더라도, 믿음의 아름다운 자태를 묵살하더라도 왕위를 지금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를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하나님께서 내 손에 사울을 맡기신 것인가? 우연 치고는 너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사울을 처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편안하게 인도하시려는 것일까?

다윗의 부하들은 너무나 경솔하게 자신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해석하고 있는 전형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만을 생각할 때, 언제나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시험하시는가 하면, 그의 인내, 경건, 그리고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인내는 이 상황을 주님께서 명확하게 허락하실 때까지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경건은 과연 원수를 갚으려는 육의 소원을 영적 욕구에 복종시킬 것인가의 문제였으며, 믿음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믿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주신 기회냐,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행동을 결정하게 됩니다.

2. 양심과 믿음은 함께 한다.
이 상황 속에 있는 다윗을 성경은 매우 예리하게 기록합니다.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6).” 사울은 자기는 물론 부하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굴에서 나갔고 기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조금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 즉 다윗의 내면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예민하게 살아있는 양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가 느낀 양심의 가책은 죄책감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경건의 표지입니다. 다윗은 후일, 인구조사를 행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을 느끼게 됩니다(삼하 24:10).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가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지적하자 그는 또한 은폐하는 쪽 보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윗의 선한 양심은 이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느낀 잘못에 대한 가책이고, 둘째는 사람들(부하들)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까?

경건의 최상의 표지 중 하나는 양심이 민감한 것입니다. 양심이 죄악을 허용하고 타협함으로써 더럽혀지면, 믿음도 다 바닥나게 됩니다. 양심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양심은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양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들을 살펴보십시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다윗에게 양심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옷자락을 베었을 뿐임에도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부하들 중 누구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지만(오히려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이 부하들에게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부하들에게 고백합니다. 선한 양심은 아무도 문제삼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문제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예민한 양심이 뭔가를 느꼈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그로 인한 수치감과 죄책감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6).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여기서 재판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엘로힘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통치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개념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어 세우신 대리인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 개념 때문에, 다윗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을 뿐인데도 그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념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하나님이 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마음 곧 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다윗이 느낀 양심의 가책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가진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은 하나님 없는 양심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은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성경의 기준을 떠나도 너무나 많이 떠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옛날 이스라엘이란 국가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신약 성경도 권위자들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바울서신에서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에 너무나 우리는 길들여져 있습니다. 무엇이 다윗의 손을 막았습니까? 부하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손을 막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양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심어놓으신 도덕법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서 부모의 영향으로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와 같이 이 사회의 기대치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는 정신이상이나 정신병의 증상입니다. 죄인이 양심에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한다면 그것도 물론 정신병적 증세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써놓으셨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다면 이렇게 볼 수 밖에 없고 다윗의 행동이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 형상 안에 각인시켜놓으신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들을 심판하실때 양심이 그 증거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롬 2:14~15). 하나님께서는 인간 안에 이런 하나님의 도덕법을 양심으로 새겨놓으신 것입니다.

3.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간다.
사울이 굴에서 나간 후, 다윗이 사울의 뒤에서 외쳤습니다. “내 주 왕이여”하며 다윗은 땅에 엎드려 사울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처럼, 자신은 사울을 해할 의도가 없음을 그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자신의 결백을 말할 뿐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각오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솔직한 다윗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하늘 법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죄로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살아계시고 자신의 인생을 결산해야 할 심판주 앞에서 결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진실성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입니다. 양심에 걸리는 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거듭난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편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증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요일 5:17). 심판날이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낱낱이 드러낼 것입니다. 그 날에 담대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사십시오. 오늘을 면하고 살아가고, 나의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진실은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결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억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것, 다윗이 했던 것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 법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이스라엘 왕이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자신을 좇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던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기를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방법입니다.

4. 굳어진 양심: 사울
사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울은 매우 격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말하면서 왕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소리 높여 웁니다. 그는 자신의 악함과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선함을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듯이, 다윗이 왕이 될 것과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도 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들을 선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울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울이 지금 보인 이 반응이 회개가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사울이 진실성이 없게 연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이 시간 자신의 감정에 진실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감동하게 만들었습니까? 다윗의 선함이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도 찔림이 된 것입니다. 비록 굳어진 양심이라도, 이렇게 반응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너무나 굳어져 있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압니다. 도덕적 양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양심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은혜의 자리 앞까지 데리고 갈 수 있지만, 양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양심이 움직일 때 사람은 기회를 가집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악행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사울의 굳어진 양심 위에 점점 더 단단한 껍질을 형성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빠질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감동이 있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사울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속적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죽이려는 마음이었고, 이것은 그의 순간적 변덕이 아니라 지속적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잠깐 그의 굳어진 양심이 반응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순간적으로 비정상적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입니다. 양심이 그를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찔림은 찔림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행한 일과는 다른 반응인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선한 양심 안에 담겨진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행하는 회개이며, 이런 역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5. 교훈
A.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부르심(롬 12:21): 악인에게 인정받는 믿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육을 이기는 영의 승리를 봅니다. 죄를 이기는 은혜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와 싸워 이기는 법입니다. 원수의 격동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원수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그 표본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게는 원수 갚는 것이 용서하는 것보다 달고 시원합니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갑자기 편안해집니다. 왜 그렇지요? 공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공정함만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옥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의 은혜가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나에게 맡겨라.” 거듭난 자녀가 아니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말씀처럼 부당하고 괴로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파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죄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과 원수 갚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일에 맡는다면, 우리 죄악된 본성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더욱 잔인해지며 더욱 담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고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이렇게 보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원수 갚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우리의 믿음은 사울과 같은 악인을 통해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B.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예민해지고 지켜진다.
여러분, 양심을 지키고 사십시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을 선하고 예민한 양심으로 지키십시오. 이렇게 하려면, 양심을 거스려서 하는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예민하게 지키는 적극적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양심을 우리 속에 써놓으신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통해서 양심을 예민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의 양심은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다 다르기에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온전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의 고백인 시편 19편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살아있고 예민한 양심을 가졌던 다윗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7절부터 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7~14)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 길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C.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선한 양심을 받으십니다. 양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신 것은 다윗이 그 긴긴 시간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쫓기며 살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의 양심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알았고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양심에 믿음을 더하시고 또 더하시고 또 더하여 주셨습니다.





1. 깨끗한 양심(a Pure Conscience)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2.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3. 찔림 받은 양심(a Stricken Conscience)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4. 더러워진 양심(a Defiled Conscience)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5. 악한 양심(an Evil Conscience)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6. 화인 맞은 양심(a Sealed Conscience)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깨끗한 양심(로마서 2:14~15)
A CLEAN CONSCIENCE

▶ 양심의 역기능(자포자기)

수잔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서 손쉬운 이혼을 유보하고, 먼저 남편에게 고통을 갚아줄 길을 모색했다.

남편이 아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임신 중의 아기를 고의로 낙태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낙태에 대한 죄책감이 훨씬 더 무거워서 양심에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녀는 자책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임신한 아이를 또 낙태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첫 번째는 남편이 미워서 낙태했고, 이번에는 자신이 미워서 또 낙태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포자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역기능이다.

자기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회개하면 되는데,

도리어 자포자기하는 죄를 더 범한다(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양심이 없었더라면, 자포자기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양심이 있는데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해서

마음이 괴로운 나머지 더 파국으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다.

 

철학자 붓지슈스키(J. Budziszewski)는 『양심의 복수』Revenge of Conscience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양심은 순기능이 있지만 잘못하면 역기능에 빠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을 순기능적으로만 생각해왔다.

양심은 죄를 깨닫게 하고 가급적 악한 일을 멀리 배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이것이 원래 양심의 순기능이다.

 

그런데, 양심이 역기능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위축되거나 겸손해져야 당연한데,

도리어 역작용으로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양심이 부패하면 순기능이 아니라

도리어 역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패한) 양심은 연쇄적인 죄를 짓게 함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셔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고 애써 무시하려해도

양심의 정죄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성경에도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고 했다.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런데 이 가책을 무마하고 죄 값을 치러서 양심을 달래기 위해

→ 결과적으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빚을 갚기 위해 더 큰 빚을 얻는 방식과 같다.

 

또한 양심의 가책은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역작용을 할 수 있다.

죄를 짓고 나서 들키면, 그것을 죄로 인정치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 가정/공동체/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둘러대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 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1. 변명, 합리화

일례로 ‘성 혁명’을 생각해 보자.

양심과 하나님의 법은 성관계를 부부관계 내에서만 허락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으로 타락해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양심의 찔림과 가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하면

그것을 변명, 합리화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식만 안 했을 따름이지 결혼한 것과 다름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하는 감정만 생기면, 결혼의 테두리를 무시하고, 서로 거리낌 없이

성관계를 가진다, 청소년, 장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둘러 댄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성 혁명의 시대니까...”

남들 다 하는 것은 -성경과 관계없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2. 일관적으로 변명함.

사람이 범죄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한 번 변명하게 되면,

그것을 일관적으로 계속 변명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사탕 사먹고 나서는,

처음에 부모가 용돈을 주기로 해놓고 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그래서 야단맞으면 계속 일관적으로 밀어 붙이는데,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서, 사탕 사주기로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아서,

친구가 사탕 사먹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자기가 한 번 변명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변명하게 된다.

 

거짓말 같은 죄도 마찬가지다. 한 번 거짓말하면, 자기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관적으로 연쇄적인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남을 정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남을 정죄하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 일관적으로 다른 정죄 거리를

찾는 것이 사람의 연약성이다.   

 

동성연애를 예로 들면,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계속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결과 혼인 신고에 의한 법적 부부로 인정,

(아이를 입양해서) 법적 자녀 인정, 나중에는 교회에서 결혼식 허용,

동성연애 목회자 안수 요구까지 계속 발전하게 된다.

동성연애가 정당한데, 나머지 다른 것도 하자가 없다는 일관적인 논리를 편다.  

 

▶3. 죄를 공개적으로 자랑함

낙태를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낙태를 찬성하는 시위집회를 가진다.

포르노를 회개하기보다, 언론 자유와 심의 과정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진다.

동성연애를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안락사를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한 병든 노인을 빨리 편하게 주사 한 방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

요즘은 병원에서 장례식까지 하므로 잘 하면 수익은 더 생긴다.

사람의 양심이 부패하면 못할 짓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수발하는 남은 가족을 돕는 일로 여긴다.(외국의 경우임)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4. 공범자와 연합함

헤롯과 빌라도는 과거 서로 적이었으나, 예수를 죽일 때 서로 친구가 되었다(눅 23:12).

술주정뱅이는 항상 술친구를 찾고, 10대 반항아들은 항상 몰려다닌다.

동성연애자들은 자기끼리 모임을 만들며 마약중독자들은 끊임없이 친구를 끌어들인다.

불공정한 상거래를 할 때도 담합한다. 교회에서도 대적하는 사람은 서로 당을 짓는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먼저’ 이런 악한 연합 관계를 끊는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부탁하셨다.

또한 마리아에겐 요한을 아들처럼 보살피라고 당부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서로 주안에서 한 가족처럼 선하게 연합한다.(히 10:24-25).

성도간의 관계는 ①청결한 마음 ②선한 양심 ③참 믿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다.

그렇게 되도록 권고하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딤전 1:5)

 

 

◑진실을 직면하라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은 끊임없이 자기를 정죄하든지 아니면 변명하게 만든다.

또는 둘 다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겉으로는 죄를 합리화하거나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양심이 바짝 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진실을 부인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진실을 뿌리치지 못해서

속병이 드는 경우이다.

 

▶메리의 경우

메리는 낙태 찬성 모임에 다니다가 낙태 합법화 요구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자기의 낙태 경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했는지를 간증(?)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낙태를 안 했더라면) 애기가 태어날 즈음에 그 고통은 극에 달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 자기는 여느 살인범과 다름없다고 자책했다.

이때까지 그녀가 낙태 찬성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자신의 양심의 고통에 의한 (반작용적인) 행동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직면하지 못하는 연약성이 있다.

그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피해버린다.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애쓴다.

아니면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떠들고 자랑한다. 그것이 직면하는 것 보다

덜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길이 있다면?

범죄 하기 이전의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죄의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면제받을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진실이(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진실을 직면하고 밝힐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되어진다.

 

◑깨끗케 하는 피

 

성경은 양심이 깨끗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14)

 

예수 피는 여러 가지 효험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범죄한 양심은 비로소 변명(적극)하거나

자책(소극)하는 일을 멈춘다. 더 나아가 하나의 사랑과 평화 가운데 거하는데, 그것은

범죄 하기 이전보다 더욱 깊은 행복이다.

 

예수님의 죄가 씻지 못할 만큼 무섭고 큰 죄는 없다.

예수님 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하이타이다. 찌든 때, 묶은 때도 쏙쏙 뺀다.

예수 피에 담궈서 빠지지 않는 얼룩은 없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천국에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계 7:14)

예수 피가 아니고서는 우리 양심을 절대로 깨끗케 할 수 없으며

예수 피가 깨끗케 하지 못할 만큼 더러운 양심도 이 세상에는 없다. 할렐루야!

 

▶다 끝냈다!

(It is finished! 요 19:30, 개역성경엔 “다 이루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던 모진 고통이 다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 피로 이루신 대속 사역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원어적으로 이 말은 상거래에서 “다 갚았다. 값이 다 치러졌다 paid in full"는 뜻이다. 

더 이상 갚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들의 죄 값은 완전히 치러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는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접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진 것이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갈레로

쫙 찢어졌다(마 27:51). 성전 휘장은 사람의 힘으로 찢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한

직조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높아서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단숨에

한 번 만에 찢을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 성전 휘장이 두 개로 쫙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증거이다. 

 

성전 휘장은 수 백 년 동안 찢어지지 않고 굳게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님(지성소)과 사람을 분리하는 선이었다.

휘장 안의 지성소는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보좌요, 거하시는 곳이었다.

그곳은 아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으며, 오직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1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와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백성들은 모두 바깥에서 기다렸다.

일반 사람들은 거기 들어가기는커녕 속을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나님은 친히 그 휘장을 찢으셨다.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쳐진 휘장을 찢어 없애 버리셨고,

이제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친근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제 대제사장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일 번에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깨끗해진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동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더러워진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하는데 짐승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

아무리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 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간증(干證)


간증(干證)

방패 간(干), 증거 증(證)

1. 예수교인(--敎人)이 자기(自己)의 지은 죄(罪)를 고백(告白)하여 증명(證明)함.
2. 범죄(犯罪)에 관계(關係) 있는 증인(證人).

[명사] testimony, [동사] give a testimony

마태복음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Whoever acknowledges me before men, I will also acknowledge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But whoever disowns me before men, I will disown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하나님의 유머

기독교 철학자인 엘튼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의 저서 중에는 '그리스도의 유머'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하나님은 매우 유머가 풍부한 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유머 넘치는 분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께 다가가는 방법은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훨씬 더 친밀해질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경 속에 그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의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가 다 되어가고 그의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생산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웃기시네요.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 부부에게 약속한 자녀를 주셨고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웃기셨다는 뜻입니다.

한 여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저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조셉 톤 목사의 순교의 신앙과 순교의 신학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맡아 시무하셨던 조셉 톤 목사님은 너무 유명해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에게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차마 이 목사님을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였습니다.
그분은 미국으로 오셔서 여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분이 가는 곳마다 많은 신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 분은 위대한 목회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조셉 톤 목사님은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던 학교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쯤에는 공산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에 미국 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그 분은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낸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이 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 까봐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 29


루마니아에 조셉 톤(Joseph Ton)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인지라 당시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그 목사님이 눈엣가시 같았지만 그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 가서 설교도 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신앙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훗날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에 미국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에게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렵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9–12분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

< 본문 - 빌립보서 1:29-30 >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는 행동하는 신앙인, 행동하는 신학자로 유명합니다. 1906년에 출생한 그는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 중에 수재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을 위해서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제국교회’로 통합시켜버렸습니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목사동행’을 결성하고 제국교회를 반대하는 ‘고백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들은 파면당하고, 투옥당하고, 교회가 폐쇄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히틀러의 악행에 저항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본훼퍼 목사입니다.

  1939년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초청교수로 있던 본훼퍼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갑니다. 미국과 독일에 있는 성도들이 ‘독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기독교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갑니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지 불과 두 달도 안 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본훼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943년 4월 5일 독일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9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에서 처형을 당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간 본훼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진한 자세로 기도를 드린 후 처형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짧게 기도한 후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았습니다. 수용소 의사인 피셔 휠슈트룽은 39세의 천재 신학자 본훼퍼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본훼퍼가 처형된 3주 뒤 히틀러는 자살했고, 1945년 5월 8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 본훼퍼는 기독교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1934년 덴마크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교회와 열방의 세계’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화설교를 했고,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피력했습니다. 평화는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군비증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야 실현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평화주의자인 목사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본훼퍼는 감옥에서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한다.’ 본훼퍼는 그 미친 운전사인 히틀러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려고 히틀러 암살조직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본훼퍼의 신학은 삶과 직결됩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와 순종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 설파했습니다.

  이런 본훼퍼의 설교나 삶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말이 거창하게 ‘행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야고보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야고보서 2:17)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표현된 삶을 성경은 행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신앙의 가치와 내 신앙의 삶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과 내가 행동하는 내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곳으로 몰려들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태복음 3:7-9)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정통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어떤 삶을 살든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아주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런 거짓된 생각을 버리라고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신대로 구원받은 자다운 삶의 모습이 없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이고, 헛된 것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된 믿음이라면 그에 걸맞는 삶의 모습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본훼퍼가 강조한 말로 한다면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의 신앙을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 건물의 설계도이고, 그 설계도에 맞춰 세워진 건물이 바로 신앙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건물을 세워가는 힘은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신앙이 만들어가는 신앙의 건물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설계도에 맞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계도와 다르게 세워진 건물은 아무리 크고 웅장하게 세워진다 하더라도 좋은 건물이 아니듯이, 우리의 신앙의 가치와 다르게 드러나는 삶은 결코 하나님께 기뻐하는 신앙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의 건물을 세워가는 힘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임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은혜가 더 자주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서 고난을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가볍게 만들고 결국에는 신앙이 왜곡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가 힘들다고 여기는 고난의 현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가 바로 믿음이 회복되는 자리이고, 고난의 자리가 믿음이 견고해지는 자리입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우리를 거대한 유혹 앞에 서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유혹은 거짓으로 치우치고 거짓으로 물들어감에도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풍성한 은혜로 인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었고, 우리가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내 의지나 내 지혜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두 번째 이유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란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우리를 고난의 자리로 내모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마태복음 7:14)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 좁은 길과 반대되는 것이 큰 문과 넓은 길입니다. 크고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갑니다.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좁고 협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안하고, 형통하고, 아무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힘든 투쟁이 있을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과 싸우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나를 둘러싼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고난과 역경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가 참된 신앙을 끌어안고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더욱 감사하고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그런 은혜가 주어지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금방 잊어버리고 자아도취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우쭐거리며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때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우리가 겸손해지고,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의 순간이고, 더 믿음을 의지하게 만드는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고난 속에 머물기를 원하시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고난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길을 가기보다는 기쁨과 형통의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시인처럼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삶이 복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나를 바르게 되돌아보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배워갈 수 있기에 고난당한 것이 때로는 내게 유익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때로 지금 내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그럴 때에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인도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기에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복을 가슴에 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난 없이는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신앙과 삶이 함께 가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 로마시대에 우리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 잡혀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 교회와 성도들은 더 바른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고, 더 복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주후 111년에 터키 북부 비두니아(Bithynia) 지역에 ‘플리니’(Plini)가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비두니아 지역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고 이방 신전들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총독이 임명되어 오자 어떤 사람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갖다 주며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플리니 총독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스파이가 교회에 잠입하여 동태를 파악한 후 총독에게 보고하였고, 폴리니 총독은 이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로마의 황제 트랴얀(Trajan)에게 보냈습니다.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황제에게 보낸 그 보고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스파이를 잠입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낯선 사람이 와도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어느 나라 어디 출신인지 따지지 않았고, 노예나 여자들도 함께 어울려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스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났어도 끝까지 형제처럼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미소를 지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모일 때마다 서로 식사를 나누었고, 자기의 것을 스스럼없이 내놓아 가난한 자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없이 언제나 사자같이 담대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들은 진정으로 '참된 신자들이며, 그들의 교회는 참된 교회'라 판단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들을 체포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 순교의 현장에서 희생될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박해자들이 보아도 감동이 될 만큼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랑할 줄 알았고, 누구든 품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를 실천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그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엄청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거대한 로마의 권력을 이겨내고 부흥을 가져온 힘임 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바른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은 고난을 통해서 정제되고 힘을 얻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더욱 향기 나는 믿음을 붙들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고난 속에서도, 세상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교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신앙을 지키지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피의 순교’ 또는 ‘붉은 순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와 같이 신앙에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그런 붉은 순교, 피의 순교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교신앙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또 하나의 순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붉은 순교’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백색 순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백색 순교’라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피를 흘려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내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 하시는 곳에 사용되도록 기꺼이 내어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복음의 청빈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정결한 신부로 살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나를 포기하는 것, 내게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도록 하나님 앞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백색 순교입니다.

너무 편안하고 안일한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의 삶에 내 욕심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고난을 거부하고 형통하고 평안만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할 삶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정결한 마음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바로 순교의 영성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가치를 따라 바른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면 바로 그 순교의 영성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배(禮拜) - 성전, 교회, 성도의 몸





05-10-2020(주일)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 진정"이란 "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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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 인격적 예배

윌리엄 템플

"예배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인격의 세 가지 요소는 양심, 생각, 의지라고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격적인 요소가 하나로 묶여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감정만 동의하는 예배(느낌으로 받는 은혜, 지적 동의에 따른 은혜, 나도 누리고 싶어하는 은혜)
삶의 적용이 없는 예배(상상, 다른 사람의 경우, 결단이 없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한국 다리놓는 사람들의 박정관 목사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간혹 지역봉사를 하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나 선교를 게을리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예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계시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접근해 보겠습니다. 자매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뻐지면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제들이 갑자기 멋을 내고 차를 청소하면 틀림없이 연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쓰고 시를 써서 읽어주기도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집앞을 찾아가기도하고,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데이트를 하고자 힙씁니다. 이제는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비로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어원적 의미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유래한 것으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할 때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

히브리어 동사 "샤하(shachah), 하와(chawah)"(창 18:2, 시 99:5)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 (proskuneo)"(요 4:23)는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혹은 입을 맟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맟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bad), 샤라트(sharat)"(신 10:12, 대상 16:4)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latreuo) 라트레이아(latreia)"(마 4:10, 롬 12:1, 행 13:2)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히브리어 동사 "야레(yare)"(렘 32:38-40, 신 6:13)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 (sebomai)"(마 15:8)는 "경외함,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위엄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어원과, 성서적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배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동사이다.
 
 1. 예배 본다(보러간다)
 2. 예배 드린다(드리러 간다)
 3. 예배
한다(하러 간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

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예식을 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 예배자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인간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Dr. David H Jung - Liberty University).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지으신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와 소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려 그 마음을 시원케 할 자들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Erickson, Millard. Christian Theology. The image of God 참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그분과 교제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여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창세기 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 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파라오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습니다. 내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3:12; 7:16; 8:1,20; 9:1,13; 10:3)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아낌없이 이땅에 흘리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깨어진 관계, 즉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작으로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땅에 보내어 죽이셔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찾아 드리셨습니다.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먼 곳에서 방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예배자들)를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가 예배로서의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예배의 두 요소인 성령과 진리를 제공하시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인 것이며, 다만 인간은 거기에 반응하고, 섬기고, 경외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5.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 중심이 될 때 예배는 무속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의 종교행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팽배한 인간 중심의 예배의 모습

- 자신의 물질 축복을 구하기 위한 예배

-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

- 영적 자기 만족이나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예배

-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드리는 예배

-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 드리는 예배

-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 드리는 예배

- 교회의 음악과 분위기가 좋아서 드리는 예배

A. W. 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진호 목사: 숨겨진 보물 예배: 예수 전도단)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욕심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배가 세속화되고 일종의 쇼와 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며, 자기 중심성위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논쟁이나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6.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기초가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정해신 시간과 장소에 모여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공중 예배' 혹은 '예배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공중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도 모든 연령의 모든 성도들이 한 믿음을 고백하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발각되어 잡혀가서 사나운 동물들에 뜯어먹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질 수 없듯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 예배해야만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의 선입견과 좁은 지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가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새롭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에 합당하고 정직하게 반응하여 한주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운동경기에 비교하면 목회자(순서의 담당자)는 선수로, 성령은 코치로, 성도들은 관중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코치로써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Dr. Vernon Whaley - Liberty University). 공중 예배 가운데 우리는 각각의 은사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가대와 찬양단으로, 안내와 헌금위원으로, 그리고 식사준비와 섬김을 통해서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갈고 다듬고 재발견하여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공중예배의 결과입니다. 공중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고백한 찬송과 기도와 결단은 삶 가운데서 반드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를 "어떠한 지정된 공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의식적 행위"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공간은 온세상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께서는 온땅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어떤 공간도 인간이 예배 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4).

우리의 일터도, 학교도, 퇴근 길도, 차동차도, 가정도, 바다와 산과 들과 우주도 예배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배는 의식적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자체가 예배(Life style worship)입니다. 이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이벤트나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공중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고 일주일 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예배가 아무리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감동적인 의식이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이중적인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잘 차려진 종교 예식을 드림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차려진 제사상을 찾는 귀신이 아니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중 예배(Corporate worship)와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반드시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이전에 온전한 예배 자체가 지니는 특성입니다. 공중 예배와 일주일 동안의 삶의 예배가 합쳐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8.예배와 선교 (전도)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설교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선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선교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선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선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와 공중예배가 균형잡혀서 우리 삶과 교회 가운데서 실현될 때 우리는 선교(전도) 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로서 예수께서 "천국은 누룩넣은 반죽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1-24 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리던 그리심산 입니다. 저 산은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공간과 전통에 구애 받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절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즉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읽었고,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시편과 선지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의 원리입니다.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려면 성령안에서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려면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해야 합니다. '영'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예배를 하게 되고, '진리'에만 치우치면 머리로만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배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은 경외심을 나타내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배가 '동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특정 시간에 특정 예식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를 제한하는 오해를 일으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으로 바꾸어갈 이 엄청난 특권인 예배를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 그것도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 드리지 않고,특정한 시간에, 예식과 제물만 올려드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전혀 무시한 채 이교도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 절에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솟구치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형식적 예배만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특권, 결코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절대로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끊임 없이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동안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오늘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나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는지, 죽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그분의 사랑안에 빠쳐 안식을 누리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는지, 그 음성을 듣고 어떻게 살기로 응답했는지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 이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대견한 자녀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중 예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예배자들이 되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족과 자족(디모데전서 6:6)


10-25-2023(수) 새벽 구은숙권사 질문

디모데전서 6:6
(한글 개역 성경)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NIV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새번역)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현대인)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

(공동번역)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헬라어)
에스틴 데 포리스모스 메가스 헤 유세베이아 메타 아우타르케이아스
εστιν   δε  πορισμος   μεγας   η    ευσεβεια   μετα      αυταρκειας

* 자족하는 마음 - 아우타르케이아스( αυταρκειας)

아우타르케이아스 - 명사형 /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 ας, ἡ 

1. 충분함
2. 만족
발음 [ autarkeia ]
어원 / 8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넉넉함(고후 9:8), 족함(딤전 6:6)
신약 성경 / 2회 사용

고린도후서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족(自足)과 지족(知足)이란 한자어는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번역할 때는 서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자족이나 지족이 큰 차이는 없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본문에서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
즉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만이 자족과 지족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福音)







복음(福音)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이 복음이란 말이 다른 종교에는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도, 유교에도, 몰몬교에도 복음이란 말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복음이란 말을 중심단어로 쓰고 있지 않는 가운데 오직 우리 기독교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이 말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른 종교서적에는 있지 않고 오직 성경에만 있는 이 복음이란 말의 의미는 "복된 소리" "기쁜 소식"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복음은 실로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두운 역사, 죽음의 역사, 멸망의 역사 속에 기적적으로 꿰뚫고 찾아온 하늘의 소식, 희망의 메시지, 생명의 음성이 바로 복음인 까닭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음이라는 말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말 대신 "승리하는 소식"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솨르"라는 말이 나오지만 신약성경이 담고 있는 "복음"이라는 내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 복음이란 말을 성경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도시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패배감에 휩싸여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들이 적군의 손에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다 해서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죽음직전의 순간, 저 멀리 들녘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잠깐만---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겼다.
승리했다" 한 전령병사가 외마디를 남기고 딱 쓰러져 죽고맙니다.
그 거리를 기념해서 마라톤이라는 기념경기가 올림픽에 채택된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 결정적으로 죽어가는 백성에게 결정적으로 사는 승리의 기쁜 소식, 생명의 복된 소식을 가지고 4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그 전령병사를 뭐라고 불렀냐면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왕이 매우 중대한 비밀의 소식을 전하려할 때 전령의 손에다 그 소식을 전하려하면, 도난 당하거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노예를 사서 그 노예의 머리털을 깍아 밀고난 후, 그 빡빡머리 위에 바늘에 먹물을 묻혀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기까지 기다렸다가 보냈는데, 이 때 이 노예를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의 비밀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결정적으로 죽게된 온 인류에게, 영원히 죽게된 우리들에게 사탄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 죽은 "유앙겔리 제스타이" 병사처럼, 만군의 주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유앙겔리 제스타이" 노예처럼, 하늘 영광 버리시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설명하면서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을 도입(픽업)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가스펠, 이밴젤리즘, 이밴젤리컬"은 "유앙겔리온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로고스)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 14)."
서신서에서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인류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유앙겔리온" 복음(gospel)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라, 옳게 살아라, 사상을 가져라, 도덕적으로 살아라, 착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윤리나 도덕, 사상이나 일반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영생을 담고 있는 바구니와도 같은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 있습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는 천국과 지옥을 가는 문제까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다"는 말 한마디로 합리화되고,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과 신앙 전통적인 자만심에 젖어사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다"고 질타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여러분! 원수는 어떤 사이입니까? 만나면 반드시 죽이는 것이 원수입니다. 아니면, 언젠가는 죽이도록 작정되어 있는 것이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고, 하나님은 그 범죄한 인간을 찾으면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있는 존재!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정의되었습니다. 키에르케골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에 붙여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라고 이름 붙은 사람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너나 할 것없이 누구나 다 죽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절망의 죽음 앞에서 "왜 이런 죽음이 왔느냐?"를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논리가 바로 "너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인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죽음에 붙여져버린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절대 절망에 빠져버린 우리인생들에게 보여주시는 절대희망의 생명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누가 죄인입니까?
그런데 죄 값을 누가 받고 죽었습니까? 설명되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골 부유한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란 그 가문의 4대째 독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그 집 가문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도시 대학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하숙집에서 하숙을 시켰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필요하다는 모든 것을 다 대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버지는 그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들을 찾아왔습니다. 물어 물어 학교 교실과 도서관을 다 찾아 다녔습니다. 결국, 하숙집 방문을 열고 잠자고 있는 그 사랑하는 4대독자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온통 역겨운 술냄새로 진동했고, 그 아들은 술집 여자와 누워있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그만 아버지의 손이 그 아들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에이 나쁜 놈아!" 혼이 난 이 아들이 "에이 씨!"하면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아들이 돌아오겠지 저녁까지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3개월 후에 어느 깊은 산골 감나무골 외딴 집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보는 순간, 아버지는 그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여러분, 잘못을 누가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용서를 빌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빌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못되고 잘못한 아들에게 애원하며 빌게 만든 것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핏줄의 생명이기에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 어떤 배신을 해도 이 아버지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찾고 찾아 다니다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애원하다 못해 절규하며 우리를 향하여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신 사건입니다.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죄 값으로 죽어가는 절대절망에 빠진 우리 인생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유업을 받아 누리는 절대희망을 갖게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다 바쳐도 아깝지 않는 그 하나님의 넓고 깊고 크신 엄청난 사랑이 이 시간도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드리는 예배가 그 강권하시는 사랑에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감사와 감격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이 십자가라는 사실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견디지 못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의 입을 열어보면 생이빨이 부러져있는 것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의가 다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의 죄 값이 얼마나 큰 가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사랑에 면면히 흘러내리는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유대 전통적으로도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로마서 3:23, 2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예수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0, 22
절 말씀에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율법을 따라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1-3)" 우리들로 하여금, 육신을 따라 죽는 삶이 아니라, 영을 따라 죽을 몸이 살리심을 입는 몸으로 새롭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롬8:14, 16, 17)"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3: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받은 자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적셔진 인생입니다. 그 피로 죄사함 받고, 그 피로 영생을 얻고, 그 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자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복"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피"에서 나왔습니다. 영어 단어에 복이란 말이 blessings, bliss란 말인데, 웹스터 사전에 찾아보니까 이 말이 blood "피" 특별히 "제단에 뿌려진 피"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제단에 뿌려진 우리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복음 얻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곧 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맛 본 자들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11절 말씀은 그 생활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즐거워 하는 삶! 이것이 생명의 복음! 피의 복음! 을 맛 본 자들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화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뜻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reconciliation! re(다시)+con(함께)+ciliation(살게된 것) 피의 복음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연합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 나라 이민족, 한국교회의 살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반목과 질시, 음모와 거짓, 술수와 모함으로 온통 나라가 진통하여 감기몸살 정도가 아니라 죽을 병에 걸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가 쩍쩍 갈라져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불신의 골이 너무도 깊고 넓어 총체적 위기감에 몰락해 가는 이 나라 이민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적셔지고 스며나는 생명의 복음이 소나기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생명의 피의 복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보여준 붉은 물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저는 모일간지에서 한 도시의 네거리에 가득 메운 붉은 인파의 십자가 모양을 항공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남과 북이 원수지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수혈되고 변화되어 만날 수 있다면, 연합하여 함께 누리는 통일의 즐거움이 머지않아 오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둘째, 화목이란 말에는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회복케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 61장의 예언대로 우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함을,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여러 가지 세상적인 것들로 눌려있는 심령, 가정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귀신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을 치유하심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권능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 회복케 하시는 부활의 능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년회장 출신의 한 젊은이가 몇 년 동안 저축한 비용으로 자비량 단기 선교를 나가겠다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단기 선교 1년 중국 오지를 갔다오려고 하는데 기도해 주시고 도움의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청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다음 "어렵운 일이나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보혈 찬송을 부르게나 그러면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걸세"

이 청년이 찾아간 선교지는 아주 오지인 시골 농촌이었는데, 한 농가의 마당에 서서 누가 없는가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 청년선교사의 서있는 집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것에 무슨 멧돼지 같은 새까만 짐승 한 마리를 메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멧돼지가 아니라,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는 시체와도 같은 병자였습니다.

"어이, 젊은 선교사 양반! 당신이 믿는다는 예수양반이 죽은 자를 살렸다던데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보여 주면 우리가 당신을 따라 예수를 믿고, 만일 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를 속인 댓가로 이 시체처럼 될 각오를 하쇼" 순간 이 젊은 선교사는 아찔했습니다. "잘못 걸렸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잠깐 눈을 감았습니다. 너무나 당황이 되어 어떻게 이 순간에 기도해야 될 지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 자기 앞에 나타나는 환상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떠나올 때, 기도해 주셨던 목사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보혈 찬송하게" 이 청년은 그 병자를 방안으로 옮기도록 부탁했습니다. 무슨 찬송을 할까 고민하는데 평소 교회에서 목사님과 온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별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젊은이였지만 여러번 불렀던 곡이라 1절은 가사를 외워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번에 부활의 능력 보여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망신! 이 젊은 놈 망신입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죄를 씻으신 주이름 찬송합시다" 찬송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10분이 지나고 20분, 30분쯤 지났는데 눈을 살짝 떠서 그 환자를 보는데 전혀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밖에서는 손에 삽과 괭이와 몽둥이를 든 동네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빈정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가는 시체를 살릴 수 있겠나, 빨리 포기 하는 편이 좋을걸, 어디 해볼 때 까지 한번 해보자구" 한 여름의 더위에 온통 몸이 땀으로 범벅이되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한시간 반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소생한 기미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목숨걸고 찬송을 부르는 그 청년선교사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소나기가 되어 그 병자의 온 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핏방울처럼…"

두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 청년이 살짝 눈을 뜨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그 새까만 멧돼지 같은 시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너무도 감격하여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이 당신의 죄를 완전히 씻어 버린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청년선교사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시체의 눈이 깜박거리며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당신이 살아난 것을 믿습니까?" 또 깜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예뻐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 선교사는 엎드려 이 시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구여질나는 시체의 냄새가 프랑스 향수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을찌어다"

그 시체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더니 이 청년 선교사의 손을 붙잡고 한발짝씩 마당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물론, 마당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 작은 예수 청년 선교사 앞에 엎드려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죽어가던 시체같은 병자가 젊은 선교사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이 젊은 선교사 역시 그 죽을 병자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 피의 복음, 부활의 복음은 죽이는 역사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오늘 이 순간 생명의 복음으로, 보혈피의 강력한 능력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학업과 자녀와 모든 행사 속에 역사되고 체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힘,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힘, 날마다 닥쳐오는 시험을 이기는 힘,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고 부정한 모든 것들을 맑히는 힘, 날마다 우리가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고,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이것이 바로 보혈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과 하나되고, 너와 내가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의 은총! 치유 받고 회복되는 감격과 감사가 차고 넘쳐서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하여 목숨 걸고 복음의 핵심인 피의 복음, 생명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모든 열방과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데 헌신하는 월드 크리스쳔의 사명완수! 그 선교의 삶을 "즐거워하는 삶"으로 누리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위 성경의 무오설(無誤說)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그 내용에 있어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이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데 대한 해석에는 학자들 간에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 예컨대, 종교, 도덕은 물론, 역사, 문화, 자연과학, 천문학 등에까지 정확한 진리를 천명하고 있다는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에 관해 정확한 진리를 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무오한 진리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첫째, 우리는 이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을 성경 본문 자체에서 볼 수 있는데, 딤후 3:15-17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고 하여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관한 규범임을 천명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성경을 기초로 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법칙’은 졸역; ‘규범’) 라고 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3년) 도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 (=행위)의 기준이 된다고 천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천명은 다른 여러 신앙고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성경 본문과 신앙고백 상의 분명한 서술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일부 신앙인 중에는 성경이 세상의 모든 사항에 대해서 절대적인,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만 하면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요, 더 보수 정통의 신앙인 줄로만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함께 그러한 주장을 하여왔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을 보면 그러한 이론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예수님 부활의 사건만 보더라도 네 복음서가 각각 부분적으로는 역사적인 사실을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17세기의 과학자 갈릴레오는 당시의 천문학인 천동설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것이 성경의 진리와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을 받아 강압에 의하여 지동설을 취소하였으나, 당시의 교회의 신앙이 진리에 위배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과 같이 성경의 내용 가운데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불일치나, 천문학적인 사실에 대하여 오류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성경의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한에서 정확무오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의 보도나 천문학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보도가 불일치한 것일지라도 그 저자가 기록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대로의 기록이므로 그 자체 진실한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천문학적인 오류도 오늘의 과학이나 천문학에서 보아 오류이지 그 당시로서는 결코 오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1세기의 신약성경 저자에게 20세기의 천문학적인 지식을 주시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 사실 때문에 성경을 믿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