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비(10-11월)와 늦은 비(3-4월)




이른 비(10-11월)와 늦은 비(3-4월)
이스라엘의 우기 때에 내리는 축복의 비


이스라엘 우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자연적 특성과 기후를 알아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에서 축복의 단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나라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유적지 중 우기 때의 비를 저장해 식수로 쓰던 저수지가 많고,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거나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신명기 11:14~17
여호와께서 ···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 다른 신들을 섬기며 ···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의 여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지속된다.
우기가을과 봄이 시작되는 시점인 10월경에서 이듬해 4월경까지다.
이른 비, 겨울 비, 늦은 비가 내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른 비(Autumn Rain) - 가을에 내리는 첫 비

10~11월경인 가을에 내리는 첫 비를 가리킨다.
이른 비를 시작으로 우기가 시작된다.
여름철 건기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말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 없다.
농부는 농사 지을 준비를 갖추어놓고 메마른 땅을 보며 간절히 이른 비를 기다린다(야고보서 5:7).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해 2~3주가 지나면 들판은 푸른 초장으로 변한다.
농부들은 이때 밭을 갈고 파종한다.
이른 비가 적당한 시기에 내려야 제때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른 비는 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겨울 비(Winter Rain) - 겨울에 내리는 늦은 비, 장마비

겨울 비는 본격적인 장맛비로, 12~2월경에 내린다.
이스라엘에서는 건기를 대비해 이때 내리는 비를 저장해 사용했다.

늦은 비(Spring Rain)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봄비’라고도 불리는데 그야말로 단비다(스가랴 10:1).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 결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을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아모스 4:7).

이른 비 –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스라엘의 농사에서 때에 맞게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비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신명기 32:2, 에스겔 34:26, 시편 65:10). 비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복음사업’을 예표한다(마태복음 13:24~30, 37~39). 농사철 우기에 내리는 두 차례의 특별한 비,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농사를 위해 허락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시온의 자녀들아 ···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요엘 2:23)

이른 비의 역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던 2천 년 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 열흘간 전심으로 기도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허락된 성령의 역사로 예언이 성취되었다. 초대교회에는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오순절이 되자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 갑자기 ··· 혀처럼 생긴 불이 나타나더니 그것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와 닿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 그들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군중들은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 그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큰 소리로 ···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베드로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는데 그 날에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추가되었다.

(현대인의성경 사도행전 2:1~4, 6, 14, 36~37, 41)

늦은 비 – 초막절 성령시대의 역사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에 내리는 늦은 비는 영적 추수 때인 이 시대에 알곡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복음사업을 위해 내려주실 성령의 역사를 표상한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태복음 24:30~3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영적 추수기에 허락될 늦은 비 성령은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임하도록 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 초막절을 지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민족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스가랴 14:16~17)

(초막절)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7:37~39)

지금은 영적 결실기인 초막절 시대로, 추수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늦은 비 성령을 간구해야 할 때다. 간구하는 자들만이 늦은 비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될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늦은 비는 이스라엘의 곡식농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비다. 이스라엘의 주식인 밀과 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거둔다. 이른 비(히브리어: יוֹרֶה[요레],[1] 영어: former rain, early rain, autumn rain)는 태양력으로 10-11월경 우기가 시작될 때 내리는 가을비로, 건기 동안 메말랐던 땅을 적셔 경작하기 쉽게 해준다. 늦은 비(히브리어: מַלקוֹשׁ[말코쉬],[2] 영어: latter rain, spring rain)는 우기가 끝나가는 3-4월경에 내리는 봄비로, 추수 시기에 곡식의 결실을 풍성하게 해준다. 성경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인 성령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자연환경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의 자연환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지역은 고대부터 물이 귀했다.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주거지를 옮길 때마다 우물 때문에 분쟁을 겪거나 우물을 새로 파야 했다.[3]

  • 지형 및 농경
이스라엘은 국토의 60% 이상이 사막 지대다.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비교적 강수량이 풍부한 북부를 중심으로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지만 전체 국토의 20%밖에 되지 않는다.[4]
가을에 주식인 보리와 밀 농사를 시작해서 봄에 추수하고, 여름에 올리브와 포도, 석류 등 과일나무를 재배해 가을에 수확한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와 강우량이 많지 않은 지역의 식물들은 새벽에 생기는 이슬로 수분을 공급받아 생장(生長)한다.
  • 기후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사막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중해성 기후(Cs)로 분류되지만 사막 기후(BW)와 초원 기후(BS)인 지역도 있다. 연간 강수량은 500–750mm에 불과하며 지역적 편차도 매우 크다. 연간 기후는 크게 건기우기로 나뉘는데 여름철에는 이스라엘 전역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건기는 5월에서 9월까지이며 기온이 높고 건조하다. 우기는 10-11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이고 기온이 온화하고 다습하다.[5]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역할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비가 한 해 농사의 결과를 좌우하는데, 때에 맞게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단비'이자 축복의 상징이었다.[6][7][8][9][10] 반대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저주와도 같았다.[11][12]

  • 이른 비 :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초가을에 내리는 비다.
    이 무렵 곡식을 파종하므로 이른 비가 내려야 땅이 물러져서 곡식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여건이 갖춰진다.[13]

  • 늦은 비 : 우기가 마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곡식을 수확하기 직전에 내리며 '봄비' 또는 '축복의 비'라고도 한다.
    늦은 비는 농산물 증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추수기에 영양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곡식이 튼실하게 영글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에 맞게 내리는 늦은 비는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였다.[7][14][15][16]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성경적 의미

이스라엘의 곡식농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비유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전파해 영적 결실을 거두는 과정을 '밭에 좋은 씨를 뿌려 추수하는 것'에 비유하셨다.[17] 농사철에 내리는 특별한 비, 곧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의미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이스라엘의 곡식농사에 필수적이듯, 복음 사업이 완성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른 비 성령과 늦은 비 성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원전 8세기경, 선지자 요엘은 장차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요엘 2:23

이른 비 성령

이른 비에 대한 예언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던 2000년 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 10일간 힘써 기도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허락된 성령으로 성취되었다. 성령 강림 이후 하루 만에 제자가 3000명이나 늘었다. 이른 비 성령은 초대교회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사도행전 2:1–47

늦은 비 성령

요엘서의 예언은 사도 시대 오순절에 내린 이른 비 성령으로 일부 성취되었으며, 영적 추수 때인 세상 끝에 임하는 늦은 비 성령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그 후에 내가 내 신[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 요엘 2:1–31

하나님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징조가 있은 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한다고 하셨다. 요엘서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세상 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림과 세상 끝에 있을 징조를 알려주면서 "그때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 또한 사도 요한은 큰 환난에 앞서 하나님의 인을 치는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는' 징조가 있다고 기록했다.[19][20]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영적 추수기로 비유된 세상 끝에 나타난다.
늦은 비를 맞은 곡식이 영글어 곡간에 들어가듯, 영적 추수 때인 세상 끝에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알곡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이고 천국 복음 사업이 완성된다.[21][22]

늦은 비 성령 받는 방법

  • 하나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성도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실 '성령의 전'이다.[23][24] 하나님의 성령은 우상으로 더럽혀진 곳이나 가증한 곳에 계실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의로써는 성령을 받을 만한 정결한 성령의 전이 될 수 없기 때문에,[25]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하는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치셨다.[26] 또한 하나님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성령)를 내리지 않으신다.[27][28]하나님의 절기를 지킴으로 성도들이 성전인 자신을 정결케 할 때 늦은 비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은 늦은 비 성령 받는 조건이다.[16]예수 그리스도는 초막절 끝날에 성전에 서서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라고 외치셨는데, 이는 '성령'을 받으러 오라는 뜻이었다.[29] 그리스도께로 가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야 한다.[30]


  • 성령 받기를 구해야 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봄비, 곧 늦은 비를 받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교훈했다.[31] 예수님도 구하는 자에게 생수, 곧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30][29]

각주

  1. יוֹרֶה. 《네이버 고대 히브리어사전》.
  2. מַלקוֹשׁ. 《네이버 고대 히브리어사전》.
  3. 창세기 26:15–22.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 이삭이 ...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4. "2021년 이스라엘 농축산업 정보", 《KOTRA 해외시장뉴스》, 2021. 9. 8., "기후 및 지형으로 본 이스라엘의 농업 여건: 이스라엘의 국토면적(내륙 수면 면적 포함)은 22,072㎢로 한국의 1/5 정도 크기이며 경상북도의 면적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농업농촌개발부의 2020년 발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총 국토면적 대비 농경지 비중은 20% 수준이다. 골란 고원과 갈릴리, 이스르엘 골짜기 등 강수량이 풍부한 북부 산맥지대와 골짜기 지역을 중심으로 비옥한 땅이 형성되어 있어 북부지역에 농축산업이 주로 발달되어 있다."
  5. "2021년 이스라엘 농축산업 정보", 《KOTRA 해외시장뉴스》, 2021. 9. 8., "이스라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고온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대부분의 강수는 11월부터 3월 사이 겨울철에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
  6. 필립 J. 킹 외, 《고대 이스라엘 문화》, 임미영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137쪽, "팔레스타인에는 단지 두 계절이 있을 뿐이다. 비가 전혀 오지 않는 5,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 건기와 10월 중순부터 3월까지의 우기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비는 11월에서 2월 사이에 내린다. 히브리어에 비를 명칭하는 여러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을 보아 농업을 위한 강우량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른 비(요레<yôreh>)는 가을에 내려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 땅을 갈고 씨뿌릴 수 있는 조건들로 만든다. 겨울의 폭우인 게쉠(gešem)은 땅을 적시고 물 저장고를 채운다. 늦은 비 말코쉬(malqôš)는 밀과 보리가 자라도록 돕는다."
  7. 이동: 7.07.1신명기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8. 야고보서 5:7.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9. 시편 84:5-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10. 잠언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11. 아모스 4:7–8.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예레미야 3:2–3.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13. "이른 비",《CLP 성경사전》, 기독교문사, 2013, 1124쪽, "우기가 시작되는 초가을에 오는 비. 이 비가 내려야 땅이 물러져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비는 매우 중요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의 징표로서 늦은 비와 연결되었다(신 11:14; 시 84:6; 욜 2:23)."
  14. 욥기 29: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15.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16. 이동: 16.016.1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17. 마태복음 13:24–30, 37–39.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8. 마태복음 24:3, 29–31.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19. 요한계시록 6:12–13.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20. 요한계시록 7:1–3.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21. 마태복음 13:36–43.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22.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3.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24.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25. 로마서 3:9–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6.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27. 스가랴 13:1.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8. 스가랴 14:16–19.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29. 이동: 29.029.1요한복음 7:37–39. 명절[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0. 이동: 30.030.1요한복음 3: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31.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3)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로 우기가 겨울입니다.
겨울이 시작 되기 전 10월부터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씨를 뿌린 후,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파종 하는 시기에 내리는 이른 비가 한 해의 농사를 결정합니다.
겨울 동안 우기를 보낸 후, 3-4월 봄이 되어서 마지막 결실을 준비하면서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기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이 80%를 차지 하지만, 20%도 차지 하지 않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파종과 수확에 엄청난 역할을 차지 합니다.

비를 <가삼. gâsham - משג> 이라고 합니다.

גָּשַׁם 스트롱번호1652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삼[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גֹּשֶׁם 스트롱번호1656
1. ~에 비가 내리다
2. 에스겔 22:24.
발음 /  고셈[ gôshem ]
어원 /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를 얻다(겔 22: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652. 
גָּשַׁם 스트롱번호1652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삼[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늦은 비를 히브리어로 <말코쉬. malqôwsh -מלקוש> 라고 합니다.

מַלקוֹשׁ 스트롱번호4456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953.  לָקַשׁ 

1. 익다
2. 피엘형 : 늦과일을 모으다
발음 / 라카쉬[ lâqash ]
관련 성경 / 따다(욥 24:6).
구약 성경 / 1회 사용





성령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를 뜻합니다.
인생에서 은혜의 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일 것입니다.
인생에서 늦은 비,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어 주시는 은총을 부어 주시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없는 인생의 발걸음은 무척 삭막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영적인 추수의 계절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늦은 비를 이 땅에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늦은 비가 오늘도 심령에 부어 주실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셨던 이른 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은혜를 이제는 영혼을 적시는 늦은 비로 가득 채워 새 생명의 삶을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른 비(시편 84: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מוֹרֶה 스트롱번호4175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3384. יָרָה 스트롱번호3384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잠언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מַלקוֹשׁ 스트롱번호4456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953.  לָקַשׁ 

1. 익다,  2. 피엘형 : 늦과일을 모으다
발음 / 라카쉬[ lâqash ]
관련 성경 / 따다(욥 24:6).
구약 성경 / 1회 사용









순교자 이야기 - 손양원목사



손양원 목사님의 열 가지 감사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이라 쓴, '감사헌금 봉투' 애양원에 유품 전시”


신사참배 거부하고 투옥/
순교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
전도하다 총살순교 감사/
천국에 갔으니 마음 안심 감사/

전남 여수에 가면 애양원이 있습니다.
소록도가 생기기 전 손양원(孫良源)목사님(1902~1950년 9월 28일)께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1909년 4월 3일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 활동에 전념하던 오웬 선교사는 급성 폐렴으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오웬의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급히 광주로 오게 되는데 포사이드는 광주로 오던 중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두 아들 동인, 동신.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한센병환자를 치료한데에서 애양원의 설립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최초의 한센병치료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애양원 교회(예장 통합)의 제2대 담임목사인 손양원 목사님은 1939년 7월 14일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원탁회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애양원에 가면 손 목사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봉투 하나가 유리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바로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두 아들(동인, 동신)이 공산당 청년(안재선)에게 총살로 순교를 당한 직후 장례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바쳤던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그 감사헌금 봉투 겉면에는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 적혀있습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와중에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도 모든 예배를 정상으로 인도한 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이 한 인사말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장례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슬퍼하기보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장례식 후에 감사헌금 1만 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80원이었습니다.
1만원은 목사님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나중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기적을 이룹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과 영화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세계에서도 읽히고 있습니다.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어 있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인 정양순 사모에게 보낸 옥중서신인데, 병든 아내를 향해서도 감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손목사님도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시는데 동인, 동신 두 아들의 하관식을 하며 자신이 죽으면 이 자리에 묻으라고 하신 유언대로 세 부자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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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인 손동신 두 형제의 순교 이야기

‘손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주명준 교수는 “故 손양원 목사와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는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며 “기독교는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온 세상에 퍼졌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들 부자의 순교역사를 항상 되새기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실천적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동인·동신 형제의 죽음은) 좌우익 사상 갈등의 결과가 아니고, 신앙을 중심으로 한 싸움의 결과였다”면서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스러졌으나, 그들의 순교의 피는 오늘날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미국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는 크게 세 기둥을 중심으로 호남 선교에 집중했다.
바로 복음선교· 의료선교· 교육선교”라며 “그러나 이를 적용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은 지역의 기후·지리·역사·문화·종교적 특성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그 특성은 첫째로 호남은 한국의 곡창지대이면서도 주민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로 인해 배움이 적고,
셋째는 질병이 성행하지만 그 치료를 주로 무속에 의존하며,
넷째가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다는 것”

“이러한 요소들이 호남이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게 된 특성들이다.
특히 호남은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를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러한 순교의 정신은 조선조 말 의병운동 기간에, 일제시대의 삼일 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간에, 그리고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순교자를 대량으로 배출하게 했다”면서 “호남은 개신교 순교자 총 수(약 1천명)의 85% 정도를 배출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순교’ ‘증언’ ‘제자’가 한 단어에서 파생됐음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는 순교적 상황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그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며 “오늘 동인·동신 형제의 순교를 알리는 표지석의 설치는, ‘이들의 순교 이야기가 언젠가는 쓰일 것’이라고 했던 한 선교사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손동인과 손동신)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사회주의 계열 군인 일부가 봉기하였다.
이들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이어 순천까지도 점령하였다.
이 당시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은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봉기군들이 이들을 체포하여 총살하였다.

애양원교회에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 발생 나흘 뒤인 10월 25일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도들이 시신을 거두어 27일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동산에 묻었다.
이들이 총살될 때 애양원교회에서는 부흥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 주례까지 맡게 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최고의 산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날 손양원 목사의 마지막 인사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지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삼남삼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로 순교당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의 말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멸사봉공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전쟁통에 피신을 권유하는 주변 사람들의 강한 요청에도 자신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보신을 위해 자신만 안전을 찾아 떠날 수 없다는 그의 진정성에는 성경의 말씀을 현장에서 실천하겠다는 초기 기독교의 근원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다.

손양원목사님 두 아들의 순교

◈ 손양원 목사님, 두 아들의 순교 눅 23:46 / 11.03.24. 손동희 권사 간증 녹취(2/3)

◑갑작스레 찾아온 815 해방

나는 (손동희 권사) 고아원에서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동생 손동장과 함께 부산 구포 애린원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난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아원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낮이었는데, 큰 고목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서 고아원 원장 한정교 목사님과 열명 가량 되는 교인들이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서 대낮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는 보통 때의 예배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아주 예배가 막 그렇게 요란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한데 얽혀서 울고 불고, 손뼉을 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무슨 큰 난리가 난듯이 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그런 요란스런 예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참 별나게 예배를 드리는구나’하며, 그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보고 있었습니다.(당시 13살)
그랬더니 마침내 요란스런 예배가 끝났습니다.
끝나자마자 한정교 목사님은, 막 나 손동희를 찾았습니다.
저를 찾더니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너 그동안 고생 많았지? 오늘 해방이란다.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망했단다.
방금 일본 천황이 라디오에, 미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공포했단다.
이제 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서 나오시겠구나..’
저는 그때 그 나이에, 해방이 무엇이며, 일본 천황.. 이런 것도 다 모르겠고, 단 한 가지,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제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이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버님은 종신형을 선고 받아서, 죽어야만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아버님이 출옥하시는 것은 잊어버려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방으로 출옥하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고아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셨습니다.

1년 전(1944)에, 우리 가족은, 동인 오빠 징집 문제로,모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산에는 우리 둘만 고아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이 8월 17일경에 출옥하셔서 구포 애린원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뵌 아버지의 몰골은, 정말 거지 중에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고, 눈은 송장처럼 쑥 들어가 있었고, 거기에다 낡은 슬리퍼에, 푸른 죄수복 차림 그대로, 고아원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손목사님은, 여기 애린원에서, 옷도 갈아입으시고, 신발도 바꿔 신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를 보시더니 ‘이놈들아,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구나!’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함께 울었습니다.

◑ 주기철 목사님과 인연

손양원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던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주목사님은 손목사님보다 나이가 5살 위입니다.
평소에 손목사님은 ‘기철 형님, 기철 형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평양에서 투옥되셨으니, (~1944 옥사)
손목사님 보다는, 약 2년가량 앞서 옥고를 치르신 셈입니다.
그러므로 손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도,
앞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 정신을 이어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손목사님은, 평소에 주기철 목사님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손양원이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1929년에 졸업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에 부산초량교회를 시무하시면서, 경남성경학교에서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주1)에 간략 연대표 있음

손양원의 일기에 보면
‘주기철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는, 은혜의 부흥시간 이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 당신 신학생을 대단히 아끼셨다고 합니다.

‘손군,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지만,

많은 위인이 나타날 것 같으니, 위인전을 많이 읽으세요’ 하시면서

좋은 책도 많이 권면해 주셨다고 합니다.

 

▲주영해(장로)와 만남                                     *주기철 목사님 3남

애린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손목사님을,

저희가 만나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을 때,

조금 있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3남 주영해가 그때 저희랑 같이 애린원에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장 달려왔습니다.

 

(주영해의 부친 주기철 목사님은, 1944.04.21.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 후,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당시는 강도사 시절이었습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년도에, 신학교가 패쇄되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양원 목사님'으로 통일해서 쓰겠습니다.)

 

그는 막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더니, 손양원 목사님을 꽉 끌어안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해입니다.”

한 마디 하고는, 두 분이 서로 끌어안고 얼마나 목을 놓아 우시던지요...

 

그렇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 이제 감옥에서 순교하시고(1944),

해방이 되어, 그 아들 주영해를 만나보니까,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겠습니까?

두 분이 서로를 붙들고, 고아원 마당에서 한참을 서로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더니, 주영해 (당시 10대 후반)는 갑자기

고아원 마루 밑에 장작 패는 도끼가 있었는데,

그 도끼를 꺼내서 감아쥐더니, 어디론가 막 달려갔습니다.

고아원 원생들은, 우르르 그를 뒤따라갔습니다. 

 

그 애린원 근처 좀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에는 일본 신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그 우상 앞에 절하고 빌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주영해는 도끼를 치켜들더니, 단 한 방에 신사 우상을 찍어서 무너뜨리고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제 오빠 동인, 동신은, 부산에서 주영해와 친구였습니다.

나이도 비슷했고, 또한 통공장에 다닐 때, 주영해도 같이 공장에 다녔습니다.

두 집안 다, 아버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고,

두 집안 다, 소년가장들이 통공장에 다니면서, 가족 생계를 꾸릴 때였습니다.

                                                   *관련글/ 순교자와 남겨진 그 가족 이야기 


훗날 제가 주영해 장로를 한 번 만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애린원 고아원 시절에,

주영해 장로가 도끼로 신사 우상을 때려 부수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옛날을 추억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영해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서 순교했을 때도,

가장 먼저 우리 집에 쫓아와서    *부산 범내골

“사모님, 사모님, 방금 제 아버님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라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주영해와 함께, 해가 지도록 방에서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방이 되어서, 가족들이 여수 애양원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애양원을 떠나간 지 꼭 5년 만에, 그리운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왔습니다.

손목사님은 다시 애양원 목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그동안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때문에 다 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이제 해방과 함께,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학교를 쉬다보니,

학교에서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시 다닌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때 큰오빠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학년,

둘째오빠 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

저는 국민학교 4학년으로 각각 입학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13살

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엔들 상상 못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애양원 근처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부득이하여 우리는 애양원에서 50리 떨어진 순천에 자취방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형제들은, 순천 자취방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애양원 사택에 거주하시면서, 나환자들을 돌보셨지요.

 

저는 토요일과, 방학 때면, 애양원에 가서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구포의 고아원에서

‘내 평생 소원은 학교에 한 번 다녀보는 것’이었습니다.

 

길에서 가방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또 저희들끼리만 놉니다.

학교에 안 다니는 저는, 같이 놀 친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범내골 집에 와서, ‘엄마, 나도 학교 보내 줘’

‘안 돼! 학교에 가면 모두 신사참배 해야 되기 때문에 안 돼!’

 

그렇게 5년 동안 학교를 못 다니다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정말 하늘을 날아갈 듯 했습니다.

지금 늙은 제가, 저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즐거운 시절을 꼽으라면,

그때 순천에서 다시 국민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게 큰 태풍이 불어 닥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과 동인, 동신의 순교

 

▲큰 오빠 손동인을 마지막 본 날

제가 16살, 순천 매산여중 1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아침밥을 먹고, 소풍가방을 들쳐 메고, 대문을 막 나서는데,

갑자기 큰 오빠가 “동희야” 하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동인은,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소풍 준비를 많이 못했지?” 하면서

제 소풍가방에, 준비해온 과자 봉지를 넣어주고,

또한 용돈도 제게 주었습니다. 

 

“오빠 고마워요. 소풍 잘 다녀올게요.”

하면서 제가 늦을까봐 뛰어 나가는데,

“동희야!” 하면서 또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날 아침 동인 오빠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습니다.

오빠는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동희, 예쁜 동희, 너 오늘 소풍 잘 다녀와야 해!”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저희 오빠와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큰 오빠 동인이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쩌면 부모님 사랑만큼, 큰 오빠의 사랑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애양원 사택에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제가 소풍을 다녀왔을 때, 이미 두 오빠는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고, 즐겁게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소풍 다음날은, 학교에 수업이 없어서, 자취집으로 안 가고

저는 소풍 간 장소에서 막바로 애양원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서 쉰 그 다음날, 애양원으로 트럭이 한 대 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애양원 근처로는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트럭에는, 엣띤 공산당 학생들이

양손에 무기를 들고서 트럭에서 뛰어내리면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손양원 목사, 이리로 나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행히 그때 손목사님은, 출타 중이셨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신다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어머니와 저) 말을 믿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손목사님이 안 보이자,

그들은 집 천정에 대고, 총알을 난사했습니다.

그리고 죽창으로 마루 밑을 찌르며 휘저어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겁에 질려서, 현관문에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폭도들은 별 성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줄줄이 집안을 빠져나갔는데,

맨 마지막 폭도가 나가면서, 어머니께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당신 알고나 있소? 당신 아들 둘이 다 총살 당해 죽었소!”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동인아, 동신아!” 부르면서 나자빠지셨습니다.

 

엊그제까지 멀쩡하던 두 오빠가 죽었다는 말이,

우리 모녀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학생이 거짓말 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 아래 제가 소풍 나오던 날,

동인 오빠가, 저를 3번이나 불러 세우며, 애절하게 저를 바라보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다 일어난 후였습니다.)

 

▲저는 사실을 확인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늘 제 시각에 오던 기차는, 그날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지금 여수와 순천은, 공산당들이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순반란사건>이었습니다.                         1948.10.19 ~ 1주일간

그 여파로 그날 기차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천까지 뛰어가기로 했습니다. 약 50리, 20킬로 거리였습니다. 

순천에 가 보니, 공산당들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총칼을 메고,

트럭을 타고, 여수와 순천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사람(반동)이 보인다 싶으면, 총으로 쏘아버렸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사람들의 시신들이 길에 무수히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무수히 시신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전봇대에 매달아 놓은 시신, 불에 태워 죽인 시신..

 

     이 <여순반란사건>은 1주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그 죽은 사람의 숫자는,

     당시 전남 보건후생국 발표에 의하면, 3천5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제가 이런 시체들을 넘어서, 뛰어서 걸어서, 우리 오빠들의 자취집에 도착했습니다.

“큰 오빠, 작은 오빠” 제가 소리쳐 불렀지만,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마당 안을 보니, 그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핏자국을 보는 순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내 두 오빠가 죽었구나... 아이고...”

 

사람이 감정의 극에 도달하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오빠의 죽음을 확인하고, 제 신앙이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집사님은, 우리 집 옆방에서 애양원 목수 일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두 오빠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라도 치를 수 있도록, 다른 곳에 옮겨두었습니다.

 

저는 양집사를 따라서, 어느 산모퉁이 논구덩이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 가마니 위에, 우리 두 오빠의 시신이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몸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고,

이마와 가슴에는 총알자국이 수없이 나타나 있어서,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저는 그만 두 오빠의 시신 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망한 대상은, 공산당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때 원망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두 오빠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저 하늘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요?”

 

한 사람만 데려가도, 큰 충격인데,

어떻게 두 오빠를 한꺼번에 데려가신 일에.. 저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 착한 두 오빠의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이해 못 했습니다.

 

‘하나님, 두고 보세요. 내가 예수 믿는가 봐요.

나는 이런 하나님 절대 안 믿을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이런 잔인한 하나님은 있어도 믿지 않을 거야..’

 

저는 그날부터 신앙에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윤선홍, 나제민 님의 증언

당시 손동인은 25세, 손동신은 19세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너무나 허망하게 마쳤습니다.

 

그날은 1948.10.21.일이었습니다.

이날 두 분이 순교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윤선홍, 두 오빠가 순교하실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보신 분

나제민의 증언에 의하면, 두 오빠가 순교하신 후, 많이 도와주신 분, 나덕환 목사님의 아들

 

윤선홍, 나제민 두 분은 평소에 제 두 오빠와 매우 친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도 돕고, 주일학교도 도우면서 절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이 두 분은, 공산당의 참화를 피하여, 용케 살아났습니다.

 

그 두 분의 증언을 토대로, 손동인, 손동신의 순교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좌익 학생들(학교 동료들)에 의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석상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폭도 좌익 학생들은, 순천 우리 자취집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끌어내서, 밧줄로 묶고는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느냐?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자’며

때리는 폭도들을 뜯어 말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폭도가 ‘너희들은 기독학생회 회장이요, 예수쟁이들의 두목이다!’

그게 죄목이었습니다.

 

이제는 손동신까지 함께 얻어맞게 되었습니다.

폭도들은, 모두 평소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무지하게 두들켜 팬 후에,

손동인을 일으켜 세워, 밧줄에 맨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양손을 들어 올린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이 점거한 순천경찰서 뒷마당에

손동인을 그 사형장 의자에 먼저 앉혔습니다.

 

학생 한 명이 이렇게 윽박질렀습니다.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 사상 뽑아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협력할 것 같으면 살려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그러자 손동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나, 내 속에 신앙은 빼앗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내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자 “할 수 없다. 저 놈을 쏘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동생 손동신이 나섰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가로막았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세요.

형님은 장남입니다. 부모를 모셔야 하니,

형님은 살려주고, 그 대신 나를 쏘아 죽이시오.”

 

그렇게 손동신이 대신 죽겠다고 하니까, 손동인이 말했습니다.

“동신아, 너 왜 이러느냐?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너는 얼른 가서 내 대신 부모님을 모셔야 해!

그러다가 너 마저 죽어. 어서 집에 가, 어서 집에 가!”

 

이렇게 두 분은, 사형대에서, 서로 죽겠다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때 어떤 폭도 학생 한 명이,

손동신을 강제로 뜯어내었습니다.

뜯어내고는, 손동인의 두 눈에 수건을 가렸답니다.

이제 정말 최후가 임박했습니다.

 

손동인은 “너희들은 회개하여라. 나는 지금 곧 천국으로 간다.”

하면서 손동인은 양팔을 벌리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하나이다.”

그 말과 함께,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 손동신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형 손동인에게 막 달려갔습니다.

그 형을 끌어안고, 손동신은,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형님, 형님, 형님은 이제 천국 가셨습니다. 나도 형님 뒤를 따르렵니다.”

 

한참을 울고 나더니, 손동신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공산 폭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죄 없는 자를 죽입니까? 당신들은 그 죗값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회개 하십시오!”

 

그러자 학생 중에 한 명이 “저 놈도 마저 죽여 버릴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래, 저 놈도 마저 해 치우자”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손동신은

“나도 내 형님 가신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내 형님 신앙과 같다.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며 일어서서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좌익 학생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답니다.

“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처럼, 팔을 벌렸다.

자, 총을 맞을 터이니, 너희 하고 싶은 대로 쏠 테면 쏘아라!”

 

그러자 “야, 저놈 자기 형보다 더 지독한 놈이다.

저런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죽여버리자”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동신은 양팔을 벌린 채로, 하늘을 향해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시고, 저들을 회개시켜 주시옵시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기까지만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순간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손동신에게, 어떤 폭도 학생이 다가와서,

확인사살 두 발을 더 쏘았답니다.

그 사람이 바로 OOO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장례식과 그 이후

 

▲두 오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순천에서 애양원으로 왔습니다.

애양원의 뜰 한복판에, 두 분의 운구가 내려졌습니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동인아, 동신아!” 부르짖다가

몇 번이나 기절하고, 다시 깨곤 했습니다.

 

천 여 명에 달하는 온 애양원 식구들도 다 마당에 나와서

땅바닥을 치면서, 모두가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모두의 울음소리가 애양원을 차고 넘쳐서, 저 하늘에까지 닿는 듯 했습니다.

 

두 오빠의 장지는 애양원 안에 동도 섬이었습니다.

햇볕 잘 들고,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곳으로

두 오빠의 꽃상여를 앞세우고, 온 애양원 식구들이 그 뒤를 울며 뒤따랐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도 참 비참했습니다.

아버지도 인간이었습니다.

꽃상여 행렬의 맨 앞에서, 상여를 붙잡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또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인지 통곡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육신적 슬픔과, 영적 신앙이 교차되는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손목사님이 지으신 <9가지 감사>는 여러 자료에 소개되었으니,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합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 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손양원 목사님은 OOO을 양자 삼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난 터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동인이, 동신이 죽인 놈을 잡았다!’는 소리였습니다.

 

그 놈은, 손동인과 같은 학교, 같은 3학년 OOO으로 밝혀졌습니다.

(OOO은, 1979년에 소천 하셨고,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위하여, 본명을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 1주일 만에 모두 진압된 후

주모자와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심판하는 일이 진행되었는데,

OOO도 체포되어, 매를 무수히 맞고,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있을 사형집행날짜만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제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잡아 죽이리라고, 이를 갈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손목사님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손목사님은, OOO을 사형장에서 빼내어, 양자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설마 그럴 리가?’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님이 그 일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을 보고,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저는 펄쩍펄쩍 뛰면서, 울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그런 놈은 죽도록 내버려둬요.

그런 놈이 안 죽으면, 도대체 누가 반란의 책임을 지고 죽는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저를 달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이 아버지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고, 그 바람에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켰다.

 

그런데 OOO을 안 잡았으면 모르거니와, OOO을 잡았다는데, 내가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제1계명과 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제1계명과 2계명만 순종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만약 지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옛날에 감옥 살은 것도 다 헛 살은 것이다.

너희들 고생 시킨 것도, 헛고생이 되고 마느니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말로 저를 설득시켜도, 저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쌓인 한이 풀리려면, OOO이 죽어 없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두 오빠의 한이 풀린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16살이었던 저는, 그때 아버지의 말씀과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하면 용서로 되었지,

또 아들 삼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그 놈을 아들 삼으면,

제게는 그 원수가, 제 오빠가 되는 셈인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 하늘 아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막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들을 삼아야’ 하느니라.”

 

저는 아버지께 대들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죽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 그래서 그 계명 지키느라,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형직전에 처해 있던,

그 원수 같은 OOO을, 사정사정해서 빼 내어, 집으로 데려와 아들을 삼았습니다.

(나덕환 목사님이 OOO을 빼 내는데 힘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OOO을, 부산에 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저 손동희 권사는, OOO과 결국 화해 했습니다.

     1979년 OOO이 지병으로 죽기 직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손양원 목사님, 625와 순교 에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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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주기철 목사님 간단 약력

 

1897년 경남 창원군 옹천면 출생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 평양신학교 19회 졸업

1926년 봄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

1926~1931 6년간 초량교회 시무 중

일제의 신사참배 거절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반대 투쟁 시작

(이 시기 1929년 경, 경남성경학교에 로마서 강의하시던 중, 손양원 신학생 만남)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6년간 시무하심.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

1938~1944 감옥에서 옥고 후 순교

 

주체사상



주체사상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핵심교리

주체사상은 우선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주의 철학과 김일성수령 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주체사상은 칼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사상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변조한 사회주의이론이다.
김일성은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다. 예수를 믿든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이다.
종교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며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의식이 없어진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본래 주체사상의 교주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김일성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착실하게 참석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에는 중국 지린의 손정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했고 학생성가대 지휘를 맡을 정도로 교회활동을 활발히 했었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은 권사의 직분을 가졌고, 그의 외삼촌 강양욱은 목사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김일성은 기독교를 차용, 표절하였다.
어릴 때 배운 하나님 사상을 자기 우상화에 악용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기독교에서 파생된 ‘사생아’(bastard)라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기독교를 표절하고 벤치마킹해서 생겨난 사이비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신본주의 창조론을 대표한다면, 주체교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을 대변한다.
주체사상의 핵심교리는 “당의 유일사상 체제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과 수령무오설, 그리고 수령의 사회정치적 생명 수여설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사상 10대 원칙.
북한에서는 어릴 때부터 성경의 10계명을 표절한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세뇌를 받아 수령에게 절대복종과 절대충성을 다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목적은 김일성 3대를 위한 것이다.
주체사상, 10대 원칙, 노동당 강령 등이 3대 신격화를 위해 종교적 경전과 같이 성문화되어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10대 원칙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해야 한다.

②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⑧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여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지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⑩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여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수령무오설.
주체사상은 수령 김일성(김정은)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으며, 그 권위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법령체계는 김정은의 교시, 로동당 규약, 당강령 및 지침, 헌법, 내각의 정령 및 지침의 순서로 되어 있다. 교황무오설과 같이 수령은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신격화되어 사소한 것도 모독하면 안 되고 심지어 수령과 관련된 물품(사진)도 신성시되어야 한다. 수령무오설에 물든 공산주의자 문재인도 그의 통치 기간에 적폐청산,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등 정책을 결정한 후에 정책수정을 하지 않는 특징을 보였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주체사상이 종교적 신앙으로 심화된 것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 완성되면서부터이다. 인간에게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한한 육체적 생명과 영원한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수령에게서 수여받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대를 두고 계승할 수 있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나지만,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생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항존법 10계명이 있듯이, 북한은 10대 원칙이라는 율법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서 김정은에게 충성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주체교는 10대원칙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행위구원론으로 10대 원칙과 주체사상은 동의어로 통한다. 북조선에서 허용되는 종교는 주체사상교 뿐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동포는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모두 “총 폭탄 정신, 수령결사옹위 정신, 자폭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

기독교에서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할 때, 주체교에서는 자아비판을 통한 인간개조를 말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위해서는 교양과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을 수정해 인간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의 핵심 두 가지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인간중심철학 사상과 매사에 수령의 뜻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수령제일주의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제일주의이다. 북한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다. 그리고 건설과 혁명의 주인은 인민이 아니고 수령의 지시를 받는 노동당이다. 북한에서의 자주는 인민의 자주가 아니라 수령의 자주이다.

북한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인 차원에서 수령의 신화와 관련된 모든 장소를 ‘혁명 전적지’와 ‘혁명사적지’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순례의 대상으로 삼으며,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소, 공장 등에 예배의 장소인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꾸며 주기적으로 주체사상의 교리와 신화를 학습하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생활총화’회합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다.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황장엽은 증언한다. “북한의 체제는 백성은 당을 위해서 존재하며, 당은 김일성 3대를 위해서 존재한다.” 김씨 3대는 언제나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다. 주체사상에서 김일성은 성부 하나님에 해당하며, 김정일은 성자 하나님, 그리고 주체사상(김정은)은 성령에 해당한다.

주체사상에는 반일, 반미사상이 깔려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의식화한다. [김일성, 그이는 하나님]이라는 책에 북한의 신앙고백이 나와 있다. “전능하사 당과 인민을 영도하시는 김일성 주석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김정일 동지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공산당으로 잉태하사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저리로서 인민을 해방하러 오시리라. 아멘.“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하늘 아래 두 하나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기독교의 종교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전 인민의 주체사상화를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이다. 무신론적 주사파가 가장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것도 기독교이다.

수령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수령론을 지속시키기 위해 북한은 수령세습이라는 신화를 한 가지 더 추가했다. 김일성의 피를 물려받은 김정일에게 이 신화가 세습되고 다시 김정은에게 이 신화를 세습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수령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인데, 사회정치적 생명론에 따라 뇌수는 김일성 수령이고, 당은 혈관이며, 인민은 신체의 각 지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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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종교의 불모지로

ANC : 한때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북한지역이 이제는 ‘종교탄압의 중심지’가 됐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홍알벗 기자의 보도입니다.

“왜 죽었냐고 하니까 종교를 해 가지고 그랬대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물을 한 모금도 안 먹여서 말려 죽였다고 했어요.”

북한에서 종교를 믿다 발각돼 고문을 받고 죽은 주민을 봤다는 어느 한 탈북자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9일 ‘2016 북한종교자유백서’를 발간하고,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는 찾을 수 없다고 폭로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1만 1천 7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99.6%는 ‘북한에서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98.8%는 평양이 아닌 지방에서 당국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예배처소를 본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은 종교를 ‘마약’이라 규정하고 주민들이 종교를 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북한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규정돼 있지만 북한 당국은 실제로 주민들의 종교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탄압이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의 강력한 단속과 규제에도 2000년 이후부터는 비밀종교모임, 즉 지하교회에 참석하거나 성경책을 본 경험이 있는 탈북자가 부쩍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종교 활동에 대한 처벌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2.8%는 종교활동을 하다 적발돼 노동교화형을 받는 것을 목격했으며, 11.4%는 교화소로, 그리고 51.8%는 정치범수용소행이라고 답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북한의 전체 정치범 수용소에 약 12만명이 수감돼 있는데 그 중 3분의 1 또는 4분의 1은 종교활동 때문에 붙잡혀 온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탈북자들에 따르면 특히 지하종교활동을 벌인 북한주민들은 북한 보위부들에게 체포되고 구타, 고문, 처형까지 당할 수 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1940년대 말만 해도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만큼 한반도 기독교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평양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평양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이유

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가 개최됐다.
그가 한국으로 들어와 언어 습득을 마치고 평양, 안주 등 5개군을 관할하는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한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 명 정도였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한말 열강들과의 통상교섭이 시작된 이래 평양은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파견되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1891년 북장로회의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립한 이후 평양과 그 일대인 관서지방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다.
미국 북장로회가 평양에서 활발히 선교를 하고 문화교류를 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19세기 말 조선 서북부는 청·일 전쟁으로 인해 고아와 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돌 볼 선교사역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평양선교부에서는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고, 이에 많은 선교사들이 평양과 관서지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둘째,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은 서울 중심의 양반사회와 달리 자립적인 중산층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 기독교 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게 됐다.
평양 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아왔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북방민족에 맞서 싸우며 상당히 호전적이었는데 문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중앙세력과 맞지 않았다.
또한 조선 초 세조가 김종서를 제거한 이후 관서지역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아예 배척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관서지방 무사들의 무과 응시를 금지 시켰고, 후대 국왕인 성종은 이러한 세조의 명을 아예 경국대전에 기록하게 했다.
한참 뒤에 정조가 관서지역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관서 지역의 차별은 더욱 심해져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차별 때문에 평양 일대에서는 양반 사족의 형성이 약했고, 아무리 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관료로 출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현실과 유리된 유교적 지식이나 형식에 거리를 두며 자신의 생계를 직접 꾸려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며 대청(代淸)무역과 상업을 통해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기에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기독교 신앙 전파를 했을 때 관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된 장로교회의 683개 중 관서지방에 있던 것이 362개로 전체의 과반수를 넘는다.
아울러 한말 근대식 학교 설립도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했는데, 1910년 7월 기준 전국 사립학교 2천 82개교 가운데 장로교,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755교였으며 이중 과반수가 관서지방에 세워졌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평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분단으로 인해 평양은 미국과 가장 적대적인 지역이 됐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비핵화 방안에 대해 합의하면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가 한층 진전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한 것과 관련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루 속히 북한과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하고 과거처럼 다시 경제와 문화교류를 추진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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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 , 2018년 9월

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은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 (“朝鮮의 예루살렘 平壤에: 十字軍의 閱兵式,” 『東亞日報』, 1934년 9월 5일.)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

1915년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거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인구 6만의 10%인 6천 명의 교인들이 여러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와 예배로 안식일을 성수했기 때문에 시내가 적막했다. 장로교회는 장대현(1,157), 신학교(770), 창전리(408), 산정현(385), 남문외(348) 5개 교회 3,068명이었고, 감리교회는 남산현(1,158), 전구리(238), 염점리(160), 이문리(85) 4개 교회 1,631명이었다.(“평양과 기독교,” 『기독신보』, 1915. 2. 19.) 교인 천 명이 넘는 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북장로회는 서북부인 신양리와 경창리 일대에 洋村을 형성하고 선교사 사택들, 숭실학당, 숭실대학, 신학교, 남녀성경학교, 숭의여학교, 외국인학교, 제중원 등의 건물이 들어선 넓은 선교지부를 형성했다. 북감리회는 그 아래 대찰리, 순영리, 남산정에 걸치는 지역에 선교지부를 조성하고, 선교사 사택, 기홀의원, 광혜의원, 광성학교 등의 기관을 운영했다.

평양 교회는 1919년 삼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기독교 민족주의를 실천했다. 5개 장로교회의 한국인 담임목사 중 장대현의 길선주, 남문외의 김선두(총회장) 등 4명이 투옥되었고, 13명의 장로도 체포되어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숭실 재학생 체포령이 내렸다. 시골에서 19개의 장로교회가 불탔다. 26개 교회와 학교들이 3개월 이상 문을 닫았다.

1924년 장로교회는 시내에 6처의 교회(연화동교회 추가)에 약 4,000명의 교인이 있었고, 주변 평양노회 지역을 합하면 교회 120여 처, 교인 21,000여 명, 학교 30여 개에 달하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감리교회는 남산현, 유정, 신양리 등 16 교회에 신도는 2,300여 명이었다. 또한 600여 명의 천주교회와 200명의 회중교회(치리자 이낙순)와 50명의 안식교회가 있었다.(김기전·차상찬, “조선문화 기본조사-평남도호,” 『개벽』[1924년 9월], 62.)

당시 인구 비율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도시는 선천, 재령, 평양, 경성 순이었다. 1925년 평안북도 선천은 인구 만 명 중 절반이 교인이라 ‘기독교 王國’으로, 황해도 재령은 ‘기독교 天下’로, 평안남도 평양은 ‘기독교 首都’ 혹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서북 기독교 시대였다. 선교 개시 한 세대 만에 기생의 도시 ‘조선의 소돔’을 거룩한 기독교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만든 평양 기독교는 개선가를 부르면 토마스 순교 60주년을 기념했다. 

1920년대 전환기적 상황: 신세대 신사조의 등장

1920년대는 전통적인 조선이 사라지고 반권위주의로 무장한 신세대가 등장한 전환기였다. 총독부의 문화정치 아래 다양한 한글 신문 잡지가 발간되고, 일본어 서적을 통해 청년들이 신사상을 수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신문 잡지를 통해 과학(진화론),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담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했다. 신여성들은 반가부장제와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신구 세대 소통이 단절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했다. 경제 침체로 평지에는 소작인, 산간엔 화전민이 증가했다.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학생의 동맹 휴학이 줄을 이었다.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하는 한인이 폭증하여 1920년 북간도에만 40만 명 이상이 거주했다.

총독부는 일본 불교와 일본 조합교회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과 종교를 친일화하려고 재정을 지원하여 급성장시켰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기성교회의 다카하시 목사는 경찰의 후원을 받아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미국 선교사를 떠나 조합교회에 가입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강압적 선전과 친정부 정책은 역효과를 내어 조합교회는 쇠퇴했다.

아시아 민족주의의 고조로 교계는 선교사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 독립하는 토착화를 논의했다. 1923년 중국 복주에서 열린 한중일 남북감리회 대표자 회의는 감독 추천권과 선교회 재산 처리권을 양도해 줄 것을 미국 본부에 요구했다. 1923년 YMCA 총무 이상재는 신임 선교사들에게 “당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미국인임을 잊는 것이오.”라고 충고하고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 1925년 12월 만국선교위원회 의장 모트가 서울에서 개최한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보완하고, 경제 문제, 청년층 선교, 선교사의 권한 이양과 한인과의 협력과 자립 문제, 예루살렘선교대회(1928) 등을 토론했다. 한석진 목사는 선교사들의 장기 체류와 지도권 유지는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되므로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1926년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허시모 의사가 과일을 훔친 소년의 얼굴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쓴 사건은 반기독교-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1930년 미국 남북 감리회 한국 선교회들이 하나의 조선감리회로 통합된 것은 자치와 연합의 결실이었으나 쇠퇴하던 감리교회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조선: 반기독교 운동

1920년대의 강력한 신사상은 공산주의였고 반기독교운동을 동반했다. 평양 기독교가 세력을 자랑하며 현실을 외면하자 사회주의자들은『개벽』지를 통해 목사와 장로의 타락을 공격했다. 

그러나 평양은 세력으로나 인수로나 예수교회가 제일 크니까 그 사회의 인물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앗다-참 평양이야 말로 목사님도 많고 장로님도 많다. 교회에 가면 물론이어니와 책사에를 가도 목사, 장로, 포목전에를 가도 목사, 장로, 연회에 가도 목사, 장로, 냉면집에를 가도 목사, 장로, 심지어 코머리(퇴기)집에 가도 목사, 장로(쉬-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간통사건 소송자도 장로, 고리대금업자도 목사, 장로다. 아주 목사 장로의 대풍년들었다. (김기전·차상찬, 앞의 글, 66.) 

개신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신문 잡지의 여론을 주도했는데, 가장 신랄한 비판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회칠한 무덤처럼 비정치적인 종교 공간으로 만들고 교권을 가진 기득권층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의 조선’이라는 비판이었다. 개신교가 40년간 한글 보급, 교육, 의료, 여권 신장 등 많은 기여를 했으나, 이제는 현실도피적인 인물만 모여 사회 정의와 평화와 빈부 문제를 외면한다. 정치경제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며, “언제나 요단강을 건널까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국에 매어 달아두고” 현실을 저주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있다. 높은 예배당과 선교사와 장로의 큰 주택 아래 개미집 같은 오막살이에서 신자들은 예배당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堅志洞人, “「에루살넴의 朝鮮」을 바라보면서, 朝鮮基督敎 現狀에 對한 所感,” 『開闢』 [1925년 7월], 55~56.)

기독교 왕국 선천에서도 경제가 침체되자 50명의 일본인 창녀가 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기생을 가진 7개의 고급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宣川에도 花柳界 大繁昌,” 『조선일보』, 1924. 5. 12.) 1929년 선천에는 안식일 성수가 깨어졌고, 교인들은 골목 안에서 밀주를 마신다고 고발했다. (김진구, “北隊,” 『別乾坤』 [1929년 8월], 148.)

장로교회는 계급 모순을 외면하고 김익두의 ‘치유’ 중심의 부흥회로 민중에 접근했다.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뜬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은사 지속론자들은 『죠션예수교회 이적 명증』(1921)을 발간하고 황해노회는 헌법의 은사 중지 조항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도와 안수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기적 전매 특허자’요 과거 미신보다 더 혹세무민하는 ‘개명한 미신’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고등 무당’으로 비판하고, 부흥회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이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총독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공격했다. “기독교회여! 灰칠한 무덤과 가튼 예루살넴의 朝鮮이여! 福잇슬진저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고 저주했다. 박헌영(朴憲永, 1900~56)은 기독교가 서구 제국주의의 영토 이권 확장의 수족이 되었으며, 조선에 미신을 선전하여 금력과 군벌에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므로, 기독교를 퇴치하기 위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한다고 주장했다. (朴憲永, “歷史上으로 본 基督敎의 內面,” 『開闢』 (1925년 11월): 64~69.) 

1927년 5월에 쑥섬에서 열린 순교기념사업전도회의 첫 토마스 순교 추모예배에서 설교하는 마페트 목사

토마스 순교자 만들기, 1925~31년

평양 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근본주의와 평양 성시화 작업으로 대응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처형된 토마스 목사의 순교 기념사업을 위해 전기 출판과 기념교회 설립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1926년 마페트를 중심으로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27년 순교기념사업전도회가 발족되고 5월에 쑥섬에서 첫 순교 추모예배를 드린 후, 9월 총회 때 토마스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공식 천명했다. 숭의여중 영어교사 오문환(吳文煥, 1903~1962)은 수집한 구전 자료를 중심으로 『도마스 牧師傳』(1928)을 출판했다. 『평양노회 지경각교회 사기』(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공저, 1925)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것을 발전시켜, 그가 강가의 군중에게 성경을 던졌으며,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조선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순교의 영웅이 탄생했다. 

근본주의 선언: “종교변호선언,” 1927년

미국에서 1910년대 중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근본주의가 형성되었다. 1923년 미국 북장로회 총회는 근본주의 “5대 필수 원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1924년 성서 무오성을 부인하는 ‘어번 선언’이 나왔고, 1925년 ‘스코프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이 승리했다. 192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가 구프린스턴 신학(전통 칼뱅주의)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천명하자, 메이첸을 중심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신학적 전환기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근본주의로 방향을 정했다. 구약학 교수 어드맨과 1924년 조직신학 교수로 평양에 온 레널즈와 신임 박형룡 교수는 『神學指南』을 통해 반종교 담론을 비판했다. 어드맨은 구프린스턴 켈로그 교수의 A Handbook of Comparative Religion(1899)을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소개했다. 1900년대 학생자원운동의 교과서로 사용된 이 책은 기독교의 우월성, 유일성, 초월성을 양보하지 않고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런 책을 반종교운동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시대착오였으며 지적인 나태였다.

1927년 조선 북장로회는 반종교운동에 대해 『神學指南』에 “종교 변호 선언서”를 발표하고 9개 항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 기독교와 사회: 이웃을 사랑하되 중생이 사회 발전의 근본이다. 2) 성서와 신앙: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기초이다. 3) 과학과 기적: 성서의 모든 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4) 예수의 인성과 신성: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는다. 5) 그리스도교의 처세: 견고한 지식 위에 생활한다. 6)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7)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8) 타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종교로 천상천하에 유일하다. 9) 신조: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믿는다. (“재죠션북쟝로션교회의 종교변호션언셔,”『神學指南』[1927년 1월]: 5~9.) 근본주의 5대 교리의 수용이었다. 이후 박형룡은 반기독교운동, 진화론,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근본주의의 전사로 나섰다. 

교회 분쟁: 노령화와 노회주의 승리로 교인 대량 유출 사태

1920년대는 교회 분쟁 시대였다. 교회는 내부 분열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1918년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조선기독교회를, 1923년 경북노회 이만집 목사가 자치교회를 분립한 것은 선교사가 지배하는 노회에 대한 반발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인 목사의 부정, 불륜, 노령화로 인한 지도력 부재에 대해 교인이 반발하면서 분쟁이 증가했다.

교회 분규와 노회 치리에 대한 항의 사태는 1923년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새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건축위원(김선두 목사, 정일선 목사)이 “돈을 먹었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유임과 분가를 놓고 투표한 결과 목사들의 유임이 결정되었다. 헌법대로 처리되었으나 교인의 불만은 잠복했다. 1926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에 감염된” 청년들이 변인서 목사를 중심으로 길선주 목사와 장로들에게 지도력 부족으로 사직을 요구하자 분쟁이 지속되었다. 당회와 길 목사를 비난하는 청년들의 선언서가 배부되고, 임시노회와 특별시찰회가 열리고, 강단이 장악되는 파행과 대치가 지속되었다. 결국 변 목사를 시골 교회에 임명하고, 길 목사는 성역 25주년 기념식 후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후 지속된 장로교회 분란 사태에서 교권을 가진 선교사와 당회는 개교회 문제는 노회가 결정한다는 노회주의 원칙으로 청년층의 개혁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30~40대 장로가 많았다. 이들로 구성된 당회가 청장년의 의사를 당회와 노회에 반영했다면 분규는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중주의와 노회주의가 충돌할 때 당회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장로교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평신도 회중주의가 질식되었다.

교회의 노령화와 노회의 교권주의는 교인 감소를 초래했다. 헌금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의무 잃은 신자’(오늘날의 ‘가나안 성도’)가 양산되는 교인 유출 현상이 일어났다. 1916년 장대현교회 교인 2,000명 중에 1897년에 방문한 자신을 본 사람이 16명뿐인 사실에 놀랐던 스피어 총무는 1926년 방문 때에도 동일 현상을 확인했다. 한 해 5,521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나, 입교자 중 사라진 자가 7,447명으로 사망자를 고려해도 기존 교인들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고 있었다. 1916년~27년 10년간 인구 400만이 증가할 때 예수교인은 20만 명이 줄어(7.5% 감소) 전체 인구의 1.4%로 축소되었다. 

맺음말

1927년 한 신자는 교회가 쇠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쇠퇴 원인은 첫째, 사상 문제로 교회는 사상계 지배 능력이 없어 세속 사상에 요동한다. 둘째, 경제 문제로 사회 경제가 피폐하여 교회는 재정 핍절로 현상 유지를 못한다. 해결책은 첫째, 반계급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통해 민중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무산계급, 농민, 빈민, 노동자와 멀어져 있다. 둘째, 자각적 전도인과 자각적 신자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직업적 목회자는 부자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적 설교를 하거나 특정 계급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다. 피동적 신자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신자는 순교적 정신을 배양하고 자율적인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익명, "敎會 衰退의 原因과 希望," 『기독신보』, 1927년 1월 5일.)

1920년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나왔을 때 교회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독교’ 담론이 등장했을 때에도 의제는 무시하고 안티-기독교 행동만 비판했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 개신교회는 세습한 중대형교회 300개, 가나안 성도 200만 명, 이단 50만 명을 양산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첫 쇠퇴기였던 1920년대의 담론과 대응을 복기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는 반복된다. 교회가 1920년대나 1980년대나 2007년처럼 ‘조선의 예루살렘’ 담론에 취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수구화의 길을 가면, 바로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죄로 침체와 굴욕과 분쟁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한다. 화려했던 평양 기독교와 서북 기독교가 사라져 버린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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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약력>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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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월 2일 평양 장대현 교회 부흥 운동 "배위량 선교사(베어드)

31년 후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 의식이다

65년 후
1972년
만수대 광장에 20미터 김일성동상 건립


장대현교회가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다니…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복음이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가장 뜨겁게 전파되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고 그 중심은 평양이었다.
복음의 중심지답게 평양에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성경학교가 있었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들이 평양의 신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07년 평양에서는 1906년의 미국 아주사 부흥보다 더 위대한 부흥이라고 평가되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시작 되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성도들의 회개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3.5배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평양대부흥운동은 1909년의 100만인구령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100년간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외국 언론들은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양의 모습은 어떤가?
놀랍게도 현재 평양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극심히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권 및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오픈도어선교회는 기독교 박해국가 명단을 발표, 이들 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북한을 4년 연속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국가’로 지목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나라가 북한이며, 지난 한 해에만 북한에서는 수백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장대현교회였다.
예배당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은 평양의 중심지에 있어서, 장대현교회는 명실상부하게 평양 주민들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장대재 언덕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이른바 ‘혁명적 언어’로 개명되어 ‘만수대’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지금 유명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
1972년 북한정권은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 참배객은 꽃다발을 반드시 준비해야 하고, 헌화한 다음 “2, 3m 뒤로 물러서서 2, 3초 동안 동상을 우러러 본다”라는 행동지침도 있다.
인도하는 사람이 “수령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평양 출신 한 탈북자는 “묵념이라 아니라 살아있는 수령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에서 요란하게 내세우는 구호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 김일성 동상은 일찍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백성이 절하도록 명령했던 그 거대한 우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사망했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지였던 장대현교회는 지금 이렇게 만수대광장(김일성 광장)으로 변해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어 있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역전이 되었을까?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공산독재정권이 둥지를 틀고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흑암과 저주의 땅이 된 북한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근이 들어 300만명이 아사(餓死)했다.
그리고 현재 차이나 대륙에는 5만명의 탈북 난민들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탈북 남성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고, 탈북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차이나 남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가정부나 매춘부 신세가 된다.
어떤 탈북 여성들은 신부를 구할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한족(漢族) 가정으로 팔려가 차이나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70년이 차면 황무함이 마치게 하소서!

어찌하여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이 ‘사단의 견고한 진’이 되어 북한이 이렇게 저주와 흑암의 땅이 되었나?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치욕스러운 교단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바로 ‘평양’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장로교 총회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므로 받아들인다”고 가결했다.
그 후 한국교회 모든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하였다.

하나님께서 1907년에 평양에 큰 부흥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평양은 이가봇(삼상 4:21)이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의 수도가 되었고,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은 오늘날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는 ‘만수대광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은 무신론 공산독재정권의 폭정 아래 포로생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의 황무함을 그치게 해달라고 울며 간구한다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그 당을 고쳐주실 줄 믿는다.
우리는 평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북한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의 구원과 평양의 회복을 위해 거룩한 손을 들고 애통하며 기도하자.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말할 때, 우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해 가는데 하나님은 두 민족을 선택하셨다. 유대인과 한민족이다. 축구경기로 예를 들면, 전반전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았다면, 이제 후반전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쓰임 받을 차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민족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는가? 

이를 위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있었던 성령강림 대 부흥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임재와 동일한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특징 중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의 제자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주 놀라운 증언이다. 그런데 평양 대부흥이 이런 놀라운 회개의 사건이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 증언에 의하면, 평양은 기생이 가장 많아 음란한 곳이었고 폭력배들이 들끓는 타락한 도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이야말로 교회를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선교부에 보고한다. 그런데 성령임재를 경험한 평양시는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초상집과 같았다 한다. 기생집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온순해지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성수주일을 지키기 위해 시내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평양의 거상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어서 예수를 믿지 않던 상인조차 팔 물건을 공급받지 못해 문을 닫아야 했단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지금 세계에 두 강대국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군사대국 일본, 하나는 기독교대국 조선이다" 라고 보도했다. 뉴욕트리뷴은 "지금 기독교가 조선의 품격을 바꿔 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주일 아침이면 평양시 280개 교회에서 울려 펴지는 종소리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한다. 장대현교회 출신 성도의 말에 의하면, 당시 복음을 듣고 전도 받아 장대현교회를 출석했던 성도의 수가 1 천명이 넘었다 한다. 이 증언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그래서 이것을 목격한 당시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양을 가리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아닌 복음전도를 위해 필수적 사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복음전도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 초기복음이 유대인사회에서 이방인사회로 전해지기 위해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세례가 반드시 필요했던 사건이라면, 이제 복음이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를 지나 땅끝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전해지기 위해선 평양 대부흥의 성령세례 사건이 필수적인 사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한민족을 선택하셨다는 증거다.   

복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흘러간다.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졌고, 특히 영국에서 미국 땅으로 옮겨졌다. 영국 프리머스 항을 출발한 청교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프리머스 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교회를 세웠다. 미국인들은 조상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프리머스항 근처에 큰 기념비(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한 여성입상과 그 입상을 받들고 있으며 동서남북을 향한 네개의 좌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입상 발취에 '신앙(Faith)'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그리고 좌상의 발취에 교육(Education), 자유(Liberty), 도덕(Morality), 법(Law)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미국 최초 이민자 청교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신앙을 기초로 미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미국의 건국이념은 점차 세속화되었다. 16 대 미국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를 새롭게 하길 원했다. 링컨대통령은 성경에서 비롯된 인권사상에 맞지 않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그의 마음은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문에 잘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링컨 대통령은 미국남북전쟁이 끝나기 전 1865년 암살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일까?  링컨대통령이 암살 당한 후 1년 뒤, 1866년 최초로 중국말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 미국상선 제너럴셔호먼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평양에 입항한 토마스선교사(Robert J. Thomas)는 제대로 선교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순교 당했지만, 그가 전달한 중국말 성경은 능력을 발휘했다. 

'야소 (예수의 조선말)을 믿으라'고 외치며 박춘권에게 건네진 중국말 성경은 그 곁에서 순교현장을 지켜보던 소년 최치량에 의해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전달된다. 박영식은 성경을 받아 자기 집 도배지로 사용했는데 박영식이 훗날 벽지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훗날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미국 북장로교회 평양 선교사로 부임한 사무엘 마펫이 그곳에 우연히 묵으면서 그곳에서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한다. 이 널다리골교회는 훗날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현장이었던 '장대현교회'로 불려진다.

너무 극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소아시아, 유럽, 미국을 지나 태평양을 넘어 이렇게 한국땅에 도착했는데 그복음이 평양 대부흥의 본거지인 장대현교회의 모체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하게하고 평양의 대부흥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의롭다.    

한민족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조선땅에 전해진 성경과 기독서적을 읽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통해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 '개인인격존중사상,' '자유사상,' '만민평등사상'을 깨닫는다.

한성감옥에서 1903년 '신학월보'에 기고한 그의 글은 다음과 같다.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럼으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順便)하고 순리된 바로다...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훗날 프린스턴에 유학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민주주의 3대 기본사상을 기초로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이승만대통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처럼, 성경 위에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1866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 최치량이 주운 중국어 성경의 행보, 1903년 이승만의 회심과 깨우침, 1907년 평양 대부흥,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한민족을 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





바벨론 종교의 기원




바벨론 종교의 기원

1. 서론
 
헬라어로는 바벨론, 히브리어로는 바벨이다. (바벨론의 뜻은 신들의 문)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다. 이락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다.

2. 관련 성경구절
(창10:6) 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창10:7) 구스의 아들은 스바하윌라삽다라아마삽드가라아마의 아들은 스바드단이며
(창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창1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창10:10) 그의 나라시날 땅의 바벨에렉악갓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10: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르호보딜갈라
(창10:12) 및 니느웨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3. 바벨론 종교의 믿음
 
니므롯 : 태양신 / 세미라미스 : 달신 / 담무스 : 별신 (구세주로 봄)
 
[왕하]17: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세미라미스)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담무스)을 경배하며 또 바알(니므롯)을 섬기고 (열왕기하 21:3 동일)
 
4. 바벨론 종교의 세미라미스 : 여신에 대한 관심
 
세미라미스는 유방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산의 여신, 풍요의 여신으로 보고 있다. 바벨론 조각과 기념비를 보면 세미라미스가 담무스를 안고 있는 조각들이 많이 있다.
 
바벨론 종교의 전 세계적 확산
 
중국에서 씽무 여신, 독일에서는 헤르타 여신, 스웨덴, 스칸디나비아, 덴마크에서는 디사, 인도에서 인드라니, 그리스에서 아르테미스 (아데미) : (행19:24) 
 
이태리 로마에서는 라틴어로 디아나, 영어로 다이아나, 이태리어로 하면, 마돈나가 된다. 이집트(애굽)에서는 세미라미스를 이시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스다롯이라고 하였다.
 
[삿]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 종교
 
로마 카톨릭 : 마리아 숭배사상
이슬람 종교 (마호멧) : 세미라미스의 초승달을 이슬람교의 상징물로 채택
 
6. 결론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는가? / 베들레헴 탄생의 의미


예수가 태어나신 곳은?


[질문]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님이 마구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
즉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  구유에 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인숙의 구유"에 누이셨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들은 분명히 마구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하 동굴의 집이기에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양들은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들은  마구간이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냐고 덤벼듭니다.
마음대로 추측해서 말해도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지요.  
한국식 마구간에  들어가 잘 수 있을까요?  
말이나 소가  쉬하면 웬만한 곳은 오줌 바다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미국 사람들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지요?

[답변]  미국 목사들이라고 특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 관해선 그 기록을 당시 상황에 맞추어 해석한 여러 의견을 다 함께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구유에 누인 것에 관한 성경 기록은 아래 세 구절뿐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눅 2:12)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눅 2:16)

따라서 성경에는 구유(manger)라는 말만 나와 있지 어느 곳에 있는 구유인지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구유가 있었던 장소와 연결해서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를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일행의 숙박 장소는 일단 성경 기록대로 사관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사관을 일반적인 여관을 뜻하는 헬라어 판도게이온(눅 10;34, 우리 말 성경에선 주막으로 번역됨) 대신에 공공숙소, 여관, 객실, 다락방 등으로 번역되는 카달뤼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예수가 탄생한 장소는 일단 여관(Hotel, Inn)의 객실은 아닙니다.

또 당시 베들레헴이 아주 작은 소읍이라는 것을 감안 하면 여관 혹은 공공숙소는 겨우 한두 개 밖에 없었을 것인데 마침 호적할 때라 여행객이 평소보다 많아 빈방이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간혹 여관 주인이 나사렛에서 온 임산부 일행을 박대해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해석은 무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머지 가능성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곡식창고, 일반 가정 집, 또는 들판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 곳에 다 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옥외에 양떼를 모으는 곳들이 있고 구유가 있었긴 하지만 아무래도 들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당시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할지라도 모세의 율법에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계명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며 만삭의 임산부를 문전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혹 들판에서 예수를 출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또한 무리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사관에 딸린 마구간 혹은 가정집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팔세스타인 지역의 일반적인 가옥 구조는 아래 위가 뚫린 One Room Style로서 그 중간에 다락 형태로 간을 나눠놓았습니다.
그 다락에는 사람들이, 아래는 가축이 기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서부 영화에 종종 나오는 지붕이 높은 곳간 한쪽 벽에 중간 다락을 만들어 놓은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 아래쪽에는 주로 석회석(Limestone)으로 만든 구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즈는 대충 길이 1m, 폭 50cm, 깊이 60cm 정도였음)

그런데 사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다락방도 의미하므로 개인 가정집 아래쪽의 가축들이 기거하는 장소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또 사관을 여관으로 해석해도 요셉 일행이 여관에 방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재워줄만한 가정집을 물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관 주인이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라도 괜찮다면 자라고 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했던 성경대로 분명히 구유 근처에서 출산했습니다.
그리고 구유란 가축 전용의 마구간이든, 가정집 아래층이든, 곳간이든 가축들이 항상은 아니지만 기거하는  곳입니다.
요셉 일행은 그런 곳에서 숙박하고 예수를 출산했던 것입니다.

가축들이 있다고 해서 항상 축축하고 지저분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그렇지만   건초나 사료를 쌓아둔 마른 땅도 있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를 젖은 땅에 둘 수도 없고, 건초가 깔린 곳이라고 해도 벌레들이 많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곳에도 쉽게 누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구유에 물이 없이 말라 있었으므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누이기에는 가장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구유에 물이 말랐다는 것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는 마침 그곳에 가축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장소를 마구간이라고 한정하기 보다는 위에 설명한 내용대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요셉이 숙박한 장소에 대해선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갓 태어난 아기 예수는 분명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탄생에 대한 잘못된 전통들

예수 탄생에 대한 기독교 전통들을 살펴 보면,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들이 있다.
가장 흔한 예로, 동방에서 온 세명의 박사들 (wise men or magi)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개정되기 이전의 찬송가 123장 “저 들밖에 한 밤중에”의 4절에는 “동방 박사 세 사람” 이란 가사가 있다.
아마, 박사들이 황금, 몰약 그리고 유황을 바쳤기 때문에 세 사람으로 추정하는듯 하지만, 성경에는 언급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말 구유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전통 역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물론 “구유(Manger)” 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꼭 그 구유가 “말 구유”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1세기경 당시 일반 유대인들이 말을 사육하였는지는 매우 의심스런 일이다.
구약 성서 시대 당시 유대인들의 흔한 직업인 목축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양, 염소, 그리고 나귀등이다.
말은 주로 전쟁이나 왕족들이 타는(삼하 13:29, 왕상 1:33, 44, 18:5) 동물로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없는 아주 비싼 동물이었다. 

히브리어로 구유를 בוס (에부스)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3번 구약 성경에 등장을 한다.

18. 구유(에부스) אֵבוּס 

1. ‘가축을 살찌우다’
2. 마굿간
3. 구유
발음 / 에부스[ ’êbûwç ]
어원 / 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외양간(욥 39:9), 구유(잠 14:4, 사 1:3).
구약 성경 / 3회 사용


  1.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אבוס)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3)
  2.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 (אבוס) 에 머물겠느냐 (욥 39:9)
  3. 소가 없으면 구유 (אבוס)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 14:4) 

헬라어로 구유를 Φατνη (파트네) 라고 하는데 신약에 4번 등장한다.

5336. 구유(파트네)  φάτνη, ης, ἡ 

1. 구유
2. 외양간
3. 마구간
발음 / 파트네[ phatnē ]
어원 / πατε´ομαι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유(눅 2:7,12, 16), 외양간(눅 13:15).
신약 성경 / 4회 사용
  1.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라 (눅 2:12)
  3.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6)
  4.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5) 

이상의 성경적 예들을 보더라도,  말 구유 전통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외양간 혹은 양떼나 염소들의 우리일 수도 있다.  

마굿간이라고 할때 집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진 곳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외양간이 집안에 있지 않다는 것과  서양, 예를 들면 미국의 마굿간이 집밖에 있다는 개념을 성경의 마굿간, 외양간, 혹은 양 우리에 적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예수의 탄생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만삭이 되었을 때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는 것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예수 탄생 기사가 자세히 기록된 눅 2:6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While they were there)."
즉 이 말은 마리아와 요셉이 만삭의 때, 즉 출산 직전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기 보다는 그 보다 상당 기간 앞선 때에 베들레헴에 와 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출발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요단 동편길을 따라 온다면, 적어도 150 km 이상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만삭의 여인이 이런 장거리 여행을 짧은 기일내에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산모의 건강을 고려하였다면 요셉은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베들레헴을 향해 출발하였을 것이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적어도 며칠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마리아가 출산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눅 2:7은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마리아와 요셉이 상당 기간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었다면, 산모의 출산을 고려하여 그들은 장기 거처를 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어야 했다.
또한 베들레헴은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다(눅 2:3, 4).
따라서 베들레헴에는 친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친족들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만일 베들레헴에 그들의 친족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유대 산골(눅 1:39)에 살고 있던 친족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있었기에 마리아와 요셉이 장기적으로 거주할 방을 구하지 못하였다면, 엘리사벳의 집에 거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예수 탄생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눅 2:7에 나오는 “여관”, 그리고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와 헬라어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잠시 구약 성서로 눈을 돌려보자.
히브리어로 여관은 מלון (말론, 헬라어 카탈루마)이다.

창 42:27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점 (말론)"에 머물렀다.
수 4:8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유숙(말론)하였다.
여기서 "말론"은 객점이라기 보다는 들판에 임시로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말론, 카탈루마는 여관, 객점, 유숙하는 곳, 혹은 객실등의 뜻이 있으며 문맥을 잘 살펴서 뜻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로 돌아가 보자. 
한글 성경에는 여관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Inn 으로 번역을 하였지만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헬라어 καταλυμα (카탈루마)는 여관이라는 의미보다는 Guest Room 혹은 손님 접대용 방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카탈루마를 살펴보자. 

  1.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 (καταλυμα)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막 14:14) 
  2.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7)
  3.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눅 22:11) 

1번과 3번은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 내용이며, 2번은 예수 탄생 기사에 나오는 것으로 모두 여관이 아닌 객실 (Guest room)을 뜻한다.

성서 시대의 카탈루마는 “객실”로서 여관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산지 높은 곳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지리적 특성상, 오고 가는 상인들이 머물만한 여관이 있을 곳이 못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0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주고, 그를 여관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는 πανδοχειον (판독세이온)으로 이 단어는 “여관 (주막)”을 뜻한다.
따라서, 눅 2:7에 “사관 (여관)”은 잘못된 번역이며,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사진 :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 (출처: http://lukechandler.wordpress.com/2011/06/24/a-visit-to-the-semitic-museum-at-harvard/) 

다음으로 “ 있을 곳이 없음…” 이라는 표현을 보자.

헬라어 τοπος (토포스)는,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빈방이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장소가 아이를 출산할 만한 공간이 못된다는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한다.
혹, 여유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여자가 출산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살펴보면, 왜 마리아가 구유가 있는 곳에서 예수를 출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안에 동물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고, 아래층에는 주로 주방과 동물 우리, 그리고 윗층에는 가족이 거주하는 방과 객실이 있었다.
물론 빈부 차이에 따라서 거주하는 공간의 넓고 좁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발견된 1세기 경의 집터들을 보면 객실을 만들어 놓았던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 곳은 그녀가 거주하고 있었던 집(눅 2:6 While they were there)의 아래층에 있는 동물들이 거하는 우리(Stall)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마리아와 요셉이 출산을 하기 위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빈 방을 찾았다? 
여관방이 손님들로 가득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마리아의 출산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몰차게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라는 식의 말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전통과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천한 곳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비성경적인 전통들을 즐겨 언급하지만, “성경적 근거를 대시오!” 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비성경적인 전통으로 예수의 탄생을 미화하거나, 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그 분이 말 구유가 아닌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창조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분은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고 가장 천한 곳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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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4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어떤 분이셨습니까?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성부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낮고 천한 육신을 입고 찾아오시되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의 모습이나 귀족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웬만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궁에서 나셨다면 왕족이나 측근들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천한 목수의 집안, 작은 마을, 마구간, 말구유에서 나셨으므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비천한 사람도 자신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어계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첫 번째로 찾아와서 경배한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당시 목자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6 이하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낮고 천하다고 생각합니까?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용납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절입니다.
교만한 사람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의사는 오직 병자들에게만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만입니다.
비천한자라도, 가난한 자라도 교만한 사람은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생 하셨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큰 성전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건물은 큰데 들어가는 문은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고 문 높이고 낮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죄인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장소를 선택하여 이 땅에 태어 나셨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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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 마태복음 2:1 - 12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면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말해 보세요(1절)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는데

1) 역사적으로 보면 눅2:1
[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 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와와 함께 호적을 하러와서 갔다가 예수님을 탄생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6절은 바로 미가5:2절의 인용으로서
[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한
바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것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 쓰시고 멀리 페르샤의 박사들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동방박사들은 멀리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별을 보고 [ 이건 분명히 새 왕이 나타났다는 징조다 ] 라고 믿고
수 만리 길을 걸어와 유대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탄의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동방은 페르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란, 이라크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박사라는 칭호는(magi)라 해서 페르시아와 갈대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주는 것인데, 이 칭호가 페르시아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가 드린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다고 해서 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확히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별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습니다만 별이 움직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별을 움직여 그가 메시야 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 즉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자면 별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 별의 인도를 따라 유대 땅 까지 왔지만 깜박 자신들 생각에 왕으로 나신이 같으면 궁궐에 있겠지 하고 예루살렘 궁궐로 찾아갔을 때 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궐에 찾아가 헤롯 왕에게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함이 없는 성탄은 항상 마음을 높은데 두는 성탄이 되고 맙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말구유에 오신 예수가 아니라 궁궐에 오신 수퍼 스타 예수로 자신의 야망을 이룩하는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동방박사들의 방문 소식을 들은 헤롯 왕과 예루살렘 군중들은 이 소문을 듣고 소동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성탄절이 되면 온 나라가 소동하고 온 세상이 소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성탄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신론 국가인 일본에서도 대다수가 범신론 내지 무신론자로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화려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며, 즐깁니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성탄절을 취급하며 그리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놀 수 있는 날”쯤으로 성탄절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온 예루살렘 군중들이 소동을 하는 가운데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에 나겠느뇨? 하고 물었습니다.

본래 서기관들은 성경에 정통이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선지자의 기록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고는 미가 5:2을 인용합니다.
[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라 ]
예수님은 베들레헴 땅 그것도 여관의 빈방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미가 5:2절에는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 합니다.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고 불리워진 곳인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 났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도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찻아간 박사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마굿간으로 인도하십니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 마굿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셋트가 마련됩니다.
그 셋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말구유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란 말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 듯 교회가 말구유 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아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혀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서울에 있는 현암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근간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책이 초판 제1쇄가 발행된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못 읽어 보았습니다만 이 책 제목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들어요. 오강남 교수가 어릴 때부터 교회 출석한 교인이요
지금도 자신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합니다만  [ 그래 눈이 뜨여진 사람은 볼 것이고 눈이 안 뜨여진 사람은 못 볼 것이고 ]
못 보면 없다 할 것이고 보면 있다 할 것이고, 그렇죠?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파문이 커지니 조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는 없다 ]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이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궁궐에 앉아 있는 헤롯 왕 같은 사람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내려 올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의 탄생이 반갑잖은 스캔들로 듣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의 헤롯의 반응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헤롯 왕은 서기관들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인가? 라고 물으며
아기를 만나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아기를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헤롯의 꿍꿍이셈이 있습니다.
결국은 헤롯왕은 박사들이 천사들의 지시로 고국으로 말없이 떠난 후 베들레헴 지경 내에 있는 두 살이하의 어린아이를 다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럽니다.
항상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애매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어야만 하는 비극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한 마음에는 사탄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와 최고의 쾌락을 약속합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실망과 파괴요 죽음이요 멸망인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왕의 왕을 위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황금은 성경에서 황금은 창세기 2장 11,12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지만 인간사에 항상 보물로 여겨 왔으며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유향은 매우 향기로운 것으로 성전의 제사를 위한 향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라비아의 한 나무에서 얻은 수액을 증류해서 만든 것입니다.

몰약은 거의 아라비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낮은 가시나무에서 추출되는 귀중한 것으로 좋은 연고를 만드는 중요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23절에서는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세 가지의 예물이 상징하는 바는 황금을 드렸다는 것은 바로 아기 예수가 만왕의 왕임을 뜻하는 예물입니다.
유황을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 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몰약을 드렸다는 것은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즉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본래 히브리 말로 메시야는 헬라말로 그리스도란 말로서 그 뜻은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메시야로서 그 분은 만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대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선지자로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경배하되 예수가 우리의 메시야라는 신앙의 고백 위에 드려지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신앙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부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의 보잘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자신들의 보물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이 예물처럼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성탄의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예물을 드린 사람은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아니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이 있습니다.
본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그리고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길가에 쓰러진 불쌍한 병자를 만나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빵과 포도주와 여비를 모두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박사들이 편지를 남기고 떠난 후 였습니다.
" 기다리다 떠납니다. 우리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십시오 "
알타반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가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군인에게 커다란 루비 보석을 쥐어 주었을 때 군인 장교는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고 하면 돌아서 갔습니다.
그때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랍비를 찾아가서 물으니 "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 " 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과 노예 시장을 찾았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손에 진주를 꼭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께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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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구하기 위해 바퀴벌레가 되려는것 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을 확증하셨고, 구약 내내 약속해 주신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때 우리는 화려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베들레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베들레헴의 의미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벧엘에서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 합니다. 즉 ‘베들레헴’은 떡의 집(House of Bread)이란 뜻1 입니다.
왜 하나님은 ‘떡의 집’에서 예수님을 태어나시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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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이 되어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51>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세 등록을 위해 남편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밤에 묶을 여관을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죠. 아기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명의 떡’으로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게 됩니다.

그 때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구원자, 즉 메시아의 표적이 될 것이라 했고, 목자들은 정말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주셨던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가 짐승의 떡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 짐승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입니다. 2  3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3:18>

사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알아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자, 배반자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란군 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을 시켜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 ‘떡의 집’ (House of Bread)에서 영생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왜 종교가 없는지에 대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 분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제 상황이나 고민하는게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즉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그것이 주 목적이 되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냐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영생의 떡이니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영생의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은 물론 다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그러나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되,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요한복음 6:68>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더 많은 떡을 위해서 즉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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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가?

1. 죽음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한 사건

베들레헴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5장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이 온 식구들과 함께 벧엘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라헬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출산의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의 12번째 아들 베냐민이었습니다.
영어 발음으로는 벤자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라헬은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길거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베들레헴에 묻었습니다.

창세기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성경에서 첫 번째 나오는 베들레헴은 죽음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지명마다 첫 인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담사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군사반란으로 인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는 모습이 당시에는 세계의 토픽이었습니다.
또한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을 들으면 금방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생각납니다.
4대강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 하면 첫 인상은 죽음과 슬픔입니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의 장소 베들레헴에 생명의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죽음과 슬픔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을 생명과 기쁨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2.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이 두 번째 등장하는 곳은 룻기서입니다.

룻기 1:1-2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베들레헴에 사는 이스라엘 남자 엘리멜렉이 역시 베들레헴 여자 나오미와 결혼하여 기룐과 말룐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 모압에서 두 명의 아들이 이방 여인인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자손도 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여자들만 과부로 덩그러니 셋이 남았습니다.
남편 잃고 아들 잃은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며느리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얼마 후 이방 여인 룻은 이스라엘 사람 보아스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여인인 그녀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예수님에게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혈통은 순수 이스라엘의 혈통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모든 사람들도 구원하시는 만인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인 우리 모두인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고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3.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의 고향입니다.

사무엘상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사무엘상 17: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장차 메시아가 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계3:7) 거지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라고 외쳤습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므로 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고로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리고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히브리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알파벳마다 개인 숫자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윗이라는 이름의 알파벳 숫자를 모두 더하면 14가 나옵니다. 즉 유대인들은 14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14는 다윗의 숫자요,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암시가 있는 숫자입니다. 고로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한대로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동방박사들이 방문하자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많은 장소 중에 예수님이 하필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4.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쓰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6)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합한 것 정도입니다. 차로 하루면 이스라엘을 다 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그 작은 나라에서 100 마을 안에도 안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당시 인구가 1,000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을에서 메시아가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건숙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중 '지푸라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5남매를 길러 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니 다 늙었습니다. 온 몸에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5년 동안 똥오줌을 받아 내며 뒷바라지 하다 보니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이제는 지푸라기 같은 인생이라고 늘 비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지푸라기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진흙땅에 떨어져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고 있었습니다. 천덕꾸러기 지푸라기였습니다. 그나마 그 지푸라기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두 동강난 지푸라기 한 쪽을 입에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새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새들이 행복하게 포근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반 동강 지푸라기는 농부가 주워 가서 새끼를 꼬는 데 넣었습니다.
그 지푸라기로 꼰 새끼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지푸라기라도 제대로 쓰이면 쓸모가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나도 쓸 데가 있겠구나!"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교회로 달렸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목사님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기도로 많은 사람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푸라기 같은 인생도 다 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우리, 보잘 것은 나도 사용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5. 마귀의 목을 꺽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베들레헴은 유다 땅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땅을 분배할 때에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땅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즉 예수님은 베들레헴 유다 땅에서 태어나 원수의 목을 잡아야 합니다. 즉 마귀의 모든 권세를 빼앗아 버려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마귀는 여자의 후손인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즉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뱀이라고 불리는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홀은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휘봉입니다. 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영원토록 왕으로 우리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했습니다.

6.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것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향하여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밥입니다.
빵이 빵집에서 나오고, 떡이 떡집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이신 예수님은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합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먹으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떡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려 죽고 맙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해야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원수의 목을 꺾으시고 영원토록 왕으로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쪼록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행복을 가꾸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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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과 세금


예수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또 기독교인이라면 이것이 미가서 5:2절,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는 예언의 성취임을 압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직접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베들레헴을 가라는 명령하시기 보다는 세금이라는 세속적인 수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1절은,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적 등록’을 뜻하는 "아포그라페스다이(ἀπογράφεσθαι)"는 세금을 걷기 위한 호구 조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운영의 밑천이 되는 인두세를 더 많이 걷고자 호구조사 명령했습니다.
그의 명령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촌동네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정확한 숫자 파악을 위해서 황제는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요셉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정혼녀인 마리아가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배가 남산만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본적지인 베들레헴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국가에서 가장 엄한 법입니다.
세법이 잘 지켜져서 세금이 잘 걷혀져야 나라가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권력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걷고자 인두세와 더불어 각종 기이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3세가 창문에 세금을 부과하자, 부자들은 창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건물의 너비에 비례해서 세금을 내게 하자, 사람들은 건물을 높게 지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절대 군주였던 표트르 대제는 한 때 수염세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때 지중해의 어느 섬에서는 집 중앙에 벽돌로 아치형 기둥 짓고, 기둥 상단에 있는 벽돌 하나만 제거하면 집이 곧 바로 무너지는 구조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앙 정부에서 세금 징수원이 나오면, 집주인은 아치 중앙의 벽돌 뺐고, 징수원이 돌아가면 다시 집을 복구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에게 세금은 주요 수입원이었기에, 그들은 시퍼런 칼을 앞세워 세법을 집행했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속담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2천년전 요셉도 세법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어서 몸이 불편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긴 여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무리한 여행을 강행하는 요셉에게 바가지를 굵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법이 무서워 그 고단한 여행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2017년 미국 가정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24%를 연방소득세, 사회보장세, 메디케이세로 냈다고 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세법을 통해서 예언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매년 4월 15일은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는 히브리서 13:5절의 약속을 경험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세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세속적인 수단입니다.