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토 프뉴마 메 스벤뉘테
공동번역 /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현대인의 성경 /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지 말며
성령이란 단어에 정관사 "토"가 있습니다.
따라서 막연한 성령이 아니라 "그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소멸치'의 헬라어 '스벤뉘테'는 '불을 끄다'(quench, extinguish)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며'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듯 성경은 성령을 '불'로 묘사한 예가 많이 있다(마 3:11; 눅 3:16; 12:49; 행 2:3).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광신적 태도가 만연했음에 비해(고전 12-14장),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오히려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배격하는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570. 소멸하다(스벤누미. sbĕnnümi) σβέννυμι
관련 성경 / 끄다(마 12:20), 꺼져 가다(마 25:8), 꺼지다(막 9:48), 소멸하다(살전 5:19), 멸하다(히 11:34)
신약 성경 / 8회 사용
성령을 받은 사람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성령이 거짓 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다는 말의 의미
성경에는 많은 상징과 그림(묘사) 같은 문학적인 요소들이 들어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들입니다.
성경이 성령을 묘사하는 상징 중 하나는 불입니다.
불은 정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전염병이 돌 때 어떻게 전염물질을 제거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불은 빛과 열을 내며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성경의 기초위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도록 건축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당신의 삶을 타오르는
불처럼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타오르는 관목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순식간에 타오른 뒤 재가되고 맙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보았던 떨기나무 불꽃은 달랐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애굽기 3:2).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산소와 연료가
계속공급되어야 합니다.
메마른 광야의 떨기나무는 여기저기에 조금씩 존재하는 하찮은 관목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의
불꽃은 떨기나무를 원료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꽃은 스스로 타오르는 불로써 연료공급이 필요하지 않으며, 결코 소멸하지도 않는
불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존하여 존재를 유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의 특징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지만 결코 소진되거나 재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것을 연료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것을 우리에게 흘러보내셔서 우리가 계속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십니다.
빛과 열을 내는 존재로 이
세상에 아름다운 기여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바람이 불 때, 불은 더욱 맹렬하게 타오릅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성경을 묵상하면 성령은 더욱 더 맹렬하게 우리의 삶속에서 타오릅니다. 물을 끼얹거나 모래나 소화기로 공기를 차단하면 불을 곧 소멸하고 맙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면 성령은 소멸하는 불처럼 되고 맙니다. 또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성령의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방해해도 성령은 소멸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즐거움과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데살로니가전서 5:19)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 성령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존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잘못된 것들을 행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막고 방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며 또 우리를 인격으로
대하십니다.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가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야고보서 4:6).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케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는 감정을 가지게 하다"입니다. 보통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진"슬프게 한다"는 표현을 일상에서는 더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케 한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거나 슬프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주 타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죽거나, 친한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는 일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태도, 행동,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이나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모님께 불순종할 때 우리는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과 성령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거나, 악의적인 말을 하거나 또는 다투고 싸울 때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본다고 믿지 않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도 성령을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 것이 된다"고 칼벵(Calvin)은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십니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확증하고 보충해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이 보증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던 우리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승리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렇듯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받을 수 있는 보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슬퍼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걸고 우리를 지지해주고 보증이 되어준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심어주는 일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성령의 열매와 신의 성품
갈라디아서 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사과나무에서 바나나가 열린 것을 본 적 있나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고 바나나나무는 바나나를 열매 맺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사과나 바나나와 같은 것들과는 당연히 다른 것으로 영적인 열매이며 동시에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당신의 행동과 당신의 말과 당신의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 즉,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변화된 성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이 열매는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당신 안에 있는 당신의 깊은 존재가 모든 방면에서 성품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당신이 맺어야만 하는 열매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런 것을 막을 율법은 없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 열매들은 당신이 성령께 다스림을 받을 때, 성령을 듣고 순종할 때에 자연스럽게 맺게 되는 열매들입니다. 건물로 비유한다면 성령께서 당신의 삶을 건축했을 때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반면에 당신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 때에 맺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쁜 열매들입니다. 예를 들면, 화내는 것, 질투, 시기, 자신만을 아는 이기심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성령에 순종할 때에 당신은 이러한 것들과는 반대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성령의 열매는 더 크고 튼실하게 더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열매를 사람들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지요? 좋은 열매입니까?
■ 사랑(LOVE) - 고린도전서 13장.■희락(JOY) - 베드로전서 1:3-9.
■화평(PEACE) - 요한복음 14:27 / 참고, 빌 4:7
■오래 참음(PATIENCE) - 베드로전서 2:22.
■자비(KINDNESS) - 디도서 3:1-8.
■양선(GOODNESS) - 베드로전서 2:11-12.
■충성(FAITHFULNESS) - 빌립보서 2:5-8.
■온유(GENTLENESS) - 마태복음 11:28-30.
■절제(SELF-CONTROL) - 고린도전서 9:24-27.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8가지 성품
1.믿음(믿음에 덕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첫번째로 가져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11:3)"
믿음의 우선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거짓되고 속이는 가설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의 실체는 거짓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의 어두움이 짙을수록 하나님 창조의 진리가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대로 밝히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진화론이 맞는 것 처럼 배우고 따라 갑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지금까지 속여 왔습니다.
이 모든 세계가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은 없습니다.
오직 태초에 계신 말씀이 모든 만물을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곧 진리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1:3)"
만물이 있다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입니다.
엘로힘은 삼위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삼위하나님이란 위가 삼위로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라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자
예수께서 앞장 서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경대로
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자는 영원구원을 받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의 음성으로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가가 되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로마서10:10)"
(3) 보이지 않은 내세가 있음을 믿는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보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은 저 세상의 내세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자가 되십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들림받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서11;6)"
믿음은 보이지 않은 실상을 믿는 것이 믿음의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11:1)"
믿음은 이 세상의 현상을 초월하여 저 세상의 실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적이 없어도 계신다는 것을 믿고
다시 오심을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현상은 저 세상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잠깐이지만 저 세상은 영원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공간의 하늘과 물질의 땅과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초월하는 저 세상의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되십시다.
보이는 땅의 세계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은 하늘세계가 있음을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은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2. 덕(믿음에 덕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의 가장 우선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은 덕입니다.
덕은 지식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고 덕을 빼버린 지식을 가진 자라면 덕이 없으므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연약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를 쉽습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덕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입니다.
덕을 두 글자로 하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또는 겸손입니다.
온유함은 밝고 옳고 착하고 빛나고 겸손함과 예의바른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에 지식은 아주 많은데 덕이 없으므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자들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마11:28~30)"
상처받은 자들이 치료를 받을려고 예수님에게 감으로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덕이 없으면 교만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말을 가려서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 뱉으면 상처가 깊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가진 자로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위로 받고 쉼을 얻어 존경받는 믿음에 덕을
가진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지식 (덕에 지식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가지는 자입니다.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지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모르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세계교회협의회가 WCC입니다.
WCC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WCC에 가입되어 종교다원주의를 따라가는 것을 배도라 부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WCC는 세계종교통합의 가증한 행위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신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유일하신 하나니을 믿는 유일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WCC는 배도하는 교회되게 합니다.
기독교는 WCC를 반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기독교 교단이 WCC에 가입되어 따라가는 것은 가증한 행위입니다.
배도는 7년 환난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일어나는 징조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전2;3)"
오늘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가져야겠습니다.
덕에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은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교회 안에 실상 종말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 영적으로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지식이 가득차면 교회가 세상의 물결로
말미암아 가라앉을 위기가 됩니다.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에 관한 종말론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과 깨어 준비할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덕에 지식을 가지는 것은 지혜와 지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지식을 가졌다면 짐승의 표 666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계13:18)"
종말을 살면서 세상 지식으로만 가져 망할 것이 아니라
세상 끝의 일어날 징조를 아는 지식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마라나타 신앙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4. 절제(지식에 절제를)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입니다.
지식 다음에 따를 것은 절제입니다.
말세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세에는 사람이 결정하여 마음가는대로 행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가지 유일한 정통성을 깨트리고 다양한 것을 인정하여
유일한 진리를 부정합니다.
유일신이 없고 다양성을 가지는 신들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타락으로 절제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순종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타락하지 않은 절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10:25)“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으로 내 몸을 쳐서 복종함으로
타락하지 않은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는
지식에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 하고 싶은대로 다양성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여
절제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5. 인내(절제에 인내를)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합니다.
날이 갈수록 넉넉한 마음이 쫓기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멈추었을 때 어디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는 참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신의 성품에 참예화는 자가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로 오래참는 인내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1:2~4)“
말세에 그리스도인이 주님 오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 결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계속적인 불의한 공격을 받아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갑절의 축복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고
성내기도 더디해야 할 것입니다.
6. 경건(인내에 경건을)
인내에 다음으로 가져야 할 것은 경건입니다.
경건은 신앙을 가진 표시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내세에 약속이 있게 하십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우상숭배가 가득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WCC를 따르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내에 경건을 가져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건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경건의 능력을 가집니다.
7. 형제 우애 (경건에 형제 우애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입니다.
공산주의는 동무라고 부르지만 실상 형제 우애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동무는 같은 사상을 가진 자이지만 거짓
사상으로 형제 우애를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우리 민족끼리라 말하여여도
형제 우애를 무너뜨려 형제를 억압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 우애를 잔인하게 짖밟아 사랑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정신으로 자유 통일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하는 자유를 가지는 진실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기만하고 속이는 악한 영에 사로 잡힌 주사파가 박멸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주사파가 전향한다는 것은 담배를 끓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가 없습니다.
주종관계란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주종관계란 주인은 종을 지배하고 종은 주인의
권력에 눌려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주종관계가 아닌
형제 우애입니다.
형제 우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사랑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내게랴
(빌레몬서1:16)“
8. 사랑 (형제 우애에 사랑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7)”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져가는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하는 자가 됩시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다.
처음도 사랑이요 나중도 사랑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사랑으로 출발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사랑의 공급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된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두려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유다원주의에 속한 WCC를 반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공산주의를 반대합니다.
공산주의는 형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가짐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