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종교의 기원




바벨론 종교의 기원

1. 서론
 
헬라어로는 바벨론, 히브리어로는 바벨이다. (바벨론의 뜻은 신들의 문)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다. 이락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다.

2. 관련 성경구절
(창10:6) 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창10:7) 구스의 아들은 스바하윌라삽다라아마삽드가라아마의 아들은 스바드단이며
(창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창1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창10:10) 그의 나라시날 땅의 바벨에렉악갓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10: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르호보딜갈라
(창10:12) 및 니느웨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3. 바벨론 종교의 믿음
 
니므롯 : 태양신 / 세미라미스 : 달신 / 담무스 : 별신 (구세주로 봄)
 
[왕하]17: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세미라미스)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담무스)을 경배하며 또 바알(니므롯)을 섬기고 (열왕기하 21:3 동일)
 
4. 바벨론 종교의 세미라미스 : 여신에 대한 관심
 
세미라미스는 유방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산의 여신, 풍요의 여신으로 보고 있다. 바벨론 조각과 기념비를 보면 세미라미스가 담무스를 안고 있는 조각들이 많이 있다.
 
바벨론 종교의 전 세계적 확산
 
중국에서 씽무 여신, 독일에서는 헤르타 여신, 스웨덴, 스칸디나비아, 덴마크에서는 디사, 인도에서 인드라니, 그리스에서 아르테미스 (아데미) : (행19:24) 
 
이태리 로마에서는 라틴어로 디아나, 영어로 다이아나, 이태리어로 하면, 마돈나가 된다. 이집트(애굽)에서는 세미라미스를 이시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스다롯이라고 하였다.
 
[삿]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 종교
 
로마 카톨릭 : 마리아 숭배사상
이슬람 종교 (마호멧) : 세미라미스의 초승달을 이슬람교의 상징물로 채택
 
6. 결론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는가? / 베들레헴 탄생의 의미


예수가 태어나신 곳은?


[질문]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님이 마구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
즉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  구유에 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인숙의 구유"에 누이셨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들은 분명히 마구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하 동굴의 집이기에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양들은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들은  마구간이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냐고 덤벼듭니다.
마음대로 추측해서 말해도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지요.  
한국식 마구간에  들어가 잘 수 있을까요?  
말이나 소가  쉬하면 웬만한 곳은 오줌 바다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미국 사람들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지요?

[답변]  미국 목사들이라고 특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 관해선 그 기록을 당시 상황에 맞추어 해석한 여러 의견을 다 함께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구유에 누인 것에 관한 성경 기록은 아래 세 구절뿐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눅 2:12)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눅 2:16)

따라서 성경에는 구유(manger)라는 말만 나와 있지 어느 곳에 있는 구유인지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구유가 있었던 장소와 연결해서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를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는 일단 성경 기록대로 사관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사관을 일반적인 여관을 뜻하는 헬라어 판도게이온(눅 10;34, 우리 말 성경에선 주막으로 번역됨) 대신에 공공숙소, 여관, 객실, 다락방 등으로 번역되는 카달뤼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예수가 탄생한 장소는 일단 여관(Hotel, Inn)의 객실은 아닙니다.

또 당시 베들레헴이 아주 작은 소읍이라는 것을 감안 하면 여관 혹은 공공숙소는 겨우 한두 개 밖에 없었을 것인데 마침 호적할 때라 여행객이 평소보다 많아 빈방이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간혹 여관 주인이 나사렛에서 온 임산부 일행을 박대해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해석은 무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머지 가능성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곡식창고, 일반 가정 집, 또는 들판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 곳에 다 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옥외에 양떼를 모으는 곳들이 있고 구유가 있었긴 하지만 아무래도 들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할지라도 모세의 율법에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계명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며 만삭의 임산부를 문전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혹 들판에서 예수를 출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가정집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팔세스타인 지역의 일반적인 가옥 구조는 아래 위가 뚫린 One Room Style로서 그 중간에 다락 형태로 간을 나눠놓았습니다.
그 다락에는 사람들이, 아래는 가축이 기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서부 영화에 종종 나오는 지붕이 높은 곳간 한쪽 벽에 중간 다락을 만들어 놓은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 아래쪽에는 주로 석회석(Limestone)으로 만든 구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즈는 대충 길이 1m, 폭 50cm, 깊이 60cm 정도였음)

그런데 사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다락방도 의미하므로 개인 가정집 아래쪽의 가축들이 기거하는 장소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또 사관을 여관으로 해석해도 요셉 일행이 여관에 방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재워줄만한 가정집을 물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관 주인이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라도 괜찮다면 자라고 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했던 성경대로 분명히 구유 근처에서 출산했습니다.
그리고 구유란 가축 전용의 마구간이든, 가정집 아래층이든, 곳간이든 가축들이 항상은 아니지만 기거하는  곳입니다.
요셉 일행은 그런 곳에서 숙박하고 예수를 출산했던 것입니다.

가축들이 있다고 해서 항상 축축하고 지저분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그렇지만   건초나 사료를 쌓아둔 마른 땅도 있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를 젖은 땅에 둘 수도 없고, 건초가 깔린 곳이라고 해도 벌레들이 많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곳에도 쉽게 누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구유에 물이 없이 말라 있었으므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누이기에는 가장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구유에 물이 말랐다는 것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는 마침 그곳에 가축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장소를 마구간이라고 한정하기 보다는 위에 설명한 내용대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요셉이 숙박한 장소에 대해선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갓 태어난 아기 예수는 분명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탄생에 대한 잘못된 전통들

예수 탄생에 대한 기독교 전통들을 살펴 보면,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들이 있다.
가장 흔한 예로, 동방에서 온 세명의 박사들 (wise men or magi)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개정되기 이전의 찬송가 123장 “저 들밖에 한 밤중에”의 4절에는 “동방 박사 세 사람” 이란 가사가 있다.
아마, 박사들이 황금, 몰약 그리고 유황을 바쳤기 때문에 세 사람으로 추정하는듯 하지만, 성경에는 언급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말 구유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전통 역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물론 “구유(Manger)” 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꼭 그 구유가 “말 구유”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1세기경 당시 일반 유대인들이 말을 사육하였는지는 매우 의심스런 일이다.
구약 성서 시대 당시 유대인들의 흔한 직업인 목축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양, 염소, 그리고 나귀등이다.
말은 주로 전쟁이나 왕족들이 타는(삼하 13:29, 왕상 1:33, 44, 18:5) 동물로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없는 아주 비싼 동물이었다. 

히브리어로 구유를 בוס (에부스)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3번 구약 성경에 등장을 한다.

18. 구유(에부스) אֵבוּס 

1. ‘가축을 살찌우다’
2. 마굿간
3. 구유
발음 / 에부스[ ’êbûwç ]
어원 / 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외양간(욥 39:9), 구유(잠 14:4, 사 1:3).
구약 성경 / 3회 사용


  1.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אבוס)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3)
  2.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 (אבוס) 에 머물겠느냐 (욥 39:9)
  3. 소가 없으면 구유 (אבוס)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 14:4) 

헬라어로 구유를 Φατνη (파트네) 라고 하는데 신약에 4번 등장한다.

5336. 구유(파트네)  φάτνη, ης, ἡ 

1. 구유
2. 외양간
3. 마구간
발음 / 파트네[ phatnē ]
어원 / πατε´ομαι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유(눅 2:7,12, 16), 외양간(눅 13:15).
신약 성경 / 4회 사용
  1.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라 (눅 2:12)
  3.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6)
  4.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5) 

이상의 성경적 예들을 보더라도,  말 구유 전통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외양간 혹은 양떼나 염소들의 우리일 수도 있다.  

마굿간이라고 할때 집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진 곳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외양간이 집안에 있지 않다는 것과  서양, 예를 들면 미국의 마굿간이 집밖에 있다는 개념을 성경의 마굿간, 외양간, 혹은 양 우리에 적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예수의 탄생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만삭이 되었을 때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는 것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예수 탄생 기사가 자세히 기록된 눅 2:6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While they were there)."
즉 이 말은 마리아와 요셉이 만삭의 때, 즉 출산 직전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기 보다는 그 보다 상당 기간 앞선 때에 베들레헴에 와 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출발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요단 동편길을 따라 온다면, 적어도 150 km 이상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만삭의 여인이 이런 장거리 여행을 짧은 기일내에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산모의 건강을 고려하였다면 요셉은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베들레헴을 향해 출발하였을 것이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적어도 며칠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마리아가 출산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눅 2:7은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마리아와 요셉이 상당 기간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었다면, 산모의 출산을 고려하여 그들은 장기 거처를 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어야 했다.
또한 베들레헴은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다(눅 2:3, 4).
따라서 베들레헴에는 친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친족들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만일 베들레헴에 그들의 친족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유대 산골(눅 1:39)에 살고 있던 친족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있었기에 마리아와 요셉이 장기적으로 거주할 방을 구하지 못하였다면, 엘리사벳의 집에 거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예수 탄생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눅 2:7에 나오는 “여관”, 그리고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와 헬라어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잠시 구약 성서로 눈을 돌려보자.
히브리어로 여관은 מלון (말론, 헬라어 카탈루마)이다.

창 42:27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점 (말론)"에 머물렀다.
수 4:8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유숙(말론)하였다.
여기서 "말론"은 객점이라기 보다는 들판에 임시로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말론, 카탈루마는 여관, 객점, 유숙하는 곳, 혹은 객실등의 뜻이 있으며 문맥을 잘 살펴서 뜻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로 돌아가 보자. 
한글 성경에는 여관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Inn 으로 번역을 하였지만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헬라어 καταλυμα (카탈루마)는 여관이라는 의미보다는 Guest Room 혹은 손님 접대용 방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카탈루마를 살펴보자. 

  1.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 (καταλυμα)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막 14:14) 
  2.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3.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눅 22:11) 

1번과 3번은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 내용이며, 2번은 예수 탄생 기사에 나오는 것으로 모두 여관이 아닌 객실 (Guest room)을 뜻한다.

성서 시대의 카탈루마는 “객실”로서 여관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산지 높은 곳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지리적 특성상, 오고 가는 상인들이 머물만한 여관이 있을 곳이 못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0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주고, 그를 여관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πανδοχειον (판독세이온)으로 이 단어는 “여관 (주막)”을 뜻한다.
따라서, 눅 2:7에 “사관 (여관)”은 잘못된 번역이며,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사진 :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 (출처: http://lukechandler.wordpress.com/2011/06/24/a-visit-to-the-semitic-museum-at-harvard/) 

다음으로 “ 있을 곳이 없음…” 이라는 표현을 보자.

헬라어 τοπος (토포스)는,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빈방이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장소가 아이를 출산할 만한 공간이 못된다는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한다.
혹, 여유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여자가 출산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살펴보면, 왜 마리아가 구유가 있는 곳에서 예수를 출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안에 동물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고, 아래층에는 주로 주방과 동물 우리, 그리고 윗층에는 가족이 거주하는 방과 객실이 있었다.
물론 빈부 차이에 따라서 거주하는 공간의 넓고 좁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발견된 1세기 경의 집터들을 보면 객실을 만들어 놓았던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 곳은 그녀가 거주하고 있었던 집(눅 2:6 While they were there)의 아래층에 있는 동물들이 거하는 우리(Stall)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마리아와 요셉이 출산을 하기 위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빈 방을 찾았다?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마리아의 출산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몰차게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라는 식의 말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전통과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천한 곳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비성경적인 전통들을 즐겨 언급하지만, “성경적 근거를 대시오!” 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비성경적인 전통으로 예수의 탄생을 미화하거나, 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 분이 말 구유가 아닌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창조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분은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고 가장 천한 곳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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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4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어떤 분이셨습니까?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성부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낮고 천한 육신을 입고 찾아오시되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의 모습이나 귀족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웬만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궁에서 나셨다면 왕족이나 측근들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천한 목수의 집안, 작은 마을, 마구간, 말구유에서 나셨으므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자신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어계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첫 번째로 찾아와서 경배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당시 목자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6 이하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낮고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용납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절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의사는 오직 병자들에게만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만입니다.
비천한자라도, 가난한 자라도 교만한 사람은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생 하셨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큰 성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건물은 큰데 들어가는 문은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고 문 높이고 낮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죄인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장소를 선택하여 이 땅에 태어 나셨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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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 마태복음 2:1 - 12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면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말해 보세요(1절)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는데

1) 역사적으로 보면 눅2:1
[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 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와와 함께 호적을 하러와서 갔다가 예수님을 탄생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6절은 바로 미가5:2절의 인용으로서
[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한
바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것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 쓰시고 멀리 페르샤의 박사들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동방박사들은 멀리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별을 보고 [ 이건 분명히 새 왕이 나타났다는 징조다 ] 라고 믿고
수 만리 길을 걸어와 유대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탄의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동방은 페르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란, 이라크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박사라는 칭호는(magi)라 해서 페르시아와 갈대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주는 것인데, 이 칭호가 페르시아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가 드린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다고 해서 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확히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별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습니다만 별이 움직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별을 움직여 그가 메시야 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 즉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자면 별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 별의 인도를 따라 유대 땅 까지 왔지만 깜박 자신들 생각에 왕으로 나신이 같으면 궁궐에 있겠지 하고 예루살렘 궁궐로 찾아갔을 때 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궐에 찾아가 헤롯 왕에게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함이 없는 성탄은 항상 마음을 높은데 두는 성탄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말구유에 오신 예수가 아니라 궁궐에 오신 수퍼 스타 예수로 자신의 야망을 이룩하는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동방박사들의 방문 소식을 들은 헤롯 왕과 예루살렘 군중들은 이 소문을 듣고 소동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성탄절이 되면 온 나라가 소동하고 온 세상이 소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성탄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신론 국가인 일본에서도 대다수가 범신론 내지 무신론자로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화려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며, 즐깁니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성탄절을 취급하며 그리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놀 수 있는 날”쯤으로 성탄절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온 예루살렘 군중들이 소동을 하는 가운데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에 나겠느뇨? 하고 물었습니다.

본래 서기관들은 성경에 정통이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선지자의 기록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고는 미가 5:2을 인용합니다.
[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라 ]
예수님은 베들레헴 땅 그것도 여관의 빈방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미가 5:2절에는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 합니다.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고 불리워진 곳인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 났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도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찻아간 박사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마굿간으로 인도하십니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 마굿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셋트가 마련됩니다.
그 셋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말구유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란 말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 듯 교회가 말구유 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아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혀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서울에 있는 현암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근간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책이 초판 제1쇄가 발행된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못 읽어 보았습니다만 이 책 제목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들어요. 오강남 교수가 어릴 때부터 교회 출석한 교인이요
지금도 자신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만  [ 그래 눈이 뜨여진 사람은 볼 것이고 눈이 안 뜨여진 사람은 못 볼 것이고 ]
못 보면 없다 할 것이고 보면 있다 할 것이고, 그렇죠?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파문이 커지니 조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는 없다 ]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이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궁궐에 앉아 있는 헤롯 왕 같은 사람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내려 올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의 탄생이 반갑잖은 스캔들로 듣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의 헤롯의 반응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헤롯 왕은 서기관들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인가? 라고 물으며
아기를 만나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아기를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헤롯의 꿍꿍이셈이 있습니다.
결국은 헤롯왕은 박사들이 천사들의 지시로 고국으로 말없이 떠난 후 베들레헴 지경 내에 있는 두 살이하의 어린아이를 다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럽니다.
항상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애매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어야만 하는 비극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한 마음에는 사탄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와 최고의 쾌락을 약속합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실망과 파괴요 죽음이요 멸망인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왕의 왕을 위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황금은 성경에서 황금은 창세기 2장 11,12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지만 인간사에 항상 보물로 여겨 왔으며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유향은 매우 향기로운 것으로 성전의 제사를 위한 향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한 나무에서 얻은 수액을 증류해서 만든 것입니다.

몰약은 거의 아라비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낮은 가시나무에서 추출되는 귀중한 것으로 좋은 연고를 만드는 중요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23절에서는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세 가지의 예물이 상징하는 바는 황금을 드렸다는 것은 바로 아기 예수가 만왕의 왕임을 뜻하는 예물입니다.
유황을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 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즉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본래 히브리 말로 메시야는 헬라말로 그리스도란 말로서 그 뜻은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메시야로서 그 분은 만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대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선지자로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경배하되 예수가 우리의 메시야라는 신앙의 고백 위에 드려지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신앙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부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의 보잘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자신들의 보물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이 예물처럼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성탄의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예물을 드린 사람은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아니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이 있습니다.
본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그리고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길가에 쓰러진 불쌍한 병자를 만나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빵과 포도주와 여비를 모두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박사들이 편지를 남기고 떠난 후 였습니다.
" 기다리다 떠납니다. 우리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십시오 "
알타반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가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군인에게 커다란 루비 보석을 쥐어 주었을 때 군인 장교는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고 하면 돌아서 갔습니다.
그때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랍비를 찾아가서 물으니 "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 " 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과 노예 시장을 찾았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손에 진주를 꼭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께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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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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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냐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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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가?

1. 죽음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한 사건

베들레헴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5장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이 온 식구들과 함께 벧엘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라헬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출산의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의 12번째 아들 베냐민이었습니다.
영어 발음으로는 벤자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라헬은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길거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베들레헴에 묻었습니다.

창세기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성경에서 첫 번째 나오는 베들레헴은 죽음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지명마다 첫 인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담사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군사반란으로 인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는 모습이 당시에는 세계의 토픽이었습니다.
또한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을 들으면 금방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생각납니다.
4대강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 하면 첫 인상은 죽음과 슬픔입니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의 장소 베들레헴에 생명의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죽음과 슬픔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을 생명과 기쁨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2.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이 두 번째 등장하는 곳은 룻기서입니다.

룻기 1:1-2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베들레헴에 사는 이스라엘 남자 엘리멜렉이 역시 베들레헴 여자 나오미와 결혼하여 기룐과 말룐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 모압에서 두 명의 아들이 이방 여인인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자손도 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여자들만 과부로 덩그러니 셋이 남았습니다.
남편 잃고 아들 잃은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며느리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얼마 후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여인인 그녀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예수님에게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혈통은 순수 이스라엘의 혈통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모든 사람들도 구원하시는 만인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인 우리 모두인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고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3.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의 고향입니다.

사무엘상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사무엘상 17: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장차 메시아가 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계3:7) 거지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라고 외쳤습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므로 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고로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리고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히브리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알파벳마다 개인 숫자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윗이라는 이름의 알파벳 숫자를 모두 더하면 14가 나옵니다. 즉 유대인들은 14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14는 다윗의 숫자요,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암시가 있는 숫자입니다. 고로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한대로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동방박사들이 방문하자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많은 장소 중에 예수님이 하필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4.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쓰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6)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합한 것 정도입니다. 차로 하루면 이스라엘을 다 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그 작은 나라에서 100 마을 안에도 안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당시 인구가 1,000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을에서 메시아가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건숙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중 '지푸라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5남매를 길러 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니 다 늙었습니다. 온 몸에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5년 동안 똥오줌을 받아 내며 뒷바라지 하다 보니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이제는 지푸라기 같은 인생이라고 늘 비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지푸라기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진흙땅에 떨어져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고 있었습니다. 천덕꾸러기 지푸라기였습니다. 그나마 그 지푸라기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두 동강난 지푸라기 한 쪽을 입에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새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새들이 행복하게 포근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반 동강 지푸라기는 농부가 주워 가서 새끼를 꼬는 데 넣었습니다.
그 지푸라기로 꼰 새끼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지푸라기라도 제대로 쓰이면 쓸모가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나도 쓸 데가 있겠구나!"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교회로 달렸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목사님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많은 사람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푸라기 같은 인생도 다 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우리, 보잘 것은 나도 사용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5. 마귀의 목을 꺽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베들레헴은 유다 땅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땅을 분배할 때에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땅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즉 예수님은 베들레헴 유다 땅에서 태어나 원수의 목을 잡아야 합니다. 즉 마귀의 모든 권세를 빼앗아 버려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마귀는 여자의 후손인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즉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뱀이라고 불리는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홀은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휘봉입니다. 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영원토록 왕으로 우리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했습니다.

6.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것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향하여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밥입니다.
빵이 빵집에서 나오고, 떡이 떡집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이신 예수님은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합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먹으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떡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려 죽고 맙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해야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원수의 목을 꺾으시고 영원토록 왕으로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쪼록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행복을 가꾸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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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과 세금


예수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또 기독교인이라면 이것이 미가서 5:2절,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는 예언의 성취임을 압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직접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베들레헴을 가라는 명령하시기 보다는 세금이라는 세속적인 수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1절은,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적 등록’을 뜻하는 "아포그라페스다이(ἀπογράφεσθαι)"는 세금을 걷기 위한 호구 조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운영의 밑천이 되는 인두세를 더 많이 걷고자 호구조사 명령했습니다.
그의 명령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촌동네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정확한 숫자 파악을 위해서 황제는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요셉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정혼녀인 마리아가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배가 남산만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본적지인 베들레헴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국가에서 가장 엄한 법입니다.
세법이 잘 지켜져서 세금이 잘 걷혀져야 나라가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권력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걷고자 인두세와 더불어 각종 기이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3세가 창문에 세금을 부과하자, 부자들은 창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건물의 너비에 비례해서 세금을 내게 하자, 사람들은 건물을 높게 지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절대 군주였던 표트르 대제는 한 때 수염세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때 지중해의 어느 섬에서는 집 중앙에 벽돌로 아치형 기둥 짓고, 기둥 상단에 있는 벽돌 하나만 제거하면 집이 곧 바로 무너지는 구조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앙 정부에서 세금 징수원이 나오면, 집주인은 아치 중앙의 벽돌 뺐고, 징수원이 돌아가면 다시 집을 복구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에게 세금은 주요 수입원이었기에, 그들은 시퍼런 칼을 앞세워 세법을 집행했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속담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2천년전 요셉도 세법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어서 몸이 불편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긴 여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무리한 여행을 강행하는 요셉에게 바가지를 굵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법이 무서워 그 고단한 여행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2017년 미국 가정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24%를 연방소득세, 사회보장세, 메디케이세로 냈다고 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세법을 통해서 예언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매년 4월 15일은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는 히브리서 13:5절의 약속을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세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세속적인 수단입니다.











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스스로 개척하라(여호수아 17:15) clear land for yourselves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If you are so numerous," Joshua answered, "and if the hill country of Ephraim is too small for you, go up into the forest and clear land for yourselves there in the land of the Perizzites and Rephaites.

개척(開拓) : 열 개(開), 넓힐 척(拓)

1. 거친 땅을 일구어 논, 밭을 만듦.
2. 새로운 분야(分野), 운명(運命), 전도(傳道) 따위를 엶.
3.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함.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받은 은혜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을 받았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지겠다고 남들보다 더 누려보겠다고 하며 감사하기보다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은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공연히 짜증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보다 할 수 있으면 자기 지분을 더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공동체에서는 집단 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한국에서는 노사분쟁이 해마다 일어납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띠고 때로는 삭발을 하고 때로는 공장을 폐쇄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약사와 의사 사이에 처방분쟁이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 사이에 수사권 분쟁이 있습니다.
양의사들과 한의사들 사이에 영역 분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잘 해보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지나치면 우리 부서, 우리 목장, 우리 그룹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지도자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특권 계층의 요구를 절제시키고 자발적으로 섬김의 정신을 갖게 함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파로부터 쉽지 않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살펴보면서 믿음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나아가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요셉 지파의 불평 : 더 많은 분깃을 주소서(17:14)

본문은 요셉 자손과 여호수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복을 주셔서 큰 지파가 되었는데 제비를 뽑아 한 몫만 유산으로 받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들의 말에는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특별히 복을 주셨듯이 여호수아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과 요구는 여호와께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뽑은 제비는 여호와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며 그의 땅 분배는 모세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인 요셉의 후손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그에 따른 특혜를 요구합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 최강대국인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7년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졌기에 야곱의 가정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그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잘 대접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범한 죄까지도 용서해주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해서 고센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400여년이 지나는 동안 70명이었던 가족이 장정만 60만 명, 가족까지 따진다면 200만 이상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한 가족이 애굽으로 건너가 한 민족을 이루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런 공로를 생각해서 요셉 자손은 자기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분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기로만 따지면 므낫세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의 크기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넓었습니다.
므낫세는 요단 동편의 바산과 길르앗 영토를 얻었으며, 요단 서편에도 이스르엘 골짜기를 경계로 하는 비옥한 영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므깃도와 벧 스안과 같은 주요한 성읍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 받은 땅까지 합하면 요셉 지파가 얻은 땅의 면적은 모든 지파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었으면 감사해야 하고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섭섭하다고 따집니다.
우리처럼 큰 민족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호수아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선 요셉 지파의 대표들은 다 여호수아의 친인척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누군가 말했듯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칫하면 여호수아도 요셉 지파의 편을 들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답변 : 스스로 개척하라(17:15)

요셉 지파의 요구는 자칫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다른 지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요구를 들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다른 지파에 비하면 넉넉하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책망할만한데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림 산지가 네가 너무 좁”다고 하며 그들의 불평을 받아줍니다.
그러면서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한 분깃은 정착과정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고, 다른 한 분깃은 이제 요셉 지파의 노력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서 받기를 바라지 말고 원하는 땅을 스스로 나가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유다 지파가 그랬습니다.
한 분깃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받았을 뿐 아니라, 갈렙을 통하여 새로운 산지를 개척하여 지경을 넓혔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 방법이고 이제 요셉 지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이 큰 민족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요셉의 변명 : 그 땅은 넉넉지 않고 그들은 철병거를 가졌나이다(17:16)


요셉 지파가 더 많은 땅을 요구할 때에 자신들이 '큰 민족'이기 때문에 더 큰 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니 자신들은 힘이 부족하다고 꼬리를 내립니다.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주저하는 두 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 번째는 가서 개척하라는 땅이 자기들에게 좁다는 것입니다.
얻어 보았자 좁은 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서 정복해야 할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은 철병거가 고사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이기고 그 땅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전쟁할 때 누구의 힘으로 싸웠습니까?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여리고를 누구의 힘으로 정복하였습니까?
기브온 전투를 남부지역을 정복한 것이 누구의 힘으로 된 것입니까?
강력한 북쪽 지역의 가나안 족속을 누구의 힘으로 물리쳤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히였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적들의 강함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후손임을 내세워 쉽게 땅을 더 분배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 속에 안주하다 보니 어느 새 앉은뱅이의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들의 능력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너희가 큰 민족이라면 힘도 클 것이고 그렇다면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요, 만일 스스로 개척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다면 주어진 땅으로 충분하니까 받은 것에 만족하며 그냥 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면 : 너는 큰 민족이니 네가 개척하라(17:17-18)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 즉 한 분 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맞는 말입니다.
요셉 자손은 큰 민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큰 민족, 큰 권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셉 자손들뿐만 아니라, 열두 지파가 다 강하고 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쫓아내리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상속’의 의미를 포함한 단어로서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은 철병거를 이길 수 없는 자신들의 부족한 능력을 언급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중심을 봅니다.

의지가 없어 순종하지 않는 것은 능력이 없어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능력’이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18절에 ‘너’라는 단어를 네 번씩이나 사용하면서 요셉 자손의 결단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큰 민족'임을 알고, '큰 권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견고한 성을 차지하고 지키고 있어도,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군사력에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요셉 자손은 반드시 승리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큰 민족이지만, 땅은 당신이 빼앗아서 나에게 달라'는 요셉 자손의 부탁은 사실 알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힘써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힘써 찾는 자에게 찾게 될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 뒤로 물러선 자에게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다면 그만큼 내가 힘써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지혜를 받고,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남들보다 더 건강하면, 남들보다 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더욱 수고 하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1.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창세기 48:5을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야곱으로부터 두 몫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축복에 의해 두 지파를 이룬 요셉 자손은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므낫세 지파는 절반은 동편에서 절반은 서편에서 몫을 얻었기에 사실상 두 몫을 배정받은 셈입니다.
따라서 요셉 지파에게는 므낫세 지파 몫으로 두 몫, 에브라임 지파 몫으로 한 몫 도합 세 지파의 몫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7:3을 보면 슬로브핫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습니다.
보통 아들이 없으면 그 땅들은 모두 삼촌이나 다른 친척의 아들들에게 상속이 되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그 땅을 상속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이미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앞에 나아가서 더 많은 몫을 요청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 직전에 행한 인구 계수에 따르면 므낫세 지파가 52,700명, 에브라임 지파가 32,500명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반은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기 때문에 남은 두 지파를 합해도 6만 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다른 지파들-유다, 단, 잇사갈, 스블론-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훨씬 좋은 땅을 차지한 그들이 감사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특권이란 한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권리를 말합니다.
요셉 자손들이 한 분깃을 더 달라는 제안은 공동체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집단 이기주의를 대변합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룹들이 있는 공동체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요셉 자손들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빙자하여 자신들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요구하자 여호수아는 다른 지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산간 지역과 가나안 족속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점령하여 개척하도록 제안했습니다.

갈렙의 본

요셉 자손의 특권의식과 그들의 소극적인 모습은 갈렙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갈렙은 이미 정복된 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달라고 했는데 요셉 자손은 이미 정복한 땅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갈렙은 헤브론 성읍이 매우 크고 견고하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요셉 자손은 자신들과 싸울 가나안 거민들이 철병거를 가졌다면서 올라가기를 주저합니다. 갈렙은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가나안 정복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섰는데 요셉 자손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파라 자부하면서도 앞장서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못하고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철병거로 무장한 헤브론 산지를 제게 주십시오. 내 나이 85세로되 장정과 더불어 싸울 힘이 있사오니 이 산지를 제게 주시옵소서” 담대하게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복과 특권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언약한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의 본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기업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가장 마지막에 기업을 받습니다. 그는 자기보다도 이스라엘 지파들의 기업 분배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세라를 얻습니다(19:50) 그는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지어야만 하는 성을 선택했습니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은 가장 특권층에 속한 분이 오신 것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당신의 특권적 지위를 한 번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산골 동네에서 자라셨습니다. 공생애 시작 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면서 사십일 금식 후에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무리는 예수님에게 내려오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럴 능력이 있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과 백성들을 돕고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특권적 지위를 악용하였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위선자라 부르시며 질타를 하셨습니다. 먼저 가장 큰 특권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만을 위해 사용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합니다.

2.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19장에 보면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의 기업 분배를 다룹니다. 이들은 인구가 매우 많은 지파였지만 배당받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셉 지파처럼 왜 적은 땅을 주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제비를 뽑아 기업을 얻은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불공평해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적당하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공평을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연약한 지체를 받아 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과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이웃의 관계에서도 성령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들은 형제나 자매를 위하여 자기가 가진 특권이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유보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큰 자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양보는커녕 도리어 자기 몫을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3. 개척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사고 팔 때에 좀 독특한 방법으로 매매한다고 합니다.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우선 양을 가파른 산비탈에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러 넓은 풀밭에서 풀을 뜯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양이 되고, 살찌는 양이 됩니다.
그러나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지금은 편안하고 쉽지만 결국은 계곡의 무서운 협곡 바닥에 이르러 계곡물에 휩쓸려 죽거나, 풀이 없어서 굶주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버리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개척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진짜 큰 사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파괴적이고 비판적이며 시시비비 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각을 가질 때 우리의 사고력이 창의적이 되고 생산적이 되지만 마귀의 시각을 가질 때 말은 많아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현재의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만들어질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후에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장차 활동할 지경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철병거가 기다리는 그 산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둘 중의 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치면서 땅을 정복하려 한 갈렙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두려움에 떨던 열 명의 정탐꾼의 자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4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갈렙은 헤브론을 차지하는 비전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성은 여전히 크고 견고하였습니다.
그의 눈에 여전히 아낙 자손이 보였습니다.
85세 된 자신의 연약함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길임을 알기에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셉 지파들에게도 가나안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철병거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을 계산하고 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산지를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 이루어놓은 자리를 그냥 차지하기 원합니다.
열심히 뛰기보다 편안하게 쉬고 싶어합니다.
복은 받고 싶지만 대가를 치루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매력적이지만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몸은 고달파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정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임을 깨달으며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를 다스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우리 것이라고 이미 선포하신 분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려갈 길이 멀고 철병거가 있어도 갈렙처럼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믿음으로 개척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게으르게 앉아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자들은 결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특권 의식을 버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과 양보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함께 나아가며 마침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분깃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자 여호수아는 각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중 요셉지파는 요단 동 서편 지역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분배받은 영토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분깃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지파는 큰 지파이고 두 지파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분깃만 받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에게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더 많은 영역을 요구하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아직도 미개척지인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땅을 개척하여 기업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곳은 산악지대라 자신들에게 넉넉한 곳이 되지 못하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 살기 때문에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면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비록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

  우리는 더 많은 분깃의 영토를 요구하며 불평하는 요셉지파에게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찾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그들이 맡은 몫이 그들에게 적은 것이라고 불만족하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비옥한 가나안 중심부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지파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땅을 배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내세우면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셔서 그 후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닙니다.

  요셉지파가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원인은, 그들은 질보다 양에 치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단 동 서편의 좋은 땅을 차지했음에도 양적으로 볼 때에 자기 지파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적은 땅을 분배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교하는 데서입니다. 요셉지파는 자기 지파의 다른 지파와 비교하면서 불평했습니다. 내 조건이 하나님 앞에서 최상의 것임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다른 지파와 비교하는 데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지파는 이기적임으로 불평했습니다. 요셉지파는 자기들 중심의 이기적인 판단에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1000원을 잃어 버려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아이에게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더 크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1000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2000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이기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요셉지파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부정적이 됨으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에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이고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사람이 있다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평했습니다,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양적이거나 비교적이고 이기적 태도에서 자유하고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인 태도 속에 불평과 불만을 없애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의 모습 갖추라는 것입니다.

  요셉지파의 불평과 불만족하는 요청에 여호수아는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들의 지역을 더 분배해주면서 그 땅을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지파는 그 땅은 산지와 산림지역이며 더구나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원주민이 있어서 개척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고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그 끝가지 네 것이 되리라”(17-18)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창조성이 있음을 주지시킨 것입니다. 얼마든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척하다”고 쓰인 히브리어 ‘바라’라는 말은 ‘베어 넘기다’는 뜻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개척하다(1254) 바라(bârâʼ)  בָּרָא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세기 1:1.
발음 / 바라[ bârâʼ ]
관련 성경 / 창조하다(창 1:1, 시 89:12, 렘 31:22), 만들다(사 4:5), 짓다(말 2:10, 사 45:7, 57:19), 행하다(출 34:10), 지음을 받다(시 148:5, 겔 21:30, 28:13), 창조되다(창 5:2, 사 48:7), 개척하다(수 17:15, 18), 죽이다(겔 23:47), 나오다(겔 21:19), 살지게 하다(삼상 2:29).
구약 성경 / 48회 사용

회사에서 중요한 물품을 생산하면 그 물품과 함께 딸려 보내는 사용자 편람이란 작은 안내 책자가 있습니다.
비디오 같은 특수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사게 되면 사용자 편람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잘 읽고서 사용하면 그 기계의 최고의 성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용자 편람을 주셨는데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창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간직해야 할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라는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수도원의 요리사가 되는 길만이 열리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수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하찮아 보이긴 하지만 수도원 요리사의 일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수도원요리사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들어간 젊은이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공부하고 기도할 때에 젊은이는 음식을 만들면서 “주여, 제가 만드는 음식들이 저들의 영과 육을 살찌우는 하늘의 만나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에는 “주여, 이 그릇들이 깨끗케 되는 것처럼 주 예수께서 제 마음도 깨끗케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불을 지필 때에는 “이 불길처럼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수도사들의 마음속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요리사로서의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활자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이었고 찬송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수도원에 요리사로 들어온 지도 7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착실하게 기도생활을 해온 그에게 수도사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세월이 지난 뒤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리버만이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든 한 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리버만은 아홉 살 때 단돈 5달러를 들고 미국에 이민하여 맨하튼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버만은 일흔 네 살에 은퇴한 후 노인정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둑 파트너가 약속을 어겨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에 한 젊은 봉사요원이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지요” 라고 종용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리버만은 화실을 찾았고 그때부터 10주간 교육을 받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나이 여든 한 살 때,  일약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로 불리었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는 백 한 살에 스물 두 번 째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인생을 살도록 인생의 중요한 편람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부여하신 편람을 잘 사용하여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창조적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5가지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것은 '첫째, 실패의 기억을 오래 남겨두지 말라. 둘째, 자기비하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셋째, 사업은 위기를 즐기는 게임이다. 넷째,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면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다섯째, 실패는 마지막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요 네게는 힘이 있다고 격려하며 창조의 역사를 이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잘 활용하여 창조의 삶을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산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고 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요셉의 후손들로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자부심 강한 요셉 자손이 그렇게 나약하고 비겁하게 바뀐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가 차지하라는 땅을 향하여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철병거가 있다”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믿음과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 없고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미국의 실업가로서 체신부장관을 지냈고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정확한 경영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투자해 구입한 물건들은 엄청난 이윤을 남겼습니다. 워너메이커가 투자하는 것은 항상 최고의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2달라 50센트를 주고 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나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가난한 소년시절 성경을 읽고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믿음을 배웠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대부호의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요셉지파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평과 불만족에서 자유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창조적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용기를 가짐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땅과 같은 현실을 요셉지파의 축복의 땅을 만들듯 변화시켜 가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는 위대한 축복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중보 기도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1.중보기도의 정의

디모데전서 2: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모든 사람들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

2. 중보기도는 누가 하는가?
 
우리는 성전입니다. (막 11:15-17) 성전의 용도 : '만민의 기도'하는 집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목적을 따라 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3.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는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창 12:1-3에서 하나님의 약속 :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 아브라함은 자기의 삶을 드리면서 나만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나를 통해 온 족속이 축복받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우리의 시야가 열려있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는 것.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온 땅을 축복하시는 비밀입니다.


4. 조지 뮬러의 기도

"내가 기도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겔 22:30)

-스웨덴의 중보기도자 옐 : "예, 나는 하나님께서 이일에 나를 쓰시도록, 중보 기도자의 삶을 살도록 준비가 끝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으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중보(中保) 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1. 중재자
2. 갈라디아서 3:19
발음 / 메시테스[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319. 메소스(mĕsŏs)  μέσος, η, ον 
1. 중간의
2. 마태복음 25:6
3. 중앙
발음 / 메소스[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운데(마 10:16), 중에서(고전 5:2), 한 가운데(막 3:3), 속에(눅 8:7), 사이로(눅 17:11), 정오(행 26:13).
신약 성경 / 58회 사용

* 3326. 메타(mĕta) μετά
1. ~와 함께
2. ~가운데
3. ἧνμετά τῶν θηρίων: 그는 들짐승들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발음 / 메타[ mĕta ]
관련 성경 / 후에(요 2:12), ~와 함께(마 4:21, 살전 3:13), 동행하고(마 5:41), 으로(엡 4:2), 더불어(갈 4:25), 데리고(마 20:20), 지나면(마26:2), 가지고(마 26:47), 다음(마 27:62), 만에(막 8:31), 겸하여(막 10:30), 타고(계 1:7), 동류로(눅2 2: 37), 가운데서(눅 24:5), 뒤에(히 9:3), 겸한 (엡 6:23), 취하여(히 9:19), 후로는(히 10:16), 에게(계 1:12).
신약 성경 / 473회 사용



중재자,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中保(메시테스)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6번 쓰였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 3번, 히브리서에 3번 도합 6번이 쓰였다.
메시테스는
메시테스는 메소스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메소스는 가운데라는 뜻이다.

중재나 중보라는 말이다.
중재나 중보는 사람과 사람간에 문제라면 사람이 중재나 중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이 하나님과 사람간에 생겨진 문제라면 사람이 중보할 수가 없다.
사람과는 대등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중재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중재하겠느냐'
(한글개역, 각각 "판결하시려니와", "간구하겠느냐").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무엇인가?
중보가 무엇인가?
구약성도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있었다.
모세였다.
모세 이후에는 데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역할을 했었다.
그것도 1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가지도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같이 약속의 중보자가 오시기까지라고 했다.

이 약속의 중보자를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할을 그의 참된 대제사장 직분의 기능으로 보았다.
(참조: 히 5:6; 5:10;  6:20; 7:17; 7:21; 7:26; 8:1).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 "새 언약의 중보"(히9:15), "새 언약의 중보"(히12:24)이시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모세가 있기전 즉 율법이 있기 전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그 언약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네 씨”를 말한다.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오 또 언약의 중보의 성취자가 된다.(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혼이 돌아가시니라.

한문의 중보(中保)라는 글을 잘 보시라.
中자는 말할 것도 없고 保자를 보시게 되면 나무 위에 한 분을 볼 수 있다.
나무 위에 그 한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세 때분터 예수 때가지의 중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한 사람이었다.(오시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이제는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내가 니루었다”(요19:30)고 하셨음은 곧 중보를 성취하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이 한 분뿐이라면 한분 뿐인 것이다.

왜 사람들이 Roma catholic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틴 루터가 이것을 개혁하기 위하여 몸을 던졌던 것인데 이제 와서 개신교가 종교개혁전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외에 그 누구도 개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중보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
중보의 성취로 완전한 중보자가 되시는 분의 이름이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가 기도할 깨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계시는 분이 누구신가?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시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시다.
중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이다.

성도가 기도할 때 응답을 주시는 것은 중보자들의 기도 대문이 아니라 중보의 이름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분 예수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중보자이시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 과 하나님 사이에 사람을 개입시키지 말라!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직접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간혹 다름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때는 누구의이름으로 기도하는가?
그 때 불려지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중보자이시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가.
기도는 성도들에게 허락한 하나님께서 그 자식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혜와도 같은 것이다.
여러분들도 자신을 위해서도 형제를 위해서도 중보자가 되시는 그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중보자의 이름으로 크게 역사하실 것이다.
중보자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그 기도와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은 크게 응답하실 것이다.

갈라디아서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디모데전서 2:5에서 메시테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께 인류를 대표하는 중보자이시다(Oepke 619).
그는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입하여, 인간의 죄가 깨뜨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회복하신 것이다.






Ⅱ. 중보기도의 능력


1. 기도의 능력을 사람들이 일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결과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When man works, man works, When man prays, God works."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2. 중보기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1990년 이전과 1990년 이후의 세계변화 (소련의 붕괴)
미국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부흥 : 한 노인의 기도
한국에서 일어난 1907년의 부흥 : 원산에서 선교사들의 기도 (1903년)
웨일즈의 부흥운동 : 사회의 악이 사라짐


3.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


Ⅲ. 중보기도자가 서 있어야 할 곳


1. 결렬된 곳 : 틈이 있는곳

모세의 기도 :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의 중보
"하나님, 차라리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없어질지언정 이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옵소서."

중보기도자는 그 죄악을 자기 것인양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심판하지 아니하시도록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중보기도는 땅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회복) -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면에서 주님께서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벽 위

중보기도자는 파수꾼입니다. (아모스 3:17)

- 파수꾼같이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은,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은 성벽 위에 두시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시야가 넓어져서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예레미야의 예언 :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것과 70년 만에 돌이키겠다는 말씀 (렘29:10, 렘 25:11-12)

- 다니엘의 기도 : 예레미야서 말씀을 읽고 금식하며 기도함 (단 9:1-2)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겔36:33-37)

-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그 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벽위에 올라갈 때에 아직까지 되지 않는 일들, 아직 볼 수 없는 일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3. 중보 기도의 사이클

;기도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백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출발하는게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
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필요를 보는 시점에 이릅니다.
-이제 무엇이 필요한지를 하나님께 듣고 나면, 비전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시점이라고 합니다.
-기도의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구한 것에 응답하셨고,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게됨.

;응답된 시점
-실제로 성취된 것입니다.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에 대해서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 경건의 시간
기도시간 -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보여 주신 것들과 무엇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그 내용을 적어 놓으면 훗날에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볼 수 있도록 중보기도노트 준비할 것


4. 영적전쟁터
 
-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29)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보기도자로 부르신다는 것은 전쟁터로 부르신 것이란 사실은 가르쳐 주십니다.
원수 마귀와 연약한 자들 사이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예배의 방향성 :


예배는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예배는 원수 마귀에 대한 전쟁으로써의 예배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IV. 중보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렘 33:2-3)


-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쌍방향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잠잠히 기다림으로 시작하라,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하라


2.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슥 4:6)
 
- 우리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내 힘이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 나
가야 합니다.


3. 방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 방언으로 기도하면, 무엇을 기도할 지 그 내용과 기도의 능력을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의 성령
의 능력에 민감하게 하고,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히도록 하고,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지를 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V. 듣는 기도는 기다리는 삶에서 연습된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2.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 기도는 쌍방향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행하는 것이고, 신뢰는 내가 할 수 없는 그 영역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3. 우리는 듣기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 많이 듣고 연습하고 우리 귀가 날카로워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 가야 합니다.


ⅤI. 중보기도를 해야 할 영역들.


1. 중보기도를 해야 할 가장 큰 제목은 열방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8)"

- 중보기도로 우리가 가 본적이 없는 땅일지라도 기도를 통해서 밟을 수 있다.
열방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는 먼저 국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9개의 최변방 지역 (9 프론티어)

a. 최변방은 공산권 (러시아, 중국, 북한)
b. 모슬렘 (터키, 이집트, 리비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c. 불교권 (태국, 일본, 대만, 스리랑카)
d. 힌두권 (인도, 네팔)
e. 명목상의 교회가 있는곳 (유럽)
f. 미전도 종족 - 24000여개의 종족이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함
g.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h. 대도시 사람들 (중국, 인도, 러시아, 캐나다등의 인구 100만 이상의 거대도시에는 복음의 사각지대가 있음)
I. 세계의 작은 절반 - 20세 미만의 인구


2. 중보기도의 두 번째 대상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의 권세를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잠 29:2, 딤전 2:1)

-권세 있는 사람들,

- 언론 : 매스미디어, 신문, 방송, TV, 인터넷

- 불의한 지도자들의 악함을 드러내주시도록 기도.


* 7개의 국가 구성 요소들 (7 Mind Molders)

- 정치, 경제, 교육, 매스컴 예술, 종교, 가정
a. 정치 -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드러나도록 기도
b. 경제 - 하나님의 정직하신 성품이 나타나도록 기도
c. 교육 -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도록
d. 매스컴 -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e. 예술 -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나도록
f. 교회 -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도록 (영적지도자, 교회부흥)
g. 가정 -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도록

3. 각자가 속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각 교회, 교회 영적 지도자. 교회부흥


ⅥI. 효과적인 기도


1. 우리속에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
(시편 66:18, 시편 139:23, 24)


2.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는을 인정하십시오 (롬 8:26)


3. 무엇을 기도해야겠다는 생각들, 소원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등을 내려놓으십시오 (잠언 3:5-6, 잠언 28:26, 사55:8,9)


4. 성령께서 당신을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엡 5:18, 히 11:6)


5. 이제부터 갖게 될 놀라운 기도시간에 대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십시오.


6. 기도를 방해 하려는 악한 영들을 강력하게 대적하십시오 (약 4:7)


7.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립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말씀하십시오. (요 10:27)


8.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기도를 인도하시거나 확인시켜 주실 수 있도록 항상 성경을 펼쳐놓고 기도하십시오 (시편 119:105)


9.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기도를 마쳤을 때는 놀라운 기도의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찬양으로 마치십시오 (롬 11:36)


ⅦI.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


1.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2.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합니다.

3. 나라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5. 일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6. 하나님께서 교회안에 선교의 열정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7.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합니다.

8.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깨어진 마음을 교회안에 주시도록, 또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세상의 지도를 바꾸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큰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바로 그 중보기도 자로 부르신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대머리


대머리(bald. 케레아흐. קֵרֵחַ)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머리를 대머리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유전적으로 머리카락이 없거나 매우 적어서 뒤통수나 정수리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자연적으로 탈모가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



레위기 13:40
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NIV. When a man has lost his hair and is bald, he is clean.
KJV. And the man whose hair is fallen off his head, he is bald; yet is he clean
NASB. Now if a man loses the hair of his head, he is bald; he is clean.

* 대머리(7142) / 케레아흐(qêrêach) קֵרֵחַ 

1.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2. 레위기 13:40, 3. 열왕기하 2:23.
발음 / 케레아흐[ qêrêac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머리의(레 13:40). [명] 대머리(왕하 2:23).
구약 성경 / 2회 사용

얄왕기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 [레위기 13:41]
앞머리가 빠져도 그는 이마 대머리니 정하니라

3. [레위기 13:42]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문둥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함이라

4. [레위기 13:43]
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찌니 그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한 문둥병과 같으면

5. [레위기 21:5]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6. [열왕기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7. [이사야 3: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8. [예레미야 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9. [에스겔 7:18]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10. [아모스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1. [미가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찌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찌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뒷 머리가 없는 기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입니다.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을 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시라큐스라는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모습을 묘사해 보면 발에 날개가 붙어 있고 앞머리에는 무성한 머리카락이 있는 반면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습니다.
이 이상한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리시퍼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

왜 날개가 발에 달렸습니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왜 당신의 앞머리는 그렇게 무성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왜 뒷머리는 대머리입니까? 지나가면 도저히 다시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머리도 감사할 조건이 있다

  ①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됩니다. 날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③ 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④ 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사도 대머리였습니다.

  ⑤ 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습니다.

  ⑥ 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립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입니다.


대머리 때문에 죽다

그리스의 극작가인 Aeschylus는 거북이에 의해 죽었다.
거북이가 머리 위를 날던 독수리의 발톱에서 떨어졌는데 독수리는
Aeschylus의 대머리를 바위로 착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미 1:16)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가운데, 나실인이 있습니다.

민수기 6:5절을 보면,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라고 말했습니다.

 

사사기 13:5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 삼손을 낳았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삼손은 그의 힘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들릴라에게,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17)고 말했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깎였을 때, 그의 힘이 빠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서, 놋 줄로 그를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공자가 지은 “효경”에 보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함이 효지시야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몸과 피부와 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의 양반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짐승의 도리이고, 머리털을 묶어,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895년, 일본의 강압으로,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아멘.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비참하게 멸망을 당한 것처럼,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처참하게 파괴되어지고, 약탈되어지고, 백성들은 머나먼 바벨론까지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머리털은 능력과 권능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구별된 자들은 머리털을 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고 있던 집은 불태워지고, 가진 양식은 약탈당하고, 자녀들은 험악한 병사들에게 붙잡혀, 머나먼 이국 땅으로 끌려가는데, 애통해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의 괴로움과 슬픔과 애통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하 25:7절을 보면,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그의 눈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살랐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성물들을 약탈해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끌려가는 자녀들은 머리털이 없는 독수리처럼, 머리털이 깎이어,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부모들도, 자신의 머리털을 대머리처럼 깎아, 그 괴로움을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노예로 끌려가는 자녀들을 보아야 하는 부모의 쓰라린 슬픔을 머리털을 깎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어린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녀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는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한다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척 스미스, 그렉 로리, 라울 리즈 목사님 등이 모두 대머리이다.
그냥 재미있게 나와 헤어 스타일이 같아서 좋았다.


▣ 마을을 지킨 쑥대머리 총각

100년 전 전라도 문경이라는 마을에 출신을 알 수 없는 한 총각이 들어왔다.
얼굴은 곰보인데다 너무나 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생김새였지만 마음은 착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쑥대머리 총각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일할 때는 구수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느 해 여름,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가축과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포졸들이 나와 겨울이 될 때까지 마을을 떠나 있으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쑥대머리 총각만 홀로 남았다.
겨울이 되어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소, 돼지, 염소, 강아지 등 동물들이 그대로 있었고, 곳간마다 햇곡식도 그대로 쌓여 있었다.
폐허가 된 줄 알았던 사람들은 깨끗한 마을을 보고 '누군가가 마을을 지켰나보다'라는 생각을 한 뒤 쑥대머리 총각을 떠올리고 그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쑥대머리 총각은 전염병을 이기고 마을을 돌보느라 지칠대로 지쳐 쓰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만 피하기에 급급했던 것을 뉘우치며 쑥 대머리 총각을 정성껏 돌보았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다.
며칠을 울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호화스런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그 뒤 돈을 모아 땅을 사서 그 땅에서 나온 곡식으로 쑥대머리총각의 제사를 올렸는데 오늘날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대머리 아저씨 이발소 간 날




머리칼이 3개인 아저씨가 이발소에 갔다.
자신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면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머리 좀 따주쇼!!
이발사 아저씨: 헥;;......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그러나 이발사 아저씨는 정성스럽게 머리를 땋아 내렸다.
그런데.... 아차차!!
그만 머리칼이 하나가 빠진것이었따.

대머리를 아저씨는 무척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가름마나 타쥬쇼!!!
이발사 아저씨: 컥;;....!

이번만큼은 저얼대로 실수를 안해야 겠다싶어
이발사 아저씨는 조심조심 가름마를 타 나갔다.

그런데.... 헉스;;이게 웬일인가???
또 머리칼 하나가 빠져 버린것이었따.

대머리 아저씨는 무척 화를 내며.
아자씨 무스발라서 세워라도 쥬쇼!!!!

이발사 아저씨: 힉!!....;;;
이발사 아저씨가 그만 넘 쫄았는지

무스를 발라 세우는 도중
또다시 마지막 남은 머리칼 마저 빠지고 말았던 것이었었었따아~~~~~~~.
이발사 아저씨는 이제 죽었구나 싶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데.....
대머리 아저씨 "왈.

대머리아저씨: (모든걸 포기한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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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이나 내쥬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