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주의와 복음주의 /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



기복주의와 복음주의

기복신앙이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 때문에 위태롭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기복신앙을 경계하면서도, 복을 얻고자 하는 신도들의 강렬한 욕구를 외면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에 그 의미를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이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창 12:2).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요구하는” 왜곡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신앙이 오히려 정상적인 신앙인 양 그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왜 교회가 나가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한 거름음 더 나아간다면 구원 받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자리에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비록 그 구원이 전적으로 저 세상 천국에서 실현된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고 저 세상 천국에 가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왜 나쁜 것인가?
“이 세상에 ‘나뿐’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기복신앙의 폐단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바로 이런 “나뿐”이라는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복신앙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결단코 떨쳐버려야 할 신앙양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목회자로부터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기복신앙으로 온통 뒤범벅이 된 듯하다.

기복신앙의 정체와 한국 교회의 실태

기복(祈福)이란 복(福)을 구하는 것이요, 신앙(信仰)이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복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풀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믿고 따르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결과적으로 목적은 복을 구하는데 있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 이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양태일 뿐이라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우려하는 기복신앙의 양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적”이라는 말과 “기복신앙”이란 말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발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 실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자신의 물질적, 육체적 복을 위해 비는 미성숙한, 더 심하게 말하면 천박한 신앙일 뿐이다.

여기서 미성숙한 신앙이란 자신의 건강, 재물, 출세 등만을 위해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을 말한다. “1일 3善이면 天福이 내리고, 1일 3惡이면 天災가 임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민중도교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의 무교적 민간신앙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신앙양태인데, 이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목적이 복을 얻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될 때, 그것은 바로 저차원적인 종교윤리가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저차원적인 윤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기복신앙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기복신앙을 자제하고 좀더 남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온통 복 받으라고 외치고, 부자 되라고 축원한다.

심지어 복 받지 못하고 부자 되지 못하면 신앙이 없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받아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 한국 교회의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는 이가 별로 없다.


이런 교회의 기복신앙은 외적 성장주의로 빠르게 치닫는다. 이 교회의 외적 성장주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한국 교회들은 크고 안정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회의 1순위는 언제나 “교회 키우기,” “교인 늘리기”에 집중되어 있다.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다.

이것은 교인수와 직결되는 문제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몰려들어야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의 토대 위에 큰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가 주일성수를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동시에 교인수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지려면 헌금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매우 확실한 담보가 아닐 수 없다. 그밖에 각종 헌금들이 교인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전도를 왜 하는가? 교인 늘리기 위해서인가? 교회 안에만 옹기종기 몰려있는 한국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무기력함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표현이다. 10의 1이 아니라 10의 3이면 어떻고 10의 5면 어떠랴. 하지만 왜 감사는 꼭 헌금(돈)으로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 초기에는 “날연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날”(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감사의 방법을 좀더 다양화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교회까지 덩달아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란 말이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 헌금(돈)을 드려라”로 들리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강조하며 걷어들인 헌금은 대체로 어디에 사용되는가? 역시 1순위는 제 교회 짓기에 들어간다. 한국 교회의 “교회건축 신드롬”은 교회 기복신앙의 결정체다. 이것은 교회당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도 교회당을 성전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구약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던 신앙이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모범인가?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로 대체되었다.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갇힌 하나님은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 교회는 바로 신자 자신들이요,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어디나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면 교회당이요, 예배당인 것이다. 
  


둘째,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기 때문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해,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양태가 아니다.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철새처럼 복을 장담하는 그런 신앙의 대상으로 옮겨다닐 것인가?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실 어떤 상급을 위해서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상주실 것을 믿으라고도 했다(히11:6). 그러니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대로 또 행한 만큼 충분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상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저급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인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면 보상을 기대하고 효도하지는 않는다. 그런 어른이 있다면 그는 미숙한 “어른 아이”일 뿐이다.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양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교회 건축헌금을 종용하면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만큼 확실한 투자는 없으니 힘껏 헌금을 하자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헌금은 가장 확실한 투자라니.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사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제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수표를 남발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는가?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달콤한 약속을 하신 분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한다(마13:23). 

셋째, 기복신앙은 복음의 정신과도 상극(相剋)되기 때문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 조건들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눅6:20),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이며(마5:1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모와 형제 자매도 버린 자(눅14:26)라고 했다. 반대로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요(막10:15, 마18:3, 눅18: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라고 했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경계한다(요일2:16). 오히려 예수께서는 영혼의 유익에 되지 않으면 눈도 빼고 손도 찍어내라 하셨다(마5:29-30). 자기 자신도 버리고 죽기까지 제자의 삶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재물/ 명예/ 권력)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복을 비는 것과 큰 고목 밑에서 복을 비는 것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세상의 잡신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기복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일 수 없다. 그러니 기복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해석에서 영적인 의미를 놓치고 문자적으로 집착하게 되며, 단장취의(斷章取意)하는 문제가 빈번하게 자행된다.


기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복신앙의 기도는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은 제 한 몸 잘 되기를 바라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분이시지만,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분은 아니시다. 결코 하나님은 차별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고통 당해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신앙이다. 내 아들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복적 기도는 다른 학생 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부모가 다 자기 아들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가 아닌 기복신앙의 기도는 당연히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기도, 이런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다. 통성기도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기도라는데 있다. 통성기도가 다 잘못된 기도는 아니지만, 대개 통성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원하는 것만 목청껏 외치다 말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기복신앙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어린 아이처럼 떼를 부리며 간구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이 형통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억압과 고통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웃 성도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교회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는 말든, 우리 교회에만 성도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 하나님의 기본 법칙, 서로 나누라는 명령을 파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되고, 내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다른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기복신앙은 은사 위주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착각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자기 희생과 섬김의 덕목은 어느 틈엔가 빠져버리고 만다.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를 내세우며 성도들을 혹세우민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3.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제자도 실천뿐!

1) 기복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딤후3:16).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누가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기복신앙은 누가 바로 잡아주는가? 평신도라도 나서야 한다. 아니 평신도가 나설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마지막 열매가 절제(갈5:23)라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그 밖에서도 절제의 미덕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행24:25; 고전9:25; 딤전3:2, 11; 딛1:8; 2:2; 벧후1:6). 절제신앙과 기복신앙은 반대말이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제할 수 없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는다.

2) 복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신 분이다. 심지어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분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재산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보상심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왜 우리는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위해 그토록 사력을 다해 간구하는가?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그의 제자가 가는 길은 제자도(弟子道)다. 제자도는 십자가의 길로 통한다. 그런데 이 길은 기복신앙과 전혀 무관한 길이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길이다. 과연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그보다도 먼저 우리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4. 마무리

언제부터인가 성경을 직접 읽을 줄 아는 젊은이와 의식있는 성도들이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감히 평신도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목사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 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 없는 종교, 맥빠진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목사의 설교에서 기복신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것인가? 그렇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신앙이다. 교회는 결단코 이 기복신앙의 늪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도 교회의 성도도 모두 기복신앙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기복신앙을 멀리 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에 대해서


교회용어 사전에서는 기복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 즉 신앙 대상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형통과 소원 성취와 입신양명(立身揚名), 무병장수와 자손 번영 등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초보적이고 현세적(現世的)인 신앙 행태를 말한다.”

  기복신앙은 자신이나 가족의 물질적인 충족(富)과 건강과 형통같은 욕망, 즉 세속적인 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종교를 너무 과다하게 믿는 형태를 말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무속종교나 불교등은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기복신앙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는 분명히 기복신앙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가 기복신앙적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답변하기 쉬운 주제가 아니며, 우리가 기독교의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에, 자칫하면 우리나라의 교회 체계나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미 뿌리깊은 기복신앙으로 치우쳤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필자는 기독교의 본질과 목적은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때로는 기복신앙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즉 가족이 아프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에, 혹은 사업이 어려울 때에 우리는 당연히 기도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느 목사가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일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없다" 혹은 "하나님은 어떤 병도 고쳐주지 않으며 가족들을 위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는 결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기독교는 기복적인 신앙을 상당히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복신앙적 형태가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질병의 신유나 귀신 축사를 강조하는 어떤 목사는 그러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으며, 예수님도 그런 사역을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일들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교회와 목사의 본질적인 사역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은 구원이며 영생이 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적 성향은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해온 요인으로서 ‘성령의 역사’나 ‘한국인의 기질’ 등의 이유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복신앙적인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부흥 집회가 기복적인 신앙체계를 갖춘 것은 6.25 전쟁 이후 물질적 궁핍감과 정신적인 공허감에서 비롯되기 시작해 1970년대 이후에 절정에 달했다고 학자들은 공감한다. 이런 토양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기독교의 집회 형태가 기도원, 부흥회 등이다. (물론 모든 부흥회나 기도원이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현재의 신앙체계는 그와 같은 방식이 비판을 받을 정도로 수준과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또 극단적인 기복신앙은 질병과 사고등 저주와 재앙을 가져다 주는 상대를 마귀로 인식하여, 마귀를 쫓음으로 축복을 찾는 것을 교회의 주된 임무로 여기게 되었고, 일부 교회와 기도원등에서 현세적인 축복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증거로 강조되었고, 헌금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상적인 행위로 강조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복신앙은 교회의 성장주의와 대형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기복적 신앙 위주로 설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소위 삼박자 구원과 같은 은사남용주의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번영신학이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집을 이사하거나, 사업처를 개업하거나, 차를 새로 사면, 무속신앙인들은 굿을 하는 대신에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려왔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무속신앙인들의 굿과 액땜의 의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는 어떤 궂은 일을 당하게 되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자는 기복적인 신앙 자체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 역시 자신과 사역과 가족의 평안과 건강을 위하여 항상 기도한다. 또한 우리가 기복신앙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 곳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12:2) 또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하셨다.(갈3:8-9) 또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육축까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신28:3-6)

사실 성경에는 복에 관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성경은 욥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끝까지 신앙을 지킨 욥에게 전의 소유의 갑절을 주셨으며(욥42:10)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욥42:13)

  그러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무조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너무 강조함으로서 자칫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과 목적이 간과되어지는 그러한 형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복의 형태가 성경적임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그저 현세에서 복을 받자고 예수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려하는 견해로서 올바른 내용이다. 자칫 질병을 고쳐달라거나 물질적으로 잘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무속신앙에서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따위의 저속한 주술적, 기복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께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와 동일시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체제였다는 것이 신약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복의 개념이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잘먹고 잘사는 그런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영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순교를 당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생(eternal life)을 받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어야 한다.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 기복신앙은 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목적과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 팔복은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적인 요소와 정반대의 것이 되어진다. 또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반대가 되는 조건들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는 자이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회평케 하는 자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마5:3-10)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하늘의 상이 클 것”(마5:11-12)이었다.


반대로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 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이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분리하여 이것을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구분한다(요일2:16).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을 나무라셨으며(눅12:34) 부자의 곳간에 쌓아둔 곡식과 물건도 그날 밤에 부자의 영혼을 찾아가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강조하셨다(눅12:19-21). 특히 예수님은 그 부자에 대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는자”(눅12:21)라고 정의하셨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반드시 어렵게 힘들여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어떤 행함과 노력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재물과 부, 육체적인 정욕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의 시험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의식주/ 명예/ 권력)을 단절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부와 육체적인 정욕을 추구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셨고(마19:24, 막10:25, 눅18:25), 하나님과 맘몬의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다.(마6:24, 눅16:13)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속주의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물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 주님보다 앞설 수 없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2-3)

  또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갈5:10)라고 바울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오직 복을 위하여 비는 것은 성황당에서 복을 비는 무속신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가 지나치게 되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가 된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기복만을 위한 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0-12)

  이러한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의 정욕을 위한 기복신앙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으며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내 가족과 친지의 어려운 상황과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신앙이 아니며(약5:14)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물질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점은 기복적인 축복이 나의 신앙과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신앙과 기도가 부족한 결과이며 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 케이스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억압과 고통과 질병과 가난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또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아니면 혹시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가정만을 위해, 나의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될 수도 있고, 내 교회가 더욱 부흥되기 위해 다른 개척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만이 더욱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직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는 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형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여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어느 극소수 교인은 어느 교회 목사가 혹은 어느 교회가 용하다 혹은 신통하다고 하며 교회를 옮겨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오직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다 건강하고 다 부유하며 다 복을 받는가? 만일 질병이 있거나 부유하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한 교인은 저주를 받았고, 혹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더욱이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형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간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혹간은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설교가 결코 될 수 없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하며(마13:23) 그 천국복음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셋째, 기복신앙은 은사 남용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혼동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이사로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존재로 이해하는 신비주의와 유사한 것이 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곧 내가 초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며, 그 능력이 나의 물질적인 축복을 돕는 방편으로 알게 되며, 영적인 은사가 그 증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간혹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일방적으로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만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와 건강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수험생을 위한 40일 특별기도회와 일천번제와 같은 기도회도 열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성령의 동행에 대한 증거는 가시적인 은사의 남용이나 개인적인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다. 재물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형제의 궁핍함을 도와야 한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7)

또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연보액수가 많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즉 넉넉한 사람의 많은 건축헌금보다 어린아이의 저금통의 동전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2-4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곧 가치관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 가치관이란 세속적인 욕망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을지라도, 결코 거듭난 사람이 못된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본질이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 진정한 거듭남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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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인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인 사람을 보았는가. 성경 안이나 밖이나 예수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만사형통을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왜 사람들을 욕심쟁이로 만들어버리는가. 성스러운 기도가 어찌 욕심쟁이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기도는 알라딘 램프가 아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피상적이고 즉물적 인간이 되었는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자로서 생명과 풍성한 인생을 산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현자들, 그리고 모든 종교적 천재들, 그리고 오늘날 심리학자들까지도 물질과 풍요와 성공은 '행복의 덫'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성공을 하고, 큰 차를 사고, 더 큰 집에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한없이 탐욕적이고 야수적인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 되었다.

지금 어떤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가. 큰 교회,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복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복주의란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기복주의를 가르친 적이 없다. 기복주의는 구약의 바알이즘이요, 신약에서 맘몬이즘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지금 미신화, 마술화, 심리화, 인본주의화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선전을 그대로 이루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과 엄연히 다르다.

진리의 신앙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불행한가. 진정한 위로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너무 철학적이라 생각하는가.

성경은 이 유한한 인생, 허망한 인생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비결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그런 것이라면 가장 저속한 샤머니즘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축복의 혁명>(뉴스앤조이)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웬만한 목사님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 풍성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부자와 성공을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이것이 소위 '소비자 중심 교회'다.

황금 송아지 만드는 한국 교회

이 시대의 영성 지도자인 유진 피터슨은 <그 길을 걸으라>에서 '소비자 중심 교회는 적그리스도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콜슨도 <이것이 교회다>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소비자 중심적'인 전형적인 사건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론의 황금 송아지 사건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작금의 한국 교회 여기저기에서도 황금 송아지 상을 볼 수 있다.

2007년 평양성령강림 100주년 기념행사 설교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를 본문으로 '한국 교회는 죽었다'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설교했음을 고백했다. 금년 1월 강변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모임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장로와 교인이 걸려 성경이 전하는 말씀을 반 토막 잘라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다. 놀랍게도 지금이나 그때나 영광의 메시아를 찾고 있는 것은 같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십자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 1:29)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롬 5: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이 시대에 기복주의가 불행하게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필자는 기복주의야말로 가장 타락하고 저속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기복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과 교제가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목회자들은 기도를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순진한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동과 다름이 없다. 얼마나 천박한 기독교인가. 그러기에 1,000만 명의 교인을 자랑하지만 이토록 무력한 교회가 되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도덕적 백치들이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도덕적 저능아로 취급 받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 신앙만이 기복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지난 3년 동안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긍정의 힘' '적극적 사고방식'을 중시하고 있다. 필자는 그 책이 나오자마자 <축복의 혁명> 개정판에서 그 심각성을 말하였거니와 2007년에는 이동원 목사가, 2008년에는 옥한흠 목사가 이 책의 비기독교성을 지적하였다. 두란노서원은 이 책으로 100억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버젓이 비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소위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없다

복음서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으신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서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받을 고난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룩한 십자가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십자가를 알고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알아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십자가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기복주의에 대한 대안과 제자의 모습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처치'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 교회 전문가들로 하여금 3년 동안 교회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지만 예수의 제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빌 하이벨스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그 내용을 시인했고, 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교인 숫자보다 제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한 시대가. 제자는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능력을 위로부터 덧입어 자기 비움과 자기 부인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혈과 육으로 하나님나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바울의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성화를 향하는 바울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변혁적이고 사회 변혁적인 급진성과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급진성과 혁명성을 잃어버리고 있지 아니한가. 오히려 많은 교회들이 점점 보수화·각질화되는 안타까움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롬 12:2)

교회는 이 땅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물신을 향한 도덕적 집단 투항이 일어나는 이때, 교회는 창조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공격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로핑크가 쓴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에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과 같은 '대조사회'를 이룸으로써만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요, 하나님나라의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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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기복주의 비판

기복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에 두지 않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신앙 습성입니다.
특히 한국인은 뿌리 깊은 기복주의적인 습성으로 인해 모든 종교에서 기복주의적인 습성을 보임으로써
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 연연합니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이러한 습성에 편승하여 교리적인 설교보다는 축복적인 설교를 하고, 교회에
많이 바쳐야 더 큰 복을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관습을 만들게 됩니다.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 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모든 복음은 영에 관한 말씀이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썩을 육신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육신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혼이 살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육신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위하고 섬기고 사랑하면 예수님이 내 앞날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내 육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헌신할 때 예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진리를 듣기는 싫어합니다.
바울 사도도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교인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는 육신의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한국 기복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S 교회의 교리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S 교회 교리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육신적인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육신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참된 목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죄의 몸을 멸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진 거듭난 새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S 교회는 성령체험과 기복주의로 크게 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죄 짓지 말고 경건하게 살라는 말씀보다는 영적 체험을 주거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대부분 듣기는 커녕
귀를 막고 싫어하거나 잔인하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고, 금욕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재림보다는 이 세상을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적 교회는 기업과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운영되며, 성경적 진리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주입시켜 우민화 함으로써 말 잘 듣는 목사 추종 세력으로 양성시킵니다.

디모데후서 4/4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


빌립보서 3/18~19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

성경은 마지막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명확히 명시하는데, 사람들이 기독교의 근본된 교리가 믿어지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이 많으므로 싫어하고,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축복적이고 향락적인 설교를 해 주는
선생(목사)들을 많이 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성경에 근거 없이 목사의 사업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파멸의 길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색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 있는 진리대로 믿지 않고, 내 욕심에 따라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상숭배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탄의 형상이 아니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금 송아지를 보고 십계명 돌판을 내 던지며 대노했고, 금 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어갔습니다.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S 교회는 삼중축복을 중심교리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S 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적 축복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청산받고 마치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가 청산되고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의 창문이 활짝 열려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모든 지식이 창문을 통해 비치는 밝은 태양처럼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되고(고전 2:9,10),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롬 12:2).

2. 환경적 축복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쫓겨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다(마 27:46).
성경은 예수님의 환경적인 난과 저주의 대속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고후 8:9; 갈 3:13).
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시고 피 흘리심으로 저주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미움, 불안과 초조, 공포와 절망, 좌절감과 죽음, 죄책, 정죄 등 모든 가시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평화의 강물이 흐르고 삶 속에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

3. 육체적 축복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육체적 질병과 죽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남은 생애를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입각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파괴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의 육체를 부활시킴으로 우리는 연약함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살려 주는 영이 되었으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 육체가 부활할 생명의 씨앗을 얻게 된다(고전 15:42-45).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도 변화되어 공중 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살전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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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복주의와 이상주의

고은교회 황부일목사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문을 따라 열심히 예수를 찾았고 미리 예수께서 가실 곳을 예측하여 먼저 가서 몰려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무리는 모두 예수를 찾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기대도 있었고 모인 회중이 공동으로 구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각각의 기대는 계층별로 형편따라 구하는 차이가 있었고 공통적으로는 함께 구하는 것은 저들 유대민족으로 함께 바라는 이상대로 유대나라 회복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을 보면 성령의 역사로 거룩케 되는 은혜로써 부름받아 교회되는 경우는 매우 적고 대체적으로 당시 유대무리처럼 예수를 통해 각자 기대를 얻고 이루려고 모여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별로 구분하여 나누어 보면 기독교 기복주의와 기독교 이상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복주의>

기복주의 혹은 기복신앙은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기복이란 "복받기 위해 빈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인 종교의 목적이 다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허물로 죽어 육체가 된 인생들이 죄의 본성을 따라 욕심, 욕망으로 사는 것 인데 그것이 끝없이 욕구하는 대로 되지 않기에 그것을 신앙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대체적으로 기복주의가 많습니다.
기독교가 이교화 되어간다는 상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다는 약속된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약속된 영원한 하늘의 복에는 관심없고 자기들이 필요로 하고 더 기대하는 바대로의 세상복을 위해 주를 찾고 모든 신앙의 행위를 그 목적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늘 계시되어 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를 통한 메시야왕국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저들 나들대로 메시야를 통한 기대들을 품고 그틀을 만들어 놓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를 상류층,중류층,
하류층으로 나누어 볼때 상류층은 메시야를 통해 기득권회복과 그 더이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기대의 복으로 바랬고 , 중류층은 갈등과 혼란과 전쟁이 없는 평안의 안정의 행복을 기대했고,
하류층은 메시야를 통해 형편적 문제해결과 신분적 상승의 기대 복을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님은 자신들의 기대의 복을 채워주지 않고
그나라와 그의 전하자 점점 불신하고 멀리하며 아예 거짓 메시야 이단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실제 당시 유대인들을 보면 예수께서 하신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고 더욱 열심히 밤이고 새벽이고 생활의 해결사로 예수를 찾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저들의 삶의 해결사로 임금삼으려 하자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요6:14~15)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26-27)
즉 썩을 복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요 영생할 복을 주러 오신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에 모여든 무리들이나 오늘날 예수 이름으로 모여든 대체적인 무리들이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 세상영광이나 형편적으로 복된 것을 얻으려 하고 그것이 원하는대로 안되는 문제들을 해결받으려고 모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사람들의 기대의 세상복을 말하는 교회가 많고 그러한 곳에 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교회들이 그런 무리들로 성장하여 대형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교회고 목회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주께서 역사하시는 신령한 축복으로 그나라를 나타내는 거룩한 교회로 서가는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신령한 복을 증거 합니다. 그것은 전혀 사람들이 기대하는 차원의 복이 아닙니다.
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엡 1:3-5)

원래 복이라는 것은 저주에서 화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고 그 형벌을 살아가는 진노의 존재들입니다.
전도서 5:17을 보면 죄의 형벌을 살아가는 인생이 된 인간들에 대해 잘 말씀했는데 보면,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죄와 그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으로 불행힌 인생이 무엇인들 진정으로 복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원하는 그 어떤 기대의 복이 넘치게 되었다 하여도 죄로 인한 저주와 그 진노의 형벌은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도 여호와의 복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라.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 33:29)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라겠느냐" (마 16:26)라고 말씀하심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은 욕망적인 온 천하적이고 부귀영화고 그것을 얻고 누리고자 주를 찾고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기독교 기복주의가 그렇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내 기대대로 넘치길 바라고 또한 나를 통해 오병이어같은 역사가 소원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형벌인 저주와 죽음의 인생 상태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복과 그 구원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하늘의 신령한 참 복을.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사는 참복은 세상 형편이나 조건이 있고 없고 많고 적고 상관없이 하나님나라를 구원의 능력으로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요 하박국서지자처럼 모든것이 되는 것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세상상태는 전쟁의 소식으로 불안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기뻐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참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믿음을.통해 세상을 살게 하려는 기복적인 교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

이상주의는 망상주의와는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이 궁극적으로 최상이 됨을 바라는 중심입니다.
보편적 개념에서 이상은 도덕적, 미적, 사회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를 말하며 바람직한 좋은 상태를 완전히 갖추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이상주의자들은 완전한 사회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믿고 합력하려는 것이 기독교 이상주의 자들입니다.그래서 이들은 공동체적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기독교 연합운동을 많이 합니다.

복음이란 용어 개념을 보면 "구원의 소식", "평화의 소식",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합니다.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은 여기서 "좋은 소식"을 자기들이 기대하는 가장 좋은 상태로 바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은 주를 통해 지상낙원을 바랍니다.
구원도 그들의 지향하는 이상실현이고 평화도 인류가 세계가
함께 공존하며 좋은 세상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공감하는 행복을 지향합니다.
이성적 좋은세상 이성적 좋은 관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 7:7-11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비유하여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자가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과 우리가 기대하며 바라는 좋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은 구원이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같은 말씀인 누가복음 11:13에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한 하나님나라 구원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은 복음이 말하는 좋은 소식으로서 인간적 이성적 행복이나 이상을 말하며 평화도 세상 평화를 말하고 모두 함께 계층 없이 박애젹으로 잘사는 사회실현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박애주의자고 인권주의자고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갇힌 자 등을 그 형편에서 건져주고 계층도 없는 좋은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 오셔서 반대 무리와 저항하다가 잡혀 죽으신 혁명가로 여깁니다.

결국 이들은 지상천국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도시 성시화 운동도 벌이고 사회정의구현이나 인권운동도 벌입니다.
기복신앙은 좀더 개인주의적이라면 기독교이상주의자들은 공동체적입니다.
세상 사회와 더불어 새시대 좋은 세상 구현이 이들의 구원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18:36)는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시대 기독교 일반 신앙의 흐름을 보면 과거 어렵고 과도기적인 시대에 찾던 기복적인 신앙보다 형편이 좋아진 이젠 기독교 이상주의인 인본주의신앙이 더 공감 확대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형편은 좋아지고
높아진 학벌이나 세계적 소통의 매체를 통한 다원적인 이성적 지식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시대는 인본주의 신앙이 판치는 시대입니다.
기독교 이상주의가 각 교파에서 많은 공감을 형성하며 같은 이념이나 시대적문화 까지 조화된체 사회와 공조를 이루며 현대교회들로 크게 자리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말씀함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합당한 신앙 입장>

오늘날 교회라 하면서 모여서 주로 구하는 부류들로 나누어 보면 자기유익을 구하는 부류들(기복주의)
과 사회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부류들(이상주의)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수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구원의 유익을 구하는
역사적 정통신앙의 개혀파가 있습니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기복을 구하든지, 이상주의를 지향하든지, 각각 그렇게 맞추어 주는 다른 복음이 넘치든지, 십자가의 도인 복음의 진리만
증거되고 거룩히 따르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바로 성령이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역사적 정통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된 교회구원을 지향하는 개혁파 교회가 맞다면
오로지 복음의 합달한 신앙을 위해 일심하고 합력해야 합니다.(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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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기복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회

눈먼 기독교(6)

중미 멕시코에 수백 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종교가 있다. ‘산타 무에르떼’라고 불리는 이 종교의 신(神)은 해골바가지 형상에 한 손에 낫을 든 흉측한 모습이다. 중남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 가톨릭이 변질되어 성모 마리아가 신의 자리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데, 멕시코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생 토착신이 마리아의 자리를 대신해서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이다.[1] 이 종교를 받드는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간구했더니 부자가 되고, 감옥에서 일찍 나오고, 병이 나았다고 열렬하게 자랑한다. 혹시 이들이 후진적 사고를 가졌기에 그런 유치한 신앙심을 가진 것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삼중큰스님 정해년 마지막 강연회 “황금돼지해 어떻게 운(運)을 받을 것인가?!” 대충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해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삼중큰스님 강연회에 오시면 길이 있고 희망이 보입니다. 참석하시는 모든 분께 영험한 황금돼지부적(지갑소지용)을 드립니다. 그동안 삼중원을 도와주신 감사의 보답으로 재물, 사업, 혼사, 이사, 매매, 취직, 승진, 시험, 건강 운 등 종합운세를 전문분야별 유명한 스님 세 분께서 무료로 봐 드립니다.

이 문구는 일간신문에 게재된 어느 유명 스님의 강연 광고다. 부처의 도(道)를 따르는 중이 중생들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운수대통(運數大通)하는 길을 알려주겠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생활밀착형 종교로 자리 잡는 데는 이런 기복성향의 포교가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기복 종교의 대명사는 무속신앙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술(易術)산업 규모는 연 4조여 원, 역술인이 45만여 명, 인터넷 역술 사이트가 200여 개에 이른다. 로봇이 커피를 타주고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점(占)치고 굿하는 모습은 음지에서 오히려 더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런 기복 신앙에서 자유로운 상태인가?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우리나라 목사 가운데 ‘억만장자 협회’를 만들어 그 협회의 장(長)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 목사가 있다. 이 목사가 쓴 책 가운데 『억만장자가 되는 12가지 비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당신의 가정과 기업, 교회의 재정이 두 배로 풍성해질 것이며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다’이다. 이 책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돼 있는데, ‘우주의 재벌 총수 하나님 아버지’, ‘기름 부음이 넘치는 억만장자가 되라’, ‘역경을 초월하는 억만장자가 되라’ 등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고 소위 ‘억만장자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이 소감문이라고 올려놓은 글을 보면 어이가 없어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책대로 실천하여 1년에 140억을 벌었습니다”, “수만 평의 땅과 여러 채 빌딩을 사게 되었어요”, “모든 성도들이 십일조가 아닌 오분의 일을 냅니다” 등의 내용이다.

이 시대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내듯 비진리가 진리를 몰아내는 시대가 된지 오래다. 성경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고, 죄성을 만족시키는, 무늬만 기독교인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몰아내고 있는 현상이 날로 확장되고 있다. 세속과 교회를 칼로 무 베듯 나누는 이원론이 썩 바람직한 가치관은 아니지만, 이 시대는 오히려 세속주의(secularism)가 교회를 집어삼키는 것을 조심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세속주의의 중심에는 역시 돈과 성공이 자리 잡고 있다.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는 결국 돈을 섬기는 배금주의와[2] 다를 바 없고, 성공이라는 신화는 기독 신앙의 수단화와 다르지 않다.

게리 토마스라는 영성 신학자는 “참된 믿음의 잣대는 얼마나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내어 맡겨졌느냐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내려놓음과 자기 비움 그리고 전적 의탁이라는 모습으로 참 기독교 신앙을 검증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는 재물의 다소(多少)와 지위의 고저(高低) 그리고 명성의 유무(有無)가 영성의 기준이 돼버렸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유명한 기독교인은 영성(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고, 그 반대는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지는 풍조가 은근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는 “성직자들 사이에, 죄나 속죄와 같은 성경 언어를 희석시킨 나머지, 예수를 자신의 행복과 자아 완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가 있다. 이 시대의 성직자마저도 예수 이름을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면, 과연 이 시대에 희망이 어디 있겠는가? 진리와 기복신앙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교회의 모습이 처량하고 안쓰럽다.


[1] 남미 페루에는 돈다발이나 주택, 승용차 같은 것의 미니어처를 마리아 상 앞에 놓고 기도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돈, 집, 차가 생긴다고 믿는 가톨릭 신앙이 퍼져 있다.

[2] 拜金主義, mammonism, 맘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