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목사 믿는 환자인가?
예수 믿는 신자인가?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일까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 관원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 죽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육신이 태어나고, 두 번째에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거듭나게 되어 중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이 한 번만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번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은 두 번의 사망, 즉 육신으로 죽어 영혼이 지옥에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사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없다고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이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두 번째 사망이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그 당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를 사함 받게 됨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도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사람은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로,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0).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말씀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귀를 지으신 성령님께서 왜 듣지 않겠습니까. 다 들으시고 다 아십니다. 기도할 때 말할 때, 다 들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22장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소리와 영음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소리는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면 다 같이 듣습니다. 그러나 영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사울만 그 음성을 듣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영음은 한자리에 있어도 듣는 자가 있고, 듣는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영음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 지식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흘 만에 부활하신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때가 바로 사도 바울이 중생하는 순간이고, 두 번째 태어난 시간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에 주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오늘 제가 설교를 듣는 중에 주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해주세요.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저도 주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은 사업에 어려움이 생겨 하나님께 특별히 기도하던 중,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아버지, 오늘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다가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오셔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뿐 아니라, 환난이나 질고로 어려움 당할 때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는 기회요, 주의 음성 들을 기회요, 큰 축복받을 기회임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고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해지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이 임하니 그때서야 히스기야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회개했습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매 맞을 징조입니다. 교만해지는 것은 망할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아사 왕은 왕이 된 지 39년 되었을 때에 발에 중병이 들었습니다(대하 16:12). 그런데 병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깨닫고 회개할 텐데, 어려움을 당해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매를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⑴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늙어서 우상숭배를 많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9~10절에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책망하셨지만, 솔로몬은 완악하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깨달음도 없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망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망합니다.

⑵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준비된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귀가 어두워져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의 공통점은 제 마음속에 주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며칠씩 기도하다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다.
그러면 저는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축복이 엄청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망했지만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어 얼마나 축복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든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축복을 받습니다. 평생 간증거리가 됩니다. 너무너무 행복해집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라야 참 신자입니다.

참 신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믿게 된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제일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자원해서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귀한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을 때에 기쁨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금은보화를 다 바치고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우러나오는 마음의 기쁨으로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이라야 참신자입니다.

항상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만 들어봐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은혜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이 나의 인격을 보여주고, 내 믿음을 보여줍니다. 말이 내 사랑을 보여주고,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밤낮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셔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밤낮 불안과 걱정 속에서 원망 불평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제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나머지 열 명은 믿음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고 말했습니다. 완전히 믿음 없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없는 말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말 그대로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사야 3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영광의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려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망했고 유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믿음의 말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해서 모두 굶어죽게 됐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내일 하루만 지나면 기근이 해결될 것을 백성들에게 고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 말을 듣고 한 장관이 의심의 말을 하자 엘리사가 예언합니다.
열왕기하 7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병환자 네 사람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용기가 생겨서 가봤더니 이상하게 사람이 하나도 없고 먹을 것과 보물만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실컷 먹고 금은보화를 자기 장막에 쌓아 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성에 가서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에는 완전히 기근이 해결되었고, 사람들은 믿음 없는 말을 했던 장관을 밟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 없는 말을 한 사람은 믿음 없는 증거가 말로써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음 없는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믿음 없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하실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라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수록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다섯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야 참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못하면 두렵고 떨리고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참 신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고 양심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죄 짓는 데 담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정직하게 산 참 신자의 모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참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실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시편 94편 9~11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위해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십니다(잠 2:7).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은 완전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시편 112편 1~4절에 보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서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에 빠져도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자신도 복을 받고, 후손도 복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사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여러분도 참 신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Big Question)'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온라인 종교활동이 종교계 안팎에 파장을 낳고 있다. 온라인 미사·예배·법회는 성직자와 신자들 모두에게 새로운 종교환경이자 신앙생활로, 당혹감을 안기면서 동시에 기존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로 모여 하나 되는 오프라인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한편으로 신앙생활이 ‘특정 시간·장소에 모여야만 하는가’ 등 그동안 해본 적 없는 근본적 질문들도 제기된다. 한국 종교계에 ‘빅 퀘스천’이 던져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종교계가 방송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용에 적극 나서면서 종교계 온라인 활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도 들린다.

■ 신앙생활에 던져진 ‘빅 퀘스천’

코로나19로 종교계는 지난달 말 사상 처음으로 종교활동의 온라인 전환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온라인 신앙생활이 11일로 2~3주간 이어지면서 종교계에는 신앙생활의 형식·내용을 둘러싼 근원적 질문들이 나오고 있다.

특정 시간·공간에 모여야만 하는가, 이 시대 성당과 교회·사찰이 지니는 의미와 기능은 무엇인가, 종교시설 밖 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활동 한계는 어떤 것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이 같은 물음은 특히 온라인 주일예배를 놓고 다양한 견해가 나온 개신교에서 두드러진다. 최근 이길주 목사는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쓴 글에서 온라인 예배가 “교회건물에서만 예배한 교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큰 도전과 고민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건물에 모여 예배하지 않으면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가 고민하고, 일상이나 사회, 나 혼자의 공간에서도 예배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대형교회 목사도 “디지털시대에 온·오프라인 예배 문제, 목회나 선교활동,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신학적·신앙적·예배학적인 다양한 물음들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며 “향후 본격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불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원교구의 한 신부는 “이번 경험을 통해 성당·공동체적 모임의 귀중함을 새삼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개인적·일상생활 속에서의 신앙생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사찰의 한 스님도 “법랍 40년 동안 이런 도량을 경험하지 못했다”며 “‘주말에만 절이나 교회를 찾아 고개 숙일 생각 말고 평소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내용의 생전 법정 스님 법문을 떠올리는 요즘”이라고 밝혔다.

■ 종교계의 분기점 되나

온라인 종교활동이 지속되자 종교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성직자, 신자들은 서로 모이는 오프라인 종교활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다. 행신침례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 김관성 목사(49)는 “처음으로 신자분들이 모이지 않은 주일예배를 유튜브로 중계했는데 너무 어색하고 신앙적 흥이 나지 않았다”며 “저는 물론 다른 목회자들, 신자들도 모여 손잡고 안부 묻고 식사를 함께하는 공예배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은 종교계에 온라인 활동을 가속화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김관성 목사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예배에 부정적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향후 온라인 중계를 병행할 것”이라며 “주변 여러 목회자들도 공감하고 있어 이번 사태가 온라인 종교활동의 기폭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길주 목사도 문화선교연구원 웹진 글에서 온라인 예배를 위한 교회의 준비사항을 소개한 뒤 “이번 사태는 한국교회를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신교에 비해 온라인 활동에 소극적이던 천주교도 바뀌고 있다.

일부 교구는 교구장 주교의 집전 미사를 중계하거나 홈페이지·유튜브를 통한 영상 제공, 교구 차원과 신부 개인의 SNS 활용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 관계자는 “온라인 채널의 확산은 물론 소통을 위한 의지표현도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계도 전례 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산문 폐쇄 중인 합천 해인사는 최근 유튜브에 ‘해인사 TV’ 계정을 열고 예불·법회를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해인사 역사 1200년의 첫 시도”라며 불자들에게 “이를 통해 또 다른 신심과 감동을 만들어보자”고 당부했다.

그동안 선교·포교수단의 하나로만 여겨지던 온라인 활동이 종교계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신앙은 가끔 상식을 초월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 벼랑 끝에 섰을 때는 무엇인가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하늘에 맡기면 필히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지요. 암 환자에게도 신앙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의사입니다. 친절한 의사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절한 의사를 넘어 주님의 의사가 되는 건 그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환자를 위해 손을 잡고 기도 드리지만 저의 힘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 환자 중에는 수혈을 거부하는 다른 종교 신자도 있었습니다. 국선도 신봉자나 도를 믿는 교도도 있었고 스님도 몇 분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들과도 모두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고 기도합니다. 제가 대표로 기도하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아마 각자 자신의 신을 찾았을 겁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성공적으로 수술과 투병을 마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자포자기했던 환자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아나는 기적이 간혹 있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때도 예전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돌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게 되지요. 의사들의 평균 수명이 그 어떤 직업군보다 짧다는 통계를 보면, 의사들이 얼마나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는지 여실히 증명됩니다. 평생을 중압감과 싸우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빨리 지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 의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반쯤 죽었다 반쯤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의사 생활에 익숙해지더라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사는 거의 없을 겁니다. 수련의 시절, 환자가 죽으면 많은 수련의들이 술과 담배를 찾았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기도에 의지했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자 근심과 번민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가 찾아온 겁니다.


“부족한 제 힘으로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고치신다고 믿기에, 하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하는 의사가 됩니다. 힘들고 고통받는 암 환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들이 암을 꼭 이겨내게 하옵소서.”


삶이 좋은 것이고 죽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가진 편견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일 수 있습니다. 생사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는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곤 합니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매 순 간 환자에게 충실함으로써 주님의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암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엔 기도하세요. 치료를 열심히 받고 좋은 음식을 잘 먹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면서, 생사의 결정은 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암 치료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게 될 겁니다.


신에 대한 믿음처럼 의사에 대한 믿음도 환자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치료 과정에서 불신이 쌓입니다. 최악의 경우 병원을 옮기는 사태까지 발생하는데,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손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의사를 신처럼 여기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환자가 어떤 경우든 의사를 믿고 따를 수 있어야 치유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믿음이 의사도 살리고 환자도 살립니다.


기도의 힘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김재환감독

김재환 감독은 미국의 어느 유력 매체의 기자가 자신에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전하며 인터뷰의 말문을 열었다.

“그 기자가 어눌한 한국말로 이러더라, 한국 교회, 왜 이렇게 또라이예요?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풍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붉은 십자가다.
외국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은 곳은 무덤뿐이다.
내게는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가 무덤이 된 것처럼 보인다.”

김재환 감독의 신작 <쿼바디스>는 그 수많은 십자가들을 향한 냉철한 자성의 목소리이며, <트루맛쇼> <MB의 추억>에 이은 통렬한 풍자화다.

- <쿼바디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의 제목이라 낯익다. 제목을 패러디하려는 의도였나.

1951년 <쿼바디스>를 물론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맥락이 있다.
나는 나의 전작들을 ‘역지사지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트루맛쇼>에서는 미디어가 하는 행태 그대로를 빌려와 미디어를 찍어본 것이었고, <MB의 추억>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 유권자를 보는 것이었다.
<쿼바디스>에도 이런 역지사지의 면이 있다.
‘쿼바디스’라는 말뜻은 원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은 말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박해받을 때 냈던 신음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를 보며 오히려 예수님이 신음을 내고 계실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원래 그 말의 향방을 거꾸로 바꾸어서 지금 한국 교회에 묻고 싶었다.
신음하는 예수님이 한국 교회에 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교회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하고.

- 시사회는 좀 열어봤나, 반응은 어떤가.

=많이 했다. 의외로 70~80대 어르신들이 많이 오신다.
그분들에게 “51년 <쿼바디스>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닌가요?” 하고 물으면 다들 빙그레 웃으시며, 다 알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목사님들도 많이 보러 오셨다.
그분들은 잘 알고 있는 거다.
대형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위중한 한국 교회에 단지 빨간 약만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 기독교인인가.

=그렇다. 영화에서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던가?
(웃음)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기독교 영화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영화는 한국 교회의 민낯, 한국 교회의 욕망을 보자는 것이다.
<MB의 추억>으로 유권자의 욕망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처럼.
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 기독교 성공학의 결정판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로 비기독교인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었다.

- 한국 대형 교회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다. 관련자들도 등장하고. 소란스러워질 여지가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영화에 등장한 교회의 몇몇 관계자들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나 걱정됐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진짜 웃긴 상황이다. 그들이 보러온 자리는 펀딩에 참여한 분들을 위한 유료 시사회였으니까, 이 사람들은 내 영화를 확인하려고 영화의 펀딩에 참여를 한 거다. (웃음)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법적으로 걸어도 내가 이긴다. 오히려 내가 서글픈 건 주변으로부터 “두렵지 않느냐, 어디 해외라도 잠시 다녀와라” 이런 말을 들을 때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닌 거다. 그래서 <쿼바디스>의 포스터에 메인 카피를 이렇게 적어놨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본래의 제 의미를 상실하여 이미 교회가 아닌 것들을 대상으로,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새삼 말하려니 오히려 허무하기까지 하다.

-참고한 자료들이 있는가.

=일단 많은 책을 참고했는데, 그중에서도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의 책 <다시 프로테스탄트>에 크게 빚졌다.
그 책에서는 한국 교회의 폐단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성직주의.
한국 교회가 목사들로 다 대표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장주의.
성장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설정해두고는 다른 모든 문제는 다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셋째, 승리주의.
세상을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전체 맥락의 구성에 있어서는 어떤 흐름을 따랐나.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라는 패러다임 안에 있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맥락화했다. 때로는 장소가 아주 중요했다. 예를 들면 평화 기도회에 참석한 조지 부시의 장면과 이랜드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을 연결시켜놓은 부분이 그렇다. 시간차는 나지만 둘 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상암월드컵경기장이다. 어떤 나라의 경우에는 부시를 전쟁 범죄자로까지 취급한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와서는 평화를 간증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간증하기 위해 섰던 월드컵경기장 그 아래층 홈에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기독교적 기업이라 자처하던 이랜드가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해고했고 그들의 농성이 있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우리나라의 민중과 교회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이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이 시무 장로로 있었던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 농성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랑의 교회 증축에 관한 언급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그 증축에 땅값까지 포함해 3천억원이 넘는 예산이 들어갔다.
영화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이슈들을 농축하고 있는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지금 한국 대형 교회의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부끄러운 면모를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 의존주의, 성직주의, 성장주의 등 많은 문제가 거기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교회의 목사는 “우리 교인들 중에 판검사가 몇명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직접 볼 수 있는 이 건물의 이미지로 영화를 열고 닫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마이클 모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미국의 다큐 감독 마이클 무어의 인상착의를 흉내냈다.

=가상의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모어’라고 이름 지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보면 그가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이름을 빌려와 패러디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책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온 부분들이 많다. 그 배경을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다가 한번씩 빵빵 터지는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같은 중세 시대의 종교 개혁자였다. 중세 유럽 기독교가 처한 상황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만연하는 한국 교회의 헌금 중시주의를 보자.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파는 것과 똑같은 거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해당 목사들의 인터뷰가 없다. 안 만나주던가.

=당연히 안 만나준다. 만나려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매번 따돌림 당했다. 돌아온 답변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그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웃음)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라니, 이 말, 정말 웃기지 않나. 목사님 만나는 게 예수님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조용기 목사에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 맞습니까?” 하고 감독이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조용기 목사의 법정 출두 장면이다.
날짜와 장소가 정해져 있었으니 미리 아침부터 기다릴 수 있었다.
카메라맨들을 건물 입구마다 보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내쪽으로 와서 마침 찍을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정해놓은 건 아니었다.
뭘 질문할까 생각했는데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내 마음속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을 따라보자, 했던 것인데 그 말이 나온 거다.
생각보다 내 울분이 컸었나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이 영화는 다큐와 픽션이 섞여 있는데, 성추행 파문을 일으켰던 전병욱 목사 부분을 묘사할 때는 다른 사안에서보다 픽션을 더 적극 활용했다.

=다른 분들 내용에서도 그런 극화된 환상 장면들이 좀 있었는데, 뺐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병욱 목사가 쓴 책의 내용을 피해자 여성들이 그에게 다시 읽어주는 장면이 꼭 필요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형 서점에서 팬 사인회를 하면 한 시간이 지나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나한테도 그분 책이 네권이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자기가 쓰는 글과 삶이 다른,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잘못한 것을 알지만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는 자의 고뇌를 표현하고도 싶었고. 그 부분만 환상이 들어갔는데, 많이 이상하던가?

-갑작스럽게 인물의 내면이 표현되는 장면이어서 돌출적으로 보였다. 다만 영화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호 기자, <뉴스타파> 최승호 PD 등도 픽션 부분에 등장하여 연기에 한몫하던데.

=<뉴스타파> 최승호 PD는 내 10년 선배다. 최 선배가 오래전에 <경찰청 사람들>이라는 프로를 했었다. 이번에는 마치 자신이 거기 나오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한 거다. (웃음) 그리고 이상호 선배는 기자하기 전에 KBS 슈퍼탤런트 최종 본선 무대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기독교 내부 개혁자들의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가 상당수 등장한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어떤 방점일 것이다.

=되도록 많은 관련 서적을 읽고 난 뒤에 그중 내가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분들을 선별했다. 그분들의 책의 내용과 이 영화가 어떤 접점을 이루기를 바랐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출연을 거절했다. 이 영화의 내용이 더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한 개혁에 관한 것인지, 단지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관한 것인지 의심스러워 그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대형 교회 관련한 인터뷰 자체가 싫다는 분들도 계셨다. 시달려서 싫다는 것이었다. <트루맛쇼>에서처럼 하나의 프레임을 정해놓고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체의 욕망과 방향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전반적인 개혁이나 변화를 바라는 관점이 잘 드러나기를 바랐다.

-인터뷰이 중 한분은 문제의 핵심을 “돈과 권력”으로 집약한다. 김홍도 목사가 그 예로 등장한다. 김 목사는 현재 법정 구속 상태다.

=어떤 분이 그런 농담을 하시더라. 전국을 돌며 <쿼바디스> 무대 인사를 함께해주어야 할 이 시점에 거기 계신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일가의 문제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린 물어야 한다. 당신은 목사를 믿는 환자인가, 예수를 믿는 신자인가.

-<쿼바디스>가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나.

=늘 그랬다.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변화를 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미세한 변화들이 늘 감지되곤 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쿼바디스>도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일반적인 기독교 관련 휴먼다큐는 많이 있다. 나는 오히려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되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만 있다면, 이 영화를 본 몇 사람의 마음만이라도 바뀌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도마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김재환 감독은 비기독교인의 눈에 <쿼바디스>가 어떻게 비치는지 많이 궁금해했다.
답하자면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쿼바디스>는 사회적 상식에 관한 정당한 질문이 담긴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기독교 외부에서 내부를 단죄하거나 계몽하려는 대신 기독교 내부의 자정적 목소리를 모았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일이다.
김재환 감독 스스로가 그 일원 중 하나인 것은 당연하다.
그 방법이 풍자일 뿐이다.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 관한 한, 특히 대형 교회들의 정황에 관한 한, 김재환 감독은 당대의 에라스무스가 되기를 자청한 것 같다.

*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 10. 27-1536. 7. 12)
일반적으로 에라스무스라고 부른다.
네델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 인문주의자.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시학자.

이름 뒤에 Roterodamus를 붙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라틴어 필명이었다.
데시데리우스는 갈망(desire)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인 데시데리움(desiderium)의 변형이고, 에라스무스는 '사랑받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라스미오스(ἐράσμιος)의 변형이고, 로테르다무스는 네덜란드 도시인 ' 로테르담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형태이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쎄네파



바리새인(Pharisees)과 사두개인(Sadducees)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리새파


“바리새(Pharise)”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Pherushim)”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헬라)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헬라시대에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유 야훼 신앙이 점차적으로 약하여 지는 것을 우려하여 모세오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함을 보였던 유대교의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BC 135년경, 마카비 전쟁 이후로 유대교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당파로 발전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토라)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의 결과로서 제사장 계층보다는 유대인 일반인들, 성전보다는 회당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움직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에세네파,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교의 3대 분파의 하나로서 예수님 시대에는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들이 많았고 경건한 지도자와 존경받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3명 이상의 바리새파 회원 앞에서 십일조 및 결례 규정과 같은 바리새파의 규범을 엄격하게 잘 지킬 것을 맹세하고 1년 동안의 시험 기간과 같은 예비 기간을 거친 뒤에 바리새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들의 직계 가족까지

회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바리새파의 규범이란,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사람과는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이후의 삶, 부활, 그리고 천사들 및 영들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정확하고도 엄격한 적용 규칙들, 곧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도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의식상 부정을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엄격하게 피했습니다. 제사의 정결 문제나 음식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활약하였던 다니엘은 이러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적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며, 헤롯왕 시대에는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던 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강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헬라 시대에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던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지켰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248개는 긍정적이며 365개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첨가되어 많은 보조적인 율법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이러한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던 조항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련된 조항만 해도 39개나 되었다).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던 바리새파 율법학자는 “샴마이 파”로 보이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 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제사와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이들에게 예배란 피의 제사(성전의 제사장이 드렸던 예배)가 아니라 기도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이외의 예배장소로서 성전과 분리된 회당(Synagogue)을 많이 발달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대교의 중심이 된 회당을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김으로 발달시켰으며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운동이었던 바리새파의 활동 시기는 AD 2세기에서 AD 3 세기까지 이어졌고 바리새파는 변화하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성서해석에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유대교를 보존하고 전수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회당 교육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일은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AD 70년 유대사람들의 로마에 저항하는 폭동이 있었을 때 로마에서는 티투스 장군을 선두로 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성전이 없는 유대교로 변화되었고, 정치적 지배 세력을 지지하며 주로 권력층에 속하였던 제사장 그룹이었던 사두개파는 성전이 무너지면서 자연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력항쟁을 지지하던 젤롯파는 이스라엘이 패망하게 되면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종파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게 된 바리새파는 이후에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고, 성전 없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형성하여 유대교의 중요한 종파로 남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초기 기독교도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회당과 유대사회에서 축출하고, 추방하였으며, 기독교 전파와 형성을 유대교의 위험요소로 인지하여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약성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의 대부분은 반기독교, 반그리스도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생(Born Again)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체포하려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자신의 새 무덤을 내어 주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바리새인으로 알려졌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개파


BC 2세기경부터 AD 66-70년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종파가 사두개파입니다. 그 사두개(Sadducees)라는 이름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삼하8:17, 왕상2:35)”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을 편애하였으며, 율법해석에 있어서도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그에게 충성하였던 친인척들,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부유한 유대 귀족 가문들과 연합하여 성전을 관할하였는데, 이를 위해 성전에 “수호장”(성전 맡은 자, 행 4:1)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의 자치 사법기구였던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 왕궁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사두개인들이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지배한 것은 엄격한 금욕적 율법주의를 따르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절기에 성전예법이나 정결법 등과 같은 율법해석에 있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의견이 다를 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의 관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율법, 즉 기록된 성경(모세5경) 만을 인정하였지만, 이를 해석한 서기관들의 전승 기록과 장로들의 유전 율법들은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당시 유대의 보수적 기득권층을 대변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육신의 부활과 사후심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 등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정치적, 물질적 실리주의자들로 이들의 관심은 오직 현재 그들이 당면하고 있던 현실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악과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힘 안에 있으므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분별없음으로 인해서 불운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운명”)을 인간 역사에서 배제하고, 인간의 존재와 복을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만 제한시켰으며,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 성서에 예수님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만났던 사건을 마태복음 22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박히기 전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낼 때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서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2:24~28) “선생님, 모세는 ‘남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아내를 자기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일곱째까지 첫째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결국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 모두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찍 죽은 일곱형제의 예를 들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은 후에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그 동생들이 후사를 잇게 하여야 하는데 그의 형처럼 후사가 없이 죽게 되어 모세의 법에 따라 계속하여 그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30) “부활할 때에는 누구도 장가가거나, 시집 가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될 것이다.”

(누가복음 20:34~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장가가고 시집간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살 자격이 인정된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다시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바리새인 중의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대답에 감명을 받아서 칭찬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눅 20:39) “율법학자 몇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신약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마 3:7 ; 16:1-12), 많은 관점의 차이와 반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항상 연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대하여서 함께 힘을 합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과 의견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로 성경에 그리스도인이 된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행 15:5 ; 빌 3:5) 그리스도인이 된 사두개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의 한 종파였던 사두개파는 AD 66-70년 사이에 성전이 무너지면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비교



















“율법”에 있어서 바리새파는 기록된 율법인 모세5경과 더불어 구전되어온 율법도 인정되었지만 사두개파는 오직 기록되어진 율법인 모세5경만 인정되었습니다.


자유의지와 예정”에 있어서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예정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예정은 없다고 믿었으므로 모든 행동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의 생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따라서 영혼은 상과 벌을 내세에서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세에 받게 되는 벌은 영원한 지옥이며 영원한 상은 부활과 영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영혼불멸설을 부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배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지 부활과 영생이라는 다른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사”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였습니다.

성서의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결법”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모든 유대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회당을 그들의 근거지로 하였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는 율법을 준수함으로만 유지된다고 믿었던 반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Messiah)관”에 관하여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설(到來說)을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시딤(거룩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헤브라이즘이 종교의 순수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이상주의적이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제의(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만 보장된다면 어떠한 정치 체제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하는 실용주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제휴한 유대인의 중류계급인데 비하여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적 귀족계급이었으며 성전과 제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권력과 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계급이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조세프스는 바리새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공동체와 조화로운 관계를 창출해 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야비했으며 그들의 동료와의 대화에서 외국인(이방인)에게 하듯이 무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War 2.166)


에세네파와 셀롯(열심)당


“에세네”라는 명칭은 “경건한”, “거룩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특별히 거룩하다거나 경건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오실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신비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896년경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사독 문서들”이 에세네 집단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에세네파들은 이러한 유형의 정보를 적절한 시기까지 비밀로 간직할 것을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을 “마스킬림(지혜로운 사람)” 혹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혼란기에 유대인들을 인도할 자들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에세네파들은 멀리 떨어진 광야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았으며, 또 다른 에세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정결한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서들은 (즉, 사해사본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에세네파에 의해서 기록한 문서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실함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해 옆에 있는 쿰란 공동체 유적지



에세네파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공동체생활을 하던 유대교의 한 사조였습니다. 에세네파가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정착지가 쿰란(Qumran)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종말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와 격리되려는 경향을 보였던 종파입니다.


AD 70년에 있었던 유대항쟁의 와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궤멸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 공동체의 유적에서 현존하는 구약성서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이 1947년 베드윈 목동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사본들은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직도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실제로 에세네파인 사람들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몇몇 점의 문서들이 현재까지 잘 알려진 에세네 가르침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사두개파는 제사장 계층으로 세속적 권력에 깊이 빠져 있었고, 바리새파는 제사, 십일조, 경건 등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속사람의 변화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종교적 외형, 체면 등을 중시하였으며, 헤롯 당파는 세속적인 권력을 잡은 헤롯 왕권을 지지하고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당(셀롯당)은 당시 로마 지배세력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당시의 유대교적 삶으로부터 퇴각한 은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BC 130년부터 AD 70년경까지의 시기에 광야에서 고립된 집단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에세네인들은 광야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였던 종파였습니다.

에세네파는 세속과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세네파 가운데 여러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쿰란이라는 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한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는 다른 어떤 공동체 보다 엄격한 율법공동체였습니다.

쿰란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정결의식을 거행했으며 태양력을 사용하는 절기들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오시게 될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열심당 (Zealots)


열심당(Zealots)은 AD 1세기에 유대교의 영향력이 있는 당파였습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침공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소원이었던 이스라엘의 회복의 소망을 여지없이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어떤 집단들이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대항하여 침략군들을 격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게 된 열심당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민족적이고 애국적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을 선동하였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열심당 지도자는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였습니다. (행 5:37)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칙령으로 인하여 모든 유대 사람들이 호적을 하도록 하였을 때,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가 로마에 반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어떤 다른 나라의 세력에 의해서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격분하였던 것입니다.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것이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투쟁의 시작이었다고 관찰했는데, 이러한 투쟁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종식되었던 항쟁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AD 52-60) 열심당들은 “시카리”(Sicarii, “단검 사람들”)라고 알려진 급진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시카리”는 축제 동안에 군중들 틈에 섞여 있다가 그들의 품속에 숨겨온 단검으로 로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반역자라고 간주하여 찔러 죽이는 일을 자주 저질렀습니다.


AD 70년에 있었던 폭동을 진압하러 왔던 로마군대와 싸움을 하는 동안에 (AD 66-70) 그들(시카리)은 “마사다”에 있는 옛 유대의 요새로 도피해서 그 곳을 본부로 삼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2년 후까지도 저항하기를 끊이지 않았던 “마사다”를 로마 군대가 포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의 손에 잡혀 죽느니보다는 자결의 길을 택했는데, 자결한 숫자는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960명이었다고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항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사다 요새



유다는 비느하스(Phinehas), 엘리아, 마타디아스(Mattathias)에 의하여 세워진 열심의 전통을 따르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때문에 열심이라고 자신을 불렀습니다. 유다는 약속의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지배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이사(시져)에게 세금을 내야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고 대답을 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막 12:17)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던져진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의 배경이었습니다.


이들은 혁명적인 행동으로 새로운 메시아 왕국의 건설을 꿈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도 이전에 이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안 사람 “시몬”입니다. “가나안 사람”으로 번역된 “카나아니아”라는 아람어는 “셀롯 당원(열심 당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15:7)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났던 바라바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5:7)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살인을 저지른 폭도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의 전례대로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했지만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요청하였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열심(Zealot) 당원이었던 바라바 대신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막 15:15)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인간의 각 구성요소와도 같은 각 종파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사용하신 것입니다. 각 당파(종파)들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유익을 위하여 일했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이루는데 일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을 고발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고, 그를 사형선고 하도록 한 자들은 헤롯 당파였으며, 그리고 열심당원이었던 바라바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풀려났던 죄수, 바라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구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환영하면서 열광하였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으며,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잘못 된 점을 찾지 못하여 풀어주려고 하였지만 제사장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소요에 두려움을 느껴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내어 준 바가 되었는데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통적으로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들의 커다란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사면하여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례에 따라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단된 예수를 풀어주기 위하여 빌라도 총독은 군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놓아줄까, 아니면 바라바를 놓아줄까?”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그들을 선동하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던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채찍질 교회의 창문의 스테인 그라스 그림, 풀려나면서 좋아하는 죄수 바라바(Jesus Barabbas).


마태복음에서는 이 “바라바”라는 사람을 “이름이 잘 알려진 죄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소요와 폭동을 일으켰던 정치범이며, 폭동 중에 살인도 저지른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원래 “바라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수라는 이름이 바라바라는 흉악한 죄수의 이름과 함께 있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던 성서 사본가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들은 “바라바”라는 이름이 “바르 아바(아바의 아들, son of Father)”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아바”라는 이름은 당시에 존경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나 랍비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바르 아바”도 어떤 랍비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바”를 소개하기를, “그는 유명한 강도”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세기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때에는 “강도”라고 불렸던 죄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인 서민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는 “강도”들은 세롯(Zealot) 당의 한 멤버로서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던 상류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테러를 일삼으면서 강도질을 하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적용시킨다면 “홍길동”과 같이 “의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반 서민들은 비폭력 메시아로 자처하던 “예수 그리스도”보다 정의롭지 못하고 부패한 상류사회를 정면으로 대항하며 의적과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속 시원하게 활동하였던  “바라바”라는 의적강도를 예수님 대신에 풀어 달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항하여 테러를 일삼으면서 위험인물이었던 열심당원의 주요 인물이었던 “바라바”를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군중들이 원한다고해서 그렇게 손쉽게 내어 주었을 리가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아남게 되었던 “바라바”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가 나중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고 마침내 잊어지고 말았습니다.


에고 에이미(내니 두려워 말라) 마태복음 14:27, 요한복음 6:35. 48,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야훼 יהוה 여호와


  여호와(야훼의 히브리어)  요드-헤-와우-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을 물은 사람이 야곱, 모세, 마노아, 세 사람이다. 

야곱이 엉덩이뼈가 다치도록 밤새도록 주의 사자와 씨름(기도)하고 날이 새어 사자가 가려고 하자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가 자기의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고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서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났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그리고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탄생되고 하나님의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보내서 왔다고 해야 합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히브리어로는 “에예 아쇠르 에예”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는데, 영어로는 “I AM THAT I AM”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하였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에 “어찌하여 묻느냐?”라고 하며 대답하셨는데, 여러 가지 번역이 다 다르다.
우리말로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개역), ‘기묘자니라’(개정판)라고 했는데, 영어성경들은 “seeing it is secret?” “seeing it is Wonderful?” “It is a name of wonder” 등으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이때도 이름을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내 이름은 기묘하니라.”라고만 하신 것이었다.


영어 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고 거의 모두 LORD로 되어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이름이 필요하지 않는 단 한 분이시다.

‘에고 에이미’는 “나는 …이다”라는 번역으로 요한복음에 7번 나온다.


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48, 51)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4. 나는 선한 목자다(10:10,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 빛, 구원의 문, 목자, 부활, 생명, 길, 진리, 포도나무시다.
즉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모든 것이시다.
“나는 …이다”의 ‘…’에 사랑, 소망, 믿음 등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을 넣고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믿을 수도 있다.
즉 “나(예수님)는 사랑이다”라고 넣고 그렇게 내 믿음대로, 성격대로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 5:43).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4).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요 17:26)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주소서.”(요 17:11-12) 


구약에서는 두려운 공의의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에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로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하셨다.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라고 하셨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탄은 ‘예수!’ 그 이름을 너무 싫어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누구나 다 외롭고 고달프고 괴롭고 힘들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불효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고 쓸쓸한 고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 악한 아버지도 있고 능력이 없어서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지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해 주실 수가 있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 내가 참포도나무이니 너희는 꼭 나에게 붙어있으라고 하셨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가지는 말라서 죽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꼭 붙어있어야 산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본 적이 없으나 너무나 잘 아는데 그것은 그분의 사상과 업적과 마음을 책에서 읽고 감동을 받고 그 이름을 알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이름이 없다면 그 업적과 사상을 알 수가 없고 구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는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하나다.
그런데 이름이 다르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이시고 그분이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고 그렇게 하시려고 오셨고 공의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 이름 예수, 너무나 좋은 나의 아버지, 당신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나요?
그 이름을 가지셨나요?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 누구를 부르다가 갈 것인지?

오직 한 분 예수님을 부르세요. 그 분께 당신을 맡기세요. 남편, 아내, 자녀들을 그분께 맡기고 안심하세요. 그러나 살아생전에 꼭 그분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저 하늘나라에서 꼭 놀라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받으소서. 아직 늦기 전에 ...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말씀하신 "나는 ~이다" ( I am~)라는 말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히브리어 <여호와(야훼)>와 같은 뜻을 가진다. 즉,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가 된다.

 יהוה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 야훼 יהוה  여호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 중 "나는 생명의 떡이다." I am the bread of life. 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여러번 나타납니다.  여기의 '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ἐγώ εἰμι 인데 '에고 에이미'라고 발음합니다.영어로는  I Am~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요한복음 6:48)
 흔히 이 말씀들을 요한복음의 7가지  '나-말씀'( I-sayings)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누구이다라고  말한 부분이 7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7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영어성경은 NIV성경을 인용했는데 KJV도 마찬가지입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 : 35, 48)

Then Jesus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he who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John6:35]

I am the bread of life.[John6: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John8:12]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John9:5]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John10:7]

 
4. 나는 선한 목자다(10: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John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John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14:6]
 

7.  나는 참포도나무다(15:1)

"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John15:1]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이다"라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바로 "여호와-야훼" יהוה 라는 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4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있음!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 근거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야훼 יהוה 가 된 것이었습니다.

 

▶ (개역개정)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b)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c)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b. 70인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히> 나는 나다. c. 히> 나라는 분이)

▶ (한글 KJV)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나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니라.

▶ (KJV)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 (NIV)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구약성경 출애굽기 3:14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여호와-야훼- 아마 이 히브리 자음 4글자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한 글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으면서 히브리어 스펠링으로 말하자면 "요드-헤-와우-헤(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영어식으로 하자면 YHWH라는 자음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네 음절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이라고 부릅니다. 발음이 불분명합니다. 감히 발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야훼라고 (영어/Yahweh)라고 발음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יהוה

이 야훼 יהוה 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오랜 세월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으신 분, 존재하심 그 자체, 있으심, 누구의 설명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분.. 수많은 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어록에 바로 이 부분이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성경으로 알려진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 성경 ->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늘 나오는 이 70인 번역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B.C. 300년 경 시대조류에 맞추어 세계인들에게 알리고자 히브리인 중에서 뛰어난 랍비들이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모여서 당시 세계언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입니다. LXX는 70이라는 숫자의 라틴어 기호입니다. 70여명의 당시 뛰어난 히브리 석학들이 모여서 책임지고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70인 번역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통해서 구약성경을 알게되는 즉 구약성경 반포작업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 편집,추가과정이 있어 훗날 구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70인 번역 LXX 헬라어 성경의 출애굽기 3:14절에서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래는 70인 번역성경 원문입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다시 강조하여 싣습니다. LXX-70인번역을 한 최고의 지성 랍비들이 히브리어 '야훼'를 "에고 에이미"로 번역했습니다!

[출애굽기 3:14] και ειπεν ο θεος προς μωυσην εγω ειμι ο ων και ειπεν ουτως ερεις τοις υιοις ισραηλ ο ων απεσταλκεν με προς υμας


 ▶ LXX성경을 헬라어 원어로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셉츄어진트 http://bibledatabase.net/html/septuagint/

εγω ειμι =  יהוה

구약의 '여호와-야훼'를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가 된다는 사실과 요한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에 계속 이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언어 서술적 측면에서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는 영어로는 'I am'이라는 뜻으로서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야훼'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 것만은 아니고 일반적인 서술법에도 많이 쓰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고 에이미'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의 '야훼'가 같은 단어라는 이유 하나로 예수님의 신격(神格) 선언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상용어는 아람어를 쓰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이스어(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고 이 용어는 요한복음 저자의 헬라어 번역일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서 일반적 서술 중에 '에고 에이미'를 자주 인용한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분명히 그 의도를 담고 있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흔히 비판적 신학자 들이 말하는 대로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만들어 낸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분명히 선언하신 분임을 사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John8:24]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 KJV성경

[John8: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 NIV성경

윗 부분의 '내가 그인줄'이라는 말씀도 원어에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8: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인자를 들어올리는 그때에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나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노라.

[요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요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윗 부분의 붉은 밑줄 친 부분도 원문에는 모두 '에고 에이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εγω ειμι' 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야훼 הוהי 하나님이 됩니다.

즉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의도하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심에 대한 요한복음의 외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랍비나 사상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존경할 이유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세상엔 대단한 혁명가와 위대한 사상가와 랍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곧 이 '에고 에이미'를 생각하며 깨달은 진리였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롬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야훼(야웨, 히브리어: יהוה, 영어: Yahweh)는 하느님[1]의 이름을 일컫는[2]고대 히브리어 소리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탈출기) 3:1-14에 근거한 유대교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고유 이름이다.[3] 이전에는 히브리 글자에 모음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4 자음만이 남아 있다. 기원 1세기 이후에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미신적 전통이 유대인들에게 생겨나 발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의 정확한 발음은 잊혀지고 말았다.[4]

'야'에 대한 모음은 거의 확실한데[출처 필요], 여기에서 딴,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이름이 -야 또는 -야후로 끝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그리스어: Ιαβε라는 표기가 발견된다. (당시 발음법에 따르면 IPA: [jave]라고 읽게 됨.)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YHWH, YHVH, JHWH, JHVH라고 쓰고, 독일에서는 JHWH로 통일해서 쓴다.

[편집] 야훼와 테트라그라마톤

야훼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4문자 YHWH로 쓰여진 하느님의 고유 이름이며 정확한 실제 발음은 밝혀져 있지 않아 논란 거리에 있지만, 이 4글자 단어 자체는 테트라그라마톤이라고 부른다.[5] 유대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느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통치가 임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하느님"을 뜻하는 일반 명사 "엘로힘"으로 대체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 거룩한 이름은 발음할 수 없을만큼 너무 신성하게 치부되었으며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라는 낱말이나 이를 가리킬 때 하솀("이름")으로 불렸다. 그 밖에도 거룩한 이름을 뜻하는 솀 하메포라쉬라고도 불렸다. 6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 학자들은 아도나이나 엘로힘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YHWH의 발음을 모음 표기로 사용하였으며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의 기독교 학자들에게 채택되었다.[6]

19세기에 히브리 학자 빌헬름 게제니우스 (1786~1842년)는 초기 그리스어 사본, 신명에 대한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야훼"를 가장 사실적인 발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사마리아 전통에 이 이름의 발음을 보고하였다.[7] 그 결과 19세기와 20세기에 성경 학자들은 야훼라는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성경 학계에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6]

 

 

70인역성서 [七十人譯聖書, Septuaginta]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역(語譯) 구약성서.

본문
72명의 학자가 이 번역사업에 종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語) 원전의 ‘율법’ 부분을 가리키는데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다 ‘예언서’ ‘제서(諸書)’의 번역까지 포함시켜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번역된 고장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이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人)들의 요구에 따라 처음에는 BC 3세기 중엽에 ‘모세 5서(율법서)’가 번역되었고, 그뒤 약 100년 사이에 현재의 정경(正經)의 거의 전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성서 연구에는 물론, 언어학상으로도 중요한 자료인데, 신약성서의 문체와 사상을 연구하는 데 특히 귀중한 자료이다.

유래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본국에서 초청 온 72명의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70인역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과정에서 70인역의 번역과정이 예언자 모세가 야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는 과정에 유비되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72명이 번역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70인역이라는 말로 불리게 된다.

외경70인역 성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없는 헬라어로만 기록된 성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외경이나 제2 정경으로 불리는 이 헬라어 성경들은 70인역 성경에 처음부터 포함된 것은 아니다.

현재 기독교에서는성공회, 로마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회에서 교회사를 통해 형성된 전통에 따라, 외경을 제2 정경이나 준 정경으로 존중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을 교회력에 맞게 배열한 성서정과에도 집회서등의 외경이 일부 나온다.

대본70인역의 대본은 마소라와 다른 제2의 히브리어 본문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실제로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본문은 주목할 만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마소라 본문 비평가들에게 70인역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70인역이 번역된 것은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과 같은 과정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디아스포라 유대인) 2, 3세들은 더이상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국어인 헬라어로 된 성경이 필요하였다. 이런 필요에 의해 히브리 성경 또는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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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문헌들이 언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는지는 문헌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명확하지 않다.
집필 연대가 가장 오래된 모세 오경을 학계의 다수설인 4전승설의 분류법을 따라 구분하여 검토해 보아도, 헤브라이 왕국기 이전의 시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경을 이루는 대부분의 나머지 후기 전승 문헌(사제계, 신명계)들은 유다왕국 멸망 후 신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하에서 '하시딤'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에 이미 완성되어진 것도 있지만, 많은 작품들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에스라의 뒤를 잇는 서기관 계급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가 분봉왕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 후예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후기 구약 문서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약 문헌들은 특별한 저자가 모두 만들어 낸 산물이라기 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저술가/필사자에 의해 내용들이 조금씩 윤색, 첨가됨으로서 비로소 현재의 성서로서 완성되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신봉자였고, 국제화를 특색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를 그가 정복한 넓은 지역에 유행시켰다. 알렉산더의 이런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그가 정복한 지역들은 삽시간에 헬라화되었고, 유다인들도 이러한 헬라화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헬라 세계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이른바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또다른 분봉왕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산하였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혹독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 통치 아래의 본토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헬라화 되어갔고,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서 점차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전통적 유다교의 보존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고, 종교적 생존에 위기를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제사장과 랍비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종교적 문화를 온존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70인역의 탄생이었다.

BC 3세기 경 모세 오경의 번역을 시작으로 이후 수백년에 걸쳐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서, 히브리 원본 문헌의 존재 여부를 알기 어려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새로이 번역된 성서의 목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70인역은, 원래의 히브리어 성서보다 그 권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그것은 기나긴 외경의 경전성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70인역은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이방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이방 유다인들은 70인역을 그들의 일반적인 성서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도, 사도 시기에도, 사도 이후의 시기에도 70인역은 헬라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모세 오경을 제외하고서는 인정되는 성서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중략 - 얌니야 회의 부분)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 문구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유스티누스, 폴리카르포, 로마의 클레멘스, 이레네오등은 이 문헌들을 폭 넓게 성서의 말씀으로서 이용하였다.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간 목록이 다른 점을 놓고서, 이미 그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70인역의 성서는 본래 '모세오경(토라)'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초대 기독교의 교부들은 성서의 범위를 성문서와 예언서등의 전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교부들은 70인역의 번역 과정에 대하여 아리스테아스나, 요세푸스가 미화시킨 기록들을 더욱 더 미화시켜, 70인이 각자 번역한 성서의 결과물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고 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못지 않은 영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그 견해를 일치시켰다.

70인역은 초대 교회의 기독교 교리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얌니야 회의와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유다교가 기독교를 배척하자, 초대 기독교 교회는 더욱 70인역에 집착하였다. 대다수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70인역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당대의 히브리어 원문 성경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더라도, 복음 기자들과 사도들도 70인역 성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을 들면서 하느님의 섭리로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게 성서의 내용이 변형된 것이라고 우기면서까지 70인역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70인역은 유대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한 책인 구약 39권에 유대인들이 외경으로 분류한 7권을 모두 다 번역한 책입니다.

1. 외경이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을 천주교에서 제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ical)] 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이를 외경이라고 합니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왔으며 1977년에 한국에서 나온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 번역성서'(1977)에서, [토비트]•[유딧]•[에스델](제1경전 [에스델]의 추가부분)•[지혜서]•[집회서]• [바룩]•[다니엘](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 등 9권의 외경이 있습니다.

2. 외경과 정경의 결정 외경이 성립된 유대교에서도 외경의 권위는 처음부터 의심 받아 왔으며 정경과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외경을 구분하였느냐고 한다면 이는 유대인들이며 그 시기는 불확실합니다.

성립시기가 정경보다 늦은 외경은 원래 최초 성립 시기부터 정경과는 다른 대접을 받아 온 것입니다.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었고 외경은 이 때 공식적으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제키엘]• [잠언]• [아가]• [전도서]• [에스델] 등이 이때 함께 경전이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초기부터 외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권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가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제2경전은 천주교에서 정경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신학자가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 구별하여 별도의 부록으로 엮어 넣고 "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자 "외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책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현재까지도 개신교 가운데서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권수에 대하여 말하자면 먼저 얌니아회의를 아셔야합니다.
얌니아종교회의에 대해 설명하자면  A.D.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  즉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후에 뿔뿔이 흩어진 유다의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중해연안의 도시인 얌니아로 주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얌니아의 율법학자들은 로마 당국에 얌니아에 율법학교를 세우고 자기네의 종교생활을 보장해  줄 것을 특별히 탄원을 하여 허락을 받습니다. 결국 유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한 후 얌니아는 많은 숫자의 유다교 율법학자들과 율법학교가 있는 도시가 됩니다.

여기서 A.D 90년경(혹은 100년경)에 유다교 종교회의가 개최가 됩니다.
이 회의에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 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의 경전목록을 확정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새로운 확정은 아니고 기원전 400년경, (일설에 의하면 에스라에 의해) 일차적으로 확정된 목록을 그대로 재확인한 셈입니다.
이때 이 회의가 경전목록에 해당하는 책들을 확정할 때 적용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 히브리어로 저술된 책
나. 모세오경의 정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책
다. 저술장소가 팔레스티나 내부인 책
라. 기원전 400년, 에스라 시대이전에 저술된 책

이렇게 하여 얌니아 회의 이전까지 유다교에서 주로 성서로 사용하고 있었던 70인역 성서(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부 책들을 유대교 경전목록에서는 제외시킵니다.
이 제외된 책들이 소위 말하는 가톨릭의 제2경전입니다.
가톨릭은 70인역 성경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유다교의 이 결정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즉 얌니아회의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약경전에서 차이가 확정되고난 후 중세에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부터 갈려 나올때 개신교에서는 이 얌니아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개신교 구약성경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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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고에이미'란 '나는 ......이다'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최초의 '에고에이미' 선언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냐고 모세가 묻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WHO I AM" (출 3:14)


'나는 곧... 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십니다. 


'에고에이미'는 바로 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선언하시는 말씀이 바로 '에고에이미'인 것입니다.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이 있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2.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3.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4.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와 함께 요한복음에는 또한 일곱 개의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 개만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표적들을 '에고에이미'의 예증이요 예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선언을 일곱 개의 표적들과 연결하여 보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일곱 개의 표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2:1-12)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 (4:46-54)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5:1-9)
  4.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 (6:1-15)
  5. 물 위를 걸으신 표적 (6:16-21)
  6.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신 표적 (9:1-7)
  7.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1-44)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요,
일곱 개의 표적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요, 그로 인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고에이미' 선언들을 통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 우리가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에고에이미' 선언과 표적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7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7번 사용된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게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3. 나는 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로마서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로마서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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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 God's Mind & Man's Mind(마태복음 16:2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23) 
God's Mind & Man's Mind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But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 stumbling block to Me; for you are not setting your mind on God's interests, but man's.

(도입 이야기)

스토코프스키(Stokovsky)는 런던 출생의 폴란드계 교향악단 지휘자로 유명하다.
그는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1912년~1936년 까지 필라델피아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가 어느 날 베토벤의 오버츄어(overture)란 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 곡은 연주 도중에 무대에서가 아니라 관중석 뒤쪽에서 트럼펫 솔로 연주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일종의 깜짝 연주인 것이다.
스토코프스키는 멋진 폼으로 신나게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관현악단은 우렁찬 화음을 만들어냈고 이윽고 관중석 2층에서 트럼펫 연주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지휘자는 관중석 쪽으로 획 몸을 돌려 트럼펫 연주자에게 연주 시작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선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휘자의 얼굴은 순간 불을 퍼부었다.
결국 그날의 관현악 연주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럼 트럼펫 연주자는 어찌된 것일까?
그는 엉뚱한 봉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는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던 수위가 트럼펫을 들고 관객석 뒤로 올라가는 연주자의 팔을 뒤로 비틀어 꼼짝도 못하게 하면서 의기양양해 있었다.

“이 미친 녀석아 !
네가 오늘 연주를 방해하여 망치려고 작정한게지 어림도 없다.
이런데서 나팔을 불도록 내가 그대로 버려둘 줄 알았니?”
수위는 자기 나름대로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을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그날의 연주를 망쳐버린 장본인은 바로 그 수위였던 것이다.

수위는 수위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주회를 위해서는 수위가 한 일은 결코 칭찬 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수위가 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러나 수위라는 자리에서 보면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소통이라고 하겠습니다.

(전개 이야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시다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예,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던데요.”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칭찬하셨다.

1. 바요나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
2. 네 이름을 이제부터 베드로라고 부를 것이다.
3.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4.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쇄를 주리니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 열리고,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히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곧바로 예수께서 비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을 예고하셨다.
그러자 이에 조금 전에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주님께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심하게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분간하지 못했다.
주님을 감동시킨 탁월한 신앙고백으로 반석이라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순간 사단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던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처럼 가깝다.
일 년 52주 휴가도 반납한 채 교회에서 땀 흘려 봉사하며 일하는 성도들이나 교단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들 중에 애초부터 사람의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너도나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뼈 빠지게 열심히 일 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그 일은 결국 문제만 남기고 말게 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할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적용을 위한 이야기)

일이란 영어 단어에서 work가 아니라 mind라고 합니다.
일을 마치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

참조 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21절), 사람의 일,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입니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Chrysostom).

일 -  5426. 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생각을 가지다
발음  / 포르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5424. φρήν, φρενός, ἡ
1. 생각,  2. 이해,  3. 고린도전서 14:20
발음  / 프랜(phrēn)
어원 /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고전 14:20).
신약 성경 / 2회 사용

예수를 바르게 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요한복음 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Therefore they said to Him, "What shall we do, so that we may work the works of God?"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has sent.


예수를 바르게 잘 믿으려면?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로마서 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역대상 24:5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이는 성소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가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도 있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도 있음이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전도서 11:5
바람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예수님은 벳새다 마을의 빈들에서 5,000명 이상의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특히 누가복음 9장 11절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전에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며,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무리를 배불리 먹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와 다르게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여 다시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찾을 때 당시 유대인처럼 먹을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찾는 것이 우리의 물질적인 복과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시 유대인이 예수님을 찾았던 목적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그 말씀을 듣고 무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 6:28) 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명백히 밝혀 주셨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피스튜에테”라는 단어로 지속적인 믿음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며,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거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사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하였다(행 22:3-4; 빌3:5-6).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고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이처럼 예수님을 찾지만, 그것이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 또는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동행일기 제자훈련인 “With Jesus Ministry” 운동을 하는 유기성 목사는 설교를 통해 “조심스럽지만,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다. 또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해도, 주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있다면 무슨 만족이 있겠나”라며, “주님이 낯선 분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면 이보다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일들은 우상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일이 진정한 하나님 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10:41-42에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이나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하거나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상이 있다고 한 것은 어떤 일을 한 것보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하나님께 의미 있음을 말해 준다.

헨리 블랙바기 목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동참케 하시는지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쳐 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하나님은 자녀와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알리시고 초청하신다는 내용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은 자기 일을 도와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여 천동설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주권자 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알아 그분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셔서 역사하시고 당신의 일에 사람들을 참여시킬 때에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길을 아는 것이 필수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해지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그분을 계속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을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빌 2:13).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이유이다. 스바냐 3장 7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말씀하시는데, 자녀가 하는 일로 인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분이심을 알려 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예수님께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무디(D. L. Moody)는 “인간은 깨어진 그릇과 같으므로 계속 충만하게 되는 방법은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 깨어진 그릇을 가져다 놓는 방법밖에 없다.”라면서, 깨어진 존재 같은 우리가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성령님을 의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는 관계 회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칼빈은 회개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로 속죄와 중생의 체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히 8:12; 10:17). “기억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와 또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죄의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회개와 믿음은 회복된 관계로 귀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스스로 쌓아 올린 업적도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Jesus).
요한복음 6:29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Jn 6:29, NIV) Jesus answered, "The work of God is th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야”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봉사, 전도와 선교만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 (고전 12:3)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음은 지적동의나 신념이 아닌 관계이다.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며 동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음 날도 예수님을 찾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바다를 건너지도 않으신 예수님이 어디에도 없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와서까지 예수님을 만납니다.
참 열심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를 고치시고 5000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신 분이라면 개인적으로는 건강 걱정이나 생계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적으로는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 정치적∙민족적 해방 왕으로서 이스라엘에 풍요와 영광을 가져오는 부푼 꿈에 열렬히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표적을 보았지만 표적이 의미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건지 묻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배부름, 썩을 양식에 관심이 있었고 영생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 자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실지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란 율법을 준수하며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인정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행위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신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를 통한 ‘자람’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영접함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말씀의 순종과 삶의 성숙과 성화로 그리고 마침내 영생의 영광인 영화로 이어지는 성도의 신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과연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요? 유대인들처럼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다녔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떡을 구하며 헤매는 모습은 없는지요?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이후 기적 자체만을 구하다가 많은 수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납니다(요6:66).

무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며 축복해주시는 것은 아닌가 해서,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요? 반대로 열심히 봉사한 만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이 땅의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갚아 주실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부활



예수는 죽은 후에 부활한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죽은 후에 어떻게 될 지 궁금해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도 세상을 떠난 후에 그를 다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죽고 나면 그렇게 멋진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죽음은 모든 의식이 종말하는 것일 뿐일까요?

예수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삶이 끝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놀라운 주장을 했습니다. “내가 부활이며 삶이다. 나를 믿는 자는 다른 이들처럼 죽더라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증인들에 따르면 당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3일간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거의 2000년이란 시간동안 희망을 가진 이유가 이러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 후에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신론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몸은 썩겠지만, 내 정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1] 러셀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땅에 묻힌 후에 살아있는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수를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식사도 같이 하고, 몸에 손을 대보기도 했으며 40일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된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확실한 증거가 존재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독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정말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 온 것이라면, 자신에 대한 주장, 삶의 의미와 죽음 후의 운명에 대한 말이 모두 사실이 되는 셈입니다.

예수가 정말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 온 것이라면, 예수 외에는 삶의 의미와 죽음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근본은 거짓이 되는 셈입니다. 신학자 R.C. 스프라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신의 힘으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다른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갖지 못한 자격을 증명한 것입니다. 부처도 죽었습니다. 마호메트도 죽었습니다. 모세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살아있습니다.[2]

여러 회의론자들은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회의론자들 중 한 명인 존 맥다웰은 부활의 증거를 찾는 데에만 700시간 넘게 노력했습니다. 맥다웰은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가해진 가장 사악하고 비열하며 비정한 거짓이거나,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사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3] 후일 맥다웰은 자신이 쓴 고전 “판단이 필요한 새로운 증거(The New 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에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환상적인 사실일까요? 아니면 사악한 거짓일까요? 그 답을 얻으려면 역사상의 증거를 살펴보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조사한 회의론자들이 직접 발견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냉소주의자들과 회의론자들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들이 증거를 공정하게 평가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고 인정했습니다.[4] 역사학자 조셉 캠벨은 자신의 PBS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증거도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5] 지저스 세미나(Jesus Seminar)의 존 도미닉 크로상과 같은 다른 학자들도 캠벨과 동의합니다.[6] 이러한 회의론자 중에서 자신의 관점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한 회의론자는 냉소주의자들과 반대로 증거에 관심을 갖습니다. “회의론자란 무엇인가?(What is a Skeptic?)”라는 회의론 전문 잡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회의론이라 함은… 이성을 모든 생각에 적용하는 것이며, 그 예외가 되는 “성스러운 소”라는 개념은 절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회의론자들은 어떤 현상이 실제이거나 어떤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습니다. “회의론자”라는 말은 즉, 반드시 설득력있는 증거가 제시되어야만 믿는다는 뜻입니다.”[7]

러셀이나 크로상과 같은 회의론자와 달리 진정한 회의론자 중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일 수 있는 이 조사의 내용과, 증거를 분석한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정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까요?

자기 예언

예수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배신당하게 되며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살아 돌아온다고 말했습니다. 계획 치고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무슨 이유였을까요? 예수는 청중의 요구에 따라 공연을 하는 엔터테이너가 아니었으며, 그 대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진정한 메시아였음을 증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서학자 윌버 스미스는 예수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후 3일 만에 살아나 죽은 자들 사이에서 돌아온다는 말을 했을 당시 예수가 만약 자신이 살아날 것임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제자들의 헌신을 더 오래 기대했다면 이는 바보나 했음직한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도 감히 그런 말을 한 경우가 없습니다.[8]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이미 명확하게 제자들에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대로 사기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진짜 죽었다면) 살아나기 전에 어떻게 죽었을까요?

끔찍한 죽음, 그리고. . . ?

브레이브하트(Braveheart), 로드 워리어(Road Warrior) 등으로 유명한 배우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다면 예수의 마지막 생전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에 빨간 필터를 대고 찍는 게 나았을 정도로) 영화의 못 보신 장면이 있었다면, 신약의 아무 복음서에서 뒤쪽을 펼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는 예언한 대로 제자 중 한 명인 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했고 체포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주재한 모의 재판에서 예수는 반역죄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형을 선고받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예수는 로마식으로 끈이 9개 달린 채찍으로 처참히 맞는데 이 채찍에는 뼈와 쇳조각이 달려있어 맞는 사람의 살을 찢을 정도입니다. 몇 번이고 주먹과 발로 맞고 심지어 침까지 맞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의 집행관은 나무망치로 무거운 쇠못을 예수의 손목과 발에 박습니다. 마지막으로 땅에 구멍을 파고, 절도죄로 잡힌 도둑들이 매달린 십자가 사이에 예수의 십자가를 넣었습니다.

예수는 이 상태로 약 6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 즉 유월절에 양을 제물로 바치는 그 시간에(뭔가 너무 상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아람어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고 숨을 마쳤습니다.[9]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10]

그위 권세와 생명의 기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암울한 깊은 어둠 속에서 꿈이 깨졌습니다. 전 영국 대법관인 헤일셤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비극은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고, 완전히 도덕적이며, 금욕적면서 어두운 인물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점이 아닙니다. 이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바로 젊고, 생명력이 넘치며 기쁨이 가득한 청년, 바로 생명 그 자체의 구주였으며, 온전한 기쁨을 찾아 사람들이 따랐던 정말로 사람을 끌어 당기는 존재였다는 것이 비극입니다.”[11]

빌라도는 십자가에 박혔던 예수의 몸을 땅에 묻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피와 물이 섞여 흘러나오는 모습을 통해 예수가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는 보통 피를 흘리지 않지만 인간의 심방은 멈춘 후에 피를 저장해 두며 바깥쪽에 있는 주머니는 수심낭이라 불리며 혈청이 담겨있습니다.”[12] 예수가 죽은 것으로 확인되자 그의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져 아리마데의 요샙의 무덤에 묻혔습니다.옆에 있던 로마 병사들이 무덤을 봉인했으며 24시간 감시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J. P. 모어랜드 박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혼동에 빠졌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신이 보낸 존재임을 더 이상 믿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라면 메시아가 목숨을 잃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 운동이 완전히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13]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로마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승리했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운동이 멈춘 것이 아니었으며, 기독교도 오늘날 세계 최대의 종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묻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피터 스타인펠즈는 예수가 죽고 3일이 지난 후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처형된 후 그 추종자들은 혼란스러워하고 겁먹은 모습에서 갑작스런 변화를 겪었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예수와 앞으로 나타날 왕국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결국 이들은 왕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었을까요?”[14]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알려진 사건에 대해서 타당한 설명은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으며, 모두 신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 “부활” 자체가 음모였습니다.

• 제자들은 환영을 보았습니다.

•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 실제 사건입니다.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 지 한 가지씩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진짜 죽었을까요?

“말리는 완전히 죽은 것이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Christmas Carol)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디킨스는 곧 벌어질 일의 초자연적인 성격에 대해 독자가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기 TV 프로그램인 CSI의 등장인물이 부활에 대해 조사한다면 증거를 짜맞추기 전에, 실제로 시체가 존재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간혹 시체인 줄 알았던 사망자가 영안실에서 몸을 움직이고 결국 살아났다는 뉴스도 보도됩니다. 그런 일이 예수에게도 일어난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음에도 생명을 유지했으며 무덤 속의 차갑고 습한 공기 덕분에 살아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의학적 증거와는 맞지 않습니다. 미국 의학 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회보에서는 소위 말하는 “기절 이론”이 말도 안되는 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역사 및 의학적 증거에서는 예수가 죽었음이 명백합니다. 예수의 오른쪽 갈비뼈 사이를 찌른 창은 오른쪽 폐을 뚫었을 뿐 아니라 심낭과 심장도 뚫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15] 하지만 이 이론에 대해서도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회의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의견을 들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비기독교 역사학자가 만든 보고서에서 그러한 의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언급한 비기독교 역사학자는 3명이 있습니다.

먼저 루시안(c.120 – c.180)은 예수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힌 궤변가(철학자)라고 불렀습니다.[16]

요세푸스(c.37 – c.100)는 “이 때 현자인 예수가 나타났는데 그는 놀라운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우리 중에 이끄는 자들은 예수를 비난했으며, 그를 사랑한 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였다”라고 적었습니다.[17]

타키투스(c. 56 – c.120)는 “그의 이름이 유래한 크리스튀스(Christus)는 우리의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18]

이는 마치 고문서 기록실에서, 1세기의 어느 화창한 봄날에 ‘예루살렘 포스트 정도의 이름을 가진 신문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사망했다고 1면 기사 처리한 걸 발견하는 느낌입니다. 상당히 잘 찾아낸 결과물이며, 마무리도 잘 된 듯 합니다.

사실 기독교인이나 로마인 또는 유대인이 남긴 역사 기록 중에서 예수의 죽음 또는 땅에 묻혔던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경우는 없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회의론자인 학자들도 예수가 죽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유명한 회의론자인 제임스 테이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가 로마 정부의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했음을 고려한다면 예수의 사망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19] 회의론적으로 악명높은 지저스 세미나의 공동 설립자인 존 도미닉 크로상 역시 예수가 실제로 살았으며 사망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점은 어떠한 역사학자의 말과 같이 확실합니다.”[20]

역사적 및 의학적 증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앞서 말한 다섯가지 중 첫번째는 잊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예수는 분명히 죽은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빈 무덤의 문제

진정한 사학자라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이미 죽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학자들은 예수의 몸이 어떻게 무덤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영국의 언론인인 프랭크 모리슨 박사는 처음에는 부활이 거짓이거나 사기라고 생각하고 이를 증명하는 책을 쓰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21] 이 책은 유명해지긴 했지만 모리슨 박사의 의도와는 다른 이유였습니다.

모리슨은 먼저 빈 무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무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한 의원인 아리마데의 요셉의 무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공의회 의원의 자리는 마치 록 스타와 다름없었습니다. 공의회 의원이 누구인지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실존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무덤은 잘 알려진 곳에 있었을 것이며 찾기도 쉬웠을 것이므로, 예수가 “묘지에서 사라졌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모리슨은 “빈 무덤설”이 거짓임에도 왜 예수의 적들이 이를 허용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예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그 즉시 모든 이야기가 틀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으로 예수의 적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며, 이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웨스턴 미시건 대학의 고대사 교수인 폴 마이어 박사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모든 증거를 면밀하고 공정하게 검토했다면, 예수가 묻힌 무덤이 사실 부활절의 첫 날 아침부터 비어있었다는 결론도 정당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 이야기는 허구가 됩니다.”[22]

유대인 지도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잘 훈련된 4명에서 16명 사이의 로마 병사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쉬 맥도웰은 이 병사들이 일반적인 군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경비병들이 잠들거나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랬음을 나타내는 역사적 근거가 다수 있습니다. 이 병사들은 옷이 벗겨졌으며, 이 옷을 태운 불에 산 채로 화형당하거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박혔습니다. 이 경비병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으며 어떤 원인으로든 실패를 두려워했습니다.”[23]

누구라도 이 경비병들 몰래 2톤이나 되는 묘비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묘비는 치워졌고, 예수의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예수의 몸이 어디서든 발견될 것이었다면 그 적들은 즉시 부활이 거짓이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법정 변호사 협회(California Trial Lawyers Association)에서 회장을 맡았던 바 있는 톰 앤더슨은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니만큼 단 한 명의 역사학자나 증인 또는 반대주의자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다고 기록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부활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역사의 침묵은 너무나 조용합니다.[24]

그리하여 실제적인 증거가 없으며, 이 알려진 이의 무덤이 비어버린 상태에서, 모리슨은 예수의 시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증거를 확실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묘지 도굴?

모리슨은 계속해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지 동기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부활이라는 건 시체를 도둑맞은 사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사학자 폴 존슨은 자신의 저서 “유대인의 역사(A History of the Jews)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갈수록 많은 이들이,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25]

무덤은 정말로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체가 없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이 깜짝 놀랐을까요?(게다가 자신들이 정말로 시체를 훔쳤을 경우에도)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이들은 슬퍼하거나 몸을 숨기지 않고 살아있는 예수를 보았다는 주장을 두려움없이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증인의 말에 따르면 예수가 갑자기 추종자들의 눈앞에 실제로 나타났으며, 여자들이 먼저 보았다고 합니다. 모리슨은 왜 공모자들이 여성을 음모의 중심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1세기 당시 여성은 권리나 개성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열악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리슨은 이 음모가 성공하려면 공모자들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 예수를 먼저 보았다고 묘사해야 했다고 추리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여성들이 예수를 먼저 만졌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빈 무덤도 먼저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제자들도 모두 예수를 10번 이상, 각기 다른 상황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증인들은 예수가 손과 발을 보여주고 만져보라고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식사도 함께 하고 이후 한 번은 500명이 넘는 추종자들 앞에 살아있는 모습을 나타냈다고도 합니다.

법학자인 존 워릭 몽고메리는 “서기 56년 당시 [사도 바울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난 예수를 보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살아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6ff.)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 퍼뜨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26]

성서학자 가이슬러와 튜렉도 이에 동의합니다.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 사도 바울은 증인으로 추정되는 명단을 제시했을까요? 그런 노골적인 거짓말로는 고린도서를 읽은 이들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27]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가 가이사랴에 모인 군중에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행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생명을 앗아갔지만 하나님은 3일 후 예수님께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0:39-41)

영국 성서학자 마이클 그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했음은 고대의 어떤 사건만큼이나 사실임이 입증된 일입니다. 부활이 실제라는 점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이란 불가능합니다.”[28]


일관성

증인들의 말이 모리슨의 회의론에 대해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역시 제자들의 행동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역사학자, 심리학자, 회의론자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역사적 사실은 그 전까지 11명의 겁쟁이에 불과하던 이들이 갑자기 모욕과 고문, 죽음까지 이기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자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지 거짓말을 하려고 몸을 바쳐서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까요?

911 테러를 감행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이 믿기만 한다면 잘못된 믿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거짓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위해 순교하려는 의지는 광기라 할 수 있습니다. 폴 리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실이라 믿는 것을 위해, 비록 그것이 실제로는 거짓이라 할 지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29]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살아있다는 진정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제자들이 거짓으로 밝혀진 사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부활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로 공모했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명예를 위해 굴복하지 않고 수십년을 지내는 게 가능했을까요? 모어랜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적 영달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하며, 특히 고난은 이익이 줄어들 때 더욱 그렇습니다.”[30]

닉슨 대통령 재직 시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척 콜슨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거짓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부활이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워터게이트를 통해 배운 사실입니다. 어떻게 깨달았냐고요? 12명의 사람들이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이 주장을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들 모두 그 때문에 매를 맞고 고문 당했으며 돌에 맞았고 감옥에도 갔습니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워터게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12명의 사람들이 연루된 사건이었지만, 이들은 단 3주도 거짓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열 두 제자가 40년 동안 거짓말을 계속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31]

이 남녀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리슨은 이 점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단순히 설명할 수 없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사실은 바로… 이 제자들에게서 강한 확신이 왔다는 것이며, 그 확신은 예수가 무덤에서 살아서 나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변화입니다.”[32]


제자들은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뚱뚱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엘비스 프레슬리가 던킨 도너츠 매장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난 밤에 외계인들이 뭔가 실험을 하고 있던 우주선에 끌려갔다는 생각도 합니다. 간혹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관점으로만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심란한 나머지 예수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강해져서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가능한 일일까요?

미국 기독상담자협회장을 역임했던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는 환영으로 인해 제자들의 행동이 급격하게 변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콜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환영은 개인적인 변화입니다. 그 특성상 한 번에 단 한 사람만이 특정한 환영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환영은 없습니다.”[33]

심리학자 토마스 J. 소어번에 따르면 환영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마음의 안정성을 가진 5백명의 사람들이 시각, 청각, 감각 등 다양한 느낌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결국 환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절대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34]

게다가 환영에 대한 심리학적으로 간절함이 너무나 강해서 마음에서 환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초기 교회의 주요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바울 두 사람 모두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기쁨에 대한 기대나 바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만났다는 주장을 너무가 강력하게 내세웠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경우 기독교에 대한 초기 탄압을 주도했기에 그의 변화는 예수가 부활하여 그에게 나타났다는 그 자신의 증언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환영 이론도 그다지 답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부활을 부정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있을까요?

거짓에서 전설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일부 회의론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한 두 사람의 거짓말 또는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전설은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면서 미화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능한 시나리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에는 3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 먼저, 전설은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여러 증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고대 로마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A. N. 셔윈-화이트는 부활에 대한 소식이 전설로 진전되기에는 너무 빨리 퍼졌다고 주장합니다.[35]

• 두 번째로 전설은 구전으로 발전하게 되며 입증이 가능한 현대 역사 문서와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은 부활이 있은 후 30년 내에 작성되었습니다.[36]

• 세 번째로 전설 이론은 빈 무덤이라는 사실 또는 예수가 살아 있었다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제자들의 신념으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37]

그러므로 전설 이론은 이 놀라운 주장을 부인하기 위한 다른 시도들보다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 않은 듯 합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실제로 역사가 바뀌었으며 그러한 변화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부활이라는 전설은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거대한 역사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까요?


기독교는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모리슨은 “어떻게 그런 작은 움직임이 로마 제국뿐 아니라 유대인 조직의 치밀한 통제를 넘어설 수 있었는 지”에 대해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승리했을까요?

모리슨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20년도 되지 않아 이 갈릴리 농부들의 주장은 유대 교회를 무너뜨렸으며…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했음에도 가장 큰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기독교는 도대체 어떻게 승리한 것일까요?”[38]

모든 점을 감안하고,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예수가 죽은 십자가 위에서, 제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도망갔을 때 무너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독교를 확고히 했습니다.

J. N. D. 앤더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한 무리의 패배한 겁쟁이들이 하루는 윗층 방에서 벌벌 떨다가 단 며칠 만에 어떠한 탄압도 막을 수 없는 집단으로 재탄생했으며, 이러한 변화를 말도 안되는 조작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심리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39]

놀라운 결론

전설, 환영, 부검상 오류 등은 모두 제외되었으며, 빈 무덤에 대한 확실한 증거, 예수의 부활을 본 상당수의 증인, 그리고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설명할 수 없는 변화와 세상에 미친 영향 등을 알게 된 모리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리슨은 다른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제목은 이렇습니다. 누가 돌을 움직였는가?(Who Moved the Stone?)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새롭게 내린 결론을 정리했습니다. 모리슨은 사건의 진실이 명백하게 나타날 때까지 단순히 일련의 증거를 하나씩 좇아왔습니다. 그가 놀란 점은 이 증거들로 인해 부활에 대해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회의론자였던 모리슨은 이 책의 첫 장인 “쓰이기를 거부한 책(The Book That Refused to Be Written)”에서 어떻게 해서 이 증거들이 자신에게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잘 알려진 길을 따라 숲을 지나려 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 도달한 것과 비슷합니다.”[40]

모리슨 외 다른 이들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회의론자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한 결과 인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존재조차 의심했던 C. S. 루이스의 경우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설득당한 경우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주 역사상 완벽하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항상 잠겨있던 문이 정말 처음으로 강제로 열린 것입니다.” [41]

부활에 대한 증거를 인정한 다른 회의론자들의 경우도 살펴보겠습니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교수

부활이 단순한 전설이라고 생각했으나 모리슨처럼 생각을 바꾼 이들 중에는 세계 최고의 법학자인 사이몬 그린리프 박사도 있습니다. 그린리프는 하버드 법대를 키워낸 인물입니다. 그는 3권으로 된 법학의 걸작이자 “법 관련 서적 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증거의 법칙에 대한 논문(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을 쓰기도 했습니다.[42] 현대 미국의 재판제도는 아직도 그린리프가 구성한 증거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하버드 재직 시절 학생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는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중 3명이 그의 증거의 규칙을 부활에 적용해 보라는 반론을 던졌습니다.

수없이 재촉을 받은 후에야 그린리프 교수는 학생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증거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사용한 그는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린리프 교수가 역사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예수가 실제로 무덤에서 살아 나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강력함에 할 말을 잃을 뿐이었습니다. 그린리프의 회의론은 인간의 역사를 뒤바꾼 사건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련의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행동이 변한 점은 가장 혼란스러웠습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제자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사실에 적용한 그린리프 교수는 결국 결론을 내렸습니다.

놀랍게도 입장을 뒤바꾼 교수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직후 일어난 사건들을 말해 주는 가장 좋은 설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명석한 법학자이자 이전까지 무신론자였던 그에게도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43]

그린리프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전도사의 증언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증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책의 결론에서 부활에 대한 진실을 찾는 이라면 공정한 자세로 증거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증거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편견이 없고 법정에서처럼 정직하게 증거를 검토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입니다.[44]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예수가 죽음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돌아왔다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삶의 의미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신께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예수 자신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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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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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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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 기도하고 예수님을 저의 삶으로 초대했습니다.
예, 기도하고 저의 삶을 예수님께 다시금 봉헌하였습니다.
아니요, 저는 이미 예수님을 저의 삶에 받아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