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죄의 결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18:20)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 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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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 -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

일반적으로 가장 회피되는 단어는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향하여 정해 놓으신 이치(히 9:27)가 죽음이므로 세상을 향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이를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와 형벌 (창 2:17; 3:19; 롬 6:23; 고전 15:21; 약 1:15)로서 우리 삶의 일부가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Augustine)은 죄의 형벌이 곧 죄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은 죄악된 상태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임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며 모든 삶에는 항상 죽음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종교개혁자 칼빈 (John Calvin)의 주장 (<기독교 강요>, 3.9.4)은 합당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 1:21).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표현하며 (전 2:7; 창 3:19; 약 2:26) 이로 인해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롬 5:12, 17).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시 90:7, 11), 심판 (롬 1:32), 정죄 (롬 5:16), 저주 (갈 3:13)로 표현된다.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죽음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엡 2:1-2;겔 18:4, 20; 롬 6:23).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셋째,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을 들 수 있다 (계 20:14).

이는 앞서 설명된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 (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킨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결과는 이렇게 저주와 형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번민과 방황,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형벌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무서운 적과 가장 큰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대적이 아니라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가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이기셨으므로 (고전 15:55-56) 죽음은 이제 정복된 원수에 불과하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이었으므로 (요 8:44)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예수를 시험했고 (마 4:1-11), 더러운 영들을 보내었고,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서 그를 죽이기를 꾀했다 (눅 22:3; 요 6:70, 13:2, 27).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거룩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사탄의 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음부의 권세는 결국 패배 당했다. 오리겐 (Origen)과 이레니우스 (Irenaeus)를 포함한 몇몇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했던 속전설은 사탄이 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사탄의 노예인 죄인들을 속량하셨다. 오리겐은 우리가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전 6:20)는바울의 고백을 자주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게 지불한 속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전설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하셨다는 성경적 진리를 충분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단지 사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원래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었던 죽음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탄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뜻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복음의 핵심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

그러나 이렇게 영생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사탄은 그들의 성화를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하도록 총력전을 펼친다 (벧전 5:8).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실제적 악이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세력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당장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가? 이미 구원받아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경륜 속에서 죽음을 성화를 완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화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지나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게 될 때 비로소 더 나은 본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죽음을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빌 1:20-23).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예비된 상급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므로 이에 대한 명상은 희망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로 다가오게 된다 (롬 14:8). 죽음은 세상에서 한 평생 지속되었던 영과 육의 싸움의 종식을 가리키며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영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아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지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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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성서적의미

기독교의 죽음의 이해의 특색은 윤리적 성격에 있다고 본다.
즉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윤리적 차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는 죽음이 단지 인간의 운명이며 자연적 사건이라는데 머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적으로 죽음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윤리적 극복을 추구한다.
⽄런 입장에서 기독교는 우선 죽음의 현상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한다. 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은 죄의 대가를 지불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해결의 길이 열리고 부활의 영광 속에서만 그 완전한 답이 주어진다.

기독교는 죽음의 문제를 앞에 놓고 몰트만(J. Moltman)의 말대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즉 신정론(Theocracy)의 질문이다. 왜 이 세상은 불의의 세력이 판을 치고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가. 즉 기독교는 고난과 죽음의 문제를 신정론적인 윤리적 물음에서부터 다룬다. ⽄독교의 신앙을 그런 각도에서 다룬다면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반항과 항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죄가 죽음을 결과하였고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며 의로운 빛의 자녀들을 괴롭혔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존재론적으로 극복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활로 이어지며 영생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극복 그것이 기독교의 죽음이해이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요 상실로서 영과 육의 분리이다. ⽄경은 절대로 죽음을 존재의 폐기나 중지로 다루지 않는다. ⽄경은 죽음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맥박이 멎고 호흡이 끊어지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요 11:11-14).

②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

인간이 하나님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시인간(原始人間)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도 단절되고, 조화의 관계도 파괴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적 죽음이 발생했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단절이 생겼다. 이 분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영적 죽음으로 상존해 있는 것이다(엡 2:1).

③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은 요한게시록 21:8에 기록한대로 둘째 사망으로 하나님의 面前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것이다. ⽄째 사망이란 악인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계 20:8, 14). 이 죽음에도 본질적인 죽음이 수반되고 있으며, ⽄ 죽음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그의 사자들에게도 임한다(마 25:41).

이제 성서를 통하여 좀더 세밀하게 죽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에 나타난 죽음

초기시대에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였다. ⽄것은 곧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일방적인 확신이 있었다는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생명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집약해보면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뜻하며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칠 수 없는 단절된 상태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죄와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죄성 여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서의 삶을 죄를 멀리하는 생명의 삶이라면 반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죄와 결탁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이 ⽄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은 그 자체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1) 죽음의 허무성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것은 구약시대의 사람에게 있어서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온 세상의 길을 떠난다"는 ⽄구는 죽음에 대한 담담한 의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는 죽은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의식과 장례식에 대한 애도의 기사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생명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죽음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낸다.

(2)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구약에서는 죽음을 곧 죄와 벌로 연결시켜 생각하려 했다.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관념은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벌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으며 불멸불사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이 죽음이 세상에 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란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형벌인 것이다. 이런 내용은 구약의 지혜 문학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악을 좇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자이며"(잠11:19)

"어리석은 여자의 유혹에 자신을 내 맡기는자"(잠7:25-27, 9:18)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들의 경우에 죽음은 자연적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귀한 선물의 성격을 지닌다. 결국 죽음은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할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기 생명을 이해하지 않고 신뢰와 감사로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성취하려는 자의 결과이다.

그래서 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절망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축복으로서의 죽음

구약성서에서 이상적인 죽음은 노년기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한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죽음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죽음으로 창세기 25장 8절에서 그런 죽음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백발의 노년에 이르러 늙고 만족하게 산 다음에 죽었으며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 함께 있었다."

이런 죽음은 성취된 인간의 마무리로서 누구나 죽어야 할 죽음이지 특정한 인간의 죽음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삭과 다윗과 욥도 만족한 죽음을 죽었으며 (창 35:29, 욥 42:16, 대상 29:28) 그들의 죽음은 음울한 결말이 아니라 평화로운 성취였다. 즉 고령과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행복한 성취일 수 있으며 풍성한 축복의 생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구약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정리해 보면, 우선 죽음은 일반적인 자연스러운 경계선이고 생명의 유한성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죽음을 누구나가 겪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신약성서에서의 죽음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움 이전까지는 죽음이 구약성서의 사상 아래서 반영되어 왔다. 즉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을 얻게 된 것처럼 죽게 되었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인류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강조되었던 죽음이 실재 한다는 사실은 이제 객관적인 사실이 된 것이다.

(1) 절망을 넘는 죽음

신약의 죽음관은 희망의 죽음이다. 바로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 희망은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부활의 희망인 것이다. 그레사케(Greshake)에 의하면

"형제들아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사람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 소비하여 없애는 것이 죽음이며 생명을 버리는 길"이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죄의 벌로서 조명된 구약시대의 죽음과는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는 옛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같이 새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에 의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라서 신약의 죽음 이해는 이미 우리는 죄와 옛사람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이 우리를 예속하지 못하고 죽음은 희망을 가져오는 제 2의 출발로 말하고 있다.

(2)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 순교나 진리의 수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철저한 희생의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또 우리를 대신해서 그를 죽음으로 내어준 죽음이다. ⽄봉랑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의 죽음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죽음"이라고 했다. 즉 그가 십자가를 맞이한 것은 인생의 허무와 좌절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을 가지려는 1차적 행동이었다. 예수가 보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은 죽은자에 대한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가 가진 신관으로 죽음에 대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모습에 대한 견해이다.

둘째는, 유대인과 함께 했던 것으로 죽음이후 부활하게 된다는 예수의 확신있는 견해이다. 또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실 때도 죽음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표현하신 부분은 생명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임을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죽음의 이해를 살펴보면,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와 맺은 인격적인 관계의 빛 속에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미 바울에게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음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존재를 깊이 생각 하도록 요구하셨다. ⽄것은 이미 죽음이 신앙안에서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임을⽄생각케 하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나타낸 죽음의 반응을 시련의 하나로 보고 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심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죽음의 심각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기독교인의 현세의 삶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을 막아주는 관점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의 모형을 새롭게 제시한다. 요 12:24이나 6:54는 밀알의 비유와 성찬의 비유로 자신을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 한다면 예수와 함께 그날에 다시 살 수 있다는 삶을 향해 죽음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 서신의 죽음의 이해

바울서신에서는 죽음의 기원과 죽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있다.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세례의식과 부활로 증명되는 죽음의 극복성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있는 피조적 한 실재로 보았다. 죽음이란 철저히 상대화되고, 죽음은 그 쏘는 가시의 권세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첫째, 바울은 죽음의 기원과 죽음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 땅에 죄가 들어 왔고 그 죄의 벌로서 죽음이 주어졌으며 온 인류는 죽음의 그림자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런 죄로 인하여 죽음에 놓인 인간을 위하여 직접 죽음을 취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형벌로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율법 아래 나셨고"(갈 4:4) "죄 많은 인류의 모습을 몸소 취하신"(롬 8:3)것으로 온 인류와 유대를 같이 보시고 인류가 받을 형벌을 대신 지신 사랑의 죽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무죄하시지만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그⽄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조물의 죄와 죽음의 역사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바울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죄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세례의식을 통하여 표시하고 있다. 로마서 6:3과 빌립보서 3:10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죽음에 묻히며 그 분의 죽음에 합치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에서 본 소극적인 면에서 본 신비스러운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죽는 죽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권세가 나타내는 모든 사물의 질서에 대한 죽음이다. 즉, 죄에 대해서와 우리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이며 육과 율법에 대한 죽음이고 세상의 모든 원리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조직신학에서의 죽음

성종현은 "기독교는 죽음으로 부터 출발한 신앙공동체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사건이요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나아간 부활의 씨앗 사건이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삶에 대한 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전제라고 말한다.

성종현은 [장신원보](1989.11.6)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죽음"이라는 그의 글에서 몇몇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다루고 있다. 개혁자 루터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깊은 수면에 비유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지지한다. 한편 칼빈은 "만약 누가 오늘날도 경건한 신자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잠든 성도는 천상의 생명의 즐거움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영광은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날까지 유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죽음 이해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철저종말론

본 이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쿨만(O. Cullmann), 바르트(K. Barth), 엘러트(W. Elert), 퓨리(R. de Pury)와 융겔(E. Jungel) 등으로 이들의 죽음 이해는 완전 죽음설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어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전적죽음 또는 완전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하고 선한 것, 생명 자체까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만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믿어 온 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초대교회)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나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의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사건 위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희랍인들의 신앙인 영혼의 불멸 사상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나 바울이나 초대교회는 영혼의 불멸을 가르틴 것이 아니라 부활체와 영체와 죽음 후의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을 후세의 교회가 희랍인의 사상인 영혼의 불멸론과 혼돈해서 그것이 현재까지 전달되어 왔다고 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떠난다거나 어떤 장소로 이동된다는 생각은 이방종교적 사고라고 비난한다. 이들에 의하면 영혼불멸설은 비기독교적이다.

(2) 영혼불멸설

본 이론은 여러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2 서서 신앙고백, 소요리 문답서)에서 지지하는 이론이다. ⽄,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죽음이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이며, 육체적 존재의 종말을 의미한다. ⽄떤이들은 영혼부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시대에 활기띤 사상이다. ⽄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영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 W.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구약성서는 개인의 사후에 그의 영혼이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여러 곳에 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0:28로 볼 수 있으며, 요한복음 11:25도 죽음 후에도 그 사람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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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 : 허물 죄

罪자는 ‘허물’이나 ‘죄’, ‘잘못’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罪자는 网(그물 망)자와 非(아닐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본래 ‘허물’이나 ‘죄’라는 뜻은 辠(허물 죄)자가 쓰였었다.
辠자는 自(스스로 자)자와 辛(매울 신)자가 결합한 것으로 고대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의 코를 잘라 처벌한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辠자가 ‘황제’를 뜻하는 皇(임금 황)자와 비슷하여 진시황 때는 이를 피해 새로이 만든 글자가 바로 罪자이다.
罪자는 ‘아니다’나 ‘나쁘다’라는 뜻을 가진 非자에 网자를 결합한 것으로 ‘잘못(非)을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网)’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죄 : 넉 사(四) + 아닐 비(非)죄는 네 가지 아닌 것을 의미한다.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성경에서 죄를 정의하는 구절을 살펴봅시다.

1. 불신(요 16:9)
참조 - 롬 14:23, 막 16:16
2. 불선(약 4:17)

3. 불의(요일 5:17)
4. 불법*요일 3:4)


죄의 본성


I. “죄” 용어


1. 구약성경

(1)  chattaath, chattath--표적에서 빗나감.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서 벗어남. 탈선
(2) a'won -부정, 죄책, 도덕적인 비틀어짐. 고결성과 정직성 결여. 품성과 행위에 있어서 결함
(3) pesha - 권위에 대한 반항. 하나님에게 항거나 반역
(4) a'bar - 범법(transgression), 지나치는 것, 건너가는 것.
(5) resha' - 사악함, 경건치 못함, 타인과의 관계 파괴
(6) ma’l - 위법행위 배반하는 행위
(7) 'ajen - 우상숭배, 부정, 허영
(8) remiyyah - 거짓, 속임, 표리부동


2. 신약성경

(1) hamartia-- chattaath와 같은 의미로 “표적에서 빗나감”
(2) anomia - 무법, 위법, 불법(lawlessness)
(3) paraptoma - 배반행위, 실수, 차질
(4) parabasis - 위법(transgression)
(5) asebeia - 불경건 (irreligion), 경건치 못함
(6) parachoe -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음, 부정확하게 듣는 것.
(7) adikia - 불의, 불법, 부정, 정의와 진리에 반대
(8) apeitheia - 반역

위의 성서적 용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 불신과 불경건, 범죄, 정직성의 결여, 불법, 반역, 변절, 왜곡, 가증한 것, 무지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비추어 보아 죄라는 용어가 대체로 외적 행위, 내적 상태, 관계의 파기를 나타내는 세 범주에서 사용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II. 죄에 관한성경의 4대 정의


1.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죄는 외적 행위이나 그 뿌리는 내적 상태에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위 인용문은 “죄=불법”이라는 도식으로 죄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불법이 외적인 행위에 국한 된 문맥이 아니다. 위 인용문을 이끄는 대전제에 다음 말씀이 선행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1기별, 320).

그리고 “죄=불법” 이라는 정의라는 문단 안에서 동 불법을 인간의 내면 상태와 연관 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표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간 내면 상태를 묘사하는 다음 진술로 끝맺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롬 8:7)다.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1기별, 321).


2. 죄는 불신이다(롬 14:23; 요 16:9). 죄는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다.

3. 죄는 불의이다(요일 5:17). 죄는 내적으로 비틀어진 상태이다.


4. 죄는 불선이다(약 4:17). 죄는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결핍이다.


III. 죄의 본성


1. 죄의 본성에 관한 개요적 안내

(1) 죄는 缺性이나 결핍(privation)이다.

Augustinus 은 죄를 선한 것 안에 생긴 선의 결핍이나 상실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원래 볼 수 있는 시력이 있었으나 그 시력을 상실하여 눈먼 상태와 같거나 부상당한 팔과 같다.

피조적 존재는 그 제한성 때문에 이러한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 전 이런 결핍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죄의 필연적 결과로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결핍을 지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완전한 상태의 결핍에서 시작한 이 결핍성은 인간을 무제한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전 1:7).

Schleiermacher는 죄를 감성(sensuous nature)에 기인한 신의식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죄를 결핍으로 보는 시각은 근원적 존재에서 이탈한 존재원천의 결핍 즉, 독립성으로 보는 방향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죄를 선의 상실 정도로만 보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 죄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능동적 반역이나 반항이기 때문이다.


(2) 죄는 幻影이나 환상이다

Spinoza는 죄의식이 인간의 제한성, 즉 지식의 불충분에서 기인한 환영이나 환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고차원 수준으로 상승되는 경우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Ritschl 역시 무지에서 기인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죄를 부인하는 천박한 이해에 불과하다.


2. 죄의 본질적인 특성

(1) 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에는 독립성이 없다. 죄는 존재가 아니다(Sin is not "is."). 죄는 존재의 반대이다(Sin is opposite of "is."). 죄가 독립성의 결핍이라는 점은 실재(reality)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된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루터파 신학자 Matthias I. Flacius(1520-1575)가 죄를 분리된 독립적인 본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2)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계되어 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참회하는 고백을 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한 범죄를 곧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고 인식을 하였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한 관계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즉, 죄에는 관계적 특성이 있다.

죄는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 율법에 일치하지 못하는 범법 행위이다. 인간 마음 판에는 보편적인 도덕률이 새겨져 있다. 보편적 도덕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들어 있다(롬 2:14-1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죄는 도덕률과 연관 되어 있어 절대적 특징을 지녔다. 죄가 되던지 안 되던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지대는 없다.


(3)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마음은 인격체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중심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반이 된다.

Augustinus는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이 된다.


(4) 죄는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갖가지 죄악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지적은(히 8:10; 10:16) 마음에 이는 생각을 경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16-17).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구 즉, “죄된 본성의 욕망들(epithumian sarkos)"이다.

이 내적 상태에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뿌리도 포함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 주었다(5BC 1128).

“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치료, 372-373).


(5) 죄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은 유죄가 된다. 즉, 죄책이 성립되어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유전 받은 잠재적 죄책(potential guilt)과 죄된 행위를 한 결과인 실제로 범한 죄책(자범죄, actual guilt)이다. 하여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롬 1:18).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롬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오염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도덕적 성질의 부패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타락성을 지닌 채 탄생한다(시 51:5; 욥 14:4; 엡 2:3).


(6)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자기 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 자체는 교만의 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루스벨이 범한 길을 따른는 것이 된다(딤전 3:6).


(7)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죄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다. 그리고 자기 죄는 숨기고 남의 죄를 극대화시킨다.


(8) 죄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녔다.

Sin is "sui generis." -->Sin is "of its kind," "one of its kind,' or "unique type of its kind."


(9) 죄는 세력(power)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이지만 (존재론적 의미), 죄는 존재(being) 이 아닌 세력이다.
  a. 부정적인 세력이다.
      죄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된다(negative power).
  b. 죄는 자멸적 세력이 된다(suicidal power).
     죄는 항상 자기 파멸적 힘이 된다.
     이는 마치 모든 수를 곱하면 것을 제로로 만드는“O"과도 같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사 64:7).
  c. 죄는 기생적 세력이다(parasitic power).
     독립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